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의 철도계 새소식

내 블로그에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있기에 잠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겠다.

1. ITX 새마을 운행 개시

등굣길에 근처 철길에서 지금까지 못 보던 열차가 지나가는 걸 봤다.
이 빨간 열차는 바로.. 지금의 새마을호(전후동력과 기관차 견인형 모두)를 대체할 차세대 열차 ITX 새마을이다. 지난 5월 12일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가 작년 초에 퇴역하고서 1년 4개월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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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1974년에 등장한 이래로 40년째 열차 이름으로서 명맥을 이어 가는구나!
10여 년 전, 정식 개통 전에 클로즈 베타테스트 중이던 지금의 떼제베 개량 KTX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누리로, ITX 청춘 등, 2010년대부터는 여객열차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전부 전동차 기반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열차 호칭에서 등급명-차량명을 병기하는 체계도 차츰 정착해 가고 있다. KTX 산천이 원조였고 말이다.

누리로의 명칭도 이런 체계에 편입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어찌 되려나 모르겠다.
무궁화호라는 이름은 그냥 예전의 기관차 견인형 여객열차 내지 개량형 디젤 동차의 총칭으로 남을 듯. 그리고 배 이름 관행의 잔재이던 '-호' 접미사도 이제는 없어져 가는 추세다.

우리 학교는 앞에 철길이 있어서 매우 아주 굉장히 좋다.
가끔 디젤 기관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멀리서라도 들으면 마음의 기쁨과 안정과 평안이 찾아온다.

2. 평화열차 DMZ train 운행 개시

'경의선' 하면 내력과 관련하여 철덕이 할 말이 참 많다.
서울 시내 구간이 일반열차들의 기지 회송 구간으로 쓰인다는 특성상 오랫동안 수도권 광역전철 버프를 못 받고 있다가 2009년에야 전철이 개통했다.
그 전, 2006년 가을에는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의 1987년 초기 도입분이 퇴역하면서 일명 '임진강 라이너' 새마을호가 3년 남짓 운행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경의선 수도권 전철이 문산까지 뚫리면서 임진강 라이너는 자연스레 폐지되었으며, 통근열차가 다니는 단선 비전철 구간은 운천, 임진강, 도라산 같은 남북 철도 연결 버프를 받은 21세기 구간으로 확 줄어 버렸다. 운행 거리가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지선 수준이 된 것이다. 전국에서 CDC 기반의 통근열차(구 통일호)가 최후까지 다니던 구간은 이 경의· 경원선밖에 없었는데, 이 둘 사이에서도 경의선은 경원선과는 처지가 많이 달라졌다. 경원선은 동두천 이북으로도 거의 50분에 가깝게 달릴 비전철 구간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4월을 끝으로 통근열차 명목의 경의선 여객 열차의 운행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럼 오리지널 CDC를 볼 수 있는 곳은 진짜로 경원선밖에 안 남는구나.
그 대신 등장한 것은 일명 DMZ-train이라고 불리는 '평화 생명 관광 열차'이다. 어차피 경의선에서 그 짤막한 CDC 구간의 수요는 안보 관광객밖에 없었으니 적절한 조치인 것 같다. 이 열차는 운임 체계상으로 KTX, 무궁화호 같은 일반열차가 아니라 O-train, V-train 같은 관광열차의 위상이 된 것이다.

운행 횟수는 하루 두 번이고 당연히 패키지 안보 관광과 연계해서 다닌다. 차량은 새로운 건 아니고 기존 CDC를 관광용으로 개조한 물건이라 함. 물론, 운임은 과거의 통근열차보다 훨씬 더 올라갔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민통선 구간에 있는 도라산까지 갔다 오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하며 돌아오는 표도 반드시 같이 구입해야 한다.

모든 변화가 달갑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특히 관광열차 명목으로 비싸진 운임) 본인은 이게 철도 경영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변화인 것 같다.
또한 한 가지 좋아진 점은, 이 열차는 문산이 아니라 서울 역에서 도라산까지 환승 없이 직통으로 간다는 것이다. 서울과 문산 사이엔 능곡 한 곳에서만 추가 정차한다.

올여름에는 경원선에도 이런 컨셉을 반영하여, 청량리에서 백마고지까지 가는 경원선 버전의 DMZ train도 운행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그래도 경원선에는 정규 여객 통근열차도 여전히 병행이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정선선, 그리고 교외선에도 안보 쪽은 아니어도 비슷한 컨셉의 관광열차가 좀 다녔으면 어떨까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5/17 08:26 2014/05/1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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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관광도 하고 식사도 한 뒤, 다음 남은 시간 동안은 철원 서북부의 민통선 이남 지대를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 마음대로 답사했다.
우리가 전선 휴게소로 갈 때는 지방도 464호선의 동남쪽을 통해 민통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으로 답사하는 곳은 그 도로의 서쪽 구간에 있다. 그래서 민통선 밖으로 나갈 때 그쪽으로 바로 나가면 목적지에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했으며, 철원 동북-서북 외곽을 횡단하기 위해 다시 남쪽의 고석정으로 되돌아갔다가 국도 87호선을 거쳐서 다시 지방도 464로 갈아타야 했다. (전선 휴게소는 동북 외곽에 있음) 동선이 대략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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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가는 코너다. '오덕'의 압박..;;
하긴 그래도 야동리보다는 낫다. 옛날에 사람 중에도 이 오덕이라는 분이 계시기도 했고.
차 안에서 밖을 촬영한 것이어서 화면이 좀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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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백골 부대 백골 구조물을.. 국도 43호선상에서 실제로 봤다..;; (저건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님.)

