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분석

1. for one's sake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경의 맨 처음 책인 창세기에서는 주요 성경 용어들이 약간 뜬금없는 문맥에서 최초로 등장하곤 한다.
창세기에 존재하는 KJV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replenish,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같은 게 있는데,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아이템은 저런 것들보다는 훨씬 덜 유명해 보인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에게 내리시는 징벌이 창 3:17에 기록돼 있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그런데 다른 모든 성경들은 because of you인 반면, 킹 제임스 성경은 유일하게 for thy sake라고 쓰여 있다.

똑같이 인과관계를 나타내더라도 for one's sake는 굉장히 긍정적인 심상이다. because of가 중립적이거나 약간 미묘하게 부정적인 심상인 반면, 쟤는 ‘누구 덕분에,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배려해서· 감안해서’라는 심상이 담겨 있다.
까놓고 말해 18장에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 40명~10명이라도 있으면 걔네들을 생각해서라도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for their sakes라는 표현이 쓰였다.

게다가 replenish가 창 1:28뿐만 아니라 노아의 홍수 이후인 9:1에서 또 나오는 것처럼, for one's sake는 역시 근처인 8:21에서 거의 동일한 문맥을 배경으로 한 번 더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또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물론 둘 다 우리말로는 because of와 마찬가지로 '-로 인하여'라고 번역해도 별 무리는 없다.
하지만 KJV도 because of가 엄청나게 많이 쓰이는데 굳이 이걸 놔두고 for one's sake가 따로 쓰였다는 것은.. 땅에 내려진 원초적인 심판과 저주조차도 그저 사람들을 엿먹이고 불편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 인간의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다른 뜻과 배려가 담겨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당장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말이다.

사실은 굳이 sake까지 안 쓰더라도 영어는 전치사 for이 단독으로 ‘위하여’(좋은 목적 one's sake) 내지 ‘인하여’(이유, 인과관계 because of)라는 뜻을 모두 지니는 구석이 있다. 이 용법을 생각하게 하는 대표적인 찬송가는 바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이다.

영어로는 Jesus died for me와 Jesus died for my sins가 모두 성립한다. 그런데 저 찬송가 후렴의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는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죄 자체는 뭔가 ‘위해서 죽어야’ 할 가치가 있는 좋은 대상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죽는다면 모를까..?

이건 희소병을 희귀병이라고 잘못 표기한 것과 비슷한 오류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찬송가 책에서는 후렴 가사를 “나의 죄 인하여”라고 수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차이점 같다.
예전에도 글로 쓴 적이 있지만, 영어의 sake는 behalf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제한적인 특정 문맥과 용법에서만 쓰인다. 한국어 문법 체계로 치면 '의존명사'와 매우 비슷한 물건이라 하겠다.

2.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이다. 이건 대다수의 기성 교회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해석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사람처럼 생기긴 했지만 생물학적으로 사람과 동일하지는 않은 천사가 인간 여성과 결합함으로써 초인적인 괴수· 거인 잡종이 태어났다. 창 6:4에 나오는 네피림..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거인이라고 번역한 이놈은 말 그대로 로버트 워들로를 능가하는 거인이었다. (20세기 초, 키가 272cm까지 갔던 관측 이래 인류 최장신 미국인)

신 3:11에 따르면, 바산의 왕 '옥'도 침대의 길이가 9큐빗.. 약 4.5미터.. 거의 아반떼 승용차와 비슷한 길이였다고 나온다. 인간의 침대가 말이다. 그리고 골리앗의 키가 6큐빗 플러스 알파다(삼상 17:4). 거의 3미터 이상..
그러니 창세기 6장의 거인도 무슨 영적 거장이니, 카인의 후예 따위로 이상하게 갖다붙일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생물학적 거인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바람직한 해석이다.

로버트 워들로는 성장판이 정신줄 놓는 병에 걸려서 키만 비정상적으로 커졌던 것이다. 발이 자기 체구와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였으며, 나중에는 발목 부상으로 인한 패혈증 때문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나 골리앗은.. 지팡이는 개뿔.. 그 키에다가 무거운 갑옷 입고 창을 들고, 전투력도 인간 흉기 급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교단 교파에서도 골리앗이 무슨 영적 거장이었다니 장수였다느니 헛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다윗은 짱돌이 아니라 영적인 돌로 신학 논쟁과 키배로 골리앗을 '영적으로' 제압했게?

이런 괴수들은 다 인간의 정상적인 평범한 유전자로부터 나온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적으로도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 또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는 보편적인 심상을 갖지만, 구약에서 창세기와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라는 용례가 명백히 존재한다. (욥 1:6, 38:7 등)

본인은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being old and full of days"라는 표현의 유사성을 근거로 욥기의 저자 자체가 모세일 것이라고도 추측을 한다만, 이건 뭐 논쟁할 정도로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3. 창세기 나머지

(1) 포도주 wine
잘 알다시피 9장에서 노아가 만취해서 곤드레만드레가 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전에도 한번 얘기했었지만.. 본인은 교리적인 근거(가나의 혼인 잔치, 빵과 잔 만찬 따위)가 있는 곳이 아니라면 wine은 “즙 < 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언급 법칙을 감안했을 때 말이다.

특히 마 11:19, 눅 7:34처럼 명백히 부정적인 음해 문맥에서까지 무알코올 포도즙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식탐 다음에 술주정이 따르는 것은 신 21:20 (부모가 막장 패륜 자식을 고발해서 죽여버리기~!! ㄷㄷ)과 대조해 봐도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성경이라 해도 문맥상 필요하다면 술도 나오고, 심지어 “There is no God”이라는 불신자 말 인용도 나오는 법이다.

(2) 누룩 없는 빵(unleavened bread 무교병)
19장에서 롯이 소돔에서 천사들을 잔치까지 베풀면서 대접하는데, 잘 부풀어오른 부드럽고 맛있는 빵이 아니라 저런 빵이 등장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율법 유월절하고 아무 관계 없는 상황인데 이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잠시 후에 소돔 불벼락을 앞두고 쟤들도 마치 이집트를 탈출하듯이 이 집을 허겁지겁 빨리 탈출해야 했던 건 사실이지만, 롯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혹시 손님으로 가장했던 천사들이 "누룩 없는 빵으로 플리즈~~" 라고 커스텀 주문을 했던 것은 아닐까?
본인은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련 강해나 주석을 아직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다.

(3) 사랑
성경에서 최초로 이 단어가 등장하는 곳이 바로 22장,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아들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라고 명랑하는 문맥이다.
모세오경 중에서는 마지막 책 신명기가 사랑이라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고, 특히 “{주} 네/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유일하게 나온다.

(4) 묵상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라, 낙타들이 오더라." (창 24:63)
여호수아기나 시편을 보면 “주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한다/하라”처럼 묵상의 대상이 같이 언급되는 반면.. 창 24:63에서는 목적어가 생략된 채 꽤 뜬금없이 이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다.
그러니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이삭이 들판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 틀고서 엄근진한 자세로 참선, 요가, 단월드 기수련, 파륜궁, 관심법(!!) 시전을 하는 장면이 떠오르기 쉽다.. ㅡ,.ㅡ;; 골수 예수쟁이인 나조차도 이 정도 선입견과 편견은 생겨 있다.

핵심은.. 묵상은 명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런 구절을 읽으면서 시 119:15 “내가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고 주의 길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지, 찬송가 가사로도 있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시 19:14)가 연결돼야 하는데..
온갖 잡다한 다른 유사품이 떠오르는 게 바로 마구니들이다.. 진짜 마구니는 법봉으로 대가리 깨뜨린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옛날의 천조국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성경을 읽은 덕분에 ?Z라는 단어를 보고 욥의 고향 우스 UZ를 먼저 떠올렸었다.
하지만 현대의 어린이들은 오즈의 마법사 OZ를 먼저 떠올린다는 카더라가 있었다. 뭐, 요즘은 오즈조차도 해리 포터에게 밀려서 한물 간 지가 오래이지만 말이다.

이런 것 말고도, 세상 매체(영화, 게임, 드라마 따위)들을 접하던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4. 유령

  • 그때에 내 얼굴 앞으로 한 영이 지나가므로 내 살의 털이 곤두섰느니라. (욥 4:15)
  • 제자들이 그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여 이르기를, 영이다, 하고 두려워서 소리 지르거늘 (마 14:26)

성경에도 딱~ Ghostbusters 풍의 공포 영화를 떠올릴 만한 정면이 이렇게 존재한다. 성경이 말하는 혼과 영이 각각 귀신과 유령으로 바뀌는 것이다. 심지어 번역 자체도 그런 스타일로 돼 있다(KJV 제외).

한 30년쯤 전엔 고스트버스터스가 “유령 대소동”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용 TV 만화영화로도 방영됐었다. “유령이 나타났다, 잔꾀와 속임수로 사람들 괴롭히는 유령이다~ㅎ”라는 주제가는
“뱀이다 뱀이다,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뱀이다~ㅎ” 트로트 “참아 주세요”와 굉장히 비슷한 풍이었다.. ㅠㅠ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에는 원래 호러 요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한 영이 나아와 {주}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그를 설득하겠나이다, 하거늘 (왕상 22:21)
  •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9)

요 4:24를 “하나님은 유령이시니...”라고 번역하는 게 말이 되겠는가?
ghost도 마찬가지. 성령님 the Holy Ghost 아니면 숨지다 give up the ghost라는 두 용례로만 쓰였다.

여담이지만, 본인의 어린 시절에 학원인가 학교에서 이름이 '혜령'인 여자애가 있었는데.. 별 상관도 없는 유령이라는 별명으로 짓궂은 남자애들로부터 놀림 받곤 했다.
본인의 이름 별명 중 하나이던 묵사발, 도루묵 따위보다는 훨씬 더 점잖아 보이는데 유령이 뭐가 그리 대수였나 모르겠다. 뭐 여자여서 유령이라는 말에 더 민감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귀신은 긴 생머리에 소복 입은 하얀 처자가 떠오르는 동양 스타일에 가깝고, 유령은 얼굴 찌그러뜨리고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거리는 게 서양 스타일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저승사자(!!)만 해도 동양은 검은 옷 검은 갓 차림의 아재이고, 서양은 낫 들고 있는 해골 아저씨이듯이.. 아이고, 갑자기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얘기가 많이 튀어나왔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1/03/25 08:34 2021/03/2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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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에 인간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직접 다녀오는 정말 초유의 이벤트가 벌어졌을 때, 정말 세계가 열광했다.
우리나라는 1969년 7월 21일 월요일, 아폴로 11호 달 착륙일 당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지구 반대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전쟁 중이었는데, 저거 중계방송을 다같이 시청하려고 잠시 휴전을 했을 정도였다.

