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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수 년 동안 죄, 회개, 믿음 등의 주요 성경 용어에 대해서 글을 많이 써 왔다. 그런데 이런 면모에 대해서 다뤘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퀴즈: 성경에서 엉뚱한 데에다 갖다붙여서 사람 겁 주기 딱 좋은 죄 투톱은?
답: 짐승의 표 666(계시록)이랑 성령모독/훼방죄(복음서)이지 싶다.

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요일 5:16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겠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ㄷㄷㄷㄷ”
와, 이것만 모아서 설교나 강해를 해도 될 거 같다. 내가 아는 답만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짐승의 표 666은 아직 정체가 뭔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이런 걸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으며, 이 죄는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죄이다. 현재로서는 해당사항 아직 전무하니 제일 짧게 패스한다.

(2) 666이 미래를 다룬다면, 성령 모독은 과거에 있었던 특이한 죄이다. 막 3:29-30에 나와 있듯이,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이 성육신해 있던 당시에나 지을 수 있던 죄이고, 지금은 복음을 거부하고 안 믿는 죄와 다를 바 없다. 이쪽으로 흡수돼 있다.
무슨 “감히 이 ‘주의 종’의 설교에 토를 달다니, 이건 성령 모독죄라구! 니가 무사할 것 같냐” 이딴 소리나 하라고 있는 개념이 아니다. 특히 비성경적인 은사주의가 잘못됐다고 팩트폭격을 가하는 건 성령 모독이 더욱 절대 전혀 아니다. -_-;;

(3) 마지막 ‘사망에 이르는 죄’도.. 무슨 구원을 잃고 지옥 가는 죄인 것처럼 확대해석 하는 분이 많다. 난 요한일서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개념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살인을 저질렀으면 세상 법에 의해 사형 당해야 되고, 사형수 구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난리법석 칠 필요 없다는 평범한 의미로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든가..?? 행 25:11에 기록된 바울의 말이 딱 정확한 예시이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 ‘욕심-죄-사망’(약 1:15).. 이건 사람의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문자적으로 죽는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계속 죄 지으면 육신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이 다~ 지옥으로부터 건짐받는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을 가는 것일 뿐, 사망이 곧 반드시 지옥/불못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시록이 지옥/불못을 ‘둘째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구분한다는 걸 생각해 보자.

이와 같은 맥락으로,

(1) 난 구약에서 “뭘 어기는 혼은 끊어지리라”도 개인의 사후세계 구원 여부와 관계 있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신약의 아나니야와 삽비라건, 구약의 사울이나 웃사건.. 그렇게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개인의 구원 여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이라는 건 죄사함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쪽(의식법) 한정이지, 규범 율법(도덕법)을 평소에 한 치의 오차 없이 다 지켰다는 걸 얘기하지 않는다고 본다.

(2) 예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자살했다고 구원을 잃는 것도 절대 아니다. 자살도 정말 문자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중 하나에 해당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특별히 더 심각한 죄가 아니다. 남을 여러 명 죽인 흉악 살인범도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데 자기 자신을 죽인다고 구원을 잃는다는 건 좀.. -_-;;
죽어서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 버렸으니 그 누구의 기도도 통하지 않겠지만, 이 역시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채 자살하면 지옥에 갈 뿐이다.

이상이다.
구원받은 사람도 계속 죄를 지으면 구원 자체 말고 다른 잃을 게 엄청나게 많다. 간증, 보상, 하나님과의 관계, 상속, 건강, 생명 등..
가령, 세상에서도 아부지에게 심하게 밉보이면 법적인 부모 자식 관계는 유지될지 몰라도, 당장 재산을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자식들 간에 상속 문제 때문에 연 끊고 살인까지 나는 게 비일비재하다. 과연 저게 사소한 문제일까?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성경 신자에게 "죄의 정의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보통은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죄", "어리석은 생각은 죄",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처럼 로마서 구절, 잠언 구절이 줄줄이 떠오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죄라는 것의 정의도 웨슬리의 정의가 어떻고 칼빈의 정의가 어떻고 하는 걸 먼저 떠올리게 되나 보다.
이거 무슨 화학에서 Acid에 대한 아레니우스의 정의, 루이스의 정의 이런 거 공부하듯이 말이다.;;

옛날의 똑똑한 신학자들이 방대한 성경 텍스트를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후학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자료를 많이 만들고 각종 짤막한 용어들도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시기와 장소에 따라 분간해서 받아들이는 방법론도 개발해 놓았다. 아까 저런 특이한 죄들도 그런 원리에 근거하여 분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다 성경으로부터 파생돼야 하며, 우리 일반인이라도 시간만 충분하면 그런 것들을 스스로 재연 reproduce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학이 성경보다 먼저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5/04 08:35 2023/05/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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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자

1.
교회는 신앙, 헌신, 하늘에서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무료 섬김이라는 게 아무래도 세상 직장 조직에 비해서는 더 많이 행해지고 허용되고 권장되는 바닥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든, 물건이건 남의 시간이건 “계속되는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는 말자!!”

무료인 게 진짜로 값어치가 전무한 싸구려여서 무료인 게 아니다~! 비록 절대값에 넘사벽급 차이는 있을지언정, 저 말은 예수님의 보혈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곡식 밟는 소의 입에 마개 씌우지 마라”(신 25:4) 같은 뜬금없는 구절이 신약에서 왜 거듭 인용되었겠는지를 생각해 보라.
주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교회 안팎에서 “주인님은 엄한 사람이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재능기부 신앙페이 착취하는..”(마 25:24, 눅 19:21) 이런 평판이 나도는 일이 절대적으로 없어야 한다.

2.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다른 분야도 전문가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고 했지, 성경이 과학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거 아니다. 심지어 창조과학이라도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면모가 있을 수 있다.
신앙, 믿음이란 게 개나 소나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라는 말이 아니다.

3.
개인적인 체험, 간증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교리라고 확대해석 하지 말자!
누구는 기도 응답으로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지만 병 고침 기도가 거절로 응답된 사람도 많다. 그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표적이 전~혀 아니다.

자기가 갑자기 깨달아지고 복음이 믿어진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남한테까지 저절로 믿어져야 구원이네 어쩌구 하는 건 선을 심하게 넘은 짓이다. 이건 그 말을 퍼뜨리는 당사자보다도, 교리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용납하고 자꾸 마이크를 건네주는 교회 쪽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내 경험상 이 세 가지만 좀 지키면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온갖 혼란과 무질서, 분쟁, 다툼이 상당수 정화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스로 유지되지 못하고 내부 분열 때문에 무너지는 조직은 정상적인 조직이 아니다. (눅 11:17-18) 세부적인 성경 해석· 신학 노선· 교리 교파를 떠나서 어디든지 말이다.

* 하자

4.
상대 비교와 탐욕의 해악을 절대 만만하게 보지 말고 경계하자.
물리적인 행위가 동반되는 살인, 간음, 도둑질에 비해 만만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위대한 바울마저도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탐욕 앞에서는 GG 쳤다. (롬 7:7)

자기는 지금까지 어지간한 기독교인들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탐욕이 출동하면 어떨까?
이 역시 온갖 귀신 잡신을 섬기고 돌· 금속 형상에다 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이다(골 3:5).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만든 것이 탐욕이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필망하게 만드는 것 역시 탐욕이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말하고,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한다. (마 6:24, 눅 16:13) 상금 아니면 훈장이지, 훈장에다가 훈장의 제조 원가만 제외한 나머지 상금 같은 건 없다.;;

성경대로만 행하면 당장 교회도 현실의 교회들보다 사람 수도 적고 훨씬 꼬질꼬질하고 인기도 없고, 남보다 ‘간지’가 안 나고 비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시스템이 탐욕을 자꾸 조장하는 구조인 건 부인할 수 없다. 신세 비관, 남과 비교, 오지랖, ‘엄친아 엄친딸’... TV 드라마와 인터넷 광고들이 온~통 이걸 조장하고 있다. 괜히 악한 현 세상인 게 아니다.

  • “누구누구는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 장만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세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누구누구는 30대 나이에 벌써 그랜저 뽑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티즈야”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그런데 요런 불만을 위선, 허세 같은 방법으로 해소, 은폐하다 보면, 교회는 팀웍과 간증과 순수성을 잃고 급속도로 타락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 하나님의 역설을 논할 자격을 상실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나니야와 삽비라를 시범 케이스로 괜히 죽여 버리신 게 아니다. 초대 교회 때 이미 그런 누룩이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암적 요인은 정말 0순위로 척결해야 한다.

5.
아까 1번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인데.. 교회는 목욕탕, 병원 같은 곳임을 기억하자.
깨끗한 사람은 굳이 또 목욕할 필요가 없고(요 13:10)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눅 5:31). 내가 교회에 무슨 대접을 받으러 온 고객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에서 ‘국가’를 ‘교회’로 바꿔서 생각하라.

