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갓 태어난 아기 내지 꼬마였던 1980년대, 레이건과 전대갈 대통령 시절 겸 히로히토 일왕의 말기는 미국· 일본· 한국 모두 경제가 호황이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잘 나가던 때였음이 틀림없다.
데모 하느라 성적이 개판이어도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대기업들에서 모셔 가려고 난리이던 시절? 방학 때 공사판에서 한두 달 노가다만 뛰면 대학 등록금이 짠 마련되던 시절? 적당히 월급 저축해서 집을 마련하고, 남자 혼자 외벌이만으로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게 가능하던 시절?
아 물론 이런 것들은 추억 보정을 받아 비현실적으로 미화된 것도 있고 걸러 가며 들어야 할 것도 있다. 그 시절에 전반적인 분위기가 저랬다고 해서 너님도 반드시 저 혜택을 입는 게 가능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저렇게 풍요로운 시절을 보낸 세대들은 더 과거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무질서하고 힘들고 어려운 나날을 겪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25 전쟁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1970년대의 악몽이던 석유 쇼크는 어떻게 극복했겠는가?
이때는 냉전의 여파로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기도 했다. 우주왕복선이 등장했고 이제 막 컴퓨터 '정보화 시대' 운운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종 창작물에서 로봇, 우주선, 컴퓨터에 대한 만능주의 환상이 마음껏 반영되어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음악은 만능 음향 제조기인 신시사이저가 발명된 지 얼마 안 되어 전자 음향이 세계적인 대세가 돼 있었다. 영상에서 CG는 아무래도 1990년대 이후부터 각종 영화와 CF에서 널리 퍼졌으며 1980년대엔 아직 소수의 실험적인 시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 반면, 음향은 그보다 약간 이른 아날로그 시대부터 전자화 가상화가 진행된 셈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점들을 감안하여 그 시절의 매체들 몇 가지를 회고해 보고자 한다.
1. 주찬양 2집 알렐루야
먼저 찬양 음반부터 언급하도록 하겠다.
세상에는 창세기 1장 6일 창조의 둘째 날 말고도.. 시리즈로 나온 물건들 중에 유독 둘째 넘버링이 존재감이 없거나 특이하거나 흑역사가 된 것이 좀 있다. 인텔 8086/88 다음으로 80186 CPU라든가 보잉 707 다음으로 717처럼 말이다.
옛날에.. 무려 1991년에 발매되었던 주찬양 선교단 10주년 컬렉션 음반에는 과거에 내놓았던 1집부터 7집의 곡들 중에서 명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유독 2집 소속인 곡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본인은 주찬양 2집은 도대체 뭔가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게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얘는 평범하게 최 덕신의 창작곡으로 구성된 앨범이 아니었다.
미국의 빌 게이더 & 글로리아 게이더 부부의 창작곡으로 구성한 찬양 예배 앨범 Alleluia를 그대로 번역하여 수록한 음반이었다. 아무래도 1집과 3집의 사이에 나왔을 테니 발매 시기는 1986년~87년 정도로 좁혀진다.
영어 원판은 바로 이것이다.
"Welcome! We've gathered together just to praise the Lord.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뭐 이렇게 시작하고..
맨 첫째 1번 트랙은.. 무슨 올림픽 개막식 같은 느낌도 든다.
사회자가 시편 150편을 인용하면서 "나팔 소리로, 비파와 하프로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이렇게 말하면 그 뒤로 오케스트라가 진짜로 그렇게 연주를 하고.. 그런다. ㅎㅎ 그래 봤자 스타일은 어쩔 수 없는 전형적인 1980년대 스타일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주찬양 2집은 주찬양 앨범들 중에 유일하게 외국 음반 번역이며 성격이 좀 특이하다.
"살아 계신 주"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예수 예수 예수 그 이름만 거기 있네"
"섬길 수록 더 귀한 주님"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요 찬송이 바로 게이더 부부의 곡이며, 저 앨범에 소개돼 있다.
