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도와 금식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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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 17:21 흠정역.

벌써 9년이 훌쩍 넘은 옛날 일이 되긴 했다만.. 저건 2006년 5월 13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에스더 코리아라는 단체의 금식 기도회 광고이다.
평소에는 개역성경을 보지만 자기 행사의 성경적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득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인용한 센스가 참 웃프다.

성경에서 저기 문맥은 이러하다.
예수님이 핵심 제자 세 명(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변모하신 뒤, 돌아와 보니 다른 제자들은 그 동안 부정한 영이 들린 어느 소년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상태였다. 허나 그들은 스승만치 실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꽤 실망하신 듯.. "어휴..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터치를 해 줘야 하냐? 아이를 데리고 와 봐라." 하신 뒤 아이를 바로 고쳐 내셨다.
제자들이 나중에 "우리는 왜 부정한 영을 내쫓지 못했습니까?"라고 슬쩍 묻자 이때 예수님은 "일차적으로는 너희의 불신 때문이다. 그러나 저번 건 좀 쉽지 않은 일이고 간절한 금식과 기도로 약발을 올릴 필요가 있다"는 요지로 대답을 하셨다. 그리고 이 '금식과 기도'를 언급한 마 17:21이 KJV 이외의 다른 역본들에서는 '없음' 삭제된 것이다.

다만, 이와 동일한 '금식과 기도' 말씀이 막 9:29에도 있는데 굳이 '흠정역'이라는 단어까지 거론하면서 마 17:21을 인용한 이유는 본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말은 '킹제임스 흠정역'이나 '한글 킹제임스' 같은 기존 한국어 역본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창작한 문장이다.

뭐, 마가복음 9장이면 29절 '금식과 기도'는 남아 있지만, 그 뒤의 46과 48절에서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지옥 경고문이 무단으로 삭제되었다는 점을 참고로 알아 두도록 하자.

2. sky와 heaven

한국어로는 이 두 단어가 별 구분 없이 똑같이 '하늘'로 번역되어서 차이가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이 신학· 성경 용어로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완전 반성경 반기독교적인 옛날 팝송인 Imagine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서, 의외로 금방 실감할 수 있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heaven이고 hell 그딴 건 없고 우리 머리 위로는 오로지 sky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아요)


이걸 생각하니 개인적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게 느껴졌다.
바로 저런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은 성경 역본들조차도 heaven과 hell이라는 단어가 본문에서 갈수록 줄어들고 sky로, 그리고 반의어는 grave, hades, sheol 등 이상한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크리스천이 주변에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얘기하지, 하데스나 스올이나 저승에 간다고 얘기하던가? 이런 단어의 변개는 그야말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정체성을 공격하는 짓이 아닐 수 없다.

3.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으시고

먼 옛날에 본인은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기독교 역사 소설을 만화 형태로 각색한 책을 우연히 접한 적이 있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 끔찍한 박해를 피해서 크리스천들은 지하 무덤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무슨 도사처럼 생긴 백발 노인이 성경 두루마리를 펼쳐서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같은 난해하지만 감격스러운 말씀을 낭독했다. 그리고 예수쟁이라는 인간들이 믿는 해괴망측한 교리가 도대체 뭔지 알고나 싶어서 어느 로마 군인이 모임에 몰래 합류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첩자 내지 배신자의 밀고로 붙잡힌 신자들은 콜로세움에서 인간 횃불이나 사자밥이 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순교 컷의 하단에는 많고 많은 관련 성경 구절들 중에 계 1:5-6이 자막으로 적혀 있었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으시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께 즉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5는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를 씻어 주셨다고 wash라는 단어까지 써서 문자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그러나 킹 제임스 이외의 다른 모든 성경 역본들은 wash가 loose 내지 free로 바뀌어서 '죄들에서 해방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루시퍼나 이스터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벧전 2:2)만치 유명한 변개 구절은 아니지만 굉장히 충격적인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다음 영문 사이트의 내용을 참고하시라.

'죄를 씻었다'라는 표현이 없으면 당장 찬송가 가사부터가 근거 구절을 잃는 직격탄을 받을 것이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를 찬송가에서 찾아 보면, 참고 구절은 다들 요일 1:7을 제시한다. 이건 그나마 계시록과 동일하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이고, 꿩 대신 닭이라고 cleanse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의미 자체는 통한다. 그러나 깨끗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속하는 wash와 정확하게 같지는 않다.

그 카타콤의 순교자 책에서도 '해방하시고' 대신에 '씻으시고'라고 적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순교자

내가 앞에서 성경 변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카타콤이니 순교자 같은 이야기를 많이 꺼낸 이유는.. '순교자'(martyr)라는 엄청난 단어가 존재하는 성경 자체도 킹 제임스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자였다고 인증하였고(행 22:20), 주님은 계시록에서 안디바라는 어느 성도가 순교자였다고(계 2:13) 증언하셨다. 끝으로, 음녀 바빌론이 바로 순교자들의 피에 만취했다고 나온다(계 17:6).

킹 제임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역본들은 순교자 대신 그냥 '증인'이다. 증인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얼마든지 쓰인 단어인데?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을 비롯해서 고난의 증인(벧전 5:1), 신실한 증인(계 1:5) 등..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무수히 많은 순교자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악의 무리들은 '순교자'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을 절대로 좋아할 리가 없을 거라는 점이다. 가령, 로마 가톨릭의 과거 만행을 은유적으로 폭로하는 계 17:6 같은 경우는 그냥 증인이라고 썼을 때는 표현의 수위가 상당수 희석될 수밖에 없다.

5. 예수님은 은근히 낮추고 사탄을 높임

그 뿐만이 아니다. 계 2:13은 순교자/증인 말고도 충격적인 차이점이 더 있다. 킹 제임스는 간단하게 '사탄의 자리'(seat, 좌석)라고 번역한 반면, 다른 역본들은 대적인 사탄을 지위를 대놓고 높여서 '사탄의 왕좌'(throne)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건 마치 우리로 치면 '일왕· 덴노/김 정일' vs '천황/김 정일 국방위원장' 정도와 비슷한 차이가 아니겠는가?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분께 먼저 경배(worship)를 한 뒤에 애원과 간청을 했는데, non-KJV들은 그 부분을 상당수 그냥 무릎을 꿇었거나 절했다고만(bow / kneel down) 표현했다. 그러나 그런 역본들도 계시록 13장에서 사람들이 짐승 적그리스도에게 홀딱 반하는 장면에서는 곧이곧대로 경배했다고 번역했다.
이 정도면 그냥 막가자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KJV에도 그냥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은 따로 있다. 막 15:19만 봐도 두 표현이 병렬로 모두 등장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상호 혼용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6. 보혜사 vs 위로자

본인은 예전에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를 소개했고, 거기 엔딩 크레딧 중엔 어느 북한 지하 교회 할머니의 기도를 몰래 녹취한 음성이 흘러나온다고도 얘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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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가 나타나심을 (나는) 압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보혜사'(redeemer)라는 단어를 보고도 왜 나의 직업병이 발동하지 못했던 걸까?
보혜사는 요한복음 14~16장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성령님을 가리키며 등장하는 단어이다. 허나 저 무명의 어르신이 킹 제임스 성경을 봤다면 기도에도 막연한 보혜사가 아니라 '위로자'(comforter)라는 단어가 쓰였을 것이다.

병맛 개그 차원에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 아니라, 저기는 순전히 끔찍한 박해 때문에 교회가 문자 그대로 무너지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다 피흘려 순교한 너무 처절하고 절박한 상황인데.. 위로자가 없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다고 말씀하는 전 4:1과 동일하게 연결되는 단어인 것이다.

7. 사람이 구원받는 장면에서의 변개

십자가에 매달렸던 한 강도가 구원받는 누가복음 장면에서(눅 23:42).. 강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서 구원받았지(롬 10:13, 행 2:21), 변개된 성경에서처럼 '예수여~, 예수 씨' 이러지 않았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게 대단하지, '그 사람/그분'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딤전 3:16).

선천성 맹인이 시력을 얻고 구원받는 장면에서(요 9:35)도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물었지 "네가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하시지 않았다.

또한, 행 8:37이 변개된 성경에서 모조리 삭제된 것은 매우 유명하다. 이것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구원받는 장면에서 적절한 신앙 고백의 필요성과 물침례의 조건을 명시한 구절인데 이게 없어짐으로써 비성경적인 유아 세례가 횡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다 커서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줄 아는 신자에게만 침례를 주는 교회가 오히려 유별난 교파인양 '침례교'라고 따로 불리게 되었다. 그게 성경적으로 당연하고 그것만 유일하게 맞는데도 말이다.

교회사에서 진짜 기독교회들은 노바티안, 왈덴시스 등 모임 인도자의 이름을 딴 이상한 듣보잡 집단으로 명명되고 정작 '기독교회'라는 이름은 이상한 집단이 도둑질해 간 것과 비슷한 역설이다.

