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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영화)

<부산행> 재미있게 잘 봤다.
새마을호가 나온 <라이터를 켜라>, 서울 지하철이 나온 <튜브>에 이어 KTX가 주 배경인 영화가 나왔다. 영화 스크린에서 서울 역, KTX, 무궁화호, 디젤 기관차 등등을 보니까 참 사랑스럽고 정겹고 훈훈했다.
난 좀비나 출연 배우나 심지어 스토리까지도 하나도 관심이 없다시피하고, 오로지 철도 구경하러 <부산행>을 봤다. 전국에 나처럼 생각한 철덕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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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운행 번호(406. 짝수는 하행이 아니라 서울 방면 상행 번호임. 400대는 경부선 부산행이 아니라 경전선 경유 마산행!)라든가 실물과는 다른 차량 외부 행선지 LED 같은 건 너무 사소한 아이템이니 따로 거론하지 않겠다.
꼭 남기고 싶은 소감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촬영의 편의를 위해 그냥 깜깜한 밤을 설정하고 만들었던 <라이터를 켜라>와는 달리,
배경이 낮이고 긴 터널 통과라는 설정으로 명암 조절을 한 것은 굉장히 훌륭한 점이다. 높게 평가한다.
대전-동대구 사이는 실제로도 긴 터널이 많은 구간인데, 그때 남자 주인공들의 객차 이동과 좀비 격투가 등장하는 건 각본을 탄탄하게 잘 짰다고 볼 수 있다.

한 터널이 통과 시간이 2분인가 3분이었는데, 열차가 시속 300km로 정상적으로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대전-대구 구간에 통과하는 데 3분씩이나 걸리는 긴 터널이 있지는 않다. 그래도 황학 터널이 거의 10km에 달하며, 비상 상황에서 열차가 약간만 감속을 했다는 걸 감안하면 저런 설정은 설득력을 충분히 얻는다.

2.
철도 차량의 진행 방향과 등화의 색깔을 헷갈리는 건 철도 등장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고증 오류이다. <튜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 <부산행>도 초반에 그런 옥에티가 있던 걸로 기억한다.
철도 차량은 그 특성상 자동차로 치면 깜빡이(방향지시등)에 해당하는 등화는 없다. 그 대신 전방으로는 백색등, 후방으로는 적색등을 켠다. 국정원 연재 추리 퀴즈 중에 이 특성을 이용해서 용의자의 논리 오류를 논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전기 철도 차량과 관련하여 나올 만한 고증 오류는 팬터그래프의 배치 방향이다. 팬터그래프는 진행 방향 기준 최대한 후방에 있는 게 관행이다. 하지만 <부산행>의 경우,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외부에서 클로즈업 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아서 팬터그래프 같은 건 확인할 수 없었다.
<라이터를 켜라>는 장면이 바뀔 때 열차의 외부 클로즈업이 종종 나오기도 했는데 이와 대조적이다. 애초에 쟤는 새마을호 디젤 동차가 배경이어서 전철과는 무관한 설정이기도 했다만..(그래서 주인공이 천장 위를 기어가는 스턴트를 하는 것도 가능했고!)

3.
동대구에서 디젤 기관차에 수십 명의 좀비가 달라붙자 기관차 바퀴에 불꽃이 튀고 힘이 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나온다. 이건 두 말할 나위 없이 연출이며 과장이다.
7000호대 디젤 (전기) 기관차는 무려 수천 마력에 달하는 출력을 자랑하며, 몇십 톤짜리 객차를 몇 개씩 견인하는 차력사이다. 얘 혼자 무게만 120톤을 넘으니, 지상의 도로를 달리는 대형 트레일러의 트랙터조차도 기관차 앞에서는 어설픈 풋 사과로 전락한다.

속도만 느리지 토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그깟 좀비들이 좀 달라붙어 봤자 차량의 주행에는 아무 영향 없다.

4.
저런 것들을 제치고 내 눈에 제일 확실하게 들어온 비현실적 고증 오류는 바로..
대전 역에서 수십 명의 군인 좀비들이 유리창을 깨고 아래의 선로로, KTX 열차 위로 후두둑 떨어졌는데 어떻게 전차선에 닿아서 감전돼서 타 버린 좀비가 한 놈도 없느냐는 것이다. 요거 간파한 분이 계신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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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선에서 펑~펑! 불꽃이 튀고 일부 좀비는 시꺼먼 통구이가 돼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면 관객과 주인공들을 더 멘붕시키고 더 공포감을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장 제작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고, 또 끈질긴 불사신으로 묘사되는 좀비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 연출이 될 테니 그런 고증까지는 제낀 듯하다.

이 영화는 좀비로 변한 주인공을 제외하면 좀비가 죽는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끝날 때가 다 돼서 그나마 안전한 부산에 주둔한 군인을 제외하면, 군인들도 소총 하나 없이 중대급 병력이 몽땅 좀비에게 무기력하게 쳐발려서 죽거나 자기도 좀비가 되는 모습으로 나온다.
특히 대전은.. 차라리 경비 인력을 처음부터 전경으로만 설정하지 왜 군인을 집어넣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나중에 상화(마 동석)가 승강장에서 사용한 도구도 전경 방패와 방망이이고 말이다.

위험물 관리를 잘못해서 수많은 국민들을 좀비로 전락시키고 나라를 내전 급의 파탄으로 몰아넣은 바이오 기업이 실제로 있다면, 저건 뭐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 따위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큰 사고를 친 것이다. 혼란이 다 수습된 뒤엔 그 기업은 공중분해돼야 할 것이고 대표와 핵심 간부들은 사형· 무기징역급의 중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_=;;
그리고 승객 중에서 악역이라면 악역인 영석(김 의성)은 정말 <라이터를 켜라>에서 국회의원 박 용갑, 그리고 <테이큰>에서 장 끌로드, <13구역>에서 국방부 장관 크루거(13구역 몰살 계획이 탄로나서 짤리는..), <타이타닉>에서 '칼' 같은 비열한 캐릭터라 여겨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01 08:37 2016/10/0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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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량 + 대포

전차와 자주포를 구분할 줄 아는지 여부는(외형, 용도 모두) 아마 일반인과 밀덕을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가 아닐까 싶다. 군사 디테일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느 것이든 그저 똑같은 탱크로 보이겠지만, 둘은 그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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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는 적진을 향해 말 그대로 돌진해서 싸우는 역할을 하는 차량이다. 눈에 보이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적을 향해서 포를 직사로 쏜다.
그 반면 자주포는 대형 곡사 화포에다가 움직이는 기능을 부가적으로 추가한 형태이다. 탱크만치 험지와 급경사, 물 속까지 돌아다니지는 못하지만 수~수십 km 밖에 있는 표적에다가 위력도 훨씬 더 강한 포를 쏜다.
스타크래프트 탱크에다 비유하면 전차는 말 그대로 탱크 모드이고, 자주포는 시즈 모드에 대응하는 셈이다. 게임에서는 한 차량이 두 모드를 겸하는 재주꾼이지만 현실에서는 둘은 별개로나 운용 가능하다.

군용차 중에는 전차보다 더 무장이 작은 장갑차도 있다. 이런 차량은 전차보다도 더욱 이동과 방어에 특화돼 있으며, 무장은 있더라도 포가 아닌 중기관총 같은 더 가벼운(?) 형태로 국한되곤 한다.
심지어 바퀴도 궤도가 아닌 일반 고무 타이어가 달려 있기도 하다. 굴삭기가 궤도형도 있고 고무 바퀴형도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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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군용차의 속성에는 이동 능력과 전투 화력이 일종의 tradeoff 형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장기에서도 이런 점을 반영하여 차(車)와 포(包)가 가장 값어치가 높은 말인 것이지 싶다. 적절한 작명이다. "차 떼고 포 떼고"라는 관용구는 핵심요소를 빼서 엄청난 핸디캡을 부과하겠다는 얘기이며, 윷놀이로 치면 윷과 모를 빼고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말(馬)이나 코끼리(象)를 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2. 드래군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공격 유닛 중에는 '드래군/드라군'이라는 놈이 있다. 영어로는 dragoon인데 '용'을 뜻하는 dragon과 철자가 아주 비슷하다(O가 하나 더 붙었을 뿐).
드래군은 우리 문화권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근세 서양에 존재했던 기마병을 뜻한다. 시기가 중세 이후이기 때문에 무슨 두꺼운 갑옷 차림에 냉병기 무장은 아니고, 그 대신 머스킷으로 무장해 있었다.

그런데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드래군의 원래 우리말 번역이 '용기병'이라고 그러길래.. 저 '용'은 도대체 무슨 한자이고 무슨 뜻으로 말이 저렇게 번역되었는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설마 했는데 그 용은 龍이었다. 드래군들이 지닌 장구류(깃발, 헬멧)에 용 모양의 휘장이 붙어 있었다고 말이다. 불과 천둥을 내뿜는 머스킷 총구가 서양 문화권에서 용의 입을 연상시켰는가 보다.
영어로도 '드래곤'과 굉장히 비슷한 단어인데 한국어 '용'도 그걸 노린 건지, 마치 dung과 '똥'과 비슷한 급의 우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토스의 드래군은 다리가 넷 달렸고 덩치도 아주 크다. 비슷한 테란 메카닉 유닛인 골리앗보다도 더 크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프로토스 용사들의 수족만 기계로 교체한 거라면 외형이 이족보행 로보캅처럼 됐을 텐데, 저렇게 '기마병'을 표방하느라 다리 개수도 늘어난 듯하다. 원래 프로토스 족이 근본적으로 인간보다 덩치가 더 큰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군대 조직 생각을 하다가 문득 스타크래프트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3. 육군 보병을 지원하는 화력

전쟁에서 가장 본질적인 주역은 예나 지금이나 땅개 보병 소총수이다. 사람은 결국 물이나 하늘에서 사는 게 아니라 땅에서 사니까.. 그리고 온갖 최첨단 무기들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특수하고 전문적인 병과들도 많이 생겼지만, 얘들도 존재 목적은 결국 보병이 벌이는 전투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난관에 부딪힌 보병 부대가 통신으로 "우리는 현재 적에게 포위됐다. / 이런이런 장애물 때문에 진격을 못 하고 있다. 여기여기 좌표를 폭격해 주길 바란다! 지원 바란다!" 식으로 후방 기지에다 연락을 한다.

군대에 어떤 기계가 도입되면 기계 덕분에 인력만으로 할 수 없는 넘사벽 급의 일을 거뜬히 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기계는 아무 환경에서나 제 능력을 발휘 가능한 게 아니며, 유지 보수하고 관리하는 인력을 추가로 필요로 한다. 기계는 사람보다 생물학적으로 척박한 곳에서는 더 잘 견디겠지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한 물건이라면 충격이나 진동에는 의외로 취약하고 신뢰성이 마냥 무한하지 않다. 만능 강화복이나 로봇 병기 같은 게 2010년대에도 실용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공상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총체적인 가성비를 따졌을 때, 알보병은 현대전에서도 가성비가 그렇게까지 꿀리지 않는다. 군사 분야에서 알보병이라는 병과가 송두리째 100% 기계로 대체되지는 않았으며, 기계는 자기 전문 영역에서만 언제까지나 인간을 보조하는 형태로 운용되고 있다.

