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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 전망대와 행주산성

본인은 작년에 강화도에 나들이를 다녀와서 이 블로그에다가도 여행기를 올린 바 있다.
그때 본인은 고인돌이나 마니산, 고려 행궁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전망대도 보고 왔다. 남한과 북한이 첩첩산중의 육지가 아니라 거대한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여기는 DMZ 같은 건 없으며, 강 건너편에는 의외로 북한의 마을이 곧바로 보이고(선전용으로 일부러 때깔 곱게 꾸며 놓은 것이지만..) 군인이 아닌 평범한 주민들도 보인다. 이런 광경은 한반도의 서부인 한강 하구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본인은 이렇게 강 건너편의 북한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강화도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도를 찾아보니 '오두산 통일 전망대'라는 게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오두산은 높이가 100m 남짓한 낮은 산이며 백제 시대에 '오두산성'이라는 성곽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가 임진강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서 경관이 아주 좋으며, 자연스럽게 강 건너편의 북한 땅을 보기에도 좋다. 게다가 그 어느 전망대보다도 서울과 가까이 있고 자유로 도로의 바로 옆이기까지 하니 접근성도 훌륭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92년 9월, 노 태우 정권 시절에 여기에 통일 전망대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자유로와 거의 동시에 완공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서 차를 몰고 여기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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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을 올라서 아래의 자유로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반대로 자유로를 저렇게 달리는 도중에도 이 전망대가 차창 밖으로 보인다.
자가용이 없더라도 셔틀버스가 평지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전망대를 찾아갈 수 있다. 자세한 건 해당 기관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그런데 이 높은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 근성의 자덕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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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의 입구 모습이다. 여기는 위도가 가장 높고 바다를 옆에 낀 강원도 고성의 통일 전망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정반대이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오두산 전망대는 북한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전망대들과는 달리 "민통선 안에 있지 않다!" 여기 주변의 지형과 군사분계선의 특이한 선형 덕분에 가능한 전국 유일의 예외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이 전망대는 드나들기 위해서 신분증을 까고 차량 번호를 적고 출입 허가증을 받는 식의 난리를 칠 필요가 없다.

군부대 내부에 있는 전망대들은 북측 방면 사진 촬영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엄격한 통제가 걸리는 편이지만, 이 전망대는 그런 게 전혀 없이 아주 관대한 분위기였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전망대 주변에 일제의 군사 시설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여기 일대는 국내의 인터넷 지도 사이트들이 항공 사진을 제공하지 않는 엄연한 전방 보안 지역이다.

전망대 안에는 실향민들을 위해 북한의 주요 도시들 내부를 3D 그래픽으로 재현해 놓은 동영상 상영관이 있고, 북한의 도발 역사와 통일의 필요성, 남과 북이 추구하는 통일 이념 같은 원론적인 얘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남한이 서부 지방도 땅을 좀 더 많이, 송악산 정도까지만 수복했으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고려 시대 유적이 더 많아졌을 것이고 경의선 전철이 개성까지도 뚫렸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 오두산 전망대 같은 전망대도 이곳이 아니라 송악산 정도로 더 북상하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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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주된 풍경은 이것이다.
저~~멀리 보이는 땅은 북한 개풍군이다.
그리고 왼쪽 중간에 있는 땅은 남한 김포시 하성면이다. 북한 땅과 남한 땅 사이에 있는 물길은 임진강과 합류한 한강으로, 반쯤 이미 서해 바다이다.
김포시 하성면과 내가 있는 곳 사이에 있는 물길은 한강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물길은 임진강이다. 지리 구도가 대략 이렇게 된다. 이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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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안에 들어가 보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지도와 함께 잘 설명되어 있다. 한강 하구 정도로 가면 강폭이 거의 2km에 달한다.
여기도 나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셈인데, 남양주 두물머리나 정선 아우라지와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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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망대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북한의 마을과 주민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망원경으로 봐도 매우 자그마해서 식별이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논밭에서 농삿일을 하는 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여기 주변에는 선전 구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두산 전망대가 또 아주 좋은 건 여느 전망대들과 달리 망원경이 무료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망원경을 비교적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면서 망원경으로 비치는 상을 카메라로 찍는 시도까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원하는 각도를 맞추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색깔도 뿌옇긴 하지만, 그래도 사물 자체는 카메라의 줌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찍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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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남한 쪽(김포 하성면)을 보고 찍은 모습이다. 흐리던 하늘이 맑고 파래져서 경치 구경하기에 적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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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폭(=거리)이 좀 압박스럽긴 해도 수심이 막 깊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밀물 썰물까지도 있다는데.. 누가 미친척 하고 근성으로 헤엄쳐서 월북이나 탈북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긴,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기도 했다.
다대포 해수욕장이 있는 부산 낙동강 하구와는 달리, 군사적으로 완전히 봉인되어 버린 한강 하구의 안습한 현실을 이렇게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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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에서 남한 내륙 쪽을 둘러보니, 맞은편 언덕 위에는 웬 거대한 한옥 건물이 보였다. 저건 도대체 뭔가 궁금해서 찾아 봤더니 '고려 통일 대전'이라고 고려의 종묘뻘 되는 행사를 치르는 '고려 역사 선양회'라는 단체 소속의 사유지라고 한다. 헐... 저기서 1년에 한 번 '대제'를 지낸다고..

이렇게 본인은 오두산 통일 전망대 구경을 잘 마쳤다. 이런 걸 보면 맨날 뉴스에서 핵 만들고 미사일 쏘는 그 또라이 북괴라는 나라가 내가 사는 곳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실존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파주에서 데이트 코스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헤이리 예술 마을, 프로방스 마을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고 북한과도 불과 4~5km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방이라는 것에 놀랐다. 거기도 보안 문제 때문에 국내 인터넷 지도에서 항공 사진이 제공도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좀 정치적인 이슈 얘기를 하자면, 본인은 인제 와서 남북이 뭔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건 거의 '영어 공용어화'만큼이나 가능하지 않으며 타이밍이 물 건너 갔다고 상당히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북괴 체제를 붕괴시킬 기회를 다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통일만 되면 한국이 인구가 7500만이 되고 탄탄한 내수 시장을 갖춘 동북아시아 강국이 되고 어쩌구 희망적으로 나불거리는 건, 북한 주민들이 굶주린 약골· 마약 중독자가 아니고 남조선 인민들에 준하는 체력과 생산성이 있으며, 김씨 정권에 세뇌되지 않은 정상적인 정치관 종교관 국가관을 갖고 있을 때에나 성립하는 얘기이다. 지금 그 전제조건이 성립하는가? 전혀, 네버..

그러니 지금은 정말 통일을 외칠 때가 아니라, 통일이 안 되고 설령 북한 땅을 다른 세력이 다스려도 좋으니 전적으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소말리아 아이티 캄보디아보다도 못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고, 북괴 정권을 고립하고 압박시키고 무너뜨리는 일에 신경써야 할 때이다. 지금은 우리가 힘이 충분치 못해서 휴전선 전방에서 '북괴의 위협'만 제거하고 예방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걸 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영구분단만 유지해도 중간은 간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북괴랑 대화하자네 퍼주자네 하는 놈들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다 쳐죽이고 씨를 말려야 된다. 이놈들은 일제 시대 친일파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나쁜 악마들이기 때문이다. 악마를 상대로는 전기톱이 훌륭한 대화수단이거늘 무슨 달러 현찰이 대화수단이란 말인가?
꼭 이런 애들이 북괴를 좋게 말할 수는 없으니 오로지 남한만 정체성을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며, 맨날 민족 민족 들먹이지만 동족이 자유를 빼앗긴 굶주린 노예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두산 전망대 다음으로 본인은 동일하게 자유로와 아주 가까이 있는 행주산성을 덤으로 들렀다. 언덕의 높이가 서로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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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이 자리잡았던 덕양산은 서울 봉화산만큼이나 산맥 없이 혼자 우뚝 솟은 독립구릉이다. 강 쪽으로는 거의 절벽이고 육지에서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요새화에 유리하고 군사적 가치가 높았다고 한다.
언덕의 특성상 경사의 압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낮기 때문에 성인 남자의 체력 기준으로는 슬금슬금 오르면 정말 금방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예전에 서울 응봉산을 오르던 정도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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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도달하니 역시 자유로+강변북로와 한강, 마곡철교(공항 철도), 방화대교 등의 다리가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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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정자도 있었다.
행주산성 안에 있는 각종 건물들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들 후대에 새로 건설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간판이 '덕양정', '대첩비각', '충의정' 등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로 적혀 있었다.

행주대첩(권 율)은 진주성 대첩(김 시민), 한산도 대첩(이 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이 순신은 임팩트가 독보적으로 너무 크고, 진주성은 그래도 2차 전투 때는 함락되어 버리기라도 했다만, 행주대첩에 대해서는 본인이 지금까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주산성 안에는 적당히 나무 아래에서 쉴 공간이 많이 있었으며, 그 당시 전투를 기리는 기념관도 드문드문 자리잡아 있어서 휴식과 힐링용으로 좋았다. 단, 본인의 막연한 예상과는 달리 여기는 돌로 쌓은 성벽 같은 건 없었다. 토성 비스무리한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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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본인은 이 정도로 서울 서부까지 온 김에 행주대교를 건넜으며, 인천 계양 역 근처의 경인 아라뱃길 공원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는 정작 배의 통행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오히려 양 옆 둑길이 훌륭한 자전거 라이딩 코스가 되었을 뿐이다. =_=;; 이러려고 괜히 운하를 팠나 자괴감이 충분히 들 만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7 08:29 2018/01/0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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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에서 제일 큰 주목을 받는 교통사고의 유형은 (1) 음주운전, (2) 졸음운전 대형차(버스, 트럭) 사고, 그리고 (3) 고령 운전자 사고인 것 같다. 일명 김여사 사고는 2010년대 초에 인천외고 운동장 사고와 인천대교 마티즈 사고 때 크게 논란이 일었다가 요즘은 잠잠해진 듯. 하지만 지난 2017년 여름에 발생했던 일산 백병원 차량 돌진 + 건물내 추락 사고는 오랜만에 또 발생한 김여사의 전형적인 운전 미숙 사고이다..;;

1. 음주운전

뺑소니와 더불어 죄질이 제일 나쁜 축에 들며 사람을 제일 빡치게 하는 사고이다. 이런 사고가 꼭 피해자는 차량 화재+몰살인데 가해자는 그냥 경상인 경향이 있다. 좀체 근절되지 않고 있어서 가해자 처벌을 더 강화하라는 여론이 기세등등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우리나라는 범죄자 인권에 너무 관대한 곳이어서 별 희망이 없을 것 같다. 이 글에서 음주운전 사고 사례는 생략하고, 더 소개하지 않겠다.

굳이 단속 기준을 지금보다 더 강화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일단 대인사고가 났다 하면 가해자를 완전 작살을 내 줘야 할 것이다. 최소한 피해자 유족 측 변호사가 "저래 봤자 가해자는 고작 몇 개월~1년이나 살다 나올 텐데 그냥 합의해서 푼돈이라도 챙기시죠?" 이딴 식으로 유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제기랄, 이게 나라냐? 오래된 생각이다.

2. 대형차 졸음운전

이건 2016년 7월의 봉평 터널 사고에 이어 작년에도 지난 7월에 경부 고속도로 상행선 양재IC 인근에서 거한 사고가 한 건 터지는 덕분에 또 이슈가 됐다.
버스와 승용차가 1차로에 엉겨 있길래 이것만 봐서는 "또 어떤 승용차가 자기 길이 막히니까 버스 전용 차선 침범하는 병신짓 하다가 뒤에서 달려오는 버스에 추돌 당했나" 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추돌 사고 자체는 2차로에서 발생했다. 오히려 버스가 웬일로 버스 전용 차선에 있지 않고 앞의 정체 구간을 못 본 채 앞의 승용차를 그대로 쾅 들이받고 타고 올라갔다. 승용차 과실 100%에서 버스 과실 100%로 원인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뒷차가 무게와 속도를 이기지 못해 앞차를 짓뭉개고 타고 올라가는 건 태생적으로 여러 객차들이 줄줄이 연결된 철도 차량의 중대한 충돌· 탈선 사고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렇게 될 정도이면 승객이 많이 죽거나 다친다.
"흰색 K5"가 졸음 운전 대형 버스에게 추돌 당해서 탑승자 전원 중상· 사망의 피해가 났다는 점은 봉평 터널 사고와 동일하다.

하루 10몇 시간씩 쉬지도 못하고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분들의 처우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방법이 없는지? 근본적으로는 물류비 교통비의 인상으로 불가피하게 귀결돼야 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인 운전사도 딸을 셋이나 둔 가장이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무리하게 근무를 했다던데 말이다.

몇 시간 운전했으면 얼마 동안은 반드시 쉬라고 법으로 강제로 규정해도 현실에서는 빡빡한 운전 스케줄이 더 중요하고 제대로 지켜질 수가 없는가 보다. 운전 기사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처럼 버그와 싸우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일정에 쫓기는 건 동일한가 보다.
물론, 아예 대형차의 최대 속도를 강제로 낮춰 버리는 건 미친 짓이며 개인적으로 적극 반대다. 자꾸 새 법을 만들고 규제만 더 넣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쉬는 걸 보장하는 법'부터 제대로 시행되게 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영업용 차량을 쉴 새 없이 운전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미친 짓을 할 리는 없으니, 음주운전은 주로 자가용 승용차가 저지르는 편이다. 그 반면, 졸음운전 사망 사고는 운전이 생업인 대형차 운전자가 내는 편이니, 가해자의 성격과 양상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버스 전용 차선 침범은.. 자기 차가 제로백을 5초 만에 달성 가능한 제네시스 프라다 같은 급의 차라든가, 무슨 1분 1초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응급 환자를 수송하는 거라도 아니라면 꿈에도 시도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이건 단순히 단속에 걸리고 과태료 벌금 무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거는 도박이기 때문이다.)

3. 고령 운전자

다음으로 이건.. 자가용과 영업용 차량을 딱히 가리지 않고 고령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손발 움직임 내지 판단 착오를 일으켜서 사고를 내는 빈도가 높아지는 편이다. 김여사처럼 '일부 예외적이고 운 나쁜 사례'만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2010년경이던가.. 면허를 4년 반 동안 필기 시험에서만 거의 무려 1000번 가까이 떨어진 할머니가 결국 턱걸이로 필기와 실기까지 간신히 합격했다. 이분은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탔고, 현기차에서는 축하한다고 이 어르신에게 경차를 한 대 기증도 해 줬으나..
저분은 그로부터 1년이 채 못 가 차가 반파되는 교통사고를 냈다고 한다. 그 뒤로 근황은 전해지는 게 없어서 알지 못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2015년의 일인데.. 어느 70대 모범택시 운전기사가 서울 소공동 소재의 롯데 호텔에 차를 몰고 들어가던 중, 이거 뭐 졸음운전도 아니고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들었는지 화단을 들이받고 근처에 세워져 있던 고급 승용차들 4대를 연달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 보도 자료 링크)

인명 피해 없는 접촉사고 수준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피해 차량 4대 중에서 제일 저렴한 싸구려 차가 그랜저였다는 거. 나머지는 포르쉐 두 대와 에쿠스였다..;;
수리 견적이 거의 5억 가까이 나왔으나.. 기사분은 대물 한도 1억까지만 보장되는 보험에 들어 있었고, 나머지 보상비는 고스란히 개인 부담이 됐다.

