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ing for you의 작곡자, MALTA

이제는 더 말하면 입만 아프겠다만,
본인은 2003~2004년 사이에 새마을호에서 Looking for you라는 음악을 들으면서 철도 성령을 체험하고 철도 덕후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 Looking for you를 작곡한 사람은 MALTA라는 예명을 쓰는 일본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다. (☞ 공식 홈페이지)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면, 공유 정신이 투철한 네티즌들 덕분에 이 사람 주요 곡은 물론, 심지어 과거의 실황 공연 동영상까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생각보다 연세가 지긋한 분이고, 본인의 부모님 연배이다. 아니, 부모님보다 나이 더 많다..;;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서양 사람처럼 생겼다. 덩치도 그렇고.

공식 홈페이지에 기재된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13세 때부터 색소폰을 불기 시작해서 도쿄 예술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미국 유학을 선택하여 그 이름도 유명한 버클리(Berklee) 음대를 졸업하고 거기서 강사도 역임했다고 한다.
재즈 내지 실용 음악이 강한 학교에 잘 찾아간 듯하다. 몇 년 전에 본인이 뒷조사를 해 본 기억에 따르면, 버클리 음대 Alumni 리스트에 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83년 11월, 일본에서 MALTA라는 예명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첫 음반을 냈다.
Looking for you가 수록된 앨범은 Obsession으로, 1988년에 발매됐다. 즉, 여전히 상당히 초창기 시절의 작품인 것이다. 그때는 기술과 장비가 차이가 있었는지, 음반 녹음을 미국 LA에서 했다고 자랑을 치던 시절이었다. 즉, 우리가 지금 듣는 Looking for you도 원판은 미국에서 녹음됐다는 뜻.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철도 성령을 소환해 낸 전설의 곡 Looking for you가 첫 소개된 그 앨범)

생각을 해 보라. 어느 때에 한국의 대중교통에서, 운행 시작 전이나 종료 후에 객실 내부에서 저렇게 가슴 터질 것 같은 빠르고 경쾌하고 톡 쏘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던가? 그리고 그 당시 철도청이나 코모넷(새마을호 내부의 시청각 UI를 담당하던 하청 업체) 담당자는 어째 이렇게 매니악한 음악을 선곡할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하지 않은가?

난 재즈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저 음악만은 예외로 그냥 닥치고 수백, 수천 번 듣고 또 들었다. 눈 지그시 감고 앉아서 새마을호 객실에서 저 음악 들으면서 타거나 내리던 시절을 회상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리고 전곡을 허접하게나마 nwc 악보로 옮겼다.

참고로 Looking for you는 새마을호에 처음으로 비디오 화면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1~2002년 사이에 등장했다가, KTX가 개통한 2004년 중반부터는 종착역 도착 때만 흘러나오는 걸로 바뀌었고(출발 전에는 이제 Steve Barakatt의 Dreamers로 변경), 2007년 중반 무렵에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이 2006년에 세 차례 Looking for you 열차내 재생 장면을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린 것은 이제 전설적인 역사 기록으로 등극해 있다.

나는 흔히 말하는 각종 가요나 연예인, 영화, 락 음악 같은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대신, 그쪽 똘끼가 여기에 전부 쏟아졌다.
MALTA 당사자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의 음악이 한국에서 극렬 철도 덕후를 한 명 배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록할 것이다. 철도님, 사랑합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2/11 08:12 2012/02/1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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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 버린 2004년은, 본인의 대학 후반기임과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웃긴 컨텐츠’들을 유난히도 자주 접한 해였다.

웃긴 컨텐츠의 원천은 크게 풀빵 닷컴 아니면 일본물로 나뉘었다. 2004년 당시 잠깐 떴다가 사그라든 박 분자 시리즈(휴지의 시, 맵핵의 추억 등), 그리고 서울 버스 개편을 비꼰 <버스 로얄> 및 <투모로우> 같은 영화 예고편 패러디였다.
그리고 일본물로는 일본 환타 CF, 그리고 일본판 가나다송, 숫자송, 인사송이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이런 거 아는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2004년을 훈훈하게 보내고서 이듬해 초의 일이다.
유머· 엽기 게시판에서 웬 5분짜리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개그 만화 일화와 본인과의 첫 인연이었다. ㅋㅋㅋㅋㅋㅋ
코트의 안에는 마물이 살고 있고 믿을 만한 동료들이 다 맛이 갔다니... 오프닝 가사부터가 무지하게 암울한 한편으로 아스트랄하고 포스가 넘치지 않는지? ^^;;

배경은 지구가 운석 충돌로 멸망하기 3시간 전. 전세계 사람들은 이제 볼장 다 봤다는 식으로 서로 똥이나 처바르면서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진행된 어느 TV 쇼프로에서는 우리나라로 치면 태 진아 같은 연륜을 자랑하는 엔카 가수가 발가벗고 출연하여 엔카는 지겹다고 말한다. 그것도 똥 묻은 파르페 다음으로 싫댄다. ㅜㅜㅜ

문 근영 정도 될 법한 아이돌 가수는 양아치 같은 차림으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아까 엔카 가수는 딸내미뻘 되는 그 아이돌에게 껄떡대다가 담배빵을 당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미소!! ㅎㄷㄷㄷ;; 갑자기 등장하는 '쿵~따 쿵쿵따' BGM도 은근히 중독성 있었다.

복화술사는 복화술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내 친구는 그저 땡그랑~뿐입니다요”라고 실토한다. 본격 인간성 파탄. 파트너인 인형을 줘 팬다.
그런데 마지막 게스트인 마술사는 자신이 사실 초능력자라고 커밍아웃한 후 운석의 궤도를 바꿔서 지구를 구해 낸다.

