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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K의 정체성

한국

  • 반도에 자리잡은 유일한 분단 국가. 징병제. 분단되지 않고 남북을 합쳐도 인구나 면적이 CJK 중 가장 작은데 하물며 지금은.. 안습
  • 한글! (한자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만 이례적으로 한자는 거의 안 쓰는 아주 특별한 국가)
  • 미국과 비슷한 대통령 직선제
  • 성탄절이 유일하게 공휴일임. 넘사벽급의 교회 인프라
  • 과학 분야의 노벨 상 수상자가 유일하게 전무-_-함

중국

  • 압도적인 영토 면적과 인구. 대륙의 기상-_-
  • (명목상의) 공산당
  • 고립어. 한국어나 일본어와는 달리 S+V+O형 언어
  • 국기의 모양도 한국-일본보다는 이질감이 더 큼
  • 훨씬 더 강경한 마약 단속. 많은 사형 집행

일본

  • 섬 나라. 한국보다 남쪽에 있지만, 북쪽 끝도 북한을 넘어 러시아와 만날 정도로 영토가 은근히 넓다.
  • 유일하게 좌측통행, 협궤, 그리고 110V 전압 (근대화· 산업화를 일찍 한 흔적이다. 얘들도 아주 장기적으로 승압을 찔끔찔끔 하고 있다고는 함)
  • 전범 국가. 정규군 대신 자위대
  •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축에 드는 문자 체계. 세로쓰기 (하지만 일본에서도 젊은 세대들은 점점 가로쓰기에 더 익숙해지고 있다고 함)
  • 영국과 비슷한 입헌 군주제

결국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건 사회주의 체계가 아닌 것과 언어 구조요,
한국과 중국이 비슷한 건 차량 통행 방향이나 전압 같은 산업 인프라 및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며,
일본과 중국이 비슷한 건 한자 의존도 정도로 요약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2/08/06 08:16 2012/08/0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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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下

아문센이 선택한 경로는 스콧이 선택한 경로보다 남극점에 96km 정도, 즉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만치 더 가까운 경로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가는 것이었다. 스콧의 경로는 선배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경로와 동일했다. 거기에다 아문센은 스콧보다 출발도 열흘 정도 더 일찍 했다.
아문센은 1등에 대한 압박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려 시도를 했지만 역시 맹추위와 준비 미숙 때문에 포기하고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잖아도 아문센은 북극점을 먼저 정복하려 했는데 선두를 미국인에게 빼앗겨서 조바심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섀클턴은 스콧보다 먼저 남극 탐험을 갔지만, 준비 미숙과 물자로 부족으로 인한 실패를 인정하고 북극점을 약 150km 정도 앞둔 지점에서 미련 없이 진행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사람이다. 그 대신 모든 대원들이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문센은 남극점을 빨리 찍고 돌아온다는 그 목표에만 집중하여 대원들도 전부 항해 측량술을 알고 스키를 능숙하게 탈 줄 알며 혹한 환경에서의 생존 능력이 뛰어난 베테랑들로 뽑았다. 그러나 스콧은 겸사겸사 학술 탐사에도 큰 비중을 둬서 대원 중엔 과학자들도 있었다. 군인보다는 민간인을 선호했던 셈. 스콧은 그 힘든 와중에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극에서 채취한 광물을 16kg치나 갖고 보관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북극 원주민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대로 남극에 갈 때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두꺼운 가죽옷을 입었고, 짐을 싣는 썰매는 개들을 이용해 운반했다. 현지에서도 수시로 바다표범들을 사냥해서 식량을 비축했고, 탐험 중에도 효용이 떨어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개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잡은 개고기를 다른 개에게 사료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콧은 원주민들이나 입는 가죽옷을 저속하다고 거부하고 개고기도 안 먹었으며, 현지에서의 사냥 역시 할 생각을 않았다. 개나 말이 죽으면 잡아먹기는커녕 묻어서 장례를 치러 줬을 정도이니! 모든 물자는 대영제국에서 조달하는 것만으로 충당하려 했던가 보다. 그러나 영국제 모직물 코트는 옷이 물에 젖고 얼면서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개 대신 조랑말과 스노우모빌(설상차)을 활용했는데, 말은 평범한 환경에서야 개보다 먹는 양에 비해 큰 수송력을 제공하는 게 사실이지만 별도의 사료를 챙겨 가야 하며 개들보다 추위에 훨씬 취약했고 잘못해서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었다. 스노우모빌은 매서운 추위와 험악한 지형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했으며, 후원사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양의 통조림도 얼어서 안 따지거나 심지어 터지기 일쑤였다.

영국이 자랑하던 자본력과 당대의 과학 기술은 남극에서만은 그들이 한낱 피지배민 루저로 치부하던 원주민들의 생활 노하우를 앞설 수 없었다.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부터 그 해 12월 14일까지 55일 동안 거의 1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끝에 남극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매일 23~24km씩 진행한 셈. 남극점 주변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었으니 그들이 1등을 한 게 확실했다.

아문센은 영국인들이 한 근성을 하기 때문에 스콧 팀도 아마 며칠 안으로 남극점에 곧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콧 팀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4일이나 지난 이듬해 1월 17일이었다. 출발 시기가 열흘이 차이가 나고 거리 차이가 100km 정도 났으니 두 주~보름 정도의 간극은 자연스럽지만 한 달이 넘게 차이가 났다는 건 스콧 팀이 시스템적인 비효율로 인해 진행도 더뎠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하루 전인 16일부터 무수한 개들과 썰매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남극점에 다다르니 거기엔 역시나 노르웨이 깃발과 함께 천막이 만들어져 있었고, 약간의 물자와 쪽지가 적혀 있었다. 쪽지에 적힌 글은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고 한다.

“존경하는 스콧 대장님, 우리가 먼저 남극점에 도착한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서 귀환하지 못한다면 대장님께서 이 쪽지를 본국으로 전달해서 우리에 대한 증거로 삼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식료품과 털옷을 좀 남겨 놓고 가니,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대장님의 무사 귀환을 빕니다. 아문센 올림”


아문센은 라이벌을 배려해서 정말 정중하고 대인배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었지만, 이 문구는 스콧에게는 가히 자존심을 건드리고 비수를 꽂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스콧 팀은 물자가 부족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문센이 남긴 보급 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아문센 팀은 1월 25일에 자기네 베이스 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갔던 길의 역순으로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귀환이 42일이 걸렸으니 55일이 걸린 출발보다 기간이 두 주 정도 더 단축됐다.

그러나 개도, 말도, 설상차도 없이 터덜터덜 허탈하게 귀환하던 스콧 팀에게는 이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귀환을 시작한 지 한 달이 경과한 2월 17일인데 이들은 거의 반밖에 진행을 못 했다. 그리고 이때 팀원 중 지질학자인 에드가 에반스가 가장 먼저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미 몇 번 추락 사고를 당해서 뇌진탕과 폐렴 증세로 인해 건강이 몹시 안 좋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한 달이 경과하여 3월 17일이 되었다. 귀환 60일째이고 전체 경로의 70% 정도는 완주한 시점이었다. 대원 중 로렌스 오츠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서 이미 괴저가 발생하고 거의 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는 대원들이 자신을 부축하고 자신과 보조를 맞추느라 귀환이 지체되고 있는 걸 알았으며, 제발 자기를 버리고 먼저 가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스콧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오츠는 그 날 저녁, “대장님, 밖에 좀 나갔다가 오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는 불편한 발을 이끌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캠프 밖으로 절뚝거리며 나갔고, 그 길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는 시신조차도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눈보라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눈에 찍힌 발자국조차 이내 사라졌던가 보다.) 스콧은 오츠가 일부러 죽음을 택했다는 걸 눈치 채고, 그가 영국 신사다운 최후를 맞이했다고 슬퍼하는 한편으로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오츠의 살신성인도 나머지 세 명을 궁극적으로 살리지는 못했다. 살인적인 악천후 때문에 3월 19일자 캠프에서 스콧 일행은 더 나아가질 못하고 1주일이 넘게 고립되었다. 베이스 캠프까지는 약 200km쯤 남았기 때문에(이미 1000km를 넘게 이동했고, 다 와 감) 저 기간 동안 조금만 더 분발했으면 근처의 보급 기지에도 도착했을 것이고, 베이스 캠프에까지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했을 터이나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남극에 무슨 생각으로 물을 끓여야 하는 번거로운 홍차를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식료품과 연료는 이미 다 떨어졌고 홍차는 생잎을 뜯어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3월 29일, 나머지 대원인 에드워드 윌슨과 헨리 바우어즈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어둠, 절망으로 인한 기력 소진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탐험대장인 스콧도 같은 캠프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일기장에 죽은 두 대원에 대한 언급도 있기 때문에 스콧이 가장 나중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익사나 추락사처럼 단번에 훅 간 게 아니라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굉장히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은 셈이다. 스콧 일행의 시신은 그로부터 무려 8개월 뒤에 남극에 여름이 다시 찾아왔을 때 미국의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자, 다음 그림은 아문센(빨간색)과 스콧(초록색)의 남극 탐험 경로를 정리한 것이다. (출처: 영문 위키백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에서는 영국 신사의 기품을 지키면서 남극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콧을 애국자와 영웅으로 열렬히 치켜세우고 떠받드는 한편으로, 어쨌든 1등을 해 버린 아문센을 헐뜯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때는 아예 대놓고 역사를 왜곡하여 스콧이 먼저 남극점에 도착했다고 가르치기까지 하다가, 국제 사회로부터의 조롱과 비웃음을 한몸에 받고서야 슬쩍 시정했다.

