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 구독자라면 이미 다 아시겠지만.. 본인은 어린 시절부터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교회 생활을 오래 해 온 크리스천, 예수쟁이이다. 그래서 블로그에다가도 성경 관련, 기독교 교리 관련 글을 지금까지 엄청 많이 써 왔다.
장기적으로는(한 10년 안?).. 그 글 내용들 일부를 정제하고 분야별로 나눠서--구원 복음, 성경 난제, 신앙 생활, 성경 번역 등등등-- 유튜브를 한다든지, 아니면 종이책을 출간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뭐, 이것도 마치 컴퓨터 분야에서 github 계정 파는 것처럼 그냥 구상만 하는 거고 적극적으로 실행까지는 아닌 상태이다. 현실적으로는 직장이나 한글 입력기 개발이 더 급해서 말이다.;;

본인은 20여 년 전 대학 시절에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진영에 입문함으로써 신앙 노선이 크게 바뀌었다. 대외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고 이단 편견도 많은 곳을 굳이 선택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들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 같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말씀 보존 학회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 초판 발간된 지도 벌써 30주년=_=이 임박했다. 그거 기념으로 한번 더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실, 본인은 신앙 노선이 바뀌었다거나 달라졌다는 말도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KJV 진영으로 오면서.. 원래 막연하게 믿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강화된 것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둘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 행위가 아닌 믿음만으로 구원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건지.. 죄 짓고 회개 안 하면 도로 취소되는 건지는 긴가민가했다. ==>> 당연히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고, 죄 짓고 회개가 없으면 보상 등 딴 걸 잔뜩 잃는다고 알게 됐다.
  • 성경 말씀은 완전하고 무오류하다고 배웠지만.. 최초의 자필원본만 그렇다고 들었다.. ==>> 그렇지 않고 번역과 보존도 완벽하게 무오류하며, 그 실체가 지금 이 시간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건 맞는데 창세기 1장의 6일이나 계시록의 1천 년은 많이 애매했다. ==>> 문자적 해석과 영적 적용의 관계를 명확하게 깨우쳤다.
  • 신약 시대 은혜의 복음에 대해 배웠다. ==>> 응 그건 당연한 건데, 대환란 때는 왕국복음이 등장하고 영원한 복음이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기는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무조건 다 구원받는다. 유아세례 안 받아도 된다. 그 대신 살아 있는 동안은 부모가 꼭 의로 양육해야 된다. 체벌은 악을 훈계하고 바로잡는 용도로는 필요하다.

이런 식이다.

한편으로는 믿음만으로 구원이라고 배웠지만 "자살하면 구원 상실인가?", "끝까지 신실하지 않으면 대환란 때 남겨지나? 666 안 받으려고 버텨야 되나?" 갖고 고민하던 거.
성경 역시 여느 고문서와 다름없으니 현대의 학자들이 옛날 텍스트와 의미를 새로 복원해 줘야 하냐고 생각했던 거.
어린아기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뭐는 자유의지이고 뭐는 예정인지 이런 간단한 문제들에 대한 답도 모르고 있다가 속 시원하게 논리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해 준 진영을 선택한 것이다.

킹진영이건 기성 교회건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닌가? 원래는 성경도 같은 성경을 보지 않는가?
그런데 세부 방법론이 다르다고 서로 이 정도로 적대하고 이단시하고 대립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된다.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절대 없다고 말하는 배타적인 종교(?)가 있다면 그렇게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쓰여 있는 경전, 말씀도 당연히 하나만 맞지 이와 일치하지 않는 건 다 잘못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소리이지 않은가?

"예수..?? 응 훌륭한 사대성인 도덕 선생이지. 근데 예수만 믿어야 구원이라고? 그건 사이비 광신이지~"와
"킹 제임스 성경..?? 응 훌륭한 영문학 고전이지. 근데 성경 번역이 그것만 맞다고? (통상적인 이역 수준은 논외) 그 본문 계보만 맞다고? 그건 이단이지~"가
내가 보기엔 둘 다 거의 같은 영, 같은 분별에서 유래됐다.

"기존 개역성경(개역개정)은 사탄 마귀에 의해 변개되고 부패된 성경이다"
이 말은 매우 극단적이고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기 좋다. 개역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누가 감히 저런 무엄한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저 말은 "제아무리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도 육신 모드가 극에 당해서 마귀 들린 듯이 깽판칠 수 있고, 마귀에게 실컷 쓰임받을 수 있다"와 같은 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개역성경에도 변개되지 않은 말씀이 많이 있고 그거 읽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 것과 별개로..
소량의 변개 삭제된 부분은 누가 뭐래도 마귀 영향을 받은 게 맞다. 그게 불편한 진실이다.

사람이 무인도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야 벌레나 풀뿌리라도 먹어야겠지만.. 멀쩡히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그런 저질 단백질 공급원을 찾아 먹을 필요는 추호도 없다.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하자나 결함이 전혀 없고, 남이 만진 흔적이 없는 깔끔한 걸 고르려 애쓴다.

맛집 찾아가서 밥 먹는데 음식에 머리카락이 한 가닥이라도 나왔다? 어디 곰팡이 슬고 상한 부위가 있다? 그러면 찝찝해서 그 음식은 통째로 교환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무시하고 그냥 먹어도 어지간해서는 탈 날 일 없더라도 말이다.
당신에게 성경이 정말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책이라면 성경 역본을 고를 때도 이런 잣대가 자연스럽게 적용될 것이다! 아멘~

KJV 유일주의를 반박하고 빠져나가는 논리는 대부분이 "그건 후대에 첨가된 거고 원본에 없던 구절이다", "여기에는 빠졌어도 다른 책에는 있어서 괜찮다(마태-마가, 에베소서-골로새서 따위)", "오히려 KJV의 오역이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반대자도.. 말이 완전히 다른 벧전 2:2 구절이 KJV가 틀렸고 다른 현대 역본들이 맞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걸 지난 20년 동안 본 적 없다. 약 5:16의 '잘못/허물'이 틀렸고 변개됐고 '죄'가 맞다고 양심을 걸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본 적 없다.

그 발달된 성서고고학 사본학과 헬라어 원어 지식으로 나온 결과물이 고작 그거라면.. 미안한데 나는 그게 맞는 하나님 말씀이라고는 동의 못 하겠다. KJV 유일주의 소신을 버릴 생각이 없다. 내가 수학이나 과학 등 다른 학문에서는 인간의 지성을 동원한 논리와 합리주의, 과학적 방법론을 다 존중하지만, 이 바닥만은 쪼금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 애초에 종교나 신학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와 진영논리"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원본 원문이 없지만 온전히 번역되고 보존된 필사본이 original과 동급이다. 행정에서 말하는 '원본대조필' 도장이 찍힌 거나 마찬가지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럴 거면 진짜로 하나님이 지옥을 전하기 위해서 지옥 구경을 진짜로 하고 온 사람을 살려 보내셔야 할 것이고, 성경 시대의 헬라어 히브리어를 구사하던 사람을 살려 보내서 뜻풀이를 시켜 주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하시지 않고 후세를 모두 기록된 말씀을 통한 간접 체험만으로 충분하다고 처분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의 변화산 변모 목격보다도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되다"라고 인증까지 해 주셨다. 그 약속은 성경의 온전한 보장을 당연히 전제로 깔아야만 성립 가능하다. 이런 원리를 알면 특정 성경 번역본만 우상화.. 이런 무식하고 민망하고 저열한 소리는 할래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 물론 KJV와 타 성경들은 거시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 구절보다 일치하는 구절이 훨씬 더 많다. KJV 진영 교회라고 해서 24시간 365일 내내 '변개된 구절 차이점'만 파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일상적인 교리 쪽에서 KJV 계열 교회가 기존 개신교회와 큰 차이를 보이는 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성경 해석 방식이라든가 교회사· 경륜에 관한 인식이다.

(1) 개신교 쪽에서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은 게 기독교가 세상을 상대로 큰 승리를 쟁취한 거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세상 요직에 진출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킹 진영의 관점은 다르다. 세상적인 성공은 자기가 재능과 노력을 다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성공하면 하는 거고, 그 자체가 교회의 세력이나 개인의 영적 성장과는 별개라고 여긴다. 박해보다도 왜곡과 변질, 배도, 순수성 상실이 기독교계에 훨씬 더 해로운 현상이라고 분명하게 인지한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당장은 기독교 박해를 멈추게 했지만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으며, 그 뒤로 훨씬 더 큰 비극을 불렀다고 본다. 그냥 일제 시대 문화 통치의 로마 제국 버전이나 마찬가지이다.

(2) 종교 개혁자들을 좋아하는 개신교 쪽에서는 에라스무스, 칼빈 같은 그 선조들이 성경 본문의 편찬과 성경 번역에도 신경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가 보다. 그렇게도 제네바, 제네바 그러는데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은 모름..;;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점을 특별히 공략해서 개신교들을 대상으로 킹 제임스 성경을 전하기도 한다.

(3) 이 킹 제임스 진영은 대체로 '온건한 세대주의' 성향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나 침례나 구원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서 다 똑같지는 않다고 본다. 계시록 예언은 대부분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예수님 재림 때 이뤄진다면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뤄진다고 본다. 함부로 비유나 묵시 따위로 치부하지 않는다. 과거에 이미 이뤄진 예언들 사례를 보니 아주 문자적으로 이뤄졌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건전한 관점 아닌가..?? 도대체 왜 세대주의가 막연하게 이단 프레임을 뒤집어쓰고 있는지..? 종말 자체는 있지만 당연히 특정 날짜 정해 놓고 깽판 치는 시한부 종말론이 절대 아니다.

아무쪼록 나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내 양심에 따라 정확하게 전하기는 하고서 거절 거부 당하거나 이단 소리 듣는 것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다.
시한부 종말론, 구약 무용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 문자적인 예수님 재림과 천년왕국 통치를 믿기 때문에 이단.
자기네 성경 안 보면 구원 못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13구절이 삭제됐고 6만여 단어가 변개됐다고 팩트폭격을 하기 때문에 이단.

이러면 진짜로 예수님이나 바울이 이단 소리 들었던 것과 똑같은 취급이고, 하늘나라 보험에서 보상 사유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건전하게 성경 교리를 풀어 주는 신학 노선이 있다면 나도 들어는 보고 싶다.

※ 여담: 이단 중의 이단 안식교

아니 무슨,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도 안식교에서 유래됐고.

"벤자민 G. 윌킨슨(1872-1968)은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선교사이자 제7일안식일워싱턴재림대학교 신학부 학장이었다. 킹제임스성경의 유일주의는 윌킨슨이 1930년에 출간한 『입증된 우리의 흠정역 성경』이란 제목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그는 시편 12:6~7을 잘못 적용하여, 그 말씀이 마치 킹제임스성경 보존에 대한 약속인 것처럼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윌킨슨이 KJV를 지키려 했던 이유는 1881년 개정된 성경RV이 KJV보다 자신이 믿고 지지하고 있는 안식교 교리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권 동우,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망상』(CLC, 2016), pp. 41-42


젊은 지구 창조론/창조과학도 안식교에서 유래됐다니..

1938년 제7일 안식교인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1870-1963)가 홍수 지질학을 주장하며 홍수 지질학회(Deluge Geology Society)를 설립한 것이 근대 창조설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사이비 과학적인 설명을 더해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젊은 지구 창조설, 혹은 창조과학이다.
-- 로널드 L. 넘버스, 『창조론자들』(2016). 새물결플러스, pp. 295


만만하면 다 호구 안식교 탓이냐..?? 1930년대에 안식교라는 곳은 아주 대단한 곳이었구나. -_-;; ㄲㄲㄲㄲㄲㄲㄲ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론 와이어트'(1933-1999)라는 아마추어 성서고고학자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논란 많은 이 아저씨가 안식교인이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흔적은 말할 것도 없고, 홍해 밑바닥을 탐사해서 모세 시절의 병거 바퀴를 발견하고 심지어 골고다 언덕에서 부계 염색체가 없이 모계 염색체만 있는 예수의 진짜 혈흔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사람 말이다. =_=;; 물론 이건 안식교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사실, 내가 알기로 정작 안식교는 크리스천도 안식일 지켜야 된다는 요지의 이상한 소리 하는 것 말고 다른 건 별로 이단기가 없다. 교리 측면에서만 이단일 뿐,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것도 없다고 들었다.
하물며 성경 말씀이 번역 과정에서도 온전히 보존되었고 그 실체가 지금까지 있다고 믿는 것,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믿는 것 그 자체는 아주 건전한 기독교 신앙이다. 문제될 게 전혀 없다. =_=;;

아무쪼록 누구든지 "이단들이 성경을 엄청 파고든댄다, 요한계시록 공부 열심히 한댄다. 6일과 1천 년을 문자적으로 믿는댄다. 이단들이 재림을 사모한다고 하니 우리는 성경 공부하지 말자, 재림 사모하지 말자." 이런 무식한 짓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다음은 진짜 마지막 여담.

