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매킨토시는 가히 꿈의 컴퓨터였다. 여기서 옛날이라 함은 대략 1990년대를 말한다.

그때 우리의 IBM 호환 PC는 아키텍처가 다 공개되어 있기도 했으니 ‘행정 전산망용’ 내지 ‘교육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내 대기업이 로컬라이즈까지 해서(일본의 로컬라이즈 방식을 따라한 것이겠지만)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니 맥에 비해 희귀하다는 느낌이 덜했다. 그리고 이 기계는 그래픽 성능이 맥보다 훨씬 시원찮았다.

그에 비해 매킨토시는 희귀함과 화려함 그 자체였다. IBM PC가 겨우 도스 명령 프롬프트에서 16색, 256색 VGA를 논하는 동안 매킨토시 화면에서는 화려한 GUI 운영체제에다 천연색 사진 그래픽과 각종 전자 출판물 편집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듣자 하니 매킨토시 컴퓨터에는 텍스트 모드라는 게 아예 없다는데? (물론, PC에서도 텍스트 모드는 컴퓨터 켠 직후에나 잠깐 보이는 과거 유물 잉여가 된 지 오래이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는 모 블로그.

기계의 모양을 봐도 모니터와 본체 일체형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다 무조건 자기네 순정만 쓰이는 게 고급스러움과 간지 그 자체였고, 웬지 지구인이 만든 물건 같지가 않은 티가 역력했다. 엘렉스 컴퓨터가 총판을 맡던 시절에, 매킨토시는 가격도 억소리 나게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딱히 전자출판· 그래픽 분야 종사자나 유학파 얼리어답터들이 아니면 쓸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물론, 그때 컴퓨터 덕질을 안 하고 그 돈 더 모아서 서울 강남에다 집을 사 놨으면, 지금쯤 떼부자가 됐을 거라고 자조 섞인 말투로 회상하는 얼리어답터도 있다고 카더라)

매킨토시 진영은 서비스 구리고 하위 호환성에 자비심 없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윈텔’ 진영과는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MS 윈도우야 API의 하위 호환성은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이고, x86 아키텍처 자체도 호환성에 목숨 거느라 그 지저분함이 말도 못 할 수준이지 않던가.

그런데, 그 간지 최강 귀족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맥 OS도, X 이전의 클래식 버전은 사실 선점형 멀티스레딩도 없이 기술적으로는 윈도우 95보다도 뒤쳐진 물건이었다고 한다.
하긴, 어렸을 땐 난 시커먼 도스 프롬프트에서 그 허접한 윈도우 3.1이 시동되는 모습만 보고도, 화려한 그래픽에 동심이 매료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하물며 매킨토시는 어땠을까?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매킨토시 진영의 역사상 있었던 대단히 큰 사건들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200x년대에 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1. 엘렉스 대신 애플 코리아가 직접 한국으로 진출 (1999)
2. 맥 OS X 출시 (2001)
3. 인텔 아키텍처 기반으로 전향 (2005-2006)
4. 아이폰의 흥행 대성공(과 국내에 드디어 시판) (2007, 2009)
(5. 그리고 아마, 잡느님의 사망. 2011)

매킨토시가 옛날에 비해서는 정말 가격도 많이 떨어지고 보급도 많이 된 건 사실이지만, 서비스의 품질은 오히려 엘렉스 시절보다도 못한 면모도 있다는 성토가 여전히 나돈다.
또한 최강의 장사꾼 기질로 한글화를 꼬박꼬박 친절하게 하는 MS 윈도우 진영과는 달리, 맥 진영은 소프트웨어의 한글화도 좀 투박한 구석이 있다. 기본 제공되는 한글 서체의 품질이 저질이라고 폭풍처럼 까여 온 것 역시 그런 맥락일 테고.

맥은 하드웨어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640KB 메모리 제한이라든가 16비트/32비트 썽킹 같은 흑역사는 없다.
다만, PowerPC에서 x86으로 갈아탄 것은 워낙 여파가 너무 큰 변화이기 때문에 제작사인 애플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호환 레이어를 제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CPU 에뮬레이터인 '로제타'를 만들고, 그리고 한 프로그램 바이너리에 아예 x86 코드와 PowerPC 기계어가 같이 들어있는 Universal binary라는 포맷도 제정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 때문에 Snow Leopard던가 Lion이던가 버전부터는 PowerPC 지원은 완전히 끊겼다. 그리고 Universal binary는 PowerPC/x86이 아니라 같은 x86 계열 안에서 32비트와 64비트 코드를 동시에 내장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앞으로는 ARM과 x86(-64) 사이의 동시 지원이 필요해질 듯.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옛날에 MS가 윈도우 NT 시절에 제정한 Portable Executable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시에 윈도우 NT는 x86, PowerPC 등 다양한 CPU를 target으로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기계어 코드는 공유를 못 하더라도 동일한 헤더로 실행 파일 바이너리들을 식별하고 관리 가능하게 할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정작 PE는 한 바이너리에 다양한 아키텍처의 기계어 코드를 한꺼번에 담는 건 지원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지금이야 PC의 역량도 충분히 매우 발전하여, 매킨토시를 사실상 다 따라잡은 지가 오래이다. (그런 비주얼 쪽의 발전을 주도한 건 다 게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기계어까지 가상 바이트코드로 대체하려는 발칙한 시도가 가능해졌을 정도이니 컴퓨터가 얼마나 성능이 좋아진 셈인가?

그랬는데, 지금 나는 그 시절의 매킨토시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은 매킨토시 노트북 PC를 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다니며 쓰고 있고, 사실 그 기계로 맥OS보다 윈도우를 여전히 훨씬 더 많이 쓰고 지낸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폭풍간지 사과 무늬...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2/08/24 19:37 2012/08/24 19:37
, , , ,
Response
No Trackback , 7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724

지난 2012년 6월 30일엔 수인선 복선 전철 1차 구간이 개통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는 서울 수도권에서의 첫 경전철인 의정부 경전철이 개통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시기인 6월 27일에는 철덕들이 기릴 만한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이 또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딱 한 군데 존재하던 영동선 스위치백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문제의 장소는 태백선과 영동선이 합류하는 강원도 태백시와 삼척시 사이의 지점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기 바란다. (바탕 그림의 출처: 네이버 지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백산 역 이북으로 올라가는 영동선은 험준한 산을 오르느라 몹시 고달프다.
자, 무엇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이번에 새로 개통한 노선은 연화산을 빙 도는 연보라색의 둥근 똬리굴(1)과 한 치의 곡선도 없이 북쪽으로 정면돌파하는 분홍색 선(2)이다. 이것이 기존의 초록색 선과 파란색 선을 대체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가까이 전에는 영동선에 인클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철덕이라면 알 것이다. 거기는 철길이긴 하지만 경사가 지나치게 급해서 열차가 자기 힘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가 아니라, “레일을 깔아 놓았는데 왜 달리지를 못하니?”였다.
그래서 이 구간만 기관차와 객차를 한 량씩 크레인으로 끌어당기고, 승객들은 내려서 옆에서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크레인의 힘이 부족해서 승객이 내려야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객차에 승객과 짐이 꽉 차 있어 봤자 기관차 한 량보다 더 무거울 리는 없잖은가.
승객들을 부득이 다 하차시킨 것은 그냥 안전 문제 때문이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들이 뒤에서 같이 객차를 밀어야 했던 건 더욱 아니다.

자, 그 인클라인이 있던 곳이 바로 지금은 폐역하고 없는 통리 역과 심포리 역 사이였고, 지도에서는 대략 '빨간색 선'에 해당한다. 이 1km 남짓 되는 인클라인을 8배가 넘는 거리와 그 대신 1/8 이하의 경사로 우회 대체시킨 것이 옆의 초록색 선이다.

그 뒤 그 이름도 유명한 스위치백은 N자 모양의 파란색 선이다. 초록색 선 정도의 회전 반경을 낼 공간마저 부족했던 관계로 부득이 열차를 정지시키고 후진을 하게 만든 것이다.

스위치백은 관광객에게는 흥미로운 체험 수단이지만 원시적이고 운전하기 까다로우며 열차의 원활한 운행에는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게다가 구불구불한 기존 초록색-파란색 선로는 지반도 그리 좋지 않아서 위험했다고 하니,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대체할 깔끔한 선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지대인 연화산 기슭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언덕을 오르는 대체 똬리굴이 개통했다. 평지가 아니라 터널이다. 똬리굴 자체는 우리나라에 이미 중앙선을 비롯해 몇 군데 있지만 이번에 개통한 건 국내 최대 규모이다. 이 터널의 이름은 '솔안 터널'이고, 터널 자체는 이미 2006년에 관통식까지 끝나고 완공되었다.

