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콩라인이지만 특이한 인물

성경의 창세기는 바벨 탑 사건 이후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이삭-야곱 3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의 관점이 세상 전체에서 특정 민족으로 범위가 확 좁아진다.
아브라함은 아무 보이는 증거 없이도 하나님 말씀만 따라 뜬금없이 고향을 떠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만으로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를 만들었다.

그들 사이에 낀 이삭은 애비나 자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삭도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하고 놀라운 구석이 있다.

(1) 이삭은 일단 기적적으로 탄생했다.
아예 처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님 정도로 드라마틱한 건 아니지만, 폐경 불임 여성에게서 갑자기 아기가 짠 태어난 것만으로도 21세기 현대 의학으로 불가능한 일이 이뤄진 것이었다. 생명이 없는 목재 지팡이에서 새순이 돋은 것과 동급이다.

(2)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달리, 개명 조치를 받은 게 없다.
아브라함은 개명 후의 이름이 유명하고, 야곱은 개명 전 이름이 더 유명하다. 야곱의 개명 후 이름은 부족·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확장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3) 그리고 이삭은 외아들로 태어나서 나름 죽다 살아났고, 부모가 정해 준 여자하고만 평생 살았다.
애비 아브라함은 본처와는 그렇게도 자식이 안 생겨서 한때는 몸종 하갈까지 동원할 정도였다.
그러나 본처가 죽고 나서 재혼한 여자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녀가 잔뜩 생겨서 기존의 이스마엘/이삭 구도가 무색할 지경이 됐다. (창세기 25장 앞부분 참고)

아브라함은 재력이 풍부한 족장이었으니 아마 많이 어린 여자와 재혼한 게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추측만 한다.;;
손자인 야곱은? 뭐 처음부터 본처가 친자매 두 명이었고, 거기에다 첩도 있어서 서로 출산 경쟁을 했다.
이런 이야기가 이삭에게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삭은 리브가 말고 다른 아내, 그리고 에서와 야곱 말고 다른 자녀 얘기가 적어도 성경에는 전혀 없다. 전근대 시절의 대가족이 아니라 현대의 핵가족을 보는 것 같다.

(4) 또한, 이삭은 장가를 40세에 갔고 저 쌍둥이 아들들을 60세에 얻었다고 한다.
얘들도 애비인 아브라함 못지않게 무자녀 기간이 길었는데.. 이삭은 아브라함 부부처럼 첩을 동원한다거나 하지 않고 이 문제로 인해 중보기도를 하고 하나님에게 호소를 했다. (창 25:21) 애비보다 믿음이 훨씬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비록 외국 타지에서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잔머리는 이삭도 아버지를 똑같이 따라했지만 말이다.

2. 외아들을 번제 헌물로 바치는 시험

뭐, 이삭의 삶에서 제일 드라마틱한 순간은 22장 번제물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한다면 창 22:8의 대사는 이렇게 만들면 딱이지 않겠는가?

“어, 아버지, 오늘은 장작과 불만 챙겨 가고 제물이 없는 거 같은데요?”
“아들아~ 번제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직접 예비해 주실.. 아 아니,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실 거야.”

성경 번역할 때야 provide himself a lamb 문장이 영어 4형식이니 5형식이니 한 형태만 골라잡아야 하니 논쟁하고 싸운다 치지만.. 관련 2차 창작물에서는 이런 식으로 두 의미를 모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창작물이 성경의 뉘앙스를 반대로 왜곡한다거나, 단순히 성경에 없는 내용을 뇌피셜 창작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기존 의미를 보충 보강까지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물론 한참 나중에 현장에 도착해서 제단이 다 세팅된 뒤엔 아브라함이
“아들아.. ㅠㅠㅠㅠ (으허허허어어엉) 오늘은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물로 바치라는구나!!”
이렇게 절규했을 것이다. 이건 거의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한 명이 오늘 밤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렇게 비통하게 선언하시는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예에에에에...??? (곧 평정심을 되찾고) 네 아버지, 알겠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를게요."
(아들의 너무 초연한 모습에 더 ㅎㄷㄷ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 게 있으니 네가 죽어서 번제물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너를 반드시 다시 살려주실 거다. 이 애비는 그렇게 믿는다.. ㅠㅠㅠ 그럼.." (칼을 번쩍 들고 아들을 찌르려고 할 때)

"어이 잠깐 스톱! 아브라함, 아브라함아!" 이러면서 분위기 급반전. 그 이후 이야기는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예배를 마치고 다시 자가용이 있는 곳으로 돌아올 때의 심정은 정말 어땠을까 싶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겠는가? 특히 이삭은 그야말로 죽다 살아나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거나 다름없었을 텐데.
이러니 이삭의 인생은 누구누구 예표로 가득하다. 이 사람이 장가 간 것도 평범한 결혼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창세기 24장이 그렇게도 길게 쓰여 있는 것이지 싶다.

3. 상남자 에서,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overdrive

(1) 앞서 거론된 바와 같이,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있었다. 얘들은 외모와 성격이 극과 극인 걸 보면 생물학적으로 일란성은 아니고 이란성이었지 싶다.

이삭은 번제물이 되라는 요구에 순응하고 결혼도 100% 전적으로 부모가 정해 준 여자와 했을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저런 성품과 별개로 상남자 기질도 있었다. 그래서 두 아들 중에서 산적 같은 마초 상남자 기질이 있는 에서를 야곱보다 더 좋아했다.

에서는 창세기 27장에서 아버지 이삭의 부탁을 받고는 짐승 사냥을 하러 평소 애용하는 엽총 샷건을 척~ 메고 오프로드용 SUV를 몰고 떠났을 것 같다. 아니면 할리데이비슨 바이크.. 터미네이터나 듀크 뉴켐을 생각하면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나서 물이 좀 빠졌는지 주변 상황을 알아보려고 방주 뚜껑을 열고는 드론을 날려보냈을 것 같고, 리브가는 엘리에셀 일행의 차량에다가 세차와 주유를 일일이 직접 해 주는 것 같은가? 에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듀크..??
아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는 Duke (족장, 추장, 공작 등등)라는 칭호를 하필 에돔.. 즉, 에서의 후손들에게만 유일하게 쓰고 있다. 창세기 36장이 대표적인데.. 이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연결고리인 것 같다!!!

(2) 그 다음으로, 세월이 흘러 창세기 30장 이후로 넘어가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을 읽어보면.. 그는 형에게 환심을 사려고 알라딘 Prince Ali 같은 퍼레이드를 벌이고 별 생쑈를 한다. 그래도 형은 과거의 팥죽 장자권 사취 사건은 쿨하게 잊었는지 동생을 반갑게 대해 줬다.
그 다음에, 이들이 나중에 같이 어디로 가려 할 때 야곱이 한 말 중에는 창 33:13이 있다.

아이고 형님도 아시다시피, 제 일행에는 연약한 어린애들이 많고 가축들도 엄청 많아서요.. '억지로 무리하게 끌고 가다가는' 다들 하루도 못 버티고 퍼지고 죽을 수도 있거든요~~

억지로 무리해서 빨리 몰고 가는 게 영어 성경에서는 overdrive라고 표현되었다. 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인데, 이게 자동차 기술 용어로는 다른 의미로 아주 친숙하다.

바로 엔진 크랭크축이 도는 것보다 바퀴 구동축이 더 많이 돌도록 기어비를 설정하는 것..
심지어 크랭크축과 구동축의 직결도 아니고 구동축이 더 많이 도는 걸 overdrive라고 한다. 보통은 변속기에서 최고단 기어가 overdrive 상태이다.

자동변속기는 일반적으로는 엔진의 토크가 허용하는 한 가장 높은 단을 설정한다. 그래야 최저 엔진 회전수(=연료 소모)에서 최고 속도 최고 성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이렇게만 하면 차도 힘이 딸리고 가속이 잘 안 돼서 운전자가 답답할 수 있다.

저 창세기에서 오버드라이브의 부작용은 애나 가축이 퍼지고 죽는 것이었는데, 차에서 극단적인 오버드라이브란 정지 상태에서 2단에서 출발 같은 식으로 엔진에 무리를 주고 부르르르 떨리게 하고 심하면 시동을 꺼뜨리는 것이다. 이러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컴퓨터로 치면 오버클럭에다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자동변속기 차량에는 '오버드라이브를 끄는' 옵션 버튼이 있었다. 이건 최고단을 봉인해서 최대 n-1단까지만, 기껏해야 1:1 직결까지만 변속되게 하는 기능이었다.
개념을 알고 보면 간단한데, 말을 거창하게 '오버드라이브'라고 하니까 뭘 오바한다는 건지 잘 와닿지 않는다.;;

파워 버튼, 오버드라이브 버튼, 2나 L단 이런 게 자동변속기에다가 "무조건 최고단으로만 동작하지 않게 하는" 예외를 제공하려고 존재했던 기능이다. 엔진 브레이크를 써야 할 때, 오르막 오를 때, 앞차 추월할 때처럼 고단보다는 고RPM이 필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는 자동변속기도 기술이 발달하고 저것들을 몽땅 통합하는 준수동 스포츠 모드라는 게 등장하면서 자질구레한 버튼들이 없어졌다.
내 차도 스포츠 모드로 바꾸면 보통은 현재 진행 중인 단수가 그대로 표시되는데, 최고단 N단은 N-1단으로 반드시 바뀐다. 이게 개념적으로 '오버드라이브 끄기'를 구현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 상태에서 다시 +를 눌러서 N단으로 되돌릴 수는 있지만..)

이상. 성경과 자동차가 이렇게도 연결된다. ㄲ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5/12/07 08:35 2025/1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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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엔 예수님의 생애를 주제로 다룬 ‘킹 오브 킹스’라는 만화영화가 개봉하네 마네 했다. 알고 보니 그거는 북미 지역 개봉 기준이었고, 얼마 전인 7월 중순엔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정식 개봉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게 잘 봤다는 소감도 있고, 뭐든지 문제삼고 꼬투리 잡는 프로불편러 관점의 비판도 있다.
유통사? 제작사가 몰몬 교 신자 소유라느니, 그리고 작품에서 액자 바깥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역사 인물 찰스 디킨스(19세기 영국의 소설가)가 유니테리언 신자라느니.. 그래서 작품에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묘사가 부실하다느니 뭐라나..?

글쎄, 어린애들 눈높이의 만화영화에다가 조직신학 강의를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뭔가 부족한 건 있을지언정, 대놓고 해롭거나 잘못됐거나 반성경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영상물에 대해서는 너도 나도 ‘꼭 봐라 두 번 봐라’ 치켜세울 필요도 없고, 일부러 공포증 수준으로 ‘워이 워이’ 멀리할 필요도 없는 듯하다. 그냥 각자 알아서 보면서 분별하면 되지 않겠냐 말이다.

찰스 디킨스는 나도 지금까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알고 보니 ‘올리버 트위스트’라든가 ‘크리스마스 캐롤’(스크루지 사장님이 나오는)을 지은 영국의 정말 엄청난 대문호이더라. 마술사 ‘데이비트 카퍼필드’도 바로 저 사람이 지은 유명 소설의 주인공 이름에서 딴 예명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예수 영화에 굳이 왜 등장하는지, 더구나 한국인 감독인 작품에서 왜 들어갔는지는 좀 의문스럽긴 하다.

