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간 역학관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독일의 히틀러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전쟁광 독재자 쌍두마차로서 역덕 밀덕들의 아주 좋은 비교 분석 대상이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히틀러는 살아 생전에 나폴레옹을 굉장히 존경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당대에 히틀러의 직접적인 라이벌은 처칠이나 스탈린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전쟁광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러시아/소련으로 쳐들어갔다가 엄청난 영토와 추위 때문에 감당을 못 하고 패배한 이력이 있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 자국민/자국어 순수주의와 국뽕 국수주의 군국주의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전쟁에서 졌을 때 배후중상설.. "원래는 이길 수 있었는데 간첩 배신자 때문에 뒤통수를 맞아서 진 거다~~~ 특히 이거 유대인 때문이다" 망상에도 빠진 적이 있었다. (보불 전쟁, 1차 세계 대전)

프랑스와 독일 모두 외국 식민지가 그렇게 많은 나라는 아니었다. 독일은 그나마 있던 식민지조차 1차 대전에서 지면서 다 빼앗겼고, 그때 특히 해군이 봉쇄당했다. 잠수함이 아닌 전함으로 해전을 치른 게 1차 대전 이후로는 없다.
나치 철십자가가 그려진 항공모함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 비슷한 역사

(1) 1936년엔 영국의 군주(조지 5세)가 붕어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가 암살 당했다(사이토 마코토, 2· 26 쿠데타). 그리고 나치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쯤 뒤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2) 그 뒤 2022년엔 영국 군주(엘리자베스 2세)가 붕어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가 암살 당했다(아베 신조). 그리고 독일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빌미로 재무장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3년쯤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참 그럴싸하게 끼워맞춘 것 같다. -_-;;

3. 동물만 보호

나치 독일은 정신나간 군국주의나 유대인 학살만 저지른 게 아니라 굉장히 뜬금없는 면모가 있었다.
바로 근현대적인 동물보호법을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제정해서 동물 복지에 힘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1933년, 나치 집권 초창기부터 말이다.

"동물을 유흥용으로 잔인하게 신체 훼손하거나 죽이는 것 금지, 불법 수렵 금지, 자연보호.." 이게.. 1930년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였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법은 히 총통이 개인적으로, 친히, 각별히 관심을 갖고 제정한 것이었다. 그는 개를 완전 좋아해서 개인적인 애완견도 키우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동물을 저렇게 학대할 정도의 흉포한 사람이라면 사람에게도 잔인한 짓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동물 학대를 처벌한다. 그러나 나치는 그냥 무식하게 흉포한 게 아니라 뭔가 신념을 갖고 냉철하게 조직적으로 인종을 청소했다.

멀쩡한 개· 돼지를 가스실에다 집어넣고 죽이는 건 범죄이지만, 유대인을 가스실에다 집어넣어 죽이고 장애인을 죽인 건 인류의 우수한 혈통 보존을 위해 필요한 행위로 정당화된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행적은 여느 흉악 범죄나 전쟁 범죄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봐야겠다.

4. 개인과 직책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초대이자 유일한 '총통', '퓌어러'였다. 하지만 그는 후임부터는 직함을 총리와 대통령이라고 둘로 나눠서 두 명을 지목했다. 총리는 파울 괴벨스이고 대통령은 카를 되니츠가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로는 이들 말고 하인리히 힘러라든가 마르틴 보어만 같은 다른 유력 후보도 있었다. 그러나 얘들은 권력욕 티를 너무 대놓고 내는 바람에 하극상 반역· 배신으로 간주되어서 히틀러에게 찍히고, 후계자 라인에서 짤렸다.
뭐, 히틀러의 사후에 나치 독일은 곧장 패망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니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저 감투들은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범 재판에 불려 다니면서 히틀러가 싼 똥을 치우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현대의 행정 체계에서는 인물과 계급? 직책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제일 높은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n년 동안 맡았다가 물러나는 제 n대 대통령이요, 여러 역대 대통령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무궁화 대훈장을 받고, 퇴임 후에도 최고 수준의 경호에다 재임 당시 연봉의 90% 가까이를 계속 꼬박꼬박 받으면서 떵떵거리고, 죽으면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국립 현충원에 묻히는 것까지도 보장되긴 한다만..
그건 그 사람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예우를 받는 거지, 그 사람 자체를 예우하는 건 아니다.

조선 시대 왕릉은 각 사람별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반면.. 지금 현충원에는 그냥 전직 대통령 묘소라고 한 군집...만이 존재하는 것도 그 예시라 하겠다. 그래서 어느 유명 전쟁 영화에 "경례는 계급에다가 하는 거지,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다"라는 대사도 있는 것이다.
뭐, 전직 대통령들이 기껏 만들어 놓은 저 장소에 들어가지를 않아서, 아직까지도 제일 존재감 없었던 최 규하밖에 묻혀 있지 않은 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현충원에서 묘지가 특별 취급을 받는 대통령은 이 승만, 박 정희, 김 영삼과 김 대중 네 명 이후로는 더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전재 독재 치하에서는 “하일 히틀러~!!” 이런 경례 구호에서 볼 수 있듯, 아무래도 개인이 숭배 받는다. 그래서 나치 독일 말고 북괴만 해도 개인과 직책이 다 따로 놀아서 김 일성 '주석', 김 정일 '국방위원장', 김 정은 '장군??' 제각각이다. 저 동네에 이런 관행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5. 영화

<다운폴>(2004)과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2차 세계 대전의 양대 추축국· 전범국들이 패망하고 항복하기 직전에 내부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나름 객관적으로 잘 조명한 영화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조피 숄의 마지막 날>(2006)과 <아이히만 쇼>(2015)도 나란히 대조해서 볼 만한 작품인 것 같다.

전자는 나치를 반대하는 선전물을 뿌리던 백장미단이 나치 치하에서 잡혀서 재판 받고 처형 당한 과정을 자세히 조명한 반면,
후자는 나치의 패망 이후에 나치 잔당 전범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모사드 요원에 의해 잡혀서 재판 받고 처형 당한 과정을 자세히 잘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1960년대에 벌어졌던 이 전범 재판을 전세계에 무슨 TV 쇼처럼 꾸며서 중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무슨 '트루먼 쇼'처럼 '아이히만 쇼'라고 적절하게 붙였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꼼꼼히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재판을 계기로 인간이 무심하게 벌이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세계적으로 이뤄지게 됐다고 한다. 무슨 <파리대왕>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성악설까지는 아니지만, 악에 무덤덤해져 버리는 <버스 44>와 비슷한 심리 말이다.

6. 반면교사와 대조

(1) 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에..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섬을 간신히 점령해서 미국 깃발을 꽂는 장면이 사진으로 전해진다.
그것처럼, 2차 대전의 독소 전쟁이 끝날 무렵엔.. 소련군이 베를린 시내를 점령해서 제국의사당에다가 붉은 깃발을 꽂는 장면이 사진으로 전해진다(베를린 공방전). 각각 시기가 1945년 3월 말과 4월 말로, 한 달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이야.. 폭격기로부터 소이탄과 원자폭탄만 먹었지, 상륙 작전이 행해진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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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되고 시체가 거꾸로 매달려 조리돌림 당한 것은, 같은 추축국 진영이던 독일의 히틀러와 일본의 도조 히데키에게도 굉장히 큰 충격을 줬다. “이제 나도 저 꼴 나겠구나. 저런 치욕을 당하느니 자결해야겠다”라고 당연히 결심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1989년 말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공개 처형 당하자 북괴의 김 일성 부자는 심장이 완전 쫄깃해졌다고 전해진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자기들도 저 꼴을 당할 것이니 내부의 사상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인민들 간 가스라이팅을 더욱 강화해서 나라를 더욱 가난하고 폐쇄적인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3) 히틀러는 자살에는 성공했지만, “적이 자기를 절대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체를 확실하게 훼손해서 없애라”라는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그 반면, 도조 히데키는 자살에 실패해서 전범 재판에까지 회부되고, 교수형을 당해서 생을 마감했다.

7. 때깔

끝으로..
우리나라는 반일 감정이 강하고 욱일기를 정서적으로 싫어할 뿐이지..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 쪽은 반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거리가 너무 멀고 직접적으로 침략이나 착취, 학살을 당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10~20여 년 전에는 나치 독일 코스프레를 잔뜩 한 클럽인지 카페인지가 있었다가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고 시정됐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 모처에는 독일차 부품을 파는 듯한 가게가 있는데.. 이름이 무려 ‘히틀러 상사’이다. 와~ 이런 곳도 있구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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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끔찍한 홀로코스트나 유대인 학살 같은 짓을 빼고 독일이 2차 대전도 1차 대전처럼 평범하게만(?) 진 것이었으면.. 히틀러에 대한 평가가 지금처럼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죄악들을 빼고 히틀러의 소싯적 연설만 생각한다면 진짜 피끓는 듯하고 대단하고 멋있어 보인다.;;
SS 친위대의 검은 군복 봐라.. 일본군 군복보다야 독일군 군복이 훨씬 더 멋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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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10/22 08:36 2022/10/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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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네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세계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폭군이었으며, 특히 마가 씌인 듯한 잔인한 기독교 박해로 인해 교회사의 관점에서는 더욱 악평을 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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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발 노안인 인상에 걸맞지 않게, 나이가 아주 젊었다.
겨우 30 초반의 나이에 부하들의 신임을 잃고 폐위당한 뒤,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폭군이었던 연산군도 겨우 20대 때 흥청망청 놀면서 나라를 말아먹은 뒤, 30이 될까말까인 나이에 죽었다.

