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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말에서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높임법이 잘못 적용된 비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에 말씀이 계셨느니라"(요 1:1)는 높임법이 아주 적절하게 쓰인 문장이다.
사실, '말씀'이나 '지옥' 같은 단어는 성경 용어로서 어쩌면 영어 단어보다도 잘 번역되고 잘 만들어진 단어이다. 성경 번역 같은 데서 영어에 비해 한국어의 어휘와 문법의 한계가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오로지 약점밖에 없는 건 또 아니다.

2. 여느 관광 여행이나 맛집 방문 같은 것이야 당연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며, 직접 가서 겪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글을 통한 간접 체험이 당대의 직접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더 낫다고 보증이 돼 있는 유일한 예외가 있다. 무엇일까? (힌트: 벧후 1:19, 요 20:29)

3. 세상의 다른 고전 문헌이나 골동품은 아무래도 제일 오래 된 필사본이 원문, original에 가장 근접해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나이가 깡패이다.
그러나 이 책만은 애초에 오래 된 필사본 같은 건 닳아 없어지고 남아 있질 않으며, 반대로 최근까지도 잡초처럼 많이 필사되어 읽히고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교차 검증된 집단이 진본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4. 세상의 다른 모든 텍스트들은 원어가 당연히 원저자의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고 가치가 가장 높다. 그래서 예전에 일본어 중역이던 텍스트가 나중에 직통 번역으로 재출간되고, 그 분야 전문가는 아예 원어를 공부해서 원문을 다시 구해다 읽는다.
그러나 이 책만은 번역본이 원어 원문에 꿀릴 게 없으며, 오히려 다른 n차 파생 번역본을 모두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 번역본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 무엇일까?

1과 2, 그리고 3만 해도 불신자의 통념을 한참 거스르며 상식을 벗어난 논리이다. 기독교는 원래 그런 종교이다.
그러나 반대로 1~3을 일단 믿는 사람이라면 4를 믿지 못할 이유는 추호도 없다고 여겨진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안 그러시는 분도 있지만, 그분의 양심과 믿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이것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1~9를 다 믿으면 10도 당연히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시나, 딱히 충분히 대안이 될 만한 논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싶은 게 있다.

아무리 상수도관에서 깨끗한 물이 만들어져도 가정의 수도관이 더러우면 최종 소비자는 더러운 물을 받을 수밖에 없다. 4는 앞의 다른 명제들을 성립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이 4에 대한 보충 설명 차원에서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 계층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원어
성경의 '원문'이 기록된 언어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다니엘서 같은 일부는 아람 어라 함), 신약은 그리스어(헬라· 희랍은 그리스와 동의어).
그럼 원어로 원문만 읽으면 끝이고 성경의 내용 전수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1) 오늘날 성경의 최초 자필 원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이 온전히 집대성돼 있지 않다. 즉, 이것들은 partial이다. 내용 자체가 변개된 필사본이 있긴 하지만, 변개되지 않은 계열의 필사본이라 해도 결국은 빠짐없이 모아서 짜깁는 과정이 필요하다.

(2)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이들 언어가 인지도와 중요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원어가 사어가 돼 있다.
여느 언어들이 그렇듯이 원어의 어휘 역시,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무슨 뜻인지 분별해 줄 수 있는 절대무오한 권위자 역시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도의 표적이 없는 것만큼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사전· 어휘집도 100%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니 원어 원문만 있다고 해서 장땡이 아닌 거다. 환상을 깨시라.

2. 영어
오늘날 원어 원문이 갖고 있는 위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원어(영어) 원문(KJV) 차원의 지위를 가진 절대기준이다. 솔까말 기독교는 논리로만 따지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있는 종교인데, 그 원천적인 권위가 무엇인지 정도는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께서 보장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그 체계 하에서 최소한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추지 않겠는가. 원어 원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교한 불신자 신학자들의 말장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원어가 불필요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성경의 이 구절에서 이 원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으면 KJV의 번역을 보면 된다. 요일 2:23 후반부가 원래 필사본에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면 KJV 구절을 보면 된다는 얘기다. 원어 원문조차도 KJV로 판단 가능하다. KJV는 단순히 가장 뛰어난 번역, 우수한 번역 차원이 아닌 것이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번역본 KJV에 하나님의 영감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판단은 여러분이.

KJV를 최종 권위로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신자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을 해 보시라. 기독교라면 저런 절대 기준이 상식적으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는 건전한 하나님이라면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 차별을 하지 않으시며, 그런 것쯤은 보장해 주셨을 것 같지 않은가?

지옥에 대해 경고를 하기 위해 굳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내서 증언시킬 필요가 없듯(눅 16:27-31),
원어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현대인들을 위해 굳이 그 시절의 원어 토박이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보내실 필요가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라고 책망했듯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읽은 사람은 이미 원어 성경을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관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언어의 관계는 성경의 여러 비유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3. 자국어
절대 기준인 영어 KJV를 바탕으로 건전한 교리관을 갖춘 양심적인 번역자가, KJV의 표현을 그대로(가령, '유월절' 대신 '이스터', '기뻐하라' 대신 '잘 있으라', 요일 5:6-7도 온전히 갖추고 등) 자국어로 일관성 있는 스타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성경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 전하고 신앙 서적을 만드는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이것은 "신들과 같이", "절대무오한"은 못 되더라도 노아나 욥이 "완전했던" 것과 같은 완성도를 갖췄다.

해당 자국어의 특성을 이용해서 번역을 아주 적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하나님, 말씀, 지옥 등), 어휘와 문법 체계의 특성상, 그리고 해당 언어권의 문화· 관습의 한계로 인해 KJV 특유의 도치나 중의성, 운율, 미묘한 문법 요소들을 다 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해당 언어나 번역자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성경 강사가 영어 KJV를 참고하여 보충 설명을 해 주면 된다. 마치 데나리온이라는 화폐 단위가 요즘 물가로 얼마 정도라고 얘기하듯이. 오늘날 영어의 지위를 생각하자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꺼내는 것보다야 상황이 훨씬 더 나아진 것이다.

(그럼 원어에서 영어로 번역될 때는 원어의 모든 뉘앙스가 고스란히 옮겨지는 게 가능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언어학적인 팩트 답변도 있고, 그것만으로 좀 확신이 안 서서 믿음의 영역으로 그냥 받아들이고 넘겨야 하는 면모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정도까지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만, 각 언어마다 최종 권위가 제각각 또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최종 권위라는 게 무슨 뜻인지 파악을 못 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단지 모든 언어적인 혼란을 일축하는 중심점에 영어 KJV가 있다는 것이 KJV 유일주의 신자의 믿음이다.

'영킹 유일주의자', '이중 영감론자' 등의 누명 내지 딱지에 전혀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그럼 그들이 미는 대안은 뭔데? '원어 원문 유일주의자'이건 '영어 숭배자'건 '자국어 만능주의자'이건, 어느 편에 서더라도 그에 대한 멸칭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국은 뭔가를 신념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마치 무신론도 유신론만큼이나 동일하게 신념이고 신앙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겠는가? 원어 원문은 앞서 말했듯이 실체가 없으며, 반대로 자국어 최종 권위 운운은 당장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영어 중심이 가장 현실성 있고 균형 잡혔으며, 실제로 KJV의 출간 이래로 지난 400여 년간 역사적인 증거와 열매도 넘치는 건전한 관점이다. 애초에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교리를 믿는 신자가, 한 성경 역본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와 일치하지 않는 역본은 틀렸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단언하건대 절대로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06 08:31 2015/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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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전에 한번 다윗과 미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 얘기를 작정하고 좀 늘어놓아 보겠다.

