« Previous : 1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 18 : Next »

성경 Trivia -- 下

0.
이번엔 먼저 난센스 퀴즈 개드립부터 좀 시작하자. 노아(성경에 나오는)의 아내의 이름이 무엇일까?

정답은 잔 다르크.
저 이름은 잘 알다시피 '아르크의 잔/요안'이라는 뜻이며, Arc(아르크)는 ark(궤, 방주)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아 제기랄....;;; 아무리 난센스라지만 그 병맛스러움은 이말년 서유기에서 나타태자가 시전했던 희대의 병맛 퀴즈,
궁예가 몰고 다니는 승용차의 이름은? 애꾸스
지금 인도는 몇 시일까? 인도네시아
귀가 불타면? 타이어. (이건 뭐 그... 거북선, 소방관, 포크레인, 활명수던가.. 그 초병맛 그림 퀴즈의 소재로 써도 되겠다 -_-;;;)

그리고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롬멜 준장이 시전한 초썰렁 퀴즈
네덜란드에 있는 강력한 방어선은? 암스테르 '담'
이 전차가 왜 '3호 전차'일까? '3호선'이면 일산까지밖에 못 가니까.
영국의 수상은 왜 이름이 '처칠'일까? 부인이 일곱 명이어서

에 필적하는 것 같다. 썰렁하게 해서 죄송~~ ㅡ,.ㅡ;;

1.
성경에는 서로 다른 책 내지 다른 문맥에서 굉장히 놀라울 정도로 유사/동일한 표현이 존재하는 쌍(pair)이 있다. 예를 들어,

  • 아들을 낳고는 죽은 산모 이야기는 아들을 낳고는 죽은 산모: 라헬(창 35:16-18), 그리고 이름도 안 나오는 엘리의 며느리 및 비느하스의 아내(삼상 4:19-21)
  • 동성애자들의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 드립: 소돔 (창 19:4-5),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벨리알의 아들들(삿 19:21-22)

이것들은 비록 시기와 장소가 다르지만 심상은 서로 동일하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without form and void는 창 1:2와 렘 4:23이 서로 동일하게 부정적인 심상이다. 시기가 각각 과거와 미래로 다를지라도 말이다.
또한, 창 1:28과 창 9:1의 replenish the earth 역시 "예전에 꽉 차 있다가 비게 된 땅을 다시 채우라"라는 동일한 심상이 존재한다고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2.
성경에서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지만, 결국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로 seamless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는 둘이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는 개념의 쌍이 있다.

  • 무교절과 유월절: 눅 22:1 vs 행 12:3-4. 유월절이 끝난 뒤에 곧바로 무교절이 이어지지만, 가끔은 단일한 명절 series로 취급되기도 한다.
  • 지옥과 불못: 계 20:14. 궁극적으로는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긴 하지만 지옥에 있던 혼들이 다 그대로 불못으로도 가므로 둘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영원을 보내게 되는 장소"라는 개념 하에서는 하나로 볼 수도 있다.
  •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마 19:23-24와 막 10:23-24. 두 왕국은 일면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가끔 성경에서 두 용어가 좀 구분 없이 섞여 쓰인 듯한 곳도 있다. 처음에는 구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는데 유대인의 예수님 거부, 교회 태동, 초림과 재림 사이의 gap으로 인해 더 분명하게 다른 개념이 된 셈이다.

3.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신다. 무슨 마인드 컨트롤 해서 로봇처럼 강제 조종을 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먹고 방향을 결정한 사람이 일단 나아가기 시작하면 거기에 '가속도'를 불어 넣기는 하신다. 마치 자동차의 파워스티어링처럼 일단 핸들을 살짝 돌리기 시작하면 작은 힘으로도 확 돌아가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삐딱서니 타고 반골 기질을 보인 파라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드셨으며, 기타 여러 악인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농락하셨다. 그분은 미혹의 영을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낚기도 하신다. (살후 2:11; 왕상 22)

그렇게 거짓을 믿게도 하실진대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믿도록 우리가 가진 믿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던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주기도 하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욱 수긍이 간다. faith of Jesus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님의 믿음인 것이다.

4.
우리는 무슨 분야에서든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삶의 질은 '지금'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당연히 더 나아진다. 단지, '남들만치'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을 뿐이다. ㅋㅋㅋ
내가 열심히 코딩을 하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예전 버전보다 더 좋아지고, 한글 입력 기능의 범위가 더 확장되고 내가 자아성취와 정신건강에 증가한다는 건 지당한 이치이다. 단지 이거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부귀영화가 찾아온다는 보장이 없을 뿐이다. 음 이건 뭐 자가디스인가.. ㅎㅎ
이건 마치 성경 말씀처럼 들린다.

  • 시험을 피할 길을 내서 너희가 능히 시험을 능히 감당 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지, 시험을 아예 없애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고전 10:13) 크리스천에게 구원의 영원한 보장만큼이나 확실하게 면제· 바이패스가 보장된 건 '그 대환란'뿐이다.
  • 간구를 잘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을 주겠다고 했지, 역경과 고난 자체를 없애고 당장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빌 4:7)
  • 영적으로 복을 주신다고 했고 어찌 보면 크리스천들은 복을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엡 1:3). 사랑도 받았다. 단지, 구약 시대처럼 당장 땅(부동산!)과 재물의 복을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고 반대로, 예수쟁이들은 성경대로 살면 365일 24시간 내내 가시밭길뿐이고 오로지 시험과 고난과 박해밖에 없고 배 쫄쫄 굶는 거지가 된다는 얘기도 아니다(북한 같은 예외· 극단적인 곳이 아닌 한!). 하나님은 그렇게 야박하고 잔인한 분이 아니다. 물질적인 복은 그냥 케바케일 뿐이란 뜻임. 요 21:23에서 제자들의 미래 순교 여부가 그냥 랜덤 케바케였던 것처럼 말이다.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덜 중요한 이런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이나 가변적인 것이다.

이래저래 겉을 남하고 비교하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사람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게 별로 없다. 비교를 굳이 하려면 "저 사람은 평소에 기도와 성경 읽기를 어떻게 하나?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도대체 어떻게 저 상황에서 기쁨과 감사가 나올까?" 이런 걸 벤치마킹하고 자기에게 도입할 생각을 해야 한다.

5.
(사람을 채용할 때는) "또 그 사람의 '구글다움(googleyness)' 여부를 봅니다." (☞ 관련 기사)

여기서 KJV 신자로서 나의 직업병이 0.1초 만에 하나 발동되는데..
성경에서 우리말로 옮기기 난감한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인 godliness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것도 이와 방식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정말 직관적으로 풀이하자면 '신스러운'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하는, 하나님다운.. 정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한때 '경건'이라고 옮기곤 했는데 이건 단순 '독실, 엄숙' 같은 뜻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게다가 반의어인 ungodliness로까지 가면..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불경건'을 쓸 수밖에.

한 가지 확실한 건, 구글 직원이라면 구글다워야 하는 것만큼이나
크리스천에게서는 지식과 행실, 머리와 심장에서 모두 하나님답고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종교적인 연기· 위선이나 정신줄 놓은 광신하고 분간이 안 돼서 오해와 편견이 무진장 많다는 게 문제일 뿐.

6.
로보캅...은 아니고 초대 교회 시절에 사도 요한의 제자라고 알려진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교회 중에 서마나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80대 중반의 나이로 AD 150~160년경에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이라도 예수 믿지 말고 황제에게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면 당신의 나이를 감안해서라도 반역 행위를 없던 걸로 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수님은 내 인생 80년 평생 동안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고 늘 신실하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처음에는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화형으로 방식이 바뀌었다.
불태웠는데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지도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한다. 결국은 칼과 창으로 난도질 당함으로써 순교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폴리캅이 죽을 때 그의 몸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튀어나왔고, 피가 넘치면서 화형장에 붙어 있던 불을 꺼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차돈처럼 하얀 피가 나온 건 아니었고.

그 당시 군중들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저 개독 예수쟁이 뒈져라!"라고 외치지 않았다. "저 무신론자 뒈져라!"라고 외쳤다! 눈앞에 있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어떤 형상 성물도 없고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개념을 이해를 못 한지라 크리스천들을 숫제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온갖 성물 형상들로 가득한 종교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음이 틀림없다.

7.
유대교 신정국가이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부족도 하지 않는 이상한 종교 행위를 해야 했다.
누가 죄를 지었으면 지금 천주교에서 하는 것처럼 고해성사를 하고 죄를 지은 당사자가 자가속죄를 위해 무슨 고행이나 뺑이를 치는 게 아니라, 웬 뜬금없이 흠 없는 불쌍한 가축을 잔인하게 죽이고 피를 쏟고 시체를 불태워야 했다.

구약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설하는 화이트칼라 먹물 문돌이이기만 한 게 아니라, 반쯤은 동물 잡는 백정 같은 일을 하면서 고된 육체 노동도 해야 했다.
그러니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고 모세오경에 기록된 게 있는데, 이걸 보고는 성경이 무슨 장애인을 차별하고 비하하네 이렇게 이상하게 트집잡는 개독안티도 있다. 별로 상대할 가치 없다.