네로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로마 대화재 배후설이다.
부하들을 시켜 시내를 일부러 불질러 놓고는 불 구경 하면서 띵까띵까 악기 연주하고 시를 지었다..???
(꼴도 보기 싫던 낡고 흉측한 건물들이 다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하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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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9 11 테러 자작극설 음모론이라든가, "할배가 일부러 다리를 폭파하고 먼저 튀었다", "빵이 없다고? 그럼 과자/고기를 쳐먹으면 되지"(마리 앙투아네트) 급의 악성 루머로 여겨진다. 정황상 네로가 그 정도까지 악마 싸이코패스는 아니었다.

그는 불 구경은커녕, 외지로 휴가를 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화재 소식을 듣고는 기겁하여 전차를 몰고 수십 km를 달려서 현장에 헐레벌떡 돌아왔다.
황제가 직접 발로 뛰며 화재 진압을 지휘하고, 자기 사재를 털어서 구호 물자를 마련하고, 심지어 궁궐의 일부를 개방해서 이재민들 임시 거처도 마련했다.
재난에 정말 최선을 다해 대처했다는 건 제아무리 네로를 싫어하고 혹평하는 역사가라도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네로가 선정을 베푼 건 거기까지가 끝이었던 것 같다.
화재 발원지에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다른 건물을 올리려 해서 "이거 너무 노골적인데? 혹시 저 건물 올리려고 일부러 불지른 거 아냐?" 의혹을 본격적으로 살 짓을 하긴 했다. 그리고 무리한 토목 공사 때문에 나라 경제를 말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 평판이 깎이고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것 같자, 그는 그제서야 예수쟁이들에게 방화범 누명을 씌워서 화풀이를 시작했다. 이건 명백한 팩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란 게 등장한 지 30년 남짓밖에 안 됐던 시절인데.. 이때 이들의 대외 이미지는 막 나쁜놈 사회악이라기보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 아싸 정도였다.

남들 다 믿는 걸 로마 잡신들을 섬기지 않고, 국가 공권력 자체는 인정하는 것 같지만 황제를 신성시하지 않고 웬 듣보잡 예수라는 교주가 부활했다며 설치고 다닌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얘기를 나눠보면 천성은 착하고 성품도 훌륭해 보이고.. 쟤들이 도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신비로운 부류였다.

그랬는데 민심이 흉흉할 때 과거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이나 '중세 유럽 페스트 창궐 후의 종교 재판'처럼 누구 아싸 한 놈 희생양 삼아 조져야겠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그리고 이때는 크리스천들이 걸려들었다. "이게 다 저 예수 믿는 이상한 놈들 때문이다. / 저놈들은 이번 화재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다 / 사실 쟤들이 방화범이다 / 쟤들은 로마 제국의 반역자다" 이런 식으로..

네로는 이 사람들을 그냥 곱게 죽인 게 아니라 동물 가죽을 뒤집어씌우고 나서 맹수들에게 던져넣기, 십자가형, 길거리 인간 횃불(= 화형-_-) 급으로 정말 가학적이고 잔혹하게 죽였다.
어떤 방식이건, 이런 잔인한 양민 학살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이어지자 다른 비기독교인들조차 "쟤들이 아무리 나쁜놈들이라지만 이건 너무했다, 선 넘었다"라고 이의 제기를 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게다가 이때는 거짓으로 신자 행세를 하다가 조직을 밀고하는 가짜 끄나풀 간첩 배신자까지 들끓었다. 그러니 이때는 어중이떠중이 다 교회로 전도 초청 따위는 꿈도 꿀 수 없고, 진짜 신자 형제를 가려내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람 마음속을 알 수가 없으니 신뢰할 만한 이웃 교회 지도자의 추천과 보증이 아주 중요한 변별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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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바로 이때 네로를 대면한 뒤,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AD 67년경. 신약 성경 데모데후서는 이런 배경에서 기록되었다.

(죄수를 사형에 처하라는 어명까지 악기를 띵띵 연주하면서 내리는 개싸이코패스 네로의 기백.ㄲㄲㄲㄲㄲㄲㄲ
저 아저씨가 현대인이었으면 락 같은 데에 심취해서 아마 일본 환타 CF에 나오는 DJ 선생이나 가죽점퍼(록커) 선생처럼 코스프레를 했지 싶다. ㅋㅋㅋㅋㅋㅋㅋ)

바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어째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은 (1) 범죄 혐의가 있더라도 채찍질 같은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지 않으며, (2) 반역죄가 아닌 한 사형을 당하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특권층이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로마로 가서 지역구가 아닌 전국구 재판을 청구할 권리까지 있었는가 보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로마 행을 고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소원대로 로마에 가서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연대기부터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복음을 널리 전했다. 최신 학문 유행 문화의 원산지였고 지금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와도 같은 대도시였던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 정부로부터도 예수 믿고 전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때는 결국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게 됐다. 네로가 바울을 어떻게든 죽여 없애 버리려고 안달이 났기 때문이다. (3) 하지만 그는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이때도 십자가형 같은 잔인한 형벌을 받지 않고 곱게(?) 참수만 당했다.

참고로, 네로 시절엔 아직 콜로세움 경기장은 없었다. 그건 AD 80년 이후에나 등장했기 때문이다. 네로 때의 순교랑, 원형 경기장에서 양민들이 맨손 무방비로 굶주린 사자 떼와 맞닥뜨리는 장면을 동시에 떠올릴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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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의 입장에서 네로에 의한 박해는 정말 엄청나고 혹독한 환란이었다. 베드로전서 역시 제일 가깝게는 이런 시국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저 네로놈이 적그리스도이고, 이 순간만 잘 넘기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 생각했다.

뭐, 예수님이 곧장 다시 오시지는 않았고 로마 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그 뒤로도 수백 년 동안 잊을 만하면 간헐적으로 또 계속되었다.
이게 횟수를 따져 보니 총 열 번이었다. (☞ 관련 링크) 계 2:10에서 말하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가 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의미한다고 분석하는 해석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네로의 깽판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 황제 역시 AD 68년에 쿠데타로 인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세상 역사에서 네로는 처음엔 통치를 잘 하다가 말년에 궁예처럼 흑화해서 광기어린 실책을 저지른 폭군이다. 히틀러처럼 그냥 예술만 했으면 좋았을 걸 괜히 정치를 하다가 돌아 버린 사람 정도?
뭐, 폭군으로서는 평범한(?) 범주에 들지, 무슨 공산주의나 파시즘이 가미됐던 20세기 최악의 싸이코패스들.. 히틀러, 김 일성, 폴 포트, 이디 아민 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죽은 뒤의 장례도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지워 버리는 정도는 아니라, 평범한 왕보다만 약간 덜 예우하는 수준으로 그쳤다고 한다.

물론 아무리 실드를 친다 해도 폭군은 폭군이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박해의 첫 포문을 열었던 악역이 네로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만 왜 그리 잔인하게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9/26 08:35 2022/09/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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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잘 알다시피 현재까지 지구의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 거주지에 핵폭탄을 쳐맞아 본 유일한 나라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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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기란 엄청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인데 1945년 8월경의 일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단순히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점령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평범한(?) 악행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제때 항복 안 하고, 총체적으로 멍청하고 병신같은 뻘짓만 골라서 하면서 천조국한테 개겼기 때문에 저 지경으로 참교육을 당한 것이었다. 지 무덤을 파면서 매를 벌었다.

1. 원폭이 떨어진 곳

잘 알다시피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였다. 모두 후쿠오카 일대에 있으며 일본 본토의 완전 남서쪽 끝 지방이다. 수없이 많은 소이탄 폭격을 당해서 먼저 잿더미가 됐던 도쿄하고는 위치와 방법이 딴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 근처에 있는 고쿠라, 그리고 좀 더 동부의 교토도 목표물 후보로 거론됐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비껴 가게 됐다.

2. 원폭의 위력

원폭 이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 폭발 사고였다고 여겨지는 건 1917년의 캐나다 핼리팩스 대폭발이었다.
거대한 화물선 한 척에 실려 있던 화약이 화재로 인해 몽땅 폭발하면서 TNT 2.9kt 정도의 위력이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바닷가에서 불구경 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파편과 잔해에 맞아서 사망자만 2천여 명이 발생했다.

그랬는데 우라늄235 기반의 히로시마 원폭의 폭발력이 TNT 16kt, 플루토늄238 기반의 나가사키 원폭의 폭발력은 TNT 21kt 정도로 여겨진다. 두 원폭 모두 무게는 그냥 4톤에서 4.5톤 사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뒤에 0이 3개가 추가되고도 남는 사기적인 에너지가 나온 셈이다.

배수량 3000여 톤급 화물선에 가득 실린 일반 폭약 vs 대형 폭격기에 실린 4.5톤짜리 핵탄두 달랑 하나의 위력 차이가 이 정도이니.. 원폭이 떨어졌던 당시에는 "이 폭탄은 30여 년 전, 핼리팩스 대폭발 위력의 수 배.."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갔었다. 지금이야 어디서 핵실험을 하면 "히로시마 원폭의 n배" 이렇게 비교 기사가 나가겠지만, 저 때는 헬리팩스가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핼리팩스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 지점과 꽤 가까이 있어서 5년 전엔 구조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사망자의 일부가 여기에 매장되기도 했다. 어째 1910년대에 굵직한 사건 두 건과 연루되면서 유명해졌다.

3. 원폭이 떨어진 방식

1940년대에는 아직 지금 같은 미사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음속 왕복 엔진 폭격기가 적진의 상공까지 직접 날아가서 폭탄을 떨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조국은 일본과 더 가까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1944년엔 B29라는 걸출한 고성능 장거리 폭격기까지 개발되어 드디어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열악하던 둘리틀 특공대 시절처럼 깜짝쇼만 한 뒤에 비행기를 버리고 불시착하는 게 아니고, 살을 많이 뺀 함재기들이 평타 정도 폭격을 하다가 근처의 항공모함으로 허겁지겁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더 크고 묵직한 폭격기가 장거리 원정을 가서 왕창 폭격을 퍼부은 뒤에 공간 넉넉한 섬 비행장으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뭐, 이러고도 일본이 항복을 안 했으면 나중엔 연합군 육군까지 본토에 상륙해서 폭격이 아니라 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를린이 함락됐을 때처럼 말이다.

