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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에 재미 붙이다

1. 운전에 재미 붙이다

자동차는 마치 내 신체의 일부라도 된 듯, 가속 페달만 밟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쓰윽 나아가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신기하고 대단한 물건이 아닐수 없다.

단지 사고가 났다 하면 온갖 험한 꼴 보면서 정말 인생에 애로사항이 알록달록 꽃피게 되며, 더구나 그게 나만 잘한다고 100% 예방 가능한 게 아니어서 문제일 뿐.. -_-;;
또한 돈 씀씀이의 레벨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올라간다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BMW(버스, 지하철, 도보)만 이용하던 시절엔 기름값, 주차비, 운전자 보험 같은 개념을 생각할 일 자체가 없지 않았던가.

도로 정체, 기름값, 주차라는 3대 난제를 생각하면 차를 가져가는 데 부담이 느껴지나,
날씨가 안 좋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귀가할 때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해진다.
심야에는 대중교통은 차가 뜸해지고 이용하기 어려워지며, 반대로 도로는 더욱 한산해지니 자가용의 경쟁력이 크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심야 총알 택시가 있긴 하지만 이때는 역시 재정의 압박이.. -_-;;

본인은 엄청난 옛날, 아직 철덕이 되기도 전이던 2003년 초에 면허를 땄다.
하지만 무려 2011년이 돼서야,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차를 몬 것보다 더욱 운전을 많이 했다.
대학원생이다 보니 이런 블랙코미디가 문득 떠오르더라.
이게 박사 학위를 따는 때(먼허)와 교수 되는 때의 간극(자가용 장만&운전)처럼 되는 건 아닌지. -_-;;;
그때까진 그럼 학위도 장롱 학위나 마찬가지인 건가. ㄲㄲㄲㄲㄲ

처음에는 차들이 쌩쌩 들어가는 도로로 들어가는 게 겁나기도 했고, 차선 바꾸거나 주차하는 게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모든 게 생소하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하고 나니까 진짜 '감'이 온다. 어려울 것 하나도 없다. 악기를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배짱도 생기고, 나 역시 상황에 따라서는 앞차를 경적 누르면서 갈구기도 하는 경지에 올랐다.

도로가 한산한 밤에 혼자 차 몰고 나들이 갔다 오면서 운전 알파테스트를 하다가 이내 남까지 태워다 주게 됐다. 차키를 쥐고 있으니 정말 절대권력을 쥔 느낌이었다.
비록 지금은 내가 전철을 타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차를 갖고 나갈 수도 있는 상태에서 일부러 전철을 타는 것하고, 차가 아예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전철을 타는 것은 마음 상태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차가 좋아서 한적한 도로에 차 세워 놓고 안에서 혼자 그냥 자기도-_-;; 했는데, 이것만으로도 마치 텐트 치고 야영 온 느낌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도로 정체가 없기 때문에 운전하기엔 최적. 교회에는 차를 가져가는 빈도가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운전하니까 좋다.

일각에서는, 자가용 운전에 재미 붙임으로써 본인의 철덕 기질도 상대적으로 한풀 꺾일 거라고 벌써부터 기대하는 분이 있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 아직까지는 과연 글쎄다.
내가 운전하면서 맨날 뭘 듣는지를 지켜본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ㅋㅋㅋㅋㅋ

내가 교회를 안 다녔으면, 차가 있으면 주말마다 일단 서울 교외선과 중앙선의 간이역 답사부터 하러 돌아다녔지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타입이 아니고, 등산도 싫어하고, 혼자서 프로그래밍도 안 하면 그럼 뭘 하겠는가?
아무튼,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숨과 자동차는 하나뿐이다. 둘 다 안 아프고 간수 잘 하는 게 효도하는 길 되겠다. ^^

2. 관련 잡설들

- 산업 혁명 시절에 다른 분야도 그랬지만, 자동차 역시 기존 마차 업계들로부터 밥그릇 빼앗는다고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 데다 교통사고까지 빈번하니까 영국이던가 미국이던가? 20세기 초에 쟤네들의 로비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조항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걸 아시는지? 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차는 시속 10km대의 속도로만 가도록 하고, 앞에서 조수가 빨간 깃발을 흔들면서 비키라고 경고하라고..;; 자동차를 완전 고자로 만들어서 굴리는 거구만.. -_-

- 198, 90년대에는 유난히도 환경과 관련된 섬뜩한 괴담이 많이 나돌고 캠페인도 많이 벌어졌었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지금도 비록 서울 공기가 그리 맑다고 볼 수는 없지만, 수십 년 동안 그렇게도 많은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는데도 반세기 전의 영국 같은 스모그가 안 생기고 시민들이 전부 호흡기에 병 걸리고 죽지 않는 걸 보면 정부와 기업에서 환경 정화를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을 많이 하긴 했다. 시꺼먼 매연을 뿜는 시내버스들은 거의 다 천연가스 엔진으로 바뀌고, 자동차 회사들도 배기가스를 정화하는 기술을 공돌이들을 갈아넣어서 충분히 개발했다.

(얼마 전엔, 지난 2003년에 단종된 현대 갤로퍼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별로 크지도 않은 차에서 나오는 시꺼먼 매연을 보니, 갤로퍼가 환경 기준을 만족 못 하고 왜 진작에 단종됐는지를 알 것 같았다.)

- 컴퓨터 프로그래밍 세계에 memory leak가 있다면, 자동차에는 battery leak가 있다. 시동이 꺼졌는데 실내등, 계기판의 각종 불빛 따위가 켜져 있는 채로 차가 장시간 방치되면, 그 다음에 그 차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을 걸 수가 없어진다. -_-;; 옆에 다른 차가 있고 배터리 연결이라도 가능하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영락없이 보험사 콜.. -_- 자동차에도 battery leak을 감지하거나 시동 가능을 위한 최소 전력까지만 전기 사용을 허용하는 그런 장치는 없으려나 모르겠다.

- 그런데, 시동을 켜서 발전기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능사는 아닌 것이, 에어컨과 헤드라이트는 오늘날의 자동차에도 상당히 무리를 주긴 하는가 보다. 특히 둘을 모두 가동해야 하는 여름 밤의 운전은 정말 최악이라고...;; 시동을 걸고 차를 주행하고 있더라도 발전량이 전력 소비량을 못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에어컨은 주기적으로 껐다가 다시 가동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시동이 꺼지면서 동작이 자동으로 멈추는 전자 기기라 하더라도, 미리 그걸 스위치를 눌러서 직접 끈 뒤에 시동을 끄는 게 여러 모로 차에 좋다고 한다. 에어컨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 옛날에는 축전지가 들어가는 물건 자체가 자동차, 노트북 컴퓨터, 워크맨 외에는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랬는데 1990년대 말부터 휴대전화부터 시작해서 온갖 전자 기기들이 보급되면서 이 구도도 바뀌었다. 자동차의 부품으로는 '밧데리'라는 말도 많이 쓰였는데, 오늘날은 확실하게 배터리라고 표현이 바뀐 것 같다.