복화술사 정도라면 모를까, 앞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엔카와 아이돌 가수 둘은 연예인 생명은 이미 완전히 파토 났으니, 아마 성형 수술하고 개명 후 이민 가서 잠적해야 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그 이름도 유명한 1기 4화 <종말편>을 통해 개그 만화 일화에 입문했다.
처음 봤을 땐 본인도 남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일본 아니랄까봐.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만화가 다 있어? ㄲㄲㄲㄲㄲㄲ” 하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봤다.

그런데 중독성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욕을 하면서도 자꾸 또 보게 됐다. 그러면서 빠져들었다. ㅠ.ㅠ
게다가 일본물과 각종 만화에 조예가 깊던 병특 회사 모 동료의 영향으로 본인은 <씰>, <서유기> 등 여타 작품까지 섭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혹자의 코멘트에 따르면, 드디어 사무엘 님도 알량한 웃음을 대가로 자기 영혼을 팔아서 타락시키기 시작했다고라...;;;;

본인은 일본 애니와는 담을 쌓고 사는데 예외적으로 이거 하나만은 찾아서 보게 됐다.
처음엔 엔카가 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핑크빛 카파(괴한)’이 뭔지도 알 정도로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다. ^^;;; 본인이 일본어를 할 줄 안다면 대사를 다 외웠을 텐데 말이다. ㄷㄷ;;

최소한 2006~7년부터 거의 3년이 넘게 본인의 MSN 대화명은 개그 만화 일화 대사였다.
- 팔릴까보냐!
- 닥치세요. 이것이 저의 완전체입니다
- 번뇌 이놈, 죽어라!
- 한겨울에도 축시
- 똥 묻은 파르페 다음으로 싫어

엽기적인 거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저런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종말>, <안 오잖아, 가정교사!>, <히라다의 세계>, <서유기> 같은 것들.

2008년 상반기에는 개그 만화 일화 3기가 본인의 병특 말년 생활을 더욱 즐겁게 해 줬다. 매주 저거 올라오는 거 기다리는(자막도) 재미가 참 쏠쏠했다.

병특이 끝난 뒤 다른 직장에서 본인은 플래시 메모리를 분실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른 동료 직원이 습득했다. 그런데 그 플래시 메모리 안에는 개그 만화 일화 동영상 자막 파일이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서 그 동료가 “이거 주인은 일본 애니 덕후인가 보군.. 그런데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라고 말했고, 이걸 계기로 본인과 그분은 서로 개그 코드가 통하는 친한 사이가 됐다. ㅋㅋㅋㅋㅋ

이렇듯, 개그 만화 일화는 본인의 인생에서 최소한 두 명의 사람과 인연을 이어 줬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이런 만화 얘기를 꺼내면 정상인 취급을 못 받는다나? ㄲㄲㄲㄲㄲ

놀랍게도, 개그 만화 일화 에피소드로 영어 연극을 하고 싶으니 대사를 영어로 좀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본인은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다. “베게의 속에는 참치로 가득 -> Inside the pillow is full of tuna” ㅋㅋㅋㅋ 유튜브에는 한때 실제로 영문 자막이 삽입된 개그 만화 일화 동영상이 나돌기도 했는데, 저작권 문제 때문에 요즘은 다들 삭제된 모양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그 만화 일화는 성우 지망생들의 더빙 연습용으로도 자주 쓰일 정도로 이 바닥 종사자에게는 친숙하다. ^^

1기(시즌 1)의 오프닝 주제가 가사 중 일부가 ‘배구에 걸었던 청춘’인지 ‘발레에 걸었던 청춘’인지가 번역자에 따라 해석이 차이가 있었는데, 이 영어 자막을 보고 정확한 해석이 뭔지 알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물이 살고 있는 코트도 coat가 아니라 court이다. 맛이 갔다는 표현의 원어 표현은 '눈이 죽었다'(eyes are lifeless)임. =_=;;

개그 만화 일화는 원래 만화책으로 나온 스토리를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다. 만화책은 2008년 말에 드디어 우리나라에 정식 번역 출간되었고, 듣기로는 애니메이션도 정식으로 더빙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개그 만화 일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개그 만화 일화는 김 성모, 삼류만화 패밀리 등 본인으로 하여금 더욱 매니악한 서브컬처 유머 문화에 입문하게 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여러분도 정신 건강을 웃음을 통해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다면, 5분을 투자해서 개그 만화 일화 1기 , 종말, 서유기 편부터 차례대로 섭렵해 보는 게 어떨까? ^^;;

http://blog.naver.com/lhj3496/110031250383 (1기 주제가만으로 만화를 만들었다. <코트 안에는 마물이 살고 있어> ㅋ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1/03/23 08:12 2011/03/2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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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공항 이야기 외

본인이 철거민, 토지 보상, 알박기 같은 사회 이슈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벌어졌던 용산 참사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 본인은 철거민만 무조건 동정하지 않으며, 공권력만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듣기로는 진짜 집 주인은 보상을 받고서 이미 옛날에 집을 비웠다고 한다. 문제가 된 건 거기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
그들이 자기 보금자리에 대해서 합법적으로 철거를 반대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처지는 딱하지만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을 사람인지 본인이 여기서 단정적으로 판단을 내리지는 않겠다.