영국이 이런 데서 은근히 찌질한 짓도 좀 했다. 영국인 중에서 양심껏 소신껏 아문센을 지지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한 사람은 스콧의 롤모델 탐험가이던 섀클턴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이 글에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아폴로 13호 같은 ‘성공적인 실패’를 기적적으로 이룩한 덕분에 이 양반 역시 아문센만큼이나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급인 위대한 탐험가로 역사에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 보기 바란다.

콩진호, 콩라인-_- 같은 예외를 빼면, 세상 역사에서 2등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지 못하는 게 통념이다. 허나, 남극에서만큼은 영국의 저런 집요한 로비로 인해 각종 시설물에 꼭 ‘스콧-아문센’ 브랜드가 심심찮게 남아 있다.

남극의 정복자 아문센은 거의 60년 뒤에 달에 갔다 온 닐 암스트롱만큼이나 세계의 영웅으로 등극하였고 곳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노르웨이 국내에서야 물어 보면 잔소리. 지금 한국으로 치면 김 연아, 안 철수 급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듣보잡 빈곤국이던 노르웨이의 위상을 그만치 끌어올린 사람이 역사상 누가 있었겠는가?

아문센은 교통 덕후여서 이 탐사 후에도 활발히 탐험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는 항공기 기술이 개발되던 시기인지라 남극을 아예 비행선으로 횡단하기도 했다. 그러다 1928년에 비행선 사고로 인해 행방불명되는 걸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이 우주 개발 경쟁을 할 때도 인공위성을 먼저 띄우고 달에 사람을 먼저 보내려고 기싸움이 엄청 벌어지긴 했다. 그러나 우주 개발은 전적으로 자본력과 기술에 의해 승패가 기울었으며, 다행히 우주 공간에서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도 없다. 또한, 소련은 자기네 연구 과정을 워낙 폐쇄적으로 공개를 잘 안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아문센과 스콧에 필적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없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11 19:39 2012/06/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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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上

인류 역사상 인간이 지구 밖으로 제일 멀리 나간 여행은 1970년의 아폴로 13호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세 명의 승무원이 모두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폭발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후 승무원과 관제 센터 직원들은 가히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승무원들은 갈증과 추위에 떨면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m(현재는 더 높아져서 8850이라고도 하는데)의 높이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이며, 인간이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등반 후 생환에 성공한 것은 1953년의 에드먼드 힐과 텐징 노르게이의 공동 등반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산들은 높아 봤자 대류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대류권에서는 고도가 1km 상승할수록 온도는 대략 6.4도 정도 떨어진다. 그래서 이런 높은 산들은 일년 내내 기온이 영하이고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 지대이다.
또한 해발 고도가 5천 m 정도 되면 기압도 해수면의 절반 정도로 떨어지고,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 무렵에서는 아예 1/3기압이 된다. 물은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에 밥을 지어도 쌀이 잘 익지 않으며, 산소도 덩덜아 부족하기 때문에 비숙련자는 조금 걷기만 해도 지표면에서 100미터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헉헉 숨이 차게 된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도면 지형이 그렇게 험하지 않으며(특히 이웃의 콩라인 K2에 비해서) 인지도도 압도적이고, 덕분에 등산로도 개척될 대로 개척되어 있어서 찾는 사람이 연간 수백여 명에 달한다. 그래서 인근의 네팔은 등산료와 관광 수입을 톡톡히 챙기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잘 알다시피 심지어 산소통 없이 등반한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계의 지붕인 이런 산들은 오늘날에도 만만한 곳이 아니어서 날씨가 험악할 때는 입산할 수 없으며, 해마다 최소한 국내의 철길 건널목 사망자 정도만치는 산에 오르다 죽는 사람이 꼭 나온다고 한다.

한편,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필리핀의 근처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 중에서도 더욱 아래에 11034m의 깊이를 자랑하는 비티아즈 해연이다. 1957년에 이곳을 발견한 구소련의 탐사선 비티아즈 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탐사선이 그렇다고 해연의 밑바닥까지 다 내려가 본 건 아니고, 일정 수준 이상의 깊이부터는 그냥 초음파만으로 깊이를 측정한 거라고. 실제로 거기 밑바닥까지 내려간 건 1960년에 미국에서 트리에스테-II 호가 해냈다.

일반 비행기가 공기 때문에 성층권도 못 벗어나고 한없이 높게 뜰 수는 없듯, 일반적인 잠수함들 역시 의외로 깊게 못 들어간다. 겨우 대륙붕 정도의 깊이밖에 못 들어가고 최첨단 핵잠수함도 500~700m 정도의 수심이 한계라고 한다. 군사 목적으로도 더 깊게는 들어갈 필요도 없고, 어차피 그 깊이 안에서 더 오래 머무르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말이다. 더 깊게 들어가려면 그 용도로 특별히 제작된 심해 잠수정을 써야 한다.

1만 미터 정도의 수심에서 물체가 받는 압력은 무려 1천 기압. 1㎠당 8톤의 힘이 가해져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살인적인 압력이다. 수심이 10미터 깊어질 때마다 대략 1기압이 증가하며(참고로 금성의 표면의 대기압이 90~95기압. 덜덜~) 덩달아 빛도 적어져서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느 수심과 압력 이상부터는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된다. 태양열이 닿지 않으니 수온 역시 영하급이다.

심해 잠수정은 실용성은 포기한 채 최대한 둥글고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졌고, 트리에스테 호는 무거운 추를 잡고 가라앉은 뒤, 그 추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 떠 올라오는 방법을 썼는데, 그때는 기술상의 한계로 20분 남짓밖에 못 머무르고 다시 올라와야 했다. 그러다가 타이타닉 호의 제작자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거의 반세기 만에 비티아즈는 아니고 챌린저 해연이라고 만만찮게 깊은 밑바닥을 2012년 지난 3월 말에 탐사한 바 있다.

우주나 심해 탐사는 아무래도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산 등정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극소수의 연구원이 최첨단 기계에 탑승해서 탐험하는 형태가 아니라 목적지를 직접 발로 걸으면서 탐험하며, 물자를 보급하는 보조 staff의 숫자도 아주 많다. 마치 영화 한 편이 배우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오늘날은 마음만 먹으면 항공기로 금방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냐는 질문은, 이건 마치 상대방을 쓰러뜨리려면 권총을 쓰면 되는데 뭣 하러 무술을 연마하냐 하는 식의 우문우답이 될 듯하다.

지구에 저런 높은 산 말고 또 남아 있는 혹독한 미지의 환경으로는 사막과 극지방이 있다. 이 중 사막은 제끼고,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는 두 꼭지점인 북극점과 남극점은 18세기~19세기 초 사이에 탐험계의 성배로 여겨져 왔다. 그 당시 인류 최초로 북극점을 정ㅋ벅ㅋ한 사람은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로 알려져 있었다(1909년 4월. 훗날 그건 오류로 판명되긴 했지만). 그리고 남극점을 정복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다(1911년 12월).

