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폴 블리스. Philip. P. Bliss (1838-1876).
19세기 미국의 찬송가 작사· 작곡자로 심심찮게 접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이 사람은 바울과 빌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복음전도자 겸 찬송가 싱어송라이터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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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찌나 복음 선포와 혼의 구원에 진심이었으면.. 당대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CCM을 만들었다.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초청)와 "하나님의 진리 등대"(선교)를 작사· 작곡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저 사람의 작품이다.

그리고 가사가 '성경'을 다루고 있는 독특한 곡..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과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을 작사· 작곡했다(1874).
그렇잖아도 이 두 곡은 6/8박자에 가사와 멜로디가 좀 비슷해 보이지 않던가?
'성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되는 곡이지만 여기 가사에도 구원과 복음 얘기는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그 뒤, 이 사람은 호레이시오 스패폴드가 지은 유명한 찬송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평안, 1873)를 보고는.. 거기에다 우리가 지금 아는 그 멜로디를 작곡해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1876).
이것 말고 "내 너를 위하여"(헌신)도 가사는 딴 사람 것이지만 곡은 저 사람 것이다.

그랬는데 이분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876년 12월 29일, 오하이오 주에서 칙칙폭폭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미국판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당하면서 4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강을 건너던 중이었는데 아래의 교량이 쇳덩어리 열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폭삭 무너진 것이다. 이름하여 애슈터뷸라 철교 붕괴 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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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랬던 교량이.. (열차가 정말 조그맣긴 하다.. 20세기가 아니라 19세기여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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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렇게 됐다.

열차는 20여 미터 아래로 떨어져서 박살이 났고, 저 사람 포함 90여 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그 시절에 토목 건축 기술이 부족했거나 부실시공이 있었던 듯하다.
이때 열차의 동력원은 석유가 아니라 기껏해야 석탄이었지만.. 그래도 조명용 등불이 다 연료를 쓰고 있었고, 또 이 시절에 객차는 나무로 만들곤 했다. 그래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사상자가 더 늘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사고 현장에서 이분의 유품을 뒤지는 과정에서.. 그가 지은 새로운 찬송시가 적혀 있는 쪽지가 발견됐다. 조만간 이것도 출판사에 보내려 했는데 고인이 미처 못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굴된 찬양이 바로... "속죄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양하리라"(1876)이었다!

이건 제임스 맥그라나한(McGranahan)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1878년에 정식으로 발표됐다고 한다. 3박자이다가 후렴에서 4박자로 바뀌는 그 곡 말이다.
"속죄하신 구세주를"이 필립 블리스의 사후 유작, 마지막 찬송가가 됐다.

신기하고 경이롭지 않은가?
호레이시오 스패폴드는 선박 침몰 사고로 가족을 잃고서 찬송시를 썼는데, 거기에다 저 사람이 곡을 붙여 줬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교량 붕괴 사고로 소천하자, 그 사람이 지은 찬송시에다가 또 다른 사람이 곡을 붙인 것이다!

필립 블리스가 7, 80대 나이까지 더 오래 살았으면 20세기 초까지 찬송가가 얼마나 더 만들어졌을지 궁금해진다.
여담이지만 bliss는 옛날 Windows XP의 푸른 초원 배경그림의 작품 이름이기도 했다~!!! (극락, 최고의 행복, 축복.. 이런 뜻) 이것도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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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저 애슈터뷸라 참사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철도 교통사고이다. 뭐, 차량이 탈선하거나 신호가 꼬여서 정면충돌한 게 아니니, 순수하게 철도 쪽 사고는 아니지만 말이다.
조선은 1899년에야 그 쬐끄만 27km짜리 경인선이 전적으로 외국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진 게 최초이며, 교량은 이듬해에 간신히 완공한 한강철교가 최초였지 않던가?

그러나 미국에서는 수십 년 이상 훨씬 전부터 그 넓은 땅에 수천 km가 넘는 길이의 철도가 땅따먹기 하듯 자체 기술로 건설됐다는 게 참.. 대단하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번 저런 불행한 사고도 난 것이다.

그 시절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를 이용해서 미국의 동부(네브라스카)에서 서부 끝(캘리포니아)까지 가는 덴 1주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4~5시간이면 가겠지만, 저 1주일만으로도 마차로 6개월 걸리던 것에 비하면 시공간 워프 수준으로 단축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러시아 대륙횡단 열차도 전 구간 완주하는 데 비슷하게 1주일 정도 걸린다. 이런 초장거리 열차가 등장하면서 경도별 시차라든가 범지구적인 시간대 동기화의 필요성도 최초로 제기되었다.

쟤들은 과학 기술이 저렇게 동시대 다른 나라들을 아득히 앞서 갔고, 한편으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패니 크로스비, 필립 블리스 등 아름다운 찬송가들이 발표돼 나왔다.
이것만 생각하면.. 서부 개척 시대의 끝물을 가던 19세기 미국은 bliss라는 단어의 뜻에 걸맞은 천조국이었던 것 같다. 통상적인 산업혁명기의 서유럽과도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아 물론 인간 사는 곳은 어디든지 빛이 있으면 어둠도 응당 있었다.
저기는 시골 깡촌은 집집마다 샷건이 필수품이고, 부녀자들도 최소한의 총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와일드 무법천지였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완전 술에 쩔어서 살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난 이 정도 알코올에도 끄떡없는 진짜 싸나이" 허세 부리기 위해서였다;;; 이 짓 하다가 급성 알코올 중독 걸려서 골로 간 사람도 많았고, 정신줄 놔 버린 가장의 가정폭력 때문에 파탄 난 가정도 많았다!

그리고.. 링컨 덕분에 미국에서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는 했다만.. 그러자 저렴한 노동력은 노예 대신 외노자로부터 조달되기 시작했다. 중국(청나라) '쿨리'라고 들어 보셨나..?
미국의 저 찬란한 대륙 횡단 철도도 상당수가 이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처참하게 갈아 넣으며 만들어졌다.

그들은 안전이고 인권이고 없던 정말 힘들고 위험한 현장에서 자국민 대비 정말 저렴한 임금 받으면서 일했는데.. 그 임금에서도 일자리 중개 수수료나 수송 비용, 송금 수수료 등 온갖 공제를 당하고 떼였다. 그들의 조국인 청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하게 일해서 푼돈 건진 게.. 그들의 청나라 깡촌에서 가난한 소작농으로 있는 것보다는 덜 비참하고 더 나았다! 이런 합법 노예 계약은 서로 윈윈이었기 때문에 수요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미국은 현대적인 개념의 대기업과 금융 경제 시스템이 그때 다 갖춰져 있었다. 철강 카네기, 석유 록펠러(로커펠러) 같은 사람도 다 이 시절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무한 시장경제 자유방임 초창기엔, 신흥 기업가 재벌 졸부들이 근로자 임금을 후려치고 각종 산업재해를 은폐하고, 경쟁 기업을 비열하게 말려 죽이면서 독점 담합.. 정말 정말 끔찍한 짓 추악한 짓도 많이 했다. 이 인간들은 워낙 악명이 높아서 '강도 귀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 든 전통적인 강도 하층민이 아니라, 칼 안 들고 더 무섭게 사람 잡는 강도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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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브루주아들을 타도하자고 공산주의라는 괴물이 튀어나올 만도 하지.. 당대에 벌써부터 저런 만평이 만들어져 나올 정도였다.)

이 시절 창업주들은 젊은 시절에 진짜 미치광이처럼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가, 나중에 늙어서는 자괴감 느껴서 도의적으로 사회에 '기부'라도 왕창 많이 하면서 재산을 환원했다. 뭐 학교 세우고 병원 세우면서.. 병 주고 약 주고를 했다. 그런 기부로 과거의 흑역사를 다 덮을 수 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이고~! 필립 블리스 얘기를 하다가 철도를 거쳐서 미국 역사 얘기가 나왔구나.;; 다시 찬송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아무튼 저분도 미국이 한창 저렇던 시절에 복음 전도자로 살면서 저런 찬송시를 썼다! 이걸 깊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미국에는 저렇게 엄청나게 선한 것도 있고, 엄청나게 악한 것도 존재해 왔다.

난 교회에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속죄하신 구세주를' 요렇게 준비 찬송을 편성해 봤다. 그 밖에..

  • 가사에 ‘갈보리’라는 단어가 있는 곡들
  • 어딘가에 더 가까이 나간다고 말하는 곡들
  •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고 말하는 곡들
    뭔가를 모른다고 말하는 곡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등~
  • 가족· 친지·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곡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그날 다가오네 등
  • 패니 크로스비 작사 + 윌리엄 도언 작곡인 곡들
  • 단조만: 현충일과 주일이 겹쳤을 때 ㅎㅎ
  • 분위기가 제일 힘찬 곡들: 무덤에 머물러, 마귀들과 싸울지라 등~

이렇게 비슷한 특성이 있고, 만들어진 계기가 비슷한 곡들을 한데 모으는 것도 의미 있어 보인다.

  • "놀라운 주의 은혜"(Haldor Lillenas) --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1910년대 곡
  • "주 하나님 큰일을 행하셨네" -- "살아계신 주"
  •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 "노래하는 순례자(하늘의 곡조 울리니)"

얘들은 전자는 클래식 찬송가 범주에 드는 반면, 후자는 더 캐주얼 리버럴한 곡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가사 내용은 서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굳이 찬송가 vs 복음성가로 구분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찬송가, 더 나아가 기독교 음악 전반에 대한 더 유연하고 가사 지향적인 분류법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 추신

자, 원래는 본인이 여기까지만 글을 썼는데 말이다. '속죄하신 구세주를' 찬송가와 관련하여 긴급히 추가해야 할 관련 정보를 또 입수했다.
'속죄하신 구세주를'이라는 찬송시는 맥그라나한 말고 다른 사람이 이미 지은 옛날 멜로디가 붙기도 했었다. 마치 우리나라 애국가가 아주 옛날에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 천부여 의지 없어서...' 그 스코틀랜드 민요 멜로디로 불리기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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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악보를 보시라~!
옛날 멜로디는 바로.. 우리말 찬송가에서는 '하늘 영광 버리시고 예수 강림하셔서'인 그 3/4박자 곡이다. 가사는 완전히 다른데.. 참 신기한 노릇이다.
하지만 저 찬송시를 매우 유명하게 만들어 준 멜로디는 아무래도 맥그라나한이 이 가사만을 위해 새로 만든 그 곡임이 틀림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20 08:19 2025/07/20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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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한민국은..

(1) 인류 역사상 식민지배를 받다가 개발도상국,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제대로 진입한 마지막(내가 알기로) 나라로 여겨진다!
경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그럭저럭 잘 이뤘다.

쌍팔년도와 세기말까지만 해도 울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선진국이냐 아니냐 갖고 엄청 논쟁을 벌였다. "국민성이 이래 갖고는 선진국 못 된다, 정신 안 차리면 북괴가 다시 남침한다, 일본놈들한테 나라를 다시 빼앗길 거다" 자괴감에 빠졌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적으로 늦게 잡아도 우리나라는 2000년대부터는 명백히 선진국이라는 걸 세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이후에 한국과 같은 처지였다가 한국처럼 처지를 역전한 나라는 결코 다시 등장한 바 없다. (도시국가 급으로 극단적으로 작은 나라 말고..!!)

(2) 과거의 식민지배라는 것도(일제강점기) 인도나 아프리카의 다른 피지배국들에 비해서는 늦게 당하고 일찍 풀려난 편이었다. 카이로 선언의 특례를 받았다.
훗날 IMF도 이례적으로 일찍 졸업했다.

(3)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UN군의 도움을 제대로 받았다. (후대의 밍밍한 평화유지군 말고!) 나라가 멸망 당할 위기에 빠졌을 때 그야말로 세계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외국에서 왔던 6· 25 참전 용사들이 "우리가 참전했던 이 듣보잡 신생독립국이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게 발전하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했구나~!! 우리가 도와줬던 게 헛되지 않았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감격한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물론, UN의 도움을 이렇게 받고, UN 창립일을 공휴일로 기념하던 나라가 정작 UN에 가입은 아주 오랫동안 못 하고 있었다. 이건 남북 관계와 관련하여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1991년에야 가입을 했으니 이 또한 지나간 옛날 일이 됐다.
옛날에 국제연맹 제안을 했던 미국이 정작 자기는 모종의 이유 때문에 가입 못 했던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정치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4) 무려 1400년대, 인류 역사상 마지막으로 자기 고유 문자를 창제했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

(5) 유니코드에 자국 문자를 1만 자가 넘게 집어넣고, 코드값 배치가 대대적으로 바뀌는 마지막 특례를 받았다. 이것도 사기적인 이벤트였다.