이런 것 말고도 뭐..;;
이스터, 루시퍼, 갈보리, 총 13군데에 달하는 '없음' 구절 같은 건 더 말하면 입만 아프니 또 거론하지 않겠다.
예전에 본인이 쓴 <음란한 성경은 가라>라는 글은 이런 차이점들 중에서 특별히 제목이 암시하는 분야에서의 차이점을 다루었다.

게다가 성경의 맨 첫 구절인 창 1:1도 다르고(KJV는 heaven, 나머지는 heavens 복수), 맨 마지막 구절인 계 22:21도 다르다(non-KJV는 '주 예수'만 있고 '그리스도' 빠짐). 이런 팩트 속에서 KJV는 그저 개역성경의 영문판 같은 성경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시중에 나온 성경들이 그냥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신앙에서 교과서, 계약서, 법전 이상인 크리티컬하고 중요한 그 텍스트가 말이다.

애초에 기독교는 예수 유일주의를 주장하는 곳인데, 그런 교리를 내세우는 근간인 텍스트 또한 하나만 옳고 그 하나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것들은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하지 않겠는가? 성경 역본 문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바로 답이 보인다.

개독안티들이야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믿을 리 없으며 말씀이 보존되어 있으면 "안 되는" 처지이기 때문에 KJV를 얼마든지, 기를 쓰고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논리에 끌려가면 이건 뭐 이적행위인지 팀킬인지 참 곤란한 상황이 된다. 본인은 특정 집단의 이익은 개뿔, 내 신앙의 근간과 정체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옹호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31 08:35 2015/12/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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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적어 없는 타동사

킹 제임스 성경에는 의미상 분명히 타동사인데 목적어가 없이 동사 하나만 달랑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옛날 영어에는 그런 문법이 원래 가능했나 보다.
사실, KJV에는 원어로는 뭔가 자비심 없는 짧은 단어 배치가 가능할지 모르나 영어로는 문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이탤릭체로 단어를 집어넣은 게 있다. 하지만 그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다 보면 한국어로도 이탤릭체 단어가 또 첨가되어야 하기도 한다.

(1) SLAY
Bring these men home, and slay, and make ready; (창 43:16)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요셉의 형들을 대접하는 장면이다. 저 slay는 당연히 사람(these men)을 죽이는 게 아니라 식용 가축을 도축하여 고기를 대접한다는 뜻이다.
한국어 성경 번역은 모두 ‘짐승을’이 추가되어 있고, 영어 역시 KJV를 제외한 성경들은 an animal 또는 animals라고 목적어가 추가되었다.

(2) MOCK
And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ich she had born unto Abraham, mocking. (창 21:9)

하갈이 낳은 아들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사라가 봤다는 장면인데, 정작 영어 성경 구절을 보면 mock에 이삭이라는 단어가 없고 심지어 대명사조차도 없다. 이것은 KJV 영어만의 용법은 아닌지, 영어 성경도 굉장히 많이 의역된 역본에만 Isaac이 들어 있으며, 대명사가 빠진 역본이 KJV 말고도 더러 있다.

참고로, 문장 전체의 목적어가 또 분사구문으로 행동을 취하는 다른 대표적인 예는 스데반의 순교 직전을 묘사하는 행 7:59이다. calling upon God의 주체는 they가 아니라 스데반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된다만, KJV 이외의 성경 역본에서는 God이 없다. 이것은 KJV도 call의 목적으로 God을 향상 계시 차원에서 이탤릭체로 넣은 부분이다.

And they stoned Stephen, calling upon God, and saying,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행 7:59)

(3) SEND
And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and took Sarah. (창 20:2)
성경에는 목적어 없이 send가 ‘사람(심부름꾼)을 보내다’라는 뜻으로 엄청 자주 쓰인다. 영어 성경 중에는 a man / a messenger를 첨가한 것과 그렇지 않은 역본이 반반씩 있는 듯.
흥미로운 것은, 옛날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목적어 없이 직역하여 우리말로도 ‘왕이 보내어’라고 번역했다는 점이다. 개역개정판부터는 ‘왕이 사람을 보내어’라고 바뀌었다.

2. 죽음을 뜻하는 단어

성경은 영적 세계, 사후 세계, 구원을 다루는 책인 만큼, 죽음/죽임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존재한다. 사전적인 차원에서의 동의어도 있지만, 비유적인 표현도 많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할 때 killed를 안 쓰고 slain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쓴다는 걸 알게 된 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 rabbit and turtle이 아니라 hare and tortoise라는 것, 뱀이 snake 대신 serpent인 것, 돼지가 pig/hog 대신 swine인 것만큼이나 생소했다.

하나님이 성경을 어떤 동작에다 비유를 하셨는지 성경의 다음 용례들을 살펴보자. 이건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 공부 소재로 삼아도 될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 DEPART 떠나다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 (창 35:18, 라헬)
... 주의 종이 평안히 떠나도록 허락하소서 (눅 2:19, 예루살렘의 시므온)
...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딤후 4:6, 바울)

(2) SLEEP 잠들다
...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행 7:60, 스데반)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고 (왕상, 왕하, 대하.. 숱하게 등장)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 27:52)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 (요 11:11)
그러니 고전 11:30도 단순히 자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고전 15:51, 살전 4:13-14 같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고!

(3) GIVE UP THE GHOST 숨지다, 숨을 거두다
창세기(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야곱), 사복음서(예수님), 사도행전(아나니야와 삽비라, 헤롯)
특히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오로지 이 표현만 사용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마 27:50, 막 15:37, 눅 23:46, 요 19:30). die라고 하지 않았다.

(4) DIE 죽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DECEASE die/death와는 달리 동사형과 명사형이 동일하다. 성경에 딱 4번만 등장하는데..
사 26:14와 마 22:25에서는 die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병렬되고, 눅 9:31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킬 때 쓰였다.
벧후 1:15는 우리말 성경들이 웬일인지 순교를 '내가 떠나간 후에도' departure이라고 좀 의역하는 경향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1/30 08:24 2015/11/3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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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말에서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높임법이 잘못 적용된 비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에 말씀이 계셨느니라"(요 1:1)는 높임법이 아주 적절하게 쓰인 문장이다.
사실, '말씀'이나 '지옥' 같은 단어는 성경 용어로서 어쩌면 영어 단어보다도 잘 번역되고 잘 만들어진 단어이다. 성경 번역 같은 데서 영어에 비해 한국어의 어휘와 문법의 한계가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오로지 약점밖에 없는 건 또 아니다.

2. 여느 관광 여행이나 맛집 방문 같은 것이야 당연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며, 직접 가서 겪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글을 통한 간접 체험이 당대의 직접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더 낫다고 보증이 돼 있는 유일한 예외가 있다. 무엇일까? (힌트: 벧후 1:19, 요 20:29)

3. 세상의 다른 고전 문헌이나 골동품은 아무래도 제일 오래 된 필사본이 원문, original에 가장 근접해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나이가 깡패이다.
그러나 이 책만은 애초에 오래 된 필사본 같은 건 닳아 없어지고 남아 있질 않으며, 반대로 최근까지도 잡초처럼 많이 필사되어 읽히고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교차 검증된 집단이 진본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4. 세상의 다른 모든 텍스트들은 원어가 당연히 원저자의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고 가치가 가장 높다. 그래서 예전에 일본어 중역이던 텍스트가 나중에 직통 번역으로 재출간되고, 그 분야 전문가는 아예 원어를 공부해서 원문을 다시 구해다 읽는다.
그러나 이 책만은 번역본이 원어 원문에 꿀릴 게 없으며, 오히려 다른 n차 파생 번역본을 모두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 번역본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 무엇일까?

1과 2, 그리고 3만 해도 불신자의 통념을 한참 거스르며 상식을 벗어난 논리이다. 기독교는 원래 그런 종교이다.
그러나 반대로 1~3을 일단 믿는 사람이라면 4를 믿지 못할 이유는 추호도 없다고 여겨진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안 그러시는 분도 있지만, 그분의 양심과 믿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이것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1~9를 다 믿으면 10도 당연히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시나, 딱히 충분히 대안이 될 만한 논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싶은 게 있다.

아무리 상수도관에서 깨끗한 물이 만들어져도 가정의 수도관이 더러우면 최종 소비자는 더러운 물을 받을 수밖에 없다. 4는 앞의 다른 명제들을 성립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이 4에 대한 보충 설명 차원에서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 계층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원어
성경의 '원문'이 기록된 언어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다니엘서 같은 일부는 아람 어라 함), 신약은 그리스어(헬라· 희랍은 그리스와 동의어).
그럼 원어로 원문만 읽으면 끝이고 성경의 내용 전수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1) 오늘날 성경의 최초 자필 원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이 온전히 집대성돼 있지 않다. 즉, 이것들은 partial이다. 내용 자체가 변개된 필사본이 있긴 하지만, 변개되지 않은 계열의 필사본이라 해도 결국은 빠짐없이 모아서 짜깁는 과정이 필요하다.

