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란, 리듬 게임에서는 화살표 타이밍과 거의 동시에 정확하게 손발 동작을 잘 넣었을 때 받는 최상위 등급 판정이다.
FPS인 퀘이크 3 arena에서는 한 번도 죽지 않고 게임을 마쳤을 때 받는 상의 명칭이다.
뭔가 좋은 말이긴 한데, 정확하게 무엇이 좋거나 무엇을 성취했을 때 perfect가 되는지는 분야와 문맥에 따라 잘 분간할 필요가 있다.

perfect와 비슷한 좋은 형용사인 excellent를 생각해 보더라도,
이게 퀘이크 3 arena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투 킬 이상을 달성했을 때 받는 판정인 반면,
버추어 파이터에서는 한 번도 맞지 않고 상대방을 이겼을 때 받는 판정이다.
모탈 컴뱃에서는 그게 또 이름이 달라서 flawless victory이다. 즉, 이런 용어들은 그야말로 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perfect라는 것은..
굳이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절대무오 넘사벽 언터쳐블, 신의 경지급의 완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뜻이라면 차라리 infallible이 더 적절하다.
또한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유리수는 제아무리 무한히 조밀하다고 해서 결코 실수만치 완비되어 있지는 못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 게 사람과 하나님의 스케일의 차이인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어떤 주어진 환경, 문맥, scope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목표나 기준을 오차 없이 달성해서 조건을 만족했다면 성경적으로 perfect가 된다.
특히 마음이 완전히 올바르다는 건 두 마음 딴생각 없이 순수한 것까지 포함한 개념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회색분자를 굉장히 싫어하시니 말이다.
어떤 경우든,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마 5:48)라는 말씀이 무슨 “우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창 3:5)”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와 같은 죄인이던 노아나 욥도 perfect라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슨 천주교 성인 같은 급이라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고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말한다.

아니 그럼, 인간이자 하나님이고 죄성 없이 처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그 전엔 품질 면에서 완전하지 못했고 무슨 결함이나 약점이 있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당연히 그런 뜻은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긴 하지만 자신만의 이념과 성품, 질서가 있고 방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건 마음대로 다 해도, 가령, 거짓말은 못 하신다고(딛 1:2) 돼 있다.

그렇게 부족할 것 없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인간의 몸도 입어 보고 인간과 똑같은 관점에서 부족함, 연약함, 고난을 다 경험해 보고 십자가 퀘스트를 클리어 함으로써 그 방면에서 드디어 perfect 판정을 받았다는 게 성경의 판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 자체만 해도... 그리스어/히브리어를 자국어로 번역한 성경이 완전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 두 관점에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KJV에 비해서는 예전의 제네바/비숍 등의 성경은 군더더기가 많고 번역의 질이 KJV만치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말 흠정역 성경만 해도 n-1판은 더 나중에 나온 n판에 비해서는 미묘한 오탈자나 실수가 더 많이 있었다.
심지어 KJV 자체도 비록 오늘날까지 내용의 변경은 없었을지언정, 1611년 초판은 인쇄공들의 실수로 인해 수십 군데의 typo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옛날 성경들도 오늘날의 변개된 계보가 아닌 바른 계보에 속하는 좋은 성경이었으며,
그 당시에 권위를 부여하고 열심히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 사용하기에 충분한 완전한 성경으로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서 역사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믿는다. 문맥을 분간을 잘 해야 된다.

그런 마이너한 옥의티는 그야말로 outlier일 뿐이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며, 현대에 벌어진 역본 변개 내지 성경 업데이트 드립과는 결코 같은 레벨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놓고 부패한 본문에서 번역된 개역성경에도 복음이 담겨 있고 이걸 읽고 구원받은 사람들로부터 한국 교회가 시작되었거늘, 하물며 바른 계보의 성경 번역본은 얼마나 더하겠느냐 말이다.

단지 성경 본문에 문제가 있으면 구원 이후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가 어렵고 개독안티들의 성경 공격에 대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치면 그럭저럭 돌아가고 결과물은 나오지만, 보안이 취약해서 악의적으로 조작된 데이터 파일에 자주 뻗는 정도의 문제가 생기는 꼴이다. 우리가 겨우 이런 약한 모습이나 보이려고 이 세상의 추세를 거스르고 또 거슬러서 예수쟁이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 자기 세대에 다시 재림할 거라고 믿었고,
중세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교황이야말로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시절과 그 식견에 계시의 분량이 그게 전부였을 때는 저 스케일로 믿고 양심대로 행한 것이 최선이고 perfect한 신앙이었을 테니까.

이렇듯, 아무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고 해도, 성경의 보존과 완전성에 대해서는 아주 최소한의 추상적인 공통 layer는 존재한다고 보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시내/바티칸 사본이 제아무리 몇백 년을 짱박혔다고 해도 그런 것이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해 주신 성경 말씀은 아니다. 유다복음 도마복음이라든가, 전량 회수해서 폐기 처분했대도 누군가가 꿍쳐서 살아남은 사악한 성경(not이 실수로 누락되는 바람에 너는 간음할지니라=_=)이 무슨 하나님 말씀 보존 약속의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개개의 수명은 수십 년 남짓밖에 못 되었더라도 잡초처럼 필사되고 놀라운 내용 일치를 보여 온 다수 공인 본문과, KJV에 이르는 거시적인 영어 성경 계보라는 집합에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27 19:27 2015/03/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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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관이나 종교관을 논하기에 앞서, 그보다 이념이나 '색깔'이 덜한 나의 인생 철학, 원칙 같은 걸 글로 한데 정리해 본 적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지지하는 원칙들을 한데 모아 보니 다음과 같다.

  • 세상에 공짜란 없다.
  • 심은 대로 거둔다. 일하지 않았으면 먹지를 말라. (장애인, 노약자는 물론 예외)
  • 일부러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가난한 게 아니라, 일부러 취업을 포기하고 공부를 더 계속하느라 궁핍하게 지내는 것 따위)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 남이 하는 꼬라지가 불만이면, 니가 나서서 한번 해 보든가. ("대안 없는 비판"을 싫어함)
  • 니 자식이 흉악범에게 살해당했을 때에도 사형 반대할 텐가?
  • 니 아들이 남자가 좋다고 데리고 오는 일이 생겨도 동성애 합법화 찬성할 텐가?
  • 니가 스스로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한 노력은 안 하면서 왜 맨날 인물이 없다는 탓만 하는가? (안 창호)
  • 국가(혹은 교회든 무슨 집단이든)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를 기대하지 말고 니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 (케네디)
  •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건 나도 때로는 못 지킬 수도 있고,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것만 본받고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마 23:3) 분리를 명하셨다. 저놈들을 빌미로 같이 깽판 쳐도 된다고 그러시지 않았다.
    하지만 말과 말조차 일치 안 하고 판단 잣대에 일관성이 없는 건 완전 싫다. (마 11:18-19)

나의 인생 알고리즘이 어떠한지가 좀 읽혀지는가?
이런 것들을 다 황금률 --니가 남들로부터 대접받고 싶은 것만치 너도 남에게 해 줘라(마 7:12)-- 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논리학이나 철학에서 저런 사고방식을 일컫는 용어 같은 게 따로 있지 싶은데..
어쨌든 난 저런 단순한 사고방식을 큰 틀에서는 일단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지지한다.
저런 사고방식에 나보다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 사정이고 내 사고방식은 저렇다.

단, 성경적으로 보자면 황금률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 아무리 나쁜놈이라도 제 자식 위할 줄은 알고(눅 11:13), 겨우 저 정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그 어떤 불신자라도 딱히 믿음을 행사할 일 없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마 5:46-47).
하나님 역시 인간을 오로지 '심은 대로 거둔다', '병 주고 약 준다' 식으로만 기계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만 대했다면 인간이 지금까지 남아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것을 얘기했으니, 다음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편이지만 나는 종교 방면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지지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몇 가지 소개하도록 하겠다. 예전에 블로그에다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다시 한데 정리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돼라” 같은 요지의 책망이나 권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취지는 물론 이해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템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당장 눈에 보이는 아이템에서부터 남에게 실족거리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 자체는 100% 성경적이며 본인 역시 아멘이다. 허나, 나 같았으면 우선순위까지 거론하면서 표현을 그런 식으로는 안 하겠다.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는 신자나 불신자의 말단의 행실 같은 건 거의 감안하지 않았다. 행실로 치자면 나부터도 완전 개판이다. 나는 크리스천부터 되고 나서야 구제불능이던 행실이 차츰차츰 바로잡히고 상식도 조금씩 입력되어 온 사람이다. 안 그래도 기독교는 선행, 행실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인데.. 저건 당장 자기가 대하는 게 불편하고 기분 나쁘다고 행실로 남의 크리스천 지위를 자체를 판단한다는 느낌이 든다. '나쁜 크리스천'이 아니라 아예 크리스천도 아니라는 식으로.

“나는 하나님/예수는 믿지만(사랑하지만 좋아하지만 등등) 교회는 믿지(역시 비슷한) 않는다” 부류의 말도 동일한 맥락에서 싫어함. 그건 불신자 개독안티라면 모를까 최소한 신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_-;; 그런 판단은 마치 어느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타 종교에도 좋은 가르침이 많다고 공자 왈 맹자 왈 석가모니 왈 인용을 자꾸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종교 가르침이야 심지어 철도교에도 많이 있다! 내가 겨우 그런 수준의 가르침을 원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거나 금쪽같은 일요일 시간을 희생하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 자체만 가르쳐도 모자랄 금쪽같은 시간 동안 목사가 왜 하필 그렇게 핀트가 어긋난 짓을 하냐는 거다.

