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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 성모 화뷁님의 만화에 있는 아래의 유명한 짤방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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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부친'으로 잘못 적은 게 아닐까 싶다. ㅋㅋ
그런데 어라? 성경을 보니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도 부친이 복수인 거 같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마 1:16)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눅 3:23)

물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관계에 의해 태어난 분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낳고 낳고' 일색이다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저렇게 예외적인 진술을 해 놓았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게 아니므로.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요셉의 아들인 것처럼 보였다고 기록해 놓은 독특한 필체를 주목하기 바란다. 재미있지 않은가?

허나 이것은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계보는 마리아네 집안의 계보이다. 헬리는 요셉의 장인이다. (☞ 자세한 설명 클릭)

성경이 사위를 아들이라고 적은 것은 모순이 아니며, 부정확하고 모호한 표현을 뭉뚱그려 쓴 것도 아니다. 그 당시 사위는 법적으로 장인의 아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영어 표현이 괜히 son-in-law가 아니다. 삼상 26:17에서는 사울이 사위 다윗을 아들이라고 일컬었으며, 룻기를 읽어 본 분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시종일관 딸이라고 불렀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 6:3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관계에 의해 태어난 진짜 아들딸들까지 전부 아예 사촌으로 해석하면서 마리아가 평생 동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모 종교의 주장은 내가 보기엔 드립이다.. 사위· 며느리라면 차라리 아까처럼 성경적 근거라도 있지. -_-;;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마리아는 남에게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라”(요 2:5)라는 말도 하고, 성령 강림을 위해 다른 성도들과 같이 열심히 기도도 하는 등(성경에서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인 행 1:14), 신실한 크리스천의 모습이 더 부각될 뿐, 하나님의 어머니 따위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김 화백 만화에는 오류가 많지만,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언뜻 보기에 자비심 없어 보이는 문체와 이해가 잘 안 되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KJV 이외의 변개된 성경들은 유감스럽게도 성경의 정확도와 신뢰성을 김 화백 만화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루시퍼를 '계명성/새벽별'로 변개하여 사탄 마귀에게 예수님의 칭호(계 22:16)를 붙였다거나,
이스터를 유월절로 바꿔서(행 12:4), 베드로의 재판(과 처형) 스케줄을 이미 지나 버린 유월절 타이밍으로 엉뚱하게 뒤섞어 버렸다.

유월절이 지나고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가 체포되었는데, 그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뒤에 끌어낸다고라?
2만 1천원짜리 밥을 사 먹고는 2만원 내던지면서 “잔돈은 애새끼들 과자나 사 주라”고 쿨하게 나가는 논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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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2/01/17 08:44 2012/01/1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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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으며 당신과 그분과의 관계는 현재 어떠한가?
성경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판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장 친밀했다고 기록된 인물은 단연 다윗임이 틀림없다.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사랑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심지어 어리광을 부리고 망가지는(?) 것까지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삼하 6:14, 21-22).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비천하고 불쌍하게 보이면 하나님도 결국 자신을 동정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삼하 16:12).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도 사람의 손에 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징계를 받는 것을 택했다(삼하 24:14).

이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했으니 그가 시편의 대부분을 기록하게 되고, 하나님 역시 그를 ‘내(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고 일컬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백부장은 놀라운 믿음으로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한 대단한 사람이다(마 8:6-13). 그는 병에 걸린 부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선한 군인일 뿐만 아니라, 군인 정신에 입각하여 놀라운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자기도 부하를 거느리고 명령 권한이 있는 장교인데, 하물며 예수님이라면 말만 하면 병이 뚝 떨어질 것이니 구태여 자기 집에 감히 찾아올 필요조차 없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거 생각해 보아라, 엄청나지 않은가? 덕분에 그는 원격 진료 즉각 완치(?)라는 기적을 그 믿음대로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능을 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 있다(긍정적인 쪽, 기쁜 쪽으로!). 심지어 천장을 뜯어서 병 걸린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려다 놓은 친구들처럼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머리를 써서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를 하나님과 reasoning을 하고(사 1:18), 그걸 끈기 있게 밀어붙여 보도록 하자. 이건 교만이나 하극상이 아니며, 가나안 여인의 명대답(마 15:27)이라든가 히스기야의 항변(왕하 20:3), 불의한 재판관 비유(눅 18:1-5) 같은 좋은 예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군대식 “까라면 까”가 아니다.

3.
욥은 의인이었다. 너무 흠잡을 데 없는 스펙이기 때문에 뭔가 특이한 계기가 없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기회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고난을 당했다.

욥은 그때도 딱히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아주 잘한 행동이다. 그는 끝까지 자기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냈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많이는 안 바랄 테니 이 상황에 대해서 잘잘못이나 한번 같이 공정하게 따져 보고 싶다고 거듭 호소했다. 이것도 논리적으로는 지극히 정당한 대응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너무 선하게 살아서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면모를 알고 그 앞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일을 벌여 놓으실 수도 있고, 그 어떤 일을 벌여 놓더라도 선하고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고민이 해결된 것이다.
세상의 악함을 한탄한 시편 73편 기자나 대언자 하박국도 비슷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참고: 2번의 reasoning과 3번의 reasoning은 상황과 문맥이 약간 다르므로 적용할 때 올바른 나누기가 필요하다.)

4.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기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남 기도에 대한 비중이 늘어나고, 더욱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남으로부터 연보를 받아서 고맙고 기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게 연보를 함으로써 그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이 추가된 걸 생각하니 기쁘다고 성경에다 쓴 적이 있다(빌 4:17) 그리고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된 그의 기도 제목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 좀 달라”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풍부한 영적 복을 이미 받았는지부터 좀 깨닫게 해 달라”이다.
바둑으로 치면 수읽기의 수준이 평범한 신자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금송아지 사건 때의 모세의 중보 기도(출 32:11-13)도 단순히 자기 동족의 영달을 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좋은 기도였다. 이런 기도일수록 응답률은 크게 올라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한 사람은 기도 자체도 이런 식으로만 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순환...;;

그럼, 이제부터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정적인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5.
최초의 여성 이브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조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나 쓴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 2:16-17과 창 3:3을 비교했을 때, '만지지도 말라' 같은 극단적인 말이 불쑥 추가되기까지 하기는 어렵다.
“에이, 기왕이면 다 먹게 해 주지 하나만 저렇게 제약을 거는 이유가 뭐야? 치사하다.” 정도?

6.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기 주인에 대해서, 아주 까칠하고 엄격하고 인색하고, 종들을 불가능· 부당한 요구로 착취만 하는 악덕 고용주로 알고 있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눅 15:29로부터 미뤄볼 때 아버지에 대해 평소에 꽤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 여러분은 악한 현 세상 안에서 신앙생활을 육신의 깡으로만 버티면서 하다가, 제풀에 지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해서 저런 오해에 빠지는 경우는 있지 아니한가?

주인이 맡겨 놓은 1달란트를 있는 그대로 잘 간수해서 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은 주인에게서 심한 꾸지람을 듣고 벌까지 받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생각해 보자.

7.
예후는 아합 왕족을 개발살내고 바알 숭배자들을 학살하는 일은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였으며, 이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잘 따랐다고 보기 힘들다. (왕하 9-10)
잘못된 것, 이단 교리를 정죄하고 파괴하는 일에만 앞장설 뿐, 그 대안인 바른 것을 세우고 보급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성도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8.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세상적으로는 정말 괜찮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키 크고 인상 좋고, 초기엔 성격도 아주 겸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카인 같은 '적당히 자기 식'이라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불완전한 순종(세상적으로 보기엔 그리 큰 잘못도 아닌데!)과 변명 일색은, 기본부터 글러먹어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싫어하시는 방식이었다.

다윗 같은 급의 큼직한 살인· 간음죄도 없건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게서는 일찌감치 정이 떨어졌고 손을 떼고 말았다.
사울은 다윗과는 달리,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문제였으며, 그는 말년에는 정 안 되니까 무당을 찾을 정도로 영적 상태가 막장으로 치달았다.

9.
성경에는 카인, 아합, 이세벨, 가룟 유다 등 여러 악역(?)이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악질적인 악역은 아마 발람일 것이다. 돈을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 양다리 회색분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영악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용해 잔머리까지 굴린 사람이다.

민수기 24장과 25장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각색하자면 이렇다.
“이스라엘 민족은 참 신인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평범한 군사력만으로는 우리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기쁨조 미인계를 동원해서 쟤네들을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타락시키면 하나님이 제 발로 자기 민족을 징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OK?”

이스라엘을 직접 저주하지는 못한 대신, 발람이 요런 천기를 누설해 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스라엘은 이 작전에 말려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으나, 성경은 이 원수 발람도 결국은 제 명에 못 살고 뒈졌다고 민 31:8에서 친절히 써 놓았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까지 발람의 길, 발람의 교리 등으로 두고두고 그를 디스한다. 신약에서 나쁘게 등장하는 구약 인물은 죽어서 지옥 가 있다고 간주하면 정확하다.

※ 맺는 말

내가 느낀 건데, 영적 성장에는 영재· 천재가 없다.
초등학생 나이 때 미적분을 술술 풀고 성경 100구절 이상을 암송하고 토플 만점을 받는 애는 있어도,
초등학생 나이 때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때리면서 훈계할 필요가 없어서 잠 22:15의 예외에 해당하는 애는 없다. 이래서 성경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자동차 운전은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할 정도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동차 설명서와 도로 교통 법규를 다 외우고 있다 해도 그런 어린아이에게 운전을 맡기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 역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가 있으니, 위에서 열거한 예에 따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바람직한 예를 벤치마킹하고 이를 따라가도록 노력해야겠다.

