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4 : 5 : 6 : 7 : 8 : 9 : 10 : Next »

철도 인명 사고에 대한 생각

지난 3월 12일에 본인은 출근길에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며 월요일 하루를 시작했다.
딱 정확하게 본인이 타려는 지하철이 앞 역에서 웬 인명 사고가 발생해서 열차 운행이 한동안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스크린도어까지 버젓이 있는데 웬 인명 사고가 난단 말인가? 이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지하철 지연 증명서(난 뭐 지연이라기보다는 열차 탑승을 애초에 포기한 경우이지만)라는 걸 구경했다.

그런데 사고의 사망자는 놀랍게도 일반 승객이 아니라 지하철 회사의 직원이고, 역무원도 아닌 기관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선로로 접근이 가능한 내부 직원이 마음먹고 자살을 하려 든다면, 제아무리 스크린도어가 갖춰져 있어도 애시당초 소용이 없을 것이다.

철도 공기업에서 승무직으로 일할 정도이면 연봉 빵빵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정년도 보장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아주 부러운 지위에 속하는 사람이다. 군대로 치면 제일 중요한 전투 병과요, 게임 개발로 치면 딱 프로그래머에 해당하지 않는가. 최소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자살할 이유는 없다.

하긴 2004년, 본인이 아직 대학 재학 중이던 시절엔 대구 과학고의 1회 졸업생이고 카이스트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어떤 사람이 대구 지하철 기관사로 취직한 게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 관련 기사 클릭 )

그땐 카이스트라는 스펙에 비해 저학벌(?) 직업을 선택한 이례적인 사례로 그 사람이 소개되었지만, 저게 과연 그렇게 만만한 직업일까? 요즘은 SKY급 대학 나오고도 공기업, 공무원엔 말단으로라도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텐데. 이런 트렌드와는 무관하게 나도 2007년에 서울 도시철도 공사에서 공채를 하던 시절에 원서를 넣긴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철도 차량 운전 면허가 없으니 승무직은 못 하더라도 다른 부서로라도 말이다. 그때 난 병특 중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지원을 할 수가 없어서 못 했을 뿐이다.

다만, 지하철 기관사의 근무 여건은 그리 좋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근무 시간이 불규칙적이고 교대를 돌면서 주기적으로 주말을 반납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 사람에겐 큰 마이너스) 아니, 승무직은 입사 지원할 때부터 주말 교대 근무에 동의한다는 각서를 제출한다. 비록 버스 기사처럼 교통 체증과 복잡한 도로, 매연, 차멀미로 인한 데미지는 없어서 좋지만, 몇 시간째 햇빛을 못 보면서 어두컴컴한 터널만 돌아다니는 것도 정서에 좋을 리가 없다. 자세한 건 예전 글을 참고할 것.

그래서 본인은 기관사가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할 정도이면, 근무 환경에 적응을 못 해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사내에서 왕따이거나 대인 관계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고에 대한 후속 뉴스 보도를 보니 내 추측이 얼추 맞는 것 같다.

특히 도철은 1인 승무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지하철 회사이기 때문에 그 점이 노조로부터 두고두고 까여 왔으며, 이번 기관사 자살 사건을 계기로 그게 또 부각되었다. 하지만 차량 상주 승무원 수의 최소화는 철도 기술의 엄연한 트렌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본적인 까임거리가 될 수는 없을 듯. 도철은 1990년대 중반에 1인 승무로도 모자라서 아예 무인 운전까지 시도한 적이 있는 과감한 회사이긴 하다만 말이다. (운전실이 없는 완전 무인 운전인 신분당선 전동차에도 승객들과 부대끼는 진짜 승무원이 객실에 한 명 있긴 함.)

난 우리나라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를 보면 무척 놀라움을 느낀다. 오죽했으면 국가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2009~2010년을 전후하여 서울 지하철의 거의 모든 역들에다 스크린도어를 도배해 버렸을까? 수백 개에 달하는 그 많은 지하철역들에다 스크린도어를 이렇게 단기간에다 모두 설치한 나라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거의 기네스북 감이 아닐까?

그만치 지하철 자살 러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다. 뉴스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당장 본인이 이용하는 집 근처의 지하철역에서만 해도 최소한 3명이 각각 2004년, 2007년, 2008년에 선로 투신으로 목숨을 끊은 적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나마 스크린도어가 설치되면서 2008년 기록이 마지막이 된 것이다.

지난 2010년 8월 23일, 분당선 태평 역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에도 본인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건 사람이 죽지는 않아서 큰 사고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사람 만날 일이 있어서 분당에서 학교로 가는 길이었는데 열차 지연으로 인한 불편을 겪었다. 분당선에서 태평과 야탑 역은 2012년 3월 현재까지도 아직 스크린도어가 없다. 다만, 공사 중이긴 하다.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남이 처한 상황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만..
저렇게 작정하고 자살하려는 사람을 치는 사고를 낸 기관사는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왜 그 정도까지 충격과 정신 공황을 겪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이 끔살 당하는 장면을 라이브로 본 것에 대한 정신적 데미지는 있겠지만,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의 생각엔 제발 안 빠졌으면 좋겠다. 이건 불의의 사고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자살하려는 사람이 죽은 것이다. 사형 집행관만큼이나 하나도,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가 없다. 일본처럼 죽은 사람 유족에게 민폐에 대한 책임으로 벌금을 때리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야 할 판.

그나저나 작년 12월엔 공항 철도에서 정말 어이없는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막차 운행이 아직 안 끝났는데도 끝난 줄 알고, 선로 보수 인부 여러 명이 선로로 들어갔다가 전동차에 치여 끔살 당한 것이다. 한밤중인 데다 요즘은 전동차가 기술이 좋아서 워낙 조용하게 달리기 때문에, 저런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기관사도 갑툭튀한 사람들 보고 간이 떨어질 정도로 얼마나 놀랐을까? 이건 승강장 자살도 아니고..! 텅 빈 막차를 몰고 저기까지만 가면 오늘 근무 끝이고 들어가서 잘 일만 남았을 텐데!

원래 그런 건 다 규정이 있다. 지하철의 경우, 심야에 업무를 위해 선로 내부로 들어가는 직원은 열차 운행 영업이 종료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차선(전깃줄)이 완전히 단전된 걸 확인하고 들어가야 한다. 사탄의 인형 처키는 건전지 없이도 움직였지만-_-, 현실의 전동차는 그렇지 않으니까. -_-;; 선로 보수· 청소 차량들은 애시당초 전기가 아닌 기름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내가 보기엔 저 사고는 일차적으로는 일종의 근무 기강 문제이다. 거기에다 또 선로 보수 인력이 외주 용역이다 보니 앞뒤 손발이 안 맞은 것일 수도 있겠고.

그랬는데, 고의적인 자살이 아니면서 사람이 여럿 죽는 사고가 나 버리는 바람에, 내 기억이 맞다면 애꿎은 전동차 기관사도 일단은 잡혀 들어갔다. 경적을 안 울리고 완벽한 수준의 안전 조치를 안 취했다고... 구속인가? 한국은 법을 적용하는데 동기나 과정보다 결과를 더 우선시하는 풍토가 있어서..;; 안타까운 일이다. 기관사의 입장에서는 저건 정말 운이 없어서 이런 신세로 전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루에 전철이 수송하는 승객 수가 얼마나 엄청나고 방대한지를 감안하면, 그에 비해 저 정도로 예외적인 급으로 발생하는 사고는 정말 극소수이고 새 발의 피도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철도는 정말 수송 효율이 좋고 안전한 교통수단이 맞다. 오늘도 수도권 시민들의 운송을 책임지는 지하철/전철 기관사님들 힘내시길.

Posted by 사무엘

2012/03/25 08:26 2012/03/25 08:26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659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첫 업데이트

평소에 운전을 하면서 차의 내비가 아주 가끔 오동작으로 의심되는 안내를 하는 걸 보고, 본인은 업데이트의 필요성을 이따금씩 느끼곤 했다.

