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대도시의 도로가 다른 중소도시· 시골의 도로와 다른 점은 가장 먼저 (1) "차로가 많고 폭이 크다는 것", 그리고 신호 대기조차 없는 입체 교차 "자동차 전용 도로"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무신호, 점멸 신호 내지 자그마한 로터리 < 일반 적록 신호 < 입체교차로"의 순으로 도로의 규모가 커진다.

여기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빠르게 소통시켜야 하니.. 다른 지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시설 투자가 많이 이뤄진다. 국도나 고속도로가 아니고 평범한 시내 도로도 아니면서 '도시 고속화도로'라는 건 또 뭘까? 대도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물건일 것이다.

20세기 말까지는 단순히 폭이 큰 길을 넘어서 (2) 고가 차도라는 게 간지 나는 산업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없는 길을 만들어 내는 제일 무난한 방법이 고가이기 때문이다. 강 위로든, 기존 도로 위로든..
하지만 21세기부터는 진출입로 주변이 여전히 심하게 막혀서 교통 혼잡을 부추김, 고가가 주변 건물이나 아래쪽의 거주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침, 환경이나 보행자에게 친화적이지 못함 등의 이유로 인해 고가 도로를 더 만들지 않으며, 이미 있는 것도 서서히 철거하는 추세이다.

물론 멀쩡히 잘 닦여 있는 고가를 일부러 때려부숴 없애는 건 아니다. 그런 것들은 한번 만들어 놓고 끝인 반영구적인 물건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유지보수를 해야 하는데.. 마침 수십 년 전에 만들었던 시설이 노후화가 너무 심해서 유지보수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이 참에 그냥 없애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는 서울 역 고가 차도, 그리고 서대문 고가 차도가 2015년경에 철거돼 없어진 것이 유명하다. 더 전에 2003년쯤엔 청계 고가 차도가 없어졌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중 하나는 (3) 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긴 터널이다.
20세기에는 길이가 1km 남짓이나 그 이상 되는 메이저한 '인서울' 터널은 남산 터널 3형제가 전부였다. 얘들은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유료 도로이기까지 했다. 원효대교나 북악 스카이웨이가 처음에 유료였다가 한참 전에 무료로 풀린 것과 달리, 남산 터널만은 2호를 제외한 1호와 3호가 줄곧 유료이다.

그러나 남산 터널은 밤 시간대와 공휴일엔 무료이며, 차에 3인 이상이 타고 있어도 면제이다. 또한 아주 특이하게도 하이패스를 지원하지 않는다.
전국에 이런 특이한 시스템과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유료 도로는 저기 말고는 없지 싶다. 역사가 긴 만큼 남산 터널만이 지닌 독특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 터널 이후로는 2004년 초에 우면산 터널이라는 유료 터널이 개통했다.
그 다음으로는 용마산· 아차산· 망우산의 중앙을 횡축으로 관통하는 용마 터널이 2014년에 개통했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는 토함산 터널도 개통했기 때문에 본인의 기억에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산을 최단거리로 횡단하는 터널 수준을 넘어, 대놓고 (4) 산이나 시내의 아래를 지나는 장거리 지하 도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2016년 7월, 강남 순환로였다. 그 동네에는 남부 순환로라는 옛 도로가 있긴 하지만 이미 느린 시내 도로의 퀄리티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대체 도로가 필요했다. 남부 순환과 강남 순환의 관계는 거의 통일로와 자유로와 비슷한 정도랄까..

그러니 호암산과 관악산 아래로 새 길을 뻥뻥 뚫어 버렸다. 특히 이 길은 안양 부근에서 서울 강남으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줬다.
그 뒤 이듬해엔 제2 경인 고속도로의 연장인 안양-성남 구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산 아래로 뚫렸다. 강남 순환로가 서울대와 가깝다면, 이 고속도로는 경인교대 근처를 지난다는 유사점이 있다.

2010년대 말~2020년경엔 서울의 좌우 양쪽에 17과 29라는 종축 고속도로가 만들어져서 한강 이북에도 무려 폐쇄식 요금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그 전까지는 한강 이북에 존재하는 고속도로는 오랫동안 100 외곽순환(수도권 1순환)밖에 없었다. 얘는 말 그대로 순환선이고 개방식 요금 구간이기 때문에 다른 장거리 고속도로와는 느낌이나 성격이 많이 차이가 났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 무렵에 동부 간선 도로의 북쪽 구간이 통째로 지하로 들어갔고..
2021년에는 신월-여의 지하 도로(4월)와 서부 간선 복층 지하 도로(9월)가 개통했다.
신월-여의는 여의도에서 경인 고속도로(120)로 빠르게 연계하는 횡축 도로요,
서부 간선 지하는 월드컵대교에서 서해안 고속도로(15)로 빠르게 연계하는 종축 도로이다.

얘들은 건설 비용을 낮추고 싶었는지, 처음부터 작은 승용차들의 트래픽만 흡수하려 했는지, 터널의 높이를 겨우 3미터 남짓으로 아주 낮게 잡았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에서는 공도 주행 가능 자동차의 높이 한계를 4미터로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높이가 3미터를 초과하는 대형 버스나 트럭은 구조적으로 이런 곳을 지나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무슨 열악한 굴다리도 아니고 새로 건설한 번듯한 지하 터널이 높이가 이렇게 낮은 건 생소한 트렌드였다. 그래서 대형차가 별 생각 없이 여기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천장을 긁는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곤 했다.
사실, 이 정도로 물리적인 높이 제한이 없더라도 우면산 터널이나 강남 순환로조차 수십 톤급 트레일러는 통행을 제한하곤 했다. 그리고 이게 고속도로와 시내 고속화도로의 큰 차이점이지 싶다. 고속도로는 건설 취지의 특성상 산업용 대형차들을 당연히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테니 말이다.

이제는 시내 고속화도로를 넘어서 (5) 기존 고속도로조차 경인과 경부는 수도권 일부 구간을 지하화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특히 경인은 엄청 옛날에 만들어져서 지반이 어차피 만만한 평지이며 고속도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니.. 고속도로는 통째로 지하로 내리고 기존 평지 도로는 시내 도로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철도에서 지상의 용산선을 지하의 공항 철도/경의선으로 바꾼 것과 비슷한 발상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대학교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도 지상을 몽땅 공원처럼 꾸미는 게 유행이다. 단지 내에서 지하 주차장 입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단지 입구에서부터 자동차를 싹 지하로 넣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아파트 단지 내 도로부터 시작해 간선 도로와 고속화도로, 심지어 고속도로까지.. 자동차 도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최후 테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부터 전깃줄이 지하로 내려가더니 이제는 도로까지 그 뒤를 따르는 듯..
물론 지하 차도는 고가 차도보다도 건설비와 유지비가 훨씬 더 비싸기 때문에 모든 도로가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하 차도는 화재에도 훨씬 더 취약하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단순 고가나 교량은 옆으로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만 낭패이지만 지하나 터널은 숨까지 제대로 못 쉬게 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27 08:35 2023/03/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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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인 1611년에 출간됐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고 그렇게도 의미 부여를 하며 떠받든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유일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떠받드는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은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 성경이 정말로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었고 내용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걸까?

요즘은 인터넷에 몇백 년 전의 옛날 영어 성경도 본문이 다 올라와 있고, 1611년도 KJV 종이책의 스캔 이미지까지 몽땅 살펴볼 수 있다. (☞ 관련 링크) 그러니 저 의문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아주 간편하게 할 수 있다.

1. 철자법의 변화

오늘날 우리가 읽는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건 1611 version(역)의 1769 edition(판)이다.
KJV는 영단어 스펠링 체계의 변화 때문에 단어 표기를 몇 차례 기계적으로 치환하여 판이 바뀐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용을 개정하고 변개한 게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령, NKJV(뉴 킹 제임스)가 한 것처럼 thou ye thee 따위를 you라고 바꾼 건 '하느니라 / 하노라'를 '합니다'라고 고친 것과 비슷하다. 하물며 devil을 demon으로 바꾸고 hell을 hades라고 바꾼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면 말의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진 개정· 변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sunne, moone, booke를 sun moon book으로 바꾸고 heauen을 heaven으로 바꾸고, conteyn을 contain으로 바꾼 건..??? 그냥 '읍니다'를 '습니다'로, '홍당무우'를 '홍당무'라고 고친 것에 불과하다. 말이나 발음은 달라진 게 전혀 없고 오로지 표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고쳤다거나, "어린 백성"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고친 정도의 변화조차도 아니다.

f처럼 길게 늘어뜨린 s 변종이 s와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진 건.. 한국어의 역사로 치면 아래아가 없어지고 ㅏ/ㅡ로 통합된 것과 거의 같다.
KJV의 우리말 번역본인 흠정역의 경우, 5판(400주년 기념판, 2011), 6판(마제스티판, 2021)처럼 edition의 변화가 오· 탈자 교정뿐만 아니라 드물게 오역 교정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KJV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2. 오· 탈자

그럼 KJV 1611 초판은 스펠링 변화 말고 일체의 오· 탈자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저 때는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는커녕 타자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원고를 마차에다 실어서 가져와서는 식자와 조판에도 정말 지루하고 고된 쌩 노가다를 거쳐야 했다.

