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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으로부터 계속됨)
그 다음으로는.. 한국어 정보 처리· 전산화 분야의 1세대 숨은 원로이며 올해 초에 작고하신 고 박 동인 부장을 회고하고 추모하는 순서가 있었다.
이분은 공식적인 최종 학력은 의외로 그냥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사가 끝이지만, 업계에서의 실력과 짬은 석박사급 연구원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였다. 주변으로부터 "대학원 가서 학위 좀 받지?" 권유도 받았지만 자기는 그냥 현장에서 '부장' 호칭으로 불리는 게 좋다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 없는 사실상의 박사 포스인 게 철도계로 치면 30년간 열차 시각표 외길만 간 김 영근 씨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2014년 한글날엔 국가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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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분을 대학원 코스웍 재학 시절에 교수님이 특강 강사로 초청하신 덕분에 알게 됐으며 나름 같이 얘기도 나눈 적이 있다. 알다시피 본인은 옛날 이야기를 좀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절이 어떻고 성 기수 박사가 어떻고 글자판이 어떻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관련 질문을 하자 그분도 굉장히 놀라고 대단해하고 내 나이를 궁금해하셨다. "자네 대전으로 내려와서 살아도 괜찮으면 ETRI에 입사하는 거 어때?" 이런 말씀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셨다. ㅎㅎ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인이 박 부장님을 대면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이분은 전공과 학벌은 보다시피 박 근혜 대통령과 동일하지만, 외모와 인상은 대조적으로 문 재인 씨와 아주 비슷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어째 고인의 생전 모습 사진 한 장을 제대로 구할 수가 없나 모르겠네.. 어쨌든 그렇다. 나이도 1952~53년생 연배로 거의 일치함.

추모 세션이 끝난 뒤엔 학술대회하고 나란히 개최된 올해치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의 시상식이 있었다. 내가 참가했던 2011년 당시보다 대회 진행이 더욱 체계적으로 잘 바뀌어 있었다. 대회 측에서 요구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성능을 측정해서 순위가 매겨지게 진짜 '경진대회'처럼 바뀌었으며, 분야가 이런 지정 과제와 자유 공모로 딱 이원화됐다. 단, 상은 여전히 두 분야를 통합해서 주더라.

이로써 학회의 첫째 날 일정이 저녁 7시쯤에 모두 끝났다. 주최 측에서 근처 식당에서 쇠고기 전골과 육회 요리로 만찬을 제공했기 때문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본인은 일행이 전혀 없는 관계로 어디에 앉을지가 좀 난감한 상태였는데.. NC 소프트에 재직하면서 동시에 대학원도 다니고 있어서 나처럼 박사 수료 상태인 어떤 여자분과 얘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이분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논문을 투고했으며, 나중에 알고 보니 논문 발표가 나하고 같은 세션에서 나의 바로 다음 차례였다. 기막힌 우연이군.

식사를 마친 뒤엔 난 다시 혼자가 됐다. 이 날은 어제와는 달리 숙소 안 잡고 (1) 노숙하거나 (2) 24시간 영업하는 가게(PC방, 패스트푸드점, 카페 따위) 에서 버티거나 정말 춥고 피곤할 때에만 (3) 찜질방 정도에나 가려고 생각해 둔 상태였다.

어제 해운대 해수욕장에 갔으니 오늘은 그 다음으로 유명한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갔다. 광안리는 해운대만큼이나 지하철 2호선 역에서 비교적 편하게 접근 가능했으며, 21세기 부산의 명물이라는 광안대교가 전방에 보이고 경치가 멋있었다. 단, 모래의 품질은 해운대보다 못해서 자갈이 종종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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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은 이튿날 아침에 찍은 것임)

여기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뒹굴면서 바다와 교감을 했다. 본격 신선놀음 모드. 해변의 구석진 곳에 가서 진짜로 여기서 잠까지 잘 생각도 했으나..
부슬부슬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새벽 1시 반쯤부터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결국 근처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카페에서 이튿날 아침 6시까지 버텼다. 이렇게 하루를 보냈다.

차를 가져갔으면 전천후 이동식 텐트가 있으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런 상황에서 숙박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기기 충전은 해결할 수 없으며, 기름값과 톨비 깨지고 어딜 가나 주차비를 뜯겼을 테니 부산 정도는 이렇게 자는 게 더 낫고 마음이 편했다.

※ 토요일(10/8): 학회, 부경 대학교 석당 박물관, 용두산 공원+부산 타워, 국제/자갈치 시장

오늘은 드디어 논문 발표 세션이 있었다. 본인은 아침 9시에 제일 먼저 하기 때문에 서둘러 학교로 돌아갔다.
13년 전의 동일 학회에서는 금요일 오후부터 논문 투고자의 발표 세션이 곧장 시작됐고, 토요일에도 점심을 먹은 뒤에까지 세션이 이어졌다. 그 당시에 당장 내 논문의 발표가 토요일 오후 제일 끄트머리였기 때문에 교수님이 "니가 발표할 때쯤엔 사람들이 다들 가고 별로 없겠다" 그러실 정도였다(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던 걸로 기억. -_-).

허나 그 사이에 절차가 많이 간소화됐는지 지금은 토요일 오전에 발표 세션을 몽땅 몰아서 진행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 대신 세션이 무려 4개가 동시에 진행된다.
어째 개수를 맞췄는지 논문이 총 64개가 투고됐으며, 구두 발표가 절반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린 이런 실험을 했소" 통계와 결과 나열이기만 해서 굳이 구두 발표가 필요하지 않은 논문은 포스터 발표로 대체했는데, 이게 나머지 절반이었다. 논문 투고자들이 원하는 발표 형태가 처음부터 감쪽같이 32/32로 나뉘지는 않았을 텐데 중간 조정이 있었지 싶다.

나는 뭔가 발표나 강의를 할 때 비록 말하는 속도가 여전히 너무 빠를지언정, 시간은 그리 초과되지 않고 그럭저럭 지키는 노하우를 오랜 시행착오 끝에 터득했다. 이런 연구를 왜 했고 논문의 초 핵심 본질만 요약하는 한편으로, 논문에서 분량상 차마 다루지 못한 보충 설명 위주로만 발표를 했다. ppt는 14장이고 사실은 지금까지 탱자탱자 놀다가 ppt 자체를 전날 밤에 카페에서 급조해서 준비했다. -_-;;

나는 그럭저럭 후회 없이 말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들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1인당 발표 시간은 15분에 불과하다고 공지가 됐을 텐데 다른 분들은 최하 20장 이상에 30~40장짜리.. 이거 무슨 30분에서 1시간 분량으로 자기 연구의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소개하는 강의 자료를 가져오신 경우가 많았다.
난 14장짜리 ppt로도 15분에 간신히 맞춰서(약간만 초과해서) 발표를 마쳤는데도 말이다.

본인은 어쩌다 보니 한글 입력기와 글꼴 같은 글자 단위의 입출력 기술 관련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 내 최대의 관심사는 "한글이니까 가능한 고유한 활용 방법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하게 언어정보학 내지 언어공학의 범주에 든다. 그게 아니면 다른 카테고리를 붙일 여지가 없다.
순수하게 전산학이나 컴공의 영역도 아니고, 순수하게 언어학이나 산업디자인의 영역도 아님. 저 바닥엔 난 독자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고 논문 쓸 거리도 더 있다.

허나, 언어공학을 한다면서 정작 인공지능에 통계, 빅데이터, 머신 러닝 어쩌구 하는 분야는 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으며 딱히 전문가도 아니다. 내가 자동차나 철도 공학에 관심만 많지 그쪽으로 딱히 전문가가 아닌 것만큼이나 저쪽도 막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창작한 프로그램과 논문들은 "한글 및 한국어 정보 처리"라는 범주에는 들지만 뭔가 '주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교수님들도 잘 모르고 생각 못 한 기괴한 주제로 논문을 쓸 거니까 뭐 시간만 주어지면 졸업이야 별 문제 없이 하겠지만, 이렇게 학위 받아서 내 논문의 연구 분야를 주제로 일자리 수요가 있을지, 취업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약간의 어두운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나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고민 할 시간에 날개셋 코딩이나 한 줄 더 해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나 말고 '비주류' 주제 연구는 사실상 딱 하나 더 있었다. 숭실대에서 한글 메타폰트에 대해서 연구 발표를 했는데, 흥미롭게도 이 역시 본인과 동일한 세션에 있었다.
오전엔 이런 식으로 내 논문 발표 후에는 남들 발표를 듣고 포스터를 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학회에서는 먼저 가 버리지 말고 논문 발표를 끝까지 듣고 귀가하라는 취지에서, 세션이 다 끝난 뒤에 점심 식권을 배부했다. 덕분에 점심도 우동 스타일의 만두국으로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학회가 완전히 끝났고, 본인은 오후에 계획했던 주변 관광을 시작했다. 그런데 비가 아침에 좀 그치나 싶었는데 낮부터 또 빗줄기가 굵어졌다. 본인은 열차의 선반에 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왔지만, 돗자리와 담요는 챙겼어도 우산은 가져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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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도 피할 겸 먼저 학회장 바로 옆에 있는 석당 박물관부터 관람했다. 건물도 근대 문화재급인데 안에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와, 토기, 인물화· 풍경화 등 고미술품과 과거 유물이 많이 전시돼 있었다.
연세 대학교는 일부 건물이 구한말 때 지어져서 근현대 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기도 나름 건립 배경은 다르지만 그에 준하는 옛날 건물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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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물 밖에 있는 부산 전차도 가까이에서 구경했다. 원래 이 시간대엔 내부도 개방하지만 비 때문에 이번엔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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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학교 밖으로 나와서 비를 맞으면서 용두산 방면 동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영락 교회라고 크고 역사가 길고 유명한 듯한 교회 예배당을 지나쳐 갔다.
용두산 공원 진입로와 부산 타워가 가까이 보일 무렵에 '부산 근대 역사관'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보수산에서 관람했던 '부산 광복 기념관'과 비슷한 컨셉으로 반일 항일 테마인 박물관이었다. 여기에도 응당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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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곳이었다. 부산이 항구 무역 도시이니만큼 일제의 경제 침탈을 더욱 부각시켜 설명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아, 해방 후 얘기도 없지는 않음. 안에는 부산 전차를 비롯해 옛날 부산 시내와 상점들을 재연해 놓은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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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남산에 타워가 있다면, 부산은 용두산에 타워가 있다. 하지만 용두산은 높이가 50여 m에 불과한 아주 낮은 언덕일 뿐이기 때문에 캐리어 끌고 도보로도 큰 부담 없이 쓱싹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서울 남산 같은 케이블카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부산 타워도 높이나 크기면에서 서울 남산 타워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부산 타워는 그냥 하얀 등대 컨셉이며, 서울의 것과는 달리 전파 송신 기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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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옆엔 웬 공터와 정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비 오는 날 공원이나 산 속 정자에서 혼자 누워서 비를 피해 자거나 코딩하는 것을.. 바닷가에서 뒹구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여기서 좀 쉬다가 입장료를 내고 타워를 올랐다. 본인 주변엔 온통 중국과 일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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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에서 영도 쪽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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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제 시장 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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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건 자갈치 시장 방면이다. 본인은 타워에서 내려온 뒤엔 이쪽으로 직접 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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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 있는 다리가 영도대교이다. "매일 오후 2시 정각~15분, 도개 중엔 차량 진입 금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시간대가 안 맞아서 실제로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은 못 봤다.
본인은 몇 년 전에 해양 대학교로 가느라 바로 저 영도대교를 건넌 적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지금 같은 부산 지리 감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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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노량진 수산 시장이 있으며 본인은 몇 번 가 봤다. 허나 부산은 아예 바다를 낀 항구 도시이니 수산 시장의 규모가 서울을 능가할 수밖에 없다.
'자갈치'는 과자 이름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원전이 따로 있더라. 또한, 저 캐치프레이즈는 "왔노라, 보았노라, 질렀노라"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시저가 남긴 말의 원래 뜻은 우리말로 치면 "나 왔음. 봤음. 이김."처럼 극도로 간결하고 시크한 뉘앙스일 뿐인데 번역 과정에서 '-노라'라는 종결어미가 동원되면서 필요 이상의 간지가 추가된 것에 가깝다.
갈매기 모양의 상점 본건물을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굳이 여기에 사진을 또 첨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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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먹어 봤기 때문에 부산에서는 특별히 광어에 준하는 우럭을 선택했다.
예전에 해수욕장 투어를 하면서 식당에서 코스 요리도 먹어 보고 그냥 회덮밥도 먹어 봤으니, 이번에는 포장만 해서 먹어 봤다.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우산 쓰고서 청승맞다면 청승맞은 모습으로 회를 혼자 열심히 "쳐묵쳐묵" 했다. 정말 꿀맛이었다. 돼지도 그렇고 광어나 우럭도 그렇고, 외형이 못생긴 편인 동물들이 살은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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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 내리는 바다를 구경하면서 식사를 했다.