완벽한 성도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있으면 너님이 거기 가입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의 완벽성이 깨질 거다.
내 자아/자존심을 방어하기 위해서 교회 지체에 대해 악하게 추측하거나 남에게 상처 주지 말라.

교리가 달라져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어서 교제를 끊는 거라면 모를까.
처음에는 간이라도 내 줄 것처럼 ‘형제님 사랑합니다’ 이러다가, 단순 감정 상하는 일 때문에 둘도 없는 원수지간이 되고 교회 떠나거나 옮기는 일이 생기지는 않게 하자.
성경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분명히 말한다! (요 13:35)

6.
그리고 이건 정말 아무에게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긴 한데.. 영적 대미지 컨트롤 능력을 키우도록 하자.

일이 너무 안 풀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답이 없다 싶을 때,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의구심이 드는 상황일 때,
일단은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라. 기도 응답 자체가 “기다려라”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렇다고 될 대로 돼라 자포자기 포기하지도 마라.

하나님은 “딴 건 다 괜찮은데 이것만은 좀..” 하필 그 약점만 골라서 뒤흔들 수 있다. 여러분의 속을 박박 긁어서 본성이 튀어나오는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 자체를 갖고 하나님을 야박하다고 탓하거나 그분 성품을 의심하지 말자.
나도 인내, 기다림 같은 거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게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건 머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ㅠㅠ

마귀가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압도 다수의 패턴은 “남들이 다 하는데 너만 안 하면 너만 바보 되고 손해 보고 뒤쳐질 걸?”이다. 근데 그걸 이기는 게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다.

영적 성장에는 영재· 천재가 없다.
한 자릿수 나이 때 미적분을 술술 풀고 성경 100구절 이상을 암송하고 토플 만점을 받는 애는 있어도,
한 자릿수 나이 때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때리면서 훈계할 필요가 없어서 잠 22:15의 예외에 해당하는 애는 없다~!

신앙 생활은 마라톤이고 지구력이 중요하다. 우직하게 꾸준히.. 잔꾀 안 부리고 일관되게 성실/신실하게 살아라.
크리스천이 아니고서야 요즘 시대에 ‘환경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천한 자리와 고귀한 자리를 모두 만드신 분이다. (롬 9:21) 궂은 자리, 남 안 보는 자리에서 성실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더 크고 높은 직책을 주신다.
세상 추세하고는 좀 반대로 미친 척 하고 살아라. 하나님의 느긋하고 일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사고방식에 적응하기 바란다.;;

Posted by 사무엘

2023/05/01 08:35 2023/05/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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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 미쳐 보자

예수 믿고 교회 댕기고 성경 읽는다는 사람들, 소위 교인들은..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에게 제대로 좀 미쳐 봐야 된다. 평생 24시간 365일 그러지는 못하더라도 한번쯤은 말이다.

특히 외모와 체력과 능력이 제일 뛰어나고.. 어쩌면 갓 취업한 사회 초년생이어서 돈도 그럭저럭 벌면서 아직 처자식도 없는 청년 시절..
그럴 때 확~ 꽂혀서 예수님을 위해서 미친 척 뭔가 내 재능, 시간, 물질 등을 통 크게 허비(???)해 봐야 된다. (비싼 향유 부은 여인)

  •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밤새워서 몽땅 독파해 버린다거나,
  • 교회에 큰 변고가 생겼거나 무슨 선교사가 어려움을 당했다거나 할 때.. 평소 내는 주일 헌금보다 10배 이상의 액수로 사비를 쾌척해서 후원한다거나..
  • 지원자가 없는 예배당 청소나 교회 주차 안내, 주일학교 교사를 하거나..
  • 의식의 흐름을 따라 찬송시를 쓰거나 선교 편지, 신앙 서적 번역을 해 보거나..
  • 길거리에서 거리 설교나 전도지 배부를 하거나..
  • 가끔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지, 종교 문제로 갈등하던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안타깝고 불쌍하게 보이고.. 남을 위해서 뭔가 눈물 흘리면서 기도해 보고, 알량한 내 자존심을 다 깨뜨리면서 펑펑 울어 보고..

이런 경험이 아무리 못해도 20대 시절에 한 번은 있어야 되지 않겠냐..??
성경적으로 정상적으로 정당하게 살면서 광신자 소리 좀 들어 봐야 된다.
20대 시절에 무슨 유럽 여행을 가 보고 강남 클럽을 가 보고 별의별 걸 다 해 보겠다는데, 예수 믿는 청년은 저런 경험을 좀 해 봐야 된다. 이건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 "으이그 저 돈지랄을 하느니 불우이웃이나 아프리카 기아들이나 돕지?
  • 진짜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겉으로 지가 예수 믿는다는 티 안 낸다"
  • "네가 제정신이 아니니 많은 학식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행 26:24)

이런 부류의 빈정거림은 성경적으로 매우 "정상"이고 예상 가능한 피드백이니까 걱정 마시라. 마 26:8-9, 막 14:4-5, 요 12:5 따위. 당연히 매우 잘못된 소리라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십중팔구 평소에는 불우이웃 어려운 이웃 따위는 쥐뿔도 관심 없던 인간들이 꼭 이런 상황에서나 이웃 핑계 대는 법이다. -_-;;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를 안다면.. "실컷 내 마음대로 죄 펑펑 지으면서 살다가 죽기 직전에만 샥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되겠네"
이런 생각은 너무 졸렬하고 민망해서 누구든지 꺼낼 엄두를 못 내게 된다.

마 12:41-42를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의 날 때 니느웨 사람들이 너희를 책망할 것이고, 스바의 여왕이 너희를 디스할 것"이라고 예시를 들며 그 당시의 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 우리는 요나의 선포를 듣고도 데꿀멍 하고 회개를 했는데.. 니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 바로 옆에서도 꼼짝도 안 했냐? 이것들이 간이 배 밖에 나왔냐?
  •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수행원 챙겨서 억만 리 원정을 힘들게 떠났었는데.. 니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을 바로 옆에 두고도 못 알아봤냐? 이 ㅂㅅ아?

그런 것처럼.. 죽기 몇 시간 전에 십자가에서 겨우 구원받았던 강도가 저런 부류의 사람들을 맹렬히 책망하게 될 거라고 난 생각한다.
"너희들은 구원받고 나서 겨우 몇 시간밖에 못 살았던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에 있었으면서 뭐가 어쩌고 저째..???"
그는 자기는 역대급 먹튀 뽀록 구원을 달성한 운 좋은 케이스라고 자랑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도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으르다"고.. "뱃대지가 부르고 살 만하니까 종교에나 심취"하는 거라고 아주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진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뻣뻣하다 (완악하고 고집 세고 믿음이 없다)"라고 진단하셨을 뿐이다.
어느 게 진짜 새겨 들어야 할 경고인지를 생각해 보자.

내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예수 믿고 성령님이 거주하는 신앙 생활이 뭔가 재미없고 따분하고 손해 보고 불편하고 꾹 참아야 하고 억압과 제약 핸디캡이 가득한 인생일 거라는 그 편견, 프레임에 속지 말길 바란다.
세상에는 온통 이상한 이단에 맛이 간 광신자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다. (오징어 게임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길은 성경적인 좋은 광신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뻘건 조끼에 뻘건 십자가 들고 무슨 좀비처럼 전도하는 사람을 묘사하지, 죄와 심판과 의에 대해서 제대로 선포하는 복음 전파자를 묘사하지 않는다.
광신자 프레임이 두려워서 자기는 구원받고 나서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그럼 그건 달란트를 받고도 주인을 믿지 못하고 뭐가 두려워서 그 돈을 땅에만 파묻어 둔 게으르고 악한 종의 사고방식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개인의 구원 여부를 X선 찍듯이 척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거한다는 증거는 보이는 언행의 변화로 드러난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생각보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허나, 교회들이 그런 양육을 안 시키고 당장 겉으로 빨리 드러나 보이는 결과물인 종교적인 열심만 강요하고 다그치면.. 이상한 광신자 아니면 아예 영적 성장이 정지한 환자들만 잔뜩 양성하면서 큰 폐해가 야기될 것이다.

아무쪼록, 구원받은 신자, 기독인이라면 예수님에게 제대로 미쳐 보자.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찬송가 가사대로 실행해 보라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24 08:35 2023/04/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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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본인이 개인적으로 서서히 불현듯이 꽂히고 있는 찬송가는..
To god be the glory "주 하나님 큰 일을 행하셨네" 이다.
제도권 교회 찬송가(통일/새)에 수록돼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없는 듯..

