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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라는 게 역사상 최초로 운행된 건 1920년 7월 1일, 대구에서이다.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다. 거기는 노면전차와 철도가 국내 최초였고 길거리에 택시는 다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버스 같은 건 없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가 등장한 건 그로부터 8년 가까이 지난 1928년 4월의 일이다.

그때는 시내버스만 해도 아무나 탈 수 없었으며, 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철도 기관사나 여객기 조종사에 준하는 완전 뽀대 나는 유니폼 착용 전문직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보다 지위가 훨씬 더 높았다.

예전에 버스에 대해서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버스의 외형과 시설의 변천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가장 큰 이유로는 검색해 보니 이 주제를 워낙 잘 정리해 놓은 사이트가 이미 있어서 내가 따로 글을 쓸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니 이 블로그에서는 그냥 변화의 큰 추세를 요약만 좀 해 보겠다.

1. 1950년대: 원박스화

먼 옛날, 20세기 초중반에 자동차들의 디자인 트렌드는 소형차건 대형차건 엔진룸은 전면부 중앙에 튀어나오고 앞바퀴 펜더가 돌출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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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50년대쯤부터는 엔진룸이 별도로 튀어나오지 않고 차체 바닥 밑으로 간 원박스형(혹은 R캡이라고도 불림) 버스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때는 버스의 디자인이 지금과 비슷해지기 시작한 일종의 과도기라 볼 수 있다. 50년대 말에 등장한 시발디젤 버스도 그런 형태이며, 관련 사진은 이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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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 때 국회의원들이 탔던 버스도 사진을 보니 정확한 차종과 제조사는 알 수 없지만 원박스형 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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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0년대: 디젤, 안내양

이때부터 시내버스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어서 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노면전차가 폐지되었다.
버스의 차체가 더 커지기 시작했고, 엔진이 휘발유에서 디젤 기반으로 바뀌었다. 시발 버스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버스가 아니라 '디젤 버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시내버스에는 공식적으로 '여차장'이라 불리던 안내양이 등장했다. 모든 승객이 타거나 내린 뒤, 안내양이 차를 툭툭 치며 "오라이!"라고 운전사에게 외치는 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나온다.

지하철 업계에는 승객을 강제로 밀어넣는 푸시맨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옛날에 시내버스는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승객이 너무 많이 탔을 때의 대처법이 있었다. 일단 출발 후 운전사가 직선 도로에서도 오른쪽으로 살짝 급핸들 조작을 해서 사람들을 원심력 때문에 왼쪽으로 강제로 쏠리게 했다. 그 사이에 안내양이 문을 닫았다. 그런 기동이 벌어지기도 했댄다.

옛날엔 시골에서 무작정 올라와서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맨몸만으로 돈을 벌기 위해 버스 안내양 직업을 선택한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의 애환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버스 요금을 차내에서 현금으로만 거래하던 시절에는 돈 관리도 안내양이 했는데, 정확한 승차자의 집계가 안 되니 승객으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안내양이 슬쩍 '삥땅', 횡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역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내양들이 근무 중일 때는 개인 돈을 절대로 지참하지 못하게 하고, 지금의 관점에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인권유린일 정도로 가혹한 방식으로 불시 몸수색을 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그때는 약한 을인 안내양들이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지 않았다.
(참고로 조폐공사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지금도 작업장에 드나들 때 개인 돈은 절대 지참하지 못한다. 개인 사물함에다 몽땅 보관해야 한다.)

3. 1970년대: 두짝 문, 고속버스

과거의 버스들은 앞바퀴가 차체의 굉장히 앞에 있었으며, 출입문은 가운데에 한 군데에만 있었다. 지금은 마이크로버스만이 이런 형태인데 말이다. 안내양은 바로 그 문의 문지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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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레알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 시내버스의 모습이다.)

그러다 70년대 후반쯤부터 대형 시내버스들은 요즘 버스처럼 앞문과 뒷문 구분이 생겼으며 앞문은 앞바퀴보다 더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단, 문은 수동 개폐식이었으며 뒷문도 앞문처럼 폴더(?) 형태로 접혔다. 이런 버스 보신 분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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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타는 문과 내리는 문을 분리하고 나니 승객의 승하차가 더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아울러, 시내버스 얘기는 아니지만 1970년에는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고속버스라는 게 등장했다.
그 시절에도 경부선 열차를 타면 서울-부산을 5시간 이내에 주파할 수 있긴 했지만 그건 관광호 내지 새마을호처럼 서민이 범접하기 어려운 매우 비싸고 빠르고 정차역 적은 최고 등급 열차를 탔을 때에나 가능했다.

그런데 고속버스라는 '자동차'를 이용해서도 열차 만만찮은 빠른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졌으니 이때 고속버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지금의 KTX 기장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탑승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안전벨트를 챙겨 주고 짐 나르는 걸 돕는 등, 지금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하는 일을 차내에서 했다. 가고 서기를 반복하는 시내버스 안내양과는 하는 일이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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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0년대: 리어 엔진, 토큰, 하차벨, 자동문

그 뒤 1980년대에는 후방 엔진 버스가 등장해서 대형 버스들은 다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 전방 엔진은 앞부분에 타는 곳이 굉장히 높으며, 운전석 옆에 따끈한 물건 거치대가 있었다. 그 대신 맨 뒷좌석은 봉긋 솟아 있지 않고 높이가 다른 좌석들과 동일했다.

그 밖에 이 시기에는 시내버스에서 안내양이 퇴출되는 기술적인 기반이 차근차근 마련됐다. 먼저 현금 대신 버스 토큰이 등장하여 차내에서 번거로운 잔돈 거래를 하는 여지가 줄었다. (서울 시내버스에서의 첫 도입 시기는 1977년)
그리고 차내에 하차벨이 생겼으며, 사람이 일일이 뭘 돌리지 않고 버튼만 누르면 별도의 동력으로 개폐되는 자동문이 등장해서 이쪽으로도 동작이 수월해졌다. 뒷문은 폴더가 아니라 미닫이 형태로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1인 승무 시내버스의 원형은 이때쯤 대부분 완성되었다.

5. 1990년대: 에어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1989년 12월 말을 끝으로 안내양은 전국의 시내버스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여차장을 둬야 한다는 법 조항 자체가 개정과 함께 삭제됐다.
그리고 나라가 좀 살 만해지고 자동차 기술의 발달 덕분에 엔진 출력도 넉넉해지면서 버스에 냉방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전철도 아직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고, 지하철역 승강장은 여름에 너무 덥다고 뉴스에서도 난리를 칠 정도였다.

시내버스에 자동 변속기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에 도입된 현대 애어로시티가 최초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대형 상용차에 자동 변속기는 비싼 추가 옵션 가격과 연비· 효율 문제로 인해 2010년대인 지금까지도 보급이 더딘 편이다.

6. 2000년대와 이후: 저상버스, 천연가스 버스, 환승 할인, 정거장 안내방송, 위치 안내

21세기에 시내버스는 생각보다 굉장한 발전을 거듭했다.
먼저 타고 내리기 쉬운 저상버스가 등장했으며 버스들이 동력원도 천연가스로 바뀌어서 대도시의 공기 질 개선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

그 밖에 IT 기술과 접목하여 환승 할인, 정류장 위치 안내 시스템도 20세기에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요 근래에는 그냥 도착 안내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는 버스들의 내부 혼잡도를 같이 표시해 주는 기능도 추가되어 매우 유용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내버스 요금은 먼 옛날과 비교했을 때 평균 물가 상승률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많이 오른 요금에 속한다.
버스 요금은 처음에 단가 자체가 절대적으로 굉장히 저렴했으며, 지금은 버스의 수송 분담률이 옛날보다 매우 낮아져서 개인당 단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거기에다 우리는 각종 IT 인프라 덕분에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비싼 요금이 마냥 바가지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31 08:26 2017/05/3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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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이전에 현대에서 만들었던 소형 트럭과 승합차

내가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라고 블로그에다 글을 올린 것들이 사실은 그냥 현대 자동차의 역사인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딱히 특정 기업으로부터 향응을 받았거나 거기 입장을 대변하는 처지인 건 전혀 아니고, 어렸을 때 많이 접했고 경험과 기억이 더 남아 있는 것들이 거기 자동차여서 그런 것일 뿐이다.

본인은 현기차의 빠도, 까도 아니다. 물론 걔네들이 무엇 때문에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지 정도는 그럭저럭 안다. 하지만 걔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정말 맨땅에서 죽도록 고생해서 '기술' 개발에 전념해서 우뚝 일어선 건 까든 빠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이며, 본인은 그런 것에 흥미가 가서 추억을 정리한 글을 올리는 것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사실, 코티나가 어떻고 최초의 고유 모델, 최초의 전륜 구동, 최초의 DOHC 이런 198, 90년대 소사는 지금 현대 그룹에 다니는 직원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오늘날 현대 자동차에서 생산하는 1톤 트럭의 이름은 잘 알다시피 '포터'이다. 모델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원조 포터는 이제 길거리에서 거의 찾을 수 없어졌지만, 이 각진 원조 포터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은 지금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요즘 차들에 비해 각진 헤드라이트의 모양, 그리고 문짝에 새겨져 있는 사선형 무늬가 특징이다. 저 사진에서는 흰색 배경에 무늬가 하늘색이지만, 반대로 하늘색 배경에 무늬가 흰색인 도색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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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이것보다 더 옛날 모델도 있었으며, 걔도 '포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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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명의 이니셜을 딴 일명 HD1000. 얘는 일본 미쓰비시에 생산하던 트럭+승합차이던 델리카를 들여온 모델이었으며, 트럭에는 특별히 '짐꾼'이라는 뜻인 포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워낙 희귀한 차량이어서 인터넷을 뒤져도 저 하얀 도색의 모습밖에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난 저 트럭에 대한 기억은 정말 아주 희미하게.. 거의 영운기나 SMC 8톤 덤프트럭과 비슷한 급으로 남아 있다.

트럭이지만 뒷바퀴가 작은 바퀴 한 쌍이 아니라 앞바퀴와 완전히 동일한 형태인 게 인상적이다. 그래서 기아 세레스와 좀 닮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레스는 HD1000보다 나중에 등장했으며, 헤드라이트가 저렇게 두 겹(?)이 달린 적이 없었다. 설마 HD1000도 사륜구동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자료가 없다.

HD1000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생산되었다. 즉, 포니, 그라나다, 코티나 등과 동연배인 상용차였던 것이다. 승용차에서는 포니는 나름 고유 모델이고 코티나와 그라나다는 포드 사 자동차의 면허 생산인데, 포드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니 현대에서는 미쓰비시와 이런 식으로 기술 제휴를 맺기 시작했다.

이 트럭은 가성비가 좋았는지 나름 잘 팔리고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5공 초기,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현대는 상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면서 단종되고 흑역사가 되었다. 오일 파동 속에서 기름을 아끼고 자동차 회사간의 쓸데없는 중복 투자 과열 경쟁 낭비를 막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런 식의 무식한 규제와 칼질로 인해 자동차 회사들 간의 건전한 경쟁 구도까지 망가지고, 자기들끼리 구축하던 기술 노하우와 미래 연구 계획이 무자비하게 짤린 것은 업계의 입장에서 큰 손해를 끼쳤다.

기아의 경우 승용차 브리사가 짤려서 흑역사로 전락했다. 훗날 대우 자동차가 내놓은 로얄 디젤만큼이나 브리사를 디젤 모델로도 개발할 작정이었는데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게 1980년대 초중반까지 자동차 업계의 중세 암흑기가 계속되는 동안 기아는 그래도 봉고라는 승합차와 트럭을 만들면서 회생에 성공했다. 봉고는 당사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대성공을 거뒀으며, 국내에 봉고라는 이름을 소형 승합차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정착시켜 버렸다. "봉고차!"

앞서 거론되었던 세레스도 1983년, 바로 이 기간에 만든 사륜구동 영농 최적화 트럭이다. 세레스의 모습을 위의 HD1000 트럭과 비교해 보시라. 맨 처음에는 헤드라이트가 각진 사각형 프레임 안의 원형이다가 중간에 텔레비전 브라운관 같은 둥근 사각형으로 바뀌었고, 그러다 곡선 프레임 안의 원으로 돌아온 듯하다. 어떤 경우든 HD1000처럼 1970년대 유행이던 쌍라이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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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훗날 차종 생산 규제가 풀리면서 기아는 잽싸게 승용차 프라이드를 내놓았으며, 현대는 우리가 아는 그 포터와 그레이스를 내놓게 되었다.
이들과는 달리 대우 자동차에서 내놓았던 바네트와 엘프 같은 상용차는 정말 존재감이 없이 묻혀 버렸다. 오히려 경차인 다마스와 라보만이 불멸의 경지에 올라서 지금까지 생산 중이다.

