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풍경 기록 + 이성산 답사

미세먼지 어택 때문에 우중충했던 2~3월과 달리 이번 4월은 유난히 날씨가 맑고 좋은 날이 많았다.
다음은 4월 초부터 말까지 서로 다른 날짜에 찍은 주변 풍경 사진들이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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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와 중랑천, 용마산의 풍경이다. 동부 간선 도로는 서울 시내의 자동차 전용 도로들 중 고도가 제일 낮으며 유일하게 강의 좌우로 상행과 하행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당시 본인이 서 있었던 보행자용 산책로 주변에는 온통 벚꽃이 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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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응봉산을 오르는 길목의 모습이다. 응봉산의 주변은 노란 개나리로 뒤덮여 있었다. 개나리 역시 벚꽃만큼이나 뭔가 봄의 상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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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강 공원이다.
다만, 올해부터는 텐트를 치는 게 특정 구역 안에서만 가능하게 큰 제약이 걸렸다. 그래서 위의 텐트는 곧장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돗자리는 여전히 가능하니 텐트 규제의 목적이 잔디 보호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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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양화 한강 공원이다. 이때는 풀밭이 아니라 강물 바로 근처의 나무 그늘 밑에서 돗자리를 깔고, 거기서 누워서 쉬기도 하고 볼일을 봤다.
세계의 도시들 중에 동일 행정구역과 생활권이 서울의 한강만치 거대한 강을 중간에 낀 채로 형성된 사례가 또 있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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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는 올해 봄에 완전히 새로 개척해서 다녀 온 곳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집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 적당히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주차 걱정도 없는 서울 교외 지역을 물색한 결과..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을 다녀왔다. 나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산의 북서쪽으로는 군부대가 있고, 서남쪽으로는 수도 정수 시설이 있고.. 주변엔 온통 무슨 공장에 물류 센터이니 평범한 거주· 업무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산은 민감한 시설이 있는 쪽을 피해서 동남쪽으로만 접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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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좀 오르니 가장 먼저 넓은 풀밭과 함께 저수지가 나타났다.
이성산은 해발 200m대의 아주 자그마한 산인데, 서울의 봉화산이나 구리의 구릉산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천마산보다는 더 높고 크다.
먼 옛날 삼국 시대에는 이 산 주변이 '이성산성'이란 게 둘러져서 요새화됐다고 한다. 이게 무슨 남한산성· 북한산성 같은 퀄리티는 아니기 때문에 지금 남은 건 그냥 돌무더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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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르막을 약간만 더 오르자 능선과 함께 또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여기는 동쪽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라고 한다.
아래로는 외곽순환 고속도로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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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서울의 동부에는 불암산성, 아차산성에 이어 이성산성처럼 조선보다 더 오래된 석성의 흔적이 전해지는 게 흥미롭다.
흔적이 너무 희미하다 보니 얘들은 오랫동안 정확하게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조차 불분명했는데.. 같이 출토된 문화재들의 스타일로 유추하건대 이성산성의 주인은 신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관련 링크 1, 링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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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 정상에 도달했다. 간단한 표지석과 산불 감시 초소가 있었다.
산의 이름인 二聖은 아마 백제의 건국의 주인공인 비류와 온조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의 서쪽으로는 삼성산이 있고 이건 승려 세 명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와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고 보니 백제는 반신반인 영웅호걸이 알에서 태어났네 하는 초월적인 설화나 신화가 없이, 건국 스토리가 가장 평범(?)하다는 특징이 있다. 비류와 온조라는 그냥 평범한 고구려 왕족이 모국을 자발적으로 떠나서 새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주몽이나 혁거세와는 상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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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갈 때는 이렇게 숲이 우거지고 인위적인 울타리나 문화재 구역이 없는 좁은 길로 갔다. 그래도 아까 봤던 저수지 쪽으로 가서 처음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4~5월 봄과 9~10월 가을이 등산 가기 제일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너무 덥지 않으면서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24 08:32 2019/05/2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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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면전차

먼 옛날에 한반도에는 장거리 여행용 일반열차 명목으로 증기 기관차가 1899년 이래로 1967년 8월 말까지 다녔다. 그리고 도시철도 정도에 대응하는 궤도 교통수단으로서 노면전차(트램)라는 것도 아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서 역사에 한 자취를 남겼다.

한반도에 노면전차가 존재했던 도시는 서울, 부산, 평양 딱 세 곳이었다. 서울(경성) 전차의 경우 제일 일찍, 경인선 철도와 같은 해(1899)에 개통했으며 심지어 경인선의 개통보다도 몇 달 더 일렀다. 그 뒤 일제 시대가 돼서야 부산(1915)과 평양(1923)도 뒤를 이었다.
참고로, 한반도 역사상 시내버스가 최초로 운행된 곳은 서울도 부산도 아닌 대구이다(1912).

지금이야 노면전차가 없어진 지 무려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래도 있었던 기간도 거의 6, 70년에 달한다. 그래서 차량들의 외형이 시종일관 동일한 건 아니었다.
구한말에 맨 처음 등장했을 때는 아래와 같이 표면에 태극 무늬(?)가 있고 옆이 개방된 형태의 차량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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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세기 중반쯤부터 거주성이 더 강화된 형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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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는 증기 기관차보다야 훨씬 작고 가벼우며,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폭폭' 소리를 내는 포스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없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을 받아서 스르르륵 앞으로 우아하고 조용하게 나아가는 게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는 왕창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고종 황제와 신하들이 "기차와 전차 중에 뭐가 더 빠를까?" / "전차이지 않겠습니까? 번개가 수증기보다 더 빠를 테니까요"처럼.. 논리 전개가 좀 이상해 보이는 대화도 나눴다고 그런다.

이 노면전차는 궤도 위만 달리지만 그렇다고 열차처럼 여러 차량을 주렁주렁 꿴 형태는 아니었다. 그냥 버스처럼 1량 1편성으로 다녔다.
기술 규격은 직류 600V 전기에다 1067mm 협궤였다. 오늘날은 경전철도 철차륜은 1435mm 표준궤이고 직류 750V이니, 저 때의 노면전차는 지금의 경전철보다 더 소규모였던 셈이다.
심지어 부산 전차는 처음에는 아예 762mm 협궤로 시작했다가(수인선!) 일제 시대 중반쯤에 1067로 개궤됐다고 한다. 그래 봤자 여전히 협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장거리 철도들이야 다 단선이었다. 하지만 노면전차는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금야금 복선화가 진행됐다. 차량이 일반열차보다 훨씬 더 자주 다니는데 시내 한복판에서 교행하고 대피하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일 테니까..
경성의 노면전차를 복선화하는 과정에서 서대문(돈의문)이 헐리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의 경전철들은 다 제3궤조 집전식인 반면, 옛날 노면전차는 덩치는 더 작은 주제에 전차선이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도시 미관에 안 좋았다.
집전 장치도 오늘날 같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뷔겔 같은 더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특별히 서울에 있었던 전차는..

  • 영등포가 서울로 편입되면서 노면전차 역시 한강을 건너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갔다. 별도의 철교가 따로 부설된 건 아니고, 한강 인도교에 전차 선로가 같이 지나갔던 모양이다.
  • 일제 시대엔 경성전기 vs 경성궤도로 운영 주체가 이원화돼 있었다. 마치 서울 메트로 vs 도철처럼 말이다. 경성궤도는 통상적인 서울 구시가지를 벗어나 동대문에서 화양, 뚝섬, 광장동 쪽을 운행했다.

다음은 서울 전차의 노선도이다. '경성궤도' 노선은 동대문에서 출발해서 왕십리를 거쳐 뚝섬유원지 내지 광장동(지선) 쪽으로 가는데, 얘들 노선은 노선도에서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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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이런 일도 있었다.
6· 25 사변이 터져서 사람들이 한창 피난 갔다가 나중에 서울을 수복하고 돌아와 보니.. 전차들이 다니는 선로 위의 전깃줄이 죄다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이건 폭격을 맞아 파괴된 게 아니고, 북괴 공산군이 건드린 것도 아니고, 알고 보니 자국민의 소행이었다. 심지어 이 시설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앞장서서 이 짓거리를 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맨홀 뚜껑을 고철로 팔아먹으려고 슬쩍한 것과 비슷하다.

노면전차는 시설 노후화와 쌓여 가는 적자, 그리고 갈수록 늘어나는 자동차로 인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으며, 결국 1968년에 완전히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서울과 부산 모두 날짜는 달라도 연도는 동일하다.
또한, 그 전 1967년 8월엔 증기 기관차도 공식적으로 완전히 퇴역했다. 1899년에서 1967년에 이르기까지 노면전차와 증기 기관차는 어째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서 비슷한 시기에 최후를 맞이했다.

참고로 서울 말고 부산 전차는 지금 부산 지하철 1호선의 동북쪽 온천장-서대신 역까지의 구간과 거의 일치하는 선형이었다. 지형 특성상 저기가 서울로 치면 종로 같은 중요한 구간이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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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평양에서 과거에 운행되었던 전차에 대해서는 정보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남한에서는 서울과 부산의 전차를 복구해서 60년대까지 운행하기라도 했지만 북한의 경우, 전쟁 이후에 기존 전차는 운행이 그대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북한에서는 1991년부터 '궤도전차'라는 이름으로 전차를 다시 만들어서 평양에서 운행 중이며, 이건 옛날 전차와는 연결고리가 없다.

사진을 보니 오늘날 운행되는 평양 전차는 한 편성에 2량 정도 연결되어서 굴절버스처럼 생긴 것도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07 19:32 2019/05/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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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재구 소령이라고 1965년 10월경에 월남전 파병을 앞두고 훈련을 하던 중에.. 부하가 안전핀 뽑고 실수로 놓친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덮어서 부하들 목숨을 구하고 혼자 장렬히 산화한 육사 출신 군인이 있다.
여기까지는 본인이 이전에 이미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며, 아예 홍천에 있는 기념관을 다녀 온 얘기까지 늘어놨었다.