내가 알기로 택시나 노선 버스 같은 영업용 차량은 대 "인"은 I, II 보상 모두 무한대인 보험에 의무적으로 들게 돼 있다. 하지만 대물은 아니었나 보다.
저분은 처음에는 급발진 핑계를 대며 발을 빼려 했으나, 블랙박스 영상을 판독한 결과 그렇지 않고 순수 자기 과실 100%인 게 빼박 입증됐다.

그야말로 집안 뿌리를 뽑아도 갚지 못할 액수 때문에 택시 기사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대로 주저앉았고, 거의 자살을 생각하는 지경까지 됐다. 이건 뭐 거의 빚보증 잘못 서서 인생 조진 것과 별 차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롯데 호텔 측에서 이 사정을 듣고는 보험 보상 범위를 초과하는 나머지 액수는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회장님이 초 대인배 조치를 취해 준 덕분에 구제를 받았다. (☞ 보도 자료 링크)

나름 모범 택시라는 것도 최하 5년 이상 무사고를 달성한 '모범 운전자'만 몰 수 있는 것일 텐데, 평생 쌓아 왔던 무사고 커리어를 저분은 저 사고 하나로 다 말아먹었다..;;
그러니 고령 운전자를 상대로는 적성검사를 더 자주 시키고, 일본처럼 면허 자진 반납을 유도하는 쪽으로 인센티브 주고 장려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너무 젊은 애들은 철없고 객기 부리느라 사고율이 높아서 자동차 보험료가 비싸다지만, 반대편 극단의 노인은 다른 이유로 인해 사고율이 높은 게 현실이다. 다만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정말로 차가 없으면 안 되는 곳에서는 문제를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 궁금해진다.

아울러, 고령자는 운전자로서 내는 교통사고뿐만 아니라 보행자로서 신호 무시 무단횡단 교통사고도 좀 문제이다. 노인분들은 지금처럼 차들이 넘쳐나고 교통법규 준수가 절실하던 시절에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며, 오랜 연륜에 따른 고집도 있어서 교통법규를 꼬박꼬박 잘 지키는 편이 아니다.

무단횡단을 할 거면 측면주시 잘 해서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들과 다르게 잽싸게 건너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들은 몸이 민첩한 것도 아니니 문제다. 애초에 무단횡단도 빨간불 기다리는 게 귀찮다기보다는 횡단보도까지 쭉 우회하는 게 귀찮고 거동이 불편해서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 기타: 긴급 자동차 관련

출동 중인 구급차나 소방차 같은 긴급자동차는 재량껏 눈치껏 신호 무시와 과속, 중앙선 침범과 버스 전용 차선 주행이 허용되며, 막히는 길에서 양보받을 권리도 인정받는 등 여러 특례가 보장된다.
하지만 긴급자동차도 운이 나쁘면 사고를 낼 수 있고, 과실 비율에서 언제나 면책되는 건 아니다. 옛날에 모닝와이드 블랙박스로 본 세상에서 이런 사고 사례가 방영된 게 있었다.

(1) 사이렌 울리며 출동 중인 구급차가 있었는데, 교차로에서 좌우로 당장 차가 없는 걸 보고는 신호 무시하고 슬금슬금 직진했다. 하지만 그 왼쪽에서는 파란불 신호만 보고 계속 달려오던 시내버스가 있어서 결국 둘이 충돌했다.

→ 구급차는 정말 합법적인 긴급자동차였던 관계로, 드물게 우열 없는 쌍방과실 50:50이 나왔다. 자기 차량 보험사가 각각 상대방 차의 손해를 물어주면 된다. 사설 견인차가 사고를 냈으면 이런 판정은 당연히 못 받는다.

(2) 화재 신고를 받고 여러 소방차들이 대열을 지어 사이렌 울리면서 출동 중이었다. 그 행렬이 지나가는 걸 못 참고 어떤 승용차가 소방차 중 대형 물탱크차를 추월해서 그 앞에 바싹 끼어들었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소방차들이 좌회전을 시작했는데 하필 그 승용차 앞에서 노랑-빨강으로 신호가 끊겨 버렸다. 단속 카메라가 있었는지 승용차는 우물쭈물 하다가 정지를 선택했으나, 무거운 물탱크차는 곧장 정차할 수 없어서 승용차를 추돌했다. 승용차가 없었으면 물탱크차는 선두 소방차들을 따라 꼬리물기쯤 해도 아무 문제 없을 상황이었을 텐데.

→ 승용차의 입장에서는 하필 노란불 딜레마 때문에 참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구나 결과적으로는 소방차가 앞차를 추돌한 것이고, 크고 무거운 소방차보다 승용차가 훨씬 더 많이 부서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과관계로 볼 때 승용차가 공익을 수행하는 긴급자동차를 상대로 거의 민족 반역자 급의 너무 큰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당연히 100:0 나왔다. 이거 방영된 동영상의 밑으로는 악플도(승용차 운전자 욕) 작살나게 많이 달렸다.

* 기타: 운전 면허 시험장에서 발생한 어이없는 사망 사고

지난 2016년 11월엔 도봉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참 어이없는 인명 사고가 났다. 시험을 치기 위해 배정받은 차량으로 가던 어떤 20대 여성이 다른 20대 남성 응시자가 탄 트럭의 앞을 슬금슬금 지나갔는데.. 이때 트럭은 출발 신호를 받고는 곧이곧대로 출발을 해 버렸다. 그래서 여성을 쳤다.

면허 시험장에서 차들이 무슨 쌩쌩 고속으로 달릴 리는 전혀 만무하다. 갓 출발하려던 상태였으니 곧장 사고를 감지하고 정지만 했으면 피해자는 기껏해야 좀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는 걸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지고 말았다. 가해자는 너무 놀라고 당황했거나 아니면 반대로 상황 파악을 못 했는지, 넘어진 피해자를 바퀴로 깔고 간 것 같다.

세상에 차량 급발진도 아니고, 어느 미친 음주운전자와 정면충돌을 한 것도 아니고, 대형 사고가 도무지 날 것 같지 않은 저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고로 죽다니 참 허탈하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동차는 총기와 맞먹는 위험한 물건이기 때문에 저런 곳도 군부대 사격장에 준하는 군기와 안전수칙이 철저히 지켜졌어야 했다.
모든 총기는 장전된 것처럼 다루고 절대로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 말아야 하듯, 그와 동일하게 누구든지 차 앞을 얼쩡거리지 말았어야 했고 그러는 사람이 있으면 감독관이나 주변 직원이 철저히 제지했어야 했다.

내 발이 인도에 있다가 차도로 옮겨지는 순간이라면 반사적으로 측면을 응시해야 하며, 주차된 차들 주변을 얼쩡거릴 때는 보행자일 때든 운전자일 때든 왕창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어폰 끼고 스마트폰 들여다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심지어 무단횡단까지 하는 사람들은 안전불감증이 너무 심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멀쩡한 운전자를 인생 꼬이게 하지 말고 조심해야지. 사실 요즘은 블랙박스도 있고 해서 도를 넘는 막장 보행자는 마냥 약자라고 편드는 게 아니라 과실이 더 높게 나오기도 한다. 그래야 마땅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4 08:35 2018/01/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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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창경· 창덕궁과 종묘를 다녀오고 나서 몇 달 뒤, 다음으로는 종로가 아닌 시청, 정동 쪽으로 놓여 있는 고궁을 답사했다. 이번에는 자전거 없이 전적으로 걸어다니기만 했는데, 답사 동선의 고저차를 감안하면 궁극적으로 이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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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시청 역은 서울 시청 및 서울 광장뿐만 아니라 덕수궁과도 아주 가까이 있다. 입구의 이름은 '대한문'인데, 본인은 저 명칭을 20여 년 전에 나왔던 어린이용 비디오 한자 교재의 출판사 이름으로 먼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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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대는 지난 2017년 3월, 반공 애국 시민들이 박 근혜 대통령의 인민재판 부당 탄핵을 반대한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목놓아 외쳤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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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으로 들어간다. 정전인 중화전이다. (돌바닥에 비석 같은 신하들 자리..) 이런 것들 이름을 붙이는 방식은 어떠했는지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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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는 동서양 건축 양식이 퓨전으로 섞인 의외의 건물이 있었다. 이름은 '정관헌'이라고 하고, 구한말인 1900년에 고종이 연회장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추가로 지은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는 '석조전'이라고 더 나중에 지어진 서양식 석조 건물도 있다. 덕수궁은 마냥 기와집 일색이 아니라 안에 의외로 이런 서양식 건물이 있었다. 물론 지금 있는 건물은 재건 복원된 것이고,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나머지 덕흥전, 함녕전 등의 건물도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지만 소개를 생략하겠다. 이렇게 덕수궁을 둘러본 뒤 본인은 후문 쪽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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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구세군 회관을 지났다. 옛날엔 뭔가 근대식 건물이라 하면 전부 붉은 벽돌 일색이었던 것 같다. 그게 지금으로 치면 '유리궁전' 같은 유행이었던 듯.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도 뭔가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는지, 제복 차림의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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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로와 새문안로2길 사이에는.. 서울 도심의 최고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복원을 위한 문화재 발굴과 조사라는 명목으로 민간인의 접근이 봉인된 넓은 폐허(?) 공터가 있다. 다른 구간은 높은 담장 때문에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지만, 그래도 출입문이 있는 곳에서는 철문 사이에다 렌즈를 집어넣어서 내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인제 와서 서대문(돈의문)이라든가 이 일대의 한양도성도 과연 부지 확보와 복원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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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그 이름도 유명한 구 러시아 공사관 첨탑에 도달했다. 고종 황제의 흑역사인 1896년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구'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의 러시아가 아니라 공산주의 소련 이전의 '러시아 제국' 시절 얘기다. 노(魯)뿐만 아니라 아(俄)도 러시아를 가리키는 한자로 쓰인 것이 생소하게 보인다.

원래 러시아 공사관은 훨씬 더 넓고 큰 건물이었지만 그것들은 6· 25 전쟁 중에 몽땅 파괴되고 이 부분만 현재까지 남아서 전해진다. 아까 그 폐허 부지와 직선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높이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여기로 가려면 정동 공원 등 다른 곳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주변 지형의 특성으로 인해, 구도는 전부 탑을 올려다보는 형태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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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아래의 정동 공원도 경치가 좋아서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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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 다음으로 나가서 새문안로를 횡단하니 경희궁의 진입로인 흥화문은 곧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희궁은 조선의 궁전 5개 중에서는 존재감이 제일 없다. 서울의 궁전들 중에서 훼손이 제일 심해서 볼 게 제일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 궁전들보다 잔디밭 마당이 유난히 넓고, 곳곳이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본인조차도 한글 학회 회관 근처에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오피스텔 단지가 있는 걸 보고는, 수 년 동안 "경복궁도 아니고 경희궁은 뭐야?"라고 생각했지, 이 도심 근처에 다른 궁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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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은 자기 건물만 철거된 게 아니라 부지 자체도 다른 건물로 막 잠식당해 왔다. 한때는 명문 서울 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있다가 그나마 강남으로 이전했으며, 서울 교육청도 여기에 떡 자리잡고 있다.
컨텐츠가 빈약하고 온통 공사판이어서 그런지, 여기는 인서울 궁전들 중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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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건물 없이 땅만 덩그러니 놀고 있다. 대문인 흥화문, 그리고 정전인 숭정전이 사실상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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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구경은 뭐 이 정도로 끝..?? 주변 사진을 더 찍은 것도 있지만 블로그에다가는 여기까지만 공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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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인은 경희궁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 역사 박물관을 찾아갔다. 학교에 갈 때 버스를 갈아타는 지점이며, 마당에는 노면 전차가 하나 전시되어 있기도 하니 본인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1층은 도서관 자료실과 특별 전시관이고, 2층은 조선 시대, 일제 시대, 해방 이후의 순으로 상설 전시관이 있었다. 아, 여기 역시 관대하게도 무료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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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특별 전시가 두 개가 진행 중이었다. 하나는 "파독 간호사 여성들의 삶"이라고 뭔가 국제시장스러운 소재였다. 그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른 하나로, 우당 이 회영 육형제 가문에 관한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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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은 조선 시대에 요즘 시세로 치면 못해도 몇백 억에 달할 땅과 재산을 소유한 플래티넘 금수저 출신이었다. 단순히 농사나 장사로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대대로 관료였다. 얘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묵인만 해도 원래 하던 정치인이나 법조인 한 자리나 꿰차서 전관예우를 충분히 받고 얼마든지 계속해서 떵떵거리며 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육형제 전체가 삼국지의 도원결의보다 더 드라마틱한 결의를 했다. 그 많던 재산을 정말 헐값에 몽땅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서 '신흥 무관 학교'를 세우는 미친 짓을 했다. 그리고 지지리도 돈 안 되는 일인 무장 투쟁 노선 독립운동가의 양성과 지원에 가산을 탕진했다. 이거 무슨 독립 운동가 배출의 숨은 요람이었다는 남쪽 끝 '소안도' 섬 얘기를 듣는 느낌이다.

여섯째인 막내는 맏형에 비하면 거의 맏형의 아들 수준으로 터울이 크긴 하다만.. 이 육형제가 모두 그 부자 가문에 걸맞지 않은 힘든 가시밭길을 걷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나마 다섯째 '이 시영'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에까지 살아남아서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선행을 한 독립 운동가와 그 가문이 안 중근· 윤 봉길, 유 관순, 김 구만치 진작부터 널리 알려지고 칭송받지 못한 주 이유는 이들이 일체의 진영과 파벌을 싫어하고 뭔가 신 채호처럼 이상주의 순수주의 무정부주의 독고다이 아나키즘 성향의 항일 노선을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그리 호의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처음엔 같이 관여하다가 감투 싸움 밥그릇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뛰쳐나왔다. 기독교계로 치면 하나님은 믿되 일종의 무교회주의를 지향한 셈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어디든 진영 논리 파벌 싸움이 지저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영과 파벌과 정치로 여러 사람을 한데 결집시키지 않고서는 뭔가 큰 일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이분들의 행적은 2% 부족한 듯한 아쉬움과 한계가 남았다. 전근대적인 조선 봉건주의를 타파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점은 매우 훌륭하지만, 그 뒤에 현실적인 대안 역할을 할 이념을 제대로 판단하고 채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저런 중립 노선만으로도 아예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빨 노선보다는 훨씬 더 건전하고 나았다.

부통령 '이 시영'이라는 이름을 본인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 사람이 저런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은 지금까지 미처 몰랐다. 저런 이상주의 중립 성향의 사람이.. 미국물 먹은 노련한 현실주의자요 강경한 반공 독재 스타일인 이 승만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전쟁이 나고 희대의 흑역사 병크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까지 터지자, 그는 "내가 이럴려고 정치인 됐나"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서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 청렴한 정치와 남북 통일까지 이루기에는 현실이 너무 급박하고 안 좋았다.