2. 신칸센 0계와 미쓰비시 데보네어 1세대

끝으로, 과거에 현대 자동차의 기술 파트너였던 일본 미쓰비시 얘기를 하겠다. 한일 합작으로 만들었던 그랜저와 에쿠스가 한국에서는 대박을 친 반면 일본에서는 몽땅 망한 이야기는 차덕이라면 이미 잘 알 것이다.

그랜저의 경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국산 고급 승용차를 개발하려는 시대적 필요가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철도계에서는 서울 지하철 3, 4호선을 만들었고 새마을호 유선형 객차를 도입했다. 도로 쪽으로는 한강 종합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올림픽대로를 닦았으며(김포 공항에서 올림픽 경기장까지 한강 따라 한번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랜저도 개발해서 출시하게 됐다.

한편, 일본에서는 미쓰비시의 대형 고급차가 데보네어 1세대였는데 얘가 1963년? 1964년에 처음 나오고 나서 일체의 개량 없이 20년이 넘게 굴러가고 있었다. 자동차계의 살아 있는 화석 실러캔스라고 까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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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데보네어의 신버전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으며, 한국과 일본은 이런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져서 각그랜저 내지 데보네어 2세대를 공동 개발하게 됐다. 첫 작품이 나온 게 1986년의 일이다.

그런데 1964년부터 1986년까지 22년을 버틴 데보네어 1세대의 연대기는 일본의 고속철인 신칸센 0계와 연대기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신칸센 0계도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간 동일 차체가 죽어라고 폐차와 교체를 수십 번, 정확히는 무려 36차 도입분까지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식빵 모양 초저항 전동차가 1974년 이래로 12년 동안 1986년까지 도입한 게 끝이었고, 서울 메트로 것도 1989년이 마지막임을 감안하면 동일 차량을 얼마나 오래 우려먹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나저나 각그랜저가 '88 서울 올림픽 대비라면, 데보네어 1세대 역시 신칸센 0계와 마찬가지로 '64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서 개발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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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차량인 신칸센 100계는 도입 연도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로, 얘 역시 각그랜저의 생존 주기와 얼추 비슷하다. 뉴 그랜저는 1992년 가을에 출시됐으며, 신칸센 300계도 1992년에 등장했다. 300계는 우리나라의 고속철 차량 입찰 경쟁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철덕은 자동차의 역사를 동일한 시기의 철도의 역사와도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23 08:32 2016/12/2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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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형차가 대형차를 추돌

요즘 자동차들은 안전 장치들이 워낙 발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 폐차 수준으로 박살 날 충돌· 전복 등의 사고가 나도, 탑승자는 벨트만 잘 매고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경상 수준을 넘지 않고 잘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런 발전하는 기술에도 불구하고, 소형차가 대형차를 들이받으면 여전히 십중팔구 중상· 사망 급의 사고가 난다. 당연히 소형차에서.

물론 차량의 덩치와 무게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 차체의 높이 차이로 인해 소형차가 범퍼와 엔진룸부터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 앞유리와 A필러를 직통으로 거쳐(;;) 캐빈(탑승 공간)이 곧바로 박살나기 때문인 게 무척 크게 작용한다.
영화 <테이큰>에서도 공사장 차량 추격씬에서 이게 잘 묘사돼 있다. 브라이언을 쫓던 마지막 악당이 불도저의 블레이드 부분과 정면충돌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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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앞이 꽉 막힌 담벼락을 꼬라박는 것보다도 이런 유형이 더 치명적인 사고인 것이다. 저 악당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가로등도 안 켜진 깜깜한 길가에 그것도 커브길에 불법주차된 대형 트럭을 뒤늦게 발견하고 들이받는 바람에 승용차 운전자가 골로 간 사고 사례가 종종 전해지곤 한다. 링크를 거는 이 사고에서도 탑승자 2명이 모두 숨졌다.

이런 유형의 사고의 극단적인 사례로는 지난 2014년 10월 28일, 호남 고속도로 상행선에서 발생한 교통사고가 있다. 군 입대를 하는 친구를 배웅하러 애들이 5명이서 승용차를 렌트해서 달렸는데.. 과속 상태로 커브를 틀다가 균형을 잃고 갓길에 서 있던 4.5톤 트럭(도로 보수 차량) 후미를 들이받았다.
차가 트럭의 밑으로 말려 들어가면서 딱딱한 트럭 짐받이가 딱 저렇게 캐빈을 강타했으며, 이 때문에 차는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그리고 입대 당사자를 포함한 탑승자 5명은 전원 사망하고 말았다.;;; 당사자의 지인뿐만 아니라 여친까지 다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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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자동차 회사들은 범퍼뿐만 아니라 앞유리와 A필러(앞유리+앞좌석 사이의 지지대)도 최대한 튼튼하게 만든다.
먼저 앞유리야.. 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금만 쩍쩍 갈 뿐 '와장창' 깨지지 않게 유리에다 온갖 첨가물을 섞어서 특수한 방법으로 제조된다.

다음으로 A필러도 단순한 금속 기둥이 아니며, 여기에도 자동차 회사들의 기술이 집약된다. 그래야 (1) 차량이 전복되거나 (2) 차량 위로 위험물이 떨어지거나, (3) 저렇게 차체가 높은 장애물과 충돌하더라도 차의 형체가 '최대한' 유지되고 캐빈 내부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1)과 (3)은 그렇다 치더라도 (2)도 적재 불량 화물차에서 뭔가가 떨어질 때 내지, 도로에 떨어진 이물질을 앞차가 밟으면서 튕겨 올라가서 뒷차를 강타할 때처럼 생각보다 발생 가능성이 높은 돌발상황이다.
물론 이렇게 하고도 탑승자가 사망 혹은 중상으로 귀결되기 십상이지만 이것도 그나마 옛날 자동차보다는 생명을 많이 구한 결과이다.

평상시에야 A필러는 차량이 모퉁이에서 회전할 때 운전자에게 측면 사각지대를 만들어서 회전축 안에 있는 장애물이나 사람을 못 보고 부딪치게 만드는 위험 요소이다. 그러나 이게 사고 시에는 자동차 내부의 탑승 공간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꽤 중요한 안전 장치 역할을 한다. 이렇듯, <테이큰> 영화 한 장면으로부터도 자동차 안전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할 수 있었다.

2. 대형차가 소형차를 추돌

위의 경우와는 반대로 대형차가 소형차의 뒤를 추돌하면..
이것도 역시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을 듯하다. 소형차는 다 박살이 날 것이다. 특히 대형차가 엄청난 운동량을 이기지 못해 소형차를 깔고 올라타는 지경에 도달하면 제아무리 단단하게 만든 A필러라 해도 다 짓이겨질 것이고 탑승자는 전원 사망 확정이라고 봐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2009년 4월 23일의 서울 수유동 대형 관광버스 교통사고이다. 관광버스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모두 하차시켜 주고 공차 회송 상태였다. 버스 기사는 모든 업무를 마쳤으며, 이제 차를 회사에다 세워 놓고 퇴근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이때 날벼락이 떨어졌다. 평소에도 정비 불량으로 인해 맛이 갈 기미를 보이던 브레이크가 4· 19 묘지 인근의 어느 내리막길에서 드디어 말을 전혀 듣지 않기 시작했다.

급발진 수준은 아니었겠지만 내리막이니 차량은 점점 속도가 붙었으며, 가로수와 승용차 몇 대를 들이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호 대기 중이던 승용차 한 대를 추돌한 걸로도 모자라 그 차를 밑에 깔고서 160미터 가까이를 밀고 갔으며, 더 앞의 승용차 7대를 추가로 들이받고 전신주를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승객이 탄 것도 아니고 빈 버스인데도 속도가 붙자 엄청난 파괴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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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게 깔린 채로 끌려간 승용차에는 계모임을 마치고 찻집으로 이동하던 학교 교직원들이 하필 7명이나 구겨서 타고 있었는데.. 아무도 차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그 어떤 알량한 안전장치라도 이 정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이렇게 끝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투신 자살하는 사람한테 깔려 죽는 것만큼이나 정말 운 한번 더럽게 없다.
듣기로는 2차를 가지 않고 먼저 귀가한 계 멤버 딱 한 명만 화를 피해서 살아 남았다고 전해진다. =_=;;;

이 사고로 버스 운전사, 버스 회사 사장, 버스의 정비 업체까지 줄줄이 경찰에 소환되었다. 너무 큰 피해가 났기 때문에 버스 운전사는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참고로 2010년 7월 3일, 인천대교에서 고장난 마티즈 CVT를 피하려다가 교각 아래로 추락해서 14명의 사망자를 낸 공항 리무진 운전자는 금고 3년형이 선고됐다. 1차 원인 제공자인 김여사는 금고 1년.) 그만큼 무거운 대형차 운전자는 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리고 또 안타까운 사고가 더 있었다. 2013년 12월 14일, 경부 고속도로 하행선의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방면에서는 승용차 간의 접촉사고 때문에 후속 차량들의 정체가 시작됐는데, 이걸 뒤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또 4중 추돌 사고가 났다.
문제른 부딪친 차량들의 배열 순서였다. 맨 앞은 그랜저였고 그 뒤는 25톤 탱크로리. 그 뒤엔 벽돌을 가득 실은 25톤 화물차였는데.. 양 25톤짜리 대형차의 사이에는 승용차가 한 대 있었다.

25톤 화물차는 운동량을 주체하지 못하여 앞의 승용차를 그대로 짓눌렀고, 승용차는 양 대형차 사이에서 완전히 으스러졌다. 승용차에는 두 집에서 제각기 남편만 빼고 아내와 자녀 두 명이 타서 총 6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고로 모두 끔살 당했다. 두 집의 가장들은 하루아침에 처자식을 모두 잃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런 사고는 올해에도 계속됐다. 지난 5월 16일엔 남해 고속도로의 터널에서 대열 운행을 하던 관광버스들이 정체 구간 급정거로 인한 9중 연쇄 추돌 사고를 냈는데, 전후의 관광버스 사이에 끼여 있던 모닝 승용차가 다 짜부러지는 바람에 거기서만 탑승자 4명이 모두 숨졌다.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라서 7월 17일엔 영동 고속도로 봉평 터널 인근에서 관광버스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앞차를 네댓 댄가 연달아 들이받고 특히 바로 앞의 K5 승용차를 완전히 짓뭉갰다.

영동 고속도로의 사고는 대열 운행도 없었고 브레이크 고장도 아니었고 순수하게 운전 기사가 졸다가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낸 것이었다. 앞차엔 강원도로 피서 여행을 다녀 오던 20대 여대생 4명이 차를 꽉 채워 타고 있었는데 모두 남해 고속도로 사고처럼 비명 한 마디 못 지르고 전원 즉사했다. 운전자 남성 한 명만 중상.
이 글에서는 사진 첨부는 생략하지만 이들 역시 잔해의 모습이 위에서 소개한 것들 만만찮게 처참했다. 소형차는 대형차의 곁을 달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럼, 이런 충돌 사고가 났을 때 꼭 대형차의 탑승자만 생존에 무조건 유리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2013년 8월 7일, 중부 고속도로에서는 운전 중 시비가 붙어서 한 승용차 운전자가 고속도로 위에서 차를 고의로 급정거하는 미친 짓을 했다. 시비가 붙은 차와 추가로 뒷차 3대까지는 급정거를 했지만, 다섯 번째로 달려오던 5톤 트럭은 제대로 정지하지 못하고 앞차를 모조리 들이받았다.

그런데 이 사고에서는 가장 큰 차를 몰고 가장 뒤에서 추돌한 트럭 운전자 한 명만 숨졌다. 트럭은 승용차와는 달리 전방에 엔진룸이 없어서 전방을 들이받으면 운전석이 곧장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고와 비극을 야기한 고의 급정거 운전자는 징역 7년 구형에 3년 6월형이 확정되는 엄벌을 받았다. 앞서 거론된 버스들의 사고보다 사상자 수는 적지만 죄질이 워낙 나쁘기 때문이다. 부디 길을 틀어막고 만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보복· 위협운전이 근절되기를.

3. 음주운전자가 낸 후방 추돌 교통사고

지금까지 차량 대파와 인명 사고를 야기하는 교통사고를 후방 추돌 위주로 살펴봤다.
후방 추돌은 정면 충돌보다야 충격량이 작을지 모르지만, 승용차의 경우 연료 탱크가 뒤에 있기 때문에 이걸로도 화재가 발생할 수 있어서 더욱 위험하다.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멀쩡히 잘 가고 있는 앞차를 뒷차가 대놓고 들이받는 경우는 잘 없다. 시내 도로 교차로라면 신호 대기 중인 차를 뒤늦게 발견해서이고,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는 갑자기 정체 구간 또는 사고 현장이 나타난 걸 대처를 못 해서 사고가 나는 편이다. 대처를 못 하는 원인으로는 (1) 브레이크 고장 같은 대형차의 기술적인 사정뿐만 아니라 (2) 무리한 떼빙(좁은 간격으로 대열 운전), (3) 과로로 인한 졸음 운전이 있다.

