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과 폭발물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와 소모품 중에는 뭔가 화학적 폭발로부터 발생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 있다. 이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 A. 폭발력으로 뭔가를 멀리 쏴 날리기: 총포. 일반 총알, 옛날 해전 때 주고받던 대포알
  • B. 주변에다 폭압 대미지를 전함: 건물 철거나 터널 개통을 위해 터뜨리는 폭약
  • C. 주변에다 폭발력으로 파편을 날려서 대미지 주기: 수류탄, 각종 폭탄들. 이게 각종 게임에서는 '로켓 런처 스플래시 대미지'라고 표현하는 효과이다.

칼이 음식물을 썰고 요리를 할 때 유용하게 쓰이지만 한편으로 사람을 죽일 때도 쓰이는 것처럼..
폭발물 역시 토목 건축에서 장애물을 제거하는 용도로 유용하게 쓰이지만(발파..) 한편으로 사람을 죽일 때도 쓰인다.

그리고 화약만 폭발용으로 쓰이는 게 아니다. 내연 기관에서는 반응 속도가 빠른 연료를 급격하게 연소시켜서 제어 가능한 작은 규모의 폭발을 지속적으로 일으킨다. 그리고 그 폭발력으로 피스톤을 회전시키거나 터빈을 돌리거나, 심지어 그 배기가스를 분출시키는 반작용으로 동력을 생성한다.

저 위의 세 분류 중에서는 B에 가까운 셈이다.
단지, 자동차 엔진은 점화 플러그나 압축 착화를 이용해서 연료를 폭발시키는 반면, 총은 그냥 민감한 화약에다가 충격을 줘서 격발시킨다는 차이가 있다. 격발 후의 총구 화염이 엔진으로 치면 배기가스와 같다.

단순히 난방용 보일러나 외연 기관에서는 연료라는 게 단순히 불 때고 매질의 온도를 올리는 용도로만 쓰이겠지만, 내연 기관은 그렇지 않다.
물을 끓여서 증기 기관을 굴리는 용도로는 석탄과 석유를 모두 쓸 수 있다. 그러나 물 없이 연료만 들이부어서 열을 동력으로 바꾸는 건 석탄으로는 할 수 없고 석유로만 가능하다.

까놓고 말해 통나무나 숯, 석탄을 잔뜩 쌓아 놨다고 해서 거기 주변에서 담뱃불을 붙이다가 와장창 폭발 사고가 나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관계가 이렇게 정리된다.
폭발물의 작용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만한 점들을 더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파편을 날리는 수류탄이 화약이 들어있는 것만큼이나, 총알도 내부에는 탄두를 날리는 힘의 원천인 화약이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총알만 잔뜩 모아 놓은 탄약고는 일정 수준을 넘는 열이나 충격에 노출되면 큰일 난다. 총알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주변을 몽땅 다 박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2.
공포탄은 탄두가 없어서 A는 존재하지 않지만, 화약이 엄연히 들어있기 때문에 B의 위력은 존재하는 탄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쏘면 고온 고압의 배기가스의 폭압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공포탄은 사람의 발성으로 치면 성대를 울리지 않는 귓속말과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을 본인은 오래 전부터 해 왔다. 귓속말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는 들리기는 하는 소리이니까..;;

이런 배기가스와 파편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아폴로 계획에 대해서도 진공에서는 로켓이 날아갈 수 없네, 달 착륙선이 이륙했는데 흙먼지가 일지 않고 주변 후폭풍이 부자연스럽다는 식의 온갖 이상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배기가스는 주변에 공기가 없어도 분출되는 것 자체만으로 기체를 반대 방향으로 밀어낼 수 있다.

3.
터널을 뚫거나 건물을 철거할 때 쓰이는 폭약 역시 탄두도, 파편도 없이 그냥 폭압만으로 자기 일을 한다. 터지는 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그냥 “따다닥~ 빡~!”으로 총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을 철거하려면 아랫부분을 날려 버린 뒤, 건물이 자기 무게를 못 이겨서 연쇄적으로 주저앉게만 만들면 된다. 물론 콘크리트 건물들이 워낙 튼튼하니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물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꼭 전쟁용 폭탄이 필요한 건 아니다.
군함을 격침시키는 것도 원래 자기들이 갖고 있던 탄약고를 유폭시키면 된다. 꼭 자기 폭발력만으로 배를 몽땅 아작 내야 할 필요가 없다.

원자폭탄도 화구가 장난 아니게 크다고 하지만 상당수의 인명· 재산 피해는 주변 건물들이 박살나고 파편이 날리면서 야기된다. 뻥 뚫린 개활지 사막에서 원폭이 터져서 폭탄 자체의 열과 폭압과 방사선만 받아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대미지가 나오지는 않는다.

4.
총알 수준을 넘어 포탄이나 어뢰, 미사일 수준이 되면 얘들은 날아간 뒤에 목표 지점에서 스스로 또 폭발을 한다. 즉, A와 C를 모두 갖추게 된다. 이런 물건들은 단순 총알과는 달리, 목표물에 물리적으로 닿는 충격 대미지보다는 폭발에 의한 파편 대미지가 훨씬 더 크다.

그런데 정교한 로켓 엔진이 달리는 미사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포탄을 만드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목표물에 도달해서 부딪혔을 때는 폭발하지만, 처음에 발사되느라 포 안에서 어마어마한 G (=충격)를 받았을 때는 폭발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 전근대 무기에다 비유하자면 불화살과도 비슷하다. 화살이 날아가는 동안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5.
현실의 폭약, 폭탄 따위의 폭발물이 영화나 게임에서 보는 폭발물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는 비주얼이다. 현실의 폭발물은 일부러 소이탄 같은 걸 터뜨리지 않은 한 우리의 통념보다 불꽃? 화염 따위가 거의 보이지 않고 간지가 안 난다. 그냥 흙먼지만 자욱하게 일 뿐..
현실이 매체보다 더 우월한 건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다. 수류탄이 터지는 곳 가까이에 있으면 지축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고,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에 놀라게 된다. 일개 소총을 격발하는 따다딱 빡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으면 살인적으로 크다.