보병을 지원하는 화력은 크게 포격과 폭격으로 나뉜다. 포격은 앞서 소개했듯이 자주포로 어마어마하게 먼 표적에다 포를 쏘는 것이며, 폭격은 공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폭격기들이 직접 날아와서 적진에다 폭탄을 떨구고 가는 것이다. 비주얼은 폭격이 더 멋있을지 모르지만, 포격이 더 안전하고 저렴하며 포탄을 더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서 더 오래 지속적으로 공격을 할 수 있다.

한편, 위의 것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저격도 매우 훌륭한 지원 임무이다. 적군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소모하는 총알 효율로는 이거 뭐 게임이 안 되니까..
다만, 얘는 화력 덕후나 지휘 통솔 공동작업 같은 일반적인 군사 이념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혼자 하는 잠입 액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나름 전문직 병과임에도 불구하고 포병 장교나 전투기 조종사와는 달리 장교가 아닌 부사관 계열로 간주된다. 해군으로 치면 여느 군함이 아니라 잠수함 근무에다 비유할 수 있겠다고 본인이 언급한 적이 있지 싶다.

적군의 대포 사격은 우리 역시 대포 사격으로 대응하고 제압하는 편이며, 적군의 저격수를 제압하는 것도 일반적으로는 아군의 저격수이다. 급이 같아야 서로 싸움이 되는가 보다.

4. 군용기

수송기: 군용기 중에서 말 그대로 이동과 수송에 가장 특화돼 있으며 민항기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다. 모든 전쟁에는 전투 인원보다 보급· 지원 인원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군용기에서도 수송기는 비록 직접 교전을 하지는 않아도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다. 공중급유기도 수송의 일종으로 봐야 하려나?

정찰· 조기경보기: 수송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래의 비행기들처럼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공중이라는 특성상 땅과 바다의 어떤 기계도 할 수 없는 첩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명백한 이유로 인해 군용기 중에서 무인화가 가장 먼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폭격기: 무장을 잔뜩 실어서 아래의 땅을 쑥밭으로 만드는 일에 최적화돼 있다. 군용기 중에서 실질적인 kill 수를 제일 많이 달성하고 20세기 전쟁사를 가장 거창하게 장식한 물건이 바로 폭격기이다.
항공 폭탄은 그냥 중력의 힘으로 낙하만 하는 것이니 포탄· 미사일이나 어뢰와는 달리 추진을 위한 기폭제나 엔진이 필요하지 않고 순수하게 본연의 임무인 파괴를 위한 폭약만 잔뜩 집어넣어서 만들면 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다만, 요즘은 정밀 유도 미사일의 발달 덕분에 옛날처럼 무식한 융단폭격 전술이 그렇게까지 막 쓰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전투기: 얘는 수송기나 폭격기, 혹은 동급의 전투기 같은 다른 군용기를 떨구는 일에 최적화됐다. 공중에서 매우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공격하는 것은 지상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투기는 기동성이 그 어떤 군용기보다도 뛰어나며 무장도 최첨단으로 달려 있다. 여러 비행기 조종사 중에서도 전투기 조종사는 되기가 가장 힘든 전문직이다.
전투기는 과격한 기동 때문에 탑승자 대비 연료 소모도 많은지라, 커다란 전투기의 내부도 겨우 2명이 타는 좌석을 빼면 다 연료를 싣는 공간이다. 여객기는 공간 확보 때문에 연료가 날개 안에 실려 있는 편이지만, 전투기는 날개 주변에다가는 무장을 싣는다.

5. 총포

일반 총(개인 소화기급은 사정거리 수십~수백 m, 대형 중화기급은 수 km): 총구에서만 불이 뿜어져 나오고, 그 뒤에 총알 하나에서 탄두 하나가 목표물의 특정 지점에 곱게 박힌다. 작은 권총 정도는 비교적 자유로운 자세로 쏠 수 있지만 장거리 사격은 화력이나 정확도 면에서 영 무리이다. 적어도 강선이 새겨진 소총급은 돼야 군인이 개인 화기로 쓸 만하며, 이런 총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댄 채로 쏴야 한다.
혼자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총도 잠깐 동안이나마 자동 연사 기능이 있다(방아쇠를 한번 당기고 있는 동안 계속 총알이 나가는..). 하지만 총열 순환과 냉각 기능이 있고 위력이 더 강한 중기관총 같은 급이 되면 운용을 위해 여러 인원이 필요하며, 경화기를 넘어 중화기의 범주에 들기 시작한다.

산탄총: 총구에서만 불이 뿜어지는데 총알 하나에서 단일 탄두가 아니라 여러 쇠구슬들이 퍼지면서 목표물에 박힌다. 이것도 스플래시 대미지인지?
이런 총기는 사정거리가 짧기 때문에 전투용으로는 부적합하며, 인명 구조를 위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딸 때 혹은 그냥 사냥 용도로 쓰인다. 마치 칼 중에서도 부엌칼처럼 어째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유용한 구석이 많다. 물론 그래도 부엌칼이나 샷건 역시 사람을 얼마든지 끔살시킬 수 있는 위험한 흉기인 건 자명한 사실이다.

대포(사정거리 수십 km): 사람이 혼자서 들고 다닐 수 없는 물건이다. 옛날에는 성벽 요새나 군함에 달려 있었으며, 야전에서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굴려서 운반하곤 했다.
그 시절에는 대구경 화포답게 무슨 볼링공 같은 거대한 탄환이 날아가서 목표물을 박살내곤 했으나, 요즘 대포에서는 그냥 단단한 탄두가 아니라 고폭탄이 날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총구뿐만 아니라 명중 지점에서도 불꽃과 폭발이 일어나며, 넓은 영역에 파편이 날리면서 '스플래시 대미지'가 발생한다.

로켓과 미사일(사정거리 수백~수천 km): 대포보다도 더 강하고 정확한 화력을 원한다면 결국 탄환에다가 직접 로켓 엔진을 달아서 추진시키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20세기 중후반이 돼서야 등장한 미사일이라는 물건이다. 얘는 발사 직후(총)나 명중 직후(포)뿐만 아니라 날아가는 동안에도 꽁무니에서 불과 연기가 피어오른다. FPS로 치면 얼추 로켓 런처처럼 되는 셈이다.
미사일은 고작 수십 km가 아니라 수백~수천 km를 날아서 대륙을 건널 수 있는 지경이 되었으며, 목표물을 향해 스스로 자세를 잡는 유도 기능도 갖추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고작 재래식 폭탄이 아니라 핵폭탄을 장착하면 가히 인류 역사상 최강의 병기가 탄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북한이 하는 짓을 보면 알 수 있듯, 핵무기의 개발에는 장거리 발사체의 개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과거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처럼 일개 폭격기가 적국의 영공 깊숙한 곳까지 친히 기어 들어와서 핵폭탄을 떨구는 짓은 오늘날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로켓 기반 화기 중에도 바주카처럼 상대적으로 작은 놈도 있긴 하지만, 대략적인 추세가 이러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8 08:31 2016/09/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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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철도의 선로 이설 내력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런 글을 발견했다. 경부선 철도가 1905년 첫 개통한 이래로 선로가 이설되고 선형이 바뀌어 온 대략의 내력이다.
우와! 이렇게 사진과 함께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거 완전 좋다. 딱 내 스타일이다. 저기 사진을 같이 펴 놓고 이 글을 보시기 바란다.

1.
지난 2010년엔 경부선 병점 역 이남으로 분기하는 지선 서동탄 역이 개통했다. 그런데 2000년 초까지만 해도 경부선은 원래 서동탄 방면의 병점기지선이 본선 구간이었다는 거 아시는가?

1990년대 중후반부터 수원-천안 2복선 확장+선형개량+전철화 공사 과정에서 병점-오산대 구간 선로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설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커브도 약간 줄어서 열차가 더 고속으로 달릴 수 있게 됐다. 기존 선로는 차량 기지 입출고용으로 자연스럽게 용도가 변경되었다. 적절하다. 저렇게 재활용을 할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그나저나 구 선로는 지금의 서동탄 역 이남 구간에서 상· 하행 선로가 실제로 저렇게 쩍~ 벌어져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2.
무슨 강이 지나는 것도 아닌데 두정-천안 사이 서쪽에 천안 축구 센터를 감싸는 둥그런 커브가 생긴 건.. 역시나 지금은 이설· 폐선되고 없는 철도의 흔적이었구나. 부산 방면 경부선 하행 선로가 저 궤적을 타고 장항선으로 갈아탔었다.
저 선로 대신 지금은 더 북쪽+동쪽에 공간을 덜 차지하는 입체교차 선로가 새로 생겼다. 이 역시 수원-천안 2복선 공사와 함께 이설되어 새로 생겼지 싶다..

3.
대전 부근은 지형이 험하기도 하고 경부고속선과의 연결 문제도 있고 해서 추가적인 선형 개량이 종종 있었다. 예전에는 고속선이 옥천에서 너무 일찍 끊어지는 바람에 KTX가 연결선을 타고 재래식 경부선으로 허겁지겁 내려와야 했으나, 2015년 8월에 대전과 대구의 도심 구간이 다 개통한 뒤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대전남연결선은 이제 더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그냥 철거해 버려도 할 말이 없으며, 해당 지역에서는 그걸 원하는 여론도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한번 힘들게 만들어 놓은 건축 구조물을 굳이 일부러 부숴 버릴 이유가 없다. 아까 경부선 구선로를 병점 차량 기지 입출고선으로 활용하듯이 이것도 뭔가 다른 활용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지천-신동 사이에 있는 대구북연결선도 현재 비슷한 처지이다.

4.
그 다음으로 경부선에서 주목할 만한 이설은 엄청 옛날인 일제 강점기, 그것도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대구 역과 김천 역은 1905년 1월,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개업했다. 하지만 그 사이의 구미 역은 개업일이 1916년 11월 1일이다. 그 이유는 경부선이 첫 개통 당시엔 지금의 구미 시내 구간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금의 경부고속선 내지 국도 4호선과 비슷한 선형으로 금오산을 관통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로를 만들었더니 그 시절의 증기 기관차가 그 정도 오르막도 제대로 못 오르고 헉헉거렸다. 중간에 보조 기관차를 연결해 줘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경부선 개통 후 10년 남짓 뒤엔, 영업거리가 더 길어지는 걸 감수하고라도 구미 시내 우회 경로로 선로를 대거 이설하게 됐다. 구미 역이 바로 이때 생겼으며, 곧 있으면 개통 100주년을 맞이한다. 반대로 옛 선로에는 '금오산 역'이라고 기관차의 관리를 위한 간이역이 있었으나, 그건 선로 이설과 함께 폐역됐다.

잘 알다시피 박 정희가 1917년 구미 출생인데, 마침 그 즈음에 거기로 경부선 철길이 지나게 된 것은 뭔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상록수 최 용신 선생이 활동하던 당시에 수인선 철도가 건설된 것처럼 말이다.
이건, 훗날 1930년대에 행해진 복선화 공사 때문에 왜관철교 일대가 이설된 것과도 별개의 이야기이다.

5.
다시 우리나라 얘기로 돌아온다. 대구선 이설과 경부고속선 대구 이남 구간의 건설의 영향을 받아서 그쪽에 경부선 본선이 살짝 이설된 건 제끼고..

