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폴 블리스. Philip. P. Bliss (1838-1876).
19세기 미국의 찬송가 작사· 작곡자로 심심찮게 접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이 사람은 바울과 빌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복음전도자 겸 찬송가 싱어송라이터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

그는 어찌나 복음 선포와 혼의 구원에 진심이었으면.. 당대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CCM을 만들었다.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초청)와 "하나님의 진리 등대"(선교)를 작사· 작곡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저 사람의 작품이다.
그리고 가사가 '성경'을 다루고 있는 독특한 곡..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과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을 작사· 작곡했다(1874).
그렇잖아도 이 두 곡은 6/8박자에 가사와 멜로디가 좀 비슷해 보이지 않던가?
'성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되는 곡이지만 여기 가사에도 구원과 복음 얘기는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그 뒤, 이 사람은 호레이시오 스패폴드가 지은 유명한 찬송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평안, 1873)를 보고는.. 거기에다 우리가 지금 아는 그 멜로디를 작곡해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1876).
이것 말고 "내 너를 위하여"(헌신)도 가사는 딴 사람 것이지만 곡은 저 사람 것이다.
그랬는데 이분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876년 12월 29일, 오하이오 주에서 칙칙폭폭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미국판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당하면서 4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강을 건너던 중이었는데 아래의 교량이 쇳덩어리 열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폭삭 무너진 것이다. 이름하여 애슈터뷸라 철교 붕괴 참사이다.

원래 이랬던 교량이.. (열차가 정말 조그맣긴 하다.. 20세기가 아니라 19세기여서 그런지..)

열차는 20여 미터 아래로 떨어져서 박살이 났고, 저 사람 포함 90여 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그 시절에 토목 건축 기술이 부족했거나 부실시공이 있었던 듯하다.
이때 열차의 동력원은 석유가 아니라 기껏해야 석탄이었지만.. 그래도 조명용 등불이 다 연료를 쓰고 있었고, 또 이 시절에 객차는 나무로 만들곤 했다. 그래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사상자가 더 늘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사고 현장에서 이분의 유품을 뒤지는 과정에서.. 그가 지은 새로운 찬송시가 적혀 있는 쪽지가 발견됐다. 조만간 이것도 출판사에 보내려 했는데 고인이 미처 못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굴된 찬양이 바로... "속죄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양하리라"(1876)이었다!
이건 제임스 맥그라나한(McGranahan)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1878년에 정식으로 발표됐다고 한다. 3박자이다가 후렴에서 4박자로 바뀌는 그 곡 말이다.
"속죄하신 구세주를"이 필립 블리스의 사후 유작, 마지막 찬송가가 됐다.
신기하고 경이롭지 않은가?
호레이시오 스패폴드는 선박 침몰 사고로 가족을 잃고서 찬송시를 썼는데, 거기에다 저 사람이 곡을 붙여 줬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교량 붕괴 사고로 소천하자, 그 사람이 지은 찬송시에다가 또 다른 사람이 곡을 붙인 것이다!
필립 블리스가 7, 80대 나이까지 더 오래 살았으면 20세기 초까지 찬송가가 얼마나 더 만들어졌을지 궁금해진다.
여담이지만 bliss는 옛날 Windows XP의 푸른 초원 배경그림의 작품 이름이기도 했다~!!! (극락, 최고의 행복, 축복.. 이런 뜻) 이것도 떠오른다. ^^

