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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2일을 낀 주말에 본인은 수인선의 전구간 복선전철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해 답사 여행을 떠났다. 기왕 수원· 화성· 안산까지 가는 김에, 딱 수인선 열차만 타는 게 아니라 주변의 지역들까지 포함해서 아예 2박 2일짜리 경기도 서남부 종합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 전에 다녀온 3박 4일짜리 여행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이번에도 짧은 시간 동안 철도와 관련된 많은 장소들을 답사하면서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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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퇴근한 당일 밤에 곧장 여행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안양의 수리산 기슭에 있는 병목안 산림욕장이었다. 여기 한구석에 짱박혀서 텐트 치고 잠들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시원하고, 계곡에 물도 졸졸 흐르고.. 여기는 정말 최고의 숙소였다. 나 말고도 큼직한 차 끌고 와서는 뒷문 열어 놓고 자는 아재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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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잘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다음으로는 산림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목안 시민 공원'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경치가 워낙 좋으니 이른 아침부터 산책과 운동을 하는 인근 주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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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과거에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서울로 치면 용마산 채석장을 리모델링한 용마 폭포 공원 같은 곳이다.
여기서 채집한 돌이 경부선 복선화 및 수인선의 건설 공사에서 쓰였으며, 옛날에는 돌을 수월하게 나르라고 경부선 안양 역에서 여기까지 아예 철길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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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채석장이었던 곳답게 넓은 풀밭과 거대한 바위 언덕이 일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공 폭포도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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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부에는 채석장 시절에 쓰였던 쬐끄만 선로와 협궤 화차 레플리카가 한구석에 전시돼 있었다. 오오~~ 표준궤와 협궤가 모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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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흔적이 있는 공원이라니 대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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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병목안'은 여기 지형의 특성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병목 현상' 할 때의 병목과 동일한 의미의 단어이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광명에는 폐광산을 공원화한 광명 동굴이 있는데.. 채석장도 뭔가 심상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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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에도 경치 좋은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다. 집 근처에 이런 공원이 있으면 무척 좋겠다.
여기서 특별히 소개하지는 않지만 공원과 산림욕장 사이에는 캠핑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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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목안 공원 다음으로는 안양에 있는 다른 공원인 '삼덕 공원'을 찾아갔다. 얘는 도심에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근린공원이다. (공원도 많이 돌아다녀 보니 급의 차이가 있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바로 옆에 공영주차장이 있기도 해서 자가용 접근성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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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 공원은 삼덕 제지라는 기업을 운영하던 업주가 지난 2003년에 은퇴하면서 공장 부지를 안양시에다 통째로 기부한 덕분에 조성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이런 훈훈한 미담만 전해지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사연이 전해진다.
업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음해· 파업을 남발하는 악성 노조의 갑질 횡포에 이골이 난 나머지, 거의 40년을 경영했던 공장을 에라이 싹 처분해 버리고 이민 간 거라고 한다..;; 덕분에 배은망덕한 종업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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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쪽 구석에는 창업주의 흉상,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공장 굴뚝의 축소 레플리카가 남아 있다. 이 사람도 당연히 흙수저 개룡남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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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의 옆으로는 수암천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올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가뭄 걱정 없고 개천마다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건 참 보기 좋았다.
얘는 먼저 봤던 수리산 병목안 계곡에서 발원해서 안양 역 건너편까지 흐른 뒤, 안양천으로 합류한다. 원래 시내에서는 대부분의 구간이 복개되었는데, 요 근래에 다시 뚜껑을 걷어내고 복원을 많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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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남산의 남쪽으로 용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둔지산'이라고 이름도 당당히 붙어 있지만, 그다지 높지 않고 전지역이 미군 기지로 점령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인지도가 대단히 낮다.

그런데 안양에도 존재감이 서울의 둔지산 같은 산이 있다. 바로 수리산의 북쪽, 서독산의 남쪽에 있는 일명 박달산이다. 얘는 언덕 전체가 예비군 훈련장을 포함한 군부대들로 꽉 차 있다. 그러니 여기 주변엔 산책로나 등산로 따위는 일체 존재하지 않고 그냥 차량 진입로 한 곳만 있다.
서울 근교에서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산을 따져 보자면 서북부에는 노고산, 동남부에는 인능산이 있는데.. 서남부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산이 바로 이 산인 셈이다.

뭐, 얘도 그냥 수리산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수리산의 유명 봉우리는 저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북악산과 북한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그리고 관악산과 삼성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여기도 뭔가 다른 산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본인은 수리산은 오른 적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본인은 인터넷 지도 로드뷰로 볼 수 없는 풍경도 좀 염탐을 했다.
안양 구경은 오전에 이 정도로 한 뒤, 본인은 시흥을 거쳐서 더 남쪽 안산으로 내려갔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27 08:36 2020/09/2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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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옥천-대전-청주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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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경부 고속도로 구도로에 있는 옥천 터널 중에 현재 완전히 쓰이지 않게 된 '상행선' 구간이다. 작년에는 상행선 터널의 답사가 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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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선 터널은 의외로 식물 공장을 운영하는 '넥스트온'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 전세를 내서 쓰고 있었다! 대표이사는 반도체 기술자 출신이고.. 이게 꽤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이었는지 CNN에서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그냥 공원 형태로 개방(구 왜관), 와인 관광지로 개방(구 남성현)에 이어 식물 공장으로 마개조된 폐터널까지 구경하게 됐다.