청도군 소재의 남성현 역 일대는 이미 유명하다. 험준한 산악으로 인한 경사+커브 때문에 건설하기도 힘들고 열차가 다니기도 힘든 구간이다. 성현 터널이 완공되기 전에는 무려 8단계 스위치백 선로를 임시 부설해서 건설 자재를 나르면서 경부선 철길을 깔았으며, 터널이 완공된 뒤엔 임시 선로는 철거됐다.
그런데 기껏 뚫은 성현 터널도 약 30여 년 뒤인 1937년에는 경부선 복선화 공사 과정에서 선로가 또 통째로 딴 데로 이설되면서 폐쇄됐다. 지금 성현 터널은 '청도 와인터널'이라는 관광지로 재활용 중이다.

6.
밀양으로 내려가면, 상동 역 이북으로 산을 직통으로 뚫고 가는 직선 터널들은 역시나 경부선 개통 처음부터 그랬던 건 절대 아니었다. 원래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꼬불꼬불 굽이치던 선형이었다.
단선도 아닌 복선 공용 터널이 일제 강점기 때 있었을 리가 절대 없지. 단순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복선화가 아니라, 경부선 KTX 1차 개통을 앞두고 대구-부산 기존선의 전철화 과정에서 선형 개량을 한 거지 싶다.

또한, 지금 선로는 추화산을 서쪽 끝 밀양 시내 근처에서 터널로 직선으로 쌩 통과하는 반면, 옛날에는 동쪽 능선으로 빙 둘러 갔다.
우회 구간에는 짤막한 단선 터널이 있다. 바로 이것. 단면은 아래쪽이 다시 좁아지는 말발굽 모양이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고 자동차용이 아닌 철도 터널이었다는 증거다. 옛날에는 경부선이 여기를 지났음을 말해 준다.

7.
이제 부산으로 간다.
부산 북부 구간도 1990년대 말, 화명 신도시의 개발로 인해 선로가 내륙이 아닌 강쪽으로, 그 대신 더 곧게 이설되었다. 구포 바로 이북의 화명 역이 1999년에 이 과정에서 새로 생겼으며, 1993년에 구포 무궁화호 전복 참사가 난 곳도 지금은 이설되고 없는 구간상의 지점이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구포보다는 화명 역에 더 가까이 있었다.

예전에는 경부선 선로가 지금의 부산 지하철 2호선과 비슷한 선형으로 시가지를 꽤 깊게 지났다. 어쩐지 지금 경부선 부산 북부 구간은 선로가 평지에 있지 않고 다들 높은 고가이던데, 다 나중에 그렇게 바뀐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님.

옛날에는 경부선이 지금의 서울 역(남대문)보다 더 북쪽까지 이어졌었고(서대문), 지금의 부산 역(초량)보다 더 남쪽까지 더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간 구간에도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다.
1908년의 경의선 직결+부산 개통, 1916년의 구미 시내 구간 개통은 일제 강점기의 일이고, 1930년대 이후 경부선 복선화도 큰 이벤트이다.
해방 후에는 주로 경부고속철 내지 수원-천안 2복선화로 인한 이설이 많았던 걸으로 요약된다.
다들 나의 정신을 살찌우는 소중한 철도 역사 지식이다. 머리에 몽땅 집어넣고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5 19:35 2016/09/2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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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서의 관광 일정을 마친 뒤, 이제 평화의 댐을 보러 화천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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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와 산뿐만 아니라 계곡과 강,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또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서 발이라도 담그고 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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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마어마한 높이 좀 보소.
평화의 댐은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에 다소 불순하고 비현실적인 동기 하에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다목적 댐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훗날 북한이 진짜로 예고 없이 수공을 퍼부었을 때 물을 제어해서 재앙을 예방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긴 했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듯이 "어쨌든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처럼 된 셈이다.

사실, 4대강도 그렇고 우리나라처럼 계절 변덕이 심한 나라에서 치수와 관련된 토목 공사 투자가 무의미한 뻘짓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조금만 계속돼도 옛날엔 제한급수에 온갖 난리 호들갑을 떨었으며, 반대로 태풍이나 홍수가 한번 났다 하면 TV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재의연금 성금 모집하던 게 불과 20여 년 전의 관행이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하면서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날씨가 결코 온순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난리 호들갑이 왜, 무엇 덕분에 쏙 들어갈 수 있었겠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도 평화의 댐은 또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댐 위로 지나가 볼 수는 없었고, 댐 주변에서 댐과 공원의 사진만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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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원에는 온갖 공격 무기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예술 작품을 표방하다 보니 도색은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돼 있다.
평화의 댐 자체는 민통선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근처의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이라고 한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또 다른 장소에서 출입증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검문소에서 즉각 신분증만 까면 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전국의 어느 민통선이든 자가용을 이용한 출입 허가를 받은 외지인은

  1. 받은 임시 출입증을 차 앞유리에 잘 보이게 노출시킬 것.
  2. 이런 데서 교통사고라도 나면 피차 왕창 골치 아파지니 절대적으로 안전 운전할 것.
  3. 목적지가 아닌 길가에 무단으로 주· 정차를 하지 말고 길을 빨리 통과할 것.
  4. 블랙박스를 끄고 다닐 것. (군사 시설을 무단 촬영하지 말 것)
  5. 민간인이 전투복을 입고 다니지 말 것.
  6.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모든 용무를 마치고 퇴장할 것.

이라는 수칙이 존재한다. 도로 통과형이 아닌 일반적인 민통선 구간들은 반드시 들어갔던 초소로 나오는 게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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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있는 홍천으로 가기 위해 경로를 남쪽으로 바꿨다. 양구, 화천 다음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온다. 하지만 철원은 예전에 간 적이 있으며, 어차피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는 춘천-홍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남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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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어느 쉼터를 발견했다. 이 사진엔 담기지 않았지만 뒤에는 지붕 달린 정자도 있다. 저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 PC를 들여다보는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으나.. 본인은 싱글 솔로이다 보니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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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발견했다. 역시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여기 근처에는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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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획에는 없었는데, '파로호' 안보 전시관이라는 게 있어서 여기도 잠시 들렀다. 파로호란 근처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북한강 상류가 화천댐에 가로막히고 고여서 호수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 일대의 댐과 수력 발전소는 일제 강점기 말기(1944년)에 건설되었으며, 6· 25 전쟁 중이던 1951년 4~5월 사이에는 북한군의 수공에 맞서 이 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국군· UN군과 북한·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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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풍경은 이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이렇게 화천을 지나고 드디어 춘천에 진입했다. 춘천, 그리고 더 남쪽의 홍천에서는 군사 훈련 중인 탱크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걸 유난히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저속으로 일종의 떼빙(대열운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자동차들의 통행이 좀 지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군용차와는 달리 탱크는 엔진 소리가 뭐랄까.. 유별나게 시끄럽고 더 기괴했다. 여느 중장비의 엔진 소리와도 달랐다. 차마 말과 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게다가 탱크는 차체의 폭도 여느 자동차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교행이나 추월하기가 더욱 난감했다.

그래도 저것도 다 나라 지키려고 저러는 건데 신기한 구경 하나 하는 셈치고 관대히 넘어갔다. 6· 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저런 탱크가 아예 한 대도 없었다. 그 반면 북한군은 242대 보유. 이 숫자 통계는 초딩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안전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졸음이 밀려 와서 춘천 외곽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서 20분 남짓 쪽잠을 잔 뒤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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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강 재구 소령 추모 공원'이고 입구 주변이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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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목사 하면 '일사각오'가 떠오르듯 강 재구 소령은 그야말로 '희생정신', '살신성인'의 아이콘이다.
1960년대에 한국군이라는 게 조직 분위기가 지금 군대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 위협은 임팩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면 군대를 열악한 자원이라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나라를 잘 지키기라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시스템 대신, 까라면 까 식의 미개한 일본군 관행에 사람 잡는 구타· 똥군기가 만연했다. 그래 놓고는 "나 간부다" 편법 한 마디에 초소가 숭숭 뚫리기도 했으니 군대가 제 역할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연간 군대 내 전체 자살자· 사고 사망자가 두 자리 수이지 그때는 세 자리 수를 가뿐히 넘어서곤 했다. 옛날 군대가 지금 군대보다 좋은 건 딱 하나, 아직 출산율 높고 인구가 많던 시절이다 보니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방위· 면제로 빠지는 길도 지금보다야 훨씬 더 꽤 관대하게 열려 있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가 실수로 병사들 한가운데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수습하려고, 그것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상관이라는 사람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걸 온몸으로 웅크려 덮어서 막은 뒤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 정말 전군의 사기를 진적시키는 미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소령이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한과 대치해 있는 평범한 전방 부대는 아니고, 베트남 파병을 갈 예정이던 부대였다. 박통이 외화벌이와 국력 신장을 위해서 선진국 군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가성비를 메리트로 내세우며 베트남전 파병을 결의했다. 그러자 맨주먹과 근성밖에 가진 게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더 짧고 굵게 돈을 많이 벌어 와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한 장정들이 여기에 많이 지원한.. 그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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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재구 소령 추모비와 추모탑이 이렇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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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아담한 크기이고 강 소령의 흉상, 초상화,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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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소령은 나이 30도 못 되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대신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영예를 얻었다. 고인의 모교에서는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고등학교까지 다 고인을 기리고 있고, 육군 부대에도 '재구 대대'라는 이름의 대대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모델격의 인물을 마음에 두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육사 32기 출신의 엘리트 군인으로 대장까지 역임한 정 승조 장군(1976년 임관, 2013년 예편)이 있는데, 이분이 1976년 당시에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강 재구 소령의 전기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서 육사를 갈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 육사는 학비 걱정 없지, 진로도 안정적이지, 가히 오늘날의 SKY급 대학에 맞먹는 위상과 입결을 자랑했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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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어렵다. 강 소령 역시 처음에는 수류탄을 다른 데로 멀리 던져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몸으로 폭발을 막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 상훈 기록을 찾아보면, 어디서는 태극 무공 훈장이라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고 다른 어디서는 4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무슨 성경의 모순 구절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성경의 모순 구절 풀듯이 문제를 풀면 된다. 본문 텍스트에 나와 있듯, 정답은 '둘 다 받았다'이다. 더 높은 훈장은 나중에 추가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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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산화하던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서 저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수류탄 폭발로 인해 고인은 사지가 절단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고, 그래도 폭발과 함께 즉사한 건 아니고 잠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린 병사의 실명(박 해천 이병)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 병사는 비록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평생 얼마나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 모르겠다. =_=;; 지금은 그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기도 했고, 저분의 근황이 어떤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게 없다.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버린 이상, 나라면 은폐(?)를 위해 개명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지금처럼 쉽게 개명이 가능한 때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_-;;

실제로 생존 무장공비 출신인 김 신조 씨는 얼굴이 알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름까지 교과서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서 그 당시 남조선 군필자들의 웬쑤가 됐다. "니놈 때문에 내가 군대 전역도 늦어지고 말년에도 얼마나 조뺑이 치고 고생했는지 알아?" 야사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예비역 아저씨에게 뒤통수를 까이기까지 했다고.. 결국 그는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실제로 '김 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김 신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근황이 더 검색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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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와서 새롭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강 재구 소령도 생전에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곳들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잘 마쳤다.
날씨가 여전히 덥고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또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여기서 더 놀지는 않았다. 조양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집에 돌아갔다.