허기를 달랜 뒤 북쪽으로 가서 국제 시장 일대를 더 돌아다니려 했으나, 비가 계속 많이 오고 길거리가 예상 이상으로 차와 사람들로 굉장히 혼잡한 관계로, 계획한 것만치 많이는 못 다녔다. 안 그래도 날이 빠르게 어두워져서 사진을 찍기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해수욕장에서 더 놀자니 비가 계속 내릴 뿐만 아니라, 돗자리가 양면에 모두 흙이 너무 많이 묻어서 더는 무리였다. 김해 경전철 시승을 하자니 여기서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동선이 안 맞았다. 사실, 비 내리는 한낮이라면 편안히 이동하면서 비 내리는 차창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김해 경전철 시승도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했을 텐데 말이다.

이것저것 고민 끝에 당초 계획보다 일찍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는데 경주를 들르는 건 자연스러운 동선이니까. 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산에서 이 정도로 역사 안보 관광을 했는데 UN군 묘지 공원을 미처 못 들른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부산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부전 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꽤 오랫동안 머물면서 폰과 컴퓨터를 충전했다. 역에서 자체적으로 아예 벽면 콘센트에다가 멀티탭을 연결해 놓고 "필요하면 전자기기 충전하고 가세요"라고 친절하게 써 붙여 놓아 있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지만 복선전철로 탈바꿈한 동해남부선의 모습을 얼추 확인할 수 있었다. 선로를 복선으로 폭을 확장하려다 보니 시내 접근성을 희생하고 선로가 바다 구경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많이 이설됐다. 대표적으로 (신)해운대 역은 바다와는 완전히 동떨어졌고 오히려 군부대가 가까이 있는 산기슭으로 이사 갔다. 경춘선 강촌 역과 비슷한 꼴이 났다. 얘도 이름과는 달리 이제 전혀 강 근처에 있지 않으니 말이다.

리모델링된 역들은 무궁화호가 서는 저상홈 승강장과 전철이 서는 고상홈 승강장이 수평으로 나란히(수직· 앞뒤가 아니라) 생겼는데, 신기한 것은 같은 역이 무궁화호 승강장에 적힌 역명과 전철 승강장에 적힌 역명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전자는 수영 역인데 후자는 센텀 역, 그리고 전자는 그냥 해운대인데 후자는 신해운대. 궁극적으로는 전철역명으로 변경할 거라고는 하는데 그럴 거면 옛 역명으로 간판을 만들기는 왜 만들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2015년쯤부터는 동해남부선이 완전히 신선으로 이설돼서 지금의 서경주· 경주 역도 다 없어지고 신경주 역이 일반열차까지 취급하게 될 거라고 하는데 2016년 말인 현재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도 동남권 '부울경'에 철도가 앞으로 많이 바뀔 예정이니 느긋하게 지켜볼 생각이다.
얼마 안 있어 동해남부선 광역전철이 개통하면 임랑이나 일광, 송정처럼 부산 북부에 교통이 더 불편한 곳에 있는 해수욕장들도 찾아가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는 오랜만에 KTX를 이용했다.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저렇게 차선 곳곳을 틀어막고 공사 중인 걸 보니 주말에 고속버스를 탔다가는 왕창 막힐 것 같아서였다.
비록 철도 노조가 파업 중이긴 하지만 코레일도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사람이 부족하다 해도 회사에 돈을 압도적으로 제일 많이 벌어 주는 cash cow 효자인 KTX는 그야말로 최하 우선순위로 감축될 것이다. 게다가 입석 승객까지 넘쳐나는 일요일 오후에 상행은 감축 같은 건 절대 없다고 봐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차를 기필코 굴릴 것이다.

사실, 대전· 대구 시내 구간이 개통한 지도 1년이 넘었는데 그 뒤로 KTX를 타 보는 게 처음이었다. 열차는 대구 시내를 벗어나자 곧장 지하 터널로 들어갔으며, 대전 근처에서도 옥천에서부터 천천히 가는 게 아니라 또 터널로 들어가서 곧장 판암 IC까지 직통으로 달렸다. 예전에 비해 느리게 달리는 구간이 확실히 줄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이거 뭐 날씨가 싹 바뀌었다. KTX를 탄 게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계절이 다른 나라로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학회가 1주일만 늦게 열렸어도 해수욕은 못 할 수도 있었겠다.

이렇게.. 논문 쓰느라 코딩 시간을 빼앗기고 좀 힘든 나날을 보내긴 했지만, 덕분에 부산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왔다. 2003년엔 대전에 있다가 서울을 갔다 왔지만, 2016년엔 서울에 있다가 부산을 다녀 왔다.
그리고 학회가 끝난 뒤엔 내가 쓴 논문이 우수 논문 중 하나로 뽑혔다는 뜻밖의 기쁜 소식도 덤으로 접했다. 요즘 뜨고 잘나가는 연구 분야를 다룬 게 아닌데 이런 논문도 알아 주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01 19:32 2016/11/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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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본인은 지난 여름에 <부산행>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얼마 전엔 어째 진짜로 부산을 갈 일이 생겼다. 한글 및 한국어 정보 처리 학술대회에다 논문을 투고하고 발표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는 28회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쓴 건 아니고.. 학술지에 소논문을 게재하는 게 박사 졸업 이수요건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두 편이 규정돼 있기 때문에 이런 걸 조만간 하나 더 써야 한다.

이번에 쓴 논문은 사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에 넣으려 했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주제이다(하지만 결국 못 넣고 또 다음 버전 기약을..ㅠㅠ). 분량 제한 때문에 모든 아이디어나 진짜 복잡한 고급 기능 소개는 넣지도 못하고 그냥 기본적인 것에다 약간의 응용 수준까지만 다뤘다.
이런 논문은 학술지 사이트에 영원히 기록으로 남고 후속 연구자들이 검색해서 열람도 하게 되는데, 저런 태생적인 한계만 감안한다면야 나름 후회 없게 논문을 썼다.

이런 기능을 넣을 생각 자체는 회사일을 하다가 떠올리게 됐다. 별개인 것 같은 기능이 알고 보니 한글 입력에다가 이렇게 접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게 내 개인 프로그램에다가도 들어가고 논문으로 써서 졸업 이수요건도 채우게 됐으니 MS의 과거 캐치프레이즈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everything at once를 얼추 달성했다.

본인이 저 학술대회와 인연을 맺은 것 자체는 대학 학부 시절이던 엄청난 옛날, 2003년 제15회 시절이다. 지금은 은퇴하신 김 진형 교수님의 제안으로 논문을 덜컥 투고했는데, 지금도 검색하면 그걸 볼 수는 있다. 물론 그로부터 13년 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버전이 8.x가 꺾인 지금 관점에서 보면 겨우 2.x를 기준으로 작성된 논문은 가히 흑역사 급의 민망한 퀄리티가 돼 있다.
하지만 그 학술대회에서는 기조 강연 겸 기념품으로 Unicode CJK IME를 득템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아직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외부 모듈조차 개발돼 있지 않던 당시에 중요한 동기 부여와 기폭제 역할을 했다.

다음으로 본인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2012년에는 이 학술대회는 아니지만 비슷한 격으로 동시 병행 개최되던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를 참관하러 부산을 방문했었다. 거기서 전년인 2011년 대회의 입상자들을 초청해서 관람권을 줬기 때문이다. 그때 경진대회와 학술대회의 개최 장소는 해양 대학교였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올해 대회도 또 부산에서 열리니, 본인으로서는 지리적인 면모가 약간 아쉬웠다.
여기는 자가용과는 완전 상극인 위치였다. 강원도나 경기도의 적당한 오지라면 미지 탐험도 할 겸 응당 차를 가져갔겠지만, 일행도 없이 혼자 이 장거리를 차 끌고 가는 건 금전과 체력 소모가 심하다.
또한 부산은 대도시일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 대비 도로 사정이 안 좋은 걸로 전국적으로 악명 높으며, 반대로 학회 장소는 지하철역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그러니 여행은 어딜 가든 캐리어 끌면서 뚜벅이 형태로 가게 됐다.

그리고 교통· 지리와 관련된 또 다른 악재는.. 기왕 부산을 대중교통만으로 방문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왔는데, 하필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의 개통 시기를 미묘하게 비껴 가게 됐다는 것이다. 선로는 다 완공됐지만 서울 수도권 바깥에서 통근형 전동차가 다니는 진풍경은 못 봤다.

단점 얘기는 여기까지. 뭐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본인은 태어난 이래로 제일 치밀하게 부산 투어를 해서 제한된 시간 동안 뽕을 뽑고 왔다.
<부산행>, <해운대> 같은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부산은 어째 재난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부산은 근대기 개항 이래로 일제 강점기, 6· 25, 그 뒤 민주화 운동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은 동네이다.

대도시로서 1960년대에 전국에서 최초로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해방 직후에 서울·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노면전차가 다녔던 3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6· 25 전쟁 중에 평양에 잠시 태극기가 꽂힌 적이 있던 것만큼이나, 부산은 전쟁 중에 임시 수도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전국의 피난민들이 한데 몰려들었으며, 전국의 대학교들이 부산에 한 자리에 임시 캠퍼스를 개설해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학회 장소인 동아 대학교 부민 캠퍼스가 부산 역사의 중심지인 아주 기가 막힌 곳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람찬 관광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 목요일(10/6): 해운대 해수욕장

학회의 시작은 금요일부터이지만, 본인은 부산에서 작정하고 놀기 위해서 그 전날에 집을 나섰다. 물놀이와 노숙이 가능하게 갈아입을 옷 여러 벌에다 돗자리와 작은 담요까지 커다란 캐리어에다 몽땅 집어넣었다.

8월 말까지는 논문 쓰는 것 때문에 '문장을 어떻게 다듬을까, 주제별 분량 편성을 어떻게 할까' 갖고 왕창 고민했다면, 9월 말에 학회 참가가 확정된 뒤부터는 여행 계획을 짜느라 '일정 전후로 관광은 어떻게 할까, 열차냐 버스냐, 어디부터 먼저 갈까, 산에서 잘까 바다에서 잘까'로 고민의 양상이 바뀌었다.
차 없이 장거리 여행을 하면 무슨 교통편을 선택할지가 마치 프로그램 짜듯 고민거리가 된다. 그런데 동서울-해운대 직행 시외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가는 길은 모든 논란이 종결돼 버렸다. okay!

해운대까지는 5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오랜만에 보는 대구-부산 민자 고속도로 구간은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지나고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단,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영동뿐만 아니라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죄다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었으며, 차선이 하나 틀어막혀서 차량 정체가 발생하곤 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남쪽으로 몇 블록 걸어가니 말로만 듣던 해운대 해수욕장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아서 짐들을 갖다놓고, 물놀이용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버스 안에서 배터리를 다 소진해 버린 폰과 노트북 PC는 콘센트에 꽂아서 충전시켜 놨다. 그 뒤 방 열쇠만 몸에 지닌 채 해변으로 가서 물에 뛰어들었다.

나 요즘 해수욕 즐기는 데 재미 붙였다. 올해에만 해도 동· 서· 남해 바다에서 제각각 다 놀아 봤다.
계곡이나 강에 비해서 바다는 물이 덜 시원하고 끈적거리고 모래 붙는 거 신경을 써야 한다. 물놀이를 마친 뒤에 샤워 같은 후처리가 반드시 필요해서 번거롭다. 하지만 일단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으며 파도가 치는 게 역동적이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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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아주 맑고 따스해서 물놀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바로 전날 이 동네에 강풍과 물폭탄이 쏟아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만, 시설이 부서진 게 있는지 근처에서는 무슨 복구 공사가 한창이긴 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품 해수욕장답게 모래는 자갈· 돌 같은 걸 전혀 찾을 수 없으며 품질이 좋아 보였다. 글쎄, 소실되는 양이 많아서 모래를 외부에서 사 와서 보충한다고는 하던데..;;
또한, 시골이 아닌 대도시 소재이다 보니, 모래사장 바로 뒤로 곧장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것도 이색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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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가까이 물에서 돌아다닌 뒤엔 여관으로 돌아가서 씻고 옷을 다시 갈아입고, 해변에 두 번째로 찾아갔다. 이제부터는 물엔 가끔씩 발만 담그고 나왔으며, 모래밭에 돗자리를 깔고 이런 식으로 뒹굴거렸다. 점심 도시락도 이 자리에서 꺼내서 먹었다.
맥북은 산과 바다 어디에서든 저렇게 나의 든든한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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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이 공식적으로는 폐장한 상태이고 평일에 날도 저물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해변의 끝부분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물놀이에다 산책을 많이 하니 꽤 피곤해져서 숙소로 돌아가 좀 쉬었다. 그 뒤 완전히 밤이 된 뒤에 세 번째로 해변으로 갔다. 돗자리와 담요, 컴퓨터, 간식/야식거리만 챙겨서 아까보다는 짐을 줄인 상태로 가서 뒹굴거렸다.

