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특히 20세기 중반 이전)와 오늘날 사람들의 평균적인 가치관, 윤리관은 서로 적지 않게 달라 보인다.
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거나 도둑질과 살인이 나쁘다는 것 정도야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겠지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어정쩡한 문제.. 예를 들어 사형 제도나 동성애 같은 것은 종교관이 개입하지 않은 상대주의 다원주의만 갖고는 확고한 답이 나오기 어렵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체면, 위신, 위계 질서, 명예를 따지는 성향이 더 컸으며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기든가 죽어라" 근성과 의지드립을 더 강조하는 편이었다.
그 반면 오늘날은 그때보다 실리, 인권을 더 따지는 편이다. "이길 수 없으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해서 후일을 기약하자" 같은 관점이다. 그리고 집단보다 개인의 개성을 훨씬 더 존중해 주게 됐다. 두 관점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

먼저 옛날 얘기부터.. 옛날에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이 전반적으로 지금 같은 인권 의식, 복지, 자비심 넘치는 정신꽈 상담과 체계적인 아동 교육 같은 게 없었다. 진짜 아픈 것과 꾀병 부리는 걸 일일이 분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조직에서나 똥군기와 꼰대질, 까라면 까, "지금 이 정도 난관도 못 견디면 밖에 나가서 어떻게 버티려고?", "정신상태 개조엔 몽둥이가 약", 군대식 전체주의 사고방식이 횡행했었다. 학교에서는 뻑하면 연좌제 단체기합이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는 시절만큼이나 CCTV와 유전자 감식이 없던 시절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황 증거 앞에서 뻑뻑 우기는 질 나쁜 범죄자한테 물과 전기를 동반한 물리 치료까지 해 줘야 했다.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자살...? "무슨무슨 죄를 속죄합니다.. 책임을 집니다 ㅠㅠ"라든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써서 "난 절대 결백합니다! 억울합니다!" 이런 호소라도 동반하는 게 아닌 이상, 단순 처지 비관 자살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금기시되었고 불명예 치욕적인 짓으로 간주됐었다.

꼭 군대· 경찰이 아니어도 의대나 사법연수원 같은 어디 좁은 바닥 전문직 엘리트 코스라면 뭐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물며 군대에다 엘리트 집단을 합쳐 놓은 사관학교에서는.. 전투 중 전사나 사고로 순직도 아니고, 선배들한테 맞아 죽은 생도도 있었다. 맥아더가 당장 19세기 말에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다니던 시절에 비슷한 일이 주변에 있었던 건 유명한 일화이다.

기독교/성경적 세계관이 딱히 존재하지 않던 일본에서는 그게 특유의 사무라이(?)/신토 문화와 결합해서 더 심해지고 이상하게 변질됐다. 그리고 그걸 우리나라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그래도 전후에 GHQ로부터 참교육 받으면서 군국주의물을 쫙 빼냈지만, 한국은 상황이 반대.. 6· 25 사변을 계기로 오히려 상시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덤으로 군사 정권을 겪으면서 군대 문화가 더 깊게 파고들게 됐다. 국력의 차이가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와 "군대에 안 가면 안 되는 나라"의 차이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풍토가 나라 안보를 지키고 고효율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기적을 만들어 낸 것도 있다. 그리고 옛날 세대도 악마나 짐승이나 괴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만큼, 그때는 오히려 지금 찾아보기 힘든 정보화· 전산화 이전 시대 특유의 인심이나 유도리, 상도덕(!!)과 명예 규율이 있었다. 일찍부터 철 들어서 어느 환경에서나 적응 잘하고 잘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즉, 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폭력이 지금보다 더 용인되고 남과 다름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고 골병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평소에는 할배나 박통에 대해서 많이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저런 부작용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인 평이 긍정적인 이유는 그때는 의식 수준이 다 그랬고 다른 대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옥 같은 여건에서 그래도 전반적으로 선하고 좋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소위 좌파 민주화 바람이라는 게.. 그렇게 너무 경직됐던 옛날 군사 문화를 청산· 완화하고 약한 사람들 인권을 돌보는 것이었으면 나도 계속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20년 겪어 보니 저것들은 역기능이 순기능을 넘어선 지 오래다. 숨겨진 억울한 죽음을 조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아예 아군과 적군에 대한 인식을 뒤바꾼다거나.. 교권을 완전히 박살 낸다거나,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인권만 금이야 옥이야 챙긴다거나..

결정적으로 남한의 군사 정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억압 폭력 비민주적인 이북 동네는 전~혀 비판하지 않고 저놈들도 실컷 퍼주면 착해질 거라고 우기는데, 내가 저런 놈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지해 줄 수 있겠는가? 이건 도저히 좌우 균형 따위로 퉁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체벌이나 사형 제도 같은 검증되고 성경적인 근거까지 있는 필요악을 없애는 실험은 조별 과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하는 것과 동급으로 무조건 실패하게 돼 있다. 인류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과학이고 진리이다.
"난 사형 반대 소신이지만 저놈은 인간도 아닌 짐승이니 상관없다" 이런 말장난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인간 사회는 사형 제도 없이는 못 돌아간다고 인정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관점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어떤 문제를 해결한 대신,또 다른 방식으로 하극상과 계층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 기강을 교묘하게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게 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야만· 폭력적인 체벌 없는 학교와 학교폭력 일진 없는 학교를 둘 다 이룰 수 없다면, 나는 후자가 더 우선순위가 높으며 그거라도 제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게 변함없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우리나라 기준으로 좀 살펴봤는데, 다음으로는 특별히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사력 넘사벽, 정보력 넘사벽, 장병 복지 넘사벽이던 천조국이었다. 세계 최초로 병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보급해 줄 정도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허나, 1940년~50년대는 이런 초일류 선진국조차도 각종 인권이나 보건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굉장히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몇몇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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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배..;; "의사들이 선택한 최고의 담배 카멜~!!" (1946년)
"엄마, 말보로 피우면서 기분 좀 푸세용~" (아빠도 아니고 엄마에게~!! ㅠㅠ) 이딴 광고가 버젓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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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나 선생이 어린아이를 벌 주는 목적으로만 패는 게 아니라.. 그냥 남자가 같은 성인 여성(부인, 여친..!!)을 무릎에다 엎어 놓고 엉덩이를 줘 패기도 했다.;; 그게 평범한 시대상이었기 때문에 각종 영화에도 버젓이 촬영돼 들어갔다. 그래도 도구를 쓰지는 않고 그냥 맨손으로..
남존여비라는 게 동양 유교 문화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은 여전히 부인을 때립니까?" 질문과 함께 "Why you should beat your wife"라는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어 보란다. 답이 없다.. -_-;;;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맛이 좋아진다"의 미국판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이런 성차별적인 발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다만, 이런 건 가장이 집사람을 훈계하고 바로잡는다는 맥락이지, 술 쳐먹고 깽판 치면서 지 꼴리는 대로 구타하는 걸 말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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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제도가 필요한가,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한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게 좋은가" 갖고 논쟁하듯이.. "필요하다면 여성(=부인)을 때려야 하는가?"에 대한 옹호 의견 중 하나가.. "Spanking might help get back some of ... respect they lost." 쉽게 말해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때릴 필요가 있다"이다. -_-;;;

다시 말하지만 저렇게 옹호 의견을 피력했던 사람은 여혐 싸이코 남성 우월주의자가 아니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책임지는 권위자로서 "부인의 행실이 지나치게 방자하다면 저런 극약 처방을 해서라도 저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옹호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자녀에 대한 체벌만 지지하지, 부인에 대한 스팽킹 같은 건 언급돼 있지 않다.. 오히려 여자는 남자보다 더 약한 그릇인데(골 3:19, 벧전 3:7), 모질게 대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3) 그리고 끝으로..
저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인종 차별이 여전히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총 잡고 전투하는 보직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기껏해야 취사병 등의 비전투 지원 병과에나 머물렀다. 물론 예외적으로 총 쏘고 전투기 조종한 흑인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 시절 백악관 같은 관공서의 화장실은 남녀뿐만 아니라 흑백도 따로 구분돼 있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인종 차별은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차츰 없어지기 시작해서 70년대 월남전 타이밍 정도는 돼서야 완전히 근절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03/05 08:35 2021/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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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와 현대의 전쟁 방식 차이 복습

옛날 전쟁에서는 겨우 성을 하나 정복하는 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거나 같은 높이의 언덕을 쌓는 등 별짓을 다 해야 했다.
그리고 해전에서는 배와 배끼리 접근하여 부딪치고, 발판을 놓아서 상대편 배로 건너가서 칼싸움을 벌였다. 적선은 완전히 부수고 침몰시키기보다는 나포해 오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뭐, 목선이었으니까 아예 불질러 없앨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가 잘못하면 아군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적의 군함을 노획(!)해 오는 병사는 그야말로 평생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포상을 받았다. 군량미 한 섬을 적군 것을 노획해도 그건 아군이 일일이 수송해 온 군량미의 10배가 넘는 전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는데 하물며 배는 뭐.. 그 정도로 보상해 줘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지금 우리나라도 단순 간첩 신고 포상금보다 "간첩선"의 신고 포상금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전과를 세우는 병사 말고 공성전에서 사다리를 제일 먼저 오르기, 전열보병(!!) 시절에 제일 앞줄에서 머스킷 주고받기.. 이렇게 제 발로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누군가가 반드시 맡아야만 하는 임무에도 동기 부여를 위해 엄청난 포상과(생사 여부 무관), 반대로 도주 시 엄청난 처벌이 뒤따르곤 했다.
무기의 화력이 부족하고 부족하고 시설이 열악하던 옛날에는 어느 분야의 조직에나 닥치고 근성 의지드립 똥군기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횡행해야만 했을지가 짐작된다.

그런데 화포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이런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갑옷이 없어지고 방탄복으로 바뀌었다. 공성전이라는 것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을 쌓는 게 아니라 참호를 잔뜩 파서 방어하는 전술이 잠시 등장했다가 그걸 뚫기 위해 탱크라는 게 발명되었다.

현대의 해전은 교전 거리가 이미 수~수십 km에 달하며, 포탄은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날아온다. 눈에 보이는 거리에서 총탄을 교환하는 건 그냥 백병전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니 제2 연평해전 때 배 옆구리를 들이대서 막던 기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하고 불리한 짓이었는지도 다시 생각을..)

이렇게 먼 거리에 포를 정확하게 쏘려면 직사가 아니라 중력과 공기 저항을 감안한 곡사 궤적은 물론이요, 심지어 지구가 둥근 것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해수면이 무한한 평면이라고만 단순하게 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쏘는 방향에 따라서는 심지어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향력도 고려 대상이 된다. 포 하나 쏘는데 오만 물리 지식이 동원된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전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20세기 초· 중까지는 군함이 크기가 왕창 커졌다. 돛 달린 목선이 엔진 달린 철갑선으로 바뀐 데다, 배가 커지면 더 많은 사람이 타고 더 멀리 더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함포도 그에 비례해서 더 커질 수 있으며, 더 강한 화력과 더 긴 사정거리를 보장하게 된다. 큰 배 한 척이 작은 배 여러 척보다 훨씬 더 나았다.

