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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사이비

1. 이단과 사이비의 차이

세상에서는 종교계의 이단과 사이비를 별 구분 없이 싸잡아서 일컫는 경향이 있다.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정통(?) 주류 종교가 아닌 다른 종파들을 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둘에 대한 정의는 엄연히 다르다. 이단은 그 종교의 교리 차원에서 잘못된 곳인 반면, 사이비는 그냥 사회 통념상 물의를 빚고 잘못된 곳을 가리키는 편이다.

가령, 기독교회를 표방한다면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다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단이 된다.
그러나 세상적으로야 예수님에 대해 어찌 생각하건, 성경에 대해 어찌 생각하건 그건 알 바 아니다. 그저 공권력에 대항하고 신자들을 가스라이팅 하고 착취하고, 생업 때려치우고 교주한데 다 바치라고 조장하고, 성추행 저지르고 탈퇴자한테 뒤끝 부린다면 그건 사이비 종교일 뿐인 것이다.

안식교나 몰몬 교는 명백한 기독 이단이지만, 사이비는 아닌 종파로 보인다.
그 반면, 전 X훈 교회는 교리 자체는 큰 문제 없는 교단 소속이지만, 처신하는 행태가 단순 정치색과는 별개로 사이비 냄새가 좀 풍기며 위험해 보인다. (그 목사님은 사임하고 그냥 시민 운동 정치 운동만 하시길..!)

통일교 정도면 이단과 아예 타 종교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데.. 다만, 사이비라고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여호와의 증인도 당연히 이단이며, 공권력 일체 부정과 병역 집총 거부, 수혈 거부는 사이비의 범주에 드는 특성이다. 단지, 강력 흉악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단/사이비를 판단하는 기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구석이 있다. 기독교도 처음 전파되던 당시에는 제사를 안 지내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어그로를 일으켜서 근본도 없는 서양 오랑캐 쌍것 사이비 종교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슬람은 주류 메이저 종교 중에서는 행태가 심각하게 배타적인 것이 사이비스러운 위험 요소이다. 기독교처럼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사후 세계 "교리"가 배타적인 것이야 어쩔 수 없고 그건 세상 법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그런 것 말고 자기는 다른 나라에서 포교 가능하지만 자기 나라 안에서는 타 종교 포교를 못 하게 한다거나.. 탈퇴한 신자를 호적에서 파 버리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코지 한다거나.. 심지어 명예 보복 살인을 한다거나..
이건 세상 법리로 보기에 명백히 문제가 있는 관행이다. 울나라에서 주로 문제되는 개독들의 추태 따위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2. 다른 정도

본인은 종교/종파 간의 이질감을 이렇게 5단계로 분류한 적이 있다. 개념적으로는 이단과 사이비를 한데 뭉뚱그려 놓았다.

(1) 미세한 성경 해석 차이와 교리 차이가 있지만, 교제에는 큰 지장 없음
(2) 교파가 다름.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특별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의 차이가 있음. 교제 가능 여부는 좀 케바케.
(3) 외형은 기독교 같지만 주요 교리에서 중대한 오류.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보기 어려움 (이단)
(4) 종교 차원에서 처음부터 다름. 여기까지는 그냥 집안 싸움일 뿐이지만 바로 다음은..
(5) 세상 공권력까지 동원해서 조져야 하는 미친놈 사회악 범죄 집단 (사이비)

여호와의 증인은 앞서 얘기했던 바와 같이 사이비 끼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집총 거부하면서 곱게 교도소를 가지, 대놓고 물리적인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으로서는 사이비보다는 잘못된 이단 교리를 더 강조해서 3번 정도로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옴진리교 같은 곳이라면 바로 5번으로 빠질 것이다. ㄲㄲㄲㄲㄲㄲ

본인이 다니는 교회 진영의 경우, 재창조 간극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건 1번에 가깝게 판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교회의 대환란 통과에 대한 견해가 다른 건 좀 더 무겁게 2번에 가깝게 판정하는 것 같다.
아예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자체에 대한 전면 불신 부정은 확고하게 2번으로 떨어지겠다.

신천지는.. 수 년 전 코로나 집단 확산에 데인 사람들이 5번 급으로 많이 싫어하는 듯한데.. 나는 그냥 3이나 4 사이로 분류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난 걔네들의 교리 자체를 잘 모른다.
극단적인 예로 아예 라엘리안 무브먼트-_- 같은 곳은.. 4나 5 사이가 되려나?

3. 조직력과 결속력

어떤 종교 종파가 교주 한 명만 없어지면 몽땅 힘을 잃고 와해되느냐, 아니면 그래도 추종자들이 또 점조직을 만들면서 끈질기게 버티느냐? 이건 조직의 세력을 판단하는 굉장히 중요한 잣대이긴 해 보인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필요충분 급 잣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오죽했으면 사도행전에서도 비슷한 예시가 언급된다. (행 5:36-39) "이 예수쟁이들의 말이 사실이고 이들이 하나님에게서 난 거면 어쩔래? 그럼 니들이 사도들 몇 명만 조진다고 해서 저 세력이 박멸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쁜놈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 이단 사이비를 판단하는 원론적인 방법이 몇 가지 나와 있다.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 7:16,20), "누군가가 예언한 것이 적중한다면 걔는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신 18:22)..
그리고 또 자기들끼리도 소송 걸면서 걸면서 싸우고(고전 6:5-7) 자기들끼리도 일치하지 못하고 뭉치지 못하는 조직도 정상이 아니다(마 12:25-27). "스스로 분열하는 왕국마다 무너진다."

국내의 이상한 이단 사이비들 중에도.. 카리스마 있던 초대 교주가 죽은 뒤부터는 아들들이 돈과 권력 분배 문제로 싸우면서 찢어졌다거나, 거의 나가리 나서 고인물 썩은물 늙은이들 모임으로 전락한 조직이 여럿 있다.
그런데 내 개인적으로는 내가 지지하는 킹 제임스 성경 독립 침례교회들도 이렇게 스스로 무너지고 나가리 난 군소 종파의 반면교사 사례가 되지 않을지 좀 우려된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좁고 작은 동네에서 한킹과 흠정역이 찢어진 것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안 맞아서 또 찢어지고 갈라져 나가는 게 도가 지나쳐 보여서 말이다.
이단들이야 교주를 신격화하고 사람을 너무 추종하게 만들지만, 저 진영은 반대로 사람을 너무 따르지 않고 각자도생만 일삼다가 각개격파 당할 것 같다. 두 방식 다 스스로 무너지는 결말로 간다는 점은 비슷하다~!

제아무리 독립 침례교회를 추구한다지만 신자가 교회로부터 독립해 버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독립해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지 꼴리는 대로 하다가 어려움 겪는 걸 무슨 박해나 영적 전투 따위로 포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는 독립과 분리 얘기는 충분히 했으니 됐고.. 이젠 최소한의 일치와 단합, 팀웍을 더 강조해야 할 것 같다. 본질적이지 않은 형식 문제에 대해서는 그래도 좀 양보도 하고 말이다.

율법주의를 타파하고 신앙의 자유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그 반대급부로 등장하기 쉬운 영적 무질서와 방종, 반지성주의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단 사이비도 바로 저런 혼란 속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목사님의 성경적인 설교를 듣고 진짜 정당한 권면에 따르는 것까지 죄다 사람을 추종하는 거네 마네.. 이딴 식으로 살아서 제정신 박힌 신자가 양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6/03 19:35 2023/06/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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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경과 과학이라는 케케묵은 논쟁거리에 대해서 또 오랜만에 다뤄 보고자 한다. 수 년 전에 이미 늘어놨던 지론도 있지만 이 기회에 또 복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과학과 신학(혹은 성경? 종교?)은.. (1)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접근하는 관점과 영역이 서로 완전히 다를 뿐이다.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 바이러스가 있고 양성자 중성자 전자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에 비해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천사, 마귀가 있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예수님이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춘 분이라고 가르치지만, 과학에서는 빛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가르친다.

뭐, 인간이 과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지금으로서는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왜 꼭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야 위생적인지를 현업 의사들조차 납득을 못 했다. 심지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소수의 의사가 역으로 의료인들 사이에서 왕따 아싸 취급을 당했을 정도였다.

옛날 동의보감에 미개하고 황당한 내용이 있다고 한의학을 싸잡아 욕하는 경우가 있던데.. 비교하려면 동시대를 비교해야지? 1600년대에는 서양 의학도 사돈 남말 할 처지가 절대 아니었다.

길거리에 침을 함부로 뱉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여러 사람이 같이 식사를 할 때 국자를 써서 각자 덜어 먹어야 위생적이라는 것.. 이런 것도 거의 비타민의 발견에 비견될 정도로 문명 사회에서 굉장히 늦게 자리잡은 관행이다. 우한 폐렴 창궐 시절엔 그걸로도 모자라서 사람들 입을 전부 마스크로 틀어막기도 했었고 말이다. (비말을 통한 감염을 막기 위해)

이런 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간이 이 자연 세계의 규모를 측정하고 자연이 돌아가는 내부 디테일을 알게 되면서 정착된 사례이다. 가령, 지구의 크기를 알게 된 것, 광속이란 게 유한하며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하게 된 건 대단하지 않은가? 이 덕분에 인간의 생활이 크게 편리해졌음은 물론이고 인간의 건강과 수명까지 향상될 수 있었다.

