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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수락산 #2

본인은 올해 가을엔 어쩌다 보니 등산 야영을 시리즈로 계속하게 됐다. (1) 예빈산(남양주), (2) 청계산 국사봉+발화산(의왕+성남) 다음으로는 (3) 수락산을 다시 찾아갔다. 한강 근처의 예빈산· 예봉산 일대도 남양주이고 서울 북동부의 수락산 근처도 남양주라니.. 실감이 잘 가지 않았다. 세부 행정구역이 별내면과 와부읍으로 서로 다르긴 하다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쯤 전, 겨울에 장암 역 근처에서 수락산을 올라서 주봉 정상에 도달한 뒤, 남양주의 청학리 수락산 유원지 방면으로 하산한 적이 있었다. 산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한 것이다. 이번에는 차를 가져가서 수락산 유원지에서 등산을 시작한 뒤, 하산도 동일 지점으로 했다.

그러니 등산 경로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산행은 새로운 산이나 등산로를 개척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3년에 가깝게 지나니 기존 경로도 충분히 새롭게 느껴졌으며, 수락산은 재방문만으로도 예빈산이나 청계산과는 사뭇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암반이 많은 돌산이며,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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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산로는 꽤 높은 곳까지 자동차 접근성이 좋았으며, 이렇게 차를 댈 만한 곳도 곳곳에 있었다. 내가 굳이 이 경로를 택한 주 이유 중 하나 역시 이것이었다.

경치 좋은 계곡의 주변 공간을 어디선가 무단 점유하고는 방문객에게 바가지 요금을 물리는 식당들의 불법 영업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랬는데 올해는 이 관행을 근절하겠다고 경기도에서 주도적으로 칼을 뽑고 나섰다. 언제까지나 생계형 범죄랍시고 오냐 오냐 봐 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도 식당들이 상당수 박살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한강 공원들만 해도 텐트와 야식 광고 찌라시, 쓰레기 때문에 몸살을 앓다가 지금은 질서를 많이 되찾았듯이.. 저것도 공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금방 바로잡을 수 있었던 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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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올라간 뒤에야 드디어 차도가 끝나고 사람만이 접근 가능한 돌계단과 비좁은 등산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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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금류 폭포'이며, 요런 게 바로 여느 흙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흙바닥이 아닌 바위 위로 물이 줄줄..
이렇게 높은 곳에서도 아주 가늘게나마 물이 흐르는 산은 본인은 지금까지 수락산밖에 못 봤다. 이 정도면 물을 그냥 인위로 끌어올리기라도 한 건가 궁금해진다. 수락산 계곡에서 발원한 이 물은 평지에서 청학천으로 이어진다.

금류 폭포의 바로 옆엔 산장이라고 해야 하나 휴게소라고 해야 하나 자그마한 간이 식당까지 있었다.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지만, 여기는 국립공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민간 산장이 들어서는 게 가능하다. 북한산 같은 곳이라면 등산로를 벗어난 계곡 근처는 몽땅 울타리가 쳐지고, 무단 침입 시 과태료가 부과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정상을 향해 더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원암'이라는 바위와 함께 절인지 암자인지가 있다. 차량이 들어올 수 없는 높고 험한 곳치고는 건물과 마당을 포함한 부지가 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해우소'라고 불리는 공중 화장실도 있었다. 실제로 이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생긴 형태는 마치 수돗물이 여기까지 들어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세식이었다.

하긴, 나중에 집에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금류 폭포와 내원암 정도는 해발 고도가 아직 300~350m밖에 안 되었다.
지금까지 올랐던 200여 m 고도는 경사가 여전히 굉장히 완만한 편이었고, 내원함 이후부터가 급격히 가팔라졌다. 실제로 빽빽한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곳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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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상이 보일 기미가 안 보이는데 날은 계속해서 어두워져 갔다. 하긴, 오늘은 등산 자체를 오후 5시가 돼서야 시작했다.
정상에 거의 다 와서야 그 이름도 유명한 '수락 산장'과 함께 약수터도 등장했다. 1리터짜리 통을 다 채우는 데 내 기억으로 거의 1분 가까이 걸릴 정도로 수압이 낮았지만, 그래도 이 높이에서 맑은 물이 나오는 것만으로 어디냐.. 마시는 용도와 씻는 용도로 모두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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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가 다 떨어진 뒤에야 주봉 정상에 도착했다. 1시간 반쯤 걸렸다.
수락산엔 여기 말고도 능선에 온갖 이름의 기암괴석 봉우리들이 더 있고 다른 등산로도 있는데, 거기는 아직 가 보지 못한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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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반석 위에 지은 집'에서 착안하여 '반석 위에 친 텐트' 정도 되겠다. ㄲㄲㄲㄲㄲ
따뜻한 간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도시락을 먹었다.
산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힘들어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고 물을 다 마실 정도였지만, 날씨는 이내 급격히 추워지고 땀이 식었으며, 바람도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전에 예영을 했던 산들은 한밤중에 정말 아무도 없었지만 이 산은 달랐다. 새벽 1시쯤에 야간 산행을 하는 일행이 수락산 정상에 왔다가 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산 정상 근처 바위에 텐트가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그 사람들도 좀 놀랐을 것 같다. =_=;;
"웬 텐트? 허걱~" 하는 소리를 본인도 듣긴 했지만.. 서로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아까 전에 저녁을 먹고 있던 중에 텐트 문을 열었을 때는 근처에 웬 고양이 한 마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옛날에 인왕산 정상 부근과 북한산 정상에서도 고양이를 봤던 기억이 있다. 야생일 텐데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시끄러워서 결국은 숙소를 정상 아래의 숲 속 공터로 옮겼다. 여기가 훨씬 더 조용하고 자기 편했다.
달빛이 밝았던 덕분에 주변도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암흑천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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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처음에 텐트를 쳤던 곳의 낮과 밤 풍경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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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정상 주변 풍경은 몹시 멋졌다. 근처의 불암산도 수락산보다 약간 더 낮고 작은 축소판일 뿐, 내부 제원(?)은 수락산의 판박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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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깜깜할 때 지나갔던 길이 낮에는 이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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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고 차가 세워진 공터로 돌아오니, 이제야 여기에 차를 몰고 와서 주차 자리를 찾는 등산객들 일행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본인은 여기 올 때는 용마 터널과 구리-포천 고속도로(29) 같은 유료 도로를 적극 활용해서 갔지만, 귀가할 때는 그냥 순화궁로, 덕릉로, 동부 간선 도로 등의 기존 종축 도로만 타고 갔다. 글쎄, 서울 동쪽의 구리와 남양주 쪽으로는 유료 도로와 관련 진출입로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것 같다.

  • 산을 관통하는 유료 터널: 용마(아차산), 별내(불암산)
  • 서울-양양 고속도로(60): 남양주*, 덕소삼패
  • 외곽순환 고속도로(100): 구리남양주, 불암산, 토평
  • 구리(세종)-포천 고속도로(29): 갈매동구릉*, 남별내
  • 수석-호평 도시고속화도로: 이패

서울의 남쪽이야 서해안(서서울), 경부(서울), 중부(동서울)라는 3대 '종축' 간선 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요금소가 있으며, 좀 더 생각하면 관악산 아래를 지나는 유료 도로인 남부순환로, 그리고 유료 터널인 우면산 터널 정도가 떠오른다.

그런데 서울의 동쪽에는 서울-춘천-양양이라는 '횡축' 간선 고속도로가 시작된다. 남양주는 마치 경부의 서울, 서해안의 서서울처럼 폐쇄식과 개방식을 전환하는 톨게이트이다. 그리고 덕소삼패는 남양주보다 전인 개방식 구간에 있지만 경부의 판교 톨게이트처럼 고정된 요금을 징수하는 톨게이트이다.