배의 지하에 수십 명의 노꾼들이 타고, 위에서 수병들이 화살을 쏘다가 상대편 적선으로 건너가서 칼싸움을 벌이던 시절에 비하면 상황이 얼마나 극과 극으로 달라졌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 거북선만 해도 노꾼이 필요한 배였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세계 대전 시절이 끝나고, 군함을 폭격기와 미사일로 잡는 시대가 되면서 군함이 한없이 더 커지는 유행도 끝났다.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자그마한 비행기들이 추락에 가까운 고각 급강하를 하면서 적국 군함에다 포탄 내지 어뢰를 떨군 뒤 튀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해야 자유 낙하만 시키는 것보다 탄의 명중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지만, 이건 비행기의 입장에서는 항공역학적으로나(실속..) 군사적으로나(대공포 피격 가능성..) 매우 위험한 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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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폭탄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뢰도 군함이나 잠수함이 아닌 비행기가 투하하고 가는 게 이례적인데.. 아무래도 비행기가 군함의 머리 위로 위험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배의 아래에서 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비행기에서 발사하는 항공 어뢰는 더 높은 고도에서 더 고속으로 바닷물에 떨어져도 내부 부품이 손상되지 않고 곧장 추진과 격발이 가능하도록 성능과 신뢰도가 계속해서 개선되었다.

이렇듯, 군용기야 같은 비행기끼리 공중전을 벌이는 전투기가 있고, 지상이나 수면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폭격기도 있다.
그럼 전함은..?? 망망대해에서 같은 배끼리만 싸우는 것 같지만.. 적당히 큰 배는 현대전에서 의외의 역할도 한다. 바로 육지에 근접해서 내륙에다 신나게 엄호 포격을 퍼부어서 아군의 상륙 작전을 지원하는 것 말이다. 얘들이 어지간한 포병 부대를 능가하는 화력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 내지 장사리 상륙 작전 같은 영화를 보면 이런 포격 장면을 응당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인천의 경우, 해안이 매우 얕고 조수 간만의 차이도 심하기 때문에 군함이 한없이 안쪽으로 들어와 줄 수 없다. 해병대가 차량 지원도 없이 뻘밭을 달려서 상륙해야 되니 더욱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라고 일컬어진 것이다. 현대전에서는 옛날처럼 사다리 타고 성벽을 오른다거나 적진 참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갈려 나가는 일은 없지만(대응 전술이 개발되었으니), 이런 해병대라든가 낙하산 메고 적진에 뛰어내리는 공수부대가 성벽을 오르는 거나 다름없어 보인다.

2. 태평양 전쟁

1940년대의 태평양 전쟁 때 활약했던 일본군 장성 중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리고 나중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저지른 침략 전쟁과 반인륜 범죄 같은 이슈들을 배제하고 생각할 때, 군인으로서는 나름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소신이었다. 그저 친미나 평화주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 국력으로 미국 같은 나라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논리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틀어지고 무역로도 봉쇄되는 등 국제 정세가 계속 불리하게 흘러가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기왕 미국과 싸워야 한다면 지금 같은 여건에서 상상 밖의 통수를 치는 것밖에 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서울대를 가기 위해 수능을 무조건 만점 맞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만 잘하면 되고, 위조지폐도 무조건 완벽하게가 아니라 그저 액면가보다만 비싸지 않은 퀄리티를 투자하면 되듯.. 적당히 미국을 타격하면 쟤들로 하여금 "쟤랑 싸우면 우리가 이기기야 하겠지만 우리도 출혈이 클 테니 그건 귀찮.. 차라리 적당히 협상"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거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40여 년 전에 러시아를 꺾었듯이 이번에도 미국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이고 우리 민족은 야마토 정신이 깃든 대단한 민족이니까" 같은 근자감도 들어갔을 것이고..
그 결과 그는 1941년 12월에 그 이름도 유명한 진주만 공습을 실행해서 처음엔 실제로 굉장한 피해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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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은 그 뒤로도 반 년 정도, 대략 1942년 5월 정도까지는 승승장구했다. 연합국 연합군이 우왕좌왕 하던 사이에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리즈 시절을 찍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그 기세에 밀려 필리핀에서 철수하면서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남긴 게 그 해 3월 11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리즈 시절은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통수에는 통수로.. 먼저 둘리틀 특공대를 보내서 일본 본토를 타격하는 깜짝쇼를 선보였다. 그 뒤 전열을 가다듬고 자기 국력을 총동원해 가히 show me the money급의 물량으로 비행기고 배고 무기고 식량이고 팍팍 찍어냈다.

일본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불굴의 정신력도 사실은 미국이 압도했다. 대공황을 버틴 깡다구에다가 일본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으로 눈이 시뻘개진 젊은이들이 "꼭 입대해서 쪽발이들을 내 손으로 때려잡고 싶습니다!"라고 줄을 서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홀시 제독이 외쳤던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는 요즘으로 치면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쑤" 내지, 둠가이의 "Rip and tear"이나 다름없는 구호였다. 그땐 물론 임프, 카코데몬 따위가 아니라 쪽발이를 성경의 왕하 2:24처럼 찢고 죽인다는 얘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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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 뿐이랴, 미국은 정보전마저도 일본을 앞섰다. 쟤들은 일본군의 통신 암호를 쭉 해독해서 사실상 맵핵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연합군은 서부 유럽 독일군의 에니그마만 해독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놈들이(일본) AF라는 곳을 공격할 거라는데 거기가 구체적으로 어딜까? 혹시 여기가 맞는지 우리가 낚시 무전을 평문으로 보내서 쟤들이 반응하는지 확인해 볼까?"라고 떠봤는데, 쟤들이 정확하게 거기에 낚여 준 덕분에 작전을 사전에 다 파악한 적도 있었다.

저기서 AF란 그 이름도 유명한 미드웨이였다. 일본이 미국의 통신을 도청했다고 자국으로 송신하는 메시지까지도 미국이 통째로 도청해 낸 것이다.
일본은 하와이와 가까이 있는 미드웨이 일대를 점령해서 영토를 넓히고 전세를 더 유리하게 이끌고 싶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1942년 6월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잃는 참패를 당했지만, 미국은 전쟁에 대비가 단단히 돼 있었고, 전사자 수는 일본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전투에서 많이 손상을 입었던 요크타운 항공모함 한 척이 격침된 것 정도가 전부였다.

미드웨이 해전은 우리 식으로 풀이하자면 미국판 명량해전이나 마찬가지인 승전보였다. 얘는 인류의 전쟁 역사상 최초로, 해전이지만 전함의 함포가 아니라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서로 먼저 마주쳐서 싸우고 적선까지 격침시킨 전투였다.
그 뒤 1942년 11월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놓았으며, 이때부터 전세는 슬슬 미국과 연합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는 미국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동선과 스케줄을 '맵핵'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우연을 가장한 특별 작전을 펼쳐서 그 적장을 제거해 버렸다! 소수의 전투기를 출격시킨 뒤, 전선 시찰 중이던 저 사람이 탄 수송기를 벌집으로 만들어서 추락시키고 튄 것이다.
미국은 자신이 일본의 무전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번 사건도 철저하게 우연한 전과로 치부했으며, 그 뒤에 일본이 의심스러워서 낚시 역정보를 퍼뜨리는 것에는 반대로 절대 응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본을 아주 그냥 갖고 논 거나 다름없었다.

1944년의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면서 일본은 더는 회생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었고..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을 떠난 지 2년 반쯤 뒤인 1944년 10월에야 귀환해서 I have returned라고 자평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에는 여느 전선보다는 일본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인 이오지마 섬에 미군이 상륙하게 되었다. 이때 최선임 지휘관이었던 일본군 장성이 바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이다.
그는 어차피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면 우리가 최대한 오래 살아서 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놈들을 최대한 귀찮게 하고 최대한 피해라도 끼치자고.. 지는 걸 전제로 하고 예전과 좀 색다른 전술을 폈다. 3년 전쯤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놈들은 화력이 워낙 넘사벽이기 때문에, 엄폐물 없는 해변에서 상륙 자체를 저지하는 것은 무의미 불가능하다. 그러니 일단 상륙은 허용한 뒤, 적이 깊숙이 들어왔을 때 게릴라전을 펼치며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괴롭히면서 정신을 빼 놓았다. 그는 반자이 어택 따위 하면서 절대로 허무하게 개죽음 당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적을 괴롭히라고 부하들에게 훈시했다. 해변에 방어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섬 내륙 곳곳에 지하 땅굴과 동굴을 이용한 아지트 네트워크를 꾸며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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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래 봤자 섬은 끝내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궤멸을 맞이했다. 그래도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전략이 적중한 덕분에 미군은 1주일이면 끝날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땅따먹기에 1개월이나 소모해야 했다. 그리고 상상 이상의 인명 피해도 당하게 되었다. 워낙 고생해서 그런지 이모지마 섬 전투와 관련해서는 미 해병대원들이 산꼭대기에다 성조기를 꽂는 모습의 저 사진이 유명해졌다.

바로 다음 달 3월 9일과 10일에는 이제 도쿄 대공습이 펼쳐져서 일본의 수도가 불바다 잿더미로 바뀌었다. 옥쇄 항전 운운하는 정신나간 일본을 보면서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당했을 때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으며, 한편으로는 저런 또라이들의 본거지에 직접 쳐들어가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쳐들어가지 않는 대신 원자폭탄을 떨구게 됐다. 이제야 일본 천황이 직접 무조건 항복을 하고 드디어 전쟁 종결..

굽시니스트 님의 ‘본격 2차 세계 대전 만화’ 시리즈를 본 게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인 진주만, 그리고 피날레인 원자폭탄 사이에도 연대기별로 다양한 사건과 전투가 있었다. 2차 대전은 전역이 워낙 넓었고 전개가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영화로도 제일 많이 만들어져 나왔다. 올해 초엔 마침 영화 ‘미드웨이’가 개봉해서 본인은 아주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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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전투기와 탱크가 첫 등장한 전쟁이라면 2차 대전은 로켓, 미사일, 핵무기, 컴퓨터 같은 것을 개발시킨 전쟁이다. 그래도 2차 대전을 끝으로 식민지니 제국주의니 하던 구도가 완전히 종결되었으며, 세계가 고전적인 형태의 전쟁은 없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시절에 일본은 정말 또라이 같은 나라였다. 쟤들이 어쩌다가 영국· 미국 하고도 사이가 순식간에 틀어졌는지 참 신통한 노릇이다.
물론 일본은 그 옛날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항공모함과 전투기, 잠수함을 독일로부터 기술 원조를 받아서든 어떻게든 자체 제작까지 했던 대단한 선진국인 건 사실이었다. 조선 따위 범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국력이 미국에 비하면 택도 안 되는데 육군과 해군이 대립하면서 따로 놀고, 레이더는 개발해 놓은 것을 적국이 먼저 활용하고 있는데도 정작 자기는 활용을 못 하고, 거기에다 무식한 똥군기와 의지드립으로 인한 폭주, 점령한 식민지에서 차라리 예전의 백인의 지배가 훨씬 더 나았다고 원주민들이 학을 뗄 정도의 폭압 학정 병크 등..
전반적인 행정 시스템과 정신 세계랄까.. 그런 소프트웨어들이 도저히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제국은 총체적 난국을 겪으면서 비참하게 몰락하고 전쟁에서 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07 08:34 2020/04/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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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업보다 더 악한 것

내가 나이가 들면서, 특히 20대 나이에서 30대가 되면서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탐욕스러운 신자유주의(자), 자본가, 거대 다국적기업, 재벌에 의해 조종되고 이놈들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 됐다고 생각하던 게 달라진 것이다.