구약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이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에는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사사(재판관)라고 불리는 정치· 종교 지도자가 백성을 통치했다.
정치 삼권 중에서 입법과 행정이 빠진 사법이 부각되어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입법은 이미 모세의 율법이 있으니 더 건드릴 필요 없고 행정은 글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너희 인간들은 이미 있는 법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법의 집행만 하라는 뜻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절의 사사는 말 그대로 판관 포청천 같은 위상이었다. 다만, 본업인 재판만 한 게 아니라 때로는 전쟁을 지휘하고 민족을 외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혼자 블레셋 사람들을 다 때려잡은 삼손도 사사였으니) 하지만 호화로운 궁전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수많은 종과 상비군을 거느리면서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민족들의 왕과 비교했을 때 '가오'가 안 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마지막 사사 겸 첫 대언자는 '사무엘'이었다. 그의 시대 때 백성들은 드디어 자기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삼상 8:5).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도 이방 민족들처럼 절대권력 국왕 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보고 싶지, 하나님 특유의 '그때 그때 달라요' 식의 믿음 행사가 필요한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반역의 영으로 인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안 그래도 걸핏하면 전쟁에 외세 식민지인데 권력이 부족한 사사 통치 체계로는 나라의 앞날이 영 불안하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니"란 표현이 사사기에 도대체 몇 번 나오던가? 사무엘은 인생이 다 좋았는데 자녀 교육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런 요구를 듣고는 불쾌한 반응이었지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긴 하지" 차원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다. 애초에 율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왕정으로 전환할 때 왕이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기도 했다. "율법 말씀을 필사해서 부지런히 묵상해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해서 사치품인 동물 말을 너무 많이 장만하지 말라" 같은. 신명기 17장을 읽어 보면 참 절묘함이 느껴진다.

단, 하나님은 왕을 가져 본 적이 없던 백성에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 주셨다. 간지 넘치고 뽀대 나는 왕권을 유지시키는 원천은 전~~부 죄다 너희들의 노동력과 세금이라는 것을 말이다.
얘들은 안 그래도 율법에 따라 종교적으로 바쳐야 하는 헌물들이 장난이 아닌데,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세금 수탈까지 추가되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유지되는 동안 안식년은 사문이 되고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감당이 되니까.

그때 가서 너무 힘들어 죽겠으니 도로 왕을 없애자고 하소연해 봤자, 대통령도 아니고 한번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의 맛을 봐 버린 왕이 호락호락 하야해 줄까? 천만의 말씀. 역성혁명, 쿠데타 급의 일이 터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상 정세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어쭈? 네놈들이 내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괘씸한 것들! 어디 엿먹어 봐라" 같은 보복성 공갈 협박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던 것이다(삼상 8:18). 성경은 생각보다 정치 분야의 통찰도 많이 담긴 책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본인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는 그 시절의 역사가 지금으로 치면 "우리에게 자가용을 주소서"와 비슷하게 읽힌다. 차가 있으면 이동이 정말 편리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지와 뽀대도 많이 난다. 그러나 차도 일단 장만하고 나면 유지비가 도대체 얼마나 깨지던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생활 패턴과 경제 양상이 확 달라지게 된다. 빚 내 가며 차 잘못 샀다가 도로 무를 수도 없고 손가락만 빨며 카푸어로 전락한 사람 많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전무했고 현재까지도 다시 없는 왕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의 사무엘기, 열왕기와 역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런 특이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울은 키 크고 잘생긴 미남이었다(삼상 9:2). 군사 영도력도 훌륭했고(삼상 14:47-48), 재임 기간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후임인 다윗과 같은 수준의 큰 병크를 저지른 것도 없었다(밧세바 간음, 인구 조사). 하지만 성경에서의 평가는 다윗과 너무 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닥을 긴다.

사울은 영적으로 점점 타락했다. 다윗이 자신의 위험한 정치 라이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그를 정당한 이유 없이 죽이려 했으며, 다윗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해 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막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가 금지해 놓고는 위급하니까 결국 부리는 영을 지닌 무당을 찾아가서 점괘를 구할 정도로 심각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행적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정말 불신자스러운 '적당히'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관점에 아주 충실했다. 세상의 정치판에서 성공하는 데는 이런 유도리 타입이 딱 적절하다.
그는 하나님께 대놓고 반역을 한 게 아니었고, 발람처럼 교묘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사악한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전적으로 드린 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경험하는 그런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저런 부분적인 순종과 온전하지 않은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보다 하나님이 광장히 싫어하시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잔인하고 부정적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답시고 가축들을 살려 갖고 왔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그 유명한 말로 책망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먼저 혼자 휙 가 버리시면 전 뭐가 됩니까? 백성들 앞에서 가오가 안 서니, 같이 좀 나가시죠, 네?"(삼상 15:30)라고 자신의 정치 생명과 체면치레 걱정만 했다.

사실 사울은 예전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좀 도착이 늦어진다 싶으니까 자기가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친 적이 있었다. 성직과 관련된 절차와 규율이 제멋대로 문란해지는 걸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구약 성경 역사서 곳곳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울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 내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 같은 영적인 일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별로 없는 딱 세속 정치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근본이 글러먹은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완전히 학을 떼 버리신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간음과 살인방조죄를 저지른 다윗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삼하 16:11-12)라고 말한 다윗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예수 믿는 크리스천은 이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거지이기라도 해서 사람으로부터 헌물을 받아야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할 처지가 전혀 아니란 말이다!

자, 사울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충분히 분석과 설명이 됐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좀 꺼내 보겠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다윗은 자기가 쫓아낸 상태이고 사무엘은 죽고 없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응답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변덕쟁이여서가 아니라 사울이 여전히 자신의 나쁜 버릇을 안 고치고 "흐음.. 대충 기도해 보고 이래도 응답이 없으면 마지막 카드로 점이라도 쳐야겠다" 같은 불순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대상 10:13-14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애초에 여쭌 게 아니었다고 진술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다.
엔돌의 무당이 불러 낸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었을까? (삼상 28:7-14)

나도 옛날에, 한 15~20년쯤 전에는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개 무속인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낼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그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며,
또 진짜 사무엘이라면 지금이라도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겠지, 저렇게 잔인하고 매정하게 사울을 멘붕시키고 죽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인간적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고방식이 당시에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다의 딸이 설마 진짜 죽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물론 지금은 진짜 사무엘이라고 생각이 바뀐 지 오래다.
무당은 평소에 하는 것처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부정한 영이나 하나 불러내려고 푸닥거리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타이밍에 맞춰 레알 사무엘을 소환시켜 주셨다. 돌발 예외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당은 깜짝 놀라 자빠지고, 자기에게 온 고객이 무려 이 나라의 왕인 것도 알아채게 됐다.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 가장 성경적인 이유는.. 인간적인 거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사무엘의 예언이 다음날 정말 문자 그대로 정확· 정밀하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비록 마귀에게도 예언을 적중시킬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모호하게 한 예언이 어쩌다 부분적으로 적중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저 문맥에서 사무엘이 가짜라고 생각하기에는 "예언의 성취"라는 건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너무 너무 긍정적으로 흐르는 심상이다.
욥의 행동에 대해 사탄이 예언한 것,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거짓 대언자들의 온갖 거짓 예언들 등등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예언의 성취 여부"만이 중요하지 그 예언에 담긴 메시지가 긍정적인 내용이냐 부정적인 내용이냐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고방식이 성경의 저술 분위기대로 바뀌는 현상이다.
다른 예로, 한때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피땀 흘리면서 울부짖었고, 동정과 연민 때문에 울었을 거라고 나도 실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많이 읽고 나면..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게 납득이 되게 된다. 그런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끝으로, 사울은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말년에 너무 타락했고 자살까지 했는데 도저히 하늘로 갔을 것 같지 않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듯. 성경에서도 사울은 신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단서를 얻을 수도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조차 못 받은 사람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무래도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인 사무엘 내지 요나단과 같이 있을 거라는(= 낙원에) 언질이 있으니(삼상 28:19) 굳이 따지자면 사울도 구원은 부끄럽게나마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단은 지배적이다.
신약에 부끄러운 구원의 상징으로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있다면, 구약에서는 사울이 그와 비슷한 급이 아닐까 싶다.

관심 있는 분은, 사울 왕과 관련된 의문을 더 자세하게 다룬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아시다시피 '새마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닉으로 쓰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5/06/21 08:28 2015/06/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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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병이어나 십자가 사건과는 달리 동일한 공통 사건이 아니다. 도대체 어느 게 어느 사건인 걸까?