(2)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이들 언어가 인지도와 중요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원어가 사어가 돼 있다.
여느 언어들이 그렇듯이 원어의 어휘 역시,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무슨 뜻인지 분별해 줄 수 있는 절대무오한 권위자 역시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도의 표적이 없는 것만큼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사전· 어휘집도 100%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니 원어 원문만 있다고 해서 장땡이 아닌 거다. 환상을 깨시라.

2. 영어
오늘날 원어 원문이 갖고 있는 위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원어(영어) 원문(KJV) 차원의 지위를 가진 절대기준이다. 솔까말 기독교는 논리로만 따지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있는 종교인데, 그 원천적인 권위가 무엇인지 정도는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께서 보장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그 체계 하에서 최소한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추지 않겠는가. 원어 원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교한 불신자 신학자들의 말장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원어가 불필요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성경의 이 구절에서 이 원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으면 KJV의 번역을 보면 된다. 요일 2:23 후반부가 원래 필사본에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면 KJV 구절을 보면 된다는 얘기다. 원어 원문조차도 KJV로 판단 가능하다. KJV는 단순히 가장 뛰어난 번역, 우수한 번역 차원이 아닌 것이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번역본 KJV에 하나님의 영감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판단은 여러분이.

KJV를 최종 권위로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신자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을 해 보시라. 기독교라면 저런 절대 기준이 상식적으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는 건전한 하나님이라면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 차별을 하지 않으시며, 그런 것쯤은 보장해 주셨을 것 같지 않은가?

지옥에 대해 경고를 하기 위해 굳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내서 증언시킬 필요가 없듯(눅 16:27-31),
원어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현대인들을 위해 굳이 그 시절의 원어 토박이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보내실 필요가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라고 책망했듯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읽은 사람은 이미 원어 성경을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관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언어의 관계는 성경의 여러 비유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3. 자국어
절대 기준인 영어 KJV를 바탕으로 건전한 교리관을 갖춘 양심적인 번역자가, KJV의 표현을 그대로(가령, '유월절' 대신 '이스터', '기뻐하라' 대신 '잘 있으라', 요일 5:6-7도 온전히 갖추고 등) 자국어로 일관성 있는 스타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성경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 전하고 신앙 서적을 만드는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이것은 "신들과 같이", "절대무오한"은 못 되더라도 노아나 욥이 "완전했던" 것과 같은 완성도를 갖췄다.

해당 자국어의 특성을 이용해서 번역을 아주 적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하나님, 말씀, 지옥 등), 어휘와 문법 체계의 특성상, 그리고 해당 언어권의 문화· 관습의 한계로 인해 KJV 특유의 도치나 중의성, 운율, 미묘한 문법 요소들을 다 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해당 언어나 번역자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성경 강사가 영어 KJV를 참고하여 보충 설명을 해 주면 된다. 마치 데나리온이라는 화폐 단위가 요즘 물가로 얼마 정도라고 얘기하듯이. 오늘날 영어의 지위를 생각하자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꺼내는 것보다야 상황이 훨씬 더 나아진 것이다.

(그럼 원어에서 영어로 번역될 때는 원어의 모든 뉘앙스가 고스란히 옮겨지는 게 가능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언어학적인 팩트 답변도 있고, 그것만으로 좀 확신이 안 서서 믿음의 영역으로 그냥 받아들이고 넘겨야 하는 면모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정도까지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만, 각 언어마다 최종 권위가 제각각 또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최종 권위라는 게 무슨 뜻인지 파악을 못 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단지 모든 언어적인 혼란을 일축하는 중심점에 영어 KJV가 있다는 것이 KJV 유일주의 신자의 믿음이다.

'영킹 유일주의자', '이중 영감론자' 등의 누명 내지 딱지에 전혀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그럼 그들이 미는 대안은 뭔데? '원어 원문 유일주의자'이건 '영어 숭배자'건 '자국어 만능주의자'이건, 어느 편에 서더라도 그에 대한 멸칭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국은 뭔가를 신념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마치 무신론도 유신론만큼이나 동일하게 신념이고 신앙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겠는가? 원어 원문은 앞서 말했듯이 실체가 없으며, 반대로 자국어 최종 권위 운운은 당장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영어 중심이 가장 현실성 있고 균형 잡혔으며, 실제로 KJV의 출간 이래로 지난 400여 년간 역사적인 증거와 열매도 넘치는 건전한 관점이다. 애초에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교리를 믿는 신자가, 한 성경 역본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와 일치하지 않는 역본은 틀렸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단언하건대 절대로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06 08:31 2015/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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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란, 리듬 게임에서는 화살표 타이밍과 거의 동시에 정확하게 손발 동작을 잘 넣었을 때 받는 최상위 등급 판정이다.
FPS인 퀘이크 3 arena에서는 한 번도 죽지 않고 게임을 마쳤을 때 받는 상의 명칭이다.
뭔가 좋은 말이긴 한데, 정확하게 무엇이 좋거나 무엇을 성취했을 때 perfect가 되는지는 분야와 문맥에 따라 잘 분간할 필요가 있다.

perfect와 비슷한 좋은 형용사인 excellent를 생각해 보더라도,
이게 퀘이크 3 arena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투 킬 이상을 달성했을 때 받는 판정인 반면,
버추어 파이터에서는 한 번도 맞지 않고 상대방을 이겼을 때 받는 판정이다.
모탈 컴뱃에서는 그게 또 이름이 달라서 flawless victory이다. 즉, 이런 용어들은 그야말로 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perfect라는 것은..
굳이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절대무오 넘사벽 언터쳐블, 신의 경지급의 완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뜻이라면 차라리 infallible이 더 적절하다.
또한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유리수는 제아무리 무한히 조밀하다고 해서 결코 실수만치 완비되어 있지는 못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 게 사람과 하나님의 스케일의 차이인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어떤 주어진 환경, 문맥, scope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목표나 기준을 오차 없이 달성해서 조건을 만족했다면 성경적으로 perfect가 된다.
특히 마음이 완전히 올바르다는 건 두 마음 딴생각 없이 순수한 것까지 포함한 개념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회색분자를 굉장히 싫어하시니 말이다.
어떤 경우든,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마 5:48)라는 말씀이 무슨 “우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창 3:5)”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와 같은 죄인이던 노아나 욥도 perfect라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슨 천주교 성인 같은 급이라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고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말한다.

아니 그럼, 인간이자 하나님이고 죄성 없이 처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그 전엔 품질 면에서 완전하지 못했고 무슨 결함이나 약점이 있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당연히 그런 뜻은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긴 하지만 자신만의 이념과 성품, 질서가 있고 방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건 마음대로 다 해도, 가령, 거짓말은 못 하신다고(딛 1:2) 돼 있다.

그렇게 부족할 것 없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인간의 몸도 입어 보고 인간과 똑같은 관점에서 부족함, 연약함, 고난을 다 경험해 보고 십자가 퀘스트를 클리어 함으로써 그 방면에서 드디어 perfect 판정을 받았다는 게 성경의 판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 자체만 해도... 그리스어/히브리어를 자국어로 번역한 성경이 완전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 두 관점에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KJV에 비해서는 예전의 제네바/비숍 등의 성경은 군더더기가 많고 번역의 질이 KJV만치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말 흠정역 성경만 해도 n-1판은 더 나중에 나온 n판에 비해서는 미묘한 오탈자나 실수가 더 많이 있었다.
심지어 KJV 자체도 비록 오늘날까지 내용의 변경은 없었을지언정, 1611년 초판은 인쇄공들의 실수로 인해 수십 군데의 typo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옛날 성경들도 오늘날의 변개된 계보가 아닌 바른 계보에 속하는 좋은 성경이었으며,
그 당시에 권위를 부여하고 열심히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 사용하기에 충분한 완전한 성경으로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서 역사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믿는다. 문맥을 분간을 잘 해야 된다.

그런 마이너한 옥의티는 그야말로 outlier일 뿐이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며, 현대에 벌어진 역본 변개 내지 성경 업데이트 드립과는 결코 같은 레벨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놓고 부패한 본문에서 번역된 개역성경에도 복음이 담겨 있고 이걸 읽고 구원받은 사람들로부터 한국 교회가 시작되었거늘, 하물며 바른 계보의 성경 번역본은 얼마나 더하겠느냐 말이다.

단지 성경 본문에 문제가 있으면 구원 이후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가 어렵고 개독안티들의 성경 공격에 대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치면 그럭저럭 돌아가고 결과물은 나오지만, 보안이 취약해서 악의적으로 조작된 데이터 파일에 자주 뻗는 정도의 문제가 생기는 꼴이다. 우리가 겨우 이런 약한 모습이나 보이려고 이 세상의 추세를 거스르고 또 거슬러서 예수쟁이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 자기 세대에 다시 재림할 거라고 믿었고,
중세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교황이야말로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시절과 그 식견에 계시의 분량이 그게 전부였을 때는 저 스케일로 믿고 양심대로 행한 것이 최선이고 perfect한 신앙이었을 테니까.