그 시절 수많은 꼬꼬마들이 저 광경을 보면서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나 연예인이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공학자가 되고 싶다고 장래희망을 굳혔다.
그리고 2000년쯤이면 인간이 화성에도 가고 달에 식민지 하나 정도 건설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우주를 배경으로 다리 달린 로봇이 나오는 수많은 SF물들이 만들어졌다.
그런 작품에서는 비행기처럼 날개 달리고 항공역학적으로 아주 새끈하게 만들어진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비행체들이 우주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외계인 군단을 때려잡았다. (그에 비해 실제 아폴로 우주선 LM 달 착륙선의 모양은... ㄲㄲㄲㄲㄲ)

허나, 실제로 2020년이 돼 보니 현재 인간의 우주 진출 현황은 어찌 됐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화에서 묘사됐던 2001년과, 실제 2001년의 차이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난 수십 년 동안 천문학도 발전하고 항공우주 기계공학 기술도 눈부시게 더 발전했지만.. 그것과 유인 달 탐사 내지 우주 식민지 개발은 별개의 문제였다. 우주 개발은 전쟁이나 결혼 생활만큼이나 매체(게임, 영화..)와 현실과의 괴리가 매우 매우 큰 분야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식의 설레발이 세상뿐만 아니라 기독교계에도 미래 예언과 관련하여 많이 있었음을 나는 신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을 넓게 영적으로 하는 방법론이 가장 건전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지지한다.
6일이나 7년이나 1000년 같은 기간을 특별한 다른 단서가 없는 한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 당장 이해가 안 되고 실감이 안 가는 부분이 있어도.. 판단을 보류하고 가만히 묻어 둘지언정, 말을 제멋대로 바꾸고 뜯어고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고, 유대인과 교회를 구분하고,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구분하고, 영과 혼을 가능한 한 구분하고, '채우다'와 '다시 채우다'를 구분하고.. 그러니 세대주의에 대해서도 태생적으로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대외적으로 평이 안 좋은가 했더니.. 시한부 종말론과 얽혀서 오해를 살 짓을 한 게 있긴 했다.

인류의 시작과 과거 역사가 4천 년쯤 전으로 굉장히 구체적인 값이 나오니, 인류의 종말 시기도 지금쯤이면 굉장히 가까워진다.
물론 세대주의 자체가 어디 악성 이단 사이비처럼 몇 월 며칠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니 “직장 그만두고 산속에 들어가고 재산 다 교회에 갖다바쳐라” 같은 미친 짓을 권장하고 조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런 움직임이 발생할 빌미는 제공했으며, 결정적으로 종말의 징조, 조짐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불발한 설레발을 너무 많이 쳤었다.

  • 이스라엘 건국
  • 유럽 연합 결성
  • 20세기의 아주 카리스마 넘치던 모 교황과 세계적인 에큐메니즘 운동, 세기말 Y2K 문제
  • 그러면서 세계 단일 정부 단일 종교 떡밥..

이런 거 말이다.

아, 20세기 중반부터 일어난 저런 사건들이 과거에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격변인 건 사실이다. 아폴로 우주선 달 착륙에 비견될 만도 하다.
그리고 세상은 갈수록 악해지고 빗장 풀리고 타락하고 심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큰 그림’ 역시 사실이다. 뭔가 성경적으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은 그 심정은 이해가 된다. 전부 비유 묵시라고 헛소리 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갖다붙이고 적용하려고 노력해 보는 게 차라리 더 나은 자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국제 정세나 과학 기술은 아주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요소이다. 언제라도 “아니었나 보네, 아님 말고”를 시전하면서 버릴 수 있게,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서 아주 가볍고 얕게 참고만 하고 있어야 하는 사항이다. 성경에는 인류의 역사와 관련하여 철기 시대, 불의 발견, 바퀴의 발명조차도 나와 있지 않다는 걸 생각하자.

아예 초대 교회 사람들부터가 “이때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지..” 생각하다가 죽었고, 중세 때 스코틀랜드 교회 사람들은 저 교황이 '그' 적그리스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교황이 소속된 집단이 몇백 년 뒤에는 개신교를 상대로 에큐메니즘 운동을 주관하는 날이 올 거라고 그 옛날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컴퓨터만 해도.. 오늘날 같은 극도의 정보화 시대가 순기능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지금 전자, 컴공, 언어 처리, 바이오 등 분야를 막론하고 이공계들이 추구하는 상당수의 목표는 인간을 닮고 인간처럼 생각하면서 인간의 취향을 정확하게 저격할 줄 아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걸 만들기 위한 밑천인 실제 인간 군상들의 동선과 행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기반도 다~~ 갖춰져 있다. 이게 마냥 좋은 의도로만 쓰일 거라고 100%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최소한 1980년대에 우려했던 것처럼 금수저들만 비싼 컴퓨터를 마음껏 쓰면서 정보와 기술을 독점하고 대중을 통제하는 무식한 사회 같은 건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그 시절 음모론자들은 블랙박스와 CCTV 덕분에 질서와 치안이 상상을 초월하게 개선되는 것, 그리고 오픈소스 진영이 등장해서 정말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양의 정보와 기술들이 무료로 풀릴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성경에서 용이 불을 뿜는 게 미래에 등장하는 탱크나 미사일을 의미하는 거라고 이상하게 갖다붙이는 사람도 있고,
한술 더 떠서 미래엔 석유가 고갈되어서 사람들이 성경의 묘사대로 문자 그대로 다시 말 타고 냉병기를 들고 싸우게 될 거라고.. 아인슈타인이 3차 세계대전 이후 다음 전쟁의 양상을 예측했던 것과 같은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후자조차도 100% 장담은 하기 어렵다. 2010년대부터 셰일 가스가 재발굴되어 지금처럼 다시 기름값이 팍 내려가고 석유 고갈 예상 시기가 한참 늦춰질 거라는 점까지 예상한 사람은 내가 못 봤다.

그러니.. 성경으로 미래 전망은 함부로 설레발 치지 말고 영원까지 길게 보는 안목을 갖고, 한낱 국제 정세나 일개 과학 기술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불가지론에 가까운 냉정한 자세로 판단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성경은 거의 1900년 전의 요한계시록 기록 시점부터 "내(예수)가 속히 오리라(come quickly)"라고 약속해 놓았다. 도대체 어느 기준으로 '속히'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세상 정세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예수님이 지금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겠구나”, 핵무기고 스마트폰이고 구글이고 중공 폐렴이고 전부 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 그땐 그랬지” 이렇게 회상할 각오를 하고..
따분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그냥 원론적인 지침에 충실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최후 승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신의 존재 여부야 불가지론의 대상이 아니지만, 종말 내지 예수님 재림 시기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불가지론인 게 맞다고 성경에서 대놓고 쓰여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으로 살지 않고 어설픈 사회 정세 음모론에다가 믿음의 근간을 두면.. 그 음모론이나 예상이 빗나갔을 때 다른 성경의 건전한 가르침까지 같은 급으로 매도되고 부정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초신자가 실족하고 믿음이 파괴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지금은 무려 2020년이다. 이제는 근미래에 대해서 과거에 전망했던 것, 그리고 빗나간 예언들에 대한 경험과 데이터도 그럭저럭 쌓이고 있는 중이다. 다미선교회 병크, Y2K 설레발, 2012년 종말 떡밥.. 전부 도대체 몇 년 전의 해프닝이 되고 있나? 이 와중에 아직 바코드, 베리칩 음모론 믿는 사람은 좀 없어야 하지 않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된 실제 대환란기는 언제쯤 어떤 형태로 실현될지 개인적으로는 노무노무 궁금해 죽겠다. 정말 흥미진진한 사건이 될 것이다.

1940년대 말, 우리나라의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조선이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고 변명하고 절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예수님이 그렇게 꿈에도 상상 못 하던 시기에 덥석 오실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요)!! / 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ㅠㅠㅠ” 이렇게 변명하고 절규하는 사람들이 분명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천국 가면.. 모인 사람들끼리 아마,

  • "라떼는 말이야 성경 몰래 베껴가면서 읽다가 걸리면 화형이었어"
  • "라떼는 말이야 영어 성경이 200종류가 넘게 나왔고 역본 내용의 차이 갖고 키배가 벌어졌어"
  • "흥, 나는 그 세상에서 살아 본 적도 없이 바로 왔거든?" (☜ 이 케이스가 아마 제일 많을 것임..)
  • "웃기시네. 니들이 공중으로 번개같이 들려 올라가는 그 느낌을 알아?"

서로 출신과 배경 갖고 약간의 알력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성품이 변화된 뒤이기 때문에 선 넘는 진흙탕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21/03/10 19:35 2021/03/1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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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교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 침례교는..

  • 딱히 종교 개혁에서 유래되지 않았고, 더 옛날부터 있었다고 여겨진다. 천주교는 물론이고 일부 개신교 교파로부터도 박해를 받았다.
  •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세례가 아니라 침례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본다. 온몸이 물에 잠겼다가 나와야 된다.
  • 침례는 이미 구원받은 후의 신앙고백 인증일 뿐이지,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거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 특히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할례나 안수 따위와 아무 상관 없는 관행이고, 대상과 방법이 모두 잘못됐다. 적어도 10대 정도의 나이가 됐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내 믿음을 자기 말로 고백할 능력이 돼야만 침례를 준다.

* 개인의 혼의 자유의지를 매우 존중하며 단호한 정교분리를 주장한다. 미국이 민간에서의 강한 기독교 배경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국교가 있고 목사가 공무원인 나라가 되지 않은 것에는 침례교인들이 매우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건국 모델은 후대에 세워진 세계 다른 나라들과 정부에도 선한 모범 참고 사례가 되었다.

