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에 대한 고찰

오늘날처럼 세상이 급변하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게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 역시 뭔가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적은 역사상 없었지 싶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그런 트렌드 자체도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있던 나그네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자기들의 시간을 달리 쓰지 아니하였더라. (행 17:21)

성경 66권 각 책들이 모두 개성이 넘치는 책이긴 하지만, 본인은 사도행전이 문체와 표현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IT 시대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얼리어답터라는 집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맨날 뭔가 새로운 트렌드, 조금이라도 더 창의적인 개똥철학에 탐닉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것과 관련된 언어 현상을 먼저 좀 살펴보기로 하자.
new에 대응하는 한국어는 원래 ‘새롭다’라는 형용사인데, 신기하게도 ‘새’만 써도 관형사로서 ‘새롭다’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유명한 컴퓨터 개그가 있다.

“교수님, 새에 대해서 논문이라도 쓰시나 보죠?” (레 11:13-19 같은?)
“아니. 파일을 ‘새 이름으로’ 저장해야 한다는데, 이젠 더 생각나는 새 이름이 도저히 없어서 고민일세.”


영어권의 “Press any key...” / “any라는 키가 도대체 어디 있지?” 개그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식 컴퓨터 개그가 아닐 수 없다. 썰렁했다면 죄송. ㄲㄲㄲㄲㄲㄲㄲㄲㄲ

사실, GUI 환경에서는 각종 메시지 박스는 반드시 ‘확인’(OK) 버튼을 클릭해야 하고, 이 버튼은 Space나 엔터로만 인식이 되니까 Press any key 같은 메시지를 볼 일은 없어졌다. 명령창(command prompt; console) 환경에서나 볼 수 있다.
요즘 소프트웨어들은 새 이름 같은 악명 높은 오해(?)를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해, ‘새’ 대신 ‘다른 이름으로 저장’이라는 표현을 써 주고 있다는 것도 알아 두자. ^^;;

하나 더, 본인은 한국어에서 ‘기존’이라는 표현이 오· 남용되고 있는 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거슬린다. ‘예전’, ‘종전’이라는 표현이 싹 다 저걸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기존이란, 현존(현재 존재)· 실존(실제로 존재)만큼이나 ‘이미 존재’라는 뜻일 뿐이다. “기존하는 아이템”처럼 활용도 가능하다. 그런데 “기존에 있는 것은 지우세요”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역전앞, 프린터기보다 더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기존’이라는 말을 제일 널리 퍼뜨리고, 또 잘못 퍼뜨리기도 한 곳이 IT계가 아닐까 하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맨날 업그레이드, 업데이트를 밥 먹듯이 하는 분야이다 보니 늘 예전 것과 비교를 하고 뭔가 새롭다는 걸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IT계가 아니어도 자동차계도 차 이름 앞에다 new를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뉴 엑셀, 뉴 소나타, 뉴 프린스, 뉴 그랜저... 그러고 보니 포니는 ‘뉴 포니’가 아니고 ‘포니 2’였는데, 나중엔 네이밍 방식이 바뀌었다.

하지만 new가 붙고 화려하게 세상에 드러난 그 이름들이 세월이 흐르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야별로 살펴보면 재미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1년에 출시된 MS-DOS 5.0의 미국 현지 CF의 한 장면이다. “It's new!!” 출처는 유튜브.
1985년에 스티브 발머가 온갖 오버액션으로 윈도우 1.0 광고 개그를 펼치던 동영상만큼이나 웃기다.

1. NE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윈도우 운영체제는 90%가 넘는 점유율로 PC 환경을 완전히 평정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20년 가까이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윈도우 1.0부터 3.x까지의 16비트 시절에 쓰이던 자체 실행 파일의 이름은.. New Executable이었다! 32 내지 64비트 시대가 된 오늘날에 이 실행 파일 포맷이 새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Portable Executable이라는 다른 포맷이 쓰임)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NDC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사진은 1984년에 도입되어 20년 남짓 국내에서 운행된 무궁화호 디젤 동차(기관차 견인형이 아니고)인데, 업계 종사자 내지 철도 동호인들이 부른 명칭은 NDC. 신형 디젤 동차(New Diesel Car)였다. 1984년에 철도청이 저런 CF를 찍던 당시에는 아주 새로운 차량이었으나, 지금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6년부터 폐차가 진행되어 지금 NDC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못미 NDC.
출처: 류 기윤(현직 코레일 기관사 겸 철도 동호인) 님의 블로그

3. NIV, NASV, NRSV, NKJV 등등..;;
드디어 KJV 크리스천들에게 아주 친숙한 이름들이 나왔다.
new라는 이름이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띄는 분야는 다름 아닌 성경 역본이다.
물론 본인 같은 사람은 그런 것들을 변개된 old lie일 뿐이라고 폄하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과거 통근열차(CDC)를 무궁화호로 개조하여 2008년부터 NDC의 후속 차량으로 뛰고 있는 열차는 RDC라고 불리고 있는데, KJV 신자들이 싫어하는 RV, RSV의 R과 같은 의미의 이니셜이다. Revised와 New는 여러 분야에서 통용되는 단어임이 틀림없다. ^^;;

이런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큰 교훈이 있다.
지금 당장은 새롭다고, 참신하다고 new라고 상업적으로 막 떠벌려진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게 태반이며, 결국 인간은 동일한 패턴의 쳇바퀴를 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 성경의 그 유명한 말씀에 공감하게 된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 1:9)

자칭 이종 예술가로 활동 중인 김 형태 씨의 칼럼을 읽어보면 글쓴이가 저런 면에서 상당한 통찰력이 있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기타 다른 주제의 글에서 느껴지는 인본주의· 자유주의적인 견해가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옛날과 오늘날이라든가 옛 것과 새 것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아주 잘 간파했다.

... 과거에 비해서 현재가 여러가지 의미로 더 좋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문화, 예술, 철학은 오늘도 옛것을 계속 리메이크하면서 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누군가 저에게 반문했죠? 정말 이 시대보다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문화와 역사에 대해 조금만 지식이 있으면 당연한 소리입니다. 아무 분야나 하나 잡아서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물어보세요. 20년, 30년 전, 40년 전, 50년 전에 비해서 지금이 더 좋은 시절이냐고. 음악, 패션, 건축, 디자인, 가구, 자동차, 경제구조, 세계 평화, 문학, 미술, 레크리에이션, 철학, 스포츠 등등 알고 보면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따끔하지만 유익한 고언, 충고, 조언이 많으니 칼럼을 진지하게 읽어보기 바란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 (렘 6:16)

굳이 이 구절과 비슷한 사상이 담긴 사자성어를 찾자면 온고지신인데...
이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의 변화를 무조건 배척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수구꼴통이 돼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극단으로 치우치면, 문명의 이기를 다 거부하고 생체 이식 칩과 신용카드가 666이라는 논리로 빠지게 된다.

말씀이 의도하는 바는, 언뜻 보기에 구시대적이고 수구꼴통(?) 같지만 결국 인간 세상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그 검증되고 안정화된 성경적인 길을 일단 존중하고 따라 걸으라는 뜻이다. 그런 것들이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 중에 진짜로 새로운 건 극히 드물다. 인생의 법칙은 불변이며, 결국은 하나 좋은 걸 만들었다면 이를 위해 다른 하나를 반드시 희생했다는 식으로 대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잘 분별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상업적인 광고는 그런 이면의 그림자를 소비자에게 절대로 솔직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인생의 지혜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능력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여기에 대해서도 분야별로 여러 case study를 제시할 수 있으나, 시간과 분량 관계상 거기까지는 생략하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NEW란, 사람이 거듭나서 구원받은 후 바뀐 행적이고, 훗날 이 땅에 세워지는 새로운 왕국이며, 나중에 창조될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만 new가 아니라 저게 진짜로 객관적으로 new이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분이라면 역설적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옛 길을 반드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12/15 18:49 2010/12/15 18:49
, , , , ,
Response
No Trackback , 13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431

친이스라엘이 살 길이다

1.
http://news.donga.com/Inter/3/02/20101123/32816154/1
이스라엘은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해 원색적인 용어를 사용해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미친' 체제를 저지하고 쓰러 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면서 "그들의 무기 확산과 도발 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중략) 이스라엘의 대표적 영자신문인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을 자세히 보도한 뒤 리베르만 장관의 성명을 톱기사로 전했다.