  • the Holy Bible '성경'이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성경전서'라는 말이 왜 붙었을까? 신구약 66권이 모두 들어있다는 걸 굳이 강조하고 싶었는가 보다.
  • 한킹이 출간된 1994년 4월 12일은 KBS 박 지원 아나운서의 생년월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5일은 서울 2기 지하철을 관할했던 서울 도시철도 공사가 창립된 날이다. ㄲㄲ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4/04/11 08:35 2024/04/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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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번역: 킹 제임스 성경에만 나오는 가르침

(1) 마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마태복음의 결말부에 나오는 great commission은 흔히 make disciple(제자 삼다)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 용덕 작곡 "가서 제자 삼으라"(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라는 복음성가가 쌍팔년도 시절에 유명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그냥 간단하게 '가르치다' teach라고만 돼 있다. 이건 뭐 변개라기보다는 번역 표현의 차이인 것 같다. 제우스(그리스)냐 주피터(로마)냐 하는 차이점과 비슷한 건지도?
저 복음성가 역시 후렴 가사가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길을 가르치라"라고 그게 결국 그 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2) 삿 8:16 "그 도시의 장로들을 붙잡은 뒤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건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무슨 삽자루 선생이라든가 일제 시대 칼 찬 선생처럼 흉기를 폼으로만 들고 열혈 강의나 교육(...)을 한 게 아니다.;; 진짜로 흉기를 휘둘러서 처절한 피의 보복을 했다는 얘기이다. 7절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라고 경고 내지 예고한 걸 그대로 행한 것이다.

위급할 때 주변에 좀 도와 달라고 요청했는데 듣보잡 취급받고 인격 모독과 함께 무시 당하는 건 사람을 정말 최고로 빡돌게 만든다. 그 위기를 이 악물고 극복하고 나서는 당연히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어진다.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당한 거랑.. 나중에 다윗이 나발에게 당한 게 서로 거의 판박이인 것 같다. (삼상 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KJV 외의 타 성경들은 저 구절을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을 '징벌했다, 응징했다' punish"라고 번역한 편이었다.
그러나 KJV는 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 ㅆㅂ 누구든지 작은 기드온을 건드리면 X되는 거예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참교육인 것이다. 매우 흥미롭다. -_-;

성경은 체벌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이고, 심지어 잠 26:3 "어리석은 자의 등에는 매가 약" 같은 말씀마저 있는 걸 생각하면 일면 수긍이 간다.
그나저나 말보회 한킹은 이 구절의 teach를 '일깨워 줬다'라고 꽤 특이하게 번역했다.

2. 성경 해석: 잠 25:12 숯불 쌓기

성경이 인간의 행실과 관련하여 요구하는 전반적인 논조는 "악을 악으로 되받아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원수를 사랑하라, 남의 잘못을 용서하라"이다.
그러나 이는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 뉘우침이 없는 악인들한테 무한한 호의와 관용을 베풀면서 호구 취급받으라는 말이 절대 절대 아니다. 북괴한테 무한정 퍼 주라거나,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한테 뜬금없이 현금 쥐어 주라는 말도 아니다.

내 가족을 죽인 흉악범이 죽이고 싶도록 밉고 보복하고 싶어하는 거.. 그 자체는 부당한 피해를 입은 인간이 충분히 가질 만한 심정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도피성이라는 걸 괜히 만드셨겠는가.
성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 자체는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하게 당한 만큼만 되돌려 줘라. 되로 받은 걸 말로 보복하지 마라"라고 권고할 뿐이다! 이 와중에 인간의 입장에서 용서니 사랑이니 아량이니는 보복을 대신 집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근거로 삼아야만 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잠 25:21-22를 보자. 그리고 이를 인용하고 있는 신약의 롬 12:19-21도 보자.
내용을 요약하자면 "니 원수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물과 음식까지 주면서 선대해라. 그거야말로 원수의 머리 위에다 숯불을 얹는 것 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하나님이 대신 보복을 해 주실 것이다"이다. 아까 저 기드온과 다윗이 받았던 취급의 완전 정반대를 하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지금 당장 손해를 감수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더(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신다~~" 이 패턴이야 구약 율법에서 이삭 줍기나 종 제도 등 곳곳에서 발견되니까 익숙할 것이다. 그게 원수· 보복과 관련해서도 적용된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많은 오해가 나도는 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이라는 표현이다. 이건 무슨 심상이며 무엇을 의미할까?
어려울 것 없다. 결론부터, 답부터 말하자면.. 이건 문자 그대로 아주 잔인하고 처참한 보복을 의미한다. 오죽했으면 휴버대 고문 소믈리에 에피소드 중에도 아주 적절한 묘사가 있더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머리 위에 숯불은 딱 이걸 의미한다. -_-;;;;
"죽이고 싶은 니 부모의 원수, 니 자녀의 원수가 마침 쫄딱 망해서 길거리에서 헐벗은 상태이네? 원수를 제일 완벽하게 압도하고 제일 가학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바로 그때 그 원수놈을 신앙의 힘에 의지해서 반대로 먹이고 입히고 도와 줘 봐라. 그러면 그놈은 머리에 숯불이 얹혀서 쪄 죽는 것 같은 급의 보복을 당할 것이다." 이런 말인 것이다. 아멘?

(1) 머리에다 숯불을 얹는 것은 원수가 "뜻하지 않은 선대를 받아서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후끈후끈 빨개지는 걸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심지어 이 구절의 번역을 그런 쪽으로 한 역본이 있다. 휴~ 이건 인본주의적인 뇌피셜을 너무 발휘한 것 같다. 성경에는 죄인이 회개하는 건 있어도 그렇게 반응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면.. (2) 이건 원수한테도 불씨를 빌려주는 선행을 의미한다..? 옛날옛적에 성냥이나 가스레인지가 없었고 아무리 불씨가 귀했다지만, 이 얘기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어느 고깃집에서 겁대가리 상실한 종업원이 불 붙은 조개탄이나 숯을 머리에 이고 다니던가? 그러다가 엎어지고 자빠지면 어쩌자고? =_=;;;

성경에서 단서를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면 때로는 원어나 그 당시 역사 고증 따위를 참고해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창세기 6장 고펠나무의 정체 같은 거라면야..  하지만 이 숯불은 그렇지 않다.
이건 그냥 시 140:10에서 말하는 그 숯불이다. 유황불과 다를 바 없는 부정적인 심판 맥락이다. 이 숯불은 인간이 얹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복 차원에서 얹는 불이다. 이 정도면 "머리 위 숯불 선행설"은 설 자리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요즘 어떤 성경 역본은 잠 25:22를 보니.. '조건문'을 만든 게 있었다. "니가 그의 머리에 불타는 숯을 쌓으면 주께서 보답해 주실 거다" ...;;; 안타깝지만 이건 영어· 원어에 충실한 번역도 아니고 숯불의 성경적인 심상도 모른 채 '숯불 선행설'을 전제로 깔고서 번역을 아주 잘못한 것 같다. 여기서 숯을 쌓는 건 비유적인 심상일 뿐이다. 하다못해 구닥다리 개역성경이 원래 의미에 더 근접하게 번역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3 19:36 2024/02/2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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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언 또는 예언

'킹제임스 흠정역'은 prophe-로 시작하는 단어들(-sy, -cy, -t)을 한 치의 예외 없이 모두 '대언-'이라고 옮긴 것이 특징이다. 선지자, 예언(자) 대신 전부 '대언(자)'이다. 이건 우리말 성경 중에 안티오크 권위역에서 처음으로 시도했고 그게 오늘날 흠정역에까지 남아 있는 흔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대신 전하기, 또는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대언'이 틀린 말은 아니다. 출 7:1-2 같은 용례도 있다.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속성은 미래 예언이다. 성경이 인간의 개똥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인 증거 중 하나도 바로 예언이 확률적으로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문자적으로 많이 적중했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긴 한데, 그 대언 중에 미래 "예언"도 있다는 것이다. 관계가 이렇게 정리된다.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prophesy에 속하는 책이라고 분류되는데, 이건 당연히 예언을 말한다. 후자까지 몽땅 대언이라고 싸잡아 풀이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중에서도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

흠정역이 아쉬운 점은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키워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예언이라고 하면 자꾸 은사주의 점쟁이 예언 기도... 가령, "너는 몇 월 몇 일 몇 시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이고.. 이 번호의 로또를 사면 당첨될 것이다" 이런 걸 떠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4장에다가 '예언'이라는 단어를 넣는 걸 너무 부담스러워한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 갖고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휴거나 종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언 갖고 이상한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에 예언이라는 개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꼭 초자연적인 점쟁이급 예언이 아니더라도.. "너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는다면 지옥에 가게 된다" 같은 원론적인 얘기만으로도 이미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다. 예언과 대언은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다.

물론 같은 단어가 어디서는 예언에 더 가깝고 어디서는 그냥 대언에 더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원칙을 갖고 번역하더라도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예언을 단 하나도 없이 깡그리 없애 버린 건.. 마치 구약의 사자음어를 몽땅 LORD라고 번역하느라 '여호와'라는 단어를 아예 깡그리 없애 버린 것과 비슷한 면모로 보인다.

이건 흠정역을 사용하는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지적하며 아쉽게 생각하는 면모이다.
말씀 보존 학회에서는 흠정역을 20여 년째 아주 부정적으로 까내리고 비방하는 편인데.. "우리 한킹을 도둑질한 짝퉁" 같은 영양가 없는 저질 네거티브 말고 "예언이 없는 성경" 이런 식으로 흠정역의 진짜 약점에 대한 공략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계 19:10 "...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의 경우, 옛날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대언'이었다가 나중에 나온 개역개정에서는 '예언'으로 바뀌었다~!
이는 킹 제임스 계열이 아닌 성경을 만드는 진영에서도 prophecy의 번역이 쉽지 않은 고민거리라는 걸 시사한다. "예수 믿는 증거는 말씀 선포/대언" vs "예수님이 하나님인 증거는 미래 예언 능력" 이렇게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 회개, 축복

영어의 동사 중에는 repent나 bless처럼.. 사람과 하나님이 모두 주체가 될 수 있는데 동일하게 번역했다가는 난감해지는 단어가 있다.
기계적으로 한 단어로만 번역하면 하나님이 잘못을 저질러서 후회· 회개(!!)를 하고, 남에게 복을 빌게 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돌이킨다, 슬퍼하신다 / 복을 '주신다')

prophesy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이 자기 말을 또 대언(?)하는 것일 리는 만무하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역시 예언이 되어야만 타당하겠다. 이 역시 생각할 점이다.

3. 전치사

(1)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흠정역은 OF를 중의적으로 직역해서 갈 2:16 faith of Jesus Christ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옮긴 성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 11:9 knowledge of the LORD는 '{주}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했다.
말보회 한킹은 그 반대다. 갈 2:16은 예수님 믿는 믿음이라고 풀이를 했지만 후자는 그냥 '{주}의 지식'이라고 옮겼다. 영어에서 of는 정말 독보적으로 중의적인 전치사임이 틀림없다.

(2) FOR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 싶다. '-를 위한'(목적)과 '-로 인한'(이유)의 의미가 모두 있다. for sinner, for sin이 모두 가능한데 우리말로는 번역 표현이 갈린다.
한킹은 for the remission of sins를 "죄사함을 위한"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인한"이라고 따박따박 번역했다. 하지만 흠정역은 요일 2:2를 "죄로 인한 화목제(화해 헌물)"라고 옮겼다.