* 침례를 받을 자격이 안 되는 너무 어린 아이,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아기 등은 죽으면 그냥 바로 천국으로 간다. 유아세례를 받았건 말건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내가 이 개념에다가 개인적으로 붙인 명칭은 ‘특례 구원’이다. 이런 애들은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은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지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낙태돼서 죽은 애들, 영 유아 때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은 애들, 그리고 특별히 올해 초에 전국민에게 큰 슬픔과 분노를 안겼던 학대 피해자인 정인이 같은 애는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사실, 천국에 가 보면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 저런 특례구원으로 온 사람이 인류 역사상 더 많을 거라는 게 내 추측이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동갑내기 아기들이 지옥에 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여겨지지 않는다. 만약 그런 거라면 개독안티들이 이것 갖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온갖 신성모독적인 조롱을 늘어놔도 실드를 칠 수 없을 것이며, 사실 나조차 기독교 안 믿었을 것이다. 아니면 믿더라도 민망해서 혼자만 조용히 믿고 말지, 이렇게 당당하게 교리를 설파하고 불신자와 논쟁할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그 대신 이렇게 어리고, 특례 구원 실드가 있는 애들에 대해서는 부모가 반드시 의로 양육해서 특례 실드가 끝난 이후의 일생에 대한 대비를 시켜 줘야 한다. 의로 양육한다는 건 필요한 경우 체벌도 불사한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회초리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나중에 지옥 형벌도 무서워할 줄 알게 된다.

난 침례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의미, 개인의 자유의지와 정교 분리, 아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침례교에서 말하는 것만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원칙과 체계가 있는 교리를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다.
난 그래서 이 교리를 믿고 지지한다. 이 정도 완성도는 되니까 주위에 복음도 전할 수 있고 기독교 관련 글을 쓰고 논쟁도 할 수 있게 됐다.

이 주제에 대해서 본인과 생각이 다른 분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성품과 예정 vs 자유의지에 대해 저것보다도 논리적으로 더 잘 분간하는 교리를 믿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삼분법(영 혼 몸 구분), 하나님 왕국과 하늘의 왕국 구분(하나님 ≠ 하느님이듯이!), 창 1:1-2 간극, 문자적인 천년왕국과 세대주의 같은 건 침례교 내부에서도 똑같이 가르치지는 않는 교리들이다.

2. 종교 개혁의 유산

옛 종교개혁자들이 후세의 크리스천들에게 남겨준 것,
혹은 원래 있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봉인됐던 것을 성경을 통해 재발굴 재조명해 준 것은..

(1) 이신칭의

  • a. 마음의 회개 없는 거짓 구원, 그저 "울 교회 오세요, 그럼 님하에게 이득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삽니다" 거의 종교 영업사원 수준의 easy believism
  • b. 혹은 반대로 아예 행실의 회개와 변화가 없는 건 구원받은 것도 아님. 예수님을 단순 구원자뿐만 아니라 니 행실의 '주권자'로도 반드시 받아들여야 된다 lordship salvation

둘 다 매우 잘못된 극단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b가 자주 저지르는 오류가 뭐냐 하면 꼭 나쁜 행실만 죄인 줄 안다는 것이다. 예수 안 믿은 거 자체부터가 엄청난 죄였고 거기서 돌이키는 게 진짜 구원을 가져다주는 회개인 걸 좀 헷갈린다.

"저는 앞으로 술 담배 끊고 모든 악한 행실을 끊고 예수님처럼 경건하게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영접 기도를 이딴 식으로 해서는 절대로 구원 못 받는다! 절대로~!! 알겠는가?
a야 너무 수준 낮고 더 논할 가치도 없으니 제낀다.

(2) 만인 제사장

  • a. 목사님은 거~룩한 주의 종님임. 목사의 축도를 안 받으면 예배가 끝난 게 아님. 차 살 때, 가게 개업 했을 때는 영험한 목사님 초빙해서 안수 기도라도 좀 받아야 됨.
  • b. 아예 목사 직분 자체가 니골라 당의 잘못된 교리이다. 예배와 친교의 구분이 없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한다.;; (헐~)

이 역시 둘 다 잘못된 극단이다.
직분과 역할의 차이를 전부 우열 계급 투쟁으로 프레임 씌우고 체제를 전복시키는 거.. 보통 빨갱이들의 수법이다.

(3)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 본문 그 자체
내가 보는 성경은..

  • 헤롯 왕이 지목한 베드로 처형 시점이 유월절이 아니라 이스터라고 돼 있고(행 12:4),
  • 루시퍼와 갈보리라는 명칭이 있으며,
  • 계시록에 증인이 아니라 순교자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 '지옥' 이런 단어가 여타 성경보다 더 자주 등장한다.
  • '이사야+말라기 = 대언자들'이지.. 이거 무슨 1+1=1도 아니고, 말라기의 예언까지 이사야라고 몽땅 퉁치는 오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막 1:1-3)

뭐 등등..
에라스무스로부터 시작해서 루터는 바른 본문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이 나올 수 있게 해 줬다.

(4) 그 밖에 루터는 너무 엄근진스럽거나 몽환적이기만 하던 교회 음악도 진입장벽을 낮추려 애썼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19 08:36 2021/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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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사람 요셉

성경에서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의 끝부분을 장식하는 매우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이다. 본인은 먼 옛날에 이집트의 왕자 만화영화와 같이 모세 얘기는 한 적이 있었는데.. 모세 만만찮게 흥미진진한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블로그에다 진지하게 늘어놓은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예표 인물이 여럿 있다. 하나님 앞에서 개기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히고 죽다 살아 나온 선지자(대언자) 요나조차도 예수님의 위대한 예표이다. 그런데 요셉은 예수님과 무려 100~150가지가 닮았다고.. 무슨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법만큼이나 많은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옛날에 한국 컨티넨탈 싱어즈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라는 뮤지컬 음반을 내놓은 적이 있고, 드림웍스에서도 이집트의 왕자 다음으로 2000년에 요셉 이야기를 애니로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스토리상 속편이 전혀 아닌 작품도 그냥 2라고 붙이는 걸 좋아해서.. 옹박 2, 이집트의 왕자 2 이런 식의 작명을 거쳐서 개봉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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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세상 물정 모르는 색동옷 차림의 늦둥이 막내아들 철부지 꿈쟁이였다. 그러나 형들로부터 시기를 받아 인신매매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 노예로 전락해서 인실X을 혹독하게 체험하게 됐다..;;

그 뒤 이집트에서 겨우 기반을 잡는가 했는데 이번엔 성폭행 흉악범 누명을 쓰고 감방에 갇히고 말았다. 석방되는 동료 죄수의 꿈을 해몽해 줬지만, 그 동료의 무관심으로 인해 2년을 감방에서 더 썩었다. 요즘 현대인들의 정신 상태였다면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에 억울하고 원통해서 몇 번이고 자살했을 법도 한 상황이었다.

요셉은 성경에 인생 흑역사나 결점이 기록된 게 전혀에 가깝게 없으며, 특히 이성의 유혹을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FM대로 제일 모범적으로 잘 대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당장 돌아온 게 저 지경이었다.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성경에 자세히 적혀 있지는 않지만... 보디발의 아내 겁탈 누명의 경우, 보디발도 이건 요셉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싶다. 요셉이 아니라 자기 마눌에게 바람기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을 것이다.
일개 노예가 감히 주인의 아내를 범한 건 최악의 파렴치 중범죄이며, 이건 투옥이 아니라 그냥 즉결 사형감이다. 만약 요셉이 진짜 범인이라면 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을 완전히 무죄방면해 버리면 자기들의 입장이 심히 난처해진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으니, 절충안으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고 그냥 감옥에 격리시키는 것으로 일을 덮은 게 아닐까? 요셉이 투옥된 뒤 보디발 집안에서는 대판 부부싸움이 벌어졌지 싶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요셉은 "해석이란 건 {주}께 속해 있지 않습니까?"라는 명대사와 함께 파라오가 꾼 뒤숭숭한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냈다. 덕분에 그는 이집트에서 의전 서열이 파라오의 바로 다음 2위인 총리로 순식간에 신분이 바뀌었다.

그리고 꿈에서 계시되었던 바와 같이, 7년 풍년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흉년 기근이 창궐했다. 이에 대한 대비가 철저히 된 나라는 이집트밖에 없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도 곡식을 사러 이집트까지 찾아와서 요셉을 대면하게 됐다. 자, 그럼 요셉은 형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이건 요셉이 지혜를 발휘해서 거의 하나님 급으로 공의와 사랑을 적절히 보이며 처신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마냥 "오 어째 이런 우연이~! 형님들 잘 오셨습니다~ 난 이집트 총리가 됐답니다~ 멋있쪙?" 할 수도 없고, "오냐, 옛날에 날 노예로 팔아넘겼던 네놈들이 제 발로 찾아왔군. 이제 내가 보복할 차례다. 한번 제대로 엿먹어 봐라" 이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처음에는 까칠하게 굴면서 형들이 자기 정체와 과거의 죄를 제 발로 털어놓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 생존은 가능하게 기본적인 곡식을 무료로 챙겨 주긴 했다. (받았던 곡식값을 자루에다 같이 반환함)
형들이 과거의 죄를 완전히 회개했고, 막내동생 베냐민을 위해서는 필살의 형제애를 발휘하여 차라리 자기들이 대신 노예로 잡혀 있겠다고 호소하는 걸 확인하고서야 요셉도 드디어 엄격 진지 근엄 모드를 풀고 자기 정체를 밝혔다.

성경에서 요셉은 울었다는 장면이 유난히 자주 기록돼 있다.
어린 시절에 형들이 갑자기 자기를 매정하게 생까면서 노예상에게 팔아넘길 때, 억만 리 타지에 끌려가서 노예 취급 받을 때도 당연히 멘붕 해서 "아빠~ 보고 싶어어헝헝" 식으로 엄청나게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엔 그런 건 적혀 있지 않고 더 고차원적인 이유로 운 장면만 기록됐다.