4. 비행기들이 출격 방식

원폭을 떨군 폭격기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 섬'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발진했다. 얼추 괌 근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폭탄 투하 한 시간쯤 전에 먼저 정찰기가 홀로 날아서 투하 지점의 날씨 같은 걸 최종 체크했다. 그 다음으로 폭격기 본체, 카메라맨이 탄 촬영 비행기, 계측기를 실은 비행기가 같이 날아갔고.. 폭탄을 투하한 뒤에는 비행기 세 대가 모두 폭발 예정지로부터 급선회· 급강하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파일럿들은 이런 기동 훈련을 반복해서 받으면서 연습했다.

폭탄은 여객기 순항 고도에 맞먹는 거의 9km대 고도에서 떨어져서 히로시마 little boy 기준, 570m대 상공에서 터졌다. fat man도 뭐 대등소이하다.

히로시마에 간 폭격기와 나가사키에 간 폭격기는 같은 B29 기종이고 같은 지역에서 발진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기체였다. 전자의 애칭은 Enola Gay이고 후자는 Bockscar인데.. 아무래도 '최초'의 타이틀을 획득한 전자가 압도적으로 더 유명하다.
두 폭격기의 승무원도 다 달랐다. 동일한 기체나 동일한 승무원이 두 도시에 원폭을 동시에 떨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5. 원폭 재료의 수송

폭격기로 원폭을 떨어뜨리려면 그 전에 원폭을 폭격기의 발진 기지로 실어나르기도 해야 했다. 단, 보안을 위해 완제품(?)이 아니라 재료와 부품만 날랐고, 조립은 출격 직전에 기지에서 행해졌다.

고농축 우라늄을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티니안 섬까지 수송한 건 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 호였다. 얘는 기밀 유지 명목으로 호위함 하나 없이 살금살금 몰래 항해하며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니 우리는 에놀라 게이 폭격기를 기억하기에 앞서 인디애나폴리스 함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배는 그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항해할 때도 호위함 없이 위험하게 다니다가.. 1945년 7월 30일, 인근의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어뢰를 맞고 격침 당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전쟁에서 다 졌고 바로 며칠 전에 포츠담 선언 최후통첩까지 나갔겠다, 우리 천조국한테 위험 요소 따위 없을 거라고 상부에서 함장의 요청까지 묵살하면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종전 직전에 이렇게 순양함 한 척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미 군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인디애나폴리스 측의 구조 요청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서 수많은 병력을 망망대해 위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는 오히려 함장을 자기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배와 부하들을 날려먹은 패장으로 몰아붙이면서 진급을 누락시켰다. 그 함장은 말년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먼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함장이 직접 "인디애나폴리스 측은 특별히 부주의하거나 잘못한 게 없습니다. 우린 그 배가 어떤 기동을 하더라도 공격해서 격침시킬 수 있던 상태였습니다"라고 인증했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더 밝혀지면서 함장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 돼서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아직 우라늄을 싣고 있던 상태에서 격침됐다면...? 햐~ 이건 "아폴로 13호가 달 착륙선을 분리시키고 난 뒤에 폭발했다면?" 같은 급의 비극이 됐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에 격노해서 어떻게든 일본을 상대로 보복하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에 비해, 저 그림에서 껄껄 웃고 있는 후임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한 뒤에야 원폭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원폭 사용을 지지하고 승인했었다.
허나, 그는 훗날 6· 25 때 한반도에서 원폭을 또 동원해서 북괴 중공을 몰아내자는 군부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이다. 이 글의 요지는 인류 최초의 핵무기 투입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일이 아니며 그 전에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조국은 이런 원폭을 떨구기 전에 핵 실험까지 미리 해 봤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모처의 사막에서 나가사키 원폭과 비슷한 규모의 플루토늄 폭탄을 터뜨려 본 것이다. 그러니 쟤들은 자기들이 터뜨리는 폭탄이 위력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도 아니었다.

물론 이 핵 실험은 진행 당시에는 극비로 부쳐졌고 종전 이후에야 비밀이 풀렸다. 어디서 뭐가 터졌다는 낌새가 신고된 건 모 공군 기지의 탄약고가 벼락 맞고 통째로 유폭해 버렸는데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식의 거짓말로 무마시켰다.
'트리니티(삼위일체) 실험'이 바로 냉전 이전에 행해진 전무후무 유일한 핵 실험 기록이 됐다.

* 원폭을 맞은 것 갖고 굳이 죽은 일본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잘 죽었다, 쌤통이다' 이러는 거야 인간말종 짓이다.
그러나 지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입 싹 씻고 원폭 맞은 불쌍한 피해자 행세만 늘어놓는 건 더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짓일 것이다.;;

예전에 본인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의 사진 기록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이 들어와서 찍은 사진 말고.. 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내부를 목숨 걸고 찍은 진귀한 사진은 딱 네 장이 전해진다고 말했었다. (☞ 이전 글 보기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그것처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찍힌 제일 따끈한(폭발 이후 겨우 3시간 남짓 경과) 현장 사진은 딱 5장이 전해진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1913-2005)라는 일본인 기자가 찍은 건데.. (☞ 보기)
이건 뭐 혐짤은 전혀 없고, 평범한 전쟁 폐허 속에서 흙먼지 뒤집어쓴 사람들이 거지꼴로 앉았거나 줄지어 선 모습이 전부이다. 훨씬 더 끔찍한 혐짤 급의 시체 사진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찍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한 일본을 접수한 미국에서는 원폭 피해자의 참상을 묘사한 글이나 현장 사진은 절대로 언론을 타지 못하게 아주 강압적으로 검열하고 찍어눌렀다고 한다. 반전 반핵 여론이 조성되지 않게 할 의도였지 싶다. 그래서 저 사진들도 GHQ가 일본에서 철수한 1952년쯤 돼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간지나는 버섯구름 사진만 매스컴을 잔뜩 탔을 뿐, 버섯구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버섯구름조차도 위에서 보다시피 히로시마 껀 영 별로이고 나가사키 것이 훨씬 더 멋있으니 그것만 사골이 되도록 인용되고 쓰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2/08/05 08:35 2022/08/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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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1년

(1) 조선에서는 1871년은 무려 천조국과 맞서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해이다(6월).
당연히 절대적인 군사력으로는 조선이 택도 없이 쳐발렸다. 상대방은 그 시절에 벌써 초보적인 잠수함과 철갑선과 철도와 기관총, 후장식 저격총을 굴리면서 내전을 벌였던 미친 나라이다. 어디 조선 따위가.. -_-;;

전사자 교환비는 기관총 소지한 문명국 vs 화살이나 딱총 소유한 미개국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뭔 신념이 있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급으로 탈영병 한 명 없이 사기가 충만했으며, 정말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총알이 다 떨어진 뒤엔 돌 던지고 흙을 뿌리기라도 하면서 양키 코쟁이들한테 끝까지 저항했다.
포로로 잡혀 결박당해도 밥과 물을 일체 얻어먹지 않았으며.. 목을 드러내 보이면서 차라리 찌르라고, 자길 죽이라고 길길이 악을 쓰고 날뛰었다. 아니,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한강으로 뛰어들어 줄줄이 자결한 병사 역시 부지기수였다.

이건 어찌 보면 70여 년 뒤의 태평양 전쟁 때 세뇌된 일본군이 미군한테 한 행동과도 비슷했다. (음 그래도 반자이 어택까지는.. -_-;; )
남북전쟁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여기까지 온 미군 베테랑들도 조선군의 이 병맛 같지만 너무 진지하고 숙연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지, 지정학적으로 너무 멀고 별 메리트 없지.. 자기들도 남북전쟁 폐허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지..
여기는 천조국이 보기에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어 보여서 쟤들도 그냥 철수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자뻑하여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뒤로 천조국은 조선을 결코 직접 침략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침략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이웃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걸 걍 묵인하기로 입을 맞춰 버렸을 뿐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2) 자 다음으로, 서양에서 1871년은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해이다(5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뜯기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겼으며,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으로도 언급된 그 유명한 전쟁 말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흑역사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엎치락뒷치락 악연은 훗날 1차 세계 대전 때 반대로 독일이 져서 천문학적 배상금크리, 그러다가 2차 대전 때는 또 반대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비시 프랑스 괴뢰 정부가 등장하는 식으로 더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 질서가 개편된 뒤에야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게 됐다.

1871년이 프랑스의 역사에서 더욱 특이한 시기인 이유는.. 저런 혼란스러운 패전 시국을 틈타서 '파리 코뮌'이라는 사회주의/공산당 정권이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70일 남짓 집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표방했었지만, 공산당 특유의 과격한 과거 단절 노선은 어딜 가지 않았다. 오래된 프랑스 문화재 건축물들이 이때 많이 박살났었다.
또한, 혁명의 나라, 미터법의 원조 나라 아니랄까 봐, 시계와 달력까지 10진법 기반으로 고쳐서 시행했던가 보다. 무엇이든 과거 레거시와는 싹 단절이었다.