경부 고속도로 옥천 터널은 처음에 만들 때는 조국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없는 자본과 부족한 기술로 그렇게도 힘들게 어렵게 고생해서 뚫었는데.. 약 30년 동안 현역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은퇴 후 용도가 저렇게 바뀌었다. 사람이 젊은 시절에 개같이 일하고 돈 벌다가, 늙어서 은퇴한 뒤에는 시골 가서 농사 짓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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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은 경부 고속도로 쪽에만 구도로 폐터널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철도 분야에도 유명한 레거시가 있다.
2004년, 경부 고속철도가 1차 개통만 했을 때는 대구에서 대전 방면으로 가는 고속선이 무려 옥천에서 끊어졌다. 거기서 대전까지는 짧지 않은 거리이지만 KTX도 얄짤없이 기존선으로 달렸다. 그때 경부선 기존선과 고속선을 잇는 연결선은 '대전남연걸선'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무려 10여 년 뒤, 대전과 대구에도 더 깊숙한 고속철 도심 통과 구간이 개통하면서 이 연결선은 쓰이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김천구미 역이 개통한 뒤부터는 대전-대구 사이에 기존선을 달리는 KTX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연결선이 더욱 필요가 없어졌다.
대전-서울 사이에서는 수원 정차 때문에, 그리고 대구-부산 사이에서는 구포· 밀양 정차 때문에 아직도 기존선 주행 KTX가 있다. 그러나 대구-대전 사이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인근의 옥천 주민들은 옳다구나 하고 대전남연결선을 하루속히 철거해 주길 바라고 있지만.. 연결선도 고가 교각 형태인 구간이 많고 다 철거하는 데 몇백 억의 예산이 필요한 실정이다.
옥천군에서는 철거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일부 구간을 레일바이크 같은 관광지로 재활용할 길을 찾고 있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고 시간만 하염없이 가는 중이라고 한다.

작년의 옥천 여행 때는 철도 답사가 전무했으니, 이번 기회에 옥천-대전을 고속도로 대신 국도 4호선으로 달려 보았다. 그러면서 과거의 영광만을 간직한 채 열차 운행이 끊긴 대전남연결선 선로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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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에서 세천, 판암, 대전 역 쪽으로 가려면 서남쪽으로 진행해야 한다. 국도와 경부선 철도의 선형도 그렇게 돼 있다. 본인 역시 국도를 계속 따라가며 거기를 답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고, 세천삼거리에서 지방도 571로 갈아탔다. 고속도로 건너편의 '신상로'라는 길로 진입했다.

이 길도 딱 보면 알 수 있듯, 과거 경부 고속도로의 폐도 구간이다. 구도로가 옥천뿐만 아니라 대전 외곽에도 이렇게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룡 JC가 근처에 있기도 한데, 여기는 통영-대전 고속도로(35)가 개통한 1990년대 중반에 선형이 개량되었지 싶다.
이 길을 통해서 본인이 최종적으로 진입한 곳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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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를 따라 지나가는 꼬불꼬불 산길이었다.
이 길을 이 기회에 한번 지나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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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동 전망대라고 불리는 곳 주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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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가 침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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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산길과 시골 마을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도 행정구역상 대전이라니~! 게다가 중간에 동구에서 대덕구로 구가 바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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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따라 계속 북상하다가 금강을 만나고, 말로만 듣던 대청댐에 도달했다.
수도권에 팔당이 있다면 충청권에는 대청이 있는 셈이다. 이건 댐 근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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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여차여차 하다가 꼬불꼬불 산을 타고 올라가 대청댐 전망대에도 도달했다. 마침 날씨가 맑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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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아래는 아직도 흙탕물이고 수위가 평소보다 높은 게 느껴진다. 바다는 쓰나미와 만조 때문에, 그리고 강물은 비와 댐 방류 때문에 수위가 오른다는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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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사진이다.
동락 전투 기념 공원에서 시작해서 대청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니.. 여행을 다닌 대부분의 지역은 경상도이지만, 여행의 시작과 끝은 어째 충북에서 인증하게 됐다.

청남대도 근처에 있고 이정표도 봤지만, 거기는 시간 관계상 가지 않았다. 창원에서 청해대를 보고 여기서 청남대까지 봤으면 그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됐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이제 여기서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문의 IC 진입). 고속도로는 딱히 정체 구간은 없었지만, 느린 대형차가 자기보다 더 느린 다른 대형차를 느릿느릿 추월하기 위해 1차로로 들어오는 일이 굉장히 잦았다. 이게 뒷차들의 원활한 고속 주행에 큰 지장을 줬다.

이렇게 3박 4일 동안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총 1200km를 넘게 주행하면서 경북 6· 25 접전지, 박 정희 대통령 관련 공원, 새마을호 열차, 경부선 구터널, 경부 고속도로 구도로와 구터널을 들렀다. 그러면서 산과 강과 바다도 덤으로 구경했다. 비 내리는 날씨도 땡볕 뙤약볕보다는 나은 경험이었다.

내년에는 서해안과 서남쪽을 답사할 것이고, 내후년에는 강원도 북부 전방을 다시 가 보는 것으로 일단 계획은 잡아 놨다. 이런 식으로 휴가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4 08:33 2020/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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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원 관광

이튿날 눈을 떠 보니 근처의 청도천은 여전히 수위가 높고 흙탕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완전히 맑고 파래졌다.
이제 본인은 더 남쪽 창원으로 향했다. 이 날은 일요일인 관계로, 창원 진해에 있는 등대 성서 침례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담임 목사님과는 예전에 신앙 서적을 같이 번역하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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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국도 25호선인 시골 들판길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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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린 뒤엔 목사님, 그리고 몇몇 교회 분들과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 그 뒤엔 목사님과 본인만 근처 관광을 다니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진해선 경화 역 공원이었다.
벚꽃이 잔뜩 피는 진해 군항제 때 관광객이 제일 몰리는 곳이긴 하지만.. 본인의 관심사는 벚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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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역에 동차형 새마을호가 있다면, 여기엔 기관차-객차형 새마을호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역시 이런 게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찾아갔다.
단, 여기는 객실 내부가 다른 용도로 건물처럼 완전히 개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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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찬재 목사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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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구시가지와 진해를 가로막는 언덕 중 하나인 안민 고개에서 남해와 진해 시내를 쪽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때는 날씨가 다시 흐려지는 중이었다. 사실, 이때가 여행 기간 전체를 통틀어서 날씨가 제일 변덕스럽게 널뛰기 하듯이 변했었다.

