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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적어 없는 타동사

킹 제임스 성경에는 의미상 분명히 타동사인데 목적어가 없이 동사 하나만 달랑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옛날 영어에는 그런 문법이 원래 가능했나 보다.
사실, KJV에는 원어로는 뭔가 자비심 없는 짧은 단어 배치가 가능할지 모르나 영어로는 문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이탤릭체로 단어를 집어넣은 게 있다. 하지만 그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다 보면 한국어로도 이탤릭체 단어가 또 첨가되어야 하기도 한다.

(1) SLAY
Bring these men home, and slay, and make ready; (창 43:16)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요셉의 형들을 대접하는 장면이다. 저 slay는 당연히 사람(these men)을 죽이는 게 아니라 식용 가축을 도축하여 고기를 대접한다는 뜻이다.
한국어 성경 번역은 모두 ‘짐승을’이 추가되어 있고, 영어 역시 KJV를 제외한 성경들은 an animal 또는 animals라고 목적어가 추가되었다.

(2) MOCK
And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ich she had born unto Abraham, mocking. (창 21:9)

하갈이 낳은 아들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사라가 봤다는 장면인데, 정작 영어 성경 구절을 보면 mock에 이삭이라는 단어가 없고 심지어 대명사조차도 없다. 이것은 KJV 영어만의 용법은 아닌지, 영어 성경도 굉장히 많이 의역된 역본에만 Isaac이 들어 있으며, 대명사가 빠진 역본이 KJV 말고도 더러 있다.

참고로, 문장 전체의 목적어가 또 분사구문으로 행동을 취하는 다른 대표적인 예는 스데반의 순교 직전을 묘사하는 행 7:59이다. calling upon God의 주체는 they가 아니라 스데반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된다만, KJV 이외의 성경 역본에서는 God이 없다. 이것은 KJV도 call의 목적으로 God을 향상 계시 차원에서 이탤릭체로 넣은 부분이다.

And they stoned Stephen, calling upon God, and saying,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행 7:59)

(3) SEND
And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and took Sarah. (창 20:2)
성경에는 목적어 없이 send가 ‘사람(심부름꾼)을 보내다’라는 뜻으로 엄청 자주 쓰인다. 영어 성경 중에는 a man / a messenger를 첨가한 것과 그렇지 않은 역본이 반반씩 있는 듯.
흥미로운 것은, 옛날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목적어 없이 직역하여 우리말로도 ‘왕이 보내어’라고 번역했다는 점이다. 개역개정판부터는 ‘왕이 사람을 보내어’라고 바뀌었다.

2. 죽음을 뜻하는 단어

성경은 영적 세계, 사후 세계, 구원을 다루는 책인 만큼, 죽음/죽임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존재한다. 사전적인 차원에서의 동의어도 있지만, 비유적인 표현도 많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할 때 killed를 안 쓰고 slain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쓴다는 걸 알게 된 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 rabbit and turtle이 아니라 hare and tortoise라는 것, 뱀이 snake 대신 serpent인 것, 돼지가 pig/hog 대신 swine인 것만큼이나 생소했다.

하나님이 성경을 어떤 동작에다 비유를 하셨는지 성경의 다음 용례들을 살펴보자. 이건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 공부 소재로 삼아도 될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 DEPART 떠나다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 (창 35:18, 라헬)
... 주의 종이 평안히 떠나도록 허락하소서 (눅 2:19, 예루살렘의 시므온)
...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딤후 4:6, 바울)

(2) SLEEP 잠들다
...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행 7:60, 스데반)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고 (왕상, 왕하, 대하.. 숱하게 등장)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 27:52)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 (요 11:11)
그러니 고전 11:30도 단순히 자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고전 15:51, 살전 4:13-14 같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고!

(3) GIVE UP THE GHOST 숨지다, 숨을 거두다
창세기(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야곱), 사복음서(예수님), 사도행전(아나니야와 삽비라, 헤롯)
특히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오로지 이 표현만 사용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마 27:50, 막 15:37, 눅 23:46, 요 19:30). die라고 하지 않았다.

(4) DIE 죽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DECEASE die/death와는 달리 동사형과 명사형이 동일하다. 성경에 딱 4번만 등장하는데..
사 26:14와 마 22:25에서는 die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병렬되고, 눅 9:31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킬 때 쓰였다.
벧후 1:15는 우리말 성경들이 웬일인지 순교를 '내가 떠나간 후에도' departure이라고 좀 의역하는 경향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1/30 08:24 2015/11/3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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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디가 홀수 개만 있는 3박자 계열 곡

대표적인 예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 따라가며>(Trust and obey)에서 "..." 부분,
그리고 <구주를 생각만 해도>(Jesus, the very thought of thee)에서 "..." 부분,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에서 "..." 부분이다. 생각보다 예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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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적절한 용어를 몰라서 묶음 단위를 편의상 그냥 '단'이라고만 부르겠다.
대부분의 찬송가들은 못갖춘마디를 감안하더라도 한 절이 보통 기승전결 4개의 단으로 구성되고 각 단은 4개의 마디로 이뤄져서 총 16마디로 돼 있다.

그러나 위의 곡들은 무슨 이유인지 둘째 단은 마디가 4개가 아니라 3개만 있다.
그래서 마지막 마디를 한 마디만 부르고 곧장 다음 단으로 넘어가는 게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하고 어색하다. 반주자도, 찬양 인도자도, 회중들도 여기서는 좀 멈칫 한다. 마디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어진다.
실제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경우, 21세기 새찬송가에서는 마디를 하나 더 추가해 버리기도 했다. 찬송가 편찬자들이 보기에도 홀수 마디는 너무 어색했는가 보다. 아래 두 악보를 대조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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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의 작곡자는 무엇을 의도하고 둘째 단에는 마디를 홀수 개만 넣었는지 모르겠다.
이건 6박자 계열도 아니고(6/4 또는 6/8) 엄연히 3박자인데 굳이 마디 수를 반드시 짝수 개로 맞춰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반론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홀수 마디는 영 아닌 것 같다.

2. 못갖춘마디의 박자 구획

<날 위하여 십자가의>(How can I keep from singing)는 보다시피 '어찌 찬양 안 할까'라고 번역된 맨 마지막 단 가사가 원제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들이 고유 제목 대신, 닥치고 가사 첫 줄을 곧 곡을 식별하는 제목으로 취급하는 게 관행이 돼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찬송가들이 외국곡 번역이다 보니 원제목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국내 창작곡에 대해서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당신을 향한 노래>를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으로 바꿔서 적는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뭐, 제목은 그렇고.. 내가 이 곡에 굉장히 불만인 것은, 박자가 굉장히 이상해지는 형태로 못갖춘마디의 구분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찬송가 책들을 보면 얘는 다음 그림에서 A 형태로 기보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부르면서 강약약 박자를 느끼는 건 B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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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이 곡은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의 전반부 3/2박자 부분하고 리듬과 박자가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이다. 못갖춘마디를 저렇게 적어야 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끼워 맞춰 보면 악보대로 박자를 맞추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한국어 번역 기준으로 기능어가 아닌 내용어에 강박이 더 걸리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멜로디의 흐름은 그 박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애국가의 앞부분처럼 박자가 어색하고 연상거부가 심하다.

저렇게 우리나라 애국가 스타일로 박자가 아주 이상한 예가 하나 더 떠오른다. 바로 <예수가 거느리시니>(He leadeth me; O blessed thought)의 후렴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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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약박이고 '날 항상 돌'이 '강 약 중강 약'이 들어가야 하지만, 실제 멜로디는 홀수 박자가 아니라 짝수 박자가 음높이가 높고 영락없이 강박이다. 그래서 쓰기는 A처럼 써졌지만 부르기는 B처럼 불러지며, 이 때문에 뒷부분에 박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게 된다. 교회 다니는 분이라면 정말 그런지 한번 직접 불러 보시라.

찬송가도 가끔은 이렇게 비판적인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찬송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외국곡의 가사를 번역할 때는 가능한 한 내용어는 강박에, 기능어는 약박에 배치해서 부르기 자연스럽고 쉽게 했으면 좋겠다.

* 잡설

1.
악보에서 스타카토 같은 꾸밈음 기호는 C/C++로 치면 매크로와 같은 구석이 있다고 본인은 옛날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음악 시간에 '적기' / '내기'라고 기보법을 배우는 건 영락없이
#define STACCATO(pitch, interval)  play(pitch, interval/2); pause(interval/2) 이런 꼴이니까 말이다.
그럼 페르마타(늘임표)는 C/C++로 치면 register나 inline와 비슷해 보인다. 늘이는 것이 권장 사항이지만 그래도 연주자의 재량껏 무시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2.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정신없이 받다 보면 <어머니의 마음>을 부르다가 후렴은 <스승의 은혜>로 넘어가기 쉽다고 한다. 둘은 동일한 3/4박자에 조와 분위기도 비슷한 편이다.
그런 것처럼 찬송가에도 분위기가 비슷하고 메들리로 엮기 좋은 pair가 몇 쌍 있다.

  • 내 죄 사함 받고서 →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구원 + 성령 동행. 둘 다 경쾌하고 명랑하다.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위로와 평안, 간구 쪽으로 좋은 조합이다.
  •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성경 카테고리. 내가 교회 청년부 찬양 때 실제로 메들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작사· 작곡자가 동일하고 굉장히 좋은 조합임. (단, 전자곡은 극초반만 빼면 나머지 가사는 성경이라기보다는 구원 카테고리에 더 가까운 내용이다.)
  • 내 주의 보혈은 → 이 세상 험하고: 서로 다른 작곡자의 곡이지만 리듬과 멜로디가 아주 비슷하며, 구원에서 신뢰와 확신 카테고리로 주제가 잘 넘어간다.

3.
끝으로, 이건 멜로디가 아닌 가사 얘기이며, 번역도 아니라 영어 원가사 얘기이다.
찬송가 가사 중에는 영어로는 "예수님은 내 꺼"라는 표현이 있다. 그것도 옛날 클래식 찬송가에 말이다.

  • My Jesus, I love Thee, I know Thou art mine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 Blessed assurance, Jesus is mine!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높임법이 존재하고 소유에 대한 개념이 보수적인 한국 및 한국어 문화로는 직역하기가 영 곤란한 대목이다. 사실, 성경적인 용례를 봐도 A is mine은 하나님이 "모든 혼은 내 것이다"(겔 18:4), "금과 은도 내 것이다"(학 2:8), "보복은 내 것이다"(롬 12:19), "첫 열매는 모두 내 것이다"(출 13:2)처럼 '갑'의 소유를 명시하는 게 전부이지.. 을이 갑을 보고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권에서 찬송가 가사를 Jesus is mine이라고 가끔 쓴 것은 다른 서정적인 의미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my Lord, my God, my savior, 심지어 my love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본인으로 하여금 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긴, 아 6:3가 있으니(나는 내 애인 것이고, 내 애인도 내 것이다) 이런 용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1/25 08:36 2015/11/2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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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기 2015/11/28 17:54 # M/D Reply Permalink

    '아무 흠도 없고'도 3+3+4+3=13마디인 홀수 마디의 3박자 곡이지요.
    말씀해 주신 부분처럼 저도 이 노래는 4+4+4+4=16마디로 편곡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끼곤 합니다...
    올려주신 글이 정말 공감되네요.

    1. 사무엘 2015/11/28 19:07 # M/D Permalink

      "아무 흠도 없고"는 한술 더 뜬 구조군요 정말.. ㅠㅠ
      마디 수는 그렇고 박자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흔한 기보 형태인 갖춘마디가 아니라 못갖춘마디가 더 정확한 기보라고 하죠. 찬송가가 아니라 다른 싸제(?) 복음성가나 악보집에서는 못갖춘마디로 적혀 있기도 합니다.
      다른 전문 반주자/기독교 음악 전문가분과 얘기를 나눠 보면 저런 것들에 대해 오래 전부터 문제 의식을 느끼고 계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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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청년부 찬양

본인이 다니는 진리 침례 교회에서는 오전 예배 때 평소엔 중· 장년층 위주로 구성된 찬양대가 설교 직전에 특별 찬양을 한다. 그러나 매월 넷째 주에는 청년부가 특별 찬양을 한다.

