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유괴 범죄 생각

* 어느 카테고리에다 넣어야 할지가 굉장히 모호한 글이 돼 버렸다.. -_-

1. 여성이 저지른 아동 유괴 범죄

세상에 수많은 흉악 범죄 중에서도 어린이 납치· 유괴 범죄의 죄질은 가히 톱클래스 급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희망고문과 상처를 안기고 그 후유증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1991년에 개구리 소년뿐만 아니라 이 형호 군 납치· 살해 사건이 유명한 영구미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야기는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용의자는 애를 납치 당일에 애초에 죽여 버렸으면서 그 후에 집요하게 집으로 낚시성 금품 요구 전화를 걸었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이끌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범죄는 꼭 한눈에 보기에도 양아치+싸이코패스 기질이 충만한 젊은 남자만 저지른 게 아니라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다.
1997년, 박 초롱초롱빛나리 양을 공범도 없이 혼자 유괴· 살해한 전 현주는 당시 겨우 20대 후반의 유부녀였고 게다가 임산부였다.

한때 경찰이 용의자가 있다는 단서를 확보한 카페를 급습해서 손님들을 검문했었다. 그러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용의자인 전 씨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임산부지, 아픈 체하지, 이 상황에서 더 조사를 하는 건 100% 공권력 남용으로 여론을 악화시킬 지경이었으니, 이때 용의자를 놓친 것은 절대로 경찰의 무능 탓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프로 범죄자가 아니었기에 범행에 여러 허점을 드러내면서 잡히긴 했다. 범행 동기는 간단히 요약하면 그냥 거짓말+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돈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납치한 애가 울고불고 하면서 자기가 통제를 못 할 지경이 돼 가자 살해하게 된 것.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의 인생도 완전히 끝났다. 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복역 중이다. 남편으로부터는 당연히 이혼 당하고, 배 속에 있던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겼다.

이 사건 이후, 아이 이름을 너무 튀거나 특이하게 짓는 관행마저 사라졌을 정도라고 한다.
마치 지존파 일당이 검거된 이후 그랜저의 판매량이 잠시 감소한 것과 비슷한 맥락..;; (그랜저급 이상을 굴리는 부유층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랬으니)

2. 곽 재은 양 유괴· 살해 사건

그런데 박 나리 양 사건은 1990년 6월에 벌어진 곽 재은 양 유괴· 살해 사건과 거의 똑같은 판박이였다. 가해자 홍 순영은 스펙과 직장을 거짓으로 위조해서 대학생 신세를 하고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던 20대 아가씨였다. 그랬는데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게 생기고 결혼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자, 이 상황을 돈으로 무마하려고 우연히 이름을 알게 된 어느 유치원생을 꾀어 냈다. 부모를 사칭하면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애부터 먼저 밖에 내보내 달라고 말이다.

그랬는데 공범도 없이 혼자서 애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울면서 자기를 집에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자 가해자에게도 뭔가 마가 씌였다. 그녀는 아무도 없던 숙명여대 모 건물 안에서 결국 아이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죽이기 전에 먼저 물어 본 연락처) 금품을 요구하였으나, 은행에서 그 돈을 인출하는 모습이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결국 잡혔다.

애당초 프로 범죄자들이 하는 것처럼 경찰의 추적을 피하면서 현금만을 교묘히 전달받는 꼼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대놓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은행 거래를 할 정도로 홍 순영은 범행 수법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에 잡히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는 듯했고, 이제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자살을 생각했다. 지하철역에서 공범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서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지하철역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기관사가 필사적으로 열차를 세운 덕분에 머리를 약간 다치기만 하고 목숨을 건졌다. 이때 그녀가 죽어 버렸다면 아이의 시체도 못 찾게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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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정아처럼 횡설수설과 거짓말을 거듭하던 전 현주와는 달리, 홍 순영의 최후는 더욱 비참했다.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멘붕과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교도소에서도, 재판 받으면서도 그냥 울부짖으면서 자기를 제발 사형시켜 달라는 말밖에 안 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종교인 성직자를 통한 교화 같은 것도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때는 그렇잖아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던 노 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그녀의 원대로 결국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그녀는 이듬해인 1991년 말에 겨우 24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언도, 장기 기증도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개를 저으며 울기만 하면서 정말 고통스럽고 처절하고 허무하게 최후를 마쳤다.

본인은 인간으로서 그녀의 혼에(도)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거짓과 허영으로 가득찬 채 빗나간 탐욕을 채우려고 한 어린이의 생명을 빼앗고, 다른 단란하던 가정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인생을 동정할 생각은 절대 없다. 사형은 성경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정말 정당한 인과응보이긴 했다. 성경에도 있잖은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이다(약 1:15).

그러나 죄책감에 짓눌린 채 후회만 하는 건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고 구원을 이루지도 못한다.
저건 그냥 가룟 유다가 죽듯이 죽은 거다. 이판사판 다 끝났고 부끄러워서 세상 사람들 볼 낯이 없고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여건이 됐으니, 이제 살 이유가 없어서 죽겠다는 심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서는, 그럼 하나님은 무슨 낯으로 보려고?

영적으로 좀 날카롭게 진단하자면, 내가 보기에 홍 순영은 애를 유괴하고 살해할 때뿐만 아니라, 나중에 멘붕 상태에서 징징거리는 것도 줄곧 '마'에 씌인 상태에 가까웠다. 자유가 있을 때는 마음껏 나쁜짓을 하게 하다가, 그 자유를 빼앗기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됐을 때는 주체 못 할 죄책감으로 사람을 재기의 여지 없이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아니면 죄책감을 아예 안 느끼는 진짜 인면수심 마인으로 바꾸거나.)

둘 다 이성이 마비된 상태인 건 비슷하다. 난 그녀의 “그 상태”가 참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것이다. 뭐,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이 어떻고, 가해자도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네 하는 개 풀 뜯어먹는 차원이 아니다. 아시겠는가?
오히려, 홍 순영 같은 일부 '서툴고 여린' 범죄자를 빌미로, 무슨 현행 사법 시스템이 너무 잔인하고 비인권적이네 하면서 사형 제도를 없애네 뭐네 하는 개드립이 일게 하는 건 마귀의 또 다른 역사이다. 이게 오늘날 영적 전투의 실상인 것이다.

민감한 얘기가 또 길어졌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런 사건을 겪은 나라들은 어린이를 상대로 실시하는 안전 교육 매뉴얼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전혀 양아치처럼 생기지 않았고 험상궂은 아저씨도 전혀 아닌 여성조차도 얼마든지 어린이를 유괴· 살해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3. 사형 집행의 부활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김 영삼 정권의 말기인 1997년 12월 30일에,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최후의 대규모 사형이 집행되었다. 다음 대통령에게 부담을 안 주기 위해 일부러 집행한 건데 아주 잘한 결정이다.

단, 남아 있던 사형수들을 다 죽인 건 아니고, 자기 정권 전부터 남아 있던 20여 명의 사형수들만 죽였다. 세상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1991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칼부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승용차를 질주해서 어린이 2명을 죽게 한 김 용제도 이때 죽은 사형수 중 하나이다.

그리고 김 영삼 정권 시절에 잡힌 지존파 멤버들은 워낙 죄질이 나빠서 그 전에 이미 다 사형이 집행되어 죽었다. 오로지 살인을 목적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전문적인 폭력 조직을 결성한 것은 세계의 범죄 역사를 통틀어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중국이 아편 전쟁 때문에 마약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듯, 한국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북한이라든가.. 북한이라든가..).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면 사실 조폭을 결성한 것만으로도 우두머리는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 시절 이후로 우리나라는 한 번도 사형이 집행되지 못하고 사법 정의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에 반해 전툴루, 전땅크 시절은 비록 다른 흑역사도 많았을지언정 사법 정의에 관한 한은 천국이었다.

약간 인민재판 같은 사례이긴 하지만,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의 경우 아직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 확실히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자기 직위를 걸고 항소심을 묵살시켰으며, 재판부에다 압력을 넣어 1~3심에서 모두 피의자에게 사형을 때려서 확인사살을 해 버렸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사전에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는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빨랑 자수해라.)”라고 진짜 전땅크스러운 대국민 담화를 대통령이 친히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약속을 이렇게 지켰다. -_-;;;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의 경고를 씹었다는 괘씸죄 때문에 어차피 사형이 떨어졌다. 마치 군인의 탈영이 나중엔 탈영 자체의 공소시효는 소멸하더라도, 복귀 명령 불복종죄 때문에 처벌 대상이 되듯이 말이다.
피해자 유가족은 이것 덕분에 그나마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으며 전툴루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되었을까? 이게 1983년의 일이다.

그 5공 시절에는 흔히 생각하듯 정치범이나 사상범도 아니고, 심지어 살인을 전혀 저지르지 않은 0 kill 상태에서도 사형이 떨어져서 집행된 적이 있었다.
가정집을 털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산부· 여대생을 강간해 온 3인조 강도 상습범(황 인규, 최 윤성, 최 성훈)은 비록 살인 혐의는 없으나 10수 차례나 저지른 강도· 강간의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는 법무부의 코멘트와 함께 1985년 11월, 얄짤없이 사형을 당했다. 이 판결에 대해 잘못됐다고 이의가 제기된 경우는 지금까지 전혀 없다.