하지만 얘들은 오래 못 가고 무력으로 토벌됐다. 이때도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과 자코뱅 공포정치(1794), 홍 경래의 난(1812), 갑신정변(1884),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1864), 우리나라 6 25 부역자 인민재판(195x) 따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피바다가 벌어졌다. “뒈져라 빨갱이!” 우리나라만 이념 갖고 서로 죽고 죽이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공산당 인터내셔널가가 이 파리 코뮌의 투쟁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니 1871년은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관점에서 꽤 흥미로운 해였다.
프랑스는 아무래도 영국 독일 미국하고는 동네 물이 좀 다르고, 러시아와 비슷한 기운이 있긴 해 보인다.;;
그나저나 2024년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군..

2. 1894년

그 다음으로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연대는 1894년이다.
찬송가 중에서 '내세, 천국'을 노래하는 곡들은 크게 내 인생의 끝(사후 세계) 내지 이 세상의 끝(종말)으로 세부 주제가 또 나뉜다.
그냥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만나 보겠네, 셋째 하늘에 올라가겠네' 이런 건 내 인생의 끝이지만.. '나팔 소리, 새 예루살렘, 들려 올라감, 몸이 변화됨, 예수님 다시 오심' 이런 건 명백히 후자이다.

전자는 그나마 장례 예배 때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불릴 수 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거야 기독교라면 이견이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교파마다 해석이 차이가 나는 민감한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교파 찬송가에 선뜻 수록하기가 참 난감하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드물게 종말을 다루는 곡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나팔소리 James. M. Black (1856-1938) Milton
  • 오랫동안 고대하던 James. M. Kirk (1854-1945) McPherson

(주의 신부인 교회가 먼저 들려 올라갔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임하는 건데.. 왜 "천년왕국이 이를 때" 들려 올라가는 걸까?? 후자곡은 가사가 무슨 생각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ㄲㄲㄲㄲ)

그런데 위의 두 곡은 작사· 작곡자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비슷하고 리듬도 비슷하고, 작사· 작곡자도 이름이 묘하게 비슷한 데다 거의 동시대를 산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 두 곡은 모두 1894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우리 조선의 사정은 어땠는가??
갑오개혁, 청일 전쟁, 전 봉준의 농민군 항쟁, 우금치 전투..;;
개막장 탐관오리가 백성 등골을 빼먹지, 나라는 남의 나라 전쟁터가 됐지, 왕이라는 작자는 외국을 끌어들여서 민란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학살했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헬게이트에 혼돈과 환란 그 자체였다.

그 동안 천조국에서는 저렇게 성도들이 변화될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올 것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만들어지고 발표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선교사가 이 꿈도 희망도 없던 조선 땅에 와서 복음 전하고 학교 짓고 병원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누와 성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말이다.;;;

1800년대 말은 세계 열강의 관점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벨 에포크, 한창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팽창하던 리즈 시절이었다. 물론 그런 나라의 자국민이라도 로동자로 저렴하게 착취 당하던 계층이라면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예 피식민지 사람들의 처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이때는 근대화 잘해서 아주 잘나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자국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은 묘하게 서양 냄새가 많이 나고 희망적이고 몽환적이다. 찬송가 하나만 생각하다 보니 조선하고는 어쩜 이렇게 극과 극이었나 하는 생각이 덩달아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18 08:36 2022/07/1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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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3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박 정희 시절에 국내에서 시행됐던 8 3 사채 동결 조치는

  • 그린벨트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개인의 재산과 시장 구조를 인위로 좌지우지했던.. 반시장적이지만 필요악 성격이 있는 조치였다.
  • 김 영삼 때의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헌정사상 제일 마지막에 행해졌던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둘 다 금융· 경제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계엄과 마지막 국민투표는 5공 시절)
  • 우리나라가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 기반이 얼마나 허술하고 경제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오죽했으면 경제 개발을 위해서 그런 통제가 필요했는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얘는 10월 유신과도 관계가 있다.

박 정희 시절에 우리나라는 무슨 공산주의 식으로 사유재산을 없앤다거나 땅을 몽땅 국유화한다거나 통치자를 우상화하거나 인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업· 경제 구조가 완전히 자유 방임인 것도 아니어서 국가가 이것저것 통제를 많이 했다.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다.

그때는 국가 차원에서 돈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공급이 충분치 않은 원자재나 농수산물에 수요가 너무 쏠리는 것을 분산시켜야만 사회 안정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가령, 혼· 분식 장려 운동은 쌀 소비를 제어하려는 취지였으며, 연탄 보급은 산림을 보호하고 비싼 석유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2. 수도 이전 계획

과거에 일제 강점기가 태평양 전쟁과 일제 패망 같은 이변 없이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됐으면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황상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을 수 있고, 철도의 관점에서는 만들다가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완공됐을 것이다. 경부-경의선뿐만 아니라 경인선과 경원선의 복선화는 그 시절에도 이미 논의됐던 계획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 자료에 따르면, 쟤들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를 경성에서 근처의 용인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출처: <국토종합개발의 역사>, 일본 국토계획협회, 1961) 음.. 도대체 왜?
하긴, 서울 구시가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데 엉켜 살기엔 너무 비좁아지긴 했다. 북쪽은 산으로 가로막혀서 더 확장을 못 하고..

그런데 지금 서울처럼 한강 이남을 개발하고 다리를 잔뜩 건설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장소를 개척할 생각을 했다는 게 흥미롭다.
심지어 조센징들은 만주로 쫓아내고 일본인들 뉴타운을 조성하려 했다는데.. 현실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통 연계는 어찌 될까? 수려선이 있긴 하지만 얘는 협궤였다. 얘가 당장 표준궤로 개궤되고 복선화도 되고, 경부선과의 연결선이 만들어져야 했을 것이다.

한편, 해방 후 리 승만 할배 시절에야 '경성부'가 서울 '특별시'로 바뀌었고 수도 이전 따위는 전~~혀 논의될 가치가 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박 정희는 남한의 중심부인 충청도쯤으로 수도 이전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국토 균형 개발이라기보다는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까워서 불안하다고 말이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1 21 사태가 큰 트라우마를 남겼지 싶다.

(내 개인적으로, 박통 시절에 훗날 통치 스타일에까지 영향을 줬을 정도로 비극적이었던 사건 둘은 1 21 (1968), 그리고 영부인 피격(1974)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박통은 어디 멀리 가지는 못하더라도 차선책인 강남을 적극 개발했다. 강북 여기저기에 난립해 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통합해서 마침 경부 고속도로와도 가까이 있는 서초구에다가 전용 터미널을 만들었다.
여기는 일제 시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리 승만 때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이었지, 애초에 인서울 자체가 아니었다.

박 정희는 유신 헌법 하에서 9대 임기만 채웠어도 1984년까지는 했을 텐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마지막 과업으로 (1) 행정 수도 이전, (2) 1996년쯤을 목표로 올림픽 유치 준비, (3)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잡았던 듯하다. 각색이 들어간 오글거리는 낭설일 수도 있겠지만, "핵무기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짠~ 공개하고는 미리 점찍어 둔 후임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퇴임한다~~" 급이었다고 한다.

저 사람 이후 행정수도 이전은 세종시로 그럭저럭 실현됐고, 이제는 대통령 집무실이 경복궁 뒤의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졌다.
올림픽은 뭐.. 바로 후임인 전땅끄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서 결국 잘 해냈다. 다만, 핵무기는 미국의 강력한 견제와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뭐.. 일제의 '용인 철도'와 마찬가지로, 계획만 했다고 해서 진짜 실현된다는 보장이 있지는 않다는 걸 유의하자.
완전히 180도 틀어져 버린 서울 지하철 1~5호선 초창기 계획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제 개발 5개년 정도는 박 정희 이전의 장 면 내각도 생각했던 것이고, 심지어 박 정희도 그걸 참고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추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3. 청와대 주변의 잠금해제 내력

청와대 부근은 1968년, 북괴 무장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김 신조 사태를 계기로 주변 경비가 역대 최고로 강화됐다. 주변의 산길까지 몽땅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묶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간첩 식별을 위한 주민등록번호(지금과 같은 번호 체계는 아니지만), 5분대기조, 실미도 공작원 양성 등 엄청 많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군복무 중이던 사람들은 복무 기간 역대 최장(3년)으로 연장이라는 날벼락을 제대로 맞았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청와대 주변 등산로의 전면 봉인쯤은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평창동 마을이 이때 육성됐으며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도 1968년 9월에 개통했다. 그 당시엔 유료 도로였다;;

그로부터 무려 25년이나 지난 1993년, 김 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개방됐다.
단, 주요 전망대 포토존에는 공익인지 의경인지 어쨌든 군인까지는 아니지만 경찰에 준하는 아재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청와대 쪽으로는 사진을 못 찍게 감시하곤 했다. 본인은 그 시절에 인왕산을 올랐던 경험과 기억이 있다.

청와대를 촬영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니, 차라리 해 떨어지고 시야가 불량해진 밤에 인왕산을 오르는 건 괜찮았던가 보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인가? 1주일에 한 번은 감시 요원들이 사정이 있어서 그런지 여전히 입산 금지였다.

1993년 말엔 창의문(a.k.a. 자하문) 일대 구간이 개방됐다고 한다. 헐~ 옛날엔 거기도 민간인 접근 금지였어?? 하긴 북악산 쪽은 월담하지 못하게 높은 담장이 쳐져 있긴 하더라.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숙정문 일대는 2006년 4월, 무려 노 무현 시절에야 개방됐다고 한다.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거의 동시에 저기도 해금됐다는 뜻이다.
그 뒤 2007년은 1월 1일부로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무료화되어 입장료 징수가 폐지됐다.
2007년 식목일엔 북악산의 한양도성 구간 산책로가 개방됐다. 단, 신분증 까고 목걸이를 받아야만 출입 가능하다. 남쪽의 청와대 방면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의 기존 북악스카이웨이와 팔각정 방면으로도 왕래는 불가능하다.

