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 관련 개념 복습

예전에도 신앙 관련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적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 내지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알량한 믿음이라는 제일 바보같고 나약한 자유의지가 전부이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외모나 스펙이나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 믿을 정도의 지적 능력조차도 없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자체를 할 수 없는 너무 어린 애들, 정신지체 박약아는.. 그냥 무조건 구원 받는다. 걔들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지만 그분을 거부할 능력도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본인은 이 개념을 편의상 '특례 구원'이라고 일컬어 왔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는 이 블로그를 찾아와서 이 글을 직접 읽을 정도의 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수학에다 비유하면 방정식의 근 중에서 그냥 너무 자명한 trivial solution과 비슷한 개념이다. 생물학으로 치면 무성 호흡/생식 같은..??

이런 논리를 따라, 본인은 어린아기들이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원죄 때문에, 혹은 유아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일단 전혀 믿지 않고 부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일체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선물 받으실 분?" / "저요, 저도 좀 주세요!"라고 응답하고 손 내미는 것도 자기의 의이고 선물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이상하게 몰아가는 설명도 배격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앞서 언급했던 '특례 구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립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까지 부르는 건 '글쎄요~'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밖의 문맥에서는 인간이 얼마든지 제 발로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지옥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사랑이나 공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못하면 정말 온갖 골때리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6· 25 대한해협 해전 때의 동해상의 북괴군 600명하고, 광주 5· 18 북괴군 600명을 헷갈리듯이 말이다.

직접적으로 동일한 문맥을 다루는 구절은 아니지만 눅 14:16-21 같은 비유 얘기를 봤을 때... 그리고 인류 역사와 지금 세상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추측하건대 미래에 하늘나라에 가 보면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는 특례 구원을 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긴 할 것 같다.

마치 증기 기관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서는 완전히 도태했지만 발전소에서 전력 생산용으로는 압도 다수인 주류이듯이(화력, 원자력이 모두 증기 터빈을 돌리므로!)...
선박이 장거리 여객에서는 비행기에 밀려 완전히 도태했지만, 일반인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물류에서는 여전히 본좌이듯이..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을 보게 되지 싶다. 민망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언론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어서 외면하고 있는 죽음이 이 세상의 음지에서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겠는가?

참 오랜만에 구원 기본 개념에 대해 복습해 보았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 많은데.. 시간과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구원만 받고 어리고 육신적인 신자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편이다.
자살은 인간이 저지르는 다른 끔찍하고 흉악한 죄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롭게 자결했다고 구원을 얻지는 못하듯, 세상 비관해서 혹은 고문 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살했다고 해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2. 성경과 세속 과학, 학문과의 관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만 하는 과학이라면, 그 알량한 방법론을 동원해서 신의 존재를 대놓고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사실은 교계에서 그렇게도 정죄하는 진화론을 절대무오한 진리라고 입증하지도 못한다. 그쪽 세계에서는 실험 결과에 따른 귀납적인 학설과 확률과 통계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과학과 종교?신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인 게 맞다. 그럼 창조니 진화니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건가? 마냥 안심하면 되냐? 그렇지는 않다.
과학 그 자체는 자연 계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이다. 잘 연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러나 거짓되이 과학이라고 불리는 학설이 대놓고 신을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고방식이나 연구 방법론· 패러다임을 잘못 적용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할 수는 있다. 이게 파괴된 신자는 진짜 볼장 다 본다.

"성경에 어차피 요런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성경의 존재 가치가 싹 부정되는 건 물론 아닐 거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기록돼 있는 엄청나고 극단적인 예언들도 그렇게 정밀하게 문자 그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거다. 비유와 교훈 등 우리에게 좋은 쪽만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면 된다. 히브리어를 보면 어떻게 그리스어를 보면 어떻고.."

요게 아주 위험하고 돼먹지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특정 부분만 분별 없이 무식하게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물의를 빚는 교파 종파에 대해서도 본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대안이 저런 지적 사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성경은 세상의 여느 학문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3. 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

성경에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다 마개를 씌우지 마라"(신 25:4, 가축이 적당히 자유롭게 먹으면서 일하게 해 줘라)가 의외로 신약에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된다. (고전 9:9, 딤전 5:18)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보상과 관련된 문맥에서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합 2:4에서 '자기'(his)가 빠진 바리에이션으로서 세 번 더 나온다. (롬 1:17, 갈 3:11, 히 10:37) 이에 덧붙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도 십계명인 출 20:12뿐만 아니라 신 5:16, 엡 6:2에서 반복되며, 복음서에서도 인용 형태로 마태· 마가· 누가에 거듭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뿐만 아니라 뭔가 좀 생뚱맞아 보이는 구절도 성경에서 톱급으로 자주 거듭 반복해서 인용된 게 있다. 바로 시 110:1이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 연이어 copy & paste 수준이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행 2:35와 히 1:13에서 추가로 나온다. 거기에다가 히 10:13도 재차 언급이라고 볼 수 있으니.. 횟수가 가히 압도적이다.

"소의 입마개"만치 인간의 실생활과 관련이 있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만치 보편적인 인륜을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믿음으로 살리라"만치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지도 않은 저 말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한 말이고 문맥이 뭘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저 구절의 모든 문맥과 의미를 강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만 말하자면 저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에게 한 말이다.
성경은 도덕 경전이나 역사 기록이나 복음과 구원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부가적인 2순위 이하의 목표일 뿐이다. 그 전에 하나님의 주 관심사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통치임을 알 수 있다. 세상 용어를 동원해서 표현하자면 다분히 정치적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온갖 시사· 종교 난제들을 가져와서 그분에게 질문을 했다. (부활의 때에 누구 아내? 율법에서 가장 큰 명령? 카이사르에게 납세? 등등등~) 떠보고 트집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든, 아니면 정말 몰라서든지..

예수님은 그런 것쯤은 막힘없이 전부 즉답을 하셨고 사람들을 데꿀멍 시켰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물으신 건 단 하나였다.

"그럼 이제 내가 니들에게 하나 좀 물어 보마. 너희는 내 정체가 정확하게 무엇인 것 같냐? 시 110:1을 봐. 다윗이 자기 비속 후손을 보고 '주'라고 존대해서 부르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 뒤로 사람들은 버로우 타 버리고 더는 예수님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시 110:1은 그 문맥에서 인용되었으며, 그게 복음서에 3회 반복해서 기록되었다.

또한, 나중에 배반당하고 체포된 뒤의 행적도 생각할 만하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다른 온갖 쓰잘데기없는 거짓 고소들에는 하나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너 정체가 뭐냐? 넌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는 정말 솔직 담백하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마 26:62-65, 막 14:60-63, 눅 22:66-71)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기만을 바라셨다. 예수의 부활조차도 곧이곧대로 믿기 싫고, 그래도 역사 팩트와 후폭풍 증거까지 송두리째 외면할 수는 없으니 제자들의 자칭 예수 부활 "체험" 사건 이 따위로 둘러대는 짓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슨 "P와 NP는 과연 동일할까?", "리만-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근은 실수부가 정말 몽땅 1/2일까?", 아니면 "광주에 과연 북괴 공작원들이 잔뜩 침투되었을까?" 같은 걸 묻지 않으신다.
그런 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답을 구하든가 말든가 하면 되고, 그 전에 정말 똑바로 알아야 하는 건 그리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너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나이다.

요한복음은 시 110:1의 직접 인용은 없지만 기록 목적이 독자들 예수 믿게 하는 것(요 20:31)이라고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분명하게 대놓고 적어 놓았다.

4. 신앙 생활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것

예수 믿고 구원받은 뒤의 신앙 생활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유리하게 짜인 것도 있고 불리한 구조로 된 것도 있다.
유리한 것은.. 뭔가 좋은 것을 사람이 "먼저" 받아서 동기 부여를 받은 뒤에, 그 다음에 사람 쪽에서 베풀고 헌신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구도라는 것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고 나서 침례를 받든지 믿음의 선한 행위를 하든지 성장을 하든지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일단 쉬고 나서, 달콤한 은혜의 말씀부터 먹고 나서, 즐기는 것부터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을 하고 헌신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 기업 중에 입사 후에 월급이건 일당이건 보수를 받고 나서 다음부터 일하는 곳이 있던가? 세상에서야 소득 주도 성장은 마치 "일단 서울대부터 보내 주면 나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같은 미친 개소리이지만.. 성경적인 신앙 원리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종 목적지, 만렙, 해탈의 경지라고 말하는 '구원' 내지 성인 성자(saint) 칭호가 이 바닥에서는 그냥 기본으로 따 놓은 당상이다. 근성 충전을 위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 이 아니라 일단 구원부터 받고 시작이다.
창세기 1~2장의 천지 창조만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6일간 일하고 나서 일곱째 날이 쉬는 날이었지만, 아담과 이브는 만들어지고 결혼하고 honeymoon부터 즐긴 뒤부터 동산 관리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얘기도 있다(눅 10:38-42).

그 반면, 인간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는 것, 혹은 이것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 사항도 있다.
신앙 생활이란 건 본질적으로 당장 보이고 들리는 대로, 편한 대로 직관적인 대로, 남들 다 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다. '바보 같아 보이고 손해 보는 듯이 보이는 좁은 길 역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결단과 행동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둬서 물리적인 여건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을 하나님이 굳이 수습해 주고 undo 해 주시는 경우 역시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생활이 무슨 공밀레 같은 신밀레 열정페이 착취는 절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성· 성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 단단하고 입에 쓴 말씀, 실행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 당하고 겪어 놓았다. 그때는 이런 믿는 구석으로 요렇게 하면 된다고 선례, 모범, 샘플이 마련돼 있다.

어려운 시험 문제나 과제에 대해 원리, 예제, 유사한 기출문제, 힌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러나 대놓고 정답을 가르쳐 주는 일은 결코 없으며, 하물며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해 줄 리는 절대 만무하다. 모든 과제는 자신의 문장을 써서 직접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절대로 '안알랴줌'인 것의 대표적인 예는.. 세대 경륜 급의 큰 그림 이상으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미래 예언,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이다. 나에게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는 완전 랜덤 케바케이다.
그것만 좀 알면 딱 죽기 직전에만 예수 믿고 구원을 먹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꼼수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걸로 농락당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다.

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비교해 보면.. 신앙 생활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어떤가?

5.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

  • 군대는 일반적으로 최악의 범죄라 여겨지는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하지만 자기 집 지키느라 불가피한 정당방위도 허용되는 마당에, 하물며 나라를 지키느라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형법상의 살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로 숭고하고 영예로운 일이다.
  • 국정원 같은 첩보 기관은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이이제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절대악을 퇴치하기 위해 필요악 역할을 맡고, 작은 악을 동원해서 더 큰 악을 예방하는 궂은일을 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건 나쁜짓이며, 공산주의자 빨갱이들이나 사용하는 수법(거짓말, 위장 침투..)으로 여겨진다.
  • 끝으로 종교는 겉으로 언뜻 보이는 결과만 보자면 정신승리, 진영논리,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분야이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라는 과학 팩트는 "그럼 최초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를 설명하지 못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무한순환을 끊으려면 결국 처음에 한 번은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인 복 받고 부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적인 박해 지역이 아닌 한, 무조건 쫄딱 망하고 거지 되고 감옥에 갇히고 죽지도 않는다. 구원받아서 신분이 바뀌는 것과 개인이 물질적으로 잘 되거나 못 되는 건 별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건전한 경제관과 시스템이 갖춰져서 잘살게 되고 중산층이 늘고 부강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게으른 개인을 일일이 다 먹여 살려 주는 게 아니다.