둘째,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도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같이 싸우겠습니다” 같은 일면 멋있어 보이고 대인배스러워 보이는 사고방식을 난 지지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종북 세력, 사형 폐지론자들을 내가 직접 물리적으로 괴롭히고 해코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남에 의해 박해받거나 법대로 처벌받고 있을 때 그들의 말할 자유를 위해서는 난 죽어도 절대로 같이 싸우지 않을 것이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같은 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분야의 이념이라면 인간적으로 협업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 종교관, '신앙'이 타겟이라면... 나치가 나를 덮쳤을 때 나의 구제를 위해서 굳이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같은 다른 불신자 그룹들의 인맥 빽 변론 실드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대적들로부터도 행실이 의롭다는 증언을 받으면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대신, 그럴 때 “너희가 마땅히 할 말을 성령님께서 바로 그 시각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마 10:19, 눅 12:11-12)라는 성경 말씀이 100배 이상 더 먼저 떠올라야 한다. 이게 레알 예수쟁이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서로 일체의 판단이나 정죄를 하지 말고 퉁치자는 식으로 성경 말씀을 이상하게 적용하는 양비론 사고방식도 굉장히 싫어한다. '원수를 사랑하라'가 개인이 아니라 무슨 집단,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교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노답. 오늘날이 정교일치가 가능하지 않고 초대 교회 시절 잠깐 이후로 사유재산 공유가 가능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그런 것도 세상 정부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절대적인 타락과 부정부패, 부작용 없이 실현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

뭔가 판단을 하고 선악을 따지고 드는 걸, 어디서 성경 몇 자 본 건 있어 가지고 무슨 바리새인인 양 치부하는 사고방식도 완전 질색임. 그런 핑계를 대는 애들치고 바리새인만도 못한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바리새인은 그래도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고 내세와 부활이라도 믿었던 종교 꼴통들이다.

마태복음 7장을 예로 들자면, “판단을 하지 말라”처럼 들리는 1~2절 이후로.. “거짓 대언자를 조심하라.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같은 명령이 동일한 chapter에서 버젓이 등장한다. 이건 영락없이 뭔가 남을 '판단해야만' 이행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면 무엇인가. 성경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모순된 책이 아닌 이상, 이것은 서로 다른 context를 말하는 것이니 바르게 나눠서 분간해야만 한다.

성경을 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의문에 해답을 알게 되는 건 물론이고 세상에 왜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일이 많은지, 필요악이라는 게 왜 등장했는지, 그것이 꼭 나에게 나쁘고 해만을 끼치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답이 구해진다. 그래서 굳이 구원이고 영생이고 하늘나라고 그런 것까지 안 가더라도 당장 사람의 정신 건강에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의로운 사람, 약한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는 아예 극초반에 등장하는 아벨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느니라.” (히 11:4)이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빌 1:21)도 있다. 그야말로 인간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아득하게 초월한 안드로메다 급이다. 정신승리이긴 한데, 그 근거가 아Q처럼 자기 자신의 알량한 근자감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반면, 세상의 불신자 작가가 만든 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들은.. “신이 있다면 왜 자꾸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 신은 전지전능하지 못하거나, 공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both일 것이다. ㅋㅋ” 요런 반골 기질 메시지를 집어넣어서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멘탈의 평형 상태를 깨뜨리는 쪽으로 간다.

“피해자 유족이 용서 안 한 가해자를 어떻게 신이 용서해?”처럼 성경 교리를 배배 틀고 왜곡하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편하며, 꼴도 보기 싫다. 더 말하면 입만 아프겠지만, 아 글쎄 성경은 명백히 세상 공권력의 사형 집행을 지지한다니까요? 사형 반대하는 다른 종교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지. -_-;;

기독교적인 관점을 찾자면 정말 볼 영화가 없으니, 차라리 종교색 같은 건 싹 배제하고 원초적인 권선징악 해피엔딩 액션만 추구한 영화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내가 테이큰을 좋아한다. 이상하게 신 같은 거 끌어들일 필요 없이, 인간 흉기 특수요원이 악당들의 본거지를 다 통쾌하게 때려부수고 딸을 구해 내는 게 좋다.
그런 건 육신적이기는 해도 최소한 반성경적이지는 않다. 흉악범들을 제대로 못 잡아내고 처벌도 솜방망이 급으로 내리는 이 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도 주니 말이다.

확실히 난 종교 쪽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21세기에 보기 드문 못말리는 꼴통이긴 하다. ㅎㅎ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건전하며 내 양심에 진정한 자유를 준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21 19:20 2015/03/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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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서 생각, 교회 생각

1.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다. '말라기'는 이 책을 기록한 대언자의 이름이다.

구약의 예언/선지서들은 분위가 다 비슷하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신랄하게 깐다. 좀 우파스러운 원론적이고 영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당대 상류층들의 부정부패를 까발리면서 민생 안정과 사회 개혁을 촉구하는 좌파스러운 책망도 골고루 균형있게 나온다.

그런데 결론은 기승전철..은 아니고 기승전'회'로 동일하다. 저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타임라인에서 궁극적으로 최후의 승자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회복되며 옳다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놈들은 다 작살이 나고 씨도 안 남는다. 이러니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음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 성향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교황이 전세계를 돌면서 예수님 재림과 이스라엘 회복을 말한 적이 있던가? (말한다면 그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며, 그 종교는 이미 천주교가 아닐 게다)

그래도 성경 말씀은 기록된 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구약 예언서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은 임할 것이다. 단지 구약 대언자들은 산봉우리 너머의 재림만을 보았을 뿐, 예언의 골짜기에 속하는 신약 교회에 대한 계시가 없었으며 초림과 재림의 구분에 대한 개념도 아직 몰랐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실질적으로 초림과 재림 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님 거부 이후부터 생겼겠지만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으로 귀환까지 하고 나서 거의 100여 년 뒤에 구약 중에서 혼자만 굉장히 늦게 기록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후, 우상 숭배라는 죄 하나는 완전히 떨쳐 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바알 숭배만 안 할 뿐이지 영적 상태는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막장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못 먹는 거니까 흠 왕창 많고 병들고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가축을 헌물로 바쳤다. 출애굽기 이후로 모세오경에 without blemish이라는 단서가 얼마나 지겹도록 많이 나오는데.. 저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십일조 헌금을 안 바치니까 레위 지파 성직자들은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생업을 따로 구해서 투잡을 뛰어야 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밤에 대리운전?? =_=;;;

말라기서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이 완전히 상실되고 “뭐 대충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다 소용없어”, “우린 아마 안 될 거야” 등, 하나님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반박을 하고 책망하는 논리로 진행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성경에서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먼저 제시하고서는 그걸 반박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텍스트가 신구약을 통틀어 여럿 있다. 로마서의 “그럼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이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통틀어 이런 예들만 한데 모아도 주일 예배 설교 한 편 분량은 충분히 나올 것 같다.

말라기도 기본적으로 그런 논조이니 유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자꾸 동물 헌물을 그딴 식으로 바칠 거면, 그 동물들의 똥을 꼴도 보기 싫은 성직자 네놈들 얼굴에다 덕지덕지 쳐발라 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책망까지 하셨을 정도이다. (말 2:3)
헌물 말고도 이 책은 '의의 태양', 침례인 요한 예언도 나오고 십일조에 결혼 문제 등 생각보다 다양한 주제를 이것저것 부랴부랴 다룬다.

그런데 지금 내게 굉장히 절실히 와 닿는 구절은 말 3:14-17이다.
“교회 다니고 하나님 섬기는 거 다 무가치한 헛일일 뿐이다. 어차피 세상에는 자기를 내세우고 적당히 줄 잘 서고 죄도 잘 짓는 사람들이 사회성이 뛰어나고 잘 되고 성공한다..”는 식의 생각..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는 2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허나 16절을 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주 성경을 강론하고 서로 믿음을 북돋우는 교제를 나누면..
그 사건은 하나님이 친히 귀를 기울여 듣고, 정말 기쁘고 기특하다면서 그걸 책으로 기록으로 남기신댄다.
그리고 다음 17절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보석만큼이나, 친아들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무진장 귀중히 여겨고 보상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온다.

성경에서 역사· 교리적으로 유대인 얘기를 하고 있는 곳에다가 교회가 유대인 사칭을 하는 건 병크이지만.. 저것만큼은 정말로 오늘날 교회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휴거와 재림만큼이나 위로의 명분이 성립하는 게 틀림없다.
스바냐서에서 “하나님께서 너로 인해 기뻐하고 노래까지 부르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구절이 의외로 소선지서 한구석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렇게 본인은 길고 길던 구약 통독을 드디어 끝냈다.

2.
난 예나 지금이나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안 믿고 무신론자 회의론자로만 산다면 모를까,
내세와 영원을 논하는 '종교'관을 판단하는데 겨우 그 종교에 속한 사람의 외적 행실, 또는 대외 이미지, 유명인사의 의견을 높은 가중치에 두는 건 아주 굉장히 대단히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걸 전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며 물론 신자들은 좋은 행실로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병싯같은 짓으로 불신자에게 쓸데없이 실족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구도자의 입장에서도 그런 외형적인 것들은 주된 판단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몇 차례 글을 썼듯이, 무슨 하나님 믿고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 믿는다는 식의 생각을 굉장히 싫어한다.
예수님이 무슨 좋은 덕담이나 남긴 4대 성인 도인 슈퍼스타이고 자신의 상식과 교양 한 줄 정도나 기여하는 아이템인 줄로 아는가 본데, 그 예수가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창립자이고 교회의 머리이다. 뭘 좀 알고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불신자들하고 어울려서 대형 교회 욕이나 하고 다니는 헛똑똑이 겉멋 든 좌독 성향도 완전 혐오.
경제 쪽으로 대기업에 대한 생각하고 완전히 똑같은 논리이다.
대기업을 엿먹이고 싶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나 자신부터 중소기업 제품을 애용하면 되듯이
한국 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대형 교회가 한국 교계의 레알 비성경적인 악의 축이라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부터 아주 보수· 근본주의적이고 신앙의 양심을 충족하는 작은 교회를 찾아서 다니면 된다.

대형 교회가 당신의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빼앗지 않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피해의식 갖고 미워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는 사람간의 트러블, 부조리가 어디 없을 줄 아는가? 대안 없는 비판, 일관성 없는 판단은 이제 좀 그칠지어다.

세상의 모든 대중교통들은 운송 약관을 보면 "만취자, 중환자 또는 신변이 불결한 자에 대해서는 당사가 승차를 거부할 수 있음"이 명시돼 있다. 무조건이든 단독 승차에 한해서든.

그러나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이.. 만취자는 몰라도 신변이 불결한 자를 입장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이겠는가?
병원이.. 중환자를 거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교회 성도들보다 자신이 너무 똑똑하고 의롭고 질이 높아서 차마 예수는 믿어도 교회는 못 믿겠다(다니겠다) 이러는 분들.. 정말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불평을 나중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털어놓고 예수님을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를 난 바라마지 않겠다.