1. To God be the glory! Great things He hath done!
So loved He the world that He gave us his son;
who yielded his life an atonement for sin,
and opened the life gate that all may go in.

2. Oh, perfect redemption, the purchase of blood,
To every believer the promise of God;
The vilest offender who truly believes,
That moment from Jesus a pardon receives.

(3절도 있긴 하지만 생략)

(후렴)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let the people rejoice;
Oh, come to the Father, through Jesus the Son,
And give Him the glory; great things He hath done.


이 곡은 멜로디가 좀 클래식하다 보니 엄근진한 경배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멜로디가 그저 "면류관 가지고"나 "다 찬양하여라", "기뻐하며 경배하세"처럼 힘차고 엄근진한 것뿐만 아니라 화사하고 우아하고 예쁜 면모도 있다. 그래서 더욱 꽂혀든다.

또한, 가사를 뜯어보면 "주께 영광"뿐만 아니라 요 3:16 인용에 대놓고 복음 메시지로 가득하다. 복음성가에 아주 충실한 곡이다.
2절은 최악의 나쁜 범죄자 죄인(vilest offender)이라도.. 진심으로 믿으면(행 8:37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pardon을 받는다고 쓰여 있다.

이 엄청난 가사의 작사자는 또 패니 크로스비 여사이더라. 명불허전 또 걸려들었다.;;
이분은 정말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던 것 같다.
이 곡의 작곡자는 William Doane으로,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패니 크로스비와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동역자라고 한다. 그녀의 시 중 무려 1500편에다가 곡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독자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는 분 계시면 이 찬양의 시청을 권한다.
난 G장조로 머리에 입력돼 있는데 공식 반주는 반음 더 높은 A플랫인가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5v9iworAU
https://www.youtube.com/watch?v=2CeBoSQsBR0

2.
다음으로 찬양의 형태와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
큼직~~한 채플 안에서 성가대가 아니라 사복 입은 남녀노소 몇백 명이 단체 합창으로 무슨 찬송가를 부르는 영상은
의외로.. 천조국뿐만 아니라 영국 것이 걸려 나오는 경우도 많더라.
본인이 유튜브를 뒤지면서 지금까지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었다. 이건 걔네들 문화인 것 같다.

회중 합창은 영국 게 많고,
뭔가 가족 중창이라고 해야 하나 요런 건 미국 내륙의 크리스천 동네가 본좌이다.. 특히 자녀가 대여섯 이상씩 있는 대가족이 악기 하나씩 쥐거나 파트 하나씩 맡아서 찬양 부르는 건.. 개인적으로 정말 보기 좋고 부러웠다.

3.
참고로 To God be the glory는.. 쌍팔년도 시절 미국의 유명한 흑인 복음성가 가수 겸 작곡자인 Andrae Couch의 곡 My tribute (어찌하여야 / 나의 찬미)의 후렴부에 나오는 To God be the glory (하나~~~~님께 영광)와 동일한 표현이다. 개인적으로 곡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저 곡이 떠올라서 멈칫 했다.
그리고 부활 찬송 "주님께 영광"은 Thine be the glory라고 시작하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4.
그리고 또 참고로.. 본인이 예전 2010년대에 꽂혔던 찬송을 열거하자면..

  • Wonderful grace of Jesus
  •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
  •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이런 것들이다. 이 블로그의 과거 글에서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클래식 스타일 찬송가인데 통일 찬송가 따위에 실리지 않았고 기성 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곡은 어떤 경로로 국내에 소개되고 알려졌는지 개인적으로 굉장히 궁금하다. Ron Hamilton 같은 사람도 기성 교회에서는 내가 알기로 거의 듣보잡이지 않나?

대체로 기성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개신교와 잘 섞이지 않는 침례교 교단 쪽에서 자체 찬송가를 편찬하면서 번역하고 소개했지 싶다. 성서 침례교회처럼 말이다. 내력 면에서 킹 제임스 유일주의와는 큰 관련이 없다.
본인의 찬양곡 스펙트럼은 저런 침례교 스타일에다가 1990년대 국내 CCM도 좀 추가돼 있는 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8 08:34 2023/04/0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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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을 썼던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은 로마 교황에 정치적으로든 교리적으로든 반대한 종교 개혁 내지 개신교 진영의 산물이다. 성공회건 청교도건, 세부 신앙 노선은 다를지언정, 반가톨릭이라는 이념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이니 루터니 개혁주의를 그렇게도 떠받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의 가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칼빈이 활동했던 제네바를 알면서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이미 성경이 필사본 번역본이라도 완벽하게 보존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이런 식으로 장로교인을 상대로, 특히 목회자에게 킹 제임스 성경을 소개하고 변증하는 분도 있다.

다만, KJV 유일주의를 믿는 바이블 빌리버 진영 자체는 개신교보다는 침례교, 특히 재침례회에 가까운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이건 말보회 한킹 진영이건, 후대에 추가로 등장한 흠정역 진영이건 공통 동일이다.

세례가 아니라 반드시 물 침례를 고집하고,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 구원이나 구원 상실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구원받기까지는 자기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 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개인의 구원 여부가 몽땅 다 답정너 예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들은 저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주의도 알미니안주의도 아닌 중간 제3의 견해를 가지며, 이 때문에 두 진영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하기도 한다. =_=;;

문제는 그 당시 걸출한 종교 개혁자들의 통찰이 저런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신칭의 교리를 재확립하고 교황을 대적하고 가톨릭을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온전한 정교분리라든가, 믿음 고백자에게만 물침례.. 이런 것까지 정립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여전히 박해하곤 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KJV의 번역을 지시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왕에게도 이런 한계가 있었다.
http://baptistnews.co.kr/mobile/article.html?no=13605

  • “왕은 백성들에게 세속적인 모든 사항은 명령할 수 있으나, 개인의 신앙과 영혼에 관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사옵니다.
  • “폐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시오이다~!” (석총 - 궁예의 700여 년 뒤 잉글랜드 버전.. ㄲㄲㄲㄲㄲ)

이 당연한 말을 한 게 그 시절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었나 보다.
저 주장을 한 ‘토머스 헬위스’는 체포되어서 1616년경에 옥사했고, 또 다른 침례교 지도자인 ‘에드워드 와이트먼’이라는 사람도 이단으로 몰려서 1612년에 화형 당했다.
좀 과장 보태면 태조 왕 건에서 궁예가 석총을 죽인 것과 정말 비슷하다..;; =_=

제임스 1세는 전반적으로는 당연히 선한 군주였다.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금연 운동을 추진한 걸로도 유명하고..
(뭐,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개신교도들 수백 명을 박해하고 죽인 전임인 메리 여왕조차도 종교 말고 세상 정치 쪽은 그닥 암군 폭군 악녀가 아니었다.)

단지,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왕권신수설 신봉자에 국교회주의자였다. 국왕이 곧 성공회 수장.. 왕이 곧 제사장..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는 왕이 돼서는 온갖 삐딱서니 타는 귀족과 신하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이 막 번역되고 출간됐던 1610년대에.. 토머스 헬위스 같은 자국의 침례교 지도자가 반역자로 몰려서 순교한 것은.. 좀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단순히 반가톨릭 정도를 넘어 정교 분리까지 대놓고 주장하다 보니, 왕권신수설을 밀어붙이던 절대군주한테 찍혔던 것 같다. 성공회도 청교도도 아닌 침례교인들은 세속 세계사에서는 그냥 듣보잡 취급일 뿐이고..

텐데일이나 세르베투스뿐만 아니라 저런 사람도 순교한 것이다. 제각기 완전히 다른 사유로 인해서.
틴데일이야 킹 제임스 진영에서 워낙 띄워 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0순위로 접했고,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흑역사 얘기하는 데서 접했다. 그 반면, 이런 얘기는 우리 진영에서 전혀 접한 적 없었다.
역시 각 진영에서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 위주로만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 진영에서.. 무슨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에서 순교한 걸 가르칠 리는 만무할 테니 말이다.. =_=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와 침례교 신앙을 모두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건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로 느껴진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진영이 특정 번역자 자체를 우상화하고 떠받드는 게 아니니 “아 그렇구나~ 저 사람도 자기 신념 때문에 저랬었구나”하고 넘길 뿐..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는 이런 제임스 왕이나 성경 번역자들의 인품, 개인사 등에 좌지우지되는 게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제임스 1세 왕도 명색이 크리스천인데, 설마 무슨 북괴 김 부자라든가 느부갓네살/네로 같은 정신나간 개인 우상화 개인 숭배를 조장한 건 아니었다. 일단 황국 신민들이 먼저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개인의 신앙의 수호자이신 위대하신 국왕 폐하 만만세" 이러면.. 왕도 "허허~ 과인도 일개 인간일 뿐이니라~ 교황놈은 적그리스도일 뿐이고 진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겠지" 이렇게 겸손하게(?) 화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침례교인들은 좀 더 시대를 앞서 간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세상 역사에서는 가톨릭에서 이탈한 개신교.. 이런 식으로만 다루는 경향이 크지만, 침례교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의 신앙을 갖고 있었던 다른 그 무언가로 여겨진다.
개신교 측에서는 미국 건국에도 청교도가 큰 기여를 했고, 청교도의 근면 성실 청부 개척 정신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침례교 측에서는 자기들이 청교도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고, 자기들이 노력한 덕분에 미국이 국교 없이 진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침례교라는 말은 교리/교파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용어이다. 침례에 대한 교리 하나만 지지한 뒤에 구원관이나 하나님의 경륜 쪽은 완벽한 칼빈주의인 사람도 있고, 반대편인 사람도 있다.

