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옛날 차들

하루는 인터넷을 돌아댕기다가 심히 놀라운 사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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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세상에~! 바로 이거다. 내가 초딩이던 시절,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이상하게 생긴 자동차가 시골이나 공사장 같은 데에서 종종 굴러다니고 있었다.
경운기 엔진에다 미군 지프 폐차 부품을 얹어서 급조한 소형 트럭. 일명 딸딸이 혹은 '영운기'라고 불렸나 보다. 어떤 건 짐받이를 들어올리는 '덤프' 기능도 있었다.

외형과 덩치는 군용 지프와 기아 세레스(과거 기아 자동차에서 생산한 사륜구동 1톤 트럭)를 짬뽕한 듯하다. 개인 작품인지, 아니면 어느 기업에서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옛날에 시발 자동차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부품을 조립해서 만들어지기도 했을 테고.

난 실물을 본 적이 없는 삼륜차도 알고 있는데, 정작 실물을 본 적도 있는 영운기는 21세기 이래로 내 머리에서 존재감이 15년~20년 가까이 완전히 잊혀지고 봉인되어 있었다.
그랬는데 이 사진 덕분에 기억이 순식간에 싹 되살아났다. 너무 반갑다.

영운기는 등록증도 번호판도 없고 각종 세금이나 보험이 붙은 정식 자동차가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 겨우 저런 허접한 물건이 대포차로 둔갑해서 범죄에 악용되기라도 할 가능성은 0이나 마찬가지니까..
경운기 엔진이 최고로 돌아 봤자 단기통에 출력도 10마력대에 불과한데 힘과 속도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그래도 얘는 동력비를 조절해서 순수 경운기+트랙터보다는 빠르게 최대 시속 50~60km까지는 달렸다고 한다.

참고로 경운기의 엔진은 일반 자동차용 디젤 엔진보다 공기 압축비를 더 높여서 작은 덩치와 저회전 상태로도 성능과 연비를 더욱 무리해서 짜낸 형태이다. 농기계는 기름 덜 먹고 경제적이면 장땡이지, 필요 이상으로 고성능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대신 경운기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일반 자동차보다 털털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더 심하며, 시동을 걸기도 더 힘들다고 한다.
다만, 승용차처럼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시동이 안 걸린다거나 밀어서 시동을 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뭘 손으로 빙빙 돌려 주면서 시동을 걸었던 것 같다.

자, 이것과 함께 문득 떠오른 추억의 대형 화물차가 있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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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 자동차가 내놓은 8톤 덤프 트럭이다. 혹시 얘 기억하시는 분?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생산되었던 물건이다. 참고로 새한 자동차는 오늘날 한국 GM의 할아버지뻘 되는 기업이다. (한국 GM의 전신은 대우 자동차, 그리고 대우 자동차의 전신이 새한 자동차임) 하지만 이 차의 원형은 이스즈(Isuzu) TX/D 시리즈로, 미국차가 아닌 일본차라고 한다.

내가 이 차를 기억하는 건 엔진룸이 운전석의 아래가 아니라 앞에 돌출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군용차가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앞에 SMC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도 기억한다. 도색은 저렇게 국방색 아니면 파란색 두 종류였던 것 같다.

얘는 1990년대에도 이미 보기가 대단히 힘들어진 올드카였다. 그런데 하물며 2010년대는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지금도 극소수 포니가 굴러다니고 있는 것처럼 제주도 포함 일부 벽지에는 '아직도' 새한 트럭이 현역으로 뛰고 있긴 한가 보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용으로 국내외의 올드카를 대여하는 것도 사업 아이템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추억을 되살리니 참 훈훈하다. 게임도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고전을 좋아하고 자동차도 고전...
난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물론이고 철도, 한글 세벌식, 킹 제임스 성경 같은 것도 하나도 까맣게 모르던 시절, 10살도 채 되기 전에는 월간 자동차생활과 승용차 취급 설명서를 읽으면서 자동차에 매달린 채 지냈다.

그 기질은 훗날 컴퓨터를 비롯한 다른 관심 분야들에 밀려서 점차 봉인되었으나, 그 봉인이 2010년도에 들어서 다시 풀렸다.
(1) 일단 철도 때문에 교통수단간의 체계적인 비교 분석이 시작되었고, (2) 실제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딱히 기계 뜯어보는 걸 좋아하는 공돌이가 아니며, 딱히 자동차가 남자의 로망이고 능력의 상징이어서 그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20여 년 전의 옛날 생각이 나서 추억을 회상하는 그 느낌이 좋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09 19:37 2014/04/0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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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GUI 구성요소 중에 콤보 박스는 굉장히 유용한 물건이다.
공간을 적게 차지하면서 리스트 박스의 역할을 고스란히 수행할 수 있으며(비록 다중 선택은 안 되지만)
에디트 박스(입력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예전에 사용자가 입력했던 문자열이나 샘플이 될 수 있는 디폴트 값을 곧장 선택할 수 있게도 해 주기 때문이다.

