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지난 봄에 중랑 물 재생 센터와 서울 하수도 과학관에 다녀 온 것에서 착안하여, 올가을엔 말로만 듣던 수도 박물관을 다녀왔다.
수도 박물관은 서울숲의 근처에 있는 '뚝도 아리수 정수 센터', 쉽게 말해 상수도 정수장이라는 보안 시설의 내부에 있다. 즉, 서울숲의 내부에 있는 시설이 아니며, 강변북로 근처에 있는 고유한 출입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건 당연히.. 정수장 자체와도 별도로 개설된 출입구이다.

여기를 어떤 교통편으로 찾아갈까 망설였는데..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도 이 기회에 한번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이 위령비는 자동차 전용 도로의 진출입로 옆이라는 좀 엄한 곳에 있는 관계로.. 차가 없이는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체 교통편은 자연스럽게 자가용으로 결정됐다. =_=;;;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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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옆의 중랑천은 한강으로 합류하고 이 길 역시 자연스럽게 강변북로로 합류하게 된다. 다만, 합류 직전에 성수대교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나들목이 나온다.
이 나들목의 접속 도로는 '뚝섬로'이다. 뚝섬로와 고산자로가 만나는 '성수대교 북단 교차로'에서 계속 직진하면 서울숲 쪽으로 가게 되며,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제서야 성수대교로 가게 된다.

단, 이때 예각으로 더 깊게 오른쪽으로 꺾으면 여기서도 지하도를 거쳐서 강변북로 동쪽 구리 방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
위령비는 설마 그 광활한 강변북로 본선에 있는 건 아니고, 강변북로와 뚝섬로를 잇는 진출입로, 철도로 치면 연결선에 속하는 좁은 도로 사이에 있다. 그나마 여기는 차들이 본선 구간만치 빠르게 달리지는 않으니 드나드는 게 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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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출입로의 상행과 하행 사이의 공간에.. 위령비 참배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다. 상· 하행 모두 어느 방향으로나 진출입 가능하다.
이 위령비 때문에 자동차 전용 도로 구간 내부에.. 무슨 휴게소도 아니면서 사고· 고장이 아닌 일반적인 명분으로 차를 세우고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터가 생겼다는 것이 무척 이색적이다.
위령비는 저 전방의 도로를 횡단하면 바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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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16일에 완공됐다. 별 관련은 없지만, 이건 당시 대통령이던 원조가카가 암살 당하기 열흘 전의 일이었으며, 원조가카 역시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5년 만인 199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 기념일 아침에 구 성수대교는 상판이 하나 무너져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32명이나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가 부상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상자가 이런 형태로 발생한 이유는 시내버스 한 대가 거꾸로 뒤집혀서 천장을 아래로 향한 채로 바닥에 수직 낙하했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그 버스의 승객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물론 부실공사였지만, 얘는 그래도 훗날 무너진 삼풍 백화점만치 악질적인 부실공사와 막장 운영의 산물은 아니었다. 또한, 성수대교도 외관상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다가 무슨 지뢰 터지듯이 무너진 게 아니며, 당일에 차가 원활하게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이음매 사이의 균열이 심하게 벌어져 있기도 했다. (백화점은 아예 당일 5층의 영업과 출입이 금지되고 에어컨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원..)

이 위령비는 보다시피 사고 3주기인 1997년 10월에 만들어졌는데, 이때는 이미 성수대교가 다시 만들어져서 개통된 뒤였다(1997년 7월). 단지, 그 당시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가 다니던 구 당산철교가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아 헐렸으며, 다시 건설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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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 주변은 이렇게 생겼다.
경부 고속도로 관련 기념탑과 위령비는 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형상화한 모양이던데.. 저 비석은 뭘 형상화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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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비석 뒤에는 희생자 3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비도 저렇게 뒷면에 명단이 적혀 있더라만..
이 중 무학여고 학생이 9명이고, 나머지 인원 중에는 필리핀 사람 1인, 그리고 서울교대 학생 1인도 포함돼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양재 시민의 숲에 있고, 거기엔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고 희생자 위령비도 근처에 같이 있다.
그것처럼 성수대교 위령비 역시 아예 근처의 서울숲 내부로 옮기면 사람들이 찾아가기는 훨씬 더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이 한강과 더 가깝고 성수대교가 같이 보이는 여기가 더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그냥 지금 위치로 정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 1999년 8월 18일 밤엔 딸을 사고로 잃은 어느 아버지가 위령비 옆에서 음독 자살하여 주변을 한없이 안타깝게 했다.
다른 언론 보도를 검색해 보면 그분은 희생자 유족 대표 명목으로 위령비의 건립도 주도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극도의 슬픔과 정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도 그만뒀으며.. 나중에는 딸 생각만 하며 거의 매일 위령비 곁을 떠나질 않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잃어도 보통 사람은 저렇게 멘탈이 견디질 못할 텐데,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더 극단적인 예도 있었다.
정 광진이라는 변호사는 딸만 넷이었는데 세 명을 저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욥 실사판이 따로 없다. "집이 무너져서"(욥 1:19) 대신에 "백화점이 무너져서"로 치환하면 된다.

그래도 유가족이 이 엄청난 비극과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라도 극복했다면.. 피해 보상금으로 장학 재단을 만들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후학들을 후원하는 초인적인 대인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재단의 이름에다가는 물론 죽은 자녀의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성수대교 희생자 중에는 서울교대 재학생이던 이 승영 씨의 유가족이 그렇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세 딸을 잃은 정 변호사도 재단을 만들었으며, 관련 보도 자료를 보면 "딸들이 살아 생전에 다니던 교회" 얘기가 나온다.

종교의 순기능이란 게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 싶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도 말이다. 이건 성경이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죄와 심판, 복음, 구원, 성령의 열매 같은 '영적인 영역'과는 별개인 '정신적인 영역' 얘기이다.
그에 비해 세월호 사고 유족 중에서는 정치 선동꾼 말고 저렇게 뜻있는 결단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일반인 유족 말고 단원고 유족 중에서 말이다. 난 딱히 못 들어 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 같은 처참한 대형 참사들을 겪고도 "아직까지도 달라진 게 없네" 운운하면서 한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소를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을 많이 고쳤으며, 그때에 비해서는 시스템이 보이지 않게 많이 개선되고 나아졌고 투명·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비록 지금도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엔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막장 헬이었는지, 법과 FM 대신 미개한 편법과 꼼수, 무식한 "까라면 까" 똥군기와 의지드립이 얼마나 더 만연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다.

옛날에 그 여건에서는 그런 방법론이 불가피했던 점도 있긴 했다. 마치 지금 한국과 일본이 명목상 동맹이라고 해서 과거에 일제에 대항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무의미한 뻘짓을 한 게 아니며.. 지금 마소가 오픈소스 진영과 친해졌다고 해서 과거 빌 게이츠와 발머 시절의 독점 정책이 삽질이 전혀 아니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6· 25 개전 초기에 야만적인 즉결처분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그렇게 독하게 나가면서 기업의 힘을 키우고 나라를 구한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과거의 적(?)과도 열등감 없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고, 과거의 관행과 방법론의 한계를 비판할 여유조차도 생긴 셈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이 복잡한 현대 문명에서 대형 사고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외국 선진국도 먼 옛날엔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지는 급은 아니지만, 멀쩡히 날던 비행기가 공중분해 되거나 출입문이 확 뜯어져서 승객들이 밖으로 튕겨 나가서 죽는 황당한 사고도 난 적이 있다. 그런 사고를 겪고서야 안전 시스템이 보강되었으며 동일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무거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옆길로 너무 많이 샜다. 이제 본론으로 되돌아가 수도 박물관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성수대교 위령비 구경을 마친 뒤, 본인은 차를 몰고 수도 박물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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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된 길다란 간판이 방문객을 반겨 주었다.
주차는 근처에 있는 서울숲 주차장에다 하면 됐다. 요금은 저렴한 편이지만 수요 대비 주차 공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주말에는 차를 가져오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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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도는 온통 흐리게 처리돼 있어서 본인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수도 박물관은 달랑 건물 한 채(저 지도에서 4번 본관)가 전부인 형태가 아니고, 생각보다 넓었다.
옛날에 현역이다가 지금은(대략 1990년대부터) 더 쓰이지 않게 된 낡은 정수 시설들이 다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최신 보안 시설은 옆에 따로 만들어져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옛 서울 역과 지금 서울 역 건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뒤, 수도 박물관 자체는 2008년에 만들어졌다.

인근의 서울숲 내부엔 강변북로를 횡단해서 한강 쪽으로 가는 육교가 하나 뻗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수도 박물관 내부에도 한강으로 가는 육교가 이어져 있다. 즉, 이 부근에 육교가 총 2개 있는 셈이다.
뭐, 그렇게 가도 강변의 자전거 도로나 산책로에 도달하지, 무슨 한강 공원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근의 뚝섬 한강 공원 쪽으로 1km가 넘게 한참을 가야 된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9/09/28 08:33 2019/09/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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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업보다 더 악한 것

내가 나이가 들면서, 특히 20대 나이에서 30대가 되면서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탐욕스러운 신자유주의(자), 자본가, 거대 다국적기업, 재벌에 의해 조종되고 이놈들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 됐다고 생각하던 게 달라진 것이다.

성경적으로도 내가 믿는 전천년주의 세대주의라는 게..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서 예수님 재림을 앞당기기는... 개뿔. 세상은 갈수록 타락하고 배도하고 망가지고 교회조차도 그렇게 다 망가질 거라고 인간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심판으로 끝나 왔다고 말이다.

물론 그건 크게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심상에다가 인간적인 감정이 가미되니.. 나 역시 무슨 막장 시한부 종말론까지는 아니어도 세상관이 필요 이상으로 염세 회의주의적으로 가긴 했다. 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세대주의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부정적인 편견이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생각이 큰 줄기가 아닌 작은 가지 수준에서 조금 바뀌었다.
그 기업가들보다 더 부패했고, 그 기업가 같은 돈과 권력을 얻었으면 비리를 훨씬 더 저질렀을 놈들이 넘쳐난다.
그런 기업들이 생기기 전, 현대와 같은 의· 약학 체계가 등장하기 전, 근대화· 산업화가 이뤄지기 전의 세상이 그렇게 깨끗하고 해피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게 됐다.

탐욕스럽고 부패한 기업보다는.. 기업만 나쁜놈으로 몰아가고 나눔 분배 복지 외치면서 정작 자기는 자본주의 잘 이용해서 떼부자 돼 있고, 그러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기 돈"으로 적선 기부 기증 따위는 한 푼도 한 적 없는 위선자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100배 1000배 그 이상..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사악하고 나쁜놈이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게 됐다. 특히 정치 분야에 있는 놈들 말이다.