나는 행실이 너무 막장 저질이었는데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고 일꾼으로 써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가끔 교회에서 이상한 사람과 싸우더라도 교회의 정체성과 본분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100% 완벽한 성도로만 구성된 교회에 내가 등록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완전성이 깨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닐 것이다.

* 나는 늘 공언한다. 누군가가.. 있지도 않은 신을 숭배하고 교회 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나같은 중생을 너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무신론을 전하기 위해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다가 나중에 부활했다면 나는 그 정도 표적에는 기꺼이 반응하여 지금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 논리가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22 08:25 2015/02/2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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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이야기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 중에서 개성이 없는 책이 있겠느냐만, 그 중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직통 라인이라는 점, '데오빌로'라는 개인적인 수신자를 설정하고 있는 점부터가 심상찮으며 이것 말고도 자신만의 아주 독특한 면모를 여럿 지닌 책이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온전한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였으며, 주체가 아닌 객체의 관점에서도 그분이 비단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자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면서도 요한복음처럼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심오한 분위기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정치 용어를 동원해서 비유하자면 '좌파'스럽다. 사복음서 중 민중, 인권, 여성 해방 같은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가장 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 책엔 정치인 디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단순히 헤롯이 침례인 요한을 잡아 가뒀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헤롯이 안 그래도 나쁜짓을 저질렀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를 책망하는 요한을 잡아 가두기까지 했으니 추가로 까임권을 획득한 것이라고 코멘트를 한다. (눅 3:19-20) 이런 코멘트는 다른 복음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예수님도 그 헤롯을 보고 여우라고 살짝 디스를 하셨다(눅 13:32).

그리고 지금으로 치면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 같은 재난· 대형 사고 시국에 적용할 만한 구절도 누가복음 13장에 나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처럼 멸망하리라."
이런 맥락에서, "세리들은 법에서 규정된 것 이상으로 세금을 부당 징수 착취하지 말라. 군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민폐 끼치지 말고 나라에서 주는 급여만으로 만족하라" 같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침례인 요한의 권면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눅 3:12-14)

마태복음의 설교에서 언급되는 "영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눅에서는 그냥 물리적으로 "배가 고픈 자"로 단순화되어 나오고,
동일한 사건도 마태복음이 scope가 대체로 "유대인 only"라면, 누가복음은 "모든 사람, 너희" 같은 global scope으로 바뀐다. 여러 모로 인간적이다. 그런데 정작 교회라는 단어 자체는 마태복음에만 직접적으로 나오니 이것도 상호 보완적인 집필 방식인 듯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성경 자체가 이념에 치우친 책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야겠다. 누가복음 역시 뭐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부자들 재산을 빼앗고 기득권층 뒤집어엎어서 정치적 해방을 이루자 그런 짓을 결코 조장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신본주의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인본주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있는 뭔가 인간적으로 훈훈한 이야기로는 선한 사마리아인 내지 돌아온 탕자가 있다. 이것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던 중에 나온 얘기이며, 실제 사건이나 실존 인물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선행이나 종교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만을 믿어서 죄사함/구원을 이루는 예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다음 두 에피소드들은 실화이다. (1)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그리고 (2) 어느 죄인인 여인.

먼저 (1)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정에 없던 예수 십자가형 졸속 집행으로 인해, 주변의 어느 두 죄수도 완전 날벼락이 따로 없는 십자가형을 같이 당했다. 이들은 당연히 완전 멘붕에 빠졌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채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 그러나 한 명은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있던 과정에서 나중에 회개했다. (눅 23:39-43)

그는 살아 생전에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게 됐는지 모르겠다. 허나, 그는 막판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함으로써 로또 1등을 능가하는 인생역전을 성취했다. 저 사람이 무슨 평생 종교 행위를 했나, 고해성사를 했나, 도대체 무슨 예쁜 짓을 했단 말인가?

(2) 눅 7장에 나오는 무슨 죄인이라는 여인도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무진장 음란 방탕하게 살기라도 했는지?) 이를 악물고 죄를 단호하게 끊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고 뭐 무슨 성사, 고행, 기도문 암송 그딴 거 없었다.
그저 예수님을 보고는 감화되어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보이고, 그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울면서 그분 발에 향유를 뿌리고 발에다 키스를 하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 발을 닦았을 뿐이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예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여인의 죄가 용서됐다고 선언하셨다.

이런 일이 가능한 근본 이유는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병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을 그분이 자꾸 행하신 이유는.. 바로 눈에 보이는 기적이 가능하듯이 동급의 NP-hard나 마찬가지인 죄사함, 즉 눈에 안 보이는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거도 내 추론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마 9:4-6, 막 2:5-10, 눅 5:20-24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며 등장!)  둘이 서로 다항시간 환산이 가능한 문제이기라도 한 듯. ㅋㅋ

그런데 저 여인이나 강도가 예수님께 잘 보여서 그저 뽀록이 난 것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무슨 기분파마냥 이랬다 저랬다 제멋대로 죄 사면권을 남발하는 분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크리스천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을 이해를 못 하면.. 당신은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이게 뭔 삽질이야?" 하고 분개했던 가룟 유다의 후예가 되는 거다. (요 12:3-5. 단, 이건 눅7과 동일 사건은 아님)

"평생 나쁘게 살다가 끝에 죽기 직전에 예수 믿기만 하면 끝이냐? ㅋㅋ" 이런 개독안티의 조롱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그게 기독교다. 단지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언제 죽을지가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지 문제만큼이나.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에게 있으며, what you do가 아니라 what you are에 달려 있다.

맨날 선행, 선행만 강조하는데 물질· 물리적인 선행에 앞서 그 동기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선행을 할 여건이나 환경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러니 그런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잣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부터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고 진짜 선행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님께 허비하는 건 궁극적으로 허비가 아니고 낭비도 아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펑펑 울고 온 눅 7장의 여인은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여인처럼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요한복음의 그 여인도 과거가 그리 깨끗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 때 요 4:18과 요일 4:18을 절대로 뒤바꿔서 인용해서는 안 되게 됐다. =_=;; (이거 대표적인 기독교 개그인데.. 뭔 말인지 모르시는 분은 성경을 직접 찾아 보시길.)

요한복음과의 연계 하니까 생각나는데.. 누가복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논조로 보자면, 사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얘기도 요한복음보다는 누가복음에 더 어울리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으니 감히 성경 변개를 주도하지는 않겠다.

자, 정치인 디스가 나왔고 제일 중요한 훈훈한 구원 이야기가 나왔고.. 끝으로, 침례인 요한 얘기 하나만 더 하겠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언급한 책이 반(마, 눅)이고 그리하지 않은 책이 반(막, 요)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뿐만이 아니라 유일하게 침례인 요한의 드라마틱한 탄생 과정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른 책에서는 요한은 그저 성경 예언에 근거하여 곧바로 갑툭튀한 인물일 뿐이니 말이다.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방문하자 엘리사벳의 배에 있던 침례인 요한이 기뻐서 흥분했다니.. 이런 성경의 사고방식에서는 낙태 같은 건 정말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태신앙'이라고 하면 그냥 충분히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서 딱히 불신자의 사고방식으로 산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일컫지, 그 애가 진짜 태어나기도 전부터 특례 구원이 아닌 진짜 자기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경우는 레알 모태신앙이었던 것 같다. 눅 1:15를 보시라. "... 심지어 자기 어머니 태에서부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한이 예수님처럼 죄성이 아예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겠지만(시 51:5), 성경은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중에서 가장 큰(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마 11:11)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크다고도 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진짜로 보게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옛 사람들보다 매우 복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같은 영광은 못 보고 먼저 죽기 때문에 신약 크리스천만치 복이 있지는 못하다는 걸 의미한다.

단, 엘리야의 영을 받고 위대한 일을 한 요한도 나중에 투옥된 상태에서는 제자들을 보내서 그 예수님보고 "너 정말 메시야 맞니?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계속 기다려야 할까?"라고 인증 질문을 하니, 이것은 성경을 처음 읽는 독자들을 의아하게 한다.
성경에서 복음서를 두 파트로 요약하면, 분량상 침례인 요한의 죽음과 곧이어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이 딱 중앙에 자리잡게 된다.

이제 글을 슬슬 맺도록 하겠다.
누가복음은 '인간 예수'를 조명하다 보니,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단서가 짤막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는 유일한 책이다. 어린 시절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무슨 척 노리스-_-라도 됐던 것처럼 희한하게 묘사한 수많은 위경들이 아니라 이게 진짜 믿을 만한 책이다.
또한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끊임없는 간구 근성을 호소하며, "예수님 당신을 낳은 태와 당신이 어릴적에 빨았던 엄마 젖가슴이 참 복이 있습니다!" 같은 시시콜콜한 군중 애드립 에피소드(눅 11:27)가 기록된 책, 불의한 청지기 비유 같은 독특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 누가복음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적혀 있는 누가복음의 1:1-4 서문을 보시라. 여기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들은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닌 신뢰도 100%의 확실한 팩트라고 한다. 저자 역시 그 사건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내가 진심으로 친애하는 '데오빌로'라는 독자로 하여금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꼭 모두 숙지하기를 바라면서 진심을 담아 기록을 남겨 전한다고 적혀 있다.
비단 누가복음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그렇게 고귀하게 기록되고 전해져 왔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상고하는 오늘날의 '데오빌로'의 후예에게도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0 08:31 2015/01/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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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뒷부분을 읽으면서 먼 옛날, 예수님이 배반 당하고 악의 무리들에게 체포되고 '답정너' 어거지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곰곰이 묵상해 보았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이 십자가 사건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하고 기괴한 이벤트만 골라서 벌어진 끝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예수님이 가끔은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발언 때문에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일단은 기적 때문에 대중적으로 최소한의 인기와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백성들 눈치를 보는 '높으신 분'들은 예수님께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명절에는 체포와 처형을 더욱 피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현실에서는 최악의 상황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가룟 유다를 보고는 예수님께서 “니가 이제 뭘 하려는지 난 뻔히 알고 있지만,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 니 할 일 하러 가라”와 다름없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유다를 밖으로 보내 주셨다. 적들과 내통하러 나가는 건데도 어찌나 곱게 보내 줬으면, 그때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다른 돈이나 물건을 챙기는 심부름을 하러 나가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그 뒤, 군중이 붙어 있지 않은 한밤중에 예수님이 거의 “옜다, 나 잡아 가슈” 급으로 일부러 한적한 바깥에 나가서 낚여 줬다. 그 덕분에 체포가 가능했다.

