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 관련 개념 복습

예전에도 신앙 관련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적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 내지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알량한 믿음이라는 제일 바보같고 나약한 자유의지가 전부이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외모나 스펙이나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 믿을 정도의 지적 능력조차도 없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자체를 할 수 없는 너무 어린 애들, 정신지체 박약아는.. 그냥 무조건 구원 받는다. 걔들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지만 그분을 거부할 능력도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본인은 이 개념을 편의상 '특례 구원'이라고 일컬어 왔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는 이 블로그를 찾아와서 이 글을 직접 읽을 정도의 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수학에다 비유하면 방정식의 근 중에서 그냥 너무 자명한 trivial solution과 비슷한 개념이다. 생물학으로 치면 무성 호흡/생식 같은..??

이런 논리를 따라, 본인은 어린아기들이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원죄 때문에, 혹은 유아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일단 전혀 믿지 않고 부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일체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선물 받으실 분?" / "저요, 저도 좀 주세요!"라고 응답하고 손 내미는 것도 자기의 의이고 선물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이상하게 몰아가는 설명도 배격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앞서 언급했던 '특례 구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립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까지 부르는 건 '글쎄요~'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밖의 문맥에서는 인간이 얼마든지 제 발로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지옥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사랑이나 공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못하면 정말 온갖 골때리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6· 25 대한해협 해전 때의 동해상의 북괴군 600명하고, 광주 5· 18 북괴군 600명을 헷갈리듯이 말이다.

직접적으로 동일한 문맥을 다루는 구절은 아니지만 눅 14:16-21 같은 비유 얘기를 봤을 때... 그리고 인류 역사와 지금 세상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추측하건대 미래에 하늘나라에 가 보면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는 특례 구원을 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긴 할 것 같다.

마치 증기 기관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서는 완전히 도태했지만 발전소에서 전력 생산용으로는 압도 다수인 주류이듯이(화력, 원자력이 모두 증기 터빈을 돌리므로!)...
선박이 장거리 여객에서는 비행기에 밀려 완전히 도태했지만, 일반인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물류에서는 여전히 본좌이듯이..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을 보게 되지 싶다. 민망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언론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어서 외면하고 있는 죽음이 이 세상의 음지에서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겠는가?

참 오랜만에 구원 기본 개념에 대해 복습해 보았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 많은데.. 시간과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구원만 받고 어리고 육신적인 신자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편이다.
자살은 인간이 저지르는 다른 끔찍하고 흉악한 죄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롭게 자결했다고 구원을 얻지는 못하듯, 세상 비관해서 혹은 고문 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살했다고 해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2. 성경과 세속 과학, 학문과의 관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만 하는 과학이라면, 그 알량한 방법론을 동원해서 신의 존재를 대놓고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사실은 교계에서 그렇게도 정죄하는 진화론을 절대무오한 진리라고 입증하지도 못한다. 그쪽 세계에서는 실험 결과에 따른 귀납적인 학설과 확률과 통계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과학과 종교?신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인 게 맞다. 그럼 창조니 진화니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건가? 마냥 안심하면 되냐? 그렇지는 않다.
과학 그 자체는 자연 계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이다. 잘 연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러나 거짓되이 과학이라고 불리는 학설이 대놓고 신을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고방식이나 연구 방법론· 패러다임을 잘못 적용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할 수는 있다. 이게 파괴된 신자는 진짜 볼장 다 본다.

"성경에 어차피 요런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성경의 존재 가치가 싹 부정되는 건 물론 아닐 거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기록돼 있는 엄청나고 극단적인 예언들도 그렇게 정밀하게 문자 그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거다. 비유와 교훈 등 우리에게 좋은 쪽만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면 된다. 히브리어를 보면 어떻게 그리스어를 보면 어떻고.."