나도 학교에서 과학 교육을 따로 받지 않았다면.. 뭔가 불에 타는 물질과 그렇지 않은 물질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고, 생명체의 구성 물질과 나머지 무생물 물질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연 발생설(모기는 도대체 어디 있다가 뿅 튀어나오는지!)이나 플로지스톤설을 어느 정도 지지했을 수도 있다. 지구가 둥글다고는 차마 실감하지 못했을 수 있고, 만물에 대해 피타고라스나 돌턴 정도로만 생각했을 수 있다.
물체는 원래 자기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아니라(관성) 정지해 있으려는 게 본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마찰..), 자연은 진공 상태를 싫어한다고도 생각했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이 눈부시게 개척해 놓은 과학이라는 걸 맛보고 나니..

  • 세상 만물은 정적으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넘사벽 급의 거시세계인 천체와 은하들도 끊임없이 돌고 돌고 팽창하고 밀려나고 있고.. 미시세계의 입자들도 팽그르르 돌면서 넘사벽 급의 힘으로 상대방을 꽉 붙잡아서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의 경계를 형성한다.
  • 이 투명한 공기 중에도 눈과 귀로 당장 보이거나 들리지는 않지만 별별 희한한 파동들이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
    이걸 뭘 어떻게만 해 주면 자연 현상과 자연의 산물로부터 초월적인 엄청난 에너지· 동력을 얻을 수 있고, 정보를 저장하고 보낼 수도 있다.
  • 세상 만물은 이 이상 절대로 더 쪼개거나 분석 불가능한 단단하고 관념적인 놈이 아니다.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도.. 흠~
  • 유기물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고 이제는 없는 원소도 아주 제한적이나마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정말 100년, 200년 전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상상도 못 했던 문명의 이기들을 값싸고 풍부하게 누리고 있다.
과학이라는 학문은 마찰이 없고 공기 저항도 없는 깔끔한 강체 내지 이상 기체에서 시작해서는.. 갈수록 엄청나게 더 복잡한 현상이 가능한 이유를 분자· 원자 레벨에서 설명하고 수식으로 딱 떨어지게 기술하고 예측한다. 보통은 미시적으로 가지만 천문학/천체물리학 하나만 예외적으로 엄청난 거시세계를 다루는 듯.

그러니 학교 시험 문제 같은 데서도 "공기의 저항은 무시한다, 마찰은 무시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애들을 그저 문제 푸는 기계로만 키울 게 아니라면, 자기가 상대하는 복잡한 개념과 원리, 숫자들이 실생활에서 어떤 위력을 나타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걸 우리가 과학이라는 도구 덕분에 얼마나 간편하게 취급하고 쓸데없는 삽질을 안 하게 됐는지를 과학 교육에서 잘 일깨워 줘야 하리라 여겨진다.
(공기의 저항이 없다는 건 깃털과 쇠구슬과 심지어 흙먼지조차 같은 속도로 툭 떨어지며, 사람이 빗방울에 맞아서 다칠 수도 있는 상태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계엔 과학 기술이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있고, 분야가 달라서 애초에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가령, 인간의 사후 세계 같은 건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탐구하는 게 전혀 불가능한 영역이다.

과학 교육이 세상을 보는 눈을 저렇게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것처럼.. 본인은 성경을 공부하고 나니 인간이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과학 관찰이나 기술 발달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공허함과 불안함,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영적 세계라는 게 존재하며, 이건 세상에서 굴러다니는 이상한 설화나 귀신 이야기 같은 것과는 급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 성경이 기본적으로는 논리나 증거 대신 믿음을 요구하는 책이지만, 그래도 도를 넘게 황당한 막장 판타지나 이상한 반지성주의 음모론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세상 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급으로 예언들이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적중한 건 또 어떻고?
  • 성경에 기록된 각종 사건과 스토리들이 정말로 다 실제로 있었다고 세상 역사와도 교차검증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일 중요하게 다루는 예수님의 실존 여부조차 미스터리인 건 아니다. 부활도 세상에서 차마 받아들이지 못해서 "제자들의 부활 체험 사건 / 영적으로 부활" 이딴 식으로 부르긴 하지만, 사도들의 이런 엄청난 변화 자체는 명백한 역사적 팩트인 것이다.
  • 인간의 과학 지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기적 얘기가 있긴 하지만, 일부 디테일 내용은 오늘날의 자연 과학의 관점에서도 맞고 타당하고 시대를 명백히 앞서 있기도 하다.

과학은 인간은 자연 세계라는 게 굉장히 보수적이고, 물질이나 에너지가 뜬금없이 우연히 뿅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그럼 그게 맨 처음에 우연히 생기려면..?? 기원은 과학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방식일 수밖에 없다.

  •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운동량 보존의 법칙
  • 열역학 제1, 제2 법칙. 영구기관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음.
  • 자연 발생설은 사실이 아님.
  • 후천적인 획득 형질은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으며, 돌연변이는 십중팔구 생물에게 해로움. 한번 정해진 종의 특성이 호락호락 바뀌지는 않음
  • 연금술 따위 기술로 금을 만들 수는 없음 (입자 가속기 풀로 돌려서 만들까말까.. 게다가 가속기 돌리는 비용이 금을 시장에서 직접 사는 비용보다 더 비쌈)

그러니 이 정도면 과학의 범위를 벗어난 곳에 신의 기적 정도는 있을 수 있고 믿을 만하다는 결론을 개인적으로 내린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다른 것만큼이나 성경과 과학은 주로 다루는 영역이 서로 별개이다. 성경은 인간의 온갖 추악한 마음 상태에 대해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지만, 딱히 자연의 신비를 밝혀 내는 걸 금지하고 죄라고 규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은 성경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경에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엄청난 이야기가 기록돼 있지만, 현실 인간의 세계에서 솔로몬의 재판 같은 재판이 매번 벌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CCTV와 유전자 감식 기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범죄자들을 잡아내고, 애매한 사람을 고문하면서 취조할 필요를 없게 해 주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줬는가? (물론, DNA라는 초월적인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생명체의 흔적과 유전자 정보를 기록한 신에게 감탄하는 건 옵션..)

의료 쪽만 해도 성경을 쭉 읽어보면 세상 의사의 필요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다. 신자들은 닥치고 기도만 하면서 손 빨고 있으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병 고치는 기적은 평소에는 좀체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불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영역을 구분하고 지내면 만사가 편안할 텐데.. 두 분야가 크게 대립한 건 아무래도 기원(origin) 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인이 생각하는 방법론을 적용하면 충돌을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 상당수를 자연스럽게 해소하고 넘길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으니 이 자리에서 또 언급하지는 않겠다.

내가 보기엔 진화도 맞고 창조도 서로 다른 영역에서 맞다. 진화론은 특정 조건과 범위 하에서 생물 종의 분화 과정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 당연히 맞다.
하다못해 예수님의 지상 재림 이후에 육식동물들이 다시 초식으로 돌아갈 거라는 예언(사 11:7, 65:25) 말이다.  만약 그런 변화가 문자적으로 발생한다면 그것조차도 생물학적으로 보면 진화이다. 딴 게 진화가 아니다~!

단지, 종의 분화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갑툭튀 원리, 기원, 근원을 이런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이 정도 진화를 관측하고 재현했다고 해서 그게 인간까지 진화의 산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던가..? 다윈은 근성의 관찰 덕후여서 지렁이가 땅을 갈고 뒤엎고 기름지게 만들어 준다는 걸 인류 역사상 거의 최초로 알아낸 과학자였다. 구더기가 파리의 유충이라는 것도 모르던 시절에 도대체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고 지렁이나 관찰하고 있었겠는가? 다윈도 당대엔 "저 양반, 진화론이나 주장하더니 이젠 인류의 조상이 지렁이라고까지 말할 기세로군!" 이런 비웃음이나 실컷 당했었다.