예를 들어, 마포 대교를 건넌 후 내비가 시킨 대로 강변북로의 동쪽 방면으로 정상적으로 진입하는데도, 내비는 이 무렵에 늘 경로를 벗어났다는 경고음을 내고 경로를 또 수정하곤 했다. 2009~2010년 사이에 그쪽 일대에서 지리 데이터가 바뀌어야 할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작년 말이 돼서야 개통한 전철 경춘선도 내비에는 당연히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불편한 점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다행히 방법이 있었다. 어차피 보급품, 순정-_- 내비이니 내비의 제조사는 자동차 회사와 연계가 잘 되어 있었고, 간단한 회원 가입 후에 2011년 하반기 기준의 최신 내비 파일을 무료로 곧장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그 용량은 2GB가 약간 넘는 수준. 내비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도가 여기에 전부 들어있는 셈이다.

이걸 내비에다 주입하는 매체는 USB 메모리 또는 DVD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전송하면서 PC로 치면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하여 재설치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안정성을 위해 DVD는 최저 속도로 구울 것을 권하고 있었고, USB 메모리는 더 견고한 금속 접촉식으로 된 것을 쓰는 게 권장되고 있었다.

그 후, 차에 들어가서 USB 메모리를 꽂은 뒤, 시스템 메뉴에 들어가서 업데이트 명령을 내렸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완전히 처음이었으니 중간에 오류라도 나면 어쩌나, 아예 내비가 부팅이 안 되고 먹통이 되면 어쩌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으려나 걱정되기도 했다.

업데이트가 되고 있는 중에는 차 시동을 켜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당연히, 켜는 순간에 차에 전원 공급이 끊어지므로). 그러니 미리 시동을 걸어 놓고, 내비가 업데이트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밖에 나가서 주변 드라이브나 좀 하게 됐다. 이 경우, 내비의 기능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운전을 하는 것이므로 과속 단속 카메라를 스스로 각별히 조심해서 눈여겨봐야 한다. 또한 시동을 꺼뜨리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제약이 걸린다.

시간은 한 3, 40분쯤 걸렸으려나? USB 메모리는 access 때문에 불빛이 격렬하게 깜빡거렸다. 게이지가 너무 오랫동안 안 올라가고 있는 듯이 보일 때는 불안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업데이트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됐다.
내비는 드디어 경춘선과 신분당선 전철역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뜨는 최신 버전으로 바뀌었다. 야호!

그리고 음성 안내를 하는 아가씨 목소리의 억양이 살짝 바뀌었다.
강변 북로 오동작이 해결되었는지는 나중에 그 구간을 몰 일이 있을 때에나 확인 가능할 것 같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혼자서 할 여건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서비스센터에 가서 요청만 하면 직원이 내비 업데이트도 해 준다고는 하더라. 그도 그럴 것이 내장형 순정품이니까 말이다. 단, 이 경우 인건비로 돈이 2만원 남짓 깨진다.

업데이트 파일이 담겨 있는 USB 메모리를 살펴보니, 인스톨 프로그램은 PE 파일이었고, 대상 플랫폼은 윈도우 CE이다. target CPU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ARM Thumb이라는 아키텍처. 보아하니 32비트 RISC 체계하에서도 16비트 데이터 버스를 쓰는 임베디드 기기에 맞게 코드를 더 compact시켜서, 메모리를 더욱 절약해 낸 아키텍처 같다. (☞ 더 자세한 설명 클릭)

한편, 1GB가 넘는 다른 지도 데이터는 내부 구조를 전혀 알 수 없는 압축(또는 암호화)된 파일 형태임.

독립된 기기로서 내비의 위상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잘 모르겠다.
스마트폰이 이미 어지간한 품질의 사진과 동영상은 즉석에서 만들어 내니 기존 디카들은 훨씬 더 전문적인 화질을 만들어 내는 영역으로 이동했다.
그것처럼 스마트폰이 길 안내와 내비 역할까지 다하다 보니, 요즘은 내비도 이에 맞서 뭔가 개인용 종합 정보 처리 시스템처럼 바뀌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내비는 정말 다익스트라의 길 찾기 알고리즘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직선 거리뿐만이 아니라 시내 도로 상황, 상하 구배, 유료 및 자동차 전용 도로 여부, 지금 자동차의 진행 방향 등 온갖 변수들이 그래프의 weight에 감안되지 않았을까? ㅋ

Posted by 사무엘

2011/12/19 19:45 2011/12/19 19:45
, ,
Response
No Trackback , 5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615

침례 받던 시절

찬송가를 부르고 간단한 준비 운동을 한 뒤, 나는 침례를 받았다. 우선 허리까지 차는 깊이까지 바다로 들어갔다. 침례자는 내 얼굴을 수건으로 감싼 뒤, 나를 얼굴까지 바닷물 속으로 뒤로 제꼈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오호~ 이런 게 침례로구나. 정말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2002년 8월 11일자 본인의 일기 중에서)


본인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중· 고등학교 미지의 시기에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내 구주로 영접했다. 그 후 대학 시절에 킹 제임스 성경(KJV)을 접했다. 그 전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막연하게 그저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는 수밖에 없어서 불신자들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킹 제임스 성경은 단순히 읽는 성경뿐만이 아니라 세세한 교리 노선까지 바꿨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바르게 알게 된 교리 중 하나가 바로 침례이다.
침례는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후, 예수님의 죽으심과 매장· 부활에 내가 동참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이다. 신약 교회에서는 침례와 더불어 주의 만찬이라는 단 두 종류의 의식만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침례는 그 성격상 온몸이 물에 잠기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물을 가져와서 행하는 게 아니라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가서 하게 된다. 마치 플룻이나 기타는 악기를 가져와서 연주하지만, 피아노는 악기가 있는 곳에 사람이 가서 치듯이 말이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닌 것만큼이나 침례도 구원의 조건이 절대로 아니다. 먼저 구원받고 나서 그 증표로서 침례를 받는다.
그리고 침례는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군대에 가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비행기 비상구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수준... 보다는 덜 엄격하겠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조건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세례는 무효이다. 더구나 유아세례는 더욱 잘못된 관행이다. 쉽게 말해서 아래 그림에서 (1)이 맞고 (2)는 틀리다는 것.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침례 받으시는 모습을 묘사한 온갖 성화· 성경 만화들 중에, 고증상 오류가 있는 게 정말 허다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침례를 기름부음(anointing)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 또한 침례는 할례하고도 아무 연결 고리가 없다.
성령 baptism은 성령님이 이마에만 찔끔 임하는 게 아니며, 불 baptism은 이마에만 불이 붙어 활활 타는 게 아니다.
세례든 침례든 뭐가 대수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것 때문에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곤 했다. -_-;;

이건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할 차원이지, 성경 자체를 세례 에디션, 침례 에디션으로 따로 내는 건 마케팅 전략일 뿐이다. 침례를 주는 게 당연한데도 오늘날은 침례를 주는 교파만을 침례교라고 따로 부를 정도이니, 매우 통탄스러운 현실이다.

2002년! 킹 제임스 성경을 갓 알게 된 후, 본인은 인터넷으로 관련 분야 지식을 탐독하면서 본인과 함께할 믿음의 동지들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침례를 줄 곳이 주변에 없는지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한글· 세벌식 진영에서 알게 된 어느 지인이 KJV 쪽으로도 안면이 있는 분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리고 그분이 나가는 교회 모임에도 따라 나가게 되었다.

거기는 가정 교회? 지방 교회? 비스무리한.. 그런 모임이었다. 66권 전서가 번역되어 있다는 이유로 흠정역을 쓰긴 하지만, 안티오크의 권위역(당시 신약만 존재하던)을 더 좋아하는 듯했다. 히 9:15-17을 근거로 '유언'(testament)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했다.
일체의 기성 개신교회의 관행을 다 부정하고, 목사도 싫어하고(그래도 자기네 모임에도 결국 목사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는데!),
속세를 떠나 아미쉬나 워치만 니처럼 사는 걸 좋아하고,
자매는 예배 때 머리에다 너울을 씌우고,
매주 모일 때마다 만찬을 하고, 포도즙 잔을 돌려가면서 입 닦으면서 마시고,
제비뽑기로 예배 인도자를 뽑고는 성도들끼리 돌아가면서 성경을 강론하고...
뭐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KJV를 알기 전에 겨우 20대 초반이던 본인의 영적 수준은,
“나중에 서울에서 지내게 되면 어느 유명한 대형 교회에 등록할까? 그런 곳에 다니면 최신 기독교 문화를 최전방에서 바로 접하면서 살 수 있겠지?”
“NIV 다음으로는 표준새번역, NASV, NLT 등 중에서 무슨 성경 역본부터 읽을까?”
이랬었다. 진짜로.