죄라는 건 겨우 고행이나 얼차려로 대충 말소하거나 다른 어설픈 선행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만 대속이 가능한 심각한 사항이며, 그래서 불쌍한 동물의 죽음이 야기되어야 하고.. 죄의 형벌을 받는 지옥이라는 게 저런 뜨거운 불이 가득한 고통의 장소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매일 시청각으로 접하며 지냈다.

요즘 병원이나 제약 연구소의 뒤뜰을 보면 사람을 대신하여 임상실험에 동원됐다가 죽은 동물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고 연구원들이 1년에 한 번쯤은 거기서 쥐나 토끼가 좋아하는 먹이를 얹어서 고사(?)도 지낸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구약 성전 뒤뜰에서는 성전 직원(?)들이 1년에 몇 번이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동물들의 고사를 지내 주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사고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9~10장은 죄사함을 위해서는 동물의 피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불완전하다는 말만 할 뿐,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박애주의(?) 따위와는 억만 리 떨어져 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라.” (히 10:4)

끝으로, 동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상식 차원에서 이미 아는 분도 계실 텐데, 성경은 신구약 66권을 통틀어 고양이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쥐, 개, 여우 같은 주변 동물은 다 등장하는데도. 더구나 성경이 다루는 시기와 지역에 고양이는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부정한 동물로라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8.
구약은 저렇고, 신약 기독교회의 역사에는 피흘린 순교자의 발자취가 있다.
교회가 그냥 세상 정부의 군대 같은 조직이거나 여느 시민 단체와 별 차이가 없었다면, 자기 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그야말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정훈 교육 소재로 써먹어야 한다.

당장 한글 학회는 조선어 학회 사건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조선어 학회 '수난'(그냥 사건이 아니라)이라고 부른다. 자기네 행사가 있을 때는 국민의례를 하고 나서 그때 고초를 겪은 국어학자들(특히 옥사한 이 윤재· 한 징 선생)에 대한 묵념을 추가적으로 한다.
그런 식이라면 교회 예배당엔 주 기철 목사 동상을 곳곳에 만들고 누구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고, 매주 예배 때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묵념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기독교회의 현충일 같은 날도 좀 있어야 한다. 그나마 천주교가 이에 근접해서 각종 성인 성자들을 만들어 놓고 별걸 다 기념하긴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짐승들의 공로와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의 공로 역시, 그게 아무리 크다 해도 예수님의 공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니 둘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순교자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그 많은 순교자들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 볼 사람들이다. 그러니 애초에 영원히 못 볼 사람인양 추모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교훈과 도전을 얻고 예우를 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우상화할 필요도 없다. 그들 역시 똑같은 인간이었고 우리 역시 이미 그들과 동급의 성도(saint. 성인 성자가 아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 구약 유대교: 죽임당한 동물 위령탑 없음
  • 신약 기독교: 순교자 묵념 없음

아울러, 신약 시대에 교회에 존재하는 유일한 의식 내지 규례는 딱 두 가지, (1) 침례와 (2) 주의 만찬이다. 둘 다 예수님의 재림 이전까지만 유효하며, '상징'일 뿐이지 혼의 구원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 에구, 서로 다른 글들을 한데 묶고 편집해서 올리는 것도 고역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15/10/24 08:39 2015/10/24 08:39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52

성경 Trivia -- 上

1.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각각 무어라 말할까?
선민인 유대인에 대해서도 죄를 짓고 계약을 위반했을 때는 역사적으로 정말 많이 심판하고 정말 처참한 꼴을 많이 허락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들은 완전히 뿌리뽑히고 멸망하지는 않고, 잡초처럼 처절하고 끈질기게 살아남고 회복되고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는 보장만 해 주셨을 뿐이다.

한편, 이방인에 대해서는 가장 대표적으로 부정적으로 얘기한 예는 가나안 민족과 소돔이다. 전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짐승과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싹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앞뒤 문맥을 모르는 개독안티들이 그걸 트집을 잡을 정도이다. 후자 소돔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이방인에 대해서도 의외로 긍정적으로 나온 게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비록 유대인 같은 명시적인 율법을 받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들어서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얘들도 기본적으로 알 거 다 알았다. 살인이나 간음죄를 저지르면 안 되고, 그랬다가는 천벌과 인과응보를 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나?"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 아비멜렉(창 20:4-5)은 간음이 죄라는 것을 뼛속까지 숙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다. 26장에 나오는 다른 아비멜렉도 마찬가지.
  • 이방인이던 아하수에로 왕의 측근들은 남편과 아내와 가정의 영적 질서에 대해서 우리처럼 바울 서신을 보지 않고도 잘 알고 있었다(에 1:17,18).
  • 요나와 같은 배를 탔던 이방인들은 살인을 저질렀다가는 자신들이 큰일 난다는 관념이 박혀 있었다(욘 1:14).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 전에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지를 보라.
  • 바울을 맞이했던 미개한 백성들도 살인을 저지르면 반드시 천벌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행 28:4).

2.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인 포함 온갖 민족들을 심판한 정복자였으며 어찌 보면 유례를 찾기 힘든 개막장 폭군이었다. 역사상 "꿈 내용이 생각은 안 나는데 어쨌든 니들이 내 기억을 복원해서 해석까지 안 해 주면 몽땅 뒈질 줄 알아라" 이런 짓거리를 한 군주가 있었던가? -_-;;

그런데 그런 막장인 것치고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도 많이 나오고 성경에서의 묘사가 꽤 호탕하고 긍정적이다.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께서 "나의 종"(렘 43:10)이라고 불러 주셨다.
게다가 미쳐서 소처럼 됐다가도 다시 왕위를 회복까지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느부갓네살은 출애굽기의 파라오처럼 성경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예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개인은 궁극적으로 아마 구원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 독특한 인물이다.

3.

  • 에스더: 법을 지키는 것, 예전 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개념 차이를 보여 준다. 권위의 영적 의미에 대한 좋은 조명을 준다.
  • 요나: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이를 초월한 구원 이념을 가르친다.

4.

  • 미래에 대해서: 이 구절은 아직 성취된 예언이 아니라 더 멀리 재림 때가 돼서야 성취될 사건이다.
  • 과거에 대해서: 이 구절은 노아의 홍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옛날 이전 세상 시점의 일이다.

생물학적인 남녀와 부모· 자녀 관계가 있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부터 아버지와 아들 개념이 있었고, 남녀간의 사랑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성품에 사랑이 존재했다.
그런 것처럼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24시간짜리 낮과 밤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전우주적인 빛이 있었고 빛과 어둠의 분리로 인한 낮과 밤이 있었다. 6일 창조 중 첫째 날에 나오는 낮과 밤은 넷째 날에 나오는 낮과 밤하고는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다. 성경은 가시적인 만물과 비가시적인 영적 만물이 서로 나란히 대칭을 이룬다는 비례와 예표 원리를 줄곧 가르친다.

5.
성경에는 잘못 해석할 경우 의미와 뉘앙스가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는 지뢰밭이 몇 군데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용어부터 살펴보면, '누룩', '불 침례' 같은 건 긍정적인 심상이 절대로 아니다. 마 3과 눅 3에서 나오는 불 침례는 지옥에서 온몸이 불에 활활 타는 걸 얘기한다. 절대로 불 같은 성령의 권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아마 '불꽃'의 모양처럼 갈라진 혀(행 2:3)랑 헷갈린 것 같은데.. 성경의 묘사는 그게 전부이다. 좌우 문맥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그리고 크리스천 개인의 작지만 소중한 믿음, 희생, 헌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으면 '겨자씨' 내지 요 12:24에서 모티브를 따서 차라리 '밀알'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하다. 그 반면 누룩은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존재이다. 누룩이 들어가서 온 빵이 부풀었다는 비유(마 13:33) 역시 교회의 기형적인 팽창과 부패와 변질을 얘기하는 것이지, 무슨 복음 전파나 하나님 나라 확장 같은 긍정적인 얘기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누룩 선교회'도 있다고 한다. 헐.. -_-;; IT 기업이 "버그 소프트웨어" 내지 "BSOD 시스템즈" 이렇게 상호를 지은 것과 비슷하다.

하긴, 똑같은 겨자도 마 17:20의 '겨자씨만 한 믿음'은 긍정적인 반면, 마 13:31-32에서 '겨자가 나무가 된 이야기'는 부정적인 묘사이니 이것도 참 절묘하다. 그건 누룩과 마찬가지로 변질과 부패를 가리킨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를 정면으로 거스른 현상이며, '공중의 새' 역시 성경적으로 심히 부정적인 심상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계 18:2)을 떠올린다면 심상이 100% 동일하지는 않아도 얼추 맞게 연결된다.