그나저나, '신흥 무관 학교'와 옆의 '경희궁'이 나란히 등장하는 건 참 절묘한 우연인 것 같다. 저 학교가 경희 대학교의 먼 전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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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구경을 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박물관의 이름답게 서울의 역사가 조선 이 성계 시절부터 잘 전시되어 있었다. 이 순신· 세종대왕의 동상이 놓여 있는 광화문 앞의 세종대로가 옛날에는 저런 모양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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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이전에 한반도에서 통용되던 대로(큰길)들은 이런 형태였구나.
해남대로는 경부선+호남선을 얼추 합한 선형이며 오늘날의 국도 1호선과 비슷한 것 같고, 영남대로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긴 하지만 잘 알다시피 용인-이천-충주-문경을 경유하니 경부선이나 경부 고속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선형이다. 그리고 부산도 우리가 지금 아는 부산항 쪽으로 가는 건 아니다.

블로그에다가는 여기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자료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일제 강점기 때 경성의 파노라마 사진 내지 서울 축소 지도가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해방 후 대한민국 시절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은 마장동의 청계천로에 있는 '청계천 박물관'도 가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본인은 성곽이나 궁궐을 몽땅 원형대로 복원하라는 식으로 무작정 환경이나 문화재 덕후 성향은 아니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를 못 하고 굴욕적으로 망했으니 끝이 매우 좋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필요 이상으로 국뽕 불어넣고 미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특히 민비 미화..)
하지만 반대 극단으로 가서 무작정 조선만 인구의 과반이 노비이고 길거리에 똥덩어리가 굴러다니던 헬 중의 헬이었으며 차라리 일제 통치가 나았다는 식의 비하 역시 걸러 가며 들으려 한다.

그리고 본인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예우하고 존경하지만, 그 사람을 띄워 주면서 의도하는 결론이 또 되도 않은 친일파 괴담 내지 분단의 원흉 이딴 식이라면 그 진영의 주장 역시 철저하게 씹을 것이다. 늘 말하지만 걔네들은 일본· 미국을 비판하는 잣대와 중국· 북괴를 비판하는 잣대가 절~대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믿고 거르는 게 건전한 역사관이라고 본인은 믿는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1 08:32 2018/01/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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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주께 속한 것들

  • 해석 (창 40:8)
  • 판단/심판 (잠 29:26)
  • 전쟁 (삼상 17:47)
  • 보복 (신 32,35, 시 94:1, 나 1:2, 롬 12:19, 히 10:30)

이런 거 한데 모아서 의미를 강론하면 심도 있는 설교 한 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 실제로 이런 설교가 나왔다.
위의 요소들을 종합하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인간에게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2. 믿음에 대해서

평소에 아무리 영적이고 소위 말하는 신앙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상을 살면서 정말 최소한의 세상적으로 방어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으며, 그로 인해 판단을 잠시 잘못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불신할 수도 있다.

그 천하의 사무엘도 처음엔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이 덩치 크고 잘생겨서 스펙 외모가 탁월한 걸 보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장군깜 대왕깜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때 기어이 하나님의 그 유명한 " '주'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느니라" 말씀이 나오게 됐다. (삼상 16:6-7을 꼭 보시길)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포악한 헤롯 왕에게 체포되자 교회가 정말 열심히 뜨겁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정작 기적이 일어나고 베드로가 진짜로 탈옥해서 찾아오니까 교회 사람들이 믿질 못했다. 여자애가 문을 열어 보지도 않고 달려와서 "저거 베드로 님 목소리예요!"라고 외치자 그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은 "너 미쳤구나?"였다. (행 12:14-15. "아니면 (죽은) 베드로의 천사의 목소리이겠지"라는 확인사살까지 나옴..)

5천 명을 먹이는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똑똑한 제자 빌립이 계산기 뚜드리면서.. "이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예산이 200데나리온, 1천만 원이 훌쩍 넘게 필요하겠는데요?"라고 말한 건
빌립이 특별히 믿음이 없거나 악의적이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사무엘도, 저 초대교회 사람들도 저 상황에서 처음엔 당연히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우리가 죄나 잘못이라고 판단할 자격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곧장 자기 생각을 유연하게 고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 된다.

계산기 뚜드리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고(눅 14:28, 31) 세상일을 소홀히 하라는 말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 핑계로 내 일을 방관하라는 말도 아니다. 인간은 신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예수쟁이들도 평소에야 병 걸리면 병원 가고 백신도 맞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고 정상이다.

그 대신 세상 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라는 여지를 늘 고려하고 믿음을 전제로 깔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3. 내가 믿는 것에 대한 흔한 부정적 편견과, 그에 대한 반박

(1) 구원의 영원한 보장
오해: 기쁜 소식 선교회, 일명 구원파..;;
반박: 저기서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너무 당연한 얘기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선행으로 구원을 얻은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일단 한번 예수님을 제대로 내 구원자로 영접만 했다면 말이다. 구원의 근거는 인간 쪽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쪽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이라면 아주 예외적인 개막장이 아닌 이상, 죄에 대해서 결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2) 왕국
오해: 여호와의 증인.. =_=;;
반박: kingdom은 지극히 평범한 성경 용어이다. 예수님이 지상 재림해서 이 땅을 다스릴 때에도 당연히 절대왕정으로 다스리지, 무슨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해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선거 유세할 일 따위는 없다. 개역성경에서 그냥 '나라'라고 번역한 단어들도 nation이 아닌 이상 kingdom은 '왕국'이라고 번역해야 정확하다.
멀쩡한 좋은 용어의 어감을 다 망가뜨려 놓는 집단이 공산주의자만 있는 건 아니어 보인다(인민, 동무..).

(3)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오해: 특정 성경 출판사, 특정 목사를 떠받드는 편협한 짓이다.
반박: 그건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는 진영에다가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치졸한 논리이다. 그럼 그 사람들의 최종 권위는 그냥 특정 신학교 교수 내지 현대의 그리스어 히브리어 학자들일 뿐이지.

오로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 종교가, 그 종교의 근거 경전이 단 한 종류만 완벽하게 보존돼 있고 나머지는 잘못됐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엄청난 얘기도 믿는데 말씀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온전히 번역됐다고는 왜 못 믿는가? (저 말씀과 그 말씀이 서로 다르다는 태클은 사절)
내 신앙은 그 어느 집단이나 사람의 이익을 결코 대변하고 있지 않다.

(4) 간극 재창조
오해: 아담 이전의 인간, 귀신 따위를 가르친다.
반박: 전혀 아니다. 인간 문명만 6천 년이고 현 세상이 문자적인 6일 동안 창조되었을 뿐이지, 이전 세상은 더 오래 전부터 있었고 그걸 세속 과학이 말하는 긴 지질 시대 및 우주의 역사와 조화시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리고 재창조는 기독교에서 당연하게 가르치는 사탄 마귀의 창조와 타락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다. 아담은 최초로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최초로 죄를 지은 인격체는 아니다.

(5) 세대주의
오해: 시한부 종말론을 조장한다.
반박: 세상에 끝이 있는 것 자체는 맞다. 단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미래를 알 수 없고 끝이 없는 것처럼 신실하게 살다가 죽거나 들림받는 것이 바람직할 뿐이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도 있고 한편으로 맹렬한 보복과 "네 어린것들을 돌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하리로다"도 있는 책이다. 성경의 저자가 싸이코 정신분열 다중인격자가 아닌 이상, 세대주의는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성경에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 우리에게 당장 적용되지 않는 구절들을 잘 분별해 주는 아주 건전한 성경 풀이법이다. 먼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다음으로 영적으로 적용한다.

나로서는 계시록 20장에 거듭 반복해서 나오는 문자적인 1000년을 안 믿는 건, 창세기 1장의 문자적인 6일을 안 믿는 것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성경에 논리·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고 일면 믿어지지 않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안 믿으면 된다. 성경이 말하는 바 자체가 그게 아니라고 주작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4. 음모론

믿을 가치가 있는 음모:

  • 이 세상의 영적 배후에 있는.. '빛의 천사로 위장한 세상의 신' (고후 4:4. 성경에 아예 대놓고 나와 있음)
  • 북괴의 대남적화 음모. 재래식 무기로 안 되니 비대칭무기, 남조선의 법조계와 교육계 적화, 나라 정체성 부정, 역사왜곡. 작은악과 필요악 교란. 민주팔이로 사회 기강과 체제 전복.
  • 철도청의 음모. 승객을 철덕 철도 중독자로 만들기 위해 과거 철도청에서는 코모넷에 외주를 줘서 새마을호 객실에다 Looking for you 곡을 주입해 넣음

별 영양가 없는 음모

  •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
  •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음모
  • 백신 제조 및 제약 회사들 음모

일고의 가치가 없는, 택도 없는 음모

  • 9· 11 테러는 자작극이다
  • 아폴로 계획 달 착륙은 NASA의 거짓 조작이다
  • 남북 통일을 원하지 않는 미국 일본의 음모, 친일파 음모, 뭐시기의 국정농단 음모 따위

5.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 초딩 시절에 4천~4500만이라고 배웠던 우리나라 인구는 5천 1백만을 넘어섰고, 옛날에 50억이라고 배웠던 세계 인구는 선진국들의 저출산 풍조에도 불구하고 80억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 지구 전체의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340ppm쯤 된다고 배웠던 것이 이제는 400ppm을 넘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오존층은 파괴되는 걸 한창 걱정하던 시절과는 달리 많이 회복됐다고도 한다.
  • 언어학에서 한국어· 일본어에 대한 우랄 알타이 어족설은 부정되고 있다.
  • 한때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라고 배웠던 마리아나 해구 아래의 '비티아스 해연'(11034m)은 1957년에 행해진 러시아의 첫 탐사 이후로 재탐사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질 않아서 당시 측정의 정확도에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 어렸을 때는 곰팡이를 식물의 특수한 형태라고 배웠던 반면, 요즘은 이놈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계라는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분류되고 있다.
  • 난 어렸을 때는 김 구가 젊은 시절에 "국모의 원쑤"를 갚으려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 장교 첩자를 때려죽였다고 배웠지만, 사실 그건 생 날조이고, 김 구가 그냥 객기로 애매한 일본인 민간인을 죽인 흑역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때 '청산리 대첩'이라고 배웠던 항일 독립군의 전투는 비록 우리가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과연 정말 '대첩'이라고 불릴 정도의 압도적인 교환비로 이긴 것인지는 진위가 좀 의심받고 있다. 그 정도로 일본군이 졸전· 패전을 하고 학살당했는데 당시 지휘관이 문책되거나 본토로 지원 요청이 갔거나, 많은 시신이 수습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간 정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도 자기에게 불리한 역사를 대외적으로 조작할 가능성이 있지만, 조작할 이유가 없는 내부 기록에도 증거가 없으며 한국 내부에서도 전과 기록에 대한 과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용돼 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선을 비하하는 근거로 즐겨 활용되던 지리학자 김 정호의 최후에 대해서 '주리 틀기+옥사설' 역시 21세기에 와서는 주작으로 여겨져서 부정되고 있다. 관련 증거와 기록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지도 작품이 잘만 전해져 내려오며, 지도의 제작에 관여했던 다른 관료들도 아무 처벌 없이 승승장구+자연사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식으로.. 그 정의상 절대불변인 수학 공식이라든가, 우주가 뒤엎어지지 않는 한 절대불변이 보장되는 뉴턴의 법칙, 열역학 법칙 같은 게 아닌 한.. 세상 대부분의 학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고쳐지고 보완된다. 심지어 고전 텍스트조차도 일본어· 영어를 거쳐서 중역되었던 것이 원어 직역으로 다시 나온다거나, 검열되었던 내용을 원래대로 다 넣어서 다시 출간되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추세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성경만은 그런 트렌드, 그런 연구 방법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오늘날 인간의 노력으로 성경 본문이 더 나아지고 있다거나, 새로운 해석, 더 정확한 해석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새로운 추세로 나왔다는 대안이란 게 기껏해야, 겨우, 고작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을 건넌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아담과 '스티브'였다", "가룟 유다도 사실 알고 보면 인간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난 더욱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성경이 전제로 깔고 있는 인간의 죄성과 근본 성품이라는 건 정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만큼이나 6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텍스트가 바뀌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죄인이 성경 말씀의 판단을 받아서 고쳐져야지, 인간이 성경을 업데이트 해야 할 필요나 이유나 당위성은 없다. 오늘날은 옛날처럼 성경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없애지는 않지만 성경 본문이나 해석을 변조하고 왜곡하는 시대이다.

다른 모든 텍스트들은 번역을 거칠수록 마치 jpg 손실 압축처럼 원래 의미로부터 차이와 왜곡이 커질지 모르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는 본인은 다른 특례나 섭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전에도 한 적이 있는 얘기이지 싶은데.. 이 '지구 안'에서는 저 수천 m 깊이에 달하는 암흑천지 바닷속이나 극지방, 심지어 화산 근처 등 일반적인 형태의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에서도 생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구 밖 우주에서는 제아무리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매도 생명 같은 건 코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한 신념의 영역이긴 하지만, 본인은 이것이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무신론 회의론자라면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지구 밖에서도 기를 쓰고 생명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세상엔 이런 식으로 성경에 대해서든 신에 대해서든, 뭔가 우연 같아 보이지 않은 구석이 존재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9 08:34 2017/12/2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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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다중 상속 생각

날개셋 한글 입력기 같은 Windows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다 보면 여러 개의 COM 인터페이스를 한꺼번에 상속받아 구현한 단일 클래스를 구현하게 된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각각의 인터페이스들이 다 IUnknown을 상속받았는데 어떻게 어느 인터페이스로 접근하든지 AddRef, Release 같은 공통 인터페이스들은 중복 없이 동일한 함수 및 동일한 숫자 카운터 인스턴스로 연결될까? 데이터 멤버 없이 인터페이스 상속만 하면 this 포인터 보정이 필요 없이 다중 상속과 관련된 문제들이 상당수 깔끔하게 해결될까?

그래서 클래스 A, 이로부터 상속받은 B와 C, 그리고 B와 C를 다중 상속한 D 이렇게 네 개의 클래스가 있을 때 일명 ‘죽음의 다이아몬드’ 현상을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를 정리해 봤다. C++의 다중 상속과 관련해서는 이제 더 글을 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요소들이 더 있었다.

1. 가상 상속

클래스에서 상속이라는 건 기술적으로 어떤 구조체에다가 부모 클래스의 컨텐츠(데이터 멤버)들을 앞에 쭉 늘어놓고 나서 그 뒤에 나 자신의 컨텐츠를 추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부모 클래스와 자식 클래스 포인터를 형변환 하는 건 그냥 프로그래밍 언어 차원에서의 의미 변환일 뿐, 메모리 주소가 바뀌는 것은 전혀 없다. 아주 쉽다.

그런데 가상 상속은 부모 클래스의 컨텐츠를 그렇게 나 자신의 일부로서 고정된 영역에 배치하는 게 아니라, 포인터로 참조하는 것과 같다.
부모 클래스를 ‘가상’이라는 방식으로 상속한 자식 클래스는 부모 클래스와 자식 클래스가 굳이 메모리 상에 연속된 형태로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동일 부모를 공유하는 다수의 클래스가 다중 상속되더라도 이들이 공통의 유일한 부모 하나만을 가리키게 하면, 한 부모 클래스의 데이터들이 불필요하게 여러 번 상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D가 B, C를 ‘가상’ 상속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인 B와 C가 A를 미리 가상으로 상속해 놔야 한다.
가상 함수도 자식이 아닌 부모 클래스에서 미리 지정해 놔야 하듯 말이다.