(3) IN은 기본적으로는 '-안'이라는 뜻이지만 rejoice in, believe in처럼 그냥 '-를'이라고 타동사처럼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하다못해 미국 지폐에 쓰여 있는 In god we trust도 말이다. ㄲㄲㄲㄲㄲ 생각보다 까다롭다.
요일 4:3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한 최초의 역본은 안티오크 권위역이고, 그 뒤 흠정역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한킹은 그냥 '육체로..'이다.

4. 조동사

영어의 can, may, will, must 같은 조동사는 우리가 중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아주 쉽고 기초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이 조동사들은 뭐랄까, 손에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 굉장히 므흣한 단어이기도 하다.
의미가 마치 to 부정사처럼 예정-의지-가정 속에서 막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과거형은 단순히 시제만 과거인 게 아니라 뜻이 또 변하기도 한다. 과거형이 좀 더 완곡하고 공손한 표현이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shall은.. 1인칭이 포함돼서 "이렇게 할까?"라는 제안으로 의미가 굳어져 버렸고, 과거형 should만이 과거가 아닌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 영어에서 몇몇 조동사들이 쓰인 걸 보면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 shall: 할 것이다(미래), 할지어다, 제안, 게다가 명령까지 붙어 있다. (thou shalt not kill) be 동사가 is, are 등으로 굴절되지 않고 뜬금없이 be 원형으로 등장한다면.. 그 문장은 십중팔구 should가 생략된 형태여서 그렇다.;

  • will/would: 역시 shall처럼 미래의 뜻이 있는데... shall과 달리 명령 뉘앙스가 아니라 want와 거의 같은 급으로 '원하다'라는 뜻이 덧붙어 있다. 딤전 2:4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will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용례 때문에 '유언'도 testament뿐만 아니라 요즘은 will이라고 표현한다.

  • want: 그럼.. 현대 영어에서 '원하다'라고 즐겨 쓰이는 이 녀석은 킹 제임스 영어에서는 lack/need와 비슷한 뜻의 자동사로 쓰인다. 시 23:1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I shall not want이다. 현대 영어로 I will not be in need 정도의 뜻이 저렇게 표현된 것이다.

군대의 야전교범이란 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지침뿐만 아니라 "그때는 이렇게 하라"라는 명령도 된다. 그렇다면 이런 교보재의 문장은 옛날 같았으면 다 shall이라고 쓰면 됐을 것이다. ㄲㄲㄲㄲㄲ

5. wine

이것도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흠정역은 우리말 성경 중에 wine을 최대한 알코올 없는 '포도즙'이라고 옮긴 역본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감히 술을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을 리는 없으니, 요한복음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음료도 '포도즙'이다. 이건 의외로 권위역이 아닌 흠정역의 독자적인 관행이다.

그 정도면 괜찮지만.. 그래도 옆에 '독주'가 나란히 나오고 부정적인 문맥이 명백해 보이는 곳에서까지 무리하게 포도즙이라고 워딩 할 필요가 있나 싶은 구절도 있다.
"모조리 포도즙"도 "예언 대신에 몽땅 다 대언"와 비슷한 흠정역 번역 정책인 것 같다.

물론 창세기 9장에서 노아가 술 취해서 자빠진 장면, 잠언에서 술을 극딜하는 장면에서는 흠정역도 당연히 '포도주'이다. wine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용례가 술인 만큼, wine은 그 뒤로도 가능한 한 '포도주' 쪽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6. virgin

끝으로.. 계 14:4의 '처녀'는 흠정역 마제스티판에서 고쳐졌나 모르겠다. "여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은 처녀"라니.. =_=;;;
하필 공교롭게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저 딱 한 구절..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virgin은 여자가 아니라 그냥 동정남을 가리킨다. 곧이곧대로 한 단어만으로 옮겨서는 안 되는 지뢰 같은 단어가 성경에 의외로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흠정역은.. 창 19:5의 man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남자'라고 옮겨야 된다는 지론을 초창기 거의 20년 전부터 고집하고 자랑해 왔다. 왜? 이건 소돔 놈들이 남색을 저지르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건 흠정역만의 독특한 특징이며, 그건 번역 방침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런 성별을 철저하게 챙겼으면서 계 14:4 virgin을 숫총각 동정이라고 안 하고 처녀...;;;
소돔만큼이나 남자라는 단서가 버젓이 붙어 있는데.. 이건 일관성이 심각하게 결여되는 아쉬운 조치로 보인다.

처녀 virgin를 그냥 젊은 여자(기혼 여부는...??)라고 의역 변개하면 예수님의 탄생의 특성이 희석돼 버린다.
그런데 어느 동네의 워딩처럼 동정녀...라고 하면.. 엄마가 평생 남편과의 자식을 안 낳았다는 뉘앙스가 들어가 버리니 문제인데..
계시록에서는 애초에 여자가 아닌 virgin이라는 게 함정이다.;;

7. kill

'죽이다'를 뜻하는 kill은 중학교 수준의 아주 쉬운 기초 단어로, 사람이건 동물이건 모두 목적으로 받을 수 있다. 한국어는 '죽이다' 말고 '살해하다'는 사람에게만 쓰고, '잡다'는 짐승에게만 쓴다.

십계명 제6계명 Thou shalt not kill은 우리말로 '살인하지 말지니라'라고 적절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건 일체의 살생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권에서 이건 '살생'이 아니라 '살인'이니까 murder가 더 나은 워딩이 아니냐는 제안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KJV 이후의 현대 역본들 중 일부는 murder로 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십계명의 주변 계명들을 보시라. 부모 공경, 간음, 도둑질... 오로지 신 아니면 인간만을 다루는 저 문맥에서 등장한 kill은 당연히 살인이지, 갑자기 동물 보호 따위가 튀어나올 여지는 전~~혀 없다. 혼동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음절수 더 적고 간결한 단어를 쓰는 게 더 낫다.

ere - before / foe - enemy / list - desire / let - allow ... 이런 식으로..
KJV의 영어 단어를 살펴보면.. 옛날 고어 단어가 더 짤막하고 운율과 암송에 더 유리한 경우가 적지 않다.

참, kill 말고 slay - slew(과거) - slain(과거분사)도 kill과 거의 같은 뜻이지만 더 문어적인 느낌의 '죽이다'이다. 특별한 차이 없이 그냥 섞여 쓰인 게 아닌가 추측된다. see / behold와 비슷한 관계인 걸까..??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창 4:8에서도 이 단어가 쓰였고..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먹겠다는 얘기에서는 아예 목적어 없는 자동사로 slay가 창 43:16에 나온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본 짐승 환상이라는 같은 장면에서 두 단어가 일부러 동시에 쓰이기도 했다. (행 10:13, 행 11:7) 표준역은 둘을 서로 달리 번역했다. (잡아먹으라, 도살하여 먹으라)

Posted by 사무엘

2024/02/18 08:35 2024/0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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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관련이 없는 아이템들이긴 하지만, 그냥 한 글에다 한데 엮었다. ㄲㄲㄲㄲㄲㄲ

1. 사다리

성경의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꿈 말이다. 하늘에서 아래로 사다리가 하나 내려와서 천사들이 그걸 딛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걸 묘사한 성화도 역사적으로 아주 많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과거에서 현대로 갈수록 “사다리가 아니고 계단이지 않을까?”로 바뀌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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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90년경에 프랑스에서 그려졌다는 이 옛날 그림을 보자. 천사들이 손까지 기둥을 붙잡아야 할 정도로 (1) 직각에 가까운 경사의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진짜 문자적인 사다리.. 무슨 성벽 타는 공성전을 치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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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중에는 손까지 붙잡지는 않고, 다락방 계단 같이 아주 가파른 (2) 계단 반 사다리 반이 등장한다.
더 나중에는 보다시피.. (3) 아예 희고 단단하고 경사도 훨씬 더 완만한 돌계단으로 바뀐다.
야곱이 꿈 속에서 실제로 본 장면은 (1)~(3) 중 어디에 가장 근접해 있을까?

이건.. 흔히 말하는 본문 계보에 따른 변개 이슈가 아니다. 그냥 옛날 성경과 현대 성경의 차이일 뿐이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개역성경이고 킹 제임스고 뭐고 다 똑같이 사다리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부터 창 28:12의 번역이 대놓고 ‘계단’이라고 바뀌기 시작했다.
ladder는 성경에서 저기 딱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구절의 용례를 비교해 볼 수 없다. 고펠나무가 노아의 홍수에서 딱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말에서는 사닥다리와 사다리 모두 표준어이다. 특히 개역성경이 이 구절에서 ‘사닥다리’를 썼고 개역개정에서도 같은 워딩을 유지하고 있다.
개역성경은 이것만 사닥다리이고, 에스겔서 등에서 운제(공정전용 이동형 사다리), 보루 같은 건 사다리라고 나름 구분을 해 놨다.

그나저나 저 1490년 그림은 사다리 주변에 아무 후광이 비치는 게 없어서 별로 간지도 안 나고, 결정적으로 사다리 꼭대기가 너무 낮다.. ㅡ,.ㅡ;; 그림을 너무 대충 그린 것 같다. ㅠㅠㅠㅠ
그래도 히브리어 원어로도 설마 계단과 사다리가 같은 단어는 아니겠지.. 계단이 아니니 처음에 옛날 번역도 사다리로 시작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야곱은 밤에 딱딱한 땅바닥에서 돌을 베고 자연 속 노숙을 했다. 나도 야곱처럼 살고 싶다~!!
이 창세기 28장의 야곱 이야기가 가사에 담겨 있는 드문 찬송가 중 하나가 바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다..! 1절이 아니라 2절과 그 이후의 가사이기 때문에 존재감이 좀 덜 느껴질 것이다. ^^

2. 물이 와인으로 변환된 기적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 혹은 예수님이 물을 와인으로 변환하신 기적 말이다.
그때 기적적으로 자동 생성된 와인의 양은 얼마 정도였을까?

6절을 보면, KJV에 따르면 2~3 firkin 분량인 항아리가 6개가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firkin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여기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생소한 단어인데.. 1 firkin은 10갤런에 대응한댄다. 그래서 KJV 이후의 통상적인 영어 성경들은 20~30 갤런짜리 항아리 6개라고 표현하였다.

1 firkin, 10갤런은 38리터에 달하는 용량이다. 생수 담는 그 말통의 두 배가량인데..
한글 개역성경은 거리의 단위 mile은 5리라고 토착화 단위를 붙였으면서 저기서는 4~6말이라고 토착화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마 5:41의 mile도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안 나오는데 말이다.

요 2:6에서는 firkin을 물통에다 대응시켰는지, ‘두세 통’이라고 번역했고 이걸 후대의 우리말 성경들이 별 생각 없이 따른 것 같다. ‘통’을 단위로 보고, “2~3통짜리 항아리 6개”라고 번역하는 게 관행이 됐다.

말보회의 한글 킹 제임스는 의외로 이 관행을 깨고.. firkin의 원어를 밝혔다. “2~3메트레타짜리 물통 6개.” 즉, ‘통’은 원래 뜻인 용기, 그릇으로 사용했다. 국내의 우리말 성경 중에 요 2:6을 저렇게 번역한 성경은 한킹이 유일하다.
furlong을 ‘스타디온’이라고 원어를 밝혀 번역한 것과 동일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 (계 21:16 등~) 흠정역은 furlong은 스타디온이지만 firkin은 원어를 밝히지 않았다.

요즘 말 많고 논란도 많은 표준역은?? 그쪽은 워낙 영어 직역만 고집했기 때문에 펄킨, 펄롱에다 파운드, 마일까지 몽땅 영어 도량형을 그대로 썼다. ㄲㄲㄲㄲㄲㄲ 제일 파격적이고 과격하다.

뭐, 한국어 토착화든 영어든 그리스 원어든.. 저 계산에 따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저 석재 물항아리 하나의 용량은 거의 100리터에 달한다.
예수님은 그 항아리 6개에 가득 담겼던 물을 몽땅 와인으로 변환하셨다.

600리터를.. 생각보다 양이 많다! 겨우 와인잔이나 유리병 몇 개 수준이 아니다!! 도대체 하객을 몇 명이나 초청해서 잔치를 얼마 동안이나 진행한 걸까? 오병이어처럼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100수십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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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양 해적 영화에 나오는 허리 불룩한 나무 배럴이 용량이 개당 150~160리터였다고 한다. 그거 4개 분량이다.
그리고 요즘 석유 담는 용도로 쓰이는 철제 드럼통 용량이 개당 200리터에 가깝다고 한다. 그거 3개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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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 잔치를 묘사한 옛 성화들 중에는 항아리가 너무 작게 묘사된 게 여럿 눈에 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고증을 무시한 결과물인 것 같다. =_=;;
오히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끝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어째 구겨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항아리를 생각해야 하지 싶다.