수 년 동안 청년부는 중· 장년부 찬양대 중 하나를 지휘하는 음대 유학파 출신의 전문가 자매님에게서 지휘를 덤으로 받았다. 그러던 것이 약 2~3년쯤 전부터 선곡을 청년부에서 독자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지금으로부터 1년쯤 전부터는 완전히 독립(?)을 했다. 외부 인사의 개입 없이 청년부 지체들의 재량만으로 완전히 독자적으로 선곡과 연습, 지휘까지 해서 매달 강단에 서게 되었다. 원래 계시던 지휘자분의 일신상의 이유가 있었고, 또 청년 중에도 작곡까지 할 줄 아는 걸출한 다른 음악 전문가가 등장한 덕분이었다.

독립을 앞두고 이미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했다. 피아노와 플룻에 능숙하고 영어권 교회에서 사용하는 old-style 찬송가를 많이 아는 자매가 있어서 새로운 곡을 가사를 같이 번역해서 불러 보기도 했다. 한편, 작곡가인 그 형제는 우리 교회의 표어인 고후 13:8, 그리고 KJV 성경 공부 모토인 딤후 2:15 구절에다가 곡을 붙여 부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서 완전히 독립을 한 뒤부터는 본인과 그 작곡가 형제가 격월 교대로 친구들을 모아 놓고 선곡· 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 형제도 매달 꼬박꼬박 청년부 찬양을 책임지는 건 부담스러워했고 격월 정도 간격이면 괜찮겠다고 동의를 했다. 사실, 청년부에서 피아노를 잘 치고 음악 쪽으로 재능이 있는 친구들은 중· 장년부 찬양 연습을 할 때 반주자로 동원되기도 하고 주일학교 어린이 찬양을 지휘하기도 한다. 즉, 청년부 자체의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위 아래 연령의 다른 부서로 지원 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직분에 대한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본인은 음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기악과 성악 어느 것도 전문적으로 깊게 배운 경험이 없다. 피아노는 다른 프로페셔널한 반주자들이 모두 부재 상태일 때 최하 우선순위로나 가끔 투입되는 "예비/스페어" 반주자 수준밖에 안 된다. 노래도 오로지 악보에 있는 대로 기계적으로 크고 정확하게 부를 줄만 알지 다른 기교나 감정 이입 테크닉, 성대 관리 같은 건 모른다. (그런데 내 경험상, 회중 찬양 인도는 그 정도만 돼도 할 만하긴 했다.. 지구력만 뛰어나면 되지 너무 잘 부를 필요는 없으니까. ㅎㅎ)

지난 1년 동안 본인 차례 때 우리 청년부가 부른 찬양은 다음과 같다.

1. 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

2014년 8월, 자체적으로 찬양을 준비한 첫 시간이었다. 이 때는 딴생각 할 것 없이 그냥 주찬양 6집에 있는 송 명희 작사· 최 덕신 작곡 CCM을 4성부 원곡 악보로 구해서 하나도 안 바꾸고 그대로 불렀다. 가사가 좋고(사랑과 고백 카테고리) 곡이 그리 어렵지 않고, 길이도 2분 50초 남짓으로 짧아서 모든 면에서 적절했다. 간주 중에는 악보에 있는 대로 플룻 연주를 넣었다. 첫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2. CCM 메들리 (나의 사랑 나의 생명 +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 보라 그 날이)

짤막한 노래들을 여럿 묶어서 멀티테마 메들리를 시도했다. 앞으로 또 다른 창의적인 메들리를 편성해서 부를 일이 있으면 좋겠다.
<나의 사랑 나의 생명>은 위에 여자 파트와 밑에 남자 파트가 돌림노래 하듯이 달라지는 노래이고, 이런 스타일의 곡이 <보라 그 날이>라고 하나 더 있음을 주목했다. 전자는 사랑과 고백이고 후자는 재림 내용이니, 중간에는 경쾌하고 뭔가 청년스러운 젊음과 열정, 헌신이 담긴 가사의 곡을 넣었다. 1곡과 2곡 사이에는 전주가 있지만, 2곡과 3곡은 전주 없이 곧바로 이어지게 했다. 그리고 각 곡의 권장 템포까지 미리 정해서 반주자에게 알려 줬다.

3. 주 임재 안에 늘 살아갈 동안 (Lord Jesus, I long in thy presence to live)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선곡했다. 첫째, 멜로디가 Away in a manger(그 어린 주 예수)라고 성탄 찬송곡과 동일하기 때문에 12월 말이던 당시 분위기와 "기분상" 잘 어울린다.
둘째, 곡과는 달리 가사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님의 임재를 회고하고 앞으로도 보호를 간구하는 내용으로, 이 역시 연말에 부르기에 적절하다.

성탄 찬송 Away in a manger는 같은 가사에 비슷한 분위기의 곡이 두 개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곡의 시작, 중간, 끝에 두 곡을 적절히 섞어서 변화를 넣었으며, 중간에 조가 반음 올라가는 것도 악보를 일일이 따로 만들어서 시도해 봤다. 이렇게 비슷한 스타일로 편곡을 한 외국의 다른 성탄 찬양 음반에서 컨셉을 착안했다.

4. 말씀 찬송 메들리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주 말씀 동산 안에는)

우리 교회가 특별히 킹 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이다 보니 특별히 이 분야를 공략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과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은 작사· 작곡자가 동일하고 조와 박자도 비슷하니 당연히 한데 엮었다. 다만, 전자는 1절 앞부분만 말씀과 비슷하고 나머지는 그냥 구원 카테고리에 가까운 가사이므로 전자를 앞에 넣고 후자가 뒤를 잇게 했다.

그 다음으로 무엇으로 뒤를 이을까 고민하다가, 침례교 찬송가를 참고해서 <주 말씀 동산 안에는>이라는 신곡을 넣었다.
중간 간주로 <신구약 성경 목록가>를 넣은 뒤 다음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를 부르는 것도 생각했으나, 여건상 실행되지 않았다.

5. CCM 메들리 (자기를 위하여 +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복음서에 기록돼 있는 예수님 말씀, 특별히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이 컨셉이었다. 찬양이라기보다는 영적 노래에 가깝고 찬송가가 아닌 CCM 스타일.
그래서 이번 메들리에 동원된 두 곡은 음악 구조가 아니라 가사의 유사성 때문에 선택됐다. 또한, 전반부는 "자기를 위해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요런 진지한 내용으로 시작해서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먼저 구하라"뿐만 아니라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는 균형을 추구하기도 했다.

1곡은 주찬양 6집 앨범의 곡이다. 다음 2곡은 Karen Lafferty의 유명한 돌림노래이니 우리 역시 돌림노래 형태로 명랑하게 잘 불렀다. 단, 킹 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마 6:33을 인용한 부분에서 he를 God로 바꿔 줘야 하는데 한국어로는 음절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6.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죄사함, 보혈, 십자가가 나오는 아주 베이직하고 클래식한 구원 찬송. 멜로디는 A A B A B A 패턴으로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고 쉽다. 그러나 가사는 그 이상으로 굉장한 고퀄이고 정확한 교리가 담겨 있고 애절하고 감동적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누가복음을 인용하여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가 2절에서 나오고, 보통 찬송가 책들은 요일 1:7을 참고 구절로 써 놓곤 했다. 그러나 나는 요 9:35-38의 맹인 이야기를 이 찬송과 특별히 연결하고 싶었다. 후렴에 "나 믿노라"가 나오니까. 그래서 간주 중에 이 구절을 형제 두 명이서 교독시켰다.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그분께 경배하니라."

아울러, 곡의 시작 부분('그 참혹한 십자가에')이 <찬양하라 내 영혼아>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부분과 멜로디· 박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본곡을 시작하기 전에 <찬양하라 내 영혼아>를 끼워 넣을까 생각도 했다.

7. 왕이 오신다

가장 최근에 불렀던 곡으로, 이번에는 재림· 소망 카테고리를 다뤘다.
이건 국내의 킹 제임스 독립 침례교회 진영에 있는 임 동선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창작곡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씩씩한 분위기의 곡에 세 절의 가사가 지상· 공중 재림을 차례로 다루고, 다음 결론으로 세상의 끝이 오기 전까지 혼을 구원하는 일에 애쓰라는 권면으로 끝나서 좋았다. 가사가 다루는 타이밍이 뒤로 갈수록 미래에서 현재로 가까워지는 셈이다. 아울러, 후렴 가사가 계 22:20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으로 끝나는 것은 덤.

휴가를 떠나고 없는 인원이 많아서 참여자가 평소보다 적고 연습 시간도 부족했던지라 딱히 기교나 변화를 많이 넣지는 못했지만, 녹화된 걸 들어 보니 발성과 화음이 잘 배분되었고 들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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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또는 다다음 달에는 어떤 곡을 부르게 될지는 현재로서는 나도 전혀 모른다. 리서치를 해 봐야 안다.
스타일은 클래식 찬송가, 국내외 CCM, 테마별 메들리 등이고,
소재는 찬양, 예수님, 구원, 십자가, 위로와 평안, 재림과 소망 등~~ 최대한 다양한 곡을 골고루 선곡하고 있다.
메들리도 가사를 중심으로 엮을 수 있고 곡의 스타일을 중심으로 엮을 수 있다.

내가 저런 곡들을 멋들어지게 손수 연주하거나 심지어 작곡을 하지는 못한다. 작곡? 정확하게는.. 하라면 한다. 단지 아무 감흥이 없이 박자와 화음만 맞는 멜로디 나열만 생성될 뿐 가성비가 전혀 수지맞지 않으니 안 하는 것이지. =_=;;

그러나 지난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중 찬송 선곡과 인도를 하느라 찬송가 책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연구하다 보니.. 많은 기존 찬양곡들이 연관 검색이 되는 게 좋다. 성경을 성경으로 이것저것 대조하는 것만큼이나 찬양곡들도 이것저것 대조하고 분류하고 종합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우리 교회에서 쓰는 찬송가 책엔 내가 아는 곡뿐만이 아니라 아직 미개척 상태인 곡들도 차고 넘친다. 현재로서는 가까운 미래에 선곡 아이디어가 고갈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정확하게 언제 구원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지난 수 년 동안 내 마음에 맞는 애창곡은 수 년째 구원 카테고리에서 배출되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 중엔 위로와 평안, 신뢰와 확신 카테고리를 가장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난 내 개인 취향과는 별개로, 공예배 때 다같이 부를 찬양곡은 앞서 얘기했듯이 최대한 골고루 균형 있게 선곡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 작곡가 형제는 자기 차례일 때는 역시나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스타일로 선곡을 하곤 했다. 그러니 음악의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고 무궁무진함을 느꼈다. 자유도가 너무 높아서 컴퓨터가 사람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 게임인 바둑처럼.

음악이 인간의 심리와 정서에 많은 영향을 주는 물건이다. 찬양을 꼭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주로 쓰이는 매체가 음악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좋은 음악, 영양가 있는 노래만 듣거나 부르고 지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본인은 이것을 이용해 감히 하나님을 찬양할 특권을 받고 그럴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찬양 내지 영적 노래는 그야말로 내 음악 감각과 재능, 성량을 총동원해서 최고의 예우를 해서 부른다.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이런 찬양도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가사 내용을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삶의 간증을 통해 이런 가사를 직접 쓰고 멜로디를 무에서 창조해 낸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물며 줘도 못 먹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아무쪼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찬양, 건전한 영적 노래들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많이 만들어지고 불리고 노하우가 전수되었으면 좋겠다. 저 북쪽 동네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마음 놓고 찬송 한 곡 좀 불러 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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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5/11/08 08:33 2015/11/0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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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극은 있다 (the Gap Fact)

본인이 번역한 신앙 서적이 하나 출간되었기에 오늘은 이곳에서 소식을 좀 전하고자 한다. 제목은 <간극은 있다>이다. 부제는 "루시퍼의 죄로 인해 야기된 홍수에 대한 성경적 해설".

원서의 저자는 Perry Demopoulos라는 미국 출신의 우크라이나 선교사이다. Gap Fact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책이 나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성경적 과거 연대기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창 1:1-2 사이의 '간극'을 다루고 있다.

세상에서는 창 1:1-2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카더라"라는 차원에서 '간극 이론'(gap theory)이라는 용어가 통용된다. 그러나 간극을 성경적으로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건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간극은 겨우 이론· 학설 따위가 아니라 확고한 진리이고 팩트이기 때문에 이들은 gap truth 내지 gap fact라는 말을 쓴다. 그 뉘앙스를 본인은 서술형으로 좀 의역해서 "간극은 있다"라고 책 제목을 뽑았다.

