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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고궁 박물관 답사

본인은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들 중에서 경복궁을 제외한 나머지 4개(덕수, 경희, 창경· 창덕)는 지난 1~2년 사이에 모두 가 봤다. 정작 제일 크고 유명한 경복궁만 유일하게 안 가 봤는데 요 얼마 전에 드디어 답사하게 됐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교회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오늘은 이에 대한 기록을 특징적인 것 위주로만 간략하게 남기고자 한다.

경희궁 옆에 서울 역사 박물관이 있듯이, 경복궁의 옆에는 박물관이 있다. 그것도 양 옆에 두 개나 있다.
왼쪽에는 고궁 박물관이 있고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의 5번 출구와 연결된다. 오른쪽에는 민속 박물관이 있고 주차장과 연결된다.
그러니 지하철을 타고 온 일반인들은 고궁 박물관과 연계하기가 쉬우며, 관광버스를 타고 경복궁을 단체로 찾은 관광객들은 민속 박물관과 연계하기가 쉽다.

본인은 먼저 고궁 박물관에 들어갔다.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유료이지, 광화문 성벽 너머에만 있는 박물관은 무료 입장 가능하다.
고궁 박물관은 2층부터 지하 1층까지 세 층에 걸쳐 조선 황실 중심으로 흥미로운 유물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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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면류관이다. 신라 금관 같은 통상적인 왕관이 아니라 사각형 판때기 아래로 여러 줄들이 치렁치렁 달렸고 어찌 보면 졸업식 학사모와 비슷하게 생긴 머리 장식품(?)이다. 국가 군주보다는 뭔가 옥황상제가 써야 할 것 같이 생겼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crown 왕관이 면류관이라고 토착화 로컬라이즈 번역이 됐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도 면류관이라는 용어가 친숙하다. 마치 빵이 떡으로 바뀌고 각종 악기들도 다 유사 국악(!!) 버전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면류관 가지고"라는 찬송가부터 시작해서 '생명의 면류관', '가시 면류관(!!)'까지 있다. 허나, 면류관이 원래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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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포함해 왕가의 높으신 분들이 타던 전용 고급 가마를 연(輦)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마는 인력거라든가 죄수 호송용 수레와 달리, 바퀴가 아닌 사람의 다리만 이용하여 더 힘든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탑승자는 나름 작은 방 안에서 외부 환경과 완전히 분리돼 있다. 이런 가마를 타는 느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내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라는 찬송이 있는데... 얘가 3절 가사의 끝부분이 "당신의 연이 되어 주만 태우리..."이다. 이 연이 바로 輦이며, 뒷부분의 '태우다'도 불태우는 burn이 아니라 give a ride, carry라는 뜻이다. 헐~ 내가 주님만 태우는 가마가 되고 싶다는 심상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떠올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 가사는 원래 시로만 존재하다가 나중에 곡이 붙은 것이다. 처음부터 노래용 가사로 만들어졌다면 저렇게 알아듣기 난해한 1음절 한자어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Margaret Barber이라고 워치만 니의 정신적 스승급인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 쓴 찬송시 If the path I travel lead me the cross를 번역한 게 아닐까 심증이 있지만, 저 한국어 번역은 그냥 모티브만 딴 수준에 가깝지 영어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것도 아니다.

"당신의 연이 되어 주만 태우리" 같은 말도 영어 원문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그 가사에 붙은 곡이 다른 형태로 따로 있다.
그러니 지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저 가사는 도대체 누가 언제 무엇을 의도하고 이렇게 번역한 것인지가 오리무중이다.
아이고, 난 조선 시대 유물을 보면서도 직업병이 별 희한한 형태로 발동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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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순종 어차를 드디어 이렇게 곁에서 보게 됐다. 이건 한반도를 돌아다닌 적이 있는 제일 오래된 자동차이며, 후대에 처음부터 다시 만든 재현품 레플리카가 아니라 오리지널 실물이다.
1950년대에 나왔던 시발 자동차조차 실물은 다 소실되어 버려서 지금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건 레플리카뿐인데, 순종 어차는 참 놀라운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단지 때 빼고 광 내고 도색을 새로 하는 복원 작업을 빡세게 했을 뿐이다.

1910년대 일제 시대 초기에 도입되었다 보니, 핸들이 모두 좌측통행 기준인 오른쪽에 있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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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기통에 5153cc에 달하는 대용량 엔진이 겨우 32마력 남짓한 출력밖에 안 나왔다니 정말 허무하기 그지없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자동차 기술이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이다. 그때는 선박도 증기선 타이타닉 호가 다녔던 시절이니..
참고로 지금 제네시스 EQ900의 최상위 8기통 5000cc 휘발유 엔진은 최대 출력이 425마력으로, 32마력의 10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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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 기억이 맞다면 종묘에서 선왕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세팅하는 제삿상이라고 한다.
굽지도 않은 시뻘건 고기가 참 맛있어 보여서(죄다 가짜 모델일 뿐이지만..) 사진을 찍게 됐다.
성경의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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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라고 하면 목이 긴 갈색 계열의 그 동물을 의미하지만, 옛날에 아프리카 기린을 보지 못한 동양 사람들에게 '기린'은 뭔가 서양의 유니콘과 비슷한 상상 속의 동물을 가리켰다. 유니콘은 흰색인 반면, 저 기린은 시퍼렇다.
옛날에 지금 같은 캐릭터 산업이 발달했을 리는 없으니,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완전 아무 근거도 없는 엉뚱한 동물을 주작하지는 않았을 텐데.. 용이라든가 해태, 기린 같은 동물은 어디에서 유래되어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진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볼 것들이 많았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가니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각종 집기와 건물 인테리어가 서양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순한글로 쓰인 문서가 증가하고, 서체도 궁서 흘림 계열로 바뀌었다.

임금 하면 빨간 곤룡포가 떠오르는 법인데(세종대왕이 집현전의 신 숙주에게 덮어 줬다는..),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태자라 일컬어지는 영친왕이 입은 빨간 곤룡포가 전시돼 있었다.

조선과 관련된 각종 박물관을 가 보면 태조 이 성계의 어진은 꼭 전시돼 있지만 조선의 모든 왕들의 어진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많은 어진들이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6· 25 사변이 터졌을 때 어진들을 부산으로 옮긴 것까지는 잘했는데, 휴전 후에도 그걸 서울로 옮기지 않고 있다가 부산에서 대판 화재가 나는 바람에(용두산 대화재) 소실된 게 많다.

끝으로, 조선의 과학 기술이라고 전시해 놓은 것은 몇몇 화포와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자격루였는데.. 나무를 깎아서 정교한 기계를 만든 것까지는 보통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동양이 서양보다는 과학 기술이 확실히 뒤쳐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 아쉬웠다. 서양에서 18~19세기 동안 수학·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던 동안 조선은 내세울 게 고작 저것밖에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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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구경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입장권을 구매하고 경복궁 안으로 들어갔다. 위의 사진은 경복궁 입구에서 남쪽으로 광화문과 세종대로 방면을 바라본 풍경이다.
지금은 여기가 아무것도 없는 넓은 운동장 공터이며, 한쪽 구석에 입장권 매표소 정도만 있다. 하지만 25년 남짓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자리에 조선 총독부 청사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찔함이 느껴진다.

경복궁은 일반적으로는 저녁 5시에 입장을 마감하고, 6시에 폐장한다. 그리고 특정 시기에만 한해서 제한된 인원을 밤 10시까지 추가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야간 운영을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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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근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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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복궁에서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라 여겨지는 경희루 주변의 경치이다.
이제 이 두 곳을 빼면 나머지 건물과 골목길은 그냥 여타 고궁들을 돌아다니는 것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현재 남아 있는 부지 내에서도 모든 건물이 복원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풀밭과 숲도 많이 있으며,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뭔가 대학교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답사 당시의 사정상(특히 너무 더워서..;;), 동쪽에 있는 민속 박물관은 못 보고 원래 들어왔던 곳으로 그대로 다시 나갔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기도 둘러볼 일이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27 08:29 2018/07/2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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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이어 올해 봄, 모처럼 미세먼지가 걷히고 날씨도 적당히 맑고 포근하고 좋을 때에 맞춰 본인은 청계산을 다녀왔다.
가장 흔한 등산로인 신분당선 역 근처의 원터골 말고 작년에는 더 남쪽의 옛골과 망경대 쪽을 공략했는데, 이번에는 더 북쪽인 옥녀봉 쪽을 다녀왔다. 청계산은 서울, 성남, 과천, 의왕을 두루는 큰 산인지라, 아직 가 보지 못한 등산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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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의 출발지인 서울 양곡 도매 시장의 주변 모습이다. 간선 버스로는 441번을 타면 도달할 수 있다.
청계산 기슭 아래로 지하차도와 터널이 둘 나 있다. 지하차도를 타면 표지판에서 보듯이 헌릉로 방면으로 갈 수 있으며, 그 위로 진입하면 산을 뚫은 터널을 지나서 서울 추모 공원으로 가게 된다.

여기는 현대· 기아 쌍둥이 사옥과 경부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휴게소와도 그리 멀지 않을 정도로 서울의 남쪽 외곽이다. 도매 시장 옆의 담벼락과, 지하 차도 위의 회전 교차로 주변에는 공간이 그럭저럭 있어서 주차도 가능했다. 단, 회전 교차로 쪽에는 웬 사고로 부서진 차가 방치된 것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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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시기인지라 나무들이 슬슬 다시 초록색 잎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파란 하늘 밑으로 노란색이 곁들어진 초록색, 그리고 종종 분홍색 꽃잎이 곁들어지니 색깔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작년 봄의 산행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이런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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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는 울창한 침엽수림이 본인을 반겨 주었다.
청계산의 북쪽 구간은 길에 울타리나 깔개 같은 인공물이 없이 흙길뿐이었다. 단, 쉬어 가라고 길다란 의자는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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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가 세 개나 있었다.
성경의 창세기 31장에서 야곱과 라반이 돌무더기를 쌓아서 언약을 맺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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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옥녀봉 정상에 도착했다. 높이는 400m가 채 안 된다는데 등산을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산이 도대체 무슨 구석이 여인의 모습과 닮았다고 저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상에는 전망대와 헬리패드만 있을 뿐, 표지석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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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산 바깥 경치를 구경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는데, 드디어 관악산과 과천(서울) 경마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기는 관할 행정 구역이 서울과 과천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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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에서 매봉으로 가는 길에는 울타리와 계단 같은 인공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옆의 철망은 아마 서울 대공원 때문에 둘러진 것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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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도중에 이런 오솔길도 잠시 나타났다.
햇볕만 쬐고 있으면 덥지만, 습도가 20%가 채 안 되는 건조한 상태여서 그런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씨가 굉장히 시원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땀 말고 헉헉대는 것만으로도 금방 혀와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등산을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이긴 했다. 준비해 간 물이 벌써 다 바닥났지만 참고 매봉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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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비탈길을 한참 오르고 나니, 옥녀봉 정상 같은 분위기의 공터와 헬리패드가 나타났다. 단, 전망대가 조성돼 있지는 않았다. 바깥 경치는 나무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행정구역이 서울에서 성남으로 바뀌는 지점이기도 했다. 성남시 관할 구간은 '성남 누비길'인데, 옛골· 청계골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으며, 아니면 매봉 정상으로 갈 수도 있었다. 매봉 정상에서 계속 누비길을 따라 진행하면 작년에 본인이 갔던 혈읍재와 망경대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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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은 바위를 좀체 찾을 수 없는 흙산이라는 점에서 강북에 있는 산들이나 심지어 자기 곁의 관악산과도 형태가 많이 다르다. 그 반면, 성남은 고지대이고 비탈이 심하지만 도시를 둘러싸는 산들이 전반적으로 바위가 없고 흙산이다.
청계산도 매봉 정상 부근에 가니까 이런 바위가 나타났다. (1) 돌문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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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불과 몇백 m 앞두고 (2) 특전용사 충혼비가 나타났다. 등산로에서 정말 가까이 있으니 부담 없이 보고 올 수 있다.

