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판문점과 관련하여 안보 지리 역사 이야기를 늘어놓겠다.
다음은 판문점 주변의 구글어스 사진이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므로 별도의 창에다 열어 놓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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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참 대단하긴 하다. 이런 봉인된 장소도 항공 사진을 다 볼 수 있고, 사실 올해(2013) 초부터는 구글어스에 북한, 특히 평양의 세부 지리 정보까지 다 뜨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공동 경비 구역(JSA)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먼 옛날,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와 북한은 서로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고, 분단은 완전히 굳어졌으며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은 극도로 커졌다.

그런데 이렇게 영토가 양분된 상태로는 서로 왕래가 전혀 불가능하다 보니 당장 휴전 협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내부이긴 하나 정치적으로 남한 관할도 북한 관할도 아니고 UN이라는 제3자가 중립적으로 관할하는 지역이 필요해졌으며, 판문점이라는 주막이 있던 지역 일대가 그런 구역으로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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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주변이 이렇게 허허벌판이었지만 훗날 건물 주변에 전부 풀과 나무가 조성된 듯하다. 지금의 구글어스 항공 사진과 몹시 비교된다.

자, 그럼 이제부터 구글어스 사진에서 우측 하단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판문점은 아무래도 흰색+파란색 지붕 형태로 도열해 있는 아담한 회의장 건물 7개이다. 얘들은 남한과 북한 영토에 반반씩 걸쳐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판문점의 주변 시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로부터 남한 쪽에 있는 커다란 건물은 '자유의 집'이라고 불리고, 그로부터 남쪽에 있는 연보라색 지붕의 건물은 '평화의 집'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프레스센터이다.

더 남쪽에 있는 칙칙한 건물은 군용차 형상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병영이다. 판문점 주변엔 온통 병사가 경비하는 초소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렇게 건물들이 있는 곳의 오른쪽을 보면 도로가 아니면서 수풀도 없는 공터가 있는데, 거기는 헬리콥터 이착륙장이다. (본인이 분홍색 글씨로 1번이라고 표시한 곳) 저 옛날 사진에서 헬리콥터가 있는 곳과 동일한 지점일 것이다.

다음으로, 판문점에서 북한 쪽을 살펴보겠다.
회의장 바로 이북에 자리잡은 회색 지붕의 직사각형 건물은 '판문각'이다. 남한의 '자유의 집'에 대응하는 건물이라 하겠다. 그리고 좀 더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밝은 옥색 건물은 '통일각'이다. 나머지 건물들은 역시 병영이나 기자 대기실이다.

공동 경비 구역은 군사 분계선 이남과 이북에 있는 남한과 북한의 비무장 지대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는 말 그대로 남한 및 UN군 초소와 북한군 초소도 뒤섞여 있다.
남양주 종합 촬영소에는 판문점 세트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 항공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재연해 놓은 시설은 회의장과 판문각 정도이다.

영화 <튜브>가 김포 공항 청사 하나를 빌려서 총격전을 촬영했다고 하지만, 판문점 주변은 영화 촬영용으로 도저히 점거할 수 없는 곳이다. 영화는 아무래도 세트장에서 찍는 게 불가피하다.
하지만 진짜 판문점과 세트 판문점은 판문각 주변의 경치가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 사진을 눈썰미있게 보고 나면 주변 사진을 보고 여기가 진짜인지 세트인지를 분간하는 게 가능하다.

여기는 민통선 수준이 아니라 군사 분계선에 바싹 근접한 몹시 중요하고 위험한 곳인 관계로, 국내에서는 VIP 급의 높으신 분이 아니면 개인 방문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30인 이상 45인 이하의 단체 견학만이 가능하며 방문 예정일보다 꽤 오래 전에 신청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갔다 온 사람들의 블로그 후기를 보면, 내부 사진 촬영은 의외로 자유로은 듯.
엄연한 우리나라 영토인데 UN 사령부의 허락을 받으면서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드나들어야 하는 게 비극임은 틀림없다.

이제 판문점의 서쪽으로 가 보자.
두 길이 합류하는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는 자그마한 풀밭이 보일 것이다.
더 서쪽으로는 '사천'이라는 자그마한 개천 위에 놓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북한이다. (분홍색 글씨 4번)
이 다리는 국토 분단 전부터 있었지만 훗날 남한과 북한 국경을 가르는 다리가 되고 말았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어로도 말 그대로 bridge of no return이다.

예전에는 이 다리가 북한 사람들이 판문점으로 오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다리를 통해 6·25 전쟁 말에 포로 송환이 이뤄졌고, 마지막으로는 1968년 푸에블로 호 선원들이 석방될 때 이 다리를 건넜다. 당연히 남으로든 북으로든 한번 다리를 건넌 뒤부터는 반대편 국가로 돌아갈 수 없으니 다리의 이름은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붙여졌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널문다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대형 사건이 터졌다.
이름하여 1976년 8월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지도를 보면, 판문점의 서쪽에 UN사령부 소속의 '제5 관측소'가 있다 (분홍색 글씨 2번). 항공 사진으로는 잘 안 드러나 보이지만 저기는 언덕 위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남한 방면 말단에는 UN사령부 소속의 '제3 초소'가 있다 (분홍색 글씨 3번). 건너편에는 물론 북한 '제4 초소'가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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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UN사 제5 관측소와 UN사 제3 초소 사이의 표시 지점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분홍색 글씨 5번). 그래서 언덕 위의 제5 관측소에서 제3 초소 내지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일대를 감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잖아도 북한은 제3 초소에서 근무하는 UN사 소속 병사들에 대해 납치 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결국 UN사 소속의 미군 장교와 병사, 그리고 여기에 소속된 근로자들이 미루나무를 베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을 더 수월하게 감시하려는 이런 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당시 공동 경비 구역에는 UN군이고 북한군이고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각종 딴지와 협박을 걸면서 작업을 방해했다.

8월 6일에 이미 근로 부대 소속의 근로자와 경호원들이 한번 퇴짜를 맞고 쫓겨난 적이 있었기에, 8월 18일에는 나무의 줄기 대신 가지만 치기로 하고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때 비극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이번에도 작업을 방해하고 딴지를 걸더니, 나중에는 갑자기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려 와서는 작업 책임자이던 군인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JSA 내부엔 소총을 들고 들어오지는 못하니까). 특히 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겁먹은 근로자들이 도망치면서 버린 도끼로 싸이코패스마냥 사람 얼굴을 마구 찍고 난도질했다. 이들은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피투성이가 된 채 끔살당했다.

사실, 이때 북한군은 “무고한 남조선 로동자들은 놔 두고, 미 제국주의 원쑤들에게 집중적으로 본때를 보여 주라”라고 상부로부터 지령도 받은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 부상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고도 북한은 우리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며 이게 다 판문점 일대에 긴장을 조장하려 한 너희들 잘못이라고, 안하무인과 적반하장의 극치의 개념 안드로메다 태도를 보였다.

이에 박 정희 대통령은 그 유명한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아울러 “내 군화와 철모를 당장 가져오라!”라는 말까지도 전해진다.
더구나 선전포고 급의 도발로 인해 젊은 장교를 둘이나 어이없게 잃은 미국은 정말 제대로 빡쳤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휴전 이후 최초로 데프콘(경계 준비 태세) 3이 떨어졌다. 참고로 북한의 위협이 전혀 없는 완전 평시가 5,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레벨은 4이다. 3이 되면 한미 연합 사령부에 작전권이 넘어가고 전군의 휴가· 외출이 통제된다. 우리나라 역사상 데프콘 3이 떨어진 때는 저 때와 19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단 두 번뿐이었다.

그리고 8월 21일.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번연 작전'이 시행되었다.
미국 본토에서 수십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날아와서 한반도 상공을 배회했다. 그리고 바다에는 항공모함까지 와서 북한 해역을 기웃거리면서 무력 시위를 벌였다.

문제의 구역엔 특전사 소속의 수십 명의 무장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JSA 내부에서는 권총 이상의 무기를 휴대해서는 안 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 살상 무기들이 즐비했다. 이들의 엄호를 받으면서 작업이 재개된 끝에, 문제의 미루나무는 가지치기 정도가 아니라 밑동만 남긴 채 완전히 베여 나가고 말았다. 아래의 before - after 사진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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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작전 수행 중에는 경비 레벨이 데프콘 3이던 게 아예 전군에 실탄이 지급되는 데프콘 2로 올라갔다!
아마 인류 역사상 제일 살벌한 나무 베기 작업?작전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 싶다.

이런 무력 시위는 단순한 나무 베기 이상으로 북한을 낚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만약에 북한이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총을 한 발이라도 쏘면서 도발에 응할 경우, 이 미군 병력으로 JSA에서 얼쩡거리던 북한군들을 모조리 섬멸하고 아예 북한 본토를 폭격해서 군사 분계선을 북쪽으로 올려 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미국의 초강수에 결국 북한은 깨갱 했다. 아무리 중국과 소련이 북한과 친하다지만 이 사건에서만큼은 그들도 북한을 편들 수 없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병신 인증을 한 거니 빨랑 미국한테 사과나 해라”였다.
김 일성은 내부적으로 '북풍 1호'를 발령하여 전군을 무장시키고 대비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버로우 타고 무력 시위와 도발에 절대로 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 미국을 달랬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유감을 표명하고 아주 형식적으로나마 사과함으로써 사태를 겨우 수습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JSA 내부에도 군사 분계선 경계가 확실하게 생겼다. 도끼 만행 사건 이전에는 판문점 회의장 안까지 칼같이 남북 금이 그어져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며, 남한 쪽에 속한 JSA에 북한군 초소도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로 금이 그어졌고 그쪽의 북한군 초소는 모두 파괴· 철거되었다. 요컨대, 아래와 같은 사진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결과물이라는 뜻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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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정적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되어 남북 사람들이 오가는 용도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거치지 않고 판문점으로 가는 길을 트기 위해 북쪽에 자기네만 쓰는 다리를 또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흘 만에 뚝딱 건설되었다고 하여 <72시간 다리>라고 불린다. 구글 지도에서 북쪽으로 노란색 음영이 쳐진 길이 경유하는 다리이다.