'알박기'라는 단어가 있다. 어디 개발한다, 건물을 짓는다는 말만 있으면 거길 비집고 가서 콘크리트 가건물을 짓고 눌러 산다. 그러다 나중에 자기 집이 철거된다고 하면 으르릉 워리어로 돌변, 배 째라고 드러눕는다. 그러면서 토지 보상 명목으로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요구한다.
심지어 교회 예배당조차도 그런 식으로 무허가 건물로 만들어 놓고는, 우격다짐을 한 끝에 토지 보상비까지 버젓이 타내는 경우가 있었다. 처벌을 받아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보상금을 받았다. 합법적으로 임대료 꼬박꼬박 내면서 건물에 입주해 있는 교회가 보면 까무러칠 일이다.

저런 식의 이기적인 알박기 때문에 대규모 국책 사업이 차질을 빚기도 하며,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의 희생양이 된 대표적인 케이스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의 나리타 국제 공항이다.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도쿄의 하늘 관문이던 기존 하네다 국제 공항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더 외곽에 더 대규모 공항을 만든 것이다. 그 계획을 수립한 게 이미 1966년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그때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그나마 토지 보상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건설 예정 부지 일대에는, 골수 전투종족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집, 내 농토 뺏기기 싫다고 농민들은 물론이고 당시 악명을 떨치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합세하여 공항 건설을 극렬 반대하고 방해했다. 환경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저 이유 때문에. 이 정도면 정말 우리나라의 극렬 좌익 데모꾼을 능가하는 수준인 듯. 이 친구들이 얼마나 악랄했냐 하면,

- 1972년 완공 예정이던 공항의 개항일을 무려 6년이나 늦췄다. (1978년으로)
- 건설 과정에서 경찰도 죽고 시위대도 죽을 정도로,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는 전쟁 수준의 데모를 벌였다.
- 게다가 그나마 개항일을 얼마 앞두고 시위대가 관제탑에 무단 침입하는 데 성공, 공항 시설을 파괴하는 바람에 개항을 더욱 지연시켰다.
-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활주로 부지에다 알박기' 대응으로 일관했으며, 사건을 수습하러 온 토지 보상 위원회장에게도 테러를 가했다.

그들의 안티질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덜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데모꾼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나리타 공항 이용객은 탑승 구역이 아니라 청사 입구로 들어갈 때부터 소지품 검사와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한다. 휴전국인 한국에도 얼마 없는 경비원들이 이 공항에는 무진장 깔려 있다고 한다.

게다가 나리타 공항은 전투종족의 방해 공작 덕분에 처음에 의도되었던 규모로 지어지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긴 활주로를 충분히 못 만들고, 그 큰 공항이 개항 후 무려 24년을 단일 활주로로 버텨야 했다...;;;
어느 4km짜리 활주로는 2km 남짓한 길이로 두 동강이 나고, 어느 직선 유도로는 논밭이나 민가를 피해서 '커브'가 생기는 바람에 뚱뚱한 대형 항공기가 드나들 수 없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S자 같은 활주로, 오징어 같은 활주로, 만들다가 후회한 활주로.."

나리타 공항의 위성 사진을 보면 그 안습한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비행기가 드나드는 길목으로 에워싸인 집, 비행기 활주로를 둘로 쪼개고 커브를 만든 밭;;; 아, 그렇게도 공항 지어지는 게 싫었는지?? -_-;;;;; 테란 기지가 저그 크립 때문에 거지같이 지어진 모습이다.

나리타 공항은 태생적인 ㅂㅅ이 되면서 일본 정부가 처음에 기대했던 정시성과 물류 경쟁력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게 지금은 나라도 포기한 공항이 되어서 오히려 하네다 공항을 다시 허브 공항으로 육성하는 분위기이다. 지역 이기주의가 나라 말아먹은 좋은 사례이며, 덕분에 인천 공항이 반사 이익을 톡톡이 챙기게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잘 알다시피 인천 공항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메워서 거대한 섬으로 연결한 부지에다 건설되었다.

이 공항을 지으면서 대차게 데인 일본 정부는 토지 보상 문제란 말만 나오면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었고, 후대의 공항은 아예 인공섬을 만들어서 짓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다. 대표적인 예가 오사카의 칸사이 국제 공항. 정말로 피똥 싸는 건설비를 쏟아부어서 바다 위에다 없던 섬을 만들어 건설했다. 하지만 후유증이 너무 큰 관계로 이 공항은 공항 이용료가 굉장히 비싸, 승객과 입주 항공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그 반면 2002년인가 03년 이래로 공항 이용료를 동결해 온 인천 공항 만세~~)

그랬는데,
그렇게도 실적 좋은 인천 공항을 우리나라 정부가 매각한다는 얘기는 왜 나돌고 있는지? -_-;;

Posted by 사무엘

2010/11/10 08:28 2010/11/1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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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과 통합

요즘이야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 내지 통합이 대세라고들 다들 그런다. 특히 인문계와 이공계의 통합 시도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본인도 일종의 그런 계열로 학업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에서 학과간 협동 과정이라는 개념이 생긴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생각보다 꽤 최근이다.

그 전엔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학 내부의 각 학과들은 자기 과가 좀더 연구비를 많이 타 내고,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세력을 확보하려고 서로 싸우는 구도였다.
융합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융합 뭥미? 그거 먹는겅미? 우걱우걱..." 이었다.

어디 학계뿐이었을까?
요즘도 그렇기도 하지만 종교 때문에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더 차지하려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가끔은 체력이 비슷한 국가들끼리 불가침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힘의 균형이 깨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조약 그딴 거 없었다. 바로 침략.