비대하고 부패한 기업보다 훨씬 더 나쁜 건 비대하고 부패한 정부라는 것을 절감한다.
기업이야 당연히 자선단체가 아니고 무슨 "믿습니다" 신앙을 실천하는 종교 단체도 아니고, 그저 이윤 추구가 최우선 순위인 조직일 뿐이다. 다 착하기만 한 게 아닐 테고, 다 해먹는데 자기만 안 해먹으면 바보 되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지저분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허나, 우리나라는 현재 정체성과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시키는 놈뿐만 아니라 작은 악과 큰 악을 교란시키는 놈과도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음이 명백하다.

2. 낙수효과

"부자가 훨씬 더 부자가 될 수 있어야 가난하던 사람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
일명 낙수효과인데.. 이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엄연한 팩트이다.

나 역시 금수저나 부자 출신 따위는 전혀 아니며 딱히 부자들 편을 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양심과 지능으로는 저 말을 반박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도 없다. 저 길이 아니면 그냥 다같이 거지 되고 조선시대나 석기시대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물론 인간의 경제라는 건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젠가 게임을 진행하는 것 같은 위험한 면모가 있다. 무작정 시장에다가만 맡기고 가만히 놔두면 치킨 게임 무질서 막장으로 동반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 겉으로 대놓고 사기 치는 것, 법을 지키는 착한놈만 바보 멍청이가 되는 꼴은 세상 정부가 개입해서 강제로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재물만이 다가 아니라고 인간의 위험한 사리사욕에 제동을 거는 건 '종교'가 해야 할 일이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세상 정부나 정치인들이 꼰대질 오지랖 부리면서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낙수효과에 대해 얘기하면 택도 없는 소리라고, 우리나라의 악독한 재벌이 어떻고 대기업이 어떻고 하면서 발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꼭 그런 부류들이 한편으로는
"북괴 정부를 도와주고 지원해 줘야 되고, 군인들부터 배불리 먹여 줘야... 일반 민간인 주민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 ... 이런 말을 태연히 해 댄다.

기업의 낙수효과보다 100배 1000배는 더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이상한 낙수효과 궤변을 늘어놓는 종북 빨갱이 하수인들은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까? 생각 같아서는 진짜 오함마로 뚝배기를 깨 버리고 싶다.

3. 일본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략했을 때는 조총이라고 불리던 머스킷으로 조선군을 쳐발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300년 뒤에는 훨씬 더 발전된 자동화기인 기관총을 들고 와서 동학 농민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이웃 나라가 저렇게 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 국방은 300년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뭔가 바뀌고 발전한 게 있었는가?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맞춰서 일본에서는 시속 200km 이상으로 상시 운행하는 고속철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그것도 '자체 기술'로 개발해서 말이다.
참고로 1960년대 초면 한국에선 서대동부만 찍는 최고속 우등열차 재건호(since 1962)가 서울-부산 소요 시간이 아직 6시간대였다. 이제 막 순간 최대 시속 100을 넘었으며, 1930년대 중반에 일제의 아카츠키 호가 무려 증기 기관차로 달성했던 소요 시간을 디젤 기관차로 이제야 따라잡았네 마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뒤, 도쿄 올림픽 시즌 2를 앞두고 일본에서는 시속 500을 찍는 자기부상열차를 개발· 건설하고 있다(츄오 신칸센).
물론 이건 올림픽에 맞춰서 개통은 절대 못 하고 2030년대는 돼야 볼 수 있을 물건이다. 하지만 저건 계획대로 개통된다면 세계 최초의 도시 간 장거리 초고속 자기부상열차가 될 예정이다.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일본은 뭔가 "발전"을 한다는 저력이 느껴진다.
뭐, 우리나라도 바퀴식 고속철이 시속 400 돌파 시험 주행까지는 성공했지만, 기술적으로 일본의 도움 없이 가능한 것일까..?
이래서 경제와 기술에서 극일을 달성한 현대, 삼성 같은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진심으로 진정한 애국자인 것이다.
맨날 조선 피해자 코스프레 반일 선동이나 하는 골빈 선동꾼 빨갱이들 말고!

4. 미국

(1) 이 반도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민족으로 따진 역사는 4천이니 5천 년이니 할지 모르지만, 국가· 헌정 체제는 20세기 이래로 상전벽해 급으로 널뛰기를 반복하며 격변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 일제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1~6공화국.. 국가 건국은 겨우 70년 남짓이요, 지금과 동일한 헌정 체제가 정립된 지는 인제 30년 남짓 됐다.

그러나 천조국은 1700년대 말 조선 정조 무렵에 신대륙에 한번 건국된 이래로 처음부터 공화정이었으며, 쿠데타 한 번 없었고 그때의 대통령제가 지금까지 정말 곧이곧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안정적이었으면 20세기에 각종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달러의 화폐 개혁 이력 또한 전무했다!

(2) 반도에서는 현충일 때 맨날 이 좁은 땅덩어리를 북괴의 침략으로부터 지킨 호국영령을 기리고, 아니면 기껏해야 일제 독립운동가들만 기린다. 삼면이 바다인데도 육군이 비대하다.
그러나 천조국은 재향군인의 날 때 1,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한국전 참전용사, 베트남전 이라크전 참전용사 분야별로..
자국의 안보는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남의 나라들을 공산주의나 추축국 등 악의 진영으로부터 지킨 영웅들을 기린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섬 나라가 전혀 아닌데도 해군과 해병대가 발달해 있다.

(3) 반도는 1945년 해방 당시에 전국에 등록된 자동차 수가 남북한 지역을 통틀어 딱 8천여 대였다. 경성 시내조차도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고 신호등 따위 없었다. 아무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에 미군정이 자동차 통행 방향을 좌에서 우로 곧장 변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이카 시대는 1980년대는 돼서야 시작됐다.
그러나 천조국은 1920년대에 이미 마이카 시대가 시작됐고 뉴욕엔 고층 마천루들이 즐비했다. 1930년대엔 대공황 때문에 좀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1940년대의 LA의 길거리와 자동차가 이미 반도의 1970년대 서울 중심부와 대등할 지경이었다.

(4) 반도는 1969년 여름에 서울-인천간 몇십 km 남짓한 경인 고속도로를 전구간 개통했다. 이게 반도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그러나 천조국은 192, 30년대에 이미 경부 고속도로보다도 더 긴 freeway들이 대륙 전역에 거미줄처럼 깔렸으니.. 너무 많아서 처음부터 이름 따위 없이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반도에서 고속도로 하나 겨우 만들어 냈던 1969년 여름에, 천조국에서는 아예 인간을 달에다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반도에서 경인 고속도로의 개통 소식은 완전히 묻혀 버렸다.

아 물론.. "김 태희보다 못생긴 주제에.."라든가.. "박 태환보다도 수영 못 하는 주제에..", "폰 노이만보다 머리도 나쁜 주제에.."가 딱히 욕설이나 험담은 아니잖은가? 너무 자괴감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보다 잘난 사람, 잘난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배우려 하기만 해도 시간과 여건이 부족할 판에, 생 찌질하게 시샘 질투하고 험담이나 하고 같은 양아치들하고나 놀면서 정신승리 하고 자빠져서는 세상을 보는 눈높이도 평생 그 따구 레벨에 머물 것이고, 발전이나 개선 따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절 그 여건에서 무려 "독립정신" / "Japan inside out"이랑.. 꼴랑 "백범일지"가 비교가 되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5. 조선

저런 이웃 나라들에 비해 조선은 정말 한글 말고는 대단한 것, 자랑스러운 것, 선한 게 나온 게 도대체 뭐가 있었나 싶다. 특히 말기에는 너무 치욕스럽고 남부끄럽고 민망한 사건들밖에 없어서 보는 내가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 을미사변: 한 나라의 궁궐이 외국 자객들에게 뚫리고 털려서 왕비가 암살됨.. (왕비가 그리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니긴 했지만, 일단 그와 별개로 "we salute the rank, not man" 지위를 생각했을 때..)
  • 아관파천: 군주가 무서워서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피신..

이놈의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오로지 자기 체제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국민을 죽이기 위해 외세의 군병력을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 무덤을 파고 조선이 멸망할 빌미를 주게 됐다.
이 정도면 연산군만 폭군 암군이라고 욕할 처지가 아니다. 자, 여기에 팩트 말고 무슨 일제의 식민사관 왜곡이 담긴 게 있으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지적해 보아라! (나도 김 정호 옥사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알고 있다.)

썩은내 풀풀 나는 나라 사정이 도저히 답이 없어서 전면 개혁을 부르짖었던 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 정부에 의해 어떤 험한 꼴을 당했던가?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김 옥균이 험한 꼴 당하는 걸 보고는 자국에 정나미가 뚝 떨어져 버려서 신념형 친일파로 돌아선 사람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일본도 이걸 계기로 조선은 자신들과 대등한 방식으로 손잡을 수 없는 대상이라고 인식이 바뀌었지 싶다.

이런 조선에 비하면 그나마 국력이 다해서 역성혁명으로 깔끔하게 망한 고려가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조선은 타 왕조들과는 달리, 건국 초기에 이전 고려 왕족에 대한 보복과 학살 말살도 꽤 잔학무도했다. 시작부터가 그랬다.

이것이 내가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개조하려고 애썼던, 시대를 너무 앞서간 두 거인 지도자를 눈물나게 존경하는 큰 이유이다. 그 업적에 비하면 일부 불가피한 피해자 내지.. 겨우 독재자라는 오명 따위는 내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다못해 일제 시대도 말기의 전쟁 관련 수탈과 반인륜 범죄만 아니었으면 흔히 생각하는 것 정도까지의 막장 생지옥은 아니었다. 일제만 욕하기에는 그 이전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 왕실은 합병 후에도 일본 왕실에 복속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며, 국권 회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독립 후에도 정말 아무도 왕실 복원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인들은 자기 손으로 조선 왕실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그런지, 비정상적으로 조선 왕실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이건 올바른 분별력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옛날 이 승만 정권을 생각해 봐라. 자기 손으로 직접 무너뜨린 정권에 대해서는 평가가 얼마나 가혹하고 박한데, 조선 왕조를 그 동일한 잣대로 평가했으면 무슨 결과가 나올까?

며칠 전에 유 관순에 대한 글을 썼다가 바로 다음에 곧장 "21세기에 반일은 정신병이고 종북 빨갱이이다"라고 쓴소리를 하자니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만.. 지금은 그게 관찰과 재현 가능한 과학이고 불편한 진실이다. -_-;;
성경의 같은 챕터에서 "판단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와 "거짓 대언자를 조심하라"가 거의 곧장 동시에 등장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이 거짓 대언자인지 판단을 해야 함..) 둘은 서로 별개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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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언제쯤 나왔더라? 한 10몇 년 됐나?
지금도 변함없는 미래예언이구만.. ㄲㄲㄲㄲㄲ
내가 2, 30년쯤 전 초딩이었을 때 일본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5, 60세 아재가 다 되도록 갖고 있고, 리얼 정치 외교판에서 그대로 표출하고 써먹는 정신병자 미치광이가 권력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_-
조선 개돼지들에게 최고의 참교육 수단은 가난과 자유박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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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9/09/25 08:33 2019/09/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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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윤 봉춘(1902-1975)이라는 영화 배우 겸 감독을 역임한 원로급 영화인이 있었다. 역시 영화인이었던 나 운규와 고향과 나이가 동일한 완전 단짝 친구였으며, 둘 다 변절 이력이 전무한 항일 성향이었다는 것도 같이 알면 좋다.