요게 아주 위험하고 돼먹지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특정 부분만 분별 없이 무식하게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물의를 빚는 교파 종파에 대해서도 본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대안이 저런 지적 사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성경은 세상의 여느 학문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3. 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

성경에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다 마개를 씌우지 마라"(신 25:4, 가축이 적당히 자유롭게 먹으면서 일하게 해 줘라)가 의외로 신약에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된다. (고전 9:9, 딤전 5:18)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보상과 관련된 문맥에서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합 2:4에서 '자기'(his)가 빠진 바리에이션으로서 세 번 더 나온다. (롬 1:17, 갈 3:11, 히 10:37) 이에 덧붙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도 십계명인 출 20:12뿐만 아니라 신 5:16, 엡 6:2에서 반복되며, 복음서에서도 인용 형태로 마태· 마가· 누가에 거듭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뿐만 아니라 뭔가 좀 생뚱맞아 보이는 구절도 성경에서 톱급으로 자주 거듭 반복해서 인용된 게 있다. 바로 시 110:1이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 연이어 copy & paste 수준이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행 2:35와 히 1:13에서 추가로 나온다. 거기에다가 히 10:13도 재차 언급이라고 볼 수 있으니.. 횟수가 가히 압도적이다.

"소의 입마개"만치 인간의 실생활과 관련이 있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만치 보편적인 인륜을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믿음으로 살리라"만치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지도 않은 저 말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한 말이고 문맥이 뭘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저 구절의 모든 문맥과 의미를 강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만 말하자면 저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에게 한 말이다.
성경은 도덕 경전이나 역사 기록이나 복음과 구원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부가적인 2순위 이하의 목표일 뿐이다. 그 전에 하나님의 주 관심사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통치임을 알 수 있다. 세상 용어를 동원해서 표현하자면 다분히 정치적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온갖 시사· 종교 난제들을 가져와서 그분에게 질문을 했다. (부활의 때에 누구 아내? 율법에서 가장 큰 명령? 카이사르에게 납세? 등등등~) 떠보고 트집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든, 아니면 정말 몰라서든지..

예수님은 그런 것쯤은 막힘없이 전부 즉답을 하셨고 사람들을 데꿀멍 시켰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물으신 건 단 하나였다.

"그럼 이제 내가 니들에게 하나 좀 물어 보마. 너희는 내 정체가 정확하게 무엇인 것 같냐? 시 110:1을 봐. 다윗이 자기 비속 후손을 보고 '주'라고 존대해서 부르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 뒤로 사람들은 버로우 타 버리고 더는 예수님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시 110:1은 그 문맥에서 인용되었으며, 그게 복음서에 3회 반복해서 기록되었다.

또한, 나중에 배반당하고 체포된 뒤의 행적도 생각할 만하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다른 온갖 쓰잘데기없는 거짓 고소들에는 하나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너 정체가 뭐냐? 넌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는 정말 솔직 담백하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마 26:62-65, 막 14:60-63, 눅 22:66-71)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기만을 바라셨다. 예수의 부활조차도 곧이곧대로 믿기 싫고, 그래도 역사 팩트와 후폭풍 증거까지 송두리째 외면할 수는 없으니 제자들의 자칭 예수 부활 "체험" 사건 이 따위로 둘러대는 짓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슨 "P와 NP는 과연 동일할까?", "리만-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근은 실수부가 정말 몽땅 1/2일까?", 아니면 "광주에 과연 북괴 공작원들이 잔뜩 침투되었을까?" 같은 걸 묻지 않으신다.
그런 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답을 구하든가 말든가 하면 되고, 그 전에 정말 똑바로 알아야 하는 건 그리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너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나이다.

요한복음은 시 110:1의 직접 인용은 없지만 기록 목적이 독자들 예수 믿게 하는 것(요 20:31)이라고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분명하게 대놓고 적어 놓았다.

4. 신앙 생활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것

예수 믿고 구원받은 뒤의 신앙 생활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유리하게 짜인 것도 있고 불리한 구조로 된 것도 있다.
유리한 것은.. 뭔가 좋은 것을 사람이 "먼저" 받아서 동기 부여를 받은 뒤에, 그 다음에 사람 쪽에서 베풀고 헌신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구도라는 것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고 나서 침례를 받든지 믿음의 선한 행위를 하든지 성장을 하든지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일단 쉬고 나서, 달콤한 은혜의 말씀부터 먹고 나서, 즐기는 것부터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을 하고 헌신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 기업 중에 입사 후에 월급이건 일당이건 보수를 받고 나서 다음부터 일하는 곳이 있던가? 세상에서야 소득 주도 성장은 마치 "일단 서울대부터 보내 주면 나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같은 미친 개소리이지만.. 성경적인 신앙 원리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종 목적지, 만렙, 해탈의 경지라고 말하는 '구원' 내지 성인 성자(saint) 칭호가 이 바닥에서는 그냥 기본으로 따 놓은 당상이다. 근성 충전을 위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 이 아니라 일단 구원부터 받고 시작이다.
창세기 1~2장의 천지 창조만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6일간 일하고 나서 일곱째 날이 쉬는 날이었지만, 아담과 이브는 만들어지고 결혼하고 honeymoon부터 즐긴 뒤부터 동산 관리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얘기도 있다(눅 10:38-42).