특히 저렇게 형들에게 커밍아웃 하기 직전엔 요셉은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모두 물러가라"부터 시전했다. 그 뒤엔 궁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으허허허헝엉엉~!" 하며 울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방영했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같은 분위기를 생각하면 된다.

나중에 부친인 야곱이 죽고 장례까지 치르자,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요셉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고 우리를 해코지 하면 어떡하지?" 이런 심정으로 요셉에게 자비를 호소하는 애원 간청을 했다. 성경에 따르면 요셉은 이때 마지막으로 또 울었다. 형들이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고 자기 진심을 몰라 준다고.. 이건 요 11에 기록된 예수님의 울음 장면과 매우 비슷한 분위기라고 보면 되겠다.

이것이 성경의 스토리이다.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요셉이 형들과 이렇게 밀고 당기는 동안, 형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의 믿음도 시험대에 올라서 야곱 모드와 이스라엘 모드를 오락가락했다. 야곱 모드일 때는 멘붕 자포자기 해서 "아이고~ 오래 살아 봤자 험한 꼴밖에 안 보고.. 난 어서 뒈져야지ㅠㅠㅠ" 내지 "요셉으로도 모자라서 베냐민까지? 절대 못 보내~" 같은 육신적이고 꼰대스러운 고집을 시전했었다.

요셉의 일생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다와 며느리 다말 개족보 이야기(38장), 그리고 하몰-세겜 지역 보복 학살극(34장) 사건도 삽입장으로 들어가서 철도 노선으로 치면 간선에서 짧게 뻗어 나간 지선 역할을 한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1/02/16 19:34 2021/02/1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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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스천의 삶

성경 말씀대로 크리스천답게 사는 것,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내 성깔을 죽이고 희생과 헌신과 손해를 수반하고 일면 바보같이 사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건 그렇다고 무슨 인생의 대단한 낙을 포기하고, 아무 멋도 재미도 없이 금욕주의 꼰대같이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뭐, 옛날 중세에는 도를 넘게 꼰대같은 관행이 있긴 했다.
가령, 성경은 음행만 죄로 규정하고 금지할 뿐,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부의 사생활은 뭘 하든 서로 좋으면 하나님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귀히 여겨 주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옛날엔.. 이거 뭐 섹스 자체를 추잡하고 지저분한 짓으로 규정해서 오로지 불가피한 욕구 해소와 자녀 생산 수단-_-으로만 치부했다. 전날 부부관계를 한 사람은 이튿날 예배 참석도 금지당했다. (무슨 레위기의 부정한 사람 규정처럼) 그러면서 피임까지도 금기시됐다.;.
이 정도면 인간에게 생식기와 성욕 같은 걸 만드신 하나님의 성품이 추잡하고 더러운 거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다. 대외적으로만 거룩한 범생이 같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사석에서는 지위를 이용해서 여성에게 더러운 성추행을 일삼는 놈들도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어 왔다. 그래서 과거에 마 광수 교수조차 저런 부류의 인간들을 극혐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마 교수야 내세를 부정하는 무신론 불신자였고, 우리 솔직해지자는 명목으로 소설을 꽤 야하게 썼었다.;;; 하지만 그분은 위선을 철저히 배격하는 소신이었으며, 오프라인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절대 안 넘고 학생들을 깍듯이 존중해 주기도 했다.)

과거에 대한 반대급부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체로 이쪽 아니면 저쪽의 잘못된 극단으로 치닫는 편이다.
체벌 자체는 성경적인데 그걸 빌미로 미친 아동학대를 저지른다거나, 아니면 아예 정상적인 체벌까지 싹 금지하고 애새끼들을 전대미문의 싸가지없는 세대로 키운다.

흉악범 살인범만 사형에 처하랬는데 그걸 빌미로 무고한 사람도 누명 씌워 사법살인으로 잡는다거나, 아니면 아예 사형 집행을 안 하면서 직무를 유기하고 가해자를 평생 공짜로 재우고 먹여 준다. 이게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며, 피해자의 인권이 억울하게 짓밟히는 건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성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너무 억압적이었다가 지금은 세상 망조 들 정도로 너무 풀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과 오해, 악한 추측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최초의 여성 이브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반발하여 원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않고서 “만지지도 말라”를 덧붙였다. 학교에서의 두발 단속에 반발해서 아예 삭발하는 것과 비슷한 심보라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뱀의 유혹에 곧장 넘어가 버렸다.

달란트/므나 비유에서 게으르고 악한 종도 주인에 대해 사람을 억압하고 갑질하고 착취하는 악덕업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하나님에 대해서 비슷하게 오해하고 악한 편견을 가진 삐뚤어진 심보를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에게 해 준 건 없으면서 자기 안 믿으면 몽땅 지옥에나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저열한 신 정도로 생각하지, 죄와 심판에 대한 경고라든가 십자가에서의 은혜와 사랑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으로.. 세상에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 지금 즐기고 있는 것들을 못 하게 된다는 피해의식 비슷한 인식이 좀 있다. 그러니 “좀 있다가, 나중에, 죽기 직전에 예수 믿을게” 이런 반응이 나온다.
아니, 그 정도 반응이면 차라리 감지덕지다. 요즘 매체에서는 천국은 아주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곳이고 지옥이 화끈하고 재미있는 곳처럼 묘사된다.

“유능한 변호사들은 몽땅 지옥에 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거주자 간에 소송이 붙으면 지옥이 승소할 것이다”야 피식 웃고 말 개드립이지만.. 심지어 “천국이 저런 꼴도 보기 싫은 꼰대 위선자들이나 우글거리는 곳이라면 난 그냥 지옥 가고 말겠다”처럼 흘러가는 지경이다.

이건 영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시국에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복음을 어떻게 지혜롭게 전해야 할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옛날에는 불신자라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정도의 관념이라도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좋은 것, 즐거운 것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성생활이든 음악 스타일이든, 인간관계든... 이것이 변함없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금지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인생의 낙을 뺏어가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라 진짜로 우리를 ‘위해서’ 금지되어 있는 것들이다. (혼전순결, 육신적인 정욕에 대한 각종 절제 등)

better late than never.. 아예 지옥을 가 버리는 것보다는 죽기 직전에라도 간신히 믿고 구원받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건 젊고 팔팔하고 능력 좋을 때부터 진작부터 구원받고 주님을 섬기고 그분과 교제하며 산 것에 비해서는 명백하게 “손해”이다.
하나님이 “그럼 나 죽기 직전에만 믿으면 되겠네” 정도의 유치한 잔머리 계산 따위에 농락당할 지능일 리는 만무하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신자조차도 자기도 솔로몬 같은 부귀영화도 좀 누리고 수백 명의 미녀들과 원나잇 스탠드(!!)도 왕창 해 보고.. 그러면서 구원도 덤으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꽤 편하게 생각한다. 상금과 훈장 둘 중 하나만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상금에서 훈장의 제조원가만 제외한 나머지 상금과 훈장을 같이 받을 수는 없을까요?” 같은 잔머리를 굴린다. 훈장의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를 모르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 생활이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무조건 정반대 상극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물질적인 복과 세상적인 성공을 허락해 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그 사람에게 언제나 마냥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니다!

또한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더 복되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굳이 전도서의 저자처럼 평생을 온갖 사치 향락과 오덕질과 연구 실험 하면서 진 다 빼고 말년에 가서야 결국 “모든 게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허무하게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
젊은 나이에 미리 그걸 말씀을 통해 간접 경험으로 체득한 뒤, 동일한 시행착오를 또 겪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복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예수 믿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그렇게 진짜 수준 높고 영원한 행복, 평안, 낙, 멋, 재미 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고 당장 보이는 것을 넘어서 영원을 보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지금 세상에서 학교나 직장에서의 본분도 아주 고차원적으로 행할 수 있다.

일찍 예수 믿고 성경을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 손해가 절대로 아니다. 좋은 것이 모두 거기에 있다. 아니, “좋다, 즐겁다, 선하다” 등의 정의 자체가 바뀔 것이다. 찬송가 가사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는 빈말이 아니다. 그렇게 해 볼 가치가 있으니까 다 생각이 있어서 나온 말이다.

2. 판단 문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우리가 남이가" 양비론 퉁치기(?)를 암시하는 듯한 구절이 있다.

  • 판단받지 않으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마 7:1-2)
  • 죄 없는 자부터 먼저 돌로 치라 (요 8:7)
  • 교회 내부 교인간의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들지 마라 (고전 6:6-7)

이건 참 훈훈하게 들리지만, 한편으로 지 죄를 슬쩍 은폐하고 넘어가려는 의도로 악용에 가깝게 오· 남용되는 빈도도 굉장히 높은 구절들이다.
교리 쪽에서 제일 흔한 오류가 교회와 유대인 혼동,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혼동, 예정과 자유 의지 혼동 같은 것이라면.. 행실 쪽에서 제일 흔한 오류는 바로 저런 유형이지 싶다.

세상에서는 아무 사람이나 덥석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양심과 자율과 사랑(?) 대신, 시스템과 법과 매뉴얼대로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려 애쓴다.
신약 교회는 그런 세상 조직보다야 더 유도리 있게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 것 내 것 구분도 없는 무법천지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하늘나라에서 받는 보상을 목표로 신앙 열정페이? 좋다. 그 자체는 종교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굉장히 신중하게 조심해서 적용되어야 하는 관행이다.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교인이라 해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공과 사를 구분해서 선을 그어야 하는 영역 구분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 관계에서건 남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해 주고, 호의를 권리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안 그러면 가족 같은 교회가 '가~~족같은 교회'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 된다. 회사만 가족 같은 회사가 있는 게 아니다. 물론, 반대편 극단인 목사/전도사 노조..?? 이딴 것도 병신 미친짓이긴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은 교회 하나로 충분하지, 기독교 기업, 기독교 국가 같은 걸 만들지 않으신 이유를 생각해 보자.
종교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한 제일 원초적인 조직인 교회 하나, 신학교 하나조차 오래 유지를 못 하고 교리 때문에 찢어지고 사람 때문에 분리되고 파편화되는 게 이 바닥의 생리이다. 하물며 신앙의 이름으로 돈이나 권력까지 다루는 조직은 만들어 봤자 서로 의만 상한다. 일반 불신자 경영자가 운영하는 기업만치도 못 돌아가고 폭파될 것이다.

