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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 기관차 이야기

1. EMD

컴퓨터 CPU의 제조사로는 인텔과 AMD가 유명하고, 민항기의 제조사로는 보잉과 에어버스가 유명하다. 자동차야 미국, 일본, 독일 등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들이 즐비하다.
미국은 내수만으로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고 땅과 도로도 넓은 풍족한 나라이다 보니, 만드는 자동차들의 스타일이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사정과 잘 안 맞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전범 국가인 독일과 일본이 보편적인 가성비가 뛰어난 자동차를 잘 만드는 편이다(서민들이 범접할 수 없는 슈퍼카 말고). 하긴, 국가 차원에서 그런 기술과 노하우가 있으니 옛날에 침략 전쟁도 벌이고 사고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배는 반쯤 건물을 짓는 것과 비슷하고 양산형 기성품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다 치고, 자동차나 컴퓨터나 비행기는 제끼고 철도 차량 중에 명가가 없는지 말이다.
일단 우리나라에 굴러다니는 디젤 기관차들은 다들 미국의 EMD (Electro-Motive Diesel)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기관차를 수입하거나 국내에서 면허 생산한 것들이다. 얘가 기관차계의 보잉 내지 인텔/AMD 같은 제조사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6· 25 전쟁 중에 겨우 800마력짜리 기관차를 몇 대 원조받은 것으로 증기가 아닌 차세대 디젤 기관차 시대가 시작되었다(2000호대). 그러다가 지금은 모델명 GT26CW인 7100~7500대의 그 특대형 기관차가 기관차-객차형 열차의 얼굴마담이 됐다. 대형 점보 여객기의 상징이 보잉 747이듯이 말이다. 그나마 화물용으로 추가 도입된 7600호대 기관차는 GE(제너럴 일렉트릭) 사가 원조이다.
디젤 기관차인데 회사명에 E자가 들어있는 이유는 대형 고출력 기관차들은 엔진을 바퀴에다 직통으로 연결하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엔진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한 뒤 전동기의 힘으로 달린다. 입환기 수준의 작은 기관차 또는 디젤 동차들이나 순수 디젤(+ 특히 기어 변속)이지 일정 규모 이상부터는 동력 전환은 전기 아니면 유압 변속기로 가야 한다.

이거 무슨 순수 디젤과 디젤-전기의 관계를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다 비유하면 C와 C++의 관계와도 비슷해 보인다. C만으로는 단순 알고리즘 절차의 코딩 이상으로 거대한 프로그램의 짜임새를 조직적으로 기술하는 데 한계가 있듯, 대형 기관차를 만들 때는 순수 디젤보다는 디젤-전기가 더 효율적이니 말이다.
요즘은 자그마한 오토바이도 다 4행정으로 가는 추세인데 디젤 기관차는 의외로 2행정 엔진을 쓴다고 한다. 다만, 휘발유 엔진의 2행정 에디션과 디젤 엔진의 2행정 에디션은 서로 같은 성격이 아니라고 어디선가 봤었다.

디젤 기관차를 제조하는 GE는 명백히 미국 기업이다. 일본은 적당히 긴 국토에 신칸센을 중심으로 고속 여객 전동차가 왕창 발달해 있지만 기존선은 협궤라는 고질적인 한계가 있어서 화물 운송은 안습한 지경이다.
미국은 반대로 엄청 큰 땅에 자동차와 비행기가 워낙 발달하다 보니 여객 철도는 망했지만, 화물이 그야말로 본좌 천국이다. 디젤 기관차를 중련 편성해서 수 km에 달하는 엄청난 길이의 화물 열차를 굴리는 기술과 노하우가 있으니 디젤 기관차로 먹고 사는 듯하다. 전기 기관차 쪽은 독일 지멘스가 본좌이다.

GE를 전동차 제조사인 GEC(특히 쵸퍼 제어 방식)와 혼동하지는 않기 바란다. GEC(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는 영국 소재의 회사이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에 현대 자동차에서 면허 생산했던 그라나다도 제조사가 '포드'인데, 미국 법인이 아니라 유럽 법인 것이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2. 7000호대 봉고 기관차

국내에 도입된 EMD 기관차들은 덩치와 개발 시기는 다를지언정 모양이 다 그 나물에 그 밥이고 큰 차이가 안 나는 편인데.. 유독 튀는 모양의 기관차가 하나 존재한 적이 있었다.
바로 GT26CW의 7100~7500대의 바로 앞 번호인 7000호대 디젤 기관차이다. 제조사의 모델명은 FT36CW-2.
얘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유선형 새마을호를 견인하기 위한 여객 전용 기관차로 도입되었다. 새마을호 유압식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일명 DHC보다 시기적으로 1년 이르다.

이 기관차는 앞부분이 봉고차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봉고 기관차라고 불렸다. 신세대 차덕들은 봉고라고 하면 승합차보다 트럭이 더 먼저 떠오를 것 같긴 하다만.
단, 후방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아서 후진이 매우 난감하며 장폐단 운전을 할 수 없는 건 요즘 기관차의 디자인 추세와 맞지 않은 설계 미스로 보인다.

얘는 EMD로부터 엔진만 수입해서 나머지는 우리나라가 생산한 건지, 아니면 EMD에다 발주를 해서 역시 국내 면허 생산인 건지 관계가 어떻게 되나 잘 모르겠다. 그 당시 국내에서 이 기관차를 생산한 업체는 '현대 정공'(중공업)이었다.
1년 뒤에 등장한 새마을호 DHC 동차를 최초로 제조· 납품한 업체는 경쟁사인 대우 중공업이니 이 역시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우등형 디젤 동차 DEC (1980)도 처음에는 새마을호로 시작했는데 그 뒤로 1986년에는 창문이 동그란 테두리로 바뀐 새마을호 객차와 더불어 7000호대 봉고 기관차가 도입되었고, 1987년에는 DHC도 도입되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렇게 새마을호라는 차급이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이 기관차는 처음에는 고급 열차의 견인을 염두에 두고 처음엔 성능이 좋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승차감이 좋다는 호평을 받았다. 여객용답게 시속 150km 고속 주행이 가능했고, 얼마 전 1985년 11월에 기존 타 기관차를 기준으로 개정된 새마을호의 서울-부산 4시간 10분 스케줄을 맞추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심지어 봉고 기관차는 HEP(객차 전원 공급 장치)도 자체 내장하여 발전차를 따로 편성할 필요조차도 없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허나, 평범한 미국 원조 스타일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로컬라이즈한 기관차여서 그런지, 얘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관사와 승무원을 골탕먹이는 하자· 문제를 굉장히 많이 일으켰다고 한다. HEP도 가성비가 안 맞아서 이내 사용하지 않게 됐다(전기 생산을 위해 정차 중에도 발생하는 엔진 소음이 너무 커서..). 거기에다 GT26CW 기관차와 DHC 동차가 계속 도입되면서 봉고 기관차만의 위상과 존재 가치와 의의도 갈수록 하락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기관차는 새마을호보다 등급이 낮은 열차의 운행에도 투입되었고 내구연한 25년이 경과한 2011~2012년에 15량 전량이 칼같이 퇴역하여 이제 현업에서 볼 수 없어졌다.
철도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봉고 기관차의 퇴역은, 곧이어 도입된 새마을호 DHC의 퇴역의 신호탄이기도 하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것이다. DHC는 2013년 1월 초에 전량 현업에서 은퇴했다. 이로써 새마을호를 위해 도입되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관차와 동차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이야 기관차나 전동차나 다 무슨 네덜란드 국기처럼 위에서 아래로 빨강-하양-파랑 순의 자석 도색이지만 옛날에는 기관차가 파랑-하양 도색 내지 호랑이 도색도 하고 있었다.
봉고 기관차의 경우 처음 운행을 시작했을 때는 파랑 도색이었으며, 한때는 새마을호의 대표색이 blue이기까지 하던 시절이 있었다. DHC는 초기 도색에 빨강도 있었지만 저 기관차는 빨강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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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호랑이 도색은 7x00은 아니고 5~6000호대 기관차에서 쓰였던 것 같다.
7000호대 기관차는 1986년에 첫 도입된 반면, 7100~7500호대 기관차는 그보다 훨씬 전 1975년부터 도입돼 왔다. 그런데 번호가 왜 지금 같은 순서로 부여되었는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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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초창기의 2000호대부터 모든 디젤 기관차는 디젤-전기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현재 현업에서 운용 중인 기관차는 7100~7500, 7600호대, 그리고 입환용 4400호대만이 남아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4/02 08:32 2017/04/0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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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철도의 선로 이설 내력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런 글을 발견했다. 경부선 철도가 1905년 첫 개통한 이래로 선로가 이설되고 선형이 바뀌어 온 대략의 내력이다.
우와! 이렇게 사진과 함께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거 완전 좋다. 딱 내 스타일이다. 저기 사진을 같이 펴 놓고 이 글을 보시기 바란다.