분류 마태 26:6- 마가 14:3- 누가 7:36- 요한 12:3-, 11:1-2 판정
누가 한 여자 한 여자 죄인인 여자 마리아 일단은 이 단서만으로는 동일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알기 어려움
언제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얘만 세 복음서보다는 시기적으로 명백하게 훨씬 전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누가복음만 혼자 차이가 남
어디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어떤 바리새인의 집. 하지만 40절을 보면 그 사람 이름도 "시몬"이라고 나오긴 함 베다니에 있는 모처 (마르다와 마리아가 섬김) 누가복음만 베다니 언급이 없고 그 문맥이 아님.
무엇을(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음 깨뜨려서 예수님 머리에 부음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발 씻고, 발에 입맞추고 머리털로 발 닦음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음 얘는 이상하게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이 동일 그룹으로 묶임
그 뒤 들어온 태클 제자들 왈, "향유를 비싸게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어떤 사람들 왈,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그 바리새인 왈, "예수님이 레알 대언자라면 저 여자가 얼마나 질 나쁜 여자인지 바로 눈치 챌 텐데" 가룟 유다 왈,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누가복음만 크게 차이가 남
이에 대한 예수님의 실드 (왜)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누가복음만 완전히 딴판인 내용

보다시피 우리에게 혼선을 주는 요소는 딱 두 가지이다. (1) 인명 '시몬'의 정체가 오락가락하고, (2) 머리와 발 부위 묘사만 다른 카테고리와 다른 방식으로 분류된다는 것.

하지만 사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의 큰 그림을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누가복음만 다른 사건이고 마태· 마가는 동일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머리와 발에 모두 향유를 부었다고까지는 취합이 가능할지 모르나, 시몬이 바리새인 겸 나병 환자인 동일 인물이고 마리아가 과거가 추잡하기도 한 여자이고, 예수님이 한 장소와 한 시간대에 자기 장사 얘기와 "마리아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말을 동시에 하셨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하다.

요한은 마태· 마가와 상당히 비슷한 사건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듯하다. 하지만 똑같이 300데나리온 드립이 나오고 예수님이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하셨다는 걸 생각하니 좀 이질감이 느껴지긴 한다.

다음에 교회에서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같은 찬양을 부를 일이 있을 때 참고하도록 하자. 가사를 분석해 보면, '깨뜨린다'는 마가복음에 있고, '발 위에 입맞추고 붓는다'는 내용은 누가복음에 있다. 여러 사건을 한데 살짝 뭉뚱그려 놨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10 19:29 2015/06/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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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행위의 관계

세상의 다음 법칙들을 생각해 보자.

  •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무료 유인물이 공짜라고 해서, 거기 있는 유인물들을 몽땅 혼자 가져가도 되는 건 아니며,
  •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이 공짜라고 해서 자기 집 쓰레기를 몽땅 가져와서 거기에다 버려도 되는 게 아니다.
  • 뷔페가 음식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고 해서 딴 그릇에 담으면서까지 막 퍼 가도 되는 건 아니다.
  •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무임 승차권조차 아예 없이 개찰 구역 안으로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 남이 만든 어떤 소프트웨어가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저작권 자체를 사칭해도 되는 건 아니다.
  •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남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와해시킬 자유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엔 이와 비슷한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것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finally..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혼의 구원이 공짜이고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서 □□□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안에 들어갈 말은 건전한 예수쟁이라면 누구나 유추 가능할 것이고. (롬 6, 엡 2, 고전 8:2, 갈 5:13 등)

다시 말하지만, 크리스천은 구원받기 위해서, 혹은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다른 사람이나 세상 정세를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선과 보상의 기준을 보고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 차원에서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믿음의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철덕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우리나라 철도의 모든 것을 줄줄 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자연스럽고 지당한 이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Q. 너는 철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일 테냐?
A. 새마을호 객실에서 흘러나왔던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악보로 만든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입증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복수 정답이 존재함)


이렇듯,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lexical하게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진술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실질적인 내용은 일맥상통하며 모순이 아니다.
그 정도 모순도 분간 못 할 정도면 성경 못 읽는다. 성경엔 그거 말고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이 차고 넘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3 08:29 2015/06/0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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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창작물 매체에는 "열린 결말"이라는 게 있다. 총이 그 수단으로 즐겨 쓰인다.
일례로 웹툰 <26년>은 그냥 건물 밖에서 "탕!" 총성만 나면서 끝난다. 격발은 대머리 전대통령을 저격하려는 그 여주인공이 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저지하려는 다른 경호원이 했는지 알 수 없는 구도로 끝난다.

완전한 열린 결말은 아니지만 그에 좀 근접한 예로는 <이연걸의 정무문>이 있다. 결말부에서 주인공 진진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겠군요"라고 하면서 총을 한 발 쏘긴 하는데, 그래도 죽지는 않고 몰래 빠져나와서 김 두한 코스프레를 하고 택시를 타는 걸로 끝난다. 이건 뭔가 성경적인 심상이 담긴 게 아닌가 싶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 (요 18:14)

그리고 사실은 성경 내부에도 뭔가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의 사사 시절에 활동했던 '입다'라는 사람이다. 사사기 11장을 읽어 보시라.
이 사람은 사생아 출신이어서 동족들로부터 냉대받으며 서럽게 자랐지만, 훗날 동족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암몬 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는데.. 내용인즉슨 "하나님이 이 전투를 이기게 해 주신다면, 돌아오는 길에 우리집 문앞에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는 생명체를 번제 헌물로 바치겠다"였다. 이 사람은 가축을 많이 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싸움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자기를 가장 먼저 맞이하며 축하해 준 생명체는...;; 자신의 외동딸이었다.

입다는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의 딸은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으며, 아버지에게 어서 서원한 대로 행하라고 당부를 했다. 단,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처지로 인해 무려 2개월 동안 펑펑 울면서 애곡을 하고 온 뒤 그렇게 했다.

입다는 "한번 서원한 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말씀 하나만은 일말의 책임감을 갖고 철썩같이 곧이곧대로 실천했다(신 23:21-23). 그러나 그는 아무리 전쟁을 앞둔 위급하고 비장한 상황이긴 했다지만, 일단 생명체 번제 헌물까지 걸면서 애초에 서원을 리스크가 큰 형태로 좀 무리하게 했다.

그리고 서원을 잘못 적용했다. 법과 약속의 적용 우선순위에 무지했다. 서원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막 죽여도 되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을 뿐더러, 설령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 해도 부정한 짐승인 개나 돼지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면 그런 건 바칠 수 없다. 허나 입다는 개나 돼지가 1타로 걸렸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다. =_=;;;

이는 사사 시대에 심지어 정치· 군사 지도자인 사사(판관)들마저도 율법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으며, 요즘 스타일로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할 줄 몰랐음을 암시한다.
나중에 삼손조차도 율법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삿 13:14) 죽은 사자의 부정한 시체에 있는 꿀을 막 먹었으며 부모에게까지 준다. 그러니 입다 정도는 약과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때 입다의 딸은 실제로 비참하게 죽어서 번제 헌물로 바쳐진 게 아니라, 그냥 시집 갈 자격을 박탈당하고 평생 처녀로 살면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기만 한 거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다.
당장 본문만 보면 입다의 딸이 "처녀 됨 /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사실만 엄청 부각되어 나오지, "죽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 자체는 안 나오긴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고 해서 그 문맥에서 딸이 죽지 않고 생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과 딱히 논쟁을 하거나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그 문맥에서 딸이 실제로 죽은 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도대체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핵심 전제 조건부터 제시하겠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신제물/인신공양을 받아들이는 잔인한 신이냐, 그게 율법적으로 맞느냐 아니냐 같은 게 아니다!
오로지 '입다'가 자기 딸을 죽이는 뻘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냐 안 벌어졌느냐만을 따져야 한다. 잘못을 해도 그건 입다의 개인적인 삽질일 뿐이지 하나님의 성품 같은 건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의하시는가?

그런데 (1) 저 주장을 하는 분들은 먼저 그걸 혼동하는 것 같다.
마치 사형 제도가 하나님이 제정한 제도이며 성경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걸 마치 "우리가, 교회가 흉악범에게 직접 보복을 하는 것인양" 이상한 비약을 혼자 자기 상상 속에서나 하면서 반발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2) 단순히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애비가 딸을 정말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실드를 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성경에는 애비가 외동딸을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많다.
다윗이 이방 민족들을 톱과 써레로 잘랐다는 말도 있고, 개독안티들이 맨날 욕하는 가나안 백성 진멸도 나오고... 비록 실행은 안 됐고 문맥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하나님은 애초에 아브라함 보고도 외아들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다. 요 문맥만 딱 떼어서 생각하면 발상 자체는 영락없이 인신제물인 것이다.