산이나 해저나 우주 같은 다른 곳에 비해서는 비교적 일찍 정복된 영역이지만, 두 극점 중에서 남극점에는 다른 미지의 영역에는 없는 특이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때는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과 영국의 로버트 스콧 팀이 남극점을 먼저 찍으려고 경쟁 중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듣보잡 빈민국에 불과했던 노르웨이가 물자가 월등히 더 풍부했던 대영제국을 누르고 압도적인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문센 팀은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개들만 약 40마리쯤 죽었음;;) 국제적인 영웅이 된 반면, 스콧 팀은 그렇잖아도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우울하게 돌아오는 길에 며칠째 혹독한 눈보라 때문에 조난을 당해서 스콧 포함 5명의 팀원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두 팀의 결말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달라진 것에는 단순히 운(날씨)보다 훨씬 더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문센은 원주민들의 노하우를 받아들여 극도로 최적화와 현지화를 잘 해 간데 반해 스콧은 남극 탐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했으며 쓸데없는 곳에서 괜히 명분과 품위만 따지다가 참혹한 낭패를 당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사람들 얘기를 좀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09 19:25 2012/06/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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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대 김 빛내리 교수라고 우리나라에서 미생물학 내지 bio-informatics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가 계신다. 최종 학력은 옥스퍼드 대학 박사. 대외적으로 쓰는 영어식 이름은 Narry Kim이라고 한다. (오옷) 연구실 이름은 “RNA 생물학 연구실”.

이분은 외국의 저명한 일류 학술지에 수시로 논문을 냈으며 한국의 촉망 받는 여성 과학자로 이미 여러 번 선정되고 상도 받고 언론도 탔다. 진짜 이름값 하는 인생을 살았다. 허나 본인은 생물학에 완전 문외한인 관계로, 이분 소개는 예전에 이 광근 교수 같은 분을 소개할 때만치 자세하고 정확하게는 못 한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

본인의 지인 중엔 대학원에 진학하여 생물학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는 친구가 있다.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먼저 김 빛내리 교수 얘기를 꺼내자 걔도 “어, 너도 그분이 누군지 아는구나.” 하고 반가워했다. ^^

비슷한 예로, 본인의 동창 중에는 정말 학창 시절 내내 수학과 물리만 파면서 살던 덕후로, 과학고와 카이스트의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하며 사는 놈이 하나 있었다. 걔에게는 “잘은 모르겠지만 네 연구 분야가 그럼 이 휘소 박사가 파던 분야하고 비슷한 거냐?”라고 거들먹거려 주니까 걔 역시 반가워하더라.

2.

난 강 용석 씨가 한창 안 철수 씨를 때리는 글을 블로그에다 올릴 때 그의 글을 통해서 김 교수에 대해서 처음으로 듣게 됐다. 세상에 그런 엄청난 연구 업적을 남긴 사람도 그 긴 시간 강사 생활을 거쳐서 힘겹게 교수에 임용되고 그 짬밥에 아직도 조교수· 부교수 급인데, 안 철수 부부에게 주어진 서울대 정교수 특혜는 해도 해도 너무한 사기 수준이라고 말이다.

본인 역시 안 철수 씨가 머리와 노력을 겸비한 의학도 출신의 엄친아 수재이고 왕년의 컴덕후 겸 훌륭한 기업인· 경영자인 것은 응당 인정한다. 하지만 교수 세계에서 그 정도로 급격한 진급이 합당할 정도로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안 씨가 허접해서가 아니라 학계에는 유명세만 안 탔을 뿐이지 안 씨보다 더한 우주괴수들도 많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석학’은 아니잖아?

뭐, 강 용석 씨 자신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스펙과 프로필을 자랑하는 똘똘이 수재이며 한때는 시사와 관련하여 굉장히 통렬하고 날카롭고 속 시원한 글을 많이 올리긴 했다. 하지만 좀 싸가지 없는 말투와 교만과 오만방자함 때문에 지금은 다시 버로우 탄 듯하다. 조금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안목이 아쉬웠다. 지금까지 실패를 모르고 빳빳하게만 살아 와서인 걸까.

3.

김 빛내리 교수 말고 본인이나 평범한 한국인들이 아는 유명한 여성 과학기술인으로는 역시 윤 송이 씨가 있다. 학력은 잘 알다시피 서울 과학고에 카이스트를 거쳐 MIT 박사이다. 모교로 돌아와 교수의 길을 갈 법도 한 진정한 엄친딸이지만, 이분은 그냥 곧바로 기업체로 간 경우이다. 사실 윤 씨는 일단 진로 자체가 과학자보다는 공학자에 훨씬 더 가깝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억만장자가 됐을 터이니 굳이 교수 자리가 아쉬울 필요도 없다.

윤 송이 씨의 여동생인 윤 하얀 씨는 언니의 명성에 너무 가려져서 조명을 못 받았을 뿐이지 역시 만만찮은 천재로,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여 과학자의 길을 갔다고 알려져 있다. 분야는 생물학. 뭐, 본인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선배나 동기 중에 남매가 나란히 동일한 과학고에 입학하는 흠좀무스러운 형제· 남매가 있긴 했다.

윤 씨와 달리 김 교수가 과학고 출신이 아닌 이유는, 그 시절에 아직 주변에 과학고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김 교수는 1969년생. 서울 과학고가 1989년 개교이니, 그 시절엔 한국의 과학고 1호인 경기 과학고밖에 없었다. 윤 송이 박사가 1975년생이고 아마 서울 과학고의 초창기 졸업생이지 싶다.

4.

김 빛내리 교수와 상당히 비슷한 이름이 옛날에는 범죄의 안타까운 희생자의 이름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바로 1997년의 ‘박 초롱초롱빛나리 양 유괴· 살해 사건’인데 기억하는 분 있는가? (자동사와 타동사의 차이밖에 없다.) 언론에서는 편의상 줄여서 ‘박 나리’ 양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특이하게 긴 이름을 갖고 있고, 또 가해자는 겨우 20대 후반의 면식범 임산부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끼친 충격이 굉장히 컸다. 가해자의 남편은 경찰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아내에게 거의 멘탈 붕괴 상태로 “○○야, 설마 네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지? 제발 아니라고 얘기해 줘!”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못 말리는 된장녀 기질과 과시욕, 외국 유학을 갔지만 적응 못 하고 다시 돌아온 것, 입만 열면 횡설수설 거짓말, 자기 잘못은 인정 안 하고 끊임없는 변명 등을 보아하니, 본인은 가해자인 전 현주 씨의 모습이 21세기를 풍미한 희대의 또라이 사기꾼인 신 정아 씨하고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 내역은 성격이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비슷한 종류의 정신병 기질이 아닌가 싶다.

법조인들이 보기에도 전 씨는 죄질이 매우 나빠 보였고, 그래서 엄벌이랍시고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8살짜리 딸을 잃은 유가족들은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분노했다. 그래도 가석방이나 사면 따위 없이 전 씨는 지금까지도 40이 넘은 나이로 교도소 복역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당연히 이혼을 했으며, 그때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진작에 외국으로 입양되었다. 쩝~
(애초에 저 여자,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하다. 온갖 감언이설로 자기 처지를 속이고 남자를 속였지 싶다.)


김 빛내리 교수로 얘기를 시작했는데 정작 이분 자체에 대한 얘기는 별로 못 하고 같이 덩달아 떠오르는 주변 지식 얘기만 잔뜩 늘어놓게 됐다. ^^
참고로 한글 학회 직원 중에도 ‘김 한빛나리’ 선생님이 계신데, 이분은 남성임.

Posted by 사무엘

2012/05/29 08:40 2012/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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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함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회로부터 온 옛날 메일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발견했고, 거기에 역대 동문들의 근황 목록이 있는 걸 열어 봤다.
내가 다닌 학교의 특성상, 역시 선후배나 동기들이 다들 프로필이 너무 쟁쟁하고 너무 잘 돼 있고 대단했다.

  • 삼성맨이 된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생산직이든 영업부 사무직이든, 박사급 정예 연구원이든 분야 한번 참 많았다. 인터넷 신문 기사 댓글이나 SNS, 파워 블로그만 보면 삼성 욕하는 글로 넘쳐나지만, 역시 넷심은 민심과 일치하지 않는 법. 현실을 지배하는 건 돈의 힘이며, 삼성 전자는 지금도 여전히 공돌이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직장 1위이다.
  • 좀 덜 유명하고 입결이 낮다 싶은 학교에 갔다 싶은 친구들은 그 대신 과가 전부 의대였다. 예외가 없었다. ㅋㅋ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이공계의 희망이다 싶던 친구들이 공무원, 금융권, 의전으로 U턴을 생각보다 많이 해 있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전교 최고의 수학 영재로 이름을 날리던 어느 후배가 서울대 치의전에 가 있었고, 나와 대학을 같이 가고 나중에 서울대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까지 했던 1기 아래 후배도 다시 의전으로 진로 변경한 듯.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니 어딜 가도 다 제 갈 길을 잘 찾아가 있다. 그래서 이런 와중에 나는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면서 각오를 새로 하게 되었다.

