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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둔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사람에게) 자유 의지는 철저히 존중하고 보장하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f(x) → y식의 인과응보 사고방식의 신봉자라는 것이다. 오로지 복음과 구원만이 공짜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세상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를 일시적으로 허락도 하시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언뜻 보기에 잠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전 9:11). 그러나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인과응보가 성립하게 된다.

(1)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하나님께서 결코 조롱 당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성경을 보니 A를 하지 말라고? 그럼 B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A 대신 B처럼 하면 되겠네?”라든가,
“지금까지 나쁜짓을 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 먹어도 되겠군? ㅋㅋ”

같은 패턴으로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할 거라는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든 삐딱하게 해석하고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이려 하는 불순분자의 심리와 의도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장 뒷부분의 의미는 말 그대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속담이다.

(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성경은 단호하다.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지 않을려거들랑 밥도 먹지 말라고 그런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유야 어쨌든 다 큰 성인이 백수나 니트족으로 있다거나, 정상적인 근로 의욕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퍼 주기식 '무상' 복지 포퓰리즘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삭 줍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 성경이 말하는 복지는 복지 수혜자라 해도 최대한 일은 하고서 먹을 것을 얻는 구도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건전한 근로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람마다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며, 통념과는 달리 심지어 돈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도 전면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탐욕을 그렇게도 정죄하고 싫어하는 성경이 한편으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관도 지지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공산주의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에 '불신자만도 못한 자'라는 표현이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서 쓰이기에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인 비하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나온다. 출처는 바로 딤전 5:8. 성경이 규정한 책망 대상이란 바로 '자기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가정을 부양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도 있다. 저건 다치거나 아파서 정말 타당한 이유 때문에 일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쫄쫄 굶으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또한, 잘못된 사회 제도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성경은 공산주의가 생길 빌미를 제공한 악덕 자본가나 기업주, 지주, 탐관오리들을 야고보서 5장에서 신랄하게 디스해 주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논조가 특정 이념 편향적이라는 오해는 없기 바란다.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레 24:20; 신 19:21)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고 진지한 주제가 나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 성경(모세 율법)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오해가 엄청 많다.

하나님이 세우신 준엄한 원칙은, 뭔가 사고가 발생하고 안 좋은 결과가 야기되었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상황을 모조리 수습하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가끔은 위자료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배상을 n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형법은 현대의 법보다 처벌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엄하다.

그리고, 뭔가 영구적인 손해를 입혀서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그 피해를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 사형 제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법규이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같은 변수가 참작되긴 하지만, 대원칙은 이러하다. 이런 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높은 공의만이 담겨 있을 뿐, 오늘날 같이 죄인의 무슨 교화 가능성이 어떻고,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 운운하는 배부른 변수 따윈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오늘날은 이게 완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칙으로 인식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에는 여자 얼굴에다 염산을 끼얹은 남자에게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라는 판결이 이따금씩 나는가 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데서는 좀 꼴통 같은 짓을 하지만, 저런 일부 윤리 규범은 성경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 아주 바람직하게 잘하고 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자의 인생을 이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아쉽게나마 보상하냐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복 심리에 비해서 성경의 원칙이 오히려 훨씬 더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명령하니까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나쁜 일을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깽판 칠 때 공갈을 어떻게 하던가? “도발 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고 절대로 안 그런다.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그런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했다가는 지구는 헬게이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국민을 대표해 보복이라는 걸 딱 당한 만큼만 집행해 주는 공권력을 제정하신 것이다.

아, 물론 성경에는 마 5:38-39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명령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구원받은 예수쟁이라 해도 정말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지킬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명령이다.

진짜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친아들을 흉악범에게 잃고 나서는 그 흉악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자신 있겠는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세상에서 왼뺨 맞고 나서는 오른뺨 돌려대고, 강도가 웃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참인가? 그건 그저 적당한 연기, 가식, 위선 떠는 구실로 인용하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라는 건 그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worst를 기준으로 삼고 만들어야 한다.

구약 율법이 뉴턴 고전 역학이라면, 천년왕국 헌법 내지 신약 계명은 상대성 이론 정도의 위치에 대응한다 하겠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차이가 생기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연 법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전 역학을 바탕으로 아주 극단적인 문맥에서 물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일 뿐, 기존 고전 역학의 영역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지간한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게임 물리 엔진 정도를 만드는 데 상대성 이론이 동원되지는 않는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4)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 속담 중에서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가 성경 말씀과 정확히 같은 문맥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심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준엄한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죄의 결실은 사망이니, 연역법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고 더 나아가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5)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마 12:36)

(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5)

위의 두 구절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심은 대로 거둔다”를 설파하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저명한 개독안티들이 남긴 신성모독 발언과 독설들.. 다 자기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인 동기로 남긴 실언이나 폭언,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심지어 음담패설 같은 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혀를 상대로 심하게 디스를 거는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로 '온라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과 미리 정산하는 게 좋다. 마치 경찰서 정모를 당하듯 훗날 하나님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하여 정산을 하게 되면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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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심은 대로 거둔다”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은 좋아하지만, 참혹한 죄의 결과물을 거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심상에 대한 대리 만족을 시켜 주는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형벌도 가능하면 곧이곧대로 엄하게 집행하지 않고 어지간한 결과 수습은 그냥 세금으로 다 때우려 한다.

이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의 후유증은 결국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세금으로 도저히 감당을 못 할 정도로 교도소 운영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며(지금 미국처럼), 흉악 범죄는 갈수록 증가한다.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교도소나 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까지 생긴다. 그 반면, 흉악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난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 때문에 논쟁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사형 집행이 흉악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이 범죄율 증가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적으로 단순한 원론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하자면,

  • 무단횡단을 하다가 누가 차에 치였다면, 지금 현행법보다 보행자의 과실을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 정당방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 젊은 여자가 만취 상태로 심야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로부터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면, 물론 기사는 크게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자도 잘한 게 없으며 어느 정도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식.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저런 원칙을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법학자나 그쪽 계층에서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주제만 더 다루고 글을 맺겠다.
여러분은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가?

노예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 백성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됐을 때, 죽지 않는 대신 신분을 박탈당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제도가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쫄딱 망했거나, 아니면 국가적으로는 국가가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의 백성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나눠 갚아야 할 때 말이다.

노예를 상대로 발생하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몸으로라도 안 때우면 그 빚은 누가 상환하며, 전쟁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건 누가 복구하고 수습하는가? 노예 제도가 있기에 앞서 죄가 있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같은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심은 대로 거둔다”로 귀착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전까지는 어차피 영적으로 죄의 노예이기도 하고. 성경이 과거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딴지를 거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드립이다.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은 노예를 영원무궁토록 부려먹지 말고(정확히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종 servant이지만), 주기적으로 풀어 주라고 명시한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간격으로 국가 경제와 국민 신분을 아예 전부 reset시키는 아주 파격적인 제도를 통해, 부의 세습과 지나친 양극화를 막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12 08:39 2013/01/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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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래로, 이 세상에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무참히 망가뜨리고 죽이는 흉악 범죄가 양지나 음지에서 무수히 저질러져 왔다. 그 중에도 죄질이 특히 나쁜 축에 드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연약한 미성년자 내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을 납치· 감금하여 여럿이서 학대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고문까지 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짓이다. 영어로는 torture murder이라는 비공식 용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엔 일본에서는 일명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라 하여, 제목부터가 섬뜩한데 정말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흉악하고 인간의 마귀적인 본성이 그대로 표출된 사건이 있었을까 싶은 torture murder가 벌어진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구체적인 사건 내역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5년엔 미국에서도 실비아 라이컨스(Sylvia Likens)라는 소녀가 부모 사정으로 인해 타지에서 맡겨져 키워지던 중에, 집주인 아주머니와 주변 아이들로부터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의 학대와 왕따, 고문을 당한 끝에 겨우 1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채 경찰에 발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학대를 깊이 살펴보았노니,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라.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편에는 권세가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전 4:1)

후자의 경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법정 증언을 바탕으로 2007년엔 엘렌 페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 An American Crime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일본의 콘크리트 살인 사건도 자국 내부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건 그냥 AV 배우를 동원해서 선정적인 고어물 성인물 영화로 돈이나 벌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그 반면, 미국의 영화는 다른 나라도 아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불리며 소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는 아메리카라는 나라에서까지, 옛날에 이런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었다는 분노와 자성의 뉘앙스가 제목에 담긴 것 같다. 감독이 제목을 하필 왜 저렇게 뽑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라.