솔안 터널은 스위치백뿐만 아니라 과거의 인클라인 대체 우회 선로까지 훌륭히 대체했으며, 전체 거리는 기존의 우회 선로보다 더 단축시키고 열차의 운행 시간도 10분이 넘게 더욱 단축시켰다.
어떤 철도의 선형이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급격하게 바뀌고 지도까지 덩달아 바뀌는 일은 앞으로도 매우 드물 것이기 때문에 이는 국내 철도사에 길이 남을 큰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재래식 스위치백 선로의 폐선을 며칠 앞두고 코레일에서는 평소에는 정차하지 않던 스위치백 구간의 간이역에도 영동선 여객 열차를 정차시켜 줬었다. 거기서는 당연히 철덕들의 향연이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좀 옛날 소식이긴 하다만, 지난 6월 초엔 웬 KTX 산천 한 편성이 강릉으로 디젤 기관차의 견인을 받아 끌려가서 스위치백까지 넘는 사상 초유의 이벤트가 벌어졌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도 열리는데 앞으로는 강원도에도 고속신선이 깔리고 고속철이 들어갈 거라는 홍보 행사를 위해 현역 고속철 한 편성이 얼굴마담 자격으로 끌려간 듯하다.

발상 자체는 좀 병맛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KTX 산천이 강원도에 들어와서 스위치백 고개를 넘는다니, 게다가 한 달 남짓 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그 스위치백을 말이다. 이 소식은 전국의, 아니 듣자하니 심지어 일본의 일부 철덕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이 KTX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철덕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자가용을 굴리는 철덕은 아예 도로를 나란히 달리면서 열차를 따라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비록 죄악도 있으나 일말의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다. 비록 본인은 교회크리와 논문크리 때문에 그 당시에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응원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22 08:46 2012/08/22 08:46
, , , ,
Response
No Trackback , 6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723

※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개발자가 알기 쉽게 요약한 우리나라 한글 기계화의 간략한 역사이다.

실용성을 떠나서 어떻게든 모아쓰기 형태의 한글을 찍을 수 있는 타자 기계를 완전히 최초로 만든 사람은 재미 교포 이 원익(1914)이다. 이건 세로쓰기 형태였다.
그 후 1949년에 잘 알다시피 공 병우가 최초의 세벌식 쌍초점 타자기를 발명하고,
1958년에는 김 동훈이 다섯벌식(자음 2, 모음 2, 받침 1) 타자기를 발명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일한 정사각형 공간에 한글을 모아쓰기 형태로 보기 좋게 찍으려면 잘 알다시피 한글 자모의 벌수가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벌수가 많아질수록 기계 구조가 복잡해지고 치기가 어려워지는 등 타자 능률에는 여러 모로 애로사항이 꽃핀다.

공 병우는 미려한 자형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형은 그냥 알아볼 수만 있는 정도의 빨랫줄 샘물체 형태로 찍히지만 타자 능률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한쪽 극단을 선택하여, 세벌식이라는 글쇠배열 이념을 고안했다. 이때가 이분이 환자의 안과 진료까지 때려치우고 기계 덕질을 하던 시절이다.

세벌식은 외형만 약간 희생하면, 굳이 풀어쓰기까지 안 가고도 한글 역시 영문 뺨칠 정도로 기계로 편하게 칠 수 있는 문자라는 걸 최초로 입증해 보였다. 구조가 간단한 덕분에 한영 겸용 타자기까지 만들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처음에는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흐르는 배열을 생각했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종이가 진행되는데 글쇠가 엉키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과 같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흐르는 배열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공 박사 자서전을 찾아보면 나온다. 기계식 타자기를 배제한다면 어느 방향이 더 좋을지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떡밥인 듯하다. R2L은 오른손잡이의 손에 유리한 반면, L2R은 시각적으로 무척 직관적이라는 장점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세벌식 타자기는 성능이 좋은 덕분에, 닥치고 능률이 짱인 군대에서 아주 환영받았다. 뭐, 군대에서도 백 선엽 장군처럼 한글 기계화에 대한 관념이 없이, 여전히 세월아 네월아 한자를 섞어서 손으로 쓴 문서를 좋아하는 지휘관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다만, 세벌식 타자기는 글자 모양이 심하게 보기 안 좋고 이질감이 심했던지라, 민간에서는 김 동훈 다섯벌식도 여전히 공존하여 쓰였다.

기계식 타자기는 몇 벌식으로 만드느냐에 따라서 기계 구조가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구조가 상이한 한글 타자기가 공존한다는 것은 사회 비용을 증가시키고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국가가 나서서 통일안을 만들었다.

그래서 다섯벌식과 세벌식을 절충한답시고 1969년 6월에 과학기술처가 내놓은 게 네벌식이다. 개그 만화 일화 씰 사장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서 너희들은 새로운 글자판을 제정했다. 그것이 이것과 이것과 이것의 네벌식이다.
팔릴까보냐! 세벌식의 능률도, 다섯벌식의 자형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 살린 글자판이 되어 버렸지 않나! 더 이상해! 게다가 왜 공청회 없이 졸속으로 후다닥 만든 거냐! 누가 고안한 거냐, 제정 위원들은 글자판 전문가이긴 하냐? 대체 누구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이랬다.
과거 영국에서는 비숍 성경과 제네바 성경을 통합하는 킹 제임스 성경 표준안이 아주 훌륭하게 정착하였지만, 한국의 타자기 글자판 표준화는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다.

허나 그때는 때가 박통 시절인지라 표준화는 불도저 식으로 추진되었다. 비표준이 된 세벌식과 다섯벌식은 모두 상당히 무식한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시장에서 씨가 마르고 말았다.
세벌식 지지자들이 이를 가는 대목이다. 오늘날 세벌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듣보잡 글자판으로 전락해 버린 가장 큰 계기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시즌 1은 종료.

시즌 2는 컴퓨터와 함께 시작되었다.
1970년대 후반엔 몇몇 선구자들을 중심으로 Apple II PC가 국내에 도입되었으며, 이에 타자기가 아닌 컴퓨터용 한글 입력 방식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공 병우 박사 역시 당당한 Apple II 사용자였으며 그 후로도 매킨토시만을 애용하였다(오옷.. 1세대 앱등이).

컴퓨터는 전자식으로 동작하니 기계식 타자기를 만들 때와는 달리 여러 벌의 한글 자모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영문 글자판과 잘 어울리게 한글 자모를 하나씩만 곱게 집어넣으면 된다.

그 당시의 국내의 컴퓨터 전문가들은 한글을 어떻게 입력하면 좋을지, 한글이 조합 중일 때 시각적인 화면 피드백은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같은 것을 면밀히 연구하였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자국 문자 입력을 어떻게 하는지도 적극 벤치마킹했다.

지금은 당연한 개념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오늘날의 컴퓨터용 두벌식 한글 입력 오토마타의 이론적 근간을 처음으로 마련한 분은 KAIST 전산학과의 최 광무 교수이다. 그분의 1978년도 석사 학위 논문 <한글 모아쓰기에 관한 연구>의 요지가 이것이다. “자음과 모음 한 벌씩, 그리고 쌍자음은 Shift로 한 타 만에 바로 입력하게 하면 음절 경계 모호성이 없이 모아 쓴 한글의 연속 입력이 가능하다”는 것.

그렇잖아도 과학기술처는 KAIST에 용역을 주어 컴퓨터용 한글 글자판을 고안하게 했고, 그래서 1982년엔 최 교수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오늘날의 KS X 5002 두벌식 글쇠배열이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냥 자음 모음만 아무 생각 없이 한 벌씩 배치하면, 요즘 천지인 같은 일부 모바일 한글 입력 방식이 그러하듯이 음절 경계 모호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 두벌식 배열은 타자기용 네벌식 배열보다야 구조가 훨씬 더 간단하고 배우기 쉬웠다. 왼손은 자음이나 오른손은 모음이니 언뜻 보기에 얼마나 직관적인가? 숫자와 기호가 영문 글자판과 완전히 일치하며, 딱 알파벳 26개 자리에만 한글 자모가 들어있다.

하지만 초중종성 세 벌로 이뤄진 문자를 두 벌의 글자판만으로 치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타자 도중에 원하지 않는 글자가 생기는 도깨비불 현상을 피할 수 없었고, 또 타자기와 컴퓨터의 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큰 문제도 있었다. 예전에는 타자기에서 세벌식과 다섯벌식 때문에 사용자가 헷갈렸다면 이제는 타자기의 네벌식과 컴퓨터의 두벌식 때문에 혼동이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5공 시절이던 1983년에는 타자기용 네벌식 글자판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네벌식을 웬수처럼 여기고 있던 세벌식 진영의 사람들도 이 순간만은 기뻐했다. 이제는 표준 글자판이 좀 개선되려나?