어차피 저것들은 다 내 길이 아니다. 난 어차피 그런 학교도 공부 성적이 아닌 오덕질로 간 것이고, 내 진로에는 선례가 없다. 빨랑 석사 졸업하고 나서 박사 가서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다음 아이템에 목숨 거는 수밖에.
이거 덕질에 비하면, 철도 덕질은 덕질도 아니고 오히려 진짜 덕질을 은폐하기 위한 떡밥일 뿐이었음이 밝혀질 것이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다. 오늘은 본인의 고등학교 동문 중에, 매스컴에 아마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인물을 소개하겠다. 바로 금 나나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2년 5월, 얘가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혔다. 나나는 본인의 바로 한 기수 아래인 후배이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본인은 얘를 학교 기숙사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원래 미스코리아 대회는 1988년부터 2001년까지는 전국구 공중파 방송인 MBC가 생중계를 해 줬다. 하지만 선정성과 성 상품화 논란 때문에 미스코리아 안티까지 생긴 마당에 하필 딱 2002년부터 그 관행이 폐지되고, 미스코리아 중계는 케이블 TV로 관할이 넘어갔다.

대회는 세종 문화 회관에서 열렸다. 카이스트에서도 고등학교 선배와 동기들은 TV를 주시하였고, 몇몇 동기들은 아예 현장에서 나나를 보러 서울로 갔다. 그 시절 물가로 5만원짜리 좌석이 3층에 있고 무대에서 완전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더 가깝고 좋은 자리는 당연히 돈이 훨씬 더 많이 든다.

구체적인 디테일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건, 나나는 그때 인터뷰의 질문에 말을 너무 조리 있게 지적으로 잘 했었다는 점이다. 관중석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 이미지에다가 특목고+의대 출신이라는 점이 더해진 덕분에, 나나는 쟁쟁한 서울 출신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치고 결국 진을 차지했다.

TV를 보던 고등학교 동문들은 그때 동기나 선후배 가리지 않고 서로 얼싸안고 난리가 났었다고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더니 끝에 “경북 과학고 파이팅!”이라고 외쳐서 감동이 더욱 고조되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 진출했을 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간 직후이니까 모교에 대한 애교심(?)도 팔팔하던 시절이다.

이 일은 당연히 고등학교의 인지도의 변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교내 1층 복도에는 재학 시절에 전국 규모 이상의 경시대회에서 입상한 학생들의 사진이 걸린 명예의 전당이라는 게 있었는데, 금 나나는 재학 시절에 다른 입상 경력이 없고 미스코리아 입상은 졸업 이후의 행적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추후에 추가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인터넷에 얘 팬카페도 생겼다. 그 후 그녀는 언론에도 잘 알려졌듯이 책도 여러 권 쓰고 나중엔 하버드 대학에 편입해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미스코리아 경력 버프도 많이 받아서 들어갔겠지만, 결국 졸업할 때도 역시나 성적 우수자로 졸업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미국의 다른 대학에서 생물, 영양, 보건 쪽으로 박사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듯. 뭐 이미 너무 유명인사가 돼 버렸고 앞날이 창창하니 굳이 더 근황을 궁금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학고 동문 중에 이런 이력의 소유자가 나오는 건 분명 특이한 경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은 괴팍한 분야에서 특이한 연구로 가까운 미래에 이름을 남기련다.

재작년인 2010년엔 뜻하지 않은 경로로 고등학교 후배를 만난 적이 두 번 있었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갔던 예비군 동미참 훈련 때, 예비군 아저씨들 중에 정말 우연히도 2기수 후배와 마주쳤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인데.. 정 동수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사랑 침례 교회에서 그 해 8월에 개최했던 청년부 교제 모임 때는 무려 10기수 후배를 만나기도 했다. 나는 6기이고 그 친구는 2008년에 입학한 무려 16기! 세상에, 킹 제임스 진영에서 까마득한 고등학교 후배를 만나다니!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모르겠다. 세상이 좁다는 걸 느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5/13 19:34 2012/05/1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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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녀와 야수 (1991)

정말 동화적인 환상으로 가득한, 전형적인 디즈니스러운 작품이다. 역대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에는 에리얼(인어공주), 포카혼타스, 자스민(알라딘), 뮬란 등 여러 여주인공이 있는데, 역시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벨이 내가 보기에 제일 예쁘다. 나의 미의 판단 알고리즘이 이미 서양 기준에 물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제목에서부터 미녀를 표방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이 당시에는 여전히 2D 애니메이션이 주류이지만,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이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알라딘의 경우 용암과 양탄자에서 CG가 들어갔고, 미녀와 야수에서는 둘이서 드디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때 배경이 간지나는 3차원 CG로 처리되었다.

엔딩에서 야수에게 걸린 저주 마법이 풀리는 장면이 정말 아름답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후에 이 땅에 걸린 저주가 풀릴 거라고 하는 성경의 예언을 기억나게 한다. 이것도 명장면이지만, 나중에 나온 라이온 킹은 음악을 너무 잘 만들어서 그 감동이 전작을 압도해 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에 라이온 킹에 대해서 얘기할 때 다시 다뤄질 것이다.

미녀와 야수에서 벨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를 담당한 성우는 Paige O'Hara(페이그 오하라 1956~)라고 하는 중년 여성이다. 이런 장편 만화영화는 중간에 뮤지컬처럼 노래가 이따금씩 나오며, 동일 주인공에 대해서도 일반 대사 성우와 노래 성우를 따로 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벨의 목소리는 일반 대사와 노래가 모두 동일 인물이다.

인어공주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주제가 Under the sea를 작곡하고 미녀와 야수의 Tale as old as time을 작곡한 음악가는 Howard Ashman (1950~1991)이다. 이 분야에서는 가히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는데, <미녀와 야수> 영화 제작 중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인해 작업을 다 못 끝내고 4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미녀와 야수> 영화를 다 보고 credit roll까지 다 올라가고 나면, 저 사람을 추모하는 tribute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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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온 킹 (1994)

월트 디즈니 사의 역대 최고 대박으로 손꼽히는 명작이다. 동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화 같은 만화영화가 과연 흥행 성공할 수 있을지 처음에는 디즈니 내부적으로도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으나, 라이온 킹은 결국 제작비의 20배가 넘는 수익을 낸 걸로도 모자라, 영화의 수명이 다 끝난 뒤에도 각종 캐릭터 상품 로열티로 계속 돈을 벌어다 줬다.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로 이 만화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본인이 받은 임팩트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게 묘사된 아프리카 정글, CG로 만들어진 살떨리는 들소 떼 돌진(stampede) 등 여러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두 영국인(Tim Rice와 Elton John)이 작곡한 음악들이 아름답고 엔딩이 너무 감동과 전율이었다. 난 라이온 킹을 능가하는 퀄리티의 엔딩이 나오는 영상 매체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스카를 물리친 후 심바가 Pride Rock에 오를 때 흘러나오는 역동적인 엔딩 음악은 뭐랄까.. 찬송가로 치면 예수님의 부활을 표현하는 <무덤에 머물러> 같은 느낌이다. Pride Land가 잿더미에서 다시 옛날의 모습을 회복한 뒤에 이어지는 코러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광복이나 남북 통일, 영적으로는 계 21:4를 떠올리게 할 정도의 환희와 희열 그 자체이다.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든 사람이 이런 음악을 작곡하고 공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직접 들어 보시라. 겨우 허구의 만화영화 엔딩으로만 쓰기엔 아까운 퀄리티이다.

라이온 킹은 ‘하쿠나 마타타’ 같은 문구를 포함해, 주인공의 각종 이름에도 아프리카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 표현을 많이 퍼뜨렸다. 무파사, 심바, 라피키는 다 스와힐리어라고 한다. 다만, 무파사의 동생이며 반동 인물인 스카(Scar)는 응당 영어 단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눈가에 흉터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하이에나 3총사의 이름은 잘 알다시피 반자이· 셴지· 에드인데, ‘반자이’도 스와힐리어이며, 통념과는 달리 일본어 ‘반자이’가 아니라고 한다. 로마자 표기까지 Banzai로 완전히 일치하지만,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_-)’ 할 때 그 반자이하고는 관계가 없으니 오해하지 말 것. 하이에나들 중에서는 ‘에드’만 스와힐리어가 아닌 영어 이름이다.