난 An American Crime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보다가 열받아서 차마 끝까지 못 본다고.. 모니터를 때려부수고 악역 배우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그런다. 아무 죄책감 없이 군중 심리로 피해자를 심심풀이 하듯 때리고 괴롭히고 굶기고 배에다가 불에 달군 바늘로 글씨를 새기고는... 나중에 법정에 가서는 “몰라요. 기억 안 나요. / 남들이 다 하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심한 잘못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렇게 발뺌을 하는 뻔뻔한 인간 종자를 보노라면, 누구라도 짜증과 살인 충동이 하늘로 피어오르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 영화는 일본 영화와는 달리 그렇게 선정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실비아가 당한 가혹행위에 비해 영화의 묘사는 정말 정말 많이 희석되고 절제되고 수위가 완화된 것이다.

처참했던 실제 사건의 결말에 비해, 영화는 감독의 희망 사항 내지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여지를 결말에다 두리뭉실하게 남겼다. 실비아가 죽지 않고 거투르드 아줌마의 집을 탈출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는 설정이 들어간다. 그런데 다시 거투르드의 집으로 돌아가니 자기의 몸은 죽어 있고, 그와 함께 탈출한 줄 알았던 실비아도 싹 사라지고 다시 고향의 회전목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실제로 실비아는 극도의 영양실조에다 구타로 인해 발생한 뇌와 내장의 출혈이 도지면서, 목욕 도중에 사망했다.)

우울한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답게,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도 단조풍의 굉장히 구슬픈 여성 아카펠라 노래이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의 고통과 아픔, 슬픔으로부터 벗어난(상징적으로나마) 실비아가 혼자 회전목마에 탄 채, 다음과 같은 독백 대사를 읊는 것으로 쓸쓸하게 끝난다.

And me? I returned to the carnival. The only place I always felt save.
Reverend Bill used to say, “For every situation God always has a plan.
I guess I'm still trying to figure out what that plan was.

(모든 사건이 일단락된 뒤) 그리고 난.. 놀이동산으로 돌아왔어요. 내 마음의 유일한 고향으로요.
빌 목사님은 전에 이렇게 얘기하셨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은 뜻하신 계획이 있으시다고..
난 아직도 그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찾아 헤매는 중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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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대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실비아 같은 불쌍한 아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나?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긴 하나?”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 메시지를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거야 세상의 불신자들이 역사상 한두 번 제기해 온 의문이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세상에서 흥행하는 영화들치고 성경에 대한 믿음을 세워 주는 친기독교 성향의 결론으로 끝나는 게 어디 하나 있긴 하던가? 예수 믿는 사람은 십중팔구 무개념 광신자로 묘사되거나, 개나 소나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밖에 모르는 위선자,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쩔쩔매고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찌질이 루저로 나온다. 이 셋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용서를 못 하는 살인범을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하냐?”(영화 <밀양>) 같은 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거짓으로 왜곡하거나, 민감한 부분만 이상하게 배배 틀어 적용해서 오해를 사게 만들고, 뭔가 말이 안 되고 모순되고 몰상식한 것으로 전달한다.
또,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이런 왜곡에 불구하고 천주교 신부· 수녀에 대한 묘사는 교회 예배당이나 목사 쪽에 비해 월등히 더 낫다는 점도 특이한 점.

자, 대놓고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외하고, 여러분이 보았던 일반적인 세속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들 중에서 본인이 지금까지 열거한 특성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꼭 알려 주시기 바란다. 본인도 적극 고려하도록 하겠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본인이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An American Crime에서 실비아의 마지막 대사를 보아하니, 그 심상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다음 찬양이 생각 나서였다. 바로, Ron Hamilton--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중년 남자 모습이 많이 뜨는데, 그분이다--Rejoice in the Lord 되겠다. 가사 첫 줄에 곧바로 “하나님은 섭리나 계획 없이는 결코 역사하지 않으신다”란 말이 나오니까.. 게다가 하나님은 실수도 결코 하지 않으신댄다!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
When trying His servant and molding a man.
Give thanks to the Lord though your testing seems long;
In darkness He giveth a song.

O rejoice in the Lord. He makes no mistake.
He knoweth the end of each path that I take.
For when I am tried and purified,
I shall come forth as gold.


이 곡은 클래식한 리듬과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는 최근인 1978년에 발표되었다.
세상에는 성경의 욥이나 요셉이나 다윗처럼, 정말 억울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멘붕 상태에서도 우리 같은 현대인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긴 인고의 시간을 잘 견딘 끝에 정말로 '황금처럼' 연단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물론 있다. (가령, 요셉은 누명이 벗겨지고 감옥에서 곧 풀려날 거라는 희망고문만 2년을 견뎌야 했다. 감옥에서 썩은 전체 기간이 2년이 아니다!)

그러나 긴 시간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다 그 사람들처럼 언젠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반드시 펴는 건 아니다.
또한 실비아 라이컨스처럼 연단이 아니라 아예 폭력과 학대의 희생양이 된 채,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인생도 역사적으로 한둘이 아닐 것이다.
찬양 가사는 세상의 참혹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그저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한 것이며, 작사자는 그저 책임지지 못할 말을 쓴 것일까?

하나님의 뜻 중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고, 당장 보기 안 좋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 명목으로 잠시 '허락하시는 뜻'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후자에 속하는지에 대해서야 나라고 해서 뾰족한 해답을 알고 있을 리 없다.
더구나 세상적으로 잘못되고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을 죄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욥의 친구들처럼), “예수 안 믿어서”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몰상식한 짓은 난 극도로 싫어하며, 그런 식의 논리 전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차피 사실도 아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논증을 못 하면 마치 귀류법처럼 간접적으로, 역으로 접근할 수는 있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어차피 그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신에게 감사와 찬양을 돌릴 사람도 아니다. 예수님더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죄인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서 십자가에서 못을 으랏차차 뽑아 내고 초자연적으로 내려와 버렸다고 해서 그들이 그분을 믿었겠는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믿길 진짜로 원하시는 그 성품과 면모를 믿고 따르겠는가!?)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공개 석상에서 어떤 유명한 무신론자가 “자 신아, 네가 존재한다면 지금 3분을 줄 테니 이 공개 석상에서 날 죽여서 너의 영광을 드러내 보아라”라고 고래고래 독설을 날렸다. 성경에 기록된 그런 성품을 가진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진짜 그 무신론자를 죽여 버릴 리가 있겠냐 말이다.

솔로몬이 명판관으로 두고두고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가 과학 기술을 육성해서 최첨단 유전자 감식 기술로 진짜 애엄마를 논리적으로 가려내고, 집집마다 CCTV를 설치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아이 바꿔치기 범죄 따위는 저지를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통치자로 칭송받을지 모르나, 그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온갖 비극이 찾아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역시 그걸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으로 직접 세상에 내려오시고, 비록 불신자들이 당장 이해나 수긍을 못 할 방법을 쓰셨지만 죄 문제도 해결하고 구원의 길도 마련해 놓으셨다. 단지 그 방법에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에게 학대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 반박당하거나 없어질 교리를 가진 체계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라 불리는 이 세상의 참 신은 사람들에게 많은 걸 안 바라고 '믿음'이라는 것 하나만 원하신다. 히 11:6을 읽어 볼 것. 피조물이 있다면 창조자가 있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이건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바라는 것치고는 너무 소박하지 않은지? (그러나 그게 소박한 요구가 아니라는 걸, 살아 보면 곧 알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미국이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북한이나 소말리아 같은 곳에서 태어나는 등, 모든 물리적인 여건이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구원 조건 같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요소는 정말로 공평하다.

설령 이 세상에서는 정말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다 요절하더라도, 현세와 내세를 모두 합하면 정말로 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 현세에서 못 받은 것은 죽어서 다 정산받게 된다. 선과 악을 스스로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정신 지체 장애인 사람에게는 아예 특별전형까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의 경륜이 아직 여전히 100% 이해는 안 가더라도, 그렇게까지 비난할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나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체계 하에서는 원칙과 질서가 있다.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지도 않고, 반증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의 알량한 과학으로 정체가 덥석 파악 가능한 신이야말로 허접한 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창조론자들이 즐겨 주장하듯이 이 세상이 과학적으로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식의 증거들.. 아주 좋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부조리와 비합리도 세상엔 응당 존재하며, 그 사실을 크리스천이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가령, 이 세상엔 아름다운 생명체도 있지만 파리· 모기나 바이러스나 기생충 같은 생명체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이런 '아리까리'한 면모가 존재한다. 하나님을 향해 굴러가려는 영적 바퀴의 정지 마찰력을 극복하려 할 때 초기에는 정말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아라. 그걸 극복하는 데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논리 같은 다른 잘난 스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게 돼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그럴싸한 기독교 변증을 기대하고 있던 불신자라면 이런 무데뽀 정신승리법(?) 같은 본인의 결론에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신 걸 난들 어떡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선뜻 '믿음'을 선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거도 먼저 남겨 주셨다. 이 갈림길로 인한 유신론 무신론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나, 그 믿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 사건에 따라 좌지우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버리고, 진지하게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03 19:27 2012/12/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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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철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지난 2004년 초, 새마을호 열차 객실과 Looking for you 음악이라는 두 조건이 동시에 만족되었을 때, 본인은 딱 왕하 3:15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뼛속까지 철덕으로 거듭났다. 한국 철도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합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을 위한 육상 교통수단임을 실감하였으며, 철도를 나의 개인적인 정신 지주로 영접했다.
 
