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매헌) 역
신분당선은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분당과 서울 강남을 16분 만에 잇는 민자 전철이다. 기본 요금이 수도권 전철의 일반 구간보다 700원이나 더 비싸지만,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비싼 값을 하며 환승 할인도 되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현재 개통해 있는 신분당선의 역들을 살펴보면, 강남(2호선), 도곡(3호선), 정자(분당)는 환승역이다.
판교는 판교 신도시 구간에 놓인 유일한 역이며 앞으로 성남-여주선과의 환승역이 될 예정이다. 신분당선 본사도 여기 인근에 있다.
여기 말고 서울 구간에 있는 비환승 신규역은 둘 있다. 하나는 등산 코스로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청계산입구 역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역은 잘 알다시피 '양재 시민의 숲' 역이다. 분당선에는 '서울숲'이라는 역이 있고 신분당선에는 '양재 시민의 숲'이라는 역이 있는 게 흥미롭다.
이 역은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 사이의 경계인 강남대로 상에 있다. 논현(7호선)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남(2호선), 양재(3호선)의 순인데, 그 다음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 IC 근처이고 현대· 기아 쌍둥이 사옥이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양재에서 끝나기에는 양재 역 이남에도 여러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이 역은 양재 역만 있었을 때의 2% 부족한 면모를 다소 보충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 교육 문화 회관이 있다.
2011년에 본인은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에 참가했었고, 그때는 발표 심사와 시상식이 거기서 열렸다.
그때는 근소한 차이로 신분당선이 아직 개통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회관에서는 양재 역에서 주기적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그걸 타고 회관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당선이 생기면서 장소가 역에서 600m 남짓한 거리로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마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의 바로 옆에는 말 그대로 시민 공원으로 조성된 숲이 있다. 이 숲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1번 출구로 나가면 북부 쪽으로 간다. 좁은 의미에서는 북부만을 양재 시민의 숲이라고 치는 듯하다.
그리고 5번 출구로 나가면 남부로 향하게 되며, '여의교'--여기가 여의도도 아닌데 이름이 왜 이럴까?--라는 개천 다리를 건너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 쪽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역명이 괜히 윤 의사의 호인 '매헌'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앞으로 소개할 각종 위령비들은 북부가 아닌 남부에 있다.
이런 관광 명소들이 여럿 있다는 게 잘 알려져 있기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 지하철 정기권 떨이를 위해 일대 답사를 떠났다.
최 용신 기념관(안산선 상록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3호선 독립문) 가듯이 답사를 갔다.
2. 윤 봉길 의사
매헌 윤 봉길 의사 (1908-1932).
그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경축 행사장에 들어가서 참석자들이 일제히 묵념을 시작했을 때 용감히 폭탄을 던졌다. 천장절(쇼와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한 행사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 정도로 뜻깊은(?) 행사장에다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그는 유수의 일본군 장성들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세계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립서비스 생색내기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장 제스 총통이 이 사건에 완전 반해서 극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그로부터 불과 3~4개월 전엔 일왕을 죽이려는 이 봉창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이번 행사에서는 보안을 나름 강화하려 애썼고,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이번엔 불발하지 않게 정말 튼튼하게 폭탄을 만들려고 애썼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이 사용한 폭탄을 만든 사람은 김 홍일 장군으로 동일 인물. (울산 자매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동명인 바람에 독립 운동가의 이름이 이미지가 다소 실추했다.)
일본은 보안 차원에서 행사장 입장객에게 초대장 검사를 실시하고, 도시락과 물통 외의 소지품은 반입하지 못하게 했다. 현장에서 식사는 제공 안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X선 금속 탐지기가 쓰이던 시절은 아니었던지라, 우리 쪽에서는 폭탄 자체를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지품은 통과 판정을 받았다.