평범한 창조론자(?)라면 이런 지렁이의 오묘한 행동 패턴도 절대 우연히 생길 수 없고 다 지적설계 어쩌구 하는 결론으로 갈 것이다. 본인도 그런 심증을 잘못됐다고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당연히 신이 지렁이를 그런 용도로 창조하신 게 맞지.. 하다못해 스타크래프트의 종족별 밸런스조차도 수학에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 치밀하게 연구해서 정하거늘, 더 정교한 게 어떻게 우연히 저절로 생기겠는가? 게다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인데, 다윈도 나름 신학 공부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다윈은 과학자로서 생물들을 관찰해 보니.. 타락한 현 자연 세계에는 그저 "보기 좋았더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매정· 냉정함, 죽음, 환경 적응.. 그 어떤 예수쟁이 창조론자라도 저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윈은 이런 부정적인 면모를 더 주목하면서 common designer라는 면모까지 common ancestor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신이 저런 걸 일부러 만든 매정 잔혹 잔인 사악한 성품의 보유자가 아니라면 저건 그냥 생물 진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관점을 잘 생각해 보자..! 그저 창조론자들이 단순하게 매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은 사탄적인 심보로 진화론을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 과학계가 굳이 앞장서서 신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과학 관찰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까지 신을 일부러 배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대폭발 vs 정상 우주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음으로..
그러고 보니 과학뿐만 아니라 성경도 (2) 쓸데없는 미신을 배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별로 안 그럴 것 같고 계산 과정도 서로 딴판인데 계산 결과는 어쩌다 보니 동일한 셈이다. 사실, 기독교 사고방식이 입력되면 죽은 사람 갖고 도 넘게 장난 치는 농간에 휘둘리지 않게 돼서 뒤가 굉장히 깔끔해진다.

한편, 과학 말고 수학은 사실상 성경 급의 절대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논하긴 한다. 단지 그건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참인 것만으로 한정이지, 영적인 가치 판단과는 전혀 무관할 뿐이다. 과학은 '법칙(law)'이라고 부르지만 수학은 '정리'라고 부르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5/16 08:35 2023/05/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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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사모하는 찬양

0.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 내지 영적 노래들의 상당수는 주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찬양, 우리를 구원하신 주께 감사, 예수님의 보혈~~"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 아니면 그분이 베푸신 위대한 구원 쪽이다.
그런데 드물게 예수님의 재림 내지 내세, 종말을 염원하는 미래 지향적인 곡도 있다. "그 날은 오리라, 예수님 이 땅에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도 과거나 현실 지향적인 기존 교리들과 대등한 핵심 교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건 은사주의 진영에서 "성령님이여 어서 뜨거운 불처럼 내 심령에 임하시옵소서" 이러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니 오해 마시기 바란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이 당연히 임하니 걱정할 필요 없고, 뜨거운 체험을 하고 싶으면 그냥 사우나에 가면 된다.

그 이상으로 오순절 때 일회적으로 일어났던 표적, 혹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 일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건 교리적으로 무의미하고 맞지 않는다는 게 본인의 소신이다. 더 자세한 건 이 글의 주제와 벗어나는 얘기이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1992년에 발매되었던 주찬양 8집 "Hosanna! 이 땅을 고치소서" 앨범에서는 마지막 트랙이 이런 재림 염원과 관련된 짤막한 찬양곡들의 메들리였다. "누가 아는가 / 마라나타 / 고개 들어 주를 맞이해"인데.. "누가 아는가"는 송 명희 작사인 국산곡이고 뒤의 두 곡은 외국곡 번역이었다.

1.
그리고 본인도 옛날에 이런 구조를 염두에 두고 청년부 특송용 메들리를 만들어 봤었다. 2014년 10월이었으니 정말 옛날이구나~
바로 "나의 사랑 나의 생명 -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 보라 그 날이 곧 다가오리라" 이다. 세 곡 다 국산 창작곡이다.

첫 곡은 시 18:1을 염두에 둔 어린이 찬송 스타일의 사랑 고백이다.
둘째 곡은 구 정민 목사가 작사· 작곡한 창작곡으로, 가사 내용은 열심과 헌신 결단이다. 단, 2절 가사가 '썩어져 죽는' 게 아니라 그냥 떨어져서 죽는다고만 묘사해도 될 것 같다(요 12:24).
그 뒤 마지막 곡이 종말과 재림 소망이다. 가사를 보면 예수님의 지상 재림뿐만 아니라 천년왕국과 영원(새 하늘과 새 땅) 얘기까지 종말 장면이 다 나온다.

세 곡은 가사 내용으로나 멜로디로나 이어서 부르기에 큰 무리가 없다.
또한 첫째 곡과 셋째 곡은 파트가 둘로 나뉘어서 서로 돌림노래 부르듯이 제각기 재잘거리는 효과가 있다. "영원토록 정성 다해 사랑합니다"도 그렇고, "보라 그 날이"는 더 심하게 서로 따로 논다.
이런 건 회중 찬송으로는 살려서 부르기 어려우니 특송으로 실제 효과를 구현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이렇게 메들리를 만들었던 노하우를 살려, 그로부터 3년 반 뒤인 2017년에는 "맑고 밝은 날 /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 /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메들리를 만들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가장 감미로운 곡들 조합이었다고 생각한다.
2014년작은 맨 첫 곡 "나의 사랑 나의 생명"이 사랑 고백이었는데, 2017년작은 마지막 곡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가 사랑 고백이었다.

2.
그 다음으로 본인 기억에 남는 특송 편성은 "그 날 다가오네"이다. 2018년 10월작. (☞ 링크)
이 곡은 우리 청년부 내부에서 꼭 불러 보고 싶다는 제안이 있었고, 또 이런 작은 교회 여건에서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리마스터링을 해서 부르기에 굉장히 적당한 곡이기도 했다. 그래서 곧장 잘 추진되었다.

이 곡은 가사부터가 "그 날 다가오네"로 시작하니, 히 10:25를 1초 만에 바로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말씀 낭송을 전주 때 넣었다. 목소리 굵직한 형제를 통해서.. 전주는 원곡 첫 소절의 끝부분을 살짝 변형하는 형태로 본인이 만들어 넣었다.

처음엔 남녀 듀엣으로 시작한 뒤, "얼마나 기쁠까, 구주 예수 만날 때" 후렴에서 합창이 들어간다. 그리고 2절에서는 조를 G에서 A플랫으로 반음 올린다.

2절 뒷부분에서는 잠시 무반주 후렴 반복도 넣었다.
진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면서 목놓아 크게 외쳐 부르라고 친구들에게 주문했다.
그 뒤 맨 마지막 소절 "얼마나 영광스런 날일까"도 반복하다가 자매 솔로로 최종 마무리를 짓게 순서를 짰다.
별다른 고민을 안 해도 개조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곡을 보자마자 곧바로 척 들었다.

예배 때 회중 찬송으로 큰 기복 없이 밋밋하게 부르던 곡을 분석해서 각종 파트, 순서 추가, 관련 성구 낭송, 관련곡 메들리로 가공 후 특송 형태로 부르는 것.. 개인적으로 굉장히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꼭 너무 웅장하고 어렵고 화려하고 복잡한 별도의 특송용 곡을 찾을 필요 없이 말이다.

앞서 소개했던 "고개 들어"라든가 "보라 그 날이"는 엄격 진지 근엄 웅장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그 날 다가오네"는 막 화려하고 웅장한 분위기가 아니며, 좀 삐딱하게 보면 슬프고 한풀이 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픈데 어서 주님 오셨으면 좋겠다~~ 같은 징징거림 말이다.
뭐, 하지만 이런 부류의 곡도 진짜로 슬프고 힘들 때 부르면 위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그 날 다가오네"는 Jim Hill (full name: James Vaughn Hill 1930-2018)이라는 사람이 1955년에 지은 곡이다. 실제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나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영감을 받아서 저 곡을 썼다고 한다.
그는 6 25 사변 때 참전한 적이 있고, 또 빌/글로리아 게이더와도 같이 찬양 사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1월에 80대 후반의 나이로 소천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5/14 08:35 2023/05/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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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수 년 동안 죄, 회개, 믿음 등의 주요 성경 용어에 대해서 글을 많이 써 왔다. 그런데 이런 면모에 대해서 다뤘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퀴즈: 성경에서 엉뚱한 데에다 갖다붙여서 사람 겁 주기 딱 좋은 죄 투톱은?
답: 짐승의 표 666(계시록)이랑 성령모독/훼방죄(복음서)이지 싶다.

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요일 5:16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겠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ㄷㄷㄷㄷ”
와, 이것만 모아서 설교나 강해를 해도 될 거 같다. 내가 아는 답만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짐승의 표 666은 아직 정체가 뭔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이런 걸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으며, 이 죄는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죄이다. 현재로서는 해당사항 아직 전무하니 제일 짧게 패스한다.

(2) 666이 미래를 다룬다면, 성령 모독은 과거에 있었던 특이한 죄이다. 막 3:29-30에 나와 있듯이,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이 성육신해 있던 당시에나 지을 수 있던 죄이고, 지금은 복음을 거부하고 안 믿는 죄와 다를 바 없다. 이쪽으로 흡수돼 있다.
무슨 “감히 이 ‘주의 종’의 설교에 토를 달다니, 이건 성령 모독죄라구! 니가 무사할 것 같냐” 이딴 소리나 하라고 있는 개념이 아니다. 특히 비성경적인 은사주의가 잘못됐다고 팩트폭격을 가하는 건 성령 모독이 더욱 절대 전혀 아니다. -_-;;

(3) 마지막 ‘사망에 이르는 죄’도.. 무슨 구원을 잃고 지옥 가는 죄인 것처럼 확대해석 하는 분이 많다. 난 요한일서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개념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살인을 저질렀으면 세상 법에 의해 사형 당해야 되고, 사형수 구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난리법석 칠 필요 없다는 평범한 의미로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든가..?? 행 25:11에 기록된 바울의 말이 딱 정확한 예시이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 ‘욕심-죄-사망’(약 1:15).. 이건 사람의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문자적으로 죽는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계속 죄 지으면 육신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이 다~ 지옥으로부터 건짐받는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을 가는 것일 뿐, 사망이 곧 반드시 지옥/불못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시록이 지옥/불못을 ‘둘째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구분한다는 걸 생각해 보자.