- 어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한국은 외래어의 원형 그대로 축약을 잘 안 한다.
일본은 play station도 그냥 '프레스테'라고 줄이고, shock absorber를 '쇼바'라고, 텔레비전을 '테레비'라고 뚝뚝 편한 대로 잘 줄이는데,
한국은 도이칠란트 대신 그냥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대신 호주, 에스컬레이터 대신 E/S, 텔레비전 대신 그냥 TV, 남캘리포니아 대신 남가주 등 영어 이니셜이나 차라리 한자어를 쓰고 마는가 보다.
자동차 용어 중에서도 조금만 생각하면 이런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12 08:29 2011/09/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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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사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넓은 잔디밭 부지 위에 지어진 하늘색 건물들, 그리고 까리용과 오리 연못.
지극히 카이스트스러운 분위기를 잘 표현한 풍경 사진이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올해는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카이스트 학부생이 무려 4명이나 연달아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거기다가 교수까지 한 분 자살!). 몇 년 전의 일명 '카이스트 미네르바' 사건 때는 인터넷 공간 위주로 카이스트가 구설수에 올랐다면, 이번 사건은 정말 개교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충격적이고 안타깝고 불미스러운 일인지라 오프라인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이 일 때문에 연일 도마에 오르며 까이고 있는 인물은, 카이스트 개혁의 장본인인 서 남표 총장이다. 서 총장 개인은 정말 너무나 대단한 인물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세계구 급의 과학 수재들이 가는 MIT에서 그냥 교수로도 모자라서 학과장을 역임한 박사 중의 박사요, 교수 중의 교수이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이를 두뇌 유출이라고 아까워했다. 서 남표의 인생 경험과 사고방식이라면, 국비로 공부하는 주제에 학부 때 평점 3.0? 3.3도 못 받는 쪼렙들은 징벌성 등록금 좀 매겨도 된다.

내 지론은, 아까운 학생을 4명이나 잡아먹은 서 남표 총장을 당장 짜르고 징벌적 등록금· 영어 강의 따위를 전면 폐지하자는 게 아니다.
또한, 요즘 대학들의 학점 인플레가 얼마나 심한지는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카이스트의 상대 평가 자체도 반대하지 않는다. 똑같은 CD-_- 그레이드라도 카이스트나 아주대나 서강대에서 받은 CD는 다른 학교의 CD하고는 어차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그건 사회가 알아서 인정해 준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그렇게 상대 평가를 하는 주제에 징벌적 등록금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 이건 누가 봐도 문제이다.
그리고 애초에 애들을 오로지 수학· 과학 덕후 공부기계 nerd, geek, science wonk로만 만들려면, 그 정책에 위배되는 애들을 뽑지 말았어야지.
뽑기는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서 고등학교에서 영어나 수학· 물리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휘한(?) 애들을 대인배스럽게 많이 뽑아 놓고서는,
걔네들을 별다른 배려 없이 획일화한 시스템에다 꽉꽉 집어넣고 부적응자는 등록금 폭탄으로 응징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의무 교육이 아닌 대학에 대해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철학을 기본적으로, 큰 틀에서는 지지한다.
그 학교의 건학 이념과 정책에 동의할 수 없으면 학생이 애초에 거길 가지 말거나 나중에라도 자퇴를 해야지,
기독교계 학교에 제 발로 가 놓고는 종교의 자유 운운하면서 채플 거부 시위 따위나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런 것처럼 카이스트도 거기가 얼마나 유별난 곳인지는 지금까지 사회에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니 거기에 적응 못 할 사람은 애초에 거기에 안 가야 한다. 생각은 그렇지만 사회가 그렇게 이상적인 모습처럼 단순하게 돌아가지는 않으니 현실은 시궁창이다. 학교나 총장이 잘못이 없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_-;;

카이스트는 원래 대학원만 있는 학교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소수정예 집단이었고, 학생들은 100% 기숙사에 학비 100% 면제는 물론이요, 병역까지 사실상 면제나 다름없는 어마어마한 혜택이 있었다. 프로필이 1970년대의 '서울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외국 박사'인 공대 교수들은 전형적으로 이 혜택을 입은 분들이다.1)

하지만 지금 카이스트는 학부도 생겼고 특히 서 총장 때 벌어진 엄청난 대학 몸집 부풀리기 덕분에 학생 수가... 마치 새마을호 정차역 수가 늘듯이(ㄲㄲㄲㄲ) 굉장히 늘었다. 그래서 지금 기숙사가 부족해서 난리이고 이 많은 학생들에게 전액 수업료 면제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지금은 근본적으로 1970년대처럼 어마어마한 인센티브를 주면서 이공계를 갓 육성하던 시절도 아니요, 그런 옛날 방법만으로 이공계를 획기적으로 띄워 줄 수 있지도 않다. 21세기에는 카이스트의 정체성에도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인은 아직까지는 서 남표 식 방법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임 총장인 로버트 러플린은, 카이스트를 아예 종합 대학으로 바꾸고 로스쿨과 의대를 만들려고까지 했었다. 그것보다는 낫잖아?

수업료 하니까 생각난다. 그렇게도 세금이 아까우시거들랑, 성적 나쁜 애들보다는...
국비로 단물 실컷 빨면서 공부하고도(그리고 그놈의 성적도 아주 잘 나왔는데도!) 의대로 돌아서 버린 친구들한테서나
먹었던 수업료 뱉게 하는 게 국익을 위해서 차라리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_-

하지만 그런 제도는, 우리나라가 부카니스탄 같은 국가가 아니며 카이스트도 이공계 연구소 의무 복무-_- 기간이라도 존재하는 사관학교급이 아닌 이상... 밀어붙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일개 기관이 개인의 차후 진로를 어떻게 일일이 다 찾아다니고 간섭할 수 있겠나?)

또한, 더 생각해 보면 의대 가는 애들 탓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이공계가 얼마나 비전 없고 암울했으면, 어렸을 때 순수하게 과학자의 꿈을 품었던 애들마저 그 꿈을 접지 않을 수 없게 됐는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서 총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학생상처럼 그렇게 미치도록 애들 공부시켜서 수학· 과학 덕후를 만들어 봤자 한국에서는 겨우 사악한 악당 공 박사(이 말년 시리즈 ㄲㄲ)밖에 되지 않는다면... 과연 학교가 서 총장의 의도대로 돌아가 줄까?
요즘 평범한 애들이 아무 비전이 없이 9급 공무원에 목숨 건다면, 걔네들보다는 더 머리 잘 돌아가고 똑똑한 애들은 의대· 법대에 매달리는 셈이다.

본인의 재학 시절에는 자살자는 아니고 풍동 실험실 폭발 사고 때문에 학교가 제대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기억하는 분이 계시는지? 이 사고로, 박사 과정 대학원생 한 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또 한 명은 다리를 잃었다. 역시 이공계의 비극.. =_= 항공 우주 공학은 레어템이어서 기계/전자 공학이나 전산학만치 흔하고 학생 많은 과도 아닌데... 인재의 손실에 따른 타격이 어느 과보다도 컸을 것이다. 사망자인 고 조 정훈 씨에게는 명예 박사 학위--훈장이나 일계급 특진은 아니고ㄲㄲ--가 추서되었다.2)

수학· 과학 덕후와는 거리가 멀고 아예 문과로 계열을 바꾼 본인조차도 카이스트를 잘 버티고 졸업해 나왔는데... 자살이든 사고사든, 뜻하던 학업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심히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얼마나 국가적인 손실인가?
본인의 졸업 논문 지도 교수이던 전산과의 ㄱ 교수님도 워낙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 분이시다 보니, 이 사건과 관련해서 이분의 인터뷰 문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카이스트 학사 졸업생으로서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아마 서 총장은 이 승만 초대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것 같다. 화려한 미국물 프로필, 천재형, 민심을 모르는 독재자형, 누군가가 죽는 유혈-_- 사태, 유쾌하지 못한 퇴임 같은 점에서.


Notes:
1) 카이스트는 국비 장학생이 기본 구도이기 때문에, 대학원을 자퇴하려면 지금까지 면제 받았던 수업료를 뱉어야 한다. 이는 재학 중의 성적과는 아무 관계 없으며 서 남표 집권 이전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학칙을 찾아보면 관련 조항이 있다. 단, 학부는 그런 조건이 없음.