1982년 6월 1일, 특전사 장병 53명(일부 소수의 공군 장병도 포함)이 지상 훈련을 마친 뒤, 수송기를 타고 그 당시 자대가 있던 서울 거여동 훈련장 상공에서 강하 훈련을 이어서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병력이 탑승했던 C-123 수송기는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했고, 어째어째 하다가 청계산 중턱에 추락해 버렸다. 결과는 전원 사망..

게다가 이보다 전에 같은 해 2월 5일에는 동일한 기종인 C-123이 한라산에서도 추락해서 똑같이 53명의 특전사 장병이 순직하기도 했다. 그나마 청계산 추락 사고는 진짜 군사 훈련 중에 조종사의 과실이나 기체 상태 불량으로 인해 추락한 것이어서 정당한 명분이 있지만, 한라산 추락 사고는 단순히 전땅크의 제주 공항 활주로 공사 시찰 행사를 경호하기 위한 이동이었기 때문에 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대통령 경호도 나름 정당한 공무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옛날에 올림픽대교의 건설 중에 횃불 조형물을 설치하다가 헬기 추락 사고가 났던 것처럼, 군인들이 더 어이없는 일이 동원됐다가 순직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전땅크는 출발지와 도착지 모두 눈이 내린 악천후 속에서 굳이 출발을 강행시켰으며, 나중에 사고가 터지자 민망했는지 이 사람들이 난데없이 간첩 잡는 '봉황새 작전'에 투입됐다가 순직한 거라고 슬쩍 둘러대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가 보다.

한라산에도 추락 현장 근처의 등산로(관음사 부근?)에는 비슷한 모양의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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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비를 지나서 언덕을 계속 오르니 돌문바위에 이어 (3) 매바위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서서 건너편 인릉산과 경부 고속도로, 그리고 인접한 청계산 봉우리 등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매바위, 그리고 매봉 정상에 있는 고깔 모양의 표지석은 다 1996년에 국민 은행에서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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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바위에서 청계산의 최고봉인 망경대를 본 모습이다. 청계산의 진짜 정상에는 저렇게 군사 시설이 설치돼 있어서 민간인이 곧장 접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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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 매봉 정상에 도착했다. 오후 늦은 시간대여서 역광 때문에 표지석의 정면 사진을 남기기가 난감했다.
표지석의 뒷면에는 무슨 시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옥녀봉 정상과는 달리, 매봉 정상은 공터가 좁고 따로 헬리패드 같은 게 마련돼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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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헬리패드 광장으로 돌아와서는 옛골 및 청계골 방면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사실, 옥녀봉에서 매봉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청계산입구 역 근처의 원터골 방면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진작부터 나오긴 했다. 하지만 원터골도 옛골도 아닌 다른 착륙(하산) 지점도 있다고 하니 본인은 청계골 방면을 선택했다.

이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리 인기 있는 등산로가 아니어서 그런지 길이 잘 닦여 있지도 않고 인적이 뜸하며 좁고 험했다. 심지어 나무들도 가지만 앙상한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참호 등의 군사 시설도 종종 나타났다.
그래도 지상과 가까워지자 풀숲과 돌계단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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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내려간 뒤에야 드디어 산행이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봄을 만끽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원터골, 옛골뿐만 아니라 청계골 역시 어김없이 옆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산에서 약수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청계골의 주변에는 의외로 민가나 식당, 가게 따위가 전혀 없고, 온통 주말 농장들만 있었다. 원터골과는 정반대 분위기이다. 그래도 등산객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 차원에서 먼지털이용 에어건과 공중 화장실 정도만 어귀에 마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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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길목에서 지하도를 타고 위의 경부 고속도로를 횡단한 뒤, 청계산 셔틀인 4432번 버스를 타고(관현사입구 정류장) 귀가하면 됐다. 그래도 여기는 워낙 한적하니까 출발 지점과 마찬가지로 주차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보였다.

Posted by 사무엘

2018/04/30 08:33 2018/04/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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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2년 전에 용마산과 망우산을 오른 적이 있다. 용마산의 정상에 먼저 도달한 뒤, 계속 북쪽으로 진행하여 망우산의 정상에도 도달하고, 일명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불리는 서울 시립 묘지 공원 방면으로 하산했다. 서울 시내에 가까이 있는 산을 산책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 뒤 본인은 올해 봄에 망우산을 다시 찾아갔다. 2년 전에 하산했던 곳에서 등산을 시작한 셈이다. 그 뒤, 묘지 공원 내부에 있는 포장된 순환 도로만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출발지로 되돌아왔다. 이 정도의 낮은 경사와 등정 난이도는 전문 산악인이 보기에는 등산이라기보다 산책에 불과한 수준이겠으나, 그래도 엄연히 산이기 때문에 오르막이 없는 건 아니다.

2년 전에는 좁고 험한 흙길 위주로 다니면서 망우산의 중심부를 종단했지만,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여러 유명인사들의 묘지는 단 하나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번 답사는 그 부족했던 점을 정확하게 보완해 주었다.
본인이 지금까지 묘지가 있는 산을 오른 건 일자산(서울-하남), 영장산(성남-광주)에 이어 여기(서울-구리) 이렇게 세 곳이다.

등산로 입구까지는 가뿐하게 자가용으로 갔다. 무료 주차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일에 가니 자리도 넉넉하고 안성맞춤이었다.
뭐, 차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여기로 되돌아오지 않고 동쪽의 구리 시내나 서쪽의 서일 대학교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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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산책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주차장 방면으로 뒤를 돌아보며 찍은 풍경이다.
2년 전에 여기를 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마침 이 날도 봄비가 땅을 촉촉하게 적신 상태였다. 그리고 산 속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혔다. 좋게 말하면 운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안 그래도 묘지 공원인데 분위기가 더욱 스산해졌다.
그래도 미세먼지가 아니라 순수하게 수증기· 미세 물방울로 이뤄진 안개 속에 둘러싸여 있는건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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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산책로는 이런 형태로 쭉 이어졌다. 이게 나름 큰길이다.
자동차가 다닐 수도 있지만 작업· 관리 차량 전용이며, 일반 방문객· 등산객이 여기까지 차를 끌고 다닐 수는 없다. 산악 자전거 정도만이 허용될 뿐이다.

그리고 자동차의 경우, 길이 일방통행 형태로 돼 있다. 우측통행이라는 특성상 서울 방면 서쪽으로 진행해서 한 바퀴 돈 뒤, 구리 방면 동쪽 경로를 타고 되돌아온다.
물론 도보 등산객은 아무 쪽이나 골라도 된다. 동쪽이 묘지 구경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본인은 자동차의 통행 방향과 반대인 경로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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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의 좌우에는 이렇게 무덤들 쪽으로 가는 샛길이 곳곳에 나 있었다. 위의 사진처럼 더 밑으로 내려가는 쪽으로도 있고, 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는 쪽으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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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최초로 마주친 유명인사 묘소의 주인공은 바로 한반도에 최초로 종두법을 보급한 지 석영이었다.
천연두가 지금이야 지구 전체를 통틀어 박멸됐다고 공식적으로 선언된 지 어언 40년이 돼 가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곰보로 만들었으며, 걸렸다 하면 답이 없으니 그냥 '신'으로 취급받던 끔찍하고 무서운 질병이었다.

옛날 어린이들의 3대 재앙이라 일컬어지던 "호환, 마마, 전쟁" 중 하나이며, 지금으로 치면 에이즈나 어지간한 말기 암에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옛날이 아니라 지금도.. 천연두는 예방접종 덕분에 박멸만 됐을 뿐이지, 일단 병에 걸려 버린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법이 개발된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1880년대에 한반도에 이제 막 종두법이 보급되고 있던 동안, 서양에서는 더 나아가 루이 파스퇴르가 광견병 백신까지 개발해 냈다. 1885년에는 그게 최초로 인간 환자에게(7월 6일, '조세프 메스테르'라는 9세 소년) 시범타로 투입됐는데, 결과는 당대 의사들의 냉소를 정면으로 뒤집으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런 선각자들은 질병이나 부패의 배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라는 것이 있다는 과학적 사실 하나를 규명함으로써, 수많은 엉뚱한 민간요법과 미신을 타파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세균보다도 더 작은 바이러스는 20세기에 와서야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런 식으로 인류의 위생과 복지는 향상돼 왔다.

한편, 지 석영은 의학을 본업으로 삼다가 뒤늦게 자국어와 한글 쪽으로도 눈을 떴다는 점에서 공 병우와 비슷한 면모가 있어 보인다. 공 박사가 이 극로의 영향을 받았다면, 지 석영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주 시경이었다. 그는 학술 서적들의 번역, 한자어의 국어 풀이,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쪽으로도 여러 주장과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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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지 공원에는 표지판에 안내까지 된 일본인의 무덤이 딱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아사카와 다쿠미'라고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살았던 일본인이다. 조선 총독부 산림과 소속의 관료로서 조선 땅을 밟게 됐지만 한반도의 산림 녹화에 실제로 기여했다고 한다. 산림 녹화라 하면 해방 후의 박 정희 때의 과업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한국의 풍토· 문화를 깊이 연구하면서 거의 호머 헐버트 급으로 한국 문화에 호의적으로 동화되었으며, 옷도 조선식으로 입고 일상적으로 한국어를 쓰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의 소반(小盤)>이라는 책을 썼다.
그의 묘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쓰여 있는데, 보다시피 글자에 흰색 칠이 좀 벗겨졌다.