판문점의 역사에 대해 얘기하면서 도끼 만행 사건은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 되고 말았다.
북한의 잔학· 흉악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건의 이름에다 '도끼'라는 이름이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영어로도 tree cutting incident뿐만 아니라 axe murder incident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밑동만 남았던 그 문제의 미루나무는 나중에 아예 뿌리째 완전히 뽑혀 없어졌다. 언제 그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는 현재 간단한 위령비만이 세워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글어스에도 가로수를 암시하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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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3/10/23 08:29 2013/10/2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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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국회 기도문

대한민국이 기도로 시작한 나라라는 걸 정치적으로 좀 우파 성향인 크리스천이라면 어렴풋이 들어서 알 것이다.
본인은 수 년 전, 우리나라 초대 겸 건국 대통령인 이 승만 박사의 옛 저서 Japan Inside Out의 번역판인 <일본 그 가면의 실체>가 국내에 출간됐을 때, 그 책을 통해서 저 기도문을 처음으로 접했다.

잠시 역사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대한민국의 제1대 국회인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첫 제정한 국회이며 1948년 5월 31일 구성되고 1950년 5월 30일까지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을 구성원으로 한 최초의 국회이다. (한국어 위키백과 설명)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 국회 의사당 건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 광화문 근처의 옛 중앙청 홀--김 영삼 정권 때 헐린 그 튼튼한 건물--에서 국회의원들이 모였다.
국회의원들은 정확히 세 주 전에 열린 5· 10 총선거 때 선출된 사람들이다. 남한만 단독으로 총선거를 해 버려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었다는 우려도 받았으나, 북한은 어차피 그 전에 이미 조선로동당 대회를 자체적으로 치렀으니 통일은 애초에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자, 그래서 1948년 5월 31일 아침 10시경이 되었다.

* 임시 의장 이 승만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 제 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 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 윤영 의원 기도 (일동 기립)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풀어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이겨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 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 기도문은 이 윤영 목사가 원고를 미리 써 와서 읽은 게 아니라는 걸 유의하자.
이 승만 의장이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즉흥으로 요청을 해서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즉, 이건 애드립이다. 텍스트는 속기사가 받아 적어서 만들어졌다.
이런 건 좀 공신력 있는 사이트에 문헌으로 좀 기재되어 있어야 할 텐데 국회 홈페이지나 위키문헌엔 없나?
<날개셋> 타자연습에는 저 글이 연습글로 수록되어 있다.

뭔가, 아폴로 8호 승무원의 창세기 낭독 사건 같은 걸 보는 느낌이지 않은가.
이런 거 읽을 때만큼은 제발 후천년주의니 정교일치니 그딴 삐딱한 시선은 잠시 집어치우고, 일단 감격하고 감사할 줄 좀 알자.
누군 뭐 국가나 정치와 관련된 성경적 입장을 모르는 줄 아나..?

한쪽에서는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 오늘 같은 날을 있게 하신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속히 오기를 축원하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이러면서 나라를 세웠다.

이 국회를 통해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의 첫 헌법이 공표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공휴일에서 빠진 국경일 제헌절이 이 날로 제정된 것이다.

그 반면, 반대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벌인 북조선 로동당 2차 대회(1948년 3월 27일~30일)는 분위기가 아마 어땠을까? -_-;;
그때는 워낙 초창기이기 때문에 북한도 내부에 여러 파당이 있었으며 노골적인 김씨 우상화는 지금보다 덜했었다.
하지만 이미 인간성 말살이 시작되고 반대파 '반동'들을 비판하고 숙청하고, “동무들, 인민 해방을 위한 과업을 어서 완수하시오”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아서 미 제국주의 남조선 원쑤들 다 쓸어버립시다” 이런 권모술수와 추악한 음모가 진행 중이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북한이 태극기 대신 자체적인 인공기를 제정해서 쓴 게 1948년 초쯤부터이고, 애국가도 자기네 애국가를 1947년 하반기부터 채택했으니, 이미 남북 영구 분단 고착은 그 무렵부터 예고된 귀결이었다. 쟤들은 소련의 군사· 경제력을 등에 업고 시민들은 공산주의 지상락원으로 선동하고, 서로 비판하고 감시하고 못 믿게 만들고 팀웍을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권력을 꽉 장악해 갔을 것이다.

난 이걸 생각하면 소름이 확 돋는다.
어디 누가 누굴 보고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더럽게 시작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정체성을 부정하고 앉았는가? 괘씸한 놈들!

난 우리나라가 건국 이래로 예수 믿고 교회 댕기고 예배드리고 심지어 거리설교까지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던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자유는 정말 넘치도록 잘 보장되어 있었고, 극소수 있었던 부조리와 제약은 종북 불순분자 빨갱이들 빼고는 하나도 걸릴 게 없었다는 생각이 변함없다.

이 승만 전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 대통령으로 충분히 예우받고 존경받아야 한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잘못한 것들은 잘한 것에 비하면 정말 사소하고 불가피하고 최소한 악의는 없었던 것들이다. 특히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친일파 드립은 내 눈에 띄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 조직적으로 반박해 줄 것이며,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이 주제만으로 또 블로그에다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정말 양심에,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물어 보고 싶다. 종북 빨갱이들조차 적으로 안 보이고 혁명가 투사로 보일 정도로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그렇게도 엿같고 개판이고 다 갈아엎어야 하고, 국민들에게 해 준 게 없는 나라인가?

Posted by 사무엘

2013/09/29 08:36 2013/09/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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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에 대한 팩트들

1. 옛날에는 6· 25사변, 동란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요즘은 그런 단어를 접하기 힘들다. 그리고 옛날에는 적군을 북한군 대신 괴뢰군, 공산군이라고도 많이 불렀다.

2. 6· 25는 선악 구도가 매우 분명한 전쟁이었다. UN이 창립 이래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한 진영의 편을 들어서 반대편 진영을 군사력으로 퇴치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한 작은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미래에 성경이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 때는 많은 나라들이 똘똘 뭉쳐서 오로지 한 나라를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게 어느 나라인지는 이 자리에서 설명하지 않겠다.

3. 일요일 새벽에 감행된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한민국은 당시 제대로 허를 찔렸다. 모든 것이 열세였고 겨우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허무하게 빼앗겼으며, 정부의 대처도 우왕좌왕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개전 직후에 타이밍이 어긋난 대국민 안내방송과 한강 다리 폭파는 정말 뼈아픈 실책으로 기록되었다.

4. 그러나 다소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나라에서 정말 혹독하게 군 내부의 숙군 작업을 진행하고 빨치산들을 토벌해 둔 것은, 추후에 더 끔찍한 비극을 예방한 매우 다행스러운 선견지명 조치였다. 국군 내부에서조차 빨갱이가 우글거렸다면 얘들은 전쟁 났을 때 맞서 싸우기는커녕 지시를 어기고 적에게 모조리 항복하거나 이적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그런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선, 사상만 올바른 게 확실하다면 친일 경력 군경이라도 적극 채용해서 안 쓸 수가 없었겠다. 내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을 방해하고 원천 봉쇄한 건 북한이며 북한 역시 내부적으로 군경 한 명이 아쉬운 마당에 친일 청산 안 한 건 마찬가지였다.

5. 중공군은 우리나라에 1· 4 후퇴를 안기고 멸공 북진 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해 버린 원흉이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열받고 통탄할 일인데, 우리가 당한 악행에 '비해서' 우리나라 내부에서의 반중 정서는 그만치 크지 않다.
1· 4 후퇴 당시에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강이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꽁꽁 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 앞에 피난민들의 발이 묶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때 이산가족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6. 1951년 3월경에 남한이 서울을 재탈환한 뒤부터 전쟁은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 38선 부근에서 국지전만 진행되었다. 38선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영토 자체는 대한민국이 과거보다 더 많이 수복했다. 그러나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졌고 서해 NLL의 군사 긴장도가 더 높아졌다.
 
7. 흔히 '종북 좌파'라고 불리는 정권 시절에 <독도는 우리 땅>과 <6· 25 노래>가 금지곡이 됐다는 말이 떠돈다. 허나 검색을 해 보면 도대체 무슨 금지 조치를 당해서 언제 다시 풀렸는지가 분명치 않고 출처가 불분명하며, 이건 그냥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마치 “이 승만이 시민들한테는 피난 가지 말라고 속이고는 자기 고의로 혼자 튀었다” 같은 급의 거짓 중상모략이 될 수도 있으니 난 그 점은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

하지만, 가사가 희석되고 변개된 심 재방 작사의 <신 6· 25 노래>는 정서상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그거야말로 개사의 저의를 의심하는 바이다.