그랬으니, 갓 KJV를 알게 된 직후, 본인은 아직 그쪽 지식이 충분치 못했으며, KJV를 옹호하고 기존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비성경적인 관행을 반대하기만 하면 무조건 나의 아군으로 간주했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보는 저런 작은 모임에도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그 모임에 수 개월 나간 후, 여름 MT 행사에서 드디어 침례를 받게 되었다.

뭐, 그분들은 침례를 밥티스마라고 불렀다. -_-;; 그리고 너 정말 구원받은 거 확실하냐고 내게 거듭 확인을 하곤 했다. 나중에 딴소리 하면서 침례를 다시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사연을 거쳐 본인은 침례탕도, 수영장도 아닌 자연에서 흐르는 물속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그때의 신앙 고백을 갱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로 본인에게 침례를 준 교회 진영과는 교제를 중단하게 된 것이 아쉽긴 하다. 나도 지식이 늘면서 점점 벌어지는 교리 차이와 분위기 이질감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기를 탈퇴했다. 비록 교리는 정당한 교제 중단 사유이긴 하지만, 좀 곱게 나오지 못한 건 유감스러운 점이긴 하다.

그리고 2003년, 본인은 흠정역을 사용하는 다른 교회를 대전에서 다니게 되었고, 그 계열의 교회를 서울에서 오늘날까지 계속 출석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년 남짓 뒤엔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대부흥 + 철도 성령 강림이 있었고. ㄲㄲㄲㄲㄲ
지금으로부터 벌써 8~9년 전인 2002~2003년이 내 인생에서 흥미롭던 시절이긴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28 09:05 2011/09/28 09:05
, , ,
Response
No Trackback , 9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575

운전에 재미 붙이다

1. 운전에 재미 붙이다

자동차는 마치 내 신체의 일부라도 된 듯, 가속 페달만 밟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쓰윽 나아가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신기하고 대단한 물건이 아닐수 없다.

단지 사고가 났다 하면 온갖 험한 꼴 보면서 정말 인생에 애로사항이 알록달록 꽃피게 되며, 더구나 그게 나만 잘한다고 100% 예방 가능한 게 아니어서 문제일 뿐.. -_-;;
또한 돈 씀씀이의 레벨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올라간다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BMW(버스, 지하철, 도보)만 이용하던 시절엔 기름값, 주차비, 운전자 보험 같은 개념을 생각할 일 자체가 없지 않았던가.

도로 정체, 기름값, 주차라는 3대 난제를 생각하면 차를 가져가는 데 부담이 느껴지나,
날씨가 안 좋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귀가할 때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해진다.
심야에는 대중교통은 차가 뜸해지고 이용하기 어려워지며, 반대로 도로는 더욱 한산해지니 자가용의 경쟁력이 크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심야 총알 택시가 있긴 하지만 이때는 역시 재정의 압박이.. -_-;;

본인은 엄청난 옛날, 아직 철덕이 되기도 전이던 2003년 초에 면허를 땄다.
하지만 무려 2011년이 돼서야,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차를 몬 것보다 더욱 운전을 많이 했다.
대학원생이다 보니 이런 블랙코미디가 문득 떠오르더라.
이게 박사 학위를 따는 때(먼허)와 교수 되는 때의 간극(자가용 장만&운전)처럼 되는 건 아닌지. -_-;;;
그때까진 그럼 학위도 장롱 학위나 마찬가지인 건가. ㄲㄲㄲㄲㄲ

처음에는 차들이 쌩쌩 들어가는 도로로 들어가는 게 겁나기도 했고, 차선 바꾸거나 주차하는 게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모든 게 생소하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하고 나니까 진짜 '감'이 온다. 어려울 것 하나도 없다. 악기를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배짱도 생기고, 나 역시 상황에 따라서는 앞차를 경적 누르면서 갈구기도 하는 경지에 올랐다.

도로가 한산한 밤에 혼자 차 몰고 나들이 갔다 오면서 운전 알파테스트를 하다가 이내 남까지 태워다 주게 됐다. 차키를 쥐고 있으니 정말 절대권력을 쥔 느낌이었다.
비록 지금은 내가 전철을 타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차를 갖고 나갈 수도 있는 상태에서 일부러 전철을 타는 것하고, 차가 아예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전철을 타는 것은 마음 상태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차가 좋아서 한적한 도로에 차 세워 놓고 안에서 혼자 그냥 자기도-_-;; 했는데, 이것만으로도 마치 텐트 치고 야영 온 느낌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도로 정체가 없기 때문에 운전하기엔 최적. 교회에는 차를 가져가는 빈도가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운전하니까 좋다.

일각에서는, 자가용 운전에 재미 붙임으로써 본인의 철덕 기질도 상대적으로 한풀 꺾일 거라고 벌써부터 기대하는 분이 있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 아직까지는 과연 글쎄다.
내가 운전하면서 맨날 뭘 듣는지를 지켜본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ㅋㅋㅋㅋㅋ

내가 교회를 안 다녔으면, 차가 있으면 주말마다 일단 서울 교외선과 중앙선의 간이역 답사부터 하러 돌아다녔지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타입이 아니고, 등산도 싫어하고, 혼자서 프로그래밍도 안 하면 그럼 뭘 하겠는가?
아무튼,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숨과 자동차는 하나뿐이다. 둘 다 안 아프고 간수 잘 하는 게 효도하는 길 되겠다. ^^

2. 관련 잡설들

- 산업 혁명 시절에 다른 분야도 그랬지만, 자동차 역시 기존 마차 업계들로부터 밥그릇 빼앗는다고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 데다 교통사고까지 빈번하니까 영국이던가 미국이던가? 20세기 초에 쟤네들의 로비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조항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걸 아시는지? 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차는 시속 10km대의 속도로만 가도록 하고, 앞에서 조수가 빨간 깃발을 흔들면서 비키라고 경고하라고..;; 자동차를 완전 고자로 만들어서 굴리는 거구만.. -_-

- 198, 90년대에는 유난히도 환경과 관련된 섬뜩한 괴담이 많이 나돌고 캠페인도 많이 벌어졌었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지금도 비록 서울 공기가 그리 맑다고 볼 수는 없지만, 수십 년 동안 그렇게도 많은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는데도 반세기 전의 영국 같은 스모그가 안 생기고 시민들이 전부 호흡기에 병 걸리고 죽지 않는 걸 보면 정부와 기업에서 환경 정화를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을 많이 하긴 했다. 시꺼먼 매연을 뿜는 시내버스들은 거의 다 천연가스 엔진으로 바뀌고, 자동차 회사들도 배기가스를 정화하는 기술을 공돌이들을 갈아넣어서 충분히 개발했다.

(얼마 전엔, 지난 2003년에 단종된 현대 갤로퍼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별로 크지도 않은 차에서 나오는 시꺼먼 매연을 보니, 갤로퍼가 환경 기준을 만족 못 하고 왜 진작에 단종됐는지를 알 것 같았다.)

- 컴퓨터 프로그래밍 세계에 memory leak가 있다면, 자동차에는 battery leak가 있다. 시동이 꺼졌는데 실내등, 계기판의 각종 불빛 따위가 켜져 있는 채로 차가 장시간 방치되면, 그 다음에 그 차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을 걸 수가 없어진다. -_-;; 옆에 다른 차가 있고 배터리 연결이라도 가능하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영락없이 보험사 콜.. -_- 자동차에도 battery leak을 감지하거나 시동 가능을 위한 최소 전력까지만 전기 사용을 허용하는 그런 장치는 없으려나 모르겠다.

- 그런데, 시동을 켜서 발전기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능사는 아닌 것이, 에어컨과 헤드라이트는 오늘날의 자동차에도 상당히 무리를 주긴 하는가 보다. 특히 둘을 모두 가동해야 하는 여름 밤의 운전은 정말 최악이라고...;; 시동을 걸고 차를 주행하고 있더라도 발전량이 전력 소비량을 못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에어컨은 주기적으로 껐다가 다시 가동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시동이 꺼지면서 동작이 자동으로 멈추는 전자 기기라 하더라도, 미리 그걸 스위치를 눌러서 직접 끈 뒤에 시동을 끄는 게 여러 모로 차에 좋다고 한다. 에어컨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 옛날에는 축전지가 들어가는 물건 자체가 자동차, 노트북 컴퓨터, 워크맨 외에는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랬는데 1990년대 말부터 휴대전화부터 시작해서 온갖 전자 기기들이 보급되면서 이 구도도 바뀌었다. 자동차의 부품으로는 '밧데리'라는 말도 많이 쓰였는데, 오늘날은 확실하게 배터리라고 표현이 바뀐 것 같다.