이것보다 좀 더 어처구니없는 원인은 (4) 운전 중 스마트폰/DMB 조작하다 전방 주시 태만이 있다. 제일 죄질이 나쁜 건 두 말할 나위 없이 (5) 음주운전 되시겠다. 그래도 음주운전은 개인의 승용차 레벨에서 발생하지, 트럭 운전이 생계인 대형차 기사가 대놓고 겁대가리 상실하고 음주운전을 하지는 않는다.

지난 6월엔 이 지선 씨가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안면이 다 타고 일그러지는 중화상을 그 쌩고생을 해서 치료하고 피부 이식을 해서 복원한 게 겨우 저 모양이다. 16년 전인 2000년 7월경에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분의 인생이 저렇게 달라진 것이었다. 그나마 얼굴이 그렇게 다 불타는 와중에 렌즈까지 끼고 있던 눈은 다치지 않아서 시력을 전혀 잃지 않은 건 기적적인 천만다행이었다. (그분 수기에 언급돼 있음)

2012년 6월 11일 새벽, 인천 공항 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앞에 멀쩡히 가던 승용차를 거의 전속력으로 추돌했다. 이 때문에 피해 차량에서는 불이 났으며, 공항에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가장을 포함해 일가족 4명이 기절한 채로 불타는 차에서 모두 몰살을 당했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 역사로부터 배우는 게 없나 모르겠다. 2015년 2월 3일 새벽에는 고속도로가 아닌 구미 시내에서 만취 음주운전자가 외제차로 앞의 경차를 추돌했다. 아까와 똑같이 경차에서는 불이 났고, 운전자인 학원 선생과 여고생 3명, 탑승자 4명이 모두 숨졌다. 이것도 시속 100이 훨씬 넘게 밟으면서 급발진 급의 추돌 사고를 낸 것이니 차와 탑승자가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16년 6월 10일 밤, 인천 청라 국제도시에서는 또 음주운전자가 신호 대기 중이던 승용차를 들이받아서 이번엔 불은 안 났지만 일가족 3명이 숨졌다. 전~부 후방 추돌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탑승자 전원이 몰살이지만 가해자는 경상에 그치고 살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더욱 분통 터진다.

음주운전자가 추돌 사고를 낼 거면 아까처럼 세워져 있는 대형차나 들이받아서 자기 혼자나 죽을 것이지, 꼭 왜 저런 식으로 남까지 죽이는 사고를 내나 모르겠다. 글쎄, 가해자도 죽은 사고도 있긴 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따로 음주 측정을 안 해서 안 알려진 건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음주운전자가 가로수를 들이받거나 고가에서 추락해서 그나마 민폐는 덜 끼치고 자기 혼자만 다친 사고 사례도 있긴 하다.

2014년 7월 20일 새벽에 대전에서는 (1) 한 음주운전자가 신호 대기 정차 중에 퍼질러 자 버려서 파란불이 됐는데도 출발 안 함. (2) 그 차량을 다른 음주운전자가 추돌해서 사고를 냈고, 덕분에 경찰 조사 과정에서 (3) 두 운전자가 모두 혈중 알코올 농도 0.1% 초과급의 음주운전이 적발되어 둘 다 사이좋게 면허 취소됨.. 요렇게 음주운전자끼리 병맛스러운 팀킬을 벌인 일이 있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한 번 단속으로 일석이조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2016년 1월 26일, 청주에서는 눈에 뵈는 게 없던 한 음주운전자가 경찰서의 순찰차 주차 구역에다가 제 발로 차를 몰고 와서 차를 당당하게 세우는 바람에 곧바로 경찰에 현행범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거기는 일반 주차 구역이 아니에요. 아저씨, 차 빼 주세요. → 어라? 아저씨 좀 술냄새가 심하게 나네요?"처럼 된 셈. 이건 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차라리 귀여운 사례이다.
아무튼 술 마신 뒤에는 제발 운전대 좀 잡지 말자.

* 여담

교통사고에 대해서만 글을 잔뜩 썼다가 또 얘기가 부득이하게 옆길로 새게 됐다만.. 말이 나왔으니 이 지선 씨와 관련된 여담도 좀 늘어놓자면 이렇다.

- 정확한 시기와 발표 주체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분의 개인 홈페이지는 2000년대 중반경에 어디선가 조사한 국내 개인 홈페이지들 중에 전체 트래픽/방문자수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참고로 1등은..? 시스템 클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_=;; )

- 교통사고 화재 현장의 화상뿐만 아니라 화공 약품 테러로 인한 화상도 끔찍한 사고 내지 사건이다. 앞서 이 지선 씨는 그래도 눈은 멀쩡히 남았지만, 1999년 5월 20일..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의 피해자인 김 태완 군은 전신 3도 화상에다가 실명까지 한 채로 7주간을 깜깜한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 패혈증으로 숨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못한 채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 2009년에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로 회사에 체납 임금 청구 소송을 벌였는데 악덕 업주로부터 황산 테러를 당한 모 여직원도.. 지금은 그나마 많이 회복됐고 이 지선 씨와 마찬가지로 사회 복지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마치 과거의 지존파 피해 여성처럼 가명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건 실명은 아니다. 어쩌다가 저런 블랙 기업에서 첫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이런 불행을 겪었는지가 안타깝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29 08:21 2016/08/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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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퀴, 엔진, 문 등의 내부 배치가 특이한 놈

요즘 자동차들은 대형 고급 승용차가 아니면 트럭 정도만이 FR(앞쪽 엔진, 뒷바퀴 구동)이다. 중형 이하의 작은 승용차들은 다 연비와 공간에 더 유리한 FF(앞쪽 엔진, 앞바퀴 구동)로 물갈이됐고, 버스들은 1종 보통(대형이 아닌) 면허로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10몇 명짜리 '봉고차'급이 아닌 이상, 공간 확보와 조향에 더 유리한 RR(뒤쪽 엔진, 뒷바퀴 구동)로 바뀌었다.

승용차는 대형이 FR인데 버스는 소형이 FR인 게 흥미롭다. 이를 종합하면 트럭이 아닌 승용· 승합차는 차량의 크기에 따라 FF-FR-RR의 형태로 엔진과 구동 형태가 바뀌기라도 하는가 보다. (뭐 외국엔 승용차도 경차 위주로 RR이 일부 있기도 하니, 이게 절대적인 경향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인해 대형 버스는 다른 차들과는 달리 엔진 소리가 뒤쪽에서 들리며, 엔진과 연결된 팬벨트가 돌아가는 것도 뒤쪽에 보인다. 대부분의 차량들의 앞면에 으레 붙어 있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버스의 앞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80년대까지는 국내의 대형 버스에도 전방 엔진 모델이 있었다. 본인도 초딩 시절에 시골에서 그런 버스를 탄 기억이 남아 있다.
전방 엔진 버스는 운전석이 있는 앞부분의 바닥이 유난히 높았고, 운전석의 오른쪽 중앙이 보다시피 뭔가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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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맨 뒷좌석이 위로 봉긋 솟아 있지 않고 높이가 앞의 다른 좌석들과 동일했다.
요즘 버스들은 맨 뒷좌석은 위로 한두 계단 높이 솟아 있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데, 이 버스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게 어릴 때도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비행기로 치면 보잉 사가 개발한 전무후무 유일한 삼발기인 727을 보는 느낌이다. 날개 밑에 엔진이 달려 있지 않은 게 신기함.

후방 엔진 버스에서는 맨 뒷자리가 폭도 좁은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최악의 폭탄 자리인 반면, 전방 엔진에서는 맨 뒷자리에 그 정도까지 페널티는 없을 듯하다.
반대로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버스는 무거운 엔진이 전방에 달려 있는 데다 옛날엔 파워 스티어링마저 없었을 테니 정지 상태에서 조향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다. 하물며 주차는 완전 고역이었겠다. 지금처럼 후방 카메라나 경보 장치가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현대 FB(전방 엔진) 버스와 RB(후방 엔진) 버스는 외형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맨 뒷좌석의 높이를 보면 구분 가능하다. 대우 자동차도 BF105 같은 초기 모델은 전방 엔진 F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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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대우(대우 자동차에서 버스 생산 부분만 계승한 후신)에서는 현대 자동차와는 달리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전방 엔진 버스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국내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전량 수출만 한다. 외국에 무슨 특별한 수요가 있어서 어째 수출 전용으로라도 생산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뭐, 이 글에서는 주로 전방 엔진 얘기만 했지만 잠깐 버스의 외형 얘기를 조금만 더 하고 넘어가겠다. 미국의 스쿨버스처럼 앞에 보닛이 달린 버스, 그리고 무슨 10~20톤 이상급 초대형 트럭처럼 뒷바퀴에 바퀴가 앞뒤로 두 줄이 달린 버스도 국내에서는 볼 수 없다.
화장실이 달린 버스가 달리기엔 우리나라는 국토가 너무 좁다. 철도계에서 열차의 주행 속도가 올라가면서 침대차가 사라졌듯이, 버스도 고속도로와 휴게소 인프라가 발달하면서 자체적으로 화장실을 내장할 필요는 없어졌다.

옛날 버스 중에는 앞쪽 출입문이 요즘 버스처럼 앞바퀴의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앞바퀴의 뒤에 달린 버스도 있었다.
물론 현대 카운티처럼(예전의 코러스/콤비.. 그러고 보니 전부 'ㅋ' 돌림 이름이네.) 중형 버스까지는 오늘날까지도 그런 형태의 차들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더 커 보이는 차가 그런 형태인 건 참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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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선보인 시발 자동차의 자매품 버스..;; '씨X 뒈X' 같은 욕설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리라. -_-;;

2. 동력원이 특이한 놈

바로 앞의 사진에서 버스의 앞면에 걸린 현수막 문구를 제대로 읽어 보면.. '국산 시발 디젤 버스'이다.
버스 같은 대형차는 만약 기름으로 달린다면 디젤 엔진 기반인 게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그때는 디젤 차량을 국내에서 만들어 낸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라서 저렇게 써 붙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천연가스로 달리는 버스들이 1990년대 이후부터 야금야금 등장하기 시작했고, 다른 버스는 몰라도 최소한 대도시의 시내버스들은 거의 다 물갈이가 됐다. 천연가스 버스는 이제 특이한 놈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주류이다. 석유 내연기관은 소형차용 휘발유와 대형차용 디젤로 나뉘는데, 어째 천연가스 엔진은 소형차(택시)와 대형차(버스)에 모두 쓰인다는 게 신기하다.

서울 시내의 공기가 시골에 비해 썩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천연가스 버스의 도입은 공기 질의 개설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잘 알다시피 디젤 차량은 선진국들에서 정말 찍어 누른다 싶은 수준으로 배기가스 규제를 걸고 있다.
과거의 디젤 버스들은 엔진이 달린 후면부에 매연 그을음도 시커멓게 잔뜩 묻어 있어서 몹시 더러웠다. 이건 단순히 흙먼지가 묻은 게 아니었다.

경상용차인 다마스와 라보는 알고 보니 휘발유도 디젤도 아니고 진작부터 가스 전용이다. 그런데 웬 배기가스 규제를 받고 그것 때문에 차를 단종하네 마네 말이 있었나 모르겠다.

한편, 2010년대부터는 서울에서 남산 투어용으로 하이브리드도 아닌 순수 전기 버스가 다니고 있다. 요렇게 생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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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데 환경 보전을 위해 전기를 선택한 건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안 그래도 전기차는 배터리 문제 때문에 지금도 소형차 수준에 머물고 있는데, 대형 버스가 그것도 배터리 집전 방식만으로 승객을 가득 싣고 에어컨 틀고 산길을 오를 수 있는지가 우려되기도 한다.
실제로 운행 개시 후 얼마 못 가 이런 애로사항이 잔뜩 제기되었다. 하지만 예전에 남산에 갔을 때도 버스가 다니고 있는 걸 보니, 문제점을 수정해서 운용은 계속하고 있는가 보다.

고질적인 배터리 충전+항속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 자동차에서는 몇 년 전에 수소 연료전지 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연구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양산과 실용화 단계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기구가 있긴 하지만 그냥 수증기+물만 나온다고 한다.

외국에는 더 엽기적인 발상을 해서 버스 차체에다 배터리 대신 가공전차선을 장착한 '트롤리버스'라는 게 있다. 비록 바퀴는 궤도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노면 전차와 다르지만, 공중에 있는 전차선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궤도 교통수단이나 마찬가지이다. '무궤도 전차'라고 불리기도 한다.
뭐 그럴 거면 "조향을 아예 할 필요가 없는 노면전차나 경전철을 만들고 말지, 저딴 걸 왜 만들어?"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위치가 좀 콩라인스러운 면모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버스의 입장에서는 정교한 레일을 만들 필요 없고 버스도 안에 간단한 집전 장치와 모터만 있으면 되고 배터리 충전 필요 없이 풍부한 전기를 팡팡 끌어다 쓸 수 있으니 나름 괜찮다. 얘도 아까 말한 전방 엔진 버스와 마찬가지로 맨 뒷좌석이 위로 툭 튀어나와 있지 않다.
외국에는 차선이나 하나 떼 낸 버스 전용 차선이 아니라 아예 버스 전용 고가 도로도 있다고 한다. 이것과 트롤리버스가 연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교통 평론가 한 우진 님의 블로그에 소개돼 있다.