그러나 현실은 나아진 게 없었다. 컴퓨터용 글자판은 변함없이 두벌식이고, 타자기는 새로운 후속 표준이 정식으로 제정되는 게 없이 그냥 컴퓨터처럼 어중간한 두벌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타자기에는 컴퓨터 같은 한글 입력 오토마타 장치가 없으니 그 대신 새로 무엇이 추가되었냐 하면 '받침' 키 신공이다. 여기서 또 씰 사장님의 절규 추가.

“그래서 너희들이 새로 만든 것이 이것과 이것과 이것의 두벌식 타자기이다.
무섭다구! 받침을 입력할 때마다 Shift를 눌러야 하는 기형 타자기를 도대체 누가 쓴단 말이냐! 이 기계로 타자를 해야 하는 타자수의 얼굴이 기분 나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마 그 당시 높으신 분들은, 어차피 글자판은 이 지경이 돼 버렸고 이제 대세는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넘어가고 있으니 타자기는 이 참에 완전히 손을 놔 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실제로 한글 타자기는 컴퓨터와 비교했을 때 단순히 기계적인 기능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글자판과 입력 방식 차원에서의 원론적이고 구조적인 차이로 인해 컴퓨터의 적수가 될 수 없어서 급속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시즌 2 종료.

오늘날 컴퓨터에서는 표준이 된 두벌식, 그리고 한글 구성 원리와 일치하는 세벌식만이 남아 있고 그보다 더 복잡한 벌수의 입력 방식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있다. 세벌식은 도깨비불 현상이 없고 타자 능률이 매우 좋다는 점, 그리고 기계간의 글자판 통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두벌식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장점이기 때문에, 한글이 남아 있는 한 절대로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글쇠 수가 좀 많고 기호가 영문 자판과 다른 게 단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자기와 컴퓨터가 모두 속 시원하게 똑같이 세벌식으로 갔으면 글자판 통일은 진작에 이뤄졌을 것이며, 타자기도 온갖 n벌식 입력 방식에 이리 저리 휘둘리다가 망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타자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본분은 다 수행하면서 실제보다 더욱 늦게 현역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기계식 타자기로 저 정도로 칠 수 있는 문자가 라틴 알파벳 계열을 빼고 전세계에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고작 네모 글꼴 하나 건지려고 벌수 놀이를 한 것치고는 감수해야 한 사회적 손실과 치러야 한 대가가 너무 컸다. 기술이 발달하면 세벌식 타자기의 빨랫줄 모양 글꼴도 그 방향을 유지하면서 얼마든지 더 미려하게 개선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세벌식이 확고하게 타자기와 PC의 주 입력 방식으로 자리잡았다면, 두벌식은 세벌식을 적용하기에는 글쇠 수가 충분치 않고, 어차피 기계식 타자기와의 연결 고리가 없으며 장시간 빠르게 입력을 할 필요도 없는 기기를 위한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변칙 입력 방식으로 추후에 논의되게 되었을 것이다.

요 얼마 전엔 드디어 모바일용 한글 입력 방식으로 천지인과 이지한글(나랏글), SKY 세 종류가 복수 표준으로 지정되었다. 기계식 타자기의 글쇠배열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차피 한글 입력은 소프트웨어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무슨 입력 방식을 심든 물리적인 비용이 드는 게 없으며, 어차피 어느 입력 방식이든 두벌식 안에서 그 나물에 그 밥이기 때문에 성능 격차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니 그냥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기존 입력 방식 몇 개만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즘은 한글날도 20여 년 만에 다시 공휴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세벌식의 표준화에 “too late”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장기적으로는 390과 최종을 통합하는 글쇠배열이 있어야 할 것이고, 표준화는 언제든지 논의되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글은 두벌식으로만 쓰기엔 너무 아까운 문자이고, 세벌식의 압도적이고 상징적인 장점은 절대로 없어지거나 희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담이다만, 아마 공 병우 박사님이 2010년대까지 살아 계셨다면, 맨날 아이폰으로 트위터 하면서 한글날 공휴일 지정과 세벌식 표준화를 주장하는 트윗을 남기고 젊은이들과 얘기를 나누셨을 것 같다. 비록 타자기/PC에서만치 세벌식을 강경하게 주장하지는 않을지라도 모바일용 한글 입력 방식을 연구하는 건 당연지사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 병우 박사(1907~1995). 안과 의사에다 불세출의 한글 공학자까지 인증..;; 하나만 제대로 하기도 무진장 힘들 텐데, 머리가 너무 좋고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분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7/15 08:29 2012/07/15 08:29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1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707

오늘은 북한과 관련된 정보들을 좀 나열해 보겠다. 스펀지에 소개될 법도 한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1. 이북5도청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관계는 정말 미묘하고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라는 헌법 조항에 의거, 한반도 북부를 무단 점거하고 있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정서가 오늘날까지도 없지는 않다.

분단 이래로 잘 알다시피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가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황해도,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는 완전히 북한 영토가 되었다. 그러니 거기는 대한민국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 역시 원래는 우리 땅이라는 발상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에는 '이북5도청'이라는 행정 기관이 있어서 형식으로나마 그 지역의 도 지사와 시장을 선출하고 근무를 시키고 있다! 하는 일은 실향민 지원, 북한 문화 기록 보존 같은 쪽으로, 행정보다는 학술적인 쪽에 가깝다.

이 기관은 무려 1949년부터 있어 왔다.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으로부터 대남 송전이 중단되는 등 분단의 앙금이 굳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이북5도청은 서울의 완전 북부 끝자락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상명 대학교 근처이긴 하지만 그곳보다도 더 북쪽이다.

다만, 북한은 또 자기 식으로 행정 구역을 개편하여 황해도가 남북으로 분할되고 없는 도가 생기기도 했다는 것을 여러분 역시 잘 아실 것이다. 도의 개수를 일부러 남한의 그것의 개수와 똑같게 맞춘 거라고 한다.

2. 자유의 마을

우리나라의 비무장 지대, 일명 DMZ라 함은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휴전선 전· 후방 2km 구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거기는 사람의 손길이 반세기가 넘게 끊어지면서 천혜의 자연이 살아 숨쉬는 생태 관광지가 되어 간다고들 한다. 전세계를 통틀어 보기 드문 세계 최대 규모의 온대 원시림!! (다만 지뢰 때문에 좀 문제이긴 하다만 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의 마을', 혹은 '대성동 마을'이라 하여 전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 지대에 자리잡은 민간인 거주지가 있다. 이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덕분이다. 첫째는 당연히 국토가 분단되기 전부터 그 자리에 마을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판문점과 가까이 있는 덕분에 6· 25 전쟁 때 마을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치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경의선 최북단의 도라산 역보다도 더욱 북쪽이며, 국내 민간 지도나 자동차 내비로는 지리 정보가 전혀 안 뜬다. 민간인이 측량 조사 자체를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구글 어스가 진리

남과 북에 걸쳐서 멀쩡히 있던 마을이 국토가 분단되면서 찢어지는 바람에 북쪽에는 남한의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해당하는 '기정동 평화의 마을'이 생겼다. 60여 년 전에 미국이고 소련이고, 공산주의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모르던 깡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마을이 반토막 났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외부인이 이 마을을 방문하는 건 육사나 국정원을 방문하는 것 이상으로 까다롭다. 1주일 전에 신청을 한 뒤 현장에서는 신분증 까고 출입증을 발급받은 뒤 여러 단계의 군부대 초소를 통과해야 한다. 내부 주민 역시 이동이나 주거의 자유가 좀 제약을 받기 때문에, 심야에 통금이 있는 건 물론이고 휴전선 근처에서 영농 활동이라도 할라치면 군부대에 신고를 해야 한다. 매일 저녁에도 점호 비슷한 가구 시찰이 있다.

마을 주변에 있는 건 진짜로 논밭 아니면 군부대뿐. 코앞이 휴전선이고 북한 쪽 마을을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전쟁 났다 하면 0순위로 박살날 동네이다. 실제로 휴전 뒤에도 남북간엔 몇 차례 무력 충돌 및 납치, 월북 같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엔 자기 체제가 좋다고 서로 대남· 대북 방송을 귀가 따갑도록 틀어 댄 건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곳은 사실 마치 공항 면세 구역 내지 뉴욕의 UN 본부 같은 치외법권 지대이다. UN군 사령관의 관할에 있으며, 여기 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다른 혜택은 누리는 반면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없다. 여기서 태어난 남자는 군대에 안 가도 된다는 뜻.