다만, 통상적으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침례교는 대외적으로는 알미니안/웨슬리안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개신교와 척졌다는 역사 내력이 있고, 칼빈주의 예정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저런 식의 편견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단지, 킹 제임스 유일주의를 표방하는 '독립 침례교회'(독침;;)들은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을 추앙하기보다는 그쪽 동네에서 평이 좋지 않은 세대주의를 지지하는 편이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한킹 진영이건 흠정역 진영이건, KJV 독침들은 칼빈주의를 거의 진화론 반박하듯이 맹렬히 반대하고 비난하곤 했다.
어디 그 뿐이랴? 그쪽에서는 기성 개신교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르고 다 타락하고 종교 통합 은사주의에 물들고 어쩌구 하면서 비판하고 척지고, 반대로 거기서는 킹진영을 향해 성경 역본을 우상시하는 이단에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자니까 상종을 말라고 욕하고..;;;
이게 바로 말보회의 창립 이래로 2~30여 년째 이어져 온 갈등과 대립과 반목이었다. 상대방에 대해 정확하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뭐, 나도 교리 노선이야 KJV 유일주의에 세대적 진리보다 더 나은 패러다임을 지금까지 결코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않는 말장난 역할극 예정론은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내 교리적 정체성을 타협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서로 비방만 해 갖고는 득/덕이 될 게 없지 않겠는가? 개신교에서 유래되지 않은 기독교 교파의 내력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고찰하면서 타 교파 사람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고 소통하고는 싶다.
침례교 중에서는 심지어 속세를 떠나 자연인처럼 살고 심지어 세상 정부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곳도 있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데.. 적어도 KJV 독침은 그런 곳은 결코 아니다. ㅡ,.ㅡ;;

킹 제임스 성경은 명백한 개신교 배경의 성경이었으니 이 점을 이용하고 어필을 해야 하는데.. 개신교를 마냥 적대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보회는 초창기에 조금만 더 젠틀했으면 이단 소리 훨씬 덜 듣고 오해를 훨씬 덜 사고 적을 덜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훨씬 더 널리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5 19:33 2023/04/0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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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인 1611년에 출간됐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고 그렇게도 의미 부여를 하며 떠받든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유일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떠받드는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은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 성경이 정말로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었고 내용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걸까?

요즘은 인터넷에 몇백 년 전의 옛날 영어 성경도 본문이 다 올라와 있고, 1611년도 KJV 종이책의 스캔 이미지까지 몽땅 살펴볼 수 있다. (☞ 관련 링크) 그러니 저 의문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아주 간편하게 할 수 있다.

1. 철자법의 변화

오늘날 우리가 읽는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건 1611 version(역)의 1769 edition(판)이다.
KJV는 영단어 스펠링 체계의 변화 때문에 단어 표기를 몇 차례 기계적으로 치환하여 판이 바뀐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용을 개정하고 변개한 게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령, NKJV(뉴 킹 제임스)가 한 것처럼 thou ye thee 따위를 you라고 바꾼 건 '하느니라 / 하노라'를 '합니다'라고 고친 것과 비슷하다. 하물며 devil을 demon으로 바꾸고 hell을 hades라고 바꾼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면 말의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진 개정· 변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sunne, moone, booke를 sun moon book으로 바꾸고 heauen을 heaven으로 바꾸고, conteyn을 contain으로 바꾼 건..??? 그냥 '읍니다'를 '습니다'로, '홍당무우'를 '홍당무'라고 고친 것에 불과하다. 말이나 발음은 달라진 게 전혀 없고 오로지 표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고쳤다거나, "어린 백성"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고친 정도의 변화조차도 아니다.

f처럼 길게 늘어뜨린 s 변종이 s와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진 건.. 한국어의 역사로 치면 아래아가 없어지고 ㅏ/ㅡ로 통합된 것과 거의 같다.
KJV의 우리말 번역본인 흠정역의 경우, 5판(400주년 기념판, 2011), 6판(마제스티판, 2021)처럼 edition의 변화가 오· 탈자 교정뿐만 아니라 드물게 오역 교정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KJV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2. 오· 탈자

그럼 KJV 1611 초판은 스펠링 변화 말고 일체의 오· 탈자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저 때는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는커녕 타자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원고를 마차에다 실어서 가져와서는 식자와 조판에도 정말 지루하고 고된 쌩 노가다를 거쳐야 했다.

설령 작가 내지 번역자가 완벽하게 원고를 내어 줬다 해도, 성경 정도로 방대하고 빡빡 두툼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삐끗 실수가 전혀 안 들어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일일이 베껴 쓰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인쇄공이 더 옛날의 서기관 필경사보다 처지가 더 나았다. 그게 문자를 기계로 다루면서 최첨단 지식과 정보 문물을 접하는 직업이었으니 말이다.

KJV 1611 초판이 출간되고 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대략 20여 군데의 오· 탈자가 책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수 년~10수 년 이래로 시정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명사 he/she/it이 헷갈렸거나 a/the 같은 관사가 빠지는 등의 자잘한 실수였다.

그나마 내용이 유의미하게 바뀌는 변개에 가까운 크리티컬한 녀석이 이거.. 시 69:32이었다. God이 good으로 잘못 찍혔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찾는 너희의 마음이 살리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od과 good은 스펠링이 비슷하고, 비슷하게 '좋은' 심상의 단어이고 God is good이라는 관용구까지 있다. 실수로 잘못 식자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농후했다.
게다가 이 typo는 출간된 지 2년 만에.. 그야말로 제일 먼저 발견되어 시정된 축에 든다.

이런 오탈자나 철자법 변경은 개정· 변개가 아니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건 인쇄 단계에서의 실수를 바로잡은 것일 뿐, 처음 원고를 작성한 번역자가 원고의 컨텐츠를 수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도 "사소한(trivial) 수정"이라고 표시하는 게 있지 않던가? 딱 그런 격이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부족하고 실수하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KJV 1611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 자체는 1611년 이후로 정말로 유의미한 개정 없이 정착됐다.

흠.. 글을 써 놓고 보니 이번 1번과 2번 아이템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킹 제임스 성경 본문 개정 의혹에 대한 전면 반박" 이야기의 판박이가 됐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그걸 참고하시기 바란다.

3. 외경 관련 루머

철자법, 오· 탈자 다음으로.. 심지어 외경 수록 여부를 갖고 1611년 KJV 원판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퍼뜨리는 진영이 있(었)다.
"1611년판은 비성경적인 가톨릭 외경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고 오점이 있다~~ 1655년판이니 17xx년판이니 그게 외경이 제외된 진짜 KJV 원조다.." 이런 요지의 얘기 들어 보신 분 계신가?

아예 대놓고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원문비평 사본학 운운하면서 변개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얘기는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리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저런 부류의 얘기엔 전혀 현혹될 필요가 없다.

종교 개혁자와 개신교 동네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외경이 성경이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성경만 아닐 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2류 교양 텍스트 내지 종교 문학 정도로는 인정했다.

당장 KJV 1611 책의 앞부분에 들어간 "역자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보면 외경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어거스틴을 포함해 가톨릭 성인(??)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의 말을 인용한 게 종종 나온다. 그게 그 당시 종교계 석학들의 지쩍 밑천이고 성장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가톨릭 반개신교(!!!)에만 충실한 오늘날의 bible baptist들이 보면 살짝 문화 충격 동심파괴를 경험할 수도 있다. 한킹이건 흠정역이건 저 텍스트가 번역되어 수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 KJV는 본문이 명백한 반가톨릭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행에 따라 외경이 들어갔었다. 단지, 본문이 아니라 부록으로 들어갔을 뿐..!
KJV가 가톨릭 성경이었다면 구약이 39권이 아니라 52권이 됐을 것이다. 에스더기가 10장 3절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KJV는 외경을 싣되, 외경을 성경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상에 그 어떤 가톨릭 성경도 에스더기의 외경 부분을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 .. 이렇게 별도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때는 성경책을 이렇게 편성하는 것만으로도 번역자가 교황 추종자들한테 해코지· 암살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바닥에서는 외경을 읽지 않게 되었고, 외경이 성경책에서도 자연스럽게 완전히 제외되었다.