이렇듯, 아무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고 해도, 성경의 보존과 완전성에 대해서는 아주 최소한의 추상적인 공통 layer는 존재한다고 보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시내/바티칸 사본이 제아무리 몇백 년을 짱박혔다고 해도 그런 것이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해 주신 성경 말씀은 아니다. 유다복음 도마복음이라든가, 전량 회수해서 폐기 처분했대도 누군가가 꿍쳐서 살아남은 사악한 성경(not이 실수로 누락되는 바람에 너는 간음할지니라=_=)이 무슨 하나님 말씀 보존 약속의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개개의 수명은 수십 년 남짓밖에 못 되었더라도 잡초처럼 필사되고 놀라운 내용 일치를 보여 온 다수 공인 본문과, KJV에 이르는 거시적인 영어 성경 계보라는 집합에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27 19:27 2015/03/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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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일 리플링거(Gail Riplinger). 194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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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 글자판 운동에다 비유하자면, 거의 킹 제임스계의 송 현 선생님 같은 분.
여성이지만 변개된 역본들을 까는 전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렙이다. 변개된 성경 옹호자 내지 원어· 원문를 빠는 사람들의 천적, 나이트메어이며, 킬러요 저격수이다.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세계적인 전문가이다. 다만, 그 덕분에 주변에 적도 엄청 많다.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 보면 일반 사진보다는, TV에 노출된 장면이 캡처된 게 더 많이 걸려 나온다. 예쁘장한 전형적인 미국 아줌마 인상이라나? 단, 그런 것들은 대개 최소한 20세기 시절의 굉장한 옛날 사진이다.

이분은 New Age Bible Version(국내엔 <뉴에이지 성경 역본>이라고 소개됨), In Awe of Thy Word, Hazardous Materials 같은 전설적인 책들을 썼는데, 다들 수백~천몇백 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작이다.
그냥 성경간의 차이를 대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KJV를 공격하는 데 쓰이는 알량한 히브리/그리스어 원어 사전이나 원문부터가 완전히 헛점투성이이고 싸그리 잘못된 이유를 다 밝혀 낸다. 그리고 그 바닥 학계가 얼마나 허접하고 더러운지를 까발린다. 종교적이 아니라 학술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적을 상대로는 디버프를 시켜 놓고, KJV에 대해서는 버프 그 자체다. 언어 차원에서 성경의 영어 번역은 KJV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음을 논증하고, KJV의 영어는 매 단어 하나 하나가 거의 뜻글자나 마찬가지라는 수준으로 의미 부여를 시켜 준다. 가령, do의 3인칭 단수가 왜 굳이 doth(더쓰)와 doeth(두이쓰)로 달리 존재하는지 같은 것까지 다 아무렇게나 번역된 게 아니라는 거다.

과장 좀 보태면, 400여 년 전의 KJV 번역자들보다 KJV를 더 잘 알 것 같기도 한 사람이다.

본인은 이분의 저서 Hazardous Materials의 일부를 번역하는 일에 투입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chapter 1만 봐도 이건 뭐..
다음과 같은 기상천외한 비유가 들어간 문장들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이분밖에 없다. ㅋㅋㅋㅋㅋㅋ 번역하면서 내가 다 놀랐다.
나부터가 글을 좀 호전· 도발· 공격적으로 쓰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런 스타일의 글을 번역할 때도 동질감이 느껴진다.

1. 신학교 교수가 강의실에서 포르노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브의 ‘원판’(original)은 원래 이렇게 생겼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와이프라는 ‘판본’(version)은 원본보다 열등합니다.” 원어 어휘집은 우리의 신앙에 이와 동일한 맥락의 악영향을 끼치니, 정말 기독교계의 포르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이런 체계 하에서 성경학도들은 끝없이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소프트웨어와 서적들을 모으면서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신들처럼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이미 뱀의 편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Yea, hath God said?)

3. 에이즈(AIDS)라는 질병은 원래는 GRID(게이와 관련된 면역 체계 이상증세)라고 불렸다. 그런데 오늘날은 또 다른 GRID(그리스어와 관련된 면역 체계 이상증세)가 학생들을 물들이고 있다. 영적 면역력을 파괴하여 이단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4. 하다못해 주변에 마약이나 포르노에 대한 유혹이 있다면, 성령의 검인 성경이 신자를 지켜서 그런 것들이 얼씬도 못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가 그 검을 빼앗아 버리면, 검을 빼앗긴 사람은 앞으로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5. 필자는 자라나는 대학생들로 인한 마음의 부담 때문에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그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은 어서 회개하고, 만약 회개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거짓말이 강제로라도 잠잠해지기를 말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합법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되고 거짓말이 최소한 ‘영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 직업을 선택하면 얼마나 좋을까? 중고차 판매 영업사원이 적절할 것 같다. 주님은 여러 위험한 교수들과 성경 의심쟁이들을 본업에서 끌어내셨으며, 일부를 진짜로 중고차 판매업계로 보내 버리신 적이 있다.


사실, 영어로 the original이라고 하면 원어도 되고 원문도 된다. 성경 번역의 품질은 얼마나 정확한 원문을 바탕으로 얼마나 정확한 언어 지식을 동원하여 번역하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킹 제임스 진영에서 기존 성경들이 다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대부분이 '원문' 문제이고 <뉴에이지 성경 역본> 같은 책도 다루는 분야가 이쪽이다. 오리겐 같은 사람이 변개한 부패한 원문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같은 학자가 본문 비평이라는 정신승리 궤변을 들고서 다시 끄집어내어, 성경의 주류로 끌어올려 놓은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하고 치밀한 음모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리플링거 박사의 관심사는 원문을 넘어서서 이제 '원어'로 넘어갔다.
변개된 성경에 대해서는 경각심이 생긴 사람들의 마음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으니, 악의 무리들은 이제는 본문은 KJV 그대로 놔 두더라도 단어의 뜻이 이게 아니고 원어로는 이렇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을 구분해서 표현할 수 없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 사자음어 때문에 음가를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식의 괴담 말이다.

그래서 새로 나온 책은 변개된 역본이나 본문에 이어 원어 어휘집, 사전을 신랄하게 까고 있다.
요즘은 사전을 만들 때 편찬자의 주관이 아니라 다량의 말뭉치 분석을 통해서, 거기에 드러난 어휘의 용례를 바탕으로 뜻풀이를 추출하는 게 대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원어 어휘집들의 밑천은 이집트나 그리스 이교도들이 남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문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엉뚱한 걸 갖다대고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KJV의 오역이라고 트집 잡고 넘기고, 심하면 KJV의 단어의 의미를 세속· 인본주의적인 뜻으로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특히 지옥, 대속, 기도, 은혜 같은 단어가 그런 식으로 왜곡되면 이건 뭐 기독교의 근간이 다 무너지지 않겠는가?

단적인 예로 virgin이 사실 원어에 따르면 굳이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성'도 된다. 이런 식으로 원어드립을 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얼마든지 공격하고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 주제로는 할 말이 무척 많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맺겠다. 요컨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1. 변개되지 않은 바른 본문에서 번역되었으며,
2. 모든 바른 필사본들을 온전히 집대성했다.
3. 원문을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실력으로 번역했고,
4. 원문을 교리적으로 바른 사상으로 번역했다.


이렇게 알면 정확할 것이다.
1은 무슨 뜻인지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겠지만, 2는 세상의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 전서가 다 담겨 있지는 않기 때문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2가 불안하면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라든가 요한일서 5:7 삼위일체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게 된다.
1과 2는 원문 계층이고 3과 4는 원어 계층이다. 3은 KJV의 이스터(행 12:4) 같은 우수한 번역을 뒷받침하며,
4는 KJV가 동성애· 여자 목사 옹호, 지옥 부정 같은 불온사상에 물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성경 역본 논쟁은 확실히 창조-진화 논쟁 바닥과 비슷한 양상이다.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화석이 없는 것만큼이나 원어· 원문의 막연한 환상도 허상일 뿐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창조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그 뒤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재림 같은 것도 결코 믿을 수 없게 되듯, 성경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말씀도 믿을 수 없게 된다.

KJV 신자의 믿음은 이런 성경 구절 패러디로도 요약될 것 같다. 매우 적절한 비유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요 14:9)
킹 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이미 original(원어+원문)을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original을 보여 주소서, 하느냐?