이런 '누룩'과 동일 선상에서 하나 더 첨언하자면, '썩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썩음'(corruption)은 행 2:27, 행 13:34-37, 롬 1:23, 고전 15:42, 벧전 1:23 등 성경에서 일관되게 매우 부정적인 심상이며 크리스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요 12:24와, 심지어 고전 15:36도 뿌려진 씨앗은 떨어져서 그냥 '죽는다고' 했지, 죽어서 굳이 썩는다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크리스천은 단어를 선택할 때도 주의를 매우 기울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살후 2:7의 막고 있는 자, 계 6:2의 흰 말 탄 자는 적그리스도이지 예수님 같은 좋은 쪽이 아니다. 다니엘서에도 이렇게 주객이 뒤바뀔 여지가 있는 예언이 나오는데 당장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변개된 성경들은 사 14:12에서 루시퍼의 정체를 감추고 아예 마귀에게 예수님의 칭호를 부여하거나(계 22:16), 혹은 예수님을 저렇게 심판 받는 나쁜놈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6.
성경에서 "어, 왜 이럴까?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잠시 생각을 좀 해야 하는 대목으로 본인은 다음 장면들을 꼽겠다.

  • 히브리 산파의 거짓말(출 1:17-20)과 라합의 거짓말(수 2)
  •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
  • 일한 시간과 무관하게 같은 보수를 받은 포도원 일꾼 비유(마 20)

상반된 진술이 동시에 나오는 부분으로는

  •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라 vs 대답하지 말라 (잠 26:4,5)
  •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의사들에게 구했더라"(대하 16:12) vs "네 위장을 위해 약 처방을 하라"(딤전 5:23)

이것 말고 예가 더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문맥 분간을 잘하고 잘 "나눠야" 하는 대목들이다.

7.
성경에는 김대기스러운 '적절하게'가 바울 서신에서 두 번이나 나온다. (고전 6:12; 10:23)
그리고 성경에는 "A가 B와 대응하는데 하물며 C와 대응할 D는 어떻겠느냐?" 요런 비례식 논법이 신구약을 통틀어 즐겨 쓰인다 바울도 자주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는 "유대인들의 삽질과 실족만으로도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줬는데 하물며 쟤들이 잘되면 얼마나 복이 크겠는가?"(롬 11:12)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요 표현을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8.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 12:6)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함과 보존 약속에 대한 근거를 논할 때 KJV 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순수함이 금속 가공에다 비유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여기서 은을 try하고 거듭 purify했다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제련’일까 ‘재련’일까?
우리말에서 ㅐ와 ㅔ의 발음 구분이 문란해지면서 외래어 표기와(데미지/대미지?) 일부 고유어의 스펠링까지(결제/결재? 메다/매다?) 오락가락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제련/재련도 대표적인 예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시 12:6이 말하는 작업은 ‘제련’이다. 제련은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서 금속을 뽑아 내는 일을 말한다. 석유로 치면 원유를 분별 증류하여 휘발유, 경유, 등유 따위를 얻는 일이다.
그 반면 재련은 일단 주성분이 결정된 쇠붙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또 시뻘겋게 달군 채로 두들기고 찬물에 확 담그는 작업을 말한다.

딱히 칼이나 낫 같은 물건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제철소에서 하는 일, 특히 금속의 순도와 관계가 있는 일은 전부 ‘제련’이다. 재련의 용례는 거의 대부분이 제련의 잘못이다. 금속 냉병기를 아이템으로 다루는 국내 온라인 게임들은 이거 용어가 제대로 사용돼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시 12:6이 말하는 것처럼 제련도 반복 작업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닥치고 용광로에서 다 녹여 버리는 제련과는 달리, 재련은 정말 말 그대로 두들기고 달구고 식히는 등 마치 사우나를 하는 것 같은 ‘연단/단련’의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련을 받은 뒤에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같은 구절에서는 재련을 연상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이 ‘강철같이 나오리라’가 아니라 ‘금같이 나오리라’이고, 불순물이 없는 pure gold/fine gold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일단은 재련이 아니라 제련을 말하는 것이 맞다. 성경에는 용광로도 지옥뿐만이 아니라 고난이나 연단의 의미가 있다. (잠 17:3, 렘 11:4 등)

Posted by 사무엘

2015/10/21 08:24 2015/10/21 08:24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51

요나 이야기

성경은 민족주의, 애국심 같은 걸 지지하고 나라 지키는 전쟁에 대해서도 아주 긍정적인 반면, 한편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에 관한 문맥에서는 그런 이념을 초월하기도 한다. 요나서가 그에 대한 좋은 예이다.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에서 요나를 직접 심층취재를 한 적이 없었으니 오늘은 이 사람에 대해 썰을 좀 풀어 보겠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19세기쯤에 한 조선의 대언자가 이웃 열도의 악명 높은 성진국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요나는 미래에 우리나라를 멸망시킬 적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심정이었다. 박해받고 순교하는 게 두렵다는 차원이 전혀 아니고, 그 원수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게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도망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본의가 아니게 남의 배의 화물을 몽땅 말아먹는 민폐를 끼치고, 큰 고래에게 잡아 먹혀서 죽다 살아나는 체험을 한 뒤에야 더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서 어쨌든 니느웨로 갔다. 그리고 영혼이 없는 “까라면 까” 식의 억지 선포를 시작했다.

완전 흉측한 몰골에 영락없는 거지꼴의 꼰대 한 명이 물고기 입에서 내던져져 나왔다. 이걸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봤다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이 아저씨는 뭐가 불만인지 입은 도널드덕처럼 쑥 튀어나와서 외친다는 말이.. 하나님이고 죄고 회개고 그딴 거 없었다. 오늘날의 거리설교 퀄리티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그냥 “이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다!”였다(욘 3:4).
무슨 꼴이냐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어느 이상한 교회에서 아저씨 두 명이 발가벗고서 트럭 위에 올라타서 “xx년 xx월에 북괴 김 정일은 남침한다”라고 써 붙이고 다닌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김 정일이 살아 있던 시절의 일임)

그런데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런 엽기 퍼포먼스에 니느웨 전체가 멘붕해 버렸다. 그들은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서 나온 어느 초사이언의 외침을 신이 주는 심각한 경고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완전히 겁을 먹고 찔림을 받았다. 그의 외침을 어느 정신병자 미친놈의 저주· 헛소리· 악담쯤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심지어 왕까지 다 금식을 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초유의 부흥이 일어났다(욘 3:5-9). 요나의 입장에서는 머피의 법칙이 최악의 방향으로만 골라서 적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요나는 적국의 영적 부흥을 목격하고는 빡돌았다. 그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내가 완전 개쪽을 감수하면서 니느웨 멸망 예언을 했는데, 이게 이뤄지지 않게 됐으니 난 도대체 뭐가 됩니까..? 배 째세요~ 난 살기 싫소” 하면서 하나님께 앙탈을 부렸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런 골수 민족주의자 요나를 차근차근 일깨워 주는 내용으로 요나서가 끝난다.

저런 요나의 빡침과 앙탈은 어찌 보면 제 발로 삽질을 자초한 면도 있었다.
툴툴 뺀질거리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이행해서 니느웨를 향해서 불편한 진리/진실을 사랑으로 정중하게 전했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회심할 때 자기도 체통이 당연히 섰을 것이니 말이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고 그물을 하나만 대충 던졌다가,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배가 되집히고 그물이 찢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래 배 속에서 요나서 2장의 기도가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드려졌는지는 난 아직 100% 단정을 못 짓겠다. 1~9절과 10절이 And로 시간 순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듯이 보여서. 특히 and 시간 순 병렬은 재창조 주장하는 진영에서 아주 좋아하지 않는가?

단, 요나는 거기서 문자적으로 완전히 끔살당했다가 부활한 것만은 절대 확실하다. 숨도 못 쉬고 독한 소화액이 분비돼 나오는 내장 안에서 도대체 어떻게 며칠을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기괴한 체험 덕분에 요나는 예수님에 의해 인용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고(눅 11:29), 니느웨는 세상에 너보다도 못한 놈들도 있다는 까임방지권(눅 11:32)을 획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이 친히 인증을 했다는 것은 요나는 100% 확실한 실존 인물이고 그의 행적 역시 100% 역사적 팩트임을 의미한다.

* 성경에서 요나를 잡아먹은 큰 물고기(욘 1:17)의 정체는?

킹 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물고기가 고래였다고 풀이를 하셨다(마 12:40). 마치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폭탄이 처음엔 그냥 무시무시한 폭탄인줄로만 알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예 원자폭탄이었다고 계시가 발전한 것처럼 말이다.

고래는 포유류라는 점에서 다른 물고기들과는 차원이 다르며, 창세기에서도 다른 동물들과는 별도로 유니크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온다(창 1:21). 그 창조의 주역이신 예수님이 고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거 뭐 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허나 non-KJV 역본들은 그리스어 '케토스'의 의미 운운하면서 다들 '큰 물고기' 내지 '바다 괴물'(공동번역, NASV, NRSV)로 표현을 바꿨다.