다만, 나 운규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7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훨씬 먼저 요절했다. 역시 1937년에 결핵으로 사망한 소설가 이 상과 비슷하다. 그 시절엔 열악한 의료· 영양· 위생 여건으로 인해 결핵이 완전 불치병까지는 아니어도 난치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윤 봉춘은 일제 시대에는 그나마 평범한 소재로 영화를 만들다가 1940년대 초, 어용 영화 단체의 가입을 거절하고 낙향하여 지조를 지켰다. 대동아 전쟁을 미화하는 프로파간다 영화 따위에 기여하느니 차라리 메가폰을 내려놓고 잠적한 것이다. 훌륭하다.
그러다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1940년대 말에는 그는 감격에 벅차서 그런지 독립 운동을 소재로 삼은 영화를 잔뜩 만들었다. <윤 봉길 의사>(1947), <애국자의 아들>(1949) 같은 것 말이다.

특히 그는 완전 유 관순 덕후였던 것 같다. 3·1 운동과 유 관순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도 무려 세 편이나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기와 거의 동갑내기인 유 관순의 삶에 대해 뒤늦게 접하고는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가 만든 유 관순 영화는 1947년작, 1959년작, 1966년작이 있는데.. 유 관순 역을 맡은 주연 배우는 각각 순서대로 고 춘희, 도 금봉, 엄 앵란으로, 그 당시로서는 날고 기는 S급 A급 여배우들이었다.
또한 1966년은 <소령 강 재구> 영화가 나왔던 해이며, 엄 앵란은 그 영화에서 강 재구 역을 맡았던 미남 배우 신 성일과 1964년에 이미 결혼하기도 했다. 이 역시 당대 톱스타끼리의 결혼이기 때문에 큰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이렇게 동일 감독이 만든 유 관순 영화가 세 편이나 있지만, 그 시절 여건상 필름이 소실되거나 딴 용도로 재사용되지 않아서 영상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건 1959년작이 유일하다.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안 가겠지만, 옛날엔 물자가 워낙 귀하고 부족했던지라 TV 방송이나 영화를 방송사나 국가에서 책임지고 영구 보존하는 인프라가 갖춰지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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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작 영화에서 유 관순이 재판을 받는 장면)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유 관순은 무슨 안 중근· 윤 봉길처럼 혼자 개인플레이로 총 쏘거나 폭탄을 던져서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국제적으로 찬사를 받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녀는 민족 대표 33인도 아니고, 만세 시위 자체를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한 것도 아니었다. 외국인이 설립한 인서울 학교의 재학생이었고, 서울에 있는 형무소(서대문)에 갇혔을 뿐이다. 일제 시대 당대에는 무슨 3· 1 운동의 원탑 아이콘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냥 지방의 만세 시위 열성 참가자 정도의 인지도밖에 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수원의 유 관순이라 일컬어지는 이 선경 같은 여러 여학생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랬는데 나중에, 최하 1940년대 이후에 "자랑스러운 이화학당 동문", "항일· 반일의 아이콘", "위대한 크리스천 여성 독립 운동가" 컨셉의 수요가 맞아떨어지면서, 전 영택 목사 같은 분 등에 의해 뒤늦게 재조명되고 전국적으로 부각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유 관순의 유해가 소실되어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녀가 일제 당대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치 전국구 수준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제가 기를 쓰고 여론을 통제해서 유 관순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걸 막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수는 있다. 그건 별개로 생각할 문제다.

유 관순은 무슨 안 중근처럼 외국 타지에서 처형 당하고 아무렇게나 매장되는 바람에 유해가 소실된 게 아니다. 멀쩡히 접근성 좋은 인서울의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묘지 부지가 개발을 위해 불도저로 밀리는 과정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유해가 사라진 것이다.

3·1 운동 때 그녀의 집이 불타고 가족이 몽땅 죽거나 투옥되거나 고아 신세로 흩어지는(동생들) 풍비박산이 난 건 사실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녀가 정말 유명한 인물이라면 묘지가 어떻게든 관리는 되었을 것이며, 아무리 일제 치하라 해도 그런 사람이 딴 데로 이장되지도 못하고 유해가 허무하게 증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흉악범(?) 윤 봉길조차도 유해가 수습되었는데 유 관순이 왜 저리 되었겠는가? 내 짐작엔 공동묘지를 밀어버린 불도저 기사조차도 그가 조선인이었건 일본인이었건, 여기에 누구 묘지가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밀었지 싶다.

뭐, 본인은 유 관순이 어떤 의도로 부각되고 칭송되었건 그녀의 행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왜경에게 두들겨 맞고 손톱이 뽑히면서도 "주동자는 나다", "애국하는 것도 죄냐, 나는 왜놈들에게 재판받아야 할 아무 명분도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건 팩트이며, 그건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말이다. 본인이 태어나서 '주동자', '주모자'라는 단어를 최초로 접한 곳이 유 관순 전기였다.

단지, 그녀가 뒤늦게 유명해지고 교과서에 실리고 전기가 보급되고 영화가 나왔을 무렵엔 그녀의 유해가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뒤였다. 이것이 일면 안타까운 점이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면..
유 관순 영화는 윤 봉춘 감독이 만든 것 세 편, 그리고 김 기덕 감독의 1974년작 컬러 영화가 하나 더 있다. 여기서는 유 관순 역이 문 지현이라는 배우인데, 지금 성우로 알려진 그 사람은 아닌 다른 사람이다. 이 영화 이후로 배우 커리어를 계속 이어 나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거 이후로 유 관순 영화가 더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난 못 들어 봤다. 그러다가 2019년이 되니 3·1 운동 100주년이랍시고 관련 영화가 <항거>, 그리고 <1919 유 관순>이라고 두 편이 더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서양에서 타이타닉 호 침몰을 소재로 한 영화만 해도 사건 직후와 20세기 중반, 그리고 1997년의 제임스 카메론 작까지 여러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해저에서 실제 잔해를 발견하기 전, 1986년 이전에 만들어진 옛날 흑백 영화에서는 배가 일체형으로 서서히 침몰한다. 그러나 후대의 영화는 최신 고증을 반영하여 배가 두 조각으로 쪼개진다.

그것처럼 유 관순 영화도 1980년대 이전의 옛날 영화는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유 관순에 대해 1902년이 아닌 1904년생, 징역 5년이 아닌 7년형처럼.. 현재는 기록의 발견으로 인해 업데이트되고 폐기된 옛날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 기록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녀에 대해서 그냥 동료 수감자의 부정확한 기억과 구전 증언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 관순의 최후는 만년 떡밥이었다. 겨우 고3 남짓한 나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가 인간 백정 악마 일본 헌병 개xx에게 어떤 참혹한 고문과 능욕을 당하고 죽었을지 묘사하는 건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과 재량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가히 호러물 수준의 각색이 들어가곤 했다. 어린애들이 보면 트라우마 생길 정도로..;; 유튜브에서 1959년 영화와 1974년 영화를 직접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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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순이 지하실로 끌려가고, 동료 죄수들은 그녀의 최후를 직감한 듯 다들 손을 뻗으며 울부짖는다. 지하실에서 간수들은 무슨 고문을 하려는지 그녀를 물이 든 통에다가 집어넣고 뚜껑을 닫으려 하며, 관순은 이를 맹렬히 저항하면서 뿌리친다. (왜 유 관순을 미리 결박하지 않고 저리도 힘들게 애쓰며 물통에다 집어넣는지는.. 묻지 말자.;; ㄲㄲㄲㄲ)
관순은 지하실을 뛰쳐나가 탈출하려 하지만 그때 간수가 그녀의 등에다 칼침을 놔 버린다..;;; 한눈에 봐도 현실성은 별로 없다만.. 벤허와 비슷한 1959년작 영화라는 걸 감안하자..

다음으로 1974년작 영화는 유튜브에 올라와 있긴 하지만 텔레비전을 카메라로 또 찍은 것이어서 화질이 대단히 좋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는 따로 소개하지 않겠다.
화면이 어둡고 불분명하지만.. 거기서는 유 관순이 열받은 간수들에 의해 바닥에 팽개쳐졌다가 상체가 일본도로 쓱싹.. 즉, 칼에 찔리는 게(stab) 아니라 베였다(slash). 어휴...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사인은 그냥 간수들의 구타로 인한 '장살'이라고 기재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바락바락 악이 들어간 만세질(?)이 되풀이되니 간수들에게 얼마나 밉보였으면 총알에 맞거나 칼에 찔린 것도 아니고 둔기로 맞아 죽었나 싶다. 이것도 충분히 비참하게 죽은 것이지만 그래도 다른 생체 실험(!!)이나 사지절단 능지처참 급의 변태적인 짓을 당해 죽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생체 실험은 일제 말기에 윤 동주 같은 사람에게나 해당된다.

다만, 옛날에 독립 기념관에서 봤던 기억으로는 3· 1 운동 시기에 왜경에게 고문 당해서 코나 귀가 잘린 사람, 잡힌 독립군 중에 팔이 잘린 사람>_<도 있긴 했다. 기회가 된다면 일제의 잔인한 만행이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자행됐는지에 대해 기록· 증언의 진위 여부와 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 볼 것이다.

끝으로... 유 관순이 방광 파열로 죽었다느니 하는 말부터 시작해, 심지어 그녀의 시신이 토막이 나 있었다는 얘기는 내가 알기로 객관적인 근거· 출처가 없다. 후대의 국내 위인전이나 영화에서 처음으로 던져진 떡밥 괴담 주작에 가깝다.
형무소의 동료 수감자가 그녀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이화학당 담임 선생? 교장? 유 관순의 친지, 가족? 어디에도 그런 증언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그들은 만에 하나 진짜로 토막 시신을 확인했더라도 고인의 명예를 생각해서 그런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더 현실적이다.

하다못해 반대편 왜놈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죄수가 죽어 버렸으면 그냥 시신을 거적에다 싸서 쓰레기 버리듯이 빨랑 내보내야 하지 않았겠는가? 쟤들이 증거를 인멸해서 경찰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무슨 싸이코패스 살인마도 아닌데, 멀쩡한 시신을 굳이 토막 내고 각을 뜰 틈도 있을 정도로 그들의 근무 여건이 여유롭고 한가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차라리, 아예 죄수들 다 보는 앞에서 "앞으로 또 만세질 하면서 소란 피우는 새x는 이렇게 된다!" 시범타로 공개 즉결처분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때 서대문 형무소는 유 관순만 갇혀 있던 광활한 공간이 아니며, 상황이 그와 정반대였다. 어느 영화에서나 묘사돼 있듯, 수용 가능 공간과 시설 대비 죄수들이 너무 많아서 바글바글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굳이 시신을 훼손해서 피와 내장이 철철 쏟아져 나오면 걔네들 입장에서는 청소 같은 뒤치다꺼리만 더 늘어날 것이다. (형무소 지하실 고문실은 일본인 헌병과 간수 자기네들도 근무하는 공간이다!)