독자 여러분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우리와는 지리적으로 멀고 딱히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도 없는데, 괜히 반기독교 반유대주의 감정에 편승하여 안 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찾는 과정이 아무 마찰 없이 된 건 아니며, 그들 역시 무력의 오· 남용으로 필요 이상으로 이웃 나라에게 민폐 끼친 것도 있다(그게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북한 수준으로 국제법 어기고 깽판 부리고 무법천지 난동을 벌인 것도 아니며, 나름대로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합법적으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

또한 오늘날의 미국은 어차피 옛날처럼 이스라엘 편만 일방적으로 들어 주는 나라도 이제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 위정자가 대북 정책 때문에 골치인 것만큼이나, 미국의 위정자는 이놈의 이스라엘 때문에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원칙대로라면 이스라엘 편 들어 줘야 하는데 쪽수가 더 많은 아랍권 눈치도 안 살필 수는 없고.
이 글에서 이스라엘의 국제 정세나 외교 문제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크리스천으로서 구국의 일념으로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첫째, 우리는 이스라엘을 고마워하고 본받아야할망정, 욕할 자격이라고는 정말 없는 처지에 있다.
둘째, 성경대로라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국익을 위해서 요즘 형제 국가로 통하는 터키 이상으로 더 가깝게 지내야 한다.

2.
이스라엘은 대한민국과 비슷한 시기인(3개월 전) 1948년 5월에 정부가 수립됐다. 남한보다 영토가 더 좁고 인구도 더 적고 열악했다. 남한처럼 이북 정도가 아니라 가히 사방에 적들이 깔려 있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자기네도 사정이 어렵고 대한민국과 딱히 친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6 25 때 UN의 각종 회의에서 남한에게 유리한 편을 들어 줬으며, 한국에 의약품과 식량을 지원했다! 남한이 북한보다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정부인데도 북한의 불법 무력 도발에 의해 축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됨을 알고부터이다. 원래 의도대로라면 이스라엘은 전투 병력까지도 파견해 줄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긴, 그 당시엔 터키도 도와 줬고, 지난번에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아이티 같은 나라도 남한을 도와 줬으니, 우리나라가 그 당시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가 실감이 간다.)

왜, 몇 년 전엔 김 충배 육사 교장의 편지라고 해서 정체불명의 ‘박빠성’(?) 글이 나돌았다. 기억하시는가? 거기 보면 앞부분에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박 정희 혁명 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한국을 냉대했다” 같은 대목이 있다. 쿠데타를 일으켰지, 옛날에 남로당 경력까지 있지, 그래서 미국 정부가 박 정희에 대해서 처음엔 미덥잖게 여겼던 게 사실이며, 박 정희가 그 오명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일보 빨갱이 조작 사건 같은 걸 일으키기도 했다고 본인은 들었다.

그런데 이때에도 이스라엘은 은혜를 베푼다. 박 정희 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했다. 미국과 그렇게도 짝짜꿍이 잘 맞는 나라가 한국을 인정해 줬으니 이게 박 정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겠는가? 게다가 이스라엘은 영농, 수자원, 안보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을 돕고,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단적인 예로 박통 시절에 한반도에 민둥산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20세기에 산림녹화 사업이 제일 성공한 걸로 손꼽히는 두 나라가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이라는 건 상식이지 않은가.

그러나 박통은 몇 년 못 가 이스라엘과의 우정을 저버렸다. 뭐, 그 심정은 이해한다. 그 시절에 중동으로 노동자 보내서 토목· 건축 사업 벌이고 외화 벌기 위해, 결국은 이스라엘 대신 아랍 편을 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석유 문제도 있다. 1970년대에 석유 파동은 얼마나 치명타였겠는지 생각해 보라.

박통 초기이던 1964년에 한국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개관하였으나, 훈훈하던 두 나라의 외교는 대한민국의 노골적인 친아랍 노선으로 인해 점점 막장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1978년에는 한국 정부의 냉대 하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철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6일 전쟁의 영웅인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장군--훗날 이스라엘의 외무장관이 됨--이, 이대로는 남한과의 외교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뭔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관계 같은 게 된 듯.
그 후 1979년 10월, 박통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얘기는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박까나 박빠 진영에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_-;;
폐쇄되었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전 두환까지 거치고서 먼 훗날, 1992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솔직히 과거에 이스라엘이 우리를 도와 준 것만큼이나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을 지금까지 도와 준 적이 있었나? 내 생각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이스라엘을 욕한단 말인가?

그런 마당에 이스라엘이 지난 연평도 무력 도발에 대해서 우리나라 편을 들고 북한을 맹비난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걔네들이 우리나라 위정자보다도 훨씬 더 속 시원하게 해 줬다. 물론 이스라엘은 북한과 사이가 좋은 나라들과 어차피 대체로 적대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북한더러 잘 쐈다고 지랄을 하는 몇몇 개념 없는 중국 짱깨들에 비해 쟤들이 얼마나 훌륭한가?

뭐, 이스라엘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병역기피자도 있고 별 희한한 일도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걔네들 특유의 애국심과 상무 정신(적에게 절대로 비굴하지 않고, 내가 적에게 당하면 반드시 수 배로 강경 보복..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도 역시 우리가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인 것이다. 북한 성질 건드리지 말고 고분고분 무조건 평화밖에 모르는 사고방식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도 할 필요 없고, 이 완용의 친일 논리도 합리화 가능할 것이다.

3.
잠시 딴 얘기를 좀 꺼내겠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이 얘기를 할 때 굉장히 말을 아껴야 하는 분야가 둘 있다.
첫째는 종말론 쪽이다. 특정 인물, 특정 과학 기술 내지 세상 정세에다가 함부로 말세니, 누가 적그리스도니, 666이니 재림이니 하는 말 갖다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 금기를 어긴 분별력 없는 크리스천들이 시한부 종말론 드립을 쳐서 망쳐 놓은 간증이 가히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은 틀림없지만 어느 타이밍에 휴거가 일어날지,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북한 정권이 붕괴할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막장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때쯤에 세상이 끝날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Y2K 드립, EU 회원국과 요한계시록의 열 뿔 드립...;; 지금까지 그만치 예언이 빗나갔으면 이젠 좀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리고 둘째는 “저건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은 거다 / 안 믿어서 벌 받은 거다” ← 요런 부류의 말... 정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그렇게 즉각 결정론적으로 반응하시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말 잘못 하면 정말로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정 떨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게 만든다.
무슨 대규모 재난이라도 발생했다 하면 걔네들이 우상 숭배하다 벌 받은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개드립을 치는 유명 목사가 국내엔 꼭 있는 거 같은데... 그건 누가 아프기만 하면 다 마귀 들려서 그런 거라고 갖다붙이는 무식한 부류들과 다를 바 없다.

예수 전혀 안 믿는 우상숭배 천국인 일본이 오늘날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부자 나라 축에 든다.
또한, 태풍이나 쓰나미로 부족이 몰살당한 미개 부족 중엔 선교사가 들어가서 나름 ‘복음화’가 돼 있던 부족도 있었다. 왜 그렇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냐 말이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금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오늘날까지도 단정적으로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주제는 이스라엘, 유대인이다!
“저건 이스라엘을 괴롭혀서 벌 받은 거다,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복 받은 거다”
차라리 저건 오늘날에도 엄연히 유효하고 적용 가능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를 자기도 축복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를 자기도 저주하겠다고 성경에 수차례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창 12:2-3)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증거 중 하나가 이스라엘인 것이다.