(6) 복음도 거의 끝물 시기에 들어왔지만 기독교계가 엄청나게 성장했다.
인구 1억이 채 안 되지만 바른 본문 계열 성경 역본도 너무 많이 나와서 난립 중인 특이한 나라이다.

(7) 다음과 같은 큰 과업이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어 미래의 후손들이 두고두고 복을 누리고 있다: 리 승만 시절의 토지 개혁, 220V 승압, 산림 녹화, 그리고 대마 대체 작물 육성.

우리나라는,

  •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지난 1994년에 1인당 1만 $를 넘었고, 2005년에 2만 $, 2014년에 3만 $를 넘어섰다.
  • 등록 자동차 수가 지난 2014년에 2천만 대를 돌파했다.
  • 인구는 지난 2012년에 5천만을 찍었고, 2020년쯤엔가 최대치 5184만까지 갔다. 그 뒤부터 감소 시작...

우리나라가 옛날에 수출 위주 경제 개발을 열나게 했고 그게 약발이 잘 통했던 건 국제 정세 운빨도 있었다. 오늘날 세계의 공장=_=으로 무섭게 도약 중인 중국, 아니 중공이 그 시절엔 대약진운동과 함께 장렬하게 삽질 자폭 중이었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이 중공군 개입으로 우리나라의 북진통일을 막아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는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을 도와주기도 했다. 토법고로 vs 포항제철 급으로 지도자의 역량이 서로 극단적으로 달랐으니 말이다.

이상이다.
이런 글을 쓰는 본인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모든 면모가 다 마음에 드는 건 물론 아니다.
사형 집행 안 하는 거는 너무 열불나며, 너무 심하게 과잉 단속을 해대는 구간단속· 어린이 보호구역 카메라들을 봐도 진짜 개빡친다.

먹는 밥값, 우유값 같은 게 다른 생필품이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너무 비싸져 있고.. 사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병역의무도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싫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역사에 기적이 적지 않았고, 후손으로서 감사할 게 많은 나라인 것도 사실이다. 제아무리 헬조선 헬조선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도 "다음에 (1) 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기 (2) 랜덤으로 전세계 1/n 확률로 아무 나라에서나 태어나기"에 아무 거리낌없이 (2)를 찍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울나라 같은 나라에서 걸핏하면 빈부격차 불평등 헬조선 불평불만 툴툴대는 사람이 어디 외국 이민을 덥석 가서 잘 적응하고 신세 펼 확률은 0은 아닐지 몰라도 매우 낮을 것이다.

물론, 상대적 빈곤감 박탈감, 경쟁의식이란 게 사람을 각성시키고 능력을 뽑아내서 지금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허나, 지금은 그게 역기능 부작용이 너무 커진 것 같다. 이제는 그거 때문에 너도 나도 애 안 낳는 지경이 됐으니..
이 위기는 단순히 피똥 싸는 가난이나 북괴 남침 위협 같은 위기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인 것 같은데 이건 과연 우리나라가 극복 가능할지 의문이다.;;;

특히 젊은 애들은 희귀한데 복지 혜택 받으려는 노인들만 드글드글한 난장판이 수십 년 뒤에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그때의 정치인들은 이거 뒷감당을 과연 어떻게 할까? 대놓고 고려장이 시행되지는 못할 테니 결국은 세금이 찔끔찔끔 오르고, 국민연금도 더 내고 덜 받는 형태로 야금야금 교묘하게 바뀌어 갈 것이다. 이건 예고된 결말이다.

※ 덧붙임

(1) 예전에도 한번 했던 말이다만, 유엔군 vs 유엔 평화유지군은 마치 야후 본사 vs 야후 재팬이라든가
구 일본군 vs 자위대, 구 대우자동차 vs 대우버스, 인도 vs 인도네시아, 자바 vs 자바스크립트만큼이나 서로 별개이고 무관한 존재이다;;

(2) 예로부터 "유럽 연합은 사형 집행을 하는 나라와 상종을 안 한다, 우리나라는 무역을 못 하고 경제 불이익을 당할 까 봐 국제 추세에 맞춰서 사형 집행 못 한다" 이런 식으로 이상한 낭설이 나돌곤 했다. 이건 "러브버그는 익충이니 저렇게 산을 새까맣게 뒤덮더라도 나랏님이 못 잡는다" 급의 헛소리가 아닌가 싶다.

그 잘난 EU가 그럼 사형 집행 잘 하고 있는 중국, 일본, 미국을 상대로는 경제 제제 가하면서 잘 응징하고 계시는가? 자국의 흉악 범죄자를 자국에서 극형 내리는 게 무슨 북한 핵무기 개발하는 급으로 세계 인권 평화를 저해하는 짓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EU 회원국은 사형 집행(사형 제도 존치)하는 나라로 "국제 범죄자 송환"을 안 해 주는 정도겠지.. 이 말이 이상하게 와전된 게 틀림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17 08:35 2025/07/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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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세노바츠 수용소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인종 청소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운용했던 수용소로는 아우슈비츠가 독보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게 아니다. 마치 북괴에서 운용하는 정치범 수용소가 요덕만 있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저 시절에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듯, 나치 독일은 자기 점령지에다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다.
크로아티아가 어떻고 유고슬라비아가 어떻고 보스니아, 세르비아가 어떻고 등등.. 저기도 나라 사정이 엄청나게 복잡하긴 한데, 내가 그런 걸 다 알지는 못한다. 핵심만 말하자면 저기에는 정치 쪽은 골수 크로아티아 인, 종교 쪽은 골수 가톨릭인 '우스타샤'라는 열성당원이 있었다. 근데 걔들이 파시즘에 물들어서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

나치 독일은 걔들에게 완장을 채워 주면서 이 점령지의 통치를 맡겼다. 그리고 수용소도 떡 지어서 불순 반동분자들을 마음껏 가두거나 죽일 수 있게 했는데.. 이 우스타샤라는 놈들은 나치 독일도 학을 뗄 정도로 또라이들이었다. 상전인 나치로부터 살인 면허를 받자, 얼마 못 가 오히려 나치 측에서 기겁하고 뜯어말릴 정도로 더 미쳐 날뛰었다.

얘네들은 나치의 주적이던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과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이웃 세르비아 인들을 더 집중적으로 괴롭히고 조졌다. 쟤들은 혈통도 다르고, 또 종교도 정교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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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링크)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거나, 성모 마리아나 유아 세례에 대한 교리적 입장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정교회는 개신교· 침례교보다는 가톨릭과 교리가 훨씬 더 가깝고 호환되는 종파일 텐데..
이거 뭐 성호를 긋는 순서가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이건 중세 종교 재판보다도 더 막장인 것 같다. -_-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사람을 극한까지 부려먹으면서 천천히 죽이는 시설이지, 사람을 바로 죽이는 시설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같은 가스실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스타샤 놈들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차라리 가스실을 구비하는 게 더 자비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또라이들은 절대로 사람을 급소에다 총알 박아서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냉병기로 목을 치거나 눈알을 뽑고 사지를 짜르고, 산 채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거나 불지르는 등..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 킬링필드 이상의 잔혹한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게다가 아기나 어린애들한테도 이런 짓을 했다.

쟤들은 세르비아 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뭐,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수용소 내부 환경이 얼마나 끔찍하고 열악했는지는.. 그건 아우슈비츠와 호각이었을 테니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 링크1 / 링크2

로마 가톨릭은 무려 교황청 차원에서 이런 극악무도한 만행에 대해 침묵을 넘어 은폐했으며, 우스타샤를 그저 애국 민족주의 독립운동 진영 정도로 미화해 왔다고 한다. 이건 로마 가톨릭의 엄청난 과오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4. 악당들의 최후

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나치 전범들은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1) 가장 먼저, 수괴인 히틀러는 자살했다. 자기는 죽으면 죽었지 베를린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못을 박았으며, 한편으로 패자 루저는 더 존재할 가치가 없다면서 주변을 몽땅 다 부수고 불지르라는 광기어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건 자국(알베르트 슈페어)이든 프랑스 점령지이든(콜티츠 장군) 해당 나와바리 담당자들이 히틀러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행하지 않았다.

(2) 히틀러의 심복 나팔수였던 요제프 괴벨스도 순사라도 하듯이 자살했는데.. 히 총통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인만 자살한 게 아니라 가족을 몽땅 동반 살해했다!!
출산이 애국이라면서 애를 6명이나 낳고 애들 이름도 다 히틀러를 따라 ㅎ(H)로 시작하게 지었는데.. 그 애들을 다 수면제와 독약을 먹여서 죽인 것이다. 저 사람은 정말 상상 이상의 또라이 미치광이였다.

(3)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대 SS와 게슈타포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다. 이 사람은 체포되고 나서 자기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즉시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재판 받고 교수대에 서는 비굴한 꼴은 어떻게든 안 당하려고 발악을 했다.

(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힘러 못지않은 SS와 게슈타포 쪽의 고위 간부였으며, 유대인들을 국가 차원에서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고 결정한 주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총독의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능력이 좋았는지 겨우 30대 나이에 엄청난 고관대작이 됐으나..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이 손잡고 일으킨 암살 작전에 말려들어 밥숟가락을 놓았다. 수류탄 파편을 많이 맞은 것이 패혈증을 일으켰고, 이것 때문에 1주일 뒤에 쇼크사한 것이다. 1942년 6월,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비교적 일찍 죽었다.

저 사람은 윤 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죽은 일본군 장성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처지가 비슷해 보인다.
후자의 경우, 폭탄 파편을 맞은 당일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100여 군데나 생긴 상처에서 패혈증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국 당일로부터 딱 1개월 뒤에 사망했다.

(5)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뇌부인 저 하이드리히의 명령(전략)을 정말 성실히 수행하면서 유대인들을 아주 조직적으로 대량 학살한 실무(전술) 책임자였다. 전자가 기업 임원· 회장급이라면 후자는 공장장 정도 되는 듯?
이 사람은 나치의 패망 이후에 자기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가 아니라 아들이 입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인생이 꼬였다.

장남이 여친에게 자기 아버지 자랑을 실컷 했기 때문이다. 여친이 유대인 출신이며 심지어 여친의 부친부터가 당장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걸 정말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아이히만 저 인간은 자기 행적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떠벌려 왔으며, 자신의 반유대주의 신념을 전수받은 후학을 양성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아들에게는 평소에 밥상머리 세뇌 교육을 어떻게 했겠는가? 이건 100% 자업자득이었다.

여친은 속으로 기겁을 하면서 남친을 신고했고, 이 소식은 여친 쪽의 아버지를 거쳐 무려 이스라엘 총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결국 모사드 요원까지 동원해서 1960년 5월, 현지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를 기어이 이스라엘에서 재판에 넘기고 처형해 버렸다.

쟤들은 유대인 학살 전범이라면 그야말로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제거하려고 눈에 불을 켠 복수귀 상태였다. 감정 같아서는 모사드 요원이 곧바로 그놈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고문해서 한 100번은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허나, 최고 상관인 총리가 절~~대로 그러지 말고 놈을 멀쩡하게 생포해서 반드시 재판정에 보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사적 보복을 그렇게 간신히 막았다.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무려 9개월이나 걸렸으며, 주요 장면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로 모조리 중계됐다고 한다. 이 사람의 배배 꼬이고 뒤틀린 심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아이고 아이히만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암튼 이 사람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피해 갔지만 훗날 잡혀서 더 험한 꼴을 당하고 이스라엘 법정으로부터 단죄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6) 다음으로 '요제프 멩겔레'. 이 사람은 일본 731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이시이 시로'의 독일판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마루타 취급하면서 자기 꼴리는 대로 온갖 잔혹한 생체실험을 벌였던 인간백정인데.. 전후엔 그 아이히만처럼 남미로 도주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안 잡히고 천수를 누렸다!!

기록에 따르면 1970년대 말에 브라질에서 수영을 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60대 후반의 나이에 급사했다고 하는데.. 행적에 비하면 정말 편안한 최후였다.
다만, 이 사람도 아이히만이 덜컥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정말 엄청나게 쫄고 겁 먹고 멘탈이 약해지기는 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생체실험에 관여한 나치의 악마 의사는 멩겔레 말고도 '카를 브란트'라든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사람이 더 있었다. 얘들은 다행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돼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7) 하인리히 뮐러는 히틀러 친위대의 간부에다 게슈타포 국장을 역임했던 나치의 핵심 간부였다.
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었으며.. "아이히만 같은 일꾼이 우리 독일에 50명만 더 있었으면 유대인들은 금세 씨가 말랐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전쟁을 이겼을 것이다~"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독일의 패전이 임박했고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싹 증발해 버렸다. 나치 고위 간부 전범들 중에 유일하게 '실종'돼서 전후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남미로 도망쳐서 완벽하게 잠적하고 자연사했다기보다는 아마 실종 당시에 폭격을 맞아서 죽고 시체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싶다.
참고로 나치당의 우두머리에다 히틀러의 개인 비서까지 역임했던 '마르틴 보어만'도 베를린 포위전 이후로 실종 상태였다.. 허나, 이 사람은 1972년에야 시신이 발견되면서 사망이 확인됐다.

