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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봄에 중랑 물 재생 센터와 서울 하수도 과학관에 다녀 온 것에서 착안하여, 올가을엔 말로만 듣던 수도 박물관을 다녀왔다.
수도 박물관은 서울숲의 근처에 있는 '뚝도 아리수 정수 센터', 쉽게 말해 상수도 정수장이라는 보안 시설의 내부에 있다. 즉, 서울숲의 내부에 있는 시설이 아니며, 강변북로 근처에 있는 고유한 출입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건 당연히.. 정수장 자체와도 별도로 개설된 출입구이다.

여기를 어떤 교통편으로 찾아갈까 망설였는데..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도 이 기회에 한번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이 위령비는 자동차 전용 도로의 진출입로 옆이라는 좀 엄한 곳에 있는 관계로.. 차가 없이는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체 교통편은 자연스럽게 자가용으로 결정됐다. =_=;;;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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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옆의 중랑천은 한강으로 합류하고 이 길 역시 자연스럽게 강변북로로 합류하게 된다. 다만, 합류 직전에 성수대교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나들목이 나온다.
이 나들목의 접속 도로는 '뚝섬로'이다. 뚝섬로와 고산자로가 만나는 '성수대교 북단 교차로'에서 계속 직진하면 서울숲 쪽으로 가게 되며,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제서야 성수대교로 가게 된다.

단, 이때 예각으로 더 깊게 오른쪽으로 꺾으면 여기서도 지하도를 거쳐서 강변북로 동쪽 구리 방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
위령비는 설마 그 광활한 강변북로 본선에 있는 건 아니고, 강변북로와 뚝섬로를 잇는 진출입로, 철도로 치면 연결선에 속하는 좁은 도로 사이에 있다. 그나마 여기는 차들이 본선 구간만치 빠르게 달리지는 않으니 드나드는 게 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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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출입로의 상행과 하행 사이의 공간에.. 위령비 참배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다. 상· 하행 모두 어느 방향으로나 진출입 가능하다.
이 위령비 때문에 자동차 전용 도로 구간 내부에.. 무슨 휴게소도 아니면서 사고· 고장이 아닌 일반적인 명분으로 차를 세우고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터가 생겼다는 것이 무척 이색적이다.
위령비는 저 전방의 도로를 횡단하면 바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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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16일에 완공됐다. 별 관련은 없지만, 이건 당시 대통령이던 원조가카가 암살 당하기 열흘 전의 일이었으며, 원조가카 역시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5년 만인 199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 기념일 아침에 구 성수대교는 상판이 하나 무너져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32명이나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가 부상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상자가 이런 형태로 발생한 이유는 시내버스 한 대가 거꾸로 뒤집혀서 천장을 아래로 향한 채로 바닥에 수직 낙하했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그 버스의 승객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물론 부실공사였지만, 얘는 그래도 훗날 무너진 삼풍 백화점만치 악질적인 부실공사와 막장 운영의 산물은 아니었다. 또한, 성수대교도 외관상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다가 무슨 지뢰 터지듯이 무너진 게 아니며, 당일에 차가 원활하게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이음매 사이의 균열이 심하게 벌어져 있기도 했다. (백화점은 아예 당일 5층의 영업과 출입이 금지되고 에어컨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원..)

이 위령비는 보다시피 사고 3주기인 1997년 10월에 만들어졌는데, 이때는 이미 성수대교가 다시 만들어져서 개통된 뒤였다(1997년 7월). 단지, 그 당시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가 다니던 구 당산철교가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아 헐렸으며, 다시 건설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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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 주변은 이렇게 생겼다.
경부 고속도로 관련 기념탑과 위령비는 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형상화한 모양이던데.. 저 비석은 뭘 형상화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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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비석 뒤에는 희생자 3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비도 저렇게 뒷면에 명단이 적혀 있더라만..
이 중 무학여고 학생이 9명이고, 나머지 인원 중에는 필리핀 사람 1인, 그리고 서울교대 학생 1인도 포함돼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양재 시민의 숲에 있고, 거기엔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고 희생자 위령비도 근처에 같이 있다.
그것처럼 성수대교 위령비 역시 아예 근처의 서울숲 내부로 옮기면 사람들이 찾아가기는 훨씬 더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이 한강과 더 가깝고 성수대교가 같이 보이는 여기가 더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그냥 지금 위치로 정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 1999년 8월 18일 밤엔 딸을 사고로 잃은 어느 아버지가 위령비 옆에서 음독 자살하여 주변을 한없이 안타깝게 했다.
다른 언론 보도를 검색해 보면 그분은 희생자 유족 대표 명목으로 위령비의 건립도 주도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극도의 슬픔과 정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도 그만뒀으며.. 나중에는 딸 생각만 하며 거의 매일 위령비 곁을 떠나질 않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잃어도 보통 사람은 저렇게 멘탈이 견디질 못할 텐데,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더 극단적인 예도 있었다.
정 광진이라는 변호사는 딸만 넷이었는데 세 명을 저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욥 실사판이 따로 없다. "집이 무너져서"(욥 1:19) 대신에 "백화점이 무너져서"로 치환하면 된다.

그래도 유가족이 이 엄청난 비극과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라도 극복했다면.. 피해 보상금으로 장학 재단을 만들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후학들을 후원하는 초인적인 대인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재단의 이름에다가는 물론 죽은 자녀의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성수대교 희생자 중에는 서울교대 재학생이던 이 승영 씨의 유가족이 그렇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세 딸을 잃은 정 변호사도 재단을 만들었으며, 관련 보도 자료를 보면 "딸들이 살아 생전에 다니던 교회" 얘기가 나온다.

종교의 순기능이란 게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 싶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도 말이다. 이건 성경이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죄와 심판, 복음, 구원, 성령의 열매 같은 '영적인 영역'과는 별개인 '정신적인 영역' 얘기이다.
그에 비해 세월호 사고 유족 중에서는 정치 선동꾼 말고 저렇게 뜻있는 결단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일반인 유족 말고 단원고 유족 중에서 말이다. 난 딱히 못 들어 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 같은 처참한 대형 참사들을 겪고도 "아직까지도 달라진 게 없네" 운운하면서 한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소를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을 많이 고쳤으며, 그때에 비해서는 시스템이 보이지 않게 많이 개선되고 나아졌고 투명·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비록 지금도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엔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막장 헬이었는지, 법과 FM 대신 미개한 편법과 꼼수, 무식한 "까라면 까" 똥군기와 의지드립이 얼마나 더 만연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다.

옛날에 그 여건에서는 그런 방법론이 불가피했던 점도 있긴 했다. 마치 지금 한국과 일본이 명목상 동맹이라고 해서 과거에 일제에 대항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무의미한 뻘짓을 한 게 아니며.. 지금 마소가 오픈소스 진영과 친해졌다고 해서 과거 빌 게이츠와 발머 시절의 독점 정책이 삽질이 전혀 아니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6· 25 개전 초기에 야만적인 즉결처분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그렇게 독하게 나가면서 기업의 힘을 키우고 나라를 구한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과거의 적(?)과도 열등감 없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고, 과거의 관행과 방법론의 한계를 비판할 여유조차도 생긴 셈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이 복잡한 현대 문명에서 대형 사고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외국 선진국도 먼 옛날엔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지는 급은 아니지만, 멀쩡히 날던 비행기가 공중분해 되거나 출입문이 확 뜯어져서 승객들이 밖으로 튕겨 나가서 죽는 황당한 사고도 난 적이 있다. 그런 사고를 겪고서야 안전 시스템이 보강되었으며 동일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무거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옆길로 너무 많이 샜다. 이제 본론으로 되돌아가 수도 박물관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성수대교 위령비 구경을 마친 뒤, 본인은 차를 몰고 수도 박물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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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된 길다란 간판이 방문객을 반겨 주었다.
주차는 근처에 있는 서울숲 주차장에다 하면 됐다. 요금은 저렴한 편이지만 수요 대비 주차 공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주말에는 차를 가져오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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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도는 온통 흐리게 처리돼 있어서 본인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수도 박물관은 달랑 건물 한 채(저 지도에서 4번 본관)가 전부인 형태가 아니고, 생각보다 넓었다.
옛날에 현역이다가 지금은(대략 1990년대부터) 더 쓰이지 않게 된 낡은 정수 시설들이 다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최신 보안 시설은 옆에 따로 만들어져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옛 서울 역과 지금 서울 역 건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뒤, 수도 박물관 자체는 2008년에 만들어졌다.

인근의 서울숲 내부엔 강변북로를 횡단해서 한강 쪽으로 가는 육교가 하나 뻗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수도 박물관 내부에도 한강으로 가는 육교가 이어져 있다. 즉, 이 부근에 육교가 총 2개 있는 셈이다.
뭐, 그렇게 가도 강변의 자전거 도로나 산책로에 도달하지, 무슨 한강 공원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근의 뚝섬 한강 공원 쪽으로 1km가 넘게 한참을 가야 된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9/09/28 08:33 2019/09/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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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

1. 컴퓨터와 인간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컴퓨터는 전원을 넣은 뒤에 실제로 사용 가능해질 때까지 준비 시간이 대단히, 가장 긴 전자 기기에 속한다.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컴퓨터와 단순 계산기를 비교해 봐도 차이를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컴퓨터에는 '부팅'이라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드디스크 대신 SSD 덕분에 부팅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긴 했지만, 컴퓨터가 사용 가능해질 때까지 내부적으로 무수히 많은 준비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범용 컴퓨터는 타 전자 기기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넘사벽급으로 확장과 프로그래밍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선천적으로 할 줄 아는 건 없다시피하고 프로그램만을 기막히게 빨리 잘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전자 기기라면 회로 하드웨어 차원에서 콕콕 박혀 있을 명령과 데이터도 다 일일이 매번 메모리에다 새로 주입해 줘야 하며, 자신과 일체형이 아닌 타 하드웨어들을 감지하고 초기화하고 점검해 줘야 한다. 오늘날의 컴퓨터가 괜히 '프로그램 내장형'인 게 아니며(메모리에 내장), 그러니 이런 오버헤드가 클 수밖에 없다.

컴퓨터와 단순 비교는 안 되겠지만, 인간만 해도 직립보행과 큰 두뇌를 얻기 위해 타 동물들에 비해 생물학적으로 다른 장점을 희생한 게 많다고 한다. 태어난 직후엔 다른 어떤 동물의 새끼보다도 무능하고 연약한 상태이며,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엄마 품에 오래 있어야 한다. 비슷한 덩치의 다른 동물에 비해 힘이 약하고 소화 효율도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그 연약한 인간은 동물이 상상도 할 수 없고 신묘막측의 영역에 가까운 언어 습득과 구사 능력이 있으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불을 다루는 능력도 지구상에서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생명체도 갖추고 있지 않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이 스스로 불을 피운다거나 돌멩이를 집어서 던질 줄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공깽일 것이다. (뭐, 그래 봤자 인간에게 제압당하는 건 변함없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컴퓨터가 타 전자 기기들과 구조적으로 다른 것만큼이나 인간도 다른 포유류와 구조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둘이 서로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양상이긴 해 보인다.