미국의 경우 2001년의 9 11 테러도,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다 부시 대통령이 아랍 국가들을 옹호하고 이스라엘 땅을 빼앗아서 걔네들에게 넘겨줄 때 벌어진 비극이라고 풀이한 자료가 있다. 본인은 차라리 그런 자료에 훨씬 더 신뢰가 간다. 앞서 언급한 박 정희 정권의 몰락도 친아랍 노선과 함께 시작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4.
이렇듯, 친이스라엘은 세상의 정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특히 우리나라는 은혜를 입었다는 역사적인 배경상, 이스라엘을 배척할 명분조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유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너무 힘들어서인지 지금의 소위 ‘장로 대통령’마저도 과거의 박 정희 같은 불교 신자 대통령과 별 차이가 없이, 이스라엘보다는 두바이, 아랍 에미리트 같은 데에 훨씬 더 관심이 가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친이스라엘 노선이야말로 나라가 잘 되는 길인데 말이다.

다음은, 이스라엘이 6 25 당시의 우리나라 외에도 각종 재난 때 다른 나라들을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지를 열거한 자료이다. 월남전 시절에는 다른 나라에서 다 거절한 베트남 보트 난민들까지도 이스라엘이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 줬다고 한다;;;
이외에 저기는 사이트 첫 화면에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여러 오해를 풀 수 있는 자료가 많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보기 바란다.
http://www.conceptwizard.com/info.html

전세계적으로 반유대주의가 횡행하고,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100가지 잘못하는 것보다 이스라엘이 이따금씩 과격 대응으로 한두 개 좀 잘못하는 것에만 예의주시하는 이유에는.. 영적인 배경이 있다는 게 성경의 설명이다. “마귀가 유대인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유대인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미친 짓, 바보짓이다. 반유대주의는 그 어떤 명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 난 생각이 절대로 아니며, 기독교가 지지하는 교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니,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았으면 우리 죄값이 어떻게 사해질 수 있었겠는가? ㄲㄲㄲ)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짤방은 영화 <회복>(김 종철 감독)의 한 장면. 시 122:6(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12/11 08:48 2010/12/11 08:48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10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428

어린 시절 날 울린 슬픈 동화들

1.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2. 플랜더스의 개 (위다)
3. 성냥팔이 소녀 (안데르센)

19세기에 지어진 작품이고 주인공이 추운 겨울에 불쌍하게 죽는 걸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세세한 스토리가 기억이 안 난다면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보시고, 여기에는 각 작품별로 본인의 논평만 싣도록 하겠다.

1. 동상과 제비를 의인화했다는 점에서, 아래의 2와 3에 비해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다. 2와 3이 지지리도 불우한 주인공의 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1은 주인공 주변에 온통 불쌍하고 못 사는 서민들이 있다. 왕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대인배. 오오~~
참고로, 진짜로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이(제비의 시체나 왕자 심장보다도!) 뭔지 알고 싶으면 성경을 찾아보시라. 단적인 예로, 구원받은 성도의 죽음--자연사든, 순교든--이 주님의 눈앞에서 귀중하다고 나와 있다. (시 116:15)
왕자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고생만 잔뜩 한 제비가 죽는 게 어렸을 때 무진장 슬펐다.;;

2. 1과 3에 비해서 분량이 길고 스토리 전개가 가장 현실적이며 소설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화가를 꿈꾸던 어느 착한 남자애가 여차여차 한 끝에 결국은 아래의 성냥팔이 소녀처럼 추운 집밖에서(정확히는 성당 벽화 아래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얘기. 충견 파트라슈가 추가되어 애절함을 더한다.

뒤늦게 부잣집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 그림이 아주 우수한 작품이었다는 식으로 좋은 소식이 주인공에게 도착하지만 이미 사후약방문이다. 마치 시대를 너무 앞섰던 천재 수학자 아벨이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어 버린 후, 이틀 뒤에 베를린 대학 교수 임용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듯이 말이다.
정작 이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된 벨기에의 그 지방 사람들은 “우리 주민들은 불우이웃에게 그렇게도 매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아냐!”하면서 소설 내용에 대해서 반발한다고... 하더라.

3. 그다지 교훈이나 감동적인 메시지보다는, 그냥 ‘여자애 너무 불쌍해. 지못미 안습’이라는 생각만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스토리였다. 너무 가혹하다. 소녀의 이름도 안 나오고 정확한 가정 배경--알코올 중독자에 아동 학대를 저지르는 아버지 말고는 그닥;;--도 안 나오는 게 어린 시절 본인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_=;;
설정상 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섣달 그믐날, 즉 12월 31일이고 죽은 소녀가 발견된 이튿날이 New Year이라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성탄절로 자꾸 혼동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소녀가 눈 내리는 길거리를 걷다가 마차에 치여 넘어지는 바람에 신발이 벗겨진다. 그런데 그 신발을 누가 갖고 튄다. 그래서 소녀는 맨발 신세로 전락...;;; 야, 이 정도면 가혹을 넘어 가학적인 설정이 아닌지? ㅎㄷㄷㄷ;;;;

잘 알다시피 중간에 판타지적인 장면이 있긴 하지만, 뭐 1과 같은 수준은 아니다.
성냥불 그어서 소녀가 새마을호 특실과 Looking for you 환상이라도 봤다면 행복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열차야~ 날 떠나지 말아 다오~~~”

흔히 저주의 의미로 ‘얼어 죽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얼어 죽는 건 굶어 죽는 것만큼이나 정말 비참하게 죽는 것이다. 추위에 이빨을 부딪치며 제대로 와들와들 떨어 본 적이 있다면 그런 말 함부로 못 한다.
성인도 아니고 10대 소년 소녀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겨울에 밖에서 객사하는 이야기... 정말 충격적이었다. 초딩 시절에 페르시아 왕자를 하다가, 왕자가 쇠꼬챙이에 찔리고 쇠톱날에 두 동강 나 죽는 걸 본 것만큼이나 말이다. =_=;;;

요즘이야 우리나라에 문자적으로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상대적인 빈곤과 박탈감이 답이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앞으로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지난 8월엔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를 하던 어느 고졸 여성이 처지를 비관하여 한강 다리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기억하시는가? 성장 배경 한번 정말 기구하더라. (대학도 못 갔음. 알바는 학비가 아니라 생활비를 벌려고 한 것이다.) 20살도 안 된 여자애가 극심한 빈곤에 이대로는 백날 이 처지 못 벗어날 거라고 염증을 느꼈을 것이며, 또 맨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즐겁게 노는 가족이나 커플들을 보면서 더욱 박탈감을 느끼고 삶의 의욕을 상실했을 것이니 참 마음이 아프다. 이 세상엔 자기 생일이라든가 크리스마스 같은 날을 증오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난 문학소년 체질이 전혀 아니며 “문학이란 모름지기 단순해야 한다”주의여서, 그냥 무조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권선징악 해피엔딩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딱 그런 스타일인 성경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학에 비극이라는 장르가 등장한 이유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죄 때문임이 틀림없다.
가령, 세속 문학가가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 같은 사건을 각색했다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아벨을 장렬하고 비극적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벨이 죽었어도 믿음으로 지금도 살아서 말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히 11:4) 관점이 다른 것이다.

이 사회 구조가 잘못되어 있는 근본 원인이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진짜 인생 역전의 길은 따로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할 텐데! 연말이 다가오니 추운 겨울 밤에 문득 저런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0/11/26 18:12 2010/11/26 18:12
, , , ,
Response
No Trackback , 6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419

성경 신자들의 글모음 (책 출간)

막간을 이용한 광고.

<성경 신자들의 글모음> -- 킹제임스 흠정역과 삶의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는 책에 제가 공동 저자 10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제가 옛날에 인터넷으로 공개한 신앙 쪽 칼럼과 간증들이 같이 실렸습니다. 저자들 중 저의 비중은(제 글이 차지하는 분량) 김 문수, 김 재욱 형제님에 이어 그래도 랭킹 3위 정도는 됩니다. 이 달 초에 갓 출간된 따끈한 책입니다.

책이 나온 곳은 킹 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킹제임스 흠정역>을 낸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입니다.
공중파 TV 출연에 이어, 제 글이 어떤 형태로든 공중파 출판사를 통해 publish된 건 이게 난생 처음이네요.

