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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력: 공기보다 가벼운 가스를 잔뜩 실어서 뜬다. 배가 물에 뜨는 것과 개념적으로 동일한 원리임. 비행선이나 기구는 둥실둥실 우아하게 뜨고 내릴 수 있으며 공중 정지가 가능하고 연료도 적게 들어서 좋다. 그러나 얘는 중량 대비 동체의 부피가 너무 커지며 비행 속도도 대단히 느려서 실용성이 떨어진다. 엔진이 꺼졌다고 바로 추락하지는 않지만, 피탄 면적이 너무 크기 때문에(가스가 새면?) 그게 안전 관점에서 안 좋다.

(2) 양력(고정익. 동체가 움직여서 생성): 고성능 엔진으로 공기+배기가스 혼합 가스를 내뿜어서 추력을 만들긴 하지만, 추력으로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고 그 뒤 날개로 양력을 발생시켜서 뜬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여야만 양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조종이 까다로우며, 이착륙 시엔 매우 길고(가속) 넓은(날개 폭..) 활주로가 필요하다. 그래도 장거리 비행에 충분한 비행 속도와 경제성(항속거리)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 바로 이 방식이다.

(3) 양력(회전익. 날개 자체가 공기를 휘저어서 생성): 엔진으로 로터를 회전시키고 그걸로 직통으로 양력을 발생시켜서 뜬다. 고정익기보다 더 불안정하고 조종과 자세 제어가 까다로운 데다, 느리고 연비도 안 좋다. 하지만 활주로 없이 달랑 뜰 수 있고 공중 정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여전히 고정익기와는 별개의 활용 영역이 존재한다.

(4) 추력: 날개 없이 연료를 태운 배기가스를 내뿜는 반작용 추력만으로 뜬다. 날개도 없이 초기에 굉장한 고도와 속도를 얻을 수 있으나, 연료 소모가 너무 극심하여 연료와 중량 대비 항속 거리가 매우 짧다. 이건 비행기보다는 로켓이나 미사일, 우주선의 동력원으로 더 적합하다. 지구 중력을 탈출하려면 닥치고 위로 솟구쳐 올라가야 하며, 달이나 우주 같은 곳은 애초에 대기가 없어서 부력이고 양력이고가 전혀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기가 없다는 말은 연료를 태울 산소도 없음을 의미하므로, 연료 자체를 산화제와 함께 섞어서 만들어야 한다.

(2)의 원리로 날도록 만들어진 비행기/비행체라도 중량 대비 엔진 출력이 캐사기급으로 좋다면 제한적으로 (3)이나 (4) 같은 기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F-22 같은 최신 전투기는 무슨 로켓처럼 수직 상승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람이 안 타서 가벼운 무선조종 항공기 같은 것도 실속에 빠졌을 때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차라리 프로펠러가 있는 쪽이 위로 향하도록 하면.. 프로펠러가 마치 헬리콥터 로터처럼 돼서 비행기를 호버링 상태로 최소한 추락 사고는 안 내고 보전이 가능하다. 반쯤은 틸트로터 비행기처럼 운항 가능한가 보다.

물론 덩치 큰 여객기에게는 저런 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동체를 수직으로 세웠다가는 곧바로 추락한다..;;

이런 기계들 말고 새와 곤충 같은 생명체가 공중에 뜨는 건 일단 (1)과 (4) 부력과 추력은 제끼고 시작한다. (1)은 크기 압박, (4)는 분출과 힘 압박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구현 가능하지 않다. 결국 남는 건 양력인데, 생물의 비행은 고정익과 항공익 어느 하나로 딱 떨어지지는 않아 보인다.

날개를 직접 퍼덕여서 상하 압력차와 양력을 만드니, 대놓고 고정익은 아니다. 게다가 어디서든 간편하게 떴다가 내릴 수 있으니 고정익의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새가 무슨 활주로가 필요하다거나, 주변 공기를 다 빨아들여서 온갖 요동을 치고 후폭풍을 일으키며 날지는 않는다!
하지만 긴 날개를 쫙 펴서 글라이더처럼 활강하는 새도 있기 때문에 고정익 비행 원리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고정익 항공기를 발명한 선구자들이 새들의 날갯짓을 눈에 불을 켜고 관찰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새들은 하늘을 날기 편하라고 여느 육상 동물들보다 시력이 아주 좋으며, 덩치 대비 폐활량도 훨씬 더 우수하다고 한다. 뼈도 가볍고 공기구멍이 많다던데, 그럼 골다공증이 인간에게는 병이지만 새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보다.

지상에서 무려 9~10km 위인 어지간한 여객기 순항 고도에서 나는 철새들도 있다. 이들은 그 먼 길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정말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매 같은 새가 공중을 날다가 거의 8~90도로 급강하해서 지표면의 작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채어 가는 건 어지간한 전투기의 기동 뺨치는 스킬이다. 이런 기술은 절대로 그냥 저절로 생길 수가 없으니 '지적 설계'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큰 새가 아니라 벌새나 참새 같은 극단적으로 작은 새들은 활강 따위 없이 닥치고 죽어라고 날갯짓을 해야만 공중에 뜰 수 있다. 이는 헬리콥터의 특성에 더욱 가깝다. 날개를 퍼덕이는 횟수가 초당 수십 회에 달하기 때문에(분당 2~3천 회) 소리가 '퍼덕퍼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엔진 소리처럼 '부웅', 영어로는 droning이 된다.

이 때문에 요런 동물들은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며, 덩치 대비 식사량도 엄청나게 많다. 내연기관으로 치면 회전수가 왕창 높은 오토바이용 2행정 숏 스트로크 엔진 같다. 디젤 엔진과는 스타일이 완전 반대다.
새들은 그렇게 힘들게 공중에 떠 있다 보면 곧 지치기 때문에 착륙해서 쉬어야 한다. 옛날에 중국에서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운동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무슨 무기를 쓴 게 아니라, 모조리 쭈욱 도열해서 참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쉬질 못하게 해서 비행 중에 지쳐 떨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참새를 잡았다.

새 다음으로 곤충으로 가면.. 전세계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이고 있는 동물은 같은 사람이 아니며,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도 아니고 뱀도 아니고.. 모기라고 한다. 곱게 피만 빨아먹고 꺼지는 게 아니라 나쁜 병원균을 같이 옮겨서... (그래도 모기 다음의 굳건한 2위는 사람이 맞댄다. ㄲㄲ)
모기는 비행체로서는 힘이 아주 부족하며 항속거리도 짧다. 지상에서 스스로 10층 이상의 고층 빌딩을 오르지는 못하며, 엘리베이터나 계단 복도 등을 타고 올라온다고 한다.

하지만 모기는 기동성은 최고이다. 공중정지부터 시작해 그야말로 상하좌우전후 6방향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그나마 민첩하지 않아서 파리보다야 훨씬 쉽게 잡을 수 있는 게 다행이다. 게다가 피를 빨아먹은 뒤엔 무거워서 민첩성· 반응성이 더욱 떨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 잡힐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원하는 시뻘건 액체를 얻었으면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고 사라지는 게 사람과 모기에게 모두 좋을 텐데, 그런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모기가 똑똑하지는 못하다. 게다가 모기의 '웨엥' 날갯짓 소리는 흡혈 이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극도의 불쾌감과 모기에 대한 살생 충동을 부추기는 요소이다.

* 여담: 복엽기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발명한 비행기를 포함해 1910~1920년대까지의 비행기의 형태는 복엽기가 대세였다. 복엽기란, 날개가 위아래로 두 겹이 달린 비행기를 말한다. 그게 옛날 비행기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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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한눈에 봐도 공기 저항을 최소화한 '에어로다이나미컬'한 디자인은 아니어 보이는데.. 초창기에 비행기의 모양이 저랬던 이유가 무엇일까?
날개를 두 겹으로 배열하면 같은 속도에서 공기를 더 많이 부딪치고 양력도 더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2배까지는 아니어도 1.x배 정도는 말이다. 또한 이렇게 하면 한 날개에 걸리는 공기의 압력 오버헤드를 분담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옛날의 비행기는 100여 년 전의 열악한 엔진+날개 기술로 일단 어떻게든 공중에 뜨는 걸 목표로 했다. 속도는 일단 안정적으로 뜬 뒤에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던 것이다. 애초에 고정익기는 이륙할 때(양력)와 착륙할 때(제동) 모두 뒷바람이 아닌 맞바람이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금속으로 더 튼튼한 비행기 날개를 넣는 기술이 개발되고 엔진의 성능도 향상되면서 비행기의 트렌드는 단엽기로 바뀌었다.
헬리콥터로 치면 상하로 로터가 둘 달린 동축 반전 로터가 만들어졌다가, 나중에는 지금 같은 테일로터 방식이 주류가 된 것과 비슷한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 여담: 라이트 형제에 대해서

세상을 바꿔 놓은 발명들이 일단 개발된 뒤에도 아무 탈 없이 곱게 정착하고 실용화된 건 아니었다.
자동차의 경우 영국에서는 잘 알다시피 멀쩡하게 잘 만들어 놓고도 적기 조례라는 규제 병크(기존 마차 운수업자들 보호..) 때문에 자동차 기술이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뒤쳐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는 이제 유명인사가 되고 돈방석에 앉은 게 아니라... 자국 정부 기관으로부터는 외면받고, 비행 기술을 시샘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들로부터는 웬 표절 도용 소송을 당해서 굉장히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됐다. 그 동안 정작 프랑스와 영국, 심지어 일본 같은 경쟁국에서는 라이트 형제를 VIP로 대접했으며, 한편으로는 비행기 제조 기술을 빼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한국도 아니고 선진국에 엔지니어· 덕후의 천국인 미국이 그것도 자국 국민으로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발명을 한 라이트 형제를 당대에 그렇게 홀대했다는 건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형인 윌버 라이트는 여기 저기 쓸데없는 소송에 말리면서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으며, 1912년에 4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동생인 오빌 라이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비행기 기술이 지금의 컴퓨터 기술만큼이나 가히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본 뒤, 1948년에 죽었다. 1903년에 플라이어 1호를 띄우고도 40년이 넘게 더 살아 있었던 것이다.

오빌과 윌버가 한 비행기를 같이 타고 조종한 건 1910년 5월 25일의 가족 비행이 마지막이었다. 지금까지는 여든이 넘은 친부가 "둘이서 한 비행기를 타다가 추락 사고라도 나서 다 죽어 버리면 비행기 연구의 맥이 끊어지지 않느냐? 그러니 연구 중에 비행기엔 반드시 한 명씩만 타고 다른 한 명은 땅에 있어라"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라고 함..;;

그리고 끝으로, 라이트 형제는 목사의 아들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평생을 비행기에 미쳐 사느라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살다가 갔다..;; 후세는 못 남겼지만 전세계인들이 영원히 기억하는 이름을 남겼다.
비행기를 발명해서 유명해지고 신문 기자로부터 혹시 결혼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들은 이렇게 대답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 오빌: 형부터 결혼하면 그 다음에 나도 할 거예요.
  • 윌버: 비행기와 부인에게 둘 다 쓸 시간은 없습니다. (!!)

그래서 둘 다 독신이 됐대나 어쨌대나..;;

Posted by 사무엘

2016/08/04 08:38 2016/08/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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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나 비행기, 열차 같은 모든 교통수단들은 진행 방향이 다른 교통수단과 한 지점에서 교차할 위험이 있는 곳에서는 신호 시설의 통제를 받으며 움직여야 한다. 비행기는 이륙이야 그냥 관제탑으로부터 허가가 날 때까지 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만 착륙은.. 신호 대기를 할 수 없고 상시 선회 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트래픽 대비 활주로가 부족한 혼잡한 공항에 착륙하는 게 다소 난감한 일이다.