부산 아니랄까봐, 해수욕장 모래밭에서도 인근 건물에서 쏘는 와이파이가 잡혔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의 업로드와 내 홈페이지 갱신은 바로 부산 해운대에서 행해졌다.
인제는 제법 쌀쌀함이 느껴져서 담요가 제 역할을 했다. 이대로 자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잠들었다.

※ 금요일(10/7): 보수산 중앙/민주 공원, 임시 수도 기념관, 학회, 광안리 해수욕장

오후부터 드디어 학회가 시작되니 그 전에 아침엔 부산 역과 동아 대학교의 사이에 있는 보수산이라는 산을 올랐다. 이 산의 정상에는 꽤 큰 규모의 여러 공원들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 강점기, 6· 25, 민주 항쟁 등 이념 한번 참 다양하더라.

해운대에서 부산 역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목적지까지는 버스 환승을 했다.
여담이지만 부산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서면 역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상당한 개념환승(환승 거리 짧음)인 게 좋았다. 서울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신설동 역은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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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북쪽에 있는 무슨 충혼탑. 검색을 해 보면 무엇을 기리기 위해 언제 세운 탑인지가 나오겠지만 생략한다. =_=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은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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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의 이남으로는 이렇게 조각 공원도 조성돼 있었다. 경치 좋고 날씨도 좋아서 여기서 산책이나 혼자 코딩, 아니면 심지어 노숙을 하기에도 적절해 보였다.
그 뒤로는 4· 19 혁명 기념탑이 있었는데 사진은 생략함.
또한 산 정상에서 주변 풍경을 몇 장 찍은 것도 있으나, 이것보다는 부산 타워에서 찍은 사진이 더 높고 전망이 좋으니 그걸로 대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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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근처에는 부산 광복 기념관이 있었다. 이건 일제 강점기 역사 버전이다.
1876년에 체결되었던 강화도 조약이 생각보다 꽤 불평등한 조약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3· 1 운동 기간 당시(1919년 3~4월)에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각지에서 벌어졌던 만세 시위에 대한 기록도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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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의 글씨체부터가 뭔가 노사모스럽고 "사람이 먼저" 이런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내부에 안내 표지판들의 주요 용어들도 통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로 바꿔 적어서 옷차림으로 치면 개량 한복스러운 느낌이 났다. 나도 엄청 국수주의적인(?) 한글 입력기를 전문으로 개발하는 사람이고 저런 시도 자체는 나쁠 게 없으나, 정치색과 관련된 이상한 편견이 생기고 나니 보기가 괜히 민망하다. =_=;;

보수산 꼭대기에 있는 각종 건물과 시설 중 이 민주 항쟁 기념관이 규모가 제일 컸다. 그래서 공원 전체의 대표 이름도 '민주 공원'이다.
이 승만 말기의 4· 19라든가 박 정희 말기의 부마 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까지는 나도 의미를 인정하겠다만.. 거기에 왜 5· 18까지 다루고 있고(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며 지역적으로 딱히 부산과 관계가 있지도 않음) 효순· 미선 반미 시위나 6· 15 정상 회담 얘기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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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주 항쟁 기념관보다도 더 남쪽으로 가서 샛길로 빠지면 '대한해협 전승비'가 나온다.
6· 25 전쟁 당시에 북한군은 38선을 넘어서 육로 전방으로만 쳐들어온 게 아니라 동시에 부산으로도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무장 병력을 침투시켰다. 그랬는데 우리나라 해군이 1950년 6월 26일 새벽에 이 괴선박을 발견하여 격침시켜서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들을 꼬르륵~ 수장시켰다. 비록 국군이 그 뒤로 밀려서 서울도 빼앗기고 후퇴하게 됐지만 어쨌든 이 전투가 우리나라로서는 6· 25 '전쟁' 중에 벌어진 전투들 중 최초의 '승전'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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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산에는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하여 볼것들이 아주 많았다.
산을 오르내리는 지름길은 이렇게 압박스러웠다. 이런 데서는 살기가 무척 힘들 것 같다.
여기서 동아 대학교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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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대학교 부민 캠퍼스가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이 먼저 날 반겼는데, 이건 실제로 옛날 건물이며 지금은 동아 대학교에서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학회는 그 옆의 신축 건물인 '국제관'에서 열림.
여기까지 관람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일단 본인은 학교 뒤에 있는 임시 수도 기념관을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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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수도 기념관도 빨간 벽돌 스타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상하이에 임시 정부 거처가 있었던 것처럼 6· 25 전쟁 중엔 우리나라 정부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대통령이 바로 여기에서 지냈다. 국회도 부산에서 열렸고.
저 건물은 그때의 그 건물 자체는 아니고 원형을 따라 나중에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대통령 관저, 그리고 전시관 이렇게 두 파트로 나뉘어 있으며, 두 건물은 살짝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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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과 대통령 집무실이다. 지난번에 고성에서 봤던 대통령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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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저렇게만 써 놔도 업적과 흑역사에 대해 충분히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잘 써 놨다.
한강 다리 폭파나 보도연맹 같은 극단적인 팩트까지 다룰려거들랑 남조선 대통령의 실책에다가 0이 몇 개는 더 붙은 수준의 훨씬 더한 악행을 저지른 공산당의 민간인 학살까지 같이 거론해야지. 예를 들면 개전 초기의 서울대 병원 대학살 같은.

오글거리는 미화나 우상화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악의적이고 불순한 왜곡이나 좀 하지 마라. 그 시절에 저런 대통령이나 희생이라도 없었고, 욕먹을 걸 감수하고라도 살짝 장기집권 안 했으면, 남조선 전체가 빨갱이 치하에 들어갔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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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제시장>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역사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53년에는 부산에 화재 참사가 두 번이나 났었다. 1월 30일엔 국제 시장에서, 그리고 그 해 11월 27일엔 부산 역 일대에서 큰 불이 나서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 송두리째 박살이 났다.

그리고 195~60년대 우리나라의 컬러 사진을 보면 산업화 이전의 옛날이 오히려 꼬질꼬질하며, 산과 언덕에도 나무라고는 찾을 수 없고 지금의 북한처럼 누런 흙이 다 드러나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이 낡고 바래서 누런 톤으로 변한 게 아니다. 인간이 화석 연료와 각종 금속· 플라스틱 재료를 활용하기 전에는 당장 동네 뒷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그런 연료와 건축 자재 역할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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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할 때는 총기를 갖고 오되(우리가 득템 노획해야 하니까), 손에 쥐지 말고 목에다 덜렁덜렁 걸치고 오너라."
"살 수 있는 유일의 길은 귀순뿐이다! 용단을 내려서 귀순하라!"
전시관에는 6· 25 전쟁 당시에 살포되었던 삐라들이 특집 전시되어 있었다. 하긴, 강원도 화천의 파로호 안보 기념관에서도 봤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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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는 무슨 초등~중등학교가 아니라 인서울 대학교들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저런 데서 수업이 진행됐다.

역사 얘기를 더 보충하자면, 6· 25 전쟁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1950년 8월 18일부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그러다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에 평양까지 점령하자 정부는 10월 27일에 환도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1951년에 전세가 도로 38선 이남으로 밀리자 정부는 1· 4 후퇴 바로 직전인 1월 3일에 다시 부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날이 1950년 10월 1일인데, 적군이 38선 이남으로 도로 넘어온 날이 1951년 1월 1일이니 정확히 3개월 만의 통한의 후퇴였다.

3월 14일, 아군이 2차 서울 수복을 이뤄 냈지만 이번에는 우리 정부는 예전처럼 곧장 환도하지 않고, 전쟁이 완전히 휴전으로 귀착될 때까지 후방인 부산에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1953년 광복절에야 2차 환도가 이뤄졌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 특히 서울 시민이라면 윤 봉길· 안 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 거사를 이룬 날이나 순국한 날뿐만 아니라 6· 25 전쟁 때 우리나라가 서울을 수복한 날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 구경하고 나니 이제 시간이 되어 본인은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첫째 날에는 강당에서 가만히 앉아서 그저 강연들을 듣기만 하면 됐다. 처음에는 근래에(지금으로부터 1년 이내에) 언어 공학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진 연구자들 4명이 초청을 받아 자기 연구 분야에 대한 강의를 했고, 그 다음엔 이 바닥에 이미 유명한 교수들 4분이 강의를 했다.

카이스트 학부 시절에는 얼굴을 한 번도 못 뵈었고 딱히 학부 강의를 하지도 않는 것 같으시던 최 기선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시맨틱 웹이 어떻고 온톨로지가 어떻고 하는 외길을 가시는 듯하던데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_=;;
경주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 변 정용 교수님도 여기서 강의를 하셨고 본인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분들 말고 또 기계번역과 관련된 강의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학술대회에 후원을 많이 해 준 네이버, NC소프트와 솔트룩스라는 기업의 "자기 회사 자랑 + 인재 모집" 소개 세션도 있었다. 네이버야 검색엔진 전문이니까 자연어 처리에 관심이 왕창 많을 수밖에 없는 기업이지만, 엔씨는 온라인 게임 개발사 아냐?
비주얼 C++에 유니티 3D 엔진을 잘 다루는 클라이언트 개발자, 유닉스 셸 스크립트와 컴터 보안에 능통한 서버/DB 개발자, 혹은 2D 원화/3D 모델 디자이너만 뽑을 것 같은데.. 의외로 거기 내부에도 인공지능 및 자연어 처리 연구소가 있어서 석· 박사급 연구원들이 논문도 많이 내고 있었다. 경쟁사인 넥슨엔 그런 게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는데 말이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10/29 08:30 2016/10/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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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2016년이고 좀 있으면 우리나라에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도 30주년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개헌과 디노미네이션(화폐 개혁)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21세기 전반부에 풀고 가야 할 대표적인 숙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지금 당장까지는 아니어도 예측 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추진하는 것에 찬성 입장이다.
먼저 정치 쪽은.. 대통령 선거 타이밍을 국회의원의 타이밍과 맞추고, 대통령은 미국처럼 4년 + 호응 좋으면 1회 중임 가능하게 하는 게 어떨까?

우리나라가 역사 정서적으로 독재자의 엿장수 식 개헌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있는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발 때문에 지금 헌법은 반대로 고치기가 너무 어렵게 바뀐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본인이 예전에도 생각을 밝혔듯이, 옛날에 그 정도 독재는 당대의 국민 의식 대비 북한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 정도로 위태롭던 시기에도 그 정도 인권유린이나 정치범 탄압 부작용밖에 없었다면, 세계 역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나마 아주 선량한(?) 독재였다고 본다.

그 독재 권위라도 없이 국론이 완전 사분오열돼서 나라꼴이 도떼기시장 개판오분전이 되고 뭐 하나 큰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맨날 반대를 위한 반대에, 조선 시대식 당파 싸움에, 제발 데모질 좀 하지 말라고 데모가 벌어지고, 이 틈을 노려 공산주의자 간첩들이 활개를 치면서 민· 관을 마음껏 이간질하다가 또 북한이 남침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라. 이것보다야 차라리 강력한 독재가 나았으며 특히 그 옛날에는 그게 더 절실한 필요악이었다. 오죽했으면 전땅크의 5. 18은 몰라도 박통의 5. 16 쿠데타는 그 시절에 어지간한 지식인 지도층들도 지지했을 정도였다(예: 장 준하).

그 와중에 민주화라는 것도 백성들이 그냥 저항만 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거 아니다. 통치자들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최소한의 선량한 마인드는 갖춰져 있었으니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그게 아니라면 북한은 주민들이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남조선 인민들보다 부족해서 저 지경이 된 것이겠는가?

예전의 통치자들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비리 저지르고 잘못한 거야 신나게 까고 비판하고 씹어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국민이 감시를 잘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큰 그림을 보면 명백히 썩은 내 풀풀 나는 쓰레기 시궁창 속에서 그나마 이 정도 꽃이라도 기적적으로 피워 낸 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우리나라가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끼리 아~주 평화롭게 통일 국가 이뤄서 잘 살 수 있었는데 무슨 나쁜놈이 친미 친일 공화국을 만들고 나라를 분단시키고 좋은 기회를 다 망가뜨렸네 하는 그딴 소리에는 본인이 내 양심과 명예를 걸고 죽어도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반대한다.
통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 시절에 그런 식의 통일이란 100% 김 일성 치하의 적화통일을 의미할 뿐이지. 그 나이 쳐먹도록 아직도 그런 순진한 말을 믿고 있냐?