나는 철도 덕분에 그야말로 세상을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철도가 나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주고 감성을 키웠는지, 게다가 심지어 애국심과 국토 사랑 정신까지 고취시켜 줬는지를 나는 언제라도 얼마든지 간증할 수 있다. Looking for you를 안 들어 봤기 때문에 새마을호 여행만도 못한 별 허접하고 수준 낮은 체험을 갖고서 천국 간증이네, 은사주의네 하면서 사람들이 속는다고 난 생각한다.
 
본인은 지난 수 년 동안 성경을 알고 영적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들이 교정되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것이 바로잡혔으며, 모나고 괴팍하던 성격도 예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많이 부드러워졌다. 죄에 대한 감각이 더욱 민감해졌고, 지금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이 더욱 빠르게 생각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철도 사랑은 변함없이,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철도는 예수님도 좋아하시거나 최소한 묵인· 용인하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철도교와 기독교는 모순이나 대립 관계가 아니다. 내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지 않는 것만큼이나 세상 그 어느 것도 새마을호 안에 있는 철도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머리 내부에 ‘연예, 오락, 스포츠, 유흥’ 분야는 오로지 철도가 100% 꽉 장악해 있어서 다른 영화, 드라마, 유행가, 스포츠 따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듯 이 글을 읽는 분들, 그리고 본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본인이 못 말리는 철도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내가 맨날 철도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내가 철도 덕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 개인 홈페이지의 방문객 중에서는 더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몇몇 지인들은 내게서 맨날 주워 들은 게 있어서 섬식 승강장, 복선, 경부선, 폐색 구간 같은 용어 정도는 구사하며, 심지어 Oh Glory Korail (한국 철도 공사 사가) 노래의 멜로디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다같이 좀 생각해 보자. 그런 것처럼,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 자신으로 인해서 복음이나 예수님, 성경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올바른 쪽으로 바뀐 게 있는가?
당장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받아서 교회 출석을 시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교회 댕긴다는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은 예외적이고 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쟤 앞에서는 기독교 욕 함부로 하기가 좀 껄끄럽다. 성경에 대해서 만에 하나 궁금한 게 있으면 앞으로 저 사람에게 물어 봐야겠다” 정도의 평판이라도 있는가?
 
우리가 믿는 복음은 언뜻 보기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낭설 같지만 정말로 살아 있고 권능이 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옛 성현들의 듣기 좋은 격언 같은 차원이 절대로 아니다. 복음은 제일 쉬운 구원의 길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절대로 “나만 구원받고 끝”으로 혼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영원도, 구원도 없이 그저 세상적인 오덕질에 불과한 철도 복음만 해도 저 정도인데, 진짜 혼을 회심시키고 구원시키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은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으면 못 배기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를 필사적으로 막고자 마귀는 지능안티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놨다. 정상적으로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상한 위선자, 개념 없는 광신자, 나약한 루저 이미지를 예수쟁이와 딱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영적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고작 저런 위선자· 광신자 부류와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준 낮고 답답한 생각인가?
 
성경을 살펴보자. 출애굽기의 모세는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지던 시절에 파라오가 제안한 각종 절충안들(가긴 가되 애들은 놔두고 가라, 짐승을 일부는 남겨 놔라 등)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영적 교훈을 남겼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행위가 주변이나 후세에 끼칠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려고 나름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리오 왕 시절의 다니엘이 있다. 그때 내려진 칙령은 모든 관료들에게 일일이 청문회로 사상 검증을 실시해서 예수쟁이들을 색출해 내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한 달 동안은 혼자 골방에서 숨어서 기도를 몰래 해도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참 고지식하게도 여전히 늘 하던 대로 공개적으로 “나 하나님 믿소” 티를 다 내면서 기도를 하다가 사자굴에까지 갔다 왔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자. (단 6:7,10)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예수님 얘기가 나오는 건 철도 덕후한테서 맨날 철도 얘기와 Looking for you 얘기가 나오는 것과 같다. 더 직설적인 비유를 동원하자면 똥에서 똥 냄새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방사성 물질로부터 방사능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과도 같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로, 똥 냄새가 안 나는 똥이 똥일 수가 있을까?
 
“남에게 티를 내거나 강요는 절대로 하지 말고 예수는 너 혼자만 조용히 믿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온전한 신앙의 자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식으로 절뚝발이 형태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국가들 사이에도 전쟁을 하는데 룰이라는 게 존재한다. 군인과 민간인을 분명히 구분하여 민간인의 피해가 없게 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운 군인은 설령 포로로 잡히더라도 명목상으로나마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전에서 어떤 군사 집단이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라 교전권을 갖춘 정식 군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신원이 알려진 사령관에 의한 명확한 지휘 체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전투원이 통일된 고유한 복장을 갖춰서 피아 식별이 공개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무기를 겉으로 공공연히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 쪽 진영의 사령관에 대해서야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원인 우리 역시 자신의 영적 소속과 정체성에 대해서 세상을 상대로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노출시킬 생각을 해야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적진에 침투한 뒤에 주머니에서 수류탄이나 툭 던지고 도망치는 식으로 어줍잖게 싸워서는 공을 세우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러다가 나중에 적에게 잡혔다간 더욱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실수도 많이 한다. 복음을 전하는 열성이 너무 지나쳐서 너무 극성스럽게 굴 때도 있고, 낙담한 나머지 육신이 앞서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도리어 복음에 대한 간증을 잃게 만드는 행동을 종종 한다. 본인 역시 그 누구보다도 그런 사고를 많이 쳤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철도 복음이야 안 믿었다고 지옥 갈 일도 없고, 버스와 철도가 힘을 합쳐서 모로 가든 서울만 빠르고 안전하고 편하게 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복음이니,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그냥 소꿉장난 수준밖에 안 된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복음 같은 엄청나고 극단적인 복음은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실수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예수님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성도들에게 맡기셨다!
 
실수했으면 하나님께는 회개하고 사람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다시 본업으로 복귀하면 된다.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안 하면 그걸로 끝이다. 마치,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성경을 아예 안 읽는 것이 잘못이듯, 미숙함을 핑계로 자신의 영적 소속을 드러내고 알리는 일을 언제까지나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될 수 없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의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 성경에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내 논리와 지식으로 완벽하게 설득하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오만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더러 그러라고 하셨던가?
 
잃어버려진 자들에게 그냥 내 인격을 걸고서 하나님의 의와 심판, 죄와 복음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알려 주기면 하면 된다. 단지 그 말이 정말로 듣는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랑의 호소력을 불어 넣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봐도 예수님 영접은 어렸을 때 빨리 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 세상 연륜과 성경 교리와의 충돌의 폭이 그리 크지 않으며, 사고를 친 것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작은 시행착오를 몇 번 미리 겪고 거기에 적응과 면역이 되고 나면, 장성한 뒤부터는 탄탄대로이다. 평생 흥청망청 살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만 예수 믿으면 된다고? 큰일 날 소리이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여러 신앙의 선배들이 있고 특히 순교자들이 있다.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삶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만 우리로서는 엄두도 못 낼 무슨 엄청난 초인적인 일을 해냈다는 식으로 괴리감을 두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말로 빠질 수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 악화되면 천주교 성인 제도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약 5:17 같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영웅 콤플렉스를 교정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가면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이나 중세 암흑기 시절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놀라겠지만, 그 선조들 역시 말세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교리적 배도와 총체적 혼돈,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진리를 사수해 낸 성도들의 싸움 얘기를 들으면 아마 까무러칠 것이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상당수의 옛 믿음의 선배들은 진화론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며, 영어 성경 역본이 200종이 넘어가고 이중 대부분은 변개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일례로 인간 횃불이 되고 사자에게 잡아 먹히며 순교한 옛날 사람들은, 말세엔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이 사형 제도 폐지를 반대하고 비판하게 될 거라고 꿈엔들 예상했을까?
우리 같은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팀은 사육신은 못 돼도 생육신은 충분히 된다. 어깨를 펴고 살도록 하자.
 