전기 모터는 열과 폭발 뒷감당을 하는 내연기관보다 작고 조용하다. 냉각수나 엔진오일, 배기가스 촉매 변환 계통 따윈 없어도 되고 정비성과 유지보수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 때문에 차량 내구연한을 기름 차량보다 훨씬 더 길게 잡아도 된다.

당장 이북의 평양에도 트롤리버스가 있으며, 영화 <태양 아래>에서는 하필 퍼진 버스를 시민들이 밀고 가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버스가 가파른 비탈길을 매연 안 내뿜고 깨끗하게 오르기 위해서 재래식 케이블 전차와 더불어 트롤리버스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트롤리버스라 하면 노면전차만큼이나 좀 낡고 꼬질꼬질하고, 못사는 나라에서 노인학대급 차량을 굴리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편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3. 외형이 특이한 놈

버스와 트럭을 정확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시내버스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슈퍼 에어로시티는 길이가 거의 11미터에 달하며 엔진 배기량은 10리터, 엔진 최대 출력은 300대 초반 마력이다. 이 덩치에 얼추 대응하는 트럭은 8톤 초장축 정도 된다.
(1종 보통 면허로 사람이 많이 타는 버스는 15인승까지밖에 운전할 수 없지만, 트럭은 이 8톤보다도 더 큰 12톤 미만까지도 운전할 수 있다. 그러니 운전 면허라는 건 단순히 기술 수준보다는 법적 책임감을 두고 제정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버스 한 대의 덩치를 더 키우고 대당 수송력을 더 키우기 위해 두 가지 시도가 있었다. (1) 위로 층수를 더 늘리거나 (2) 버스의 앞뒤 길이를 더 늘이는 것이다. 그리고 선뜻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두 종류의 버스를 생각보다 옛날에 서울에 도입하려 한 적이 있었다.

높이를 키우거나 길이를 키우면 대당 수송력은 일반 버스보다 확실히 1.몇 배가량 더 증가한다. 입석까지 감안하면 차 한 대에 100명 이상은 너끈히 탈 수 있다. 하지만 외제차를 소량 수입하는 것이다 보니, 수송력 대비 차량 단가는 일반 버스의 2배 이상으로 훨씬 더 증가하고 정비도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어서 가성비 문제 때문에 도입이 무산되곤 했다.

먼저, 2층 버스 얘기부터 하자면.. 얘 원조는 역시 빨간 2층 버스를 굴리던 영국이다. 유명한 런던 명물이니 사진 첨부는 귀찮아서 생략한다.
2층 버스는 여행객을(특히 외국인) 대상으로 굴리는 도시 관광버스 계열이 있는가 하면, 본격 노선 버스(일반 시내버스) 계열이 있다. 전자는 2층은 천장이 없이 뚫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일반 시내버스용으로는 국내에서 1991년 10월부터 2개월간 서울 시청 - 사당 - 과천 노선을 시범 운행한 적이 있다. 차종으로는 독일 '네오플란'이라는 메이커 수입차를 3대 도입했다. 본인은 그 당시 자동차생활 같은 잡지에서 이에 대해 흥미롭게 다뤘던 걸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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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버스는 딱히 회전반경이 걸리는 건 없겠지만 아무래도 무게중심이 높다 보니 커브를 돌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승용차보다 약~간만 차체가 높은 SUV만 해도 고속 회전 중에 전복 위험이 더 커지니 말이다.
또한 2층 버스는 당연한 말이지만 노선을 짤 때 중간에 높이가 4~5미터 남짓한 육교, 교량, 신호등 따위와 부딪치지 않는지를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2층으로 인해 같은 면적에 걸리는 하중이 증가하는 건 바퀴를 더 달면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승하차 시간이 길어지는 건 감안해야 할 문제 되겠다. 2층 버스의 구조에 맞는 복층 승강장과 출입문이라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열차로 치면 승강장 길이보다 더 긴 열차가 들어와서 앞의 일부 출입문만 열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당시에 저 2층 버스를 베타테스트 해 봤다. 도로 주행에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시내 대중교통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차량을 놀이공원 셔틀버스 부류로 용도변경 처분했다. 그 동안 오히려 철도에서 ITX-청춘이라는 국내 최초의 2층 열차가 등장했으나 얘는 아직 경춘선에서만 볼 수 있다.

2층 다음으로, 일명 아코디언 버스라고 불리는 굴절 버스 차례다. 철도 차량이나 트레일러 트럭처럼 중간에 꺾이는 부분을 만들어서 차체의 길이를 늘렸다(11미터 → 거의 18미터). 얘도 의외로 역사가 오래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 여름경에 서울 시내에서 스웨덴제인 스카니아-볼보 차량을 도입해서 테스트한 적이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역시 유지· 정비 비용 같은 가성비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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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묻혔던 굴절 버스는 그로부터 20여 년 뒤, 2004 서울 버스 대개편 때 다시 등장했다. 이때는 이탈리아 이베코 차량이 살짝 로컬라이즈와 원가 절감 디버프를 거쳐서 들어온 뒤, 470 같은 일부 파란 간선 버스에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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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4자리 번호인 초록 버스와 3자리 번호인 파랑 버스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버스 개편 당시의 원래 의도는 둘을 훨씬 더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파랑 버스는 진짜 '대로'급의 간선에서 버스 전용 차선 위주로만 달리고 정거장도 적고 심지어 빨강 버스처럼 요금까지 더 비싸게 받으려 했다. 그리고 그런 파란 버스에 굴절처럼 수송력이 큰 차량을 집어넣는다는 게 계획이었다.

얘는 탈 때 계단을 덜 올라도 되는 저상(1번. 내부 배치 특이)에다 엔진도 기름이 아닌 천연가스 기반이어서(2번. 동력원) 버스의 여러 분야에서 신기원을 개척했다.
운용하는 데 2층 버스만치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위험한 요소는 없지만, 주차나 회차는 좀 아슬아슬할 듯하다. 그리고 중간문이나 후문에서 운전사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한 불법 무임승차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뭐 CCTV로 잡아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서울 시민들이면 잘 알다시피 저상 버스는 2000년대의 시즌 2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으며, 몇 년 못 가 시내 도로에서 사라졌다. 고장이 나면 국내 기술자들이 뒷감당을 할 수 없었으며, 디버프가 너무 심하게 됐는지 엔진 출력이나 냉방 조절도 기사 재량으로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기획예산처에서는 굴절 버스의 도입을 세금 낭비 돈지랄로 끝났다고 깠었는데, 이에 대해 한 우진 님은 그렇지 않다는 반박글을 썼었다.
이때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현대 자동차에서 국산 굴절 버스 프로토타입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베코 외제차가 보였던 냉방 같은 문제까지 해결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산은 더 되지 않았다. 뭔가 포니 쿠페처럼 묻혀 버린 것 같다.

지하철에서는 6호선의 609편성 국산 인버터 지하철이 고장이 너무 잦아서 퇴출되고 다시 외제 인버터로 돌아갔는데.. 버스는 반대로 외제가 정비가 힘들어서 퇴출되고 다시 국산차로 돌아간 것이 특이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10 08:32 2016/08/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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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 승용차의 종류

자동차에서 일반 서민들이 범접할 수 없는 최고급 승용차라고 하면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말 그대로 롤스로이스, 마이바흐, 벤틀리처럼 대통령, 대기업 총수 등이 운전수를 부려서 타는 기함 계열이다. 차체가 크고 내부엔 온갖 편의 시설이 즐비하다. 뒷좌석에도 팔걸이 다리 받침대가 있고, 개인 모니터와 냉장고도 있다. 차 문과 트렁크는 스위치 조작으로 자동 개폐가 가능하다. 주행 중에도 워낙 조용하고 진동이 안 느껴져서 밖이 고속 주행 중인지 알기가 어렵다.

겨우 네댓 명이 타는 승용차 주제에 공차중량이 2톤을 넘으며, 5000~7000cc에 달하는 배기량으로 300~500마력짜리 출력을 내는 8기통짜리 엔진은 그 규모와 성능이 거의 대형 버스나 트럭과 비슷하다. 그것도 버스· 트럭과는 달리 디젤이 아닌 휘발유 엔진으로 그렇게 달린다. (그럼 연비가..;; ) 힘이 워낙 넘치기 때문에 변속기도 5~6단이 아닌 8단 이상급이며, 1000대 중반 rpm만으로 시속 100km쯤은 거뜬히 넘어간다. 에어컨을 켜도, 무거운 짐을 가득 실어도 고속도로쯤은 슬금슬금 적당한 경제 속도 주행일 뿐, 경차처럼 힘겨운 고rpm 주행이 아니다. 아, 나도 이런 차 몰고 싶다..

이런 차는 진짜 높으신 분들의 보안을 위해 장갑을 장착하여 방탄 의전 차량으로 개조되어 운용되기도 한다. 기관총 탄환은 물론이고 차 밑에서 폭탄이 터져도 어지간히 방어할 수 있다.
물론 장갑이 장착되면 차체는 무슨 군용차처럼 굉장히 무거워진다. 하지만 엔진이 원래부터 워낙 고성능이니 이 정도 부담이 크게 문제될 건 없다.

'크고 호화로운 차' 말고 다른 갈래로는 스포츠카 내지 슈퍼카 계열이 있다. 여기도 포르쉐, 부가티, 람보르기니, 페라리 같은 역사 깊은 메이커 계보가 있다. 이런 차들은 떡대와 갑빠, 안락함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날렵함과 스포티함을 추구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게 높이가 낮고 정말 매끄럽게 생겼으며, 문도 대체로 쿠페형이다.
사실, 시속 300km 이상은 엔진 출력만 크다고 달성 가능한 게 아니라 속도에 비례해서 폭발적으로 커지는 공기 저항의 제어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같은 고급차여도 단순 호화로운 기함급과 스포츠카 차급의 디자인 철학이 달라진다.

이런 명품 스포츠카들은 너무 성능이 좋으니.. 오토바이도 아닌 것이 그냥 쑥 밟으면 단 몇 초 만에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로 진입한다. 운전자는 관성 때문에 뒤로 확 밀릴 것이다. 이런 차를 일반 승용차 몰듯이 밟았다간 그야말로 급발진 사고에 준하는 큰일이 난다.

실제로 2012년 10월엔 이런 일이 있었다. 억대의 포르쉐 카레라 S 한 대가 차주의 경제 사정 때문이었는지 은행에 압류 당해서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차량은 경기도 화성시에 소재한 자동차 안전 연구원(교통 안전 공단 산하)에 넘겨져서 간단한 검사를 받았는데.. 일반 직원이 이 차를 몰고 시운전을 해 보다가 차가 폭주해 버렸고, 빗길에 미끄러져서 충돌 사고 발생. 운전자는 중상을 입었으며, 차는 경매가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 나는 바람에 폐차 처분되었다..; 다시 말해, 압류 자산 값을 못 하고 허무하게 일생을 마쳤다.

호화형이든 스포츠형이든 대도시 시내 도로에서 이렇게 지나치게 고성능인 차들이 제대로 달릴 만한 공간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엔 우리나라보다 땅이 넓은 나라도 많고, 자동차라는 게 남자의 재력 과시와 질주 본능이라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육신적인 욕망을 잘 충족하는 물건이다 보니, 저런 데에 집착하는 부자들이 꼭 있다.

그리고 이런 명차들은 한때는 다 수제 주문 생산을 했기 때문에 더욱 비싸고 희귀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한테나 팔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자본주의 규모의 경제 시대에는 아무리 명차 메이커라 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내고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다른 자동차 대기업에 합병됐거나 마케팅 방식을 바꿨다. 옛날 같은 고자세를 버리고 돈만 주면 당연히 아무에게나 팔며, 고급차라 하지만 운전수가 태워 주는 구도뿐만 아니라 차주가 오너 드라이빙을 하는 것도 고려해서 뒷좌석만 너무 고급스럽게 꾸미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 자동차에서도 이런 이미지의 쇄신을 위해서 이례적으로 에쿠스라는 브랜드를 접고 제네시스 EQ 900을 기함으로 계승한 것이라 생각된다.