정확한 역사 맥락을 모르면 아폴로 달 착륙 자작극 음모론 같은 데에 속듯, 비슷하게 KJV 본문 관련 음모론에도 속기 쉽다.
KJV 1611에 외경이 들어가 있었던 건 당시 관행에 따른 부록 명목이었을 뿐, 본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무슨 예수회의 농간 같은 급으로 확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4. 인쇄공 로버트 바커

끝으로, 옛날 사람을 한 명 소개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17세기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로버트 바커. (Robert Barker)
제임스 1세 왕에게 직통 고용돼서 킹 제임스 성경 1611년도 종이책 초판을 조판· 인쇄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인쇄공 내지 출판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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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서 평생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1611 이래로 딱 20년 뒤 1631년, 제임스 1세 이후로 아들 찰스 1세 시절에 새로 편집된 킹 제임스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십계명 구절에서 NOT을 빼먹어서 '너는 간음할지니라' wicked bible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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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KJV 초판 시절에 발견됐던 여느 자잘한 오· 탈자와는 차원이 다른 너무 큰 사고였다.
사악한 성경책은 전량 리콜· 회수되어 폐기 처분됐지만, 몇 권은 살아남아서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그는 무슨 투옥·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뒤로는 몰락해서 그에 대해 근황 기록이 딱히 전해지는 게 없다. 1645년에 사망했다고만 전해질 뿐.

조선의 장 영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왕에 의해 고용된 특정 분야 기술자였고, 역사에 기억될 업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장 영실은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초대형 사고가 나는 바람에 리타이어 당하고 기록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성경 신자라면 킹 제임스 성경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록 이 성경의 외형이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책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1611 KJV라는 타이틀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차이점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1) 하루는 성경 역본을 비교하느라 똑같이 NIV로 동일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서 본인과 상대방이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구절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알고 보니 NIV도 1984년판 이후에 2011년경에 개정됐더라.. 이럴 수가..!!
TNIV 같은 바리에이션이 아니라 NIV 자체가 또 개정된 것이다. KJV는 이런 식으로 쓱 바뀐 게 없다~!!

(2) 글쎄, 이 문제에 대해 덕질을 더 깊게 들어가면 KJV의 캠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룻 3:15의 끝부분에서 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she)인지 보아스(he)인지를 질문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은 정답만 알지 더 구체적인 내력이나 사연은 아직 잘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더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3) 하나님은 민족과 언어를 나누어서 인간들의 생활권에 '구획/파티션'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 성경과 한 믿음으로 인간들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도 있게도 해 놓으셨다.
꼭 학교에서 가까이 사는 집 애가 성적 우수 모범생이 아니듯.. 예수님과 동시대 같은 지역을 살았다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라고 해서 특별히 신앙 생활을 더 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계 선교와 복음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접근성이 훨씬 더 좋은 게 사실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성경의 합리적인 법칙일진대(눅 12:48), 우리 주님도 한국어 화자보다는 KJV 같은 성경을 직통으로 읽을 수 있는 영어 화자에게 저런 사명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묻기는 하실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19 08:35 2023/03/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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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본 간의 차이들

1. 변개 유형 (신약)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가 타 성경에서 변개됐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뉜다.

(1) A형 오리겐 변개(원문)
요한복음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을 순종치 하니하는 자는"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골로새서 "그분의 피로" 삭제 같은 것들.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은 대체로 이 유형에 속한다.

(2) B형 번역 이슈(원어)
이사야서 루시퍼, 사도행전 이스터, 누가복음 갈보리, 요나가 '고래' 배 속, 증인이냐 순교자냐, 지옥이냐 음부냐 등..
같은 원어가 서로 다르게 번역된 것들이다.

(3) C형 후대 본문비평에 의한 변개(원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 요한의 콤마 따위
이건 옛날 사람보다는 웨스트코트-호르트의 기여도가 더 높은 변개이다.
수백 년 전의 옛날 성경에는 심지어 가톨릭용이라고 해도 이 C형 변개가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2. 변개 유형 (구약)

사실, KJV 옹호자/유일주의자들은 구약보다는 신약의 차이점에 관심이 더 많다. 신약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위주로 전수되어 왔으며, 본문 계보가 명백하게 이분화돼 있어서 번역의 차이에 앞서 내용의 차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허나, 구약도.. 맛소라 본문 덕분에 본문의 변개 문제는 덜한 편이지만.. 원어의 미스터리함이 아무래도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보다 더 심하다. 그래서 번역의 차이로 인한 잡음이 더 많고, 원어 말장난이 틈탈 여지도 더 많은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당장 기억하고 있는 예시 몇 가지일 뿐이다. 보다시피 숫자가 막 대놓고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 4년 뒤 / 40년 뒤에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7)
  • 3년 뒤에 십일조 / 3일마다 십일조 (암 4:4)
  • 온천 / 노새 (창 36:24)
  • 엘하난이 골리앗? 골리앗의 동생?을 죽임 (삼하 21:19)
  • 요셉에게 색동옷 / 소매 긴 옷 (창 37:3)
  • 그들을 톱으로 잘라서 끔살시켰다 /톱으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대상 20:3)

그러니 내가 주장하는 건.. 이게 다 맞을 수는 없고, 그래도 어느 것 하나가 정답이긴 할 거라는 점이다.

3. 의외로 KJV처럼 번역된 구절

한글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이나 심지어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서는 KJV 유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아쉽지만 부패한 본문에서 만들어진 변개된 역본이다.
그런데 얘들은 아주 극소수 예외적으로 KJV 스타일로 옮겨진 표현도 있긴 하다.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지만.. 복습해 본다.

(1) 개역성경의 경우, 창세기 요셉의 옷이 색동옷/채색옷, 어쨌든 무지개 같은 컬러풀한(창 37:3) 옷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KJV와 일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본들은 장신구 치장이 잔뜩 달린 화려한 옷, 소매 긴 옷 등으로 표현이 바뀌는 추세이다.

(2) 엡 4:12에서 KJV는 “각종 은사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perfecting) 한다”고 말하지만, 타 역본들은 성도들을 “준비시킨다”(equip, prepare)고 되어 있다.
이건 마치 마태복음 28:19에서 “가르치는”(KJV) 것과 “제자 삼는”(나머지) 것하고 비슷한 차이점 같다.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엡 4:12의 경우, 개역성경도 의외로 ‘준비시켜’ 대신 ‘온전케’ 한다고 KJV와 동일하게 번역되었다. 이건 원문의 차이점인지, 아니면 색동옷 같은 번역 스타일의 차이점인지 잘 모르겠다.

(3) 다음으로 요 3:36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KJV)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바뀐 걸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얘는 의외로 공동번역 성서도 “아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KJV와 동일한 워딩을 했다.

(4) 고후 13:11의 끝인사가 KJV만이 “굿빠이, 잘 있으라, 안녕히 계시오” 등의 작별인사인 farewell이다. 나머지 역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다 “기뻐하라”(rejoice)라고 바뀌었다.
우리말 역본 중에서는 심지어 말보회의 한킹조차도 ‘기뻐하라’라고 번역했는데(왜???)..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farewell이라는 의미로 KJV처럼 번역되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막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기보다는.. 흐름상 의역을 하느라고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게 아닌가 싶다. ‘믿는 자’ 다음에 논리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나오는 게 맞고, 그리고 서신이 다 끝나는 문맥이니 뜬금없이 ‘기뻐하라’보다는 ‘굿바이’가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4. 진짜 어려운 것

유경험자로서 말할는데, KJV는 겨우 -eth, thou thee ye, gay clothing, prevent 같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고어가 어려운 건 절대 아니다. 그건 그냥 며칠이면 적응되고 익숙해지니 하나도 문제될 것 없고..

진짜 어려운 건 대명사와 도치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에서 개나 소나 it he 대명사가 너무 많아서 뭘 가리키는지 분간이 안 될 때.. 그리고 복잡한 도치에서 주/객 관계 따지는 게 좀 어려울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왕상 3:27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저 여자가 진짜 애엄마다" 할 때도 KJV는 그냥 평범하게 her이다.
두 여자 중 누구를 가리키는 her인지를 기계적인 어휘 통사 구조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에 비해, 다른 역본들은 약간 해석을 추가해서 the first woman이라고 써 놓은 편이다.