2) 덧붙이자면, 2003년은 국내 과학계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사고가 전국민을 슬프게 했다. 하나는 5월에 발생한 저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그 해 말, 남극 세종 과학 기지에서 전 재규 대원이 순직한 사고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4/12 19:22 2011/04/1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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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 버린 2004년은, 본인의 대학 후반기임과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웃긴 컨텐츠’들을 유난히도 자주 접한 해였다.

웃긴 컨텐츠의 원천은 크게 풀빵 닷컴 아니면 일본물로 나뉘었다. 2004년 당시 잠깐 떴다가 사그라든 박 분자 시리즈(휴지의 시, 맵핵의 추억 등), 그리고 서울 버스 개편을 비꼰 <버스 로얄> 및 <투모로우> 같은 영화 예고편 패러디였다.
그리고 일본물로는 일본 환타 CF, 그리고 일본판 가나다송, 숫자송, 인사송이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이런 거 아는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2004년을 훈훈하게 보내고서 이듬해 초의 일이다.
유머· 엽기 게시판에서 웬 5분짜리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개그 만화 일화와 본인과의 첫 인연이었다. ㅋㅋㅋㅋㅋㅋ
코트의 안에는 마물이 살고 있고 믿을 만한 동료들이 다 맛이 갔다니... 오프닝 가사부터가 무지하게 암울한 한편으로 아스트랄하고 포스가 넘치지 않는지? ^^;;

배경은 지구가 운석 충돌로 멸망하기 3시간 전. 전세계 사람들은 이제 볼장 다 봤다는 식으로 서로 똥이나 처바르면서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진행된 어느 TV 쇼프로에서는 우리나라로 치면 태 진아 같은 연륜을 자랑하는 엔카 가수가 발가벗고 출연하여 엔카는 지겹다고 말한다. 그것도 똥 묻은 파르페 다음으로 싫댄다. ㅜㅜㅜ

문 근영 정도 될 법한 아이돌 가수는 양아치 같은 차림으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아까 엔카 가수는 딸내미뻘 되는 그 아이돌에게 껄떡대다가 담배빵을 당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미소!! ㅎㄷㄷㄷ;; 갑자기 등장하는 '쿵~따 쿵쿵따' BGM도 은근히 중독성 있었다.

복화술사는 복화술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내 친구는 그저 땡그랑~뿐입니다요”라고 실토한다. 본격 인간성 파탄. 파트너인 인형을 줘 팬다.
그런데 마지막 게스트인 마술사는 자신이 사실 초능력자라고 커밍아웃한 후 운석의 궤도를 바꿔서 지구를 구해 낸다.

복화술사 정도라면 모를까, 앞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엔카와 아이돌 가수 둘은 연예인 생명은 이미 완전히 파토 났으니, 아마 성형 수술하고 개명 후 이민 가서 잠적해야 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그 이름도 유명한 1기 4화 <종말편>을 통해 개그 만화 일화에 입문했다.
처음 봤을 땐 본인도 남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일본 아니랄까봐.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만화가 다 있어? ㄲㄲㄲㄲㄲㄲ” 하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봤다.

그런데 중독성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욕을 하면서도 자꾸 또 보게 됐다. 그러면서 빠져들었다. ㅠ.ㅠ
게다가 일본물과 각종 만화에 조예가 깊던 병특 회사 모 동료의 영향으로 본인은 <씰>, <서유기> 등 여타 작품까지 섭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혹자의 코멘트에 따르면, 드디어 사무엘 님도 알량한 웃음을 대가로 자기 영혼을 팔아서 타락시키기 시작했다고라...;;;;

본인은 일본 애니와는 담을 쌓고 사는데 예외적으로 이거 하나만은 찾아서 보게 됐다.
처음엔 엔카가 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핑크빛 카파(괴한)’이 뭔지도 알 정도로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다. ^^;;; 본인이 일본어를 할 줄 안다면 대사를 다 외웠을 텐데 말이다. ㄷㄷ;;

최소한 2006~7년부터 거의 3년이 넘게 본인의 MSN 대화명은 개그 만화 일화 대사였다.
- 팔릴까보냐!
- 닥치세요. 이것이 저의 완전체입니다
- 번뇌 이놈, 죽어라!
- 한겨울에도 축시
- 똥 묻은 파르페 다음으로 싫어

엽기적인 거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저런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종말>, <안 오잖아, 가정교사!>, <히라다의 세계>, <서유기> 같은 것들.

2008년 상반기에는 개그 만화 일화 3기가 본인의 병특 말년 생활을 더욱 즐겁게 해 줬다. 매주 저거 올라오는 거 기다리는(자막도) 재미가 참 쏠쏠했다.

병특이 끝난 뒤 다른 직장에서 본인은 플래시 메모리를 분실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른 동료 직원이 습득했다. 그런데 그 플래시 메모리 안에는 개그 만화 일화 동영상 자막 파일이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서 그 동료가 “이거 주인은 일본 애니 덕후인가 보군.. 그런데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라고 말했고, 이걸 계기로 본인과 그분은 서로 개그 코드가 통하는 친한 사이가 됐다. ㅋㅋㅋㅋㅋ

이렇듯, 개그 만화 일화는 본인의 인생에서 최소한 두 명의 사람과 인연을 이어 줬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이런 만화 얘기를 꺼내면 정상인 취급을 못 받는다나? ㄲㄲㄲㄲㄲ

놀랍게도, 개그 만화 일화 에피소드로 영어 연극을 하고 싶으니 대사를 영어로 좀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본인은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다. “베게의 속에는 참치로 가득 -> Inside the pillow is full of tuna” ㅋㅋㅋㅋ 유튜브에는 한때 실제로 영문 자막이 삽입된 개그 만화 일화 동영상이 나돌기도 했는데, 저작권 문제 때문에 요즘은 다들 삭제된 모양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그 만화 일화는 성우 지망생들의 더빙 연습용으로도 자주 쓰일 정도로 이 바닥 종사자에게는 친숙하다. ^^

1기(시즌 1)의 오프닝 주제가 가사 중 일부가 ‘배구에 걸었던 청춘’인지 ‘발레에 걸었던 청춘’인지가 번역자에 따라 해석이 차이가 있었는데, 이 영어 자막을 보고 정확한 해석이 뭔지 알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물이 살고 있는 코트도 coat가 아니라 court이다. 맛이 갔다는 표현의 원어 표현은 '눈이 죽었다'(eyes are lifeless)임. =_=;;

개그 만화 일화는 원래 만화책으로 나온 스토리를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다. 만화책은 2008년 말에 드디어 우리나라에 정식 번역 출간되었고, 듣기로는 애니메이션도 정식으로 더빙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개그 만화 일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개그 만화 일화는 김 성모, 삼류만화 패밀리 등 본인으로 하여금 더욱 매니악한 서브컬처 유머 문화에 입문하게 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여러분도 정신 건강을 웃음을 통해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다면, 5분을 투자해서 개그 만화 일화 1기 , 종말, 서유기 편부터 차례대로 섭렵해 보는 게 어떨까? ^^;;

http://blog.naver.com/lhj3496/110031250383 (1기 주제가만으로 만화를 만들었다. <코트 안에는 마물이 살고 있어> ㅋ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1/03/23 08:12 2011/03/2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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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27일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개발해 온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프로그램과 설명서를 교육청에 제출했다.