그러니 클래스 라이브러리 개발자는 공통 부모를 공유하는 여러 클래스들이 사용자에 의해 다중 상속되겠다 싶으면 그 공통 부모를 virtual로 상속하도록 설계를 미리 해 놔야 한다. 특히 그 클래스(공통 부모 말고)가 순수 가상 함수 같은 걸 포함하고 있어서 상속이 100% 필수라면 더욱 그러하다.
앞의 A~D의 경우, 혹시 A가 default constructor가 없어서 B, C의 생성자에 모두 A를 초기화하는 인자가 들어있었다 하더라도, D의 A는 D의 생성자에서 제공된 인자만으로 딱 한 번만 초기화된다.

가상 상속을 한 자식 클래스는 굉장히 이색적인 특징을 하나 갖게 된다.
자식 클래스의 포인터에서 부모 클래스의 포인터로 형변환을 하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 귀결이며, 반대로 부모에서 자식으로 가는 건 좀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가능하다. 단일 상속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다중 상속이라 하더라도 그냥 고정된 크기만큼의 포인터 덧셈/뺄셈만 하면 된다.
그에 반해, 부모 클래스에서 자신을 virtual 상속한 자식 클래스로 형변환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A *pa = new D; //자식에서 부모로 가는 건 당연히 되고
B *pb = new D;
D *pd;
pd = static_cast<D*>(pb); //부모에서 자식으로 가는 건 요건 괜찮지만
pd = static_cast<D*>(pa); //요건 안 된다는 뜻..

그 자식 클래스의 주소와 부모 클래스의 주소 사이에는 컴파일 타임 때 결정되는 관계 내지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에서 부모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단방향 연결 리스트를 타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됐는데, 저런 형변환은 단방향 연결 리스트를 역추적하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다.

물론, 가상 상속이라 해도 현실에서는 D라는 오브젝트 내부에서 A가 배치되는 오프셋은 고정불변일 것이고 컴파일러가 그 값을 계산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식 클래스들과 연속적으로 배치되지만 않을 뿐이다.
static_cast를 어거지로 구현하라면 구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A가 반드시 D에 속한 A라는 보장도 없고, 포인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C++ 컴파일러가 그런 어거지 무리수까지 구현하지는 않기로 한 모양이다.

2. 가상 함수로 이뤄진 추상 클래스(인터페이스)들만 상속

죽음의 다이아몬드를 해소하기 위해서 요즘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C++ 같은 우악스러운 수준의 다중 상속을 허용하지 않고, 잘 알다시피 데이터 멤버 없고 가상 함수로만 구성된 추상 클래스들의 다중 상속만 허용하곤 한다.
그러면 문제의 복잡도가 크게 줄어들긴 한다.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장땡은 아니다.

명시적인 데이터가 없는 클래스라 하더라도 가상 함수가 들어있는 클래스를 상속받을 경우, 2개째와 그 이후부터는 클래스 하나당 vtbl (가상 함수 테이블 v-table) 포인터만치 클래스의 덩치가 커지게 된다.

단일 상속 체계에서는 this 포인터의 변화가 전무하니 상속을 제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한 vtbl의 크기만 커질 뿐, 그 테이블을 가리키는 포인터의 개수 자체가 늘어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중 상속에서는 D 같은 한 객체가 상황에 따라 클래스 B 행세도 하고 클래스 C 행세도 하면서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A, B, D일 때의 vtbl, 그리고 C일 때의 vtbl 이렇게, 테이블과 테이블 포인터가 둘 필요하다.

클래스 D에 속하는 인스턴스 포인터(가령, D *pd)를 부모 C의 포인터로 변환해서 전달할 때는 pd는 A, B, D 같은 직통 상속 계열 vtbl이 아니라 C의 vtbl을 가리키는 형태로 오프셋이 보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상 함수를 호출하면.. this 포인터가 C가 아닌 D를 기준으로, 보정 전의 형태로 복구된 채로 함수에 전해진다. 이 함수는 애초부터 C가 아닌 D에 소속된 함수이기 때문이다.

즉, 다중 상속에서 가상 함수를 호출하면 비록 겉으로 this 포인터는 바뀐 게 없지만 내부적으로 vtbl을 찾는 것을 부모와 자식 클래스가 완전히 동일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보정이 일어나고, 그걸 함수에다 호출할 때는 보정 전의 값을 전하도록 일종의 thunk 함수가 먼저 수행된다.
한 클래스 오브젝트에서 여러 인터페이스 함수를 자유자재로 호출하는 polymorphism의 이면에는 이런 비용 오버헤드가 존재하는 셈이다. 무슨 숫자나 문자열로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닌 이상, 서로 다른 클래스에 존재하는 가상 함수는 vtbl의 종류와 오프셋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3. 멤버로만 갖기

다중 상속의 지저분함을 회피하는 방법 중 하나는.. 원하는 기능이 들어있는 클래스를 내 아래로 상속하지 말고 그냥 멤버 변수로 갖는 것이다. 상속하더라도 걔만 따로 상속해서 확장 구현을 한 뒤에 그걸 멤버 변수로 갖는다. 이 개념을 유식한 용어로는 aggregation이라고 한다.

이 방법은 다중 상속의 각종 오버헤드는 피할 수 있지만 그만큼 다른 방면에서 불편을 야기한다. 그 클래스가 동작하는 과정에서 내 클래스의 함수 및 데이터를 빈번하게 참조해야 한다면(결합도 coupling가 높은 관계..) 그 통로를 억지로 트는 게 더 불편하며 코드를 지저분하게 만든다. 또한 서로 다른 클래스 간에 중복 없이 동일한 기능을 제공하는 일관된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게 다중 상속이 아니면 답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게 경험상 딱 떨어지는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복잡한 클래스 계층이 필요한 대규모 개발을 한 경험이 없는 프로그래머라면 이런 부류의 문제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조차 난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 상속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며, 그걸 억지로 우회하다 보면 결국 다른 형태로 불편함과 성능 오버헤드가 야기될 거라며 다중 상속을 옹호하는 프로그래머도 있다.

이상.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다중 상속은 사람마다 취향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비록 C++이 이걸 지원하는 유일한 언어는 아니지만, 네이티브 코드 생성이 가능한 유명한 언어 중에서는 C++이 사실상 대표격인 것처럼 취급받고 있다.

어떤 기능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만 아니다면야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상술했다시피 다중 상속이 가능해서 아주 편리한 경우도 물론 있다. 한 오브젝트로 다수 개의 기반 클래스 행세를 자동으로 하는 것과, 그 오브젝트 내부의 구현 함수에서는 여러 기반 클래스를 넘나드는 게 동시에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중 상속은 가성비를 따져 보니 그 부작용과 오버헤드, 삽질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구현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나 하는 게 PL계의 다수설 대세로 흐르고 있다. this 포인터의 보정이라든가, 복수 개의 기반 클래스들이 또 공통의 기반 클래스를 갖고 있을 때 발생하는 모호성의 처리 등.. 템플릿 export만치 막장은 아니지만 컴파일러 개발자와 PL 연구자들의 고개는 설레설레 저어지곤 했다.

그래서 C++ 이후에 등장한 더 깔끔한 언어인 D, C#, Java 등은 다중 상속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중 상속을 우회하고 복잡도를 완화하기 위해, 적어도 가상 상속만은 할 필요가 없게끔 static 내지 가상 함수 선언만 잔뜩 들어있는 인터페이스에 대해서만 다중 상속을 허용하는 것이다. Java는 두 종류의 상속을 extends와 implements라고 아예 구분까지 했다.

물론 이런 패러다임 하에서는.. 프로그램 구조가 간단해서 가상 함수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까지 일단은 인터페이스부터 만들어 놓고 구현 클래스를 내부적으로 또 만드는 식의 오버헤드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Java는 final이 아닌 함수는 기본적으로 몽땅 가상 함수일 정도로.. 디자인 이념이 애초에 성능 대신 극도의 유연성이니, 그 관점에서는 그건 별 상관이 없는가 보다.

가장 대중적인 기술이 알고 보면 레거시 때문에 굉장히 지저분하고 기괴하기도 하다는 것은 CPU계에서 x86이 그 예이고,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는 C++이 해당되지 싶다. 전처리기(+생짜 파일 기반 인클루드), 다중 상속, 클로저 없이 특유의 pointer-to-member 기능 같은 것 말이다. 후대 언어에서는 저런 게 결코 도입되지 않고 있다.

본인은 다중 상속을 굳이 의도적으로 기피하면서 코딩을 하지는 않는다. 다중 상속이 필요하고 당장 편하겠다 싶으면 한 클래스에다 막 엮었다. 그 상태로 막 복잡한 pointer-to-member나 람다를 구사하면서 컴파일러를 변태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고, 컴파일러가 그냥 this 포인터 보정을 알아서 해 주는 것만 원했으니까 말이다.

하루는 ", public"라고 검색을 해서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소스 코드 내부에도 혹시 다중 상속을 쓴 부분이 있나 찾아 봤는데.. 그래도 2017년 현재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소스 코드에는 데이터 멤버가 존재하는 클래스를 둘 이상 동시에 상속받은 부분은 없었다. 추가적인 상속처럼 보이는 것은 COM 인터페이스 내지, 내가 콜백 함수를 대신해서 내부적으로 만들어 놓은 추상 클래스 인터페이스들이었다.

한두 번 썼을 법도 해 보이는데.. 이 정도 규모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도 실질적인 다중 상속을 사용한 부분이 없다면 그건.. 정말로 가성비 대비 불필요하게 지원할 필요는 없을 법도 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6 08:37 2017/12/2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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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공 시절

우리나라 헌정 체제의 변천사에 대해서는 본인이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로 다룬 적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인 할배가 집권했던 최초의 1공화국 시절은.. 지금으로서는 뭐랄까 같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질감이 심하다. 대체역사물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나라이다. 태극기, 한국어, 한글만 없다면 말이다.

이때 대통령은 생전에 군대의 근처에도 안 가 본 문돌이였고 군사 정권도 분명 아니었지만, 가난한 여건에다 극렬 반공 트렌드 때문에 나라가 막 자유롭다고는 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 지금과 같은 화폐 단위가 도입되고 마지막으로 화폐 개혁을 한 게 1962년,
  • 군대에 상병과 병장 계급이 추가된 게 1962년,
  • 공문서에서 서기 연호만 쓰기 시작한 게 1962년(더 옛날의 이 승만 시절 관보나 대한뉴스, 각종 법조문에서는 4천 몇백 년 하면서 단기 연호가 나온다~!)
  • 마지막으로 탈영병을 사면해 준 게 1963년
  • 부산이 전국 최초의 직할시로 승격된 게 1963년
  • 국가 차원에서 독립 유공자를 본격적으로 발굴해서 훈장을 추서한 게 1962년...

당장 떠오른 예만 나열해도 이 정도이니 지금의 우리나라 기틀이 상당수 다져진 건 확실히 박통 때부터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나저나, 대통령 관저의 이름이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뀐 건 박통보다 미묘하게 전인 윤 보선 때 1961년..)

해방 이후 1962년 이전에 우리나라는 6· 25 전쟁을 전후한 1950년 8월과 1953년 2월에 화폐 개혁을 시행했다. 1950년이야.. 개전 직후 서울이 털리고 한국 은행에 보관돼 있던 현찰 뭉치들이 괴뢰군에게 통째로 노획돼 버렸기 때문에 그 돈은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무효화하고 유통을 금지시켜야 했다. 수능 문제지가 시험 전날에 외부로 유출된 것과 얼추 비슷한 상황이다. 새로 만든 돈은 부득이 일본에서 인쇄해서 수입해 와야 했다.

그 뒤 1953년의 화폐 개혁은 단위도 '환'으로 바뀌어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용도로 쓰이다가, 훗날 1962년에 단위가 또 바뀌어 지금의 '원'이 정착했다. 개드립을 좀 치자면, 환에서 원으로 '환원'됐다.

할배 각하는 기본적으로야 크리스천이었지만, 자기 치적에 대한 자랑질도 했다. 남산과 탑골공원에 크고 아름다운 자기 동상을 세우고, 남한산성 근처 도로를 닦고는 자기 호를 따서 '우남로'라는 이름을 붙였다(지금은 헌릉로와 합쳐져서 없어짐). 1957년부터 하야 직전의 60년까지는 황금연휴 부근도 아닌 대통령 탄신일(3월 26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 승만은 양력 기준 1875년 5월 1일생인데, 이 날짜가 그 당시 음력으로는 3월 26일이었던 것이다. 임시 공휴일은 그냥 일관되게 매년 양력 3월 26일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할배는 생일을 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환' 지폐에다 한복 차림의 자기 초상화를 집어넣었다(100, 500환). 처음엔 정중앙에다 집어넣었는데 지갑에 돈을 넣을 때 자기 얼굴이 접힌다는 걸 발견하고는 한쪽 끝으로 위치도 옮겼다. (그런데 소리만 '환'이지, 이때도 한자 표기는 여전히 '원'이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우리나라 지폐가 온통 조선 시대 '이씨' 인물만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는 비판이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는 먼 옛날에 대한민국 인물, 그것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인물을 집어넣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셈이다. 전무후무 1공 시절에 말이다. 지폐에다 자기 얼굴을 떡 집어넣는 건, 나중에 군인 출신 대통령도 하지 않은 짓인걸.. 반쯤은 자기 자발적인 지시이고, 반은 부하들이 알아서 아부질 하는 걸 본인도 듣기 싫지는 않고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지 싶다. 대통령과 왕의 차이점에 대한 관념도 아직 드물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제1공화국 시절엔 남한 땅에서 미국처럼 서머타임(일광 시간 절약)이 시행되기도 했다. 미국이 단위 체계와 전압처럼 세계 규격과 달리 혼자 따로 노는 관행 중 하나인데.. 1960년대 박통 때부터는 폐지됐다. 그 서머 타임은 훗날 서울 올림픽을 하던 시절에 또 잠깐 부활했다가, 올림픽이 끝난 뒤부터는 다시 영구 봉인됐다.

2. 부산 잔혹사

우리나라 광역시들 중 대전은 공항이 없고(대전 대신 청주에..), 울산은 지하철이 없다.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대전은 포항· 울산 같은 네임드급 공장이 없는 대신(산업단지 자체가 없는 건 아님. 대덕구 대화동에..), 정부 청사와 각종 과학 연구소들이 있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1공화국 얘기가 나왔으니 그 시절에 특정 지역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아이템을 하나 더 늘어놓아 보겠다.

부산은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서울·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에 노면전차가 다닌 세 도시 중 하나이다.
6· 25 때 북괴에 점령당하거나 대판 전투가 치러진 이력이 없고, 오히려 안전한 최후방인 덕분에 임시 수도 본진 역할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부산은 전쟁과 지진이 없는 대신, 피난민 목조 판잣집들이 밀집해 있던 와중에 화재 참화를 여러 번 겪었다.