  •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인간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다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 2:5)
  • 그러고 보니 배럴(barrel)도 처음에는 150~160리터짜리 나무 술통이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200리터짜리 드럼통의 단위 명칭으로 슬며시 바뀌었다. (석유 10만 배럴..) 우리말 성경 요 2:6에 나오는 '통'도 그런 의미 확장을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다. ^^

3. 동방박사

마태복음에 따르면, 먼 옛날 예수님이 탄생하던 당시에 일명 '동방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별을 보고는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성경에는 그 동방박사의 인원수나 이름 같은 건 전혀 안 나온다. 오히려 10수 명 이상 무리를 지어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데 굳이 3명에 이름까지 거론된 건 아무래도 다른 종교적인 전통이나 설화가 첨가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동방박사들이 바친 예물이 세 종류이긴 했다. 그것 때문에 인원수까지 3이었을 거라는 편견이 생긴 것이지 싶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이 ‘박사’라고 해 놓으니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저 사람들이 꼭.. 무슨 학위를 소지한 학자 글쟁이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아니고.. 저기서는 지식보다는 지혜.. wise men 지혜자가 더 정확한 뉘앙스이다.
시쳇말 ‘현타’라고 할 때 떠올리는 그 ‘현자’.. 딱 그걸 생각하면 된다. 현자타임!!!
나중에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회당에서 진짜 율법 ‘박사’들과 논쟁하고 키배를 떴었다. 눅 2:46을 같이 보시길 바란다. ㅋ

Posted by 사무엘

2024/02/03 19:35 2024/0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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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기의 강한 손

성경에서 출애굽기의 앞부분은 모세라는 인물이 태어나고 광야로 도피 중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동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서 나오라는 소명을 받는 내용이다. 모세는 자기는 인간적으로는 이집트 왕가를 맞닥뜨릴 면목이 없는 상태라고 변명하면서 뒤로 빼지만, 하나님은 겁먹지 말라고 다그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파라오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내 백성을 놓아 주라고 얘기해라. 하지만 파라오는 처음에는 네 말을 절대로 호락호락 듣지 않을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걔는 강한 손이라는 초월적인 파워로 쳐맞기 전까지는 절대로 너희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출 3:19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강한 손이 개입해야만 놓아 준다는 뜻이다.
이게 언뜻 보기엔 문맥상 굉장히 자연스러운 서사인 것 같다.

게다가 뒤의 6:1에서 '강한 손'이 다시 나온다. 이때는 모세가 파라오에게 겁먹어서 선포가 아니라 애원· 당부· 네고와 비슷하게 얘기를 하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하고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을 때이다.
"파라오는 강한 손한테 혼쭐이 단단히 난 뒤에 네 백성을 거의 추방하다시피 진절머리를 내며 내보낼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 3:19도 '강한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워딩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KJV의 출 3:19는 not let you go, no, not by a might hand이다. '강한 손이 있어야 풀어 준다'가 아니라 '강한 손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풀어 주지 않는다'라는 반대의 뜻이다.
no, not은...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시 14와 시 53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백부장의 믿음에서 "이와 같음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단 한 건도 못 봤다" 등.. 의심의 여지 없이 시종일관 전체 부정을 뜻한다.

이런 점이 감안되어 킹제임스 흠정역의 경우, 작년 여름에 출간된 6판 마제스티 판에서야 "강한 손으로도 가게 하지 않는다"라고 번역이 수정되었다. 딱히 변개 이슈와 관련된 구절이 아니다 보니, 흠정역도 얘는 오랫동안 별 생각 없이 타 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던 것 같다.

그 반면, 말보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오래 전부터 저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그쪽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다시 채우다 replenish' 등, 진작부터 KJV의 튀는 번역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성향이어서 그런 듯하다.

2. 삼손이 빡친 이유

사사기 15장에는 이스라엘의 천하장사 재판관이었던 삼손이 적국 여자와의 사랑에 실패해서 사고뭉치로 흑화하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우선 3절.. "선 넘네.. 이제는 내가 승질대로 깽판 쳐도 니들은 할 말 없을 줄 아쇼~~" 이거는 성경에서 제일 빡친 사람의 대사이지 싶다. 삼손이 빡친 구체적인 이유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을 것이므로 관심 있는 분은 성경을 직접 찾아 보시길..

블레셋 사람들은 앵그리 삼손으로부터 불여우 테러를 당한 뒤, 맨 처음엔 의외로 삼손이 아니라 원인 제공자인 저 여자네 가족을 보복하고 응징했다. 집을 불질러서 그 집안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6절)

그랬는데.. 삼손은 화를 푼 게 아니라 여자네 가족을 죽인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양학을 벌였다. 그 이유가 뭘까..??
어지간한 다른 성경들에 따르면, 삼손은 그래도 여자 집안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 그들을 죽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복을 했다. "이런 잔인한 살인극을 벌이다니 내가 보복을 하겠다" (because, since) (7절)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의 묘사는 다르며, 싸이코패스 급으로 더 잔혹하다. "니들이 이렇게 하더라도 내 성에 안 찬다. 나는 더 보복하고 말겠다" (though)라는 도발이다~!!!
즉, 7절이나 앞의 3절이나 동일하게 '-하더라도' though가 나란히 쓰인 것이다. 이것 말고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다.

성경엔.. 특히 구약을 보면 사건의 묘사가 동심파괴스럽고 잔혹한 경우가 가끔 있다. "입다의 딸이 궁극적으로 어찌 됐는가?", "피지배민들을 톱으로 잘랐는가, 아니면 톱으로 노동을 시켰는가?" 같은 것 말이다. 성경 자체가 그러한데, 내 경험상 킹 제임스 성경은 그런 강도가 조금 더 높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다만, 아무리 당장 이해가 안 되고 수긍이 안 된다 해도 말을 뜯어고치고 성경을 변개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3. 욥기의 영과 독

욥 6:4를 보자.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들어와서(박혀서/있어서)" 보통은 '내 영이 그 독을 마셨다' 인데,
킹 제임스 성경만 혼자 '그 독이 내 영을 마셨다' 라고 돼 있다.
우와.. 러시아식 도치 유머가 성경 역본에도 존재하는구나.;;;

이거 뭐

  • 미국에서는 시민이 대통령을 암살합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대통령이 시민을 암살합니다~!!
  • 미국에서는 당신이 파티를 찾아 다닙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당원(party)이 당신을 찾아 다닙니다!!
처럼..
  • 개역/NIV에서는 당신의 영이 독을 마십니다. 하지만 KJV에서는 독이 당신의 영을 마십니다~!
인 것이다. ㄲㄲㄲㄲㄲㄲㄲ the 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

일각에서는 "도치됐을 뿐 KJV도 영이 독을 마신다는 뜻이다, 이건 한국어 번역 문제일 뿐이다"라고 실드 치기도 하는데..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도치를 하더라도 "the poison whereof MY SPIRIT drinketh up" 정도가 돼야 주어가 '영'이 되지, 저건 누가 봐도 평이하게 독이 영을 마신다는 뜻이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KJV 특유의 그 복잡하게 꼬인 도치 문장을 파헤쳤던 경험으로는, 저 문장은 통사론적(= 문법)으로 영이 독을 마신다고는 절대로 읽히지 않는다.
해석은 독자 마음대로.
의미상으로는.. 영이 독을 마시든 독이 영을 쭉쭉 흡입해 버리든 어쨌든 털리고 X된다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_+

얘는 의외로 흠정역이 영어대로 번역돼 있고 한킹은 '내 영이 독을 마셨나니'라고 non-KJV 스타일로 번역돼 있다. 아까 출애굽기의 강한 손과는 좀 반대의 면모이다.

4. 물리 치료

사람을 두들겨 패서 질병이나 못된 심보를 고치는 걸 시쳇말로 참교육 내지 '물리 치료'라고 부른다. 뭐, 참교육은.. 엄밀히는 패는 것뿐만 아니라 경찰서 정모나 소송, 금융 치료까지 포함 가능한 더 큰 용어이지만 말이다.
성경에도 물리 치료라는 게 나온다. 그런데 KJV와 non-KJV가 사용한 방식이 서로 정반대인 곳이 있다.

바울의 비장한 심정이 담겨 있는 고전 9:27에서 KJV는 "억제하여 keep".. 단순히 욕구 절제, 자제.. 이런 뉘앙스가 강한 반면, 타 역본들은 beat, discipline, 심지어 punish라고.. '쳐서 복종하게 한다'라고 돼 있다. 기독교 외의 타 종교에서 행하는 고행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왕하 5:11에서 나아만 장군이 빡쳐서 내뱉는 말을 보자. "이야, 엘리사가 직접 날 찾아와서 썩은 부위를 팍팍 치고(strike) 신나게 푸닥거리를 벌이면서 나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꼴랑 강에 가서 목욕을 하라고? 이거 뭐야..?"
이건 반대로 KJV는 '치다, 때리다'인데 다른 역본들은 몽땅 다 '손을 흔들다'(wave)라고 수위가 약화됐다. 참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오늘날 2020년대까지도 이상한 데서 신앙 치료 한답시고 사람을 때려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KJV는 이를 정확하게 통찰한 것 같다. ㄲㄲㄲㄲㄲㄲ

5. 이익이 경건인가, 경건이 이익인가??

딤전 6:5는 킹 제임스 성경과 타 성경 간의 차이점이 두 가지 존재한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진"이라는 수식은 동일한데, 그 다음.. 대개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말이 저렇게 쓰여 있으면 십중팔구 삯꾼 목자 정도를 떠올리게 된다. 영적인 거, 종교심 이런 걸 갖고 돈벌이나 하려는 사람.. 목회를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 범주에 들지 않겠는가? 나도 이전 성경을 보던 시절엔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킹의 번역은 단어의 배치가 타 성경과는 반대다. (1) "이익을 경건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이건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이 세상에서 일 잘 풀리고 잘 살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신자 수가 늘고 헌금 많이 걷히고 교회 팽창하고 이익 많이 남기는 것이 '곧'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이다.. 이렇게 실용주의를 적극적으로 접목한 사고방식이다. 더 뼈때리게 비유를 들자면 발람의 사고방식.

그냥 삯꾼 목자이기만 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잘못된 사고방식임이 명백하다. 아니, 저건 삯꾼 목자의 사상을 본질적으로 저격한 게 아니겠는가?
킹은 이익이 경건인 게 아니라, 반대로 '만족함이 있는 경건에 큰 이익'이 있다고 바로 다음 6절에서 말한다. 둘의 차이를 명심하시길 바란다.
빌 1:21 '죽는 것이 이익'과 더불어 신약 성경에서 예수쟁이의 '이익'에 대해 언급하는 둘뿐인 구절이다.

(참고로: 성경은 말씀 사역자가 물질적으로 보상받는 것 자체는 지극히 정당하다고 몇 번이나 말한다. 비현실적으로 물질 자체를 부정하고 죄악시하면서 무소유 위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사 해서 이익 남기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는걸... 하지만 이 딤전6은 그와는 다른 문맥을 말하고 있으니 오해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킹은..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쓰잘데기없는 논쟁이 발생하니까, 독자 여러분은 (2) 저런 자들로부터 떠나고(withdraw 발 빼라) 쟤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고, 분리되라고 추가로 명령한다!!! 살후 3:6처럼 말이다.
그러나 킹 말고 다른 성경들은 '쓰잘데기없는 논쟁이 발생한다'까지만 말하고 5절이 끝난다. 왜 이렇게 차이가 발생했는지는 난 모르겠고, 어쨌든 그렇다는 거.

요즘 안 그래도 킹을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역본들이 여럿 난립해서 정신 시끄러운 상태다. 근데 어떤 역본은 차이가 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 간단명료한 구절의 (1) 파트의 번역이 갑자기 뜬금없이 달라져서 독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했는가 보다. 킹의 번역본을 표방했다면서 non킹 스타일로 돌아간 거다.