그런 마인드로 과학 기술만 급속도로 발전하니, 그 결과는 인류의 비극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ㄷㄷㄷ;;
아마 그때 종교에 좀 심취해 있던 사람들은, 이걸 분명 요한계시록 재앙에다 갖다붙이면서 인류가 이렇게 멸망하고 말 거라고 호들갑도 떨었을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원자 폭탄의 버섯 구름을 본 사람들이 경험했을 충격과 공포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 * * * * *
독특한 사례로 일본을 들 수 있다.
그때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 중 나름 일찍 근대화에 성공하여, 한때 미국과도 맞장 뜨고 전쟁을 벌일 정도로 성장하긴 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일본의 내부 조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아마 전에도 블로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존재하던 시절, 일본의 육군과 해군이 서로 얼마나 사이가 나빴는지 말이다. 그냥 나쁜 게 아니라 서로 거의 적군에 가까운 수준이었으며, 서로 스파이를 보내서 상대편 근황을 알아볼 정도였다..!!

(르누와르와 세잔을 일본 육군과 해군으로 바꿔서 개그만화일화 만들어도 될 듯.. ㄲㄲㄲㄲㄲ)

육군과 해군이 각각 천황 직속이었던지라 육· 해군 통합 사령부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중에 하도 상황이 안 좋아져서 해군이 보다못해 "육군아, 과달카날로 보병 좀 파견해 주셈" 하자, 육군 왈, "과달카날이 어디야?" -_-;;;
서로 작전을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둘 중 하나가 싸우다 다 죽어가고 있어도 상대편은 그냥 '생깠다'.

전투기나 장비조차도 똑같은 걸 서로 중복 투자하여 따로 개발했으며, 들어가는 부품의 나사 규격조차도 서로 달랐다고 한다. =_=;;

이 정도면, 지 만원 박사의 지론대로라면, 일본은 '시스템'에서 졌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확한 표현이다.
본인이 공 병우 박사를 공부하던 시절엔, 전쟁 당시 일본의 주된 비효율 요인으로 '한자'를 비중 있게 살펴봤었다. 미군은 군함 곳곳에 영문 타자기가 비치되어 있어서 아주 빠르게 교신을 주고받았던 반면 일본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
그런데, 한자보다도 저런 막장 군대 조직이  더 큰 비효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이런 막장 시스템은 헌병과 특별 고등 경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일본 헌병은 여타 군대의 헌병과는 달리, 군사 치안뿐만 아니라 민간인 치안까지 담당했다. 자기 마음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사상 검문을 하고 구금, 체포, 고문이 가능했다. 우리 같은 피지배인뿐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인조차도 자기네 나라 헌병을 싫어할 정도였다.

그런데 불순분자를 잡아내는 일은 어차피 일본이 만들어 낸 특별 고등 경찰과도 거의 겹치는 업무였다. 일례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 건 올린 조직은 헌병이 아니라 고등 경찰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업무 협조나 첩보 정보 공유? 그딴 건 전혀 없었고 둘 사이도 극도로 나쁘긴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육군· 해군 사이와 마찬가지로 실적 쌓기 천황 충성 경쟁 때문이었다. ㅋㅋ
* * * * * *

그랬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부터 인간 사회에 과거와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났다.
컴퓨터가 발명되고,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전쟁으로 인해 발달한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민간 여객기가 지구촌 시대를 개막하고...
그리고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예전의 국제 연맹보다 더욱 강력한 범국가 기구인 UN이 생기고..;;

지금은 분야를 불문하고 협력과 통합이 대세이다.
서로 협력해서 파이의 크기를 키울 수만 있다면, 어제의 적국도 오늘의 친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시 영원히 생까고 지낼 것 같던 일본하고도 문호 개방하고, 6 25의 원흉이던 북한하고도 이 정도로 개방하고, 심지어 정치 이념적 우방이던 대만 대신에 시장 크기가 더 큰 중국과 수교하고.. 북한의 친구였던 러시아하고도 수교하고...;;
좋게 말하면 실용적인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일 수도 있다. 세상에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은(같을 수도 있는) 세상인지는, 겪어 보지 않고서는 잘 모를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각종 국제 규모의 올림피아드나 대회..;; 100년 전에는 상상하기 쉽지 않던 개념이었다.
자, 학문간의 융합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만한 트렌드인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식으로 종교까지 통합 중이다. 성탄절 때 절에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합니다" 현수막 걸어 주고(안 해 줘도 되는데! ㄲㄲㄲㄲ), 석가탄신일 때 성당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 해 주는 게 요즘 관행이라며?
물론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은 이런 에큐메니컬 운동을 굉장히 싫어한다. 성경에 예고된 대로 말세에 있을 큰 배도와 타락이라고 갖다붙이며, 그 의견에는 본인 역시 동의한다.

