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1994년에 발매되었던 국산 패키지 게임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리크니스'라고 그림체나 게임 진행 방식이 슈퍼마리오와 비슷한 형태인 아케이드 게임이다.
본인은 그 시절에 얘 실물을 해 보거나 구경한 적이 없다. 단지 초딩 말년이던 시절, PC월드 한국어판 1994년 8월호 기사를 통해 소개된 것을 읽은 기억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최근에 오랜만에 되살아나서 다시 회고를 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는 그 날이 오면, 못말리는 탈옥범, 낚시광 같은 여러 국산 게임들이 있었다.
이 시절에 게임은 하드웨어 제어가 용이한 도스용으로 개발되었다. DirectX나 3D 셰이더 언어, 언리얼/유니티 엔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어셈블리를 이용한 교묘한 하드웨어 테크닉이 고급 기술로 취급되었다. 그래픽 모드를 바꾸고, 비디오 메모리를 직접 조작해서 화면이 Doom처럼 쫙 흐르듯이 갈라지고, 사각형이 아닌 형형색색 모양의 2D 스프라이트로 애니메이션을 구현하고..

IBM PC는 게임 전용 하드웨어가 아니다 보니 3차원 그래픽은 고사하고 부드러운 2차원 화면 스크롤을 구현하는 것조차도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Windows API로 치면 ScrollDC 내지 ScrollWindowEx를 구현하는 거 말이다.
스크롤 기술이 더 발전하면 '다중 스크롤'이 된다. 먼 배경은 천천히 스크롤하고, 가까운 기물은 많이 스크롤해서 반쯤 원근감과 입체감을 내는 것 말이다.

저 리크니스도 그렇고, 더 옛날에 id에서 Doom 이전에 개발했던 커맨더 킨을 보면 자기들의 독자 노하우를 동원해서 게임기를 방불케 하는 빠르고 부드러운 스크롤을 구현했다고 자랑을 했다. 스크롤을 못 하면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페이지 단위 스크롤밖에 구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건 단조롭다. Titus에서 만들었던 고인돌(Prehistorik) 1편과 2편의 스크롤의 차이도 생각해 보시라.

게임용 그래픽 아티스트들도 포토샵이나 MAX, Maya가 아니라 딜럭스 페인트가 생계 도구였다. 트루컬러 같은 건 없고, 256색에서 팔레트 배분을 잘하고 도트 노가다를 열나게 하는 게 일이었다.
320*200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워낙 저해상도이니, 막 크고 화질 높은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스프라이트 말고 고정된 그림은 가장자리 안티앨리어싱을 잘해서 저해상도에서도 최대한 부드럽게 보이게 해야 했다.

1990년대에 그런 불모지 영역을 개척했던 1세대 게임 개발자들이 김 동건· 이 은석(85되었수다/삭제되었수다), 정 재성(그 날이 오면) 같은 분들이다. 그리고 같은 연배의 개발자로 김 학규라는 분이 있으며, 이분이 옛날에 소프트맥스의 아트크래프트 스튜디오에 소속되어서 만들었던 게임이 리크니스이다.

(이 게임을 심층 분석한 블로그 링크)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크니스는 만화풍 + 파스텔톤의 그래픽을 추구했는데 개인적으로 색감이 참 예쁘고 마음에 든다.
저런 게임 스토리 연출과 각종 그래픽들을 그 시절에 어떻게 다 생각해 내고 만들었는지 경이로울 따름이다. 하드웨어 장비도 열악하고 지금 같은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스토리 화면에서 리크니스(남캐)와 아이리스(여캐)가 눈을 마주친 뒤, 새들이 푸드득 날아가면서 시작 메뉴 화면이 뜬다.
링크하는 블로그 글에서도 지적하지만, 주인공을 선택했을 때의 반응이 참 익살스럽다.
블루스 형제(Titus 작)와는 달리, 이 게임에서는 선택받은 주인공이 기뻐하는 게 아니라 "뭐? 또 나야?" 같은 뻘쭘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아이리스 아가씨는 마시던 물을 뿜기까지 한다.