창원에는 현대로템 공장이 있고 진해에도 해군 기지, 해군 사관학교, 육군 종합 정비창 등 보안 시설이 무척 많다.
그래서 여기는 위성/항공 사진 지도에서 산이라고 표시된 곳이 진짜 산인지 아니면 보안상 가려진 곳인지 헷갈리는 곳이 많으며, 인천과 마찬가지로 본토와 인접한 남해안 바닷가에 딱히 해수욕장이 있지는 않다.

자연 해변 관광을 즐기려면 거제도 같은 남쪽이나 전라도 같은 서쪽으로 더 가야 한다.
그에 비해, 엄청난 대도시이면서 본토의 해변에 해수욕장도 남아 있는 부산이 이례적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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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기지 근처에는 여기가 영화 "연평해전"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더라.
사건의 실제 배경은 평택 기지이지만, 그 영화가 촬영된 곳은 평택보다 더 한산한 후방의 진해 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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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희생자를 잠수 수색하다가 과로로 순직한 한 주호 준위의 동상이다.
잊지 말아야 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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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는 진해 해양 공원을 다니면서 철도나 안보, 역사 같은 다른 의미는 없이, 경치 구경만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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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무인도들이 콕콕 박혀 있는 건 동해나 황해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하롱 베이의 한국판 같았다.
나도 자그마한 보트를 장만해서 매일 이 섬 저 섬 돌아다니면서 텐트 치고 캠핑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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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해수욕장은 아니지만 이 정도 모래사장도 주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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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은 이 정도까지 했다.
주 기철 목사 기념관이 여기 근처에 있었지만 못 갔다. 주일성수 정신이 너무 투철한지, 저기는 여느 기념관답지 않게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휴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해대'라고 불리는 이 승만 별장도 있다고 들었지만 해군 기지 내부에 있어서 보안과 코로나 창궐의 이유로 인해 못 갔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 곳을 못 간 대신, 자연 경치 구경을 더 오래 하면서 힐링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진해와 마산은 모두 창원시에 흡수· 통합되어서 지금은 창원 내부의 구 이름 정도로나 남아 있다. 경상북도에서 점촌이 문경에 통합된 것처럼 말이다.
옛날에는 '구마 고속도로'라는 것도 있었고(현재는 45 내지 451번 고속도로로 변경), 마산이라고 하면 김 주열 열사라든가 부마 항쟁처럼 뭔가 항쟁의 지역 같은 인상이 강했는데.. 오늘날은 마산이라는 이름이 싹 없어져 있다.

이제 아쉽지만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됐다.
목사님과 작별인사를 한 뒤 서울로 돌아갔는데.. 작년에 갔던 옥천의 경부 고속도로 폐구간을 다시 찾아갔다.
시간도 마침 자정이 됐으니.. 거기서 마지막 캠핑을 한 뒤, 이튿날 아침엔 거기 일대 답사를 추가로 진행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1 19:35 2020/09/0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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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청도 관광

짧은 시간 동안 이곳 저곳을 우산 들고 돌아다니느라 꽤 힘들었는데.. 곧장 또 청도로 이동했다. 칠곡에서 대구까지는 경부 고속도로(1), 대구에서 청도까지는 대구-부산 고속도로(55)로 답이 딱 나왔다.
경부는 차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니는 차도 그 이상으로 많고 비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만치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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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와인 터널은 남성현 역에서부터 길 안내가 잘 돼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길 곳곳에 토사와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역시 폭우로 인해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변 경치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왜관에 이어서 청도까지 경부선 폐터널을 연달아 감상하는 것을 노렸는데.. 아쉽다. 어쩐지 주변에 주차된 차들이 너무 없어 보이긴 했다.
허탕 치고 돌아가는 관광객들에게 주변 상인들이 복숭아라도 팔려고 들이밀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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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 이름인지 단순 사자성어인지 알 수 없는 이 한자 문구는 경부선을 건설하던 당시에 일본인이 새겨 놓은 것인데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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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터널에 못 들어간 대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빗길을 뚫고 대신 찾아간 곳은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과 내부의 기념관이었다. 청도에 이런 역사적 사연이 있었구나~!
단, 놀랍게도 포항에도 기계면에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이 있으며, 두 지역이 서로 자기가 새마을 운동의 원조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이름도 참 새마을스럽게 '기계'네..;;;

다만, 두 곳의 자료를 대조해 보면, 시기적으로 원조 발상지는 청도가 맞는 듯하다. 포항 저 동네는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고 나서 첫 성과가 가장 탁월해서 대통령에게 직접 칭찬을 들은 마을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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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에 우리나라 농촌은 저런 대대적인 마개조 사업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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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기념관은 단순히 원조가카의 치적을 자랑하는 보수 성향의 성지가 아님을 주의하라. 1957년은 아직 1공화국이지, 박통이 집권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박통의 집권 전부터 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몇몇 지도자들이 스스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힘을 합쳐서 길을 닦고 주민들 의식 개조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코앞에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데 여기다가 열차도 세워 달라고 철도청에다 투서를 찔러 넣고 돈 모아서 철도역까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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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1969년 여름, 경상도의 수해 현장 순시를 마친 박통의 눈에 이곳 신도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곳의 내력이 보고되었다.
이것을 보고 박통은 feel이 꽂혀서 그 해 11월에 농촌 근대화 촉진법을 발표했다고 한다..;; 류 태영 박사 같은 참모의 도움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우리는 할 수 있다 / 잘 살아 보세" 의식 개조 농촌 근대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의외로 1960년대 3공 시절에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이런 것만 있었지 국가 차원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 그 시절부터 자체적으로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던 마을이라면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주장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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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최고 등급 열차 이름도 새마을호가 되고... 박통의 따님은 '새마음(!!!)의 길'이라고 20대 중반의 나이로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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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우리나라가 K팝, 한류, K방역-_- 같은 것보다 더 선하고 건전한 문물을 세계에 전한 것이었다.
이웃의 중공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뻘짓을 하면서 자폭하던 동안, 한국은 그나마 제정신 박힌 건전한 운동을 하며 중흥을 이룩한 것에 그 후손들은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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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는 대통령이 되기 1년 남짓 전에 여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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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더 이상의 기념관 내부 사진 소개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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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엔 공원도 넓게 잘 꾸며져 있었다. 날씨가 맑을 때 왔으면 경치가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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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에 이어 여기서도 박 정희 대통령 동상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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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거 역은 실제 역사는 수십 년 전에 철거되고 없지만, 이 공원 내부에 레플리카가 지어져 있었다. 마치 중앙선 구 능내 역, 영동선 양원 역, 함백선 함백 역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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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은 이런 풍경의 마을 내지 펜션촌으로도 이어졌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개천은 역시 흙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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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처럼 여기도 이렇게 산의 측면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 놓은 구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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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이 철거되고 역명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 마치 옛날 군함 백두산함이 스크랩되고 현재 마스트만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을 답사한 뒤 오늘,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청도 역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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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한 지 벌써 7년이 넘은.. 과거 한국 철도계의 왕자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한 편성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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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대해 말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성지 순례를 이제야 하게 됐다.
새마을호 디젤 동차 실물을 만난 기쁨도 잠시.. 열차의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표면 곳곳에 부식이 진행되고 있고, 열차로 올라가는 사다리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심지어 거미줄에 큼직한 거미가 붙어 있기까지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하고 신경을 쓰고 지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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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내부에는 새마을호 열차뿐만 아니라 아주 자그맣게 토속 공원이 꾸며져 있기도 하다. 예전에 중앙 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부산 방향의 테마 공원의 하위 호환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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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이것으로 둘째 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
해가 진 뒤에야 허기를 달랜 뒤, 잠은 교외의 어느 으슥한 공원 정자에다 텐트 치고 잤다. 환상적이었다. 비는 저녁쯤에 그친 듯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9 19:36 2020/08/2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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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동강 일대 관광