본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자로서 창세기 1장이 말하는 6일 창조는 정말 말 그대로 24시간 문자적인 하루 단위였다고 믿으며, 지금으로부터 6천여 년 전의 아담 이전에는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여기까지는 소위 말하는 '창조 과학회'라는 단체가 주장하는 것과 견해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지구와 우주 전체의 역사는 인간과 '현 세상'의 역사만치 짧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짧아야만 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 세속 과학과의 타협이 아니라 성경 교리를 토대로 내리는 결론이다.

창조 과학회는 그야말로 '젊은 지구, 젊은 우주' 덕후이다. 생명의 기원에만 신수설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천문· 지질학의 연대 측정 방식까지 모두 부정하며, 오로지 '노아의 홍수'만으로 모든 지질 이변을 설명하는 걸로 유명하다. 본인은 걔네들이 주장하는 과학 디테일에 대해서야 크게 관심이 없다. 불신자들이 알아서 가루가 되도록 반박하고 까고 있으며 본인의 신앙 역시 거기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창조 과학회는 성경 믿음을 수호한다고 하면서 성경 믿음에 대한 팀킬까지 야기하고 있다는 게 나 같은 신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큰 문제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화론이란 곧 비인간적인(?) 적자생존 약육강식이고 피흘림과 죽음이다. 걔들은 잘 알다시피 진화론이 단순한 무신론을 넘어 나치즘과 공산주의 등 온갖 악한 사상의 근간이 됐다고까지 공격할 정도로 진화론을 완전 극혐한다.

뭐 인간이 원숭이나 아메바로부터 진화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처음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는 건전하고 좋다고 치자. (여기서 '원숭이나 아메바' 따위에 트집 잡는 진화론자가 없길 바란다. 공통 조상이야 그 무엇이 됐건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튼 저절로 '진화'를 했다는 게 중요한 키워드임.)
그런데, 그런 이념을 몰아내려다 보니 그들이 읽는 창세기 1장엔 그 어떤 일체의 죄, 타락, 심판, 사망 같은 부정적인 심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장의 배경엔 무조건 반드시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만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얘들은 "죄의 원조 = 오로지 아담"에 완전히 꽂혀 버렸다. 선악과를 시간적인 순서상 제일 먼저 먹은 건 아담이 아니라 이브이고, 인간보다도 루시퍼라고 불리던 사탄 마귀가 먼저 죄를 짓고 타락했는데 그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도대체 어쩌다가 주객이 전도된 그런 오류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 이름도 유명한 롬 5:12는 너무 당연한 얘기이지만 최초로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 뿐,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통틀어서 죄라는 걸 처음으로 지은 인격체(사람뿐만 아니라 영적 존재들까지 포함)에 대한 문맥이 아니다.

재창조· 간극을 안 믿는 사람치고 사탄은 정확하게 언제 창조되어 언제 타락했고, 쫓겨나서는 어디로 갔는지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전혀 없다. 물과 어둠은 언제 창조됐는지, 6일 창조 중 둘째 날에만 "보기 좋았더라"라는 말이 왜 없는지 같은 것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탄은 교만에 빠져서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반역을 저지르는 그야말로 엄청난 죄를 지었다. 그런데도 처벌을 받긴 한 건지 행동 반경에 별다른 제약이 없이 잘만 살아 있다.
그 반면 사람은 어떤가. 이브는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겨우 금지된 선악과 하나 좀 먹는 아주 소심한(?) 죄를 지었을 뿐이다. 아담은 이브보다 더 고의로 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어기긴 했지만, 사랑하는 이브가 저 지경이 돼 버렸으니 차라리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같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이 지은 최초의 죄에는 최소한 교만이나 신성모독 같은 괘씸죄 요소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담 부부는 그 날로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창조 세계가 와르르 타락해서 이 모든 고생이 시작되고, 그야말로 후손들의 인류 역사가 모조리 꼬여 버리는 헬게이트가 시작됐다.
사람과 사탄의 처분을 비교해 보면 이거 좀 형평성이 심각하게 안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본인은 옛날엔 이 논리를 들추면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던 불신자를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아담의 죄가 사탄의 죄보다 격이 낮고 죄질이 가볍다는 사실은 오직 킹 제임스 성경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창 3:5가 '하나님(God)처럼 되어'가 아니라 '신들(gods)처럼 되어'이기 때문이다(사 14:14와 비교해 볼 것!).
더구나 사탄 마귀의 옛 이름인 '루시퍼' 자체도 킹 제임스 성경(사 14:12)에만 존재한다. 얘는 단순히 바빌론 왕이 아니라 진짜 사탄에 대한 이야기로 이중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NIV도 아니고 이런 엄청난 영적 조명을 얻을 수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 간극을 안 믿는다고? 논리적으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먼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전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거기서 사탄 마귀가 반역하고 타락함으로써 그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벧후 3:6)하고, 땅이 형태가 없고 공허하게(창 1:2) 되었다고 해야만 논리가 맞아 떨어진다. 지금 세상은 6일 동안 새로 "재창조"된 것이며, 에덴 동산에 뱀의 모양으로 몰래 침입해 들어간 사탄은 예전에 누리던 영광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된 상태인 것이다.

재창조· 간극과 관련된 FAQ 중에는 "사람이 죄를 지은 것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회개의 여지를 주시고 예수님 같은 구원자를 보내기도 하셨는데 루시퍼에 대해서는 왜 저렇게 가차없이 쫓아내고 세상을 다 뒤집어엎고 완전히 주적을 삼으신 걸까?"가 있다. 이 의문도 루시퍼와 인간이라는 두 인격체가 최초로 저지른 죄의 죄질을 비교해 보면 바로 답을 얻을 수 있다.
루시퍼는 엄연히 내란수괴인 정치범이다. 제5공화국 장 태완 장군의 대사를 빌리자면, 탱크를 몰고 가서 머리통을 날려 버릴 반란군이요 역적놈의 새X이다. 그 반면, 사람은 생계형 잡범에 가까운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니 법적으로 서로 다르게 처분하는 게 당연한 귀결 아니겠는가? 하나도 어려울 거 없다.

물론 한번 죄에 빠지고 타락이 진행되면서 아담의 후예들 역시 사탄 마귀와 별 다를 바 없는 반란 가담자로 흑화해 갔으며, 이들은 사탄 마귀를 집어넣으려고 만들어진 지옥에 사후에 불청객으로 들어가게 된 건 사실이다. 또한, 그 엄청난 내란 반역죄에 비해 하나님께서 루시퍼에 대한 완전한 심판 집행은 좀 이례적으로 길게 보류하고 계신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사람과 관련된 다른 뜻이 있어서..;;)

이전 세상에는 공룡이 살았건 네안데르탈 인이 살았건, 다른 영적 존재들이 살았건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단지 아담과 같은 호모 사피엔스만이 전혀 없었을 뿐이며, 그 옛날 생명체들은 설령 지금까지 화석으로 남아 있더라도 인간과 유전적인 관계는 없다.

이런 사탄의 죄와는 달리 아담의 죄는 현 세상을 망가뜨리긴 했지만 사탄의 죄처럼 당대 세상을 깡그리, 송두리째 멸망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훗날 노아의 홍수는 코로 호흡하는 지표면의 육상 생물만 절멸하는 수준이었으며, 루시퍼 시절의 홍수와는 규모면에서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창 1:2의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가 대환란 심판 문맥인 렘 4:23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without form, and void"와 표현이 일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박이 따로 없다.
창세기의 소돔 사람들이, 그리고 사사기의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이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한 것은 서로 정확하게 같은 심상이다.
창세기에서 라헬이 죽기 전에 산파가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이 아들을 얻으리라"라고 말한 것과, 사무엘기상에서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기 전에 여인들이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말한 것에는 당연히 동질감이 있다.

그것만큼이나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는 창 1:2와 렘 4:23 공히 명백하게 심판 문맥이고 부정적인 심상이다! 스타 테란 종족으로 치면 SCV가 건물을 짓다 만 상태가 아니라, 파괴된 건물의 잔해인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서 여기저기 네트워크가 형성된 사람이라면 이런 심상을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다.
세속 학계에서도 두 논문에 통상 여섯 단어 정도가 연달아 복붙한 듯이 일치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거의 필연이고 표절을 강력하게 의심하게 된다. 그 잣대를 보더라도 창 1:2와 렘 4:23은 인과관계를 부정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심상을 무시하고, 어둠도 부정적인 게 아니고 중립적이고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거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을 혼동하는 것과 같다. 죄악도 다 하나님의 섭리로 예정된 것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히 왜곡하는 짓이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 뜻에 의해서 이뤄진 것인가? -_-;; 이와 비슷한 급의 혼돈을 정치 분야에다 비유하자면, 북한 체제(수뇌부)와 북한 주민을 구분 안 한 나머지 이상한 방법으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쫓아다니는 짓거리와도 같다.

난 재창조 간극이 없을 때 성경에 야기되는 논리 모순과 부조리들이 아주 빤~히 눈에 보인다. 마치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가 야기하는 모순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공룡 박사이자 열혈 간극 반대자요, 젊은 지구 창조론자로 유명한 켄트 호빈드(Kent Hovind) 씨가 몇 년 전에 엉뚱하게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로 전격 전향한것은 우연이 아니라 동일한 오류에 빠진 결과로 여겨진다. 옛날에 안티오크던가 거기를 비롯해 "간극 극렬 반대 + 교회 환란 통과" 진영을 몇몇 본 적이 있다. 거기는 그렇게 같은 영인 것 같다.
성경 교리 체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 지금이 무슨 공룡 발자국 화석이 인간과 같은 시기네 뭐네 한가롭게 따질 때가 아니다.

눈에 도대체 뭐가 씌여서 이런 건전한 교리가 별 희한한 거짓 고소와 중상모략으로 매도되고 있는지 참 기가 차고 통탄할 노릇이다. 젊은 우주(지구)는 너무 무리수다 싶어서 아예 창세기 1장의 6일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포기하는 것보다야, 그 6일은 그냥 냅두고 간극만 설정하는 게 100배 이상 더 건전한데도 말이다.

사실, 재창조 교리도 아담 이전의 세상에 대해서 아주 상세한 디테일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에, 세속 과학과 여전히 맞지 않는 게 있을 수 있고 선뜻 믿어지지 않는 시나리오가 있을 수는 있다. 간극 반대자들의 트집 역시 성경 해석 쪽이 아니라 이런 지엽적인 과학 디테일 쪽에서 많이 나오기도 한다.
허나, 우리가 무슨 문자적인 24시간 6일 창조를 믿지 않는다는 둥, 아담 이전부터 인간이 살았다고 주장한다는 둥, 있지도 않은 소설을 근거로 비방을 하지는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본인은 이런 마음을 담고 정말 없는 시간을 쪼개어 최고의 속도와 최고의 품질로 번역을 했다.
회사 다니면서 학교 다니고, 일요일엔 교회에서 하루를 다 보내고, 그러고 남은 개인 시간엔 몽땅 한글 입력기 개발하고.. 글감이 있으면 개인 블로그에다 글까지 꼬박꼬박 써 올리고..
그 와중에 도대체 무슨 짬을 내서 방대한 분량의 책 번역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_-;;

다만, 시간 스케줄링에 관한 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저런 극한의 최적화를 한 대신에 본인은 여가와 유흥이라고는 없는 인생을 살아 왔으며, 운동 부족-_- 때문에 키 대비 체중이 증가하고 있어서 고민이다.
그리고 본인은 무엇보다도 30여 년 평생 모솔이다. 정말 시간이 없어서 할 수가 없다.

참 안타깝고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에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해서 보급하는 데 큰 기여를 해 온 모 출판사 겸 교회 진영은 간극을 정당한 이유 없이 그저 반대하며, 자신과 믿음이 다른 진영에 대한 거짓 비방을 일삼고 있다. 반대하는 논리들이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엔 대부분 말이 안 되는 것들이다. 아직도 진화론과의 절충, 유신론적 진화론, 아담 이전의 인간(세상이 아니라) 따위의 케케묵은 레퍼토리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간극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서 그저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이다. 협력할 건 협력하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는 본인 역시 본인의 양심을 걸고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으며 그들의 교리적 오류를 꾸준히 폭로할 것이다. 하다못해 아까 얘기했던 '둘째 날', 사탄의 타락 시기 이런 거 해명이나 좀 하고서,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고서 자기 주장을 했으면 싶다. 거짓에는 논리와 팩트가 답이다.

