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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매킨토시는 가히 꿈의 컴퓨터였다. 여기서 옛날이라 함은 대략 1990년대를 말한다.

그때 우리의 IBM 호환 PC는 아키텍처가 다 공개되어 있기도 했으니 ‘행정 전산망용’ 내지 ‘교육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내 대기업이 로컬라이즈까지 해서(일본의 로컬라이즈 방식을 따라한 것이겠지만)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니 맥에 비해 희귀하다는 느낌이 덜했다. 그리고 이 기계는 그래픽 성능이 맥보다 훨씬 시원찮았다.

그에 비해 매킨토시는 희귀함과 화려함 그 자체였다. IBM PC가 겨우 도스 명령 프롬프트에서 16색, 256색 VGA를 논하는 동안 매킨토시 화면에서는 화려한 GUI 운영체제에다 천연색 사진 그래픽과 각종 전자 출판물 편집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듣자 하니 매킨토시 컴퓨터에는 텍스트 모드라는 게 아예 없다는데? (물론, PC에서도 텍스트 모드는 컴퓨터 켠 직후에나 잠깐 보이는 과거 유물 잉여가 된 지 오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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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는 모 블로그.

기계의 모양을 봐도 모니터와 본체 일체형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다 무조건 자기네 순정만 쓰이는 게 고급스러움과 간지 그 자체였고, 웬지 지구인이 만든 물건 같지가 않은 티가 역력했다. 엘렉스 컴퓨터가 총판을 맡던 시절에, 매킨토시는 가격도 억소리 나게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딱히 전자출판· 그래픽 분야 종사자나 유학파 얼리어답터들이 아니면 쓸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물론, 그때 컴퓨터 덕질을 안 하고 그 돈 더 모아서 서울 강남에다 집을 사 놨으면, 지금쯤 떼부자가 됐을 거라고 자조 섞인 말투로 회상하는 얼리어답터도 있다고 카더라)

매킨토시 진영은 서비스 구리고 하위 호환성에 자비심 없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윈텔’ 진영과는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MS 윈도우야 API의 하위 호환성은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이고, x86 아키텍처 자체도 호환성에 목숨 거느라 그 지저분함이 말도 못 할 수준이지 않던가.

그런데, 그 간지 최강 귀족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맥 OS도, X 이전의 클래식 버전은 사실 선점형 멀티스레딩도 없이 기술적으로는 윈도우 95보다도 뒤쳐진 물건이었다고 한다.
하긴, 어렸을 땐 난 시커먼 도스 프롬프트에서 그 허접한 윈도우 3.1이 시동되는 모습만 보고도, 화려한 그래픽에 동심이 매료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하물며 매킨토시는 어땠을까?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매킨토시 진영의 역사상 있었던 대단히 큰 사건들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200x년대에 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1. 엘렉스 대신 애플 코리아가 직접 한국으로 진출 (1999)
2. 맥 OS X 출시 (2001)
3. 인텔 아키텍처 기반으로 전향 (2005-2006)
4. 아이폰의 흥행 대성공(과 국내에 드디어 시판) (2007, 2009)
(5. 그리고 아마, 잡느님의 사망. 2011)

매킨토시가 옛날에 비해서는 정말 가격도 많이 떨어지고 보급도 많이 된 건 사실이지만, 서비스의 품질은 오히려 엘렉스 시절보다도 못한 면모도 있다는 성토가 여전히 나돈다.
또한 최강의 장사꾼 기질로 한글화를 꼬박꼬박 친절하게 하는 MS 윈도우 진영과는 달리, 맥 진영은 소프트웨어의 한글화도 좀 투박한 구석이 있다. 기본 제공되는 한글 서체의 품질이 저질이라고 폭풍처럼 까여 온 것 역시 그런 맥락일 테고.

맥은 하드웨어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640KB 메모리 제한이라든가 16비트/32비트 썽킹 같은 흑역사는 없다.
다만, PowerPC에서 x86으로 갈아탄 것은 워낙 여파가 너무 큰 변화이기 때문에 제작사인 애플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호환 레이어를 제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CPU 에뮬레이터인 '로제타'를 만들고, 그리고 한 프로그램 바이너리에 아예 x86 코드와 PowerPC 기계어가 같이 들어있는 Universal binary라는 포맷도 제정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 때문에 Snow Leopard던가 Lion이던가 버전부터는 PowerPC 지원은 완전히 끊겼다. 그리고 Universal binary는 PowerPC/x86이 아니라 같은 x86 계열 안에서 32비트와 64비트 코드를 동시에 내장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앞으로는 ARM과 x86(-64) 사이의 동시 지원이 필요해질 듯.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옛날에 MS가 윈도우 NT 시절에 제정한 Portable Executable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시에 윈도우 NT는 x86, PowerPC 등 다양한 CPU를 target으로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기계어 코드는 공유를 못 하더라도 동일한 헤더로 실행 파일 바이너리들을 식별하고 관리 가능하게 할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정작 PE는 한 바이너리에 다양한 아키텍처의 기계어 코드를 한꺼번에 담는 건 지원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지금이야 PC의 역량도 충분히 매우 발전하여, 매킨토시를 사실상 다 따라잡은 지가 오래이다. (그런 비주얼 쪽의 발전을 주도한 건 다 게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기계어까지 가상 바이트코드로 대체하려는 발칙한 시도가 가능해졌을 정도이니 컴퓨터가 얼마나 성능이 좋아진 셈인가?