냉전 시대엔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이 태극기 깃대와 인공기 깃대를 서로 더 높게 올리려는 병림픽 비슷한 기싸움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엄청 옛날에 어렸을 때 학교에서 사회/도덕 교과서를 통해 이 일화에 대해 알게 됐는데 그게 이 마을 얘기였구나. 결국 이 병림픽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은 남쪽에서 먼저 기권(?)을 하면서 끝이 났던 걸로 기억.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 그림을 한 장 첨부한다. (출처: 위키백과)
38선 시절에 비해 남한이 영토 자체는 훨씬 더 많이 수복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서울 근처의 평지 겸 전략 요충지는 북한이 주도권을 잡았다.
판문점, 자유의 마을 등등이 있는 곳은 지도에서 제3 땅굴 근처, 즉 휴전선의 선형이 90도로 꺾이면서 남하하는 그 모서리이다. 원래 대성동과 기정동 마을은 38선 시절에도 같은 마을이었는데 휴전선 때문에 둘로 찢어진 셈이다.

3.
북한의 애국가는 가사에 다행히 김씨 부자 찬양 내용이 들어있지 않으며, 그냥 평범한 조국 찬가 스타일이다. 하지만 장군님 찬송가가 응당 따로 존재하며, 실제로 공식 석상에서는 애국가보다도 그게 더 많이 불리는 모양이다.
유튜브에서 검색만 해 보면 바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소개하는 건 국가 보안법에 저촉되어 최악의 경우 코렁탕 취식의 사유가 될 수 있으니 하지 않겠다.

이렇게 무조건 금지하고 하지 말라고만 하니까, 딱히 이북이 좋은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냥 제도권에 대한 반발 심리로 친북 성향(?)이 생긴 사람들이 과거에 있기도 하지 않았겠나 싶다. 하지만 본인은 나라의 법을 이해하며, 그에 반발하지는 않는다.

걔네들은 잘 알다시피 컴퓨터로 타자를 할 때도 '김일성', '김정일'은 별도의 코드값에 배당된 문자로 더 진하게 찍으며, 읽을 때는 악센트를 잔뜩 실어서 '키임정일'처럼 읽는다. 그리고 그 이름은 두 줄에 구간이 걸치지 않게 처리된다(word wrap). 문자의 형태로라도 수령님의 거룩하신 존함을 다루는 분위기는, 옛날에 구약 성경 필사 서기관이 사자음어 YHWH 기록할 때 하나님의 존함을 다루던 경건함에 맞먹는다. -_-;;

남한에서는 세계구급으로 성장한 대형 교회 브랜드가 나왔고 세계 최대의 기독교계 이단 종교인 모 종교도 배출되었다. 그러는 동안 이북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주체 사상'.. juche라는 영어 단어를 전세계에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 단군의 후손들은 어째 종교 분야에 한 근성 하는 건 틀림없나 보다. 철도를 종교의 경지로 승화한 나도 그렇고. ㅋㅋㅋㅋㅋ

4.
사실, 내가 이 정도로 북한 문제나 통일 쪽에 관심이 생긴 것도 철도 덕분이다. 국토가 분단되면서 반토막이 난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철도이기 때문이다. 먼저, 경의선 장단 역 근처에 수십 년이 넘게 버려져 있다가 2000년대에 와서야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녹슨 증기 기관차를 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6·25 때 폭격을 당하고 그 여파로 기관차가 탈선하는 바람에 저 지경이 된 거라는 걸 모르는 분은 없겠지. 표면 전체를 통틀어 무려 1천여 발에 가까운 총알을 맞았다고 한다. 그때 저 기관차를 운전했던 분은 신원이 알려졌으며,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경원선 신탄리 역 북쪽 끝자락에 놓여 있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표지도 있다. 분단의 비극을 빼고 한국 철도를 논할 수는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2년 현재 디젤 통근열차 CDC가 다니는 구간은 저 경의선과 경원선밖에 없다. 그런데 KTX 개통 전에 이들 통근열차의 등급 명칭은 잘 알다시피 '통일호'였다. 오늘날은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두 철도 노선에만 통일호의 후예가 다니고 있으니, 이 역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린 시절부터 철도 덕후가 되어서 애국심, 특히 국토 사랑 정신을 마음껏 고취하면 좋겠다. 나는 대학 졸업할 때가 다 돼서야 철도 끝물을 맛보게 된 게 한이다.
학창 시절 때 죽어도 공부하기 싫던 우리나라 현대사와 지리 공부에 요즘만치 물미가 트인 적이 없다. 내가 옛날에 철도 커리큘럼을 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북한 철도 내지 남북 분단 관련 철도사 얘기를 충분히 편성했던가 궁금하다. 부족하면 보강해야지.

... 이 나라의 온 국민이 철덕이 되어 철도님께서 그들 위에 자신의 영을 두시기를 원하노라! ... (민 11:29 패러디)

Posted by 사무엘

2012/05/02 08:22 2012/05/02 08:22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679

3. 피의 메리

1539년에 크고 아름다운 그레이트 성경까지 나온 뒤에야 영국은 확실히 개신교 국가로 탈바꿈하는가 싶었으나, 헨리 8세가 죽은 후 개신교 계열의 에드워드 6세(병으로 요절)와 그 후의 9일천하 레이디 제인 그레이(지못미..;;)가 제대로 권력 승계를 못 하면서 메리 1세가 역사를 다시 뒤로 되돌려 놓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비운의 9일천하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삶이 정말 기구했다. 왕위에 앉을 마음이 없었고 사실은 “너 여왕 됐어”란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졸도를 할 정도였던 여인도 아니고 소녀였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등쌀에 떠밀려 정략 결혼을 하고, 조국의 개신교 노선을 이어 나갈 여왕 자리에까지 여차여차 올랐지만 백성들의 의식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던 모양.

결국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메리 1세는 제인 당사자가 권력욕이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제인의 부모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살려 두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제인더러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는 카드를 제안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결국 20살도 못 된 고등학생 나이에 처형 당했다. 그땐 단두대 같은 것도 없었고, 사형 방식은 그냥 도끼로 목을 치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인 그레이는 라틴· 히브리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똑똑했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외모도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냥 귀족하고만 결혼해서 학자나 교사로 평범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저렇게 정치· 종교적 희생양으로 전락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다만 겨우 고등학생 나이 때도 자기 신앙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시편 51편을 외웠으며, 집행을 앞두고 눈이 가려진 뒤엔 “어, 형틀이 어디 있지?” 하면서 당황하며 자신이 목을 내밀 곳을 손을 더듬어 찾았다고 한다. 이 장면은 주변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더욱 자아냈으며, 이것이 그림으로 남아 전해진다.

이런 사연을 거쳐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잘 알다시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회를 포함해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선왕이 구축해 놓은 영국 내의 종교 개혁 인프라를 모조리 망가뜨렸다. 그래서인지 메리 1세는 초상화를 봐도 좀 표독스러운 모습의 못생긴 여자로 그려져 있고, 특히 이 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는 네로에 필적하는 싸이코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때 화형 당한 크리스천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여 명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숫자만 보면 그래도 1000단위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적은 규모인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공산당 숙청 수준은 아닌 듯. 하지만 메리 여왕이 사람만 죽인 게 아니라 성경까지 죄다 불태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세속 역사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종교 문제를 빼면 메리는 사회·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악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그 분야에까지 막장이었으면 진작에 짤렸겠지;; 또한 메리 역시 여왕에 오르기까지 개인사나 가정사는 불운한 편이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지병으로 인해 자녀 한 명 못 낳고 중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영국에서 갑자기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자, 영국에 있던 종교 개혁 성향의 학자들은 죄다 외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스위스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지금까지 구축된 원어 자료를 집대성하여 더욱 좋은 성경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제네바 성경이다. 예정론과 개신교 교황이라는 오명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비교적 좋지 않은 평판을 갖고 있는 존 칼빈이 그래도 이때는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을 잘 보호해 준 공로를 세웠다.

제네바 성경은 처음으로 66권 전서를 모두 원어에서 번역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리고 무슨 스터디 성경처럼 온갖 난외주가 첨가되어 성경의 각 구절마다 편찬자들이 생각하는 해설과 강해가 성경 본문의 양보다도 많이 들어갔다.

4. 킹 제임스 성경 -- 종교 개혁 성경의 종결자

메리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 시대가 되면서 영국은 다시 개신교 노선으로 돌아갔다. 이 시절에 영국 내부의 종교 대립은 가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좌우 이념 대립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반가톨릭 진영에서는 진짜 반공 교육 수준으로 교황을 험담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아니라 “나는 교황이 싫어요” 급이었으며, 교황이 성경에서 예언된 적그리스도 바로 그놈이라고 대놓고 가르쳤다.

예전에 헨리 8세에 이어 왕위를 잠시 이었던 에드워드 6세 왕은 어릴 때부터 궁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겨우 초등학생 나이인 11살 때 “교황은 레알 마귀 자식이며, 나쁜 놈이요 적그리스도요 가증스러운 독재자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썼을 정도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 승복 어린이 수준이지 않은가? “교황을 죽입시다 교황은 나의 원수”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가톨릭과 앙금이 생길 대로 생긴 게 사실이다. 또, 과거의 역대 교황들이 자신을 예수님 급으로 신성시하면서 “교황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같은 안하무인 개드립을 치는 것을 보면, 어차피 그들은 북한 김 일성· 김 정일이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긴 했다.