아사카와 다쿠미 말고 묻혀 있는 다른 일본인은 '사이토 오토사쿠'이다. 역시 조선 총독부 산림과 소속이면서 직급은 아사카와보다 더 높고, 막 한국 스타일로 살았던 사람은 아닌 듯하다. 무덤도 봉분 없는 일본 스타일로 조성돼 있어서 전자의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뭐, 망우리 공동묘지는 애초에 무슨 현충원 같은 묘지가 아니다. 무명의 일반인들도 엄청 많이 묻혀 있는 와중에 극소수의 주목할 만한 위인이나 유명인사들의 묘만 이렇게 안내가 돼 있을 뿐이다.
일제 시대의 일본인이라도 정치적으로 막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수탈했거나 전쟁 범죄를 저지른 악질이 아닌 이상, 한국 땅에서 죽었으니 저 정도 매장과 예우는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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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그 이름도 유명한 소파 방 정환의 묘지 근처에 다다랐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 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그 꿈도 희망도 없던 시절에 사상적으로 무슨 영향을 받아서 이런 진보적인(?) 주장을 한 운동가 겸 아동 문학가가 한반도에서 배출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담배 골초였고, 최종적으로는 극도의 성인병(비만· 고혈압, 그리고 아마 당뇨도?)에 시달리다 요절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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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가는 차원에서 주변 풍경을 또 투척한다. 봄· 여름 사이에 산이 완전히 초록색으로 변했을 때 찾아왔으면 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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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정환 만만찮게 유명한 만해 한 용운의 묘이다. 지금까지 책으로만 접하던 인물의 묘지를 이렇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한 용운은 불교 승려이지만 결혼을 했으며, 죽어서도 부인과 함께 저렇게 나란히 묻혀 있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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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중에는 죽산 조 봉암의 묘도 나왔다. 한때는 좌파· 사회주의 계열로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농지 개혁에 큰 기여를 한 분이다. 농민들이 만년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 자기 땅이 생기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며, 그 덕분에 6· 25가 터졌을 때도 북괴 인민군의 무상 분배 지상락원 선전 선동에 속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다만, 아무리 전향했다 해도 그는 박 정희의 남로당 경력만큼이나 과거 커리어가 영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며, 나중에는 이 승만의 독재를 너무 견제하다가 눈 밖에 나고 빨갱이로 몰려서 사법 살인을 당했다. 6· 25가 끝난 지 10년이 채 안 지났고 남북간의 적개심이 극악으로 치달았던 1950년대에 벌써 '평화 통일' 운운은 너무 급진적이며, 정치 정적들에게 저의를 의심받고 꼬투리를 잡힐 주장이긴 했다. 비극적인 일이다.

비석에 새겨진 어록 하나는 정말 고퀄이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난 저분 무덤이 북한산 기슭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신 익희와 혼동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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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묘지 공원 순환로는 한 바퀴 빙 돌아서 북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순환로를 따르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이제 서울 둘레길을 따라 남쪽의 용마산이나 아차산으로 가게 된다. 묘지 공원 구간에서는 벗어나지만 그래도 포장된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서쪽 순환로는 동쪽 구간보다 유명인사의 무덤이 훨씬 적었다. 소설가 계 용묵, 화가 이 중섭의 무덤이 있다는 안내판 정도나 봤다.
그 밖에 중간 중간 '사잇길'이라고 양쪽의 순환로를 잇는 산길이 몇 군데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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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하나 있었다. 허나, 날씨가 날씨인 관계로 바로 근처의 무덤들 말고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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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강녕탑'이라는 이름의 돌무더기가 있어서 이건 도대체 뭔가 싶었다.
'최 고학'이라는 이름의 어떤 할아버지가 매일 산에서 쓰레기를 줍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근성으로 돌탑을 쌓은 거라고 한다.
검색을 더 해 봤더니 2012년도 기준으로 이런 글이 있다. 2012년에 86세이시니 6년이 더 지난 2018년 현재는 춘추가 아흔을 넘으셨겠지만.. 80대 중반에도 워낙 팔팔하고 건강한 상태이시니 아마 지금도 살아 계시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자살하는 국민도, 이혼하는 국민도, 결혼을 못 하고 늙어 가는 처녀 총각도 없을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맞으면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저분은 이런 덕담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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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길을 4km가 좀 넘게 한 바퀴 빙 돌고 돌아왔다. 여기가 괜히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보고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온통 20세기 인물 일색인 이곳에 생뚱맞게도 조선 순조의 딸인 명온공주의 무덤이 있다. 원래 미아리 쪽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는데, 본인이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관리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반대로 도산 안 창호는 원래 이곳에 묻혔지만 1970년대에 서울 강남에 도산 공원이 생기면서 거기로 이장되었다. 박 정희 정권이 이 순신 장군을 아주 띄워 줬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갑자기 안 창호에도 필이 확 꽂혔던 것 같다.

서울과 구리시에서는 '인문학길'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이면서 이곳을 더 친숙하고 접근하기 쉬운 테마 공원으로 조성을 의향이 있어 보이던데.. 차라리 주차장을 유료화해서 관리인을 두고, 그 대신 상봉· 망우 같은 인근 전철역에서 셔틀버스라도 굴리면 자가용 수요를 억제하면서 더 많은 등산객과 성묘객이 이곳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4/19 08:36 2018/04/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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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이 지나고 2018년의 봄이 찾아왔다.
낮 기온은 영상 한 자릿수 정도이다. 한겨울 중무장 급의 두꺼운 옷은 이제 필요 없어졌으며, 낮에 격렬하게 활동하면 땀도 날 정도이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여전히 외투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딱 이런 날씨가 정말 좋다. 이보다 더 더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봄과 가을처럼 날씨가 좋을 때 등산을 자주 가려 한다.

서울 근거리에서 새로 개척할 만한 산은 거의 남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가까운 시간 간격으로 서울의 북쪽 근교에 있는 명산 세 곳.. 북한-북악-인왕산을 예전과 살짝 다른 경로로 예전에 들르지 못했던 곳을 보충하는 형태로 다녀왔다.
한번 다녀오고서 기억이 희미해져 가던 곳을 다시 다녀오니, 이제는 각각의 산 속 지리와 등산로 구조가 더 분명하게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저 세 산을 또 찾아갈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1. 북한산 -- 북한산성 탐방 지원 센터, 대서문, 원효봉

예전에 하산 지점이었던 진관사는 은평구의 거의 끝자락이기라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서울이었다. 이번에는 서울을 확실하게 벗어나서 북한산 초등학교 근처의 '북한산성 탐방 지원 센터'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그래서 북한산성 대서문을 지나고 원효봉까지 오르고 돌아왔다.

똑같이 북한산 등산로여도 정릉이나 우이 탐방 지원 센터 근처는 공영 주차장도 있고 등산용품 매장, 식당, 카페들이 즐비해서 반쯤 유원지 같다. 옆으로 계곡이 있어서 시냇물이라도 흐르고 있으면 경치가 좋으니 그런 시설들이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국민대 근처의 북악 공원 지킴터라든가 평창동 내부의 평창 공원 지킴터, 구기 탐방 지원 센터 같은 곳은 산기슭에도 그냥 평범한 주택 건물밖에 없는 마이너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북한산성 탐방 지원 센터는 메이저 중의 메이저 등산로인 듯하다. 주차장도 두 곳이나 있고 등산객들로 정말 북적거렸다.
여기는 집에서 꽤 먼 관계로 본인도 차를 가져갔기 때문에, 등산을 막 멀리까지 하지는 못하고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차를 세워 놓기 위해 공영 주차장을 이용하지는 않았으며, 그렇다고 불안하게 불법 주차를 하지도 않았다. 기왕 주차비가 들 거면 카페를 하나 이용하고서 고객 전용 주차장에다 차를 세우고 등산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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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대동문과 보국문, 대남문은 한참을 낑낑대며 산을 중턱까지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반면, 대서문은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달할 수 있었다.
북한산의 서쪽 기슭에는 절(사찰)이 정말 많았다. 상운사, 대동사, 국녕사, 중흥사 등.. 이 때문에 제법 높은 고도까지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게 닦여 있었으며, 대서문은 그 길목에 있었다. 북한산에서 아마 가장 깊숙하게 차도가 닦인 구간이 여기가 아닐까 한다.

물론 여기까지 실제로 차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공무원이나 사찰 관계자나 방문객 불자로서 허가를 받은 사람뿐이다. 아무나 등산로에서 차를 굴리고 다닐 수는 없으며, 부득이하게 운전을 하더라도 타 등산객과 사고를 내지 않게 비상등을 켜면서 아주 천천히 달려야 한다.

산에서 차도를 필요하게 만드는 존재는 군부대와 사찰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것 같다. 그나마 사찰은 산중턱에 있는 게 대부분이지만 군부대는 공군 방공부대 같은 건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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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비봉에서 북한산을 올랐을 때는 북한 무장공비의 동선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이번 등산로에서는 과거에 여기 주변에 조성돼 있었던 '북한동 마을'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하게 됐다.
원래 여기 주변에도 다 민간인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가 2000년대 초에 국가에서 북한산의 생태 복원과 환경 보전을 위해 주민들을 보상과 함께 타지로 이주시켰으며, 마을을 철거했다고 한다.

아무리 보상을 해 준다 해도 대대로 여기서 살던 사람들을 갑자기 이주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치 좋은 관광지에서 요식업에만 종사하며 살면 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타지로 쫓겨나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사진은 지독한 역광 구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런 모양으로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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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드디어 넓은 차도가 끝나고 가파른 계단식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길을 계속 가면 원효봉에 도달할 수 있다.
단, 돌로 된 북한산의 봉우리들은 마지막 300~500m를 남겨두고 더욱 가팔라지면서 등정 난이도가 상승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여기는 백운대 정상 같은 급의 막장 난이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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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등산로 시작점에서 1km를 조금 넘는 구간은 대서문을 지나는 차도만 있는 게 아니라 계곡을 구경하면서 더 짧고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등산로도 있었다. 본인은 하산할 때는 이쪽 경로를 선택했다.
옛날에는 저 사진의 공터에 다 집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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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으며, 아직 눈과 얼음이 녹지 않은 곳도 많이 보였다. 나중에 곧 방문한 인왕산 수성 계곡도 딱 이런 분위기였다.

2. 북악산 -- 삼청각, 팔각정

본인은 2016년에 북악산을 1차로 올랐을 때는 한양도성을 따라 철저하게 남쪽 봉우리만 지났다. 그 뒤 2차로는 북쪽 봉우리로 가되, 김 신조 루트를 따라 북동쪽으로 가서 국민 대학교 방면으로 하산했다. 둘 다 시작은 종로구였다(각각 창의문 안내소와 삼청 공원),

그 뒤 이번 3차 산행에서는 1차 등산의 하산 지점과 얼추 비슷한 성북구의 삼청각 근처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2차 산행과 비슷한 경로로 북쪽 봉우리로 건너갔는데, 김 신조 루트 대신 꾸준히 봉우리만 올라서 북악 팔각정을 최단거리로 찍었다. 그 뒤 북서쪽의 평창동 방면으로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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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북악산 등산로를 찾아가기 위해 2112 녹색 버스의 종점에서 내렸다. 그 뒤 산을 향하여 비탈길을 계속해서 쭉 올라갔다.
위의 사진에 나온 집은 1차 등산 때 내려다봤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2년 전 블로그 포스트의 마지막 사진을 보시길..). 아파트인지 빌라인지 사무실인지, 아니면 갑부들 저택인지 모를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을 드디어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검색을 해 보니.. 분양가가 수십억 원에 달하는 갑부용 단독주택이라고 한다..)

이 산책로의 옆에는 계곡이 있어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건 근처의 북악산에서 발원한 성북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 주변엔 공터가 생각보다 있는 덕분에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본인은 여기는 북한산을 갈 때와는 달리 어차피 버스를 타고 갔지, 차를 가져가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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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올라가니까 자동차 도로(도로명: 대사관로)가 나오고, 근처엔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 온 '삼청각'이라는 한옥 단지(?)의 입구가 나타났다.
무슨 역사적 유래가 있는 옛날 문화재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라. 의외로 1972년에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북악산 동쪽 기슭에 일부러 전통 한옥 스타일로 만든 '요정(料亭)'이라고 한다. 단체 손님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고급 한식당이라는 뜻이다. 여종업원이 서빙을 하는 건 덤이고..