그랬는데, 지금 나는 그 시절의 매킨토시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은 매킨토시 노트북 PC를 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다니며 쓰고 있고, 사실 그 기계로 맥OS보다 윈도우를 여전히 훨씬 더 많이 쓰고 지낸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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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간지 사과 무늬...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2/08/24 19:37 2012/08/2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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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6월 30일엔 수인선 복선 전철 1차 구간이 개통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는 서울 수도권에서의 첫 경전철인 의정부 경전철이 개통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시기인 6월 27일에는 철덕들이 기릴 만한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이 또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딱 한 군데 존재하던 영동선 스위치백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문제의 장소는 태백선과 영동선이 합류하는 강원도 태백시와 삼척시 사이의 지점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기 바란다. (바탕 그림의 출처: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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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산 역 이북으로 올라가는 영동선은 험준한 산을 오르느라 몹시 고달프다.
자, 무엇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이번에 새로 개통한 노선은 연화산을 빙 도는 연보라색의 둥근 똬리굴(1)과 한 치의 곡선도 없이 북쪽으로 정면돌파하는 분홍색 선(2)이다. 이것이 기존의 초록색 선과 파란색 선을 대체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가까이 전에는 영동선에 인클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철덕이라면 알 것이다. 거기는 철길이긴 하지만 경사가 지나치게 급해서 열차가 자기 힘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가 아니라, “레일을 깔아 놓았는데 왜 달리지를 못하니?”였다.
그래서 이 구간만 기관차와 객차를 한 량씩 크레인으로 끌어당기고, 승객들은 내려서 옆에서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크레인의 힘이 부족해서 승객이 내려야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객차에 승객과 짐이 꽉 차 있어 봤자 기관차 한 량보다 더 무거울 리는 없잖은가.
승객들을 부득이 다 하차시킨 것은 그냥 안전 문제 때문이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들이 뒤에서 같이 객차를 밀어야 했던 건 더욱 아니다.

자, 그 인클라인이 있던 곳이 바로 지금은 폐역하고 없는 통리 역과 심포리 역 사이였고, 지도에서는 대략 '빨간색 선'에 해당한다. 이 1km 남짓 되는 인클라인을 8배가 넘는 거리와 그 대신 1/8 이하의 경사로 우회 대체시킨 것이 옆의 초록색 선이다.

그 뒤 그 이름도 유명한 스위치백은 N자 모양의 파란색 선이다. 초록색 선 정도의 회전 반경을 낼 공간마저 부족했던 관계로 부득이 열차를 정지시키고 후진을 하게 만든 것이다.

스위치백은 관광객에게는 흥미로운 체험 수단이지만 원시적이고 운전하기 까다로우며 열차의 원활한 운행에는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게다가 구불구불한 기존 초록색-파란색 선로는 지반도 그리 좋지 않아서 위험했다고 하니,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대체할 깔끔한 선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지대인 연화산 기슭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언덕을 오르는 대체 똬리굴이 개통했다. 평지가 아니라 터널이다. 똬리굴 자체는 우리나라에 이미 중앙선을 비롯해 몇 군데 있지만 이번에 개통한 건 국내 최대 규모이다. 이 터널의 이름은 '솔안 터널'이고, 터널 자체는 이미 2006년에 관통식까지 끝나고 완공되었다.

솔안 터널은 스위치백뿐만 아니라 과거의 인클라인 대체 우회 선로까지 훌륭히 대체했으며, 전체 거리는 기존의 우회 선로보다 더 단축시키고 열차의 운행 시간도 10분이 넘게 더욱 단축시켰다.
어떤 철도의 선형이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급격하게 바뀌고 지도까지 덩달아 바뀌는 일은 앞으로도 매우 드물 것이기 때문에 이는 국내 철도사에 길이 남을 큰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재래식 스위치백 선로의 폐선을 며칠 앞두고 코레일에서는 평소에는 정차하지 않던 스위치백 구간의 간이역에도 영동선 여객 열차를 정차시켜 줬었다. 거기서는 당연히 철덕들의 향연이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좀 옛날 소식이긴 하다만, 지난 6월 초엔 웬 KTX 산천 한 편성이 강릉으로 디젤 기관차의 견인을 받아 끌려가서 스위치백까지 넘는 사상 초유의 이벤트가 벌어졌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도 열리는데 앞으로는 강원도에도 고속신선이 깔리고 고속철이 들어갈 거라는 홍보 행사를 위해 현역 고속철 한 편성이 얼굴마담 자격으로 끌려간 듯하다.

발상 자체는 좀 병맛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KTX 산천이 강원도에 들어와서 스위치백 고개를 넘는다니, 게다가 한 달 남짓 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그 스위치백을 말이다. 이 소식은 전국의, 아니 듣자하니 심지어 일본의 일부 철덕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이 KTX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철덕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자가용을 굴리는 철덕은 아예 도로를 나란히 달리면서 열차를 따라가며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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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비록 죄악도 있으나 일말의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다. 비록 본인은 교회크리와 논문크리 때문에 그 당시에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응원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22 08:46 2012/08/2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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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 언어가 제공하는 기본 라이브러리에는 단순히 자주 쓰이는 자료 구조나 알고리즘 외에도, 운영체제에다 요청을 해야 지원받을 수 있는 기능이 일부 있다. 메모리를 할당하거나 파일을 읽고 쓰는 작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C/C++ 라이브러리라 해도 그런 기능은 궁극적으로 Windows API 같은 저수준 API를 호출함으로써 제공하는 셈이다.

그러니 프로그래머로서는 굳이 이식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는 코드가 아니라면, 언어가 제공하는 API보다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API를 직통으로 쓰는 게 성능면에서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윈도우 API에 있는 ReadFile/WriteFile과, C 라이브러리에 있는 fread와 fwrite를 생각해 보자.
C 라이브러리의 소스를 보신 분은 있겠지만, 일례로 fwrite는 내부적으로 _write 함수를 호출하는 형태이고, 두 함수만 해도 소스 코드가 수백 줄에 달한다. 뭔가 추상화 계층을 거치는 게 있고 복잡하다. 그러면서 _write 함수의 한쪽 구석에 결국은 WriteFile 함수를 호출하는 부분이 있다. fwrie가 WriteFile 직통보다 빠를래야 빠를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윈도우 환경에서 프로그래밍을 오래 해 본 분은 경험적으로 아시겠지만, 몇 바이트짜리 소량의 I/O를 수백, 수천 번씩 반복해서 시켜 보면 fread/fwrite가 ReadFile/WriteFile보다 훨씬 더 빠르게 수행된다.
그렇다. C 함수는 내부적으로 버퍼링? 캐싱?을 해서 소량의 I/O는 뭉쳤다가 몰아서 한꺼번에 하는 반면, 운영체제 API는 곧이곧대로 매번 오버헤드를 감수하면서 I/O를 직통으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운영체제가 자체적으로 디스크 캐싱을 다 하는 게 대세이지만, C 함수는 더 상위 계층에서도 캐싱을 하는 걸로 보인다. 이게 성능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난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서 1년 전쯤에 공개된 지난 6.2 버전의 README를 보면, 편집기의 파일 저장 및 변환기의 변환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고 적혀 있다. 이것의 비결이 바로 저 특성을 이용해서 파일 I/O 속도를 향상시킨 것이었다.