1.
지난 2010년엔 경부선 병점 역 이남으로 분기하는 지선 서동탄 역이 개통했다. 그런데 2000년 초까지만 해도 경부선은 원래 서동탄 방면의 병점기지선이 본선 구간이었다는 거 아시는가?

1990년대 중후반부터 수원-천안 2복선 확장+선형개량+전철화 공사 과정에서 병점-오산대 구간 선로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설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커브도 약간 줄어서 열차가 더 고속으로 달릴 수 있게 됐다. 기존 선로는 차량 기지 입출고용으로 자연스럽게 용도가 변경되었다. 적절하다. 저렇게 재활용을 할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그나저나 구 선로는 지금의 서동탄 역 이남 구간에서 상· 하행 선로가 실제로 저렇게 쩍~ 벌어져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2.
무슨 강이 지나는 것도 아닌데 두정-천안 사이 서쪽에 천안 축구 센터를 감싸는 둥그런 커브가 생긴 건.. 역시나 지금은 이설· 폐선되고 없는 철도의 흔적이었구나. 부산 방면 경부선 하행 선로가 저 궤적을 타고 장항선으로 갈아탔었다.
저 선로 대신 지금은 더 북쪽+동쪽에 공간을 덜 차지하는 입체교차 선로가 새로 생겼다. 이 역시 수원-천안 2복선 공사와 함께 이설되어 새로 생겼지 싶다..

3.
대전 부근은 지형이 험하기도 하고 경부고속선과의 연결 문제도 있고 해서 추가적인 선형 개량이 종종 있었다. 예전에는 고속선이 옥천에서 너무 일찍 끊어지는 바람에 KTX가 연결선을 타고 재래식 경부선으로 허겁지겁 내려와야 했으나, 2015년 8월에 대전과 대구의 도심 구간이 다 개통한 뒤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대전남연결선은 이제 더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그냥 철거해 버려도 할 말이 없으며, 해당 지역에서는 그걸 원하는 여론도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한번 힘들게 만들어 놓은 건축 구조물을 굳이 일부러 부숴 버릴 이유가 없다. 아까 경부선 구선로를 병점 차량 기지 입출고선으로 활용하듯이 이것도 뭔가 다른 활용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지천-신동 사이에 있는 대구북연결선도 현재 비슷한 처지이다.

4.
그 다음으로 경부선에서 주목할 만한 이설은 엄청 옛날인 일제 강점기, 그것도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대구 역과 김천 역은 1905년 1월,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개업했다. 하지만 그 사이의 구미 역은 개업일이 1916년 11월 1일이다. 그 이유는 경부선이 첫 개통 당시엔 지금의 구미 시내 구간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금의 경부고속선 내지 국도 4호선과 비슷한 선형으로 금오산을 관통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로를 만들었더니 그 시절의 증기 기관차가 그 정도 오르막도 제대로 못 오르고 헉헉거렸다. 중간에 보조 기관차를 연결해 줘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경부선 개통 후 10년 남짓 뒤엔, 영업거리가 더 길어지는 걸 감수하고라도 구미 시내 우회 경로로 선로를 대거 이설하게 됐다. 구미 역이 바로 이때 생겼으며, 곧 있으면 개통 100주년을 맞이한다. 반대로 옛 선로에는 '금오산 역'이라고 기관차의 관리를 위한 간이역이 있었으나, 그건 선로 이설과 함께 폐역됐다.

잘 알다시피 박 정희가 1917년 구미 출생인데, 마침 그 즈음에 거기로 경부선 철길이 지나게 된 것은 뭔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상록수 최 용신 선생이 활동하던 당시에 수인선 철도가 건설된 것처럼 말이다.
이건, 훗날 1930년대에 행해진 복선화 공사 때문에 왜관철교 일대가 이설된 것과도 별개의 이야기이다.

5.
다시 우리나라 얘기로 돌아온다. 대구선 이설과 경부고속선 대구 이남 구간의 건설의 영향을 받아서 그쪽에 경부선 본선이 살짝 이설된 건 제끼고..

청도군 소재의 남성현 역 일대는 이미 유명하다. 험준한 산악으로 인한 경사+커브 때문에 건설하기도 힘들고 열차가 다니기도 힘든 구간이다. 성현 터널이 완공되기 전에는 무려 8단계 스위치백 선로를 임시 부설해서 건설 자재를 나르면서 경부선 철길을 깔았으며, 터널이 완공된 뒤엔 임시 선로는 철거됐다.
그런데 기껏 뚫은 성현 터널도 약 30여 년 뒤인 1937년에는 경부선 복선화 공사 과정에서 선로가 또 통째로 딴 데로 이설되면서 폐쇄됐다. 지금 성현 터널은 '청도 와인터널'이라는 관광지로 재활용 중이다.

6.
밀양으로 내려가면, 상동 역 이북으로 산을 직통으로 뚫고 가는 직선 터널들은 역시나 경부선 개통 처음부터 그랬던 건 절대 아니었다. 원래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꼬불꼬불 굽이치던 선형이었다.
단선도 아닌 복선 공용 터널이 일제 강점기 때 있었을 리가 절대 없지. 단순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복선화가 아니라, 경부선 KTX 1차 개통을 앞두고 대구-부산 기존선의 전철화 과정에서 선형 개량을 한 거지 싶다.

또한, 지금 선로는 추화산을 서쪽 끝 밀양 시내 근처에서 터널로 직선으로 쌩 통과하는 반면, 옛날에는 동쪽 능선으로 빙 둘러 갔다.
우회 구간에는 짤막한 단선 터널이 있다. 바로 이것. 단면은 아래쪽이 다시 좁아지는 말발굽 모양이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고 자동차용이 아닌 철도 터널이었다는 증거다. 옛날에는 경부선이 여기를 지났음을 말해 준다.

7.
이제 부산으로 간다.
부산 북부 구간도 1990년대 말, 화명 신도시의 개발로 인해 선로가 내륙이 아닌 강쪽으로, 그 대신 더 곧게 이설되었다. 구포 바로 이북의 화명 역이 1999년에 이 과정에서 새로 생겼으며, 1993년에 구포 무궁화호 전복 참사가 난 곳도 지금은 이설되고 없는 구간상의 지점이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구포보다는 화명 역에 더 가까이 있었다.

예전에는 경부선 선로가 지금의 부산 지하철 2호선과 비슷한 선형으로 시가지를 꽤 깊게 지났다. 어쩐지 지금 경부선 부산 북부 구간은 선로가 평지에 있지 않고 다들 높은 고가이던데, 다 나중에 그렇게 바뀐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님.

옛날에는 경부선이 지금의 서울 역(남대문)보다 더 북쪽까지 이어졌었고(서대문), 지금의 부산 역(초량)보다 더 남쪽까지 더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간 구간에도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다.
1908년의 경의선 직결+부산 개통, 1916년의 구미 시내 구간 개통은 일제 강점기의 일이고, 1930년대 이후 경부선 복선화도 큰 이벤트이다.
해방 후에는 주로 경부고속철 내지 수원-천안 2복선화로 인한 이설이 많았던 걸으로 요약된다.
다들 나의 정신을 살찌우는 소중한 철도 역사 지식이다. 머리에 몽땅 집어넣고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5 19:35 2016/09/2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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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철도/도로 뒷북 이야기

1.
국내 고속도로계에서 독보적으로 낙후한 이단아이던 88 올림픽 고속도로는 지난 2015년 말에 드디어, 드디어 전구간이 4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름도 '광주대구 고속도로'라고 바뀌었다. 솔직히 이 도로는 착공· 건설 시기가(개통 시기가 아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시기와 비슷할지 몰라도, 지리적으로는 올림픽과 정말 아무 상관도 없었으니까..

중앙분리대조차 없이 2차선이던 이 고속도로는 설계 최대 속도도 100이 아닌 80km/h이었으며, 중앙선을 침범하여 앞차를 추월하다가 마주 오던 차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잦아서 교통사고 발생 빈도 내지 사고 사망률이 여타 고속도로들보다 몇 배로 더 높았다. 백괴사전에서는 "44(死死) 내림픽 저속도로"라고 개드립을 치면서 깠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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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 여건이 다른 고속도로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히 리모델링된 국도보다도 열악했던 관계로, 한국 도로 공사는 여기 구간의 통행료는 여타 고속도로의 반값 정도로만 징수했다. 서울 지하철이 '최소 거리 이용 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요금을 측정하듯, 고속도로 톨비 역시 비록 진입과 최종 진출 나들목 자체가 88 내부의 나들목이 아니더라도 경로상으로 88을 이용했을 만한 위치라면 그걸 감안하여 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가 이 도로도 찔끔찔끔 선형 개선과 확장, 이설 공사를 되풀이했으며, 그게 드디어 작년 말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존속해 온 통행료 특별 할인도 폐지됐다.