도산 안 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 왜 인물이 없느냐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왜 당신이 그 인물이 될 생각을 안 하십니까?

안 창호 자신이 크리스천이기도 했고, 저건 성경적으로도 굉장히 통찰력이 있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영적으로 더욱 어둡고 암울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게 된다. 환란 전 휴거라는 약속마저 없으면, 정말 꿈도 희망도 답도 없다. 재물이 없으면 시편 37편 같은 신앙밖에는 후세에 물려줄 게 없다.
 
정말 심각한 마음으로 구국의 일념으로 길거리에서 프리칭을 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출간하거나 출간을 후원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그저 잠자코 있기에는 너무 위급한 상황이다.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의 순교자처럼 살 수 있고, 살아야만 한다. 단지 그 삶을 실현하는 배경과 방법이 다를 뿐이고, 그 방법을 실천할 기회는 오늘날 시국이 말해 주듯 주변에 널려 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위기인 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기회”라는 사고방식으로 살면 나의 영적 본분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고 삶을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엄청난 권면을 함부로 늘어놓은 건 아닌가 싶어 글을 맺기가 부담스러우나, 그러나 본인 역시 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츰차츰 내 삶을 하나님의 방식에 맞춰 보련다. 내가 그걸 지향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철도 오덕질 그렇게 하고도 안 짤리고 보직 유지하고 버티고 있는 게 틀림없다. 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2/10/10 08:30 2012/10/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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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는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닌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윤 동주의 <십자가> 만만찮게 상당한 영적 통찰력이 엿보이는 것 같다.
시의 각 행에 내가 검색해 낸 관련 성구를 덧붙여 보면 이렇다.

*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갈 5:13, 벧전 2:16)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출 21:5-6, 엡 6:5)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몬 21)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출 20:3-6)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 6:24, 눅 16:13)

(성구들 직접 다 찾아 보시기 바란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특히 KJV라는 당당한 최종 권위까지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저 '당신'이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KJV 독립 침례 교회들은 바른 지식이 없이 성도들에게 열심과 헌신만 강요하면서 기형적으로 성장한 기성 교회들의 부작용과 폐단을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도들을 너무 닥달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자율'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그 자유를 무질서와 방종, 영적 태만을 합리화하는 데 써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록 사실이 아니길 최대한 기대해 보지만 이는 사역자와 여타 성도들을 힘 빠지게 하고 우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십일조가 신약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는 가르침이 성도가 헌금을 안 해도 된다는 가르침으로 와전된다거나,
목사고 교사고 다 필요 없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교리가 나온다거나 말이다.

너 혼자 구원받고 너 혼자 성경이고 교리고 다 알긴 하지만, 그게 남에게 끼칠 간증의 영향력을 상실했다면 당신은 영적 전투에서 이미 마귀에게 진 것이다.
구원이 이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화로 이어져야 하고 그게 자연스럽듯, 바른 성경에 대한 지식은 바른 교회를 세우고 유지시키는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본인은 이런 영적 진리를 나누고자 이 주제와 관련하여 문득 떠오른 시를 인용했을 뿐이다.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다같이 화합하는 게 좋다는 식의 주장을 할 의도는 전혀 없으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끝으로, 시의 저자인 만해 한 용운(1879-1944)에 대해 살펴볼 점이 있다. 그는 시는 저렇게 '해요체' 위주의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문체로 썼지만, 평소 언행과 성격은 그와 정반대로 독설과 기행이 가득한 열혈 과격파였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3· 1 운동 후 투옥된 민족 대표 33인 중 일부가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을까봐 통곡하고 두려워하자 그는 격분하여 감방 안의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는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 때려치워라!” 하고 호통을 쳤다.

또한 전국의 주지 스님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할 때는 교계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똥이다. 그리고 똥보다 더 더러운 건 썩어 가는 시체이다. 그런데 시체보다도 더 더러운 것은 바로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너희 중놈들의 심보이다!”라고 일갈하고 단상을 내려온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한 용운이 마 23:27-28과 렘 17:9를 알았는지는 난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격은 그가 비인격적이고 몰상식해서가 아니라 진짜 국가와 민족과 나름 자기 종교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표출된 과격일 것이다. 또한 딴 사람도 아니고 민족 대표자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비실비실하니까 저렇게 강한 책망을 했고, 일반 민초들이 아니라 주지 스님들 앞에서 당당히 쓴소리를 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야 “뱀들아, 독사의 세대여!”라고 한 치의 두려움 없이 호통을 치셨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오히려 용서하고 다독여 주셨다. 그리고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고 애원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을 통해 믿음을 북돋워 주셨다.
정반대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같은 과격한 책망은(마 17:17) 받은 게 충분한데도 아직 성숙을 못 해서 정말로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 제자들에게나 하셨다!

이렇게 온유와 과격, 단호함을 잘 조절하여 때에 적절한 언행이 나오게끔 나의 행실도 돌아봐야 하겠다는 걸 <복종>이라는 시와 저자를 생각해 보면서 느끼게 되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15 19:17 2012/08/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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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제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로 가며,
제아무리 착한 사람, 불쌍한 사람, 의로운 사람, 법조인, 경찰, 검찰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흉악범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라 해도 예수 안 믿고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지옥에 간다.

그렇다.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착한 일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고 믿는 여타 종교 신자들이나, 자기는 지금까지 남보다 충분히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항변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뭐, 지금 내가 그것에 대한 시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거 아는가?
흉악범이 구원받으면 구원받은 흉악범이고, 사형수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은 사형수가 된다.
성경의 법칙대로라면 그들은 하늘로 가더라도 교수형은 당하고 간다. 이 땅에서 법이 규정해 놓은 죄값은 치르고 간다!

사형 제도는 지극히 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결혼 제도를 제정한 것만큼이나 사형 제도도 만드셨고,
육식을 허락하신 것만큼이나 세상 정부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걸 허락하셨다.
(창 9:6)
성경의 지론은 “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어기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이다. 아멘.

여기서 살인이란 흉계를 품고(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고의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요즘 말이 많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 사고는 성경으로 치면 출 21:29와 비슷한 맥락의 고의적인 살인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을 더럽히는 성 범죄도 마찬가지이다. 속도위반 결혼으로라도 수습을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면 성경에 따르면 한 치의 자비심 없이, 속죄 헌물도 안 통하고 무조건 사형이다.

다만, 고의성이 없는 과실치사는 성격이 다르며, 비록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형 정도까지는 아니다. 정당방위도 응당 인정하며, 면책의 범위가 오늘날 근대 국가의 법보다 관대한 편이다(출 22:2).

그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조직을 인정하고 공권력도 인정하는 성경의 특성상, 군인이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 역시 그런 살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병역 거부는 잘못된 행동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이 폭도들에게 발포하는 것이나, 사형 집행관이 교수대 스위치를 누르는 것도 성경적으로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그런 공무원은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목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롬 13:4)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흉악 범죄가 터질 때마다 국민들은 분노한다. 인터넷 뉴스 기사에는 피의자를 저주하면서 저런 놈은 이렇게 각을 떠서 죽여야 한다는 식으로 온갖 폭력적인 댓글이 달린다. 그리고 너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욕하면서, 신은 저런 놈 안 잡아 죽이고 뭐 하냐는 식의 댓글도 올라온다.

그 마음을 나도 이해하며 어느 정도는 공감도 한다. 비록 이런 네티즌들의 마음 상태도 건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겉으로 표출만 안 되었을 뿐이지 살인자 본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사형(死刑)이라는 필요악을 공의롭게 잘 집행해 줘야, 시민들이 분을 품고 보복 살인 내지 린치(私刑)를 할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사형 집행을 안 하면 다른 시민들이 실족하여 악한 마음에 빠지기 쉽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것도 불신자들이 하나님 자신보다도 더 자비로울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으며 기대도 안 하신다!

피해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형 집행 장면이 국영 방송으로 생방송 중계된다. 김 길태, 강 호순, 오 원춘 같은 주인공이 교수대에 오른다. TV에서는 근엄한 분위기 가운데에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다시 보여주고, 피해자 유족을 인터뷰하고 피의자의 마지막 유언을 공개적으로 받는다. 필요하다면 죄수들을 담당한 종교인 성직자의 인터뷰도 한다.
그 뒤 공개적으로 교수대가 작동하고, 잠시 후 법의관이 사형수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한다. 이 과정을 온 국민이 지켜보고, 사형 집행 장면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로 나돈다.