성경적으로도 내가 믿는 전천년주의 세대주의라는 게..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서 예수님 재림을 앞당기기는... 개뿔. 세상은 갈수록 타락하고 배도하고 망가지고 교회조차도 그렇게 다 망가질 거라고 인간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심판으로 끝나 왔다고 말이다.

물론 그건 크게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심상에다가 인간적인 감정이 가미되니.. 나 역시 무슨 막장 시한부 종말론까지는 아니어도 세상관이 필요 이상으로 염세 회의주의적으로 가긴 했다. 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세대주의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부정적인 편견이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생각이 큰 줄기가 아닌 작은 가지 수준에서 조금 바뀌었다.
그 기업가들보다 더 부패했고, 그 기업가 같은 돈과 권력을 얻었으면 비리를 훨씬 더 저질렀을 놈들이 넘쳐난다.
그런 기업들이 생기기 전, 현대와 같은 의· 약학 체계가 등장하기 전, 근대화· 산업화가 이뤄지기 전의 세상이 그렇게 깨끗하고 해피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게 됐다.

탐욕스럽고 부패한 기업보다는.. 기업만 나쁜놈으로 몰아가고 나눔 분배 복지 외치면서 정작 자기는 자본주의 잘 이용해서 떼부자 돼 있고, 그러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기 돈"으로 적선 기부 기증 따위는 한 푼도 한 적 없는 위선자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100배 1000배 그 이상..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사악하고 나쁜놈이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게 됐다. 특히 정치 분야에 있는 놈들 말이다.

비대하고 부패한 기업보다 훨씬 더 나쁜 건 비대하고 부패한 정부라는 것을 절감한다.
기업이야 당연히 자선단체가 아니고 무슨 "믿습니다" 신앙을 실천하는 종교 단체도 아니고, 그저 이윤 추구가 최우선 순위인 조직일 뿐이다. 다 착하기만 한 게 아닐 테고, 다 해먹는데 자기만 안 해먹으면 바보 되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지저분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허나, 우리나라는 현재 정체성과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시키는 놈뿐만 아니라 작은 악과 큰 악을 교란시키는 놈과도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음이 명백하다.

2. 낙수효과

"부자가 훨씬 더 부자가 될 수 있어야 가난하던 사람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
일명 낙수효과인데.. 이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엄연한 팩트이다.

나 역시 금수저나 부자 출신 따위는 전혀 아니며 딱히 부자들 편을 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양심과 지능으로는 저 말을 반박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도 없다. 저 길이 아니면 그냥 다같이 거지 되고 조선시대나 석기시대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물론 인간의 경제라는 건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젠가 게임을 진행하는 것 같은 위험한 면모가 있다. 무작정 시장에다가만 맡기고 가만히 놔두면 치킨 게임 무질서 막장으로 동반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 겉으로 대놓고 사기 치는 것, 법을 지키는 착한놈만 바보 멍청이가 되는 꼴은 세상 정부가 개입해서 강제로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재물만이 다가 아니라고 인간의 위험한 사리사욕에 제동을 거는 건 '종교'가 해야 할 일이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세상 정부나 정치인들이 꼰대질 오지랖 부리면서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낙수효과에 대해 얘기하면 택도 없는 소리라고, 우리나라의 악독한 재벌이 어떻고 대기업이 어떻고 하면서 발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꼭 그런 부류들이 한편으로는
"북괴 정부를 도와주고 지원해 줘야 되고, 군인들부터 배불리 먹여 줘야... 일반 민간인 주민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 ... 이런 말을 태연히 해 댄다.

기업의 낙수효과보다 100배 1000배는 더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이상한 낙수효과 궤변을 늘어놓는 종북 빨갱이 하수인들은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까? 생각 같아서는 진짜 오함마로 뚝배기를 깨 버리고 싶다.

3. 일본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략했을 때는 조총이라고 불리던 머스킷으로 조선군을 쳐발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300년 뒤에는 훨씬 더 발전된 자동화기인 기관총을 들고 와서 동학 농민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이웃 나라가 저렇게 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 국방은 300년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뭔가 바뀌고 발전한 게 있었는가?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맞춰서 일본에서는 시속 200km 이상으로 상시 운행하는 고속철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그것도 '자체 기술'로 개발해서 말이다.
참고로 1960년대 초면 한국에선 서대동부만 찍는 최고속 우등열차 재건호(since 1962)가 서울-부산 소요 시간이 아직 6시간대였다. 이제 막 순간 최대 시속 100을 넘었으며, 1930년대 중반에 일제의 아카츠키 호가 무려 증기 기관차로 달성했던 소요 시간을 디젤 기관차로 이제야 따라잡았네 마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뒤, 도쿄 올림픽 시즌 2를 앞두고 일본에서는 시속 500을 찍는 자기부상열차를 개발· 건설하고 있다(츄오 신칸센).
물론 이건 올림픽에 맞춰서 개통은 절대 못 하고 2030년대는 돼야 볼 수 있을 물건이다. 하지만 저건 계획대로 개통된다면 세계 최초의 도시 간 장거리 초고속 자기부상열차가 될 예정이다.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일본은 뭔가 "발전"을 한다는 저력이 느껴진다.
뭐, 우리나라도 바퀴식 고속철이 시속 400 돌파 시험 주행까지는 성공했지만, 기술적으로 일본의 도움 없이 가능한 것일까..?
이래서 경제와 기술에서 극일을 달성한 현대, 삼성 같은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진심으로 진정한 애국자인 것이다.
맨날 조선 피해자 코스프레 반일 선동이나 하는 골빈 선동꾼 빨갱이들 말고!

4. 미국

(1) 이 반도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민족으로 따진 역사는 4천이니 5천 년이니 할지 모르지만, 국가· 헌정 체제는 20세기 이래로 상전벽해 급으로 널뛰기를 반복하며 격변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 일제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1~6공화국.. 국가 건국은 겨우 70년 남짓이요, 지금과 동일한 헌정 체제가 정립된 지는 인제 30년 남짓 됐다.

그러나 천조국은 1700년대 말 조선 정조 무렵에 신대륙에 한번 건국된 이래로 처음부터 공화정이었으며, 쿠데타 한 번 없었고 그때의 대통령제가 지금까지 정말 곧이곧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안정적이었으면 20세기에 각종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달러의 화폐 개혁 이력 또한 전무했다!

(2) 반도에서는 현충일 때 맨날 이 좁은 땅덩어리를 북괴의 침략으로부터 지킨 호국영령을 기리고, 아니면 기껏해야 일제 독립운동가들만 기린다. 삼면이 바다인데도 육군이 비대하다.
그러나 천조국은 재향군인의 날 때 1,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한국전 참전용사, 베트남전 이라크전 참전용사 분야별로..
자국의 안보는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남의 나라들을 공산주의나 추축국 등 악의 진영으로부터 지킨 영웅들을 기린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섬 나라가 전혀 아닌데도 해군과 해병대가 발달해 있다.

(3) 반도는 1945년 해방 당시에 전국에 등록된 자동차 수가 남북한 지역을 통틀어 딱 8천여 대였다. 경성 시내조차도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고 신호등 따위 없었다. 아무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에 미군정이 자동차 통행 방향을 좌에서 우로 곧장 변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이카 시대는 1980년대는 돼서야 시작됐다.
그러나 천조국은 1920년대에 이미 마이카 시대가 시작됐고 뉴욕엔 고층 마천루들이 즐비했다. 1930년대엔 대공황 때문에 좀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1940년대의 LA의 길거리와 자동차가 이미 반도의 1970년대 서울 중심부와 대등할 지경이었다.

(4) 반도는 1969년 여름에 서울-인천간 몇십 km 남짓한 경인 고속도로를 전구간 개통했다. 이게 반도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그러나 천조국은 192, 30년대에 이미 경부 고속도로보다도 더 긴 freeway들이 대륙 전역에 거미줄처럼 깔렸으니.. 너무 많아서 처음부터 이름 따위 없이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반도에서 고속도로 하나 겨우 만들어 냈던 1969년 여름에, 천조국에서는 아예 인간을 달에다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반도에서 경인 고속도로의 개통 소식은 완전히 묻혀 버렸다.

아 물론.. "김 태희보다 못생긴 주제에.."라든가.. "박 태환보다도 수영 못 하는 주제에..", "폰 노이만보다 머리도 나쁜 주제에.."가 딱히 욕설이나 험담은 아니잖은가? 너무 자괴감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보다 잘난 사람, 잘난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배우려 하기만 해도 시간과 여건이 부족할 판에, 생 찌질하게 시샘 질투하고 험담이나 하고 같은 양아치들하고나 놀면서 정신승리 하고 자빠져서는 세상을 보는 눈높이도 평생 그 따구 레벨에 머물 것이고, 발전이나 개선 따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절 그 여건에서 무려 "독립정신" / "Japan inside out"이랑.. 꼴랑 "백범일지"가 비교가 되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5. 조선

저런 이웃 나라들에 비해 조선은 정말 한글 말고는 대단한 것, 자랑스러운 것, 선한 게 나온 게 도대체 뭐가 있었나 싶다. 특히 말기에는 너무 치욕스럽고 남부끄럽고 민망한 사건들밖에 없어서 보는 내가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 을미사변: 한 나라의 궁궐이 외국 자객들에게 뚫리고 털려서 왕비가 암살됨.. (왕비가 그리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니긴 했지만, 일단 그와 별개로 "we salute the rank, not man" 지위를 생각했을 때..)
  • 아관파천: 군주가 무서워서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피신..

이놈의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오로지 자기 체제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국민을 죽이기 위해 외세의 군병력을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 무덤을 파고 조선이 멸망할 빌미를 주게 됐다.
이 정도면 연산군만 폭군 암군이라고 욕할 처지가 아니다. 자, 여기에 팩트 말고 무슨 일제의 식민사관 왜곡이 담긴 게 있으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지적해 보아라! (나도 김 정호 옥사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알고 있다.)

썩은내 풀풀 나는 나라 사정이 도저히 답이 없어서 전면 개혁을 부르짖었던 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 정부에 의해 어떤 험한 꼴을 당했던가?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김 옥균이 험한 꼴 당하는 걸 보고는 자국에 정나미가 뚝 떨어져 버려서 신념형 친일파로 돌아선 사람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일본도 이걸 계기로 조선은 자신들과 대등한 방식으로 손잡을 수 없는 대상이라고 인식이 바뀌었지 싶다.

이런 조선에 비하면 그나마 국력이 다해서 역성혁명으로 깔끔하게 망한 고려가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조선은 타 왕조들과는 달리, 건국 초기에 이전 고려 왕족에 대한 보복과 학살 말살도 꽤 잔학무도했다. 시작부터가 그랬다.

이것이 내가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개조하려고 애썼던, 시대를 너무 앞서간 두 거인 지도자를 눈물나게 존경하는 큰 이유이다. 그 업적에 비하면 일부 불가피한 피해자 내지.. 겨우 독재자라는 오명 따위는 내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다못해 일제 시대도 말기의 전쟁 관련 수탈과 반인륜 범죄만 아니었으면 흔히 생각하는 것 정도까지의 막장 생지옥은 아니었다. 일제만 욕하기에는 그 이전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 왕실은 합병 후에도 일본 왕실에 복속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며, 국권 회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독립 후에도 정말 아무도 왕실 복원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인들은 자기 손으로 조선 왕실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그런지, 비정상적으로 조선 왕실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이건 올바른 분별력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옛날 이 승만 정권을 생각해 봐라. 자기 손으로 직접 무너뜨린 정권에 대해서는 평가가 얼마나 가혹하고 박한데, 조선 왕조를 그 동일한 잣대로 평가했으면 무슨 결과가 나올까?