그 반면, 인간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는 것, 혹은 이것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 사항도 있다.
신앙 생활이란 건 본질적으로 당장 보이고 들리는 대로, 편한 대로 직관적인 대로, 남들 다 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다. '바보 같아 보이고 손해 보는 듯이 보이는 좁은 길 역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결단과 행동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둬서 물리적인 여건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을 하나님이 굳이 수습해 주고 undo 해 주시는 경우 역시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생활이 무슨 공밀레 같은 신밀레 열정페이 착취는 절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성· 성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 단단하고 입에 쓴 말씀, 실행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 당하고 겪어 놓았다. 그때는 이런 믿는 구석으로 요렇게 하면 된다고 선례, 모범, 샘플이 마련돼 있다.

어려운 시험 문제나 과제에 대해 원리, 예제, 유사한 기출문제, 힌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러나 대놓고 정답을 가르쳐 주는 일은 결코 없으며, 하물며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해 줄 리는 절대 만무하다. 모든 과제는 자신의 문장을 써서 직접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절대로 '안알랴줌'인 것의 대표적인 예는.. 세대 경륜 급의 큰 그림 이상으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미래 예언,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이다. 나에게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는 완전 랜덤 케바케이다.
그것만 좀 알면 딱 죽기 직전에만 예수 믿고 구원을 먹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꼼수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걸로 농락당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다.

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비교해 보면.. 신앙 생활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어떤가?

5.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

  • 군대는 일반적으로 최악의 범죄라 여겨지는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하지만 자기 집 지키느라 불가피한 정당방위도 허용되는 마당에, 하물며 나라를 지키느라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형법상의 살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로 숭고하고 영예로운 일이다.
  • 국정원 같은 첩보 기관은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이이제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절대악을 퇴치하기 위해 필요악 역할을 맡고, 작은 악을 동원해서 더 큰 악을 예방하는 궂은일을 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건 나쁜짓이며, 공산주의자 빨갱이들이나 사용하는 수법(거짓말, 위장 침투..)으로 여겨진다.
  • 끝으로 종교는 겉으로 언뜻 보이는 결과만 보자면 정신승리, 진영논리,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분야이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라는 과학 팩트는 "그럼 최초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를 설명하지 못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무한순환을 끊으려면 결국 처음에 한 번은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인 복 받고 부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적인 박해 지역이 아닌 한, 무조건 쫄딱 망하고 거지 되고 감옥에 갇히고 죽지도 않는다. 구원받아서 신분이 바뀌는 것과 개인이 물질적으로 잘 되거나 못 되는 건 별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건전한 경제관과 시스템이 갖춰져서 잘살게 되고 중산층이 늘고 부강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게으른 개인을 일일이 다 먹여 살려 주는 게 아니다.

예수 믿어서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영적 복을 받고, 설령 가난하더라도 그 처지만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 주님께서 내게 지금 당장 허락하신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건 별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남들보다 가난하지만 난 영적으로는 부자.." 영이건 정신이건 이것도 정신승리라면 정신승리이다. 하지만 이건 아Q의 정신승리와 달리, 성경적인 근거와 보장이 돼 있는 건전한 정신승리인 것이다.
상대적 빈곤에 연연하는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져 있지 않으면 어차피 하나님이 물질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 주셔도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면서 불만족 불평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1 08:33 2019/04/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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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행위의 관계

세상의 다음 법칙들을 생각해 보자.