너무 과격한 상상인가?
난 이렇게까지 하는데 사람들이 죄와 벌과 죽음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게 될지, 모방 범죄가 또 생기고 사람들이 감히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왜 이렇게 시행을 안 하는지 궁금하다. 제아무리 인간말종 흉악범이라 해도, 무슨 독립 운동가의 심정으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닌 이상,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알고 죽음이 두려운 줄은 안다. 그래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어쩌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경우도 생긴다.

구약 율법 핑계를 대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의견이 아주 많다. 구약 율법 중에는 음식 규정이나 안식일 같은 것처럼 경륜의 차이로 인해 오늘날 전혀 무의미하고 적용되지 않는 제도나 규율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윤리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유효하고 최소한 그 의도를 되살려 시행했을 때 나쁠 게 없는 게 거의 대부분이다. 가령, 신약 시대라고 해서 짐승과 마음대로 수간해도 괜찮은 건 아니지 않은가? (출 22:19; 레 20:15)

또한 사형 제도는 구약 율법에만 얽매인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히려 성경 전체가 인간의 죄와 벌과 구원 계획에 대해 논하면서 사형 제도를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히 인정하는 뉘앙스에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가령, 롬 1:32) 그래서 오죽했으면 바울조차 행 25:11에서 자기가 죽을 죄를 지었으면 기꺼이 사형 당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자기 아들을 죽인 흉악범을 용서한 손 양원 목사 같은 유명한 사례가 있다. 그런 사람이 나오기 위해서라도 사형 제도가 있어야 한다. 법대로라면 죽어야 하는데 용서를 하고 탄원을 해서 목숨을 건졌으니 그게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당신도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라면, 나라의 법은 공의롭게 요구하고 나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에나 원수에게 그런 사랑을 개인적으로 실천해 보아라. 알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아예 나라의 법이 흉악 범죄자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니 오늘날 시국은 전 8:11처럼 되어 가고, 피해자 유족들은 가슴에 피멍이 든다.
오늘날은 정말로 가해자 인권만 있지 피해자 인권은 없다. 그냥 운이 나빠서 당한 것일 뿐이다. 이것만 생각하면 나는 도대체 민주화가 됐다는 요즘이, 옛날의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정권 시절보다 인권이 뭐가 좋아졌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결론을 내리겠다.
기독교 교리의 논리적인 성립을 위해서라도 사형 제도를 부정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신이 불신자나 기독교 안티이고 그저 인본주의 박애주의자여서 사형 제도를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당신은 지금 살인자 마귀에게 속아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엄한 형벌을 필요하게 만든 것도 죄이지만, 죄에 대한 벌을 공의롭게 집행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 역시 인간의 죄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해 보아라. 역사적으로 억울하게 사형 당하기로는 지금까지 크리스천들만치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린 집단이 또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사형 제도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성경에 입각한 바른 교리가 세상에 널리 퍼져서 영화 <밀양>에서처럼 “내가 용서를 안 한 가해자를 어떻게 신이 용서해?” 같은 시험에 드는 사람이 이 땅에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믿는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맹목적이고 몰상식·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지극히 건전하고 이치에 맞는 진리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7/31 19:27 2012/07/3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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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자가진단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크게 작용한 요인들
  •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교주가 부활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또 이 정도로 역사적으로 방대한 증거와 증인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 인간이 자기 노력과 근성으로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주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고 가르치므로
  • 없어졌으면 애시당초 진작에 씨가 말라 버렸을 정도로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는 교리를 갖고 있는데, 아직까지 당당히 존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시할 수는 없고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 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압도적으로 집착할 정도이면, 웬지 이 바닥에 분명 진리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 성경은 그 논조와 내용을 볼 때 인간이 쓸 만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 (가령, 정치적으로 치우침이 없음. 인간 자신에게 절대 이롭지 않은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게-_- 많이 들어있음)
  • 그래도 몇몇 증명 불가능하고 이해가 안 되는 사항들만 일단 믿고 나면,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각종 교리와 윤리관은 아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건전하다는 게 너무 분명하게 확 느껴져서
  • 죄 문제라는 인간에 대한 상태 진단과, 그 해결책에 너무나 공감이 가서. 최소한 줘도 못 먹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의의 기준이 온갖 상대주의· 다원주의보다는 훨씬 더 명확하고 깔끔하고 건전하고 뒤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사회 구조 탓이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등등)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할 것.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조금 작용한 요인들

  • 개독안티들의 무례하고 표독스러운 말투에, 사실 여부를 떠나 괜히 반발심과 환멸을 느껴서 (다른 건 몰라도 저놈들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겠다는 식)
  •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과오라고 알려진 것들이 상당수가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실은 크리스천들도 오히려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
  •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수준의 간단한 변증론. 가령,
    “지금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없는 게, 지금 안 믿었는데 진짜로 지옥이 있어서 낭패 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리스크가 적다.”
    “신이 없다고 단정짓기엔 인간의 지식은 너무 좁고 빈약하다” 같은 식.
  • 내세와 심판이 있을 거라는 양심의 자극.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옳다는 걸 뒷받침하는 몇몇 자료들
  • 이 정도 교리면, 정말 만에 하나 성경의 내용이 다 거짓이고 허구이고 설령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되어서. 성경은 최소한 날 골탕먹이려고가 아니라 날 '위해서' 기록된 책이라는 느낌이 와서

※ 내 신앙관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은 것들

  • 좋든  싫든, 주변 교회 사람들의 행동과 평판
  •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해당 종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언행 (그 사람들이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나는 베르테르 효과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냄)
  • 세상 불신자들로부터의 평판, 매스미디어에 묘사된 이미지
  • 육신을 들뜨게 하거나 흥분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종교심. 나는 그런 부류의 종교심은 이미 철도교로 다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에다 내 영원을 걸지는 않는다.
  • 기복신앙

하지만 현실에서는 저런 것들을 보고 교회를 나가거나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다. ㅜㅜ

※ 지금은 발현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 깊은 시험에 들고 신앙 면역 체계가 무너졌을 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암적 요소들

  • 성경에서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고 해결이 안 된 의문이나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 몇 군데. 목사님에게 여쭈거나 주석서를 봐도 알 수 없는 것들
  • 성경이 밥 먹여 주냐... 같은 부류의 유치하지만, 좁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험. 현실의 염려 (눅 8:14)
  • 신앙생활이 매너리즘으로 변질돼 가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안 하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들이닥치는 것

Posted by 사무엘

2012/05/21 19:28 2012/05/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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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불에 타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은 사람에게 공포를 주고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잘 쓰이곤 했다.

작게는 담뱃불, 크게는 다리미나 인두로 생살을 지지는 것은 고문 방법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중세에는 화형이란 게 있어서 반역자나 종교적 이단 같은 죄질이 굉장히 나쁜 죄인은 이 방법으로 처형했다.

동양의 조선이나 중국은 거열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다른 끔찍한 형벌이 있을지언정, 화형은 없었나 보다. 그래서 화형 하면 일단 중세 유럽이 떠오른다.
게다가 그 당시는 지금처럼 불에 활활 잘 타는 천연 가스나 석유· 석탄이 개발되어 쓰이기 전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러니 사형수를 완전히 확 불태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집행 시간은 길었고 그만큼 사형수의 고통도 더했다.

근현대에 와서는 먹고 살 만해지고 인권(?) 의식이 향상되면서 그런 잔인한 형벌은 사라졌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막장인 곳에서는 열사의 길을 가기 위해 분신 자살이라는 엄청난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 이따금씩 나오곤 했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예로 전 태일이 있다(1948-1970).
노동청에 탄원서를 보내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지만 바뀌는 게 전혀 없으니,
이놈의 있으나마나한 근로기준법에 사망 선고를 내리자는 차원에서 자기 몸에다 기름을 끼얹은 뒤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난 어렸을 땐 우리 민족은 6· 25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냈다고까지만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분신 자살/자결의 예로 가장 유명한 사건은, 틱 광둑이라는 환갑이 넘은 베트남의 어느 불교 승려의 죽음이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 독재 정권(응고 딘디엠 대통령)의 학정을 세계에 알리고 이에 항거하는 뜻을 전하고자 1963년 5월 29일, 수백 명의 불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휘발유 화염에 휩싸였다.