이와 같은 맥락으로,

(1) 난 구약에서 “뭘 어기는 혼은 끊어지리라”도 개인의 사후세계 구원 여부와 관계 있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신약의 아나니야와 삽비라건, 구약의 사울이나 웃사건.. 그렇게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개인의 구원 여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이라는 건 죄사함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쪽(의식법) 한정이지, 규범 율법(도덕법)을 평소에 한 치의 오차 없이 다 지켰다는 걸 얘기하지 않는다고 본다.

(2) 예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자살했다고 구원을 잃는 것도 절대 아니다. 자살도 정말 문자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중 하나에 해당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특별히 더 심각한 죄가 아니다. 남을 여러 명 죽인 흉악 살인범도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데 자기 자신을 죽인다고 구원을 잃는다는 건 좀.. -_-;;
죽어서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 버렸으니 그 누구의 기도도 통하지 않겠지만, 이 역시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채 자살하면 지옥에 갈 뿐이다.

이상이다.
구원받은 사람도 계속 죄를 지으면 구원 자체 말고 다른 잃을 게 엄청나게 많다. 간증, 보상, 하나님과의 관계, 상속, 건강, 생명 등..
가령, 세상에서도 아부지에게 심하게 밉보이면 법적인 부모 자식 관계는 유지될지 몰라도, 당장 재산을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자식들 간에 상속 문제 때문에 연 끊고 살인까지 나는 게 비일비재하다. 과연 저게 사소한 문제일까?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성경 신자에게 "죄의 정의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보통은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죄", "어리석은 생각은 죄",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처럼 로마서 구절, 잠언 구절이 줄줄이 떠오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죄라는 것의 정의도 웨슬리의 정의가 어떻고 칼빈의 정의가 어떻고 하는 걸 먼저 떠올리게 되나 보다.
이거 무슨 화학에서 Acid에 대한 아레니우스의 정의, 루이스의 정의 이런 거 공부하듯이 말이다.;;

옛날의 똑똑한 신학자들이 방대한 성경 텍스트를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후학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자료를 많이 만들고 각종 짤막한 용어들도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시기와 장소에 따라 분간해서 받아들이는 방법론도 개발해 놓았다. 아까 저런 특이한 죄들도 그런 원리에 근거하여 분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다 성경으로부터 파생돼야 하며, 우리 일반인이라도 시간만 충분하면 그런 것들을 스스로 재연 reproduce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학이 성경보다 먼저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5/04 08:35 2023/05/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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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자

1.
교회는 신앙, 헌신, 하늘에서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무료 섬김이라는 게 아무래도 세상 직장 조직에 비해서는 더 많이 행해지고 허용되고 권장되는 바닥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든, 물건이건 남의 시간이건 “계속되는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는 말자!!”

무료인 게 진짜로 값어치가 전무한 싸구려여서 무료인 게 아니다~! 비록 절대값에 넘사벽급 차이는 있을지언정, 저 말은 예수님의 보혈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곡식 밟는 소의 입에 마개 씌우지 마라”(신 25:4) 같은 뜬금없는 구절이 신약에서 왜 거듭 인용되었겠는지를 생각해 보라.
주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교회 안팎에서 “주인님은 엄한 사람이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재능기부 신앙페이 착취하는..”(마 25:24, 눅 19:21) 이런 평판이 나도는 일이 절대적으로 없어야 한다.

2.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다른 분야도 전문가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고 했지, 성경이 과학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거 아니다. 심지어 창조과학이라도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면모가 있을 수 있다.
신앙, 믿음이란 게 개나 소나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라는 말이 아니다.

3.
개인적인 체험, 간증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교리라고 확대해석 하지 말자!
누구는 기도 응답으로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지만 병 고침 기도가 거절로 응답된 사람도 많다. 그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표적이 전~혀 아니다.

자기가 갑자기 깨달아지고 복음이 믿어진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남한테까지 저절로 믿어져야 구원이네 어쩌구 하는 건 선을 심하게 넘은 짓이다. 이건 그 말을 퍼뜨리는 당사자보다도, 교리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용납하고 자꾸 마이크를 건네주는 교회 쪽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내 경험상 이 세 가지만 좀 지키면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온갖 혼란과 무질서, 분쟁, 다툼이 상당수 정화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스로 유지되지 못하고 내부 분열 때문에 무너지는 조직은 정상적인 조직이 아니다. (눅 11:17-18) 세부적인 성경 해석· 신학 노선· 교리 교파를 떠나서 어디든지 말이다.

* 하자

4.
상대 비교와 탐욕의 해악을 절대 만만하게 보지 말고 경계하자.
물리적인 행위가 동반되는 살인, 간음, 도둑질에 비해 만만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위대한 바울마저도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탐욕 앞에서는 GG 쳤다. (롬 7:7)

자기는 지금까지 어지간한 기독교인들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탐욕이 출동하면 어떨까?
이 역시 온갖 귀신 잡신을 섬기고 돌· 금속 형상에다 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이다(골 3:5).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만든 것이 탐욕이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필망하게 만드는 것 역시 탐욕이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말하고,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한다. (마 6:24, 눅 16:13) 상금 아니면 훈장이지, 훈장에다가 훈장의 제조 원가만 제외한 나머지 상금 같은 건 없다.;;

성경대로만 행하면 당장 교회도 현실의 교회들보다 사람 수도 적고 훨씬 꼬질꼬질하고 인기도 없고, 남보다 ‘간지’가 안 나고 비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시스템이 탐욕을 자꾸 조장하는 구조인 건 부인할 수 없다. 신세 비관, 남과 비교, 오지랖, ‘엄친아 엄친딸’... TV 드라마와 인터넷 광고들이 온~통 이걸 조장하고 있다. 괜히 악한 현 세상인 게 아니다.

  • “누구누구는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 장만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세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누구누구는 30대 나이에 벌써 그랜저 뽑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티즈야”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그런데 요런 불만을 위선, 허세 같은 방법으로 해소, 은폐하다 보면, 교회는 팀웍과 간증과 순수성을 잃고 급속도로 타락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 하나님의 역설을 논할 자격을 상실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나니야와 삽비라를 시범 케이스로 괜히 죽여 버리신 게 아니다. 초대 교회 때 이미 그런 누룩이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암적 요인은 정말 0순위로 척결해야 한다.

5.
아까 1번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인데.. 교회는 목욕탕, 병원 같은 곳임을 기억하자.
깨끗한 사람은 굳이 또 목욕할 필요가 없고(요 13:10)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눅 5:31). 내가 교회에 무슨 대접을 받으러 온 고객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에서 ‘국가’를 ‘교회’로 바꿔서 생각하라.

완벽한 성도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있으면 너님이 거기 가입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의 완벽성이 깨질 거다.
내 자아/자존심을 방어하기 위해서 교회 지체에 대해 악하게 추측하거나 남에게 상처 주지 말라.

교리가 달라져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어서 교제를 끊는 거라면 모를까.
처음에는 간이라도 내 줄 것처럼 ‘형제님 사랑합니다’ 이러다가, 단순 감정 상하는 일 때문에 둘도 없는 원수지간이 되고 교회 떠나거나 옮기는 일이 생기지는 않게 하자.
성경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분명히 말한다! (요 13:35)

6.
그리고 이건 정말 아무에게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긴 한데.. 영적 대미지 컨트롤 능력을 키우도록 하자.

일이 너무 안 풀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답이 없다 싶을 때,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의구심이 드는 상황일 때,
일단은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라. 기도 응답 자체가 “기다려라”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렇다고 될 대로 돼라 자포자기 포기하지도 마라.

하나님은 “딴 건 다 괜찮은데 이것만은 좀..” 하필 그 약점만 골라서 뒤흔들 수 있다. 여러분의 속을 박박 긁어서 본성이 튀어나오는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 자체를 갖고 하나님을 야박하다고 탓하거나 그분 성품을 의심하지 말자.
나도 인내, 기다림 같은 거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게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건 머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ㅠㅠ

마귀가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압도 다수의 패턴은 “남들이 다 하는데 너만 안 하면 너만 바보 되고 손해 보고 뒤쳐질 걸?”이다. 근데 그걸 이기는 게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다.