솔로몬의 재판이야 워낙 유명하고 문맥이 뻔하기 때문에 "아이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고, 죽이지는 말아 주세요!"가 진짜 엄마인 걸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런 유명한 얘기 말고 더 어려운 문맥에서는 대명사 포인터를 역참조할 때 머리에서 쥐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KJV가 그렇게 자비심 없게 번역된 이유는 애초에 원어 원문의 표현이 그렇게 자비심 없고 모호했었기 때문이다. KJV는 표현 추가나 윤문을 극~~도로 꺼리면서, 불가피하게 단어 하나를 추가하더라도 이탤릭체로 티를 내면서 아주 보수적으로 정직하게 번역됐다는 걸 생각해 보자.

5. 고펠나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목재는 무슨 나무일까..??
성경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나는 당연히 전나무, X나무, 포플러나무 같은 친근한 나무 내지 레바논의 백향목, 아니면 출애굽기에서 성막 제조용으로 죽어라고 나오는 시팀나무 이런 걸 떠올렸는데.. 노아의 방주는 그렇지 않더라.

창 6:14에 따르면 고펠나무 gopher wood라고 한다.
그러나 gopher라는 단어는 고유명사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이면서 여기 말고 성경 다른 데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장 사전을 이용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특히 킹 제임스 유일주의 진영에서 좋아하는 방식-- 이 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킹제임스 흠정역을 출간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편찬한 성경 용어 사전에서도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 이상으로 설명이 더 없다. 다른 표제어들 대비 이상하리만치 풀이가 부실하다.
이건 그냥 통상적인 성서고고학이나 원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옛날 한글개역 성경은 그냥 '잣나무'라고 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음역으로 바뀌었다.
영어는 뉴 킹 제임스에서는 gopher가 단독으로 생산성이 없는 사어라고 간주하고.. gopherwood 한 단어로 붙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대에는 이게 사이프러스 나무가 아닐까 하는 해석이 등장해 있다(NIV 등). 이건 본문 변개하고는 관계 없고 후대에 와서 등장한 견해이다.

심지어 "노아의 홍수 이후로 멸종하고 현존하지 않는 나무 품종일 것이다",
"애초에 나무 품종 명칭이 아니라 나무를 가공하는 방식의 명칭일 것이다. 혹시 이건 비슷하게 생긴 다른 히브리어 글자의 오기가 아닐까..?? '고페르'가 아니고 '코페르'이면 pitched tree (역청 바른 나무..??)가 된다는데?"

이런 낭설까지 있는가 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뇌피셜이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성경 본문을 교정하는 정도로까지 선을 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도 킹 제임스 킹왕짱을 주장해 온 럭크만의 주석서에는 이 구절에 대해 뭐라 해설하고 있는지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참고로 이 gopher는 북미 다람쥐 동물이나 컴퓨터 고퍼 프로토콜과 스펠링이 우연히 같지만 이들과는 어원상 서로 전혀 무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5 08:35 2023/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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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목에는 KJV 유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특정 역본을 옹호한다기보다는.. 무오류한 역본 하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더 원론적인 사실"에 대한 변증 위주이다.

1. 언어 관련

과거에 하나님은 친히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언어와 문화, 민족 구분을 만들었다. 인간들을 강제로 찢어 놓고 파편화시켰다. 인류가 한꺼번에 동반 타락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심판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훗날, 언어와 민족의 구분 없이 한 가족인 교회라는 것이 태동할 때는 하나님께서 제일 드라마틱한 기적이면서 사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했던 외국어 구사 표적을 주셨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타 언어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절대로 아니라고 고린도전서에서 거듭 강조하셨다. 세례/침례 문제와 비교하면 대략 이런 관계이다.

  •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유아나 어린아이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침례도 아닌 세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통역 없이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가 공석에서 남발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외국어도 아닌 날랄랄따따 잡소리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듣지 못하는 '원어'에 대한 동경, 환상이 있다. 하나님께 다이뤡트로 내리꽂혀진다는 하늘의 신비로운 언어, 천상의 기계어 어셈블리어뻘..???? C/C++ 고급 언어 짜끄레기나 구사하는 자기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언어라고 말이다.

그게 말은 방언 기도(하나님에게 직통 전달되는 =_=;; )요, 글은 도대체 실체는 모르겠지만 original 원어 원문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hoax, myth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기독교는 "죽은 사람 갖고 장난치지 않으며 일체의 뒤끝이 없다(하늘 아니면 지옥.. 끝!)." 그리고 비슷한 차원에서, 무슨 신비로운 언어 주술 주문 말장난질이 없다.

하나님이 언어와 민족 구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을 '배려해서'이지, 그런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정말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는 성문법인 율법을 주시고 이방인에게 양심의 법을 주셨다고 해서 이게 민족별로 개인 구원 접근성에 대한 차별은 절대 아닌 것과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소통하는 큰 특권을 받은 대신에, 법을 어겼을 때의 처벌과 책임도 더 컸다. 마음속에만 있는 양심의 법의 물리적인 근거· 실체가 율법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논리로..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다음으로 영어로 된 최종 권위 성경을 하나 남겨 주셨다고 해서 이것이 영어 모국어 화자에게만 불공평한 특혜를 제공한 게 아니다. 관점을 좀 달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기왕 이렇게 민족과 언어가 다양하게 찢어진 와중에, 총체적인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 기준 하나를 제정하신 것 자체를 나쁜 조치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정말 만에 하나 불공평한 특혜라고 해도.. 지금 죽은 언어인 원어 공부한 신학자들에게만 불공평한 특혜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 제일 접근하기 쉽고 대중적인 외국어인 영어에다가 특혜를 주는 게 훨씬 낫고 '덜' 불공평하다.

2. 비유

(1) 죽어서 지옥 간 사람이 지옥에서 살아 나와서 막 증언을 하고 "지옥은 정말 있어!! 니들은 정말로 지옥 가면 안 돼!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돼..!!" 이렇게 증언을 하면 사람들이 말을 좀 들을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답은? 눅 16장 끝부분

(2)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신자들의 휴거까지 목격하고.. 반대로 초자연적인 재앙까지 겪으니 그때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성경 읽고 왕국 복음에라도 순종할 생각을 할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답은? 계 9:20

(3) 옛날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쓰던 사람이 살아나서 우리에게 "어 이건 이런 뜻인데?" 교통정리를 해 주면 성경 번역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될 것이다. 현지인이 깡패 아니겠나?
→ 과연?? 성경의 답은??? @@@

(4)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내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이렇게 따지느냐?
→ 킹 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이미 원어 원문 성경을 보았거늘.. (이하생략)

(5) 계시의 확대

  • 예수님이 사도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까? (초대 교회 시절)
    → 예수님이 일곱 교회 경륜까지 다 찍고 나서 21~22세기쯤엔 오실까? (현재)
  • 교황은 바로 그 적그리스도일까? (중세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생각)
    → 교황은 미래 진짜 적그리스도의 짝퉁 예시 모형인 걸까? (현재)
  • 영국에서 성공회와 청교도를 중재하기 위한 단일 성경 (1600년대 당시)
    → 영어로 완벽하게 보존된 최종권위 성경 (현재)

성경 역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비유를 적용해서 생각하면 이렇다는 뜻이다.

3. 임의성

성경 기록이란 건 증명 없이,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토 달지 말고 신자가 맞춰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심각하고 민감한 텍스트이다.

가령,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진술 중 둘째 날엔 다들 아시다시피 "보기 좋았더라"가 유일하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둘째 날에는 뭔가 안 좋은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 좋았다는 말을 넌지시 생략하셨구나, 저 바닥엔 여전히 사탄 마귀 잔당이 있고 악이 있구나" 이렇게 유추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변개되고 삭제되어서 없는 거면 논리가 정반대로 바뀌어야 된다~!!
"변개된 성서에서는 이 구절에서 '보기 좋았더라'를 고의로 삭제함으로써 재창조니 어쩌구니 하는 이단 교리가 들어올 빌미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풀이해야 된다. 어느 게 맞는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

성경에 원래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까라면 까로 논리를 맞춰야 된다는 거다.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대로 "임의적"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이 내용이 다르고 표현이 제멋대로인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그저 "여기서는 삭제됐지만 다른 구절에는 유사 내용이 있으니 상관없다", "아 그건 후대에 추가된 거고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 "원래 인간이 기록한 것이다 보니 오류가 좀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이건 내 성질 같았으면 너무 답답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죽빵이라도 날리고 싶은 사항이다.. ㅡ,.ㅡ;;

세상에서는 인간이 제정한 법조문을 갖고도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삭제되는 걸 반대하고 투쟁한다.
"A와 B 중"이 "A와 B 등"으로 바뀌어서 뉘앙스가 달라진 걸 귀신같이 간파해서 반대파를 반박하고 버로우 태운다.
그런데 성경은 큰 뜻만 통하게 대충 아무렇게나 만들어져도 괜찮다?