이 글에서는 킹 오브 킹스를 논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던 썰을 좀 풀어 보고자 한다. ㄲㄲㄲㄲㄲ

1. 시험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로 이끌려 들어가서 40일을 금식하고 마귀로부터 몇 가지 테스트를 받았다. 물론 그분은 모든 시험에 FM 답안을 내면서 모조리 통과하셨다.
이건 예수님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릅니다”를 제대로 숙지했는지?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공명심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충실하게 해낼지, 초자연적인 기적 권능을 정말 필요한 일에만 적절히 사용할지를 확인하고 인증받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가령,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을 빵으로 변환해 보시지? ㅋㅋ”라는 시험을 통과할 역량 정도는 돼야..
훗날 실전에서 “니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면 한번 자력으로 못을 뚝 뽑아내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ㅋㅋ” 이런 도발에 욱하거나 낚이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와 빵 5조각을 5000개로 불려 놨더니 저 군중들이 좋아서 난리 치는 거 봐라. 이 지지자들을 이끌고 당장 혁명 일으켜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이 돼 봐라~~!” 이런 꼬드김은 어떤가?
마귀가 제안했던 시험 중에도 딱 이런 범주에 드는 게 있었다는 걸 기억하자.

그런데 저런 시험에서 곧장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주 네 하나님만 경배하라 / 그분을 감히 함부로 떠보지 마라” 이런 말씀을 인용해서 답변을 할 정도라면..
예수님은 40일 광야 외박 중에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아주 깊이 묵상했을 것이고 신명기 같은 책은 머리에 몽땅 다 집어넣은 상태였지 싶다.

그럼 성경 말고 잠시 딴 얘기를 꺼내겠다. 1969년, 옛날에 아폴로 10호 미션 때 말이다.
이건 인간이 달에 착륙하기 직전 코앞의 미션이었다. 달 착륙선이 달 상공으로 살짝 하강만 하다가 다시 올라가서 사령선과 합체하고 귀환할 예정이었다.

10호의 달 착륙선에 탔던 승무원 2인은 얼마나 들떴겠는가?
이들 중에 공명심에 들떠서 절제하지 못하고 객기 부리고 일탈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구 우주센터와 사령선으로부터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달 착륙선을 달에 완전히 내려앉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 후대의 11호 승무원이 아니라 자기들이 인류 역사상 달에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이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에서 지구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달에 뼈를 묻게 됐을 것이다. 10호에는 달 착륙선의 지상 발사 기술은 아직 적용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들만 죽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NASA는 한바탕 뒤집어졌을 것이다.
안 그래도 소련과 경쟁 중이었던 냉전 시국에, 후대의 유인 달 탐사 계획도 줄줄이 꼬였을 것이다.
그래서 극한의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공과 사를 구분하며 임무를 충직하게 수행하는 군인 기질이 심지어 성경에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물론 “나는 명령에만 따랐을 뿐이다”가 악의 평범성 수준으로 악용돼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하물며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미션을 수행하던 예수님에게도 저런 자질 검증이 꼭 필요했지 않겠나 싶다!

2. 무술 수련

성경에서 사도행전 9:2는 뭔가 예수 믿는 거를 '길'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말 성경 중에 개역과 한킹은 이 구절의 way를 '도'라고 번역했다. "이 道에 속한 사람들"..

창세기 24:63은 이삭이 저녁에 뭐 요가나 파륜궁이나 영춘권 수련이라도 하러 들로 나간 것 같다. ㄲㄲㄲㄲㄲㄲㄲ
또, 요한복음 3~4장도 있다. 이런 걸 읽어보면 성경도 약간은 동양철학(??)이나 권법서(!!!)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요한과 예수님이 무술 사범이 돼서 제각기 도장을 차렸고, 상대편 제자들을 견제한다.
"요한은 제자들한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다는데 우리도 좀 가르쳐 주세요!" (눅 11:1) 이건
"싸부님 우리한테도 이런저런 권법 좀 가르쳐 주세요~ 네?" 같다.

마 17:16에서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건,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동네 양아치한테도 얻어터지고 돌아와서 싸부님한테 수련이 부족하다며 혼난 거고.. 뭐 그렇게 대응이 된다ㅋㅋㅋㅋㅋㅋ

내가 어떨 때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카 퍼레이드를 떠올리고, 베드로가 밴을 운전하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자동차가 아니라 무림 버전이 등장했다.
물론 이건 개드립 쪼크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라~!! 예수님을 '주' Lord가 아니라 단순히 스승, 싸부 master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의 현대인이 창 24:63을 읽으면서 저런 느낌이 개인적으로 드는 건 자유이지만.. 아예 성경 번역을 그런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성경에 따르면 이때 이삭은 '묵상'하러 나갔다. 시편 19:14 '나의 마음의 묵상이' 할 때의 그 묵상 말이다.
뭐 어디 이상한 데서 말하는 것처럼 '명상, 참선'을 하러 간 게 아니다.

3. 나머지 여러 패턴들

(1)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이 뭔가 부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온 경우는 다음과 같다.

  • 그놈의 안식일 드립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내내 그분을 따라다닌 트집거리였다. 초자연적으로 사람이 살아난 기적을 보고도 “당신 지금 무면허 의료행위 했지? 의료법 위반이야!” 이딴 반응을 보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 “내가 곧 아버지 하나님과 동급”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많이 빡쳤고, 심지어 그분을 죽이려 했다. 요한복음 5~10장이 온~통 이 얘기밖에 없다.
  • 당대 종교인들의 위선과 악행을 폭로하고 교리적 오류를 지적하시자 팩폭을 당한 당사자들은 빡돌아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백성들 눈치를 보느라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 눅 16:14를 보면 성경의 다른 논조와는 사뭇 다른 피드백이 등장하는데,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에 탐욕스러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허이구~ 지가 가난하니까 괜히 부자들 욕이나 하는 거지? ㅋㅋ” 이런 반응을 보인 것에 가깝다.

(2)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책망하고 심지어 분노도 하셨다.

  • 제자들의 불신: 특히 변모산 이후 사건 때 제일 크게 실망하신 듯.. 어지간한 중대장 이상이었다.
  • 성전 장사꾼들: 두 번이나 크게 분노하셨다!!
  • 아까 (1)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악행: “이 독사 같은 xx들아!”라는 폭언까지 나왔다.

(3)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군 패턴은 다음과 같다.

  •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변모산 이후, 부활 직후 엠마오 제자들에게, 물 위를 걷다가 도로 빠진 베드로에게. 제일 흔한 책망이었다.
  • 베드로에게는 아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요한과 야고보에게는 “니가 지금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모르는구나” 이건 궁예 식으로 말하자면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다는 급이었다.

요런 것들을 조목조목 분석하고 분류해서 “주님의 빡침” 같은 설교나 강해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성경의 예수님께서 인간의 어떤 면모에서 가장 실망하고 분노하셨는지에 대한 답이 나오니까 말이다.

(4) 낯선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마귀 쫓는 것에 대해서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9장 끝부분에서는 “우리의 적이 아닌 진영은 다 우리의 친구다. 그냥 냅둬라” 라고 반응하셨다.
  • 마 7:22-23에서는 그런 행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생깔... 수 있다고 경고하셨다.
  •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시전하는 사람이 가짜이다 보니 그 사람이 마귀에게 역관광을 당했다. 마귀 왈,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들어 봤다만.. 네놈은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귀냐?”

(5) 예수님은 아주 합리적이다. 옳은 것은 누가 말했든지 그대로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 그들의 말만 듣고 따르고, 그놈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라 (마 23:2)
  • 내가 믿기지 않더라도 내 행적은 믿으라 (요 10:38)
  •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 이것을 하고, 한편으로 저것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본질과 정신 VS 외형. 눅 11:42)

(6) 성경은 일관성 없는 것, 간보고 쟤는 걸 싫어한다.

  • 요한은 안 마신다고 X랄이고, 예수님은 마신다고 지X..
  •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인정하면 이렇게 되고, 인정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네..

(7)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꽤 극단적이고 꽤 어려워 보이는 표현이 있다.

  • 현 세상에서 100배 보상. (막 10:30)
  • 내가 속히 오리라 (계 22:20)
  •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들어서 저리로 옮길 것이다
  • 저 사람들이 외치지 않으면 이 돌들이 대신 소리지를 것이다 (눅 19:40)
  • 돌을 갖고도 인간들 집단을 만들 수 있다 (눅 3:8)
이런 패턴들은 만화영화가 아니라 성경 텍스트 자체만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만 서서히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29 19:35 2025/07/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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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드로 서신

본인은 와이프와 함께 성경 통톡을 하면서 올해 초쯤엔 베드로전후서를 쭉 지나갔었다.
그런데, 와~ 이건 신약의 주류(!!)인 바울 서신이 아니라고, 특정 수신자가 존재하지 않는 일반서신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볼 게 절대 아니라는 걸 특별히 느꼈다.

그 짧은 분량에 몇 절 간격으로 주요 암송/유명 구절들이 빵빵 터져나온다. 후서보다도 전서가 더한 것 같다.
비킹에서 매우 치명적으로 변개된 구절 중 하나인 '말씀의 젖 먹고 자라라' 벧전 2:2도 그 중 하나.

이들 책에서는 precious 보배로운, 귀중한 이라는 단어가 다른 어느 책보다도 자주 나온다.
왕가의 제사장과 특별한 백성, 남녀노소 주종 인간관계, 위의 권위에 순종, 목(회)자를 향한 권면, 시험과 인내, 올바른 행실과 선한 간증까지, 바울 서신 몇 권치 내용이 다 압축된 것 같다.

베드로전서가 특별히 강조하는 건 그냥 선한 행실을 하는 게 아니라 불신자 세상 사람들이 비방하고 악담을 하다가도 무안해져서 입을 다물게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행실이다. 그들에게 너희의 소망을 증언하고 답변할 걸 늘 예비하라고..
이런 논조는 기존 바울 서신서나 심지어 야고보서에서도 딱히 못 봤던 것 같다.

거기에다 행실만 얘기하면 섭섭하니 벧전에는 지옥에 떨어진 천사, 죽은 자에게 선포, 감옥에 있는 영에게 선포, 구원의 모형으로서 물침례처럼.. 경륜이나 영적 세계 관련 어려운 구절까지 슬쩍 들어가 있다.

벧후 3장 끝부분을 보면 베드로가 바울 서신을 언급하면서 일부 내용이 참 질기고 난해했다고 얘기하는데..
난 "님이 기록하신 서신도 똑같이 난해해요"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베드로가 어려운 구절을 슬쩍 집어넣은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니, 벧후 3:6은 단순 노아의 홍수 얘기가 절대 아니겠다는 생각도 더욱 확실하게 들었다.

성경에서 element라는 단어는 갈라디아서 4장과 베드로후서 3장에서 각각 두 번씩만 등장한다.
전자는 유치한 '초등원리' 문맥인 반면, 후자는 온 우주가 불에 녹는 상황이다 보니 '원소'라고 번역되었는데..

사실 이것조차 1800년대 이후 돌턴의 원자설을 학교에서 배운 후대 사람의 선입견이 가미된 번역이 아닌가 싶다. 뭐, 만물이 분자건 원자건 미립자 근본 본질 차원에서 다 분해되고 포맷될 거라는 점은 변함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베드로에 대해서 뭐 "쿠오바디스"라든가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십자가형 당해서 순교~~ 이런 카더라 일화를 찾아보기 전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라고 말하는 서신을 통해 기억하는 게 먼저이지 않겠나 싶다. 그 사람이 직접 후대의 크리스천들이 읽으라고 글을 남겨 줬으니 말이다.

2. 자동차

성경은 자동차가 발명되기 한참 전에 만들어진 책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자동차를 대입해 넣어도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세 곳 정도 있다.

(1) 출 20:17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소나 나귀 대신에 "남의 차를 탐내지 말라~~"라고 생각해 보면 이 계명이 오늘날 기준으로 뭘 의미하고 어떻게 적용하면 되겠는지 감이 바로 올 것이다.