심지어 변개된 잘못된 성경들은 원어 드립을 치면서 그걸 '보정'하기까지 했다. 톱과 써레로 잘랐다는 표현을 톱과 써레로 강제 노동을 시킨 것으로 바꾸고, 지옥을 삭제하고 음부· 스올로 바꾸고, devil을 덜 자극적인 단어인 demon으로 바꾸는 등..

입다의 외동딸 생존을 주장하는 분들은 비록 성경 변개자들처럼 악의적이지는 않겠지만, 혹시 자신도 부지중에 저런 성경 변개자의 심정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모세는 정말로 홍해를 건넌 게 아니라 갈대밭을 건넌 것이다"와 "입다의 딸은 정말로 죽은 게 아니라 그냥 평생 동정으로 산 것이다"의 차이는 의외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원래 서원을 보면 대명사가 he가 아닌 it으로 표현돼 있고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바치는 서원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이 역시 금방 반박되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그럼 딸이 마중 나왔을 때 부녀가 애초에 슬퍼하고 난리를 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이런 것들 외에도 입다의 딸의 생존 가능성을 0으로 확인사살하는 요소는, 그녀의 또래 친구들이 단순히 1회로 그치지 않고 해마다 무려 나흘씩이나 그녀의 '처녀 됨'을 애곡했다는 것이다(삿 11:40).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주께 바쳐져서 수녀처럼 헌신하며 사는 게 무슨 무인도 염전이나 꽁치잡이 어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기라도 하나? 영원히 연락이 끊기는 실종이기라도 하나?
사무엘처럼, 혹은 누가복음 2장의 안나처럼 사는 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엽기 뉴스이고 매년 애곡할 만한 엄청난 비극인가? 일단 당사자가 목숨이 붙어 있는데..?

우리 조선 시대에는 팽형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건 실제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그 죄인의 존재를 사회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형벌이었다. 유족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고 제사까지 지내야 했다.
사사 시절의 이스라엘 사회에 그런 팽형에 준하는 제도라도 있지 않았다면, 입다의 딸은 정황상 도저히 살아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삿 11:39 did with her according to...)를 보면, 본인은 창세기 9장의 다음 구절도 오버랩 된다.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what his younger son had done unto him)

이때도 do만 나오지만, '함'은 자기 아버지가 술 취해서 곯아떨어진 사이에 아버지의 몸에다 굉장히 흉한 짓을 했음을 성경은 암시하지 않은가 말이다. 함이 한 짓이든, 입다가 딸에게 한 짓이든, 그리고 발람이 민수기 24장에서 25장 사이에 발락에게 무슨 조언을 줬는지 같은 것은.. 성경이 굳이 구차하고 민망스럽게 일일이 묘사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의 저자가 쑥덕같이 말했으면 우리 신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하긴, 생각해 보니 창 1:1-2 사이의 "간극"도 이런 implicit한 어려운 주제에 속하는구나!

입다 하나를 갖고 정말 다양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이 '입다'는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히 11:32)
'입다'가 실수· 오타가 아님을 인증하기 위해, 심지어 입다 이상의 좌충우돌 사고뭉치이고 자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삼손도 믿음장에 등재되어 있다. 이건 반전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긴, 입다든 삼손이든 삽질만 했지 확실히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롯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5/28 08:25 2015/05/2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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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 2015/07/10 09:42 # M/D Reply Permalink

    참고로 입다의 딸과는 달리, 민 31:40에서 주께 바쳐진 사람들은 그냥 산 채로 제사장 휘하의 종이 됐다는 뜻이다. 인신공양이 아님. 분간을 잘해야 한다.
    http://av1611.net/4081 글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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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란, 리듬 게임에서는 화살표 타이밍과 거의 동시에 정확하게 손발 동작을 잘 넣었을 때 받는 최상위 등급 판정이다.
FPS인 퀘이크 3 arena에서는 한 번도 죽지 않고 게임을 마쳤을 때 받는 상의 명칭이다.
뭔가 좋은 말이긴 한데, 정확하게 무엇이 좋거나 무엇을 성취했을 때 perfect가 되는지는 분야와 문맥에 따라 잘 분간할 필요가 있다.

perfect와 비슷한 좋은 형용사인 excellent를 생각해 보더라도,
이게 퀘이크 3 arena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투 킬 이상을 달성했을 때 받는 판정인 반면,
버추어 파이터에서는 한 번도 맞지 않고 상대방을 이겼을 때 받는 판정이다.
모탈 컴뱃에서는 그게 또 이름이 달라서 flawless victory이다. 즉, 이런 용어들은 그야말로 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perfect라는 것은..
굳이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절대무오 넘사벽 언터쳐블, 신의 경지급의 완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뜻이라면 차라리 infallible이 더 적절하다.
또한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유리수는 제아무리 무한히 조밀하다고 해서 결코 실수만치 완비되어 있지는 못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 게 사람과 하나님의 스케일의 차이인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어떤 주어진 환경, 문맥, scope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목표나 기준을 오차 없이 달성해서 조건을 만족했다면 성경적으로 perfect가 된다.
특히 마음이 완전히 올바르다는 건 두 마음 딴생각 없이 순수한 것까지 포함한 개념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회색분자를 굉장히 싫어하시니 말이다.
어떤 경우든,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마 5:48)라는 말씀이 무슨 “우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창 3:5)”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와 같은 죄인이던 노아나 욥도 perfect라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슨 천주교 성인 같은 급이라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고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말한다.

아니 그럼, 인간이자 하나님이고 죄성 없이 처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그 전엔 품질 면에서 완전하지 못했고 무슨 결함이나 약점이 있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당연히 그런 뜻은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긴 하지만 자신만의 이념과 성품, 질서가 있고 방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건 마음대로 다 해도, 가령, 거짓말은 못 하신다고(딛 1:2) 돼 있다.

그렇게 부족할 것 없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인간의 몸도 입어 보고 인간과 똑같은 관점에서 부족함, 연약함, 고난을 다 경험해 보고 십자가 퀘스트를 클리어 함으로써 그 방면에서 드디어 perfect 판정을 받았다는 게 성경의 판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 자체만 해도... 그리스어/히브리어를 자국어로 번역한 성경이 완전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 두 관점에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KJV에 비해서는 예전의 제네바/비숍 등의 성경은 군더더기가 많고 번역의 질이 KJV만치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말 흠정역 성경만 해도 n-1판은 더 나중에 나온 n판에 비해서는 미묘한 오탈자나 실수가 더 많이 있었다.
심지어 KJV 자체도 비록 오늘날까지 내용의 변경은 없었을지언정, 1611년 초판은 인쇄공들의 실수로 인해 수십 군데의 typo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옛날 성경들도 오늘날의 변개된 계보가 아닌 바른 계보에 속하는 좋은 성경이었으며,
그 당시에 권위를 부여하고 열심히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 사용하기에 충분한 완전한 성경으로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서 역사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믿는다. 문맥을 분간을 잘 해야 된다.

그런 마이너한 옥의티는 그야말로 outlier일 뿐이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며, 현대에 벌어진 역본 변개 내지 성경 업데이트 드립과는 결코 같은 레벨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놓고 부패한 본문에서 번역된 개역성경에도 복음이 담겨 있고 이걸 읽고 구원받은 사람들로부터 한국 교회가 시작되었거늘, 하물며 바른 계보의 성경 번역본은 얼마나 더하겠느냐 말이다.

단지 성경 본문에 문제가 있으면 구원 이후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가 어렵고 개독안티들의 성경 공격에 대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치면 그럭저럭 돌아가고 결과물은 나오지만, 보안이 취약해서 악의적으로 조작된 데이터 파일에 자주 뻗는 정도의 문제가 생기는 꼴이다. 우리가 겨우 이런 약한 모습이나 보이려고 이 세상의 추세를 거스르고 또 거슬러서 예수쟁이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 자기 세대에 다시 재림할 거라고 믿었고,
중세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교황이야말로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시절과 그 식견에 계시의 분량이 그게 전부였을 때는 저 스케일로 믿고 양심대로 행한 것이 최선이고 perfect한 신앙이었을 테니까.