제 글은 저의 트레이드마크-_-인 <음란한 성경은 가라> 부터 시작해,
<킬로그램 원기>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같은 것들이 수록되었으며,
이외에도 다른 분의 글 중에도 주옥 같은 성경 비평, 칼럼, 간증이 많습니다.
다들 keepbible.com 의 게시판에서 개념글 인증을 받은 글들을 다듬고 재정비한 것입니다.

yes24 http://www.yes24.com/24/goods/4330581?scode=032&srank=1
갓피플몰 http://mall.godpeople.com/?G=9788992485210
생명의말씀사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9788&detail=yes

책이 팔림으로써 제게 돌아가는 이익은 사실상 전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차피 글들 자체가 제가 좋아서 혼자 끄적인 것이지 영리를 목적으로 돈 받고 글 쓴 것도 아니었고,
많이 팔리는 장르의 책도 아닌 데다, 참여한 저자도 워낙 많으니. ㅎㅎ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더 널리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인터넷 상에 수많은 개독안티 사이트가 있으면, 한 곳 정도는 제 홈페이지 같은 곳도 있어야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서 KJV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이트가 있으면, KJV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사이트도 좀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나요?

대학원 다니면서 독자적인 책을 하나 쓰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게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제는 <Introduction to 철덕>이 되겠고,
철덕 입문을 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대학교에서 한 학기 강의할 분량 정도 되는 교재 컨셉으로,
철도와 교통 공학, 도시 공학 개론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철도의 변천사, 수도권 지하철 노선별 분석, 차량 계보 등등.

인문계는 역사와 지리, 이공계는 기계와 전자 공학, 예체능은 음악을 두루 아우르면서
이 책 한 권이면 철덕의 머리 구조를 다 파악할 수 있게. 음, 한 학기 강의만으로 다 되려나?

연습 문제로는 "다음 사진은 우리나라 어느 철도 어느 구간의 모습인가?"
"다음과 같은 지형과 행정구역이 주어졌을 때, 지하철 노선을 설계해 보시오."
"다음과 같은 배선을 지닌 선로에서 완급 결합 열차 다이아를 작성하시오."

그보다 먼저 Looking for you 악보를 피아노 양손 연주곡으로 편곡하고,
Looking for you의 각 소절별 화음· 음정 분석과 감상 포인트 해설을 집필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현실은 시궁창.
저 <성도들의 글모음> 책에서도 저는 철덕이라고 소개가 당당히 나갔습니다. ^__________^
(정확히는 철도 동호인이라고.. -_-)

아놔 기독교 서적 소개하다가 말고 옆길로 많이 샜네요.
아무튼, 이상입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0/11/06 09:03 2010/11/06 09:03
,
Response
No Trackback , 9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405

본인은 지난 2006년 2월, <음란한 성경은 가라>라는 글을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성경 역본 이슈에 대해서 인터넷을 돌아다녀 찾아보고 지인과 메신저로 교제하다가, 불현듯 소재가 떠올라서 서너 시간 끄적여서 완성한 글이었는데...
이 글은 자랑이 아니고 진짜로, KJV 독립 침례 교회 목사님들로부터는 가히 '형제가 지금까지 쓴 글들 중 최고로 뛰어난 명문'이라는 격찬을 아낌없이 받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 반만에..
어느 안티 KJV 진영이 그 글을 정면으로 난도질한 꽤 강경한 반박문을 올린 걸 우연히 발견했다.
글 올라온 날짜도 비교적 최근이다.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EC%9D%8C%EB%9E%80%ED%95%9C-%EC%A7%84%EC%A7%9C-%EC%84%B1%EA%B2%BD-%EC%88%AD%EB%B0%B0  (음란한-진짜-성경-숭배)

글쓴이는 김 삼(김 풍도 아니고. -_-)이라는 분인데 처음 본다.
프로필을 보니, 딱 우리나라 정통 신학 코스를 밟은 후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고 미국에 목회 중이다. 나이도 나보다야 많겠지만, 그래도 글투를 보면 그렇게 나이 지긋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신학 공부 전혀 안 하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나부랭이는 하나도 모르는 풋 사과의 글을 현직 목사가 친히 반박을 해 주다니 감개무량하다. 체급이 서로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인데... ㅋㅋㅋㅋㅋㅋ
KJV를 반대하는 대다수 목사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글로써 잘 대변해 주었다.

저 사람은 프로필에 신앙 고백이 아예 대놓고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보존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음란한 성경은 가라> 같은 글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배알이 뒤틀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정세나 이단 교리 판단한 다른 주제의 글은 그럭저럭 건전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성경관에 관한 한은 본인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믿음의 소유자이다.
 
  성경은 최초의 원문 그대로가 곧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자들을 활용해 기록하신 절대 완전/정확/무오한 말씀이며..현재의 원문은 여러 사본들이 합해지고 조화되고 종합된 결과로 원본에 거의 가깝다고 믿습니다.
(일부 주장자들의 말과는 달리, 절대/완전하게 보존된 사본은 없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원본만이 오직 완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본을 모두 종합/조화시킨 현재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자란다"는 뜻은 아닙니다. 완전에 가깝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의 해석과 번역 탓입니다.)

내가 KJV 숭배자라면 저런 사람은 아무리 봐도 원어 숭배자로밖에 안 보인다. 내가 KJV가 최종 권위인 것만큼이나 저 사람은 세속 학자들의 그리스어 히브리어 사전이 최종 권위이다.
저 사람들의 머릿속엔  "킹 제임스 성경 = 이 송오 & 럭크만 추종자 = 성경 역본의 맹신과 우상화" 밖에 없다. 본인은 이 송오 & 럭크만 추종자가 전혀 아닐 뿐더러, 예수쟁이가 신앙의 근간인 성경의 온전한 보존과 그 실체를 믿는다는데 어떻게 거기에 맹신, 우상화라는 딱지가 붙을 수 있단 말인가!
 
KJV와 외경 사이의 논란, 그리고 초창기 인쇄본의 철자법 얘기는(그리스도 예수안에 발행 흠정역의 부록에도 실려 있는 반박문)
이미 진실을 아는 사람들한텐 면역이 다 돼 있는 주제인데 언제까지 뻔한 레퍼토리를 상대해 줘야 하나 모르겠다.
 
반박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생략하고 넘긴 KJV 출간 당시의 교회사라든가,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원어 해석 몇몇 개만 갖고 계속 끝도 없이 꼬투리 잡고 있다. 반박하는 게 다 저런 식이다. 그 사람이 추종하는 그리스어 사전대로라면(변개된 성경에 맞춰진) KJV는 당연히 오역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일말의 반카톨릭 성향은 있는지 외경 나쁜 줄은 알아서, KJV가 1611년 초창기에 외경이 같이(본문으로 포함되어 나온 게 전혀 아니었는데도) 들어갔다고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게 통탄스럽다.

저 사람은 KJV도 어차피 온갖 카톨릭스러운 컨벤션이 잔뜩 들어있다고 KJV를 폄하하는데, 뭐 그 말이 일부 맞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문화권 교회의 컨벤션이 원래 그랬으니까...;; The translators to the readers 같은 서문을 읽어봐도 성 어거스틴이 어떻고, 무슨 교부가 어떻고 하는 천주교스러운 문체가 물씬 풍긴다 "카더라".
그러나 저런 사람은 천주교가 KJV의 출간을 결사적으로 막고 방해했으며, 첩자를 보내 gunpowder 사건 같은 걸 꾸며서 제임스 왕과 성경 번역자들을 암살하려 한 KJV의 안티 카톨릭 역사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고 있다.

KJV에도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몇몇 바리에이션이 생겼고 인쇄 과정에서 오탈자가 있었으며 몇 차례 에디션이 나온 것 정도는 나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 갖고 "KJV의 여러 에디션 중에 어느 게 당신의 최종 권위입니까?" 같은 불순한 말장난 정도에는 다 대비가 돼 있다. 같은 크리스천끼리 그런 찌질한 짓은 좀 그만 하는 게 어떨까 싶다.

글쓴이는 본인의 글의 본질적인 주제인, 현대 역본들의 음란한 표현에 대해서는 정작 한 마디도 반론이나 해명이 없다. 하다못해, NIV처럼 "거시기를 짤라 버린다는 게 맞는 표현이고" KJV의 "끊어지기를 원하노라"는 오역이라고 떳떳하게 지적한 것도 없다. 반박문을 시리즈로 쓸 기세이니 앞으로 다루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반박을 어떻게 할지는 본인 눈에도 훤히 보이고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한 마디로 말해 일일이 상대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영양가가 없다.