그리고 서울의 북동쪽으로는 구리(세종)-포천이라는 '종축' 간선 고속도로가 시작된다. 공식 명칭은 세종이지만 과연 그 길고 먼 구간이 모두 개통하는 때는 과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얘는 갈매동구릉 톨게이트가 폐쇄식과 개방식이 전환되는 곳이며, 여기 근처에서는 북중랑 톨게이트를 통해 고속도로를 드나들 수 있다.
폐쇄식 요금소와 개방식 요금소가 뒤섞여 있으니 구조가 더욱 복잡하게 느껴진다. 폐쇄식과 개방식 요금제는 열차로 치면 지정석과 자유석의 관계와도 비슷해 보인다.

서울 북쪽 외곽의 노고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은 모두 터널이 뚫려 있다. 그 중 수락산 아래를 지나는 덕릉 터널만이 무료이고, 나머지는 다들 유료 터널이거나 유료 도로인 외곽순환 고속도로 구간에 포함돼 있다.
이에 덧붙여 수석-호평 고속화도로는 고속도로도, 터널도 아닌 마치 제3 경인 고속화도로와 비슷한 급의 유료 도로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11/04 08:32 2019/11/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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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의 예빈산과 더불어 본인이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등산 코스는 청계산에서 아직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 있는 남쪽 구간이었다. 거기는 상수도 보호 구역은 아니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온통 개발 제한 구역이다. 그래서 경치가 좋으며 뭔가 오지 탐험을 한다는 느낌이 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남양주와 성남 중 어디부터 먼저 갈지도 꽤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둘 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예빈산을 먼저 가게 됐고, 청계산은 그 다음 주에 찾아갔다.
처음에는 성남시 금토동에 있는 완만한 등산로(능안골)를 생각했다. 그러나 청계산을 갔다가 근처 길 건너편 남쪽의 발화산도 오랜만에 다시 가 보기 위해.. 계획을 변경했다.

남북으로는 청계산과 발화산 사이에, 그리고 동서로는 성남과 의왕 사이에는 외곽순환 고속도로,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생긴 제2경인 고속도로의 연장 구간(안양-성남 고속도로.. 터널로 지나니 밖에서는 보이지 않음), 지방도 57호선이 지난다. 이것들 말고 아마 가장 먼저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길은 '하오개로'라고 불리는 2차로짜리 꼬불꼬불 산길이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달리면 자연스럽게 이 길로 진입할 수 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은 속세와 기막히게 단절된 곳에 자리잡은 것 같다. 여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학교 주변에 들어선 온갖 식당들과, 그리고 서판교의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 단지 때문에 전원적인 느낌은 없어진다.
본인이야 전공이 다르니 딱히 인연이 없지만, 한국학 중앙 연구원은 나름 인문계의 카이스트 같은 급의 국립 특성화 연구소 겸 대학원대학교이다. 학부 과정이 없고 석· 박사 대학원만 있는데, 카이스트도 1970년대에 처음 설립됐을 때는 학부 과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본인은 바로 저 길을 따라 '하오 고개'의 꼭대기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성남과 광주 사이에 이배재 고개가 있다면, 성남과 의왕 사이에는 하오 고개라는 게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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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중앙 연구원을 지나서 고개를 오르는 길이다. 단, 담장의 방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건 고개 쪽이 아닌 연구원 쪽을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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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곧고 넓게 잘 뚫린 고속도로나 57번 지방도와는 너무 대조되는 좁고 꼬불꼬불한 산길이다. 그 대신 차량 통행이 매우 뜸하며, 종종 갓길 공터가 나오기 때문에 중간에 차를 세우는 것에도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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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 고개의 정상에는 이렇게 발화산과 청계산을 잇는 육교가 설치돼 있다. 이 육교를 통해 보행자는 하오개로와 지방도와 고속도로를 몽땅 횡단하여 두 산을 왕래할 수 있다.
이배재 고개의 정상에도 망덕산과 고불산(+영장산)을 잇는 육교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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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를 올라서 청계산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금토동 등산로보다 수평 이동이 적기 때문에 등산로가 가파를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길은 좁은 편이지만 성남 누비길 구간이다 보니 울타리로 안내가 잘 돼 있었다. 여기는 안양 시민 묘지의 근처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덤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송전선 철탑과 두 번 마주쳤다.
산은 역시 잎이 초록색일 때 오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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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오른 끝에 현 산등성이의 능선에 도달했다. 약간 넓은 공터와 의자가 있었는데, 여기서 국사봉으로 가려면 약간 하강해서 산등성이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수직 이동이 막 심한 삽질 수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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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이런 좁은 길 아니면 울타리 계단의 순으로 계속되었으며, 정상과 가까워지니까 바위도 슬슬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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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 정상에 거의 다 오니 갈림길이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국사봉이 아닌 쪽의 바위를 오르니 이렇게 자그마한 바위 꼭대기가 나왔다.
여기는 아무 표지석이 없고 바깥 전망도 썩 좋지 않았지만.. 의외로 건너편 발화산의 능선 바깥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름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시설의 산 속 잔디밭 부지가 눈에 들어오니 놀랍고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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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사봉 정상에도 도달했다. 여기도 막 썩 경치 좋은 전망대가 있는 건 아니어서 고속도로 말고는 딱히 내려다볼 만한 게 없었다.
성남시 운중동 주변에는 보안 시설이 의외로 좀 있기 때문이다. 괜히 개발 제한 구역인 게 아니다. 아까 그 모종의 바위 꼭대기에서 봤던 것들은 이 정상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이로써 본인은 청계산의 망경대, 서울(성남?) 매봉, 과천 매봉, 이수봉에 이어서 국사봉까지 정상을 모두 올라 보게 됐다.

예봉산이야 주변의 예빈산, 운길산, 갑산 따위가 몽땅 깔끔하게 남양주 소속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청계산은 지역 파편화가 꽤 심한 산에 속한다. 시계에 걸친 산들도 기껏해야 서울-구리(아차산), 성남-광주 같은 둘 정도가 보통인 반면, 청계산은 뭐 각 사분면별로 서울-과천-성남-의왕 4개로 찢어졌으니까..
경부 고속도로가 관할 구간이 달라지고(양재 IC 이남 이북으로 도로 공사 vs 서울시), 지하철의 관할 구간(서울역-청량리 서울 메트로 vs 코레일)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개념이 산에도 존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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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후에는 운종 저수지 근처의 어느 경치 좋은 카페에서 음료와 전기 보급을 받으며 쉬고 컴퓨터 작업을 했다. 그 뒤, 오후에는 다시 육교로 돌아와서 발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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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에서는 이렇게 57번 지방도(왼쪽), 하오개로(오른쪽), 그리고 외곽순환 고속도로까지(저 앞쪽.. 청계 톨게이트 근처) 세 도로를 한데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경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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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 왔던 육교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제는 육교의 저쪽 건너편이 청계산이다.
이 발화산도 성남 누비길 구간이다. 하지만 표지판을 보니 발화산이 아닌 '태봉산' 구간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 언덕은 사실 발화산 정상의 주봉이 아니며, 발화산 정상은 행정구역상 성남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비길은 더 동남쪽으로 응달산을 거쳐서 태봉산 쪽으로 이어진다. 그쪽은 본인이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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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비좁고 가파르며 딱히 볼 것이 없었다. 다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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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다 올라서 능선에 도달하니 드디어 재작년에 봤던 그 송신탑이 나왔다.
재작년에는 여기보다 더 서쪽인 청계 톨게이트 쪽에서 길 없는 곳에 잘못 들어가서 밀림을 헤치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어째 이쪽으로 합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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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탑을 지나가면 약간의 내리막이 이런 식으로 펼쳐지며.. 길을 따라 더 진행하면 코렁탕 제조 시설, 응달산, 대장동 등으로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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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하오고개 쪽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한없이 더 진행하지는 않았다. 중간 길목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여기는 청계산보다는 덜 유명하고 교통 불편한 곳이다 보니 사람 한 명 얼씬하지 않아서 좋았다.