메모리 할당도 마찬가지이다.
운영체제는 프로세스마다 heap이라는 가상 메모리를 둬서 프로그램이 다수의 작은 메모리 덩어리를 동적으로 요청할 때 빨리 빨리 반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연결 리스트나 트리 같은 자료구조는 메모리 할당이 잽싸게 안 되면 성능이 크게 떨어질 테니 말이다.
(이때 heap은 자료 구조 heap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개념이므로 혼동하지 말 것.) 그래서 윈도우 운영체제에서 C 라이브러리의 malloc 계열 함수는 HeapAlloc이라는 API 함수를 호출하는 상위 계층이다.

내 경험상으로는 요즘의 NT 커널 윈도우는 HeapAlloc와 malloc, 그리고 HeapFree와 free가 성능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윈도우 9x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윈도우 9x에서는 이 함수는 진짜로 작은 메모리 블록에만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걸로 수 MB에 달하는 메모리를 한꺼번에 여러 번 할당하면 성능이 크게 떨어지고 프로그램이 느려짐. 그 경우엔 다른 메모리 할당 함수를 쓰기 바람.”이라는 경고문이 MSDN에 명시되어 있었다.

내부적으로 그 함수가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테스트 해 보니 진짜 그랬다. 9x에서는 프로그램이 뻗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저히 견딜 수 없이 느려졌다.
이때에도 윈도우 API가 아닌 C 라이브러리의 malloc 함수는 랙 없이 잘 동작했다. 대용량 메모리 할당 요청이 왔을 때 가상 메모리 주소를 다시 잡는 등 대비가 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원론적으로야 추상화 계층이 있는 언어 API보다는 운영체제 API 직통이 더 빠를 수밖에 없는 게 맞다. 사실, Windows API로도 모자라서 NTDLL처럼 아예 문서화되어 있지도 않은 곳에 있는 native API를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이식성까지 희생하면서 굳이 직통 API를 쓰고자 한다면,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그 API의 특성을 잘 알고 쓰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C++ 라이브러리야 객체지향 구현을 위해서 bloat되는 게 불가피하다고 쳐도, 그보다는 더 단순한 C 라이브러리의 추상화 계층은 그저 불필요한 잉여밖에 없는 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20 08:25 2012/08/2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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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전에 교통수단의 동력 메커니즘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듯, 자동차는 내연기관으로 피스톤을 움직이고 그 힘으로 바퀴를 굴린다. 차체는 지면과의 구름 마찰력을 이용해서 나아간다. 엔진이 차체의 하중(과 그로 인한 정지 마찰력)을 직접 상대하는 부담을 덜려면 변속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가솔린 엔진과 디젤 엔진이 모두 쓰인다.

비행기는 제트엔진으로 움직인다. 연료를 공기와 혼합시킨 후 압축· 폭발시키고 내뿜어서 그 반동으로 나아간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가스 폭발 사고 하나만 나도 주변이 엄청난 파괴력에 얼마나 박살이 나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힘을 제어하여 자동차와 비행기를 굴리는 걸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단, 로켓은 아래로 내뿜어서 그 추력 자체로 위로 뜨는 반면, 여타 항공기는 뒤로 내뿜어서 전진만 하고 하늘로 뜨는 건 날개의 양력을 이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항공기의 엔진은 당연한 말이지만 자동차 엔진보다 연료 소모가 많고 후폭풍과 소음도 막대하다. 하지만 결국 엔진이 밀어내는 건 공기일 뿐이기 때문에, 항공기의 엔진은 출력만 높으면 되지 자동차와는 달리 특별히 높은 토크나 동력비 변환 같은 걸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륙할 때가 비행기에 특별히 힘이 많이 필요하며 순항 중일 때보다 연료가 훨씬 더 많이 소모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릴 때 파일럿이 무슨 1단, 2단 변속을 한다거나 비행기 엔진음이 단계별로 오르내린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

항공기의 엔진에 경유-중유 같은 디젤 연료가 쓰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공유는 휘발유와 등유 사이의 등급에 속하며, 액체 연료 로켓에 들어가는 연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단순히 뭔가를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연료를 폭발시킨 배기가스 자체를 내뿜어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만은 여타 교통수단과는 달리 '전기 동력화'를 전혀 할 수 없다. (배는 전력 공급 문제 때문에 기름으로 달리지만, 그래도 아예 원자로를 내장하고 전기로 움직이는 원자력 잠수함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배가 나아가는 원리를 자동차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 좀 특수한 상황인 것 같다.
무거운 바닷물 속에서 거대한 스크루를 회전시켜서 추진력을 만들려면 배의 엔진에는 역시 높은 회전수보다는 낮은 회전수에 높은 토크가 필요할 것이고, 이런 상황에는 디젤 엔진이 매우 적합하다. 유원지 가서 보트에서 노를 젓거나 페달 밟아서 오리배라도 몰아 본 분은 아시겠지만, 물에서 배를 움직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러니 배의 엔진은 자동차 엔진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배에 철도처럼 디젤-전기 기관이 쓰이기도 하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다만, 배는 자동차와는 역학적 여건이 다른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구름 마찰력에 의해 나아가는 게 아니며(스크루는 바퀴가 아니다!), 엔진에 배의 하중이 그대로 걸리는 형태가 아니다. 무게를 직접 받는다면 최하 수백~수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배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배는 구동축이 수중에 있기 때문에 공기보다야 엔진에 기본적으로 걸리는 부담이 훨씬 더 크겠지만, 갓 출발할 때이든 순항 중일 때이든 그 부담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동력비 변환 외에 자동차 같은 다이나믹한 변속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중에 배를 탈 일이 있으면 엔진 소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좀 더 주의 깊게 들어 봐야겠다.