이상이다.
이런 얘기를 지난번에 항거 영화 감상평과 함께 늘어놨어야 했는데.. 그때는 더 옛날 영화는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최 은희 선생 같은 다른 사람 얘기를 같이 늘어놓았다.
유 관순은.. 군인으로 치면 신라 화랑 중의 관창처럼.. 어린 나이에 너무 용맹스럽고 애국심 투철하고 존경스럽긴 하지만 좀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더 큰 일을 하지 못하고 너무 짧고 굵게 가 버린 것 같다는 아쉬운 느낌도 든다.

참고로, 옛날 유 관순 영화들에서는 일본인 배역조차(헌병, 간수, 판사, 검사..) 다 한국어만 쓴다. 최근 영화인 "항거"에서처럼 일본인은 일본어로 말하고 조선인 죄수 중의 일부가 일본어를 알아듣는 식의 이야기 전개는 없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모든 배역을 한국인 배우가 연기했기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저 때는 현실성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어 따위를 동원하는 게 국민 정서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만 해도 SKY 중에 일어일문학과가 있는 학교는 K밖에 없으며, 그것도 한참 후대에 생긴 것이니 말이다. 그 이유는.. 본인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22 08:35 2019/09/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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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평균적으로 볼 때(장 미란이나 은하캠핑 님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빼고..) 사람은 남자가 여자보다 체구나 체력이 더 뛰어나고 더 활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작품에서도 남자 영웅이 나라를 구하고 미녀도 구출하고 쟁취(...)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전근대 판타지물이라면 기사도에 충실한 주인공이 임금님의 마음에 들어서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1900년대 근대물이라면.. 예쁜 아가씨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필 철길 위에 꽁꽁 묶여 있으며,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여친을 구해 낸다. prince Charming이라든가, damsel in distress라고 이런 오랜 패턴 내지 클리셰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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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20세기 후반에 비디오 게임이란 게 처음 등장했을 때도 소재와 스토리는 이런 전통적인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페르시아의 왕자와 그 전작인 가라테카, 그리고 일본 게임 중에서도 당장 떠오르는 건 캐슬(+ 캐슬 엑설런트), 더블 드래곤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디오 게임은 만드는 사람이 대부분 컴공돌이 남자들이지만, 유저도 대체로 남자이다. 그래서 여성 유저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캐주얼 게임이 나왔으며, 이런 컨셉 하에서 이미 1980년대에 버블보블(일명 보글보글) 같은 명작도 탄생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여 남성 유저를 더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도 그저 수동적인 피해자에 일방적인 구출 대상이 아니라, 주인공이나 심지어 악역으로 넣은 게임이 나오게 되었다.
레이싱걸이니 치어걸이니 하는 게 있는 이유도 다 그 장르는(자동차, 스포츠..) 남성 팬이 많기 때문이지 않은가? 컴터 게임도 그런 게 있어야 장사가 더 잘 된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여자 주인공이 차지하는 위상은 다음과 같이 "여러 팀원 중 하나인가" 아니면 "단독인가"로 크게 나눌 수 있겠다.

1. 여러 주인공들 중 하나/일부가 여자

온라인 FPS라든가 대전 액션 게임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는 똑같은 Ctrl+C, V 잡몹 개떼라는 개념이 없이, 모든 캐릭터들이 고유한 외형과 특성을 갖고 일대일로만 싸운다. 그러니 캐릭터가 10여 종 이상으로 매우 많으며 그 중에 여성도 존재한다. 버추어 파이터에서 사라와 파이, 철권에서 아스카와 리리, 모탈 컴뱃에서 소냐 등.. 내가 기억하는 건 이 정도다.

물론 여캐는 재미를 위해 밸런스에 비현실적인 보정이 가해진 경우가 태반인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는 근육 하나 안 보이는 가녀린 쭉쭉빵빵 아가씨가 근육질 아재를 그렇게 패대기치는 게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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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액션· 아케이드나 슈팅 장르는 주인공이 대전 액션 정도로 많지는 않다. 주인공 3명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팀을 이루고 있고, 그 중 한 명이 홍일점인 경우가 많다. 그 날이 오면 3이라든가 엘리베이터 액션 리턴즈, 황금도끼가 그 예이다. 이런 데서 여캐는 일반적인 체력이나 공격력은 남캐보다 약하고, 그 대신 마법 내지 스킬 쪽이 더 뛰어나게 설정되는 편이다.

황금도끼의 경우, 전반적으로 로버드 하워드라는 미국의 소설가가 쓴 '코난 사가'(Conan Saga) 같은 중세 판타지물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으며, 여캐인 '타이리스 플레어'는 레드 소냐에서 모티브를 딴 듯하다. 저 소설과 게임은 비키니를 수영할 때가 아니라 땅에서 백병전을 벌일 때=_=;; 착용하는 헐벗은 아마존 여전사의 스테레오타입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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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sundae의 발음이 '순대'가 아니듯, 저 sonja의 발음은 '손자'가 아님.. -_-)

Streets of Rage (Bare Knuckle)도 황금도끼와 동일 개발사에서 나온 동일 장르의 액션인데.. 시간 배경만 현대이다. 여기에는 블레이즈 필딩(Blaze Fielding)이라는 여캐가 유명하다. 시리즈마다 복장에 변화가 있긴 하지만 빨간 탱크탑과 미니스커트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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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혼성 주인공인 게임 중에서 특별히 1:1 듀엣 파트너 형태인 것은 국산 게임 중엔 "85되었수다/삭제되었수다"(할 박사와 '산소'), 그리고 리크니스가 떠오른다.
일본에서 나온 좀비물 중에서 House of the dead 시리즈도 전통적으로 남캐와 여캐 이렇게 둘이서 진행하는 형태이다.

2. 여자 단독

여자 단독 주인공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게임으로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은.. 무려 1983년의 8비트 시절 작품인 Tropical Angel이다. 본인이 느끼기에 꽤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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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이 장애물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돌진을 하는 '남극탐험'과 비슷한 부류이다. 이 게임에서는 좌우로 각종 장애물을 잘 피해서 수상 스키를 탄 비키니 처자를 잘 조종하는 게 목표이다. 이 게임은 쏘고 부수고 죽이는 건 없지만, 상위 레벨에서는 심지어 상어도 가끔 튀어나오기 때문에 그건 잘 피해야 된다.

여느 장애물에 부딪혀서 미스가 나면 시간만 까먹고 직전의 깃발 통과 지점에서 게임이 다시 시작된다(물론 미스가 누적되면 나중에 시간 초과로 게임오버됨.. 페르시아 왕자처럼). 하지만 상어와 접촉하면 그냥 게임오버라고 그런다. 직접 해 보지는 않아서 모르겠다.

조종에 여유가 있다 싶으면 보조 버튼을 눌러서 아가씨를 뒤 돌아보면서(= 우리 쪽으로) 더 우아한(?) 포즈를 취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그 동안 점수는 더 많이 올라가지만, 이 상태로 장애물을 즉시 피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더 불안한 상태가 된다.
게임 엔딩은 "축하해용~ 우리의 앤젤 아가씨가 당신에게 축하의 키스를 선사합니당^^ ♥"라는 요지의 메시지 한 줄 나오고 끝이다.

다음으로 '메트로이드'라는 게임의 주인공인 '사무스 아란'은 아케이드 게임에 등장하는 단독 고유 여캐인 데다, 엔젤과 달리 이름까지 분명하게 개성 있게 지어진 초창기의 사례이지 싶다. 신체가 온통 강화복으로 둘러싸여서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윤곽은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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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코 120'은 4살 꼬마로 시작해서 레벨이 올라갈수록 여캐가 성장한다~! 이런 게임은 거의 전무후무가 아닐까 싶다. 6살, 12살, 15살, 18살을 거쳐 엔딩 레벨에서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20세 처녀로 나오고 끝난다. 10대 소녀가 팔짝팔짝 뛰어다니면서 아무렇지 않게 총질을 하는 게 웃기지만.. 어차피 총도 당대의 게임들처럼 총알이 직선 운동을 하는 게 눈에 보이고 반동도 없는 등 현실적인 묘사가 전혀 아니긴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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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 게임들은 모두 198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과연 모에의 동네답다.
저거 말고 서양에서 나온 작품 중에는.. 역시나 Jill of the jungle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분야의 끝판왕은 당연히.. 툼 레이더 시리즈이다.
처음에 기획했던 기획자? 디자이너?는 버추어 파이터에서 여캐인 사라 브라이언트를 즐겨 골라서 했는데,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뻔한 인디아나 존스 아류작 대신 라라 크로프트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주인공에 대한 섹스 어필이 늘어 가는 건 몹시 싫어했으며, 이 때문에 회사를 퇴사까지 했다고 한다. 옛날 시리즈 특유의 너무 과장되게 큰 가슴과 너무 잘록한 허리도 자기 의도가 아니었다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개발사가 Core Design이던 시절의 옛날 얘기이다.

결국 툼 레이더는 2010년대 이후에 설정이 리부트 되어서 아가씨의 모습이 더 동양인에 가까워지고 노출도 덜 하고, 군인· 특수요원보다는 평범한 여대생(?)에 더 가까운 외형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서든어택 2 같은 무식 유치찬란한 성 상품화는 안 하고 있고 툼 레이더 브랜드는 지금도 건재하는 중이다.

이상이다.
옛날에 고전 게임들에 대해서 리뷰를 종종 한 적이 있었는데 여캐에 대해서만 이렇게 집중해서 생각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걸로도 글이 한 편 써지는구나!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09/19 08:33 2019/09/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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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로남불 진영논리는 이제 좀 그만

입으로만 맨날 정의니 진보니 평등이니 외치던 어느 운동권 출신 법학자가 알고 보니 자기는 지력이 못 따라 주는 지 애새끼를 온갖 추악한 불법과 편법과 비리를 동원해서 신분 상승시키려 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학업 성적으로나, 집안 경제력으로나 '장학금'하고는 억만 리 떨어진 애가 장학금을 뭔 빽으로 어찌 그리 많이 받아 쳐먹었는지! 지금 꼬라지를 보니, 차라리 옛날에 최 숭실· 정 유라 정도면 정말 선량하고 기특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결국은 답정너 법무부 장관까지 됐다. 이건 내가 보기엔 지금 대통령이 퇴임 후에 여느 전직 대통령들처럼 잡혀 들어가지 않기 위한 철저한 준비 작업으로 보인다.
게다가 저 양반은 그 와중에도 로스쿨 교수 타이틀까지 휴직 상태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자신을 대체할 교수를 뽑지도 못하게 해 놓고 말이다. 탐욕의 끝이 어디인지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최· 정 모녀한테 그렇게까지 열받을 필요가 없었는 게..
일단 이건 우리나라에서 최고 민감한 주제인 병역하고 전혀 무관한 일이다. 그 아줌마한테 아들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또한, 난리가 났던 분야가 무슨 의전· 로스쿨이나 평범한 문과대, 공대,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따위가 아니다. 애초에 돈 왕창 깨지고 서민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예체능 쪽이다.