(2) 삼상 8:5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우리에게 붕붕이를 주소서"라고 생각해 보아라.
단순히 남 앞에서 간지와 가오 내세우려고 왕을 선출하고 나면.. 이제 왕의 유지보수 비용 때문에 세금 부담이 왕창 늘고 니들 등골이 휠 것이다.

그때 와서 후회하더라도 하지만 한번 권력 맛을 봐 버린 왕이 호락호락 하야를 하겠는가? 아니, 단순히 권력욕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왕은 하야를 못 한다. 호랑이 등 위에 앉아버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붕붕이는 물론 정치 권력과는 관계가 없지만.. 얘도 한번 지르고 나면 단순 차값+기름값과는 차원이 다른 지출이 발생하고 사람 생활 패턴과 씀씀이가 달라져 버린다. 카푸어 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3) 막 11:2 등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베드로야, 저 마을 어귀를 가 보면 공장에서 갓 출고된 새끈한 스타크래프트 밴이 키가 꽂혀 있을 것이다. 그거 몰고 이리로 돌아와라. 누가 뭐라 하면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라고 대답해라. 내가 차주하고는 미리 입을 맞춰 놨다"

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루살렘 입성 장면 때 카퍼레이드가 같이 떠오른다.
예수님 제자들 중에는 그 나이의 남자들답게 차덕 컴덕도 있을 것이고, 베드로는 가방끈은 짧아도 대형에 해기사 면허까지 보유하고 있고.. =_=;;; (훗날 저 베드로전서· 후서를 기록하게 될 바로 그 사람이!!)

솔로몬만 해도 살았던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그 머리로 차덕 총덕 컴덕 항덕이 아니라 자연덕 생물덕이었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진다.

3. 안티오크

나는 '안티오크/안디옥(Antioch)'이라는 지명을 난생 처음 접한 곳이 성경이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스타크래프트였다. =_=;;;
프로토스 외계인들의 본거지 도시 중 하나가 안티오크이기 때문이다. 프로토스 캠페인을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프로토스의 영웅 중 한 명은 이름이 Fenix인데.. (질럿이다가 나중에 드라군으로..)
안디옥이 등장하는 성경 사도행전에는 벨릭스(Felix)라는 이름의 총독이 나온다. (행 23:24)

이에 대한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힌 관계로, 난 사도행전 후반부(=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이후)를 읽으면 지금도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같이 어른거린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Fenix는 아마 불사조 phoenix를 베낀 명칭이었을 것 같지만, 본인은 그것보다도 성경 인물 Felix가 먼저 떠오를 정도이다. ㅠ.ㅠ

4. 호환, 마마, 전쟁

"내가 네게 기근과 ‘악한 짐승’들을 보내서 니 자식을 앗아갈 거다.
다음으로는 ‘역병’과 피가 니들을 지나갈 거고
그 뒤엔 내가 너에게 ‘칼’을 보낼 것이다.
나 곧 주가 이렇게 말한 줄이나 알아라." (에스겔 5:17~ 임의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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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름 3권 분립(lawgiver, judge, king)이 나뉘어 언급되는 구절이 있듯이,
성경엔 나름 옛날 어린이들의 3대 재앙이었다는 호환, 마마, 전쟁이 나오기도 한다! ㄷㄷㄷㄷ
세계 보건 기구(WHO)는 요즘이야 이것저것 욕 많이 먹고 있지만 한때는 그래도 국제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천연두를 지구상에서 박멸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즉, 3대 재앙 중 ‘마마’를 없앴다.

전세계에서 천연두 감염 발병이 마지막으로 보고된 게 1977년 10년경이다.
참고로 인류 역사상 마지막으로 단두대에 의한 사형이 집행된 것도 1977년 9월이니 꽤 비슷하다.;;;

유엔이야.. 잘 알다시피 ‘전쟁’을 없애려고 만들어진 단체이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하긴, 먼 옛날에 한번 연합군 진영이었다고 그 나라들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우방 동맹인 건 아니니까 말이다.

5. 머신러닝

데이터 → 정보 → 지식 → 지혜의 관계를 피라미드 계층으로 묘사한 그림이 있다. 이거 무슨 과학 → 수학 → 철학 → 신학 같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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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머신러닝에서 다루는 개념이지만~~
성경 공부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커 보인다.

성경이란 게 무슨 학술논문, 수학 교재처럼 막 수리논리적으로 ‘엄밀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다.
용어와 개념 definition부터 시작해서 lemma, theory, proof.. 이런 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나마 로마서가 일부 구간에서 그런 형태를 흉내만 비스무리하게 냈을 뿐이다.

  • 죄라 함은 *****한 것을 말한다.
  • 이 교리의 적용 대상으로서 닝겐이란 이러이러한 특성을 가진 검은 머리 이족 직립보행 포유류를 말한다. 최초의 시조는 아담이다. 생물학적 분류는 호모 사피엔스이다.

성경 여기저기에 흩어진 내용들을 분야별 주제별로 한데 모으고 체계화하면 조직신학 교재가 된다.
그럼 성경이 처음부터 조직신학 교재처럼 쓰여졌으면 좋겠지만, 그런 식으로 저술해서는 성경이 그야말로 동서고금 보편적인 텍스트가 될 수 없어진다.
조직신학 자체도 당대 인간의 학문 패러다임이 반영되어 만들어진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패러다임보다 더 위에 있는 텍스트이지 않은가?

그야말로 일자무식 농경시대부터 지금 과학혁명 정보화 혁명까지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만들어질 수 없다. 인류가 언제부터 그런 엄밀함을 따지기 시작했다고 감히 그런 배부른 소리를 지껄이나.

그리고 뭐랄까, 후세에게 사이드이펙트/나비효과를 끼치지 않으면서 수백~수천 년 뒤를 내다본 예언을 정확하게 담을 수가 없다. 이 주제만으로도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이 글의 주제가 이건 아니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결국은 평범한 스토리 ‘데이터’들을 담으면서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성품을 슬쩍 담아 넣고, 여러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역사 패턴도 찔끔 담아 넣는 게 성경 기록자의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추상적인 데이터로 가득한 책이며, 독자들에게 데이터를 통한 학습과 패턴 추출.. 일종의 머신러닝을 요구한다. 이걸 신앙 용어로는 “성령님을 통한 조명”이라고 표현한다. ㄲㄲㄲㄲㄲ

머신러닝에 underfit과 overfit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동일한 오류 유형이 성경 공부도 존재한다.
6일이라든가 1천 년을 문자적으로 안 믿는 거, 개나 소나 영적 해석에 비유로 치부하는 건 underfit이다.

반대로 본질적이지 않은 디테일에만 너무 문자적으로 꽂혀서 난리를 치는 건 overfit이라 하겠다.
솔로몬의 재판을 읽고는 “요즘은 CCTV와 유전자 감식 기술이 발달했으니 괜찮아요! 아 그럼 나도 앞으로 남의 아기 몰래 뺏어서는 저 사람 주라고 연기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overfit인 듯. ㅋ

성경이라는 데이터가 점들이 저렇게 콕콕콕 박혀 있는 걸 말한다면.. 하나님이 의도한 선형이 과연 무엇일까 판단하는 건 닝겐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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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5/05/23 08:35 2025/05/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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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유의 가격

성경에서 오병이어 기적 장면을 보면.. 5000여 명의 군중들한테 한 끼 식사를 제공하기 위한 비용 견적이 200 데나리온 정도로 산출됐다. (요 6:7, 막 6:37)
그런데 예수님에게 어떤 여인이 쏟아부은 향유라고 해야 하나.. 그거 가격 견적은 300 데나리온이 나왔다! (요 12:5, 막 14:5) 이걸 비교하니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

당시 로동자 평균 일당이 1데나리온이라는 거, 그리고 요즘 밥값 물가를 같이 생각하면 200~300데나리온은 아주 러프하게 어림잡아도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다. 자동차 한 대는 너끈히 살 수 있는 돈이고 사회 초년생이나마 직장인 연봉에도 근접한다.

우와~ 저 여인은 정말 예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느껴진다. 요즘으로 치면 가히 초호화 고가 브랜드 명품 화장품이나 로션, 향수를 통째로 예수님 머리인지 발인지에다 끼얹어 없앤 격이다.

이러니 이건 성경에 기록되고 박제될 만도 한 사건이었겠다. 두 렙돈을 바친 과부 이야기는 “절대적인 양은 적으면서 진심”인 거고, 이 옥합 깨뜨린 여인 이야기는 “절대적인 양도 많으면서 마음도 진심”이랄까? 주님께 허비하는 건 허비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여인에 대해서 “아니 그 비싼 향유를 살 돈으로 차라리 가난한 사람 자선을 하지 무슨 저런 낭비를?” 이렇게 비아냥거린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진짜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절대 아니라는 게 포인트다. 교회 가기 싫고 예수 믿기 싫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이다. 그냥 "으으~ 난 솔직히 저렇게까지 몽땅 다 바칠 자신은 없다~"라고만 말하고 마는 게 훨씬 더 정직하고 나았을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은 세공업자들이 바울 일행을 적대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다이아나 여신을 정말 진지하게 위대한 신, 자기의 절대자 구원자로 섬기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기들이 제조하는 다이아나 형상이 안 팔리게 되고 자기 밥줄이 끊기게 생겼으니 빡쳤을 뿐..
진짜 오로지 신념 이념에만 미쳐서 폭탄 들고서 "알라후 아크바르!!" 이러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상당수의 우상 숭배는 그냥 돈이 얽혀 있다. 물론 요즘은 예수 믿고 교회 댕기는 것조차 그런 마인드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이지만 그건 별도로 생각할 사항이다.

2. 누가복음(눅)과 요한복음(요)의 관계

(1) 눅에는 “사람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기록)을 믿는다면 지옥에 대한 증언도 믿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눅 16:29-31)
요에서는 사람들이 모세를 제대로 믿었다면 예수님도 응당 믿었을 거라고 말한다. (요 5:46)

(2) 눅에는 죄인인 여인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무슨 죄인인지는 언급이 없다. (눅 7:37)
요에는 간음하다가 현행범으로 붙잡힌 여인이 나온다. (요 8:3)

(3) 눅에서는 침례인 요한이 회개의 열매를 촉구하면서 혈통상의 아브라함 후손 드립을 치지 말라고 말했다. (눅 3:8)
요에서는 예수님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이나 행실도 없는 주제에 아브라함의 후손 부심 따위 가질 자격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 8:39-40)

(4) 눅에는 사람들 가운데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다는 말이 있다. (눅 16:15)
요에서는 사람을 두려워해서 사람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우선시했다는 진술이 있다. (요 12:43)

(5) 요에서 소경이 눈 뜨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요 9:38)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왠지 눅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가 “주여, 당신의 나라로 가실 때 부디 저도 기억해 주십쇼~!” (눅 23:42) 이러던 것과 심상이 아주 비슷해 보인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라는 찬송가는 2절에서 그 강도를 언급하는 한편으로, 후렴 가사는 “나 믿노라, 나 믿노라”라는 걸 생각해 보자.

3. 복음서의 기적과 사도행전의 기적

요한복음 9장에는 선천적인 소경이 나온다면, 사도행전 3장에는 선천적인 하반신마비 앉은뱅이가 나온다. 대충 이런 장면이다.

“이 불쌍한 장애인 거지에게 한푼 좀 줍쇼~~ 네에에? ㅠㅠㅠㅠ”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니가 뭘 원하는지는 얼추 알 거 같다만, 난 돈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건 아주 특출난 스킬이지. 예수 싸부님을 3년간 따르면서 습득된 스킬이야. 당신 같은 사람이 놀라서 까무러칠 스킬이지. (손 내밀며) 나사렛 예~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을지어다!”