라이온 킹 이전에 본인에게 아프리카 밀림에 대한 환상을 심어 준 만화영화는 TV로 봤던 <재키와 머피>였다. 거기에다 <밀림의 왕자 레오>도 있으니, 일본이 웬일로 아프리카 동물을 배경으로 한 만화영화를 좀 만들긴 했다. 이 때문에 라이온 킹이 유독 일본에서는 짝퉁 표절 소리를 들으면서 세계 평균만 한 인기는 못 누렸다고 한다.

첨언하자면, 스와힐리어와 관련 지어 CCM 중에도 떠오르는 검색 결과가 있다. 1998년에 발매된 최 덕신의 <갈망>의 1번 트랙 <오 놀라워라>는 스와힐리어 코러스가 시작과 끝부분에서 반복해서 흘러나온다. 도입부에서 라이온 킹의 주제가인 Circle of Life가 약간 오버랩된 건 나만의 생각인 것 같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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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 정도로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만화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과연 천조국 미국의 기상을 느낀다.

다만, 음모론 쪽에 관심이 많은 기독교계에서는 디즈니 사와 그쪽 작품을 굉장히 경계하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디즈니 사 애니메이션 작가들 내부에서는, 일종의 이스터 에그 차원에서 좀 성적인 장면을 작품 안에다 아주 몰래 집어넣는 게 거의 관행으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

라이온 킹에서 심바가 풀밭에 털썩 주저앉을 때 SEX 모양으로 꽃가루가 생긴다는 루머, 들어 보신 적이 있는가? 디즈니 사에서는 SFX를 의도한 것이었다고 해명하다가 나중에는 제풀에 지쳐서 DVD로는 그 장면을 아예 삭제하고 판매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거 말고도 논란이 된 예가 몇 가지 더 있다. 무슨 디즈니 만화영화 포스터를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뚫어지게 들여다보면, 남근을 발견할 수 있다거나 그런 것.

물론 개중에는 도시전설, 과민반응 급인 루머도 있다. 하지만 그런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집단의 내부에서는 과연 어떤 오덕-_-질이 벌어지고 있을까? 계약직인지 정규직인지는 모르겠다만(모르긴 몰라도 예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프리랜서 형태로 작업을 하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이 디즈니 사의 일류 음악가가 에이즈에 걸려 죽었다는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굳이 저런 선정적인 주제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다니던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라이온 킹에 들어있는 소위 뉴에이지 사상(circle of life? 윤회?) 내지 아프리카 샤머니즘을 굉장히 비판하신 적이 있다. 라피키가 무파사의 환상을 심바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저건 영락없이 부리는 영(familiar spirit)을 지닌 자가 하는 짓이며, 구약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일 중죄이다.

하긴, 그 정도로 뼛속까지 성령 충만하고 성경의 사고방식에 단련되어 있는 사람은, 그 명작 타이타닉(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볼 때조차도 불륜과 음행, 반역을 미화하는 역겨운 영화라고 불편해한다. (누드도 나오고 아마 검열삭제 암시 장면도 있었을걸? ㄲㄲ) 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런 반성경적인 코드가 그토록 아름다운 영상과 음향에 아주 교묘하게 녹아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영화를 전면 거부하고 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경각심은 잊지 말아야겠다.

이런 저런 얘깃거리가 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가능한 한 디즈니 만화영화에 대해서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싶다. 요즘은 잘 알다시피 Pixar 합병까지 했겠다, 3D CG 애니메이션이 대세인데 어떤 작품을 만들며 지내는지 모르겠다. 본인은 2008년에 Wall-E를 본 게 마지막이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로도 음악에 대한 나의 감수성이 아직까지 죽지 않았음은, 거의 10년 가까이 뒤에 Looking for you를 통해서 입증되었다. (이 글은 철도 얘기가 없을 줄 알았지? 페이크다. ㄲ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12/03/15 19:20 2012/03/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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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동차 쏘나타

‘쏘나타’(Sonata)는 음악 용어인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 현역으로 살아 있는 국산 승용차 브랜드이기도 하다. 주행을 마치 음악 연주처럼 조화롭고 우아하게 예술의 경지로 소화해 낸다는 뜻을 담은 작명이리라. 제작사는 현대 자동차이다.

외래어 표기법 FM대로는 ‘소나타’라고 적어야 맞으나, 잘 알다시피 ‘소나 타(고 다녀라)-_-’라는, 자동차에게는 심히 굴욕적일 수 있는 개드립을 의식해서인지 공식 한글 표기를 ‘쏘나타’라고 바꿨다.
아니, 실제로 옛날엔 경쟁사인 대우의 김 우중 회장이 그런 언어유희로 쏘나타를 디스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뒤, 대우의 경쟁 차종인 로얄 살롱/프린스 시리즈는 깨끗이 사라진 반면, 쏘나타는 건재하다.

승용차는 뒷부분에 차명 엠블렘이 관례적으로 부착되어 있는데, “쏘나타의 엠블렘에서 첫 글자 S를 떼서 갖고 있으면 서울대에 붙는다”라는 웃기지도 않은 도시전설이 나돌았나 보다. 그래서 특히 학교에서 교사가 세워 놓은 차의 엠블렘이 졸지에 ‘쏘나타’에서 ‘오나타’(ONATA)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21세기에 출시된 후속 모델은 한 글자만 떼어 갈 수 없게 엠블렘이 일체형으로 바뀌었다는 후문이 나돈다.

본인이 이걸 보고 떠오른 건, 이 상 시인의 ‘오감도’이다. 쏘나타에서 글자 하나를 떼어내서 오나타가 되었는데, 이처럼 오감도는 잘 알다시피 건축 용어인 ‘조감도’(鳥瞰圖)의 한자에서 한 획을 떼어내서 오감도(烏瞰圖)로 바꾼 것이다. (잘 알다시피 작가는 문과 출신도 아니고 건축 공학 전공의 공돌이로, 시에다가 ‘가역반응’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글자를 변개하여 뭔가 2% 빠진 듯한 cripple을 만듦으로써, 장조에서 단조로, 완전 연소에서 불완전 연소로 바뀌는 것 같은 그리 불안하고 각박하고 즐겁지 못한 분위기를 연출한 셈이다.

얘기가 옆길로 좀 많이 빗나갔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쏘나타는 잘 알다시피 현대 자동차가 개발하여 판매하는 중형 세단 승용차이다. 기아 자동차의 K5, 그리고 르노삼성의 SM5가 동급 차량으로 쏘나타하고 경쟁하는 구도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쏘나타가 오히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아반떼와 그랜저 사이의 콩라인으로 전락한 면모도 있다. 안 그래도 기름값도 비싼데 아반떼 같은 더 작은 차를 장만하거나, 아니면 돈 약간만 더 보태서 더 크고 간지 나는 그랜저를 사고 말지, 쏘나타는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트렌드인 양극화의 손길이 자동차에까지 뻗친 것 같다.

최초의 쏘나타는 그랜저보다 1년 남짓 앞선 1985년에 출시되었다. 이때는 외형이 스텔라하고 별로 다를 게 없었다. MS 개발툴로 치면, 비주얼 C++ 1.0이지만 여전히 전신인 MS C/C++ 7.0스럽던 시절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쏘나타다운 고유 모델이 처음으로 나온 건 1988년. 바로 이것이다. 본인은 아직도 쏘나타 하면 이 모양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엑셀보다 더 크고, 특히 바퀴의 휠 모양이 저렇게 생긴 게 쏘나타의 고유 외형이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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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91년 초에 외형이 더 매끄러워진 뉴 쏘나타가 나오고 1993년에 쏘나타 2(II)가 나왔는데, ‘뉴’와 2는 외형이 서로 비슷한 편이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쏘나타 3이 나왔다. 3은 뒷부분의 붉은 램프의 디자인이 기존 쏘나타들에 비해 좀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1998년에 나온 EF 쏘나타는 램프 모양을 포함해 외형이 예전 모델보다도 더욱 알록달록 동글동글해졌다. 은근히 그랜저 같은 고급스러운 맛까지 느껴졌다. 이런 디자인은 2001년에 나온 뉴 EF 쏘나타도 물려받았는데, 헤드라이트에 원이 두 개인 듯한 파임이 들어가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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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나온 NF 쏘나타는 예전 모델들에 비해서는 다시 각진 느낌으로 돌아간 듯하다. 사실은 너무 오랫동안 우려먹은 쏘나타라는 브랜드도 다른 걸로 대체할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쏘나타로 회귀한 거라고 한다.