이렇듯, 군사정권 시절에 벌어진 일이 다 나쁘기만 했다는 건 큰 편견이며 오산이다.
내가 광주의 학살자(?.. 뭐 이 표현 자체에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를 옹호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만큼 반대편 성향의 위정자들도 만만찮게 병크를 저지른 게 많으며, 세상 한켠에는 당신과 반대의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도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정말로 저출산을 걱정하신다면,
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애를 낳아서 키우는 부모의 권리를 정말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미래를 인질로 잡고 장난치고 짓밟고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에게 생명은 생명으로 일벌백계를 내려 주길 간절히 바란다.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세상 정부는 무슨 구원이나 내세· 영생을 논하는 조직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시민들 생명을 지키고, 질서과 치안을 문란케 한 자에 대한 공공의 보복을 집행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전땅크를 비판하고 욕하고 싶으면 이런 기초적인 거 하나라도 전땅크보다 잘해 달란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4/05 08:32 2013/04/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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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1906-1990).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군 장성이다. 군사, 세계사, 현대 전쟁사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름을 들어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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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 정말 골때리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군인 타입으로, 닥치고 폭격기 화력 덕후였으며 그의 주특기는 쑥밭 만들기였다.
하긴, 그 당시 미국은 워낙 물자가 풍족하게 넘쳐나는 부자 나라였으니 그의 전투 이념은 나름 적절했다.

게다가 그는 '석기 시대'를 굉장히 좋아한 매니아였다. ㅋㅋㅋㅋㅋ
미국 앞에서 깝치는 적국들은 본진을 폭격으로 다 쑥밭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조리 '죽탕치는(?)' 것도 아니고,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으름장을 공석에서 입버릇처럼 뇌까렸다. 영어로는 Stone Age.
호전적이고 입이 험악한 걸로 악명 높은 북한도 공식 석상에서 석기 시대 공갈을 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르메이 장군에 대해서 이런 패러디짤이 나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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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휘 하에 일본 도쿄는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그 이름도 유명한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미군 폭격기가 우박처럼 떨어뜨리는 소이탄에 시내 전체가 말 그대로 시뻘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서 보듯, 목조 건물은 형체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없어졌고, 일부 석조/콘크리트 건물도 새까맣게 탄 흉측한 몰골만 남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10만여 명에 달해서 사실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보다도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도쿄를 그런 석기 시대로 되돌리는 데는 겨우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원폭을 성층권 고도에서 투하하는 식이 아니라 상당한 저공에서 위험한 자세로 소이탄을 떨어뜨리다 보니, 미군도 폭격기가 총 12기나 일본의 대공포로부터 반격을 받아 격추되고, 42기는 피탄 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이에 몇몇 미군 파일럿들은 권총을 들고 르메이를 직접 찾아가서 이렇게 따졌다.

“왜 이런 무모한 저공 비행 폭격 명령을 내렸는가? 귀관 때문에 우리가 전우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아는가?”

하지만 르메이는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제군들은 단 하루 만에 일본 제국의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고 놈들을 최소 10만 명이나 없앴다! (사실, 미군 전사자는 많아 봤자 수십~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다. 이런 식으로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 1주일 동안 일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모두들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도록!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작전 자체는 르메이의 말대로 미군의 승리이긴 하지만... 저건 좀.. ^^;; 정말 그의 머리에 든 건 오로지 폭격밖에 없었다.
일본이 원폭을 맞고 나서 일찌감치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르메이가 생각한 작전들이 모두 시행되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진짜로 지도에서 없어지고 일본 열도는 석기 시대로 퇴화했을지도 모른다.

이 양반의 무자비한 작전은 훗날 6·25 때도 계속되었다. 북한 중에서도 평양 시내는 그야말로 형체가 남은 건물이 손에 꼽을 정도였을 정도로 그냥 말 그대로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오로지 미국이니까 가능한 돈지랄로 폭탄을 그냥 때려 박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북한의 내부에서는, 평양을 재건할 게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수도를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도 오갔다고 한다. 비록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습과 폭격의 악몽 때문에 지금 평양 시내는 이에 대비하느라 지하 방공망이 굉장히 깊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평양 지하철이 무지막지하게 깊게 건설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 뒤에도 르메이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월남전 땐 베트남도, 그리고 쿠바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베트남이건 쿠바건 다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 대통령 각하는 명령만 내려 달라”는 식으로 일관되게 나섰다.
마치 게임 해설자 김 태형 씨가 캐리어를 좋아하듯 그는 석기 시대가 자기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의 정치인들도 그의 말투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걸프전 때 이라크를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고 공갈을 쳤고, 나중에 9· 11이 터졌을 때는 파키스탄을 상대로도 대테러전에 협조하지 않으면 너네 나라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그랬다. 뭐, 반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협박 멘트에 심기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르메이 같은 사람도 미군에 있는데 맥아더 장군은 차라리 양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맥아더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군인이라지만 그도 인간이고 신은 아니기에, 맨날 인천 상륙 작전 같은 성공만 한 게 아니며 실수도 저질렀다. 처음엔 북한과 중공군을 얕잡아보다가 1· 4 후퇴를 당하고 호되게 데인 뒤에야, “이 자식들 안 되겠어.”라고 하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경책을 쓰려 했다.

어떻게든 빨갱이들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린다거나, 전쟁을 아예 3차 세계 대전 급의 대규모 장기전으로 키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식이었으니... 이런 강경한 생각이 화근이 되어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진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르메이도 그 당시 “이 좋은 핵무기를 왜 안 써?” 급의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맥아더보다 더하면 더한 꼴통이지 못하지는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이런 호전적인 군 장성 양반들의 근성을 이성적으로 잘 통제하지 않았다면, 과거에 소련과의 냉전이 냉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한반도가 아니어도 어디에서 핵이 한두 발 터지는 바람에 특정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거나 진짜 석기 시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도 “3차 세계 대전 때 인간이 무슨 신무기를 쓰고 있을지는 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때 인간은 새총(slingshot) 같은 냉병기를 쓰고 있겠죠?”라고 얘기했겠는가. 성문 종합 영어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지문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영락없이 석기 시대 회귀-_-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석기 시대 드립 말고 르메이 장군이 자신의 호전성을 또 드러낸 유명한 어록으로는 “세상에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이다.
사실, 도쿄 대공습 같은 경우 미국이 연합국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지, 저렇게 대놓고 시내를 폭격하여 비전투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건 전쟁 범죄로 간주될 수 있는 짓이었다.
대놓고 말해, 나치 독일이 영국이나 미국의 본토 도심지를 소이탄 폭격으로 다 불태워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면 그 후폭풍이 어찌 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메이는 작전을 강행했다.

일례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에 참여했던 폴 티베트 대령은 훗날 다음과 같은 요지로 회고한 바 있다.
“난 그 당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원폭은 전쟁을 더 일찍 종결시키고 더 많은 인명의 희생을 막은 차선이며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인으로서 나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는 없다.”

허나, 르메이는 한 술 더 떠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 아예 그 정도의 책임이나 죄책감마저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
“사실 저 밑에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고해 보인다고 저 민간인들을 안 죽이면, 그게 다 우리를 죽이는 병력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마음껏 폭격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워 버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르메이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시 구조가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 업체 영역의 구분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 어록으로는 이 외에도
“전쟁이란 총알 많은 쪽이 많이 죽이면 이기는 것이다.”
“충분히 많이 죽이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처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우악스럽고 꼴통 같은 방면으로 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아무려면 어때, 천조국 미국 소속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최소한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고, 그러다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같은 이런 진짜 미친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저건 잘 알다시피 '무다구치 렌야'라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군이 남긴 훈시.. -_-
그도 그럴 것이 물량이 풍족한 곳에서 그냥 물량으로 밀면 된다는 교리가, 없는 여건 속에서 닥치고 근성과 정신력만으로 돌격하라는 교리보다는 훨씬 나은 게 자명하지 않은가?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했으면 무한 맵에서 저그 가디언 굴리는 걸 좋아했을 것 같다. (대공 유닛으로 대지상 폭격 -_-)

뭐, 르메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미워할 구석이 없는 인물이다.
우방국의 장군답게 일본, 북한 등 대한민국의 적들하고만 싸웠으니 말이다.
(아 하긴, 무다구치 렌야도 자기 군대를 말아먹은 행적이 가히 대한 독립 유공자 급이니, 우리가 딱히 미워할 구석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고.. -_-;;;)

그는 그런 호전적인 기질답지 않게 미군의 전술 체계 수립에 큰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심지어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도 훗날 자위대의 재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괜히 장성까지 진급한 게 아니다.

다만, 그 막강한 화력으로 미국이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깔끔한 '전쟁 승리'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 때는 재일 동포도 많이 희생된 게 사실이다. 비록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
이 사람의 상징은 잘 알다시피 '석기 시대'이다. 허나 아담 이래로 6천 년 인류 역사를 믿는 크리스천은 인류에게 딱히 석기 시대라 불릴 만한 긴 원시 시대가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로의 퇴보를 언급하려 한다면, 차라리 노아의 홍수 직후 상태로 되돌리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될 텐데.. 아무래도 '석기 시대'보다는 우악스러움이 덜하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3/07 19:26 2013/03/0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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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지 만원 지은 <제주 4·3 반란 사건>을 읽고

난 어린 시절부터 근대로 갈수록 우리나라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 민족이 뭔가를 발명하고 정복하고 성공하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식의 좋은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줄곧 고통받았으며 개혁은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기만 했다. 나중에는 좋든 나쁘든 한 나라의 왕비라는 사람이 외국 침입자에게 살해당하는 희대의 치욕을 당하기까지 하고, 궁극적으로 주권이 외세에 완전히 빼앗기는 것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난다. 빼앗긴 주권을 훗날 극적으로 되찾기는 하지만 이것도 우리 힘으로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며, 덕분에 이념 대립과 국토 분단, 동족상잔 같은 또 다른 비극이 이어진다.