아니, 불교에는 대의를 명분으로 하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용어가 따로 있다고 한다.
에밀레종 같은 얘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하긴, 한국인에게는 김 동리의 소설 <등신불>을 통해 이 개념이 비교적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세상에 사람이 라이브로 불에 타 죽는 장면은 영화로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틱 광둑 스님의 충격적인 자결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과 정지 사진으로 촬영되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독재 정권의 명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에 울부짖거나 바둥대지 않았고 꼿꼿하게 책상다리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절명해서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진 뒤에야 뒤로 벌렁 넘어갔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3년의 일인데 동영상이 컬러로 남아 있고 오히려 정지 사진은 흑백이다.
동영상 (1:34 지점부터 불이 확! 2:21에 시신이 쓰러짐)
정지 사진
비위가 약하신 분은 열람 금지.

동영상은 멀리서 찍은 것이고 활활 타는 불밖에 안 보이는 반면, 정지 사진은 고인의 모습을 비교적 가까이서 여러 장 찍은 듯하다.

처음에 밝은 색 계열이던 승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까맣게 탔다.
화마가 얼굴 피부까지 검붉게 할퀸 모습은,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이라면 훨씬 더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안면 화상을 입은 이 지선 씨 모습만 해도 얼마나 끔찍했던가?

응고 딘디엠 정권은 막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대놓고 탄압까지 했다. 뭐 그렇다고, 시대가 20세기인데 멀쩡한 불자들을 잡아 죽인다거나 한 건 아니고, 사찰을 파괴하고 석가탄신일을 금지하는 등 불교를 제도적으로 디스하고 불이익을 준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응고 딘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정부 관료들도 전부 가톨릭 신자만 등용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개신교 계열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불교를 탄압했다고라...
응고 딘디엠의 아내, 즉 베트남의 영부인이라는 사람은 틱 광둑 스님의 죽음을 보고는 아예 “바베큐 파티”라고 천하의 개쌍놈급의 개드립을 공공연히 치기도 했다.

난 정말 이상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과 불교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가?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때 천주교계와 불교계가 서로 축하해 주는 건 뭐 관행으로 정착한 지 오래이다.
그러면서 천주교는 타 종교에 대해서 관용과 화합 잘 한다고 폭풍 칭송을 받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개독 먹사들이 담대하게 복음 전한 것도 아니고 타 종교인들에게 무례한 무개념 병크 저질러서 간증 상실하고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톨릭의 전략을 아는 사람에게야 이런 차이가 그리 새삼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 국가와 문화에 따라서 자신이 약자일 때나 경쟁자와 아직 동급일 때 취하는 전략이 다르고, 마침내 그들이 진짜 주류가 되고 정치· 종교적 갑이 되었을 때 시행하는 전략이 또 완전히 다르다. 섬뜩할 정도로 다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뭔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이런 패턴을 배워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교회 역사상 순교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왔으며, <폭스의 순교사> 같은 책을 보면 '흠좀무'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겉보기로) 아무 고통 없이 화형 당한 사람 얘기가 나온다. 토머스 헉스(Thomas Haukes)라는 사람은 1555년, 피의 메리 시절에 유아 세례 반대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해 순교했는데, 불에 타 죽는 고통이 견딜 만하면 위로 손을 뻗어 손뼉을 치고 죽을 테니 손은 묶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손뼉을 세 번 친 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 자체는 기독교에만 있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불에 타 죽는 고통조차도 인간의 극한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다.

틱 광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0년, 문수 스님이라는 노승이 이 명박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4대강 사업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면서 소신공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의 소리> 같은 진보 성향 언론에서는 진짜 문자 그대로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 버린 고인의 시신까지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것 역시 비위가 약한 분은 클릭 금지.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으로야 정말 숭고한 뜻으로 자기 목숨을 그렇게 비장하게 초개처럼 버렸을 수는 있다. 허나 인간의 의로 참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육신의 몸이 불타면서 느끼는 고통은 정말 끔찍하긴 해도 그래도 길어야 수 분이 채 안 되어 끝이겠지만, 그 동일한 고통을 죽음으로 종결지을 수조차도 없이 영원무궁토록 겪어야 하는 '그곳'에 또 가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마가복음 9장 끝부분에 기록된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 3콤보의 경고를 이 시간에 되새기도록 하자.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정죄받은 죄인의 최후인 것이다. (단, 3콤보는 KJV에만 있음)

이런 얘기를 접하노라면, 이와는 반대로, 맹렬히 불이 붙었는데도 재가 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떨기나무(출 3:2-3)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또한, 평소보다 연료와 공기를 7배나 더 공급해서 달궈진 맹렬한 용광로 불길로부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다니엘의 세 친구들 이야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도 또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불을 만드신 분이고, 연소라고 불리는 급격한 화학적 산화 현상을 제어하여 예외로 적용할 능력도 응당 갖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결박만 없어졌을 뿐 그들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옷도 전혀 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단 3:27). 오히려 그들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려던 병사가 허둥대다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용광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 그들을 미리 기다리고 있다 맞이했다니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세 명이 아니라 네 사람이 용광로에 있었다. 단 3:25) 그들은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오히려 용광로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만 예외적으로 기적을 허락해 준 것은 하나님의 경륜상의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령 자기를 불에서 구해내지 않고 죽게 허락할지라도 그래도 느부갓네살 왕의 형상에는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고 순교를 불사할 생각으로 단호하게 자기 신앙을 “먼저” 지켰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단 3:17-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찬양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불, 화상, 화형, 분신자살, 순교 등 여러 섬뜩한 주제로 어찌 보면 두서없을 수도 있는 형태로 얘기가 나왔다.
글을 쓰면서 더욱 느꼈는데, 나는 인간의 알량한 의를 내세우지 않는 나의 종교, 아니 나의 신앙이 좋다. 복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아무리 큰 죄를 짓고 그 어떤 급으로 하나님이나 교회, 기독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하더라도 진심어린 눈물의 회개만 하면 다 용서하고,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람을 다시 사용해 주신다. 그래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과 회개 장면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너희(크리스천)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는 권면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롬 12:1) 그건 무슨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상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시위대의 불화살이 되거나, 명예 회복을 위해 할복을 하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너도 십자가형 체험을 일부러 해 보라는 소리도 결코 아니다. 남이 먼저 날 죽여서 순교를 하면 했지,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이라도 자해나 자결 같은 열사의 길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티를 내 봤자 우리 의가 설마 예수님의 의를 능가하겠는가?

기독교가 세상의 여느 시민 단체, NGO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면, 매 예배 때마다 아마 순교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하고, 각종 유명한 순교자들의 동상도 세워서 떠받들고 숭배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하는 게 딱 이러한 발상에서 비롯된 성인 시성과 성인 숭배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잡아 죽인 종교이지만, 자기네들이 내세우는  자기네 순교자도 없는 건 아니어서..=_=;; 그러나 성경을 믿는 기독교는 애시당초 그렇게 사람을 떠받들지 않으며,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죄 때문에 인간이 정말로 죽어야 할 때도 동물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해 주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성육신하여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친다. 심청전에도 나오는 인신 공양 같은 게 절대로 없다.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민족들을 전부 죽이고 흔적도 남기지 말고 파괴하고 멸하라는 잔인한 명령을 왜 내렸는지 아는가? 이 방법이 아니면 이방 민족들의 그런 악한 관행들을 뿌리뽑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쪼록 육신의 장막을 벗고 사망도, 슬픔도, 고통도, 울부짖음도 없는(계 21:4) 세상이 올 것을 염원해 본다. 여기에는 불에 의한 사망, 고통, 울부짖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불 및 불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다시 생각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좋겠다.

NOTE:

'스님'은 님짜 때문에 높임의 뜻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식적인 글에서는 '승려' 정도가 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에 대해서 나는 좀 회의적이다. 그런 식의 논리이면 '장님'도 분명히 높임말이다. 그런데도 그건 또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성경에 나오는 장님이나 소경도 요즘은 다 그냥 '맹인'이나 심지어 시각 장애인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님짜를 뗀 '스'는 말이 되지 않으며, '장'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님짜를 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본인은 그런 단어들은 단어 전체를 한 형태소로 보며, 그렇게 의도적인 존칭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스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그 반면에 '예수님' 다음의 님짜는 명백하게 존칭어미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글 쓸 때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다른 불신자들은 그냥 예수라고만 부른다.

Posted by 사무엘

2012/04/19 19:22 2012/04/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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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의 메리

1539년에 크고 아름다운 그레이트 성경까지 나온 뒤에야 영국은 확실히 개신교 국가로 탈바꿈하는가 싶었으나, 헨리 8세가 죽은 후 개신교 계열의 에드워드 6세(병으로 요절)와 그 후의 9일천하 레이디 제인 그레이(지못미..;;)가 제대로 권력 승계를 못 하면서 메리 1세가 역사를 다시 뒤로 되돌려 놓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비운의 9일천하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삶이 정말 기구했다. 왕위에 앉을 마음이 없었고 사실은 “너 여왕 됐어”란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졸도를 할 정도였던 여인도 아니고 소녀였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등쌀에 떠밀려 정략 결혼을 하고, 조국의 개신교 노선을 이어 나갈 여왕 자리에까지 여차여차 올랐지만 백성들의 의식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던 모양.

