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철도의 부흥과 쇠퇴
본인은 한국 철도 얘기는 이 블로그에다 지금까지 귀가 따갑게 해 댔고, 이따금씩 일본 신칸센 얘기도 하고 예전엔 시베리아 대륙 횡단 철도 얘기도 했다.
그에 이어 오늘은 미국 철도 얘기를 좀 하겠다.
일본이나 유럽 같은 나라와는 달리, 미국이라는 나라는 철도와 웬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자동차와 비행기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처음으로 산업화라는 걸 경험하던 시절엔 철도가 소중한 친구였다.
미국의 철도 전성기는 19세기 초였다. 1820~30년대의 서부 개척 시대 때부터 철도가 그 넓은 대륙에 미친 듯이 깔렸다. 마차만으로는 그 많은 이민자와 화물을 수송하기 벅찼기 때문이고, 또 철도를 땅따먹기 하듯 넓게 길게 깔아야 “여긴 미국 땅”이라는 인증도 확실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억의 고전 게임인 <남북 전쟁>(1860년대)을 봐도, 기차가 달리는 장면이나 기차에서 벌어지는 미션을 볼 수 있다.
이때 다닌 철도 차량은 당연히 증기 기관차. 오늘날의 기름이나 전기로 달리는 열차에 비하면 답답하기 그지없는 느림보였지만, 그게 그래도 마차에 비하면 가히 교통 혁명 물류 혁명이었다. 그 당시엔 미국에도 협궤(주로 914mm)가 많이 부설되었으나, 20세기에 대부분 표준궤로 개궤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중반에 미국에 대대적인 석유 공급 시설과 함께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고, 한국의 고속도로 뻘 되는 프리웨이가 거미줄처럼 깔리면서 철도는 대략 쇠퇴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마이카 시대인 1980~90년대와 비교하면 시기가 거의 반세기 가깝게 앞선 셈이다.
참고로, 1930년대 중반의 미국 하니까 생각이 나서 사족을 덧붙인다. 그때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도 자가용을 굴리면서 미국 방방곡곡을 돌며 강연과 독립 운동을 했다. 그는 왕년에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희대의 난폭 운전(하지만 무사고)으로 유명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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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이던 이 승만과 그의 애마. (출처: 월간 <자동차생활> 2008년 10월호)
다시 철도 얘기로 돌아오면..
우리나라가 6· 25 당시에 미국으로부터 디젤 기관차를 최초로 기증 받은 적이 있으므로, 미국 역시 증기 기관차는 자동차의 보급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현역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허나, 1970년대부터는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본격적인 항공기 시대까지 도래하면서, 철도는 단거리뿐만이 아니라 장거리에서도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여러 모로 우울한 소식이다.
우리나라도 철도 시설이 낙후해 있긴 하지만 미국은 철도의 역사가 더 길고 낙후한 정도가 정말로 더하기 때문에, 장거리 여객으로서의 철도는 실용적인 이동 수단보다는 레저나 관광, 여행 컨셉으로 바뀌어 있다. 이 정도면 진짜로 legacy 교통수단으로 전락인가? 하루에 열차가 한두 번 운행하거나 심지어 무슨 비행기 노선처럼 1주에 n 번 다니는 노선도 있다.
다만, 여객이 아닌 화물에 관한 한... 미국 철도는 지금도 전혀 우울하지 않다. 그 넓은 미국 대륙에 그 많은 물자를 싸고 편리하게 실어나르는 교통수단으로 철도보다 더 효율적인 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기관차를 2중 3중 이상으로 중간 중간에다 중련 편성한 후 화차를 무려 100~200량씩 끌고 가는 게 다반사. 10량에서 기껏해야 20량 사이인 한국· 일본 따위와는 가히 차원을 달리한다. ㅜ.ㅜ
과연 대륙의 기상이다. 그래서 중간 중간의 중련 편성 전용으로, 운전실이 없이 순수하게 엔진만 달린 기관차도 별도로 만들어서 쓴다.
이런 열차가 건널목에 한번 등장하면, 다 지나가는 데 3분에서 5분은 족히 걸린다. 운전자라면 아예 차 시동 끄고 기다리는 게 나을 정도. 본인도 미국 가서 건널목에서 3분 정도 기다린 적은 있다.
흔히 전철화율은 철도의 현대화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하지만, 미국 철도의 전철화율은 매우 낮다. 그렇게도 화물 수송의 비중이 높은 미국에 화물 수송용 전기 기관차가 전혀 없으며, 모두 기름으로 달리는 디젤 기관차에 의존하고 있다. 철도의 전철화라는 게 초기 투자 비용이 아주 높고 힘든 일이다 보니 그건 미국도 포기한 모양이다. 마치 미터법 도입과 가정용 전기 승압을 포기했듯이 말이다. ㄲㄲㄲㄲㄲ
길이가 9000km를 넘는 시베리아 대륙 횡단 철도의 전철화 사업이 거의 1930년대에 시작했는데, 무려 2002년에야 100% 끝났다는 걸 생각해 보자.
※ 암트랙
한국에 코레일이 있고 일본에 JR이 있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여객 철도 회사는 단연 암트랙(또는 앰트랙; Amtrak)이다.
미국은 회사 이름을 그 회사 상품에다가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용언화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서류를 xerox 해 오너라”라고 하면 그게 곧 복사라는 뜻이다.