며칠 전에 유 관순에 대한 글을 썼다가 바로 다음에 곧장 "21세기에 반일은 정신병이고 종북 빨갱이이다"라고 쓴소리를 하자니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만.. 지금은 그게 관찰과 재현 가능한 과학이고 불편한 진실이다. -_-;;
성경의 같은 챕터에서 "판단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와 "거짓 대언자를 조심하라"가 거의 곧장 동시에 등장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이 거짓 대언자인지 판단을 해야 함..) 둘은 서로 별개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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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언제쯤 나왔더라? 한 10몇 년 됐나?
지금도 변함없는 미래예언이구만.. ㄲㄲㄲㄲㄲ
내가 2, 30년쯤 전 초딩이었을 때 일본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5, 60세 아재가 다 되도록 갖고 있고, 리얼 정치 외교판에서 그대로 표출하고 써먹는 정신병자 미치광이가 권력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_-
조선 개돼지들에게 최고의 참교육 수단은 가난과 자유박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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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9/09/25 08:33 2019/09/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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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96, 70년대에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해서 폰 브라운의 영도력으로 새턴 V라는 왕창 크고 아름다운 로켓을 만들었던 동안, 소련에서는 세르게이 코룔로프의 휘하에서 N1이라는 이름의 로켓을 만들었다.
그랬는데 1969년에 미국에서 아폴로 11호 미션을 먼저 성공시키자, 소련에서는 2등은 별 의미가 없다면서 유인 달 착륙 계획을 취소했다. 패배를 깔끔히 인정했다.

사실, 그 당시 소련은 그렇잖아도 미국과는 달리 로켓 엔진의 고출력 대형화를 달성하지 못해서 기술적으로 매우 고전하던 중이었다. 자동차로 치면 휘발유 엔진은 디젤 엔진만치 실린더 하나의 배기량을 무한히 키우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작정 공간을 크게 만들어서 무식하게 연료를 한꺼번에 많이 폭발시킨다고 장땡이 아니다. 그럴수록 연소 효율이나 폭발 압력 관리 같은 난관이 커진다.

미국의 새턴 V는 맨 아래에 가장 큰 출력을 내야 하는 1단 로켓이 저렇게 딱 5개의 큼직한 엔진으로 구성돼 있었다. 분출구 크기와 주변의 사람 크기를 비교해 보라. 각각의 엔진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 수 있다. 저게 평범한 기술로 구현 가능한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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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소련의 N1은 자그마한 엔진이 무려 30개나 다발로 달려 있었다. 단수도 새턴은 3단이지만 N1은 4단으로 한 단계 더 많았다. 밑바닥이 무슨 자동차 휠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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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턴 V는 가장자리에 엔진이 4개 있고 중앙에 하나가 더 있는 형태인데, N1은 가장자리에 엔진이 24개 있고 중앙에 엔진이 추가로 정육각형 꼭지점 모양으로 달려 있으니.. 공교롭게도 딱 6배수 관계이다.

그런데 같은 동력을 공급하는 용도로 힘의 원천이 지나치게 많으면 제어가 너무 힘들어진다. 10기통을 훌쩍 넘어가는 스포츠카 엔진이라든가, 1km 이상의 긴 열차에서 3대 이상의 기관차가 동시에 가속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하물며 로켓 엔진은 자동차나 비행기 엔진보다 더 많은 연료를 더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태워 없애야 한다. 그만큼 더 위험하다. 연료와 공기를 그 많은 엔진에다가 균등하게 공급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엔진들 중 한 곳에라도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뒷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N1 로켓은 1969년부터 시작해서 수 년에 걸쳐 네 번이나 발사 시도를 했지만, 모두 폭발 사고가 나고 실패로 끝났다. 이건 나로 호 같은 자그마한 로켓도 아니고, 인간을 달에 보내는 수준의 초대형 로켓이다. 그러니 한번 실패할 때마다 등유와 액체 수소 등등 연료만 생각해도.. 허공에 날리는 비용과 손해가 장난이 아니었다. 발사대까지 불바다에 휘말려 다 날려먹었을 정도였다.

그에 반해 새턴 V는 발사 실패가 전무하고 언제나 100% 성공이었으니.. 참 대조적이다. 저 로켓의 1단 밑바닥 모양이 마치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의 운명의 차이를 보는 것 같다.

물론 세르게이 코룔로프도 천재였으며, 미국 같은 자금빨과 지원이 있어서 기술을 꾸준히 개선했으면 새턴 V에 필적하는 로켓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달 착륙용 로켓 이후로 1980년대의 우주왕복선 계열로 와서는 후속작 에네르기아 로켓이 과거 N1 로켓의 한계를 모두 극복하였으며, 소유스 로켓은 100% 무사고 성공 기록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옛날에 달 착륙 경쟁을 하던 시절에는 소련이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우주로 날아가는 로켓은 수평으로 달리거나 굴러가면서 내기도 어려운 엄청난 고속 가속을... 중력을 정면으로 180도 거스른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구현한다는 게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니 수백~수천 톤에 달하는 연료를 겨우 몇 분 만에 다 태워 없애 버린다.

수 톤 남짓한 payload를 지구 저궤도에 띄우고 우주로 보내기 위해서 이만한 연료가 필요한데, 그 연료 자체의 무게 때문에 또 엄청난 양의 연료가 추가되고.. 이런 걸 다 감안하며 계산해 보니 결국 저 거대한 로켓이 필요해진 것이다. 나라에서 세금을 걷으려면 원래 필요하던 돈뿐만 아니라 세금을 걷는 데 드는 비용까지 다 감안해서 세금을 걷어야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저런 난관을 해결하고 대형 고출력 엔진만 만든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나는 것도 아니다.
로켓은 총알처럼 강선을 타고 고속으로 뱅글뱅글 돌면서 날아가는 게 아니고, 무슨 비행기 같은 조향 장치(rudder)가 있지도 않은데.. 진행 방향이 어긋나기가 정말 쉬워 보이지 않는가? 그거 방향이 어긋나면.. 비행기가 실속에 빠지듯이 로켓은 최악의 경우 땅으로 꼬라박아 버릴 수도 있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져 보면.. 지금 같은 컴퓨터도 없던 반세기 전에 천체 운동 궤도를 계산하고 로켓의 모든 내부 구조를 설계한 우주 개발 공돌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천재들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우주왕복선은 탐사선을 등에 업은 기형적인 자세로도 수직-수평으로 방향을 잡고 제대로 날아가는 게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에는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 소련에는 세르게이 코롤료프(1906-1966)가 있었고.. 중국에는 첸쉐썬(1911-2009) 같은 사람이 있었다. 천재 한 명이 나라의 항공 우주 기술을 다 이끌다시피했다. 우리나라...는 몰라도 일본에도 또 그런 엘리트가 분명 있을 텐데 싶다.

참고로 브라운의 경우, 정말 진성 우주덕으로서 인간을 달도 모자라서 화성에까지 보내고 싶어했는데.. 아폴로 17호 이후로 우주 개발 관련 예산이 모조리 짤리는 바람에 몹시 상심하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뭐, 천조국도 예산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화성까지 가는 건 현재 기술도 편도로만 최하 반 년이 넘게 걸리는데.. 거기에 사람을 보내면 그 동안 뭐 먹고 어떻게 살며 귀환은 어떻게 할지 문제가 너무 어렵긴 하겠다..;;

* 보너스: 영화 옥토버 스카이

마침 10월이 되기도 했으니 저런 로켓과 관련하여 본인이 감명깊게 접한 옛날 영화가 하나 떠오른다. 바로 옥토버 스카이.. October Sky (1999)이다.
이건 Homer Hickam(1943~)이라는 미국의 실존 인물과 그의 친구들의 학창 시절 행적을 다룬 영화로, 아폴로 13과 더불어 본인의 favorite 투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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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냥 탄광촌 깡촌에서 그저 그런 아이로 살고 있었는데..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 소식을 계기로 로켓에 완전히 미치고 꽂혀 버려서 로버트 고다드의 후예처럼 살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의 만류, 미친놈 취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철주야 로켓 연구만 하다가..
1960년,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지금 인텔 ISEF의 전신인 전미 과학 전람회(NSF)에 자기 로켓을 출품했다. 그리고 추진체 분야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본인도 먼 옛날에 ISEF의 허접 참가자였다. 그러니 저 장면에서 더욱 콧등 찡함이 느껴진다. (1960년은 인텔 사는 아직 없던 시절..)
그리고 저 소년이 쏘아올린 작은 로켓은 훗날 우주왕복선으로 바뀐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화 결말부를 한번 보시라.

Homer Hickam은 그 대회 입상실적 덕분에 버지니아 공대를 특채로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장교로 임관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전역 후에는 NASA에 들어가서 각종 연구 개발과 우주왕복선 승무원 양성에 관여했다고 한다.
일본 최초의 우주인이며 옛날에 <생명 그 영원한 신비> 다큐 진행자로 잘 알려진 모리 마모루도 그때 저 사람을 만났었다는 얘기다!

저런 괴짜들, 덕후들이 자기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진정한 저력이다. ㅜㅜ
1960년대에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라 하면.. 난 지금까지 실비아 라이컨스 아동 학대치사 범죄 사건(An American Crime 영화) 정도밖에 몰랐는데, 저 때 과학 전람회가 열린 곳도 인디애나폴리스이다. 시간과 공간 배경이 비슷하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이 뜬금없이 '10월 하늘'이냐 하면.. Rocket Boys의 단어 anagram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나도 Looking for you가 아니었으면 항공우주덕으로 기울었을 텐데.. 음악 때문에 철덕으로 방향이 고정돼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02 08:30 2018/10/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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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코딩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설적인 인물을 좀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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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는 무려 아폴로 11호 우주선을 총괄 제어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한... 열혈 공순이 되시겠다. 이름은 마가렛 해밀턴(1936~). (마가렛 대처..는 영국의 정치인 이름이고.)

지금은 이미 8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저 사진은 1968~1969년경에 촬영되었으니, 지금 내 나이 때 저런 일을 해낸 것이다.
IBM PC도,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도, C/파스칼도 없던 시절에 프로그래밍을 도대체 어떻게 했다는 건지 실감이 안 감. 기껏해야 어셈블리어, 포트란, 코볼 정도나 있었을 텐데.
우주선이나 전투기에는 Ada 언어가 많이 쓰인(쓰였)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거의 1980년대는 돼서야 등장한 언어이다.

저기 옆에 있는 서류더미는..;; 프린트된 전체 소스 코드 리스트라고 한다.
그녀는 노가다 코딩만 한 게 아니라 수학자· 과학자· 공학자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까마득한 옛날에 사실상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새로 개척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의 숨결을 받아서인지 NASA가 예로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최적화의 종결자 소리를 듣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여군 장성인 그레이스 호퍼의 뒤를 이은 미국의 천재 여성 프로그래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녀는 나중엔 자기 이름을 따서 Hamilton Technologies라는 회사도 차렸다.
주요 솔루션이 Universal Systems Language이라고 하는데.. 말만 들어서는 PL과 SE 분야의 융합 같기도 하고 도대체 핵심 기술이 무엇인지가 봐도 모르겠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저 때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이니, 그 당시에 딱 현업에서 종사하고 있었던 저분은 그 영화를 보는 눈이 남달랐을것이다. 아니 아예 영화 제작 과정에서 기술 자문도 해 주지 않았을까.