그 반면, 교회는 사람을 스펙이나 능력으로 평가하거나 짜르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만치 작은 죄의 누룩 하나, 연약한 지체가 시험 들고 실족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반응해야 하는) 조직은 없다. 물론 죄를 책망하는 진리 팩트폭격에 지 혼자 자존심 상하고 삐치고 발끈해서 뛰쳐나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데.. 두 상황(약함 vs 악함)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성경은 "판단하지 말라" 바로 다음에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이어진다.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판단을 해야 된다.
"죄 없는 자부터 먼저 돌로 치라" 다음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살아라"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성경은 끝까지 꼼꼼히 다 읽어봐야 된다.

끝으로 신자간의 법정 분쟁 문제는..?? 이건 마치 교회와 세상 정부의 관계, 교인과 정치의 관계만큼이나 미묘하고 민감한 구석이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일체 세상 법정에 의지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3. 박해에 대한 대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교분리를 지지하며, 위의 모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한다. 특히 군대에도 가며, 필요하다면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는 것도 불사한다.
그런데 그 나라가 개인의 신앙을 간섭해서 예수 못 믿게 한다거나 교회를 핍박한다면, 혹은 교묘하게 핍박하는 듯이 보인다면 어떡해야 할까?

기독교 신앙은 "가능하면 이 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이다.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고, 죽을 각오까지 하고 싸우라. 죽으면 죽으리이다"가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다가 진짜로 순교할 수도 있지만, 섭리가 있어서 살아서 돌아올 수도 있다.

무슨 옛날 일본군 같은 무조건 나가 죽어라 카미카제 특공대가 아니다.
그리고 "주여, 내게 고난의 십자가를 얼마든지 내려 주시옵소서" 이건 교만 만용 객기이며 '지나친 의로움'이다. 저건 예수님보다 더 의로운 짓거리이다. 저렇게 깝치는 애들은 진짜 고난 시험이 실전으로 닥쳤을 때는 베드로보다 더 큰 실수를 하고, 행 19에 나오는 7형제들보다 더 큰 망신을 당할 것이다.

도피, 망명 등 최대한 안 부딪히기 위해 노력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소극적으로 항거하고, 핍박이 가해지면 받고, 그래도 위의 권위자와 통치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주여 저 (새끼)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숭고하게 간구하는 게 FM이고 가장 이상적인 대처이다.

저걸 인간의 육신만으로 위선 가식 연기 없이 실천한다는 건 딱 잘라서 전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게 십자가의 권능이고 기독교의 능력이다.

그런데... 저게 예수쟁이들로 하여금 뻔히 보이는 시국을 분간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고, 멀쩡히 챙길 수 있는 정당한 권리까지 바보 병신같이 호구처럼 가만히 있다 뺏기라는 얘기도 아니다. 그건 마치 기도만 죽어라고 하면 공부 안 해도 시험 100점 맞을 수 있다는 소리와 같고, 기도만 죽어라고 하면 병에 걸려도 병원 갈 필요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그래서 이런 영역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미되어 신앙생활의 좌파와 우파, 또는 매파와 비둘기파 성향이 나뉜다.
북한에서도, 옛날 로마 제국 초대 교회 시절에도, 정들었던 교인들이 하나 둘 잡혀가고 순교하고, 교회 안에 배신자 밀고자가 튀어나오고, 아무리 기도해도 당장 박해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혈기 넘치는 젊은 청년들 중심으로 “우린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냐? 우리도 힘을 모아서 보복하러 가야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로마 정부나 김정은 정권 따위 갈아엎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엄마 감성!!) 신앙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영화 <바울>, 모 지하 교회 출신 탈북자 증언 등 참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지금 대한민국이야 북한 같은 기독교 박해는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민감하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 중공 폐렴 대처를 핑계로 이상하게 교회에다가만 감염원 누명을 과장해서 씌우고 모임에 불공평하게 제약을 가하는 것조차 명백히 불순한 수작이자 박해로 간주하고, "이런 정책까지 마냥 고분고분 따를 수만은 없다. 적극적으로 청원을 넣고 항의하고 대항해야 한다, 힘을 모아서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내가 조심스럽게 내리는 결론은.. 그런 운동은 아직까지는 그냥 개인별로 자기 신념과 재량에 따라 참여하고 활동할 사항인 것 같다.
옛날 LA 폭동에다 비유하자면, 성경에 명시된 권리를 행사해서 총 들고 집 지키고 폭도들에게 발포하는 것도 훌륭한 크리스천 시민의 모습이지만, 한편으로 평소에 워낙 선행을 많이 베풀고 평판이 좋아서 폭동 때 오히려 흑인들이 앞장서서 집을 지켜 줬다는 Mama Kim 아줌마 같은 사람도 예수쟁이들 중에서 더 많이 나왔어야 했다. 두 면모가 모두 필요하고 적절히 발휘돼야 한다.

국가 정책과 교회 활동이 서로 충돌하고 이것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저항과 투쟁이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최후의 수단이 동원되기에 앞서, 신자들이 잘 행한다면 그 문제를 원천적으로 예방· 회피하거나, 정말 초월적인 상호 해피엔딩으로 해결될 여지가 없지 않은지를 꼭 살펴봐야 할 것이다.
좌우 성향의 균형이란 건 이런 해법을 찾으라고 있는 개념이다.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빨갱이들은 좌우 균형과 아무 상관없고, 그냥 잡아 죽여야 할 기생충 암세포 버러지일 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11/06 08:35 2020/11/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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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성경 풀이하기

1.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음

"무엇보다도 너희끼리 뜨거운 사랑을 품으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으리라." (벧전 4:8)
라는 말씀과 관계가 있는 구절들은 내가 아는 한 다음과 같다.

(1) 사랑의 위력/효과에 대한 말씀의 원조는 잠언이다.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되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 (잠 10:12)

(2) 저기서 말하는 사랑은 교회 지체간의 brotherly love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에서 언급돼 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친절하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 (롬 12:10)
"형제의 사랑을 지속하고" (히 13:1)

(3) 지체들간에 그렇게 사랑한다면, 특별히 누군가가 오류에 빠져 잘못 행동하는 것을 사랑으로 잘 권면하게 된다.
"형제들아,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잘못하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그의 길의 잘못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을 그가 알게 할지니라." (약 5:19-20)

이런 게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면서" 진리를 얻어 가는 과정이다~!
물론 머리로 이렇게 아는 것하고, 진짜로 성령의 열매로서 사심· 가식이나 조건 없이 사랑이 실천되어 나오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인 것을 알 필요가 있다.

2. 야고보서와 로마서

성경에서 야고보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 의롭게 된다”를 가르치면서 언어 통사와 논리 구조상 로마서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두 책의 텍스트를 입력시켜서 컴퓨터로 구문 분석을 했더니 통사론적으로 모순 판정이 나왔다는 카더라 통신이 전해지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했는지, 믿을 만한 결과인지 출처가 불분명하다.

두 책은 똑같이 아브라함을 거론하고 똑같이 창 15:6까지 인용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정반대로 전개된다. 이걸 보면 굳이 기계가 아닌 사람이 보더라도 두 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롬 4: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보거니와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고 단지 믿음만으로 되지 아니하느니라. (약 2:21-24)


오죽했으면 믿음 덕후 종교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가 성경 정경이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정했으며, 차마 쓰레기라고는 말 못 하고 지푸라기 같은 책이라며 극딜을 가했다. 참고로 야고보서는 신약 성경 중에서는 시기적으로 제일 일찍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의 필요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로써 그 믿음이라는 게 실체가 있다는 것이 인증된다”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예전에도 비유를 들었듯이, 자동차가 시동이 걸렸으면 공회전만 하지 말고 변속기를 D로 넣고 앞으로 나아가야(행위의 열매) 존재의 의미가 있다.

N에서 공회전만 하면 그 자동차는 아무 쓸모가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의 존재(구원과 믿음)와 작동 자체가 거짓인 건 아니다. 그런 차원인 것이다.

히 5:9에 따르면,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직접 몸소 고난을 받고 섬김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완전하게 됐다고 한다. 이건 예수님이 성육신 이전에는 신으로서의 능력이나 레벨이 2% 정도 부족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치 노아(창 6:9)나 욥(욥 1:1)이 perfect였다고 해서 한 치의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듯이 예수님에 대한 made perfect도 그런 자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수님이 행위를 통해서 뭔가 공개적으로 인증, 입증을 받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조차 본을 보이셨는데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가식 위선적인 선행이 아니라 믿음의 선행을 실천해 보여야 그 믿음의 실체를 대외적으로 인증받고 남에게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말하는 바이다.

이 외에도 야고보서에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약 1:15)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과 대조된다.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룸”(약 1:3)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롬 5:3-4)과도 대응하는 구석이 있다.

3. 노아의 날과 롯의 날

본인은 우주(지구 포함)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한 신의 창조를 믿으며, 연대기에 관해서는 오래된 우주와 젊은 인류를 지지한다고 이 블로그 글을 통해 몇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의 간극(gap)을 믿는다. 이것이 과학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간극 지지자라면 벧후 3:6의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이 노아의 홍수가 아닌 더 큰 우주적인 이전 세상의 심판과 멸망이라고 본다. 그러나 반대론자는 이것도 무조건 100% 노아의 홍수라고 여긴다.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걸까?

본인은 예전에 여러 논리와 비유를 들면서 간극이 성경 교리 차원에서 가능하고 옳으며, 이게 지질학· 천문학 관찰과도 조화를 가장 잘 이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벧후 3:6이 노아의 홍수 얘기가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기' 컬렉션에다가 항목을 개설하여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하겠다.