그래도 알고 보니 우리나라 역사에는 비극만 있는 게 아니었고 지도자 복이 없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은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지도자가 그 가난하고 열악하고 위험하던 여건 속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반쪽만이라도 필사적으로 막고 올바른 이념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미국을 든든한 우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우리 민족은 기적적인 경제 성장까지 이뤘다. 이 정도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기네 나라의 내력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있는 그대로 가르쳐지고 대대로 전수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행히도 심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공이 과를 객관적으로 월등히 압도하는 지도자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후세에 의해 저열한 중상모략과 부관참시를 당하는 꼴을 본인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피아식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민간인 오폭이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로 와전되고, 반역자가 소위 민주화 투사로 둔갑하는 것을 보니, 이건 정치색을 떠나서 정말 뭔가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거 일제의 만행에 그렇게도 분노하던 사람들이 북한이 더 최근에 저지른 잔학한 테러, 무력 도발, 민간인 학살을 왜 그토록 쉽게 잊어버리는가?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도덕과 정신을 무참히 파괴하는 사악한 북한의 사회 시스템을 왜 그리도 만만하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인터넷을 하면서 북한 김 정은 정권을 비웃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이고 무엇 덕분인지 혹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정녕 없는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우리 국민들이 사상이 글러먹어서 북한 정권을 직접 지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닐 것이다. 단지, 가슴으로만 애국을 할 뿐 머리와 시스템적인 안목으로 애국을 못 해서 극소수 불순분자가 벌이는 역사 왜곡과 선전 선동, 시체 장사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을 예전처럼 무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남한의 정신 기강부터 먼저 무너뜨리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발달된 인터넷 인프라를 이용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 사회의 치부만을 편파적으로 들추고, 정부과 국민 사이에 극심한 불신풍조를 조장한다. 국가에 몸바쳐 충성한 애국자를 수구꼴통으로, 반역자를 민주투사로 바꾸는 역사 왜곡은 덤이다. 이것은 남을 교묘하게 쓰러뜨리려는 모든 '악의 무리'들이 분야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취해 온 전략이다.

제주 4·3 사건도 그런 예에 속한다.
책의 저자는 이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한반도가 분단된 과정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아예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처음으로 들어온 배경부터 면밀히 파헤쳤다. 그 내역을 보노라면 한반도가 공산화되느니 차라리 일제 치하에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왕 먹힐 거면 소련이 아니라 일본에게 먹힌 게 오히려 축복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미국· 일본 등 그 당시에 나름 선진국 축에 들던 나라들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던 소련 발 공산주의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는 마치 이단 종교 교리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기 매우 좋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배경을 모른 채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하고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 책은 알려 준다.

한반도 본토에서 떨어져 있던 제주도를 공산주의 체제로 뒤엎으려는 계획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인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한 박 헌영은 6·25를 사주한 것 이상으로 4·3 사건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좌익과 우익이 모두 연루된 처절한 피의 비극으로 끝난 데는 일차적으로는 '빨갱이'들의 교묘한 위장 전술과 잔학성, 피아식별의 어려움, 그리고 다음으로 상대편 진영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증오, 보복 심리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이 사건은 친북 세력이 일으킨 반란임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그 어떤 좌편향 인사라도 감히 북한 쪽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성향의 정권 때 반란의 주동자가 명예가 회복되고 훈장이 추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건의 피해자인 당시의 제주도민들조차도 이것은 불순분자가 일으킨 무장 반란일 뿐 남북 북단을 반대하는 항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사건이 그렇게 왜곡되어 재해석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덮으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이것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는 책을 왜 현업에 종사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응용수학을 공부한 시스템공학 박사가 썼을까? 이 책을 쓰기 위해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하면서 얼마나 많은 문헌들을 읽고 공부해야 했을까?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분야에도 이런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천재인 공 병우 박사는 안과 의사였고, 오늘날 흠정역이라고 성서 공회 성경보다 더 나은 우리말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분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대 교수이다. 머리가 시대를 앞서 가는 선각자들이 맑은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좁은 길을 먼저 간 덕분에, 다른 국민들도 더 똑똑해지고 삶이 더 윤택해져 왔다. 어느 분야든 그 맥이 부디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비정상적인 국가인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더욱 궁금해졌다.
숙주가 완전히 죽어 버리면 바이러스 자신도 죽는데, 북한은 왜 하필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조차 가지 않은 최악의 길만 골라서 가 있을까? 북한도 처음에는 그래도 여러 당이 존재하고 주민들을 먹여 살릴 최소한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주민은커녕 군인들마저 못 먹여 살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북한 수뇌부들은 지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도 남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치색이 굉장히 강한 논객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고, 사람마다 사상적인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분이다. 그러나 저자의 일부 극단적인 평론이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여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어도, 친일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프로필을 가진 멀쩡한 군사 평론가를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여론 조작과 선동의 결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의 비열하고 집요한 대남 도발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이것이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될 일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없을 터이며 4·3 사건에 대한 기록도 그러할 것이다. 팩트가 정치색으로 매도되지 않으면 좋겠고, 저자에 대한 편견 하나 때문에 진실까지 가려지는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만에 하나 이 책이 정치색을 띠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색은 무슨 불확실한 음모나 들추고 국가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감사와 애국심을 북돋우는 건전한 정치색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직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는 것은 과거에 조선이 러시아 대신 일제에게 먹힌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축복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만 제대로 알아도 자부심은 충분히 생기며, 환단고기 같은 위서로 대리 만족을 얻어야 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책이 널리 읽혀서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이 알려지고 자유와 안보의 소중함이 전파되고, 북한의 대남 도발사가 있는 그대로 폭로되며 내 조국은 이런 위태로운 와중에도 오뚝이처럼 굳게 일어선 나라라는 사실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13 19:26 2013/02/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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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국토 분단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에 대해 살펴보자.

1. 우선, 38선과 오늘날의 휴전선은 다르다.
38선은 일제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눠서 지배하기 위해,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지리적인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땅을 수평 분할한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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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오늘날 남한과 북한 사이의 실질적인 국경 역할을 하고 있는 휴전선은 6· 25가 휴전/정전으로 끝나면서 나중에 생겼다. 꼬불꼬불한 곡선 형태로 38선 시절에 비해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반면, 강원도 쪽 영토는 남한이 훨씬 더 많이 수복하여 속초와 고성이 남한 땅이 되었다.

휴전선은 일명 군사 분계선(MDL)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미터법이 대세인 우리나라에서 그 길이가 유독 마일이라는 단위로 일컬어지는 흔치 않은 존재이다. (155마일)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2. 흔히 휴전선 하면 이런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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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전방 GOP라 불리는 곳에서 근무하는 국군 병사들이 곁에 바싹 붙어서 순찰하고 정비하는 그 철조망은.. 한반도를 딱 반으로 가르는 그 '휴전선'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에서 벌인 3· 1 만세 운동과, 그 후에 유 관순이 음력 3월 1일에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벌인 만세 운동만큼이나 서로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다.

국군 병사들이 지키는 철조망은 휴전선 이남의 '남방 한계선'을 나타내는 철조망이다. 물론 북한 쪽에는 '북방 한계선'이 있다. 이것은 실제 휴전선과는 명목상 2km정도 떨어져 있으나, 그게 칼같이 지켜지는 건 아니어서 2km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남과 북의 군인이 동일한 단일 철조망을 공유하면서 진짜 코앞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피차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진영의 철조망을 갖고서 서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휴전선을 포함하여 남북 양쪽의 한계선 사이의 공간이 바로 천연 자연의 보고라고 불리는 그 이름도 유명한 비무장지대(DMZ)이다. 금강초롱과 끈끈이주걱까지 서식한다고 하나, 거기는 지뢰도 엄청 많이 묻혀 있는 위험한 지대이다. -_-

동쪽 강원도 쪽으로 갈수록 DMZ는 첩첩산중 지형이 되지만 서쪽 경기도는 DMZ가 평지이다. 판문점이 있는 공동 경비 구역(JSA)은 DMZ에 속하며, 대성동 마을도 이례적으로 JSA 인근 DMZ 내부에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DMZ는 마치 뉴욕 한가운데의 UN 본사처럼 UN의 관할에 있는 땅이니, UN 본사를 판문점으로 옮기겠다는 허 경영의 공약(?)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닌 듯하다. -_-;;

남방 한계선과는 달리, 진짜 오리지널 휴전선(군사 분계선)은 극소수 육로로 월북이나 귀순을 하는 용자 말고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시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은 진짜 60여 년 전 휴전 당시에 만들어진 철조망이 시뻘겋게 녹슨 형태로 방치돼 있거나, 아예 애초에 철조망도 없이 낡은 표지판만이 남아서 여기가 군사 분계선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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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남북의 군인들이 전방에서 매일 철통같이 순찰하고 정비하는 철조망은 휴전선이 아니라 거기에서 파생된 남방 한계선임을 기억하자. DMZ 내부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JSA에서 근무하는 권총 든 헌병이라든가 GOP보다도 안의 GP 순찰병 정도밖에 없다.
이런 위험한 곳에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체력 좋고 사상이 확실하게 건전한 사람만을 엄격하게 가려서 뽑는다.