오리지널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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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단조로 시작해서 장조로 끝나는 이 노래이다.
갓 태어난 가난한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를 정말 숨 막히고 섬뜩하고 처절한 가사로 표현했다. 6· 25를 직접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가사이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를 불순한 의도로 변개한 놈들이 있다.
가해자의 정체와 전쟁의 근본 원인을 쏙 감춰서 “원수들이 내 조국을 짓밟던 날”을 “국토가 두동강 나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댄 날”로.. 오로지 결과만 부각되어 보이게 바꾼 新 6·25 노래가 만들어져 한때 보급되었었다.

이건 일본이 자기네 전쟁 범죄는 입 싹 씻고 사과도 제대로 안 하고 그저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로 얼버무리기만 하고, 자기들도 원폭 피해자일 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진짜 똑같다.

잘 들어라. 난 분명하고 단호하게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선언한다.
6·25 노래에서 북한의 정체성과 그들의 범죄 행위를 제거하는 것은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를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없애고 동성애를 정죄하는 표현을 희석시키는 식으로 말씀을 변개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난 이런 짓을 조장하는 진영을 매우 싫어한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주의 교리를 믿고 절대적인 선과 악 관념과 내세관을 갖춘 신자라면 종북 좌빨의 영하고는 도저히 같이 상종을 할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3/07/25 19:23 2013/07/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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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총 4개이다. 그리고 이들은 발견 순서대로 1(1974년)부터 4(1990년)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북한이 남침 땅굴을 판 사상적 근거로는 1971년 9월 25일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 폭탄보다 더 효과적이다”라는 김 일성의 교시가 제시되곤 한다. 뭘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비밀 스텔스 폐쇄국가인 북한이 땅 속을 두더지처럼 헤집으면서 한반도에 나이더스 캐널 네트워크를 깔아 놓는다면 무섭긴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보 기관들은 북한이 땅굴 발파 기계를 대량 수입했다는 첩보 하나만으로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종북들의 눈엔 한반도에 땅굴이란 공식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땅굴처럼 생긴 건 다 자연 동굴일 뿐인가 보다. =_=;;
그러나 반대로 '땅굴 덕후' 기질이 있는 안보 연구가들은 우리나라에 이것보다 땅굴이 훨씬 더 많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대외 인지도와 신뢰도는 예수회/프리메이슨 세계 정복설이나 광주 5·18 북한군 개입설 급의 후덜덜한 수준이다.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그냥 흠좀무스럽고 엄청나다는 뜻임.)

그런데, 오늘날 같은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에 '비해서' 남침 땅굴과 관련된 정보는 구글과 네이버를 총동원해도 이상할 정도로 잘 안 찾아진다. 내 느낌으로는 그렇다. 각종 위키나 백과사전에 등재된 설명도 너무 부실하다. 땅굴의 발견 경위, 작전에 참여한 부대의 신상 정보, 발견 과정에서 벌어진 위험 상황 등을 한데 열람하기가 너무 어렵다.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걸까?

단적인 예로, 한국어 위키백과에 '제n땅굴'이라고 땅굴마다 독립된 표제어조차 개설되어 있지 않은 걸 보고 본인은 정말 굉장히 놀랐다. (내가 써 넣을까ㅋㅋㅋ)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6·25 발발일을 기념하여, 평양 시내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4개의 땅굴들의 입구를 찾아 보았다.

1. 제3땅굴(1978): 도라산 역과 도라 전망대보다 살짝 북서쪽으로

앞서 글을 쓴 적이 있듯이 이 땅굴은 서울 및 판문점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위협적인 놈이며 길이도 가장 짧다. 그리고 첩보를 바탕으로 의심 지대을 탐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DMZ 내부의 의심 지대 곳곳에다 구멍을 뚫어서 시추봉을 집어넣고 동향을 살폈는데, 한 시추봉이 지하의 발파 충격으로 인해 튀어오르고 물이 솟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이다.

관광객은 도라산 역, 도라 전망대, 통일촌 일대의 안보 관광의 일환으로 이 땅굴을 방문할 수 있다. 출입구는 승강 전동차를 타고 가거나 그냥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데, 전동차를 타면 요금이 몇천 원 더 비싸진다. 도보 출입구와 전동차 출입구는 서로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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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본인이 직접 갔다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글어스에서 위치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방 한계선(좌측 하단의 선)이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땅굴을 이용하면 군사 분계선의 거의  200m 앞까지 지하로 도달한다고 한다.

2. 제2땅굴(1975): 토교 저수지보다 북동쪽으로 수 km

제1과 제2땅굴은 모두 DMZ를 경비하던 병사가 지표면에서의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신고하여 조기에 발견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창기이다 보니 심도가 이후의 땅굴보다는 얕았던 편. 하지만 2땅굴은 1땅굴에 비해 터널 단면적이 더욱 커지고 대담해져 있었다.

2땅굴이 있는 곳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이다. (우리나라는 DMZ나 민통선 내부도 독립된 행정구역이 할당되어 있다) 이곳은 최근에 경원선 북쪽 끝에 생긴 역의 이름이 '백마고지'일 정도로 6·25 당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결국 우리나라가 수복해 낸 38선 이북 지역이다. 백마고지 역이라든가 38선 시절에 북한이 사용하던 로동당 청사 정도는 그래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월정리 역과 제2 땅굴까지 가는 건 패키지 관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은 본인이 아직 직접 가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땅굴 입구의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토교 저수지'를 먼저 찾은 뒤에 거기서 쭉 올라가 보면, 도로 위에 검은 아스팔트 덧칠이 덕지덕지 되어 있는 이 지역을 찾을 수 있다. 지상 사진은 내가 참조 목적으로 구글링을 통해 임의로 긁어 온 것임. 땅굴 입구 역시 여기 근처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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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땅굴은 탐사와 발견 과정에서 국군 장병의 인명 피해(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비극의 땅굴이기도 하다. 입구에는 희생자 위령탑이 만들어져 있다.

3. 제4땅굴(1990):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이현리

예전의 세 땅굴과는 다소 다른 위치와 시기에 발견되었다. 이로써 강원도 동부도 땅굴 안심 지대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지상의 이상 징후만으로 조기에 발견된 1, 2나, 첩보에 따른 수색에 의해 발견된 3과는 달리, 이 땅굴은 교본대로 평범하게 땅굴 탐사를 하던 중에 산지 아래의 지하 140m의 굉장히 깊은 곳에서 꽤 어렵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땅굴은 발견 당시 남방 한계선 이남으로 이미 1km가 넘게 진행되어 있던 상태였다.

양구군 이현리를 찾은 뒤 북쪽으로 울창한 숲이 있는 곳으로 가 보면 땅굴이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도로 이름도 '땅굴로'이다. 땅굴 근처에는 '남침 분쇄'라고 적힌 기념탑이 세워진 광장이 있다. 이곳 역시 각종 전망대, 전쟁 기념관 같은 연계 관광 상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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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땅굴은 길어서 그런지, 땅굴들 중 유일하게 땅굴 내부를 전동차를 타고 구경할 수 있다. (3땅굴은 출입구의 경사로에만 전동차가 다님) 제3궤조 집전식이라거나 한 건 아니고, 전동차가 자체적으로 배터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운행 후엔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땅굴은 탐사 과정에서 '헌트'라는 이름의 군견이 희생되었다. 화약 냄새를 맡고 지뢰를 찾도록 훈련받은 독일산 셰퍼드였는데, 물에 잠겨 있던 목함 지뢰를 밟고 그만 장렬히 산화했다. 그 대신, 10여 명의 분대원들이 당했을지도 모를 희생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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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하는 짐승이라지만 이것은 너무나 숭고하고 값진 희생이었다. 그래서 헌트에게는 소위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땅굴 입구에 '충견지묘'라고 적힌 무덤과 동상이 세워졌다. 누가 일계급 특진을 한다고 소위가 되지는 않으니, 소위는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군견에게 적절한 계급 포상인 것 같다. (고 한 주호 준위에게 소위 계급이 추서되지는 않았잖아?)

4. 제1땅굴(1974):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포춘리

가장 먼저 발견된 제1땅굴을 가장 나중에 소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건 땅굴들 중 유일하게 입구가 남방 한계선 이북의 DMZ 내부에 있으며,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땅굴인 만큼 얘는 다른 땅굴들보다 훨씬 얕고 작고 소심한 규모이다. 사람이 서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터널 단면적이 작다. 단면이 아랫변이 더 긴 사다리꼴 형태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봐도, 이 땅굴의 주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유일하다. 어느 언론사 기자가 남방 한계선 철책 근처에서 줌을 당겨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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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본인은 저게 아마 제1 땅굴의 입구가 아닌가 추정한다. 지상 사진과 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땅굴 입구의 위쪽 언덕은 나무가 없이 풀만 나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주변에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이 될 만한 인공물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시청으로부터는 직선 거리로 약 60km가량 떨어져 있다.