흙수저 서민의 신분 상승이라든가 안정된 직장하고는 전혀 무관하고, 학술적인 면모도 별로 없는 분야이다. 논문이나 시험 성적 따위가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대회 입상 실적에만 목숨 걸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 바닥에서 뭐 기여입학 좀 하고 수업 많이 빠지고 학사관리가 파행이었던 게 그게 그렇게까지 문제이고 욕 먹을 일이고 저 사람들만 혼자 심하게 잘못한 짓이었나? 고삐리의 의학 논문 1저자에 비하면 완전 별나라 얘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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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머리가 나쁘지 않고서는 좌좀좌빨이 될 수 없겠다는 걸 실감한다. 거기에다가 양심까지 털나면(혹은 탈나면) 금상첨화다. 비슷한 게 이 외수 버전, 심지어 당사자 자신 버전도 있다. 과거에 자신이 해 놓은 말에 정확하게 걸려드는 게 어찌나 많은지, 이건 뭐 조적조 미래 예언 바이블 수준이다.
기록이 몽땅 다 남고, 쥐나 새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도청장치가 존재하는 요즘 세상에 어째 겁도 없이 저렇게 자승자박하는 말을 함부로 씨부리는 걸까?

그래서 그런지 내 주변의 좌좀들은 저 아줌마에 비해서는 일말의 염치가 있는지, 요즘은 온· 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정치 얘기가 쏙~ 들어갔더라.
3~4년 전 정권 때 무슨무슨 장관이고 총리고 내정자가 저 따구였으면 단언하건대 나라가 뒤집어졌을 텐데!

심은 대로 거둔다는 걸 개돼지 좀비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냥 무조건 묻지 마 진영논리는 출 32:26처럼 신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것이지, 사람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건 여러 모로 추하고 보기 좋지 않다.

내가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는 거지만 우리나라 정치판은 색깔과 이념만으로 변별하고 승부해야 된다. 종교는 오로지 교리만 보고 판단해야 하듯이 말이다. 우리나라 수준에서 뭔 되도 않은 도덕 청렴 지조냐? 도대체 언제까지 내로남불 행태에나 실망할 참이냐?
그건 좌든 우든 피장파장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으니 지금 시국은 확실하게 친일친미냐, 아니면 친중종북이냐 양자택일 구도라고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저건 좌우 같은 취향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영역이라는 것도 덤으로 인지하고 말이다.

2. 경마? 승마?

아무튼.. 본인은 정 유라가 요즘 뉴스를 보면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든 한편으로..
승마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 스포츠인지도 문득 궁금해서 한번 찾아 봤다. 난 저 바닥은 진짜 하나도 1도 경험하거나 관람한 게 없고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무슨 육상이나 사이클 경기처럼 말 탄 기수 여러 명이 평지를 죽어라고 달리고 경쟁자를 추월해서 빨리 골인하는 순서대로 금은동메달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그건 경마이지, 승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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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승마는 혼자서 장애물 넘고 말을 갖고 묘기를 하는 기교로 승부를 낸다. 마치 군대 사격과 스포츠 사격만큼이나 서로 지향점이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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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수의 복장이 어째 옛날 마술사 정장과 닮아서 馬術과 魔術을 모두 의도한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성경에서 약 3:3이 한국어 기준으로는 혀(=언어 말)와 동물 말이 모두 떠올라서 공감각적 심상이 형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선거 관련 용어인 출마도 한자는 馬이며, 승마에 빗대어서 의미가 확장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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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에는 전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군견도 아니고 군마를 운용하는 군마대라는 부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소속되어 말을 조련할 줄 아는 특수 전공 출신의 병사가 생도들에게 승마를 맛보기 수준으로 가르치는 조교 역할을 한댄다.
이건 프로그래머 양성 커리큘럼에다 비유하자면, 엄청 옛날 CPU의 어셈블리어 코딩을 맛보기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겠다. 군인에게 승마는 총검술 같은 완전 레거시 스킬일 테니 말이다.

한편.. 말 탄 선수들이 헬멧을 쓰는 건.. 무슨 오토바이 같은 통상적인 충돌 사고가 아니라,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에 대비한 것이다.
큰 말의 등은 일반인이 선뜻 올라타기 어려울 정도로 꽤 높다. 그런데 무슨 말이 몸뚱이가 앞뒤로 두 동강(...;;) 나서 사람이 아래로 푹 꺼질 리는 없으니, 말에서 떨어지게 되면 절대로 다리부터 먼저 곱게 착지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낙마 사고는 이륜차 교통사고와는 다른 방향으로 매우 위험하다. 뻑하면 팔· 다리 부러지는 중상을 입거나 심지어 허리나 목이 부러지고 사망까지 할 수 있다. 이건 뭐 무작정 사람 몸을 말에다 결박만 해 놓는다고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6년 12월 7일, 도하 아시안게임 때 김 형칠 선수가 경기 중에 낙마 사고로 목숨을 잃는 참극을 당한 바 있다.
평범하게 말에서 내동댕이쳐진 충격만으로 죽은 추락사가 아니었다. 말이 앞다리가 장애물에 걸리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졌으며, 사람과 말의 상하 위치가 완전히 뒤집혔다. 그래서 그는 500kg에 달하는 말의 몸뚱이에 깔려 현장에서 즉사했다.;;

하필 경부선 전구간 전철화가 완료되기 하루 전날 저런 일이 있었다니..
마치 이 한열 열사가 새마을호 전후동력 디젤 동차가 운행되기 바로 전날 죽은 것과 비슷한 심상이 느껴졌다.

3. 복권

말 하니까 경마에 이어 복권 쪽으로도 의식이 흐르는구나. ㄲㄲㄲㄲ
세상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들 중에는 지불한 액수만큼 성능이 무조건 발휘되는(그렇지 않다면 불량품이므로 교환· 환불 대상) 일반적인 물건만 있는 게 아니다. 아예 대놓고 모 아니면 도이고 복불복 형태여서 운에 맡겨야 하며, '꽝'이 있을 수 있는 물건도 있다. 요즘은 온라인 게임의 유료 아이템조차 랜덤박스라고 저런 형태로 나오는 게 있다고 들었다.

주식이나 투자용 금융 상품은 그 운빨이란 게 소비자에만 있는 게 아니고 경제 전반의 미래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운빨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소비자의 실력과 안목과 감도 필요하다. 또한, 경마만 해도 말과 선수에 대해서 뭘 좀 알아야 승률이 높은 말에게 베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 말고 진짜 운밖에 변수가 없는 것도 있는데, 애들을 상대로는 물건 자체에 당첨 여부가 고정적으로 담겨 있는 각종 뽑기나 과자 봉지 속 사은품 아이템이 있었다. (컴파일 타임??) 긁어 보면 당첨 여부를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복권은 나중에 당첨 번호가 추첨을 통해 따로 정해진다. (런타임??)

우리나라에서는 초창기에 나라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국가적으로 목돈이 필요할 때 무슨 국채도 아니고 복권을 비정기적으로 발행한 바 있다. 예를 들어 1948년 런던 올림픽 참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재민 복구를 위해, 6· 25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사람들은 당첨 대박을 꿈꾸면서 푼돈을 내서 복권을 사지만, 실제로는 이걸로 벌어들인 돈의 절반 이하 매우 소수만 당첨금 지급용으로 사용된다. 나머지 이윤은 당장 저런 일에 쓰였다. 이게 대한민국의 복권 시즌 1이었다.

그 뒤 제2기는 197, 80년대 주택 복권이고, 제3기는 1990년대에 엑스포 복권이니 체육 복권이니 하면서 온갖 은행과 공공기관, 지방 자치 단체에서 발행한 복권들이 난립하던 시기이다. 중앙 정부에서 복권을 발행하던 1기와는 양상이 확 달라진 셈이다. 그러다가 2002년 말, 스포츠토토와 로또가 전국을 평정한 시즌4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당첨금을 지급하는 은행이 국민 은행이다가 농협으로 굉장히 오래 전에 바뀌었더라. 허나, 본인은 이쪽으로 관심이 없다 보니 그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사실, 복권 몇 장 내지 몇만 원 판돈으로 카지노 몇 판 수준의 가벼운 노름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돈을 억울하게(?) 잃은 게 아니다. 약간의 즐거운 희망고문을 체험한 비용, 그리고 유흥을 즐기고 자리를 차지하고 서빙을 받은 게임비를 지불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내가 물리적으로 내는 돈과 저렇게 얻는 효과를 비교했을 때 가성비가 안 맞다면 안 하면 되고, 예산을 다 소모했다면 미련 없이 일어나야 된다.

저걸로 작정하고 생업을 대체하겠다? 대박 내겠다? 잃었던 돈을 되찾겠다? 세상에 그것만치 멍청한 망상이 없으니 단념해야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신병 수준으로 그런 멍청한 망상에 빠진 중독자가 적지 않은 덕분에 저런 업계가 잘 돌아가고 있다. ㅠ.ㅠ 도박의 최종 승자는 도박장 업주일 뿐이거늘 말이다. 복권도 마찬가지로, 돈을 제일 많이 버는 최종 승자는 그냥 복권 발행사일 뿐이다.

다만, 저거랑 별개로.. 복권의 가격에 세금도 이미 포함돼 있었는데 당첨금에다가 세금을 굉장히 많이 또 떼어 가는 건 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든다. 나야 뭐 복권 고액 당첨자가 된 적이 없었고 그럴 일도 없으니 어찌 됐건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원론적으로만 생각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위층들의 편법 비리 소식을 접하다 보면.. 평범하게 일하고 돈 버는 것에 대해 회의감과 허탈감,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래 갖고는 집 장만이고 자녀 양육이고 노후고 미래가 안 보이니 자꾸 "인생한방" 쪽으로 관심이 늘어 간다. 바람직한 사회 분위기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다만, 이것도 마냥 서민들만의 탓은 아니고 인간의 욕심과 결부지어서 총체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복잡한 문제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6 08:36 2019/09/1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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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계속해서 봉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계절이 바뀌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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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엔 계속해서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고 보니 옛날 도로는 가드레일 말고 저렇게 노란 경계석이 쓰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느 샌가 보기 힘든 풍경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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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마을 어귀를 흐르는 요런 맑은 개울을 발견해서 차를 세우고 물놀이를 했다.
이럴 때 햇볕이 쨍쨍하고 날씨가 더 더웠으면 물놀이의 효과가 더 커졌겠지만, 폭염과 가뭄 때문에 개울이 말라 버리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물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낫다. 비 덕분에 여기 모든 개천· 개울들은 물이 콸콸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참 보기 좋았다.
그렇잖아도 어제 땀을 많이 흘려서 몸이 온통 끈적거리는 상태였는데 싹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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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월산 자생화 공원이라는 곳을 발견해서 들렀다가 갔다. 주변에 나밖에 없는 오지에서 자연을 즐긴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지구가 금성 화성과 달리 초록별이라는 사실에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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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서 봉화로 가려면 역시 산을 하나 넘어야 하더라. 길은 어느 샌가 꼬불꼬불한 산길로 바뀌었다.
터널 안에 들어갈 때는 일반적으로는 헤드라이트를 켜는 게 맞는데, 현실에서는 '끄시오'라고 안내된 표지판도 많이 보인다. 화장실에서 휴지는 변기에 "넣으시오/넣지 마시오"만큼이나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사항인 것 같다.