자동차도 제트 엔진을 장착한 초음속 자동차가 사막에서 시운전을 하는데 배에도 굳이 내연기관이 아니라 제트엔진을 장착해서 가게 할 수도 있다. 어차피 망망대해에서는 뒤로 공기를 뿜으며 후폭풍을 일으켜도 위험할 게 없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이 경우 배는 무척 빨리 움직일 수는 있지만 연비도 크게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다. 군함 중에는 경제성과 기동성을 겸비하기 위해 내연기관과 제트 엔진이 모두 달린 배가 있다고 한다.

끝으로, 배가 제동은 어떻게 하겠는지를 생각해 보자. 자동차처럼 브레이크를 밟아서 구동축만 붙잡고 있는다고 서는 게 아니며, 주변은 온통 물뿐인데 땅을 붙잡아서 마찰을 일으켜서 설 수도 없다.
배가 제동을 걸려면 정말 엔진의 동력을 뒤로 향하게 하는 역추진을 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초대형 선박은 그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 때문에 속도를 바꾸기가 대형 트레일러나 열차보다도 훨씬 더 힘들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다음은 관련 추가 잡설들이다.

1. 대형 선박은 자동차처럼 키 꽂고 START만 돌린다고 해서 바로 시동이 걸리는 게 아니며, 시동 걸어서 초기화하는 데만 30분~1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무슨 예열 과정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엔진이 얼마나 거대하면 컴퓨터 운영체제의 부팅도 아니고 기동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릴 수 있을까?
참고로 디젤 기관차의 시동을 거는 장면은 류 기윤 님 같은 철덕 기관사가 올린 UCC를 통해 본인은 접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평소에 듣을 수 없는 웽~ 소리가 난다.

2. 전세계의 항구들은 주변 지형과 시설 구조가 완전 제각각이다. 그에 반해 전세계를 누비는 배들은 덩치가 몹시 크고 가감속이 더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배가 항구의 원하는 위치에 제대로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일은 매우 몹시 중요하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도선사라고 한다.
교통덕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도선사는 교통· 운수업에서는 비행기 조종사에 필적할 정도로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종사자의 수도 적고 고령이며, 그 업종에서는 가히 최강의 연봉을 받는다. 게다가 도선사는 영어로는 조종사와 동일한 파일럿(pilot)이라고 불린다.

3. 군사 목적으로 수륙 양용차라는 게 있다. 그리고 철도계에서는 도로와 레일 위를 동시에 달릴 수 있는 특수 자동차도 있다. 흠, 이들을 통합하면 물과 육지는 전천후로 달릴 수 있는 교통수단이 나올 수 있을 듯.
다만, 비행기와의 통합은 현실적으로 힘들 것이다. 엔진 구조와 사용 연료가 근본적으로 다르고 날개를 접었다 꺼내는 설비도 필요할 테고... 굳이 무리해서 만든다고 해도 고정익보다는 헬리콥터 같은 회전익 겸용차가 더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4. 자전거를 타고 평지에서 정지 상태에서 처음으로 전진할 때는, 페달을 밟는 것보다 땅을 발로 뒤로 차는 게 힘이 덜 들 때가 있다. 그렇게 한 다음에는 페달 밟는 부담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배가 물을 박차고 나아가는 것에도 이와 비슷한 차원의 역학이 적용되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18 08:18 2012/08/1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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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는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닌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윤 동주의 <십자가> 만만찮게 상당한 영적 통찰력이 엿보이는 것 같다.
시의 각 행에 내가 검색해 낸 관련 성구를 덧붙여 보면 이렇다.

*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갈 5:13, 벧전 2:16)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출 21:5-6, 엡 6:5)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몬 21)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출 20:3-6)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 6:24, 눅 16:13)

(성구들 직접 다 찾아 보시기 바란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특히 KJV라는 당당한 최종 권위까지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저 '당신'이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KJV 독립 침례 교회들은 바른 지식이 없이 성도들에게 열심과 헌신만 강요하면서 기형적으로 성장한 기성 교회들의 부작용과 폐단을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도들을 너무 닥달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자율'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그 자유를 무질서와 방종, 영적 태만을 합리화하는 데 써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록 사실이 아니길 최대한 기대해 보지만 이는 사역자와 여타 성도들을 힘 빠지게 하고 우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십일조가 신약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는 가르침이 성도가 헌금을 안 해도 된다는 가르침으로 와전된다거나,
목사고 교사고 다 필요 없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교리가 나온다거나 말이다.

너 혼자 구원받고 너 혼자 성경이고 교리고 다 알긴 하지만, 그게 남에게 끼칠 간증의 영향력을 상실했다면 당신은 영적 전투에서 이미 마귀에게 진 것이다.
구원이 이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화로 이어져야 하고 그게 자연스럽듯, 바른 성경에 대한 지식은 바른 교회를 세우고 유지시키는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본인은 이런 영적 진리를 나누고자 이 주제와 관련하여 문득 떠오른 시를 인용했을 뿐이다.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다같이 화합하는 게 좋다는 식의 주장을 할 의도는 전혀 없으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끝으로, 시의 저자인 만해 한 용운(1879-1944)에 대해 살펴볼 점이 있다. 그는 시는 저렇게 '해요체' 위주의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문체로 썼지만, 평소 언행과 성격은 그와 정반대로 독설과 기행이 가득한 열혈 과격파였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3· 1 운동 후 투옥된 민족 대표 33인 중 일부가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을까봐 통곡하고 두려워하자 그는 격분하여 감방 안의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는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 때려치워라!” 하고 호통을 쳤다.