난 그렇게 달라진 줄도 몰랐는데 최근에야 얘기를 듣고는 놀랐다. 도대체 왜 바꿨지? 딤전 6:5가 무슨 아세라/grove도 아니고, replenish도 아니고, baptize for the dead도 아니고, 해산함으로 구원도 아니고.. 하나도 어려운 구절이 아닌데 말이다.
부디 착오였길 바라며, 다음 판이나 쇄에서는 도로 원복 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3/12/17 08:35 2023/12/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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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권

말보회 한킹에는 영어 KJV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민권' citizenship이라는 단어가 두 군데 나온다.
하지만 1600년대에 그런 직접적인 단어가 없었을 뿐이지, 그 문맥에서 그 단어의 실질적인 의미는 시민권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로켓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에 로켓을 'NASA 제트 추진 연구소'에서 개발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먼저 빌 3:20이다.
conversation은 단순히 '소통/대화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행실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쓰였다. 베드로전/후서에서 타인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의 사례로 특별히 자주 쓰였다.
쉽게 말해 찬송가 가사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에서 저 '행실'이 conversation과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대응한다.

그런데 딱 하나 빌 3:20 "우리의 conversation은 in heaven 하늘에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건 우리의 영적 지위 얘기이다.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행실 문맥이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conversation = 행실" 영어 직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한킹을 제외한 나머지.. 먼 옛날의 권위역부터 시작해 흠, 근, 표.. 모두 이 단어를 "생활 방식"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방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거의 다 manner에 대응한다. 즉 저 말을 영어로 역번역하면 오히려 manner of conversation이 된다.

그럼 어차피 빌 3:20의 conversation은 벧후 3:11이나 벧전 1:15 같은 행실이 아닌데.. 여기서만 예외적으로 '생활 방식'이라고 새로운 말을 만들 바에야 '시민권'이 뭐가 대수인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미국에 90일 관광비자만 받고 놀러 와 있는 사람이랑.. 아예 미국 영주권· "시민권"이 있고 거기 정착해서 직업도 갖고 있는 사람은 미국 땅에서의 "생활 방식"이 당연히 서로 완전히 다르다. 이런 관계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빌 3:20 말고 또 시민권이 등장하는 곳은 바로... 행 22:28이다. 성경 스토리 좀 들어 본 분이라면 다들 아실 스토리 되시겠다.

-- 로마군 사령관: 난 돈 왕창 많이 갖다바쳐서 로마 시민권을 간신히 취득했는데..
-- 바울: 난 모태 로마인이오.

영킹은 이 부분이 시민권이 아니라 '자유' freedom이라고 돼 있다.
이건 그냥 옛날 성경과 현대 성경의 용어 차이이지, 변개 이슈가 아니며 KJV만의 교리적으로 우수한 번역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KJV 이전 계보의 영어 성경들도 다 freedom이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왜냐고? 이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근대적인 시민 계층, 민주주의, 상비군, 국가 체계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로마인이면 로마인이지, 로마 시민권자??? 이런 개념이나 용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천적 로마인"으로서의 권한과 혜택을 freedom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영어 freedom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거잖아~~" ㅇㅇ 그렇긴 하다.
그런데 이 본문이 교리적으로 무슨 갈라디아서 4장 같은 문맥인가? free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종 노예인가? 저 사람은 무슨 땅거지 노예였다가 극적으로 해방된 걸까?
그 당시에 로마 시민이 아닌 유대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사회적 신분이 전부 창세기의 하갈 같은 처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로마 시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고, 당장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지 않았으며.. 재판 받다가 억울하면 항소해서 로마에 직접 가서 재판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중죄 반역죄를 지어도 십자가형으로 처형 당하지는 않았다.

로마인이 아닌 사람은 저 정도의 권한이 없고 생활이 다른 제약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로마 제국 내에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그게 아니어서 저 사령관이 밑바닥 노예에서 해방된 거라면, 평민이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과연 어떻게 요즘으로 치면 대령~준장 급의 고위급 군인이 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생각할 점이다.

1600년대 당시에 영킹으로 행 22:28을 읽었던 영어권 화자나, 지금 우리가 한킹으로 행 22:28을 읽으나 결국 그 말이 그 말, 로마 시민권을 떠올리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시절 1600년대 영어 언어 문화에서는 freedom이 최선의 번역이었고, 지금 우리 언어 문화에서는 시민권도 전혀 문제 없는 번역이다. 이걸 최소한 오역이나 변개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ervice Guarantees Citizenship "군복무 하시면 시민권 무조건 드립니다~!!" (옛날 공상과학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에 나오는 유명한 선전 문구 ㄲㄲㄲㄲㄲ)

세상에서는 어느 강대국의 Citizenship을 얻으려면 행 22:28처럼 돈을 왕창 내거나, 아니면 저 영화에서처럼 군복무라도 하면서 나라에 기여하고 왕창 고생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순서가 반대다. 먼저 하늘나라 Citizenship부터 얻고 나서 롬 12:1처럼 Service, 아니 reasonable service를 실천한다.
'시민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유일한 우리말 킹 제임스 성경을 보시는 분이라면 이 점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그분의 기쁨을 위하여

계시록 4:11에 나오는 스물네 장로들의 찬송을 보면.. 여느 성경들은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피조물들은 주의 '뜻'에 따라/의해/뜻대로 창조되었다"고 나와 있다. by your will, because of your will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특이하게도 이 부분을 주의 '기쁨을 위하여/인하여' for thy pleasure 라고 번역했다. 말보회 한킹은 도로 '뜻'이라고 옮겼다.

그리스어 '델레마'는 다른 모든 구절에서는 그냥 '뜻, 의지, 의도'를 의미한다. (논리 용어 딜레마와는 무관한 단어)
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이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에서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 "나를 보내신 분의 뜻", 살전 5:1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내가 찾아본 바로는 전부 이 단어이다!

(1) KJV 이전에 계 4:11을 thy will 대신 thy pleasure라고 옮긴 역본은 내가 아는 한 비숍밖에 없다. KJV는 이 구절에서 비숍과 제네바 중, 비숍의 번역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일단 본문 자체 변개 문제는 아니고, 그 다음의 번역의 차이점 문제이다.
(비숍은 바른 본문 기반이긴 하지만 전 11:1 "빵을 젖은 얼굴 wet faces 위에 놔둬라"처럼 자신만의 튀는 오역이 존재하기도 했던 역본이다. ㅎㅎ)

(2) '뜻'과 '기쁨'이 모두 나오는 엡 1:5 같은 구절도 있다.
여기 말고도 여러 구절을 찾아보니, 기쁨을 뜻하는 원어는 원래 당연히 따로 있다.

(3) 계 4:11이 혹시 히 12:10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걸 비교해 봤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했거니와" 이거야말로 '자기 마음대로/뜻대로'와 '자기 기분 좋을 대로'가 상호 교차 가능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구약에도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셨음이니이다" (욘 1:14) 같은 표현이 있으며, 이 역시 '자기 마음대로, 뜻대로'와 다를 바 없는 의미라 하겠다.

하지만 히 12:10에서 쓰인 원어는 계 4:11과의 접점이 의외로 전혀 없었다.
물론, "기뻐하는 대로(= 멋대로 마음대로라는 뉘앙스) 징계"와 "숭고하고 심오한 기쁨을 위해 창조"는 어감과 심상 자체가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건 감안할 점이다.
그러니 이쯤 되면.. 사람마다 어떤 언어관 성경관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판정이 달라진다.

(1) 그냥 평범하게 원어 원문이나 헬라어 사전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KJV가 혼자 특이하게 번역했거나 심지어 오역을 했네~ 헬라어로 보니 '뜻' will이 맞네?"라고 말하고 코웃음 치며 간단하게 넘어간다.

(2) 그게 아니라 킹의 번역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서는 그냥 뜻이 아니라 기쁨이 수반된 뜻이기 때문에 킹이 일부러 다르게 번역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영킹은 어린 시절부터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일상적으로 팠던 미친 석학들 47명이 각자가 성경을 전부 번역한 뒤, 그걸 서로 대조하고 14번이나 검토하는 식으로 왕창 빡세게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해 보시길..)
마치 빌 4:1 '나의 기쁨'처럼 피조물들이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창조를 하셨고 실제로 기쁨을 얻으셨다.

(3) 그런데 '뜻'이라는 원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짜 오로지 영어 KJV의 표현 for thy pleasure만 보면..
좀 의역 내지 확장된 해석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사명.. 아니 하나님 기쁨조의 사명을 띠고 창조되었다"처럼 된다.
빌 4:1이 아니라 군인은 자기 상관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딤후 2:4 같은 논리가 된다. 이쯤 되면 원래 '뜻'이라던 그리스어하고는 꽤 멀어지는 것 같다. ^^

당연히 교리적으로야 우리는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아기가 갓 태어나서 부모가 기쁜 것하고, 그 애가 커서 효도해서 부모가 기쁜 건 조금 다른 차원인 것도 사실이리라. 계 4:11은 무슨 기쁨을 말하는 걸까?

계 4에서 장로들의 찬송은 그렇잖아도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얘기하는 문맥이다. 그러니 "뜻대로 창조" 1, 2번이 일면 더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정말 원어를 생까고 영어 킹에서만 발견되는 계시와 교훈을 찾자면 3까지도 확장 가능하다. 영어 전치사 for, in, of 따위는 무진장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단어이니까.

킹 빌리버들의 믿음에 따르면, 성경엔 문맥에 벗어난 말도 갑자기 툭 튀어나올 수 있다. 시편 12편에서 온통 경건한 자, 가난한 자, 학대받는 자, 이스라엘 백성 얘기를 하다가도 끝에 갑자기 말씀을 영원히 온전히 보존한다는 얘기가 뜬금없이 나올 수도 있을 정도니까.

이런 구절에서 킹을 단순히 잘 번역된 성경,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 정도로만 아는 사람과.. 아예 원어를 초월하는 계시가 담긴 더 뛰어난 성경(!!!)이라고 보는 사람의 관점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_=;;

3. 기뻐하라 / 세굿빠

고린도후서의 끝부분인 13:11 말이다. "끝으로 형제들아.. finally, brethren" 다음에..
어떤 성경은 "안녕히 계세요, 바이바이, 잘 있으라"(farewell, goodbye)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성경은 "기뻐하라"(rejoice)라고 되어 있다. 영어 KJV는 전자인데, 한킹은 후자를 택했다.;; 어찌 된 일일까?

이 역시 원어로 '카이로'.. '기뻐하라'와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살전 5:16의 그 유명한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옥중서신 빌 4:4의 "기뻐하라"..
심지어 같은 고린도후서 13장의 바로 앞 9절의 "기뻐하라"와도 같은 단어이다. 하지만 KJV는 거기서 이미 '기뻐하라'가 나왔으니 또 '기뻐하라'일 것 같지는 않아서 작별인사를 선택한 것 같다.

이건 역사적인 근거도 아까 계 4:11보다는 더 갖추고 있다. KJV 이전의 틴데일, 그레이트, 비숍이 다 farewell이었다.
심지어 NIV, NRSV 같은 일부 변개된 계보의 성서도 farewell이고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도 아마 의역하다 보니 작별인사로 옮겼다. 그러니 이건 변개나 오역 문제가 아니다.

다만, 9절과 11절에는 perfection(온전함)이라는 말이 공통으로 나온다. 그래서 11절에서도 '기뻐하라'를 써 주면 9절과 11절이 모두 '기뻐하다'와 '온전함/온전하라'가 나와서 뭔가 호응이 이뤄진다.
그리고 11절은 어차피 live in peace.. 말 그대로 "평안히 지내라"라는 작별인사 의미가 따로 들어있기도 하다는 점 역시 참고할 사항이다. ㄲㄲㄲㄲㄲ

(1) 여담으로.. 행 23:30은 편지를 인용하는 부분의 결말부인데.. 여기서도 킹 제임스 성경만이 끝인사 farewell이 붙어 있다.
고후 13:11과 행 23:30을 보면.. KJV 번역자들은 farewell이라는 작별인사를 좀 좋아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사도행전 구절은 그냥 원문 계보의 차이라고 한다. 변개된 본문에서는 그리스어에서부터 기뻐하라고 나발이고 끝인사 자체가 빠져 있다. 그러니 고후 13:11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런 걸 강경 영킹주의자가 발견하면 farewell과 관련하여 원어가 아니라 영킹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진리~ KJV의 우수성~ 어쩌구 하면서 얼마든지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야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그 바닥을 오래 경험해 봤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식으로 주장을 하는지 패턴을 안다.