3. 끝으로, 민간인은 남방 한계선까지라도 선뜻 갈 수 있는 게 당연히 아니다. 남방 한계선보다 더 수 km 남쪽으로는 드디어 민통선이라고 불리는 민간인 통제선이 있다. 민통선은 무슨 남방 한계선처럼 전구간이 살벌한 철조망이 둘러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동차 도로는 마치 청와대 근처처럼 헌병 초소로 가로막혀 있으며,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

민통선 내부 구간을 방문하려면 사전에 방문 신청을 하고 군인들로부터 신원 확인을 받는 등 여러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도라산, 제진, 월정리 역은 바로 민통선 내부에 있는 철도역이다. 그래도 여기는 DMZ와는 달리, UN 관할이 아닌 엄연히 대한민국 영토인 건 맞다. 휴전 직후에는 민통선 구간이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무려 10~20km가까이나 떨어져 있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다시 북쪽으로 많이 올라갔다. 통제가 완화되었다는 뜻이다.

※ 별첨

우리나라에는 현충원 같은 묘지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적군 묘지'도 있다. 스펀지 같은 데에 소개될 만한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에 소재한 적군 묘지에는 6·25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죽은 북한군, 중공군, 무장공비, 테러범들이 묻혀 있다. 찾아와 줄 유족이 있을 리 없는데도!
1968년 김 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공비들,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 김 현희의 파트너(자살)까지 다 묻혀 있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자세한 건 링크 참고.

제아무리 제네바 협약 같은 게 있다지만, 적군에게까지 이런 예를 갖추는 우리나라는 정말 인심 좋은 나라이다.
하긴, 해방 직후에 일본 민간인들이 권력을 잃고 본토로 쫓겨날 때도, 한국인들이 폭동· 약탈 하나 없이 고이 보내 줘서 걔네들이 무척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그런데 저 나쁜놈들은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으로 은혜를 끝까지 원수로 갚았고..)

그런데 더욱 경악할 만한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저 적군들은 그래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나름 자기네 나라로부터 명령을 수행하다가 순직/순국한 호국영령들이다. 미국의 경우, 자국 군인이 죽으면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유해를 찾아 오는 걸로 익히 유명하며, 한국도 나름 그 원칙을 수행하려 노력 중이다.

허나 북한은 한 번도 우리나라에 자국 병사의 유해 인도를 요청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다. 특히 각종 지저분한 테러 공작의 경우, 공작원의 시신 인도를 요청했다간 그 행위를 자기가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 절대로 안 한다.

인권이고 예우고 뭐시고 없는 북한 정권은, 이용 가치가 끝난 병사나 공작원은 자기네 인력이라도 철저히 무시하고 토사구팽하는가 보다. 남과 북이 사이가 좋던 시절에 판문점을 통해 쌀과 소와 관광객이 오고 가긴 했어도, 북한군 유해가 갔다는 소식은 여러분도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996년의 강릉 잠수함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북한군의 유해는 북한으로 송환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자기들이 벌인 만행에 대해서 “유감 표명”까지 했을 정도로 예외적인 경우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03 08:18 2013/02/0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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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2-1949).
뼛속까지 한국덕으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진심으로 사랑한 미국인으로 아주 유명한 분이다. 2013년 새해의 첫 글은 훈훈한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ㅎㅎ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 한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에다 소개하고 한반도에 신식 학교를 세우는 등 수많은 좋은 일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구한말 시절부터 고종 황제를 보호하고 헤이그 밀사를 직접 선발하여 조선/대한 제국의 독립 승인을 위해 적극 애썼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결정을 내린 사람이었다. 그가 그냥 국제 정세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탈하는 걸 승인했을 때, 헐버트는 자국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쫓겨난 뒤에 본토에서도 이 승만, 서 재필 등의 독립 운동을 도와 줬다.

또한 그가 무엇보다도 감화되었던 것은 한글이다. 한글을 나흘 만에 깨우친 뒤 이게 보통 문자가 아니라는 걸 직감하였으며, 어렵고 비효율적인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온 국민이 한글로 지식을 깨우쳐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한글 정서법에도 띄어쓰기가 있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여 서 재필이나 주 시경 같은 선각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우수한 자기네 고유 문자를 스스로 천대하다니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이런 말을 미국인이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여러 애국 단체들 중에서도 특별히 한글 학회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중근 의사조차도 일본 경찰로부터 심문을 받던 중에 어쩌다 헐버트 얘기가 나오자, 그는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단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될 민족의 은인이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다른 위인의 눈에 보기에도 헐버트는 큰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45년 해방이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한국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나는 죽어서도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포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우리나라의 유명 독립 유공자들은 대체로 1960년대 초에 대대적으로 조사되어 각종 훈장이 추서된 반면, 이분은 아예 서거 이듬해인 1950년 3월 1일에 진작부터 이 승만 정부로부터 건국 공로 훈장 태극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어떤 계기로 그렇게 여러 나라들 중에 하필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다트머스 대학 출신이라고 하는데, old timer 프로그래머라면 기억하려나? BASIC 언어를 개발한 존 케메니와 토머스 커즈가 바로 이 대학의 교수이다. 그래서 베이직 언어의 여러 방언들 중에서 특별히 오리지널을 ‘다트머스 베이직’이라고 일컫는다. 한국인이라면 다트머스 대학이 헐버트의 모교이기도 하다는 걸 덩달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한편, 헐버트에 필적하는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 외국인으로는 캐나다인인 프랭크 스코필드(귀화명 석 호필)도 있다. 그는 의사이자 제암리 학살 사건 사진을 전세계에 보도한 기자이고, 서울 현충원에 묻혔다. 옛날에 스펀지에서 이 스코필드에 대해서 소개했었는데, 내용이 워낙 훈훈하다 보니 별 다섯 개를 당당히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헐버트는 스코필드에 비해서 인지도가 많이 뒤쳐지는 것 같다. 구한말 때는 열정적으로 한반도에서 활동했지만 정작 일제 강점기를 앞두고는 추방당해서 미국에서 지낼 수밖에 없어서 그런 듯.
그래서 작년 여름, 한글 새소식(한글 학회 월간지) 2012년 8월호(통권 480호)에서는 헐버트 박사 특집이 편성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분도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01 08:21 2013/01/0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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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과 경원선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양대 철도이며, 국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철도이기도 하다.
전자는 개성과 평양을 경유하여 중국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평안북도의 신의주까지 가고, 후자는 6· 25 당시의 원산 폭격으로 유명한 동해 항구 도시인 함경남도 원산까지 간다.

분단 이후 이들 노선의 대한민국 관할 구간은 잘 알다시피 장거리 일반열차를 운행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너무 짧아졌다. 서울-인천보다는 길지만 서울-춘천보다는 짧은 어중간한 거리가 됐다.

그래서 이곳은 전통적으로 통근형 디젤 동차가 강세이다. 세월이 흘러서 전국 각지의 디젤 동차들은 죄다 무궁화호 RDC 내지 기관차-객차형 무궁화호로 바뀌거나 심지어 전동차로 바뀌었지만, 경의선과 경원선만은 우리나라에서 최후까지 CDC(통근형 디젤 동차)가 남아 있는 노선이다. 그래서 CDC를 시승하고 안보 관광까지 덤으로 하려는 철덕들에게 좋은 여행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통근열차가 통근용이 아니라 옛 명칭인 '통일호'나 다름없게 된 셈.

지난 2006년 말엔 의정부까지만 가던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무려 동두천과 소요산까지로 연장됐고, 2009년에는 회송 열차 트래픽으로 인해 금기의 영역이던 경의선에도 수도권 전철화의 손길이 뻗쳤다. 그래서 디젤 동차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대부분의 구간이 전철화가 되어 버린 경의선의 CDC는 문산-도라산 사이의 4개역만 다니는 15분짜리 셔틀 열차로 전락했다. 마치 서울 지하철 2호선 용답-신설동 지선 열차처럼 됐다.

그 반면, 경원선은 비전철 구간이 경의선보다 더 길기 때문에, CDC가 다니는 역이 아직 9개이고 전구간 완주 시간도 46분가량이다. 동두천-소요산은 단선 전철로, CDC와 전동차가 공유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경의선과 경원선의 지리적 여건에 대해서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휴전선은 한반도의 서쪽으로 갈수록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고, 동쪽으로 갈수록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는 선형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쪽이 북한과 더 가까우며, 이런 이유로 인해 경의선이 경원선보다 더 짧다. 경원선의 연천군 구간은 경의선으로 치면 이미 북한 관할로 넘어간 개성과 장단 구간이다. 38선 시절에는 남한 관할이었지만, 6· 25 때는 북으로 빼앗겼기 때문.