(8)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빠 광신도에 유대인 혐오로 똘똘 뭉친 뚱뚱한 아저씨였다. 자세한 행적은 잘 기억이 안 난다만 이 아저씨는 체포돼서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총살형을 내려 달라는 요청이 소련 측에 의해 묵살되고 교수형이라는 통보를 받자 매우 실망=_=, 낙담하여 몰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라는 점은 힘러와 동일하지만, 그 타이밍이 다르다.
한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출신인 '루돌프 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한 수용소에 세팅된 전용 교수대에서 처형 당했다.

(9) 회스 말고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받아 적은 이력이 있을 정도로 히 총통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 허나, 1941년에 일찌감치 연합군에게 체포돼 버리는 바람에 전쟁 중에 대놓고 사고를 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건 없었다. 그는 이 점이 감안되어 전범 재판에서 사형까지는 안 당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른 여러 나치 전범들과 함께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어쩌다 보니 무려 1980년대까지 살아남으면서 넓은 교도소를 혼자 전세 내어 사는 처지가 돼 버렸다. 다른 죄수들은 만기 출소하거나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죽거나 가석방 됐는데 이 사람만 그 어떤 조건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나치에게 제일 치를 떨던 소련조차도 "쟤는 이제 그만 풀어 주자"에 동의할 지경이 됐으나.. 그는 1987년에 무려 93세의 나이로 굳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슈판다우 교도소는 통째로 철거됐다.
나치 전범들 중에 이런 식으로 감옥에서 죽은 사람은 헤스가 유일했다.

5. 뒤끝

(1) 독소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던 1941년 11월, 나치 독일은 흑해에서 소련의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폭격기로 공격해서 격침시켰다. 배에는 5000명이 넘는 피난민과 상이 군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조리 몰살당해 버렸고, 생존자는 단 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 전쟁이 끝나 가던 1945년 1월에는 반대로 소련 잠수함이 독일의 유람선 ‘빌헬름 구스타프 호’를 어뢰로 공격해서 격침시켰다. 이때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피난민과 상이 군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9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케이스 모두 엄밀히 따지면 군함이 병원선이나 민간 선박을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 협약 위반이고 전쟁범죄였다. 특히 빌헬름 구스타프의 경우, 이건 인류 역사상 단일 선박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죽은 침몰 사고였다. 우리나라의 우키시마 호? 대한항공 007 격추? 그것들 희생자를 아득히 능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자기 배를 격침시킨 소련에다가 항의하고 따질 수 없었다. 자기들이 먼저 한 짓이 정상적인 짓이 아니었으니까.. 공론화하지 않고 그냥 쉬쉬 하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2)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 가족과 친지를 나치에 의해 잃은 사람들은 당연히 독일이 죽이고 싶도록 미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한국인들이 해방 직후에 가졌을 반일 감정보다도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트라우마로 인해 더 극단적인 신념을 갖게 됐다. 나치 전범 윗대가리 겨우 수십 명만 감방에 가두거나 죽이는 걸로는 텍도 없으니 니들도 우리와 똑같이 죽어 보라고.. 독일놈들이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600만 명 죽였으니까 이젠 우리도 독일인들을 신분 지위 불문하고 똑같이 600만 명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그걸 시도했던 유대인이 있었다. ㄷㄷㄷ

이들은 ‘나캄’(히브리어로 ‘복수’!!)이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서 독일 내부의 상수원에다가 독을 타고 수용소에 납품되는 식료품에다가 독을 집어넣는 식으로 공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공작이 허술했는지 금세 잡혔다.

독일 경찰은 나캄 조직원들을 체포하기는 했지만.. 이제 막 나치가 패망했던 와중에 이 사람들을 도저히 단죄하고 처벌할 수 없었다. 저들의 원한과 빡침을 생각하면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독일의 이미지만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니 독일 측에서는 그들을 기소하지 않고 이건 서로 없던 일로 하고 유야무야 넘겼다.;

이상이다.
원래 연합국 진영에서는 일본이나 독일 같은 패전· 전범국들을 국가와 민족을 유지는 시켜 주지만 차 떼고 포 떼고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는 나라로.. 앞으로 전쟁의 전 짜도 입에 담지 못하는 약소국으로 거세시키고 싶어했다. 쟤들이 워낙 크고 끔찍한 사고를 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같은 연합국 진영에서 미국과 소련이 이념 차이로 갈라졌다. 그러니 미국은 공산주의를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런 전범국들을 슬그머니 다시 소생시켜 주게 됐다. 나라가 너무 못 살고 백성들이 굶주리면 사상적으로도 그만큼 취약해지며, 적화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저런 나라들은 전쟁에서 지고 인프라가 다 파괴됐어도, 고급 인재들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노하우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금방 다시 일어나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 폐허 상태이던 1947년에 최초로 노벨 상 수상자까지 배출했고 말이다.

뭐, 일본은 헌법에다가 군대 미보유와 전쟁 포기를 명시했고, 독일은 탈나치화를 워낙 빡세게 했더니 통상적인 애국심 민족주의조차 없어지고 밍밍해져서 난리일 지경...이다.
특히 이 두 나라들은 핵 무장은 일~~절 안 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걔들이 전범국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핵을 개발하겠다고 깝친다면.. 이건 국제 어그로를 제대로 끌면서 진짜 작살이 났을 테니 말이다.;;

오늘날의 UN 상임이사국을 제외하면 오히려 인도, 중국 등 신흥 강국들, 2차 대전 이전에는 식민 지배도 받고 약골이었던 나라들이 핵을 보유하려 난리를 치는 편이다.
그 대신 독일은 몰라도 일본은 상임이사국 자리를 아주 오래 전부터 탐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의 견제와 뒤끝 때문에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11 08:35 2025/07/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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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1933년부터 1945년은 뭐랄까 광란과 암울의 시기였다. 세계적인 경제 호황 황금기였던 1920년대가 대공황이라는 날벼락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때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치욕을 갚으려고, 일본은 나락으로 가는 경제를 살리려고 군국주의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국부를 창출할 방법이 없으니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고 빼앗고 식민지를 늘려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일본은 딱 저 무렵에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웠으며..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해군 군축 규제를 생까기 시작했다.
독일은 권력이 나치에게 완전히 넘어갔으며, 히틀러가 총통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는 주변 강대국들이 머뭇거리는 동안(1차 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에..) 체코나 오스트리아 같은 이웃 나라들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런 폭주가 나중엔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독소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을 만들어냈다. 얘들은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점령지에서 정말 반인륜적이고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고, 그러면서 결국 연합국에게 지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빼박 악의 축으로 전락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딱 정확하게 이 기간 동안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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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에 있었던 일들 중에 본인 기억에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을 몇 가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폴란드, 퀴리 부인

우리나라는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일본에 치이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현대사가 불운하고 기구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폴란드가 역사적으로 처지가 한국과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껴서 19~20세기 사이에 양쪽으로부터 번갈아가며 지배 받고, 걔네들 마음대로 영토가 분할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장 2차 세계 대전부터가 바로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걸로 시작됐었다.
오죽했으면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폴란드 땅에 만들어졌다! 독일 본토가 아니다.
그러니 나중에 독일이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점령지를 상실했을 때는 거기 수감자들을 점점 더 독일 본토에 가까이 있는 수용소로 이감을 해야 했다.

그랬는데.. 더 옛날 19세기 중후반엔 폴란드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다.
마리 퀴리(퀴리 부인)가 그 시기에 이 지역 출신이었다.

아마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였던가..?? 마리 퀴리의 학창 시절 일화가 실려 있었다.
러시아에서 불시에 학교 시찰을 보내서 수업 중인 선생한테 "이 교실에서 제일 똘똘한 애를 하나 지목하시오. 당신이 학생들을 우리 교육방침대로 잘 가르치고 있나 확인해 보게" 대뜸 이런 요구를 했다.

애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얼어붙어서 'ㄷㄷㄷㄷㄷ 제발 저는 지목하지 마세요!!!ㅠㅠㅠ' 이러던 와중에 넘사벽급 우등생 모범생이던 마리 퀴리가 답정너 지목됐다.
교과 내용 질문뿐만 아니라 국가관 사상 검증 질문까지 모든 답변이 러시아어로 막힘없이 술술..

러시아 장학사인지 누군지는 아주 흡족해하며 떠났다. 허나, 그렇게 위기를 넘긴 뒤에 그 선생과 마리는 부둥켜안고 서럽게 엉엉 울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마지막 수업"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다.

햐, 러시아에 나치에.. 이런 지경이었으니 훗날 동아시아에서 중-일 전쟁이 터졌던 것과 비슷한 구도로 독-소 전쟁이 터졌나 싶기도 하다.
그 사이에 낑겼던 폴란드는 2차 대전 피해를 극심하게 당했다. 뭐, 마리 퀴리는 프랑스 과학자와 결혼해서 프랑스로 귀화했고, 2차 대전이 터지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험한 꼴을 보지는 않았다.

마리 퀴리가 그냥 타고난 천재이고 독한 공부기계 괴수였다고만 말하는 건 고인에 대한 모독일 거다.
이 사람은 약소민족 차별과 설움, 학계에서 여자라는 성차별 유리천장, 하루에 사과 하나 빵 한 조각밖에 못 먹을 정도의 가난과 굶주림..

그야말로 신체 장애만 빼고 어지간한 역경과 핸디캡을 다 겪었는데 이걸 오로지 실력과 노력만으로 다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방사성 원소 라듐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퀴리 부인의 둘째딸이 "어머니, 아버지, 언니, 내 남편.. 다 노벨 상 받았는데 나만 못 받았으니 나는 가문의 수치입니다"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는데.. 그런 가문이 저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마리 퀴리는 독일의 그 유명한 과학자..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 하지만 동족을 죽이는 독가스의 개발에도 참여했던 과학자 '프리츠 하버'와 생년 몰년이 거의 같은 동갑내기였다. 암모니아를 인공 합성한 거나,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발견한 거나.. 다 비슷하게 넘사벽이었다.

2. 연설과 선동의 천재

꼭 과학 쪽에만 천재가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소파 방 정환 선생은 동화 구연의 천재였다.
이 사람이 감방 안에서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면 동료 죄수들은 물론, 밖의 간수들도 실실 쪼개거나 눈물 짰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옛날이 지금보다 오락거리가 없고 신파가 더 잘 통하는 시절이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저건 비범한 능력이었음이 틀림없다.

근데 히틀러는.. 연설· 웅변의 천재였다.
"비겁하게 팩트 따위 들이대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승부하자!! 대중들에게 막연한 공포와 적개심을 팍팍 조장하자!"의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

"여러분, 살기 힘드시죠? 우리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 국력이 부족해서 전쟁에서 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거, 알고 보면 이게 다~~~ 노뭏... 아니 유대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배신자 쥐새끼들로부터 비열하게 뒤에서 총질을 당했기 때문에 졌을 뿐입니다!!"
이 말을 눈짓 손짓 총동원해서 고래고래 고함 치듯이 외치니까 다들 입 헤 벌렸다.

히틀러는 쿠데타(뮌헨 맥주홀 폭동)가 실패하고 붙잡혔는데, 재판정에서도 연기까지 가미해서 이렇게 피 끓는 호소를 했댄다.
"이러쿵저러쿵.. 그러니 존경하는 판사님, 제 눈을 똑바로 보십시오. 저에게 죄가 있다면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해서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고 싸운 죄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말빨이 좋았는지, 저 호소에 법정 방청석에서는 "옳소!"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오고 검사와 판사까지 정신줄을 놔 버렸댄다.
"응..?? 여기서는 우리가 피고인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려야 되는데.. 왜 반대로 우리가 피고인한테서 연설을 잔뜩 듣고 있는 거지..???? 병신 같지만 아주 멋있는걸? 우리가 설득 당하겠어?"

그 결과, 히틀러는 내란 정치범으로 금고 5년이 나오긴 했지만.. 책상 있고 침대 있는 넓은 독방에서 외부인 접견도 자유롭게 하면서 진짜 편하게 잘 쉬었다. 최소한의 형식적인 솜방망이 처벌만 받다가 겨우 13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 동안 담당 간수가 "저 같은 미물이 감히 선생님을 곁에서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이랬다. -_-;; 히틀러는 애국자 VIP 양심수로 예우받으면서 이 전과가 정치 커리어에서 커다란 플러스로 추가됐다.;;
울나라로 치면 안 두희를 살해한 박 기서 씨가 받았던 대우와 비슷했다. 저 사람도 살인죄 5년을 최대한 감경해서 3년형이 나왔지만.. 17개월 남짓 만에 삼일절 특사로 석방됐으니 말이다.