우측 하단에 있는 경계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그리고 땅굴 근처의 서쪽 상단에 있는 수직선은 군사 분계선은 아니며, 아마 GP 초소를 드나드는 길이지 싶다. GP는 아무래도 북한 땅을 내려다봐야 하는 곳이니, 언덕 위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그저 학교 교과서나 언론 보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들었던 남침 땅굴이 더욱 현실성 있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땅굴들도 다 같은 땅굴이 아니라 제각기 특징과 개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본인이 캡처한 4장의 구글어스 사진들은 모두 같은 배율로 맞춰져 있다. 그리고 지도 화면에 남방 한계선이 같이 찍힌 땅굴은 1과 3 이렇게 둘이다. 1은 입구가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5~600m 정도 떨어져 있고, 3은 그야말로 코앞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땅굴을 의식하여 그 주변으로 우리나라의 군사 시설들이 배치되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땅굴 자체는 우리나라의 군사 시설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 애들이 직접 만든 물건이다. 이 정도로 아주 간접적으로만 위치에 대한 힌트와 항공 사진을 노출하는 건, 설령 이북 간첩들이 본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게 아니며 안보면에서 그리 문제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6/25 08:29 2013/06/2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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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선의 역사

금강산선에 이어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의 산악 철도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즐거운 한국 철도 역사 탐방 -- 태백선 편이다.

태백선은 중앙선(제천)과 영동선(동백산) 사이에 있으며, 우리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열차를 타고 갈 때 거치는 노선이다. 고속철이나 대도시 광역전철이 아니면서 대한민국에 2013년 현재 마지막으로 건설된 지방 대 지방 ‘신규 간선 철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태백선이 없던 시절엔 서울에서 강릉을 갈 때 무려 경상북도 영주까지 내려가서 영동선을 타고 다시 올라가야 했으니, 이는 어마어마한 우회와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태백선은 경부선처럼 처음부터 서울-부산 같은 식으로 전구간이 작정하고 한 번에 확 구상되고 건설된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여러 소규모 철도들이 독립적으로 찔끔찔끔 건설되고 연장되어 왔는데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최종적으로 태백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위키백과의 다음 그림이 태백선의 복잡한 내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철도 동호계에서 유명한 ‘조사부장’이라는 분이 만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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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었다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 치면 마치 멸종한 '모아'(moa)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태백선은 해방 이후에 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다.
생각을 해 보시라. 예전에 한반도에는 탄광과 공장이 거의 다 북부 지방에 몰려 있었는데 그게 이제 전부 북한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남한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자기네 지역에 있는 탄광이라도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업선 철도의 건설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1955년에 처음으로 제천-영월(약 34.1km) 구간이 건설된 것이 영월선으로, 이것이 태백선의 전신 되시겠다. 그 후 이 철도는 연장되어 함백 역까지 이어졌으며 함백선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함백 역에서 동쪽으로 더 연장을 하기가 어려웠다. 지형의 특성상 급커브와 급경사가 불가피했다.
그래서 함백이 아니라 전역인 예미에서 새 선로를 뻗어서 조동, 증산, 정선을 이었으며, 제천에서 정선까지를 통틀어 정선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함백선은 예미에서 함백까지 가는 구선로만을 가리키는 지선이 되었다.

그럼 함백은 막다른 종착역(terminal)으로 전락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가는 선로는 1975년에 추가로 건설되어 함백선에 편입되었다. 단, 저 그림에서 볼 수 있듯, 급경사를 감안하여 동그란 똬리를 그리면서 우회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철도에 등장하는 4개의 똬리굴 중 하나이다. (중앙선에 두 곳, 영동선에 스위치백을 대신하여 건설된 솔안 터널, 그리고 저것)

결국 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길은 곧은 길과 함백을 경유하여 우회하는 길 두 갈래가 존재하게 됐다. 요약하자면 함백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생겼지만, 그 뒤에 함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동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중에 생겼고,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똬리를 틀며 가는 길이 가장 늦게 생겼다.

지선인 함백선과 태백선 본선은 지리적으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혹시 태백선의 부분복선 구간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으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단선이 둘 존재하는 형태일 뿐이다. 양 선로에서 상행과 하행이 모두 오간다.

다만, 똬리굴이 없는 지름길은 우회가 없는 대신, 법적인 설계 한계에 육박할 정도의 급경사를 자랑한다(30퍼밀). 2도가 채 안 되는 오르막도 철도 차량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래서 무거운 화물 열차들은 상· 하행을 막론하고 함백선을 거쳐 가는 편이었다. 여객 열차는 맞은편에서 오는 열차와 원활히 교행하기 위해 함백선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그쪽으로 지나는 열차가 없다고 그런다.

태백선과 함백선의 관계는 이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새로 건설된 예미-조동 지름길 선로(현재의 태백선 본선)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멘(독일어 Rahmen) 식 교량 위에 놓여 있다. 일명 라멘교. 열차가 여기를 지날 때 창 밖으로 아래를 보면 함백선이 응당 내려다 보인다. (이 시점에서 FSM교의 'RAmen!' 구호라든가, 면발과 국물과 김치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라면교가 떠오른다면 지는 거다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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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60년대에 조동-예미 구간이 개량되고 정선선이 건설되고 있던 동안, 증산(현재의 민둥산)에서는 정선뿐만 아니라 고한으로 가는 철도도 건설되었으며, 동쪽에서도 황지(현재의 태백)에서 백산까지 현재의 영동선으로 치면 지선에 해당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두 철도가 동서로 한데 이어져야겠다는 스멜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고한과 황지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선과 영동선을 한데 잇는 철도가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태백선이 완성되었고, 정선선은 함백선과 마찬가지로 태백선의 지선이 되었다. 서울 방면에서 강릉으로 바로 올라가는 용도로 쓰이는 태백삼각선은 함백선의 똬리굴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앙선과 태백선, 영동선 구간은 전철화까지 완료되었다.

하지만 자동차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석탄 산업이 망하면서 이들 산업선의 지위 역시 오늘날 매우 쇠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뭐, 화물 수요가 꾸준히 있고 사북-고한 구간은 강원랜드-_- 때문에 여객 수요가 있으니, 완전히 망한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평창 동계 올림픽에 맞춰서 제천도 아니고 아예 원주에서 분기하는 강원도 행 철도가 복선 전철로 깔끔하게 건설된다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릉에 빨리 갈 수 있게 될 테고, 기존 태백선의 여객 수요는 크게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9 08:40 2013/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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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전기 철도, 금강산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는 금강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다. 경원선 철원 역에서 분기하여 국토의 딱 중부를 동서로 횡단한 뒤 금강산 근처의 내금강 역까지 가는 116.6km 길이의 철도이다. 처음에는 일본 내륙 철도 스타일의 협궤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표준궤로 형태가 변경되어 전구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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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1919년 3월 말에 건설이 논의되어 1924년에 부분 개통하고 1931년이 돼서야 전구간 개통했다. 건설 도중에 현장이 극심한 수해를 입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납품받을 예정이던 열차 부품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금강산선은 한국의 철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역사상 최초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틀어 유일했던 전기 철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존 글들을 뒤져 보면 전철이라는 금강산선의 위상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많이 강조하지만, '유일'이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키는 편인 듯.

전기 기관차는 매연을 뿜지 않으며, 물이나 석탄을 보충할 필요가 없이 전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곧장 공급받아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나아간다. 칙칙폭폭 같은 소리도 안 난다. 열차라고는 증기 기관차밖에 없던 그 시절에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는 디젤 기관차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디젤 기관차가 도입된 때는 6·25 중이던 1951년이다. 금강산선을 달리던 전기 기관차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원천은 인근의 산악 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관차의 차종들을 2000호대부터 8000호대까지 번호를 붙여서 식별하지만, 그때는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는 '데로'라고 불렸다.

전기 규격은 팬터그래프를 이용한 직류 1500V. 그러니 요즘 어지간한 지하철과 동일한 규격이 되겠다. 100km가 넘는 간선이면 교류를 써서 더 고압의 전기를 보내는 게 효율이 더 좋을 법도 해 보이나, 그 당시엔 더 정교한 변압 시설을 갖출 여건이 안 됐던 것 같다.

금강산선은 기업이 영리를 위해 건설한 사철이었으며, 거리당 임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용도는 대도시 통근을 위한 광역전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자원 수송을 위한 산업선도 아니었으며 건설 목적은 다름아닌 여가· 관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웰빙 열차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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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금강산선을 타고 금강산을 구경 가러 일본과 중국에서도 관광객이 왔으며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코스로도 애용되었다. 서울에서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직결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금강산선은 장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차는 하루에 7번 정도 다녔다고.

이게 왜 전철로 건설되었느냐 하면, 노선의 성격상 스위치백까지 있을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을 오르는 산악 철도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힘 좋은 전철을 투입하고도 정차를 가장 적게 하는 최고속 열차로 금강산선 전구간을 편도로 완주하는 데 4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표정 속도는 오늘날의 지하철보다도 살짝 느린 시속 30km대에 불과했다. 복선은 아니고 물론 단선 전철이다.

이렇듯, 금강산선은 우리나라 최초+유일한 전철 겸 관광 컨셉 노선으로서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금강산 종점 부근의 선로를 무려 49km나 뜯어내는 병크를 저질러서 금강산선은 금강산까지 갈 수 없는 노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 시절에는 전구간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6·25까지 터진 뒤부터는.. 그저 묵념.

앞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 금강산선은 전반적인 선형이 오늘날의 군사 분계선과 묘하게 비슷하다. 경원선이나 경의선은 북쪽으로 향하는 종축 노선인 반면, 금강산선은 횡축 노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원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 일부 구간에 존재하는 금강산선의 옛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속한 일부 구간은 북한이 2003년에 금강산 댐을 건설하면서 아예 수몰되기도 했다. 철덕으로서 아쉬움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강원도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방향만 다를지언정 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 지역인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이제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는 그냥 관광버스가 다니지 과연 철도가 다시 건설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금강산선은 재건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금강산선 이후로 대한민국에 전기 철도가 다시 등장한 건 무려 1970년대 초에 태백선과 중앙선이 산악 철도 산업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철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국가의 표준 전철 규격은 60Hz짜리 교류 25000V로 정해졌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알스톰 사의 8000호대 전기 기관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직류 1500V짜리 서울 지하철이 개통하기도 했다.