이렇듯, 아무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고 해도, 성경의 보존과 완전성에 대해서는 아주 최소한의 추상적인 공통 layer는 존재한다고 보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시내/바티칸 사본이 제아무리 몇백 년을 짱박혔다고 해도 그런 것이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해 주신 성경 말씀은 아니다. 유다복음 도마복음이라든가, 전량 회수해서 폐기 처분했대도 누군가가 꿍쳐서 살아남은 사악한 성경(not이 실수로 누락되는 바람에 너는 간음할지니라=_=)이 무슨 하나님 말씀 보존 약속의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개개의 수명은 수십 년 남짓밖에 못 되었더라도 잡초처럼 필사되고 놀라운 내용 일치를 보여 온 다수 공인 본문과, KJV에 이르는 거시적인 영어 성경 계보라는 집합에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27 19:27 2015/03/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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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관이나 종교관을 논하기에 앞서, 그보다 이념이나 '색깔'이 덜한 나의 인생 철학, 원칙 같은 걸 글로 한데 정리해 본 적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지지하는 원칙들을 한데 모아 보니 다음과 같다.

  • 세상에 공짜란 없다.
  • 심은 대로 거둔다. 일하지 않았으면 먹지를 말라. (장애인, 노약자는 물론 예외)
  • 일부러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가난한 게 아니라, 일부러 취업을 포기하고 공부를 더 계속하느라 궁핍하게 지내는 것 따위)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 남이 하는 꼬라지가 불만이면, 니가 나서서 한번 해 보든가. ("대안 없는 비판"을 싫어함)
  • 니 자식이 흉악범에게 살해당했을 때에도 사형 반대할 텐가?
  • 니 아들이 남자가 좋다고 데리고 오는 일이 생겨도 동성애 합법화 찬성할 텐가?
  • 니가 스스로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한 노력은 안 하면서 왜 맨날 인물이 없다는 탓만 하는가? (안 창호)
  • 국가(혹은 교회든 무슨 집단이든)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를 기대하지 말고 니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 (케네디)
  •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건 나도 때로는 못 지킬 수도 있고,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것만 본받고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마 23:3) 분리를 명하셨다. 저놈들을 빌미로 같이 깽판 쳐도 된다고 그러시지 않았다.
    하지만 말과 말조차 일치 안 하고 판단 잣대에 일관성이 없는 건 완전 싫다. (마 11:18-19)

나의 인생 알고리즘이 어떠한지가 좀 읽혀지는가?
이런 것들을 다 황금률 --니가 남들로부터 대접받고 싶은 것만치 너도 남에게 해 줘라(마 7:12)-- 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논리학이나 철학에서 저런 사고방식을 일컫는 용어 같은 게 따로 있지 싶은데..
어쨌든 난 저런 단순한 사고방식을 큰 틀에서는 일단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지지한다.
저런 사고방식에 나보다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 사정이고 내 사고방식은 저렇다.

단, 성경적으로 보자면 황금률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 아무리 나쁜놈이라도 제 자식 위할 줄은 알고(눅 11:13), 겨우 저 정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그 어떤 불신자라도 딱히 믿음을 행사할 일 없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마 5:46-47).
하나님 역시 인간을 오로지 '심은 대로 거둔다', '병 주고 약 준다' 식으로만 기계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만 대했다면 인간이 지금까지 남아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것을 얘기했으니, 다음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편이지만 나는 종교 방면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지지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몇 가지 소개하도록 하겠다. 예전에 블로그에다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다시 한데 정리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돼라” 같은 요지의 책망이나 권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취지는 물론 이해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템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당장 눈에 보이는 아이템에서부터 남에게 실족거리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 자체는 100% 성경적이며 본인 역시 아멘이다. 허나, 나 같았으면 우선순위까지 거론하면서 표현을 그런 식으로는 안 하겠다.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는 신자나 불신자의 말단의 행실 같은 건 거의 감안하지 않았다. 행실로 치자면 나부터도 완전 개판이다. 나는 크리스천부터 되고 나서야 구제불능이던 행실이 차츰차츰 바로잡히고 상식도 조금씩 입력되어 온 사람이다. 안 그래도 기독교는 선행, 행실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인데.. 저건 당장 자기가 대하는 게 불편하고 기분 나쁘다고 행실로 남의 크리스천 지위를 자체를 판단한다는 느낌이 든다. '나쁜 크리스천'이 아니라 아예 크리스천도 아니라는 식으로.

“나는 하나님/예수는 믿지만(사랑하지만 좋아하지만 등등) 교회는 믿지(역시 비슷한) 않는다” 부류의 말도 동일한 맥락에서 싫어함. 그건 불신자 개독안티라면 모를까 최소한 신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_-;; 그런 판단은 마치 어느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타 종교에도 좋은 가르침이 많다고 공자 왈 맹자 왈 석가모니 왈 인용을 자꾸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종교 가르침이야 심지어 철도교에도 많이 있다! 내가 겨우 그런 수준의 가르침을 원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거나 금쪽같은 일요일 시간을 희생하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 자체만 가르쳐도 모자랄 금쪽같은 시간 동안 목사가 왜 하필 그렇게 핀트가 어긋난 짓을 하냐는 거다.

둘째,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도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같이 싸우겠습니다” 같은 일면 멋있어 보이고 대인배스러워 보이는 사고방식을 난 지지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종북 세력, 사형 폐지론자들을 내가 직접 물리적으로 괴롭히고 해코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남에 의해 박해받거나 법대로 처벌받고 있을 때 그들의 말할 자유를 위해서는 난 죽어도 절대로 같이 싸우지 않을 것이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같은 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분야의 이념이라면 인간적으로 협업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 종교관, '신앙'이 타겟이라면... 나치가 나를 덮쳤을 때 나의 구제를 위해서 굳이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같은 다른 불신자 그룹들의 인맥 빽 변론 실드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대적들로부터도 행실이 의롭다는 증언을 받으면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대신, 그럴 때 “너희가 마땅히 할 말을 성령님께서 바로 그 시각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마 10:19, 눅 12:11-12)라는 성경 말씀이 100배 이상 더 먼저 떠올라야 한다. 이게 레알 예수쟁이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서로 일체의 판단이나 정죄를 하지 말고 퉁치자는 식으로 성경 말씀을 이상하게 적용하는 양비론 사고방식도 굉장히 싫어한다. '원수를 사랑하라'가 개인이 아니라 무슨 집단,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교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노답. 오늘날이 정교일치가 가능하지 않고 초대 교회 시절 잠깐 이후로 사유재산 공유가 가능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그런 것도 세상 정부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절대적인 타락과 부정부패, 부작용 없이 실현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

뭔가 판단을 하고 선악을 따지고 드는 걸, 어디서 성경 몇 자 본 건 있어 가지고 무슨 바리새인인 양 치부하는 사고방식도 완전 질색임. 그런 핑계를 대는 애들치고 바리새인만도 못한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바리새인은 그래도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고 내세와 부활이라도 믿었던 종교 꼴통들이다.

마태복음 7장을 예로 들자면, “판단을 하지 말라”처럼 들리는 1~2절 이후로.. “거짓 대언자를 조심하라.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같은 명령이 동일한 chapter에서 버젓이 등장한다. 이건 영락없이 뭔가 남을 '판단해야만' 이행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면 무엇인가. 성경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모순된 책이 아닌 이상, 이것은 서로 다른 context를 말하는 것이니 바르게 나눠서 분간해야만 한다.