7번 트랙이 "섬길 수록 더 귀한 주님"인데, (테이프에서는 B면 둘째 곡) 앞에 어떤 노년 신사의 인생 간증이 먼저 나온다. 영어 원판은 자기가 이제 70세가 됐다고 나오는데, 주찬양 2집 번역판에서는 회갑의 나이가 됐다고 약간 초월번역 됐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6· 25 사변 등의 여러 격변의 세월.." 운운하는 회고도 원판에는 없는 로컬라이징이다. 영어 원판이라고 해서 대공황이나 2차 세계 대전 같은 사건의 언급은 없다.. ^^
다만, 미국에서 어린 시절에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겪은 1910~20년대생은 정말 불굴의 Greatest Generation이라고 실제로 일컬어지긴 한다. 생존을 위해 겨우 10대 나이로 생업 전선에 내던져지고, 군 입대도 하는 개고생을 하면서.. 지금의 위대한 미국 천조국을 일궈낸 세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처럼 나라 자체가 없어졌거나 헌정 체제가 널뛰기 하듯이 격변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개인의 인생은 만만찮게 힘들었던 셈이다.
트럼프 성님이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고 슬로건을 만들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원조 great가 먼저 있었음)
1980년대 기준으로 나이 70이면 진짜 딱 저 세대에 맞게 떨어진다~! 다만, 검색을 더 해 보니 알렐루야 영어 원판 앨범은 1973년작으로 더 오래됐다고 한다. ㅎㅎ
2. 철도 음악
본인은 철덕으로서 Looking for you도 1988년작 음반에 수록된 1980년대 곡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글쎄, 그 정도로 오래됐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데..;;
그리고 혹시 기억하는 분이 계시나 모르겠는데, 지난 2006~07년 사이... 08년부터 Let it be 가야금과 국악풍 시그널송이 도입되기 전의 과도기에 새마을호에서는 정차역 안내방송 전에 뭔가 전자악기 풍의 경쾌한 G장조 시그널송이 연주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동일한 음악이 1988년도 롯데 월드 쇼핑몰 CF에서 쓰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음악은 그보다 더 전부터 발표되었고 존재했다는 뜻이다.
저 음악의 제목과 작곡자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것도 여러 무명의 영상 음악 아카이브/라이브러리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롯데 월드 CF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견이다.
굳이 철도 BGM이 아니어도, 잊혀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불려지는 1980년대 BGM이나 팝송 따위가 있다면.. 그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과 맥락을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3. 국내 가요와 동요
우리나라가 1980년대에 영화는 3S 정책과 맞물려서 좀 침체돼 있었다고 하나, 노래는 이때 의외로 명작들이 많이 배출된 것 같다.
-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
- 코리아나 손에 손잡고
- 해바라기 사랑으로
- 이 상은 담다디
- 혜은이 파란 나라, 피노키오
- 신 형원 터, 개똥벌레
- 동요 새싹들이다, 노을
- 배따라기 아빠와 크레파스
- 김 원중 바위섬
4. 영화 쿵 퓨리~!
아아~ 본인은 <쿵 퓨리>(Kung Fury, 2015)라는 미친 30분짜리 단편영화를 얼마 전에야 우연히 접했다.
정말 인간의 약빤 의식의 흐름과 병맛은 도대체 끝이 어딘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현웃 하면서 잘 봤다. ㅠㅠㅠㅠㅠ ㅋㅋㅋㅋㅋㅋ
- 1980년대의 마이애미, GTA 바이스 시티
(그러고 보니 "로보캅"은 배경이 디트로이트이고, "블루스 브라더스"는 시카고가 배경이구나! LA 배경도 어딘가에 있긴 할 것이다;;)
- 들고 다니는 커다란 붐박스 라디오
- 그 시절 티가 빵빵 나는 테크노스러운 전자음향 음악, 어설프게 SF스러운 폰트, 아날로그 VHS 노이즈와 그 색감
- 모탈 컴뱃과 섀도 워리어 (서양 스타일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
- 킬 빌 (온갖 B급 영상물들 패러디)
- 맥가이버와 스트리트 파이터 류 (빨간 머리띠만 -_-), 듀크 뉴켐 3D
- 자동차 키트
- 쿵푸 팬더 (!!!)