※ 국회의원들의 이동 수단

우리나라는 1952년, 아직 6· 25 전쟁 중이고 수도가 부산으로 임시로 옮겨져 있던 시절에 '부산 정치 파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간단히만 말하면 이 승만 대통령이 2선에서도 확실하게 당선되고 독재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기를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하고 구속한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이 승만을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만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때 이 승만 정권이 국회의원들을 납치한 방식이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이야 국회의원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회사원 월급쟁이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돈 많이 벌고 온갖 예우를 세금으로 공짜로 받으면서 호화롭게 산다. 출퇴근 할 때도 당연히 '검정 고급차'를 끌고 다닌다. 과장 좀 보태면 "남들은 전부 외제차인데 나만 에쿠스예요" 이게 그 바닥에서는 겸손이랍시고 나오는 말일 지경이다. 덴마크의 국회의원들은 자전거로 통근하는데 우리나라 국회의원과 너무 비교된다고 까는 글도 인터넷에 올라온 적이 있다. 마치 같은 폭설이 내렸는데 미군과 국군에서 간부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1952년 저 시절엔 우리나라가 몹시 가난했고, 게다가 나라가 전쟁 중이었다. 그러니 국회의원들도 얄짤없었다. 무슨 공장 출퇴근하는 노동자마냥 한데 모여 통근버스를 탔었다. 그랬기 때문에 저 때는 검문을 핑계로 그 버스를 강제로 세운 뒤, 헌병대가 군용차를 동원해 버스를 통째로 코렁 시설로 끌고 가는 방식으로 야당 의원들을 간단히 연행할 수 있었다. (!)

지금 느닷없이 옛날 독재가 어떻고 세금값 월급값 못 하는 국회의원(놈)들이 어떻고 하는 골치 아픈 정치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다. 그건 잠시 잊고, 단지 고위 정치인의 이동 수단에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 봤다.

※ 1000마력짜리 스포츠카

세계의 명품 스포츠카/호화 고급 승용차들이 다들 세 자리 수 마력대의 성능을 내고 있을 때, 프랑스의 '부가티 베이론'이 8기통 엔진을 두 개 붙인 16기통 엔진에다 터보차저도 4개나 들여서 1000마력을 돌파했다. 그렇게 해서 최고 속도를 시속 400~430km까지 달성했다.
프랑스는 그렇잖아도 바퀴식 고속철도도 세계 최고 속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2007년, 574km/h!!!) 자동차까지.. 상상 이상의 속도 덕후 과학 기술 강국인 것 같다. 어디 그 뿐인가? 프랑스는 옛날에 콩코드 초음속기도 영국과 공동 개발할 정도였다!

하지만 콩코드와 마찬가지로, 속도가 올라갈수록 가성비는 정말 돈지랄에 가까운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엔진 두 개를 붙였다고 해서 속도도 기존 300대짜리 슈퍼카의 두 배에 준하는 시속 5~600이라도 나오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이런 엔진은 기름뿐만 아니라 공기(=산소)도 어마어마하게 소비한다. 세상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는데 없어지는 연료가 다 어디로 가겠나? 다 같은 질량의 배기가스(혹은 기껏해야 + 물)로 바뀌어서 차 밖으로 나간 거다. 겨우 한두 명의 탑승자를 이동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 속도가 얼마인지와 무관하게 연료를 태운 양에 정확하게 비례해서 속도가 더 올라가는 건 진공의 우주 공간 속을 비행하는 우주선에서나 가능하지,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자동차나 비행기는 결국 일정 속도 이상부터는 더 속도를 올리기가 급격하게 힘들어지는 것 같다. 이건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가속이 더 어려워진다는 상대성 이론하고는 전혀에 가깝게 무관하며, 광속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저속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공기 저항, 타이어가 받는 마찰열 등..

하지만 비행기는 역설적으로 그런 공기 저항을 받아야 뜰 수가 있으며, 자동차는 지면 마찰이 어느 정도 있어야 바퀴를 굴려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뭔가 비선형적인 변수가 많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기술하려면 역시나 복잡한 미분 방정식을 풀 줄 알아야겠다. 중등교육 수준의 물리 시험 문제에서는 '단, 공기 저항은 무시한다' 단서가 아무 생각 없이 나왔겠지만 대학 이후의 고등교육 전공부터는 이상이 아닌 현실을 다루니까. 이 분야를 정밀하게 연구해서 자동차와 비행기의 엔진 성능을 더 끌어올리려면 풍동 실험실 같은 게 필요하고 기계공학 석박사 이상의 학력과 연구 경력이 필요하겠다.

※ 우리나라의 스포츠카 컨셉 차량의 역사

1976년에 천신만고 끝에 이탈리아 디자인과 일본 엔진으로 포니라는 고유 모델을 겨우 만들어 낸 우리나라에서 하루아침에 포르쉐나 람보르기니 같은 명품 스포츠카가 만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술로나 경제력으로나 정서로나 모두.
그나마 쥬지아로가 같이 설계해 줬던 포니 쿠페조차도 "이런 디자인은 경제성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우리나라 정서와 미풍양속(?)과 맞지 않는다.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나겠다"라는 이유로 양산되지 못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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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쿠페. 당시 포니의 개발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훗날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쿠페 모델이 컨셉트 카만으로 묻힌 걸 무척 아쉬워했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쿠페형으로 스포츠카 비스무리한 물건을 최초로 시도한 것은 1990년에 출시된 현대 스쿠프이다. 엑셀과 비슷한 외형과 크기이고(동일한 하체 프레임, 엔진 배기량도 1500cc로 동일) 성능도 외국의 스포츠카에 비해서는 택도 없었지만, 엑셀에서는 선택사양이던 리어 스포일러가 기본으로 달려 있고 뭔가 날렵한 외형이 젊은 연령의 운전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스포츠/경주용 자동차에 리어 스포일러는 그저 폼이나 장식으로 다는 건 아니고, 고속 주행 시에 차량에 발생하는 양력을 억제해서 주행 안정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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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스쿠프 1 (1990), 엑셀 X2 (1989. 뉴 엑셀 말고), 쏘나타 Y2 (1988)는 전방의 램프 모양이 서로 굉장히 비슷했다. 이 중에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중형차인 쏘나타 Y2이고, 얘는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인의 끝물을 본 작품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쏘나타의 디자인이 더 작은 차급인 스쿠프와 엑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다.
포니부터 시작해서 스텔라(쏘나타의 전신)와 프레스토(엑셀의 전신)까지 다 쥬지아로의 디자인인 반면, 당시 최고급 승용차이던 그랜저(1986)만은 쥬지아로가 관여하지 않은 디자인이라는 특징이 있다. 얘는 일제와 합작해서 만들어진 거니까.

스쿠프는 젊은 컨셉답게 유난히 파란색이 많았고 빨강도 심심찮게 보였던 것 같다. 무채색 중에는 차라리 검정. 드물게 하양도 있었지만, 스쿠프가 엑셀· 쏘나타 같은 평범한 승용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색 도색인 건 내가 본 기억이 없다. 여러 모로 독특한 차였다.

외형 다음으로 엔진을 논하자면, 그랜저가 1986년 처음엔 2000cc 엔진으로 시작했다가 2400cc를 거쳐 나중에 3000cc V6 모델을 출시했듯, 스쿠프도 처음에는 미쓰비시 오리온 엔진을 사용하다가 1991년 봄에 최초의 자체 개발 알파 엔진을 얹고, 그 해 가을에는 터보차저까지 얹는 식으로 성능을 끌어올렸다. 특히 최초의 휘발유 터보 엔진을 장착함으로써 스쿠프는 1500cc 배기량에서 엔진의 최고 출력이 세 자리수 마력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제로백이 10초 이내로 당겨졌으며, 최대 시속이 200km를 돌파했다.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스쿠프 이후로 스쿠프 2가 나왔고, 그 뒤 현대 자동차에서는 엘란트라를 시작으로 아반떼라는 준중형 승용차를 내놓았다. 스쿠프가 터보를 소개했다면 엘란트라는 DOHC 흡기 방식을 도입하여 고성능을 표방했다.
이 엘란트라의 후속 모델로는 잘 알다시피 아반떼가 나왔다. 1세대 아반떼는 가성비 최강에 그야말로 불후의 명차로 대접받았는데.. 이 아반떼 플랫폼을 기반으로 스쿠프의 뒤를 잇는 스포츠 쿠페 후속 모델이 나왔다. 바로 티뷰론.

현대 자동차가 거의 1990년대 초부터 애지중지 연구했던 컨셉트 카로 HCD-II가 있는데, 그게 양산된 게 티뷰론이다. 마치 철도계에서 컨셉트카 HSR-350x가 양산된 것이 KTX-산천인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4분 30초짜리 티뷰론 광고 영화 동영상은... 뭐랄까 스케일 한번 참 거창하게 만들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보기엔 좀 중2병스럽기도 해 보인다.
악당들이 포르쉐를 탈취해 가는데 경찰들은 자기 경찰차로는 쟤들을 따라잡질 못함. 그런데 때마침 베일에 싸인 티뷰론을 수송하는 트레일러가 지나간다. 경찰들은 거기로 진입해서는 트레일러 운전사에게 신분증 제시하면서 "우린 경찰입니다. 좀 협조해 주시죠"..와 함께 그 티뷰론을 공권력-_-을 동원해 빌려 타고.. 쌩쌩~~

저게 고딩 시절에 거원 제트오디오 CD 안에 예제 동영상으로 들어있기도 했다.;; 사이버 가수 아담 뮤직비디오와 더불어 말이다. ㅎㅎ
옛날에 엘란트라 아우토반 CF도 그렇고 현대차 관계자들은 자기 회사 차로 외국 스포츠카를 따라잡는 걸 그렇게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티뷰론 이후로 2000년대에는 '투스카니'라는 스포츠형 쿠페가 나왔다고 한다. 이제 현대도 기술이 많이 발달했고 차의 배기량도 2700cc로 뛰어서 그럭저럭 무늬만 스포츠카에서 레알 스포츠카로 진입하는 단계라는 소리를 들었다. 국내외로 평도 좋았다. 하지만 본인은 이 차는 정말 본 적이 없고 기억도 전혀 없다. 스쿠프만 해도 그 어리던 시절에 지방에서도 종종 봤던 것 같은데 얘는 왜 이리 생소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200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현대 자동차가 밀고 있는 스포츠형 쿠페는.. '제네시스 쿠페'이다.
에쿠스 다음으로 대형이던 후륜 세단을 베이스로 한 차량답게 얘 역시 후륜이다. 게다가 세단 제네시스와 동일한 3800cc 엔진도 얹혔는데, 세단과는 달리 저렴한 중형급의 2000cc 모델도 추가로 존재한다.
뭐 가격이 수억에 달하는 외국의 초고성능 슈퍼카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네시스 쿠페 정도면 제로백도 5초대까지 왔고 세계 어디를 가도 진정한 스포츠카 체급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그게 21세기에 와서야 달성된 것이다.

현대 자동차는 과거의 에쿠스 같은 호화형 차량에다, 고성능 스포츠카까지 최고급 승용차는 모두 '제네시스'라는 브랜드로 판매하려는가 보다.
또한 스포츠카의 포지션이 처음에는 엑셀과 비슷한 소형에서 시작했다가(스쿠프), 준/중형(티뷰론, 투스카니)을 거쳐 중/대형(제네시스 쿠페)로 점차 커져 온 것을 현대 자동차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 주행 시험장

우리나라에서는 현대 자동차가 기아 자동차까지 같은 계열사 안으로 흡수한 뒤, 그야말로 국내 톱급 규모의 자동차 제조사로 군림해 있다. 그래서 대졸 신입 사원의 연봉도 업계 최강인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풍족하다. 국내의 자동차 제조사들 중엔 유일하게 차량 수송을 위한 철도 차량을 자체 보유하고 있으며(울산-성북.. 아니 태화강-광운대), 또 기술 연구소 내에 자체적인 주행 시험장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태화강 역 근처에 있는 현대 자동차 주행 시험장은 트랙에서 직선 도로의 길이가 1km가 채 되지 않아 다소 작은 감이 있다. 물론, 대도시에다 철도역까지 가까운 곳에 그 정도 시험장이라도 있는 게 감지덕지이겠지만..
화성시에 있는 남양 연구소의 주행 시험장은 트랙의 직선 길이가 2km 남짓으로 훨씬 더 길며, 그렇기 때문에 시속 200km급의 고성능 주행 시험도 그럭저럭 가능하다.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교통 안전 연구원의 주행 시험장도 인터넷 지도로 보면 크기가 그 정도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볼 때 움직이는 물체가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해서 커지니, 슈퍼카의 성능을 안정적으로 테스트하는 데는 그 정도 크기로도 부족하다. 현대 자동차는 미국 모하비 사막에도 국내의 시험장보다 더 큰 주행 시험장을 건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이름하여 Hyundai/Kia Proving Grounds. 트랙 내부의 직선 도로는 거의 4km에 육박한다.
참고로 보잉 747을 연료 만땅 상태에서 이륙시키기 위해 필요한 활주로의 길이가 이미 2.5~3km에 달하며, A380이나 An-225급이라면 진짜 저렇게 4km 정도는 돼야 한다.