설령 작가 내지 번역자가 완벽하게 원고를 내어 줬다 해도, 성경 정도로 방대하고 빡빡 두툼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삐끗 실수가 전혀 안 들어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일일이 베껴 쓰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인쇄공이 더 옛날의 서기관 필경사보다 처지가 더 나았다. 그게 문자를 기계로 다루면서 최첨단 지식과 정보 문물을 접하는 직업이었으니 말이다.

KJV 1611 초판이 출간되고 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대략 20여 군데의 오· 탈자가 책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수 년~10수 년 이래로 시정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명사 he/she/it이 헷갈렸거나 a/the 같은 관사가 빠지는 등의 자잘한 실수였다.

그나마 내용이 유의미하게 바뀌는 변개에 가까운 크리티컬한 녀석이 이거.. 시 69:32이었다. God이 good으로 잘못 찍혔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찾는 너희의 마음이 살리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od과 good은 스펠링이 비슷하고, 비슷하게 '좋은' 심상의 단어이고 God is good이라는 관용구까지 있다. 실수로 잘못 식자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농후했다.
게다가 이 typo는 출간된 지 2년 만에.. 그야말로 제일 먼저 발견되어 시정된 축에 든다.

이런 오탈자나 철자법 변경은 개정· 변개가 아니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건 인쇄 단계에서의 실수를 바로잡은 것일 뿐, 처음 원고를 작성한 번역자가 원고의 컨텐츠를 수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도 "사소한(trivial) 수정"이라고 표시하는 게 있지 않던가? 딱 그런 격이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부족하고 실수하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KJV 1611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 자체는 1611년 이후로 정말로 유의미한 개정 없이 정착됐다.

흠.. 글을 써 놓고 보니 이번 1번과 2번 아이템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킹 제임스 성경 본문 개정 의혹에 대한 전면 반박" 이야기의 판박이가 됐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그걸 참고하시기 바란다.

3. 외경 관련 루머

철자법, 오· 탈자 다음으로.. 심지어 외경 수록 여부를 갖고 1611년 KJV 원판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퍼뜨리는 진영이 있(었)다.
"1611년판은 비성경적인 가톨릭 외경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고 오점이 있다~~ 1655년판이니 17xx년판이니 그게 외경이 제외된 진짜 KJV 원조다.." 이런 요지의 얘기 들어 보신 분 계신가?

아예 대놓고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원문비평 사본학 운운하면서 변개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얘기는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리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저런 부류의 얘기엔 전혀 현혹될 필요가 없다.

종교 개혁자와 개신교 동네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외경이 성경이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성경만 아닐 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2류 교양 텍스트 내지 종교 문학 정도로는 인정했다.

당장 KJV 1611 책의 앞부분에 들어간 "역자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보면 외경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어거스틴을 포함해 가톨릭 성인(??)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의 말을 인용한 게 종종 나온다. 그게 그 당시 종교계 석학들의 지쩍 밑천이고 성장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가톨릭 반개신교(!!!)에만 충실한 오늘날의 bible baptist들이 보면 살짝 문화 충격 동심파괴를 경험할 수도 있다. 한킹이건 흠정역이건 저 텍스트가 번역되어 수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 KJV는 본문이 명백한 반가톨릭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행에 따라 외경이 들어갔었다. 단지, 본문이 아니라 부록으로 들어갔을 뿐..!
KJV가 가톨릭 성경이었다면 구약이 39권이 아니라 52권이 됐을 것이다. 에스더기가 10장 3절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KJV는 외경을 싣되, 외경을 성경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상에 그 어떤 가톨릭 성경도 에스더기의 외경 부분을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 .. 이렇게 별도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때는 성경책을 이렇게 편성하는 것만으로도 번역자가 교황 추종자들한테 해코지· 암살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바닥에서는 외경을 읽지 않게 되었고, 외경이 성경책에서도 자연스럽게 완전히 제외되었다.

정확한 역사 맥락을 모르면 아폴로 달 착륙 자작극 음모론 같은 데에 속듯, 비슷하게 KJV 본문 관련 음모론에도 속기 쉽다.
KJV 1611에 외경이 들어가 있었던 건 당시 관행에 따른 부록 명목이었을 뿐, 본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무슨 예수회의 농간 같은 급으로 확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4. 인쇄공 로버트 바커

끝으로, 옛날 사람을 한 명 소개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17세기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로버트 바커. (Robert Barker)
제임스 1세 왕에게 직통 고용돼서 킹 제임스 성경 1611년도 종이책 초판을 조판· 인쇄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인쇄공 내지 출판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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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서 평생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1611 이래로 딱 20년 뒤 1631년, 제임스 1세 이후로 아들 찰스 1세 시절에 새로 편집된 킹 제임스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십계명 구절에서 NOT을 빼먹어서 '너는 간음할지니라' wicked bible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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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KJV 초판 시절에 발견됐던 여느 자잘한 오· 탈자와는 차원이 다른 너무 큰 사고였다.
사악한 성경책은 전량 리콜· 회수되어 폐기 처분됐지만, 몇 권은 살아남아서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그는 무슨 투옥·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뒤로는 몰락해서 그에 대해 근황 기록이 딱히 전해지는 게 없다. 1645년에 사망했다고만 전해질 뿐.

조선의 장 영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왕에 의해 고용된 특정 분야 기술자였고, 역사에 기억될 업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장 영실은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초대형 사고가 나는 바람에 리타이어 당하고 기록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성경 신자라면 킹 제임스 성경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록 이 성경의 외형이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책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1611 KJV라는 타이틀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차이점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1) 하루는 성경 역본을 비교하느라 똑같이 NIV로 동일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서 본인과 상대방이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구절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알고 보니 NIV도 1984년판 이후에 2011년경에 개정됐더라.. 이럴 수가..!!
TNIV 같은 바리에이션이 아니라 NIV 자체가 또 개정된 것이다. KJV는 이런 식으로 쓱 바뀐 게 없다~!!

(2) 글쎄, 이 문제에 대해 덕질을 더 깊게 들어가면 KJV의 캠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룻 3:15의 끝부분에서 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she)인지 보아스(he)인지를 질문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은 정답만 알지 더 구체적인 내력이나 사연은 아직 잘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더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3) 하나님은 민족과 언어를 나누어서 인간들의 생활권에 '구획/파티션'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 성경과 한 믿음으로 인간들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도 있게도 해 놓으셨다.
꼭 학교에서 가까이 사는 집 애가 성적 우수 모범생이 아니듯.. 예수님과 동시대 같은 지역을 살았다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라고 해서 특별히 신앙 생활을 더 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계 선교와 복음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접근성이 훨씬 더 좋은 게 사실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성경의 합리적인 법칙일진대(눅 12:48), 우리 주님도 한국어 화자보다는 KJV 같은 성경을 직통으로 읽을 수 있는 영어 화자에게 저런 사명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묻기는 하실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19 08:35 2023/03/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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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 원일 전 천안함 함장은 손 원일 제독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해군 병 출신인 부친으로부터 참 부담스러운 이름을 물려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 원일은 독립운동가 겸 대한민국 초대 해군 참모총장.. 그야말로 해군의 창설자 내지 아버지다. ㄲㄲㄲㄲㄲ 관심 있는 분이라면 저분은 투스타 신분으로 미국 가서 극한의 심리전 흥정 딜을 벌여서 가격을 후려친 끝에 각종 군함과 무장을 똥값 헐값에 도입해 온 에피소드를 아실 것이다.

이런 준비 덕분에 6 25 사변 초기에 울나라가 본토에서 참패와 후퇴가 이어지던 동안, 바다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해서 북괴의 내륙 침투를 저지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전쟁 내내 재해권은 우리 아군이 차지할 수 있었다.


이분은 해군 사관학교를 나와서 저 손 제독처럼 해군 장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우수한 성적과 근무 실적으로 진급도 금방 금방 하면서 아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2010년의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싹 바뀌게 되었다.

이거 무슨 인디애나폴리스 호 피격의 조선판도 아니고.. 패잔병, 패장, 임무 소홀/실패..?? 함장으로서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제일 나중에 정당하게 구조됐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세월호 선장마냥 혼자 빠져나왔다는 식의 망발.. 정말 말도 안 되는 개 헛소리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했다.

그는 이 정신병자 미친놈들을 몽땅 다 소송으로 대응해서 참교육 시켰다. 전우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 인생 최대의 과제가 돼 버린 것이다.
특히 지난 2021년 6월에 휘문고의 어느 또라이 교사를 데꿀멍 시킨 일화가 유명하다. 저분은 2021년 2월에 대령 진급과 함께 예편했으니, 저건 민간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졌던 일이다.