제아무리 악의 무리라 해도 예수님이 선한 일을 한 것.. 즉,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걸 트집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어설픈 거짓 증언들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자기들끼리도 진술이 일치하지 않아서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나마 트집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성전 사흘 재건' 떡밥인데... 이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원래는 요 2:19이지만 '카더라' 명목으로 마 26:61에서 먼저 미리 등장한다.
솔로몬이 기도를 한 내용이 있기도 하니 유대인들은 물리적인 성전 건물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컸던가 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성전을 걸고 저런 충격적인 말을 예수님이 하셨으니 그게 예수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모양이다.

물론 앞뒤 문맥 행간 다 짤라먹고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찌라시 기레기들의 수법은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수, 성전 폭파 발언 충격 일파만파”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다른 그 어떤 거짓 고소 개드립에도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않아서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는 즉각 대답하셨다. 대제사장 앞에서든(마 26:63-64), 빌라도 앞에서든(마 27:11) 말이다. 그것이 당장 자기 신변을 불리하게 만드는 답변이더라도 말이다.
예전부터도 예수님은 시종일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 16:15)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 종교, 시사 등 온갖 주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냥 즉문즉답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니 제끼고, 그분이 카운터어택으로 딱 하나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던 것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데 왜 선조인 다윗이 자기 후손을 보고 주님이라고 불렀을까?” 정체성 질문 하나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떡실신했다.

그러니 이런 패턴을 아는 예수님의 적들이 트집을 잡은 방법은 역시나 100% 걸려들 수밖에 없는 종교라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악용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을 모함한 대신들이 다니엘을 행실로는 트집 잡을 수 없으니 기도라는 종교 관습으로 올가미에 넣었듯이 말이다. 다니엘도 그냥 그 30일 동안은 그냥 문 닫고 골방에서 몰래 기도할 수도 있었지만, 일면 고지식한 바보 같이 일부러 흉계에 걸려들었다.

이처럼 예수님도 자기 정체성만은 당당하게 드러내셨다. 대제사장은 드디어 명목상 신성모독이라는 중대한 껀수를 하나 잡았으니 이렇게 기쁠 데가. 하지만 겉으로는 옷을 찢고 오버하면서 “oh my god!! ㅠ.ㅠ 어머나 세상에 제 입으로 제 발로 하나님을 사칭하는 놈이 있다니 이런 참람할 데가!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이 새퀴는 뒈져야 마땅하다”라고 짜여진 각본대로 아주 생지X(비속어 죄송~~)을 해 댔다. 옛날에 악의 무리들이 나봇을 신성모독죄 누명을 씌워 인민재판을 벌이고 죽였을 때처럼 말이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그 창조주가 현신했는데 피조물들로부터 따귀를 맞고 침뱉음, 조롱, 학대를 당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피조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제자들은 실족하고 멘붕에 빠지고 도망쳤다. 5천 명의 군중을 먹이고, 물 위를 걷고, 중병을 고치고 마귀들을 내쫓고 죽은 사람까지 살렸던 자기 스승이 언제부턴가 고난, 죽음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더니.. 왜 이렇게 너무 나약하게 험한 꼴을 당하는 걸까?

베드로는 의욕이 넘쳐서 처음엔 예수님의 적들을 향하여 용감하게 칼까지 휘두를 정도였지만..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는 너무 딴판으로 행동하자 제풀에 기가 죽었고.. 결국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위급한 상황에서 그분을 세 번 부인하는 인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반역죄 신성모독죄로 몰아서 죽이고 싶었지만, 자기들도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판에 자체적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분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원수인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나중에는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이러기까지 한다. 일제 강점기로 치면 조센징들이 “우리에게는 덴노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이런 짓을 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 버린 확인사살 크리티컬은 “저 사람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올지어다”이고 말이다.

하지만 빌라도도, 헤롯도 예수님을 찬찬히 살펴보니 저 사람은 딱히 사형을 당할 만한 중죄인이 절대 아니었다. 헤롯은 예수님을 그냥 해롭지 않은 미치광이 정도로 치부한 듯하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보통사람이 아니란 걸 직감했다. 목숨을 전혀 구걸하지 않고 태연한 그분의 포스에 자신이 오히려 압도당하고 초조해졌다. “다..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없느냐? 주변에서 온통 당신을 고소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나에게는 너를 처벌하거나 풀어 줄 권한이 있는데 왜..? 으응..??” 같은 식.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이미 민심은 광기로 치닫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선동을 당했는지, 아니면 무기력한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백성들조차 폭도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흉악범에게나 집행되는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 정치 생명 보존을 위해 이를 허락해 버렸다. 그것도 명절 기간에..;; 이때 같이 들러리로 끌려나와 갑자기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 두 명은 날벼락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온갖 기적을 베풀며 당장이라도 자기 민족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킬 것 같던 슈퍼스타 예수가 하루아침에 너무도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십자가형을 당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그분에게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성전 사흘 재건' 떡밥도 다시 나온다. (마 27:40)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더니 당신 꼴 좋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저 사람은 자기 자신은 못 구하네? ㅋㅋㅋㅋㅋ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 유대인의 왕이라면 한번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ㅋㅋㅋㅋ”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기도는 정말 비장하고 숙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들도 처음에는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었다. 제 코가 석 자인 주제에.
그러나 누가복음의 진술에 따르면 둘 중 하나는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정말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회심을 했다. (눅 23:42)

그 뒤의 결말은 여기서 굳이 길게 각색해서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당한 여느 죄수들과는 달리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찍 숨이 끊어졌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명을 내어놓은 거라고 한다. 십자가형은 참수나 화형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죄수를 내버려 두는 형벌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저런 행적이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되고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했으며, 이를 본 제자들은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듯 기쁨으로 용기백배하여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바뀌었다. 그 어떤 난관이나 심지어 죽음과 순교도 이들의 증언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태동할 수 있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 중 신이 인간을 먼저 사랑했고 인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피흘려 죽었지만 부활까지 했다고 가르치는 유일한 종교이다!

국내에는 송 명희 시인이 예수님의 고난을 뭔가 인간적인 애틋한 심상으로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누구 때문에> 같은 찬양 말이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단순히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나 여느 순교자 같은 성격은 아니다. 또한 무슨 도살장에서 도축 당하는 짐승을 불쌍해하듯이 인간의 입장에서 무작정 동정할 만한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뭐랄까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일인 건 틀림없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봉인까지 아무 문제 없이 뚫고 무덤을 탈출하자, 기존 악의 무리들은 보초병들을 매수하여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 보초병들이 조는 사이에 제자들이 무덤에 침입해서 예수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걸로 대응했다.
그 시절에 로마 군인이 근무 중에 졸다가 적발되었다? 이건 중대 군기 문란죄이며 당사자는 그야말로 끔살을 면치 못했다. 또한 죄수 같은 걸 놓쳤다면 지키던 간수가 자기 목숨을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행 12:19 베드로를 놓친 감옥 간수들의 최후. 행 16:27 감옥이 지진으로 파괴되자 간수는 곧장 자결하려 함)

아무리 유대교 종교인들이 돈을 많이 주고, 또 졸았던 것에 대해서 자신들이 적극 변호하고 실드를 쳐 주겠다고 약속은 했어도... 졸다가 예수 시체를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로마 군인이 퍼뜨린다는 건 어지간해서는 자충수에 가까운 짓이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든다. 뭐, 고의성이 있든 없든 예수님 시신을 놓친 군인들은 어떤 경우든 신변이 좀 걱정되는 처지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앞뒤가 안 맞는 행적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자기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백성들 눈치를 보고 그들의 예상 반응을 시뮬레이션하고, 서로 의논을 하면서 잔머리를 굴린다.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에 대한 대답도..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하면 될 것을 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마 21:25-27)

또한 온갖 율법을 어기면서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고 추악한 짓은 다 했으면서... 가룟 유다로부터 반환받은 돈은 제 딴에 더러운 돈이라고 성전의 보고에다 안 넣고 율법 따지면서 종교적인 행세를 한다(마 27:6).

그들의 또 다른 위선적인 면모는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그들을 맹렬하게 책망하시는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 23:29-33을 보면.. 한 마디로 이런 내용이다. “우리 선조들은 참 병신 같아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대언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어요.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안 그랬을 겁니다.”
허나, 이들이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걸 생각한다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물론, 우리라고 해서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예수님의 진면모를 영적으로 파악하고 그분의 길을 따랐을지.. 아니면 역시나 육신적인 선동에 혹해서 그분을 정죄하는 일에 동참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성경은 인간이라면 바다가 갈라지고 홍해 중앙을 멀쩡히 건너는 넘사벽 기적 체험을 하고도 딱 사흘 뒤엔 목 말라 죽겠다고, 이딴 식으로 고생하면 뺑이 칠 거면 걍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영웅 예수님이 입성하는 걸 흥분해서 환영하던 인파들도 며칠 뒤에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폭도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라는 저 무능한 꼰대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인간이 생각보다 굉장히 변덕이 심하고 간사하다고 말하는 책이다. 당신이라고 해서 안 그럴 것 같은가? “천만에”다.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바빌론 포로 귀환 이래로 이제 절대로 우상 숭배 안 하고 최소한 구약 성경 유일신만 믿기로 작정을 한 종교 꼴통들이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해 온 종교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이들이 비록 예수님 당대에 전반적으로 영적으로 좀 맛이 가 있긴 했어도 이들만이 마치 악의 축인 양 싸잡아 정죄하는 것은 성경 독자로서 옳지 못한 태도이다. 세상에는 바리새인만도 못한 인간들 역시 엄청 많다는 걸 알아야 하며, 특히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반유대주의 풍조에 동조하는 건 절대로 성경적인 자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글이 굉장히 길어져 버렸는데.. 맺기 전에 하나만 더, 빌라도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겠다.
먼저 빌라도. 그는 현장에서 저렇게 우유부단하고 고뇌하던 모습으로 인해, 그저 운 나쁘게 저 현장에 있었을 뿐이고 악의적이는 않았던 나약한 보신주의자라는 식으로 실드 치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빌라도를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헤롯하고도 다시 친해졌을 정도로(눅 23:12) 결국 예수님의 대적들 편에 확실하게 섰기 때문이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이건 진지한 구도적인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한 마디 툭 던진 립서비스일 뿐이었다. “ㅉㅉ 이 상황에서 뭔 놈의 얼어죽을 진리 타령이냐?”에 가깝다.