그런데 동일 경로의 공유와 교차가 같은 종류의 교통수단끼리만 발생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옛날에 이종간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교통수단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교통수단들간의 이색적인 교차 양상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사람 vs 자동차

이건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가장 먼저 생긴 갈등(?)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일단 횡단보도가 만들어졌으며, 아주 혼잡한 곳에서는 사람과 자동차를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하기 위해서 육교와 지하도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높이의 변화는 노약자, 혹은 짐이 많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악재이기 때문에, 귀차니즘에 충실한 보행자의 무단횡단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고 있다.

사람들과 차들이 터져 나가는 교차로에서는 그냥 단순무식하게 일정 시간 주기로 빨간불과 파란불을 반복하면 되지만 한적한 시간과 장소에서는 점멸 신호 내지 주문형(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서 요청을 했을 때에만 잠시 후 파란불이 되는) 신호등이 운용되기도 한다.

2. 육상 vs 철도

육상 교통수단들 중 진행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놈은 단연 철도 차량이다. 차량이 무겁고 수송량이 압도적이며, 무엇보다도 너무 둔하고 지면 마찰도 작아서 가감속을 날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얘가 일단 속도가 붙어 버렸으면 아무도 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의 차와 사람들이 알아서 비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인 교통사고가 나면 무단횡단에 굉장히 관대하고 오로지 운전자에게만 과실을 뒤집어 씌우는 관행이 심하지만, 그래도 철길 주변 보행이나 철길 건널목 교통사고에서까지 보행자에게 무한 관대하지는 않다.

철길 건널목 사고가 나면 철도 당국은 여러 모로 골치아파진다. 2002년 5월에 어느 전라선 상행 새마을호에서 발생했던 3연속 건널목 사고는 요런 사고의 아주 극단적인 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꾸준히 전국의 수백, 수천 곳에 달하는 건널목들을 야금야금 모조리 정책적으로 입체화해 왔다. "열차를 급정거시킬 수 없다면 애초에 급정거해야 할 상황 자체를 봉쇄하자"라는 발상에 따른 것이다. 이런 조치 덕분에 오늘날 철도 건널목 사고는 3, 40년 전에 비해서 굉장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이 아닌 서울에도 일부 건널목이 있다. 물론 무려 3복선이 된 경부선이나 2복선짜리 경인선 구간에 건널목이 있는 건 아니며, 그 이북의 경의선과 경원선, 특히 경원선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먼저 서빙고 역에서 한남 역 방면으로 400미터쯤 전방 반포대교 근처를 보면 건널목이 있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62길). 새마을· 무궁화 같은 열차도 아니고 전동차가 지상에서 차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널목을 통과해 간다니 참 상상이 안 된다.
서빙고 역 인근에는 자동차 도로를 예각으로 가로질러서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단선 철도도 이따금씩 쓰이는가 보다. 이거 유명한 사진이다. 차단기도 없이 이거 정말 안습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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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회기 역에서 외대앞 방면으로 얼마 안 간 곳에도 건널목이 있으며(서울 동대문구 휘경로12길), 이웃 외대앞 역은 역 출입구에 대놓고 선로 횡단 건널목이 있다. 육교와 지하도로 대체 경로도 있으니 코레일에서는 여기를 못 없애서 난리이나, 인근 주민과 상인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서 건널목을 완전히 못 없앤 상태이다.

심지어 육교에다가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까지 다 놔 줘도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아무리 최첨단 액세서리 기능들로 무장한 안경이나 휠체어가 있어도, 그런 게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눈과 건강한 다리보다 나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런가 보다.
경원선 구간은 일반열차가 다니기도 하고 게다가 이렇게 건널목까지 있으니 전동차(운행 계통상으로는 경의중앙선)의 배차간격을 지금보다 더 줄이는 건 도저히 무리일 것이다.

경원선보다 상태가 더 안습한 건널목은 바로 서울 역 이북 경의선 구간에 있는 '서소문 건널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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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수색 기지에서 서울· 용산 역으로 입출고하는 KTX 포함 모든 일반열차들이 이 선로를 지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크리티컬 중의 크리티컬이다. 그야말로 몇 분이 멀다 하고 차단기가 내려온다. 애초에 경의선 서울-신촌 통근열차/전동차가 1시간에 1대꼴밖에 못 다니고 지금도 경의중앙선의 지선으로 전락한 이유도 이런 열차들의 트래픽 때문이다.

그러니 이 건널목으로 정상적인 차량 통행은 곤란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완전히 틀어막고 건널목을 없애기에는 지상의 자동차 트래픽도 무시 못 하며(밤에는 열차 운행도 뜸해지거나 중단되니), 이 건널목은 입체화를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로 위로는 서소문 고가차도가 있고, 지하로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지나기 때문이다(시청-충정로 사이. 서울 도시 구간에는 2호선이 별로 깊지도 않음). 여러 모로 진퇴양난이다.

3. 육상 vs 배

배는 물 위를 다니는 교통수단이며, 자동차는 수륙양용이 아닌 이상 다리가 놓여 있어야 물 위를 건널 수 있다. 그러니 자동차와 선박이 교차 가능한 상황이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다리가 도개교(bascule, 跳開橋) 형태인 것이다. 이게 철도로 치면 차단기가 내려오는 것과 개념적으로 동일하다.

요즘은 건축 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애초에 다리를 지을 때 어지간히 큰 선박도 아래로 지나갈 수 있게 왕창 높고 크고 기둥 간격도 넓게 만들곤 한다. 선박의 통과를 위해 다리를 통째로 들어올리게 되면 그 동안 자동차들의 통행이 막히는 큰 불편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요즘은 길거리에 자동차들이 좀 많나..;; 그러니 도개교는 노면 전차만큼이나 좀 과거의 유물이고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 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도개교가 전국을 통틀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부산의 영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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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 도개교 형태로 오리지널이 완공됐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운 항구 도시로서 그 시절부터 대도시였으며, 나룻배만으로 영도와 본토 사이를 오가기에는 트래픽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리가 생기긴 했지만 그때엔 선박의 트래픽도 여전히 만만찮은 수준이어서 리즈 시절엔 다리 도개를 하루에 무려 7번이나 했다고 한다. 매회 도개 시간은 약 20분.

이렇게 자동차와 선박 사이의 평면교차가 이뤄졌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영도대교의 도개는 15분씩 하루 2회로 줄었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인 1966년 9월에는 다리 아래로 상수도관을 매달면서 도개가 중단되어 버렸다. 노면 전차(1968) 내지 증기 기관차(1967)와 비슷한 시기에 도개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뭐, 도개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다리를 근 60년 가까이 잘 쓰면서 지냈는데.. 마침 1994년 가을,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터졌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혹시 성수대교 시즌 2가 벌어질 여지는 없는지 전국의 유명 교량들을 부랴부랴 긴급 점검했다. 이때 서울에서는 지하철 2호선이 다니는 당산철교가 시범 케이스로 제대로 걸렸다. 그야말로 "성수대교가 안 무너졌으면 얘가 무너졌을 것이다. 달리던 지하철이 다리와 함께 나란히 강으로 추락해서 초특급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급의 막장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산철교는 전면 철거 후 새로 만들어졌는데..

부산에서는 지은 지 너무 오래 된 영도대교가 '대대적인 긴급 보수, 혹은 아예 철거 후 재시공 필요' 판정을 받았다. 간이역 건물만큼이나 역사적인 가치가 크고 안전을 위해 여러 번 땜빵도 했지만, 넘쳐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고 근본적인 안전이라는 토끼까지 둘 다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지금 다리는 철거해 버리고 다리를 더 큰 규모로 다시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됐다. 그래도 새 다리는 오리지널 영도대교와 최대한 같은 외형으로 만들고, 먼 옛날에 봉인되어 버렸던 도개 기능도 상징적인 차원에서 다시 부활시켰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영도대교는 지난 2013년 11월에 개통했다. 하루 한 번(오후 2시) 다리를 15분 동안 들어올린다.
그러고 보니 민방위 대피 훈련도 매달 15일의 이 시간대에 20분 동안 진행한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건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서 벌건 대낮에 하는 게 아무래도 운전자들에게 민폐가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육상+철도의 특수한 경우

음, 그러고 보니 전라남도 무안과 영암 사이에는 호남선의 지선인 대불선이라는 화물 철도가 있다.
얘도 종점 인근에 자동차 도로와 만나는 건널목이 있는데, 여기는 서울처럼 열차나 차량 통행량 자체가 너무 많아서 입체화가 필요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건널목에 존재한다.

대불선은 전철화가 돼 있다. 그런데 이게 고성능 전기 기관차를 운용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호재이지만, 화물 수송 능률면에서는 큰 악재이기도 하다.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린 전차선 때문에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화차에다 선뜻 실을 수가 없으며, 게다가 전차선의 높이보다 더 높게 화물을 쌓은 트레일러가 건널목을 지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교량 때문에 높은 배가 통과할 수 없어 지는 것과 비슷한 양상의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여기 건널목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됐고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동식 전차선이 존재한다. 마치 배가 지나가게 다리를 들어올리듯, 아슬아슬 간당간당한 대형 트레일러가 건널목을 통과할 때는 건널목 위를 지나는 전차선을 잠시 치울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치 주문식 횡단보도 신호기처럼. 세상에 이런 것도 있다.

5. 육상 vs 비행기

자동차가 비행기의 항로를 침범한다는 건 불가능-_-한 일이고, 그 대신, 과거에 일부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가 비상시에 군용기의 활주로로 쓰이는 경우는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에 신갈, 천안을 비롯해 몇몇 구간이 이상하리만치 곧고 길게 잘 뻗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붙박이 중앙분리대가 없이 페이크 이동식 중앙분리대만 있었다. 그런 곳이 바로 활주로 공용 구간이었다.

옛날에는 물론 자주는 아니었겠지만 공군이 가끔씩 경부 고속도로 일부 구간을 틀어막고 실제로 훈련을 했다.
동아일보 1988년 3월 30일자를 보면, "팀 스피리트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의 하나인 비상 활주로 이착륙 훈련이 30일 경부 고속도로 판교-신갈 구간에서 전투기 F4, F5, F15, F16, 대형 수송기 C123, 폭격기 B52 등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됐다." 같은 보도가 있다. TV 뉴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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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지금 8차선, 10차선으로 확장되고 있고 24시간 차들로 터져 나가는 그 경부 고속도로의 일부를 틀어막고, 거기서 전투기 이착륙 훈련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이야 그런 비상 활주로들은 다른 한산한 도로로 옮겨지고 해제되고 있다. 특히 활주로 구간의 중간에 분기점이나 나들목을 만들다 보면 활주로 기능이 자동으로 상실되었다. 성환 활주로에 생긴 북천안 IC처럼 말이다.