깜깜한 밤에 높은 산 깊은 숲 속에 혼자 있으면 일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디라도 텐트를 치고 안에 들어가면.. 이 얇고 연약한 텐트가 나를 바깥과 격리시켜 주고 추위와 바람과 각종 야생 벌레들을 차단해 준다. 넓은 산 속에 나를 위한 호텔 방이 짠~ 생기는 듯한 느낌?

그냥 돗자리나 침낭만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느낌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텐트까지 들고 이동하는 수고를 감내하고라도 등산에다 야영을 겸하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9/10/21 08:35 2019/10/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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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예빈산 견우봉

지난 9월 중순엔 전반적으로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렇게 날이 맑고 단풍도 들기 전에 꼭 등산을 가서 산 정상에서 야영도 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진작부터 했다. 지난 5월의 이성산 이후로 등산이란 걸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해 보게 됐다.

어느 산부터 갈지 고민하다가 남양주 예봉산 옆의 예빈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예봉산은 예전에 두 번이나 가 봤고, 요즘 양 예빈 선수가 우리나라 육상의 에이스로 뜨고 있기도 하니까.. 미리 봐 뒀던 예봉 산장 근처에다 차를 세우고, 팔당 유원지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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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 장비를 추가로 들고 오르느라 안 그래도 힘든데 이 등산로는 웬걸, 굉장히 가파르고 험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이 흠뻑 젖었다.
뭐 그렇다고 서울의 북한산, 관악산처럼 로프를 잡고 바위를 오른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고.. 내려갈 때 스틱이나 주변 나무를 붙잡아야 되는 정도.. 그냥 흙산인 것치고는 가파르다.

그런 데다 최소한의 좁은 길 흔적만 있지 울타리나 이정표 같은 안내 시설이 아무것도 없다시피했다. 종종 등장하는 벤치나 평상도 없고, 정말 일체의 인공물이란 게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
얼마나 더 올라야 하는지 아무 기약이 없으니 심리적으로 힘든 정도를 더욱 가중시켰다. 온통 숲과 나무에 가려서 경치가 보이는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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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양 예빈 선수와 달리 저질 체력을 자랑하는 관계로..-_-;; 너무 덥고 숨 차고 힘들어서 몇 번씩 돗자리 깔고 한참을 쉬다 가야 했다. 오르는 동안 1리터에 가까운 음료수를 다 마셔 버렸으며 이걸로도 부족했다. 그래도 나뭇잎들이 아직 싱싱한 초록색이어서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고, 하늘도 맑고 적당히 더우니 이런 날이 등산 자체는 하기 아주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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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가까이 한참을 오르고 또 오른 뒤에야 견우봉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있는 것은 이렇게 아주 좁은 공터에다 돌무더기와 간단한 이정표가 전부였다.
예빈산은 주봉이 견우봉과 직녀봉 둘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직녀봉(588m)이 견우봉(581m)보다 미세하게 더 높고, 인터넷 사진으로 본 '예빈산 정상' 표지석도 직녀봉에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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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해서는 저 앞의 직녀봉도 가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체력은 둘째치고 물이 고갈된 관계로.. 산을 한참 내려갔다가 또 오르면서 땀을 빼는 동작을 더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7미터만 더 오르면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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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예봉산 정상에 건축된 기상 관측 레이더를 이렇게 멀리서 보게 될 줄이야.. 몇 년째 공사하던 게 드디어 다 완공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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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정상 자체에는 별로 볼 게 없었지만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니 팔당호.. 즉 한강과 남한강, 북한강, 경안천, 양평 두물머리와 남양주 다산 유원지가 다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정말 일품이었다. 힘들게 예빈산 견우봉 정상까지 올라간 것에 대한 보상을 이제야 받을 수 있었다. 예봉산에서는 이런 걸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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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각각 두물머리와 다산 유원지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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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검단산 기슭의 배알미 마을 쪽으로 확대한 모습이다. 수돗물 취수? 정수장이 있는 거기 말이다.
경치 좋기로 소문난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 지점을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예빈산 견우봉의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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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를 앞두고 바닥이 비교적 평평한 곳이 있어서 거기에다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5시가 넘어가니 슬슬 어두워지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으며, 7시쯤부터는 주변이 암흑천지가 됐다. 춥고 어둡고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산 정상에서 혼자 야영을 하니 아늑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밖은 추워도 텐트와 침낭 안은 따뜻했다. 새벽엔 텐트 안도 꽤 쌀쌀해졌지만 텐트 밖은 바람까지 불고 더 추웠다.

하산은 이튿날 아침 6시쯤부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었지만 어둠이 적당히 걷혀서 앞을 보고 길을 찾을 수는 있었다.
처음에는 추워서 침낭을 점퍼처럼 두른 채 산을 내려갔다. 하지만 이게 웬걸, 길이 험해서 그런지 하산도 생각보다 꽤 길고 힘들었으며, 덕분에 체감상의 추위도 금방 없어졌다. 기온이 20도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에도 여전히 더워서 땀을 잔뜩 흘렸다.

내가 어제는 이런 험한 길을 도대체 어떻게 올라왔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이 길이 정말 맞나 의문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길을 전혀 잃지 않았으며, 어제 올랐던 경로를 정확히 역순으로 거쳐서 차를 세워 뒀던 곳으로 잘 하산했다.
그리고 어제 산기슭에서 마주쳤던 계곡에서 세수를 하고 땀을 씻어내고, 물을 받아서 마시기까지 했다. 계곡물이 있으니 정말 좋았으며, 이렇게라도 하니 살 것 같았다.

예빈산에서 이렇게 좋은 추억을 하나 추가한 뒤, 집에는 딱 아침 8시 무렵에 잘 도착했다. 정작 이때는 선선하고 시원했는데 아까 산에 있을 때만 유난히 덥게 느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19/10/18 08:34 2019/10/1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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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계속해서 봉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계절이 바뀌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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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엔 계속해서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고 보니 옛날 도로는 가드레일 말고 저렇게 노란 경계석이 쓰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느 샌가 보기 힘든 풍경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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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마을 어귀를 흐르는 요런 맑은 개울을 발견해서 차를 세우고 물놀이를 했다.
이럴 때 햇볕이 쨍쨍하고 날씨가 더 더웠으면 물놀이의 효과가 더 커졌겠지만, 폭염과 가뭄 때문에 개울이 말라 버리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물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낫다. 비 덕분에 여기 모든 개천· 개울들은 물이 콸콸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참 보기 좋았다.
그렇잖아도 어제 땀을 많이 흘려서 몸이 온통 끈적거리는 상태였는데 싹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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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월산 자생화 공원이라는 곳을 발견해서 들렀다가 갔다. 주변에 나밖에 없는 오지에서 자연을 즐긴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지구가 금성 화성과 달리 초록별이라는 사실에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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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서 봉화로 가려면 역시 산을 하나 넘어야 하더라. 길은 어느 샌가 꼬불꼬불한 산길로 바뀌었다.
터널 안에 들어갈 때는 일반적으로는 헤드라이트를 켜는 게 맞는데, 현실에서는 '끄시오'라고 안내된 표지판도 많이 보인다. 화장실에서 휴지는 변기에 "넣으시오/넣지 마시오"만큼이나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사항인 것 같다.

저 영양 터널을 지난 다음에는 행정구역이 봉화로 바뀌고, 봉화 터널과 어느 공군 부대가 뒤이어 등장했다. 그리고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됐다.