사실, 중앙선· 태백선 일대는 그 시절부터 만성적인 수송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전구간을 복선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선로 말고도 열차의 소통을 심각하게 저해하던 병목 중 하나가 바로 디젤 기관차의 열악한 출력이었다고 하니, 당시 전철화가 얼마나 시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전기 기관차는 가감속 좋고, 한 기관차에 어마어마한 양의 객차/화차를 연결할 수 있으니, 복선화가 아니라 전철화만으로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환경 이슈 같은 건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한편, 북한은 장거리 간선에 직류 3000V와 평양 지하철에 직류 750V를 쓰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전기 규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철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제3궤조 방식으로 집전한다. 전철화 비율 자체는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더 높았다고 하나, 전기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못해서 말짱 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6 08:39 2013/05/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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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생이라면 페스카마 호 선상 반란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딱 한 달쯤 전인 1996년 8월경에 벌어진 참극이다.

페스카마 호는 원양어선이었다. 어업, 아니 선원 생활이라는 건 정말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저기서 하는 일은 대규모 육체 노동이 그렇듯이 정교한 팀웍이 요구되며, 누구 한 명이 실수하면 큰 영업 손해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원들 조직 내부엔 군대만큼이나 엄한 군기와 규율이 존재해 왔다.

그랬는데, 업무에 미숙하여 폭언과 인격모독--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쓴 표현--을 자주 당하던 조선족 선원들과, 한국인 선장 및 선원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그들은 나중에는, 옛날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현혹되어 기업 무너뜨리려 위장 취업한 붉은 노동자들처럼, 업주가 정황상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면서 태업과 꾀병을 일삼고, 정상적인 조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아무리 구슬리고 타일러도 말이 안 통하니, 선장은 참다못해 조업을 중단하는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인근의 항구에다 그들을 하선시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대로 말이다. 단,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손해들을 걔네들에게 청구하고, 그들을 앞으로 다시는 배를 못 타게 만드는 블랙리스트 낙인까지 업계 전체에다 찍으면서 말이다.

예상 외의 강경한 조치로 인해 돈이고 일자리고 다 잃고 인생이 송두리째 꼬이게 된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7명의 한국인 선원을 한 명씩 꾀어내어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하여 바다에 던지고, 자기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조선족 1명, 그리고 범행을 우연히 목격한 인도네시아 선원 3명까지 추가로 살해했다. 총 11명. 그러나 항해에 필요해서 살려 둔 1등 항해사 한국인 선원이 목숨을 건 기지와 노력을 다한 덕분에 범행은 꼬리가 잡혔다.

선원들을 11명이나 살해하고 배를 탈취한 건, 오늘날의 소말리아 해적들도 차마 못 저지른 매우 극악한 범죄이기에 저 조선족 선원 6명은 전원 사형이 선고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존파가 모조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들을 선량하고 불쌍한 동포라고 적극 변호하여 조직적이고 잔인한 살인극을 우발 범행으로 둔갑시키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고, 그나마 수괴 1명만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된 것조차 그 미만으로 크게 감형시킨 일등공신은 바로..

'독재자의 딸'(?)을 대신하여 지난 18대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뻔했던 유력 대선 후보였다.
덕분에 이때도 피해자는 싹 묻히고, 오히려 살인범 조선족들에게 국민 성금이 가고, 중국 내부에서까지 “한국에서는 중국인이 한국인을 죽여도 무거운 처벌 안 받는구나” 하는 인식이 퍼졌을 정도였다. 훗날 어민을 빙자한 중국 해적들이 한국 공권력을 아주 우습게 여기게 되는 데에도 이 사건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해석하는 건 좀 비약일까?

세상에 조선족 포함 외노자들이 사회적 약자이니 인권 보호하자고 외치는 배부른 사람들치고, 자기 바로 옆집에 외노자가 사는 걸 좋아할 사람이 과연 있을지 양심을 걸고 솔직하게 묻고 싶다. (오 원춘이 어디 출신이더라? ㄲㄲㄲ) 세상에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약자를 가장한 악인을 분간할 방법이 없으니 생기는 것이다. 주한 미군이 여성을 성폭행· 살해한 것하고 외노자가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언론에서는 절대로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피해자 인권은 없고 오로지 불쌍한 척 하는 놈, 가해자 인권만 챙기는 세상을 만드는 데만 열심인 사람이 정권을 잡아서 국정을 계속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면 이 나라는 얼마나 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얼마나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막장으로 치달았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현 대통령이 발언한 취임사에서 언급되었던 상당수의 건전한 문장을 들을 수 없거나 정반대의 논조로 바뀐 채 듣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내 블로그의 옛날 글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본인은 정작 대선 기간 도중에는 정치 발언을 극도로 자제하고 삼가 왔다. 오히려 그땐 <날개셋> 한글 입력기 6.71 작업하느라 바빴다.
겨우 신변잡기· 흠집내기 식의 신문 기사 한두 개를 근거로 특정 후보의 호불호 같은 내 정치관을 표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흥분도 좀 가라앉았을 테니, 빼도 박도 못할 검증된 심성, 팩트를 기반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표출해 보련다. 이번 대선 결과는 정말로 축복이고 다행이며, 우리나라가 국운이 최소한 몇 년은 더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여당이 예쁜 구석이 있어서가 결코 아니라, 야당이 해도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4/27 08:43 2013/04/2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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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철도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철덕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여객 열차의 이름의 변천사이다. 열차의 이름은 그 열차의 차종을 식별하는 동시에 등급을 식별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위상이 조금 모호하다. 철도는 고속버스나 비행기처럼 출발지와 도착지만이 중요한 point-to-point 수송 교통수단이 아니라 중간 정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으며, 정차 빈도에 따라 속도의 편차가 큰 여러 열차 등급이 존재할 수 있다.

1899년에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하고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했을 때는 고유명사라 불릴 열차의 이름 같은 건 딱히 없었다. 그냥 빠르다는 수식어가 붙은 ‘급행열차’라는 용어만이 쓰일 뿐이었다. 프랑스의 떼제베(TGV)가 거창한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아주 빠른 열차’가 전부이듯이 말이다. 증기 기관차로 경인선 제물포-노량진이 1시간 40분 가까이 걸렸고 지금의 서울-부산뻘인 경부선 서대문-초량이 17시간이나 걸렸지만,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속도 혁명이라 불리기 충분했다.

그 해 5월부터는 서울-부산이 14시간대로 단축된 특급 열차가 운행을 시작했지만, 아직 그것만을 식별하는 명칭은 없었다.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원 태우 의사에게서 짱돌을 맞아 얼굴을 크게 다친 게 1905년 11월이니, 그건 바로 이 열차의 탑승 중에 발생한 사건일 것이다. 열차의 표정 속도가 아직 시속 30km를 채 못 넘어서 지하철보다도 느리던 시절이다. (그나마 요즘 지하철은 1km를 채 못 달리고 정차를 반복하면서도 그런 표정 속도를 내는데!) 그러니 그 시절엔 열차 밖에서 돌을 던져서 열차 안의 승객을 맞히는 게 가능했다.

한국 철도에서 최초로 고유명사 이름이 붙은 열차는 1906년 4월 16일부터 경부선을 달리기 시작한 ‘융희호’이다. 이것은 망해 가던 대한제국의 연호에서 따 온 명칭이다. 서대문-초량을 11시간 만에 주파했으니 경부선 개통 직후의 열차 운행 시간인 17시간에 비하면 상당히 빨라진 것이고 사실 KTX 개통 전까지 다니던 청량리-부전 전역정차 통일호보다도 빨랐다 (12시간 반이나 걸리던 1221 열차)! 표정 속도는 30km/h를 드디어 돌파하여 지하철을 따라잡았고, 최고 속도는 60km/h 정도에 진입했다.

융희호의 중간 정차역은 KTX 개통 전에 정차를 좀 많이 하던 경부선 새마을호와 얼추 비슷한 수준(8~9개역?)이었다. 여객 취급뿐만 아니라 물과 석탄 보충을 위한 정차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가감속이 병맛인 증기 기관차로 통일호만치 정차를 많이 했다간 그 속도를 절대로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융희’라는 이름을 반으로 쪼개서 서울 방면 상행은 ‘융호’라고, 부산 방면 하행은 ‘희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는 경인선과 경부선이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단선이고 열차 운행도 몹시 드물었기 때문에 특정 열차에 곧바로 고유한 이름이 붙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엔 물가 대비 열차 운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비쌌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서민들은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지금으로 치면 고속버스나 KTX가 아니라, 비행기 정도는 타는 각오를 하고 열차를 타야 했다. 박리다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지금도 일본은 본토의 열차 운임이 사철 위주이고 비싼 걸로 악명 높은데 그 시스템이 식민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일제가 조선 땅에서 철도를 운영하여 벌어들인 수익은 굉장한 흑자를 냈다고 한다.