예수 믿어서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영적 복을 받고, 설령 가난하더라도 그 처지만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 주님께서 내게 지금 당장 허락하신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건 별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남들보다 가난하지만 난 영적으로는 부자.." 영이건 정신이건 이것도 정신승리라면 정신승리이다. 하지만 이건 아Q의 정신승리와 달리, 성경적인 근거와 보장이 돼 있는 건전한 정신승리인 것이다.
상대적 빈곤에 연연하는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져 있지 않으면 어차피 하나님이 물질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 주셔도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면서 불만족 불평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1 08:33 2019/04/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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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욥기는 모세오경과 더불어 가장 오래되고 먼저 기록된 책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책이 아니다. 너무 엄청나고 극단적인 스토리와 판타스틱한 서술들, 그리고 인류의 만년 의문 떡밥인 '의인의 까닭 없는 고난'을 다룬다는 점으로 인해 욥기는 문학성 하나는 가히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물론 불신자들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만 인정할 뿐, 저게 설마 레알 실존인물 실화일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통념과 달리, 다른 책에서 욥을 거듭해서 실존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인용하니(약 5:11 같은..), 이게 딜레마이다. 노아, 아벨만큼이나 말이다.
가령, 그 천하의 예수님이 창세기 4장 인물인 아벨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정하셨다(마 23:35). 예수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비평가라면 창세기 1~11장은 그냥 설화이고 상징 비유 묵시문학이라고 치부해도 될 것이다. 욥기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그 문제의 책 욥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그에게 아들 7명과 딸 3명이 태어나니라. 또한 그의 재산은 양이 7000마리요, 낙타가 3000마리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마리이며 집안사람들도 심히 많았으므로 이 사람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더라." (욥 1:1-3; 가독성을 위해 성경 본문에서 수량 표기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꿈)

욥은 노아· 다니엘과 더불어 구약의 3대 의인이라고 일컬어진다(겔 14:14). 특히 노아와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perfect(창 6:9, 욥 1:1)라는 수식어까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예수님과 동급의 완전무결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단지 구약 + 인간의 관점에서 그럭저럭 흠잡을 데 없고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만점 합격점이라는 뜻이다. 마치 all(모든)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느 문맥과 범위에서 전체 또는 완벽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은 아시다시피 한번 쫄딱 망했다가 그래도 다음과 같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 {주}께서 그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 그는 양 14000마리와 낙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하였더라. 또 그가 아들 7명과 딸 3명을 두었더라." (욥 42:10,12,13)

욥은 고난 이후에 자기 재산에 속하는 가축들은 몽땅 다 정확히 두 배로 보상받았다. 그런데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열 명 그대로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설명은.. 자녀는 재산과 별개이며 두 배 보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이나 보험(!!) 관점에서 보자면 대인과 대물은 엄연히 다르며, 자식은 단순히 부모의 소유물 개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가축 수와 자녀 수를 나란히 늘어놓은 욥기의 진술 방식 자체가 좀 문제가 있으며,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의 여지를 남기는 거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인 결론은.. 구원받은 자녀는 다른 가축이나 재물과 달리, 내세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고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었어도 영원의 관점에서는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이별하고 못 보는 기간 / 내세에서 n년간 보는 기간"의 비율은 n이 무한대로 갈 때 극한값이 0으로 가는 것이 자명하니..;;
그러므로 20명을 몽땅 새로 줄 필요 없이 새 자녀 10명만 추가로 주면 10+10 = 20이 된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가축)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낳았고 낳았고'만 잔뜩 나오는 마태복음 1장의 리스트의 진술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록에서 일부 인물이 누락된 이유도 덤으로 말이다.
또한,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라고.. 어린아이의 구원을 당당히 믿은 다윗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과학과 지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많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많다. 죽음도 그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은 꽤 건전하다. 죽은 사람 갖고 사기를 치는 수많은 미신, 괴담 등에 휩쓸릴 일이 없게 하며, 그 반대편 극단인 "죽으면 다 소멸하고 끝" 염세 회의 허무주의 쪽으로 빠지지도 않게 해 주기 때문에 더욱 좋다.

이런 신앙이 있으니 손 양원 목사는 "미국 유학 보내려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라는 초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생명 인격체를 만드는 일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인 것 같다. 구원받는 것도 그렇게 현세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한편, 이런 "현세 10+내세 10 = 20"설 말고.. 그 10명은 그냥 욥의 기존 자녀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일 거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뭐, 그것도 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피엔딩이며, 성경의 심상 면에서 일리가 있다.
성경에는 구약 성도들의 집단 부활이라든가(마 27:52-53) 모세의 부활(유 9)처럼 아주 implicit하고 간략하게 기록된 엄청난 부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욥 당사자도 단순 내세 이상으로 육체의 부활을 믿은 와중에(욥 19:26), 욥기에 부활의 실제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자녀를 만드는 건 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도 10명이나 다시 낳으려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욥의 기존 아내는.. 욥을 완전히 떠나 버렸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난 후에 재배회를 했는지.. 그렇지 않고 욥이 재혼을 하기라도 했는지 성경에 언급이 전혀 없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욥의 아내는 막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신앙이 남편만치 좋지는 못했던 그냥 예쁘장한 부잣집 사모님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ㄲㄲㄲ 사탄이 욥의 아내를 괜히 살려 둔 게 아님..)

이런 시나리오에 비해, 죽었던 기존 자녀만 다시 초자연적으로 살아나는 시나리오는 기적 그 자체 말고는 주변의 미주알고주알 디테일을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부활설은 근처에서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등장하는 '2배 보상'이라는 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자녀는 무슨 물건 같은 존재는 아니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주님으로부터 온 유산이요 보상이다(시 127:3-5).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축을 2배로 보상해 주셨거늘, 하물며 자녀도 2배로 보충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욥기의 도입부에서는 자녀 수부터 먼저 나온 뒤에 다음에 가축 수인데, 결말부에서는 2배로 늘어난 가축 수부터 나온 뒤에 그 다음이 자녀 수이다. 이것도 생각해 볼 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9 08:36 2019/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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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차이

  • 내가 이 일을 듣고는 내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놀란 채 앉았더니 (스 9:3)
  • 내가 그들을 꾸짖고 그들을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며 이르되 ... (느 13:25)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빡쳤을 때 에스라는 자기를 저렇게 했고, 느헤미야는 남을 저렇게 했구나.. (참고로 뜯다/뽑다 모두 영어로는 구분 없이 pluck off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2. 한글 개역성경의 감성 번역 (개역개정판도 포함)

(1) 습 3:17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영어로는 rejoice over you with joy / great gladness 정도다. 그냥 "너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정도의 뉘앙스인데, 하나님이 차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노무노무 기뻐하실 거라니! 번역자가 over이라는 단어를 전치사가 아니라 접두사로 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

(2) 시 8: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만, 내가 아는 전세계 그 어떤 성경 역본도 저기서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없다. 개역 말고는. 그냥 excellent(KJV. 뛰어나다) vs majestic(웅장한, 장엄한) 정도로 나뉜다.
번역자가 '크고 아름다워요'라는 심상을 의도한 건가 의문이 들지만, 그때는 아직 저런 표현이 없었는데..

3. 개역성경도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된 곳

(1) 창 37:3 채색옷/색동옷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주일학교 때부터 색동옷 입은 꿈쟁이 요셉을 보면서 자란 건, 개역성경이 비록 큰 줄기는 다르지만 저기서만은 어째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요즘 번역은 장신구가 잔뜩 달린 옷, 소매 긴 옷 등이 트렌드이다. 번역의 정오를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2) 엡 4:12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여(perfecting)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킹 제임스 성경만이 perfecting이고 타 역본들은 equip, prepare 그냥 '준비시키다'라고 번역되었다.
이건 구약도 아니고 신약인데, 개역성경이 딴 건 놔두고 여기서는 어떻게 KJV의 표현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4. 사흘 밤낮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게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날수로 따지면 토요일이 하룻날, 일요일이 이튿날로 48시간도 안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헛갈리는 점이다."


굉장히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긴 하나, 문제는 성경에는 저 기간에 대해 3박 3일..
three days & THREE NIGHTS
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낮도 셋, 밤도 셋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다. 마 12:40에서 요나의 표적 말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와 문화에 따라 날짜나 나이 계산을 할 때 당일을 포함시켜서 1부터 시작하느냐, 그렇지 않고 0부터 시작하느냐 같은 유도리와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 day는 '낮'도 되고 '날'도 되는 중의성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저 문맥에서는 내가 보기에 그런 유도리가 틈탈 여지가 없다. 금요일이 첫째 날, 일요일이 셋째 날 식으로 계산하면 밤이 "3박"이 되지 못한다. 그냥 2박 3일이 될 뿐이지.
마치 창세기 1장에서 1, 2절까지 몽땅 첫째 날에 포함시켜서 첫째 날이 "하늘과 땅과 빛을 만든 날"이라고 붙이는 격의 오류가 야기된다.

성경에서 third day와 three days가 서로 연결되어 쓰인 용례들을 쭉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들은 완전히 72시간을 꽉 채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48시간은 확실하게 경과한 기간이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도 예수님이 딱 부활하신 시각이 아니라 빈 무덤을 사람들이 발견한 시각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확하게 얼마나 더 전에 일어나서 무덤을 탈출해 나가셨을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넉넉하게는 수요일, 또는 아무리 늦어도 목요일 정도는 돼야 한다.

본인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성 금요일'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
나무위키의 설명과 성경의 진술이 서로 충돌할 때는 당연히 후자를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

5. 세례가 아니라 침례이며, 침례는 구원 증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1) 침례는 '주'의 만찬과 더불어 신약 기독교회에서 성경에서 행하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2대 의식이다.

(2) 또한 침례는 선행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조건이 전혀, 절대 아니다. 사람을 교회에 소속시킨다거나 종교적으로 뭔가 성화· 버프 시켜 주는 효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신앙 고백 내지 구원 간증 같은 인증일 뿐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은 뒤에 침례를 받는 게 나중이다. 이거 순서가 꼬이면 정말 사람 피곤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물론 침례인 요한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성격과 의미가 약간 다른 회개의 침례 같은 게 존재하긴 했었다(행 2:38 같은). 하지만 그건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1) 성경의 용례를 따라 꼭 물에 전신이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강조하며, (2) "애들은 가라"이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아기, 유아들에게는 그걸 절대 주지 않는다. 행 8:37이 KJV 이외의 성경에서 삭제된 것은 교리적으로 굉장히 큰 오류를 야기했다고 본다.

애들한테 유아 세례? 영세? 전~혀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애들은 설령 그 상태로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 해도 특례가 적용되어 어차피 무조건 구원 받는다. 이거라도 있으니 예수님 시절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애들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도 된다. 유아 세례가 이 복된 교리하고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시겠는가?

기독교계의 여러 종파 교파들 중에 침례교가 참 역설적이게도 침례에 다른 종교적인 의미나 주술적인(?) 능력을 일체 부정하고 침례를 제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냥 주님께서 명령하신 독특한 신앙 고백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쓰인 빵과 잔이 그냥 상징 외에 다른 아무런 주술적인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성경적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교리인데, 역사적으로 이 사소한 교리 하나 지키느라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나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밝히지 않겠다.

6. 히브리서의 저자

난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욥기의 저자는 모세라고 생각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
이라고 생각한다.