결국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메리 1세는 제인 당사자가 권력욕이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제인의 부모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살려 두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제인더러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는 카드를 제안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결국 20살도 못 된 고등학생 나이에 처형 당했다. 그땐 단두대 같은 것도 없었고, 사형 방식은 그냥 도끼로 목을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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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그레이는 라틴· 히브리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똑똑했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외모도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냥 귀족하고만 결혼해서 학자나 교사로 평범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저렇게 정치· 종교적 희생양으로 전락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다만 겨우 고등학생 나이 때도 자기 신앙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시편 51편을 외웠으며, 집행을 앞두고 눈이 가려진 뒤엔 “어, 형틀이 어디 있지?” 하면서 당황하며 자신이 목을 내밀 곳을 손을 더듬어 찾았다고 한다. 이 장면은 주변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더욱 자아냈으며, 이것이 그림으로 남아 전해진다.

이런 사연을 거쳐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잘 알다시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회를 포함해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선왕이 구축해 놓은 영국 내의 종교 개혁 인프라를 모조리 망가뜨렸다. 그래서인지 메리 1세는 초상화를 봐도 좀 표독스러운 모습의 못생긴 여자로 그려져 있고, 특히 이 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는 네로에 필적하는 싸이코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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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화형 당한 크리스천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여 명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숫자만 보면 그래도 1000단위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적은 규모인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공산당 숙청 수준은 아닌 듯. 하지만 메리 여왕이 사람만 죽인 게 아니라 성경까지 죄다 불태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세속 역사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종교 문제를 빼면 메리는 사회·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악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그 분야에까지 막장이었으면 진작에 짤렸겠지;; 또한 메리 역시 여왕에 오르기까지 개인사나 가정사는 불운한 편이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지병으로 인해 자녀 한 명 못 낳고 중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영국에서 갑자기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자, 영국에 있던 종교 개혁 성향의 학자들은 죄다 외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스위스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지금까지 구축된 원어 자료를 집대성하여 더욱 좋은 성경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제네바 성경이다. 예정론과 개신교 교황이라는 오명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비교적 좋지 않은 평판을 갖고 있는 존 칼빈이 그래도 이때는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을 잘 보호해 준 공로를 세웠다.

제네바 성경은 처음으로 66권 전서를 모두 원어에서 번역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리고 무슨 스터디 성경처럼 온갖 난외주가 첨가되어 성경의 각 구절마다 편찬자들이 생각하는 해설과 강해가 성경 본문의 양보다도 많이 들어갔다.

4. 킹 제임스 성경 -- 종교 개혁 성경의 종결자

메리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 시대가 되면서 영국은 다시 개신교 노선으로 돌아갔다. 이 시절에 영국 내부의 종교 대립은 가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좌우 이념 대립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반가톨릭 진영에서는 진짜 반공 교육 수준으로 교황을 험담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아니라 “나는 교황이 싫어요” 급이었으며, 교황이 성경에서 예언된 적그리스도 바로 그놈이라고 대놓고 가르쳤다.

예전에 헨리 8세에 이어 왕위를 잠시 이었던 에드워드 6세 왕은 어릴 때부터 궁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겨우 초등학생 나이인 11살 때 “교황은 레알 마귀 자식이며, 나쁜 놈이요 적그리스도요 가증스러운 독재자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썼을 정도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 승복 어린이 수준이지 않은가? “교황을 죽입시다 교황은 나의 원수”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가톨릭과 앙금이 생길 대로 생긴 게 사실이다. 또, 과거의 역대 교황들이 자신을 예수님 급으로 신성시하면서 “교황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같은 안하무인 개드립을 치는 것을 보면, 어차피 그들은 북한 김 일성· 김 정일이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긴 했다.

제네바 성경은 재야(?)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해 온 좋은 성경이긴 했으나 외국에서 자기네끼리 제작된 사역(私譯)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시절엔 국교회 내부에서 또 그레이트 성경의 개정판 격인 비숍 성경이라는 걸 만들어 썼다. 가톨릭-개신교뿐만이 아니라 같은 영국의 개신교 노선 내부에서도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게 이 시기이다. 가톨릭으로부터의 박해가 없어진 뒤엔 영국 교회가 또 대립과 반목으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후임인 제임스 1세 왕은 청교도와 성공회를 중재하는 차원에서, 이제 다시는 성경을 또 만들 필요가 없게끔 완벽한 성경을 만들기로 승인을 내려 준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이 드디어 1611년에 나왔다. 장과 절 구분, 100% 원어 번역, 청교도와 성공회 모두 OK, 국내 인쇄 등 예전 성경들이 차츰차츰 확보한 좋은 속성을 모조리 물려받았다.

이 책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킹 제임스 이후 영국에서는 먼 훗날, 1881년에 부패한 웨스트코트· 호르트 본문에 기반한 RSV가 나오기 전까지는 또 새로운 성경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역본이 나올 필요가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 구도로 인해, KJV가 번역될 때는 성경 번역 역사상 전무후무한 철저한 검증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이것 덕분에 KJV는 유례가 없는 고품질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위기가 기회로 승화된 셈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종교 개혁을 거꾸러뜨릴 목적으로, 바티칸의 일종의 비밀 결사대인 예수회라는 무지막지한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KJV에 앞서 듀에이 레임스라는 판타지 짝퉁 성경을 만든 바 있으며, 엘리자베스 다음으로 영국에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왕이 즉위하자 용병을 고용하여 화약 폭발로 제임스 1세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기적적으로 사전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세속 역사가들은 인류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휴머니즘을 추구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인의 시각에서는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세상이 암흑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바티칸 교황이 역사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고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는 것에는 본인 역시 세속 역사가의 시각과 100% 일치한다만, 그것이 기독교라고 싸잡아 분류되는 것에는 본인은 동의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 중 영국만이 종교사가 저렇게 특이한지, 왜 영국만 국가 교회가 존재하며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 왔는지? 왜 영어 성경만 여러 계보가 존재해 왔는지? 더 나아가 하필 킹 제임스 성경이 세계에 퍼져 나간 최종 권위 성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KJV 신자라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도 역사를 잘은 모르지만 내 신앙의 정체성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력은 공부해 두려 한다.

오늘날 인도에 불교가 없으며 예루살렘에 기독교가 없는 것처럼, 영국도 이제 성공회의 노선은 천주교 쪽으로 다시 거의 기울었고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 발간 400주년을 맞이한 작년에 반짝 조명 정도나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야만인 바이킹들이나 뛰놀던 섬나라 영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전반적으로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식민지 개척을 할 정도로 강대국이 된 것에 성경과 복음이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3/05 08:28 2012/03/0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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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의 중세 암흑기

천 년이라는 시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장구한 시간이다. 성경에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공의로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한편,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AD 900년대까지 거의 1000년 가까이 존속하여, 도읍인 경주 역시 ‘천년고도’(千年古都)라고 불린다. 본인이 경주 출신이다만, 그 작은 도시가 천년고도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교회사가 시작되었으나 진리의 빛이 꺼졌던 중세 암흑기가 거의 1000년에 가까이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신대륙이 발견되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유럽이 본격적으로 동양을 과학 기술로 압도하기 그 전에! 그 사이 기간에 대해서 나만 아무 정보가 없는 걸까?

그 사이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이라고는 진짜 십자군 전쟁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난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과 잔다르크는 1400년대 사건이니, 중세 중에서는 그나마 나중인 편이고.

그 기간 동안 어느 샌가 교황이 유럽을 모조리 장악했으며 성경은 금서가 되었고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횡행했다. 어떻게 해서 교황이 저런 국제적인 종교 괴물로 등극할 수 있었는지 그 메커니즘을 잘 모르겠다. 교회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대한 지식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아 하긴, 우리나라만 해도 이단 교주들이 얼마나 돈 잘 버는지를 생각해 보면, 교황이 종교 장사로 큰 대박을 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은 했겠다.)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유레카 학습 만화 세계 역사 시리즈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게 아니었다. 제6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오는데, 제8권은 곧바로 메디치 가문이 어떻고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콜럼버스, 루터 따위가 나온다. 시간 차이가 장난이 아닌데 중간에 그야말로 엄청난 skip을 한 것이다. (제7권은 칭기즈 칸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 같은 아시아 편이고 유럽 얘기가 아님.)