한동안 미친 듯이 컴퓨터나 철도, 교통수단 쪽 글을 썼지만 성경의 사색과 묵상의 결과도 틈틈이 메모해 놓은 게 있다.
필요악에 대해서, 그리고 모세에 이어 요셉에 대해서도 아이디어만 적어 놨는데 본격적으로 집필을 할 시간이 없다.

아 끝으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믿음 행사를 위한 위법 행위의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case by case”이다. 위법 행위가 뭔질 물으신다면 라합 내지 이집트 산파의 거짓말 같은 걸 가리킨다. 미래에 기회가 되면 이런 경우에 대한 분석도 다루고 싶다.
여백이 부족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쓰련다.

Posted by 사무엘

2012/01/10 19:28 2012/01/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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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크리스천이라면 인간의 '탐욕'이라는 심보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나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황금 만능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covet-ous-ness (동-형-명사)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고, lust도 그 자체가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 단어이다.

살인· 간음보다야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종종 간과될 뿐이지, 탐욕도 살인· 간음만큼이나 십계명의 마지막 10째 계명으로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금기 사항이다.
아니, 저걸 충족하기 위해서 살인(6)· 간음(7)· 도둑질(8)이 저질러지며, 그걸 합법의 이름으로 위장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9)이 저질러지는 게 태반이니, 알고 보면 탐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잠시 첨언하자면, 본인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죄들이 죄라는 n차원의 벡터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여러 점· 선· 면이라고 했을 때, 십계명의 각 계명이 커버하는(금지/정죄하는) 영역은 그 벡터 공간의 기저 벡터들이 아닐까?
물론 기저 벡터이니 각 계명들은 벡터 공간 안에서 서로 선형적으로 독립(linearly independent)일 것이다.

아놔 갑자기 웬 선형대수학 드립이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마치 삼원색의 각 색을 여타 색깔의 혼합으로 얻을 수 없듯이, 탐욕은 여타 다른 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원천이라는 것.
살인과 도둑질은 몸으로 짓는 죄요, 간음은 몸'에다' 짓는 죄요, 거짓 증언은 입으로 짓는 죄라면,1) 탐욕은 마음만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이다.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성경은 구약 율법 시절에서부터 지도자의 요건으로 탐욕을 미워하는 성품을 제시하고 있으며(출 18:2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기 드립 범죄 역시 그 원인이 탐욕이었다고 거듭해서 말한다(민 11:4, 시 106:14). 아간은 또 어땠던가(수 7:21)?
성경 66권을 통틀어 최악의 양다리 회색분자요 잔머리 굴리기의 달인으로 기록된 발람을 보라. 성경은 그도 탐욕이 문제였다고 지적하면서 신약에서까지 그를 두고두고 깐다(벧후 2:15, 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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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싫은 녀석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출처는 개그 만화 일화 종말편.

이 탐욕 앞에서는 그 대인배인 사도 바울마저 GG를 쳤다! (롬 7:7) 이거 내가 보기엔 꽤 심각한 사실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어지간한 기독교인들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 따윈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탐욕이 출동하면 어떨까? ㄲㄲㄲㄲ 타! 암! 욕!

그렇게도 육신의 스펙이 완벽한 엄친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충분했다고 생각한 바울도, 그 계명으로 인해 고꾸라지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한 것이다.
뒤이어 유명한 골 3:5는 탐욕이 우상숭배와 같다고 선언하며, 딤전 6:10은 돈을 사랑함이 그야말로 모든 악의 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세상이 원수지간(약 4:4)이며 세상에 태양이 둘일 수 없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도 없다(마 6:24, 눅 16:13).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교인'들이, 돌부처 앞에서 절하고 조상신 숭배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각종 무례한 짓(병크라고 부르는-_-)을 저질러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난 그 친구들이 지능안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쉴드를 치고 싶다만, 뭐 지능안티가 아니라 해도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러는 당신도 하나님을 들러리 삼아서 돈님을 더 섬기고, 예수 믿어서 삼박자 축복 받고 팔자 펴고 예수 이름으로 주식 대박이나 나고 로또가 당첨되고 벼락부자 되길 바라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 상태도 그런 돌부처 섬기는 미개한(?) 부류들과 똑같다. 동일한 목적인데 추구하는 방법만 다를 뿐, 극과 극은 통한다! 이것이 성경의 판결이다. 아시겠는가?

남과 비교하면서 나도 더 열심히 살고 분발해야겠다고 단순히 긍정적으로 다짐하는 걸 넘어...!
자신의 정당한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며 자기 신세 비관하고, 남이 잘 되는 걸 배아파하고 그게 미움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탐욕이며 죄악이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심보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된 말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라)

“누구누구는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 장만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세야, ㅆㅂ” 라고 한탄하는가?
당신은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정확히 위반했다. 근거는 출 20:17을 찾아보면 다 나온다.
“누구누구는 30대 나이에 벌써 그랜저 뽑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티즈야” 하면서 부럽고 갖고 싶고 배가 아픈가?
약간 transform을 하자면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저촉이다.
자기도 유부남인데 친구나 친인척의 배우자가 너무 예뻐 보이고 같이 자고 싶은가? 이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내가 보기엔 요즘 TV 광고, 인터넷이 전-_-부 저걸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칼 들고 강도짓 하는 걸 금지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은 저런 것도 금지하신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교과서적으로 훈계조로 “그러니 넌 무조건 닥치고 꾹 참고, 욕심이라곤 부릴 생각도 하지 마”로만 결론을 낼 거라면 내가 이런 글을 길게 쓸 필요도 없었을 터이니, 이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어디까지가 인간의 정당한 욕구 충족이며 어디부터가 죄악인 걸까?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도 일부 아주 완전 막장 인생이 아닌 이상, 자기도 욕심 부리고 싶어서 부리는 건 아니다.
이렇게 안 하면 이 험악한 세상에 눈 뜬 채로 코 베이고 바보 신세 되고, 뒤쳐지고 도태하는 것 같으니까 치열하게(?) 산다.

게다가 사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식 먹여 살리고 자식을 잘 되게 해 주려고 나쁜짓 하는 사람도 많다. 성경에도 마 7:11과 눅 11:11-13에서 이런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런 케이스들 때문에, 직업 종교인들은 사리사욕을 안 품으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아예 안 꾸리고 평생 동정-_-으로 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천주교나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까지 있다. 음, 그럼 사랑의 열매를 허락해 준 하나님이 나빴던 것이군. -_-

인간이 말세에 자동차와 컴퓨터 같은 눈부신 기계 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 나타나고 있는 분명한 추세가 있다. 인간의 심성 내지 양심을 이젠 도저히 믿을 수 없고(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 대신 눈에 보이고 분명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위주로 사회 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과 심성은 눈에 절대 보이지 않고 측정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제도를 개혁해도 입시 병폐는 없어질 수가 없으며, 이렇게 땅 좁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콩라인인 우리나라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그런 형태로라도 애들 교육을 빡세게 안 시킬 수가 없다. 정말 측정해야 하는 걸 인간의 기술로 측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 구조에서 그나마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건 돈뿐이니, 영적 조명이 없이는 세상은 결국 황금 만능주의와 양극화로 당연히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고삐 풀린 탐욕은 바이러스의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욕 얻어먹어도, 남들도 다 똑같이 하는데 나도 안 하면 나만 바보 되니까 어쩔 수 없다.

이제 세상은 적당히 먹고 살 만하게 지내는 중산층이라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잠 30:8의 기도 제목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의식주' 중에 주(집!)조차도 빠진 채, “생명이 붙어 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걸로 만족하라”는 성경 말씀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이고 지킬 수 없는 명령인 것 같아 보인다. (딤전 6:8)

누구는 손 하나 안 더럽히고 돈으로 돈을 벌고 지내는 반면,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가난 구제는 나랏님이라도 못 한다”란 속담은 신 15:11로부터 미뤄 봤을 때 굉장히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명언이다.3)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이삭 줍기 같은 복지 제도는,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독려함과 동시에 수혜자도 직접 나가서 활동을 함으로써 생존할 만큼만 식량을 모으는 등, 여러가지 바람직한 면모를 갖추고 있긴 한데... 지금은 그조차도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악해졌으니 문제이다.

다만,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 구조라고 해서 그 대안이, 정부에서 부자들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서 나눠 주는 것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교도소 인권이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 사고 한번 치고 빵에나 갔다 와야지”가 될 정도로 좋아져서는 안 되고, 복지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신체 멀쩡한 인간이 “연금만 받으면 되니 이제 일할 필요가 없네”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정말 망조가 단단히 든 미친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만든 것도 탐욕이지만, 사악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를 만든 것도 탐욕이다. 난 개인적으로 그런 식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부추기는 복지 포퓰리즘을 혐오 수준으로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를 무슨 유럽의 복지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이상하게 열등감과 피해의식 조장하는 글 내지 통계도 싫어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 자리에선 언급을 생략함.

이제 슬슬 글을 맺겠다.
지금 전세계 국가들이 경제가 어렵다고 하고, 특히 막대한 빚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조차도 빚이 억소리 나는 수준이라고 하니, 이 세상에 그럼 도대체 진짜 채권자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극소수 석유· 에너지 재벌? 돈놀이를 세계적으로 잘 하는 은행? 도대체 누굴까?