이틀 동안 1분 1초가 버릴 게 없는 즐거운 여행을 했다. 산과 계곡과 바다를 모두 구경했으며 고속도로부터 엔진 브레이크 비탈길까지 골고루 75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했다. 이 정도로 욕구를 해소했으니, 당분간은 또 서울을 빠져나간다거나 차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시골은 차량 운행이 뜸하고 어디든지 주차 걱정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강원도는 꽤 넓다. 내년 여름에는 정선, 영월, 태백, 동해처럼 태백선 철도와도 인접해 있는 강원도의 '남부'를 돌아다녀 볼 예정이다. 영역이 공교롭게도 강릉 이남이냐 이북이냐로 나뉘는 것 같다. 이번에 다닌 곳은 온통 북부이니 말이다.
또한 내년엔 이제 병특 마친 직후에 만들었던 여권이 유효 기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는데, 아직도 여권엔 사증란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딜 가든 외국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3 08:31 2016/09/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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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 2: 내륙 산악 드라이빙

아침에 눈을 뜨니 숙소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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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를 뒤로 하고 양구로 가기 위해 꼬불꼬불 고갯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둘째 날엔 하루 종일 이런 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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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위성 사진 지도를 보면, 동북부는 온통 초록색 삼림으로 뒤덮였는데 양구 일대만 사람 머리로 치면 땜통처럼 동그랗게 패여 있다. 양구는 대구처럼 일종의 분지 지형이며 6· 25 전쟁 당시에 외국인 종군기자는 우묵한 사발(punch bowl)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글로는 장모음의 표기가 생략되어 '펀치볼'이라고 적는데, '볼'이라고 해서 ball인 건 아니다. ball은 단모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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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옛날 서체가 참 정겹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각종 표지판과 간판, 자막에 이런 어설픈 둥근고딕 형태의 서체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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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한번 탔다가 다시 내려오니 '사발의 안'에 자리잡은 양구 시내가 나타났다.
을지 전망대와 제4 땅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양구 통일관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민통선 출입 신고를 하면 된다. 절차가 고성 통일 전망대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하다. 단, 오후에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충분치 않으면 둘 중 하나는 못 볼 수도 있다.
양구 통일관 자체도 북한의 실상 같은 안보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양 옆에는 각종 전적비· 충혼탑과 탱크가 놓여 있고 또 독특한 외형을 한 '전쟁 기념관'도 있다. 나름 볼것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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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이 좁아 터진 땅덩어리에 1국가 2체제가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에 반해 북괴는 여전히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주체사상과 남조선 혁명, 공산화 통일 구도를 접은 적이 없다.
하지만 북괴의 마귀적인 현 체제를 갈아엎지 않으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없으며, 그럼 남북은 통일을 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안 하는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현실은 둘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없어져야만 통일이 될 것이고 남한 주도의 통일은 사실상 무력 흡수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

그걸 감당할 리스크가 없다면? 그냥 영구분단, 고립, 봉쇄이라도 제대로 해서 북한이 스스로 붕괴라도 하게 내버려 둬야지.
매정· 냉정하게 들리더라도 저 북괴한테 평화를 구걸하며 계속 퍼주는 것보다는 저거야말로 훨씬 올바르고 더 인간적인 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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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전쟁 기념관은 전쟁터를 형상화한 기발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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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증을 받은 뒤엔 양구 통일관의 북쪽(12시 방향)으로 간다. 로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3시를 선택하면 을지 전망대로 가며, 계속 12시 방향으로 직진하면 땅굴로 갈 수 있다. 난 먼저 을지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도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먼저 3시 방향으로 나 있는 이유는.. 산을 오르는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길이의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을지 전망대는 해발 고도가 무려 1000미터가 넘고 국군 GOP가 코앞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높이를 무시하고 보면 전망대와 땅굴은 직선 거리가 상당히 가까우며 길이 서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보안 때문인지 안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민통선 안에서 이 두 장소를 곧장 왕래할 수는 없었다. 전망대를 본 뒤엔 다시 민통선 밖으로 나와서 그 로터리까지 갔다가 그야말로 수십 km를 뺑이를 치면서 땅굴을 보러 가야 했다. 동선이 아쉽다.

뭐 아무튼..
앞서 얘기했듯이 을지 전망대는 본격 군사 시설이기 때문에 전망대 건물 자체와 양구 시내 방면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북한 쪽은 촬영이 절대 금지.
하긴, 파주의 도라 전망대는 금이 그어져 있어서 카메라질은 금 밖에서 어깨 너머로만 할 수 있던데, 여기는 통제가 더 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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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 전망대에서는 나무로 뒤덮인 빽빽한 산과 숲, 그리고 끝없이 둘러진 철조망, 띄엄띄엄 설치된 우리나라와 북한의 GOP를 볼 수 있었다. 도라 전망대는 평지, 철원의 평화 전망대는 초원, 고성의 통일 전망대는 바다인데 여기는 그냥 산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이지만 가이드 아가씨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북한이 남한 병사들을 꾀어 내려고 자기네 여군들을 근처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대놓고 노출시켰다고 한다. 이거 무슨 선녀와 나무꾼 얘기도 아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미인계엔 미인계로 대응했는데, 1992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일부러 을지 전망대 GOP 근처에서 했다고 한다. 이 1992년도 대회에서 진을 차지한 우승자가 바로 이 승연 씨. 하지만 이분은 각종 부적절한 언행들로 인해 지금은 몸값이 많~이 하락하고 망가진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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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와는 달리 이 전망대는 응당 내비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
산을 내려갈 때는 2단 고정 엔진 브레이크를 단단히 걸면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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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인 제4땅굴 광장에 도착했다. 얘는 서부가 아닌 동부 전선에서 최초이자 현재까지 최후로 발견된 땅굴이다.
과거의 제1과 제2 땅굴은 지상에서의 이상 징후를 토대로 발견된 반면, 제3과 제4는 귀순자의 증언을 토대로 발견되었다. 다만, 제4 땅굴을 제보한 귀순자는 우리나라 군 내부에까지 드나들었다가 나중에 또 중국에서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쟤 혹시 이중간첩이 아닌가, 제4 땅굴은 그저 역정보 떡밥 유포일 뿐인가 하는 불안한 음모론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귀순자가 얘기하는 장소 일대에서 시추공을 이곳 저곳 내리꽂으며 수백 번이나 허탕을 친 뒤에야 땅속의 빈 공간을 발견했다. 우리나라가 땅굴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한 때는 1989년 12월 24일이다. 그 뒤 우리 쪽에서 역갱도를 파기 시작해서 북한의 땅굴과 실제로 관통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정도 뒤인 1990년 3월 3일이다.

제2와 제3 땅굴은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한 뒤에도 북쪽으로 엄청 깊숙히 들어간 곳에 있지만, 이 제4 땅굴은 가는 경로의 대부분이 의외로 민통선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단지, 땅굴 광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무슨 군부대 입구처럼 막혀 있었고, 여기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까 양구 통일관에서 발급받은 출입증을 제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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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은 자가용을 끌고 개인 단위로 찾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가는 길목에 이런 표지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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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 광장의 중앙에는 이런 멸공탑이 세워져 있고, 땅굴 발견 당시에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 진삼 대장이 작성했다는 '건립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저 사람은.. 리즈 시절에 자기가 북파공작원 신분으로 휴전선을 몰래 넘어가서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북한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는 이빨 무용담을 늘어놓아 왔으나... 그게 사실인지 주작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군인 신분을 벗어난 정치질과 똥별질 때문에 안 좋은 평판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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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견 헌트 소위의 무덤과 동상을 드디어 현장에서 실물로 보게 됐다. 제1과 제2 땅굴을 저지하던 시절엔 우리 군인들이 북한군의 총격을 당하거나 지뢰를 밟아서 죽거나 다치곤 했다. 제3 땅굴이 발견됐을 때는 다행히 그런 얘기가 없었음.
어쨌든, 과거 경험을 토대로 인명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4 땅굴을 정찰할 때는.. 화약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군견을 처음으로 투입하여 먼저 보내 봤다.

그리고 이 전략은 매우 현명했음이 입증되었다. 저 군견은 땅굴 안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고 혼자 앞으로 뛰어가다가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고 폭사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죽을 걸 군견이 대신 죽어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값진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 군견은 사후에 이렇게 떠받들여지게 되었고, 소위라는 장교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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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의 입구는 이렇게 생겼다.
제2 땅굴은 그냥 전구간 걸어다녀야 한다.
제3 땅굴은 북한군이 판 땅굴 내부에서는 걸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판 역갱도는 걸어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고 전동차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다. 전동차를 타려면 땅굴 입장료에다 전동차 이용료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 반면 제4 땅굴은 역갱도에서는 걸어야 하고 땅굴 내부는 전동차로 다닌다. 터널의 단면적이 너무 작아서 사람이 걸어 다니려면 어정쩡한 오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전동차를 타고 쪼그리고 앉은 채로 이동해야 한다. 안 그래도 북한은 가평 남이섬과 임진각 공원에 있는 꼬마열차를 연상케 하는 협궤 레일을 제4 땅굴 내부에 부설해 놓기도 했었다.

물론 제2와 제3 땅굴도 공간이 충분히 큼직한 건 아니다. 성인 남자가 간신히 서서 걸을 수 있는 정도이며, 울퉁불퉁한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 쉽기 때문에 안전모는 반드시 쓰고 다녀야 한다.

제4 땅굴은 길지만 민간인에게 공개된 구간은 겨우 100여 m 남짓에 불과하며, 생각했던 것만치 거창하게 볼 건 없었다. 지하로도 민통선 영역까지만 가지, 남방한계선을 넘어 DMZ까지 가지는 않는다. 위도를 비교해 보면 제4 땅굴의 입구는 을지 전망대보다는 훨씬 남쪽에 있다(몇백 m 정도 차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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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간단한 안보 전시관이 있어서 6· 25 전쟁 때 양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제4 땅굴의 특징도 잘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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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 역시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4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20 19:32 2016/09/2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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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관광을 마친 뒤엔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동부의 최북단을 구경하기 위해 고성으로 향했다. 강릉 이북으로는 100km 가까이나 더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이니 서부의 북방 한계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참고로 정동진이 서울의 도봉산-장암뻘과 비슷한 위도이고, 양양 국제 공항이 있는 곳이 38선과 거의 같은 위도이다. 하지만 동부는 그 위로도 속초에 고성까지 계속 북상 가능하다.)

양양까지는 동해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갔다. 길 곧고 차가 거의 없는 덕분에 시속 140~150까지도 밟을 수 있었다. 하조대 IC 이북부터는 고속도로도 없으니 거기부터는 얄짤없이 국도 7호선으로 콜. 항구와 해수욕장을 나란히 끼고 달릴 때는 당장 차를 세우고 물에 들어가고 싶었다.