저 영양 터널을 지난 다음에는 행정구역이 봉화로 바뀌고, 봉화 터널과 어느 공군 부대가 뒤이어 등장했다. 그리고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됐다.

6. 봉화군 탐험기

본인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봉화에서 영동선 양원 역을 답사하고 봉화 시가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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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행 합쳐도 차가 몇 분에 한 대 다닐까말까인 이 꼬불꼬불 산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시로 정차하고 사진 찍고 시동 끄고 사색에 잠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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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하나 넘어서 내려오니 또 강이 펼쳐졌다. 이 강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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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동선 철길 위를 지나갔다. 참 공교롭게도 본인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타이밍에 맞춰서 여객도 아니고 화물 열차가 하나 지나갔다. 얼마나 무거운 짐을 끄는지, 전기 기관차 중련에다가 보조 중형 디젤 기관차까지 편성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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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양원 역이 자리잡고 있다는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마을 앞에도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양원 역은 행정구역상 봉화이지만 동쪽 맨 끝이기 때문에 거의 울진 근처이며, 가는 길에 울진의 서쪽 끝을 경유하기도 했다. 봉화 시가지와는 수십 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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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을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양원 역으로 가려면 거기서도 산을 하나 타넘어야 했다~!
엔진 회전수 4000rpm을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밟을 때도 찍고, 여기서 2단 엔진 브레이크로도 찍었다. 1단 말고 2단으로 말이다.
그렇게 산을 넘은 뒤에도 저 길로 들어가야 했는데.. 차가 지나갈 수는 있지만 거기서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딱히 차를 세울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차는 이 부근에서 세우고 여기서부터 몇백 m 남짓은 걸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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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니 이 강은 낙동강 상류라고 한다. 물이 콸콸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저 교각은 무슨 옛날에 있었던 다리의 흔적 같다.
양원 역이 이 정도로 답 없는 오지에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저기를 건너간 다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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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얘를 실물로 보게 되었다.
예전에 태백선· 함백선 부근에서 조동 역과 함백 역을 보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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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 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 주민들이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현기증이 나니 제발 열차 좀 정차시켜 달라고 아우성 치고 정부에 청원 넣고, 아무 국고 지원 없이 스스로 돈을 모아서 역 건물을 지어서 승인 받은 역이다. 진정한 의미의 민자역사인 셈이다. 단지,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라 지역 주민 복지를 위한 민자역사인 것이고.. 그게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전날 옥천에서 정 지용 시인 관련 안내문에서도 1988이라는 숫자를 봤는데, 양원 역의 개업 시기도 1988년 4월이라니 우연 치고는 절묘하다. (지용회: 1988년 3월)

얼마나 한이 서렸으면 양원 역에 첫 열차가 정차하던 날 사람도 감격하고 산과 강도 감격했댄다.
옛날엔 열차가 여기 마을을 통과할 때 짐보따리부터 미리 던져 놓은 뒤 더 먼 승부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돌아와서 그 짐을 챙겼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옛날에는 열차에 화장실이 비산식이었고(오물이 선로로 그대로...; ), 주행 중일 때 차량의 출입문이나 창문을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근성 있는 사람이라면 짐만 미리 던져 놓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훌쩍 뛰어내릴 법도 해 보이는데.. 그러기에는 아무리 젊고 민첩한 사람이라도 좀 위험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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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없이 컨테이너 가건물 같은 규모이지만 컨테이너가 아니다. 시멘트를 얹어서 정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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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서체 안내판까지도 주민들이 직접 만든 거라고 한다.
현재는 여기가 유명세를 타면서 정규 여객열차뿐만 아니라 V-train(백두대간 협곡)과 O-train(중부내륙 순환)이라는 관광 열차도 정차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역 건물과 안내판 말고 저 승강장은 코레일에서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
순환선이기 때문에 O이고, 그리고 계곡 모양을 형상화해서 V라니.. 코레일 수뇌부에서 머리 좀 쓴 것 같다. 이름을 참 기발하게 지었다.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마침 저기에 열차가 정차하는 것을 봤다.
이번 여행 동안 경부선과 영동선을 지나는 열차를 종종 목격했는데, 모두 전기 기관차 기반이었다. 디젤 기관차는 전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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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봉화 시가지로 가는 길에 또 절경을 발견하여 풍경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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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가 돼서야 봉화 시가지에 도착했다. 이 강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보급을 받는 것으로 2일간의 여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는 3년 주기로 남해안, 서해안, 동해안을 한 번씩 가는 것으로 어렴풋이 계획을 잡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3 08:33 2019/09/1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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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부 고속도로 최후 유일의 4차로 구간과 추풍령

이제 본인은 구도로가 아니라 실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옥천에서 추풍령까지 이동했다. 옥천 휴게소 이후부터 영동1 터널까지, 2019년 현재 경부 고속도로 416.1km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4차로로 남아 있는 마지막 구간을 쭉 달려 봤다. 영천-경주-울산 구간도 오랫동안 4차로였지만, 거기는 2010년대 내내 지겹게 공사를 한 끝에 바로 작년 말에야 전구간이 6차로로 간신히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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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옥천 근처에는 이렇게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갓길이 없어지고 속도 제한이 80으로 내려간 위험 구간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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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딱히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특히 금강 휴게소 인근의 금강을 건너는 구간은 높은 교량, 그것도 2000년대가 돼서야 완공된 교량이기 때문에 거기가 또 가까운 미래에 확장될 것 같지는 않다. 천하의 경부 고속도로에도 이렇게 차로가 적고 좁은 구간이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차에 동승자가 없었던 관계로, 이 사진들은 다 본인이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던 중에 잠시 핸들을 놓고 좀 위태롭게 찍은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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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경부선 추풍령 역의 승강장이다. 추풍령 IC와 철도역은 역시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운 편이다.
추풍령 역은 경부선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역이다. 물론 경부선 구간이 높아 봤자 220m대에서 노는데, 진짜 산악 철도인 태백선· 영동선 역들의 고도(7~800m대!)하고는 비교하는 게 실례이지만, 그래도 철도는 오르막에 매우 취약하니 저 정도만으로도 열차가 오르기 버겁긴 하다.

과거 초창기에 경부선은 김천 이전의 구미에서도 지금의 국도 4호선처럼 금오산 고개를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길을 만들었더니 20세기 초의 증기 기관차가 오르막을 도저히 끝까지 오르질 못하고 중간에 픽픽 퍼졌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스위치백 같은 걸 만들 여건은 못 됐으니 그 구간에서만 열차의 뒤에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형태로 매우 불편한 운행을 해야 했는데..

결국 1910년대에 구미 시내를 삥 둘러서 평지를 우회하는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다. 그 덕분에 새로 생긴 구간에서 구미 역이 1916년에 개업했으며, 구미 출신인 원조가카는 집을 떠나 장거리를 이동할 때 그 구미 역을 잘 이용했을 것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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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 휴게소는 경부 고속도로 전구간의 거의 정중앙 지점에 위치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금강과는 달리 상· 하행이 분리돼 있지만, 금강처럼 자체 나들목(추풍령 IC)을 갖췄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얘도 1971년 1월 1일부로 개업했으니 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당시에는 길을 닦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지경인데 휴게소까지 같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1970년 하반기에 경부 고속도로에는 휴게소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ㄷㄷㄷ 그러다가 금강 휴게소가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1주년에 맞춰 같은 해 7월에 뒤이어 개업했다.

추풍령 휴게소 부근은 강을 끼고 있는 금장 휴게소보다 고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4차로가 아닌 6차로이다. 구도로는 선형이 꼬불꼬불 굽었고 매우 불량했으며, 여기 일대에서 실제로 큰 사고가 나기도 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개통 이래 최초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는 1970년 8월 21일 발생한 고속버스 추락 사고(25명 사망, 22명 부상)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7월 14일에도 수학여행 전세 버스의 연쇄 추돌 사고(18명 사망, 70여 명 부상)가 나서 그야말로 대형 사고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둘 다 사고 지점이 동일하게 추풍령 휴게소 부근의 고갯길이었다!

문제의 구간은 2006년 말에 대대적인 선형 개량과 6차로 확장이 완료됐다. 그에 비해 옥천-영동 구간은 2003년에 선형 개량만 됐고 여전히 4차로이다. 옥천-영동 쪽은 구도로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반면에 추풍령 쪽의 구도로는 완전히 흑역사가 된 것 같다. 일부 구간은 기존 국도 4호선의 확장 영역으로 흡수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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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의 근처의 언덕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있다. 순직자 위령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높으며, 주변에 넓은 풀밭도 꾸며져 있다.
상행 방면 휴게소와 더 가까이 있긴 하지만, 양 휴게소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행 방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도 도보로 준공 기념탑에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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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풀밭도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에 풍경 사진을 남겨 봤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 --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 정희"
"이 고속도로는 ... 우리 자체 재원과 기술과 역량만으로 최단 시간에 이뤄낸 우리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 1970년 7월 7일 건설부 장관 이 한림"


기념탑 아래 벽면에는 뭐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치하하는 감격의 덕담을 한 마디씩 남겼다.

참고로 이 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은 아까 봤던 옥천 터널을 빨리 뚫어 내라고, 개통식 날짜를 못 맞추면 너희들 국물도 없을 거라고 건설사들을 무진장 갈구고 쪼아댔던 그 당사자이기도 했다. =_=;;;;
딱 같은 시기에 김 현옥 서울 시장도 군인 출신의 정말 못 말리는 지독한 "까라면 까" 불도저였으니.. 군사 정권 시절에 나라 분위기가 그렇게 군대식으로 극도로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뭔가 역사적인 사건에다 기념을 한 문구는 대부분 이 은상 시인이 작성한 것 같던데.. 아까 순직자 위령비뿐만 아니라 준공 기념탑에도 글이 있었던가..??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첫 개통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라고 불렸다! 그래서 준공 기념탑과 순직자 위령탑에도 저 긴 이름이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옛날에도 '경부'라는 이름이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비격식 약칭이었다. 그런데 그게 공식 명칭으로 바뀐 것은 1981년 11월 7일, 고속국도 노선지정령이 개정되고부터이다.