세상에서 맛집을 고르고 물건을 살 때도 같은 값이면 무조건 상태가 더 좋은 걸 고르는데.. 성경에 대한 관념이 무덤덤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 사람에게 성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굳이 최선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4. 불신자에게도 100%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논리

뭐~~ "킹 제임스 떠드는 신자들도 행실이 개판이더라, 말보회가 이단이더라, KJV 쓰는 교회들 중에도 이단 많다"
이런 쓰잘데기없는 소리들이 도대체 왜 나오는 건지 난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킹 제임스 성경을 거부하는 논리들을 보면.. "기성교회 vs KJV" 대신에 "불신자 vs 기독교/교회/예수"라고 치환만 하면 완벽하게 동일한 패턴이 많다.

예: 조선 시대 사람들은 다 지옥 갔나, 이 순신, 세종대왕도 다 지옥 갔나
→ 킹 제임스 이전엔 무슨 성경 썼는데? 한킹 나오기 이전에 주 기철 목사도 다 잘못됐나

지금 도대체 옛날 사람 얘기가 왜 나오는데?
난 그런 사람들이 애초에 예수 왜 믿는지, 교회는 왜 다니기 시작했는지 진지하게 궁금하다.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종교(편의상의 표현)에서..
그렇게 쓰여 있는 성경이 한 종류만 맞고 나머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
  • "부활의 날에는 그 여자는 칠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 "부활의 날에 **그들이 다 깨어나면** 그 여자는 칠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 "형제에게 화내는 자마다"
    →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자마다"

아멘???

당연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무인도나 감옥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무 성경이라도 선택의 여지 없이 봐야 한다면 개역이니 NIV니 심지어 메시지니.. 따질 때가 아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을 지경이라면 풀뿌리라도 뜯어먹고 쥐나 벌레라도 먹어야 하지 않는가?
옛날에 그 가난하고 열악한 여건에서 개역이라도 열심히 읽었던 선조들은 그 사람 사정이 따로 있고 우리는 처지가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변개된 성경과 변개되지 않은 성경을 대놓고 한 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고 팩트와 정보가 다 마련돼 있는데 굳이 변개된 성경을 고의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본인은 위쪽 같은 성경을 보기 싫고 아래쪽의 온전한 말씀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둘 다 옳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멘~! ^^ 대한민국이 아무리 물가가 올라서 먹고 살기 힘들기로서니, 풀뿌리나 쥐나 벌레를 찾아 먹어야 할 지경은 아니니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2 08:35 2023/03/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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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실수한 이유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베드로의 인생일대 흑역사가 기록돼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님하와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는..
정작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붙잡히시던 타이밍엔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는지,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린 사건 말이다.

게다가 부인할 때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아 ㅆㅂ, 내가 저 사람을 본 적이라도 있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니까? 성을 간다! 내가 할복이라도 해야 내 말 믿어 줄 거야?” 급의 극언까지 불사했다고 성경은 진술한다.

이건 인간의 멘탈의 한계를 너무나 강렬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저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꼴 좋다 졸장부 찌질이 등신"이라는 비난보다는 동정과 공감의 시각이 더 강한 편이다.
"평소에 허세 똥군기만 잔뜩 부리던 녀석일수록 정작 실전에서는 총소리만 나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거다. 천하의 베드로조차 저랬는데 하물며 너 같은 쪼렙 X밥은?"과 같은 패턴으로 아주 즐겨 거론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다른 시각도 있다. 베드로는 천성이 저돌적이며, 저 정도로 찌질한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호언장담 맹세 자체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적 진영의 똘마니에게 용감하게 검을 휘둘러서 귀 한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요 18:10)
예수님이 베드로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로마 병정들을 그렇게 온몸으로 저지하다가 혼자 또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여 열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허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선의의 대응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뜯어말리셨다. “야, 내가 어디 무력이 부족해서 잡혀 가는 줄 아니? 지금은 성경 기록이 성취되고 있는 순간 아니냐? 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처신 잘 하라고..”
그리고 그분은 베드로를 말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공격을 받아 귀가 짤린 그 똘마니를 도로 치료까지 해 주셨다! (눅 22:51)

이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급 ‘시무룩~’ 무기력 모드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모세의 소싯적 일화가 떠오른다. 자기는 나름 동족을 위한답시고 어느 노예 감독을 몰래 죽여서 없애 줬는데, 동족은 그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날 “허 참, 당신은 노예 감독 다음으로는 우리도 때려죽일 거야?”라고 모세에게 따진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급 당황하고 멘붕하여 이집트를 떠나서 도망치게 된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최악의 취약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당부처럼 딱히 믿음의 강건을 기도하며 간구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전한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이라도 쳤느냐 하면 그리하지도 않고, 위험한 적진 내부를 혼자 계속 맴돌면서 염탐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 저 작자도 예수랑 한 패였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이런 말이 들리니 허를 완벽하게 제대로 찔린 것이다. 갑자기 겁에 사로잡혔는지, 멘탈이 나갔는지, 아니면 고의로 삐딱서니를 타고 싶었는지.. 이때 베드로는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태도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거듭해서 부인하게 됐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이 베드로의 심경 변화 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이렇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정도로 단순무식하게 비겁한 허세 겁쟁이는 아니었을 수 있다.
설마.. 의기탱천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괜히 쿠사리를 먹여서 의욕을 꺾는 바람에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겠는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기에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믿지도 못한 채, 내면의 두려움을 그저 알량한 혈과 육과 객기로 찍어누르고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분은 베드로의 본질적인 상태를 간파하고서 그러지 말라고, 영에 속한 싸움에 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에서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용감하게 물 위를 걷기 시작했는데 '어어..' 딴 생각을 하다가 불안해지고 물에 빠져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요 11의 "예수께서 우시니라"는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 것이다(창 50에서 요셉이 운 이유도 같이 참고를..).
그것처럼 베드로의 흑역사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인간이 어디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 신앙생활이 단순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인 투쟁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남을 죽이는 의사 투사든, 자기를 죽이는 열사든 무엇이건 말이다.

그나저나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에 제자들이 모두 성경을 잘 알고 성령 충만하게 FM대로 대처했다면 어찌 됐을까?
“스승님을 잡아갈 거면 우리도 다같이 잡아 가시오! / 우리부터 먼저 죽이시오~” 이렇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들러리 도적 대신에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가 같이 달리게 됐을 수도 있다.

혹은 악의 무리들이 예수님만 잡아들이고 제자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체포됐을 때처럼 골방에서 열심히 기도라도 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 싶다.
뭐, 다~ '만약에 그랬다면?' 같은 낭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베드로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실컷 배반하고 나서는 어떤 계기로 마음이 또 바뀐 걸까? 뭔 바람이 들어서 뒤늦게 돈을 반환하고 난리를 치다가 자살을 했겠는지도 적지 않게 의문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09 08:35 2023/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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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은사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형태와 위상이 비교적 명확한 아버지와 아들 말고 성령(..!!)은 존재감이 제일 없고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분이다. 그래서 번역도 성령 이전의 초창기엔 성신, 성숨(..!!) 등 난립하는 편이었다.

'신'자가 들어간 번역은 옛날 한글 개역성경에 ‘하나님의 신, 신령과 진정’ 같은 표현에서 남아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바뀌었지만..
성경에서 '신들'(gods)은 하나님 자신은 아니면서 인간보다는 능력이 우월한 천사, 그룹 등 다른 영적 존재에 대한 총칭으로도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가리키는 명칭에 '신'자가 또 들어기는 좀 난감해지는 구석이 있다. ㄲㄲㄲㄲ

다음으로 '숨'은 웬 말인가 싶은데 Spirit 말고 Holy Ghost의 번역을 말한다. 영어 성경에서 ghost는 '숨지다/숨을 거두다'를 뜻하는 yield/give up the ghost 아니면 Holy Ghost.. 딱 두 용례에서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치 testament를 '유언'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은 실험적인 시도인 셈이다.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떨며 한 말은 "앗.. 영이다(spirit)!! ㄷㄷㄷ"였다. 그걸 보고 흐물흐물 동양 귀신이나 서양 유령(ghost??)을 떠올렸다는 워딩은 현대에 와서야 등장한 것이다.

일부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듯이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냥 무슨 기, 에너지, 버프 아이템인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성경에 그런 것 같은 묘사가 있긴 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울이나 삼손 같은 사람이 초인으로 바뀌었다. 신약에서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온갖 이적이 터졌다. 하지만 그게 그림의 전부가 아니다.