2000년 8월 30일
밤 11시 20분경,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나를 불러 집에 전화가 왔다고 전해 주셨다. 그리고 무슨 대회 예선을 통과했다고 하는 일종의 힌트도 덧붙였다. 집에 전화해서 보니 아니나다를까 어머니께서 ICC(당시 정보 문화 센터.. KOI 주최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전해 주셨다. 결과는 물론 합격이었다.
오! 이제까지 코딩한다고 겪은 고생과, 그 고통보다 더 컸던 기다림의 고통이 단번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2000년 9월 1일, 7교시 수업을 듣고 바로 가방을 싼 뒤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2차 심사 준비를 해야 하니까. 2년 전의 기적이 재현됐으니 난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9월 2일, 오전 6시에 출발하는 서울 행 고속버스를 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97, 98년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2차 심사가 대학교가 아닌 ICC 본관에서 열렸다. 건물은 새로 지어져 있었고 무척 깔끔했다. 1년 반쯤 전에 여기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넓은 홀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었다. 몇몇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 20분이 되어서 나는 대기실로 들어가서 진행위원의 지시를 들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몇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나는 심사받는 15명 중 가장 먼저 심사받는 조에 걸렸다. 수험표를 받고 심사장으로 들어갔다. 카이스트, 고려대 교수를 비롯한 다섯 명의 교수들이 컴퓨터를 빙 둘러싼 가운데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 떨리긴 했지만, 난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진지하게 프로그램 소개를 했다.

교수들이 주로 질문한 내용은 두벌식 자판에 대한 내 입력기의 호환성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입력기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한글 기계화는 세벌식으로 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을 이었다.
곧이어 심사 위원들은 이 프로그램을 무슨 언어로 짰는지 묻고, 여기에 대한 지식을 언제부터 쌓아 왔는지 물었다. 난 물론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10분짜리 심사가 끝나고 나는 귀가하게 됐다. 그동안 조금도 떨지 않았고, 심사위원과 아주 평범하게, 부담없이 얘기를 나눴다. 시간이 내가 느낀 것보다 훨씬 빨리 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00년 9월 4일
아침 조회가 끝난 직후에 부랴부랴 ICC 홈페이지에 접속해 봤지만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4층으로 올라가자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대상을 받았다고 전해 주셨다. 날 보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용묵아, 축하한다. 대상이더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컴퓨터실에 가 있던 사이에 선생님께서 먼저 교실에다 소식을 전하신 모양이었다. 급우들도 나를 보자 곧바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이제 카이스트에 그냥 갈 수 있냐고 다그쳐 물었다.

-- 이 날은 네게 기념일이 될지니 네가 이 날을 평생 명절로 지키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영원토록 명절로 지킬지니라.
-- 보라, 김 용묵의 남은 행적 곧 그가 코딩을 하고 정올에서 입상한 과정은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느니라.

당시 17회 대회 때 고등부에서는 총 92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 중 15편이 2차 심사 대상자가 되었다.
참고로, 대회 결과가 발표된 지 얼마 안 되어 ICC 홈페이지엔 이런 글도 올라와 있었다.

"공모는 대리 출품이 가능하다."라는 잘못된 인식;;

17회 공모 면접을 보신 분들은 2~3명만 빼고는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_- 면접실을 나갔습니다.
다들..진이 빠진 상태에서;; 심사위원님들의.. 해박함에 질려서;;
또.. 몇 개월 동안 밤샘해서 만든 자기 프로그램이..심위분들 앞에서 일순간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한;; 황당함;; 때문에 말이죠.

아는;; 수상자님께서;; 면접 끝나고 나서;; 대기실에 있는 제게 오시더니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심위님들은.. 모든 걸 알고 있죠..--; 무슨 얘기냐 하면
어설프게 다른 프로그램 베끼거나..대리 개발해서 출품한 작품은
3분 내에 뽀록납니다.
작품과 관련된 배경 이론들을 모조리 물어보시며.. 우선.. 나쁘게 말해서-_- 작품을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어떻게든 출품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최고 미션인 듯;;하더군요-_-
심지어는.. 열심히 작품 설명하고있는데.. 딴 데 쳐다보시고..
심위님들끼리 딴 얘기 하시고..--; 중간에 말 끊고;; 이건 기본이구,

저는 맨 마지막쯤에..면접을 봐서리, 또 설치 중에 문제가 많아서 다른 분들 면접하시는 걸 거의 다 봤는데요..
거의 모든 분들 면접할때..심위님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래서 되는 게 뭔데? 빨리 보여 달라니깐.."
"그럼 그게 뭐야? 이미 있는 거잖아? 좋을 게 뭔데?"
"뭐야? 아무 필요 없는 건데?"
"다 하는 거네.."
이런..--;성격의 것들이죠;

심위님들 앞에서 절대 거짓말 못 합니다.-_-
모르는 것 아는 체 못 하구요-_- 대리 개발작..바로 뽀록납니다..


본인은 심사 받으면서 저런 일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2~3명 중의 하나였군), 아주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내 프로그램 소개를 하고 질문에 답변도 하고 왔다. 또한 조원들 중에 가장 먼저 심사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심사 장면은 보지도 못했다. 가히 best 케이스...;;
솔직히 말해서 내 프로그램은 대리 개발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대회 결과가 나오긴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카이스트는 다른 대학보다 전형을 굉장히 일찍 하기 때문에, 본인은 이 대회의 결과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원서를 '일반 지원자'로 제출해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카이스트는 추후에 발표된 이 대회 결과를 받아들였고, '일반 지원자'이던 본인의 등급을 '지정 대회 우수 입상자'로 업그레이드해 줬다. (지금은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이미 옛날에 없어졌음. ㄲㄲ)
나중에 카이스트에서 본인의 고등학교로 1차 서류 전형 합격자 명단을 팩스로 보내 줬는데, 그때 본인의 이름은 인쇄체가 아니라 맨 끝에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2, 3, 4를 거쳐서 10년이 지난 지금은.. 5.65까지 버전이 올라갔다. 5.65 버전이 일종의 개발 10주년 기념작이다. 소스 코드 줄 수는 10년 전에 비해서 5배가 넘게 불어났고, 기술 수준은 당연히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학부 시절엔 이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된 연구만으로 5학점을 먹었다. 3학점짜리 학부 졸업 논문과 1학점짜리 개별 연구 두 건(TSF 모듈 개발, 그리고 3.0 아키텍처 연구). 이제 대학원에 가서도 써먹을 예정이다. 왜냐 하면 학부 졸업 후에도 또 논문 쓸 만치 연구 실적은 추가로 쌓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날개셋> 말고도 전산 기술을 접목시킨 다른 한글 관련 연구 주제도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프로그램 개발하면서 나름대로 아래와 같은 손발리 오그라들 것 같은 말도 들었다. 앞으로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버전 6.0을 향하여 "cheers!"를 외쳐 본다.

-- 그 프로그램은 "날개셋 한글입력기 3.02" 이다. 세벌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준것이 바로 이 위대한 발명품(나는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이다.
정말 단순히 손목이 부담이 없고, 속도나 좀 더 빠르게 나올수 있다는 정도라면 나는 결코 세벌식 자판과 이 프로그램을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

-- 그냥 쓸 때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날개셋을 써 보면 왜 세벌식 최종이 좋은 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무궁무진한 응용을 할 수 있죠..  “한글이 컴퓨터와 이리도 잘 어울리다니”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

-- 용묵님은 우리나라 역사에 꼭 남을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문화사에는요.