결혼을 위해 집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누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분수껏 살고 싶은데 이 세상의 신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돈 돌아가는 통로 어디선가 지뢰가 빵! 터지기라도 하면, 전세계 경제가 가까운 미래에 수습 불가능의 막장 패닉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성경을 통해, 인간의 탐욕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보았으나, 그 처방은 영적 전투를 야기하며 결국은 역시 개인의 믿음과 영적 상태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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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다고 탐욕이라는 번뇌가 극복되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ㄲㄲㄲㄲㄲ

Notes:

1) 성경은 당연히 거짓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며 사탄 마귀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말한다.
하지만 십계명의 제9계명은 쉽게 말해, 돈이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 부당한 이익을 위해 거짓말--특히 법정에서 위증--을 하지 말라는 문맥이다. 일체의 거짓말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가령,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려고-_-, 데이트 분위기를 매끄럽게 유지하려고 당장 마음에 없는 말을 좀 한 걸 갖고 나중에 하나님이 “너 임마, 그때 왜 거짓말 했어?” 라고 책망을 설마 하시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고 deterministic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ㄲㄲ

뭐 그렇다고 해서 모든 white lie가 성경적으로 다 바람직하기만 한 건 또 아닌데.. 대표적인 예로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알려 주는 게 좋겠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열하자면 글이 또 길어지니 일단은 여기까지만 쓰자.

2) 발람의 길, 발람의 잘못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까지.

3) 천년왕국은 절대로 공산주의의 이상향처럼 운영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사유 재산 제도는 건재하며, 가난한 사람과 빈부 격차는 존재한다! 사유 재산은 마치 부부간의 사생활만큼이나, 그리고 보호 모드 운영체제에서 각 프로세스의 메모리 공간만큼이나 철저하게 개인별로 보장된다.
구약 성경에 '네 포도원', '네 우물'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던가.

Posted by 사무엘

2011/11/10 19:21 2011/11/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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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下

첫째, 하나님은 죄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자비심이 없다. 지옥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국민 정서가 좀 이상하고 사법 체계도 그런 관행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나쁜짓을 저질러도 가해자 역시 죽었다거나, 술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거나, 우울증 때문이라거나,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면 굉장히 동정· 미화와 정상 참작을 잘 한다. 싸움을 중재하는데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며 시빗거리가 정당한 것인지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구 처지가 더 딱한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누가 더 많이 얻어맞고 다쳤는지를 더 감안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냥 눈에 보이는 결과로, 객관적인 증거 확보가 용이한 쪽으로만. -_-)

하나님은 이런 사고방식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지옥엔 히틀러, 유 영철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너무 착해서 구원도 못 받은 사람도 많고, 비참하게 살다 불쌍하게 죽은 사람도 엄청 많이 가 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죄는 철저히 미워하고 회개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로 인해 민망해하고 가슴 아파하고 죄의 결과를 수습하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한다. 죄를 무슨 치유 받아야 할 질병인 것처럼 여기고 동정하는 것, 죄 지어서 당연하게 받은 벌을 무슨 의인이 받는 시련과 영적 전쟁처럼 미화하는 것, 그 사람도 잘못된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감싸는 것...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에 대해 아주 잘못된 인식을 심어 놓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종교의 탈을 쓰고 부추기는 위선자들에게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용공 사상만 불온 사상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심어린 회개에는 무한 관대하다.

제아무리 인간의 죄가 무겁고 심각하다 한들 하나님의 사고방식에는 명예 살인이란 건 없다. 자해나 자결로 명예를 회복하는 행위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과 서양 문화권 사이에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서로 극과 극으로 갈라 놓기도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진짜로 죽어야 할 때에도 동물을 대신 죽게 하셨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의 보혈이 대가로 치러졌는데 그 무슨 죄인들 회개하면 사해지지 않겠으며, 과거에 어떤 나쁜짓을 한 사람이라도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겠는가? 죄에 대한 찔림부터 있은 후에 그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복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법칙이다. 예수님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성도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넌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도 없다. 너처럼 우리 교회를 배반하고 내 명예에 먹칠을 한 녀석은, 부끄러운 줄 알면 나가서 곱게 할복해라" 그러시지 않는다!

셋째, 박해 상황만 아니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와 대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양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양심도 믿음도 필요하지 않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발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다. 크리스천은 불신자가 언뜻 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말도 안 되고 보편적인 이성과 양심에 위배되는 사항을 믿는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모습은 불신자에게 어떤 형태로 비쳐져야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사람에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게 당연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래서 성경엔 굳이 야고보서 말씀을 차치하고라도 요 13:35, 요일 4:11-12 같은 준엄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사람하고부터 먼저 화해하라고 말한다(마 5:23). 하나님 따로 사람 따로가 절대 아니다. 대인 관계와 대신(對神) 관계는 별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더라도, 죄의 결과로 인해 야기된 잘못과 허물은 사람 간에 서로 고백하라고 성경이 명령한 것이다. (약 5:16)

- 하나님께 자백(소스 코드 차원에서): 돈을 사랑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을 구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죄는 결국, 선하신 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 그분 말씀을 믿지 않은 잘못된 마음 상태에서 비롯됐다 등등..

- 사람에게 자백(실행 결과 차원에서): 오늘도 내 성질대로 욱하고 말았는데 이건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내가 좀더 당신 입장에서 생각을 못 했다, 이 사고는 내가 잘못된 지시를 내려서 일어난 것이다, 내가 뭘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 내가 몰래 슬쩍 했다 등등...

명확하지 않은가? 그 후 회개의 열매는 당연히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을 완전 정반대로 돌이키고,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수습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임재하고 죄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진 사람이라면, 저렇게 안 하는 게 비정상이다.

남이 받아들이든 말든 내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면 사과하고, 처벌을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배상도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그럼 평생 나쁜 짓 해 놓고서 주둥이로 예수 믿고 회개만 달랑 하면 천당 가냐?” 뭐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나올 일이 없게 하나님은 다 배려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라도 그런 식의 실족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던 상황에서는 온갖 나쁜 짓 다 하다가, 죄가 탄로나고 경찰에 검거된 뒤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 싹 씻듯이, 잘못을 일단 인정하는 게 전략상으로 더 나으니까 '죄송~' 이러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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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 말이다. ㄲㄲㄲㄲㄲㄲㄲ 개그 만화 일화 3기 4화 요가 교실 편 -_-;; 비둘기의 포즈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또한, 몇 년 전엔 우리나라에서 어느 사형수가 그저 죄책감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안절부절 못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마치 가룟 유다의 도피성 자살을 연상케 하는 이런 행위도 회개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며,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냥 속 시원하게 사형 집행 해 주는 게 당사자와 국가와 국민 모두를 위해서 훨씬 나을 텐데!

본인은 보지는 않았지만, 수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밀양>에도 복음을 왜곡하는 여러 스토리 중, 이런 장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저 놈(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 안 했는데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어?” 정말 가슴아프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이 글의 서론에서 언급한 저 두 사람은 “피해자 여러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길 원합니다” 같은 말이 입에 발린 위선으로 비치지 않도록, 더는 실족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어느 사역자보다도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회개의 열매를 보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성경에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구원과는 완전 별개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개념이 있음을 첨언하고 글을 맺겠다. (요일 5:16-17) 이 사망이란 하나님께서 도저히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도를 극단적으로 데려가시는 경우라든가 사회의 형벌을 의미할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연쇄 살인 흉악범이 회개하여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그는 구원 받은 사형수이다.
기독교 만화 전도지를 보면, 안티들이 그렇게도 조롱하듯이 흉악범이 감옥에서 예수 믿어서 사형 당한 뒤 천당 가고, 그 반면 자기 의에 가득차서 예수님을 거부한 형사 내지 교도관은 죽어서 지옥 가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심지어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그 흉악범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는 지옥 가고 가해자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마저도 가능하다. 교리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단 하나 최후의 보루. 성경은 사형수에게도 인격이 있네 같은 인권 드립-_-이나 치면서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사형 제도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구원받아서 천당 가더라도, 사형은 당하고서 그 뒤에 간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논리 체계이다. 지금도 사형 반대 외치면서 피해자 유족들의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 위선적인 종교인들 역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다시 공부하면서 자기의 오류에 대해 깊이 회개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CASE STUDY:

1980년엔 5공 시절을 떠들썩하게 한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이 있었다.
원조 교제로 여고생을 임신시키기도 하고 도박빚에 시달리기도 하던 어느 불량한 체육 교사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던 제자인 이 군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려 했는데, 가혹한 환경에서 감금당해 있던 이 군이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 군이 수 개월째 행방불명이고 수사가 벌어지던 동안엔 전통이 이 군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부모를 위로하고, “유괴범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살려 주면 당신도 살고(정상 참작-_-), 아이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고 이례적으로 전두환스럽게 강경한 대국민 담화를 손수 발표할 정도였다.

범인은 결국 잡혔고, 전통은 약속을 지켰다. 살해범인 주 영형이 수차례 항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2년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83년,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떠났다.
제아무리 29만원, 빛나리, 전통이라 해도, 저 순간만큼은 정말 사회 정의를 실현해 냈다. 멋있다. -_-;;;

돈 때문에 제자를 유괴· 살해한 천하의 개쌍놈인 주 영형도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 군과 그의 유족에게 사죄하는 말을 남겼으며, 나름 두 눈과 콩팥을 기증하고 죽었다. 오늘날도 사회 구조가 최소한 이런 결말이라도 만들 수 있는 형태라면 유가족들에게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Posted by 사무엘

2011/10/31 08:41 2011/10/3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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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上

우리나라에는, 전국민이 알 정도로 시끄러운 사고를 쳐서 20세기에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21세기의 여생을 이 분야의 사역에 바치겠다고 공언한 사람이 최소한 둘 있다. 이들의 발언은 매스컴에도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하면......;;
하나는 삼풍 백화점 사장이던 이 한상 씨이다(회장이던 이 준 씨의 아들). 몽골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잘 알다시피 고문 기술자라는 말을 만들어 내며 한때 악명을 떨쳤던 이 근안 씨이다. 요 몇 년 전에 아예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그야말로 저주의 이름으로 전락한 삼풍 백화점!
당시 경영진은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전세계의 건축 전문가들을 경악케 한 전대미문의 비리와 편법을 동원하여 백화점 건물을 혹사시켰다. 그러다 결국 1995년 6월, 거대한 백화점 한 동을 지진이나 외부 폭격도 없이 제 발로 와르르 무너뜨리는 초대형 병크를 터뜨렸다. 4층 기준으로 설계된 건물을 5층으로 무단 증축하고, 미관을 위해 기둥 수를 줄이고 있던 기둥도 굵기를 줄이고, 윗층에는 무거운 온돌을 얹고, 옥상에는 규정 하중의 몇 배나 더 무거운 에어컨까지 얹고... 전문가들은 그 상태로 건물이 어떻게 6년씩이나 버텼는지를 더 신기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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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죄질이 더욱 나쁜 이유는, 건물이 붕괴할 걸 알고도 자기네만 쏙 피하고 영업은 계속 강행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귀중품을 지하로 옮기고 고위 임원들은 미리 대피하고서 말이다. 이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 패닉 상태에 빠져서 자기 혼자 마스터 키를 빼들고 전동차를 탈출해서 달아나 버린 기관사와는 차원이 다른 악행이다.