이분에게는 순직 당시에 겨우 2살밖에 안 된 아들이 있었는데 부인은 졸지에 과부가 됐다. 하지만 이 모자는 잔뜩 매스컴 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방방곡곡에서 온정이 쏟아졌다.
높으신 분들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성금과 조의금이 도착했다. 육사의 후배 생도들이 단체로 찾아가서 미망인을 위로했으며, 존경스러운 대선배님이 남긴 유일한 후세이면서 유복자나 마찬가지인 어린 아들(강 병훈 군, 1964-)을 "도리도리 까꿍~" 하면서 놀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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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미망인은 재혼하지 않고 혼자서 외아들을 키웠다.
박 정희 대통령은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원한다면 육사에 특례로 입학시켜 주라는 정말 파격적인 지시를 내렸다.
뭐, 알고 보니 박통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이런 지시를 내린 건 아니고, 어느 시민이 올린 청와대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과 비슷하게 일이 성사된 것이었다.

국가 유공자의 자녀에게 병역 의무를 열외시켜 주는 규정은 지금도 우리나라에 있다. 정확히는 상이· 전몰 군경의 아들 한 명에 한해서 신검 등급과 무관하게 공익--사회 복무 요원-- 6개월만으로 병역 의무를 퉁치는 것이다.
하지만 사관학교 특례 입학은 우리나라 역사상 제안되거나 시행된 적이 없었다. 이건 미국에서도 명예 훈장 수훈자의 자녀에게나 주어지는 특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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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은 다행히 잘 컸다. 특례 입학이 보장된 육사 대신, 자기 실력만으로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복싱 선수 김 득구의 유복자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치과 의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냥 평범한 공돌이로 회사 생활을 하다가 스타트업을 차리기도 하고, 나중에는 양재천 일대에 와인 카페를 연 것으로 2000년대까지의 근황이 검색된다. 그 뒤에는 그 가게가 없어졌고 최근 근황을 알 수 없다.

이분은 뭔가 윤 봉길의 아들, 안 중근의 아들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지 싶다. 자기는 아버지를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주변에서는 온통 그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예의주시 주목하니까 말이다.
그는 교과서에서 자기 아버지의 일화에 대해 배우고, 자기 아버지의 행적을 재연한 영화를 봤다. 수류탄 사고가 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타이밍에(1966) 아예 "소령 강 재구"라는 영화도 나왔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육사를 수석 입학 내지 졸업한 생도가 인터뷰 때 맨날 얘기하는 클리셰 중 하나가 "강 재구 소령님처럼 남을 위해 살신성인 하는 군인이 되겠습니다"였다.
주변 분위기가 이 정도이니 정작 고인의 아들은 주변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고, 육사에 들어가고 싶다가도 단념했을 법도 해 보인다. 그럼 자기는 뒤이어서 "아버님처럼 남을 위해 살신성인 하는 군인이 되겠습니다"라고 읊고 싶겠는가?

참고로 강 재구 전기 영화는 그 이름도 유명한 "빨간 마후라"(1964)와 비슷한 시기의 영화이다. 저게 공군 버전이면 강 재구는 육군 버전인 셈.
위인을 추모하고 기림과 동시에 육사에 대해서 완전 간지 나게 홍보하고 한창 진행 중이던 월남전 파병에 대해서도 홍보하는 프로파간다도 가미되었다.

제작 명분이 아주 훌륭하니 이런 영화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제작 지원을 두둑히 해 줬다. 그래서 "소령 강 재구"는 1960년대의 국내 여건에서 무려 올컬러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아직 대한뉴스조차도 흑백이던 시절에 말이다.
지리덕· 역덕이라면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철이고 경인 고속도로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시외버스로 오가고, 주변은 온통 비포장길 민둥산 황무지이던... 당시 국내 모습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어서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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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하 병사의 군기를 주입하기 위해서 고참 병사도 아니고 소대장(강 재구)이 직접 빠따를 때리는 장면이라든가,
생도 남친의 직각식사 동작을 보고는(강 재구 말고 다른 조연) 여친이 "니 어디 아프나? 똑똑하던 애가 왜 저리 됐노? ㅠㅠ"라고...;;
마치 국제시장에서 막순이가 영어를 구사하며 이산가족 TV에 출연하자 시청자들이 진심으로 안쓰러워한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게 영화의 깨알같은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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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안 그래도 너무 바람직한 모범 FM 생도 겸 군인으로 묘사했는데, 대사도 성우가 따로 과장을 잔뜩 넣은 후시녹음이다 보니 말투가 정말 오글거린다. ㅡ,.ㅡ;;

"기상 동작 다시~!"
"아직도 고등학교 때의 느릿느릿한 동작을 가시지 못하고 있지? 이래 가지고 장교가 되겠다는 거냐? 부대 차렷! 우향 우! 앞으로~~갓! 뛰어~~갓!! (...) 왕성한 군인 정신과 원기가 생길 때까지 계속 연병장을 돈다. 알겠나!"
"육사는 직선과 직각으로 조화된 국군의 요람이다. 목표를 향해서 직각보행이다. 앞으로 갓~!!"
"몽둥이로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개나 소에게 하는 짓이다. 그 말의 뜻을 새기면서 해라."


그에 반해 풀 메탈 자켓에서는 교관이 병사들에게 군기를 주입하기 위해서 욕쟁이 할머니 뺨치는 온갖 마초스러운 막말 쌍욕 섹드립 패드립으로 오바하며 기선 제압을 한다. 특히 훈련병들 이름을 즉석에서 제멋대로 바꿔서 불러 주는 게 압권이다.

강 재구 영화와 참 비교된다.;;; ㅋㅋ 한국과 미국이라는 차이, 그리고 사관학교와 해병대 병영이라는 차이도 있지만.. 군대에서 상급자가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 실제 군대의 모습은 이 두 영화의 평균에 가까우려나? ㅡ,.ㅡ;;

사실, 국군 역사상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군인이 저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주 비슷한 시기에(1966년 2월!) 낙하산 강하 훈련을 하던 중에 다른 동료/후임 낙하산을 바로잡아 주고는 자기는 추락사한 이 원등 상사도 있고,

1971년 1월에는 전 명세라고 육군 항공대 출신의 조종사가 월북을 시도하는 여객기 테러리스트를 제압한 후, 놈이 기폭시킨 사제폭탄을 강 재구 소령이 한 것처럼 직접 껴안아서 승객들 목숨을 구하고 산화했었다.
강 재구의 경우는 일단 시기적으로 처음이고(1965년..), 육사 출신 장교이기도 해서 빽이 든든하니 군인 정신의 귀감으로 정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기린다고 봐도 되겠다.

그럼, 끝으로 이와 관련된 내 직업병 얘기를 좀 늘어놓고 글을 맺겠다.

"강 병훈 군이 훗날 육사 입교를 지원한다면 우선적으로 입교할 수 있도록 조치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공문을 보니 느낌이 짠하다. 이것도 그 특유의 글자체를 보니 공 병우 세벌식 타자기로 작성되었다. 1965년이면 아직 졸속 네벌식 표준이 제정되기 전이기도 하니까... 글자 모양이 약간 엉성하긴 해도 세벌식이 타자 속도와 편의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물건이었다.

유럽 같은 알파벳 문화권이 아닌 듣보잡 전쟁 폐허 거지 나라에 고유한 자국 문자가 존재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걸 찍는 기계식 타자기까지 이미 만들어져 있다니!
휴전 협정 문서를 만들 때부터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 측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활용도 제대로 못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공 병우 박사는 약 빤 급의 괴수 천재였다. 그것도 본업도 안과 의사 할 거 다 하면서 저 쪽 오덕질도 그만치 했으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02 08:38 2019/05/0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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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 대통령 기념관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는 아니고, 국뽕을 한 사발 거하게 혈관에다 주입하고 취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본인은 올 3월에 리모델링 개관했다는 원조가카 기념관에 다녀왔다.
김치 한복 된장 정도로는 택도 없고 한글이나 할배, 원조가카 정도는 돼야 국뽕의 재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본인은 저기에 2012년, 2017년 이렇게 두 번이나 가 봤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독립된 블로그 글을 통해서 후기를 올린 적은 없었다.
작년 말에는 기념관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웬 공사로 인한 휴관/폐관 상태였다. 안 그래도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저기도 정치 보복, 이념 보복을 당하고 있기라도 한지, 이화장처럼 공사를 가장한 무기한 폐쇄 상태는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잔뜩 들었다.

그래도 기념관은 우려와 달리 다행히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잘 됐고, 올해 삼일절부터 재개장했다.
전에는 이름이 좀 오해의 여지가 있게 '기념 도서관'이었는데(실제 의미는 기념관 및 도서관), 리모델링하면서 확실하게 '기념관'이라고 이름도 고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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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원조가카의 어린 시절 개인사에 대해서 이 정도로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았던 거 같다.
어쩐지, 옛날에 "만화 박정희"라고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박통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에서도 박통이 어린 시절에 나팔 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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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까지는 철원에서 열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아아, 원조가카도 어린 시절에 금강산선 열차를 타 봤구나~! 기념관에서 읽은 제일 반가운 문구였다.

보다시피 원조가카는 지금으로 치면 교육 대학교와 군 사관학교 두 곳을 나왔다. 둘 다 안정된 진로와 명예가 보장된 코스이며, 공부를 대충 쉬엄쉬엄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긴 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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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카가 이뤄낸 것들..
x축은 61년부터 79년까지 시간이고, y축은 경제 정책 전반, 토목 건설, 과학 기술, 새마을 운동, 안보· 국방, 교육· 문화· 복지 이렇게 카테고리별로 박통이 만든 것들을 소개해 놓은 게 무척 유익했다.
또한, 저 테이블이 있는 방의 중앙에는 각종 토목 공사들의 준공식 때 원조가카가 테이프를 끊는 용도로 사용한 금색 가위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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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카가 재임 기간 동안 해마다 저렇게 표어, 모토랄까 슬로건이랄까.. 그런 걸 제정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예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리 박사 할배는 이름을 지어 준 게 많고, 원조가카는 뭔가 글씨를 쓴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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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공업화 산업화가 환경을 꼭 파괴만 하는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더티한 화석 연료는 역설적으로 나무를 땔감용으로 벨 일이 없게 해 준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다음 화석 연료를 쓸 일을 줄여 준다.