자, 내가 동선의 삽질까지 감수하면서 찾아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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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87과 지방도 464가 만나는 월하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가면 '한다리'라는 자동차 교량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남쪽) 방면으로 한 200m쯤 떨어진 곳엔 옛날 금강산선 철도의 교량이 기둥만 남아 있다. 이걸 현장 답사했다.
그 옆을 보면 언덕이 두 동강 나기도 했을 정도로 옛날에 철길이 있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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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다리로부터 3km 정도 동쪽으로 더 가면.. '대위교'라는 교량이 나오며, 역시 여기서도 오른쪽을 보면 한다리보다 더 온전한 형태의 금강산선 교량이 남아 있다! “금강산 가던 철길!”이라는 글자까지 있음을 주목하시라.
이걸 직접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시겠는가? 자동차는 이런 걸 답사할 때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인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나보다 어린 친구가 차도 없이 철원까지 대중교통으로 찾아간 뒤, 민통선이 코앞인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답사한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빠르고 편안하게 찾아갔는가? 완전 양반이다.
한다리, 대위교 근처에 있는 교량과, 전선 휴게소 근처에 있는 교량을 지도에서 찾아서 한 선분으로 이어 보면, 옛날에 금강산선의 선형이 대략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대위교 인근에는 '철길가든'이라는 식당이 있고, 또 민통선 구역으로 들어가는 초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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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교까지 간 뒤 본인은 차를 돌려 서쪽 백마고지 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면 국도 87호선이 90도 꺾이는 지점이 있는데, 사실 길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방향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길일 뿐. 그리고 바로 그 교차점에 그 이름도 유명한 노동당사가 있었다.

철원이 북한 치하에 있었을 때 그들이 후딱 지어 사용하던 일종의 관청 건물이다.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2호.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6·25 때 주변의 다른 건물들은 폭격 때 다 폭삭 무너지고 부서졌지만 쟤만 그래도 뼈대는 저렇게 온전히 남았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조선 총독부 청사나 서대문 형무소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이 건물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는 북한 공산당이 양민을 수탈하고 애국 우파 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악마의 소굴이었다. 공산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그걸 강제로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감시· 억압하고 거짓 선동하고 자유를 빼앗는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학한 만행을 저질러 왔다.

남산 안기부? 남영동 대공분실? 노동당사의 악랄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는 될까 싶다. 내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절대악과 필요악을 분간 못 하는 오류를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빨갱이라는 극단적이고 경멸적인 호칭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겠지만,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사용해 온 악한 방법론과 배경 사상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악한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공산당도 허용돼야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하는 건 정말 역사와 현실을 모르는 극도의 무개념· 무지의 소치이다..

오해가 없게 말씀드리자면, 나의 정치 성향은.. 악의 세력으로서 본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한 수뇌부와 잘 검증된 과거 역사 팩트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겨우 무슨 새누리당이니 민주당이니 일베 오유 같은 것에 뿌리가 있는 게 아니다.
달랑 진보냐 보수냐, 성장이냐 분배냐 그딴 것만을 논하는 거라면 정치색 같은 걸로 논쟁하고 싸울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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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각은 벌써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서쪽으로 수 km를 더 달려 도착한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난 2012년 말에 개통한 경원선의 북쪽 종점인 백마고지 역이었다. 근처에 백마고지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원래 옛날에는 백마고지 역 일대도 민통선 지대였는데 나중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어차피 또 민통선을 만나게 된다. 역 주변엔 걸어서 가 볼 만한 건 없다시피하다니, 연계 교통수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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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은 경의선과는 달리 남북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로가 심지어 민통선 안 구간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딱 끊어져 있다. 경의선 도라산 역은 잉여롭긴 해도 출입국 사무소가 있고 승강장에서 북쪽으로 쭉 이어진 선로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이곳은 단촐하고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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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신탄리 역 이북에 철도 중단점이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옮긴 건 아니고.. 철도 중단점을 새로 만들었다. 그래, 이걸 실물을 직접 보면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승차권이나 입장권 없이도 승강장과 선로 끝에 슬쩍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철원에서 철도 and/or 안보와 관련된 대부분의 명소들을 답사하면서 철덕력을 키웠다. 그리고 대한민국 땅에 주어진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올 때는 국도 3호선을 이용했다. 길이 상당 부분 경원선 철길과 겹치다 보니 돌아오면서도 철도역과 철길 구경을 덤으로 할 수 있었다. 도로 정체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2시간이 좀 넘게 걸렸으며, 아침 7시 반으로부터 정확히 12시간 뒤인 저녁 7시 반에 서울에 무사히 귀환했다.

돌아오는 길엔 친구들은 너무 피곤해서 간식을 먹을 기력조차 없이 차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집에 도착한 뒤에 침대에 쓰러져서 시체 모드가 됐을 뿐.

철저한 준비 덕분에 길에서 전혀 헤매지 않았으며 시간도 적절히 분배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장소를 답사할 수 있었다. 인파가 바글바글 몰리는 데가 아니어서 분위기가 좋았으며, 완벽에 가깝게 좋던 날씨 역시 성공적인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고 말이다.
다음날 교회에서는 같이 간 친구들의 부친께서 한 분씩 날 개인적으로 불러서 좋은 구경을 시켜 주느라 수고 많았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4/05/14 08:24 2014/05/1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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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주변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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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철원 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 공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철원을 빼앗긴 뒤 물귀신 심보로 철원으로 가는 무슨 강의 물줄기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저수지는 그 난관을 극복하게 위해 만들어진 거라 함. 물론 여기는 낚시꾼 내지 철새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아온다.

워낙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북한 땅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다만, 이 지역엔 개성 공단이나 기정동 마을 같은 명물이 없는 관계로, 파주의 도라 전망대만치 북한 쪽에 딱히 볼거리는 별로 없다. 그냥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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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 사진으로만 보며 그리워하던 월정리 역 복원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오오!! ㅠ.ㅠ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다.
난 역 건물을 팔로 꼬옥 끌어안은 채 감격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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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구내의 선로에는 두 가지 중요 유물이 있는데, 하나는 코레일 4001호 디젤 기관차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중에 우리 아군의 폭격을 받고 부서진 어느 증기 기관차이다.
4001호 디젤 기관차는 굉장히 옛날 차량이긴 하지만, 월정리 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여기에 전시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거기 현장에서도 딱히 설명이 돼 있지 않다.