경의선은 북한과 더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 대중 정권 시절에 철도가 연결되었으며 임진강 역 이북의 민통선 내부에 도라산 역이 생겼다. 덕분에 통일만 되면 경의선 열차를 타고 당장 북한으로 갈 수 있다. 전기 규격이 남과 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로 같은 게 없으니, 비록 전철은 직통 운행을 못 하겠지만 말이다. 당대의 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한 다른 행적이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철도가 연결됐다는 건 정치색을 배제하고 철덕의 순수한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경의선과 관련한 유물로는, 장단 역에 있던 증기 기관차 한 량이 6· 25 때 폭격을 당해서 총알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버려진 것이 잘 알다시피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서쪽에 경의선이 있다면 동쪽에는 동해북부선(강원도 고성군. 속초보다도 더욱 북쪽 완전 끝에 소재)이 옛날에 남북 관계가 좋던 시절에 연결되었다. 경의선의 도라산에 해당하는 동해북부선의 역이 바로 제진 역이다. 하지만 거기는 연계되는 간선 철도가 없으니 인지도와 효용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말이다.

일제가 포항 이북으로 건설하려다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포항, 영덕, 울진, 삼척이 철도로 연결되고 지금 영동선의 지선으로 간주되는 삼척선이 당당히 동해선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이 공사는 일제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면서 중단되었다. 일제가 한반도에 건설하던 최후의 철도인 셈이다.

이러한 경의선이나 심지어 동해북부선과는 달리, 경원선은 남북 철도 복원 같은 논의가 없었다. 그래서 철원이나 월정리처럼 위치가 영 좋지 않던 역은 그렇잖아도 전쟁 때 역사와 선로가 파괴되기도 했는데 일찌감치 시설이 철거되었으며 철도가 끊어졌다. 도라산이나 제진 같은 민통선 허브역이 이 노선에는 없다.

이 부근에서 군생활을 한 분이라면 절대 잊어버리시지 않겠지만, 경의선에 임진강이 있다면 경원선에는 한탄강이 있다.
경원선의 종점인 신탄리 역의 이북에는 그 유명한 '철도 중단점 --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기념비가 있었다. 그러나 코레일에서 신탄리보다도 더 북쪽에 '철마고지'라는 옛 철원 역과 비슷한 위상의 역을 신설하면서 그 기념비는 철거된 상태이다.

경의선과 경원선의 잔여 비전철 구간에는 1시간에 1대꼴로 CDC가 다닌다. 전철을 타다가 털털거리는 트럭 엔진 소리가 나는 CDC를 타 보면, 전철이 얼마나 조용하고 우아하게 달리는 아름다운 육상 교통수단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배차 간격이 저런 이유는 수요가 없어서라기보다도, 단선 철도에서 근본적으로 1시간에 1대보다 열차를 더 자주 투입하기란 도저히 무리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당 지금 같은 운임으로 별도의 디젤 동차를 굴려서 코레일의 입장에서 이윤이 남는 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밑지는 장사를 일부러 공익 차원에서 해 주는 것이다. 분단 같은 국가적인 사정만 아니었으면 이런 열차는 진작에 없어졌거나 전철 형태로 마저 바뀌었을 것이다.

CDC의 운임은 수도권 통합 요금과 연동되지 않는다. 적자를 감수하고 운행하는 걸 아니 환승 할인은 안 해 줘도 좋은데, 티머니 교통 카드로 운임 지불이라도 좀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 우진 님 같은 분이 그걸 건의하신 적도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철도는 KTX의 개통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가 시작되었다. 기존의 새마을-무궁화-통일호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콩라인 새마을호는 2010년대 중반까지 차량이 모조리 퇴역하여 차종 자체가 사라질 예정이고, 통일호는 명칭 자체는 진작에 없어져서 통근열차로 대체되었으며 이마저도 사라지는 중이다. 그 대신 기존 열차의 통념을 깨는 전동차들이 여럿 도입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북한을 향하고 있는 경의선과 경원선의 비전철 구간은 전동차, 코레일체 유리궁전 등 21세기의 모든 철도 트렌드에서 소외된 채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국토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지금까지 나쁜 불순분자들에 의해 본디 의도가 극도로 더렵혀지고 왜곡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궁극적으로 되어야 하고 필요한 것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래도 한국어와 한글을 쓰는 사람끼리라도 최대한 뭉쳐야 살지 않겠냐 말이다.

금강산도 백두산도 보고 싶고 개마 고원에도 가고 싶고 압록강과 대동강과 두만강도 구경 가고 싶지 않은가? 의정부 역은 북쪽의 수원 역 같은 역이 되어야 할 것이고 수색과 성북 역은 서울 북부의 영등포 같은 큰 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의선과 경원선도 서울 시내 구간은 그야말로 2복선, 3복선급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인 김씨 왕조에 대한 잔재를 지우고 우리나라의 체제와 정체성을 유지한 통일(흠, 그럼 흡수 통일이네-_-)이 이뤄져, 철마가 북녘 '미수복 영토'까지 마음껏 달리는 날이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뤄지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28 08:32 2012/12/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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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95 이전에 전세계를 석권하며 가장 성공한 운영체제(?)로 평가받았던 최후의 16비트 버전 윈도우는 바로 1992년에 출시된 3.1이다.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물론 이 물건이 홀로 부팅 가능한 완전한 형태의 운영체제는 아니었기 때문.

그런데 그 3.1이 있기 전에는 3.0 버전이 있었다. 3.1이 너무 히트를 쳤기 때문에 존재감이 무척 덜해졌지만, 영미권에서는 1990년에 출시된 윈도우 3.0이 먼저 대박을 터뜨렸다. 시스템 폰트가 밋밋한 불변폭 Fixedsys이다가 가변폭으로 최초로 바뀌었으며, 흰 바탕 윈도우에다가 버튼에 최초로 은색 3D 효과가 추가되었다.

윈도우 3.0은 한글화가 된 최초의 버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2.0이던가 2.x는 한국 지사를 통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버전이고, 3.0은 한글화까지 된 버전 되시겠다.

한글 윈도우 3.0과 한글 윈도우 3.1은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난다. 영문 윈도우 오리지널 3.0과 3.1 사이의 차이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글을 좀 남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윈도우도 3.1이 아니라 3.0이다. 20여 년 전, 우리집 컴은 겨우 286 AT인데 이웃집 형의 컴퓨터는 386이고 아래아한글 2.0 전문용으로 화려한 윤곽선 글꼴을 찍어 내고 있었으며, Windows라는 꿈의 GUI 환경도 구동하고 있었다니, 초등학생 꼬마이던 본인은 감수성이 자극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록달록한 아이콘과 컬러 그림들!

그때 처음 본 것은 3.1이 아니라 분명 3.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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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윈도우 3.0의 부팅 스플래시 화면이다. 영문 원판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파란 배경이며, copyright이라든가 Microsoft까지 전부 우리말로 번역이나 음차를 해서 한글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저작권 경고문은 영문 원판의 스플래시 화면에는 없는데 한글판에서만 새로 추가되었다.

파란 배색 때문에 나는 윈도우 3.0의 부팅 화면과, 한메 타자 교사의 시작 화면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다. 여러분도 동감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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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 부팅 스플래시는 3.0의 것보다야 훨씬 더 유명하니,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손으로 그린 듯한 저 동글동글한 한글 서체가 인상적이다. 3.1에서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 3.11은 한글화되지 않았으며, 95부터 MS는 제품명은 세계 어디서나 무조건 영문 원형 그대로 표기해 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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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3.0을 구동한 화면이다. 한글판은 한옥 문 무늬를 연상케 하는 mun.bmp가 설치 직후에 기본 배경 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영문판은 당연히 그렇지 않음. 3.1은 프로그램 제목 표시줄의 배경색이 그냥 어두운 군청색인 반면, 3.0은 옅은 파랑이고 무엇보다도 solid color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프로그램 아이콘은 완전히 모노크롬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회색 톤이 짙어서 채도가 낮다. 좋게 말하면 차분하고 가라앉은 느낌을 주고, 나쁘게 말하면 칙칙하다. 오로지 그래픽 에디터인 그림판만이 3.1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고채도 색상의 아이콘인 듯.
3.1은 메뉴의 배경색이 프로그램 제목 표시줄의 배경색과 동일하게 군청색이지만, 3.0은 검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떠나서, 3.0 한글판의 한글 서체는 3.1 한글판의 한글 서체보다 훨씬 더 못생기고 허접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뭐, 한글뿐만 아니라 영문 서체도 엄청 엉성하다. 영문 윈도우 3.0의 영문 서체는 3.1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한글 윈도우 3.0의 영문 서체는 그렇지 않다. 3.1에 가서야 일치가 이뤄졌다.

메뉴 단축키가 영문이 아니라 한글인 게 인상적인데, 이건 제어판에서 설정을 바꾸면 된다. 한글 윈도우 3.0과 3.1은 메뉴 단축키를 한글로 바꾸는 특이한 옵션이 존재했었다. 파일 메뉴가 ㅍ에 배당되어 있으니, 두벌식 기준으로 Alt+V를 누르면 되는 식이다. 이런 옵션은 윈도우 95 이후부터는 물론 완전히 사라졌으며, 결코 다시 도입되지 않았다. 일종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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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한글 윈도우의 한글 서체 이름은 처음부터 바탕, 돋움이 아니었다. 한글화 첫 버전인 윈도우 3.0에서의 명칭은 아직 명조와 고딕이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랐다. 엄청 옛날에는 MS에서 조합형 코드를 사용한 한글 도스를 만들기도 했다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느낌이다. 궁서와 굴림은 아직 있지도 않았고 겨우 2종.

윈도우 3.0은 아직 트루타입 글꼴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New가 붙은 Courier New나 Times New Roman 같은 서체도 없었고, 글꼴 대화상자에 보다시피 볼드/이탤릭 옵션 같은 것도 없다.