2. 정치와 종교 싸움

인간이 나누는 여러 대화 주제들 중에 정치와 종교는 제일 골치 아프고 답 안 나오며 사람을 친구 아니면 적으로 극단적으로 가르는 분야이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자존심을 걸고서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분야이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이런 주제는 안 꺼내는 게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분야에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그저 먹고 자고 싸고 씨 뿌리는 욕망만 충족되면 되는 개돼지 짐승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리스천에게는 종교관 한정으로 복음 전파의 의무도 있다.

둘 중 정치는 내가 속한 "집단의 현재 현실" 또는 가까운 미래와 관계가 있다. 내가 낸 세금을 정치인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쓰지 않고 사회와 국가· 민족 전체를 공멸로 몰고 가고 있다면, 이에 대해 분노하고 항거하는 것이 개인의 권리이자 어느 정도 의무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 뻘짓 한 게 당장 나에게까지 돌아와서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 반면, 종교는 "개인의 가치관(특히 경전의 해석 체계) 내지 영원", 먼 미래(특히 죽음 이후)와 관계가 있다. 현실 그 자체인 정치와 달리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분야에 대한 신념을 다루며, 스케일도 집단이 아니라 개인으로 줄어든다.

정상적인 정교 분리 국가라면, 주변에 온통 자신과 종교관이 다른 사람뿐이라고 해도 세금이 낭비된다거나 국가 안보가 무너진다거나 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이게 다르면 사람간에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더 가까워질 수 없어진다. 특히 이것 때문에 결혼도 못 하고 파토 난다.
이렇듯, "집단의 물질적인 현재"와 "개인의 영적인 미래"를 다루는 두 축은 인간의 자아 및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동일한 분별력과 믿음과 양심이라면 정치 성향과 종교관도 뭔가 일관되게 동일하게 나오지 않겠나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본인과 신앙관이 일치하고 정치 성향만 정반대인 사람, 혹은 반대로 정치 성향만 일치하고 종교 쪽은 정반대인 사람도 많이 봐 왔다. 글쎄, 어떤 건 취향 존중의 영역이겠지만.. 명백하게 옳고 그름의 영역인 것까지 좌우 균형 취향으로 왜곡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3. 인종간의 우열?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라고.. 20세기 중반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엄청난 생물학자가 있다. 이과 출신이라면 다들 이름을 기억하실 것이다. 크릭은 2004년에 사망했지만 왓슨은 90대의 나이로 현재까지 살아 있다. (과거 vs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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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획기적인 연구 성과 덕분에 노벨 상을 받고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으나.. 나중엔 무슨 마가 꼈는지 유전자 차원에서의 인종의 우열 운운하는 또라이 같은 망언도 많이 늘어놓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늘그막의 이미지를 많이 구겼다.
인텔의 창업주인 누구누구가 엔지니어로서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노조를 탄압한 악덕 기업주였네 뭐네 하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저 사람들은 기업가가 아닌 학자였고, 단순히 돈만 밝힌 것하고는 흑역사가 차원이 달랐다.

타 분야의 전문가가 자기 전공과 무관한 정치· 종교· 이념 쪽으로 어그로를 끄는 것도 아니고, 유전자 쪽 연구의 넘사벽급 전문가가 직접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니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백인과 흑인이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흑인 직원을 다뤄 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다들 공감할 거다." / "인종 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 ... ㅡ,.ㅡ;;

이 때문에 왓슨은 국제 왕따로 전락해서 강연 초청과 책 출판 계약이 몽땅 짤리고.. 한때는 생계를 위해 노벨 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기까지 했을 정도로 몰락했다고 한다.
학자가 논문 표절, 연구 결과 조작, 연구비 횡령, 마루타 실험-_- 같은 업무상의 비윤리적인 짓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상과 신념이라는 외부 요인만으로 학계에서 매장 당하기란 참 쉽지 않을 텐데.. 저 사람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안 그래도 진화생물학 진영에서는 진화론은 우생학과 아무 관계 없다고 못을 박으며, 기독교 창조론자들이 벌이는 진화론 비방(?)과 음해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왓슨과 크릭의 언행은 진화론이 동일선상에서 비방 받을 빌미를 잔뜩 제공하게 됐다. 물론 교인들도 밖에서 개독 소리 들을 짓, 예수 이름이 모독 받을 짓을 한 게 많으니 서로 상쇄되는 건가.. -_-;;;

이 점을 감안하여 본인은 거리 설교를 하면서 기원에 대해 잠깐 언급할 때, 진화론을 대놓고 공격하고 욕하지 않는다. 단지, 우주와 생명이 다 우연히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 게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난 왓슨 저 양반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취지는 얼추 알 것 같다. 백인들이 탁월한 과학 기술로 세계를 정복했으며, 나머지 나라 사람들은 미개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을 저렇게 공공연하게 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저 사람이 비정상적인 PC(정치적 올바름) 트렌드를 저격하면서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동성애는 잘못됐다, 빨갱이는 박멸해야 된다" 같은 식으로 과격한 말을 한 거라면 성경적으로 실드 받을 여지라도 있을 텐데.. 저건 아무 실드 없이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일 뿐이다.

인종 간에 유전자 차원에서 지능의 우열이 정말 있을 수는 있다고 치자.
평균 이상으로 천재 괴수들을 줄줄이 배출한 가문이 있다면 저 사람들은 유전자 차원에서 뭐가 있는지 궁금해질 법도 하다. 실험 결과가 참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그걸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만 있다면 과학자의 연구 대상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구가 정치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제대로 진행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우며, 그건 십중팔구 "열등한 인종은 없애 버려야 된다, 고자로 만들어서 대를 끊어야 된다" 같은 나치즘 내지 다윈 상을 암시하는 결론으로 곡해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고 마는 것도 아니고 공공연하게 표현까지 하는 건 미친 짓 위험한 짓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 싶다.

난 개인적으로는 인종뿐만 아니라 언어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가 우열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어떤 언어는 다른 언어보다 더 오버헤드 적고 간결하고, 학문이나 기계화나 성경 번역 같은 용도에 구조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어휘, 문법, 문자 표기 등등을 총체적으로 따져 봤을 때 말이다.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의 비율까지는 차마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견해를 피력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고, 열등한 언어를 쓰는 사람은 머리를 개조해서 모국어를 강제로 바꾼다거나 나가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총체적인 검증과 비교가 가능하지 않으니 이런 생각은 혼자만의 심증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오늘날 언어학 전공자들은 문화 제국주의 운운하면서 언어의 기원이나 우열 같은 거 따지는 짓을 절대 금기시하고 불가지론으로 부치고는 있다. 그러나 언급을 꺼린다고 해서 실체 자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덕이 안 되는 짓이고.. 참 어려운 문제이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08/07 08:34 2019/08/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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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대로에서 중랑천 서쪽 구간은 남북으로 동대문구와 성동구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성동구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으로 둘러싸인 삼각형 비슷한 지대는 뭐랄까.. 서울 시내이면서 서울 같지 않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평범한 주택이나 업무 시설이 아니라 군자 차량기지부터 시작해서 빗물 및 하수 처리장,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스 탱크, 남쪽 끝에는 성동 자동차 검사소.. 민간인이 범접하기 어려우며 교외 변두리에나 있을 법한 인프라 시설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한평은 중고차 시장과 자동차 부품 상가가 유명하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 일대에 지하철 차량기지까지 들어선 것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성수에서 용답까지 없는 길을 일부러 만들어 가면서 괜히 애쓴 게 아니었다.

그런데 2010년대 이래로 이 동네가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하수 처리 시설의 일부가 복개되어 지하로 들어가고, 그 위의 부지가 공원으로 꾸며지는 듯하다.
근래에는(2017) '서울 새활용 플라자'라고 이름만 들어도 용도와 성격이 짐작되는 시장 겸 공공시설이 들어섰으며, 바로 옆엔 '서울 하수도 과학관'이라는 것도 나란히 생겼다.

결정적으로 하수 처리장의 이름마저 '물 재생 센터'라고 바뀌었으니, 이 동네는 친환경, 재활용 산업이라는 컨셉을 표방하면서 꼬질꼬질한 과거 이미지를 벗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천호대로 일대의 군소 하천들을 답사하던 와중에 거기 정도면 방문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그래서 본인은 거기를 찾아갔다.

새활용 플라자는 천호대로에 가까이 위치한 서울 청년 회의소에서 500m쯤 남쪽에 있다. 걸어서 못 갈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외진 곳에 있기도 하니.. 장한평 역 8번 출구 인근에서 대략 20분 간격으로 25인승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고 한다. 뭐, 본인은 자전거가 있으니 이 정도는 이동하기 딱 좋은 거리와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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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이렇게 생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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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가 정녕 서울 한복판이란 말이냐...;; 주변의 넓은 풀밭 벌판에 압도되어 버렸다. 옛날에 서울 마곡 미개발 지대를 보는 것 같았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부터 한 바퀴 돌면서 경치 감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주차료가 징수되는 구역 내부이기 때문에 자동차는 아무나 못 들어온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울타리나 출입 금지 표지판도 없고 사람 몸은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다.

여기에 각종 공원 시설들이 본격적으로 지어지고,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덜 유명하고 황량한 지금 모습을 기록으로 많이 남겨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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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 동안 공사를 많이도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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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 박물관 내부에는 시설의 명칭에 걸맞게 우리나라의 하수 처리 시설의 변천사에 대한 자료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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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물 지도이다. 나름 하천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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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이런 물 재생 센터는 총 네 곳 있다. 난지도 같은 쓰레기 처리장의 액체 버전이라 할 수 있는데..
난지와 서남은 각각 고양과 김포에 근접한 너무 서쪽 끝에 있고, 동남쪽의 탄천에도 하나 더 있다. 그나마 중랑은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이면서 서울 시내와도 그리 멀지 않으니 위치가 가장 좋다.

또한 중랑은 인서울 하수 처리장 중에 제일 먼저 생긴 곳이라고 한다. (나머지 세 곳은 80년대의 한강 종합 개발 사업 때 만들어졌지만 얘만은 박통 때 만들어짐)
근처의 군자 차량기지는 공교롭게도 최초의 인서울 지하철 차량기지인데.. 기막힌 인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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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 과학관을 포함해 물 재생 센터까지 시설 전체의 축소판 미니어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 봤던 그 황량한 벌판에는 앞으로 꽃밭과 연못이 조성되려는가 보다. 난지도 하늘 공원 같은 공원이 여기에도 생길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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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매립지에서 메탄 가스를 수집해서 열병합 발전을 하듯이, 하수 처리장에서도 메탄 수집이 가능한가 보다. 게다가 소규모로나마 수력 발전도 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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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 저 정도로 중요한 자원인지 몰랐다. 질소처럼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소 중 하나이며, 비료 내지 화약의 제조에도 쓰인다.
'나우루'라고 석유도 아닌 인광석 하나만으로 벼락부자가 됐다가.. 그게 고갈되면서 쫄딱 망한 나라가 있긴 했다.

이런 전시관 자체는 그냥 한 층이 전부이고 볼거리가 아주 많은 건 아니었다. 동영상까지 일일이 다 시청하더라도 2~30분이면 다 관람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 이런 테마의 박물관과 넓은 공터가 있다니, 흥미로운 체험을 했다.