원쑤지간이던 빌라도와 헤롯이 과연 무엇을 매개체로 화해했을지도 생각해 보면 뻔한 노릇이다. 까놓고 말해 술자리에서 술안주로 예수님을 같이 씹으면서 친해진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내가 보니 그 사람 완전 바보 싸이코더구만! ㅋㅋㅋ” “그러게? ㅋㅋㅋ 사실은 나도 똑같이 생각했지!” 그는 예수님을 대면하면서 양심이 좀 찔리던 기억은 이런 식으로 잊어버리고 훌훌 털어내 버렸다.

그리고 유다는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였다가 한 순간에 대실수를 저지르고 그걸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수습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 정도로 여겨진다. 하도 부정적으로만 평가되다 보니 마치 원 균을 재평가하듯이 유다도 최대한 개인 상황을 감안하여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신학 해석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유다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없이 성육신한 마귀라는 해석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마귀이니라” (요 6:70)가 비유가 아니라 평이한 사실 진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행 1:25에서도 베드로가 유다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라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고 얘기하는 게 뭔가 저 사람 정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육신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마귀 역시 짝퉁 성육신해서 훗날 예수님의 제자로 위장해 들어갔다는 뜻이 되는데.. 사실이라면 많이 무섭다. 성경에는 유다 자체가 마귀라는 말뿐만 아니라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눅 22:3), “사탄이 유다에게 이상한 생각을 넣었다”(요 13:27) 같은 상이한 진술이 모두 들어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의 잘못된 인구 조사의 배후에 무슨 일이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상이하게 진술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삼하 24:1, 대상 21:1).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나중에 목을 매어 자살했는데, 이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증언을 보면 그는 내장이 튀어나오며 상당히 끔찍하게 죽은 것 같다. (행 1:18)
단, 사도행전 1장에서 언급되는 피 밭과, 마태복음 27장에서 언급되는 피 밭은 개념상 서로 다른 장소이다.
전자는 유다가 개인적으로 비축해 둔 돈으로 산 자기 땅이다. 그러나 후자는 따로 토기장이의 땅을 사서 조성한 공동묘지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11/10 08:30 2014/11/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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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분석

구약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일명 '눈물의 선지자(대언자)'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이사야서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의 저자이다.

앞의 책인 이사야서에서도 앞부분에 잠깐 민족의 타락 얘기가 나오지만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며 얘는 외국 민족에 대한 예언이 더 많다.
그 반면, 예레미야서는 외국 민족에 대한 예언은 뒷부분에 잠깐 나오는 게 전부이고 주 내용은 민족의 타락에 대한 책망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항복하고 바빌론으로 잡혀 가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정치적인 얘기도 많다. 이 때문에 그는 당대의 동족들로부터 반역자라고 욕을 엄청 먹었으며 살해 위협을 받고 폭행, 투옥과 감금도 당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히브리 음차 알파벳 철자는 Jeremiah이지만, 그리스어가 기본인 신약 성경에 가면 Jeremias와 Jeremy도 나온다. 뭐, 신약이라고 해 봤자 실질적으로 나오는 책은 마태복음밖에 없지만. Jeremy는 오늘날에도 영미권에서 인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게 두 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렘 31:15 “라마에서 애통하며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를 인용한 마 2:17-18인데,
정작 구약 본문을 보면.. “엥? 그게 그 얘기예요? 이 문맥이 헤롯 왕의 유아 학살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싶은 생각도 든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게 그 예언이라고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지 않았으면 눈치를 채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 자체가 과거, 교리적, 예언적으로 굉장히 중의적으로 기록되기라도 했는가 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 27:9인데.. 이건 좀 더 어려운 문제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거라고 하나, 정작 예레미야서에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은 30냥 인신매매 같은 걸 암시하는 구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토기장이? 예레미야서에는 18~19장 사이에서 토기장이가 빚는 토기 관련 퍼포먼스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은 30냥에 팔리는 것을 암시하는 예언은 스가랴서에 있다. (슥 11:12-13)

그럼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더구나 KJV 유일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과 거의 같은 패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KJV 이외의 다른 변개된 성경들이 잘못됐다고 까기도 했다.
바로 막 1:2-3 말이다. 거기에는 이사야서 인용도 있고 말라기서 인용도 있다. “이사야 + 말라기 = 대언자들(prophets)”이 돼야 맞는데, 변개된 성경에서는 말라기의 예언까지 싸잡아서 '대언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써 놨으니 이는 명백한 오류인 것이다.
애초에 이런 논리를 펴기까지 했으니 신구약간 예언 언급의 정확도에 대해서 KJV 빌리버는 민감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러나 막 1:2와 마 27:9의 다른 점을 굳이 찾자면..
전자의 경우 명백하게 대언자들의 글이라고 written이라는 동사가 있는 반면, 마태복음의 예레미야 인용은 그냥 spoken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은 30냥 운운하는 예언을 하긴 했지만, 그건 구전으로만 전해졌을 뿐 예레미야서에 정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 중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행 20:35)와 비슷한 급의 예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저 말 역시 정작 사복음서에서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7:14)를 비롯해 50장, 53장 등에서 예수님 예언이 잔뜩 들어있다.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관심사가 온통 바빌론 포로일 뿐, 딱히 예수님 예언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예외적인 힌트를 통해 예레미야 역시 그 먼 옛날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암시와 힌트를 받긴 했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예레미야서 자체의 특징을 좀 살펴보도록 하자.

1. 성경의 다른 책들에 대한 오마주가 생각보다 많다. 간단한 예로,

  • 1인칭의 자조적인 기도(느헤미야)
  • 악인의 형통에 대한 회의와 의문: 시편 73편, 하박국 1장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에도 12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 자기가 태어난 날에 대한 저주(욥기): 특히 20장 끝부분은 이거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욥기 3장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노골적인 분위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레미야서의 앞부분은 워낙 암울한 논조이기 때문에 저런 내용이 전부 등장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에스겔서 오마주라고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어서 아들까지 이가 시리다”라는 잘못된 조상 은덕/조상 탓 통념에 대한 반박이 렘 31:29와 겔 18:2에 같이 나온다.

또한 거짓 대언자와의 대결이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 '미가야 vs 시드기야'를 기억하시는지? 예레미야서에는 28장에서 하나냐와의 대결이 나온다.
거짓 대언자 시드기야는 참 대언자 미가야의 따귀를 때리면서 도발을 했는데, 거짓 대언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퍼포먼스 차원에서 걸고 있던 나무 멍에를 뺏어서 부러뜨리면서 “여러분 이거(= 예레미야의 말)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하나님은 바빌론의 멍에를 '이렇게' 꺾어 버리실 겁니다!”라고 선동질을 제대로 했다.

이런 개막장 분위기에 예레미야는 기도 안 차서 그냥 자리를 떠 버렸고.. 하나냐는 그로부터 두 달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아 급사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아울러, 예레미야서에는 사도행전을 오마주한 듯한 장면도 있다.
예레미야로부터 너무 과격하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들은 뒤 사람들이 “이 자식 이거 어떡하면 좋을까? 예전에도 좀 똘끼 부리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그때는 이렇게 됐었다” ... 처럼 '전례'를 따지고 드는 내용이 있다.
이건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 공회가 보인 반응과 매우 유사하다. 행 5:36-39와 렘 26:17 이후를 서로 비교해 보시라.

그 뿐만이 아니다. 성경에서 에티오피아 내시가 나오는 장면도 사도행전 8장과 더불어 예레미야 38장이며, 둘 다 긍정적으로 나온다. 전자에서는 내시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으며, 후자에서는 내시가 예레미야를 구출해 준다! 하나님 역시 그 내시에게 보상을 해 주셨다(렘 39:16-18).

2. 예레미야서에서 대표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 내지 관용구로는

  • 칼, 기근, 역병 sword, famine, pestilence 3종 콤보 세트
  • 일찍 일어나 ...하기 rising up early and ...ing
  • backsliding(타락하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레미야에서만 압도적으로 자주 쓰인다.
  • unpunished: “니가 아무 벌도 안 받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문맥에서 몇 번 나온다. 이 단어는 잠언과 예레미야서에서만 나온다.
  • horrible thing: “그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렘 5:30) 요즘 식으로 치자면 충격과 공포 정도 되겠다.

이 정도가 있다.

3. 이 책에는 했던 말 반복 패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는 성경에서 주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는 말이 나오는 유일한 책인데, 23:6과 33:16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다.

상처를 조금만 고쳐 주고는 평안이 없는데 평안 드립을 치는 것: 6:14와 8:11에서 반복된다.
도벳에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앞으로 '살육 골짜기'라고 불릴 것이다: 7:32와 19:6에서 반복된다.
그 많은 기적이 행해졌던 이집트 탈출 사건보다도 바빌론 귀환 사건이 더 큰 기적이라고 알려질 것이다: 16:14-15와 23:7-8에서 반복된다.

여러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뒷부분에서도 49:18-20과 50:40,44-45처럼.. 뭔가 copy & paste 같은 느낌이 드는 표현이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단어를 하나씩 일일이 대조해 보면 완전히 같지도 않고 약간은 차이가 발견된다. 10:12-16와 51:15-19도 헛된 우상들을 까는 문맥에서 동일한 메시지 copy paste이다.

그리고, 열왕기하의 끝부분은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같다. (왕하 25:27-30; 렘 52:31-34)
한편 역대기하의 끝부분은 바로 다음 책인 에스라서의 첫부분과 같다. (대하 36:22-23; 스 1:1-2)
그러니 역사서인 열왕기와 역대기는 책 자체에는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이 역시 각각 예레미야와 에스라가 기록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다소 설득력을 얻는다.