얘기가 좀 엉뚱하게 흘렀다만.. 아무튼 북한을 대치하고 있는 시국 속에서 우리나라는 미군정을 졸업하고 군사 정권까지 청산한 뒤, '직접 민주주의'까지 잘 이뤘다. 하지만 이제는 1987년 체제도 좀 초월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렇게 정치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민주화? 직선제 등등)..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북한 주민들을 구출한 급이 아닌 이상, 나라를 외적 침략으로부터 지키거나 가난을 극복한 일만치 위대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 역시 변함없다. 그게 급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화폐 얘기다. 우리나라의 헌정 시스템은 since 1987이라지만, 지금의 '원'이라는 단위 체계는 무려 since 1962이다. 박통 때 제정된 돈이 만약 있기만 하다면 지금도 동일한 액면가로 통용 가능하다. (물론 그런 골동품 돈은 액면가 그대로 써 버리는 건 완전 바보짓이다. 수집가에게 파는 게 훨씬 더 이익이므로.)

허나, 대한민국 급의 선진국들 중에서 이 '원'만치 가치가 너무 작고 반대로 자릿수가 너무 큰 화폐단위를 쓰는 나라는 없다. 반세기 동안 인플레가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10만원 지폐까지 만들 지경이 된다면 그걸 하느니 끝의 0 한두 개를 좀 없애 버리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화폐를 새로 만들 때쯤이면, 제발 조선 시대 이씨 말고 대한민국 시대 인물도 모델로 좀 넣자.
굳이 조선을 또 넣을 거면 성역 고정출연급인 세종대왕 이 순신 말고는 장 영실· 정 약용 같은 발명가, 실학자 계열을 넣고 말이다. 유학자들만 너무 빨아댄다. 유교탈레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저게 평판이 얼마나 안 좋은데!

이런 개헌과 화폐 개혁이 통일과 함께 안 그래도 어차피 사회 기반을 갈아엎어야 할 타이밍 때 원큐로 싹 같이 진행돼 버리면 비용도 제일 덜 들고 좋을 것이다. 이 시기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광복 전후, 6· 25 전후 같은 급으로 분위기가 싹 달라질 것이고 그 날은 아마 국경일· 기념일 정도는 돼서 달력에 표기될 것이다.

아, 한반도에 유일하게 바람직한 통일, 평화 통일, 진정한 통일이란 당연한 말이지만 이북의 김돼지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든, 군사력으로 쳐부수든 어쨌든 걔네들이 축출되고 제거되고 처벌받는 통일밖에 없다. 그것 말고 적과 싸우다 져서 통일 '당하든가', 적과 내통하고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에게 왕창 돈 갖다 바쳐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얻은 통일 따위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잘못된 통일이다.
아무리 통일이 좋기로서니 주체사상 내지 김돼지 부자 동상을 그대로 놔 두고 존치시킬 생각이신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 보라.

제대로 된 통일이 불가능하다면 차선· 차악 차원에서 차라리 영구분단이 1억 배 이상 낫다. 사채· 보증 써서 막느니 차라리 평범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나은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어차피 북괴는 교류 끊고 고립만 제대로 잘 시켜도 알아서 붕괴한다. 굳이 전쟁 벌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
상황이 급하고 저자세로 나와야 되는 건 걔네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걔네들이 그 와중에 핵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한 건 그렇게 고립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군인의 본분에다 비유하자면 작전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경계에 실패한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비극이 앞으로 다시는 없어야 한다.

북괴 정권은 완전히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폭탄 끌어안고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자기가 없어지더라도 땅 한 평, 인민 한 명이라도 남조선에 도움이 될 건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독 뿌리고 방사능 오염시키고서 망할 게 뻔히 보인다. 차라리 중국에다 주면 줬지 우리한텐 안 준다. 옛날에 일제가 핵폭탄 안 맞았으면 마지막까지 전인민 옥쇄니 뭐니 하면서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된다. 북한은 그런 나라이다.

그렇게 김돼지 정권을 몰아냈다고 생각해 보자. 못 먹어서 허약하고 기형이고 마약에까지 취한 인민들.. 물론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제는 해야겠지만, 반쯤 병신인 인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제력이나 생산 능력이 있을 리 없을 것이고 이건 통일 비용을 왕창 잡아먹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민족끼리'의 허상을 버리고, 북괴 정권을 도와준 건 인민에게는 절대 안 간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괴를 조직적으로 고립 압박해서 망하게 해야 한다. 이럴 자신이 없으면 그냥 영구분단으로 가든가.

이 개념을 복습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전혀 사실이 아님

  1. 통일은 지금 외세의 방해 때문에 못 하고 있다.
  2. 김씨 부자 정권과 주체사상을 그대로 존치하면서 남북을 통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 적절하다 / 옳다.
  3. 북한 정권은 완전히 개과천선해서 대남적화 야욕이 없어졌다.
  4. 북한은 정부가 인민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다른 외형적인 불가피한 이유 때문에 못살고 있다.

* 100% 절대무오한 사실임

  1. 통일은 남 탓 할 필요 없이 북괴의 잘못된 통치 이념과 사상 때문에 못 하는 것일 뿐이다.
  2. 북한은 이념으로서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공산주의는 물론 진작에 버렸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제일 만만한 나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위장, 간첩질, 거짓 선동, 유언비어, 역사왜곡, 계층간 이간질 등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은 여전히 적극 운용 중이다.
  3. 정상적인 경제개발 및 군사력 육성으로 남조선을 적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쟤들은 더 극단적이고(핵 등 비대칭무기) 치사한(위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북쪽에 대해서 positive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쟤들이 공략하는 건 오로지 남쪽에 대한 negative이다.
  4.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아는 게 힘이다. 이제라도 우리보다 힘센 일본을 배우자. 근대화하자" 이런 움직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북한에게서 우리가 일말의 배울 만한 선한 것이 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쟤들은 하다못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비열하고 더러운 전술에 속지 말아야 하고 경계 분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5. 자기도 말로만, 입으로만 북한 정권 싫어한다 김 일성 싫어한다 그러면서 필요악과 절대악은 구분할 줄 모르고, 6·25 전쟁이 무슨 남북 양비론인 줄 알고, 적화통일 반대한다면서 적화통일 자금줄 대주는 일에는 아무 관념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남조선에 너무 많다.

위와 같은 나의 팩트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내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내지 정치와 관련하여 쓰는 글에는 북괴, 종북개빨, 더 나아가서 좌좀 깨시민 같은 과격한 단어가 사라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면, 누구든지 위의 저 전제조건들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 된다. 남이 지지하는 것의 욕만 자꾸 하지 말고 자기가 지지하는 것이 옳고 맞다는 걸 입증해 보이면 된다.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맞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오픈소스가 아니지만 난 사상 체계는 철저한 오픈소스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논리를 구성하는 근거 팩트들을 아주 투명하게 제시해 놓았다. 저것만 무너뜨리고 논파하면 내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남이 뭐라고 지껄이든 듣지 않고 답은 정해 놓고 박박 우기는 거야말로 폐쇄 클로우즈드 소스겠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 나라 체계 하에서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특혜 받고 나쁜짓 하고 평범하게 부정축재 해 온 놈과,
아예 적국에게 자금 바치고는 그걸 온갖 평화드립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오로지 자국 폄하만 일삼는 놈이 어떻게 서로 레벨이 같냐..? -_-;;
저 둘은 성경에서 아담의 죄와 루시퍼의 죄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고, 노아의 홍수와 이전 세상 홍수가 다른 것만큼이나 완전히 다르다.

후자가 전자보다 청렴하기라도 한 것도 당연히 절~대 아님. 선조의 친일 내력이나 자식새끼의 특혜/병역비리를 파자면 절대적으로 평균이나 그 이상 나온다. 서로 네거티브 대결만 해서는 양쪽 다 오십 보 백 보이고 끝이 안 난다. 6· 25의 책임이 양비론인 게 아니라 이런 거나 양비론 피장파장이다. 그러니 결국은 대적관과 이념의 건전함으로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

통일이란 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마치 결혼이나 교통사고처럼 나(혹은 우리나라)만 잘한다고 혼자 할 수 있거나 예방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게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통일에 덧붙여서 개헌· 디노미네이션까지 국가 체계를 적절한 타이밍에 잘 개편해 내는 복을 누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더 늦기 전에 좋은 타이밍 때 220볼트 승압을 싹 해치웠고 철도 표준궤 개궤를 해서 미래에 후손들이 편해진 것처럼 말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때쯤이면 한글 글자판도 세벌식 중심으로 다시 제대로 논의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26 08:31 2016/10/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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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공원 내부의 셔틀버스, 맹꽁이 전기차

서울 상암동에 있는 하늘 공원은 월드컵 경기장과 가까이 있으며, 역시나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시기에 맞춰서 개장했다. 사실 얘는 인근의 평화의 공원, 노을 공원, 난지천 공원과 더불어 '월드컵 공원'이라는 단지를 구성하는 공원 중 하나이다. 요컨대 서울에는 올림픽 공원만 있는 게 아니라 월드컵 공원도 있다.

본인은 지난 10여 년 동안 여기를 교회 친구들이나 다른 지인과 함께 몇 번 가 봤다. 하지만 지하철(월드컵경기장 역)로든 승용차로든 월드컵 경기장 쪽에서 접근해서 하늘 공원으로는 걸어서 계단으로 직접 오르기만 했다.
하늘 공원 내부의 주차장에 직접 주차를 한 건 최근에 간 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공원 꼭대기까지 도보가 아니라 '맹꽁이 전기차'라고 불리는 내부 셔틀버스를 타고 올랐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물론 무료는 아니다. (1인당 편도 2천, 왕복 3천원)

남산에도 전기 버스가 다니긴 한다만, 하늘 공원에도 이런 게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사실, 하늘 공원뿐만 아니라 옆의 노을 공원 캠핑장과 노을 공원 주차장 사이에도 동일한 전기차가 다닌다. 차량 한 대엔 10~12명 정도가 탈 수 있다.
이 전기차는 제3궤조나 전차선을 통해서 급전받는 건 아니고 배터리 기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차량이 한없이 쉬지 않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고 주기적으로 충전이 필요하다. 또한 차량의 덩치나 출력에도 응당 한계가 걸린다.

맹꽁이 전기차를 타는 느낌은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유적지 내부에서 툭툭이를 타던 느낌과 비슷했다.
사실, 우리나라 정도의 자본과 기술이 있는 나라이니까 전기차이지, 못사는 나라라면 이렇게 관광지· 공원 내부를 다니는 셔틀은 죄다 선진국에서 차령 경과로 폐차된 2행정 삼륜차 툭툭이 같은 차량일 것이다. 배기가스 처리도 제대로 안 하는 것들..;;
전기 자동차가 배터리 충전과 항속거리 문제만 잘 해결해서 내연기관 자동차 대신에 실용화가 됐다면 얼마나 가볍고 조용하게 잘 달렸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2. 식물 이야기

하늘 공원에 펼쳐진 푸른 억새밭과 꽃밭은 이번이 처음 구경하는 건 아니지만 다시 봐도 경치가 참 아름다웠다. 머리가 복잡할 때 기분 전환 효과가 탁월했다. 강 건너 멀리 빌딩숲이 아니라 들판만 바라보면 무슨 마라도 내지 Windows XP 초원 배경 같지, 인서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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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빨간 꽃은 양귀비이다. 모든 버섯이 독버섯은 아니며 모든 뱀이 독사는 아니듯, 모든 양귀비가 마약 성분이 든 품종인 것도 역시 아니므로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처럼 꽃밭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John Rutter라고, 찬송가 중에서도 좀 시편 8편스러운 창조 세계 찬양과 성탄 캐롤 분야 작곡이 전문인 영국의 유명한 음악가가 있다. 이 사람이 만든 성가 중에 Look at the world (바라보라 세상의 모든 일들)라는 불후의 명곡이 있는데..

Look at the earth: bringing forth fruit and flower
Look at the sky: the sunshine and the rain

Praise to thee, O Lord for all creation
Give us thankful hearts that we may see!
All the gift we share, and every blessing
All things come of thee.


곡중의 2절 가사가 떠올랐다.