그나저나 저 애슈터뷸라 참사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철도 교통사고이다. 뭐, 차량이 탈선하거나 신호가 꼬여서 정면충돌한 게 아니니, 순수하게 철도 쪽 사고는 아니지만 말이다.
조선은 1899년에야 그 쬐끄만 27km짜리 경인선이 전적으로 외국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진 게 최초이며, 교량은 이듬해에 간신히 완공한 한강철교가 최초였지 않던가?
그러나 미국에서는 수십 년 이상 훨씬 전부터 그 넓은 땅에 수천 km가 넘는 길이의 철도가 땅따먹기 하듯 자체 기술로 건설됐다는 게 참.. 대단하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번 저런 불행한 사고도 난 것이다.
그 시절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를 이용해서 미국의 동부(네브라스카)에서 서부 끝(캘리포니아)까지 가는 덴 1주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4~5시간이면 가겠지만, 저 1주일만으로도 마차로 6개월 걸리던 것에 비하면 시공간 워프 수준으로 단축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러시아 대륙횡단 열차도 전 구간 완주하는 데 비슷하게 1주일 정도 걸린다. 이런 초장거리 열차가 등장하면서 경도별 시차라든가 범지구적인 시간대 동기화의 필요성도 최초로 제기되었다.
쟤들은 과학 기술이 저렇게 동시대 다른 나라들을 아득히 앞서 갔고, 한편으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패니 크로스비, 필립 블리스 등 아름다운 찬송가들이 발표돼 나왔다.
이것만 생각하면.. 서부 개척 시대의 끝물을 가던 19세기 미국은 bliss라는 단어의 뜻에 걸맞은 천조국이었던 것 같다. 통상적인 산업혁명기의 서유럽과도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아 물론 인간 사는 곳은 어디든지 빛이 있으면 어둠도 응당 있었다.
저기는 시골 깡촌은 집집마다 샷건이 필수품이고, 부녀자들도 최소한의 총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와일드 무법천지였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완전 술에 쩔어서 살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난 이 정도 알코올에도 끄떡없는 진짜 싸나이" 허세 부리기 위해서였다;;; 이 짓 하다가 급성 알코올 중독 걸려서 골로 간 사람도 많았고, 정신줄 놔 버린 가장의 가정폭력 때문에 파탄 난 가정도 많았다!
그리고.. 링컨 덕분에 미국에서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는 했다만.. 그러자 저렴한 노동력은 노예 대신 외노자로부터 조달되기 시작했다. 중국(청나라) '쿨리'라고 들어 보셨나..?
미국의 저 찬란한 대륙 횡단 철도도 상당수가 이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처참하게 갈아 넣으며 만들어졌다.
그들은 안전이고 인권이고 없던 정말 힘들고 위험한 현장에서 자국민 대비 정말 저렴한 임금 받으면서 일했는데.. 그 임금에서도 일자리 중개 수수료나 수송 비용, 송금 수수료 등 온갖 공제를 당하고 떼였다. 그들의 조국인 청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하게 일해서 푼돈 건진 게.. 그들의 청나라 깡촌에서 가난한 소작농으로 있는 것보다는 덜 비참하고 더 나았다! 이런 합법 노예 계약은 서로 윈윈이었기 때문에 수요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미국은 현대적인 개념의 대기업과 금융 경제 시스템이 그때 다 갖춰져 있었다. 철강 카네기, 석유 록펠러(로커펠러) 같은 사람도 다 이 시절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무한 시장경제 자유방임 초창기엔, 신흥 기업가 재벌 졸부들이 근로자 임금을 후려치고 각종 산업재해를 은폐하고, 경쟁 기업을 비열하게 말려 죽이면서 독점 담합.. 정말 정말 끔찍한 짓 추악한 짓도 많이 했다. 이 인간들은 워낙 악명이 높아서 '강도 귀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 든 전통적인 강도 하층민이 아니라, 칼 안 들고 더 무섭게 사람 잡는 강도 귀족..

이 시절 창업주들은 젊은 시절에 진짜 미치광이처럼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가, 나중에 늙어서는 자괴감 느껴서 도의적으로 사회에 '기부'라도 왕창 많이 하면서 재산을 환원했다. 뭐 학교 세우고 병원 세우면서.. 병 주고 약 주고를 했다. 그런 기부로 과거의 흑역사를 다 덮을 수 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이고~! 필립 블리스 얘기를 하다가 철도를 거쳐서 미국 역사 얘기가 나왔구나.;; 다시 찬송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아무튼 저분도 미국이 한창 저렇던 시절에 복음 전도자로 살면서 저런 찬송시를 썼다! 이걸 깊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미국에는 저렇게 엄청나게 선한 것도 있고, 엄청나게 악한 것도 존재해 왔다.
난 교회에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속죄하신 구세주를' 요렇게 준비 찬송을 편성해 봤다. 그 밖에..
- 가사에 ‘갈보리’라는 단어가 있는 곡들
- 어딘가에 더 가까이 나간다고 말하는 곡들
-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고 말하는 곡들
뭔가를 모른다고 말하는 곡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등~
- 가족· 친지·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곡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그날 다가오네 등
- 패니 크로스비 작사 + 윌리엄 도언 작곡인 곡들
- 단조만: 현충일과 주일이 겹쳤을 때 ㅎㅎ
- 분위기가 제일 힘찬 곡들: 무덤에 머물러, 마귀들과 싸울지라 등~
이렇게 비슷한 특성이 있고, 만들어진 계기가 비슷한 곡들을 한데 모으는 것도 의미 있어 보인다.
- "놀라운 주의 은혜"(Haldor Lillenas) --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1910년대 곡
- "주 하나님 큰일을 행하셨네" -- "살아계신 주"
-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 "노래하는 순례자(하늘의 곡조 울리니)"
얘들은 전자는 클래식 찬송가 범주에 드는 반면, 후자는 더 캐주얼 리버럴한 곡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가사 내용은 서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굳이 찬송가 vs 복음성가로 구분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찬송가, 더 나아가 기독교 음악 전반에 대한 더 유연하고 가사 지향적인 분류법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 추신
자, 원래는 본인이 여기까지만 글을 썼는데 말이다. '속죄하신 구세주를' 찬송가와 관련하여 긴급히 추가해야 할 관련 정보를 또 입수했다.
'속죄하신 구세주를'이라는 찬송시는 맥그라나한 말고 다른 사람이 이미 지은 옛날 멜로디가 붙기도 했었다. 마치 우리나라 애국가가 아주 옛날에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 천부여 의지 없어서...' 그 스코틀랜드 민요 멜로디로 불리기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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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악보를 보시라~!
옛날 멜로디는 바로.. 우리말 찬송가에서는 '하늘 영광 버리시고 예수 강림하셔서'인 그 3/4박자 곡이다. 가사는 완전히 다른데.. 참 신기한 노릇이다.
하지만 저 찬송시를 매우 유명하게 만들어 준 멜로디는 아무래도 맥그라나한이 이 가사만을 위해 새로 만든 그 곡임이 틀림없다.
Posted by 사무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