한글-한자 논쟁으로 비유하자면, 리플링거 박사는 수천 년 전의 한중일 한문 고전을 죄다 술술 읽고 해석해 내는 한문 전문가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계몽을 위한 한글 전용을 적극 지지하고 한자 기득권 속에 숨은 위선자 헛똑똑이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의로운 일을 하는 셈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언어 가지고 말장난을 하시지 않는다. 언어 장벽은 인간의 동반 타락을 막기 위해 허락하신 것일 뿐, 이것이 성경 말씀에 대한 접근성 제약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쪼록 리플링거의 책의 번역문이 어서 출판되어 나와서 국내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성경에 대한 바른 믿음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02 08:37 2013/10/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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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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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의 메리

1539년에 크고 아름다운 그레이트 성경까지 나온 뒤에야 영국은 확실히 개신교 국가로 탈바꿈하는가 싶었으나, 헨리 8세가 죽은 후 개신교 계열의 에드워드 6세(병으로 요절)와 그 후의 9일천하 레이디 제인 그레이(지못미..;;)가 제대로 권력 승계를 못 하면서 메리 1세가 역사를 다시 뒤로 되돌려 놓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비운의 9일천하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삶이 정말 기구했다. 왕위에 앉을 마음이 없었고 사실은 “너 여왕 됐어”란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졸도를 할 정도였던 여인도 아니고 소녀였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등쌀에 떠밀려 정략 결혼을 하고, 조국의 개신교 노선을 이어 나갈 여왕 자리에까지 여차여차 올랐지만 백성들의 의식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던 모양.

결국 골수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메리 1세는 제인 당사자가 권력욕이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제인의 부모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살려 두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제인더러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는 카드를 제안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결국 20살도 못 된 고등학생 나이에 처형 당했다. 그땐 단두대 같은 것도 없었고, 사형 방식은 그냥 도끼로 목을 치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인 그레이는 라틴· 히브리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똑똑했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외모도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냥 귀족하고만 결혼해서 학자나 교사로 평범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저렇게 정치· 종교적 희생양으로 전락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다만 겨우 고등학생 나이 때도 자기 신앙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시편 51편을 외웠으며, 집행을 앞두고 눈이 가려진 뒤엔 “어, 형틀이 어디 있지?” 하면서 당황하며 자신이 목을 내밀 곳을 손을 더듬어 찾았다고 한다. 이 장면은 주변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더욱 자아냈으며, 이것이 그림으로 남아 전해진다.

이런 사연을 거쳐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잘 알다시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회를 포함해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선왕이 구축해 놓은 영국 내의 종교 개혁 인프라를 모조리 망가뜨렸다. 그래서인지 메리 1세는 초상화를 봐도 좀 표독스러운 모습의 못생긴 여자로 그려져 있고, 특히 이 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는 네로에 필적하는 싸이코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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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화형 당한 크리스천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여 명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숫자만 보면 그래도 1000단위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적은 규모인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공산당 숙청 수준은 아닌 듯. 하지만 메리 여왕이 사람만 죽인 게 아니라 성경까지 죄다 불태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세속 역사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종교 문제를 빼면 메리는 사회·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악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그 분야에까지 막장이었으면 진작에 짤렸겠지;; 또한 메리 역시 여왕에 오르기까지 개인사나 가정사는 불운한 편이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지병으로 인해 자녀 한 명 못 낳고 중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영국에서 갑자기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자, 영국에 있던 종교 개혁 성향의 학자들은 죄다 외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스위스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지금까지 구축된 원어 자료를 집대성하여 더욱 좋은 성경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제네바 성경이다. 예정론과 개신교 교황이라는 오명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비교적 좋지 않은 평판을 갖고 있는 존 칼빈이 그래도 이때는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을 잘 보호해 준 공로를 세웠다.

제네바 성경은 처음으로 66권 전서를 모두 원어에서 번역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리고 무슨 스터디 성경처럼 온갖 난외주가 첨가되어 성경의 각 구절마다 편찬자들이 생각하는 해설과 강해가 성경 본문의 양보다도 많이 들어갔다.

4. 킹 제임스 성경 -- 종교 개혁 성경의 종결자

메리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 시대가 되면서 영국은 다시 개신교 노선으로 돌아갔다. 이 시절에 영국 내부의 종교 대립은 가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좌우 이념 대립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반가톨릭 진영에서는 진짜 반공 교육 수준으로 교황을 험담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아니라 “나는 교황이 싫어요” 급이었으며, 교황이 성경에서 예언된 적그리스도 바로 그놈이라고 대놓고 가르쳤다.

예전에 헨리 8세에 이어 왕위를 잠시 이었던 에드워드 6세 왕은 어릴 때부터 궁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겨우 초등학생 나이인 11살 때 “교황은 레알 마귀 자식이며, 나쁜 놈이요 적그리스도요 가증스러운 독재자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썼을 정도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 승복 어린이 수준이지 않은가? “교황을 죽입시다 교황은 나의 원수”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가톨릭과 앙금이 생길 대로 생긴 게 사실이다. 또, 과거의 역대 교황들이 자신을 예수님 급으로 신성시하면서 “교황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같은 안하무인 개드립을 치는 것을 보면, 어차피 그들은 북한 김 일성· 김 정일이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긴 했다.

제네바 성경은 재야(?)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해 온 좋은 성경이긴 했으나 외국에서 자기네끼리 제작된 사역(私譯)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시절엔 국교회 내부에서 또 그레이트 성경의 개정판 격인 비숍 성경이라는 걸 만들어 썼다. 가톨릭-개신교뿐만이 아니라 같은 영국의 개신교 노선 내부에서도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게 이 시기이다. 가톨릭으로부터의 박해가 없어진 뒤엔 영국 교회가 또 대립과 반목으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후임인 제임스 1세 왕은 청교도와 성공회를 중재하는 차원에서, 이제 다시는 성경을 또 만들 필요가 없게끔 완벽한 성경을 만들기로 승인을 내려 준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이 드디어 1611년에 나왔다. 장과 절 구분, 100% 원어 번역, 청교도와 성공회 모두 OK, 국내 인쇄 등 예전 성경들이 차츰차츰 확보한 좋은 속성을 모조리 물려받았다.

이 책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킹 제임스 이후 영국에서는 먼 훗날, 1881년에 부패한 웨스트코트· 호르트 본문에 기반한 RSV가 나오기 전까지는 또 새로운 성경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역본이 나올 필요가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 구도로 인해, KJV가 번역될 때는 성경 번역 역사상 전무후무한 철저한 검증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이것 덕분에 KJV는 유례가 없는 고품질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위기가 기회로 승화된 셈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종교 개혁을 거꾸러뜨릴 목적으로, 바티칸의 일종의 비밀 결사대인 예수회라는 무지막지한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KJV에 앞서 듀에이 레임스라는 판타지 짝퉁 성경을 만든 바 있으며, 엘리자베스 다음으로 영국에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왕이 즉위하자 용병을 고용하여 화약 폭발로 제임스 1세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기적적으로 사전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세속 역사가들은 인류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휴머니즘을 추구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인의 시각에서는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고 세상이 암흑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바티칸 교황이 역사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고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는 것에는 본인 역시 세속 역사가의 시각과 100% 일치한다만, 그것이 기독교라고 싸잡아 분류되는 것에는 본인은 동의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 중 영국만이 종교사가 저렇게 특이한지, 왜 영국만 국가 교회가 존재하며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 왔는지? 왜 영어 성경만 여러 계보가 존재해 왔는지? 더 나아가 하필 킹 제임스 성경이 세계에 퍼져 나간 최종 권위 성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KJV 신자라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도 역사를 잘은 모르지만 내 신앙의 정체성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력은 공부해 두려 한다.

오늘날 인도에 불교가 없으며 예루살렘에 기독교가 없는 것처럼, 영국도 이제 성공회의 노선은 천주교 쪽으로 다시 거의 기울었고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 발간 400주년을 맞이한 작년에 반짝 조명 정도나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야만인 바이킹들이나 뛰놀던 섬나라 영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전반적으로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식민지 개척을 할 정도로 강대국이 된 것에 성경과 복음이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3/05 08:28 2012/03/0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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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의 중세 암흑기

천 년이라는 시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장구한 시간이다. 성경에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공의로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한편,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AD 900년대까지 거의 1000년 가까이 존속하여, 도읍인 경주 역시 ‘천년고도’(千年古都)라고 불린다. 본인이 경주 출신이다만, 그 작은 도시가 천년고도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교회사가 시작되었으나 진리의 빛이 꺼졌던 중세 암흑기가 거의 1000년에 가까이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신대륙이 발견되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유럽이 본격적으로 동양을 과학 기술로 압도하기 그 전에! 그 사이 기간에 대해서 나만 아무 정보가 없는 걸까?

그 사이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이라고는 진짜 십자군 전쟁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난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과 잔다르크는 1400년대 사건이니, 중세 중에서는 그나마 나중인 편이고.