제네바 성경은 재야(?)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해 온 좋은 성경이긴 했으나 외국에서 자기네끼리 제작된 사역(私譯)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시절엔 국교회 내부에서 또 그레이트 성경의 개정판 격인 비숍 성경이라는 걸 만들어 썼다. 가톨릭-개신교뿐만이 아니라 같은 영국의 개신교 노선 내부에서도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게 이 시기이다. 가톨릭으로부터의 박해가 없어진 뒤엔 영국 교회가 또 대립과 반목으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후임인 제임스 1세 왕은 청교도와 성공회를 중재하는 차원에서, 이제 다시는 성경을 또 만들 필요가 없게끔 완벽한 성경을 만들기로 승인을 내려 준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이 드디어 1611년에 나왔다. 장과 절 구분, 100% 원어 번역, 청교도와 성공회 모두 OK, 국내 인쇄 등 예전 성경들이 차츰차츰 확보한 좋은 속성을 모조리 물려받았다.

이 책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킹 제임스 이후 영국에서는 먼 훗날, 1881년에 부패한 웨스트코트· 호르트 본문에 기반한 RSV가 나오기 전까지는 또 새로운 성경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역본이 나올 필요가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 구도로 인해, KJV가 번역될 때는 성경 번역 역사상 전무후무한 철저한 검증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이것 덕분에 KJV는 유례가 없는 고품질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위기가 기회로 승화된 셈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종교 개혁을 거꾸러뜨릴 목적으로, 바티칸의 일종의 비밀 결사대인 예수회라는 무지막지한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KJV에 앞서 듀에이 레임스라는 판타지 짝퉁 성경을 만든 바 있으며, 엘리자베스 다음으로 영국에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왕이 즉위하자 용병을 고용하여 화약 폭발로 제임스 1세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기적적으로 사전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세속 역사가들은 인류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휴머니즘을 추구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인의 시각에서는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세상이 암흑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바티칸 교황이 역사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고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는 것에는 본인 역시 세속 역사가의 시각과 100% 일치한다만, 그것이 기독교라고 싸잡아 분류되는 것에는 본인은 동의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 중 영국만이 종교사가 저렇게 특이한지, 왜 영국만 국가 교회가 존재하며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 왔는지? 왜 영어 성경만 여러 계보가 존재해 왔는지? 더 나아가 하필 킹 제임스 성경이 세계에 퍼져 나간 최종 권위 성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KJV 신자라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도 역사를 잘은 모르지만 내 신앙의 정체성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력은 공부해 두려 한다.

오늘날 인도에 불교가 없으며 예루살렘에 기독교가 없는 것처럼, 영국도 이제 성공회의 노선은 천주교 쪽으로 다시 거의 기울었고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 발간 400주년을 맞이한 작년에 반짝 조명 정도나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야만인 바이킹들이나 뛰놀던 섬나라 영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전반적으로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식민지 개척을 할 정도로 강대국이 된 것에 성경과 복음이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3/05 08:28 2012/03/05 08:28
,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650

1. 유럽의 중세 암흑기

천 년이라는 시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장구한 시간이다. 성경에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공의로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한편,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AD 900년대까지 거의 1000년 가까이 존속하여, 도읍인 경주 역시 ‘천년고도’(千年古都)라고 불린다. 본인이 경주 출신이다만, 그 작은 도시가 천년고도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교회사가 시작되었으나 진리의 빛이 꺼졌던 중세 암흑기가 거의 1000년에 가까이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신대륙이 발견되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유럽이 본격적으로 동양을 과학 기술로 압도하기 그 전에! 그 사이 기간에 대해서 나만 아무 정보가 없는 걸까?

그 사이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이라고는 진짜 십자군 전쟁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난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과 잔다르크는 1400년대 사건이니, 중세 중에서는 그나마 나중인 편이고.

그 기간 동안 어느 샌가 교황이 유럽을 모조리 장악했으며 성경은 금서가 되었고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횡행했다. 어떻게 해서 교황이 저런 국제적인 종교 괴물로 등극할 수 있었는지 그 메커니즘을 잘 모르겠다. 교회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대한 지식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아 하긴, 우리나라만 해도 이단 교주들이 얼마나 돈 잘 버는지를 생각해 보면, 교황이 종교 장사로 큰 대박을 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은 했겠다.)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유레카 학습 만화 세계 역사 시리즈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게 아니었다. 제6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오는데, 제8권은 곧바로 메디치 가문이 어떻고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콜럼버스, 루터 따위가 나온다. 시간 차이가 장난이 아닌데 중간에 그야말로 엄청난 skip을 한 것이다. (제7권은 칭기즈 칸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 같은 아시아 편이고 유럽 얘기가 아님.)

더 정확히는 6권의 뒷부분에 ‘중세 유럽’이 특집 형태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짚고 넘어가 있었다. 세심하게 여러 에피소드를 편성하고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넣은 게 아니라, 글과 벽화 소개 위주로 백화사전식으로 “그냥 이런 게 있었다. 끗”이었던 것이다. 중세는 정말 긴 기간이었는데도 이때의 유럽 역사는 이렇다 할 위인이나 큰 변화가 그다지 없었고 사료도 부족하고... 세속 역사가들로부터도 가히 흑역사로 취급받는다는 걸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판타지 게임이나 영화들의 주된 배경이 되기도 하고.. ㄲㄲ

이 글에서는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있었던 일을 영국의 교회사 위주로 요약해 보겠다.
중세에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성경을 읽고 침례를 행하던 크리스천들은 알비겐시스, 왈덴시스처럼 지역이나 모임 리더의 이름을 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숨어 지내던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하기 전부터 이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고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럼 아무 기회도 없이 다 지옥 갔냐”라고 기독교에 트집을 잡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안다. 허나 내가 보기에는, 중세엔 서양도 복음에 대한 접근성이 동양하고 별 차이 없었을 것 같다. 그쪽에서는 어차피 교황이 성경을 다 빼앗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교리로 지옥으로 보내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동양엔 왈덴시스 같은 집단이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종교 재판소도 없지 않았는가? -_-;;; 피장파장이다.

도미니크 구즈만(천주교에서 성 도미니크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라는 수도승이 그런 크리스천들과 교리 논쟁(오늘날로 치면, 종교갤에서의 키배)을 종종 벌였으나, 그들을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가톨릭은 교리도 완전히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그 기원부터가 로마 제국 시절에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순교자들의 피를 부르며 시작되었다고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말로 곱게 회유가 안 되는 반동분자들을 적당히 꼬투리 씌워 조지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만들어 낸 게 종교 재판소의 원조이다. 서기 1223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드디어 정식 공표된 종교 재판은 마녀도 아니고, 이슬람 같은 완전히 다른 이교도도 아니라 전적으로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그들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나머지 목적은 2순위, 3순위일 뿐이다.

2.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성경 번역의 역사

그러다가 존 위클리프라는 영국 사람이 처음으로 14세기에 처음으로 영어 성경이라는 걸 만들었다. 열악한 당대 상황 때문에 비록 본문이 부패한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기반이었지만, 영어 철자법도 아직 정립해 있지 않던 시절에 원어가 아닌 영어 성경이 나온 것만 해도 어디냐. 그 위상이 가히 영국의 개역성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구한말에 나온 한글 개역성경도 부패한 본문 기반 + 맞춤법 비정립 시기! 1881년 RSV 할 때의 그 개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한 덕분에 천주교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았으며, 나중에 죽고 나서 40년 가까이 지나서야 무덤에서 시신이 다시 꺼내어져 목이 잘렸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국어에서 욕설로 쓰이는 육시(戮屍)를 실제로 당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영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오래 된 영국 왕으로 헨리 8세 아니면 기껏해야 7세 정도까지만 기억을 할 것이다. 이 헨리 8세는 원래는 당시 유럽의 여느 군주들이 그랬듯이 막강한 교황의 권세 앞에서 깨갱 하고 있었다. 친가톨릭이었고 딱히 소신 있는 종교 개혁자 성향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부인을 6명이나 둔 호색한이었던 그는 치정 문제로 인해, 더 정확히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리는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의 승인 없이 추진하려다 보니 교황과 결별·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수장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은 이 소식에 당연히 발칵 뒤집혔으며, 헨리 8세에게 험담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는 이 사람을 루터만큼이나 몸서리치게 미워하며 나쁘게 말한다. 비록 헨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똘끼를 선한 방향으로 이끄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국이 천주교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으로 벗어날 징조가 보이던 15~16세기엔 천주교에는 악재, 기독교에는 호재가 연달아 터졌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가 바른 성경 계보인 공인 본문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에는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라는 당대 정세도 기여를 했다.