2.
지난 2002년엔 아폴로 계획 자작극 음모론자이던 어떤 스토커가 무려 11호 승무원 출신인 버즈 올드린(닐 암스트롱 다음으로 달에 발을 디딘..)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어그로를 끌었다. “당신이 달에 진짜로 간 거면 어디 성경책에다 손 얹고 맹세해 봐라~ 용용~ 이 거짓말쟁이 사기꾼놈아!” 이랬다.

허.. 올드린은 11호 착륙 당시에 “저희는 달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지구의 각지에서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은 하시던 일을 잠시만 멈추고, 지금 이 순간을 심사숙고하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감사’를 같이 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이었다.

1948년 울나라 제헌국회 때 리 승만 의장이 애드립으로 감사 기도 요청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반 년 전 아폴로 8호 때는 창세기 1장 애드립 낭독이 논란이 돼서 이번엔 종교색을 빼고 ‘각자의 방법으로’라고 표현만 바꿨을 뿐이다. 그는 정말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달에서 개인적으로 몰래 주의 만찬까지 진행했었다..!! (대외적으로는 성찬식..)

근데 성경에 대고 맹세, 사기꾼? 처음엔 이 사람도 그냥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이 새X가 계속 길을 막고 선을 넘으며 모욕적인 도발을 일삼으니 참다못해 70대 나이로도 죽빵을 날리게 됐다.
한국 같으면 폭행죄로 기소됐겠지만, 정당방위를 높게 평가하는 천조국에서는 “이 정도면 아예 폭행을 대놓고 유도한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기소조차 하지 않고 무혐의 방면됐다.

자, 저 버즈 올드린의 심정과(달 착륙), 손 원일 함장(천안함 폭침)의 심정이 비슷했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솔직히 이건 타이슨 핵이빨이나 박 찬호 가위차기 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참고 더 점잖게 대응한 것이었다.
참고로 버즈 올드린은 아폴로 11호 승무원 3명 중에서 2023년 현재까지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사람이다.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90대의 나이로.. 한 달쯤 전(2023년 1월)엔 리 승만-프란체스카를 능가하는 연하의 여자와 네 번째 결혼까지 했다~!! ㄷㄷㄷㄷㄷ
그 반면, 가장 유명한 암스트롱은 2012년에, 사령선 조종사인 콜린스는 2021년에 세상을 떠났다.

3.
다음으로, 국내엔 손 원일의 이름을 딴 인물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월북 독립 운동가인 박 헌영의 이름을 딴 인물도 있다. 임 헌영..;; 이 사람은 본명이 따로 있다가 훗날 스스로 개명한 것이다.

이 사람은 교사 출신으로 문학 평론 쪽으로 일하다가 나중엔 민족 문제 연구소, 친일 인명 사전.. 이름만 들어도 성향이 짐작이 되는 진영에서 뼈를 묻으며 지냈다.
군사 정권 시절엔 감방을 들락거리기도 했고 정부로부터 사찰 감시도 받았다고..

행적이 입체적이고 진짜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 시대를 잘못 만난 풍운아, 선친일 후항일이 낫냐 선항일 후친일이 낫냐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
그 많고 많은 일제 시대 인물 중에 하필이면 남한과 북한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았고 재평가 가능성도 없는 최악의 인물의 이름을 땄을까? 취향이 참 이상한 것 같다.

하다못해 손 원일의 부친인 손 정도 목사는 남한의 입장에서도 독립 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으로부터도.. 김 일성 수령의 옛 스승이었다고 예우받고 인정받는 사람이다. 이건 당연히 현재 북괴의 정치나 이념과도 전혀 무관한 옛날 일이다.

마치 중국에서 ‘쑨 원’이 중공과 대만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도 민족이니 통일이니가 좋으면 차라리 저런 사람이나 재조명할 것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친일파니 어쩌니 하는 저 바닥에는 독립 기념관 관장을 역임한 김 삼웅이라는 사람도 있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한 김 원웅이라는 사람도 있다. 인상이 좀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물론 그닥 긍정적인 인상은 아니다. -_-;; 도 넘는 반일 정신병은 이제 좀 그만..

Posted by 사무엘

2023/02/20 08:34 2023/02/2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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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00년대 전반기에 잉글랜드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헨리 8세라는 군주가 재위했다. 그는 '수장령'이라는 걸 선포하며 자기 나라를 종교적으로 로마 교황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떼어 놓았다.
뭐, 루터처럼 무슨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이런 거창한 신념 때문은 아니고, 교황이 자신의 이혼을 승인해 주지 않고 어영부영한 것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크게 작용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사람은 거쳐 간 마누라가 한두 명이 아니었고(6명), 심지어 그 중 두 명은 자기 손으로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궁예만 자기 마누라를 죽인 줄 알았더니..=_=;;
여러 모로 가정사가 비범하고, 도라이 정신병자 같은 기질도 있었지만.. 저 사람을 통해 종교 쪽은 결과적으로 좀 선한 결과가 나왔다.

이 사람의 재위 때(1530년대) 윌리엄 틴데일이 순교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기도가 응답되어 커버데일, 매튜, 그레이트 같은 영어 번역 성경이 출간되어 나왔다.

이때는 훗날 킹 제임스처럼 왕이 자기 이름을 걸고 국비로 번역자들을 50여 명이나 소환해서 성경 번역을 추진한 단계까지는 아직 아니었다. 그저 "개인이 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할 자유 정도는 국가에서 보장한다. 이제 성경 번역자가 순교자가 되지는 않아도 된다" 정도만 이뤄진 것이었다.

헨리 8세는 1536년에 낙마 사고를 크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때 2시간 동안이나 의식을 잃었으며, 한쪽 다리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뒤로 평생 제대로 못 쓰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 사람은 더욱 심신이 피폐해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싸이코처럼 흑화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2.
어 그런데 1547년엔.. 프랑스에서도 '헨리'라는 이름의 새 왕이 즉위했다. 현지 발음으로는 '앙리 2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사람은 잉글랜드 저 동네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골수 가톨릭이었다. 유럽을 휩쓸던 종교 개혁을 온몸으로 반대하는 소신이었다.
그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해서 대놓고 금지했으며, 종교개혁자고 개신교 신자들이고 눈에 띄면 잡아서 화형에 처했다. 심지어 죽는 동안 비명을 제대로 못 지르게 하려고 혀까지 미리 자르고 죽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앙리 2세(1519-1547-1559)(출생;즉위;사망)와 아주 비슷한 시기에 잉글랜드에서는 메리 1세(1516-1553-1558) 여왕이 재위 중이었다. 저 아줌마도 '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신교 박해에는 한 끗발 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째 저 시기엔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군주의 종교 성향이 똑같이 저렇게 갔는지가 흥미롭다. 어떻게든 종교 개혁을 짓밟고 없애 버리고 싶긴 했는가 보다.

다만, 메리 1세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죽인 것으로 확인된 사람도 일단은 몇백 명 단위가 전부(!)이다. 무슨 스페인 종교재판소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또 저 사람은 종교 박해만 빼면 세상적인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쪽에서는 아무래도 자기를 박해한 군주를 아주 나쁘게 기록할 수밖에 없고.. 폭스의 순교사 책에서도 재위 기간 대비 그녀의 악행(?)이 굉장히 길고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폭스 자신의 자국 얘기이기도 하니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앙리 2세는 여자인 메리 1세와 달리, 아주 마초스럽고 스포츠 승부를 즐기는 기사 스타일이었다. 허나 이 기질 때문에 사고를 당해 요절했다.
1559년, 그는 자기 장녀와 자기 여동생이 나란히 결혼--어떻게 이런 일이 동시에 가능??--하는 이벤트가 있어서 국내외 여러 왕족· 귀족들과 먹고 마시며 놀았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그는 자기 부하인 가브리엘 몽고메리 백작과 나란히 말 타고 창술 시합을 벌였는데..

격렬히 싸우던 중에 몽고메리 백작의 창이 빠직 부서졌다. 그런데 창 자루가 부러진 날카로운 파편이 앙리 2세의 투구 틈새로 튀어서 그만 국왕의 눈 바로 옆을 찌르고 관자놀이 근처까지 박혀 버렸다.
앙리 2세는 얼굴이 피칠갑이 됐다. 당대 최고의 명의들이 동원돼서 파편을 빼내고 치료에 수술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고 곪고 그 독소가 바로 근처의 뇌까지 퍼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앙리 2세는 끙끙 앓다가 사고 후 11일 만에 만 40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현대의 위생과 의술이 있었다면 겨우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고통 속에 죽어 가면서도 몽고메리를 사면하고, 사고의 책임을 저 사람에게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앙리 2세는 말에서 떨어진 헨리 8세보다 더 큰 사고를 당해서 결국 목숨까지 잃은 셈인데..
당시 노스트라다무스가 4년쯤 전에 이 사람의 죽음을 아주 막연하게나마 예언을 했다고 여겨진다.
"젊은 사자가 늙은 사자를 이길 것이다. 단 한 번의 전투를 치르는 전장에서 그는 황금빛 새장 너머 그의 눈을 찌를 것이다. 그는 두 상처가 하나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으리.."라고 썼다고 한다.