참고로, 내가 방문했을 때 기준으로 여기 국도 7호선은 옛 도로를 새 도로로 교체· 개량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영동 고속도로는 올림픽 준비 때문이고 여기는 그냥 너무 후져서 갈아엎는 듯하다. 어디는 내비의 도로 선형과 실제 도로 선형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서 화진포로 들어갈 때도 한참을 헤맸다. 게다가 여기는 너무 북쪽이기 때문에 인터넷 지도들도 항공 사진이나 거리뷰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서 길을 더욱 익히기 힘들다는 걸 감안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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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1시간 반이 넘게 달려서 드디어 화진포에 도착했다. 바다, 그것도 해수욕장 근처에 저렇게 호수가 있다니? 거기에다 숲과 나무가 드리워져 있으니 경치가 강릉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옛 정치인들이 교통도 왕창 불편한데 굳이 여기에까지 와서 별장을 괜히 만든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뭐, 나중에 5공 시절엔 전땅크 아저씨가 청남대라는 대통령 별장을 청주시 외곽에 또 만들기도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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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 일성 별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화진포의 성'부터 찾아갔다. 숲 속 언덕에 지어진 저 위치부터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화진포의 성은 그 자체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 그러나 해방 후에 여기 일대가 잠시 북한 치하로 들어가고, 김 일성 일가가 여기에 와서 놀았던 기록과 사진이 전해지기 때문에 김 일성 별장이라는 이름도 덤으로 붙었다. 북한 정권이 저걸 직접 건설한 건 아니다. 지금 건물은 원래 건물의 모양과 구조를 본따서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안에는 옛날 응접실의 복원 모형이 있고, 옥상에는 전망대가 있다. 아, (1) 이 화진포의 성과 (2) 나중에 소개할 이 승만 별장, 그리고 여기에서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은 (3) 화진포 생태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진포 유원지 통합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이것도 한 곳에서 하나만 사면 당일 동안 세 곳에서 모두 통용 가능하기 때문에 강릉의 통일 공원 티켓과 역할이 비슷하다. 다들 걸어서 가기에는 몇백 m 정도 거리의 압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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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전망대에서 해수욕장과 호수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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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진포의 성 근처의 평지에는 '이 기붕 부통령의 별장'도 있다. 이건 규모도 작으며 티켓 없이 누구나 간단히 들어갔다가 보고 나올 수 있다. 주변엔 잔디밭과 나무, 벤치가 잘 조성돼 있다. 얘 역시 의외로 건물 자체는 일제 강점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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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별장은 해수욕장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으니 현장에서 각 별장들을 찾아가는 건 별 어려움이 없다. 이 별장은 6· 25 전쟁이 끝나고 남한이 고성군 일대를 확실하게 수복한 뒤인 1950년대에 새로 만들어졌다.
맑은 동해 바다에다 호수에 이런 유적지까지 곁들어져 있다니 화진포는 참 특별한 해수욕장인 것 같다.

화진포에서 5km 정도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북단 주유소가 아닌가 생각되는 '통일전망대 주유소'가 나오고, 길 건너편엔 통일 전망대 출입 신고소가 나온다. 여기에 들러서 대표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통일 전망대 입장료를 내면 민통선 출입증이 나온다.

출입증을 받은 뒤엔 지금까지 지나왔던 좁고 꼬불꼬불한 길로 도로 나오는 게 아니라, 4차선+중앙분리대가 갖춰진 국도 7호선 새 도로로 빠져나가서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민통선 진입을 위해서 누구 통제를 받는다거나, 일정 시각 간격으로 다같이 출발한다거나 하는 건 없음. 개인 행동 가능하다.

민통선으로 들어가니, 내륙 방면으로는 서쪽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역처럼 이곳 역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제진 역과 금강산 관광 관련(지금은 파토 난) 출입경 사무소 등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 전망대로 가려면 오른쪽 해변 방면으로 가야 했다.
파주는 서울과 가깝고 워낙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이 자차를 직접 끌고 민통선에 들어가는 건 없다. 그 대신 버스 타고 다니는 패키지 관광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여기는 오지여서 그런지 관광이 개인 방문 중심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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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의 주차장 앞마당에 도달하니 날 맞이한 것은 다름아닌 3010호 디젤 기관차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였다. 철원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 근처에는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있더니 이건 또 웬 떡이냐? 나 이런 거 완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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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서 내려 언덕을 또 오르면 드디어 통일 전망대 건물에 도착한다.
여기는 듣자하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망대 중에 가장 먼저 생겨서 이름도 굉장히 흔한 보통명사스러운 '통일' 전망대라고 한다. 또한 전국의 전망대들 중 일단은 가장 북쪽에 있다. '일단은'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잠시 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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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것이 통일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북쪽의 풍경이다. 바다에, 모래사장에, 산에, 동해선 철도까지..! 경치 한번 완전 죽인다.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해수욕장이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도 개방될 수 없는 장소로 봉인되었다는 게 안타깝다. 서부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날씨가 더 맑았으면 저 멀리 금강산까지 보였을 거라고 한다.

근처에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부처님과 성모님(?)에게 빌면서 남북 통일을 염원해 보라는 배려인지 하얀 종교 형상들이 있었고, 또 6· 25 전쟁 체험 전시관도 있었는데,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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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 화면 인증.
통일 전망대는 비록 민통선 안에 있지만 내비 지도에 표시돼 있으며, 게다가 전망대 내부에서도 "북쪽으로 사진 촬영 금지" 같은 제약과 통제가 전혀 없었다. 주변에 민감한 군사 시설이 없는지 분위기가 훨씬 덜 삼엄했다. 그 이유를 본인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통일 전망대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북쪽에 있으며 북한 영토를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군사분계선과는 여전히 수 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전망대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전망대"는 아니다. 덜 위험하고 군에서 딱히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용도로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널널했던 것이다. 여기 주변엔 단순 철조망 이상으로 GOP나 해안 경계 초소 같은 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우리나라가 동쪽 해안은 극단적으로 많이 북진해서 땅을 수복한 덕분에 공간이 이렇게 많이 생겼다.

여기 말고 진짜 군사 시설로도 활용되는 '위험한' 전망대는 '금강산 전망대'라고 따로 있다. 일명 717 OP. 얘는 통일 전망대보다 더 내륙(서쪽)에 있고 위도도 훨씬 더 북쪽이어서 남방 한계선 철책이 훤히 보이고 말 그대로 금강산도 더 가까이 보인다. 그 앞의 북한 땅에 있는 '감호'라는 호수도 '통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금강산'에서는 보인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 차이점을 참고하시라. (저건 내가 찍은 거 아니고 출처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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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전망대는 개인이 '신고'만 한 뒤 불쑥 방문할 수 없으며, 단체가 군부대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은 뒤에만 방문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본인이 나중에 방문한 을지 전망대도 한때는 이런 '단체+허가' 형태였으나, 비교적 최근에 제약이 완화된 것이다. 금강 전망대도 민간 개인 단위로 개방해 달라는 요구가 없지는 않으나, 금방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뭐, 본인은 이렇게 통일 전망대의 관람을 마쳤다. 근처에 DMZ 박물관도 있었지만 월요일에 찾아갔던 관계로 휴관이어서 방문하지 못했다.
일과 시간 동안 계획했던 관광 코스들은 답사가 모두 끝났다. 시각은 오후 3시 반 무렵이었다. 이제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면서 동해 북단에 있는 해수욕장들을 둘러봤다.

최북단의 해수욕장은 명파 해수욕장이다. 크기는 생각보다 아담하다. 그런데 피서철이 끝나고 해수욕장이 폐장한 뒤엔 여기는 철책이 둘러지고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금지돼 있었다. 역시나... 그 아래의 해수욕장들도 그러했다.
그러니 철책이 없고 1년 내내 적어도 낮에는 출입 가능한 최북단 해수욕장은 화진포였다. 그래서 본인 역시 아까 관광을 했던 화진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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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해수욕장이 폐장해 있었지만 날씨가 습하고 후덥지근했으며, 본인은 이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기온과 수온은 물놀이를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해변을 걷고 다리 정도는 바닷물에 담그는 관광객도 몇 명 있었다.
본인 역시 여기까지 왔는데 동해 바닷물을 적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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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모래사장의 경사가 서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을 때리는 파도가 굉장히 강했다.
안전요원도 없는 상태에서 뒤로(바다 쪽으로) 밀려가는 파도에 잘못 휩쓸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여기서는 바닷가에서 몇 발짝밖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해변에서 거의 2~300미터 가까이 진행했던 지난번 서해 해수욕장과는 완전 비교된다.
그런데 거센 파도 때문에 해변엔 물이 온통 흙탕물이어서 동해 바다가 서해 바다보다 딱히 깨끗한지는 제대로 실감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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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에게도 바다 구경을 시켜 주지 않으면 그건 맥북에 대한 실례이고.

이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수욕장 근처에는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남쪽의 거진항 근처의 마을로 갔다. 거기 식당에서 회 요리를 먹고 씻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완전히 밤이 된 뒤에는 해변 도로의 공터에다 차를 세운 뒤,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바람을 쐬면서 노숙과 차박을 했다.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고 손전등을 켜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3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8 08:31 2016/09/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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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파주, 2014년 철원 당일치기 여행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엔 본인은 아예 2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투어를 다녀왔다. 자료 리서치와 최적 경로 프로그래밍, 예산 편성, 운전, 관광 전부 1인 단독 플레이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여행의 자유가 있고 자동차가 있으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도 이 정도의 감흥은 못 느낄 것 같다.;;

※ Day 1: 동해 바다 최북단

한밤중에 집을 나서서 제2중부 고속도로(37)와 영동 고속도로(50)를 달렸다. 강원도에 가까워지자 길이 젖어 있었으며 금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선이 안 보이고 와이퍼를 고속으로 가동해야 할 정도로 비가 오는 곳도 있었다.
거기에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도로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운전을 더욱 조심해서 해야 했다. 갑자기 차선이 줄어들거나 도로 선형이 바뀌는 지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야가 아니라 주말 낮이었으면 병목 때문에 길이 왕창 막혔을 것이다.

난 운전대를 잡는 동안은 어지간해서는 몸 컨디션과 시간대를 불문하고 거의 졸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비 오는 밤에 고속도로 운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이 느껴졌다. 그래서 부득이 휴게소에 들러서 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주변 경치 감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심야 운전을 강행한 이유는 도로 정체가 없을 때 서울을 빠져나가고 해가 뜨자마자 강원도에서 관광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첫 목적지인 이 승복 기념관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속사 IC와 그리 멀지 않고, 또 올림픽도 얼마 안 남았으니 특별히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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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나름 해발 700m에 달하는 대관령 고지대라고 한다. 주변의 산들엔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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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단순히 건물 한 채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동상, 묘소, 생가와 학교의 복원 모형 등 볼거리가 많았다. 정식 개장하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지만(아침 7시 무렵) 친절하게도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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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포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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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일가족들이 이 언덕에 한데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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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두 사람이 한데 공유하고 표면이 짙은 초록색 형태인 옛날 나무 책상은.. 본인도 초딩 저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실제로 사용한 적이 있다. 교실 바닥도 저렇게 목재여서 청소 시간엔 밀대로 닦는 게 아니라 아니라 왁스칠을 해야 했다.
그 밖에 생가 사진, 각종 기념비 사진, 그리고 밖에 뜬금없이 전시돼 있는 각종 탱크와 전투기 사진은 첨부를 생략하겠다. 이것 말고도 올려야 할 사진이 너무 많아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입증된 사건을 안 믿고 자작극설 같은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 왔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든가 난징 대학살, 그리고 아폴로 계획 달 착륙에 대해서 말이다. (종교의 영역으로 가면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뭐, 같은 맥락으로 이 승복에 대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선일보의 주작이라고 뜬금없이 이의 제기를 한 불순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1990년대 말에 있었다.
이건 유족들의 강렬한 반발과 함께 주작이 아닌 팩트라고 최종 판결이 났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잊혀지고 동상이 철거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던 이 승복은 이미 완전히 확인사살을 당한 뒤였다.