6. 봉화군 탐험기

본인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봉화에서 영동선 양원 역을 답사하고 봉화 시가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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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행 합쳐도 차가 몇 분에 한 대 다닐까말까인 이 꼬불꼬불 산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시로 정차하고 사진 찍고 시동 끄고 사색에 잠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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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하나 넘어서 내려오니 또 강이 펼쳐졌다. 이 강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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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동선 철길 위를 지나갔다. 참 공교롭게도 본인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타이밍에 맞춰서 여객도 아니고 화물 열차가 하나 지나갔다. 얼마나 무거운 짐을 끄는지, 전기 기관차 중련에다가 보조 중형 디젤 기관차까지 편성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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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양원 역이 자리잡고 있다는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마을 앞에도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양원 역은 행정구역상 봉화이지만 동쪽 맨 끝이기 때문에 거의 울진 근처이며, 가는 길에 울진의 서쪽 끝을 경유하기도 했다. 봉화 시가지와는 수십 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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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을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양원 역으로 가려면 거기서도 산을 하나 타넘어야 했다~!
엔진 회전수 4000rpm을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밟을 때도 찍고, 여기서 2단 엔진 브레이크로도 찍었다. 1단 말고 2단으로 말이다.
그렇게 산을 넘은 뒤에도 저 길로 들어가야 했는데.. 차가 지나갈 수는 있지만 거기서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딱히 차를 세울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차는 이 부근에서 세우고 여기서부터 몇백 m 남짓은 걸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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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니 이 강은 낙동강 상류라고 한다. 물이 콸콸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저 교각은 무슨 옛날에 있었던 다리의 흔적 같다.
양원 역이 이 정도로 답 없는 오지에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저기를 건너간 다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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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얘를 실물로 보게 되었다.
예전에 태백선· 함백선 부근에서 조동 역과 함백 역을 보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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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 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 주민들이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현기증이 나니 제발 열차 좀 정차시켜 달라고 아우성 치고 정부에 청원 넣고, 아무 국고 지원 없이 스스로 돈을 모아서 역 건물을 지어서 승인 받은 역이다. 진정한 의미의 민자역사인 셈이다. 단지,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라 지역 주민 복지를 위한 민자역사인 것이고.. 그게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전날 옥천에서 정 지용 시인 관련 안내문에서도 1988이라는 숫자를 봤는데, 양원 역의 개업 시기도 1988년 4월이라니 우연 치고는 절묘하다. (지용회: 1988년 3월)

얼마나 한이 서렸으면 양원 역에 첫 열차가 정차하던 날 사람도 감격하고 산과 강도 감격했댄다.
옛날엔 열차가 여기 마을을 통과할 때 짐보따리부터 미리 던져 놓은 뒤 더 먼 승부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돌아와서 그 짐을 챙겼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옛날에는 열차에 화장실이 비산식이었고(오물이 선로로 그대로...; ), 주행 중일 때 차량의 출입문이나 창문을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근성 있는 사람이라면 짐만 미리 던져 놓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훌쩍 뛰어내릴 법도 해 보이는데.. 그러기에는 아무리 젊고 민첩한 사람이라도 좀 위험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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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없이 컨테이너 가건물 같은 규모이지만 컨테이너가 아니다. 시멘트를 얹어서 정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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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서체 안내판까지도 주민들이 직접 만든 거라고 한다.
현재는 여기가 유명세를 타면서 정규 여객열차뿐만 아니라 V-train(백두대간 협곡)과 O-train(중부내륙 순환)이라는 관광 열차도 정차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역 건물과 안내판 말고 저 승강장은 코레일에서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
순환선이기 때문에 O이고, 그리고 계곡 모양을 형상화해서 V라니.. 코레일 수뇌부에서 머리 좀 쓴 것 같다. 이름을 참 기발하게 지었다.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마침 저기에 열차가 정차하는 것을 봤다.
이번 여행 동안 경부선과 영동선을 지나는 열차를 종종 목격했는데, 모두 전기 기관차 기반이었다. 디젤 기관차는 전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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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봉화 시가지로 가는 길에 또 절경을 발견하여 풍경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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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가 돼서야 봉화 시가지에 도착했다. 이 강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보급을 받는 것으로 2일간의 여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는 3년 주기로 남해안, 서해안, 동해안을 한 번씩 가는 것으로 어렴풋이 계획을 잡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3 08:33 2019/09/1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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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부 고속도로 최후 유일의 4차로 구간과 추풍령

이제 본인은 구도로가 아니라 실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옥천에서 추풍령까지 이동했다. 옥천 휴게소 이후부터 영동1 터널까지, 2019년 현재 경부 고속도로 416.1km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4차로로 남아 있는 마지막 구간을 쭉 달려 봤다. 영천-경주-울산 구간도 오랫동안 4차로였지만, 거기는 2010년대 내내 지겹게 공사를 한 끝에 바로 작년 말에야 전구간이 6차로로 간신히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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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옥천 근처에는 이렇게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갓길이 없어지고 속도 제한이 80으로 내려간 위험 구간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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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딱히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특히 금강 휴게소 인근의 금강을 건너는 구간은 높은 교량, 그것도 2000년대가 돼서야 완공된 교량이기 때문에 거기가 또 가까운 미래에 확장될 것 같지는 않다. 천하의 경부 고속도로에도 이렇게 차로가 적고 좁은 구간이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차에 동승자가 없었던 관계로, 이 사진들은 다 본인이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던 중에 잠시 핸들을 놓고 좀 위태롭게 찍은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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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경부선 추풍령 역의 승강장이다. 추풍령 IC와 철도역은 역시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운 편이다.
추풍령 역은 경부선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역이다. 물론 경부선 구간이 높아 봤자 220m대에서 노는데, 진짜 산악 철도인 태백선· 영동선 역들의 고도(7~800m대!)하고는 비교하는 게 실례이지만, 그래도 철도는 오르막에 매우 취약하니 저 정도만으로도 열차가 오르기 버겁긴 하다.

과거 초창기에 경부선은 김천 이전의 구미에서도 지금의 국도 4호선처럼 금오산 고개를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길을 만들었더니 20세기 초의 증기 기관차가 오르막을 도저히 끝까지 오르질 못하고 중간에 픽픽 퍼졌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스위치백 같은 걸 만들 여건은 못 됐으니 그 구간에서만 열차의 뒤에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형태로 매우 불편한 운행을 해야 했는데..

결국 1910년대에 구미 시내를 삥 둘러서 평지를 우회하는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다. 그 덕분에 새로 생긴 구간에서 구미 역이 1916년에 개업했으며, 구미 출신인 원조가카는 집을 떠나 장거리를 이동할 때 그 구미 역을 잘 이용했을 것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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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 휴게소는 경부 고속도로 전구간의 거의 정중앙 지점에 위치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금강과는 달리 상· 하행이 분리돼 있지만, 금강처럼 자체 나들목(추풍령 IC)을 갖췄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얘도 1971년 1월 1일부로 개업했으니 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당시에는 길을 닦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지경인데 휴게소까지 같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1970년 하반기에 경부 고속도로에는 휴게소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ㄷㄷㄷ 그러다가 금강 휴게소가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1주년에 맞춰 같은 해 7월에 뒤이어 개업했다.

추풍령 휴게소 부근은 강을 끼고 있는 금장 휴게소보다 고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4차로가 아닌 6차로이다. 구도로는 선형이 꼬불꼬불 굽었고 매우 불량했으며, 여기 일대에서 실제로 큰 사고가 나기도 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개통 이래 최초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는 1970년 8월 21일 발생한 고속버스 추락 사고(25명 사망, 22명 부상)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7월 14일에도 수학여행 전세 버스의 연쇄 추돌 사고(18명 사망, 70여 명 부상)가 나서 그야말로 대형 사고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둘 다 사고 지점이 동일하게 추풍령 휴게소 부근의 고갯길이었다!

문제의 구간은 2006년 말에 대대적인 선형 개량과 6차로 확장이 완료됐다. 그에 비해 옥천-영동 구간은 2003년에 선형 개량만 됐고 여전히 4차로이다. 옥천-영동 쪽은 구도로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반면에 추풍령 쪽의 구도로는 완전히 흑역사가 된 것 같다. 일부 구간은 기존 국도 4호선의 확장 영역으로 흡수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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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의 근처의 언덕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있다. 순직자 위령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높으며, 주변에 넓은 풀밭도 꾸며져 있다.
상행 방면 휴게소와 더 가까이 있긴 하지만, 양 휴게소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행 방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도 도보로 준공 기념탑에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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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풀밭도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에 풍경 사진을 남겨 봤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 --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 정희"
"이 고속도로는 ... 우리 자체 재원과 기술과 역량만으로 최단 시간에 이뤄낸 우리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 1970년 7월 7일 건설부 장관 이 한림"


기념탑 아래 벽면에는 뭐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치하하는 감격의 덕담을 한 마디씩 남겼다.