욥기의 근거는 구약을 통틀어 창세기와 욥기에만 존재하는 sons of God, being old and full of days이다.
히브리서의 근거는 바울 서신서에만 존재하는 Timothy, brotherly love, Grace be with you이다. 거기에다 킹 제임스 성경에만 존재하는 제목과 끝인사도 추가적인 증거 역할을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 이탈리아에서 써서 디모데 편으로 보냄)

욥기에 대해서는 중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엘리후가 자신을 1인칭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엘리후가 책 전체의 저자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욥 32:16이 대표적인 근거라고 한다.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가 긴 대화를 채록했을 것이라는 점은 설득력 있지만, 저 구절은 3인칭 시점의 텍스트에서 엘리후의 말이 직접 인용된 것일 뿐이다. 욥기가 전반적으로 엘리후의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에서 기록된 건 아니며, 32장의 중간에 갑자기 엘리후의 말 인용이 끝나고 엘리후의 동작에 대한 서술로 시점이 바뀔 만한 문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구절은 그냥 "제가 좀 기다려 봤는데 형님들이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제 의견 좀 털어놔야겠다고요."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에서 화자의 시점만으로 욥기의 저자를 추측하는 건 근거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하긴, 성경에서 간접 인용과 직접 인용이 한 문장 안에서 갑자기 왔다갔다 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바로 행 1:4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구절의 역본별 번역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다음으로 히브리서의 경우 비록 처음에는 완전 이질적인 문체로 시작해서 정체불명이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성도들의 행실 얘기가 나오면서 바울 서신 냄새가 짙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앞부분도 마찬가지다.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원리와 맥을 잡으면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저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을 기록할 만한 실력자가 그 당시에 바울 말고 또 있었을까? 내가 읽어 본 느낌은 그렇다.

백범일지를 읽어 보면, 당시의 보안 때문에 처음에는 생뚱맞은 가명 불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행적을 보면 그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으로 폭탄의 공급책이던 김 홍일 장군 말이다. 성경에도 그런 식의 표현 기법이 쓰인 게 아닐까?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본문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레미야일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열왕기하의 끝부분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호야긴 왕의 체포)
마치 역대기하의 끝부분과 다음 에스라기의 시작 부분이 일치하듯이 말이다. (고레스 왕의 칙령)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표현의 유사성"에 최대한 의미를 둔다면, 이런 식으로 결론이 일관되게 도출된다. 창 1:2와 렘 4:23에서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가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게 우연이 아니듯이 말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그 정황상 모세와 엘리야의 현신이다. 에녹이 아니며 다른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글쎄, 히브리서의 저자를 의심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고, 이사야서는 40장 이후부터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다는 식의 썰은 도대체 왜 나오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이나 침례인 요한이나 신약 복음서의 기자는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내용 역시 아무 이질감 없이 이사야의 책, 이사야의 말이라고 버젓이 인용하는데도 말이다.

본인이(다른 모든 bible believer들도 포함) 창세기의 1~11장 내용이 다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아담이 실존 인물이며 노아의 홍수가 실제 사건이라고 믿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굳이 지금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서 발견됐다든가 에덴 동산의 흔적이 발견됐네 하는 낭설이 없어도 된다. 예수님이 아담의 아들 아벨(마 23:35)과 노아(마 24:37-39)를 버젓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증하면서 교차 검증을 하셨기 때문이다. 난 내가 예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모험이나 도박을 감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4 08:37 2018/08/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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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
미래에 이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실현될 정교일치 통치 체제. 하드웨어.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일명 천년왕국이 이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문자적인 6일인 것과 동일하게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다 문자적인 1000년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분을 영접했으면 교회 시대 없이 세상 경륜이 곧바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도래 시기는 교회 시대+대환란+예수님 지상 재림 이후로 미뤄졌다.
구원받고 몸이 변화된 사람들은 이 왕국에서 지배 계층이 되고, 그렇지 않고 대환란 때 단순히 생존만 한 사람들은 여기서 수명만 늘어난 피지배 계층이 된다.

안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뭐가 이리 죄악이 만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못 살고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은 당연히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공의가 철철 넘치는 세상을 이 땅에 실제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때 피지배 계층은 최상의 환경에서 믿음에다가 마 5-7 산상설교를 지키는 급의 엄청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시퍼렇게 물리적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존재 자체가 지금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적인 왕국 하에서는 구원의 조건도 믿음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방법이 가미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내지 영적 상태 관점. 소프트웨어.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명목상 소속되는 왕국이다. translate의 용례 중 하나인 골 1:13도 이것을 말하며, '소프트웨어, 영적'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왕국은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14:17, 고전 4:20, 고전 15:50).

단, 이 때문에 1과 3 같은 다른 왕국까지도 문자적으로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눅 17:21 등)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는 1과 2의 구분이 뚜렷이 계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성경에는 둘이 섞여 쓰인 듯한 용례도 있다. (마 19:23-24)  어차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하나라도 없는 컴퓨터는 성립할 수가 없을 테고, 두 왕국 다 통치자는 동일하니까 그 시절의 계시 수준으로는 한데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 특성상 보편적인 '교회'와 비슷한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덩치는 커지지만 본질이 변질된다는 식으로(겨자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앉는 것, 부푼 누룩 등.. 긍정적인 얘기 아님.) 부정적인 비유로 등장하는 대상 역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다.

3. 하늘 왕국 heavenly kingdom
성도의 내세 관점. 하이브리드웨어??

저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옛날 용어로는 '천당'이라고도 불렀다. 딤후 4:18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천국'이라고 하면 이거랑 1 kingdom of heaven이 혼동될 여지가 좀 있음.)

이곳은 셋째 하늘(고후 12:2)이요, 지옥의 반의어이다. 왜 셋째냐 하면 지구 대기권의 창공(1 sky)과 그냥 어두컴컴한 우주(2 space/universe)의 다음 계층이기 때문이다. heaven은 한편으로는 세 종류의 하늘들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3계층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sky와 heaven에 대한 구분이 기본적으로 없으며, 사실 영어에서도 너무 구닥다리이고 종교색이 짙은(?) heaven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런 가사처럼 말이다. 신자들은 그런 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부정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

이곳은 내세의 장소이지만 무작정 '비가시적/영적'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일단 물리적으로도 실존한다고 여겨진다. 지옥이 지구 내부의 실존 장소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지옥이 지구 안의 극단적으로 깊은 곳에 있다면, 저 heaven은 과학에서 말하는 소위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 밖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heaven과, 지구 바로 아래에 있는 hell은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은 지구에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광체이지만 물리적인 특성--크기, 지구에서의 거리, 주성분과 내부 구조..--은 서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니 말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소속된 사람이 훗날 하늘 왕국으로도 가는 셈이다. 그러니 이 둘은 지옥-불못만큼이나 서로 연계가 된다. 단지, 하늘의 왕국을 경험하는 건 그 사람이 먼저 죽느냐,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심을 두고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이것에 비해서 겨우 인류의 구원(?)은 사전 준비 작업에 가까우며 너무 원초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질적인 의미를 혼동한 나머지 세상 정부 자체를 싹 거부하고 집총까지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적인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반대편 극단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교회의 등장은 예전에 구분할 필요가 없던 여러 개념들을 세분화시키면서 성경 해석을 꽤 다채롭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라는 일체형 기계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것이 나중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교회를 제대로 구분 못 한 이상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 있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설령 지옥에 가지 않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여 영원을 보내는 장소조차도 서로 다르다(새 하늘과 새 땅 vs 새 예루살렘).
왜 new라는 수식어가 붙었는가 하면, 저건 현재 있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땅과 각종 물질들이 미래에 싹 다 불로 심판받고 멸망한 뒤에 다시 창조되어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을 참고할 것. '물의 넘침으로 멸망' 문맥이 겨우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해서는 저런 개념을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 하늘은 기존 셋째 하늘과 통합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heaven에 계층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계시록 21장~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듭해서 신랑 신부에다 비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구원받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삐까번쩍한 도시이다. 단순한 자연 환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능가하는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x, y, z축이 모두 12000 스타디온이라고 구체적인 크기까지 나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2200~2300km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명왕성과 비스무리한 크기이다. (지구의 지름은 약 12700km) 단, 새 예루살렘은 여느 천체와는 달리 구가 아니라 정육면체 또는 사각뿔 형태이며, 사람들은 겉의 표면에서 사는 게 아니라 속을 꽉꽉 채우며 살게 된다. 중력에 대한 개념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 크기의 공간에 역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이 들어가서 사는 게 가능할까? 마치 방주의 크기와 비슷한 떡밥이다(동물들이 몽땅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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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8/12 08:35 2018/08/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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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관련 생각들

1.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북한에다가 좀 엮어서 비유해 보자면..

(1)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구원의 영원한 보장.
==> 북한은 법적으로 대한민국의 미수복 영토이고, 거기 주민들은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한번 탈북에 성공해서 자유 남한에 온 이상,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결코 재북송되지 않는다.

탈북자가 남한 와서 그 어떤 끔찍한 사고를 치고 흉악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사형 무기징역 선고받고 남한 교도소에서 평생 썩을지언정 북송되던가? 이런 차원의 문제다. 구원받으면 사람의 신분이 근본적으로 싹 바뀌며, 그건 그 사람의 행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2)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과거),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현재), 죄의 임재로부터 구원(미래)
==> 북괴의 직접적인 마수를 제거(과거.. 6·25 전쟁 때 대판 싸워서), 북괴의 위협을 제거(현재.. 휴전선에서 으르렁거리고 간첩이나 잡으면서..),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미래.. 과연 가능이나 할까?

2.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무슨 엉덩국 만화에서 홍콩 행 게이바에 들어온 존슨이 아니라, 남한 땅을 일단 밟은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저 제목과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도 같은 급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그렇다. 남한 내부의 탈북자들의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북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좌빨 언론들이 뭐 탈북자 신문 센터에서 탈북자들이 인권유린 가혹행위를 당했네 뭐네 별 트집을 다 잡는가 보다.
거기서 탈북자들을 위장 탈북 간첩으로 너무 의심하다 보니 인권모독 발언, 구타 감금 같은 짓이 일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게 과연 아예 재북송보다도 더한 인권 유린일까?

그리고 사실은 반대편에서도 우리 같은 원칙을 적용해 주면 더욱 좋겠다.
북괴 좋다고 북으로 가 버린 사람들.. 거기서 영원히 다시는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 간절한 바람이다.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보낼 게 아니라, 돼지새끼 좋아서 안달 난 새끼들, 평양도 아주 살기 좋다고 침 질질 흘리는 빠가들이나 몽땅 북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은가?

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북한 주민들 구제 이상으로, 북괴 체제가 저딴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 통일은 결사 반대론자다.
김돼지를 재판에 회부해서 처벌하고, 국군의 손으로 정치범 수용소 문을 따고 들어가는 통일이 아니면 다른 통일 따위 1도 할 필요 없다!

북한 인권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고? 응, 참견 안 할게. 단, 그 대신 네놈들도 우리랑 통일 하자고 가증스러운 수작 안 부렸으면 좋겠다.
지극히 정당한 논리와 근거를 갖고 반대하는 것이니, 어디 한번 나 같은 사람을 잘도 얼마든지 반통일 적폐로 몰아붙이고 공격해 봐라.

3. 악의 무리들이 하는 짓들의 패턴

(1) 경전, 법전의 변개

  • '그분의 피' 삭제, '기도와 금식' 삭제. 성경을 야금야금 뜯어고치고 변개. 애초부터 이미 잘 번역되고 정착돼 있는 성경은 내팽개치고, "현대의 발달된 사본학과 언어학으로 잘 살펴봤더니" 그 단어는 나중에 임의로 추가된 것일 뿐이고, 원래 뜻은 그게 아니고 굳이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인이고, 홍해가 아니고 갈대밭이고 어쩌구 저쩌구...
  • '자유 민주주의'에서 굳이 자유 삭제. 자유라 하면 옛날 '자유당' 오로지 나쁜 심상이다.^^ 근로자 대신 노동자, 국민 대신 인민이나 그냥 사람 등등~

어떤 최종 권위 텍스트에서 단어가 하나라도 바뀌거나 빠지는 것에 대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다. (1) 성경이 단어 하나라도 변개돼서는 안 되는 골수 성경 신자들, 그리고 (2) 인간의 죄성에 빠삭하고 언어 교란 선전 선동술의 프로 전문가인 공산주의자 빨갱이들.