창 1:1-2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은 성경에 스타에 대해서 "처음에 저그 해처리에서 저글링이 나오니라. 그 저글링은 발업이 되고 *and* 아드레날린업이 되었느니라." 라는 구절이 있는 것과 같다.
발업은 스포닝 풀을 지은 순간 바로 가능하지만, 아드레날린업이 되기까지는 그 사이에 레어업에 퀸, 하이브업까지 어마어마한 테크 간극이 필요하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이런 스타일로 기록된 문장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간극이고 말이다(예: 사 61:2).

진리가 다른 진리와 모순을 일으키고 다른 진리를 파괴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다.
부디 gap이라는 fact가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로 돌아오고 성경의 깊숙하고 은밀한 주제에 대한 안목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본인은 제프리 티벳의 <창 1:1-3 주석>도 번역했으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거의 재창조 교리 전문가 및 간극 에반젤리스트-_-처럼 활동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1/05 08:25 2015/11/0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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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국현 2015/12/17 20:25 # M/D Reply Permalink

    누가 제게 "창조와 재창조 중에 어떤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현재로서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주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아무래도 마귀가 한 때 천사였지만 타락했으며, 그는 아담과 이브를 속여 죄를 세상에 들여 오게 했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 지옥으로 보내고 있으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유혹해 상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한다.

    위와 같은 내용에 비해 마귀가 타락한 시점은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보니, "언제" 타락했다는 부분은 그냥 "사람보다 먼저"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되도록 성경이 기록된 것 같습니다.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마귀의 타락 시점은 클래스의 private 영역 같은 것. 소설로 치면 prequel의 느낌이라 지금 가진 자료로는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한데, 과연 그 추측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나중에 그것을 만드신 분께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기. 항상 기뻐하기. 꾸준히 기도하기.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 같은 것에 우선 신경을 쓰고 있느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언젠가 시간 나면 알아 볼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선은 뒤로 미뤄 놓았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조사해 보고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네요.

    1. 사무엘 2015/12/17 22:46 # M/D Permalink

      클래스로 치면 private 멤버처럼 느껴지고요(^^), 또 어머니로부터 "니 이전에 원래 형이나 누나가 있었는데 유산/사산되고 없다. 너의 이름은 사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재사용해서 지은 것이다. 이젠 너도 충분히 컸으니 이런 비화를 알려 준다" 같은 얘기를 듣는 것과도 비슷하죠.

      거리 설교를 한다거나 남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기원과 죄의 기원 얘기를 하다 보면 도대체 사람의 잘못은 무엇이고 마귀의 잘못은 무엇인지를 분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현 세상과 6일 창조밖에 없다면 성경 논리가 말이 되질 않지요.
      이전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고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나중에 주님께 여쭤 볼 사항입니다만, 이전 세상의 심판과 멸망, 간극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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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Trivia -- 下

0.
이번엔 먼저 난센스 퀴즈 개드립부터 좀 시작하자. 노아(성경에 나오는)의 아내의 이름이 무엇일까?

정답은 잔 다르크.
저 이름은 잘 알다시피 '아르크의 잔/요안'이라는 뜻이며, Arc(아르크)는 ark(궤, 방주)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아 제기랄....;;; 아무리 난센스라지만 그 병맛스러움은 이말년 서유기에서 나타태자가 시전했던 희대의 병맛 퀴즈,
궁예가 몰고 다니는 승용차의 이름은? 애꾸스
지금 인도는 몇 시일까? 인도네시아
귀가 불타면? 타이어. (이건 뭐 그... 거북선, 소방관, 포크레인, 활명수던가.. 그 초병맛 그림 퀴즈의 소재로 써도 되겠다 -_-;;;)

그리고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롬멜 준장이 시전한 초썰렁 퀴즈
네덜란드에 있는 강력한 방어선은? 암스테르 '담'
이 전차가 왜 '3호 전차'일까? '3호선'이면 일산까지밖에 못 가니까.
영국의 수상은 왜 이름이 '처칠'일까? 부인이 일곱 명이어서

에 필적하는 것 같다. 썰렁하게 해서 죄송~~ ㅡ,.ㅡ;;

1.
성경에는 서로 다른 책 내지 다른 문맥에서 굉장히 놀라울 정도로 유사/동일한 표현이 존재하는 쌍(pair)이 있다. 예를 들어,

  • 아들을 낳고는 죽은 산모 이야기는 아들을 낳고는 죽은 산모: 라헬(창 35:16-18), 그리고 이름도 안 나오는 엘리의 며느리 및 비느하스의 아내(삼상 4:19-21)
  • 동성애자들의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 드립: 소돔 (창 19:4-5),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벨리알의 아들들(삿 19:21-22)

이것들은 비록 시기와 장소가 다르지만 심상은 서로 동일하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without form and void는 창 1:2와 렘 4:23이 서로 동일하게 부정적인 심상이다. 시기가 각각 과거와 미래로 다를지라도 말이다.
또한, 창 1:28과 창 9:1의 replenish the earth 역시 "예전에 꽉 차 있다가 비게 된 땅을 다시 채우라"라는 동일한 심상이 존재한다고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2.
성경에서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지만, 결국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로 seamless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는 둘이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는 개념의 쌍이 있다.

  • 무교절과 유월절: 눅 22:1 vs 행 12:3-4. 유월절이 끝난 뒤에 곧바로 무교절이 이어지지만, 가끔은 단일한 명절 series로 취급되기도 한다.
  • 지옥과 불못: 계 20:14. 궁극적으로는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긴 하지만 지옥에 있던 혼들이 다 그대로 불못으로도 가므로 둘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영원을 보내게 되는 장소"라는 개념 하에서는 하나로 볼 수도 있다.
  •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마 19:23-24와 막 10:23-24. 두 왕국은 일면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가끔 성경에서 두 용어가 좀 구분 없이 섞여 쓰인 듯한 곳도 있다. 처음에는 구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는데 유대인의 예수님 거부, 교회 태동, 초림과 재림 사이의 gap으로 인해 더 분명하게 다른 개념이 된 셈이다.

3.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신다. 무슨 마인드 컨트롤 해서 로봇처럼 강제 조종을 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먹고 방향을 결정한 사람이 일단 나아가기 시작하면 거기에 '가속도'를 불어 넣기는 하신다. 마치 자동차의 파워스티어링처럼 일단 핸들을 살짝 돌리기 시작하면 작은 힘으로도 확 돌아가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삐딱서니 타고 반골 기질을 보인 파라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드셨으며, 기타 여러 악인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농락하셨다. 그분은 미혹의 영을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낚기도 하신다. (살후 2:11; 왕상 22)

그렇게 거짓을 믿게도 하실진대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믿도록 우리가 가진 믿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던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주기도 하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욱 수긍이 간다. faith of Jesus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님의 믿음인 것이다.

4.
우리는 무슨 분야에서든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삶의 질은 '지금'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당연히 더 나아진다. 단지, '남들만치'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을 뿐이다. ㅋㅋㅋ
내가 열심히 코딩을 하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예전 버전보다 더 좋아지고, 한글 입력 기능의 범위가 더 확장되고 내가 자아성취와 정신건강에 증가한다는 건 지당한 이치이다. 단지 이거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부귀영화가 찾아온다는 보장이 없을 뿐이다. 음 이건 뭐 자가디스인가.. ㅎㅎ
이건 마치 성경 말씀처럼 들린다.

  • 시험을 피할 길을 내서 너희가 능히 시험을 능히 감당 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지, 시험을 아예 없애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고전 10:13) 크리스천에게 구원의 영원한 보장만큼이나 확실하게 면제· 바이패스가 보장된 건 '그 대환란'뿐이다.
  • 간구를 잘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을 주겠다고 했지, 역경과 고난 자체를 없애고 당장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빌 4:7)
  • 영적으로 복을 주신다고 했고 어찌 보면 크리스천들은 복을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엡 1:3). 사랑도 받았다. 단지, 구약 시대처럼 당장 땅(부동산!)과 재물의 복을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고 반대로, 예수쟁이들은 성경대로 살면 365일 24시간 내내 가시밭길뿐이고 오로지 시험과 고난과 박해밖에 없고 배 쫄쫄 굶는 거지가 된다는 얘기도 아니다(북한 같은 예외· 극단적인 곳이 아닌 한!). 하나님은 그렇게 야박하고 잔인한 분이 아니다. 물질적인 복은 그냥 케바케일 뿐이란 뜻임. 요 21:23에서 제자들의 미래 순교 여부가 그냥 랜덤 케바케였던 것처럼 말이다.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덜 중요한 이런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이나 가변적인 것이다.

이래저래 겉을 남하고 비교하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사람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게 별로 없다. 비교를 굳이 하려면 "저 사람은 평소에 기도와 성경 읽기를 어떻게 하나?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도대체 어떻게 저 상황에서 기쁨과 감사가 나올까?" 이런 걸 벤치마킹하고 자기에게 도입할 생각을 해야 한다.

5.
(사람을 채용할 때는) "또 그 사람의 '구글다움(googleyness)' 여부를 봅니다." (☞ 관련 기사)

여기서 KJV 신자로서 나의 직업병이 0.1초 만에 하나 발동되는데..
성경에서 우리말로 옮기기 난감한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인 godliness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것도 이와 방식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정말 직관적으로 풀이하자면 '신스러운'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하는, 하나님다운.. 정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한때 '경건'이라고 옮기곤 했는데 이건 단순 '독실, 엄숙' 같은 뜻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게다가 반의어인 ungodliness로까지 가면..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불경건'을 쓸 수밖에.

한 가지 확실한 건, 구글 직원이라면 구글다워야 하는 것만큼이나
크리스천에게서는 지식과 행실, 머리와 심장에서 모두 하나님답고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종교적인 연기· 위선이나 정신줄 놓은 광신하고 분간이 안 돼서 오해와 편견이 무진장 많다는 게 문제일 뿐.

6.
로보캅...은 아니고 초대 교회 시절에 사도 요한의 제자라고 알려진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교회 중에 서마나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80대 중반의 나이로 AD 150~160년경에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이라도 예수 믿지 말고 황제에게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면 당신의 나이를 감안해서라도 반역 행위를 없던 걸로 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수님은 내 인생 80년 평생 동안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고 늘 신실하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처음에는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화형으로 방식이 바뀌었다.
불태웠는데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지도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한다. 결국은 칼과 창으로 난도질 당함으로써 순교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폴리캅이 죽을 때 그의 몸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튀어나왔고, 피가 넘치면서 화형장에 붙어 있던 불을 꺼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차돈처럼 하얀 피가 나온 건 아니었고.

그 당시 군중들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저 개독 예수쟁이 뒈져라!"라고 외치지 않았다. "저 무신론자 뒈져라!"라고 외쳤다! 눈앞에 있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어떤 형상 성물도 없고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개념을 이해를 못 한지라 크리스천들을 숫제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온갖 성물 형상들로 가득한 종교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음이 틀림없다.

7.
유대교 신정국가이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부족도 하지 않는 이상한 종교 행위를 해야 했다.
누가 죄를 지었으면 지금 천주교에서 하는 것처럼 고해성사를 하고 죄를 지은 당사자가 자가속죄를 위해 무슨 고행이나 뺑이를 치는 게 아니라, 웬 뜬금없이 흠 없는 불쌍한 가축을 잔인하게 죽이고 피를 쏟고 시체를 불태워야 했다.

구약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설하는 화이트칼라 먹물 문돌이이기만 한 게 아니라, 반쯤은 동물 잡는 백정 같은 일을 하면서 고된 육체 노동도 해야 했다.
그러니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고 모세오경에 기록된 게 있는데, 이걸 보고는 성경이 무슨 장애인을 차별하고 비하하네 이렇게 이상하게 트집잡는 개독안티도 있다. 별로 상대할 가치 없다.

죄라는 건 겨우 고행이나 얼차려로 대충 말소하거나 다른 어설픈 선행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만 대속이 가능한 심각한 사항이며, 그래서 불쌍한 동물의 죽음이 야기되어야 하고.. 죄의 형벌을 받는 지옥이라는 게 저런 뜨거운 불이 가득한 고통의 장소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매일 시청각으로 접하며 지냈다.