영적 성장에는 영재· 천재가 없다.
한 자릿수 나이 때 미적분을 술술 풀고 성경 100구절 이상을 암송하고 토플 만점을 받는 애는 있어도,
한 자릿수 나이 때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때리면서 훈계할 필요가 없어서 잠 22:15의 예외에 해당하는 애는 없다~!

신앙 생활은 마라톤이고 지구력이 중요하다. 우직하게 꾸준히.. 잔꾀 안 부리고 일관되게 성실/신실하게 살아라.
크리스천이 아니고서야 요즘 시대에 ‘환경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천한 자리와 고귀한 자리를 모두 만드신 분이다. (롬 9:21) 궂은 자리, 남 안 보는 자리에서 성실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더 크고 높은 직책을 주신다.
세상 추세하고는 좀 반대로 미친 척 하고 살아라. 하나님의 느긋하고 일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사고방식에 적응하기 바란다.;;

Posted by 사무엘

2023/05/01 08:35 2023/05/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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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 미쳐 보자

예수 믿고 교회 댕기고 성경 읽는다는 사람들, 소위 교인들은..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에게 제대로 좀 미쳐 봐야 된다. 평생 24시간 365일 그러지는 못하더라도 한번쯤은 말이다.

특히 외모와 체력과 능력이 제일 뛰어나고.. 어쩌면 갓 취업한 사회 초년생이어서 돈도 그럭저럭 벌면서 아직 처자식도 없는 청년 시절..
그럴 때 확~ 꽂혀서 예수님을 위해서 미친 척 뭔가 내 재능, 시간, 물질 등을 통 크게 허비(???)해 봐야 된다. (비싼 향유 부은 여인)

  •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밤새워서 몽땅 독파해 버린다거나,
  • 교회에 큰 변고가 생겼거나 무슨 선교사가 어려움을 당했다거나 할 때.. 평소 내는 주일 헌금보다 10배 이상의 액수로 사비를 쾌척해서 후원한다거나..
  • 지원자가 없는 예배당 청소나 교회 주차 안내, 주일학교 교사를 하거나..
  • 의식의 흐름을 따라 찬송시를 쓰거나 선교 편지, 신앙 서적 번역을 해 보거나..
  • 길거리에서 거리 설교나 전도지 배부를 하거나..
  • 가끔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지, 종교 문제로 갈등하던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안타깝고 불쌍하게 보이고.. 남을 위해서 뭔가 눈물 흘리면서 기도해 보고, 알량한 내 자존심을 다 깨뜨리면서 펑펑 울어 보고..

이런 경험이 아무리 못해도 20대 시절에 한 번은 있어야 되지 않겠냐..??
성경적으로 정상적으로 정당하게 살면서 광신자 소리 좀 들어 봐야 된다.
20대 시절에 무슨 유럽 여행을 가 보고 강남 클럽을 가 보고 별의별 걸 다 해 보겠다는데, 예수 믿는 청년은 저런 경험을 좀 해 봐야 된다. 이건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 "으이그 저 돈지랄을 하느니 불우이웃이나 아프리카 기아들이나 돕지?
  • 진짜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겉으로 지가 예수 믿는다는 티 안 낸다"
  • "네가 제정신이 아니니 많은 학식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행 26:24)

이런 부류의 빈정거림은 성경적으로 매우 "정상"이고 예상 가능한 피드백이니까 걱정 마시라. 마 26:8-9, 막 14:4-5, 요 12:5 따위. 당연히 매우 잘못된 소리라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십중팔구 평소에는 불우이웃 어려운 이웃 따위는 쥐뿔도 관심 없던 인간들이 꼭 이런 상황에서나 이웃 핑계 대는 법이다. -_-;;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를 안다면.. "실컷 내 마음대로 죄 펑펑 지으면서 살다가 죽기 직전에만 샥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되겠네"
이런 생각은 너무 졸렬하고 민망해서 누구든지 꺼낼 엄두를 못 내게 된다.

마 12:41-42를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의 날 때 니느웨 사람들이 너희를 책망할 것이고, 스바의 여왕이 너희를 디스할 것"이라고 예시를 들며 그 당시의 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 우리는 요나의 선포를 듣고도 데꿀멍 하고 회개를 했는데.. 니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 바로 옆에서도 꼼짝도 안 했냐? 이것들이 간이 배 밖에 나왔냐?
  •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수행원 챙겨서 억만 리 원정을 힘들게 떠났었는데.. 니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을 바로 옆에 두고도 못 알아봤냐? 이 ㅂㅅ아?

그런 것처럼.. 죽기 몇 시간 전에 십자가에서 겨우 구원받았던 강도가 저런 부류의 사람들을 맹렬히 책망하게 될 거라고 난 생각한다.
"너희들은 구원받고 나서 겨우 몇 시간밖에 못 살았던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에 있었으면서 뭐가 어쩌고 저째..???"
그는 자기는 역대급 먹튀 뽀록 구원을 달성한 운 좋은 케이스라고 자랑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도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으르다"고.. "뱃대지가 부르고 살 만하니까 종교에나 심취"하는 거라고 아주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진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뻣뻣하다 (완악하고 고집 세고 믿음이 없다)"라고 진단하셨을 뿐이다.
어느 게 진짜 새겨 들어야 할 경고인지를 생각해 보자.

내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예수 믿고 성령님이 거주하는 신앙 생활이 뭔가 재미없고 따분하고 손해 보고 불편하고 꾹 참아야 하고 억압과 제약 핸디캡이 가득한 인생일 거라는 그 편견, 프레임에 속지 말길 바란다.
세상에는 온통 이상한 이단에 맛이 간 광신자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다. (오징어 게임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길은 성경적인 좋은 광신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뻘건 조끼에 뻘건 십자가 들고 무슨 좀비처럼 전도하는 사람을 묘사하지, 죄와 심판과 의에 대해서 제대로 선포하는 복음 전파자를 묘사하지 않는다.
광신자 프레임이 두려워서 자기는 구원받고 나서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그럼 그건 달란트를 받고도 주인을 믿지 못하고 뭐가 두려워서 그 돈을 땅에만 파묻어 둔 게으르고 악한 종의 사고방식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개인의 구원 여부를 X선 찍듯이 척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거한다는 증거는 보이는 언행의 변화로 드러난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생각보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허나, 교회들이 그런 양육을 안 시키고 당장 겉으로 빨리 드러나 보이는 결과물인 종교적인 열심만 강요하고 다그치면.. 이상한 광신자 아니면 아예 영적 성장이 정지한 환자들만 잔뜩 양성하면서 큰 폐해가 야기될 것이다.

아무쪼록, 구원받은 신자, 기독인이라면 예수님에게 제대로 미쳐 보자.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찬송가 가사대로 실행해 보라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24 08:35 2023/04/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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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본인이 개인적으로 서서히 불현듯이 꽂히고 있는 찬송가는..
To god be the glory "주 하나님 큰 일을 행하셨네" 이다.
제도권 교회 찬송가(통일/새)에 수록돼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없는 듯..

1. To God be the glory! Great things He hath done!
So loved He the world that He gave us his son;
who yielded his life an atonement for sin,
and opened the life gate that all may go in.

2. Oh, perfect redemption, the purchase of blood,
To every believer the promise of God;
The vilest offender who truly believes,
That moment from Jesus a pardon receives.

(3절도 있긴 하지만 생략)

(후렴)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let the people rejoice;
Oh, come to the Father, through Jesus the Son,
And give Him the glory; great things He hath done.


이 곡은 멜로디가 좀 클래식하다 보니 엄근진한 경배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멜로디가 그저 "면류관 가지고"나 "다 찬양하여라", "기뻐하며 경배하세"처럼 힘차고 엄근진한 것뿐만 아니라 화사하고 우아하고 예쁜 면모도 있다. 그래서 더욱 꽂혀든다.

또한, 가사를 뜯어보면 "주께 영광"뿐만 아니라 요 3:16 인용에 대놓고 복음 메시지로 가득하다. 복음성가에 아주 충실한 곡이다.
2절은 최악의 나쁜 범죄자 죄인(vilest offender)이라도.. 진심으로 믿으면(행 8:37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pardon을 받는다고 쓰여 있다.

이 엄청난 가사의 작사자는 또 패니 크로스비 여사이더라. 명불허전 또 걸려들었다.;;
이분은 정말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던 것 같다.
이 곡의 작곡자는 William Doane으로,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패니 크로스비와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동역자라고 한다. 그녀의 시 중 무려 1500편에다가 곡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독자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는 분 계시면 이 찬양의 시청을 권한다.
난 G장조로 머리에 입력돼 있는데 공식 반주는 반음 더 높은 A플랫인가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5v9iworAU
https://www.youtube.com/watch?v=2CeBoSQsBR0

2.
다음으로 찬양의 형태와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
큼직~~한 채플 안에서 성가대가 아니라 사복 입은 남녀노소 몇백 명이 단체 합창으로 무슨 찬송가를 부르는 영상은
의외로.. 천조국뿐만 아니라 영국 것이 걸려 나오는 경우도 많더라.
본인이 유튜브를 뒤지면서 지금까지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었다. 이건 걔네들 문화인 것 같다.