이 사람과 대등한 레벨의 괴수를 우리나라에서 찾자면 아무래도 성 기수 박사를 꼽을 수 있겠다.
일단 1934년생으로 연령도 비슷하고, 하버드 최단기 박사 졸업에다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의 산 증인인 분이기 때문이다.
우주선 시스템은 아니지만 88 서울 올림픽의 전산 운영 시스템을 총괄 개발했다. 게다가 이분 역시 원래 전공은 항공 우주로 NASA 입사를 지망하기까지 했으며, 1960년대의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환경을 접했던 분이기 때문에 일치하는 면모가 많다.

저런 천재들을 보면 난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싶은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여담.

  • 저 사진에 있는 마가렛 해밀턴의 옷차림처럼, 무릎까지 올라오는 미니스커트(!)가 세상에 첫 등장한 것도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러니 저 복장은 그 당시로서는 최신 패션이었다..!
  •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는 grasshopper(메뚜기)와 단어 발음이 참 묘하게 비슷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26 08:39 2015/12/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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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턴 워커 중장 (1889~1950)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하고, 나중에 한국 전쟁에도 중장 계급으로 참전했다. 그가 세운 가장 큰 공은, 필사적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더는 물러나지 않게 하고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코리아를 지키겠다.” 이게 성공한 덕분에 나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도 가능했다.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은 임무에 사병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워커의 옆에 있던 맥아더도 워커를 거들면서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라고 “까라면 까”를 돌려서 표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지프를 타고 이동 중인데 맞은편에서 다른 군용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왔다. 그걸 피하려다 지프는 길 밖으로 굴러떨어져 뒤집혔고, 운전병과 장군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했다. (하긴,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도 6·25 중이던 1952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었고..)

가해 차량도 군용차였기 때문에 이 승만 대통령이 나서서 그 차의 괘씸한 운전병을 총살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하긴, 저 때는 아직 즉결처분 제도가 있던 막장 시절이었다.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침략에 국군은 졸전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사기가 떨어지고 군 기강이 개판이 돼 있었다. 명령과 통솔이 안 먹히고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부대가 와해되는 지경이다 보니.. 오죽했으면 정말 고육지책으로 윗사람이 자기 말 안 듣는 부하를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응징할 권한을 줬었다. “내 명령이 있기 전에 멋대로 전선에서 후퇴하는 놈은 곧바로 총살이다!” 같은 식.

그랬는데 현실에서는.. 아 글쎄 사단장이 자기 기분 좀 나쁘다고, 훈시하는데 좀 몸을 움직였다고 사병을 제멋대로 총살하고,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 안 한다고 중대장이 소대장을 꼬투리 잡아 총살하는 지경이 벌어진 것이다. 무슨 보노의 삼류만화 패밀리 <아침조회> 편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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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하물며 미군 장군을 교통사고로 죽게 한 운전병이 과연 목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워커 장군의 유족들이 이 승만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렸고, 이건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인한 사고임이 밝혀지면서 해당 운전병은 징역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즉결처분 제도는 부작용과 병폐가 너무 많기도 하고, 또 극약 처방이 아니면 지휘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그럭저럭 해소도 된지라 이듬해인 1951년 7월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걷다'라는 동사에 -er이 붙은 walker이라는 단어를 본인은 레밍즈 게임에서 처음으로 봤던 듯하다. 특별한 작업이나 임무 없이 그저 좌우로 돌아다니기만 하는 보통 생쥐를 가리키고 있으면 저 명칭이 뜬다. 오늘날 서울 광장동에 조성된 '워커힐'이라는 지명과 호텔 상호는 저 워커 장군을 기려셔 명명되었다.

수 년 전엔 지인 초대를 받아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하루 투숙한 적이 있었는데, 시설도 호화롭고 산과 강이 어우러진 주변 경치도 굉장히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한다.

2. 윌리엄 딘 소장 (1899~1981)

6· 25 개전 초기이던 7월 중순에 대전을 사수하는 전투를 지휘했던 분이다. 그러나 병력의 열세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대전을 내어주고 후퇴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대열에서 이탈하고 실종되었다.

그래서 미군은 특공대를 열차에 태우고 대전으로 다시 투입하여 그를 구출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전에 자원하여 미카 129호 증기 기관차를 운전하다가 적진에서 총격을 받고 순직한 분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김 재현 기관사이다.

딘 소장은 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부끄럽게도, 한국인의 배신과 밀고를 몇 번 당하는 바람에 무려 투스타의 신분으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었다. 평양에까지 끌려가기도 했지만 그나마 심각하게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으며, 1953년 휴전 후에 포로 교환 차원에서 석방된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이 대인배인 건, 이런 천하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트집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딘 소장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나중에 체포되었을 때도 그를 용서하고 감형을 탄원했다고 한다.
온갖 편파적인 선동질과 역사 왜곡, 시체 장사로 가득한 오늘날 좌익 매체들의 사악한 짓거리와는 참으로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미군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한국 철도인의 은혜를 미국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고인에게 감사를 표했을 뿐만 아니라 2012년 6월 26일에는 고인에게 미국 국방부 특별 민간 봉사상(특별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전후에 딘 소장은 영예롭게 예편하였으며, 천수를 누리다 별세했다.

3. 조지 리비 중사 (1919~1950)

공병대 소속의 미군 병사로, 위의 김 재현 기관사와 매우 비슷한 시기와 장소(1950년 7월 19일)에서 전사한 분이다(이 사람은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이 후퇴할 때 같은 그룹에 속해 있었던 셈이다.

그는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위험한 일(= 자기를 적군에게 노출하는)을 용감하게 도맡아 하고, 심지어 인간 총알받이 역할까지 하면서 적을 교란시키고 전우들의 탈출과 부상병 이송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총알을 여러 발 맞고 과다출혈로 산화한다. 살아남은 전우들에 의해 그의 무용담이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훈장도 일찌감치 추서되었다.

영문 위키백과에는 이 행적만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대해서 대전 전투 이전의 행적이 더 알려져 있는 듯하다. 북한군의 진격이 코앞에 임박한 위험한 상황에서, 파주의 임진강 위에 놓여 있던 어느 다리를 끊어서 진격을 저지했다고 한다.

파주시는 임진강 이북이 민통선으로 봉인된 형태인데, 장파리에 가 보면 국도 37호선과 민통선 지대를 연결하는 한 교차로가 '리비 사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다. 본인은 작년에 이 길을 따라 들어가서 허 준 선생 묘소에 가 봤었다.
이것이 저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리고 민통선 지대로 들어가는 다리가 바로 '리비교'이며, 이게 그 사람이 끊었던 다리를 훗날 복원한 것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8/19 08:20 2014/08/1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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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판문점과 관련하여 안보 지리 역사 이야기를 늘어놓겠다.
다음은 판문점 주변의 구글어스 사진이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므로 별도의 창에다 열어 놓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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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참 대단하긴 하다. 이런 봉인된 장소도 항공 사진을 다 볼 수 있고, 사실 올해(2013) 초부터는 구글어스에 북한, 특히 평양의 세부 지리 정보까지 다 뜨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공동 경비 구역(JSA)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먼 옛날,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와 북한은 서로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고, 분단은 완전히 굳어졌으며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은 극도로 커졌다.

그런데 이렇게 영토가 양분된 상태로는 서로 왕래가 전혀 불가능하다 보니 당장 휴전 협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내부이긴 하나 정치적으로 남한 관할도 북한 관할도 아니고 UN이라는 제3자가 중립적으로 관할하는 지역이 필요해졌으며, 판문점이라는 주막이 있던 지역 일대가 그런 구역으로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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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주변이 이렇게 허허벌판이었지만 훗날 건물 주변에 전부 풀과 나무가 조성된 듯하다. 지금의 구글어스 항공 사진과 몹시 비교된다.

자, 그럼 이제부터 구글어스 사진에서 우측 하단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판문점은 아무래도 흰색+파란색 지붕 형태로 도열해 있는 아담한 회의장 건물 7개이다. 얘들은 남한과 북한 영토에 반반씩 걸쳐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판문점의 주변 시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로부터 남한 쪽에 있는 커다란 건물은 '자유의 집'이라고 불리고, 그로부터 남쪽에 있는 연보라색 지붕의 건물은 '평화의 집'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프레스센터이다.

더 남쪽에 있는 칙칙한 건물은 군용차 형상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병영이다. 판문점 주변엔 온통 병사가 경비하는 초소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렇게 건물들이 있는 곳의 오른쪽을 보면 도로가 아니면서 수풀도 없는 공터가 있는데, 거기는 헬리콥터 이착륙장이다. (본인이 분홍색 글씨로 1번이라고 표시한 곳) 저 옛날 사진에서 헬리콥터가 있는 곳과 동일한 지점일 것이다.

다음으로, 판문점에서 북한 쪽을 살펴보겠다.
회의장 바로 이북에 자리잡은 회색 지붕의 직사각형 건물은 '판문각'이다. 남한의 '자유의 집'에 대응하는 건물이라 하겠다. 그리고 좀 더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밝은 옥색 건물은 '통일각'이다. 나머지 건물들은 역시 병영이나 기자 대기실이다.

공동 경비 구역은 군사 분계선 이남과 이북에 있는 남한과 북한의 비무장 지대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는 말 그대로 남한 및 UN군 초소와 북한군 초소도 뒤섞여 있다.
남양주 종합 촬영소에는 판문점 세트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 항공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재연해 놓은 시설은 회의장과 판문각 정도이다.

영화 <튜브>가 김포 공항 청사 하나를 빌려서 총격전을 촬영했다고 하지만, 판문점 주변은 영화 촬영용으로 도저히 점거할 수 없는 곳이다. 영화는 아무래도 세트장에서 찍는 게 불가피하다.
하지만 진짜 판문점과 세트 판문점은 판문각 주변의 경치가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 사진을 눈썰미있게 보고 나면 주변 사진을 보고 여기가 진짜인지 세트인지를 분간하는 게 가능하다.

여기는 민통선 수준이 아니라 군사 분계선에 바싹 근접한 몹시 중요하고 위험한 곳인 관계로, 국내에서는 VIP 급의 높으신 분이 아니면 개인 방문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30인 이상 45인 이하의 단체 견학만이 가능하며 방문 예정일보다 꽤 오래 전에 신청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갔다 온 사람들의 블로그 후기를 보면, 내부 사진 촬영은 의외로 자유로은 듯.
엄연한 우리나라 영토인데 UN 사령부의 허락을 받으면서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드나들어야 하는 게 비극임은 틀림없다.

이제 판문점의 서쪽으로 가 보자.
두 길이 합류하는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는 자그마한 풀밭이 보일 것이다.
더 서쪽으로는 '사천'이라는 자그마한 개천 위에 놓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북한이다. (분홍색 글씨 4번)
이 다리는 국토 분단 전부터 있었지만 훗날 남한과 북한 국경을 가르는 다리가 되고 말았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어로도 말 그대로 bridge of no return이다.