한글 윈도우 3.0은 트루타입 글꼴 기술이 영문 윈도우 3.1보다 먼저 도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운영체제가 기본 제공하는 글꼴이 윤곽선 트루타입 글꼴은 아니었다. 여전히 비트맵이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 드디어 한글 IME 도구모음줄이 보이시는가? 이것이 한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초로 개발한 윈도우용 한글 IME이다. 저 도구모음줄은 드래그로 위치 이동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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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도움말.
한글 윈도우 3.1과 한글 윈도우 95 초창기 제품들은 도움말이 해라체, 즉 반말이다. 그러나 한글 윈도우 3.0의 프로그램들의 도움말은 합쇼체, 즉 존댓말이다!
반말 도움말이 다시 존댓말로 복귀한 건 IE 4.0이 나오던 시기인 1997년쯤부터이다.

게다가 저 도트 노가다 이미지로 급조해 넣은 색인, 뒤로, 훑어보기 등의 버튼들은 도대체 뭐냐! 하긴, 영문 원판도 3.0은 저 버튼들이 이미지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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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조합 중일 때는 비록 에디트 컨트롤처럼 기술적으로 IME-aware인 환경이라 할지라도 화면 하단에 조합 중인 글자(저기서는 ‘짝’)가 따로 또 뜨곤 했다. 이것이 3.1에서는 개선되었고, 윈도우 95에서는 조합 중일 때 커서가 네모 깜빡이로 변하는 수준까지 발전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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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3.1 이래로 지금까지 운영체제의 기본 게임 중에서는 지뢰찾기가 지존의 폐인 양성 게임에 등극해 있지만, 1.0부터 3.0까지는 일명 오델로라고도 불리는 리버시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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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마찬가지로 굳이 한글판에만 적용되는 차이는 아니겠지만..
윈도우 운영체제가 기본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은 About 대화상자가 원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 동일한 ShellAbout 함수에다가 아이콘과 프로그램명만 달리해서 호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운영체제가 기본으로 제공하는 About 대화상자는 프로그램의 이름, 운영체제의 이름과 버전, 남은 메모리와 리소스, 사용자와 제품 번호 같은 걸 보여준다.

하지만 윈도우 3.0은 프로그램 관리자, 파일 관리자, 제어판 같은 관리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만이 공용 About을 쓰고, 메모장이나 문서작성기 같은 보조 프로그램들은 자기네 약식 About 대화상자를 출력하고 있다.

윈도우 3.0과 3.1 사이에는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23 08:39 2012/12/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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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서 계속.. 현대 자동차 얘기를 하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포니 2에 이어 후속 모델로는 프레스토와 엑셀이 나왔고, 중형차로는 국내 최장수 자동차 브랜드인 쏘나타가 탄생했다. 쏘나타도 그 전신은 코티나 마크 V의 파생형인 '스텔라'이지만, 후속 모델로 갈수록 미국 차와의 유사성은 없어지고 독창성이 증가했다.

한편, 당대의 최고급 모델이던 (각)그랜저는 미쓰비시 사와 공동 개발하여 동일한 차량을 한일 각국에서 서로 다른 브랜드로 시판했다. 처음엔 2000cc급만 나왔다가 2400cc와 3000cc 모델도 추후에 개발되었다. 오늘날이야 그랜저는 제네시스나 에쿠스에게 기함 타이틀을 내 주고, 그냥 쏘나타보다 약간 더 비싼 중대형급에 머물러 있지만,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그랜저의 이미지는 굳건하다.

또한 철덕이라면 그랜저와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사이에 매우 유사한 심상이 느껴질 것이다. 둘 다 등장 시기(1986 vs 1987)부터가 아주 유사하며 목적도 동일하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각각 최고급 승용차와 최고급 호화 열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때보다 굉장히 대중화(?)와 서민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고급 물건의 대명사로 통용되고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풀린 뒤엔 포터(1톤)와 마이티(2.5톤) 트럭을 만들어서 기아의 봉고/타이탄과 경쟁하였다. 포터는 '짐꾼'이라는 뜻이고 마이티는 왈도체의 '힘세고 강한 아침' 할 때의 '힘센'이라는 뜻이니, 다들 트럭으로서는 적절한 작명이라 여겨진다. 한편, 그레이스라는 소형 승합차는 디젤 엔진으로 휘발유 엔진에 필적하는 정숙함을 구현해 내어 그 당시로서는 꽤 발전된 기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Aero City라는 대형 버스를 만들어서 대우 버스와 경쟁하는 양대 산맥을 구축했으며, 일본 차량을 기반으로 갤로퍼라는 SUV도 만들어서 쌍용 코란도를 제쳤다. 단, 갤로퍼는 현대 자동차가 아니라 '현대 정공'에서 제작하여 '현대 자동차 써비스'라는 다른 계열사와 다른 파생 회사에서 판매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현대 자동차 라인의 제품이 아니다.

아래 그림에 나와 있듯, 현대 버스(왼쪽)는 대우 버스(오른쪽)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바퀴 위쪽의 차체 윤곽이 완전한 원호를 이루어 동그랗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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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술을 개발해 나가던 현대에서는 부품의 국산화 비율을 차츰차츰 높인 끝에, 드디어 설계부터 프레임, 엔진까지 모든 공정을 국산화하여 로얄티를 지불하지 않는 차를 내놓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엑셀의 후속 모델 소형차인 액센트(1994)이다. 포니가 자체 모델이라면, 액센트는 자체 개발이다. 자동차계의 KTX 산천 및 서울 지하철 609편성인 셈이다.

포니를 만들던 그 회사가 이제는 제네시스와 에쿠스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실을 위해 공돌이들을 얼마나 갈아 넣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존경스럽다. 비록 국내에서 워낙 독보적인 위치에 있어서 가격 횡포도 많이 부리고, 이 때문에 현대라는 기업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에쿠스야 1세대 '각진' 모델은 과거의 그랜저처럼 미쓰비시와의 공동 개발이지만, 제네시스는 현대의 독자 개발 모델이며 에쿠스도 2세대 모델은 외형이 제네시스와 더 비슷해져 있다. 제네시스와 에쿠스는 현대 차임에도 불구하고 외제차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인지 차 주변에 현대 앰블렘이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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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 자동차

신진 자동차, 동아 자동차를 거쳐서 지금의 쌍용이 된 기업이다. '더블 드래곤'은 엄밀히 말하면 '쌍룡'으로 표기하는 게 맞으나, 어차피 저건 고유명사이니 굳이 꼭 맞출 필요는 없다.
여기는 잘 알다시피 코란도라는 4WD SUV 외길 브랜드만 밀어 온 기업으로 유명하다. 물론 옛날에는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때문에 쌍용에 배당된 차종 TO는 저것밖에 없어서이기도 했고. -_-;;

옛날에 4WD 차량은 “전쟁 났을 때 국가에서 군용차로 징발해 간다. 그 대신 차의 덩치에 비해 각종 세금은 파격적으로 감면”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전쟁 안 날 거라 믿고 코란도를 장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됐지만.
그리고 코란도라는 이름은 “KORean cAN DO”라는 애국심 드립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혹시 아시는가? 어렸을 때 차 카탈로그에서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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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1세대 코란도.

나중에는 같은 SUV 차종 안에서도 코란도 패밀리라든가 무쏘라는 다른 차를 내놓기도 했으며, 소형 승합차 이스타나, 그리고 고급 승용차 체어맨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체 기술이 부족하여 주력 차종인 SUV에서 현대에게 추월당하고 주춤하다가, 중국 상하이 자동차에게 매각+처참한 먹튀를 당했다. 그리고 최근엔 잘 알다시피 구조조정+장기간의 파업 사태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져 있다.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할 텐데.

공장이 평택에 있는 건 파업 사태와 관련된 뉴스 보도 때문에 알게 됐다.

※ 르노 삼성 자동차

삼성은 삼성 전자를 등에 업고 있는 굴지의 대기업이지만, 이 그룹의 회장님은 롤스로이스와 마이바흐를 굴리는 굉장한 자동차 덕후였으며 자기 회사에서 자동차까지 만들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0년대 말에 자동차 계열사를 만들었지만, 이미 국내의 차 시장은 포화 상태였고 IMF까지 터지면서 삼성 자동차는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르노라는 외국 회사가 이를 인수하여 르노 삼성 자동차가 된 것이다.

자동차를 처음부터 혼자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없으니 여기서도 주로 일본 닛산 자동차를 현지화하여 생산· 판매하는 형태였다. 생산되는 승용차는 잘 알다시피 SM_n이라는 형태로 작명되었으며, 특히 현대 계열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삼성 차를 선호했다고 회자된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직원들을 상대로 희망 퇴직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공장은 부산 강서구에 있음.

※ 아시아 자동차

아시아 대학교만큼이나 지금은 사라진 회사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그 대학처럼 막장 행보를 간 회사는 물론 아니었다.
금호 그룹만큼이나 국내에 얼마 안 되는 호남 기업 중 하나이다. (그래서 공장도 광주에~!) 그러고 보니 아시아나 항공도 이쪽 계열사인데, 이 이름도 '아시아'에서 유래되었다. ㅎㅎ

197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피아트를 판매하다가 나중에 기아 자동차에 인수되었다. 둘 다 기업 앰블렘이 비슷하게 생긴 게 이 때문인 듯하다. '록스타'라는 SUV, 콤비· 코스모스라는 버스, 타우너라는 트럭이 이 회사의 제품이며, 특히 대형 버스 그랜버드는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는 브랜드이다. 쌍용이 SUV라면 아시아는 버스인 듯.