맨홀 아래의 길은 어떻게 나 있는지,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더러워진 물과 대소변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뭔가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옛날에는 동네 곳곳마다 일명 똥차라고 불리는 분뇨 수거차가 번거롭게 다녀야 했다. 재래식 화장실 기반인 곳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들을 퍼야 했고, 수세식에 정화조까지 갖춰진 건물이라도 침전물 찌꺼기(슬러지)는 몇 달 간격으로 직접 긁어 가야 했다. 슬러지는 한번 분해를 거쳤기 때문에 최초의 그 X만치 흉악한 외형과 악취를 지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관상 절대로 보기 좋게 생기지는 않은 건 마찬가지이다.

그랬는데 요즘 어지간한 도시에서는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오물을 건물 정화조에서 썩히는 게 아니라 그대로 중앙 하수 처리장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하수도와는 별개로 부설된 통로로 말이다.

생각해 보니 우린 상수도 요금만 내지, 하수 처리 비용을 따로 지불하지는 않는다. 쓰레기는 유료 봉투에다 넣어서 버린다지만 버려지는 물은 정확하게 집계하는 게 가능하지 않으며, 의미도 없어서 그렇지 싶다. 상수도 요금에다가 하수 처리 비용까지 포함해서 징수하는 게 더 낫다.

중랑 물 재생 센터가 있는 곳은 청계천이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더 서남쪽으로 중랑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는 서울숲이라는 녹지 공원과 함께 인서울 거의 최후의 공장으로 여겨지는 삼표 시멘트가 있으며, 지도에서 가려지기까지 한 '서울 한강 사업 본부'와 함께 '수도 박물관'이 있다. 둘이 서로 좋은 대조군을 형성하는 듯하다.

아울러, 아차산-광나루 사이의 언덕에는 '서울 물 연구원'이라는 게 있어서 거기도 온통 지도에서 가려져 있다.
한강의 서울 시내 구간 정도면 이미 상수원으로 취수하지도 않는 하류일 텐데.. 물 관련 보안 시설이 비단 상수도 취수 시설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26 19:38 2019/07/2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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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한강이라는 거대한 강이 있다. 서울은 수도답게 고층 빌딩이 즐비하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에 한참을 더 가야 시내가 나오고.. 자연물인 강조차도 폭이 저렇게 왕창 크다는 생각을 본인은 어린 시절부터 했었다.
한강이 임진강과 합류한 막바지 하구는 폭이 여기보다도 더 크며, 이름부터가 '조강'이라고 달리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는 소금물이 수시로 드나드는 반쯤 바다이며, 사실은 북한이 코앞에 있어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도 없으니 논외로 하자.

서울 전역을 통틀어 강이 한강만 있는 건 아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들의 계곡에서 개천이 발원하여 흘러내린다. 이것들은 지형이 낮아지고 다른 물줄기와 합쳐지면서 굵어진 뒤, 최종적으로는 한강으로 흘러든다. 모양이 트리 구조와 얼추 비슷하다. 사이클이 존재한다면 그건 하중도를 뜻할 것이다.

본인은 서울과 여기 변두리에 존재하는 하천으로 청계, 중랑, 도림, 안양, 탄.. 딱 5개 정도만 금방 떠오른다.
청계천은 딱 서울 도심을 지날 뿐만 아니라 이 명박 서울 시장 시절부터 복원 사업 때문에 너무 유명해서 모를 수가 없고.. 중랑천은 동부 간선 도로 때문에 금세 알게 됐다.

도림천은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일부 구간을 덮어 버렸기 때문에 알고, 안양천은 전철 구일 역의 교량과 서울-광명 경계 때문에, 탄천은 분당-판교의 경계 때문에 알았다.
좀 더 생각해 보니 탄천으로 흘러드는 양재천이 있으며, 은평구에서 국도 1호선 증산로와 나란히 흐르는 불광천, 그리고 근처의 서대문구에는 홍제천이 있다. 동쪽으로는 성내천이라는 것도 들어 봤다.

본인은 서울에 한강과 청계천 말고도 하천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추가로 알게 됐다. 복개되어서 지표면에서 존재감이 싹 사라지고 사실상 지하수처럼 바뀐 하천 구간도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복개라는 게 단순히 그 위로 고가 형태로 도로나 철도가 지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고 만만한 하천의 경우, 주변의 땅과 구분이 전혀 안 되게 싹 복개되어서 시가지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바다는 간척하고 하천은 복개해서 땅을 확보하는가 보다.

가령, 청계천의 경우 복원 구간이 잘 알다시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시작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청계천이 원래부터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청계천의 제일 먼 발원지는 청운동의 인왕산 모 계곡 정도로 추정된다. 거기서부터 서울 시청 정도는 여전히 복개되어 있다.

본인은 이런 사실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서울 시내의 모든 하천을 돌아다닐 필요까지는 없고.. 가성비가 높은 천호대로의 동대문구· 성동구 구간을 중심으로 자전거를 타고 답사를 했다. 여기는 짧은 거리에 비해 꽤 다양한 하천들을 볼 수 있으며, 최근에 근사한 공원으로 조성된 중랑구 하수 처리 시설과 하수도 박물관도 있다. 그래서 예상했던 것보다 굉장히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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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동 역 교차로를 지나서 천호대로가 시작되는 구간을 달려 보면.. 신설동-용두 역 사이에만 하천을 두 개나 건너게 된다. 바로 성북천과 정릉천이다. 하지만 다들 워낙 작기 때문에 다리를 건넌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이들 모두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성북천은 북악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지만 계곡을 제외한 상류 구간은 복개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부터 한성대입구 지하철역에서부터 여기까지가 그나마 조금씩 복개를 걷어내고 복원되어서 위의 사진과 같은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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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좀 더 지나면 나오는 이 하천은 정릉천이다. 정릉천도 상류는 복개되어 파묻혔고, 그나마 숨통을 튼 구간은 온통 내부순환로 고가가 위로 지나기 때문에 지상에서 제 모습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하긴, 본인은 작년에 고려대에 다녀올 때 이 산책로를 유용하게 이용했다.
내부순환로는 홍제천, 청계천 등 여러 하천의 선형을 따라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청계천 대신 정릉천으로 갈아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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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정릉천이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내부순환로도 마장 IC 이후로 청계천에서 정릉천 쪽으로 선형이 바뀌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청계천 박물관과 판잣집 체험관이라는 통나무집도 바로 여기 근처에 있다.
청계천이야 지금 같은 깔끔한 산책로가 조성되기 전에는 그 위로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었고, 더 옛날에는 판잣집들이 즐비했고 물은 똥물 수준으로 더러웠다는 것을 국내 역덕 지리덕이라면 다들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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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본인은 청계 고가 차도를 실물로 본 기억은 없다. 아직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어쩌다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버스보다 지하철을 훨씬 더 즐겨 타던 대학교 초창기 시절이니 그런 걸 볼 일이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청계 고가 차도의 폐쇄· 철거와 서울 역 민자 역사 개관이 2003년 하반기로 꽤 비슷한 시기에 시행됐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 반면,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서대문 고가 차도와 서울 역 고가 차도가 철거된 것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것들은 내가 운전을 해서 직접 지나가 본 적도 있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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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본인은 답십리까지 갔다. 여기서 주목한 곳은 바로.. 군자 차량기지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전농천이라는 존재감 없는 개천이다.
얘도 원래는 북쪽의 배봉산에서 발원한다고 전해지지만.. 배봉산부터가 별로 크고 높은 산이 아니고 물줄기가 워낙 보잘것없는 수준이니 도시 개발을 위해 얄짤없이 복개되었다.

성동구 공영 주차장과 견인 차량 보관소가 바로 그 복개된 부지 위에 조성되었다. 시기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 천호대로라는 길 자체가 닦인 때와 비슷하다. 어쩐지~! 여기는 교량 분위기가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로에 교량 같은 이음매가 있더라.
그리고 남쪽의 복개 부지는 응당 차량기지가 사용하며, 전농천은 차량기지의 아래를 지나서 근처의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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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천은 주차장과 차량기지 사이의 400미터 남짓한 직선 구간만이 복개되지 않았으며, 산책로도 한쪽에 짤막하게나마 마련돼 있다. 하지만 퀄리티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위쪽에 차도와 나란히 지나는 인도가 더 낫다.
이 길은 청계천 같은 다른 하천으로 연결되는 게 없이 여기에서만 얼쩡거려야 하며, 중간에 앉아서 쉴 곳도 없다. 물의 양과 질이라든가 경치 역시 썩 좋지 않다.

그래도 하천을 따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지리와 개발 내력을 공부하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금화, 시민, 충정, 삼일 등.. 서울의 역사를 풍미하는 옛날 아파트들에 대해서도 자료를 한데 찾아서 글을 한번 썼으면 싶다.

하천의 생태에 대해서 궁금증이 하나 떠오른다.
가뭄이 계속되면 거기를 흐르던 물은 어쩔 수 없이 말라 버릴 것이다. 그래도 비가 그치자마자 물줄기가 즉시 칼같이 끊기는 건 아니다. 최상류의 계곡이라도 말이다.
이 물이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강의 발원지에 가면 무엇이 있고 주변 지형이 어떤 형태일까?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모르겠지만 산 속 식물이 물을 자체적으로 저장해 놓고 증산 작용을 통해 그걸 수증기 형태로 위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 기여하는 게 크다고 한다. 그 많은 물이 위치 에너지를 얻어서 올라가는 것도 그냥 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나무를 비롯해 각종 식물들을 많이 심어 놓으면 뿌리가 흙을 붙잡아 줘서 홍수 때 산사태를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가 안 오는 동안에도 계곡에 물이 공급되는 선순환이 계속된다. 산이 벌거숭이 민둥산이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여기까지 구경한 뒤 본인은 여기 근처에 있는 하수도 과학관을 찾아갔다. 글이 길어지니 여기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24 08:31 2019/07/2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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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풍경 기록 + 이성산 답사