2009년 7월 10일엔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있는 우이령길이 매일 최대 500명에 예약제 형태로 민간에 개방됐다. 사실, 안보보다는 환경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선뜻 개방을 못 하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첫 개통을 앞두고 있고, 용인-서울 고속도로가 개통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24일엔 북악산에서 "성북천 발원지 - 하늘마루" 사이의 제2 산책로, 일명 김 신조 루트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렇게 규제가 차츰차츰 풀리다가 2019년쯤..?? 인왕산의 촬영 감시요원이 없어졌다. 그리고 북악산 목걸이는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개인 정보까지 수집하지는 않고 그냥 드나드는 인원 집계만 하는 출입 태그로 바뀌었다.
2020년 11월부터는.. 산중턱의 북악스카이웨이에서 한양도성 청운대 - 곡장 사이를 오가는 등산로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리고 2022년.. 대통령의 집무실 자체가 청와대 말고 용산 국방부 청사 안으로 이사를 감으로써.. 청와대를 경호하기 위해 취해졌던 온갖 봉쇄· 금지 조치들도 모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북악산 등산로는 모두 개방되고 목걸이 자체가 폐지되고, 북악산은 지금의 남산이나 인왕산과 별 차이 없는 서울 중심부의 친근한 야산으로 바뀔 것이며, 청와대 기존 건물은 청남대의 서울 버전뻘 될 것이고 흠.. 큰 변화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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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구글 지도가 아닌 국내 지도 사이트들에서도 청와대의 전체 구조가 멀쩡히 다 표시된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궁궐이라면, 청와대는 대한민국 초기의 궁궐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2020년대 이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영화나 드라마 찍을 때 "청와대 세트"를 따로 차릴 필요가 없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05 08:35 2022/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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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니, 봉고, 엑셀

국산차 중 현대 포니는 동급 배기량 중에서는 전무후무 유일하게 후륜구동이었던 승용차이다.
기아 봉고는 뒷바퀴가 트럭처럼 복륜 형태였던 유일한 소형 승합차이다.

봉고는 한때는 승합차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트럭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엑셀은 한때는 승용차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ㄲㄲㄲㄲㄲ
워드퍼펙, 로터스 1-2-3, dBASE 같은 업무용 프로그램들은 Windows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고 사라졌다.;;

2. 위험한 데이브

우한 괴질 덕분에 30여 년 전 초딩 시절에 했던 ‘위험한 데이브’ 게임에 새겨져 있던 이 알파벳 이니셜을 다시 주목하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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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좀 뒤져 보니, 저건 PC Arcade를 의도한 거였다고 한다.;;)

저 시절에(1990년경) PC용 게임들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래픽 모드를 CGA (4색), EGA (16색), VGA (256색) 중 하나 선택하는 게 관행이었다. 한번 선택한 뒤에는 변경할 수 없었고, 딱히 변경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저 데이브는 굉장히 이례적이게도, 게임 진행 중에 그래픽 모드를 자유자재로 변경할 수 있었다. 하던 게임을 중단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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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중에 F2를 누르면 언제든지 나타나는 환경설정 화면. 어라? 이미 PC-arcade라는 단어가 있었구나~!!)

그게 가능한 게임은 내가 아는 도스용 수백여 종의 게임 중에 진짜 쟤가 유일한 것 같다~! 신기하지 않은가?
비슷한 시기의 Windows 3.x만 해도 그래픽 모드, 색상, 해상도 따위를 변경한 뒤에는 운영체제를 재시작해야 했는데 말이다. 지정도 제어판이 아니라 설치 관리자를 통해서 해야 했다.

3. 메신저

과거의 icq, msn (훗날 WLM), 스카이프, 그리고 요즘 카카오톡에 이르기까지..
기업에서 만들면서 무료로 뿌리는 메신저 프로그램은 세월이 흐를수록 엄청나게, 불필요하게 덩치 커지고 무거워지는 게 필연적인 수순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채팅 기능만 제공해서는 수익이 나질 않으니 어떤 형태로든 부가적인 서비스를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은 기존 대화 데이터들이 쌓이고 프로그램 자체도 버전업을 거듭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뜨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말 눈에 띄게 길어졌다. 뭐, 본인은 수 년 이상 묵은 굉장한 구닥다리 전화기를 사용한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긴 하지만.. 거의 20~30초씩 걸린다.
PC용 프로그램이었다면 일개 메신저가 스플래시 화면이라도 좀 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과거엔 공공장소 입장용 QR 코드를 생성하거나 백신 접종 정보를 불러오는 데도 비슷하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이것도 불만 사항이었다. 지금이야 백신패스는 아련한 옛날 이야기가 됐지만.. 그래도 프로그램이 최적화와 관련해서 좀 아쉬운 면모가 있다.

4. 블리자드

블리자드가 2018년 이래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빠른 속도로 망조 들고 몰락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무려 2000년경, "환상의 테란"이라는 PC통신(!!) 소설에서는 "서기 2020년, 블리자드는 스타라는 걸작 게임만을 남긴 채 망해 버렸고 게임의 소스 코드는 공개되지 않았으며, 사장은 어느 열받은 테란 플레이어에게 살해 당했다"라는 정말 비현실적인 설정을 제시했었다.

디아블로, 스타, 워크래프트라는 불멸의 명작 대작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던 게임 개발사가 망할 거라고는 그 시절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뒤로도 WoW에, 오버워치 이러면서 2010년대까지도 잘 나가지 않았던가?
그랬는데 지금이야 뭐.. 회사 창립자인 사장이 살해...;;까지는 아니지만 물러났고, 스타를 만들었던 핵심 개발진들이 죄다 퇴사하고 회사를 따로 차리는 지경이 됐다. 기존 스타크래프트는 1(리마스터)이고 2고 간에 유지 보수가 도저히 안 되는 막장 상황이 된 건 확실해 보인다.

우와, 그 명작인 스타크가 개발사로부터 버림받는 지경이 됐다니.. 하긴, 유명한 것 대비 회사 입장에서의 수익성이 너무 없어지긴 한 것 같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국내의 온라인 게임 개발사들은 처음에 돈독 올랐다고 욕 먹는 한이 있어도 정액제니 부분 유료화니 하면서 사용자에게서 지속적으로 돈을 걷는 체계를 만든 것 같다. 한 번만 돈 내고 끝인 패키지가 아니라 말이다.

그랬는데 블리자드가 2022년 초에 마소에 인수됐다. 마소는 게임 제작사들의 재량을 존중해 주는 관대한 기업이니 블리자드의 옛 명성을 되찾아 줄 것을 기대해 본다.
하긴, 왕년에 Doom과 Quake를 개발했던 id조차도 마소에 인수돼서 그쪽 계열사가 된 지 오래다. id를 인수하고 싶어했던 빌 게이츠의 오랜 소원은 빌이 은퇴한 뒤에야 결과적으로 성취됐다.

그 마소에서도 알다시피.. 2010년대에 경영진이 싹 바뀌고 컴퓨팅 시장의 판도가 많이 바뀌었던 시절에 Windows 8과 관련해서 삽질이 유난히 잦았다. Windows 10은 초창기에 예전의 마소답지 않은 온갖 버그들이 난무했었다.
MFC처럼 수십 년 묵은 고인물 썩은물은 마소 내부에서도 안 쓸 뿐만 아니라, 코드 구조를 다 꿰뚫고 유지 보수 가능한 사람이 거의 안 남았다나 어쨌다나.. MFC가 그러한데 하물며 딱히 작업할 것도 없고 10년 넘게 변화가 없는 한글 IME 코드의 관리 인력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지 싶다.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핵심 프로그래머가 교체되더라도 제품 코드에 대한 노하우가 단절 없이 전수되고 코드의 유지 보수가 가능하도록 정말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일례로 각종 주석과 문서 작성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이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스파게티 코드, 난독화 코드를 잔뜩 짜 놓고는 "이 코드는 나 말고는 아무도 의미를 알 수 없어~" 이렇게 버티는 건.. 반칙이며 알박기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22/06/30 08:36 2022/06/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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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일 전쟁과 경부선 건설 시절

1900년대 초의 경부선 철도 건설은 러일 전쟁과 거의 같은 타임라인이다.
그런데 일본군 군복이 아직 블랙이었고-_- 러시아를 완전히 쫓아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전이던 이 시절엔..
미래 판도가 어찌 될지 모르니 쟤들도 조선을 생각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이때의 일본군은 40여 년 뒤 태평양 전쟁 때의 그런 미쳐 폭주하던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 땅을 거쳐 진군할 때도 민폐 안 끼치고 보급품을 꼬박꼬박 제값 주고 사 먹었다!
러일 전쟁 때 여러 조선 지배층 및 지식인들이 **괜히 일본을 응원했던 게 아니다**. 이건 팩트다.
이 인간들이 반민족 친일파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러시안스키들보다는 인종적으로 더 가까운 일본 편" 같은 논리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완공되고 러일 전쟁이 끝나거나 최소한 일본의 승기로 기울고, 을사조약까지 맺어진 뒤에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하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고, 일본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현타가 뒤늦게 전해진다.
을사/정미의병이 조직돼서 최후의 발악을 해 보지만 끝내 다 토벌되고 무장해제됐다.

오죽했으면 몇 년 뒤에 안 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동기· 배경도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이거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 이토 이 비열한 자식~!"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이라 하면 곧바로
홍보도 제대로 안 한 채 눈곱만치 짧은 기간 동안에 절차대로 신고 안 한 땅은 몽땅 날강도처럼 몰수 국유화 → 농민들 몽땅 땅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다.

그런 것처럼 흔히 경부선 철도 건설이라고 하면 곧바로
"대대로 전해지던 땅을 강제로 헐값 처분 →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강제(!!) 징용해서 착취 → 철도 건설 반대 사보타주 하던 항일분자들 총살 처형.." 이런 게 떠오르는데..