본인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내 방식대로 믿고 아니면 아예 때려치우고 말지,
저 사람처럼은 못 믿겠다.
아직도 성경보다 원어 사전에 더 믿음이 간다면, 김 문수 형제님의 다음 글들을 한번쯤 묵상해 보기 바란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3596 <원어 성경의 유혹>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474 <노새 이야기는 빼 놓고 왜 온천 타령을?> -- KJV와 non-KJV가 대표적으로 다르게 번역된 구절 중 하나이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230 <이삭이 리브가를 애무했다고?> -- 본인의 글 <음란한 성경은 가라>와 비슷한 주제이며, 본인 글을 언급도 하고 있음.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0/09/01 08:35 2010/09/01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23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62

1.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정반대인 관념 중에 대표적인 예로는 부정문에 대한 응답 방법이 있다.

"너 숙제 안 했지?"에 대한 대답이 한국어는 "아냐, 했단 말이야."인 반면, 영어로는 "Yes, I did"로 긍정 의문에 대한 대답과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관점에서는 거 참 희한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어에도 무조건 상대방의 말 자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뜻하는 감탄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Then Sarah denied, saying, I laughed not; for she was afraid. And he said, Nay; but thou didst laugh. (창 18:15) 안 웃었는데요. / 아냐, 너 아까 방금 분명히 웃었어.

킹 제임스 성경은 yes/no보다 yea/nay(예이/네이)가 훨씬 더 많이 쓰인다. 마 5:37의 "오직 너희 의사 표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에서도 yea/nay이다.

2.
이에 덧붙여 또 중요한 차이로 '가다'와 '오다'가 있다.

"너 빨리 이리 와 봐."에 대한 대답으로 한국어는 "지금 가는 중이야"인 반면, 영어로는 "I'm coming"이다.
영어는 남이 내게 come이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나는 거기에 순응하여 그에게 come한다고 기계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오다'는 오로지 나에게, 화자에게 상대방이 움직여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오다'의 주체가 '나'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come이 성경 번역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문자 그대로 죄다 '오다'라고 번역하면 우리말 어법에 어긋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영어 성경 중에서도 킹 제임스 성경은 come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걸 go나 enter로 바꿔 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3.
이렇게 단어 자체에 '나'라는 객체가 수반된 비슷한 예로는 불완전 동사인 '달다'가 있다.
sweet나 equip 말고 give이다. '다오', '달라', '도(사투리-_-)'로만 활용되는 그 이상한 단어 말이다.
불완전 동사가 '가로다', '더불다', '달다', '데리다' 말고 또 뭐가 있더라?
이 '달다'는 '주다'와 의미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남으로 하여금 특별히 '나에게' 뭔가를 주기를 원한다는 아주 이기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주다'라고만 하면 내가 남에게 베푸는 뉘앙스가 풍기지 않는가?

"저 사람에게 빵을 다오"라고 하면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다. "저 사람에게 빵을 주게/주시오/주세요"라고 하거나 아니면 "내게 빵을 다오",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고 해야 말이 된다.

흔히 한국어는 압존법이란 게 있을 정도로 최대한 청자 위주로 언어가 구성돼 있다고들 한다..
내가 언급하는 사람이 나보다 높더라도, 청자보다는 낮은 사람이라면 반말이 허용된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오십니다"가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가 옵니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다-가다'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어도 청자가 아닌 나 위주, 화자 위주의 사고방식이 배인 것도 분명 있다. 그래서 '달다' 같은 단어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친분 사이가 아닌 공식 석상에서는 압존법이 꼭 적용되는 것도 아니라는데? KBS 한국어 능력 시험 공부하면서 교재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다. 가령, 할아버지/아버지가 아니라 사장/과장이라거나(자기는 대리-_-) 할 때 말이다. 이래서 한국어는 어렵다. -_-;;

끝으로, 성경 번역에서 유명한 토착화 표현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1) "누가 너를 데리고 오 리를 끌고 가면 십 리를 가 주어라"(마 5:41)가 영어로 원래 무엇인지가 아는가? 1 mile과 2 miles이다. 5리(약 2km)가 1 마일(약 1.6km)보다는 약간 더 긴 거리이다. ^^;;
(2) "장가 가고 시집 가기"는 영어로는 "결혼하거나 혼인 당하거나"(marry / be given in marriage / be married to)가 된다. -_-;; 성경에서 여자가 시집 가는 건 언제나 marry의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0 08:37 2010/08/10 08:37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43

인구 수와 지구의 크기

현재 지구상의 인구는 60억을 넘어선 지 오래라고 한다. 뭐, 넉넉잡아서 70억이라고 치자.
지금으로부터 한 2, 30년 전엔 세계 인구가 50억을 넘어선 걸 갖고도 식량이 부족하네, 인구 조절을 해야 되네 하면서 온통 호들갑이었다.

그런데 이 70억 인구를 전부 한 명당 딱 1제곱미터(㎡)짜리 면적의 격자에다 꽉꽉 구겨 집어넣으면...;; (그것도 층을 만들지도 않고)
우리나라 일개 도 정도의 면적에도 다 들어간다! 전세계 인구가 그 좁은 한반도의 경상북도 안에 다 들어가고도 남는다면 믿어지는가?

거짓말이 아니다. 넓이는 2차원이다. 70억에다가 제곱근만 씌워도 겨우 8만~9만으로 숫자가 줄어든다.
1㎡라고 하니까 굉장히 좁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관이나 비행기 좌석은 말할 것도 없고 무궁화호 열차의 좌석 하나 면적조차도 1㎡가 안 된다. 앞뒤 간격이 83~85cm 남짓이다. 좌우 간격은 당연히 앞뒤 간격보다 좁다. 그러니 1㎡보다 작은 면적이다.

물론 그 인파만 해도 수십 km에 달하는 길이에 수천 ㎢의 면적에 달할 것이므로 70억 인구는 결코 만만한 양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가 사는 지구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히 더 크고 넓다. 남아메리카가 중국이나 인도 같은 처지라면 그 대륙 한 곳에만도 지금보다 20~30억에 달하는 인구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본인의 생각이 좀 바뀐 게 있다. 인구 문제, 식량 문제나 환경 문제 따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치 심각하지 않으며, 진실은 우리의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도 자연을 짜내고 착취해 가면서 식량을 생산하는데, 인구가 너무 많아서 먹여 살리지 못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건, 전적으로 생산된 식량이 분배가 안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제아무리 지하자원 많고 식량 생산도 많은 나라라도 정치가 막장이면 국민들이 굶주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땅의 절대적인 면적이 좁은 게 절대, 절대로 아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좁게 사니까 좁은 것이고 그 때문에 부동산 집값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때문에 환경이 좀 파괴되었기로서니, 지구가 겨우 그 정도 오염과 파괴 때문에 망하지는 않을 것이며 식량의 절대적인 생산량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자꾸 욕심을 부리니까 자원이 부족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지, 농경 사회라면 이 지구상에 인구는 최소한 몇백억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나이가 들고 보니까 가족 계획, 인구 억제 같은 건 정말 부질없는 발상이고 좀 심하게 말하면 영적으로 굉장히 마귀적인 정책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결혼과 출산은 하나님조차도 간섭 안 하고 부부의 결정을 전적으로 존중해 주시는 영역이다!

뭐, 에너지 낭비하고 환경 마음껏 파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본인은 지구가 겨우 인간의 뻘짓 때문에 그렇게도 호락호락 쉽게 파괴되고 멸망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지구 온난화나 오존층 파괴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불안해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인류가 망한다면 언제나 죄와 불의 때문에 망하지, 무슨 외계인의 침략이나 환경 오염 같은 불가항적이고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허무하게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미우나 고우나 지구 밖을 떠나 우주에서 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테란 같은 종족은 SF 소설에서나... ㅎㅎㅎ

끝으로, 성경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사항이 있다.
지금까지 독립된 인격체로 태어난 개개인의 사람은 총 몇 명일까? (성경대로라면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낙태되거나 굶어죽은 아기들까지 합하면.. 몇 천억, 조 단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의 크기가 가로· 세로· 높이 공히 12000 스타디온이었다고 나온다. (계 21:16)
KJV에서 펄롱(furlong)이라고 번역된 이 단위는 1/8 마일로, 12000 스타디온은 약 2400km이다. 지구의 지름의 1/5이 좀 안 되는 크기 되겠다.