참고로 이 모하비 주행 시험장은 모하비 공항(겸 우주항)과 꽤 가깝다. 직선 거리로 10km 남짓 떨어진 건 미국의 땅 넓이를 감안하면 이웃집이나 마찬가지인 거리이고 무엇보다도 위도가 거의 같다. 모하비 공항은 세계에서 실려 온 노후 중고 항공기들의 보관소이며 민간 우주 왕복선이 뜨고 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끝으로, 모하비 주행 시험장보다도 더 긴 유명한 주행 시험장은 독일에 있는 Ehra-Lessien test track인데, 트랙 직선 거리는 거의 9km에 달한다. 아까 언급되었던 부가티 베이론의 최고 속도는 이 시험장에서 측정되었다. 자동차의 속도가 극단적으로 빨라지면 모든 게 불안해지는데, 오버런 내지 커브 전복 사고를 안 내려면 최고 속도를 찍자마자 허겁지겁 감속을 해야 했을 것 같다. 물론 대형차가 아니니 그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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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속 자동차는 아예 정식 주행 시험장에서 테스트를 하지도 못하고 얄짤없이 사막 모처로 가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_-

Posted by 사무엘

2016/08/07 08:39 2016/08/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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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 칼리스타(1992)와 기아 엘란(1996).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그 옛날에 저런 자동차도 팔았나 싶은데, 위의 두 자동차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 본인은 직접 본 경험이 전무하다. (초딩 시절에 대우 임페리얼조차 길거리에서 본 적이 있건만, 저것들은 정말 듣보잡. 그나마 칼리스타는 자동차 잡지를 통해서 접하긴 했었다.)
  • 나름 2인승 스포츠카 컨셉으로 영국제 자동차를 그대로 들여 와서 생산했다.
  • 생소한 컨셉에다 너무 비싼 가격으로 인해 망했음. (수제 생산 크리)

굳이 나 말고도 자동차 매니아들이라면 국내의 자동차 역사에서 두 차량이 갖는 유사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1. 기아 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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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자동차는 1980년대 말에 외제차 수입 규제가 완화되자마자 3000cc급 대형 고급차 컨셉으로 머큐리 세이블이라는 미제 승용차를 수입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쯤 전인 197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에서 최고급차 컨셉으로 포드 그라나다를 포드 사 CI조차 안 걷어내고 그대로 판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머큐리 세이블은 무엇보다도 도어에 번호 기반 자물쇠가 장착돼 있는 게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 뒤로 기아 자동차는 스포츠카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되고, 영국 로터스 사의 스포츠카인 엘란을 생산 라인을 인수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건 외제차를 하나도 안 고치고 100% 똑같이 만들어 판 건 아니며 엔진, 서스펜션, 내장재 등 여러 곳에 변형과 로컬라이제이션이 가해졌다.

현대 자동차에서 1990년대 초에 '엘란트라'라는 준중형 승용차를 내놓았는데, 그때는 얘를 수출할 때 이 '엘란'과의 이름 충돌을 의식해서 '엘'은 빼고 '란트라'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이름으로 수출해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기아 자동차가 '엘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수하고 그 기아 자동차를 현대 그룹이 꿀꺽 해 버리니, 그때부터는 이름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이제 '엘란트라'는 후속 모델 아반떼의 수출명으로도 당당히 쓰이고 있으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중간 체급이라고 전륜구동 준대형 '아슬란'을 만든 건 망한 듯하지만, 그래도 엘란트라처럼 엑셀과 쏘나타 사이의 준중형 체급은 굉장한 선견지명으로 판명됐으며 오늘날까지도 잘나가는 중이다. 자동차 엔진 기술을 개발하는 것 자체뿐만 아니라 이렇게 평균적인 소비자들의 수요 심리를 잘 읽는 것도 자동차 회사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엘란은 범퍼 위로 라디에이터 그릴이 없는 게 인상적이다. 이게 그 시절에 스포티한 디자인 유행이었던 것 같다. 대우 에스페로와 현대 아반떼 초기형 말고는 이런 디자인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엘란은 2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었으며, 전국적으로 1055대 남짓만 생산된 뒤 단종됐다. 이것도 나중엔 차를 좀 팔려고 제작사에서 원가 미만인 2천만 원대 후반 가격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팔기도 해서 얻은 실적이었다. 참고로 대우 임페리얼이 최종 생산량이 863대였다.

2. 쌍용 칼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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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이 미래지향적이라면 칼리스타는 딱 봐도 복고풍의 컨셉이다. 원 제작사는 영국의 팬서(panther. 만화 주인공 핑크 팬더도 곰이 아니라 표범임) 웨스트윈드 사로, 이를 쌍용 자동차에서 인수하여 SUV 말고 쌍용 최초의 승용차 명목으로 국내에서 생산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동일 모델의 차명이 '리마'(Lima)였다고 하는데, 칼리스타는 도대체 무슨 어원이고 누가 지은 이름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옛날 자동차의 주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휀다(바퀴 덮개)가 저렇게 돌출돼 있는 것이다. 외국의 차덕들도 서양이 아닌 웬 동북아시아 대한민국에서 이런 차가 생산되다는 것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하지만, 딱 봐도 이런 자동차는.. 매니아들 말고는 일반 서민들에게 많이 팔리게 생기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대기업 총수 같은 부자들이 그랜저 대신 이런 차를 굴리지는 않을 테고.

스포츠카를 표방하고 있어서 엔진의 성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자동화 대량 생산을 못 한 탓에 차 가격은 1990년대 초 물가로 역시 무려 3천만 원을 넘어섰다.
결국 앞의 엘란만치도 못 팔았다. 연 판매량은 10~20대에 불과했으며, 1994년까지 누적 판매 100대를 채 못 채우고 단종됐다(78대). 그것들도 다 국내에서 굴러다닌 게 아니라 수출 처분되기도 했다.

칼리스타 이후로도 이런 복고풍 로드스터 승용차는 국내에 현재까지 다시 등장한 적이 없다. 엘란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차인데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였던 것 같다. 엘란이 등장한 때는 칼리스타가 이미 단종된 뒤였다.

* 이 외에 대우 르망 이름셔(Irmscher, 1991)도 생각난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차종은 아니고 그 당시에 생산되던 대우 르망을 '이름셔'라는 외국 회사에서 스포츠형으로 튜닝해서 고급화하고 성능을 올려 놓은 것이다.
르망은 분명 엑셀·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 체급인데 이름셔 에디션(?)은 엔진 배기량부터가 중형차급 2000cc로 버프되어서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으며, 그 외에 다른 내외장제도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보통 국내에서는 세금 규제를 피하려고 이미 있는 외국 원판 차량도 배기량을 줄여서 내놓곤 한다. 옛날에 그라나다도 그랬고 대우 에스페로도 준중형 차급에 비해 너무 작은 1500cc 엔진을 얹은 게 화근이어서 빌빌댔다. 이름셔는 그와는 정반대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름셔 역시 인지도 부족과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별로 인기를 못 얻었다. 1000몇백만 원에 달했는데, 그 돈 쓸 거면 아예 대놓고 중형차를 사는 게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23 19:32 2016/07/2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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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울에 샤워를 하기 위해서 보일러를 켜고 온수를 튼다. 물은 잠시 후 따뜻해지긴 하겠지만, 틀자마자 곧바로 더운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물은 생각보다 무겁고 비열도 굉장히 큰 물질인데 스위치만 눌러서 한겨울에 샤워나 목욕이 가능할 정도로 따뜻한 물이 자동으로 콸콸 솟아 나오는 건 정말 엄청나게 편리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커다란 쟁반에다 물을 담아서 불 때서 데우고, 그걸 욕조로 낑낑거리며 들고 가서 끼얹어서 목욕을 하던 시절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뭐 그렇긴 하지만, 아직 충분히 데워지지 못해서 몸에 끼얹을 수 없는 물은.. 어렵게 취수되고 소독되고 불순물이 걸러진 맑은 수돗물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어디 담아 놓을 데가 없으면 버려지고 곧장 하수구로 향하기 쉽다. 본인은 그때마다 자동차 엔진의 공회전도 이런 현상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낭비라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의 자동차의 엔진 공회전은 차의 엔진을 적당히 데우고(냉각수 온도..) 엔진오일을 내부에 충분히 순환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이 들어가는 실내를 좀 데우기 위해서 필요하다. 밖이 추울수록 더욱 필요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흔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배터리가 방전돼 버려서 점프로 시동을 간신히 건 뒤, 배터리 충전을 위해서 일부러 엔진만 좀 돌릴 때도 있다.

2.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 말고 불필요한 엔진 공회전은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좋지 않다.
(1) 가장 먼저, 두 말할 나위 없이 연료 낭비이다. (2) 엔진이 저회전 저출력 저온(액셀을 막 밟을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태이다 보니, 촉매 변환 장치의 효율도 안 좋아서 연료 소비량 대비 배기가스는 오히려 더 심하다고 한다.
게다가 (3) 정지 상태이니까 라디에이터로 맞바람도 전혀 못 받는 상태에서 엔진이 혼자 장시간 돌아가고 있으면, 밖이 어지간히 추워도 열평형이 깨지고 엔진 과열이 야기될 수 있다. 특히 웜업 한답시고 P나 N 상태에서 액셀까지 밟다 보면 내부의 열이 더욱 증가되니 이를 피해야 한다.

엔진이 곱게(?) 과열되면 냉각수가 증발해서 연기가 나고 엔진 출력이 떨어지는 것만으로 끝나지만, 그때 재수 없게 엔진룸 안이나 배기구에 종이나 낙엽 같은 이물질이 들어있어서 발화점이라도 넘기면 차에 불이 나는 참사까지 발생한다. 굳이 연료가 새서 유증기가 폭발하지 않아도 화재가 이렇게도 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기름때 때문에 식당에 불이 나서 건물 전체를 삽시간에 덮쳐 버리는 것처럼.

뭐, 액셀러레이터를 꽉 밟지 않고 시동 유지를 위한 최소 회전수로만 엔진이 돌아가는 건데도 장시간 공회전이 (1)은 그렇다 치더라도 (2)와 (3)까지도 야기될 수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물론 아이들링 rpm도 그것만으로도 1.5톤짜리 기계 덩어리를 걷는 속도로라도 굴러가게 할 수 있는 큰 출력이긴 하다.

어느 도로나 장소에서 단순히 주정차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공회전을 금지시키는 건 가장 크게는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2) 환경 문제 때문이다. (1)과 (3)은 그냥 차주 개인에게만 금전적인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니 (2)보다야 덜 중요한 문제다.

3.
본인은 진작부터 "나의 소중한 기름은 오로지 차를 가게 하는 데만 쓰여야 한다" 지론을 유지하고 있다. 단순히 편의 장치를 사용할 목적으로 차내에 체류할 때는 절대로 시동을 켜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 드나들어서 신호 주기를 대충 기억하고 있는 교차로에서, 진입하자마자 노랑-빨강 신호에 걸렸다면 앞으로 3분 가까이 기다려야 하니 곧바로 시동을 끈다.

요즘 자동차들은 전자 제어 방식이 많이 똑똑해져서 어지간해서는 시동을 걸자마자 바로 출발해도 별 무리가 없으며, 한겨울에나 그것도 길어야 2~30초 남짓만 공회전을 해도 충분하댄다. (물론 오랫동안 세워 둔 차를 처음 시동 걸었을 때 말고)
차는 통념과는 달리,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는 순간에 특별히 기름이나 전기를 심각하게 더 많이 먹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공회전 중에 엔진이 지속적인 회전을 위해 관성의 도움을 딱히 받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엔진이 무슨 선풍기의 팬도 아니고 평소에도 얼마나 무거운 부하를 받으며 돌고 있는데.. 시동이 꺼져서 힘이 끊어지면, 선풍기 팬과는 달리 정말 신속하게 회전이 멈춰 버린다.

정지 상태에서 액셀을 밟아서 실제로 "출발 가속을 할 때에야" 속도 대비 연료 소모가 많고 연비가 꽝이겠지만, 어차피 같은 정지 상태인데 특별히 엔진의 시동 자체를 거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그때의 연료 오버헤드는 여러 자료를 검토해 봐도 공회전 수 초~길어도 10초 남짓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정지 상태가 분 단위로 계속되고 출발 시기를 예측 가능하다면 쿨하게 시동 꺼 버리는 게 명백히 이익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단지 운전자가 출발 시기를 신경 쓰고 있어야 하니 스트레스가 가중될 뿐이다. 파란불이 됐는데 즉시 출발을 못 해서 뒷차에게 욕 얻어먹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4.
끝으로.. 고연비 연료 절약을 위해서는 쓸데없는 짐을 안 싣고 차를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전기 장치를 안 켜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 것도 다 알게 모르게 엔진에 부하를 주며 연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쉽게 생각해서 자전거를 탄다고 할 때 내 발에 힘 덜 들이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은 원칙들은 자동차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

자동차는 페달 밟는 순간적인 힘은 생각만치 크지 않으며, 체중이 담긴 사람의 발보다도 약하다. 초대형 디젤 차량이 아닌 이상 자동차 엔진의 최대 토크는 성인 남자 체중의 몇 분의 1밖에 안 된다.
하지만 페달링 회전수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 회전수를 낮추고 낮춰서 견인력으로 바꾸고, 이걸 밑천으로 해서 자전거보다 훨씬 더 무거운 차체의 바퀴를 굴린다. 승용차의 바퀴가 성인용 자전거의 바퀴보다 더 작은 이유도 이 때문임.