히틀러의 선동 기술은 그야말로 악마의 나팔수였던 괴벨스의 도움이 합쳐져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
미국은 나라가 부유하고 잘 살다 보니 1920년대에 이미 중산층 서민들이 자가용을 굴리고 라디오도 갖고 있었다고 하던데.. 독일에서는 국민들을 히틀러 연설로 세뇌시키려고 저가형 '국민라디오'를 저렴하게 찍어내서 뿌렸다. 주파수는 특정 채널로 답정너 고정돼 있었고..

히틀러를 유대인 학살 같은 죄악을 빼고 평범하게 정치인, 군인(패배하긴 했지만)으로서만 생각하면 뽀대나기는 한다.
한자 문화권도 아닌 동네에서 웬 卍짜를 심볼로 쓴 것도 그 당시엔 꽤 참신한 디자인이었을 것이고, 나치 SS 군복이 일본군 군복보다야 비주얼이 멋있는 건 사실이니까. =_=;;;

히틀러의 종교관은 김 일성의 종교관과 비슷한 유형의 떡밥인 것 같다.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개인 숭배로 빠지고 이상한 쪽으로 흑화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히틀러는 영화 배우 찰리 채플린과 생년월일이 겨우 4일밖에 차이 나지 않는 완전 동갑내기였다. 찰리 채플린은 나치 독일을 풍자하는 영화에서 히틀러 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으며, 히틀러 역시 그 영화를 보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08 08:35 2025/07/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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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변천사

본인은 유튜브를 돌아다니다가 근래에 꽤 재미있는 영상을 봤다.
이름하여 '음악의 변천사'.. 이 주제로 이 영상 하나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고 여러 개가 굴러다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걸 보니 "오 그렇군..!" 무릎이 쳐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인류의 역사 수천 년 동안 음악이라는 건
오랫동안 장송곡 아카펠라에다가 단선율 붙인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악기의 음색이나 음계도 지역별로 파편화가 심했다. 고대/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도 다 이런 스타일이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음악이란 게 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좀 더 파격화 세속화가 이뤄졌다. 사람들 코러스가 더 화려하고 웅장해지고 예뻐졌고 피리 소리가 더 예뻐졌다.

그 뒤 17세기 바로크 정도부터 바이올린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악기 소리가 들리고 악기가 더 다양해지고, 요런 유럽 음악이 타 지방 민속 음악과는 차별화된 독보적인 면모를 갖추게 됐다.
1700~1800년대가 딱 클래식이다. 교회 찬송가도 대부분 이 시기 곡들이다. 처음에는 작곡가도 당대 귀족들처럼 치렁치렁 가발을 쓰고 있었다가(바흐, 모차르트) 후대 인물부터는 그런 게 없어진다는 것도 포인트..

1800년대 후반, 낭만주의의 끝물쯤 되면 음색은 클래식이지만 좀 더 격식이 풀리고 선율이 자유로워진 것 같다.
1900년 초중반부터는 그냥 귀족들이나 듣는 라이브 교향곡이나 오페라/뮤지컬 음악뿐만 아니라!! 음반에 담긴 가요나 영화 음악도 등장한다.

20세기 중반에 와서는 재즈에다 락이며 힙합도 등장한다. 실용음악이란 게 클래식과 완전히 분리되고 양지로 나와서 별개의 영역으로 전문화된다.
1970~80년대, 전자악기며 MIDI, 컴퓨터 음악이 등장한 뒤부터는 판도가 또 확 달라진다. 요때 음악부터 디지털화가 됐고, 1990년대엔 그 다음으로 영상까지 CG가 등장하니 말이다.

현대의 인류는 그야말로 지난 5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상들이 겪지 못했던 음악의 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단조에 단선율 장송곡 노동요를 크게 벗어나지 않던 음악이 나중에 왕족 귀족 후원 받아서 명맥을 유지하는 클래식이니 교향곡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이거 자체가 엄청 돈 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바뀌면서 비틀즈, 마이클 잭슨, 서태지, 강남 스타일 뭐 이런 걸로 바뀌었다. 정말 상전벽해 그 자체이지 않은가?

또한 음악을 널리 공유하고 퍼뜨리는 기술도 상상을 초월하게 발달했다.
소리바다가 없어진 대신에 유튜브로 그냥 아무 음악이나 다 찾아 들을 수 있다..;; 새로 출시되는 음반뿐만 아니라 옛날에 발매됐던 음반까지 몽땅 다 아카이빙까지 하고 있으니 실로 무서운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출판물의 폰트라든가 자동차 디자인, 건물 모양, 사람들의 옷차림(특히 여성)을 보고서 우리는 대충의 연대기를 알 수 있다. 반대로 시대극의 고증 정확성도 판단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악 스타일도 시대별로 개성이 아주 명확하기 때문에 연대기의 판단에 유의미하게 기여할 수 있다. 1500년대에 루터가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만 해도 그 시절엔 정말 격식파괴 그 자체인 강렬한 CCM이었다는데 말이다.

음악의 유형 내지 역사와 관련하여 본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1. 락과 힙합

(1) 마초 백인 아저씨가 치렁치렁 장발에다 바이크 운전자 같은 가죽잠바 차림에,
일렉기타 들고 찌링찌링 소리와 정신없는 드럼 비트에 맞춰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거랑....

(2) 농구 유니폼 같은 차림의 흑형이 세 손가락으로 xyz축 삿대질 하면서
적당한 비트에 맞춰 "헤이 요 왓썹 피스~~!!" 이러고 롸임 맞춰서 재잘재잘 랩 하는 거.
야외에서는 붐박스 들고 비보이 댄스, 실내에서는 LP판떼기 들고 디제잉.
이 둘은 영역이 서로 많이 다른 거구나.. 이놈의 음알못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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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본 환타 CF에서는 A반 카와장 선생과 F반 DJ 선생이 제각기 나왔던 것이었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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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이 흑인영가, 째즈(루이 암스트롱!!)에 이어서 힙합까지 만들어 낸 건가? 대단하다.
저게 원래 자기네들 커뮤니티에서는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같은 전통민요 노동요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에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나돌았던 병맛 Visual Studio 2005 CM쏭 링크를 걸어 본다. ㄲㄲㄲㄲㄲㄲ 가사에 "고객 / 고개, 팀장 / 심장, 후배 / 두 배" 롸임도 나름 절묘하게 들어가 있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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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악과 R&B

내가 보기에 성악은 으아아아아아아~ 단음을 귀가 찢어질 정도의 성량으로 크게 내지르는 거고, (박 종호, 조 수미 같은)
R&B는 여러 음을 오르내리면서 우우~우으으으으으으~~~ 아놔 글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이러는 거 같다. ㄲㄲㄲㄲㄲㄲㄲ (나얼, 박 정현 같은)

가요는 댄스곡과 뮤직비디오의 비중이 커지면서 정작 본질인 노래를 녹음으로 때우는 립싱크 관행이 논란이 됐었다.
그러나 성악은..?? 공연장에 애초에 마이크가 없다~!! 클래식 성악은 마이크나 스피커, 녹음기 같은 음향 장비가 발명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장르이기 때문이다. 립싱크 따윈 상상도 할 수 없다.

3. 리듬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들었던 제일 기괴한 리듬 톱 쓰리는

  • 강남스타일(옵, 옵, 옵, 옵.. 오빤 강남 스타일),
  • 마카레나(뻡 '뻡 뻡 뻡 뻡... =_=), 그리고
  • 주토피아 try everthing (오 오 오 오오~~)

이다.
음높이의 변화 없이 박자만으로 사람을 굉장히 흥겹게 하거나 심지어 긴장· 흥분시킬 수도 있다는 거다.

특히 try everything 저 리듬은 오선지를 생각하면서 들어 보면 점8분음표가 쫙 이어졌다 이러면서.. 나 같은 비전공자한테는 시창이나 채보가 대단히 어렵다.
옛날에 Looking for you에서 반음계 단위로 멜로디가 현란하게 오르내리는 구간을 채보하던 것보다 이 리듬 채보가 더 어렵더라.
컴퓨터로 치면 word 경계에 align이 안 된 메모리에 계속 접근하는 느낌이다. 그러니 한 클럭 만에 처리가 안 되고 여러 클럭이 든다.

음치가 있는 것처럼 길치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악보 읽으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16분음표나 8분음표 박자에 딱딱 맞게 들어가고 발성하는 거.
운전하면서 내비 안내를 읽으면서 여러 모퉁이들 중 어느 쪽에서 오른쪽, 어디에서 좌회전을 맞게 찾아가는 거.
지도 그림과 전방 실제 화면을 맞게 동기화시키는 거. 이것도 뭔가 서로 비슷한 일 같다. ^^

4. 핫한 뮤지션들

(1) 그나저나 브루노 마르스..?? 이 사람이 초대박을 치면서 요즘 그렇게도 잘나가는 뮤지션이구낭.. 여자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본좌이고. 이 사람들은 뭘 그렇게 천재적으로 잘해서 히트곡을 만들어 내고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떼돈을 번 걸까? 요즘은 음반 판매량도 아니고 음원 스트리밍 조회수와 노래방 로얄티(!!!!)로만 수익이 나올 텐데 말이다.

(2) APT 아파트라는 노래가 작년에 그렇게도 히트였다는데.. 브루노 마르스가 블랙핑크 '로제'라는 한국계 가수와 같이 만들고 부른 곡이다.
얘는 아무래도 술자리 게임 노래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보니 기반 리듬이 심하게 어렵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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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파트 아파트~ 딴 딴딴 딴딴딴.. 이건 굿거리는 아니고 휘모리 장단인데???
물론 이것만 반복되는 건 아니고 바리에이션 리듬도 나온다. =_=;;

(3) 2012년에 말춤으로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싸이는 요즘은 뭐 하고 지내는지.?? 이 사람은 유튜브의 역사상 최초로 32비트 정수 범위를 초과하는 동영상 조회수를 달성했었다!
글쎄, 평생 먹고 살 돈 다 벌었으니 은퇴를 했는지 다른 사업을 하는지.. 모르겠다.
배우 김 희원이 방탄유리의 아성을 또 넘어서기 어렵듯, 저 아저씨도 강남 스타일의 아성을 또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4) 닥터 드레, 이박사...;; 뮤지션들 중에 은근히 박사 호칭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로트'가 복고 유행인지 케이블TV(종편) 위주로 그렇게도 뜨고 있는데, 이런 건 세계화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참, 미국 가요계에는 반대로 우리나라 같은 걸그룹=_=은 없는 듯하다.

5. 보딩뮤직

자동차에서 3점식 안전벨트를 최초로 도입한 제작사는 볼보이지만, 카오디오라는 걸 최초로 장착한 회사는 미국 GM이었다고 그런다. 운전하면서 라디오나 음반도 들으라고 말이다.

현대엔 교통수단을 이용하거나 자가운전하는 게 생활의 일부가 됐다. 그리고 고급스럽거나 장거리· 장시간 가는 대중 교통수단들은 출발 전이나 도착 직전에 적절한 BGM을 넣어 주는 게 승객에게 청각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관행이 됐다. 그러면 그 곡의 작사· 작곡자나 가수에게는 소정의 로얄티가 지급될 것이다.

그래서 '보딩뮤직'이라는 장르가 등장했다. 이건 음악 성향 자체의 역사라기보다는 음악의 활용 역사에 가까운 듯?
거북이 '비행기'는 정말 대놓고 이 용도로 만들어진 노래 같고, 김 동률 '출발', 그리고 이들보다는 최근곡인 볼빨간사춘기 '여행'.. 얘들은 울나라 대한항공의 여객기에서 보딩뮤직으로 사용된 적이 있거나 현재도 흘러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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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빨간사춘기 '여행'은 뮤직비디오부터도 비주얼 영상미가 정말 작살..ㄷㄷㄷㄷ)

그랬는데.. 항공 쪽이 아니라 대한민국 철도청이 이 분야에 의외로 선구안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선보였던 새마을호 Looking for you는 ‘보딩뮤직’이라는 장르에서 세계 음악사에 한 획을 당당히 긋게 되었다. 이때가 정말 리즈 시절이었다.
음악의 역사 얘기를 하는데 Looking for you 얘기를 빼먹는다면 섭섭하지 않겠냐 말이다. ㄲㄲㄲ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5/07/04 08:35 2025/07/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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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 취향 존중합니다

1.
우리에게 아이작 뉴턴은 "사과가 왜 땅에 떨어질까?"에서 시작해서 고전역학을 엄밀하게 정립한 위대한 물리학자, '프린키피아'의 저자, 미적분학의 초창기 선구자 정도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거기서 좀 더 나가면..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계란 대신 회중시계를 끓는 물에다 집어넣어 삶아 버렸을 정도로 초인적인 집중력의 소유자 정도?