융희호가 첫 운행한 건 한강 철교가 완공되고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가는 경의선이 개통한(1906년 4월 3일) 거의 직후였다. 다만, 지금과 같은 서울 역은 없었고 공덕, 서강으로 가는 오늘날의 용산선이 그때의 경의선 본선이었으니 그 길을 통해 열차는 서울 이북의 신의주로 갔다. 융희호는 1908년부터 부산-서울이 아니라 부산-신의주를 몽땅 직통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 그 후 조선이 망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고부터는 열차 이름도 대놓고 하카리(빛), 노조미(소망) 같은 일본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스케일은 더 커져서 부산에서 아예 만주까지 열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일제는 애초에 대륙 침략의 발판을 닦으려고 철도를 놓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1936년 12월 1일부터는 ‘아까스키(여명)’ 호라는 특급 열차가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열차였다.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되기도 전에 그것도 증기 기관차로 서울-부산 무려 6시간 45분을 달성했다는 건 사기에 가깝다. 나중엔 6시간 반으로 더 단축!

일제 강점기 때 이 정도로 인프라가 구축됐으니 그 당시엔 육지에서 철도보다 더 빠른 교통수단은 없었고, 6· 25 때도 대통령과 참모진은 열차를 타고 피난을 갔다. 자동차는 서울을 벗어나면 빠르게 달릴 만한 포장 도로가 없어서 서울-대전이 과장 좀 보태면 8시간씩 걸리는 지경이었다. (사실 지금은 북한이 평양만 벗어나면 이 지경이기도 하고. ㄲㄲ)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인 1946년 5월 27일,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해방자호’라는 이름의 증기 기관차가 경부선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해방호도 아니고 왜 ‘자’가 붙었나 하면 이건 者를 뜻하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Korean Liberator. 이 열차는 고급 컨셉을 표방하지 않았고 일본인 철도 경영자가 물러나서 그런지 서울-부산 운행 시간이 9시간으로 크게 늘었다.

그리고 한국 철도는 이 승만 정권의 말기인 1960년 초가 돼서야 ‘특급 무궁화호’를 통해 옛날 아까스키 호의 표정 속도를 회복하게 되었다. 동력원은 증기가 아닌 디젤이다.

자막: 특급 무궁화호 등장
경부선에 또 하나의 특별 급행열차가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특급열차는 우리 이 대통령 각하께서 '무궁화호'라고 명명해 주셨는데, 2월 21일 아침부터 운행했습니다.
종래의 통일호보다도 30분이나 빠른 무궁화호는 서울-부산간을 6시간 40분에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호’라는 접미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까지 열차의 명명 방식은 배의 명명 방식과 비슷했다. 경부선을 다니는 열차와 호남선을 달리는 열차의 호칭이 달랐다. 이때의 무궁화호는 지금의 무궁화호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경부선 열차였고, 호남선에는 동급의 열차인 삼천리호나 태극호가 달리는 식이었다. 마치 옛날에 타이타닉 호에도 올림픽, 브리타닉 같은 동급의 자매선이 또 있었듯이 말이다.

또한 옛날에 증기 기관차는 오늘날의 디젤이나 전기 기관차와는 달리 외형적인 차륜 배치가 동력비 변환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여객용 기관차와 화물용 기관차의 구분이 더욱 분명했으며 차륜 형태를 식별하는 이름이 존재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미카, 901호, 파시 같은 이름이 바로 그 예이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증기 기관차는 1967년 8월 31일을 끝으로 현역 운행을 완전히 종료한다.

자, 1960년대 이후로는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재건호, 맹호호, 청룡호, 백마호처럼 호가 아니라 ‘부대’를 붙여도 될 것 같은 북한/군대스러운 명칭도 열차에 부여되었는데.. 실제로 박통 시절엔 월남전 참전 부대 이름들이 전부 열차 명칭으로도 의도적으로 쓰였다. 군사 정권 아니랄까봐. 그것 외에도 배에 이름 붙이듯이 열차에도 노선별로 다양한 이름이 난립(?)하기 시작했으니, 상록호, 풍년호, 부흥호까지. 비둘기호와 통일호도 옛날부터 명칭 자체는 존재했다. 단지 이름의 용도 내지 의미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뿐이다.

그러면서 열차의 속도는 특급열차를 위주로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고, 1969년 6월 10일에 등장한 초호화 특급 열차인 관광호가 드디어 서울-부산을 5시간대도 극복한 4시간 50분 주파를 달성했다. 경부 고속도로도 아직 없던 시절에 속도도 속도이거니와, 그 옛날에 객실에 천장 선풍기 대신 에어컨이 달려 있었을 정도면 얼마나 호화로웠을지 상상이 된다. 단지 관광호의 물가 대비 운임은 일본의 신칸센보다도 더 비쌌다는 점 역시 감안하시길. 진짜 돈지랄용이었다.

이 열차는 훗날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한 날부터 ‘새마을호’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이것이 그로부터 30년 뒤에 KTX가 개통할 때까지 대한민국 최고급 열차의 혈통을 이어 나갔다. 서울-대전-대구-부산만 찍는 그 고매한 열차 라인 말이다.

1977년 8월부터는 새마을호를 제외한 모든 열차들은 그냥 등급만으로 우등-특급-보통으로 바뀌게 정리되었다. 일일이 이름을 붙이기에는 열차의 운행 노선과 횟수가 크게 늘어서 이렇게 단순화가 이뤄진 셈이다. 우등열차가 오늘날의 무궁화호의 전신이며, 통일호가 특급이라고 불렸다니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1984년 1월 1일이 돼서야 드디어 새마을-무궁화-통일-비둘기 체계가 정립되어서 열차의 이름은 오로지 등급만을 나타나게 바뀌었다. 새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들은 국민 공모를 통해 뽑은 거라고 하지만, 결국 옛날에 한 번씩 쓰인 적이 있는 명칭들을 재사용한 셈이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새마을호는 잘 알다시피 1985년 11월 16일에 서울-부산 운행 시간이 4시간 10분으로 단축되어 표정 속도가 드디어 100km/h를 돌파하였으며, 이것이 한국 철도 역사상 기존선에서 이뤄진 최후의 표정속도 향상 기록이다. 기관차의 출력 증대를 통해 최대 시속 150km 주행 자체는 관광호 시절부터 가능했지만, 선로/선형 개량과 신호 시스템 개선을 통해서 고속 주행 가능 구간을 늘린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이다.

지금까지 과거 얘기가 길어졌으니 이제 미래 전망을 하고서 글을 맺겠다. 1984년 이래로 거의 30년간 쓰여 온 재래식 ‘-호’ 체계는 오늘날 심하게 문란해지고 의미가 퇴색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지난 2000년 말에 비둘기호가 멸종하였으며, 고속철이 개통하면서 통일호 역시 문서상으로는 사라지고 객차형은 전량 퇴역했다. 통일호 중 통근형 디젤 동차만 통근열차라고 명맥을 잠시 유지했지만, 그나마 얘도 이제 경의선/경원선의 극소수 구간에만 남아 있지 다 멸종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KTX에 밀려 콩라인이 된 새마을호마저도 사망이 임박했다. 2013년 1월에는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가 드디어 전량 퇴역했고 2014년 말을 끝으로 지금의 새마을호는 객차형까지 죄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럼 ‘-호’ 열차는 무궁화호 하나만 남으니 기존 ‘-호’ 체계가 다 붕괴되는 셈이다.

무궁화호도 디젤 동차(NDC)는 진작에 다 퇴역하고 없기 때문에, 무궁화호는 그냥 재래식 기관차 견인형 일반열차를 총칭하는 상징적인 명칭으로만 남을 것이다. 요컨대 오로지 통일호만이 새마을호와 무궁화호와는 달리 객차형이 동차형보다 먼저 없어졌다. 등급이 등급이다 보니까 말이다.

이런 재래식 열차를 대신하여 꿰차고 들어온 것은 KTX부터 시작해 누리로, ITX-청춘 같은 신형 전동차들이다. KTX는 워낙 특별한 물건이고 누리로는 어차피 무궁화호와 거의 같은 위상과 운임 체계를 계승했다지만, ITX 청춘은 새마을호를 꿰차고 들어와서 새로운 등급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다 새마을호의 후속 열차로는 ‘ITX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1974년 이래로 40년을 이어 가는 ‘새마을’의 명줄은 참 길기도 하다!

오늘날 철도계의 높으신 분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명명 전략은, 열차 명칭을 ‘등급-차종’으로 이원화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등급으로는 고속열차를 뜻하는 KTX, 그 다음으로 장거리 특급 간선을 뜻하는 ITX가 있으며, 이보다 낮은 등급에 대한 이름도 정해져야 할 것이다.

다음 차종으로 말할 것 같으면 ‘KTX-산천’이 있으니 재래식 떼제베 열차를 나타내는 ‘KTX-TGV’ 같은 차종명 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경춘선에 ITX-청춘이라는 2층 열차가 다니듯이 기존 경부선이나 호남선에는 ITX-새마을이 다닐 것이고 중앙선에는 틸팅 열차가 다니게 될 수 있다. ‘새마을’이 이제는 등급명이 아니라 차종명으로 쓰이는 셈이다.

그보다 더 아래의 무궁화급라면 ‘누리로’는 등급명이 될지 차종명이 될지 확실치 않으나, 아마 차종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새마을(ITX)급이든 무궁화급이든 재래식 기관차-객차형 열차는 ‘클래식’(?)이나 그에 준하는 차종명이 붙지 않을까 싶다. 선박의 명명 스타일에서 유래되었던 한국 철도의 열차 명명 방식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가 기대된다.