2007년는 마이너 업그레이드 버전인 쏘나타 트랜스폼이 나왔다. NF와 생김새가 거의 같지만 앞의 헤드라이트의 크기가 더 커지고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습도 살짝 달라졌다. 아래 그림에서 오른쪽이 NF 오리지널, 왼쪽이 트랜스폼이다. 구분할 수 있으시겠는가? 전동차로 치면 1차 도입분과 2차 도입분 사이에 생긴 미묘한 차이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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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날 쏘나타의 최신 모델은 잘 알다시피 2009년에 출시된 YF이다. 쿠페 스타일의 날렵한 외형은 역대 쏘나타들 중 가장 과감하고 참신한 디자인이 아닌가 싶으며,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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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반떼 MD(2010년형)와 그랜저 HG(5세대 2011년형)하고 좀 닮은 건 사실이다. 다들 비슷한 컨셉으로 디자인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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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나타의 역사를 통해 현대 자동차의 엔진 기술의 발달사도 엿볼 수 있다. 격투기의 체급이 체중에 따라 나뉘듯 자동차의 체급은 배기량으로 얼추 분류가 가능한데, 중형차에 속하는 2000cc만 예로 들자면 스텔라의 후속 모델이던 1985년형 쏘나타가 엔진 최대 출력이 110마력이었다.

그러던 것이 SOHC 대신 DOHC 엔진이 장착되면서 뉴 쏘나타에서는 동일 배기량으로 137마력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후 쏘나타 2(146마력)를 거쳐 쏘나타 트랜스폼에서 150마력대에 도달하고, 신형 YF 쏘나타의 2000cc 기본 모델은 이미 165마력을 찍었다. 그러면서도 연비는 오히려 미미하게 더 좋아졌다.

하긴, 옛날에 1세대 그랜저가 3000cc 최고급 모델의 최대 출력이 161마력이었으니 기술이 발달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건 SOHC 방식만으로 낸 출력이었다. SOHC와 DOHC의 차이는 컴퓨터로 치면 싱글과 듀얼 코어의 차이요, 생물로 치면 심방/심실의 수의 차이로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원래 YF 쏘나타는 예전 모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급형 2400cc 모델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얼마 못 가 명이 끊겼다. 위로는 그랜저 2400cc (쏘나타에게는 높은 사양이지만 그랜저에게는 낮은 사양)와 경쟁하는 구도가 되면서 완전히 밀렸고, 아래로는 너무나 성능이 좋은 2000cc 기반 쎄타 II GDI 터보 엔진이 개발되면서 2400cc 모델의 존재의 의미를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YF 쏘나타 2.4는 난 지금까지 딱~ 한 번 봤다. 2400cc 모델은 그랜저처럼 뒷부분의 배기구 머플러가 좌우에 쌍으로 두 개 달려 있다.

2011년에는 YF 쏘나타의 하이브리드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앞의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양이 더 단순하게 바뀌었다. 하이브리드인 덕분에 공인 연비가 21km라고 하는데, 옛날에 그 작고 열악한 티코의 최저 사양 연비가 24.1km(자동도 아니고 수동)였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경제성이 아닐 수 없다.

하이브리드 차량은 전기로 달릴 때면 너무 조용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이 자동차 소리를 못 들어서 위험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자동차 주행 소음을 만들어 주는 장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디젤 전기 기관차처럼 내연 기관과 전동기가 모두 달려 있다 보니, 더 무겁고 엔진 부품이 더 복잡하고 유지 보수 비용도 더 드는 건 감안해야 할 점이다.

쏘나타, 앞으로 몇 년 뒤엔 또 어떤 모델로 변모할지 궁금해진다.
난 어렸을 때 뒷좌석의 중앙에 팔걸이를 내릴 수 있는 차를 보고 굉장히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쏘나타에는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고급 승용차와 관련된 잡설을 몇 개 추가하며 글을 맺는다.

1. 한때 그랜저는 한국 최고의 고급차의 대명사로 통용되었다. 그 각그랜저의 위엄은 정말! 허나 지금은 그냥 준대형차 수준으로 옛날에 비해서는 굉장히 보급형 세속(?) 모델로 격이 낮아졌으며, 이젠 그랜저 택시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건 마치 새마을호의 위상의 변화를 보는 것 같다. 서울-대전-대구-부산만 찍던 도도한 열차가 지금은 흠.. 그래도 둘 다 현실적인 격은 좀 낮아졌을지언정 그 상징적인 의미는 변함없다.

2. 그랜저보다 더 고급인 레알 대형 차량으로 현대 자동차가 만들고 있는 차는 잘 알다시피 제네시스와 에쿠스이다. 둘은 외부에 현대 자동차 엠블렘조차도 있지 않아서 언뜻 보기에 외제차 같은 인상을 준다. 연비가 10km도 안 되는 3000~5000cc급 대형차들은 그야말로 기름 먹는 하마이며, 진짜 재벌이나 사장님들이나 타고 장군· 장관들 관용차로나 쓰일 법하다. 5명밖에 못 타는 승용차 주제에 최대 출력은 45인승 버스의 그것을 능가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2/03/13 08:20 2012/03/1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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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근 교수는 프로그램의 정적 분석 분야에서는 아마 우주괴수급의 전문가가 아닌가 여겨지는 분이다.
카이스트 교수로 첫 부임했다가 2003년부터 서울대로 이직했다. 학부 출신 역시 서울대. 1983년에 입학 당시 자연과학 단과대 수석을 차지했으며, 재학 성적 역시 내내 최상위권이던 수재였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교수는 상당한 동안이고 학생 시절 모습이 어땠을지가 상상이 된다.

개교 초창기부터 딱부러지게 전산학과가 있었던 카이스트와는 달리, 서울대는 198, 90년대엔 이과에 속한 계산통계학과와 공과에 속한 전자계산기공학과로 컴퓨터 쪽 학과 계열이 므흣하게 나뉘어 있었다. 통합된 컴퓨터공학부라는 게 생긴 것은 1990년대 말 내지 21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덧붙이자면, 연세대 역시 컴퓨터과학과라는 이름이 생긴 건 2005년부터이고 그 전엔 정보산업공학이라고 하여 이쪽으로의 분류가 모호했다.
IT 붐과 함께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학과 이름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일류대급에 속하는 대학에도 없었던 게 의외이다. 어쨌든, 이 교수 역시 당시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했다.

이분의 설파 교리(?)와 연구 분야는 이러하다.
먼저, 기계 중심적이지 않고, 수학적으로 더 엄밀하며 인간의 사고와 논리를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향한다. 사실, C/C++이나 자바는 오늘날의 최신 프로그래밍 언어 이론이나 방법론이 반영된 깨끗한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전산학 순수주의자(?)는 특별히 람다 대수에 기반한 OCaml이나 최소한 Scheme 같은 함수형 언어를 선호한다. 함수가 마치 일반 상수처럼 코드 중간에서 별다른 작명 없이도 자유롭게 만들어지고 값처럼 다뤄질 수 있다.
이게 좋은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심지어 C++도 C++0x에서는 함수 포인터를 대체할 만한 람다 대수 문법이 추가되었으며, 비주얼 스튜디오 2010에서는 F#이라는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가 새로 도입되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이다.

그리고 이 교수가 연구하는 정적 분석이란, 프로그램을 실제로 실행해 보지 않고, 그 구조를 뜯어보기만 하고서 이 프로그램이 잠재적으로 배열 첨자 초과 오류나 메모리 누설 따위가 발생할 수 있겠다고 진단을 내리는 기술을 말한다. 사실, 좋은 프로그래밍 언어란, 컴파일러만 통과한 프로그램이라면 뻗지 않고 잘 돌아간다는 보장이 되어야 하고 컴파일 시점 때 해당 코드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모든 문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분의 지론이다.

이게 가능할까? 입력은 키보드나 파일로 들어오고 메모리 할당과 해제가 일어나는 통로가 주어져 있을 때, 복잡한 루프와 배열, 함수 재귀호출, 다중 포인터 로직을 추적하면서(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게 아니고!) 딱 보고 이 코드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찾아내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ㅋㅋ

당연히 머리가 터져나가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프로그램을 일일이 실행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꼼꼼하고 확실한 검증이 행해질 수 있다. 자동차를 실제로 만든 뒤에 충돌시켜서 부숴 보지 않고도 디자인만 딱 보고 운전자의 안전에 어떤 문제가 있겠는지 예측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 않은가.