쟤는 무슨 대단한 반공 영웅이 결코 아니다. 10살짜리 초딩이 무슨 정치를 알고 이념을 알았겠는가?
그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평범하고 순진하게.. 마치 "차조심 해라 / 낯선 사람을 무작정 믿고 따라가지 마라"를 실천하듯이 "공산당 나빠요 / 싫어요"를 시전한 죄밖에 없는데 빨갱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1.21 사태 때는 김 신조라는 공비 딱 한 명만이 생포되었는데, 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는 김 익풍이라는 사람이 생포되었고 훗날 완전히 전향했다. 그는 사건 당일로부터 무려 41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야 이 승복 기념관 관장의 제안으로 이 승복의 묘지를 참배하고,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에 대해서도 극구 부인했음은 물론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때 이 승복의 가족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님..;;

이 승복 기념관의 관람을 마친 뒤 곧장 강릉으로 달려갔다. 해는 완전히 떴지만 중간에 비상등을 켜고 달려야 할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낀 구간도 있었다. 운전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그래도 비는 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늘이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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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통일 공원이 있는 곳은 바다와 산, 영동선 철도가 나란히 지나니 바깥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함정 전시관에서는 퇴역한 커다란 전함과 탈북용 어선, 그리고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예전에 평택 해군 기지를 견학한 적이 있어서 전함 내부의 풍경은 그럭저럭 익숙했다.

해군은 배가 그야말로 생활관 겸 전장이고 안 그래도 힘든 선원 생활이 군대와 결합하니 얼마나 힘들까 싶다. 그리고 배는 곧 기계덩어리이며, 모든 기계는 관리하는 인력을 필요로 하니 육군 보병보다야 더 기술지향적이다.
여기에는 '전북함'이라고 길이 119미터, 배수량이 3천 톤 정도 되는 구축함이 1999년에 퇴역한 후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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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옛날 골동품들.
난 25년쯤 전 초딩 시절에 컴퓨터 학원에서 GWBASIC을 배울 때, 정확하게 저 두 컴퓨터들의 실물을 구경하고 써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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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바다를 보며 찍은 사진이다. 방파제 같은 시설 주변에서 파도를 막으려고 이렇게 잔뜩 집어넣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테트라포드'라고 한다. 뾰족하게 만들어서 파력을 효과적으로 상쇄하기 위해 공이나 정육면체가 아니라 다리가 4개 달린 형태이다.

그런데 방파제에서 멀쩡한 길을 놔 두고 사람이 저기 위를 일부러 지나가는 건 바다의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억만 리 떨어진.. 거의 자살행위 급의 미친 짓이다. (☞ 더 자세한 설명)
십중팔구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져서 아래 틈새로 쏙 빠지기 쉬운데.. 몇 m 아래에 있는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수 차례 부딪히면서 바닷물에 빠지기 때문에 매우 높은 확률로 중상 또는 사망이 보장된다.

물에 안 빠지고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혼자서 위로 다시 기어올라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살려 달라는 외침 소리가 바깥까지 퍼져 나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안 그래도 인적도 드문 곳인데 비명 소리도 파도 소리에 그냥 묻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더라도 테트라포드들 사이에 갇힌 채로 조용히 탈진해서 죽기 딱 좋다.
더구나 구조 신고가 접수됐다 하더라도 빠진 사람을 찾는 건 심히 어려우며, 구조 작업 역시 극도로 힘들고 위험하다. 저기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지형 장애물이 없이 파도에 휩쓸려서 물에만 곱게 빠진 건 완전 양반이다. 거긴 보트를 투입해서 곧장 출동이라도 가능하지.

테트라포드는 어지간한 플랫폼 아케이드 게임에 있는 데쓰 트랩, 남극 크레바스, 민통선 안의 지뢰밭, 사냥용 덫, 함정 급으로 위험하다고 봐야 한다.
모래사장+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저길 갈 일은 물론 없고, 저기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다 낚시꾼들이다. 낚시 명당이긴 하지만 안전을 등가교환하고 가는 장소라는 건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한편, 전북함의 옆에는 어느 북한 주민들이 탈북할 때 사용했다는 어선이 있었다. 이 배는 그나마 탈북에 성공한 경우에 속하지만, 어떤 사람은 배에 탄 채로 죽어 버려서 배는 식량과 연료가 떨어진 채 시체만 싣고 일본으로까지 떠내려간 비극적인 경우도 있다. 사진 첨부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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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있는 것은 바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들이 탔던 북한제 잠수함이었다. 벌써 20주년이 됐다. 같은 계열의 색으로 도색은 다시 반들반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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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은 일반 군함보다 공간이 훨씬 좁고 거주성이 열악했다. 일어서 있을 수가 없다. 물(잠수함..)이든 땅(땅굴..)이든 그 아래 속에서 지내는데 공간을 넉넉하게 내기란 힘들 것이다. 게다가 북한 사람들은 못 먹어서 키부터가 남한 사람보다 작으니까.
잠수함 안은 온갖 복잡한 계기판과 밸브, 스위치들로 가득했는데, 계기판 아래에 자그맣게 찍혀 있는 "1991. 평양"이라는 글자가 참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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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잠수함이 좌초하면서 부서진 부분인 듯하다. 이것 말고도 사진 찍은 게 많이 있지만 첨부를 생략한다.

지금까지 함정 전시관을 살펴봤다.
강릉 통일 공원은 (1) 함정 전시관, (2) 항일 기념 공원, (3) 안보 전시관이라는 세 파트로 나뉜다. 함정 전시관은 나머지 둘이 있는 곳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직선 거리 7~800m)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저 차이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동을 위해 차량이 사실상 필수이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가는 수단 자체가 자동차밖에 없기도 하지만.

(2)는 그냥 공터에 각종 옛날 전투기와 6· 25 전투 전적비에다가 강릉 항일 인사 추모비가 있는 수준이지만, (1)과 (3)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둘 중 아무 한 곳에서만 입장료를 구입하면 당일 하루 동안 양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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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기념 공원은 위와 같이 생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항일 관련 전시물보다는 해방 이후 관련 전시물이 더 많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파란 프로펠러기는 박 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용되었던 대통령 전용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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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항일 관련 전시물인 강릉 의병 항쟁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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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의 모습. 출입문의 위에 있는 파란 지붕이 뭔가 실사가 아닌 CG 그러데이션처럼 굉장히 예쁜 색상으로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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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보 전시관에는 여느 6· 25 내지 반공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강릉답게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은신처 마련을 위해 판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인 '비트'가 이 사건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얘는 그냥 '비밀 아지트'의 약자라고 한다. 영어 bit나 beat와는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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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중인 동영상을 촬영한 건데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선명하고 깨끗하게 잘 찍혔다.
조 창호 중위는 내가 이 블로그에서 전에 소개한 적도 있는데.. 참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픈 사례이다.
저건 행방불명 전사자로 현충원에 등재되었던 자기 이름을 몇십 년 만에 손수 지우는 모습이다.
전사한 걸로 간주되어 1계급 특진을 해서 '중위'를 추서받은 것이었는데, 당사자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저분은 형식적으로나마 진짜 중위로 진급식을 한 뒤 곧장 전역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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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을 나와서 언덕을 내려가면서 찍은 모습. 카메라는 내가 눈으로 본 색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저렇게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2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5 19:20 2016/09/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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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무더위로부터 자극과 동기를 받아 본인은 이번 여름에는 바다에도 다녀 왔다. 지난 봄엔 등산을 많이 갔는데 여름엔 드디어 바다도 간 것이다. 물론 등산은 한 10월쯤 돼서 덜 더위지면 운동 차원에서 다시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가고 싶은 산이 아직 몇 군데 더 남아 있다.

단순히 산이나 계곡이나 강이 아니라 꼭 바다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바쁜 와중에도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다녀온 소감을 먼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제아무리 가정과 사무실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들어온다 해도, 피서를 직접 가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게 느껴졌다. 안 갔다왔으면 후회했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잘 알다시피 해수욕장의 퀄리티는 동해가 서해보다 더 낫다. 서해는 얕고 물이 더 탁하다. 서울 사람들이 가까운 인천 앞바다를 놔 두고 괜히 강원도나 부산까지 가는 게 아니다. 부산은 대도시답게 빽빽한 고층 건물이 해수욕장 모래사장의 바로 앞까지 닿아 있고 심지어 해운대 해수욕장은 지하철로도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거긴 잘 알다시피 피서철엔 사람들로 완전 터져나간다..;; 이런 풍경을 정작 수도권인 인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학 동안 본인은 학기 중일 때보다 회사에 더 자주 출근하고, 주일마다 교회, 그리고 방학 기간 동안 성경 특강을 부탁받은 것도 있어서 행동 반경에 제약이 심했다. 그래서 동해보다 더 가까운 서해부터 1박 2일 스케줄로 먼저 가게 됐다. 동해는 멀기도 하고, 비단 바다 구경뿐만 아니라 각종 안보 관광 코스를 엮어서 최하 2박 이상의 스케줄로 다시 갈 예정이다.

일단 서해의 어느 해수욕장을 갈지 많이 고민했다. 사실, 공항이 걸쳐 있는 용유도에도 끝자락에 해수욕장과 유원지가 있긴 한데 그건 제외하고, 또 전라도 이남으로까지 너무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크고 유명해서 혼잡할 걸로 예상되는 해수욕장도(대천 같은..) 제외하고, 해변에 상업 시설들이 너무 다닥다닥 늘어서 있지 않고, 적당히 외지고 잠시 속세를 떠났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곳을 골랐다.

그래서 태안군의 북쪽에 있는 구례포/학암포 해수욕장이 선택됐다. 참고로 최후까지 경합했던 후보는 거기 남쪽에 있는 (1) 안면도에 소재한 해수욕장들, 그리고 (2) 장항선+서천화력선을 구경할 수 있는 춘장대 쪽이었다. 비록 철도 구경은 못 했지만 그래도 구례포/학암포 주변에도 마치 춘장대 해수욕장처럼 근처에 화력 발전소가 있긴 했다. 일말의 공통점이다.

서해를 갈 예정이니 응당 서해안 고속도로를 탔다.
평소에 자주 구경하는 경부 고속도로는 차선수가 정말 많고 넓다. 그리고 온갖 광역· 고속버스들이 넘쳐나며 버스 전용 차선까지 있다. 그 반면, 서해안 고속도로는 경부보다는 아담하며 수도권 구간에서도 버스를 거의 볼 수 없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서울 서남부는 이미 경부선 전철이 발달해 있고, 또 경부와는 달리 서울 진입로(서부간선)가 너무 비좁아서 병목이 심해서 경부 같은 교통망을 구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지 싶다.