(2) 역사 왜곡

  • 역사상 기독교인들을 제일 많이 학살한 괴물 집단이 정통 기독교 타이틀을 자처하면서 피해자들의 역사는 몽땅 말살하고 부정하고 왜곡함.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을 아주 긍정적인 승리로 선전함.
  • 자기 나라 역사는 오로지 잘못된 거 부정적인 것 한계만. 적 진영의 역사는 완전 정반대로.. 입만 더 아플 것 같으니 더 말을 말자..

(3) 거짓 평화

  • 유대인들은 옛날에 진짜 메시야는 배척하고 "그의 피가 우리에게로" 이랬는데, 미래의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환호하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된통 당하고 뒤늦게 정체를 깨닫고서 개고생)
  • 저 일이 있기 전에 동아시아 어디에서는 거짓 평화 공세에 혹해서 세계 최악의 살인마 독재자보고 우리 민족이라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환호하고 귀엽게 생겼다고 캐 난리.

당연히 성경 자체에 무슨 남한 북한이 나오는 건 아니다. 14만 4천 명이 누구랑 관계 있고, 동방의 의인이 무슨 자기 교주이고 하는 그딴 소리는 개소리이다.
한국이고 미국이고 이런 나라들은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 중의 하나일 뿐, 걔네들이 유대인 이스라엘처럼 성경의 세대적 경륜의 직접적인 선상에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성경과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습득된 그 세계관, 성경의 사고방식,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서 반복되는 '추상적인 패턴'을 염두에 두고 세상사와 정치를 동일한 잣대로 일관되게 평론하고 전망할 수는 있다! 왜? 해 아래에 새로운 건 없으니까. 이 개념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령, 로마 교황이 미래에 나타날 성육신한 마귀 적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세에 하던 짓거리로 봐서는 거기에 정치 종교적으로 항거했던 사람들이 저놈은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충분히 생각할 만도 했으며, 그 시절에 존 네이피어(수학 로그의 고안자)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처럼 북괴 정권은 얘 자체가 성경 교리 차원에서의 적그리스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얘들이 주민들에게 해 온 짓거리는 대환란기 때 벌어질 적그리스도의 본색 통치와 인류 역사상 가장 유사한 형태이며,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경계할 만한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4. 우박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라는 게, 관측 가능한 모습만 서술하자면 공중의 구름 속 얼음 조각(빙정)이 적당히 커지고 무거워진 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상 현상이다. 녹으면 비가 되고 언 채로 내리면 눈이 될 뿐이다.
구름은 짙은 안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건이다. 비행기 안이나 높은 산을 오르는 중에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잠시나마 할 수 있는데, 별 거 없다. 그냥 시야가 싹 흐려지고 온통 회색 천지가 됐다가 다시 풀려난다.

본인 역시 흐리고 비 내리는 날에 등산을 갔다가 이걸 실제로 겪은 적이 있다. 구름 속에 있다고 해서 딱히 눅눅하고 축축한 느낌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때로는 하늘에서 비나 눈보다 더 더 딱딱한 얼음 덩어리인 우박이 떨어질 때가 있다. 얘는 큰놈을 맞으면 좀 아플 수가 있다. 심하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며, 건물과 차량을 부수고 농사를 아작 내는 재앙이 된다.

우박은 눈이나 비가 되어 곧장 떨어져야 할 빙정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대기의 상승 기류를 타고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녹지 않은 채로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졌을 때 생긴다. 그러니 기온이 무작정 낮을 때가 아니라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서 대기가 불안정할 때 더 잘 생긴다. 우박이 한겨울보다는 봄에 더 잘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우박은 이집트의 재앙(출 9:18)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나오는 대환란 재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라고 언급된다.
구름 속 얼음 조각들을 평범한 눈· 비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마치 기 모으듯이 요리조리 만지작만지작 크기를 일부러 키워서 우박으로 개조한 뒤에 떨어뜨리는 건 신의 입장에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콩알만 한 우박은 그냥 귀여운 애교 수준이겠지만, 관측과 기록이 있는 근래에 수백 g~심지어 1kg에 달하는 우박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검색을..) 당연히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그런데 성경은 미래의 대환란 때 무려 1 달란트 무게의 우박이 떨어질 거라고 말한다(계 16:21). 달란트는 화폐 단위일 때도 매우 큰 단위이지만, 무게 단위일 때는 거의 27~30kg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건 뭐 우박 한 덩어리가 수박을 넘어서 쌀 한 가마니나 무거운 아령, 완전군장의 무게에 맞먹는다. 일반적인 기상 현상/이변으로 발생하는 우박보다 수십 배 이상 무거운 놈이다.
얼음의 밀도만으로 우박 덩어리의 무게를 그 정도로 키우려면 우박 하나가 사람 머리통 이상으로 더 커야 할 것이고, 아니면 우박 안에 무슨 쇳덩어리라도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우박을 맞는 지역은 당연히 완전 작살이 나며, 이 재앙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창 욕하고 모독할 것이라고.. 그 예상까지도 성경에 친절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5월 초에 서울에 난데없이 천둥과 우박이 내린 걸 보고는 성경에 나오는 우박 생각이 문득 들었다.

5. 웰 다잉

요즘 웰빙뿐만 아니라 '웰 다잉'이라고 해서 죽는 것도 미리 준비해서 품위 있게 죽자.. 뭐 그런 트렌드가 있다.
이게 조금 더 엇나가면 "더 추해지기 전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권리다"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윤리 논쟁까지 일으키게 된다만..

그래도 미리 장례 체험, 유서 미리 쓰기.. 이런 움직임 정도라면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군생활 하면서 KCTC 훈련 중에 적탄에 맞으면 전사로 처리되어 전장에서 열외된다. 영현빽에 산 채로 들어가고 자기 배 위로 태극기가 덮이는 체험을 해 보면, 체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고 한다. 군대 가서 유익한 경험을 하고 온 셈이다.

물론, 내세를 가르치는 종교들은 죽음 준비 전문이니 이 분야에서 자기 교리를 따라 할 말이 무척 많을 것이다. 군대에도 군종이라는 병과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군인이란 직무 수행 중 순직할 수 있는 직업의 최고 극한 형태이니까..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약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내세와 심판, 절대자에 의한 구원과 영생이 핵심 교리이다.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에 대해서는 구약 유대교와도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좋은 교회는 복음 전파와 구원에 충실해야겠지만, 그 뒤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성장· 양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시키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죽어서 가든, 아니면 산 채로 휴거되어서 가든.. 거기서 하나님이 무슨 질문을 할지, 우리는 욥기 끝부분을 능가하는 어떤 팩트폭격을 당하게 될지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학원생이 졸업을 위해 논문 심사를 받는 순간이 오고 기업가가 정기적으로 세무 조사를 받는 순간이 오며, 기업에서 인사고과 평가를 하는 날이 오는 것과 같다. 일단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행 천국행을 결정하는 심판에는 걸릴 일이 결단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평가를 받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걸 늘 의식하고 산다면 크리스천의 삶이 지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12 08:31 2018/07/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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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으로서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

'성(城)'이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월트 디즈니 영화 인트로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주변에 moat라고 불리는 도랑도 있고 거대한 저택이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아무래도 만리장성 같은 긴 성벽이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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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남한산성과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한양도성은 세계 유산에까지 등재될 정도의 유니크함은 부족하다는 판정을 받아 등재가 거절됐다.

수원화성은 남한산성만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없고 한양도성만치 오래되지도 않은 데다, 일제 시대와 6· 25 전쟁을 거치며 왕창 훼손됐던 것을 어차피 후대에 재건· 복원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을까?
'화성 성역 의궤(儀軌)'라는 기록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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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짓는 데 동원된 기자재와 구체적인 공사 기법, 건설 당시의 꼼꼼한 일지, 건설 과정에서 중앙 정부와 주고받았던 공문들, 건설에 참여했던 석공과 목수들 명단... 이런 게 미주알고주알 몽땅 적혀 있다.

성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기고 다 파괴됐다 해도 이 FM대로만 다시 이행하면 정말 1700년대 고증을 100% 반영해서 성을 똑같은 절차를 동원해서 똑같은 형태로 고스란히 다시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 소스 코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지 현대 고고학 지식을 동원해서 재추적해야 하는 이집트 피라미드나 이스터 섬 모아이 같은 물건과는 처지가 정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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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그 유명한 오사카 성만 해도, 저 정도의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건된 건물은 그냥 외형만 얼추 닮았을 뿐, 내부는 그냥 엘리베이터까지 달린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재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조선이 말기에 망한 과정이 워낙 추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많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실록을 포함해 기록 하나는 타 왕조나 국가들보다 신경 써서 잘 남겼다. 이런 기록 덕후 왕조에서 한글 같은 문자를 새로 창제했으니, 문자의 창제 시기와 설계 컨셉 같은 것도 꼼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런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으며, 지금의 재건 레플리카가 1700년대 초기 원형 건물과 동급의 권위와 정통성이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원형 건물과 동등한 권위"... 아마 킹 제임스 성경 빌리버들에게 귀가 솔깃하게 들릴 텐데..
그렇다. 성경도 이런 정도의 퀄리티로 전수되고 번역됐다. 그렇기 때문에 자필 원본이 진작에 소실되고 없어도 지금 읽는 역본이 자필 원본과 동등한 영감을 담고 있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오래되고 낡은 채로 짱박혀 있는 소수 사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필사되고 읽히고 닳아 없어지길 반복했으며 교차 검증도 되는 다수 사본이 진품이다.

또한 수원화성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에 기록돼 있는 온갖 쓸데없이(?) 디테일해 보이는 사람 명단이나 숫자 목록, 물건들의 구체적인 치수들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성경 기록이 각종 초자연적인 기적까지 포함해서 모두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2. long S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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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를 오늘날보다 더 많이 쓰고 있고 (booke, fowle, forme, grasse, selfe, sunne, starres)
u와 v가 헷갈리는 등.. (heauen??)
완전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단어 스펠링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겨우 thou, thy, -eth 이런 건 그냥 약과다.

심지어 KJV의 고유한 특징이라 불리는 '이탤릭체'조차도 오리지날에서는 이탤릭이 아니었다.
보다시피 본문은 뉴욕 타임스 같은 '고딕체'이고, 이탤릭은 그 안에 작은 크기의 '로만체'로 적혀 있다. (정작 난외주에서는 이탤릭체가 쓰였는데도!)
첨가된 단어에 대한 표기는 차라리 한글 개역성경과 더 가까운 형태인 셈이다.

그런데 I와 J, U와 V, W 이런 게 오락가락 하는 건 제쳐놓고라도.. s가 f처럼 적혀 있는 건 굉장히 적응이 어렵다.
graffe, beafts, felfe, feafons, leffer, faid, firft, alfo (???)
게다가 모든 s가 저렇게 쓰인 것도 아니고 s 자체 역시 따로 있다. s와 f모두 각각 음절초와 음절말에 다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한 등장 조건이나 규칙을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건 어찌 된 영문일까?

독일어 철자법에 ß가 있는 것처럼 저 시절에는 long S라는 게 따로 있었다.
내 생각에, 한글로 치면 아래아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처음엔 발음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한쪽의 음가가 오래 전에 소멸하고, 영어의 철자법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결국 long S는 짤린 것이다. 그게 무려 1700년대의 일이다.
아래아가 음가를 상실한 뒤, 20세기에 와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짤린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 하겠다.