삼청각은 높으신 분들의 회식· 회의, 거래 미팅, 친교 공간으로 쓰였으며, 실제로 만들어지자마자 남북 적십자 회담과 한일 회담의 협상이 거기서 이뤄졌다. 그때는 1. 21 사태의 트라우마가 쩔었었기 때문에 일반 양민들은 삼청각이 위치해 있는 북악산 쪽으로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삼청각은 197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서 그야말로 정· 재계 VIP들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정동 안가(安家)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군사 정권이 끝나면서 삼청각은 예전 같은 넘사벽급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부유층 민간인을 상대로 고급 레스토랑· 카페 겸, 돈지랄 좀 한 결혼식과 돌잔치 장소로 쓰이게 됐다. 지금은 2001년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서 문화 행사 공연 장소로도 쓰이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저기는 돌아가는 방식이 공영인지 민영인지가 좀 궁금해진다.

말이 좀 길어졌다만, 우리나라에 이런 시설도 있다는 걸 본인은 이번 기회에 난생 처음으로 알게 됐다.
다만, 2018년 1월부터 3월까지는 삼청각이 무려 17년 만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그래서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이곳이 영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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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온 김에 삼청각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내부 수리 상태이지만 각각의 건물만이 폐쇄되었지,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는 여전히 가능했다.
삼청각을 구성하는 각각의 한옥 건물들은 누가 지었는지 모를 한자어 이름이 붙어 있었으며, 북쪽 끝에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편운정'(片雲亭), '떠다니는 구름 한 조각'이라는 뜻의 정자가 놓여 있었다.

삼청각은 산 쪽으로 울타리가 아주 빡세게 둘러져 있지는 않았으며, 그 안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을 억지로 찾아서 북악산 등산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면 동쪽의 군부대로 가는 계단으로 합류하여 국민 대학교와 북한산 방면으로만 진행 가능하지, 팔각정으로 갈 수는 없었다. 팔각정으로 가려면 삼청각의 서쪽에 따로 나 있는 등산로를 이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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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각의 편운정 근처에서 전방의 정식 등산로를 보고 찍은 사진이다. 저 등산로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성북천 발원지와 김 신조 루트 갈림길은 2년 전에 봤던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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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남짓 근성으로 계단을 오른 끝에 드디어 북악산 팔각정에 도달했다. 차를 몰고 가던 곳을 처음으로 도보로 완주하게 됐다.
북악 스카이웨이의 길 좌우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 살벌한 철조망까지는 아니어도 다들 담장이 둘러져 있는 편인데, 그래도 등산로와 연결되는 곳은 담장이 개방돼 있다.
본인은 그 등산로를 통해서 북악 스카이웨이 구간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이렇게 이뤘다.

팔각정에서 차도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커브와 함께 평창동 방면으로 내려가는 도보 등산로가 나왔다. 본인은 이 경로를 이용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악산 북쪽 봉우리를 종단하며 하산했다.
이 등산로에는 최소한의 오솔길 말고는 아무런 표지판도, 계단도, 보안 시설도 없었다. 북악산도 남쪽으로 청와대 부근만이 요새화돼 있고 등산객에게 목걸이를 배부할 뿐이지, 반대편의 평창동 주민에게는 그냥 평범한 동네 뒷산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듯하다.

3. 인왕산 -- 수성동 계곡, 석굴암

끝으로 인왕산이다. 얘는 그렇게 높고 큰 산이 아니고 등산로가 딱히 많이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오른 적도 있는 산이다. 하지만 굳이 또 찾아간 이유는, 본인이 답사한 적이 없는 곳에 있는 수성동 계곡이 그렇게도 경치가 좋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계곡 바로 앞까지 가는 유일한 대중교통으로는 종로 09 마을 버스가 있었다. 저기가 버스의 종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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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실제로 보니 장관이 꽤 미려했다. 아차산 생태 공원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원래 아파트(옥인동 시범 아파트)까지 지어져 있던 걸 다 철거하고, 옛날 조선 시대에 그려진 풍경화에 묘사된 대로 나무를 심고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복원한 뒤에 2010년대에야 개방한 거라고 한다. 북한산 마을과 비슷한 사연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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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북악 스카이웨이의 인왕산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인왕산로라는 찻길이 나타나고, 길 건너편으로 등산을 계속해서 몇몇 약수터와 석굴암(?)으로 갈 수 있었다. 거기서도 계속 산을 오르면 결국 한양도성과 합류하고 기존 정규 등산로를 따라 결국 정상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래도 한양도성이 아닌 좁은 오솔길을 따라, 감시 요원도 없는 경로로 인왕산을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을 오르고 나니 본인이 등산을 시작했던 지점인 수성동 계곡 방면을 이렇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보니까 수성동 계곡이 전혀 별것 아니어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산행을 마쳤다.

Posted by 사무엘

2018/04/16 08:29 2018/04/1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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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번듯한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낮고(해발 100여 m대) 그냥 공원 산책에 가까운 언덕 두 곳에 다녀온 기록을 남기도록 하겠다.

1. 북서울 꿈의 숲

서울 강북에 서울숲뿐만 아니라 더 북쪽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본인도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서울숲은 산이 전혀 아닌 평지이고(원래 골프장..) 한강과 가까워서 한강 공원과도 연계되는 반면(강변북로를 육교로 횡단하여 서로 왕래 가능함), 저기는 벽오산인지 오패산인지 그래도 높이 차이가 존재하는 언덕이다.

옛날에는 서울 시내에 소규모 놀이공원 유원지가 좀 있었던 모양이다. 용마산 서쪽 기슭에 용마랜드라는 게 있었던 것처럼, 저기에는 ‘드림랜드’라는 게 있었다가 망했다. 그 뒤 시설을 철거하고 부지를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이름에다가 예우 차원에서 나름 ‘꿈’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재개장한 게 북서울 꿈의 숲이라고 한다.

북서울 꿈의 숲은 북쪽과 남쪽이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기는 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등산로 구간이다. 그리고 양 언덕 사이는 일종의 분지이며 넓은 풀밭과 자그마한 호수, 갤러리가 있다. 돗자리 깔고 앉아서 쉬기 좋다. 혼자 변방의 언덕길 산책을 하거나 단체로 중앙의 풀밭에서 노는 게 모두 가능하다.

다만, 여기는 위치와 교통 접근성이 아무래도 서울숲만치 좋지는 못하다. 지하철만 타고 간편하게 갈 수는 없다. 그래도 정문· 동문 말고 언덕 쪽으로 나 있는 여러 등산로를 통해서도 접근 가능한 것은 서울숲보다 약간 좋은 점이다.
본인 역시 여기에 처음 갈 때는 번동의 모 아파트 단지 뒤로 나 있는 북쪽 언덕 진입로를 이용했다. 집에서 거기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으며, 애초에 방문 목적도 등산과 산책에다 비중을 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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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울 꿈의 숲이 어떤 구조로 돼 있는지 이 지도 한 장이면 곧장 이해 가능하다. 여기는 바로 8번 출입구를 통해 숲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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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오르는 산책로는 이런 모양이었다. 공원 형태로 나름 잘 꾸며 놨다.
서울숲의 북쪽 언덕에서 가장 높은 정상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공터가 꾸며져서 벤치, 간단한 운동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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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언덕을 내려가면서 서울숲의 서쪽 끝에 있는 문화 광장, 꿈의 숲 아트 센터 근처에 도달했다. 이제는 남쪽 언덕을 오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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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언덕에서 아래의 넓은 잔디밭, 월영지라고 불리는 연못을 내려다본 모습이다. 아직은 언덕과 평지 사이의 높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남쪽 언덕도 꼭대기까지 올라 봤는데, 딱히 별로 볼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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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울 꿈의 숲의 동쪽 끝으로 나가는 것으로 탐방을 마쳤다.

2. 동구릉

서울 서쪽의 고양시에 서오릉이 있다면, 서울 동쪽의 구리시에는 동구릉이 있다. 최고의 명당에다 만든다는 왕릉이 9개나 밀집해 있는 건 조선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태조 이 성계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하긴, 경주에도 왕릉 숫자로는 ‘오릉’이 최고이지, 신라 왕릉이 9개씩이나 밀집해 있는 곳은 없다.
광명시에서 광명 동굴을 관광 자원으로 미는 것처럼 구리시에서는 여기를 많이 홍보한다. 구리는 안 그래도 정말 작고 좁은 도시인데 나름 거물급 명소를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등산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동구릉이 있는 곳은 ‘구릉산’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의 동쪽이다. 서쪽은 ‘검암산’이라고 따로 불리면서 등산로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근래에 산의 바로 서쪽으로 고속도로(구리-포천 29)가 뚫리면서 등산로가 많이 봉인되었다.
그리고 산의 남쪽에는 군부대가 있다. 사실, 서오릉이 있는 산도 서쪽 끝에는 군부대가 있긴 하다.

이런 특이한 점을 감안하여, 본인은 작년 겨울에 눈이 와서 제대로 등산을 할 수 없을 때에 동구릉 산책으로 등산을 대신했다. 실제로 찾아가 보니 왕릉에서 언덕 건너편의 등산로로 가는 길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왕릉은 입장료를 내고 정문에서 들어가야 하는 통제 구역이니 산 전체가 왕릉과 사통팔달 뚫려 있지는 않겠지만, 얼마나 산 속 깊숙히 갈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허나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엔 날씨를 비롯한 다른 사정 때문에 그 길로 진입이 금지돼 있었으며, 가까운 미래에 등산로가 개방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산 전체가 다음에 또 찾아올 가치가 있을 정도로 크고 볼거리가 많은 산도 아니다 보니.. 본인은 이곳에서 그냥 동구릉만 다녀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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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은 내부가 저런 구조이다.
본인은 이 산의 능선 쪽을 먼저 구경하고 싶어서 산을 깊숙하게 들어가는 순으로.. 경릉-원릉-휘릉 순으로 돌다가 다음으로 목-헌-수릉을 둘러봤다. 왕릉 안은 산 속으로 갈수록 약하게 오르막이 등장하긴 하지만 등산로의 경사에 비해서야 약과 수준일 뿐이었다.

혜릉은 방문 당시에 주변이 온통 공사 중인 관계로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또한, 맨 왼쪽의 숭릉은 다른 왕릉들과 달리 혼자 외진 곳에 있어서 찾아가기 힘들었다.
각 무덤과 무덤 사이의 거리는 그냥 100~300m 남짓이었던 것 같다. 슬금슬금 산책하기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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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안으로 입장하니 거의 곧장 이런 자그마한 전시관이 눈에 띄었다. 역대 모든 조선 왕들의 무덤 소재지를 저렇게 표시해 놓으니 아주 도움이 된다.
일부 왕릉은 북한으로 넘어가 버리기도 했구나. 그래도 개성 정도면 38선 시절에는 아직 미묘하게 남한 땅이었는데 아쉽다.