그 기간 동안 어느 샌가 교황이 유럽을 모조리 장악했으며 성경은 금서가 되었고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횡행했다. 어떻게 해서 교황이 저런 국제적인 종교 괴물로 등극할 수 있었는지 그 메커니즘을 잘 모르겠다. 교회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대한 지식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아 하긴, 우리나라만 해도 이단 교주들이 얼마나 돈 잘 버는지를 생각해 보면, 교황이 종교 장사로 큰 대박을 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은 했겠다.)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유레카 학습 만화 세계 역사 시리즈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게 아니었다. 제6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오는데, 제8권은 곧바로 메디치 가문이 어떻고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콜럼버스, 루터 따위가 나온다. 시간 차이가 장난이 아닌데 중간에 그야말로 엄청난 skip을 한 것이다. (제7권은 칭기즈 칸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 같은 아시아 편이고 유럽 얘기가 아님.)

더 정확히는 6권의 뒷부분에 ‘중세 유럽’이 특집 형태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짚고 넘어가 있었다. 세심하게 여러 에피소드를 편성하고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넣은 게 아니라, 글과 벽화 소개 위주로 백화사전식으로 “그냥 이런 게 있었다. 끗”이었던 것이다. 중세는 정말 긴 기간이었는데도 이때의 유럽 역사는 이렇다 할 위인이나 큰 변화가 그다지 없었고 사료도 부족하고... 세속 역사가들로부터도 가히 흑역사로 취급받는다는 걸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판타지 게임이나 영화들의 주된 배경이 되기도 하고.. ㄲㄲ

이 글에서는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있었던 일을 영국의 교회사 위주로 요약해 보겠다.
중세에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성경을 읽고 침례를 행하던 크리스천들은 알비겐시스, 왈덴시스처럼 지역이나 모임 리더의 이름을 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숨어 지내던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하기 전부터 이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고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럼 아무 기회도 없이 다 지옥 갔냐”라고 기독교에 트집을 잡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안다. 허나 내가 보기에는, 중세엔 서양도 복음에 대한 접근성이 동양하고 별 차이 없었을 것 같다. 그쪽에서는 어차피 교황이 성경을 다 빼앗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교리로 지옥으로 보내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동양엔 왈덴시스 같은 집단이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종교 재판소도 없지 않았는가? -_-;;; 피장파장이다.

도미니크 구즈만(천주교에서 성 도미니크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라는 수도승이 그런 크리스천들과 교리 논쟁(오늘날로 치면, 종교갤에서의 키배)을 종종 벌였으나, 그들을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가톨릭은 교리도 완전히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그 기원부터가 로마 제국 시절에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순교자들의 피를 부르며 시작되었다고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말로 곱게 회유가 안 되는 반동분자들을 적당히 꼬투리 씌워 조지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만들어 낸 게 종교 재판소의 원조이다. 서기 1223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드디어 정식 공표된 종교 재판은 마녀도 아니고, 이슬람 같은 완전히 다른 이교도도 아니라 전적으로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그들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나머지 목적은 2순위, 3순위일 뿐이다.

2.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성경 번역의 역사

그러다가 존 위클리프라는 영국 사람이 처음으로 14세기에 처음으로 영어 성경이라는 걸 만들었다. 열악한 당대 상황 때문에 비록 본문이 부패한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기반이었지만, 영어 철자법도 아직 정립해 있지 않던 시절에 원어가 아닌 영어 성경이 나온 것만 해도 어디냐. 그 위상이 가히 영국의 개역성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구한말에 나온 한글 개역성경도 부패한 본문 기반 + 맞춤법 비정립 시기! 1881년 RSV 할 때의 그 개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한 덕분에 천주교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았으며, 나중에 죽고 나서 40년 가까이 지나서야 무덤에서 시신이 다시 꺼내어져 목이 잘렸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국어에서 욕설로 쓰이는 육시(戮屍)를 실제로 당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영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오래 된 영국 왕으로 헨리 8세 아니면 기껏해야 7세 정도까지만 기억을 할 것이다. 이 헨리 8세는 원래는 당시 유럽의 여느 군주들이 그랬듯이 막강한 교황의 권세 앞에서 깨갱 하고 있었다. 친가톨릭이었고 딱히 소신 있는 종교 개혁자 성향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부인을 6명이나 둔 호색한이었던 그는 치정 문제로 인해, 더 정확히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리는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의 승인 없이 추진하려다 보니 교황과 결별·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수장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은 이 소식에 당연히 발칵 뒤집혔으며, 헨리 8세에게 험담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는 이 사람을 루터만큼이나 몸서리치게 미워하며 나쁘게 말한다. 비록 헨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똘끼를 선한 방향으로 이끄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국이 천주교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으로 벗어날 징조가 보이던 15~16세기엔 천주교에는 악재, 기독교에는 호재가 연달아 터졌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가 바른 성경 계보인 공인 본문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에는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라는 당대 정세도 기여를 했다.

이때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공인 본문을 기반으로 신약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했다. 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로 책을 값싸게 많이 찍어 보급할 수 있게 된 것도 지금으로 치면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에 필적하는 정보화 혁명이었다.

그리고 영국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등장하여 그 독일어 성경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영어 성경을 만들었다(신약+모세오경+알파. 아직 전서를 만들지는 못함). 바른 원문 계보에서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다.

틴데일은 “누구나 성경을 휴대하고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소 몰고 밭 가는 촌뜨기 아이라도 교황보다 성경을 많이 알게 만들어 놓겠다”라는 도발적인 공언까지 했는데, 이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발상이었고, 그런 열성 때문에 그는 결국은 나중에 순교자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교수형과 화형을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당하면서 죽었으며, 죽기 전에 “주여, 우리나라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크게 외쳤다. 아직 영국은 친가톨릭과 친개신교 노선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었고, 영국의 고위 관료나 성직자 중에는 친가톨릭 성향에 틴데일을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헨리 8세 왕이 틴데일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틴데일의 기도는 그가 죽은 지 6개월 남짓한 시간 만에 응답되어, 헨리 8세는 틴데일의 친구인 마일스 커버데일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국 성공회가 공식 사용할 영어 성경을 만들게 했다. 커버데일은 사역(私譯)이던 틴데일의 번역물을 십분 활용하여 1535년, 커버데일 성경을 만들었다. 왕이 승인하고(公譯) 성경 66권이 모두 번역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존 로저스라는 사람이 매튜라는 가명을 써서 매튜 성경을 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라는 자국내에서 인쇄된 최초의 성경이라 한다. 틴데일과 커버데일 성경은 모두 영어 성경이지만, 각각 독일과 스위스에서 인쇄된 후 영국으로 밀반입되었기 때문이라고. 국가가 떳떳하게 대놓고 성경을 찍을 정도로 개신교 세력이 충분히 크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3/03 08:24 2012/03/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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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날개셋> 한글 입력기 6.2가 공개된 때와 아주 비슷한 타이밍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는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KJV 출간 400주년 기념판’을 내놓았다. 버전으로 치면 5판이다. 4판이 나온 지 3년 만의 일이다.

2~4판 사이에서도(특히 3판에서) 한국어 문장에 revision과 breaking change가 적지 않았지만, 2011년은 아주 특별한 해이지 않던가. 영국에서 KJV 출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미국은 의회가 아예 KJV가 미국에 남긴 공적을 기리는 성명서를 냈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엄청난 공을 들여서 번역을 다시 가다듬었다. 전체적으로 예전보다 좀 더 영어 직역에 가까워졌다.

성경이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도 아닌데, 본문을 자꾸 패치한다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시간과 돈이 들고, 번거롭고 귀찮고 골치아프다. 성경은 모름지기 권위가 담긴 텍스트여야 하는데 명분이야 어떻든 자꾸 바뀌어 버리면, 그럼 예전 판은 무슨 신세가 되는지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요즘 컴퓨터 프로그램이 보안 업데이트를 귀찮더라도 자꾸 해 줘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걸 왜 꼭 해야 하며,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프로그램 개발자는 너무 자세히 알려 줄 수 없다. (당연히, 모방범죄 같은 안 좋은 파급효과 때문)

성경 번역자도 이와 비슷한 처지인지라, 성도들에게서 안 좋은 소리와 심지어 오해까지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명감 때문에 이런 개정을 하는 것이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에 법인까지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고 이를 교계에 가장 먼저 알린 단체는 대한 항공 조종사 출신의 모 목사가 설립한 ㅁㅂㅎ라는 곳이다.
이들은 교리도 그럭저럭 건전한 편이었으나, 초창기에 세상 교회를 상대로 appeal을 굉장히 잘못하는 바람에 이곳과 더불어 킹 제임스 성경은 한국 교회에서 이상한 이단으로 완전히 낙인찍혀 버렸다. 그게 1990년대 중후반의 흑역사이다.