전국의 고속도로 나들목들 중 유일하게 평면교차+비보호 좌회전(고속도로에서!)이라는 엽기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남장수 IC'는 해당 구간이 대거 이설되면서 없어졌다. 이를 대체하는 동남원 IC가 생기긴 했지만 저기서 서쪽으로 수 km 떨어진 곳이다. 남장수 IC가 없어진 건 철도로 치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스위치백이라든가 통표 폐색 구간이 없어진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옛날에는 이 88 말고 다른 고속도로도 이름만 고속도로이지 2차선에 평면교차 같은 막장 시설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호남 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 따위도 처음엔 그랬다.
심지어 1990년대에 대구와 원주를 잇는 중앙 고속도로조차도 처음엔 2차선으로 건설되고 있었는데 감사원에서 이를 잡아 냈다. "이렇게 만들었다간 99.9% 나중에 또 확장하느라 더 고생하고 돈과 시간을 더 낭비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설계를 갈아엎고 다시 만들어라. 그리고 이를 선례로 삼아 앞으로 새로 만드는 모든 고속도로들은 처음부터 반드시 4차선 이상 크기로 건설해라."라는 현명한 지시를 내려서 개선이 됐다.

저렇게 1990년대에도 2차선으로 건설될 뻔한 고속도로가 있었는데 1960년대 말 그 옛날에 처음부터 전구간 4차선으로 시작을 했던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이 문득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출처는 정확히 알 수 없다만 그 시절에 박통이 이미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 대서 일단은 4차선으로만 건설하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얼마 못 가 분명히 비좁아질 거다. 확장을 하게 될 테니 도로 주변에 건물 건설 허가를 내지 말고 준비를 해 둬라" 이런 예고까지 했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유지 보수 비용이 결국 건설 비용만큼이나 더 들었다고 회자되긴 한다만, 그건 다른 고속도로들도 훗날 꾸준히 개선되어 온 건 대동소이했다. 허나 88은 박통도 아니고 나름 5공 시절인 1980년대에 건설된 주제에 오랫동안 개선되질 못해서 까임거리가 된 것이다. 영호남 화합? 실질적인 수요보다는 정치 논리에 따라 건설됐다 보니 리모델링의 우선순위도 뒷전으로 밀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것도 이제 다 지나간 일이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88 올림픽 고속도로에 이어, 철도 경전선도 올해는 대대적인 선형 개량 공사가 끝나서 여러 구간이 이설되고 여러 간이역들이 없어질 예정이다.
자, 다음부터는 철도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2.
과거에 20세기 말에 우리나라의 최하등급 열차는 비둘기호였다. 정선선에서 운행하다가 2000년 11월 14일을 끝으로 퇴역했다.
객차형 비둘기호는 너무 싸서 수지맞지 않은 운임 체계, 너무 낡고 노후화한 객차 같은 여러 이유로 인해(비산식 화장실, 수동 출입문, 별도의 발전차 없이 객차가 차축 연결해서 소규모 자가발전-_-, 에어컨도 없음..) 21세기에까지 존속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긴 했다.

그 다음으로 통일호도 객차형은 차량이 비둘기호 만만찮게 열악했던지라 2004년 3월 31일, KTX 개통을 앞두고는 모두 퇴역했다. 근성열차라고 불리던 청량리-부전 통일호가 이때 사라졌고 경춘선도 통일호가 모두 무궁화호로 바뀌면서 사실상 운임이 강제로 일괄 인상된 효과도 났다.

나머지 디젤 동차형 통일호는 '통근열차'라고 이름이 바뀌었는데, 얘들은 진해선, 동해남부선, 군산선 등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차근차근 무궁화호로 교체되면서 명줄이 위태로워졌다. 기관차-객차형처럼 차량이 완전히 다른 무궁화호 말고, CDC 객차 자체가 일명 RDC 무궁화호로 개조되기도 했다.

현재 통근열차의 최후의 보루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경의선과 경원선밖에 안 남았다. 허나 경의선에서는 이미 진작에 전철에 밀려 퇴출되었으며, 현재 전국에서 오리지널 CDC가 다니는 곳은 이제 소요산 이북의 경원선이 유일하다! 과거에 정선선 비둘기호와 비슷한 꼴이 된 셈이다. 비둘기호:정선선 = 통근열차:경원선 정도의 비례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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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0년쯤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약 빨고 더 연장되어 연천까지 가 버리면 이제 CDC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더 북쪽의 잔여 구간은 지금 경의선이 그런 것처럼 안보 관광 열차가 대신 맡을 것이고.

물론 경원선 연장 구간은 전철이 들어간다고 해도 일단은 복선 노반만 확보해 놓은 '단선 전철' 형태로 운행될 예정이다. 그런데 복선 구간 운행이 너무 당연시되는 지하철 통근형 전동차가 갑자기 단선 구간에서 상하행 교행을 한다니 그것도 참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 하긴, 천하의 KTX도 과거에 광주 역을 드나들 때는 꼬불꼬불 단선 구간을 다니긴 했다.

3.
21세기 이래로 경기화학선, 세풍제지선, 화순선 등 여러 산업· 화물 철도들이 소리소문 없이 열차 운행과 관리가 중단되고 사실상 폐선 테크를 타 왔다.
하지만 화물 분야에서 철도가 마냥 몰락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 지난 2010년 말에는 부산신항선이라는 걸출한 화물 철도가 개통했다. 그것도 복선으로. 여객이 아니고 항구 화물 전용 철도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쯤 뒤, 작년에는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평택에서 평택항으로 향하는 화물 철도가 또 신규 개통했다. 이름하여 평택선. 경부선과 연결하는 삼각선도 상하행으로 모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 방향으로나 통한다.

경부선 전철에서 성환-평택은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이기도 하고 역간거리가 무려 9km가 넘는다. 공항 철도를 제외하면 수도권 전철에서 역간거리가 가장 긴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이엔 온통 들판에 소규모 마을밖에 없기 때문에 역이 만들어질 여지가 별로 없다.

평택 다음 성환 역에도 사이에 웬 지선 철도가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하행 방향으로만 있고 서울 상행 방향은 없는데, 다름아닌 성환읍 학정리의 야산 하나를 몽땅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군부대로 향하는 비밀 철도이다. 서빙고 역에서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그 철도, 그리고 호남선에서 논산 육군 훈련소 방면으로 가는 강경선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관련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그 군부대는 탄약창인가 보다. 탄약은 굳이 사방으로 파편이 날리는 수류탄 같은 부류가 아니더라도, 내부에 다 화약이 들어있는 위험물이다. 한 탄약고가 공격을 받아 폭발하면 인근의 다른 탄약고까지 연달아 재귀적으로-_- 폭발하면서 Doom 2의 레벨 23 Barrels o' fun이 실사판으로 재연되는 참극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스플래시 대미지를 예방하기 위해 탄약창은 최대한 넓게 띄엄띄엄 지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탄약창의 부지가 굉장히 크다. 다만 여기에 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눈꼽만 한 보상밖에 못 받고 오랫동안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꽤 고달프게 지냈다고 한다.

4.
그 밖에 작년에 있었던 의미 있는 사건으로 또 떠오르는 건.. 서울 역과 노량진 역에 정식 환승 통로가 개통했다는 것이다.
버스와는 달리 지하철은 내렸다가(=집표 구역 밖으로 나감) 다시 탔을 때 환승 할인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서울 지하철 9호선이 개통한 뒤에도 노량진 역에는 물리적인 환승 통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항 철도와 경의선도 기존 지하철 1· 4호선 서울 역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는 수도권 전철 전체를 통틀어 예외적으로 철도끼리 내렸다가 30분 이내에 다시 타도 환승 할인이 인정되게 되었다. 일명 소프트 환승이다.

사실, 지금은 찍고 나간 동일 게이트에 5분 이내에 다시 들어가도 1회에 한해 기본 운임 재징수 면제라는 예외까지도 추가돼 있다. 이런 것들도 다 소프트웨어로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다 구현 가능한 건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으니 막아 놓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5년도 더 전에 환승 통로가 개통했지만, 2010년 이전엔 '국철/중앙선' 청량리 역과 서울 지하철 청량리(1호선) 역도 마치 경의선 신촌과 지하철 신촌(2호선)만큼이나 환승이되지 않았고 별개의 역으로 취급되곤 했다. 또한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갓 개통했을 때에도 신당 역은 2호선과의 환승 통로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몇 달간을 환승이 안 되는 역으로 영업을 했었다. 이때엔 소프트 환승 같은 건 없었다.