더 정확히는 6권의 뒷부분에 ‘중세 유럽’이 특집 형태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짚고 넘어가 있었다. 세심하게 여러 에피소드를 편성하고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넣은 게 아니라, 글과 벽화 소개 위주로 백화사전식으로 “그냥 이런 게 있었다. 끗”이었던 것이다. 중세는 정말 긴 기간이었는데도 이때의 유럽 역사는 이렇다 할 위인이나 큰 변화가 그다지 없었고 사료도 부족하고... 세속 역사가들로부터도 가히 흑역사로 취급받는다는 걸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판타지 게임이나 영화들의 주된 배경이 되기도 하고.. ㄲㄲ

이 글에서는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있었던 일을 영국의 교회사 위주로 요약해 보겠다.
중세에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성경을 읽고 침례를 행하던 크리스천들은 알비겐시스, 왈덴시스처럼 지역이나 모임 리더의 이름을 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숨어 지내던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하기 전부터 이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고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럼 아무 기회도 없이 다 지옥 갔냐”라고 기독교에 트집을 잡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안다. 허나 내가 보기에는, 중세엔 서양도 복음에 대한 접근성이 동양하고 별 차이 없었을 것 같다. 그쪽에서는 어차피 교황이 성경을 다 빼앗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교리로 지옥으로 보내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동양엔 왈덴시스 같은 집단이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종교 재판소도 없지 않았는가? -_-;;; 피장파장이다.

도미니크 구즈만(천주교에서 성 도미니크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라는 수도승이 그런 크리스천들과 교리 논쟁(오늘날로 치면, 종교갤에서의 키배)을 종종 벌였으나, 그들을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가톨릭은 교리도 완전히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그 기원부터가 로마 제국 시절에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순교자들의 피를 부르며 시작되었다고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말로 곱게 회유가 안 되는 반동분자들을 적당히 꼬투리 씌워 조지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만들어 낸 게 종교 재판소의 원조이다. 서기 1223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드디어 정식 공표된 종교 재판은 마녀도 아니고, 이슬람 같은 완전히 다른 이교도도 아니라 전적으로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그들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나머지 목적은 2순위, 3순위일 뿐이다.

2.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성경 번역의 역사

그러다가 존 위클리프라는 영국 사람이 처음으로 14세기에 처음으로 영어 성경이라는 걸 만들었다. 열악한 당대 상황 때문에 비록 본문이 부패한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기반이었지만, 영어 철자법도 아직 정립해 있지 않던 시절에 원어가 아닌 영어 성경이 나온 것만 해도 어디냐. 그 위상이 가히 영국의 개역성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구한말에 나온 한글 개역성경도 부패한 본문 기반 + 맞춤법 비정립 시기! 1881년 RSV 할 때의 그 개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한 덕분에 천주교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았으며, 나중에 죽고 나서 40년 가까이 지나서야 무덤에서 시신이 다시 꺼내어져 목이 잘렸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국어에서 욕설로 쓰이는 육시(戮屍)를 실제로 당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영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오래 된 영국 왕으로 헨리 8세 아니면 기껏해야 7세 정도까지만 기억을 할 것이다. 이 헨리 8세는 원래는 당시 유럽의 여느 군주들이 그랬듯이 막강한 교황의 권세 앞에서 깨갱 하고 있었다. 친가톨릭이었고 딱히 소신 있는 종교 개혁자 성향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부인을 6명이나 둔 호색한이었던 그는 치정 문제로 인해, 더 정확히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리는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의 승인 없이 추진하려다 보니 교황과 결별·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수장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은 이 소식에 당연히 발칵 뒤집혔으며, 헨리 8세에게 험담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는 이 사람을 루터만큼이나 몸서리치게 미워하며 나쁘게 말한다. 비록 헨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똘끼를 선한 방향으로 이끄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국이 천주교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으로 벗어날 징조가 보이던 15~16세기엔 천주교에는 악재, 기독교에는 호재가 연달아 터졌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가 바른 성경 계보인 공인 본문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에는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라는 당대 정세도 기여를 했다.

이때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공인 본문을 기반으로 신약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했다. 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로 책을 값싸게 많이 찍어 보급할 수 있게 된 것도 지금으로 치면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에 필적하는 정보화 혁명이었다.

그리고 영국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등장하여 그 독일어 성경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영어 성경을 만들었다(신약+모세오경+알파. 아직 전서를 만들지는 못함). 바른 원문 계보에서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다.

틴데일은 “누구나 성경을 휴대하고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소 몰고 밭 가는 촌뜨기 아이라도 교황보다 성경을 많이 알게 만들어 놓겠다”라는 도발적인 공언까지 했는데, 이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발상이었고, 그런 열성 때문에 그는 결국은 나중에 순교자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교수형과 화형을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당하면서 죽었으며, 죽기 전에 “주여, 우리나라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크게 외쳤다. 아직 영국은 친가톨릭과 친개신교 노선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었고, 영국의 고위 관료나 성직자 중에는 친가톨릭 성향에 틴데일을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헨리 8세 왕이 틴데일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틴데일의 기도는 그가 죽은 지 6개월 남짓한 시간 만에 응답되어, 헨리 8세는 틴데일의 친구인 마일스 커버데일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국 성공회가 공식 사용할 영어 성경을 만들게 했다. 커버데일은 사역(私譯)이던 틴데일의 번역물을 십분 활용하여 1535년, 커버데일 성경을 만들었다. 왕이 승인하고(公譯) 성경 66권이 모두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존 로저스라는 사람이 매튜라는 가명을 써서 매튜 성경을 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라는 자국내에서 인쇄된 최초의 성경이라 한다. 틴데일과 커버데일 성경은 모두 영어 성경이지만, 각각 독일과 스위스에서 인쇄된 후 영국으로 밀반입되었기 때문이라고. 국가가 떳떳하게 대놓고 성경을 찍을 정도로 개신교 세력이 충분히 크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3/03 08:24 2012/03/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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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 성모 화뷁님의 만화에 있는 아래의 유명한 짤방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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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부친'으로 잘못 적은 게 아닐까 싶다. ㅋㅋ
그런데 어라? 성경을 보니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도 부친이 복수인 거 같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마 1:16)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눅 3:23)

물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관계에 의해 태어난 분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낳고 낳고' 일색이다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저렇게 예외적인 진술을 해 놓았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게 아니므로.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요셉의 아들인 것처럼 보였다고 기록해 놓은 독특한 필체를 주목하기 바란다. 재미있지 않은가?

허나 이것은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계보는 마리아네 집안의 계보이다. 헬리는 요셉의 장인이다. (☞ 자세한 설명 클릭)

성경이 사위를 아들이라고 적은 것은 모순이 아니며, 부정확하고 모호한 표현을 뭉뚱그려 쓴 것도 아니다. 그 당시 사위는 법적으로 장인의 아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영어 표현이 괜히 son-in-law가 아니다. 삼상 26:17에서는 사울이 사위 다윗을 아들이라고 일컬었으며, 룻기를 읽어 본 분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시종일관 딸이라고 불렀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 6:3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관계에 의해 태어난 진짜 아들딸들까지 전부 아예 사촌으로 해석하면서 마리아가 평생 동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모 종교의 주장은 내가 보기엔 드립이다.. 사위· 며느리라면 차라리 아까처럼 성경적 근거라도 있지. -_-;;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마리아는 남에게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라”(요 2:5)라는 말도 하고, 성령 강림을 위해 다른 성도들과 같이 열심히 기도도 하는 등(성경에서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인 행 1:14), 신실한 크리스천의 모습이 더 부각될 뿐, 하나님의 어머니 따위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김 화백 만화에는 오류가 많지만,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언뜻 보기에 자비심 없어 보이는 문체와 이해가 잘 안 되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KJV 이외의 변개된 성경들은 유감스럽게도 성경의 정확도와 신뢰성을 김 화백 만화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루시퍼를 '계명성/새벽별'로 변개하여 사탄 마귀에게 예수님의 칭호(계 22:16)를 붙였다거나,
이스터를 유월절로 바꿔서(행 12:4), 베드로의 재판(과 처형) 스케줄을 이미 지나 버린 유월절 타이밍으로 엉뚱하게 뒤섞어 버렸다.

유월절이 지나고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가 체포되었는데, 그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뒤에 끌어낸다고라?
2만 1천원짜리 밥을 사 먹고는 2만원 내던지면서 “잔돈은 애새끼들 과자나 사 주라”고 쿨하게 나가는 논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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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2/01/17 08:44 2012/01/1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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