-- 저는 이미 용묵씨의 <날개셋>은 영원한 한민족의 유산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올 발전을 생각하면 가슴마저 뻐근할 정도의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 이 프로그램은 프리웨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 10年前、高校生がこれだけ高度なIMEを??で開?するなんて、さすがはIT先進?の韓?。
10년 전에 고등학생이 이만큼 고급 IME를 독학으로 개발하다니, 과연 한국은 IT 선진국이다. (일본인 중에 내 프로그램 사용자)


 

Posted by 사무엘

2010/09/03 08:30 2010/09/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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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역에서 느껴지는 애환

* 카테고리를 뭘로 잡아야 할지 난감한 글이다. 철도 얘기, 성경 얘기, 별별 얘기가 다 들어가서... -_-

※ 철도 얘기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서쪽 종점은 잘 알다시피 방화 역이다. 그러나 서쪽 종점이라고 해서 이 역이 5호선 역 전체를 통틀어 서울 최서단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5호선 최서단 역은 김포공항 역이며, 그 후로 5호선은 선형이 다시 살짝 동쪽으로 바뀐다. 김포 공항을 경유하기 위해 굴곡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6호선의 최서단 역은 월드컵경기장 역이다. 서울 2기 지하철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월드컵 경기장을 강서구 마곡 지구에 만들지, 은평구 상암동에 만들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결국 후자로 결정되면서 6호선의 노선에도 그쪽으로 급히 굴곡이 추가된 것이다. 이 때문에 건설업자들이 고생을 좀 했다고 들었다. (덧붙이자면, 당시 조 순 서울 시장의 지시로 마곡 지구의 개발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5호선 마곡 역도 10년이 넘게 미개통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방화 역은 시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종착역답게, 그 인근은 좁은 4차선 도로이고 한가한 베드타운이다. 동쪽 종점인 상일동이나 마천도 비슷한 분위기이다. 본인은 2008년 6월 말, 마곡 역이 거의 12년만에 정식 개통하기로 한 바로 전날, 방화 행 막차를 타고 거기까지 간 후, 근처 PC방에서 외박을 했다. 그리고 새벽 5시 반에 하행 첫 차를 타고 5시 38분경, 갓 개통한 마곡 역의 승강장에 지하철 회사 관계자가 아닌 사람 중에서는 최초로 발을 디뎠다!

이건 완전, 달에 최초로 도착한 아폴로 11호 조종사 같았고, 또 주의 첫 날에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는 심정이었다(막 16:1). 본인은 예수님의 부활은 눈으로 못 봤지만 마곡 역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증인이다. 본인처럼 마곡 역 답사하러 인천에서 미리 찾아와 기다렸다는 어느 철도 덕후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날, 본인도 어차피 혼자 간 게 아니었고, 같은 철도 동호인 후배 친구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본인에게 방화 역은 이런 오덕스러운 추억이 있다. 그런데 방화 역 인근에는 주거 구역만 있는 게 아니다. 국어학에 관심이 많고 동시에 KJV 빌리버이기도 한 본인에게 꽤 큰 의미를 지니는 기관이 두 곳이나 이 지역에 입주해 있다.
하나는 국립 국어원이고, 또 하나는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이다. ㅎㅎ

※ 철도 말고 나머지 얘기

다만, 관심 분야가 유사할 뿐이지, 두 곳 모두 본인이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적은 없는 곳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가령, 한글 학회와 국립 국어원은 민간 단체와 정부 기관이라는 차이도 있거니와 정체성도 완전히 다르고, 서로 원수지간까지는 아니어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파헤치자면 서울대 이 희승 라인과 연세대 최 현배 라인까지 길고 긴 흑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이 글에서 다 다루지는 않겠다. 뭐, 요즘은 어차피 옛날 같은 그런 파벌 싸움 자체가 별로 무의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국립 국어원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비판을 한글 학회에다가 하는 사람의 글을 예전에 좀 보곤 했다. 이건 지하철로 비유하자면, 코레일 관할 역 내지 코레일 소속 전동차에서 생긴 불만 사항 민원을 서울 메트로에다가 넣는 것과 같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말글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 체육 관광부 소속 정부 기관이 방화동에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그리고 또 말보회도 아주 유명하다. 있는 위치가 하도 상징성이 크다 보니, 우리 진영에서 설교 같은 공식 석상에서 가끔 말보회를 완곡하게 언급할 때 ‘방화동 교회’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아는 게 아니라 어설프게 들어 본 사람의 머리에는 “KJV = 말보회 = 이 송오 = 피터 럭크만 = 이단”이라는 다중 거부 장치가 겹겹이 설치되어 있다. 이걸 두고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바른 성경에 대한 관념이 없고 성경의 보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삐뚤어진 신앙도 잘못됐지만,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사랑으로 전하지 않고 무례하게 깽판 부리면서 간증을 다 망친 진영도 잘못한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남 탓할 자격이 없는 게... KJV를 처음부터 말보회 진영을 통해서 받아들였다면, 난 과격 면에서는 아마 이 송오 목사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의 전투종족이 되지 않았을지? ㅋㅋㅋㅋ 럭크만 정도의 성경 실력은 없는 주제에 그 사람의 성깔만 Ctrl+C, Ctrl+V가 돼서.. 성경을 무기로 삼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단들 욕하고 까는 글 기고하면서 말이다.
그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오버하느라 기성 교회 사람들 마음을 아주 닫아 버리게 만든 건 분명 잘못이다. 오죽했으면 “말썽 보존 학회”로 전락을.. -_-

“처음에 한국에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더라.”(1절) “And 한국 교회는 교리의 혼돈과 공허로 가득한데, 정작 KJV 교계는 여러 파벌들로 갈라져 있으며 기성 교회들로부터 이단으로 찍혔더라.”(2절)
이게 한국 KJV 교회 역사의 간극 이론이 아닌가 싶다. 그 간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절을 1절 이후의 시간 순으로 해석하면 간극 이론이고, 2절을 1절이 일어나던 당시의 배경 상황 내지 부연 설명으로 풀이하면 간극을 배제한 해석이 되는 셈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기발하다 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0/09/02 09:10 2010/09/0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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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와 더불어 본인에게 21세기 이전에 기차 타고 방문한 추억이 있는 곳은 바로 수원이다. 고등학교 시절, 인텔 ISEF 참가 준비와 교육 때문에 한동안(1999년 3월~4월).. 무려 주말마다 성균관 대학교 수원 캠퍼스를 찾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사를 치르느라 그 옛날에 휴대전화까지 잠깐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구미와 삼성 하니까 둘 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업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네? 뭐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인 것 같고.

저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나고 값진 경험인데, 내가 그때는 지리와 교통 쪽 감각이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여서 당시에 대한 기록과 기억이 전혀에 가깝게 없다. ㅠ.ㅠ 새마을호나 무궁화호 같은 관념도 없어서 어떤 열차는 좀 으리으리하고 고급스러운데, 어떤 열차는 좌석도 작고 입석 승객까지 있어서 혼잡하다는 식의 인식만 있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집에 돌아갈 때 기차를 잘못 타서 삽질한 적도 있었다.