칠곡 관광의 제1부는 전적 기념관 구경이었고, 제2부는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왜관 소방서 앞 사거리" 일대 답사 형태로 진행됐다.
여기는 경부선 철길이 단선이던 시절에 쓰였던 구 철교(지금 "호국의 다리")와 구 터널이 남아 있으며, 이것 말고도 아기자기한 의미를 지닌 공원들이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 걱정도 전혀 없어서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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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구 경부선 왜관 터널의 입구이다. 경부선이 단선이던 시절, 1905년부터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은 철길이 여기를 지났다는 뜻이다. 지금은 터널 바로 옆에 식당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폐터널은 사유지의 창고로 개조되어 방치되는 편이다만.. 얘는 등록문화재로 정식으로 등재되고 터널의 양방향이 뚫려서 공원으로도 이어지게 개조되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 보존을 위해 나름 노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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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나 터널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바닥에는 일부 빗물이 떨어지고 고인 곳도 있었다.
터널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판 그림도 옆에 같이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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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은 근처의 "왜관 소공원"이라는 아담한 공원으로 이어졌다. 공원은 여기 저기에 공터와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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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과 같은 열매가 열린 가로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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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소공원의 길 건너편에는 '애국 동산'이라고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으리으리한 묘비와 함께 소개돼 있는 묘지 언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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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병철(1903-1945). 유 관순과 거의 동갑내기로 10대 중반의 나이로 칠곡에서 3· 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정모 한번 했고..
그 뒤로 임시정부와 신간회에 후원, 야학 교사, 그리고 이미 다 와해되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까지 다양한 분야 계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이 때문에 3· 1 운동으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뒤인 1938년에 한번 더 경찰서 정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정도 이력만으로 그는 일제 말기에 불령선인으로 찍히기에 충분했다. 감시를 받으며 지내던 와중에 1945년 여름, 사실상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터지자 또 어거지 같은 꼬투리를 잡혀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래서 아마 호송 열차를 타고 대구로 끌려가는 길이었지 싶은데.. 그는 열차가 낙동강 철교를 달리고 있을 때.. 비록 손은 결박 당했겠지만 경찰들을 몸으로 뿌리치고 확 뛰쳐나가서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순국한 때는 8월 7일..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가 완료되어 새로운 낙동강 철교가 개통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시절이었고, 저 때는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에 작은 꼬마가 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1주일~열흘 남짓 동안 조금만 수모를 참고 버텼으면 조국의 광복을 보고 석방돼 나왔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런 바깥 소식, 게다가 일제에게 불리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총칼 폭탄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도 아니고, 저 정도 행적은 사형 당할 정도의 죄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런 시기에 또 잡혀 들어가면 무슨 꼬투리를 잡혀서든 살아서 나오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영원히 행방불명된 김 익상 의사의 최후와 비슷..)
아니면 고문 당하면서 동지들의 신변까지 실토하게 될 것을 염려했거나..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일제가 원폭 맞아서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빠져나온 것은 미국에게나 우리에게나 매우 엄청난 행운이었다.
자국민한테도 1억 옥쇄 X랄하던 미친놈들이 시간이 충분했으면 나가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다 죽이고 증겨 인멸하고 파괴하고 나갔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도망칠 때도 위안부들 다 죽이고 나갔던 것처럼. 히틀러가 패전을 앞두고 파리를 몽땅 불지르려고 했던 것처럼..
도 병철 같은 사람이 체포되던 중에 괜히 자결을 한 게 아니었다. "1주일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 같은 아쉬움도.. 결말을 다 아는 후손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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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의 뒷면에는 여기에 무덤은 없지만 어쨌든 칠곡 출신의 애국지사들 수십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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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덕의 꼭대기에는 UN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왜관 지구 전승비가 놓여 있었다. 여기는 정식 현충원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보훈 시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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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터널, 소공원, 애국 동산 다음으로 경부선 구교량이라 할 수 있는 '호국의 다리'를 반쯤 건너 보는 것으로 칠곡 관광을 마무리했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고 풍경은 뭐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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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강변 공원도 금방이라도 침수될 듯 물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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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도 중앙선의 옛 시내 관통 구간이 교량(장군교)에서 폐터널로 바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것 같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7 08:35 2020/08/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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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칠곡 다부동/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 호국 평화 기념관