KJV도 구약의 애 4:3에서는 sea monster가 나온다. 그런데 거기서는 또 non-KJV들은 들개, 여우, jackal 같은 다른 육상 동물로 말을 바꿨다. KJV와는 더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 4:3에서는 이 생물체가 자기 새끼들로 하여금 젖을 빨게 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즉, 포유류라는 얘기이며, 포유류라 하면 아무래도 육상 동물이 더 금방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래도 포유류인데? 바다 속에서 알이 아니라 새끼를 출산하고 새끼한테 젖을 주는데?
KJV는 신약에서는 대놓고 '고래'라고 했고, 구약에서는 최소한 바다에 사는 포유류라는 고래의 단서를 던지는 반면, non-KJV들은 두 곳 모두 '고래'의 특성이 훨씬 덜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론 재칼(jackal)이라는 단어도 참 오랜만에 듣는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접한 곳은 알라딘 2의 I'm looking out for me 노래 직후에 나오는 대사에서. 어렸을 때는 "... dinner for the jackals!"밖에 못 들었지만 지금은 앞부분의 "Steal from us again and your scrawny body will be..."까지도 들린다. 시장터에서 깽판 치던 앵무새 이아고에게 어떤 상인이 협박하는 말이다. "한 번만 더 여기 물건 손댔다가는 네놈 몸뚱아리를 고기로 만들어서 들개들에게 줘 버리겠다!" -_-;;

Posted by 사무엘

2015/09/28 08:34 2015/09/28 08:34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43

1. 하라 vs 하지 말라

세상의 법이나 규칙 같은 것은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하라'(do)보다는 '-하지 말라'(don't) 위주로 만들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시험 문제야 학습자의 심리적인 영향을 감안하여, "-틀린 예는?, -아닌 것은? -없는 것은?" 같은 부정적인 문제는 일정 비율 이상 만들지 말라고 하는 가이드라인이 있다. 그러나 법률은 아무래도 죄를 다루고 사람의 재산과 생명을 다루다 보니 심각하고 부정적인 말이 많다.

자동차나 총기, 전기톱, 독극물 같은 위험한 물건의 취급 설명서는 온갖 오· 남· 악용 상황을 금지하는 주의· 경고문으로 가득하다.
복싱은 룰의 태반이 금지 반칙 조건의 리스트라고 한다. 그 덕분에 위험한 격투기이면서도 신사의 스포츠로 품위가 유지되는 듯하다.

프로레슬링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Please, don't try this"(제발 따라하지 마세요!)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대표적인 don't 규칙이다. -_-;; 옛날에는 at home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저건 다~ 전문가들이 지극히 통제된 환경에서 각본 다 짜서 하는 액션이고, 그러고도 후유증이 쌓이고 가끔은 안전사고도 나니... 일반인이 현실에서 따라할 생각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뜻으로 home을 붙인 것이었다. 그런데 "응? 집이 아니면 학교나 도장에서는 해도 된다는 얘기네?" 이렇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서 사고 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지라 at home은 나중에 빠지게 됐다.

don't에 비해 do 법은 "납세나 병역 따위의 의무를 수행하라" 말고는 흔치 않다.
세상법에서는 어린 자녀를 제대로 먹이고 재우고 치료하지 않은 것 정도가 꽤 적극적인 do 법의 위배이다. 이것 말고도 선한 사마리아인 법도 만드네 마네 하는 말이 있지만, do 법은 아무래도 마음의 동기를 측정 가능치 않다 보니 적용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아까 말이 나온 자녀 부양도 do 법의 위배가 걸리는 것보다는 자녀를 학대하지 말라는 don't 법의 위배까지 간 뒤에야 적발되고 처벌되는 경우가 더 많다.

성경에도 물론 don't 법이 적지 않다. 특히 최초의 법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도 don't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 do 법도 의외로 좀 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 계명과 인간 계명의 중간쯤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제4와 제5는 don't가 아니라 do 계명이다.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에게는 단순히 패륜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그 이상의 적극적인 예우를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don't는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do까지 해야만 죄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또한 안식일은 유대인과 하나님 사이의 표적으로서, 일정 주기로 강제로 쉬는 것도 당장 손해를 감수하는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안식일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6·25나 진주만 폭격이나 다 일요일에 벌어졌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라고 돼 있으니 don't가 아닌 do 형태라고 본다.

구약 모세오경을 보면, 신성모독을 저지른 어느 혼혈아만 공개처형(레 24:10-23)을 한 게 아니라, 안식일에 일을 하다 걸린 사람을 처형하는 장면도 나온다(민 15:32-36).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 흉악범도 아니고 겨우(?)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까지 중범죄로 간주하여 죽였던 것이다.

안식일이야 신약 시대에 직접적으로 적용이 안 되는 것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성경엔 믿지 않은 것, 기도를 게을리 한 것, 복음 안 전하는 것 등 더 적극적으로 do 법을 명시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도 많이 있는 셈이다.

특히 오늘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죄, 지옥 가는 유일한 죄"는 살인· 간음· 사기처럼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른 죄가 아니라, 하라는 것을 안 한 죄이다!
마치 출애굽 직전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반드시 발라 놓아야 한다거나, 놋뱀을 반드시 바라봐야만 살 수 있다거나 한 거처럼.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2. 법을 만드신 분, 법 위에 계신 분

성경에는 신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예가 아주 많다. 이것은 성경과 성경간의 연계 효과를 강화하고 내용을 교차검증하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가령, 여느 무신론자 개독안티가 아니라 예수 믿고 교회도 댕긴다는 사람이 창세기 1~3장은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이렇게 치고 들어가면 된다. "야, 니가 믿는 그 예수님도 아벨이 실존 인물이고 의인이라고(마 23:35, 눅 11:51) 아주 진지하게 인증을 했구만 그럼 예수님도 팩트가 아닌 거짓을 믿은 거냐?" 이런 식이다.

어디 그 뿐이랴? 여타 성경 인용의 정확도는 변개된 성경과 그렇지 않은 성경을 판단하는 잣대 역할도 한다. 막 1:2의 대언자들 vs 이사야가 대표적인 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성경의 용례를 찾아보면, 예전 성경을 언제나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정확하게 인용하지는 않은 예도 많다.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신약에서는 ‘자기’가 빠지고 의인은 그냥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갈 3:11, 히 10:38)로 바뀐 걸로 유명하다.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말이다. 이것 말고 또 다른 예로는 이 글을 참고하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예수님 역시 초림하셨을 때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안식일 때 제자들이 곡식을 비벼 먹었는데, 이때 주변 율법주의자들과 키배를 하면서 하신 말씀이 “사람의 [아들]은 곧 안식일의 [주]니라” (마 12:8)였다. 이건 결국 안식일을 뭐 어찌 하셨다는 뜻이겠는가? 이 모든 사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떤 법을 제정한 주체에게는 자신도 그 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그 기존 규칙을 초월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도 있고, 또 규칙 위에 예외를 둘 권리도 있다.
성경에는 다른 여러 사건들도 많지만 특히 에스더기가 그 두 사례를 잘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결국은 하나님께는 두 적용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신자로서 그 모든 판단(judgment)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시 119:75).
이 관계를 잘 생각해 봐야 예수님/사도들의 성경 인용은 필요에 따른 적절한 수정인 반면에, 이브와 사탄의 성경 인용은 변개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도 God forbid 같은 표현은 축자 번역이 아니라 동적 일치 의역이라는 식으로 딴지를 거는 시비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봤던 월트 디즈니 <알라딘>도 이 법의 권위와 관련된 비슷한 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술탄이 자스민 공주에게
“법에 따르면 너는 네 다음 생일 때까지 반드시 왕자와 결혼해야만 한다구.” (The law says you must be married to a prince by your next birthday.)
라고 융통성 없게 말하지만, 나중에 결말부에서는 결국 이렇게 말하니까 말이다.

법을 고치겠다. 난 술탄(왕)이니까. 지금부터 공주는 자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다. (꼭 왕자가 아니어도)”
(물론, 사람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오락가락 이랬다 저랬다를 막으려고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 체계에서는 입법과 행정을 분리하고 있다. “짐이 곧 법이다”를 제도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막은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08 08:36 2015/09/08 08:36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36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기독교계 종교에 대한 정서는 거의 지구와 금성의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이다. 물론 일본뿐만이 아니라 북한 내지 중국하고 비교해 봐도 극과 극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난 솔직히 말해 일본의 보편적인 종교관을 잘 모르겠다. 완전히 불교도 아니고 유교, 도교도 아니고 전적으로 샤머니즘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신사는 무엇이고 덴노(일왕/천황)는 무엇이고 이들이 정치 종교 통합적인 존재인지? 어쨌든 기독교 배경이 절대로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딱히 단군을 숭배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해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다른 식민지를 거느리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 교리도 당연히 전파되었고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단,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계열은 아니고 스페인의 예수회가 주축이 된 천주교 중심이었다.

16~17세기 사이는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벌어져서 나라가 작살이 나 있었고, 서양의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의 순으로 왕이 바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는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 포카혼타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에서는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유럽을 다시 가톨릭화하기 위해 예수회가 만들어졌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조선도 한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지는 않았다. 황 사영 백서 사건 같은 병크 때문에 스스로 매를 번 것도 있었고. 하지만 그 기간이나 규모는 일본의 박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가 극렬 "안티개독"이었으며, 정말 중세 종교 재판을 뺨치는 가학· 변태적인 악랄한 고문과 형벌로 신자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박멸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그딴 건 그 양반이 알 바 아니었을 테고.