성경을 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의문에 해답을 알게 되는 건 물론이고 세상에 왜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일이 많은지, 필요악이라는 게 왜 등장했는지, 그것이 꼭 나에게 나쁘고 해만을 끼치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답이 구해진다. 그래서 굳이 구원이고 영생이고 하늘나라고 그런 것까지 안 가더라도 당장 사람의 정신 건강에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의로운 사람, 약한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는 아예 극초반에 등장하는 아벨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느니라.” (히 11:4)이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빌 1:21)도 있다. 그야말로 인간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아득하게 초월한 안드로메다 급이다. 정신승리이긴 한데, 그 근거가 아Q처럼 자기 자신의 알량한 근자감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반면, 세상의 불신자 작가가 만든 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들은.. “신이 있다면 왜 자꾸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 신은 전지전능하지 못하거나, 공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both일 것이다. ㅋㅋ” 요런 반골 기질 메시지를 집어넣어서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멘탈의 평형 상태를 깨뜨리는 쪽으로 간다.

“피해자 유족이 용서 안 한 가해자를 어떻게 신이 용서해?”처럼 성경 교리를 배배 틀고 왜곡하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편하며, 꼴도 보기 싫다. 더 말하면 입만 아프겠지만, 아 글쎄 성경은 명백히 세상 공권력의 사형 집행을 지지한다니까요? 사형 반대하는 다른 종교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지. -_-;;

기독교적인 관점을 찾자면 정말 볼 영화가 없으니, 차라리 종교색 같은 건 싹 배제하고 원초적인 권선징악 해피엔딩 액션만 추구한 영화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내가 테이큰을 좋아한다. 이상하게 신 같은 거 끌어들일 필요 없이, 인간 흉기 특수요원이 악당들의 본거지를 다 통쾌하게 때려부수고 딸을 구해 내는 게 좋다.
그런 건 육신적이기는 해도 최소한 반성경적이지는 않다. 흉악범들을 제대로 못 잡아내고 처벌도 솜방망이 급으로 내리는 이 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도 주니 말이다.

확실히 난 종교 쪽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21세기에 보기 드문 못말리는 꼴통이긴 하다. ㅎㅎ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건전하며 내 양심에 진정한 자유를 준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21 19:20 2015/03/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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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 번역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찬송가의 번역과 편찬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쓰였던 찬송가 중에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물건으로는 <신증 복음가>가 있다.

지금은 장로교가 세력이 크지만 한국 땅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감리교가 대세였다. 그리고 감리교에서 좀 더 심화와 로컬라이징(?)을 거친 교파가 바로 성결교인데..
<신증 복음가>는 성결교 선교사가 세운 "동방 선교회"라는 단체에서 출간하였다. 시기는 1919년 4월,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벌어지던 때와 아주 비슷하다.

이 신증 복음가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서 지금까지 교회에서 불리고 있는 찬송가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제 와서 뭔가 출처를 추적할 수가 없는 짬뽕(?) 번역도 꽤 있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예를 들도록 하겠다.

1.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난 지금까지 확 꽂혀서 좋아하게 된 찬송가들이 대부분 구원 카테고리 쪽에 있었다. Wonderful grace of Jesus, 그리고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까지. 그 뒤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곡은 바로 저것이다.
올해는 삼일절이 일요일과 겹치는데, 이런 날엔 신증 복음가 출신 찬송가를 부르는 게 아주 어울린다고 생각되어 본인은 거의 한 달 쯤 전부터 이 날 준비 찬송으로는 이걸 넣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앞부분 멜로디는 <찬양하라 내 영혼아>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와 닮았다. 계속 듣고 있으면.. 정말 애절하고 화사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예수님의 피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감격이 솟아나는 것 같다. 그래서 후렴에서는 "나 믿노라..!"가 나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이 곡은 작사· 작곡자가 미상이다. 1919년 당시의 가사는 지금 가사와는 차이가 많았다.
다만, 가사가 There is a fountain filled with blood(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에서 모티브를 약간 딴 거라는 말은 있다.
1절에 '샘물'이라는 단어가 있고(1919년 가사는 '임마누엘') 2절에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얘기가 있으며 3절에 '어린양'이 나오는 것이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나중에 1930년대에 다른 찬송가가 출간되면서 가사가 좀 바뀌었는데,
그때의 가사도 지금과는 여전히 차이가 좀 있어서 '그 참혹한' 대신 '그 수욕된'(수치스럽고 욕된)이라고 적혔고, '나 믿노라' 대신 '나는 믿소'라고 적혀 있었다.

후렴 절정부에 나오는 Lord, I believe!를 생각해 보자. 한국어 가사에서는 음절수 제약 때문에 '주'가 빠졌지만 1919년 수록 당시부터 이 곡의 설정상 영어 제목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였다. 이 표현은 명백히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불신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는 아이 아버지의 절박한 절규가 오버랩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선천성 맹인이 시력을 받은 후 예수님을 믿는(요 9:38) 장면도 떠오른다. (막 9:24.. KJV 이외의 성경에서는 '주여'라는 단어가 빠졌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이 찬송가 가사는 그 심상에다가 예수님 영접을 절묘하게 오버랩 시켰다.
죄의 사슬,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된 것에 감격하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듯이 이 찬양을 예배당에서 목놓아 불러 보자.
깨알같은 바람이지만, 난 3절 가사대로 영원한 새 나라에 모여서 금거문고보다는.. Looking for you를 흥얼거리고 싶다. 하늘나라에는 철도도 있고 새마을호 열차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본인은 평소에 유튜브에서 다음 찬양 동영상을 즐겨 듣는다.
2절과 그 이후로 갈수록 알토 한 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유난히도 부각되어 들린다. 투개월의 김 예림 목소리처럼 독특하다!

2.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우리에게 친숙한 요것도 신증 복음가에서 처음 소개된 찬송 중 하나이다.
한국어 가사를 보면 영락없이, 딱 전형적인 '영적 전투와 승리' 카테고리이다. 그러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이 곡이 하드코어 전천년주의 종말+재림 가사가 붙은 찬송인 걸 아시는 분 계신가?

영어 가사는 "내 눈이 주님의 재림의 영광을 보았노라"로 시작하며, 예수님이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
He is trampling out the vintage where the grapes of wrath are stored;
He hath loosed the fateful lightning of His terrible swift sword:
His truth is marching on.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His truth is marching on.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는다. 입에서 날카로운 검이 나온다." 이런 표현은 평소에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서(특히 19장) 성경적 종말론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소할 것이다.

기독교 음악 중에서 특별히 찬양보다 영적 노래에 가까운 범주라면 가사에 응당 성경 말씀과 직설적인 성경 교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CCM이 영적으로 다 나쁘지는 않겠지만 CCM이 옛날 클래식 찬송가에 비해서 영성이 부족한 면모 중 하나가 교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듣기 좋은 내용만 있지 대놓고 예수님의 피, 죄와 심판, 지옥, 재림 같은 원색적인 얘기를 점점 안 하는 것이 비단 설교 스타일뿐만 아니라 기독교 음악의 트렌드에까지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198, 90년대 이후의 CCM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클래식들부터가 영어 가사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찐한' 교리 표현의 수위가 좀 약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또 내 블로그에서 다룰 기회가 있으면 언급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귀들과 싸울지라>의 영어 원판 가사는 본인에게 무척 인상적으로 보였다.
한국어 가사는 일본인 목사가 쓴 다른 찬송시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 가사와 영문 가사가 같이 일치하는 건 후렴의 "영광 영광 할렐루야"밖에 없는 셈이다.

이 노래의 곡에 대해서도 사연이 많다. 원래 이 멜로디는 19세기에 미국에서 소방대원의 행진곡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멜로디가 적당히 경쾌하고 듣기 좋다 보니 이 곡은 여러 종류의 가사가 붙어서 다른 행진곡이나 군가 등으로도 애창되었다. 그랬는데 "이거, 곡 멜로디는 좋은데 가사가 영 좋지 않다. 뭔가 좋은 찬송시를 붙여서 부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한 어느 크리스천 작사자가 있었고, 성경을 묵상하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동경하는 가사가 붙어서 저런 곡이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이렇듯, 성경의 각 책만큼이나 찬송가도 각 곡들이 작사· 작곡· 번역된 과정이 독특한 게 많다. 그런 것들을 알고 부르면 재미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이런 정보들은 정말 금방 쉽게 얻을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년 봄에 세월호 침몰이라는 국가적인 대참사가 벌어졌을 때는 It is well with my soul(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송이 잠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거 작사자도 선박 사고로 처자식을 잃은 와중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을 되찾고 가사를 썼기 때문이다.