원래 조선 왕릉은 한양 도성으로부터 100리(대략 42km) 이내의 지점에 조성해야 한다는 규정을 따라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화성이나 영월처럼 무덤이 혼자 독보적으로 먼 곳에 있는 왕은 사도세자나 단종처럼 정치적으로 좀 특이하고 예외적인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세종대왕의 경우 원래는 서울 강남의 헌인릉 인근에 무덤이 있었지만, 풍수지리상 더 길한 장소를 찾아서 훗날  멀리 여주로 이장된 거라고 한다.

저 때와는 달리, 오늘날의 전직 대통령은 죽으면 고인이 따로 유언을 남기지 않은 한 그냥 국립 현충원의 국가 원수 묘역에 순서대로 쭈욱 안장될 것이다. 김 영삼 이후로는 이 나라에 딱히 정치적인 격변도 없고 설마 또 서울 현충원에 묻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냥 대전 현충원에 가게 된다. 참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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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내부에는 이렇게 아름드리 나무들과 함께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작게나마 개울도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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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주변에 이런 스타일의 건물이 있는 건 예전에 서오릉과 천장산을 다녀보고 나니 이제 눈에 익숙했다.
눈이 쌓인 곳과 그렇지 않고 녹은 곳의 차이가 저렇다. 김 성모 만화에 나오는 "햇볕도 안 들고 양지바른 곳"이 저런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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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동쪽 끝으로 넓은 공터가 있던 목릉 주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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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휘릉.
사실, 무덤들이 다 그게 그거 같이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메모를 해 놓거나,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눈썰미를 갖추지 않는다면 어느 게 무슨 무덤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뭐, 잘 알다시피 조선의 왕이라고 해서 죽은 뒤에 다 저런 예우를 받은 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조도.. 히스기야 같은 좋은 왕은 왕들의 돌무덤에서 제일 명당에 묻힌 반면(대하 16:14, 32:33, 35:24), 막장인 왕은 그냥 다윗의 도시에다가만 묻히고 왕들의 돌무덤에 가지는 못했다고 나온다(대하 21:20, 24:25, 28:27).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에서 짤렸기 때문에 사후에 '-종' 같은 휘호(명칭이 맞나?)를 못 받았고 무덤도 '릉/능'이 아닌 그냥 조촐한 '묘'이다. 박 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인용 파면으로 인해 경호를 제외한 전 대통령 예우가 박탈되고, 역시 사후에 현충원에 묻히지는 못하게 됐다.

이상이다.
같은 날에 다녀오지도 않은 북서울 꿈의 숲과 동구릉을 좀 어거지로 한데 엮긴 했지만 그래도 등산 대체 산책 코스로서 일말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참고로, 북서울 꿈의 숲과 동구릉은 직선 거리로 8km쯤 떨어져 있지만 위도는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둘의 얼추 중간 지점에 봉화산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4/07 08:39 2018/04/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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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북한산 비봉

본인은 2010년대에 북한산을 두 번 올랐다.
처음엔 정릉 유원지에서 등산을 시작해서 최고봉인 백운대 정상을 지난 뒤, 우이동으로 하산했다.
그 다음으로는 국민대에서 등산을 시작해서 대성문과 대남문을 지난 뒤, 구기동 방면으로 하산했다.

본인은 그로부터 거의 1년 뒤에 북한산의 더 서쪽을 탐험하러 떠났다. 북한산은 워낙 넓고 크고 봉우리가 많기 때문에 개척할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도심에서 가깝고 작고 공원 느낌이 나는 산보다는, 힘들더라도 좀 더 규모가 있는 산을 종종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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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이북5도청을 직접 가서 구경했다. 황해도, 평안남· 북도, 함경남· 북도..;; 저기는 비록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가 닿지 못하는 미수복 영토이지만, 통일을 지향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관청을 만들어 놓고 대북· 통일 관련 업무를 본다고 한다.
설립 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저기는 개막장 급의 낙하산 인사로 사람을 뽑아서는 하는 일 대비 과도한 급여와 특혜를 주는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했다고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나 보다.

여기까지 가는 데는 7212번 버스를 이용했다. 북악산· 북한산· 인왕산으로 가는 버스는 다들 광화문 역 2번 출구에서 탑승 가능했다.
7212는 이북5도청까지 가서는 유턴해서 도로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버스의 종점인 건 아니고, 교통 편의 제공 차원에서 한번 경유만 하는 것이다(종점은 은평 공영 차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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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버스에서 내린 뒤, 산을 향해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드디어 비봉 탐방 지원 센터가 나타났다.
한때(대략 10수 년 남짓 전)는 여기에 다 매표소가 있었지만, 국립공원들이 모두 무료로 풀리면서 이 오두막은 관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직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장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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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답게 처음에는 '등산로가 아닌 곳은 출입금지' 경고문이 붙은 울타리와 함께 넓은 흙길이 나왔다. 하지만 등산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거 없이 가파른 돌계단 형태로 바뀌었다.
절이나 약간의 등산로 시설 자체(울타리, 밧줄, 계단..?) 말고는 벤치, 정자, 옛날 유적, 군사 시설(!!) 등 그 어떤 인공물도 없었으며 아래 경치를 볼 만한 곳도 없었다. 비봉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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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산등성이에 올랐는데... 완전 딴판의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에는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그리고 아주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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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긴 아마 향로봉? 내가 가려는 길과는 다른 쪽에 있어서 저기로 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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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60m, 비봉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이 등산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진짜 정상으로 가려면 근처의 거대한 암반을 올라야 하는데, 이건 별도의 등반 장비를 이용해서 오를 수 있으며 지금은 위험하다고 길이 폐쇄되어 있었다. 하긴, 눈까지 내려 있는데 위험할 만도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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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길을 갔다. 그늘진 곳은 눈이 장난 아니게 쌓여 있었다. 벌써부터 내려가는 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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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기차 바위'가 있다면, 북한산 비봉 일대에는 '사모 바위'가 있는 모양이다. 역시 네임드급 산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 바위 부근에는 꽤 넓은 공터와 전망대가 놓여 있었다. 북한산성도 아니고, 북한산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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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68년 일명 1· 21 사태 때,  청와대 근처로 침투했던 북괴 무장공비 수십 명이 바로 이 사모 바위 아래의 틈새 동굴에서 집단 숙영을 했다고 한다. 저 먼 거리를 걸어서 이동했다니 그 근성 한번 대단하다. 게다가 쟤들은 공작 활동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을 갖고서 무거운 상태로 평지도 아닌 산길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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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에 들어가 보니까 찬바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고 따뜻하고 지낼 만하긴 했다. 짱박혀서 캠핑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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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이긴 하다만 사모 바위만 따로 사진을 찍었다. 북한산은 어떻게 형성됐길래 이런 바위가 떡 놓여 있는지 궁금하다. 여느 흔한 흙산들과는 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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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찍고 보니 색감과 분위기가 왠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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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 바위를 건너 저 앞쪽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산 경로를 잡았다. 그런데 바위 위에 눈이 얼어붙어 있어서 하산길에 애로사항이 사정없이 꽃폈다. 본인은 아이젠이나 스틱 같은 장비를 전혀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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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과 수락산을 오르면서 도봉 차량 기지를 내려다본 적은 있었지만 지축 차량 기지를 내려다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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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가는 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잘 가다가 또 빙판 바위를 만나면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엄청난 모험과 스트레스가 돼 버려서 진행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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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산이 구름에 뒤덮였는지, 싸락눈이 휘몰아치고 주변이 온통 하얘져서 아래가 하나도 안 보이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을 내려간 뒤에야 드디어 바위가 다 끝나고, 나무가 가득한 숲길 흙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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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탐방 지원 센터로 가는 게 계획이었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는지 그리로 못 가고, 진관사 방면으로 착륙했다.
여기도 나름 인서울이다. 진관동은 서울의 북서쪽 외곽의 마지노 선으로, 뭔가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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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를 지나자 여기에는 웬 은평 한옥 마을이 있었다. 이런 게 언제 무슨 취지로 생겼는지 모르겠다. 건물들을 보니 지어진 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위의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진 배경의 뒤쪽으로는 말로만 듣던 '하나 고등학교'가 있었다. 하나 은행 계열의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큰길을 따라 여기보다 더 북쪽으로 가면 드디어 행정구역이 서울을 벗어나서 고양시로 바뀌고, 주변에 각종 예비군 훈련장들이 나오면서 분위기가 삭막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북한산성을 더 가까이 낀 북한산 등산로도 나온다.

여기에서 서울 시내로 가는 노선 버스로는 파란 간선 버스 704가 있어서 북한산 등산객들이 즐겨 이용한다. 하지만 이거 말고도 7211도 있다(아까 탔던 건 7212). 704는 서울 역 환승 센터로 가는 반면, 7211은 구기 터널, 국민대, 길음 역, 고려대, 신설동 등 북쪽 선형을 쭉 유지한다는 차이가 있다.

본인은 갈 때와 올 때 모두 초록색 버스를 이용하며 등산을 마쳤다. 이번 산행에서는 예전의 두 차례 산행과는 달리 북한산성은 전혀 구경하지 못한 대신, 1· 21 무장공비의 동선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뜻하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나머지 북한산의 메리트는 암반과 크기와 경치로 정리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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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08:13 2018/02/2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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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인왕산

본인은 이번엔 2년 전 등산 초창기 시절에 별 기록을 안 남기고 올랐던 인왕산을 다시 찾아갔다. 찾아가는 거리, 산의 높이와 규모, 등산 시간은 이 정도가 다시 생각해 봐도 입문용으로 딱 적당하긴 하다.

산행을 하던 당시엔 날씨도 아주 맑고 한편으로는 추워서 등산에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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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은 주 능선과 정상이 한양도성 성곽으로 쫙 이어져 있다. 이 길만 따라가면 정상을 지나서 창의문 방면으로 하산하게 되며, 창의문에서 북악산 등산을 계속 진행할 수 있다.
본인은 2년 전에는 지하철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내려서 인왕산 아이파크 아파트 뒤쪽으로 인왕사를 거쳐서 성곽길로 나중에 합류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저렇게 성곽길과 함께 정식 등산로 입구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리로 갔다.

등산로 입구 근처엔 '한국 사회 과학 자료원'이라는 난생 처음 듣는 기관이 있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종로 05 마을 버스가 입구 바로 코앞까지 가 줬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서대문 일대 나들이도 했는데, 얘는 마침 5호선 서대문 역 3번 출구에서 출발한 뒤 독립문 역에서 골목 비탈길로 들어가는 단방향 순환 버스였다.
서울 종로구는 지하철이 다니고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도심 종로와, 그 북쪽의 산기슭 종로가 그야말로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역이다. 그래서 도심과 산기슭을 오가는 역할을 이런 마을 버스들이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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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번 산행은 이렇게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오른쪽 계단이 순간 철길처럼 보이긴 한다만.. (계단이 침목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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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철조망이 보이시는가?
행정 내지 보안 측면에서 보자면, 인왕산은 무슨 국립공원 같은 감투는 없다. 북악산처럼 입산을 위해 신분증 까고 목걸이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경복궁과 청와대가 옆에서 딱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정상을 포함한 주요 전망대에는 경찰 소속의 보안 요원이 2명 1조로 등산객을 감시한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입산이 금지된다.