그런데, 활주로+고속도로 공용보다 더 엽기적인 사례가 있다.
스페인의 남부에 있는 영국 속령인 '지브롤터'라는 지역에는 지브롤터 국제 공항이 있는데, 얘는 전세계의 공항들 중 유일하게 공항 활주로가 일반 도로와 수직으로 평면교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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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이착륙 예정일 때는 마치 철도 건널목처럼 차단기가 내려오며, 운전자들은 눈앞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저렇게 빤히 지켜보게 된다.
활주로에는 이물질 하나 있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2000년 7월에 발생한 에어프랑스 4590편 콩코드 여객기 추락 사고는 바로 전에 먼저 이륙한 비행기에서 떨어진 부품을 밟는 바람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런 와중에 여객기 활주로가 자동차 도로와 평면교차한다는 건 안전이나 보안 면에서 굉장히 아찔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활주로를 포함하는 공항 담장 외벽에 철조망이 괜히 쳐진 게 아닌데.;;
캄보디아의 씨엠 립 국제공항은 비행기 착륙 후에 여객 터미널까지 승객이 활주로 바닥을 걸어서 이동하며, 제주 국제공항에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X자 모양으로 평면교차하는 두 활주로를 바꿔 가며 운용하긴 한다.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은 지역 주민들의 알박기 때문에 반쯤 고자처럼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지브롤터 국제 공항은 그런 공항들보다 더 엽기적이다. 비보호 좌회전+평면교차가 있던 옛 88 올림픽 고속도로의 남장수 IC의 공항 버전이라 하겠다.
활주로는 지형과 역사적인 사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만들어졌으며, 딱히 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01 08:39 2016/08/0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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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배봉산, 백련산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본인 역시 코딩 집중도가 올라가고 대외적으로 이것저것 바쁜 일이 생기니.. 지난 봄만치 멀리 가서 높은 산을 오르지는 못하고 있다. 날씨가 풍경 사진을 찍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이긴 하나, 본인처럼 열 많고 땀 많이 흘리고 더위에 약한 사람에게는 장거리 산행을 몹시 괴롭게 하는 날씨이다.

이럴 때는 도심에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그냥 100~200m대 높이의 공원에 가까운 언덕을 산책하고 오는 걸로 만족하곤 했다. 중전철 대신 경전철, 행성 대신 왜행성 같은 느낌이랄까? 하긴, 예전에 올랐던 산 중에도 개화산이나 응봉산처럼 완전 작은 놈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원래 가려던 산 대신 예정에 없던 엑스트라로 다녀온 곳이 두 군데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얘들은 다 외곽이 아닌 시내 중심지에 있고, 산 반대편으로 건너갔다고 해서 교외 지역이나 경기도에 도달하는 게 아닌 것치고는 지하철 접근성이 별로 좋지 않다. 이에, 본인 역시 둘 다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방문해서 다녀 왔다. 단, 한 곳은 자전거를, 다른 한 곳은 자동차를 이용했다는 차이가 있다.

1. 배봉산

정상의 높이는 108미터, 종축 횡단 거리도 1km 남짓밖에 안 되는 정말 아담한 산이다. 한때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 여기에 묻혔었다는 걸 안내 표지판을 보고 처음 알았다(나중엔 더 멀고 터 좋은 곳으로 이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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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산으로 접근하는 곳이 이곳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봉산 근린공원'은 이렇게 근사한 입구를 갖추고 있다. 바로 옆에는 야외무대라는 공터도 있다. 위치는 산의 최남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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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둘레길만 돌아다닐 수 있고 정상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본인은 응당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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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건물 계단 오르는 정도의 기분으로 잠깐만 수고를 하고 나니 금세 정상이 나왔다. 단, 산의 진짜 정상은 유적 발굴 공사 때문에 접근이 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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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산은 전반적으로 나무들이 굉장히 조밀하게 우거져 있어서 위로나 좌우로나 경치를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정상 근처에 딱 한 군데 있는 전망대도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이 정도에 불과했다. 전방에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용마산으로, 여기서 3~4km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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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지난 뒤부터는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는 길이 이런 식으로 나 있다. 산이 면적이 굉장히 작은 관계로 여기 말고 다른 길은 없는 듯하다. 아까 언급한 그 둘레길도 사실은 서울 시립대 부근에서 끊어졌다.

북쪽 끝까지 가면 '휘경 광장'이라는 공터가 나오며, 더 진행하면 휘경2동 주민센터를 보면서 하산할 수 있었다. 혹은 그냥 서울 시립대 부지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본인도 평소 같으면 당연히 그쪽으로 하산을 했겠으나, 이번엔 자전거를 세워 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관계로 부득이 방향을 돌려서 배봉산 능선을 1왕복했다. 이렇게 하는 데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실, 배봉산은 남쪽의 횡축 도로인 사가정로(전농동사거리 동쪽)의 남쪽으로도 계속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그렇잖아도 경사가 굉장히 급한 언덕길이다. 사가정로의 남쪽에 계속 이어지는 언덕엔 아파트도 있지만 또 '답십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낮은 배봉산보다도 더욱 낮은 언덕이지만 인근 주민이 부담 없이 운동과 산책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이다.

본인은 여기 일대에 있는 운동 장소로는 그냥 청계천, 중랑천, 한강 주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물뿐만 아니라 고지대에도 애착이 간다. 이런 데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잠도 자고 싶은데 여름 밤에는 모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2. 백련산

이 산은 인왕산과 안산만치 유명하지는 않으며 정상의 높이도 이들보다 낮지만, 어쨌든 이들보다 더 서쪽에 은평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종단하는 거리는 대략 2km 정도 된다.

지도를 보니 산기슭에는 '백련사길'이라는 도로가 있고, 그 길가엔 백련사 방문객과 백련산 등산객이 무료로 이용 가능한 주차장이 있었다. 안 그래도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힘들게 생겼던데 주차장이라니? 마이 프레셔스!
학교 갈 일이 있을 때 곧장 차를 끌고 갔다 왔다. 새벽에 여기 등산을 한 뒤 학교로 가면 동선이 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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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세워 놓은 뒤 '팔각정'이라는 정자 겸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에서 계단을 쭉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만 팔각정이 있는 게 아니라 등산로 입구에도 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위와 같은 능선 산책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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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운동 시설과 웬 송전탑 같은 시설도 있었다. 그것들을 지나친 뒤, 총 약 1km 정도 걷자 '은평정'이라는 정자가 나타났다.
여기가 백련산의 실질적인 정상이지만 정상 표지석 같은 건 없다. 그런 걸 세우기에는 너무 낮은 산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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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걸 내려다볼 수 있다.
인왕산이 보이는 동쪽으로는 막 해가 뜨는 시간대여서 사진을 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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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정을 지난 뒤에도 북동쪽으로 산행을 계속했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타났는데, 여기서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을 선택했다. 오른쪽은 북한산 자락으로 길이 계속 이어지는 반면, 왼쪽은 그대로 하산하면서 산행이 끝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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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도가 충분히 낮아졌는지 아파트와 시멘트로 포장된 길, 그리고 근린공원이 눈에 띄었다. 거길 지나자 지금까지 못 보던 암반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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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산은 전망대라고는 정상의 은평정밖에 없는가 싶었는데 요런 곳이 하나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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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계속 하강하자.. 결국은 서울 지하철 3호선이 지나는 '통일로' 도로에 도달했다.
녹번 역과 홍제 역의 사이(그래도 녹번에 훨씬 더 가까움), 서대문구와 은평구의 경계쯤 되는 지점에 이렇게 큰 다리가 있어서 백련산과 북한산 자락을 연결하고 있었다.

체력과 날씨,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 다리를 건너서 등산을 계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산행은 여느 때와는 달리 몸만 달랑 온 게 아니니 발 닿는 대로 계속 편도 경로로 이동할 수 없었다.
이제는 지금까지 온 길의 정확한 역순으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은평정에서 여기까지도 또 1km가 넘었던 듯하니 편도 거리가 약 2.몇 km. 그래서 왕복으로 대략 5km 가까이를 걸었다. 시간은 2시간이 좀 덜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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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션을 완수하고 출발지로 돌아왔다. 새벽에 갓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주변은 온통 주차된 차들로 가득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큰일 났겠다. "일찍 움직이는 운전자가 주차 자리를 차지한다"라는 말이 진리임을 알 수 있었다.
차가 없었으면 또 세월아 네월아 마을 버스를 기다리고 근처의 지하철역에서 또 환승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다음 목적지인 학교로 아주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26 08:35 2016/07/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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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 칼리스타(1992)와 기아 엘란(1996).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그 옛날에 저런 자동차도 팔았나 싶은데, 위의 두 자동차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 본인은 직접 본 경험이 전무하다. (초딩 시절에 대우 임페리얼조차 길거리에서 본 적이 있건만, 저것들은 정말 듣보잡. 그나마 칼리스타는 자동차 잡지를 통해서 접하긴 했었다.)
  • 나름 2인승 스포츠카 컨셉으로 영국제 자동차를 그대로 들여 와서 생산했다.
  • 생소한 컨셉에다 너무 비싼 가격으로 인해 망했음. (수제 생산 크리)

굳이 나 말고도 자동차 매니아들이라면 국내의 자동차 역사에서 두 차량이 갖는 유사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1. 기아 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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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자동차는 1980년대 말에 외제차 수입 규제가 완화되자마자 3000cc급 대형 고급차 컨셉으로 머큐리 세이블이라는 미제 승용차를 수입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쯤 전인 197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에서 최고급차 컨셉으로 포드 그라나다를 포드 사 CI조차 안 걷어내고 그대로 판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머큐리 세이블은 무엇보다도 도어에 번호 기반 자물쇠가 장착돼 있는 게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 뒤로 기아 자동차는 스포츠카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되고, 영국 로터스 사의 스포츠카인 엘란을 생산 라인을 인수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건 외제차를 하나도 안 고치고 100% 똑같이 만들어 판 건 아니며 엔진, 서스펜션, 내장재 등 여러 곳에 변형과 로컬라이제이션이 가해졌다.

현대 자동차에서 1990년대 초에 '엘란트라'라는 준중형 승용차를 내놓았는데, 그때는 얘를 수출할 때 이 '엘란'과의 이름 충돌을 의식해서 '엘'은 빼고 '란트라'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이름으로 수출해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기아 자동차가 '엘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수하고 그 기아 자동차를 현대 그룹이 꿀꺽 해 버리니, 그때부터는 이름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이제 '엘란트라'는 후속 모델 아반떼의 수출명으로도 당당히 쓰이고 있으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중간 체급이라고 전륜구동 준대형 '아슬란'을 만든 건 망한 듯하지만, 그래도 엘란트라처럼 엑셀과 쏘나타 사이의 준중형 체급은 굉장한 선견지명으로 판명됐으며 오늘날까지도 잘나가는 중이다. 자동차 엔진 기술을 개발하는 것 자체뿐만 아니라 이렇게 평균적인 소비자들의 수요 심리를 잘 읽는 것도 자동차 회사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엘란은 범퍼 위로 라디에이터 그릴이 없는 게 인상적이다. 이게 그 시절에 스포티한 디자인 유행이었던 것 같다. 대우 에스페로와 현대 아반떼 초기형 말고는 이런 디자인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엘란은 2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었으며, 전국적으로 1055대 남짓만 생산된 뒤 단종됐다. 이것도 나중엔 차를 좀 팔려고 제작사에서 원가 미만인 2천만 원대 후반 가격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팔기도 해서 얻은 실적이었다. 참고로 대우 임페리얼이 최종 생산량이 863대였다.

2. 쌍용 칼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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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이 미래지향적이라면 칼리스타는 딱 봐도 복고풍의 컨셉이다. 원 제작사는 영국의 팬서(panther. 만화 주인공 핑크 팬더도 곰이 아니라 표범임) 웨스트윈드 사로, 이를 쌍용 자동차에서 인수하여 SUV 말고 쌍용 최초의 승용차 명목으로 국내에서 생산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동일 모델의 차명이 '리마'(Lima)였다고 하는데, 칼리스타는 도대체 무슨 어원이고 누가 지은 이름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옛날 자동차의 주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휀다(바퀴 덮개)가 저렇게 돌출돼 있는 것이다. 외국의 차덕들도 서양이 아닌 웬 동북아시아 대한민국에서 이런 차가 생산되다는 것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하지만, 딱 봐도 이런 자동차는.. 매니아들 말고는 일반 서민들에게 많이 팔리게 생기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대기업 총수 같은 부자들이 그랜저 대신 이런 차를 굴리지는 않을 테고.