우리나라의 산림 녹화는 석탄 산업 육성과 맞물린 덕분에 성공했는데.. 지금은 그 석탄 산업도 망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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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1950년대 할배 시절에는 아직 국가 차원의 의료 보험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박통 때 일단 공무원을 대상으로 먼저 의료 보험이 시작되었고, 이게 지금처럼 전국민에게 몽땅 시행된 것은 박통에다 전대갈 시절까지 지난 1989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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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국민 교육 헌장이다.
멸사봉공 진충보국스러운 표현 일색이라고 트집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이 잡을 수 있겠지만, 본인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는 문구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본인이 몇 년 전의 블로그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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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원조가카의 치적이 잔뜩 소개된 뒤, 맨 마지막에 '유신 --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이라는 글자와 함께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의 가카 마네킹.. 요렇게 꾸며진 어두운 방이 나왔다. 참 웃겼다.
"머릿속에 구상해 놓은 계획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 물러나기에는 이 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아직도 북괴의 위협은 여전한데.." 아이고...;; ㅋㅋㅋㅋ

지금 이 2010년대에도.. 이놈의 헬조선은 답이 없다고, 영어만 되면 그저 외국으로 뜨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 미개한 조센징들은 국민성이 민주주의와 맞지 않고 불도저형 독재자가 한 명 나와서 싹 다 갈아엎어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다.

하물며 완전 전쟁 폐허 거지꼴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 생각이 어땠을까?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노예근성 패배의식이 얼~마나 만연했을까?
자국의 미개한 실상과 조센징의 국민성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애초에 구한말 때부터 단군의 후손들은 다 일본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신념형' 친일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윤 치호이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나라 간판 내리고 천조국의 50몇 째 주로 편입해 들어가자는 식으로 말이다. 기회주의 권력 지향 매국노라든가 생계형 부역자, 싸이코패스 악질 헌병 같은 부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원조가카라는.. 조선인에게 너무 과분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사람들의 의식부터 개조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 "피똥 싸는 가난 물리치고 잘 살아 보세"라고 독려했다. 고속도로 놓고, 발전소 짓고 공장 짓고, 과학 연구소 만들고, 기능공을 양성했다.

성경의 느헤미야처럼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느 4:16-18)를 전파했다.
역대기하 26장에 나오는 웃시야 왕처럼 농사 시스템을 개선하고 신무기를 개발하고 기계(엔진)를 만들었다.
이런 사람이면 10년이고 100년이고 독재 하면서 종북 용공 빨갱이 자식들은 다 죽여서 씨를 말려 버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바라기에는 원조가카도 역량이 한계가 있었다. 반동분자들을 너무 관대하고 너그럽게 다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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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다 보고 나면 이렇게 쾌적한 독서와 공부 공간이 나온다. 옆에 도서관과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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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부에 있는 추모 공간의 벽면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0에서 1을 만든 할배 다음으로 1에서 100을 만든 선한 독재자 원조가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반일· 항일을 가장 수준 높게 실천한 사람이다.
소싯적에 일본군 장교를 지원해서 들어갔다고?
뭐, 항일 독립운동을 한 것보다야 비주얼 모양새가 안 나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예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직업에 종사한 것 자체만으로 친일 반민족질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으며, 원조가카가 아예 헌병대 장교로 들어와서 자국 안에서 동포들을 괴롭히고 착취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독립 운동이라고는 맥이 다 끊긴 1940년대에 동족도 없는 먼 변방에 나가서 중국군하고나 싸웠지.

그는 선생까지 됐는데도 굳이 더 고생해서 군인으로 신분을 업그레이드 했으며, 긴 칼 차고 돌아와서는 선생 시절에 자기를 깔보던 일본인들을 버로우 태우고 데꿀멍 시켰다. 그냥 현실 불만족과 출세욕 때문에 그랬을 뿐이다.
이 정도는.. 카이스트(국비 장학생..;;) 나와서 국내 대기업 내지 연구소에서 몇 달 근무해 봤는데, 헬조선 이공계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의대나 로스쿨로 다시 진학한 정도의 일탈일 뿐이다! 그 이상의 악질적인 짓은 아니라는 것이다.

할배 시절의 반민특위 해체와 친일 부역자 재등용에 대해서는 애산 이 인의 판단이라든가, Windows 9x의 16비트 코드 재사용과 같은 반박 비유가 있다. 그리고 원조가카의 과거에 대해서는 딱 저런 비유를 들어서 대처하면 된다.

내가 단언하건대 원조가카는 되도 않은 욕지거리 험담 늘어놓는 머저리들, 그리고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사상 불순한 정치인들보다 인품, 그릇 크기 등등이 0이 몇 개는 더 붙은 정도로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 시절에 전혀 통용되지 않았던 오늘날의 관행, 그 시절에 절대로 실현 불가능했던 일, 자기도 절대로 실천하지 못했을 도덕 청렴을 이루지 못했다는 식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생트집 불평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맨날 천날 일제 잔재 탓, 군사 문화 탓만 하는데.. 비록 거기에도 악한 것 잘못된 것이 있긴 했어도 195, 6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 땅에서 군대는 어지간한 민간 싸제보다는 더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선진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만 해도.. 그 일제 잔재의 원산지 본거지가 어찌 그렇게도 선진국이 됐고 노벨 상 수상자까지 배출하는 과학 기술 강국이 됐는가? 역사로부터, 자기보다 잘난 사람으로부터 배우지를 않고 저런 썩은 사고방식으로만 살아서는 평생 찌질이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4 08:33 2019/04/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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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 외

1. 영화

올해는 3· 1 운동 발발 100주년인 해답게 이 타이밍에 맞춰 유 관순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적절하게 개봉했다. 말모이에 이어 또 일제 시대 배경 영화이긴 하다만, 이것도 명분이 충분하기 때문에 본인은 관람을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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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안 그래도 3· 1 운동 자체가 아니라 유 관순의 투옥 이후 시점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실제로 구경하고 나면 영화의 공간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니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분은 사전에 저기부터 가 보시기 바란다.

본인은 9년 전, 이 블로그가 처음 생겼던 2010년 초에 가 봤다. 일반 감방뿐만 아니라 유 관순이 말년에 실제로 격리 수용됐던 지하 독방까지 직접 볼 수 있다.

  • 유 관순은 서대문(경성) 형무소에서 옥사
  • 강 우규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유 관순이 투옥된 시기에 서울 역 광장에서 사이토 총독의 암살을 시도했던 노인)
  • 훗날 조선어 학회 사건 연루자 두 분은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
  • 주 기철 목사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사

지역이 이렇게 대응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례적으로 흔치 않은 흑백 영화라는 것도 미리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킬 빌처럼 일부 주요 장면만 흑백인 것도 아니다(녹엽정 전투..).
현실의 형무소 장면은 죄다 흑백이고, 일부 과거 회상 장면이 컬러이다. 보통은 그 반대인 것 같은데 이례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또 항일 운동을 소재로 한 "자전차왕 엄 복동"도 개봉했다.
하지만 스포츠로 한국이 일본을 이긴 얘기를 극화하고 싶으면 차라리 손 기정 내지 홍 덕영 골키퍼 (해방 이후 월드컵 예선 한일전!)같은 사람이나 재조명할 것이지, 참신한 소재를 찾는답시고 자전거 도둑질도 전문이었던 사람을 소재로 삼은 게 논란이 됐다. 그 사람이 하다못해 친일파· 일본놈들만 상대로 의적(?)질을 한 것도 아니다.

소재부터가 삐걱거리는데 영화 자체도 그리 잘 만든 게 아니었고, 더 고퀄인 "항거"에게 팀킬 당하니 엄 복동 얘기는 예전의 "대장 김 창수"의 말로를 가면서 대차게 망했다. 뭐, 자전거 도벽은 아예 친일 변절이나 강도살인보다는 죄질이 상대적으로 가볍긴 하다만, 저 양반이 훔친 액수도 단순 생계형으로 실드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2. 3· 1 운동

그럼, 영화를 벗어나 3· 1운동 자체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해 보자.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까짓 만세 부른다고 해서 일제가 "아 그러셨어요~? ^^"물러가고 독립이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3· 1 운동은 주요 배경, 명분, 동기에 핀트가 근본적으로 안 맞는 게 있었다.

(1) 1910년대 일제 무단 통치에 대한 반감과 민생고(흉년, 물가 상승)는 그렇다 치지만 (2) 고종 독살 의혹은.. 글쎄, 고종이 무슨 세종대왕 급으로 추모 받을 성군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3) 민족 자결주의는 1차 대전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유 관순도 그 기백이 정말 대단하긴 하지만, 너무 무모하게 매를 벌지 말고, 1년 반 정도만 빵에서 살다가 나와서 공부 더 하고 더 오래 살았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만세 시위 때 자기 부모를 왜놈들한테 잃고 완전히 꼭지가 돌아 버렸을 테니, 그 뒤로 왜놈을 가족과 민족의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저놈들한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고집 부린 그 악바리와 깡과 근성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유 관순의 감방 동료로 나오는 권 애라와 김 향화(배우 이름이 아닌 배역 이름)는 실존 인물이다. 특히 김 향화는 수원에서 활동한 기생이다. 이 시절에 기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야시꾸리한 직업 종사자가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스튜어디스 급은 되는.. 단순 서비스 접대 이상으로 지와 미와 예능을 갖춘 사람이었다.

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이 일본놈들한테 학을 떼면서 뭐 저런 상또라이들이 있나(반자이 어택, 카미카제..) 경악했었다. 하지만 더 옛날에는 일본도 조센징들을 보곤 뭐 저렇게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 독종 또라이들이 있나 멘탈 대미지(반자이 트라우마..)를 입고 충격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20년대에는 문화 통치 유화책이 나오게 되었다.

흔히 호남 지역을 비하하면서 저기가 3· 1 운동 참가자 내지 투옥자가 제일 적었다는 통계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거기는 3· 1 운동 이전에 1890년대의 동학 운동과 1900년대의 의병 때문에 항일 인사들이 몽땅 토벌되고 씨가 마른 상태이기도 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통계 자체에 대한 조작과 왜곡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을 때 말이다.

3.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 영화와 배경 내용에 대해서 말할 거리는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일단 기독교 신앙이 의외로 꽤 자주 언급되는 게 인상적이고 좋았다. 유 관순은 실제로 교인이기도 했으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시험을 면하게는 하지 않아도 이길 힘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음", "예수님은 바보여서 저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줄 아냐" 무려 이 정도 분량이 대사에 포함돼 있다.

신앙 쪽으로 왜곡 없는 중립· 긍정적인 묘사 덕분에 본인은 처음엔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슬슬 올라갔다. 그러나 결말부를 보고는 기분이 완전히 잡쳐 버렸다.
정작 유 관순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너무 얼렁뚱땅 대충 자막으로 때워 버리고는, 그 뒤에 어설프게 또 이상한 친일파 드립과 반일 프레임 엮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군.. ㅉㅉ" 싶었다.