1953년 1월 30일엔 영화로도 나왔던 국제시장에서 대화재가 나서 수천 채에 달하는 상가와 판짓집들이 다 타 버렸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또 벌어졌던 화재들에 비하면 피해 규모가 약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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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27일, 전쟁이 끝난 지 정확히 3개월 뒤엔 또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시내 중심부로까지 번져서 부산 역, 방송국, 신문사까지 몽땅 불에 탔다. 이 때문에 부산 역이 철거되고, 오리지널 부산 역보다 1km 남짓 북쪽에 있던 초량 역이 지금의 부산 역 역할을 하게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54년 12월 10일과 26일에는 또 두 차례 대형 화재가 용두산 언덕 일대를 덮쳤다. 판잣집들 피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엔 휴전 뒤에도 귀차니즘에 입각하여 서울로 아직 안 옮기고 부산의 모 창고에 보관해 놓고 있던 조선시대 어진과 유물, 문화재들 수천 점이 소실돼 버렸다.
국제시장, 부산역, 용두산 등등.. 다 비슷비슷한 지역이다. 열악한 닭장 같은 곳에서 살다 불 한번 나면 이렇게 작살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다가 5년 뒤에 1959년에는 땅, 불 다음으로 바람과 물 차례였다(이젠 '마음'만 남았나?-_-). 14호 태풍 사라 때문에 일대가 또 박살이 났으니, 1950년대에 부산은 제2의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살기가 참 잔혹한 곳이었지 싶다.

3. 1960년, 1980년의 올림픽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의 공통점 뭐 이런 괴담이 나돌았고, 또 1840년부터 1960년까지 20의 배수 년도에 당선됐던 대통령은 제 명에 못 살고 병사· 암살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일명 '테쿰세의 저주' 괴담이 나돌곤 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서의 역사는 아주 짧으며 정치가 아닌 스포츠 분야이긴 하다만, 20의 배수 년도에 참가했던 올림픽이 좀 뭔가 특이했다.

우리나라는 그 가난하고 열악했던 1948년 런던 올림픽 첫 참가 때, 그리고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1952년도 올림픽에서도 복싱과 역도에서 메달을 따 오곤 했다. 그런데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현재까지 전무후무하게 메달을 단 하나도 못 따는 부진을 보였다. 이 때문에 올림픽 선수단 대표이던 손 기정 단장은 삭발을 하고 귀국했다.

1960년대에는 국제 대회에 선수를 선발하고 육성하는 스포츠 행정 체계가 굉장히 미개하고 막장이었던 듯하다. 밥그릇 싸움과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때문에 뉴스 기사를 찾아보면 손 기정은 1966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도 선수단 단장이었는데, 이때는 나름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뭔가 심하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삭발 귀국을 단행했던 듯하다.

게다가 로마 다음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나름 가까운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수들을 파견한 것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성적은 꽤 부진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하에 박 정희 정권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스포츠 단체들을 통합하고 태릉 선수촌도 만들면서 엘리트 체육의 육성에 힘썼다.

지금 괴수들이 우글거리고 한국인 코치가 세계 곳곳에 활동하는 지경이 된 양궁조차도 처음부터 지금 같은 인프라가 갖춰진 게 절대 아니라는 점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나라가 건국 이후 최초로 메달을 딴 분야는 역도와 복싱이지 양궁이 아니지 않던가??

뭐, 1960년대는 그렇다 치고 그로부터 20년 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짐작하다시피 우리나라가 애초에 보이콧을 해 버리고 참가를 안 했기 때문에 메달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산권 국가인 중국조차도 참가를 안 했다는 게 흥미롭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해서 반드시 친소 성향은 아니니까..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만,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 여자 양궁의 초창기 멤버이던 김 진호 선수가 커리어에서 큰 손해를 봐야 했다.
2000년대부터는 1960, 1980 같은 굴곡이나 이변이 아마 더는 없을 것이다.

4. 국민투표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라 하면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어떤 대표자를 뽑는 선거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국가적으로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일이 있을 때 투표를 통해 yes/no를 묻는 제도도 있다(우리나라 헌법 제72조). 이를 '국민투표'라고 한다. 마치 논문이라고 해서 학위 청구용 졸업 논문만 있는 게 아니라 학술지 논문도 있고 발표 논문도 있듯이, 투표란 것도 그렇게 성격에 따른 구분이 있는 것 같다.

보통은 이런 의사 결정을 국민이 아닌 의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게 돼 있으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직접 묻는 예외적인 제도도 대통령이 자기 재량껏 시행할 수 있다. 투표 결과가 대통령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나왔다면 이건 강력한 설득력을 얻게 되니 의회도 어찌하기가 난감할 것이다.

국민투표는 보통은 헌법을 고쳐야 할 때 시행되곤 했으며, 투표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곤 했다. 이 승만 때는 시행된 적이 없고 1960년대의 군사 정권 시절이 원조이다. 우리나라는 1987년 10월, 제6공화국 수립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시행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북괴의 붕괴와 흡수 통일과 같은 급의 이변이 없는 한, 현 헌정 체제에서는 앞으로도 할 일이 없는 게 좋을 것이다.

5. 대통령의 초법적 권한: 계엄과 긴급명령

자고로 대통령은 왕이 아닌 관계로, 자기 멋대로 기분대로 "짐이 곧 법이다" 식으로 통치할 수 없다. 특히 무엇보다도 혼자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자기 자식에게 권좌를 슬쩍 넘겨줄 수도 없다. 현대의 대통령은 국가 원수라는 지위와 예우는 동일하지만, 권한의 행사 범위는 법의 통제를 받으며, 전근대 시절의 왕에 비해 큰 제약이 걸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전쟁을 포함한 굉장히 긴박하고 불가피한 상황일 때 예외적으로 일시적으로 법과 권한, 의회의 동의 같은 절차를 씹어먹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 정도는 이미 법에 보장돼 있다.
대표적인 예는 계엄이다. 계엄은 나라 사정을 준전시 상태로 만들어서 바싹 긴장시키고, 국민의 기본 자유와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조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국 이래로 1948년 여순 반란(여수· 순천 일대)과 4· 3 사건(제주도)을 시작으로 제일 최근에는 1979년의 부마 항쟁(부산· 경남)과 10· 26 사건 때 계엄이 내려졌으며, 전땅크의 쿠데타의 정점인 1980년 5월 17일 내란 때 또 계엄이 내려진 것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두 계엄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려졌었다.
뭐, 4· 19 혁명(의거), 5. 16 쿠데타(군사 혁명), 10월 유신 같은 크리티컬한 이벤트 때는 제주도까지 포함한 전국에 계엄크리가 떨어지기도 했었다.

계엄 다음으로 현행 헌법 제76조에 의거한 '긴급명령'이란 게 있다. 이건 건국 이래로 지금까지 총 16번이 내려졌는데, 그 중 13회가 6· 25 전쟁 기간 중에 내려졌다. 전시의 마지막 명령인 제13호는 1953년 2월, 1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 지시였다.
대부분의 역대 긴급명령들은 관련법이 따로 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내려진 긴급명령은 1993년 8월, 금융실명제를 빵 터뜨려 실시한 김 영삼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박 정희는 긴급명령을 제3공의 말기에 단 한 번밖에 내리지 않았으며(제15호, 1972. 8. 2.), 이것도 계엄과는 달리 정치 분야는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양반이 특별히 고안해서 1974년부터 75년, 4공 유신 시절에 1년 반 남짓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남발했던 더 강한 특별 명령은 바로 '긴급조치'였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로 시작하는 게 제1호였고, 제9호가 가장 길었다. 이전의 긴급조치를 해제한다는 명령도 별도의 긴급조치 호수로 올라가곤 했다.

대부분의 긴급조치들은 사실상 빨갱이들, 데모질 하는 애들을 잡아서 벌 준다는 협박이었지만, 딱 하나 제3호만은 민생과 관련된 다소 생뚱맞은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는 박통이 암살당하고 헌법이 업데이트 되면서 즉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민투표 내력, 개헌 내력처럼 계엄과 긴급명령(/조치) 내력도 살펴보는 게 재미있다. 이런 게 사회 공부의 묘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3 08:36 2017/12/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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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프로그램의 GUI 구성요소들 중에는 여러 아이템들을 한데 나열하는 리스트 박스(list box)라는 게 있고, 고정된 한 문장에 대해서 예/아니요, 참/거짓 여부를 지정하는 체크 박스(check box)라는 게 있다.

체크 박스는 프로그램이 고정 붙박이 형태로 제공하는 기능이나 옵션 하나에 대한 설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리스트 박스는 보통은 가변적인 개수의 항목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때 쓰인다.
그런데 가끔은 이 두 물건의 기능을 한데 합치고 싶은 상황이 생긴다. 리스트 박스의 각 아이템들에 대해서 1비트짜리 정보를 배당해서 선택 여부를 지정하는 것 말이다.

뭐, Windows의 리스트박스 컨트롤은 모든 아이템들에 대해서 1비트도 아니고 그냥 machine word 크기 하나로 custom 정보 data를 지정하는 기능이 있다. 또한 필요하다면 하나가 아닌 복수 개 multi-selection 모드로 동작하게 할 수 있고, 각 아이템에 대한 custom drawing도 가능하다.

하지만 딱 부러지게 아이템들 앞에 자동으로 운영체제의 check box 그림을 그려 주고 체크 박스의 리스트를 구현하는 기능 자체는 없다. 필요하면 사용자가 그걸 직접 구현해서 쓰게 여건만 만들어 놨을 뿐이다.
그래서 MFC의 경우 기존 리스트박스를 서브클래스 해서 CCheckListBox라는 걸 제공한다. owner drawing만 구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space를 누른 키보드 입력과 check 버튼 주위를 누른 마우스 클릭도 감지하게 메시지 몇 개를 서브클래스 했다.

자고로 화면에 뭔가 길다란 리스트를 만들고 아이템들을 복수 선택할 수 있게 해 놓은 프로그램의 원조는 PC-Tools나 MDIR, Norton Commander, 심지어 Windows 3.x의 파일 관리자 같은 파일 관리 유틸리티이지 싶다. 복수 개의 파일을 복사하거나 삭제하는 기능을 제공해야 하니 리스트의 복수 선택 기능이 무조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selection이라는 것과 highlight 선택막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프로그램의 동작이 달라지곤 했다. 도스용 프로그램들은 selection과 선택막대가 서로 따로 논다고 본 반면, Windows는 selection이 곧 선택막대의 연장선이라고 봤다.

그래서 Windows의 리스트박스는 화살표 키를 누르는 순간 기존 selection들이 다 사라지면서 선택막대가 움직이곤 했다. Shift+화살표로 연속된 영역을 한꺼번에 선택하는 것 말고 불연속적인 영역을 취사선택하려면 Shift+F8부터 눌러서 선택막대가 아닌 포커스 테두리가 깜빡거리는 상태로 들어간 뒤, 포커스 테두리만 움직이면서 Space로 아이템들을 선택하면 됐다.

굉장히 특이한 동작인데 Windows에서는 이게 기본이다. 기본적으로 포커스 테두리만 움직이게 하는 모드는 extended 플래그(LBS_EXTENDEDSEL)로 따로 있었다.
그에 비해 평소에는 선택막대와 selection이 다같이 움직이고 Ctrl+화살표로 포커스 테두리를 움직여서 Space로 선택하는 비교적 '직관적인 방법'은 훗날 리스트뷰 컨트롤이 도입하게 된다. 아이템을 복수 선택하는 방식은 이 두 컨트롤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또한, 각 아이템들에 대해 체크 플래그를 지원하는 건 아이템을 그냥 복수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과는 UI의 관점이 다르다. 비록 내부적으로 본질적으로는 아이템별로 1비트짜리 boolean 정보를 지정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겠지만 용도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복수 선택은 대체로 아이템들이 진짜 가변적이고 사용자에 의해 아이템을 추가하거나 삭제까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쓰이겠지만 체크 리스트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순히 응용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기능과 옵션이 많기 때문에 리스트 형태로 만들었을 뿐이다. 체크 리스트는 복수 선택과 달리, 선택 막대 selection과는 완전히 별개로 관리되기도 해야 할 것이고 말이다.

다음은 MFC의 CCheckListBox를 사용했던 먼 옛날 날개셋 한글 입력기 1.x의 옵션 대화상자이다.
Windows XP부터는 테마도 등장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따라 체크 박스를 그리는 방법 역시 더 복잡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은 리스트 박스가 아니라 무려 트리 컨트롤(공용 컨트롤)을 사용했던 날개셋 2.x의 옵션 대화상자의 모습이다.
Internet Explorer가 4인가 5에서부터 인터넷 고급 옵션들을 이렇게 트리 컨트롤로 구현해서 오늘날 최후의 11 버전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원하는 옵션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본인 역시 이 스타일을 따라해 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용 컨트롤들은 owner-draw 안 쓰고도 자체적으로 아이템별 비트맵을 지정할 수 있으며, 더구나 트리 컨트롤은 아이템들을 카테고리별로 분류도 할 수 있으니 더욱 좋다.
날개셋 3과 그 이후부터는 이들 옵션이 상당수가 오토마타와 글쇠의 수식, 별도의 카테고리 옵션 등으로 떨어져나간 관계로, 저렇게 트리 컨트롤까지 써야 할 정도로 긴 옵션 리스트를 만들 일이 없어졌다.

사실, 트리 컨트롤은 IE 4 타이밍에서 TVS_CHECKBOXES라는 스타일이 추가되기도 했다. 기존 이미지 스타일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 그건 놔두고 옆에 체크 박스를 별도로 추가해 주는 형태이다.

트리 컨트롤에서 체크 박스는 설치 프로그램에서 어떤 소프트웨어 제품의 구성요소들을 계층 구조로 나열한 뒤 설치· 제거할 부분을 선택받는 부분에서 유용하게 쓰일 듯하다. 이런 데서는 자식 노드가 하나라도 선택되면 부모 노드들은 중간 상태로 바뀌고, 부모 노드를 선택하거나 해제하면 자식들도 한꺼번에 선택이나 해제되는 동작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트리 컨트롤의 체크박스 기능은 깔끔하게 구현되지 않아서 잡음이 많다. 스타일을 윈도우를 생성한 뒤에 SetWindowLongPtr로 런타임 때, 그리고 아이템을 하나라도 추가하기 전에 적절한 타이밍에만 지정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 아저씨는 저건 차라리 스타일이 아니라 메시지 형태로 구현하는 게 더 나았을 정도라면서 API 설계 구조를 비판한 바 있다. (☞ 링크) 실제로 콤보 박스의 extended UI 여부는 스타일이 적절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덩그러니 CB_SETEXTENDEDUI라는 메시지를 통해 지정하게 돼 있다.

한편, 트리 컨트롤은 처음 도입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체크 박스와는 달리, '복수 선택'은 지원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리스트뷰 컨트롤처럼 아이콘을 Shift 및 Ctrl을 이용하여 복수 선택할 수 있지 않다는 뜻이다.
Windows 운영체제는 탐색기에서 볼 수 있듯이, UI 디자인 철학이 "트리로는 분야를 하나 선택만 하고", "리스트에다가 그 분야에 속하는 아이템들을 출력한 뒤 복수 선택해서 지지고 볶는다" 형태이긴 했다.