또한 전국의 주지 스님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할 때는 교계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똥이다. 그리고 똥보다 더 더러운 건 썩어 가는 시체이다. 그런데 시체보다도 더 더러운 것은 바로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너희 중놈들의 심보이다!”라고 일갈하고 단상을 내려온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한 용운이 마 23:27-28과 렘 17:9를 알았는지는 난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격은 그가 비인격적이고 몰상식해서가 아니라 진짜 국가와 민족과 나름 자기 종교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표출된 과격일 것이다. 또한 딴 사람도 아니고 민족 대표자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비실비실하니까 저렇게 강한 책망을 했고, 일반 민초들이 아니라 주지 스님들 앞에서 당당히 쓴소리를 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야 “뱀들아, 독사의 세대여!”라고 한 치의 두려움 없이 호통을 치셨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오히려 용서하고 다독여 주셨다. 그리고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고 애원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을 통해 믿음을 북돋워 주셨다.
정반대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같은 과격한 책망은(마 17:17) 받은 게 충분한데도 아직 성숙을 못 해서 정말로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 제자들에게나 하셨다!

이렇게 온유와 과격, 단호함을 잘 조절하여 때에 적절한 언행이 나오게끔 나의 행실도 돌아봐야 하겠다는 걸 <복종>이라는 시와 저자를 생각해 보면서 느끼게 되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15 19:17 2012/08/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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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5월경에 방영된 <현장 르포 제3지대> -- 지하철에 미친 아이들 편

현재까지 공중파 방송에서 철덕들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 가장 흥미진진하게 잘 보여준 TV 프로가 아닌가 싶다. 철덕들의 열정과 낭만이 느껴지더라. 난 무척 감명깊게 봤다!
이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노랑-초록 도색의 코레일 전동차와, 리모델링 전의 용산 역 승강장의 모습이 덤으로 인상적이다.

역시 겨우 나 정도의 철덕력으로는 저런 사람들에게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저 TV에 나온 이 재원 씨는 MEIS의 운영자이고 지하철역에서 공익 요원으로 병역을 마친 뒤, 현재는 어엿한 서울 도시철도 공사 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국내 유명 철덕이신 '영동선 511' 운영자분도 도철 입사..;;)

“전동차 출발 구동음을 녹음해서 차량별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어요. 차량 제작사마다 소리가 제각각이거든요.” (38:50 ~ 39:40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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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철도 덕후들이 한국 사람보다 한국 철도 차량에 대해 이미 더 잘 알고 더 면밀히 분석해서 일본어로 책을 만들어 놨다. 게다가 그런 책이 일본에서 아주 잘 팔린다고.. “이건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1:10 ~ 41:50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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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역 - 한대앞 - 수인선 선로 답사도 난 2005년에 완전히 똑같이 한 적이 있으니 완전 공감이다. 물론 저 TV 프로를 모르던 상태에서.
상록수 역 어원을 찾다가 최 용신 선생의 일대기 공부를 한 것까지도 똑같다. (42:50 ~ 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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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2/08/11 08:40 2012/08/1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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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오래 써 본 분들은 아미 아시겠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두벌식 글자판의 자음 글쇠는 내부적으로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표현된다.

T<=1 ? 초성: 종성

그래서 ㄱ을 예로 들면,

T<=1 ? H2|G_: H2|_G

그 반면, 세벌식 글쇠는 간단하게 해당 자모 하나로 끝이다.

H3|G_ (초성 ㄱ) 아니면
H3|_G (종성 ㄱ)

H3은 세벌식 자모를, 그리고 H2는 두벌식 자모를 뜻하는 날개셋문자 접두사이다. G는 ㄱ을 뜻한다. 다만 알파벳 한 글자만 있으면 변수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뒤에 _가 추가되었다.

종성은 앞에 _를 추가하는 것으로 초성 명칭과 구분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명칭의 길이가 두 글자를 넘어섰으므로 뒤에 별도로 또 _를 추가하지는 않는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헤비 유저라면 이 정도 수식은 이미 다 익숙할 것이다.

두벌식에서 번거롭게 수식이 추가된 이유는 한 글쇠가 상황에 따라 초성 역할도 하고 종성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토마타에서 1번 상태는 통상 초성을 첫 입력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ㄱ을 초성으로 내보내고, 중성이나 종성이 입력된 뒤부터는 종성으로 내보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 두벌식 타자기에 존재하던 ‘받침’ 글쇠를 이 수식이 담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세벌식이 아닌 두벌식 자모는 종성을 처리할 때 세벌식 자모에 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추가 작업이 행해진다. 두벌식 글자판에서 한글이 입력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자명한 것들이다.

첫째, 두벌식 종성 다음에 두벌식 중성이 이어지면, 잘 알다시피 도깨비불 현상이 일어난다. 직전에 입력되었던 마지막 종성 한 타가 다음 글자의 ‘초성’이 되고, 그 글자와 중성이 한데 결합한다.

둘째, 두벌식 종성이 계속 입력되었는데 기존 종성과 새 종성이 결합이 불가능하면 새 종성은 다음 글자의 종성이 아니라 ‘초성’으로 넘어간다.


두벌식을 세벌식에다가 추가적인 처리를 덤으로 하는 관점에서 한글 입력기를 설계하면 대체로 이런 식의 구현체가 나온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그렇고 아래아한글도 그렇고, 심지어 맥 OS의 한글 입력기도 그러하다.