이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던 1천 명이 넘는 종업원과 쇼핑객은 건물과 함께 그대로 폭삭..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불과 8개월 남짓 만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평시에 최다 사상자를 낸 최악의 참사를 일으키고 국제 망신까지 초래했다.

한편, 이 근안의 과거 행적도 충격과 공포이다. 심문 전에 기선 제압용으로 한주먹으로 사과를 으스러뜨리는 퍼포먼스부터 시작해 물 고문, 전기 고문, 통닭 고문, 잠 안 재우기 등등.. 말이야 쉽지 당해 보면 정말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는 말했다. “내가 손대기만 하면 누구라도 불게 돼 있어.”

고문 출장까지 갔던 그가 돌연히 목회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흉악범이 회개하여 목사가 된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왕년에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회심한 것과도 성격이 다르다.

고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반인권적이고 사악한 행위이다. 성경의 그 엄한 구약 율법조차 사형은 백 번 인정할지언정, 고문은 절대 없다.
다만, 이 근안을 까는 글은 인터넷에 이미 널리고 널렸으니 본인은 for the sake of completeness 차원에서, 일부러 좀 다른 관점에서 논리를 잠시 펴도록 하겠다. 오죽했으면 인류 역사에 고문이란 게 존재했을지도 잠시 생각해 보자.

뻔히 드러나 있는 혐의를 일단 부인부터 하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거짓말로 태연하게 잡아떼기만 하던--그래 봤자, 밑져야 본전이므로-- 인면수심 흉악범 김 길태를 보고 열불이 안 났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고문이란 저런 신발샛길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는 게 본인의 육신적인 심정이었다. -_-;;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은 전북 대학교 이 윤희 씨 실종 사건을 기억하는가? 딸을 잃은 아버지는, 강력한 용의자이자--그러나 무능한 수사로 말미암아 증거 확보와 유죄 입증엔 실패-- 딸의 스토커이던 뻔뻔한 남학생으로 하여금 읽으라고 쓴 공개 성명서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이 사건을 맡은 수사관이라면 누구라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정도 사건은, 30년 전만 해도 물고문에 고춧가루 한방이면 일도 아니었을 거라고 말이다. 네놈 선배들이 피땀 흘려 이뤄낸 민주화의 열매를 네놈 같은 녀석이 악용하는 게 통탄스럽다.” (☞ 원문이 있는 곳 클릭)

요즘 같은 첨단 과학 수사 기법과 심리 프로파일링 같은 기술도 없던 시절에 흉악 범죄에 맞서서 치안은 유지해야겠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간첩 불순분자도 우글거리던 시절,
비열하고 부작용의 우려도 만만찮으나 저비용으로 성과를 제일 간단하게 내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외면할 수 있었겠냐 말이다.

고문을 옹호나 정당화할 의도는 절대 없으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단지 전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그의 과거 행적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하늘에서 그저 뚝 떨어진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더 잃을 게 없으니 배째라 하는 악질을 다스리는 제일 쉬운 방법은, 그 녀석들에게도 “더 잃을 게 있다는 걸” 일깨우고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 인간이 이열치열로 만들어 낸 차선책 중 하나가 고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두 사람은 동일하게 징역 7년이라는 죄값을 치렀다. 가정 전체가 풍비박산 났고 가족들까지 밖에 얼굴을 들고 다니질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한상의 집안은 피해자 배상금 명목으로 전재산을 압류 당했으며, 이 근안의 자녀 중엔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지자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몽골로 떠난 후 언론으로부터 수 년째 별다른 소식 없이 잠적해 있는 이 한상과는 달리, 이 근안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도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응하면서 국내에서 활동 중인 것 같다. 그런데 발언의 수위가 다소 우려스럽다.

그래, 만에 하나 그는 왕년에 정말로 국가 명령에만 충성한 사람일 수 있으며, 고문도 상부 기관의 명령 내지 묵인하에 실적 쌓으려고,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수행한 것일 수도 있다. 무고한 사람 잡은 것보다는 그래도 진짜 흉악범이나 간첩을 잡은 공이 더 클 수도 있다.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도 아닌데, 당대 상황을 감안하지도 않고 어제의 충신이 무작정 오늘의 역적으로 뒤죽박죽 평가 잣대가 바뀌는 언론 플레이도 본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목사 타이틀을 갓 얻은 그의 지금 처지에서 할 말이 아니다. 그런 변명은 그가 회개의 열매부터 충분히 보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이 근안 목사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옹호하는 발언을 자발적으로 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직도 그로 인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사람, 파탄 난 가정이 즐비한 현 시국에서 그의 자기방어 변명성 발언은 더욱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고 복음을 비방할 빌미만을 불신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죄와 벌, 회개 같은 것은 민감한 주제이다.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며 오늘날 사람들이 반드시 정확하게 갖추고 있어야 하는 개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라든가 복음에 대해 요즘 나돌고 있는 무수한 오해들도 불식시킬 수 있으며, 불신자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전한다든가 교회 내부에서 죄로 인해 간증을 잃은 사람을 다루는 과정도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두 사람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저런 개념을 재정립을 한 번쯤 할 필요를 느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교 중 하나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굳이 종교라고 풀이하자면,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규정하며, 그 죄를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해결하고 내세의 구원까지 얻으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 교리는 인간의 머리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자연인들 보기에는 완전 황당무계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거야말로 인간의 지혜와 시스템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교리로 인해 복음이 초기에 비방 받고 조롱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성경은 그것 자체만으로 두려워하거나 쫄 필요는 절대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주신 간증도 무수히 많으며, 그 어리석음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게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원칙은 변함이 없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1/10/29 08:40 2011/10/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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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찬송 몇 곡

Wonderful Grace of Jesus

가사 보기

‘세상에 이렇게 선율이 아름다운 찬양도 있구나!’ 생각이 곧장 들어서 자료를 검색해 봤다.
작사· 작곡자는 Haldor Lillenas. 사실 그는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평생 수천 편의 찬송시를 지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며, 저 Wonderful Grace of Jesus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왜 우리나라의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저 곡이 발표된 때는 1918년. 유럽에서는 독가스와 탱크가 첫 등장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가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무단 통치 하에서 신음하던 시절이었다.

이 곡을 모르는 분이라면 한번 들어 보기 바란다. 후렴을 돌림노래 비슷하게 편성한 것도 그렇고, 너무 우아하고 멋있지 않나..?
증오심으로 가득한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 짤과는 정반대로, 구원받아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감격이 느껴진다.
곡 전체를 통틀어 당김음 하나 없는데도 전혀 단조롭지 않다.

Sing On, Ye Joyful Pilgrims

가사 보기

Wonderful Grace of Jesus에 필적하는 미려한 선율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참 즐거운 노래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도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멸의 명작이지 않던가.

한국어 가사도 아름답지만, 영어 원문 가사는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떠돌되 방랑자가 아닌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심상이 더욱 잘 드러나 있다.
그 곡의 작사자는 Carrie M. Wilson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는 필명일 뿐, 그 이름도 유명한 Fanny J. Crosby 여사의 작품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패니 크로스비 여사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이분 얘기를 좀 더 하겠다.
그분은 평생 9천여 편의 찬송시를 썼지만, 작품으로 인해 자기가 유명세를 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생전에 200여 개의 필명을 돌려가며 쓰면서 작품을 발표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우리나라 통일 찬송가의 작사자 색인을 보면 압도적으로 작품이 제일 많이 실려 있는 분이 저분이다. 2006년에 나온 새찬송가도 아마 변함없을 것이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등 첫 몇 소절만 들으면 바로 알아챌 무수한 찬송가들을 작사했다.

그리고 저분은 평생을 맹인으로 산 분이다. 우리나라의 뇌성마비 장애인 시인인 송 명희가 흔히 한국의 패니 크로스비로 비유되곤 한다. <그 이름>의 작사자인 거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이고.
하지만 <그 이름>이 영어 같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세계구 급으로 퍼져나가지는 않았으니, 역시 전세계에 기독교 근간을 퍼뜨린 영향력으로 얘기하자면 미국이 짱이다.

Meekness and Maje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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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개한 세 곡보다는 훨씬 더 나중에 발표되었고 어찌 보면 CCM에 가깝다.
영국의 그 유명한 Graham Kendrick의 곡으로, 저분 하면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 <God Is Good>, <Heaven Is In My Heart> 등이 바로 떠오를 것이다.
좀 더 매니악한 분이라면, 주찬양 선교단 8집 <Hosanna! 이 땅을 고치소서>의 타이틀곡의 뒷부분에 이어지는 <Lord Have Mercy On Us>가 저분의 곡이라는 것도 아실 테고.