서울 역의 경우 지하철과 공항 철도가 정말 도를 지나칠 정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수직 이동 삽질을 줄이고 수평 이동도 무빙워크로 도와 줄 환승 토로가 정말 절실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환승 통로 만들어 주세요" 급이었다. 그래서 작년 3월에 먼저 개통했다.
한편, 노량진은 민자역사의 건설과 맞물려서 환승 통로의 개통이 한없이 늦어졌다. 이건 마치 분당선 야탑 역과 인근 버스 터미널과의 통로 개통과도 비슷한 문제였던 것 같다. 둘 다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일이 늦어졌고 그 동안 승객들만 불편을 겪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래도 작년 10월 말에 환승 통로가 생기긴 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물리적인 환승 통로가 뚫린 덕분에,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두 역에만 존재하던 소프트 환승 예외 로직은 폐지되었다. 마치 88 올림픽 고속도로가 리모델링이 완료되면서 반값 통행료 제도가 없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단, 서울 역에 있는 4개 전철 노선 중 경의선은 여전히 여타 노선들과 단절되어 있으며, 여기는 수도권 전철에서 유일하게 소프트 환승 예외가 계속 유지된다. 1시간에 1대밖에 안 다니는 마이너 지선에까지 굳이 환승 통로를 뚫을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신촌은 아주 유니크한 구간으로 그렇게 명맥이 유지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0 08:38 2016/04/2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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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의 역사

*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1. 개통식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8월 15일에 맞춰서 정부 수립을 했다. 그런데 이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1974년 8월 15일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광역전철이 같이 개통한 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최고급 열차이던 관광호가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꿔 첫 운행을 시작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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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진을 보자. 이 둘은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겉으로는 흑백 사진이지만, 철덕이라면 전동차의 색깔이 저절로 컬러로 복원돼서 뇌에 비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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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동선과 스케줄을 보면,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의 개통식이 먼저 청량리 역 승강장에서 열렸다. 마침 친절하게도 당시 시각까지 사진에 담겨 있다. 아침 11시 15분경.
지하철 개통식 때는 서울 지하철 공사(현 서울 메트로) 소속의 흰 배경에 창틀 부분만 빨강 도색인 전동차가 사진에 담겼다.

이 사람들은 저 열차를 마치 자가용처럼 시승하고 다녔다. 그 당시 종합 사령실이 종로5가 역에 있었던 관계로 그 역에서 내려서 사령실도 잠시 들른 뒤, 서울 역도 지나 남쪽으로 쭈욱 내려갔다.

그렇게 지하철 개통식 팀이 도착한 뒤에야 수원, 인천, 성북 방면의 지상 '수도권 전철'의 개통식이 바로 구로 역 승강장에서 아침 11시 50분쯤에 열렸다. 이번에는 철도청 소속의 파란 배경에 창틀 부분만 흰 도색 전동차가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물론 '초저항'이라고 불리는 저 식빵 모양의 일제 전동차 자체는 철도청 것이든 서지공 것이든 완전히 동일하다.

서울에서 수원이나 인천을 가려면 예전에는 털털거리는 디젤 동차를 타야 했는데 그게 모두 깔끔한 전철로 바뀌었고, 그 전철이 서울 종로에 있는 지하철 구간과 직통 운행까지 한다는 것이 이 지하철· 전철 개통의 의의였다.

가끔 코레일이나 서울 메트로 전동차를 타고서 안에서 철도의 역사 관련 동영상이 나오는 걸 살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회사에 해당하는 얘기만 한다. 서울 메트로에서는 지하철 개통 얘기만 하고, 코레일에서는 수도권 광역전철 개통 얘기만 한다. 우리는 두 사건이 모두 순차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 되겠다.

지하철· 전철 직통 시스템의 개통식은 원래는 대통령도 참석하고 아주 웅장· 성대하게 치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다시피... 아침 10시부터 장충동 국립 극장에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광복절 기념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부인인 육 영수 여사가 괴한에게 총격을 당했기 때문이다(10시 23분).

지하철 개통식 사진에 찍힌 11시 15분은 그 대형 사고가 터진 지 50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러니 저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마냥 기쁜 표정만 지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 당시 양 택식 서울 시장이 아주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과업이었으며, 원래대로라면 개통식은 그의 인생 최고의 날이 돼야만 했다. 하지만 하필 그 날 대통령의 영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장 자리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인 구 자춘 시장은 양 택식의 지하철 건설 계획을 거의 다 갈아엎었다. 하지만 저 사람도 선임 뺨치는 불도저였으며, 다음 노선인 2호선이 거대한 순환선으로 만들어진 건 그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2. 발전 내력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전철은 처음에는 한 편성당 6량으로 개통했지만 이미 1980년 12월에 8량으로 증설되었고, 1984년에는 10량으로 증설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은 "객실에서는 금연입니다. 출입문은 30초 동안 열려 있습니다(일반열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닫히고 금방 출발하므로). 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라고, 난생 처음으로 일반열차가 아닌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대상으로 초보적인 안내 방송도 일일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때 "이 도로에는 사람이나 손수레, 자전거 따위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참 홍보를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974년 첫 개통 당시의 운행 계통과 운행 시격은 다음과 같았다.

  • 청량리-성북(지금의 광운대 역): 40분
  • 서울역-청량리: 10분 (R/H 땐 5분)
  • 서울-구로: 10분
  • 구로-인천: 20분
  • 구로-수원: 40분

즉 남쪽으로는 10분 간격으로 구로, 인천, 수원, 인천 행이 번갈아가며 왔다고 생각하면 되고 북쪽으로는 4대 중 1대 꼴로 성북 행이고 나머지는 청량리까지만 간 셈이다.
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급행도 없고 배차간격이 지금의 중앙선과 비슷한 수준이요, 수원 가는 전철은 지금의 소요산 행 열차보다 배차간격이 더 길었다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경부, 경인선 모두 그냥 복선이었고 특히 경부선 전동차는 지금 급행 전동차가 그런 것처럼 일반열차의 틈새를 이용해서 운행되었으니, 열차를 많이 투입할 수 없었음이 자명하다.
1981년 12월 23일에는 경부선 수원-영등포 구간이 2복선으로 확장되면서 경부선 전동차를 더욱 증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반열차 눈치 볼 필요 없이 전동차만의 선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 상대식 승강장을 하고 있던 역은 자연스레 쌍섬식 승강장이 됐다.

2복선화 공사는 그때 이미 구로 이남은 방향별 복복선으로, 서울 시내 구간은 공사가 쉽지 않아 선로별 복복선으로 정착한 것 같다. 방향별 복복선은 기존 복선 선로의 양 끝에 선로를 하나씩 추가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예전부터 있던 내선은 일반열차가 계속 쓰고 신설된 외선으로 전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수원 이남으로도 계속 달리는 일반열차와는 달리, 수원에서 북쪽으로 회차해야 하는 전동차는 선로를 바꾸는 회차 과정에서 일반열차 내선을 침범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회차할 때만은 여전히 일반열차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2복선의 선로 용량에 걸맞게 전동차를 증차하기가 어려웠다.
이 고질적인 문제는 먼 훗날인 2003년, 병점 역이 개통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차량기지와 함께 회차 전용 입체 교차로가 신설된 것이다. 병점뿐만 아니라 천안에도 전동차 회차 및 장항선 분기가 모두 입체 교차로로 잘 구비돼 있다.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인선도 2복선화가 추진됐다. 거기는 일반열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 타당성 조사는 진작에 다 통과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됐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인선이 합류하는 구로-영등포 간은 아예 3복선화도 진행되었다. 1991년 11월 23일은 경인선 2복선화 기공식과 경부선 해당 구간 3복선화의 개통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경인선 2복선화는 부평-주안-동인천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구일 같은 역은 이를 계기로 형태가 크게 바뀌기도 했다.

사실 그 해 5월 25일에는 공사 때문에 1박 2일 남짓한 시간 동안 전동차가 잠시 단축 운행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경부 고속철 2차 공사 구간에서 경부 고속도로 위를 타넘는 언양 고가 공사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되겠다. 첨단 공법을 동원한 덕분에 공사의 대부분은 차량 통행을 막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지만 아치의 기초를 놓는 한나절 남짓한 시간은 고속도로를 잠시 막아야 했다고 한다.

경인선과 더불어 경부선 수도권 전철도 수원이 아닌 무려 천안까지 남하하는 공사가 1996년부터 추진되었다. 그 시절에 경부선 일반열차를 타면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전철역 승강장이 휙휙 지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경부선은 이제 천안 이북은 2복선 전철이 되었지만 일반열차 때문에 경인선처럼 충분하게 급행 전동차를 운행하지는 못한다.

서울 서남쪽이 그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북쪽 종점인 성북 일대에서는 1호선 전동차의 병목을 야기하고 선로 용량을 깎아먹던 '평면교차'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진행됐다.
1978년 12월에는 경원선 용산-성북 구간에도 전동차가 투입되어 종전의 디젤 동차를 대체하고 1호선의 지선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이놈은 선로 합류와 회차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1호선 전동차와의 평면교차를 야기하고 있었다.

얘는 2005년에 광역전철 중앙선으로 분리해 나감으로써 문제가 해결됐다. 용산-성북이 아니라 용산-덕소가 됐다. 마치 안산선 열차가 처음엔 1호선 경부선의 지선으로 운행되다가 훗날 4호선으로 완전히 독립해 나간 것과 같은 방식이다.
또한 경춘선 무궁화호가 야기하던 평면교차도 경춘선 복선 전철이 다른 선로로 이설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이런 조치로 인해 반대로 말하면 성북(지금의 광운대) 역이 그 덩치에 비해서 경춘선도 못 타고 중앙선도 못 타고 오로지 1호선 전동차밖에 못 타는 역으로 역할이 줄기도 했다.