미세먼지 어택 때문에 우중충했던 2~3월과 달리 이번 4월은 유난히 날씨가 맑고 좋은 날이 많았다.
다음은 4월 초부터 말까지 서로 다른 날짜에 찍은 주변 풍경 사진들이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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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와 중랑천, 용마산의 풍경이다. 동부 간선 도로는 서울 시내의 자동차 전용 도로들 중 고도가 제일 낮으며 유일하게 강의 좌우로 상행과 하행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당시 본인이 서 있었던 보행자용 산책로 주변에는 온통 벚꽃이 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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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응봉산을 오르는 길목의 모습이다. 응봉산의 주변은 노란 개나리로 뒤덮여 있었다. 개나리 역시 벚꽃만큼이나 뭔가 봄의 상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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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강 공원이다.
다만, 올해부터는 텐트를 치는 게 특정 구역 안에서만 가능하게 큰 제약이 걸렸다. 그래서 위의 텐트는 곧장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돗자리는 여전히 가능하니 텐트 규제의 목적이 잔디 보호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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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양화 한강 공원이다. 이때는 풀밭이 아니라 강물 바로 근처의 나무 그늘 밑에서 돗자리를 깔고, 거기서 누워서 쉬기도 하고 볼일을 봤다.
세계의 도시들 중에 동일 행정구역과 생활권이 서울의 한강만치 거대한 강을 중간에 낀 채로 형성된 사례가 또 있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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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는 올해 봄에 완전히 새로 개척해서 다녀 온 곳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집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 적당히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주차 걱정도 없는 서울 교외 지역을 물색한 결과..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을 다녀왔다. 나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산의 북서쪽으로는 군부대가 있고, 서남쪽으로는 수도 정수 시설이 있고.. 주변엔 온통 무슨 공장에 물류 센터이니 평범한 거주· 업무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산은 민감한 시설이 있는 쪽을 피해서 동남쪽으로만 접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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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좀 오르니 가장 먼저 넓은 풀밭과 함께 저수지가 나타났다.
이성산은 해발 200m대의 아주 자그마한 산인데, 서울의 봉화산이나 구리의 구릉산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천마산보다는 더 높고 크다.
먼 옛날 삼국 시대에는 이 산 주변이 '이성산성'이란 게 둘러져서 요새화됐다고 한다. 이게 무슨 남한산성· 북한산성 같은 퀄리티는 아니기 때문에 지금 남은 건 그냥 돌무더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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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르막을 약간만 더 오르자 능선과 함께 또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여기는 동쪽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라고 한다.
아래로는 외곽순환 고속도로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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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서울의 동부에는 불암산성, 아차산성에 이어 이성산성처럼 조선보다 더 오래된 석성의 흔적이 전해지는 게 흥미롭다.
흔적이 너무 희미하다 보니 얘들은 오랫동안 정확하게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조차 불분명했는데.. 같이 출토된 문화재들의 스타일로 유추하건대 이성산성의 주인은 신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관련 링크 1, 링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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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 정상에 도달했다. 간단한 표지석과 산불 감시 초소가 있었다.
산의 이름인 二聖은 아마 백제의 건국의 주인공인 비류와 온조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의 서쪽으로는 삼성산이 있고 이건 승려 세 명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와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고 보니 백제는 반신반인 영웅호걸이 알에서 태어났네 하는 초월적인 설화나 신화가 없이, 건국 스토리가 가장 평범(?)하다는 특징이 있다. 비류와 온조라는 그냥 평범한 고구려 왕족이 모국을 자발적으로 떠나서 새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주몽이나 혁거세와는 상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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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갈 때는 이렇게 숲이 우거지고 인위적인 울타리나 문화재 구역이 없는 좁은 길로 갔다. 그래도 아까 봤던 저수지 쪽으로 가서 처음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4~5월 봄과 9~10월 가을이 등산 가기 제일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너무 덥지 않으면서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24 08:32 2019/05/2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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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 (☞ 링크)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방송 사고들 중에는 배 철수 감전 사고, 카우치 성기 노출, 모 광신도의 방송국 점거 난입 같은 심각한 것도 있고, 사고를 넘어 범죄 사건에 가까운 것도 있다. "귓속에 도청장치"는 엽기 해프닝에 가깝게 끝났지만 그 사람이 나쁜 마음 품고 칼 같은 거라도 갖고 들어가서 앵커를 공격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지난 2001년,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는 심각한 요인이 없이 그냥 웃긴 방송 사고로는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MC가 짤막하게 사과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가기만 했으면 됐을 텐데 애드립으로 저 유명한 대사를 읊는 바람에 웃음병이라는 불길에다 기름을 끼얹어 버렸다.;;;;

이런 사고까지 원천봉쇄 예방하려면 앞으로 여름에 방송국 스튜디오에서는 공항 활주로에서 새를 쫓아내는 것처럼 파리도 몽땅 쫓아내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링크로 소개한 동영상은 그 원본 동영상이 아니라.. YTN에서 작년 말에 그 문제의 당사자 인물(나 민호 팀장)을 다시 초청해서 인터뷰를 한 영상이다.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이제는 머리도 많이 하얘지셨는데.. 17년 전에 자신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모습을 보고는 역시 자지러지게 빵터지시더라.. ㅋㅋㅋ

그리고 댓글을 보고도 빵터졌다. "3년째 이거 보고 개웃는다 ㅋㅋㅋㅋㅋ" / "빡쳤는데 이거 보고 항암 치료 받고 간다" 등.. 어째 의도치 않았는데 이분들이 "병시나 산소"만큼이나 여러 네티즌들의 정신 건강 증진이 큰 기여를 했다.

2. 4딸라 (☞ 링크)

2000년대 초반에 <태조 왕 건>에서 궁예의 관심법과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대사가 병맛 코드와 너무 잘 어울린 덕분에 대박을 치고 유행어로 등극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야인시대>에서는 "내가 고자라니"가 불멸의 명대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전자에서 궁예를 맡았던 김 영철이 후자에서는 장군의 아들 김 두한 역으로 포스 있게 출연했다. 그리고 6· 25 전쟁 도중에 미군을 상대로 우격다짐 배째라 협상을 해서 군수 노무자들의 일당을 1$에서 무려 네 배나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냥 무턱대고 "4딸라! 4딸라!"라고 우기기만 했다..;;

그리고 2019년 초, 버거킹에서는 15년도 더 전의 이 드라마 장면을 패러디 했다. 나이도 그만치 더 드신 김 영철 씨를 다시 모셔 와서 CF를 찍었다.
웬 꼰대가 햄버거 가게에 가서 무식하게 4딸라 4딸라만 외치길래 도대체 무슨 의미가 담긴 장면인가 궁금했는데.. 세상에 원전이 저거였다. 어떻게 저걸 광고 소재로 쓸 생각을 했을까..?? 그나저나 CF에 나오는 여자 알바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 예쁘장해 보인다.

영어 원어민 강사 겸 유명 유튜버인 올리버 선생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내가 고자라니"를 적절한 연기와 함께 영어로 더빙하기도 했다. 보고서 완전 빵터졌다. ㅋㅋㅋㅋㅋㅋ

3. 종말 (☞ 링크)

이건 <인류 멸망 보고서>(2012)라는 국산 영화의 셋째 에피소드 "해피 버쓰데이" 중에 나오는 가상의 TV 뉴스 화면이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아놔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ㅠ.ㅠ
우리나라 영화 중에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종말편"과 "귓속에 도청장치"를 섞은 듯한 실사판을 만든 게 있었다니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 이래로 동영상을 보고 현웃 빵터지기는 처음이었다. ㅠㅠㅠㅠㅠ

여자 앵커: "저는 죽기 전에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수많은 괜찮은 남자들을 놔두고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이 남자와 불륜의 늪에 빠져 청춘을 다 바쳐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비열하게 저를 버리고 새파랗게 젊은 보도국 김 송이 리포터와 놀아나고 있습니다! ㅠ.ㅠ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이 인간 쓰레기를 국민 여러분 앞에서 제 손으로 꼭~ 아아아악!"


이 배우 진짜 혼신을 다해 열연했다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남자 앵커: (시치미 뚝 떼고) "에.. 시청자 여러분, 저는 방송인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아.. (님이) 왜 여기 앉아 계세요?"
기상 캐스터: "네~ 꼭 한번 (뉴스 앵커 자리에) 앉아 보고 싶었습니다! ^_^ (빵끗) 안 됩니까? 오늘 마지막인데? ^___^"


아 미치겠음.. ㅠㅠㅠㅠㅠㅠㅠㅠ
하긴, 2012년은 마야 달력이 어쩌네 하면서 또 시한부 종말론이 살짝 고개를 들기도 했던 때 같다. 뭐,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지금도 세상은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성경에서 재림과 종말 날짜가 철저하게 "안알랴줌" 모드인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된다.

4. 흙꼭두장군 (☞ 링크)

1990~1993년 즈음 본인의 초등 저~중학년 시절. TV에서는 저녁 5시 반~7시 사이에 어린이용 프로를 많이 방영해 줬었다.
KBS의 경우, 만화영화뿐만 아니라 외국 동화를 각색한 '인형극'도 방영해 줬었다. 아라비안 나이트, 삼총사, 왕자와 거지 등.
그리고 KBS2에서는 월~목과 달리 금요일 저녁엔 국산 만화영화를 방영하곤 했다. 은비까비, 날아라 슈퍼보드 등. 이 바닥에도 스크린쿼터 같은 국산작 할당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TV에서 시리즈로 방영된 것 말고 90분 안팎 분량의 국산 단편 만화영화도 있었는데, 이런 건 어째 또 KBS 대신 주로 MBC에서 특집 명목으로 방영하는 편이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머털도사", 그리고 이것만치 유명하지는 않지만 "흙꼭두장군"이라는 것도 있다. MBC에서 창사 30주년 기념으로 "여명의 눈동자" 실사 드라마뿐만 아니라 단편 애니메이션도 나름 수작을 만들었다.

줄거리 소개 1 / 줄거리 소개 2

내가 본방을 봤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 흙꼭두장군이 주인공(빈수)에게 "숙제도 안 하고 쳐자면 어떡해?"라고 도발(?)하면서 등장하는 맨 첫 장면.. (실제 대사가 저렇지는 않다 ㅋㅋ)
  • 그리고 주인공이 도굴꾼에게 납치 감금당했을 때 "이 알약을 먹으면 며칠 동안 밥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도 될 거야" 이렇게 도움을 주는 거..
  • 어떤 할아버지가 밤에 무덤 봉분을 끌어안고 자다가 맛이 가고 지능 퇴갤했다는 일화
  • 나중에 흙꼭두장군의 병거가 바퀴가 부러져서 어째 주인공이 땜빵을 하는 것

정도이다.
아, 무슨 만화영화에서.. 남자와 여자애가 입원했는데 남자는 괜찮지만 여자는 병세가 심각해서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의사양반이 말하는 게... 그것도 알고 보니 흙꼭두장군의 장면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야 이 작품의 세계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완전 시골 마을에다 이사 온 병약 여자아이(새길)는 소설 소나기와 비슷하고,
악당이 전혀 아니고 재질도 돌/흙이긴 하지만, 무생물 인형이 말을 하고 움직이고 "내가 살아 있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이러는 건 사탄의 인형 처키(;;;)와 비슷하다.
왕릉이 어떻고 하는 건 툼레이더, 특히 "라라 크로프트와 빛의 수호자"에 나오는 톨텍 장군과 비슷해 보인다.

198-90년대 기준으로 2012년 전이면 삼국시대 중에서도 극초반일 텐데.. 어느 왕조 왕릉을 생각하고 작품을 만든 걸까? (작품에서 정식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신라에서 모티브를 딴 듯)
최신 CG와 HD 화면 종횡비를 적용하여 지금 리메이크/리마스터링 돼 나오면 지금 3, 40대 연령대 중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5. AniMusic -- Pipe Dream (☞ 링크)

애니매트릭스도 아니고 애니뮤직이라니..
이건 본인이 대학교 시절 2000년대 초에 봤던 엄청 옛날 동영상인데 지금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 시절엔 유튜브가 없었으니 웹페이지에서 동영상을 보려면 asf, wmv 형태로 굴러다니는 파일을 Media Player ActiveX 컨트롤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봐야 했다.

지금이야 현란한 CG가 게임과 영화에서 너무 넘쳐나니까 별 감흥이 없지만.. 저 시절에 박자에 맞춰서 수많은 공들이 금속판에 부딪치는 동영상은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걸 처음에 만들었던 회사는 지금도 살아 있고 유사 계열의 다른 영상물도 여럿 만들었더라. 설립자가 컴공과 음악을 겸비한 능력자인 덕분에 음악을 직접 작곡도 했다. 보유한 기술 내지 솔루션으로 B2B 장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앨범을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판매도 하는 모양이다.