꽃은 동물로 치면 일종의 생식기이다. 풍매화는 꽃가루를 단순히 바람에다 날리기만 하지만, 충매화는 예쁜 꽃과 달콤한 꿀을 만들어서 곤충을 끌어들인 뒤, 꽃가루가 덩달아 묻은 곤충들이 열심히 날아다님으로써 꽃가루+암술 교접과 번식이 저절로 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매화가 풍매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생겼다. 풍매화는..?? 퀄리티가 "엥? 걔들도 꽃이 피긴 해?" 수준이다. 소나무나 벼가 꽃이 핀다고는 하지만 백합· 장미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옛날에 <생명 영원한 신비> 다큐에서도 충매화에 대해서는 풍매화와 비교했을 때 정말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룬 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신자들은 신이 그렇게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믿고, 그 다큐에서는 생명이 스스로 진화해서 그런 걸 만들었다고 얘기하니,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풍매화는 그냥 광고 찌라시 내지 스팸 메일을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 살포하는 것이고, 충매화는 그래도 목적을 갖고 가게를 찾은 고객에게 사은품과 함께 자매품 광고를 같이 하는 것과 같다. 후자가 광고 효율이 더 높을 거라는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기계공학적으로 봐도 풍매화가 그냥 글라이더 내지 증기 기관이라면, 충매화는 진짜 엔진 달린 비행기 내지 내연 기관 급의 혁신인 것 같다.

본인은 생물학하고는 완전히 담을 싼 배경이지만 이렇게 식물의 번식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자동차 운전과도 관계가 있다. 봄철에 나무 아래 그늘에다 차를 세워 놨는데, 나중에 보니 잎과 가지 정도만 위에 떨어진 게 아니라 차 전체가 뿌연 송홧가루 테러를 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그래도 차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게 의외로 멀리까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송홧가루를 이렇게 많이 살포해도 가성비는 꿀벌이 나르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식물 중에도 곤충과 상생하는 게 아니라 아예 곤충을 잡아먹는 놈도 있고, 또 '라플레시아'처럼 거대하지만 지독한 악취를 내는 못생긴 꽃을 피우는 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것대로 꿀벌이 아니라 '파리'를 끌어들여서 꽃가루를 퍼뜨리려는 의도라니 참 이것도 걔네만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그리고 하나 더.. 동물은 어지간히 이상한 예외적인 종을 제외하면 암컷과 수컷이 따로 있다. 식물은 반대로 비록 수분(가루받이) 자체는 다른 몸체의 것으로 하더라도 일단 한 몸체에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나, 이것도 예외가 있어서 동물 중에도 자웅동체가 있으며, 식물 역시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인 자웅이주(암수딴그루)가 있다.

자웅이주의 대표적인 예로는 살아 있는 화석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은행나무가 있다. 전세계를 통틀어 단 한 품종밖에 존재하지 않아서 언어 계통으로 치면 고립어처럼 다른 나무와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없는 아주 유니크한 놈이라고 한다. 얘가 수분을 해서 열매를 맺었는데 그게 잘못해서 터지면 주변에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암그루와 수그루가 서로 만나지만 않게 배치하면 도시 가로수로서 다른 자질들은 다 훌륭한데 그 악취만이 문제라고..

그런데 묘목 수준일 때 이 은행나무가 암그루인지 수그루인지를 파괴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판별하는 게 과학적으로 꽤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여러 모로 나무들도 다 같은 나무가 아니고 침엽수와 활엽수, 상록수와 낙엽수 구분도 있는 등 굉장히 신기한 특성이 많다.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은 지금처럼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덕후가 될 여지는 없는 시절을 살았으니, 그 머리로 자연 속에서 완전 동식물 분류 덕후가 된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 같다. (왕상 4:33)

단백질인가 뭔가 하는 성분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똑같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질이어도 식물이 동물보다 보존성이 훨씬 더 뛰어나며, 부패하더라도 그 중간 과정(비주얼이나 악취)이 훨씬 덜 혐오스럽다. 식물의 씨 vs 계란, 두유 vs 우유 같은 식품의 차이점을 생각하면 명백하다. 꽃가루도 일반적인 환경에서 딱히 상하거나 썩지는 않는다고 하며, 꿀조차도 상한다거나 냉장· 냉동 보관 필수 이런 말은 내가 들은 적이 없다. 이것도 시사하는 바가 큰 차이점이라 여겨진다.

3. 풍경

갑자기 식물 얘기가 좀 길어졌다만..
하늘 공원에서는 아래에 있는 '난지 한강 공원'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하늘 공원이 고지대이고 식물들 때문에 산책로 위주로만 다녀야 한다면, 한강 공원은 말 그대로 한강과 더욱 가까이 있으며 잔디밭이 있어서 거기서 돗자리 깔고 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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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서 모든 사진은 스마트폰으로만 찍었다.

그나저나, 월드컵 공원에 포함돼 있지는 않지만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는 또 매봉산이라는 자그마한 언덕이 있다. 얘는 쓰레기와는 무관하고 진짜로 자연적인 산이다. 여기 산 속에는 1980년대까지 국가에서 석유를 비축해 놓던 기름 탱크가 남아 있는데, 요것들은 나름 국가 기간 시설인 관계로 민간 항공 지도에 표시되지 않고 가려져 있다.
이쪽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답사해 보고 싶다. 옛날에는 이 언덕 전체가 아마 민간인 접근 금지였지 싶다.

4. 쓰레기 매립지의 변천

하늘 공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평범한 해발 100미터짜리 언덕이 아니다. 여기가 한때는(25~30년쯤 전) '난지도'라고 불리는 거대한 쓰레기 산이었다는 걸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올림픽 공원을 건설하던 부지에서는 몽촌토성 유물이 나왔지만 월드컵 공원의 부지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쓰레기가 쌓여서 저 높이와 덩치의 산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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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난지도에서 '난'은 難이나 亂 같은 안 좋은 뜻이 절대 아니라 蘭, 즉, 난초라는 꽃을 뜻하는 아주 향기로운 이름이었다. 쓰레기 매립이 시작되기 전에 거기는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들판이었고 데이트 내지 심지어 신혼여행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는 원래 지금과는 정반대로, 홍수를 맞으면 종종 침수도 되는 저지대였다.
그랬던 곳이 한때는 서울 시민들이 배출하는 오물, 건축 폐기물, 하수 슬러지 등등을 한몸에 뒤집어쓰고서 온갖 해충과 악취를 내뿜는 죽음의 장소로 전락한 것이다. '달동네'만큼이나 예쁜 이름과 실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예에 속한다.

이런 내력으로 인해 하늘 공원 곳곳에는 땅 속 쓰레기의 부패로 인해 발생하는 메탄 가스를 수집하는 시설이 있고 바로 옆엔 열병합 발전소인 지역 난방 공사도 있다. 일반 쓰레기들은 방사능 폐기물만치 위험하지는 않으며, 완전히 분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방사성 원소의 반감 붕괴 주기만치 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양이 너무 많으니 처리하는 게 골칫거리이다.

하늘 공원의 이런 외형과 내력이 믿어지지 않거니와, 옛날에는 겨우 마포구 상암동 일대가 쓰레기 매립지일 정도로 서울 시내가 그만큼 작기도 했다는 것 역시 실감이 안 간다. 남산이 있는 곳이 벌써 서울의 남쪽 외곽으로 간주되었고 합정동 일대에 무려 화력 발전소가 있으며, 조선 시대엔 한강 모래사장에 아예 사형장(새남터)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시절에 거기는 서울 시내에서 완전히 떨어진 교외 변두리로 여겨졌음을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에 비해 사회 인프라가 부족하고 시민 의식이 미개해서 교통사고 1위, 쓰레기 배출량 1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러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땐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쓰레기 봉투 종량제와 쓰레기 분리 배출이 당연한 관행으로 잘 정착한 지 오래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도면 이제 세계적으로도 쓰레기나 하수 처리 같은 건 환경 오염을 최소화하게 선진적으로 잘하는 축에 든다. 육지뿐만 아니라 안산 시화호나 울산 태화강도 옛날에는 죽음의 호수, 죽음의 강 어쩌구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말이 딱히 없다.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 기술도 예전에 비해 많이 발달한 덕분이다.

난지도는 1978년부터 쓰레기 매립지로 쓰였지만 1992년부터 매립이 중단됐으며(쓰레기가 너무 많이 쌓여서..), 국가에서는 이 쓰레기더미를 몽땅 흙으로 덮고 녹지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무슨 묘지 공원처럼 말이다. 돈이 한두 푼 든 게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거기는 다시 시민들의 휴식 공간과 데이트 코스로 잘 바뀌었다. 서울 안에 등산로도 아니고 그 정도 고지대이면서 그 정도로 넓은 녹지는 흔치 않다.

그 대신 1992년부터 지금까지 서울 포함 수도권의 쓰레기 매립은 인천 서구 검단5동, 공항 철도 청라 역의 북쪽으로 경인 아라뱃길의 건너편에 있는 거대한 부지에다가 하고 있다. 거기엔 웬 뜬금없이 '드림파크'라는 이름의 골프장과 공원이 있는데, 거기는 이미 매립이 다 끝나고 휴양· 레저 부지로 탈바꿈한 곳이다. 기왕 골프장을 만들 거면 멀쩡한 산 깎고 환경 파괴하지 말고 쓰레기 매립장 위에 그럭저럭 잘 만든 것 같다.

드림파크보다 더 서쪽에 논밭이나 갯벌이 아니고, 재개발 부지는 아니어 보이고, 그렇다고 군사 보안 시설도 분명 아닌데 거대한 제방이 쳐져 민간인의 접근은 막힌 한 넓은 땅이 보인다. 거기가 바로 현재 쓰이고 있는 쓰레기 매립지이다. 과거의 난지도 시절만치 무식하게 쏟아붓고 파묻는 게 아니라, 분비되는 각종 부패 액체(침출수)와 기체(메탄..) 처리는 영글게 잘 하고서 매립한다.

거기가 옛날에는 행정구역상으로 김포군이었기 때문에 '김포 매립지'라고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행정구역이 인천으로 바뀌었다. 마치 김포 공항이 처음 지어지던 시절에는 김포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서울 강서구로 바뀐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맥락의 변화이다. (김포 지못미)
한강의 상수도 취수 시설은 점점 상류로 이동해서 남양주까지 갔고,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는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서 성남(경부), 안산(서해안), 하남(중부)까지 갔다. 김포 공항도 서울의 관문으로 운용하기엔 너무 비좁고 혼잡해져서 저 멀리 영종도에다 인천 공항이 대신 만들어졌다.

이처럼 쓰레기 처리장도 세월이 흐르면서 저 멀리 인천 서쪽 끄트머리로 옮겨졌다. 하지만 쓰레기 처리장을 받는 지역의 입장에서는 마치 교도소나 시신 화장장만큼이나 땅값 떨어뜨리는 영 좋지 않은 시설이 오는 것이니, 이런 걸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다 쓰레기 처리장을 유치하는 대신에 서울시에서는 우리를 위해 뭘 해 달라, 뭘 보장해 달라는 식으로 딜이 오가곤 한다. 어 이건..? 철도를 지하화하지 않고 지상으로 만드는 대신에 뭘 만들어 달라 이러는 싸움과 비슷한 분위기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3 08:36 2016/08/1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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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생활 관련 잡설

1.
내가 한겨울에 운전을 하면서 지금까지 본 가장 낮은 기온은 -13도이다.
그런데 기온이 영상과 영하를 오락가락 할 때 차에서 표시해 주는 온도계를 보면, 가끔 0도라고 표시할 때도 있고 -0도라고 표시할 때도 있다.

기온이 영상이었다가 어느 땐가 영하로 내려갔다면, 그 사이에 0도이던 순간이 적어도 한 번 이상 존재했겠다는 중간값 정리 개드립이 떠오르는 한편으로.. (시각 t에 대한 기온 변화 함수는 연속함수일 테니..)
또 하나 떠오른 생각은.. "저 컴퓨터는 온도를 내부적으로 부동소수점 실수로 표현하고 있겠구나!"였다.

2의 보수 기반 정수로 표현했다면 0이 두 종류가 있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이공계 지식을 알면 기계 내부의 별별 디테일이 머리에 들어온다.
그나저나 연도에는 서기 0년이 없다고 한다. 서기 1년의 이전 해는 바로 기원전 1년. 마치 건물에서 지상 1층의 아래는 0층이 아니라 바로 지하 1층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밤에 잠을 자는데 그냥 평범한 침실이 아니라, 밖에 어디 아늑하고 아담하고 눈에 안 띄는 곳에 콕 짱박혀서 자고 싶다. 집 밖에서 야영을 하고 싶다.
하루 종일 대형 트럭이나 트레일러를 몰다가 밤에 뒷좌석의 간이 침대에서 길다랗게 누워 자는 화물차 운전사 있잖아.. 뭐 그런 거에 갑자기 꽂혀서 로망이 생겼다.