몽고메리는 이 사고에서는 무사했지만, 훗날 앙리 2세가 싫어했던 '위그노'--당시 프랑스에서 칼빈파 개신교도를 일컫던 멸칭--로 전향하고 잉글랜드 쪽으로 정치 입장까지 바꿨는가 보다. 그는 프랑스의 종교 내전이었던 위그노 전쟁에 참여했다가 잡혀서 처형 당했다.

프랑스는 종교 개혁이나 개신교 따위와는 영 접점이 없어 보이는 동네인데 웬 칼빈인가 싶지만.. 애초에 칼빈부터가 처음에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러니 대외적으로 '쟝 깔뱅'이라는 표기도 통용되는 것이다.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도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거기는 이런 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여전히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18 08:35 2023/0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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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했던 말도 있지만 오랜만에 철도 역사 얘기를 정리해 본다.

1.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경부선 남쪽 방면 종점은 1974년 첫 개통 이래로 30년 가까이 쭉~ 수원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3년 4월 30일, 거의 30년 만에 딱 두 정거장 남하한 병점으로 연장됐다. 그리고 2005년 1월 20일, 이 종점은 무려 천안까지 내려갔다. 경부선 천안-수원간 2복선 전철화가 모두 완료됐다.

그럼.. 수원 다음에 바로 천안으로 한꺼번에 개통하면 될 것을.. 아니면 화끈하게 오산이나 평택 정도의 중간 지점도 아니고, 그 당시에 겨우 화성시 병점까지만 먼저 연장 개통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원과 병점 사이에는 '세류'라는 역 하나만 달랑 있다. 여기는 바로 옆에 공군 기지가 있어서 여객 수요가 별로 없고, 전철이 굳이 선개통을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여객이 아니라 시설 때문이었다.
수원을 살짝 벗어난 병점 역 근처에 병점 차량기지가 만들어졌고, 전동차 회차를 위한 전용 입체교차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게 전철 운영을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이 짧은 구간부터 먼저 개통을 한 것이다.

2.
이 과정은 우리나라의 지폐 신권의 도입 과정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원래 한국 은행의 의도는 2009년에 새로운 5만원권과 함께 기존 지폐들도 새 도안을 내놓고, 모든 지폐를 한꺼번에 신권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전 2007년에 기존권의 신권을 먼저 풀게 되었고 특히 5천원은 2006년 초에.. 0순위로 제일 먼저 시급히 내놓았다. 신권을 이렇게 준비되는 대로 찔끔찔끔 '축차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 당시에 5천원 구권의 위조지폐가 엄청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77246 위조지폐" 사건인데, 이 엄청난 사고를 친 범인은 무려 2013년에야 잡혔다.
돈은 위조지폐 때문에 신권이 일찍 나오게 됐고 전철은 수원 역의 회차 시설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에 병점부터 먼저 시급히 개통했다.

병점 기지와 입체 회차 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수원까지 간 하행 전동차가 상행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로 치면.. "유턴"이라는 걸 해야 하는데.. 하행 외선에서 상행 외선으로 평면교차로 가다 보니 중간에 내선 일반열차 선로를 횡단해야 했다.
새마을호처럼 수원 역을 전속력으로 무정차 통과하는 열차도 있는 선로를 횡단하는 건... '비보호 좌회전'만큼이나 굉장히 위험 부담이 큰 기동이었다.

물론 철도는 아주 정교한 신호와 시각표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이게 진짜 자동차 도로 같은 비보호인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철은 일반열차를 피해서 회차를 해야 하니 회차 용량을 늘릴 수 없고, 이 때문에 경부선 전철 자체를 충분히 증차할 수 없었다. 1981년에 애써 경부선 서울-수원 2복선화까지 했는데 회차 용량이 선로 용량을 많이 까먹어서 도루묵으로 만들었다.

2002년 2월에는 수원 역 부근에서 서울 메트로 소속 전동차가 일반열차를 먼저 보내주려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철도청 선로 보수 차량이 이를 추돌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철도청 새내기 신입 기관사가 앞을 제대로 못 보고 사고를 낸 거라고 전해진다. 아마 이 사고도 철도청에게 트라우마를 안기고, 병점 역의 시급 조기 개통에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된다.

3.
그리고 이 병점 차량기지는 아무 곳에다 새로 만든 게 아니었다.
경부선 수원-천안간 2복선화 과정에서 병점 부근의 선로가 선형개량이 되어서 딴 데로 이설되었다. 병점 기지는 바로 이설 전 기존 선로 부지에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0년에는 여기에 '서동탄'이라는 전철역도 만들어지게 됐다.

이건 뭐랑 비슷한가 하면.. 서울 송파구 잠실 근처에 있는 석촌 호수이다.
여기는 원래 한강의 남쪽 지류가 흐르던 곳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서 물길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 버리고, 거기만 호수로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 거기 일대에 '송파 나루' 같은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석촌호수가 원래 한강이 있던 곳이었다면, 병점 차량기지는 원래 경부선 선로가 있던 곳이었던 셈이다.

4.
(1) 참고로, 병점 기지가 만들어지고 2년쯤 뒤인 2005년 7월엔 인서울인 이문 차량기지가 새로 생겼다. 얘는 망우선의 잉여역이던 '이문 역'을 대체하는 형태로 부지를 확보해서 만들어졌다. 근처에 이미 '신이문'이라는 전철역이 별도로 있다.

(2) 2005년 1월 20일로부터 11개월 뒤, 12월 20일엔 경부선에 이어 경인선도 주안 이후로 동인천 역까지.. 즉, 마지막 인천 역을 제외한 나머지 전구간이 2복선화가 완료됐다.
이로써 수도권 전철 1호선은 인천 라인과 수원-천안 라인이 모두 복복선으로 갖춰졌다. 경부선 라인은 2008년에 천안 이남으로 장항선 구간까지 침투해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존재감이 좀 덜하다.
그리고 인천은 일반열차가 다니지는 않지만.. 승장장 이후로 인상선로가 없어서 열차가 빨리 진입하지 못하며, 이게 회차 용량을 여전히 떨어뜨린다. 이 한계는 오늘날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

(3) 병점 차량기지는 오랫동안 누리로 전동차의 주박 기지로 쓰였다. 하지만 지난 2020년 5월말부터 서울-신창 누리로 열차가 폐지됐고, 얘들은 경부선 대신 웬 중앙· 영동· 태백선 쪽으로 전보(!!) 발령됐다. 소속도 강릉 기지로 변경.. 그러니 병점 기지에서는 이제 누리로를 볼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07 08:35 2023/0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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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쪽 얘기 참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네..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며칠 동안 버퍼에 차곡차곡 쌓여서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서 말이다.. 뭐, 옛날 레퍼토리들도 많이 재탕했다. =_=;;

1. 표현의 자유와 형평성

  •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권리?'랑, 금남로 한복판에서 전 대갈 만세 외칠 '자유?권리?'는 똑같이 보장하거나 똑같이 금지했으면 좋겠다. 회고록의 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편파적 적용은 결사반대.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5· 18은 상대방을 오인한 민-군-관 쌍방과실에 가까운 비극이다. 그러니 5 18을 기념하려면 시민과 군경 희생자를 같이 기리고 서로 화해하게 해야 한다.
  • 5· 18 모독죄를 만들고 싶거들랑 천안함 모독죄와 리 승만 할배 허위비방 모독죄까지 같이 넣었으면 좋겠다.

6· 25에 대해서 쌍방과실, 남침 유도, 심지어 북침설까지 주장하며 국가유공자들을 모독하는 건 괜찮은데.. 5· 18은 어떤 이견도 용납 못한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최근에 지 만원 박사가 징역 2년형이 확정된 것도.. 그 사람 말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정말 천부당만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다. 광주에 북괴군이 아니라 외계인이 침투했다고 개소리를 퍼부었어도 실형을 때렸을 건가? 저게 감방 갈 죄이면 광우뻥, 세월호, 천안함 패잔병, 이 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 등등도 전부 처벌했어야 한다.