다음으로 1시간이 좀 넘게 운전해서 칠곡에 갔다. 꼬불꼬불 해변길과 포항 시내를 거친 뒤, 20번 고속도로(포항-익산)를 처음으로 달려 봤다. 다만, 여전히 몹시 피곤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거의 30분 가까이 기절하듯이 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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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먼저 백 선엽 장군의 공훈이 남아 있는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도착했다. 55번 고속도로 다부 IC의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아가기 쉬웠다. 기념관의 뜰에는 탱크와 미사일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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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가히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한 혈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물러나고 대구까지 북괴에게 빼앗기면 더 물러날 곳도, 더 확보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면 남한 수뇌부는 진짜로 제주도나 외국 망명까지 고려하는 지경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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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비가 내려서 온통 물바다인데 마침 비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쉼터가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새참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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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 경찰 추모비와 무명 용사 묘지가 있었다.
백 선엽 장군은 종북 반역 매국 세력의 패악질로 인해 자신이 현충원에 못 들어간다면 차라리 자기를 여기 다부동 전적지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던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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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기념관은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규모도 작고, 홈페이지를 보니 막 특별한 것이 전시돼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하필 백 선엽 장군의 서거로 인해서 이곳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시기에 기념관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리모델링 자체는 백 장군의 서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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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인은 서쪽으로 10여 km 정도 더 이동해서 낙동강 근처까지 갔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과 호국 평화 기념관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후자가 뭔가 전쟁 기념관의 칠곡 버전처럼 제법 규모 있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부터 먼저 들어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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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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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편과 악의 무리들이 나란히 대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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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칠곡은 6· 25 사변 당시에 남한이 영토의 90%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했을 때, 낙동강을 마지노 선으로 잡고 최후의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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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는 분들은 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해서 관람해 보시기 바란다.
일일이 사진을 소개하지는 않지만 1950년 8월 하순에 벌어졌던 유학산 전투,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이런 것도 다뤄져 있다.

이랬는데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덕분에 불과 한 달 뒤인 9월 하순엔 남북 영토가 전쟁 이전 시점으로 되돌아갔으니 정말 고맙고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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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인공의 실제 모델 인물. 그랬구나.
다만, 내 기억으로 영화에서는 형이 중공군에 합류했고 강원도 산간의 금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뭔가 각색이 있었던 듯하다.
중공군이 칠곡까지 남하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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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꼭대기 층에서는 아래의 낙동강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경부고속선 철길이 근처를 지나는데, 마침 주행 중인 KTX를 굉장히 괜찮은 구도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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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의 입구이다. 저 언덕 위에 자그맣게 보이는 건물이 방금 관람했던 호국 평화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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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기념관은 평화 기념관보다 규모가 작고 볼거리가 적었지만 최소한 전투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모습은 유익했다. 김 재옥 기념관과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에도 이런 레플리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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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유치하고 원색적인 북괴 비난 같지만.. 솔직히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괴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쟤들이 전면 개방되지 않는 한 우리도 저런 놈들과 협력, 통일 같은 수작에는 절대로 응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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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야외엔 이런 전적비도 있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이렇게 전적 기념관들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4 19:34 2020/08/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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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덕 장사 해수욕장,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 동해선 장사 역

이렇게 충주 동락 전투 관련 유적을 구경한 뒤, 본인은 곧장 영덕으로 떠났다.
작년에 영양· 봉화로 가기 위해서 이용했던 30번 고속도로(당진-영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본인이 차를 타고 이동을 시작하자 이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차가 없고 길고 곧게 뻗은 터널 안에서 순간 최고 속도를 193km/h까지 내는 과업을 달성했다. 2년 전의 185km/h를 갱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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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나온 뒤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좀 내려가니, 장사 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은 보다시피 문산호의 모양을 한 선박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언제부턴가 계곡 옆에는 평상이, 해수욕장 바닷물 코앞엔 파라솔들이 점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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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언제까지 내리지 않고 있으려나 의아했는데.. 결국은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했으며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다. 그래도 본인은 비를 맞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물놀이를 했다.
물은 적당히 차가우면서 맑고 파도도 잔잔한 편이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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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를 마친 뒤엔 비 내리는 해변과 캠핑장을 거닐다가 장사 상륙 작전 전적지와 기념관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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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변이 해수욕장이 아니라 전쟁터였던 고딩 나이의 학도병들을 생각하며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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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잔잔히 흘러가던 이 도랑은.. 본인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돌아온 1시간쯤 뒤엔 흙탕물이 콸콸 넘쳐 흐르는 헬게이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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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상륙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의 바로 전날 행해져서 진짜 통수를 치는 인천 상륙에 대한 훼이크 역할을 했다. 게다가 훼이크가 얘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훼이크일 뿐이니 막 정예 병력까지 투입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년병을 투입하다니.. -_-;;

문산호는 민간 선박이다가 군용으로 징집된 물건이다.
그런데 얘가 가던 중에 좌초해 버리고 구조선이 제때 못 온 바람이 애들의 희생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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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옥상(갑판)에도 올라가 볼 수 있다. 비가 철철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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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에서 볼일을 다 본 뒤엔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동해선 장사 역을 찾아가서 내부를 구경했다.
동해선은 일제가 1940년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건설하고 있던 철도였는데 21세기가 돼서야 드디어 철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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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상주하는 직원이 없는 무인역이고, 선로도 본선과 측선 두 가닥에 섬식 승강장 하나밖에 없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하루에 열차가 방향별로 7회밖에 정차하지 않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갔을 때 열차가 도착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아직까지는 포항에서 영덕 사이를 오가는 3량짜리 RDC 무궁화호가 단선 선로를 오갈 뿐이다. 앞으로 더 발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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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오후 6시쯤에 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집에서 싸 간 과일 말고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곧장 저녁을 먹으러 갔다. 휴가 가서 전통적으로 늘 하듯이 해수욕장 근처의 어느 식당에서 회를 배불리 먹었다. 여기서 컴퓨터와 폰을 충전도 잔뜩 할 수 있었다.