이때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공인 본문을 기반으로 신약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했다. 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로 책을 값싸게 많이 찍어 보급할 수 있게 된 것도 지금으로 치면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에 필적하는 정보화 혁명이었다.

그리고 영국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등장하여 그 독일어 성경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영어 성경을 만들었다(신약+모세오경+알파. 아직 전서를 만들지는 못함). 바른 원문 계보에서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다.

틴데일은 “누구나 성경을 휴대하고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소 몰고 밭 가는 촌뜨기 아이라도 교황보다 성경을 많이 알게 만들어 놓겠다”라는 도발적인 공언까지 했는데, 이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발상이었고, 그런 열성 때문에 그는 결국은 나중에 순교자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교수형과 화형을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당하면서 죽었으며, 죽기 전에 “주여, 우리나라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크게 외쳤다. 아직 영국은 친가톨릭과 친개신교 노선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었고, 영국의 고위 관료나 성직자 중에는 친가톨릭 성향에 틴데일을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헨리 8세 왕이 틴데일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틴데일의 기도는 그가 죽은 지 6개월 남짓한 시간 만에 응답되어, 헨리 8세는 틴데일의 친구인 마일스 커버데일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국 성공회가 공식 사용할 영어 성경을 만들게 했다. 커버데일은 사역(私譯)이던 틴데일의 번역물을 십분 활용하여 1535년, 커버데일 성경을 만들었다. 왕이 승인하고(公譯) 성경 66권이 모두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존 로저스라는 사람이 매튜라는 가명을 써서 매튜 성경을 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라는 자국내에서 인쇄된 최초의 성경이라 한다. 틴데일과 커버데일 성경은 모두 영어 성경이지만, 각각 독일과 스위스에서 인쇄된 후 영국으로 밀반입되었기 때문이라고. 국가가 떳떳하게 대놓고 성경을 찍을 정도로 개신교 세력이 충분히 크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3/03 08:24 2012/03/03 08:24
,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649

한국 철도의 ‘마지막’ 기록

1. 지하철, 광역전철, 기존선의 개량· 복선화· 고속화 등을 모두 제외하고,
순수하게 비수도권의 지역과 지역을 잇는 간선 철도가 마지막으로 건설된 것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무려 박통 시절, 1973년의 태백선이 마지막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 말의 경전선이라든가, 1963년의 서울 교외선도 일제가 아닌 한국 정부가 만든 철도이긴 한지만.. 이건 도대체 언제적 얘기냐?

고속도로는 경부 고속도로 개통 40주년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얼마나 많이 건설되었던가. 서해안, 중앙, 중부, 영동 등등~ 그에 반해 철도는 공주를 경유하는 철도가 생겼다거나, 포항과 울진이 철도로 연결되었다거나, 대구에서 광주로 가는 철도가 건설되었다거나 하는 소식이 전-_-혀 없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가 계속되었고 2차 세계대전 같은 이변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일본처럼 자동차도 좌측통행을 하게 됐을 것이고, 일본 본토가 그런 것처럼 전국을 촘촘히 연결하는 철도가 잔뜩 건설되었을 것이다. 사철도 엄청 많이 생겼을 것이고. 사실, 선로의 질을 떠나서 철도 노선의 양이 한반도에서 가장 풍부하던 시절은 역설적이게도 일제 강점기이다. 게다가 그때는 남북 분단 같은 게 없었으니, 철도로 중국이나 러시아로도 갈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일제 강점기가 좋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길. 그래도 한국과 일본의 위정자들이 철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식으로 차이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2. 우리나라에 기름으로 달리는 철도 차량이 마지막으로 도입된 것은?

1996~1998년 사이에 도입된 통근형 디젤 동차, 일명 CDC가 마지막이다.
CDC는 구닥다리 비둘기호 객차를 대체할 목적으로 도입되어 과거엔 경의· 경원선과 각종 비전철 지선(군산선, 동해남부선 등)에서 요긴하게 운행되었으나, 지금은 기름값 폭등 + 통일호 폐지 + 전철화 트렌드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됐다. 경의· 경원선의 말단 북쪽 구간을 제외하면 완전히 씨가 말라 있는 상태. 나머지 CDC들은 무궁화호로 개조되었다. 일명 RDC임.

3. 기관차-객차형 열차가 마지막으로 도입된 것은?

2003년에 디자인리미트(현 SLS 중공업)와 현대 로템에서 제조한 신조 무궁화호 객차가 마지막이다.
그 뒤로는 한국 철도계에도 기관차-객차 대신, 전기 동차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더구나 비전철 구간에는 CDC로부터 격상된 RDC 무궁화호도 있으니 추가 객차를 도입할 필요가 더욱 없어져 있는 것도 사실임.

EEC 이래로 대가 끊기는 듯했던 좌석형 전기 동차는 공항 철도 직통 열차를 통해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으며, 다음으로 누리로가 전성기를 열어 놓았다. 통근형 광역전철과 일반열차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경춘선에는 앞으로 2층 좌석형 전동차도 도입될 예정이니 더욱 흥미롭다.

1994년에 마지막으로 도입된 새마을호가 몇 년 뒤에 없어지고, 이렇게 도입된 무궁화호도 모두 퇴역하고 나면 1970~80년대 이래로 대한민국에 존재해 온 새마을-무궁화호 체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될 것이다. 통근형 완행 등급은 운임 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전동차가 대신하고 있으며, 새마을호처럼 내장재가 비정상적으로 너무 호화로운 열차는 이제 필요하지 않으니... 간선 철도에는 고속철 + 로컬 같은 단순한 구도만이 살아남을 듯하다.

그럼, 우리나라 철도의 '최후/마지막 기록'에 속하는 것을 몇 가지 더 살펴보도록 하자.

1. 증기 기관차: 1967년 8월 31일에 서울 역에서 종운식을 함으로써 한국 철도의 현업에서는 완전히 은퇴했다. (관광용으로 일부러 증기 기관차나 그 비슷한 걸 깜짝쇼 차원에서 투입하는 건 제외)

2. 수인선: 우리나라의 최후의 협궤 철도이던 수인선은 원래 인천에서 수원, 여주까지 이어져 있던 게 무려 40년 전인 1972년에 수원까지로 구간이 단축되었으며(수원-여주 폐선크리), 나머지 구간도 점점 역이 폐역하고 열차 운행이 줄더니 1995년 12월 31일을 끝으로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유는 당연히 도로 교통에 밀려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았기 때문.

오늘날까지도 경기도 동남부의 성남, 광주, 이천, 여주 쪽은 이렇다 할 간선 철도가 없는 철도 사각 지대이다. 하지만 수인선이 복선 전철로 다시 건설될 뿐만 아니라, 수원이 아닌 판교에서 시작하여 여주까지 가는 복선 철도도 건설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분당선 이매 역은 무려 2004년에 야탑과 서현 사이에 새로 생긴 역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성남-여주선의 환승역이 될 예정이다. 그리고 판교는 신분당선에다 이 철도와의 환승역이 됨.

3. 비둘기호: 1914년 9월 1일 오후 1시 무렵에, 미국의 모 동물원에 남겨져 있던 최후의 여행비둘기가 번식에 실패하고 죽음으로써 완전히 멸종하고 말았다. 한글이 이례적으로 창제자와 창제 목적· 시기가 알려져 있는 유일한 문자인 것만큼이나, 여행비둘기는 인류 역사상 멸종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가 알려져 있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여행비둘기가 죽었슴다..--;

바로 이런 느낌이랄까? 대한민국의 정선선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는 2000년 11월 14일을 끝으로 운행을 중단하였고, 이로써 당시 최하등급이던 비둘기호라는 열차 자체가 없어졌다. 똑같이 비둘기라는 단어가 있다니, 게다가 그냥 비둘기도 아니고 여행비둘기!! ㅋㅋㅋ 비둘기호가 사라진 날은 공교롭게도 2001년도 수능 시험 바로 전날(2000년 11월 15일)이었다. 그 당시 고등학생 철덕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앞서 언급한 수인선 협궤를 마지막 순간까지 달리던 디젤 동차도 운행 등급은 응당 비둘기호였다.
동물을 철도 이야기에다 이렇게 연결시키다니, 내가 쓴 글에 내가 감탄하고 말았다. 나 천재인가 봐. ㅋㅋㅋㅋㅋㅋ 철덕은 열차의 퇴역에 대해 특정 동물의 멸종을 보는 것만큼이나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는 법이다.

4. 통일호: 비둘기호가 사라진 지 4년이 채 지나기 전에, 통일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KTX 개통과 함께 과거의 구닥다리 객차형 통일호는 모조리 퇴출되었으며, 이와 함께 서울 교외선도 지나친 잉여력을 못 이기고 정규 여객 열차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살아남은 것이라곤 일부 지선에 디젤 동차의 형태로만 명맥을 유지하던 통근열차 뿐.