- 어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한국은 외래어의 원형 그대로 축약을 잘 안 한다.
일본은 play station도 그냥 '프레스테'라고 줄이고, shock absorber를 '쇼바'라고, 텔레비전을 '테레비'라고 뚝뚝 편한 대로 잘 줄이는데,
한국은 도이칠란트 대신 그냥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대신 호주, 에스컬레이터 대신 E/S, 텔레비전 대신 그냥 TV, 남캘리포니아 대신 남가주 등 영어 이니셜이나 차라리 한자어를 쓰고 마는가 보다.
자동차 용어 중에서도 조금만 생각하면 이런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12 08:29 2011/09/12 08:29
, ,
Response
No Trackback , 13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568

카이스트 사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넓은 잔디밭 부지 위에 지어진 하늘색 건물들, 그리고 까리용과 오리 연못.
지극히 카이스트스러운 분위기를 잘 표현한 풍경 사진이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올해는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카이스트 학부생이 무려 4명이나 연달아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거기다가 교수까지 한 분 자살!). 몇 년 전의 일명 '카이스트 미네르바' 사건 때는 인터넷 공간 위주로 카이스트가 구설수에 올랐다면, 이번 사건은 정말 개교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충격적이고 안타깝고 불미스러운 일인지라 오프라인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이 일 때문에 연일 도마에 오르며 까이고 있는 인물은, 카이스트 개혁의 장본인인 서 남표 총장이다. 서 총장 개인은 정말 너무나 대단한 인물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세계구 급의 과학 수재들이 가는 MIT에서 그냥 교수로도 모자라서 학과장을 역임한 박사 중의 박사요, 교수 중의 교수이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이를 두뇌 유출이라고 아까워했다. 서 남표의 인생 경험과 사고방식이라면, 국비로 공부하는 주제에 학부 때 평점 3.0? 3.3도 못 받는 쪼렙들은 징벌성 등록금 좀 매겨도 된다.

내 지론은, 아까운 학생을 4명이나 잡아먹은 서 남표 총장을 당장 짜르고 징벌적 등록금· 영어 강의 따위를 전면 폐지하자는 게 아니다.
또한, 요즘 대학들의 학점 인플레가 얼마나 심한지는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카이스트의 상대 평가 자체도 반대하지 않는다. 똑같은 CD-_- 그레이드라도 카이스트나 아주대나 서강대에서 받은 CD는 다른 학교의 CD하고는 어차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그건 사회가 알아서 인정해 준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그렇게 상대 평가를 하는 주제에 징벌적 등록금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 이건 누가 봐도 문제이다.
그리고 애초에 애들을 오로지 수학· 과학 덕후 공부기계 nerd, geek, science wonk로만 만들려면, 그 정책에 위배되는 애들을 뽑지 말았어야지.
뽑기는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서 고등학교에서 영어나 수학· 물리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휘한(?) 애들을 대인배스럽게 많이 뽑아 놓고서는,
걔네들을 별다른 배려 없이 획일화한 시스템에다 꽉꽉 집어넣고 부적응자는 등록금 폭탄으로 응징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의무 교육이 아닌 대학에 대해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철학을 기본적으로, 큰 틀에서는 지지한다.
그 학교의 건학 이념과 정책에 동의할 수 없으면 학생이 애초에 거길 가지 말거나 나중에라도 자퇴를 해야지,
기독교계 학교에 제 발로 가 놓고는 종교의 자유 운운하면서 채플 거부 시위 따위나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런 것처럼 카이스트도 거기가 얼마나 유별난 곳인지는 지금까지 사회에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니 거기에 적응 못 할 사람은 애초에 거기에 안 가야 한다. 생각은 그렇지만 사회가 그렇게 이상적인 모습처럼 단순하게 돌아가지는 않으니 현실은 시궁창이다. 학교나 총장이 잘못이 없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_-;;

카이스트는 원래 대학원만 있는 학교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소수정예 집단이었고, 학생들은 100% 기숙사에 학비 100% 면제는 물론이요, 병역까지 사실상 면제나 다름없는 어마어마한 혜택이 있었다. 프로필이 1970년대의 '서울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외국 박사'인 공대 교수들은 전형적으로 이 혜택을 입은 분들이다.1)

하지만 지금 카이스트는 학부도 생겼고 특히 서 총장 때 벌어진 엄청난 대학 몸집 부풀리기 덕분에 학생 수가... 마치 새마을호 정차역 수가 늘듯이(ㄲㄲㄲㄲ) 굉장히 늘었다. 그래서 지금 기숙사가 부족해서 난리이고 이 많은 학생들에게 전액 수업료 면제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지금은 근본적으로 1970년대처럼 어마어마한 인센티브를 주면서 이공계를 갓 육성하던 시절도 아니요, 그런 옛날 방법만으로 이공계를 획기적으로 띄워 줄 수 있지도 않다. 21세기에는 카이스트의 정체성에도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인은 아직까지는 서 남표 식 방법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임 총장인 로버트 러플린은, 카이스트를 아예 종합 대학으로 바꾸고 로스쿨과 의대를 만들려고까지 했었다. 그것보다는 낫잖아?

수업료 하니까 생각난다. 그렇게도 세금이 아까우시거들랑, 성적 나쁜 애들보다는...
국비로 단물 실컷 빨면서 공부하고도(그리고 그놈의 성적도 아주 잘 나왔는데도!) 의대로 돌아서 버린 친구들한테서나
먹었던 수업료 뱉게 하는 게 국익을 위해서 차라리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_-

하지만 그런 제도는, 우리나라가 부카니스탄 같은 국가가 아니며 카이스트도 이공계 연구소 의무 복무-_- 기간이라도 존재하는 사관학교급이 아닌 이상... 밀어붙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일개 기관이 개인의 차후 진로를 어떻게 일일이 다 찾아다니고 간섭할 수 있겠나?)

또한, 더 생각해 보면 의대 가는 애들 탓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이공계가 얼마나 비전 없고 암울했으면, 어렸을 때 순수하게 과학자의 꿈을 품었던 애들마저 그 꿈을 접지 않을 수 없게 됐는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서 총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학생상처럼 그렇게 미치도록 애들 공부시켜서 수학· 과학 덕후를 만들어 봤자 한국에서는 겨우 사악한 악당 공 박사(이 말년 시리즈 ㄲㄲ)밖에 되지 않는다면... 과연 학교가 서 총장의 의도대로 돌아가 줄까?
요즘 평범한 애들이 아무 비전이 없이 9급 공무원에 목숨 건다면, 걔네들보다는 더 머리 잘 돌아가고 똑똑한 애들은 의대· 법대에 매달리는 셈이다.

본인의 재학 시절에는 자살자는 아니고 풍동 실험실 폭발 사고 때문에 학교가 제대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기억하는 분이 계시는지? 이 사고로, 박사 과정 대학원생 한 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또 한 명은 다리를 잃었다. 역시 이공계의 비극.. =_= 항공 우주 공학은 레어템이어서 기계/전자 공학이나 전산학만치 흔하고 학생 많은 과도 아닌데... 인재의 손실에 따른 타격이 어느 과보다도 컸을 것이다. 사망자인 고 조 정훈 씨에게는 명예 박사 학위--훈장이나 일계급 특진은 아니고ㄲㄲ--가 추서되었다.2)

수학· 과학 덕후와는 거리가 멀고 아예 문과로 계열을 바꾼 본인조차도 카이스트를 잘 버티고 졸업해 나왔는데... 자살이든 사고사든, 뜻하던 학업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심히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얼마나 국가적인 손실인가?
본인의 졸업 논문 지도 교수이던 전산과의 ㄱ 교수님도 워낙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 분이시다 보니, 이 사건과 관련해서 이분의 인터뷰 문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카이스트 학사 졸업생으로서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아마 서 총장은 이 승만 초대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것 같다. 화려한 미국물 프로필, 천재형, 민심을 모르는 독재자형, 누군가가 죽는 유혈-_- 사태, 유쾌하지 못한 퇴임 같은 점에서.