이건 전국의 산들 중에서 인왕산에만 존재하는 특징이지 싶다. 정작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서도 청와대는 거의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면 감지덕지이지, 먼 옛날에는 인왕산 정도면 산 전체가 그냥 민간인 출입 금지였었다. 그러던 것이 1993년 2월 말, 김 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인왕산이 해금되고 거기 주요 등산로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인왕산은 주요 봉우리들 꼭대기에 군부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여느 산들의 꼭대기에 있는 군부대처럼 공군 소속의 방공 부대가 아니라 육군 소속이다. 여기는 청와대와 아주 가까우며 애초에 엄격한 비행 금지 구역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 정도로 군부대가 많이 있는 산치고 인왕산에는 헬리패드가 없다. 적어도 주 등산로 근처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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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보안 요원 초소를 지나고 계속 산을 오르는 중이다.
2년 전에 갔을 때는 이런 전망대들마다 "청와대 방면으로 사진 촬영 금지" 이런 경고문 표지판이 대놓고 놓여 있었는데.. 시대가 바뀌었는지 지금은 그런 표지판을 없앤 모양이다.
표지판은 없지만 보안 요원은 여전히 상주하고 있다. 뭐,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진다" 심리를 조장하지 않으려고 없앤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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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등산은 상당수가 그냥 성곽 따라 고개를 오르는 것이다. 남한산과 비슷하다. 성벽이라는 게 그 특성상 산의 가장 높은 부위를 따라 만들어지니까 말이다.
물론 그 아래에도 생태 공원이 있고 약수터도 있긴 하지만, 본인은 거기는 이번에도 못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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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몇 장 찍지도 않았는데 슬금슬금 걷다 보니 정상에 이내 도달했다. 정상 표지석은 없고, 바닥에 서대문구· 종로구 경계 표시와 위치 측량 인증이 놓인 게 전부이다.
정상은 정규 등산로에 놓인 게 아니라 거기서 벗어난 곳에 일종의 '지선'처럼 놓여 있다. 내 기억으로 북악산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 지점에서 더 진행은 할 수 없고 앞이 막혀 있다. 왔던 곳으로 잠시 되돌아가야 산행을 계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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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내려와 하산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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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서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삐죽 솟은 다른 봉우리인 '기차바위'로 건너갈 수 있고, 아니면 지금 가던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서 그냥 창의문· 북악산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건너편 기차바위의 모습이다.

인왕산을 최대한 경험하려면 기차바위로 가서 부암동 내지 상명대 방면으로 하산하는 게 좋다. 본인은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성곽 같은 거 없이 평범한 산행이 시작됐다.
본인은 2년 전에도 기차바위 쪽으로 갔었다. 그랬는데 일부 기억이 소실되어서 정상에서 기차바위가 바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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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은 아주 작은 산이다. 기차바위에도 단 몇 분 만에 정말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는 청와대는 딱히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기에도 보안 요원이 있었다. 이게 이번 산행에서 만난 마지막 보안 요원 일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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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에서 구경할 건 다 봤으며, 산을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인왕산은 별로 높지도 않은데 보다시피 정말 철저하게 돌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곽을 벗어난 뒤에도 흙을 밟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어지간한 나무들이 다 낙엽이 지다못해 잎이 다 떨어진 추운 계절인데도, 산의 나무가 소나무 같은 침엽· 상록수 위주인 덕분에 초록색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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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의 최북단에 있는 마지막 군부대를 지났다. 이정표에 그냥 "이쪽은 군부대. 등산로 더 없음"이라는 안내가 돼 있어서 홍지문· 상명대 방면만 선택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인왕산에서 내부순환로를 타넘어 그 이북에 속하는 구간에 도달했다. 이제 산이 얼마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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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말로만 들어 온 상명 대학교가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이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이 종로가 그 종로는 아니다. 캠퍼스가 어지간히도 가파른 산기슭에 있구나..;;
옛날에는 저기가 여대였다고 그러던데 본인은 그에 대해 듣거나 아는 바가 없다.
전방에는 한양도성도, 북한산성도 아닌 이상한 성벽이 나타났다. 상명대 쪽으로 더 가면 북한산 구간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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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을 완료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라는 완전 처음 듣는 유물이었다. 경주의 '동궁과 월지'처럼 둘을 한 명칭으로 묶어서 부르는 듯하다.
그리고 '세검정'이라는 정자도 여기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난 상명대만 기대하고 왔는데 뜻밖의 구경을 더 하게 됐다. 등산 과정에서 이런 역사· 지리 지식을 늘리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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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 대학교는 뒤에는 산이고 앞에는 홍제천이 지나는 친자연적인 곳에 있구나.
로고가 내 한글 입력기의 아이콘처럼 한글 자모를 세로로 풀어쓴 형태인 것이 예전부터 인상적이었다. 물론 날개셋의 아이콘은 본인이 상명 대학교를 모르던 시절에 만든 것이니 둘은 형태가 그냥 우연히 일치하는 것이다.

창의문, 자하문, 북소문이 전부 같은 문을 가리킨다는 게 개인적으로 무척 헷갈렸다. 실물 근처에서는 다들 '창의문'이라고 부르는데, 정작 근처의 터널은 '자하문 터널'이고 도로명도 '자하문로'이니까 다른 문이 또 있는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산행을 마치고 귀가할 때는 역시 경복궁 역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탔으며, 창의문과 최 규식 경무관 동상을 지나쳐 갔다. 그런데 차창 밖을 보니, 어둡고 칙칙한 갈색이던 동상이 번쩍이는 황토색/구리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내가 뭘 잘못 봤나?

검색을 해 보니 역시나 내가 몰랐던 이벤트가 있었다. 세워진 지 반세기가 다 돼 가던 낡은 동상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뒤, 바로 작년 가을(2017년 10월 20일경)에 경찰 관계자들과 고인 유족을 초청한 제막식까지 열었다고 한다. 이것도 인왕산 등산을 안 했으면 알지 못했을 일이다.
요 근래 들어 경찰에서는 자기네 순직자들을 기리는 일에 열심인 것 같다. 서대문 소공원을 경찰 기념 공원으로 개조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번에도 이렇게 산행 한번 하면서 좋은 경치 구경하고 여러 정보들을 업데이트 하고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23 08:33 2018/02/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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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대모산+구룡산

대모산과 구룡산은 서울의 동남부에 있는 최대 높이 300m대의 산으로, 산중턱에 서울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산 남쪽 건너편도 여전히 미묘하게 인서울이기 때문에 등산로가 행정구역의 경계를 넘나들지는 않는다. 아차산이나 인릉산· 우면산 같은 산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남쪽에 울타리로 둘러진 헌인릉과 코렁 시설이 있기 때문에 산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것은 좌우 말단의 일부 등산로를 빼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이 이 산과 관련된 역사· 군사상 특이 사항의 전부이다.

본인은 서울· 수도권 일대의 산들을 운동 삼아 틈틈이 답사하기로 마음먹은 게 2015년 초의 일이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그 많은 산들 중에 제일 먼저 찾아갔던 산이 바로 이 산이었다. 지금처럼 미주알고주알 사진 기록을 남겨서 여행기를 블로그에다가 올리기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말로만 듣던 타워팰리스를 이렇게 산에서 내려다보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때는 대모산입구 역에서 내려서 일원 터널 근처에서 산을 오른 뒤, 대모산과 구룡산의 정상을 구경하고 구룡 마을 방면으로 하산했다. 그로부터 거의 3년 가까이 뒤, 지금은 산을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완전히 횡단했다. 수서 역 6번 출구에서부터 시작해서 아예 KOTRA, 현대· 기아 사옥, 양재 IC 근처까지 도달했다. 과거에는 가장 돋보였던 고층 건물이 타워팰리스였지만 지금은 단연 롯데 타워이다.

대모산· 구룡산은 진지한 등산용 산보다는 낮고, 그냥 공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높아 보인다. 역사 유물 같은 거 없고(헌릉은 등산로에서 구경할 수는 없으니) 사실상 북부밖에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곳곳에 이정표와 쉬어 가는 의자 같은 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 사용자 인터페이스 측면에서는 인상이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여행 기록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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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역 6번 출구는 아마 등산로와 가장 가까이 연결돼 있는 지하철역 출입구가 아닌가 싶다. 뭐, 처음에는 서울 둘레길로 시작하다가 '산 정상으로 계속 올라가기 vs 이쪽 지대만 둘레길 계속 걷기'라고 갈림길이 나오긴 한다.

단순히 대모산 정상까지 더 빨리 가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먼 수서에서 시작할 필요 없이 옆에 있는 일원 역 일대의 아파트 뒤쪽에서 산을 올라도 된다. 하지만 대모· 구룡산은 안 그래도 작은 산인데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대신, 정상까지 최장거리인 산책로 내지 등산로를 선택해 걷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산 속 풍경은 뭐 저렇게 흔한 가을 숲 속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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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가까이 걷고 또 걷고 나니, 공터와 함께 이 산에서 유일한 듯한 지붕 달린 정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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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의 정상을 앞두고 드디어 산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철망 울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헌릉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대모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LH 강남 힐스테이트 아파트라든가 헌릉 근처의 비닐하우스 농장도 형체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무들에 가려져서 전망이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사진을 남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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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 알림 표지가 관할 행정구역 표시와 함께 저런 식으로 만들어진 산은 대모산 말고는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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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이 암반으로 이뤄지지 않은 흙산의 경우, 정상 지점이 공터 겸 헬리패드인 편이다. 하지만 이 산은 그렇지 않고 헬리패드가 정상 근처에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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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패드 근처에서는 이렇게 산 아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산 높이가 정말 낮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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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헌인릉의 철망과 코렁 시설의 철망이 동시에 등장하고 바뀌는 지점이다. 후자 철망은 잿빛이며, 약간 더 높고 꼭대기에 날카로운 철조망도 달려 있어서 더 위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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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에서 구룡산으로 가는 길은 철망을 따라서 계속 이어졌다. 중간에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수직 이동도 많았다. 비록 낮은 산이긴 해도 무슨 '껌' 수준으로 만만하지는 않고, 다리의 압박이 적당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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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의 정상에는 딱히 돌출된 표지석이 없고 이렇게 바닥에 발판 형태로 정상 안내가 돼 있었다. 그리고 헬리패드와 전망대가 같이 놓여 있었다.
본인이 산을 오를 때부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흐린 상태였다. 본인이 대모산을 넘어 구룡산의 정상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정상에 도달한 뒤부터는 우산이나 비옷이 필요할 정도로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비를 만난 건 2016년의 용마산· 망우산을 오를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럴 때 아까처럼 지붕 달린 정자라도 하나 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비를 피할 만한 시설은 아쉽게도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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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과정에서 날씨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 수 있는 풍경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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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 정상을 지난 지점부터 철조망은 드디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강남구와 서초구 경계 이정표가 나타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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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이 정상 인근에 헬리패드와 보조 전망대(?)가 있던 것처럼, 구룡산은 정상 근처에 '국수봉'이라는 또 다른 작은 산봉우리와 전망대가 있었다. 본인의 방문 당시에는 비가 오고 안개도 뿌옇게 껴서 경치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하산하는 길은 평범한 산행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본인도 비를 피해 허겁지겁 내려가느라 정신 없었기 때문에 사진을 딱히 소개하지 않겠다. 철조망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군사 시설 보호 구역' 팻말은 산 속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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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에서 출발해서 산행 도보만으로 무려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나름 성공적인 산행을 했다. 청계산· 인릉산 등산 후에 4432 버스를 타고 여기 일대를 지난 적이 있었는데 여기를 내 발로 걸어다닌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17 08:32 2018/02/1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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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 일대 나들이

서울 서대문 새문안로 일대는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이면서 서울 지하철 5호선이 지나며, 한양 겸 경성의 중심지로서 근현대 역사 유물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도 일본인들은 여기보다 더 남쪽으로 남산· 남대문 일대에 많이 살았고, 조선인은 서대문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지난번엔 각종 고궁과 서울 역사 박물관을 구경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 주변에 각종 박물관을 포함해 볼거리가 많다는 것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래서 본인은 하루 시간을 내어 순회 답사를 했다.