인류 역사상 구원받은 모든 신약 성도들. 뭐 사도 바울, 베드로, 주 기철 목사,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그리고 이 홈페이지 주인장 등등이 전부 한데 모여 살게 될 천국 도시의 크기가 그렇게 설정되었다는 게 의미심장하지 않은지?
어떤 사람이 얼추 숫자놀음으로 계산해 보니 저건, 그 사람들이 전부 들어가 살고도 남는 공간이라고 하더라. 자세한 내막은 본인도 지식이 없지만, 2400km의 제곱이 아니라 세제곱임을 감안하면 정말 넉넉할 수도 있을 듯.

반대로 이 지구 밑에 자리잡고 있는 지옥도 아담 이래로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최소한 수백억 이상의 사람들이 전부 들어가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성경에 따르면, 애초에 규격이 딱 명시된 새 예루살렘과는 달리 지옥은 크기가 가변이고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잠 27:20, 사 5:14) 흠좀무.

애초에 지옥은 마귀와 그를 따라 타락한 천사들을 집어넣으려고 만든 곳이지(마 25:41) 인간을 집어넣으려고 만든 게 아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이 자꾸 지옥으로 불청객으로 가니까 지옥은 어쩔 수 없이 계속 확장 공사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산 폭발이 증가하는 게 지옥 확장 공사의 증거이며, 심지어 지구가 자꾸 더워지고 있는 이유가 이산화탄소 때문이 아니라 발 아래에 뜨거운 지옥이 자꾸 커지고 있어서라고 풀이하는 용자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뭐, 성경대로라면 신이 노해서 천둥을 내린다는 해석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듯, 지구의 크기, 인간의 개체수와 차지하는 크기를 따져서 글로 정리해 보니 웬지 재미있다. 워낙 다양한 주제로 얘기가 나와서 카테고리 분류하기가 골치 아프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한 천년왕국 때는 지구상의 인구가 진짜로 앞서 예상했던 대로 몇백억 급으로 불어날 것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0/08/04 08:20 2010/08/04 08:20
, ,
Response
No Trackback , 17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38

본격 막장 성경 만화

김 성모 + 개그 만화 일화 + 이 말년 스타일의 성경 만화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1.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내가 창으로 다윗을 쳐서 벽에 박으리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 18:11)

2. 온 도시가 격동하고 백성이 다 같이 달려들어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매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 21:30)

전자는 사울 왕이 다윗을 너무 시샘하여 죽이려 하는 장면이며,
후자는 바울이 광분한 동족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가 구타당하는 장면이다.
이때 이런 대사가 하나 들어가면 정말 빵터지지 않을까?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저녁 8시. 누굴 끝장내도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보너스.

3. 그가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이 땅에서 없애 버리라. 그를 살려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하며 (행 22:22)

이건 "네놈을 살려 두긴 쌀이 아까워!" 로 받아쳐 주자. ㅋㅋㅋ

4. 날이 새매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함께 단결하고 자신을 속박하여 저주 아래 두고 자기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말하더라.  (행 23:12)

이들은 웬지 이런 피켓을 들고서 농성을 할 것 같다.
“바울을 죽입시다 바울은 나의 원수”

5. 다윗이 이 말들을 마음속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자기 행동을 바꾸고 그들의 손 안에서 미친 체하며 바깥문의 문짝들에 휘갈겨 쓰고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2-13)

이건 영락없이 개그 만화 일화에서 바쇼 씨가 독버섯 먹고 발작을 하는 장면이다. (3기 9화) ㅋㅋㅋㅋ 다음 14~15절은 아기스 왕 대신 후류 군으로 바꿔서 읽어보기 바란다.

6.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큰 존귀에 이르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리니 그러므로 원하건대 와서 나를 위해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매 (민 22:17)

민수기 22~23장을 읽어보면, 장소 세팅하고서 발람이 웬지 축시의 참배를 거행하는 것 같다. “한겨울에도 귀마개 쓰고 축시”
마치 개그만화에서 스토리가 잘 풀리지 않고 자꾸 꼬이고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것처럼, 성경에서 발락이 발람에 저주를 요청하지만 저주가 잘 내려지지 않는 것도 똑같다. "죄송합니다. 기분상으로는 분명 저주하는 느낌이었습니다만." ㅋㅋ

7.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그것을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이 먹게 하라, 하매 솥에서 해를 일으키는 것이 없어지니라. (왕하 4:41)

독초가 들어간 국을 해독하는 방법으로는, “가루를 사용하며 그것을 솥에 던지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ㄲㄲㄲㄲ

8.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합 3:17)

하박국의 유명한 찬송시는
“비록 코트 안에 마물이 살고 있고, 배구에 걸었던 청춘이 모두 맛이 갔으며 믿을 만한 동료들이 눈이 죽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정도로 패러디 가능하지 않을까? 성경 원전하고 대조해 보면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함을 알 수 있다!

9.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주리라, 하니 (삼상 17:44)

골리앗이 다윗에게 한 이 공갈은 김 성모 식 언어로는 “뼈와 살을 분리해 주겠다” 정도로 번역 가능하겠다.

10.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그러하리라, 하니라. (삼상 22:16)

사울 왕이 자기 멋대로 제사장들을 누명을 씌워 학살하는 장면인데... 앞부분 문맥을 읽어보면 영락없이 아래의 대사가 떠오르게 된다.
“좋다! 솔직하게 말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될까요?”
“죽을 것이다!”

11. 나발이 다윗의 종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각각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들이 많도다. (삼상 25:10)

뭥미, 듣보잡, 갑툭튀 같은 말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성경을 찾아보면 ‘이새의 아들’은 다윗을 굉장히 경멸조로 얕잡아 부르는 표현이다.

12. 평안히 가라 (Go in peace)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인데, 본인은 김 성모 만화에서 “안녕히 가라”라고 막장 반말 자막이 떠 있는 동서울 톨게이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ㅋㅋㅋㅋ

13. 왕이 내게 이르되, 네가 병들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네 얼굴에 슬픈 기색이 있느냐? 이것은 분명히 마음의 슬픔이로다, 하므로 그때에 내가 매우 심히 두려워하며 (느 2:2)

문맥을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다. 그때는 왕 앞에서 신하가 감히 인상 쓰고 있는 건 굉장한 결례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이방인 왕의 포도즙 시종장이던 느헤미야가 자기 동족과 관련된 슬픈 소식을 듣고서 슬픔에 잠겼고 그 감정을 왕이 간파를 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딱 개그만화일화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가?

"포도즙 마실까보냐! 뭣보다 왜 이렇게 유감스러운 표정의 시종장이냐! 이 포도즙 마시는 사람 얼굴이 기분 나뻐!"

14. 성경은 성경이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증언하지만, 개그 만화에서는 우사미가 영감을 받아 범인을 잡아낸다. "앗! 사도 바울이 펜을 든 순간, 그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이것은 곧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뜻이다!"