Notes:
1) 카이스트는 국비 장학생이 기본 구도이기 때문에, 대학원을 자퇴하려면 지금까지 면제 받았던 수업료를 뱉어야 한다. 이는 재학 중의 성적과는 아무 관계 없으며 서 남표 집권 이전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학칙을 찾아보면 관련 조항이 있다. 단, 학부는 그런 조건이 없음.

2) 덧붙이자면, 2003년은 국내 과학계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사고가 전국민을 슬프게 했다. 하나는 5월에 발생한 저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그 해 말, 남극 세종 과학 기지에서 전 재규 대원이 순직한 사고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4/12 19:22 2011/04/12 19:22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495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 버린 2004년은, 본인의 대학 후반기임과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웃긴 컨텐츠’들을 유난히도 자주 접한 해였다.

웃긴 컨텐츠의 원천은 크게 풀빵 닷컴 아니면 일본물로 나뉘었다. 2004년 당시 잠깐 떴다가 사그라든 박 분자 시리즈(휴지의 시, 맵핵의 추억 등), 그리고 서울 버스 개편을 비꼰 <버스 로얄> 및 <투모로우> 같은 영화 예고편 패러디였다.
그리고 일본물로는 일본 환타 CF, 그리고 일본판 가나다송, 숫자송, 인사송이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이런 거 아는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2004년을 훈훈하게 보내고서 이듬해 초의 일이다.
유머· 엽기 게시판에서 웬 5분짜리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개그 만화 일화와 본인과의 첫 인연이었다. ㅋㅋㅋㅋㅋㅋ
코트의 안에는 마물이 살고 있고 믿을 만한 동료들이 다 맛이 갔다니... 오프닝 가사부터가 무지하게 암울한 한편으로 아스트랄하고 포스가 넘치지 않는지? ^^;;

배경은 지구가 운석 충돌로 멸망하기 3시간 전. 전세계 사람들은 이제 볼장 다 봤다는 식으로 서로 똥이나 처바르면서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진행된 어느 TV 쇼프로에서는 우리나라로 치면 태 진아 같은 연륜을 자랑하는 엔카 가수가 발가벗고 출연하여 엔카는 지겹다고 말한다. 그것도 똥 묻은 파르페 다음으로 싫댄다. ㅜㅜㅜ

문 근영 정도 될 법한 아이돌 가수는 양아치 같은 차림으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아까 엔카 가수는 딸내미뻘 되는 그 아이돌에게 껄떡대다가 담배빵을 당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미소!! ㅎㄷㄷㄷ;; 갑자기 등장하는 '쿵~따 쿵쿵따' BGM도 은근히 중독성 있었다.

복화술사는 복화술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내 친구는 그저 땡그랑~뿐입니다요”라고 실토한다. 본격 인간성 파탄. 파트너인 인형을 줘 팬다.
그런데 마지막 게스트인 마술사는 자신이 사실 초능력자라고 커밍아웃한 후 운석의 궤도를 바꿔서 지구를 구해 낸다.

복화술사 정도라면 모를까, 앞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엔카와 아이돌 가수 둘은 연예인 생명은 이미 완전히 파토 났으니, 아마 성형 수술하고 개명 후 이민 가서 잠적해야 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그 이름도 유명한 1기 4화 <종말편>을 통해 개그 만화 일화에 입문했다.
처음 봤을 땐 본인도 남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일본 아니랄까봐.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만화가 다 있어? ㄲㄲㄲㄲㄲㄲ” 하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봤다.

그런데 중독성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욕을 하면서도 자꾸 또 보게 됐다. 그러면서 빠져들었다. ㅠ.ㅠ
게다가 일본물과 각종 만화에 조예가 깊던 병특 회사 모 동료의 영향으로 본인은 <씰>, <서유기> 등 여타 작품까지 섭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혹자의 코멘트에 따르면, 드디어 사무엘 님도 알량한 웃음을 대가로 자기 영혼을 팔아서 타락시키기 시작했다고라...;;;;

본인은 일본 애니와는 담을 쌓고 사는데 예외적으로 이거 하나만은 찾아서 보게 됐다.
처음엔 엔카가 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핑크빛 카파(괴한)’이 뭔지도 알 정도로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다. ^^;;; 본인이 일본어를 할 줄 안다면 대사를 다 외웠을 텐데 말이다. ㄷㄷ;;

최소한 2006~7년부터 거의 3년이 넘게 본인의 MSN 대화명은 개그 만화 일화 대사였다.
- 팔릴까보냐!
- 닥치세요. 이것이 저의 완전체입니다
- 번뇌 이놈, 죽어라!
- 한겨울에도 축시
- 똥 묻은 파르페 다음으로 싫어

엽기적인 거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저런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종말>, <안 오잖아, 가정교사!>, <히라다의 세계>, <서유기> 같은 것들.

2008년 상반기에는 개그 만화 일화 3기가 본인의 병특 말년 생활을 더욱 즐겁게 해 줬다. 매주 저거 올라오는 거 기다리는(자막도) 재미가 참 쏠쏠했다.

병특이 끝난 뒤 다른 직장에서 본인은 플래시 메모리를 분실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른 동료 직원이 습득했다. 그런데 그 플래시 메모리 안에는 개그 만화 일화 동영상 자막 파일이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서 그 동료가 “이거 주인은 일본 애니 덕후인가 보군.. 그런데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라고 말했고, 이걸 계기로 본인과 그분은 서로 개그 코드가 통하는 친한 사이가 됐다. ㅋㅋㅋㅋㅋ

이렇듯, 개그 만화 일화는 본인의 인생에서 최소한 두 명의 사람과 인연을 이어 줬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이런 만화 얘기를 꺼내면 정상인 취급을 못 받는다나? ㄲㄲㄲㄲㄲ

놀랍게도, 개그 만화 일화 에피소드로 영어 연극을 하고 싶으니 대사를 영어로 좀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본인은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다. “베게의 속에는 참치로 가득 -> Inside the pillow is full of tuna” ㅋㅋㅋㅋ 유튜브에는 한때 실제로 영문 자막이 삽입된 개그 만화 일화 동영상이 나돌기도 했는데, 저작권 문제 때문에 요즘은 다들 삭제된 모양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그 만화 일화는 성우 지망생들의 더빙 연습용으로도 자주 쓰일 정도로 이 바닥 종사자에게는 친숙하다. ^^

1기(시즌 1)의 오프닝 주제가 가사 중 일부가 ‘배구에 걸었던 청춘’인지 ‘발레에 걸었던 청춘’인지가 번역자에 따라 해석이 차이가 있었는데, 이 영어 자막을 보고 정확한 해석이 뭔지 알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물이 살고 있는 코트도 coat가 아니라 court이다. 맛이 갔다는 표현의 원어 표현은 '눈이 죽었다'(eyes are lifeless)임. =_=;;

개그 만화 일화는 원래 만화책으로 나온 스토리를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다. 만화책은 2008년 말에 드디어 우리나라에 정식 번역 출간되었고, 듣기로는 애니메이션도 정식으로 더빙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개그 만화 일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개그 만화 일화는 김 성모, 삼류만화 패밀리 등 본인으로 하여금 더욱 매니악한 서브컬처 유머 문화에 입문하게 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여러분도 정신 건강을 웃음을 통해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다면, 5분을 투자해서 개그 만화 일화 1기 , 종말, 서유기 편부터 차례대로 섭렵해 보는 게 어떨까? ^^;;

http://blog.naver.com/lhj3496/110031250383 (1기 주제가만으로 만화를 만들었다. <코트 안에는 마물이 살고 있어> ㅋ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1/03/23 08:12 2011/03/23 08:12
,
Response
No Trackback , 5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484

2000년 7월 27일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개발해 온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프로그램과 설명서를 교육청에 제출했다.