예전에는 이 다리가 북한 사람들이 판문점으로 오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다리를 통해 6·25 전쟁 말에 포로 송환이 이뤄졌고, 마지막으로는 1968년 푸에블로 호 선원들이 석방될 때 이 다리를 건넜다. 당연히 남으로든 북으로든 한번 다리를 건넌 뒤부터는 반대편 국가로 돌아갈 수 없으니 다리의 이름은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붙여졌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널문다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대형 사건이 터졌다.
이름하여 1976년 8월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지도를 보면, 판문점의 서쪽에 UN사령부 소속의 '제5 관측소'가 있다 (분홍색 글씨 2번). 항공 사진으로는 잘 안 드러나 보이지만 저기는 언덕 위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남한 방면 말단에는 UN사령부 소속의 '제3 초소'가 있다 (분홍색 글씨 3번). 건너편에는 물론 북한 '제4 초소'가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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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UN사 제5 관측소와 UN사 제3 초소 사이의 표시 지점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분홍색 글씨 5번). 그래서 언덕 위의 제5 관측소에서 제3 초소 내지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일대를 감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잖아도 북한은 제3 초소에서 근무하는 UN사 소속 병사들에 대해 납치 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결국 UN사 소속의 미군 장교와 병사, 그리고 여기에 소속된 근로자들이 미루나무를 베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을 더 수월하게 감시하려는 이런 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당시 공동 경비 구역에는 UN군이고 북한군이고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각종 딴지와 협박을 걸면서 작업을 방해했다.

8월 6일에 이미 근로 부대 소속의 근로자와 경호원들이 한번 퇴짜를 맞고 쫓겨난 적이 있었기에, 8월 18일에는 나무의 줄기 대신 가지만 치기로 하고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때 비극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이번에도 작업을 방해하고 딴지를 걸더니, 나중에는 갑자기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려 와서는 작업 책임자이던 군인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JSA 내부엔 소총을 들고 들어오지는 못하니까). 특히 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겁먹은 근로자들이 도망치면서 버린 도끼로 싸이코패스마냥 사람 얼굴을 마구 찍고 난도질했다. 이들은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피투성이가 된 채 끔살당했다.

사실, 이때 북한군은 “무고한 남조선 로동자들은 놔 두고, 미 제국주의 원쑤들에게 집중적으로 본때를 보여 주라”라고 상부로부터 지령도 받은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 부상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고도 북한은 우리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며 이게 다 판문점 일대에 긴장을 조장하려 한 너희들 잘못이라고, 안하무인과 적반하장의 극치의 개념 안드로메다 태도를 보였다.

이에 박 정희 대통령은 그 유명한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아울러 “내 군화와 철모를 당장 가져오라!”라는 말까지도 전해진다.
더구나 선전포고 급의 도발로 인해 젊은 장교를 둘이나 어이없게 잃은 미국은 정말 제대로 빡쳤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휴전 이후 최초로 데프콘(경계 준비 태세) 3이 떨어졌다. 참고로 북한의 위협이 전혀 없는 완전 평시가 5,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레벨은 4이다. 3이 되면 한미 연합 사령부에 작전권이 넘어가고 전군의 휴가· 외출이 통제된다. 우리나라 역사상 데프콘 3이 떨어진 때는 저 때와 19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단 두 번뿐이었다.

그리고 8월 21일.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번연 작전'이 시행되었다.
미국 본토에서 수십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날아와서 한반도 상공을 배회했다. 그리고 바다에는 항공모함까지 와서 북한 해역을 기웃거리면서 무력 시위를 벌였다.

문제의 구역엔 특전사 소속의 수십 명의 무장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JSA 내부에서는 권총 이상의 무기를 휴대해서는 안 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 살상 무기들이 즐비했다. 이들의 엄호를 받으면서 작업이 재개된 끝에, 문제의 미루나무는 가지치기 정도가 아니라 밑동만 남긴 채 완전히 베여 나가고 말았다. 아래의 before - after 사진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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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작전 수행 중에는 경비 레벨이 데프콘 3이던 게 아예 전군에 실탄이 지급되는 데프콘 2로 올라갔다!
아마 인류 역사상 제일 살벌한 나무 베기 작업?작전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 싶다.

이런 무력 시위는 단순한 나무 베기 이상으로 북한을 낚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만약에 북한이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총을 한 발이라도 쏘면서 도발에 응할 경우, 이 미군 병력으로 JSA에서 얼쩡거리던 북한군들을 모조리 섬멸하고 아예 북한 본토를 폭격해서 군사 분계선을 북쪽으로 올려 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미국의 초강수에 결국 북한은 깨갱 했다. 아무리 중국과 소련이 북한과 친하다지만 이 사건에서만큼은 그들도 북한을 편들 수 없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병신 인증을 한 거니 빨랑 미국한테 사과나 해라”였다.
김 일성은 내부적으로 '북풍 1호'를 발령하여 전군을 무장시키고 대비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버로우 타고 무력 시위와 도발에 절대로 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 미국을 달랬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유감을 표명하고 아주 형식적으로나마 사과함으로써 사태를 겨우 수습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JSA 내부에도 군사 분계선 경계가 확실하게 생겼다. 도끼 만행 사건 이전에는 판문점 회의장 안까지 칼같이 남북 금이 그어져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며, 남한 쪽에 속한 JSA에 북한군 초소도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로 금이 그어졌고 그쪽의 북한군 초소는 모두 파괴· 철거되었다. 요컨대, 아래와 같은 사진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결과물이라는 뜻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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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정적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되어 남북 사람들이 오가는 용도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거치지 않고 판문점으로 가는 길을 트기 위해 북쪽에 자기네만 쓰는 다리를 또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흘 만에 뚝딱 건설되었다고 하여 <72시간 다리>라고 불린다. 구글 지도에서 북쪽으로 노란색 음영이 쳐진 길이 경유하는 다리이다.

판문점의 역사에 대해 얘기하면서 도끼 만행 사건은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 되고 말았다.
북한의 잔학· 흉악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건의 이름에다 '도끼'라는 이름이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영어로도 tree cutting incident뿐만 아니라 axe murder incident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밑동만 남았던 그 문제의 미루나무는 나중에 아예 뿌리째 완전히 뽑혀 없어졌다. 언제 그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는 현재 간단한 위령비만이 세워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글어스에도 가로수를 암시하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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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3/10/23 08:29 2013/10/2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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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한 생각

우리나라 내지 이에 준하는 여타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민에게 보장하는 자유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 제2장에서 신체의 자유, 거주와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사생활과 비밀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등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르며, 남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범죄· 이적 행위· 반역을 조장하거나, 다른 자유 이념과 모순을 일으키는 자유는 자유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사회· 도덕 시간에 배운다.

이런 자유들은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한 게 아니다. 선조들이 피흘려 쟁취한 소중하고 고귀한 이념이다(대표적으로 6· 25!). 또한 이것은 충분한 경제력과 심지어 과학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만 실현 가능하다. 옛날에 먹고 살기가 어렵던 시절에는 사회 보장 제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었으며, 뭐 하나 잘못 사고 쳤다간 집안이 쫄딱 망하고 처자식이나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만 수습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누가 무슨 짓을 할지 상대방을 믿을 수도 없는 긴급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모든 자유가 보장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나라는 명목상 미국의 사회· 정치 제도를 벤치마킹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시작했으나, 휴전선 너머 북한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비열한 해코지로 인해, 완전히 이상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완전 폐쇄적인 선군정치 최적화 병영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다 개방되어 있는 자유로운 국가가, 서로 인구와 경제력이 비슷하고 다른 변수가 없다면 어디에서 어디로 간첩을 침투시키고 유언비어 퍼뜨리고 심리전을 전개하기가 쉬울 것이며,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때 누가 이길 가능성이 더 높을까?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북한과 관련해서는 불가피하게 기본권을 법으로 크게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21세기에까지 국가 보안법 같은 구시대 악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21세기에까지 우리나라 체제를 부정하고 김씨 부자에게 이로운 짓을 하는 구시대 악인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법에 저촉되어 잡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일이 아무리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 해도 나치 및 히틀러와 관련된 매체 표현은 무조건적으로 금지하며, 누가 길거리에서 팔 뻗쳐서 “하일 히틀러!”만 외쳐도 잡아 가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정상적인 독일 국민 중에 그걸 보고 무슨 국민 기본권 침해라고 징징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자, 여기서 표현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18조와 21, 22조는 개념적으로 표현의 자유의 범주에 든다고 여겨진다.

본인은 크리스천으로서 표현의 자유라는 게, 사상과 종교의 자유에 동급으로 매우 중요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는 크리스천에게 거리 설교 같은 복음 전파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남에게 영향을 끼치고 역사하는 신앙이다. 표현의 자유를 배제하고서 사상과 종교의 자유만으로 크리스천 신앙을 다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둘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본인은,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권의 보장이 이미 넘치도록 충분히 아주 잘 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체제에 대해 고맙게 여긴다. 지금까지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 내가 믿는 프로파간다를 주변에 알리거나 교회에서 거리 설교를 하면서 공권력으로부터 구금· 체포의 위협을 느낀 적이 없다. 심지어 정치인들 비판도 아무 문제 없이 했다.

이 명박 정권 때부터 분야별로 온라인 검열이 강화된다면서 사람들이 굉장히 불안해했다. 그러나 난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난 일단 신앙과 관련된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자유감을 느끼며,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심지어 독재 정권이라 해도 별로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가 너무 많아서 그걸 오· 남용 하는 부류들이 더 문제라고 난 생각한다.

북한 관련 표현이야 나라에서 하지 말라면 좀 참고 안 하면 되고, 음란물· 성인물이야 어차피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 나라에서 그런 규제를 가하는 사정을 오히려 이해한다. 그런 규제가 무슨 북한 같은 수준의 검열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언론들이 너무 오버를 하고 네티즌들을 막 선동했다.

글쎄, 난 이런 점에서는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식의 어찌 보면 좀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난 그게 성경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난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도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끝까지 같이 싸우겠습니다.”


그래서 특히 진보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이 말을 자기 블로그에다가도 많이 걸어 놓고, 많이 떠받드는 것 같다.

그런데, 난 양심적으로 저렇게는 못 하겠다.
나더러 그저 소수이고 박해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병역 거부하는 인간들, 동성애자들, 낙태 합법화, 사형 폐지론자들의 말할 권리를 위해 같이 싸우자고? 못 한다. 물론 그들은 어차피 요즘 대한민국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천으로서 그런 사람들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고 해코지하는 것에야 물론 동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 죄의 가시밭길을 가다가 혼자 망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면 지적했지,
그들의 표현의 자유의 보장을 위해 싸운다거나 기도해 준다거나(?) 하는 일은 난 할 수 없다. 난 볼테르 같은 대인배가 아니다. 아니, 난 하나님보다 더 대인배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저렇게 '행동하는 양심'의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도 유명하다.
물론, 정치적 무관심을 풍자하는 건전한 메시지가 핵심이며, 평소에 선을 많이 행해 놔야 내가 위급할 때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 정도는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노조, 유대인?
그 무엇이 됐든 아무튼 내가 신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그룹이 먼저 쓸려 나갈 때, 내가 굳이 먼저 그들을 위해 같이 나서야 할 필요는.. 솔직히 난 못 느끼겠다.
그들이 남아 있다고 해서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의 '신앙'을 방어해 주는 데 기여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오히려 크리스천은 그런 상황에서 마 10:17-20 같은 말씀을 더 떠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글쎄, 배가 침몰한다거나 화재가 났다거나 해서 사상이고 종교고 나발이고 없이 다같이 죽게 됐을 때야 인간으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 그거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사상과 종교 자체만이 사람을 가르는 요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자라면서 이런 내 생각이 앞으로 또 바뀌게 될지는 모르겠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교리에 명백히 어긋나지 않는 범위 하에서 세상사의 참여에 굉장히 호의적이며, 각종 사회 운동이나 심지어 파업· 데모에 대해서도 더 열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실 집회와 결사의 자유 자체가 헌법에 있기도 하니 말이다. 이에 대한 이견과 논쟁은 이 세상이 어차피 제도적으로 성경대로 손쉽게 살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지 않은 이상, 언제까지나 존재할 것 같다.