참고로 이 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은 아까 봤던 옥천 터널을 빨리 뚫어 내라고, 개통식 날짜를 못 맞추면 너희들 국물도 없을 거라고 건설사들을 무진장 갈구고 쪼아댔던 그 당사자이기도 했다. =_=;;;;
딱 같은 시기에 김 현옥 서울 시장도 군인 출신의 정말 못 말리는 지독한 "까라면 까" 불도저였으니.. 군사 정권 시절에 나라 분위기가 그렇게 군대식으로 극도로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뭔가 역사적인 사건에다 기념을 한 문구는 대부분 이 은상 시인이 작성한 것 같던데.. 아까 순직자 위령비뿐만 아니라 준공 기념탑에도 글이 있었던가..??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첫 개통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라고 불렸다! 그래서 준공 기념탑과 순직자 위령탑에도 저 긴 이름이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옛날에도 '경부'라는 이름이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비격식 약칭이었다. 그런데 그게 공식 명칭으로 바뀐 것은 1981년 11월 7일, 고속국도 노선지정령이 개정되고부터이다.

아이고 글이 왕창 길어져 버렸는데..
여기까지가 옥천과 추풍령, 경부 고속도로와 관련된 테마 답사였다. 이제 본인은 제2부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5. 영양군에서 외박

(1) 김천에서 영양으로 갈 때는 내비의 안내대로 중부내륙(45)과 당진-영덕(30)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후자가 워낙 한산했던 덕분에 차량 성능 테스트를 빙자한 폭주 시험/실험을 거기서 시행할 수 있었다.
전방에 시야가 탁 트였고 다른 차도 없는 절호의 기회가 종종 찾아왔다. "복동아 지금이야!"-_- 같은 소리가 뇌리에 전해지는 듯할 때 필사적으로 확 밟았다. 주행 당시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악셀 페달이 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풀로 꽉 밟았는데도 이상하게 차가 더 가속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가 더 올라가지 않았다. 당연히 레드 존 상태 따위가 전혀 아닌데도... 더 오래 밟고 있으면 가속이 됐을지 모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번 휴가 때는 예전에 수립했던 185km/h를 간신히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 성능이 좋은 차였다면 그 정도로 밟았으면 190~200은 분명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2)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를 모두 달려 보니, 표지판에 표기된 각 지역까지의 거리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고속도로야 입체교차 진출입로가 존재하고 자기 영역이 명확하다. "대전 xx km" 이러는 것은 대전 IC로 진출하는 갈림길까지의 거리이다. 그러나 다른 국도· 지방도에서 "영양 xx km" 이러는 것은 해당 지역의 도로 원표까지의 거리인데.. 시청이나 군청 같은 대표 행정기관이 있는 곳과도 비슷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그 지역 내부에 이미 진입했지만 킬로 수가 아직 한참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럼 국도 중에도 입체교차 진출입로와 중앙분리대까지 있어서 반쯤 고속도로인 물건이 있는데.. 얘는 그럼 지역의 중심부까지의 거리와 IC까지의 거리가 혼재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지방 국도를 운전할 일이 또 생겼을 때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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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는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시가지는 정말 작았으며 2차선 도로가 전부이고, 교차로에도 황색 신호밖에 없었다.
영업을 하는 카페를 용케 찾아서 거기서 2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목을 축이고 인터넷을 확인하고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며 쉬었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이 보급으로 오늘 밤을 보내고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하니, 전자 기기들은 무조건 꽉 충전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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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를 벗어나면 주변은 온통 이렇게 산과 강과 들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날이 저물었으며 주변은 암흑천지가 됐다. 흐리고 비가 계속해서 내렸지만 습하고 몹시 더웠다.
본인은 국도 31호선을 따라 봉화 방면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적당히 으슥하고 인적이 없고 캠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 탐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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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주변에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오지에서도 iptime 와이파이가 잡히다니 신통한 노릇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0 08:34 2019/09/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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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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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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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난 77인의 명단 자체가 공개된 적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저 위령탑의 뒷면을 보면 순직자의 이름과 거주지(시/구)가 적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난 그건 현장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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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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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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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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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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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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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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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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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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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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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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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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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세상에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폭염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견딜 만했던 것 같다. 작년이 워낙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본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하계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다가 연차를 추가로 써서 말이다. 강원도, 인천에 이어 올해는 중부 지방 내륙 위주로 돌아다녔다.

이번 여행이 예전의 휴가 여행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첫째, 날씨다. 이틀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 사진에는 파란 하늘이 찍힌 게 없다. 하지만 여전히 습하고 더웠기 때문에 땀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냉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둘째, 내륙 위주로 돌아다니느라 이례적으로 바다에는 못 갔다. 바다 물놀이는 그 전 주말에 마침 부산에서 볼일이 생긴 덕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겸사겸사 하고 왔다.

3년 전에 학술대회 참석 때문에 10월이 다 돼서야 부산에 들러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만,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해 있는 실제 피서철에 저길 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던 서해와 달리(작년 을왕리 기준), 여기는 파도와 수심이 급이 달랐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해는 해변으로부터 최하 100미터 이상은 진입 가능하며 안전 부표도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썰물 때는 부표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도 하지만.. 동해는 그런 거 없다. 부표가 해변에 훨씬 더 가까이 있으며 사실은 모래밭 바닥의 경사부터가 서해보다 훨씬 더 급격하다.

바다에서 사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은 매우 좁은데 사람은 많고 바글바글하니.. 해운대에서는 물에 들어간 채 돌아다니기는 어렵고 그냥 제자리에서 파도만 맞다가 나와야 했다. 아무 대비 없이 복부에 맞으면 좀 아플 정도로 파도가 강했으며, 성인 남성인 본인도 신체가 앞으로 떠밀릴 정도였다.
아울러, 해운대는 여느 한적한 시골 해수욕장과는 딴판인 곳인 관계로, 모래밭에서 텐트를 칠 수는 없더라.

뭐, 바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번 여행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먼저 (1) 옥천-추풍령 사이에서 경부 고속도로 심층 탐구 답사를 했으며, 그 다음 (2) "군인 없는 양구"라 불리는 영양과 봉화 일대에서 자연과 철도를 즐겼다.