* 그리고 몇 가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은..

  • 본인은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찬양 인도자이다. 비록 기악이든 성악이든 음악을 전공한 이력은 전혀 없지만 찬송은 그냥 의욕 있게 크고 기계적으로 정확하게만 부르면 장땡이니까..
  • 본인은 킹 제임스 진영에 들어가기 전에 고향에서는 성결교 출신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10 08:27 2015/03/1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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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서 생각, 교회 생각

1.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다. '말라기'는 이 책을 기록한 대언자의 이름이다.

구약의 예언/선지서들은 분위가 다 비슷하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신랄하게 깐다. 좀 우파스러운 원론적이고 영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당대 상류층들의 부정부패를 까발리면서 민생 안정과 사회 개혁을 촉구하는 좌파스러운 책망도 골고루 균형있게 나온다.

그런데 결론은 기승전철..은 아니고 기승전'회'로 동일하다. 저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타임라인에서 궁극적으로 최후의 승자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회복되며 옳다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놈들은 다 작살이 나고 씨도 안 남는다. 이러니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음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 성향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교황이 전세계를 돌면서 예수님 재림과 이스라엘 회복을 말한 적이 있던가? (말한다면 그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며, 그 종교는 이미 천주교가 아닐 게다)

그래도 성경 말씀은 기록된 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구약 예언서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은 임할 것이다. 단지 구약 대언자들은 산봉우리 너머의 재림만을 보았을 뿐, 예언의 골짜기에 속하는 신약 교회에 대한 계시가 없었으며 초림과 재림의 구분에 대한 개념도 아직 몰랐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실질적으로 초림과 재림 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님 거부 이후부터 생겼겠지만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으로 귀환까지 하고 나서 거의 100여 년 뒤에 구약 중에서 혼자만 굉장히 늦게 기록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후, 우상 숭배라는 죄 하나는 완전히 떨쳐 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바알 숭배만 안 할 뿐이지 영적 상태는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막장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못 먹는 거니까 흠 왕창 많고 병들고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가축을 헌물로 바쳤다. 출애굽기 이후로 모세오경에 without blemish이라는 단서가 얼마나 지겹도록 많이 나오는데.. 저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십일조 헌금을 안 바치니까 레위 지파 성직자들은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생업을 따로 구해서 투잡을 뛰어야 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밤에 대리운전?? =_=;;;

말라기서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이 완전히 상실되고 “뭐 대충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다 소용없어”, “우린 아마 안 될 거야” 등, 하나님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반박을 하고 책망하는 논리로 진행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성경에서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먼저 제시하고서는 그걸 반박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텍스트가 신구약을 통틀어 여럿 있다. 로마서의 “그럼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이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통틀어 이런 예들만 한데 모아도 주일 예배 설교 한 편 분량은 충분히 나올 것 같다.

말라기도 기본적으로 그런 논조이니 유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자꾸 동물 헌물을 그딴 식으로 바칠 거면, 그 동물들의 똥을 꼴도 보기 싫은 성직자 네놈들 얼굴에다 덕지덕지 쳐발라 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책망까지 하셨을 정도이다. (말 2:3)
헌물 말고도 이 책은 '의의 태양', 침례인 요한 예언도 나오고 십일조에 결혼 문제 등 생각보다 다양한 주제를 이것저것 부랴부랴 다룬다.

그런데 지금 내게 굉장히 절실히 와 닿는 구절은 말 3:14-17이다.
“교회 다니고 하나님 섬기는 거 다 무가치한 헛일일 뿐이다. 어차피 세상에는 자기를 내세우고 적당히 줄 잘 서고 죄도 잘 짓는 사람들이 사회성이 뛰어나고 잘 되고 성공한다..”는 식의 생각..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는 2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허나 16절을 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주 성경을 강론하고 서로 믿음을 북돋우는 교제를 나누면..
그 사건은 하나님이 친히 귀를 기울여 듣고, 정말 기쁘고 기특하다면서 그걸 책으로 기록으로 남기신댄다.
그리고 다음 17절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보석만큼이나, 친아들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무진장 귀중히 여겨고 보상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온다.

성경에서 역사· 교리적으로 유대인 얘기를 하고 있는 곳에다가 교회가 유대인 사칭을 하는 건 병크이지만.. 저것만큼은 정말로 오늘날 교회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휴거와 재림만큼이나 위로의 명분이 성립하는 게 틀림없다.
스바냐서에서 “하나님께서 너로 인해 기뻐하고 노래까지 부르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구절이 의외로 소선지서 한구석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렇게 본인은 길고 길던 구약 통독을 드디어 끝냈다.

2.
난 예나 지금이나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안 믿고 무신론자 회의론자로만 산다면 모를까,
내세와 영원을 논하는 '종교'관을 판단하는데 겨우 그 종교에 속한 사람의 외적 행실, 또는 대외 이미지, 유명인사의 의견을 높은 가중치에 두는 건 아주 굉장히 대단히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걸 전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며 물론 신자들은 좋은 행실로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병싯같은 짓으로 불신자에게 쓸데없이 실족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구도자의 입장에서도 그런 외형적인 것들은 주된 판단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몇 차례 글을 썼듯이, 무슨 하나님 믿고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 믿는다는 식의 생각을 굉장히 싫어한다.
예수님이 무슨 좋은 덕담이나 남긴 4대 성인 도인 슈퍼스타이고 자신의 상식과 교양 한 줄 정도나 기여하는 아이템인 줄로 아는가 본데, 그 예수가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창립자이고 교회의 머리이다. 뭘 좀 알고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불신자들하고 어울려서 대형 교회 욕이나 하고 다니는 헛똑똑이 겉멋 든 좌독 성향도 완전 혐오.
경제 쪽으로 대기업에 대한 생각하고 완전히 똑같은 논리이다.
대기업을 엿먹이고 싶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나 자신부터 중소기업 제품을 애용하면 되듯이
한국 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대형 교회가 한국 교계의 레알 비성경적인 악의 축이라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부터 아주 보수· 근본주의적이고 신앙의 양심을 충족하는 작은 교회를 찾아서 다니면 된다.

대형 교회가 당신의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빼앗지 않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피해의식 갖고 미워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는 사람간의 트러블, 부조리가 어디 없을 줄 아는가? 대안 없는 비판, 일관성 없는 판단은 이제 좀 그칠지어다.

세상의 모든 대중교통들은 운송 약관을 보면 "만취자, 중환자 또는 신변이 불결한 자에 대해서는 당사가 승차를 거부할 수 있음"이 명시돼 있다. 무조건이든 단독 승차에 한해서든.

그러나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이.. 만취자는 몰라도 신변이 불결한 자를 입장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이겠는가?
병원이.. 중환자를 거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교회 성도들보다 자신이 너무 똑똑하고 의롭고 질이 높아서 차마 예수는 믿어도 교회는 못 믿겠다(다니겠다) 이러는 분들.. 정말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불평을 나중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털어놓고 예수님을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를 난 바라마지 않겠다.

나는 행실이 너무 막장 저질이었는데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고 일꾼으로 써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가끔 교회에서 이상한 사람과 싸우더라도 교회의 정체성과 본분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100% 완벽한 성도로만 구성된 교회에 내가 등록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완전성이 깨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닐 것이다.

* 나는 늘 공언한다. 누군가가.. 있지도 않은 신을 숭배하고 교회 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나같은 중생을 너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무신론을 전하기 위해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다가 나중에 부활했다면 나는 그 정도 표적에는 기꺼이 반응하여 지금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 논리가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22 08:25 2015/02/2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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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이야기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 중에서 개성이 없는 책이 있겠느냐만, 그 중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직통 라인이라는 점, '데오빌로'라는 개인적인 수신자를 설정하고 있는 점부터가 심상찮으며 이것 말고도 자신만의 아주 독특한 면모를 여럿 지닌 책이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온전한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였으며, 주체가 아닌 객체의 관점에서도 그분이 비단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자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면서도 요한복음처럼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심오한 분위기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정치 용어를 동원해서 비유하자면 '좌파'스럽다. 사복음서 중 민중, 인권, 여성 해방 같은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가장 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 책엔 정치인 디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단순히 헤롯이 침례인 요한을 잡아 가뒀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헤롯이 안 그래도 나쁜짓을 저질렀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를 책망하는 요한을 잡아 가두기까지 했으니 추가로 까임권을 획득한 것이라고 코멘트를 한다. (눅 3:19-20) 이런 코멘트는 다른 복음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예수님도 그 헤롯을 보고 여우라고 살짝 디스를 하셨다(눅 13:32).