다른 때도 아니고 서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동안 동양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천주교 기독교를 떠나서 일단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일본의 B급 새디스트 사극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쇼군의 새디즘>처럼.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어 놓고 산 채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 미꾸라지가 가득한 어항에다 사람을 옷 벗겨서 집어넣기, 썰물 때 바다 갯벌에다가 십자가 기둥을 꽂고 사람을 거꾸로 묶어 놓기(그 상태로 나중에 밀물이 되면..;;) 이런 건 중세 서양에서는 못 본 장면 같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육체적으로 끔찍한 형벌이나 고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의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하는 형태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자행했다.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어디에 절을 해라", "입으로 믿음을 부인해라", 아니 단순무식하게 "김 일성 개XX 해 봐라" 식의 더 간단한 판별법도 있었을 텐데, 저건 그야말로 성상,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스타일에 최적화된 판별법이라 여겨진다. 나 같았으면 저런 건 걸릴 게 없었을 것이다. 마치 주의 만찬이 끝나고 남은 빵과 포도 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 몽땅 집어먹거나 여느 잔반을 처리하듯이 임의 처분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 <바비도>에 나오는 것처럼, 성찬식에 대한 견해 하나만으로도 서양에서는 한때 순교 사유였다. 기독교인이 천주교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북한은 민주화에 실패하고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완전 김씨 일가의 철권독재 생지옥으로 전락했다. 종교도 주체사상 외에는 당연히 전면 말살. 스페인은 종교 개혁이 실패하고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가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누가 '개신교인'(천주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호칭)이 되면 잡혀 가는 나라가 됐다.

그것처럼 일본도 이 박해를 못 이기고 천주교/기독교를 막론하고 양놈(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양놈이 아니라 유대계=_=) 종교는 거의 씨가 말라 버렸으며, 그 상태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개신교 계열 교파가 나중에 안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1억이 넘는 일본 인구 중에 그나마 명목상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몇십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배경이 있는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도, 공산주의도 아니고 나름 자유 진영의 강대국 선진국인 것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기독교 선교의 불모지로 여겨진다. 솔까말 기복신앙에 대한 반례이기도 하다. 뭐, 국가가 부유한 것만치 국민들이 다 잘사는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쟤들이 과거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긴 했지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아예 자국민에 대한 천주/기독교 박해는 그 이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 선교를 가는 건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앗시리아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게 뻔히 보이니,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생쑈를 했던가? 하지만 인제 와서 일본에서 니느웨 같은 대각성 부흥이 과연 일어나기라도 할지는 좀 회의적이다. 성경적으로 민족주의를 적용할 문맥이 있고 그게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문맥도 있는 법이다.

한국은 역사가 워낙 스펙타클하다 보니,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보다는 일제 말기에 일제로부터의 박해, 그리고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더 부각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시아의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회가 이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는 이례적인 선례를 세계에 남겼다. 신자라면 감사할 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21 08:31 2015/08/21 08:31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29

삼손 평전

성경에 나오는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치고는 너무 괴팍하고 특이했던 사람이며, 천하장사였지만 여자에게 배신을 당해서 인생을 망친 비운의 사나이라고 비기독교인에게도 그럭저럭 알려져 있다.
삼손은 혼자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을 벌여서 블레셋으로부터 확실하게 독립을 쟁취해 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명색이 민족 지도자인데 적국의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너무 똘끼 넘치게 행동했다.

민족 대표, 민족 지도자라 불리는 사람은 적국이 아니라 그냥 중립적인 외국인을 애인·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만 해도 민족 정서상 대외 평판에 절대로 좋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연걸의 정무문> 영화에서 일본인 여자를 사귄 진진, 그리고 에티오피아 여인과 재혼했다고 비방을 받은 모세(민 12:1) . 거기에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 승만도 그 많고 많은 한국 여자를 놔 두고 '호주댁'과 결혼했다고 비방 받곤 했다. 삼손 역시 그런 격이었다.

사사기 14장을 보자.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첫 블레셋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 그런데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났다. 이건 단순히 위험에 처한 상황이기에 앞서 여러가지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왜 포도원인 걸까?

삼손은 나사르 서원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어서(삿 16:17) 머리를 깎는 것뿐만이 아니라 포도도 절대 금지이다. 단순히 알코올 성분이 든 포도주를 안 마시는 것 정도를 넘어, 아예 생 포도송이, 포도 주스, 건포도 같은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민수기 6장 참고) 불자에다 비유하자면 오신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삼손은 왜 포도원을 갔을까?
그리고 포도원에서 뱀이라든가, 혹은 여우(아 2:15)처럼 성경에도 나오고 이솝 우화에도 나오고 침입자로서 비교적 흔히 연상 가능한 동물을 만난 게 아니라, 하필 야생 맹수인 사자를 만난 걸까?

구약 역사서에서 동물 사자는 사람을 징벌하는 용도로 종종 쓰였다. 그러나 저기서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몬스터/몹만 소환한 게 아니라 Doom 2 게임으로 치면 Berserk 파워업 치트키를 먹여 주셨다. 다윗은 돌팔매질로 맹수들을 내쫓았다지만, 삼손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냥 맨주먹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다. FPS 용어로 치면 gib을 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무용담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라는 공개적인 간증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화재 현장에서 저를 기적적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 "오 그래요? 어디서 화재를 겪으셨는데요?" / "나이트클럽에서요" =_=;;; 이런 꼴이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공인으로서 포도원 안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얘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중에는 삼손이 죽인 사자의 시체에도 이변이 생겼다. 더러운 구더기가 들끓는 게 아니라 여왕벌이 들어오기라도 했는지 안에 벌꿀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꿀이어도 그렇지 저건 시체 안에 담겨 있는 건데..;;
원효대사의 이야기만 봐도, 밤에 마셨던 물이 더러운 해골 안에 담겼었다는 걸 알게 되자, 그 사람이 우웩~ 하면서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삼손은 참 멘탈도, 비위도 강했나 보다. 부정한 걸 만져서는 더욱 안 되는 나사르 인인데도 손수 사자의 시체를 뒤져서 꿀을 가져와서는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도 줬다.
이것 다음에 꿀 이야기는 사무엘기상 14장에서 또 나오는데 이것과는 어떤 영적 관계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삼손은 혼자서 사자를 때려 잡고 그 시체에서 꿀까지 득템한 행적을, 비록 공개적으로 간증은 못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명 뿌듯한 자랑거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율법을 몽땅 어긴 건 안중에 없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그걸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문제로 냈다. 사자와 꿀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평범한 사람들이 떠올리기란 물론 불가능했다.

삼손의 친구들은 치사하게도 삼손의 여친을 공갈 협박해서 답을 알아 냈다. 이것은 오늘날 정보 보호· 보안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이다. 이중 삼중으로 복잡하게 암호를 걸어 놔도, 관리자 당사자 내지 그 지인을 매수하거나 족치는 데 성공하면 그냥 끝이니까. 결국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사람이 있다.

이 때문에 삼손은 내기에서 졌으며, 옷 서른 벌을 마련하느라 다른 동네의 블레셋 사람 30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게 됐다. 옷 서른 벌 때문에 30킬이라니 오늘날로 치면 그야말로 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따로 없다. "피해자들은 모조리 시체도 없이 실종"되거나 또는 "피해자들은 모두 겉옷이 없어졌다는 공통점 있음" ㅎㄷㄷㄷㄷ
그 시절에 마을 곳곳에 CCTV가 없었던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그림의 출처는 삼손의 생애를 그린 칙 출판사 만화 전도지 <Superman?> (1990) 편.)

그리고 또 생각할 점이 있다.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벗겨서 줘야 하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옷이 찢어지거나 핏자국이 묻지 않게 매우 조심해서 죽여야 했다는 점이다. 때리거나 칼로 찔러서는 안 되고, 뒤에서 덮쳐서 목을 조르거나 비틀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삼손은 워낙 천하장사 인간흉기였으니, 사람 목을 움켜쥐고서 손가락에 까딱 힘만 주면 곧바로 경동맥이 작살이 났을 테고, 사람을 무슨 개미를 눌러 죽이듯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인 건 고전 FPS로 치면 천하무적 주인공이 잡몹들을 싸그리 사냥하면서 1000 kill / frags를 달성하는 것과 똑같다. 삼손의 이야기는 은근히 게임스럽다. 턱뼈가 아니라 칼이나 창 같은 진짜 냉병기가 있었다면 삼손의 주변에 있던 적군들은 그냥 죽는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사지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 이 사건은 포도원에서의 사자 킬과는 달리 공적인 찬양 명분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딱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내가 당나귀 턱뼈로 시체로 산을 쌓으며 1천 킬을 달성했도다"라고 으쓱하기만 했다(삿 15:16).
이에 삼손은 싸움을 다 이겨 놓고는 곧 극심한 갈증으로 인해 죽을 지경이 됐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당장의 기도 응답과 승리는 주시지만 그래도 뼈 있는 경고도 같이 주셨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경고에 담긴 메시지를 삼손이 더 일찍 간파했으면 자기 자신이나 민족이 훨씬 덜 불행을 겪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것들 말고도 삼손의 차력 기행 중에는 성을 탈출하기 위해 그 크고 무거운 성문을 잠금 장치까지 포함해 통째로 뜯어 버린 뒤, 그걸 방패 삼아 등에 지고 도망친 것이 있다(삿 16:3). 못해도 수백 kg 내지 몇 톤에 달하는 무게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전의를 상실케 하는 충격과 공포 도시전설 괴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엔 상황이 역전되어 블레셋에서 골리앗이 배출된 것이 참 공교롭다. 삼손과 골리앗이 일대일 맞장을 떴으면 어땠을까? =_=)

그런데 삼손이 그저 무식하게 힘만 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꼬리와 꼬리를 묶고 불붙는 나무 조각들을 취하여" (삿 15:4)
이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산과 들로 나가서 여우를 300 마리나... 그것도 학살이 아니라 산 채로 수집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들었을까?