아이고 글이 왕창 길어져 버렸는데..
여기까지가 옥천과 추풍령, 경부 고속도로와 관련된 테마 답사였다. 이제 본인은 제2부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5. 영양군에서 외박

(1) 김천에서 영양으로 갈 때는 내비의 안내대로 중부내륙(45)과 당진-영덕(30)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후자가 워낙 한산했던 덕분에 차량 성능 테스트를 빙자한 폭주 시험/실험을 거기서 시행할 수 있었다.
전방에 시야가 탁 트였고 다른 차도 없는 절호의 기회가 종종 찾아왔다. "복동아 지금이야!"-_- 같은 소리가 뇌리에 전해지는 듯할 때 필사적으로 확 밟았다. 주행 당시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악셀 페달이 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풀로 꽉 밟았는데도 이상하게 차가 더 가속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가 더 올라가지 않았다. 당연히 레드 존 상태 따위가 전혀 아닌데도... 더 오래 밟고 있으면 가속이 됐을지 모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번 휴가 때는 예전에 수립했던 185km/h를 간신히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 성능이 좋은 차였다면 그 정도로 밟았으면 190~200은 분명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2)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를 모두 달려 보니, 표지판에 표기된 각 지역까지의 거리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고속도로야 입체교차 진출입로가 존재하고 자기 영역이 명확하다. "대전 xx km" 이러는 것은 대전 IC로 진출하는 갈림길까지의 거리이다. 그러나 다른 국도· 지방도에서 "영양 xx km" 이러는 것은 해당 지역의 도로 원표까지의 거리인데.. 시청이나 군청 같은 대표 행정기관이 있는 곳과도 비슷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그 지역 내부에 이미 진입했지만 킬로 수가 아직 한참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럼 국도 중에도 입체교차 진출입로와 중앙분리대까지 있어서 반쯤 고속도로인 물건이 있는데.. 얘는 그럼 지역의 중심부까지의 거리와 IC까지의 거리가 혼재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지방 국도를 운전할 일이 또 생겼을 때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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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는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시가지는 정말 작았으며 2차선 도로가 전부이고, 교차로에도 황색 신호밖에 없었다.
영업을 하는 카페를 용케 찾아서 거기서 2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목을 축이고 인터넷을 확인하고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며 쉬었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이 보급으로 오늘 밤을 보내고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하니, 전자 기기들은 무조건 꽉 충전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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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를 벗어나면 주변은 온통 이렇게 산과 강과 들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날이 저물었으며 주변은 암흑천지가 됐다. 흐리고 비가 계속해서 내렸지만 습하고 몹시 더웠다.
본인은 국도 31호선을 따라 봉화 방면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적당히 으슥하고 인적이 없고 캠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 탐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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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주변에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오지에서도 iptime 와이파이가 잡히다니 신통한 노릇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0 08:34 2019/09/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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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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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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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난 77인의 명단 자체가 공개된 적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저 위령탑의 뒷면을 보면 순직자의 이름과 거주지(시/구)가 적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난 그건 현장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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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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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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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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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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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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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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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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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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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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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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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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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세상에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폭염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견딜 만했던 것 같다. 작년이 워낙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본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하계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다가 연차를 추가로 써서 말이다. 강원도, 인천에 이어 올해는 중부 지방 내륙 위주로 돌아다녔다.

이번 여행이 예전의 휴가 여행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첫째, 날씨다. 이틀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였기 때문에 이번 여행 사진에는 파란 하늘이 찍힌 게 없다. 하지만 여전히 습하고 더웠기 때문에 땀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냉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둘째, 내륙 위주로 돌아다니느라 이례적으로 바다에는 못 갔다. 바다 물놀이는 그 전 주말에 마침 부산에서 볼일이 생긴 덕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겸사겸사 하고 왔다.

3년 전에 학술대회 참석 때문에 10월이 다 돼서야 부산에 들러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만,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해 있는 실제 피서철에 저길 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던 서해와 달리(작년 을왕리 기준), 여기는 파도와 수심이 급이 달랐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해는 해변으로부터 최하 100미터 이상은 진입 가능하며 안전 부표도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썰물 때는 부표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도 하지만.. 동해는 그런 거 없다. 부표가 해변에 훨씬 더 가까이 있으며 사실은 모래밭 바닥의 경사부터가 서해보다 훨씬 더 급격하다.

바다에서 사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은 매우 좁은데 사람은 많고 바글바글하니.. 해운대에서는 물에 들어간 채 돌아다니기는 어렵고 그냥 제자리에서 파도만 맞다가 나와야 했다. 아무 대비 없이 복부에 맞으면 좀 아플 정도로 파도가 강했으며, 성인 남성인 본인도 신체가 앞으로 떠밀릴 정도였다.
아울러, 해운대는 여느 한적한 시골 해수욕장과는 딴판인 곳인 관계로, 모래밭에서 텐트를 칠 수는 없더라.

뭐, 바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번 여행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먼저 (1) 옥천-추풍령 사이에서 경부 고속도로 심층 탐구 답사를 했으며, 그 다음 (2) "군인 없는 양구"라 불리는 영양과 봉화 일대에서 자연과 철도를 즐겼다.

1. 경부 고속도로 옛 구간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옥천으로 갔다. 중간에 용인-서울 고속도로 등 다른 곳도 들르면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 여행 때는 오로지 경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경부 고속도로는 내년이면 벌써 개통 50주년이 된다. 지금이야 경부 고속도로는 수도권 한정으로 도로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지어져서 거대한 방음벽이 둘러졌으며, 무려 8~10차로로 확장되고도 차들로 몸살을 앓는 지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1970년에 갓 개통했던 당시에는 얘는 전구간이 겨우 4차로일 뿐이고 주변은 온통 그냥 논밭이었다. 비상 활주로 공용(신갈, 천안, 김천 어딘가?)이어서 제대로 된 중앙분리대가 없거나, 아니면 그냥 화단 형태로 만들어졌던 구간도 있었다. 거기에다 다니는 차량도 매우 적으니, 인근 주민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최초로 6차로 이상으로 확장된 구간은 1987년, 회덕-남이 사이이다. 서울-수원 구간은 6차로를 거치지 않고 1991년에 곧장 8차로로 확장되었고, 2010년대가 돼서야 판교 주변 등 일부 구간은 10차로까지 확장됐다. 여기 말고도 곳곳이 도로를 다시 만드는 수준의 선형 개량과 확장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 경부 고속도로 개통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고속도로를 처음 만들 때 열악한 여건 하에서 너무 날림 졸속으로 만든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조가카도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해서 일단 4차로만 만들지만.. 얘는 앞으로 너무 비좁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건축을 허가하지 말고 언제든지 확장 가능하게 대비해 놔라" 이런 예상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마치 옛날에 갑작스러운 북괴 남침 때 정부가 너무 허둥거리고 미숙하게 대처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할배 자신은 "북괴가 곧 반드시 남침할 것"을 알고 미국에다 계속 더 도와 달라고 지원을 요청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이 묵살당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했던 선각자가 북괴의 침략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본인은 그렇게 경부 고속도로의 어제와 오늘은 모습 차이가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면서 운전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구간만 좀 막혔지 그 뒤부터는 쌩쌩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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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동이면에서 옛날 고속도로가 현재의 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는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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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는 한쪽만 재포장 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그냥 주차장 공터처럼 쓰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경의선이 복선이었다가 국토 분단 후에는 단선만 쓰이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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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금강2교'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여행이 더욱 운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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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니 거대한 공터가 나타나 있었다. 캠핑 하기 딱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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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쭉 달렸다. 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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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폐선 같은 감흥을 고속도로 폐구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여기 길바닥 아무데서나 텐트 치고 혼자 고독을 즐기며 밤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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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옥천 터널, '그분'이 임박했다~!
저 촌스러운 한글 글자는 '어설픈 둥근고딕' 계열보다도 더 오래된 197, 80년대 작품임이 틀림없다.
터널의 이름이 처음에는 '당재 터널'이다가 나중에 '옥천 터널'이라고 바뀌었는데...

언제 개명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개명되고 나서 처음 만들어진 표지판이 한 번도 안 바뀌고 저렇게 전해진 것이지 싶다.
밑에 로마자 표기만이 훗날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으로 인해 땜질 형태로 바뀌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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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현역 시절의 옛날 사진으로만 보던 그 터널 입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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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터널은 위의 사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행과 하행이 서로 모양과 길이가 다른 짝짝이로 만들어졌다.
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전-대구 사이의 난공사 구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히 최악의, 마의 구간이었다고 한다.

기술과 노하우라고는 쥐뿔도 없던 열악한 시절에 거기는 지형도 참 지랄맞았던 것 같다. 발파를 한번 했다 하면 지반이 무너지고 토사가 흘러내리고 현장이 황폐화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서만 공식 통계상 낙반 사고 13건에 9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인부들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특히 터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산신령이 노해서 이런 사고가 나는 거라는 낭설이 쫙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느티나무를 베라는 명령을 내렸던 어느 공병 중령 장교조차 그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부들이 너무 겁먹은 나머지 작업 지시를 거부하고 도주할 지경이 됐으며, 일당을 몇 배로 더 올려 준대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간부들이 이들을 달래느라 왕창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어렵고 힘든 건 알겠다만, 개통 날짜는 정해져 있고 그때 무려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실 예정이다. 개통식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연기할 수 없으니 무조건 까라면 까라. Impossible is nothing이야. 못 하면 너네 회사 문 닫을 줄 알아!"라고 시공사인 현대 건설을 무식하게 쪼아 댔다. 어휴.. 그땐 그랬다.

그러니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높으신 관리자들도, 심지어 정 주영 현대 회장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과로를 감내하며 아예 현장에서 죽치고 살아야 했다. 중장비를 조종하던 인부가 도중에 화장실에 갈 여유도 도저히 없어서 참다못해 운전석에 앉은 채로 바지에다 쌌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나마 현대 건설에서 일반 시멘트보다 만들기 어렵고 훨씬 더 비싸지만(단가가 2배 이상) 수십 배가량 더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동원하는 묘책을 내서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영업수지 흑자를 포기하고 말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옥천 터널은 거의 30년 동안 쓰이다가 지난 2003년, 옥천 구간의 선형 개량과 이설로 인해 고속도로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하행 터널만이 2차선 도로로 쓰이고 있고, 상행 터널은 폐쇄되어 김치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와인 저장 창고로 쓰이고 있는 경부선 철도의 옛 성현 터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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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런 멋진 길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의 경부 고속도로 본선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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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 고속도로의 흔적은 옥천의 거의 동쪽 끝에서 구도로가 신도로와 다시 마주치는 듯하면서 끝났다. 현재 고속도로로 치면 '영동1터널'을 동쪽으로 지난 지 얼마 안 된 지점이다.
본인은 다시 옥천 방면으로 돌아와서 여기 일대의 나머지 관광을 시작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4 08:33 2019/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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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민 아파트

고급형으로 시작했던 한국의 원조 아파트와 달리, '시민 아파트'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아파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이건 서민· 빈민들을 좁은 서울 땅에 최대한 많이 수용하기 위해 나라에서 작정하고 건축한 저가의(언제까지나 상대적으로) 양산형 보급형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치면 경차인 셈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시골 빈민들이 아무 일자리나 구하러 무작정 닥치고 서울로 몰려드니.. 서울의 인구는 조선, 일제 시대 등을 통틀어 어느 때보다도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도 발 뻗고 잘 곳이 있어야 한지라, 서울 시내엔 무슨 6· 25 피난민들이 몰렸던 부산처럼 무허가 판잣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도시 미관을 해치기 시작했다. 당장 청계천 주변만 해도 195, 60년대 사진을 보면 판잣집들이 장난이 아니게 많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런 판자촌을 대체할 아파트들을 '시민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서울 곳곳에 시급히 짓게 되었다. 2천 가구에 달하는 주택을 공급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고급형 아파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규모였다. 이 과업을 추진한 주역이 바로 당시 서울 시장이자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 현옥이다.