허나, 본인은 Meekness and Majesty을 그분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일품으로 친다.
예수님을 너무 사실적이고도 서정적으로 잘 묘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rhyme을 봐라. -ty, -ce, -le 등을 포함해서 단어 선택을 정말 절묘하게 했다.
화음도 특히 후렴 부분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느낌을 잘 살리려면 꽤 어려운 chord를 넣어서 연주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1/10/23 19:21 2011/10/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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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원색적인 문구에 잘 요약되어 있듯, 뭐니뭐니해도 내세관이 아주 분명하다는 게 특징이다.
이걸 믿지 않는 분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고 본인 역시 그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다만, 그 교리가 논리적으로 성립하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서 하늘로 가며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어떨지 이런 면모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하늘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내가 예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너무 어려서 스스로 선이나 악을 판단할 수 없으며 아직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아기, 영· 유아, 어린이, 정신박약아, 지적 장애인은 죽으면 무조건 하늘로 간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분명한 논리로 요약할 수 있다.

- 그들은 구원자 예수님을 자기 의지로 스스로 영접하지 못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으므로(못하므로)
- 그들이 태생에서부터 아무 죄가 없고 순수하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그들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에

아멘!
다윗이 삼하 12:23에서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어른들의 욕심과 잘못 때문에 이런 애들이 죽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고 죄악의 결과이다. 당장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태어난 첫 아이도,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명목으로 1주일을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애가 무슨 잘못이 있나?

하지만 그들이 죽어서 하늘로 가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며, 오히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다윗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그 아이도 다시 보게 됐을 것이다.

심지어 2000여 년 전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에도, 헤롯 왕이 예수님의 동갑내기 2살 이하 유아들을 대상으로 학살극을 저지른 적이 있다. 온 인류의 구원자가 태어난 덕분에 주변의 동갑내기 아기들이 다 뒈져셔 지옥으로 떨어졌을 리는 없잖아? 아이들이 죽어서 가는 곳에 대해서는 이 이상 어떤 논쟁도, 이견도 필요하지 않다.

2. 그러나 동물은 죽으면 끝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기를 쓰고 기독교의 지옥 교리를 부정한다. 그 대신 내세우는 것이 영혼 멸절이다. 즉, 죄인은 그냥 자기 인격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끝난다는 것.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영혼 멸절은 사람이 아닌 다른 짐승들에 한해서만 성립한다.

발생· 유전학적으로 사람과 굉장히 비슷한 유인원 동물이 존재하여 소위 진화론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을 하는 것, 불을 다루는 것 이상으로 사람이 짐승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영적인 위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전 3:21).

사람은 불멸이지만 짐승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가령, 어떤 개가 아무리 충성스럽고 어지간한 인간 말종 개차반보다도 낫다 하더라도, 개는 개일 뿐이다. 짐승은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큼이나 하늘로도 가지 않으며 완전히 없어진다.
지금 당신이 현 세상에서 보는 바로 그 동물은, 비록 지금 아무리 사랑스럽게 보일지라도 내세에서 볼 수 없다. 이 사실을 알면 사람과 짐승 사이의 우정(?)을 다룬 각종 문학 작품에도 그리 애착이 가지 않게 될 것이다.

3. 사람 식별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예수님 같은 생사람을 못 알아봐서 실수를 한 주변 사람들 얘기는 나오지만, 정작 고인을 못 알아본 경우는 없다.
예수님이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왔을 때,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생전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사진 같은 것도 없던 시절!) 그들을 바로 알아봤다(눅 9:28-34).
그리고 예수님이 미래에 지구에 재림하실 때도 세계 어디에서도 이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라고 성경은 말한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지 그 디테일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하늘나라에서는.. 신참이 한 명 들어올 때마다 마치 공항 입국장처럼 지인들이 이름 적힌 피켓 들고 사람 찾는 광경은 없을 걸로 보인다. 시대를 초월한 상봉이 이뤄질 때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1번과도 연동하여, 하늘나라에 가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내가 예전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지적 장애아였을 때 형제님이 나를 잘 보살펴 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같은 인사를 들을 걸 생각해 보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이런 데서 나오는 법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조차도 답을 주고 있다. 이런 게 감히 아메바· 원숭이 진화론이나 귀신 이야기 따위와 비교가 되겠는가!

4. 이 땅에서와 같은 결혼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라는 한 마디로 모든 논란이 끝난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현 세상에서 살던 때와 같은 결혼의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배우자가 죽었을 때 재혼이 가능하다. 성경은 간음과 음행을 그토록 싫어하지만, 과부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건 무척 중요한 개념이란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의 범죄처럼 간음을 재혼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살인에 대해서도 이미 다 예상하고 언급하고 있고, 이 체계를 악의적으로 비비 꼰 트집성 질문에 대해서도 해답을 마 22:23-33에서 마련해 놓았다. 난 성경에서 이 논리 체계를 발견하고서는 개인적으로 무릎을 탁 치고 감탄했었다.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소설 <상록수>의 스토리를 잘 아실 것이다. 지금 안산에 가면 상록수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는 실제 여주인공인 최 용신하고, 그분과 약혼한 사이였던 김 학준이 나란히 묻혀 있다. 김 학준에게는 훗날 실제로 결혼한 부인(길 금복 여사..)이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근본적으로는 김과 최가 연애 기간이나 약혼 기간을 너무 길게 잡지 말고 가능하면 어서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게 훗날 문제가 되긴 했다. 또한, 옛 약혼녀 옆에다 묻어 달라고 부탁한 김의 이런 유언 때문에 가정에 내부적으로 좀 갈등이 일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충분히 갈등이 있을 만도 하지 않은가? 이건 대놓고 저지른 불륜은 아니지만 뭔가 좀 미묘한 감정 싸움이다.

허나, 세 분 다 크리스천이었고, 세 분 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하늘에 있다. 그들이 거기서 한데 만나서 이 세상에서와 같은 질투와 갈등을 겪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시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상 매체에서 말하는 '영혼 결혼식'이라는 건 부질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5. 다른 건 못 가져가도 자식은 가져간다

저 하늘나라에 우리가 도대체 돈을 가져가겠는가, 집과 차를 가져가겠는가, 심지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가져가겠는가?
다른 건 못 가져가도 육신의 자식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보고 지내게 된다.
아 물론, 이건 제대로 키워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식에 한해서 말이다.
아니면 차라리, 앞의 1번 항처럼 엄청 어렸을 때 불의의 사고로 잃은 자식이라면, 부모가 구원받았다면 최소한 하늘에서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요즘 정말 결혼할 엄두를 못 내고 애 낳고 키울 엄두를 못 낼 저출산 시국인 거 나도 너무나 잘 안다.
또한 하나님은 음행을 극도로 정죄하는 것만큼이나 그와 반대로 결혼한 부부끼리의 사생활은 그 어떤 형태라도 무조건 존중해 주시며, 이는 자녀 계획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게 정말 영원을 생각하는 투자인지 크리스천이라면 이 변수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6. 이 땅에서 갖고 있던 기억은 과연?

이건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현 세상에서 습득된 개개인의 인격과 지식이 그곳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본인의 철도 덕후 기질은 하늘나라에서도 변함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거기서 온 우주를 누비는 철도를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육신의 성별이나 나이가 의미가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부활한 예수님처럼 33세 남자처럼 될까? 내 애인과 어머니까지? 거기까지 당장 여기서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친하게 지내던 가족과 지인들 중 상당수가 예수 안 믿고 죄 가운데 죽어서 지옥· 불못으로 영원히 이별을 하고 말았는데 우리가 과연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지낼 수 있겠나?”라는 고전적인 질문이 있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따지기나 하지 말고 당장 가족과 지인에게 복음부터 전해야 할 것이다. -_-;; 그렇게 자기 할일부터 다하고 그것 때문에 무시와 따돌림과 핍박까지 당했는데도 그들이 끈질기게 복음을 거절한 것이면 그들이 자업자득이고 우린 덜 슬프겠지.

(그리고 당신의 신앙을 비웃고 조롱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당신이 지금까지 지나치게 잘 어울리고 아쉬울 것 없이 지내 왔다면, 당신의 영적 본분에 대해서도 어차피 다시 생각을 좀 해야 할 것이다.;;)

큰 백왕좌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서 눈물을 닦아 주실 거라는(계 21:4) 약속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의 죄악을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는 것처럼(할렐루야!), 그리고 반대로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기수열외'되고 단절되고 잊혀지는 것처럼, 이때 우리는 과거의 '흑역사'에 해당하는 온갖 쓰라리고 아픈 기억들이 말 그대로 '포맷'되기도 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의 기억은 영원히 남는 것도 있고 잊혀지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7. 고참, 말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대에다가는 1을 더해도 무한대이고 1억을 더해도 무한대이다. 하늘나라도 영원하고 지옥· 불못도 영원하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에는 은퇴· 졸업 같은 게 없다. 수료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말을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수료하고서 목사님에게서 들었다.
마치 마태복음 1장은 오로지 '낳고'만 있지, 창세기 5장처럼 '죽었더라'가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군대에 고참· 말년이 있고 이등병부터 말년병장까지 계급별로 온갖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는 건 '제대'가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 영원무궁토록 갇혀 있어야 한다면 그런 관행이 생기겠는가? -_-
명심하자. 내세에서는 고참, 말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
.
.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와 지옥 구성원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생각하시는 하늘나라와 지옥 구성원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차이가 크다.
예수님을 절대적인 의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선과 악 관념이 있을 수가 없다. 그저 상대적인 권선징악 패러다임에다 “이런 사회 시스템 하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지”, “남들만치만 하면 되지”,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해먹지 않을 수 없지”, “죄도 적당히 즐길 줄만 알면 되지”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완전히 반성경적인 내세관을 전달하고 있는 웹툰 <신과함께> 같은 걸 보아라, 기반 사상이 딱 저것이다. (개인적으로 내용을 무척 재미있게-_- 봤으나, 안타깝긴 하다.;;) 내세를 소재로 하면서 성경을 배제한다면 솔직히 저 수준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하늘나라(그리고 지옥)에 대해서 이 글과 비슷한 방향으로 알 레이시 목사가 디테일을 재미있게 잘 논증한 바 있다.
예전에 말씀과 만남 출판사에서 <천국은 있다>(Window of Heaven)라는 책이 나왔고, 이걸 현재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 <천국과 지옥 바로 알기>라고 천국편과 지옥편 합본을 내놓았으므로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하기 바란다.