트럭이 아니라 버스도. 땅 넓어서 이동에 며칠씩 걸리는 나라에서는 버스 안에도 화장실이 있고 운전사가 두 명 타서 한 명은 운전하고 다른 한 명은 짐칸에서 자다가 몇 시간 주기로 교대 근무를 한다는데.. 뭐 그렇게 자는 것도 좋다. 되게 편안하게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청계천 공원이나, 아예 깊은 산 속 수풀 덤불에 짱박혀서 침낭과 외투 껴입고 자고 싶기도 하고,
무슨 무장공비나 북파공작원처럼 비트 파서 맥북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기도 하다.
아 근데.. 산에서 자면... 그땐 식물들도 광합성 안 하고 호흡만 하기 때문에 산소 공급 측면에서는 안 좋으려나.

성경을 동원해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밖은 폭풍 때문에 배가 다 가라앉게 생겼는데 밑전에서 쿨쿨 잘 쳐자던 요나처럼 자고 싶다. 서리해서 먹는 수박이 박진감 넘치고 더 맛있듯, 저거 그야말로 꿀잠이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선장이 한심해서 sleeper라는 단어까지 썼다. ㅋㅋ

3.
과식과 과속은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다. 다음은 고기와 관련된 명언들이다.

  •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죠." (베어 그릴스)
  • "밥상에 자연의 향기가 물씬 풍기네. 자연에도 달리는 동물이 있는데 여긴 그게 없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라면 끓여 주세요~~" 의 주인공. ㅠㅠㅠ 그런데 세종대왕도 딱 저런 타입이었다~ 고기와 학문을 사랑하신 우리 대왕님)
  • "이모, 반찬이 죄다 잡범이네. 아니, 어떻게 살인사건이 하나도 없나?" (영화 아저씨 대사 중)
  •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일본군 병맛 졸장 무타구치 렌야)

4.
지금까지 컵라면으로만 접하던 육개장 사발면이 언제부턴가 봉지 라면으로도 나오는 걸 편의점에서 봤다.
이걸 보니 딱 바로 든 생각은... 뭔가 스마트폰 앱이 데스크톱 PC용으로 포팅되어 출시된 듯한 느낌이다~~!! 카카오톡처럼.
신라면과 짜파게티는 반대로 PC에서 오랜 인기를 누리던 장수 소프트웨어가 모바일용으로 포팅된 예이다.
식당에서 라면을 시켰을 때 보통은 면이나 스프가 신라면 베이스가 많다고 하는데, 그럼 이건 서버 기반의 웹 애플리케이션인 걸까? =_=;; 라면 하나를 두고도 별 희한한 생각이 다 들었다. ^^

5.
200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 가요계는 그야말로 그냥 아이돌도 아니고 '걸그룹' 아이돌 위주로 구도가 급격히 바뀐 듯하다. H.O.T 같은 남자 그룹도 아니고, 이 효리나 박 정현 같은 여성 솔로도 아니고.. 하긴 옛날에는 핑클이나 SES 같은 그룹도 있긴 했다만 요즘은 그때보다 애들이 더 어리고, 무엇보다 그룹 당 인원 수가 무진장 많으며 게다가 다국적이기까지 하다. 아이고 정말 정신없다. 그 와중에도 아이유는 어째 솔로로 여전히 잘 나가고는 있다만...

올해 연초에 방영됐던 '프로듀스 101'은 참 인상적이었다. 슈스케 시리즈보다 스케일과 선정성이 더 커졌다. "정말 자본주의의 진수이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약 빨고 이런 프로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저런 걸 한다고 또 저기 출연을 하는 여자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참가를 신청해서 저 고생인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출연자들은 다들 98년에서 2002년생.. 나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어린 걸 보고는 기겁을 했다.

예능과 끼만으로 돈 버는 게 쉬울 리가 있겠나..;; 저런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학업 스트레스가 낫지. 나중에 내 자녀가 철딱서니 없이 '나도 연예인 될래. 걸그룹 아이돌 할래' 이러면 참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드라마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정공파로 나가는 건 약발이 다했으니 '병맛'으로 승부하는 것 같다. "병맛으로 인한 중독성 때문에 욕을 하면서도 저게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자꾸 보게 된다" 같은 것이랄까.. 텔미, 크레용팝 빠빠빠, 픽 미 다 그런 부류인 것 같다. 걸그룹과 관련해서 본인이 최근에 얻은 경험으로는..;;

  • 서현과 설현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걸 얼마 전에 확실하게 깨우쳤다. 특히 설현은 쏠 스마트폰 CF에 출연해서 더 유명해졌다.
  • 10년이 넘게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의 약자로만 알았던 이니셜이 이제는 걸그룹 명칭이 됐구나. 101이 그대로 알파벳으로.. 참 기발하다. =_=;;
  • 크레용팝 빠빠빠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은 서울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은 폐업한 유원지인 "용마랜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뮤비에 나온 장면을 항공 사진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한때 교회에서 <주께 가오니>를 굉장히 과격한 독수리춤 안무로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그 당사자가.. 훗날 트와이스라는 걸그룹의 멤버로 데뷔했음을 알게 됐다! 이름은 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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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면은 거의 방사능 물질과 같은 급으로 왕창 위험한 물질이었구나. 수 년 전부터 "지하철 역사 내부에서 석면 검출" 이러는 뉴스 보도를 여느 "미세먼지 주의보"처럼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지내 왔는데.. 그렇게 사소하게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슬레이트 지붕도 전부 석면이라면.. 그렇게도 위험한 물질인 것치고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흔히 봐 왔는데 말이다.

보온· 단열재로 쓰였다는데 그럼 스티로폼과도 용도가 비슷한 건가?
한 분야에서 가성비가 아주 뛰어난 물건이 환경을 치명적으로 파괴하고 인체에 안 좋다는 게 뒤늦게 밝혀져서 흑역사로 전락한 게..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품 말고도 더 있었다.

7.
끝으로, 운전자의 직업병을 소개한다.
골목길을 거닐다가 옆에 요런 적당한 공터를 발견하면.. 차를 세워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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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어느 한적한 골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08 08:23 2016/05/0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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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 처리 관련 이야기 외

1. 하수도 시설

사람이 사는 환경에서 배설물의 처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골치 아프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과 같은 위생적인 상하수도 인프라가 없던 시절엔 정말 말도 못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농촌과는 달리 퇴비로 활용할 수도 없으니, 오물을 그냥 바로 길거리에다 버렸다고 한다. 그럼 길거리는 대변 썩는 냄새로 진동하고 온갖 해충과 불결한 동물들이 들끓었으니 전염병이 돌기도 딱 좋았다. 길거리에서 똥을 안 밟으려고 하이힐이 만들어졌고, 구린내를 가리려고 향수가 발명되었다니 그 시절을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하다.

닥치고 기름 끼얹고 불태워 버리면 악취는 좀 줄어들지 않으려나 싶지만, 갓 배출된 대변은 수분이 상당히 많은 물질이어서 소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매번 그렇게 처분하기엔 비용도 많이 들고 이산화탄소-_- 배출 측면에서도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동물보다도 사람의 X이 유난히 더 독하고 구리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성경에서도 이 점이 감안되어, 에스겔이 징징대자 하나님이 인분 대신 소똥을 말려서 연료로 쓰라고 대체제를 제안하신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닐까? (겔 4:12-15)
또한 같은 인분이어도 요즘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육식 섭취가 늘면서 단백질 때문에 더 구려지기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 이 문단에 나오는 말들은 다 개인적인 추측임을 밝힌다.

우리나라도 조선 구한말 때 한양에 인구가 크게 늘었을 때는 인구 대비 도시 기반 시설이 너무 열악했던 관계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오물이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조선이 미개하고 일제에 의해 망해도 할 말 없는 개막장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진영에서는 이런 사진도 제시하는 모양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붉은 원이 전부 X이라고 한다. 노면전차가 다닐 정도로 사대문 안의 최대 번화가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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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1세기까지 지구상에 존속하고 있는 최악의 생지옥인 북한에서는 다른 깡촌도 아니고 평양의 상류층 아파트에서까지 안습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에 한번 얘기한 바 있다.
수돗물과 전기, 가스 따위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겨울에 이불 뒤집어쓰고 냉방으로 지내는 건 차라리 양반. 수십 층 위에서 노인들은 집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계단!), 게다가 수세식 변기도 물을 내릴 수가 없어서 신문지 위에다 응가를 본 뒤 오물을 밤에 몰래 베란다에서 아래로 투척한다.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감시를 해도 주변에 남조선처럼 가로등 불빛이 있나, CCTV가 있나, 그 암흑천지 속에서 누가 몰래 갑자기 투척하는 걸 잡아 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크기가 아주 큰 것도 아니고..
그러니 매일 아파트 근처 바닥에 철퍼덕 떨어진 똥을 치우는 사람들이 고역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밤에 길을 지나가다가 똥벼락을 맞는 사람도 있다. 밤에는 아파트 근처에는 접근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나라는 그 정도까지 막장은 아니지만 철도 차량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소변이 그대로 선로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비산식 화장실' 객차가 다니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미개한 객차는 전국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20년 가까이 됐지만 말이다.

2. 극지와 험지, 특수한 직업

이런 상하수도 시설과는 별개로, 직업적으로 제때에 화장실에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가깝게는 화장실이 없는 교통수단을 운전하는 택시/버스 운전사나 지하철 기관사이다. 지하철 기관사의 경우, 정말 급할 때는 소변 정도는 섬식 승강장역에 정차했을 때 승강장 쪽이 아닌 벽 쪽 문을 열고 몰래 처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객기가 아닌 전투기 조종사는 장시간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별 수 없다. 기저귀를 챙긴다고 한다.

성경에도 지금으로 치면 야전에서 싸우는 육군 보병에게 적용되는 말이 있다. 필드에서 볼일을 보고 나면 삽으로 흙을 파서 오물을 잘~ 덮어서 은폐를 하라고(신 23:12-14) 말이다. 마치 옷을 입어서 신체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듯, 더러운 배설물도 안 보이게 잘 가려 놓으면 하나님이 전쟁 중에 복을 주실 거라고까지 약속했다. 의외로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가 모세 율법에 기록돼 있다.

옛날에 아문센과 스콧 시절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남극 조약까지 다 체결된 지금 남극을 탐험하는 팀은 사람이 안 사는 곳이라고 해서 주변에 무단 방뇨· 방변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원의 배설물은 고이 회수해서 정화 처리를 한 후, 남극의 밖에다 버려야 한다.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인체의 생리 현상으로도 주변을 오염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국제 협정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달 포함 우주에 갔다 온 사람들도 자기 배설물을 감히 지구 밖으로 방출하지 않았다. 단, 이와 관련해서 황당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안습한 사건이 1969년 5월 말에 발사된 아폴로 10호 미션 때 있었다.

아폴로 10호는 달에 최초로 착륙을 한 11호의 직전 미션이었다. 달의 궤도에 진입하여 사령선과 착륙선이 분리를 하고, 착륙선이 달 표면 기준 15.6km 고도의 상공까지 내려갔다가 도로 사령선으로 합류한 뒤 지구로 돌아왔다.

달 탐사 우주선은 우주 정거장이 아니며, 화장실을 따로 만들 공간이 없다. 사람이 재량껏 엉덩이에다 봉지를 요강 삼아서 오물을 잘 담아야 한다.; 그런데... 사령선 안에서 누군가가 대변을 보는데 뒷처리를 제대로 못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주인을 알 수 없는 똥이 그 좁은 우주선 안의 무중력 공간에서 둥둥 떠 다니는 참극(...ㅠ.ㅠ)이 벌어졌다!

승무원들 3명이 모두 자기가 싼 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고 문서로 기록됐고=_=;;, 그게 수십년 뒤에 비밀이 풀려서 일반인에게까지 공개됐다. 예기치 않게 실수로 초대형 민폐를 끼친 당사자만이 그 똥이 누구 똥인지에 대한 진실을 죽을 때까지 혼자 간직하다 갈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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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륙선의 분리는 없이 최초로 달을 돌고 오는 것까지 성공했던 아폴로 8호 미션(1968년 크리스마스) 때는.. 창세기 1장 낭독 애드립이 있었다. 그 뒤 10호 미션 때는 저런 똥 해프닝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3. 저격수 비유

본인은 예전에 군대에서의 전문직인 전투기 조종사와 저격수를 비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저격수의 경우 총만 기가 막히게 잘 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혼자 몰래 잠입해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특성상 간첩, 무장공비, 공작원과 같은 성격도 지닌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저격수는 수풀 속에서 위장을 한 후 목표물이 나타날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근성으로 기다리는 훈련을 한다. 공작원이 적진에서 비트를 파고 잠복하는 것과 비슷하다. 위장을 잘 하면 적군들이 자기 위를 밟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정말로 꼼짝도 안 하고 있을까? 밥과 물은 안 먹는다 쳐도 대소변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지난 2011년 9월에는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저격수 특수부대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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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수: 위장을 한 채로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3박 4일 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견뎌 본 적이 있습니다.
기자: 생리현상 같은 건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저격수: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인데, 최대한 자제를 하며... 정말 어려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절대 움직이지 않고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 인생이고 현실이며 실전이다. 현실의 전쟁은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며 저런 임무에도 간지 나고 아름다운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머뭇머뭇 쭈뼛거리면서 "정말 어려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저격수의 속사정은 무엇일까?