세상 정세에 더 민감한 미국 크리스천들은 UN도 굉장히 싫어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국가와 민족을 나누는 것인데, 그걸 인간이 멋대로 힘을 합치고 통합하면 그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밖에 안 할 거라고 말이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다만, 6 25 때 UN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 특히 반공 정신이 투철한 한국 교회 성도가 느끼는 UN 이미지와, 미국이 느끼는 UN 이미지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해서 나쁠 것 없는 융합과, 영적으로 불순한 동기의 융합을 잘 분별하는 것도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0/10/24 18:38 2010/10/2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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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반대편에 서서 끝까지 막장테크를 가며 저항하던 일본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뉴클리어'를 두 방 맞고서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당시 우리나라를 포함해 일본의 식민지 점령 하에 있던 민족들이 모두 주권을 되찾았다.
한국은 잘 알다시피 이 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이 날을 종전 기념일이라고 부른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때문에 광복군이 참전 못 했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가 2차 세계 대전 전승국이 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한다.
오히려 교활한 소련이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어기고 다 이겨 놓은 싸움에 기회를 잘 보고 참전함으로써 전승국이 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의 미래에도 치명타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김 구 존경하는 진영에서 이 사실을 더욱 애석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은 국어학의 관점에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큰 행운도 안겨다 주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던 외솔 최 현배 박사는 1945년 8월 18일에 총살 예정이었다. 주 시경의 제자이며, 연세 대학교(전신인 연희 전문학교 포함)의 교수를 역임하고 해방 후 미군정 때 당장 국어 교과서를 만든 한글학자 말이다.
그분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들었다고 한다. 광복이 딱 사흘만 더 늦어졌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이판사판 눈이 뒤집혀 있던 일본은 그 당시 9월이라든가 아니 8월 17일에만 해도, 신사 참배 거부나 조선어 학회 사건 등으로 투옥돼 있던 수많은 애국자, 지식인, 독립 운동가, 크리스천 내지 본토 거주 조선인들에 대해 홀로코스트 수준의 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관동 대지진 때처럼, 아니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어차피 내가 못 먹을 떡이면 남도 못 먹게 다 작살을 내 버리고 가자는 간악한 심보였다. 그게 실현됐다면 진짜 우리나라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그 사이에 광복군이 참전해 봤자 국제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겠나 하는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한글이면 한글, 교회사면 교회사, 그리고 김 삼웅 지은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는가> 같은 여러 분야 문헌을 봐도 동일한 결론이다.

둘째, 조선어 학회 사건 당시에 빼앗겼던 <큰사전>의 작업 원고도 일제가 허겁지겁 도망간 덕분에 서울 역 창고에서 되찾았다. 이때 조선어 학회의 사전 편찬 위원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일제의 통치가 장기화됐다면 이 원고는 영원히 못 찾았을 수도 있다. 일제가 불태워 버리든, 아니면 본토로 가져가 버리든 무슨 짓을 해도 했을 것이다. 민족 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작업물을 일제가 그냥 뒀을 리가 있나?

우리나라 정부는 1962년, 최 현배 박사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아직 살아 계실 때), 국가보훈처는 이번 2010년 10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이분을 선정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 한국어는 나름대로 사용 인구 세계 1x위를 당당히 차지하는 언어이며, 외국에서도 학습자를 찾을 수 있다. 이제 최소한 국력이 약해서 정치상의 이유로 말살당할 수는 없는 탄탄한 지위를 획득했다는 뜻이다. 공대의 특성상 온통 영어 일색이던 학부 시절과는 달리, 이 대학원에서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한국어 교사를 꿈꾸는 중국인, 일본인 유학생들을 본인은 심심찮게 본다.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계속 잘 살아 주고 대외 이미지가 좋아야 한국어로 먹고 살려는 사람들도 어깨 펴고 살 텐데 말이다.
그러나 요즘 현실은 자국인들부터가 못 살겠다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결혼 기피하고 애 안 낳는다. -_-;; 캐안습.

Posted by 사무엘

2010/10/09 08:03 2010/10/0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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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청사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시기적으로 우리나라의 1990년대 중반에 해당하는 김 영삼 정권 때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었으며, 고속도로 통행료의 징수 방식이 후불제로 바뀌었다. 직할시가 이때부터 광역시로 바뀌기도 했다. 물론 성수 대교와 삼풍 백화점의 붕괴, 그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같은 비극적인 대형 참사도 이 정권 때 유독 많았다.

이외에도 1994년엔 서울 600주년을 기념한 타임캡슐 매장 행사가 열렸고 여기에 아래아한글 2.5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에 덧붙여 또 의미 있는 거사가 추진된 게 있다. 바로 반세기 가까이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조선 총독부 청사가 1995년에 헐린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나저나 세종로는 예나 지금이나 폭이 기겁을 할 정도로 넓고 아름답다. 저 차선 수를 봐라...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길이라 함.)
조선 총독부 청사는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후 일제가 경복궁 건물의 일부를 헐고 그 부지에다 지은 건물이다. 둥근 돔은 마치 옛날 서울 역의 외관을 떠올리게 하며, 1920년대에는 그게 고급스러운 유행이었던 것 같다. (조선 총독부 청사 1926년, 서울 역 1923년)

하지만 우리로서는 침략자요 민족의 원수들이 사는 곳으로 정말 치욕의 기억이 사린 건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위치조차 경복궁을 딱 가로막는 구도이니 말이다. 그 당시엔 조선 총독부로 들어가 요인 암살과 건물 파괴를 시도한 독립 운동가들의 의거도 물론 있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흠,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생각나네)와 더불어 테러 대상 1순위.

그 후 일제는 패망했다. 마음 같았으면 저 얄미운 건물도 당장 부숴 버리고 싶었을 것이고, 실제로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부터가 수 차례 이를 계획하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우리나라가 당시 얼마나 가난했던가. 근처의 경복궁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저놈만 곱게 폭파할 비용도 기술도 없었고, 당장 우리나라 정부가 사용할 건물도 없는 마당에 그 건물은 한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청으로 쓰이게 됐다.

세월이 흘러 인근에 정부 종합 청사 건물이 따로 지어지면서, 조선 총독부 청사는 잠시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을 철거해야 하느냐 그냥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보존하느냐를 두고 양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특히 한글 학회처럼 민족 성향이 강한 단체에서는 저 흉물을 하루빨리 철거해 달라고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청원을 해 왔다.

본인은 뭐 그렇게 풍수지리 같은 건 안 믿는다. 뭐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고 뭘 관통시키고 이런 거... 별로 관심 없다. 하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그때 조선 총독부 건물은 철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상술했듯이 경복궁을 가로막는 저 위치가 너무 부자연스럽고 우리나라 문화 유적에 대한 좋은 인상을 못 준다.
둘째, 차라리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서대문 형무소 같은 장소야 당장 피지배자들이 직접적인 고초를 겪었던 곳이고 보존 가치가 있지만, 저기는 어차피 한국 서민이나 독립 운동과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었으며 역사 교육 효과보다는 생뚱맞음과 민족적 반감만 더 키운다.