스포츠카를 표방하고 있어서 엔진의 성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자동화 대량 생산을 못 한 탓에 차 가격은 1990년대 초 물가로 역시 무려 3천만 원을 넘어섰다.
결국 앞의 엘란만치도 못 팔았다. 연 판매량은 10~20대에 불과했으며, 1994년까지 누적 판매 100대를 채 못 채우고 단종됐다(78대). 그것들도 다 국내에서 굴러다닌 게 아니라 수출 처분되기도 했다.

칼리스타 이후로도 이런 복고풍 로드스터 승용차는 국내에 현재까지 다시 등장한 적이 없다. 엘란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차인데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였던 것 같다. 엘란이 등장한 때는 칼리스타가 이미 단종된 뒤였다.

* 이 외에 대우 르망 이름셔(Irmscher, 1991)도 생각난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차종은 아니고 그 당시에 생산되던 대우 르망을 '이름셔'라는 외국 회사에서 스포츠형으로 튜닝해서 고급화하고 성능을 올려 놓은 것이다.
르망은 분명 엑셀·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 체급인데 이름셔 에디션(?)은 엔진 배기량부터가 중형차급 2000cc로 버프되어서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으며, 그 외에 다른 내외장제도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보통 국내에서는 세금 규제를 피하려고 이미 있는 외국 원판 차량도 배기량을 줄여서 내놓곤 한다. 옛날에 그라나다도 그랬고 대우 에스페로도 준중형 차급에 비해 너무 작은 1500cc 엔진을 얹은 게 화근이어서 빌빌댔다. 이름셔는 그와는 정반대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름셔 역시 인지도 부족과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별로 인기를 못 얻었다. 1000몇백만 원에 달했는데, 그 돈 쓸 거면 아예 대놓고 중형차를 사는 게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23 19:32 2016/07/2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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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실행 제어라 하면 조건과 분기, 반복, 예외 처리 같은 것들이 있는데.. 절차형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는 이런 게 예약어와 블록 구조 같은 걸로 표현되고, 단순 함수 호출이나 연산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순차적으로 수행되는 편이다.

그런데 C 언어는 타 언어었으면 예약어를 써서 구현되었을 실행 흐름 제어도 다 함수로 구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코드 정적 분석 프로그램 같은 걸 만든다면 이런 건 함수 차원에서 예외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C가 저수준이라는 소리를 괜히 듣는 게 아닌 듯하다.

1. signal

시스템 차원에서 인터럽트가 발생했을 때 실행될 콜백 함수를 지정한다. Ctrl+C나 Ctrl+Break가 눌리는 것도 이런 상황에 포함되나, Windows의 경우 C 표준을 준수하느라 함수는 동일해도 Ctrl 키 인터럽트는 다른 인터럽트와는 꽤 다른 방식으로 따로 처리된다. (Windows API에 SetConsoleCtrlHandler이라는 함수가 있음) 사실, Windows는 자체적인 예외 처리 함수 지정 메커니즘도 제공한다.
현대의 언어라면 다 try ... catch로 처리했을 사항들이다. SIG* 상수들은 catch 구문에다 별도의 값이나 타입으로 전달되고 말이다.

2. setjmp/longjmp

C 언어에 이런 함수도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굉장히 놀랐었다. goto는 한 함수 안에서만 분기가 가능하지만 얘는 아예 함수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전의 setjmp 실행 직후 상황으로 분기를 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함수는 다음과 같이 사용하면 된다. 개념적으로 운영체제의 '시스템 복원'을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include <setjmp.h>
jmp_buf jb;

void Func(int n)
{
    printf("%d\n", n);
    if(n==5) longjmp(jb, 0); else Func(n+1);
}

int main()
{
    if(setjmp(jb)) {
        puts("recursion interrupted.");
    }
    else {
        puts("OK, try");
        Func(0);
    }
    return 0;
}

jmp_buf라는 버퍼 자료형을 선언한다. 얘는 배열에 대한 typedef이며, 함수의 인자로 전달될 때는 자동으로 포인터처럼 취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setjmp, longjmp의 인자로 전달할 때 &를 붙일 필요가 없으며, 그리고 안 붙이더라도 언제나 내부 컨텐츠는 call by reference처럼 취급된다. jb는 매번 함수의 인자로 전달할 게 아니라면 그 특성상 전역변수로 선언해 놓는 게 속 편하다.

그럼, setjmp를 호출하여 되돌아가고 싶은 지점에 대한 스냅샷을 만든다. 스냅샷을 만든 직후에는 setjmp의 리턴값이 0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위의 코드에서는 "OK, try"가 먼저 출력되고 Func가 호출된다.

나중에 Func가 굉장히 복잡하게 실행된 뒤에 이것들을 몽땅 한 큐에 종료해야겠다 싶으면 longjmp를 호출한다. 그러면 얘는 아까 setjmp를 호출한 곳에서 함수가 0이 아닌 값이 리턴된 상황으로 모든 컨텍스트가 '원상복귀' 된다. 그래서 "recursion interrupted"가 출력되고 실행이 끝난다.

구체적인 리턴값은 longjmp의 인자에다가 줄 수 있다. 다만, 여기에다가 0을 지정하면 setjmp가 처음 호출되어 0이 리턴된 것과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setjmp의 리턴값이 1인 것으로 값이 일부러 보정된다.

위의 코드는 예외 처리 구문을 사용한 다음 코드와 실행 결과가 완전히 동일하다. 이번에도 try, catch가 답이다. 언어 차원에서 예약어를 동원해서 구현했을 기능이 그냥 함수로 처리되어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void Func(int n)
{
    printf("%d\n", n);
    if(n==5) throw 1; else Func(n+1);
}

int main()
{
    try {
        puts("OK, try");
        Func(0);
    }
    catch(int e) {
        puts("recursion interrupted.");
    }
}

setjmp/longjmp는 언어 차원에서 제공되는 기능이 아니다 보니, 저렇게 함수들을 이탈할 때 C++ 객체들의 소멸자 함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한계도 있다. 가변 인자만큼이나 C와 C++의 기능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래도 얘는 시스템 프로그래밍 차원에서 고유한 용도가 있다 보니, 이들 함수가 현대의 컴파일러에서 deprecate됐다거나, 뭔가 기능이 보강된 *_s 버전이 생겼다거나 하지는 않다.

3. fork

새로운 실행 주체를 생성하는 함수라는 점에서 Windows의 CreateProcess나 CreateThread와 얼추 비슷하다. 그러나 생성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Windows에서는 프로세스를 생성할 때 파일명을 주며, 그 프로세스는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실행된다. 그리고 스레드는 콜백 함수를 지정해서 생성하며, 그 콜백 함수의 실행이 끝나면 스레드 역시 종료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fork는 지금 나 자신과 메모리 구조와 스택 프레임, 내부 상태 문맥 같은 게 완~전히 동일한 프로세스가 하나 또 실행된다. 그래서 fork를 처음 호출한 기존 프로세스는 fork의 리턴값이 nonzero인 것으로 간주되어 실행이 계속되며, 새로 생성된 프로세스는 리턴값이 0인 것처럼 간주되어 실행이 계속된다. 굉장히 신기한 결과인데, 함수의 디자인 방식이 setjmp와 미묘하게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공통 처리 진행 후,
if(fork()==0) {
    //분기된 자식 프로세스 문맥. 하지만 공통 부분에서 만들어 뒀던 변수들에 접근 가능함.
}
else {
    //'공통'을 실행하던 부모 프로세스 문맥
}

(뭐, 정확히는 실행이 성공하면 양수가 돌아오고, 실패하면 음수가 돌아오니 이건 마치 GetMessage의 리턴값만큼이나 주의할 필요는 있다.)

Windows API에는 저렇게 모든 실행 문맥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신의 분신 프로세스를 만드는 함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그램들 내부에 포인터들까지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정말 주소 공간이 문자 단위로 정확하게 일치해야 할 텐데, 그걸 그대로 복제하는 건 성능 오버헤드가 크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fork는 프로세스를 생성하는 놈이다 보니 CreateProcess와 마찬가지로 비동기적으로 실행된다. 앞서 소개한 signal도 인터럽트 함수가 이론적으로 비동기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 set/longjmp는 하는 일은 기괴해도 그래도 프로세스/스레드를 넘나드는 물건은 아니니 대조적이다.

그래서 signal 핸들러나 fork를 사용하는 코드에서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버퍼를 사용하는 고수준 IO 함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 Hello, world를 찍을 때도 간단하게 printf나 puts를 쓰지 말고 write(1, "Hello", 5)라고 좀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한다. 비동기적인 환경에서 여러 실행 단위가 고수준 IO에 동시에 접근하면 출력이 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 대학 시절, 시스템 프로그래밍 숙제를 하던 시절에 어떤 수강생이 뭘 잘못 건드렸는지 자식 프로세스를 무한 생성하는 삽질을 했고, 이 때문에 학과 서버가 몽땅 다운되어서 수강생들이 과제를 할 수가 없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정도면 그 학생뿐만 아니라 계정별로 자원 할당 한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서버 관리자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만, 어쨌든 이것 때문에 과제의 듀(제출 기한)까지 불가피하게 연장된 적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빡친 모 친구의 메신저 대화명은 "포크 삽질하는 놈 포크로 찍어 버린다 -_-"였던 것을 본인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21 08:39 2016/07/2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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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남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서울의 너무 중심에 있는 바람에 지금까지 등산 대상에서 아오안이었던 산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산. 물론, 옛날 그 사대문의 안 좁디좁은 한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남쪽이라는 얘기다.
서울 남산이라 하면 케이블카와 거대한 타워가 상징이지만, 그것 말고도 남산 일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참 많이도 변해 왔다. 과거에 여기 일대는 한양 도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예 수련을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신궁'이라는 커다란 신사가 여기 기슭에 만들어졌다.

해방 후에 신사는 당연히 곧장 철거됐다. 그 뒤,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박통이 들어선 1961년부터는 남산에 잘 알다시피 코렁탕 시설인 중앙정보부 청사가 들어섰다. "남산에서 왔습니다."란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떨 지경이었대나. 이북에서 온 간첩만 벌벌 떨어야 하는데 무고한 시민들까지 떨었다는 게 문제다.

여기서 잠시 설명충 기질을 발휘하자면,
남산은 바로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인 1995년까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와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이었다.
그 반면 남영동 대공분실은 치안 본부, 즉 오늘날의 경찰청 관할이다.
그리고 서빙고 대공분실은 군 소속이었다. 국군 보안 사령부, 지금의 기무 사령부 관할이다.
그러니 똑같이 코렁탕을 제조하는 곳이어도 소속이 제각기 모두 달랐다.