요즘 병원이나 제약 연구소의 뒤뜰을 보면 사람을 대신하여 임상실험에 동원됐다가 죽은 동물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고 연구원들이 1년에 한 번쯤은 거기서 쥐나 토끼가 좋아하는 먹이를 얹어서 고사(?)도 지낸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구약 성전 뒤뜰에서는 성전 직원(?)들이 1년에 몇 번이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동물들의 고사를 지내 주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사고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9~10장은 죄사함을 위해서는 동물의 피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불완전하다는 말만 할 뿐,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박애주의(?) 따위와는 억만 리 떨어져 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라.” (히 10:4)

끝으로, 동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상식 차원에서 이미 아는 분도 계실 텐데, 성경은 신구약 66권을 통틀어 고양이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쥐, 개, 여우 같은 주변 동물은 다 등장하는데도. 더구나 성경이 다루는 시기와 지역에 고양이는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부정한 동물로라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8.
구약은 저렇고, 신약 기독교회의 역사에는 피흘린 순교자의 발자취가 있다.
교회가 그냥 세상 정부의 군대 같은 조직이거나 여느 시민 단체와 별 차이가 없었다면, 자기 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그야말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정훈 교육 소재로 써먹어야 한다.

당장 한글 학회는 조선어 학회 사건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조선어 학회 '수난'(그냥 사건이 아니라)이라고 부른다. 자기네 행사가 있을 때는 국민의례를 하고 나서 그때 고초를 겪은 국어학자들(특히 옥사한 이 윤재· 한 징 선생)에 대한 묵념을 추가적으로 한다.
그런 식이라면 교회 예배당엔 주 기철 목사 동상을 곳곳에 만들고 누구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고, 매주 예배 때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묵념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기독교회의 현충일 같은 날도 좀 있어야 한다. 그나마 천주교가 이에 근접해서 각종 성인 성자들을 만들어 놓고 별걸 다 기념하긴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짐승들의 공로와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의 공로 역시, 그게 아무리 크다 해도 예수님의 공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니 둘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순교자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그 많은 순교자들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 볼 사람들이다. 그러니 애초에 영원히 못 볼 사람인양 추모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교훈과 도전을 얻고 예우를 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우상화할 필요도 없다. 그들 역시 똑같은 인간이었고 우리 역시 이미 그들과 동급의 성도(saint. 성인 성자가 아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 구약 유대교: 죽임당한 동물 위령탑 없음
  • 신약 기독교: 순교자 묵념 없음

아울러, 신약 시대에 교회에 존재하는 유일한 의식 내지 규례는 딱 두 가지, (1) 침례와 (2) 주의 만찬이다. 둘 다 예수님의 재림 이전까지만 유효하며, '상징'일 뿐이지 혼의 구원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 에구, 서로 다른 글들을 한데 묶고 편집해서 올리는 것도 고역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15/10/24 08:39 2015/10/2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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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Trivia -- 上

1.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각각 무어라 말할까?
선민인 유대인에 대해서도 죄를 짓고 계약을 위반했을 때는 역사적으로 정말 많이 심판하고 정말 처참한 꼴을 많이 허락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들은 완전히 뿌리뽑히고 멸망하지는 않고, 잡초처럼 처절하고 끈질기게 살아남고 회복되고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는 보장만 해 주셨을 뿐이다.

한편, 이방인에 대해서는 가장 대표적으로 부정적으로 얘기한 예는 가나안 민족과 소돔이다. 전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짐승과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싹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앞뒤 문맥을 모르는 개독안티들이 그걸 트집을 잡을 정도이다. 후자 소돔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이방인에 대해서도 의외로 긍정적으로 나온 게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비록 유대인 같은 명시적인 율법을 받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들어서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얘들도 기본적으로 알 거 다 알았다. 살인이나 간음죄를 저지르면 안 되고, 그랬다가는 천벌과 인과응보를 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나?"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 아비멜렉(창 20:4-5)은 간음이 죄라는 것을 뼛속까지 숙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다. 26장에 나오는 다른 아비멜렉도 마찬가지.
  • 이방인이던 아하수에로 왕의 측근들은 남편과 아내와 가정의 영적 질서에 대해서 우리처럼 바울 서신을 보지 않고도 잘 알고 있었다(에 1:17,18).
  • 요나와 같은 배를 탔던 이방인들은 살인을 저질렀다가는 자신들이 큰일 난다는 관념이 박혀 있었다(욘 1:14).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 전에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지를 보라.
  • 바울을 맞이했던 미개한 백성들도 살인을 저지르면 반드시 천벌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행 28:4).

2.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인 포함 온갖 민족들을 심판한 정복자였으며 어찌 보면 유례를 찾기 힘든 개막장 폭군이었다. 역사상 "꿈 내용이 생각은 안 나는데 어쨌든 니들이 내 기억을 복원해서 해석까지 안 해 주면 몽땅 뒈질 줄 알아라" 이런 짓거리를 한 군주가 있었던가? -_-;;

그런데 그런 막장인 것치고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도 많이 나오고 성경에서의 묘사가 꽤 호탕하고 긍정적이다.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께서 "나의 종"(렘 43:10)이라고 불러 주셨다.
게다가 미쳐서 소처럼 됐다가도 다시 왕위를 회복까지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느부갓네살은 출애굽기의 파라오처럼 성경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예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개인은 궁극적으로 아마 구원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 독특한 인물이다.

3.

  • 에스더: 법을 지키는 것, 예전 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개념 차이를 보여 준다. 권위의 영적 의미에 대한 좋은 조명을 준다.
  • 요나: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이를 초월한 구원 이념을 가르친다.

4.

  • 미래에 대해서: 이 구절은 아직 성취된 예언이 아니라 더 멀리 재림 때가 돼서야 성취될 사건이다.
  • 과거에 대해서: 이 구절은 노아의 홍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옛날 이전 세상 시점의 일이다.

생물학적인 남녀와 부모· 자녀 관계가 있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부터 아버지와 아들 개념이 있었고, 남녀간의 사랑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성품에 사랑이 존재했다.
그런 것처럼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24시간짜리 낮과 밤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전우주적인 빛이 있었고 빛과 어둠의 분리로 인한 낮과 밤이 있었다. 6일 창조 중 첫째 날에 나오는 낮과 밤은 넷째 날에 나오는 낮과 밤하고는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다. 성경은 가시적인 만물과 비가시적인 영적 만물이 서로 나란히 대칭을 이룬다는 비례와 예표 원리를 줄곧 가르친다.

5.
성경에는 잘못 해석할 경우 의미와 뉘앙스가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는 지뢰밭이 몇 군데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용어부터 살펴보면, '누룩', '불 침례' 같은 건 긍정적인 심상이 절대로 아니다. 마 3과 눅 3에서 나오는 불 침례는 지옥에서 온몸이 불에 활활 타는 걸 얘기한다. 절대로 불 같은 성령의 권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아마 '불꽃'의 모양처럼 갈라진 혀(행 2:3)랑 헷갈린 것 같은데.. 성경의 묘사는 그게 전부이다. 좌우 문맥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그리고 크리스천 개인의 작지만 소중한 믿음, 희생, 헌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으면 '겨자씨' 내지 요 12:24에서 모티브를 따서 차라리 '밀알'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하다. 그 반면 누룩은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존재이다. 누룩이 들어가서 온 빵이 부풀었다는 비유(마 13:33) 역시 교회의 기형적인 팽창과 부패와 변질을 얘기하는 것이지, 무슨 복음 전파나 하나님 나라 확장 같은 긍정적인 얘기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누룩 선교회'도 있다고 한다. 헐.. -_-;; IT 기업이 "버그 소프트웨어" 내지 "BSOD 시스템즈" 이렇게 상호를 지은 것과 비슷하다.

하긴, 똑같은 겨자도 마 17:20의 '겨자씨만 한 믿음'은 긍정적인 반면, 마 13:31-32에서 '겨자가 나무가 된 이야기'는 부정적인 묘사이니 이것도 참 절묘하다. 그건 누룩과 마찬가지로 변질과 부패를 가리킨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를 정면으로 거스른 현상이며, '공중의 새' 역시 성경적으로 심히 부정적인 심상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계 18:2)을 떠올린다면 심상이 100% 동일하지는 않아도 얼추 맞게 연결된다.

이런 '누룩'과 동일 선상에서 하나 더 첨언하자면, '썩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썩음'(corruption)은 행 2:27, 행 13:34-37, 롬 1:23, 고전 15:42, 벧전 1:23 등 성경에서 일관되게 매우 부정적인 심상이며 크리스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요 12:24와, 심지어 고전 15:36도 뿌려진 씨앗은 떨어져서 그냥 '죽는다고' 했지, 죽어서 굳이 썩는다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크리스천은 단어를 선택할 때도 주의를 매우 기울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살후 2:7의 막고 있는 자, 계 6:2의 흰 말 탄 자는 적그리스도이지 예수님 같은 좋은 쪽이 아니다. 다니엘서에도 이렇게 주객이 뒤바뀔 여지가 있는 예언이 나오는데 당장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변개된 성경들은 사 14:12에서 루시퍼의 정체를 감추고 아예 마귀에게 예수님의 칭호를 부여하거나(계 22:16), 혹은 예수님을 저렇게 심판 받는 나쁜놈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6.
성경에서 "어, 왜 이럴까?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잠시 생각을 좀 해야 하는 대목으로 본인은 다음 장면들을 꼽겠다.

  • 히브리 산파의 거짓말(출 1:17-20)과 라합의 거짓말(수 2)
  •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
  • 일한 시간과 무관하게 같은 보수를 받은 포도원 일꾼 비유(마 20)

상반된 진술이 동시에 나오는 부분으로는

  •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라 vs 대답하지 말라 (잠 26:4,5)
  •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의사들에게 구했더라"(대하 16:12) vs "네 위장을 위해 약 처방을 하라"(딤전 5:23)

이것 말고 예가 더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문맥 분간을 잘하고 잘 "나눠야" 하는 대목들이다.

7.
성경에는 김대기스러운 '적절하게'가 바울 서신에서 두 번이나 나온다. (고전 6:12; 10:23)
그리고 성경에는 "A가 B와 대응하는데 하물며 C와 대응할 D는 어떻겠느냐?" 요런 비례식 논법이 신구약을 통틀어 즐겨 쓰인다 바울도 자주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는 "유대인들의 삽질과 실족만으로도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줬는데 하물며 쟤들이 잘되면 얼마나 복이 크겠는가?"(롬 11:12)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요 표현을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8.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 12:6)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함과 보존 약속에 대한 근거를 논할 때 KJV 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순수함이 금속 가공에다 비유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여기서 은을 try하고 거듭 purify했다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제련’일까 ‘재련’일까?
우리말에서 ㅐ와 ㅔ의 발음 구분이 문란해지면서 외래어 표기와(데미지/대미지?) 일부 고유어의 스펠링까지(결제/결재? 메다/매다?) 오락가락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제련/재련도 대표적인 예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시 12:6이 말하는 작업은 ‘제련’이다. 제련은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서 금속을 뽑아 내는 일을 말한다. 석유로 치면 원유를 분별 증류하여 휘발유, 경유, 등유 따위를 얻는 일이다.
그 반면 재련은 일단 주성분이 결정된 쇠붙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또 시뻘겋게 달군 채로 두들기고 찬물에 확 담그는 작업을 말한다.

딱히 칼이나 낫 같은 물건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제철소에서 하는 일, 특히 금속의 순도와 관계가 있는 일은 전부 ‘제련’이다. 재련의 용례는 거의 대부분이 제련의 잘못이다. 금속 냉병기를 아이템으로 다루는 국내 온라인 게임들은 이거 용어가 제대로 사용돼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시 12:6이 말하는 것처럼 제련도 반복 작업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닥치고 용광로에서 다 녹여 버리는 제련과는 달리, 재련은 정말 말 그대로 두들기고 달구고 식히는 등 마치 사우나를 하는 것 같은 ‘연단/단련’의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련을 받은 뒤에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같은 구절에서는 재련을 연상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이 ‘강철같이 나오리라’가 아니라 ‘금같이 나오리라’이고, 불순물이 없는 pure gold/fine gold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일단은 재련이 아니라 제련을 말하는 것이 맞다. 성경에는 용광로도 지옥뿐만이 아니라 고난이나 연단의 의미가 있다. (잠 17:3, 렘 11:4 등)

Posted by 사무엘

2015/10/21 08:24 2015/10/21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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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이야기

성경은 민족주의, 애국심 같은 걸 지지하고 나라 지키는 전쟁에 대해서도 아주 긍정적인 반면, 한편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에 관한 문맥에서는 그런 이념을 초월하기도 한다. 요나서가 그에 대한 좋은 예이다.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에서 요나를 직접 심층취재를 한 적이 없었으니 오늘은 이 사람에 대해 썰을 좀 풀어 보겠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19세기쯤에 한 조선의 대언자가 이웃 열도의 악명 높은 성진국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요나는 미래에 우리나라를 멸망시킬 적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심정이었다. 박해받고 순교하는 게 두렵다는 차원이 전혀 아니고, 그 원수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게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도망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본의가 아니게 남의 배의 화물을 몽땅 말아먹는 민폐를 끼치고, 큰 고래에게 잡아 먹혀서 죽다 살아나는 체험을 한 뒤에야 더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서 어쨌든 니느웨로 갔다. 그리고 영혼이 없는 “까라면 까” 식의 억지 선포를 시작했다.