계층 구조를 나타낼 수 있는 복잡한 UI 컨트롤에서 복수 선택까지 가능하면 프로그램의 기능이 매우 복잡해지며, 리스트도 아니고 트리 컨트롤이 굳이 복수 선택까지 가능해야 할 일은 매우 드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Visual Studio IDE부터가 클래스· 리소스· 솔루션 뷰의 트리 목록이 진작부터 복수 선택을 지원한다. 걔들은 4.0 시절부터 공용 컨트롤 없이 진작부터 자체 구현 트리 컨트롤을 써 왔기 때문이다.

끝으로, 체크와 다중 선택을 짬뽕한 듯한 기괴한 UI가 Windows의 역사상 단 한 번, 8의 리스트뷰 컨트롤에서 잠시 등장한 적이 있었다.
아이템의 좌측 상단 같은 특정 부위를 마우스로 가리키고 있으면 체크 박스가 나타나고, 그걸 클릭하면 아이템을 복수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아이템을 클릭하면 기존 selection들은 다 없어지고 그것'만' 선택되곤 하는데, 체크 박스를 선택하면 기존 selection들을 놔두고 그걸 추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당시엔 아마 터치 장치를 염두에 두고.. Ctrl/Shift+클릭이나 드래그 없이 클릭만으로도 아이템들을 복수 선택할 수 있게 고심 끝에 저런 기능을 넣었던 듯하다.
하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는지, 이런 기능은 내 기억이 맞다면 Windows 8.1에서 곧장 없어졌고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하긴, Windows 8은 저 정도면 약과이지, 아예 시작 버튼을 없애 버렸을 정도로 엄청 과격한 모험을 한 물건이기도 했으니까.

이렇듯, 리스트 박스, 리스트뷰 컨트롤, 트리 컨트롤을 두고 아이템의 복수 선택 및 체크 선택과 관련하여 할 말이 무척 많은 걸 알 수 있다. 복수 선택은 단수 선택만치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기능은 아닐 뿐더러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지 동작의 customization의 폭도 넓은 편이다. 그래서 운영체제의 GUI가 곧장 직통으로 지원하지 않고 구현을 사용자에게 맡기는 편이었던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0 08:36 2017/12/2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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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 2010년대 초에는 제로보드 4를 쓰지 말자, IE6을 쓰지 말자, ActiveX를 퇴출시키자 이런 운동이 벌어졌다. 그때는 같은 PC 안에서 Windows에 종속되지 말고 맥, 리눅스까지 잘 지원하는 웹 표준을 지키자는 게 아젠다였다.

그러다가 2010년대 중반부터는 구시대 관행들이 추가적으로 없어지는 게 눈에 띈다. 웹 상으로 주민 등록 번호 13자리 전체를 수집하는 게 금지되었으며, 기술적으로는 영원불변할 것만 같던 플래시마저 웹에서 퇴출 수순을 밟고 있다. 이건 PC 운영체제 간의 연동이 아니라, PC와 모바일이라는 상이한 플랫폼 간의 연동이 아젠다이다. (플래시 없이 현란한 광고 애니메이션은 어째 만드나 싶다.)

사실, 기술과 이론만 따지자면야 모바일에서도 플래시를 지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플래시는 근본적으로 현란한 벡터 애니메이션을 출력하려고 만들어진 물건이니 설계 이념이 딱히 화면 작고 전력 소비에 민감한 모바일과는 친화적이지 않다. 기기와 무관한 접근성의 보장이라는 웹 표준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플래시도 따지고 보면 그 본질은 3rd-party plug in이고 IE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ActiveX의 일종이긴 했다. 플래시를 집어넣을 때 쓰는 태그가 여느 ActiveX 컨트롤을 집어넣을 때 사용하는 태그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얘는 독보적으로 너무 유명하고 널리 쓰이다 보니 타 ActiveX와는 지위가 다른 예외적인 물건으로 취급되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좀 웹 표준을 어겨도 PC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컴퓨팅 환경인 모바일에서는 더욱 부각되게 되었다. 거기에다 보안 문제도 불거지고, 또 모종의 이유로 인해 아이폰 제조사인 애플과 플래시의 제조사인 어도비가 사이가 나빠지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플래시는 인터넷에서 퇴물로 전락했다.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가게 됐다.

플래시가 독자적으로 제공하던 고급 기능들은 그냥 웹브라우저가 직통으로 지원하는 HTML5 표준으로 몽땅 이동했다. 인터랙티브하게 싹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웹사이트 메뉴, 인터랙티브한 게임, 간단한 이미지 편집 등등이 몽땅 말이다.
Chrome 브라우저의 경우 플래시는 자동 실행은 개뿔 물 건너 갔으며, 사용자가 수동으로 켜 줘야만 실행되는 legacy가 됐다. 음.. 예전에 흑역사로 사라졌던 MS Office의 길잡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웹 환경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2.
인터넷 IPv4 주소 고갈과 주소 할당 중단은(이미 2011년의 일임!) 마치 유니코드에서 BMP 영역의 고갈과 비슷한 성격의 현상 같다.
결국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공유기를 사용해서 인터넷을 하고 고정 IP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어졌는데,
공인 IP와 사설 IP가 따로 노는 것 때문에 계층이 좀 헷갈리고 복잡해지고 골치 아파진 것도 있다. 이건 마치 분당선 서현 역이 지하철 출구 번호(안)와 백화점 출구 번호(밖)가 서로 완전히 따로 놀아서 위치 식별이 어려운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초기에 설계되었던 공인 IP 주소 영역들을 보면 class A~C 이런 거 말고도 공유기를 위한 영역을 따로 떼어 놓은 게 있는데.. 이게 유니코드로 치면 UTF-16에 존재하는 surrogate와 개념상 정확하게 일치한다. (처음엔 유니코드에 UCS2만 있었지 UTF-16 같은 게 있지는 않았듯이, IP 주소도 처음부터 공유기 영역에 있지는 않았었다.)
아니, 애초에 유니코드가 없던 시절에 지원 글자 수를 늘리려고 사용하던 multibyte, lead byte, tail byte 따위와도 비슷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또는 16비트 시절의 far pointer하고도 비슷하고 말이다.

결국 32비트, 64비트, IPv6처럼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고 넉넉하고 나은 것, 완전한 것이 오기 전에 컴퓨터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임시땜빵을 하는 방법은 분야를 불문하고 방법론이 다 비슷해 보인다~!

3.
예전에 PC에서는 ICQ, MSN, 그리고 국내 한정으로 네이트온 같은 온라인 메신저가 있었다. 얘들은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PC 전용이었는데, 2010년대 들어서는 다들 망하고 스카이프만이 MS에 인수되어 살아 있는 듯하다.
2010년대에는 카카오톡이 스마트폰 앱과 PC 통합으로 메신저 시장을 사실상 평정했다. PC는 사람이 기계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기계의 전원을 넣어야만 쓸 수 있는 반면, 스마트폰은 365일 24시간 내내 켜져 있으며 사람이 늘 들고 다닌다. 이런 결정적인 차이로 인해 카카오톡은 과거의 메신저와는 달리, 자기 상태를 표시하는 기능이 없다~! (available, away, out to lunch 같은)

카카오톡은 PC용이 있기 때문에 PC와 모바일을 지원한다.
한편, SNS 웹사이트로 출발한 페이스북도 메신저 기능이 있으니, 모바일과 '웹'을 지원하는 셈이다.
예전에 잠시 있었던 Google Talk은 PC용 프로그램, 모바일용 앱에다가 gmail 같은 Google 계열 사이트에서 실시간 대화도 지원하여 드물게 PC, 모바일, 웹을 모두 커버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애플리케이션들이 실행 양상이 다양해지고 있는 게 흥미롭다.

그리고 2010년대부터는 웹 자체도 사용자 상호작용과 반응성이 워낙 좋아진 관계로 PC용 네이티브 프로그램까지는 몰라도 모바일 앱의 정체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물론 기기의 물리적인 기능에 아주 특화된 기능이라든가 방대한 게임 같은 건 모바일 기기에서 직통으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 필요하겠지만, 단순 서버와의 교신과 정보 공유, 조회, 열람이 목적이면 웹 페이지와 자바스크립트 자체를 그냥 기계와 운영체제를 초월한 통합 GUI 플랫폼으로 쓰지 말라는 법이 없게 되는 셈이다.

순수 웹 애플리케이션은 서버 주소만 알려주면 앱스토어 심사 같은 것도 필요 없고 곧장 배포가 가능하다. 웹 전체를 검열하는 빅 브라더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웹을 기반으로 안드로이드와 iOS를 모두 통합하고, 부분적으로 각 모바일 플랫폼에 종속적인 코드를 끌어다 쓸 수 있는 형태인 '하이브리드' 앱이 있다. 그리고 그런 걸 만들어 주는 프레임워크도 있다. qt가 PC에서 Windows/리눅스/macOS 통합이라면, 아이오닉 같은 모바일 프레임워크는 안드로이드/iOS 통합인 셈이다.

'아이오닉'은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이름이기도 한데 컴퓨터에서도 나름 하이브리드 모바일 프레임워크의 이름이구나(비록 영어 철자는 차이가 있지만). 디스크와 드럼(브레이크 vs 메모리 기술), 엑셀(자동차 이름 vs 스프레드시트 이름)처럼 들린다.

4.
웹은 기계와 CPU 아키텍처에 구애받지 않는 정말 universal한 프로그래밍 환경이다. 그 누구도 처음에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다른 형태의 프로토콜로 제공되는 서비스들도 거의 다 웹이 몽땅 독식해 버렸다. 글과 그림과 하이퍼링크만 있는 문서에 불과하던 웹은 한 2, 30년쯤 전의 옛날 얘기이고, 지금은 이게 그냥 인터넷의 알파와 오메가요, 문서와 코드의 짬뽕인 광활한 프로그래밍 환경이다. 그러니 웹 프로그래밍을 하나 잘 공부해 놓으면 그야말로 모든 기계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프로그래밍 스킬을 얻게 된다.

웹이 그런 공룡 같은 거대한 환경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브라우저, 언어 등 각종 규격들이 찢어졌다가 표준화된 과정도 살펴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한편으로, 인간 사는 바닥은 어디든 다 정치와 밥그릇 싸움, 돈지랄이 있구나 하는 병맛스러움이 느껴진다.

HTML4의 지저분함을 참다못해 1990년대 말에 엄격한 XHTML이 제정되었지만, 결국 망하고 HTML5가 다시 옛날 관행 기반에서 제정된 건.. 1990년대 말에 IA64가 너무 과격한 변화를 추구하다가 망하고 기존 x86 호환성을 유지한 amd64로 64비트 컴퓨팅의 판도가 기운 것과 비슷해 보인다. 시기도 서로 비슷한 편이다.

또한 Windows 10이 2015년 가을에 나온 첫 판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게 절대 아니듯, HTML5도 보아하니 한번 정하고 영원히 고정이 아니라 찔끔찔끔 계속 뭔가 추가되고 있긴 한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ACID 테스트 말고 또 2017년 현재까지 만점을 받은 브라우저가 전혀 없는 다른 HTML5 점수 테스트 사이트도 있다.

한편으로 HTML4 이래로 무려 15년 가까이 뒤에야 HTML5가 제정되고 HTML이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건 C++98 내지 C++03 이후로 C++이 2000년대에 정체돼 있다가.. C++1x 이후로 C++이 함수형 패러다임도 받아들이고 네이티브 코드 생성 언어가 갑자기 약 빤 듯이 발전하고 있는 양상과 비슷해 보인다.

웹이 MS Office 문서라면 자바스크립트는 VBA 매크로와도 같은 물건이다. 그리고 내가 HTML, CSS, JS를 삼권분립과 비슷한 구도라고도 비유한 바 있다. 게임 개발에다 비유해도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에 착착 잘 대응하는 것 같다.
아 그래..! 옛날에는 이런 스크립트 자체가 단일화되지 않아서 HTML 주석 안에다가 스크립트 코드를 몰래 집어넣어야 했다. 마치 프레임만큼이나 "이 웹페이지를 제대로 표시하려면 자바스크립트를 지원하는 브라우저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이 출력되도록 참 기괴하게 HTML 문서를 작성했었다. 이거 도대체 언젯적 얘기냐..;;

또한, 웹 프로그래밍에 스크립트는 클라이언트 쪽만 있는 게 아니라 서버 쪽도 있다. 클라이언트는 처리가 빠른 대신 대외적으로 프로그램 소스 코드가 몽땅 공개돼야 한다. (뭐, 난독화는 가능하지만) 서버 쪽은 소스가 노출되지 않지만 데이터 입출력에 서버와 네트워크 트래픽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도 컴퓨터 한 대에서만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에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흥미로운 면모이다.

이런 와중에 마소는 20여 년 전 1990년대 중반에 Bob이라든가 MSN 이런 거 만들면서 좀 삽질을 했었다. Windows 95를 만들어서 개인용 PC의 운영체제는 자기 뜻대로 세계정복을 했지만, 인터넷까지 자기 서비스만으로 호락호락 세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큰 오판이었다. 그래서 잘 알다시피 IE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운영체제에다 끼워넣어서 웹 브라우저의 전면무료화 관행을 정착시켜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IE 자체는 경쟁 브라우저와 모바일 환경 때문에 세계정복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또한 마소는 2000년대 말에 와서는 PC에 너무 안주하고 모바일 환경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예상하다가 스마트폰 플랫폼의 주도권을 안드로이드와 iOS에 완전히 뺏겨 버렸다. 그 시기에 LG전자가 피처폰에 안주하다가 지금 같은 처지가 된 것과 비슷한 실수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후반엔 나조차도 솔직히 말해 사고의 구조가 "그냥 디카 쓰면 되지 폰에다가 카메라를 왜 얹어?" 이러던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전문가라도 스마트폰이 이렇게 뜨고, 그 스마트폰 OS를 오픈소스로 전세계에 뿌려 버리는 괴수 용자 대인배가 등장할 거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즉, <미래로 가는 길> 같은 베스트셀러 책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썼던 천하의 빌 게이츠조차도 웹과 모바일에 대한 전망이 다 적중하지는 못했다. 뭐, "손가락 끝으로 모든 정보를" 같은 큰 그림이야 물론 적중했지만, 그런 기술이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보급되고 마소 주도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IA64 하니까 떠오르는데..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2000년 가을쯤 Windows ME와 아래아한글 워디안도 비슷하게 세기말의 흑역사 삽질을 좀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17 08:31 2017/12/1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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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행기 외형과 동력의 간략한 변천 내력

(1) 옛날에 처음으로 등장한 동력 비행기는 날개가 두 겹으로 달린 복엽기 형태가 주류였다. 빈약한 엔진으로 양력을 최대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날개 형태는 단엽기로 곧 바뀌었으며, 오늘날은 복엽기는 일부 작은 경비행기에서나 볼 수 있다.

(2) 비행기는 랜딩기어의 접지 형태가 자동차로 치면 삼륜차(...!)에 가깝다. 뒤쪽에 삼각형의 두 꼭지점이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옛날에는 전방에 삼각형의 두 꼭지점이 있는.. 일종의 역삼각형(▽) 형태의 비행기 디자인이 주류였다. 이런 비행기는 앞바퀴가 아니라 꼭지점이 하나만 있는 쪽인 뒷바퀴를 조향했으며, 아마 이륙 시에 양력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땅에서 주기· 주행 중일 때는 기수가 위로 치켜세워진 형태이기도 했다. 오늘날 이런 비행기는 역시 일부 경비행기에서나 볼 수 있다.