3. 포항 사방 기념 공원

이제 여행의 첫째 날이 저물고 숙소를 잡을 때가 됐다. 바닷가나 한가한 교외의 정자, 해수욕장 캠핑장 등 텐트를 칠 곳이야 많다만, 문제는 비가 밤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 위의 비는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고민 끝에 다음 목적지인 사방 기념 공원에 미리 가서 거기 내부에 짱박혀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다음 둘째 날의 일정은 오늘보다도 더욱, 매우 빡빡할 예정인데 이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장사 해수욕장은 영덕의 최남단에 있고 사방 기념 공원은 포항의 최북단에 있다. 그러니 차로 2~30분 거리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는 경로에는 곧게 뻗은 국도를 벗어나서 온통 좁고 꼬불꼬불 굽은 산길과 해변길도 있어서 눈이 즐거웠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해수욕장에서 캠핑을 하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비는 밤새도록 정말 시원스럽게 내렸다. 공원 내부의 어느 건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비를 피하면서 한숨 잔 뒤, 아침 6시쯤 날이 밝아 오자 우산을 들고 공원 주변을 산책하고 언덕을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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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정원이 정말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저 멀리 바다까지 보였을 텐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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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砂防)이란 높은 지대에서 모래가 비바람에 씻겨 무너져 내리는 것, 쉽게 말해 산사태를 예방하는 정비 과업을 말한다. 이게 박통 시절에 여기 포항 북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행됐는가 보다.

안 그래도 지금 당장 기록적인 폭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산사태가 났는데, 현 시국과 관계가 있는 적절한 장소를 잘 찾아간 것 같다. 나도 이런 용어와 심지어 이런 과업을 기념하는 공원까지 있다는 걸 몰랐는데.. 지도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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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흥해 일대가 사방 사업의 최초 시범 추진 지역이었던가 보다. 박 정희 대통령이 사방 사업을 특별 현지지도(?) 하는 장면이 이렇게 동상으로 꾸며져 있다.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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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밤과 새벽 시간대에 잠깐만 머무를 수 있어서 기념관 안에는 못 들어갔다. 더구나 날씨가 맑고 좋으면 여기서 바다까지 보이는 멋진 풍경 사진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넓고 경치 좋고 박 정희 대통령 동상까지 있는 공원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비 내리는 밤을 보낸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추억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1 19:37 2020/08/2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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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본인은 지난 4월말 황금 연휴 동안의 근거리 여행에 이어, 8월에도 매년 해 온 것처럼 하계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는 교회 수련회가 없었던 것을 감안하여 개인 여행을 기존의 1박 2일이나 2박 3일보다 긴 3박 4일로 잡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더 멀리 나가고 다양한 곳을 둘러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바이러스 말고도 이번 여행에서의 큰 복병은 이례적으로 길게 지속된 장마였다. 이 때문에 원래 7월 말~8월 초에 다녀 오려던 것을 한 주 미루기도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광복절 연휴나 그 이후까지 계획을 질질 미루고 싶지는 않아서 그 다음 주에는 출발을 강행했다. 사실, 비가 내리던 날도 해만 안 날 뿐 땀 뻘뻘 흐르고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처음에 생각했던 올해의 여행 계획은 통영-대전 + 중부 고속도로(35)를 끝까지 타고 남하해서 남해안 정도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평소에 서울에서 거기까지 갈 기회는 잘 없었으니까.. 다도해 해상 공원을 구경하고 남해안의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경전선 폐역이나 88 올림픽 고속도로 구도로를 답사하는 것 정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7월쯤 되면서 좀 수정됐다. 백 선엽 장군의 서거 소식을 계기로, 올해는 강원도를 전혀 경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보 관광의 비중을 매우 크게 잡게 됐다. 바로 1950년 여름의 격전지였던 칠곡 일대의 답사가 추가된 것.. 거기에다 작년에 관람했던 영화 <장사리>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면서 물놀이 장소도 그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남해안까지 가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경로가 당초 계획보다 더 동쪽으로 기울어졌다. 역대 휴가 여행 중, 본인의 고향과 가장 가까이 가게 됐다.

1. 충주 동락 전투 승전 기념 공원, 동락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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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충주의 서쪽 끝인 동락 전투 승전 기념 공원이었다. 경유한 고속도로는 50, 45와 40의 순으로 번호가 작아졌다. 넓고 한적하고 으슥한 공터에 일찌감치 도착한 뒤, 잠도 여기서 한숨 잤다.
해 안 나고 덥지 않고, 아직 비도 안 오고 화장실과 수돗물이 바로 옆에 있기까지 해서 첫 야영을 아주 기분 좋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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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 전투는 6· 25 전쟁 중에 국군의 육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해군의 승전은 후방 동해에서의 대한해협 해전)
김 재옥 교사가 동락 초등학교 운동장을 점령한 적의 동태를 아군에게 침착하게 잘 신고한 덕분에 승리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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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공원이 있는 곳에서 300미터 남짓 떨어진 저 동락 초등학교 지점으로 아군이 박격포를 쐈다. 현장엔 그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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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비도 있고 참전 유공자 기념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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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들어오는 짤막한 길은 도로명이 "김재옥길"이라고 명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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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맑은 물이 흐르고 경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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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락 초등학교로 들어가서 김 재옥 교사 기념관에 들어갔다.
방학 기간이고 평소 방문 인원이 매우 드물어서 그런지, 교무실을 찾아가서 교직원에게 요청을 해야 문을 열어 줬다.
이 학교 자체도 2020년 현재 전교생이 몇십 명 남짓밖에 안 된다고 본인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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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참전 기념비와 김 재옥 교사 현충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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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재옥 교사에 대한 소개 문구.
이분은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학생 나이로 교사로 부임했다가 거의 곧장 전쟁을 맞이했다. 그리고 군인과 결혼하면서 교사 커리어는 얼마 쌓지도 못하고 퇴직하여 전업주부가 됐다.
그 뒤엔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로 범죄에 희생되어 세상을 떠났다..;;
가족 대부분이 싸이코패스에게 몰살 당했지만 당시 집에 없던 아들 딱 한 명만 살아남아서 대를 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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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 초등학교 운동장. 뭔가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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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은 생각만치 볼 건 없었다. '동락리 전투'를 '리' 자를 떼어내고 '동락 전투'라고 고쳐 부르려는지, 글자를 땜빵한 흔적이 보였다.
동락 전투에 참전했던 주역들이 1988년 7월 7일에 이 학교에 모여서 회고 간담회를 개최했던 사진이 걸려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19 08:33 2020/08/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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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운길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이 산은 국립공원이나 각종 둘레길 같은 브랜드가 없고, 딱히 군사 시설이나 역사적인 사연도 없는 아주 평범한 산이었다. 구조도 흙산이어서 정상 부근에 거대한 바위 같은 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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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어쩐 일인지 넓은 전망대가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본인 말고도 다른 등산객 일행이 서너 명가량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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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본인이 세팅한 숙소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헬리패드와 함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의 주변에 고맙게도 이런 평상이 3개 정도 있었던 덕분에 거기에다 간편하게 텐트를 칠 수 있었다. 텐트를 지고 힘들게 산을 오른 보람이 있었다.