다만, 처음에는 이 수도권 전철의 북쪽 종점은 계속해서 올라가서 한동안 의정부북부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는 동두천과 양주를 거쳐 소요산까지 올라갔고, 장기적으로는 무려 연천까지 갈 거라고 한다. 경원선 자체는 아예 민통선 안의 월정리와 철원까지 복원할 계획이 잡혀 있고.. 정말 40년 동안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나저나 먼 옛날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내부 인테리어가 온통 빨강이었다는 것이 본인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로마자 표기법이 바뀐 게 반영되고 국철과 지하철 구분 없이 색깔을 남색으로 획일화한 모습만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옛날 사진을 보면.. 오히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나, 색맹이 됐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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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0 08:31 2016/03/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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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개통과 운행 내력 외

한반도에 KTX라는 이름의 고속철이 개통하여 상업 운행을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개통한 지 무려 반세기가 넘은 일본의 신칸센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KTX도 개통 내력이 은근히 복잡해지고 있으니 한번쯤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2004. 4. 1. [경부 1차 개통]
- 경부선: 서울-부산 (고속선은 대전-광명, 대구-옥천만)
- 호남선: 기존선의 복선전철화. 용산-목포 (대전 이남엔 고유한 고속선 구간 없음)
- KTX 개통과 함께 (1) 서울교외선에 정규 열차 운행이 중단됨. (2) 통일호 폐지, (3) 경춘선 무궁화호 폐지.

* 이 일대 시기의 서울/철도 소사를 참고 차원에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청계고가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행됨.
- KTX 개통 약간 전에 서울역 민자역사가 개관함.
- KTX 개통 후 얼마 안 있어 경부선은 서울 역, 호남/전라/장항선은 용산 역으로 역의 역할이 완전히 이원화됨.
- 2004년 7월, 서울 수도권의 버스· 지하철 통합 환승 제도가 시행됨.
- 2005년부터 철도청 폐지,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출범.

2007.
- 경부선: 대전-대구 사이만 기존선으로 달리면서 김천과 구미에 정차하는 KTX 일부 운행

2010. 11. 1. [경부 2차 개통]
- 경부선: 대구-신경주-울산-부산 사이의 고속신선 신규 개통. 기개통 구간엔 오송과 김천구미 역이 추가 영업 시작함
김천· 구미 KTX는 폐지. 그 대신 수원· 영등포 정차 KTX 생김

2010. 12. 15.
- 경전선: 기존선의 복선전철화. 대구 이남으로 창원, 마산으로 가는 노선. 수요 폭발이었다고 함.

2011. 10. 5.
- 전라선: 기존선의 복선전철화. 익산 이남으로 여수엑스포 행

2012.
- 드디어 KTX-산천 차량 투입

2014. 6. 30.
- 일부 열차가 인천 공항까지 직결 운행 시작

2015. 4. 2. [호남 1차 개통]
- 호남선: 고속신선 신규 개통. 익산· 정읍· 광주송정을 경유하며 공주 역 추가 영업 시작. 저 역들을 제외한 호남선 기존선 역들은 KTX 취급이 폐지됨(광주, 김제 등).
- 동해남부선(앞으로 동해중부선과 연결되어 동해선이 될 예정): 포항 직결 운행 시작

2015. 8. 1.
- 대전과 (동)대구는 기존선과 인접하는 도심 구간까지도 기존선 연결선이 아니라 고속선이 깔림으로써.. 운행 계통이 일반열차와는 완전히 분리되는 복을 누리게 됐다.

요약하면:
고속신선은 오송에서 분기하는 경부선과 호남선 축으로 깔려 있고, KTX 운행 노선은 거기에다 호남 분기(전라선), 경부 분기(경전선, 동해남부선), 그리고 서울 이북으로 공항선이 추가적인 겉저리로 붙은 형태이다.
차량은 아무래도 1세대 떼제베 차량과 2010년대 이후의 2세대 산천 차량 정도로 나뉜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KTX-산천은 HSR-350의 기술로부터 만들어진 열차이긴 하지만 산천 자체가 HSR-350을 그대로 양산한 건 아니다.

더 먼 미래엔:
(1) 호남 고속철이 광주 이남으로 2차 구간이 마저 개통할 것이며, (2) 수서 발 수도권 고속철과 (3) 강릉 방면 동서 고속철이 남아 있다.
“희망을 싣고 번영을 싣고 뻗어가는 철도 따라 커 가는 나라”대로 될지어다. 아멘. (철도의 노래 가사 중)

* 고속철의 이름: 차량이냐 선로냐

고속철 보유국으로서 프랑스와 일본을 비교해 보면 좋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떼제베(TGV)는 '매우 빠른 열차'라는 뜻이며 차량 중심으로 작명됐다. 한국의 KTX도 이니셜을 보면 알 수 있듯, 차량 중심이다. 프랑스는 차량 기술에 자부심이 많은지 그 뒤에도 증속 경쟁을 제일 열성적으로 진행해 왔다. 2007년엔 자기 부상 열차가 아닌 재래식 바퀴식 열차로 무려 시속 574km라는 사기적인 시운전을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신칸센은 '새로운 간선 철도'라는 뜻으로 의외로 차량이 아닌 선로 중심으로 작명됐다. 본인은 철덕으로서 이 차이가 매우 신기하게 와 닿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차량보다도, 기존 협궤가 아닌 표준궤로 고속철 신선을 깔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1964년에 첫 운행을 한 신칸센 0계 전동차는 떼제베 같은 독자적인 디자인도 아니고 걍 자기네 옛날 전투기와 비슷한 투박한 외형이었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만들 때는 성능뿐만이 아니라 안전도 굉장히 높은 가중치로 고려 대상이 되며, 고속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속 200km를 넘게 증속을 하는 기술보다도, 그렇게 고속 주행 중에 장애물이 나타나고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제동 거리를 얼마를 넘지 않고 비상 정지를 도대체 어떻게 할지가 더 심각한 고민거리로 대두되었다. 엔지니어들이 별별 아이디어를 다 짜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싸움이 가장 좋은 싸움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They're only good when dead 포카혼타스 Savages 대사;; )처럼.
애초에 비상 정지를 할 일이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건널목 따위는 전혀 안 만들고 모든 구간을 무조건 입체교차로 만들고, 선로에는 아무도 접근을 못 하게 겹겹이 벽을 두르면서 일본의 경부선뻘 되는 도카이도선을 표준궤 고속선으로 새로 만들었다. 1960년대에 벌써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선로를 내세운 '신칸센'이 됐고 이것이 일본 고속철의 선로, 열차, 시스템의 명칭이 됐다.

이런 일본과 프랑스의 고속철 역사를 살펴보면, 철도라는 걸 처음 만들 때는 당연한 말이지만 차량보다 선로가 먼저라는 원칙을 확인할 수있다.

우리나라도 1992년에 대전-천안간의 경부고속선 본선 겸 시험선 구간을 먼저 착공한 뒤, 차량의 선정 계약은 더 나중인 1994년에 맺었다.

시속 200km를 넘는 장거리 간선 철도의 건설 자체는 1964년의 일본 신칸센이 세계 최초이다. 하지만 그 뒤의 추가적인 속도 경쟁은 후발 주자인 프랑스 떼제베가 앞섰다. 가령, 시속 260km대의 상업 운전은 1981년에 떼제베가 세계 최초로 달성했고 신칸센은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뒤인 1992년에야 300계 전동차가 도입되면서 그 속도를 따라잡았다. (300계는 TGV-R, ICE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속철의 차량 입찰 후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1984년 8월에 경부선 천안-서정리 구간에서 겨우 시속 150km 시운전 성공.. 이러던 지경이었다. 그러니 국제적인 안목이 있는 철도 공학자와 경영자들이 통탄할 법도 했다. 1980년대, 전국 곳곳에 포장 도로가 깔리고 마이카 시대가 코앞인데 이래 가지고는 "한국 철도엔 답이 없다"라는 게 뻔히 보였다. 철도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증속을 통해 많이 빠르게 실어 나르는 "회전율 향상"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1985년 11월에 서울-부산 4시간 10분이 달성된 후, 지속적인 레일 장대화와 선형 개량, 기관차 출력 증대로 서울-부산을 1980년대 말까지 3시간 반까지 단축시키려는 계획은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미봉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1992년에 드디어 인천 공항의 건설과 더불어 경부 고속철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 그대로이다.

우리나라에서 떼제베 대신 신칸센이 낙찰됐다면, 철덕의 입장에서 전망해 보자면 다른 건 몰라도 떼제베보다 폭이 더 넉넉하고 애초부터 역방향 좌석이 없는 열차가 도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신칸센은 2-3배열 가축수송 열차가(한 줄에 좌석이 5개!) 있을 정도로 같은 표준궤에서도 뚱뚱한 덩치이기 때문이다. 자기네 자위대 전차의 부품도 제대로 수송을 못 할 정도로 빼짝 마른 협궤에 이골이 난지라, 신칸센은 이왕 표준궤로 까는 김에 열차의 폭까지 최대한 더 키운 듯. 하지만 지나친 고자세 때문에 입찰 후보들 중에서는 신칸센이 가장 먼저 탈락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11 08:32 2015/09/1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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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임시 철도

철도 얘기를 하기 위해 먼저 컴퓨터 비유를 들어 보겠다.
어떤 복잡한 컴퓨터 아키텍처가 완전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이걸 타겟으로 하는 고급 언어 컴파일러를 완전 최초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상황일까?