4. 이 외에 예레미야서에서 인상적인 부분

  • '하늘의 여왕'이 언급돼 있으며(7:18, 44:17-18) 크리스마스 트리를 까는 듯한 대목(10:3-5)이 나오는 유일한 책
  • '마음이야말로 가장 사악하다'(17:19), '옛 길로 가라'(6:16)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음
  • 일명 하나님의 전화번호라고 불리는 렘 33:3이 예레미야서에 있음

성경의 여느 역사서와 선지서들이 그렇듯이 예레미야서 역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에 대해서 혹독한 경고와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렇게 멸망하고 끝인 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선민들은 나중에 반드시 회복되며, 이들을 징벌하는 도구로 쓰였던 민족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게 굴었다가 아예 씨도 안 남기고 처절하게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결론이다.

“쟤들? 어차피 자기네 신 제대로 안 믿어서 저 꼴 난 거잖아? 그러니 우리가 마음껏 막 대해도 되지”...를 성경은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애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민족이니 꼴 좋지”이다. 반유대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 말고도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괴롭히고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이다가 덩달아 망할 악역들은 차고 넘치니 크리스천이 그런 데에 가담하지는 말아야 한다.

오죽했으면 네가 낮과 밤 천체 운동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 회복 약속도 뒤엎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까지 성경은 말한다. (렘 31:35-37)
바빌론으로 70년간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일단 항복만 하면 니 목숨은 내가 절대 보장한다. 무슨 여행, 요양이라도 다녀 오듯이 잘 갔다 오너라”이다.

사람 인생에서는 잠깐 갔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여행이 영원히 못 돌아오는 단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1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중의 1·4 후퇴, 그리고 이 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요양 등..
그런데 바빌론 포로 귀환은 이런 추세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사건이다. 이때는 이집트의 10재앙 같은 것도 없고, 모세 같은 넘사벽급의 걸출한 지도자가 없는데도! 그래서 이 사건이 모세의 기적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생각할 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도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불과 쇠망치에다 비유하였으며(23:29), 말씀 변개(perverted the words of the living God)에 대한 언급(렘 23:36)이 있기 때문이다. 36장과 끝부분에서는 성경 자필 원본이 소실되는 장면도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24 08:24 2014/10/2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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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해설

흐음, 지금까지 내가 블로그에 십계명 자체를 분석한 글을 올린 적이 없었구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법으로, 성경에서 출애굽기 20장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나중에 신명기 5장에서 재탕된다.
십계명은 곰곰이 뜯어 보면 굉장히 잘 만든 법 체계이다.
각각의 아이템들이 다 죄라는 vector space에서 서로 일차독립을 이루는 벡터를 구성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색깔)를 서로 독립된 분야(R, G, B??)별로 잘 망라했다는 뜻이다.

십계명의 속성을 쪼개 보면 이러하다.

I. 하나님 관련

1.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형상: 하나님을 잘못된 방식으로, 혹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우기면서 섬기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신앙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에다 비유하자면, 2와 1은 각각 내란죄-외환죄 정도에 대응하는 굉장한 중죄이다. 천주교의 십계명은 1과 2를 한데 뭉뚱그려서 '반역죄' 정도로 취급하는 듯한데, 본인의 입장에서는 신념상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대놓고 주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러 떨어져 나간 사건이 아니었다. 단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간주하고 얘에게 경배했을 뿐이다.

3은 한국어는 딱히 그리 심한 게 없지만, 심심하면 Oh my God! Goddamn! Jesus! 이런 신성모독적인 감탄사를 남발하는 게 정확하게 해당한다. 성경이 말하는 그 심각하고 끔찍한 문자적인 지옥은 안 믿으면서, What the hell.. 이런 저주를 가벼이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II.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는 중간 계명

4.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어떤 나쁜 짓을 하지 말라” 패턴이 아니라, “신이 정해 준 휴일엔 욕심 부리지 말고 조바심 내지 말고 반드시 쉬어라”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지금 쉬느라 생산성이 저하되는 것은 하나님이 유· 무형으로 나중에 다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이 계명을 지키려면 역시나 믿음이 필요하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 게, 딱 이 날을 노려서 적의 침략을 받기라도 하면 어떡할 참인가? (당장 우리나라의 6·25 전쟁만 해도 북한군이 일요일에 딱 맞춰 쳐들어왔었다!).

물론 안식일은 유대인의 표적이기 때문에 이 계명은 신약 크리스천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 유일한 계명이다. 이걸 주일 지키는 것에다 적용하는 건, 마치 열역학 제2법칙을 들이대면서 진화론을 반박하는 것만큼이나 4계명을 굉장히 간접적으로 영적으로 적용한 귀결이다.

5. 부모를 공경하라: 사람 관련이긴 하되, 그냥 일반인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특별한 사람에 대한 계명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패륜죄를 굉장히 싫어하신다. (출 21:15,17; 레 20:9; 특히 압권은 신 21:18-21)
안 지켰을 때 채찍만 가혹한 게 아니라, 지켰을 때 이 땅에서 장수할 거라는 당근까지 문맥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진 유일한 계명임.

III. 사람 관련

6. 살인하지 말라: 물리적인 폭력으로 지을 수 있는 죄 중에서 단연 1위. 하나님의 법은 “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살인은 흉계를 품고 남을 고의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고의성 없는 과실치사나 정당방위, 전쟁 등은 해당되지 않음.
7. 간음하지 말라: 꼭 물리적인 폭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사람 몸에다 쉽게 지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몸까지 실질적으로 더럽힐 수 있는 심각한 죄이다. 간음은 성경에서 영적인 의미도 매우 크다.

8. 도둑질하지 말라: 남의 것을 속여 빼앗는 모든 행위에 대한 철퇴이다. 이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황금률 등 인생의 기본 원칙을 위반하는 죄이다.

9. 거짓 증언하지 말라: 거짓말에 대한 철퇴이긴 한데, 일단 이 문맥이 가장 좁은 범위에서 말하는 것은 판결을 굽게 하는 법적 위증을 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이건 그야말로 입만 뻥긋함으로써 지을 수 있는 죄이다.
10. 탐내지 말라: 이제는 입을 움직일 필요조차 없이 마음과 생각만으로 지을 수 있는 죄가 십계명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것은 인간을 다른 무수히 많은 죄들로 끌어들인 죄이며 스스로 완벽을 자처하던 사도 바울을 떡실신시킨 죄이기도 하다.

십계명은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유익하며, 제4를 제외하면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할 규범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행실을 하도 강조하다 보니, 십계명을 평생 지켜야 구원이 유지된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율법주의 농간에는 속지 마시길 바란다.

이 자리에서 또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조화를 논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매우 부족하니, 결론만 간단히 말하겠다. 구약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법은 “나 이렇게 외형적인 법을 딱 맞춰 지켰어요. 나 잘했죠? 이 정도면 내 힘으로 칭의와 구원이 가능하겠죠?”라고 으스대라고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십계명이, 아니 하나님의 법 전체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추상적인 계명에 그대로 요약되어 있다고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롬 13:9)

Posted by 사무엘

2014/08/10 08:34 2014/08/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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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때는 절대로 남 따위와 비교하지 말고 성경과 비교하고 하나님의 법과 '절대적인 잣대로' 비교한다.
그 반면, 위의 권위와 위정자에 대해서는 “이게 그나마 불신자가 불신자를 통제하고 죄의 결과를 제어하려는 최선의 방법이구나. 비록 멍청하거나 사악하거나 혹은 둘 다일 때도 왕왕 있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세상은 더 망가질 수밖에 없으니, 내 신앙을 가로막는 것만 아니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고 순종해야지”라는 '상대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된다.

이 생각이 딱 정립돼 있으면 정신 건강에 여러 모로 좋다.
큰 절대악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고서 불가피한 필요악의 작은 폐해만 자꾸 부각시키면서 없애고 뒤집어엎자고 드는 선동질, 반골 기질, 쓸데없는 세상 비관과 피해의식,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인권 드립, 그리고 인간의 죄성상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사회 제도가 존재 가능하다고 속삭이는 속임수 등등에 넘어갈 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저건 전부 성경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내가 가끔 정치색 띤 글을 쓰는 건(특히 종북들 까는) 전부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아이템들로 한정해서이다.

2.
신약 성경에 나온 긍정적인 얘기들, 대표적으로 빌 4:13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 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 같은 것들은...
쉽게 말해 너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환경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열매를 맺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얘기다. 세상적으로는 오히려 바보 되고 손해 보더라도 말이다. 빌 4장 전후 문맥을 보면 아주 쉽게 유추 가능한 얘기임. 무슨 예수 버프를 받아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내 야망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롬 8:28도 당신이 육신적으로 절대로 원하지 않는 중간 과정과 결말을 다 포함할 수도 있는 얘기다. 신약 성경은 단순히 “차카게 살자” 수준을 넘어서 흔한 통념보다 굉장히 영적이고 고차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가 무엇인지, 그런 문맥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요한복음을 읽을 때쯤부터 미리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도 “제발 복 좀 주시옵소서”에 앞서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부터 알 수 있는 안목을 주시옵소서” 기도부터 먼저 한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신약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이상한 은사주의 기복 신앙 같은 데에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다.

3.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구원이나 크리스천의 양육 같은 게 아니다. 겨우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기에는 성경엔 나머지 잉여스러운 내용이 분량이 너무 많고 그쪽 묘사들이 “쓸데없이 고퀄”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초림보다 재림 예언이 더 많고, 이뤄진 예언보다 아직 안 이뤄진 예언이 더 많이 적혀 있다. 특히 이스라엘, 유대인의 문자적인 회복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이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문자적인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아니라고 가르치거나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했다거나 영적 유대인 드립 친다거나, “예수님을 죽인 나쁜 민족” 운운하면서 반유대주의를 조장한다거나, 14만 4천 명이 자기 교단이라고 가르치는 것들은 전부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이단 교리다. 그런 데서는 당장 떠나고 나오시라.

성경 내용을 영적으로 적용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읽히는 문자적 1차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는 하고서 “그 다음에” 내 개인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어느 문맥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고 어디서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 맞으면 오른뺨도 대라”가 적용되는지를 제대로 분간할 줄만 알아도 최하 95%가 넘는 이단에는 안 빠질 수 있으며, 성경 읽는 기본 자세의 반은 마스터한 게 아닐까 싶다.