게다가, 믿거나 말거나, 서울을 방문한 일본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저기였다고 한다.
자기 민족이 한때 남의 민족을 관광-_-했던 본부로 반드시 관광 간다는 것. 어???

그래서였을까?
김 영삼 정권 때 본격적으로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 떡밥--독도 폭파 떡밥도 아니고--이 나돌기 시작했을 때, 일본 정부는 공문까지 보내어 우리에게 아주 정중하게 이렇게 제안했다.
"이건 그래도 옛날에 우리가 지은 건물이니, 우리가 알아서 곱게 해체해서 잔해를 본국으로 가져가 보관하겠다. 모든 과정의 비용은 우리가 일체 부담하겠다"고 말이다.

와.. 이건 무슨 전사자 유골 찾아 가는 것도 아니고...;;; 저 말에 무슨 뉘앙스가 깔렸는지는 빤히 보이지 않는가?
이 말에 빡친 김 영삼 대통령은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씹었으며, 도리어 대통령 특명을 내려서 서둘러 건물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일부는 폭파하고 돔 같은 일부 주요 부품(?)만 독립 기념관으로 가져가서 보존해 놨다. 그때 외인 아파트만 폭파한 게 아니다. ^^ 이것 덕분에 당시 대통령의 지지도가 크게 올라갔다는 후문.

이 일에 대해서
"그래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인데 왜 굳이 우리 돈까지 들여서 헐어 버렸냐?"
"그나마 철거도 일본이 알아서 완전 공짜로 해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왜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했냐?"
뭐 이런 말도 오가곤 했으나, 본인은 별로 영양가 있는 말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도 그렇잖아도 일본이 독도 망언 엄청 하던 시절이었으며, 이 때문에 사기업도, 공기업도 아니고 무려 정부 기관이었던 철도청조차 열차 내 일본어 안내 방송을 잠시 중단한 적까지 있었다. 과연 대인배이다. ㅋㅋ

참고로, 6 25 때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 총독부 청사는 무척 튼튼했다고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말하듯,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도로· 건물· 철도 따위가 오늘날까지도 끄떡없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졌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_=;;

성인이 되고 서울에서 좀 살아 보니까, 서울 지리를 아는 게 세상 문물을 접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걸 느낀다.
성북동이 어디 있는지, 서울의 도시 개발 역사가 어땠는지 까맣게 모르는 상태에서 <성북동 비둘기> 같은 시가 감흥이 와 닿을 수가 없으며,
동작동이 어딘지도 모르고서 동작동 국립 묘지 운운하는 반공 웅변 원고 외우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을 이용해서 경복궁 구경을 하고 왔는데 그 터에 옛날에는 저런 건물이 있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간다.

다음은 이 글 내용과 관련하여 덧붙이는 아이템들.

1. 일본이 저런 식으로 우리에게 무언가 슬쩍 제안을 한 사례가 나중에 또 있었다. 바로 1999년, 김 대중 정권이 김 종필 총리를 위시하여 웬 한자 병용 병크를 터뜨렸을 때의 일이다. 그 해 2월 11일에 서울에 온 일본 외무 장관 '고무라 마사히코'는 우리나라의 홍 순영 외무 장관에게 "기왕 한자를 병용할 거면 우리 일본식 한자를 써 주시죠? ㅋㅋ"라고 요청을 했다.
비단 이런 사례뿐만이 아니라, 또 민족 감정 같은 걸 배제하더라도 일본인의 관점에서야 한국이 한글 전용보다는 한자 혼용하기를 훨씬 더 원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 학회 같은 진영에서는 이 사실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며 그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대로 선생님의 글을 참고하자.

2. 그나저나 왜 자꾸 "일제 36년"이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뺄셈도 못 하나? 1945-1910은 35이지 36이 아니다. 게다가 8월 29일부터 8월 15일까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만 35년도 아니고 34년 350몇 일이다!
나라 주권을 외세에게 빼앗겨 지낸 게 뭐가 자랑스럽다고 무슨 사람 나이처럼 1을 덧붙이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5 08:27 2010/06/1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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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방송, 일본어

지금까지 공공 장소나 각종 교통수단 내부에서 셀 수 없이 다양한 안내 방송을 들었다.
안내 방송은 한국어, 영어가 대부분이고 가끔 중국어나 일본어를 들을 일도 있었다.

원래 철도는 무궁화호조차도 중국어와 일본어 방송이 나왔는데 KTX가 개통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2005~6년쯤부터 중국어와 일본어는 삭제되고 화면의 자막으로만 대체되었다.
하지만 2007년에 개통한 공항 철도는 중국어와 일본어 방송도 나오고 있으며, 요즘은 심지어 지하철도 한 2008년쯤부터는 이용객이 많은 중요 환승역에서는 중국어와 일본어 방송을 다시 해 주고 있다. 내 기억에 이거 원조는 서울 메트로이다. 그걸 나중에 코레일과 SMRT도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철도계에는 손님이나 승객 대신 '고객'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거 원조는 의심의 여지 없이 코레일이다. 서울 메트로는 그걸 적극 수용한 반면, SMRT는 조금은 더디다.
그 반면 SMRT는 행복미소라는 BI(브랜드 로고)를 만들고 스크린도어를 자체 기술로 굉장히 빠르게 도입해 냈으며, 역시 2008년 무렵부터 굉장히 적극적인 이미지 마케팅을 시작했다. 이따금씩 심심찮게 붙던 철도 노조의 살벌한 포스터를 더 볼 수 없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런 시도는 지하철 회사의 형님격인 서울 메트로도 1234 행복열차 BI를 만들어서 뒤쫓고 있는 중이다. (사실 서메는 자체 TV 방송까지 하고 있는 엄청난 회사이다)