고속버스를 탄다고 안 하고 그냥 그레이하운드를 탄다고 말한다. 포토샵, 구글도 비슷한 방식으로 보통명사화하는 중이다. 이런 맥락으로 미국에서는 암트랙이 열차와 거의 동급인 대명사로 통용되고 있다. National이 붙지 않은 애칭이어서 이색적이다.
암트랙은 자동차와 비행기의 발달로 인해 쇠퇴하고 있던 미국 내부의 철도 회사들을 연방 정부가 인수하여 전국구 급으로 공영화한 회사이다. 하지만 아무리 쇠퇴했다고 해도,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35000km에 달하는 방대한 철도망을 소유하고 있고, 그렇게까지 오로지 세금 먹는 하마 식의 막장은 아니라고 한다.
암트랙이 담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객'뿐이다. 미국에는 화물을 주로 운행하는 유니온 퍼시픽 같은 다른 철도 회사도 많기 때문에, 역에 게시된 열차 운행 스케줄을 보면, 마치 다양한 회사의 여객기를 취급하는 공항처럼 철도 회사를 식별하는 코드들도 볼 수 있다. 또한 캐나다-미국간 국제 열차도 있다. ^^;;
앞서 말했듯이 미국에는 화물이 차지하는 트래픽이 워낙 너무 많아서, 통과 우선순위가 단연 최상위여야 할 암트랙 여객 열차조차도 수시로 지연된다고 한다. 550마일(약 900km) 이상을 운행하는 장거리 열차는 예정 시각보다 30분만 안 넘기면 정시 도착이라고 인정하고 지연으로 치지도 않는다. 그렇게 암트랙 홈페이지에 명시되어 있다.
자, 그럼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진다.
미국에는 화물용 전기 기관차가 없다. 그럼 미국에 고속철은 있을까?
넓은 의미에서 답은 '예'이다.
미국도 철도 노선도를 보면, 역시 서부보다는 동부가 더 역사 깊고 더 번화하고 '미국스러운' 곳이다 보니, 그쪽에 철도도 더 빽빽하게 건설되어 있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발티모어, 워싱턴 DC를 경유하는 동북 간선(NEC; 약 734km)에는 아셀라(Accela) 익스프레스라고, 차량 자체는 시속 266km까지 낼 수 있는 미국 유일의 고속철(전철)이 있다. 2000년 말에 개통했고, 운영 주체는 물론 암트랙이다.
아셀라 차량은 틸팅 열차이다. 봄바르디에와 알스톰이 공동 제작하여 공급했는데 전자의 기여도가 더 높다.
다만, 차량은 나름 좋은 걸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선 위주의 영업이어서 그런지 차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와 매사추세츠 사이의 구간만 영업 최고 시속인 240km로 달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선로는 160km대가 한계. 참고로 새마을호가 경부선 천안-평택 구간을 영업 최고 시속인 140km로 달린다.
정차까지 감안하여 아셀라의 전구간 운행 표정 속도는 시속 110km대라고 한다. 과거 서울-대전-동대구-부산 4시간 10분짜리 최고급 새마을호의 표정 속도가 시속 107km였으니 결국은 새마을호급이다. ^^;;;
현재 동부에 이어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가 고속철 도입을 검토 중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리콘 밸리도 있고 로스앤젤레스도 끼고 있고 여건이 나을 테니까 말이다.
끝으로, 미국 LA에서 2005년 1월(Glendale)과 2008년 12월(Chatsworth district)에 벌어졌던 대형 열차 사고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때 사고가 난 열차는 모두 메트로링크라는 회사가 운영하는 통근열차로, 암트랙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먼저 알아 두자.
2005년 사고는 차라리 외부 요인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할 목적이었는지 자기 차에다가 석유를 끼얹은 후 그걸 철길 건널목에다 세워 놨다. 통근열차는 그 차를 들이받은 후 탈선했는데, 그 상태로 맞은편에서 오던 열차와 2차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차주는 차에서 탈출하여 죽지 않았다.
이 사고는 11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의 승객이 다친 대형 참사가 되었으며, 사건의 장본인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2008년 사고는 메트로링크 소속의 통근열차와 유니온 퍼시픽 소속의 화물 열차가 신호 착오로 인해 단선상에서 정면 충돌하고 탈선한 ㅎㄷㄷ한 사고로, 25명이 사망하고 135명이 다쳤다. 자세한 디테일은 잊어버렸으나, 철도 신호 체계가 어지간히 후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황당한 후진국형 사고였다고 본인은 기억한다. 마치 활주로에서 여객기 두 대가 충돌한 테네리페 참사처럼 말이다.
이건 3년 주기(혹은 거의 4년)로 동일 철도 회사 관할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일 뿐만이 아니라, 2005년 사고에서 생존했던 어떤 사람이 2008년 사고를 또 당해서 결국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상.
뉴욕 지하철 설명은 지면과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생략해야겠다.
미국에도 철도의 날이 있다. 암트랙이 아주 최근인 2008년부터, 5월 10일과 가장 가까운 토요일을 철도의 날(National Train Day)로 제정해서 각 역에서 자체적으로 기념 행사를 개최한다.
한국의 철도의 날이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개통 기념이듯(1899년 9월 18일), 미국은 자기네 나라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한 1869년 5월 10일을 기념한 것이다.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 가더라도 우려한 것만치 심심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ㅋㅋㅋㅋㅋㅋ
내가 무슨 미국 시민도 아닌데 이런 철도 정보들을 현장에서 직접 얻었을 리는 만무하고... 이 글에 인용된 정보의 주된 출처는 영문 위키백과임을 참고로 밝힌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