4.
세상에 복음과 구원 말고 공짜란 없다. 어디 하나가 공짜라면 다른 한쪽에서는 반드시 바가지나 착취나 희생이 존재한다. 아니, 구원이라는 공짜마저도 예수님의 보혈 덕분에 가능한 것이니 거시적으로는 공짜가 아닌 셈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인이 예전에 경제관 쪽으로 글을 쓴 적이 있고 성경 교리 쪽으로도 글을 길게 쓴 적이 있다. 중요한 주제이니 관련 글을 반드시 참고하시라.

5.
크리스천의 윤리관은 그야말로 완전 보수 수구 꼴통급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역시 예전 글을 참고하시라.
그리고 역시 위의 예전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만,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은 자에 대한 각종 이상한 미신(귀신 따위), 필요 이상의 신세 한탄, 트라우마, '천추의 한' 같은 게 (일단은) 없다. 이것도 사람의 멘탈을 굉장히 건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가치관이다.

6.
끝으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성경대로 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신이 대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가?
예수 믿느라 나 혼자만 잔뜩 손해 보고 생존 경쟁에서 뒤쳐지고 부당한 일,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생각이 드는가? 도대체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감이 안 오는가?
내가 인간적인 논리를 동원해서 그 질문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마냥 동네북, 호구처럼 로봇처럼 살라는 말도 당연히 절대 아니다. 다만 난 이런 말은 해 줄 수 있다.

먼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구원 조건, 하나님을 찾는 통로로.. 인간의 다른 그 어떤 스펙이나 외모, 능력도 모조리 제끼고.. 제일 하찮고 나약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믿음'이라는 것만을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이걸 기회로 삼아야 한다.

왜 하나님이 세상을 그런 원리로 만들어 놓았는지 제대로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공평해야 하는 것은 진짜 공평하게 돌아가게 해 놓으셨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보다 더 잘났고 더 똑똑하고 더 부유한 사람들이 진작에 하나님을 당신보다 먼저 만났을 것이며 게임 다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필요한 그 수단을 인간에게 너무 불공평하게 배분해 놓으신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잘못된 꼴이 된다. 다른 능력자들이 다 안 믿을 때 당신이 믿어야 인생의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이라고?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악한 카인을 벌을 내려 일찌감치 죽여 버린 게 아니라 반대로 의인 아벨이 카인에게 살해당하는 걸 허락하실 때부터.. 애초에 그 시절부터 불공평하기 시작했다. 저건 전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도 얼마나 추악하고 황당무계한 비리와 부조리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는지 역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조차 그 악한 시스템을 한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그 시스템을 역이용하여 자기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셨으니 우리 역시 너무 피해의식 갖지 말자.

또한 우리의 모든 마음속 생각과 일거수일투족이 다 훗날 심판석 앞에서 회계보고가 될 텐데, 정산되지 않고 숨겨진 죄가 드러나서 하나님 앞에서 쪽팔림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의로운 행실 때문에 손해 보고 부당함과 고난을 당한 것도 “똑같은 맥락으로” 그때 다 드러나서 보상받는 날이 온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거.. 영구적인 손해가 절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건 아Q 같은 근자감 정신승리법이 아니다. 영적 배후가 걸린 각종 문제들은.. 그 문제 자체가 물리적으로 제거됨으로써 해결되기보다는
내가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을 바꾸고 안목을 바꿔서 성경이 약속한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빌 4:7)을 얻음으로써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욥기만 봐도 하나님은 욥의 고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안 하셨지만 욥이 알아서 데꿀멍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악한 마귀의 통치하에 있는 현 세상은.. 사람이 그 믿음을 행사를 못 하게 시스템을 착착 만들어 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이상한 사람들, 잘못 믿고 성경을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의 바보짓, 병크를 잔뜩 부각시키면서 이래서 종교에는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한다. 하나님의 뜻을 오· 남용하는 것, 교회와 유대인을 구분 못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이러니 바른 성경 원천을 토대로 바른 믿음을 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오늘날의 모습이다.

“저런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한번 믿어 보고 싶다” 정도의 엄청난 선한 간증이 있는 크리스천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 평판은 나조차도 감당 못 하며 기대 안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괴감 가질 필요도 없고,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내 힘으로 이를 악물고 뭔가 엄청난 극기과 선행과 고행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더욱 없다.

난 딱 하나가 목표이다. 오로지 교리만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해서, 누가 그걸 안 믿고 반대하더라도 뭐가 기독교인지 정확하게 알긴 하고서 제대로 반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안 믿을 권리는 있어도, 기독교가 아닌 걸 기독교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굳이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편견을 막는 것도 인정받는 것 맞다.

나일롱 신자인 건 하나님 앞에서 겸손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순교자나 각종 '성인'(?)들의 행적이 자기와는 완전 별개 딴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이 압수되고 성도들이 화형을 당하던 시대에 치러지던 영적 전쟁이 있고, 성경이라 불리는 물건이 넘쳐나지만 그게 죄다 변개되는 오늘날 같은 시대에 치러지는 영적 전쟁도 따로 있다. 난 그걸 추구하며 지낸다.

Posted by 사무엘

2014/06/18 08:33 2014/06/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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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미갈 이야기

1. 다윗의 조약돌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장면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 같이 좀 생각해 보자.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왜 조약돌을 5개씩이나 챙겨 갔을까? (삼상 17:40)

“발사한 돌이 빗나가는 경우 / 골리앗이 한 발 만에 안 죽을 경우에 대비해서” 같은 답변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필살의 일격 단 한 발로 미간을 명중시켜서 인간 흉기 골리앗을 즉사 내지 최소한 기절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다윗은 곧바로 반격을 당해서 다음 돌은 쏴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 조약돌은 FPS 용어로 치면 일종의 레일건인 것이다. 골리앗은 BFG로 무장해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한 발 이후로는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비장한 각오를 단단히 한 사람들은... 거사를 치르기 전에 일부러 자기에게 주어진 리소스를 딱 자기 여건에 맞춰 제약하는 퍼포먼스를 행하곤 했다. 일종의 배수진이랄까?
 
안 이숙 여사는 왕복이 아닌 편도 배삯만 치르고 일본에 갔으며,
윤 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지러 가기 전에 김 구와 손목시계를 교환하여 자기가 더 저렴한 것을 챙겼다.
옛날 백제의 계백 장군은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전에 자기 처자식부터 미리 죽였다..;;
 
다윗도 만약 그런 식으로 비장하게 행동했다면 필생필사의 각오로 돌을 달랑 하나만 챙겨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스타일로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자기는 죽을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골리앗을 무찌르고 멀쩡히 돌아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일이 틀어질 가능성 따윈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건 영락없이 '근자감'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가진 자의 여유마냥 별 생각 없이 평상시처럼 여러 스페어 조약돌을 챙겼다.

아니, 어쩌면 그는 골리앗 정도를 초월하여 아예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장 현실의 목표물인 골리앗을 원 샷 원 킬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소리이고, 혹시 이 돌발상황 결과에 불복하여 예정에 없던 다른 거인들이 또 튀어나와서 시비를 걸면, 그놈들까지 이 조약돌로 잡아야겠다는 준비까지 한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거인이 골리앗만 있었던 건 아니며 당장 골리앗에게도 혈육상의 친동생이 있었다고 나오니까 말이다.
 
이 PvP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PK하고, 골리앗이 갖고 있던 커다란 검을 득템했다. 참고로 사무엘기상 17장을 읽어 보면, 성경은 골리앗을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걸 극도로 기피하면서 의도적으로 '그 블레셋 사람'이라고 에둘러 가리키는 걸 볼 수 있다.

2. 사울의 둘째 딸 미갈

성경에서 사울 왕의 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다윗이 골리앗을 죽여서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 뒤부터이다. 영웅이 된 건 좋은데 다윗이 너무 유명해지고 왕보다도 인기가 올라가자, 그는 왕의 눈 밖에 나 버렸다.

이거 뭐 누명을 씌워 죽일 수도 없고.. 왕은 꼼수 차원에서 다윗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고 높은 군사 직위를 주었으며,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어 결혼시켰다. 사실, 왕의 사위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 삼상 17:25에서 이미 약속된 사항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같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감히 왕의 딸과 결혼할 수는 없다고 제안을 고사했다. 이에 왕은 다윗을 또 전쟁터에서 죽게 할 명목으로, 아무 지참금 따위 안 받을 테니 다만 민족의 원수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서 놈들 포피만 가져오면 둘째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다윗은.. 미갈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가서 블레셋 사람 200명의 포피를 갖고 멀쩡히 돌아왔다. 그래서 결혼에 골인했다.
생각을 해 봐. 사랑하는 마누라를 얻으려고 목숨 걸고 전쟁터에서 사람 수백 명을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맺어진 결혼 생활은 그리 단란하지 못했으며 오래 못 갔다.

미갈은 거짓말까지 해 가며 다윗의 도피를 도와 줘야 했으며, 별거 모드에 빠졌던 그녀는 훗날 아버지의 명에 의해 '발디/발디엘'라는 다른 남자에게로 강제 재혼을 당했다. (삼상 25:44) 그 동안 다윗은 타지에서 또 아비가일, 아히노암이라는 아내를 두 명이나 추가했고 말이다.

허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었으니...
나중에 다윗은 긴 도피 생활을 마치고 왕이 된 후, 발디에게서 미갈을 도로 뺏어 와 버렸다! (삼하 3:14-16)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마누라를.. 그것도 자기 나라 왕에게 빼앗긴 발디는 엉엉 울면서 미갈을 뒤따라 갔는데.. 군대 대장 아브넬의 “그만 꺼져”(성경에는 그냥 Go return이지만..ㅎㅎ) 한 마디에 “넹.. ㅠ.ㅠ” 깨갱 하고 버로우 타 버린 완전 안습한 남자로 성경에 나온다. 성경에서 처지가 제일 처량한 남자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다윗과 미갈은 재회를 하였으나, 궁극적인 결말은 또 다시 불미스러웠다.
사사 시절 이래로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가 돌아오던 날, 다윗은 왕의 체면도 다 버리고 너무 즐거워서 백성들과 덩실덩실 춤추고 즐겼는데...