회중 합창은 영국 게 많고,
뭔가 가족 중창이라고 해야 하나 요런 건 미국 내륙의 크리스천 동네가 본좌이다.. 특히 자녀가 대여섯 이상씩 있는 대가족이 악기 하나씩 쥐거나 파트 하나씩 맡아서 찬양 부르는 건.. 개인적으로 정말 보기 좋고 부러웠다.

3.
참고로 To God be the glory는.. 쌍팔년도 시절 미국의 유명한 흑인 복음성가 가수 겸 작곡자인 Andrae Couch의 곡 My tribute (어찌하여야 / 나의 찬미)의 후렴부에 나오는 To God be the glory (하나~~~~님께 영광)와 동일한 표현이다. 개인적으로 곡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저 곡이 떠올라서 멈칫 했다.
그리고 부활 찬송 "주님께 영광"은 Thine be the glory라고 시작하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4.
그리고 또 참고로.. 본인이 예전 2010년대에 꽂혔던 찬송을 열거하자면..

  • Wonderful grace of Jesus
  •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
  •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이런 것들이다. 이 블로그의 과거 글에서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클래식 스타일 찬송가인데 통일 찬송가 따위에 실리지 않았고 기성 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곡은 어떤 경로로 국내에 소개되고 알려졌는지 개인적으로 굉장히 궁금하다. Ron Hamilton 같은 사람도 기성 교회에서는 내가 알기로 거의 듣보잡이지 않나?

대체로 기성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개신교와 잘 섞이지 않는 침례교 교단 쪽에서 자체 찬송가를 편찬하면서 번역하고 소개했지 싶다. 성서 침례교회처럼 말이다. 내력 면에서 킹 제임스 유일주의와는 큰 관련이 없다.
본인의 찬양곡 스펙트럼은 저런 침례교 스타일에다가 1990년대 국내 CCM도 좀 추가돼 있는 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8 08:34 2023/04/0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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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을 썼던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은 로마 교황에 정치적으로든 교리적으로든 반대한 종교 개혁 내지 개신교 진영의 산물이다. 성공회건 청교도건, 세부 신앙 노선은 다를지언정, 반가톨릭이라는 이념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이니 루터니 개혁주의를 그렇게도 떠받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의 가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칼빈이 활동했던 제네바를 알면서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이미 성경이 필사본 번역본이라도 완벽하게 보존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이런 식으로 장로교인을 상대로, 특히 목회자에게 킹 제임스 성경을 소개하고 변증하는 분도 있다.

다만, KJV 유일주의를 믿는 바이블 빌리버 진영 자체는 개신교보다는 침례교, 특히 재침례회에 가까운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이건 말보회 한킹 진영이건, 후대에 추가로 등장한 흠정역 진영이건 공통 동일이다.

세례가 아니라 반드시 물 침례를 고집하고,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 구원이나 구원 상실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구원받기까지는 자기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 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개인의 구원 여부가 몽땅 다 답정너 예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들은 저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주의도 알미니안주의도 아닌 중간 제3의 견해를 가지며, 이 때문에 두 진영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하기도 한다. =_=;;

문제는 그 당시 걸출한 종교 개혁자들의 통찰이 저런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신칭의 교리를 재확립하고 교황을 대적하고 가톨릭을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온전한 정교분리라든가, 믿음 고백자에게만 물침례.. 이런 것까지 정립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여전히 박해하곤 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KJV의 번역을 지시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왕에게도 이런 한계가 있었다.
http://baptistnews.co.kr/mobile/article.html?no=13605

  • “왕은 백성들에게 세속적인 모든 사항은 명령할 수 있으나, 개인의 신앙과 영혼에 관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사옵니다.
  • “폐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시오이다~!” (석총 - 궁예의 700여 년 뒤 잉글랜드 버전.. ㄲㄲㄲㄲㄲ)

이 당연한 말을 한 게 그 시절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었나 보다.
저 주장을 한 ‘토머스 헬위스’는 체포되어서 1616년경에 옥사했고, 또 다른 침례교 지도자인 ‘에드워드 와이트먼’이라는 사람도 이단으로 몰려서 1612년에 화형 당했다.
좀 과장 보태면 태조 왕 건에서 궁예가 석총을 죽인 것과 정말 비슷하다..;; =_=

제임스 1세는 전반적으로는 당연히 선한 군주였다.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금연 운동을 추진한 걸로도 유명하고..
(뭐,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개신교도들 수백 명을 박해하고 죽인 전임인 메리 여왕조차도 종교 말고 세상 정치 쪽은 그닥 암군 폭군 악녀가 아니었다.)

단지,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왕권신수설 신봉자에 국교회주의자였다. 국왕이 곧 성공회 수장.. 왕이 곧 제사장..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는 왕이 돼서는 온갖 삐딱서니 타는 귀족과 신하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이 막 번역되고 출간됐던 1610년대에.. 토머스 헬위스 같은 자국의 침례교 지도자가 반역자로 몰려서 순교한 것은.. 좀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단순히 반가톨릭 정도를 넘어 정교 분리까지 대놓고 주장하다 보니, 왕권신수설을 밀어붙이던 절대군주한테 찍혔던 것 같다. 성공회도 청교도도 아닌 침례교인들은 세속 세계사에서는 그냥 듣보잡 취급일 뿐이고..

텐데일이나 세르베투스뿐만 아니라 저런 사람도 순교한 것이다. 제각기 완전히 다른 사유로 인해서.
틴데일이야 킹 제임스 진영에서 워낙 띄워 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0순위로 접했고,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흑역사 얘기하는 데서 접했다. 그 반면, 이런 얘기는 우리 진영에서 전혀 접한 적 없었다.
역시 각 진영에서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 위주로만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 진영에서.. 무슨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에서 순교한 걸 가르칠 리는 만무할 테니 말이다.. =_=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와 침례교 신앙을 모두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건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로 느껴진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진영이 특정 번역자 자체를 우상화하고 떠받드는 게 아니니 “아 그렇구나~ 저 사람도 자기 신념 때문에 저랬었구나”하고 넘길 뿐..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는 이런 제임스 왕이나 성경 번역자들의 인품, 개인사 등에 좌지우지되는 게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제임스 1세 왕도 명색이 크리스천인데, 설마 무슨 북괴 김 부자라든가 느부갓네살/네로 같은 정신나간 개인 우상화 개인 숭배를 조장한 건 아니었다. 일단 황국 신민들이 먼저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개인의 신앙의 수호자이신 위대하신 국왕 폐하 만만세" 이러면.. 왕도 "허허~ 과인도 일개 인간일 뿐이니라~ 교황놈은 적그리스도일 뿐이고 진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겠지" 이렇게 겸손하게(?) 화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침례교인들은 좀 더 시대를 앞서 간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세상 역사에서는 가톨릭에서 이탈한 개신교.. 이런 식으로만 다루는 경향이 크지만, 침례교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의 신앙을 갖고 있었던 다른 그 무언가로 여겨진다.
개신교 측에서는 미국 건국에도 청교도가 큰 기여를 했고, 청교도의 근면 성실 청부 개척 정신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침례교 측에서는 자기들이 청교도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고, 자기들이 노력한 덕분에 미국이 국교 없이 진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침례교라는 말은 교리/교파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용어이다. 침례에 대한 교리 하나만 지지한 뒤에 구원관이나 하나님의 경륜 쪽은 완벽한 칼빈주의인 사람도 있고, 반대편인 사람도 있다.

다만, 통상적으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침례교는 대외적으로는 알미니안/웨슬리안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개신교와 척졌다는 역사 내력이 있고, 칼빈주의 예정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저런 식의 편견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단지, 킹 제임스 유일주의를 표방하는 '독립 침례교회'(독침;;)들은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을 추앙하기보다는 그쪽 동네에서 평이 좋지 않은 세대주의를 지지하는 편이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한킹 진영이건 흠정역 진영이건, KJV 독침들은 칼빈주의를 거의 진화론 반박하듯이 맹렬히 반대하고 비난하곤 했다.
어디 그 뿐이랴? 그쪽에서는 기성 개신교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르고 다 타락하고 종교 통합 은사주의에 물들고 어쩌구 하면서 비판하고 척지고, 반대로 거기서는 킹진영을 향해 성경 역본을 우상시하는 이단에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자니까 상종을 말라고 욕하고..;;;
이게 바로 말보회의 창립 이래로 2~30여 년째 이어져 온 갈등과 대립과 반목이었다. 상대방에 대해 정확하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뭐, 나도 교리 노선이야 KJV 유일주의에 세대적 진리보다 더 나은 패러다임을 지금까지 결코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않는 말장난 역할극 예정론은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내 교리적 정체성을 타협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서로 비방만 해 갖고는 득/덕이 될 게 없지 않겠는가? 개신교에서 유래되지 않은 기독교 교파의 내력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고찰하면서 타 교파 사람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고 소통하고는 싶다.
침례교 중에서는 심지어 속세를 떠나 자연인처럼 살고 심지어 세상 정부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곳도 있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데.. 적어도 KJV 독침은 그런 곳은 결코 아니다. ㅡ,.ㅡ;;

킹 제임스 성경은 명백한 개신교 배경의 성경이었으니 이 점을 이용하고 어필을 해야 하는데.. 개신교를 마냥 적대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보회는 초창기에 조금만 더 젠틀했으면 이단 소리 훨씬 덜 듣고 오해를 훨씬 덜 사고 적을 덜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훨씬 더 널리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5 19:33 2023/04/0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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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인 1611년에 출간됐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고 그렇게도 의미 부여를 하며 떠받든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유일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떠받드는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은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 성경이 정말로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었고 내용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걸까?