본인이 아는 성령은 이 시대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에게 임한다. 그걸 성경 용어로는 '성령 침례'(요 1:33, 행 1:5)라고 부른다. 침례 시술사(!!) 요한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한 게 이것이었다. "나는 맛보기로 이렇게 물을 끼얹는 침례를 주는데, 나 뒤에 오실 분은 니들을 성령으로 침례를 주거나 불로 침례를 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눅 11:13, 요 20:22)

한번 거주한 성령님은 우리를 아주 버리고 떠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통해 느껴지는 성령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죄 짓고 육신적으로 살면 약해지고 식고 역사하지 못하게 된다.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 강림을 매번 간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수시로 간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성경 교리 논란까지 일으키는 주제이긴 하다만..
성령님은 초대 교회가 태동한 직후에 잠시 예외적으로 허락하셨던 초자연적 이적을 지금까지 매번 또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적이 그렇게 끊임없이 흔하게 발생한다면 그건 기적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때야 교회라는 게 갓 태어났고 신약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사도들이 유대인들 앞에서 한번 더 예수님을 증언하고 믿을 기회를 주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표적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바벨 탑 앞에서 인간들의 언어를 헤집어 놓으셨던 것과 반대로,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가라고 언어 장벽을 잠시 없애 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기적이 필요한 예외적인 사유가 없어지고 나면 하나님 역시 기적을 중단하시고 사람들을 평범한 일반적인 여건에다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부터 만나의 공급이 끝났듯이 말이다.
그 뒤에는 기적적인 병 고침이나 직통 계시 같은 건.. 정말 극단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처한 예외적인 사람 또는 아주 특수한 기도 응답이 아니면 일반적으로는 없다. 가능성이 0은 아니지만, 있더라도 개인의 간증 수준일 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교리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도들의 이적 표적을 재현한다는 사람들은 재현을 정확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남이 알아듣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막 16:17-18이 말하는 것처럼 독극물(poison)을 먹거나 독사(venom)에게 물려도 괜찮다거나 하지도 않다.

진짜로 옛날 사도들처럼 병 고치는 기적이 행해진다면, 지금 우리처럼 병원 치료와 기도를 병행한다거나..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절로 응답하셔도 감사.. 이렇게 어정쩡한(?) 케바케 같은 게 없는 게 정상이다. 특히 환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병이 안 고쳐지네 같은 개소리 구라 야바위 따위 없다!!

환자가 신자건 불신자건, 사도가 손만 얹으면 테란 메딕 실사판처럼 heal이나 restore가 짠~ 일어났다.
그러니 나더러 성령님의 사역을 감히 부정하네, 성령을 모독/훼방하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대들 필요 없다. 일단 성령님의 사역대로, 계약서대로 100% 똑같이 하기는 하고서 내게 태클 거시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에 사도들의 표적을 재현하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일반인들이 그렇게 직싸게 고생하며 공부해서 의대를 갈 필요가 없고, 대학 병원 중환자실이나 암 병동 따위가 없어도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전국의 병원부터 순회해야 되지, 무슨 부흥회 따위를 하고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_- 아무튼..

기독교계에서 "우리도 뜨겁던 초대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 이런 거 강조하다가 "성령님이여 오소서, 불 같이 뜨겁게 임하소서"가 와전되어 "불 받아라~!!"가 된 걸까..?? 이런 트렌드가 언제 무슨 계기로 들어온 건지 잘 모르겠다.

부흥회(?)라는 건 내 경험에 비춰 풀이하자면, 일반적인 설교나 성경 공부 모임보다 새신자 초청 복음 전도나 성령 간구(?)의 비중이 더 큰 집회이다.
그런 곳에서 더 즐겨 불리는 찬송가도 있다. 외국곡인 "불길 같은 주 성령" (...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이라든가,
국산곡인 "참참참 피 흘리신" ... (성령의 불길 성령불이야)

아~ 참 2~30년 전 추억 돋는다. 템포 올려 가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박수 치며 부르면 분위기가 진짜 뜨거워진다. =_=;; ㅋㅋㅋ
그리고 고 형원 "부흥"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도.. 얘는 뽕짝 느낌은 위의 곡들보다 좀 덜한 것 같다.

이런 곡들의 가사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묘사가 있다. 불에 그렇게도 집착한다는 거..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일단 행 2:3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묘사가 원조가 아닐까 한다.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흠정역) 개역성경 계열의 워딩도 이와 그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흔한 통념과 달리,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물체가 임했다는 건지 이 구절의 묘사는 의외로 분명하지가 않다.
오히려 통사 구조상으로는 불꽃처럼 낼름 갈라진 '혀', 단순히 '혀'에 가깝다. 불은 그저 비유 대상일 뿐이다. 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니가 진짜 문자적으로 식물 꽃이라는 얘기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 장면을 게임 아이템이나 쿵 퓨리 각성 모습을 떠올리면서 최대한 불에 가깝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번갯불 같은 게 번쩍 하더니 버프 효과가 남았다.."이다. 본인은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믿지 않지만, 저 혀가 곱게 머리 위에 앉은 거야말로 세례에 가까운 묘사인 것 같다.
저 행 2:3만 읽어서는 무슨 거대한 화염이 사람을 삼키고 감싸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구약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이나 불 병거 승천과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_-;; 아니면 페르시아의 왕자 2에서 불 먹은 왕자 모습을 떠올렸거나..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순절 구절이 아니면, 설마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짬뽕 시킨 걸까? 그건 제발 아니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생명의 부활과 정죄의 부활만큼이나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 불 침례는 형벌이며,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침례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마 3:12) 처럼 대구 대조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긍정적인 심상이라고 해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돼서 공중의 새들이 앉았다"가 긍정적인 심상일 수는 없다. 그것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이 싹 앉았다" 이런 간접적인 묘사가 어쩌다가 "성령의 불 받아라~!"로 바뀌었는지 나로서는 성경만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아, 뜨거운 체험과 기분 각성이 가끔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신앙 생활에서 그게 '주 main'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그냥 사우나에 들어가면 된다. 방언 받고 희열을 체험하고 싶으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철도교를 믿어도 된다. 겨우 그런 것만 하기 위해서 무려 성경을 믿고 예수 믿을 필요까지는 없다.

진짜 성령이 임해서 충만해지면 무슨 병 고침 쪽의 기적 이적보다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처럼 평범한 자기 자아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오지 싶다. 이런 게 이적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도 1차적인 의미는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반면, 그렇게 불타는 체험을 하고 입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직통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바탕 눈물 콧물 빼고 나서
길거리에서 신들린 듯이 전도지 뿌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가? 감정적으로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했는가?
갑자기 예수님의 성품이 행동으로 나오기 시작했는가? 세상적인 유흥과 쾌락을 탐닉하던 습성이 바뀌고 진짜 성령 충만해졌는가...???
내가 아는 한, 아무것도 없다..;;;;;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저런 건 진짜 성령으로부터 유래된 표적이 아니다.

아무쪼록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진짜로 성령 충만한 게 뭔지를 많이 잘 보여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찬송가는 너무 뽕짝보다는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같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그런데 실로암은 딱히 성령 장르의 가사가 아니고 곡이 뽕짝 스타일도 아닌데 어째 어지간한 은사주의 부흥회 이상으로 군대 교회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지.. 얘는 멜로디에 무슨 마성이 들어있는지 이 역시 개인적인 미스터리이다. "왼발! 왼발! GOP!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 아마 작곡자가 보면 까무러치지 싶다.;;

말이 나왔으니.. 찬송가 중에서 부르기가 좀 조심스러워지는 장르들을 좀 정리하고 글을 맺겠다.

  • 성탄: 아기 예수 묘사는 교리적으로 큰 영양가가 없음. 휴..
  • 성령: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소서ㅠㅠㅠㅠㅠ
  • 열심과 헌신: 행위 구원이 들어갈 수 있음
  • 선교: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 나라 이뤄 간다ㄲㄲㄲㄲㄲ

이들 장르 자체가 잘못된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하지만 이런 장르는 가사에 누룩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내 경험상 높다. 더구나 영어 원래 가사는 그렇지 않았는데 번역이 이상하게 되는 편이다.

성령이야 이 글에서 많이 다뤘으니 더 언급을 생략하겠다. 그런데 다음으로 후천년· 무천년주의에 입각한 선교 이념도 참 난감하다. 하나님 나라 이루고 확장해 간다고 좋은 뜻으로 말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_=;;
하긴, 성경도 다 소실되고 훼손된 걸 학자들이 '불쌍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복원하고 복구하고 있는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복음화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 확장한다는 발상과 제일 비슷하게 세계에 복음이 확 전파됐던 때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뭐, 그 덕분에 한반도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건 "일면" 고마운 일이지만.. 이때는 여전히 우생학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의 끝은 세계대전 생지옥이었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개뿔..

복음 전파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왕국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두 눈을 직시하고 역사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30 08:35 2023/01/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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