2. 병적인 집착

  • 별 희한한 거, 아무 상관도 없는 걸 갖고 편집증적이고 변태적인 욱일기 논란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페미년들이 별걸 갖고 성차별이니 여혐이니 시비 거는 것과 비슷하다.
  • 소녀상에다가 옷 입히는 짓도 제발 좀..
  • 멀쩡한 6 25 노래, 멸공의 횃불 노래를 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악한 반일 장사꾼들은 하루속히 정체가 탄로나고 X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군의 날 포스터나 행사에 웬 중공군 무기가 등장하고, 국내 철도 개통 포스터나 현수막에 웬 신칸센 그림이 등장하는 꼴도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괜히 멀쩡한 일제 시대 대신에 ‘일제 강점기’, 을사조약 대신에 ‘을사늑약’, 한일합방 대신 ‘한일병탄’처럼 피해의식을 더 부추기는 말을 일부러 쓸데없이 만들고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조약 대신에 늑약이라고 바꿔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게 있나? 민족 정신이 고취되고 구한말 선조들의 행적에 실드가 쳐지고 자부심이 생기고 하다못해 국뽕이 생기는 거라도 있나? 일본이 더 나쁜놈이 되고  속이 더 후련해지나?

6 25 사변은 자꾸 전쟁이나 한국 전쟁이라고 바꾸려 하고, 북괴라는 칭호를 안 쓰고.. 그쪽으로는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한없이 ‘중립적인’ 용어를 쓰면서 일본 쪽은 왜 저러는데? 그 삐딱한 잣대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든다.

3. 자유는 좋지만 자유주의는 좀..

나는 닥치고 시장 만능 방임주의는 경계하며, 지나친 자유뽕 성향도 극혐까지는 아니지만 싫어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 싫으면 그냥 니가 때려치우고 나가던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상황 봐 가면서 적용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자기가 제발로 종교 계열 고등학교-대학교에 지원하고 거기 방침에 동의를 하고 입학해 놓고는 거기서 채플 반대, 종교 강요 반대 짓거리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자기가 나가든지 해야지?
그러나 기업들이 다같이 비열한 담합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냥 파업만 욕하면서 귀족 노조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진짜 조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인데 소수의 양심적인 내부고발자한테 저딴 논리를 들이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

4. 윤석 열차

그림 한번 잘 그렸네. 고등학생이 벌써 머리에 뭐가 들어가서 저렇게 정치에 세뇌됐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다고 치자.
저 열차는 물 먹고 석탄 먹고 칙칙폭폭 더 폭주해서 이전 정권의 탈원전과 탈북자 북송 죄악을 다 까발리고 나쁜놈들 죄를 묻고 잡아 쳐넣었으면 좋겠다. 놈들이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

이 사람 다음으로 지금 법무부 장관이 바톤 터치를 해서 정권을 물려받으면 우리나라는 21세기 최고의 황금기 중흥기가 찾아올 것 같은데.. 과연 국운이 거기까지 따라 줄지 잘 모르겠다.

5. 북한을 제대로 도우려면

구제불능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돕고 싶으면 당장 굶지는 않게 밥을 주거나, 중독 치료를 받게 병원에 보내 주든가.. 어쨌든 당장 필요한 현물 서비스를 줘야 한다. 정상적인 경제 관념이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생돈을 덥석 쥐어 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개인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의 원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돕고 싶다면.. 그 도움이 주민들에게 직접 가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핵이니 미사일 같은 쓸데없는 도발 따위는 꿈에서라도 엄두를 못 내게 해 놓고 도와줘야 된다.
쌀이나 의약품을 줄 건 주더라도 핵 시설 같은 거 짓는 기미가 보이면 드론 날려서라도 폭격으로 조져 버리면서 도와야지..

저 동네는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수괴들 자기만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교통· 통신 인프라조차 없어서 주민들을 돕고 싶어도 물자가 그리로 가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북한에 백신 지원 사업을 벌였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얼마 전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백신을 주겠다니 북한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백신을 실어 나를 트럭이 없다고 했다. 트럭을 사주니까 이번엔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가 없다며 사달라고 했다. 트럭에 냉장고를 싣고 북한의 백신 접종 현장에 갔더니 이번엔 냉장고를 돌릴 전기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고 돌아왔다.” (☞ 원문)


그러니 옛날에 원조가카가 괜히 고속도로부터 먼저 닦은 게 아니었다. 그 다음에야 제철소를 만들고, 그 다음에 그거 바탕으로 자동차나 조선소 만들고.. 할배 때 준비해 놓은 원자력 전문가를 이용해서 한참 뒤에야 원전까지 만들고..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이런 인프라가 없으면 만년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새마을 운동도 1960년대가 아니라 생각보다 늦은 70년대 이후에 시작된 걸 알고서 좀 놀랐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 유신 독재 하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6.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

내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북한 컨텐츠도 그냥 있는 그대로 노출해도 되지 않나 싶다. 울나라가 물리적인 경제력 군사력이 북괴한테 딸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로동신문이나 고려항공 웹사이트를 warning.or.kr로 틀어막지 말고 개방하라는 거다. 뭐,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른들의 사정이 있어서 여전히 틀어막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까 김 일성 회고록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거 자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 개방되고 풀려나올 필요가 있다.
세월이 흐르니 하다못해 독일에서도 히틀러 "나의 투쟁"이 해금돼서 서서히 풀려나오니 말이다. 물론 책 내용을 오해하지 말라는 단서를 많이 달고서...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는 대신, 북한에다가는 성경이나 전 두환 회고록, 리 승만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을 보급하는 거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이라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남한에다가만 북한 방송? 그것도 북한에다가 중계료 왕창 주고 사 와서? 그런 짓거리라면 이건 완전 종북 이적행위이니 나로서는 목숨 걸고 결사반대다.

신앙에서도 주변으로 복음 전파, 전도를 못 하게 하고 너 혼자만 조용히 믿으라는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다. (출애굽기, 다니엘서)
이와 비슷하게.. 남북이 서로 똑같이 선전방송을 안 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 남한(+북한 주민)에게 손해인 거래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소위 햇볕정책이니 뭐니 하던 것에 분노하고 그게 정치쑈 사기극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퍼주기만 하고서 정말 기본적인 것 하나 실제로 개방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을 진짜로 제대로 도와주고 북한 체제를 개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한 게 없다.

그냥 정치쑈만 벌이다가 연평해전이나 박 왕자 피살 사건으로 뒤통수만 맞았으며, 그 뒤에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2010년대 이후로는 계속 핵과 미사일 도발만 하는 중..

제발 저것들이랑 통일 수작 벌이지 말고, 그냥 지원 끊고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는 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전쟁 따위 안 해도 된다.
이 와중에 "우리 북한은 안 물어요" / "남측이 북한을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 "이건 좀 더 도와 달라는 신호" 이러는 정신병자 미친 새끼들은 정말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든가, 추방 아니면 공개 처형에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괴뿐만 아니라 이슬람 애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쟤들은 "나는 너희 나라에서 포교 가능하지만 너희는 우리나라에서 포교 금지"를 고수하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상호주의를 제일 안 지키는 집단이다. 그러니 우리도 국내의 무슬림들에 대해 철저히 경계하고 필요 이상의 편의는 절대 봐 주지 말고, 세력이 절대로 커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5 08:35 2023/01/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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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신여성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중에서 그나마 제일 희망적이고 살 만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3· 1 운동 덕분에 일제도 너무 놀라서 표면적인 억압을 좀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했을 때 말이다. 사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가 전반적으로 호황이고 살기 좋던 시절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신여성'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건 MZ세대, X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특정 트렌드에 속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교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 파일럿, 의사, 기자 같은 직업도 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인물로는 일단 여자 말고 남자.. 김 우진(1897-1926)이라고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희곡 작가가 있다. 희곡 쪽으로 유 치진보다도 더 선배격인 사람인데.. 보다시피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대표작은 <산돼지>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인 형태의 희곡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유학파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동갑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악가(소프라노!!)였던 (1) 윤 심덕과 같이 배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감쪽같이 사라지고 실종되었다. 시체도 못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 우진은 당시에 이미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당시엔 언론에서 저 지식인 유명인사 커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나란히 대한해협 망망대해로 투신 자살한 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두 사람이 당시에 동반 자살을 할 이유가 사실상 없었으며, 애초에 두 사람이 불륜 커플이기라도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기존 통념이 반박되는 추세이다. 단순히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미화하고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증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동반 자살이 아닐 뿐, 그럼 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진 건 아니다.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우진이 남긴 외아들 김 방한(1925-2001)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가 되었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었다. 천재적인 언어 기질을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이거 무슨 강 재구 소령의 외아들, 김 득구 선수의 외아들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현대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2) 김 명순(1896-1951)도 흥미롭게도 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연배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탁월한 글빨, 여러 외국어 구사까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너무 똑똑했던 데다 자유 연애를 추구한 것, 기생의 딸인 것, 왕년에 성폭행을 당한 이력이 있는 것이 합쳐져서 주변의 다른 유교 꼰대 성향의 남자 문인들로부터 온갖 시샘과 모함과 중상모략을 당했다. 행실이 방탕한 썅년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소설가 김 동인이라든가 소파 방 정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김 명순을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집요하게 비방했다. (어린이에게 그렇게도 파격 진보적이었던 소파 선생조차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듯..)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고도 요조숙녀 행세하는 년.." 이건 뭐.. 성경의 요 4:18에서 모티브를 딴 걸까..?
또, 문학 글쟁이가 어떤 사람을 저격하고 골로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흑역사가 폭로되는 소설/희곡 따위를 써서 공개하면 됐다. (햄릿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네..??)
김 동인의 <김연실전>이 바로 김 명순을 악의적으로 저격하는 소설이었다.