이건 힘만 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퀘이크로 치면 Frags나 Excellent가 아니라 Impressive, Perfect, Accuracy 같은 분야에 속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생포하는 과정에서 여우를 다리 같은 걸 조금이라도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여우들을 꼬리에 불을 붙인 채 풀어 줘서 남의 밭을 왕창 불태워 버릴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밭을 전속력으로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삼손은 늘 개인 플레이를 하다 보니, 딱히 자기 동지· 부하나 공범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에 하나 공범이 좀 있다 하더라도 여우를 300마리나 곱게 사로잡는 건 어떤 방법으로든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삼손은 굉장한 근성가이였음을 알 수 있다.

.
.
.

이런 삼손이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너무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기의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헬스 트레이너-_-로든 성경· 정치· 군사 어느 쪽으로도 후계자 양성을 못 하고 정규전 한 번 제대로 못 치른 채 혼자 원맨쇼만 일삼다가 자폭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삼손은 들릴라의 치명적이고 위험천만한 질문에 대해 너무 째째하고 진지하고 재미없게(?) "당신, 내 힘의 근원을 알려고 했다간 다쳐. 그런 건 다시는 묻지 마시오. / 내 힘은 우리 민족의 신인 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오" 이렇게 원천차단 돌직구를 날리기에는... 너무 대인배였다.
예전에 사자를 죽이던 시절부터 수수께끼와 내기를 즐기던 근성이 여전했다. 이제는 절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자기의 힘의 근원마저도 수수께끼 소재로 삼아서 "그게 궁금해? 그럼 내가 힌트 줄 테니 알아맞혀 보셔" 유흥거리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살얼음판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게임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순진하고 철딱서니 없는 구석은 있을지언정, 교활하거나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동족들로부터 버림받을지언정 자기가 먼저 동족을 해치지는 않으려 했으며, 철저하게 피아 구분을 할 줄 알았다. "나 한 몸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리라"라는 뭔가 요나와 예수님의 예표스러운 행적도 있다.
그 스펙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자한테는 완전 순애보였고..;; 어쨌든 교활 잔머리의 천재인 발람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성향이었다.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삿 16:28,30)는 눈물이 핑 돌 정도의 회한 서린 비장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은 적군에게 잡히고 나서 꼴좋다고 얼마나 새디스틱한 모욕과 능멸을 당했겠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로 치면 ㅎㅎ/ㅋㅋㅋ를 W를 붙여서 haw haw라고 표현하는 건 칙 만화 전도지의 고유한 관행이다.)

가정용 소형 맷돌이 아니라 아예 감옥에 있는 대형 맷돌은 나귀나 소 같은 동물을 동원해서 돌리는 물건이다. 요즘 같았으면 당연히 내연기관이나 모터를 쓰지 생명체는 쓰지도 않는다. 자동차에 밀려서 인력거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삼손은 딴 데다 비유하자면, 배나 건물의 지하 기계실 같은 데서 평생 힘만 쓰는 동력 셔틀로 전락하고 말았다(삿 16:21).
작업 환경이 어두컴컴한 건 삼손에게는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눈이 없는 상태이니까. 사람을 무진장 귀찮게 하던 파리나 모기가 결국 생포당해서 날개가 뽑힌 것과 비슷한 격이다.

삼손의 생애를 각색한 드라마 중에는 (1) 들릴라가 마치 가룟 유다마냥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삼손을 배반한 것을 후회하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이야기가 들어간 게 있다. 요즘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악 구도보다는 대체로 입체적인 인물 위주의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또한, 삼손이 마지막 순간엔 자기가 신전의 기둥을 붙드는 것을 도와 준 소년에게는 몰래 (2) "고맙소. 당신은 이 신전에서 최대한 멀리 빨리 탈출하시오."(내가 곧 신전을 무너뜨릴 거니까)라고 귀띔을 하는 애드립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진실은 저 너머에"이다. (1)과 (2)는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애드립일 뿐인 것을 감안하도록 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경에 따르면 삼손은 거대한 석조 건물을 맨손으로 붕괴시킴으로써, 자폭하면서 죽인 블레셋 사람 수가 생전에 죽인 블레셋 사람 수보다 더 많았다고 말한다. 저 정도 대형 신전은 폭탄 테러로 붕괴시킨다고 해도 TNT가 몇 톤짜리가 필요했겠는가? =_=;;; 이거 정말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참고로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가 TNT 2.3톤 정도의 위력이었으며 영국의 Gunpowder plot이 위력계수 0.55짜리 흑색 화약 1.n톤이니 TNT 1톤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의 위력으로 추정됨)

성경에 기록된 생전의 kill 수만 해도 최하 1000+30+알파인데, 저 붕괴 사고로 몰살당한 사람은 제일 적게 잡아도 3천 명가량으로 추정한다(삿 16:27, 30). 블레셋 민족의 원수 삼손이 재주 부리는 꼴을 보러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죽은 사람이 600여 명, 부상자가 900여 명이니 저 살상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삼손은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덕분에 자살· 자폭을 하고도 정황상 얼마든지 구원받는 게 가능하다는 예로도 언급된다. 삼손이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선진이라는 것을 히브리서의 저자(아마 사도 바울)가 확실하게 인증한 셈이다. "삼손도 믿음으로 신전을 무너뜨렸다." 같은 말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히 11:32).
또한 딸을 죽이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었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입다 역시 같이 믿음장에 있는데, 삼손은 저 사람하고도 뭔가 통하는 맥이 있어 보인다.

그나저나 머털도사가 삼손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땄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도 머리털이 다시 자라는 게 나오는데..;;

Posted by 사무엘

2015/08/18 08:27 2015/08/18 08:27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28

1. 우리말에서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높임법이 잘못 적용된 비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에 말씀이 계셨느니라"(요 1:1)는 높임법이 아주 적절하게 쓰인 문장이다.
사실, '말씀'이나 '지옥' 같은 단어는 성경 용어로서 어쩌면 영어 단어보다도 잘 번역되고 잘 만들어진 단어이다. 성경 번역 같은 데서 영어에 비해 한국어의 어휘와 문법의 한계가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오로지 약점밖에 없는 건 또 아니다.

2. 여느 관광 여행이나 맛집 방문 같은 것이야 당연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며, 직접 가서 겪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글을 통한 간접 체험이 당대의 직접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더 낫다고 보증이 돼 있는 유일한 예외가 있다. 무엇일까? (힌트: 벧후 1:19, 요 20:29)

3. 세상의 다른 고전 문헌이나 골동품은 아무래도 제일 오래 된 필사본이 원문, original에 가장 근접해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나이가 깡패이다.
그러나 이 책만은 애초에 오래 된 필사본 같은 건 닳아 없어지고 남아 있질 않으며, 반대로 최근까지도 잡초처럼 많이 필사되어 읽히고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교차 검증된 집단이 진본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4. 세상의 다른 모든 텍스트들은 원어가 당연히 원저자의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고 가치가 가장 높다. 그래서 예전에 일본어 중역이던 텍스트가 나중에 직통 번역으로 재출간되고, 그 분야 전문가는 아예 원어를 공부해서 원문을 다시 구해다 읽는다.
그러나 이 책만은 번역본이 원어 원문에 꿀릴 게 없으며, 오히려 다른 n차 파생 번역본을 모두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 번역본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 무엇일까?

1과 2, 그리고 3만 해도 불신자의 통념을 한참 거스르며 상식을 벗어난 논리이다. 기독교는 원래 그런 종교이다.
그러나 반대로 1~3을 일단 믿는 사람이라면 4를 믿지 못할 이유는 추호도 없다고 여겨진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안 그러시는 분도 있지만, 그분의 양심과 믿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이것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1~9를 다 믿으면 10도 당연히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시나, 딱히 충분히 대안이 될 만한 논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싶은 게 있다.

