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네모 글꼴에 대한 생각

한글 타이포그래피에서 탈네모 글꼴은 만년 떡밥인 것 같다. 지금 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그렇겠지

한글 가변폭 글꼴: 한글 글꼴 중에서 명조, 고딕 내지 한자 같은 부류와는 달리, 글자의 폭이 획일적이지 않고 글자마다 차이가 있는 글꼴을 일컫는다. 본문용으로는 잘 쓰이지 않고 특이한 제목이나 장식용으로 쓰인다. 아래에서 설명될 세벌식 글꼴과는 살짝 다른 개념으로, 세벌 글꼴은 굉장히 높은 확률로 한글 가변폭 글꼴이지만 모든 가변폭 글꼴이 세벌 글꼴은 아니다.

세벌식 글꼴: 공 병우 세벌식으로 만들어진 기계식 타자기로 글자를 쳤을 때 찍혀 나오는 자형과 같거나 최소한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는 글꼴. 일명 샘물체 내지 안상수체, 공한체 계열이다. 초중종을 이루는 벌수가 매우 적으며 글꼴 크기가 대체로 아주 작고 가볍다. 세벌식 글꼴은 거의 필연적으로 가변폭 글꼴이 되며, '가'과 '강'에서 '가'의 모양이 같아서 세로로도 기복이 크다는 특성상 '탈네모 글꼴'이라고도 분류된다.

그런데 문제는, 획일적인 정사각형을 탈피한 한글 글꼴에 대한 개인 호불호 편차가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국어학자,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한글 기계화 연구인 중에서도 그런 발상 자체를 완전 개혐오하는 분이 좀 있다. 수 년 전, 한겨레 신문사가 이질감을 최소화하려고 무늬만 세벌 글꼴 흉내를 살짝 낸 한겨레결체로 본문 서체를 과감하게 바꿨는데, 당시엔 그것만으로도 “이거 도대체 뭐야?”(성경에 나오는 '만나'의 의미가 정확하게 이것이다-_-) 하는 반발이 벌써부터 터져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애초에 과거 기계식 타자기 시절에 네벌식, 다섯벌식 같은 불편한 입력 방식이 있었던 것도, 세벌식만으로 타자를 하면 자형이 너무 들쭉날쭉하고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문자 습관이라는 건 무척 보수적이다.

그 반면에 서양 먹물 좀 먹었거나 일말의 선각자 자질이 있는 분은, 한글 자형이 정사각형 일색이기만 해서는 로마자(p, d, v 같은 들쭉날쭉 다양한 글자가 있는) 같은 가독성이 살아나질 않는다면서 그래도 탈네모 글꼴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국어 정서법에는 대문자도 없고, 고유명사도 없고, 영문 정서법 같은 엄격한 띄어쓰기가 정착해 있지 않으며, 문장 부호의 활용이 활발한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글 전용론자라면 맨날 한글이 우수하다고 자뻑만 할 게 아니라, 현실에서 드러나는 한글의 단점을 한글로 해결하는 방법도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컴퓨터용으로 만들어진 세벌식 글꼴은 최소한의 보정을 거친다. 가령, 간의 ㄴ은 감의 ㅁ보다 약간 위로 올라가며(공간이 너무 벌어지니까), 진짜 곧이곧대로 타자기 FM대로 1*1*1벌이라기보다는 최소한 2*1*2벌(특히 글자별 폭의 격차를 줄여서 디자인할 때) 이상이 시도되기도 한다.
<날개셋> 편집기에 존재하는 샘물이나 타자기 같은 글꼴은 에디팅 엔진의 한계 때문에 폭은 불변폭이나, 너그럽게 보면 세벌식 글꼴의 범주에 들어간다.

세벌식이라는 이념은, 한글을 풀어쓰기 형태로 파괴하지 않고 최소한의 형태와 원리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또 사람과 기계 모두에게 편리한 간결한 방법으로 한글을 입출력할 수 있는 정점을 찍은 일종의 교리이다.
탈네모 가변폭 한글 글꼴이라는 개념 자체는 글자판과는 별개로 일부 디자이너들이 시도하기도 했지만, 세벌식이 한글 글꼴에 그런 맥락의 변화를 시도하는 데에도 응당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 이념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에 이미 안 상수 교수가 캐드를 이용한 디자인으로 안상수체 내지 안체를 개발했으며, 1990년대에는 한 재준 교수가 공 병우 박사와 합작으로 공한체와 한체 시리즈를 내놓았다. 대표적인 가변폭+세벌 글꼴이다.
안상수체는 아래아한글 2.1 (1993)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공한체/한체는 아래아한글 96에서 도입되어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여러분은 이런 탈네모, 세벌, 가변폭 한글 글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일단, 이런 글꼴들은 생김새가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 네모 글꼴과는 디자인된 metric이라고 해야 하나, 전반적인 크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같이 쓰기가 더욱 힘들다. 같은 크기로 맞췄을 때 저 글꼴은 여타 네모 글꼴들보다 훨씬 더 작아 보인다.