2000년 8월 30일
밤 11시 20분경,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나를 불러 집에 전화가 왔다고 전해 주셨다. 그리고 무슨 대회 예선을 통과했다고 하는 일종의 힌트도 덧붙였다. 집에 전화해서 보니 아니나다를까 어머니께서 ICC(당시 정보 문화 센터.. KOI 주최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전해 주셨다. 결과는 물론 합격이었다.
오! 이제까지 코딩한다고 겪은 고생과, 그 고통보다 더 컸던 기다림의 고통이 단번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2000년 9월 1일, 7교시 수업을 듣고 바로 가방을 싼 뒤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2차 심사 준비를 해야 하니까. 2년 전의 기적이 재현됐으니 난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9월 2일, 오전 6시에 출발하는 서울 행 고속버스를 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97, 98년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2차 심사가 대학교가 아닌 ICC 본관에서 열렸다. 건물은 새로 지어져 있었고 무척 깔끔했다. 1년 반쯤 전에 여기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넓은 홀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었다. 몇몇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 20분이 되어서 나는 대기실로 들어가서 진행위원의 지시를 들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몇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나는 심사받는 15명 중 가장 먼저 심사받는 조에 걸렸다. 수험표를 받고 심사장으로 들어갔다. 카이스트, 고려대 교수를 비롯한 다섯 명의 교수들이 컴퓨터를 빙 둘러싼 가운데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 떨리긴 했지만, 난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진지하게 프로그램 소개를 했다.

교수들이 주로 질문한 내용은 두벌식 자판에 대한 내 입력기의 호환성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입력기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한글 기계화는 세벌식으로 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을 이었다.
곧이어 심사 위원들은 이 프로그램을 무슨 언어로 짰는지 묻고, 여기에 대한 지식을 언제부터 쌓아 왔는지 물었다. 난 물론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10분짜리 심사가 끝나고 나는 귀가하게 됐다. 그동안 조금도 떨지 않았고, 심사위원과 아주 평범하게, 부담없이 얘기를 나눴다. 시간이 내가 느낀 것보다 훨씬 빨리 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00년 9월 4일
아침 조회가 끝난 직후에 부랴부랴 ICC 홈페이지에 접속해 봤지만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4층으로 올라가자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대상을 받았다고 전해 주셨다. 날 보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용묵아, 축하한다. 대상이더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컴퓨터실에 가 있던 사이에 선생님께서 먼저 교실에다 소식을 전하신 모양이었다. 급우들도 나를 보자 곧바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이제 카이스트에 그냥 갈 수 있냐고 다그쳐 물었다.

-- 이 날은 네게 기념일이 될지니 네가 이 날을 평생 명절로 지키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영원토록 명절로 지킬지니라.
-- 보라, 김 용묵의 남은 행적 곧 그가 코딩을 하고 정올에서 입상한 과정은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느니라.

당시 17회 대회 때 고등부에서는 총 92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 중 15편이 2차 심사 대상자가 되었다.
참고로, 대회 결과가 발표된 지 얼마 안 되어 ICC 홈페이지엔 이런 글도 올라와 있었다.

"공모는 대리 출품이 가능하다."라는 잘못된 인식;;

17회 공모 면접을 보신 분들은 2~3명만 빼고는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_- 면접실을 나갔습니다.
다들..진이 빠진 상태에서;; 심사위원님들의.. 해박함에 질려서;;
또.. 몇 개월 동안 밤샘해서 만든 자기 프로그램이..심위분들 앞에서 일순간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한;; 황당함;; 때문에 말이죠.

아는;; 수상자님께서;; 면접 끝나고 나서;; 대기실에 있는 제게 오시더니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심위님들은.. 모든 걸 알고 있죠..--; 무슨 얘기냐 하면
어설프게 다른 프로그램 베끼거나..대리 개발해서 출품한 작품은
3분 내에 뽀록납니다.
작품과 관련된 배경 이론들을 모조리 물어보시며.. 우선.. 나쁘게 말해서-_- 작품을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어떻게든 출품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최고 미션인 듯;;하더군요-_-
심지어는.. 열심히 작품 설명하고있는데.. 딴 데 쳐다보시고..
심위님들끼리 딴 얘기 하시고..--; 중간에 말 끊고;; 이건 기본이구,

저는 맨 마지막쯤에..면접을 봐서리, 또 설치 중에 문제가 많아서 다른 분들 면접하시는 걸 거의 다 봤는데요..
거의 모든 분들 면접할때..심위님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래서 되는 게 뭔데? 빨리 보여 달라니깐.."
"그럼 그게 뭐야? 이미 있는 거잖아? 좋을 게 뭔데?"
"뭐야? 아무 필요 없는 건데?"
"다 하는 거네.."
이런..--;성격의 것들이죠;

심위님들 앞에서 절대 거짓말 못 합니다.-_-
모르는 것 아는 체 못 하구요-_- 대리 개발작..바로 뽀록납니다..


본인은 심사 받으면서 저런 일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2~3명 중의 하나였군), 아주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내 프로그램 소개를 하고 질문에 답변도 하고 왔다. 또한 조원들 중에 가장 먼저 심사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심사 장면은 보지도 못했다. 가히 best 케이스...;;
솔직히 말해서 내 프로그램은 대리 개발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대회 결과가 나오긴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카이스트는 다른 대학보다 전형을 굉장히 일찍 하기 때문에, 본인은 이 대회의 결과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원서를 '일반 지원자'로 제출해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카이스트는 추후에 발표된 이 대회 결과를 받아들였고, '일반 지원자'이던 본인의 등급을 '지정 대회 우수 입상자'로 업그레이드해 줬다. (지금은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이미 옛날에 없어졌음. ㄲㄲ)
나중에 카이스트에서 본인의 고등학교로 1차 서류 전형 합격자 명단을 팩스로 보내 줬는데, 그때 본인의 이름은 인쇄체가 아니라 맨 끝에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2, 3, 4를 거쳐서 10년이 지난 지금은.. 5.65까지 버전이 올라갔다. 5.65 버전이 일종의 개발 10주년 기념작이다. 소스 코드 줄 수는 10년 전에 비해서 5배가 넘게 불어났고, 기술 수준은 당연히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학부 시절엔 이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된 연구만으로 5학점을 먹었다. 3학점짜리 학부 졸업 논문과 1학점짜리 개별 연구 두 건(TSF 모듈 개발, 그리고 3.0 아키텍처 연구). 이제 대학원에 가서도 써먹을 예정이다. 왜냐 하면 학부 졸업 후에도 또 논문 쓸 만치 연구 실적은 추가로 쌓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날개셋> 말고도 전산 기술을 접목시킨 다른 한글 관련 연구 주제도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프로그램 개발하면서 나름대로 아래와 같은 손발리 오그라들 것 같은 말도 들었다. 앞으로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버전 6.0을 향하여 "cheers!"를 외쳐 본다.

-- 그 프로그램은 "날개셋 한글입력기 3.02" 이다. 세벌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준것이 바로 이 위대한 발명품(나는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이다.
정말 단순히 손목이 부담이 없고, 속도나 좀 더 빠르게 나올수 있다는 정도라면 나는 결코 세벌식 자판과 이 프로그램을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

-- 그냥 쓸 때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날개셋을 써 보면 왜 세벌식 최종이 좋은 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무궁무진한 응용을 할 수 있죠..  “한글이 컴퓨터와 이리도 잘 어울리다니”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

-- 용묵님은 우리나라 역사에 꼭 남을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문화사에는요.

-- 저는 이미 용묵씨의 <날개셋>은 영원한 한민족의 유산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올 발전을 생각하면 가슴마저 뻐근할 정도의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 이 프로그램은 프리웨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 10年前、高校生がこれだけ高度なIMEを??で開?するなんて、さすがはIT先進?の韓?。
10년 전에 고등학생이 이만큼 고급 IME를 독학으로 개발하다니, 과연 한국은 IT 선진국이다. (일본인 중에 내 프로그램 사용자)


 

Posted by 사무엘

2010/09/03 08:30 2010/09/03 08:30
, ,
Response
No Trackback , 6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64

방화 역에서 느껴지는 애환

* 카테고리를 뭘로 잡아야 할지 난감한 글이다. 철도 얘기, 성경 얘기, 별별 얘기가 다 들어가서... -_-

※ 철도 얘기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서쪽 종점은 잘 알다시피 방화 역이다. 그러나 서쪽 종점이라고 해서 이 역이 5호선 역 전체를 통틀어 서울 최서단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5호선 최서단 역은 김포공항 역이며, 그 후로 5호선은 선형이 다시 살짝 동쪽으로 바뀐다. 김포 공항을 경유하기 위해 굴곡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6호선의 최서단 역은 월드컵경기장 역이다. 서울 2기 지하철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월드컵 경기장을 강서구 마곡 지구에 만들지, 은평구 상암동에 만들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결국 후자로 결정되면서 6호선의 노선에도 그쪽으로 급히 굴곡이 추가된 것이다. 이 때문에 건설업자들이 고생을 좀 했다고 들었다. (덧붙이자면, 당시 조 순 서울 시장의 지시로 마곡 지구의 개발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5호선 마곡 역도 10년이 넘게 미개통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방화 역은 시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종착역답게, 그 인근은 좁은 4차선 도로이고 한가한 베드타운이다. 동쪽 종점인 상일동이나 마천도 비슷한 분위기이다. 본인은 2008년 6월 말, 마곡 역이 거의 12년만에 정식 개통하기로 한 바로 전날, 방화 행 막차를 타고 거기까지 간 후, 근처 PC방에서 외박을 했다. 그리고 새벽 5시 반에 하행 첫 차를 타고 5시 38분경, 갓 개통한 마곡 역의 승강장에 지하철 회사 관계자가 아닌 사람 중에서는 최초로 발을 디뎠다!