1. 경부 고속도로 옛 구간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옥천으로 갔다. 중간에 용인-서울 고속도로 등 다른 곳도 들르면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 여행 때는 오로지 경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경부 고속도로는 내년이면 벌써 개통 50주년이 된다. 지금이야 경부 고속도로는 수도권 한정으로 도로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지어져서 거대한 방음벽이 둘러졌으며, 무려 8~10차로로 확장되고도 차들로 몸살을 앓는 지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1970년에 갓 개통했던 당시에는 얘는 전구간이 겨우 4차로일 뿐이고 주변은 온통 그냥 논밭이었다. 비상 활주로 공용(신갈, 천안, 김천 어딘가?)이어서 제대로 된 중앙분리대가 없거나, 아니면 그냥 화단 형태로 만들어졌던 구간도 있었다. 거기에다 다니는 차량도 매우 적으니, 인근 주민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최초로 6차로 이상으로 확장된 구간은 1987년, 회덕-남이 사이이다. 서울-수원 구간은 6차로를 거치지 않고 1991년에 곧장 8차로로 확장되었고, 2010년대가 돼서야 판교 주변 등 일부 구간은 10차로까지 확장됐다. 여기 말고도 곳곳이 도로를 다시 만드는 수준의 선형 개량과 확장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 경부 고속도로 개통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고속도로를 처음 만들 때 열악한 여건 하에서 너무 날림 졸속으로 만든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조가카도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서 일단 4차로만 만들지만.. 얘는 앞으로 너무 비좁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건축을 허가하지 말고 언제든지 확장 가능하게 대비해 놔라" 이런 예상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마치 옛날에 갑작스러운 북괴 남침 때 정부가 너무 허둥거리고 미숙하게 대처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할배 자신은 "북괴가 곧 반드시 남침할 것"을 알고 미국에다 계속 더 도와 달라고 지원을 요청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이 묵살당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했던 선각자가 북괴의 침략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본인은 그렇게 경부 고속도로의 어제와 오늘은 모습 차이가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면서 운전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구간만 좀 막혔지 그 뒤부터는 쌩쌩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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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동이면에서 옛날 고속도로가 현재의 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는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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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는 한쪽만 재포장 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그냥 주차장 공터처럼 쓰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경의선이 복선이었다가 국토 분단 후에는 단선만 쓰이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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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금강2교'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여행이 더욱 운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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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니 거대한 공터가 나타나 있었다. 캠핑 하기 딱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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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쭉 달렸다. 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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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폐선 같은 감흥을 고속도로 폐구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여기 길바닥 아무데서나 텐트 치고 혼자 고독을 즐기며 밤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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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옥천 터널, '그분'이 임박했다~!
저 촌스러운 한글 글자는 '어설픈 둥근고딕' 계열보다도 더 오래된 197, 80년대 작품임이 틀림없다.
터널의 이름이 처음에는 '당재 터널'이다가 나중에 '옥천 터널'이라고 바뀌었는데...

언제 개명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개명되고 나서 처음 만들어진 표지판이 한 번도 안 바뀌고 저렇게 전해진 것이지 싶다.
밑에 로마자 표기만이 훗날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으로 인해 땜질 형태로 바뀌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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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현역 시절의 옛날 사진으로만 보던 그 터널 입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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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터널은 위의 사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행과 하행이 서로 모양과 길이가 다른 짝짝이로 만들어졌다.
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전-대구 사이의 난공사 구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히 최악의, 마의 구간이었다고 한다.

기술과 노하우라고는 쥐뿔도 없던 열악한 시절에 거기는 지형도 참 지랄맞았던 것 같다. 발파를 한번 했다 하면 지반이 무너지고 토사가 흘러내리고 현장이 황폐화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서만 공식 통계상 낙반 사고 13건에 9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인부들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특히 터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산신령이 노해서 이런 사고가 나는 거라는 낭설이 쫙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느티나무를 베라는 명령을 내렸던 어느 공병 중령 장교조차 그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부들이 너무 겁먹은 나머지 작업 지시를 거부하고 도주할 지경이 됐으며, 일당을 몇 배로 더 올려 준대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간부들이 이들을 달래느라 왕창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어렵고 힘든 건 알겠다만, 개통 날짜는 정해져 있고 그때 무려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실 예정이다. 개통식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연기할 수 없으니 무조건 까라면 까라. Impossible is nothing이야. 못 하면 너네 회사 문 닫을 줄 알아!"라고 시공사인 현대 건설을 무식하게 쪼아 댔다. 어휴.. 그땐 그랬다.

그러니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높으신 관리자들도, 심지어 정 주영 현대 회장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과로를 감내하며 아예 현장에서 죽치고 살아야 했다. 중장비를 조종하던 인부가 도중에 화장실에 갈 여유도 도저히 없어서 참다못해 운전석에 앉은 채로 바지에다 쌌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나마 현대 건설에서 일반 시멘트보다 만들기 어렵고 훨씬 더 비싸지만(단가가 2배 이상) 수십 배가량 더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동원하는 묘책을 내서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영업수지 흑자를 포기하고 말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옥천 터널은 거의 30년 동안 쓰이다가 지난 2003년, 옥천 구간의 선형 개량과 이설로 인해 고속도로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하행 터널만이 2차선 도로로 쓰이고 있고, 상행 터널은 폐쇄되어 김치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와인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는 경부선 철도의 옛 성현 터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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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런 멋진 길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의 경부 고속도로 본선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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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 고속도로의 흔적은 옥천의 거의 동쪽 끝에서 구도로가 신도로와 다시 마주치는 듯하면서 끝났다. 현재 고속도로로 치면 '영동1터널'을 동쪽으로 지난 지 얼마 안 된 지점이다.
본인은 다시 옥천 방면으로 돌아와서 여기 일대의 나머지 관광을 시작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4 08:33 2019/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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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일대는 강물이 십자형으로 만나는(세로: 북한강과 경안천, 가로: 남한강과 한강) 교차로일 뿐만 아니라, 행정구역도 남양주(북서)와 양평(북동), 하남(남서)과 광주(남동)로 제각기 갈리는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다.
주변의 지형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면 얼추 아래와 같다. 각 사분면별로 땅의 이름, 강의 이름, 산과 강변 공원과 교량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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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교차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남한강 이남에도 행정구역상 양평이 있으며, 경안천 서쪽에도 광주시 퇴촌면이 있음.)

여기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개발이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며 경치도 대단히 아름답다. 다산 생태 공원과 두물머리 공원에 대해서는 본인이 예전에 답사기를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강북 말고 강남, 특히 광주시 쪽은 딱히 갈 일이 없었고 접근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양평에서 약간 남쪽으로 남한강만 건너면 되는데 접근이 어려운 이유는... 거기 주변에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동쪽의 양평 시내 쪽으로 한참을 더 가면 양평대교가 나오지만 그건 2012년에야 건설된 것이고 그마저도 고속도로용(45번 중부내륙)이기 때문에 일반 차량들은 이용하지 못한다.

광주시 쪽의 남한강변으로 가려면 남쪽으로라도 잔뜩 내려가서 경안천을 건너는 광동교를 건너야 한다. 저기는 거의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 같으며, 개인적으로는 '광주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이다. 가까운 미래에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저기 주변에 생길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엔 본인은 여기에 한번 가 볼 기회가 생겼다.
본인 어머니의 어느 친구분이 은퇴 후 바로 저기 일대의 시골 마을에 주말 농장을 분양받으셨기 때문이다. 본인은 어머니를 따라 거기에 한번 놀러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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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왔는데 밤에 잠은 당연히 밖에서 잤다. 이 당시 한낮에 30도를 훌쩍 넘는 7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침낭을 덮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물론 본인은 이런 날씨가 아주 좋았다. 비까지 오면 완전 금상첨화였을 텐데~!