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발꿈치를 내어 주고 목을 딴다고라... 김 성모 만화 대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패턴이다.
"가랑비는 맞는다.. 하지만, 폭풍은 내 것이야!"
"한 대 맞고 두 대 친다"
"내 옆구리를 주고 네 목을 가져가는 전략일 뿐이야!" / "내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부활할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이런 전략을 구사하셨단 말인가. ㄲㄲㄲㄲ (그렇다고 해서 으윽~ '옆구리를 너무 깊이 찔렸어' 같은 건 없다. ㅜ.ㅜ)

16.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 (고전 11:23)

고린도전서 자체가 육신적으로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 내용이다. "우리 이런 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기 전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아주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인데 예수님을 졸지에 저팔계로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어떡해, 분위기와 대사 패턴이 너무 잘 들어맞는데. 이거 고인드립인가? ㄲㄲㄲㄲ

이 외에도 ‘근성’, “세상이 대충 망한 뒤에”, “안 돼! / 돼!”, “리듬과 파워! 그리고 집중력!”(성경에도 은근히 배틀 씬 많다) 등, 여러 대사가 응용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가령, 아브넬의 부하와 요압의 부하들이 배틀 아레나를 하는 장면에서(삼하 2:14) "나의 40단 컴보는 자비심이 없지", "네놈의 공격 패턴 강약약", "풋 사과", "내 공격을 막는 데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같은 대사가 나올 수 있으며,
요압이 자기 정적들을 교활하게 죽이는 장면에서는 "발차기의 모든 것을 보여 주마" 하면서 훼이크로 주먹질을 하는 장면이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

저런 만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크리스천인 경우는 거-_-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성경을 이 정도로 아는 크리스천 중에서 저런 만화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혀에 가깝게 없을 것이다. 어? 그럼 난? ㅋㅋㅋㅋㅋ

* 참고로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이지, 아버지와 함께 럭키짱 만화책이나 실컷 볼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다. ㅠ.ㅠ
한번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는 무슨 군대처럼
고참도 없고 말년 같은 개념도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13 12:20 2010/07/13 12:20
, ,
Response
No Trackback , 11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19

본인은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 모두가 하나님의 영감 받은 무오류한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 성경이라는 막연한 존재의 실질적인 구현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본인은 오늘날 실존하는 특정 역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싸움 나기 엄청 좋으며 이 글의 주제는 그 분야가 아니므로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특히 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절대자에 의한 세상의 창조를 믿는다.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진화론도 워낙 분야가 다양하며 소위 창조론자라는 사람들이 진화론이 뭔지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서 무작정 무식하게 깐다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는 것, 본인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에서 우연히 창조되었으며, 내 조상의 100대, 200대.. 혹은 n대로 올라가면 유인원과 원숭이, 아메바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진화론이 가르친다면 본인은 그런 학설은 누가 뭐래도 당연히 거부한다.

이 외에도 본인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6일 창조는 문자적인 24시간이었다고 믿는다. 식물이 셋째 날에 먼저 창조되고 나서 그 이튿날에 해와 달이 만들어진 마당에, 그 하루가 수억 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출 20:11 같은 곳에서 인간의 6일과 천지 창조 6일을 명백하게 동일선상에 놓으심으로써, 쓸데없이 원어라든가 영적 해석 나부랭이를 동원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놓았다.

다음으로 본인은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며, 인류의 역사는 그로부터 약 6천 년 남짓이라고 믿는다.
고대인은 미개인이 결코 아니었으며 불이라든가 바퀴 같은 건 거의 아담 시절부터 곧바로 만들거나 활용하기 시작했다. 농사도 바로 짓기 시작했다. 인간은 바보가 아니다. 정말 아니다.

여기까지는 창조 교리에 관한 한, 본인의 견해와 우리나라에서 '창조 과학회'라고 불리는 단체의 견해는 서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실제로 본인은 어렸을 때 창조 과학회에서 가르치는 여러 지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얻은 유익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많다.

자 그럼, 이제 견해가 어긋나기 시작한 분야를 털어놓도록 하겠다.

본인은 인류의 역사만 6천 년이라고 믿지, 지구와 우주의 나이까지 덩달아 그렇게 짧다고 믿지 않는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경과 과학이 일치하기 위해서 우주의 나이가 짧아야 할 필요는 없다' 주의.
사실, 성경엔 우주의 나이가 얼마인지 나와 있지 않으며 그건 인간이 알 수 없다. 그 이상은 순전히 과학의 영역이다.

창조 과학회는 '필트다운 인 구라설' 같은 걸 파헤치면서 생물학의 진화론자하고만 싸우면 됐던걸 자기 깜냥으로 지질학, 천문학 우주론 등마저 깡그리 부정하고 그야말로 과학계에서 자기네만의 영역을 개척해야 할 지경이 됐다. 그런데 종교적 신념을 떠나서 창조 과학회에서 내놓는 대안이라는 게 학문적으로 보기에 심하게 허접한가 보다. 그래서 사이비 과학 취급 받으면서 까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말씀 보존 학회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기성 교회들로부터 간증을 잃었듯이 말이다.

과거에는 빛의 속도가 더 빨랐다거나, 달에 쌓인 먼지 두께라거나, 지구 자기장의 반감기라든가... 지구/우주의 나이가 젊다고 내놓는 근거들은 다 과학적으로 반박되어 있다(고 한다). 창조 과학 진영에도 전문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천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줍잖은 지식으로 우주론을 논하고 현대 생물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엔트로피 운운하면서 진화론 까는 모습이 세속 학계에서는 상당히 찌질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듯.

심지어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이런 추태 때문에 창조 과학회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며, 특히 연세 대학교 천문학과 이 영욱 교수의 경우(물론 크리스천) 강연과 글을 통해 창조 과학회 안티를 공공연히 자처하고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빅뱅(대폭발설)은 이제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 없는 100% 절대무오 확실한 정설이 맞으며, 창조 과학회가 주장하는 성년 우주설이라든가 광속 가변설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오류라고 너무 단호하게 딱 잘라 말을 하는데, 본인은 과학 지식이 없으니 그에 대해 뭐라 코멘트 할 수가 없다.

2008년 가을엔 창조 과학회 주요 간부이던 양 승훈 교수가 "나도 다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지구와 우주 나이는 많은 것 같아" 하고 커밍아웃을 한 후 창조 과학회를 탈퇴해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렇게 우주의 나이가 많은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하면, 필연적으로 창세기 1장의 문자적 해석을 포기하는 쪽으로 빠진다. 하나님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 이 day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어로는 year가 될 수도 있고 두리뭉실 궁시렁궁시렁...;;; 나중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공격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진실은 어디 있을까?

이 모순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이 바로 간극 이론(gap theory)이다.
창세기 1:1 (천지창조) - 2 (심판의 결과로 땅이 혼돈) 사이에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흘렀고 그 후 3절 이후부터 6일 창조는 문자적인 24시간이요, 인류의 역사는 6천 년이라는 시나리오이다. 우주의 나이까지 6천 년으로 좁힐 필요도 없고, 무리하게 6일 창조를 늘어뜨릴 필요도 없다!

그런데 간극 이론은 기독교계 내부에서 굉장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무슨 아담 이전의 인간 조상이라든가 귀신론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으며, 간극 이론은 성경과 과학을 바르게 풀이하는 열쇠이다.

간극 이론의 핵심은 창 1:2의 without form and void를 마치 렘 4:23처럼 매우 부정적인 심상(=심판의 결과)으로 본다는 것이다. 본인은 비행기 사고로 끔살 당한 희생자 시체 중에, 새까맣게 타고 특히 이목구비가 싹 없어진 민얼굴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후덜덜;;; 그게 바로 without form and void인 얼굴이다. 정확하다.