이건 완전, 달에 최초로 도착한 아폴로 11호 조종사 같았고, 또 주의 첫 날에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는 심정이었다(막 16:1). 본인은 예수님의 부활은 눈으로 못 봤지만 마곡 역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증인이다. 본인처럼 마곡 역 답사하러 인천에서 미리 찾아와 기다렸다는 어느 철도 덕후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날, 본인도 어차피 혼자 간 게 아니었고, 같은 철도 동호인 후배 친구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본인에게 방화 역은 이런 오덕스러운 추억이 있다. 그런데 방화 역 인근에는 주거 구역만 있는 게 아니다. 국어학에 관심이 많고 동시에 KJV 빌리버이기도 한 본인에게 꽤 큰 의미를 지니는 기관이 두 곳이나 이 지역에 입주해 있다.
하나는 국립 국어원이고, 또 하나는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이다. ㅎㅎ

※ 철도 말고 나머지 얘기

다만, 관심 분야가 유사할 뿐이지, 두 곳 모두 본인이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적은 없는 곳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가령, 한글 학회와 국립 국어원은 민간 단체와 정부 기관이라는 차이도 있거니와 정체성도 완전히 다르고, 서로 원수지간까지는 아니어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파헤치자면 서울대 이 희승 라인과 연세대 최 현배 라인까지 길고 긴 흑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이 글에서 다 다루지는 않겠다. 뭐, 요즘은 어차피 옛날 같은 그런 파벌 싸움 자체가 별로 무의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국립 국어원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비판을 한글 학회에다가 하는 사람의 글을 예전에 좀 보곤 했다. 이건 지하철로 비유하자면, 코레일 관할 역 내지 코레일 소속 전동차에서 생긴 불만 사항 민원을 서울 메트로에다가 넣는 것과 같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말글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 체육 관광부 소속 정부 기관이 방화동에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그리고 또 말보회도 아주 유명하다. 있는 위치가 하도 상징성이 크다 보니, 우리 진영에서 설교 같은 공식 석상에서 가끔 말보회를 완곡하게 언급할 때 ‘방화동 교회’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아는 게 아니라 어설프게 들어 본 사람의 머리에는 “KJV = 말보회 = 이 송오 = 피터 럭크만 = 이단”이라는 다중 거부 장치가 겹겹이 설치되어 있다. 이걸 두고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바른 성경에 대한 관념이 없고 성경의 보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삐뚤어진 신앙도 잘못됐지만,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사랑으로 전하지 않고 무례하게 깽판 부리면서 간증을 다 망친 진영도 잘못한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남 탓할 자격이 없는 게... KJV를 처음부터 말보회 진영을 통해서 받아들였다면, 난 과격 면에서는 아마 이 송오 목사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의 전투종족이 되지 않았을지? ㅋㅋㅋㅋ 럭크만 정도의 성경 실력은 없는 주제에 그 사람의 성깔만 Ctrl+C, Ctrl+V가 돼서.. 성경을 무기로 삼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단들 욕하고 까는 글 기고하면서 말이다.
그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오버하느라 기성 교회 사람들 마음을 아주 닫아 버리게 만든 건 분명 잘못이다. 오죽했으면 “말썽 보존 학회”로 전락을.. -_-

“처음에 한국에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더라.”(1절) “And 한국 교회는 교리의 혼돈과 공허로 가득한데, 정작 KJV 교계는 여러 파벌들로 갈라져 있으며 기성 교회들로부터 이단으로 찍혔더라.”(2절)
이게 한국 KJV 교회 역사의 간극 이론이 아닌가 싶다. 그 간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절을 1절 이후의 시간 순으로 해석하면 간극 이론이고, 2절을 1절이 일어나던 당시의 배경 상황 내지 부연 설명으로 풀이하면 간극을 배제한 해석이 되는 셈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기발하다 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0/09/02 09:10 2010/09/02 09:10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1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63

구미와 더불어 본인에게 21세기 이전에 기차 타고 방문한 추억이 있는 곳은 바로 수원이다. 고등학교 시절, 인텔 ISEF 참가 준비와 교육 때문에 한동안(1999년 3월~4월).. 무려 주말마다 성균관 대학교 수원 캠퍼스를 찾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사를 치르느라 그 옛날에 휴대전화까지 잠깐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구미와 삼성 하니까 둘 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업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네? 뭐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인 것 같고.

저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나고 값진 경험인데, 내가 그때는 지리와 교통 쪽 감각이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여서 당시에 대한 기록과 기억이 전혀에 가깝게 없다. ㅠ.ㅠ 새마을호나 무궁화호 같은 관념도 없어서 어떤 열차는 좀 으리으리하고 고급스러운데, 어떤 열차는 좌석도 작고 입석 승객까지 있어서 혼잡하다는 식의 인식만 있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집에 돌아갈 때 기차를 잘못 타서 삽질한 적도 있었다.

수원 역에서 성균관대 역까지는 전철로 금방이다. 출구로 나가면 곧바로 야구 연습장이 보였고, 언덕을 내려서 조금 걸어가면 성균관 대학교 이공계 대학 캠퍼스가 나왔다. 당시 지도 교수는 워낙 유명한 분이니 실명을 거론하겠다. 황 대준 교수님의 멀티미디어 연구실에 있었다. 그러면서 거기 랩에 있던 대학원생 형들과도 부대꼈고, 아마 이분들이 지내는 기숙사 내지 대학원생 아파트 구경도 했던 것 같다. 난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서 이제야 대학원으로 고고씽이구나. ㅠ.ㅠ

그때가 본인 역시 이제 막 도스+C에서 벗어나 윈도우 API+MFC를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때의 대회 준비 경험은 본인의 실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단편적인 프로그래밍 지식뿐만이 아니라 영어 프레젠테이션, 대인 관계, 대학과 대학원의 분위기 같은 것들도.
내가 조금만 더 세상 보는 식견이 넓었으면 그때 마주쳤던 분들에게 훨씬 더 예쁘게-_- 보이고, 그분들에게서 더 많은 걸 배워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학 시절 한때는, 밤에 자다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 ISEF에 다시 나가는 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건 아주 한국적인 소재인 데다, 고3 때 입상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본인이 ISEF 첫 출전 티켓을 딴 것도, 전적으로 당시 본인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든 학생은 이듬해에 대학에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아직 인지도가 부족한 관계로 ISEF 참가 경험은 IOI(국제 정보 올림피아드) 참가와는 달리 입시에서 뭔가 가산점으로 인정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게 본인에게는 역설적으로 기회로 작용했다. ISEF에 갔다 온 후에도 아예 고3 때 과거 ISEF 작품과는 관계가 없는 작품을 하나 또 만들어서 그건 아예 대상을 받아 버렸기 때문이다. 정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지? (경시부였다면 불가능한 일. IOI 참가자는 이제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KOI에 또 응시할 수 없다.)

첫 참가자인 본인 이후로 ISEF 참가자 교육은 카이스트에서 이뤄지고 있는 걸로 본인은 알고 있다. 그리고 혼자만 가는 게 아니라 최하 두 팀이 가는데, 동 대회에 출전하는 ISEF 참가자들끼리는 서로 그렇게 자주 교류한다거나 친한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후배에게서 들은 증언) 차라리 서로 다른 기수의 대회에 참가한 선후배끼리가 친해진다나?