(2) 끝으로 NIV의 경우, 1984년판 NIV 첫판은 "형제들아, good-bye"였다. 그러다가 2011년판 개정 NIV는 "형제 자매님들, 기뻐하십쇼~!"로 바뀌었다. 형제가 '형제 자매'라고 바뀌고, 저 단어를 '기뻐하라'라고 옮기는 게 요즘 번역 트렌드이기는 한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11/05 08:35 2023/11/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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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의 원천

우리나라엔 그 이름도 유명한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출판사가 있어서 한글 킹 제임스(이하 한킹)라는 이름의 성경을 출간· 판매하고 있다. 내년이면 발간 30주년이 된다. 이 단체는 전국 각지에 '성경 침례 교회'라고 자기네 성경을 사용하는 침례 교회들을 두고 있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성경을 번역했다면 자기네 성경을 써 줄 기존 교회· 교단을 물색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직접 교회· 교단을 개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네 성경을 인용해서 독자적인 내용의 책도 많이 내면서 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 성경 역본은 현실의 기독교계에서 쓰이지 못하고 그냥 듣보잡 군소 번역으로 전락한 채 사라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보회는 딱 이 전략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성경은 한킹을 밀고, 이를 기반으로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를 잔뜩 출간한 것이다.

말보회는 대외적으로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 때문에 이상한 이단 소리를 들었다. 물론 순수하게 성경관 신념 때문에만 이단 소리를 들은 건 아니고, 그들 고유의 간증 상실 삽질과 흑역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진짜 중요한 논란거리는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말보회에서 내놓은 한킹은 정작 같은 킹 진영 내부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영어 KJV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왜 그렇냐 하면 한킹은 언뜻 보기에 KJV의 영단어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듯한 표현과 어휘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허나, 한킹 측의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걔들도 할 말은 있다. 기계적인 직역을 안 했을지언정,

  • grave 무덤 // 음부 (문자적인 무덤 묫자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지하 사후세계 자체를 나타낼 때. 낙원+지옥 통틀어)
  • 환난 (일상적인 역경 고난) // 환란 (미래의 유대인 대환란)
  • 나라 // 왕국
  • 위하여 (for sinner) // 인하여 (for sin)
  • 육체 안에 // 육신으로
  • 심지어 그리스(Greece) // 헬라(Greek) 등등

이런 걸 나름 자기 원칙대로 임의로 구분을 많이 해 놨다. 영어로는 같은 단어인데. ㅎㅎ
저런 거 말고 루시퍼, 갈보리, 이스터, 다시 채우다(창 1:28), 순교자, 말씀의 젖으로 자라라(벧전 2:2), 하나님 자신을 어린양으로(창 22:8).. 이런 건 한킹도 당연히 영어 KJV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애초에 한킹의 존재 의의가 저런 걸 공론화하고 한국어로 반영한 거의 최초의 우리말 성경이니까 말이다.

한킹의 번역 방침 내지 스타일에 공감되지 않아서 한킹을 안 쓰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변개 오역이라고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영어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게, 최소한 아무 이유 없이 제멋대로 의역을 해서 그런 건 아니다.
영킹이 아니라 영킹의 번역 원천인 원어를 좀 참고한 것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점을 알면 한킹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한킹은 이름과 실체의 관계가 웹툰 '교도소 일기', (작가가 실제로는 구치소에만 갇혀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대구 성서 초등학교 '개구리 소년' 사건 (실제로는 애들이 도롱뇽을 잡으러 갔다가 실종되고 살해당한 거지만)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구치소나 도롱뇽 대신 더 친숙한 교도소나 개구리를 썼다고 해서 저 타이틀이 독자를 심각하게 악의적으로 기만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타이틀이 무엇이건 간에 "범죄자가 수용되는 국립호텔은 이런 험악한 시궁창이다" 내지 "초딩 꼬마들이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놀러 나갔다가 안타깝게 실종되고 살해당했다"라는 게 본질이고 핵심이니까 말이다.

마치 C++ 이후로 얘처럼 무식한(?) #include #define 전처리기나 다중 상속을 몽땅 구현한 프로그래밍 언어가 결코 다시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한킹 이후의 소위 KJV 계열 역본 중에 한킹의 저런 독자적인 용어와 번역 스타일을 답습한 역본은 결코 다시 등장하지 않지 싶다.

게다가 한킹은 재판관기(사사기)처럼 일부 책 이름을 통째로 바꾸기도 했으며, 인명과 지명 표기도 ㅋㅌㅍ 음운을 첨가해서 자기 스타일로 많이 바꿨다. (스카랴, 스테판, 카나안 등)
이런 걸 한킹 말고 후대의 어느 진영이 수용하겠는가? 말보회는 이 분야의 선두 주자로서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긴 했다.

글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킹은 변개되지 않은 원문에서 번역을 가장 잘한 역본 정도가 아니다. 원어 원문 성경보다도 더 뛰어난 계시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의 중의성을 해소하고, 원어에 없던 미세한 뜻 변별과 운율까지 다 살려 줬다~!!" 이런 급이라면 한킹의 번역 스타일은 의미가 다소 퇴색할 것이다.

이 정도로 영킹을 극도로 지지하는 영어 순수주의자(?)가 보기에는 한킹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흠정역조차도 순수(?) 영킹 번역이 아니며 100% 만족스럽지 못하다. 2020년대에 출간된 표준역은 그런 순수주의자 성향을 더 반영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 대신 다른 쪽으로 논란거리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한쪽에서는 상대방을 보고 "맨날 수시로 잠수함 패치되어 온 성경이 무슨 놈의 최종 권위냐"라고 까고, 거기서는 이쪽을 향해 "한번 주어진 영감이 쭉 전수되고 보존되는 거지, 번역본에 무슨 영감이 이중 삼중으로 임하냐" 이러면서 맞받아치는 일이 되풀이된다.

이건 내가 보기엔 그냥 영감이나 최종 권위라는 단어에 대해 서로 생각하는 정의가 달라서 벌어지는 말장난이다. 자기네가 번역한 우리말 성경에다가 차마 최종 권위라는 말은 못 붙이니, 거기서도 그래도 이게 perfect 하고 온전 완전하다면서 같은 용도의 다른 수식어를 붙일 뿐..
내 공식 입장은 "아무나 이겨라"다. -_-;; 그럼 다음으로 최종 권위라는 개념에 더 자세히 얘기해 보고자 한다.

2. 최종 권위

옛날에.. 과학계에서는 1킬로그램의 정의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 킬로그램 원기의 질량을 그대로 1kg이라고 한다" 이러던 시절이 있었다.

진짜배기 원기는 세계에 단 하나만 존재해야 했고, 워낙 귀하신 몸이니 함부로 여기저기 움직이고 활약할 수 없었다. 평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화학적으로 극도로 안정한 금고 안에 짱박혀 있는다.
취급 부주의로 인해서 원기에 이물질이 묻거나 생채기가 생겼다간 얘의 질량이 0.1 마이크로그램이나마 달라지게 되고, 그랬다간 전세계 과학계에서 참조하는 킬로그램의 정의가 달라져 버릴 테니 말이다... 그러면 정밀 실험의 결과값이 달라질 것이고, 같은 금의 거래 가격이 달라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원기를 아주 정교하게 복제한 레플리카가 수십, 수백 개 만들어져서 세계 각국에 보급되었다.
세계 각국엔 자기들의 표준 과학 연구원에 상당하는 기관이 있고, 걔들은 그 레플리카를 기준으로 자국에서 생산되는 저울, 무게추의 품질을 측정하고 실험의 정확도를 판정해 왔다.

그리고 그 기관에서는 수 년 간격으로 그 레플리카 원기가 질량이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오리지날' 원기와 대조해서 보정· 시정 조치를 취했다.
지금이야 1kg의 정의가 플랑크 상수 어쩌구 하면서 어렵긴 하지만 자연 실험으로 재현 가능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게 옛날 일이 됐다. 허나, SI 단위 중에서 질량 단위가 원기 의존 정의를 제일 늦게 벗어났다. 이 질량이라는 게 생각보다 난해하고 오묘한 물리량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의 권위라는 것을 말할 때도 이와 비슷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일각에서 우리가 영어알못이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KJV만이 최종 권위라고 말하는 건.. 영킹이 바로 저 "오리지날 킬로그램 원기"와 같다는 차원에서이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영킹 읽어서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성경은 지금도 계속 교열하느라 난리인 반면, 영어 성경 본문은 불변 고정된 지 400년이 넘었다.
한국어 성경들을 교열 보고 비교할 때 기준이 영킹인 거다. 이런 원론적인 차원에서 영킹이 최종 권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보회에서 말하는 "자기네 한킹이 최종 권위"라는 건.. 실제로 개인이 읽고 묵상하고 교회에서 낭독하고 설교하고 믿고 실천하는 그런 권위라는 얘기이다. 실생활에서 다른 저울과 무게추를 판정할 때 쓰이는 레플리카 원기가 킹왕짱이라는 말과 같다. 뭐, 그냥 최종 권위도 아니고 '믿음과 실행에서의 최종 권위'라고 말하니 그쪽 논리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허나 오리지날 원기가 평소에 맨날 금고에 짱박혀 있는다고 해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무용지물인 게 아니고, 레플리카들이 오리지날 대비 믿을 게 못 되고 아무 권위가 없는 게 절대 아니다. 각자 역할과 쓸모가 있을 뿐이다.
kg원기의 경우, 저런 물리적인 여건의 한계가 있는 거고, 영어 성경의 경우 언어 장벽으로 인한 접근성 한계가 있는 거지.
그래서 내가 양측이 생각하는 '최종 권위'의 정의가 서로 다른 거라고 진단한 것이다.

C 코드로 비유하자면
const BIBLE my_final_authority = 한킹;
이 아니라

BIBLE *const my_final_authority = &한킹;
인 거라고 생각하자. =_=;; (가리키는 위치만 불변이고 거기에 들어있는 값이 바뀌어도 무관)
그러고 보니 Java는 키워드의 이름부터가 const가 아니라 final이긴 하다. 그리고 '값 변경 불가'뿐만 아니라 '더 상속 불가, 오버라이드 불가' 같은 다양한 봉인 용도로 이 키워드를 사용하고 있다. ㄲㄲㄲㄲㄲㄲ

이상이다.
본인은 20여 년 전에 흠정역을 통해 처음으로 KJV 유일주의에 입문했다.
그러나 짬이 좀 찬 지금은 흠정역 쪽의 약점도 그럭저럭 파악해서 알고 있고, 반대로 한킹이 더 잘 번역한 부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특히 한킹은 지금까지 출간된 우리말 성경들 중에 서문이 제일 고퀄-_-인 것 같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읽어보면 그야말로 피가 끓을 것 같다. 영적 전쟁에서 성경이란 게 어떤 존재이며 아군과 적군이 무엇인지를 딱 칼같이 정의한 뒤, 이 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한 이유, 목적, 배경, 번역 방법론과 기대되는 효과를 일목요연하게.. 논문에 가까운 스타일로 잘 써 놓았기 때문이다.

첫 시작을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했는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우리나라 킹 진영은 너무 찢어져 있다. -_-;;
너도 나도 성경 번역하겠다고 나서서 인구 1억도 안 되는 고립어인 한국어에 영킹을 번역했다는 역본이 과장 좀 보태면 10종 가까이 난립해 있다. (군소 마이너까지 포함해서)
물론 역본이 수백 종에 달하는 영어 성경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영어는 세계에서의 인지도가 한국어 따위와 비교를 불허하는 넘사벽이니 처지가 다르다.

이렇게 성경 역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더 나은 성경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냥 분열과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30년, 50년 뒤에 우리나라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 KJV 계열 역본 원조라 할 수 있는 말보회 한킹을 다시 살펴보니 감회가 새롭다. ㄲㄲㄲㄲ 다음 시간에는 한킹의 특이한 번역 내지 표현에 대해 조금 논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3/11/02 08:35 2023/11/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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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을 썼던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은 로마 교황에 정치적으로든 교리적으로든 반대한 종교 개혁 내지 개신교 진영의 산물이다. 성공회건 청교도건, 세부 신앙 노선은 다를지언정, 반가톨릭이라는 이념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이니 루터니 개혁주의를 그렇게도 떠받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의 가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칼빈이 활동했던 제네바를 알면서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이미 성경이 필사본 번역본이라도 완벽하게 보존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이런 식으로 장로교인을 상대로, 특히 목회자에게 킹 제임스 성경을 소개하고 변증하는 분도 있다.