별 수 없다. 도저히 어쩔 수 없으면 결국은 바지에다 싼다는 얘기다.
그런 것까지 대비해서 저격수 훈련 중에 기저귀까지 미리 지급해 주는지는 난 모르겠지만, 결국 대놓고 직접 얘기를 안 할 뿐이지 뻔한 결말인 것이다.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직접 말 안 해도 결국 그 말이 그 말인 사례는.. 성경에도 많다.

  •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는가? (여동생 중 하나와 결혼했다. 그 시절엔 근친 결혼이 이상한 짓이 아니었으니까.)
  • 함은 술 취해 잠든 아버지 노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검열삭제를 했다)
  • 입다는 자기 딸에게 결국 무슨 행동을 했는가? (결국 딸을 이삭 죽이듯이 죽였다)
  • 6일 창조가 있기 전에 이전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다)
  • 노아의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유전자가 교란된 반신반인 괴생명체가 태어나게 되는 짓을 함)
  • 민수기 24장과 25장 사이에 발람이 무슨 짓을 했는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역이용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족시켰다)

"에이, 저 멋진 정예 군인인 저격수가 바지에 똥을 쌀 리가 없어. 저건 문자적인 배설물이 아닐 거야, / 문자적인 3박 4일이 아닐 거야" 이런 반응을 할 게 아니라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사건을 문자적으로 믿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민망해서 굳이 일일이 디테일을 기록할 필요가 없고 정황상 안 봐도 뻔하니 간접적으로 기록을 해 놓은 것이다.

이상. 성경을 읽고 내용을 믿는 태도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 먼저 똥 얘기부터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었다. ^^

Posted by 사무엘

2015/07/04 08:28 2015/07/0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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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 3, 국제시장

2015년 새해 연초에 본인은 이례적으로 영화를 세 개나 영화관에 가서 봤다. (이 글에서 크게 코멘트를 하지 않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까지 포함해서)

1. 테이큰 3

악당이 아니라 니슨이 남에게 굿 럭을 날리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잔뜩 기대를 하고 봤다. 예고편에서는 "우리는 FBI와 CIA를 총동원해서 당신을(니슨) 저지할 겁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던데 실제 영화에서는 놓쳤는지 못 들었다.

1편에서는 흑발 내지 갈색에 가깝게 염색을 하고 출연했던 킴은 원래의 머리 색깔인 금발로 바뀌었다. 1편에서는 끼만으로 먹고 살고 싶어하던 가수 지망생이었던 반면, 3편에서는 철이 들어서 공부를 했는지 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대학교 학부생 주제에 벌써 혼전임신을 한 상태다..;; 1편의 '아만다'만치 심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킴도 좀 노는 타입인 듯. 임신 테스터는 영락없이 "킬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이언 정도의 딸바보라면 딸을 임신시킨 남친을 반쯤 죽여 놓고 머리에 샷건을 들이대면서 "내 딸하고 당장 결혼 안 하면 넌 뒈진다"라고 협박할 법도 한데 그 일에 대해서는 브라이언도 의외로 쿨하다.

이 3편에서는 무엇보다도 킴의 새아빠인 스튜어트가 배우 자체가 더 얍삽하고 사악하게 생긴 사람으로 바뀌고 완전히 악역으로 흑화했다. 1편에서 브라이언을 프랑스로 데려다 줬던 그 전세기가 3편에서는 새아빠가 의붓딸(자기 입장에서)을 납치하는 도구로 용도가 바뀌어 버린다. 이미 비행기가 뜨기 시작했는데, 자동차로 밑의 랜딩기어를 날려 버리는 것만으로 비행기를 저렇게 휘청거리게 만들고 떨어뜨리는 게 항공역학적으로 가능한지는 난 좀 회의적이다.

"다이하드" 어느 시리즈에서처럼 러시아 최종 보스를 해치우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끝냈어도 될 텐데, 반전은 좀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 든다. 어설프게 "쏠트" 흉내를 낸 듯.
이에 맞서 브라이언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이번에도 남에게 형사를 사칭하고 악당을 고문한다. 새아빠가 얼굴에다 헝겊을 쓴 뒤 브라이언에게 꼴꼴꼴~ 물 고문을 당한다. =_=;;

수사반장인 흑인 도츨러는 처음에는 골칫거리인 브라이언을 직업상 체포하는 역할을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브라이언의 혐의가 풀리면서 서로 화해한다. "브라이언은 너희(부하들) 능력으로 잡은 게 아니라 잡혀 준 척 한 것일 뿐이다. 빨랑 차 세워라"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똑똑하다.

끝으로, 종교적인 부분. 테이큰 시리즈는 나 같은 신자가 보기에 교리적인 왜곡 같은 건 없어서 보기가 참 편했다. (괜히 이상한 코드 집어넣는 영화들은 천하에 꼴도 보기가 싫었다) 레노어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목사가 영어로는, 내 기억이 맞다면 the word of God says... 라고 말하지만, 자막 번역은 그냥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라고 떴다.
성경 말씀 자체에 인격이 담겨 있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불신자가 대충 의역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성경은 말합니다"라고 직역을 못 하더라도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번 3편은 1편의 포스를 능가할 수준은 못 되지만 그래도 2편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럭저럭 잘 봤다.
그러고 보니 나 완전 액션 영화 매니아인 것 같다. 인용하는 관련 영화들이 전부 그쪽.. ^^;;

2.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정말 딱 "포레스트 검프"의 우리나라판 같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아래의 굵직한 사건들을 스크린에서 다뤄 줬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매우 건전하고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1) 6· 25 흥남 철수(1950. 12.): 1차 세계 대전 때 크리스마스 휴전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면, 6· 25 전쟁 때는 이런 기적 같은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잠깐이나마 평양까지 진출하고 북진 멸공 자유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중공군 때문에 이 염원이 사실상 영원히 좌절돼 버렸다. 남쪽의 원산까지 이미 적군에게 점령당한 관계로 퇴로가 해로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를 타야 했다.
참고로 월턴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한 때가 1950년 12월 23일로, 흥남 철수와 타이밍이 거의 일치한다. 지금 서울에 '워커힐'이 바로 저 사람 이름을 따라 명명됐다.

(2) 파독 광부와 간호사(1964~1966): 한 10여 년 전부터 육사 교장의 편지라는 정체불명의 글이 나돌면서 어쨌든 많이 알려졌다. 일류대에 들어갈 정도로 머리 좋고 똑똑하면 뭘 하나, 나라가 가난하고 스스로 부를 창출할 기반이 없으니.. 억만 리 타지에서 학벌에 어울리지 않는 힘든 일 궂은 일을 하는 것인데도 목돈 모을려고 다들 못 나가서 난리였다.

(3) 월남전(1972~1974): 무슨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네(민간인 위장을 한 스파이 얘기는 절대 안 하고) 어쩌네 이상한 헛소리 음모론 대신, 이렇게 건전한 얘기를 풀어 주니 관람하는 기분이 좋았다.
물론, 실제로는 동일 인물이 공무원· 관리 명목이 아닌 인부· 일꾼 명목으로 서독과 베트남을 모두 경험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창작물이라는 허구에서는 한 주인공이 온갖 역사 사건을 다 몰아서 경험하는 게 관행이긴 하다. <여명의 눈동자>나 영화 <진주만> 등의 주인공을 생각해 볼 것.

(4) KBS 이산가족 찾기(1983. 10.): 재연을 한 건지, 아니면 당대의 레알 기록 영상물에다가 주인공을 CG로 합성해 넣은 건지? 어쨌든 재연을 굉장히 잘했다. 난리통에 생이별한 아버지는 못 찾았지만, 여동생은 미국으로 입양돼 있었을 줄이야.
내가 "님아 그 강을..."을 보면서는 그렇게까지 큰 감흥이 없었지만, 이산가족 상봉 장면만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여기는 운동장 아니다." / "Am I really your sister?" ㅠ.ㅠ
미국으로 입양된 막순이 역을 맡은 배우.. 한국계 미국인 신인 같은데 정말 리얼하게 연기를 잘했다. 킬빌로 치면 뭔가 헬렌 김(암살자 카렌 김 역) 같은 위치일까?

부부싸움 하다가 어색하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은 정말 다른 불순한 의도 없이 그 시절에 그랬다는 풍자가 들어간 개그이더구만.. 도대체 뭐가 이념이 들어간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뭐? "나이 많은 꼰대들한테서 지겹도록 들은 얘기를 굳이 또 영화로 봐야 할 필요 있나?" 이런 인간말종 수준의 개소리는 정말로 일고의 가치가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영화는 6· 25 시절의 부산을 다루고 있으면서 정확하게 그 시간과 장소에 있었던 대역경인 "부산역전 대화재"는 건너뛰었다는 점이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살던 덕수네 집안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사건인데, 딱히 집어넣을 만한 공간이 없어서 안 넣은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5 08:38 2015/01/2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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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번의 여유

얼마 전, 본인은 회사에서 어도비 인디자인의 약간 구버전을 업무상 프로그램 구조 분석을 목적으로 설치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프로그래머이지 디자이너가 아니며, 나의 컴퓨터 생업 밑천은 비주얼 C++이지 인디자인은 아니다. 이건 잠깐만 들여다보고 버릴 예정이므로 30일 트라이얼 버전만 잠깐 깔았다.
그리고 그걸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본인은 그걸 방치했는데..

나중에 내 한글 입력기가 인디자인에서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듯하다는 문의가 어디선가 들어왔다. 난 비록 30일 기간은 아득히 경과했겠지만 일단 내 회사 컴에 인디자인이 깔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걸 일단 실행해 봤다. 그랬더니..
프로그램은 "트라이얼 기간이 경과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실행 기회를 준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일단 실행이 됐다.

어도비가 요즘 먹고 살기가 팍팍한지, 혹은 도를 넘는 불법복제에 이골이 났는지 소프트웨어 제품들에 인증을 강화하고 패키지 일회성 구매보다 사용권/사용 기간 구매 위주로 정책을 짜게 바꾸고 있다고 본인은 들었다. 하지만 30일이 경과하자마자 칼같이 실행을 거부하는 여느 데모나 셰어웨어와 달리, 트라이얼 버전에 대해서는 쟤들이 나름 자비심 있는 조치를 취한 것 같다.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준 것이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와 유사한 다른 사례들을 주변에서 여럿 찾을 수 있다.
옛날에 '잔기'(목숨, 마릿수)가 존재하던 게임을 보면, 1이 마지막 잔기인 게임이 있는가 하면 0이 마지막인 게임도 있었다. 이 역시 1보다는 0이 더 관대해 보인다.

지하철의 경우, 운임이 중간에 오르더라도 예전 운임을 기준으로 이미 충전된 한 달치 정기권은 추가 정산 없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옛날엔 서울 지하철에 정액권이란 게 있었다. 구입가보다 더 많은 금액이 입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진 직전 맨 마지막에는 금액이 100원이 남았든 50원이 남았든 무방하게 전철 최장거리 구간도 1회에 한해 더 이용할 수 있었다. 뭐, 지하철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운임 누수 꼼수를 막으려면 정액권의 단가를 최대한 높게 잡아야 했겠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아기자기한 '마지막 한 번의 여유'를 생각할 만한 일이 또 있었다.
한번은 교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놀다가 야식을 시켜 먹었다. 이럴 때는 집 냉장고나 문에 쳐박혀 있는 야식집 메뉴판을 꺼내서 그 내용대로 주문을 하는데, 그 메뉴판 가격을 그대로 접수받는 집이 내 경험상 생각보다 적다. 수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가격이 올랐다고 그런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센스 있는 조치는 아니다.