(3) 비행기는 거의 1950년대 이전까지는 프로펠러기가 주류이다가 그 뒤부터 슬슬 프로펠러 대신 팬이나 다른 추진 기관이 달린 물건이 나온다. 그런데 프로펠러라고 해도 다 같은 엔진 기반이 아니었다.
동체의 전방에 프로펠러가 하나만 달려 있는 놈은 프로펠러를 자동차와 별 차이 없는 피스톤 왕복 또는 성형 엔진으로 돌렸다. 그렇기 때문에 엔진 소리도 자동차와 별 차이 없는 "털털털 부우웅~"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양 날개에 총 2개나 4개씩 프로펠러가 달린 것은 '터보프롭' 엔진으로, 프로펠러를 돌려서 뒤로 배기가스를 분출하는 터빈 기반의 제트 엔진이다. 이제 "위이잉~ " 좀 공기 가르는 비행기다운 세련된(?) 소리가 들리지, 자동차 같은 엔진 소리는 나지 않는다. 오늘날 왕복 엔진 기반 단발 프로펠러기는 역시 소형 경비행기에서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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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비행기 축에 드는 An-2 (12인승)와 DHC-6 트윈오터(19인승). 날개 형태(복엽/단엽), 랜딩기어 구성, 프로펠러 구조(성형 왕복/터보 프롭)가 모두 다른 재미있는 대조군이다. DHC-6의 경우, 미국 그랜드 캐년 관광용으로 쓰이는 기종이기도 하다.

그리고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인데, 옛날에는 프로펠러가 뒤에 달린 비행기가 만들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마치 선박처럼 말이다.
프로펠러가 뒤에 있어도 비행기가 나아가고 뜨는 것 자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게 다른 방면에서 의미와 장점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비행기가 떠서 기수가 들릴 때 프로펠러가 땅과 부딪칠 위험이 크다.;; 그리고 굳이 꼭 그렇게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 보니 사장되었다. 삼발기, 전방 엔진 버스 같은 레어템이 됐다.

2. 악천후

폭우나 폭설처럼 '물'을 동반한 통상적인 악천후뿐만 아니라, 물 없는 지나친 폭염도 교통수단들에게는 전반적으로 악재이다.
고온은 물질들의 열팽창과 밀도 감소를 야기하는데.. 이 때문에 자동차는 공기압이 부족한 대형차에서 타이어의 파열 사고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러면 자기 혼자만 운행 불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타이어 파편이 다른 차에 튈 수 있고, 또 조향력의 상실로 인한 연쇄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

철도의 경우 레일이 과열된다. 팽창으로 인해 휘는 것은 요즘은 기술 개발로 인해 극복되어서 장대 레일까지 잘 돌아가고 있으니 괜찮다. 하지만 문제는 강도도 약해진다는 것. 기관총 같은 게 너무 과열된 상태로 격발이 계속되면 아예 총열이 휘어 버리고, 현지에서 정비 불가능한 정도의 심각한 손상을 입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철도의 경우 스프링클러로 물을 주기적으로 뿌려서 레일을 식히기도 하고, 불가피하면 고속철이라도 주행 속도를 평소보다 낮춘다.

육상 교통수단과는 달리, 비행기는 이착륙 때를 제외하면 타이어와 지면의 접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더위로 인해 공기의 밀도가 감소하면 이는 양력의 부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비행기는 평소보다 더 긴 활주로에서 더 빠르게 달려야 이륙이 가능해지는데, 공항(작은 지방 공항)과 비행기(무겁고 큰 중형 이상급 여객기..)가 드물게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항된다.
비행기는 날개 위의 눈조차도 무게 이전에 양력 발생을 방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싹 다 치우고 출발하는 교통수단이다. 그러니 무더위와 관련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정이 있다.

선박은 폭풍우라면 모를까, 그래도 폭염의 영향을 받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육지가 폭염에 시달리는 중이어도 바다에는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가득하다.
물이나 바다가 싹 말라 버려서 배가 주저앉는 건 지구 멸망 급의 극단적인 천재지변일 테니..

3. 비상 탈출

자동차에는 안전벨트가 있고, 선박에는 구명조끼와 구명보트가 있다. 그나마 철도 차량만이 아무런 안전 장치가 없는 게 인상적이다.
비행기에는 안전벨트는 물론이고 구명조끼와 산소 마스크까지 있다. 구명조끼는 비행기가 바다나 강에 내렸을 때를 대비한 것이고, 산소 마스크는 비행기가 사람이 정상적으로 호흡하기 힘든 고고도에서 위험에 빠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한 사람당 순항 고도에서 자연 호흡이 가능한 고도로 하강하는 데 걸리는 최대 시간만치만 산소가 준비돼 있다. (내가 알기로 대략 15분) 상승도 아니고 하강인데 이건 최대 시간 이내에는 반드시 달성 가능할 것이다.

갑자기 산소 마스크가 덜컥 내려왔다는 건 비행기가 비상 상황에 빠졌음을 뜻한다. 이때 독신 홀몸이라면 그나마 나 자신만 챙기면 되지만, 곁에 금쪽같은 처자식이 있더라도.. 일단은 "가장인 나 자신부터 마스크를 쓴 뒤에" 아직 방법을 모르는 어린애들에게 마스크를 씌워 주는 게 정석이다. 다른 애들을 챙겨 줘야 할 어른 본인이 먼저 기절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뭐랄까, 굳이 창조 진화 논쟁이 아니어도 성경의 법칙도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질문의 답은 언제나 단호하게 "닭이 먼저"인데, 그런 심상이 느껴진다.

비상 착륙을 하든 불시착을 하든 심지어 추락을 했든.. 어쨌든 공중에서 땅이나 물에 내려앉았다면 이제 비행기를 신속하게 빠져나가야 할 차례다.
선박이야 건물 수준의 대형화가 가능하니 논외로 하더라도, 오늘날은 버스와 열차에 이어 비행기까지도 모두 2층 차량· 기체가 개발돼 있다. 보잉 747은 조종석과 특실..만 2층이었지만 A380은 일반실까지 모두 2층이 존재한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는 2층 여객기가 수요도 있고 기술적으로 문제도 없지만 한동안 출시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몇 차례 추락 사고를 겪은 뒤부터는 비상시에 비상구를 개방하고 미끄럼틀을 깔아서 모든 승객을 90초 이내에 탈출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국제 안전 규정이 추가됐는데, 2층 객실로는 이 조건을 구조적으로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여객기는 1층을 유지하면서 승객을 더 많이 태우기 위해서 광동체가 먼저 개발되었다. 버스나 열차와는 달리 복도가 두 줄 있는 것 말이다. 보잉 747이 대표적인 예이다. 얘는 조종석과 특실(!!)만이 2층이다.
그래도 지금은 결국 2층짜리 비행기도 봉인이 풀리고 나오긴 했는데, 그 90초 탈출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나 모르겠다. 결국 배는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 열차, 비행기에 모두 2층 차량/기체가 존재하게 됐다.

높은 비행기에서 승객을 0.1초라도 더 빨리 지면에 닿게 하려면 탈출용 슬라이드/미끄럼틀은 직선이 아니라 사이클로이드(최단 강하 곡선)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잡생각이 문득 든다.
어차피 이 슬라이드는 딱딱한 강체가 아니고, 비행기가 물에 내려앉은 경우 그대로 구명보트로도 쓰이니 현실적으로 그렇게 굽은 모양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추락해서 부서진 비행기는 어디서 연료가 새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승객들이 절대적으로 신속하게 비행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사 승무원들은 깜깜한 비행기 세트장에서 임의의 엑스트라 승객들을 동원해서 탈출 모의 훈련도 실시하며, 이 상황에서는 "고갱님~ 5천원이십니다" 오글오글 서비스 모드가 아니라 강한 명령조와 반말까지 부득이하게 허용된다. "당신, 이쪽으로 빨리 나가!"처럼. 워낙 1분 1초가 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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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나가세요"보다 저런 반말이 승객들을 더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더 신속한 탈출을 돕는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조종석에서 기장과 부기장끼리나, 비상 상황에서 승객과 승무원끼리나 한국어 특유의 괴상한 높임법은 별로 효율적인 의사소통 모델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하다.

비상구 쪽에 앉아 있던 승객은 지금까지 다리 쭉 뻗으며 편하게 앉았던 대신, 이제부터는 법적으로 승무원들과 함께 다른 승객의 탈출을 같이 도와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다. 그럴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승객에게는 애초부터 비상구 쪽 좌석이 아예 발권되지 않는다. 이건 타 교통수단에서는 찾기 힘든 관행인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항공 상식도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알 만한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비상 탈출을 할 때는 짐도 어지간히 거추장스러운 건 다 버려야 한다. 수하물로 부친 캐리어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어지간해서는 선반 위에 올린 백팩조차도 못 건진다. 지갑, 핸드백, 최소한의 개인 의료기기 정도나? 자기가 짐 꺼내느라 복도 공간을 점유하는 동안 뒤의 승객들이 탈출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 짐은 무게 당 얼마로 환산해서 나중에 보험사로부터 보상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힐 같은 신발은 거동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뾰족한 굽으로 탈출 슬라이드를 펑크내는 민족 반역자급 초 울트라 민폐를 끼칠 위험이 있다. 이런 거 탈출하는 모습을 보면 그 승객이 속한 국가와 사회의 평소 시민의식 질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추락 실험

자동차, 특히 그나마 작고 자가운전의 비중이 높은 양산형 소형차들은 모델을 처음 개발할 때 철저한 안전 테스트를 거친다. 사고가 나더라도 탑승객이 받는 대미지가 도를 넘지 않고 일정 수준 이상의 생존률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이다. 특히 미국 같은 자동차 선진국에 신차를 수출하려면 거기서 시행하는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자동차의 구조적인 안전을 100% 완전히 예측하고 검증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자동차에는 충돌 테스트가 쓰인다. 그때 교보재로 동원되는 마네킹인 더미는 보기보다 굉장히 비싸고 귀하신 물건이다.
그런데 자동차의 충돌 실험 말고 혹시 비행기의 추락 실험이 시행된 예가 있을까?

보잉이든 에어버스든, 양산형 여객기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조류 충돌에 대비한" 모의 충돌 테스트는 하지만, 아예 기체를 통째로 추락· 전손시키는 테스트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 사고가 났을 때 어디에 있던 승객이 가장 많이 생존하더라 어쩌고 하는 것은 다 실제로 일어난 사고들을 통해서만 데이터를 축적해서 통계를 낸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싶으니, 미국에서는 비행기 제조사가 아닌 다른 서로 다른 단체에서 딱 두 번 추락 테스트를 시행한 적이 있었다.

처음은 1984년 12월 1일, NASA와 FAA(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 번역은..;;)의 공동 주관으로 보잉 720기를 캘리포니아 주의 모 사막에다 추락시켰다. (☞ 자세한 설명) 720이라는 모델명이 생소할 텐데, 이건 727의 오타가 아니다. 195, 60년대를 풍미했던 구닥다리 4발 여객기인 707의 다운사이즈 버전으로, 제원상의 최대 좌석 수는 149였다.

시범타로 쓰인 기체는 FAA에서 1960년에 훈련용으로 구매한 것으로, 심하게 낡았고 어차피 폐기할 때도 됐으니 이런 용도로 쓰이며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추락한 기체는 파손되면서 연료가 온통 유출되었으며, 이것이 주변의 뜨거운 엔진열로 인해 발화하여 화재를 일으켰다. 기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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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비행기를 추락시켜 부수는 것은 자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니, 한 번의 이벤트로 최대한의 실험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추락 계획을 정말 치밀하게 잘 짜야 했을 것이다. 마치 건물 철거 계획을 수립하듯이 말이다.

더구나 자동차 충돌 실험 때야 궤도나 피아노줄을 이용해서 차를 무인으로 이동시킨다지만, 비행기는 그런 게 없다. 여객기는 하다못해 전투기 같은 조종석 사출 기능조차도 없다. 그러니 처음엔 사람이 들어가서 비행기를 조종하다가 중간에 낙하산으로 뛰어내려서 탈출해야 했다. 물론 동승한 전문 스카이다이버의 도움을 받으며 말이다. 비행기 조종 전문가가 낙하산 전문가는 아니니까.

이런 추락 실험이 비교적 최근에 또 행해졌다. 지난 2012년 4월 27일, 이번에는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이 자사의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Curiosity) 프로 방영을 위해 구닥다리 중고 보잉 727-200을 구매해서 미국· 멕시코 국경 지대에 있는 사막에 추락시켰다. (☞ 자세한 설명)
추락시킨다는 게 공중에서 시동을 꺼 버리고 마냥 활강 내지 자유 낙하시키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착륙 때처럼 뒷부분부터 사뿐히 착지시키지 않고 그냥 연약한 앞부분부터 바로 땅에 닿게만 해도 하체가 으스러지면서 추락 사고가 나는가 보다.

이때는 1984년 실험과는 달리 비행기가 수평 자세로 비교적 곱게(?) 추락했으며, 기체에 불이 나지도 않았다. 훗날 발생한 2013년의 아시아나 항공 814편 추락 사고와 비슷한 양상이 된 것 같다.
단, 727은 삼발기이며 요즘 비행기들처럼 엔진이 날개 아래에 주렁주렁 달린 형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다른 비행기와는 사고의 양상이 좀 다르게 흘러간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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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과 727 모두 엄청난 구형 기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객기의 추락 실험에 동원된 이력이 있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긴, 서구· 영미권에서 저런 "스펀지" 스타일의 지식 쇼 프로들은 자동차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충돌시키고 박살 내고, 폭탄도 터뜨리고 별 엽기적인 소재를 갖고 실험을 하더라. 그리고 자동차의 충돌 실험 자체를 수평 충돌이 아니라 자유낙하 실험 형태로 진행하기도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14 08:28 2017/12/1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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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초 전산학/컴공 상식을 좀 복습해 보고자 한다.

※ 지금과 같은 컴퓨터의 근간이 갖춰진 과정

1. 순 전자식

이로써 인간이 발명한 계산 기계는 엔진 달린 주판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모든 내부 상태를 전자 신호만으로 광속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에니악이 순 전자식 컴퓨터로서는 거의 최초 원조라 여겨진다. 이거 이후로 컴퓨터는 진공관, 트랜지스터, IC, (V)LSI 회로 순으로 그야말로 엄청난 공간 워프를 거듭하면서 작아지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전자식이 아니라면? 컴퓨터도 엔진이나 모터가 달린 채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19세기에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보편적인 계산 기계'인 '해석 기관'이라는 걸 제안하고 만들려 했다. 시대를 아득히 앞서 간 물건이었는데, 그걸 가동하기 위해서 무려 증기 기관을 접목할 생각까지 했었다. 지금 같은 눈부신 전자 공학 기술이 없던 시절이니 당연히 기계식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0년대 초에 에니악 이전에 등장했던 '하버드 마크 1'이라는 기계는 '전자식 계산기'라기보다는 '전동식 계산기'에 더 가까웠다. 복잡한 배선과 릴레이뿐만 아니라 4마력짜리 모터가 달려 있었다. 이건 냉각팬 모터가 아니며 하드디스크 같은 기계식 보조 기억장치용 모터도 아니고, CPU의 실제 계산 동작을 위한 모터였다..;;

2. 2진법 기반

사람이나 열 손가락이 달려 있으니 10진법이 편하지, 기계는 단순한 2진법이 더 편하다. 컴퓨터가 전자식으로 바뀐 뒤부터는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극초창기에는 숫자 진법을 변환하는 것조차 쉬운 작업이 아니었고, 정수가 아닌 부동소수점으로 가면 숫자를 표현하는 난이도가 더 올라갔다. 더구나 컴퓨터는 처음부터 포탄 탄도 예측, 풍동 실험, 일기예보 시뮬, 모의 핵실험처럼 천상 실수 연산이 잔뜩 필요한 과학 영역에서 쓰였다.