코레일, 서메, SMRT 사이의 유저 인터페이스 신경전은 대략 이런 구도이긴 한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는 지금까지 남자와 여자 목소리를 모두 들은 적이 있는데
일본어는 굳이 철도 시설이 아니더라도, 어딜 가더라도 남자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일본어 하면 늘 나긋나긋 옥구슬 같은 여자 목소리이다.
일본어가 좀 여성스러운 언어라는 말도 어디서 듣긴 했지만 정확한 근거는 잘 모르겠고,
일본은 안내 방송에서 오로지 여자 목소리만으로 대외 홍보를 하기로 정책을 결정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이건 그냥 내가 일본 견문이 부족한 것이고 우연의 일치일 뿐인지도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0/02/18 09:50 2010/02/1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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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철도 이야기

2003~2004년의 역사적인 Looking for you 사건을 계기로 본인의 혼이 철도와 완전 동화해 버린 후, 지금까지 본인은 철도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써 왔다.
하지만 그 범위는 '우리나라'로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철도 노선, 철도 차량 계보, 심지어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구조, 지형, 도시 교통 양상 등등..

특히 그 분야에 그 정도로 미쳐 버린 사람치고는 의외로 일본 철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별로 없었다.
나는 솔직히 일본 문화와는 별 흥미나 인연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딱 하나 예외 케이스인 개그 만화-_-만 빼면 일본 애니나 게임 등과는 담을 쌓고 살아 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일본 철도에 대해서, 특히 신칸센을 위주로 개념을 좀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일본은 로봇, 자동차 쪽 기술이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철도도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앞서 있다. 철도가 문화이며 생활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은하철도 999 같은 애니도 나온 게 아닐까 한다. 건널목을 지나는 디젤 동차를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디카로 사진 찍는다거나, 심지어 아버지는 시각표 펼쳐들고 "맞은편 열차가 올 때가 됐다!" 하면 아들은 카메라로 촬영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인가!

시속 200km를 돌파한 신칸센 첫 개통이 1964년이요, 도쿄 지하철 첫 개통이 1927년이니, 철도 핵심 기술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지하철과 고속철이 모두, 한국보다 시기만으로 쳐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앞섰다. 그것도 전부 자체 기술과 자본이다.
1900년대 초, 조선을 식민지로 영원히 부려먹으려고 장기 계획을 짜면서도 맨 먼저 생각한 것은 바로 치밀한 지형 측량과 철도 건설이었다. 자기네는 협궤이면서 한반도에 간선 철도는 표준궤로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치떨리고 무서운 전략이었다.

일본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모든 교통수단이 좌측 통행이고 운전대가 우측에 있다. 100% 표준궤(1435) 일색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간선인 신칸센을 제외한 도시 철도는 협궤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인선 같은 762mm협궤는 아니고 1067mm인가 한다. 우리나라가 70년대에 서울 지하철용으로 일본 히타치 사에다 주문해서 도입한 전동차는, 스타일만 일본식이었지 사실 본토 일본에서도 안 쓰는 어마어마한 대형 전동차였다. 그것도 한 편성에 10량씩이나 후덜덜!

작고 가벼운 협궤 차량의 잠재적 위험성은 지난 2005년 일본 어딘가에서 난 전동차 탈선 추락 대형 사고에서 한 번 입증된 바 있다. 서울 지하철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도쿄에도 야마노테 선이라고 순환 지하철이 있긴 하지만, 차도 작고 노선 길이도 서울 2호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차량뿐만 아니라 노선도 한국의 지하철은 스케일이 굉장히 크다.

하지만 물리적인 규모와는 달리, 일본의 철도의 인프라는 한국보다 모든 면에서 스케일이 크다. 한국 코레일은 철도청이라는 정부 직속 기관이었다가 그나마 공기업화한 수준인 반면, 일본 철도는 민영화도 훨씬 일찍부터 더 개방적으로 진행됐으며, 사설 운영 기관도 많고 그래서 역마다 회사별 개성도 더 짙다(나쁘게 말하면 한국 같은 완벽에 가까운 환승 할인과 요금 통합을 기대하기도 어려움). 민영화의 특성상 일본의 철도 운임은 양국의 경제력을 감안하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더 비싸다. 그 대신 비싼 만큼 노선도 풍부하고 서비스나 정시성 따위도 한국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철도 여객 회사들은 운임 말고도 부동산, 임대업 등 다른 사업 분야 진출을 통해 많은 이윤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영국, 일본 같은 나라의 지하철 기본 운임은 한국으로 치면 거의 택시 기본 요금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한국처럼 철도와 버스가 경쟁하는 이상한 구조가 아니어서 간선 버스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장거리 간선 이동은 100% 철도이며, 철도가 좀 큰 사고가 나거나 파업이라도 하면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승객들은 진짜 교통이 마비되고 만다. 철도가 깊숙한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열차 지연으로 인한 지각은 학교나 회사에서도 공식 인정되는 면책 사유이며, 그런 지연 사고라도 나면 역마다 지연 증명서를 떼 주는 것도 지극히 보편화해 있다.