태안은 서산을 경유해서 국도를 타고 산 같은 비탈길도 한참을 오른 뒤에야 나타났다. 일요일 예배를 마친 뒤 저녁이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오토캠핑장 주변은 차 끌고 텐트 친 피서객들로 가득했다. 나야 홀몸이고 자동차가 곧 이동식 텐트이니 따로 텐트를 치지 않았다. 에어컨 냉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차 안에서 좀 쉬다가, 냉기가 빠졌을 때쯤 이제 주변 지형과 시설 정찰을 시작했다. 그래도 바닷가답게 바깥도 제법 시원한지라, 냉기가 빠진 뒤에도 차에서 자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심야와 이른 아침, 해수욕장이 정식 개장하지 않은 시간대이긴 하지만 모래밭에 돗자리 깔고 바닷바람 맞으며 책 읽고 코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꿈 같은 피서가 시작됐다. 먼 길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바닷물에다가는 아직은 발만 담갔다. 진짜 본게임은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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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주변은 몇십 m 떨어진 물체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무가 짙게 껴 있었다. 그리고 썰물 상태여서 동해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갯벌이 쫘악 펼쳐져 있었다. 바닷물은 한 200m쯤 뒤로 싹 밀려났으며 이 때문에 부표(사진엔 안 나옴)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돗자리 깔고 노트북 PC까지 올려 놓은 채로 사진을 찍었지만, 밀물 때는 여기 일대는 다 물에 잠겼다. 아무튼, 이로써 등산 코딩에 이어 갯벌 코딩까지 달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가 뜨고 더워졌으며, 해무가 차츰 걷히고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개장 시각이 지나자 텅 비다시피하던 해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렇다고 인산인해 수준인 건 물론 아니고, 혼자 쾌적하게 물 속을 돌아다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본인 역시 이 무렵부터 하반신뿐만 아니라 상반신과 얼굴까지 몽땅 바닷물에 담갔다. 기온과 수온이 모두 해수욕에 안성맞춤이었다.

본인은 비록 수영을 할 줄은 모르지만,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바다는 계곡이나 강과는 달리 계속 파도가 치니 물이 뭔가 역동적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많은 물을 밀어내는 엄청난 힘이 어디서 유래된 걸까? 지구의 자전? 달의 인력? 온도 차이? 이렇게 비열이 엄청난 물질이 액체라는 유체라는 게 지질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의 저항과 공기 저항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별별 잡생각을 하며 물놀이를 했다.

서해는 정말 얕고 바닥의 경사가 완만해서 모래사장으로부터 한참을 멀리 떨어져도 여전히 발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럼 여기는 바닥의 경사가 몇 퍼밀인 걸까? 철도 차량의 경사 한계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생각도 덩달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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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밀물과 썰물의 차이라는 것을 이렇게 직접 보니 몹시 신기했다. 정오 무렵이 되니까 물이 제일 많이 들어왔으며, 그 넓던 갯벌이 감쪽같이 몽땅 바닷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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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안개가 곁들어져서 여기도 꽤 괜찮은 풍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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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오른쪽에는 요렇게 나무로 덮인 언덕도 있는데, 이 산길을 따라 몇백 m쯤 걸으면 이웃의 학암포 해수욕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물놀이에다 주변 지역 산책도 몇 시간 하니, 생각보다 팔다리가 쑤시고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그래서 본인은 저 길을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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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점심 시간이 어중간하게 지난 오후 2~3시경, 드디어 해수욕장을 나와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학암포 근처의 민박·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한 마을로 가서 식사를 했다.
바다에 갔으니 해물을 먹어야지. 해수욕장 잘 찾아간 것에 대한 자가보상 차원에서 두세 명 분량의 회 코스 요리를 마지막 매운탕까지 혼자 다 먹어치웠다.

의식주 중에서 의와 주는 전혀 신경쓸 필요 없으니 교통비(유류/톨비)를 제외한 나머지 예산은 전부 '식'에 집중 투입되었다. 사실 여행 기간 내내 이때 말고 나머지 끼니는 거르거나 부실하게 해결한 편이었다. 또한 밥뿐만 아니라 전기 공급도 열악한 상태였는데 식당에 있는 동안 컴퓨터와 전화기를 덩달아 충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때 총체적인 에너지 보충을 했다.

학암포 해수욕장은 마을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또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다시 돗자리 깔고 누워서 해변과 언덕을 구경하며 쉬었다.
그렇게 저녁 무렵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정체 시간대를 피할 겸, 서해안 고속도로의 유명한 행담도 휴게소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면서(휴식+코딩) 추억을 더 만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원하는 대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차가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피서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생업 전선에서 여전히 피서 전과 다를 바 없는 폭염을 경험하면서 좌절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해도 조만간 어서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해에서는 뿌연 해무, 갯벌과 초록색 바닷물을 보고 왔다면, 동해에서는 더 맑고 깊고 시퍼런 바다를 보게 될 듯하다.

그나저나 햇살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얼굴, 팔뚝, 심지어 발등까지 제법 탔다. 물은 자외선의 차단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12 19:28 2016/09/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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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10 이야기

1. 메트로 앱

Windows 10이 나온 지 1년이 좀 넘었고, 마소에서 그 1년간 시행하던 사상 초유의 OS 메이저 버전간의 무료 업그레이드 기간도 끝났다.
처음부터 Windows 7 이하의 구형 OS를 쓰고 있었고 컴의 사양도 빠듯하다면 모를까, 8.1을 쓰는 중에 10으로는 업그레이드를 마다할 이유가 확실히 전혀 없다고 여겨진다.

잘 알다시피 시작 메뉴와 메트로 앱이 쓸데없이 전체 화면을 점유하는 게 아니라 창 형태로 실행 가능해진 것은 아주 환영할 만한 변화이다. 왜 진작에 이렇게 안 만들었나 모르겠다.
결국 PC용 Windows의 입장에서는 재래식 데스크톱 UI뿐만 아니라 외형이 뭔가 flat하고 modern하고 stylish(?)하고, 모바일에 친화적이고 보안 제약이 강하게 걸린 UI 모드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마소에서는 그걸 최종적으로 Universal Windows app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같은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들을 이 형태로도 여럿 만들었다. 대표적인 게 Edge 브라우저이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이 두 버전으로 중복 구현돼 있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든다. 특히 제어판도 기존 제어판에 덧붙여 '설정'이라는 메트로 앱과 이중 구도로 바뀌었다. 화면 해상도를 바꾸는 기능과 DPI를 바꾸는 기능만 해도 데스크톱 버전으로 갔다가 메트로 버전으로 갔다가 하면서 찾는 등 좀 혼란스러워진 느낌이다.

데스크톱 UI는 전통적으로 키보드가 주류이고 마우스가 옵션인 구도이다. 그리고 640*480 내지 800*600처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저해상도 디스플레이와 비트맵 글꼴 환경에서 시작해서 차근차근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크기도 전통적으로 작은 편이다. 사실, 업무 환경에서는 한 화면에서 작은 글씨로 정보가 많이 표시되는 것도 중요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메트로 UI는 그런 레거시 배경이 없으며, 반대로 터치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각종 글자나 GUI 위젯이 큼직하다. 키보드를 배려한 지저분한 focus rectangle 점선이나 액셀러레이터 문자 밑줄이 없다. 사실 마소는 데스크톱 UI에서도 진작부터 저걸 시각적으로 지저분하다고 인지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없애 버릴 수는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마우스만 사용할 때는 저걸 기본적으로 표시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신경을 썼다. WM_UPDATEUISTATE 같은 메시지가 추가된 건 무려 Windows 2000 시절부터이다.

과거에 닷넷이 C++보다 생산성이 더 뛰어나고 단순 바이너리 레벨에서의 API 통합 규격인 COM보다 규모가 더 큰 언어 통합 바이트코드 실행 환경을 추구했다면, 메트로는 PC와 모바일 기기간의 통합 UI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메트로와 닷넷은 큰 관련이 없으며 메트로 앱도 C++ 네이티브 코드 기반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게 의외의 면모이다.

하지만 난 컴퓨터에서는 걍 데스크톱 앱만 있는 게 좋다. 모니터에 가로/세로 피벗 기능이 있는 건 봤어도 멀티터치 기능이 있는 건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봤다. 정작 멀티터치 API 자체는 Windows 7부터 도입됐는데도 말이다. 멀티터치는 문자 입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터페이스임에도 불구하고 날개셋 역시 그쪽 지원은 전무하다. 지원되는 기기를 지금까지 전혀 못 봤고, 고로 지원할 필요를 못 느껴서.
터치스크린은 호주머니에 넣고 들고 다니는 기기만으로 족하지, 커다란 모니터에다가 지저분한 지문 묻히고 싶지는 않더라.

2. 에디트 컨트롤

아 그나저나 굉장히 뜻밖인 점인데, Windows 10은 에디트 컨트롤이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쳤는지 메모장이 수~10수MB에 달하는 파일을 순식간에 읽고 편집할 수 있게 됐다. 아주 최근에야 알았다. 직전의 8.1만 해도 안 이랬는데.
Windows에서 에디트 컨트롤은 전통적으로 단일 버퍼 기반이기 때문에 아주 큰 파일을 읽은 뒤 맨 앞부분에서 글자를 삽입하거나 지우면 랙이 장난 아니게 발생했다. 평생 영원히 안 고쳐질 줄 알았는데.. 이건 뜻밖의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먼 옛날, Windows 9x에서 NT로 넘어가면서 일단 황당한 64KB 제약은 없어졌다. 하지만 2000/XP급에서도 16비트 기준에 맞춰졌던 비효율적인 내부 알고리즘은 여전했기 때문에 메모장이 편집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파일 크기는 겨우 몇백KB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Windows 10에 와서야 완전히 개선돼서 한계가 없어졌다. 참 오래도 걸렸다.

3. 마우스 휠의 적용 대상

마우스 포인터의 움직임이나 버튼 누름 메시지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포인터의 바로 아래에 깔려 있는 윈도우로 전달된다.
그러나 휠 굴림 메시지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맥 OS는 여전히 바로 아래의 윈도우로 전달되는 반면, Windows는 전통적으로 키보드 포커스를 받고 있는 윈도우로 전달되곤 했다.

그랬는데.. Windows 10에서는 휠 메시지 전달을 어느 방식으로 할지를 지정할 수 있다. 내가 본 기억이 맞다면, 제어판의 마우스 카테고리엔 없고, '설정'이라는 메트로 앱으로 가야 한다.
콤보 박스에서 drop list는 열지 않고 키보드 포커스만 갖다 놓은 뒤 휠을 굴렸는데 콤보 박스의 selection이 바뀌지 않아서 마우스에 문제가 생겼나 의아해했는데 사실은 이렇게 동작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둘을 절충해서 일단 마우스 포인터가 놓인 창부터 먼저 고려하되, 그 창에 스크롤 바 같은 게 없어서 휠에 반응할 여지가 없으면 그 다음 순위로 키보드 포커스가 있는 창을 스크롤 시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4. 두벌식/세벌식 전환

세벌식 자판 사용자에게는 참 난감한 일이지만, Windows라는 운영체제는 기본 한글 IME에서 두벌식/세벌식을 전환하는 절차가 버전업을 거칠수록 더욱 복잡해져 왔다.

  • 98/2000/ME: 이때가 제일 나았음. 한영 상태 버튼을 우클릭했을 때 나오는 메뉴에서 글자판을 바로 고를 수 있었다.
  • 95: 한영 상태 버튼 우클릭 메뉴에서 '환경설정' 대화상자를 꺼낼 수 있었고, 거기서 글자판을 고르면 됐다.
  • Windows XP/Vista/7: 우클릭 메뉴에서 "텍스트 서비스 및 입력 언어" 대화상자를 꺼낸 뒤, 거기서 한 단계 거쳐야 MS 한글 IME의 환경설정 대화상자를 열 수 있다. 즉, 예전보다 한 단계 더 거쳐야 글자판을 바꿀 수 있다.
  • Windows 8 ~ 10: IME 브랜드 아이콘을 클릭 후 맨 아래의 '설정'을 고른 뒤, '한국어'를 골라야 MS 한글 IME를 찾을 수 있고, 거기서 또 '옵션'을 클릭하면 환경설정 대화상자를 열 수 있다. 이제는 두 단계를 거쳐야 된다.

