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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크기별 분류

1. 야외 시계탑

오늘날이야 스마트폰 덕분에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정확한 현재 시각을 얻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해시계· 물시계 같은 자연(?) 시계 말고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시계라는 건 전근대 시절 기계 기술의 정수가 담긴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다.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안정되게 균일한 속도로 움직이는 기계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리고 시계가 널리 보급된 뒤에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일반인들은 정확한 표준 시각을 알기 위해서 오랫동안 텔레비전 방송의 시각 표시와 시보에 의존해야 했다.

시계가 집집마다 개인마다 쉽게 보유 가능한 물건이 아니었던 시절에는 공공장소· 광장에 커다란 시계탑이 세워지곤 했다. 철도역 광장 같은 곳도 당연히 포함이었다. 이건 20세기 초중반까지, 아직 노면전차와 증기 기관차가 다니고 건물은 온통 빨간 벽돌 외형에다 목재 인테리어가 보편적이던 시절의 얘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대 병원 시계탑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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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멀리서도 시각을 확인하라고 탑은 높게 세워졌다. 그렇잖아도 수백 년 전의 옛날 시계들은 추에 작용하는 중력을 동력원으로 삼아서 돌아가는 아주 원시적인 구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크고 높게 만드는 게 구조적으로 유리했다.

시계탑은 바늘의 위치로 시각을 시각적으로(?) 표시할 뿐만 아니라, 주요 이벤트는 소리로도 멀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뎅뎅' 소리가 나는 종이란 게 달렸다. 옛날에는 시계탑의 종은 사람이 직접 쳤던 것 같다..;;

오늘날이야 시계가 너무 흔해진 관계로 시계탑이라는 시설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을 일부러 보존하는 것 말고, 공익을 위해 새로 만들 일은 없어졌다.

2. 실내 벽걸이 -- 대형

금속의 탄성을 이용한 용수철과 태엽 같은 장치가 발명되면서 기계식 시계는 더욱 작아질 수 있게 되었다.
실내에 비치 가능한 시계 중에서 가장 큰 물건은 디스플레이 아래로 '추'가 진자 운동을 하는 '괘종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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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시계는 매시 정각에는 그 시각 수만큼, 그리고 매시 30분에는 또 한 번 종이 쳤다. 추가 노출돼 있어야 하는 이유라든가, 시계 바늘 위치에 따라 종이 연결되는 원리는 난 잘 모르겠다.

오늘날의 전자식 아날로그 시계는 제일 시끄러워 봐야 1초 간격으로 tick, '째깍' 소리가 나는 반면..
요런 기계식 시계는 근처에서 가만히 들어 보면 정말 사전적인 의미의 '똑딱똑딱'에 충실한 소리가 났다. 마치 열차로 치면 증기 기관차의 고전적인 '칙칙폭폭' 같은 소리인 셈이다. (참고로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이라는 그 동요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인 1920년대에 작곡됐음)

글쎄, 요즘은 초침 달린 아날로그 형태이면서 '째깍' 소리조차도 안 나는 물건이 있고, 심지어 초침이 계단식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등속 운동을 하는 놈도 있지만.. 그래도 등속 운동 시계는 주류 디자인은 아닌지라 흔히 볼 수 있지 않는 듯하다.

전자식 시계는 서 버렸다면 건전지를 교체한 뒤, 뒷면의 자그마한 다이얼을 아무 방향으로나 돌려서 시각을 맞추면 된다.
하지만 기계식 괘종시계는 절차가 이와 달랐다. 무슨 자그마한 공구를 시계 표면의 작은 구멍에다가 집어넣고 돌려서 일명 '밥을 줘야' 했다. 태엽을 조이는 작업이다.

바늘 위치는 별도의 다이얼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절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직접 조절하면 됐다. 태엽을 조이고 바늘 모양을 맞춘 뒤에, 무슨 트리거를 또 조작하고 나서 추를 흔들어 주면.. 그때부터 추는 멈추지 않고 시계 바늘과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다른 어르신이 시계를 조작하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전부인지라 기억이 100%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기하기 그지없다. 자동차로 치면 타이어를 교환하는 작업 같기도 하고, 밀어서 시동 거는 작업 같기도 하고..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뒤에는 시계 바늘을 강제로 역방향으로 돌리는 조작을 해서는 안 됐다. 그러면 바늘과 연결된 내부 장치가 망가질 위험이 있었다. 특성이 전자식 시계와는 여러 모로 달랐다.

3. 실내 벽걸이 -- 소형

뭐, 기계식으로도 시계의 소형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단지 가성비가 차이가 날 뿐이다.
괘종시계보다 작은 벽걸이 시계는 오늘날도 볼 수 있듯이 지름 수십 cm 남짓한 동그란 원반형 시계가 될 것이다.
기계식 시계는 무조건 아날로그이겠지만 전자식 시계는 아날로그/디지털이 모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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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괘종시계의 소형화 변종으로 '뻐꾸기 시계'라는 것도 있었다. 시계 본체가 새장 모양이고, 매시 정각에는 뻐꾸기 인형이 튀어나오는 그 물건 말이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소개돼서 200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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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물건의 원형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얘 덕분에 "뻐꾹 왈츠"라는 곡도 인지도가 올라가고, 웬 뻐꾸기가 시계와 관련 있는 새처럼 사람들 기억에 새겨지게 됐다.
뻐꾸기 벽시계는 시기적으로 최근인지라, 무늬만 괘종시계이지 내부 메커니즘은 이미 전자식으로 다 바뀐 물건이었다.