본인은 집과 직장에서 내내 버그와 싸우다가 불금을 기념하여 여기를 찾아갔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보지 못한 진짜 버그들과 대판 싸우게 됐다. >_<
자그마한 벌레들이 컴퓨터나 자동차 내부로 들어가서 기계의 동작을 물리적으로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을 해 보면 단순히 도시에 꾸며져 있는 공원의 풀숲하고 진짜 시골의 풀숲은 이런 데서 야생의 급이 차이가 난다는 것과, 텐트의 방충망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생명 자연발생설을 믿었던 옛날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_-;; 하긴,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 지렁이가 흙을 삼켰다가 뱉으면서 땅을 기름지게 해 준다는 것, 구더기가 파리의 유충일 뿐 둘이 같은 종이라는 것 등도 인류가 알아낸 지 생각만치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 걸 선뜻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평균적인 비위와 근성이 강하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시골에서는 인공물이 별로 없으니 음식물 정도의 쓰레기 투척이나 노상방뇨에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글쎄, 기생충 같은 위생 차원에서는 그것도 너무 많아지면 별로 안 좋긴 하지만..
자연이 어지간한 생체 배설물· 폐기물을 자체적으로 정화하는 능력은 컴퓨터로 치면 garbage collection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스타에서도 생체인 저그는 테란· 플토와 달리 자기 체력이 천천히 자체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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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섬을 감싸는 지방도 342호선은 강을 따라가는 동시에 꼬불꼬불한 산도 타는 경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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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강변을 따라 공원과 산책로도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방문하던 당시에는 너무 더워서 구경만 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가을쯤에는 여기서 돗자리 펴고 더 오래 있을 수 있겠다. 물론 더워도 날씨가 아주 쾌청하니 풍경 사진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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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섬의 서쪽에는 하중도에 '팔당 물안개 공원'이라는 게 있었다. (혹은 팔당물 안개 공원?? 띄어쓰기가 확실치 않음 ㅡ,.ㅡ;;) 녹지의 면적으로만 따지면 두물머리와 다산 공원을 아득히 능가한다. 하중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교량 아래에는 연꽃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산책로는 거리가 편도로만 1~2km에 달하기 때문에 이 더운 날 도보 답사는 할 수 없고, 그냥 조금만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기는 넓고 경치는 좋지만 서울 방면에서의 교통 불편과 홍보 부족, 그리고 이 뙤약볕에 그늘이나 화장실, 카페, 편의점 등 보조 시설이 부족한지라 토요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본인도 이제야 처음 알게 됐을 정도이니 이 공원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덥긴 해도 두물머리나 다산은 이 시간대에 이 정도로 한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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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다음으로는 팔당 전망대 부근에서 강을 바라보며 풍경 사진을 남겼다. 딱히 산 같은 고지대가 아닌 곳에 '전망대'라니 심상이 좀 어색하다만, 여기는 맨 위의 일러스트에서 진짜로 원점에 해당하는 중심지이다.
전망대 주변에는 카페와 식당이 여럿 있고, 좀 외곽에는 짙은 분홍색으로 칠해진 모텔도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에서 데이트 하다가 잠은 여기서 자라는 건가 싶다.;;

이렇게 광주섬(?)에 눈도장을 찍고 땅밟기를 마쳤다.
정암산 등산도 하고 싶은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광주섬에 대한 총체적인 관광을 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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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주변은 상수원 보호 명목으로 사람이 얼씬도 할 수 없다. 저렇게 공원이 꾸며져 있으면 그것만으로 감지덕지지 팔당댐 근처는 아예 철망·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본인은 문득 한강 물을 가까이서 체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뚝섬 한강 공원에 들렀다.

10여 개에 달하는 서울 한강 공원들 중 투톱은 여의도와 뚝섬이지 싶다. 둘 다 지하철역 접근성이 아주 좋은 데다 여의도는 위치가 너무 좋고, 뚝섬은 한강 공원들이 여기저기 조성되기 전부터 이미 민간 싸제 유원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뚝섬의 경우 지금도 국공립 시설뿐만 아니라 민간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그 중엔 '아리랑 하우스'라고 커페, 레스토랑과 오리보트 대여 서비스를 하는 곳이 있다. 여기 말고 한강에서 오리보트를 탈 수 있는 곳이 한강 공원에 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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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보트는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서 돌리는 것 말고 전동 모터가 달린 것도 있으며, 대여료도 더 비싸다. 보트 한 척에는 최대 3명(240kg)까지 탈 수 있다더라.
전동이라 해도 그냥 빠르게 걷는 수준이다. 수면에 긴 여파를 남기면서 시속 수십 km로 질주하는 고속 모터보트는 따로 있으며 요금도 더 비싸다.

운전하는 게 놀이공원 범퍼카 같은 느낌이다만.. 그렇다고 다른 배에 일부러 부딪치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한없이 멀리 나가거나 아예 강 건너편으로 갈 수도 없다. 부표 이내에 가로· 세로 공히 200미터 남짓한 사각형 영역 안만 돌아다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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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량이 아니라 쪽배로나마 한강 서울 구간의 수면을 자가운전으로 돌아다녀 보는 건 이게 태어나서 거의 처음이었다.
여기도 엄연히 방대한 면적의 물이 흐르는 구간이니, 나름 바다 냄새가 나고 바람도 육지보다 더 많이 불어서 시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8/24 08:33 2019/08/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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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두물머리 공원

여느 봄이 다 그랬겠지만 지난 5월부터 6월 초 정도가 날씨가 참 좋았다. 한낮에 건물이나 차량 안에서는 에어컨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열대야 따위 없이, 더워도 기분 좋게 더웠기 때문이다.
바람 불거나 그늘에 들어가거나 해가 지면 금세 시원해지고, 밤에는 20도나 그 아래로 아주 서늘해지고.. 건조해서 빨래는 금방 마르고.. 지금 이 상태에서 더 덥지만 않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럴 때가 나들이 가기에도 아주 좋은 시기이다. 그래서 본인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동쪽으로 달려갔다.
재작년에 비슷한 컨셉으로 남양주 다산 유원지를 갔었는데 그때는 날씨가 흐리고 비까지 와서 충분히 경치 구경을 못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최적인 덕분에 자연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 오던 양평 두물머리 공원부터 들른 뒤, 다음으로 다산 유원지를 다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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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양평으로 가는 길은 뭐랄까 신세계로 가는 느낌이다.
일명 '구도로'는 예빈산과 한강 사이의 틈새에 구불구불 만들어져 있는데, 1990년대 이전에는 이게 국도 6호선이었다. 그러나 더 곧은 길이 개통하면서 그게 국도의 지위를 대체하게 됐다. 새 길은 산을 팔당 1~4터널 시리즈로 뚫고 지난다.
위의 사진은 물론 구도로의 모습이다. 강 건너편엔 검단산이 보인다.

새 길은 '경강로'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옛 길의 남양주 구간은 '다산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에도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신당 사이 구간의 길이 다산로이며, 다산 콜센터도 있으니 정 약용의 흔적을 서울과 남양주에서 두루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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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공원의 첫 모습은 이런 넓은 공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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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에는 남한강이 보이고 뒤에는 카페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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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까지 최단 직선 거리를 잡아도 750m 남짓이다. 옛날에는 이 자리에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요즘은 아예 다리를 놓거나, 바다의 섬들을 왕래하는 연락선을 굴렸지 겨우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완전히 전멸했다. 배에도 정식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가 있을 뿐이지 겨우 노 젓는 뱃사공은...;; 참 낭만적이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직업이 됐다. 인력거의 수상 버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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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이 곁들어진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그래서 풍경 사진을 여러 장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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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흙길 공터 대신 넓고 푸른 초원과 좁은 산책로가 이어졌다. 보기만 해도 멘탈이 힐링힐링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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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계속하자 바닥이 동그란 광장과 함께 '두물경'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여기가 땅의 모서리이며, 여기 전방이 남한강· 북한강이 합쳐져서 한강으로 바뀌는 교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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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후로도 아름다운 경치는 계속 펼쳐졌는데, 여기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혼자 가서 독서와 사색이나 코딩 삼매경에 빠지기 좋고, 연인이 있다면 같이 데이트 하기에도 좋고, 아예 처자식이 딸렸다면 같이 놀러 가도 좋은 곳이다.

다만, 여기는 벤치에 앉으면 앉았지 돗자리를 깔고 놀 만한 곳은 별로 없다. 그럴 목적으로는 서남쪽의 다산 유원지(다산 생태 공원)가 더 낫다. 본인은 2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거기도 다시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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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유채꽃이 날 반겨 줬다.
양평 두물머리 공원이 여의도 같은 섬이라면, 다산 유원지는 본토와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혼자 강으로 쑥 튀어나온 일종의 '곶'이다.
주차는 다산은 완전 무료이고, 두물머리는 공영 주차장 말고 강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싸제 주차장은 고정 요금 2000원을 징수했다.
참고로 양평과 남양주 모두 무료 와이파이를 쏴 주고 있어서 공원 안에서도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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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구간은 다산이 두물머리보다 더 길게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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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두물머리 만만찮게 넓고 푸른 초원이 많이 널려 있었다.
이런 수풀뿐만 아니라 돗자리를 깔 수 있는 풀밭도 있고 말이다. 다만, 텐트를 치는 건 낮· 밤을 불문하고 금지였다.
사진을 더 많이 찍긴 했지만 귀찮아서 제일 특징적인 것만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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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건 다산 생태 공원의 특징을 적당한 색채와 적당한 구도로 잘 담은 풍경 같다.
종합하자면, 두물머리의 강점은 넓고 웅장한 자연의 비주얼, 그리고 긴 산책로이다.
다산의 강점은 강을 더 가까이에서 구경하면서 자연의 정취를 느끼며 쉬는 공간이다. 여기 일대에 놀러 갈 생각이 있으신 분은 이 점을 참고하면 되겠다.

