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파일러의 경고 외

군대 유머, 관제탑 유머가 있는 것처럼 변호사를 소재로 한 블랙코미디 시리즈가 있다.
돈만 주면 자기 양심과 혼까지 팔아서 온갖 미사여구와 궤변(?)으로 범죄자의 형량을 감소시키고 심지어 무죄로 조작한다는.. 변호사에 대한 좀 과장되고 왜곡된 이미지가 들어가 있다.

천당과 지옥(혹은 천사와 악마)이 법정에서 소송이 붙으면 천당/천사 진영은 아마 승산이 없을 거라는 개드립조차 있다. 왜냐하면 유능한(=타락한-_-) 변호사들은 몽땅 지옥에 가 있어서 다 악마 편이기 때문에. -_-;; 물론 영적 법정에서 실제로 하나님이 어떤 편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성경에서 judgment라든가 judge라는 단어의 용례만 쭉 뽑아 보면 개드립은 그냥 개드립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변호사가 굉장히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었)는가 보다. 예를 들어..

  • 그림을 도둑맞던 당시에 선생님/고객님은 현장에 계셨습니까?
  • 그 일을 혼자 하셨나요? 아니면 단독 범행?
  • 충돌 당시에 두 차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죠?
  • 그 스무 살 먹었다는 막내아들이 나이가 어떻게 된댔죠?
  • 전쟁에서 죽었다는 사람이 당신이었습니까, 아니면 당신 동생이었습니까?
  • 건망증을 앓고 계셨다면, 그럼 그 동안 잊어버린 것들의 예를 좀 들어 주시죠.

도대체 저 변호사 양반이 왕년에 그 무시무시한 사법 시험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아니면 악착같은 공부 기계 괴수들이 몰리는 로스쿨을 어떻게 들어가서 졸업했고 어떻게 변호사 시험을 합격했는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보같은 질문은 그 변호사가 너무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1) 정말로 뇌에 나사가 좀 풀려서 감을 잃었거나, (2) 정신 없어서 의뢰인을 완전 성의없게 대해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3) 일부러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서 일종의 심문을 하려는 의도도 있다. 같은 내용을 비비 꼰 바보 같은 질문에 낚여서 진지하게 대답하다 보면, 일관성 없는 진술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여기서 내가 법조인들의 심리나 심문 기법 같은 걸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중요한 건, 자연 언어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코드도 사람이 작성하는 것이다 보니 저런 바보 같은 문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컴파일러가 그걸 지적해 주는 것을 우리는 '경고'라고 부른다.

간단한 예로는 선언만 해 놓고 사용하지 않은 변수, 초기화하지 않고 곧장 참조하는 변수, 한쪽에서는 class로 선언했는데 나중에 몸체를 정의할 때는 동일 명칭을 struct로 규정한 것이 있다. 딱히 에러까지는 아니고 코드 생성이 가능하지만, "혹시 다른 걸 의도한 게 아니었는지" 의심할 만한 부분이다.

더 똑똑한 컴파일러는 세미콜론이나 =/==사용이 아리까리해 보이는 것도 경고로 찍으며, 이런 것도 지적해 준다.
unsigned long p; (...) if(p<0) { }

unsigned 타입의 변수를 보고 "너 혹시 0보다 작니?"라고 묻는 건 그야말로 변호사가 "당신과 당신 동생 중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라고 했죠?"라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저 if 안에 있는 코드는 unreachable이라고 지적해 주는 건 적절한 조치이다.

사실, 사람이라 해도 처음부터 대놓고 저렇게 바보 같은 문장을 작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작성한 지 오래 된 코드를 나중에 리팩터링이나 다른 수정을 하게 됐는데, 같이 고쳐져야 하는 문장이 일부만 고쳐져서 일관성이 깨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남이 int를 기준으로 작성해 놓은 코드를 나중에 후임이 UINT로 고치면서 저 if문의 존재를 잊어버린다거나(알고 보니 이 값에 음수가 들어오거나 쓰일 일은 절대 없더라). 버그도 이런 식으로 생기곤 한다.

비주얼 C++에서 경고는 총 4단계가 있다. 1단계는 정말로 말이 안 되어 보이는 것만 출력하고, 4단계까지 가면 정말 미주알고주알 별걸 다 의심스럽다고 지적한다. 경고들을 그렇게 여러 단계로 분류한 기준은 딱히 표준이 있지는 않고 그냥 컴파일러 제조사의 임의 재량인 것으로 보인다.

비주얼 C++이 프로젝트를 만들 때 지정하는 디폴트는 3단계이다. 3단계를 기준으로 깔끔하게 컴파일되게 작성하던 코드를 4단계로 바꿔서 빌드해 보면 이름 없는 구조체를 포함해서 사용되지 않은 '함수 인자'들까지 온통 경고로 뜨기 때문에 output란이 꽤 지저분해진다. 물론, 특정 경고를 그냥 꺼 버리는 #pragma warning 지시문도 있지만, 그 자체가 소스 코드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 어지간하면 3단계만으로 충분하지만, 4단계 경고 중에도 컴파일러가 잡아 주면 도움이 되겠다 싶은 일관성 미스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코드의 모든 구조를 알지 못하는 공동 작업을 하는 경우.. (직감보다 시스템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짐) 그리고 팀원/팀장 중에 좀 결벽증 강박관념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 4단계를 기준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커밋하는 코드는 반드시 경고와 에러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못을 박곤 한다. 심지어 경고도 에러와 동등하게 간주시켜서 빌드를 더 진행되지 않게 하는 컴파일 옵션을 사용하기도 한다.

변호사 유머를 보니까 컴파일러의 경고가 생각이 나서 글을 썼다.
내 생각엔 a=a++처럼 이식성 문제가 있고 컴파일러 구현체마다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코드에 대해서나 경고가 좀 나와 줬으면 좋겠다. 저것도 초기화되지 않은 변수만큼이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주얼 C++의 경고 level 4 옵션으로도 저건 그냥 넘어가는 듯하다.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듯, 법은 사람을 제어하는 일종의 선언/논리형 프로그래밍 언어로서 컴퓨터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또한, 프로그램의 버전을 얼마나 올릴지 결정하는 게 형벌의 양형 기준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잡다한 기능들을 많이 추가한 것, 짧고 굵직한 기능을 구현한 것, 비록 작업량은 별로 많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상징성과 의미가 굉장히 큰 것, 아니면 그냥 적당히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숫자를 팍 올리는 것.

형벌이라는 것도 사람을 n명 죽인 것에 비례해서 징역이 올라가는 그런 관계는 당연히 아닐 테니, 상당히 많은 변수들이 감안된다.
이런 것들을 다 감안해서 다음 버전의 숫자를 결정하는데 이거 굉장히 복잡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10 08:33 2015/12/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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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포 2015/12/10 09:55 # M/D Reply Permalink

    비유가 상당히 참신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1. 사무엘 2015/12/10 14:23 # M/D Permalink

      글들을 재미있게 읽고 꾸준히 의견도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는 바로 전에 음악 관련 글을 썼는데, 사포 님도 작곡 스킬이 있으신 것 같네요!

  2. 사포 2015/12/15 10:10 # M/D Reply Permalink

    ㅎㅎ 넹 중딩 때부터 취미로 간간히 해오고 있습니다. 재밌어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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