요즘은 인터넷에 몇백 년 전의 옛날 영어 성경도 본문이 다 올라와 있고, 1611년도 KJV 종이책의 스캔 이미지까지 몽땅 살펴볼 수 있다. (☞ 관련 링크) 그러니 저 의문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아주 간편하게 할 수 있다.

1. 철자법의 변화

오늘날 우리가 읽는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건 1611 version(역)의 1769 edition(판)이다.
KJV는 영단어 스펠링 체계의 변화 때문에 단어 표기를 몇 차례 기계적으로 치환하여 판이 바뀐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용을 개정하고 변개한 게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령, NKJV(뉴 킹 제임스)가 한 것처럼 thou ye thee 따위를 you라고 바꾼 건 '하느니라 / 하노라'를 '합니다'라고 고친 것과 비슷하다. 하물며 devil을 demon으로 바꾸고 hell을 hades라고 바꾼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면 말의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진 개정· 변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sunne, moone, booke를 sun moon book으로 바꾸고 heauen을 heaven으로 바꾸고, conteyn을 contain으로 바꾼 건..??? 그냥 '읍니다'를 '습니다'로, '홍당무우'를 '홍당무'라고 고친 것에 불과하다. 말이나 발음은 달라진 게 전혀 없고 오로지 표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고쳤다거나, "어린 백성"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고친 정도의 변화조차도 아니다.

f처럼 길게 늘어뜨린 s 변종이 s와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진 건.. 한국어의 역사로 치면 아래아가 없어지고 ㅏ/ㅡ로 통합된 것과 거의 같다.
KJV의 우리말 번역본인 흠정역의 경우, 5판(400주년 기념판, 2011), 6판(마제스티판, 2021)처럼 edition의 변화가 오· 탈자 교정뿐만 아니라 드물게 오역 교정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KJV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2. 오· 탈자

그럼 KJV 1611 초판은 스펠링 변화 말고 일체의 오· 탈자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저 때는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는커녕 타자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원고를 마차에다 실어서 가져와서는 식자와 조판에도 정말 지루하고 고된 쌩 노가다를 거쳐야 했다.

설령 작가 내지 번역자가 완벽하게 원고를 내어 줬다 해도, 성경 정도로 방대하고 빡빡 두툼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삐끗 실수가 전혀 안 들어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일일이 베껴 쓰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인쇄공이 더 옛날의 서기관 필경사보다 처지가 더 나았다. 그게 문자를 기계로 다루면서 최첨단 지식과 정보 문물을 접하는 직업이었으니 말이다.

KJV 1611 초판이 출간되고 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대략 20여 군데의 오· 탈자가 책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수 년~10수 년 이래로 시정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명사 he/she/it이 헷갈렸거나 a/the 같은 관사가 빠지는 등의 자잘한 실수였다.

그나마 내용이 유의미하게 바뀌는 변개에 가까운 크리티컬한 녀석이 이거.. 시 69:32이었다. God이 good으로 잘못 찍혔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찾는 너희의 마음이 살리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od과 good은 스펠링이 비슷하고, 비슷하게 '좋은' 심상의 단어이고 God is good이라는 관용구까지 있다. 실수로 잘못 식자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농후했다.
게다가 이 typo는 출간된 지 2년 만에.. 그야말로 제일 먼저 발견되어 시정된 축에 든다.

이런 오탈자나 철자법 변경은 개정· 변개가 아니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건 인쇄 단계에서의 실수를 바로잡은 것일 뿐, 처음 원고를 작성한 번역자가 원고의 컨텐츠를 수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도 "사소한(trivial) 수정"이라고 표시하는 게 있지 않던가? 딱 그런 격이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부족하고 실수하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KJV 1611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 자체는 1611년 이후로 정말로 유의미한 개정 없이 정착됐다.

흠.. 글을 써 놓고 보니 이번 1번과 2번 아이템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킹 제임스 성경 본문 개정 의혹에 대한 전면 반박" 이야기의 판박이가 됐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그걸 참고하시기 바란다.

3. 외경 관련 루머

철자법, 오· 탈자 다음으로.. 심지어 외경 수록 여부를 갖고 1611년 KJV 원판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퍼뜨리는 진영이 있(었)다.
"1611년판은 비성경적인 가톨릭 외경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고 오점이 있다~~ 1655년판이니 17xx년판이니 그게 외경이 제외된 진짜 KJV 원조다.." 이런 요지의 얘기 들어 보신 분 계신가?

아예 대놓고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원문비평 사본학 운운하면서 변개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얘기는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리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저런 부류의 얘기엔 전혀 현혹될 필요가 없다.

종교 개혁자와 개신교 동네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외경이 성경이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성경만 아닐 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2류 교양 텍스트 내지 종교 문학 정도로는 인정했다.

당장 KJV 1611 책의 앞부분에 들어간 "역자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보면 외경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어거스틴을 포함해 가톨릭 성인(??)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의 말을 인용한 게 종종 나온다. 그게 그 당시 종교계 석학들의 지쩍 밑천이고 성장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가톨릭 반개신교(!!!)에만 충실한 오늘날의 bible baptist들이 보면 살짝 문화 충격 동심파괴를 경험할 수도 있다. 한킹이건 흠정역이건 저 텍스트가 번역되어 수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 KJV는 본문이 명백한 반가톨릭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행에 따라 외경이 들어갔었다. 단지, 본문이 아니라 부록으로 들어갔을 뿐..!
KJV가 가톨릭 성경이었다면 구약이 39권이 아니라 52권이 됐을 것이다. 에스더기가 10장 3절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KJV는 외경을 싣되, 외경을 성경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상에 그 어떤 가톨릭 성경도 에스더기의 외경 부분을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 .. 이렇게 별도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때는 성경책을 이렇게 편성하는 것만으로도 번역자가 교황 추종자들한테 해코지· 암살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바닥에서는 외경을 읽지 않게 되었고, 외경이 성경책에서도 자연스럽게 완전히 제외되었다.

정확한 역사 맥락을 모르면 아폴로 달 착륙 자작극 음모론 같은 데에 속듯, 비슷하게 KJV 본문 관련 음모론에도 속기 쉽다.
KJV 1611에 외경이 들어가 있었던 건 당시 관행에 따른 부록 명목이었을 뿐, 본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무슨 예수회의 농간 같은 급으로 확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4. 인쇄공 로버트 바커

끝으로, 옛날 사람을 한 명 소개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17세기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로버트 바커. (Robert Barker)
제임스 1세 왕에게 직통 고용돼서 킹 제임스 성경 1611년도 종이책 초판을 조판· 인쇄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인쇄공 내지 출판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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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서 평생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1611 이래로 딱 20년 뒤 1631년, 제임스 1세 이후로 아들 찰스 1세 시절에 새로 편집된 킹 제임스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십계명 구절에서 NOT을 빼먹어서 '너는 간음할지니라' wicked bible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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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KJV 초판 시절에 발견됐던 여느 자잘한 오· 탈자와는 차원이 다른 너무 큰 사고였다.
사악한 성경책은 전량 리콜· 회수되어 폐기 처분됐지만, 몇 권은 살아남아서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그는 무슨 투옥·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뒤로는 몰락해서 그에 대해 근황 기록이 딱히 전해지는 게 없다. 1645년에 사망했다고만 전해질 뿐.

조선의 장 영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왕에 의해 고용된 특정 분야 기술자였고, 역사에 기억될 업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장 영실은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초대형 사고가 나는 바람에 리타이어 당하고 기록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성경 신자라면 킹 제임스 성경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록 이 성경의 외형이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책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1611 KJV라는 타이틀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차이점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1) 하루는 성경 역본을 비교하느라 똑같이 NIV로 동일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서 본인과 상대방이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구절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알고 보니 NIV도 1984년판 이후에 2011년경에 개정됐더라.. 이럴 수가..!!
TNIV 같은 바리에이션이 아니라 NIV 자체가 또 개정된 것이다. KJV는 이런 식으로 쓱 바뀐 게 없다~!!