이 사람은 수학· 과학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천재였고 덕질을 한 게 많았다.
그는 과학자이기에 앞서 조폐국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었다. 화폐위조범들을 과학적 증거로 잡아내서 기소하고 중형을 때리는 걸 즐겼다. "드디어 정의가 실현되었구나!! ㄲㄲㄲ"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우사미 짱 같은 기질이 있었다;;

그는 경제· 금융, 재테크 쪽도 잘알이어서 굉장한 부자였다. 몰빵 투자를 하나 잘못하는 바람에 요즘 대한민국 시세로 수십 억에 달하는 재산을 한순간에 날린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하루아침에 쫄딱 망한 알거지로 전락하지도 않았다.
"내가 우주 천체의 운동은 다 계산하고 예측해 냈지만 이놈의 사람 심리와 돈의 흐름은 도무지 모르겠다" 라는 명언이 이때 나왔었다. 뭐, 서양은 조선 시대부터 이미 기업이란 게 있고 주식· 선물 거래도 있었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뉴턴은 과학, 철학을 넘어 신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성공회 신자를 표방하면서 확실하게 유신론자이긴 했지만, 자기 식으로 요모조모 따져 가며 독특하게 믿었다.
그는 '아리우스 파' 성향이었는지,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신과의 매개자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신학에 조예가 깊었다면서 그럼 요일 5:20 같은 구절은 못 봤나~ 하는 생각이 든다만.. =_=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딤전 3:16에 '하나님'이라든가, 요일 5:7 같은 구절은 "원래 성경에 없던 말이 후대에 무단으로 추가된 거다~~ 추적을 해 보니까 무슨 1500년대(자기 기준으로는 겨우 100년 남짓 전) 필사본에서 추가됐다..;;"

즉,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일종의 변개된 성서 본문 옹호를 했다!! 와~ 바로 자기 고국에서 불과 반세기쯤 전에 킹 제임스 성경까지 출간돼 나왔는데 말이다.. =_=;; 킹 유일주의자가 보면 뒷목 잡았을 일이겠다.

2.
20세기 초, 체코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골수 미친 철덕이었다고 한다.
집채만 한 쇳덩어리가 칙칙칙쉭쉭쉭 소리 내면서 굴러가는 걸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열차 타거나 누구 마중 나갈 일이 없는데도 철도역을 기웃거리면서 열차 지나가는 걸 구경하면서 입 헤 벌린 건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 단순히 기관사 정도가 아니라 증기 기관차를 개발하는 엔지니어 공돌이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교향곡을 다 포기해도 좋다" 이런 말까지 공공연하게 했다.
이 사람은 증기 기관차가 아니라 전기 기관차/전동차의 VVVF 구동음을 들었다면.. 그 음향을 응용해서 교향곡 하나 무조건 만들었지 싶다.

3.
한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영국의 그 간호사· 보건행정가)은 골수 캣맘이었다고 한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연민, 감성이 더 풍부하다! 하트뿅뿅~~” 이랬고, 평생 거의 60마리에 달하는 길고양이들을 돌봤던 것으로 여겨진다.
심지어는 자기 애착 고양이 중 하나에다가는 당대 독일 제국 수상의 이름을 따서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나이팅게일은 병원에서 발로 뛰며 부상병들 병수발 한 건 크림 전쟁 시절에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 뒤로는 "이런 조치를 취했더니 부상병 사망률이 몇 프로 줄었더라" 병원 위생을 개선시키고 정치질 싸움질까지 불사하면서 보건 관련 예산을 타내는 등.. 보건 행정 쪽으로 훨씬 더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허나, 저 사람은 닝겐 환자가 아니라 꼬냉이는 진짜 사랑과 헌신으로 돌봤던 건지도 모르겠다.;;

4.
우리나라에 고스톱이라는 건 정황상 우 장춘 박사가 최초로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_=
일본 화투 게임 룰을 일부 변형하여 그 이름도 유명한 '고스톱'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고 대한민국 땅에 이걸 퍼뜨린 장본인은....;; 저 사람이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우 장춘은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우 범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우 범선은 국모의 원쑤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고 영근에게 곧 암살 당했고, 아들인 우 장춘은 일본인 어머니 편모 가정에서 컸다. 졸지에 과부가 된 그 일본 여인이 나름 조선 혈통의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위대한 과학자로 키운 것이다.

우 장춘은 어린 시절엔 한국어를 몰랐다. 일본 애들 사이에서 왕따 안 당하고 고등교육까지 받으려면 당연히 완벽하게 일본인 행세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그는 어른이 된 뒤에야 무슨 모세처럼 한국인 정체성이 생겼다. -_-;; 공 병우 박사가 이 극로 선생을 만나서 뭔가 각성을 했다면, 우 장춘은 김 철수라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서 감화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종전 후엔 일본에 남지 않고 한국에 들어왔으며, 일체의 정치질이라고는 안 하고 죽을 때까지 우직하게 종자 연구만 했다. 국민들이 굶주리는 와중에 잘 자라고 과육 많이 맺는 고효율 종자를 들여오고 개발하고, 자기 생활비 사비로 쓰라고 받은 돈까지 몽땅 다 종자 구입하는 데 썼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 사람은 연구 말고는 인생에 일체의 재미나 낙이라고는 없는 샌님이 아니었다. 게임 쪽에 은근히 승부욕 있고 화투의 승리 확률을 수학적으로 분석도 했다는 사람이라네.. ㄷㄷㄷㄷㄷㄷ
이거 무슨 세종대왕이 고기를 너무 좋아하고 고기만 잔뜩 먹어대서 비만에 성인병 달고 살았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구한말의 풍운아로 태어나서 농학박사가 되고 다윈 진화론을 보강시키고, 농업 종자를 연구하면서 고스톱까지 만들어 퍼뜨린 우 장춘 박사는 공 병우 박사 못지않게 진짜 대단한 분 같다. ㅠㅠㅠㅠㅠㅠㅠ

* stop의 발음이 우리말에서는 '스돕' (고스돕 =_=)처럼 되고, 영어로는 '스땁'처럼 되는 것 같다. ㅌ을 그대로 발음하기는 불편한지 ㄷ나 ㄸ로 다들 바뀐다.

말이 나왔으니 천재들 얘기를 좀 더 늘어놓고 글을 맺겠다.
만 24세 나이(또는 ±1 부근) 때...

  •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조각상을 만들었다.
  • 필립 캐츠는 zip 압축 알고리즘과 파일 포맷을 만들고, pkware라는 회사를 차렸다.
  • 빌 게이츠는 하버드를 잠깐 다니던 시절에 팬케이크 정렬 알고리즘에 대해서 이산수학 학술지 논문을 투고했다.
  • 손 기정 선수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 존 카맥은 Doom 게임을 만들었다. 어셈블리어 안 쓰고 C 코드만으로 486 PC에서 텍스처 매핑이 적용된 준 3D FPS 게임을 만들었다.
  • 앨런 튜링은 저 나이 때 "계산 가능한 수에 대하여"라고 튜링 기계 개념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했다.
    과학/철학에서는 "재현 가능, 반증 가능"을 논하고 천문학에서는 "관측 가능"을 논하는데, 전산학에서는 "계산 가능" 그 자체, 또는 "다항식 시간 안에 계산 가능"을 중요하게 따진다.

그리고 이건 머리 천재하고는 약간 다른 영역이지만..

  • 윤 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행사 때 폭탄을 던졌다.
  • 김 대건 신부는 24를 약간 초과했지만 비슷한 나이 때 순교했다;;;;

난 벌써 나이가 40을 넘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ㅠㅠㅠㅠㅠ 이 나이 먹도록 뭐 했나.
나는 만 24살 때 뭐 하고 있었지??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인제 버전 4.x이던 초 허접 상태였다. 그 나이대일 때 성경 노선도를 만들었고 Looking for you 악보 채보를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01 08:35 2025/07/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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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 승만 할배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서 0에서 1을 만든 거인 위인 초인인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20세기 초 젊은 시절에 가츠라 테프트 밀약을 당하는 걸(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제 식민지가 승인됨) 직접 겪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자기가 대통령이 됐을 때는 미국이 울나라를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리게 나라 틀을 짰다.

생각을 해 보셔, 해방 직후부터 용산에 주한 미군 기지가 있었으면 6· 25 당시에 겨우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겠냐?
친서방, 시장 경제 자유 민주주의, 농지 개혁, 독도 평화선, 주한미군, 반공포로 석방, 한미 상호방위조약, 학생들한테도 민주주의 교육, 국비 유학 장학생 양성..
폐허 속에 붕괴 직전이던 집을 정말 초인적인 인맥 빽 동원해서 무너질 일이 없게는 만들어 놨다.

뭐, 큰 고비를 넘긴 뒤, 인의 장막 속에서 서서히 자기과시와 흑화 조짐이 보인 것은 사실이다.
곳곳에 할배 동상이 세워졌다. 1950년대 후반 몇 년간은 3월 26일인가 할배 탄신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됐다. 지폐에 할배 얼굴은 진작부터 들어가 있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생존 현직 대통령이 이 정도로 라이브로 떠받들어졌던 건 저 1공 시절이 유일 전무후무하다.

그래도 이때는 한국인들이 대통령이란 걸 처음으로 경험해 보고, 조선 왕정 시대와 일제 시대의 관념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도 꼴랑 10년 남짓이었다.
할배는 조선 황실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박대했는데 그래도 늘그막에 자기가 왕 같은 대접은 좀 받고 싶어한 것 같다. 그러니 할배 주위에 아부꾼 간신배들도 끊이지 않았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배는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압도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할배가 진짜로 악의적인 독재자였으면 애초에 젊은 애들한테 민주주의 교육을 안 시켰을 것이다. 4 19 따위는 그 시절 북괴나 동구권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관총과 탱크로 유혈진압 하면 그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내가 긴 말 하지는 않겠지만, 리 승만이 악의적인 분단의 원흉이라니(!!) 친일파 득세 원흉이라니, 리 승만 대신 김 구만 대통령 됐으면.. 그거는 정말 일고의 가치가 없는 소리이다.

2.
자, 저렇게 리 승만 할배는 항일 독립운동으로나 훗날 울나라 초대 대통령으로나 워낙 큰 족적을 많이 남겼다. 공도 있고 과도 있으며, 그거 갖고 호불호도 많이 갈리는 편이다. 과는 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자릿수가 다를 정도로 쨉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아, 오해하지 말라. 리 승만이 정치인으로서 실책을 저지르고 잘못한 것이 작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잘한 것이 정말 너무 넘사벽급으로 엄청나다는 말을 하는 것일 뿐이다.
디즈니 뮬란의 끝부분 대사처럼 말이다. "뮬란, 자네는 제멋대로 가출해서 입대해서 자기 상관을 속이고 궁궐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온갖 사고를 치고는.. 우리 국가와 민족을 구해냈다" 할배의 공과 과가 이런 관계라는 얘기다.)

이런 할배에 비해 서 재필은 그 정도 임팩트가 없어 보인다. 해방 후에 국내에서 정치를 하지를 않았으니 실책이나 악행, 과오를 깔 것도 없다.
그러니 서 재필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냥 미쿡인이었음. 한국어도 다 까먹고 고국과 동족을 깔보고 무시했음. 미국으로 돌아가서 지 한몸 편하게 잘 살았음. 친일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애국애족 한 것도 아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무덤에 누워 있던 서 재필이 저 말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서 “뭐가 어쩌고 저째?”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지 싶다. 그 사람이 왜 미국인 행세를 했는지 생각은 해 보셨는가?

서 재필은 20세 청년 나이로 벌였던 갑신정변이 실패하는 바람에 역적으로 몰려서 정말 참혹한 멸문지화를 당했던 사람이다. 자기 부모, 와이프, 심지어 자기 아들, 양아버지, 형.. 집안이 몽땅 싸그리 몰살당했다. 처형, 자결, 노비로 강등..

우리의 고종은 갑신정변 잔당들을 해외로 자객까지 보내서 집요하게 제거했다. 가령, 김 옥균은 중국 상하이에서 피살당한 뒤, 목이 짤리고 머리가 한양 시내에 내걸렸다. (시체를 방부 처리해서 한국으로 운구해 와서는 일부러 저런 짓을)
서 재필은 목숨 부지하려고 일본을 거쳐서 미국까지 도망치게 됐다. 이 모든 게 무슨 고대 근대 중세도 아니고, 1880년대에 구한말 한반도 땅에서 벌어졌다!!