사실, 프로그램 정적 분석과 뿌리를 공유하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바로 전산학에서 다루는 정지 문제(halting problem)이다. 이는 오늘날의 컴퓨터 모델인 튜링 기계에서는 100% 완벽하게 푸는 게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게 증명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그램 정적 분석기 또한 100% 완벽하고 정확하게 동작하는 건 불가능하다. 실제로는 문제가 있는 부분이 아닌데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는 false alarm도 존재한다. 그 이상 더 정밀하게 동작할 수는 없기 때문.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어디냐. C/C++은 성능이 무지막지하게 좋은 대신, dangling pointer, memory leak, buffer overflow 등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무시무시한 버그와 보안 문제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chaotic한 언어가 아니던가? 전산학 전공자는 소프트웨어 공학 시간에 익히 배워 알듯, 소프트웨어 개발이란 건 그렇잖아도 작업의 절대적인 양과 질을 측정하기가 어려운 분야이다. 그러니 소스 코드를 정적 분석으로 검증하는 시스템이 없이는 IT 산업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뻑이 날지 모르는 C/C++ 언어로 의료 기기나 우주선 같은 크리티컬 시스템을 만들거나 사용하려면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 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짜로. -_-;;

이런 복잡도를 제어하는 시스템을 연구하는 게 이 광근 교수의 목표이다.
그분은 이걸로 이미 저명한 학술지에 적지 않은 논문을 냈고, 소프트웨어 검증 솔루션을 개발하여 기업체에 납품했다.

사실, 비주얼 스튜디오도 일반인이나 학생이 사용하는 라이선스 말고 제일 비싼 엔터프라이즈급 라이선스 제품을 써 보면, 소스 코드 정적 분석 기능이 들어있다.
기회가 되면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도 그런 걸로 한번 좀 분석해 봐야 할 텐데 말이다. 메모리나 GDI 개체, 커널 핸들 등 해제가 필요한 자원들은 전부 클래스 소멸자가 처리하게 바꾸고, 지속적인 개량과 코드 리팩터링을 해 왔기 때문에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이제 없으리라 여겨진다만, 이걸 시스템 차원에서 깔끔하게 입증을 못 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

코드를 실행하지 않고 척 들여다보기만 한 뒤 그 코드로부터 문제될 만한 부분을 알아서 찾아 내는 것은 활용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 마치 공항 검색대가 가방을 열어 보지 않고 사생활 침해 걱정이 없이 비행기에 실을 수 없는 물건을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얼마나 유용한 기술인가?

이 광근 교수는 자기 연구 분야를 차치하고라도, 독특한 스타일의 강의 자료나 여러 글들을 읽어 보면, 가히 공부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며 정말로 보통사람이 아니다 싶은 면모가 여럿 느껴진다. 특히 이분은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대한 관념이 굉장히 투철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 “MIT라는 이름은 본토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황해도 과기원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으며, 떼제베도 프랑스 원어민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단지 매우 빠른 열차일 뿐이다. 우리만 혼자 폼나 보인다고 외래어 알파벳을 남발하고 있다.”
  • “비록 어떤 개념이나 기술이 외국에서 유래되었다 하더라도, 그 원판을 능가하는 학문적 성과는 언제나 모국어를 통해서만 이뤄져 왔다.

외래어는 싹 다 배격하고 정확· 엄밀함을 희생해서까지 무조건 뭉뚱그려서 순우리말만 쓰자는 국수주의 주장이 절대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의 주장이다.
작년에 한창 카이스트가 자살과 영어 강의 때문에 시끄럽던 시절에 이분은 자기의 지론을 다시 한데 정리한 개념글을 하나 교수신문에다 기고했다. 그 후 이 글은 전산 비전공자, 심지어 인문학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인용되고 폭풍처럼 칭송받고 있는 중이다.

IT 쪽 최정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례적으로 용어 순화와 모국어 강의를 옹호하니 뜻밖이지 않은가? 저 글에 딱히 정치색이 있는 건 물론 전혀 아니지만, 영어 강의, 세계화 이런 것들을 반대하고 이념적으로 진보 성향이 좀 있는 사람들이 더욱 지지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 국 교수도 그 글을 완전 극찬한 바 있다.

카이스트 교수 부임 시절에 이 교수는 학과 이름을 전산학과에서 컴퓨터xx학과로 바꾸는 것도 괜히 쓸데없는 일이라고 만류한 적이 있다. ACM, IBM의 M은 완전 구닥다리 용어인 '기계'라는 뜻이지 않냐고 말이다.

그리고 대학 캠퍼스 내부의 건물들을 초행자도 식별하기 쉽게 번호가 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신 바 있다.
그 제안 때문인지 이분이 서울대로 전근 가신 뒤에 얼마 안 되어(2004~2005년쯤 아마?) 카이스트도 건물들에 N0, E0, S0 같은 식으로 번호가 붙었다.
서울대는 워낙 건물이 많고 내부가 복잡해서 진작부터 그런 게 있다.
연세대는 그런 거 없다. 본교 도입이 시급합니다.

지금이야 카이스트 전산학동이 수 년 전부터 몇 층 더 증축되었지만, 그 당시에 이 광근 교수는 아마 공간 부족으로 인해 전산학동이 아닌 이웃 산업공학동에 연구실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이 더해져서 그분은 서울대로 전근을 가신 걸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전산학과의 김 태환 교수도 서울대로 가셨다.

이분의 수업은 진짜 그냥 온갖 기호와 공식, 증명이 즐비한 수학 덕후식이며 빡세다..;;;
그래서 카이스트 재학 시절, 내게는 좀 굴욕적인 기억이 있다.
C++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중독되다시피하던 내 머리 구조로는 nML이네 뭐네 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PL”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전공 필수 과목일 뿐만 아니라 전근을 앞둔 스타 교수의 마지막 수업을 드랍하고 말았다. 2003년 봄 학기의 일이다. 그것도 수강 변경도 아닌 철회 기간에 출혈을 감수하며 드랍.

난 그 당시 <날개셋> 한글 입력기 2.x와 3.0의 개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은 복잡한 추상화 계층이나 뜬구름 잡는 이론에는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동기 부여를 받으면 철도 덕후 수준으로 머리가 미쳐 돌아가지만, 동기 부여가 없는 곳에는 난 담을 확 쌓아 버리고 죽어도 관심 안 보인다. 역시 난 프로그래밍으로 다른 창의적인 작품을 만드는 게 삶의 목적이지, 프로그래밍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일은 내 적성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C++보다 더 엄밀하고 깔끔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수학 덕질하는 것보다는, 당장 윈도우 API로 옛한글과 세벌식 모아치기를 구현하는 것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어서..

그래서 나중에 한 태숙 교수의 PL을 다시 들었다. 이분의 PL 수업이 그나마 내가 생각했던 PL 수업에 더 근접한 평범한(?) 것이었고, 들을 만했다.;; 각종 프로그래밍 언어들의 특성과 개념, 값의 평가 시기, LL 파서, LR 파서, garbage collector의 동작 원리 등등.. 참고로 덧붙이자면, 내가 예전 글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듯 한 교수 역시 왕년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대입 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차지했던 공부 만렙 괴물이다.;;

현재는 카이스트 전산학과의 류 석영 교수가 과거 이 광근 교수의 제자이며, 그분 뒤를 이어 카이스트 프로그래밍 언어 연구실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한 태숙, 최 광무 교수와 같이).
류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이 교수 연구실은 말도 못 하게 무지막지하게 빡세기 때문에, (그 대신 잘 적응하면 얻는 것도 많겠지);; 어지간한 각오가 돼 있지 않다면 그분 연구실로 대학원 진학을 하는 건 비추라고 한다. =_=;;;
그래도, 좀 까칠한 것만 빼면 교수님은 학자로서 정말 좋은 분이라고.. ㅜㅜ

어쨌든 이 광근 교수. 수업 하나 들은 적도 없이 헤어졌지만, 이런 식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본인이 이분에 대해 수집한 모든 정보들의 출처는 당연히 그분의 공식 홈페이지이므로, 관심 있으신 분은 방문해 보시라.