내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 아시아 자동차에서 만든 시내버스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차내의 선바이저(sun visor)에는 “여행은 아시아 자동차 버스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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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살펴보면 과거에는 PowerPC, Alpha, MIPS 등 여러 아키텍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닥치고 x86(-64) 아니면 ARM밖에 살아남은 게 없다. 프린터는 HP 말고 다른 제조사는 가히 듣보잡으로 전락했고, 그래픽 카드는 nVIDIA에 기껏해야 ATI나 인텔 말고 지금 생존한 물건이 있나?

그런 것처럼 자동차도 과거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제조사들이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기술과 자본줄이 탄탄한 한두 업체 말고는 다들 몰락했다. 사실은 어느 분야라도 안정화가 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이 와중에 시종일관 살아남았고, 완전히 새로운 차를 밑바닥 부품부터 스스로 다 설계하고 창조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국내 기업은 사실상 현대가 유일하다.

물론 그게 전적으로 현대의 기술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닐 것이다. 보호 무역 버프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로부터 지원과 특혜도 엄청 받았을 것이며 “내수는 비싸게, 수출은 싸게” 식으로 온 국민이 간접적으로 국내 기업을 육성하는 데-_- 일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런 특혜를 입지 않고서야 이미 수십년 이상의 격차가 존재하는 외국의 넘사벽급 자동차 기술을 어떻게 따라잡겠는가? 또한 그렇게 혜택을 처묵처묵하고도 먹튀하는 막장 기업도 많은 판에, 현대 정도면 그래도 다른 기업들보다 기술을 중시하여 성장도 많이 했다. 그로 인한 막대한 양의 수출+일자리와 국부 창출은 덤이고 말이다.

어쩌다 보니 현대를 좀 칭찬하는 논조가 되고 말았는데, 난 딱히 현대 자동차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저 “깔 건 까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라는 중립적인 시각임을 밝힌다. 철도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자동차 쪽 덕질을 오랜만에 해 보니 재미있다. ^^

Posted by 사무엘

2012/10/01 19:32 2012/10/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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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서 특별히 성경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영어 성경이란 건 위클리프 이래로 킹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아주 점진적으로 발전이 이뤄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성경전서(위클리프), 최초로 왕이 승인한 성경(커버데일/그레이트), 최초로 국내에서 인쇄(매튜), 최초로 중역이 아니라 원어에서 곧장 번역(제네바), 최초로 위원회가 조직되어 번역(비숍), 최초로 장· 절 구분 추가(제네바) 등등~~
그러다가 이 모든 장점들이 합쳐져서 성경의 종결자를 이룬 것이 킹 제임스 성경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도 그렇게 점진적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가 개통한 게 잘 알다시피 1899년 경인선인데, 그 무렵에 왕이나 외국 외교관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최초로 자동차라는 기계가 다니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에 고종 황제가 탄 어차(御車)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다임러 리무진이었으며, 운전대는 오른쪽에 달려 있었다. 다만, 오늘날 전해져 오는 건 그 다음 1910년대에 도입된 순종 어차 위주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시보레, 포드 같은 수입 외제차가 부유층을 중심으로 도로를 누볐다. 드라마 각시탈을 보니 올드카를 애써 임대한 것까지는 좋으나, 운전대가 우측통행을 염두에 둔 왼쪽에 있는 것은 고증 오류이다. 그 시절에는 한반도에서도 차량이 일본처럼 좌측통행을 했다.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자동차 광고)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자동차 정비 공장까지는 있었지만, 그 불모지에서 자동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랬는데 최 무성· 최 혜성· 최 순성 엔지니어 삼형제가 국제차량제작이라는 무슨 다국적 기업 같은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고, 1955년에 '시발(始發..;;)'이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만들어 냈다. 수입한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이게 바로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대한민국 땅에서 한국인이 최초로 만들어 낸 자동차이다. 해방 후의 시기이니 운전대는 왼쪽, 주유구는 오른쪽으로 우측통행 기준이다.

1960년대부터의 국내의 자동차 역사는 회사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기아

창업주가 한 근성 하는 분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부터 차근차근 자전거, 오토바이, 삼륜차를 거친 끝에 마침내 자동차까지 직접 만드는 수준으로 기업을 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천리 자전거가 원래 기아 산업의 계열사였다.

기아에서는 1960년대에 일본 차체를 바탕으로 삼륜차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은 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삼륜차가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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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차는 승용차가 아니라 트럭 형태로만 만들었던가 보다.
이런 차는 덩치가 작아서 좁은 골목길에 잘 들어가고 가격과 유지비도 저렴해서 실속이 있었다. 그래서 짐 실어 나르는 생계 수단 및 사업 밑천으로 차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잉여가 된 '1종 소형' 면허가 바로 삼륜차 운전이 가능한 면허이다.

1974년에 기아는 기존 일본차(마쓰다 파밀리아) 프레임을 기반으로 '브리사'라는 소형 승용차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산 보급형 승용차라고 한다. 정부가 요구한 수준의 국산화율을 가장 먼저 달성하였으며, 배기량도 1000cc대의 소형이어서 당대 세계 경제를 강타하던 오일 쇼크에 대응하기에도 유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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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등학생 시절이던 1990년대 초에 브리사 실물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더욱 애증이 교차한다. 하지만 멀쩡한 모습뿐만 아니라 사고가 나서 부서진 폐차 상태의 모습으로도 많이 봤다. 사진으로는 저 흰색 사진이 유명해서 인터넷에 많이 나돌지만, 본인은 자주색 도색을 더 자주 봤다. 그리고 브리사 2는 실물을 본 적이 없다.

기아에서는 이미 브리사의 디젤 모델까지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에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승용차 생산을 못 하게 되면서 계획은 흑역사가 되고, 그 대신 봉고(1톤급 소형 승합차 및 트럭), 타이탄(2.5톤 트럭), Boxer(4.5톤 트럭) 같은 다른 차종에서 근근히 인지도를 유지하게 된다. 특히 트럭으로는 유일하게 사륜구동이 가능한 영농인 최적화용 트럭인 '세레스'를 만들기도 했고, 비슷한 맥락에서 레토나나 두돈반 같은 군용차도 이 회사에서 만들어서 납품한다.

훗날 산업 합리화 조치가 풀리면서 기아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승용차 프라이드를 내놓고, 중형차로는 콩코드를 밀기 시작했다. 1990년대로 들어서서는 캐피탈, 세피아, 크레도스 등 다양한 차들을 만들었으나, 오늘날은 쏘나타의 경쟁 모델인 K5, 그랜저의 경쟁 모델인 K7 같은 식으로 K_n이라는 간단한 네이밍으로 자사 제품에 이름을 붙이는 듯하다.

기아 자동차 소속 공장으로는 과거의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광주 공장, 화성 공장, 그리고 광명 소하리 공장이 있다. 다만, 잘 알다시피 기아 그룹이 IMF 시절에 부도가 나면서 오늘날 기아 자동차는 현대 자동차 그룹의 계열사가 되었다. 현대 자동차 그룹 아래에 현대 자동차와 기아 자동차가 나란히 있는 셈이다. 응?? 그래서 오늘날 생산되는 현대 차와 기아 차는 일부 엔진 부품이 상호 호환되기도 한다.

※ 대우

한때는 세계 경영(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을 부르짖으며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던 대기업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브랜드로 전락했다. 안습.

대우 자동차는 현대나 기아에 비해서는 기업의 정체성을 설명하기가 다소 복잡하다. 신진 자동차 공업, 새나라 자동차, 새한 자동차 등 경영 주체가 여러 번 바뀌었던 회사가 최종적으로는 GM 코리아를 거쳐서 대우 계열사로 넘어온 형태이기 때문이다. 대우 자동차라는 정식 명칭이 붙은 회사가 생긴 건 1983년의 일이다. 물론 이 이름은 그로부터 20년 남짓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1990년대 초반에는 가끔 완전 옛날 스타일의 대형 트럭이 보였다. 요즘 국내에는 군용차를 제외하면 버스나 대형 트럭이 엔진룸과 앞바퀴가 운전석의 앞에 달린 형태가 없으며, 그런 건 미국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트럭은 미국 스타일이었고, 앞에 SMC라는 이니셜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새한 자동차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중반, 새한 자동차 시절에는 시보레 1700 프레임을 기반으로 제미니, 카미나 같은 차를 내놓았다가 최종적으로는 순우리말 명칭인 '맵시', '맵시-나'라는 소형차를 만들어서 현대 포니 및 기아 브리사와 경쟁했다. 이 차의 후속 모델이 바로 1980년대 중반에 출시된 르망이며, 현대 엑셀 및 기아 프라이드와의 경쟁 차종이다.

1980년대에 대우에서는 중· 대형차로는 로얄/살롱 브랜드를 밀었다. 로얄 XQ, 로얄 살롱, 슈퍼 살롱, 로얄 프린스 등등~ 이것은 독일의 GM 계열사인 오펠 사에서 생산한 '레코드'라는 차종의 파생형이다. 뒤이어 임페리얼이라는 희대의 기함급 차종을 내놓기도 했으나, 이것은 품질 문제로 인해 흑역사가 되었다.