여기를 구경한 뒤 본인은 근처의 예빈산 중턱에서 텐트 치고 야영도 하고 싶었지만.. 보급 부족과 피곤 등 여러 이유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그냥 귀가했다. 예빈산은 아직 등산도 못 한 산인데.. 언젠가 꼭 도전하고 싶다.

글을 맺으면서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남양주는 생각보다 꽤 큰 도시인 것 같다.
보통은 불암산과 수락산의 동쪽으로 별내, 퇴계원, 그리고 포천과 가평 근처까지 '경춘선' 라인이 남양주라고 일컬어지는데..
한편으로 양평 방면으로 덕소, 팔당, 그리고 한강을 접하는 다산 유원지까지도 남양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남양주의 완전 남쪽 끝이며, 남북은 산으로 가로막혀서 생활권이 단절돼 있다. 남양주는 도농 복합일 뿐만 아니라 다핵도시인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8/21 08:36 2019/08/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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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설 연휴 때 등산 다녀 온 이야기를 블로그에다 먼저 올렸었다. 오늘은 그 다음으로, 그때 등산 말고 국립 경주 박물관과 근처의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를 관람한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다.
서울에서 오래 살면서 맨날 조선 시대 흔적만 지겹도록 봐 왔는데, 모처럼 물이 좀 다른 동네에 가서 분위기를 전환하니 좋았다.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 싶다만.. 신라는 조선 600년을 아득히 초월하여 한반도 역사상 거의 1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왕조이다. 그 동안 도읍도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경주 서라벌로 줄곧 유지되었다는 게 경이롭다. (중간에 도읍을 지금의 대구로 옮기자는 떡밥이 던져지긴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음) 덕분에 경주는 일찌감치 관광 도시로 국가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받으며 육성되었다.

신라는 남쪽의 가야를 흡수하고 울릉도 우산국까지 정복해서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무로 만든 가짜 사자로 원주민들을 위협해서 굴복시켰다니.. 지금으로 치면 배에다 거대한 기관총이나 함포를 훼이크로만 잔뜩 만들어 놓고 뻥카를 친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 뒤 신라는 삼국 통일의 과업까지 달성했다. 물론 전부 혼자 한 건 아니고 당나라의 도움도 받긴 했다. 그때는 신라가 나름 지금의 서울과 38선 이북 지역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진흥왕 순수비 같은 게 의외의 장소에 남아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 남동쪽에만 있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도 굉장히 길고 크게 뻗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라에는 화랑이라고 오늘날로 치면 학도병인지 예비군인지 모를 젊은 무인/군인 양성 제도가 있었다. 더구나 화랑 제도 이전에 원래는 남자가 아닌 여자 아이돌을 선발하는 '원화' 제도를 시행했었다. 그런데 첫 원화로 뽑혔던 두 아가씨 사이에 질투로 인한 살인극이 벌어지자 가해자도 처형되고 이 제도 자체가 폐지된 것이다. 신라에는 전무후무하게 여왕이 있었던 것만큼이나 여성과 관련된 특이한 내력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중인-서민-노비의 4계급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신라는 '골품'이라고 '뼈'라는 단어까지 써 가며 조선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신분제가 시행되었다. 출신 성분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성골· 진골 같은 말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심상보다는 자조· 부정적인 심상으로 말이다.

신라는 한때 그렇게 잘 나갔으나, 나중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너무 크고 강해져서 중앙 정부가 지방을 일일이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세금이 안 걷히고 국력이 쇠하면서 신라는 신흥 국가인 후백제와 태봉와 고려에 밀려 급격히 쪼그라들었고, 나중에는 왕이 고려의 왕 건에게 자진 귀순함으로써 멸망했다.

그래서 다른 왕들의 무덤은 경주에 있지만 마지막 경순왕의 무덤은 신라가 아닌 고려의 도읍에서 가까운 연천에 있다.
뭐, 왕릉이 바다에 조성되었다는 문무왕, 그리고 생전에 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는 김 유신 장군도 한국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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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내가 아는 그 어떤 한반도 국가들보다도 금으로 된 유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신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일명 '신라의 미소'라고 일컬어지는 그 기와 무늬(얼굴무늬 수막새)와 금관이 아니겠는가?
영남 지방에 무슨 금광이 있기라도 했는지, 어째 저 시절에만 저렇게 금 장신구가 많이 만들어졌나 모르겠다. 성경의 솔로몬 시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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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무늬 수막새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얼마 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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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말고 도자기 항아리 부류는 오늘날까지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을 수가 없을 텐데..
깨진 조각들을 고고학자들이 전부, 일일이 근성으로 짜맞춰서 이렇게 복원한 것이다.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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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150년이 넘게 늦었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인 뒤엔 신라는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굉장한 불교 덕후 국가로 탈바꿈했다.
이 차돈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건.. 뭔가 킬 빌 같은 느낌이 순간 들었다. 물론 킬 빌에서 흰색 피가 나오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긴, 후대의 조선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버리고 유교 국가로 바뀐 관계로, 국보· 보물급 문화재 중에 불상 같은 건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조선 시대에 불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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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경주 박물관의 건물은 일종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1) 신라 역사관, 신라의 불교 미술 관련 유물을 집중 전시한 (2) 미술관, 그리고 동궁과 월지 관련 유물을 전시한 (3) 월지관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각 건물이 두 층 정도 높이이다.
그리고 야외에는 각종 유명 석탑의 모형과 불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일명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의 진품도 전시되어 있다. 종은 실제로 치지는 않으며, 그냥 녹음된 종소리를 주기적으로 들려 준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갈아 넣었다는 말은 삼국xx 같은 문헌에 실제로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20세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제기된 주작이라는 게 대세이다. 이 차돈의 순교 장면은 선뜻 믿어지지 않을지언정 문헌에 기록이라도 돼 있는 반면, 에밀레종 인신공양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비파괴 검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의 내부에는 '인' 같은 인체의 뼈 성분 같은 것도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서울 보신각 동종은 매년 1월 1일에 타종하긴 하지만.. 그건 진품이 아니라 30여 년 전에 따로 만든 진품의 복제품으로 하는 것이다. 원래 있던 종은 보존을 위해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대외적으로는 1985년부터 복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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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입구에는 석굴암 내부에 있는 불상 부조(돋을새김)가 입체 탁본이라는 이름으로 정교하게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에는 '국은 기념실'이라고 국은 이 양선 선생(1916-1999)이 수십 년간 수백 점의 신라 유물을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기증한 것을 전시한 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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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다 보는 데는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 다음으로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 돼서야 동궁과 월지에 도착했다. 걸어서는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동궁과 월지'에서 '과'는 그냥 접속조사이다. 그냥 ‘동궁 & 월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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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왕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못과 풀밭, 자그마한 숲, 그리고 약간의 정자 건물만 있는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지만 해가 진 뒤부터는 곳곳에 조명이 켜졌다.
그래서 밤에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주차장은 차들로 몸살을 앓았다. 박물관이 저녁 6시까지만 열려 있지만 여기는 밤 10시까지 개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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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야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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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연못 야경보다도.. 여기 바로 옆으로 동해남부선 철길이 지나는 게 더 좋았다~!
전국에서 철길과 이렇게 인접해 있는 옛날 유적지는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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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좀 더 밝았으면 더 좋은 구도의 사진을 남길 수 있을 텐데.. 이렇게라도 방문한 것에 의미를 두련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24 08:33 2019/02/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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