수원 역에서 성균관대 역까지는 전철로 금방이다. 출구로 나가면 곧바로 야구 연습장이 보였고, 언덕을 내려서 조금 걸어가면 성균관 대학교 이공계 대학 캠퍼스가 나왔다. 당시 지도 교수는 워낙 유명한 분이니 실명을 거론하겠다. 황 대준 교수님의 멀티미디어 연구실에 있었다. 그러면서 거기 랩에 있던 대학원생 형들과도 부대꼈고, 아마 이분들이 지내는 기숙사 내지 대학원생 아파트 구경도 했던 것 같다. 난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서 이제야 대학원으로 고고씽이구나. ㅠ.ㅠ

그때가 본인 역시 이제 막 도스+C에서 벗어나 윈도우 API+MFC를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때의 대회 준비 경험은 본인의 실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단편적인 프로그래밍 지식뿐만이 아니라 영어 프레젠테이션, 대인 관계, 대학과 대학원의 분위기 같은 것들도.
내가 조금만 더 세상 보는 식견이 넓었으면 그때 마주쳤던 분들에게 훨씬 더 예쁘게-_- 보이고, 그분들에게서 더 많은 걸 배워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학 시절 한때는, 밤에 자다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 ISEF에 다시 나가는 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건 아주 한국적인 소재인 데다, 고3 때 입상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본인이 ISEF 첫 출전 티켓을 딴 것도, 전적으로 당시 본인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든 학생은 이듬해에 대학에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아직 인지도가 부족한 관계로 ISEF 참가 경험은 IOI(국제 정보 올림피아드) 참가와는 달리 입시에서 뭔가 가산점으로 인정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게 본인에게는 역설적으로 기회로 작용했다. ISEF에 갔다 온 후에도 아예 고3 때 과거 ISEF 작품과는 관계가 없는 작품을 하나 또 만들어서 그건 아예 대상을 받아 버렸기 때문이다. 정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지? (경시부였다면 불가능한 일. IOI 참가자는 이제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KOI에 또 응시할 수 없다.)

첫 참가자인 본인 이후로 ISEF 참가자 교육은 카이스트에서 이뤄지고 있는 걸로 본인은 알고 있다. 그리고 혼자만 가는 게 아니라 최하 두 팀이 가는데, 동 대회에 출전하는 ISEF 참가자들끼리는 서로 그렇게 자주 교류한다거나 친한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후배에게서 들은 증언) 차라리 서로 다른 기수의 대회에 참가한 선후배끼리가 친해진다나?

정보 올림피아드와 관련하여 본인이 방문한 적이 있는 대학으로는 성균관대 말고도 KOI 경시부가 당시 치러졌던 서울대, 그리고 공모부 2차 심사가 열렸던 중앙대(1997)와 숭실대(1998)가 있다. 경시부의 경우, 지방에서 온 애들은 대회 전날의 예비 소집에 참석한 후 무려 학교 근처의 여관에서 자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행사들이 대학에서 개최되지 않고 백범 기념관이라든가 정보화 진흥원 본관에서 개최되는 걸로 안다. 기관 이름도 처음엔 정보 문화 센터(ICC)이다가 정보 문화 진흥원(KADO)을 거쳐 지금은 정보화 진흥원(NIA)으로 참 자주 바뀌었다.
옛날에는 역대 수상자를 조회하면서 공모부의 경우 작품명까지 볼 수 있었는데 그건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모양이다.

어쨌든 결론은!
본인의 인생에서 정올과 관련된 옛 추억에도 철도가 조금이나마 끼여 있다. 그걸 이제 와서 추적하려고 하니까 쉽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2 09:01 2010/08/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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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에는 경북 외국어 고등학교가 있다.
포항에 있는 본인의 모교인 경북 과학 고등학교도 1993년에 개교했으니 본인이 중· 고등학생 나이이던 당시에는 꽤 최근에 생긴 학교이긴 했으나, 외고는 더욱 나중에 생긴 학교였다.

경북 외고는 1995년에 설립 인가가 나고 1996년 개교로 알고 있고 있는데, 그땐 아직 기숙사나 강당 같은 건물조차 다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 홈페이지엔 연혁이 안 나와 있다. -_-)
1996년 개교이면 민족사관 고등학교와 생년이 동일하다. 1995년 중학교 <방학책>(초등학교의 탐구생활에 해당하는 책자?)의 뒷표지 광고에 민족사관 고등학교 1회 입학생 요강이 적혀 있던 걸 기억한다. 물론 살인적으로 까다로운 전형 절차와 우수한 성적, 요구 조건으로 말이다. 내신에 심층 면접에, 나중엔 체력장까지... 흠좀무.

어쨌든 본인은 경북 외고가 그 민사고와 동급으로 그렇게 역사가 짧은 파릇파릇한 학교인지는 그 당시에 잘 몰랐다. 하도 특목고, 특목고 하니까 내가 사는 경북에도 그런 외국어고가 으레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가 상대적으로 강하고, 비록 전교 열 손가락 안의 순위까지는 아니어도 평소실력(?)만으로 나름 상위권이고...
머리는 나쁘지 않-_-은 거 같은데 그닥 노력파 성실형은 아니고 자꾸 컴퓨터로 쓸데없는 짓만 하던 본인에게, 당시 중학교 선생님들의 진로 조언은 불 보듯 뻔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공부 열심히 하고 내신 튜닝-_- 해서 외고 가라”였다.
백 번 수긍한다. 내가 선생이어도 본인 같은 학생에겐 그렇게 조언했을 것이다. 뭐 나중엔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 덕분에 과학고로 당첨됐지만-_- 말이다.

그러던 차에 본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사실상??)으로 경북 외고와 인연을 맺은 일이 있었다. 바로 1997년 가을, 본인이 중3이던 시절에 거기서 자기네 학교 홍보를 목적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제 1회 외국어 경시대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외국어 경시대회라고 해 봤자 사실상 영어 필기시험이었다.
이 대회의 입상자는 외고에 지원할 때 가산점을 준다는 단서도 당연히 붙었다. 그래서 본인은 그 대회에 우리 중학교에서는 혼자서 참가했다. 덕분에 대회 당일 수업은 공결로 째고, 경북 외고로 고고씽.

깔끔한 붉은 벽돌 건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때는 이미 이런 특목고에 진학해 있는 외고 재학생들이 가히 하늘처럼 높게 보일 뿐이었다. 시험 치는 느낌이 어땠는지는 13년이나 지난 지금 기억이 날 리가 없고, 어쨌든 그때 본인은 장려상 하나 겨우 건져 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게 있다.
그때 본인은 동행하는 인솔 교사가 없이 혼자 기차 타고 타지에 있는 학교에 찾아가서는 시험 치고 돌아왔다! 경북 외고는 구미 역에서 900m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타지에서 방문할 때는 철도가 딱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면 본인은 지리 하나도 모르고, 혼자서 기차 탈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시험 치고 나서는 확실하게 혼자였다는 게 기억난다. 담임 선생님에게 경과 보고를 공중전화로 하고, 귀가도 다시 기차 타고 스스로 해냈다. 그때 지금처럼 일기를 써 놨으면 그 당시 철도가 어땠는지 더할 수 없이 귀중한 기록이 되었을 텐데!

사실 경북 과학고도 포항 역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남짓한 가까운 거리이다. 포항에 지하철이 있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지만, 뭐 1.5km 남짓한 거리니까... 본인은 그것도 까맣게 모르고서 고등학교 시절 3년간을 철도는 전혀 이용하지 않고, 더 멀고 비싼 시외버스만으로 경주와 포항을 왕래했다. 그 정도로 지리에 문외한이었는데 그때 구미 여행은 어떻게 해냈을까?

그때 이후로 본인은 구미를 다시 찾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에 ‘경북 외고는 구미 역에서 무척 가깝다’는 기억 하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제 본인이 글을 쓰는 전형적인 방식인, 관련 잡설들을 옴니버스 형태로 나열하는 걸로 글을 맺겠다.

1. 경북 과학고와 외고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를 제외한 본인의 모교들은 전반적으로 역사가 짧은 편이었다. 계림 중학교는 1986년 개교로, 이는 포항 공대의 생년과 카이스트의 학부 개설 연도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다만, 본인은 이제 대학원은 역사가 무진장 긴 학교로 가게 된다. ^^;;

2. 그러고 보니 정보 올림피아드 경시 부문의 전신이던 PC 경진대회의 경북 지역 예선은 포항도, 구미도 아닌 안동에서 늘 개최되어 왔다. 안동은 경북 내륙의 중심지이지만 당시 고속도로 하나 없는 교통 불편한 곳이다 보니, 인솔 선생님이 꼬불꼬불한 국도로 차를 몰면서 대회장까지 학생들을 태워다 주었다.