그럼 지금부터는 신칸센에 대해서 알아보자.
철도 동호인이라면 신칸센이 후지 산 아래로 달리는 사진을 한번 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속철 차량 후보로는 신칸센은 일찌감치 배제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같은 표준궤이지만 차체의 크기가 한국의 기존 철도역 구조와 맞지 않았던 것(신칸센이 더 컸음), 당시엔 신칸센이 해외 수출 사례가 전무했다는 것, 기술 이전에 시큰둥했던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늦게 개통한 만큼 우리나라 KTX도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세계 어느 고속철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시속 300~310으로 이 정도로 상시 주행할 수 있는 선로와 차량을 갖춘 나라는 정말 드물다. 일본이나 프랑스에서 성공했다던 시속 4, 500 달성은 시운전이며, 언제까지나 시운전일 뿐이다.)

신칸센은 차량 구조가 근본적으로 한국에서 아직 찾아보기 쉽지 않은 동력 분산식 전동차이다. EEC 내지, 좀더 까놓고 말하면 오히려 지하철과 비슷한 형태라는 것이다. 전동기의 구동음을 객실 아래 바닥에서도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선두차에도 새마을호 PP 동차보다도 좌석이 많다.
기관차+객차 구조에 너무나 절어 있는 한국 철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라 하겠다. 한국의 철도 운영이 그만큼 일제 강점기 이후로 변한 게 별로 없고 많이 경직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용적이기는 동차 형태가 더 실용적이며, 앞으로 공항 철도 직통 열차라든가 신창 급행 좌석형 동차 등, 우리나라에서도 전기 동차를 더욱 많이 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신칸센이 역에 정차해 있는 사진을 눈썰미 있게 살펴본 분이라면, 승강장이 전부 "고상홈"이라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랄 것이다. 분명 서울-부산 장거리급 열차인데, 열차가 생긴 모습도 그렇고 타는 방식도 마치 지하철 타듯이? 이것도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본 신칸센의 문화라 할 수 있겠다.

신칸센의 초창기 차량은 앞이 마치 구형 비행기(정확히 말하면 전투기)처럼 동그랗게 생긴 소위 "0계"이다. 처음에는 비주얼 스튜디오 .NET이라고만 불리다가 2003이 등장하면서 이전 제품이 2002라고 불리게 된 것처럼, 0계라는 숫자는 후속 차종이 등장하면서 서로 구분을 위해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

이 0계의 외형은 증기 기관차만큼이나 기차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된지라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경축 어디어디 전철 개통" 이런 현수막이나 전단을 보면 신칸센 0계 그림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후 신칸센의 디자인은 점차 개선되어 앞은 점점 새 부리처럼 더 뾰족해지고 세련되게 바뀌었다. 500계가 그 변화의 극치가 아니었나 싶다. 앞이 워낙 작고 뾰족한지라 선두차의 운전석이 뒤로 꽤 밀려나고, 덕분에 열차 탑승 정원도 약간 줄어들 정도였다.

그런데 신칸센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비싸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같은 노선의 국내선 비행기보다도 비싸며, 서울-부산 정도 거리의 편도 운임이 우리 돈으로 최하 10몇 만원씩은 깨진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출장은 신칸센으로!"이런 구호가 있을 정도로 신칸센은 일본인들의 주된 교통수단으로 쓰이면서 생활을 바꿔 놓고 있다.

KTX가 2004년에 첫 개통했을 때 경부선 이용객이 예상 수요의 70% 남짓밖에 안 됐다고, 정치적 실패라고 그때 언론이 떠들썩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안정화가 덜 돼서 그렇게도 욕 얻어먹던 그 시절에도 벌써 70%씩이나 탔으면 별로 실패는 아닌 것 같은데?" 싶기도 하다.

사실 2005년 코레일 출범 이후, 내가 보기에 새마을호의 몰락은 무척 안타깝지만 걔네들이 KTX로 영업을 못 하지는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 별 차이 없는 너무나 열악한 노선만으로 어떻게든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KTX를 타게 만들고 일반열차와 환승 연계가 잘 되게 하려고 애썼다. KTX 이용객은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3천억짜리 간이역이라고 엄청 욕 얻어먹었던 광명 역도 많이 회생하긴 했다. 극심한 초만원으로 시달리는 경인선 전철과 더불어 경부 고속선은, 코레일의 흑자 양대 산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KTX는 전기로 달려서 수송 원가가 매우 저렴한 데다, 속도도 빨라서 운임을 비싸게 받을 명분이 되고 한 편성으로 무려 900명 가까이를 태울 수 있다. 어차피 접근성 면에서는 자동차한테 경쟁이 안 되고 무궁화호급 운임으로는 수지도 안 맞으니 거기는 포기하고 코레일 경영자라면 그 누구라도, 뇌가 있다면 어떻게든 KTX에다 올인해서 이윤 챙겨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TX에 사운이 걸려 있다.

  (승객 입장에서는 싸고 좌석이 편한 새마을호와, 빠르고 비싼 KTX가 상호 경쟁하는 것을 원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 새마을호는 위상이 어중간하고 완전히 KTX 시다바리로 전락시키기도, 처분하기도 곤란한 계륵 같은 열차가 되었을 것이다.)

승객의 user experience 만족도 향상을 위해 고속신선 주행 최대 시속을 305에서 310으로 올려 잡은 것엔 나름 센스도 부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2단계 구간도 속히 개통되어 KTX가 대구-부산 고속도로도 멀찌감치 따돌리고, 서울-부산을 진짜 2시간대 이내로 어서 연결해 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개통 첫 해도 아니고 작년의 이용객이, 예상 수요의 70%는커녕, 7%였다던 공항 철도야말로 정말 어찌 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맑고 신선한 인천 영종도 공기를 서울로 수송하기 위해 만든 철도라는 비아냥까지 나돌았다고 하니. ㅜㅜ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09:48 2010/01/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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