김 명순은 이런 저열한 인격살인에 시달리다가 몇 번이나 자살 기도도 하고, 끝내는 완전히 탈조선을 해서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올 엄두를 못 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미혼 글쟁이 여성이 미수교 적성국가 패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건강 악화로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 무덤도 없다.

그녀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족 남자 문인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열거해 봤자 황무지에서 잡초 몇 포기 뽑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조선아...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걸 유언이라고 남겼다. 사나운 곳..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잔인한 곳' 정도 되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혼자 굶으면 굶었지, 그래도 반민족 친일 행위에는 생계형으로라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능력이 아까웠던 너무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째 이 작품은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김 명순과 굉장히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 여성으로 (3) 나 혜석(1896-1948)이 있었다.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졸에 준하는 고학력자였는데, 전공은 미술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쓰고 여성 인권 내지 여성 해방..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 시절에 공개적으로 벌였다.

명절이 오로지 여자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을.. 무려 1930년대에 했다니 믿어지는가?
남편이 도를 넘게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혼자 한없이 꾹 참으면서 골병 들지 말고 여자 쪽에서 과감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오~

1920년대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사상의 자유도 누리던 시절이었다. 방 정환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아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면, 나 혜석 역시 일본 유학을 계기로 여성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김 명순은 평생 독신이었던 반면, 나 혜석은 부모의 강권 때문에 결혼 자체는 한 유부녀였다. 그래도 남편도 아주 부유한 능력자였던 덕분에 이들 부부는 1927~1928년 사이에 무려 세계 일주에 가까운 외국 여행을 즐기고 마침 역시 외국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도 했는데.. 그녀는 그만 외국에서 다른 조선인과 불륜 바람이 나 버렸다.

이 때문에 나 혜석은 이혼 당하고 사회적 평판이 정말 많이 깎이고, 빼도 박도 못한 썅년으로 낙인 찍히면서 인생이 불행해졌다. 자녀의 양육권도 뺏긴 채 불명예스러운 돌싱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 혜석을 저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불륜남은 그 뒤엔 그녀를 버렸는가 보다.

나 혜석은 대인기피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족 없이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김 명순과 달리 한국 땅에서 잠들었다. 이 사람 역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대조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변절한 내력은 전혀 없었다.

나 혜석 다음으로 (4) 김 일엽(1896-1971)..;;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미술이 주업이고 문학을 부업으로 활동한 동갑내기 신여성이었다. 본명은 김 원주라는데..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뒤 종교를 개신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 혜석이니 김 명순이니 하는 위의 인물보다는 덜 유명하고 작품의 존재감도 훨씬 더 낮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여전히 지닌 인물인 셈이다. 이 사람은 종교에 귀의해서 그런지, 50대 나이에 객사하지는 않고 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이상이다.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근대화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준 냉장고나 세탁기나 가스레인지까지 갈 것도 없이, 공중 화장실이 설치된 것만으로도 여성의 실외 활동과 사회 진출이 늘어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는 1920년대였던 셈이다. 그때의 각 분야별 신여성들의 행적이 어땠는지 더 알고 싶다.
그 다음 1930년대는 대공황에 전쟁 준비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도 신여성 얘기는 쏙 들어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01 08:35 2023/0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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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XXX파 조폭이 있고 일본에 야쿠자가 있다면, 유럽과 미국에는 마피아라고 불리는 범죄 조직이 있었다.
미국 마피아는 1920~30년대.. 세계사에서 '전간기'라고 부르고 미국에 금주법이라는 게 있던 시절에 '알 카포네'(1899-1947)라는 두목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시카고 마피아가 유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바리를 접수해서 보호비 자리값을 뜯고, 자기 조직으로부터 술을 사지 않는 업소한테는 처절하게 보복하고.. 자기 나와바리를 노리는 적대적인 조직은 칼뿐만 아니라 총과 폭탄까지 동원해서 작살을 내 버리고.. 그런데 법조인까지 매수해서 잘 구슬렸는지, 두목이 어지간한 사고를 쳐도 혐의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서 감옥에는 절대 안 가고..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얘네들이 지금 2020년대에도 잘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제 공권력에 의해 다 토벌되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찌그러져 있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내 개인적으로는 영화 '대부'와 그 패러디작에서 묘사된 마피아 정도밖에 아는 게 없다.
저 시절, 미국 마피아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는 게 있다.

1. 술과 우유

저 시절에 미국 마피아들은 밀주를 몰래 불법 유통시키며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얘들은 한편으로, 금주법은 무리수가 많은 조치이기 때문에 몇 년 못 가 폐지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했다. (1933년, 루스벨트 때 폐지) 이렇게 술 특수를 누리는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고, 이는 자기네 조직의 미래와도 직결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술 말고 다른 물 장사를 개척했는데 그건... 우유였다. 이건 술과 달리 전국민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시는 음료이다. 낙농업을 접수해서 독점해 버리면.. 마피아들이 보기에도 이게 더 안정적이고 더 돈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술보다야 더 건전하기도 하고. ㄲㄲㄲㄲ

이때 미국에서는 우유가 품질 관리가 안 되고 유통망이 개판이었다. 상온에서 오래 방치되어 시큼하게 상하고 앙금까지 생긴 우유가 버젓이 공급되기도 했으며, 어제 팔고 남은 우유를 새 우유에다 섞는 건 예사.. 그걸 밀가루나 심지어 분필 가루까지 넣어서 도로 하얗게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이딴 우유 마시고 배탈 나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심지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도 소수나마 있었다. 허나, 이게 우유 때문이라는 걸 입증하는 건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급발진을 소비자가 입증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나 보다. 돈 먹은 의사들은 적당히 삭아서 시큼한 우유가 몸에 더 좋다고 비양심적인 궤변 언플까지 늘어놨다고 한다.
상한 우유가 무슨 늙은 호박처럼 허연 가루가 앉으면서 영양분이 더 많아지기라도 하냐 젠장..

그랬는데 마피아가 개입하자 오히려 이런 관행이 개선되었다. 천조국 마피아들은 자릿세 뜯는 건 악랄했어도, 사람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에 대해서는 나름 신념이 있었는지 선 넘지 않고 양심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원유를 채취하는 농장에서부터 조직적인 품질 관리를 시행했으며, 심지어 제조되는 우유 병에다가 유통기한을 찍는 관행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나 어쨌다나.. 마피아 지들이 돈 되는 일을 하려다 보니 우유의 품질이 개선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나치 독일이 1933년에 현대적인 동물보호법을 세계 최초로 제정하고 뜬금없이 동물 복지에 기여를 했다면, 미국 마피아는 뜬금없이 우유의 품질과 유통망을 개선했다.
큰 악이 초기에 작은 악을 좀 척결하는 건 그리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ㄲㄲㄲㄲㄲ

사실, 미국은 20세기 초에는 정말 자유 시장 경쟁 방임의 극치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 다 열거하지는 않지만 기업-기업(경쟁사에 대한 흑색선전 거짓 비방), 기업-근로자(가혹한 노동 조건), 기업-소비자(저런 불량품), 기업-정치/법조인(매수, 뇌물) 간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추악하고 부도덕한 일이 많이 벌어졌었다.
걔네들이 조폭 같은 기업이라면, 저런 마피아는 기업화된 조폭이나 마찬가지였다.

* 여담

  • 우리나라에서 '장군의 아들 김 두한' 패거리가 행색이나 인상, 이미지가 이런 미국 마피아 두목의 한국 버전과 좀 비슷하게 느껴진다.;;; 뭐, 처한 여건이나 행적이나 신분이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 일본 야쿠자야.. 100여 년 전, 관동 대지진 때문에 미친 학살극이 벌어졌을 때 조직원 중에 조선인이 있으면 쟤들이 그 조선인을 보호해 줬을 정도였다. 이런 뒷동네 조직에 최소한의 의리는 있었던 셈이다.

2. 법무팀 변호사

알 카포네는 무력을 담당하는 칼잡이 총잡이 건달뿐만 아니라, 변호사 브레인도 부하로 고용해서 법률을 자문하고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일에 써먹고 있었다.
그의 법률 참모는 에드워드 조셉 오헤어(Edward Joseph O'Hare 1893-1939)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변호사였다. 그는 해박한 법률 지식을 동원해서 알 카포네를 변호하고, 그가 감옥에 가는 일을 막아 줬다. 반대로 알 카포네 역시 그에게 엄청난 연봉을 지급하고 으리으리한 집과 차도 장만해 주고.. 물질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보상했다.