3. 본인에게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을 한 적이 있고 당시 같은 영어 사교육-_- 학원에서도 각종 대회에서 본인과 1, 2등을 다투는 라이벌 사이이던 여자 동창이 있다. 예쁘고 못 하는 게 없는 모범생 엄친딸이었는데, 이 친구는 결국 경북 외고에 진학했다. 저 외국어 경시대회에 참가를 안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때 현장에서 걜 만나지는 못했다. (어머니께 고증을 의뢰하니, 어머니 왈, 걔도 그 대회에 응당 참가했고 역시 장려상 받았다고 한다)
본인은 뭐 과학고에 합격했으니, 중학교를 마칠 무렵 서로 축하 전화를 주고받았다. 본인의 어머니와 그 친구 어머니께서 서로 아는 사이여서 말이지..;;;

4. 하지만 과학고도 가 보니, 당시 외국어 경시대회에 참가했던 친구가 그래도 딱 한 명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때 외고에서는 모든 대회 참가자에게 학교 마크가 인쇄된 공책을 사은품으로 줬는데, 본인과 그 친구가 서로 그 공책을 갖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5. 하긴, 내 기억이 맞다면, 본인이 중학교에 갓 들어간 시절인 199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의 언어 관련 교육 제도에 좀 변화가 생겼다. 논술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논술 경시대회라는 게 생긴 게 그때이다. EBS에서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영어 듣기 평가를 시행해서 그 점수 20점이 중간· 기말고사의 영어 점수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 또한 나름 영어 말하기(혼자 웅변이 아니라 연극) 대회도 그때 생겼다.

세월이 흘러 어느 지식인 검색을 보니, 영어 말하기 대회 때 써먹겠다면서 개그 만화 일화 3기 3화 쇼토쿠 태자 대사를 좀 영작해 달라는 요청을 본 기억이 난다. Inside the pillow is full of tuna (베게의 속에는 참치가 가득) ㅋㅋㅋㅋㅋㅋ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1 08:49 2010/08/11 08:49

나의 운영체제 사용 내력

구경이란 해당 운영체제가 설치된 다른 컴퓨터를 본인의 눈으로 처음으로 직접 보고 잠시나마 다룰 기회가 있었던 때를 말한다.

※ 윈도우 95
출시: 1995년 중반
구경: 1996년 초. 당시 정말 전율이었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1996년 말. 컴퓨터를 한번 업그레이드 하면서.

※ 윈도우 98
출시: 1998년 중반. 윈도우 95+IE4일 뿐이라는 비아냥거림 잔뜩.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개선되고 나아진 게 엄청 많음
구경: 1999년 초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0년 후반. 구닥다리 노트북이 장수한 덕분에 95를 굉장히 오래 사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윈도우 95 환경에서 개발됐다.

※ 윈도우 2000
출시: 2000년 초
구경: 2000년 후반. layered 윈도우 + 마우스 포인터 주변의 그림자가 무척 신기했다.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2년 중반. NT 계열로 갈아타는 데 은근히 오래 걸렸음

※ 윈도우 XP
출시: 2001년 말
구경: 2001년 말. 대학 내의 얼리 어답터 덕분에 꽤 일찍 구경. Luna 화면은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2년 말. 램 256MB로는 돌리기 좀 무겁다는 걸 실감함.

※ 윈도우 비스타
출시: 2006년 말~2007년 초
구경: 2007년 초. 세벌식 파워업 패치 만드느라 어둠의 경로로 구했음. Aero는 역시 충격과 공포였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7년 후반, 새 데스크톱 컴퓨터를 장만하면서

※ 윈도우 7
출시: 2009년 중반
구경: 2009년 중반. 윈도우 7은 정식 출시 전부터도 구해다 쓰는 용자들이 워낙 많아서 구경하기 매우 쉬웠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Not yet! 회사 컴, 집의 데스크톱과 노트북이 전부 여전히 비스타임.

새로운 윈도우 운영체제가 출시되면 본인이 그걸 실제로 내 컴퓨터에서 쓰게 되기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이 넘는 간극이 있어 왔다. 과연 난 7은 언제쯤 써 보게 될까?
하지만 PC 성능의 상향 평준화, 그리고 운영체제의 안정성 증가(운영체제를 재설치할 일이 별로..-_-), 불법 복제 방지용 인증 같은 요인들 때문에 당분간 내 PC가 운영체제를 갈아탈 날은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09 08:48 2010/08/0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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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클럽과의 인연

2005년 초의 일이다. 그때 본인은 인터넷 상으로 짜증나는 소식을 하나 접했다.
고려 대학교의 한 모 교수(정확히는 이미 명예 교수 랭킹인)가 일본의 무슨 출판물에다가 “일제 식민 통치는 조선에게 축복”이었다고 기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치고 상식적으로 이 한 줄만 딱 접하고서 열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이 사람을 옹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등장했다. 본인도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친일파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평균적인 국민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지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패거리들이 또 고루고루 나서서 ㅈㄹ을 하는군.. 이번엔 대체 누구야?’ 정도의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2005년에는 연초부터 일명 ‘박 정희 배틀’이 벌어졌다.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도 개봉해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여차여차 하다 보니 관람하게 됐고, <만화 박정희>라는 책도 나왔다. 박 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써 놓은 광화문 현판을 철거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글 진영 내부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다 비슷한 시기이다! 이게 다 우연일까?

게다가 압권이었던 것은 CBS 방송국에서 벌어진 공개 토론. 바로 이를 계기로 본인 역시 지 만원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으며, 시스템 클럽이라는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공개 토론을 계기로 지 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미친 수꼴 개새끼로 확실하게 인증 받게 됐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회자조차 그다지 중립적인 위치에 안 서고 진 중권 씨와 한 패가 되어 지 박사를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보기 안 좋았다. (성공회대 교수라는데 성향 면에서 뭘 더 바라겠는가.)

도대체 지 만원이라는 사람은 어디서 갑툭튀한 사람인가? 당사자에게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솔직히 인상이 좀 얍실한 족제비-_- 같고 영화로 치면 주동 인물보다는 반동 인물, 진짜 친일파처럼 보이긴 했다. O<-<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스템 클럽 글을 읽고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외부로도 보도가 되어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골수 수꼴로 굳히는 데 일조한 글로는,

<민족, 외세만 아는 바퀴벌레들>: 공산주의, 좌익, 운동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감
<역대 대통령의 자질 추이>: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만 우왕ㅋ굳ㅋ이었고  그 후대 대통령들은 타락일로

이런 것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가 결코 아니며 그런 글들을 쓰는 것이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본인은 느낄 수 있었다. 김 완섭 같은 싸이코 부류가 절대 아니다! 일본 내지 친일파 후손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며, 군 복무도 월남전 참전까지 하면서 명예롭게 마쳤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해서 미 해군 대학원에서 응용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말마따나 자신만의 정리와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일평생을 자기 계발과 교양 수련에 투자하고 살았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정말 대쪽같은 분이다. 본인은 진 중권 씨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적으로 지 박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 중에, 저 정도로 대인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지 박사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시스템 공학자 내지 군사 평론가를 비롯해 자기 전문 분야의 프리랜서로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놈의 김 대중 정권 때부터 나라에서 하는 짓을 보니까 이 반역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본격적으로, 한 2002년부터 본업을 버리고 시사 논객으로 악역을 자처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혀 청렴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민주화 패거리 저질 정치인들이.. 능력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옛날 정치인의 도덕성(?)을 욕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 기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살짝 수구 극우 성향이고 시국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음모론스럽게 확대 해석하는 면모가 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허용할 만한 수준이다. 음모론이야 반대편 진영도 어차피 만들어 내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안함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등등등.. 지 박사의 주장이 선동조라면,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13구절이나 통째로 삭제되고 무려 6만 개의 단어가 변개됐다"는 주장도 충격적이고 선동조이긴 마찬가지이다.