입력란이 없이 선택만 가능한 타입을 Windows에서는 drop list 형태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콤보 박스에서는 마우스 휠을 굴리거나 상하좌우 화살표를 누르면 선택 항목이 인접한 다른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키보드 F4 내지 Alt+상하 화살표를 누르면 리스트가 화면에도 뜬다. 이것이 표준 동작 방식이다.

그런데 Windows는 이것과 약간 다른 형태의 동작 방식도 지원한다. 일명 extended UI라고 들어 보셨나 모르겠다.
이 모드를 사용하는 콤보 박스는 일반적인 기능은 여느 drop list 콤보 박스와 완전히 똑같다.
그러나 얘는 일단 마우스 휠에 반응하지 않는다. 클릭을 하거나 아래 화살표를 누르면 먼저 리스트부터 나타난다. 그 뒤에야 상하 화살표나 마우스를 이용해서 선택 아이템을 변경할 수 있다.
다른 프로그램들에서 이렇게 동작하는 콤보 박스를 본 기억이 있으신 분 계신가? 이런 콤보 박스는 매우 드물고 보기 힘들긴 할 것이다.

extended UI가 지정된 콤보 박스는 아이템 선택을 바꾸는 게 번거롭다. 굳이 리스트를 꺼내지 않고 간편하게 선택을 바꿀 수가 없으며, 리스트를 여는 키보드/마우스 동작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이런 모드를 왜 넣었는지 본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혹시 Windows 3.x 시절에는 콤보 박스가 원래 이렇게 동작하기라도 했었나?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의 GUI와 호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는지?

호환성이 이유라면 차라리 모든 콤보 박스들이 extended이든 그렇지 않든 사용자가 지정한 방식으로 동일하게 동작하도록 제어판 설정 같은 걸 추가하면 된다. 굳이 각각의 콤보 상자에 따로 적용되는 옵션으로 둘 필요는 없다.

더구나 extended UI의 사용 여부는 내가 아는 한은 어느 개발 환경에서도 리소스 차원에서 개체 속성의 수정만으로 간단히 지정하는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 반드시 코딩을 통해서 지정해 줘야 하며, API의 형태도 구리다는 뜻이다.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다.

CB_GETEXTENDEDUI 메시지를 보내서 사용 여부를 얻어 오고, CB_SETEXTENDEDUI로 지정하면 된다. 진짜로 BOOL 값 하나를 달랑 얻어 오거나 지정하는 get/set 함수 형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트리 뷰나 리스트 뷰 같은 공용 컨트롤의 경우, 지정할 수 있는 속성이 워낙 많다 보니 운영체제가 기본으로 할당해 주는 스타일과 확장 스타일(extended style)로도 공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체적인 추가 확장 스타일을 얻거나 지정하는 메시지가 따로 존재한다.

그러나 콤보 박스는 필요한 정보량이 겨우 1비트에 불과하고 그 정도면 그냥 CBS_(EX)_EXTENDEDUI 같은 스타일 비트 하나만 추가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잉여력이 충만한 옵션인데 왜 사용하기도 번거롭게 만들어 놓았나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니... 반대로 잉여로운 옵션이니까 API도 그렇게 따로 뚝 고립시켜 놓은 것인지도?

옛날에는 extended UI를 리소스 에디터에서 속성 변경만으로 곧장 지정했던 것 같기도 해서 지금 비주얼 C++의 리소스 에디터를 뒤져 보고, 심지어 비주얼 C++ 6 같은 옛날 버전들도 살펴봤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그 대신, 비주얼 C++ 4~6이 사용하던 옛날 프로퍼티 대화상자가 사용하는 콤보 박스가 extended UI를 사용하는 것을 확인했다. 마우스 휠이 동작하지 않으며, F4 대신 아래 화살표를 누르면 drop list가 나오더라.
그리고 그러고 보니.. MS 오피스 프로그램들, 특히 대화상자들까지 운영체제의 표준 GUI 대신 자체 GUI를 쓰는 Word와 Excel의 경우, 모든 콤보 상자들이 extended UI 기반이긴 하다.

운영체제의 GUI를 API 날것 형태로 그대로 제공하는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재분류도 해 놓은 닷넷(C#)이나 비주얼 베이직 6의 폼 에디터도 살펴봤다. 콤보 박스를 집어넣었지만 딱히 extended UI 속성을 지정하는 프로퍼티는 보이지 않는다. (단, 델파이까지는 못 살펴봄)

이상, Windows의 기본 GUI에 존재하는 어느 대단히 잉여로워 보이는 기능과 불편한 API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지금이나 앞으로나.. extended UI가 적용된 콤보 상자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노턴 유틸리티의 GUI(뭐, 텍스트 모드에서 GUI를 비슷하게 흉내 내며 동작한 것이니 정확히 말하면 TUI?)가 제공하는 콤보 상자는 Ctrl+아래 화살표를 눌러야 리스트가 떴었는데 Windows는 F4 또는 "Alt+아래 화살표"이구나.