“아니 다 큰 어른이 장애인을 갖고 노나~ (손을 탁 뿌리치며) 아 돈 안 줄 거면 됐네 이 사람아..!!
어?? 어라? 뭐야, 다리에 힘이.. 일어서지네?? 엇 세상에 내가 걸을 수 있게 됐잖아!!”

이게 복음서에서 줄곧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과 차이점으로 내 눈에 와 닿는 건 두 가지이다.

(1) 이때가 그놈의 안식일은 아니어 보인다는 거. 안식일에 병 고친 거 갖고 예수님이 트집 잡힌 걸 생각하면 진짜 안식일 트라우마라도 생겼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늘날로 치면 예수님을 무슨 무면허 의료행위 했다고 고소할 각이다. ㄲㄲㄲㄲㄲㄲㄲ 예수님은 그야말로 현대 의학을 아득히 뛰어넘는 일을 하셨는데도 말이다.
아니면 인공위성 우주발사체를 보고 영공통과료를 안 냈네, 비행계획 신고를 안 하고 멋대로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네, 항공법 위반이네 어쩌구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2) 사두개 인이 본격적으로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거. 복음서 시절에는 사두개 인은 그냥 “칠형제와 한 번씩 다 잤던 형수는 최후에 누구 아내가 되는 겁니까?” 잔머리 정도나 굴렸던 분파였다. 저 때 악역은 그냥 바리새 인, 서기관 정도였었는데..
하지만 사도행전의 타임라인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이다. 그러니 부활이란 걸 믿지 않는 사두개 사람들도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고발하는 적대세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하긴,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들도 무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다비다’라는 여인, 그리고 20장에서 졸다가 건물 밖으로 추락사한 ‘유두고’. 하지만 이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한 기적보다 존재감이 훨씬 작고 사람 이름도 생소한 편이다. ㄲㄲㄲㄲ

4. 사도행전과 복음서의 추가적인 유사점과 차이점

(1) 사도행전은 저자의 특성상 아무래도 누가복음의 연장선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복음 전파 사명이 계승되는 부분을 생각하면 마태복음의 끝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누가복음의 끝에 묘사되는 승천 장면과 사도행전 시작의 승천 장면은 살짝 다른 묘사도 있으니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변모도 하고 승천도 했다고 묘사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2) 타 복음서들은 바리새 인이나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배척했다고 묘사하는 편이지만 요한복음은 그냥 유대인들이 지위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묘사한다.
그것처럼 사도행전은 믿지 않는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자주 나온다. 이건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꽤 닮은 면모인 것 같다.

(3) 예수님은 체포되고 나서 온갖 황당한 거짓 고소 내용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않아서 침묵하셨고, 오로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만 집중하셨다. “니가 그리스도냐?” 이런 부류의 질문에만 짧게 핵심만 답변하셨을 뿐이다.

그 반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은 아무래도 예수님과는 처지가 다르니 거짓 고소에 대해서 예수님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자기 권리를 챙긴 면모가 보인다. 자신이 골수 바리새 인 출신인 것과 한편으로 로마 시민권자인 것을 잘 활용했고, 심지어 적절한 타이밍 때 부활 드립을 쳐서 바리새 인과 사두개 인 사이의 내분 팀킬도 조장했다. 이런 건 뭔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무해하라”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4) “저놈을 없애 버려라!!” Away with him, Away with this man도 뭔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만의 공통분모라 하겠다. (요 19:15, 행 21:36, 행 22:22)

특히 fellow는 출 2:13이나 욘 1:7 같은 곳에서 친근한 동료, 동기라는 뜻이 있지만, 가끔씩은 그것보다 더 멸칭으로 놈, 작자, 새X라는 뜻도 얼마든지 들어간다.
아합이 미가야를 부를 때도, 그리고 베드로가 “이놈도 예수와 한 패였어요!”라고 정체를 폭로당하려 할 때도 다 fellow가 쓰였었다.

5. 나머지 미분류 얘깃거리들

(1) 성경에서 예수님이 분노하신 건 제자들의 불신, 성전 장사꾼들(두 번이나!!),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악행 이렇게 얼추 세 갈래로 나뉜다. 나름 서로 다른 분야인데 이걸 조목조목 분석하고 세분화해서 “주님의 빡침” 같은 설교나 강해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

(2) 예수님이 죽으심과 관련해서 사용하신 물건, 들렀던 장소들은 공교롭게도 전부 다 새거다. 당나귀, 다락방, 무덤.. 신기하지 않은가? 남이 썼던 중고는 전혀 없다.

(3) 성경에 나오는 현타의 대표적인 예는 탕자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눅 15:17)

(4) 성경에서 뭔가 찢어진 게 좋게 등장하는 건 예수님의 죽으심 직후에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머지는 암곰이 애들을 찢었다거나, 웃사가 천벌 받아 죽으면서 찢겼다거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얘기들이다.

(5) 성경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저렇게 말하지만 한편으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고(요 4:22),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고도 말한다(롬 3:2).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잘못됐고 척결되고 없어져야 할 대상인 건 절대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25/02/15 13:35 2025/02/1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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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들이긴 하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나열하고 한데 대조· 비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니 이렇게 한번 더 개념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1. 비킹: 예정 vs 자유의지

난 기회가 된다면 킹 제임스 진영의 밖에 있는 제도권/일반 교회 신자와 다음 주제들에 대해 언제든지 진지하게 토론해 보고 싶다.

  • 님 다니는 교회· 교파에서는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
  •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 선과 악을 분간 못 하는 어린 아기는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어찌 될까? 이런 의문에 대한 댁들의 생각은 어떤가..?

난 이 주제에 대해 극도로 단순화시켜서 비약해서 말하자면..
"십자가 이전에는 알미니안(자유의지), 그 이후부터는 칼빈(섭리, 예정, 영원한 구원)"설을 개인적으로 지지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한다.

성경에는 당연히 절대자 하나님의 주권과 재량, 예정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마다 환경 처지가 제각각이고 신체· 지능 리소스도 제각각이다.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이건 마감 1시간 전에 온 품꾼이건 동일한 일당을 받았다는 포도원 비유도 있다. 모태신앙 구원도 있고, 십자가 강도 같은 끝물 구원도 있다.

(1) 그러나 이건 개개인의 구원 여부가 엿장수 마음대.. 아니,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얘기가 아니다.
미리 아심도 있고 구원받은 사람의 신분 변화가 '예정'된 건 있지만, 그게 로보트 마냥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말하는 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을 수학 집합에다 비유하자면 원소나열법이 아니라 '조건제시법'이다. 울나라 법에다 비유하자면 특별사면이 아니라 일반사면을 말하는 거다.

"파라오의 마음을 더 강퍅하게 만들겠다" 이건 스스로 삐딱서니 타기 시작한 악인의 벡터의 크기 정도나 하나님이 더 키워 버리시겠다는 얘기이다, 아예 벡터의 방향을 마인드 컨트롤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시험이나 함정수사는 기회제공일 뿐, 아예 대놓고 죄 지으라고 꼬드기는 범의유발이 아니다.

어떤 경우건 "신이 누구누구는 처음부터 죄인 역할극을 하게 만들려고, 지옥불로 떨굴려고 창조했다", "하나님이 악도 필요해서 같이 창조했다" 같은 식의 결론은 난 절대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악도 필요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실도 냅두고, 북괴 정치범 수용소도 저렇게 냅두고 731 부대와 캄보디아 킬링필드도 다 묵인한 건가?
그러면 죄의 책임이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는 꼴이 된다. 그런 하나님 믿으라고 불신자한테 복음을 참 잘도 전할 수 있겠다.

저걸 믿을 바에야 차라리 진화론이 낫다!! 진화론은 "서로 죽고 죽이고 속고 속이고 중독시키고 말려 죽이는 자연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신이 만든 게 아니라면 오랫동안 스스로 진화해서 저리 된 거다"라고 이렇게 변명하는 거라도 있다! 알겠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죄악까지 전부 하나님이 의도한 빅픽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착각하는 거다.

(2)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기· 영유아가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가 도대체 신학적으로 왜 논란이고 논쟁거리인지 난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했던 2살 이하 아기들이 다 원죄 때문에 지옥 갔다면.. 나는 정말 기독교 안 믿었을 거다. 나부터가 부끄러워서라도 그런 신 믿으라고 주변에 못 전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 어떤 흉악범죄자라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갈 수 있다. 반대로 예수 안 믿고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그 범죄자를 체포한 경찰이나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 검사, 심지어 그 범죄자에게 희생당한 피해자라 해도 지옥 간다.
이건 불신자 입장에서는 선뜻 동의나 납득이 안 될 수 있지만, 이게 기독교 교리이다. 허나, 이런 기독교조차도 예수님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능력조차 아직 없는 아기까지 몽땅 지옥으로 보내는 미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3) 내가 간극 재창조를 적극 지지하는 이유도 겨우 젊은 지구 오래된 우주 같은 과학 연대기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6천 년 전 6일 창조가 전부라면 사탄 마귀는 도대체 언제 창조됐고 언제 타락했는데? 인간은 죄를 짓는 바람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후손들이 대대로 고생하게 됐구만, 그럼 저놈은 언제 어디서 반역해서 무슨 처분을 받았는데? 최소한 인간보다는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게 이전 세상의 멸망과 간극 없이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니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 예정도 있고, 인간 쪽의 자유의지도 있다. 가중치가 반반이고 상호 보완적이다. 마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세 분과 한 분..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 거의 그런 급이다. 서로 자기만 옳다고 피터지게 싸울 주제는 아니어 보인다.

이것 말고도 킹 진영과 비킹 진영 간에는 교회와 이스라엘(유대인)의 관계, 전천년주의 vs 무천년주의 같은 관점도 차이가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세대주의도 나온다만, 이 이슈는 이 글에서는 일단 논외로 하련다. 벌써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말이다.

2. 킹: 영어 vs 원어

자, 킹 제임스 진영은 한킹이고 흠정역이고 표킹이고 어느 역본 진영을 가건, 위에서 논했던 저런 교리 문제는 그럭저럭 다 일치한다. 이견이 없고 교통정리가 돼 있다. (적어도 난 그런 걸로 알고 있음) 나는 저 관점이 매우 합리적이고 건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좁디좁은 진영을 지지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킹 제임스 진영들이 시급하게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원문과 원어, 원어와 영어 사이의 개념정리 교통정리이지 싶다.
이게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승패가 가려지질 않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작은 킹 진영들이 더 쪼개지고 분열되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 역본이 제일 짱이네 하면서 도토리 키 재기 대립이 끊이질 않는다. 이거 심각한 지경이다.

일단, 원문 레벨은.. 정말 더 말이 필요하지 않다.
루터고 칼빈이고 옛날 종교개혁자 대선배들은 마 5:22가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화내는 자"라고 적혀 있는 바른 본문 계열의 성경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늘날의 비킹들은 그렇지 않다. 그냥 무조건 화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요일 5:7 요한의 콤마 삼위일체 구절도 마찬가지. 비킹이 삭제한 게 아니라 오히려 킹이 후대에 첨가한 거라고 반박하는 분도 있다. 근데.. 이때는 킹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아예 가톨릭 예수회의 두에 랭스 성서조차도 이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빼면 뺐지 도대체 누가 언제 왜 뇌피셜을 펼쳐서 첨가를 했다는 말인지..??

킹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반박하는 그 어떤 목사, 신학자도 벧전 2:2가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영적으로 자라려면"이 틀렸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려면"이 사본학적으로(?) 맞다고 자신의 학자적 양심과 손모가지를 걸고 맹세하는 사람..? 난 못 봤다.