본인은 여기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묵었다. 예빈산, 갑산 새재고개에 이어 운길산까지.. 남양주 남부에 있는 산의 정상이나 능선에서 야영 기록을 연달아 남기게 됐다.
이불만 덮으니 밖은 전혀 춥지 않고 지낼 만했다.

4. 국도 45호선과 대성리 유원지

한숨 잘 자고 나서 텐트를 걷고 산을 내려갔다. 이른 아침에 국도 45호선을 타고 북한강을 따라 북쪽 가평 방면으로 이동했다. 안개가 자욱히 껴 있는 시원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주행하는 기분은.. 정말 끝내주게 좋았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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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의 첫 목적지는 대성리 역 근처에 있는 북한강변의 넓은 풀밭이었다. (그 전에 대성리 역 화장실의 도움을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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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전반적으로 흐리고 우중충한 잿빛으로 찍혔지만 지내기는 이때가 덥지 않고 무척 좋았다. 주변엔 저 멀리 자전거 타거나 산책하는 사람만 가끔 지나가고, 이 공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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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여기서 돗자리 깔고 있으면서 폰과 노트북의 남은 배터리를 모두 소모했다.
아직 일반적인 식당이나 카페가 문을 열기에는 좀 이른 오전이었지만, 그래도 아침 9~10시쯤 되니 민간 카페(?) 말고 브랜드 체인점 카페는 문을 연 게 있었다. 거기서 또 2시간이 넘게 있으면서 음료와 전기를 보충하고 인터넷 확인도 했다.

5. 청평댐과 지방도 391호선

아침이 지나고 낮이 가까워지자 해가 뜨고 날이 급격히 더워졌다. 그리고 도로에는 이전보다 차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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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을 받은 뒤엔 이제 어디에 갈지가 고민됐는데.. 마침 신청평대교 아래의 강변에 아주 넓은 풀밭과 함께 한낮부터 텐트들이 잔뜩 보였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 멀리 댐 같은 것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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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본인은 옳다구나 하고 그리로 내려갔다. 낮에는 또 여기서 텐트를 치고 지냈다.
자세한 내역을 적지는 않지만 이 날 카페와 텐트 안에서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코딩 작업도 많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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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일과를 진행하니 오후 3시쯤이 됐다.
이제 가평 쪽으로 탐험을 더 계속할지, 아니면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끝에.. 이번 여행의 공세종말점(?)을 감안했을 때 신 청평대교를 건너서 유턴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강 건너편의 지방도 391호선 강변 구간도 어차피 몽땅 미지의 영역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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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먹고, 어느 근사한 카페에서 전자기기들을 추가로 충전하며 마지막 보급을 받았다.
391번 지방도는 마냥 평지에서 강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가끔 경사와 커브가 아주 급한 산길 형태로 돌변하기도 했다. 운전이 꽤 다이나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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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날이 슬슬 저물고 있다. 여기는 아마 양평과 가평 경계의 어느 카페촌이었지 싶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 지도를 펴서 정확한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겠지만.. 귀찮아서 생략한다.
이 당시 서종대교 위로 60번 고속도로는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상· 하행 어디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6. 강변 오토캠핑

그리고 저녁 6시 반쯤, 가평을 벗어나 양평 서종면 구간에서 드디어 텐트들이 즐비한 넓은 캠핑장을 발견했다. 캠핑장은 보통 '수상레저'라는 상호가 붙은 곳에 같이 있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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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텐트... 취미 성향이 이런 쪽인 남자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낚시에도 재미를 붙일 법하지만.. 그러고 보니 본인은 어제와 오늘 동안 자덕들은 많이 봤어도 낚시꾼은 거의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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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물 바로 코앞에다 텐트를 치고 강 구경 하면서 밤을 보내니 이것도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산에서 보냈던 어젯밤과도 비교되고 말이다. 한강 공원이나 팔당호 주변의 강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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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를 친 모든 사람들이 야영을 하지는 않았다. 해가 떨어지니 상당수는 돌아가고 텐트는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래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어제는 등산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지 눈을 감자마자 곧장 기절했지만, 이 날 밤은 덜 피곤하고 마음이 들떠서 그런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면서 몸이 시동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넘게 컴퓨터 작업과 독서를 반복하다가 그제서야 잠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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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어제와 거의 같았다. 어제와 비슷하게 아침 드라이브를 즐기며 귀가했다. 길거리 사진은 이것 하나만 올리지만, 여기 도로 주변 풍경이 전반적으로 다 이런 식이었다.