자동차에서 이용하는 전기는 그 엔진의 출력을 끌어들여서 덤으로 생산된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만 해도 헤드라이트를 켜기 위해 바퀴에다가 발전기를 연결하면 아무래도 마찰이 더 커지고 자전거가 예전보다 잘 안 나아간다. 밤에 주변 건물은 사고로 다 정전돼서 가로등까지 꺼지고 깜깜한데 밖의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 켜고 잘 달리고 있는 걸 보면, 자동차 전기에 대한 존재감을 더 크게 알 수 있다.

다만, 똑같이 기름을 태우더라도 발전소의 거대한 증기 터빈에서 최고의 효율로 대량 생산된 건물용 전기와 비교하면, 자동차의 전기는 생산 단가면에서 효율이 잽이 안 된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발전소의 경우 평상시에는 화력보다도 더 저렴한 원자력 발전이 쓰이니까 말이다.
세금이 덕지덕지 왕창 붙은 그 비싼 기름을 태워 없앴는데, 그 동력과 전기로 굳이 건물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오로지 자동차에서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폰 충전 같은 건 정 급한 상황이 아니면 그냥 자동차보다는 건물에서 하는 게 원론적으로 더 나으며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아낄 수 있다. 그리고 추우면 굳이 전기 저항을 일으키는 열선보다는, 이미 있는 엔진열을 자연스럽게 끌어다 쓰는 히터가 더 나은 선택이다.

물론 헤드라이트 하나 더 켜고 오디오와 에어컨 좀 틀었다고 500km 갈 기름으로 3, 400km밖에 못 갈 정도로 그렇게 연비가 곤두박질 치는 건 아니다. 이런 걸 너무 과민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특히, 밤에 "나 여기 있소!"를 나타내는 등화에다가는 전기 아낄 생각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교통사고는 기름값 몇 푼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니 말이다. 주변이 가로등 불빛 때문에 훤히 밝더라도, 당신 시야가 아니라 남의 시야를 위해서 헤드라이트 켜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뭐가 보이긴 해야 남도 조심해 주든가 말든가 할 테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7/09 08:35 2016/07/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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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역사에 대해서 글을 쓰는 건 거의 3년 반 만에 처음인 것 같다.
지난번 자동차 이야기에 이어, 이번엔 화제를 VIP의 애마 말고 다른 쪽으로 좀 돌리도록 하겠다.

까마득히 먼 옛날인 순종 황제라든가 이 승만· 김 일성 같은 사람이 몰았던 차는 유니크템으로서 오늘날까지 실물이 존재하는데..
정작 해방 후에 한국 땅에서 직접 처음부터 조립해서 생산된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1955)은 의외로 실차가 오늘날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이거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발은 차체 외형은 자동 기계 공작 없이 엔지니어가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고 펴서 만들고, 엔진은 미국 자동차 부품을 불법 복제해서 넣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 물건들은 수출로 팔려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고, 차량이 한물 갈 때쯤 다들 폐차 처분되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자동차 박물관 같은 데에 전시돼 있는 시발 택시는 그 시절에 달렸던 실차가 아니며, 다들 레플리카이다(예전의 고증을 반영해서 후대에 옛 물건을 일부러 새로 만든 복원품). 지금 불국사가 신라 시대에 지어진 원판이 아니라 훗날 재건된 건물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발 이후에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를 현대 자동차 위주로 좀 늘어 놓으면 이렇다.

  • 코티나(1968): 현대 자동차가 창립 후 면허 생산한 최초의 자동차. 외국의 자동차를 단순히 완제품 수입만 해서 판 게 아니라 면허 생산한 것임.
  • 포니(1975~1976): 잘 알다시피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 디자인 자체는 외국의 디자이너(쥬지아로)가 한 것이고 엔진도 일제(미쓰비시 새턴)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지구상에 없던 모양의 자동차를 한국 땅에서 생산해 내는 데 성공함.
  • 프레스토(1985): 포니의 후속으로 개발된 포니 엑셀의 세단형 버전에 붙은 별칭이며, 요건 현대차 최초의 전륜구동 승용차이다. 전륜구동은 후륜구동보다 부품 수가 더 적지만 만들기는 더 어려웠다. 첫 승용차인 포니가 괜히 후륜구동이었던 게 아님.
  • 엑셀(1989): 연료 분사 방식이 카뷰레터에서 전자제어 다중분사(MPI)로 넘어가는 과도기. 최신 기술은 최상위 모델인 GLSi에서 첫 도입됐다. 이때 CF에서는 자동차에도 드디어 컴퓨터가 들어간다며 최첨단 기술이랍시고 왕창 자랑을 해 댔었다.
  • 엘란트라(1990): DOHC 흡기 방식 도입으로 엔진 출력 향상. 이 역시 최신 기술은 최상위 모델에 도입되곤 했다. 엘란트라 이전엔 그랜저의 최상위 모델인 V6 3000cc (1989)짜리도 SOHC 방식이었다.
  • 스쿠프(1991): 최초의 2도어 쿠페. 엔진을 최초로 독자 개발(알파 엔진). 터보차저
  • 액센트(1994): 최초로 로얄티가 전혀 들지 않고 현대 자동차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100% 독자 개발한 승용차다. 이만치 기술이 발달했다.

확실히 현대 자동차의 역사는 포드 사와 기술 제휴를 하던 시절과, 그 후 미쯔비시 사와 손잡은 시절로 시즌 1과 2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와 미쓰비시 사이의 기술 주종 관계 역전은 우리나라의 자동차 역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공동 개발한 자동차들이 하필 일본에서는 다 망했는데 한국에서만 대박을 친 것도 신기하고 말이다(그랜저/데보네어 V, 에쿠스/프라우디아).

1990년대에 자동차의 엔진 성능은 비슷한 시기에 무슨 컴퓨터의 클럭 속도가 증가한 것만치 그 정도로 폭발적으로 뻥튀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 차는 같은 배기량으로도 몇십 년 전 자동차가 상상도 못 할 만치 큰 출력이 나오는 건 사실이다. 특히 DOHC 흡기라든가 터보차저가 엔진 출력을 크게 끌어올려 주긴 했다.

포니 같은 옛날 차들을 보면 엔진룸이 요즘 차보다 더 길고 각지게 돌출돼 있는 주제에 정작 뚜껑을 열어 보면 공간은 더 휑하다. 부품들도 다 기계식이고 단순하다.
하지만 요즘 차들은 온통 복잡한 전자 부품들로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엔진룸은 최대한 줄이고 객실 공간을 짜내다시피하게 설계된 것이 눈에 선하다.

포니부터 시작해서 엑셀, 스텔라, 쏘나타 Y2까지 그 시절 자동차들은 조르제토 쥬지아로의 디자인이다. 그러나 1986년에 나온 각그랜저는 시간대가 얼추 저 시절에 듦에도 불구하고 쥬지아로의 디자인이 아니며, 디자인과 설계까지 모두 현대/미쓰비시 공동 개발이다. 우리나라의 동전 중에 500원만이 다른 동전보다 늦게 따로 등장했으며, 열차 명칭 중에 새마을호는 비둘기/통일/무궁화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먼저 쓰이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쥬지아로 이후로 한참 뒤, 2000년대 말에 fluidic sculpture라는 이념 하에 YF 쏘나타와 아반떼 MD를 디자인한 사람은 안드레 허드슨이라는 미국인이다. 쏘나타는 미국물 먹은 디자인이고, 경쟁 차종인 K5는 유럽물 먹은 디자인이라고 흔히 비교되곤 했다.

* 보너스: 현대 자동차의 차명 관련 개드립

  • 코티나: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 자동차가 생산한 최초의 차량이다. 최초라는 건 시행착오의 시범타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차가 생각보다 잘 퍼지고 고장이 잦았던지라, 코티나의 초창기 모델은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 불명예스러운 개드립이 많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치면 버그가 꽤 많았던 듯.
  • 그라나다: 역시 유럽 포드 사의 차량을 면허 생산한 것이다. 얘는 그 당시로서는 그랜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꿈의 최고급 승용차였으며, 국내에 아직도 이 차를 애지중지 관리 잘 하면서 소장 중인 사람이 있다. 채널 A 카톡쇼에서 그 차주와 차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제18회).. 차주의 가족들은 차명에서 G를 B로 바꿔서 차를 '불안하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무 옛날 차여서 언제 갑자기 퍼질지 몰라서 타기 불안하다고. -_-;;
  • 쏘나타: '소나 타'. 이건 그 당시 경쟁사(대우?)의 회장조차도 현대를 디스할 때 구사한 드립이라고 한다.-_-;;; 한국어 보조사의 특성상 나름 중의성도 있다. (1) 사람이 아닌 소를 싣는 데 적합한 차라는 의미와, (2) 이런 저질 차를 탈 바에야 차라리 소를 타는 게 낫다는 의미. 그래서 1985년에 스텔라의 최상위 트림으로 Y1 모델이 나왔을 때에는 CF에 분명히 '소나타'라고 기재돼 있었지만, 그 이듬해, 심지어 Y2이 나오기도 전에 곧장 '쏘나타'라고 한글 표기가 ㅅ이 ㅆ으로 바뀌었다!
  • 에쿠스: 어느 난센스퀴즈에 따르면, 궁예가 타고 다니는 차라고 한다. -_-;; 글쎄, 한 나라의 국왕이니까 저 정도 기함급 승용차를 몰 만도 하겠다. 그런데 이젠 에쿠스도 단종되고 제네시스 EQ 900으로 넘어갔으니 옛날 이야기가 됐다.

소나타/쏘나타 드립에 대해서는 다음 사진과 화면을 참고할 것.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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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과거에 쏘나타는 후면 엠블렘의 첫 글자가 떨어져 나가서 '오나타'라고 바뀌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름 하나 갖고 참..;; 조감도가 한 획만 빠져서 오감도로 바뀐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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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5/06 08:38 2016/05/0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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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 어차(1903)

황제의 즉위 무려 40주년을 기념하여 도입됐으며(참고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60년이 넘었다만..), 이게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달린 자동차이다. 차종은 '포드 모델 A'이라는 2도어 오픈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으며, 자동차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그게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런 거야말로 고종 실록 같은 데에 수록되지 않았나?

허나, 이 차는 얼마 못 가 러일 전쟁 기간 중에 소실된 관계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시절에 자동차는 얼마나 비싼 물건이었을 텐데, 명백한 사고 폐차도 아니고 러일 전쟁 자체가 한국 땅에서 벌어진 것도 아닌데(청일 전쟁이 아님), 도대체 그 당시에 국가 자산 관리가 얼마나 막장으로 되고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얘는 가정사로 치면, 첫째 자식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일찍 죽은 형· 누나 정도의 존재감으로 취급된다.

2. 순종 어차(1913)

일제 강점기가 된 뒤에 데라우치 총독이 자기 차와 더불어 조선 황실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선물해 준 차라고 한다. 1911년엔 고종 어차 시즌 2로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이 들어왔고, 1913년에는 순종 어차 명목으로 더 큰 캐딜릭 8기통 리무진이 들어왔다. 고종-순종 부자가 타라고 차를 두 대 구매했으나, 실소유자는 곧 순종-왕비 부부로 바뀌었다. 도입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운전대는 명백하게 오른쪽에 있다.

이 차들에 대해서도 도입 시기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1911-1913년 도입이라고 하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한참 나중인 1918년식이라는 얘기도 있고. 저래 뵈어도 엔진의 배기량은 5000cc가 넘는데 제원상 최대 출력은 30몇 마력밖에 안 됐다는 것 역시 참 안습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자동차 기술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들은 엄연히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실물이다. 그리고 저 차종 자체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차량이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인데, 한국에 있는 물건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세계 자동차 역사의 관점에서도 유물로서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6· 25 전쟁의 포화까지 견뎠을 정도이니, 얼마 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종 어차 최초 도입분과는 운명이 정반대이다.