현재 임진각에 가 보면, 알다시피 경의선 장단 역에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가 녹을 최대한 벗겨 내는 가공을 거친 뒤 전시되어 있다. 그건 총격 때문에 표면이 벌집이 된 것만 빼면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며, 그때 그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가 누군지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 기관차는 '마터'라고 불리던 산악 화물용의 굉장한 대형 기관차였다.
그러나 월정리 역 인근에 있는 '경원선' 기관차는 총알이 아니라 포탄이라도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으스러져 있다. 이것도 마터 형 기관차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정색이다. 붉게 녹이 슨 모습 아니면 옛날의 흑백 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은 온통 녹이 슬어서 퍼렇지만, 원래는 그거야말로 갈색이다. 평양에 있는 갈색의 김씨 부자 동상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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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 역의 바로 옆에는 철원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은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도 잠시 둘러봤다. 동물은 원래 화약 냄새를 잘 맡는 편이지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동물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매우 유익한 구경을 한 뒤, 버스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옛 철원 역 부지와 몇몇 옛 건물들 흔적을 지나갔다. 딱히 정차하지는 않고 가이드가 설명만 해 줬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정권이 잠시 쓰던 건물 되시겠다.

그 뒤 버스는 처음에 입장할 때 거쳤던 민통선 초소와는 다른 초소에서 민통선 구역을 빠져나갔다. 관광버스가 아니고 민통선 패스를 갖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들어갔던 초소에다 신분증을 맡기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내가 오해한 관계로 추후의 여행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다.

전체 관광은 3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로 돌아왔다. 시각은 1시 40분쯤. 이제 점심을 먹으러 '전선 휴게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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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휴게소! 휴게소라고 간판은 걸려 있지만, 이곳은 잠깐 거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엄연한 목적지, 아니 종점 역할을 하는 식당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으면서 민통선 밖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메기 민물 매운탕이 유일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회식을 여기서 할지도 모르겠다.

파주 임진각 쪽에서는 민통선 안에 통일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인근에 있는지라, 안보 관광 때 거기서 식사를 하는 스케줄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선 휴게소는 그런 식으로 연계가 돼 있지는 않다. 위치도 좀 외딴 곳이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까지의 규모도 안 되고 말이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국도 43호선을 탄 뒤, 철원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지방도 464호선을 갈아탔다. 그 길로 끝까지 가면 길이 더 없이 끊어진 것처럼 나오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민통선 초소이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당일 아침에 식당에 전화해서 인원 수를 말하고 식사 주문을 한 뒤, 초소에서는 “전선 휴게소 방문”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대표자의 이름·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기고, 동승자들의 이름과 생일 정도를 적어서 제출하면 초소에서는 임시 출입증과 차량 식별용 깃발을 준다. 출입증은 운전석 앞유리에다 두고 깃발은 옆유리에다 끼워서 펄럭이게 해야 한다.
참고로 식당은 민통선 초소에서도 거의 3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철원 북쪽 외곽에서 들판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다 치면 십중팔구 거긴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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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텅 빈 내비 화면으로 민통선 진입을 인증하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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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간해서는 개인 블로그에다 맛집 광고나 음식 인증샷 같은 건 좀체 안 올리는데.. 여기 민물 매운탕은 정말 별미였다. 한탄강에서 주인장이 직접 잡아서 요리한다는 생선은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며 곁들어진 수제비와 채소는 담백했다. 국물은 딱 적당히 구수하고 얼큰했으며 너무 맵거나 짜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전선 휴게소 근처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금강산선 옛 교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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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도 몸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 인파가 북적거리지도 않고 우리밖에 없으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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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11 19:34 2014/05/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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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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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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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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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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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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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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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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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원 역 전동차 추돌 사고

도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거나 고장· 정체로 인해 서 있는 앞차를 발견 못 하고 추돌하는 건 흔히 발생하는 교통사고 패턴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고가 철도에도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왠지 콩스러운 2002년 2월 22일에 발생한 수원 역 전동차 추돌 사고가 있다.

한 서울 메트로(그 당시 서울 지하철 공사) 소속 1호선 전동차가 수원 역 진입을 앞두고, 하행 무궁화호를 먼저 보내 주기 위해 신호 대기 정차 중이었다.
그런데 뒤따라 오던 철도청(코레일 출범 전) 소속의 선로 보수 차량이 짙은 안개와 신호 오독으로 인해 이 전동차를 발견 못 하고 그대로 추돌했다.
그 결과, 차량과 직접 닿은 객차 2량이 탈선+대파되었고, 30여 명의 승객이 경상을 입었다.

여느 철도 교통사고와는 달리, 이건 가해 차량과 피해 차량의 소속 회사가 서로 다르기까지 하다 보니 보상 문제를 두고 양사간 알력다툼이 있었다.
철도청에서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잉여 중고 전동차만 달랑 넘겨 주는 걸로 배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서울 메트로에서는 피해 객차 중에 차령이 3년도 안 된 새 물건이 있다는 걸 내세우면서 신차 도입에 맞먹는 손해 배상금을 청구했다. 이 의견 대립으로 인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결국은 철도청이 서울 메트로의 요구를 사실상 다 수용하는 걸로 분쟁이 종결되었다. 총 배상금은 일반 자동차 교통사고의 배상하고는 잽도 안 되는 49억 2천만 원에 달했다고..! 참고로 전동차 한 편성이 아니라 한 량의 가격이 10억 원 정도 한다.

근본적으로 그때 전동차에도 웬 신호대기라는 게 있었고 판단 착오로 인해 이런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평면교차 때문이었다.
수원에서 경부선 전동차가 회차를 하려면 일반열차 선로를 타넘어야 했다. 자동차로 치면 일종의 U턴과 같다. 이때 일반열차 눈치를 보는 건 필수다.