시민 아파트라는 명목으로 지어진 가장 오래된 최초의 아파트는 1969년 4월에 최초 입주가 시작된 '금화 시민 아파트'였다. 경기 대학교 서울 캠퍼스의 바로 뒤쪽 언덕에 있다. 여기서 금화란 아파트가 자리잡은 기슭인 안산의 다른 이름이다. 무악산, 금화산 모두 같은 산을 가리킨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 서울에 이런 붕괴 직전의 폐가 흉가가 있다면서 매스컴을 탔던 그 문제의 아파트가 바로 이것이었는데.. 2015년에 다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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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2000년대 초부터 이미 안전 진단 검사에서 허구헌날 D급 E급 폐급을 받아서 오늘 내일 하고 있었지만, 입주민들은 여기가 아니면 딱히 갈 데가 없던지라 불안해하면서도 철거 직전까지 이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불미스러운 붕괴 사고는 안 나고 곱게 철거되긴 했다.

다른 유명한 시민 아파트로는 삼일 시민 아파트라는 게 있었다. 얘는 산기슭 위주로 만들어진 다른 시민 아파트들과 달리 평지인 청계천 근처에 지어졌으며, 유일하게 주상복합 형태이기도 했다. 1960년대 말 당시에 남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63 빌딩 이전) 지리적으로도 가깝던 삼일 빌딩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져서 이름도 똑같이 '삼일'이라고 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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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고가 도로 위에서 아파트 한 동을 본 모습. 얘는 큰 그림을 찾기가 어려웠다)

삼일 시민 아파트는 2004년경에 철거되었다. 청계 고가의 철거와 비슷한 타이밍이다. 일부 상가 건물은 아직까지 현존하긴 하지만 아파트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또 이 글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시민 아파트는 남산 기슭에 있는 회현 시민 아파트이다. 2개 동 중 2차분은 1970년 5월, 전국에서 마지막으로 건설된 시민 아파트이며 2019년 현재까지 철거되지 않고 입주민도 존재하는 유일한 시민 아파트이다. 역사적 가치를 감안하여 보존하느냐, 아니면 안전을 위해 철거하느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얘는 리모델링만 하고 철거까지는 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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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한 동 형태이다. 두 동으로 따로 떨어진 게 아님.)

시민 아파트의 건설과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흑역사가 있으니 바로 1970년 4월의 '와우 시민 아파트 붕괴 사고'이다.
서민용 양산형 보급형 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다혈질 불도저 시장이 너무 짧은 기간과 너무 부족한 예산만 주고서 까라면 까 군대식으로 시공업체들을 쥐어짜며 밀어붙인 게 문제였다. 업자들도 물자 떼어먹기 비리와 졸속 부실 시공이 관행이었고.. 이 때문에 홍대 근처 와우산 기슭의 지반을 제대로 안 닦고 지었던 아파트 한 동이 해빙기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같이 자빠져 버렸다.

이 사고로 30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나마 입주가 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정도 피해밖에 안 난 것이었다.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김 현옥은 서울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후임인 양 택식 시장은 훗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잘 완성했는데, 하필 개통식 때 영부인 저격 사건이 터져서 물러나게 되니 이래 저래 참 허무하다.

김 현옥 시장은 아파트로도 감당이 안 되는 판자촌 주민들을 지금의 성남 구시가지인 서울 외곽 변두리로 반강제로 이주시키기까지 했다. 거기 가면 서울시에서 주거와 교통과 각종 생활 인프라를 저렴하게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현장은 텐트 하나 달랑 쳐져 있는 허허벌판이었으며 약속이 지켜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광주대단지 사건 같은 병크가 터지기도 했다. 이것은 아파트 붕괴 사고와 더불어 흑역사의 양대 산맥이다.

시민 아파트들은 저렇게 시범타로 붕괴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고급 프리미엄이 아니라 열악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던 고가차도들이 2000년대 이후부터 하나 둘 철거됐듯, 시민 아파트들도 지금은 거의 다 남지 않고 주차장, 공원 등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다. 회현 시민 아파트 제2동은 와우 아파트 사고를 반면교사 삼아 그나마 더 튼튼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왕산 수성동 계곡도 원래 거기에 옥인 시민 아파트가 있었는데 철거되고 원래 형태가 복원됐다고 들었다.

5. 그 이후

지금까지 얘기가 나왔던 게 일제 시대의 충정 아파트, 그리고 할배 때의 종암 아파트, 나중에 박통 때의 마포와 시민 아파트 시리즈들인데..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초창기 원조 아파트들과 건설 트렌드는 그럭저럭 다 다룬 것 같다.

1970년을 전후해서 너무 무리해서 지었던 시민 아파트는 아파트에 대한 대외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깎아내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그 인식을 개선하고자 아파트의 컨셉을 다시 고급화했으며, 그 첫 작품으로 1971년 말에 (1) '여의도 시범 아파트'를 내놓았다. 이름조차도 '시민' 대신 '시범(example!!)'이라고 바꾼 것이다. 여의도 시범 아파트는 국내에서 엘리베이터가 최초로 설치된 고층 아파트라고 한다..;;

아울러, 시민 아파트 자체는 망했지만 시민 아파트의 본래 취지이던 '서민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주택 공급'이라는 이념도 여전히 등한시할 수는 없다. 그 역할은 대한 주택 공사에서 분양하는 (2) '주공 아파트'가 담당하게 됐다. 주공 아파트 1호는 1972년에 지어진 반포 주공 아파트라고 한다. 그리고 74년에는 잠실 주공 아파트도 만들어졌다. 여의도와 강남의 이 아파트들은 아직까지 재건축되지 않고 건재하는 중이다.

1970년대에는 강남 허허벌판도 활발하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3) 대치동 은마 아파트는 1979년부터 입주가 시작됐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간· 공간 배경이 그 바닥이다.
세월이 흘러 서울의 서쪽 양천구의 (4) 목동에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1985년부터 1988년에  걸쳐 입주가 진행됐다. 간선 도로가 독특한 일방통행 형태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끝으로, (5) 1988 서울 올림픽과 관련된 대규모 아파트 건설과 분양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을 방문하는 수많은 선수와 언론 기자들이 거주할 '올림픽 선수 기자촌 아파트'가 올림픽 공원 바로 옆에 동그란 방사형으로 지어졌으며, 올림픽이 끝나고 그들이 떠난 뒤엔 민간에 분양되었다. 그리고 가락시장 남쪽의 문정동에는 '올림픽 훼밀리타운 아파트'라고 해서 선수의 가족들.. 그러니 기자촌보다는 올림픽과의 관련이 약간 덜한 주변 사람들이 머물라고 역시 수천 세대 규모로 지어졌다. 세월이 흘러 이 건물들 역시 노후하여 재건축 대상에 올라 있다.

이런 식이면 요즘은 올림픽 한번 치르려면 경기장뿐만 아니라 주변에 아파트를 짓는 것도 필수인 듯하다. 그 많은 사람들을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수 주 이상) 내내 호텔에 투숙시킬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서울 올림픽보다 최근인 평창 동계 올림픽도 동일하게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라는 유물을 평창군에 남겼다.
그 반면, 옛날에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치러졌던 1948 런던 올림픽 때는 세계가 가난하다 보니 군대 천막과 대학교 기숙사를 동원해서 선수촌을 꾸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서울과 수도권은 땅값이 치솟고 온통 아파트 천지가 돼 왔다. 그린벨트는 차근차근 풀리고, 논밭으로 놀고 있던 땅엔 건물이 들어서고, 군부대나 그에 준하는 엄한 시설들은 더 먼 데로 이전하고, 꾸질꾸질한 상가와 단독 주택, 낡고 낮은 아파트들은 재개발된다. 그리고 그걸로도 감당을 못 하니 서울 밖에 신도시가 개발되고 이것도 1기, 2기를 거쳐서 3기까지 만드네 마네 하는 지경이다. 일산과 분당이라는 1기 신도시 건설이 시작된 게 무려 노 태우 때였다.

원래 허허벌판이던 곳을 개발하는 거라면 차라리 나은데 재건축이라면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을 보상하고 이주시키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원래 그 땅이나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보상에 동의하고 빠져나갔는데 거기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 애초에 그 부동산에 대해 온전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는 편이라고 들었다. 뭐, 악의적인 알박기를 시전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6. 여러가지 관련 생각들

(1) 서울대나 카이스트 같은 일부 국립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교수 아파트, 그리고 예전에 천장산 근처에서 봤던 과학자 아파트는 어디서 어떻게 운영되는 걸까..?

(2) 옛날에는 아파트 이름이 그냥 지역명이나 시공사의 이름이 붙은 무미건조한 2~3음절 한자어 위주였지만, 2000년대부터는 그 이름도 브랜드화해서 온갖 외래어가 섞인 복잡한 명칭으로 바뀌고 있다. 자이, 래미안, 푸르지오, 블루밍 등등..

그래서 주택 공사조차도 주공이라는 싼티 나는 이름 대신 휴먼시아라는 그럴싸한 브랜드명을 개발했는데, 이게 웬걸 '휴거'(휴먼시아에 사는 거지 깽깽이..)라는 엽기적인 개드립 앞에서 버로우 타고 그걸 흑역사 처리한 바 있다.
쟤들은 LH라는 이니셜을 쓰는데 SH(서울 주택 도시 공사)는 또 뭔지?
옛날에는 주택 마련 복권이라고 해서 매주 TV에서 예쁘장한 아가씨들이 "쏘세요!" 소리와 함께 다트를 던지거나 공을 아무거나 꺼내는 추첨도 했는데.. 요즘도 그런 걸 하는지, 목돈 마련 절차가 어찌 되나 궁금하다. 나도 이런 건 조만간 알아야 할 텐데.. >_<

(3)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 남산 외인 아파트의 발파 해체 장면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건물을 철거할 때나, 또 예전에 삼풍 백화점이 스스로 붕괴했을 때에나, 심지어 9· 11 테러 때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졌을 때에도.. 건물이 무너질 때는 정말 엄청난 양의 먼지 폭풍이 발생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급격하게 주변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아주 가늘고 길게 야금야금 조용히 건물을 철거하는 것도 고급 기술이다.
일본에서 지난 2012~13년에.. 우리나라 영친왕이 머물렀던 것으로 유명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신관을 천천히 철거했다. 수십~수백 배속 화면을 보면 건물이 차츰차츰 높이가 낮아지면서 땅으로 꺼져 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1 19:35 2019/09/0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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