여담을 하나 남기며 글을 맺겠다.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각종 Win+? 단축키에 대한 설명은 컴퓨터 활용 팁 같은 데에 많이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기본 컨트롤 자체에 대한 팁 정보는 상대적으로 문서화나 공유가 덜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복수 선택이 가능한 리스트 컨트롤은 Shift+F8을 눌러서 복수 선택 모드로 진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 말고도 내가 모르는 기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왜 하필 그냥 F8도 아니고 Shift+F8인 것이며 그 유래는 무엇일까?
그리고 리스트 뷰 컨트롤은 아이템 이름을 바꾸는 단축키가 왜 하필 F2일까? 이런 것에 대해 좀 더 알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04 08:31 2014/04/0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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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e의 대체제

확실히 #define은 다른 걸로 대체 가능할 때는 가능한 한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C++은 용도별로 다음과 같은 다양한 대체제를 제공한다.

1. 매크로 함수의 대체제: 인라인 함수로 대체 가능하며, 템플릿까지 동원하면 매크로 함수 만만찮은 유연한 메타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또한 한 함수 안에서만 지엽적으로 반복되는 루틴을 정리하려면 C++0x부터는 람다 함수를 쓸 수도 있다.

2. 매크로 상수의 대체제: 정수의 경우 enum을 쓰면 같은 성격의 여러 심벌들을 한데 묶어 놓을 수도 있어서 좋다.
그리고 문자열은 그냥 const char/WCHAR 형태의 전역/클래스 static 변수로 처리함. 선언과 정의가 따로 존재해야 해서 불편할 수 있으나, 이것은 선언부에다 값을 다 집어넣고 확장 문법인 __declspec(selectany) extern const 를 지정해서 해결할 수도 있다.

아무 통제도 없이 너무 일방적으로 효력이 나타나는 #define보다는 저런 대체제들이 type-safety와 엄격한 scope 검증이 보장되기 때문에 "훨씬 더" 깔끔하다. 가능한 한 전처리기보다는 컴파일러에게 일을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
내가 만든 명칭이 매크로로 이미 존재하여 딴 걸로 치환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컴파일러가 자꾸 이상한 난독증을 보이며 에러를 뱉는 것 때문에 빡친 경험이 있는 사람.. 주변에 의외로 많다. ㅎㅎ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제가 존재하지 않아서 #define을 불가피하게 써야만 하는 경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if #elif #endif 같은 조건부 컴파일 변수 지정

2. 함수 형태를 갖추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너무 간단한 로직. 디버그 빌드에서도 독립된 함수 호출이 아니라 언제나 인라이닝이 반드시 보장되기를 바라는 부분

3. 호출하는 함수나 지정하는 변수 이름을 말 그대로 간단히 치환만 시키기를 원하는 경우

4. 대체제의 문법적 한도를 넘는 과격한 구문 치환을 해야 하는 경우. 특히 #나 ## 같은 연산자를 동원해서 완전히 새로운 토큰을 만들어 내야 할 때

5. __LINE__, __FILE__, __TIME__ 같은 빌드/디버그 정보를 그때 그때 삽입하고 싶을 때

6. 정수와는 달리 부동소숫점과 문자열은 여전히 #define이 유용한 경우가 있다.
부동소숫점은 enum이 지원되지 않고 static const 멤버도 클래스 선언부에서 바로 값 지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걸 지원하는 컴파일러도 있긴 하나, 일단은 비표준임)
문자열은 매크로 상수의 경우, concatenate(연결)되는 문자열의 일부가 되는 게 가능하다. const 상수는 그렇지 않다.

#include와 #define이 너무 지저분하고 컴파일 시간을 증가시키는 요인이라며 없애자니.. 위와 같은 용도까지 부정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이긴 하다.

여담으로..
근래엔 남이 만든 코드를 읽다가 IID_PPV_ARGS라는 매크로를 보고 감탄하여 내가 짠 기존 코드에다가도 다 리팩터링을 해서 적용해 놨다.

CoCreateInstance와 IUknown::QueryInterface 때 꼴도 보기 싫던 void ** 형변환을 없애 주는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물건이다. COM이 등장한 건 무려 20년이 넘었고 C++에 템플릿이 추가된 것도 만만찮게 오래 됐을 텐데 이 매크로는 무려 Windows 7의 플랫폼 SDK에서야 정식 등장했다는 게 놀랍다.
매개변수 2개를 하나로 줄이는 역할까지 하니 이 정도라면 컴파일러가 아니라 전처리기 매크로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01 19:20 2014/04/0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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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자동차

요즘 교통수단이라는 건 사람이 단순히 말 타듯이 위에 타는 형태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조종하는 형태를 가정하고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큼직하고 안에 공간도 제법 있으며, 이걸 또 다른 교통수단에다 싣는 건 거대한 화물선이나 트레일러급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가능치 않다. (자전거는 엔진이 달린 '자동차'는 아니니까) 그러니 배는 말할 것도 없고 승용차 정도만 돼도 법적으로 준부동산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컴퓨터도 들고 다니고, 전화기도 들고 다니는 세상에 휴대 가능한 1인용 초소형 교통수단에 대한 연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제트팩도 있는데 하물며 더 저렴한 자동차가 휴대용 버전이 없겠나?
쉽게 생각해 보시라. 막히는 곳에서는 사람이 그냥 차를 들고 성큼성큼 걷다가, 도로가 나오면 다시 차를 펼쳐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주차를 따로 하는 게 아니라 차를 접어서 같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가능하다면 이 또한 매력적일 것이다.