끝으로, 글을 맺기 전에 한 마디 더... 하늘나라는 거룩~하고 경건한 꼴통들만 있어서 조용하고 따분하고 지겹기 그지없는 곳인 반면,
오히려 지옥이 신나고 화끈하고 다이나믹한 곳이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드립에 결코 현혹되지 말기 바란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아버지와 함께 럭키짱 만화책이나 볼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래 대사가 '지옥'으로 알려져 있는데, 짤방을 뒤져 보니 '저승'이구나..)

Posted by 사무엘

2011/10/16 08:42 2011/10/1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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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 율법과 말라기 구절을 근거로 십일조 헌금을 부과하고, 심지어 솔로몬을 따라 일천번제(?)라는 이상한 헌금 제도까지 시행하는 교회가 적지 않다.
2. 목사는 거~룩한 “주의 종”이고 구약으로 치면 레위 인이다. 교회 예배당은 거룩한 ‘성전’이다.
3. 안식일은 고증상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라며, 어떤 교회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안식일도 모자라서 유월절을 지키는 곳도 있다.
4. 오늘날 수많은 개독안티들은 모세오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서, 기독경 바이블이 말하는 신은 반인륜적이고 잔인하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신이라고 공격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행한다면 이런 것도 그대로 행하겠냐ㅋㅋ라고 막 빈정댄다.
5. 성경을 잘 모르지만 어쨌든 위의 조롱을 좀 의식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의 신인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신”이라는 식의 드립? 쉴드?를 친다. 이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근거로 제시되는 각종 ‘보수적인’ 기독교 윤리관(사형 제도, 동성애, 낙태, 옷차림과 외모 등등등)에 대해서도, 동일한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쏙 빠져나간다. -_-;;


이 모든 사례는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아서 발생하는 촌극이다. 그 사례가 겨우 저 다섯 가지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신약과 구약 교리를 잘못 분간하여 저질러지는 병크는, 기독교회가 존재하는 한 아마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_-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든, 개독안티이든,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방향만 다를 뿐 그 누구라도 똑같이 걸려 넘어지고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그렇게 호락호락 만만하게 쓰여진 책이 아니다.

위의 다섯 사례들에 대한 본인의 코멘트는 이러하다.

1.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 성도는 복, 믿음에 대한 구도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말 3:10 같은 십일조에 대한 보상 자체가 오늘날의 크리스천에게는 약속되어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신약 성도가 예수 잘 믿거나 교회 열심히 잘 다니거나 헌금 많이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고 부자 된다는 약속은 없다. 신약 성도들이 이미 받은 영적 복은 엡 1:3에 규정되어 있고, 헌금 원칙은 고후 8:12 같은 자발적인 규정이 전부이다. (이 관행에 대해서 통탄하는 어느 목사님의 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과 시간과 물질을 바치지만, 그 일을 하는 동기에다 구약의 마인드를 집어넣는 건... 정말 생뚱맞고 안 어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 믿음으로 헌신할 뿐이지, 걔네들처럼 ‘십일조 바치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 받는지 따져보자’ 이러는 구도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2. 구약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벧전 2:9, 엡 2:21, 고전 3:16 같은 구절과 비춰 봤을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_-;;;
물론 본인은, 자긴 그 잘난 제사장의 의무를 다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만인 제사장 운운하는 뺀질이를 아주 싫어하며, 목사와 교사 직분 자체를 부정하는 모임도 명백히 잘못됐고 비성경적이라고 여긴다.

3. 오늘날 신약 교회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며, 그와 아무 관계가 없다. 일요일 예배는 예수님이 부활한, 더 정확히 말하면 부활이 알려진 날에서 유래되었을 뿐이다. 태양신 축제와 연관 짓는 건 성탄절, 이스터 정도로 족하다. 일요일 자체는 아무 문제될 게 없다.

4. 이런 부류들은 도대체 어디부터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환이 상한 자, 안면이 함몰된 자는 군대에 가지 못할지니라”고 하면, 얘네들은 군대가 장애인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집단이라고 드립을 칠 친구들이다. 가나안 백성들을 다 진멸하라고 명령한 하나님 탓할 줄만 알지,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명령을 100% 이행 안 하고 걔네들로부터 안 좋은 거 배워서 동화되다가, 죄에 빠져서 하나님에게서 똑같이 큰 벌 받은 건 눈에 안 들어온다.

트집 잡는 게 다 저런 식이다. 저 친구들은 성경에서 그런 의문과 이해가 안 되는 부분만 해결되면 성경을 믿겠다는 의향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알기 때문에, 나도 더 친절하게 설명 안 할 생각이다.
수학의 ‘수’짜도 모르는 초딩이 “님들아, 입실론 델타 증명부터 로피탈의 정리까지를 A4 한 장에다 내가 알기 쉽게 좀 설명해 주셈” 질문 달랑 던져 놓고는, 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욕지거리 하는 것과 같은 꼴.

그리고 끝으로,
5. 성경 66권을 통틀어 짐승과 수간하지 말라고 명령되어 있는 곳은 구약 율법밖에 없다. 그럼, 저 논리대로라면, 신약 크리스천들은 짐승과 수간해도 괜찮겠다. ㄲㄲㄲㄲ
저 사고방식의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이 시대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데 있다. 단적인 예로,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명제는 신약과 구약에 동급으로 인용되어 있다(신 4:24, 히 12:29). 그리고 구약 율법에도 정말 가난한 자, 어려운 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 구절은 얼마든지 있다.

신약과 구약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 여러 할 말이 있지만, 요약하고 또 요약하자면 이렇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하셨다. 각자 자기 favorite gods들을 찾아 떠난 이방 민족들을 상대로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지 객관적으로 맞장 뜨는 구도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정 국가 컨셉의 특이한 규범이 많았고 당장 눈에 띄는 보상에 대한 약속도 많았다. 그러나 몇몇 얘네들의 민족적 특수성이 감안된 규범을 제외하면, 윤리와 관련된 대다수 규범들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유익한 것들이다.

그 후 신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분을 거부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을 상대로 교회를 만들고, 교회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질투심을 유발해서 유대인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래서 신약 규범은 비격식· 비가시적이고, 자율적이고, 영적인 것이 많다. 그런데 그게 더 수준이 높다.

다만, 이런 하나님의 경륜의 저변에 깔린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성품은 시대를 불문하고 불변 동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사실을 전제에 깔면 신구약과 관련된 상당수의 오류를 예방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신자? 개독?)들은 도대체 왜 너네 주장만 맞다고 생각하느냐? 맞다는 근거로 맨날 성경을 들이대는데 그건 순환논리이고 우리 같은 불신자한테는 씨알도 안 먹힌다.”
본인은 왕년에 종교 배틀을 한두 번 벌여 본 것도 아니고, 걔네들의 심리 정도는 다 꿰뚫고 있다.

그런데, 참 애석하게도... 진짜로 성경은 순수한 동기로 먼저 믿어야지 나머지 부분도 나중에 차츰 이해가 되게 된다. 나도 저것보다 더 속시원한 반격을 하고 싶어 죽겠는데, 더 할 게 없다. 성경 신자들의 신앙은 세속 논리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히 순환 논리도 갖고 있고,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겠는가.

단, 일단 먼저 믿어서 나쁠 게 절대 없는데도, 안티들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극단적이고 이상한 부류들이나 들먹이면서, 그걸 일반화하여 종교가 사람의 정상적인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민화한다고 깐다. 그건 그렇지 않다고 그 정도는 본인이 반박해 줄 수 있다. 이해나 증명이 불가능한 몇몇 핵심 명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이후부터 기독교 교리는 그걸 바탕으로 철저한 논리와 일관성과 질서 그 자체이다.

본인은 구약 율법과 크리스천의 관계를 군대에다 비유한 적이 있다.
율법은 군인에게 부과되는 온갖 제약과 규율들이다. 그 중에는 각종 심신 단련과 규칙적인 생활처럼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한 게 많다. 인간에게도 유익하고 군대가 돌아가는 데도 필요하니까 그런 게 명시된 거겠지.

마치, '10시 취침, 6시 기상'은 전세계 군대나 민간인들이 지켜서 나쁠 게 없는 규정인 반면, '우리의 주적은 북한'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대한민국이라는 민족의 특수성 하에서만 유효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개독안티들이 비판하는 건, '전시에 적진으로 도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같은 법규를 보고는, 잔인하고 반인륜적이라고 욕하는 것과 거의 똑같다. 저 군법이 과연 잔인하고 반인륜적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약 교회의 크리스천은 민간인이다. 그걸로 끝이다. -_-;;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하게 먹혀드는 비유는 없을 거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니라. (마 11:11)

위의 말씀은, 제아무리 뼛속까지 FM인 1등급, A급 병사라 해도, 제대한 민간인보다는 못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뭐가 못하다는 건지 모르는 분은 없을 테고.

오늘은 요기까지만 쓰련다.
신약 vs 구약과 더불어 자매품(?)으로는, 신구약 ‘과도기’의 교리와 신약 교리를 잘못 분간하는 오류가 있다는 걸 아울러 밝힌다.