킹 제임스 성경이 원체 archaic한 단어와 문체로 유명하긴 하지만, 글자 자체도 archaic한 놈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수학에서 일명 '인테그랄'이라고 불리는 적분 기호 ∫가 바로 길게 늘어뜨린 long S의 후신이다. sum을 나타낸다.

3.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본인은 개인적인 신앙 노선을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이다.
구원의 길이 예수 유일이듯이, 그런 독단 배타적인 교리를 텍스트 형태로 명시하고 있는 성경도 특정 역본 유일이라는 개념은 이상하거나 어색할 것이 전혀 없다고 본다.

성경만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여느 텍스트가 번역될 때와는 달리 예외적이고 특례적인 섭리와 보존이 있었다고 믿는다. 설령 KJV라는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이나 번역자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기독교계가 원어 원문 운운하는 온갖 지적 사기와 말장난, 혼돈을 벗어나서 뭔가 절대 기준을 가질 수 있다. 교리의 근간과 믿음의 대상이 존속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고전 텍스트들은 잘난 학자들이 점점 더 원래의 의미를 복원해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이미 정확하게 잘 완성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트렌드가 반대로 타락하고 퇴화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 왕이 아기를 둘로 쪼개서 반반씩 나눠 가지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아이의 진짜 엄마는 완전 화들짝 멘붕했지 않던가?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읽는 성경이 변개되고 파편화돼 있다는 말을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JV 유일주의는 기독교계에서도 소수설로 취급되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다.
이런 사람들은 KJV에 '없음' 구절이 없는 게 정상이 아니라, 반대로 '없음'이 원래 맞고 KJV가 후대에 추가(!!)돼서 사본학 근거가 부족한 구절까지 덤으로 갖고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없음'이 있긴 하지만 동일한 내용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도 해명한다. 예를 들어 마 17:21에서 "기도와 금식"이 삭제되긴 했지만 막 9:29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가 삭제되긴 했지만 엡 1:7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이런 식이다.

행 12:4의 '이스터'(파스카)와 마 12:40의 '고래'(케토스)는 단골로 오르내리는 번역 이슈이다. 이건 KJV 옹호 진영에서도 다 반박이 돼 있다.
요일 5:7은 일명 '요한의 콤마'라 하여 킹 제임스 성경에서만(동일 계열의 바른 사본도 포함)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온전히 입증하는 구절인데... 이것도 원래 성경에는 없던 말이 후대에 추가된 거라고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은 나쁜놈들이 변개하고 삭제하는 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과잉 충성분자가 첨가하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본다. 계 22:18을 뻔히 믿는 사람이 설마 감히 첨가를 하겠는가?

그리고 원어· 원문뿐만 아니라 해석에 대해서도 대립하는 구절이 있다. KJV 빌리버들은 시 12:6-7이 하나님 말씀 보존에 관한 약속이라고 본다. 7절에 나오는 preserve them은 당연히 바로 앞의 words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이마저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한다는 말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이런 말을 하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다중적용 예언이 나오는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불편해하고 굳이 가리려고 애쓰는 건, 마치 창 22:8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실 것임"이라는 의미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고 창 1:2와 렘 4:23을 같이 연결하여 심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단시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KJV 유일주의를 기를 쓰고 공격하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저런 유명한 구절들을 끄집어내서 KJV가 오역을 했거나 원래 원문에 없는 문구를 추가한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벧전 2:2까지 거론하면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자라라"가 아니라,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라는 잘못된 교리가 맞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성경과 관련하여 어차피 어딘가에 권위를 둬야 한다면, 현대 역본 번역자나 원어학자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400여 년 짬밥의 안정화 내력이 있는 영어 성경에 권위를 두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하고 현실성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지엽적으로 약간 오류(흑역사, 아쉬운 점, 단점, 나쁜 점, 부정적인 것)가 있지만 그래도 큰 그림을 보면 좋은 게(선한 것, 감사할 것, 유익한 것 등..) (훨씬) 더 많고 괜찮다."
이런 사고방식은 통계를 동원하여 공학 연구나 과학 실험 결과를 평가할 때, 혹은 우리나라 현대사 같은 걸 논할 때, 이· 박 대통령 같은 사람의 행적을 평가할 때는 적절하고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적당히 오역이나 오류도 좀 있지만 대충 요점만 들어맞으면 되는 부류의 책이 아니다. 만약 성경이 그런 부류의 책이라면 자기가 성경의 오류 감별사라고 설치면서 궤변 말장난을 늘어놓는 사기꾼들, 성경에 기록된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내용들을 제멋대로 영해하는 미친놈 이단 교주 등.. 그로부터 야기될 혼돈· 무질서와 오류, 부작용, 폐단이 가히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내가 저런 사고방식을 몰라서 KJV 유일주의를 고수하는 게 아니다. 성경이 기독교 정체성의 유지에 어떤 기여를 하는 존재이며 나에게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제대로 알기 때문에 이런 지론을 갖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28 08:29 2018/06/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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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글다 =_=;;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해변에서 가까이서 본 광안대교와, (대략 1.2km 정도 떨어짐)
저 멀리 일본 쓰시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본 광안대교(대략 50km)는 외형상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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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쪽에서 본 교량은 해수면 수평선의 아래로 푹 꺼지듯 내려앉아 있음이 명백하다.
굳이 이 사진 말고 어느 풍경 사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원근법 때문에 작게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건 교량 위 아래의 기둥 크기 비율을 고려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아래로 꺼진 건 명백하게 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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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광안리 해수욕장 해변은 말 그대로 해수면에 거의 근접하는 낮은 고도인 반면, 쓰시마 섬에 소재한 '한국 전망대'는 해발 70m에 달하는 언덕 위의 고지대이다! 그럼 상식적으로 광안대교가 밑동까지도 잘 보여야 정상일 것이다. 참고로 광안대교의 도로는 해발 45~50m 남짓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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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이가 왜 발생할까?
답은 하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이다.
배가 저 멀리 사라질 때도 그냥 중앙의 소실점 근처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듯이 사라지는데..
그 현상만 갖고는 flat earther들이 선뜻 수긍하질 않으니, 이럴 땐 일개 선박보다 훨씬 더 크고 확실한 증거인 광안대교 풍경을 제시해 보자.

이 문제 갖고 고민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특히 성경 믿고 신의 창조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과학으로 검증이나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세계 지도가 평면이니까 지구도 평면이다" 수준의 유체이탈이나 마찬가지인 아무말을 지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수님 부활이 사실인 것만큼이나 아폴로 승무원들이 달에 다녀 온 것도 사실이고, 지구가 둥근 구인 것도 사실이다. 그건 창조· 진화라든가 성경의 무오성하고는 아무 관계 없다.
"땅의 원"(circle of the earth - 사 40:22)이 지구가 둥글다는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땅의 네 모퉁이"(four corners of the earth - 계 7:1)는 지구가 평면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그 문맥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는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세상을 너무 음모론 괴담스럽게 볼 필요 없다. 세상이 영적으로 아무리 악해도 멀쩡히 눈과 귀로 관찰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것을 호락호락 조작하고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지구 모양을 갖고 사기를 쳐서 도대체 누가 무슨 이득을 얼마나 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는데, 세상 다른 현상은 다 음모론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최소한 (1) 전기차가 망한 것과 (2) 인간이 과거에 달이 간 적이 있는지, 갔다면 지금은 왜 달에 더 안/못(?) 가고 있느냐 하는 건 음모론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현상이다.

(1)은 무슨 석유 회사의 외압 로비 같은 거 전혀에 가깝게 없으며, 있다 해도 전기차 몰락의 주 요인이 결코 아니다. 그냥 전기차가 배터리의 무게와 가격, 항속 거리와 충전 시간이라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기름차의 기술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서 망했을 뿐이다. 전기차는 처음에 간단하게 만드는 게 기름차보다 쉬웠을 뿐이지 그 이후로는 실용화가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디젤 엔진 기반의 대형 버스와 트레일러가 배터리 기반 전기차로 가능할까?? 21세기에도 어림도 없는 일이다.

(2) 역시.. 천문학적인 발사 비용 대비 효과가 없으니 더 안 보내는 것일 뿐이다. 허무하게 들리지만 현실에서 이것보다 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우주 관련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꼭 미국 NASA만 세상 모든 정보를 움켜쥔 빅 브라더스 흑막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왜 소련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미국 최대의 경쟁자요 어떻게든 미국의 행보에서 약점 잡을 것 찾느라 목숨을 걸었던 소련조차 미국이 달에 사람을 보냈던 걸 빼박 다 ㅇㅈ했구만.. 설마 미국과 소련이 나란히 같이 짜고 조작극을 벌였다고 믿으시는가? 애초에 NASA 자체가 소련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멘붕 하고서 미국이 허겁지겁 설립한 연구 기관일 뿐인데 말이다.

지금은 그 냉전이 끝났다. 컴퓨터가 처음으로 대중화되고 정보화 시대네 뭐네 말이 나오자 이번에는 666이 어떻고 모든 것이 컴퓨터에 의해 중앙 통제되고 정보 접근성으로 인한 신분 계층 차별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게 될 거라는 식으로 괴담이 왕창 나돌았다.
난 그 심정은 이해한다. 198, 90년대라면 나도 그런 쪽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의 뚜껑을 열어 보니 세상은 그렇게 막장으로 무식하고 폐쇄적이고 흉물스럽기보다는.. 훨씬 더 상업주의 자본주의적으로 돈의 논리를 따라 개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기술과 정보들이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기는커녕, 대중들에게 개방되고 무료로 내지 아주 저렴하게 풀렸다. CCTV, 블랙박스, 중앙집권 전산화 덕분에 치안, 행정과 금융이 정말 투명하고 깨끗해지고 신속· 공정해졌다.

남극과 달은 은폐는커녕 표면의 스트리트 뷰가 나도는 지경이다!
아폴로 우주선을 제어하던 컴퓨터 프로그램의 어셈블리어 소스가 github에 공개되어 있다. 설마 그게 다~~ 주작 조작이겠는가?

물론 그것들이 마냥 자선행위 차원에서 풀린 건 아니며, 그 투자 비용은 더 교묘한 방식과 다른 형태로 어떻게든 회수되긴 할 것이다.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던 기술과 집중되었던 자본이 나중에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악하게 쓰일 수 있으며,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 가능성은 본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 어떤 형태로 구체적으로 실현될지 우리로서는 선뜻 추측할 수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그 엄청난 기술들이 대중들을 통제하여 고작 아폴로 계획 자작극이나 지구 평면이라는 엄청난 팩트(?)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어 쓰이고 있다고 믿는 건... 성경을 믿는 것보다 정말 엄청나게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게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같은 날 같은 정오 시간대에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그림자 길이가 차이가 난다는 걸 발견하고는 그걸 토대로 지구의 둘레를 추측 계산해 내기까지 했다. 이 때는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 시기이던.. 그야말로 엄청난 옛날이다. 기구 하나조차 띄울 여력이 안 되던 시절에 지구가 둥근 건 너무 당연한 귀결이고, 그 둘레를 오늘날의 측정값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맞힌 것이다.

컴퓨터, 우주선, 휴대전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2천 몇 백 년 전의 사람보다도 통찰력이 뒤쳐져서야 되겠는가?
세상 자녀들이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게 머리 잘 돌아가는 분야가 있다는 건 성경도 인정한 팩트이다(눅 16:8). 그걸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07 08:33 2018/06/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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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이야기

지구상의 포유류 동물 중에는 토끼나 원숭이나 사자 같은 평범한(?) 놈만 있는 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상한 하이브리드도 몇 종 있다.

  • 박쥐: 날개가 달렸으며, 이래뵈어도 자가비행이 가능한 유일한 포유류이다. 조류가 절대로 아니다. '박쥐의 알' 같은 걸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오리너구리: 분명 새끼에게 젖을 주긴 하지만 난생이다. 그리고 이빨이 없고 부리가 달려 있다!