진리를 정말 성령 충만한 애끓는 사랑으로 호소하며 전해도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이 태반이며 열매가 맺힐까말까인데, 그걸 육신의 깡을 동원한 온갖 과격· 극단적인 표현으로 밀어붙였으니 튕겨나오는 역효과는 100배이다. 뭐, 나라도 겪었을 시행착오이니 ㅁㅂㅎ를 그렇게 욕할 생각은 없다.

둘 다 잘못했다. 비록 ㅁㅂㅎ도 잘못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경이 역본마다 다르고 변개· 삭제된 말씀이 있다고 해도 아무 경각심도 안 느끼고 최소한의 진실 규명도 안 하는 사람들 역시, 크리스천의 자질이 굉장히 의심되는 부류가 아닐 수 없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 보존에 대해서는 불신자 내지 개독안티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요즘 굉장히 많다.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과 근간이 뭔지 난 정말 궁금하다. 겨우 그런 허술한 근간으로 예수쟁이 행세하고 교회 댕기기에는, 기독교계가 요즘 저지르는 병크가 너무 많고 예수쟁이들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불신자들도 너무 많으며 반기독교 정서는 너무 팽배해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은 안 그래도 소수이던 것이 n갈래로 더욱 소수로 쪼개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때 모 공대 교수가 다시 동지들을 모아서 ㅁㅂㅎ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과는 별개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고, 그래서 나온 것이 <킹제임스 흠정역>이다. 초판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인데,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태어난 시기와 비슷하다.

성경 번역이란 건 자금과 지지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치성도 띠고 있다. 본인은 그래서 우리나라 KJV 진영의 양상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다 비유해 보곤 했다.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 이후 우리나라는 온갖 정치 집단과 이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처럼 한국 교계도 개역성경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ㅁㅂㅎ 진영까지 분열된 후, 어중이떠중이가 다 KJV를 번역하겠다고 나서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개역성경이 일제 같은 존재는 절대 아니다. 오해 말길!)

이때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치면, 이 승만 같은 일을 해냈다. 당연히 긍정적인 면에서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일제 강점기 때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이 무력 투쟁 정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이 승만은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국제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직시했고, 당대의 강대국이던 미국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친구로 만들려 애썼다. 그리고 당대의 여타 민족 지도자들과는 달리, 공산주의의 해악을 완전히 간파하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이념이 지켜지는 국가를 한반도에다 세우고 정부를 수립했다. 이북처럼 자기 지지자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개막장 독재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

그것처럼 흠정역의 주 번역자 역시, 명색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공대 교수이다. 객관성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분야에서 학문 하는 훈련을 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 번역자라는 소영웅주의에 도취해 자신을 드러내고 appeal한 게 아니라, ㅁㅂㅎ로 인해 치명적으로 실추된 KJV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성경이, 성경 오타쿠들이나 자기 교리 노선· 자기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보는 성경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기존 성경의 컨벤션을 존중하고, 교리적으로 튀는 번역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거 정말 대인배적인 마인드이지 않은가? 난 그 의도가 존경스럽다.

기존 개신교회들이 변개된 성경을 쓰고 잘못된 관행을 저지른다고 비판하고 까기만 하는 건 쉽다.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KJV를 읽게 하려고 노력한 끝에, 자기 출판사를 기성 기독교 인터넷 서점에 입점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과연 KJV 교계의 이 승만 같은 사람의 업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금까지 어느 KJV 진영도 한국 기독교회에 KJV를 이런 방식으로 알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잘한 건 티가 별로 안 나는 반면 못하면 바로 티가 나고 온갖 괴담과 비방, 오해가 나돌기 딱 좋은 분야이다. 이 승만이 악의적인 세력들에 의해 부관참시 당해 온 것만큼이나 저 번역자도 성경 번역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이단 소리 듣고, 반대편 진영으로부터 욕도 얻어먹고 험한 꼴 꽤 많이 봤다. 평범하게 자기 연구만 계속하면 돈도 훨씬 더 많이 벌고 교수로 아주 편하게 잘 살았을 텐데, 지금까지 인생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분을 성경 하나 때문에 희생한 것이다.

어쨌든 여러 모로 유사점이 보인다. 본인은 이런 식으로 비교한 글을 예전에 모 기독교 커뮤니티에다 올린 적이 있다. 당사자더러 보라고 쓴 글은 아니었지만, 어째 정보가 퍼져 나갔는지 그분의 사모님께서 그 글을 보고는 본인에게 따로 연락을 주셨다. “우리 쪽에서 직접 말하기 민망한 심정을 잘 이해하고 대변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뭐, 그래도 이 승만을 그저 증오하는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도 불편해하더라. ㅋㅋㅋㅋㅋ

그에 반해, 흠정역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 모 진영이 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파울로, 밥티스마 같은 말을 일일이 만들면서 완전히 자기네 진영에서만 쓰는 독자적인 번역을 만들었다. 기존 개신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여타 KJV 진영과도 일체의 교제를 끊고는, 자기 말고는 전부 배도하고 타락했다고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한다. 내가 보기에는 덜 배운 친구들이 이 승만이 친일 공화국 만들었다고 욕하는 것과 쎄임쎄임이다. 머리에 든 게 부족하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보인다.

양 진영이 맺은 열매는 난 이렇게 비유하겠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81
그분은 채팅과 교제를 통해 많은 추종자를 얻었지만 저(흠정역 진영)는 성경과 교회들과 성도들을 얻었습니다.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2563
김 구는 아들에게 유언장을 남겼지만, 이 승만은 국민에게 대한민국과 주권을 남겨주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꾼을 쓰신 수준의 차이이다! 킵바이블 사이트의 글과, 시스템클럽의 글을 이런 식으로 비교해서 종합한 사람은 지금까지 나밖에 없지 싶다. ㅋㅋ

말이 길어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본인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킹제임스 흠정역 진영을 지지하며, 이 성경을 쓰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흠정역이라는 이 우리말 성경은 만만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을 국내에 이 정도로 정착시키기까지 성도들의 무수한 노력과 헌신, 기도가 있었다. 부디 KJV에 대한 근거 없는 이단 낭설이 하루빨리 불식되고, 이 땅에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굳게 서고 이를 전파하는 지역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길 바랄 뿐이다.

(흠정역 홍보 동영상 클릭)

Posted by 사무엘

2011/09/19 08:13 2011/09/1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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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011년이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이하 KJV)을 최종 권위로 믿는 진영에서는 요즘 무척 들떠 있다.
올해가 그 성경이 출간된 지 만 4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1611년) 날짜로는 5월 2일이라 함.
KJV 신자들에게 1611은 아주 유명한 숫자이지만, 연도 이하의 정확한 날짜는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날짜에 맞춰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도 400주년 기념판(5th edition)을 내려고 한창 작업 중이다.

본인에게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건 2002년 무렵이다.
그 전에도 킹 제임스인지 흠정역인지 하는 고어체 성경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개역성경의 영문판 정도 되는 성경이겠지” 정도로 치부할 뿐이었다.
개역성경이 “하시니라, 가라사대” 같은 말투가 있듯이 영어에도 “thou, thee, ye”가 나오는 성경이 있다는 맥락. ㄲㄲㄲㄲㄲ
또한, 마치 손실 압축인 JPG 방식으로 그림을 계속 고치고 저장하면 할수록 그림의 화질이 떨어지듯이, 성경도 여느 고문서와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의 일부가 소실되어 '없음'이 생긴 줄 알았다. 진짜다.

그랬는데.. 성경 이슈에 대해 알게 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엄청나게 충격적인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것들은 본인의 내면 속에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기독교 신앙의 고유 진동수에 딱 맞춰 나를 격렬히 진동시키고 말았다. 타코마 다리가 들썩들썩하다 와르르 무너지듯, 나의 기존 통념도 와르르...;;

사연을 다 설명하자면 복잡하다만..
내가 KJV 빌리버가 된 주 이유 중 하나는... KJV 반대자 내지 현대 역본 옹호자들의 논리랄까 사고방식이, 어쩜 저렇게 불신자 기독교 안티들의 그것과 똑같을까 그 이중적인 모습에 충격 받고 분노해서였다.

나는 나보다 성경을 많이 아는 목사, 신학자가 마땅히 내 신앙을 방어해 주는 사람인줄로 알고 있었다.
걔네들은 그걸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다. 살인· 간음을 저질러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개독안티가 성경을 헐뜯고 “토끼는 되새김질을 안 하는데 성경이 잘못됐다, 뭐가 모순이다”라고 시비를 걸면, 반대편 진영에 선 사람들은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게 맞다. 이거는 네가 성경을 문맥을 무시하고 당시 사정을 감안 안 하고 삐딱하게 잘못 읽어서 그런 거다 ... 어쨌든 결론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손실이 없이 절대무오하고 자체 모순이 없다.” 그렇게 대응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 팔아서 돈과 명성을 얻는다는 사람이, 자기들부터가 그 신앙의 근간인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존돼 있지 않다고 하고, 세상에 무오류한 성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방어해도 시원찮을 판에 같이 앉아서 헐뜯고 있으니...! 그럼 그는 그런 하나님 파는 짓은 중단하고 자기 양심껏 목사질 때려치우고 안티 진영으로 가야지 왜 거기에 들러앉아 있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독교에 대한 물리적인 박해보다도, 성경을 조롱하는 안티들의 집요한 독설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치명적인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 기독교로 둔갑하여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현상이었다!