아무리 상수도관에서 깨끗한 물이 만들어져도 가정의 수도관이 더러우면 최종 소비자는 더러운 물을 받을 수밖에 없다. 4는 앞의 다른 명제들을 성립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이 4에 대한 보충 설명 차원에서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 계층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원어
성경의 '원문'이 기록된 언어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다니엘서 같은 일부는 아람 어라 함), 신약은 그리스어(헬라· 희랍은 그리스와 동의어).
그럼 원어로 원문만 읽으면 끝이고 성경의 내용 전수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1) 오늘날 성경의 최초 자필 원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이 온전히 집대성돼 있지 않다. 즉, 이것들은 partial이다. 내용 자체가 변개된 필사본이 있긴 하지만, 변개되지 않은 계열의 필사본이라 해도 결국은 빠짐없이 모아서 짜깁는 과정이 필요하다.

(2)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이들 언어가 인지도와 중요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원어가 사어가 돼 있다.
여느 언어들이 그렇듯이 원어의 어휘 역시,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무슨 뜻인지 분별해 줄 수 있는 절대무오한 권위자 역시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도의 표적이 없는 것만큼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사전· 어휘집도 100%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니 원어 원문만 있다고 해서 장땡이 아닌 거다. 환상을 깨시라.

2. 영어
오늘날 원어 원문이 갖고 있는 위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원어(영어) 원문(KJV) 차원의 지위를 가진 절대기준이다. 솔까말 기독교는 논리로만 따지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있는 종교인데, 그 원천적인 권위가 무엇인지 정도는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께서 보장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그 체계 하에서 최소한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추지 않겠는가. 원어 원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교한 불신자 신학자들의 말장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원어가 불필요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성경의 이 구절에서 이 원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으면 KJV의 번역을 보면 된다. 요일 2:23 후반부가 원래 필사본에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면 KJV 구절을 보면 된다는 얘기다. 원어 원문조차도 KJV로 판단 가능하다. KJV는 단순히 가장 뛰어난 번역, 우수한 번역 차원이 아닌 것이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번역본 KJV에 하나님의 영감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판단은 여러분이.

KJV를 최종 권위로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신자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을 해 보시라. 기독교라면 저런 절대 기준이 상식적으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는 건전한 하나님이라면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 차별을 하지 않으시며, 그런 것쯤은 보장해 주셨을 것 같지 않은가?

지옥에 대해 경고를 하기 위해 굳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내서 증언시킬 필요가 없듯(눅 16:27-31),
원어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현대인들을 위해 굳이 그 시절의 원어 토박이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보내실 필요가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라고 책망했듯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읽은 사람은 이미 원어 성경을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관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언어의 관계는 성경의 여러 비유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3. 자국어
절대 기준인 영어 KJV를 바탕으로 건전한 교리관을 갖춘 양심적인 번역자가, KJV의 표현을 그대로(가령, '유월절' 대신 '이스터', '기뻐하라' 대신 '잘 있으라', 요일 5:6-7도 온전히 갖추고 등) 자국어로 일관성 있는 스타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성경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 전하고 신앙 서적을 만드는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이것은 "신들과 같이", "절대무오한"은 못 되더라도 노아나 욥이 "완전했던" 것과 같은 완성도를 갖췄다.

해당 자국어의 특성을 이용해서 번역을 아주 적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하나님, 말씀, 지옥 등), 어휘와 문법 체계의 특성상, 그리고 해당 언어권의 문화· 관습의 한계로 인해 KJV 특유의 도치나 중의성, 운율, 미묘한 문법 요소들을 다 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해당 언어나 번역자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성경 강사가 영어 KJV를 참고하여 보충 설명을 해 주면 된다. 마치 데나리온이라는 화폐 단위가 요즘 물가로 얼마 정도라고 얘기하듯이. 오늘날 영어의 지위를 생각하자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꺼내는 것보다야 상황이 훨씬 더 나아진 것이다.

(그럼 원어에서 영어로 번역될 때는 원어의 모든 뉘앙스가 고스란히 옮겨지는 게 가능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언어학적인 팩트 답변도 있고, 그것만으로 좀 확신이 안 서서 믿음의 영역으로 그냥 받아들이고 넘겨야 하는 면모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정도까지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만, 각 언어마다 최종 권위가 제각각 또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최종 권위라는 게 무슨 뜻인지 파악을 못 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단지 모든 언어적인 혼란을 일축하는 중심점에 영어 KJV가 있다는 것이 KJV 유일주의 신자의 믿음이다.

'영킹 유일주의자', '이중 영감론자' 등의 누명 내지 딱지에 전혀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그럼 그들이 미는 대안은 뭔데? '원어 원문 유일주의자'이건 '영어 숭배자'건 '자국어 만능주의자'이건, 어느 편에 서더라도 그에 대한 멸칭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국은 뭔가를 신념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마치 무신론도 유신론만큼이나 동일하게 신념이고 신앙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겠는가? 원어 원문은 앞서 말했듯이 실체가 없으며, 반대로 자국어 최종 권위 운운은 당장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영어 중심이 가장 현실성 있고 균형 잡혔으며, 실제로 KJV의 출간 이래로 지난 400여 년간 역사적인 증거와 열매도 넘치는 건전한 관점이다. 애초에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교리를 믿는 신자가, 한 성경 역본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와 일치하지 않는 역본은 틀렸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단언하건대 절대로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06 08:31 2015/08/06 08:31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24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전에 한번 다윗과 미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 얘기를 작정하고 좀 늘어놓아 보겠다.

구약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이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에는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사사(재판관)라고 불리는 정치· 종교 지도자가 백성을 통치했다.
정치 삼권 중에서 입법과 행정이 빠진 사법이 부각되어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입법은 이미 모세의 율법이 있으니 더 건드릴 필요 없고 행정은 글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너희 인간들은 이미 있는 법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법의 집행만 하라는 뜻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절의 사사는 말 그대로 판관 포청천 같은 위상이었다. 다만, 본업인 재판만 한 게 아니라 때로는 전쟁을 지휘하고 민족을 외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혼자 블레셋 사람들을 다 때려잡은 삼손도 사사였으니) 하지만 호화로운 궁전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수많은 종과 상비군을 거느리면서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민족들의 왕과 비교했을 때 '가오'가 안 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마지막 사사 겸 첫 대언자는 '사무엘'이었다. 그의 시대 때 백성들은 드디어 자기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삼상 8:5).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도 이방 민족들처럼 절대권력 국왕 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보고 싶지, 하나님 특유의 '그때 그때 달라요' 식의 믿음 행사가 필요한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반역의 영으로 인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안 그래도 걸핏하면 전쟁에 외세 식민지인데 권력이 부족한 사사 통치 체계로는 나라의 앞날이 영 불안하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니"란 표현이 사사기에 도대체 몇 번 나오던가? 사무엘은 인생이 다 좋았는데 자녀 교육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런 요구를 듣고는 불쾌한 반응이었지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긴 하지" 차원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다. 애초에 율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왕정으로 전환할 때 왕이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기도 했다. "율법 말씀을 필사해서 부지런히 묵상해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해서 사치품인 동물 말을 너무 많이 장만하지 말라" 같은. 신명기 17장을 읽어 보면 참 절묘함이 느껴진다.

단, 하나님은 왕을 가져 본 적이 없던 백성에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 주셨다. 간지 넘치고 뽀대 나는 왕권을 유지시키는 원천은 전~~부 죄다 너희들의 노동력과 세금이라는 것을 말이다.
얘들은 안 그래도 율법에 따라 종교적으로 바쳐야 하는 헌물들이 장난이 아닌데,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세금 수탈까지 추가되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유지되는 동안 안식년은 사문이 되고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감당이 되니까.

그때 가서 너무 힘들어 죽겠으니 도로 왕을 없애자고 하소연해 봤자, 대통령도 아니고 한번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의 맛을 봐 버린 왕이 호락호락 하야해 줄까? 천만의 말씀. 역성혁명, 쿠데타 급의 일이 터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상 정세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어쭈? 네놈들이 내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괘씸한 것들! 어디 엿먹어 봐라" 같은 보복성 공갈 협박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던 것이다(삼상 8:18). 성경은 생각보다 정치 분야의 통찰도 많이 담긴 책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본인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는 그 시절의 역사가 지금으로 치면 "우리에게 자가용을 주소서"와 비슷하게 읽힌다. 차가 있으면 이동이 정말 편리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지와 뽀대도 많이 난다. 그러나 차도 일단 장만하고 나면 유지비가 도대체 얼마나 깨지던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생활 패턴과 경제 양상이 확 달라지게 된다. 빚 내 가며 차 잘못 샀다가 도로 무를 수도 없고 손가락만 빨며 카푸어로 전락한 사람 많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전무했고 현재까지도 다시 없는 왕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의 사무엘기, 열왕기와 역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런 특이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울은 키 크고 잘생긴 미남이었다(삼상 9:2). 군사 영도력도 훌륭했고(삼상 14:47-48), 재임 기간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후임인 다윗과 같은 수준의 큰 병크를 저지른 것도 없었다(밧세바 간음, 인구 조사). 하지만 성경에서의 평가는 다윗과 너무 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닥을 긴다.