오리너구리의 경우 생긴 게 워낙 기괴한지라,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을 때에 다른 학자들이 "어디서 합성(박제를..) 주작질이야"라는 핀잔과 함께 믿지 않을 정도였다. 현지(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포된 개체가 확인된 뒤에야 존재가 완전히 인정되었다.

박쥐는 포유류와 조류의 하이브리드인데, 색깔도 시꺼멓고 어두컴컴 음침한 동굴에서 살기 때문에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다. 동화에서는 무슨 카멜레온처럼 비겁한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각종 아케이드 게임에서는 닿기만 해도 주인공에게 대미지를 주는 악랄한 몬스터 역할을 한다. (고인돌, 라이온 킹, 알라딘 등..)

이 외에 날치는 어류와 조류의 하이브리드처럼 생기긴 했다. 뭐, 본격적인 비행 능력을 갖춘 건 아니기 때문에 교통수단으로 치면 비행정· 수상기라기보다는 호버크래프트에 더 가깝다.
그리고 펭귄은 시꺼먼 색깔에다 날개인지 지느러미인지 모를 팔로 헤엄과 잠수까지 가능한 것이 특이한 조류이다.
뭐, 모든 동물들을 다 합쳐도 인간의 특이함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뭐 일단은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다.

하늘과 땅 다음으로 물 속에는 고래가 저런 특이한 하이브리드에 속한다.
지느러미 달린 바다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류와는 달리 알이 아닌 새끼를 낳고 젖을 준다. 게다가 항온이고.. 무려 허파 기반의 공기 호흡을 하니 빼도 박도 못할 포유류이다. 다른 대형 어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런 특이한 고래 중에서 (1)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이다. 공룡처럼 이미 멸종한 옛날 지질 시대 생물까지 '다' 포함해도 이 바닥의 원톱이다!

  • 아프리카코끼리: 몸길이 6~7.5미터, 어깨높이 약 3미터, 몸무게 최대 6톤..;;
  • 기린: 몸길이 약 3미터, 뿔 끝까지 키가 약 8~9미터, 몸무게 약 1.5톤
  •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 몸길이 약 25미터, 몸무게 약 50톤이었을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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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는 성체의 몸길이가 25~35미터에 달해서 거의 보잉 737 여객기 초기형의 길이에 맞먹는다. 무게는 150톤을 훌쩍 넘어서 대형 디젤 기관차 한 량보다 더 무겁다. 공룡은 몸길이야 뭐 화석을 보고 비교적 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몸무게는 공룡과 가장 비슷한 악어의 부피 대 몸무게 비율을 토대로 추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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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는 뭔가 제일 고래처럼 생겨 있다. 이명에 걸맞게 턱 아래로 희고 긴 수염 같은 게 보인다.)

생물은 동물보다 식물이 더 크며, 동물 중에서는 포유류보다 파충류가, 육식보다는 초식 동물이 더 큰 편이다. 덩치 말고 생존력은 포유류가 파충류보다 더 뛰어나다.
먼저 체온. 항온동물인 포유류가 변온동물보다 훨씬 더 생존력이 강한지라, 더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겨울잠 같은 거 잘 필요 없이 서식할 수 있다.

이 겨울잠을 영어로 hibernate(-ation)라고 하는데, 요즘은 컴퓨터의 최대 절전 모드를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쓴다.
항온동물 중에도 겨울잠을 자는 놈이 일부 있긴 하나, 그래도 변온동물만치 체온이 확 떨어지고 가사(假死) 상태로 깊이 잠들지는 않는다.

파충류는 조금만 날씨가 추워져도 사람에게 저체온증이 찾아온 것처럼 동작이 둔해진다. 더구나 심장 구조도 불완전 2심실이어서 격렬하게 활동하다 보면 정맥피가 섞이고 몸이 경직되기 쉽다.
일례로 뱀을 계속 도구를 써서 긴장시키고 있으면 그 불완전한 심장 구조 때문에 피가 안 통해서 근육이 굳은 채로 삐끗거리게 된다고 한다. 땅꾼들은 뱀을 이렇게 긴장+stun 시켜서 잡는다.

그런데 체온 유지란 게 그냥 되는 게 아니어서 포유류는 털이나 땀 등 파충류보다 월등히 더 복잡한 메카니즘이 필요하다. 에너지 소비량이 많으며, 평소에 숨만 쉬고 가만히 지내더라도 많이 먹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덩치가 한없이 커질 수가 없다. 공룡 같은 덩치가 포유류였다가는 제 몸 수습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아프리카코끼리가 지금 여건상 육상 포유류가 가질 수 있는 덩치의 생물학적 한계치에 근접해 있다는 말을 언제 어디에선가 봤었다. 그 반면, 공룡은 제약이 덜한 파충류일 뿐만 아니라, 얘들이 활동하던 지질 시대급의 옛날에는 1년 내내 따뜻하고 환경 자체가 지금보다 더 좋기도 했으니 덩치가 더 커질 수 있었다.

조금 다른 분야의 얘기이다만, 플라나리아나 해면 같은 동물은 구조가 극도로 단순한 덕분에 몸을 여러 갈래로 쪼개도 살아남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생 능력을 자랑한다. 사람처럼 복잡한 생물은 손가락 하나만 잘려도 자동 재생은 엄두도 못 내거늘 말이다.
그 반면, 저렇게 너무 단순한 동물은 복잡한 물질대사와 상태 유지 능력도 전무한 관계로 사는 곳이 조금만 더러워지면 곧장 녹고 죽어 버린다. 파충류와 포유류 역시 생물학적 구조에 저런 식으로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동물이 덩치가 더 커질 수 있는 환경을 하나 더 꼽자면 공기 중의 육지보다는 물 속이다. 외부로부터의 힘· 충격이나 온도 변화가 공기 중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디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물 자체의 부력도 있으니 고래 같이 크고 무거운 생물이 그 속에서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지구상의 교통수단들 중에 선박이 그 어떤 비행기나 육상 교통수단보다도 덩치가 훨씬 더 크고 무거울 수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다만, 먼 옛날 지질 시대에 육지에서는 저렇게 큰 공룡이 활보했던 반면, 바다에는 지금의 대왕고래의 덩치를 능가하고 압도하는 해룡이 있었다는 증거가.. 딱히 검증 불가능한 도시전설 말고는 없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다.

고래는 물에서 살면서도 아가미가 아닌 공기 허파 호흡을 하기 때문에, 물 속에서 숨을 못 쉰다. 심지어 수면(?) 중에도 뇌를 반반씩 재우고 깨우면서 수면(!)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해야 하는 불편한 인생을 산다. 악어가 물 마시러 온 육상 동물을 공격하여 잡아먹듯, 인간은 숨 쉬러 올라온 고래를 바다에서 손쉽게 잡는다.

고래가 물 밖에 내팽개쳐지면 얼마 못 살고 죽는 주 이유는.. 그냥 장기들이 엄청난 체중에 짓눌려서 숨을 못 쉬고 질식하기 때문이다. 엎드려 자던 신생아가 질식사하듯이 말이다.
피부 표면이 공기에 노출되고 건조해지는 것도 고래에게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고래가 무슨 양서류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피부 호흡을 못 해서 죽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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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저런 아틀란티스인 같은 신체 구조는 아니라는 뜻... ㄲㄲㄲㄲㄲㄲ)

그런데 고래는 그 거구를 이끌고 시속 30km 이상의 고속으로 주행이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숨을 참은 채로 잠수를 더럽게 잘한다.
모든 고래들이 전반적으로 잠수 능력이 우수하지만, 특히 (2) 향유고래는 어지간한 잠수함으로도 엄두를 못 낼 수심 2000m 아래로 잘도 내려간다. 그리고 1시간 반 가까이 숨을 참으며 잠수가 가능하다. 그 엄청난 수압을 극복하고 올라오는 과정에서도 인간 같은 잠수병 걱정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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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고래는 앞부분이 직각형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다.)

인간은 맨몸으로 겨우 몇십 m만 잠수했다가도 올라올 때 시간 보면서, 마치 우주왕복선이 대기권으로 재돌입할 때처럼 조심해서 천천히 올라와야 되는데.. 고래는 기관지에 혈중 질소를 처리하는 장치가 갖춰져 있다고 한다. 아무렴, 산소 보충하러 빨리 수면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저렇게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잠수함· 잠수정 같은 기계들은 산소 조달 문제로 인해 수중에서는 내연기관을 가동할 수 없다! 거기서는 마치 월면차처럼 전기로만 동작해야 한다. 본인은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자력 잠수함 급이 아닌 이상, 수중 기계는 활동 반경과 시간에 근본적으로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미도 안 달렸으면서 고래는 육중한 체력은 어디서 나는지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또한, 산소는 그렇잖아도 물에 잘 안 녹는 기체여서 산소를 모을 때도 물 속에서 모을 정도인데, 거기에 있는 산소를 추출해 내는 어류들의 아가미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고래 중에는.. (3) 범고래가 있다. 얘는 앞서 언급한 네임드급 고래만치 거대하지는 않지만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 사냥꾼이며 바다의 조폭 깡패이다.
정작 그 큰 대왕고래는 주 식량이 의외로 플랑크톤이나 크릴 같은 아주 작은 조무래기들이구만, 범고래는 타 물범이나 바다사자, 심지어 다른 상어나 돌고래를 사냥해서 잡아먹는다. 어떨 때는 배가 안 고픈데 별 이유 없이 재미삼아 공격하기도 하며, 먹이를 향해 육중한 덩치로 박치기도 하고 심지어 물 밖으로 던져서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폭력적인 범고래가..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건드리지 않고 해친 사례가 없는 것이 아주 이색적이다. (다른 동물로 오인했거나,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거나 한 경우를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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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는 밋밋한 회색 위주인 타 고래들과 달리, 마치 펭귄처럼 흑백 구분이 명백하다. 그리고 눈 주변에 눈 흰자처럼 생긴 흰 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곰, 사자, 호랑이 같은 육지의 다른 맹수들이라든가, 어류 중의 깡패인 백상아리(죠스!!) 육상 공룡의 후신에 가장 근접한 파충류라고 여겨지는 악어 따위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차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애초에 어류 중에는 피 냄새만 맡고도 흥분해서 몰려오는 놈들도 있지 않던가. 범고래뿐만 아니라 다른 고래들도 전반적으로 다 사람에게는 적대감이 없다시피하다.

코끼리가 다 아프리카코끼리 같은 게 아니며, 작은 건 거의 마소 정도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그것처럼 고래 중에서도 작은 돌고래는 참치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고래는 전반적으로 아주 똑똑하고 집단 유대의식이 강하다. 동료와 협력해서 인간이 설치한 장애물을 치우고 먹이를 차지할 줄 알며, 연구에 따르면 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의 작은 이익을 접을 줄도 안다.

거기에다 (4) 돌고래는 고래 중에서 제일 작은 축에 드는 놈이지만, 물 속에서 초음파를 이용해서 어지간한 유인원이나 앵무새 이상의 수준으로 상대방과 의사소통 능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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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는 타 고래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 있다. 하지만 얘도 범고래에게만 밀릴 뿐, 체력과 공격력은 타 해양 생물들을 엄연히 능가하는 '갑'이다.)