과연 그게 그림의 전부일까..??
경부선 철도 건설 여건이 벌써부터 무슨 40년 뒤에 일본 탄광이나 남태평양 섬에서 교량/비행장 건설과 같은 여건이었을까?
그건 일단 물음표로 남겨 두고 자료를 더 찾아 봐야겠다.

2. 관동 대지진 학살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가 지배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탄압· 응징이나 보복을 한 거,
전쟁 때문에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고 뻘짓 한 거, 물자 착취한 거,
이런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인을 싹 빼고도 제일 실드의 여지가 없이 일본이 치명적인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고 욕 쳐먹어야 하고 사죄하고 유족 후손에게라도 배상해야 하는 건 관동대지진 대학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들이 자연재해를 겪은 걸 갖고, 또 조선인들한테 켕기는 게 있어 놓으니 "지진 시국을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탄다" 이런 유언비어 정도는 그나마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고 양반이다. 그런데..
"조센징들이 일본에 지진 좀 일어나라고 매일 축시의 참배를 벌였다, 조센징들이 모두 우리 혼슈 땅을 영차영차 밀고 흔들어서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뭐.. 세월호 7시간이나 닭근혜 굿판, 광우뻥 미친소, 천안함 자침설을 능가하는 미친 짓거리 아닌가?
그때 자경단 폭도들은 항일 운동도 안 하고 그저 평범하게 먹고 살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붙잡아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죽창으로 찌르고 사지 자르고 불태우고..

근처의 강이 며칠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조선인들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일본 경찰서에 제 발로 도망쳐 와서 제발 유치장 안에라도 집어넣어서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미약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전무하다. 이것들이 정신력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져 놓으니 그딴 황당한 유언비어 선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정신 차려라잉~" 그렇게 훈시하는 장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권력은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인들을 그닥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항인데 그 어떤 반일 장사꾼도 이걸 진지하게 재조명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정치색이 너무 없어서 별로 선동할 거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반일정신병을 매우 혐오하고 공격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반일정신병자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ㄲㄲㄲㄲㄲ

3. 2 26 쿠데타

1936년, 일본의 2. 26 쿠데타에 대해 들어보니 꽤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국사나 심지어 세계사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구 일본제국에서 육군과 해군이 사이가 극히 안 좋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만, 육군 안에서도 황도파와 통제파라는 두 파벌이 나뉘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쉽게 비유하면 통제파는 좀 기득권 수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도파는 진보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썩어빠진 것들 다 갈아엎자, 우리도 잘 살아 보자. 특히 천황 폐하께서 얼굴마담만 하면서 간신배에게 놀아나지 말고, 용단을 내려서 우리를 직접 통치해 달라” 이런 걸 주장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도 모든 계층이 마냥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도는 누런 복숭아가 아니라 황제의 길을 뜻하는 皇道.. ㄲㄲㄲ

그랬는데 여차여차 하다 보니 황도파 장교들은 자기 뜻을 펴고 실현하려면 좀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하듯이 일제히 궐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으며, 심지어 천황조차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쿠데타 진영에게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충성을 바치네 어쩌네 하더라도, 명령 없이 군이 움직인 것부터가 짐에 대한 하극상 반역이다. 더구나 고관대작들을 살해까지 해?? 역적노무 색히들 당장 꺼져”라고 응수하면서 군부에다가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히로히토 천황도 이럴 때는 꽤 단호박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도파는 이상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이 너무 서툴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장렬히 자폭하고 와해되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군부는 통제파가 아무 경쟁자 없이 완전히 접수하게 됐는데, 통제파의 수장이 바로 도조 히데키.. 일본은 그때부터 더욱 군국주의로 브레이크 고장 난 내리막길 버스처럼 폭주하게 됐다. 이거 뭐 일본판 8월 종파 사건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 우규 의사가 1919년 가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3. 1 운동 이후로 문화 정책을 폈다는 그 사람 말이다.
사이토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을 받아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 의사의 의거 이후로 17년이나 뒤, 바로 저 2. 26 쿠데타 때 총을 수십 발 맞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래도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요절은 아니었다.

일제 시절 동안 맨날 일제가 조선인을 탄압했네 착취했네 어쩌구뿐만 아니라, 적들의 소굴/본부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역사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니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될 것이다.

  •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납치해서 끌고 갔는가? 혹은 공장 취업, 취학 등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모집했는가?
  • 미리 계약했던 정당한 화대를 주지 않고 착취했는가? 위생 보건 복지가 심각한 막장이었는가?
  • 패전으로 인해 철수· 후퇴할 때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인들을 집단 학살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인멸하려 한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중일/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과 아군한테도 반인륜 범죄를 잔뜩 저지른 미친 집단이었다는 걸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의 처우도 극악이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는 정당한 가설이다.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든가 아니면 부정 반박하면 된다.

허나,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방식만 문제삼으면 되지, 무슨 위안부 자체가 인류의 전쟁 역사상 일제만의 최초· 독보적인 죄악인양 헛소리를 해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위안부 할머니한테 빨대 꽂아 있는 사악한 반일 장사꾼 위선자 사기꾼도 당연히 걸러내고 쳐내야 한다. 걔 주변에 있다가 자살 당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인도 철저하게 진상 규명해야 한다. 걔야말로 생계형 친일파 김 뭐시기보다 더 나쁜 놈이다.

일제 초기의 토지 조사 사업도 그렇고, 말기의 강제 징용(?) 노동자도 그렇고..
불법 갈취 착취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착취나 피해의 정도, 강압/강제성은 우리가 쌍팔년도 반일 항일 국뽕 패러다임대로 배웠던 것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차츰 입증되는 추세이다.

이런 걸 남이 바로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로잡아야 다른 팩트까지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식인 호랑이를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사냥하고 제거해 줘야 다른 야생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이 설 수 있듯이 말이다.

5. 6 25 때 일본의 기여

징병제를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게 집총 대신 시킬 만한 대안 작업으로 지뢰 제거가 즐겨 거론되곤 한다. 엄연히 군사 활동이지만 남을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자기만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 25 사변 중에 일본이 딱 정확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일본이야 그 당시엔 UN 회원국도 아니고, 한창 연합군(=미군) GHQ로부터 참교육을 받으며 자숙과 반성 중이던 일개 패전국일 뿐이었다.
그러니 UN군 명목으로 전투병 파병 같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면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부터가 “우리는 괴뢰군과 싸우기 전에 왜놈부터 먼저 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맹렬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적당히 가까운 섬나라로서 UN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냥 놔 둘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적당히 구슬리며 투입시킨 일 중 하나가 기뢰 제거였다. 동해 바다에서 북괴가 매설한 것들 말이다. 굉장히 적절한 활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과 일본 모두 인정하기를 민망해하고 꺼리지만, 일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6 25 때 우리나라를 전혀 안 도와 준 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초기에 은행을 털린 뒤에 돈을 다시 만들어서 찍어내는 시급한 임무도 일본에서 진행됐다.
쟤들이 남의 전쟁 덕분에 물자 많이 팔아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6 25는 8월 15일을 광복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도 아닌 적화 혁명 과업 완수일로 만들려고 50일쯤 전의 더운 초여름에 일부러 침략을 벌인 '김 일성의 난'이었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이 작고 좁은 한 나라를 도와준 전쟁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2/06/27 08:35 2022/06/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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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라는 건 어째 2차 세계 대전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이 잘 만든다고 전통적으로 호평이 자자하다. 도요타, 벤츠, BMW 등..
하지만 세계 최강의 과학기술 선진국인 미국도 이들 만만찮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단지, 땅 넓고 물자가 풍족하고 내수 시장도 크다 보니, 오랫동안 한국 같은 외국의 사정에 맞는 차를 수출형으로 굳이 잘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미국이 유럽 같은 급의 고효율 디젤 엔진은 그냥 '안' 만든 거지, 못 만든 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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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딜락 엘도라도. 이런 큼직한 머슬카가 아메리칸 스타일 자가용의 상징이었다. 1950~60년대엔 저게 얼마나 하이테크 디자인의 최첨단 문명의 이기였을까..??? ㄲㄲ)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국 자동차는.. 제조사 이름과 자동차 브랜드 이름이 많이 헷갈리는 형태인 것 같다. 이는 그 브랜드의 자동차를 만들던 회사를 다른 회사가 인수 합병해서 그렇게 된 것도 있다.
미국의 3대 메이저 자동차 제조사는 GM, 포드, 크라이슬러이다. 나머지 캐딜락, 쉐보레, 링컨, 뷰익 같은 건 브랜드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자동차 제조사들이 너무 거대해지면서, 시장을 독점하고 동일 업종의 경쟁 기업을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과거에 스탠다드 오일(정유)이라든가, 20세기 말의 마소 IE 웹브라우저 끼워 팔기처럼 말이다. 이런 게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룡 자동차 제조사, 그리고 어쩌면 공룡 정유 회사들까지 교묘하게 로비를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들 한다.

1.
노면전차를 없애 버렸댄다. 미국은 극소수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1950년대 이후부터 대중교통이란 게 없는 나라가 돼 버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작품은 그때 이후로는 더 나올 수 없다.
꼴랑 중학교 졸업하고는 면허를 따야 되고, 마트를 가거나 햄버거 가게 알바 출퇴근을 위해서라도 차가 없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됐다. =_=

프리웨이의 중앙 카풀 전용 차로는.. 버스나 승합차 전용도 아니고 꼴랑 2인 이상만 타도 이용 가능하거늘.. 그 막히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텅 비어 있다. 이런~~!! 전부 그 큰 차에 혼자 타고서 길바닥에다 기름을 뿌리고 있다.