이렇게 열차 이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읊어 보니 참 훈훈하고 기쁘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철도가 희망과 동경, 기쁨과 평안을 주는 존재이기를 본인은 원한다. May the railroad richly bless you!

Posted by 사무엘

2013/04/22 08:33 2013/04/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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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유괴 범죄 생각

* 어느 카테고리에다 넣어야 할지가 굉장히 모호한 글이 돼 버렸다.. -_-

1. 여성이 저지른 아동 유괴 범죄

세상에 수많은 흉악 범죄 중에서도 어린이 납치· 유괴 범죄의 죄질은 가히 톱클래스 급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희망고문과 상처를 안기고 그 후유증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1991년에 개구리 소년뿐만 아니라 이 형호 군 납치· 살해 사건이 유명한 영구미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야기는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용의자는 애를 납치 당일에 애초에 죽여 버렸으면서 그 후에 집요하게 집으로 낚시성 금품 요구 전화를 걸었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이끌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범죄는 꼭 한눈에 보기에도 양아치+싸이코패스 기질이 충만한 젊은 남자만 저지른 게 아니라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다.
1997년, 박 초롱초롱빛나리 양을 공범도 없이 혼자 유괴· 살해한 전 현주는 당시 겨우 20대 후반의 유부녀였고 게다가 임산부였다.

한때 경찰이 용의자가 있다는 단서를 확보한 카페를 급습해서 손님들을 검문했었다. 그러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용의자인 전 씨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임산부지, 아픈 체하지, 이 상황에서 더 조사를 하는 건 100% 공권력 남용으로 여론을 악화시킬 지경이었으니, 이때 용의자를 놓친 것은 절대로 경찰의 무능 탓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프로 범죄자가 아니었기에 범행에 여러 허점을 드러내면서 잡히긴 했다. 범행 동기는 간단히 요약하면 그냥 거짓말+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돈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납치한 애가 울고불고 하면서 자기가 통제를 못 할 지경이 돼 가자 살해하게 된 것.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의 인생도 완전히 끝났다. 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복역 중이다. 남편으로부터는 당연히 이혼 당하고, 배 속에 있던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겼다.

이 사건 이후, 아이 이름을 너무 튀거나 특이하게 짓는 관행마저 사라졌을 정도라고 한다.
마치 지존파 일당이 검거된 이후 그랜저의 판매량이 잠시 감소한 것과 비슷한 맥락..;; (그랜저급 이상을 굴리는 부유층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랬으니)

2. 곽 재은 양 유괴· 살해 사건

그런데 박 나리 양 사건은 1990년 6월에 벌어진 곽 재은 양 유괴· 살해 사건과 거의 똑같은 판박이였다. 가해자 홍 순영은 스펙과 직장을 거짓으로 위조해서 대학생 신세를 하고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던 20대 아가씨였다. 그랬는데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게 생기고 결혼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자, 이 상황을 돈으로 무마하려고 우연히 이름을 알게 된 어느 유치원생을 꾀어 냈다. 부모를 사칭하면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애부터 먼저 밖에 내보내 달라고 말이다.

그랬는데 공범도 없이 혼자서 애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울면서 자기를 집에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자 가해자에게도 뭔가 마가 씌였다. 그녀는 아무도 없던 숙명여대 모 건물 안에서 결국 아이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죽이기 전에 먼저 물어 본 연락처) 금품을 요구하였으나, 은행에서 그 돈을 인출하는 모습이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결국 잡혔다.

애당초 프로 범죄자들이 하는 것처럼 경찰의 추적을 피하면서 현금만을 교묘히 전달받는 꼼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대놓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은행 거래를 할 정도로 홍 순영은 범행 수법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에 잡히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는 듯했고, 이제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자살을 생각했다. 지하철역에서 공범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서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지하철역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기관사가 필사적으로 열차를 세운 덕분에 머리를 약간 다치기만 하고 목숨을 건졌다. 이때 그녀가 죽어 버렸다면 아이의 시체도 못 찾게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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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정아처럼 횡설수설과 거짓말을 거듭하던 전 현주와는 달리, 홍 순영의 최후는 더욱 비참했다.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멘붕과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교도소에서도, 재판 받으면서도 그냥 울부짖으면서 자기를 제발 사형시켜 달라는 말밖에 안 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종교인 성직자를 통한 교화 같은 것도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때는 그렇잖아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던 노 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그녀의 원대로 결국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그녀는 이듬해인 1991년 말에 겨우 24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언도, 장기 기증도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개를 저으며 울기만 하면서 정말 고통스럽고 처절하고 허무하게 최후를 마쳤다.

본인은 인간으로서 그녀의 혼에(도)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거짓과 허영으로 가득찬 채 빗나간 탐욕을 채우려고 한 어린이의 생명을 빼앗고, 다른 단란하던 가정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인생을 동정할 생각은 절대 없다. 사형은 성경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정말 정당한 인과응보이긴 했다. 성경에도 있잖은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이다(약 1:15).

그러나 죄책감에 짓눌린 채 후회만 하는 건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고 구원을 이루지도 못한다.
저건 그냥 가룟 유다가 죽듯이 죽은 거다. 이판사판 다 끝났고 부끄러워서 세상 사람들 볼 낯이 없고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여건이 됐으니, 이제 살 이유가 없어서 죽겠다는 심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서는, 그럼 하나님은 무슨 낯으로 보려고?

영적으로 좀 날카롭게 진단하자면, 내가 보기에 홍 순영은 애를 유괴하고 살해할 때뿐만 아니라, 나중에 멘붕 상태에서 징징거리는 것도 줄곧 '마'에 씌인 상태에 가까웠다. 자유가 있을 때는 마음껏 나쁜짓을 하게 하다가, 그 자유를 빼앗기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됐을 때는 주체 못 할 죄책감으로 사람을 재기의 여지 없이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아니면 죄책감을 아예 안 느끼는 진짜 인면수심 마인으로 바꾸거나.)

둘 다 이성이 마비된 상태인 건 비슷하다. 난 그녀의 “그 상태”가 참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것이다. 뭐,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이 어떻고, 가해자도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네 하는 개 풀 뜯어먹는 차원이 아니다. 아시겠는가?
오히려, 홍 순영 같은 일부 '서툴고 여린' 범죄자를 빌미로, 무슨 현행 사법 시스템이 너무 잔인하고 비인권적이네 하면서 사형 제도를 없애네 뭐네 하는 개드립이 일게 하는 건 마귀의 또 다른 역사이다. 이게 오늘날 영적 전투의 실상인 것이다.

민감한 얘기가 또 길어졌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런 사건을 겪은 나라들은 어린이를 상대로 실시하는 안전 교육 매뉴얼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전혀 양아치처럼 생기지 않았고 험상궂은 아저씨도 전혀 아닌 여성조차도 얼마든지 어린이를 유괴· 살해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3. 사형 집행의 부활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김 영삼 정권의 말기인 1997년 12월 30일에,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최후의 대규모 사형이 집행되었다. 다음 대통령에게 부담을 안 주기 위해 일부러 집행한 건데 아주 잘한 결정이다.

단, 남아 있던 사형수들을 다 죽인 건 아니고, 자기 정권 전부터 남아 있던 20여 명의 사형수들만 죽였다. 세상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1991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칼부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승용차를 질주해서 어린이 2명을 죽게 한 김 용제도 이때 죽은 사형수 중 하나이다.

그리고 김 영삼 정권 시절에 잡힌 지존파 멤버들은 워낙 죄질이 나빠서 그 전에 이미 다 사형이 집행되어 죽었다. 오로지 살인을 목적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전문적인 폭력 조직을 결성한 것은 세계의 범죄 역사를 통틀어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중국이 아편 전쟁 때문에 마약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듯, 한국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북한이라든가.. 북한이라든가..).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면 사실 조폭을 결성한 것만으로도 우두머리는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 시절 이후로 우리나라는 한 번도 사형이 집행되지 못하고 사법 정의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에 반해 전툴루, 전땅크 시절은 비록 다른 흑역사도 많았을지언정 사법 정의에 관한 한은 천국이었다.

약간 인민재판 같은 사례이긴 하지만,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의 경우 아직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 확실히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자기 직위를 걸고 항소심을 묵살시켰으며, 재판부에다 압력을 넣어 1~3심에서 모두 피의자에게 사형을 때려서 확인사살을 해 버렸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사전에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는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빨랑 자수해라.)”라고 진짜 전땅크스러운 대국민 담화를 대통령이 친히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약속을 이렇게 지켰다. -_-;;;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의 경고를 씹었다는 괘씸죄 때문에 어차피 사형이 떨어졌다. 마치 군인의 탈영이 나중엔 탈영 자체의 공소시효는 소멸하더라도, 복귀 명령 불복종죄 때문에 처벌 대상이 되듯이 말이다.
피해자 유가족은 이것 덕분에 그나마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으며 전툴루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되었을까? 이게 1983년의 일이다.

그 5공 시절에는 흔히 생각하듯 정치범이나 사상범도 아니고, 심지어 살인을 전혀 저지르지 않은 0 kill 상태에서도 사형이 떨어져서 집행된 적이 있었다.
가정집을 털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산부· 여대생을 강간해 온 3인조 강도 상습범(황 인규, 최 윤성, 최 성훈)은 비록 살인 혐의는 없으나 10수 차례나 저지른 강도· 강간의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는 법무부의 코멘트와 함께 1985년 11월, 얄짤없이 사형을 당했다. 이 판결에 대해 잘못됐다고 이의가 제기된 경우는 지금까지 전혀 없다.