정 춘영인지 누군지 출신과 생몰 시기도 모르는 웬 듣보잡 조선인 헌병이 있어서 유 관순을 내내 괴롭혔다고 한다.
이놈은 친일 부역 행적이 탄로나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그 이름도 찬란한 모 할배의 특별 배려(!)로 사면되고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걸 말이라고 자막을 떡 걸어 놨으니 나도 꼭지가 돌아 버리겠다. 하지만 실상은 유 관순이 교인이었던 것만큼이나 할배도 교파까지 같은(감리교) 교인이었으며, 유 관순이 독립 운동가인 것만큼이나 반민특위를 불가피하게 해체한 배후 인물(애산 이 인)도 똑같이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어디 '정춘영 유관순 고문'이라고 검색을 해 보아라. 정확한 기록 같은 건 없고, 같이 걸려 나오는 건 유 관순이 무슨 미꾸라지 고문을 당하고 코가 잘리고 머리 가죽이 벗겨졌다는 얘기, 아니 도시전설 괴담밖에 없다.
그렇게도 친일 부역자 조선인 헌병을 개새끼로 만들고 싶으면 영화에다가도 미꾸라지 고문 씬을 넣지 그랬냐? 일본 제국주의 악마들이 겨우 손톱 뽑기 내지 캐비닛 안에 선 채로 며칠 감금 정도만 했을 것 같은가?

그리고 크레딧 롤이 올라가는 동안이나 작품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죽기 전에.. 그 이름도 유명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출처불명의 비장한 유언도 좀 나왔어야지? 안 그런가?

삼일 운동 그 자체가 조국의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이 항거는 외국에까지 소개되어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는둥, 그 정신이 지금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돼 있다는둥, 유 관순 말고 다른 여학생· 기생의 의거도 많이 벌어졌다는둥.. 클로징 멘트로 다른 좋은 말을 얼마든지 골라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마무리를 의도적으로 저 따구로 지은 저의가 뭐냐!? 매우 유감스럽고 씁쓸했다.

4. 3· 1 운동 때 투옥된 뒤에도 천수를 누린 다른 여성

옛날에 우리나라엔 '추계 최 은희(1904-1984)'라고 무려 1920년대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여성으로서는 거의 국내 최초로 기자라는 직업에 종사한 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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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유 관순보다 약간 어릴 뿐 거의 같은 연배이다. 3· 1 운동에 가담하다가 붙잡혀서 세 주 남짓 옥고를 치르면서 험한 꼴을 봤지만, 그 뒤엔 풀려나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기자도 됐다. 덕분에 방송을 타고 비행기도 타 보는 등, 일제 시대 조선 여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참고로 3· 1 운동 당시의 소속이 유 관순은 이화학당, 저분은 경성여고보)

이분의 호인 '추계'는 추계 예술 대학교의 설립자하고는 관계 없다. 그 추계는 황 신덕(1898-1983)이라는 다른 사람의 아호인데, 저분 역시 최 은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여성이며, 3· 1 운동에 가담했고 기자 커리어까지 있는 것이 서로 굉장히 비슷하긴 하다. 아마 서로 아는 사이였지 않을까?

호 다음으로 '최 은희'라는 이름은 국내에서는 영화 배우의 이름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두 단어를 합친 '추계 최 은희'라는 사람은 인지도가 낮으며, 언론 쪽 종사자가 아니면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언론인 출신 최 은희가 영화 배우 최 은희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인물이다. 추계 최 은희는 대학을 설립한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을 딴 '최은희 여기자상'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저분은 결혼 후에는 기자 커리어가 중단되었다. 허나, 1남 2녀를 낳아서 세 명 모두 박사까지 공부 시키고 유학도 보내고 전부 대학 교수로 키웠다.;; 그 중 막내딸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한 이 혜순으로, 2000년대 중반에 정년 퇴임했다.

본인은 먼 옛날에 "유쾌한 구두쇠들"(1994)이라는 책을 통해 저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공 병우 박사, 남 기심 교수, 이 혜순 교수(두 교수 다 국문과이구나.. 세부 전공은 다르지만) 등 17명의 유명인사가 공동 집필한 책인데, 다들 비범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도 엄청 많이 번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일상생활은 서민들 이상으로 정말 둘도 없이 검소하게 효율적으로 하면서, 옳은 일 큰 일에 아낌없이 돈을 쾌척한 얘기들이 실려 있다. 지금은 시대에 맞게 저 책 내용이 웹툰으로 각색되어서 연재되면 어떨까 싶다.
다만, 저자 중에 지금은 완전히 몰락한 방송인 서 세원 씨까지 포함돼 있는 게 참 묘하다.

이 혜순 교수는 저 책이 나온 지 10년이 넘게 지나고 나이 70을 바라보는 명예교수가 된 뒤에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변함없이 자기 어머니라고 회고했다. (☞ 관련 링크)
뭐, 인생 한번 짧고 굵게 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유 관순 같은 인물이 형무소를 살아서 출소해서 공부 더 하고 후세도 남겼으면 인생이 최 은희와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3/11 08:36 2019/03/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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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1. 말모이

독자 여러분은 '말모이'라는 단어를 혹시 들어 보셨는가?
이건 word + collection을 직역한 합성어로, 구한말-일제 시대 급의 과거에 일부 국어학자들이 사전(dictionary)을 순우리말로 옮겨서 표현했던 단어이다.

코퍼스를 뜻하는 '말뭉치'도 어쩌면 ‘말모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연세대인지 고려대인지 어디 교수가 처음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 그 최초 제안자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물론 현대에 만들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업계에서 활발히 쓰이는 용어이다.

다만, 명사로만 이뤄진 합성어인 말뭉치와 달리, 말모이에서 '모이'는 '먹다'(eat)로부터 '먹이'(food)를 만들듯이 '모으다'의 어간에다가 명사화 접미사 '-이'를 붙인 파생어이다.
결합 과정에서 모음 음운이 하나 탈락하긴 했지만(모으다 ≠ 모다) 그건 별로 어색하지 않으며, 저건 ‘해돋이’, ‘한살이’만큼이나 아무 문제 없는 조어이다. 하지만 어감이 이상하다고 까는 사람도 있다. horse + food (for birds to peck up)가 떠오른다고 말이다. =_=;;

뭐, 그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동음이의어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옛날에는 ‘시발’이라는 자동차도 있었다. 어감이라는 걸 판단하는 기준이 옛날과 지금이 서로 같지 않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2. 동명의 최근 영화

세월이 흘러서 조선어 학회가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고 ‘말모이’라는 단어가 영화 제목이 되는 날이 왔다. 그놈의 좌편향 반일 프레임이 지긋지긋하다고 싫어하는 분들의 심정을 본인 역시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언어와 신앙 분야(과거에 일사각오..)는 내가 특별 관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요런 영화는 찾아서.. ‘혼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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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얘는 여느 전쟁 영화 같은 본격적인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일제 말기에 저런 단체가 있어서 국어사전을 만들려고 했고, 그러다가 왜놈들에게 잡혀서 회원들이 고초를 겪었다. 원고를 빼앗기기까지 했지만 다행히 해방 후에 서울역 창고에서 되찾았고, 사전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출간돼 나왔다.”
라는 기본 배경만이 팩트이다. 아, 그 당시에 저기서 ‘한글’이라는 제목의 기관지를 발간했다는 것도 추가적인 팩트이고..

허나, 그것 이후로 세부적인 주인공, 조선어 학회 구성원, 중간에 일어난 사건 등등등은 순도 99%에 가까운 허구 창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도록 하자. 세상에, 조선어 학회의 대표가 친일파로 변절한 중학교 이사장의 아들 부잣집 도련님이라니, 완전 충격이다. ㅡ,.ㅡ;; ㅠ_ㅠ

더구나 영화에는 어설픈 첩보전까지 나온다. 조선어 학회가 일제의 어용 학술단체로 변절한 듯이 간판을 바꿔 달고, 조선총독부가 허가해 준 합법 집회에서는 대표가 일제 부역 독려 연설까지 하며 페이크를 친다. 그 뒤 그들은 야밤에 극장에서 진짜 동지들을 몰래 모아서 지방 방언을 수집한다.;;;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런 건 그냥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려고 일부러 만든 설정이다. 이 영화의 등장 인물 중에는 조선어 학회 대표는 물론이고 일반 회원 중에서도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딴 인물이 없다. 그러니 <말모이>는 어찌 보면 과거의 <밀정>이나 <암살> 같은 부류보다도 현실성이 더 떨어진다.

3. 실제 조선어 학회의 대표

그 당시에 조선어 학회 ‘대표’의 직함명은 ‘간사장(간사+장)’이었다. 193, 40년대에 조선어 학회의 간사장을 역임한 핵심 간부로는 이 극로, 신 명균 같은 사람이 있다.
이 극로는 이 미륵(압록강은 흐른다)처럼 그 시절에 극소수이던 독일 유학 박사이고, 독일의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걸출한 학자로서 조선어 학회에서는 최 현배보다도 중요도가 더 높은 인물이었다.

이 사람이 남긴 매우 긍정적인 행적이 하나 전해진다. 근무 중에 눈병을 앓아서 근처 병원을 찾아갔는데(1938년경) 거기가 바로 개업한 지 얼마 안 됐던 공안과였다. 그는 거기서 자기를 치료해 준 원장 선생에게 대뜸 한글뽕(?)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그 의사양반은 거기서 큰 감화를 받은 나머지, 훗날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뭐, 말모이 같은 영화에는 들어갈 만한 문맥이 없었겠지만, 이런 일화가 영화 같은 매체에서 소개될 기회가 없는 건 아쉬운 점이다.

다만, 이 극로는 해방 후에는 월북을 하는 바람에 남한에서 존재감이 묻혀 버렸다. (사후에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됨) 오죽했으면 해방 후에 조선어 학회가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꾼 이유(1949) 중 하나도.. 대표의 월북으로 인한 빨갱이 누명을 조금이라도 벗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신 명균은 나도 대학 시절 내내 전혀 몰랐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인데.. 1941년쯤에 일제의 한국어 탄압과 민족 말살 정책에 항의하여 ‘자결’을 해 버렸다. 그러니,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지도 않았고 투옥 기록도 없고.. 존재도 한참 뒤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런 분들과 달리, 해방 이후 남한에서 그럭저럭 오래 살았던 최 현배 선생은 조선어 학회 간사이긴 했지만 간사장까지 맡은 적은 없었다.