즉, 수원역은 근본적으로 종점으로서는 상당히 열악하고 위험한 구조였다. 또한 이 병목 지점 때문에 경부선 전동차를 충분히 증차할 수 없었다. 수원에 다 와 가지고는 n분간 지루한 신호 대기...

경부선 전철이 수원에서 천안까지 연장된 게 2005년부터인데, 그보다 앞서 병점 구간이 2003년에 개통했다. 이는 수원에서의 평면교차 지장을 없애기 위해 먼저 시급히 취한 조치였다. 거기는 병점 차량 기지 입· 출고 및 회차 선로가 경부선 본선과 별도의 입체교차 시설로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2. 미전 신호소 열차 충돌 사고

자동차나 비행기의 좌석에는 안전벨트가 있다. 배는 안전벨트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침몰에 대비한 구명 조끼 정도는 승객 수만치 갖춰져 있다. 그러나 열차는 한번에 수백 명 이상의 승객을 대량으로 수송하는 교통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안전벨트 같은 개인 단위의 구명 수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철도는 주행 중에 도로와 같은 돌발상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장애물이 나타난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열차가 그냥 장애물을 밀고 지나간다. 무게 차이가 서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승객이 급정거로 인한 큰 위험에 빠질 일이 없다.

그런데 똑같이 길고 무거운 열차와 열차가 서로 부딪치게 되면 이건 그야말로 대재앙이 된다.
관성 때문에 뒤의 객차들이 탈선하여 앞의 객차들을 타고 올라가게 되며, 깔린 객차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사고까지 나면 어차피 안전벨트도 아무 도움이 안 되긴 마찬가지가 된다.

위의 1번처럼 멈춰 있는 열차를 뒷차가 추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로 마주 보며 달려오던 열차가 머리끼리 정면 충돌하는 건 자동차로 치면 중앙선 침범 교통사고 정도에 해당한다. 이건 단선 구간에서 폐색 처리가 엉망으로 된 완전 막장 철도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1994년 8월 11일, 경부선 복선과 경전선이 합류/분기하는 구간에서 대구 발 마산 행 경전선 하행 무궁화호(217열차)와 부산 발 대구 행 경부선 상행 무궁화호(202열차)가 그만.. 정면 충돌했다.
이 사고도 당시 위험한 평면교차 시설에 두 열차가 동시에 진입하면서 발생했다.

우리나라 철도는 좌측통행이기 때문에 서울 방면 상행 선로가 부산 방면 하행 선로의 왼쪽에 있다. 그런데 경전선은 경부선의 서쪽, 즉 왼쪽으로 뻗어 나간다.
따라서 맨 오른쪽의 경부선 하행을 달리고 있던 경전선 하행 217열차는 경전선 마산 방면으로 가기 위해 잠시 경부선 상행을 침범했다가 경전선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리고 202는 217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남쪽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선로 분기기가 원래의 경부선 직진 쪽으로 돌아온 뒤에 진행해야 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하던 당시에 202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다리지 않고 경부선 상행 선로를 그대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때 경부선 상행의 해당 지점은 평상시처럼 서울 방면으로 향해 있던 게 아니라, 217이 지나갈 수 있게 경전선↔경부선 상행↔경부선 하행으로 잠시 행로가 바뀐 형태였다.
이에 202는 상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경로를 벗어나 하행 선로로 역주행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부선 하행 선로에서 마주 오던 217과 충돌해 버렸다. 진짜로 중앙선 침범 사고와 똑같다. (☞ 당시의 MBC 뉴스 보도).

이 사고로 총 4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의 승객이 중경상을 입었다.
결과론적으로는 잘못된 선로에 진입한 202의 기관사의 과실이 의심되었으나 현직 기관사들은 거기는 정황상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며 과실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리고 오히려 열차나 선로 시설의 시스템적 오류를 더 의심했다.

하지만 시설 미비 내지 파손으로 인해 기계적인 결함 가능성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었으며, 이례적으로 양 열차의 기관사들도 모두 사망해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증언할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이 사고는 공식적으로는 '원인 불명'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비행기 추락도 아닌데 철도 사고에서 기관사가 모두 죽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다. 게다가 두 열차가 모두 기관차형 열차가 아니라 무궁화호 디젤 동차(NDC)였고, 기관실이 정말 전방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돌 사고 시에 기관사가 상대적으로 더욱 위험하긴 했다.

지금이야 경부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구간은 모두 복선에 입체 교차 형태로 바뀐 지 오래이며, 전철화가 되어서 경전선 KTX까지 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24 08:36 2014/04/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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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음모론

2004년 1월 31일 이래로 벌써 10주년이 됐다.
1월 31일은 내가 생일, 침례 받은 날, 정보 올림피아드 대상 받은 날과 더불어 기념하는 4대 인생 축일 중 하나이다.

대학 시절, 난 새마을호를 몇 번 타 보면서 2003년 하반기 무렵쯤부터, 새마을호를 타면 시종착역에서 뭔가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걸 경험적으로 어렴풋이 체득했다. 그 음악이 왠지 인상이 좋아서 인터넷 검색을 했고, 그게 Looking for you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난 서울에 갈 일이 있었고, 바로 저 날 아침 10시 38분에 대전을 출발하여 12시 10분에 무정차로 서울에 도착하는 새마을호 #2(당시)열차를 탔다. 이젠 Looking for you를 들을 준비를 하고 탔는데... 도착 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 어떤 마약보다도 더한 극한의 엑스터시와 함께 뿅~~~!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Looking for you를 그의 귀에 틀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철덕이 되니라. (창 2:7 패러디)

Looking for you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니라. (히 13:8 패러디)

새로 태어난 철덕으로서 철도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 패러디)

Looking for you는 정말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희열과 흥분을 주고 내게 한없는 철덕 정신을 불어넣는다. 기독교의 근간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면, 나의 철덕 정신의 근간은 바로 여느 평범한 여행 경험 같은 게 아니라 Looking for you 음악이다.
한글이 목적을 갖고 따로 인위적으로 창제된 문자인 것만큼이나 내가 철도에 언제 왜 빠져들었는지는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명시가 되어 있다..