내가 아는 휴대용 교통수단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일본 마쓰다 자동차에서 여행용 캐리어 정도 크기에 쌀 한 가마니 남짓한 무게의 1인용 휴대용 자동차를 만든 게 있다. 초소형 1기통 2행정 가솔린 엔진으로 최고 시속 30km 남짓을 낸다고. 기발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근데 난 저거 굉장히 옛날에, 20년도 더 전에 봤었다. 199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월간 자동차생활 잡지에서 처음 본 거니까..
내연기관 대신 그냥 전기 모터를 썼으면 더 작고 가볍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전동 휠체어랑 뭐가 다르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환자가 타는 용도가 아니니까 탑승자가 더 꾸부정하게 불편한 자세로 앉아도 되고, 그만큼 차지 면적과 기계의 크기를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 그리고 최근에 개발된 물건으로는 외륜 오토바이가 있다. 얘는 전기로 달린다.
타이어 폭이 크고 손잡이도 있기 때문에 외발자전거보다야 타거나 중심 잡기는 쉬울 것 같다. 외발자전거 타는 게 취미인 분에게는 무척 흥미로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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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 모습이 좀 스카이 콩콩처럼 생겨 보인다만, 그건 그냥 착시다. ^^

여타 장거리 교통수단에 휴대가 가능하면서 한편으로 자전거보다 오르막을 더 잘 오르고 빠르게 갈 수 있는 편리한 소형 교통수단이 있다면 분명 유용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30 08:27 2014/03/3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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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제관

내 주변의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은 의학이나 공학 쪽의 천재가 아닌 이상은 다들 경제, 금융, 법, 행정 쪽으로 몰리고 있다. 거기가 아무래도 잘 나가고 돈 많이 버는 업종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난 그런 골치아픈 학문은 완전 무관심하고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제관에 관한 한은 다음과 같이 확고한 maxim / principle이 머리에 박혀 있다.

1.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가 공짜로 뭔가를 얻어 쓰고 있다면 그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남보다 더 노력해서 잉여분을 제공해 준 덕분이거나 남의 것을 희생하거나 빼앗았기 때문이다.

2. 정부(또는 국가)는 먼저 국민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는 국민에게 그 어떤 편의나 복지도 제공할 수 없다. 그것도 빼앗은 총량보다 훨씬 적은 양만큼만 되돌려 줄 수 있다. 열심히 일해 봤자 다 세금으로 뜯기는 시스템에서는 어느 누구도 먼저 사업을 벌리고 열심히 일하려 나설 수 없다.

3. 복지 제도는 마치 보험과도 같아서 오· 남· 악용되는 일이 없게 나일롱 수혜자를 정확히 걸러내는 시스템이라는 전제조건이 갖춰져야만 실현 가능하다. 가난 구제는 왜 나랏님도 못 하는지를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탈세나 보험 사기에는 아주 민감한 사람들이, 그것과 거의 똑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복지에 대해서는 보편적 복지를 왜 그리도 너무 쉽게 얘기하는가?

4. 부패한 정부의 폐해는 부패한 기업의 폐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나라가 아무리 나쁘다 해도, 국가가 개인을 착취하는 나라보다 나쁠 수는 없다. 기업은 최소한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입사 안 할 수 있고 사표 쓰고 나올 수 있고, 극소수의 독과점 상황만 아니라면 제품 불매 운동이라도 벌여서 응징할 수 있다.

5. 성장을 좋아하든 분배를 좋아하든, 어떤 경제관을 갖든, 이상적인 부의 분배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개인 자유이다. 그러나 그 경제관은 당신이 월급쟁이일 뿐만 아니라 직접 사업을 하고 남을 고용하고 월급을 "주는" 처지가 됐을 때도 똑같이 유지할 수 있는 관점이겠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6. 사유재산과 자유 시장은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그나마 빵의 크기를 키우고 다같이 잘 살게 하는 쪽으로 발산되게 하는 좋은 경제 제도이다. 빈부 격차도 없을 수가 없으며, 때로는 돈으로 돈을 버는 것도 필요하다. 돈으로 돈을 불려서 부자를 훨씬 더 부자로 만드는 걸 허용하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을 작은 부자로라도 만들 수가 없다. 또한 산업 인프라가 대량 생산 위주로 중앙 집중이 돼야 제품의 생산 단가가 내려가고, 덕분에 공산품은 싸고 인건비는 비싼 바람직한 경제 체제가 구축될 수 있다. 이게 그냥 공짜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개인의 local maximum을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언제나 집단 전체의 이익을 키우지는 않으며, 시장이 아무 통제가 없으면 치킨 게임, 눈치 보기, 담합, 독점 같은 부작용이나 데드락도 생긴다. 당장 이익이 안 나더라도 국가에서 먼 미래를 보고 비효율적인 아이템을 밀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정부만이 마냥 해결책이고 뭐든지 국가가 나서서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상당히 조심하고 제한적으로 걸러서 들어야 한다.