성경적으로 볼 때 노아의 홍수는 소돔· 고모라의 멸망과 호응하고 짝을 이룬다. 전자는 물바다, 후자는 불바다여서 그런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도 성경에서 노아의 홍수와 거의 대등한 급으로 굉장히 자주.. 악과 심판과 폐허의 상징으로 두고두고 언급된다. 즉, 인지도가 매우 높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는 인간을 포함해 코로 호흡하는 육상 동물만 다 죽었지, 다른 어류· 식물· 곤충 따위는 굳이 방주에 타지 않아도 멸종하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는 뭐.. 그 지역에 있는 생명체들은 몰살을 면하기 어려웠겠지만, 면적이 노아의 홍수보다는 훨씬 좁았다. 두 심판은 강렬하긴 하지만 규모 면에서 전면적이지 않고 부분적(partial)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 본문을 살펴보자.
베드로후서는 바로 앞 2장의 5~6절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사례로 저 두 사건을 쌍으로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예수님도 눅 17:26-30에서 노아의 날과 롯의 날을 같이 거론하면서 둘을 쌍으로 엮으셨다. 이 정도면 둘이 매우 비슷한 심상이라는 건 성경적으로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반면, 벧후 2의 바로 다음 3장은 어떤 문맥인가?
이 홍수와 나란히 대응하는 불 버전은 하늘과 땅을 통째로 불태워 없애 버리는 것이며(7절), 겨우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정도하고는 쨉이 안 된다. 계속해서 10~12절을 읽어 보면, 거의 원자력 핵융합/핵분열 급의 전우주적 물질 붕괴가 묘사되어 있다. 단순히 산소에 의한 연소가 아니다.

이런 묘사는 벧후 이외의 다른 책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저 불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와 차원이 다른 것과 동급으로, 과거의 물 심판 역시 노아의 홍수와 같은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논리이다. 2장 5절도 노아의 홍수이고 3장 6절도 노아의 홍수라고?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맥에서 또..??
아래의 비례식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진지하게 다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노아의 홍수 : 소돔과 고모라 유황불 =
???? :
하늘과 땅이 몽땅 불로 멸망, 물질 붕괴

4. 수식 대상과 범위

위의 3번 아이템과 이어지는 내용인데..
성경에는 긴 문장에서 수식의 대상과 범위를 잘 분간하며 읽어야 하는 부분이 좀 있다.

(1)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중략)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벧후 3:6-7)

벧후 3장을 처음부터 쭉 읽어보면 종말과 재림을 믿지 않는 비웃는 자들이 나타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그것으로 말미암아”와 연결되어 비웃는 자와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다음 사건은 “현 세상은 불로써 멸망할 것”이다. 걔네들 때문에 이전 세상이 물로써 멸망한 게 아니다.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거리 차이 때문에 저렇게 읽히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과거의 물 심판은 미래의 심판하고 그냥 대조 대구를 이루기 위해 언급되었을 뿐이다.

(2)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세상의 창건 이후로’는 생명책의 이름 등재 시기를 수식한다. 어린양의 도살..;; 시점을 수식하는 게 아니다.
문장의 통사 구조는 중의성을 지니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뒤에 계 17:8에서 대놓고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가 분명하게 다시 등장한다. 안심하시라.

어린양이야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딱 한 번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했다. 어린양의 도살 시점은 계 5:6에서 “전에 죽임을 당했었던” as it HAD BEEN slain이라고 대과거 완료 시제를 통해 표현돼 있다.
참고로 마 1:6에서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 전처 ex-wife라는 개념도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과거 완료 시제로 표현됐다는 걸 생각하자. (지금은 우리야가 아닌 다윗의 아내이다 / 지금은 죽지 않았고 살아 있다~ 계 1:18)

5.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

성경의 복음서에는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가 있다. 전자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관점에서 묘사한 마태복음에 있고, 후자는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 관점에서 묘사한 누가복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에 비해 유대인 민족색이나 왕국복음 같은 얘기가 덜 나오며, 킹 제임스 성경은 비유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를 음역이 아니라 아예 영어 파운드로 로컬라이즈 번역해 버리기도 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종 세 명이 각각 5, 2, 1달란트씩을 받는다. 그걸 밑천으로 각각 5와 2달란트.. 즉 정확하게 수익률 100%를 달성한 종은 칭찬을 받지만, 1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걸로 아무것도 안 하고 돈을 묵힌 죄로 바깥 어둠 속으로 추방당한다. 이 장소는 성경적인 심상으로 볼 때 지옥으로 여겨진다. 즉, 게으르고 악한 종은 아예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나 므나 비유에서는 종 10명이 각각 1므나를 “동일”하게 받는다. 그리고 1므나를 밑천으로 투자해서 10므나, 즉 수익률 1000%를 낸 사람도 있고 5므나(500%)를 번 사람도 있어서 수익률이 차이가 난다. 달란트와 달리 원금 별도는 아니고 원금 포함인 것 같긴 하다만.. (달란트는 5+5, 므나는 1-1+10)

여기서도 1므나로 아무것도 안 한 종은 주인에게서 꾸중을 듣는다. 하지만 받았던 원금을 빼앗기는 것으로 끝이고, 추방까지 당하지는 않는다. 심판이 집행되어 처형 당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므나 비유는 아무리 봐도 구원을 잃지 않고 보상만을 잃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을 빗댄 얘기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저건 그리스도의 심판석 등급이다.

이 정도 차이는 세대적 진리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간할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이 성경 본문에서 요즘 추가로 주목하고 있는 아이템은 바로.. 예수님의 칭찬도 두 비유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마 25:21은 “네가 적은 것(few - many 少)에도 신실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눅 19:17은 “네가 아주 작은 것(very little - big 小)에도 신실했다”라고 말한다. 전자는 일의 양, 금전의 액수, 물건의 개수를 따지고, 후자는 일 또는 물건의 규모를 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뭐 언뜻 보기에는 구분 없이 섞어 써도 별 차이 없으며, 그게 그 말 같게도 들린다. 하지만 왕국 복음에서는 “적은 일에 신실함”이 나오고 은혜의 복음에는 “작은 것에 신실함”이 언급되는 것에도 뭔가 미묘한 영적 통찰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최소한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의 차이 같은 차이는 있지 않을까? 이 역시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11/03 08:34 2020/11/0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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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e -- 포도주 또는 포도즙

웰치스 포도주스는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음료수이다. 진짜 과즙 에디션과 환타 비슷한 청량음료 에디션(스파클링)이 모두 존재하는데,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자주 보는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상표는 '토머스 브램웰 웰치'라는 감리교 목사 겸 치과의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주의 만찬 때 사용할 '알코올이 안 들어간 포도즙'을 어떻게 잘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포도즙에 대한 고유한 저온살균법(pasteurization)을 개발했다.

어 그런데 영어 단어가..? 세균학의 아버지인 그 루이 파스퇴르에서 유래되었다. 웰치는 파스퇴르와 거의 동시대인 19세기 사람이었다.
우유나 주스에 대한 저온 살균법은 굉장히 획기적인 기술이었기 때문에 아예 "포도주스를 파스퇴르화한다"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과즙을 살균한답시고 무슨 고기 국물마냥 펄펄 끓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맛 변하고, 비타민 다 파괴되고..

성경에서 wine은 포도주와 포도즙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포도즙을 짜 놓으면 얼마 못 가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곤 했기 때문에 언어 차원에서 둘의 구분이 불분명했을 정도였다. 확 깨는 방식으로 비유하자면 지옥과 불못의 관계만큼이나 그게 그 말 같다는 것이다.

더구나 성경에서 wine이 최초로 등장하는 곳은 9장, 노아가 술 취해서 벌거벗고 드러눕는 장면이다. 킹 제임스 진영에서 주장하는 "최초 언급의 법칙"을 감안한다면, 성경의 wine은 문맥상 분명한 근거가 있지 않은 한 '포도주'를 먼저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령, 욥 1:18의 경우 욥의 자녀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놀던 중에 재앙을 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 11:19 같은 내로남불 음해 문맥에서까지 '포도주'를 기피하고 '포도즙'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식탐에 술주정뱅이..)

옛날에는 냉장이고 살균이고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깨끗한 물은 세균에 오염되기 쉽고 오래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맥주나 포도주를 음료수처럼 일상적으로 마시게 됐던 곳도 있었다. 물을 김치나 된장처럼 처리한 셈이다.
물을 끓여서 마시면 된다고... 그것도 오늘날이니까 쉽게 가능하지 주전자고 가스레인지고 커피포트고 정수기고 아무것도 없고, 나무를 베어 와서 땔감으로 쓰던 시절엔 어땠을까?

그러니 아무리 술이 나쁜 물질이라고 해도, 그 시절을 몽땅 지금의 잣대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면모가 있다.
오죽했으면 교회에서 알코올 안 들어간 포도즙 잔을 마시려고 저렇게 웰치라는 사람이 안전한 주스 제조법을 개발한 게 무려 180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요즘 시대에 그 시절 핑계를 대면서 술을 합리화하는 것도 궤변이고 잘못됐다.
비타민 결핍증이라는 것도 몰라서 선원들이 픽픽 죽어가던 시절,
"수인성 전염병(장티푸스, 콜레라 등..)이랑 알코올 중독 둘 중에 뭐 고를래?" 하던 암울한 시절하고 지금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에서 굳이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거하게 술로 제조해 주셨잖아! / 성경에도 위장병을 위해 와인 처방을 좀 하라는 말 있잖아?" 이런 말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는 않겠다.
솔직히 혼인 잔치는 세상적으로 즐거운 자리이니 알코올을 떠올릴 여지가 0.1이나 1만치라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리는 잔을 나누면서 포도주..? 성경이 썩음, 누룩 같은 개념에 대해서 어떤 심상을 갖고 무어라고 일관되게 말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저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다.

크리스천으로서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야 합니다 / 우리 다같이 누룩이 됩시다"..;;; 는 내가 전에도 비유를 든 적이 있지만 "버그 소프트웨어", "BSOD 시스템즈"라는 IT 기업과 비슷한 발상이다. 예수님이 죽음이야 경험하셨지만 설마 시체가 썩었을까..?? (시 16:10, 행 13:34-37 등)

한국 교회는 율법주의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주일성수 금주 금연 같은 외형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편인데 왜 포도주 포도즙 문제에서는 대체로 헛점을 보이는 걸까?
술판을 즐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아까 저 누룩이나 썩음처럼 성경 교리에 대한 기본 개념이 덜 정립되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이건 세례· 침례 문제, 성탄절· 부활절 문제하고도 일면 비슷한 구석이 있다.