서양에서는 아예 왕을 암살한 반역범이라 해도 가족한테까지 저런 보복을 하지는 않았다. 저 때로부터 수백 년 전에도 말이다. 당사자야 사지 찢기고 내장 끄집어내진 채 죽었을지언정, 가족은 추방이나 신분세탁 정도로 끝났다. 한 마디로 조선이 미개했거나 최소한 고종이 엄청난 암군 폭군이었다. (+ 민씨 일가도)

서 재필은 영어의 영 짜도 모르던 상태에서 인종차별도 쩔던 미국 한복판에 알거지 상태로 내던져졌다. 그러니 생존하려면 이를 악물고 정말 미칠 듯이 주경야독 공부, 공부밖에 할 게 없었다.
결국 그는 만학도 신분으로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졸업생 대표 연설), 미국 시민권을 받고 거기서 의대를 나와서 의사까지 됐다! 박 정희가 신분 상승을 위해 외국 나가서 만주군 장교가 됐다면, 서 재필은 더 먼 외국에 나가서 저렇게 출세한 것이다.

그는 미국 간 지 12년 만에 성경의 요셉과 비슷한 급으로 신분이 바뀌어서 조선 땅에 돌아오게 됐다. 독립협회 세워서 자기 고국을 청나라 간섭 없는 나라, 미국 같은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춘 나라로 만들려고 말이다.

이런 그가 자기 가족을 절멸시켜 버린 애증의 고국에서 “헤이, my name is 필립 제이슨. // 오우 노!! 코리아는 이래서 노 답!! ㅉㅉㅉ” 이렇게 미국인 행세를 한 거는 정말 정말 소심한 복수이자 귀여운 애교인 거 같은데 말이다. 미국인 행세를 해야 자기가 미국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남들이 자기를 함부로 해코지를 못 하지 않겠는가?

그는 진짜로 자기 고국이 싫어졌으면 박 중양처럼 신념형 친일파가 됐거나, 미국에 틀어박혀서 평생 병원이나 경영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미쳤다고 현실의 서재필처럼 살았겠냐?
정말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소릴 듣는다.

더 코미디 같은 건.. 이런 서 재필조차도 리 승만의 업적을 가리고 존재를 지우는 대타 용도로는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_=
왜, 미국에 세계 각국 영사관에는 각 나라의 국부들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기에도 리 할배 대신 서 재필 동상이 있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 건국전쟁 참조) 정말 썅소리 나오지 않을 수 없다.

3.
할배는 대통령으로 선출은 합법적으로 됐는데 장기 집권을 하려고 법을 고쳤던 반면..
박 정희는 첫 시작부터가 군사정변이고 집권 중에도 유신 쿠데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치적인 사고를 제일 크게 쳤고 제일 오래 집권했지만, 그 규모에 비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한 정도는 덜했다. 과묵하고 뚝심 있는 편이었다.

박 정희는 우리나라 대통령들 중에 명예박사 학위가 전혀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딴 요식행위 다 쓸데없다고 거절하고 안 받았다.

  • “학생 여러분은 내일의 주인공이지 지금 오늘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좌익분자들한테 선동돼서 반정부 데모질 시위 하지 말고 조용히 공부나 하기 바랍니다)”
  • “내가 벌이는 일이 지금은 잔뜩 욕 먹을지 모르지만 평가는 후세가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할 겁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나중에 내 무덤에다 침이나 실컷 뱉으시오.”

쿨하고 씨크하고.. 뭔가 미래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저 사람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과연 언제까지 대통령을 했을까? 9대 임기가 끝나는 84년쯤에 자체개발 핵무기 공개하고 90년대 올림픽 유치까지 마치고 나서 퇴임했을까?
저 사람은 제 명에 죽었다면 자기 무덤도 성대하게 꾸미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지 싶다. 지금 같은 왕릉처럼 만들지 말라고 말이다.;;

박 정희는 영부인이 역대 제일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생각할 점이다.
영부인이 소록도까지 찾아가서 위문했던 것 때문에 오죽했으면 2012년도 대선 때 그 동네가 7시 지역에서 '유일'하게 레카 표가 뭉괴 표보다 더 많았었다.

그리고 더 여담을 보태자면..
박 정희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뭔가 모욕이나 무시를 당하면 그걸 절대로 넘기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다 설욕했다.
그래서 학교 선생질 하다가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무시 당하자 아예 만주국 장교가 돼서 돌아와서 걔들을 데꿀멍 시켰으며,
가난한 놈팽이라고 장인어른으로부터 무시 당하자.. 아예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서 장인으로부터 사과까지 받았다.;; 무섭지 않은가?

또 저 사람 가문은 부친, 당사자, 아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아들을 40~50 나이가 돼서야 얻었다. 대를 이은 노산 가문인 게 인상적이다. 박 정희가 1917년생인데 아들 박 지만의 막내아들이 2014~2015년생이니.. 그래도 박 지만은 요즘 세상에 아들만 넷인 애국자 집안이 됐다.;;

4.
이런 박 정희에 비해.. 후임 전땅끄는 좀 더 '촐랑촐랑' 경박한 이미지인 것 같다. =_=;;
자기를 드러내고 쑈맨십 내세우는 걸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이때 '땡전뉴스'라는 게 있었다. 심지어 영부인도 남편이랑 같이 어디서 환호를 받으면 같이 손 흔들면서 화답도 했다.
"인간 전두환", "이 시대에 대한민국을 위해 준비된 답정너 대통령"...;;

박 정희 때는 5 16이나 유신 쿠데타 시절에도 언론이 이 정도로 치켜세우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ㅎㅎ 리 승만 시절과는 좀 다른 형태의 아부꾼이 등장했다.
왜, 옛날에 미국 맥아더 원수도 쑈맨십 있고 언론을 적절히 잘 구워삶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인물 사진, 풍경 사진 한 장을 언론에 내보내더라도 이 구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거 말이다. 전땅끄에 대해서도 그런 기질이 느껴진다.

그 과시욕이 어딜 가지 않아서 제주공항 신설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도 군용기까지 악천후에 무리해서 의전용으로 띄웠다가 날려먹은 적이 있었다.
땅끄는 평생 사는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에 정치질의 달인이 됐고, 그 기질이 나중에는 "카메라들이 나만 좀 삐딱하게 찍어. / 요즘 젊은 친구들이 나한테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내한테 당해 보지도 안 해놓고"라는 희대의 멘탈갑 명대사로 이어졌다.

전땅끄는 할배나 박 정희와 달리,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내력이 전혀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래도 저 사람도 권좌에 오르는 과정이 좀 에바였지, 일단 대령통으로서 재임 중의 뚝심 있는 행적은 괜찮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저 사람도 죽을 때는.. 북한 땅 보이는 전방에 이름없이 묻어 달라고 당부했었는데.. 지금 장지를 정하기는 했나? 어디 묻혔나? 참 궁금하다.

※ 나머지 여담

(1) 백범 김 구에 대해서 '킬구'라는 별명이 나도는데.. 이건 당사자의 성깔과 행적을 감안하면 마냥 터무니없는 별명이나 멸칭이 아니었다.
소싯적에 일본인 민간인을 린치해서 죽였던 ‘치하포 사건’뿐만이 아니라, 그는 임시정부를 운영하던 시절에도 수틀리면 테러와 암살을 종종 사주했기 때문이다. 변절한 안 중근의 아들을 암살하려 했고, 김 립 같은 생사람을 밀정이라고 의심해서 죽여 버리기도 했고.. 뭔가 주토피아 땃쥐 “Ice them!” 같은 인상이다.
그랬는데 그도 결국은 암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2) 할배와 박 정희 사이에 잠깐 대통령을 했던 윤 보선은.. 권력욕이 있었는지 2공 시절 대통령을 퇴임하고도 3공 시절에 대선에 ‘또’ 출마를 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1960~61년 사이 윤 보선 시절에 경무대가 청와대로 바뀌고, 형무소가 교도소로 용어가 바뀌었다.

(3) 할배는 “대통령은 n회 이상 중임할 수 없다. 단, 초대 대통령은 예외로 한다”라고 정말 속내가 노골적으로 뻔히 보이는 개헌을 추진했었다.
그 뒤 전땅끄는 선례가 선례인 관계로 옛날 같은 독재 장기집권을 대놓고 추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국가원로 자문회 운운하면서 대통령 위의 ‘상황’ 자리를 만드는 데 진심이었다. 꼼수 보소.. 그 흔적이 현행 헌법에까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사문화된 지 오래다.

(4) 대한민국 역사상 범죄자를 길거리에다 조리돌림 시켜서 망신 준 건 1961년에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시절이 유일, 전무후무했다.
한편, 살인이 아니라 강간 절도 범죄 누범만으로 무려 ‘사형’이 집행된 건 1985년 즈음, 전땅끄 시절의 가정파괴범 처벌이 유일했다.

(5) 박 정희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빡쳐서 북괴를 상대로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일갈했었다. (내 철모와 군화를 가져오너라!)
김 영삼은 역사 바로 세우기 명목으로 중앙청 건물 철거를 강행하면서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는 말을 남겼다.

Posted by 사무엘

2025/06/27 19:35 2025/06/2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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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화학이 인류의 삶을 마법처럼 바꿔 놓은 경이로운 시기였다.
자고로 유기물이라는 건 생명체가 아니면 얻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는데 그걸 인간이 부분적으로나마 인위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기술을 기반으로 플라스틱, 합성 섬유, 합성 고무, 화학 비료, 농약, 살충제, 새로운 냉매 등등이 연이어 발명됐다. 없는 물질이 새로 만들어지기만 한 게 아니고, 기존 물질도 동· 식물의 부산물에 의존하지 않고 아주 저렴하게 팍팍 많이 찍어낼 수 있게 됐다.

하임 바이츠만이 아주 저렴한 아세톤 합성 방법을 개발한 것,
프리츠 하버가 질소 고정법을 개발해서 암모니아를 치트키처럼 대량 생산하게 된 것.. 이런 게 1910년대의 전설적인 업적의 예이다.

그런데 저런 것만 발명되면 섭섭하기라도 한지, 저 시절엔 그 과학 기술로 인간을 죽이는 물질도 응당 개발됐다. 이는 마치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우주 로켓과 장거리 미사일과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20세기 이래로 인류 역사상 독가스라는 게 인명 살상용으로 쓰였던 큼직한 사건은 대략 이렇게 분류된다.

1. 정규군끼리의 교전: 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 (1915)

이건 참호를 뚫기 위해 발명된 양대 발명품 중 하나였다.
참호라는 벙커에다가 기관총이라는 시즈 탱크를 구축해 놓으니 이건 뭐.. 통상적인 알보병들 돌격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절의 공성전이라든가 어지간한 해병대 상륙전에 필적하는 난이도였다.

소총도 아니고 대포도 아니고 기관총이라는 공용화기는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끔찍한 대량 살상 무기였다.
처음에는 제국주의 백인들이 미개한 식민지 주민들한테나 이걸 갈겼지만, 얼마 못 가 같은 백인들끼리 서로 쏴 제끼게 됐다.

참호는 병력을 지표면 아래로 짱박히게 해서 그들을 총알로부터는 생존률을 크게 끌어올려 줬다. 하지만 그 참호 속 생활이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끔찍하고 생지옥 같았는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은 19세기까지 유럽에서 몇몇 나라들끼리 툭탁거리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참호전을 파훼하기 위해서 1차 세계 대전 때 발명된 신무기가 바로 (1) 탱크와 (2) 독가스였다.
탱크야 기관총이나 소총의 총알에 뚫리지 않으면서 참호고 뭐고 다 짓밟으면서 전진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다만, 아직 자동차조차 허접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개발된 탱크는 성능이나 안정성, 신뢰성 같은 게 많이 빈약했다. 가격도 너무 비쌌고..

다음으로 독가스는 물리적인 파괴력 없이 적군 병력을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도망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탱크와는 완전히 다른 '화생방'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셈이다.
초창기의 독가스는 호흡기를 망가뜨리는 염소 계열이 쓰였다. 시퍼런 쌩 Cl 염소 기체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포스겐(COCl2), 겨자가스((Cl-CH2CH2)2S) 같은 거. 이제는 병사들에게 방어를 위해 방탄조끼나 헬멧뿐만 아니라 방독면까지 필요해졌다.

선견지명인지 모르겠다만, "탄환에다가 독가스를 달아서 쏴서는 안 된다"라는 국제 협약은 놀랍게도 1차 대전 이전, 1899년부터 존재했다(헤이그 협약).
그래서 독일이 독가스를 투입하면서 "우리는 독가스를 총이 아니라 손으로 던지거나(수류탄), 혹은 바람에다 실어서 퍼뜨렸다. 그러니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이렇게 둘러댔던 것이 잘 알려져 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급이랄까.