끝으로, 자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미국 얘기를 좀 하고 글을 맺겠다.
한쪽에서는, 미국이 점점 법이 바뀌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반기독교 성향으로 가고 있다고 엄청 걱정한다.
거리설교를 했다간 잡혀 가고, 학교에 성경의 개인적인 반입이 금지되고, 교회나 신학교계에서도 이제 동성애를 당당히 반대했다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생겼다고 걱정한다. 특히 흑인 대통령이 부임하면서 그런 추세가 더욱 심해졌다고 그런다.

그러나 크리스천 중에서도 좌성향이 더 강한 다른 한쪽에서는, 저런 것보다는, 여전히 미국의 메이저 교회들이 저지르는 병크와 비리, 그리고 특히 정치 종교 결탁 행위만을 비판하느라 바쁘다. 그런 것들이 나라에서의 크리스천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빌미를 주고 있다고 말이다.

양 극단 중에서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모든 면모를 균형 있게 이해하기가 힘든 나라인 한편으로, 대형 교회들의 폐단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 차이 없다는 걸 느낀다.

Posted by 사무엘

2013/03/25 08:38 2013/03/2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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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1906-1990).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군 장성이다. 군사, 세계사, 현대 전쟁사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름을 들어서 알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양반 정말 골때리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군인 타입으로, 닥치고 폭격기 화력 덕후였으며 그의 주특기는 쑥밭 만들기였다.
하긴, 그 당시 미국은 워낙 물자가 풍족하게 넘쳐나는 부자 나라였으니 그의 전투 이념은 나름 적절했다.

게다가 그는 '석기 시대'를 굉장히 좋아한 매니아였다. ㅋㅋㅋㅋㅋ
미국 앞에서 깝치는 적국들은 본진을 폭격으로 다 쑥밭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조리 '죽탕치는(?)' 것도 아니고,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으름장을 공석에서 입버릇처럼 뇌까렸다. 영어로는 Stone Age.
호전적이고 입이 험악한 걸로 악명 높은 북한도 공식 석상에서 석기 시대 공갈을 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르메이 장군에 대해서 이런 패러디짤이 나돌 정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지휘 하에 일본 도쿄는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그 이름도 유명한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미군 폭격기가 우박처럼 떨어뜨리는 소이탄에 시내 전체가 말 그대로 시뻘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서 보듯, 목조 건물은 형체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없어졌고, 일부 석조/콘크리트 건물도 새까맣게 탄 흉측한 몰골만 남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10만여 명에 달해서 사실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보다도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도쿄를 그런 석기 시대로 되돌리는 데는 겨우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원폭을 성층권 고도에서 투하하는 식이 아니라 상당한 저공에서 위험한 자세로 소이탄을 떨어뜨리다 보니, 미군도 폭격기가 총 12기나 일본의 대공포로부터 반격을 받아 격추되고, 42기는 피탄 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이에 몇몇 미군 파일럿들은 권총을 들고 르메이를 직접 찾아가서 이렇게 따졌다.

“왜 이런 무모한 저공 비행 폭격 명령을 내렸는가? 귀관 때문에 우리가 전우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아는가?”

하지만 르메이는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제군들은 단 하루 만에 일본 제국의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고 놈들을 최소 10만 명이나 없앴다! (사실, 미군 전사자는 많아 봤자 수십~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다. 이런 식으로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 1주일 동안 일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모두들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도록!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작전 자체는 르메이의 말대로 미군의 승리이긴 하지만... 저건 좀.. ^^;; 정말 그의 머리에 든 건 오로지 폭격밖에 없었다.
일본이 원폭을 맞고 나서 일찌감치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르메이가 생각한 작전들이 모두 시행되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진짜로 지도에서 없어지고 일본 열도는 석기 시대로 퇴화했을지도 모른다.

이 양반의 무자비한 작전은 훗날 6·25 때도 계속되었다. 북한 중에서도 평양 시내는 그야말로 형체가 남은 건물이 손에 꼽을 정도였을 정도로 그냥 말 그대로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오로지 미국이니까 가능한 돈지랄로 폭탄을 그냥 때려 박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북한의 내부에서는, 평양을 재건할 게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수도를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도 오갔다고 한다. 비록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습과 폭격의 악몽 때문에 지금 평양 시내는 이에 대비하느라 지하 방공망이 굉장히 깊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평양 지하철이 무지막지하게 깊게 건설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 뒤에도 르메이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월남전 땐 베트남도, 그리고 쿠바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베트남이건 쿠바건 다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 대통령 각하는 명령만 내려 달라”는 식으로 일관되게 나섰다.
마치 게임 해설자 김 태형 씨가 캐리어를 좋아하듯 그는 석기 시대가 자기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의 정치인들도 그의 말투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걸프전 때 이라크를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고 공갈을 쳤고, 나중에 9· 11이 터졌을 때는 파키스탄을 상대로도 대테러전에 협조하지 않으면 너네 나라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그랬다. 뭐, 반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협박 멘트에 심기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르메이 같은 사람도 미군에 있는데 맥아더 장군은 차라리 양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맥아더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군인이라지만 그도 인간이고 신은 아니기에, 맨날 인천 상륙 작전 같은 성공만 한 게 아니며 실수도 저질렀다. 처음엔 북한과 중공군을 얕잡아보다가 1· 4 후퇴를 당하고 호되게 데인 뒤에야, “이 자식들 안 되겠어.”라고 하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경책을 쓰려 했다.

어떻게든 빨갱이들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린다거나, 전쟁을 아예 3차 세계 대전 급의 대규모 장기전으로 키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식이었으니... 이런 강경한 생각이 화근이 되어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진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르메이도 그 당시 “이 좋은 핵무기를 왜 안 써?” 급의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맥아더보다 더하면 더한 꼴통이지 못하지는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이런 호전적인 군 장성 양반들의 근성을 이성적으로 잘 통제하지 않았다면, 과거에 소련과의 냉전이 냉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한반도가 아니어도 어디에서 핵이 한두 발 터지는 바람에 특정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거나 진짜 석기 시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도 “3차 세계 대전 때 인간이 무슨 신무기를 쓰고 있을지는 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때 인간은 새총(slingshot) 같은 냉병기를 쓰고 있겠죠?”라고 얘기했겠는가. 성문 종합 영어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지문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영락없이 석기 시대 회귀-_-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석기 시대 드립 말고 르메이 장군이 자신의 호전성을 또 드러낸 유명한 어록으로는 “세상에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이다.
사실, 도쿄 대공습 같은 경우 미국이 연합국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지, 저렇게 대놓고 시내를 폭격하여 비전투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건 전쟁 범죄로 간주될 수 있는 짓이었다.
대놓고 말해, 나치 독일이 영국이나 미국의 본토 도심지를 소이탄 폭격으로 다 불태워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면 그 후폭풍이 어찌 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메이는 작전을 강행했다.

일례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에 참여했던 폴 티베트 대령은 훗날 다음과 같은 요지로 회고한 바 있다.
“난 그 당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원폭은 전쟁을 더 일찍 종결시키고 더 많은 인명의 희생을 막은 차선이며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인으로서 나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는 없다.”

허나, 르메이는 한 술 더 떠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 아예 그 정도의 책임이나 죄책감마저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
“사실 저 밑에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고해 보인다고 저 민간인들을 안 죽이면, 그게 다 우리를 죽이는 병력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마음껏 폭격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워 버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르메이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시 구조가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 업체 영역의 구분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 어록으로는 이 외에도
“전쟁이란 총알 많은 쪽이 많이 죽이면 이기는 것이다.”
“충분히 많이 죽이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처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우악스럽고 꼴통 같은 방면으로 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아무려면 어때, 천조국 미국 소속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최소한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고, 그러다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같은 이런 진짜 미친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저건 잘 알다시피 '무다구치 렌야'라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군이 남긴 훈시.. -_-
그도 그럴 것이 물량이 풍족한 곳에서 그냥 물량으로 밀면 된다는 교리가, 없는 여건 속에서 닥치고 근성과 정신력만으로 돌격하라는 교리보다는 훨씬 나은 게 자명하지 않은가?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했으면 무한 맵에서 저그 가디언 굴리는 걸 좋아했을 것 같다. (대공 유닛으로 대지상 폭격 -_-)

뭐, 르메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미워할 구석이 없는 인물이다.
우방국의 장군답게 일본, 북한 등 대한민국의 적들하고만 싸웠으니 말이다.
(아 하긴, 무다구치 렌야도 자기 군대를 말아먹은 행적이 가히 대한 독립 유공자 급이니, 우리가 딱히 미워할 구석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고.. -_-;;;)

그는 그런 호전적인 기질답지 않게 미군의 전술 체계 수립에 큰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심지어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도 훗날 자위대의 재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괜히 장성까지 진급한 게 아니다.

다만, 그 막강한 화력으로 미국이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깔끔한 '전쟁 승리'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 때는 재일 동포도 많이 희생된 게 사실이다. 비록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
이 사람의 상징은 잘 알다시피 '석기 시대'이다. 허나 아담 이래로 6천 년 인류 역사를 믿는 크리스천은 인류에게 딱히 석기 시대라 불릴 만한 긴 원시 시대가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로의 퇴보를 언급하려 한다면, 차라리 노아의 홍수 직후 상태로 되돌리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될 텐데.. 아무래도 '석기 시대'보다는 우악스러움이 덜하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3/07 19:26 2013/03/0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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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국적인 대한민국의 건국 정체성에 대해서는 잘 알다시피 두 개의 극단적인 평이 있다.
엄친아 이 승만의 영도력으로 그 어렵고 열악하고 위태롭던 여건하에서(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무슨 권리가 있는 전승국도 아니었다!) 중국도, 소련도 아닌 미국을 끌어들여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한반도에다 기적적으로 세웠으며, 더구나 초대 대통령이 크리스천이었던 덕분에 제헌 국회 때 감사 기도까지 올렸더라...;; 이건 밝은 면만 본 것이다.

이 국가의 사회 시스템에 대해 굉장한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굳이 여기서 또 설명하지는 않겠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 상에 이 승만을 칭송하는 글의 양하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글의 양의 비율이 어떻게 되던가? -_-

그런 것처럼, 미국의 태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이 건국 이념이 담긴 메이플라워 서약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이 들어가고 지폐에 “In God We Trust”가 들어간 기독교 국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기독빠가 있는가 하면,
사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포함한 미국의 건국 공신들의 상당수는 그저 이신론(deism)을 믿었을 뿐이며 성경의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심지어 그들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주장까지 있다..;;
또한, 과거의 흑인 노예라든가 인디언들 학대 문제 같은 흑역사를 들추면서 미국을 까는 사람도 있다.

뭐, 미국이 아무리 기독교 냄새가 짙다 해도 미국의 국교가 기독교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라도 한 건 아니며, 독일처럼 목사가 아예 공무원이기라도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 냄새가 옅어지고 있고, 이를 미국 내부의 크리스천들은 배도와 타락-_-이라고 표현한다.