철도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지만 못할 뿐이지 나의 삶에 모든 의욕과 원동력을 불어넣고 어지간한 인간적· 육신적인 종교들보다 더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 나에게 철도는 거의 '준종교' 수준이다.

그래서 이 날 주변엔 난 운전을 할 때도 차에서 Looking for you는 말할 것도 없고 Oh Glory Korail을 비롯해 서울 메트로와 서울 도시철도 공사의 사가, 그리고 각종 열차 안내방송을 들으며 지냈다.

갓 철덕이 되었다면 먼저 우리나라 철도 영업거리표와 수도권 전철 노선도를 큰 윤곽이라도 암기하고 열차 시각표, 철도 차량 계보, 주요 철도 정보 사이트(한 우진, MEIS 등)들을 쭈욱 독파해야 할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교육제도를 비관하는 사람들이 자조하는 논조로 에디슨,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 같은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나면 무슨 과외 선생, 중국집 알바 등등이 됐을 거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토머스 에디슨이 만약 20세기 말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자랐고 열차를 탈 기회가 있었다면 철덕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에는 희망이 없지만 철도에서 희망을 찾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악기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자동차, 비행기, 배와는 너무 다르다. 궁금하다.” (서울 지하철 VVVF 구동음)
“어떻게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오는 교통수단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게 왜 하필 철도일까?”

라는 의문에서 “왜? 왜? 왜?”를 남발하면서 넘사벽 급의 오덕력과 똘끼와 탐구 정신이 발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발견해 낸 걸 에디슨이 놓쳤을 리는 없다!!
역사적으로 에디슨은 직류 전기를 좋아했으니, 교류를 쓰는 광역전철보다는 직류를 쓰는 지하철 쪽으로 제 갈 길 잘 찾아갔을 것이다.

뭐 아무튼..
세상이 무슨 그림자 정부에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예수회의 음모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철도청이 자기 말기 시절에 새마을호 객실에다 시종착 음악으로 Looking for you를 선곡해 넣었던 것에는 분명..

승객을 철도에 중독시켜서 철도의 노예로 만들려는 매우 교묘하고 치밀한 음모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나중에 코레일이 수익 내려고 백 날 철도 이미지 광고 때리고 마케팅 해댄 것보다도, 철도청이 슬그머니 선곡해 넣은 마약 같은 음악 한 곡이 더 폭발적인 효과가 있었다.

세상에 아폴로 계획 음모론이나 백신 음모론, 유대인 세계 정복 음모론, 9·11 테러 자작극 음모론 같은 건 아예 거짓이거나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철도청의 Looking for you 철도 중독 음모론은.. 이렇게 증인이 팔팔하게 살아 있는 이상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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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난 그 음모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음모론 좋아하는 분들은 그 개연성을 연구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그러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음모를 통해서도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셨다. 철도사랑 나라사랑, 성경 노선도처럼!

* 결론: 음모론이라는 건 자기 꼴리는 대로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상당수 걸러 가며 들어야 한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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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4/03/01 19:21 2014/03/0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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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교통수단

1. 마일 트레인 (mile train)

철도와 관련하여 진정한 미국의 기상을 느껴 보고 싶다면 역시나 이런 걸 직접 봐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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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가 1마일을 넘는다고 해서 마일트레인이라고 불린다만, 어디 1마일 뿐이겠는가? 2~3마일에 달하고 건널목에서 다 지나가는 데 수 분 이상이 걸리는 열차도 있다. 화차만으로 그야말로 만리장성을 쌓을 기세다.

2. 로드 트레인 (road train)

마일 트레인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땅 넓고 자원 많은 나라들은 도로 위의 트레일러도 열차처럼 운영한다. 일명 로드 트레인이라고 부르는데, 이 분야의 종주국은 미국이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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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가 정말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궤도도 없이 차량을 저렇게 길게 이어 놓으면 조향(회전)을 어째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우려된다. 그리고 감속을 하는 것도 말이다.

도로에서 가장 긴 차량(수십~100여 m)과 레일에서 가장 긴 차량(2~3km)을 한데 비교해 보니 느낌이 새롭다.

Posted by 사무엘

2014/02/24 08:29 2014/02/2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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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야 너를 사랑해

한겨레 매거진: 철도야 너를 사랑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굉장히 재미있는 뉴스 기사를 발견했다.
2012년 11월경에 서울 수색 차량기지에서 다음 철도 동호회 카페인 '레일플러스'의 오프라인 정모가 있었는데, 이 모습을 한겨레 매거진에서 취재하여 보도했다.

내가 한글 세벌식 연구를 안 하고 일요일마다 교회를 안 다녔으면, 나 역시 저 모임에 없는 시간 만들어서 뛰쳐나가는 무명/유명 철덕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철도 동호회 모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주말마다 차 끌고 1박 2일 중앙선과 교외선 탐방을 다녔을지도 모른다.

글 내용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 이들은 철도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궁금해한다. 이 날 모인 마니아들한테 기관차의 무게가 132톤, 연료탱크의 용량이 9800리터, 8200번대 기관차의 힘이 7060마력이라는 것은 상식이었다. 어떤 마니아는 경적소리로써 기관차의 종류를 구별하고 경적의 음높이를 정확히 재현하기도 했다.

당연한 거 아님?

-- 이들한테 왜 철도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처럼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라는 것.

난 다른 건 필요없고, 닥치고 Looking for you 음악 때문에~~

-- 철도 박물관 손 길신 관장은 “철도에 대한 관심은 곧 한국사 연구와도 통한다”고 말했다.

우와, 완전 울트라 초캡숑 킹왕짱 100% 1000000000% 공감 또 공감.
정곡을 짚었다.