1. 경찰 박물관

<청년경찰>, <범죄도시> 같은 영화만 볼 게 아니라 이런 곳도 가 보면 좋을 것 같다.
경희궁의 동쪽으로는(광화문 역 방면) 서울 역사 박물관이 있고, 서쪽으로는 경찰 박물관이 있다(서대문 역 방면). 서로 아주 가까이 붙어 있으며, 도심 접근성이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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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박물관은 다층 건물 형태이다. 들어간 뒤에는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6층으로 간 뒤, 한 층씩 내려가면서 방을 관람한다. 중간에 3층인가는 예외적으로 직원 사무 공간이기 때문에 관람객이 입장할 수 없고, 건너뛰어야 한다.

입장료가 없으며 무료이다. 경찰이 뭘 하는 사람인지 소개하고 경찰 코스프레· 경찰 체험 코너가 있는 건 아무래도 애들 눈높이에 맞춰진 컨텐츠이지만, 맨 처음 관람하는 꼭대기 층에 마련된 한국 경찰의 역사 코너는 유일하게 애들한테 좀 어려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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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태극 무공 훈장이 추서된 최 규식 경무관에 대해서는 당연히 큰 비중을 두고 소개했으며, 그 외에도 순직한 경찰들 소개와 묵념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긴, 6· 25 전쟁 중에 최전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북진하고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북괴와 직접적으로 싸운 사람들은 군인이지만.. 남한 영토 내부에서 북괴 빨치산과 간첩들을 소탕한 사람은 경찰이었을 것이다.

내 머리에 편견으로 형성돼 있는 경찰에 대한 외형적인 이미지는..

  1. 평소에 교통정리와 범죄 “예방” 업무를 하면서 구역을 순찰하는 제복 차림의 경찰. 이건 일상생활에서 제일 자주 본다. 내근직도 제복 차림이긴 하지만 일반인이 경찰서를 방문할 일은 별로 없으니..
  2. 강력 범죄가 터져서 사복 차림으로 현장에서 잠복하고 피의자를 격투 끝에 검거하는 경찰. ‘형사’라고 종종 불리며, 이건 영화 같은 매체에서 제일 자주 본다.
  3. 투명한 방패와 검은 방망이 들고 있는 전경들. 시위· 집회 현장에서만 본다.

이렇게 생각해 왔는데.. 이게 근거 없는 분류가 아닌 것 같다.
나 초딩 시절 286 AT에서 재미있게 했던 블루스 형제 게임에서도 세 캐릭터가 딱 정확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ㅋ (물론 주인공을 죽이는 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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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경찰을 컴퓨터에다 비유하면, 정규 경찰 공무원들이 CPU라면 전경들은 GPU뻘 되겠다고 본인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GPU는 전문성과 범용성이 정식 CPU만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픽 연산이라는 특정 작업만을 압도적인 코어 수로 보조해 주니까..

어느 나라건 경찰과 군대, 첩보기관은 서로 사이가 좋은 적이 별로 없었다. (실적 다툼 때문..?) 심지어 이들과 검사도 사이가 안 좋다.
원래는 이들은 서로 전문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이다. 일개 조폭을 넘어서는 군벌, 테러리스트와 싸워야 할 정도로 나라 사정이 막장이라면 특수부대나 아예 정규군의 도움이 필요하다.

용공사범, 마약이나 산업 스파이처럼 심각하고 교묘한 범죄를 정확한 증거를 잡아내서 겨우 말단 조직원이 아닌 근원지까지 일망타진하려면, 위장 침투가 전문인 첩보기관으로부터 첩보를 제공받아야 한다. (영화 아저씨..!!)

군대가 아예 전문적인 대형 DBMS이고, 첩보기관이 심벌과 임의 정밀도 연산까지 지원하는 수학 패키지라면, 경찰은 그 중간에 속하는 엑셀 같은 스프레드시트가 아닐까 한다. 일반인이 컴퓨터에서 이 셋 중 가장 즐겨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단연 엑셀이기도 하니 말이다.

얘네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거나, 정치와 야합해서 나라에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가장 비열 사악한 본성을 자극하면서 세력을 키우는 공산주의는 정말 불가피하게 경찰, 군대, 첩보기관에 대한 필요· 수요를 자꾸 만들어 내고 그쪽이 타락할 빌미를 주기도 했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친다, 야 이 짭새야!”
청년경찰 각본 쓴 사람이 오버워치를 좋아하는 취향이었군.. ㅡ,.ㅡ;;

2. 경교장

경찰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네..
경찰 박물관에서 더 서쪽으로 걸으면 강북 삼성 병원이 나온다. 그런데 그 안에 그 이름도 유명한 경교장이라는 근대 유적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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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은 원래 1938년에 지어진 부잣집 건물인데, 백범 김 구가 여기서 몇 년간 지냈고 임시정부 요원들이 여기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장소로 유명해졌다. 잘 알다시피 김 구는 아예 여기서 안 두희의 흉탄에 맞아 암살당하기도 했다.
이 건물은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 1· 2층과 지하를 원형대로 복원해서 전시관으로 공개되었다...고 입구의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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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가구로 응접실과 집무실이 있는 건 부산에서 본 임시수도 청사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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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는 마치 애니매트릭스의 첫 에피소드(오시리스 최후의 비행)에서 테디우스와 주에가 칼싸움을 한 장소와 비슷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사진은 생략하지만 김 구가 암살당하던 당시의 2층 집무실 방, 그리고 고인이 입고 있던 피로 물든 겉옷도 어떻게 복원과 보존을 했는지 전시되어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역사가 실제로 이 장소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 구를 암살한 안 두희는 먼 훗날 1996년, 박 기서 씨에게 몽둥이로 난타 당해 죽었다. 그 당시 박 씨가 버스 기사였던 관계로, 안 두희가 버스를 타다가 잘못 걸려서 죽었다는 식의 낭설이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 씨는 인천에 소재한 안 두희의 집 주소를 알아내어 거기로 직접 찾아간 뒤, 문이 열릴 때까지 오랫동안 잠복했다. 내연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부터 포박해서 제압한 뒤, 집으로 침입해 들어가서 안 두희를 살해했다. 그 뒤에는 곧장 고해성사를 받고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할 고의적 살인범이기 때문에 그는 일단 구속되고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이렇게까지 전국적으로 칭송받은 살인범은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변호하겠다는 변호인이 줄을 섰고, 전국 각지에서 박 기서의 집으로 익명 성금과 지원 물자가 도달했댄다. 그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장에서는 관장 선생이 수업료를 면제해 줬다. 김 구가 먼 옛날에 일본인 민간인 상인을 죽인 것보다, 차라리 박 기서가 김 구의 암살범을 죽인 게 더 훌륭한 일처럼 보일 정도이다.

본인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독립 운동가 겸 건국의 주역으로서는 김 구보다는 미국물 먹은 할배를 훨씬 더 존경한다. 이화장도 복원해서 재개장할 거라고 소식을 들었는데, 완공된다면 거기도 당연히 0순위로 가 볼 것이다.

3. 4· 19 혁명 기념 도서관

북한산 기슭에 4· 19 묘지가 있는 건 본인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만.., 경교장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엔 4· 19 혁명 기념 도서관이라는 것도 있다. 저건 도대체 뭐지?
(사실, 상암동에 있는 박 정희 기념관도 정확한 명칭은 '박 정희 기념 도서관', 더 세부적으로는 '기념관 및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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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여기는 자유당 시절에 잘나가던 이 기붕· 박 마리아 부부의 자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들은 가족 전체가 동반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서 주인을 잃은 집과 부지를 국가가 환수하여 꽤 오래 전부터 4· 19 혁명 도서관이 이 자리에 조성됐다고 한다. 경교장과는 달리, 집 건물 자체는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없으니 철거하고 도서관 형태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건 마치 프랑스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를 보는 것 같다. 기독교를 맹렬히 증오해서 "성경 같은 쓰레기는 앞으로 100년 안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사멸해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랬는데.. 그가 죽고 나서는 그의 생가 부지에 성경 인쇄소가 들어섰다나 어쨌다나..

잠시 들어가 봤는데, 역시나 4· 19 혁명 관련 자료의 보관과 열람에 특화된 도서관인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4· 19까지는 인정하지만, 5· 18은.. 너무 이상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 같다. 폄하하는 쪽, 맹목적으로 신성시하는 쪽 모두 마음에 안 든다. 저건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재평가한다 해도 쌍방과실일 뿐이고 여파가 4· 19만치 크지도 않았으며, 지금 해 주는 것만치 그렇게 예우할 급도 못 된다.

사실은 4· 19조차도 대통령이 자격지심에 과오를 저질렀을지언정, 한편으로는 너무 착했고 진작부터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쳤기 때문에 저런 항거가 일어나고 성공한 것이다. 진짜 악질적인 독재자 치하였으면 민중 항거· 항쟁으로 정권 교체? 택도 없는 일이다. (북괴 내부의 8월 종파 사건, 황해 제철소 사건 등..)

4. 농업 박물관, 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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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걸어가면 서대문 역이 나온다. 그 뒤 길 건너편 서대문 역 5· 6번 출구 방향을 보면 농협 은행 본점과 함께 농업 박물관과 쌀 박물관 이렇게 박물관이 두 곳 있다. 여기도 무료 입장 가능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도시와는 정반대 심상의 박물관이 있는 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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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봉길 의사는 폭탄 의거를 벌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생전에는 농촌 계몽 운동에도 크게 앞장선 이력이 있다.
지금처럼 국제 교역이 활발해진 시대에 농업 내지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이념을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만치 목숨 걸고 붙들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6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여전히 땅에서 나는 소산물에 의존해서 명줄을 유지하고 있는 건 변함없다. 식량은 공산품이 아니다. 또한, 하늘의 기상 현상에 의존하지 않고는 땅의 소산물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항공업계는 20세기에 비행기의 발명으로 인해 등장한 최첨단 산업이지만.. 역시 하늘 날씨에 영향을 많이 봤고 심지어 새들을 쫓아야 하는 게 어찌 보면 그 원시적인(?) 농업과 비슷하다.