자기 집의 옛날 메뉴판 찌라시를 제시하면 그걸 회수하고 새 찌라시로 교환하는 조건으로 1회에 한해, 메뉴에 적힌 대로 옛날 가격을 받게 하는 게 고객에게는 훨씬 더 좋은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
자기네 가게에서 옛날에 집집마다 돌며 뿌렸던 광고 찌라시를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나중에 그걸로 주문을 한 것만으로도 업소에서 보상을 해 주는 게 마땅치 않은가 말이다.

또한 이것은 "찌라시에 대한 신뢰도를 올리고" 한번 주문을 했던 고객으로 하여금 자기 업소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도 낸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할인 쿠폰이 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소프트웨어 UI 내지 고객을 접대하는 장사를 하는 업종에서는 이런 '마지막 기회'에 대한 아량이라는 덕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3 08:34 2015/01/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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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 컴퓨터 음악 이야기

올해 상반기는 박사 첫 학기 진학과 <날개셋> 한글 입력기 7.4 완성이라는 본인의 개인사와는 대조적으로, 분위기가 은근히 우울했다.
월드컵 축구 경기는 기대를 저버리는 졸전 끝에 별 재미를 못 봤고, 신촌 동성애 퍼레이드에다 어째 1993년에 벌어진 것과 비슷한 패턴의 사건· 사고가 두 건이나 벌어졌다. 세월호(1993년의 서해 페리호), 그리고 총기 난사+무장 탈영(1993년의 임 채성 무장 탈영 인질극) 말이다. 정치판에서 돌아가는 큼직한 사건들은 좌파와 우파 성향 모두에게 최악의 실망만을 안겼다.

뭐 어쨌거나.. 이번 학기에 본인은 아직 프로그램 개발에 더 전념하려고 수업은 2개만 들었다. 언어학 문법 수업은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확실히 어려웠다. 그래도 다음 학기에 프로그래밍 언어와 관련된 수업을 들으면서 경험을 서로 대조해 보면, 자연어와 인공 프로그래밍 언어가 개념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조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학기 초부터 기대했던 컴음악은 어려운 한편으로 재미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텀 프로젝트를 발표한 걸 보니 모바일 또는 웹으로 간단한 미디 음악 시퀀서를 만든 경우도 있고, 미디 데이터를 일정 규칙대로 변조하거나 climax를 찾는 알고리즘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 담당 교수님의 연구실에 들어가 있는 학생들은 여러 이미지와 여러 음악들을 분위기에 맞는 것끼리 서로 짝지어 주는 솔루션을 주로 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멜로디로부터 chord를 자동으로 매긴다거나 다른 감정 같은 의미를 읽어 내는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곧 단념했다. 그런 것도 없는 곡을 새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엄청 어렵고 창의적인 일이라는 걸 곧 인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컴음악 시간에는 이 기회를 이용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자동 작곡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걸로 방향을 선회했다. 복잡한 요소들 싹 다 제끼고 오로지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동요 급의 간단하고 짤막한 단음 멜로디를 생성하는 것.

음악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무질서하고 무작위한 요소가 있지만, 그 뒤부터는 정말 인간의 언어만큼이나 극도로 예전 문맥에 의존적이고 체계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이 그저 rand()의 결과대로 멜로디와 박자를 뿌리면 그건 음악이 되지 않고 아무 호소력이나 메시지, 시너지 효과가 안 나오는 횡설수설 노이즈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구하면 할수록 음악도 마치 문장을 구문 분석하듯이 계층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각 마디 안의 음표들은 일정 chord 범위에 드는 한도에서 생성되는데, 그 chord가 바뀌는 규칙은 또 다른 상위 계층에 따라 정해지고, 그 계층의 상위 계층은 또??

맨 처음엔 박자를 재귀적으로 무작위 생성하는 것부터 해 봤다. 음색이 들어간 음악이 말 그대로 색, 컬러 그림이라면, 박자는.. 그냥 흑백 그림에 가깝다고 하겠다. 박자도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았으며, 취사선택을 잘 해야 했다.

2 1 1 2 1 1
8
3 1 4
4 2 2
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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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1 2 2
6 2
4 2 2
3 1 2 2
2 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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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2 2
3 1 2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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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4
8
4 2 1 1
4 2 2
6 2
1 1 1 1 2 2
1 1 1 1 4

아주 공교롭게도, 마지막 두 박자는.. 바로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 그런 노래 없다 다시 불러라”의 박자와 동일하다.. ㅋㅋㅋㅋ 컴퓨터가 그런 박자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박자에다가 음색을 입히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1도 화음에서 시작하고 끝은 언제나 '도'로 끝나고, 주어진 chord와 어긋나는 음은 약박에만 들어가게 하고,
같은 음 반복, 1도씩 증가, 1도씩 감소 같은 인위적인 규칙을 일정 확률로 준 결과, 노이즈보다는 듣기 좋은 멜로디가 종종 생성되었다. 아 물론, Looking for you나 Let it go 같은 퀄리티를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ㅎㅎ

텀 프로젝트를 발표한 후 교수님의 반응은 “(1) 마디별 코드 전환이 부드럽고 꽤 그럴싸하게 작곡이 잘 됐다. (2) 단, 당초 계획만치 참고문헌 내용이나 관련 기존 연구 성과가 반영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었다.

내가 목표했던 퀄리티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수준의 작곡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무작위로 흥얼거린다 해도 결국 예전에 자기가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음악을 변형하는 형태인 반면, 컴퓨터는 그런 경험 데이터가 없이 난수 생성만으로 음악을 만든다. 결국 컴퓨터도 사람에게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려면 모방이 필요하며 기존 음악 패턴에 대한 데이터가 아주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래저래 음악은 탁월한 수리 능력에다가 창의성까지 갖춘 괴수 천재들을 매혹시키기 충분한 분야이다. 리서치 과정에서 Musimathics라는 책을 참고했는데, 저자는 이건 뭐 수학, 전산학에 소리를 물리· 전자공학적으로 분석하는 것까지 완전 다 통달한 천재다. 전자공학의 푸리에 변환도 나오고, 작곡 방법론에서 난수 생성 얘기를 하는 데서는 ACM 논문까지 소개한다.

나 또한 딴 건 몰라도 음악의 위력에 대해서는 Looking for you와 관련하여 할 말이 무진장 많다. 이런 음악 한 곡도 지적 설계자의 치밀한 설계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데 하물며 이 세상 만물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응당 들었다.

사실, 과거에 마소에서는 미래엔 이렇게 실시간으로 작· 편곡을 하여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게임이 등장할 걸로 예상하고 DirectX에다가 미디 기반의 DirectMusic이라는 컴포넌트도 만들었다. 1990년대 말이면 아직 소프트웨어 기반 미디 신시사이저도 흔치 않던 시절이어서.. 하지만 게임 음악 기술은 음표 신호 방식이 아닌 waveform 방식으로 대세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DirectMusic도 개발이 중단된 흑역사로 전락했다.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다음은 여담이다.

1.
어떤 학생이 자기 결과물을 발표하고 시연하는 중이었는데, 파일을 기록했다는 영문 메시지가 writed라고 뜨고 있었다. 본인은 그걸 보면서 속으로 뿜었다. 우와, 정말 생각도 못 했던 단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내가 발표했던 PPT 자료를 다시 보니, 나도 ‘결론’을 Conclusition이라고 써 놔 있었다. ㅋㅋㅋㅋㅋ

다들 시간에 쫓기는 상태로, 혹은 밤샘 하고 나서 머리 가동률이 70% 이하로 떨어진 상태로 비몽사몽 발로 영작을 하다 보니 저런 오타들이 나왔는가 보다.

2.
본인은 작곡한 멜로디를 출력할 때 미디 API를 쓴 게 아니라, 과거 BASIC에 존재하던 PLAY문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함수를 직접 만들어서 썼다. 지정된 음의 주파수에 해당하는 sine wave를 생성해서 오디오로 출력하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waveOut*** 어쩌구 하는 함수들을 직접 공부해서 써 봤다.

난 간단한 콘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파일 재생 관련 통지를 그냥 callback 함수 호출로 받게 했는데... 뭐가 이상하게 꼬이면서 잘 되질 않았다.
한참을 디버깅 하다가 시간도 부족하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message-only 윈도우를 만들고 통지를 메시지로 받게 했더니.. 모든 문제가 싹 해결되었다. 메시지가 진리. 두 메커니즘의 차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픽 애니메이션 출력 때 더블 버퍼링을 하는 것만큼이나, 실시간으로 오디오 데이터를 보내는 것도 더블 버퍼링 기법이 쓰인다는 게 흥미롭다. 관련 코딩을 해 보신 분이라면 이미 잘 아실 것이다.
버퍼 A의 내용이 사운드 카드로 가서 재생되는 동안 미리 버퍼 B의 내용을 보내 놓고 기다리고, 다음으로 버퍼 B가 처리되었으면 다시 버퍼 A에다가 다음 내용을 보내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7/05 08:36 2014/07/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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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제관

내 주변의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은 의학이나 공학 쪽의 천재가 아닌 이상은 다들 경제, 금융, 법, 행정 쪽으로 몰리고 있다. 거기가 아무래도 잘 나가고 돈 많이 버는 업종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난 그런 골치아픈 학문은 완전 무관심하고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제관에 관한 한은 다음과 같이 확고한 maxim / principle이 머리에 박혀 있다.

1.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가 공짜로 뭔가를 얻어 쓰고 있다면 그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남보다 더 노력해서 잉여분을 제공해 준 덕분이거나 남의 것을 희생하거나 빼앗았기 때문이다.

2. 정부(또는 국가)는 먼저 국민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는 국민에게 그 어떤 편의나 복지도 제공할 수 없다. 그것도 빼앗은 총량보다 훨씬 적은 양만큼만 되돌려 줄 수 있다. 열심히 일해 봤자 다 세금으로 뜯기는 시스템에서는 어느 누구도 먼저 사업을 벌리고 열심히 일하려 나설 수 없다.

3. 복지 제도는 마치 보험과도 같아서 오· 남· 악용되는 일이 없게 나일롱 수혜자를 정확히 걸러내는 시스템이라는 전제조건이 갖춰져야만 실현 가능하다. 가난 구제는 왜 나랏님도 못 하는지를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탈세나 보험 사기에는 아주 민감한 사람들이, 그것과 거의 똑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복지에 대해서는 보편적 복지를 왜 그리도 너무 쉽게 얘기하는가?

4. 부패한 정부의 폐해는 부패한 기업의 폐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나라가 아무리 나쁘다 해도, 국가가 개인을 착취하는 나라보다 나쁠 수는 없다. 기업은 최소한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입사 안 할 수 있고 사표 쓰고 나올 수 있고, 극소수의 독과점 상황만 아니라면 제품 불매 운동이라도 벌여서 응징할 수 있다.

5. 성장을 좋아하든 분배를 좋아하든, 어떤 경제관을 갖든, 이상적인 부의 분배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개인 자유이다. 그러나 그 경제관은 당신이 월급쟁이일 뿐만 아니라 직접 사업을 하고 남을 고용하고 월급을 "주는" 처지가 됐을 때도 똑같이 유지할 수 있는 관점이겠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6. 사유재산과 자유 시장은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그나마 빵의 크기를 키우고 다같이 잘 살게 하는 쪽으로 발산되게 하는 좋은 경제 제도이다. 빈부 격차도 없을 수가 없으며, 때로는 돈으로 돈을 버는 것도 필요하다. 돈으로 돈을 불려서 부자를 훨씬 더 부자로 만드는 걸 허용하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을 작은 부자로라도 만들 수가 없다. 또한 산업 인프라가 대량 생산 위주로 중앙 집중이 돼야 제품의 생산 단가가 내려가고, 덕분에 공산품은 싸고 인건비는 비싼 바람직한 경제 체제가 구축될 수 있다. 이게 그냥 공짜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개인의 local maximum을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언제나 집단 전체의 이익을 키우지는 않으며, 시장이 아무 통제가 없으면 치킨 게임, 눈치 보기, 담합, 독점 같은 부작용이나 데드락도 생긴다. 당장 이익이 안 나더라도 국가에서 먼 미래를 보고 비효율적인 아이템을 밀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정부만이 마냥 해결책이고 뭐든지 국가가 나서서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상당히 조심하고 제한적으로 걸러서 들어야 한다.

간부가 아무리 미워도 간부 없이 군대가 돌아갈 수는 없으며 정치인들이 아무리 미워도 이 악한 세상이 정치 없이 돌아갈 수는 없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같은 건 영구 기관만큼이나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죄성상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속이는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사유재산과 시장 경쟁의 혜택은 실컷 입었으면서 정작 자기는 이상한 음모론 제기하고 비방만 하는 '헛똑똑이'들을 우리는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정부의 비효율은 한번 놔 두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시장을 왜곡하고 민생을 헬게이트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을 애들에게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27 08:39 2014/03/2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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