Posted by 사무엘

2012/02/29 19:12 2012/02/2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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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으로부터 이어짐)

왕년에 게임 개발자였던 Bill Williams가 진로를 바꾼 것에는 그의 기구한 성장 내력도 작용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이라는 희소 유전병을 지니고 있었다(몇백· 몇천 명 중에 한 명꼴로 걸리는 병이고 아시아· 아프리카계 사람에게는 거의 발견되지 않음. 열성 유전자.). 인체 장기 내부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점액이 선천적으로 이상하게 만들어져서 각종 물질대사와 질병 면역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이 때문에 보균자는 몸의 이곳저곳에서 탈이 나면서 오래 못 살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한다. 무슨 에이즈도 아니고..?

애초에 그는 13세까지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지만 예상의 3배에 가까운 기간을 산 상태였다.
그가 신학교를 다닌 지역인 시카고는 공기가 그리 안 좋은 곳이었고, 거기서 지낸 2년간의 시간이 그의 지병을 악화시켰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고통과 고뇌 가운데서 Naked Before God: The Return of a Broken Disciple이라는 책을 썼다. 예수님 시대에 ‘나다니엘’이라는 어느 소심하고 병약한 젊은이가 몰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이 세상의 질병과 슬픔, 고통에 대한 의문의 해결책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작가 자신의 삶을 그린 자서전적 소설이다. 교리보다는 영성 분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생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성경의 욥기가 떠오르기도 하고, 요한복음 2~3장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주인공을 설정한 첫 모티브는 막 14:51-52이라고 한다.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그 유명한 사건! 책 제목에 괜히 naked란 말이 들어간 게 아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못 가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마존 서평을 보니 책에 대한 독자 리뷰는 굉장히 좋은 편이다. (구글 도서 서비스는 완전히 엉뚱한 동명이인을 책의 저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니므로 착오 없기 바란다.)
15년 전의 그의 대표작인 Alley Cat이라는 게임과는 너무나 딴판인 분위기이지 않은지?

그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 IT계에 있다.
오늘날 전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압축 알고리즘인 zip을 고안한 사람은 Phil Katz (1962-2000)라는 천재 프로그래머이다. 도스 시절에 쓰이던 pkzip, pkunzip에서 pk는 당연히 그의 이름의 이니셜이며, 사실 모든 zip 파일은 첫 부분이 PK라는 문자로 시작한다.

jar이나 안드로이드 apk, 그리고 MS 오피스 2007 문서들도 다 zip을 컨테이너 파일 포맷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그 인지도는 얼마나 압도적인가?
도스 EXE의 식별자인 MZ (고안자인 Mark Zbikowski에서 유래)와 더불어 그는 가장 유명한 파일 포맷을 만든 거장 중 하나이다.

Phil Katz는 Bill Williams와 딱 두 살 차이이고, pkzip의 전신인 pkarc를 만든 게 1986년으로 역시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작품을 남긴 사람이다. 게다가 30대 후반의 나이로 요절한 것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빌의 생년과 몰년에다가 2만 더하면 된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듯, pkzip의 개발자는 Bill Williams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급사하여 그 당시 IT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갑자기 늘어난 부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재산 탕진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채 호텔에서 객사했다 -_-)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IT계라도 예외가 아니다.
작년 가을엔 세상 언론들이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는 완전 애도하고 자서전까지 만들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1주일 뒤에 잡스보다 컴퓨터의 발전에 월등히 더 기여한 어느 전산학자가 죽었을 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유닉스 운영체제의 개발에 참여하고 C언어를 발명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영문학의 기반을 다 닦은 셰익스피어를 문학의 천재로 칭송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고 아예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에 참여한 천재 언어학자인 랜설롯 앤드류스 같은 사람은 거의 알지 못한다.

이런 것처럼, 개인적인 재능과는 무관하게 인생의 정확한 행로와 목표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달라지는 게 자명하며, 그리고 사람의 어떤 행적에 대해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하고는 웬지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게임계에도 저런 사연을 남긴 개발자가 있었다는 게 무척 애착이 간다. 그리고 그 Alley Cat 게임도 보통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다시 보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2/02/09 08:24 2012/02/0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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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중에 혹시 옛날에 Alley Cat이라는 아래의 완전 구석기 시대 게임을 해 보신 분이 있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해 봤다.
전설의 카세트테이프까지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990년대의 16비트 IBM 호환 PC의 발전은 다 지켜본 세대이기 때문이다.

저 게임의 제목은 우리말로는 딱 ‘도둑고양이’라는 뜻이다.
내가 갓난아기이던 1984년에 만들어진 게임이요, (PC용이 1984년. 8비트 Atari용 원판은 1983년에!)
6만 바이트가 채 안 되는 실행 파일 하나에 게임에 필요한 모든 코드와 데이터가 다 들어있다.
실행하면, 도.도. 시.시. 라~시라솔... 로 시작하는 그 중독성 있는 음악이 나온다.

실행 파일을 들여다보면,

This program requires a color graphics adapter.

라는 문자열이 있다.
This program requires Microsoft Windows도 아니고(과거에 윈도우 3.x용 프로그램이 도스에서 실행되었을 때 뜨던 실행 거부 메시지), VGA도 아니고.. 컴에 CGA가 없을 때 출력해 줄 에러 메시지가 들어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옛날 게임인 걸까? 320*200 4색짜리 그래픽 ㅋㅋ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은 Bill Williams (1960-1998)라는 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John Harris라는 다른 프로그래머가 만들다 만 것을 이어받아서 자기 식으로 완수한 거라고 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출처: 영문 위키백과)

아주 흔하고 동명이인이 많은 이름이긴 한데, William의 애칭이 Bill 아니던가? 그럼 동일 이름 중복?

그야말로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그 열악한 하드웨어에서 어셈블리 코딩만으로 저렇게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세계를 창조했다는 게 심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존 카맥(John Carmack)이 Doom 엔진을 만들어 낸 나이도 저 때와 비슷하다. 다들 25세가 채 되기 전이다! 천재들은 다 그 나이 때 이미 세상에 이름을 남긴다.

저 게임은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아케이드· 플랫폼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HP가 없이 즉사하는 시스템을 별로 안 좋아했다.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놀라게 해서-_-) 그리고 맨날 빗자루에 걷어 채여 날아가는 고양이가 좀 불쌍했다. 드럼통에서 창문 빨랫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때 딱 창문에서 떨어지는 물건에 이따금씩 맞는 게 싫기도 했고.

하지만 게임의 세계관이 심히 창의적이고 독특한 건 사실이다. 게임은 몰입도가 상당히 높다. 게임 속의 고양이는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길바닥에서 고양이가 좀 지체하고 있으면 개가 달려와서 고양이를 죽인다. 드럼통에도 너무 오래 있으면 밑에서 괴물 머리가 툭 튀어나오면서 고양이를 밑으로 쫓아낸다. 방에 들어가서도 안심할 수 없다. 빗자루의 방해를 안 받고 미션을 완수하려면, 주기적으로 계속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흙먼지를 묻혀 줘야 한다. 고양이가 좀 발 붙이고 쉴 틈이라곤 없다.

보글보글만큼이나 게임에 갑툭튀하는 랜덤한 요소가 많다. 화살표 키도 어떻게 조작하냐에 따라 고양이의 이동 속도와 점프 방향이 생각보다 다양하게 바뀐다. 나름 머리를 써서 만들었다는 흔적을 느낄 수 있다. PC 스피커만으로 상당히 정교하게 합성해 낸 효과음도 일품.

이 게임은 딱히 엔딩이 없어서, 퀘스트를 달성해서 암고양이를 만난 뒤에도, 진행 속도와 난이도만 더 올라간 채 게임은 한없이 반복되었다. 또한 원래 PC가 아닌 게임기용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PC 버전도 종료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컴퓨터를 그냥 끄거나 Game Wizard 같은 유틸리티의 Crash back to DOS 기능을 사용해서 빠져나가야 했다.

난 Bill Williams의 작품이라고는 Alley Cat밖에 알지 못하지만, 외국에 있는 어느 고전 게임 개발자 열전 사이트에서는 그를 1980년대를 풍미한 천재 게임 개발자라면서 게임 디자인계의 ‘스탠리 큐브릭’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His games are completely original and stunning.”

그는 1990년대에는 게임 개발을 완전히 접고, 뜻밖의 진로를 선택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목회를 할 의향으로 시카고에 있는 루터 신학교에 돌연 입학하여, 1994년에는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에도 성경 탐구에 대한 열의가 남다른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2/02/07 08:18 2012/02/0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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