요놈의 주된 부작용으로는 치유나 방언 같은 잘못된 은사주의 교리가 있다. 그래서 행 2:38이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 적용되는 교리로 왜곡되고, 막 16:17-18을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 버린다.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구사하고, 중환자에게 안수만 하면 병이 즉시 낫고, 청산가리 같은 걸 마셔도 안 죽고..;; 우리가 시도했다가는 다윈 상 수상자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 -_- ㄲㄲㄲㄲㄲㄲㄲㄲ

이건 다른 책보다도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를 잘못 적용했을 때 나타나기 쉬운 증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30 08:46 2011/09/3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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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날개셋> 한글 입력기 6.2가 공개된 때와 아주 비슷한 타이밍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는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KJV 출간 400주년 기념판’을 내놓았다. 버전으로 치면 5판이다. 4판이 나온 지 3년 만의 일이다.

2~4판 사이에서도(특히 3판에서) 한국어 문장에 revision과 breaking change가 적지 않았지만, 2011년은 아주 특별한 해이지 않던가. 영국에서 KJV 출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미국은 의회가 아예 KJV가 미국에 남긴 공적을 기리는 성명서를 냈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엄청난 공을 들여서 번역을 다시 가다듬었다. 전체적으로 예전보다 좀 더 영어 직역에 가까워졌다.

성경이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도 아닌데, 본문을 자꾸 패치한다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시간과 돈이 들고, 번거롭고 귀찮고 골치아프다. 성경은 모름지기 권위가 담긴 텍스트여야 하는데 명분이야 어떻든 자꾸 바뀌어 버리면, 그럼 예전 판은 무슨 신세가 되는지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요즘 컴퓨터 프로그램이 보안 업데이트를 귀찮더라도 자꾸 해 줘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걸 왜 꼭 해야 하며,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프로그램 개발자는 너무 자세히 알려 줄 수 없다. (당연히, 모방범죄 같은 안 좋은 파급효과 때문)

성경 번역자도 이와 비슷한 처지인지라, 성도들에게서 안 좋은 소리와 심지어 오해까지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명감 때문에 이런 개정을 하는 것이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에 법인까지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고 이를 교계에 가장 먼저 알린 단체는 대한 항공 조종사 출신의 모 목사가 설립한 ㅁㅂㅎ라는 곳이다.
이들은 교리도 그럭저럭 건전한 편이었으나, 초창기에 세상 교회를 상대로 appeal을 굉장히 잘못하는 바람에 이곳과 더불어 킹 제임스 성경은 한국 교회에서 이상한 이단으로 완전히 낙인찍혀 버렸다. 그게 1990년대 중후반의 흑역사이다.

진리를 정말 성령 충만한 애끓는 사랑으로 호소하며 전해도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이 태반이며 열매가 맺힐까말까인데, 그걸 육신의 깡을 동원한 온갖 과격· 극단적인 표현으로 밀어붙였으니 튕겨나오는 역효과는 100배이다. 뭐, 나라도 겪었을 시행착오이니 ㅁㅂㅎ를 그렇게 욕할 생각은 없다.

둘 다 잘못했다. 비록 ㅁㅂㅎ도 잘못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경이 역본마다 다르고 변개· 삭제된 말씀이 있다고 해도 아무 경각심도 안 느끼고 최소한의 진실 규명도 안 하는 사람들 역시, 크리스천의 자질이 굉장히 의심되는 부류가 아닐 수 없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 보존에 대해서는 불신자 내지 개독안티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요즘 굉장히 많다.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과 근간이 뭔지 난 정말 궁금하다. 겨우 그런 허술한 근간으로 예수쟁이 행세하고 교회 댕기기에는, 기독교계가 요즘 저지르는 병크가 너무 많고 예수쟁이들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불신자들도 너무 많으며 반기독교 정서는 너무 팽배해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은 안 그래도 소수이던 것이 n갈래로 더욱 소수로 쪼개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때 모 공대 교수가 다시 동지들을 모아서 ㅁㅂㅎ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과는 별개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고, 그래서 나온 것이 <킹제임스 흠정역>이다. 초판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인데,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태어난 시기와 비슷하다.

성경 번역이란 건 자금과 지지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치성도 띠고 있다. 본인은 그래서 우리나라 KJV 진영의 양상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다 비유해 보곤 했다.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 이후 우리나라는 온갖 정치 집단과 이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처럼 한국 교계도 개역성경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ㅁㅂㅎ 진영까지 분열된 후, 어중이떠중이가 다 KJV를 번역하겠다고 나서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개역성경이 일제 같은 존재는 절대 아니다. 오해 말길!)

이때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치면, 이 승만 같은 일을 해냈다. 당연히 긍정적인 면에서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일제 강점기 때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이 무력 투쟁 정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이 승만은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국제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직시했고, 당대의 강대국이던 미국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친구로 만들려 애썼다. 그리고 당대의 여타 민족 지도자들과는 달리, 공산주의의 해악을 완전히 간파하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이념이 지켜지는 국가를 한반도에다 세우고 정부를 수립했다. 이북처럼 자기 지지자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개막장 독재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

그것처럼 흠정역의 주 번역자 역시, 명색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공대 교수이다. 객관성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분야에서 학문 하는 훈련을 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 번역자라는 소영웅주의에 도취해 자신을 드러내고 appeal한 게 아니라, ㅁㅂㅎ로 인해 치명적으로 실추된 KJV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성경이, 성경 오타쿠들이나 자기 교리 노선· 자기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보는 성경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기존 성경의 컨벤션을 존중하고, 교리적으로 튀는 번역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거 정말 대인배적인 마인드이지 않은가? 난 그 의도가 존경스럽다.

기존 개신교회들이 변개된 성경을 쓰고 잘못된 관행을 저지른다고 비판하고 까기만 하는 건 쉽다.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KJV를 읽게 하려고 노력한 끝에, 자기 출판사를 기성 기독교 인터넷 서점에 입점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과연 KJV 교계의 이 승만 같은 사람의 업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금까지 어느 KJV 진영도 한국 기독교회에 KJV를 이런 방식으로 알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잘한 건 티가 별로 안 나는 반면 못하면 바로 티가 나고 온갖 괴담과 비방, 오해가 나돌기 딱 좋은 분야이다. 이 승만이 악의적인 세력들에 의해 부관참시 당해 온 것만큼이나 저 번역자도 성경 번역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이단 소리 듣고, 반대편 진영으로부터 욕도 얻어먹고 험한 꼴 꽤 많이 봤다. 평범하게 자기 연구만 계속하면 돈도 훨씬 더 많이 벌고 교수로 아주 편하게 잘 살았을 텐데, 지금까지 인생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분을 성경 하나 때문에 희생한 것이다.

어쨌든 여러 모로 유사점이 보인다. 본인은 이런 식으로 비교한 글을 예전에 모 기독교 커뮤니티에다 올린 적이 있다. 당사자더러 보라고 쓴 글은 아니었지만, 어째 정보가 퍼져 나갔는지 그분의 사모님께서 그 글을 보고는 본인에게 따로 연락을 주셨다. “우리 쪽에서 직접 말하기 민망한 심정을 잘 이해하고 대변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뭐, 그래도 이 승만을 그저 증오하는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도 불편해하더라. ㅋㅋㅋㅋㅋ

그에 반해, 흠정역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 모 진영이 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파울로, 밥티스마 같은 말을 일일이 만들면서 완전히 자기네 진영에서만 쓰는 독자적인 번역을 만들었다. 기존 개신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여타 KJV 진영과도 일체의 교제를 끊고는, 자기 말고는 전부 배도하고 타락했다고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한다. 내가 보기에는 덜 배운 친구들이 이 승만이 친일 공화국 만들었다고 욕하는 것과 쎄임쎄임이다. 머리에 든 게 부족하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보인다.

양 진영이 맺은 열매는 난 이렇게 비유하겠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81
그분은 채팅과 교제를 통해 많은 추종자를 얻었지만 저(흠정역 진영)는 성경과 교회들과 성도들을 얻었습니다.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2563
김 구는 아들에게 유언장을 남겼지만, 이 승만은 국민에게 대한민국과 주권을 남겨주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꾼을 쓰신 수준의 차이이다! 킵바이블 사이트의 글과, 시스템클럽의 글을 이런 식으로 비교해서 종합한 사람은 지금까지 나밖에 없지 싶다. ㅋㅋ

말이 길어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본인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킹제임스 흠정역 진영을 지지하며, 이 성경을 쓰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흠정역이라는 이 우리말 성경은 만만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을 국내에 이 정도로 정착시키기까지 성도들의 무수한 노력과 헌신, 기도가 있었다. 부디 KJV에 대한 근거 없는 이단 낭설이 하루빨리 불식되고, 이 땅에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굳게 서고 이를 전파하는 지역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길 바랄 뿐이다.

(흠정역 홍보 동영상 클릭)

Posted by 사무엘

2011/09/19 08:13 2011/09/1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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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이야기

본인은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분명한 종말론자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시한부 종말(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도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종말 날짜를 1년 단위 이하로 구체적으로 확정한다거나, 한술 더 떠서 그 종말 날짜에 맞춰 현 사회로부터 이탈을 감행한다거나 무슨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는 결코, 절대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걸 부추기는 인간들은 그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지 무조건 성경을 벗어난 이단 사이비이며, 세상에 민폐 끼치는 사회악이다. 그들이 순진한 사람들 내지 현 사회에 불만 많은 약자들을 현혹하여 가정 파탄내고 사람 인생 망치고, 성경에 입각한 건전한 진짜 종말론까지 죄다 사이비로 매도시킨 해악을 생각하자면, 그들은 가히 “숨쉬지 마라, 산소 아깝다. 네놈을 살려 두긴 쌀이 아까워!” 급의 암적 존재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서 본인이 말하는 종말론이란, 이 인간 세상이 언제까지나 이대로 지속되지는 않으며, 특히 여러분에게 더 잘 와닿게 말하자면, 21~22세기를 넘길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맥락에서이다.