반대로 간극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창 1:1-2를 창세기 1장 전체의 주제 문장으로 보고, 2절은 창조 중간 과정이나 준비 상태로 해석한다. 식사를 준비하기 전의 조용하고 깔끔한 부엌을 without form and void 상태라고 비유하는 글을 봤다. 심지어는 첫째 날이 "하늘과 땅도 창조하고" 빛도 창조한 날이라고 뭉뚱그리기도 하는 듯.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다. C/C++ 언어에도 등장하는 void는 공허하고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최소한 관념적으로 텅 빈 심상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간극 이론은 인간 이전의 온 우주가 물로 멸망한 적이 있다고 가르치며, 벧후 3:6을 노아의 홍수로 보지 않는다. 간극 이론은 물과 어둠이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천사라든가 사탄 마귀는 언제 창조되었고 언제 타락했는지에 대해서도 딱 떨어지게 답이 나온다. 6일 창조 중 둘째 날에만 왜 하나님께서 보기 좋았다는 말을 안 하셨는지가 정확하게 설명된다는 것도 아주 큰 매력이다! 본인은 이 논리를 깨달은 뒤부터 간극 이론 매니아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젊은 우주 진영에서는 노아의 홍수만으로 지구의 모든 지질학적 격변을 다 설명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그쪽의 주장대로라면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지구상에 화석 연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니, 인류는 창조 후 약 1600년 동안 석탄과 석유가 없이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용한 역청(pitch)은 아스팔트 같은 석유 화합물이 아니라 송진이라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극을 믿으면 굳이 그렇게 단정지을 필요가 없다.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길다는 증거는 아무 무리 없이 받아들이면 되고, 젊은 듯이 보이는 증거에 대해서는 6천여 년 전쯤에 한번 우주 물청소를 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된다. 달이나 화성 같은 여타 행성에서 과거에 물이 흐른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뉴스 보도는 간극 주장자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여러 논쟁거리가 있으나, 이 글에서 더 다루지는 않겠다. 젊은 우주를 믿는 분들은 본인과 같은 믿음에 대해서 "과학과 신앙의 절충"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버럭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건 절충이나 타협이 아니다. 제아무리 "선장은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란 말이 있다고 한들, 선장도 충분히 구조될 수 있는 상황에서 선장이랍시고 굳이 똥고집 부리면서 침몰하는 배에 남아 개죽음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싸울 필요가 없는 분야에서까지 바이블 빌리버들이 세속 과학을 상대로 전투종족이 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간극만치 기독교의 여타 근간 교리(특히 마귀론!)와 예표에 잘 부합하고 현대 과학하고도 충돌 안 하는 멋진 교리는 찾을 수 없는데 왜 이렇게 간극이 오해 받고 이단시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간극 이론은 진화론과의 절충이 아니며, 아담 이외의 인류 조상을 주장하지 않고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간극을 반대하더라도 제대로 알기나 하고서 반대했으면 좋겠고, 창조 과학회는 젊은 우주를 주장하더라도 좀더 업데이트된 최신 과학적 데이터로 밀어붙였으면 좋겠다.

평소에 성경을 믿지 않았거나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라면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모르겠다. 진화론자 욕하는 내용은 없으니 부담 없이 편하게 읽으셨길 바란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본인 같은 사람(교회 진영)도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

* 2011년 12월 5일 추가
요약하자면, 원창조· 재창조 문제는 without form and void를 아래 그림에서 왼쪽처럼 보느냐, 오른쪽처럼 보느냐 문제와 정확히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잘 알다시피 왼쪽은 짓다가 만 미완성 건물인 반면, 오른쪽은 완공되었다가 파괴된 건물의 잔해이다.
세상에, 이걸 떠올리고는 내 머리에 내가 감탄하고 말았음.. -_-;; 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0/07/09 09:08 2010/07/09 09:08
, ,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15

금 이야기

금과 은, 특히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값비싼 귀금속의 제왕으로 각인되어 왔으며 성경적인 의미도 풍부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물질도 귀한 것과 흔해빠진 것을 구분해 놓으신 것이다.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누구라도 번쩍이는 누런 금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탐내고 갖고 싶어할 것이다. 금은 어디서나 보편적인 ‘경제적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찰만큼이나 검은 거래에서 쓰이는 매개체가 되기도 쉽다. 흔한 물질로부터 금을 만들려고 애썼던 연금술, 그리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골드러시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기억한다.

잘 알다시피 올림픽에서는 상위 입상자에게 금· 은· 동메달이 수여된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의 직전에 개최된 1912년 제 6회 대회까지는 메달을 단순 도금이 아닌 진짜 순금· 순은으로 만들어서 줬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흠좀무... 그렇게 해서는 올림픽 위원회의 재정이 남아나질 못했을 것이다.

금은 잘 알다시피 일단 외형이 정말 탐스럽다. 그런데 희귀하다.
그리고 매우 안정적이다. 공기 중에서 녹이 전혀 슬지 않으며, 수중이나 고온에서도 산화하지 않고 어지간한 화학 물질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뭐, 왕수 같은 일부 물질에는 녹지만) 제아무리 금이 보기에 아름다워도 공기 중에 조금만 놔 두자 쇠처럼 녹이 슨다면, 이 정도로 비싼 귀금속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불변성 역시 금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금은 액세서리를 만들 때뿐만이 아니라 그 안정성과 불변성 덕분에 치과 의료용으로도 쓰이고, 전기적 특성 덕분에 손전화 같은 전자 기기에도 소량 들어간다. 오죽했으면 그런 반도체 기판을 만드는 회사에서 수거되는 금을 몰래 빼돌린 직원이 경찰에 잡히기도 했을 정도이다.

태양계 바깥으로 떠난 우주 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에는 혹시 외계인이 발견하면 보라는 의도로 지구의 위치와 인간의 모습 등이 새겨진 일명 ‘파이어니어 금속판(Pioneer plaque)’이 장착되었는데 이 금속판의 재질은 알루미늄에다 금 도금이다. 11호에는 아예 금으로 만들어진 LP 음반까지 들어있다(지구의 소리 수록).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여행할지도 모르는데 변질되지 말라고 비싸고 무거운 금을 쓴 게 틀림없다.

또 금은과 비슷하게 안정적인 금속으로 백금이 있다. 백금은 촉매로도 실용성이 매우 뛰어난 금속이며, 백금과 이리듐(Ir)이라는 희소 금속과의 합금은 전자 장비의 접촉 부품, 만년필 펜촉 등으로도 쓰이고 측정 기기의 재질로 활용된다. 특히 과거에 킬로그램 원기, 미터 원기 같은 물건도 안정성 덕분에 이 합금으로 만들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손전화 같은 정밀 전자 기기를 만들 때 쓰이는 이런 희소 금속들을 확보해 놓으려는 경쟁도 국가간에 치열하다고 소식을 전에 들은 것 같다.

은만 있는 게 아니라 수은도 있고, 금만 있는 게 아니라 백금도 있다는 게 흥미롭다. 백금과 은의 차이는 마치 여성 친구(female friend; 그냥 우정)와 여자 친구(girl friend; 애인-_-)의 차이인 것 같다. ^^;;

성경에는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동방 박사들이 그분께 바친 선물 세 종류 중에도 금이 있었다(마 2:11).
뭐니 뭐니 해도 황금 잔치가 벌어졌던 때는 솔로몬 왕 시절인데, 궁내 경비병들에게 지급된 방패의 재질이 금이었고 왕좌도 금이었으며, 왕이 사용하는 식기조차 다 금이었다! (왕상 10:14-22, 27)

은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마냥 흔해 빠졌고 아예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니 믿어지는가? (왕상 10:27) 그때는 사실상 전세계의 모든 금이 예루살렘으로 몰렸다는 소리이다. 조금 상식이 있다면 불신자라도 666이라는 숫자가 아주 나쁜 의미로 성경에 나온다는 걸 알 텐데, 계시록에만 666이 있는 게 아니다. 1년 동안 솔로몬의 왕국으로 반입된 금의 무게가 666달란트(약 20~25톤)였다고 한다. 성경에서 666이 딱 두 번 이렇게 나온다는 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뭐 그래 봤자 금으로 도배를 해 놨던 성전과 각종 집기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망할 때 다 외적들에게 뺏겼다. 예수님은 헤롯 시절에 지어진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기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신 적이 있는데(마 24:2), 이것은 유대인들의 민족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요, 마치 “제아무리 불침선 타이타닉이라고 해도 처녀 항해 때 싹 침몰해 버릴 것이다” 같은 메가톤급 예언이었다.
하지만 예언은 그대로 적중. 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넘기고 무너졌는가 하면, 탐욕스러운 적군들이 금을 추출하려고 돌을 하나하나 다 뒤지고 녹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말 ‘지못미 성전’이다.

그래도 안타까워하지 말자. 예수님께서 그 황금 잔치를 벌였던 솔로몬의 영광도 보잘것없다고 말씀하시며(마 6:29), 자신이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마 12:42)라고 소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곳은 도시 전체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일 테니 말이다(계 21:18).

이상, 4월의 마지막 블로그 포스트였다. ^^

Posted by 사무엘

2010/04/30 21:35 2010/04/30 21:35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56

« Previous : 1 : ... 15 : 16 : 17 : 18 : 19 : 20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6/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4058422
Today:
1300
Yesterday:
2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