-- 철도는 0과 1의 단순명쾌한 세계입니다. 기계, 전기, 통신전자, 토목건축 등 이공계 분야가 종합적으로 기능합니다.

이 재원 씨.. 지하철역 공익 요원을 거쳐서 한때 서울 도시철도 공사에 취직했더니만.. 코레일로 직장을 옮겼구나. 존경스럽다. 완전 덕업일치를 이루신 분.

-- 이날 정모에 참가한 회원들은 초등학생부터 40대 직장인까지 나이대는 다양했지만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대목에서는 웃을까 울을까 망설여진다. ㅠ.ㅠ
철덕계에도 홍일점이 아주 드물게 있긴 하지만, 여자사람은 아무래도 차량, 토목, 시설 쪽보다는 여행 분야로 관심이 한정된 편이라고 한다.
오 유미 씨(전 충북선 목행 역 명예역장)가 국내에서 유명한 여성 철덕이다.

난 한글 입출력 응용 기술 쪽으로 연구를 더 할 수 없다면 굳이 IT 쪽에 남아 있지 않아도 별 미련이 없을 것 같다.
  •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는 (눅 24:32)
철도를 공부하면서도 저 성경 말씀과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다.
  • “1899년에 한반도에 최초로 다닌 증기 기관차는 흔히 매체에서 보는 기관차보다 훨씬 더 작은 탱크식 '모가'형 기관차였다.”
  • “원래 호남선은 서울이 아닌 부산 방면 선로만 있었다. 서울 방면으로 입체 교차하여 바로 올라가는 선로는 1978년에 호남선이 전구간 복선화되면서 같이 건설되었다. 대전 역 우동이 유명한 이유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 “경부선 개통 당시에는 서대문-남대문-노량진-영등포 다음에 바로 시흥(지금의 금천구청)이었다.”
  • “예전에는 서대문 역이 서울 역이었고 지금의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었다. 예전에는 지금의 부산 역은 초량 역이었고 진짜 부산 역은 더 남쪽에 있었다. 유 관순이 다니던 이화 학당은 서대문 역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지면 관계상 역사 얘기만 했는데..

이런 지식 하나하나가 참 달콤하고 나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철도가 그저 인간을 위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교통수단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철도가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다.. 나 정말 어떡하면 좋지? ㅠ.ㅠ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은 애초에 한낱 종교 레벨이 아니기 때문에..
철도교야말로 인간이 만든 2류 3류 종교 중에서는, 복음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거의 최고급 최상급의 좋은 종교라 할 수 있다. 그저 사람 교양과 정서에나 좋은 종교 레벨에서 말이다.
3류 종교는 1류 종교를 사칭하거나 대립하지 않고 자기 위치만 지키고 있으면 해롭지 않다.

그러고 보니 저건 군대에서 딱 좋아할 만한 종교 같은데? (철도 역사와 함께하는 지리/역사 안보교육, Looking for you 카타르시스)
군대가 무슨 혼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정훈 교육, 안보 의식 함양과 장병 자살 방지가 목적일 텐데.. 그 용도로는 철도교가 최적격이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철도가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 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Looking for you를 그의 귀에 들려 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철덕이 되니라.

Posted by 사무엘

2014/01/09 08:32 2014/01/0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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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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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명이 그렇게 일본인 몇 명하고 목숨을 맞바꾸는 식으로 백 날 노력해 봐라. 독립이 되나? 조선의 대외 이미지만 나빠지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이렇게 무력 독립 투쟁을 평가절하하는 편인 사람들이 과거에나 지금에나 있다. 외교파이던 이 승만도 딱 저런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고... 비록 그 생각 역시 일리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폭탄을 들고 무장 투쟁을 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그런 것 정도는 다 예상하고 감안했던 사람이다. 그러고도 자기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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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윤 봉길이 맞는지 논란이 일기도 했던 사진이다.
실제로 윤 의사는 체포 직후부터 일본 헌병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해서 피떡이 된 상태였지만, 일본은 대외적으로 신사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멀쩡한 사람을 정중히 끌고 가는 사진을 대외적으로 내보냈다고 그러는데..
하지만 윤 의사의 후손 중 어떤 분은 저게 윤 의사가 맞다고 증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위의 사람하고 아래의 사람은 아무래도 얼굴색을 포함해 인상이 좀 달라 보인다. 정말 동일 인물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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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면 윤 봉길 의사 동상이 있다. 날씨가 온통 흐리고 비가 오기 직전이어서 색감이 저렇게 됐다.
그런데 동상의 얼굴은 사진으로 보는 윤 의사와는 인상이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이것으로 기념관 관람 후기는 마치고, 숲 남부의 기념비/위령비 인증샷을 남기겠다.

4. 양재 시민의 숲 남부에 있는 3대 비석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유격 백마 부대 충혼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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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왜 10월 1일을 국군의 날이라고 기념하는지 아시는가? 이 날이 바로 우리 국군이 6· 25 때 38선을 넘어 이북 땅으로 최초로 진군한 날이기 때문이다.