특히 맥 OS는 두벌식과 세벌식의 낱자 결합 규칙이 완전히 동일하다. 초성은 쌍자음을 원시 자음의 연타로 입력할 수 있는 반면 종성(ㄲ, ㅆ)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둘 모두 똑같다. 초성의 결합 규칙과 종성의 결합 규칙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며, 두벌식에서 다음 음절로 이어진 첫 자음도 응당 초성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초성’이 아닌 ‘종성’ 관점의 두벌식 한글 입력 방식도 생각할 수 있으며, 사실 이것이 초성과 종성의 구분이 없는 진정한 두벌식다운 두벌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이 반영된 구현체는 마이크로소프트 Windows의 한글 IME가 유일하다.

MS IME의 두벌식은 초성과 종성의 구분이 없고 자음 입력은 어떤 경우에든 종성 문맥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음 없이 자음을 바로 입력할 때도 ㄳ, ㄻ 같은 겹자음을 만들 수 있다. 심지어 그 상태에서 ‘ㄱ (ㅏ) 가 (bksp) ㄱ (ㅅ) ㄳ (ㅗ) ㄱ소’ 같은 자유로운 입력도 가능하다.

이것은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서는 지금까지 가능하지 않았다. 수식 없이 H2|_G 같은 기존 두벌식을 종성만 배당하면, 모음 없이 당장 겹자음을 만드는 것을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똑같게는 못 한다. 계속해서 다음 음절로 입력되는 자음은 어차피 종성이 아니라 초성이 되어 버리고, 종성의 낱자 결합 규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두벌식 종성으로 자음, 그 다음으로 모음을 입력한 뒤 Bksp를 눌러 보면, 첫 타에 해당하는 자음은 종성이 아니라 초성으로 바뀌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내부적으로 두벌식 종성과 두벌식 중성 사이에는 도깨비불 현상이 한번 일어나서 종성이 초성으로 넘어간 걸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종성 위주 두벌식을 도입하기 위해, 본인은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어느 부분을 개량하면 좋을지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 기존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어느 구조체를 확장할까, 어느 API에다 옵션 플래그를 추가할까, 아예 날개셋문자에다가 새로운 타입을 추가할까..?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정말 내가 엔지니어로서 현역이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API 호환성을 깨뜨리지 않고 가장 후폭풍이 적은 방법을 며칠간 고민하던 중, 결국은 날개셋문자에다 타입을 추가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래서 H2에 이어 일명 H2J라는 타입이 도입되었다. 일명 ‘두벌식 종성’ 타입. <날개셋> 한글 입력기 다음 버전인 6.7에서 바로 볼 수 있을 예정이다.

현재 한글 입력과 관련된 날개셋문자 타입은 H3과 H2 말고도 H3의 자매격에 해당하는 다중 자모가 둘 더 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기존 H3만으로도 ‘ㅏ+종성ㄴ’ 같은 다중 자모를 배당할 수 있다. 초성 ㄱ을 입력 중에 저걸 누르면 곧바로 ‘간’이 되고, ‘오’를 입력하던 중에 저걸 누르면 곧바로 ‘완’이 된다. 다중 자모는 동시치기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므로 그런 것과는 절대로 혼동하지 말라.

그런데 디폴트인 H3은 ‘초-중-종’을 순서대로 적용하는 반면, 여타 다중 자모는 ‘중-종’만 적용 후 음절을 끊고 다음 글자 초성을 또 입력시키거나 ‘종’만 적용 후 ‘초-중’은 다음 글자로 넘긴다. 세벌식은 음절 경계와 관련된 변칙적인 처리가 없으니 이런 다중 자모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반면, 두벌식은 다중 자모까지는 갈 수 없고 음절 경계 처리에만 치중한 파생 타입만을 생각할 수 있는 셈이다.

‘두벌식 종성’ 타입으로 입력된 종성은 도깨비불 현상이나 결합 실패로 인해 다음 글자로 넘어갈 때 초성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종성이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중성을 입력하더라도 종성은 초성으로 바뀌지 않고 종성 상태로 그대로 보존된다.

이 타입을 쓰면 두벌식으로도 자음을 배당할 때, 골치 아픈 수식을 쓸 필요 없이 언제나 마치 세벌식처럼 H2J|_G라고 언제나 종성 형태만 넘겨 주면 끝이다. 다만, <날개셋> 편집기처럼 초-중-종성의 형태를 완벽하게 보존하는 한글 글꼴 체계에서는 처음에 초성을 입력했는데 초성이 아니라 종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마치 도깨비불 현상만큼이나 보기가 어색할 것이다.

이 어색함은 표준 한글 자모를 호환용 한글 자모로 치환해서 표시해야 덜해진다. 즉, 애초에 초성과 종성의 구분이 없는 글자판은 역시나 초성과 종성의 구분이 없는 글자 코드와 글꼴을 동반해야 자연스럽다는 뜻. 실제로는 한글의 구성 원리를 어기고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처리가 추가로 행해지는 셈이다. 오버헤드는 ‘세벌식 < 기존 세벌식 관점에서 추가로 구현된 두벌식 < 새로 도입된 종성 지향 두벌식’의 순으로 많아진다.

H2J 타입을 쓰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도 MS IME의 두벌식과 완전히 동일하게 동작하는 입력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 사실 내 프로그램은 세벌식 자판과 관련된 응용 기능들은 거의 1.x 시절부터 제공해 온 반면, 두벌식을 두벌식답게 지원하는 편의 기능들은 훨씬 나중에 도입되어 왔다. 특수 도깨비불 규칙(3.9부터)이라든가, 초-종성 공유 낱자 결합 규칙(6.0)에 이어, 종성 지향 두벌식(6.7)의 순이다.