(전체 플레이 동영상)

플레이 장면을 보니 진짜 슈퍼마리오 스타일 같다.
여러 블로그들의 평을 보면.. 리크니스는 왕창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카지노 슬롯 같은 걸 돌려서 공격하는 최종 보스전은 메모리를 강제 조작해서 보스의 HP를 너프시킨 뒤에야 겨우 깼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럼 나 같은 사람한텐 더욱 어렵겠다. <그 날이 오면>도 그렇고 게임들이 전반적으로 어려웠다. ^^

끝판을 깬 뒤 엔딩은 생각보다 허무하고 별로 볼 게 없었다. 개발팀의 사진 같은 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인이 리크니스를 재주목하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하여 또 있다.
먼 옛날에 하이텔 게임 제작 동호회에서 딱 두 번인가 게임 공모전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얘기 자체는 <삭제되었수다>를 소개하면서 예전에 한 적이 있다. 그때 저 게임이 1등을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당시에 본인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프로그래밍 동호회 친구도 거기에 게임을 출품했으며, 공개된 그 게임을 나도 해 봤다.
그 게임에 쓰였던 BGM들 중 일부가 바로 리크니스 게임의 BGM을 빌린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게 그로부터 거의 20년 뒤의 일이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일부 스테이지의 음악이 귀에 아주 익숙했다.

1990년대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이미 저렇게 날고 기었던 김 학규 씨는 그 뒤로 대학까지 중퇴하고서 게임 개발 학원 강사로 뛰기도 했고, 수제자들과 함께 그라비티를 설립해서 걸출한 온라인 게임을 계속해서 개발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플랫폼도 Windows로 넘어가고 3D 기술 + 네트워크 기술까지 게임 개발 방법론이 그냥 싹 갈아엎어진 거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걸 일일이 다 공부하면서 어떻게 따라갔는지가 그저 대단할 따름이다. 하지만 개발 능력 대비 경영 수완이 부족해서 자기가 세웠던 회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도 학창 시절에는 프로그래밍에 빠져서 제도권 교육에서는 완전히 이탈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실력이야 쨉도 안 되고 저렇게 현업에서 당장 돈 되는 물건을 만들 능력도 없다 보니 학교를 때려칠 배짱은 없었다. 저런 사람들의 꿈과 열정이야 참 대단하긴 한데 요즘 우리나라는 게임 업계가 사정이 너무 안 좋긴 하다. 정부로부터의 온갖 규제, 사용자의 불법복제, 끊임없이 치고 들어오는 외산 게임들.. 업계에서는 또 공밀레에 야근 야근..;;

그런데 이렇게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코딩으로 먹고 살자니 그나마 SI 품팔이 같은 진짜 지옥 말고 스스로 수익을 내고 할 만한 데가 미우나 고우나 게임밖에 없다. 국내의 걸출한 소프트웨어 개발자 프로그래머들을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데가 모르긴 몰라도 넥슨, NC 같은 게임 개발사들이다. 에구, 이건 나의 적성· 전공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인데 이 바닥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찬찬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1/28 19:35 2017/01/2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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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ppler 2017/02/02 01:30 # M/D Reply Permalink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85되었수다 보면서 재밌다기보다 부러운 감정을 느꼈던 때가 생각나네요.

    ==

    "게임" 이 제일 큰 수익원 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은근히 "앱"도 수익이 되는듯합니다.

    물론 주변에 성공사례가 적어서 일반화 시키기 힘들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1. 사무엘 2017/02/02 10:25 # M/D Permalink

      오옷~ kippler 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반갑습니다. ^^;;
      그 시절에 벌써 저런 게임을 만든 사람도 있는데 난 뭐 했나 싶은 자괴감이 충분히 들지요.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 "일반적인 앱"으로 그 얼마 안 되는 성공 사례를 만들고 계신 선배님 같은 분도 충분히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선례를 남겨 주셨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2. kippler 2017/02/04 16:52 # M/D Reply Permalink

    네, 사족을 달자면...

    제가 언급한 저 "앱"은 (정확히 확인은 못했습니다만) 최근 꽤 고무적인 성공 사례를 관찰해서 쓴 글입니다. ^^


    요즘 청년 창업이 이슈중 하나인데, 이바닥은 대부분 게임이나 서비스쪽으로 몰려있는듯 해서

    좀 아쉬운감이 있어서 써봤네요... 아 물론 저도 좋은 사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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