간부가 아무리 미워도 간부 없이 군대가 돌아갈 수는 없으며 정치인들이 아무리 미워도 이 악한 세상이 정치 없이 돌아갈 수는 없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같은 건 영구 기관만큼이나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죄성상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속이는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사유재산과 시장 경쟁의 혜택은 실컷 입었으면서 정작 자기는 이상한 음모론 제기하고 비방만 하는 '헛똑똑이'들을 우리는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정부의 비효율은 한번 놔 두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시장을 왜곡하고 민생을 헬게이트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을 애들에게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27 08:39 2014/03/2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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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 문명에 대한 짧은 생각

나는 내 신앙관과는 별개로 현대의 눈부신 과학 기술과 물질 문명, 문명의 이기, 제도권 의학을 매우 사랑하며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본다.
그에 대해 되도 않은 방식으로 부작용· 폐해만 부각시키며 폄훼하는 음모론, 그리고 대안이랍시고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가네, 이상한 유사과학 끄집어내는 것들을 기본적으로 경멸하며 부정적으로 본다. 역사적으로 다 검증된 시행착오로 왜 또 복귀하려 하냐?

우리나라가 해방 이래로 이 정도로 인권이 발달하고 자유 민주주의 지수가 오른 건..
일단 나라가 올바른 이념으로 건립되었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국민 개인이 등 따시고 배부르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덕분이다.
거기서 민중 항쟁? 데모질, 시위가 기여한 건 아예 0은 아니겠지만 비중이 굉장히 낮다고 본다.
북한이 인민들의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부족해서 저 지경이 된 게 절대 아니란 말이다. 닥치고 총칼 폭력 위협과 굶주림 앞에서 장사 있냐?

내가 예전에도 여러 번 언급한 비유이다만.. 솔로몬의 재판을 생각해 보자.
세상 정부가 무슨 예수님이나 솔로몬 같은 완벽한 통치나 재판을 할 수는 없다. 세상 정부로부터 종교적인 면모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걸 바랄 수 없다면, CCTV나 유전자 감식으로라도 진짜 애엄마를 가려내는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 엔지니어들이 마땅히 칭송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양심을 믿을 수 없다면 양심이 필요하지 않은 시스템을 개발한 학자라도 칭송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나 정교분리 이념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이 점을 더욱 명심해야 한다.

과학 기술 덕분에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이 인건비에 비해 크게 내려가고 인간의 복지가 향상되고 인간은 생존 이외의 다른 창의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죄 짓는 일도 덩달아 증가한 건 전적으로 별개로 생각해야 할 문제다.

과학 기술 덕분에 세상이 더욱 공정하고 질서정연해졌으며, 한 사람의 실수가 집단 전체로 파급될 일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각 개인을 더 선하게 믿어도 되고 군기라든가 끔찍한 일벌백계 같은 게 덜 필요해졌으며, 세상이 덜 각박해져도 되게 되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 피의자를 고문해서 자백을 강요하는 관행을 없앤 것은 뭔 민주화 인권 시위 같은 게 아니라 첨단 과학 수사 기법이다!
  • 옛날에 자연이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하던(?) 시절엔 오히려 인구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더 짧았다. 옛날엔 전염병 때문에 인구가 이렇게 밀집한 대도시가 아예 존재할 수가 없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22 08:38 2014/03/2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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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 발을 코에 대고

'봉은사 땅밟기'....는 아니고 '남극점 땅밟기'를 세계 최초로 성공한 사람은 알다시피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 일행이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인 1911년의 일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예전에 이 사람에 대해 한번 다룬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인 1994년엔 산악인 허 영호 대장이 이끄는 팀이 한국인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썰매를 안 타고 끌면서, 무려 1000km가 넘는 거리--'리'도 아니고 '킬로미터'!--를 도보만으로 이동하여 남극점을 정복한 것은 영국, 이탈리아, 일본에 이어 넷째였다고 한다. 아문센 팀은 알다시피 개가 끄는 썰매를 탄 것이기 때문에 제끼고.

물론 정확하게 같은 거리를 이동한 건 아니겠지만, 아문센은 55일이 걸렸다. 그러나 우리나라 팀은 44일 만에 갔다. 그리고 아문센/스콧 시절에는 탐사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미리 길을 개척하고 보급 물자 기지도 일정 간격으로 준비해 놔야 했지만, 요즘은 GPS가 발달하고 다른 장비와 물자도 좋아진 덕분인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100년 전과는 달리, (1) 중간 보급 없이 (2) 순수 도보만으로 남극점까지 간 것이다.

그러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날짜다. 모든 탐험대들이 남극점에 도달하는 날짜는 한 치의 예외 없이 12월~1월로 맞춰져 있다. 그때가 남반구에서는 한여름이기 때문이다. 계절상으로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탐험대는 현장에서 영하 30도를 밑도는 극심한 추위 때문에 고생한다. 하물며 겨울에는 남극 중심부에 절대로 못 들어간다.

다음 글을 읽어 보자.
1994년 당시 기록은 아니고, 2004년에 남극점을 정복한 박 영석 대장에 대한 보도 자료이다. 하필 공교롭게도 남극 연구소에서 전 재규 대원이 순직(2003년 12월)한 그 기간에 탐험 중이었구나.