다만, KJV 유일주의를 믿는 바이블 빌리버 진영 자체는 개신교보다는 침례교, 특히 재침례회에 가까운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이건 말보회 한킹 진영이건, 후대에 추가로 등장한 흠정역 진영이건 공통 동일이다.

세례가 아니라 반드시 물 침례를 고집하고,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 구원이나 구원 상실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구원받기까지는 자기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 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개인의 구원 여부가 몽땅 다 답정너 예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들은 저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주의도 알미니안주의도 아닌 중간 제3의 견해를 가지며, 이 때문에 두 진영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하기도 한다. =_=;;

문제는 그 당시 걸출한 종교 개혁자들의 통찰이 저런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신칭의 교리를 재확립하고 교황을 대적하고 가톨릭을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온전한 정교분리라든가, 믿음 고백자에게만 물침례.. 이런 것까지 정립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여전히 박해하곤 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KJV의 번역을 지시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왕에게도 이런 한계가 있었다.
http://baptistnews.co.kr/mobile/article.html?no=13605

  • “왕은 백성들에게 세속적인 모든 사항은 명령할 수 있으나, 개인의 신앙과 영혼에 관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사옵니다.
  • “폐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시오이다~!” (석총 - 궁예의 700여 년 뒤 잉글랜드 버전.. ㄲㄲㄲㄲㄲ)

이 당연한 말을 한 게 그 시절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었나 보다.
저 주장을 한 ‘토머스 헬위스’는 체포되어서 1616년경에 옥사했고, 또 다른 침례교 지도자인 ‘에드워드 와이트먼’이라는 사람도 이단으로 몰려서 1612년에 화형 당했다.
좀 과장 보태면 태조 왕 건에서 궁예가 석총을 죽인 것과 정말 비슷하다..;; =_=

제임스 1세는 전반적으로는 당연히 선한 군주였다.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금연 운동을 추진한 걸로도 유명하고..
(뭐,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개신교도들 수백 명을 박해하고 죽인 전임인 메리 여왕조차도 종교 말고 세상 정치 쪽은 그닥 암군 폭군 악녀가 아니었다.)

단지,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왕권신수설 신봉자에 국교회주의자였다. 국왕이 곧 성공회 수장.. 왕이 곧 제사장..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는 왕이 돼서는 온갖 삐딱서니 타는 귀족과 신하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이 막 번역되고 출간됐던 1610년대에.. 토머스 헬위스 같은 자국의 침례교 지도자가 반역자로 몰려서 순교한 것은.. 좀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단순히 반가톨릭 정도를 넘어 정교 분리까지 대놓고 주장하다 보니, 왕권신수설을 밀어붙이던 절대군주한테 찍혔던 것 같다. 성공회도 청교도도 아닌 침례교인들은 세속 세계사에서는 그냥 듣보잡 취급일 뿐이고..

텐데일이나 세르베투스뿐만 아니라 저런 사람도 순교한 것이다. 제각기 완전히 다른 사유로 인해서.
틴데일이야 킹 제임스 진영에서 워낙 띄워 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0순위로 접했고,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흑역사 얘기하는 데서 접했다. 그 반면, 이런 얘기는 우리 진영에서 전혀 접한 적 없었다.
역시 각 진영에서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 위주로만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 진영에서.. 무슨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에서 순교한 걸 가르칠 리는 만무할 테니 말이다.. =_=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와 침례교 신앙을 모두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건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로 느껴진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진영이 특정 번역자 자체를 우상화하고 떠받드는 게 아니니 “아 그렇구나~ 저 사람도 자기 신념 때문에 저랬었구나”하고 넘길 뿐..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는 이런 제임스 왕이나 성경 번역자들의 인품, 개인사 등에 좌지우지되는 게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제임스 1세 왕도 명색이 크리스천인데, 설마 무슨 북괴 김 부자라든가 느부갓네살/네로 같은 정신나간 개인 우상화 개인 숭배를 조장한 건 아니었다. 일단 황국 신민들이 먼저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개인의 신앙의 수호자이신 위대하신 국왕 폐하 만만세" 이러면.. 왕도 "허허~ 과인도 일개 인간일 뿐이니라~ 교황놈은 적그리스도일 뿐이고 진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겠지" 이렇게 겸손하게(?) 화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침례교인들은 좀 더 시대를 앞서 간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세상 역사에서는 가톨릭에서 이탈한 개신교.. 이런 식으로만 다루는 경향이 크지만, 침례교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의 신앙을 갖고 있었던 다른 그 무언가로 여겨진다.
개신교 측에서는 미국 건국에도 청교도가 큰 기여를 했고, 청교도의 근면 성실 청부 개척 정신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침례교 측에서는 자기들이 청교도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고, 자기들이 노력한 덕분에 미국이 국교 없이 진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침례교라는 말은 교리/교파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용어이다. 침례에 대한 교리 하나만 지지한 뒤에 구원관이나 하나님의 경륜 쪽은 완벽한 칼빈주의인 사람도 있고, 반대편인 사람도 있다.

다만, 통상적으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침례교는 대외적으로는 알미니안/웨슬리안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개신교와 척졌다는 역사 내력이 있고, 칼빈주의 예정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저런 식의 편견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단지, 킹 제임스 유일주의를 표방하는 '독립 침례교회'(독침;;)들은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을 추앙하기보다는 그쪽 동네에서 평이 좋지 않은 세대주의를 지지하는 편이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한킹 진영이건 흠정역 진영이건, KJV 독침들은 칼빈주의를 거의 진화론 반박하듯이 맹렬히 반대하고 비난하곤 했다.
어디 그 뿐이랴? 그쪽에서는 기성 개신교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르고 다 타락하고 종교 통합 은사주의에 물들고 어쩌구 하면서 비판하고 척지고, 반대로 거기서는 킹진영을 향해 성경 역본을 우상시하는 이단에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자니까 상종을 말라고 욕하고..;;;
이게 바로 말보회의 창립 이래로 2~30여 년째 이어져 온 갈등과 대립과 반목이었다. 상대방에 대해 정확하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뭐, 나도 교리 노선이야 KJV 유일주의에 세대적 진리보다 더 나은 패러다임을 지금까지 결코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않는 말장난 역할극 예정론은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내 교리적 정체성을 타협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서로 비방만 해 갖고는 득/덕이 될 게 없지 않겠는가? 개신교에서 유래되지 않은 기독교 교파의 내력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고찰하면서 타 교파 사람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고 소통하고는 싶다.
침례교 중에서는 심지어 속세를 떠나 자연인처럼 살고 심지어 세상 정부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곳도 있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데.. 적어도 KJV 독침은 그런 곳은 결코 아니다. ㅡ,.ㅡ;;

킹 제임스 성경은 명백한 개신교 배경의 성경이었으니 이 점을 이용하고 어필을 해야 하는데.. 개신교를 마냥 적대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보회는 초창기에 조금만 더 젠틀했으면 이단 소리 훨씬 덜 듣고 오해를 훨씬 덜 사고 적을 덜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훨씬 더 널리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5 19:33 2023/04/0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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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인 1611년에 출간됐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고 그렇게도 의미 부여를 하며 떠받든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유일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떠받드는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은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 성경이 정말로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었고 내용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걸까?

요즘은 인터넷에 몇백 년 전의 옛날 영어 성경도 본문이 다 올라와 있고, 1611년도 KJV 종이책의 스캔 이미지까지 몽땅 살펴볼 수 있다. (☞ 관련 링크) 그러니 저 의문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아주 간편하게 할 수 있다.

1. 철자법의 변화

오늘날 우리가 읽는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건 1611 version(역)의 1769 edition(판)이다.
KJV는 영단어 스펠링 체계의 변화 때문에 단어 표기를 몇 차례 기계적으로 치환하여 판이 바뀐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용을 개정하고 변개한 게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령, NKJV(뉴 킹 제임스)가 한 것처럼 thou ye thee 따위를 you라고 바꾼 건 '하느니라 / 하노라'를 '합니다'라고 고친 것과 비슷하다. 하물며 devil을 demon으로 바꾸고 hell을 hades라고 바꾼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면 말의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진 개정· 변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sunne, moone, booke를 sun moon book으로 바꾸고 heauen을 heaven으로 바꾸고, conteyn을 contain으로 바꾼 건..??? 그냥 '읍니다'를 '습니다'로, '홍당무우'를 '홍당무'라고 고친 것에 불과하다. 말이나 발음은 달라진 게 전혀 없고 오로지 표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고쳤다거나, "어린 백성"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고친 정도의 변화조차도 아니다.

f처럼 길게 늘어뜨린 s 변종이 s와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진 건.. 한국어의 역사로 치면 아래아가 없어지고 ㅏ/ㅡ로 통합된 것과 거의 같다.
KJV의 우리말 번역본인 흠정역의 경우, 5판(400주년 기념판, 2011), 6판(마제스티판, 2021)처럼 edition의 변화가 오· 탈자 교정뿐만 아니라 드물게 오역 교정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KJV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2. 오· 탈자

그럼 KJV 1611 초판은 스펠링 변화 말고 일체의 오· 탈자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저 때는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는커녕 타자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원고를 마차에다 실어서 가져와서는 식자와 조판에도 정말 지루하고 고된 쌩 노가다를 거쳐야 했다.

설령 작가 내지 번역자가 완벽하게 원고를 내어 줬다 해도, 성경 정도로 방대하고 빡빡 두툼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삐끗 실수가 전혀 안 들어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일일이 베껴 쓰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인쇄공이 더 옛날의 서기관 필경사보다 처지가 더 나았다. 그게 문자를 기계로 다루면서 최첨단 지식과 정보 문물을 접하는 직업이었으니 말이다.

KJV 1611 초판이 출간되고 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대략 20여 군데의 오· 탈자가 책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수 년~10수 년 이래로 시정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명사 he/she/it이 헷갈렸거나 a/the 같은 관사가 빠지는 등의 자잘한 실수였다.

그나마 내용이 유의미하게 바뀌는 변개에 가까운 크리티컬한 녀석이 이거.. 시 69:32이었다. God이 good으로 잘못 찍혔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찾는 너희의 마음이 살리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od과 good은 스펠링이 비슷하고, 비슷하게 '좋은' 심상의 단어이고 God is good이라는 관용구까지 있다. 실수로 잘못 식자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농후했다.
게다가 이 typo는 출간된 지 2년 만에.. 그야말로 제일 먼저 발견되어 시정된 축에 든다.

이런 오탈자나 철자법 변경은 개정· 변개가 아니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건 인쇄 단계에서의 실수를 바로잡은 것일 뿐, 처음 원고를 작성한 번역자가 원고의 컨텐츠를 수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도 "사소한(trivial) 수정"이라고 표시하는 게 있지 않던가? 딱 그런 격이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부족하고 실수하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KJV 1611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 자체는 1611년 이후로 정말로 유의미한 개정 없이 정착됐다.

흠.. 글을 써 놓고 보니 이번 1번과 2번 아이템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킹 제임스 성경 본문 개정 의혹에 대한 전면 반박" 이야기의 판박이가 됐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그걸 참고하시기 바란다.

3. 외경 관련 루머

철자법, 오· 탈자 다음으로.. 심지어 외경 수록 여부를 갖고 1611년 KJV 원판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퍼뜨리는 진영이 있(었)다.
"1611년판은 비성경적인 가톨릭 외경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고 오점이 있다~~ 1655년판이니 17xx년판이니 그게 외경이 제외된 진짜 KJV 원조다.." 이런 요지의 얘기 들어 보신 분 계신가?

아예 대놓고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원문비평 사본학 운운하면서 변개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얘기는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리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저런 부류의 얘기엔 전혀 현혹될 필요가 없다.

종교 개혁자와 개신교 동네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외경이 성경이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성경만 아닐 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2류 교양 텍스트 내지 종교 문학 정도로는 인정했다.