알면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인데 이 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분이 얼마나 되려나 모르겠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올해로 개발 12주년이고 무려 7.0을 바라보는 시점인데 아직도 한글 입력의 본질과 관련된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고 향상된 게 있다는 게 내게는 무척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08 08:20 2012/08/0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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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K의 정체성

한국

  • 반도에 자리잡은 유일한 분단 국가. 징병제. 분단되지 않고 남북을 합쳐도 인구나 면적이 CJK 중 가장 작은데 하물며 지금은.. 안습
  • 한글! (한자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만 이례적으로 한자는 거의 안 쓰는 아주 특별한 국가)
  • 미국과 비슷한 대통령 직선제
  • 성탄절이 유일하게 공휴일임. 넘사벽급의 교회 인프라
  • 과학 분야의 노벨 상 수상자가 유일하게 전무-_-함

중국

  • 압도적인 영토 면적과 인구. 대륙의 기상-_-
  • (명목상의) 공산당
  • 고립어. 한국어나 일본어와는 달리 S+V+O형 언어
  • 국기의 모양도 한국-일본보다는 이질감이 더 큼
  • 훨씬 더 강경한 마약 단속. 많은 사형 집행

일본

  • 섬 나라. 한국보다 남쪽에 있지만, 북쪽 끝도 북한을 넘어 러시아와 만날 정도로 영토가 은근히 넓다.
  • 유일하게 좌측통행, 협궤, 그리고 110V 전압 (근대화· 산업화를 일찍 한 흔적이다. 얘들도 아주 장기적으로 승압을 찔끔찔끔 하고 있다고는 함)
  • 전범 국가. 정규군 대신 자위대
  •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축에 드는 문자 체계. 세로쓰기 (하지만 일본에서도 젊은 세대들은 점점 가로쓰기에 더 익숙해지고 있다고 함)
  • 영국과 비슷한 입헌 군주제

결국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건 사회주의 체계가 아닌 것과 언어 구조요,
한국과 중국이 비슷한 건 차량 통행 방향이나 전압 같은 산업 인프라 및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며,
일본과 중국이 비슷한 건 한자 의존도 정도로 요약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06 08:16 2012/08/0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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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시나 산소 / 문과 출신인 나도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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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말, 디씨를 통째로 빵터지게 만들었던 유럽연합 님의 희대의 말실수 사건. 잠이 좀 덜 깬 채로 댓글을 달았는가 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닼ㅋㅋㅋㅋㅋㅋ.
지금은 검색을 해 보면 저 원본 스샷보다도, H2O가 산소라는 걸 풍자하는 대사가 담긴 온갖 만화 패러디 그림들이 더 많이 나돌고 있다.

요즘은 최악의 올림픽 오심 병크 때문에 H2O도 모자라서 1초의 정의마저 바뀌게 생긴 듯. 화학에 이어 물리까지

2. 안드로메다 행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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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경에 서울 메트로 소속 4호선 모 전동차에서 직원이 LED 전광판을 테스트하느라, 승객이 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순간 저런 문구를 집어넣어서 승객들을 뒤집어 놓았다.
안드로메다는 어느 샌가 사람들이 개념을 냅다 보내 버리는 안습한 장소...;;로 전락해 있다.

3. 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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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도 아니고, 멈춤도 아니고, STOP은 더욱 아니고, 북한에서는 교통 표지판에 저렇게 써져 있다고 한다..;;

비문도 아니고 의미 전달에 아무 결격사유가 없는 표현이 남한에서는 황당함과 웃음을 선사하는 이유는 언어학에서는 격식의 충돌 때문으로 분석한다. 북한이 평소에도 자기 특유의 우악스럽고 과격한 언어 활용을 공식 매체에서 즐겨 하기 때문에, 이를 풍자하여 “천하의 개쌍놈들” 합성 짤방이 나돌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다.

4.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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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어지간히도 슬프고 화가 났던가 보다. 진정한 적개심(...)을 느낄 수 있는 글인데 읽다 보면 웬지 웃긴다. 이것도 이제는 왕년의 “나일록 방석 갓다노라. 안 그러면 방법한다. 방법하면 손발리 오그라진다” 급의 전설이 되어 가는 중. 그나저나 크리스천은 모름지기 “육신을 죽입시다 육신은 나의 원수”를 외쳐야 할 것 같다.

5. 어둠의 다크에서 죽음의 데스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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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단어 암송시도 아니고...
왕년에 이 외수 씨를 경악하게 만든 전설의 시라고 한다.

가만히 읽어 보면, 성경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의 아홉째 재앙인 어둠 재앙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지? -_-;;
그때 이집트 사람들은 진짜 어둠의 다크에서 죽음의 데스를 느끼며 이 재앙이 길이길이 가슴속의 하트에 기억될 리멤버가 되었지 싶다. 뭐, 서풍은 메뚜기 재앙을 끝낼 때 불었던 바람이긴 하지만.

지금도 “어둠의 다크”, “개미를 죽입시다”, “병시나 산소” 등은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자동 완성까지 되는 유명한 문구이며, 각종 웹툰에서 패러디까지 되고 있다.

6. 김 성모 만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이 작성한 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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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디 가입할 때 약관을 도통 안 읽는 것만큼이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도 성경에 관심이 없으며 안 읽는다. (어쩌면 자기네 교회 헌법에도)

그래서 수백여 군데의 사이트에 저런 '빅장을 구사하고 뼈와 살이 분리되는' 약관이 한때 복붙으로 나돌았으며,
그런 것처럼 열세 군데가 삭제되고 6만여 군데가 변개된 성경이 오히려 진짜 행세를 하면서 버젓이 나도는가 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03 08:24 2012/08/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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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제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로 가며,
제아무리 착한 사람, 불쌍한 사람, 의로운 사람, 법조인, 경찰, 검찰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흉악범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라 해도 예수 안 믿고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지옥에 간다.

그렇다.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착한 일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고 믿는 여타 종교 신자들이나, 자기는 지금까지 남보다 충분히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항변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뭐, 지금 내가 그것에 대한 시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거 아는가?
흉악범이 구원받으면 구원받은 흉악범이고, 사형수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은 사형수가 된다.
성경의 법칙대로라면 그들은 하늘로 가더라도 교수형은 당하고 간다. 이 땅에서 법이 규정해 놓은 죄값은 치르고 간다!