킹제임스 흠정역이라는 성경은 지금까지 출간된 한국어 성경 중에서 wine을 '주'가 아닌 '즙' 쪽으로 가장 편향되게 번역한 역본이다(나쁘다는 뜻은 아님). 심지어 말보회의 한킹도 그렇지는 않다.
아무튼, 성경의 wine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웰치 아재의 행적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창조 진화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종간 합성이란 걸 해낸 위대한 한국인 과학자인 우장춘 박사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듯이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22 08:35 2020/09/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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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랜만에 원초적인 성경 계보와 종교 비교 얘기를 좀 하겠다. ㄲㄲㄲ
종교 개혁 개신교 진영에 킹 제임스라는 고전 영어 성경이 있다면, 가톨릭(천주교) 진영에는 듀에이-림즈(Douay-Rheims)라는 고전 영어 성경이 있다.

개신교 쪽 성경 중에 제네바 성경처럼 인명이 아니라 지명을 딴 역본이 있듯, 듀에이와 림즈는 프랑스의 지명이다. 원어인 프랑스어 스타일로 읽으면 “두에 렝스”라고 한다.
프랑스는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개신교 쪽의 종교 개혁이나 성경 번역과 관련해서는 언급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 대신 천주교 성경이 저 동네에서 번역되었던가 보다.

공교롭게도 킹 제임스와 듀에이-림즈는 나온 시기가 굉장히 비슷하다. 전자는 어명에 의해 1604년에 번역 위원회가 조직되고 번역이 시작됐으며, 1611년에 전서가 한꺼번에 출간됐다.
한편 후자는 전자보다 약간 더 전부터 더 오랫동안 번역되어서 1582년에 신약, 1609년에 구약의 순으로 나눠서 출간됐다. 그래도 시기가 상당히 비슷한 건 사실이다.

1582년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100의 배수해의 윤년 여부) 현재까지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달력인 그레고리력이 시행된 해이기도 하다. 저 때가 교황청에서 나름 성경도 만들고 달력도 고치는 등 여러 일을 했던 때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쟤들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교황의 권위를 다시 강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먼 옛날 헨리 8세 때부터 이미 교황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체 교회를 운용하였으며, 자국어로 성경 번역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출간 목적 중 하나는 성경 역본을 통합하여(비숍, 제네바) 그런 영국 교회(성공회, 청교도)를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천주교에서, 특히 휘하 조직인 예수회에서 뜬금없이 영어 성경을 내놓은 목적은 개신교 진영에서 시작된 자국어 성경 번역 트렌드에 맞불을 놓고(counter-) 자기네 교리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안 하던 짓을 어쩔 수 없이 한 셈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오늘날 천주교 성경에서도 수용하지 않는 오글거리는 왜곡 번역이 좀 있다. 본인이 아는 건 딱 두 가지이다.

  • 창 3:15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는 예언을 “여자”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고 바꿨다.
  • 눅 1:28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말은 원래 “큰 은총을 입은 자여”(피동)라는 요지인데.. 그걸 “은혜가 가득한 자여”(능동)라고 바꿨다.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번역을 저렇게 한 것이다. 저 시절에 저렇게 뜯어고치는 건 우리로 치면 일제 시대에 손 기정 선수 사진에서 복부의 일장기를 뽀샵질로 일부러 지우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로서 천주교는 성경을 금지하고 없애고 신자들을 죽이고 성경 변개에 일조한 집단 정도로나 알고 있었다. 자기 교리를 위해서 말을 버젓이 뜯어고친 듀에이-림즈 역본이야 더 볼 것도 없는 부패한 성서이고 말이다.

지금도 그 신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총론을 넘어 세부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런 성경에도 의외의 면모가 있다는 것을 근래에야 발견했기에 몇 가지 예를 완전성 차원에서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듀에이-림즈(DRB)는 만들어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킹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고어체이며 thou, thee, -eth 같은 대명사와 접사를 볼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는데.. 가장 먼저 골 1:14를 펴 보자.
변개된 역본에서는 “그분의 피로 through his blood”가 삭제되었다고 킹 제임스 유일주의자들이 으시대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remission of sins:

본인은 눈을 의심했다. 존재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through his blood가 DRB에서도 살아 있었다. 아니 이거, 마리아 숭배를 조장하던 그 역본이 맞나?
오히려 개신교 계열이며 천주교에서 과거에 시신을 부관참시했고 오늘날까지도 싫어하고 이단시하고 있는 위클리프.. 그 사람이 만들었던 옛날 성경(WYC)에는 through his blood가 없다.

in whom we have again-buying and remission of sins.

그건 이해가 된다. 위클리프 성경은 DRB보다 200년 가까이 전, 이 성계가 살아 있고 조선이 건국되었던 1390년대에 그 시절 여건의 한계상 ‘변개된 본문 계열’인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번역됐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요 1:18도 찾아봤다. 무려 초대 교회 시절 오리겐 때 ‘독생하신 아들(son)’이 ‘독생하신 하나님(God)’으로 바뀌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DRB)
… but the one begotten Son, that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told out. (WYC)

어라? 위클리프와 듀에이 모두 ‘아들’이라고 돼 있고 결과적으로는 KJV와도 일치한다. 오히려 개역, NIV, NASV 같은 20세기 역본들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뭔가 혼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For three be, that give witnessing in heaven,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be one. (WYC)
And there are Three who give testimony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DRB)

혼란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요일 5:7이었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세 분이 계시니…”라고 KJV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구절, 원래는 없었다가 후대에 첨가된 거라고 잔뜩 공격받는 그 구절이 위클리프와 듀에이에 모두 버젓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양 진영에서 각각 내놓은 성경이 진술이 이 정도로 일치한다면 이건 완벽한 교차검증 성공이지 않은가? KJV를 만들 때 성공회 팀과 청교도 팀이 눈에 불을 켜고 상호 검증하던 것을 뺨치는 수준이다.

따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DRB는 사 14:12에 루시퍼도 남아 있고 계 2:13에서 사탄의 왕좌 대신 자리라고 KJV 스타일로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DRB만 욕하기가 민망하고 미안해질 정도였다. 이래서 뭐든지 양쪽의 말을 다 들어 보고 팩트 확인을 꼼꼼히 해야 되는구나..

뭐 그래도 벧전 2:2에서는 서로 제 갈 길 가는지 DRB는 변개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이고, WYC는 어째 KJV에 더 가까운 스타일로 번역되었다.

As newborn babes, desire the rational milk without guile, that thereby you may grow unto salvation. (DRB)
as now born young children, reasonable, without guile, covet ye milk [of full teaching], that in it ye wax into health; (WYC)

다시 말해 골 1:14와 벧전 2:2를 비교해 보면 KJV는 OO, 개역 NIV 따위는 XX인데.. DRB는 OX요, 위클리프는 XO인 셈이다.
본인은 세상의 모든 성경은 OO 타입 아니면 XX 타입이지, OX나 XO 타입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중간형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어찌된 일일까? 이런 사실은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5분만 관심을 갖고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나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뭐, 킹 제임스 지지자건 반대자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회색지대 영역이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위의 사실은 가톨릭 쪽이든 개신교 쪽이든, 성경이 필사되고 전수된 과정이 모 아니면 도 하나로 언제나 딱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그나마 긍정적인 쪽으로(OO) 크게 교통 정리가 된 건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 정립이다. 그리고 이를 대적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쪽으로(XX) 크게 교통 정리가 된 것은 19세기 말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본문과 RV 역본이다.

16세기에는 요일 5:7에 실제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이 기록돼 있었나,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진짜로 기록돼 있었나 하는 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이래로 본문비평이라고.. 성경 변개를 학술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수작 하에서 근현대에 와서야 제기된 낭설이다.

종교 개혁으로 인해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심하던 16세기에 진짜 중요했던 것은 “성경에 외경--가톨릭에서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을 넣을 것인가? 넣는다면 구약의 일부로서 embed시킬 것인가 아니면 부록으로 별도로 넣을 것인가?”였다. 천주교 식이라면 토비트, 유딧, 에스드라, 마카베오 같은 책도 구약에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에스더기는 10장 3절 이후로도 계속되어 무려 16장까지 있게 된다.

킹 제임스조차도 당대의 관행과 종교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나왔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절대 아니고 구약으로부터 분리된 부록 형태로 수록되었다. 그 시절엔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신의 한 수 파격이었고 교황 추종자들로부터 밉보일 짓이었으며, 최악의 경우 번역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겪고 암살 당할 수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사진은(☞ 출처) 1611년도 KJV 원판에서 외경의 한 페이지이다. 보다시피.. 에스더기만 해도 10장 4절부터 시작되는 외경 영역은 완전히 분리해서 수록하지 않았는가?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라고 말이다. 세상에 그 어떤 천주교 성경도 에스더기 뒷부분을 이딴 식으로 편집해서 수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톨릭 정신이 너무 투철한 일부 사람들은 KJV도 외경이 들어갔기 때문에 친가톨릭 성경이라고 비판하고 1611년판이 아니라 1655년인가 뭔가 외경이 완전히 제외된 KJV가 진짜 KJV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건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며, 별 영양가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얘기가 길어졌으니 슬슬 정리를 하겠다.
본인은 KJV 유일주의자로서 가톨릭이 성경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기여를 한 것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독립된 분야로 요약하겠다.

1. (과거) 가장 먼저 옛날에야 일반인들에게 성경의 소지를 금하고 번역도 금하고.. 자기들 말고는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실물을 불태웠다.
차라리 이단도 생기고 온갖 교단 교파들로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수많은 지역 교회들이 잡초처럼 생겨나는 것이 성경적이지, 저기 같은 피라미드 중앙 집권 체계는 성경적인 교회 모델이 아니다. 뭐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어서 쟤들도 물리적인 박해는 못 한다.