전쟁에서 우리 다같이 쓰지 말자고 결의하는 무기는 단순히 위력이 너무 강하거나 적군을 너무 잔인하게 죽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게 아니다. 위력이 아군/적군, 군인/민간인 통제가 안 되고 종전 이후까지 후유증이 남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다.

독가스는 위력이 바람 부는 방향의 영향을 받아 복불복이 심하며, 기껏 적진을 점령했는데 아군조차 독가스의 여파 때문에 거기서 제대로 못 있었다. 즉, 통제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내가 독가스를 쓰면 상대방도 보복 차원에서 독가스를 썼다. 이러면 전쟁이 굉장히 골치 아파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가스는 1차 대전 때 잠깐 등장하고 그 뒤에는 정규전에서 쓰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 인간 백정 악마 히틀러조차 전장에서 독가스를 투입하는 걸 반대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탱크에 독가스가 등장한 1차 대전의 모습은 이것만으로도 무슨 SF 소설이라든가 성경의 계시록에 등장하는 괴물, 살이 썩는 괴질 묘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충격적인 전투 양상이었다.

2. 인종 청소 대량학살: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1941)

자, 나치 독일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독가스를 군사용으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걸 인종 청소라는 더 정신나간 짓에 활용했다.
히틀러는 우생학에 근거한 극단적인 인종주의 망상에 빠졌다. 유대인, 집시 등 열등(?) 인종은 딱히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그냥 모조리 씨를 말려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

맨 처음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주고, 재산을 빼앗고, 격리 및 추방을 시켰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터진 뒤에는 대피를 못 하고 점령지에 있던 열등분자(?)들을 수용소에 가뒀다. 여기서도 처음에는 노동을 시켜서 알아서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노동력조차 필요 없는지 아예 대놓고 학살을 했다.
'명예훼손, 협박'이던 게 '사기, 절도, 강도'로, 그 다음은 '납치, 감금 치사'로, 마지막으로는 대놓고 '살인'으로.. 갈수록 죄질이 나빠지고 탄압의 수위가 더욱 올라간 것이다.

처음에는 학살을 위해서 이 많은 수용자들한테 기관총을 갈겼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그렇잖아도 전시에 총알이 아까운 짓이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밥 먹고 이 짓만 하던 병사들이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글쎄, 극심한 전투 스트레스도 shell shock 같은 장애를 남기겠지만, 저렇게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아무 명분 없이 저지르는 양학도.. 전투 스트레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람 양심을 자극하고 정신 건강을 해쳤던 것이다. 피해자 유족의 보복을 대행하는 흉악범 죄수 처형도 아니고, 나라 지키는 전투도 아니고 도대체 뭔 짓이냐?

사람들을 구덩이에다 한데 몰아넣은 뒤 안전핀 뽑은 수류탄을 떨구는 건 소음, 진동, 뒷감당이 난감할 테고..
많은 사람들을 한 명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떼거지로 많이, 조용히, 저렴하게, 주변 건물 구조물에 대미지 가하지 않고.. 자기가 살해 당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만들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은..???

해골 굴리면서 고민하다 보니 사람을 물리적으로 대미지를 가하는 유혈 공법 대신에 화학적인 독가스가 채택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산화탄소 중독을 생각해 봤는데, 가성비가 맞지 않아서 최종적으로는 치클론 B 독가스 깡통이 선택됐다.;; 이건 HCN 청산가리를 주입시키는 것과 같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각을 해 보시라! 이 시스템은 저놈들이 나름 엄청 "많이" 고민하고 애쓴 결과물이었다. 완전 싸이코 그 자체였다. =_=;;;
수용소에서 독가스를 이용한 최초의 집단 학살은 1941년 가을이니 태평양 전쟁과 독· 소 전쟁이 발발한 때와 시기적으로 비슷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소련군 포로, 폴란드의 반동분자, 몇몇 유대인들에게 베타테스트가 행해졌는데.. 결과가 괜찮았다!
그 뒤 1942년 1월, '반제(지명 Wannsee) 회의'에서 나치 수뇌부는 "유대인들을 이런 식으로 죽여서 완전히 씨를 말리자~! 절멸시켜 버리자" 이렇게 정식으로 결의를 했다.

이때부터 쟤들이 운용하는 살인 공장에서 가스실은 1945년 초까지 거의 3년 동안 쉬지 않고 꾸준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치클론 B는 오늘날에도 선박이나 대형 창고처럼.. 엄청 넓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고, 안전보다는 가성비와 위력이 더 중요한 공간에서는 살충제 구서제로 잘 쓰이고 있다. 나치 수용소에 납품되는 치클론 B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안전을 위해 원래 일부러 첨가하는 악취· 구토 유발제를 "빼고" 납품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하임 바이츠만은 아세톤 합성으로 탄약· 폭약 생산을 혁신시켰다.
그러나 프리츠 하버는 1차 대전 시절에 군용 독가스의 개발을 주도했으며, 나중엔 저 치클론 B의 개발에도 참여했었다. 사람을 살리는 발명도 하고 죽이는 발명도 한 셈이다.

3. 불특정 다수 테러: 옴진리교 (1995)

이렇듯 독가스는 저렇게 1차 대전 시절의 끔찍한 군용 무기, 2차 대전 시절의 극악무도한 활용 사례로 인해 인간에게 정말 진절머리 나는 악몽을 안겼다. 이제 독가스라는 건 어디 공업 단지에서 산업 재해가 터졌을 때에나 유출되지, 국가 공권력이 대놓고 살포할 일은 없어졌다.
그나마 옛날에는 과격한 시위·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최루가스 같은 걸 살포했지만 이건 사람을 대놓고 죽이려는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참 뒤, 일본의 옴진리교가 저지른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독가스를 대량 살상 무기로 사용한 테러 사건이었다.
이건 북괴? 알 카에다? ISIL? 그 어떤 악당들도 시도한 적이 없었던 또라이짓이었다.

옴진리교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수사되고 추적되는 걸 더 큰 사고를 쳐서 무마시키려고 한 미친놈들이었다. 빚을 빚으로 막는 것도 아니고..
하긴, 일본 제국이 옛날에는 자기가 전쟁 벌여서(중일 전쟁) 사고 친 걸(석유 금수 조치) 더 큰 사고를(태평양 전쟁) 쳐서 무마하는 상또라이짓을 한 적이 있긴 했다.

결국 옴진리교는 공권력에 의해 강제 해산됐고, 머리 치렁치렁하던 교주는 이때 체포돼서 2018년에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 요인 단독 테러: 김 정남 피살 (2017)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북한 김 정일의 장남 김 정남이.. 말레이시아의 공항에서 괴한에 의해 VX라는 독극물을 얼굴에 강제 접촉 당하고는 곧장 목숨을 잃었다.

VX는 옴진리교 시절의 사린보다 독성이 훨씬 더 강하고 위험한 물질이다.
검색을 해 보니 사린은 화학식이 C4H10FO2P이고 VX는 C11H26NO2PS이네.. 어쨌든 VX가 더 복잡하고 정교하고 더 흉악한 물질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앞의 1~3처럼 호흡기로 독가스 주입이라기보다는.. 황산 테러 쪽에 가깝다. 그래도 화학 무기의 범주에 드는 건 변함없다고 하겠다. 화약의 힘으로 금속 파편을 박아 넣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말이다.

이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가스의 사용 범위가 작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방면에 대한 위험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으니 각종 군사 훈련이나 민방위에도 '화생방'은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같다.
다음은 이런 독가스· 독극물에 대한 자잘한 여담들이다.

(1) 위에서 소개된 저런 독가스들은 상당수가 반도체의 제조에도 쓰인다고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너무나 값싸고 흔하게 접하는 컴퓨터 부품들이 평범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겨우 인간문화재 장인 급 스킬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하고 정교하고 위험한 공정이 필요하다.

(2) 살충제는 사람에게 전혀 무해하면서 벌레만 골라서 죽여 주는 물질이 아니다. 사람이 죽기 훨씬 전에 벌레부터 먼저 죽게 해 주는 물질일 뿐.. 에프킬라는 파리· 모기의 입장에서는 극악의 독가스일 것이다.

(3) 독사의 독은 신경독 아니면 출혈독으로 나뉘는데, 독가스나 살충제도 신경을 조지거나 아니면 폐를 조져서 질식· 익사시키는 것으로 작용 기질이 나뉜다.

(4) 먹는 독이나 폐로 흡입하는 독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독사의 독은 물려서 혈관에 다이렉트로 주입 당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평범하게 먹는다면 그냥 단백질로서 위장에서 소화될 뿐이라고 한다. 복어 독 같은 독이 아니랜다.

(5) 꼭 생물독이 아니어도.. 옛날에 인간이 과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엔 납이나 수은을 화장품으로 취급하면서 얼굴에 쳐발쳐발 했었다(으악~).
20세기 초에는 뭐.. 방사성 원소인 라듐 같은 걸 영롱한 빛이 나니 신비롭다면서 보석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심지어 먹기도 했었나..?? 그러기도 했다.
제일 최근에는 석면이 위험성이 너무 늦게 알려져서 세계적으로 허겁지겁 봉인하고 없애는 추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5/05/29 08:35 2025/05/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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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엔 예로부터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고 일본에 대한 증오 적개심이 풀풀 생길 전시물이 좀 있었다.

일본은 일제시대의 시작과 끝 시기에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반인륜적인 짓을 저질렀다. ‘끝’은 731 부대처럼 중일/태평양 전쟁 때 이판사판 인간이기를 포기한 짓거리이고..
‘시작’은 초기 헌병 무단통치 시기에 누구든 말 안들으면 닥치고 무식하게 다 총칼 휘두르면서 위협하고 찍어누르고 고문도 하던 걸 말한다. 둘의 차이는 ‘흉악’과 ‘흉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독립기념관은 3· 1 운동이나 독립군을 성역화하고 띄워주는 곳이라는 특성상, 일본에 대한 포커스는 ‘끝’이 아니라 ‘시작’, 흉포 쪽에 맞춰져 있다. 옛날에는 전용 전시관의 이름부터가 ‘일제침략관’이었는데 지금은 ‘겨레의 함성’(제3관)이라고 바뀐 듯하다.
“3· 1 운동 당시에 만세 시위에 참여하던 사람이 잡혀가서 이런 일을 당했다~~”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는 이게 기억에 남아 있다.

(1) 남자는 팔 하나 짤린 모습 사진.
(2) 여자는 머리는 다 풀어헤쳐지고 양팔 묶인 채 매달려서 상반신이 인두로 지져지는 모습 인형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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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렁탕 물고문이나 손톱 뽑기, 길다란 벽관에다 며칠 세워 놓는 비교적 평범한(?) 케이스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봤던 것 같다. 그러나 저거는 진짜 독립기념관 ONLY 전유물인 것 같다.

자고로 고문이라는 것의 목적은 “혐의를 인정해! 자백해!” 아니면 “니 동료들 있는 곳을 불어!”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저 때 일제 왜경· 헌병이 자행한 고문의 의도는 그냥 “너 이 X끼 이래도 만세질 할 테냐? 오냐 오늘 누가 이기나 보자!”였다. 법대로 집행하는 형벌이 아니라, 조폭 양아치마냥 그냥 해코지· 가혹행위를 동반한 공갈협박일 뿐이었다. 여자한테는 성희롱 추행 폭행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고문 하는 놈도 “이런 독한 연놈을 봤나!” 하면서 악에 받쳤겠지만, 당하는 쪽은 더 악에 받쳐서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네놈한테는 절대로 고개 안 숙인다 이 천추의 원쑤놈아!!”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 관순 정도는 워낙 예외적이니까 “이런 짓을 여고생 혼자서 벌였을 리가 없다~ 진짜 주동자를 불어!”도 추가됐겠지만 말이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백이나 정보를 받아내려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대한 독립 만세 외쳤다고 무장도 안 한 생사람 사지를 짜르고 인두로 지지나? 그건 좀 이해가 안 된다.

(1) 남자는 나도 먼 옛날 학창 시절에 학교 수학여행 때 어렴풋이 봤던 기억이 난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2) 여자는 본인이 직접 본 기억은 남아 있지 않고.. ‘콩숙이의 일기’에서 독립기념관 관람 에피소드에 저 고문 장면 사진이 있는 걸 봤던 기억이 있다. 1~3편 중 뭐더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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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에피소드에서는 콩숙이도 울고불고 하면서 “너무 끔찍하고 잔인해~~ 저 쳐죽일 일본 나쁜놈” 한다. 그리고 친구 중에 온통 일제(일본산) 전자기기를 쓰던 애가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더라. 1990년대 초엔 아동용 개그 수필집에도 저런 반일 코드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ㄲㄲㄲㄲㄲㄲㄲ
심지어 내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라는 일본어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문헌이 바로 이 책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세월이 흐르니 이젠 유 관순뿐만 아니라 노 순경, 어 윤희, 임 명애 같은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실 동료들에 대해서도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해 제법 알려졌다.
천안 말고 수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여학생인 이 선경 같은 사람도 발굴됐다.
그러나 먼 옛날부터 독립기념관에서 저렇게 인두로 지져지는 고문을 당하는 걸로 묘사된 여성은 누구로부터 모티브를 딴 걸까..??