고려대 교수의 문제의 발언도 “조선이 러시아에게 안 먹히고 일제에게 먹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요지였다. 그에 대해서 “차라리 러시아가 낫지 일제는 훨씬 더 막장이었다”라고 정당한 반론을 할지언정, 앞뒤 문맥 다 떼어내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조센징을 일제가 보살펴 준 건 축복이었다”고 말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람 매장하는 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않은가!

본인은 예전에 “그나마 숙군 작업부터 한 뒤에 6 25가 터진 건 천만다행이었다”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걸 마치 “김 용묵이라는 작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가 터진 게 잘 되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라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인 것이다. 난독증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본인은 지 박사의 행적에서 공 병우 박사의 정신을 새삼 느꼈다. 본업을 버리고 생뚱맞은 분야로 뛰어든 점,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점(공 박사는 남산으로, 지 박사는 광주로. -_-)이 말이다. 특히 지 박사가 5 18 사태에 대해서 야사를 캐고 자료 모으는 건, 공 박사 버전으로 치면 과거 글자판 제정 과정의 흑역사를 추적하는 수준과 맞먹는다.

물론 본인은 이 승만과 박 정희에 대한 견해 외에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그의 견해에 다 동감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잘 모르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의 자세를 높게 사고 존경할 뿐이다. 요즘 세상에 색깔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서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하지 않는 자가 바로 빨갱이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빨갱이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렇게 분명한 흑백논리 자체는 성경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다. 빨갱이 대신에 죄나 지옥 같은 개념을 집어넣어 봐라. (게다가 지 박사는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일제 강점기가 ‘러시아 강점기에 비해서’ 축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이 나라에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 주민 중에도 지 박사를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건 상식. 지금 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지 박사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티를 공개적으로 낸 것만으로도 본인을 싫어하게 되고 떠나고, 심지어 <날개셋> 사용마저 보이콧한 사람이 좀 있다. ^^;;; 지 만원 박사의 사상이 뭐가 그렇게도 악하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 얘기나 좀 들어 보고 싶지만, 그들은 그런 대화조차도 원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꽉 닫아 놓고 있을 것이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지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02 08:30 2010/07/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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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특 시절

본인은 올해로 예비군 2년차이고 전반기 향방 작계도 받았다. 이 달 말이면 군필자가 된 지 드디어 만 2년이 된다.
본인이 그럴 때 전투복 상의 안에 늘 즐겨 입는 옷은 병특 회사에서 받은 체육 대회 참가용 티셔츠(물론 회사 로고가 새겨진)이다. 이제 그 회사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 가끔 집안에서 입거나 아니면 이런 용도로나 쓴다.

향방 작계 가서 하는 건 동네 산책, 심폐 소생술, 8자 매듭 포박 정도뿐이다. 이번에 가니까, 전투모는 아예 따로 제출했다가 퇴소 때 돌려받는 시스템이 추가되어 있었다. 전투모는 무조건 지참해야 하는 예비군 복장이면서 정작 훈련 때는 전혀 쓰이지 않는 정말 아이러니한 물건이다. ^^;;; (훈련 중엔 거기서 지급하는 헬멧? 철모? 화이바만 쓰므로)

우리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라는 산을 넘고 나니까, 그 전과 후에 인생을 보는 느낌이 확 달라져 보인다. 정말 대학 입시에 이은 제 2의 큰 관문이 맞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까 슬슬 털어 놓는 얘기이다. 뭐, 내막을 이미 아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본인은 윈도우용 온라인 게임 개발 회사 두 곳을 거치면서 병특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했다.
전직을 한 번 했다는 얘기인데, 의무 근무 기간인 1년만 딱 채우고 나서 대우가 더 나은 곳으로 냅다 튄 게 아니라, 순수하게 회사가 망해서 전직한 것이었다. 그래도 첫 직장은 내게 생명 같은 병특 TO를 준 곳인데 내가 무슨 달다 쓰다 말을 할 자격이 있으리요?

그 회사에서 만든 게임은, 비록 아주 유명한 대박은 아니지만 매니아 계층들로부터는 아주 사랑 받던 게임이었다. 망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다시 하고 싶다고 그리워하는 사용자의 블로그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나중에 간 곳은 회사 자체는 아주 튼튼하고 유능한 게임 개발자들이 꼭 가고 싶어하는 곳이었다. 벤처 기업으로 시작했으나 이제 큰 건물의 여러 층을 차지하고 어느 정도 중견 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규모였다. 송년회나 체육 대회도, 꾀죄죄한 작은 회사 다닐 때는 경험할 수 없는 으리으리한 스케일로 치렀었다.
게다가 이 직장은 본인이 지금까지 서울에서 다닌 직장 중 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지라, 마음만 먹으면 자전거 출퇴근조차 가능한 곳이었다.

여러 모로 좋았으나... 내가 근본적으로 게이머나 게임 개발 적성이 전혀 아니니 그곳 역시 본인의 생업이 될 수는 없는 분야였다. 게다가 거기는, 회사 자체야 건재하지만 내가 소속되어 있던 스튜디오가 내가 병특이 끝난 후 2년이 채 안 지나서 망했다. 프로젝트가 접혔다.

사실 내가 입사하던 당시부터도 그 스튜디오는 이미 만들어 놨던 게임을 고치고 또 고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출시가 꽤 심하게 지연된 상태였다. 그 후에 행해진 작업은 온라인 게임을 전혀 안 하는 내가 보기에도 시스템을 WOW와 굉장히 비슷하게 고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서비스도 못 해 보고 경영진으로부터 돈과 시간 먹는 하마라고 낙인 찍힌 채, 더는 돈과 시간을 못 주겠다고 접게 된 것이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수십억 원대의 자금이 투입된 프로젝트가 말이다.

첫 직장에서 만들던 게임은 Direct3D SDK만 갖고서 밑바닥에서 완전 쌩으로 모든 걸 만들어 놓고 있었다. 후덜덜..;;
다음 직장의 게임은 게임브리오 기반이었다. 나름 상업용 게임들이 비주얼 C++을 써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개발 중이던 게임을 테스트한답시고 바닷가, 숲 속, 중세 도시, 창공, 던젼 등 여러 맵들을 돌아다니면서 마치 여기가 내 집인 것 같은 아늑함(?)을 경험하기도 했었는데... 모든 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

어지간한 게임 개발 회사에서는 남이 짜 놓은 코드를 고치고 덧대는 잔업이나 한다.
자기가 진지하게 따로 시간을 투자하여 코드를 공부하지 않는 한 3D 그래픽 이론이라든가 게임 엔진 구현 원리 같은 근본 테크닉을 배울 기회는 없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 직장에서 괜히 당신에게 돈까지 주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회사들을 거치면서 내가 만난 '직속 상사'들의 컴퓨터 실력은 제각기 정말 대단했다. 그들 역시 대학 졸업 후 처음엔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서 그 바닥에 최소한 10년이 넘게 구르다가 관리자의 자리에 오른 사례일 것이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저 길이 내게 맞는 적성이라 할 수 있을까?

미래에 나의 소속이 또 바뀌면 지금 다니던 직장에 대한 추억도 블로그에 언젠가 올라올 것이다.
그나저나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직장인에게 일정 예측이란 분야를 막론하고 정말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스트레스로 남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1 08:42 2010/06/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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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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