이런 것들 말이다. 이건 번역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원문 내용이 변개되고 달라진 사항이다. 다시 말하지만 옛날 칼빈이나 루터나 에라스무스 이런 사람이 번역했거나 봤던 성경이랑, 지금 현대인들 대다수가 보는 성경이 이런 건 서로 같지 않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킹 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말씀 보존 학회가 다른 행실이나 언변에서 제아무리 깽판을 쳤어도 걔네들이 이 주제에 관해서 말하는 건 절대적으로 맞다. 나는 저쪽을 지지한다.

자 여기까지는 한킹 흠정 표킹 어느 진영들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 뒤에 번역을 함에 있어서 영어와 원어의 비중을 서로 어떻게 둘 것인가 하는 것에서 또 예송 논쟁 노론 소론, 탕수육 부먹 찍먹 같은 당파싸움이 벌어져 있다.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이 바닥 대안 성경 1호라 할 수 있는 말보회 한킹은 영어 킹을 그대로 곧이곧대로 중역한 성경이 아니라, 영킹과 동일한 원어 대본을 번역하고 영킹을 일부 참고만 한 성경이다. 그래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해서 원어 누룩(?)을 좀 뺀 게 흠정역이고, 흠정역보다도 더 과격하게 영어 직역을 추구한 역본이 표준역.. (심지어 도량형까지 마일, 파운드 그대로 썼을 정도로. =_=)

예를 들자면 "영어로 같은 단어이면 우리말로도 (가능한 한 어지간해서는 몽땅) 다 같은 단어로 번역돼야 한다", "it came to pass도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God forbid는 하나님이 금하신다라는 뜻을 넣어서 번역해야 한다" 이런 거 말이다. 영어 KJV는 영어권 화자에게만 최종 권위인가, 아니면 원어 원문과 대등한 전세계의 최종 권위인가???

사실 성경 원어 원문은 우리 생각 이상으로 꽤 함축적이고 모호성이 많다. 뜬금없이 나오는 it he 대명사가 뭘 가리키는지 애매한 게 많고, 시제가 과거 미래 중 뭔지, 대화 인용이 어디까지이며 어디부터가 내레이터인지.. 알쏭달쏭한 게 많다.
이런 부분에서 한킹은 영킹과 자잘하게 미묘하게 일치하지 않는 게 있다. 그러니까 오역 변개는 분명 아닌데 어쨌든 영킹과는 미묘하게 다른 이게 오로지 영킹 최종 권위 순수주의(!!!) 성향인 분들한테는 성이 안 차는 거다. =_=;;

그럼 원어가 헷갈릴 때는 무조건 영킹대로 번역만 하면 되느냐? 그런데 영어는 또 영어만의 중의성이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전치사. for을 '위하여'라고 할지, '인하여'라고 할지?? of나 in은 또 얼마나 뜻이 다양한가?
제아무리 교리적인 편견 없이 기계적으로 곧이곧대로 번역만 했다고 한들, 교리와 해석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번역을 옳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킹 제임스 영어는 현대 영어와는 뜻이 달라진 것도 여럿 있고, 이럴 때도 번역자의 해석과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영킹이 단어 뜻을 스스로 정의하는 내장사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대로 엄밀한 뜻 구분 없이 단순히 운율이나 패러프레이징 차원에서 비슷한 단어를 일부러 다르게 늘어놓은 것도 있다. slay와 kill, create / form / make 같은 거.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고 이 블로그는 킹이나 비킹, 심지어 불신자까지 다 보는 공간이니 내가 내막을 자세하게 다 늘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거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앗싸리 오로지 영킹 그대로 번역만 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진작에 해결됐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참 문제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는 아까처럼 예정이냐 자유의지냐 이런 거 논쟁은 할 필요 없고, 그 대신 비킹 입장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할 희한한 주제를 갖고 논쟁을 벌이는 지경이다.

아 끝으로.. 영킹에 하나님 영감이 또 짠~~ 임했건, 자필원문에 임했던 영감이 번역과 필사 과정에서도 쭉 내려오고 '보존'되어 왔건.. 결과물은 어쨌든 지금 우리말 성경도 영감으로 주어져 있다는 얘기 아니냐?
이거 갖고도 너무 쓸데없이 머리 쥐어뜯고 싸우지는 말자구우~~ 아멘!

Posted by 사무엘

2024/10/30 08:35 2024/10/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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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편

성경의 시편은..

  • 하나님 쪽은 내가 죄 때문에 너무 더러워서 차마 나아가기가 민망하고
  • 인간 쪽은 당장 악인 원수들로부터의 해코지가 두렵고..

이렇게 양측으로부터 샌드위치 신세가 된 사람의 처절한 고뇌가 많이 담겨 있다.

물론 시온이 어떻고 땅 상속이 어떻고 하는 건 구약 관점의 보상 얘기이다.
원수에 대한 저주나 보복이 종종 언급되는 건 하나님 관점 내지 재림 관점에서이다. 신약 크리스천의 행실 교리로 참고할 사항은 아니다.

허나, 신약 크리스천도 정규분포 안에 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 전쟁을 치른다면.. 저렇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낀 시편 기자의 심정을 거의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게 정상이다. 시편 얘기가 지금이라고 해서 별개가 절대 아니다.

죄에 대해서 "그래서 뭐 어쨌다고? 어차피 남들도 다 똑같이 하는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잖아? 니 혼자 도도하게 굴어 봤자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이렇게 치부하는 게 아니라~~~
"이런 죄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구나~! 이런 죄를 지은 대가가 누군가의 피흘림과 죽음이구나! 이런 더러운 마음 상태로 어찌 주 앞에 나아갈 수 있으리요?"

이렇게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하는 거.
"세상에서 부귀영화 누리면서 1천 일보다, 주와 함께 초막에서 단 하루가 더 낫다~~ 금은보화보다 더 낫다"
이러는 그 심정, 그 영성을 시편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이건 정말 평범한 상태로 기록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복음서 이후 신약 성경의 상당수를 바울이 기록했다면, 시편 대부분은 다윗이 기록했다.
왜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셨는지(한때 간음 살인이라는 흉악한 죄를 지었는데도), 반대로 사울이 인간적인 평가 대비 하나님이 왜 학을 떼 버리셨는지?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다.
이래서 성경은 겨우 인간의 생각대로 막연하게 “그냥 우리끼리 차카게 살자” 스타일로 써 갈긴 책일 수가 없는 것이다.

2. 찬송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들 중에는 작사자가 주변 가족, 친지, 연인을 질병이나 사고로 잃고 나서 극심한 슬픔과 고난 가운데 가사를 지은 것이 여럿 있다.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내 영혼 평안해 (호레이쇼 스패포드)
작사자의 4살짜리 아들이 병으로 죽고, 나머지 네 딸들을 여객선 충돌 사고로 모조리 익사.. (19세기 말. 인제 증기기관 여객선이란 게 처음으로 등장했던 시절임)

(2)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조세프 스크리븐)
작사자의 약혼녀가 결혼식 바로 전날에 강물에 빠져 익사함. 그 뒤 모친이 중병에 걸려서 위독하다는 소식까지..

(3) Near to the Heart of God (Cleland B. McAfee)
작사자의 어린 조카딸 2명이 디프테리아에 걸려서 죽음 (19세기 말, 이런 후진국형 전염병이 아직 현역이던 시절)

(4) 그 날 다가오네 -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일까 (제임스 힐)
작사자의 장모가 갑자기 근육마비에 걸리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남

이것 말고도 다른 예들이 또 있겠지.
본인은 교회에서 집회 전 준비찬송을 인도할 때 가사 내용이 서로 비슷한 거, 조나 박자가 비슷한 것, 단조로만 이뤄진 것, 혹은 뒤에 이어질 설교 및 강의 주제와 관련 있는 것, 후렴에 ‘주여’가 나오는 거, 같은 작사-작곡자 쌍인 것 이런 것들을 묶어서 편성해 봤다.

그랬는데 한번은 "작사자가 가족· 친지를 잃고서 지은 곡들"만 골라 보니 저렇게 아주 그럴싸한 조합이 나왔다. 심지어 카테고리도 기도와 간구, 위로와 평안, 천국과 재림 이렇게 다양하다.
물론, 그 특성상 즐겁고 경쾌한 곡은 별로 없고 장송곡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저런 찬송가를 굳이 장례식장에서만 불러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3. 여담

- 성경에 주석 성경이 있다면 찬송가에는 해설 찬송가가 있다. 원래 영어가사라든가 이 곡이 만들어진 계기와 배경과 사연,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신상 정보 같은 것들을 알면 그 곡에 대한 애착이 더 생길 수 있다.
물론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저런 것들을 대번에 다 찾아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

- 요즘 사람들은 아예 19~20세기 클래식 찬송가가 아니면 마커스니 어쩌구 하는 2010년대 이후 CCM이다.
그 사이에 낑겨 있는 1980~90년대 초창기 CCM/복음성가는 차차 잊혀지고 못 들어 본 세대가 늘어나는 것 같다. =_=;;

- 성경에 따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 사랑" 그 다음에 "이웃 사랑"이다.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 자선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 발에다가 향유를 끼얹어 버린 것은 허비 낭비가 절대로 아니었다. 정반대.. 주님이 귀하게 받으시는 경배로 인정됐다~!!

-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스도와 아그립바(행 26:24,28)의 반응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말 동일한 패턴이다.

- 성경에 기록된 기도들 예시만 갖고도 설교나 강해를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다니엘서 9장이나 사도행전 4장은 고난이 깃든 가운데 정말 기도를 예쁘게 잘한 것이다. 왕상 8 솔로몬의 기도도 이런 범주에 들까?
그에 비해 삼손이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기도는.. 그냥 안습하고 처절한 기도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9/13 08:35 2024/09/1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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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관련 개드립들

1. 세상 학문과의 관계 #1

- 성경 수비학의 관점에서는 3이나.. 특히 7이 완전한 수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수학에서 말하는 perfect number 완전수는 6, 28 같은 수이다. (자신을 제외한 약수들의 합이 자신과 같은 수)

- 성경에서 말하는 tree of life는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 그야말로 환상의 아이템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tree of life는 생물들의 진화 계통을 나타낸 트리 네트워크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세상 역사에서 말하는 그리스 아테네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수학· 기하학이 발달하고 헬라 문화가 태동하고 민주주의가 발생했던 곳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헬라)나 알렉산드리아의 평판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급이다.

2. 세상 학문과의 관계 #2

계 7:1 땅의 네 모퉁이를 보고는 “성경에 따르면 지구는 평평하다”라고 어거지 부리는 건..
대하 4:2 같은 구절을 근거로 “성경에 따르면 원주율은 3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아주 비슷해 보인다. =_=
(거대한 원형 놋쇠 대야--솔로몬의 바다--가 지름은 10큐빗인데 둘레가 30큐빗이라고 나와 있음)

나는 성경에 수학· 과학적으로 고증오류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성경은 수학· 과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 아니며, 과학 저널 논문 문체가 아니라는 거.
오히려 수학· 과학의 영역 밖의 초월적인 주제를.. 문과 이꽈 불문하고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용어와 문체로 다뤘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학과 접점이 있는 주제를 언급한다면 그건 절대로 오류가 없이 맞다는 거. (예: 흐르는 물에다 손 씻으라는 권면 하나만으로도 엄청 시대를 앞서갔었음)

이렇게만 알면 된다.

3. 난폭운전

오~~ 성경에도 난폭운전이란 게 있구나!! 완전 마음에 든다. ^^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병거를 모는 폼이 님시의 아들 예후 같습니다. 그 친구는 평소에 병거를 미친 듯이 격렬 난폭하게 몰잖아요." -- 왕하 9:20

심지어 영어로는 furiously이다...!!!
분노의 질주 fast and furious 할 때의 그 단어이다. 내 차에다 인쇄해서 붙여 놓을까 보다.
주변 옆 차로는 씽씽 잘 가는데 내 차로만 못 가고 멈춰 있는 걸 차마 눈 뜨고 못 봐 주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과속 난폭운전의 기본 발상이다.