당장 KJV 1611 책의 앞부분에 들어간 "역자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보면 외경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어거스틴을 포함해 가톨릭 성인(??)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의 말을 인용한 게 종종 나온다. 그게 그 당시 종교계 석학들의 지쩍 밑천이고 성장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가톨릭 반개신교(!!!)에만 충실한 오늘날의 bible baptist들이 보면 살짝 문화 충격 동심파괴를 경험할 수도 있다. 한킹이건 흠정역이건 저 텍스트가 번역되어 수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 KJV는 본문이 명백한 반가톨릭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행에 따라 외경이 들어갔었다. 단지, 본문이 아니라 부록으로 들어갔을 뿐..!
KJV가 가톨릭 성경이었다면 구약이 39권이 아니라 52권이 됐을 것이다. 에스더기가 10장 3절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KJV는 외경을 싣되, 외경을 성경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상에 그 어떤 가톨릭 성경도 에스더기의 외경 부분을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 .. 이렇게 별도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때는 성경책을 이렇게 편성하는 것만으로도 번역자가 교황 추종자들한테 해코지· 암살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바닥에서는 외경을 읽지 않게 되었고, 외경이 성경책에서도 자연스럽게 완전히 제외되었다.

정확한 역사 맥락을 모르면 아폴로 달 착륙 자작극 음모론 같은 데에 속듯, 비슷하게 KJV 본문 관련 음모론에도 속기 쉽다.
KJV 1611에 외경이 들어가 있었던 건 당시 관행에 따른 부록 명목이었을 뿐, 본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무슨 예수회의 농간 같은 급으로 확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4. 인쇄공 로버트 바커

끝으로, 옛날 사람을 한 명 소개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17세기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로버트 바커. (Robert Barker)
제임스 1세 왕에게 직통 고용돼서 킹 제임스 성경 1611년도 종이책 초판을 조판· 인쇄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인쇄공 내지 출판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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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서 평생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1611 이래로 딱 20년 뒤 1631년, 제임스 1세 이후로 아들 찰스 1세 시절에 새로 편집된 킹 제임스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십계명 구절에서 NOT을 빼먹어서 '너는 간음할지니라' wicked bible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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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KJV 초판 시절에 발견됐던 여느 자잘한 오· 탈자와는 차원이 다른 너무 큰 사고였다.
사악한 성경책은 전량 리콜· 회수되어 폐기 처분됐지만, 몇 권은 살아남아서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그는 무슨 투옥·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뒤로는 몰락해서 그에 대해 근황 기록이 딱히 전해지는 게 없다. 1645년에 사망했다고만 전해질 뿐.

조선의 장 영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왕에 의해 고용된 특정 분야 기술자였고, 역사에 기억될 업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장 영실은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초대형 사고가 나는 바람에 리타이어 당하고 기록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성경 신자라면 킹 제임스 성경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록 이 성경의 외형이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책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1611 KJV라는 타이틀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차이점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1) 하루는 성경 역본을 비교하느라 똑같이 NIV로 동일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서 본인과 상대방이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구절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알고 보니 NIV도 1984년판 이후에 2011년경에 개정됐더라.. 이럴 수가..!!
TNIV 같은 바리에이션이 아니라 NIV 자체가 또 개정된 것이다. KJV는 이런 식으로 쓱 바뀐 게 없다~!!

(2) 글쎄, 이 문제에 대해 덕질을 더 깊게 들어가면 KJV의 캠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룻 3:15의 끝부분에서 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she)인지 보아스(he)인지를 질문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은 정답만 알지 더 구체적인 내력이나 사연은 아직 잘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더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3) 하나님은 민족과 언어를 나누어서 인간들의 생활권에 '구획/파티션'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 성경과 한 믿음으로 인간들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도 있게도 해 놓으셨다.
꼭 학교에서 가까이 사는 집 애가 성적 우수 모범생이 아니듯.. 예수님과 동시대 같은 지역을 살았다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라고 해서 특별히 신앙 생활을 더 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계 선교와 복음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접근성이 훨씬 더 좋은 게 사실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성경의 합리적인 법칙일진대(눅 12:48), 우리 주님도 한국어 화자보다는 KJV 같은 성경을 직통으로 읽을 수 있는 영어 화자에게 저런 사명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묻기는 하실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19 08:35 2023/03/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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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본 간의 차이들

1. 변개 유형 (신약)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가 타 성경에서 변개됐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뉜다.

(1) A형 오리겐 변개(원문)
요한복음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을 순종치 하니하는 자는"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골로새서 "그분의 피로" 삭제 같은 것들.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은 대체로 이 유형에 속한다.

(2) B형 번역 이슈(원어)
이사야서 루시퍼, 사도행전 이스터, 누가복음 갈보리, 요나가 '고래' 배 속, 증인이냐 순교자냐, 지옥이냐 음부냐 등..
같은 원어가 서로 다르게 번역된 것들이다.

(3) C형 후대 본문비평에 의한 변개(원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 요한의 콤마 따위
이건 옛날 사람보다는 웨스트코트-호르트의 기여도가 더 높은 변개이다.
수백 년 전의 옛날 성경에는 심지어 가톨릭용이라고 해도 이 C형 변개가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2. 변개 유형 (구약)

사실, KJV 옹호자/유일주의자들은 구약보다는 신약의 차이점에 관심이 더 많다. 신약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위주로 전수되어 왔으며, 본문 계보가 명백하게 이분화돼 있어서 번역의 차이에 앞서 내용의 차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허나, 구약도.. 맛소라 본문 덕분에 본문의 변개 문제는 덜한 편이지만.. 원어의 미스터리함이 아무래도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보다 더 심하다. 그래서 번역의 차이로 인한 잡음이 더 많고, 원어 말장난이 틈탈 여지도 더 많은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당장 기억하고 있는 예시 몇 가지일 뿐이다. 보다시피 숫자가 막 대놓고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 4년 뒤 / 40년 뒤에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7)
  • 3년 뒤에 십일조 / 3일마다 십일조 (암 4:4)
  • 온천 / 노새 (창 36:24)
  • 엘하난이 골리앗? 골리앗의 동생?을 죽임 (삼하 21:19)
  • 요셉에게 색동옷 / 소매 긴 옷 (창 37:3)
  • 그들을 톱으로 잘라서 끔살시켰다 /톱으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대상 20:3)

그러니 내가 주장하는 건.. 이게 다 맞을 수는 없고, 그래도 어느 것 하나가 정답이긴 할 거라는 점이다.

3. 의외로 KJV처럼 번역된 구절

한글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이나 심지어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서는 KJV 유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아쉽지만 부패한 본문에서 만들어진 변개된 역본이다.
그런데 얘들은 아주 극소수 예외적으로 KJV 스타일로 옮겨진 표현도 있긴 하다.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지만.. 복습해 본다.

(1) 개역성경의 경우, 창세기 요셉의 옷이 색동옷/채색옷, 어쨌든 무지개 같은 컬러풀한(창 37:3) 옷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KJV와 일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본들은 장신구 치장이 잔뜩 달린 화려한 옷, 소매 긴 옷 등으로 표현이 바뀌는 추세이다.

(2) 엡 4:12에서 KJV는 “각종 은사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perfecting) 한다”고 말하지만, 타 역본들은 성도들을 “준비시킨다”(equip, prepare)고 되어 있다.
이건 마치 마태복음 28:19에서 “가르치는”(KJV) 것과 “제자 삼는”(나머지) 것하고 비슷한 차이점 같다.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엡 4:12의 경우, 개역성경도 의외로 ‘준비시켜’ 대신 ‘온전케’ 한다고 KJV와 동일하게 번역되었다. 이건 원문의 차이점인지, 아니면 색동옷 같은 번역 스타일의 차이점인지 잘 모르겠다.

(3) 다음으로 요 3:36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KJV)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바뀐 걸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얘는 의외로 공동번역 성서도 “아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KJV와 동일한 워딩을 했다.

(4) 고후 13:11의 끝인사가 KJV만이 “굿빠이, 잘 있으라, 안녕히 계시오” 등의 작별인사인 farewell이다. 나머지 역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다 “기뻐하라”(rejoice)라고 바뀌었다.
우리말 역본 중에서는 심지어 말보회의 한킹조차도 ‘기뻐하라’라고 번역했는데(왜???)..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farewell이라는 의미로 KJV처럼 번역되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막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기보다는.. 흐름상 의역을 하느라고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게 아닌가 싶다. ‘믿는 자’ 다음에 논리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나오는 게 맞고, 그리고 서신이 다 끝나는 문맥이니 뜬금없이 ‘기뻐하라’보다는 ‘굿바이’가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4. 진짜 어려운 것

유경험자로서 말할는데, KJV는 겨우 -eth, thou thee ye, gay clothing, prevent 같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고어가 어려운 건 절대 아니다. 그건 그냥 며칠이면 적응되고 익숙해지니 하나도 문제될 것 없고..

진짜 어려운 건 대명사와 도치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에서 개나 소나 it he 대명사가 너무 많아서 뭘 가리키는지 분간이 안 될 때.. 그리고 복잡한 도치에서 주/객 관계 따지는 게 좀 어려울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왕상 3:27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저 여자가 진짜 애엄마다" 할 때도 KJV는 그냥 평범하게 her이다.
두 여자 중 누구를 가리키는 her인지를 기계적인 어휘 통사 구조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에 비해, 다른 역본들은 약간 해석을 추가해서 the first woman이라고 써 놓은 편이다.

솔로몬의 재판이야 워낙 유명하고 문맥이 뻔하기 때문에 "아이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고, 죽이지는 말아 주세요!"가 진짜 엄마인 걸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런 유명한 얘기 말고 더 어려운 문맥에서는 대명사 포인터를 역참조할 때 머리에서 쥐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KJV가 그렇게 자비심 없게 번역된 이유는 애초에 원어 원문의 표현이 그렇게 자비심 없고 모호했었기 때문이다. KJV는 표현 추가나 윤문을 극~~도로 꺼리면서, 불가피하게 단어 하나를 추가하더라도 이탤릭체로 티를 내면서 아주 보수적으로 정직하게 번역됐다는 걸 생각해 보자.

5. 고펠나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목재는 무슨 나무일까..??
성경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나는 당연히 전나무, X나무, 포플러나무 같은 친근한 나무 내지 레바논의 백향목, 아니면 출애굽기에서 성막 제조용으로 죽어라고 나오는 시팀나무 이런 걸 떠올렸는데.. 노아의 방주는 그렇지 않더라.

창 6:14에 따르면 고펠나무 gopher wood라고 한다.
그러나 gopher라는 단어는 고유명사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이면서 여기 말고 성경 다른 데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장 사전을 이용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특히 킹 제임스 유일주의 진영에서 좋아하는 방식-- 이 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킹제임스 흠정역을 출간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편찬한 성경 용어 사전에서도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 이상으로 설명이 더 없다. 다른 표제어들 대비 이상하리만치 풀이가 부실하다.
이건 그냥 통상적인 성서고고학이나 원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옛날 한글개역 성경은 그냥 '잣나무'라고 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음역으로 바뀌었다.
영어는 뉴 킹 제임스에서는 gopher가 단독으로 생산성이 없는 사어라고 간주하고.. gopherwood 한 단어로 붙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대에는 이게 사이프러스 나무가 아닐까 하는 해석이 등장해 있다(NIV 등). 이건 본문 변개하고는 관계 없고 후대에 와서 등장한 견해이다.

심지어 "노아의 홍수 이후로 멸종하고 현존하지 않는 나무 품종일 것이다",
"애초에 나무 품종 명칭이 아니라 나무를 가공하는 방식의 명칭일 것이다. 혹시 이건 비슷하게 생긴 다른 히브리어 글자의 오기가 아닐까..?? '고페르'가 아니고 '코페르'이면 pitched tree (역청 바른 나무..??)가 된다는데?"

이런 낭설까지 있는가 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뇌피셜이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성경 본문을 교정하는 정도로까지 선을 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도 킹 제임스 킹왕짱을 주장해 온 럭크만의 주석서에는 이 구절에 대해 뭐라 해설하고 있는지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참고로 이 gopher는 북미 다람쥐 동물이나 컴퓨터 고퍼 프로토콜과 스펠링이 우연히 같지만 이들과는 어원상 서로 전혀 무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5 08:35 2023/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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