4. 조선어 학회 사건이 발생한 진짜 이유

사실, 조선어 학회는 조선어 국어사전 편찬과 출간 자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1940년에 허가를 받았다. 총칼 무장 독립 운동이 아닌 학술 활동일 뿐인데, 일제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탄압할 정도로 야박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국어사전의 편찬에 관심을 가질 정도의 인물이라면 항일 성향도 강하다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으니, 놈들이 예의주시하고 감시를 하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어 학회가 1942년에 뒤늦게 조선 시대 사화를 당하듯이 화를 입은 이유는.. 잘 알다시피 여학생 일기장 사건 때문이다. “국어(=일본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선생이 혼내 줬다” → 어라? 국가 정책을 무시하고 왜 일본어 쓰는 애를 혼내지? → 그 교사를 뒷조사 해 보니 전교조.. 아니 조선어 학회 소속 → 이거 알고 보니 골수 불령선인 악질 반동이구만? → 안 그래도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그럼 그렇지, 요놈 잘 걸렸다.

일제의 고등 경찰인지 특별 고등 경찰인지 거기서 실적 껀수 하나 올리려고 요렇게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학자들을 잡아들이고 투옥시킨 것이다. 그리고 만들던 사전 원고도 빼앗겼다. 다만, 이건 피의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참고하려고 증거물 차원에서 압수한 것이지, 그게 무슨 일제의 입장에서 나쁜.. 이를테면 일본의 국가기밀 누설, 조선총독부 폭파 음모, 총독 내지 덴노 암살 음모, 본토 테러 지령 같은 것이어서 압수당한 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선어 사전 원고를 작성한 것 자체까지 법적으로 죄는 아니었다. 애초에 조선어 학회도 무슨 광복군 의열단 같은 단체가 아니니까 말이다. 굳이 그 사전 편찬자들을 해코지 하려면 명목상으로 다른 정치적이고 더 큰 죄를 뒤집어씌워야 했다.

애매한 학자들을 골수 반동분자로 조작하기 위해 잔인한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가 되풀이되었으며, 거기에다 춥고 비위생적인 형무소 수감이 장기화되면서 이 윤재, 한 징 선생 두 분이 결국 옥사했다.
그때 그 일기를 썼던 여학생은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를 졸업했는데, 자기 일기로 인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을 뒤늦게 전해 듣고는 큰 충격을 받고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을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저분은 1982년 여름, 일본의 역사 왜곡 때문에 전국적인 반일 정서가 강해졌던 시절에 환갑을 앞둔 나이가 돼서야 “내가 그때의 영생여고보 학생 박 영희였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중앙일보 인터뷰를 했다. “그때 일기장을 빼앗기고 은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대라는 협박과 함께 온갖 불법 감금과 폭행을 당했던 피해자가 바로 본인이고 아직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오리발 내밀고 발뺌하고 부정한다니, 왜놈들은 정말 인간도 아닙니다!”라고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내용은 한국일보에도 실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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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전에 옛날엔 “내가 소설과 영화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고 최 용신의 옛 약혼자인 김 학준이오!” 커밍아웃이 나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쯤 뒤 1990년대 초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이런 식으로 옛날 역사의 증인들이 하나 둘 나타난 듯하다.

그러니 <말모이> 같은 소재의 영화가 좀 더 진지하게 역사 고증과 사실성을 추구한다면, 저런 사람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액자식 구성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 대신, 그랬으면 또 월북한 빨갱이 학자를 미화한다는 색깔 논란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 극로는 깨끗이 잊고 최 현배를 대신 부각시키거나..

5. 그들은 왜 그렇게 사전 편찬에 목숨을 걸었는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한국어에 이런 단어가 있었나 싶은 듣보잡 어휘가 의외로 많이 잠들어 있다. 가령, 미혼 해녀를 '비바리'라고 하고, 돌싱 여성을 '되모시'라고 한다.
한자어 합성이긴 하지만, 1/n 더치페이를 나타내는 '각추렴'이라는 말도 있다.

호칭과 높임법이 너무 불편해서 영어로 대화하는 거, 정말 어휘가 없어서 외래어 쓰는 것을 뭐라할 수는 없다. 그런 걸 어설프게 순화어 만드는 건 별 영양가가 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당장 멀쩡하게 이미 있는 말부터 제대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 쓰여서 사어가 됐다면 그걸 고유명사화해서 브랜드명으로 써먹는 방법도 있을 테고 말이다.

더구나 한국어는 체언보다 용언을, 형용사보다 부사를 훨씬 더 좋아하는 언어이지 않던가. 순우리말도 저런 지엽적인 명사보다는 동사 같은 용언을 더 많이 찾아서 살려 써야 된다.
본인의 오래된 생각이긴 하다만.. 영어로는 reliable이라고 한 단어로 간단하게 표현하는 걸 우리는 맨날 '믿을 만한, 신뢰할 수 있는'이라고 길게 풀어서 번역해야 한다면 몹시 불편하고 비경제적이다. 이런 예가 한두 개가 아니라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난다면 한국어의 사고 체계는 영어의 사고 체계와 비교했을 때 결코 편리하다고 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걸 '미덥다'라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믿음직하다'보다도 더 짧다. 한국어에 원래 그런 어휘가 있다는 증언을 바로 국어사전이 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faithful에는 '신실하다'뿐만 아니라 '미쁘다'도 들어가 있어야 한다. throw는 그냥 '던지다'이지만, hurl에는 '내박치다'라는 뜻풀이가 실려 있어야 한다.

영일 사전을 그대로 베끼기만 해서는 진짜 우리말다운 표현이 반영된 영한 사전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국어 사전과의 적절한 연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어 최초의 사전이라 일컬어지는 조선어 학회 큰사전의 존재 의의였다.

6. Aftermath

이렇듯, 조선어 학회는 일제 시대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내놓고 사전 편찬 작업을 했다. 영화에서는 맞춤법이라기보다는 방언 수집· 분류와 표준어 제정처럼 묘사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전을 편찬하려면 실제로 저런 식으로 온갖 어휘들을 수집하기도 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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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는 이 학회 출신의 학자들이 미군정 하에서 거의 즉시 한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고 사전을 실제로 출간하는 과업까지 이뤘다.
한글 학회 큰사전 이후로 나중에는 신 기철· 신 용철이 편찬한 '새우리말 큰사전'도 민간 국어사전의 양대 산맥을 구성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부터는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나오면서 민간에서 국어사전을 또 편찬할 일은 사실상 없어졌다.

그런데 이때는 대세가 이미 인터넷으로 기울고 있었던지라, 국가 기관에서 편찬한 국어사전조차도 초판 종이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가 적자를 봤다고 한다. 그 뒤로 사전이 수차례 개정되고 증보되었지만 종이책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참 격세지감이다.

이상이다.
영화가 배경 말고 이야기의 주 뼈대가 거의 다 허구인 것은 아쉬운 점이다. 햄· 소시지 같은 가공육인 것을 처음부터 감안하고 먹긴 했지만, 성분 분포를 보니 싸구려 잡육과 밀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그래도 맨날 뻔한 무장 항일 투쟁 말고 조선어 학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온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아저씨>의 오 명규 사장과 <범죄도시>의 장 첸을 한데 만나니 반갑기도 했다.
국내에 있는 영화 소품용 1930년대 올드카 대여 업체들은 다 좌핸들 차량만 보유 중인가 보다. 그 시절 배경 드라마나 영화들을 봐도 다 그런 것 같다. 진짜 일제 시대에는 일본을 따라 다 좌측통행 우핸들이었을 텐데 말이다.

* 이 글은 한글 학회 홈페이지에 공식 기재된 학회 연혁을 상당수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 기억에만 의지해서 쓴 게 아니다.
아울러, 관심 있으신 분은 조선어 학회 사건의 전말에 대해 잘 소개해 놓은 다음 사이트의 자료도 추가로 참고하시기 바란다. #1 / #2

Posted by 사무엘

2019/01/19 08:33 2019/01/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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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철도 관련 사진 몇 장

1. 로마자 표기

지금이야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된 지 어언 20년이 돼 가기 때문에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은 과거의 유물로 전락해 있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은 소리 표기는 정확할지 모르지만 ㅓ, ㅜ를 표기할 때 컴퓨터 키보드에 없는 반달점 붙은 글자를 써야 하고, ㅋㅌㅍㅎ에 ' 를 덧붙이는 등 실용적으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국내에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은 1980, 90년대에만 도입되어 쓰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역사가 길지 않다.
1970년대 같은 더 옛날로 가면 오히려 그때는 지금처럼 ㅓ를 EO를 써서 표기하고 있었다. 현재의 로마자 표기법은 어찌 보면 더 먼 과거로 복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공식 기록 영상에 등재돼 있는 '수원' 역명의 로마자는 SU WEON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역앞'도 SEOUL YEOG-AP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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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울 지하철 2호선도 전구간 개통하기 전, 신설동부터 강남 구간의 부분 개통만 했을 때는 로마자 표기법이 보다시피 매큔-라이샤워가 아니었다.
'서초'도 화면상으로는 짤렸지만 Se...로 시작하는 걸 볼 수 있다(Seocho).

1983~84년 사이에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되면서 1984년, 2호선이 전구간 개통할 때쯤부터 매큔-라이샤워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기존 안내판들은 다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1980년대에 2호선에서 구 로마자 표기법이 잠깐 쓰였던 시절은 우주왕복선으로 치면.. 액체 연료 탱크에도 하얀 도색이 칠해져 있던 초창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또한, 저 "교대 - Gyodae"라는 압박스러운 표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 2호선은 개통 당시에 '이대'역도 Idae...라고 표기했던 적이 있다. 그러다 얼마 못 가, 로마자 표기는 각각 'SNU of education', 'Ewha womans univ..'처럼 긴 정식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하철 역명판에 지금처럼 한자까지 병기된 것은 훗날, 2000년의 현행 로마자 표기법 개정과 비슷하다.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알게 된 건데.. 전국의 다른 모든 **여대들은 ** women's university라고 표기하고 있고 그게 직관적인 반면,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이화여대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식 영문 표기가 womans university이다. 믿어지지 않으면 직접 확인해 보시길.. 어퍼스트로피도 생략하고 없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 냈다.