저걸 패러디해서 CG 아닌 실사판(!!!)을 시도하는 근성가이는 나타나지 않을지 궁금하다. 세상에는 튀기 위해 별 희한한 짓을 다 하는 용자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세팅 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실사 도미노처럼 말이다.

옛날에는 코덱도 얼마나 파편화가 심했는데 전부 다 교통정리가 됐는지.. 인터넷으로 동영상 보는 거 하나는 정말 편해졌다.
더구나 옛날 같았으면 컷씬에서나 나왔을 수준의 3D CG 동영상을 이제는 인게임에서 실시간으로 보는 세상이 됐다. 놀랍기 그지없다.

6. 그래픽 데모 (☞ 링크)

말이 나왔으니 CG 관련 동영상을 하나 더 투척하겠다.
외국에는 '그래픽 데모'라는 걸 전문적으로 만드는 해커 집단이 있다.
지금 링크로 소개하는 동영상은 fr-041_debris이라는 명칭으로 검색하면 나오는데, 원래는 177KB, 겨우 181,248바이트밖에 차지하지 않는 자그마한 Windows용 실행 파일 형태이다.

그런데 그걸 실행하면 7분에 달하는 분량의 정교한 3D 그래픽 동영상이 음악과 곁들어져서 흘러나온다. 게다가 이건 2007년,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물건이다!

동영상에 나타나는 각종 카메라와 객체의 움직임(곡선 궤적~!!), 그리고 BGM의 음표 정보들을 그야말로 최소 단위로 압축에 압축을 거듭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Direct3D 9.0c 엔진으로 실시간으로 렌더링 해서 동영상을 표시한다.
놀랍지 않은가? 최소한의 씨앗만으로 최대한의 정보량을 갖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난수 생성, 프랙탈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테크닉이 동원됐지 싶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 실행될 때는 각종 데이터들을 extract/expand하느라 수십 초가량의 로딩이 필요했다. 그 다음부터는 그야말로 CPU와 배터리를 full로 쓰면서 데모를 표시했다(2000년대 말 당대의 듀얼코어 급 PC 기준).
그러니 이런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프레임 손실 없이 인코딩 하려면 캡처 보드 같은 하드웨어 차원의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장르에 속하는 데모 동영상이 더 있다.
그리고 100K도 아니고 겨우 64KB짜리 실행 파일로 2~3분짜리 이런 동영상을 출력하는 데모도 있으니.. 인간의 최적화 실력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18 08:31 2019/05/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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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 대통령 기념관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는 아니고, 국뽕을 한 사발 거하게 혈관에다 주입하고 취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본인은 올 3월에 리모델링 개관했다는 원조가카 기념관에 다녀왔다.
김치 한복 된장 정도로는 택도 없고 한글이나 할배, 원조가카 정도는 돼야 국뽕의 재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본인은 저기에 2012년, 2017년 이렇게 두 번이나 가 봤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독립된 블로그 글을 통해서 후기를 올린 적은 없었다.
작년 말에는 기념관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웬 공사로 인한 휴관/폐관 상태였다. 안 그래도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저기도 정치 보복, 이념 보복을 당하고 있기라도 한지, 이화장처럼 공사를 가장한 무기한 폐쇄 상태는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잔뜩 들었다.

그래도 기념관은 우려와 달리 다행히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잘 됐고, 올해 삼일절부터 재개장했다.
전에는 이름이 좀 오해의 여지가 있게 '기념 도서관'이었는데(실제 의미는 기념관 및 도서관), 리모델링하면서 확실하게 '기념관'이라고 이름도 고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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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원조가카의 어린 시절 개인사에 대해서 이 정도로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았던 거 같다.
어쩐지, 옛날에 "만화 박정희"라고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박통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에서도 박통이 어린 시절에 나팔 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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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까지는 철원에서 열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아아, 원조가카도 어린 시절에 금강산선 열차를 타 봤구나~! 기념관에서 읽은 제일 반가운 문구였다.

보다시피 원조가카는 지금으로 치면 교육 대학교와 군 사관학교 두 곳을 나왔다. 둘 다 안정된 진로와 명예가 보장된 코스이며, 공부를 대충 쉬엄쉬엄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긴 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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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카가 이뤄낸 것들..
x축은 61년부터 79년까지 시간이고, y축은 경제 정책 전반, 토목 건설, 과학 기술, 새마을 운동, 안보· 국방, 교육· 문화· 복지 이렇게 카테고리별로 박통이 만든 것들을 소개해 놓은 게 무척 유익했다.
또한, 저 테이블이 있는 방의 중앙에는 각종 토목 공사들의 준공식 때 원조가카가 테이프를 끊는 용도로 사용한 금색 가위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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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카가 재임 기간 동안 해마다 저렇게 표어, 모토랄까 슬로건이랄까.. 그런 걸 제정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예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리 박사 할배는 이름을 지어 준 게 많고, 원조가카는 뭔가 글씨를 쓴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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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공업화 산업화가 환경을 꼭 파괴만 하는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더티한 화석 연료는 역설적으로 나무를 땔감용으로 벨 일이 없게 해 준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다음 화석 연료를 쓸 일을 줄여 준다.

우리나라의 산림 녹화는 석탄 산업 육성과 맞물린 덕분에 성공했는데.. 지금은 그 석탄 산업도 망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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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1950년대 할배 시절에는 아직 국가 차원의 의료 보험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박통 때 일단 공무원을 대상으로 먼저 의료 보험이 시작되었고, 이게 지금처럼 전국민에게 몽땅 시행된 것은 박통에다 전대갈 시절까지 지난 1989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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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국민 교육 헌장이다.
멸사봉공 진충보국스러운 표현 일색이라고 트집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이 잡을 수 있겠지만, 본인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는 문구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본인이 몇 년 전의 블로그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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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원조가카의 치적이 잔뜩 소개된 뒤, 맨 마지막에 '유신 --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이라는 글자와 함께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의 가카 마네킹.. 요렇게 꾸며진 어두운 방이 나왔다. 참 웃겼다.
"머릿속에 구상해 놓은 계획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 물러나기에는 이 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아직도 북괴의 위협은 여전한데.." 아이고...;; ㅋㅋㅋㅋ

지금 이 2010년대에도.. 이놈의 헬조선은 답이 없다고, 영어만 되면 그저 외국으로 뜨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 미개한 조센징들은 국민성이 민주주의와 맞지 않고 불도저형 독재자가 한 명 나와서 싹 다 갈아엎어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다.

하물며 완전 전쟁 폐허 거지꼴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 생각이 어땠을까?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노예근성 패배의식이 얼~마나 만연했을까?
자국의 미개한 실상과 조센징의 국민성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애초에 구한말 때부터 단군의 후손들은 다 일본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신념형' 친일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윤 치호이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나라 간판 내리고 천조국의 50몇 째 주로 편입해 들어가자는 식으로 말이다. 기회주의 권력 지향 매국노라든가 생계형 부역자, 싸이코패스 악질 헌병 같은 부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원조가카라는.. 조선인에게 너무 과분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사람들의 의식부터 개조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 "피똥 싸는 가난 물리치고 잘 살아 보세"라고 독려했다. 고속도로 놓고, 발전소 짓고 공장 짓고, 과학 연구소 만들고, 기능공을 양성했다.

성경의 느헤미야처럼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느 4:16-18)를 전파했다.
역대기하 26장에 나오는 웃시야 왕처럼 농사 시스템을 개선하고 신무기를 개발하고 기계(엔진)를 만들었다.
이런 사람이면 10년이고 100년이고 독재 하면서 종북 용공 빨갱이 자식들은 다 죽여서 씨를 말려 버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바라기에는 원조가카도 역량이 한계가 있었다. 반동분자들을 너무 관대하고 너그럽게 다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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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다 보고 나면 이렇게 쾌적한 독서와 공부 공간이 나온다. 옆에 도서관과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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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부에 있는 추모 공간의 벽면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0에서 1을 만든 할배 다음으로 1에서 100을 만든 선한 독재자 원조가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반일· 항일을 가장 수준 높게 실천한 사람이다.
소싯적에 일본군 장교를 지원해서 들어갔다고?
뭐, 항일 독립운동을 한 것보다야 비주얼 모양새가 안 나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예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직업에 종사한 것 자체만으로 친일 반민족질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으며, 원조가카가 아예 헌병대 장교로 들어와서 자국 안에서 동포들을 괴롭히고 착취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독립 운동이라고는 맥이 다 끊긴 1940년대에 동족도 없는 먼 변방에 나가서 중국군하고나 싸웠지.

그는 선생까지 됐는데도 굳이 더 고생해서 군인으로 신분을 업그레이드 했으며, 긴 칼 차고 돌아와서는 선생 시절에 자기를 깔보던 일본인들을 버로우 태우고 데꿀멍 시켰다. 그냥 현실 불만족과 출세욕 때문에 그랬을 뿐이다.
이 정도는.. 카이스트(국비 장학생..;;) 나와서 국내 대기업 내지 연구소에서 몇 달 근무해 봤는데, 헬조선 이공계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의대나 로스쿨로 다시 진학한 정도의 일탈일 뿐이다! 그 이상의 악질적인 짓은 아니라는 것이다.

할배 시절의 반민특위 해체와 친일 부역자 재등용에 대해서는 애산 이 인의 판단이라든가, Windows 9x의 16비트 코드 재사용과 같은 반박 비유가 있다. 그리고 원조가카의 과거에 대해서는 딱 저런 비유를 들어서 대처하면 된다.

내가 단언하건대 원조가카는 되도 않은 욕지거리 험담 늘어놓는 머저리들, 그리고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사상 불순한 정치인들보다 인품, 그릇 크기 등등이 0이 몇 개는 더 붙은 정도로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 시절에 전혀 통용되지 않았던 오늘날의 관행, 그 시절에 절대로 실현 불가능했던 일, 자기도 절대로 실천하지 못했을 도덕 청렴을 이루지 못했다는 식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생트집 불평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맨날 천날 일제 잔재 탓, 군사 문화 탓만 하는데.. 비록 거기에도 악한 것 잘못된 것이 있긴 했어도 195, 6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 땅에서 군대는 어지간한 민간 싸제보다는 더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선진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만 해도.. 그 일제 잔재의 원산지 본거지가 어찌 그렇게도 선진국이 됐고 노벨 상 수상자까지 배출하는 과학 기술 강국이 됐는가? 역사로부터, 자기보다 잘난 사람으로부터 배우지를 않고 저런 썩은 사고방식으로만 살아서는 평생 찌질이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4 08:33 2019/04/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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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의 개장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신당동은 구미와 더불어 박 정희 대통령이 살았던 곳이다. 이처럼 종로구 이화동에는 이화장이라고 이 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사저가 있다.

이화장은 근현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으며, 내부엔 자그맣게 이 승만 대통령 기념관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언제부턴가(한 2010년대쯤?) 내부 수리를 이유로 수 년 이상 장기간, 거의 무기한에 가깝게 휴관한 채 방치되었으며 일반인이 들어가 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옛날엔 인터넷 지도에도 '2018년 개장 예정'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말도 없다.