일단 아래 사진에서 왼쪽 것이 1911년도 다임러 리무진이고 오른쪽 것이 1913년도 캐딜락 리무진이다.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양이 서로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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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때는 흙 묻고 빛 바래고 먼지가 수북이 앉은 채로 창덕궁 차고에 방치돼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와 영국의 올드카 복원 전문 업체가 협력해서 표면을 광 내고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다. 복원하는 덴 시간이 5년에 가깝게 걸렸으며 비용도 10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복원 작업은 2001년 말에 완료됐으며, 이 덕분에 어차는 완전히 새 차처럼 변했다. 캐딜락의 경우 원래 검정이었는데 표면 도색도 빨강으로 바꾼 듯하다. 현재 이들은 경복궁 안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캐딜락 리무진의 before과 after를 대조한 것이다.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저 차들이 191X년대에 갓 들여 온 직후에는 저렇게 반들반들 윤이 났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 시퍼렇게 녹이 슬었다고 해서 그게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도 퍼렇지는 않았으며(동상은 원래 갈색· 구리색임), 옛날 사진이 지금 누렇게 바래 있다고 해서 옛날 그 당시의 풍경 자체가 누렇게 바랬던 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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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 일성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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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름아닌 북한의 수괴인 김 일성이 몰고 다니던 승용차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구소련 시절의 자동차이다.
구소련이라 하면 총(AK47!)과 비행기(AN-??)와 우주선은 만들었어도 정작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정보는 영 생소하다. 저건 ZIS 110이라는 모델로, 1948년에 김 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

김 일성은 이 차를 즐겨 몰고 다녔다. 6· 25 전쟁 중에는 안전한 후방에서 보고나 받고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경북 왜관까지 남하해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도 없던 와중에 참 멀리까지도 내려왔다. 낙동강을 사수하네 마네 하던 리즈(?) 시절엔 그야말로 한반도 전역의 적화통일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1950년 가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었고 김 일성은 시급히 후퇴를 해야 했다. 평양까지 빼앗기고 계속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앞은 강으로 가로막혀 있고 다리가 없고 차량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다른 길로 뺑뺑이를 칠 수도 없고.. 그래서 김 일성은 (아마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애마를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난 차량이 남한에서 노획되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 차량은 1950년 10월 22일,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km쯤 떨어진 청천강 근처에서 남한 국군(6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고 노획됐다. 국군이 38선을 최초로 넘어서 국군의 날이 시초가 된 10월 1일 이후로 정확히 3주 만의 일이다.
이걸 최초로 발견하고 신고한 병사가 누군지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검색은 더 귀찮아서 안 하련다. 그 병사는 당연히 큰 포상을 받았다.

김 일성의 리무진은 대한민국의 국고로 귀속됐다. 김 일성은 차만 버렸지 차키까지 놔 두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절의 옛날 차들은 지금 같은 첨단 이모빌라이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타터 모터의 배선만 연결하면 강제 시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가 그때 이후로 줄곧 한국에서 애지중지 보존되어서 반공 안보 교육(?) 아이템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승만 대통령은 1951년, 미 8군 사령관이던 월튼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줬다. 워커 장군은 잘 알다시피 1950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통사고로 한국 땅에서 순직했기 때문이다(교전 중 전사는 아니고..).

부인 되시는 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인수했지만 차는 곧 고장 났다. 냉전 중에 미국에서 적성국인 구소련제 차량은 부품을 구해 유지 보수를 하기도 어려웠던 관계로, 그녀는 차를 또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김 일성 리무진은 미국 땅에서 정처 없이 30년 가까이를 방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차가 사고가 나고 폐차됐다면 김 일성 리무진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랬는데 사단법인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라는 단체에서(대표: 지 갑종) 1970년대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이 차의 소재를 미국에서 찾아 냈으며, 뉴저지에 소재한 어느 자동차 수집상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1982년에야 그 차를 한국으로 도로 역수입을 해 왔다. 먼 나라로 수출되었던 포니가 20여 년 뒤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도로 역수입된 것처럼. 그때 고맙게도 대우 그룹 김 우중 회장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줬다고 한다.

또한, 그때 이래로 지 회장이 러시아 엔지니어까지 초청해서 관리를 잘 한 덕분에, 김 일성 리무진은 현재도 간단한 정비만 하면 곧장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이분은 6· 25 전쟁 휴전 60주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2013년 7월 16일, 차량을 전쟁 기념관에다 기증했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 기념관에서 김 일성 리무진과 동시에 곧 소개할 이 승만 리무진도 나란히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6· 25 전쟁을 계기로 김 일성은 자기 애마뿐만 아니라 강원도 고성에 있던 자기 별장도 빼앗겼다.

4. 이 승만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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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성 차량에 비해 이 승만 리무진은 설명할 게 훨씬 없다. 1956년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의전용 방탄 캐딜락이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굴러다닌 건 아님. 애초에 이 승만은 6· 25 때 피난도 자차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갔다.

얘는 어차처럼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부터 전쟁 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며, 2013년경에는 역시 때 빼고 광 내는 부분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작업은 당연하지만 구한말 어차를 복원하는 것만치 힘들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차 역시 당장 시동 걸고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정태를 넘어 동태보존 상태라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8 08:31 2016/04/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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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라는 물건은 차체의 크기와 엔진의 배기량 같은 전반적인 규모를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고, 같은 규모라면 사람을 태우는 것과 화물을 싣는 것을 각각 얼마만큼 비중을 뒀느냐에 따라서도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사람에 초점을 두면서 덩치가 커지면 버스가 되고, 화물에 초점을 두면서 덩치가 커지면 트럭이 된다.
그런데 전문적인 트럭이나 버스로 불리기에는 작은 승용차급 크기에서도 생각보다 다양한 차종이 존재한다.

가장 흔한 건 5명이 타고 짐은 뒤의 트렁크에 싣는 '세단'이다. 세단은 객실과 화물칸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정숙성 면에서 좋다. 그러나 짐을 높이 쌓기 어려우며, 이런 화물칸에다가 성인용 자전거 같은 건 접지 않은 이상 아무래도 실을 수 없다.

옛날에는 해치백이라고 뒷부분에 위로 열리는 문이 달린 차량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라는 포니부터가 해치백이었고, 그 뒤에 르망이나 프라이드(초기 모델)도 해치백이었는데 요즘 국내에서는 해치백 승용차는 거의 찾을 수 없게 됐다. 해치백은 통상적인 승용차보다 더 큰 SUV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해치백은 세단처럼 뒤에 뭔가 돌출된 부위가 없다 보니, 유체역학적으로 볼 때 뒷유리에 먼지가 더 잘 쌓이고 더러워지기가 쉽다. 그래서 뒷유리에도 와이퍼가 달려 있다.

요런 5인승 승용차/SUV급 체형에다가 뒤에 트럭처럼 짐받이도 장착된 차량을 특별히 '픽업트럭'이라고 하는 것 같다. 미국 시골에서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처럼 평범한 세단형 승용차가 아니라 픽업트럭이 자가용으로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험지를 종종 달려야 하니 차체가 크고 튼튼할 필요가 있으며, 땅 넓고 길 넓고 단독 주택에 자기 차고도 있고, 기름값 싸고 배기량 규제도 없으니 큰 차 굴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건비가 비싸서 어지간한 가사노동은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이사 갈 때처럼 짐을 많이 실을 일 있을 때도 용달차를 부르기보다는 자차로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

이러니 미국의 시골 문화에는 큼직한 픽업트럭이 어울린다. 영화 <킬 빌>에서 빌의 동생 버드는 사막 한가운데의 어느 컨테이너에서 살았던 한편으로 자가용이 픽업트럭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자동차 문화라는 것도 참 가난하고 열악하고 배고픈 여건 속에서 태동했다. 수출을 위해서 무작정 중공업을 육성했는데, 그래도 외화는 목숨 걸고 아끼려고 기름값에 세금 왕창, 자동차 배기량에 세금 왕창..;; 고위 공무원들의 관용차에도 4기통보다 더 큰 차는 금지시켰을 정도다. 또한, 소비자에게만 규제를 넣은 게 아니라 심지어 자동차 제조사에도 생산 가능한 자동차의 종류까지 규제를 했다.

그러니 국내에서 생계형 미니 용달 화물차는 기아 자동차의 전신인 기아 산업에서 만든 삼륜차부터 시작했다. 삼륜차는 내가 몇 차례 예전 글에서 소개한 바 있으니 이 자리에서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그 후 1974년에 기아에서는 잘 알다시피 '브리사'라는 승용차를 내놓았는데, 사실은 그 전 1973년 여름에 베타테스트 명목으로 브리사의 전신인 픽업 트럭을 먼저 내놓은 적이 있었다. 브리사는 상용차부터 출시된 뒤에 그걸 베이스로 나중에 만들어진 승용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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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동차에서 나온 포니 역시, 앞좌석까지만 동일하고 뒷부분은 짐받이로 대체된 픽업 트럭 에디션이 응당 있었다. 최대 적재는 400kg 남짓까지 가능했다.
포니나 SMC 덤프트럭 같은 옛날 차들을 보면 엔진룸은 요즘 자동차보다 더 길고 각지게 돌출돼 있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 보면 들어있는 부품은 생각만치 조밀하지 않고 듬성듬성해 보이는 게 인상적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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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화물차이긴 한데 천장이 있고 외형은 승용차와 동일한 일명 3도어 '밴' 에디션도 있었다.
포니 이후에 엑셀까지 밴 에디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진 첨부는 귀찮은 관계로 생략하겠다.
엑셀은 포니와는 달리 원래 세단인데 밴은 해치백? 쿠페? 스타일이니 이것도 인상적이었다.

기아와 현대에서 픽업트럭을 내놓는 동안 대우 자동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아래의 요놈은 휠 모양을 보아하니 맵시나 기반인 것 같은데 내가 어렸을 때 실물을 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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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것보다도 내가 더욱 신기하게 여기는 추억의 자동차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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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승용차의 픽업트럭 파생 에디션이 아니라, 아예 트럭에 더욱 근접해 있는 형태이다. 앞부분은 엔진룸이 돌출돼 있고 좀 승용차처럼 생겼지만, 그래도 앞의 차체와 뒷바퀴 휀다는 짐받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짐받이는 후면뿐만 아니라 측면까지 모두 열어 젖힐 수 있다. 일반 트럭처럼 말이다. 승용차로 치면 딱 봐도 그랜저/쏘나타급의 중대형의 덩치이고 적재 용량 역시 7~800kg에 달했다.

실제로 엔진의 배기량도 2000cc급이었고, 휘발유가 아니라 '디젤' 엔진 기반이었으니 더욱 트럭에 가깝다. 걍 1톤 트럭의 약간 마이너 버전이다. 크고 무거운 디젤 엔진을 승용차에다 얹으려다 보니 그 당시 기술로는 부득이하게 중앙이 불룩 튀어나온 전용 보닛이 필요해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한/대우 자동차는 독일 오펠 사로부터 수입한 승용차용 디젤 엔진을 얹기도 했기 때문에 국내 자동차 역사에서는 디젤 승용차의 원조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 당시의 현대/기아 계열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록이다. 그러니 픽업 트럭 역시 휘발유 에디션(흰 놈. 제미니/맵시나 기반)과 디젤 에디션(파랗고 더 크고 엔진이 불룩한 놈. 로얄 디젤 기반)이 모두 존재했다고 한다.

요놈은 그 당시 웬일로 '맥스'라는 차명이 붙었으며, 1988년까지 생산되다 단종됐다.
본인은 25년 가까이 전의 어린 시절, 집에서 피아노를 구입했을 때 피아노가 바로 이 맥스 픽업트럭의 짐받이에 실려서 오는 걸 본 기억이 있다. 그 차의 색깔도 딱 저런 파란색이었다. 그 피아노는 2016년 현재, 아직도 본인의 고향집에 있다.

그에 반해 요즘은 트럭은 기본이 1톤 단위로 시작한다. 그것보다 더 작은 '경상용차'는 국내 유일의 경상용차인 다마스와 라보가 사실상 독식하고 있는 걸로 안다. (적재 하중 550kg)
경차에게 주는 법적 혜택이 워낙 독보적인 관계로, 이 차량은 비록 자동차 회사 입장에서 마진이 남는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생계수단 장사 밑천으로서 기본적인 판매 수요는 절대보장이다.

다만, 원가 절감을 위해 자동 변속기, ABS, 에어백, 자세제어, 그딴 거 하나도 없..다. 안전 테스트도 결과에 관계없이 단종돼서는 안 되는 차량이라고 꾸준히 열외· 면제-_-돼 왔고, 사고 시에 연료가 새는지, 디젤 엔진이 배기가스 기준을 충족하는지 이런 것만 검사를 받아 왔다. 뭐 현실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트럭 중에도 옛날에는 포터에 1.25톤짜리 바리에이션이 있었고, 기아의 점보 타이탄 중에는 1.4톤 모델이 있어서 오늘날 1톤과 2.5톤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걸 찾을 수 없다. 엔진음이 여자 톤에서 남자 톤으로 바뀌는 과도기적인 체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상. 오늘은 소형 트럭 쪽에서 특별히 픽업트럭를 중심으로 옛날 차들을 회상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3 08:33 2016/04/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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