탈네모 글꼴을 처음으로 시도한 디자이너들은, 단순히 '생소하고 디자인이 정착해 있지 못하며, 완성도 높은 탈네모 글꼴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거부감이 드는 것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즉, 시간이 탈네모 글꼴의 문제를 점차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2011년이 된 오늘날, 굳이 세벌이 아니더라도 가변폭 글꼴에 대한 국민적인 이질감은 예전보다는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그래도 갈 길이 멀다. 아무래도 탈네모 글꼴이 명조· 고딕의 벽을 완전히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정사각형 안에 차곡차곡 자모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는 명조· 궁서· 문화바탕 같은 미려한 서체의 완성도는, 탈네모 글꼴 주장자들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글꼴이 괜히 수십~수백 년의 짬밥을 먹으면서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살아남은 게 아니다. 탈네모 글꼴은 여전히 세리프 계열 글꼴이 빈약하며, 그나마 세리프 축에 드는 공한체는 진짜 무늬만 세리프이지 명조 같은 급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즉 여전히 실험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 되겠다.

하지만, (또 반전을 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한자 같은 아예 픽토그램급의 상형문자가 아니고 일정한 규칙과 체계가 있는 '자질문자' 시스템인데..
천편일률적인 정사각형에만 맞춰 쓰는 건 많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것이 앞으로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이다.

믿거나 말거나. MS 워드는.. 2007의 바로 직전의 2003 버전까지만 해도 가변폭 한글 글꼴이 전부 불변폭처럼 고정폭으로 찍혔다! 한글은 한자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정사각형이라고 전제를 했던 것 같다.
워드패드--정확히 말하면 그 밑에서 돌아가는 리치 에디트 컨트롤-- 도 초창기 버전은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아마 윈도우 2000/XP 타이밍 무렵부터 개선되었지 싶다.

과거의 아래아한글 97은 정사각형 글꼴을 쓸 때는 안 그런데 공한체나 안상수체 같은 가변폭 글꼴로 한글을 입력하면 매번 줄 전체가 번쩍거리며 바뀌는 게 보여서 불편했다. 이 문제는 차세대 엔진 기반인 워디안/2002부터 바로 개선되긴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1/08/25 09:23 2011/08/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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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이버카가미 2011/08/25 13:02 # M/D Reply Permalink

    이번 윈도폰의 네오고딕도 탈네모 느낌이 있던데(세로 길이가 달라지니..!), 그건 어떨지 기대하고 있어요.

    1. 사무엘 2011/08/25 21:27 # M/D Permalink

      요즘은 어느 분야든 융합이 대세이다 보니, 한글 글꼴도 정사각형과 탈네모 사이를 절충한 형태가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

    2. 사이버카가미 2011/08/25 22:30 # M/D Permalink

      다만 베타라서 그랬는지, 세로 길이가 달라지는데도 불구하고 세로쓰기로 표시된 메뉴에서 마치 고정폭인 것처럼 나타내더군요..; 정식 버전에서도 그러면 저는 신경쓰일 거 같아요. ㅜㅠ

  2. 삼각형 2011/08/31 19:08 # M/D Reply Permalink

    탈네모꼴 글꼴을 본문에서 쓰니까 가독성이 문제가 좀 되더군요. 사람들이 안정적이라고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제목용으로는 특이한 느낌이 들곤 하죠. 거기에 탈네모꼴이 되면 필연적으로 네모꼴 글꼴보다는 같은 포인트에서 작게 보입니다. 그래서 줄간격이 너무 커져버려요. 물론, 이런저런 방법을 쓰면 해결은 됩니다만.

    의외로 손글씨에서는 탈네모꼴이 문제가 별로 없는데 말이죠. 컴퓨터라는 녀석이 들쑥날쑥하는 것 보다는 네모난 걸 좋아하는지라 그럴겁니다. 영어도 전각 반각 정도의 차이만 있지 영 특이한 글꼴은 본문용으로는 안쓰던걸요.

    1. 사무엘 2011/08/27 20:00 # M/D Permalink

      네, 말씀하신 것처럼 오히려 아무 편견이 없는 어린애들이 한글을 갓 배우면 탈네모 글꼴을 더 자연스럽게 구사합니다. 글쓰기 교육을 받으면서 인위적으로 한글을 정사각형 안에다 맞춰 쓰게 되지요.
      먼 미래에 정사각형 vs 네모 글꼴의 관계는 마치 윈도우 네이티브 코드 vs 닷넷 코드의 관계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3. 소범준 2011/09/13 08:05 # M/D Reply Permalink

    글꼴에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니 글꼴도 IT 계열에서는 상당히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나 봅니다. (아직 이 분야는 공부 더 해야 겠음...__;) 좋은 글 감사합니다.

    1. 사무엘 2011/09/13 14:18 # M/D Permalink

      디지털 서체는 예술과 기술의 만남이거든요.
      외국인이 어떤 나라의 문자를 접하는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저는 입력기에 이어 이 분야에도 분명 노다지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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