미갈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편에게 “품위라고는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리면서 당신 참 가관이더군요”라는 요지로 비아냥거리면서 굉장한 악담을 퍼부었다.

다윗도 이것만은 영적인 문제인지라 그냥 넘길 수 없었고, 아내에게 굉장히 실망을 한 듯하다. “나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지금보다 더 어리광 부리고 기꺼이 더 망가질 수도 있소. (그리고 그러더라도 나는 당신이 언급한 그런 천한 여자들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더 대접을 받을 테니 걱정 마쇼.)”

그 뒤로 미갈은 자녀 없이 쓸쓸한 말로를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삼하 6:23) 그 시절에 유부녀가 자기 자녀가 없는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굉장한 치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이것이 단순히 금슬에 금이 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생리학적 불임을 만들어 버리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인간의 출산을 굉장히 주관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성경의 전반적인 심상으로부터 유추했을 때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미갈의 마지막 장면이다. 처음엔 다윗이 미갈을 좋아한 게 아니라 미갈이 다윗을 먼저 사랑했다고 나오는데.. 본의가 아니게 시집을 다시 갔다가 돌아온 뒤, 결국 다윗의 여러 아내들 중 랭킹 끄트머리로 밀려나면서 파경으로 갔구나. 인생 한번 참 파란만장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6/09 08:37 2014/06/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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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세

제아무리 불신자 무신론자라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건 마치 “목 잘린 직후의 느낌이 어떻냐”만큼이나.. 체험해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질 못하니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론이 접근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종교관에 의지해서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회· 환생이든, 완전 소멸이든, 하늘과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보니, 옳다 그르다 같은 감정 싸움은 딱히 없다. 뭐, 굳이 하나 지적하자면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니 너네 종교는 참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정도의 딴지만 있을 뿐.
그러나 그건 협박이나 공갈이 아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해서 죄인을 지옥에 보낸다는 거지, 그 말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을 제멋대로 해코지 차원에서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교리가 안 믿어지면 그냥 개인적으로만 안 받아들이고 안 믿으면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내세관은 그 배타적인 것 딱 하나만 받아들이고 넘기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굉장히 뒤끝 없고 깔끔하고 건전하다!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귀신 없고 미신 없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류 없고, 죽은 사람 갖고 현질(=돈 내라)을 유도하는 지긋지긋한 종교 장난질이 없다! 그 대신 부활의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혼이 소멸하고 모든 게 그대로 끝이라면... 내가 단언하는데 이 세상을 지금처럼 힘들게 살 필요라고는 눈꼽만큼도 조금도 없다~~!!! 자살이 전혀 죄가 될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5. 보편적인 윤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경적 윤리관은 어지간한 세상 사람들이 ‘진보 트렌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인 수구꼴통(?)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일단 필요악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다 긍정적이다. 사형제, 체벌, 나라 지키는 군대, 공권력 같은 것. 절대적인 선악 기준이 없을 때는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흉악범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 피해자 유족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있어서 범죄가 줄어들었느냐, 범죄자의 교화는 어떡하냐 그딴 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경의 판결은 “흉계를 품고 사람을 고의로 죽게 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 “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인 것이다. “너 고소”가 아니라 “너 죽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흉악범도 개인적으로야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형벌에 의해 세상 하직해야 한다. 자기 목숨 바쳐서 피해자 유족들의 한을 풀고 자기 피로 땅을 깨끗하게 해 준 뒤, 빨랑 하늘나라 가야 된다.

그리고 성(sex) 관념도 진짜 깔끔하다. (1) 결혼한 (2) 남자사람과 (3) 여자사람이 하는 것 말고는.. (1)부터 (3)까지 한 단서라도 누락되거나 바뀐 것은 전부 음행, 죄악이고 그것도 굉장히 큰 죄이다.

이런 법칙들이 온갖 인간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핑계로 문란해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인권이(특히 여성 인권) 실질적으로 향상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야금야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만이 열릴 뿐이다. 당장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낳은 뒤 책임감 있게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성장한 당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늘 이상한 통계 자료나 주고받으면서 답 없는 쳇바퀴 같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 윤리관의 경우, 다른 창조/진화나 성경 같은 이슈와는 달리,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크리스천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위에서 소개된 여러 아이템들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가르는 가장 크리티컬한 변수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이다!

세속 백과사전이나 세계사 만화, 인명 사전, 위키백과 같은 데서 ‘예수’를 찾아 보시라. 제아무리 개독안티라 해도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는 안 그런다. 그건 역사적 증거가 너무 분명해서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이면 열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얘기로 끝난다. 아니면 부활까지도 소개는 하지만 “성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랬다고 한다, 기독경에 따르면 그랬다고 전해진다”라고 단서는 꼭 붙이고서, 우리는 저 진술에 책임 안 진다는 식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확인해 보아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혔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고 쓰는 순간 그 책은 객관성을 잃고 특정 종교 집단의 교리를 대변하는 경전(?) 내지 간증집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부활이 역사적으로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시점에서 관심사가 아니다.

정체불명의 위경이나 이상한 사료를 토대로 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예수는 사실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으며, 나중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한 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기고 죽었다는 얘기까지 지어낸 개독안티가 고대로부터 있었다. 고대의 철학자나 석학들도 현대의 지성인 무신론자보다 지성과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얼마 못 가 쏙 들어갔다. 지금도 예수 부활을 공격하는 얘기가 강경한 개독안티 커뮤니티 위주로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 내지 창조/진화보다는 강도가 “훨씬” 덜하다. 이 주제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마치 ‘내세’만큼이나,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으로 그냥 쉬쉬 하는 분위기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겁쟁이었던 예수님 제자들이 불과 수십 일 만에 예수 전하느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로 뒤바뀐 것, 고대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믿음을 지킨 것,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 기독교회가 수백, 수천 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우려먹는 레퍼토리이자 복음의 핵심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새마을호 열차에서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온 사건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게 호락호락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당할 것 같은가? 아예 예수님을 비롯해 사도들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무시하고 부정하지 않는 이상, 부활만 쏙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해서 살아난 거라면 제자들이 그걸 모를 수가 절대 없었을 텐데, 겨우 그런 예수님을 보고는 역전의 용사로 바뀌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담대히 증언하다가 순교까지 했다고? 에라이..

모르긴 몰라도 아폴로 계획 달 탐사 자작극 음모론을 반박하는 것만큼이나 예수 기절설 같은 건 단박에 반박 가능할 것이다. 법학자로서 무신론· 회의론자이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법적으로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라는 걸 발견한 사이먼 그린리프 같은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아낸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예수라는 인물이 정말 부활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성경 전체의 실질적인 진위 여부와 여러분의 혼의 미래까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 결론

잠시 눈을 돌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을 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당장 북한과 휴전 상태이고 대립 상태이다. 물론 365일 24시간 내내 긴장만 하고 있으면 너무 피곤하고 피차 좋을 게 없으니, 가끔은 대화도 시도하고 화해 무드도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둘은 근본적으로 통치 체제와 지향하는 바가 180도 완전히 너무 다른 정치 집단이며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둘은 도저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하고도 미묘한 애증의 관계가 있다. 경제 쪽으로는 분명 협력과 공존 관계이며, 개인적으로야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독도 때문에 여전히 대립하고 있고, 과거사 문제도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바로 이런 세상 국가들의 정치적 분쟁과 비슷한 맥락으로..
개인간의 영적 세계에는 예수님을 두고, 생명의 기원을 두고, 성경을 두고 다양한 분쟁 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도 일시적인 휴전 상태일 뿐, 완전한 종전이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 불씨는 언제든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크리스천은 불신자와는 얼마나 넘사벽급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췄는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건 혈과 육의 싸움이 전혀 아니다. 그러니, 이런 걸로 신자와 불신자끼리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싸운다거나, 한 신념을 남에게 폭력과 협박으로 강요한다거나, 그걸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차별의 근거로 활용한다거나 해서는 정말 절대로 안 된다. 크리스천은 다른 불신자와도 ‘가능한 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롬 12:18).

그런데.. 종교 쪽 논쟁은 서로 싸워 봤자 별로 답도 안 나오고 서로 말도 안 통하고 감정만 나빠진다고 해서 아예 완전 입 다물고 말을 말고 “너는 네 식대로 믿어라. 나는 내 식대로 믿는다”고 선을 마냥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경의 판결대로라면 이건 또 다른 극단이며 크리스천의 직무유기죄로 빠진다. 성경을 읽다 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진술로 인해 그럼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싶은 딜레마가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리스천으로 최소한의 영적 생명력은 갖췄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개독안티와의 어떤 논쟁도 다 이길 방대한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악의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왕년에 간증 잃을 병맛 같은 행실도 많이 남겼다. 게다가 나 또한 하나님의 모든 사고방식이 다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성품을 다듬고 내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오늘은 어제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간구하고 노력을 할 뿐이다. 최소한 상대방이 복음이 무엇이고 기독교 교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제대로 알고서 거절하든가 반대하지, 삐쳐서 마음을 확 닫아 버리는 일은 없게 내 말에 너를 ‘위한다’는 진심을 담으려 노력한다.

사실,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지금 당장 안 믿어지는 창조론이라든가 하나님의 경륜을 납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자기 힘으로 술· 담배를 끊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성경관· 윤리관 같은 사상을 인위로 개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구원을 위해 당장 가장 중요한 건 4번과 6번일 것이다. 일단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머지 믿음은 추가로 공급된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복음 전하다가 불신자가 1~3, 5번 같은 걸 갖고 불필요하게 논쟁을 걸면서 시간을 끌면, 적당히 커트를 하는 기지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 데에 끌려가면 힘만 빠지지 결론 절대 안 난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부족하고 여건마저 제각각 불공평(?)하게 타고나는 사람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육신적인 스펙이 아니라 ‘믿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그래도 공평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평한 거다.

기독교는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몇몇 전제조건 아이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에는 나름대로 상당히 건전한 원칙과 일관성과 체계가 잡혀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걸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안 믿는 건 개인 자유인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걸 남들이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것도 분명히 전해야 한다. 이렇게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 신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5/06 08:28 2014/05/0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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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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