그러니 에니악 같은 컴퓨터는 10진법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4비트를 한 자리로 묶어서 0~9를 표현하는 BCD 코드 기반이었지 싶다. 하지만 10진법 숫자를 처리하기 위해서 어차피 2진법 기반의 각종 논리 연산 회로를 구현해야 했을 것이고, 후대의 컴퓨터들은 얼마 가지 않아 native 2진법 기반으로 다 바뀌었다.

3. 튜링 완전

프로그램이 하드코딩된 고정된 변수가 아니라 메모리에 기록된 값을 토대로 또 임의의 위치의 메모리를 읽고 쓸 수 있고(= 배열, 포인터 등을 이용한 복합 자료형. 공간 확장),
런타임 때 결정되는 값의 조건에 따라 반복과 분기가 가능하다면 (= 시간 확장)
그런 계산 모델은 Turing-complete하다고 여겨진다. 즉, 단순 계산기를 넘어 뭔가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 열악한 에니악조차도 설계 구조는 튜링 완전한 형태였다고 한다.

4.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에게 시킬 작업을 변경하기 위해 매번 회로 배선을 뜯어고치고 바꾸는 게 아니라, 한 메모리에서 코드와 데이터를 일체로 내장시킨다. 이 개념까지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컴퓨터는 정말 유연하고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물건으로 변모했으며, 컴퓨터에서 하드웨어와 별개로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메모리가 컴퓨터의 성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커졌다. 프로그램을 메모리에다 처음으로 입력시킬 때는 과거엔 천공 카드 같은 불편한 매체가 쓰였지만, 나중에는 더 간편한 키보드로 대체됐다.

저 아이템들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는 급의 대격변이고 혁신이었다.
인류 역사상 이런 네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컴퓨터가 발명되고 등장한 지 아직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자동차와 비행기의 역사는 100년을 넘었지만 컴퓨터는 아직 그렇지 않고 오히려 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때부터 발전해 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컴퓨터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이 세상을 바꿔 놓은 걸 보면.. 정말 전율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 메모리 계층

컴퓨터는 모름지기 정보를 다루는 기계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특성상, (1) 실행할 코드와 (2) 그 코드가 처리할 데이터가 모두 메모리에 담겨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정보를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그런데 컴퓨터가 취급하는 메모리라는 게 여러 종류가 있고, 이들은 속도와 용량, 단위 용량당 가격이 극단적으로 반비례하는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류별로 일종의 '메모리 계층'이 존재한다.

1. 레지스터(수십~수백 byte)

CPU 구성요소의 일부이다. 당연히 CPU 차원에서 최고속으로 직통으로 값을 읽고 쓸 수 있다.
현재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 지점(메모리 위치), 수만 번씩 실행되는 for 문 loop 변수, C++ 함수의 경우 this 포인터, 산술 연산 명령에 쓰이는 피연산자와 연산 결과 같은 정~말 원초적인 값들이 이곳에 저장된다.
실행되는 스레드의 context가 바뀌면 레지스터의 값도 자기 상태의 것으로 바뀐다.

2. 캐시 메모리(수백 KB~수 MB)

CPU 자체는 아니지만 여전히 CPU의 연장선 격이며 접근 속도가 매우 빠르다. CPU가 사람 두뇌이고 레지스터가 손의 손가락이라면 캐시는 의수 정도는 된다.
얘는 CPU 속도와 메모리 속도의 격차가 커지면서 메모리로 인한 병목을 줄이기 위한 버퍼 차원에서 도입되었다.

캐시도 레벨 1, 레벨 2로 나뉘긴 하는데, 인텔 x86 CPU에서 제일 원초적인 L1 캐시는 80486 때 8K짜리가 도입된 것이 최초이다. 반대로 펜티엄 2이 나왔던 시절에 셀러론 프로세서는 L2 캐시를 제거하거나 용량을 팍 줄인 저가형 모델이었다.

3. 일반 메모리(수십 GB)

CPU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위의 것들보다는 느리지만, 그래도 보조 기억장치보다는 여전히 훨씬 빠르다. 이들 메모리는 전원이 끊어지면 내용이 다 지워지는 휘발성 메모리이다. 이제 신체 접근성으로 치면 의수를 넘어서 핸들과 버튼으로 따로 조작하는 로봇 팔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4. 하드디스크(수 TB)

디스크부터는 보조 기억장치이기 때문에 이건 CPU의 명령만으로는 직접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운영체제라는 소프트웨어가 구현해 놓은 파일 시스템에다 해당 운영체제 API를 통해 요청해야만 데이터를 읽고 쓸 수 있다. 파일 시스템은 열고 닫는 상태를 따로 보관하고 관리해야 하며, 프로그램의 입장에서는 여는 작업이 실패하는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내 손으로 뭔가를 직접 조작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말로 부탁을 해서 간접적으로 뭔가를 요청하고 움직이는 형태가 된다.

그 대신 보조 기억장치는 전원이 끊어진 뒤에도 기록을 남기고 보존할 수 있다. persistency를 보장하려다 보니, 하드디스크는 컴퓨터에서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으로 동작하는 얼마 안 되는 부품 중 하나가 돼 있다. 플래시 메모리는 '일반 메모리'의 성격에 더 근접해 있는 기억장치이지만, 가격과 용량 문제 때문에 하드디스크를 완전히 대체하는 구도는 못 된다.

캐시 메모리에서 캐시 미스가 나서 더 느린 일반 메모리까지 내려가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게, 아래의 운영체제의 가상 메모리 체계에서 페이지 폴트가 발생해서 디스크의 페이지 파일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것과 비슷한 구도이다. 메모리 공간 자체가 CPU의 일부는 아니지만, 보호 모드 가상 메모리 구현을 위한 주소 변환은 CPU 차원의 지원을 따로 받아서 이뤄진다.

메모리가 비싸고 귀하고 부족하던 옛날에는 가상 메모리라는 게 디스크를 메모리 보충분처럼 사용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했다. 비록 속도는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지만, 그래도 아예 안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으니 better late than never이다. 요즘 운영체제들은 memory mapped file이라고 디스크를 반쯤 메모리 다루듯이 포인터로 접근시켜 주는 API를 제공하는데, 가상 메모리를 구현하면서 내부적으로 구현된 기능을 사용자도 적절하게 활용하라고 떼어 준 것에 가깝다.

또한, 가상 메모리와는 별개 개념으로.. 레지스터와 메모리 사이에 '캐시 메모리'가 있듯이, 메모리와 디스크 사이에 '디스크 캐시'라는 계층이 존재한다. 이게 잡아먹는 메모리 양이 만만찮지만 도스 시절에 smartdrv 유틸로 수백 KB~2MB 남짓만 캐시를 잡았어도 체감 성능 향상 효과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거 없이 곧이곧대로 찔끔찔끔 디스크에 접근해서는 오늘날의 방대한 컴퓨터 시스템이 돌아가질 못한다. 그만치 메모리와 디스크 사이의 속도 격차 병목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5. 자기 테이프(수백 TB~수 PB)

아주 극단적인 보조 기억장치이다. 느리고 랜덤(임의 위치) 접근이 안 된다는 엄청난 단점이 있지만, 용량이 가히 압도적이고 가격이 저렴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버 전체 내지 매일 생성되는 방송국 동영상 같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오로지 백업· 보존만 할 목적으로 일부 연구소나 기업에서 테이프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마치 국제 화물 운송에서 선박이 차지하는 위상(느리지만 엄청난 수송량)과 비슷하고, 프린터계에서 도트 프린터의 먹끈 카트리지(원시적이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렴함)와 비슷하다.

메모리야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맨날 하는 짓이 저걸 건드리는 것이고, 보조 기억장치는 파일을 읽고 쓰는 운영체제 API를 통해 사용 가능하다.
레지스터의 경우, C/C++ 언어에는 특정 정수 변수를 가능한 한 저기에 얹어 달라고 컴파일러에게 요청하는 register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함수에 inline이 있다면 변수는 저게 있는 셈이다. for문 loop 변수가 레지스터에 올라가면 좋다.
물론, inline 함수는 재귀호출을 해서는 안 되며, 레지스터 등재 변수는 주소 참조(단항 & 연산자)를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타 메모리나 디스크나 레지스터와는 달리, 캐시 메모리만은 적중률을 올리기 위해 소프트웨어가 직접 접근하고 개입하는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멀티코어 병렬화를 위해서는 CPU 직통 명령인 인트린식 같은 것도 있는데 캐시는 활용 방식이 소프트웨어가 아닌 오로지 CPU의 재량인가 보다.
이렇게 존재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캐시 메모리의 양과 성능은 클럭 속도 다음으로 컴의 속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다.

※ 인텔 x86

인텔 x86은 전세계의 PC 시장을 완전히 석권한 기계어 아키텍처이다. 애플 맥 진영이 x86으로 갈아탄 지 이미 10년이 넘었고, 슈퍼컴퓨터조차도 Cray 같은 슈퍼컴 전용 아키텍처가 진작에 다 망하고 x86이 코어 수를 늘려서 야금야금 파고들고 있다.

하지만 x86은 CPU를 만들던 기술과 방법론이 지금과 같지 않던 초창기, 특히 메모리 가격이 왕창 비싸던 시절을 기준으로 기반이 설계되었으며 16, 32, 64비트로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하위 호환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넘사벽급의 범용성과 시장 경쟁력은 확보했지만, 내부 구조가 갈수록 왕창 지저분해지고 스마트폰용 ARM 같은 후대의 최신 CPU들의 유행과는 영 동떨어진 형태가 됐다.

  • 범용 레지스터 수가 유난히 매우 적음. R## 이렇게 수십 개씩 번호가 붙는 게 아니라 EAX EDX ESI EBP 등 꼴랑 8개로 끝인 건 x86이 예외적이고 특이하기 때문이다. 함수에다가 매개변수를 올리는 주 방식도 x86은 당연히 레지스터가 아닌 스택 기반이다. 이 때문에 컴파일러 백 엔드를 개발하는 방법론이 x86 타겟 계열과 타 아키텍처 계열은 서로 완전히 다르며, x86은 오늘날 컴공과에서 컴파일러 제작 교육용 교보재로 쓰이기에는 영 좋지 못한 타겟 아키텍처이다.
  • 메모리를 조밀하고 compact하게 쓰는 대신에, 디코딩이 복잡하고 더 어려운 CISC 가변 길이 방식으로 명령어를 기술한다. 한 인스트럭션으로 연산에다 메모리 조작까지 몽땅.. 이런 식으로 많은 지시를 함축하고 있는 편이다. 자동차 엔진으로 치면 회전수가 낮은 대신 실린더의 스트로크가 긴 디젤처럼..
  • machine word align이 맞지 않은 메모리 주소의 값을 fetch하는 것을 굉장한 비효율(여러 클럭수 소모)을 감수하고라도 CPU 차원에서 아무 문제 없이 잘 처리해 준다. 요즘 CPU 같았으면 그냥 예외 날리고 끝이었을 텐데.. 이 역시 메모리를 아끼기 위한 조치이다.

레지스터가 부족하면 나중에라도 더 보충하면 되지 않냐고?
레지스터는 추가로 더 꽂기만 하면 되는 메모리가 아니라 CPU 그 자체이다. 그걸 뒤늦게 확장한다는 건 CPU의 아키텍처, 세부 설계와 생산 라인이 다 바뀐다는 뜻이다. 컴파일러도 그에 맞춰 바뀌고 프로그램도 몽땅 다시 빌드되어야 추가된 레지스터 덕을 볼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가방 크기를 더 키우는 게 아니라 생물의 유전자 차원에서 손의 크기, 손가락 개수를 더 키우고 늘리는 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이다.

x86이 너무 지저분하다는 건 제조사인 인텔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2000년대 초, 64비트 CPU를 내놓는 김에 애플처럼 하위 호환성을 싹 버리고 현대적인 디자인 트렌드를 따라 과감한 물갈이를 하려 했다.
마소 역시 새천년 Windows 2000에 맞춰 64비트 에디션을 당당히 내놓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Windows SDK 헤더 파일에서 INT_PTR, INT64 이런 typedef가 등장하고 GetWindowLong이 GetWindowLongPtr로 감싸진 게 이 시기의 준비 작업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IA64 Itanium라는 새 아키텍처는 CPU와 컴파일러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고 호환성도 안습했기 때문에 철저히 망하고 실패했다.
결국 지금은 기존 x86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Itanium보다 훨씬 더 현실과 절충한 x86-64라는 다른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64비트 컴퓨터가 쓰이게 됐다. 이 아키텍처는 인텔이 아니라 경쟁사인 AMD가 최초로 개발했다.

Windows 2000은 과거 NT 3~4 시절에 지원했던 한물 간 구형 CPU들의 지원은 다 끊었고(Alpha, PowerPC, MIPS 등), IA64는 베이퍼웨어이고, 지금 같은 ARM이나 x64는 아직 안 나왔다 보니 NT로서는 이례적으로 사실상 x86 전용으로만 출시되어야 했다.

그런데.. 인텔 x86이 저렇게 메모리 아끼려고 CPU 본연의 효율까지 희생하면서 헝그리하게 설계된 건 과거 PC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32비트 80386 CPU가 이미 1985년에 개발됐는데도 Windows NT, OS/2 같은 이상적인 32비트 운영체제의 도입과 보편화가 10년 가까이 너무 늦었고 Windows 9x 같은 요물이 몇 년간 쓰여야 했던 이유는 32비트 가상 메모리를 운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컴의 메모리가 충분치(못해도 수~십수 MB) 못했기 때문이다. (CPU 말고 그래픽 카드는 1987년에 VGA가 개발되자 못해도 2~3년 안으로 프로그램들이 다 지원하기 시작함)

64비트로 넘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IA64가 개발되던 1990년대 말엔 아직 가정용 컴의 메모리는 100~200MB대에 불과했다. 32비트를 벗어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64비트 CPU는 대용량 데이터 처리 분야에서 속도가 좀 더 올라갈지는 모르지만, 같은 명령과 데이터를 수행하더라도 메모리 소모가 훨씬 더 많아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이러니 가정용 PC에서 64비트의 대중화는 Windows 2000/XP 시기는 어림도 없고, 본격적으로 램 용량이 4GB를 넘어선 2000년대 후반 Vista/7급은 돼서야 이뤄지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11 08:31 2017/12/1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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