요약하자면 XP 시절에 TSF라는 체계가 추가되면서 글자판 전환 절차가 급 까다로워졌으며, 8~10에서는 더 번거로워졌다.
사실 이건 TSF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MS 한글 IME가 옛날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글쇠배열을 간편하게 전환하는 버튼이나 메뉴를 제공하지 않는 바람에, 운영체제 제어판 애플릿을 일일이 꺼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 근본 원인이다. 마소에서는 두벌식/세벌식 전환을 꼭 그렇게까지 기능을 노출해 줄 필요가 있을 정도로 자주 행해지는 동작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Windows 10 시절에도 본인의 세벌식 파워업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사용자 차원에서 글쇠배열 전환 절차는 복잡한 편이지만, 그래도 Windows Vista 이래로 마소에서는 내부적인 두세벌 정보 저장 방식은 쓸데없이 이랬다 저랬다 바꾸지 않고 있다. 그 덕분에 거의 10여 년간 세벌식 파워업 프로그램도 핵심적인 동작 알고리즘이 크게 바뀔 필요는 없었다.

5. 프로그램 외형

Windows 10은 데스크톱 앱의 창 껍데기가 알다시피 전반적으로 하얗게 밝은 회색 계열로 바뀌었다. 8 시절에는 non-client 영역의 두꺼운 테두리가 배경 그림의 분위기에 맞춰 형형색색으로 바뀌곤 했는데 그건 없어졌다.
Visual Studio와 Office도 최신 버전이 다 그런 색으로 바뀐 걸 보면 이게 2010년대 마소의 디자인 트렌드인 듯하다. 다만, 활성화된 창과 비활성화된 창이 껍데기나 제목 표시줄에 배경색의 차이가 서로 전혀 없고 글자색만 살짝 달라지는 건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태를 분간하기 어려워서다.

어쩌면 저 디자인이 마소가 데스크톱 앱에다 선보이는 마지막 디자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마소는 운영체제와 VS, 오피스 공히, 메이저 버전이 바뀔 때마다 프로그램 비주얼과 아이콘을 왕창 뜯어고치는 게 유행이었다. 맥OS 진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그런데 그 관행이 이제 약발이 다해 가나 보다.
VS 2013과 2015, 오피스 2013과 2015는 웬일로 비주얼이 큰 차이가 없고 프로그램들 아이콘도 바뀌지 않았다. 마소 제품들에서 전반적으로 발견되는 추세이다.
심지어 미플이라든가 IE는 잘 알다시피 개발을 중단하고 유사 기능의 메트로 앱으로 대체한다는 선언까지 된 상태이다. 진작에 개발이 중단되어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Html Help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또 2010년대 후반이나 2020년대로 가면 프로그램 외형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미래를 개척한다는 것 참 힘든 일이다.

6. 도움말

Windows 10은 로컬 도움말이란 게 사실상 완전히 없어졌는가 보다.
메모장 같은 기본 제공 프로그램에서 F1을 누르면 HTML 도움말이 뜨지도 않고 자기네들이 또 따로 만든 도움말 창이 뜨지도 않고 그냥 Edge 브라우저로 웹사이트 기반 도움말만이 달랑 뜬다.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으면 도움말을 열람할 수 없다. 도움말이 일체의 전용 프로그램이 없이 아예 이런 형태로 싹 바뀌어 버린 건 10이 처음인 듯하다.

덕분에 C:\Windows\Help 디렉터리를 보면 XP까지만 해도 예전엔 chm 파일들이 즐비했으며 웹페이지/플래시 기반의 신제품 데모 같은 볼거리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죄다 옛날 추억이 됐다.
PC 사용자들의 평균적인 컴퓨터 실력이 충분히 향상됐으니, 어차피 읽지도 않을 구질구질한 도움말들을 다 삭제한 건지는 모르겠다. 허나 Vista/7 때는 아예 '에니악'까지 소개하면서 컴맹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초를 일일이 소개하는 로컬 도움말이 있었는데 이건 너무 과격한 변화가 아닌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10 08:32 2016/09/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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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천장산, 낙산

컴퓨터도 더 작은 모바일로 바뀌고, 철도도 더 작은 경전철로 바뀌는 게 트렌드인지..
지금까지 산책삼아 다녀 온 작은 언덕들의 주요 탐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도록 하겠다.

1. 천장산

서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구소들이 가득하고 남쪽에도 산림 과학원, 카이스트 경영 대학원 등이 있어서 왠지 지적인 느낌이 드는 산이다. 그런 쪽 말고도 동남쪽에는 경희 대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의릉과 한국 예술 종합 학교(일명 한예종)이 있다.
게다가 산의 이름부터가 '하늘 아래 명당'이라는 뜻인데 이런 산을 오르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서 지하철 6호선 상월곡 역에서 내려서 산책로를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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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아파트도, 교수 아파트도 아닌 과학자 아파트다. ㄷㄷㄷ 하긴, 과학자들은 국가를 먹여 살리는 기간 인력이지.
그런데 지금 '과학자 아파트'라는 단어로 구글링을 하면 온통 북한 소식만 검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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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이렇게 빽빽한 나무들로 가득해서 산림욕을 즐기기 좋았다.
단, 천장산은 앞서 말했듯이 산기슭에 여러 연구소와 심지어 문화재까지 있는 관계로 접근이 통제된 곳이 아주 많았다. 사방팔방 등산로가 뚫려 있는 봉화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일단 국립 산림 과학원이 관리하는 '홍릉숲' 영역은 전부 펜스가 쳐져서 막혀 있었다. 서쪽의 연구소 방면도 접근 불가이며 거기 있는 건물들을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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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41m짜리 낮은 산이니 정상에는 아주 금방 도달한다. 그런데 홍릉숲 말고 맞은편 쪽도 전부 펜스가 둘러져서 막혀 있다. 펜스 건너편은 '의릉' 쪽에서 올라와야만 갈 수 있다.
즉, 그냥 동네 뒷산 오르듯이 오르면 천장산은 거의 셰어웨어 데모 수준만 구경할 수 있었다. 갈 수 있는 경로가 단 한 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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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는 북서쪽을 바라보는 딱 한 곳에만 있었다. 북부 간선 도로를 넘어 가까이 있는 언덕은 북서울 꿈의 숲 내지 오패산이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그냥 북한산이다.
여기를 지난 뒤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서 하산하며, 산기슭 둘레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한예종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의릉을 가려면 한예종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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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은 서울 동대문구· 성북구 주민, 제복 입은 현역 군인, 한복 착용자 등등이 무료 입장 가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장료 1000원을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풀밭이 참 깔끔하게 닦여 있던데.. 본인은 여기서 천장산을 다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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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산의 진짜 꼭대기에 도달했다. 위의 사진에서 연두색 펜스 왼쪽이 처음 들렀던 곳이고, 지금은 의릉 쪽에서 산을 다시 올라 있다. 의릉 쪽 등산로는 정상까지 나무 판자 내지 시멘트로 마치 협궤 철길 같은 등산로가 닦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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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릉 방면에서 산을 한 바퀴 도는 쪽으로 하산했다. 저 멀리 경희 대학교 평화의 전당이 보였지만 길이 봉인돼 있어서 그쪽으로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여기는 통제 구역이 많아서 산을 종단할 수 없으며, 들어왔던 의릉 입구로 되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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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들에 둘러싸인 초록색 지붕의 건물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지도와 대조해 보니 저건 한예종 미술원 건물이었다. 본캠 건물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한예종이 있던 이곳에는 잘 알다시피 안기부 청사가 있기도 했다. 남산 청사와 더불어 이렇게 천장산 청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합쳐져서 내곡동으로 간 것이다. (의릉 근처에 있던 것이 지금은 헌릉 근처로 바뀌었다는 게 흥미롭다.) 사실 아까 그 미술원 건물도 과거에는 안기부 건물의 일부였다고 함. 그러니 그 시절엔 민간인이 이렇게 천장산에 자유롭게 접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안기부 강당 건물은 리모델링되거나 철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 남아 있었다. 별로 볼 건 없이 썰렁해서 사진 첨부는 생략하지만, 그 강당에서 지난 1972년에 남북 7· 4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고 한다.

이렇게 의릉과 천장산 구경을 한 뒤, 본인은 무작정 한예종 캠퍼스를 지나서 큰길을 찾아 쪽문 밖으로 나갔다. 초행길이었지만 이렇게 나가는 게 맞았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이내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오고, 상월곡 역의 다음 역인 돌곶이 역이 나왔다. 이렇게 여행을 마쳤다.

2. 낙산

낙산은 안습한 높이 때문에 온통 아파트와 건물로 뒤덮인지라, 항공 사진을 봐도 산 같아 보이지가 않을 정도이다. 그래도 지형상 엄연히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산이며, 꼭대기에 도달하고 나면 서울의 중심부에서 번화한 대학로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산이라고 하면 보통 2차원 공간이 연상되지만 낙산에서 공원에 속하는 영역은 한양 도성을 따라 길쭉한 '길'이라는 1차원적인 성격이 강하다.

동대문(흥인지문)이 있는 교차로에서 북쪽을 보면 한양 도성이 시작되고 땅의 고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여기를 종종 자동차를 몰며 지나가기도 하는데, 저 성곽 공원에는 무엇이 있을지 언젠가 한번 땅밟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지난번에 남산에서 한양 도성 구간을 지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지하철 동대문 역에서 내린 뒤, 실제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낙산을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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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존재감이 없었고, 동대문과 남대문은 왕년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과하기도 한 뜻깊은(?) 곳이어서 존치. 그 반면 서대문은 다른 명분이 없어서 일제 강점기 당시에 노면 전차 복선화를 구실로 헐림...;; 뭐 이런 말이 있던데.
어쨌든 동대문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동대문의 양 옆으로는 동소문(혜화문), 그리고 남소문(광희문)이 있다. 비록 성곽은 동소문 방면 것만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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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을 오르자 주택은 뜸해지고 고급 카페와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거지 대신 공원 티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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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너머 건너편도 굉장한 고지대인 것 같은데 저기에도 집들이 빽빽하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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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정상까지 시내버스도 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교회 친구들과도 낙산 공원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남쪽의 동대문 쪽에서 안 오고 서쪽의 대학로 쪽에서 오르느라 성곽이 있는 이곳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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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으로 나가니 한성 대학교가 바로 내려다 보였고, 그 밖에 경치는 대략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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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인가 제3 전망광장까지 가니 성곽이 잠시 끊어졌고, 본인은 여기서 산을 내려갔다. 요런 계단을 내려가니 또 빽빽한 빌라촌이 나왔고, 거기를 지나자 각종 극장들이 보였다. 방통대 건물이 멀리 보이길래 거기와는 90도 수직인 방향으로 이동하여 큰길을 찾았고, 이내 지하철 혜화 역에 도달하여 산책을 마쳤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07 08:33 2016/09/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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