2. 오리겐 같은 옛날 사람들이 조금씩 독소를 넣고 변개해 놓은 일명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토대로 변개된 라틴어 본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 자체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그 당시엔 본문 변개의 여파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DRB에도 올바른 다수 사본의 영향을 받은 맞는 표현도 여럿 등장했던 것이다.

3. 구약 성경에다 외경을 추가해 넣고, 십계명을 고쳤다. 이건 오늘날 개신교 쪽의 변개된 성경에서도 따르지 않는 사항이니 골 1:14, 벧전 2:2 같은 변개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4. (과거) 한때 DRB 같은 마리아 숭배용 엽기적인 역본도 만들었다. 물론 오늘날은 천주교 성경에서도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지는 않으니 저건 흑역사가 되었다.

5. 그리고.. 옛날 성경에서 O를 확실하게 X로 몽땅 바꾼 개정판을 만들고, 20세기 이래로 모든 성경들의 번역 트렌드가 이걸 따라가게 만들었다. 2에다가 학문적인 근거(?)를 추가해서 그 영향력을 소위 기독교계 전체에 파급시킨 것이다.

본인은 이번 리서치를 통해서 2와 5를 더 명확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요일 5:7이 원래는 없다가 후대에 추가됐네 이딴 소리들은 2가 아니라 5의 산물인 것이다. 그놈의 후대라는 건 도대체 정확하게 언제쯤 후대를 가리키는 걸까?

사실, 논리를 더 명확하게 세우려면 천주교에서는 DRB 이후로 어떤 영어 성경을 사용해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개신교계가 KJV를 300년 가까이 사용하다가 갑자기 19세기 말부터 RV, ASV의 순으로 부패가 시작됐는데 저쪽도 DRB를 천주교계의 KJV마냥 수백 년 사용하다가 성경이 바뀌었는지?

1970년대에 나온 천주교용 NAB (New American Bible)은 이미 변개된 XX 스타일로 다 바뀌었다. 개신교가 이미 변개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가톨릭에도 그런 변화가 없었을 리가 없다.
사실 본인은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기 전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무슨 성경을 사용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설마 개신교 쪽 성경을 봤을 리는 없을 테고, 아니면 아예 성경 없이 교리문답서만 보고 살았는가?

적장은 적장을 알아본다고 가톨릭은 오늘날도 위클리프나 루터나 틴데일이나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당연히 절대로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지금이 옛날 같은 종교 재판, 이단 심문 같은 게 존재하지는 않으며 다들 평화니 화합이니 하고 있지만.. 결국 교리와 믿음이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그 차이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두 버전으로 주셨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가톨릭의 듀에이-림즈는 현재 가톨릭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골동품이지만, 기독교의 킹 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최종 권위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말씀 보존 약속을 이행해 주신 바로 그 실물이다. 아멘.

  • 종교 개혁의 불모지이고 예수회의 본산지이던 스페인에도 그래도 ‘레이나-발레라’라고 바른 계보의 성경 역본이 있다. 요일 5:7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얘는 누가 언제 어떤 계기로 번역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국은 1990년대가 돼서야 바른 계보 번역 성경이 나왔는걸..;;
  • 우리 진영 교회사에서는 맨날 사악한 가해자, 거의 공산주의자 급의 종교 공작원이라고 묘사되는 예수회가 일본에서는 박해받은 ‘기리시탄’이라고 불렸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중세 일본에서 사용했던 예수쟁이 식별법 중엔.. 나 같은 사람이라면 굳이 걸려들지 않았을 방법도 있다. 형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5 08:35 2020/05/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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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어, 시력 이야기 등

1.

  • "즉시 그(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행 9:18)

요즘 scale이라고 하면 크기, 규모라는 뜻이 더 와닿지만 scale에는 비늘이라는 뜻도 있다. (동음이의)
구약 성경의 율법에서 포유류는 굽과 되새김질 여부가 식용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면, 어류는 비늘과 지느러미의 존재 여부가 그 역할을 한다.
아울러, 사전을 찾아보면 피부병 딱지, 갑옷의 미늘, 물통 안에 낀 물때 같은 것도 다 저 scale이다.

치아 스케일링은 치아 주변에서 저런 비늘처럼 덕지덕지 붙은 치석을 떼어낸다는 뜻이다. 무슨 크기 조절과 관련된 뜻이 아니다.
그러니 사실 descale이라고 해야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컴퓨터 저장 장치에서 defragment, 비행기에서 deicing처럼 말이다. 뭔가를 제거하여 정리한다는 뜻의 단어에는 대체로 접두사 de-가 붙어 있다.
다만, void/be devoid of, press/depress 이런 관계를 생각해 보면 de-가 언제나 뒤의 어근을 없애거나 부정하는 것 같지도 않다.

2.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성경을 더 찾아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되찾아 준 것이 여럿 나온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는 남이 뱉은 침을 맞는 극도의 치욕· 모욕이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도 침을 뱉으신 적이 있다. 두 번인데.. 모두 다 맹인의 눈을 고치실 때이다. 치과 다음으로는 안과 얘기네..

  • "그분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에게 물으시니" (막 8:23)
  •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요 9:6)

모욕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정반대 일을 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구약 외경 중에 토비트.. 개역성경식 외래어 표기법이라면 아마 '도빗' 정도 됐을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은 놀랍게도 공중에서 떨어진 새똥(정확히는 참새의..)을 눈에다가 정통으로 맞는 바람에 눈에 막 같은 게 끼고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결말부에서는 물고기의 쓸개를 환부에다 발라서 눈을 치료받는다.

눈 영양제 '토비콤'의 이름이 혹시 토비트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안국 약품의 창업주나 중역 중에 혹시 가톨릭 신자가 있나.. 라고 나만 생각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추측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3 08:34 2020/05/0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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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해서

1. 관련 용어

빨강이라는 색이 있을 때 같이 나란히 쓰일 만한 보색으로는 노랑(경고의 수위), 검정, 파랑, 초록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처럼 성경 용어 내지 개념으로서 faith(믿음)와 대비될 만한 관련 용어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은혜(grace):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다. 받을 자격이 없는 을에게 갑이 먼저 무료로 베풀어 주는 뭔가 좋은 것을 말한다. 엡 2:8은 saved by faith through grace라고 믿음과 은혜의 관계를 설명한다.
  • 회개(repentance): 믿기 위해서 을에게 먼저 동반되어야 하는 심경의 변화, 유턴, 반전이다. 이전 글에서 논했듯이, 꼭 물리적인 나쁜짓을 그만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믿지 않는 것도 죄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진단하고 치료하지, 증상만 없애려 하지 않는다.
  • 일, 행위(work): 정말 믿었다면 그 결과 겉으로 바뀌어 드러나는 행적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믿음 분량의 차이가 있는 이상, 믿었다고 무조건 기계적으로 행위가 당장 나타나는 건 아니다. 또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인 것은 더욱 아니다.
  • 시인, 고백(confession): 자기가 믿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동작이다. 성경에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같은 말씀이 있는데, 한편으로 문맥과 관점에 따라서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의 열매인 행위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롬 10:9-10).

2. 유사 용어

  • faith는 뭔가 을이 갑에게 의지하는 종교적인 염원이 담긴 믿음을 말한다. "P와 NP는 아마도 같지 않을 것이다, 홀수 완전수나 65537 이후의 페르마 소수는 아마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수학자들의 믿음이다." 이렇게 단순 추측에 가까운 믿음은 belief라고 하지 faith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 believing과 belief의 차이는 그리기와 그림의 차이와 비슷한 그냥 언어적인 차이일 뿐이고.. 성경에서 요한복음은 believe만 나오지 faith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3. 다양한 종류와 강도의 믿음

  •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와 믿음이 존재하고, 그 뒤에도 지속적인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바람직한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내 죄 사하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건 굳건히 믿지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 먹은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를 안/못 믿는 "구원받은 불신자"도 세상에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그건 대외적으로나 자기 자신에게나 건전한 상태는 아님)
  • 꼴랑 구원받는 회개와 믿음 하나만 갖고 평생 사는 것은 결혼한 부부가 연애와 신혼 시절의 콩깍지만 갖고 평생 사는 것과도 같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짓이다.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이 왜 즉시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지 않는지를 잘 생각해 봐라.
  • 그리고 믿음이 아직 작은 것하고, 믿음이 아예 없는 것, 죽은 믿음은 셋 다 다른 상태를 가리킨다. 세상에 그 어떤 고성능 자동차라도 정지 상태에서 3단, 4단 기어에서 곧장 출발할 수는 없다. 이걸 갖고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아예 때려쳐라" 식으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않아야 한다.

4. 성경에 나오는 정말 위대한 신앙고백들

성경에는 여러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는데 그 중 신앙 고백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굉장히 대단하고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몇 개 뽑으면 다음과 같다. 이걸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1) 욥: 알몸으로 태어났다가 죽어서도 알몸으로 돌아가는 게 인간 아닙니까?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도로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주의 이름이 찬송 받으옵소서.
(욥 1:21. 빌 게이츠 급의 플래티넘 수저 갑부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천재지변으로 전재산 다 풍비박산 나고 자녀 10명이 몽땅 몰살당한 뒤에..)

(2) 다니엘의 세 친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풀무불에서 능히 건져낼 능력이 있습니다. 설령 그분께서 “그리하지 않고” 우리에게 죽음을 허락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한 치의 고민 없이 폐하의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황금 형상에도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3:17-18. 노발대발한 느부갓네살 왕과 불타는 용광로 앞에서..)

(3) 백부장: 님하 같은 엄청난 분께서 굳이 누추한 저희 집에 오시겠다니요? ㅠㅠ 그럴 필요 없이 말씀만 한 마디 하시면 종의 병이 원격으로 치료될 겁니다. 저 같은 일개 중대장도 명령을 내리면 100여 명의 부하 군사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님하이시겠습니까?
(마 8:8-9. 다시 생각해 봐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정말 대단한 논리와 믿음에 입각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바리에이션으로 딸의 병을 원격으로 치료받은 어느 가나안 여인의 명대사도 있다. 마 15:27-28)

(4) 베드로: 님하는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6. 특별히 역경 속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그냥 내용 자체가 고퀄이어서)

Posted by 사무엘

2020/04/20 08:35 2020/04/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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