이 경우, 일단 그 언어를 타겟 기계어로 옮기는 컴파일러를 그 언어와 타겟 환경 기준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컴파일러의 소스 자체가 컴파일되지 못했으니 아직 그 언어를 타겟 기계어로 곧장 옮길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원래 목표로 하는 아키텍처보다 구조가 훨씬 더 간단한 가상 기계 내지 임시 P-code 아키텍처를 설계한 뒤, (1) 원래 언어를 임시 기계어로 옮기는 컴파일러와 (2) 임시 기계어 코드를 돌리는 가상 머신을 타겟 기계용으로 야메로 만든다. 둘 다 성능 따위는 쌈싸먹어도 되고 그냥 정확하게 돌아가기만 하게 극도로 단순하게 후딱 만들면 된다.

그 뒤, 원래의 컴파일러 소스를 (1)을 이용하여 컴파일하면 임시 코드 기반이긴 하지만 일단 타겟에서 돌아가고 원래 타겟 기계어를 생성하는 컴파일러가 완성된다. 이렇게 생성된 컴파일러를 이용하여 원래 소스를 다시 컴파일하면.. 드디어 타겟 기계에서 돌아가는 타겟 기계어 컴파일러가 완성된다. 자기 자신도 컴파일할 수 있고, 다른 소스도 컴파일할 수 있고.. 이제 컴파일러 2.0은 1.0을 이용하여 개발한 뒤, 그 2.0 소스를 2.0 컴파일러로 다시 빌드하는 식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자, 이런 얘기가 철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컴퓨터가 난수를 생성하기 위해 먼저 난수가 필요하고, 자동차나 발전기가 동력을 생산하기 위해서 먼저 최소한의 동력이 필요하며, 또 고급 언어로 작성된 고급 언어 컴파일러는 먼저 동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소스부터가 컴파일되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철도 역시 부설을 위해서 다른 보조 철도가 먼저 필요하여 건설된 경우가 드물지만 있다.

가까운 예로는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온수-신풍 구간 개통 때의 일이다. 전동차를 천왕 차량기지에다 반입하기 위해 경인선 오류동 역에서 기존 경기화학선 선로를 이용하여 차량을 최대한 접근시켰다. 거기에서 최종 목적지까지는 임시 선로를 지상에다가 깔아서 옮겼다.
그러니 1990년대 중반에 거기 주변을 살았던 사람들은 거대한 지하철 전동차가 마치 지상 전차처럼 이동해 가는 걸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차량의 견인은 디젤 기관차가 했겠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한 우진 님 블로그, 그리고 '전동차를 사랑하는 모임' 다음 카페의 게시글을 성지순례 하시기 바란다.
차량 반입이 끝난 뒤엔 그 임시 선로는 곧장 철거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예는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던 시절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옛날이다.
흔히 우리나라 철도에서 스위치백이라고 하면 영동선에만 딱 한 군데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그 스위치백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영동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건설된 철도이고, 더 옛날의 일제가 한반도에다 건설한 철도 중에도 스위치백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들은 한반도의 최하 중· 북부 구간 한정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로서는 실감이 잘 안 날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흑역사가 된 금강산선이고 말이다.

그런데 중앙선도 아니고 경부선의 건설 과정에서 작업을 위해 인근에 보조 철도가 그것도 스위치백 형태로 건설된 적이 있었다.
바로 경북 청도군에 있는 삼성-남성현 역 사이에 터널을 뚫는 구간이다.
서울 사람이라면 강남에 있는 지하철 2호선 삼성 역밖에 기억이 안 날지 모르나, 철덕이라면 경부선의 대구 이남에 있는 삼성 역도 알 것이다.

거기는 경부선 본선이 부설되는 공사 현장의 지대가 높고 좁고 험준하여 공사 자재를 운반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그래서 무려 8단계의 스위치백을 거쳐서 터널의 남북 양 끝을 우회하여 연결하는 임시 선로를 먼저 만들게 되었다. 이건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경부선의 대전-대구도 아니고 대구-부산 사이에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컴파일러로 비유하자면 산을 직통으로 뚫는 터널은 본디 기계어요, 우회하는 임시 선로는 그 임시 P코드인 셈이다.
그 스위치백은 경부선의 완공 이후에는 응당 철거되었고 철거된 지 무려 10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흔적을 아주 약간은 확인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이 블로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11 08:37 2015/02/1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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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부에 있었던 옛 철도들

서울 중에서 1970년대 이후부터 육성되기 시작한 강남 일대는 바둑판 모양의 반듯한 도시 디자인에 도로 폭이 무진장 넓고 지하철 역시 엄청나게 많이 다닌다(2, 3, 7, 9, 분당, 신분당!). 하지만 일반열차가 다니는 철도는 완전히 불모지이다. 그나마 고속철 수서 역이 개통하고 나면 완전 동남쪽 끝자락 정도나 장거리 간선 철도의 혜택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반면 강북, 특히 서부 지역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포함한 먼 옛날부터 계속 인서울이었다. 자동차 교통이 발달하기 전부터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여기는 도로 폭이 강남만치 여유가 있지는 않으며, 꼬불꼬불한 선형에 오거리 같은 교차로도 있고 철도도 진작부터 이것저것 많이 건설되었다. 1899년에 경인선보다 몇 달 먼저 개통했던 노면 전차 말고도 이런 예가 몇 가지 더 있었다.

물론 그 철도들은 오늘날은 남아 있지 못하고 다 폐선되고 없어졌다. 주된 이유는 자동차 통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 노면 전차는 1899년에 경인선보다도 몇 달 더 일찍 개통해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다 겪은 유서 깊은 궤도 교통수단이지만, 서울 지하철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폐선되었다. 그리고 21세기가 돼서야 제일 최근에 없어진 건 용산선 지상 구간이 되겠다. 뭐, 엄밀히는 없어진 건 아니고 그 선형 그대로 지하로 들어가서 경의선과 공항 철도의 복층 공용 구간이 된 것이지만.

그것 말고 서울에, 특히 마포 일대에 있었던 철도는 다음과 같다. (출처: 다음 철도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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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인리선

그나마 이 바닥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철도이다. 경의선의 지선인 용산선에서 또 분기하는 지선으로, 지금의 홍대입구 역 인근과 남쪽의 서울 화력 발전소(구 당인리 발전소)를 연결하였다. 발전소의 완공보다 살짝 이른 1929년에 개통하여 발전소가 사용하는 석탄 연료를 수송해 왔으며, 엄청난 옛날 리즈 시절에는 부분적으로 여객 수송도 했는가 보다. 그러니 '방송소앞' 같은 역까지 있었을 터. 발전소를 연결하는 철도라는 점에서는 오늘날 장항선의 지선인 서천화력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철도는 발전소가 석탄 연료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존재의 의미가 없어졌으며, 가성비가 안 맞게 되자 1982년 6월 10일에 폐선됐다. 지금 '서울 마포구 어울마당로'가 옛 당인리선의 선형을 나타낸다. 홍대앞 걷고 싶은 거리, 예술의 거리 일대 말이다. 건물들이 어설프게 곡선 선형으로 좁게 다닥다닥 붙었고 길쭉한 주차 공간도 있는 거기 말이다.
'동'이 2차원 평면 공간을 나타낸다면 도로명 주소 체계에서 도로명은 1차원 선형을 한꺼번에 나타낼 수 있어서 좋다.

오늘날은 당인리선뿐만이 아니라 당인리 발전소 자체조차도 지하화하네 이전하네 하면서 존폐가 불투명해져 있는 듯하다.
허나 옛날엔 한강과 인접한 당산, 이촌 일대만 해도 오늘날로 치면 마곡, 세곡, 내곡에 준하는 완전 서울 외곽이었다. 조선 시대엔 근처에 아예 사형장이 있을 정도였는데(새남터, 절두산 순교 성지!) 하물며 비슷한 위치에 발전소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본인은 '당인리선'이라는 단어를 영화 <튜브>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물론 고증과 개연성 따위는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보낸 설정 속에서 등장한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당인리선은 그 당시로서도 무려 20년 가까이 전에 이미 폐선되고 없구만, 지하철이 그 선로를 타고 질주해서 발전소와 충돌하여 대형 참사를 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2. 경성순환선

경성/경룡/외곽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 노선은 철도 노선이라기보다는 열차 운행 계통의 이름이다. 당인리선과 비슷한 1929년에 개통하여 잘 영업하다가 1944년에 폐선되었는데, 폐선 이유는 수요 감소나 자동차 통행 같은 건 아니다.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전쟁 물자 공출로 인한 폐선이다.