그 에드워드 변호사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가 이렇게 돈을 악착같이 많이 번 건 아들을 물질적인 부족함 없이 최고로 잘 키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아들이 머리가 굵어지고 "아버지 뭐 하시노?"에 대한 관념이 형성될 때가 되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돈을 많이 벌긴 하는데.. 그닥 떳떳한 거래를 통해서 버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비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아들이 "저는 아버지가 부끄럽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현타에 빠져서 자괴감이 든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에드워드는 양심의 가책을 심각하게 느끼게 됐다. 아들은 자기처럼 범죄자와 거래하는 더러운 돈의 노예로 만들지 말고, 깨끗한 양심으로 정의롭게 살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을 사관학교에 보내서 군인으로 키우고.. 급기야는 자기에게 후한 월급을 주던 조직을 정면으로 배신해 버렸다. 이놈의 알 카포네 일당이 저지른 짓, 그리고 자기가 은폐한 악행을 경찰에 조막조목 고발하고 자백해 버리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그의 증언과 증거 자료 덕분에 사법 당국은 오랜 기간 잡지 못했던 알 카포네를 1931년에 체포해서 다른 혐의는 모르겠다만 '탈세'라는 중범죄 혐의를 적용해서 투옥시킬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양심의 자유를 얻은 대신, 자기 목숨을 대가로 치르게 되었다.
1939년, 알 카포네가 만기 출소가 임박했을 즈음에.. 에드워드는 자동차 운전 중에 주변 괴한들로부터 샷건을 난사당했다.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헨리' 오헤어(1914-1943)는 애비의 바람대로 군인이 되어서 의인에 애국자에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잘 자랐기 때문이다.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는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 소식에 꽂혀서 비행기 덕후가 되었고, 해군 항공대 소속의 장교 신분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탁월한 상황 판단력에다 우수한 비행기 조종술과 사격술을 동원해서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일본 적기를 6기나 떨구고, 수천 명이 탑승 중이던 아군 항공모함이 빈집털이 당하는 걸 막았다.

패닉에 빠질 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기의 엔진과 연료 탱크만 저격하듯이 쏘며 공중전을 벌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
이런 엄청난 무공 덕분에 그는 명예 훈장을 받았고 중위에서 2계급을 건너뛰어 바로 소령으로 진급하고, 그야말로 전국적인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게 1942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43년 11월 어느 밤에 짧고 굵었던 삶을 마쳤다.
길버트 제도 부근에서 야간 경계 임무 수행 중에 적기와 마주쳤는데.. 이때 갑자기 적기로부터 피격을 당했는지 어두운 바다 수평선으로 사라지면서 아군 기지와 연락이 끊어졌다. 그 뒤 시체도, 기체 잔해도 못 찾은 채 영원히 실종되어 버렸다.

시카고 시민들은 2차 세계 대전 영웅이었던 아들 에드워드 오헤어, 그리고 의로움을 몸으로 실천했던 아버지 에드워드 오헤어를 기억하기 위해.. 시카고에 있던 '오차드 디포'라는 국제공항을 1949년 9월부로 '오헤어' 국제공항이라고 개명했다.
이스라엘에서 우주왕복선 사고로 순직한 아버지와, 전투기 훈련 중에 순직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일란 & 아사프 라몬' 국제공항을 만든 것과 아주 비슷한 사례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2/12/09 08:35 2022/1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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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우크라이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나라들과 통치 형태는 상당수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정립되었다. 그래서 21세기도 20세기의 연장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넓은 전장에다 전례가 없던 끔찍한 전쟁 범죄, 그리고 핵무기까지 경험한 뒤에야 "이래서는 정말 안 되겠다"라는 관념이 생기고 제국주의 군국주의라는 게 종식됐다.

유엔이라는 단체가 생겨나고 세계 인권 선언이라는 게 생기고.. 각종 식민지들이 모조리 해방되어 독립했다.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울나라..), 승전국인 영국도 인도 같은 자기 식민지를 그냥 해방시켜 줬다. 이건 좀 의아하지 않은가?
영국이 자애롭고 관대한 대인배여서가 아니다. 이렇게 제국주의 군국주의 트렌드가 다 끝장나고 사람 몸값도 왕창 오른 시국에서는(인권..) 식민지가 뽕 뽑는 것보다 관리 비용이 더 들어서 가성비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이 타이밍을 계기로 세계 상당수의 나라들이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그리고 세계 인권 선언의 이념을 반영한 현대적인 헌법을 본격적으로 채택했다(신분제나 노예제 부정, 인종 차별 철폐,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 보장). 그러니 1945~1950년대는 격변과 혁명 급으로 세계 질서가 확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전.. 그로부터 30~40년쯤 전에는 동북아시아에서도 아주 큰 격변이 벌어졌다.

  • 1910년, 조선? 한국?은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해서 일본 제국의 멀티로 편입돼 들어갔다. 이건 일본 내부에서도 대대적으로 선전 보도됐고, 세계적으로도 크게 보도됐다. 신흥 열강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이긴 것에 이어 식민지를 하나 통째로 접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국 우편 연합 등 나름 그 시절의 국제 기구에도 여럿 가입돼 있던 멀쩡한 회원국 하나가 이를 계기로 싹 없어졌다.

  • 그리고.. 이웃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엔 중화민국이라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 1917년, 쓰러져 가던 러시아 제국이 멸망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엔 쏘비에트라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에 각 나라들이 어째 서로 극과 극의 길을 가게 됐는지가 신기할 따름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는 그 제국주의의 본좌 영국도 자기 식민지들을 다 해방시켜 준 반면,
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는 조선은 전혀 해방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보자. 민족 자결주의 따위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수십 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서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청과 러를 몰아내면서 어떻게 만든 식민지인데.. 아직 인프라 시설 투자도 덜 했고 제대로 뽕을 뽑은 것도 없는데, 당연히 전혀 풀어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훗날 1940년대에 와서는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지만 이념 대립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다.
그러나 남북 분단 정도면 감지덕지지, 중국은 대륙 전체가 적화됐다(중공). 원래 있던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고(대만), 중공의 텃세에 밀려서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못 내고 있다. 이제 대다수 사람들이 '중국 = 중공'이라고 생각하지, 대만을 떠올리지는 않으니 말이다.
우리 남한도 만약 6· 25 전쟁에서 졌으면 제주도 하나만 달랑 남아서 대만과 비슷한 처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본인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루는 우연히 대만의 국가를 들어 봤다. (☞ 링크)
그러고 보니 "일어나라(찌라이~)"라고 시작하는 대륙 중공의 국가는 진작부터 접해 봤지만, 대만의 국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민주의는 우리가 따를 길 ...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삼민)주의를 따르라
맹세코 근면 용감하고, 반드시 정직하고 충실하라.
한 마음 한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라."

뭐야 이거.. 대만 국가는 왜 이렇게 고퀄이었던 거냐..?? 쓸데없이 고퀄... 아, '쓸데없이'는 아니지.
나 솔직히 삼민주의가 뭔지 몰라서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말하는 건가.. 맨 처음엔 그걸 생각했었다. 엄청난 실수를 참회한다.
지나치게 일어나 싸워라 투쟁하라 반쯤 군가 같은 국가들보다 더 수준 높고, 너무 밍숭맹숭한 울나라 국가보다도 훨씬 낫다.

다음은 유튜브에 달린 댓글들이며 나도 100% 공감한다.
  • 정말 성스럽고 거룩한 느낌이 물씬 난다. 자유를 염원하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국가라 자신한다. 삼민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이어나가자. 그리고 대륙에 민주주의를 꽃 피울때 진정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 평화와 정직함이 대만국가에서 느껴집니다
  • 이 노래가 천안문 광장에서 울려 퍼지길..
  • 전 국민 노예 만들면서 노예가 되기 싫으면 일어나라고 하는 '그 나라' 국가보다 더더욱 품격있는 국가였네요~~*
  • 저기가 진짜 중국이다. 가짜 중공은 중국이 아님
  • 중화민국(대만) 국가가 아주 듣기 좋으네요. 곡은 애잔하면서 장중하고 그리고 비장함까지 느껴집니다. 가사 내용은 더 없이 평화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 마음이 따뜻해진다

"일본을 공격한다"가 아니라.. 누구 유언 말마따나 대륙을 공격이라도 해야겠구만..
우리로서는 러시아 대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듯이, 중공 대신 대만을 지지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아 참, 중간에 잠깐 스타카토가 나오는 연출(?) 기법은.. 카이스트 교가 이후로 개인적으로 처음 본다. (... 과학도의 긍지와 포부를 안고...)