그래서 본인은 올해 두어 차례 이화장을 찾아가 봤다.
지하철 4호선 혜화 역 2번 출구로 나가서 방통대 건물 모퉁에서 좌회전 한 뒤, 언덕을 오르며 대학로 파출소 방면으로 골목길을 쭉 걸어가면 된다.
지하철 출입구에서 목적지까지 직선 거리로는 600미터이지만 실제로는 언덕길 7~800미터 정도를 걷게 되니 남자의 걸음으로 10~15분 남짓 걸린다. 막 가깝지는 않지만 도저히 걷지 못할 먼 거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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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역 주변에는 방통대와 서울대 병원이 있고 이들은 전반적으로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어서 좀 고풍스러운 느낌이다. 그런데 거기서 이화장이 있는 동쪽은 한양도성과 낙산 공원 방면이다. 길이 좁아서 차들이 다니기는 불편하지만 대학로라는 명칭답게 이색적인 카페들과 극장도 있어서 신촌· 홍대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러다가 이화장에 다다르면 요런 한옥과 담벼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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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가 정문 입구이다. 주변은 온통 공사를 위한 컨테이너 가건물이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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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아직 공사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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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에 대해 설명해 놓은 표지판은 컨테이너 가건물에 가려져서 접근하기도, 읽기도 어려워져 있었다.
이 정도가 끝.. 더 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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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기념 사업회의 공식 홈페이지를 가 보면 휴관 사유가 저렇게 적혀 있는데.. 내가 보기엔 말이 안 된다.
지난 2011년엔 우면산에서 큰 산사태가 났지, 낙산에서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은 난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설령 그때 피해를 입었다 해도 저 쬐끄만 건물이 무슨 놈의 복구가 7년이 넘게 걸리냐?
화재로 깡그리 소실됐던 숭례문이 복구에 5년이 걸렸고 그것도 예상 외로 굉장히 오래 걸린 축에 든다.

마치 레카를 죽을 때까지 그냥 무기한 구속시켜 저렇게 구치소에 쳐넣어 두는 것처럼.. (주 기철 목사도 정식으로 재판과 형량 선고도 없이 유치장-구치소만 나돌면서 고문 당하다가 죽었다)
유지보수를 핑계로 친일 공화국 분단의 원흉 독재자의 행적은 이렇게 방치함으로써 교묘하게 지우고 폐쇄하고 봉인시키는 게 아닐까? 독립기념관 바깥뜰에다가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방치해 놓았듯이 말이다. 괴담 음모론 같은 거 믿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나라 꼬라지가 꼬라지이다 보니 저런 불길한 생각마저 들려 한다.

저 안에 있는 동상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너뜨리고 박살 내고 싶어하는 들쥐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미개한 반도에 쌔고 널렸다. 완전 위험물이다.

정치 보복 한번 참 졸렬하고 치사하게 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도 다 포용? 즐쳐드시고 엿 먹으라고 해라. 레카도 바보같이 그렇게 어영부영 순진하게 관용 베풀다가 믿는 도끼 발등 찍히고 저 지경 됐다.

표현의 자유? 맨날 천날 광화문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 운운하는데.. 그럼 어디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누가 "전 두환 만세"라고 외쳐도 너그럽게 오냐 오냐 포용할 수 있다면 그럼 본인도 그 자유에 대해 동의해 주겠다.

종북좌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뼛속까지 오로지 내로남불과 진영논리에 입각해서 움직일 뿐이다. 난 이래서 그런 놈들이 너무 혐오스럽다. '김 정은 위원장님', '비록 친척을 죽였지만 예의바르고 훌륭한 지도자'와 동일한 잣대와 포용력으로 이 승만· 박 정희를 미화하고 과오를 실드 친다면.. 남한 대통령쯤은 거의 예수에 맞먹는 성군 도덕군자로 포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들은 광우뻥 선동· 세월호 선동부터 시작해서 온갖 가짜 뉴스와 왜곡, 여론조작으로 세력을 키우고 집권한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가짜 뉴스를 근절하겠네 뭐네 수작인가?
그리고 2017년 이래로 지금까지 곳곳에서 드러난 채용 비리와 부적격 인사 임명, 기업의 후원 강요 사례들.. 그게 2013~2016년 사이에 폭로됐으면 광화문 촛불이 몇 번이고 터져 나오고 대통령이 몇 번은 갈아엎어졌을 것이다.

걔네들은 진짜로 부정부패 비리 척결, 친일 청산, 민주주의 등등을 원해서 그런 구호를 외치는 게 절대~ 전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반민주적이고 반대자를 악랄하게 탄압할 놈들이 야당이고 약자일 때는 인권 복지 민주 팔고 감성팔이 짓거리를 할 뿐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대학까지 나와 놓고는 이 사실을 아직도 못 깨달았다면 정말 학교 헛다닌 미개한 개 돼지란 소리 들어도 싸다. 지능과 양심 둘 중 하나 이상은 문제가 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서 좋은 말, 이성과 논리와 팩트로 산업화가 되지 않고 자꾸 나라 체제를 위협하는 이상한 사상에 끌려가고 있고, 격리와 분리도 안 되면.. 어쩌겠는가? 쌍욕 아니면 폭력밖에 처방이 남는 게 없다. 이게 그저 단순히 견해나 성향, 신념이 다르기만 한 문제이면 내가 이런 험악한 말을 절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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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에 왔을 때는 "2017년도 보수 공사"(올해 7월 17일까지)가 진행 중이었고, 얼마 전에 왔을 때는 "2018년도 보수 공사"(내년 3월 5일까지)가 진행 중이었다.
도대체 이화장이 뭘 그렇게 다 뜯어고쳐야 되는지, 모든 공사가 언제 끝나서 언제 재개방을 할지 모르겠다.

과연 이화장이 제대로 개관을 하는 날이 올까? 나의 이 썰은 과연 다 쓸데없는 기우로 끝날까? 어디 한번 두고보련다. 나중에 딴소리가 나오면 이 글이 증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말 불가피하게 약간 훼손된 건 그렇게도 악랄하게 물어뜯고 욕하면서, 그렇게 민주주의 자체의 근간을 마련한 공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배은망덕한 족속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진짜 친일 청산과 민주주의를 제일 방해한 원흉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는 머저리들..
이 승만 대통령은 미개한 부류들에겐 너무 과분한 지도자였다.

Posted by 사무엘

2018/11/17 08:33 2018/11/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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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서울의 중심부에 속하는 광화문-시청-종각 일대는 어쩐 일인지 대형 서점이 두 개나 비교적 서로 가까운 거리(광화문 교보, 종각 영풍)에 입점해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사러 잠시 들르기 좋다.
본인은 여러 볼일을 보러 시내에 갔는데, 광화문 근처에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근래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거기도 짬을 내어 들렀다.

아래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관람하는 형태이고, 2층은 그냥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3층은 이 승만 시절의 건국 초기, 4층은 산업화와 민주화 ~ 현대의 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 사진을 소개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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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일제 시대는 제끼고..
저건 1948년 5· 10 총선거를 앞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라는 걸 해 보는 단군의 후손들에게 요령을 설명하는 포스터이다.
저 때는 지금 같은 주민 등록 번호나 신분증이 없었던 관계로 투표를 하려면 유권자 등록부터 먼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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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자는커녕 한글도 못 읽고 심지어 아라비아 숫자조차 못 읽는 사람이 있었나? 막대 표기라니 무슨 로마 숫자 같다.
당사자에게는 좀 잔인하고 미안한 얘기이지만, 이 정도로 무지·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에서 무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 선출과 민주주의 따위를 바랄 수 있었겠는지 본인으로서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이 무슨 정책이나 이념이나 공약을 보고 자기 소신대로 투표를 하겠는가? 그냥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향응을 주는 진영에서 부탁하는 대로, 혹은 빨갱이들이 지상락원 선동하는 대로 우루루 끌려갈 확률이 99.9%이지.. 이래 갖고는 나라 망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에서 불철주야 애들만 상대하던 교사가 퇴직하고 나와서 어설프게 사업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그 교사의 퇴직금은 반쯤 과장 보태면 그냥 먼저 맡은 놈(= 사기꾼)이 임자라고 한다. 심지어 현직 교사들조차도 자기들이 학교 밖 사회에서는 완전 호구 취급 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할 정도이다.

오늘날 교사는 분명 아무나 될 수 없는 직업이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사까지 된 사람은 일반인들 평균 이상의 지능과 체력과 리더십을 갖춘 인재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될 수가 있다. 하물며 무지몽매한 민중들의 투표권이 어떤 방식으로 오· 남· 악용될지 대해서야 뭐 안 봐도 비디오이다.

투표권이란 게 무슨 운전 면허에 준하는 급으로, 혹은 군복무 조건까지 요구할 정도로 까다롭게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와 학력, 그리고 자기 소득으로 단돈 1원이라도 세금을 내는 최소한의 경제력 같은 조건 정도는 붙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소한 연령을 지금보다 더 낮춰서 무슨 중· 고등학생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건.. 영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애들이 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5월 총선거 이후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생일이니 박물관에서도 당시 경축 기념식을 하던 분위기 회고록과 할배 대통령의 축사 연설 육성 같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단, 제헌 국회 때 애드립으로 드려졌던 기도문은 종교색 때문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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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는 분단과 북괴 정권의 수립 과정, 1940년대에 좌익이 저지른 각종 반란과 혼란 공작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곧장 6· 25 전쟁 파트로 넘어갔다.
전쟁 당시에 북한의 절반인 10만 명에 불과하던 남한의 육군은 휴전 이후 1954년엔 7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영상 자료가 소개하는 바와 같이 군사력이 증강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고? 이제 상시 징병제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난 1950년대 이 승만 때는 원자력 연구소만 만들고 국방 과학 연구소는 순전히 1970년대 박통의 작품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 때도 '국방부 과학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연구 기관이 생기긴 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긴, 저 때는 어떻게든 북괴의 남침 시즌 2를 원천 봉쇄하는 게 최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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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으로 1960년대로 넘어간다. 저게 바로 그 시절에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해 낸 자석식 전화기와 라디오이다. ㅠ.ㅠ
전화기는 다이얼조차 없이 수동 발전기로 최소한의 전기 신호를 전화선을 통해 보내는 기능만 있다. 그리고 라디오는 기능이 굉장히 빈약해 보이는데 크기는 꽤=_= 크다.
하긴, 저 때는 저렇게 전파를 통해 아날로그 신호를 수신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최첨단 기술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지금으로부터 5년도 더 전에 아날로그 송출이 중단되고 디지털로 전환된 반면, 라디오는 그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운전자용 아니면 비상용으로 TV와는 용도가 확 다르니 예로부터 통용되는 단순한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충분한 듯하다.
그나저나 라디오 중에는 TV 채널의 음성 부분만 추출 가능한 물건도 있었는데, 그럼 이제 그건 불가능해진 건가 모르겠다. 라디오 방송국이 일부러 TV 방송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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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교통 박물관에서 봤던 시발 자동차를 여기서도 보게 됐다. 색깔도 동일하다.
저 시절엔 자매품으로 시발 리무진과 시발 버스도 있었는데.. 그건 실물은 말할 것도 없고 레플리카가 만들어진 것도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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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시절, 박통의 원대한 국토 마개조 야망이 저 지도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짧은 역사 동안 정말 박통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다. 옛날에 무슨 "인도와 마 광수를 바꾸지 않겠다" 이런 구호가 있었던가 본데, 저 시절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건전하고 불가피하고 선했던 경제 개발 반공 독재라면 어줍잖은 2공 의원내각이니 사분오열 당파싸움 민주주의 따위하고는 얼마든지 맞바꾸고도 남는 장사였다.