사울은 영적으로 점점 타락했다. 다윗이 자신의 위험한 정치 라이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그를 정당한 이유 없이 죽이려 했으며, 다윗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해 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막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가 금지해 놓고는 위급하니까 결국 부리는 영을 지닌 무당을 찾아가서 점괘를 구할 정도로 심각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행적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정말 불신자스러운 '적당히'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관점에 아주 충실했다. 세상의 정치판에서 성공하는 데는 이런 유도리 타입이 딱 적절하다.
그는 하나님께 대놓고 반역을 한 게 아니었고, 발람처럼 교묘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사악한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전적으로 드린 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경험하는 그런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저런 부분적인 순종과 온전하지 않은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보다 하나님이 광장히 싫어하시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잔인하고 부정적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답시고 가축들을 살려 갖고 왔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그 유명한 말로 책망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먼저 혼자 휙 가 버리시면 전 뭐가 됩니까? 백성들 앞에서 가오가 안 서니, 같이 좀 나가시죠, 네?"(삼상 15:30)라고 자신의 정치 생명과 체면치레 걱정만 했다.

사실 사울은 예전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좀 도착이 늦어진다 싶으니까 자기가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친 적이 있었다. 성직과 관련된 절차와 규율이 제멋대로 문란해지는 걸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구약 성경 역사서 곳곳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울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 내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 같은 영적인 일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별로 없는 딱 세속 정치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근본이 글러먹은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완전히 학을 떼 버리신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간음과 살인방조죄를 저지른 다윗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삼하 16:11-12)라고 말한 다윗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예수 믿는 크리스천은 이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거지이기라도 해서 사람으로부터 헌물을 받아야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할 처지가 전혀 아니란 말이다!

자, 사울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충분히 분석과 설명이 됐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좀 꺼내 보겠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다윗은 자기가 쫓아낸 상태이고 사무엘은 죽고 없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응답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변덕쟁이여서가 아니라 사울이 여전히 자신의 나쁜 버릇을 안 고치고 "흐음.. 대충 기도해 보고 이래도 응답이 없으면 마지막 카드로 점이라도 쳐야겠다" 같은 불순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대상 10:13-14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애초에 여쭌 게 아니었다고 진술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다.
엔돌의 무당이 불러 낸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었을까? (삼상 28:7-14)

나도 옛날에, 한 15~20년쯤 전에는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개 무속인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낼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그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며,
또 진짜 사무엘이라면 지금이라도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겠지, 저렇게 잔인하고 매정하게 사울을 멘붕시키고 죽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인간적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고방식이 당시에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다의 딸이 설마 진짜 죽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물론 지금은 진짜 사무엘이라고 생각이 바뀐 지 오래다.
무당은 평소에 하는 것처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부정한 영이나 하나 불러내려고 푸닥거리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타이밍에 맞춰 레알 사무엘을 소환시켜 주셨다. 돌발 예외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당은 깜짝 놀라 자빠지고, 자기에게 온 고객이 무려 이 나라의 왕인 것도 알아채게 됐다.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 가장 성경적인 이유는.. 인간적인 거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사무엘의 예언이 다음날 정말 문자 그대로 정확· 정밀하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비록 마귀에게도 예언을 적중시킬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모호하게 한 예언이 어쩌다 부분적으로 적중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저 문맥에서 사무엘이 가짜라고 생각하기에는 "예언의 성취"라는 건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너무 너무 긍정적으로 흐르는 심상이다.
욥의 행동에 대해 사탄이 예언한 것,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거짓 대언자들의 온갖 거짓 예언들 등등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예언의 성취 여부"만이 중요하지 그 예언에 담긴 메시지가 긍정적인 내용이냐 부정적인 내용이냐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고방식이 성경의 저술 분위기대로 바뀌는 현상이다.
다른 예로, 한때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피땀 흘리면서 울부짖었고, 동정과 연민 때문에 울었을 거라고 나도 실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많이 읽고 나면..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게 납득이 되게 된다. 그런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끝으로, 사울은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말년에 너무 타락했고 자살까지 했는데 도저히 하늘로 갔을 것 같지 않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듯. 성경에서도 사울은 신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단서를 얻을 수도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조차 못 받은 사람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무래도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인 사무엘 내지 요나단과 같이 있을 거라는(= 낙원에) 언질이 있으니(삼상 28:19) 굳이 따지자면 사울도 구원은 부끄럽게나마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단은 지배적이다.
신약에 부끄러운 구원의 상징으로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있다면, 구약에서는 사울이 그와 비슷한 급이 아닐까 싶다.

관심 있는 분은, 사울 왕과 관련된 의문을 더 자세하게 다룬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아시다시피 '새마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닉으로 쓰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5/06/21 08:28 2015/06/21 08:28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07

성경에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병이어나 십자가 사건과는 달리 동일한 공통 사건이 아니다. 도대체 어느 게 어느 사건인 걸까?

분류 마태 26:6- 마가 14:3- 누가 7:36- 요한 12:3-, 11:1-2 판정
누가 한 여자 한 여자 죄인인 여자 마리아 일단은 이 단서만으로는 동일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알기 어려움
언제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얘만 세 복음서보다는 시기적으로 명백하게 훨씬 전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누가복음만 혼자 차이가 남
어디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어떤 바리새인의 집. 하지만 40절을 보면 그 사람 이름도 "시몬"이라고 나오긴 함 베다니에 있는 모처 (마르다와 마리아가 섬김) 누가복음만 베다니 언급이 없고 그 문맥이 아님.
무엇을(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음 깨뜨려서 예수님 머리에 부음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발 씻고, 발에 입맞추고 머리털로 발 닦음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음 얘는 이상하게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이 동일 그룹으로 묶임
그 뒤 들어온 태클 제자들 왈, "향유를 비싸게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어떤 사람들 왈,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그 바리새인 왈, "예수님이 레알 대언자라면 저 여자가 얼마나 질 나쁜 여자인지 바로 눈치 챌 텐데" 가룟 유다 왈,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누가복음만 크게 차이가 남
이에 대한 예수님의 실드 (왜)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누가복음만 완전히 딴판인 내용

보다시피 우리에게 혼선을 주는 요소는 딱 두 가지이다. (1) 인명 '시몬'의 정체가 오락가락하고, (2) 머리와 발 부위 묘사만 다른 카테고리와 다른 방식으로 분류된다는 것.

하지만 사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의 큰 그림을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누가복음만 다른 사건이고 마태· 마가는 동일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머리와 발에 모두 향유를 부었다고까지는 취합이 가능할지 모르나, 시몬이 바리새인 겸 나병 환자인 동일 인물이고 마리아가 과거가 추잡하기도 한 여자이고, 예수님이 한 장소와 한 시간대에 자기 장사 얘기와 "마리아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말을 동시에 하셨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하다.

요한은 마태· 마가와 상당히 비슷한 사건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듯하다. 하지만 똑같이 300데나리온 드립이 나오고 예수님이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하셨다는 걸 생각하니 좀 이질감이 느껴지긴 한다.

다음에 교회에서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같은 찬양을 부를 일이 있을 때 참고하도록 하자. 가사를 분석해 보면, '깨뜨린다'는 마가복음에 있고, '발 위에 입맞추고 붓는다'는 내용은 누가복음에 있다. 여러 사건을 한데 살짝 뭉뚱그려 놨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10 19:29 2015/06/10 19:29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03

구원과 행위의 관계

세상의 다음 법칙들을 생각해 보자.

  •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무료 유인물이 공짜라고 해서, 거기 있는 유인물들을 몽땅 혼자 가져가도 되는 건 아니며,
  •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이 공짜라고 해서 자기 집 쓰레기를 몽땅 가져와서 거기에다 버려도 되는 게 아니다.
  • 뷔페가 음식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고 해서 딴 그릇에 담으면서까지 막 퍼 가도 되는 건 아니다.
  •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무임 승차권조차 아예 없이 개찰 구역 안으로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 남이 만든 어떤 소프트웨어가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저작권 자체를 사칭해도 되는 건 아니다.
  •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남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와해시킬 자유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엔 이와 비슷한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것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finally..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혼의 구원이 공짜이고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서 □□□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안에 들어갈 말은 건전한 예수쟁이라면 누구나 유추 가능할 것이고. (롬 6, 엡 2, 고전 8:2, 갈 5:13 등)

다시 말하지만, 크리스천은 구원받기 위해서, 혹은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다른 사람이나 세상 정세를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선과 보상의 기준을 보고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 차원에서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믿음의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철덕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우리나라 철도의 모든 것을 줄줄 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자연스럽고 지당한 이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Q. 너는 철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일 테냐?
A. 새마을호 객실에서 흘러나왔던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악보로 만든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입증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복수 정답이 존재함)


이렇듯,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lexical하게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진술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실질적인 내용은 일맥상통하며 모순이 아니다.
그 정도 모순도 분간 못 할 정도면 성경 못 읽는다. 성경엔 그거 말고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이 차고 넘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3 08:29 2015/06/03 08:29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00

« Previous : 1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 18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676399
Today:
967
Yesterday: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