완전 흉측한 몰골에 영락없는 거지꼴의 꼰대 한 명이 물고기 입에서 내던져져 나왔다. 이걸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봤다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이 아저씨는 뭐가 불만인지 입은 도널드덕처럼 쑥 튀어나와서 외친다는 말이.. 하나님이고 죄고 회개고 그딴 거 없었다. 오늘날의 거리설교 퀄리티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그냥 “이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다!”였다(욘 3:4).
무슨 꼴이냐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어느 이상한 교회에서 아저씨 두 명이 발가벗고서 트럭 위에 올라타서 “xx년 xx월에 북괴 김 정일은 남침한다”라고 써 붙이고 다닌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김 정일이 살아 있던 시절의 일임)

그런데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런 엽기 퍼포먼스에 니느웨 전체가 멘붕해 버렸다. 그들은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서 나온 어느 초사이언의 외침을 신이 주는 심각한 경고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완전히 겁을 먹고 찔림을 받았다. 그의 외침을 어느 정신병자 미친놈의 저주· 헛소리· 악담쯤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심지어 왕까지 다 금식을 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초유의 부흥이 일어났다(욘 3:5-9). 요나의 입장에서는 머피의 법칙이 최악의 방향으로만 골라서 적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요나는 적국의 영적 부흥을 목격하고는 빡돌았다. 그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내가 완전 개쪽을 감수하면서 니느웨 멸망 예언을 했는데, 이게 이뤄지지 않게 됐으니 난 도대체 뭐가 됩니까..? 배 째세요~ 난 살기 싫소” 하면서 하나님께 앙탈을 부렸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런 골수 민족주의자 요나를 차근차근 일깨워 주는 내용으로 요나서가 끝난다.

저런 요나의 빡침과 앙탈은 어찌 보면 제 발로 삽질을 자초한 면도 있었다.
툴툴 뺀질거리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이행해서 니느웨를 향해서 불편한 진리/진실을 사랑으로 정중하게 전했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회심할 때 자기도 체통이 당연히 섰을 것이니 말이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고 그물을 하나만 대충 던졌다가,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배가 되집히고 그물이 찢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래 배 속에서 요나서 2장의 기도가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드려졌는지는 난 아직 100% 단정을 못 짓겠다. 1~9절과 10절이 And로 시간 순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듯이 보여서. 특히 and 시간 순 병렬은 재창조 주장하는 진영에서 아주 좋아하지 않는가?

단, 요나는 거기서 문자적으로 완전히 끔살당했다가 부활한 것만은 절대 확실하다. 숨도 못 쉬고 독한 소화액이 분비돼 나오는 내장 안에서 도대체 어떻게 며칠을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기괴한 체험 덕분에 요나는 예수님에 의해 인용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고(눅 11:29), 니느웨는 세상에 너보다도 못한 놈들도 있다는 까임방지권(눅 11:32)을 획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이 친히 인증을 했다는 것은 요나는 100% 확실한 실존 인물이고 그의 행적 역시 100% 역사적 팩트임을 의미한다.

* 성경에서 요나를 잡아먹은 큰 물고기(욘 1:17)의 정체는?

킹 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물고기가 고래였다고 풀이를 하셨다(마 12:40). 마치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폭탄이 처음엔 그냥 무시무시한 폭탄인줄로만 알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예 원자폭탄이었다고 계시가 발전한 것처럼 말이다.

고래는 포유류라는 점에서 다른 물고기들과는 차원이 다르며, 창세기에서도 다른 동물들과는 별도로 유니크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온다(창 1:21). 그 창조의 주역이신 예수님이 고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거 뭐 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허나 non-KJV 역본들은 그리스어 '케토스'의 의미 운운하면서 다들 '큰 물고기' 내지 '바다 괴물'(공동번역, NASV, NRSV)로 표현을 바꿨다.

KJV도 구약의 애 4:3에서는 sea monster가 나온다. 그런데 거기서는 또 non-KJV들은 들개, 여우, jackal 같은 다른 육상 동물로 말을 바꿨다. KJV와는 더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 4:3에서는 이 생물체가 자기 새끼들로 하여금 젖을 빨게 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즉, 포유류라는 얘기이며, 포유류라 하면 아무래도 육상 동물이 더 금방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래도 포유류인데? 바다 속에서 알이 아니라 새끼를 출산하고 새끼한테 젖을 주는데?
KJV는 신약에서는 대놓고 '고래'라고 했고, 구약에서는 최소한 바다에 사는 포유류라는 고래의 단서를 던지는 반면, non-KJV들은 두 곳 모두 '고래'의 특성이 훨씬 덜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론 재칼(jackal)이라는 단어도 참 오랜만에 듣는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접한 곳은 알라딘 2의 I'm looking out for me 노래 직후에 나오는 대사에서. 어렸을 때는 "... dinner for the jackals!"밖에 못 들었지만 지금은 앞부분의 "Steal from us again and your scrawny body will be..."까지도 들린다. 시장터에서 깽판 치던 앵무새 이아고에게 어떤 상인이 협박하는 말이다. "한 번만 더 여기 물건 손댔다가는 네놈 몸뚱아리를 고기로 만들어서 들개들에게 줘 버리겠다!" -_-;;

Posted by 사무엘

2015/09/28 08:34 2015/09/2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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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국현 2015/10/23 07:54 # M/D Reply Permalink

    유명한 사이트에서 요나가 기도한 시점에 대한 글을 읽고 저도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는 수밖에 없겠다"였습니다.

    out of라는 것이 완전 바깥을 의미하지는 않고, 안에서 밖으로의 벡터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로 창세기 2장에 이 표현이 처음 나오는데, "강 하나가 에덴'에서 나가'"에서 '에서 나가'가 있습니다. 에덴 동산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는 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먹히고, 죽고, 지옥에 가고, 깨어나고, 기도하고 순으로 일이 진행되는데, '깨어나고'가 물고기가 요나를 뱉기 전이라면 뱃속이 맞고, 뱉은 후에 깬 것이라면 배 바깥이 맞습니다. 다만 이 둘 다 이제 배에서 나올 때 쯤 일어난 일이라, 뭐가 맞는지는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 사무엘 2015/10/23 12:27 # M/D Permalink

      out of는 일종의 벡터 같은 심상~~! 표현이 참 맛깔 납니다. ^^ 가끔은 from하고 비슷한 뜻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된 성경 해석 논쟁도 많지요.
      저 구절에서 핵심은 요나는 물고기가 자기를 뱉기 전에 살아났느냐, 아니면 완전히 그 뒤에 살아났느냐가 됩니다. (기도를 드린 장소)
      성경의 시간 순 전개를 보면 전자인 것 같은데, 뱉기 전에 살아났다면 그 상태로 오래 견디지 못하고 또 죽게 됐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은 텀을 두고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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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라 vs 하지 말라

세상의 법이나 규칙 같은 것은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하라'(do)보다는 '-하지 말라'(don't) 위주로 만들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시험 문제야 학습자의 심리적인 영향을 감안하여, "-틀린 예는?, -아닌 것은? -없는 것은?" 같은 부정적인 문제는 일정 비율 이상 만들지 말라고 하는 가이드라인이 있다. 그러나 법률은 아무래도 죄를 다루고 사람의 재산과 생명을 다루다 보니 심각하고 부정적인 말이 많다.

자동차나 총기, 전기톱, 독극물 같은 위험한 물건의 취급 설명서는 온갖 오· 남· 악용 상황을 금지하는 주의· 경고문으로 가득하다.
복싱은 룰의 태반이 금지 반칙 조건의 리스트라고 한다. 그 덕분에 위험한 격투기이면서도 신사의 스포츠로 품위가 유지되는 듯하다.

프로레슬링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Please, don't try this"(제발 따라하지 마세요!)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대표적인 don't 규칙이다. -_-;; 옛날에는 at home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저건 다~ 전문가들이 지극히 통제된 환경에서 각본 다 짜서 하는 액션이고, 그러고도 후유증이 쌓이고 가끔은 안전사고도 나니... 일반인이 현실에서 따라할 생각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뜻으로 home을 붙인 것이었다. 그런데 "응? 집이 아니면 학교나 도장에서는 해도 된다는 얘기네?" 이렇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서 사고 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지라 at home은 나중에 빠지게 됐다.

don't에 비해 do 법은 "납세나 병역 따위의 의무를 수행하라" 말고는 흔치 않다.
세상법에서는 어린 자녀를 제대로 먹이고 재우고 치료하지 않은 것 정도가 꽤 적극적인 do 법의 위배이다. 이것 말고도 선한 사마리아인 법도 만드네 마네 하는 말이 있지만, do 법은 아무래도 마음의 동기를 측정 가능치 않다 보니 적용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아까 말이 나온 자녀 부양도 do 법의 위배가 걸리는 것보다는 자녀를 학대하지 말라는 don't 법의 위배까지 간 뒤에야 적발되고 처벌되는 경우가 더 많다.

성경에도 물론 don't 법이 적지 않다. 특히 최초의 법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도 don't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 do 법도 의외로 좀 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 계명과 인간 계명의 중간쯤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제4와 제5는 don't가 아니라 do 계명이다.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에게는 단순히 패륜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그 이상의 적극적인 예우를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don't는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do까지 해야만 죄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또한 안식일은 유대인과 하나님 사이의 표적으로서, 일정 주기로 강제로 쉬는 것도 당장 손해를 감수하는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안식일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6·25나 진주만 폭격이나 다 일요일에 벌어졌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라고 돼 있으니 don't가 아닌 do 형태라고 본다.

구약 모세오경을 보면, 신성모독을 저지른 어느 혼혈아만 공개처형(레 24:10-23)을 한 게 아니라, 안식일에 일을 하다 걸린 사람을 처형하는 장면도 나온다(민 15:32-36).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 흉악범도 아니고 겨우(?)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까지 중범죄로 간주하여 죽였던 것이다.

안식일이야 신약 시대에 직접적으로 적용이 안 되는 것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성경엔 믿지 않은 것, 기도를 게을리 한 것, 복음 안 전하는 것 등 더 적극적으로 do 법을 명시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도 많이 있는 셈이다.

특히 오늘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죄, 지옥 가는 유일한 죄"는 살인· 간음· 사기처럼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른 죄가 아니라, 하라는 것을 안 한 죄이다!
마치 출애굽 직전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반드시 발라 놓아야 한다거나, 놋뱀을 반드시 바라봐야만 살 수 있다거나 한 거처럼.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2. 법을 만드신 분, 법 위에 계신 분

성경에는 신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예가 아주 많다. 이것은 성경과 성경간의 연계 효과를 강화하고 내용을 교차검증하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가령, 여느 무신론자 개독안티가 아니라 예수 믿고 교회도 댕긴다는 사람이 창세기 1~3장은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이렇게 치고 들어가면 된다. "야, 니가 믿는 그 예수님도 아벨이 실존 인물이고 의인이라고(마 23:35, 눅 11:51) 아주 진지하게 인증을 했구만 그럼 예수님도 팩트가 아닌 거짓을 믿은 거냐?" 이런 식이다.