남한강 합류 지점이 가까워지자 강폭이 커지고 주변에 갑자기 울타리와 철조망이 둘러지면서 “상수원 보호 구역” 표지판이 곳곳에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걸 보니 여행이 끝났다는 게 벌써부터 느껴졌다.
이렇게 휴가 여행을 마쳤다. 그러고 보니 경기도조차 벗어나지 않은 단거리 투어가 됐지만.. 새로운 장소들을 개척하면서 자연인· 자유인 체험을 잘 하고 왔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0/05/11 08:34 2020/05/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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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4월 말부터 5월 초 사이에 석가탄신일, 근로자의 날, 주말, 어린이날이 거의 일렬로 쭉 이어지는 황금 연휴가 있는 편이다. 일본은 4월 29일이 쇼와의 날이라고 해서 자기네 리즈 시절이었던 히로히토 일왕을 기리는 공휴일인데.. 한국은 석가탄신일이 얼추 비슷한 시기에 공휴일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성탄절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1970년대에야 추가된 종교 공휴일이 나름 봄철의 연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이 기간 동안 너도 나도 외국으로 나가느라 인천 공항은 터져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더러 외국으로만 나가지 말고 내수 경제도 좀 살려 달라고 나라에서 고속도로 톨비도 면제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것 없다. 천재지변 급의 재앙 때문에 하늘길이 꽁꽁 묶여 버렸다. 인천 공항은 재작년에 평창 올림픽에 맞춰서 제2 여객터미널까지 당당히 개장했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냐..;; 안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국내는 다행히 전염병이 기세가 많이 꺾였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도 완화되었다. 그러니 본인은 이 연휴 기간 동안 하계 휴가에 준하는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컨셉은 "2020년 춘계 황금연휴를 이용한 자연인 체험 -- 북한강변을 중심으로"가 됐다.

생각했던 것만치 멀리 나가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답사했던 적이 없는 장소를 다니면서 자연을 즐기고 왔다. 특히 "하루는 산에서 자고 하루는 강가에서 자기"를 목표로 설정하여 잘 달성했다.
딱 하나 미스는 처음에 떠나는 길에 시간대를 잘못 선택해서 극심한 교통 체증에 시달린 것이었다. 역시 이 시국에 나만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평범한 아침 시간대가 아니라 새벽 같은 다른 시간대를 선택했어야 했다.

사고 하나 없이 오로지 차량과 분기점 병목만으로 길이 이 정도로 막히는 건 굉장히 오랜만에 봤다.;; 팔당대교 진입로에는 2~3km에 달하는 차들이 길게 늘어섰다.
명절 귀향· 귀경길이 아닌 상황에서 차 내비 화면에 "2시간 연속 주행하셨습니다. 좀 쉬었다 가세요"가 뜨는 걸 보니 자괴감이 들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건 마치 우주 로켓이 1단 엔진을 가동해서 지구 대기권을 빠져나가는 것과 같았으며,
서울 교외에서 남양주든 양평이든 가평이든 어디든 가는 건 지구 저궤도에서 3단 엔진을 가속해서 달이든 화성이든 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서울-남양주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일단 서울을 벗어난 뒤부터는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1. 중앙선 구 능내 역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는 바로 남양주 조안면에 소재한 중앙선 능내 역이었다. 이 역은 중앙선 복선 전철화와 선형 개량(=대대적인 선로 이설)으로 인해 2008년 말에 폐역했지만, 역 주변이 통째로 공원 내지 관광지로 보존 처리되었다.
본인은 다산 유원지는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저기는 지금까지 가 본 적이 없었다. 다산 유원지와 이 정도로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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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내부와 승강장은 지난 2월에 답사했던 화랑대 철도 공원과 여러 모로 비슷한 분위기였다.
단, 여기는 "자덕들의 성지"라는 점에서 화랑대 철도 공원과는 차이가 있었다. 반포 한강 공원이 자덕의 성지인 것처럼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선과 경춘선은 모두 복선 전철로 개량되면서 많은 구간이 이설됐는데, 기존 구선로 구간, 특히 강을 따라 달리는 구간은 상당수 자전거길로 리모델링 됐기 때문이다. 능내 역은 이 과정에서 특혜를 입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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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철도 공원이 그렇듯이, 저기 보이는 객차 안에도 카페가 있다. 하지만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역시 코로나 크리 때문에 영업이 중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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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에서 역 건물을 바라본 모습이다. 이 시선의 후방으로는 자전거 도로가 나란히 놓여서 자전거들이 씽씽 지나갔으며, 근처에는 자전거 대여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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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근처에는 선로와 자전거 도로, 주차장이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2. 물의 정원

능내 역을 답사한 뒤, 다음으로 본인은 북한강을 따라 가평 방면으로 올라가다가 '물의 정원'이라는 강변 공원을 발견하여 거기를 들렀다.
팔당 물안개 공원 같은 곳이 남양주의 북한강 구간에도 있었구나. 다만, 규모는 이게 훨씬 더 작다. 그리고 여기가 팔당 물안개보다는 먼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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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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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좋고..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근사한 풍경화가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넓은 풀밭을 자유롭게 거닐다가 벤치에 앉아 쉬거나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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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부에는 이렇게 섬 같은 곳을 드나드는 다리가 있었다. 섬 안이나 밖이나 면적은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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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장면 남긴다. 본인은 여기서 2시간 남짓 머물면서 신선놀음을 하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등산을 시작했다.

3. 운길산

등산 대상은 큰 고민 없이 의외로 금방 정해졌다.
운길산은 본인의 여행 경로와 가까이 있고 산 중턱의 수종사 부근까지 차를 몰고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 근처에 평상까지 준비돼 있으니 가히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본인은 첫째 날은 여기서 텐트 치고 잤다.

마침 이 날이 석가탄신일이기도 해서 수종사 주변의 주차장 공터엔 불자들이 등산객 이상으로 아주 많았다. 절과 운길산 역을 오가는 셔틀버스(소형 승합차..)도 다닐 정도였다.
산을 올라간 다음에는 다음날 아침에 내려올 예정이니 본인은 여기서 오늘의 마지막 보급을 받았다. 음료수를 보충하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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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를 지나고 나니 주변에는 절 방문객이 아닌 등산객만 남고 주변이 썰렁해졌다.
거기서 정상까지 명목상 이동 거리는 800m 남짓에 불과했지만, 고도는 거의 300m 가까이 상승해야 했다. 즉, 등산로가 꽤 가파르고 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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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물의 정원' 쪽을 내려다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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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과 저 멀리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모습이다. 산에서는 이런 넓은 전망을 볼 수 있으니 좋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8 08:33 2020/05/0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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