- 공룡, 북유럽 신화
- 그 시절 특유의 로봇, 우주선, 컴퓨터 해킹에 대한 만능주의 환상
젠장~ 쿵 퓨리에서는 저런 것들이 몽땅 다 오마주 되어, 짬뽕 돼서 나온다. =_=;;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사람 실물이 튀어나오는 장면 정도는 어지간한 만화에서도 나왔지만, 여기서는 악당(히틀러..;; )이 전화기에다 대고 총질을 하니까 전화를 받는 사람이 죽는다. =_=;;
Hackerman, Kung Fuhrer 자막이 뜨는 그 촌스럽고 오글거리는 장면에서는 아 ㅆㅂ 소리와 함께 경악이.. '해커맨'을 보면, 서양에도 '금요일날, 프린터기, 역전앞' 같은 겹말이 얼마든지 쓰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병맛을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돈 주고도 볼 의향이 있다.
만든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단, 만든 사람들 소변 도핑 검사도 시키는 조건으로 말이다.
운동 선수들 스포츠뿐만 아니라 영화도 정정당당한 상상력만 발휘해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ㅠㅠㅠㅠ
맨날 쿵푸 쿵푸 하는데 이건 功夫(우리말로 치면 '공부'에 더 가까운 소리!)에서 유래된 비격식 민간 어원이고, 위키백과에서는 '중국 권법의 총칭'이라고 분류돼 있다. 즉, 태권도나 가라테 같은 특정 무술 명칭이 아니라 일종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쿵푸의 하위 분류로 창시자별로 홍가권, 영춘권, 태극권, 절권도 등등의 파생이 있다. 마치 SVGA는 EGA, VGA 같은 특정 그래픽 모드가 아니라 여러 VGA 확장들의 총칭이듯이 말이다. 에휴.. 명작 병맛 영화 하나 덕분에 내가 이런 것까지 직접 찾아보게 됐다. ㄲㄲㄲ
철덕으로서 일말의 동질감이 느껴진 부분을 찾자면..
주인공이 번개를 맞고 코브라에 물려서 각성해서 쿵 퓨리가 된 것과 비슷하게, 본인은 새마을호를 타고 Looking for you를 들음으로써 철덕으로 각성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쿵푸를 너무 좋아해서 자기 이름까지 쿵 퓌어러라고 지었듯이, 본인은 철도를 너무 좋아해서 영어 닉도 새뮤얼(새마을..)이라고 지었다. 이런 것도 비슷한 점이라 하겠다. ㄲㄲ
이제 이 영화에서 컴퓨터와 관련된 부분만 코멘트를 몇 가지 더 하겠다.
이렇게 시커먼 배경의 바둑판 격자 사이버 공간(?)은 1980년대 초창기 CG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초의 CG 합성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1982년작 트론(TRON)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며..
장 선우 감독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때문에 쫄딱 망하기 전, 옛날에 만들었던 수작 중 하나인 <성공시대>(1988)에서도.. 컴퓨미라는(..!!) 가상의 제품과 그 광고 역시 전형적인 1980년대 상상력에 근거한 것이었다. ㅡ,.ㅡ;; 참, 그러고 보니 쿵 퓨리도 작품 중에 전화기 광고가 나오네..
다시 쿵 퓨리로 돌아온다.
1980년대 8비트 컴퓨터에서 Java 코드가 줄줄 흘러나오는 건.. 저 영화의 개막장 안드로메다 초월 설정과 전개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비중의 아이템이니 그냥 넘어가자~ 해킹으로 시간 워프는 물론이고 주인공의 총상까지 치료하는 영화인걸 뭐.. ㅡ,.ㅡ;; 외계인의 컴퓨터를 해킹해서 방어막을 무력화시키는 것쯤은 시간 해킹에 비하면 완전 약과였다(인디펜던스 데이;;).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8비트 컴퓨터는 기술과 성능상의 한계로 인해 화면 해상도가 오늘날의 컴퓨터보다 매우 낮다. 코딩은 닥치고 어셈블리어, 아니면 최대한 잘해 봤자 C 정도만 나오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아~ 심지어 화면이 맛이 갔을 때 모니터를 툭 치니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깨알같은 디테일까지 영화에 반영돼 있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ㅠㅠㅠ 요즘은 스마트폰 같은 게 맛이 갔다고 해서 툭 치지는 않는다. 참 오래된 추억의 관행이다.
비현실적인 사기 해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찰물은 후대에도 로보캅 3, 걸캅스 등 여럿 있지만, 이 정도는 돼야 정말 진한 병맛이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