어디 그 뿐이랴? 여타 성경 인용의 정확도는 변개된 성경과 그렇지 않은 성경을 판단하는 잣대 역할도 한다. 막 1:2의 대언자들 vs 이사야가 대표적인 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성경의 용례를 찾아보면, 예전 성경을 언제나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정확하게 인용하지는 않은 예도 많다.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신약에서는 ‘자기’가 빠지고 의인은 그냥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갈 3:11, 히 10:38)로 바뀐 걸로 유명하다.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말이다. 이것 말고 또 다른 예로는 이 글을 참고하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예수님 역시 초림하셨을 때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안식일 때 제자들이 곡식을 비벼 먹었는데, 이때 주변 율법주의자들과 키배를 하면서 하신 말씀이 “사람의 [아들]은 곧 안식일의 [주]니라” (마 12:8)였다. 이건 결국 안식일을 뭐 어찌 하셨다는 뜻이겠는가? 이 모든 사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떤 법을 제정한 주체에게는 자신도 그 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그 기존 규칙을 초월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도 있고, 또 규칙 위에 예외를 둘 권리도 있다.
성경에는 다른 여러 사건들도 많지만 특히 에스더기가 그 두 사례를 잘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결국은 하나님께는 두 적용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신자로서 그 모든 판단(judgment)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시 119:75).
이 관계를 잘 생각해 봐야 예수님/사도들의 성경 인용은 필요에 따른 적절한 수정인 반면에, 이브와 사탄의 성경 인용은 변개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도 God forbid 같은 표현은 축자 번역이 아니라 동적 일치 의역이라는 식으로 딴지를 거는 시비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봤던 월트 디즈니 <알라딘>도 이 법의 권위와 관련된 비슷한 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술탄이 자스민 공주에게
“법에 따르면 너는 네 다음 생일 때까지 반드시 왕자와 결혼해야만 한다구.” (The law says you must be married to a prince by your next birthday.)
라고 융통성 없게 말하지만, 나중에 결말부에서는 결국 이렇게 말하니까 말이다.

법을 고치겠다. 난 술탄(왕)이니까. 지금부터 공주는 자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다. (꼭 왕자가 아니어도)”
(물론, 사람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오락가락 이랬다 저랬다를 막으려고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 체계에서는 입법과 행정을 분리하고 있다. “짐이 곧 법이다”를 제도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막은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08 08:36 2015/09/0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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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기독교계 종교에 대한 정서는 거의 지구와 금성의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이다. 물론 일본뿐만이 아니라 북한 내지 중국하고 비교해 봐도 극과 극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난 솔직히 말해 일본의 보편적인 종교관을 잘 모르겠다. 완전히 불교도 아니고 유교, 도교도 아니고 전적으로 샤머니즘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신사는 무엇이고 덴노(일왕/천황)는 무엇이고 이들이 정치 종교 통합적인 존재인지? 어쨌든 기독교 배경이 절대로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딱히 단군을 숭배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해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다른 식민지를 거느리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 교리도 당연히 전파되었고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단,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계열은 아니고 스페인의 예수회가 주축이 된 천주교 중심이었다.

16~17세기 사이는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벌어져서 나라가 작살이 나 있었고, 서양의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의 순으로 왕이 바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는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 포카혼타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에서는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유럽을 다시 가톨릭화하기 위해 예수회가 만들어졌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조선도 한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지는 않았다. 황 사영 백서 사건 같은 병크 때문에 스스로 매를 번 것도 있었고. 하지만 그 기간이나 규모는 일본의 박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가 극렬 "안티개독"이었으며, 정말 중세 종교 재판을 뺨치는 가학· 변태적인 악랄한 고문과 형벌로 신자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박멸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그딴 건 그 양반이 알 바 아니었을 테고.

다른 때도 아니고 서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동안 동양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천주교 기독교를 떠나서 일단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일본의 B급 새디스트 사극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쇼군의 새디즘>처럼.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어 놓고 산 채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 미꾸라지가 가득한 어항에다 사람을 옷 벗겨서 집어넣기, 썰물 때 바다 갯벌에다가 십자가 기둥을 꽂고 사람을 거꾸로 묶어 놓기(그 상태로 나중에 밀물이 되면..;;) 이런 건 중세 서양에서는 못 본 장면 같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육체적으로 끔찍한 형벌이나 고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의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하는 형태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자행했다.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어디에 절을 해라", "입으로 믿음을 부인해라", 아니 단순무식하게 "김 일성 개XX 해 봐라" 식의 더 간단한 판별법도 있었을 텐데, 저건 그야말로 성상,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스타일에 최적화된 판별법이라 여겨진다. 나 같았으면 저런 건 걸릴 게 없었을 것이다. 마치 주의 만찬이 끝나고 남은 빵과 포도 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 몽땅 집어먹거나 여느 잔반을 처리하듯이 임의 처분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 <바비도>에 나오는 것처럼, 성찬식에 대한 견해 하나만으로도 서양에서는 한때 순교 사유였다. 기독교인이 천주교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북한은 민주화에 실패하고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완전 김씨 일가의 철권독재 생지옥으로 전락했다. 종교도 주체사상 외에는 당연히 전면 말살. 스페인은 종교 개혁이 실패하고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가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누가 '개신교인'(천주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호칭)이 되면 잡혀 가는 나라가 됐다.

그것처럼 일본도 이 박해를 못 이기고 천주교/기독교를 막론하고 양놈(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양놈이 아니라 유대계=_=) 종교는 거의 씨가 말라 버렸으며, 그 상태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개신교 계열 교파가 나중에 안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1억이 넘는 일본 인구 중에 그나마 명목상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몇십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배경이 있는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도, 공산주의도 아니고 나름 자유 진영의 강대국 선진국인 것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기독교 선교의 불모지로 여겨진다. 솔까말 기복신앙에 대한 반례이기도 하다. 뭐, 국가가 부유한 것만치 국민들이 다 잘사는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쟤들이 과거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긴 했지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아예 자국민에 대한 천주/기독교 박해는 그 이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 선교를 가는 건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앗시리아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게 뻔히 보이니,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생쑈를 했던가? 하지만 인제 와서 일본에서 니느웨 같은 대각성 부흥이 과연 일어나기라도 할지는 좀 회의적이다. 성경적으로 민족주의를 적용할 문맥이 있고 그게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문맥도 있는 법이다.

한국은 역사가 워낙 스펙타클하다 보니,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보다는 일제 말기에 일제로부터의 박해, 그리고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더 부각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시아의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회가 이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는 이례적인 선례를 세계에 남겼다. 신자라면 감사할 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21 08:31 2015/08/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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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평전

성경에 나오는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치고는 너무 괴팍하고 특이했던 사람이며, 천하장사였지만 여자에게 배신을 당해서 인생을 망친 비운의 사나이라고 비기독교인에게도 그럭저럭 알려져 있다.
삼손은 혼자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을 벌여서 블레셋으로부터 확실하게 독립을 쟁취해 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명색이 민족 지도자인데 적국의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너무 똘끼 넘치게 행동했다.

민족 대표, 민족 지도자라 불리는 사람은 적국이 아니라 그냥 중립적인 외국인을 애인·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만 해도 민족 정서상 대외 평판에 절대로 좋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연걸의 정무문> 영화에서 일본인 여자를 사귄 진진, 그리고 에티오피아 여인과 재혼했다고 비방을 받은 모세(민 12:1) . 거기에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 승만도 그 많고 많은 한국 여자를 놔 두고 '호주댁'과 결혼했다고 비방 받곤 했다. 삼손 역시 그런 격이었다.

사사기 14장을 보자.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첫 블레셋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 그런데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났다. 이건 단순히 위험에 처한 상황이기에 앞서 여러가지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왜 포도원인 걸까?

삼손은 나사르 서원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어서(삿 16:17) 머리를 깎는 것뿐만이 아니라 포도도 절대 금지이다. 단순히 알코올 성분이 든 포도주를 안 마시는 것 정도를 넘어, 아예 생 포도송이, 포도 주스, 건포도 같은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민수기 6장 참고) 불자에다 비유하자면 오신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삼손은 왜 포도원을 갔을까?
그리고 포도원에서 뱀이라든가, 혹은 여우(아 2:15)처럼 성경에도 나오고 이솝 우화에도 나오고 침입자로서 비교적 흔히 연상 가능한 동물을 만난 게 아니라, 하필 야생 맹수인 사자를 만난 걸까?

구약 역사서에서 동물 사자는 사람을 징벌하는 용도로 종종 쓰였다. 그러나 저기서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몬스터/몹만 소환한 게 아니라 Doom 2 게임으로 치면 Berserk 파워업 치트키를 먹여 주셨다. 다윗은 돌팔매질로 맹수들을 내쫓았다지만, 삼손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냥 맨주먹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다. FPS 용어로 치면 gib을 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무용담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라는 공개적인 간증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화재 현장에서 저를 기적적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 "오 그래요? 어디서 화재를 겪으셨는데요?" / "나이트클럽에서요" =_=;;; 이런 꼴이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공인으로서 포도원 안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얘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중에는 삼손이 죽인 사자의 시체에도 이변이 생겼다. 더러운 구더기가 들끓는 게 아니라 여왕벌이 들어오기라도 했는지 안에 벌꿀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꿀이어도 그렇지 저건 시체 안에 담겨 있는 건데..;;
원효대사의 이야기만 봐도, 밤에 마셨던 물이 더러운 해골 안에 담겼었다는 걸 알게 되자, 그 사람이 우웩~ 하면서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삼손은 참 멘탈도, 비위도 강했나 보다. 부정한 걸 만져서는 더욱 안 되는 나사르 인인데도 손수 사자의 시체를 뒤져서 꿀을 가져와서는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도 줬다.
이것 다음에 꿀 이야기는 사무엘기상 14장에서 또 나오는데 이것과는 어떤 영적 관계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삼손은 혼자서 사자를 때려 잡고 그 시체에서 꿀까지 득템한 행적을, 비록 공개적으로 간증은 못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명 뿌듯한 자랑거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율법을 몽땅 어긴 건 안중에 없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그걸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문제로 냈다. 사자와 꿀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평범한 사람들이 떠올리기란 물론 불가능했다.

삼손의 친구들은 치사하게도 삼손의 여친을 공갈 협박해서 답을 알아 냈다. 이것은 오늘날 정보 보호· 보안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이다. 이중 삼중으로 복잡하게 암호를 걸어 놔도, 관리자 당사자 내지 그 지인을 매수하거나 족치는 데 성공하면 그냥 끝이니까. 결국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사람이 있다.

이 때문에 삼손은 내기에서 졌으며, 옷 서른 벌을 마련하느라 다른 동네의 블레셋 사람 30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게 됐다. 옷 서른 벌 때문에 30킬이라니 오늘날로 치면 그야말로 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따로 없다. "피해자들은 모조리 시체도 없이 실종"되거나 또는 "피해자들은 모두 겉옷이 없어졌다는 공통점 있음" ㅎㄷㄷㄷㄷ
그 시절에 마을 곳곳에 CCTV가 없었던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그림의 출처는 삼손의 생애를 그린 칙 출판사 만화 전도지 <Superman?> (1990) 편.)

그리고 또 생각할 점이 있다.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벗겨서 줘야 하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옷이 찢어지거나 핏자국이 묻지 않게 매우 조심해서 죽여야 했다는 점이다. 때리거나 칼로 찔러서는 안 되고, 뒤에서 덮쳐서 목을 조르거나 비틀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삼손은 워낙 천하장사 인간흉기였으니, 사람 목을 움켜쥐고서 손가락에 까딱 힘만 주면 곧바로 경동맥이 작살이 났을 테고, 사람을 무슨 개미를 눌러 죽이듯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인 건 고전 FPS로 치면 천하무적 주인공이 잡몹들을 싸그리 사냥하면서 1000 kill / frags를 달성하는 것과 똑같다. 삼손의 이야기는 은근히 게임스럽다. 턱뼈가 아니라 칼이나 창 같은 진짜 냉병기가 있었다면 삼손의 주변에 있던 적군들은 그냥 죽는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사지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 이 사건은 포도원에서의 사자 킬과는 달리 공적인 찬양 명분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딱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내가 당나귀 턱뼈로 시체로 산을 쌓으며 1천 킬을 달성했도다"라고 으쓱하기만 했다(삿 15:16).
이에 삼손은 싸움을 다 이겨 놓고는 곧 극심한 갈증으로 인해 죽을 지경이 됐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당장의 기도 응답과 승리는 주시지만 그래도 뼈 있는 경고도 같이 주셨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경고에 담긴 메시지를 삼손이 더 일찍 간파했으면 자기 자신이나 민족이 훨씬 덜 불행을 겪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것들 말고도 삼손의 차력 기행 중에는 성을 탈출하기 위해 그 크고 무거운 성문을 잠금 장치까지 포함해 통째로 뜯어 버린 뒤, 그걸 방패 삼아 등에 지고 도망친 것이 있다(삿 16:3). 못해도 수백 kg 내지 몇 톤에 달하는 무게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전의를 상실케 하는 충격과 공포 도시전설 괴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엔 상황이 역전되어 블레셋에서 골리앗이 배출된 것이 참 공교롭다. 삼손과 골리앗이 일대일 맞장을 떴으면 어땠을까? =_=)

그런데 삼손이 그저 무식하게 힘만 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꼬리와 꼬리를 묶고 불붙는 나무 조각들을 취하여" (삿 15:4)
이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산과 들로 나가서 여우를 300 마리나... 그것도 학살이 아니라 산 채로 수집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들었을까?