  •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무료 유인물이 공짜라고 해서, 거기 있는 유인물들을 몽땅 혼자 가져가도 되는 건 아니며,
  •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이 공짜라고 해서 자기 집 쓰레기를 몽땅 가져와서 거기에다 버려도 되는 게 아니다.
  • 뷔페가 음식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고 해서 딴 그릇에 담으면서까지 막 퍼 가도 되는 건 아니다.
  •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무임 승차권조차 아예 없이 개찰 구역 안으로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 남이 만든 어떤 소프트웨어가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저작권 자체를 사칭해도 되는 건 아니다.
  •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남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와해시킬 자유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엔 이와 비슷한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것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finally..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혼의 구원이 공짜이고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서 □□□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안에 들어갈 말은 건전한 예수쟁이라면 누구나 유추 가능할 것이고. (롬 6, 엡 2, 고전 8:2, 갈 5:13 등)

다시 말하지만, 크리스천은 구원받기 위해서, 혹은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다른 사람이나 세상 정세를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선과 보상의 기준을 보고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 차원에서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믿음의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철덕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우리나라 철도의 모든 것을 줄줄 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자연스럽고 지당한 이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Q. 너는 철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일 테냐?
A. 새마을호 객실에서 흘러나왔던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악보로 만든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입증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복수 정답이 존재함)


이렇듯,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lexical하게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진술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실질적인 내용은 일맥상통하며 모순이 아니다.
그 정도 모순도 분간 못 할 정도면 성경 못 읽는다. 성경엔 그거 말고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이 차고 넘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3 08:29 2015/06/0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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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구원받았다면서 행실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 왜 이리 많나?
  • 거짓/페이크 영접 기도로 인해 양산된 거짓 구원 확신, 가짜 크리스천에 대한 트라우마
  • 신이 어떻게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지옥에 보낼 수 있나?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왜 이리도 많나?
  • 신이 존재한다면서 정작 세상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왜 이렇게 악이 가득하나?

등등의 이유로 인해, 세상에는 일명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곤란해 보이는 상황이 무척 많다.
그렇다 보니 이 모순을 풀려고 결국 크리스천들은 마치 좌· 우파마냥 내부적으로 크게 두 극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a. 사람마다 구원 여부는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애초에 다 정해져 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대해 인간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vs

b. 아무래도 예수님을 입으로만 믿고 시인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죄로부터 완전히 회개한 뒤에 자발적인 선행이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미 받은 구원도 이를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a는 흔히 칼빈주의, 예정론이라고 불리며 b는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는 둘 다 비성경적인 양극단이다.

1.

예정론의 매우 큰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이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완전 혼동하여, 죄를 무슨 죄인 역할극 정도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북의 김씨 부자가 인민들을 학살한 것도 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놨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니 이런 신성모독적인 발상이 어디 있는가? 그런 신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죄가 역할극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아무런 찬양받을 가치가 없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역할극에 불과할 것이다.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지옥도 무슨 가상 머신 매트릭스 샌드박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천차만별 불공평한 듯이 배분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지위나 위상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태어나는 애와 북한에서 태어나는 애의 인생이 갈리고, 순교하는 신자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신자의 인생이 갈린다. 사람마다 신분과 빈부귀천이 갈린다.

그러나 개인의 구원 여부는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공평하다. 송명희 시인의 <나> 기억 안 나냐?
예정되어 있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향후 지위 그 자체뿐이다. 미리 아심(read-only)을 예정(write operation)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령, 성경의 파라오는 재앙을 자초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풀어 줬어도 충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인간 백정 인간 악마라 불리는 북한 김 정은이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당연한 말 아닌가?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이 아무리 대가 없이 행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 해도,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손을 내미는 것조차 선물 받는 것에 대한 대가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만,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은혜는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못 하는 어린아기가 받는 특례 구원에나 적용되는 조항일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 전지전능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 있는 현상일 뿐이다.

난 정말,
하나님이 공의롭거나 전지전능하지 않고 새디스트여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지전능하긴 한데 일부만 사랑하고 택했기 때문에 열외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둘의 차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멍청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아주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둘러대는 것만큼이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빼고서 지옥을 설명하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여담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뭐 어쩌기로 하신 것은, 일종의 가속(acceleration)이다. 그 사람을 보호하지 않고 그가 극단으로 치우치고 스스로 막장으로 빠지게 내버려 둔 것에 가깝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동차나 비행기의 무거운 조향타를 움직일 수 없어서 파워스티어링 유압의 도움을 받는데, 하나님의 역할은 그런 유압인 것이다. 사람이 조향 자체를 무슨 pre-programmed된 로봇 조종 받듯이 하는 건 아니다.