남극점으로 가는 동안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대원들끼리 대화 내용이 줄곧 “아.. 난 막걸리 한 사발과 홍어회나 좀 먹고 싶다 / 난 딸기우유 3리터 plz”였댄다.
그리고 수능 출제 위원의 감금 기간보다도 더 긴 6주 남짓한 기간 동안... 저 사람들은 세수, 빨래를 전혀 못 하고 머리도 한 번도 못 감았다고. 으악~~

그 상태로 밤엔 3인용 텐트 하나에 5명의 사람이 뽁짝뽁짝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공간을 아끼려고 “서로 엇갈려 머리를 두고” 잤다고 한다.
“서로 발을 코에 대고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북한 정치범 수용소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잤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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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헌 북한 인권 정보 센터 이사장이 탈북자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서 잘 알려진 바로 이 그림.)

탐사 대원 5명 전체의 한 끼 식량의 무게가 800g에 불과했다고 한다. 5를 나누고 3을 곱하면 그래도 500g 정도는 되겠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오늘날 무보급 남극 탐사가 가능해진 건 아무래도 현대 과학 기술이 접목된 고열량 보존 식품이 개발된 덕분일 것이다. 비록, 이건 일상적인 음식에 비해 맛은 보장을 못 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북한의 저 생지옥에서는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는 죄수들에게 1인당 하루 식량 배급이 강냉이 200~300g 남짓이라고 그런다. 그러니 배급받는 것만 먹었다간 영양실조 걸리고 굶어 죽으니, 쥐도 잡아먹고 쇠똥에 파묻힌 곡식 알갱이까지 끄집어 먹는 거다. 그저 묵념.

극지 탐험 관련 글을 읽으면서도 북한 인권 생각이 날 정도로 내가 우익 성향이 강해지긴 했다.
저 사람들은 그래도 미지의 지대를 개척한다는 자부심으로 고생을 견디며, 무사히 귀환하고 나면 심신이 달련되고 명예라도 따른다. 하지만 이북 동네는 도대체 뭐냐.. 가슴아프다.

2. 비둘기 자세

'비둘기 자세'라고 하면 본인은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3기 4화 요가 교실 편의 병맛 대사를 바로 떠올리면서 낄낄대곤 했다.
“비둘기의 포즈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너 임마 그거 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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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시는가?

‘비둘기 자세’란 게 있다. 남북한의 비둘기 생김새가 정녕 다르지 않을진대, 그 자세의 의미는 남북이 천양지차다.

남쪽 것은 요가의 한 동작이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등 뒤로 팔을 넘겨 뒤쪽 발을 잡아 끌어올린다. 앞가슴을 쭉 내민 비둘기 모습과 닮았대서 붙은 이름이다. 팔과 다리 선을 가꿔주고 옆구리 군살을 빼는 효과가 있단다. 늘씬한 연예인이 이 자세를 취한 사진이 퍼져 너도나도 따라 하는 동작이 됐다.

북녘 것은 고문의 한 방법이다. 양손을 등 뒤로 돌려 벽의 고리에 묶는다. 고리 높이가 바닥에서 60㎝ 정도밖에 안 돼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다. 먹이를 쪼며 걷는 비둘기 모습이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배 속에 든 걸 모두 토해낼 정도로 고통스럽다. 실제로 북한인권을 다룬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이 자세로 촬영했다가 몸에 마비가 왔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남북의 거리가 이만큼 멀다. 맞붙어 한반도고, 한 뿌리 한 겨렌데 이웃나라보다 더 멀고 더 새 뜬다. 한쪽은 못해서 안달이고 다른 쪽은 할까 봐 섬뜩한 비둘기 자세처럼, 말 쓰임새가 다른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 남쪽이 청년실업과 업무스트레스, 노후불안에 떨 때, 북쪽은 굶주림과 질병, 처형의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목숨과 바꾸지 않고는, 최소한 목숨을 걸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공포다. (중앙일보 이 훈범 국제부장)


난 비둘기의 포즈 북한 버전을, 역시 탈북자들이 그린 정치범 수용소 그림을 통해 본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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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런 자세로 있는다고 해서 어떻게 구토까지 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는지 그 역학· 생리학적 원리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굳이 상상하거나 체험하고 싶지도 않고. 어떤 그림을 보더라도 토하는 장면 묘사는 절대로 안 빠진다!

<신이 보낸 사람>의 주연 배우 김 인권 씨는 저걸 체험해 봤더니 정말 작-_-살나게 괴롭고 사지 마비 증세가 오더라고 증언한 바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19 08:25 2014/03/19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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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해 버렸으니 허접한 게 아니라, 오히려 500년이나 버틴 대단한 왕조이다”라는 요지로 조선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서울대 중문과 허 성도 교수가 했다는 강연을 보신 분이 있는가 모르겠다. 본인 역시 오래 전에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조선이 그저 말기에 막장으로 치달아서 망할 만하니까 망했고 먹힐 만하니까 일제에게 먹혔다고만 생각하기에 앞서,
조선 역시 리즈 시절에는 기강과 체계가 굉장히 잘 갖춰진 좋은 나라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식의 황당한 얘기가 아니라 그럴싸하게 들린다.