저 과업들을 다 일관되게 이루려 하다 보니 통상적인 임기만으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장기집권을 하게 된 거다.
그리고 그걸 추진하려면 돈이 왕창 많이 필요한데 돈이란 게 땅 판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국가고 국민이고 다들 가난했다.
초창기에는 삼성과 현대도 그냥 오늘 내일 직원 월급 주는 걸 걱정하는 아류 영세 기업일 뿐이었으며, 돈줄은 제도권 은행이 아니라 지하에서 민간 사채업자들이 잔뜩 쥐고 있었다. 그만치 나라 사정이 답이 없고 열악했다.

그러니 박통은 화폐 개혁을 감행하고, 기업들이 돈 걱정 없이 투자를 할 수 있게 사채의 전부나 일부를 국가가 초법적인 권한으로 강제로 탕감해 버리기도 하고, 국민들에게는 온통 저축을 강조하면서 경제 개발 자금이 은행으로 모이도록 독려했다. 일본과 수교하면서 받은 소위 일제 피해 배상금도 최소한 다른 이상한 짓거리로 탕진하지 않고, 경부 고속도로와 포항 제철의 건설에 썼다. 왜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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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국가가 잘살고 국민들이 다들 등 따시고 배 부른 중산층이 되어 자기 생업에만 종사하면서 가족과 오순도순 즐겁게 잘 살기만 한다면.. 골치 아픈 정치에 관심 가질 필요 따위 없고 반공은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장 자기가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면 무슨 계급 갈등에 자본가들을 타도해야 되네 혁명 과업을 이뤄야 하네 식의 불순한 수작에 귀를 기울일 일이 없다.

그러니 위의 포스터는 그저 정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력으로 일본을 이기는 게 가장 훌륭한 극일 반일이듯이, 자유 시장 경제 하에서 북괴보다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반공이다.
오늘날의 좌익 종북 빨갱이 위정자들은 이와 정반대 짓거리를 하고 있다. 기업을 몽땅 망가뜨리고 서민 경제를 파탄 몰락시키는 게 대남적화에 어떤 형태로든 더 유리하다. (선동에 더 취약해지고 먹을것 앞에서 인간성이 더 쉽게 상실되는 등..) 이른바 경제 무장의 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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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야당의 쓸데없는 태클은 심해지고 기존 선거 방식대로는 계속 당선되기가 어려우니..
박통은 헌법을 뜯어고치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전무후무한 10월 유신.. 이게 '우리식 사회주의'...가 아니고, '한국식 민주주의'이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긍정적인 프로파간다 홍보를 죽어라고 해야 했다. 병신 같지만 왠지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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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니는 뉴질랜드로 수출되었던 것을 역수입한 것이어서 포니로서는 아주 드물게 우핸들이다. 게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자동 변속기이더라. 2도 아니고 1이 오토라니.. 정말 보기 드문 모델이다.
옛날에 무슨 영화 찍고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하는 용도로 이집트에 수출되었던 포니를 하나 역수입했다고 그러던데, 그 시절에 포니가 참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긴 했었다.

이렇게 산업화 얘기부터 한 뒤에 한켠에 개발 부작용에 대한 한계, 민주화 열망 그런 얘기도 소개돼 있었다. 이념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듯했다.

이 승만은 건국 초기와 관련하여 육성과 사진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반면, 박통에 대해서는 경제 성장 성과만 저렇게 소개돼 있고 당사자의 족적은 박물관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더 관심이 있으면 아무래도 상암동에 소재한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또한 못살던 시절, 한창 산업화 하던 시절에 서민들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는 경희궁 근처의 "서울 역사 박물관"과도 영역이 일부 겹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이라면 차라리 구한말· 일제 시대를 빼 버리고, 서울 올림픽이나 대전 엑스포, IMF 극복 같은 역사 자료도 더 풍부하게 넣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도 벌써 2~30년 묵은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관람을 다 마치고 내려가는 계단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청년부 동생과 마주쳤다. 서로 깜짝 놀라면서 좁은 세상을 실감했다. =_=;;;

※ 외솔 상 시상식

이 날 서점과 박물관을 방문한 뒤 본인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울 시청 근처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었던 올해치 외솔 상 시상식이었다. 본인은 수상자와는 별 인연이 없지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지인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재단법인 외솔회"라고 국어학자 외솔 최 현배 박사를 기념하는 단체가 있다. 거기서는 매년 고인의 탄신일(10월 19일)에 즈음해서 한국어· 한글과 관련해 문화· 학술 분야에서 1명, 계몽· 운동 분야에서 1명 이렇게 총 2명을 선정해서 상을 준다.
그렇게 시작된 시상식이 2018년 기준 벌써 40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공 병우 박사도 외솔 상의 아주 초창기 수상자였다.

올해는 학술 분야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 겸 국립 국어원 원장을 역임했던 권 재일 교수가, 운동 분야는 한글 문화 연대의 어느 간부가 받았다.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 돼 가는 허 웅(한글 학회 회장) 박사가 외솔의 제자였고, 권 교수는 허 웅의 제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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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입구에는 본인이 다니는 대학원의 총장과,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명의로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외솔회는 재단법인이지만, 비슷한 업종(?)에 속하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는 사단법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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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은 상만 씨크하게 주고 끝인 게 아니라 외솔 선생의 생전 육성 청취, 수상자의 소감 연설, 심지어 "한글이 목숨이다"를 가사로 뮤지컬 공연까지 생각보다 프로그램이 많았다. 게다가 뷔페 저녁 식사도 공짜로 줬다.

전공 분야와 관련해서 외솔의 사상과 행적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듯하다.
킹 제임스 성경 신자가 0.5초 만에 이해 가능하게 한데 요약하자면, 요일 5:7 구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대신에 '말, 글, 얼'을 집어넣으면 씽크로율이 99%에 근접할 것이다.
이분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해서 개인적인 종교가 실제로 기독교였다고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런 신앙보다는 그냥 방망이 깎던 노인 스타일의 대쪽 강직한 고집쟁이 원칙주의자 "한글이 목숨" 언어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1970년 봄, 아폴로 13호의 발사를 세 주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분이 그 근성으로 성경· 신학 쪽도 진지하게 파고들었다면 이 분야 순우리말 용어에도 분명 관심을 가졌을 것이며 혼과 영 대신에 넋과 얼을 제안도 분명 했으리라고 본인은 추측해 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8 08:33 2018/10/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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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재작년(2016)에 이어 올해 열린 한글 및 한국어 정보처리 학술대회(제30회)에 논문을 투고하고 발표했다.
재작년에는 현재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라고 깔끔하게 구현된(8.8~9.0) 기능의 개념과 필요성에 대해서 썼다.

그 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세벌식 글쇠배열에서 구현 가능한 모아치기, 동시치기 등의 개념을 정립했으며 이와 관련된 연구, 날개셋 9.5에서 새로 구현된 기능의 핵심 아이디어, 그리고 간단한 관련 실험 결과를 짧은 분량에 최대한 요약해서 소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파이널 버전에서 최종 테크 명목으로 연구된 (1) 세벌식 응용 기능을 발표한 자리이니 본인으로서는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특이한 점은 장소이다.
재작년에는 학술대회가 부산 동아 대학교에서 열렸다. 서울과 굉장히 먼 대도시라는 특성상, 차를 가져가지 않고 커다란 캐리어만 끌고 다니며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소가 서울 고려 대학교이고, (2) 차나 숙박이 전혀 필요 없이 집에서 간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학회를 다녀 오는 분위기가 완전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

적당히 경기도 외곽이나 강원도 지방에 자가용을 몰고 내려가고 주변에 좀 놀러도 다니고, 밤에는 차에서 자면서 추억을 만드는 학회를 생각했는데.. 이건 결국 본인의 대학원 재학 중에는 이뤄지지 않게 됐다.
그래도 해수욕을 하고 여관방과 카페에서 잔 학회와, 교통과 숙박 걱정이 전무한 인서울 학회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의미가 있었다. 극단적으로 먼 곳과 극단적으로 가까운 곳의 차이이다.

그리고 (3) 다른 학교가 아니라 고려대라니.. 여기는 본인이 대학 학부 시절에 최초로 논문을 투고하고 참가했던 먼 옛날 2003년 제15회 대회 때와도 동일한 장소였다. 거기를 15년 만에 다시 찾아가다니.. 참 좁은 세상이다. (그땐 본인이 아직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 거주지가 없던 시절인 관계로, 숙박은 서울 친척 집에서 함)

올해는 딱 30회 기념에다 인서울 버프까지 받아서 그런지, 재작년은 물론이고 예년 평균의 2배를 상회하는 많은 논문이 투고되었다.
재작년엔 4개의 세션에서 토요일 오후 12시 반쯤에 모든 논문 발표가 마무리 되었던 반면, 올해는 5개의 세션에서 무려 오후 5시까지 끊임없이 논문 발표 스케줄이 배당되어 있었다.

재작년에는 학회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반면, 올해에는 우리 학교의 김 한샘 교수님이 발표 세션 중 한 곳에서 좌장을 맡으시고 우리 학교 언어 정보 연구원에서도 논문을 투고했다. Universal Dependency라고.. 언어들의 구문 분석 태그 세트도 전세계 공통 통합 체계를 만들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걸 난생 처음 들었는데, 저 세션은 바로 그 UD 관련 발표 세션이었다.

또한 (4) 본인처럼 한글 코드와 글자판 같은 기초/마이너 분야의 연구를 하는 분을 몇몇 뵐 수도 있었다.
변 정용 교수님은 재작년에는 특강만 하시더니 올해는 논문도 투고하셨고, 내 논문까지 포함해서 아예 이 분야만을 위한 별도의 발표 세션도 배당되었다. 이것도 좋았다. 재작년에 냈던 내 논문은 인지과학 세션으로 분류됐었다.

그러니 이번 학술대회는 개인적으로 느낀 분위기가 재작년 대회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런 데다가 정말 고맙게도 본인은 2년 전에 이어 올해에도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재작년과는 달리 아예 대회 시작 전에 미리 알려 주더라.
뭐, NLP처럼 많은 연구자들이 몰리는 주류 연구 주제에서 두각을 보였다기보다는, 워낙 독특하고 마이너한 분야를 파고 있고 그게 학술적으로 무가치한 건 아니니, 그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것에 대한 비중이 더 컸을 것이다.

본인이 여기에 논문을 하나 더 낸 이유는 다른 동기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학교 졸업 이수요건 충족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학계에서 논문이라는 건 크게 학위논문(대학원 졸업용), 학술지(저널) 논문, 그리고 학술대회 발표 논문(프로시딩)으로 크게 나뉜다.
본인은 발표 논문만으로 이수요건이 충족되는 줄 알고 있었으나 그렇지는 않더라. 사실 프로시딩은 투고하고 게재되는 절차가 제일 신속 간편하고 격도 제일 낮다. 학계 이 바닥의 최신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자기 연구 성과를 정말 짤막하게 신속하게 광고하는 수단에 가깝다.