고래가 반쯤 수면으로 나와서 물을 촤악 뿜는 건 잘 알다시피 호흡 때문이다. 그런데 주행 중에 저렇게(본문에서 범고래와 돌고래의 모습) 괜히 힘들게 도움닫기 점프까지 하는 건 나름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컴퓨터용 아케이드 게임이나 FPS에서도 점프를 하면서 가는 게 그냥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빠르지 않던가? ㅋㅋ

물론, 인간의 경우 달리기가 아니라 수영을 할 때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인간은 수영 중에 저렇게까지 높이 점프를 할 능력이 없으니, 그냥 물에 완전히 잠겨서 잠영을 하는 게 자유형 따위보다 더 빠르다. 신체가 물과 부딪치면서 잃는 에너지가 만만찮은가 보다.
그러니 수영 경기에서 최단시간 기록만 강조하다 보면 수영 대회가 잠수-_- 대회로 바뀌어 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에 공식 경기에서는 잠영을 허용하는 시간에 한계가 걸려 있다.

이렇듯, 고래는 생물학적 특성이 비범하고, 크고 아름답고, 생태계의 최상위 랭킹이고, 똑똑하기까지 한데 한편으로 여느 맹수와 달리 사람에게 호의적이라는 점으로 인해, 인간에게 느껴지는 인상이 아주 좋은 편이다. 최소한 뱀이나 악어 같지는 않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고래가 이렇게 독특한 건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창 1:21에서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라고 진술하면서 6일 창조 중 다섯째 날에 고래는 다른 수중 생물과는 좀 급이 다르게 따로 창조되었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비록 문장 구조상 다르게 읽힐 여지도 있긴 하지만, 본인은 고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6천여 년 전에 완전히 새로 등장한 종이라고 생각한다.

실러캔스야 아무래도 현 세상 이전의 지질 시대· 이전 세상에도 존재했다가 싹 멸종하고, 훗날 6천여 년 전에 6일 동안 그 종류대로 똑같이 '다시' 창조된 놈일 것이다.
하지만 고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전 세상에는 없었다가 현 세상에서 완전히 새롭게 등장했다. 근본적으로 뭔가 좀 new, fresh한 구석이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특성이 기존 동물들과는 좀 다른 구석이 있는 거라고 추측해도 아귀가 맞지 않겠는가?

다만, 킹 제임스 성경 외의 다른 성경에서는 whale이라는 단어가 남아나질 못해 있다는 것도 생각할 점이다. 당장 저 창 1:21을 비롯해서 겔 32:2까지.. 오로지 KJV만이 요나를 잡아먹은 생물이 고래였다고 말한다(마 12:40). 이스터 '파스카'만큼이나 그리스어 '케토스'도 논란의 대상이다. 최종 권위가 없으면 신앙의 근간이 이렇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작 킹 제임스 성경이 '바다 괴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애 4:3은 타 성경에서 전부 승냥이, jackal 같은 육상 동물로 바뀌었다. 음.. 고래도 포유류이기 때문에 새끼에게 젖 줄 수 있는데..? 어쨌든 고래의 생물학적 특징과 성경 번역에서의 혼란이 오버랩되는 현상이 무척 흥미롭다.

Posted by 사무엘

2018/05/17 08:31 2018/05/1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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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태와 고통

성경에서 창 3:16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고통과 수태를 크게 늘리리니..."라고 나온다.
본문을 주의해서 똑바로 봐야 된다. 저건 고통을 늘리고 수태도 별개로 따로 늘린다는 뜻이다. "수태의 고통"을 늘린다는 게 아니다.

물론, 인간만 타 동물과는 달리 산통이 커져서 "고통 중에 자식을 낳게" 된 게 그 늘어난 고통 중에 포함은 돼 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바는 그것보다 더 포괄적이라는 얘기이다. 고통과 수태의 교집합이 아니라 합집합을 말한다.
수태도 늘었다고 했으니 인간의 배란 주기 같은 게 이때 더 짧아졌다거나 가임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 있다. 생물학적 디테일은 그 이상은 뭐 불명.

2. 가인과 아벨

창 4:8을 보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의 인과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연결한 나머지, 가인이 아벨보고 "우리 같이 들에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 이렇게 작정하고 꾀었다고 '각색을 해 놓은' 성경 역본이 일부 있다. 각색은 성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소설에서나 할 것이지, 성경 본문에다가 있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써 놓으면 안 된다.

얘기를 했다는 게 그 얘기를 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가인과 아벨은 종교적으로 진지한 얘기를 나눴으며, 어쩌면 다투기까지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참 뒤에, 둘만 우연히 황량한 들판에 있게 됐을 때.. 가인이 갑자기 악마가 각성해서 아벨을 죽인 것에 가깝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성경에서 아벨을 단순히 폭행치사· 살인 사건의 가련한 희생자가 아니라, 믿음의 영웅이고 의인이고 순교자였다고 신약에서 굉장히 치켜세운다는 점이 단서를 제공한다. (마 23:35, 눅 11:51, 히 11:4)

3. 해산함으로 구원

딤전 2:15 "그녀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으리라" she shall be saved in childbearing 이건 무슨 말일까?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표현인 be saved by/through faith, by grace와는 달리 저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고전 15:29 baptized for the dead와 더불어 바울 서신서에서 생뚱맞은 양대 난해 구절로 일컬어진다. 이 문제를 내가 풀어 나가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성경 자체의 용례: 성경에 save(d)라고 해서 언제나 지옥에서 건짐받고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얘기는 아님. 마 24:13 같은 여러 예가 있음.
  • 영어 표현의 용례: be saved in X에서 X는 구원· 구출을 얻는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상태나 환경· 여건이라는 용례도 있음. the spirit may be saved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고전 5:5.
  • 영어 표현의 용례 2: 일단 childbearing은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저기에서만 쓰임. 여기 말고 출산· 해산은 travail, be delivered 등의 표현으로 쓰이며, 중립적인 심상이 아니면 늘 수고, 고통, 괴로운 뉘앙스와 함께 쓰임.
  • 딤전 2 자체의 주변 문맥: 딤전 2의 뒷부분은 고전 14의 뒷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녀 질서를 얘기하면서 페미들이 싫어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여자는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말고 잠잠하고 복종하고..." 최초의 인류도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죄를 지었지 않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맑은 정신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지내면.. 저렇게 뭔가 좋게 될 거라고 말한다.

또한, 전근대 시절에 출산은 여성의 너무 당연한 인생 통과의례였다. 애 못 낳는 건 합당한 이혼 사유이기까지 했다.
이 모든 성경 안팎의 정황과 배경을 감안했을 때, 저 구절은..
여성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계속해서 잘 유지하고 있으면.. 여성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벤트인 출산과 관련된 여러 심리적인 고통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평이한 뜻이다.

창 3:16이 말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출산이 시 127:3이 말하는 진정한 태의 보상이고 축복이 되게 해 준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저렇게 딤전 2:15가 말하는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 산후우울증으로 산모의 자살 내지 영아 살해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 구절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남자의 의무인 군대에다 비유해서 각색하면... "니가 이렇게 공손하고 홀리하고 댄디하게 잘 살면 나중에 군대 가더라도 통제되고 억압된 환경을 잘 견디고 고참들하고도 잘 지내고 탈영· 자살의 충동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도 된다.
닥치고 "남자는 군대 갔다 오면(와야) 인간 된다"가 아니다. 여성의 출산· 해산 자체가 무슨 구원의 수단인 것처럼 그렇게 풀이하다가는 군대로 치면 바로 저런 꼴의 이상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하긴 고전 3:15 '불에 의해 받는'도 불을 무슨 구원의 수단인 것처럼 이상하게 풀이하거나 번역해 놓은 성경도 있긴 하더라. 그건 연옥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쓰인다.

4.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

성경에는 '두려움, 두려워하다' 이런 단어가 좋은 심상으로도 쓰이고 나쁜 심상으로도 쓰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심상이 달라진다.
먼저, 좋은 두려움의 예는 다음과 같다.

  • ...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빌 2:12)
  • ...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속한 두려움을 가지고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섬길지니 (히 12:28)
  • 두려움이 동반된 너희의 정숙한 행실... (벧전 3:2)
  • ...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벧전 3:15)

한편, 나쁜 두려움은..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딤후 1:7)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계 21:8)
  •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요약하자면,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언제나 의식하는 것, 누가 안 보더라도 전지전능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늘 인지하는 것, 그에 따라 생각과 행동을 바로잡는 것은 건전하고 좋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평판을 두려워해서 죄를 묵인하고 동참하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해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면모를 쓸데없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영적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나쁜 두려움이다.

구원을 잃으면 어쩌나, 교회가 대환란을 겪게 되면 어떡하나 그런 걸 두려워하는 것은 대상을 잘못 설정한 나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님의 훨씬 더 고차원적인 성품을 두려워하면서 현실에서 당장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나 잘 지고 가면 될 것을, 저건 가히 엄청난 삽질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계 21:8에서는 '두려워하는 자'가 살인자, 우상숭배자, 가증한 자와 완전히 동급으로 취급되어 불 호수에 던져진다는 극언이 나온다. 아니, 단순히 뭔가를 두려워하는 게 그 정도로 심각한 죄이기라도 하나?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 역본들은 coward 겁쟁이, 비겁자로 말을 바꾸기도 했는데, 뭐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다.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결국 두려움 때문이니까.

이건 영적으로 악하기까지 한 쓸데없는 두려움으로 인해 우물쭈물 하다가 복음을 거부하고, 거의 구원받았지만 결국 구원받지 못한 죄인의 말로가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당장 세상적으로 보기엔 착한 사람, 불쌍한 사람도 이것 때문에 지옥 가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런 두려움은 정상 참작 요인이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러니 성경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만큼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도 엄청 자주 나오는 것이다.

5. 눈과 우박의 곳간

"네가 눈이 있는 곳간에 들어간 적이 있느냐? 혹은 네가 우박이 있는 곳간을 본 적이 있느냐?" (욥 38:22)

지구과학 내지 기상학에서는 그냥 공기 중의 수증기가 먼지와 응결해서 구름이 됐다가 얼어서 눈이 내리고.. 그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서 더 큼직한 얼음덩어리가 되면 우박이 되는 것이라고 관찰하고 설명하는 게 전부이다.
그런데 성경의 묘사는 하나님이 무슨 음식에다 소금이나 후추 뿌리듯이 곳간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서 촥 뿌려 주면 눈이나 우박이 내리는 거랜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게다가 저 문맥은 그냥 애매한 서정적인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욥에게 현피 요청을 하면서 하신 말씀의 직접 인용이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 넌 어디서 뭐 하고 있었냐? 천사들이 노래하고 기뻐 소리 지르던 시절에 넌 뭐 하고 있었냐? 남자답게 일대일로 맞장 떠 보자."
이런 도발하는 얘기들과 함께 나오는 예시이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걸 귀걸이 코걸이 같은 비유로 어물쩡 언급한 게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창세기만큼이나 욥기 자체도 실화일 리가 없고 누구의 주작일 거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많은데.. 글쎄, 그 사람은 야고보 사도보다 더 똑똑한 사람일까? (약 5:11.. 욥의 인내) 무슨 윌리엄(빌헬름) 텔처럼 실존하지도 않은 인물을 우리가 굳이 존경하고 본받을 필요가 있을까?

물이라는 물질도 얼마나 특이한지는 화학을 어지간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얼음이 밀도가 더 내려가서 물에 뜨는 점이라든가, 굳이 끓는점에 달하지 않아도 일부가 혼자 증발해서 수증기도 되고, 또 심지어 물 알갱이가 그대로 공기 중에 존재하기도 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신기하기 그지없다.
수소 결합이 어떻고 하면서 분자와 원자 차원에서 물의 특성을 설명하기는 하나, 더 근본적으로 그게 어째서 그렇게 존재 가능한지 이유는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물은 해답을 알고 있다" 급으로 가는 건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판타지이다만 말이다.