1950년 6· 25 전쟁이 터진 직후,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겨우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대통령이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 할 정도로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몰렸었다.
그러나 UN군이 참전하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빼앗긴 지 딱 3개월 만이다! 그리고 10월 1일엔 38선을 넘었으며, 그 달 19일엔 평양을 점령했다.
11월쯤에는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물을 떠다가 대통령에게 진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김 일성 패당 무리들을 완전히 추방하고 대한민국 자유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하지만, 하지만...
그 당시 중국도 아닌 중공군이 북한의 원군으로 참전하면서 국군과 UN군은 평안도 일대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안북도 일대에서 몇몇 학생과 젊은이들이 정식 군번도 없이...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의병'을 조직하여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 2600여 명의 병사들 중 500여 명(552명이라 함)이 전사했으나, 이들은 정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의 전적이 없었다면 1· 4 후퇴도 타이밍이 더욱 앞당겨져서 12· xx나 11· xx 후퇴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 기념비는 바로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다. 현장에 게시된 설명문은 이렇게 끝난다.
“길 가는 손들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무 살 안팎 젊은 목숨을 반공 구국에 기꺼이 바친 뜻을 새기고 넋을 기려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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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가장 큼직한 이 비석은 1987년 11월 29일,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건 희생자의 위령비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한 정도가 아니라 방해까지 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 이라크 발 대한민국 행 대한 항공 소속 여객기에다 폭탄을 슬쩍 설치한 것이다.
이것이 터지면서 그 비행기는 인도양 상공 망망대해 위에서 실종되었으며, 승객 95명, 승무원 20명 총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그리고 사망한 정도를 넘어 시신조차 한 구도 못 건졌다.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북한의 공작원 커플은 외국에서 체포되었다. 남자는 검거 직후, 사전에 훈련받았던 대로 청산가리 앰플--윤 봉길 의사에게도 자결용으로 차라리 이런 간편한 물건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만--을 깨물어서 자살했으나 여자는 실패하여 국내로 송환됐다. 그녀의 이름은 김 현희. 맨날 인권 유린이라고 비난받아 온 코렁탕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조지라고 있는 필요악일 게다. 그러나 그녀는 전향 후 사면받고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잘 살아 있다.

참고로 북한은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직전에도 남의 나라 잔치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김포 공항 청사 안에서 폭탄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북괴 천하의 개쌍놈들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이런 놈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항공업계에서는 누가 비행기에 탔다가 여행을 포기하고 도로 내린 경우, 기내를 싹 다 수색하고 수하물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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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가장 남쪽에 가장 최근에 생긴 이 비석은.. 북한과는 관계가 없긴 하다만 그저 한숨뿐. 6· 25 이래로 평시에 단일 사고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의 위령비이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는 502명. 아까 500여 명의 저 백마 부대 유격 대원들은 그래도 전투 중에 영예롭게 전사하기라도 했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저 희생자들은 대체 뭐냐. (하긴, 대한 항공 858편 희생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 주변엔 유족들이 헌화해 놓은 꽃을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더라.
유족들의 희망 사항은 삼풍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이런 위령비가 세워지는 것이었으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거기는 워낙 금싸라기 땅인지라 아크로비스타라는 다른 주상 복합 주택이 들어선 지 오래다.
참고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현장과 비교적 가까운 성수대교 북단의 한강 둔치에 들어서 있다.

삼풍 백화점의 경우, 부실 공사에 대해 조금도 사죄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건물이 무너졌으니 고객도 고객이지만 우리 회사도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거야!”라고.. 정말 개념 안드로메다로 보낸 회장의 발언이 더욱 어그로를 탔었다. 정말 북괴 뺨치는 철면피 천하의 개쌍놈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같았으면 책임자가 할복을 해도 시원찮았을 일이다! 1985년 JAL123 추락 사고로 520명이 죽었을 때도, 별로 책임이 크지도 않은 정비사 한 명이 자살했잖아.
물론 지금은 피해자 보상하느라 삼풍 그룹 전체가 자산이 싹 압류당하고 진작에 공중분해되었으니 그들은 정말 최소한의 죄값은 치렀다.

이상이다.
우리나라 역사· 지리를 사랑하는 철덕이라면 양재 시민의 숲 역은 이렇게 볼거리가 많으니 꼭 답사해서 주변 시설들을 둘러보도록 하자.

아, 그나저나 여기 근처에 aT센터가 있고, 말로만 듣던 코스프레 오덕들이 공원에서 모임을 한 게 진짜 보였다.
그런데, 일본 오타쿠 복장을 하고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화장실에 갔다 오거나 근처를 들락날락하는 애들이 정서적으로 많은 논란이 된 바 있다.
옛날에, 일본 야동 업로드로 유명했던 김 본좌 양반도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서 광복절에는 업로드 안 했다고 한다. =_=;; 정말 그런 애가 있다면 제발 개념 탑재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02 08:26 2013/11/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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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매헌) 역

신분당선은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분당과 서울 강남을 16분 만에 잇는 민자 전철이다. 기본 요금이 수도권 전철의 일반 구간보다 700원이나 더 비싸지만,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비싼 값을 하며 환승 할인도 되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현재 개통해 있는 신분당선의 역들을 살펴보면, 강남(2호선), 도곡(3호선), 정자(분당)는 환승역이다.
판교는 판교 신도시 구간에 놓인 유일한 역이며 앞으로 성남-여주선과의 환승역이 될 예정이다. 신분당선 본사도 여기 인근에 있다.
여기 말고 서울 구간에 있는 비환승 신규역은 둘 있다. 하나는 등산 코스로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청계산입구 역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역은 잘 알다시피 '양재 시민의 숲' 역이다. 분당선에는 '서울숲'이라는 역이 있고 신분당선에는 '양재 시민의 숲'이라는 역이 있는 게 흥미롭다.

이 역은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 사이의 경계인 강남대로 상에 있다. 논현(7호선)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남(2호선), 양재(3호선)의 순인데, 그 다음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 IC 근처이고 현대· 기아 쌍둥이 사옥이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양재에서 끝나기에는 양재 역 이남에도 여러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이 역은 양재 역만 있었을 때의 2% 부족한 면모를 다소 보충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 교육 문화 회관이 있다.
2011년에 본인은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에 참가했었고, 그때는 발표 심사와 시상식이 거기서 열렸다.
그때는 근소한 차이로 신분당선이 아직 개통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회관에서는 양재 역에서 주기적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그걸 타고 회관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당선이 생기면서 장소가 역에서 600m 남짓한 거리로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마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의 바로 옆에는 말 그대로 시민 공원으로 조성된 숲이 있다. 이 숲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1번 출구로 나가면 북부 쪽으로 간다. 좁은 의미에서는 북부만을 양재 시민의 숲이라고 치는 듯하다.
그리고 5번 출구로 나가면 남부로 향하게 되며, '여의교'--여기가 여의도도 아닌데 이름이 왜 이럴까?--라는 개천 다리를 건너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 쪽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역명이 괜히 윤 의사의 호인 '매헌'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앞으로 소개할 각종 위령비들은 북부가 아닌 남부에 있다.