성경이 완벽하지 못하니까 그 완벽하지 못한 부분은 나의 해석이, 히브리/그리스어 사전이, 신학이, 교회 전통이 보완하겠다는 소리로 들려서 본인, 매우 심히 불쾌했다. 내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그런 의도를 파악할 눈치 정도는 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내 신앙은 내가 지켜야겠다는 '신앙 자주국방론'(?)이 대두되었고, 작정하고 성경을 읽고 독학했다.

내 지론은 언제나 “안티는 안티답게, 신자는 신자답게”이다. 어느 것이든 모 아니면 도로 색깔과 노선만 분명하다면, 본인과 다른 신앙의 소유자라 해도 이 글 읽고서 기분 나쁘거나 불쾌해할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색과 공부의 결과로 본인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대안이 바른 성경에 있으며, 그 대안의 실체가 바로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멀쩡해 보이는 성경이 실은 13구절이 삭제되고 6만 개나 되는 단어가 변개돼 있습니다”라고 그러면, 언뜻 보기엔 거의 “2011년 안으로 북괴 김 정일은 남침합니다” 수준의 미친 개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건 무슨 루머나 음모론도 아니고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인걸.

세상에, 삭제된 게 맞고, 킹 제임스 성경의 구절이 나중에 추가된 거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막 9:44,48; 행 8:37 등등)
불순분자가 삭제한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사본'은 도대체 무슨 사본을 말하는 걸까?

본인은 히브리어· 그리스어 따위는 전혀 모르고,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런 것과는 인연이 거의 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 그래도 킹 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는다.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니다. KJV 유일주의가 신앙면에서 건전하고 내 믿음을 세워 주고 안티들의 공격을 반박하는 사고방식이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헛점(?)을 물고 늘어지는 안티들의 공격이 얼마나 집요하고 맹렬한지 본인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성경은 뜻만 통하면 되지 역본들이 다 같은 내용이라는 주장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저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차라리 KJV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NIV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최종 권위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쓰신 선한 간증이 있는 성경이라는 식의 논리라도 폈다면 나는 응당 NIV 맨이 됐을 것이다.
최소한 예수쟁이 행세하고 성경 말씀에 꺼뻑 죽으려면 저렇게 하는 게 정상이다. 사실, KJV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다혈질 골수이고, 모 아니면 도 노선이다.

본인 주변의 모 목사님은 왕년의 유학 시절에 KJV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이거 자료 찾고 번역만 하다가 문학 박사 과정 졸업을 포기하고 수료만 하고 돌아왔으며,
다른 모 목사님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전문직 종사자이면서 사재를 탈탈 털어서 그것도 욕 얻어먹고 오해 사면서까지 10년째 성경 번역에 매달리고 계시기도 하다. 한국에 이런 올바른 성경을 번역해서 알리지 않으면, 내 양심상 배기질 못하겠다고...;; 이런 분들에 비하면 난 그렇게 강경한 것도, 골수도 아니다.

본인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유명한 곳으로 '말씀 보존 학회'(말보회)라는 단체가 있다. 본인은 그곳과는 아무 개인적인 인연이 없다. 저곳은 한때 극렬 전투종족으로 기존 개신교로부터도 이단 판정을 받을 정도로 악명을 떨쳤었는데, 걔네들이 비록 간증을 잃을 잘못된 행동을 하긴 했으나, 본인은 심정적으로 그들에게 공감은 한다. 얼마나 답답하고 기성 교회에 대해 실망했으면!

내가 만약 말보회를 통해서 KJV를 접했다면, 아마 말보회 내부에서 만렙-_- 불화살 워리어가 됐을 것이다. ㅋㅋㅋㅋㅋ 지금보다 한 100배는 더 과격한 글 쓰면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주필 논객이라든가 거기 신학원 강사 등으로 한 자리 차지했을지도 모를 듯.
본인의 성깔을 아는 교회 사람 중에는, “용묵 형제가 말보회를 거치지 않고 KJV를 알게 된 건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KJV 유일주의를 주장하면 대체로 “그래도 원어 성경이 더 낫지 않습니까? KJV 이후에도 더 나은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하도 많이 들었다만... 뭐,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최초의 성경 자필 원본은 오늘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사본만이 전해지며, 그 필사본들이 오늘날의 성경처럼 완전한 66권 합본으로 전해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이 필사본이 전체 중 어느 조각에 속하는지, 그리고 의미가 그토록 다양하게 변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의미를 단정적으로 이거라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시 말해, KJV와 동급으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원어 성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이다. 둘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그러니,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KJV가 하는 역할이 자기 밥줄을 뺏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KJV를 배척하고 반대할 수밖에 없다.
KJV는 변개되지 않은 바른 원문에서 바르게 번역되었고, 바르게 집대성(compile)되었다. 따라서 바른 히브리/그리스 원어 성경이라면 KJV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전통적인 고문헌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수되어 왔다. 다른 고대 문헌들은 가장 오래 된 게 원본에 가장 가까울 확률이 높겠지만 성경은 끊임없이 필사되고 사람들에게 수시로 읽히고, 그러다 닳아 없어지길 되풀이했다. 회전률이 높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필사본이 존재하고 이들이 서로 일치하면 그게 곧 맞는 본문이다. (쉽죠?) 하나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을 보존해 놓으셨다.

그 반면, 극소수 골동품처럼 전해내려져 온 튀는 필사본은 애초에 진작부터 버려진 가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마치 유다복음이라든가, 사악한 성경--'간음하지 말라'에서 not이 실수로 삭제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나저나, KJV 번역을 지시한 제임스 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난 세속 역사를 통해 알고 있던 건

  • 엘리자베스 여왕 다음으로 즉위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 하지만 선왕보다는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는 평판을 받음
  • 왕권신수설을 내세웠고, 좀 독재자 스타일로 의회와의 대립이 심했던 듯?
  •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포카혼타스>에 나오는 제임스타운의 어원이 된 사람. (포카혼타스는 설정상 배경이 1607년이다. KJV가 한창 번역되고 있던 시절이다.)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왕의 신분으로서 국민을 위해서 국비로 성경을 번역하라고 했을 정도이니, 제임스 1세 왕은 거의 영국의 세종대왕 급이다.
“나랏말씀이 라틴어와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무지몽매한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도 마침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내 이를 가련히 여겨 새로 성경 역본을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읽어 구원받고 영적으로 자라게 할 따름이니라.” 정도..;;

그 외에 더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면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자.
http://jesus-is-lord.com/kinginde.htm

물론 저 사이트의 운영자는 KJV 지지자로, 제임스 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그가 아주 훌륭한 왕이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담배를 지독하게 싫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 번역 작업에 앙심을 품은 교황청 세력에 의해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gunpowder 사건)
KJV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임스 왕에 대해서도 굉장히 치졸하게 헐뜯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영국 역사를 좀 공부해 놓는 것도 좋다.

킹 제임스 성경 이전에도 여러 성경 역본이 존재해 왔으나, 이 KJV만이 20세기 초까지 독자적으로 쓰이면서 전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수많은 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KJV는 400년 전에 출간된 후, 인쇄 오류를 바로잡고 개정된 영어 철자법대로 표기를 고치는... 몇 차례 edition이 나왔다. 그래서 1611년 KJV의 1769년도 edition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쓰고 있는 그 정확한 본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글 개역성경도 번역 후 제정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대로 새로운 edition이 나온 바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차원이다. edition은 코딩으로 치면 재컴파일이나 포팅일 뿐이지, 결코 프로그램의 로직을 바꾸는 revision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이렇게 성경의 절대 기준이 나오고 영어가 나오고 세계 표준시가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철도 표준 규격도 여기서 정해졌다. ^^;;;
영국에서는 올해에 KJV 발간 4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될 것이라고 한다. (내년에는 올림픽을 기념하여 콩코드도 다시 먼지 털고 잠시 운항할 거라고 하던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성경을 이단이라고 하고 있고 그 많고 많은 기독교 서점에서 역본 자체를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대단히 통탄할 노릇이다.
오늘날 KJV는 영국에서도 듣보잡이 돼 가고 있다. 인도에서 불교를 찾을 수 없고,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찾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나 할까..

아무쪼록 이 글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보존에 대한 믿음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블로그 말고 이곳 대문에 HTM 문서로 등재되어 있는 <음란한 성경은 가라>, <킬로그램 원기> 같은 본인의 글도 읽어 보시길.

Posted by 사무엘

2011/01/26 08:36 2011/01/2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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