3· 1 운동 때 누구누구가 일제로부터 온갖 참혹한 고문, 폭행, 가혹행위를 당했다~~ 요렇게 독자에게 빡침을 유발하는 기록들은 대체로 박 은식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출처이다. 거의 기독교회사 “피 흘린 발자취”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문헌을 훗날 국가기록원에서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2016)에서도 많이 인용했다.

거기 기록에 따르면(pp. 90~93)..
출신과 나이가 불명인 노 영렬이라는 여성이 저 모형에서 묘사된 것을 포함해 그보다 더한 악형을 당했던 사례라고 나온다. 소속은 학교인데 정확한 명칭도 불명이고 그냥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 소속이라고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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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안 먹이고 며칠 간격으로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악에 바친 노 열사가 "독립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를 것이다~ 너희 왜놈은 물러가라!" 이런 식으로 소리질렀다고 한다. 결국은 일본 경찰인지 헌병인지 걔들도 기세에 질려서 풀어는 줬다.

그 뒤 저 노 영렬이라는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처음에는 심지어 학생으로 소개됐다가 나중에.. 1946년도 신문 보도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면서 교사였다고 신분이 정정됐다(!!). 그만큼 베일에 싸인 인물이고, 훈장 추서 같은 것도 당연히 전무하다.

노 열사는 3· 1 운동 참여로 인해 경찰서인지 헌병대인지 끌려가서 잠깐, 어설프게 린치만 당하다 풀려났을 뿐, 정식으로 투옥돼서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울나라에서 보상을 해 주고 싶어도 못 한다.

그리고 또 생각할 점이 있다.
요즘 독립기념관 제3관엔 저 열사의 모습을 포함해서 고문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모형들이 없어진 것 같다. 최소한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말이다. 끔찍하고 섬뜩한 수위에 비해 당사자에 대한 '물증'이  불분명하기 때문인 듯?

제3관을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있는 VR 디지털 관람 기능으로 쭉 살펴봤는데.. 앞서 언급했던 팔 짤린 남자 사진이 제일 잔혹한 모습이다. 안타깝지만 이분도 정확한 신원은 불명이다.
요즘은 항일 관련 전시관에도 애들 트라우마 생길 고문 장면 묘사, 심지어 고문 체험(!!) 시설은 빼는 추세인 것 같다. 비슷한 변화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도 있었다고 한다. (고문 신음소리 재생, 벽관 고문 체험 등등..)

이상이다. 갑자기 하나 꽂혀서 별 걸 다 찾아봤네. +_+;;
아무쪼록.. 1910년대 무단 통치 치하에서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엔 저런 것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고 싶다. 3· 1 운동 시위대에다가 총질하고, 붙잡아서 투옥만 시킨 게 아니다.
한편으로 기록이 없어서 발굴되지 못하고 잊혀져 버린 무명의 독립운동 참여자 기여자들은 저 때 얼마나 있었을까~ 이것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조선/대한제국의 말기도 서민들에게 절대로 살기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동족의 무능한 암군과 탐관오리들이 자행한 트롤짓도 절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는데.. 그 뒤의 일제도 통치를 얼마나 등신같이 했으면 차라리 조선 왕조가 더 나았다고 저런 대규모 저항이 발생했겠는가? (2등 신민이라고 차별은 차별대로 하면서 비슷하게 억압, 수탈..) 이 또한 생각할 점이다.

(1)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 오늘날 일본은 헌법 차원에서 공무원에 의한 고문과 잔학한 형벌은 그냥 금지가 아니라 "절대 금지한다"라고 적혀 있다(제36조).

(2) 3· 1 운동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일제의 총칼에 완전히 제압되고 진압되는 걸로 끝났지만 이건 일본의 국제 위상을 실추시키고 걔네들에게 멘탈 대미지를 꽤 크게 입혔다. 코리언인지 누군지 어디 듣보잡인지는 모르겠지만, 쟤들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세계로 전파됐다.

(3) 오늘날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이 서대문 형무소 같은 델 들어가면.. “에에에에? 이런 잔인한 시설을 우리 선조가 만들었다고요? 그럴 리가!” 기겁을 하면서 당장 관광 가이드한테 무릎 꿇고 사죄를 하고 난리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국가 간의 관계와 개인 간의 관계는 서로 별개로 봐야 할 것이고, 선조의 잘못을 굳이 후손이 도의적인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연연하면서 난리 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옛날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린다고 하니까 그건 놓치지 않고 꼭 보러 일본인 관광객의 한국 방문이 잠시 크게 증가한 적도 있었고 말이다.

(4) 콩숙이라는 사람은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살려나?? 문득 궁금하다. 근황올림픽 같은 데서 취재 가능하면 좋겠다!

지금은 일본 대중 문화도 다 개방되고, 반일 감정도 콩숙이의 일기가 출간됐던 저 시절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반중 감정이 저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으니.. 격세지감이다. 세월 앞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5/05/20 08:35 2025/05/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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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의 군주였던 루이 15세는.. 태양왕이라고 불렸던 선대 14세나, 대혁명 때 참수를 당한 후대 16세에 비해 존재감이 작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야곱 사이에 낀 이삭 같은 느낌이랄까?
저 사람에 대해서도 인간성은 좋지만 군주로서는 무능하고 우유부단이 너무 심했다는 비판이 많다. 허나, 이 사람 시절에 다음과 같이 분야별로 여러 일들이 있기도 했다.

1. 민생 치안, 미스터리: 제보당의 괴수

1764년부터 176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제보당'이라는 지역에 늑대처럼 생겼지만 늑대는 아닌 괴물이 출현해서 사람을 습격하고 뚝배기를 깨뜨려 죽이고 잡아먹었다. 소문은 나라 밖으로까지 퍼졌고 "프랑스 너네는 들짐승 하나 처리도 제대로 못 하냐? ㅋㅋㅋ"라는 이런 비아냥이 외교계에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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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은 루이 15세는 노발대발해서 육군 병력이라도 동원해서 저놈 당장 잡으라고 분부를 내렸는데..
사건의 비교적 초창기이던 1765년 초엔 남녀 어린이들이 6명(혹은 기록에 따르면 7명)이나 같이 숲길을 걷다가 공터에서 저 괴물 괴수와 마주쳤다고 한다.

이 애들은 처신을 잘못하면 몰살 당하고 1991년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의 18세기 프랑스 판을 찍게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이때 그들은 침착하게 서로 손잡고 한꺼번에 1오 횡대로 늘어서서 괴수를 야렸다.
사람 쪽의 덩치를 아주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제대로 통했다. 괴수는 그 애들을 한참을 노려보다가 물러났으며, 그 애들 일행은 정말 다행히도 무사히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루이 15세는 이 장한 애들을 왕궁에 불러서 용기와 기지를 치하하고, 상금 300리브르를 줬다고 한다. 리더격 애한테 혼자 300, 그리고 나머지 애들한테 또 300을 줘서 나눠 갖게 했다.
(요즘 평범한 직장인 연봉에 필적하는 액수라고 한다. 1리브르는 성경의 1데나리온과 비슷한 환율인 듯..)

제보당의 괴수는 딱 한 놈만 있지는 않았던 걸로 추정된다. 그래도 몇 년간 의심 개체를 사살한 뒤에는 발견이나 피해 신고가 더 들어오지 않고 사건이 종결됐다. 오늘날로서는 증언이나 그림 말고 박제물이 전해지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

2. 국방, 과학 기술: 증기 자동차의 발명

원시적이나마 세계 최초의 자동차라고 일컬어지는 물건이 이 시절인 1770년에 발명됐다. 육군 공병 장교 출신의 발명가인 퀴뇨가 만든 '삼륜 증기 자동차' 말이다.
이 물건은 사람이 걷는 속도와 비슷하게 스스로 굴러가면서 수 톤에 달하는 무거운 대포를 견인해 줬다. 사람이나 마소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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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초의 발명답게 제대로 운용하기에는 불편하고 번거로운 점, 미흡한 점도 너무 많았다. 이 자동차는 현업에서 당장 정식으로 채용되지는 못했으며, 결과만 따지면 일단은 실패에 가깝게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는 이 사람의 아이디어와 노고를 극찬했다. 1772년부터 왕이 그에게 직접 연금을 600리브르씩 매년 지급해 줬다고 전해진다.

퀴뇨의 삼륜차(대포 수송), 에니악 컴퓨터(탄도 계산), 오늘날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 다들 처음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3. 개인사, 정치: 암살 위기

루이 15세는 1757년 초에 암살당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외출 이동 중에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이름의 괴한으로부터 칼빵을 맞았다. 하지만 때는 1월 한겨울이라 왕이 옷을 워낙 두껍게 입고 있었던 덕분에 대미지는 경상에 그쳤다. 옛날의 그 두껍고 무겁고 질긴 외투가 일종의 방탄조끼 역할을 한 것 같다.

저 암살미수범은 전근대 시절에 역적죄를 지었으니.. 곱게 죽지 못했다. 바로 잡혀가서 공범· 배후를 캐내기 위한 처참한 고문부터 2개월 가까이 당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 폐인이 됐다.
결국 단독 범행이 인정되기는 했는데, 재판 결과도 "주문: 피고 다미앵을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깔끔하고 자비롭게 나오지 않았다.

"피고 다미앵을 먼저 팔, 가슴, 허벅지를 불에 달군 쇠집게로 지진다. 그 뒤 국왕을 살해하려 했던 그 단도를 오른손에 쥐게 하고 그 손을 유황불로 태워 버린다. 다음으로 지졌던 부위에다 끓는 납을 붓고, 사지를 말 네 마리로 끌어당겨 거열하고 시체를 불태운다"...;; 판결문이 이렇게 쓸데없이 디테일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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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꼴을 보며 루이 15세 당사자는 "짐이 진짜로 죽은 것도 아닌데 너무 잔혹하게 처벌하지는 말게나" 선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아니 되옵니다 폐하. 왕을 시해하려 든 자에게는 후대를 생각해서라도 무관용 일벌백계를 내려야 하옵니다."라는 항변과 함께 거절됐다.

그래도, 프랑스는 잔혹하던 구체제 시절에도 연좌제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저 범인의 직계가족은 국외 추방,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성을 갈고 신분세탁만 하는 선에서 뒤끝이 마무리됐다. 오히려 루이 15세는 그 범인 유족들에게 개인적으로 연금을 하사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게 배려해 줬다고 한다.

훗날 조선 고종 치하의 서 재필이나 김 옥균 등이 당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매우 비교된다.
한편으로, "왕을 시해하려 든 자에게는 무관용 일벌백계" 이러던 왕조가 겨우 35년 뒤에 완전히 붕괴해 버리고, 왕이 반대로 시민의 손으로 재판 받고 단두대에서 목이 짤리는 날이 찾아왔다. (1792) 이것도 참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1) 월트 디즈니 '미녀와 야수'에서는 저 괴물 짐승도 나오고, 벨의 아버지가 발명한 삼륜 자동차도 나온다. 저 시절 프랑스의 모습을 잘 반영한 것 같다.

(2) 루이 15세 이전, 1600년대 초에 잉글랜드에서는 가이 포크스에 의한 국왕 암살 미수 시도가 있었고(1604, 국회의사당 화약 음모), 프랑스에서는 앙리 4세가 괴한에게 암살 당했었다(1610). 둘 다 예수회인지 뭔지 가톨릭 광신자의 소행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성공회 대비 가톨릭을 홀대하는 것에 불만, 후자는 가톨릭 텃밭에서 쓸데없이(?) 개신교까지 포용하는 것에 불만..
그에 비해 루이 15세 암살 미수는 종교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경우건 유럽 사회에서는 이런 역적 흉악범에 대해서도 당사자만 끔살일 뿐, 조선처럼 '삼족을 멸하는' 정도의 연좌제는 적용되지 않았다.

(3) 이 시절 프랑스 국왕들은 허벅지 각선미의 묘사에 진심이었던 것 같다. 특히 14세가 말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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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4세이고, 아래는 각각 15, 16세...
14세만이 가발이 검으며, 허벅지를 양쪽 모두 제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Posted by 사무엘

2025/05/17 08:35 2025/05/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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