이런 관광 명소들이 여럿 있다는 게 잘 알려져 있기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 지하철 정기권 떨이를 위해 일대 답사를 떠났다.
최 용신 기념관(안산선 상록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3호선 독립문) 가듯이 답사를 갔다.

2. 윤 봉길 의사

매헌 윤 봉길 의사 (1908-1932).

그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경축 행사장에 들어가서 참석자들이 일제히 묵념을 시작했을 때 용감히 폭탄을 던졌다. 천장절(쇼와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한 행사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 정도로 뜻깊은(?) 행사장에다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그는 유수의 일본군 장성들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세계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립서비스 생색내기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장 제스 총통이 이 사건에 완전 반해서 극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그로부터 불과 3~4개월 전엔 일왕을 죽이려는 이 봉창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이번 행사에서는 보안을 나름 강화하려 애썼고,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이번엔 불발하지 않게 정말 튼튼하게 폭탄을 만들려고 애썼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이 사용한 폭탄을 만든 사람은 김 홍일 장군으로 동일 인물. (울산 자매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동명인 바람에 독립 운동가의 이름이 이미지가 다소 실추했다.)

일본은 보안 차원에서 행사장 입장객에게 초대장 검사를 실시하고, 도시락과 물통 외의 소지품은 반입하지 못하게 했다. 현장에서 식사는 제공 안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X선 금속 탐지기가 쓰이던 시절은 아니었던지라, 우리 쪽에서는 폭탄 자체를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지품은 통과 판정을 받았다.
초대장이 없는 건 윤 봉길이 시치미 뚝 떼고 유창한 일본어로 “아 왜 이런 기쁜 행사에 우리 자국민이 참석을 못 하냐?”라고 우겨서 넘겼다고 한다. 시쳇말로 '멘탈 갑'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윤 의사는 물통 모양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진 걸 확인한 후 도시락 모양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 폭탄은 또 불발하여 실패했다. 그는 이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자폭에 실패하고 죽지 못한 대가로, 잡힌 후엔 이 테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폭탄을 누가 만들어 줬는지 불라고 그야말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본토로 끌려가서 재판받은 뒤, 비공개로 집행된 총살로 겨우 24년간의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감정 같았으면 이런 반동분자에게 능지처참을 가해서 시신을 본보기로 전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 처형 즉결처분을 했다간 오히려 일제의 잔학함이 국제적으로 폭로되고 조선에 대한 여론이 좋아질 걸 우려해서 일을 조용히 해치웠다.

그 대신 윤 의사는 모 형무소 내부에 마련된 사형장에서 수십 발의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마치 차우세스쿠의 최후의 순간처럼 끔살당했다. 격발 중 일부는 윤 의사를 겨냥하지 않은 페이크였을지 모르나, 그래도 단 몇 발이라도 권총도 아니고 돌격소총으로 복부의 심장도 아니고 얼굴 미간을 집중적으로 맞았으니 형체가 남아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시신은 공동묘지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 그래도 안 중근과는 달리 해방 후에 유해가 수습· 송환되었으니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점이다. 백범 김 구가 이 봉창· 윤 봉길 같은 사람을 침투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윤 의사는 정말 가슴이 터질 듯한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훙커우 공원으로 가야만 했을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사내 대장부는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상하이 의거를 앞두고 아직 갓난아기인 두 아들들에게 미리 남긴 유언)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김 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저런 말과 글의 퀄리티를 보노라면, 누가 윤 의사를 감히 무식한 테러리스트 정도로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유언을 보면 '빈 무덤'이랜다. 그는 최악의 경우 자기 시체도 못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다 염두에 둔 듯하다. 아아...
자, 배경지식에 대한 복습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부터 기념관과 주변 지역 사진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3. 윤 봉길 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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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입장은 무료이나, 주차장은 무료가 아니다.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은 둘 다 무료였던 걸로 기억.)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경우, 재정난· 운영난 때문에 유품들이 제대로 관리도 못 되고 기념관 자체가 폐관될 위기에 처했다고도 들었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아서 유료화를 해도 좋으니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념관은 중앙 홀의 좌우로 방이 2개 있었다. 내부의 관람 컨텐츠는 이게 전부다. 2층과 3층이 있긴 하지만 거기는 관람 공간이 아님. 3층의 경우, 기념 사업회의 수익 모델 차원에서 강당 공간 유료 대여를 한다고 한다.
안에는 윤 의사의 여러 사진,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어록이 소개되어 있었다. 윤 의사를 소재로 초등학생들이 포스터를 그린 것도 잔뜩 걸려 있었다.

여기가 첫 개관한 건 1988년으로, 천안의 독립 기념관보다 살짝 늦지간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개관한 셈이다.
참고로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도 별도의 윤 의사 생가와 기념관이 있긴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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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윤 의사의 생애에서 유명한 일화다. 한자를 못 읽는 어떤 문맹 청년이 윤 의사에게 자기 아버지 묘비를 좀 찾아 달라고 동네 야산의 묘비들을 죄다 뽑아 왔는데...
“님 선친 묘비는 골라 낼 수 있지만, 묘비들 원상복귀는 어떻게 시킬려고?”라는 한 마디에 데꿀멍해 버린 사연 말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개고생한다. 그 청년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묘지도 못 찾게 만드는 초대형 민폐를 달성했다. -_-;;

안 중근도 그렇지만 윤 봉길도, 테러리스트(?)이기에 앞서 민족 독립의 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상가이고 계몽가였다. 윤 봉길의 삶에서도 의외로 최 용신스러운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교육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지식인이 얼마나 고민하던 끝에 폭탄까지 들게 됐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3/10/30 08:23 2013/10/3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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