이렇듯, 군사정권 시절에 벌어진 일이 다 나쁘기만 했다는 건 큰 편견이며 오산이다.
내가 광주의 학살자(?.. 뭐 이 표현 자체에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를 옹호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만큼 반대편 성향의 위정자들도 만만찮게 병크를 저지른 게 많으며, 세상 한켠에는 당신과 반대의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도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정말로 저출산을 걱정하신다면,
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애를 낳아서 키우는 부모의 권리를 정말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미래를 인질로 잡고 장난치고 짓밟고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에게 생명은 생명으로 일벌백계를 내려 주길 간절히 바란다.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세상 정부는 무슨 구원이나 내세· 영생을 논하는 조직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시민들 생명을 지키고, 질서과 치안을 문란케 한 자에 대한 공공의 보복을 집행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전땅크를 비판하고 욕하고 싶으면 이런 기초적인 거 하나라도 전땅크보다 잘해 달란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4/05 08:32 2013/04/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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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1906-1990).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군 장성이다. 군사, 세계사, 현대 전쟁사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름을 들어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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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 정말 골때리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군인 타입으로, 닥치고 폭격기 화력 덕후였으며 그의 주특기는 쑥밭 만들기였다.
하긴, 그 당시 미국은 워낙 물자가 풍족하게 넘쳐나는 부자 나라였으니 그의 전투 이념은 나름 적절했다.

게다가 그는 '석기 시대'를 굉장히 좋아한 매니아였다. ㅋㅋㅋㅋㅋ
미국 앞에서 깝치는 적국들은 본진을 폭격으로 다 쑥밭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조리 '죽탕치는(?)' 것도 아니고,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으름장을 공석에서 입버릇처럼 뇌까렸다. 영어로는 Stone Age.
호전적이고 입이 험악한 걸로 악명 높은 북한도 공식 석상에서 석기 시대 공갈을 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르메이 장군에 대해서 이런 패러디짤이 나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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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휘 하에 일본 도쿄는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그 이름도 유명한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미군 폭격기가 우박처럼 떨어뜨리는 소이탄에 시내 전체가 말 그대로 시뻘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서 보듯, 목조 건물은 형체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없어졌고, 일부 석조/콘크리트 건물도 새까맣게 탄 흉측한 몰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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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10만여 명에 달해서 사실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보다도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도쿄를 그런 석기 시대로 되돌리는 데는 겨우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원폭을 성층권 고도에서 투하하는 식이 아니라 상당한 저공에서 위험한 자세로 소이탄을 떨어뜨리다 보니, 미군도 폭격기가 총 12기나 일본의 대공포로부터 반격을 받아 격추되고, 42기는 피탄 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이에 몇몇 미군 파일럿들은 권총을 들고 르메이를 직접 찾아가서 이렇게 따졌다.

“왜 이런 무모한 저공 비행 폭격 명령을 내렸는가? 귀관 때문에 우리가 전우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아는가?”

하지만 르메이는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제군들은 단 하루 만에 일본 제국의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고 놈들을 최소 10만 명이나 없앴다! (사실, 미군 전사자는 많아 봤자 수십~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다. 이런 식으로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 1주일 동안 일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모두들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도록!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작전 자체는 르메이의 말대로 미군의 승리이긴 하지만... 저건 좀.. ^^;; 정말 그의 머리에 든 건 오로지 폭격밖에 없었다.
일본이 원폭을 맞고 나서 일찌감치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르메이가 생각한 작전들이 모두 시행되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진짜로 지도에서 없어지고 일본 열도는 석기 시대로 퇴화했을지도 모른다.

이 양반의 무자비한 작전은 훗날 6·25 때도 계속되었다. 북한 중에서도 평양 시내는 그야말로 형체가 남은 건물이 손에 꼽을 정도였을 정도로 그냥 말 그대로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오로지 미국이니까 가능한 돈지랄로 폭탄을 그냥 때려 박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북한의 내부에서는, 평양을 재건할 게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수도를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도 오갔다고 한다. 비록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습과 폭격의 악몽 때문에 지금 평양 시내는 이에 대비하느라 지하 방공망이 굉장히 깊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평양 지하철이 무지막지하게 깊게 건설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 뒤에도 르메이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월남전 땐 베트남도, 그리고 쿠바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베트남이건 쿠바건 다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 대통령 각하는 명령만 내려 달라”는 식으로 일관되게 나섰다.
마치 게임 해설자 김 태형 씨가 캐리어를 좋아하듯 그는 석기 시대가 자기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의 정치인들도 그의 말투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걸프전 때 이라크를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고 공갈을 쳤고, 나중에 9· 11이 터졌을 때는 파키스탄을 상대로도 대테러전에 협조하지 않으면 너네 나라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그랬다. 뭐, 반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협박 멘트에 심기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르메이 같은 사람도 미군에 있는데 맥아더 장군은 차라리 양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맥아더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군인이라지만 그도 인간이고 신은 아니기에, 맨날 인천 상륙 작전 같은 성공만 한 게 아니며 실수도 저질렀다. 처음엔 북한과 중공군을 얕잡아보다가 1· 4 후퇴를 당하고 호되게 데인 뒤에야, “이 자식들 안 되겠어.”라고 하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경책을 쓰려 했다.

어떻게든 빨갱이들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린다거나, 전쟁을 아예 3차 세계 대전 급의 대규모 장기전으로 키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식이었으니... 이런 강경한 생각이 화근이 되어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진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르메이도 그 당시 “이 좋은 핵무기를 왜 안 써?” 급의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맥아더보다 더하면 더한 꼴통이지 못하지는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이런 호전적인 군 장성 양반들의 근성을 이성적으로 잘 통제하지 않았다면, 과거에 소련과의 냉전이 냉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한반도가 아니어도 어디에서 핵이 한두 발 터지는 바람에 특정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거나 진짜 석기 시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도 “3차 세계 대전 때 인간이 무슨 신무기를 쓰고 있을지는 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때 인간은 새총(slingshot) 같은 냉병기를 쓰고 있겠죠?”라고 얘기했겠는가. 성문 종합 영어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지문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영락없이 석기 시대 회귀-_-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석기 시대 드립 말고 르메이 장군이 자신의 호전성을 또 드러낸 유명한 어록으로는 “세상에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이다.
사실, 도쿄 대공습 같은 경우 미국이 연합국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지, 저렇게 대놓고 시내를 폭격하여 비전투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건 전쟁 범죄로 간주될 수 있는 짓이었다.
대놓고 말해, 나치 독일이 영국이나 미국의 본토 도심지를 소이탄 폭격으로 다 불태워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면 그 후폭풍이 어찌 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메이는 작전을 강행했다.

일례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에 참여했던 폴 티베트 대령은 훗날 다음과 같은 요지로 회고한 바 있다.
“난 그 당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원폭은 전쟁을 더 일찍 종결시키고 더 많은 인명의 희생을 막은 차선이며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인으로서 나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는 없다.”

허나, 르메이는 한 술 더 떠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 아예 그 정도의 책임이나 죄책감마저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
“사실 저 밑에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고해 보인다고 저 민간인들을 안 죽이면, 그게 다 우리를 죽이는 병력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마음껏 폭격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워 버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르메이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시 구조가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 업체 영역의 구분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 어록으로는 이 외에도
“전쟁이란 총알 많은 쪽이 많이 죽이면 이기는 것이다.”
“충분히 많이 죽이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처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우악스럽고 꼴통 같은 방면으로 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아무려면 어때, 천조국 미국 소속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최소한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고, 그러다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같은 이런 진짜 미친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저건 잘 알다시피 '무다구치 렌야'라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군이 남긴 훈시.. -_-
그도 그럴 것이 물량이 풍족한 곳에서 그냥 물량으로 밀면 된다는 교리가, 없는 여건 속에서 닥치고 근성과 정신력만으로 돌격하라는 교리보다는 훨씬 나은 게 자명하지 않은가?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했으면 무한 맵에서 저그 가디언 굴리는 걸 좋아했을 것 같다. (대공 유닛으로 대지상 폭격 -_-)

뭐, 르메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미워할 구석이 없는 인물이다.
우방국의 장군답게 일본, 북한 등 대한민국의 적들하고만 싸웠으니 말이다.
(아 하긴, 무다구치 렌야도 자기 군대를 말아먹은 행적이 가히 대한 독립 유공자 급이니, 우리가 딱히 미워할 구석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고.. -_-;;;)

그는 그런 호전적인 기질답지 않게 미군의 전술 체계 수립에 큰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심지어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도 훗날 자위대의 재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괜히 장성까지 진급한 게 아니다.

다만, 그 막강한 화력으로 미국이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깔끔한 '전쟁 승리'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 때는 재일 동포도 많이 희생된 게 사실이다. 비록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
이 사람의 상징은 잘 알다시피 '석기 시대'이다. 허나 아담 이래로 6천 년 인류 역사를 믿는 크리스천은 인류에게 딱히 석기 시대라 불릴 만한 긴 원시 시대가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로의 퇴보를 언급하려 한다면, 차라리 노아의 홍수 직후 상태로 되돌리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될 텐데.. 아무래도 '석기 시대'보다는 우악스러움이 덜하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3/07 19:26 2013/03/0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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