KTX 개통 하루 전이던 2004년 3월 31일엔 철도계에서 워낙 유명하던 청량리-부전 전역정차 통일호가 종운식을 했는데, 당시 전국 각지에서 철덕들이 모여 이 열차를 타면서 통일호의 퇴역을 아쉬워했었다. 이 날은 가히 성경이 말하는 엄숙한 명절(solemn feast)이 아닐 수 없었다.

경춘선을 달리던 객차형 통일호가 모조리 무궁화호로 승격되는 바람에, 이는 사실상의 열차 운임 인상 효과를 야기하여 승객들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자전거처럼 바퀴로 전기를 생산하고, 정화조도 없이 배설물이 선로 밖으로 곧바로 배출되는 낡아빠진 열차를 21세기에 언제까지나 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불가피한 변화인 것도 있다. 그러다 지금은 경춘선은 무궁화호도 없어지고 온통 전철만 다니고 있으니, 참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1/12/06 08:14 2011/12/06 08:14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609

문헌으로 보는 옛날 열차들의 추억

오늘날 인터넷으로만 컨텐츠가 제공되고 있는 두산 동아의 <두산 세계 대백과 사전>의 전신은, 바로 동아 출판사의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 사전>이다. 무려 1982년에 총 30권 분량으로 나온 책으로, 전체의 가격은 그 시절 물가로 100여 만 원에 달했다! 오리지널의 타이틀에 ‘원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던 이유는, 당연히 그 시절에 올컬러로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이 출판된 건 가히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90년대에 서비스 팩이라고 해야 할까, 보유편이 두 권 추가로 나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 보유편에 서울 지하철 5호선에 대해서 “현재 건설 중이고 개통 예정인 지하철”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집에서 아직까지 이 책을 주기적으로 꺼내 보는 사람은 가족 중에 물론 나밖에 없다. ㅋㅋㅋ 어머니께서 그 옛날에 그 거금을 들여서 본인의 교육을 위해 투자를 하신 셈이다.
지금은 20년이 넘은 책의 표지 껍질이 우수수 떨어지고 종이가 슬슬 누렇게 변하는 중. 종이가 세월이 들어서 누렇게 변하는 건, 아예 불타서 누렇고 검게 변하는 것과 속도만 다를 뿐 화학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산화 현상이라고 하니, 후덜덜하다.

1990년대 초· 중반엔 이 백과사전의 24권의 앞부분만 너덜너덜했다. ㅈ이 시작하는 부분이었고 ‘자동차’ 표제어의 풀이와 자동차 원색 화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본인의 관심사가 컴퓨터, 한국어 등으로 옮겨 갈 때마다 그쪽의 access가 순간적으로 늘곤 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백과사전에서 분량이 가장 많은 표제어는 단연 ‘대한민국’이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모든 요소가 줄줄이 소개돼 있기 때문에.;; )

그러나 지금 자주 보는 부분은 당연히 철도 쪽이다. -_-;; 한국 철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소개하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오오옷!!
DEC와 EEC가 모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철덕이라면 엄청난 감격과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가?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본인의 옛날 글 복습 요망
이 백과사전은 초판이 1982년에 나왔으며 따라서 원고는 거의 1980년 무렵에나 작성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DEC, EEC가 지금으로 치면 마치 누리로만큼이나 갓 도입되었으며, 새마을호 말고 무궁화· 통일호라는 명칭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다.

본인이 옛날에 쓴 이 글에서 언급돼 있듯, DEC는 새마을호였고 EEC는 우등 열차(현재의 무궁화) 컨셉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때는 특대형 기관차가 여객 열차의 시속 150도 달성하기 전이었던지라, 110이 빠른 열차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때 넘사벽급 귀족 열차라던 새마을호의 좌석이 지금의 KTX하고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은지? -_-

뉴욕 지하철 전동차는 영화에서 맨날 보던 모습이니 친근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앞부분이 마치 비행기(전투기)처럼 동그란 건 신칸센만의 전매 특허이고.
우리나라에는 2004년부터 등장한 KTX의 전신이 바로 저 주황색 떼제베 열차이다. 외형이 벌써부터 좀 친숙하다.

물론, 우리나라에 도입된 건 저 정도로 구닥다리 버전은 아니고 1996년도 버전인가 그렇다. 전동기의 출력을 더 키워서 한 편성을 무려 20량 935명 수송으로 만든 건 한국 것만 그렇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으로, 1991년판 기네스북의 국내 기록을 보자.
이제 드디어 시속 150km가 나오고, 새마을호 디젤 동차가 나온다.

하지만 내가 늘 강조하지만, 새마을호 디젤 동차가 최초로 등장한 건 1987년이고, 이 동차가 시속 150km와 서울-부산 4시간 10분을 최초로 달성한 건 아니다. 그 전에 특대형 디젤 기관차가 끄는 유선형 새마을호가 1985년 11월에 이미 시각표 개정을 통해 4시간 10분을 달성했다.

철덕이라면 경부선 열차가 특히 어느 구간에서 전속력인 시속 150km로 달리는지도 알 필요가 있다. 이 블로그를 뒤져 보면 답이 나오니 관심 있는 분은 찾아 보시길.

Posted by 사무엘

2011/10/04 19:11 2011/10/04 19:11
,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579

경인선 구일 역의 역사

수도권 전철 1호선에 있는 구일 역은 구로 역에서 분기한 경인선 철도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역이다.
이 역은 1995년에 개통되어 경인선 2복선화 공사 과정의 복잡한 사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특이한 역이다.
다만, 경인선에는 구일보다도 나중에 생긴 역도 있다. 2001년에 개통한 도화 역이 막내이며, 이게 아마 경인선 최후의 신설역으로 남을 것이다. 경인선은 이제 전구간이 거의 지하철 수준으로 역이 많아져 있기 때문에.

구일 역은 위치부터가 심하게 특이하다. 역이 잘 알다시피 안양천을 건너는 철교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신대방, 구로디지털단지, 대림 3개역이야 도림천을 따라 복개 고가로 건설되어 물위에 역이 있다지만, 강을 수직으로 횡단하면서 그 길목에 역이 있는 경우는 구일 역이 유일하다. 그 위치가 개봉과 구로의 정중앙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2호선의 경우, 아무리 선상역이라고 해도 구일 역처럼 선로 아래로 강물이 출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_-;;)

경인선 자체가 처음부터 복선으로 건설된 철도가 아니고 1965년에야 복선화가 된 만큼, 안양천 철교 역시 단선 교량이 새로 놓이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두 교량 사이에 공간이 넉넉했는지, 구일 역은 처음에 섬식 승강장으로 만들어졌다. 기존 선로에 신설되는 역이 섬식 승강장인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마치 섬식 승강장을 확장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개통 당시에 구일 역의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를 선로, ■를 승강장이라고 생각하라.

인천 방면(서쪽)
..┃■┃..
서울 방면(동쪽)

그런데 이것만 있었느냐? 그렇지 않았다. 구일 역이 생기던 시점에는 이미 경인선의 2복선 선로가 딱 개봉 역 직전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서울-구로는 3복선까지 생겼고 말이다. 즉 실제 선로는

인천 방면(서쪽)
│┃■┃│
서울 방면(동쪽)

로, 양 옆에 또다른 복선 선로가 있었다. 2복선 공사를 왜 해야 했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구로 이북의 경부선 서울 시내 구간은 선로별 복복선이 되어 새로운 전동차 선로가 기존 선로의 최북단에 깔려서 ┃┃││처럼 된 반면, 경인선은 방향별 복복선이 되어 새로운 선로가 남쪽과 북쪽에 하나씩 추가된 것이다.
경부선이 경인선처럼 일관성 있게 방향별 복복선이 되지 못한 이유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선로를 그렇게 추가할 부지가 없어서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더구나 남쪽에는 일반열차 선로까지 이미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로별 복복선이던 선로가 방향별 복복선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한 선로가 다른 선로를 필연적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입체 교차로가 생겼다. 특히 인천 방면 선로는 인접한 경부선 선로를 모두 타넘고 남쪽 끝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고가 위로 붕 떠 있었으며, 이는 안양천을 건너는 구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구일 역의 인천 방면 신규 선로는 다른 세 선로보다 높이가 높다.