초대장이 없는 건 윤 봉길이 시치미 뚝 떼고 유창한 일본어로 “아 왜 이런 기쁜 행사에 우리 자국민이 참석을 못 하냐?”라고 우겨서 넘겼다고 한다. 시쳇말로 '멘탈 갑'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윤 의사는 물통 모양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진 걸 확인한 후 도시락 모양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 폭탄은 또 불발하여 실패했다. 그는 이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자폭에 실패하고 죽지 못한 대가로, 잡힌 후엔 이 테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폭탄을 누가 만들어 줬는지 불라고 그야말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본토로 끌려가서 재판받은 뒤, 비공개로 집행된 총살로 겨우 24년간의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감정 같았으면 이런 반동분자에게 능지처참을 가해서 시신을 본보기로 전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 처형 즉결처분을 했다간 오히려 일제의 잔학함이 국제적으로 폭로되고 조선에 대한 여론이 좋아질 걸 우려해서 일을 조용히 해치웠다.
그 대신 윤 의사는 모 형무소 내부에 마련된 사형장에서 수십 발의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마치 차우세스쿠의 최후의 순간처럼 끔살당했다. 격발 중 일부는 윤 의사를 겨냥하지 않은 페이크였을지 모르나, 그래도 단 몇 발이라도 권총도 아니고 돌격소총으로 복부의 심장도 아니고 얼굴 미간을 집중적으로 맞았으니 형체가 남아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시신은 공동묘지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 그래도 안 중근과는 달리 해방 후에 유해가 수습· 송환되었으니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점이다. 백범 김 구가 이 봉창· 윤 봉길 같은 사람을 침투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윤 의사는 정말 가슴이 터질 듯한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훙커우 공원으로 가야만 했을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사내 대장부는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상하이 의거를 앞두고 아직 갓난아기인 두 아들들에게 미리 남긴 유언)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김 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저런 말과 글의 퀄리티를 보노라면, 누가 윤 의사를 감히 무식한 테러리스트 정도로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유언을 보면 '빈 무덤'이랜다. 그는 최악의 경우 자기 시체도 못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다 염두에 둔 듯하다. 아아...
자, 배경지식에 대한 복습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부터 기념관과 주변 지역 사진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3. 윤 봉길 의사 기념관
기념관을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입장은 무료이나, 주차장은 무료가 아니다.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은 둘 다 무료였던 걸로 기억.)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경우, 재정난· 운영난 때문에 유품들이 제대로 관리도 못 되고 기념관 자체가 폐관될 위기에 처했다고도 들었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아서 유료화를 해도 좋으니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념관은 중앙 홀의 좌우로 방이 2개 있었다. 내부의 관람 컨텐츠는 이게 전부다. 2층과 3층이 있긴 하지만 거기는 관람 공간이 아님. 3층의 경우, 기념 사업회의 수익 모델 차원에서 강당 공간 유료 대여를 한다고 한다.
안에는 윤 의사의 여러 사진,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어록이 소개되어 있었다. 윤 의사를 소재로 초등학생들이 포스터를 그린 것도 잔뜩 걸려 있었다.
여기가 첫 개관한 건 1988년으로, 천안의 독립 기념관보다 살짝 늦지간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개관한 셈이다.
참고로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도 별도의 윤 의사 생가와 기념관이 있긴 하다고 한다.
이것도 윤 의사의 생애에서 유명한 일화다. 한자를 못 읽는 어떤 문맹 청년이 윤 의사에게 자기 아버지 묘비를 좀 찾아 달라고 동네 야산의 묘비들을 죄다 뽑아 왔는데...
“님 선친 묘비는 골라 낼 수 있지만, 묘비들 원상복귀는 어떻게 시킬려고?”라는 한 마디에 데꿀멍해 버린 사연 말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개고생한다. 그 청년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묘지도 못 찾게 만드는 초대형 민폐를 달성했다. -_-;;
안 중근도 그렇지만 윤 봉길도, 테러리스트(?)이기에 앞서 민족 독립의 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상가이고 계몽가였다. 윤 봉길의 삶에서도 의외로 최 용신스러운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교육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지식인이 얼마나 고민하던 끝에 폭탄까지 들게 됐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