소리를 줄여 주는 소음기라는 게 악기용이 있고, 자동차나 총기를 대상으로도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착용하는 귀마개라는 것도 방수용과 방음용이 있는데, 둘은 내부 구조와 성분이 당연히 다르다. 방검복과 방탄복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

권총은 위력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은폐하기 쉽다는 이유로 인해 불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에 장착하는 소음기도 일단은 수렵용으로라도 불법이다. 자동차가 번호판을 가리고 다니듯, 은밀하게 총질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범죄 악용).

다만, 총에 소음기를 달았다고 해서 총 쏘는 게 무슨 화살 쏘는 것처럼 조용해지는 건 절대 아니다. 비유하자면 160dB정도이던 게 120dB대로 줄어들 뿐이다.

소음이 무려 1000배나 줄어들기는 하지만, 1경쯤 되는 액수가 10조로 줄어들면 비용이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줄어든 거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대신, 소음기를 달면 총소리가 많이 탁해지고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추적하는 게 더 어려워지는 효과가 있다.

6.
수백 년 전 옛날에는 열악한 흑색화약만 해도 얼마나 비싸서 군인들이 실탄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엔 총알, 포탄 같은 게 왕창 대량 생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얼마나 흔해지고 저렴해졌는가..??

이런 게 다방면의 과학 기술과 첨단 산업공학,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것들이 통합적으로 선순환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의 현대 문명이 존재 가능하게 됐다.
고대에도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놀랄 만한 과학 기술이 존재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 그런 것들은 대량 생산되어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7.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11월에 발생한 이리 역(현재 익산) 폭발 사고가 정말 끔찍했던 참사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다이너마이트에다 뇌관까지 싣고 가던 열차가 규정을 어기고 역에 당당히 정지했는데, 기관사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지, 화약이 실린 화물칸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로 술 마시고 잠들었다.

밤에 켜 놨던 촛불이 엎어져서 화재가 발생하는 건 그 시절에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평범하게 불만 난 게 아니라 40톤에 달하는 화약들이 연쇄 폭발해 버렸다. 그래서 반경 500여 m 안의 건물들이 몽땅 파괴되고 어지간한 전시 폭격을 능가하는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더 과거엔 1917년,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화약을 잔뜩 실은 화물선(SS 몽블랑)이 충돌 사고와 화재로 인해 몽땅 폭발하면서 TNT 2900톤 급의 폭발 사고가 났다. 이건 뭐.. 그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폭발 사고였다.
사실, 1970년 무렵엔 소련이 유인 달 탐사를 위해서 거대한 N1 로켓을 무리해서 개발했지만, 이것들은 다 실패하고 발사대에서 폭발했다. 이때도 그야말로 천지가 불바다가 되면서 핵이 아닌 폭발 중에는 역대급 폭발 사고가 났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저런 옛날일 말고, 21세기에도 2015년 8월 12일 톈진 항구 폭발 사고(TNT 한두 자리수 톤급)는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편이어서 아직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작년 여름 2020년 8월 4일엔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에서 질산암모늄을 잘못 다뤄서 TNT 무려 1천 톤급의 폭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나라가 통째로 혼란에 빠졌다. 항구에서 위험물을 대량으로 취급하다가 이런 사고가 나는가 보다.

8.
요즘 세상에 주유소는 무인 셀프가 완전히 대세가 됐고 말통 주유 정도나 직원 대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LPG 충전소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어떤 용도이건 무인화로부터는 여전히 열외되어 있다.
다른 에너지원은 어떨지를 생각해 보면, 전기차 충전이야 당연히 무인화 되겠지만.. 수소 연료 역시 무인화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자동차의 연료 및 엔진의 종류가 "소형차를 위한 휘발유, 아니면 대형차를 위한 디젤 엔진 경유"로 '얼추' 나뉘듯이, 비행기의 연료 및 엔진 종류는 "경비행기를 위한 왕복 엔진과 항공 휘발유, 아니면 나머지 대형기를 위한 제트 엔진과 등유" 계열로 얼추 나뉜다.
비행기를 넘어 로켓 엔진으로 가면 "등유 아니면 액체 수소"로 이원화된다. 연료 전지가 아니라 진짜 쌩 수소를 폭발시킨다.

9.
21세기의 최신 과학 기술로도 인간의 주류 살상 무기는 여전히 화약 기반의 열병기이며(핵무기는 논외로 하고..), 우주로 나가는 수단은 연료 소모가 너무 심한 내연기관 로켓에 머물러 있다.
영화나 게임에서 레이저 포가 어떻고 레일건이 어떻고, 플라즈마 소총이 어떻고 하는 건 여전히 비현실적인 SF의 영역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총알이나 포탄 파편이 아니라, 빛을 내뿜는 뭔가 신비로운 입자가 날아가서 적군을 죽이거나 시설을 파괴하는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심지어 사람이 쏘는 장풍은 SF라고 보기도 좀 민망하다. 얘도 일종의 폭압을 전하는 것에 가까울 텐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에네르기 파는 드래곤볼 만화에서 유래됐고, 파동권은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에서 유래됐다. ㄲㄲㄲㄲ 다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명작들이구나.

Posted by 사무엘

2022/05/09 08:35 2022/05/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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