경인선의 2복선 신규 선로가 개봉까지만 있던 시절에는 철도청에서 오늘날 경인선 급행 전동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영등포-주안 반복 열차라는 열차를 운행했다. 구일 이북부터는 그냥 다시 기존 복선 선로를 이용해서 달리고 영등포-구일까지만 신선으로 다니는 그런 열차였다. 경인선 완행 전동차의 일부 선로 용량을 빼내서 거기다 투입시켰던 것 같다. 지금은 영등포-광명 셔틀 전동차가 있지만, 그때는 영등포 역이 그런 부류의 전동차의 시종착 취급도 했다는 게 신기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경인선도 그렇고 경부선 구로 이북도 그렇고, 전동차 선로는 지금의 급행 전동차가 다니는 선로가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완행 전동차는 지금의 급행 전동차 선로로 다녔다. 그래서 경인선 전동차는 구일 역에 그대로 정차했으며, 그 반면 바깥쪽 선로를 다니던 '영등포-주안 반복 열차'는 아직 승강장이 없었기 때문에 구일 역을 무정차 통과했다. 구일 역을 통과한다는 점만 빼면 영등포-주안 열차의 정차역은 다른 경인선 전동차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아직은 2복선 구간 자체가 너무 짧았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1999년, 경인선 2복선이 부평까지 개통했다. 이제 철도청은 새로운 전동차의 운행 계통을 기존 완행의 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했다. 영등포-주안 반복 열차를 없애고, 더 북쪽인 용산에서 출발하되 남쪽으로는 주안이 아니라 2복선이 존재하는 부평까지만 가고, 별도의 선로에서 정차역 수도 줄인 열차를 도입했다. 그때 철도청은 이 열차를 '직통열차'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코레일 민영화 후에야 용어가 급행으로 바로잡힌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으니, 바로 이때부터 내선과 외선의 용도가 바뀌었다. 기존 완행은 새로 추가된 외선으로 들어가고, 급행이 기존 내선으로 들어가서 이 관행이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물론, 일반열차가 내선을 쓰고 전동차가 외선을 쓰는 경부선처럼, 경인선도 빠른 열차가 내선을 이용하게 일관성 있게 바꾼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용산에서 먼저 회차하는 급행 전동차를 내선에다 배치함으로써, 청량리와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1호선 풀코스 전동차와의 평면 교차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은 게 어차피 서울 시내 구간은 방향별 복복선도 아니고 선로별 복복선이다. 게다가 노량진부터는 일반열차의 선로가 남쪽에 있다가 북쪽으로 꽈배기굴을 통해 위치를 바꾼다. 경부선 3복선 공사와 관련된 더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까지는 본인은 아직 잘 모르겠으며, 이에 대한 설명이 있는 자료도 아직까지 접하지 못했다.

이렇게 내선과 외선이 교환됨으로써 구일 역 1층의 중앙 섬식 승강장은 완행이 아닌 급행 전동차가 지나가게 되었고, 구일 역은 급행 무정차 통과역이 되었다. 따라서 그 승강장은 잉여로 전락했다.;;
그 대신 외선에 승강장이 설치되어 완행 전동차는 거기에 정차하게 되었다.

■│┃□┃│■

결과적으로 구일 역은 섬식 승강장의 양 옆에 승강장이 하나씩 더 설치됨으로써 쌍상대식 승강장 형태가 되었는데, 특별히 인천 방면 승강장은 위에 따로 단선 승강장처럼 설치된 특이한 형태가 되었다.

이 글이 이해가 잘 안 되시더라도 구글에서 구일 역 승강장 사진을 찾아 보거나, 이 글을 프린트해서 구일 역을 답사해 보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참고로 구일 역은 출입구가 동쪽 서울 방면에 하나만 있다. 그래서 강 건너 부천 방면에서 구일 역을 이용하는 사람은 건너편까지 가서 우회를 좀 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10 08:17 2011/09/10 08:17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567

과거의 철도: 단선 비전철이 다수였다. 그래서 길 좌우로 철도와 관련된 시설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전망 하나는 좋았다.
현대의 철도: 자동차 도로와 경쟁을 해야 하는 마당에 장난하나? 복선 전철은 필수이며, 수요가 없어서 당장은 단선으로 만들더라도 최소한 복선 노반은 깔아 놓고 공사를 한다.

과거의 철도: 기름으로 달리는 차량이 주류였다. 전철은 통근형 전동차가 다니는 수도권이나 아예 영동· 태백선 같은 산악 철도에서나 볼 수 있었다.
현대의 철도: 전기로 달리는 차량이 주류이다. 우리나라에 기름으로 달리는 차가 도입된 건 1990년대 말의 CDC가 마지막인 반면, 전기 차량은...;

과거의 철도: 한 차량만으로 여객과 화물 등 다양한 객차를 끌 수 있고 편성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기관차+객차 형태가 주류였다.
현대의 철도: 가감속력이 뛰어나고, 전후 대칭이어서 기동성이 좋은 동차가 각광받고 있다.

과거의 철도: 나무 침목과 자갈 노반은 철도의 상징이었다.
현대의 철도: 나무는 부패하기 쉬우며 자갈은 부서지고 수시로 갈아 줘야 하기 때문에, 요즘은 처음에 비용이 좀 많이 들더라도 튼튼한 콘크리트 침목+노반으로 물갈이되었다.

과거의 철도: 덜컹덜컹 소리 역시 철도의 상징이었다. 더운 여름엔 쇠가 늘어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레일에 일정 간격으로 이음매를 일부러 만들어 놓는다고 과학 시간에 배운다.
현대의 철도: 장대레일이 필수이다. 쇠가 늘어나더라도, 레일이 휘는 걸 방지하는 특수 장치 덕분에, 긴 장대레일의 양 끝만 늘어나거나 줄어든다고 함.

과거의 철도: 통표 폐색 장치 -_- (정말 옛날) 우리나라에 마지막까지 존재하던 통표 사용 구간이 전라선 어디였다고 하던데.
현대의 철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단위 시간당 취급 가능 열차 throughput을 올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로수만 늘리는 게 아니라 발달된 신호 시스템이 필수이다. (철도는 충돌을 피할 길이 없고 심지어 선로 전환조차도 외부에서 해 줘야만 가능한 1차원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하긴, 운영체제의 스레드 동기화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세마포어(semaphore)를 통표에다 비유한 교수님이 계셨다.

과거의 철도: 건널목이 많았다.
현대의 철도: 무조건 고가+터널. 요즘 새로 건설되는 철도에 건널목이 있는 경우는 없ㅋ다ㅋ.

과거의 철도: 서울 지하철 2호선과 청량리 역의 경우, 플랩식 전광판이 2000년대 말까지 마지막까지 남아 있기도 했지만...
현대의 철도: 최하 스펙이 청색 없는 저해상도 LED이고, 요즘은 다 올컬러 LCD 전광판이 대세.

- 오래 전에 바뀐 것이긴 하다만,
과거의 철도: 열차가 정차 중일 때는 화장실에 갈 수 없었다.
현대의 철도: 그거 도대체 어느 시절 얘기를..? (정화조는 필수)

- 이건 지하철 한정이다만,
과거의 철도: 선로 투신 자살이 가능했다.
현대의 철도: 스크린도어는 무조건 필수!

이렇듯, 기술이 발달하면서 요즘 철도는 어제의 철도가 아니다.
장대 레일과 콘크리트 노반, 고가와 터널처럼 고속철이 한국 철도의 전반적인 스펙을 끌어올린 것도 적지 않거니와
지하철에서나 보편적으로 쓰이던 기술이 일반 철도로 옮겨진 것도 많다. 지하철은 표정속도만 느릴 뿐 상당한 최첨단 기술이 결집된 철도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철도와 현재의 철도의 차이가 이러하다면, 미래의 철도는 과연 어떤 양상으로 변할까?
경직된 기관차+객차 내지 “버스 아니면 지하철” 모델을 탈피하여, 미래의 철도는 더 작아지거나(경전철), 더욱 빨라지는(고속철)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종전의 바퀴식 철도는 고속선에서는 그야말로 바퀴식 철도의 한계인 시속 400km대까지 빨라질 것이고, 아니면 기존선에서 더욱 빨리 달릴 수 있는 틸팅 열차가 도입될 것이다.
그리고 아예 바퀴를 굴리지 않아서 매질과의 마찰이 없는, 자기 부상 열차가 개발될 것이다. 자기 부상 열차야말로 도시형 경전철 아니면 초고속 장거리 고속철의 두 극단적인 양상으로 딱 나뉘어 연구 개발이 한창이다.

본인이 나중에 글로 또 쓰겠지만, 컴퓨터는 과거에 메인프레임-단말기 모델이던 것이 기술이 발달하면서 PC 모델로 바뀌었고, 지금은 다시 클라우드 컴퓨팅이 대세가 되고 있다. 그런 것처럼 육상 교통수단 역시 과거에는 철도가 주류(메인프레임-단말기)이던 것이 지금은 자가용이 대세가 되었고(PC), 그러다 자가용의 비효율성과 위험성으로 인해 앞으로는 다시 중앙 집권화가 잘 된 똑똑한 궤도 교통수단(ㅋㅋ)이 각광받는 날이 도래하는 중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8/30 08:24 2011/08/30 08:24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562

« Previous : 1 :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680144
Today:
105
Yesterday: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