그리고 지금으로 치면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 같은 재난· 대형 사고 시국에 적용할 만한 구절도 누가복음 13장에 나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처럼 멸망하리라."
이런 맥락에서, "세리들은 법에서 규정된 것 이상으로 세금을 부당 징수 착취하지 말라. 군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민폐 끼치지 말고 나라에서 주는 급여만으로 만족하라" 같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침례인 요한의 권면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눅 3:12-14)

마태복음의 설교에서 언급되는 "영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눅에서는 그냥 물리적으로 "배가 고픈 자"로 단순화되어 나오고,
동일한 사건도 마태복음이 scope가 대체로 "유대인 only"라면, 누가복음은 "모든 사람, 너희" 같은 global scope으로 바뀐다. 여러 모로 인간적이다. 그런데 정작 교회라는 단어 자체는 마태복음에만 직접적으로 나오니 이것도 상호 보완적인 집필 방식인 듯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성경 자체가 이념에 치우친 책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야겠다. 누가복음 역시 뭐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부자들 재산을 빼앗고 기득권층 뒤집어엎어서 정치적 해방을 이루자 그런 짓을 결코 조장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신본주의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인본주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있는 뭔가 인간적으로 훈훈한 이야기로는 선한 사마리아인 내지 돌아온 탕자가 있다. 이것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던 중에 나온 얘기이며, 실제 사건이나 실존 인물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선행이나 종교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만을 믿어서 죄사함/구원을 이루는 예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다음 두 에피소드들은 실화이다. (1)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그리고 (2) 어느 죄인인 여인.

먼저 (1)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정에 없던 예수 십자가형 졸속 집행으로 인해, 주변의 어느 두 죄수도 완전 날벼락이 따로 없는 십자가형을 같이 당했다. 이들은 당연히 완전 멘붕에 빠졌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채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 그러나 한 명은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있던 과정에서 나중에 회개했다. (눅 23:39-43)

그는 살아 생전에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게 됐는지 모르겠다. 허나, 그는 막판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함으로써 로또 1등을 능가하는 인생역전을 성취했다. 저 사람이 무슨 평생 종교 행위를 했나, 고해성사를 했나, 도대체 무슨 예쁜 짓을 했단 말인가?

(2) 눅 7장에 나오는 무슨 죄인이라는 여인도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무진장 음란 방탕하게 살기라도 했는지?) 이를 악물고 죄를 단호하게 끊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고 뭐 무슨 성사, 고행, 기도문 암송 그딴 거 없었다.
그저 예수님을 보고는 감화되어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보이고, 그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울면서 그분 발에 향유를 뿌리고 발에다 키스를 하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 발을 닦았을 뿐이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예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여인의 죄가 용서됐다고 선언하셨다.

이런 일이 가능한 근본 이유는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병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을 그분이 자꾸 행하신 이유는.. 바로 눈에 보이는 기적이 가능하듯이 동급의 NP-hard나 마찬가지인 죄사함, 즉 눈에 안 보이는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거도 내 추론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마 9:4-6, 막 2:5-10, 눅 5:20-24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며 등장!)  둘이 서로 다항시간 환산이 가능한 문제이기라도 한 듯. ㅋㅋ

그런데 저 여인이나 강도가 예수님께 잘 보여서 그저 뽀록이 난 것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무슨 기분파마냥 이랬다 저랬다 제멋대로 죄 사면권을 남발하는 분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크리스천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을 이해를 못 하면.. 당신은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이게 뭔 삽질이야?" 하고 분개했던 가룟 유다의 후예가 되는 거다. (요 12:3-5. 단, 이건 눅7과 동일 사건은 아님)

"평생 나쁘게 살다가 끝에 죽기 직전에 예수 믿기만 하면 끝이냐? ㅋㅋ" 이런 개독안티의 조롱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그게 기독교다. 단지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언제 죽을지가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지 문제만큼이나.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에게 있으며, what you do가 아니라 what you are에 달려 있다.

맨날 선행, 선행만 강조하는데 물질· 물리적인 선행에 앞서 그 동기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선행을 할 여건이나 환경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러니 그런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잣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부터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고 진짜 선행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님께 허비하는 건 궁극적으로 허비가 아니고 낭비도 아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펑펑 울고 온 눅 7장의 여인은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여인처럼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요한복음의 그 여인도 과거가 그리 깨끗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 때 요 4:18과 요일 4:18을 절대로 뒤바꿔서 인용해서는 안 되게 됐다. =_=;; (이거 대표적인 기독교 개그인데.. 뭔 말인지 모르시는 분은 성경을 직접 찾아 보시길.)

요한복음과의 연계 하니까 생각나는데.. 누가복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논조로 보자면, 사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얘기도 요한복음보다는 누가복음에 더 어울리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으니 감히 성경 변개를 주도하지는 않겠다.

자, 정치인 디스가 나왔고 제일 중요한 훈훈한 구원 이야기가 나왔고.. 끝으로, 침례인 요한 얘기 하나만 더 하겠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언급한 책이 반(마, 눅)이고 그리하지 않은 책이 반(막, 요)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뿐만이 아니라 유일하게 침례인 요한의 드라마틱한 탄생 과정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른 책에서는 요한은 그저 성경 예언에 근거하여 곧바로 갑툭튀한 인물일 뿐이니 말이다.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방문하자 엘리사벳의 배에 있던 침례인 요한이 기뻐서 흥분했다니.. 이런 성경의 사고방식에서는 낙태 같은 건 정말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태신앙'이라고 하면 그냥 충분히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서 딱히 불신자의 사고방식으로 산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일컫지, 그 애가 진짜 태어나기도 전부터 특례 구원이 아닌 진짜 자기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경우는 레알 모태신앙이었던 것 같다. 눅 1:15를 보시라. "... 심지어 자기 어머니 태에서부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한이 예수님처럼 죄성이 아예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겠지만(시 51:5), 성경은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중에서 가장 큰(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마 11:11)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크다고도 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진짜로 보게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옛 사람들보다 매우 복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같은 영광은 못 보고 먼저 죽기 때문에 신약 크리스천만치 복이 있지는 못하다는 걸 의미한다.

단, 엘리야의 영을 받고 위대한 일을 한 요한도 나중에 투옥된 상태에서는 제자들을 보내서 그 예수님보고 "너 정말 메시야 맞니?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계속 기다려야 할까?"라고 인증 질문을 하니, 이것은 성경을 처음 읽는 독자들을 의아하게 한다.
성경에서 복음서를 두 파트로 요약하면, 분량상 침례인 요한의 죽음과 곧이어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이 딱 중앙에 자리잡게 된다.

이제 글을 슬슬 맺도록 하겠다.
누가복음은 '인간 예수'를 조명하다 보니,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단서가 짤막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는 유일한 책이다. 어린 시절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무슨 척 노리스-_-라도 됐던 것처럼 희한하게 묘사한 수많은 위경들이 아니라 이게 진짜 믿을 만한 책이다.
또한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끊임없는 간구 근성을 호소하며, "예수님 당신을 낳은 태와 당신이 어릴적에 빨았던 엄마 젖가슴이 참 복이 있습니다!" 같은 시시콜콜한 군중 애드립 에피소드(눅 11:27)가 기록된 책, 불의한 청지기 비유 같은 독특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 누가복음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적혀 있는 누가복음의 1:1-4 서문을 보시라. 여기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들은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닌 신뢰도 100%의 확실한 팩트라고 한다. 저자 역시 그 사건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내가 진심으로 친애하는 '데오빌로'라는 독자로 하여금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꼭 모두 숙지하기를 바라면서 진심을 담아 기록을 남겨 전한다고 적혀 있다.
비단 누가복음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그렇게 고귀하게 기록되고 전해져 왔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상고하는 오늘날의 '데오빌로'의 후예에게도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0 08:31 2015/01/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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