사형 제도는 지극히 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결혼 제도를 제정한 것만큼이나 사형 제도도 만드셨고,
육식을 허락하신 것만큼이나 세상 정부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걸 허락하셨다.
(창 9:6)
성경의 지론은 “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어기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이다. 아멘.

여기서 살인이란 흉계를 품고(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고의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요즘 말이 많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 사고는 성경으로 치면 출 21:29와 비슷한 맥락의 고의적인 살인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을 더럽히는 성 범죄도 마찬가지이다. 속도위반 결혼으로라도 수습을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면 성경에 따르면 한 치의 자비심 없이, 속죄 헌물도 안 통하고 무조건 사형이다.

다만, 고의성이 없는 과실치사는 성격이 다르며, 비록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형 정도까지는 아니다. 정당방위도 응당 인정하며, 면책의 범위가 오늘날 근대 국가의 법보다 관대한 편이다(출 22:2).

그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조직을 인정하고 공권력도 인정하는 성경의 특성상, 군인이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 역시 그런 살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병역 거부는 잘못된 행동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이 폭도들에게 발포하는 것이나, 사형 집행관이 교수대 스위치를 누르는 것도 성경적으로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그런 공무원은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목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롬 13:4)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흉악 범죄가 터질 때마다 국민들은 분노한다. 인터넷 뉴스 기사에는 피의자를 저주하면서 저런 놈은 이렇게 각을 떠서 죽여야 한다는 식으로 온갖 폭력적인 댓글이 달린다. 그리고 너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욕하면서, 신은 저런 놈 안 잡아 죽이고 뭐 하냐는 식의 댓글도 올라온다.

그 마음을 나도 이해하며 어느 정도는 공감도 한다. 비록 이런 네티즌들의 마음 상태도 건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겉으로 표출만 안 되었을 뿐이지 살인자 본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사형(死刑)이라는 필요악을 공의롭게 잘 집행해 줘야, 시민들이 분을 품고 보복 살인 내지 린치(私刑)를 할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사형 집행을 안 하면 다른 시민들이 실족하여 악한 마음에 빠지기 쉽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것도 불신자들이 하나님 자신보다도 더 자비로울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으며 기대도 안 하신다!

피해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형 집행 장면이 국영 방송으로 생방송 중계된다. 김 길태, 강 호순, 오 원춘 같은 주인공이 교수대에 오른다. TV에서는 근엄한 분위기 가운데에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다시 보여주고, 피해자 유족을 인터뷰하고 피의자의 마지막 유언을 공개적으로 받는다. 필요하다면 죄수들을 담당한 종교인 성직자의 인터뷰도 한다.
그 뒤 공개적으로 교수대가 작동하고, 잠시 후 법의관이 사형수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한다. 이 과정을 온 국민이 지켜보고, 사형 집행 장면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로 나돈다.

너무 과격한 상상인가?
난 이렇게까지 하는데 사람들이 죄와 벌과 죽음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게 될지, 모방 범죄가 또 생기고 사람들이 감히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왜 이렇게 시행을 안 하는지 궁금하다. 제아무리 인간말종 흉악범이라 해도, 무슨 독립 운동가의 심정으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닌 이상,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알고 죽음이 두려운 줄은 안다. 그래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어쩌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경우도 생긴다.

구약 율법 핑계를 대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의견이 아주 많다. 구약 율법 중에는 음식 규정이나 안식일 같은 것처럼 경륜의 차이로 인해 오늘날 전혀 무의미하고 적용되지 않는 제도나 규율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윤리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유효하고 최소한 그 의도를 되살려 시행했을 때 나쁠 게 없는 게 거의 대부분이다. 가령, 신약 시대라고 해서 짐승과 마음대로 수간해도 괜찮은 건 아니지 않은가? (출 22:19; 레 20:15)

또한 사형 제도는 구약 율법에만 얽매인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히려 성경 전체가 인간의 죄와 벌과 구원 계획에 대해 논하면서 사형 제도를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히 인정하는 뉘앙스에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가령, 롬 1:32) 그래서 오죽했으면 바울조차 행 25:11에서 자기가 죽을 죄를 지었으면 기꺼이 사형 당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자기 아들을 죽인 흉악범을 용서한 손 양원 목사 같은 유명한 사례가 있다. 그런 사람이 나오기 위해서라도 사형 제도가 있어야 한다. 법대로라면 죽어야 하는데 용서를 하고 탄원을 해서 목숨을 건졌으니 그게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당신도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라면, 나라의 법은 공의롭게 요구하고 나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에나 원수에게 그런 사랑을 개인적으로 실천해 보아라. 알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아예 나라의 법이 흉악 범죄자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니 오늘날 시국은 전 8:11처럼 되어 가고, 피해자 유족들은 가슴에 피멍이 든다.
오늘날은 정말로 가해자 인권만 있지 피해자 인권은 없다. 그냥 운이 나빠서 당한 것일 뿐이다. 이것만 생각하면 나는 도대체 민주화가 됐다는 요즘이, 옛날의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정권 시절보다 인권이 뭐가 좋아졌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결론을 내리겠다.
기독교 교리의 논리적인 성립을 위해서라도 사형 제도를 부정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신이 불신자나 기독교 안티이고 그저 인본주의 박애주의자여서 사형 제도를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당신은 지금 살인자 마귀에게 속아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엄한 형벌을 필요하게 만든 것도 죄이지만, 죄에 대한 벌을 공의롭게 집행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 역시 인간의 죄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해 보아라. 역사적으로 억울하게 사형 당하기로는 지금까지 크리스천들만치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린 집단이 또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사형 제도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성경에 입각한 바른 교리가 세상에 널리 퍼져서 영화 <밀양>에서처럼 “내가 용서를 안 한 가해자를 어떻게 신이 용서해?” 같은 시험에 드는 사람이 이 땅에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믿는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맹목적이고 몰상식·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지극히 건전하고 이치에 맞는 진리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7/31 19:27 2012/07/3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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