다음은 교대와 아주 가까이 있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 역의 개통 당시 승강장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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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로마자 표기법은 매큔-라이샤워 이전의 초창기이고 지금과 동일하다. 그래도 한자 표기는 없다.
인상적인 것은 에스컬레이터 픽토그램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국내에서 지하철 역사상 최초로 내부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역이 저기라고 한다.
스크린도어가 최초로 설치된 역은 기준과 조건에 따라 인천, 김포공항, 신길 등으로 나뉜다만... 에스컬레이터 1호는 저기이다.

옛날에는 자동차에 자동 변속기가 고가 사치품이었던 관계로 이 옵션이 장착된 자동차는 겉면에 automatic이라고 써 붙여서 큼직하게 광고를 했었다.
그것처럼 옛날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있다는 것도 자랑하고 광고하고 유세를 떨 만한 사유였던 듯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노선의 구분을 위해 지금과 같은 노선색 체계를 정립했으며(2호선은 초록색!), 그리고 일명 '지하철체'라고 불리는 역명판 전용 서체도 정립했다. 1호선만 있던 박통 시절에는 그런 게 아직 없었다.

그러다가 1984년, 2호선이 순환선 형태로 완전히 개통할 즈음에는 매큔-라이샤워 로마자 표기법이 도입되었으며, 65세 이상 노인의 무임승차도 딱 이때부터 시행되었다. 2호선의 완전 개통을 알리는 다음 대한뉴스 동영상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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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의 성수 지선에 위치한 용답 역이 원래 이름은 기지였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사진으로나마 당시 흔적을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Kiji (vs Idae...) 대신에 Car Depot (vs Ewha WU..) 인 것, 역번호가 본선이 아닌 지선 형태로 매겨진 것을 감안하면, 저건 개통 초창기가 아니며 2호선 전체 완공 후 좀 시간이 흐른 뒤의 모습이다. 실제로 저 역은 1980년대까지는 계속해서 이름이 '기지'이다가 90년대에 와서야 용답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도 저기는 서울에서 제일 먼저 생긴 지하철 차량 기지이다 보니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울 시내· 중심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긴 했다.

2. 철교의 정체

지난 여름에 용산 역을 가 보니, 내부 광장에는 "필름 속에 담긴 한국 철도 -- 철도를 통해서 본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희망" (주최 주관 코레일, 후원 국토교통부)라는 제목으로 자그마한 옛날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다.

경인선을 비롯해 일제 시대 옛날 철도의 모습, 해방자호 이런 건 유명한 흑백 사진이다.
나중에는 김 대중 시절에 경의선을 연결해서 도라산 역을 개통하던 것, 그리고 2007년 노 무현 때의 동해선 연결 남북 시범 운행 사진도 걸려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6· 25 때의 모습이라면서 바로 문제의 저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3번은 "대동강 철교"라고 소개돼 있지만 글자가 패치된 흔적이 보인다.
안 봐도 비디오다. 저건 "한강 철교"라고 자료를 잘못 만들었다가 오류를 지적받고는 허겁지겁 수정한 것이다.

저 사진은 1950년 12월 초, 평양에서 북한 공산 괴뢰군의 대동강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유엔군이 다리를 폭격해서 저렇게 부숴 놓은 것이다. 그때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우리가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머지않아 다리를 망가뜨려 놓을 테니까 피난 가려면 빨리 가라고 사전에 시민들에게 경고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 교통 통신이 지금처럼 좋지가 못했으니, 다리가 파괴되고 열차 운행이 중단된 뒤에야 소식을 뒤늦게 접한 사람들은 저거라도 붙잡아서 어떻게든 강 건너 피난 가려고 북적거렸다.
한강 인도교 내지 철교를 배경으로 피난민들의 영상 기록이 남겨진 건 내가 알기로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8/11/19 19:34 2018/11/1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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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의 개장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신당동은 구미와 더불어 박 정희 대통령이 살았던 곳이다. 이처럼 종로구 이화동에는 이화장이라고 이 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사저가 있다.

이화장은 근현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으며, 내부엔 자그맣게 이 승만 대통령 기념관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언제부턴가(한 2010년대쯤?) 내부 수리를 이유로 수 년 이상 장기간, 거의 무기한에 가깝게 휴관한 채 방치되었으며 일반인이 들어가 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옛날엔 인터넷 지도에도 '2018년 개장 예정'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말도 없다.

그래서 본인은 올해 두어 차례 이화장을 찾아가 봤다.
지하철 4호선 혜화 역 2번 출구로 나가서 방통대 건물 모퉁에서 좌회전 한 뒤, 언덕을 오르며 대학로 파출소 방면으로 골목길을 쭉 걸어가면 된다.
지하철 출입구에서 목적지까지 직선 거리로는 600미터이지만 실제로는 언덕길 7~800미터 정도를 걷게 되니 남자의 걸음으로 10~15분 남짓 걸린다. 막 가깝지는 않지만 도저히 걷지 못할 먼 거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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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역 주변에는 방통대와 서울대 병원이 있고 이들은 전반적으로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어서 좀 고풍스러운 느낌이다. 그런데 거기서 이화장이 있는 동쪽은 한양도성과 낙산 공원 방면이다. 길이 좁아서 차들이 다니기는 불편하지만 대학로라는 명칭답게 이색적인 카페들과 극장도 있어서 신촌· 홍대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러다가 이화장에 다다르면 요런 한옥과 담벼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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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가 정문 입구이다. 주변은 온통 공사를 위한 컨테이너 가건물이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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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아직 공사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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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에 대해 설명해 놓은 표지판은 컨테이너 가건물에 가려져서 접근하기도, 읽기도 어려워져 있었다.
이 정도가 끝.. 더 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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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기념 사업회의 공식 홈페이지를 가 보면 휴관 사유가 저렇게 적혀 있는데.. 내가 보기엔 말이 안 된다.
지난 2011년엔 우면산에서 큰 산사태가 났지, 낙산에서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은 난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설령 그때 피해를 입었다 해도 저 쬐끄만 건물이 무슨 놈의 복구가 7년이 넘게 걸리냐?
화재로 깡그리 소실됐던 숭례문이 복구에 5년이 걸렸고 그것도 예상 외로 굉장히 오래 걸린 축에 든다.

마치 레카를 죽을 때까지 그냥 무기한 구속시켜 저렇게 구치소에 쳐넣어 두는 것처럼.. (주 기철 목사도 정식으로 재판과 형량 선고도 없이 유치장-구치소만 나돌면서 고문 당하다가 죽었다)
유지보수를 핑계로 친일 공화국 분단의 원흉 독재자의 행적은 이렇게 방치함으로써 교묘하게 지우고 폐쇄하고 봉인시키는 게 아닐까? 독립기념관 바깥뜰에다가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방치해 놓았듯이 말이다. 괴담 음모론 같은 거 믿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나라 꼬라지가 꼬라지이다 보니 저런 불길한 생각마저 들려 한다.

저 안에 있는 동상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너뜨리고 박살 내고 싶어하는 들쥐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미개한 반도에 쌔고 널렸다. 완전 위험물이다.

정치 보복 한번 참 졸렬하고 치사하게 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도 다 포용? 즐쳐드시고 엿 먹으라고 해라. 레카도 바보같이 그렇게 어영부영 순진하게 관용 베풀다가 믿는 도끼 발등 찍히고 저 지경 됐다.

표현의 자유? 맨날 천날 광화문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 운운하는데.. 그럼 어디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누가 "전 두환 만세"라고 외쳐도 너그럽게 오냐 오냐 포용할 수 있다면 그럼 본인도 그 자유에 대해 동의해 주겠다.

종북좌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뼛속까지 오로지 내로남불과 진영논리에 입각해서 움직일 뿐이다. 난 이래서 그런 놈들이 너무 혐오스럽다. '김 정은 위원장님', '비록 친척을 죽였지만 예의바르고 훌륭한 지도자'와 동일한 잣대와 포용력으로 이 승만· 박 정희를 미화하고 과오를 실드 친다면.. 남한 대통령쯤은 거의 예수에 맞먹는 성군 도덕군자로 포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들은 광우뻥 선동· 세월호 선동부터 시작해서 온갖 가짜 뉴스와 왜곡, 여론조작으로 세력을 키우고 집권한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가짜 뉴스를 근절하겠네 뭐네 수작인가?
그리고 2017년 이래로 지금까지 곳곳에서 드러난 채용 비리와 부적격 인사 임명, 기업의 후원 강요 사례들.. 그게 2013~2016년 사이에 폭로됐으면 광화문 촛불이 몇 번이고 터져 나오고 대통령이 몇 번은 갈아엎어졌을 것이다.

걔네들은 진짜로 부정부패 비리 척결, 친일 청산, 민주주의 등등을 원해서 그런 구호를 외치는 게 절대~ 전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반민주적이고 반대자를 악랄하게 탄압할 놈들이 야당이고 약자일 때는 인권 복지 민주 팔고 감성팔이 짓거리를 할 뿐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대학까지 나와 놓고는 이 사실을 아직도 못 깨달았다면 정말 학교 헛다닌 미개한 개 돼지란 소리 들어도 싸다. 지능과 양심 둘 중 하나 이상은 문제가 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서 좋은 말, 이성과 논리와 팩트로 산업화가 되지 않고 자꾸 나라 체제를 위협하는 이상한 사상에 끌려가고 있고, 격리와 분리도 안 되면.. 어쩌겠는가? 쌍욕 아니면 폭력밖에 처방이 남는 게 없다. 이게 그저 단순히 견해나 성향, 신념이 다르기만 한 문제이면 내가 이런 험악한 말을 절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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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에 왔을 때는 "2017년도 보수 공사"(올해 7월 17일까지)가 진행 중이었고, 얼마 전에 왔을 때는 "2018년도 보수 공사"(내년 3월 5일까지)가 진행 중이었다.
도대체 이화장이 뭘 그렇게 다 뜯어고쳐야 되는지, 모든 공사가 언제 끝나서 언제 재개방을 할지 모르겠다.

과연 이화장이 제대로 개관을 하는 날이 올까? 나의 이 썰은 과연 다 쓸데없는 기우로 끝날까? 어디 한번 두고보련다. 나중에 딴소리가 나오면 이 글이 증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말 불가피하게 약간 훼손된 건 그렇게도 악랄하게 물어뜯고 욕하면서, 그렇게 민주주의 자체의 근간을 마련한 공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배은망덕한 족속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진짜 친일 청산과 민주주의를 제일 방해한 원흉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는 머저리들..
이 승만 대통령은 미개한 부류들에겐 너무 과분한 지도자였다.