본인은 개인 신념상의 친미와 반미 중 하나만 고르라면 명백하게 친미이다.-_-;;; 미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오지랖을 떨면서 잘한 것도 있고 병크를 저지른 것도 다 있겠지만,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에 기여하고 유익을 끼친 것이, 잘못한 것을 월등히 압도한다고 의심의 여지 없이 인정한다. 소련· 중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가 세계 패권 국가였다고 생각해 봐라. 미국보다 훨씬 더 나쁜 짓 많이 했겠지..
특히 다른 나라도 아니고 대한민국 같은 나라가 반미 할 자격이라고는 정말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그나마 국민 의식이 선진적인 덕분에, 저렇게 많은 자유가 있으면서도 나라가 그 정도나마 질서가 유지되고 잘 돌아간다. 부자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보다 낫고, 기부나 상속에 대한 문화도 더 낫다. 국민 대다수가 그냥 시골에서 자영업이나 농업에만 종사해도 집과 차 장만하고 심지어 호신용 총까지 장만해서 잘 산다. 그러나 소수 똘똘이 엘리트들은 그야말로 세계를 호령한다.

미국은 9· 11 테러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역사상 자국 영토가 적의 침략을 직접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한반도는 역사상 침략을 몇 번 받았다더라? -_-) 미국의 현충일인 재향 군인의 날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 나가서 남을 위해 싸운 자국 군인을 기리는 날이다.
이 뿐이던가?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선거로 뽑힌 국가 원수가 지정된 임기 동안만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 대통령제를 시행했다. 200여 년의 역사 동안 비록 대통령의 암살은 있었을지언정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적이 없고 정권이 비교적 평화롭게 잘 교체되어 온 것도 한국의 현대사와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 미국의 주요 전직 대통령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봤다. 미국 시민권 득템 시험을 통과하려면 이런 거 달달 외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에 스티브 유 씨도 공부 열심히 했을 것이고. -_-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본인은 “기독교인은 무조건 기독교인 대통령을 지지해야 한다” 주의가 절대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글 중에 나오는 “미국의 크리스천들은 대체로 이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김 용묵도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이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로 확대 해석해서 받아들이지도 말기 바란다.

조지 워싱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 당시 국가 원수로서의 주변의 비교 대상이 왕밖에 없다 보니, 아직은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3인칭 '짐'-_-이라고 부르고 왕처럼 행세한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훌륭한 본도 충분히 보였다.
그는 미국의 당시 국력에 비해서 개인적으로 이미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에, 연봉을 안 받고(요즘도 뭐 연봉 1$ CEO들이 있으니까^^) 대통령 직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 이후에는 가난한 사람 중에도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선례를 남기려고 연봉을 받았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는, 후세에 독재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2선까지만 한 후 깨끗이 물러났다.(물론, 이 양반은 어차피 권좌에 안 있어도 워낙 잘 살았고 아쉬울 게 없던 처지이기도 했지만. ㄲㄲ)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도 애초에 부카니스탄 같은 막장 정부를 수립한 게 아니었던 이상, 딱 3선까지만 하고 스스로 물러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주위의 아부꾼들이 자꾸 부추기니까, 진짜 국민이 원하는 줄 알고, 고스톱으로 치면 스톱을 안 하고 쓰리고 포고 하다 피박 나서 딥다 바가지 썼다. -_-;;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이 단일 국가라기보다는 아직 array/set of States에 가깝고(united가 아니라!) 껀수만 생기면 얼마든지 서로 찢어질 수도 있던 시절... 남북 전쟁이라는 비극까지 벌어지던 시절에 미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연합한 국가로서의 미국의 근간을 세운 위대한 지도자이다.
링컨 하면 노예 해방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그렇다고 해서 흑인을 백인과 완전히 동등하게 대우하고 동등한 권리를 줘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박애주의자는 물론 아니었다. 그때 아직 시대가 어느 시대였는데..
또한,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링컨> 같은 기독교 서적까지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은 평생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신앙면에서 무척 회의적으로 지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래서 골수 남부 백인 출신인 피터 럭크만 같은 성경학자는, 링컨 대통령이 사실 구원 받았다는 증거조차도 없다고까지 그를 깐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끼리라 해도 정치 성향이 일치할 수는 없는 모양.

시어도어 루스벨트: 20세기 초에 상당히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한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는 가쯔라-태프트 밀약을 승인한 정권의 수뇌였으니 감정이 좋을 수는 없을 듯. “미국이 보기에도 조선이라는 듣보잡 나라는 식민지로 좀 먹혀도 이상할 게 없는 미개한 나라인 반면, 러일 전쟁에서 당당히 이긴 너희 일본은 본격 선진국 강대국 인증. 일본이 조선을 갖도록 하고, 나 미국은 필리핀을 사이좋게 나눠 갖겠다.”
그 당시는 이런 합의가 힘의 균형이요 세계 평화와 국제 사회의 질서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거 중재를 잘 한 게 아예 노벨 평화상감이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샤바샤바가 몰래 되고 나니까, 이 승만 같은 사람이 나중에 뒤늦게 미국을 상대로 아무리 조선 독립을 호소하며 외교 로비를 해도, 얘기는 이미 다 끝났으니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

우드로 윌슨: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고 국제 연맹을 창설한 저명한 대학 교수 겸 정치인.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에게 박사 학위를 준 지도 교수이다. 하지만 그의 지론은 정세상 조선의 독립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이에 낙담한 이 승만이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아무리 배워 봤자 결국 세상은 법과 원칙이 아니라 강대국 꼴리는 대로만 돌아가니 아무짝에도 쓸모 없군요. 내가 낸 등록금 다시 돌려 주세요”라는 뼈 있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윌슨은 미국에서, 이 승만은 한국에서 각각 현재까지, 박사 학위를 소유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명예 박사 말고) 쉽게 말해 최고 고학력자라는 뜻.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정책을 밀어붙인 걸로 유명한 사람이고,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12년이나 대통령을 한 합법적 독재자이다. 그때까지 미국 헌법에 중임 제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긴 했지만, 통상 대통령은 많아야 2선까지만 하고 제 발로 물러났었는데, 이 사람은 덥석 4선까지 해 버린 것. 그래서 대공황과 훗날 2차 세계 대전의 진주만 폭격 사이엔 기간이 꽤 긴 것 같은데, 이례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은 동일 인물인 것이다.
그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휠체어를 탄 것으로 유명하다. 종전을 앞둔 1945년에 돌연사했다. (뇌출혈로 인해 왕하 4:19의 장면처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서거 후에 대통령의 중임 제한이 헌법으로 추가로 명시되었다.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을 하다가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양반. 대통령이 되자마자 194~50년대에 세계의 역사를 바꾸고 한국의 운명도 바꾸는 중요한 결정을 여러 차례 내렸다. 먼저 일본에다 원자폭탄의 투하를 승인함으로써 본격 2차 세계대전 종결자로 등극하였으며, 6· 25 때는 반대로 맥아더 장군의 과격한 행동거지를 견제하고 오히려 그를 해임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맥아더를 오로지 민족의 은인으로만 아는 반공 진영에서는 트루먼을 싫어하는 편이나, 맥아더도 당시에 하극상을 벌이면서 너무 무모한 작전을 강행하기도 했었다.

리처드 닉슨: 풍채 좋고 업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양반이다만, 워터게이트 사건 하나로 이미지 다 말아먹었다. 결국 탄핵 당하기 직전에 사임했으며,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를 다 못 채우고 굴욕적으로 자방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다. (본진 털리고 엘리 당하기 직전에 겨우 gg 치고 먼저 나갔다 -_-)

존 F. 케네디: 아주 유명한 대통령. 40대 초반의 상당히 젊은 대통령이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가톨릭 신자였다. 케네디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대통령 배출'을 위해서 자녀들끼리 극성스러운 경쟁과 엄친아 스펙 쌓기 스파르타식 교육이 행해졌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는 교회 헌법상 국적이 둘이다(다른 하나는 바티칸-_-). 이 때문에 케네디는 대선 후보 시절에 “당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만약 미국의 국익과 바티칸 시국의 국익이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같은 낚시성 질문까지 주변으로부터 받았다고.
종교가 천주교라는 점, 취임 선서 때 무엄하게도(?) 성경에 손을 얹지 않은 점, 게다가 공립 학교에 비치돼 있던 십계명을 철거하고 성경 공부· 기도 시간을 없앤 점들 때문에 미국 내부의 크리스천들로부터는 나라의 기강을 싹 말아먹었다고 정말 축시의 참배급으로 가루가 되도록 폭풍처럼 까이고 있다.

잘 알다시피 케네디는 상당히 괴이하게 암살당했다. 그런데 그 암살범도 이내 암살을 당해 버려서 케네디의 죽음은 각종 음모론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무명 병사의 군대 의문사도 아니고 한 대통령의 죽음에 왜 이렇게 의혹이 많나? ㄲㄲ

로널드 레이건: Reagan이라고 적혀 있어서 '리건'이라고 낚이기 쉬운데, great처럼 이때 ea는 '레이건'이라고 발음된다. ㄲㄲ 1980년대, 우리나라의 5공 시절을 풍미했던 대통령으로, 70대의 상당한 고령으로 대통령에 취임했고 퇴임 후에도 90세가 넘게 장수했다.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우리가 처한 온갖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저 작은 책 안에 다 들어있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조지 부시: 이 사람과 관련해서는 걸프 전쟁밖에 생각 안 난다. 이 사람 자신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출신.
듣자 하니 대선 시절엔 경쟁 후보를 상대로 사형 제도 드립을 시전하여 지지율을 뺏어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세상에, 자기 가족을 죽인 살인범에게도 사형 집행을 반대하겠다니, 이런 반인륜적인 불온사상의 소유자가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ㄲㄲㄲㄲㄲ” 나도 크리스천으로서 사형 제도를 적극 지지한다만 저건 말장난스럽고 좀 유치하다.. -_-;;

빌 클린턴: 스캔들 하나 때문에 탄핵 위기까지 갔던 양반. 닉슨과 마찬가지로 스캔들 자체보다도 그걸 무마하려고 거짓말을 한 게 그의 입지를 더욱 위협했었다. 문란한 사생활에다가 예수회 소속의 대학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미국의 보수-_- 기독교 진영에서는 그를 무척 싫어했지만, 대통령으로서 행적에 대한 세속 평가는 좋은 편이다.

조지 W. 부시: 젊었을 때 방황도 하고 좀 '놀기도' 했다가 나중에 기독교 신앙으로 교화되고 정신을 차린 케이스이며, 예일대도 사실 가문빨로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정말 친절하고 온화하며, 클린턴과는 달리 사생활도 깨끗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치인으로서는 좀 띨띨.. -_-;; 이 양반에 대해서 뭐 전쟁광이네 어쩌네 하는 모함에는 난 별 관심이 없다만, 진짜 어눌했던 건 사실이다.
그나마 신앙빨 하나 내세워서 재선까지도 아슬아슬하게 성공함. 부자가 나란히 대통령이 된 사례로 미국 역사상 둘째라고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사람들 말고도 미국 역사를 공부해 보면 재미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성경의 열왕기처럼 누가 왕이 돼서 죽을 때까지 실컷 나라를 통치하다가 또 자기 아들에게 왕위 물려주는 패턴이 아니라,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해서 지정된 임기 동안만 통치를 하게 하는 나라의 내역은 색다르지 않을 수가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1/06/24 08:45 2011/06/2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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