이 시절에 계기판이 디지털 액정(자동차의 주행 속도가 아라비아 숫자로 뜸!)이고 헤드라이트에까지 와이퍼가 달린 차는 대우 차밖에 없었다. 그랜저에도 그런 오버스러운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우는 외제차 프레임을 우려먹기만 할 뿐 여타 토종 자동차 회사들에 비해 고유 모델과 기술의 개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으며, 이것이 훗날 회사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대우에서는 대우 국민차라고 대우 조선(대우 자동차가 아님!) 산하의 다른 계열사를 통해, 그 이름도 유명한 '티코'라는 경차를 만들기도 했다. '다마스'와 '라보'라고 경차형 승합차와 트럭도 만들었고 심지어 지금도 종종 굴러다니는 게 보이지만, 역시 티코의 인지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한때 대우가 쌍용 자동차를 인수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번복되었고, 대우 그룹의 경영 악화로 인해 오히려 자기가 GM으로 다시 인수되었다. 2011년부터는 잘 알다시피 GM대우라는 이름에서 '대우'라는 단어가 아예 빠지고 그냥 '한국GM'이 되었다. 그렇게 자동차 제조사로서 대우라는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까지도 버스에서는 대우라는 브랜드가 압도 다수의 인지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우 버스'는 지금의 한국GM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다른 기업이다.

※ 현대

현대 그룹의 창업주이고 일명 '왕 회장'이라고도 불리는 그분이 자동차 정비업에 만족하지 않고 자동차 제조업에까지 손을 뻗침으로써, 1967년부터 현대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공장은 울산과 아산에 있는 걸로 아주 잘 알려져 있고..

물론 현대라고 해서 용 빼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맨땅에서 자동차를 스스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미국 포드 사로부터 기술 협력을 받아 미국 차인 코티나(Ford Cortina)를 국내에서 면허 생산했다. 그러나 포드와는 곧 결별하고 일본 미쓰비시 사와 제휴를 했는데, 현대 차들이 이례적으로 연료 주입구가 대우 차들과는 달리 오른쪽에 아닌 왼쪽에 달려 있는 게 이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승용차 '포니'를 빼고서 현대 자동차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포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이다. 비록 여전히 일제 부품으로 엔진을 만들었고 설계도 한국인이 아닌 이탈리아의 '쥬지아로'라는 디자이너가 했지만, 어쨌든 현대 자동차는 1976년 이전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모양의 자동차를 한국 땅에서 생산해 냈고 수출까지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D를 형상화한 현대 자동차의 옛 앰블렘이 참 인상적이다.
당장은 이득이 없는 것 같은 무모한 도전을 통해 경험과 기술이 쌓일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대 자동차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9/29 08:27 2012/09/2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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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서울역-DMC는 서울에 있는 도시철도/광역전철 중 배차간격이 가장 긴 구간이다. 사실 인서울뿐만이 아니라 수도권 전체, 아니 전국의 지하철까지 다 포함해도 말이다. 1시간에 1대꼴이니 이건 배차가 길기로 악명 높은 중앙선이나 2호선 지선조차도 가뿐히 관광 태우기에 충분하다.

이 구간에 열차가 이렇게 드문 이유는 잘 알다시피 용산-서울역에서 수색 기지로 입출고하는 KTX 포함 일반열차들이 차지하는 트래픽 때문이다. 몇 분 간격으로 화물도 아닌 여객 열차들이 드나드니, 이곳 선로를 2복선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는 이상 경의선 전철은 도저히 더 늘릴 수가 없다. 수색 기지를 지난 뒤인 DMC 이북부터나 현재의 중앙선과 비슷한 수준으로 열차가 다니는 실정이다.

서울역-DMC 사이에 있는 경의선의 중간 경유역으로는 신촌과 가좌가 있다. 외곽의 차량 기지 주변의 시종착역도 아니고, 엄연히 서울 중심부에 이런 특이한 역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신촌은 지하철 2호선의 역과 이름이 겹치기도 하기 때문에 흔히 '기차 신촌 역'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엄밀히는 경의선 신촌 역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신촌과 가좌는 이렇게 열차 운행 위상은 동일하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가히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신촌은 연세대와 이화여대에 인접했다는 천혜의 위치 덕분에 이용객이 많고 진작에 큼직한 민자역사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넓은 광장까지 있다! 일반열차도 안 서고 1시간에 1대꼴로 다니는 전철밖에 없는 것치고는 상당히 과분한 대우이다. 아담하던 구역사는 진작에 한쪽 구석으로 이설되었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그 반면 가좌 역은 아직 신역사가 건설 중이고 구역사는 서울 시내의 '간이역'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직접 가 보면 그 초라함과 허접함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가좌 역에서 내리면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은 급조한 듯한 임시 섬식 승강장 하나이다(그러고 보니 신촌도 섬식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역사는 선로와는 따로 작은 건물로 존재하는데, 승강장에서 거기로 가려면 놀랍게도... 철길을 건널목으로 평면 횡단해야 한다! 수도권, 고상홈 전동차를 타는 역에 선로 평면 횡단이 존재하는 역은 수도권, 아니 전국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가히 수도권 전철계의 '영동선 스위치백' 같은 유물(legacy)이지 않은지?

역 건물은 한 층밖에 안 되고 냉방도 없이 철도 대합실 같은 분위기이다. 내부에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이란 게 없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인천 역과 딱 비슷한 분위기이다. 인천 역이 '바로타'이듯이 가좌 역도 '바로타'이다. 다만 인천 역은 종점이다 보니 두단식 승강장이 가능한 반면, 가좌는 그렇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건널목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촌과 가좌 역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철덕이라면 옛날에 용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고 거기엔 중간에 효창, 서강이라는 역이 있었다는 걸 아실 것이다. 용산선은 용산 역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서울 지하철 6호선과 비슷한 선형을 탔다가 가좌 역에서 지금의 경의선과 합류를 했다. 서강 역에는 당인리 화력 발전소로 분기하는 지선도 있어서 발전소에 석탄 공급 화차가 다녔으나, 이 선로는 1980년대에 폐선됐다.

그리고 사실은 용산선이 오리지널 경의선 구간이었다. 경의선은 서울 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더 앞서 있다. 서울 역에서 출발하여 신촌을 경유하는 경의선 신선은 나중에 1920년대가 돼서야 생겼다. 신촌 역이 바로 이 시기에 영업을 시작했으며, 오늘날 서울 역의 전신인 경성 역은 그로부터 수 년이 더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그래서 서울 역 이북으로 신촌, 가좌 쪽으로 가는 선로는 왼쪽으로 상당히 급격한 드리프트가 있고 중간에 터널까지 지난다. 뭐, 용산선도 드리프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경의선 신선은 구선보다도 없는 길을 무리해서 힘들게 만든 흔적이 역력함을 알 수 있다. 경의선이 처음부터 서울 역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런 곡선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선로는 용산 대신 경성/서울 역을 뒤늦게 한반도의 허브 철도역으로 육성하기 위한 결과물인 것이다.

용산선은 여객 취급은 안 하고 코레일이 내부적으로 비밀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단선 철길이었는데 수 년 전에 드디어 폐선되어 선로가 철거되었다. 그러나 해당 구간은 지하화되어 복선 전철로 재건설되고 있다. 이미 공항 철도가 동일 구간을 아주 깊숙히 지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수도권 전철 경의선은 지하에서 용산까지 간 후, 지금의 중앙선 복선 전철과 직통 운행을 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도 글로 썼듯이, 서울 역에 공항 철도가 들어왔다면 용산 역엔 경의선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경춘선 ITX 청춘에 이어 경의선까지 말이다!

신촌과 가좌의 미래의 위상은 여기서도 또 갈린다. 가좌는 지하 용산/경의선에 속하는 구간이기 때문에 지하에 승강장이 새로 건설된다. 그런데 용산을 기점으로 하는 지하 경의선이 개통하더라도 지금 신촌을 경유하는 서울 계통 경의선도 여전히 존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들의 인지도와 수요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 지금 DMC에서 멈추는 열차들만 용산까지 그대로 연장되고, 서울-신촌 경유 열차는 변동 사항이 없이 1시간에 1대꼴로 유지된다는 뜻 되겠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초라한 몰골의 가좌 역이지만, 계획대로라면 이 역은 지상 승강장과 지하 승강장을 모두 갖춘 특이한 역으로 거듭날 것이다. 파주, 문산 쪽으로 간다면야 지상과 지하 중 먼저 오는 열차를 아무거나 타면 될 것이며, 용산으로 가려면 지하 승강장으로 가고, 서울로 가려면 시각표 보고 지상 승강장으로 가면 된다.

새롭게 태어나는 가좌 역의 모습이 기대된다. 용산 방면 지하 경의선 복선 전철이 개통하면 이것이 경의선의 본선 역할을 할 것이고, 기존의 서울-신촌 방면 지상 경의선은 열차의 회송이 main이고 전동차는 보조인 지선 성격으로 위상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철덕이라면 환골탈태하기 전의 지금의 가좌 역을 어서 다시 방문하여 구경해 보시기 바란다. 열차가 1시간에 1대꼴로 다니니, 인서울이면서도 어지간한 근성 없이는 찾아가기 쉽지 않은 곳이다. 본인은 밀덕, 역사덕, 애니덕 등 여러 덕 중에서도 하필 철덕이 된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특히 새마을호 Looking for you를 계기로 철덕이 된 것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

Posted by 사무엘

2012/09/27 08:37 2012/09/2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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