Posted by 사무엘

2018/11/17 08:33 2018/11/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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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서울의 중심부에 속하는 광화문-시청-종각 일대는 어쩐 일인지 대형 서점이 두 개나 비교적 서로 가까운 거리(광화문 교보, 종각 영풍)에 입점해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사러 잠시 들르기 좋다.
본인은 여러 볼일을 보러 시내에 갔는데, 광화문 근처에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근래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거기도 짬을 내어 들렀다.

아래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관람하는 형태이고, 2층은 그냥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3층은 이 승만 시절의 건국 초기, 4층은 산업화와 민주화 ~ 현대의 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 사진을 소개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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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일제 시대는 제끼고..
저건 1948년 5· 10 총선거를 앞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라는 걸 해 보는 단군의 후손들에게 요령을 설명하는 포스터이다.
저 때는 지금 같은 주민 등록 번호나 신분증이 없었던 관계로 투표를 하려면 유권자 등록부터 먼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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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자는커녕 한글도 못 읽고 심지어 아라비아 숫자조차 못 읽는 사람이 있었나? 막대 표기라니 무슨 로마 숫자 같다.
당사자에게는 좀 잔인하고 미안한 얘기이지만, 이 정도로 무지·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에서 무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 선출과 민주주의 따위를 바랄 수 있었겠는지 본인으로서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이 무슨 정책이나 이념이나 공약을 보고 자기 소신대로 투표를 하겠는가? 그냥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향응을 주는 진영에서 부탁하는 대로, 혹은 빨갱이들이 지상락원 선동하는 대로 우루루 끌려갈 확률이 99.9%이지.. 이래 갖고는 나라 망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에서 불철주야 애들만 상대하던 교사가 퇴직하고 나와서 어설프게 사업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그 교사의 퇴직금은 반쯤 과장 보태면 그냥 먼저 맡은 놈(= 사기꾼)이 임자라고 한다. 심지어 현직 교사들조차도 자기들이 학교 밖 사회에서는 완전 호구 취급 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할 정도이다.

오늘날 교사는 분명 아무나 될 수 없는 직업이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사까지 된 사람은 일반인들 평균 이상의 지능과 체력과 리더십을 갖춘 인재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될 수가 있다. 하물며 무지몽매한 민중들의 투표권이 어떤 방식으로 오· 남· 악용될지 대해서야 뭐 안 봐도 비디오이다.

투표권이란 게 무슨 운전 면허에 준하는 급으로, 혹은 군복무 조건까지 요구할 정도로 까다롭게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와 학력, 그리고 자기 소득으로 단돈 1원이라도 세금을 내는 최소한의 경제력 같은 조건 정도는 붙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소한 연령을 지금보다 더 낮춰서 무슨 중· 고등학생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건.. 영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애들이 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5월 총선거 이후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생일이니 박물관에서도 당시 경축 기념식을 하던 분위기 회고록과 할배 대통령의 축사 연설 육성 같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단, 제헌 국회 때 애드립으로 드려졌던 기도문은 종교색 때문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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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는 분단과 북괴 정권의 수립 과정, 1940년대에 좌익이 저지른 각종 반란과 혼란 공작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곧장 6· 25 전쟁 파트로 넘어갔다.
전쟁 당시에 북한의 절반인 10만 명에 불과하던 남한의 육군은 휴전 이후 1954년엔 7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영상 자료가 소개하는 바와 같이 군사력이 증강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고? 이제 상시 징병제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난 1950년대 이 승만 때는 원자력 연구소만 만들고 국방 과학 연구소는 순전히 1970년대 박통의 작품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 때도 '국방부 과학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연구 기관이 생기긴 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긴, 저 때는 어떻게든 북괴의 남침 시즌 2를 원천 봉쇄하는 게 최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다음으로 1960년대로 넘어간다. 저게 바로 그 시절에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해 낸 자석식 전화기와 라디오이다. ㅠ.ㅠ
전화기는 다이얼조차 없이 수동 발전기로 최소한의 전기 신호를 전화선을 통해 보내는 기능만 있다. 그리고 라디오는 기능이 굉장히 빈약해 보이는데 크기는 꽤=_= 크다.
하긴, 저 때는 저렇게 전파를 통해 아날로그 신호를 수신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최첨단 기술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지금으로부터 5년도 더 전에 아날로그 송출이 중단되고 디지털로 전환된 반면, 라디오는 그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운전자용 아니면 비상용으로 TV와는 용도가 확 다르니 예로부터 통용되는 단순한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충분한 듯하다.
그나저나 라디오 중에는 TV 채널의 음성 부분만 추출 가능한 물건도 있었는데, 그럼 이제 그건 불가능해진 건가 모르겠다. 라디오 방송국이 일부러 TV 방송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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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교통 박물관에서 봤던 시발 자동차를 여기서도 보게 됐다. 색깔도 동일하다.
저 시절엔 자매품으로 시발 리무진과 시발 버스도 있었는데.. 그건 실물은 말할 것도 없고 레플리카가 만들어진 것도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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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시절, 박통의 원대한 국토 마개조 야망이 저 지도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짧은 역사 동안 정말 박통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다. 옛날에 무슨 "인도와 마 광수를 바꾸지 않겠다" 이런 구호가 있었던가 본데, 저 시절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건전하고 불가피하고 선했던 경제 개발 반공 독재라면 어줍잖은 2공 의원내각이니 사분오열 당파싸움 민주주의 따위하고는 얼마든지 맞바꾸고도 남는 장사였다.

저 과업들을 다 일관되게 이루려 하다 보니 통상적인 임기만으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장기집권을 하게 된 거다.
그리고 그걸 추진하려면 돈이 왕창 많이 필요한데 돈이란 게 땅 판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국가고 국민이고 다들 가난했다.
초창기에는 삼성과 현대도 그냥 오늘 내일 직원 월급 주는 걸 걱정하는 아류 영세 기업일 뿐이었으며, 돈줄은 제도권 은행이 아니라 지하에서 민간 사채업자들이 잔뜩 쥐고 있었다. 그만치 나라 사정이 답이 없고 열악했다.

그러니 박통은 화폐 개혁을 감행하고, 기업들이 돈 걱정 없이 투자를 할 수 있게 사채의 전부나 일부를 국가가 초법적인 권한으로 강제로 탕감해 버리기도 하고, 국민들에게는 온통 저축을 강조하면서 경제 개발 자금이 은행으로 모이도록 독려했다. 일본과 수교하면서 받은 소위 일제 피해 배상금도 최소한 다른 이상한 짓거리로 탕진하지 않고, 경부 고속도로와 포항 제철의 건설에 썼다. 왜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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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국가가 잘살고 국민들이 다들 등 따시고 배 부른 중산층이 되어 자기 생업에만 종사하면서 가족과 오순도순 즐겁게 잘 살기만 한다면.. 골치 아픈 정치에 관심 가질 필요 따위 없고 반공은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장 자기가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면 무슨 계급 갈등에 자본가들을 타도해야 되네 혁명 과업을 이뤄야 하네 식의 불순한 수작에 귀를 기울일 일이 없다.

그러니 위의 포스터는 그저 정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력으로 일본을 이기는 게 가장 훌륭한 극일 반일이듯이, 자유 시장 경제 하에서 북괴보다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반공이다.
오늘날의 좌익 종북 빨갱이 위정자들은 이와 정반대 짓거리를 하고 있다. 기업을 몽땅 망가뜨리고 서민 경제를 파탄 몰락시키는 게 대남적화에 어떤 형태로든 더 유리하다. (선동에 더 취약해지고 먹을것 앞에서 인간성이 더 쉽게 상실되는 등..) 이른바 경제 무장의 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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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야당의 쓸데없는 태클은 심해지고 기존 선거 방식대로는 계속 당선되기가 어려우니..
박통은 헌법을 뜯어고치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전무후무한 10월 유신.. 이게 '우리식 사회주의'...가 아니고, '한국식 민주주의'이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긍정적인 프로파간다 홍보를 죽어라고 해야 했다. 병신 같지만 왠지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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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니는 뉴질랜드로 수출되었던 것을 역수입한 것이어서 포니로서는 아주 드물게 우핸들이다. 게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자동 변속기이더라. 2도 아니고 1이 오토라니.. 정말 보기 드문 모델이다.
옛날에 무슨 영화 찍고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하는 용도로 이집트에 수출되었던 포니를 하나 역수입했다고 그러던데, 그 시절에 포니가 참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긴 했었다.

이렇게 산업화 얘기부터 한 뒤에 한켠에 개발 부작용에 대한 한계, 민주화 열망 그런 얘기도 소개돼 있었다. 이념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듯했다.

이 승만은 건국 초기와 관련하여 육성과 사진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반면, 박통에 대해서는 경제 성장 성과만 저렇게 소개돼 있고 당사자의 족적은 박물관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더 관심이 있으면 아무래도 상암동에 소재한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또한 못살던 시절, 한창 산업화 하던 시절에 서민들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는 경희궁 근처의 "서울 역사 박물관"과도 영역이 일부 겹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이라면 차라리 구한말· 일제 시대를 빼 버리고, 서울 올림픽이나 대전 엑스포, IMF 극복 같은 역사 자료도 더 풍부하게 넣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도 벌써 2~30년 묵은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관람을 다 마치고 내려가는 계단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청년부 동생과 마주쳤다. 서로 깜짝 놀라면서 좁은 세상을 실감했다. =_=;;;

※ 외솔 상 시상식

이 날 서점과 박물관을 방문한 뒤 본인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울 시청 근처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었던 올해치 외솔 상 시상식이었다. 본인은 수상자와는 별 인연이 없지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지인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재단법인 외솔회"라고 국어학자 외솔 최 현배 박사를 기념하는 단체가 있다. 거기서는 매년 고인의 탄신일(10월 19일)에 즈음해서 한국어· 한글과 관련해 문화· 학술 분야에서 1명, 계몽· 운동 분야에서 1명 이렇게 총 2명을 선정해서 상을 준다.
그렇게 시작된 시상식이 2018년 기준 벌써 40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공 병우 박사도 외솔 상의 아주 초창기 수상자였다.