4. 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왓~~ 문구가 대박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도대체 어디서 만들었냐??
이제 전도서 3장을 읽다 보면 이태리타올이 생각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5. 색깔

사용자 삽입 이미지

blue, purple, scarlet.
어쩌다 보니 집에 진열돼 있는 수건들의 색깔 순서가 출애굽기 성막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 덕후는 별의 별 현상이나 패턴을 보고도 성경과 연관시킬 수 있다. 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24/09/05 08:35 2024/09/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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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남녀 질서

* 이런 고리타분하고 기초적인 주제에 대해서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이 블로그에 글을 쓴 적이 없었던가 보다. 지금 생각날 때 써서 올린다~!! ^^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 (고전 14:34)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딤전 2:12)

이거는 다른 가장들(기혼 남자)까지 한데 모여 있는 교회 내부 집회에서 그 회중을 대표하고 인도하는 활동이 여성에게 일단 불허라는 뜻이다. 설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표기도 같은 것도 말이다. (딤전 2:8)

그러나 여자는 성인 남자가 아니라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건 당연히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주일학교 교사..!!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가 찬 미혼 자매들에게 훈수 놓는 것도 할 수 있다. 여자는 일체의 권위를 절대 행세하지 못하고 닥치고 입 다물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글쎄, 음대 나온 자매가 성가대에서 성인 남자들까지 가르치는 거는? 조금 수위가 높아지지만 그것까지는 괜찮다고 본다.
성가대 연습은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게 아니고, 찬양 중에도 지휘자가 혼자 드러나고 주목받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예 불신자 남성을 초청해서 지휘할 바에야 믿는 자매가 훨씬 낫다.

그리고 이것도 내 뇌피셜이다만.. 남자고 여자고 성인 청년이지만 다들 미혼인 파라처치/선교단체의 예배라면 찬양인도나 대표기도 정도는 자매도 못 하란 법 없다고 본다.
어차피 다들 미혼이고 인원부터가 성경이 상정하는 일반적인 정규분포 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애매한 상태이다. 뭐 그런 식이면 요즘처럼 이렇게 결혼을 안 하거나 너무 늦게 하는 풍조도 총체적으로 다 비정상이긴 하지만..;;

성경에서 인간의 위계질서를 논하면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우선시하는 건 기혼이 전제됐을 때의 얘기이다.
남자여서 예우받는 게 아니라 가장이어서 예우받는 거다. 그 가장 역할을 남자가 맡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자가 예우받는 듯이 보인다. 내가 알기로 논리가 그렇다.

끝으로..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복음 전하는 것에는 당연히 남녀노소 구분이니 위계질서니 없다! 누구나 해야 한다.

나는 세상 법에서 이거랑 비슷한 법리가 적용되는 게 요거라고 생각한다.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212조)
우리나라의 법은 사적제재를 절대 금지하고 정의 실현은 오로지 경찰과 사법에다가만 위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장 음주운전 차량을 세우고 차키 뺏고 운전자를 팔 꺾어서 제압하는 것 정도는 사법 수사권이 없는 그 누구에게라도 허용해 준다.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용해 준다. 당연히 진짜 경찰이 올 때까지 일시적으로만 말이다.

  • 당장 사람을 해치려 하는 중범죄 현행범은 그 누구라도 제압이 허용되듯이, (그 뒤 신속히 경찰에게 인계)
  • 의사나 정식 구급대원이 환자를 완전히 인계하기 전까지는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도 CPR을 잠시라도 중단하지 말아야 하듯이,

여자라도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안 할 뿐이지,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는 저것과 동급으로 시급하게 해야 한다.
이거는 "여자는 잠잠하라"가 적용되는 상황이 전혀 아니다. 애초에 교회 안이 전혀 아닌걸..

개인적으로 여자 목사는 바람직하지 않고 교리적으로 잘못됐다는 소신이다. 물론 그 여성도 신학 공부 많이 했고 성경 많이 알고 어지간한 남성들보다 훨씬 더 똑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녀는 강단에 서는 목회 말고 다른 방식으로 주의 일을 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허나, 이와 별개로.. 자기는 남자로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하지도 않는 주제에 다른 바람직한 자매를 보고 "어디 여자 주제에 나댄다" 이런 미친 소리를 함부로 하는 것 역시 본인은 완전 극혐한다.

※ 여담

(1)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와 더불어 성경이 남녀 차별적이라고 비판(?)받게 만드는 양대 구절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이다. 이거는 교회에서 잠잠 버전보다도 더 쉽게 논파할 수 있다.
성경에는 그 구절 바로 다음엔 "남편은 자기 아내를 목숨 바쳐 사랑해 줘라~ 모질게 대하지 마라"도 있는데?
남자 쪽 조건은 싹 무시하면서 여자 쪽 조건만 들이대는 건 그 사람의 논리가 잘못된 거다. 성경은 결코 편파적이지 않다. 가정에서 역할의 차이는 우열 차이 내지 계급 차이가 아니다.

(2)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뵈베를 신약 교회 최초의 '여자 집사'로 만들고 싶어서 저 사람이 deacon이었다고, 헬라어 원어로는 집사라는 뜻도 된다는 얘기가 종종 나돈다. 심지어 요즘 성경들은 번역 자체가 그렇게 되는 편이다.
남자 집사는 스테판이고 여자 집사는 뵈베인 거냐? 뭐, 성경 번역에 대한 최종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이건 그다지 영양가 있는 낭설이 아니다. 뵈베는 지역 교회를 섬기는 주님의 종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3) 바울 서신서에 나오는 "형제들아"가 요즘 성경에서는 "형제 자매 여러분"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우리말 성경은 무려 30여 년 전의 표준새번역에서 이런 양성평등 시도가 행해졌다.
저 brethren 형제는 마치 '청년'이나 영어 man처럼 기본적으로 남자사람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여자까지 포함하는 그런 사람 집단을 말한다. 말을 꼭 그렇게 바꿀 필요가 있는지?

성경도 필요할 때는 일부러 남자와 여자를 콕콕 찝어서 저격하기도 했다. 약 4:4 "너희 간음남과 간음녀들아" 말이다. 시쳇말 좀 쓰자면 "이 간음하는 연놈들아" 같은 뉘앙스다.
그런데 여기서는 킹 외의 변개된 역본들은 남자를 빼고 간음녀만 들어있다! 아니면 성중립 차원에서 "간음하는 사람들아"가 고작이다. 마치 요한복음 8장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에서 남자는 없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8/28 19:35 2024/08/2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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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성경 번역 이슈

1. '-시니라'의 시제

한국어 성경은 개역성경의 선례 덕분에 '-느니라, -도다, -소서' 같은 고어체가 여전히 현역이다.
그런데 창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시제가 현재일까, 과거일까?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는 현대어로 바꾸면 "창조하신다"이다. 명백한 현재 시제이다.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는 현대어로 바꾸면 "창조하셨다".. 과거이다.
그 반면, '하시니라'는 그냥 '창조하시다'와 대응한다. 얘는 형태소 차원에서 시제 정보가 없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어디 제목이나 선언문처럼 말이다.

'하시니라'는 용언의 기본형(으뜸꼴) '하다'에다가 그대로 높임 선어말어미 '시'와 고어체 어말어미 '니라'가 붙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쓰면 사람들이 보통,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과거 시제로 인지하는 편이다. 그래서 "창조하시니라"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개역개정판 말고, 옛날 개역성경은 유독 사복음서에만 '-시다' 종결어미가 안긴 문장(인용)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쓰인 흔적이 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요 8:1),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 15:37), "... 저희를 떠나가시다" (마 16:4)
이것들이 개역개정판에서는 다 '--시니라'로 고쳐졌다. 이것들 다 의미 문맥으로 봐도 과거이고, 영어/원어로도 당연히 다 과거 시제이다.
그러므로 "창조하시니라"도 과거 시제 의미라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하시니라"라고만 썼다고 부정확하거나 틀린 번역이라고 매도하는 건..
마치 개역성경이나 일부 옛날 찬송가들이 '예수' 뒤에다 님짜 안 붙였다고 번역자들이 싸가지없는 호로자식이었다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한 급의 무리수일 것이다.
영킹은 하나님/예수 가리키는 대명사에 대문자 표기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옛날 성경과 요즘 성경의 스펠링 관행의 차이일 뿐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영어 번역투의 영향을 왕창 받아 왔다. 그래서 한국어로 쓰는 문장에도 단 복수를 더 엄격히 따지고, 대명사에 그 그녀를 따지기 시작했다. green과 blue를 구분하지 않던 기존 '푸르다'의 의미에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신호등 파란불 → 녹색불 같은..)

그런 트렌드를 감안하자면 앞으로 번역되는 성경이라면 "하시니라" 대신 "하셨느니라"를 채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변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어로 문장을 만들 때 뜬금없이 "창조하시다!!" 이러지는 않을 테니, 고어체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돼야 할 것이다.

  • 개역성경은 창 1:1, 요 1:1 모두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시니라'이다.
  • 한킹은 처음엔 개역성경과 동일하다가 언제부턴가 둘 다 '셨느니라'로 바뀌었다.
  • 흠정역은 언제부턴가 요 1:1만 '셨느니라'로 바뀌었다. 아마 번역자의 신념 때문에 창1:1의 시제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둘 중 하나만 고를 거면 차라리 요 1:1 '하나님이시니라'가 시제를 훨씬 덜 타는 선언이지 않은가. 이걸 놔두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내 생각은 그렇다.
  • 표준역은 저 두 구절뿐만 아니라 모든 본문에서 선언형 '시니라'를 명백한 과거 시제 '셨느니라'로 바꾼 최초의 고어체 역본이다.

2. 무엇을/어떻게

의문사 무엇(what)과 어떻게(how)는 지칭하는 영역이 언어 품사 차원에서 다르다. "이건 뭘 표현한 거야?" /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어떡하다'라는 굉장히 미묘 므흣한 단어가 있다. 그래서 같은 의문이지만 영어로는 what으로 시작하는 반면, 우리말로는 how에 가까운 뉘앙스로 표현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때가 발생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유명한 행 16:31의 바로 앞 절.. 30절 감옥 간수의 질문을 보자.
개역, 표준, 한킹 같은 우리말 성경들은 모두 "어떡해야 구원받을 수 있죠?"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킹 이후에 등장한 킹 계열 역본.. 흠정역 내지 표준역만이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죠?"라고 what을 직역했다. 흥미롭지 않은가?

문제나 위기가 생기고 난감한 상황이 됐을 때 한국어 화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은 "이를 어쩌면 좋지? 어떡해야 하지?"이다. "뭘 해야 하지"가 아니다. 예전에 월급값 못 한 여경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오또캐스트라' 드립을 생각해 보자.
"뭘 해야 하지"는 그건 자기 신변과 무관한 업무를 인계받으면서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지?"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죠?" 아주 객관적으로나 할 만한 말인 거다.

영어는 명사 지향적이고 체언을 꾸미는 관형어가 발달해 있다. 그러나 우리말은 동사 지향적이고 용언을 꾸미는 부사어가 발달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 많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정서가 반영되어 영어로는 what(무엇을 명사)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말로는 how(어떻게 동작)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오죽했으면 방문 용건을 묻는 질문조차 "어떻게 오셨습니까?"("무슨 일로"가 아니라)라고 묻는 경우가 있고, 그걸 마 동석이 어느 영화에서 "봉고차 타고. 내비 찍고 왔어"라고 동문서답 개드립을 치지 않았던가.