성경대로라면 우주의 여러 별과 행성 중에서 지구는 정말 달라도 너무 특이한 행성이어야 한다. 지구만이 유일하게 물질이 순환하고 활발한 기상 현상이 발생하는 행성이고(비록 자전 속도는 점점 느려질지언정), 지구만이 속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뜨거운 장소가 있어서 지진파 결과도 타 행성과는 다르게 나오고.. 뭐 그런 게 있어야 한다.

무신론 과학자들이 외계에서 생명체 찾는 것에 열광한다면, 믿는 과학자들은 저런 지구의 넘사벽급 특성을 규명하는 연구에 더 매진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3/01 08:32 2018/03/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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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주께 속한 것들

  • 해석 (창 40:8)
  • 판단/심판 (잠 29:26)
  • 전쟁 (삼상 17:47)
  • 보복 (신 32,35, 시 94:1, 나 1:2, 롬 12:19, 히 10:30)

이런 거 한데 모아서 의미를 강론하면 심도 있는 설교 한 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 실제로 이런 설교가 나왔다.
위의 요소들을 종합하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인간에게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2. 믿음에 대해서

평소에 아무리 영적이고 소위 말하는 신앙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상을 살면서 정말 최소한의 세상적으로 방어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으며, 그로 인해 판단을 잠시 잘못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불신할 수도 있다.

그 천하의 사무엘도 처음엔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이 덩치 크고 잘생겨서 스펙 외모가 탁월한 걸 보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장군깜 대왕깜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때 기어이 하나님의 그 유명한 " '주'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느니라" 말씀이 나오게 됐다. (삼상 16:6-7을 꼭 보시길)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포악한 헤롯 왕에게 체포되자 교회가 정말 열심히 뜨겁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정작 기적이 일어나고 베드로가 진짜로 탈옥해서 찾아오니까 교회 사람들이 믿질 못했다. 여자애가 문을 열어 보지도 않고 달려와서 "저거 베드로 님 목소리예요!"라고 외치자 그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은 "너 미쳤구나?"였다. (행 12:14-15. "아니면 (죽은) 베드로의 천사의 목소리이겠지"라는 확인사살까지 나옴..)

5천 명을 먹이는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똑똑한 제자 빌립이 계산기 뚜드리면서.. "이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예산이 200데나리온, 1천만 원이 훌쩍 넘게 필요하겠는데요?"라고 말한 건
빌립이 특별히 믿음이 없거나 악의적이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사무엘도, 저 초대교회 사람들도 저 상황에서 처음엔 당연히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우리가 죄나 잘못이라고 판단할 자격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곧장 자기 생각을 유연하게 고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 된다.

계산기 뚜드리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고(눅 14:28, 31) 세상일을 소홀히 하라는 말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 핑계로 내 일을 방관하라는 말도 아니다. 인간은 신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예수쟁이들도 평소에야 병 걸리면 병원 가고 백신도 맞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고 정상이다.

그 대신 세상 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라는 여지를 늘 고려하고 믿음을 전제로 깔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3. 내가 믿는 것에 대한 흔한 부정적 편견과, 그에 대한 반박

(1) 구원의 영원한 보장
오해: 기쁜 소식 선교회, 일명 구원파..;;
반박: 저기서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너무 당연한 얘기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선행으로 구원을 얻은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일단 한번 예수님을 제대로 내 구원자로 영접만 했다면 말이다. 구원의 근거는 인간 쪽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쪽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이라면 아주 예외적인 개막장이 아닌 이상, 죄에 대해서 결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2) 왕국
오해: 여호와의 증인.. =_=;;
반박: kingdom은 지극히 평범한 성경 용어이다. 예수님이 지상 재림해서 이 땅을 다스릴 때에도 당연히 절대왕정으로 다스리지, 무슨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해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선거 유세할 일 따위는 없다. 개역성경에서 그냥 '나라'라고 번역한 단어들도 nation이 아닌 이상 kingdom은 '왕국'이라고 번역해야 정확하다.
멀쩡한 좋은 용어의 어감을 다 망가뜨려 놓는 집단이 공산주의자만 있는 건 아니어 보인다(인민, 동무..).

(3)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오해: 특정 성경 출판사, 특정 목사를 떠받드는 편협한 짓이다.
반박: 그건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는 진영에다가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치졸한 논리이다. 그럼 그 사람들의 최종 권위는 그냥 특정 신학교 교수 내지 현대의 그리스어 히브리어 학자들일 뿐이지.

오로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 종교가, 그 종교의 근거 경전이 단 한 종류만 완벽하게 보존돼 있고 나머지는 잘못됐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엄청난 얘기도 믿는데 말씀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온전히 번역됐다고는 왜 못 믿는가? (저 말씀과 그 말씀이 서로 다르다는 태클은 사절)
내 신앙은 그 어느 집단이나 사람의 이익을 결코 대변하고 있지 않다.

(4) 간극 재창조
오해: 아담 이전의 인간, 귀신 따위를 가르친다.
반박: 전혀 아니다. 인간 문명만 6천 년이고 현 세상이 문자적인 6일 동안 창조되었을 뿐이지, 이전 세상은 더 오래 전부터 있었고 그걸 세속 과학이 말하는 긴 지질 시대 및 우주의 역사와 조화시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리고 재창조는 기독교에서 당연하게 가르치는 사탄 마귀의 창조와 타락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다. 아담은 최초로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최초로 죄를 지은 인격체는 아니다.

(5) 세대주의
오해: 시한부 종말론을 조장한다.
반박: 세상에 끝이 있는 것 자체는 맞다. 단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미래를 알 수 없고 끝이 없는 것처럼 신실하게 살다가 죽거나 들림받는 것이 바람직할 뿐이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도 있고 한편으로 맹렬한 보복과 "네 어린것들을 돌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하리로다"도 있는 책이다. 성경의 저자가 싸이코 정신분열 다중인격자가 아닌 이상, 세대주의는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성경에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 우리에게 당장 적용되지 않는 구절들을 잘 분별해 주는 아주 건전한 성경 풀이법이다. 먼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다음으로 영적으로 적용한다.

나로서는 계시록 20장에 거듭 반복해서 나오는 문자적인 1000년을 안 믿는 건, 창세기 1장의 문자적인 6일을 안 믿는 것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성경에 논리·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고 일면 믿어지지 않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안 믿으면 된다. 성경이 말하는 바 자체가 그게 아니라고 주작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4. 음모론

믿을 가치가 있는 음모:

  • 이 세상의 영적 배후에 있는.. '빛의 천사로 위장한 세상의 신' (고후 4:4. 성경에 아예 대놓고 나와 있음)
  • 북괴의 대남적화 음모. 재래식 무기로 안 되니 비대칭무기, 남조선의 법조계와 교육계 적화, 나라 정체성 부정, 역사왜곡. 작은악과 필요악 교란. 민주팔이로 사회 기강과 체제 전복.
  • 철도청의 음모. 승객을 철덕 철도 중독자로 만들기 위해 과거 철도청에서는 코모넷에 외주를 줘서 새마을호 객실에다 Looking for you 곡을 주입해 넣음

별 영양가 없는 음모

  •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
  •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음모
  • 백신 제조 및 제약 회사들 음모

일고의 가치가 없는, 택도 없는 음모

  • 9· 11 테러는 자작극이다
  • 아폴로 계획 달 착륙은 NASA의 거짓 조작이다
  • 남북 통일을 원하지 않는 미국 일본의 음모, 친일파 음모, 뭐시기의 국정농단 음모 따위

5.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 초딩 시절에 4천~4500만이라고 배웠던 우리나라 인구는 5천 1백만을 넘어섰고, 옛날에 50억이라고 배웠던 세계 인구는 선진국들의 저출산 풍조에도 불구하고 80억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 지구 전체의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340ppm쯤 된다고 배웠던 것이 이제는 400ppm을 넘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오존층은 파괴되는 걸 한창 걱정하던 시절과는 달리 많이 회복됐다고도 한다.
  • 언어학에서 한국어· 일본어에 대한 우랄 알타이 어족설은 부정되고 있다.
  • 한때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라고 배웠던 마리아나 해구 아래의 '비티아스 해연'(11034m)은 1957년에 행해진 러시아의 첫 탐사 이후로 재탐사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질 않아서 당시 측정의 정확도에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 어렸을 때는 곰팡이를 식물의 특수한 형태라고 배웠던 반면, 요즘은 이놈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계라는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분류되고 있다.
  • 난 어렸을 때는 김 구가 젊은 시절에 "국모의 원쑤"를 갚으려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 장교 첩자를 때려죽였다고 배웠지만, 사실 그건 생 날조이고, 김 구가 그냥 객기로 애매한 일본인 민간인을 죽인 흑역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때 '청산리 대첩'이라고 배웠던 항일 독립군의 전투는 비록 우리가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과연 정말 '대첩'이라고 불릴 정도의 압도적인 교환비로 이긴 것인지는 진위가 좀 의심받고 있다. 그 정도로 일본군이 졸전· 패전을 하고 학살당했는데 당시 지휘관이 문책되거나 본토로 지원 요청이 갔거나, 많은 시신이 수습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간 정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도 자기에게 불리한 역사를 대외적으로 조작할 가능성이 있지만, 조작할 이유가 없는 내부 기록에도 증거가 없으며 한국 내부에서도 전과 기록에 대한 과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용돼 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선을 비하하는 근거로 즐겨 활용되던 지리학자 김 정호의 최후에 대해서 '주리 틀기+옥사설' 역시 21세기에 와서는 주작으로 여겨져서 부정되고 있다. 관련 증거와 기록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지도 작품이 잘만 전해져 내려오며, 지도의 제작에 관여했던 다른 관료들도 아무 처벌 없이 승승장구+자연사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식으로.. 그 정의상 절대불변인 수학 공식이라든가, 우주가 뒤엎어지지 않는 한 절대불변이 보장되는 뉴턴의 법칙, 열역학 법칙 같은 게 아닌 한.. 세상 대부분의 학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고쳐지고 보완된다. 심지어 고전 텍스트조차도 일본어· 영어를 거쳐서 중역되었던 것이 원어 직역으로 다시 나온다거나, 검열되었던 내용을 원래대로 다 넣어서 다시 출간되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추세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성경만은 그런 트렌드, 그런 연구 방법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오늘날 인간의 노력으로 성경 본문이 더 나아지고 있다거나, 새로운 해석, 더 정확한 해석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새로운 추세로 나왔다는 대안이란 게 기껏해야, 겨우, 고작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을 건넌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아담과 '스티브'였다", "가룟 유다도 사실 알고 보면 인간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난 더욱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성경이 전제로 깔고 있는 인간의 죄성과 근본 성품이라는 건 정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만큼이나 6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텍스트가 바뀌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죄인이 성경 말씀의 판단을 받아서 고쳐져야지, 인간이 성경을 업데이트 해야 할 필요나 이유나 당위성은 없다. 오늘날은 옛날처럼 성경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없애지는 않지만 성경 본문이나 해석을 변조하고 왜곡하는 시대이다.

다른 모든 텍스트들은 번역을 거칠수록 마치 jpg 손실 압축처럼 원래 의미로부터 차이와 왜곡이 커질지 모르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는 본인은 다른 특례나 섭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전에도 한 적이 있는 얘기이지 싶은데.. 이 '지구 안'에서는 저 수천 m 깊이에 달하는 암흑천지 바닷속이나 극지방, 심지어 화산 근처 등 일반적인 형태의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에서도 생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구 밖 우주에서는 제아무리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매도 생명 같은 건 코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한 신념의 영역이긴 하지만, 본인은 이것이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무신론 회의론자라면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지구 밖에서도 기를 쓰고 생명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세상엔 이런 식으로 성경에 대해서든 신에 대해서든, 뭔가 우연 같아 보이지 않은 구석이 존재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9 08:34 2017/12/2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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