올해는 학술 분야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 겸 국립 국어원 원장을 역임했던 권 재일 교수가, 운동 분야는 한글 문화 연대의 어느 간부가 받았다.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 돼 가는 허 웅(한글 학회 회장) 박사가 외솔의 제자였고, 권 교수는 허 웅의 제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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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입구에는 본인이 다니는 대학원의 총장과,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명의로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외솔회는 재단법인이지만, 비슷한 업종(?)에 속하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는 사단법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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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은 상만 씨크하게 주고 끝인 게 아니라 외솔 선생의 생전 육성 청취, 수상자의 소감 연설, 심지어 "한글이 목숨이다"를 가사로 뮤지컬 공연까지 생각보다 프로그램이 많았다. 게다가 뷔페 저녁 식사도 공짜로 줬다.

전공 분야와 관련해서 외솔의 사상과 행적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듯하다.
킹 제임스 성경 신자가 0.5초 만에 이해 가능하게 한데 요약하자면, 요일 5:7 구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대신에 '말, 글, 얼'을 집어넣으면 씽크로율이 99%에 근접할 것이다.
이분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해서 개인적인 종교가 실제로 기독교였다고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런 신앙보다는 그냥 방망이 깎던 노인 스타일의 대쪽 강직한 고집쟁이 원칙주의자 "한글이 목숨" 언어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1970년 봄, 아폴로 13호의 발사를 세 주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분이 그 근성으로 성경· 신학 쪽도 진지하게 파고들었다면 이 분야 순우리말 용어에도 분명 관심을 가졌을 것이며 혼과 영 대신에 넋과 얼을 제안도 분명 했으리라고 본인은 추측해 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8 08:33 2018/10/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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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행정구역상 한 도시는 여러 개의 동으로 나뉘는데, 규모가 큰 도시는 시와 동 사이에 '구'가 있기도 하다.
어지간한 광역시들은 그냥 동서남북구에다 중구 등, 많아야 예닐곱 개 정도 존재하지만.. 수도 서울에는 구가 10여 개도 아니고 20개를 초월하여 무려 25개나 있다.

서울 지리 좀 안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백지 상태에서 25개 구 목록을 기억에만 의지해서 다 써 보시기 바란다. 절대로 곧장 기억나지 않는 구가 한두 개는 있을 것이며, 일이 생각만치 쉽지 않을 것이다.

구가 처음부터 이렇게 무진장 많았던 건 아니다. 가령, 서초· 강남· 송파구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인서울 자체가 아니고 광주군 소속이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지금의 서울 경계가 얼추 정해졌을 때 몽땅 성동구가 먹었으며(강남· 강북을 두루!), 1970년대에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의 구가 추가로 등장한 것이다.
성동 구치소가 지금의 성동구와는 아무 관계 없는 서울 동쪽 외곽 송파구에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름 분구 시기와 출처 구청 연계 지하철역
강남 1975 (성동) 7강남구청* (500)
강동 1979 (강남) 8강동구청* (250)
강북 1995 (도봉) 4수유 (200)
강서 1977 (영등포) - (1km 이상)
관악 1973 (영등포) 2서울대입구 (300)
광진 1995 (성동) 2구의 (300)
구로 1980 (영등포) 2대림? (700)
금천 1995 (구로) 1금천구청* (150)
노원 1988 (도봉) 7노원 (350)
도봉 1973 (성북) 1방학 (250)
동대문 * 2용두 (150)
동작 1980 (관악) 9노량진 (200)
마포 * 6마포구청* (350)
서대문 * - (1km 이상)
서초 1988 (강남) 3양재 (150)
성동 * 2왕십리 (200)
성북 * 4성신여대입구 (350)
송파 1988 (강동) 8잠실 (250)
양천 1988 (강서) 2양천구청* (500)
영등포 * 2영등포구청* (100)
용산 * 6녹사평 (400)
은평 1979 (서대문) 3녹번? (700)
종로 * 5광화문 (300)
* 2을지로4가 (300)
중랑 1988 (동대문) 망우? (700)

1970년대 초에 압구정 쪽에 조성된 도산 안 창호 공원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 최후의 미개발 지대라 여겨지던 마곡이나 문정 지구의 벌판에 공원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포 공항은 지어지던 당시에는 부지가 인서울이 아니었지만 저 때 이후로 처음엔 무려 영등포구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강서구 소속으로 바뀌었다.

지금과 같은 구 체계가 모두 완성된 때는 1995년이다. 최후에 생긴 구는 강북, 광진, 금천이다.
그 반면, 대한민국 건국 직후부터 있었던 '초대 멤버, 창립 멤버'에 해당하는 구는 종로, 마포, 영등포, 동-서대문 등의 딱 9개이다.
영등포는 일제 강점기 때 경성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조선 시대 한양과의 접점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인서울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철도가 그쪽으로 지나기도 했으니..

보통 여권을 신청하고 발급받으려면 구청이나 시청을 찾아가면 되는데, 옛날에는 이게 서울 시내의 모든 구청에서 가능하지가 않았다.
아무 구청에서나 여권 발급이 가능해진 건 내 기억으로 2010년대에 와서부터이고, 뉴스를 검색해 보니 정확하게는 2008년 4월부터이다. 그 전에는 18개 구에서만 가능했다고 하며, 나머지 7개 구는 열외돼 있었다.

지하철역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단순히 동 이름(2차원)이나 도로명(1차원), 터미널, 대학교, 산 등의 이름뿐만 아니라 구청에서 유래된 것도 있다.
구청 이름이 대놓고 주역명으로 등재된 것으로는 강남, 강동, 금천 등 6개가 존재한다. 특히 금천구청 역은 과거에 시흥이던 것이 개명된 경우이다. 나머지 역들도 어지간해서는 부역명으로라도 구청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다만, 주역명에 등재된 구청이 부역명 등 그렇지 않은 구청보다 역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우도 있다. 강남구청과 서초구청의 관계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주역명이냐 부역명이냐가 역에서 구청까지 실제 거리와 정확한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뭐, 구청과 아주 가까이 있는 역이라도 구청보다 더 중요한 랜드마크가 있다면 그걸 주역명으로 써야 할 테니 말이다.

영등포구청이 제일 압도적으로 지하철에서 나오기만 하면 코빼기에서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주역명이 아깝지 않다.
은평, 구로, 중랑은 조금 멀다면 먼 위치이다. 서대문과 강서 이렇게 둘만이 구청이 지하철역과 연계된다고 보기 어려운 다소 외진 위치에 있다.

*. 보너스: 서울 전차도 알고 보니 운영 주체가 이원화된 적이 있었음

본인은 요 얼마 전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꽤 흥미로운 옛날 자료를 발견했다.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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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임 인식 작가가 촬영한 뚝섬 전동차 정거장. 해마다 여름이면 동대문과 뚝섬을 오가는 전동차는 사람들로 꽉 찼다.)

옛날엔 뚝섬이 반쯤 섬 취급을 받았으며, 골프장과 경마장이 있던 서울 교외 유원지(지금의 서울숲)였다. 서울 서쪽 외곽의 난지도(지금의 하늘 공원 일대)가 신혼여행 코스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시절엔 한강의 서울 시내 구간도 콘크리트 제방이 없이, 백사장이 펼쳐진 반쯤 해수욕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런데 엥? 동대문과 뚝섬을 오가는 전동차라니? 디젤 동차도 아니고?

1955년이면 6· 25 사변이 휴전으로 끝난 지 3년이 채 안 되었던 정말 엄청난 옛날이다. 지하철이고 광역전철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서울에 궤도 교통수단이라고는 서울 노면전차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서울 전차에 승강장이 저렇게 생겼고 뚝섬으로 가는 전차 노선이 있었다는 소리는 난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었다. 전차는 서울의 구시가지인 서쪽의 마포, 아니면 차라리 강 건너서 영등포 쪽으로 갔지 웬 뚝섬으로 갔단 말인가?

연도나 장소의 기록이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검색을 해 봤다.
알고 보니 그 시절엔 "서울(경성) 전차" 말고 "경성 궤도"라고 도심과 교외를 잇는 지상 전차 노선이 하나 더 있었다. 서울의 동대문 바깥으로, 왕십리, 지금의 뚝섬과 뚝섬 유원지, 광장동 일대를 다녔다고 한다. 오오~

얘는 사대문 안 위주의 도심을 다니던 서울 전차보다 늦게 추가적으로 생긴 물건이며, 운영 회사도 경성 전기 주식회사 vs 경성 궤도 주식회사로 서로 달랐다. 마치 서울 지하철이 과거에 서울 메트로 vs 서울 도철로 운영사가 나뉘었던 것처럼 말이다. (뭐, 해방 후에는 동일하게 서울시 직통 관할로 바뀌었다고 한다)

얘는 동대문에서 시작해서 말 그대로 뚝섬 유원지까지 갔는데, 중간에 분기하여 화양동· 광장동으로 가는 지선도 있었다.
또한 서울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성동구 지역을 경유하는 노선답게 '성동'이라는 이름의 정거장도 있었다. 과거의 사철 경춘선의 시발역도 성동 역인데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다만, 제기동 인근에 있는 경춘선 성동과는 달리, 경성 궤도 성동 역은 지선 분기점인 한양대 근처에 있었다.

두 성동 역은 모두 1960년대 중반~70년대 초에 모두 폐선· 폐역되어서 오늘날은 흔적도 안 남았다.
참고로 서울 전차들은 모두 1067mm 협궤였다. 저 사진에 나온 경인 궤도 노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1435mm 표준궤로 개통했던 경인선과는 대조적이다.

모처럼 새로운 철도 역사 지식을 하나 건졌다.
오늘날은 한강 공원 내부에다가 실외 수영장을 따로 설치해서 물놀이 비슷한 기분이나 내는 게 고작인데.. 한강 본류에서 곧장 속옷 바람으로 물놀이를 하고, 잠실이고 여의도고 몽땅 미개발 뻘밭이던 옛날 시절이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이질감이 느껴진다. 믿어지지 않고 실감이 안 간다. 아래 사진은 무슨 인천 앞바다 해수욕장의 모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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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신설동 이후부터 시작하는 천호대로는 종로에 준하는 6~10차로 규모의 매우 큰 간선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즉 노면전차는 모두 이미 없어지고 지하철이 대신 생긴 뒤에야 건설되고 개통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은 전차 같은 게 다닌 적이 전무하다. 전국에서 최초로 중앙 버스 전용 차로가 개통한 역사적인 길인 것치고는 의외의 내력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1 08:38 2018/08/2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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