이건 힘만 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퀘이크로 치면 Frags나 Excellent가 아니라 Impressive, Perfect, Accuracy 같은 분야에 속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생포하는 과정에서 여우를 다리 같은 걸 조금이라도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여우들을 꼬리에 불을 붙인 채 풀어 줘서 남의 밭을 왕창 불태워 버릴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밭을 전속력으로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삼손은 늘 개인 플레이를 하다 보니, 딱히 자기 동지· 부하나 공범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에 하나 공범이 좀 있다 하더라도 여우를 300마리나 곱게 사로잡는 건 어떤 방법으로든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삼손은 굉장한 근성가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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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삼손이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너무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기의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헬스 트레이너-_-로든 성경· 정치· 군사 어느 쪽으로도 후계자 양성을 못 하고 정규전 한 번 제대로 못 치른 채 혼자 원맨쇼만 일삼다가 자폭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삼손은 들릴라의 치명적이고 위험천만한 질문에 대해 너무 째째하고 진지하고 재미없게(?) "당신, 내 힘의 근원을 알려고 했다간 다쳐. 그런 건 다시는 묻지 마시오. / 내 힘은 우리 민족의 신인 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오" 이렇게 원천차단 돌직구를 날리기에는... 너무 대인배였다.
예전에 사자를 죽이던 시절부터 수수께끼와 내기를 즐기던 근성이 여전했다. 이제는 절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자기의 힘의 근원마저도 수수께끼 소재로 삼아서 "그게 궁금해? 그럼 내가 힌트 줄 테니 알아맞혀 보셔" 유흥거리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살얼음판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게임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순진하고 철딱서니 없는 구석은 있을지언정, 교활하거나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동족들로부터 버림받을지언정 자기가 먼저 동족을 해치지는 않으려 했으며, 철저하게 피아 구분을 할 줄 알았다. "나 한 몸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리라"라는 뭔가 요나와 예수님의 예표스러운 행적도 있다.
그 스펙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자한테는 완전 순애보였고..;; 어쨌든 교활 잔머리의 천재인 발람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성향이었다.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삿 16:28,30)는 눈물이 핑 돌 정도의 회한 서린 비장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은 적군에게 잡히고 나서 꼴좋다고 얼마나 새디스틱한 모욕과 능멸을 당했겠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로 치면 ㅎㅎ/ㅋㅋㅋ를 W를 붙여서 haw haw라고 표현하는 건 칙 만화 전도지의 고유한 관행이다.)

가정용 소형 맷돌이 아니라 아예 감옥에 있는 대형 맷돌은 나귀나 소 같은 동물을 동원해서 돌리는 물건이다. 요즘 같았으면 당연히 내연기관이나 모터를 쓰지 생명체는 쓰지도 않는다. 자동차에 밀려서 인력거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삼손은 딴 데다 비유하자면, 배나 건물의 지하 기계실 같은 데서 평생 힘만 쓰는 동력 셔틀로 전락하고 말았다(삿 16:21).
작업 환경이 어두컴컴한 건 삼손에게는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눈이 없는 상태이니까. 사람을 무진장 귀찮게 하던 파리나 모기가 결국 생포당해서 날개가 뽑힌 것과 비슷한 격이다.

삼손의 생애를 각색한 드라마 중에는 (1) 들릴라가 마치 가룟 유다마냥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삼손을 배반한 것을 후회하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이야기가 들어간 게 있다. 요즘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악 구도보다는 대체로 입체적인 인물 위주의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또한, 삼손이 마지막 순간엔 자기가 신전의 기둥을 붙드는 것을 도와 준 소년에게는 몰래 (2) "고맙소. 당신은 이 신전에서 최대한 멀리 빨리 탈출하시오."(내가 곧 신전을 무너뜨릴 거니까)라고 귀띔을 하는 애드립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진실은 저 너머에"이다. (1)과 (2)는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애드립일 뿐인 것을 감안하도록 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경에 따르면 삼손은 거대한 석조 건물을 맨손으로 붕괴시킴으로써, 자폭하면서 죽인 블레셋 사람 수가 생전에 죽인 블레셋 사람 수보다 더 많았다고 말한다. 저 정도 대형 신전은 폭탄 테러로 붕괴시킨다고 해도 TNT가 몇 톤짜리가 필요했겠는가? =_=;;; 이거 정말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참고로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가 TNT 2.3톤 정도의 위력이었으며 영국의 Gunpowder plot이 위력계수 0.55짜리 흑색 화약 1.n톤이니 TNT 1톤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의 위력으로 추정됨)

성경에 기록된 생전의 kill 수만 해도 최하 1000+30+알파인데, 저 붕괴 사고로 몰살당한 사람은 제일 적게 잡아도 3천 명가량으로 추정한다(삿 16:27, 30). 블레셋 민족의 원수 삼손이 재주 부리는 꼴을 보러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죽은 사람이 600여 명, 부상자가 900여 명이니 저 살상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삼손은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덕분에 자살· 자폭을 하고도 정황상 얼마든지 구원받는 게 가능하다는 예로도 언급된다. 삼손이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선진이라는 것을 히브리서의 저자(아마 사도 바울)가 확실하게 인증한 셈이다. "삼손도 믿음으로 신전을 무너뜨렸다." 같은 말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히 11:32).
또한 딸을 죽이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었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입다 역시 같이 믿음장에 있는데, 삼손은 저 사람하고도 뭔가 통하는 맥이 있어 보인다.

그나저나 머털도사가 삼손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땄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도 머리털이 다시 자라는 게 나오는데..;;

Posted by 사무엘

2015/08/18 08:27 2015/08/1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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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카이 2019/02/15 20:58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이 블러그의 "성경,교회" 카테고리의 글들을 쭉 읽어보았는데
    성경 해석과 구원관에 대한 것인데
    사무엘님은 삼손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1. 사무엘 2019/02/16 08:44 # M/D Permalink

      저는 삼손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추하게 몰락하고 죽은 사울조차도 개인적으로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구약 인물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히 11:32에서 그 많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 중에서 하필 사고뭉치에 논란이 많은 '삼손'이 굳이 언급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매우 큽니다.
      굳이 히브리서 믿음장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요.. 그래서 벧후 2:7을 보면 행실이 양다리 시궁창이었던 롯도 의인이라고 미화(?) 보정을 받아서 나오지요.

      그에 반해, 신약에서도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구약 인물은 명백하게 지옥에 갔다고 유추 가능합니다. 카인, 발람, 이세벨 등..
      사울은 신약에서 언급되는 예가 없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에서 부정적인 최후가 언급되는 '신약 교회' 인물은 그 자체만으로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구원은 받았을 겁니다. 아나니야, 삽비라, 데마 따위.

  2. 신세카이 2019/02/16 10:59 # M/D Reply Permalink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켜갔네요
    신약에 믿음의 선진들 중에 삼손이 언급됩니다

    저는 사무엘님에게 "삼손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 라고 물었는데
    사무엘님은 저에게 "삼손이 구원을 받았다고 왜 알 수 있나"라는 답변(신약에 나와있다)을 한 것입니다

    사울에 대한 얘기를 하셔서 저는 사울이 지옥에 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상16장14절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자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삼손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간음으로 십계명조차도 지키지 못했고 마지막에 적국에게 잡혀서
    양의 피로 자기 죄를 씻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도대체 삼손이 어떻게 구원은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1. 사무엘 2019/02/16 11:11 # M/D Permalink

      간단하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신약 시대처럼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건 아니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계시받은 상황에서 최대한 그분을 믿은 것입니다. 이제 답변 되시겠습니까? 삼손이 믿음장에 언급된다는 걸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 율법의 준수 여부와 얽힌 보상과 징계/벌은 scope이 대부분 현 세상 수준입니다. (복 받고 부자 되고 잘 산다 vs 병 든다, 심지어 죽는다) 개인 구원이 관여하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은 아론의 아들들, 그리고 언약궤 만졌다가 급사한 웃사... 죽긴 했지만 그 뒤의 구원 여부는 별개로 논할 문제입니다.

      그 위대한 다윗도 간음에다 사실상 살인죄까지 저지른 거 잘 아시지요? 둘 다 속죄 헌물 없이 사형만이 규정된 중죄인 것도요.
      악행은 부가적인 문제입니다. 행위로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면 성경에 풀리지 않는 문제, 모순점이 엄청나게, 훨씬 더 많이 생길 겁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존재하던 성령 소멸(사울의 경우)이 개인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울의 경우,

      삼상 28:19 "내일 너(사울)와 네 아들들(요나단 등)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죽은 사무엘)"가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사무엘이 구원 못 받고 지옥 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삼하 12:23 "나(다윗)는 그(죽은 아기)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게.. 어린아기가 죽으면 다 특례 구원 받고 하늘로 간다는 간접 증거로 쓰이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또한, 하나님도 지옥이나 간/갈 벨리알의 자식을 감히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발하셨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 신세카이 2019/02/16 11:26 # M/D Reply Permalink

    사울에 대해서는 저는 그정도까지 지식은 없어서 일단 논외로 하고요

    저는 삼손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기는 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러니까 구약시대는 신약시대와 다르게 예수님이 자신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른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1. 사무엘 2019/02/16 11:35 # M/D Permalink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네, 그렇습니다'.
      애초에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도 않았고 비스무리한 예언 떡밥만 무성하던 시절에 인간이 예수님의 행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지요.
      단지 그때는 주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믿고 메시야가 오실 거라고 믿고 그걸 근거로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은 것이 신약 교회 믿음과 대등한 믿음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 옛날에 기록된 욥기를 보면 욥도 얼추 그렇게 믿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신세카이 2019/02/16 12:11 # M/D Reply Permalink

    저는 이런 구원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나눠서 시대에 따라서 다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경 해석은
    본질적으로 "구원 받는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것과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만

    결국에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피흘림을 믿지 않고도 구원을 받고 천국에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삼손이 "오실 주님께서 자신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실 것"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동일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주님의 대속을 예표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했을 때 양을 죽여 옷을 만들어 입힌 것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려고 한 것이고 양을 대신해 바치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을 이삭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 또한 오실 주님을 믿고
    이삭 또한 오실 주님을 믿고
    기드온도 다윗도 솔로몬도
    믿음의 선진이라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 지혜로 선에 도달할 수 없고
    주님의 피흘림의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1. 사무엘 2019/02/16 12:16 # M/D Permalink

      이 주제를 더 깊게 들어가면 구약 성도, 아니면 심지어 조선 시대 삼국 시대 사람들의 구원 문제로 들어가는데.. 일정 수준 이상부터는 그냥 답 없는 문제가 됩니다.
      구원받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의 어떤 면모를 믿어서 구원받는지에 대해서야 신세카이 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 역시 이 믿음 저 믿음이 따로 별개라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평범한 인간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을 리는 없으니, BC 몇백 년 이하의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물 이름이라든가, 로마 제국에나 존재했던 십자가형을 미리 알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시간 공간 배경에 속한 예수님의 행적을 분명하게 알고서 딱 그걸 믿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요지입니다.

  5. 신세카이 2019/02/16 12:08 # M/D Reply Permalink

    율법을 너무나 잘 지켰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율법을 지킨 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킨 것이 아니었어요
    자기 우월감이 진짜 목적이었죠
    나는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율법을 많이 읽었고 많이 안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에요

    사실 인간이라는 게 본성이 그래요
    인간은 선의조차도 숨겨진 목적이 있고
    거짓말쟁이이며 자기 자신에게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죠

    구원을 쉽게 받는 사람은 없고
    모두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삶이라는 것이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지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1. 사무엘 2019/02/16 12:17 # M/D Permalink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로 유대인들이 외형적인 우상 숭배 하나는 완전히 척결하고 유일신 민족이 됐지만, 그것만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예쁜 민족이 된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6. 신세카이 2019/02/16 12:36 # M/D Reply Permalink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과거의 제사(2000년전)로 미래의 죄(현재)를 속죄한다는 것이 안 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오히려 죄를 지은 다음에 죽기 전에 제사를 지내야 앞뒤가 맞죠

    진리의 영이 직접 알려주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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