2.

한편, 칼빈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극단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교리를 아예 대놓고 부인하면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다. 구원의 결과로서 나오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혼동하여 이런 오류가 생긴다. 영어로는 fruit / root of salvation이라고 표현한다.

행위가 덧붙은 구원 획득 내지 구원 유지 교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뭔지 모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의 수준이 뭔지도 모르는 극도의 무지의 소치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영접 기도를 이런 식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예수님, 저는 내가 죄인임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삶을 모조리 청산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술, 담배, 마약 다 끊고 예전의 일체의 방탕하던 생활 방식을 다 그만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성결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아멘.”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자기가 예쁜 짓 해서 들어갔다가, 심한 사고 치거나 나쁜 짓 하면 짤리고... 저런 식으로 믿을 거면, 예수 믿는 게 부처· 마리아를 믿거나 심지어 철도교에 입교하는 것과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선행이 결과론적으로 아무리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이런 교리의 누룩은 우리가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술· 담배, 마약이 나쁜 줄은 솔직히 불신자도 다 알고 그런 건 자기 깜냥과 재량껏 끊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걸 그만뒀다는 게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뭐가 대수란 말인가?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 구원을 요청하며 따라야 할 고백은 이것밖에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내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걸 믿습니다.” (단, 정말 진심으로 말할 것).

인간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한 나의 처참한 죄를 사하기 위해서, 공자· 맹자나 부처나 마리아가 아니라 2000여 년 남짓 전에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그 역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시인하는 게 참 회개이고 기독교의 구원 조건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 구원부터 받은 뒤에야, 물리적인 죄로부터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원동력은 성령님에 의해 차차 생겨난다. 철도는 교통 체증으로부터나 구원할 수 있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예수님 말고 다른 사대성인 같은 걸 이런 식으로 믿는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 같은 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 구원은 나를 담보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담보로 유지되는 거다. 내가 선행으로 구원받은 게 아닌 것만큼이나 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넘사벽 급의 차이인 것이다.

구원 절차가 달랑 '믿음' 하나밖에 없고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믿음'이란 게 뭔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자꾸 '행위'를 갖다 붙일려고 하는 것이다.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저렇게 제대로 믿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이 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물론, 정말 구원받았는데도 엄청 육신적인 신자도 있고 회개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신자도 있다. 신자의 영적 성장은 아주 느리고 답답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다. 행실만으로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기란 몹시 어렵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이것은 우리에게는 일면 불리한 면모이다. 그것만 바로 알 수 있으면 교회에서 불순분자를 훨씬 더 수월하게 솎아 내고 각종 분쟁도 시스템의 힘만으로 예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못 참겠다고 신자들을 거짓 교리로 겁주고 협박하는 건 목사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갖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되듯, 혼의 구원과 관련된 교리로 장난을 치지는 말아야 한다.

3.

믿음과 행위 사이에 모순처럼 보이는 관계 문제는 크리스천 사이에서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답이 분명히 나와 있는 아주 쉬운 문제인데, 그걸 모순이 많은 이 현실에 적용하기가 껄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어떻게 '없음'이 있지? 완전한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사항이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바른 관념도 갖추어서 내가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면모를 믿고 있는지를 잘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믿는 종교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느라 논리적으로 빼도 박도 못할 치명적인 모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절대무오하다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겠는가?

본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오로지 믿음'이 모두 반영되어 있는 위와 같은 해석이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제시하며, 이 모델로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참고 기다리면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는 것은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은사주의와 거짓 영접 기도를 비판하면서 선행과 회개를 강조하는 폴 워셔 목사의 경우, 개념상 골수 알미니안주의일 것 같은데 실은 칼빈주의자이다. 아무나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주권 구원이 결국 행위 구원이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계산 과정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결과는 일치한다고나 할까. 이 점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12 08:12 2014/04/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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