공 병우 박사는 세벌식 글자판을 주장하다가 정부 정책을 건방지게 비판하는 죄로 1970년대에 중정 요원에게 연행되어 남산 구경을 하고 온 적이 있다. 그것 말고도 중정과 안기부의 흑역사는 많다.
5공 시절에 김 근태, 박 종철 같은 사람이 고문을 당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며, 이 근안 역시 경찰 출신이니 여기서 활동했었다.
그럼 박통을 암살한 김 재규는? 10. 26 사태의 수사권이 아무래도 전땅크 아래의 보안 사령부에 있었던 관계로, 그는 서빙고로 끌려가서 자기 옛 부하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신사는 전부 공원(특히 안 중근 의사 기념관. 중앙 기준 10시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과거의 중정/안기부 건물은 다 유스호스텔, 방재 센터 등 다른 평범한 건물로 개조됐다(11~12시 북쪽 방향). 남산 기슭은 그린벨트 지대인지라 이미 만들어진 건물을 철거를 하면 했지 더 증· 개축은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김 영삼 정권 때는 조선 총독부 청사만 헐린 게 아니라 남산의 외관을 가리던 외인 아파트도 폭파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는 지금 식물원이 조성돼 있다. (5시 남쪽 방향)

그러니 지금은 과거에 비해 남산이 그나마 자연 본연의 모습을 정말 많이 되찾은 셈이다.
사실, 남산은 본격적인 산행의 대상이 되기에는 시내와 너무 가깝고, 산 높이도 너무 낮은 관계로 진작부터 관광지 내지 공원 컨셉으로 꾸며져 왔다. 그래서 타워가 있는 정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전국에서 최초로 생겼다. 정상에 도달해도 "남산 무슨봉 해발 262m" 이런 표지석 같은 건 없다.
뭐, 단순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나 관광버스를 타고 올라가겠지만, 여기도 도보로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 코스가 없는 건 아니다.

본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산을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다. 교회 친구들과 함께 주일 저녁에 남산 근처까지 차를 몰고 간 적은 있었지만 거기를 제대로 구경하지는 못했으며 케이블카도 못 타 봤다. 그래서 이 기회에 운동삼아 남산을 걸어서 올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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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회현 역에서 내려서 남산 쪽을 향해 골목길을 오르니 남산 공원 입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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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공원은 경치가 좋고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공원과 산이 있다니,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공원에는 독립 운동가 김 구와 안 중근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넓은 공터는 이름부터가 '백범 광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안 중근 의사의 어록이 새겨진 바위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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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 시민의 숲 근처에는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더니 여기에는 안 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 자체는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세련된 건물로 새로 만들어진 건 201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안 중근 의사는 뜻을 결의하면서 왼손 약지의 앞단을 절단한 행적이 워낙 임팩트가 강한지라, 안 중근 하면 그 "대한국인 손바닥" 그림이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그나마 열 손가락 중에서 제일 덜 중요한 부위이니까.
이분은 무예에만 강한 게 아니라 글씨도 잘 쓰고 사상적인 배경도 무척 심오했다. 처음부터 요인 암살 같은 과격한 방법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이거 정말 좋게 가지고는 씨알도 안 먹히고 동양의 평화가 이뤄질 수가 없어 보이니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다.

기념관에는 안 의사의 생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당시의 상황, 고인이 사용한 권총 등 어지간한 자료는 다 전시돼 있다.
사소한 사실이다만, 안 의사는 교수형을 당해서 순국했다. 총살을 당한 건 윤 봉길이니 혼동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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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울 타워(N타워?)가 보이는 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옆에는 가림막을 치고 성벽을 다시 만드는지 뭔 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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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은 이런 식으로 쭉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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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복판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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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계단을 오른 끝에 드디어 정상 도착. 적당한 아침에 도착하니 타워 주변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엄청 많았다.
맨 먼저 봉수대가 보이기에 등산 인증샷은 봉수대에서 저렇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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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를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면서 기념 촬영. 그리고 건너편 봉우리엔 정체를 알 수 없는 탑이 있어서 또 사진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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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은 동쪽으로 버스들이 내려가는 방향으로 했다. 남산은 타워가 있는 정상까지 포장된 차도가 있긴 하지만 일단 관광버스나 노선버스 전용이다. 아무나 자가용을 끌고 올라갈 수는 없다. 차라리 엔진 없는 자전거는 허용된다.
어쨌든, 이 차도에서 또 도보 등산로가 갈라져 나가는 곳이 있어서 본인은 응당 그쪽으로 경로를 바꿨다. 역시 남산에도 돌계단뿐만 아니라 더 자연 친화적인(?) 등산로가 있었다.

하산을 계속하니 등산로는 아스팔트 도로와 합류했으며, 본인은 결국 국립 극장이 있는 쪽으로 나와서 장충단로라는 큰길에 이르렀다. 그리고 길 바로 건너편에는 '한국 자유 총연맹' 본부가 있었다. 남산 공원에는 김 구 동상이 있더니, 자유 총연맹 내부에는 이 승만 동상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동대입구 지하철역까지는 좀 멀 것 같아서 버스를 타고 싶었으나.. 버스 승강장을 찾지 못해서 결국 그 거리를 다 걸어서 갔다. 3· 1 운동 기념탑, 유 관순 열사 동상, 제2 남산 터널을 몽땅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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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국민대, 성균관대), 안산(연세대)처럼 어째 대학교 구경과 함께 등산이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는 동국대 차례가 됐다.

단, 이번 산행에서는 남산을 동서 위주로 횡단하다 보니 남북으로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구경하지 못했다.
남쪽의 식물원이라든가 북쪽의 남산골 공원, 타임캡슐 광장 같은 건 못 봤다.
금수저를 위한 초등학교라고 옛날부터 유명하던 '리라 초등학교'도 남산 북쪽 기슭에 있다. 대성동 초등학교만큼이나 특이한 학교인 걸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18 19:32 2016/07/1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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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우면산

본인이 지금까지 올랐던 산들 중에 대모산· 구룡산은 거의 유일하게 서울 강남구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로부터 1년 반쯤 뒤, 최근에 본인은 그보다 서쪽으로 서초구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우면산을 올랐다.
우면산은 왼쪽으로는 남태령 고개를 경계로 관악산을 마주 보는 형태이며, 한편으로 동쪽으로는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말단의 언덕이 살짝 둘로 쪼개져 있기도 하다. 그 쪼개진 지역에는 서울 인재 개발원과 양재 자동차 학원이 자리잡고 있다.

군사 시설 보안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모산· 구룡산은 남쪽 건너편 기슭에 유명한 코렁 시설이 있기 때문에 남북 종단 횡단을 할 수 없다. 건너편은 철조망이 둘러져서 완전히 막혀 있다.
우면산은 그렇지는 않고 제한적으로나마 종단 등산로가 있다. 그 대신 얘는 꼭대기에 공군 부대가 있고, 남쪽에서는 공군 부대까지 올라가는 자동차 도로가 닦여 있다. 그 외에 이 산은 웬 과거 지뢰 매설 지역 출입 금지 경고문이 곳곳에 붙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대모산· 구룡산의 아래로는 구룡 터널이 있어서 분당-내곡 고속화도로의 일부 구간이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예술의 전당과 우면산의 아래로는 '우면산 터널'이 뚫려 있으며 이 도로는 과천으로 향한다. 우면산 터널은 유료 도로이다.

이들 산의 남쪽 기슭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아직 서울이다. 하지만 거기는 아무래도 서울 시내와는 떨어진 외곽이고 전원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다만, 경부 고속도로에 인접해 있는 우면산의 남쪽 기슭에는 KT나 LG 같은 기업의 연구소가 있고 한국 교육 개발원(옛날에 탐구생활을 출간한 기관..;;)도 있어서 '우면동'이라 하면 왠지 지적인 냄새가 풍긴다. 게다가 지금은 거기 일대에 삼성 전자 연구소도 지어지고 있다.

서론이 좀 길어졌는데, 우면산은 이런 특징을 가진 산이다. 등산로는 남부터미널 역에서 내린 뒤 예술의 전당 근처에서 아주 쉽게 접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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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을 오르는 첫 구간은 느낌이 이러했다. 벌써부터 철조망이 등장하는데, 이건 서울특별시 인재 개발원과의 영역 구분을 위해 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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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길엔 서초구민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돈을 후원해서 만든 계단도 있었고, 위의 사진처럼 널찍한 공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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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역시 울창한 숲이 잘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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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이 접근 가능한 우면산의 실질적인 정상인 소망봉 '소망탑'에 도달했다. 여기는 예술의 전당이 발밑에 딱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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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강남에서 바라본 경치 하나는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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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을 당기니, 저 멀리 남산과 북한산까지 보인다.

소망봉에 도달한 뒤부터가 문제였다.
꼭대기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서남쪽으로, 이왕이면 선바위 역 근처의 전원마을로 하산하고 싶었으나 그 길은 이제 "과거 지뢰 매설 지대 위험"이라는 명목으로 막혀 있었다.
이제부터 서쪽으로 가려면 도로 하강하여 꼭대기와는 거리를 두고 산중턱의 능선을 따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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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의 왼쪽을 돌아보면 가끔씩 이런 골짜기 같은 게 보였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반쯤은 지뢰 때문에, 반쯤은 군부대 때문에 저렇게 몇 겹씩 철조망이 쳐진 채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참을 간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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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찍은 본인의 등 뒤에는 공군 군부대가 있다. 말로만 듣던 자동차 도로도 발견했다. 등산로가 이렇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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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에서 바라본 건너편 관악산. 관악산은 남산에 있던 각종 전국구 전파 송신 시설들이 모두 이전한 관계로 꼭대기에 저런 케이블들이 있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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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길을 따라 끝없이 하산을 계속했다. 차도 주변에도 도보 등산로로 빠지는 샛길이 한두 군데 정도 있는 듯했으나 본인이 현장에 있을 때에는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 표지판도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찾아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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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내려가니 송동 마을에 도달했다. 차도의 선형의 특성상 과천 쪽으로 서쪽으로 뻗어 가지 못하고 어중간한 지점에 도달하게 됐지만, 그래도 꿩 대신 닭을 얻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산에 없는 우면산의 고유한 캐릭터는.. 5년 전에 발생한 대형 산사태의 흔적이다. 산사태 피해 복구 공사 알림 표지판과 '급경사지 붕괴 위험 지역' 표지판이 보였다.

이렇게 등산을 마친 뒤, 양재대로(국도 47호선) 큰길까지 나왔다. 거기서 선바위 역까지는 버스로 이동한 뒤 귀가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16 08:29 2016/07/1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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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의 역사 -- 下

(上으로부터 이어짐)

4. 총기의 최종 발전 형태는 탄피+후장식

과거의 활, 그리고 총 중에서도 일명 BB탄을 쏘는 장난감 에어소프트 건이라든지 공기총 같은 물건은 아무래도 총알을 밀어내는 힘의 근원이 총기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화살이나 총알 같은 건 발사체 전체가 날아가 버리고 없다. 또한 발사 과정에서 딱히 열이나 폭발 같은 게 없으며 소리도 조용한 편이다.

그러나 화약의 힘으로 총알을 발사하는 화기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발사체를 날리는 힘은 총이 아니라 화약에 있으며, 총은 (1) 그 화약을 격발하는 트리거를 제공하고 (2) 총알이 최대한 곧게 날아가게 방향을 잡는 역할만 할 뿐이다. 아, 자동소총이나 기관총이라면 (3) 지속적으로 급탄하는 기능도 추가로 중요하겠지만.

탄환+화약+뇌홍이 탄피에 감싸져서 총알 하나에 딱 일체화가 됨으로써 장전이 더욱 간편하고 내부 구조가 더욱 정교한 총을 만들 수가 있게 되었다. 이는 (1) 후장식 장전과 (2) 총열에 아까 설명했던 강선을 가능케 했다.
후장식이란, 총구 안쪽으로 총알과 화약을 역으로 집어넣지 않음을 의미한다. 총알의 자료구조가 스택에서 큐로 바뀐 셈이다.

이것은 가히 엄청난 장점인데, 장전을 위해서 총의 방향을 매번 뒤집었다가 다시 조준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수의 입장에서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도 누운 채로, 앉은 채로 지속적인 장전과 사격이 가능하고, 총열을 더 길게 만들 수도 있다.
두두두두 콩 볶듯이 발사되는 기관총을 만들기 위해서는, 총알이 들어가는 방향과 발사되는 방향이 당연히 따로여야 한다. 그러니 전장식으로는 어림도 없고 후장식이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후장식은 만들기가 더 어렵다. 총구 외에 급탄을 위한 구멍이 추가로 존재해야 하는데, 이게 격발 때에는 정말 완벽하게 막히고 밀폐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총 쏘다가 새어 나온 화약 역풍을 사수가 맞아서 죽거나 다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쓰고 난 탄피는 즉각 잘 사출돼야 한다. 화약은 폭발해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며, 탄환은 날아가고 없으니 남는 것은 껍데기인 탄피뿐이다.