대만에는 저런 '국가'에 이어 국기에 대한 노래도 있다. (☞ 링크)
국기가는 국가보다는 템포가 더 빠르고 경쾌한데, 들어 보면 무슨 "시온 성과 같은 교회" 느낌이 나는 찬송가 풍이다. 애초에 "시온 성과 같은 교회"도 독일 국가 멜로디이기도 하고..
뭔가 대만 국기가에다가 가사를 그럴싸하게 붙여서 찬송가로 불러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대만은 원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있다가 중공한테 패배하고 밀려난 나라이다. 중공은 대만까지 다 '단일 중국'으로 집어넣고 싶어서 안달이고, 반대로 대만도 "저거 원래 다 우리 땅인데.. 중공을 몰아내야 하는데.. (현실은 시궁창)" 이러고 있다.

한편, 올해 전쟁 때문에 시끄러웠던 우크라이나는..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독립한 나라가 아니라, 냉전..;; 지난 1991년에 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해 나온 신생국이다. 내가 자세한 내력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소련 시절에 강제 합병됐다가 다시 독립한 형태일 것이다.

대만과 우크라이나는 서로 출신과 배경은 다르지만 "중공 vs 대만", 그리고 "러시아 vs 우크라이나"에서 뭔가 동질감이 느껴진다. 전자는 땅 넓고 거대하지만 비민주 독재 국가이고, 후자는 그 정반대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국내의 어느 케이블도 아닌 지상파 TV 방송국 말이다.
도대체 연출이나 편성 책임자가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는지 작년에는 도쿄 올림픽 때는 우크라이나를 소개하면서 체르노빌 원전 모습을 내보냈다.
그리고 올해 초에 전쟁이 났을 때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해서 개그맨 출신 주제에 지도력이 의심스럽다고 비하 보도를 내보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와.. 이것들이 약소국을 대놓고 무시하나?
우크라이나 측으로부터 직싸게 규탄과 항의를 받고 국내 시청자들로부터도 욕을 바가지로 쳐먹은 뒤에 겨우 사과하고 문제의 영상을 내렸다. 이 정도면 방송 통신 위원회인지 어디서 징계를 먹여야 한다.
외국에서 울나라 소개하면서 삼풍 백화점 붕괴 현장이나 세월호 침몰 장면, 광주 사태 내전 벌어진 길거리 모습을 내보냈다고 생각해 보아라.

그 같은 방송국에서는 대통령 영부인을 천하의 요망한 개썅년으로 음해할 의도로,
비슷하게 닮은 대역을 써서 이상한 주작 영상을 만들고는 그게 영부인의 실제 행적인 것처럼 내보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게 들통나서는 또 망신 당했다. 이것도 엄청난 중징계감이지 않은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말 이렇게 돼도 싸다~ 쌤통이다)

쟤들은 이념이나 정치색도 썩었지만, 저런 꼬라지를 보면 쟤들이 강자가 아닌 약자를 얼마나 깔보고 개취급하고 무시하고 갑질해 댈지.. 그런 것까지 쫙 느껴진다.
"아~~ 그 지잡대 야간대학원 다니면서 딴 석사학위 나부랭이쯤은 걍 반납하고 말죠~~ 그럼 됐죠?" 이랬던 그 태도와 똑같단 말이다.

내가 그래서 저것들은 정말 인간 취급을 하고 싶지 않다.
난 이런 거 잘 안 잊어버려.. 역사를 잊은 민족한테 미래는 없다며? 나는 미래가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거든?
아무쪼록 그렇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좋으면 마오가 아니라 장 제스가 있었던 대만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한때 국제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약소 신생 독립국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런 처지의 나라를 먼저 도와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23 08:35 2022/11/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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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종삼이라는 시인이 1971년에 발표했다는 <민간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본인은 먼 옛날 학창 시절 문학 시간에 아주 어렴풋이 이런 시를 접했던 기억이 있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시의 제목부터가 군인이 아닌 사람이라는 뜻에서 '민간인'이라고 지었던 것 같은데..
얘는 읽어 보면 정말 섬뜩하고 비극적인 내용임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헤밍웨이가 즉석에서 지었다는 6단어짜리 비극 소설이 곧바로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같다.;;; 분위기가 완전 비슷하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아기용 중고 신발 판매. 사용된 적 없음)


원래의 시에서 언급하는 시기인 1947년 봄은 아직 남한 단독 총선거를 하기 전이고, 북한이 자체적인 애국가와 인공기를 제정하기도 전인 완전 초창기였다. 하지만 남북 분단은 갈수록 굳어지고 남북 왕래가 어려워지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황해도 해주는 서쪽이 아니라 남쪽이 바다로 뻥 뚫려 있었다. 그러니 배 타고 전방의 바다를 향해 조금만 나아가면 38선 이남으로 갈 수 있었다.

빨갱이 치하에서 살 수는 없겠다 싶어서 이 지역 주민들 약간명이 모여서 탈북을 시도했다. 감시를 피해 보트 타고 해상으로 몰래 야반도주 중이었는데..
갑자기 아기 울음 소리 때문에 자기들의 존재가 노출되고 들킬 위험에 처했다. 그러자 아기의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아기를 바다에 던져 버리게 됐다.

이게 바로 시가 묘사하는 상황이다. 시인은 어쩌다 보니 그 쪽배에 동승해서 이 사건이 벌어지는 걸 목격했던 모양이다.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건 1947년 이후로 1970년대가 될 때까지 20년이 넘게 잊혀지지 않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인간이 너무 굶주려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 인륜이고 천륜이고 인간성이고 다 없어져서 거의 동물로 퇴화해 버린다. 그래서 자기 친자식이라도 잡아먹거나 노예로 팔아 버릴 수 있다. 이런 건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이다.

그런데 목숨 걸고 어디를 탈출해서 몰래 피난 가고 도망치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아기 울음 소리를 억제하지 못해서 걔를 불가피하게 버리게 되는 비극은.. ㅠㅠㅠㅠ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도망치다가 들키게 생긴 상황에서는 부모가 자기 한 몸만 희생함으로써 어차피 자녀라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게다가 어영부영 하다가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남까지 다 죽이게 되니까.. 도저히 답이 없다.

게다가 이런 사례가 역사적으로 드문 것도 아니다.
위의 '민간인' 스토리의 해상이 아닌 육로 버전도 존재한다고 한다. 38선을 넘어서 일가족이 야밤에 월남을 시도했는데, 공산군 초소 부근에서 아기가 우는 바람에 엄마는 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허나, 위기를 모면하고 확인해 보니 아기는 그 사이에 질식사한 상태였다고..

1907년 평양 대각성--은사주의 논란은 일단 논외로..-- 당시엔 길 선주 장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는데.. 그때에도 한 여인이 10여 년 전, 청일 전쟁으로 인한 피난 중에 자신의 아이를 죽게 했다며 참회했다고 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아기가 너무 우는 바람에 근처의 나무에다 걔를 부딪쳐서 죽게 했다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고 독소 전쟁 당시의 온갖 끔찍 잔혹한 회고가 가득한 회고록이 있다. 여기서도 어느 애엄마가 적군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결국 울음 소리를 없애기 위해 자기 아기를 우물에 던졌다는 얘기가 나온댄다. 우물 속에서 울음 소리가 완전히 멎어 버리자 주변 사람들은 죄책감과 절망, 멘붕에 빠져서 침묵하고 만다.

성경에도 대환란 중의 피난 상황에서 "임산부와 산모에게 화 있으리로다" (마 23:19)가 괜히 기록된 게 아니었겠다 싶다.
아 하긴,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부모가 생후 겨우 3개월이던 모세를 더는 몰래 키우지 못하고 버리기로 결심한 주 이유도 울음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출 2:2-3). 그래도 그 울음 덕분에 이집트 사람의 동정심을 사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울러, 울음 소리 때문에 아기를 죽인 것보다는 덜 비극적인지 모르겠지만 6 25 사변 초기에 이런 믿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멀쩡한 남자들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곧바로 모병관 일행에게 붙들려서 군대로 납치에 가깝게 끌려가는 지경이었는데.. 어떤 4살배기 딸의 아버지는 징집을 피하려고 잘 짱박혀 숨어 있었다.

그런데 징집관이 그 아이에게 먹을것도 주면서 꼬드겨서 “네 아버지 혹시 어디 계신지 아니?” 이렇게 물었는데 애가 순진하게 아버지가 숨은 곳을 발설해 버렸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징집되어 끌려갔고, 전장에서 전사했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됐는지를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야 알게 됐다고 한다.

옛날에 어디에서 들은 얘기인데 지금은 출처를 검색해도 잘 안 나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테 죄를 물을 수 없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장병을 징집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모병관을 비난할 수도 없다.
이런 것도 전쟁이 야기한 너무 슬픈 비극이다. 오로지 자기 권력욕을 위해 동족상잔을 추진한 이북 수뇌부들이 개XX일 뿐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18 08:35 2022/11/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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