이 열차는 경의선 서울, 신촌을 경유했다가 신촌-연희에서 경의선과 용산선을 연결하는 짤막한 신선 구간으로 들어간 뒤, 용산선 서강, 공덕리를 경유하여 용산으로 간다. 순환이라고는 하지만 용산에는 삼각선이 없는 관계로 서울로 고리를 완전히 완성하지는 못했다. 경성의 야마노테선 같은 상징성을 부여하기에는 노선 길이가 매우 심하게 아담하긴 하다. (서울-용산 9km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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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순환선의 신선이라 할 수 있는 경의선-용산선 연결 구간은 오늘날 서울 서대문구의 신촌로10길과 신촌로11길에 대응한다! 창서 초등학교 서쪽의 그 길 말이다. 물론 당인리선보다는 훨씬 더 일찌 폐역했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시가지가 대놓고 구부정하게 철길 부지를 따라 형성되었다는 티가 난다.

요약하자면 당인리선은 용산선의 남쪽으로 뻗고, 경성순환선의 연결선은 경의선 방면이니까 용산선의 북쪽으로 뻗는다.
용산선은 원래 경의선의 본선 구간이었는데 1920년대 초에 서울-신촌 신선이 생기면서 여기가 경의선 본선으로 바뀌고 용산선은 잉여로 전락했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 놓은 용산선을 활용하자는 차원에서 당인리선과 경성순환선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경선순환선은 일제 말기에 진작에 없어졌고, 당인리선도 없어졌다 보니 용산선도 통째로 지하로 들어가 없어졌고 말이다.

재미있지 않으신지? 이런 게 바로 강남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서울 철도 발달사이다.
폐선 덕후라면 이런 용산선과 지선들뿐만 아니라 경의선 자체에 남아 있는 옛 서소문, 아현리 역의 흔적에도 집착할 것이다.
오늘날 남북이 통일되고 서울에서 중국· 러시아로 가는 철도의 필요성이 부각된다면.. 기존 경의선의 시내 구간을 2복선 이상으로 확장하는 건 진작에 물 건너 가 버렸으니.. 아예 서울을 우회하여 멀찌감치 외곽에서 경부선과 경의선을 연결하는 철도가 생겨야 하지 않나 싶다. 가령, 소사-원시선을 남북으로 길게 늘어뜨려서 말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오래 된 도시는 도로의 폭이나 교차로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길거리 위로 전봇대와 전선이 치렁치렁 달려 있는지, 아니면 전부 지중화되어 있는지를 봐도 구도심인지 신도시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당, 일산이 미관이 아주 깔끔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14 08:30 2015/01/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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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원래는 있었는데 국토 분단으로 인해 기능이 상실되고, 게다가 6· 25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터만 남은 비운의 철도역을 심층 탐방해 보겠다. 오오오~ 흥미진진 두근두근~!
얘들은 황량한 부지만 달랑 있고 건물 실체가 없는 관계로, 주소도 도로명 주소 같은 게 없이 여전히 지번 기반이다. 이름도 '역'이 아니라 그냥 '역지'이다. 황룡사가 아니라 황룡사지인 것처럼 말이다.

1. 경의선 장단 역

장단 역은 원래는 1906년 4월에 경의선이 개통했던 당시부터 영업을 시작한 창립 멤버이다. 그때는 같은 창립 멤버인 문산 역의 바로 다음이 장단이었다. 지금 문산 이북에 있는 운천, 임진강, 도라산 같은 역은 먼 훗날 이뤄진 남북 경의선 철도 연결 작업의 산물이다. (더구나 운천은 그저 임시승강장일 뿐이고.)

장단 역이 유명해진 건 잘 알다시피 인근 선로에 반세기 동안 버려져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 때문이다.
1950년 12월 31일, 고 한 준기 기관사는 평양 방면으로 화물 열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인해 국군과 UN군은 후퇴 중이었다(서울을 북한군에게 도로 빼앗긴 1· 4 후퇴의 불과 닷새 전이었다). 그래서 이 열차는 더는 북상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장단 역에는 전차대 같은 게 없어서 진행 중인 열차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결국 이 열차는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차라리 동작 불능 상태로 파괴 대상이 되었다. 이에 명령을 받은 미군 병사들은 소총을 난사하여 기관차를 벌집으로 만들고 또 탈선까지 시켰다. 한씨는 다른 하행 열차를 갈아타고 후퇴했다. 김 재현 기관사 때처럼 열차가 무슨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서 벌집이 된 건 아니다.

그렇게 긴급 상황에서 버려진 증기 기관차 화통은 2005년에 임진각으로 옮겨졌고, 녹을 벗겨내는 대공사를 거쳐서 2009년부터 임진각에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난리 중에 장단 역 자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위치 자체도 38선, 지금의 군사 분계선과도 너무 가까운지라 복원이나 관광지 조성 같은 건 요원하다. 민통선도 아닌 완전 비무장지대에 있으니 말이다.

장단역지의 공식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198”이다. 지도 사이트에서 주소를 입력하면 위치가 정확하게 나온다. 도라산리도 아니고 동장리이기 때문에 도라산 역에서 1km가 넘게 북쪽으로 멀찌기 떨어져 있고, 군사 분계선이 몇백 m 코앞이다.
이 일대의 항공 사진을 보면 4차선 도로의 옆으로 경의선 단선 철길이 지나고, 주변은 온통 숲이다.
예전에 기관차가 임진각으로 옮겨지기 전에 시뻘겋게 녹슨 채 내팽개쳐져 있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여기 어딘가의 경의선 선로 옆에 나란히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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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 전의 리즈 시절엔 장단 역은 제법 컸다고 그러는데 지금 저 지형을 봐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또한 '죽음의 다리'라고 불리는 교량이 장단 역 남단 300m쯤에 지금도 있다고 하는데 항공 사진으로는 짐작을 못 하겠다.

2. 경원선 철원 역 외

철원은 남북 분단 이전에는 지금의 춘천에 맞먹는 큰 도시였으며, 철원 역도 무려 1912년에 개통한 경원선의 창립 멤버역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게다가 금강산선의 분기역이기까지 했으니 역의 덩치도 당시의 경성 역만큼이나 컸다고 한다.
철원 역 일대는 분단 직후에는 북한 치하에 있다가 6· 25가 발발하면서 건물과 시설이 모조리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한 후, 다행히 터와 최소한의 흔적은 건졌다. 위치도 DMZ는 아닌 단순 민통선 내부인지라 개인이 그럭저럭 찾아가서 답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안보 패키지 관광을 이용해서 이 지역을 방문하면, 철원 역은 아무래도 건물 실체가 짝퉁 형태로라도 남아 있는 월정리 역보다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관광버스가 정차하지도 않고 가이드가 그냥 차창 밖으로 “여기가 철원 역 부지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걸로 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를 직접 땅밟기를 하고 살펴보고 싶으면 평일에 개인이 자가용을 끌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물론 사전에 군부대에 연락해서 허가를 받고서 말이다. 다른 방문자의 경험담을 보자면, 원래부터 그 지대의 출입증을 갖고 있는 지역 주민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닌 경우(외지인의 단독 방문), 감시하는 군인이 동승· 동행을 한다고 그런다.

"사람이 가득하던 도시가 어찌 외로이 앉았는가! ..." (애 1:1)
성경의 이 애가(lamentation) 구절이 철원역지를 보면 저절로 읊어질 것 같다.
경원선은 경의선과는 달리 남북이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니 지도를 펴 놓고 옛 철길 궤적을 한번 추적해 보도록 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그림 한 장으로 모든 게 설명된다.
좌측 최하단의 '묘장로' 인근에 있는 붉은 점은 바로 지금의 경원선 종점인 백마고지 역이다.
그리고 근처의 오른쪽 위에 있는 점은 옛 철원 역으로, 지금은 민통선 안에 빈 터만 남아 있다.
더 위로 들판과 산지의 경계에 있는 붉은 점은 월정리 역이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남한 쪽의 논밭 들판들은 거의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단, 월정리 역은 원래는 민통선 지대를 넘어 더 북쪽의 DMZ 내부에까지 걸쳐 있었으나 좀 덜 위험한 곳으로 살짝 옮겨져서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철원 역도 지금은 국도 3호선에 딱 붙은 지점에 복원되었지만 원래 있던 곳은 그보다는 좀 더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북한으로 넘어가서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붉은 점이 바로 가곡 역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북한의 월정리 역에 해당하는 버려진 역이다! 선로는 없고 역사 흔적만 있다.
다음으로 '평강군'에 걸쳐 있는 점은 평강 역으로, 오늘날 경원선의 북한 구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북한에서는 자기 구간을 강원선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쪽에 있는 푸른 점은 철원에서 금강산선의 궤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각각 한다리, 대위교, 그리고 전선 휴게소 인근에 있는 교각이다. 위의 자료가 정확하다면, 철원 역에서 분기한 금강산선은 남쪽으로 좀 내려간 뒤에 동쪽을 향해 간다는 걸 알 수 있다.