탄피는 고온 고압의 화약 폭발을 견뎌야 하는 관계로 아무 금속으로나 아무렇게 쉽게 만들 수 있지는 않다. 가성비를 감안했을 때 보통 황동으로 만들며, 요즘 총알들이 다 누런 황금빛인 건 이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날아가는 탄환은 적당한 무게를 통한 파괴력을 얻기 위해 납으로 만든다. 탄피는 격발 과정에서 딱히 심각하게 변형이나 손상되지는 않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수거 후 재활용이 가능하다.

탄피는 총알 내부의 복잡한 부품들을 일체화해 주고, 또 엉뚱한 타이밍에 오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내용물을 잘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구성요소이긴 하지만..
그래도 총 쏘는 병사의 입장에서는 탄피는 격발 후에 남는 골치아픈 쓰레기일 뿐이다. 제대로 수거하지 않으면 평시 훈련 중에도 영 좋지 않거니와, 전쟁 중에도 흘린 탄피는 적군에게 자기 위치와 동선을 노출하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각종 추리 소설에서도 사건 현장에 탄피가 발견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총기 격발 흔적이므로 탐정에게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그래서 화약 기반 총기에도 '무탄피총'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연구가 과거에 진행되기도 했다. 격발 후에 총알의 모든 부위가 사라지고 없다면 총의 입장에서도 딱히 탄피 사출 기능을 만들 필요가 없으며, 총알이 더 가벼워지거나 반대로 같은 무게로 파괴력이 더 강해질 수 있으니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무탄피 탄약은 총알 전체를 위험한 화약으로 감싸는 와중에 총기 과열 상태에서도 오발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렵다. 현재로서는 여전히 가성비가 크게 떨어지며, 가까운 미래에 실용화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5. 탄창, 기관총

후장식+탄피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총기는 연사· 난사가 가능한 단계로 발전할 기술적인 기반이 갖춰졌다. 단, 이제 급탄을 어떻게 할지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격발을 하고 나서 무슨 레버를 당기고 노리쇠(볼트)를 젖혀서 이전 탄의 탄피를 빼내고 다음 탄의 장전을 자동으로 하는 것이 바로 볼트액션 내지 레버액션, 펌프액션 방식이다. 대략 1차 세계 대전 때 쓰인 개인 화기는 이런 수준이며, FPS에서 샷건도 그러하다. 가령, Doom의 샷건은 펌프 액션이고, Doom 2에서 도입된 슈퍼샷건은 브레이크 액션이다. 전자는 펌프 손잡이 같은 걸 찰칵 당겨서 장전하고, 후자는 아예 총열을 구부려 꺾어서 장전하니까 말이다.

그 뒤, 별도의 배출과 장전 동작이 없이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가고 탄피가 빠지며, 다음 탄이 자동으로 장전까지 되는 총이 나왔는데 이것이 '반자동 소총'이다. 이제는 사수는 총 쏠 일이 있으면 정말 방아쇠만 까딱까딱 당기면 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자동화 수준이 상당하다.

완전 '자동 소총'은 까딱까딱조차도 필요 없이, 방아쇠를 당긴 채로 그대로 있으면 알아서 2발 이상의 총알이 두두두두 날아가는 총이다. 과거 그 불편하던 화승총을 쏘던 군인이 이런 총을 보면 아마 까무러치지 않을까 싶다.
이 자동 소총의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가야 한 길이 참 멀고도 험난했다. 요즘 군인에게 지급되는 소총은 '반자동/자동' 모드를 바꿀 수 있다. 자동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탄약 절약이나 오발 방지를 위해서는 반자동도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분당 수십~수백 발을 발사하는 기관총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총과 총알 모두 마치 자동차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정밀 기계/재료공학의 산물이 된 덕분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조총을 쐈던 일본군은 그로부터 300여 년 뒤엔 기관총을 가져와서 동학 농민군을 처참하게 학살할 수 있었다. 이제 재래식 냉병기는 총을 든 군대를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이길 수 없어진 것이다. (물론 중기관총은 사람이 혼자 들고서 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이제 연사 가능한 총에다가 지속적으로 총알을 공급하기 위해, 탄창이라는 물건이 추가로 발명되었다. 실전에서는 다 쓴 탄창을 빨리 떼어내고 새 탄창으로 교체하는 게 전투원의 생존 능력과도 직결된다. 탄창은 단순한 박스 모양인 것도 있고, 총알의 모양(앞쪽과 뒷쪽의 직경이 다름)대로 휘어진 모양인 것도 있다. 기관총은 영화에서 보니 딱히 탄창 없이 탄띠로만 연결된 총알들을 콩 볶듯이 쏴 제끼는 것 같다. 급탄 자체에도 동력이 필요할 텐데 다 스프링의 탄성만으로 충분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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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 550 돌격소총용 반투명 탄창. 출처는 위키백과)

일부 볼트액션형 옛날 총은 총기 내부에 총알이 대여섯 발 정도 한꺼번에 들어가는 '내부 탄창'이 있기도 하다. 이건 권총으로 치면 6개의 총알을 한 실린더 안에 한꺼번에 넣어서 돌려 가며 쓰는 리볼버와도 비슷한 형태인 것 같다. 내부 탄창과 외부 탄창은 증기 기관차로 치면 탄수차가 따로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차이와도 같은데, 그쪽도 별도의 탄수차가 있는 형태가 더 유명하듯이 총기도 탄창 하면 외부 탄창이 더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하긴, 총알의 장전이 어렵던 시절에는 미국 서부의 보안관은 미리 장전되어 있는 권총을 두세 개 차고 다니기도 했다. 반대로 '개틀링'이라고 불리는 중대형 기관총은 약실이 아니라 총열을 여러 개 묶어서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연사로 인해 한 총열에 집중되는 과열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총알을 격발하다 보면 폭발로 인한 열을 감당할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열 제어는 장전과 격발 문제를 해결한 고성능 총기가 그 다음으로 추가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등극했다. 총기를 식히는 방법은 자동차 엔진을 식히듯이 수랭식 아니면 공랭식으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까지가 개인용 총기 내지 소화기(小火器)의 발달사이다. 그러고 보니 군인용 돌격소총은 Doom 2에 나오는 피스톨, 샷건, 체인건 중에 어느 부류에도 정확하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피스톨보다는 위력이 훨씬 더 세고, 그렇다고 산탄이 발사되는 건 아니고, 자동 연사도 되긴 하지만 게임에서처럼 여러 총열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6. 기타 여담

(1) 화약 안 쓰는 장난감 총만 다뤄 봤거나 총질이란 걸 FPS 게임에서만 해 본 사람이라면, 나중에 군대 같은 데서 탄피 튀어나오는 진짜 총을 처음으로 쐈을 때 무지막지한 소음은 물론이거니와 반동 때문에 놀라게 된다.
반동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물리 법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긴 하나, 격발 직후에 사람과 총기를 움찔하게 만들기 때문에 조준 자세를 흐트리고 총알의 명중률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총알이 총 밖으로 완전히 나오기 전에 그 찰나의 짧은 시간 동안에 총열이 흔들려서 총알의 진행 방향이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반동을 사수의 어깨의 힘으로 받아내라고 보다시피 총기에 개머리판은 화승총 시절부터 진작에 만들어져 있었다. 반동을 받더라도 총알 진행 방향의 정확히 뒤로만 가고, 총구가 흔들리지 않게 말이다. 설령 어깨에다 받치지 않는 자그마한 권총이라도 일단 한 손만으로 쏘는 건 굉장한 무리다. 정확한 사격과 사수의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FM이 권장하는 바른 자세로 총기를 양손 파지(손에 움켜쥠)해야 한다.

둠 코믹스를 보면 주인공 아저씨가 허구헌날 '존나 큰 총' 타령만 해 댄다. 그러나 너무 크고 화력이 강한 총은 현실에서는 격발 때 반동도 감당할 수 없어서 혼자서 다룰 수 없을 것이다.

(2) 옛날에 둠 게임(1, 2 모두)은 주인공은 샷건이고 로켓이고 그 어떤 화기를 발사해도 반동이 전혀 없는 반면, 몬스터가 죽을 때는 뒤로 밀려나는 게 꽤 찰지고 과장되게 구현되어 있었다. 이럴 때는 바닥이 아주 반들반들한 얼음판(마찰이..)이기라도 한 것 같다. 심지어 회전 모멘트까지 반영했는지, 나보다 위에 있는 몬스터를 하체를 피격해서 죽이면 몬스터가 뒤가 아닌 앞으로 살짝 밀려오며 죽기도 한다.

둠의 소스 코드를 보면 몬스터들에 무게(mass)라는 속성이 있다. 어차피 기술적으로 아직 반쪽짜리 3D 수준이던 둠에서 무게 정보를 막 진지하게 활용한 건 아니고, 뒤로 밀려나는 정도를 판단할 때나 사용했다. 그래서 아주 가벼운 소형 몬스터인 좀비맨을 BFG로 그것도 놈 쪽으로 돌진하면서 쏴 죽이면.. 그 좀비맨은 그야말로 광속으로 뒤로 밀리면서 핏덩어리로 변했다.

현실에서는, 몬스터에게 총알을 박아서 그렇게 뒤로 밀리게 할 정도면 나도 총을 쏠 때 그 정도로 뒤로 밀리는 반동을 받는 게 마땅하다. 발사체 자체가 엔진이 달려서 자력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그런 반동이 없었다면 몬스터도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을 뿐이지, 한낱 총알이 그 무거운 몬스터를 그렇게까지 크게 밀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스타크래프트의 마린이 사용하는 가우스 소총은 설정상 개머리판이 없다. CMC전투복만큼이나 그렇게 현실적인 설정은 아닌 듯.

(3) 사람이 말소리를 내는 걸 실탄 사격에다가 비유하면, 성대를 울리지 않는 속삭임(whisper)은 공포탄 발사에다 비유할 수 있다.
성대를 떨어서 음성을 내지 않고 속삭이기만 해도 주변이 조용하다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포탄도 비록 탄환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화약 폭발로 인해 발생한 고온 고압의 배기가스만으로도 총구로부터 몇 m쯤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충분히 중상을 입힐 수 있다.

완벽한 살상이 아니라 경고· 위협이나 경상만을 목표로 하는 탄환으로 공포탄만 있는 건 아니다. 탄환으로 암염 덩어리가 들어있는 소금탄, 그리고 고무 덩어리가 들어있는 고무탄도 비살상 탄환의 범주에 든다. 물론 이것들도 납 재질의 실탄보다만 덜 위험할 뿐이지, 급소에 가까이서 잘못 맞으면 치명상이 될 수 있으니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한다.
전자는 <킬 빌 2>, 후자는 <폰 부스>라는 영화에서 각각 주인공이 맞은 바 있다.

(4) 리볼버에 하필이면 약실이 원형으로 6개가 들어있는 이유는 수학적으로 볼 때 2차원에서의 kissing number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육상 경기에서 준비 땅 신호탄을 발사하는 권총도 꼭 리볼버 모양이었던 것 같다.