2.
1990년대에 일찍이 친환경 전기차가 개발되고 있던 것도 잘근잘근 없애 버렸댄다. EV1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저기는 한국하고는 상황이 다르다 보니, 성능 좋은 유사휘발유가 개발되고 있는 것을 잘근잘근 없애 버린 사례는 없는가 보다. (차량에 악영향, 환경 문제, 세수 확보 애로사항)

3.
사실, 위의 1과 2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식의 근거 부족 음모론에 가깝다. 전기차나 노면전차는 그 시절 그 기술만으로는 대기업 로비가 아니었어도 다른 이유로 인해 어차피 몰락이 어느 정도 예상돼 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 자동차 제조사가 과거에 '터커 모터스'라는 스타트업을 (사실상) 교묘하게 잘근잘근 밟아 없앤 것은 음모론이 아닌 것 같다.

설립자인 '프레스턴 터커'는 모터 스포츠부터 자동차 정비와 제조까지 정말 뼛속까지 자동차에 미친 덕후, 자동차밖에 모르는 바보 공돌이였다.
그때 기록에 따르면 1948년에 '터커 48 톨피도(어뢰)'라고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성 자동차들보다 성능과 연비가 훨씬 더 뛰어나고 안전벨트와 브레이크 같은 안전까지 지금 관점에서 10~20년은 시대를 앞섰던 마법 같은 승용차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투자를 더 받아서 이걸 대량생산해서 미친 가격으로 판매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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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도 헤드라이트가 달려 있어서 좌우 핸들을 틀면 불빛의 방향도 바뀌는 거.. 우와 완전 참신한걸..??????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어느 자동차 덕후가 회사 차리고 미군 지프를 조립해서 시발 자동차를 겨우겨우 만들었는데, 천조국에서는 자동차 덕후가 포니 같은 고유 모델 승용차를 뚝딱 만들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랬는데 '터커 48'이 매스컴을 탄 지 얼마 되부터, 은행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이 회사에 갑자기 대출을 안 해 주기 시작했다. 오히려 빌려 간 사업 자금을 상환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언론 보도도 싹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이 사람은 버티질 못하고 경제사범 사기꾼으로 몰려서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게 됐다.
비록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는 건졌지만, 그는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원대한 꿈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스트레스와 지병으로 인해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놓고 드러나는 물증은 없지만,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자기들의 나와바리를 위협하는 강력한 라이벌인 터커 모터스를 교묘하게 말려 죽이려는.. 기성 자동차 회사들의 알력이 있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터커 48'은 겨우 수십 대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심지어 터커 모터스를 짓밟았던 포드 사에서 설립한 자동차 박물관에도 한 대 전시돼 있다. (☞ 링크)

하긴.. 공돌이의 천국인 천조국에서조차도 라이트 형제가 20세기 초에 비행기를 처음 발명했을 때는 기득권층들로부터 시기 질투와 음해를 왕창 받았다. 당사자들은 불필요한 고생을 잔뜩 해야 했고, 오죽했으면 비행기 양산 공장을 자국이 아닌 외국에 먼저 짓게 됐다. 그 과정에서 제조 기술이 외국으로 알음알음 유출되기까지 한 건 덤..

더 옛날 1700년대엔 미국에서 실용적인 증기선이 처음으로 발명됐다. 이를 만든 존 피치는 뼛속까지 공돌이에 불세출의 기계 천재였으며, 증기선 덕분에 발명가로서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됐다.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말년엔 아편 중독으로 인한 자살을 당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디젤 엔진 발명자의 최후와 비슷한 최후인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다른 나라가 아니라 그나마 천조국이니까, 혹은 서양이니까 공돌이들이 그 옛날부터 저 정도라도 꿈을 실현했던 것 같다.
생각하는 방식이 뭔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서 개척자 정신· 기업가 정신이란 게 있고 기술자가 존경받았으니까. 그리고 과학기술 자체뿐만 아니라 상업 교류를 하고 경제 제도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비록 걔네들도 하는 짓이 다 선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조차 남해 회사인가, 주식 투자 잘못해서 현재 시가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그는 기가 차서 "내가 우주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도 발견했지만, 빌어먹을 사람의 심리와 돈의 흐름은 도저히 기술이나 예측을 못 하겠다" 라고 디스했다고 전해진다.

서양엔 겨우 1700년경, 조선에서 병자호란 끝나고 영조 탕평책 이러던 시절에 벌써 기업이란 게 있고 저런 경제 제도가 있었다는 게 핵심이다. 최소한 "기술이나 배운 쌍것들 에헴" 선비질을 하지는 않았다.

전에 얘기했던가..?? 조선은.. 상상을 초월하는 미주알고주알 기록덕후 관료제 국가였다.
조선왕조 실록이 나름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고, 수원화성도 지금 실물이야 1도 역사적 가치가 없지만 제작 과정이 너무 상세하게 잘 기록돼 있었던 덕분에 역시 세계 유산으로 등재됐다. 지금 실물도 오리지널과 동급의 가치가 있음이 인정된 것이다.

근데, 그런 나라에서 장 영실(기술), 김 정호(지도) 같은 한 분야 전문가 덕후가 생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냐? 임진왜란 때 도자기 기술자들 잔뜩 유출시킨 건 어떻고..??
이게 관점이 글러먹었다는 거다. 미국처럼 기업들끼리 비열한 싸움이나 담합, 독점이 벌어진 걸 비판하는 단계로 갈 여지조차 없이 그 앞단계에서 막혔다~!!

* 여담

(1) 미국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같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 뭔가 기업다운 기업은 해방 후 박통 때 1960년대에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옛날 일제 시대에 한국인으로서 기업을 경영한 사람들은.. 참 존경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 일한 회장은 너무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다.

(2) 기업 얘기는 아니다만.. 저 1940년대 말, 터커 자동차가 있던 시절에.. 미국에서는 전쟁이 끝났으니 군대를 대폭 칼질하고 덩치를 줄이게 됐다.
태평양 전쟁 시절 같은 거대한 규모의 해군이 필요하지 않게 됐고, 이제 막 공군다운 공군이라는 게 태동해서 기존 육· 해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바다에서는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띄워서 함재기끼리 싸우게 하면 되겠고..

이때가 뭔가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기였다. 그래서 군 수뇌부에서는 독립된 군종으로서 해군과 해병대를 통째로 없앨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건 컴퓨터로 치면 마치 2000년대 중반에 IE6이 고인물 썩은물이 돼서 마소에서 브라우저 팀을 없애고 Windows 팀으로 통합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 2010년대 초반에 Windows 8에서 시작 메뉴를 앲앴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 것 같다.

20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대중교통도 전멸하고 설마 해군도 전멸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며, 미군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은 여전히 해군이다. 해군 해체설이 제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1950년대엔 대형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의 동력원에 원자력이라는 치트키도 등장했다. 그렇게 기술은 발전해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23 08:35 2022/05/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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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관련 여러 이야기들

1. 천조국 군대의 기상

미군은 무슨 중국이나 북괴처럼 대규모 거위걸음 열병식이나 매스게임, 특수부대 차력쇼를 벌이면서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독립기념일이나 대통령 취임식 때 옛날 군대 코스프레 퍼레이드 정도나 하지..
이건 서울대나 육사가 "취업률 xx%" 이러면서 학교 홍보하고 지하철역 안에다가 광고를 붙이지는 않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지금이야 중공과 러시아가 많이 성장해서 미국 패권을 위협 중이긴 하다. 그러나 미국은 단순 국력 물량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과 자유 민주주의 인권 이념을 바탕으로 세계를 석권하고 세계 질서를 확립한 나라이다. 저 사회주의 독재 국가--겉으로 법은 자유 민주주의 표방이지만, 여전히 옛날물이 많이 묻어 있는 경우도 포함--들이 미국의 이런 진정한 저력을 흉내 내지는 못할 것이다.

2. 한국과 일본과 미국의 과거

1980년대: 우리나라로서는 5공 시절이요, 일본은 쇼와 말기요,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었다. 이때는 세계적으로 경제가 안정되고 오일 쇼크도 끝나고, 엄청난 호황기였다고 회자된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정보화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장밋빛 희망, 우주나 사이보그를 소재로 한 온갖 기발한 SF물들.. 우리나라의 경우 마이카 시대, 일본은 특유의 버블 경제.. 이런 걸 생각해 보자~!

1960년대: 한국은 이때 ‘경부’라는 간선 고속도로 하나를 겨우 간신히 만들었다.
일본은 이때 시속 200km짜리 고속철도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미국은 거의 같은 시기에 로켓을 쏴서 인간을 달로 보냈다.;;

(1940년대: 바로 다음에 올라올 글에서 이 시대를 좀 다룰 것이다. ㄲㄲㄲㄲ)

그런데 더 옛날,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전간기이던 1920년대도 이와 비슷하게 세계적으로 좋은 추억이 남겨진 시기였다.
우선 한반도는 3· 1 운동 이후에 문화 통치가 시작됐다. 이때는 그 전의 무단 통치나 그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에 비해서는 훨씬 더 살 만했던 때였다. 항일 독립 운동만 아니면 여러 다양한 사회 활동이 허용되고 온갖 신문물도 들어왔다.

본거지인 일본도 정치판의 분위기가 아직 군국주의로 폭주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하물며 천조국은..?? 라디오 방송과 할리우드 영화, 뉴욕에 초고층 마천루, 포드 T 자동차 마이카.. 전부 얼추 이 시기에 등장했다. 또 국제 연맹도 세계 곳곳에서 마이너한 국가들의 분쟁은 잘 중재하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좋은 시절은 대공황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이를 계기로 1930년대부터는 세계는 다시 분위기가 슬슬 험악해진다. 국제 연맹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걸 막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확하게 이 험난한 기간 동안 통치했었다.