끝으로, 군사 분계선 인근의 분홍색 점은 제2 땅굴 입구가 있는 지점인데 참고로 첨가해 넣었다.

위의 점들이 다 철길로 연결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본인은 경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황룡사지보다도 철원역지, 장단역지 같은 이름을 들었을 때 더욱 가슴이 뭉클하고 뭔가 울컥함을 느낀다. 분단된 철도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에.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는 잘 알다시피 '천사의 도시'라는 뜻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평화와는 별 관계가 없는 짓을 하는 북한 같은 또라이 반국가단체가 '평강, 평양' 등 '평'자가 들어간 지명을 갖고 있다는 건 참 역설적인 것 같다. 북한은 자기들의 악한 체제의 유지를 위해 주민들에게 절대로 자유를 주지 않으며 눈과 귀를 강제로 틀어막고 지내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한편, 경의· 경원 라인과는 달리, 동해중부선 쪽은 일제가 한창 공사를 하다가 패망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쪽에는 영업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고 파괴되고 없어진 역 같은 건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4/11/16 08:41 2014/11/1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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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주요 사건들과 철도

1.
경부선이 개통하던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역이 있는 곳보다 더 북쪽에, 서울 중심과 더 가까우며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과 가까운 곳에 경부선 서대문 역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때의 진짜 서울 역이었다. 지금의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유 관순 열사는 잘 알다시피 이화 학당을 다녔는데, 이화 학당은 지금의 이화여고가 있는 곳에 있었다.
이화여고는 서대문 역과 가깝다. 따라서 이화 학당 역시 그 시절엔 경부선 서울 역의 역세권에 있었으며, 유 관순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고향 천안을 수월하게 오갈 수 있었다.

서대문 역은 1919년 3월, 3·1 운동이 벌어지던 와중에 폐역되었으며, 남대문 역 이북으로는 서대문이 아닌 신촌으로 꺾는 드리프트 선로가 1920년 말에 뒤늦게 건설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구 서울 역 건물은 1925년 9월에 완공되었다.

2.
농촌 운동가 최 용신 선생은 샘골 학원 주변으로 수인선 철도가 생기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 애석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1935년 사망, 수인선은 1937년 개통. 약 2년 반 차이) 그래도 자기 지역으로 철도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소식 정도는 듣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3.
1929년의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의 배경에도 철도가 있다. 나주에서 광주 사이를 열차로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했기 때문임. 이게 결국은 수십 명의 학생들이 엉겨붙은 패싸움으로 커져 버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남선 나주 역(광주보다 더 남쪽)과 광주 역을 오가는 열차란 상상하기 어렵다. 서울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있어도, 목포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호남선은 몰라도 경전선 쪽은 지금까지 변화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때의 광주 역은 지금의 광주 역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 동쪽으로는 담양과 남원으로 가는 '전남선'이라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다. 이것도 참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남선은 1944년에 일제의 전쟁 물자 공출로 인해 선로가 철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광주 역은 다른 곳으로 이설되고 새로 건설된 경전선이 광주를 지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선로가 남쪽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광주 역은 지금과 같은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뭐 지금의 광주송정 역인 구 송정리 역이 호남선과 전남/경전선과의 환승역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1929년에 다녔던 열차는 어떤 형태로든 호남선 남부와 전남/경전선을 직결하는 통근열차요, 지금으로 치면 광역전철뻘 되는 열차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담으로, 대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철도 선형상으로는 왠지 고립된 고자처럼 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촌과 광주 역이 서로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4.
끝으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있다.
1942년 여름, 영생 여자 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가러 열차를 탔다. 한 열차를 같이 탄 여학생들이 낄낄대며 한국어로 수다를 떨었는데, 하필 옆에 조선인 사복 형사가 타고 있었다.
때는 이미 창씨 개명에 조선어 사용 금지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 중이던지라.. 일제의 앞잡이이던 그 형사는 “이것들이 황국 신민이면 신민답게 일본어를 쓸 것이지 왜 조선어를 쓰고 난리냐?”라고 꾸짖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일 뿐인데 웬 참견이냐는 식으로 대들었다. (상대방이 일제 끄나풀인지 처음엔 몰랐음)

이에 형사는 빡쳐서 다음 역에서 여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려 심문을 했고, 나중에는 일행 중에 제일 강하게 반항하던 박 영희라는 학생의 집에까지 쳐들어가서 옛 일기장을 압수했다. 그런데 거기에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썼다가 선생님에게서 꾸지람을 들었다”란 문장이 있는 걸 보고는...

국어를 썼으면 칭찬을 받아야지 왜 꾸지람이냐? 그 선생 누구야? 이거 악질 반동 새끼구만?” 취조를 한 끝에.. 옛 교사였던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 선생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제 고등 경찰은 이 사람이 소속되었던 조선어 학회까지 과격 무장 독립 운동 조직으로 날조하고 일망타진해서 성과 한 건 올리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진 계기이다. 더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옛날에는 한글, 국어 쪽으로만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 이 사건을 다시 읽어 보니, 그 당시 영생여고보 학생들이 이용한 철도 노선은 함경선이었고 지금의 북한 치하에서는 평라선 구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깊이 와 닿는다. 아아~ 지금도 국토가 분단되지만 않았다면..!
철도교에 입문하고 나면,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철도를 중심으로 다시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긴다.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이 아닌 국내의 철도역 승강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라도 했다면 거기는 그야말로 철덕들의 성지가 되지 않았겠는가?
6·25 때도 군인· 경찰 말고 민간인 중에 가장 많이 순직한 사람들이 바로 철도인이다. 철도 사랑과 나라 사랑이 별개가 아닌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2 08:32 2014/10/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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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선된 철도, 안성선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간선 철도인 경부선을 보면 대전에서 호남선이 서쪽으로 분기하고 천안에서 장항선이 서쪽으로 분기한다. 동쪽 내륙 쪽으로 분기하는 건 조치원(충북선)과 김천(경북선) 정도다.
아울러, 과거에는 수원에서 서쪽으로 수인선이 분기하기도 했다.

한 쪽으로만 분기하는 게 아니라 양방향으로 모두 분기하는 역은 흔치 않다. 안산선과 과천선이 만나는 금정 정도가 고작인데, 얘들은 일반열차가 아니라 전철만 다니는 노선이어서 존재감이 좀 덜하다.

먼 옛날에는 수원에 서쪽으로 수인선뿐만 아니라 동쪽 여주 방면으로 수려선도 있어서 동서남북이 모두 철길로 통했었다. 그러나 수려선은 영동 고속도로 개통의 타격으로 인해 이미 1973년에 폐선됐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수원은 분당선과 수인선이 만남으로써 일반열차+전철이 수직+수평 양방향으로 분기하는 역이 될 예정이긴 하다.

그때는 수원이 그랬던 것처럼 천안도 양방향 분기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서쪽으로 장항선이 있었다면, 동쪽으로는 안성 방면으로 가는 안성선이라는 철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도와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안성에도 철도라니? 게다가 둘은 사실 1920년대에 매우 비슷한 시기에 착공되어 개통했다. 그 당시 장항선과 안성선의 이름은 각각 충남선, 경기선이었다.

천안에서 안성까지는 30km가 좀 안 되는 거리이고, 평택과 안성은 지리적으로 수원과 용인 정도의 관계와 비슷하다.
일제는 안성선을 연장해서 이천을 지나 여주까지 가게 할 생각이었다. 여주에는 수려선이 있긴 했으나, 안성선은 표준궤이고 수려선은 협궤인 관계로 선로의 직결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즈 시절에 안성선은 안성을 지나 경기도 이천의 장호원읍까지 약 70km 남짓한 거리가 뻗어 있어서 수려선의 길이와도 비슷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공사를 하면 실제로 여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안성선은 연장은커녕 이미 있던 선로도 뜯겨져 나가서 천안-안성 사이의 짤막한 로컬선으로 전락해 버렸다. 해방 후에도 이 구간은 복원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0년대에 안성선을 연장해서 여주가 아니라 원주까지 가게 할 계획을 한때 했었다. 경북선(김천-영주), 충북선(김천-제천)에 이어 경부선과 중앙선을 잇는 제3의 철도를 만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정부는 철도보다 자동차 도로를 더 육성하면서 이 계획을 백지화해 버렸다. 경부 고속도로가 안성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건설되자 안 그래도 짤막하던 안성선은 더욱 잉여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0년대 말에 안성선은 하루에 겨우 n회밖에 열차가 운행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표준궤인 덕분에 수려선보다는 더 오래 명맥을 유지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뒤 1985년 4월 1일, 수인선이 영업을 중단하기 10년 남짓 전에 안성선은 여객 열차의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1일부로 완전히 폐선 처리되어 모든 선로가 사라졌다. 수려선과 수인선의 종말 사이에 이런 사건도 있었다는 걸 알아 두도록 하자.

Posted by 사무엘

2014/09/04 19:21 2014/09/0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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