(5)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천혜의 요새에다 세워진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건 어지간한 화력의 보조 없이는 방어자의 몇 배를 상회하는 병력을 동원하고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고대· 중세엔 성벽의 정확한 높이가 상당히 중요한 군사기밀이기도 했다. 사다리를 만들 때 매우 요긴히 활용되는 정보이니까. 다만, 사다리를 성벽을 타고 오르는 건 너무 위험하고 공격자의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고 다른 방법(땅굴, 성문 파괴 등)을 도저히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일 때만 불가피하게 쓰였다.

하지만 요즘은? 성 하나쯤이야 미사일을 쏴도 되고, 결정적으로 공성전의 종결자는 공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로 폭격만 하면 끝...이다. 물론 공군 등 저런 현대적인 무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화포의 성능이 크게 발전한 것 하나만으로도 전통적인 공성전이라는 건 의미를 상실했다. 세상이 그만치 변했다.

(6) 1860년대의 남북 전쟁은 아직 후장식 탄피 기반 소총이 등장하기 전의 전쟁이었지만 그때부터 벌써 사격의 달인인 저격수가 운용되었던 모양이다. 총기 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전열보병 전술이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을 숨기는 저격수 사격으로 확 바뀐 것이다.
때는 1864년 5월 9일이었다. 북군의 제6군단장이었던 존 세지윅 장군은 몰래 숨어 있는 남군 저격수들을 무서워하여 부하들이 행군을 못 하고 벌벌 떨자 사기 진작을 위해 몸을 훤히 드러내고 팔을 흔들면서 이렇게 갈궜으나..

"야 이놈들아, 겨우 총알 한두 발 날아오는 것 때문에 겁 먹고 숨었냐? 그러면 전장에서 적군들이 진짜로 눈앞에서 총을 갈겨댈 때는 어쩔 참이냐? 뭐, 저격수라고? 그래 봤자 이 정도 장거리에서는 사람은커녕 집채만 한 코끼리가 있어도 못 맞.. (탕) .. 으윽!"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ㄲㄲㄲㄲㄲㄲ
그는 장거리 저격을 당해서 총알을 왼쪽 눈 아래에 맞고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그의 용감한 솔선수범 행동은 안타깝게도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군 소속의 저 무명 저격수는 졸지에 적군의 쓰리스타를 사살하는 초대박 전과를 올렸는데, 얼마나 큰 포상을 받았을까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7/13 19:26 2016/07/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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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의 역사 -- 上

1. 개인 화기로서 등장한 최초의 총은 화승총

전쟁이라는 건 그걸 겪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고 비극이다. 하지만 옛날에 이미 일어났다가 끝나 버린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뭘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제는 후손들도 깨달은 게 있는지, 최소한 인류를 멸망시킬 능력이 있는 주류 국가들이 대놓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를 만들지는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고, 핵무기까지 등장할 정도로 무기의 화력이 역설적으로 너무 강해진 탓이다. 앞으로 미래가 또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3차 세계 대전은 2차가 끝난 지 70년이 넘은 2016년 현재까지는 여전히 떡밥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인간이 활, 칼, 창 같은 냉병기로 싸우던 시절부터 돌격소총, 전투기, 핵무기, ICBM이 존재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전쟁과 싸움의 근원은 한결같이 '인간 내면의 정욕'(lust)이라고 말한다(약 4:1). 이거 하나 때문에 사람 죽이는 기술이 어떤 식으로 기상천외하게 발달해 왔는지를 과학 기술 역사와 연계해서 살펴보는 것은 밀덕이나 역덕에게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냉병기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도 몇 년 전에 다룬 적이 있다.

흔히 혼동하기 쉬운데, 활은 새총과는 달리 줄의 탄성이 아니라 활대의 탄성을 이용해서 화살을 날린다.
이건 마치 케이블카와 스키장 리프트의 차이와도 비슷해 보인다. 전자는 차량 위에 달린 바퀴가 케이블 위를 굴러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모노레일과 비슷하다. 하지만 후자는 차체는 가만히 고정돼 있고 케이블 자체가 움직임으로써 차체 내지 좌석을 이동시키니까 말이다.
총보다 화력이 약하고 다루기도 까다로운 활로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맞힌 빌헬름 텔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실존하지 않은 가상의 캐릭터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다가 총이 발명되면서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맹수도 죽일 수 있는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랐으며, 같은 인간끼리 싸우는 전쟁의 양상도 크게 바뀌었다.
기존 갑옷이나 방패 같은 방식의 방어구는 화살이나 냉병기가 아니라 훨씬 더 큰 운동량을 가진 총알을 막는 건 어림도 없었다. 아니면 인간이 거동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보다 더 두껍고 무거워져야 했다. 그러니 그런 건 퇴출되었고, 차라리 방탄조끼나 헬멧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다만, 총이 하루아침에 모든 냉병기를 싹 밀어낸 건 아니다. 총도 똑같이 길다란 총구가 있고 방아쇠가 달렸다고 해서 다 같은 총이 아니다.
총은 총알을 강한 화력으로 편하고 지속적으로, 또 단위 시간당 많이 발사하기 위해서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내부 구조가 바뀌고 발전해 왔다. 쉽게 말해 서울-부산 열차의 운행 시간이 단축되고 컴퓨터의 연산 속도가 빨라진 것만큼이나 총의 격발 성능도 향상되어 왔다.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명백한 편이므로 총이 등장하는 옛날 역사물을 만든다면(만화, 영화, 게임 등) 정확한 고증을 반영해야 오늘날의 똑똑한 역덕· 밀덕 시청자나 사용자들에게 털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부터가 최고급 최첨단 기술이었다. 재료의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그걸로 차라리 대포도 아니고 더 작은 개인 화기를 만드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초창기의 총은 지금처럼 방아쇠만 당기면 바로 펑~ 발사되는 형태가 아니었다. 탄환과 화약을 잘 뭉쳐서 총구 안으로 쑤셔 넣고, 그 화약도 심지에다 따로 불을 붙여서 격발하는 등, 그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름하여 match lock, 화승총 또는 조총이다. 숙달된 사수라 해도 1분에 겨우 한 발을 쏠까 말까 수준에 불과했다. 방아쇠는 화승을 화약 접시와 연결하는 역할을 했지, 그런다고 바로 격발되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우리 선조부터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이런 불편한 조총으로도 왜군에게 쳐발려서 나라가 멸망할 뻔했다. 하긴, 스페인의 신대륙 개척자(혹은 침략자)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도 임진왜란보다 불과 몇십 년 더 전에 그런 비슷한 수준의 총(거기에다 중화기인 대포까지 덤)으로 중남미의 비문명인들을 잘만 제압하고 멸망시켰었다.

그 시절에 총은 불(火)과 천둥, 짙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탕' 하니까 사람이 죽는 캐사기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적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겁을 주는 용도로도 이만한 물건이 없었으며, '겁 주는 용도'로는 오늘날까지 공포탄이 그 역할을 톡톡히 분담하고 있다.

2. 전열보병

옛날 화승총에 쓰인 흑색 화약은 한번 발사되고 나면 주변이 온통 연기로 자욱해져서 연기가 걷힐 때까지는 목표물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무기가 아닌 전술 차원에서의 얘기를 좀 덧붙이자면, 그 시절에 총과 총끼리 교전이 붙었을 때는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단순무식한 전술인 '전열보병'이라는 게 가능했다. 양 진영이 아무 엄폐물도 없는 개활지에서 한 100미터 간격으로 횡대로 쭈욱 늘어서서는 "영국 신사들이여, 그대들이 먼저 쏘시오" /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소. 귀측에서 선빵을 날리는 게 어떻겠소?" 이러는 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패트리어트>의 한 장면.)

무슨 전쟁놀이도 아니고, 철없는 고삐리들이 건물 옥상에서 현피 뜨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 목숨을 갖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은데.. 저건 단순히 낭만적인 기사도 차원에서 나온 관행이 아니다. 그 시절엔 그 전술의 천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조차 전열보병의 불가피함과 효율을 인정하고 있었다.

먼저 쏜 쪽에서 일제히 격발을 하고 나면, 비록 맞은 쪽의 1열은 상당수 사망과 부상을 면치 못하지만, 먼저 쏜 쪽은 연기가 걷히고 긴 재장전 작업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무력화 상태가 됐다. 그럼 맞은 쪽은 그 사이에 상대방을 향해 더 가까이 더 접근해서 반격을 하면 됐다. 실제로, 역사적으로는 먼저 쏜 쪽이 전투에서 지고, 반대로 1빵을 맞은 진영이 이긴 사례도 있다.
이런 식으로 총격을 교환하면서 전진하다가 병사가 너무 많이 죽고 전열이 먼저 흐트러지는 쪽이 졌다. 그 잔여 병력들은 항복하지 않는 한 그냥 적군 기병이나 냉병기 육탄전 병사들이 알아서 정리하면 됐다.

물론, 죽을 게 뻔한 상황에서 전열보병의 제1열로 서는 건 보통 멘탈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과거 사다리를 타고 성을 오르는 공성전에서, 맨 먼저 사다리를 타는 1타는 그야말로 총알받이요, 그냥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듯이 말이다. (당장 우리 임진왜란 공성전에서도 볼 수 있듯, 돌팔매질, 뜨거운 물 등등..) 그런데 이런 선구자 아방가르드가 없으면 전투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런 1열 1타는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서 강제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1타를 뛰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병사는 종전 후에 나라에서 엄청난 벼슬과 보상을 약속하고, 전사하더라도 최고의 예우에다 유족들이 연금 타서 평생 먹고 살 걱정 안 하게 해 줬다.
반대로 1열로 서 있다가 무서워서 혼자 도망가는 놈은 사기 유지 차원에서 가혹한 태형과 채찍질로 거의 반 죽여 놓는 식으로 다스렸다. 적군에게 죽을 확률은 95%쯤 되지만 그래도 호국영령으로서 아주 영예롭게 산화하는 것인 반면, 아군 지휘관에게 죽는 건 100%이고 겁쟁이 졸장부로 아주 치욕스럽게 뒈지는 구도를 만든 것이다. =_=;;

그 시절에는 군복, 아니 전투복이 오늘날로 치면 사관학교 생도 예복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아주 형형색색 화려했다. 뿌연 연기 속에서 피아식별을 하는 게 더 중요했으며, "군대에 가면 저렇게 멋있고 간지나는 옷도 입는구나" 하는 긍정적인 홍보 효과도 덤으로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갑옷이 사라진 뒤에 초창기의 총기가 가져온 레어한 관행이다.

총기가 격발만 된다면야 활보다 화력이 강하지만 초창기에는 보다시피 그 격발이 너무 더디고 재장전도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의 필요성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절실했으며, 지금 같은 개인 단위 위장과 각개전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3. 성냥에서 부싯돌로, 부싯돌에서 뇌홍으로

옛날 총은 격발 방식뿐만 아니라 총열의 내부 구조도 오늘날과 차이가 있었다. 총열 내부에 강선이 파이지 않아서 기껏 발사된 총알도 뱅글뱅글 돌지 않고 궤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허나, 강선은 정교하게 파인 홈 형태인데 이건 옛날 기술로 제대로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그 강선의 이점을 살려 제대로 날아가 주는 총알을 만들 기술도 부족했다.