3.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징집 관련 일화

미국 남북전쟁은 밀덕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로 철도를 통한 보급, 후장식 총기와 저격수, 초보적인 단계의 기관총과 철갑선, 잠수함이 등장한 첨단 과학 기술 전쟁이었다. (풍경 사진과 종군기자는 남북전쟁보다 미묘하게 전인 유럽의 크림 전쟁 때 최초로 등장했고..)

일개 내전 주제에 탱크와 비행기만 없는 1차 세계 대전 급으로 시대를 앞섰던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그런데.. 이 남북전쟁은 징집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는 게 좀 있다. 둘 다 남군과 북군 중 어느 진영의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어차피 그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1) 전사
나라가 전시 상황이 되니 모병이 아닌 징병제가 시행됐다. 그런데 이때 부유층들은 300달러라는 돈을 내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입대시키는 것으로 징병 의무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대리 입대자도 어차피 징집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 어찌 되는 거지? 아무튼..

A라는 어떤 사람이 B라는 다른 사람을 대리 입대시켰는데, 그렇게 참전한 B는 전장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A에게 징집 영장이 또 날아왔다는 것..
이때 그는 "나는 B라는 사람의 명의로 이미 전사하고 죽은 목숨이다. 이거 뭐 한군두도 아니고, 나는 또 징집되거나 또 국방세 내고 대리인을 내세워야 할 국방의 의무가 없다"라고 항변했다. 이 논리가 인정되어 그는 두 번 다시 징집되지 않았으며, 그게 판례로 정착했다고 한다.

이건 무슨 일사부재리의 원칙처럼 들리는데..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 '대속'이라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 쪽에서 복음 전할 때 종종 인용되는 예화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만,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렇게 막 도덕적으로 본이 될 만한 일화까지는 아닌 것이 아쉽다. 부자들은 돈으로 군대를 다 빠진다고 그 당시에도 원성이 자자했었기 때문이다. 전사자를 예우하는 연금도 당연히 A의 유족이 아니라 B의 유족에게 지급돼야 할 것이다.

(2) 포로
옛날에는 전쟁도 현재보다 명분과 체통과 원칙을 따지면서 훨씬 더 신사적이고 고지식하게(?) 하는 면모가 있었다.
미국 남군과 북군이야 비록 지금은 총 들고 싸우지만 상대방이 같은 나라 같은 언어 같은 기독교 문화권인 사람이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화해해야 할 이웃이었다.

그래서 적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당장 포로를 번거롭게 관리할 여건이 안 되면..
포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장만 해제하고는 풀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단, 이런 각서를 쓰고 동의를 받게 하고 말이다.

"우리가 사정이 여의찮아서 너를 석방해 주지만 너는 여전히 법적으로 우리 측의 포로이다. 그러니 훗날 포로 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너는 군사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장교가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이런 절차를 거쳐서 풀려났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선으로 곧장 복귀하고 전투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그 각서를 제시하면서 자기는 정식으로 포로 교환을 하기 전엔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군에서는 그 정황을 인정하고 그를 진짜로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거 뭐, 감독 없이 시험을 쳐도 아무도 컨닝을 안 하고, 땅에다 금만 그어 놓고는 감옥이라고 해도 죄수가 거기 얌전히 앉아 있을 것 같은 샤방샤방 분위기이다.
저 때는 적이라도 약속을 지키기는 한다는 신뢰가 있으니 이런 '서류 상으로만 포로'가 가능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분위기와 정반대였던 전쟁은 아무래도 80년 남짓 뒤의 태평양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일본이고 미국이고 모두 상대방을 인간이 아니라 악마 괴물로 취급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다 악이 받친 나머지, 한쪽에서는 적군 포로를 말 그대로 잡아먹었으며(식인).. 다른쪽에서는 적군 시체에서 두개골을 뽑아서 아이템으로 갖고 다니는 Savage 실사판 '인외마경'이 벌어졌던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20 19:34 2022/05/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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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킹 제임스 성경은 제임스 1세 왕이 즉위한 지(1603)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초기인 서기 1604년에 번역 위원회가 조직되고 작업이 시작되었다. 완료되고 출간된 건 그로부터 약 7년이나 지난 1611년..

나라 모양새를 보아하니 교회 통합과 국민 단결을 위해 새 성경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시급히 느꼈던 모양이다. 조선의 한글은 1418~1450년에 달하는 세종대왕 통치 기간 중에서 비교적 말기에 만들어졌으니(144x년대..) 이와 대조적이다.

킹 제임스 성경과 비슷한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졌던 것들, 존재했던 주요 인물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은 대체로 1600년대를 전후해서 만들어졌다.
  • 돈 키호테: 1605~1615년.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스페인 사람으로서 성경에 아주 능통 박식했다고 한다.
  • 두에-랭스 가톨릭 성경: 신약이 1582년에 먼저 나왔고, 구약까지 완역 전서는 1609~1610년에 출간됐다. 가톨릭의 KJV나 마찬가지인 듯..
  • 제임스타운: 1607년에 영국이 북미 대륙에 최초로 개척한 식민지이다. 이때 추장의 딸이 그 유명한 포카혼타스였다.
  • 갈릴레이 갈릴레오: 1609~1610년 사이에.. 당시 최신 문물이었던 망원경을 이용해서 목성의 위성들을 인류 최초로 발견했다.
  • 존 네이피어: 로마 교황을 왕창 싫어했던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1590년대에 이미 로그라는 것을 발견? 고안했다.
  • 동의보감: 1612년. KJV와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 영창대군: 1606년생, 1614년 사망.
  •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 1610년대에 출범.

세상에서 다루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제임스 왕은 전임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비해 그리 훌륭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뭐, KJV의 권위가 그런 일개 군주의 인성에 좌우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 역시 일각에서 모함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똑똑하고 성품이 올바르고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입력돼 있던 사람이었다. 일단 국비를 투입해서 성경을 만들 생각부터가 군주가 독실하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정치적인 행적은 다 제끼고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역사 잡학은.. 제임스 1세 왕이 담배를 개인적인 소신상 극혐해서 금연 운동을 거의 세계 최초로 추진했던 군주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A Counterblaste to Tobacco -- 담배를 반대(극딜)하며
이건 저 왕이 1604년, 즉, 성경 번역과 같은 시기에 친히 저술했던 에세이.. 소논문 급의 글이다. 끝의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A custome lothsome to the eye, hatefull to the Nose, harmefull to the braine, dangerous to the Lungs, and in the blacke stinking fume thereof, neerest resembling the horrible Stigian smoke of the pit that is bottomelesse."
(담배는) 꼴도 보기 싫은 냄새와 광경. 뇌에 해롭다. 폐에 위험하다. 시커먼 연기는 이거 무슨 무저갱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같다.


저 글에서 위의 결론 부분은 기독교니 성경이니 하고 아무 상관 없이 그냥 세상적인 금연 운동을 하는 진영에서도 즐겨 인용하는 유명한 텍스트이다.

자, 생각을 해 보자.
전근대 왕조 시절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담배라는 값비싸고 신기한 신문물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보통은 왕과 신하들이 좋다고 서로 맞담배를 피워 댔다. 궁궐 안의 어전회의 장소가 냄새와 연기로 뒤덮여서 너구리굴처럼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_=;;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으니 담배와 관련된 문화와 예절도 차차 생겨났다.

그 와중에 잉글랜드의 제임스 왕은 담배 연기를 보고는 계 9:1-2 말씀.. 대환란 재앙 때 무저갱(바닥 없는 구덩이)이 열려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1600년대 옛날 사람이니까 뭘 보든 성경 구절 묘사를 더 잘 떠올렸을 것이다. 옛날에는 담배 연기가 시꺼멓기라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술이야 인간과 함께한 내력이 담배보다 훨씬 더 길기 때문에 성경에도 대놓고 언급된다. 그리고 1700년대 조선 영조의 금주령이나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 같은 사례도 있다.
그러나 담배는..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가 즐겨 피우는 담배", "의사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담배" 이런 광고가 19~20세기 사이에 나돌 정도였다. 세계적인 금연 운동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담배는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도 없다. 현대의 예수쟁이들은 "단순히 해로운 화학 물질에 중독되지 말고 하나님의 성전인 자기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관리하라"라는.. 간접적이고 보편적인 2차 말씀에 근거해서 담배를 안 피울 뿐이다. 즉, 굳이 담배에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닌 셈이다.

이런 것까지 생각하면 제임스 왕의 금연 운동이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이 사람도 세금 수입 때문에 당장 제임스타운 같은 식민지에서 담배의 재배까지 다 금지한 건 아니었다. 이건 뭐 정치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면모였다. (이스라엘/유다 왕국의 선한 왕들도 산당들은 어지간해서는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리고 성경에.. "경건치 아니한 자는 악을 캐내나니 그의 입술에는 타오르는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as a burning fire" (잠 16:27) 이런 말씀이 있긴 하다. 설마 대놓고 담배를 저격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그럴싸해 보인다.;;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 as of fire"가 꼭 '낼름 이글이글 불꽃처럼 생긴 혀'를 말한다면,
잠 16:27은 '활활 타는 불'처럼 생긴 그 무언가를 가리킨다.
그 다음으로 내가 떠오르는 문구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인기 아이돌 마츠야마 아이 씨입니... 아!!
왠지 표정이 맛이 가 있습니다! 게다가 손에는 담배 같은 것이~!! 평소의 아이 씨가 아닙니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종말편
(어이 거기 사회자, X나 시끄러워.. 날 물로 보지 마)


전부 '무엇처럼 생긴 것'이라고 대상을 비유로 가리킨다. =_=;; ㄲㄲ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2/05/18 08:35 2022/05/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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