결국 학술지 논문 두 편 이상인데, 하나는 KCI 등재 또는 등재후보 등급 이상의 학술지에 실어야 한다. 그건 본인이 이미 작년에 하나 해냈다. 나머지 하나 더는 이론적으로는 정말 아무 학술지에나 실어도 되고 더 부담 없이 해도 된다.
하지만 논문이란 건 한번 투고하면 영원히 기록이 남고 특히 박사들에게는 취업 스펙이나 마찬가지인 아이템인데, 너무 대충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발표 논문도 학술지 논문으로 발전시켜서 실으려면 내용을 추가 보완하는 두벌일을 하게 됐다.

그래도 이런 학술대회에서 우수 논문 추천을 받으면 관련 학술지에다가 발표 논문의 파생 논문을 싣는 것도 한결 더 수월해진다. 본인의 이전 학술지 논문도 이런 절차를 거쳐서 실을 수 있었다.
한글 및 한국어 정보처리 학술대회는 본인과 이런 관계가 있는 자리였다. 올해 대회에 참가하여 추억을 만들고 온 기록을 내 블로그에다가도 남기고자 한다.

※ 장소와 분위기

고려대는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 많은 게 인상적이었다.
교내로 들어온 차량은 지하로 쏙 보내 버리고 지상에는 보행자와 이륜차 정도만 지나가는 넓은 광장을 두는 게 요즘 대학교 캠퍼스들의 디자인 트렌드인 것 같다. 라이벌인 연세대만 해도 2010년대 초중반에 '백양로 재창조' 리모델링을 하면서 캠퍼스를 그렇게 뜯어고쳤으니 말이다.

요런 학회는 첫째 날엔 참가자들이 몽땅 한 자리에 모이니 커다란 강당이 필요하고, 다음날 실제 학회가 진행될 때는 발표 세션들이 있을 강의실 네댓 개와 포스터가 전시될 광장이 필요하다.
두 공간이 성격이 좀 다르다 보니 이번에는 첫째 날 모이는 장소(인촌 기념관)와 둘째 날 모이는 장소(현대자동차 경영관)가 학교 정문의 서쪽과 동쪽으로 서로 완전히 달라졌다. 동일하거나 인접한 건물에서 층만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올해 학술대회는 논문이 많이 투고된 것에 비해 첫째 날의 프로그램이 의외로 어느 때보다도 적었다. 특강 딱 세 개 이후에 경과 보고와 시상식만 하고 끝이었다.
보통 저녁 7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저녁 먹으러 나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5시 반에 칼같이 첫째 날 일정이 종료됐다. 새내기 박사 졸업자들의 자기 학위 논문 발표라든가 후원사 홍보 세션 같은 것도 없고..

그리고 만찬도 예전에는 뷔페라든가, 앉아서 먹는 한식 정도가 나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냥 교내 학생 식당에서 각자 알아서 배식 받아 먹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번 학회가 참가자가 이례적으로 굉장히 많아서 이렇게 결정한 것 같긴 하나.. 이렇게 하니 모르는 사람과 안면을 틀 기회가 없어서 일면 아쉬웠다.

※ 특강(초청 강연): 검색엔진

특강 세 편 중에서 (1) 네이버에서 근무 중인 어느 언어공학 박사가 한 강의가 제일 유익했고 머리에 제일 많이 남았다.

  • 오늘날 전세계에 유의미하게 남아 있는 검색엔진은 구글, 마소 Bing, ..., 러시아 XXX, 중국 바이두, 한국 네이버 등 딱 7개 남짓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폐쇄적이거나, 기술 배경이 특이하게 고립된(갈라파고스화..) 곳 말고는 그나마 구글이 사실상 전부 다 먹었다. 우리(네이버)는 이런 상황에서 뒤쳐지고 도태하지 않게 위기의식을 갖고 피말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 웹사이트 검색과 블로그/뉴스 검색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 검색엔진들이 웹 문서들을 평가하고 노출 순위를 매기는 세부 기준들은 전적으로 개발사들의 권한· 재량인 동시에 중대한 영업기밀이다. 교사들의 시험 문제 출제와도 같다. 그게 유출되면 당연히 오· 남용 악용되고(시험지 유출처럼..!!) 그걸 막으려고 피차 또 왕창 피곤해진다. 아무리 오픈소스네 개방이네 해도 개방되는 건 중립적인 기술과 알고리즘일 뿐, 그런 주관적인 잣대는 국회의원 같은 높으신 분이 요청한다 하더라도 넘겨줄 수 없다.
  • 뭔가 얼토당토않은 사이트가 상위로 랭크된 듯한 게 있으면 그건 기술적인 문제나 한계, 버그 때문일 뿐이다. 노출 우선순위는 전적으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상상을 초월하게 방대하고 복잡한!) 결정될 뿐, 그게 내부인의 농간에 의해 호락호락 조작 가능한 게 아니다. 관련 괴담이나 음모론들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 굳이 AI나 기계 학습 관련 알고리즘을 다 이해하고 있고 직접 코딩 구현까지 했다고 해서 엔지니어 채용 시에 크게 가산점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 기술을 이용해서 실제 언어 데이터를 상대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창의적인 실험을 해 봤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강연 내용들은 본인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 내 직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옛날에, 1990년대 25년쯤 전에 검색엔진이라는 건 수많은 웹사이트들을 사람이 손으로 도서 분류하듯이 카테고리화해서 안내하는 길잡이, 아니면 msdn의 검색(search) 기능처럼 그냥 기계적으로 특정 주제어가 존재하는 웹페이지들을 정확도와 빈도 순으로 보여주는 메타사이트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검색엔진은 웹메일, 뉴스 기사 등 온갖 서비스들을 같이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를 겸하게 되어 덩치가 커졌으며, 검색 기능에도 온갖 자연어 처리 기술이 접목되었다.
2002년쯤에 네이버에 지식인이라는 게 도입되면서 이변이 일어났다. 검색엔진은 그냥 기계적인 검색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고 그 사람이 원하는 정보를 즉각 대령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됐다.

그리고 나라 밖에서는 구글이라는 신흥 강자가 세계의 웹을 정복했다. 야후, 심마니, 엠파스 등.. 1세대 검색엔진들은 싹 도태해 버리고 물갈이 됐다. 과거에 워드 프로세서를 두고 마소 vs 한컴이던 게 지금은 검색엔진을 갖고 구글 vs 네이버 구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아무튼..

(2) 그 다음, 젊어 보이는 어느 고려대 '영문과' 교수님은 맥북 Keynote를 써서 발표하면서(예능· 디자인?), null space가 어떻고 야코비안 행렬이니 벡터 편미분이니 나열하며 반쯤 선형대수학 강의를 하시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요즘은 정말 학문에 경계란 게 없는가 보다.
하긴 언어 응용 중에 음성 처리 쪽은 기술 집약적이고 굉장히 이과스러운 분야이기도 하니까..

※ 특강: 한글 코드

(3)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 정용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자음· 모음을 이중 삼중으로 임의로 집어넣은 한글을 구현하려고 애쓰고 계셨다.
지금 유니코드에서는 한글을 글자 단위로 완성형으로 쓰지는 않는다. 단지, 낱자 레벨에서는 완성형인 게 사실이다. 초성의 자음 집합과 종성의 자음 집합이 일치하지 않는다. ㅄ이라는 낱자 번호로부터 ㅂ과 ㅅ을 자연스럽게 추출할 수 없으며, 초성 ㅂ으로부터 종성 ㅂ의 코드값을 얻을 수 없다. 다 테이블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변 교수님의 주장은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지금의 160여 만 자 옛한글조차도 한글을 컴퓨터에서 제대로 구현한 게 아니라고 한다. 원래 훈민정음의 원리대로 한글 자모를 뭉쳐 넣고 조합하면 399억 종류, 32비트 정수 범위를 초과하는 가짓수의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그냥 영어의 strike, school라든가, 중국의 xian, yao 등등.. 세계 모든 언어에서 1음절로 표현되는 음운은 몽땅 한글 한 글자로 묶어서 표현하겠다는 포부이다.;;

프로그래밍 언어 분야에도 극단적인 순수주의자(purist)가 있듯이, 한글의 표현 방식에 대해서 이런 최고 수준의 추상화와 순수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분이 계시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 24자인지 28자인지 최소한의 낱자만 문자 코드에 배당해 놓고, 얘를 쭈루룩~~ 늘어놓는 것만으로 모아쓰기 글자가 생성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지 그렇기 하기에는 제반 글꼴 기술이라든가 음절 경계 구분 쪽의 부담이 대책 없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낱자는 그냥 코드 차원에서 완성형으로 퉁친 것이다. 심지어 현대 한글은 글자마디 11172자를 다 집어넣기도 했다.
뭐, 유니코드 5.2가 등장하기 전에는 심지어 마소에서도 1.1 자모를 최대 3개까지 한데 묶어서 최대 9개의 코드 포인트를 차지하는 옛한글을 편법으로 구현한 적이 있다. 그러니 변 교수님의 지론도 기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조합 가짓수가 비현실적으로 너무 많긴 하다.

변 교수님이야 무려 1980년대부터 한글 코드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니, 학회에서도 이분에 대한 courtesy 차원에서 특강에 논문 발표 기회까지 잔뜩 마련해 줬다. 하지만 "한글을 굳이 저렇게 이상한 형태로 활용할 필요가 있나, 그게 무슨 돈이 되고 실용적인 의미가 있나? 멀쩡한 IPA 부호를 냅두고 굳이 저런 한글 변형을 쓸 사람이 있겠나" 같은 이의 제기도 물론 있다. 이건 요즘처럼 AI네 빅데이터네 머신러닝이네 떠들어대는 시절에 신세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인기 분야라고는 할 수 없다. =_=;;

발표 자료 중에는 북한에서 유니코드 위원회에다 '한글' 대신 '조선글'이라는 명칭을 써 달라 뭐 이렇게 영어로 이의 제기 메일을 보냈던 것의 캡처 화면이 잠시 지나갔다. 북한은 국가· 민족 정체성과 관련하여 한(韓)이라는 글자를 아주 싫어하니까..
물론 북괴는 그래 봤자 회비도 잔뜩 체납된 상태에서 발언권이고 영향력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한글 배열 순서를 북한 식으로 해 달라, 최고존엄(김 일성 김 정일) 전용 문자 코드를 배당해 달라" 이런 요청 따위도 몽땅 씹혔으며, 유니코드에서 한글은 오로지 100% 남한의 관행대로만 배당되었다.

북한이 작성한 이메일을 쭉 훑어보니 byte를 bite로 잘못 써 놓은 게 보였다. ㅡ,.ㅡ;;
하긴, '자전거'도 bycicle이라고 쓰기 쉬운 와중에 I와 Y를 헷갈리는 거 이해는 된다.
게다가 4비트 nibble도 '야금야금 물어뜯어 갉아먹다'라는 뜻이 있으니, 그 다음 byte 역시 bite와 전혀 무관한 명칭은 아니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2 08:31 2018/10/2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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