다른 제도는 몰라도 특히 조선왕조 실록은 훈민정음에 버금가는 위대한 문화 자산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뭔가... "성경에 과학적으로 아주 정확한 진술이 있다.." 그런 예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

본인에게는 그분의 성함이 낯설지 않게 들린다.
저 강연을 한 허 성도 교수는 '한국사 사료 연구소'에 재직하였으며,
유니코드가 정식 제정되기 전에 아래아한글이 제공하던 '제2수준 확장 한자'를 제정하고 글자를 직접 그리기까지 했던 분 중 하나이다. 아래아한글의 도움말 credits에도 이름이 당당히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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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로 우리나라 문화와 관련해서 공적이 뚜렷한 분임이 틀림없다.흔히 한글 전용론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한문 고전을 통해 전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소수의 전문가를 양성해서 고전을 번역을 해야지, 그걸 빌미로 전국민에게 어려운 한자· 한문을 원어 그대로 가르치기에는 국가적인 손실과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허 교수는 그 주장이 가리키는 '소수의 전문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대단한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올해에 갓 정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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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4/03/16 08:16 2014/03/1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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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30일, 5공 시절에 KBS 텔레비전에서는 6·25가 발발한 지 33주년과 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소박한(?) 이벤트를 하나 편성했다.
남북 이산가족까지는 못 하더라도 같은 대한민국 안에서라도(domestic) 원치 않게 헤어지고 연락이 끊어진 이산가족을 매스컴의 힘을 동원해서 찾아 보자는 1시간 반 남짓한 길이의 생방송 이벤트 프로그램이었다.

그랬는데..
이 프로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영된 이후,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상상도 못 한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막혀 있던 봇물이 터졌다.

KBS 사무국은 전화통이 불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일 밤과 새벽까지, 출연 신청도 없이 수천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로 찾아왔으며, 1회로 기획되었던 생방송은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 동안 연달아 방영되는 기염을 토했다.
쉽게 말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고(그 해 9월)와 아웅산 폭탄 테러(그 해 10월)가 벌어진 동안에도 저 프로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라도 내 모습을 내보내서 어떻게든 가족을 찾으려고 여의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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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은 외신으로도 특종을 타고 보도됐으며 기네스북에 당당히 등재되었다.
TV에서 사람을 공개적으로 찾는 건 십중팔구 범죄자 수배밖에 없을 텐데 TV가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을 찾는 역할을 하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태어난 해에 있었던 옛날 일이다. 그러니 난 당연히 직접 체험한 적은 없고,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편린 정도만 머릿속에 지니고 있다.
인터넷, 휴대전화, SNS 없고 전화 보급률도 더딘데 마침 5공 시절에 컬러 텔레비전은 딱 집집마다 보급되던 시절이었으니 기술적으로 시기가 적절했다.

어느 중년의 남매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전화로 연결이 됐다. 혈육 인증을 위해 이름과 가족, 가족사, 신체 특징 같은 걸 물었는데 그게 일치하자..
그냥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 모두 자지러지게 펑펑 울음을 터뜨린 장면이 내 기억에 남는다. 이건 그 어떤 연기로도 제대로 재연할 수 없을 것이다. 방청객도, 아나운서도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이 스튜디오에서 만나게 됐을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성경을 아는 분이라면 이쯤에서 요셉 이야기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창 43:30, 45: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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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도 울어 버린 인간 드라마, 1983년 KBS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그때 TV 출연 신청이 총 10만 건 정도가 들어와서 그 중 절반인 5만 건 정도가 실제 접수되어 방송을 탔으며, 거기서 또 20% 정도 되는 1만여 가족이 상봉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혈육을 끝끝내 찾지 못한 이산가족도 굉장히 많았다는 뜻이다. 6·25가 가져온 분단의 비극은 이렇게 처참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프로가 방영된 때로부터 또 무려 30년이 지나 있다.
참고로 국내 이산가족이 아니라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행사는 대한 적십자사가 민간 차원에서 1971년에 실태를 조사하고 1985년에 한번 추진했던 것 이후로는, 김 대중· 노 무현 정권이 돼서야 성사되었다. 규모는 아무래도 저 국내 이산가족 상봉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상봉 후 재결합은 당연히 안 되고 이 사람들은 잠깐 만났다가 도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만 했다. =_=;;.

그 당시 북한에서는 남한 사람과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행사 몇 달 전부터 평양으로 불러서 밥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굶주린 티, 험하게 산 티를 최대한 감추고 내보냈다. 또한 남한 사람과 만났을 때는 “우리는 수령님, 장군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다”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하라고 세뇌 교육도 당연히 시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데 님 달러 좀”이라고 뒷돈까지 삥뜯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런 궁색한 이벤트도 이산가족의 입장에서는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은지 모르겠다만, 겨우 저런 식의 상봉은 바람직한 통일을 정말로 염두에 둔 조치라고는 볼 수 없다. 남과 북이 정말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개방과 평화 통일을 할 의향이 있다면 상식적으로 그 전에 서신 왕래와 관광 여행부터라도 성사시켜야 하지 않겠나?