정보 올림피아드와 관련하여 본인이 방문한 적이 있는 대학으로는 성균관대 말고도 KOI 경시부가 당시 치러졌던 서울대, 그리고 공모부 2차 심사가 열렸던 중앙대(1997)와 숭실대(1998)가 있다. 경시부의 경우, 지방에서 온 애들은 대회 전날의 예비 소집에 참석한 후 무려 학교 근처의 여관에서 자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행사들이 대학에서 개최되지 않고 백범 기념관이라든가 정보화 진흥원 본관에서 개최되는 걸로 안다. 기관 이름도 처음엔 정보 문화 센터(ICC)이다가 정보 문화 진흥원(KADO)을 거쳐 지금은 정보화 진흥원(NIA)으로 참 자주 바뀌었다.
옛날에는 역대 수상자를 조회하면서 공모부의 경우 작품명까지 볼 수 있었는데 그건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모양이다.

어쨌든 결론은!
본인의 인생에서 정올과 관련된 옛 추억에도 철도가 조금이나마 끼여 있다. 그걸 이제 와서 추적하려고 하니까 쉽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2 09:01 2010/08/12 09:01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46

경상북도 구미에는 경북 외국어 고등학교가 있다.
포항에 있는 본인의 모교인 경북 과학 고등학교도 1993년에 개교했으니 본인이 중· 고등학생 나이이던 당시에는 꽤 최근에 생긴 학교이긴 했으나, 외고는 더욱 나중에 생긴 학교였다.

경북 외고는 1995년에 설립 인가가 나고 1996년 개교로 알고 있고 있는데, 그땐 아직 기숙사나 강당 같은 건물조차 다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 홈페이지엔 연혁이 안 나와 있다. -_-)
1996년 개교이면 민족사관 고등학교와 생년이 동일하다. 1995년 중학교 <방학책>(초등학교의 탐구생활에 해당하는 책자?)의 뒷표지 광고에 민족사관 고등학교 1회 입학생 요강이 적혀 있던 걸 기억한다. 물론 살인적으로 까다로운 전형 절차와 우수한 성적, 요구 조건으로 말이다. 내신에 심층 면접에, 나중엔 체력장까지... 흠좀무.

어쨌든 본인은 경북 외고가 그 민사고와 동급으로 그렇게 역사가 짧은 파릇파릇한 학교인지는 그 당시에 잘 몰랐다. 하도 특목고, 특목고 하니까 내가 사는 경북에도 그런 외국어고가 으레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가 상대적으로 강하고, 비록 전교 열 손가락 안의 순위까지는 아니어도 평소실력(?)만으로 나름 상위권이고...
머리는 나쁘지 않-_-은 거 같은데 그닥 노력파 성실형은 아니고 자꾸 컴퓨터로 쓸데없는 짓만 하던 본인에게, 당시 중학교 선생님들의 진로 조언은 불 보듯 뻔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공부 열심히 하고 내신 튜닝-_- 해서 외고 가라”였다.
백 번 수긍한다. 내가 선생이어도 본인 같은 학생에겐 그렇게 조언했을 것이다. 뭐 나중엔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 덕분에 과학고로 당첨됐지만-_- 말이다.

그러던 차에 본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사실상??)으로 경북 외고와 인연을 맺은 일이 있었다. 바로 1997년 가을, 본인이 중3이던 시절에 거기서 자기네 학교 홍보를 목적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제 1회 외국어 경시대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외국어 경시대회라고 해 봤자 사실상 영어 필기시험이었다.
이 대회의 입상자는 외고에 지원할 때 가산점을 준다는 단서도 당연히 붙었다. 그래서 본인은 그 대회에 우리 중학교에서는 혼자서 참가했다. 덕분에 대회 당일 수업은 공결로 째고, 경북 외고로 고고씽.

깔끔한 붉은 벽돌 건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때는 이미 이런 특목고에 진학해 있는 외고 재학생들이 가히 하늘처럼 높게 보일 뿐이었다. 시험 치는 느낌이 어땠는지는 13년이나 지난 지금 기억이 날 리가 없고, 어쨌든 그때 본인은 장려상 하나 겨우 건져 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게 있다.
그때 본인은 동행하는 인솔 교사가 없이 혼자 기차 타고 타지에 있는 학교에 찾아가서는 시험 치고 돌아왔다! 경북 외고는 구미 역에서 900m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타지에서 방문할 때는 철도가 딱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면 본인은 지리 하나도 모르고, 혼자서 기차 탈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시험 치고 나서는 확실하게 혼자였다는 게 기억난다. 담임 선생님에게 경과 보고를 공중전화로 하고, 귀가도 다시 기차 타고 스스로 해냈다. 그때 지금처럼 일기를 써 놨으면 그 당시 철도가 어땠는지 더할 수 없이 귀중한 기록이 되었을 텐데!

사실 경북 과학고도 포항 역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남짓한 가까운 거리이다. 포항에 지하철이 있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지만, 뭐 1.5km 남짓한 거리니까... 본인은 그것도 까맣게 모르고서 고등학교 시절 3년간을 철도는 전혀 이용하지 않고, 더 멀고 비싼 시외버스만으로 경주와 포항을 왕래했다. 그 정도로 지리에 문외한이었는데 그때 구미 여행은 어떻게 해냈을까?

그때 이후로 본인은 구미를 다시 찾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에 ‘경북 외고는 구미 역에서 무척 가깝다’는 기억 하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제 본인이 글을 쓰는 전형적인 방식인, 관련 잡설들을 옴니버스 형태로 나열하는 걸로 글을 맺겠다.

1. 경북 과학고와 외고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를 제외한 본인의 모교들은 전반적으로 역사가 짧은 편이었다. 계림 중학교는 1986년 개교로, 이는 포항 공대의 생년과 카이스트의 학부 개설 연도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다만, 본인은 이제 대학원은 역사가 무진장 긴 학교로 가게 된다. ^^;;

2. 그러고 보니 정보 올림피아드 경시 부문의 전신이던 PC 경진대회의 경북 지역 예선은 포항도, 구미도 아닌 안동에서 늘 개최되어 왔다. 안동은 경북 내륙의 중심지이지만 당시 고속도로 하나 없는 교통 불편한 곳이다 보니, 인솔 선생님이 꼬불꼬불한 국도로 차를 몰면서 대회장까지 학생들을 태워다 주었다.

3. 본인에게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을 한 적이 있고 당시 같은 영어 사교육-_- 학원에서도 각종 대회에서 본인과 1, 2등을 다투는 라이벌 사이이던 여자 동창이 있다. 예쁘고 못 하는 게 없는 모범생 엄친딸이었는데, 이 친구는 결국 경북 외고에 진학했다. 저 외국어 경시대회에 참가를 안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때 현장에서 걜 만나지는 못했다. (어머니께 고증을 의뢰하니, 어머니 왈, 걔도 그 대회에 응당 참가했고 역시 장려상 받았다고 한다)
본인은 뭐 과학고에 합격했으니, 중학교를 마칠 무렵 서로 축하 전화를 주고받았다. 본인의 어머니와 그 친구 어머니께서 서로 아는 사이여서 말이지..;;;

4. 하지만 과학고도 가 보니, 당시 외국어 경시대회에 참가했던 친구가 그래도 딱 한 명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때 외고에서는 모든 대회 참가자에게 학교 마크가 인쇄된 공책을 사은품으로 줬는데, 본인과 그 친구가 서로 그 공책을 갖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5. 하긴, 내 기억이 맞다면, 본인이 중학교에 갓 들어간 시절인 199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의 언어 관련 교육 제도에 좀 변화가 생겼다. 논술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논술 경시대회라는 게 생긴 게 그때이다. EBS에서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영어 듣기 평가를 시행해서 그 점수 20점이 중간· 기말고사의 영어 점수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 또한 나름 영어 말하기(혼자 웅변이 아니라 연극) 대회도 그때 생겼다.

세월이 흘러 어느 지식인 검색을 보니, 영어 말하기 대회 때 써먹겠다면서 개그 만화 일화 3기 3화 쇼토쿠 태자 대사를 좀 영작해 달라는 요청을 본 기억이 난다. Inside the pillow is full of tuna (베게의 속에는 참치가 가득) ㅋㅋㅋㅋㅋㅋ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1 08:49 2010/08/11 08:49

« Previous : 1 : ... 4 : 5 : 6 : 7 : 8 : 9 : 10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983937
Today:
1674
Yesterday:
1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