시간과 지면 관계상 더 자세한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인간이 농사를 지어 온 역사, 그리고 각종 논밭 개간 기술의 개발, 이앙법, 직파법 이런 얘기들이 나와 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우 장춘 박사가 이룩한 영농 과학화 얘기는 전혀 없는 게 아쉽다.

박물관의 1층과 2층은 저런 농업 얘기이고, 지하에는 농협 자체에 대한 소개가 들어있더라.

5. 서대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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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동대문(흥인지문), 남대문(숭례문), 북대문(북악산 숙정문)과 달리 서대문(돈의문)만이 유일하게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그 뒤 재건· 복원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길온천 역 주변에 온천이 없듯이 서대문 역 주변에 실제로 서대문이 있지는 않다.
여기는 주변에 이미 건물들이 많이 지어져 버린 관계로, 서대문의 부지 확보와 재건 복원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여기 근처에 있는 경희궁도 사정이 비슷한지라, 인제 와서 원형 복원은 난감한 상태이다.

참고로, 한양도성에는 사 '대문'(동 흥인지, 서 돈의, 남 숭례, 북 숙정) 말고, 사 '소문'도 있다. 창의문 또는 자하문은 북소문에 속한다.
동소문에 속하는 혜화문, 그리고 남소문에 속하는 광희문은 복원된 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원래 있던 곳에 있지는 않다. 이미 도로나 건물이 자리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북소문만이 유일하게 원형이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서소문에 해당하는 소의문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소실되어 있다. 대문과 소문 모두 '서'쪽만이 현재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소· 지명에만 '서대문, 서소문'이 전해질 뿐이다.

6. 경찰 기념 공원과 서대문 역 터

여기 근처에는 서대문이라는 조선 시대 유적 말고, 서대문이라는 이름의 '철도역'도 있었다. 경부선이 만들어졌던 초창기에는 지금 있는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었으며, 살짝 더(지하철 한두 정거장 남짓) 북쪽으로 가서 '서대문 역'이 실질적인 경성 역이요 경부선의 북쪽 종점이었다.

그랬는데.. 1920년대 초에 서대문 역은 폐지되고, 남대문 역에서 경의선으로 분기하는 신촌· 가좌 방면 드리프트 선로가 부설됐다. 어차피 일본인들이 주로 사는 곳은 남대문 쪽이었으니, 철길이 그쪽까지만 있어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서대문 역 6번 출구로 나와서 경찰청이 마주 보이는 정도까지 좀 걸어가면.. 인도 옆으로 아주 작은 풀밭 공원이 있으며, 거기에 "옛날에 이 자리에 옛 경성, 서대문 역이 있었음"이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유 관순 열사가 다녔던 이화 학당도 바로 이 근처(현재의 이화여고)이니, 그 학교는 가히 엎어지면 코앞인 역세권이었던 셈이다.

지난 2016년 여름에는 그 소공원이 '경찰 기념 공원'으로 리모델링됐다. 안 그래도 경찰청이 코앞이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찰 박물관도 있으니, 내친 김에 순직 경찰을 기리는 공간을 더 만든 듯하다. 경복궁 역 근처에서 학교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던 건물은 경찰청 본청이고, 여기서 보는 건 서울 '지방 경찰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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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 자리에 있던 서대문 역 표지석 역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름 경찰청장 출신이 코레일 사장을 역임한 적도 있는데(허 준영)..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서대문 역 일대에서 여러 뜻깊은 장소들을 잘 구경하고 돌아왔다.
표지석은 너무 아쉬웠던지라 집에서 검색을 좀 더 해 봤는데, 사진들의 구도를 보니 소공원에 있던 그 표지석은 이화여고 정문 바로 옆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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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2/14 08:35 2018/02/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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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불암산

산 세 군데를 연거푸 오른 뒤 본인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서울 불암산이었다. 2016년 초에도 여기를 정상까지 오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세부 등산 경로와 당일 날씨 같은 게 모두 달랐기 때문에 느낌이 새로웠다.
이번에는 하산할 때 주 능선을 타면서 작년에 들르지 못했던 불암산성 부근을 구경했으며, 남양주가 아닌 서울 중계본동 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더 남쪽 끝까지 진행했으면 2017년초에 들렀던 태릉과 한전 연수원, 삼육 대학교 근처까지 도달하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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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4호선 상계 역에서 내려서 정암사 방면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국립공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지만 나름 등산로 안내가 잘 돼 있었다. 본인이 선택한 경로는 거기 안내도 상으로는 제5 등산로라고 기재돼 있었다.
여기는 지하철 선로가 개천을 복개한 형태이더니만, 등산로를 따라 자그마한 계곡이 있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계곡 따라 물 구경은 내 등산 패턴의 특성상 보통은 하산 과정에서 하는 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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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포장된 비탈길은 정암사까지만 나 있었고, 그 뒤부터는 좁은 등산로가 이어졌다. 사실, 완전히 정암사 부지까지 가는 게 아니라 도중에 등산로로 진로를 바꿔야 한다.
등산로는 대부분 온통 돌계단 형태로 닦여 있었으며, 이 상태로 산의 종축 능선인 깔딱고개까지 올라갔다. 산길은 깔딱고개가 가까워질수록 가팔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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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을 한참을 낑낑대며 오른 뒤에야 깔딱고개에 도착했다. 여기는 자동차 교차로처럼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었다. 본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올라온 셈인데, 더 동쪽으로 진행하면 남양주로 빠져 버린다.
북쪽으로 더 가면 산의 정상 방향이며, 남쪽으로 가면 불암산성, 공릉동, 중· 하계동이 나온다. 본인은 정상에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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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에서 정상 방면을 향하자 산의 최종 보스인 암반이 곧장 나타났다. 이정표 상으로는 정상까지 몇백 미터밖에 안 남았다고 나오지만, 지금까지 설렁설렁 걷던 오솔길로 몇백 미터가 아니다. 그러니 저 거리는 북한산 정상 근처의 이정표만큼이나 낚시이다.
일부 정말로 길이 없고 위험한 암반에는 계단이 설치돼 있었지만 일부 구간은 발뿐만 아니라 손도 써서 로프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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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정상의 암반을 오를 때가 돼서야 산 아래의 경치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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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은 확실히 돌산이긴 하다.
예전에 갔을 때는 국기와 지리 표시 마크를 보고 사진을 찍었지만, 정상 표지석은 못 보고 지나쳤다. 산을 올라온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지 싶다.

그나저나 성남에 있는 산(영장, 망덕, 청계, 인릉 등~)들은 위치를 막론하고 딱히 돌산이 없었던 것 같다. 산이 많긴 하지만 높이도 막 높지 않고 그저 그런 흙산일 뿐이다.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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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역, 그리고 불암산의 정상보다는 낮지만 또 다른 산봉우리가 내려다보인다.
사실,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로 지하철 4호선 선로를 가로막고 있는 저 산봉우리를 타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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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서울이 아닌 남양주 쪽도 내려다본다. 아파트들이 빽빽히 들어선 서울과 달리 저기는 훨씬 한적해 보였다.
단, 아직 아침 시간대였던 관계로, 동쪽인 남양주는 역광이 심해서 좋은 풍경 사진을 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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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구경은 이 정도로 한 뒤, 본인은 다시 깔딱고개 쪽으로 내려가서 남쪽으로 능선을 타고 걷기 시작했다. 길이 전반적으로 이렇게 곱게 난 편이었지만, 이정표 없이 갈림길도 종종 나와서 헷갈렸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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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불암산에서 아마 정상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라 여겨지는 장소가 나왔다.
아까 같은 오솔길이 아니라 꽤 넓고 큰 광장이 펼쳐졌으며, 그 광장의 위에는 아마 불암산 유일의 헬리패드가 놓여 있었다.
인릉산은 정상이 이렇게 공터+헬리패드로 꾸며져 있는 반면, 불암산은 제일 높은 정상은 암반에 따로 있고 헬리패드가 이렇게 딴 곳에 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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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 아차산성이 있다면 불암산은 불암산성이 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불암산성의 일부 성벽은 알고 보니 이 광장 등산로의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그러니 가까이 접근해서 살펴보기가 곤란했다.
형태가 좀 더 온전히 남아 있으면 더 급이 높은 문화재로 승격됐을 것이고, 기록이라도 더 상세히 남아 있으면 복원 재건하네 마네 했겠지만 달랑 저 황량한 돌무더기 폐허만으로는 뭔가 거창한 유적지 관광지를 조성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황룡사처럼 아예 흔적도 없이 부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지(址)'자가 붙을 정도는 아니다.
아차산과 불암산 모두 서울에서 너무 흔해 빠진 조선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흔적을 아쉬운 대로 간직하고 있는 흥미로운 산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위치도 서울의 동북부로 비슷한 편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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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가는 길은 무작정 평지밖에 없는 게 아니라 작게나마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부분도 있었다.
학도암까지 지나자 역시 이 산에서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은 커다란 팔각정이 나타났는데, 여기는 방문 당시 웬 단체 등산객들이 잔뜩 점령해 있어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본인은 중계본동과 공릉동의 경계에 있는 백사 마을 쪽으로 하산하려 마음먹었다. 위의 사진은 착륙 예정지를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름은 뱀이나 모래가 아니라, 유래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숫자 104를 뜻한다고 한다. 마치 시인 '이 육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등산로는 아주 좁고 험해지고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제대로 추적할 수가 없어졌다. 지난번에 인릉산에 다녀왔을 때도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에 거의 다 내려와 놓고는 길을 못 찾아서 한참 헤맸는데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래서 정확하게 백사 마을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거기서 북쪽으로 몇백 m 정도 비껴서 중계 현대 5차 아파트 부근에 착륙하게 됐다. 남쪽으로는 도저히 더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기서 약간만 더 걸어가면 백사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할 수는 있었다. 참고로 저기는 서울 강남의 '구룡 마을'처럼 서울 강북에 거의 최후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달동네라고 한다. 몇 년 안으로 주민들을 다 이주시키고 철거· 재개발할 예정이다.

이번에는 평소의 내 등산 스타일과는 달리, 서울 시내를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등산을 마쳤다.
그런데, 귀갓길 버스 차창 밖으로 '한글비석로'라는 도로명 주소가 보여서 "저건 뜬금없이 뭐야?" 생각이 들어 폰을 꺼내 검색을 해 봤다.

오오.. '서울 이 영탁 한글 영비'라고 무려 1500년대에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쓴 묘비가 여기 근처에 있다고 한다.
내용 자체는 "이 비석을 훼손하면 방법 한다. 방법 하면 손발리 오그라진다. 이 사실을 한문을 모르는 후세에게도 분명하게 알리는 바이다"급의 아주 단순무식 원초적..(!) 경고문에 불과하지만, 그야말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순한글 묘비문이기 때문에 국어사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얘는 '보물'로 지정돼 있으며, 남한산성보다 당연히 격이 더 높다.

아이고, 나도 이런 게 있는 걸 진작에 알았으면 여기까지 온 김에 당장 찾아가서 구경하는 건데... 지금 당장 그러지는 못했다. 그래도 불암산 등산 덕분에 이제라도 덤으로 알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08 08:31 2018/02/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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