구원받은 지체들은 이 세상에서 헤어지더라도 다시 부활하고 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복된 소망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13 08:26 2014/03/1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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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삼일절엔 두 가지 볼일이 있어서 합정 역 일대를 방문했다.

먼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과 1, 2학년 학생들이 주최한 “서울여자, 취미는 한글” 전시회를 관람했다.
한 재준 교수님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레터링 수업을 듣고 결과물로 만든 작품을 전시한 듯하다.
장소는 <벼레별씨>라는 카페 건물인데, 합정 역 7번 출구로 나온 뒤 뒤돌아서 우리 은행 건물이 있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300미터가량 직진하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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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작품에 대한 설명은 땅바닥에 쓰여져 있는 게 인상적임.
한글은 앞으로는 가변폭 글꼴이 대세가 돼야 하며, 영문 글꼴처럼 다양한 metric을 지닌 들쭉날쭉 창의적이고 기상천외한 글꼴이 많이 나와야 하리라 여겨진다.

원래 3월 2일까지 하기로 예정됐던 전시가 3월 8일까지로 연장돼서 아직 시간이 며칠 더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가 보시길 바란다.

혹시나 해서 독자 여러분께 당부하는데... 내가 북한 비판하고 종북들 까는 글, 철도 찬양하는 글을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빈도가 지나치게(?) 잦아진다고 해서, 내가 내 본업을 잊어버린 건 절대로 아니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길.
오히려 내 진짜 본업과 생업은 입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잠수 탄 상태에서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자, 합정동까지 온 김에 이거 다음으로는.. 근처의 유명한 기독교 유적지를 들렀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와 선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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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서울이 강북 4대문 안으로 완전 코딱지만 하게 작던 시절엔, 강변은 완전 외곽 변두리였다. 군사 요새가 있고 사형장, 묘지 같은 거나 있을 정도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양화진은 바로 그런 곳이었으며, 그래서 묘지도 있고 바로 근처엔 절두산 같은 종교 성지도 존재한다(난 거기까지는 안 갔음).

우리나라는 천주교가 먼저 전래된 뒤에 흔히 개신교라고 불리는 기독교 교파들이 구한말에 들어왔다.
자국 정부에 의한 박해와 순교는 천주교에 더 많이 남아 있는 반면, 기독교는 민간 차원에서의 정서적 왕따 말고 딱히 공권력에 의한 박해는 없었던 듯하다. 워낙 나라가 망해 가는 막장 시기에 들어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다만, 성경 번역 역사는 천주교가 아닌 기독교 쪽이 확실한 우위를 쥐고 있다. 그리고 일제와 북한 공산당에 의한 박해 역사도 기독교의 비중이 더 높다. 이것이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한반도 교회사이다.

단군의 후손들은 기독교를 전파받은 여러 민족들 중, 일찍부터 자국어 성경이 잘 완역된 좋은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일찍부터 성경의 중요성을 알았으며, 선교사들이 놀랄 정도로 성경 공부에 완전 목숨을 걸기도 했다고 함.

“성경 번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사라질 뻔했던 한글을 구원하셨고, 그 한글은 복음에 봉사하도록 부름받아 태어났다.” (전시관 안의 동영상 끝에 나오던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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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화자찬 아전인수식 해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1907년의 평양 대부흥조차도 제대로 된 회개와 부흥이 아니라 은사주의 난장판이었을 뿐이라는 의혹도 있는 마당에...;;
다만, 이왕 이런 성경적인 배경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 한반도에 들어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매우 큰 안타까움도 느껴진다.

묘지나 기념관은 일단은 기독교 색깔이 80%이나, 가끔 천주교 쪽 얘기도 나오더라. 묘지에도 천주교 특유의 그 P와 X를 겹쳐 놓은 심벌이 묘비에 새겨진 무덤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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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니, 일부 묘비엔 아예 프리메이슨 컴퍼스와 G 표식까지 있기도 했다. 이 불모지에 와서 복음 전하고 병원과 학교 세우는 등 좋은 일을 하고 간 사람이긴 하나, 저건 정체가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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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말로만 듣던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지를 드디어 처음으로 봤다. 감개무량했다. (프로필을 보면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박사 학위가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국내에서는 으레 박사 호칭이 붙더라)
한국과 한글을 워낙 사랑했던 분인지라 한글 학회에서도 완전 띄워 주고 존경하고 추모하는 바로 그분이다.

석 호필 박사--저 사람은 정말로 수의학 박사 맞음--가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로서 서울 현충원에 묻혔는데 헐버트가 그보다는 격이 낮아(?) 보이는 이곳에 묻힌 이유는...
6·25가 발발하기도 전에, 그 서울 현충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그냥 여기에 묻혔고, 굳이 이장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외국인 중에 대한민국의 영원한 은인 1호인 분이다.

이렇게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용인 산골짜기에 소재한 총신대 신학 대학원 근처에 있는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도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어졌다.
양화진이 순교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외국인 선교사 위주라면, 저기는 실제로 박해를 받은 자국인 크리스천들의 일대기를 다루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04 08:32 2014/03/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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