이게 한국어다. 이것 말고도 영어로는 come인데 우리말로는 정황상 '가다'라고 번역해야 할 때가 있고, 부정의문문의 대답도 대놓고 yes/no의 번역이 갈리곤 한다. ㄲㄲㄲㄲ

3. 챔피언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필리스틴) 장수 ‘골리앗’은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정말 유명하다. 스타의 테란 메카닉 유닛의 이름으로도 쓰였을 정도이다.
하지만 사무엘상 17장을 읽어보면 성경 기자, 아니 하나님은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다. 거의 다 ‘그 블레셋 사람’, ‘그 블레셋 사람’ 일색이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건 의도적인 서사이다.
성경의 진술 방식에서 이름 언급이 매우 중요하다는 건 누가복음 “부자(익명)와 나사로”, 룻기 “보아스와 아무개(익명..)”, 그리고 다니엘서 풀무불 씬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친구 이름들의 등장 빈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미주알고주알 명단들이 나오는 거다. 하다못해 로마서 16장 안부 인사 대상자 명단처럼 말이다.

그 대신, 성경은 골리앗이.. 그냥 평범한 파이터, 글래디에이터, 워리어 따위가 아니라 ‘챔피언’이었다고 언급한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champ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이 삼상 17이다. 우리말로는 대체로 ‘투사’라고 번역됐다.

오늘날이야 챔피언은 무슨 개인 단위 게임이나 스포츠의 전국 단위 우승자, 1등 타이틀 보유자..라는 뜻이 강하다. 바둑 챔피언, 20xx년도 탁구 챔피언.
그래서 “세상에서 너무 챔피언이 되려 애쓸 필요 없다. 성경에서 챔피언은 부정적인 인물인 골리앗에게나 쓰였다” 이렇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겠다만 그건 “성경에서 그림(pictures)이 민 33:52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니 각종 영화 산업들도 영적으로 별로 안 좋은 것들이다~ 영화사들도 다 OOO pictures이잖아?” 와 비슷한 급으로 아주 간접적이고 영적인 적용이라 하겠다.

챔피언은 원래는 자기 고용주나 VIP를 대신/대표해서 전투나 결투에 나가서 싸우는 직업 싸움꾼..이란 뜻에서 출발했다. 성경의 용례도 1차적으로는 이거지 싶다.
골리앗 저 시절에 “블레셋 대왕배 특전사 격투기 대회 우승 타이틀”이라든가.. 무슨 태평양 전쟁 일본군마냥 100인 참수 시합 같은 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언무언가를 지키고 수호하는 사람한테도 챔피언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그 대상이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친환경 전기차를 운전하는 당신은 환경 챔피언입니다” 이렇게 써도 된다는 것이다. (전기차가 진짜로 완벽하게 친환경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기아 니로 CF에 나오는 환경전투사 같은..;;
글쎄, 싸이의 노래 가사처럼 음악에 미치면서 인생을 즐기는 건 무슨 챔피언인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말이다.

물론, 지키고 싸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반인들보다 더 힘 좋고 체격 좋고 잘 싸울 것이다. 골리앗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래서 우승자라는 의미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직업이 챔피언인 사람은 지위 내지 실력도 챔피언일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말보회 한킹은 챔피언을 그냥 투사가 아니라 ‘최고 투사’라고 번역했더라. 저런 번역은 한킹이 유일하다. 원래 의미에다가 나중 의미까지 저렇게 넣고 싶었던가 보다. 한킹은 전반적인 번역 스타일이 영킹 직역뿐만 아니라 ‘나중 의미’도 더 살리는 쪽이다 보니.. 일면 수긍이 간다.
또한, testament를 그냥 언약이라고만 옮기기는 아까워서 흠정역이 ‘상속 언약’이라고 번역한 것과 비슷한 워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킹은 testament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음)

4. 은과 돈과 재물

행 8:20 말이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네 돈과 더불어 망하라. 이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행 8:20)
여기서 ‘네 돈’ 부분을 ‘돈’ 대신 ‘은’이라고 번역한 역본이 생각보다 여럿 있다. 당장 개역성경도 그렇고, NASV나 NRSV도 그렇다.

궁금해서 잠시 조사를 해 보니, 이건 원문 변개 이슈는 아니다. 변개된 계보의 성서 중에도 ‘돈’인 역본 또한 많기 때문이다.
같은 헬라어가 문맥에 따라서 은도 되고 돈도 되는 것 같다. 즉, 이건 번역에서의 바리에이션이다.
베드로는 금과 은이 아니라 유독 은과 금이라는 말을 썼는데, (행 3:6, 벧전 1:18) 이때의 은과 저기서의 돈이 같은 단어이다.

우리 한자어에서는 현금, 등록금, 계약금 등.. 금을 돈과 비슷한 뜻으로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금에 앞서 은이 먼저 화폐로 널리 통용됐다.
오죽했으면 돈을 보관하는 기관의 이름도 ‘은행’이지 않은가? 그리고 '은전 한 닢'이라는 유명한 수필도 있다. ㄲㄲㄲ

성경에 등장하는 화폐들도 거의 다 은화이다.
주님의 몸값부터 시작해서 요셉의 몸값, 사도행전 19장에서 불태운 주술 서적의 가격.. 은이다.
서양의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중국도 이런 은본위제 국가로 유명했으며, 아편 전쟁 당시에도 은이 거래됐었다.

‘네 돈’ 말고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의 ‘돈’은 앞의 돈/은과는 다른 헬라어이다. 용어 몇 개를 찾아보니 이건 보편적인 ‘부, 재물’과 비슷한 맥락으로서 돈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베드로는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의 선물은 한낱 은이나 금과 견줄 바가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아무쪼록, 우리 같은 헬알못(?) 일반인은 은이니 돈이니 재물이니 이런 게 알쏭달쏭하면 우리의 모국어, 아니면 최소한 영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최종 권위인 킹 제임스 성경이 규정해 준 원어의 뜻을 따르면 될 것이다.

하긴,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의 시편 8편에서 “인간을 천사보다 약간 낮게 하시고”에 '천사'가 히브리어로 그냥 엘로힘.. 하나님/신들과 같은 단어라고 한다. 돈/은과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같은 단어가 하나님, 신, 천사 모두 가능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_=;; 하지만 이건 문맥상 하나님일 리가 없고, 신약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헬라어로 천사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들었다. 저기서의 의미는 당연히 천사가 돼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여러 주제의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성경 읽을 때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양한 번역본을 참고하면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관점을 학술적으로 섭렵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그런 면모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닥치고 익숙한 단일 모국어 역본만 철썩같이 반복해서 읽으면서 골수에 새겨서 "암송"하고, 일상생활에서 곧장 그 말씀이 떠오르게 하는 거.

이 둘에 대한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으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형태가 단순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헛똑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적사기 말장난 기만을 싫어한다.
이솝 우화던가? 당장 고양이가 쫓아오는데, 똑똑한 쥐는 탈출하는 방법 100가지 중에서 뭐가 지금 가장 효율적일지 짱구 굴리면서 고민만 하다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닥치고 달리기인지 개헤엄인지 방법을 하나밖에 모르던 평범한(?) 쥐는 자기가 아는 방법 하나만 X나 무식하게 밀어붙여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아는 건 많은데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어느 게 나에게 당장 필요한 진리인지를 모르는 건 영적으로 바람직하게 성장한 상태가 아니다.
전자가 오히려 혼동을 야기하면서 후자의 활동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다~~ 세상에 100%라는 건 없다" 이건 유한한 자원에서 최대의 가성비를 찾는 공학 같은 세상 학문에서나 통용되는 특징이다.
그 반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최종 권위는 이건데 그래도 추가로 참고적으로 요렇게도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도 생각하긴 했다" 이렇게 중심 절대값부터 잡고 나서 부가설명 액세서리를 참고하는 형태가 돼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문자적 해석부터 한 다음에 영적 교훈을 넓고 다양하게 적용하듯이 말이다.

성경 말씀이나 찬송가 가사 같은 건 책을 보고 있지 않아도, 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아도 일상생활 중에 튀어나오고 흥얼거릴 수 있어야 한다.
찬송가라고 해서 맨날 군가 아니면 중세 장송곡 같은 식상한 멜로디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거 뭐 악보를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도로 박자가 너무 복잡한 2000년대 이후 CCM은..;; 과연 어렵고 힘들 때나 성령 충만할 때 누구나 쉽게 떠올려서 그대로 부를 수 있을까? 세월을 안 타고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불후의 명곡이 될 수 있을까?

그것처럼 그 좋은 영어 성경도 말이다. 영어 성경에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Rejoice in the Lord 같은 쉬운 문구만 있는 게 아니다. 성막이나 성전 설명을 영킹으로 바로 읽고 알아듣고 머리에 외울 수 있겠는가?
영어 영어 하다가 자기한테 본질적인 걸 놓치지도 말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8/23 08:35 2024/08/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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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보회 한킹

말씀 보존 학회는 우리나라에서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걸 최초로, 가장 먼저 개척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킹이라는 성경도 면류관, 천국, 예수님 대신 예수, 길 대신 도(사도행전) 등 옛날 성경 용어가 남아 있어 좀 정겨운(?) 느낌이 든다.

얘들은 한킹을 다른 교회· 교단들에다가 전파하는 것보다는 독자적인 교회· 교단을 개척하려는 성향이 더 강했다.
모바일 생태계에다 비유하자면 애플의 맥이나 아이폰이 완전히 자기네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일체형인 걸 생각해 보시라. 이 송오 목사는..

  • 성경침례교라는 아이폰을 만들었고,
  • 그 하드웨어에서 돌릴 한킹이라는 iOS의 개발을 주도했다.
  • 그 뒤 그는 말씀 보존 학회라는 앱스토어를 만들었고,
  • 이를 토대로 세대적 진리, 럭크만 주석서 같은 다양한 앱을 출시했다.
  • 이런 조직과 교회, 성경, 서적을 통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는 여러 앱등이들을 양성했다.

이런 식이다.
스티브 잡스는 사업가로서는 혁신적이었지만 사석에서나 직장 상사로서는 X나 X랄맞은 인성과 싸가지를 자랑했다고 한다. 이 송오 목사도 이런 쪽으로 아주 악명높았었다.

쟤들은 자기 조직, 자기 교리 노선, 성경, 교회를 완전히 통합 일체형으로 본다. 사고방식이랄까 포교 전략이 저렇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저렇게도 독단적으로 구는 거다.

그래서 심지어 30여 년 전엔 자기들(만)이 대한민국 최초의 진정한 성경적인 신약 교회라는 드립을 쳤던 건 유명한 일화이고, 반대급부로 자기 교회에 있다가 나간 사람을 배교자라고 그렇게도 욕을 해댔다.
진짜로 순수하게 진리를 전하다가 부당한 박해와 배척 받는 거랑 그냥 혈기 깽판 부리다가 간증 잃고 욕 쳐먹는 걸 구분을 못 하고.. 심지어 탈퇴자한테는 자기네 성경을 쓰지 말라는 어이 안드로메다 급의 미친 소리까지 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진짜 중요한 사항인데..
한킹은 킹 제임스라는 영어 성경을 중역했기 때문에 '킹'이라는 명칭이 붙은 게 아니다.

400년 전 잉글랜드 사람들이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쓰였던 그 바른 원어 원문(TR 공인 본문, 정통 맛소라)을 갖고,
마치 영킹을 만들듯이 우리말 성경을 만들었다..!! 도착어만 다르지 출발 원문이 영킹의 그것과 같다는 뜻에서 '한킹'인 것이다. ㄲㄲㄲㄲㄲㄲ

어, 써 놓고 보니 약간 진화론 얘기 같네..??
현대 진화론에서는 인간(한킹)이 원숭이(영킹)로부터 진화(번역)한 게 아니라..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공통조상(히브리 헬라 원어)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하니까 말이다! 딱 그 모양새이다!!!