특히, 예수님이 가까운 미래에 공중과 지상으로 재림할 것이고(특히 공중 재림의 경우 휴거 포함) 성경에 기록된 것 그대로 세상이 끝날 뿐, 무슨 핵 전쟁이나 태양의 백색왜성화, 온실효과, 외계인 침략 같은 것 때문에 인류가 허무하게 멸망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지구에 재림하실 터인데 달이나 화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걸 생각하면 크리스천은 각종 SF물도 김이 확 빠지고 재미없어서 못 본다. -_-;;

종말에 대해 성경은 무어라 말하는가?
일단 종말 자체는 있으며, 말세엔 재림이고 종말이고 뭐고 다 안드로메다로 보낸 채 사람들의 내세관 자체가 무뎌질 거라는 예언이 성경에 있다. 베드로후서 3장이 다 이런 내용이다. 예수님은 속히 올 거라고 성경의 끝부분에다 약속해 놓으셨다. (계 22:2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종말의 날짜를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나니 ... (막 13:32)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행 1:7)

천국, 지옥을 보고 왔다는 얘기가 순도 100% 구라인 것만큼이나, 어느 날 어느 때에 예수가 재림하고 휴거가 일어나고 세상 종말이 온다는 소리도 순도 100% 구라이다.
전자는 장소의 금기이고 후자는 시간의 금기라 하겠다. 우리 착한 크리스천들은 절대로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기 바란다. 천국, 지옥 자체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며 재림과 휴거(흔히 말하는 종말) 역시 절대적으로 사실이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맥락에서 말이다.

인간이 종말의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 날짜가 되기 전에 이미 종말이 온다.
개그 만화 일화 종말편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아니, 세상은 그보다 훨씬 더 막장으로 치닫는다. 그때 사람들이 그 애니에 묘사된 대로 곱게 똥이나 처바르고 앉아 있겠는가?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러분이 인간을 창조하고 언젠가 세상을 심판하려고 스케줄을 짜 놓고 있는 신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인간들이 신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날짜를 잡아서 종말드립을 치고 있으면, 신이 보기엔 이것들이 무신론자 이상으로 얼마나 같잖고 한심하게 보일까? 종말의 사유를 자기들이 제공해 놓고는(자승자박) 또 종말에 대비도 하겠다고 설치는 꼴이다.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라. 미쳤다고 종말 날짜를 인간들에게 계시해 주겠는가?

윤 성목 목사님의 글 클릭.
...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틀리면 회개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변명만 할 뿐입니다)
... 2012년은 정말 기대되는 한 해입니다. 많은 종교 단제에서 2012년에 재림, 종말, 심판 등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예언이라면 적중률은 무조건 100%이다. 단 하나라도 틀리면 그건 거짓말이다. 죄가 단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맥락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예언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인 것도 결코 아니다. 수 6:26와 왕상 16:34 (여리고 재건자), 그리고 왕상 13:2와 왕하 23:16 (요시야 왕)정도로 섬뜩할 만치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오죽했으면 참 계시와 거짓 계시를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허탈하게도 '그 계시의 성취 여부'라고 성경에 쓰여 있을 정도이며(신 18:22), 거짓 대언자로 판명된 사람은 사형으로 즉결 처분이었다(신 13). -_-;;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서는 그게 마치 위조지폐를 유포하는 것만큼이나 건전한 신앙의 기강을 문란케 하는 악질 중의 악질 중죄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요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한국이나 미국 같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만나서 참 좋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_-;;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여러 번 시한부 종말론을 시전했다가 버로우 탄 적이 있다. 그들의 흑역사이다. 종교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설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10년도 더 전의 Y2K 문제는 어땠던가?

특별히 한국에서는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 휴거 병크가 한국 교회에서 재림· 종말 신앙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렸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이단 교리들의 원천으로 매도되면서 사 29:11-12와 같은 급의 금기· 봉인의 책이 되고 말았다. 난 성경을 믿는다면서 휴거와 예수님의 지상 재림을 안 믿는 사람을 보면 놀라는데, 그쪽에서는 나를 보고 또 놀라더라.
(참고로, 정말 재미있게도 그 이튿날인 1992년 10월 29일은 연세대 마 광수 교수가 외설 혐의로 체포되었던 날이다. ㄲㄲ 우연의 일치이겠지..)

그런데, 이 많고 많은 거짓 종말론자들이 예언이 빗나간 후에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회개했다는 소리는 난 정말 못 듣고 지냈다. 이것도 신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 빨리 뒤집어 엎어져 버리길 바라는 사회 부적응자, 그리고 진리가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는 잘못된 욕심쟁이 위주로, 잘못된 종말론에 현혹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있어 왔다. 그리고 이런 수요(?)에 부합하는 거짓 교사, 거짓 대언자는 앞으로도 없어질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조차도 “저런 혹세무민하는 나쁜놈들은 생기는 족족 내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너희들이 진짜로 재물이 아닌 주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갈망하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저런 낚시꾼들의 출현을 종종 허락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잊지 말자(신 13:3).

하나님이 너무해 보이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완전히 마음이 삐딱해져 버린 사람에게는 잘못된 기도에도 응답해 주시고, 그를 심지어 더욱 완악하게 하고(출애굽기의 파라오), 그가 잘못된 생각에 그대로 속아넘어가게(아합 왕) 골탕도 먹이는 다이나믹한 분이다.

폴 워셔(Paul Washer) 목사 같은 분은 한술 더 떠서 “저렇게 이단 교리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은 불쌍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자업자득이며, 그 마음 상태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의 결과일 뿐입니다”라고까지 부르짖는다. 그분은 행실에 변화가 없는 사람은 아예 구원도 못 받은 거라는 식으로 너무 또 주권 구원 내지 행위로 가는 경향이 없지는 않는 듯하나, 그래도 잘못된 은사주의와 종말론이 난무하는 오늘날 교계에 오아시스 같은 용기 있고 훌륭한 분인 건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예수님은 과연 언제쯤 다시 오실까? 휴거는 언제쯤 일어나고 세상은 언제쯤 끝날까?
점점 그때가 임박하고 있다는 막연한 말만 할 수 있을 뿐 그건 정말 나도 모른다.
기름값이 1리터당 얼마가 되고 대학 등록금이 얼마가 됐을 때쯤 끝이 날지, 서민 경제가 얼마나 더 파탄나고 국가의 부채가 얼마까지 치달으며, 이 명박보다 얼마나 더 막장인 대통령이 나올 때쯤 세상이 끝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암울한 예만 드니, 종말이 생각보다 가까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_-;;;;; ㄲㄲㄲㄲㄲㄲ

난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3, 4년쯤 뒤엔 “차라리 2MB 시절이 나았어” 분명 이런 말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오래 전부터 예상해 왔다. 하지만 2MB 님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분들은 “그건 아니야. 정말 2MB가 역사상 최악이야. 다음엔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저놈보다는 나을 거야”라고 얘기를 하는데...;;;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_-;;

비록 앞서 예를 들었던 그런 나쁜 시한부 종말론만치 해롭지는 않지만, 성경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른 것도 있다. 세상 정세와 과학 기술을 성경에다 너무 아전인수격으로 갖다붙인 나머지 베리칩이 666이고 유럽 연합이 요한계시록의 열 뿔이라는 식으로 드립을 많이 쳤다. 의도야 어떠했든, 오류는 오류였다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무화과나무 비유를 들면서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을 목격한 세대가 예수님의 재림도 목격할 거라고까지 하는데, 그렇다면 재림은 1950년대로부터 늦어도 7, 80년 안으로 일어나야 한다. 과연?

난 '개인적으로는', 정말 내 추측으로는 우리 부모 세대는 아슬아슬할 수도 있고, 내가 중장년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아마 끝이 올 것 같다. -_-;; 7, 8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100년 안으로. 어쩌면 32비트 유닉스 time이 끝나는 2038년대와 근접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이 예측의 오차가 얼마나 됐나 분석해 볼 생각이다. ㄲㄲㄲ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종 세상 정세와 전쟁, 재앙을 보고 “말세야 말세. 세상은 곧 끝장 날 거야”라고 탄식했지만 종말은 그리 호락호락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상한 양상을 보이며 막장으로 치닫는 속도를 보면 또 오래 지속은 못 될 것 같고.. 이런 생각들을 종합한 타협점을 그 정도로 잡고 있다는 뜻.
이건 내가 전혀 책임지지 않는 추측이므로 그냥 재미로 읽고 잊어버리는 게 여러분의 정신 건강에 좋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난 분명히 이렇게 얘기했다.

어떤 경우든, 미리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빠져나가고 벙커 짓고 농사 짓는다거나 하는 뻘짓을 할 필요가 없다. 특히 대환란 통과론자들의 공갈에 현혹되지 말라. 그냥 마지막 순간까지 사회에서의 자기 본분에 충실하고 신실하게 주의 일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종말 대비책이다.

크리스천은 먼 앞날을 내다보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안목도 키울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아담 이래로 전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만큼이나, 그분의 재림도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중요한 날을 그렇게 호락호락 예측 가능한 날에, 그것도 하나님 모르는 죄인들이 만들어 낸 과학 기술이나 국제 정세에 그리도 쉽게 휘둘려 집행하실 리는 없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언제 오시더라도 우리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정신줄 놓고서 헛짓 안 하는 건데..-_- 역시나 주님은 너무 빨리 오셨어!” 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게 될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자마자 하늘로 당장 데려가시지 않고, 왜 이 험악한 세상에 불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놔두고 계신지를 생각해 봐도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Posted by 사무엘

2011/07/25 08:32 2011/07/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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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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