(2) 글쎄, 이 문제에 대해 덕질을 더 깊게 들어가면 KJV의 캠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룻 3:15의 끝부분에서 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she)인지 보아스(he)인지를 질문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은 정답만 알지 더 구체적인 내력이나 사연은 아직 잘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더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3) 하나님은 민족과 언어를 나누어서 인간들의 생활권에 '구획/파티션'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 성경과 한 믿음으로 인간들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도 있게도 해 놓으셨다.
꼭 학교에서 가까이 사는 집 애가 성적 우수 모범생이 아니듯.. 예수님과 동시대 같은 지역을 살았다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라고 해서 특별히 신앙 생활을 더 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계 선교와 복음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접근성이 훨씬 더 좋은 게 사실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성경의 합리적인 법칙일진대(눅 12:48), 우리 주님도 한국어 화자보다는 KJV 같은 성경을 직통으로 읽을 수 있는 영어 화자에게 저런 사명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묻기는 하실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19 08:35 2023/03/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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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본 간의 차이들

1. 변개 유형 (신약)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가 타 성경에서 변개됐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뉜다.

(1) A형 오리겐 변개(원문)
요한복음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을 순종치 하니하는 자는"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골로새서 "그분의 피로" 삭제 같은 것들.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은 대체로 이 유형에 속한다.

(2) B형 번역 이슈(원어)
이사야서 루시퍼, 사도행전 이스터, 누가복음 갈보리, 요나가 '고래' 배 속, 증인이냐 순교자냐, 지옥이냐 음부냐 등..
같은 원어가 서로 다르게 번역된 것들이다.

(3) C형 후대 본문비평에 의한 변개(원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 요한의 콤마 따위
이건 옛날 사람보다는 웨스트코트-호르트의 기여도가 더 높은 변개이다.
수백 년 전의 옛날 성경에는 심지어 가톨릭용이라고 해도 이 C형 변개가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2. 변개 유형 (구약)

사실, KJV 옹호자/유일주의자들은 구약보다는 신약의 차이점에 관심이 더 많다. 신약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위주로 전수되어 왔으며, 본문 계보가 명백하게 이분화돼 있어서 번역의 차이에 앞서 내용의 차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허나, 구약도.. 맛소라 본문 덕분에 본문의 변개 문제는 덜한 편이지만.. 원어의 미스터리함이 아무래도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보다 더 심하다. 그래서 번역의 차이로 인한 잡음이 더 많고, 원어 말장난이 틈탈 여지도 더 많은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당장 기억하고 있는 예시 몇 가지일 뿐이다. 보다시피 숫자가 막 대놓고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 4년 뒤 / 40년 뒤에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7)
  • 3년 뒤에 십일조 / 3일마다 십일조 (암 4:4)
  • 온천 / 노새 (창 36:24)
  • 엘하난이 골리앗? 골리앗의 동생?을 죽임 (삼하 21:19)
  • 요셉에게 색동옷 / 소매 긴 옷 (창 37:3)
  • 그들을 톱으로 잘라서 끔살시켰다 /톱으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대상 20:3)

그러니 내가 주장하는 건.. 이게 다 맞을 수는 없고, 그래도 어느 것 하나가 정답이긴 할 거라는 점이다.

3. 의외로 KJV처럼 번역된 구절

한글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이나 심지어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서는 KJV 유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아쉽지만 부패한 본문에서 만들어진 변개된 역본이다.
그런데 얘들은 아주 극소수 예외적으로 KJV 스타일로 옮겨진 표현도 있긴 하다.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지만.. 복습해 본다.

(1) 개역성경의 경우, 창세기 요셉의 옷이 색동옷/채색옷, 어쨌든 무지개 같은 컬러풀한(창 37:3) 옷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KJV와 일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본들은 장신구 치장이 잔뜩 달린 화려한 옷, 소매 긴 옷 등으로 표현이 바뀌는 추세이다.

(2) 엡 4:12에서 KJV는 “각종 은사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perfecting) 한다”고 말하지만, 타 역본들은 성도들을 “준비시킨다”(equip, prepare)고 되어 있다.
이건 마치 마태복음 28:19에서 “가르치는”(KJV) 것과 “제자 삼는”(나머지) 것하고 비슷한 차이점 같다.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엡 4:12의 경우, 개역성경도 의외로 ‘준비시켜’ 대신 ‘온전케’ 한다고 KJV와 동일하게 번역되었다. 이건 원문의 차이점인지, 아니면 색동옷 같은 번역 스타일의 차이점인지 잘 모르겠다.

(3) 다음으로 요 3:36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KJV)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바뀐 걸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얘는 의외로 공동번역 성서도 “아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KJV와 동일한 워딩을 했다.

(4) 고후 13:11의 끝인사가 KJV만이 “굿빠이, 잘 있으라, 안녕히 계시오” 등의 작별인사인 farewell이다. 나머지 역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다 “기뻐하라”(rejoice)라고 바뀌었다.
우리말 역본 중에서는 심지어 말보회의 한킹조차도 ‘기뻐하라’라고 번역했는데(왜???)..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farewell이라는 의미로 KJV처럼 번역되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막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기보다는.. 흐름상 의역을 하느라고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게 아닌가 싶다. ‘믿는 자’ 다음에 논리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나오는 게 맞고, 그리고 서신이 다 끝나는 문맥이니 뜬금없이 ‘기뻐하라’보다는 ‘굿바이’가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4. 진짜 어려운 것

유경험자로서 말할는데, KJV는 겨우 -eth, thou thee ye, gay clothing, prevent 같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고어가 어려운 건 절대 아니다. 그건 그냥 며칠이면 적응되고 익숙해지니 하나도 문제될 것 없고..

진짜 어려운 건 대명사와 도치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에서 개나 소나 it he 대명사가 너무 많아서 뭘 가리키는지 분간이 안 될 때.. 그리고 복잡한 도치에서 주/객 관계 따지는 게 좀 어려울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왕상 3:27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저 여자가 진짜 애엄마다" 할 때도 KJV는 그냥 평범하게 her이다.
두 여자 중 누구를 가리키는 her인지를 기계적인 어휘 통사 구조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에 비해, 다른 역본들은 약간 해석을 추가해서 the first woman이라고 써 놓은 편이다.

솔로몬의 재판이야 워낙 유명하고 문맥이 뻔하기 때문에 "아이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고, 죽이지는 말아 주세요!"가 진짜 엄마인 걸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런 유명한 얘기 말고 더 어려운 문맥에서는 대명사 포인터를 역참조할 때 머리에서 쥐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KJV가 그렇게 자비심 없게 번역된 이유는 애초에 원어 원문의 표현이 그렇게 자비심 없고 모호했었기 때문이다. KJV는 표현 추가나 윤문을 극~~도로 꺼리면서, 불가피하게 단어 하나를 추가하더라도 이탤릭체로 티를 내면서 아주 보수적으로 정직하게 번역됐다는 걸 생각해 보자.

5. 고펠나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목재는 무슨 나무일까..??
성경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나는 당연히 전나무, X나무, 포플러나무 같은 친근한 나무 내지 레바논의 백향목, 아니면 출애굽기에서 성막 제조용으로 죽어라고 나오는 시팀나무 이런 걸 떠올렸는데.. 노아의 방주는 그렇지 않더라.

창 6:14에 따르면 고펠나무 gopher wood라고 한다.
그러나 gopher라는 단어는 고유명사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이면서 여기 말고 성경 다른 데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장 사전을 이용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특히 킹 제임스 유일주의 진영에서 좋아하는 방식-- 이 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킹제임스 흠정역을 출간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편찬한 성경 용어 사전에서도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 이상으로 설명이 더 없다. 다른 표제어들 대비 이상하리만치 풀이가 부실하다.
이건 그냥 통상적인 성서고고학이나 원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옛날 한글개역 성경은 그냥 '잣나무'라고 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음역으로 바뀌었다.
영어는 뉴 킹 제임스에서는 gopher가 단독으로 생산성이 없는 사어라고 간주하고.. gopherwood 한 단어로 붙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대에는 이게 사이프러스 나무가 아닐까 하는 해석이 등장해 있다(NIV 등). 이건 본문 변개하고는 관계 없고 후대에 와서 등장한 견해이다.

심지어 "노아의 홍수 이후로 멸종하고 현존하지 않는 나무 품종일 것이다",
"애초에 나무 품종 명칭이 아니라 나무를 가공하는 방식의 명칭일 것이다. 혹시 이건 비슷하게 생긴 다른 히브리어 글자의 오기가 아닐까..?? '고페르'가 아니고 '코페르'이면 pitched tree (역청 바른 나무..??)가 된다는데?"

이런 낭설까지 있는가 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뇌피셜이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성경 본문을 교정하는 정도로까지 선을 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도 킹 제임스 킹왕짱을 주장해 온 럭크만의 주석서에는 이 구절에 대해 뭐라 해설하고 있는지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참고로 이 gopher는 북미 다람쥐 동물이나 컴퓨터 고퍼 프로토콜과 스펠링이 우연히 같지만 이들과는 어원상 서로 전혀 무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5 08:35 2023/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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