한킹은 신약은 TR 원어 원문 기반(시민권)에다가 영킹 용어(이스터, 순교자 등)를 참고해서 만들어졌고,
오히려 구약이 영킹 중역(로뎀나무가 아니라 향나무)에다가 맛소라 히브리어 본문 용어(음부, 아세라)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그 어떤 성경도 채택하지 않은 특이한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_=;;

일각에서 모함하는 것처럼 "한킹은 킹 제임스 성경이 아예 아니다"는 당연히 아니다. 단지, 성서 초등학교 애들을 도롱뇽 소년이 아니라 개구리 소년이라고 불러도 문제 없는 거, 구치소 얘기이지만 교도소 일기라고 웹툰 제목을 붙인 거,
그리고 복음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불못이 아니라 지옥 간다고 말하는 거(정작 영원히 있게 되는 곳은 불못인데)..

이런 관계일 뿐이다. 별개가 아니고 어차피 그게 그것인 관계이기 때문에 좀 더 인지도 높고 대중적인 명칭을 썼을 뿐이다. 차이라고 해 봐야 영킹이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을 묘사했다면, 한킹은 그게 결국 이런 뜻이라는 식으로 표현한 정도가 대부분이다. (자유-생활방식 → 시민권, 긴장하다 → 거르다, 작은숲 → 아세라)

1980년대에 이 송오 목사가 TR을 기반으로 코리언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는 건 그 당시 미국의 KJV 옹호 진영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터 럭크만 같은 강성 영킹 유일주의자도 그에 대해서 "당신 왜 영킹에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아?" 같은 문제 제기는 하지 않았다.
말보회 교회를 직접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교회 조직이나 성경책에 대해서 이렇게 애플에, 진화론에, 개구리 소년 비유까지 동원하면서 진지하게 깊이 고찰해 본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_-;;;;;

2. 표준역

표준역은 2020년대에 정말 젊은(나보다도 어린..!) 신학도가 과감한 영킹 중역을 표방하면서 편찬한 성경 역본이다.
우선 칭찬부터 하고 시작하자. 몇몇 일부 단어나 표현은 참신한 시도이거나 잘 번역한 것 있다.

- (가령, seek와 find를 찾다/발견하다 라고 구분해 준 것, win을 쟁취라고 시도한 것,
행 5:30을 단순히 "나무에 매달아 죽인"이 아니라 "죽여서 나무에 매단"이라고 옮긴 것.. 이런 건 잘한 거다.)
기존 타킹 쓰는 진영에서는 표킹의 이런 면모까지 다 무시하면서 밟아버리려는 듯이 감정적으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 영킹 직역이라지만 일부 표현은 말보회 한킹의 번역을 따른 게 있다. grave, walk 등.. 단지 원어를 참조한 게 아니라 영어에도 그런 뜻 있다고 웹스터 사전을 들이댈 뿐.

- 그러나 몇몇 접속사나 관사 복수형을 일일이 다 살려서 넣은 건 무리수이다. 영어의 모든 관사가 정확하게 수효를 한정짓는 용도로 쓰이는 게 아니다. 그냥 다음에 오는 단어가 형용사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라는 것만 명시하는 용도로 습관적으로 붙는 것도 있으며, 그런 건 한국어로 옮길 때 굳이 번역하지 않는 게 정상적인 번역이다!
저런 번역 스타일만으로도 논란이 되는데 하물며 그렇게 하지 않은 타 역본을 변개 삭제라고 까는 거는.. 무리수를 넘어 누워서 침 뱉는 자충수이다.

- 같은 뜻인데 단순히 영문학상 패러프레이징 하느라 유의어를 동원한 것을 굳이 우리말로 무리해서 다 다르게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가령 행10의 kill '잡아먹다'과 11의 slay '도살하여 먹다')

- '비둘기 그녀, 지혜 그녀'는 좀 다시 생각했으면..? 영킹은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아기도 it이라고 가리키는 부분이 있다. 표킹도 아기를 '그것'이라고 옮기지는 않았더구만? 영어 대명사랑 우리말 직역이 어차피 대응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 마케팅 방식이 적절치 못했다. 그렇게도 영킹 직역 성경을 내고 싶었으면 차이점만 나열하고 자기 것이 뭐가 좋은지만 얘기를 하면 됐는데 무슨 타킹들이 변개하고 삭제했다는 소리는 그 뒤로 욕을 십자포화로 얻어먹어도 실드를 칠 수 없다.
누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정당하게 성경 번역 새로 해도 기득권들로부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욕 먹고 비방 당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저거는 부당한 욕이 아니라 욕먹어도 싼 짓을 해서 욕먹는 거다.

- 영어 본문을 갖고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썰을 풀면서 어그로 끌었던 것도 이 바닥의 금도의 도를 어긴 거다. 일부 목사님들로부터 미운털 단단히 박힌 꼴이 됐다.

그러니 표킹에 대한 내 생각을 세 줄로 요약하면

  • 일부 영킹대로 잘 캐치하고 잘 번역한 표현
  • 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번역 스타일
  • 적절하지 못했던 마케팅

정도다.
참조용으로 고려할 만은 하다. 나도 처음엔 '다시 채우라'와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언'이 모두 살아 있고 it came to pass를 다 번역했다고 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봤으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아직은 무시 못 할 지경인 것 같다. 일부 장점이 아니라 성경의 전반적인 번역 퀄리티나 저 진영의 인성의 퀄리티가 아직 검증이 덜 된 것 같다. 더 지켜봐야지.

"이제야 우리 민족에게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앗싸!" 이렇게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지는.. 글쎄? 표킹 쓰고 싶거들랑, 한참 더 교열 보고 다듬는 일에 동참할 의향이 있는 사람만 그 진영으로 가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성경으로 예배드리고 싶거들랑 혼자 조용히 교회 옮기면 된다. 기존 교회 목사를 비방하고 딴 초신자들 꼬드겨서 우르르 나가고 분탕질 치지는 마시라. 그건 무식하고 덕이 되지 않는 짓일 것이다.

3. 흠정역 (+ 근본역)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흠정역'은 한킹의 뒤를 이은 2인자로 시작했지만.. 말보회의 삽질 뻘짓으로 인한 반사 이익을 받으면서 지난 20년 동안 점유율을 꾸준히 올려 왔다. 안티오크 권위역의 용어와 번역 이념을 많이 계승한 한편으로, 영킹의 표현을 말보회 한킹보다 더 많이 반영했다.

말보회가 애플이면 흠정역은 기기의 제조사가 다양한 안드로이드 진영이기라도 한 걸까? 흠정역 진영은 성향도 더 개방적이었다. 교리 노선이 번역자와 다른 기성 개신교회나 독립 교회들에게 자기 성경을 널리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 대신 흠정역 쓰는 교회들은 영어와 원어 사이의 관념부터 시작해서 세부 교리의 파편화가 말보회 계열보다 더 큰 편이다.

그래서 흠정역 진영이 한킹 진영을 완전히 대체했느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리 되지 못했다. 이쪽도 단점과 한계가 있고, 공과 과가 모두 생겼다.
세월이 흐르고 세력이 커지면서 성경 번역자 개인이 분별력이 흐려지고 흑화하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방식만 다를 뿐 절대값은 별 차이 없었다. 허나, 말보회 쪽은 교리 노선이 확고하고 탄탄해서 성경과 성경 번역자를 완벽하게 분리해서 판단할 수 있는 반면, 흠정역 쪽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흠정역은 번역자의 독특 내지 이상한 신념이 들어가서 성경에 예언이라는 단어가 전혀 없다. 그리고 창조과학회 영향을 받아서 세대적 진리에서 간극 재창조는 별 이상한 근거를 들면서 거부하는 등 교리 노선이 예전부터 많이 삐그덕거렸다.
10년 전에는 "원어로 너스레 떠는 목사 격퇴하기" 하면서 영킹을 강조하다가 지금은 원어 의존도가 훨씬 늘었다.
10년 전에는 "바른 성경을 믿어서 이단 소리 들으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하다가 지금은 "우리는 이단 아니다. 성경 선택권을 보장하라"...;;;

차라리 한 교리 노선에 일관되게 단호박이면서 탈퇴자 뒷담화만 거하게 하던 원래 동네가 더 나아 보일 지경이다.
이 와중에 최신 마제스티판은 딤전 6:5 '이익이 경건'을 이상하게 고쳐서 이전 판보다 개악되었고, 이것 때문에 학을 떼는 사람과 이것도 별 상관없다고 실드 치는 사람이 갈라져서 싸우는 촌극이 벌어졌다.

말보회에서는 지금도 흠정역이 짝퉁 가짜 성서라면서 비방 험담하느라 여념이 없다. 근데 쟤들은 상대방의 동태에 대해 공부를 하긴 할까? 욕할 거면 진짜로 물어뜯기 좋은 이런 아이템을 갖고 물고 늘어져야지, 책 제목 같은 별 쓰잘데기없는 걸 갖고 참 수준 낮게 트집 잡고 제 얼굴에 침 뱉더라.

그 와중에.. 2020년대에 근본역이라는 게 성서 침례교회 진영에서 만들어져 나왔다. 이건 예언 같은 몇몇 단어만 빼면 흠정역과 아주 비슷하다.
다만 판이 올라갈 때마다 정오표를 만들어서 수정 내역을 정직하게 공개해 주고(!!!!), 개인이 아니라 위원회 명목으로 판권 없이 오픈소스 정신을 반영해서 출간하고.. 딱 3판까지만 만들고 영원히 관두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번역보다는 번역 방식 면에서 참신한 시도를 한 것 같다.

이상이다.
이 2020년대 대한민국 땅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은.. 왕짜가 들어간 성경을 쓴다면서 정작 왕이 없는 판관기(사사기) 말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한 진영이 다른 진영을 완전히 압도하고 대체· 흡수하지 못하고 전부 찢어져서 각자도생 중이다. 다양한 번역본들이 서로 장점을 합쳐서 하나로 수렴을 못 하고 혼란만 더 커지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각 진영의 번역자들을 골방에다 몇 달 가둬 놓고 한킹의 교리 체계에다가 흠정역 정도의 문장 구성, 거기에다 표준역의 일부 잘 캐치한 표현들을 집어넣어서 단일 역본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만.. 그런 기적적인 통합이 성사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다. -_-;; 애초에 정교분리 세속 국가에 제임스 왕 같은 중재자도 있을 리 없으니까.

어느 거 하나도 선뜻 못 고르겠으니 "역시 영킹을 직접 보는 수밖에 없군.." 이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아주 짧고 단순한 구절이야 영어가 임팩트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신은 엄청 길고 복잡하고 꼬인 영킹 구절도 술술 읽고 암기할 수 있겠는가? =_=;;

이 와중에 "이거는 이 번역이 맞고, 저거는 저 번역이 맞는 거 같다" 식으로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입맛대로 판단하는 교만이나 지적사기는 정말 위험한 짓이다. 내가 저런 짓을 하기 싫어서 킹 진영으로 왔는데, 한국어 한정으로는 그 진영 안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게 됐구나. -_-;;

본인은 오랫동안 흠정역을 쓰는 교회를 다니다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교회를 옮길 일이 생겼다. 이 참에 예언이 있고 "하나님 자신을 어린양으로"(창 22:8)가 있는 성경을 쓰고 싶어서 진영을 옮겨 봤다. 유의미한 단점이란 게 "영어가 아닌 TR 번역이다"밖에 없다면.. 그게 뭐 어때서? 영어와 TR의 차이점에 대해서 판단을 보류하고 공부 중이다.
이래저래 우리나라는 대한 성서공회만이 성경 번역을 독점하는 동네가 결코 아니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20년, 30년 뒤엔 3rd-party 성경의 점유율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참 궁금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30 08:35 2024/07/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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