격발 방식 말고, 총열에 강선이 없다는 관점에서 옛날 총을 흔히 '머스킷'이라고 부르며, 오늘날의 강선이 파인 개인 화기를 '라이플'(소총)이라고 부른다.
강선도 없는데 총알이 최대한 곧게 나아가게 하려면 닥치고 총신을 곧고 최대한 길게 만들어야 했다. 옛날 화승총이 구조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데 어지간한 작대기 지팡이처럼 엄청 길쭉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라이플은 기술이 한참 발달한 뒤인 19세기에야 등장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 쓰인 총기는 다 머스킷 형태였다. 월트 디즈니 <포카혼타스>를 봐도 머스킷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프랑스의 소설 <삼총사>도 제목의 원래 의미는 그냥 총이 아니라 '머스킷 사수 트리오'(three musketeers) 정도다.
포카혼타스의 경우 위기· 절정부 장면을 보면, 토머스가 인디언 코쿰을 죽이면서 "both eyes open.."(조준할 때는 두 눈을 뜨고)라는 충고를 뇌까릴 때, 총의 심지가 타오르는 게 보인다. 1600년대의 match lock 방식 총이니까 그렇다.

화승 방식은 당장 비만 와도 심지가 꺼져 버리고 총을 쏠 수가 없으니,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일단 격발 방식이 총 내부에 부싯돌을 내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담배에다 비유하자면, 불 붙이는 도구가 성냥에서 라이터로 바뀐 것과 같다. 총도 그런 변화를 겪었다. wheel lock, 그리고 뒤이어 flint lock이라는 방식이 등장했는데, match lock보다 사용이 더 편리해지긴 했지만 총의 구조는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고 제조 단가가 더 올라갔다. 그래서 가성비 면에서 옛날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기까지는 1세기 이상 시간이 더 걸렸다. 휠락은 말 그대로 방아쇠 주변에 동그란 바퀴 같은 장치를 볼 수 있으며, 플린트락은 총신 위쪽에 부싯돌처럼 생긴 돌출 부품이 있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새로운 기폭제를 기반으로 '퍼커션 캡'이라는 방식이 도입되면서, 총기는 격발 방식이 부싯돌 점화가 아닌 뇌관 기반으로 바뀌었다. 툭 건드리기만 하면 부싯돌보다 불꽃이 훨씬 더 잘 일어나는, '뇌홍'이 든 캡슐을 탄환+화약과는 별개로 따로 장전한다. 총기의 방아쇠는 그 캡슐을 자극하는 역할만 한다. 그럼 그 뇌홍의 불꽃으로 인해 화약이 폭발하고, 그 힘으로 총알이 날아가게 된다.

퍼커션 캡은 거의 400년간 총기에 존재하던 화약 접시를 퇴출시켰으며 장전 속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미국의 남북 전쟁을 포함해 19세기의 주요 전쟁들에는 부싯돌 방식 총기를 퍼커션 캡 기반으로 개조한 머스킷이 맹활약을 했다. 전열보병 전술도 사라졌으며, 병사들이 입는 군복도 미국 독립 전쟁 시절보다 훨씬 더 칙칙하고 단순해졌다. 그리고 이 탄환, 화약, 기폭제를 하나로 통합하여 간소화시킨 것이 바로 오늘날의 '탄피'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세포이의 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도 그 시절에 총의 격발 방식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뭐, 탄환과 화약을 감싸는 주머니에 쇠기름· 돼지기름이 발라져 있었다고? 그럼 난 그걸 입으로 물어뜯고 총을 쏠 때마다 힌두 교/이슬람 교 율법을 어긴 꼴이잖아?" 이런 종교 규범 광역 어그로 때문에 용병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오늘날의 편리한 자동 소총이라면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7/11 08:34 2016/07/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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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울에 샤워를 하기 위해서 보일러를 켜고 온수를 튼다. 물은 잠시 후 따뜻해지긴 하겠지만, 틀자마자 곧바로 더운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물은 생각보다 무겁고 비열도 굉장히 큰 물질인데 스위치만 눌러서 한겨울에 샤워나 목욕이 가능할 정도로 따뜻한 물이 자동으로 콸콸 솟아 나오는 건 정말 엄청나게 편리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커다란 쟁반에다 물을 담아서 불 때서 데우고, 그걸 욕조로 낑낑거리며 들고 가서 끼얹어서 목욕을 하던 시절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뭐 그렇긴 하지만, 아직 충분히 데워지지 못해서 몸에 끼얹을 수 없는 물은.. 어렵게 취수되고 소독되고 불순물이 걸러진 맑은 수돗물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어디 담아 놓을 데가 없으면 버려지고 곧장 하수구로 향하기 쉽다. 본인은 그때마다 자동차 엔진의 공회전도 이런 현상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낭비라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의 자동차의 엔진 공회전은 차의 엔진을 적당히 데우고(냉각수 온도..) 엔진오일을 내부에 충분히 순환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이 들어가는 실내를 좀 데우기 위해서 필요하다. 밖이 추울수록 더욱 필요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흔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배터리가 방전돼 버려서 점프로 시동을 간신히 건 뒤, 배터리 충전을 위해서 일부러 엔진만 좀 돌릴 때도 있다.

2.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 말고 불필요한 엔진 공회전은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좋지 않다.
(1) 가장 먼저, 두 말할 나위 없이 연료 낭비이다. (2) 엔진이 저회전 저출력 저온(액셀을 막 밟을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태이다 보니, 촉매 변환 장치의 효율도 안 좋아서 연료 소비량 대비 배기가스는 오히려 더 심하다고 한다.
게다가 (3) 정지 상태이니까 라디에이터로 맞바람도 전혀 못 받는 상태에서 엔진이 혼자 장시간 돌아가고 있으면, 밖이 어지간히 추워도 열평형이 깨지고 엔진 과열이 야기될 수 있다. 특히 웜업 한답시고 P나 N 상태에서 액셀까지 밟다 보면 내부의 열이 더욱 증가되니 이를 피해야 한다.

엔진이 곱게(?) 과열되면 냉각수가 증발해서 연기가 나고 엔진 출력이 떨어지는 것만으로 끝나지만, 그때 재수 없게 엔진룸 안이나 배기구에 종이나 낙엽 같은 이물질이 들어있어서 발화점이라도 넘기면 차에 불이 나는 참사까지 발생한다. 굳이 연료가 새서 유증기가 폭발하지 않아도 화재가 이렇게도 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기름때 때문에 식당에 불이 나서 건물 전체를 삽시간에 덮쳐 버리는 것처럼.

뭐, 액셀러레이터를 꽉 밟지 않고 시동 유지를 위한 최소 회전수로만 엔진이 돌아가는 건데도 장시간 공회전이 (1)은 그렇다 치더라도 (2)와 (3)까지도 야기될 수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물론 아이들링 rpm도 그것만으로도 1.5톤짜리 기계 덩어리를 걷는 속도로라도 굴러가게 할 수 있는 큰 출력이긴 하다.

어느 도로나 장소에서 단순히 주정차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공회전을 금지시키는 건 가장 크게는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2) 환경 문제 때문이다. (1)과 (3)은 그냥 차주 개인에게만 금전적인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니 (2)보다야 덜 중요한 문제다.

3.
본인은 진작부터 "나의 소중한 기름은 오로지 차를 가게 하는 데만 쓰여야 한다" 지론을 유지하고 있다. 단순히 편의 장치를 사용할 목적으로 차내에 체류할 때는 절대로 시동을 켜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 드나들어서 신호 주기를 대충 기억하고 있는 교차로에서, 진입하자마자 노랑-빨강 신호에 걸렸다면 앞으로 3분 가까이 기다려야 하니 곧바로 시동을 끈다.

요즘 자동차들은 전자 제어 방식이 많이 똑똑해져서 어지간해서는 시동을 걸자마자 바로 출발해도 별 무리가 없으며, 한겨울에나 그것도 길어야 2~30초 남짓만 공회전을 해도 충분하댄다. (물론 오랫동안 세워 둔 차를 처음 시동 걸었을 때 말고)
차는 통념과는 달리,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는 순간에 특별히 기름이나 전기를 심각하게 더 많이 먹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공회전 중에 엔진이 지속적인 회전을 위해 관성의 도움을 딱히 받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엔진이 무슨 선풍기의 팬도 아니고 평소에도 얼마나 무거운 부하를 받으며 돌고 있는데.. 시동이 꺼져서 힘이 끊어지면, 선풍기 팬과는 달리 정말 신속하게 회전이 멈춰 버린다.

정지 상태에서 액셀을 밟아서 실제로 "출발 가속을 할 때에야" 속도 대비 연료 소모가 많고 연비가 꽝이겠지만, 어차피 같은 정지 상태인데 특별히 엔진의 시동 자체를 거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그때의 연료 오버헤드는 여러 자료를 검토해 봐도 공회전 수 초~길어도 10초 남짓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정지 상태가 분 단위로 계속되고 출발 시기를 예측 가능하다면 쿨하게 시동 꺼 버리는 게 명백히 이익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단지 운전자가 출발 시기를 신경 쓰고 있어야 하니 스트레스가 가중될 뿐이다. 파란불이 됐는데 즉시 출발을 못 해서 뒷차에게 욕 얻어먹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4.
끝으로.. 고연비 연료 절약을 위해서는 쓸데없는 짐을 안 싣고 차를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전기 장치를 안 켜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 것도 다 알게 모르게 엔진에 부하를 주며 연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쉽게 생각해서 자전거를 탄다고 할 때 내 발에 힘 덜 들이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은 원칙들은 자동차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

자동차는 페달 밟는 순간적인 힘은 생각만치 크지 않으며, 체중이 담긴 사람의 발보다도 약하다. 초대형 디젤 차량이 아닌 이상 자동차 엔진의 최대 토크는 성인 남자 체중의 몇 분의 1밖에 안 된다.
하지만 페달링 회전수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 회전수를 낮추고 낮춰서 견인력으로 바꾸고, 이걸 밑천으로 해서 자전거보다 훨씬 더 무거운 차체의 바퀴를 굴린다. 승용차의 바퀴가 성인용 자전거의 바퀴보다 더 작은 이유도 이 때문임.

자동차에서 이용하는 전기는 그 엔진의 출력을 끌어들여서 덤으로 생산된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만 해도 헤드라이트를 켜기 위해 바퀴에다가 발전기를 연결하면 아무래도 마찰이 더 커지고 자전거가 예전보다 잘 안 나아간다. 밤에 주변 건물은 사고로 다 정전돼서 가로등까지 꺼지고 깜깜한데 밖의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 켜고 잘 달리고 있는 걸 보면, 자동차 전기에 대한 존재감을 더 크게 알 수 있다.

다만, 똑같이 기름을 태우더라도 발전소의 거대한 증기 터빈에서 최고의 효율로 대량 생산된 건물용 전기와 비교하면, 자동차의 전기는 생산 단가면에서 효율이 잽이 안 된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발전소의 경우 평상시에는 화력보다도 더 저렴한 원자력 발전이 쓰이니까 말이다.
세금이 덕지덕지 왕창 붙은 그 비싼 기름을 태워 없앴는데, 그 동력과 전기로 굳이 건물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오로지 자동차에서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폰 충전 같은 건 정 급한 상황이 아니면 그냥 자동차보다는 건물에서 하는 게 원론적으로 더 나으며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아낄 수 있다. 그리고 추우면 굳이 전기 저항을 일으키는 열선보다는, 이미 있는 엔진열을 자연스럽게 끌어다 쓰는 히터가 더 나은 선택이다.

물론 헤드라이트 하나 더 켜고 오디오와 에어컨 좀 틀었다고 500km 갈 기름으로 3, 400km밖에 못 갈 정도로 그렇게 연비가 곤두박질 치는 건 아니다. 이런 걸 너무 과민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특히, 밤에 "나 여기 있소!"를 나타내는 등화에다가는 전기 아낄 생각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교통사고는 기름값 몇 푼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니 말이다. 주변이 가로등 불빛 때문에 훤히 밝더라도, 당신 시야가 아니라 남의 시야를 위해서 헤드라이트 켜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뭐가 보이긴 해야 남도 조심해 주든가 말든가 할 테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7/09 08:35 2016/07/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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