4. 탁상

시계가 더 작아지면 이제 벽에 고정시켜 놓는 게 아니라 탁상시계 내지 자명종 같은 급이 된다. 귀가 두 개 달렸고 때르르릉~ 울리는 바로 그 시계 말이다.
얘는 사용자가 시계 본체에 수시로 손을 뻗어서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 벽시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알람 기능이 이 레벨에서 드디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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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금속판을 물리적으로 때리는 방식으로 알람 소리가 동작했다. 구식 다이얼 전화기의 따르르릉 소리처럼 말이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다들 그냥 전자음으로 바뀌었다.

본인은 옛날에 전자식 디지털 탁상 시계가 콘센트 하나를 떡 차지하여 돌아가는 형태인 걸 본 기억이 있다. 배터리도, 메모리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플러그를 빼 버리면 시계는 바로 꺼졌다. 저장하고 있던 시각도 날아갔기 때문에 매번 다시 맞춰 줘야 했다.
그에 반해, 요즘 시계는 전자식으로 돌아간다 해도 전력 소모가 굉장히 작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그냥 건전지만으로 몇 달은 버틴다. AC 전원 자체를 쓰지 않는다.

그나저나 과거에 컴퓨터도 전자식이 아닌 전기식이 있었듯이, 시계에도 메커니즘은 기계식인데 동력만 태엽 대신 모터로 조달하는 '전기식 시계'라는 게 있긴 했다고 한다.

5. 회중

이제 사람이 목에 걸거나 주머니에 넣어서 휴대 가능한 정도로 시계의 크기가 더욱 작아졌다. 이것보다 조금만 더 작아지면 손목에 두를 수 있게 된다. 회중시계에는 '시곗줄'이라는 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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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시계라 하면 옛날에 의사나 철도 기관사가 한때 사용했던 물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앞부분에서 토끼가 차고 있던 물건, 아이작 뉴턴이 달걀 대신 물에다 삶아 버린(...) 물건, 그리고 윤 봉길 의사가 거사를 앞두고 김 구 주석과 맞교환한 물건 정도로 본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의사들이야 수술칼을 집고 정교한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 시절의 크고 무거운 손목시계는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리고 철도 기관사는 매번 종합 사령실과 시각을 동기화시키고 정시 운행을 해야 하는데 붙박이 벽걸이 시계는 조작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중간 위상인 회중시계가 선호되었다고 한다.

6. 손목

이렇게 작은 시계를 기계식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역시 매우 어려웠으며 제품도 고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손목시계가 있으면 활동하는 데 굉장히 편리하기 때문에 20세기 중반쯤부터는 군사 같은 업종을 중심으로 차츰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40년대 말에 한반도에 들어온 소련군들이 손목시계만 잔뜩 약탈해서 주렁주렁 차고 다녔으며, 6· 25 때 비밀 작전을 펼치던 군인들도 한데 모여서 자기 손목시계의 시각을 동기화시킨 뒤, 각자 흩어져서 작전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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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손목시계가 저렴하게 널리 보급된 것은 아무래도 전자식 시계가 발명된 20세기 후반부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손목시계는 외형이 미묘하게 남녀 구분도 있는 게 특징이다.
이상이다.

(1)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화면에 흡수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시계의 형태는 "3. 벽걸이 소형" 다수, "4. 탁상" 소수, "6. 손목시계" 소수 정도인 것 같다. 스마트폰은 굳이 따지자면 회중시계에 가깝고, 스마트워치는 손목시계 그 자체의 변종에 가깝다. 시계탑, 괘종, 회중시계는 멸종이다.

(2) 옛날에는 매일 한 장씩 찢어 내는 달력도 많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사라졌다.
그리고 로마 숫자를 1부터 12까지나마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던 곳도 시계였는데 이 역시 요즘 시계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3) 시계 바늘의 위치와 관련해서..
시계 가게에 있는 시계들은 바늘이 일부러 전부 제각각 랜덤으로 맞춰져 있다는 건 상식이었다. 동기화 메커니즘이 없던 시절엔 모든 시계들을 정확하게 맞춰 놔도 어차피 얼마 못 가 전부 다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CF는 소비자의 심리를 고도로 겨냥해서 바늘의 모양이 제일 괜찮은 10시 10분으로 맞춰 놓네 마네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바늘이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needle이 아닌 hand라고 부른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4) 컴퓨터에서는 Windows 3.x까지만 해도 시계 앱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시각 표시는 그냥 운영체제 셸의 작업 표시줄에 나타나는 기능으로 축소되었다.
다만, 전문적인 스톱워치/알람 앱은 스마트폰에 존재한다.

(5) 그러고 보니, 용(dagon)이나 성(castle)뿐만 아니라 '종'(bell)도 동양과 서양의 심상이 서로 차이가 난다.
동양의 종은 왕창 거대하며, 나무로 된 큰 막대기로 종의 겉면을 쳐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서양의 종은 그렇게까지는 크지 않고, 손잡이를 잡아당겨서 종 내부의 금속판을 속면과 충돌시켜서 소리를 낸다. 소리도 '뎅뎅'보다는 '땡땡 딸랑딸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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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종근당 CF에서 마지막에 늘 나왔던 "CG 황금색 종 + '뎅' 소리" 씬은.. 서양식 종 비주얼에다가 동양식 종소리를 넣은 일종의 짬뽕이다.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6) 끝으로, 건물 말고 자동차 내부의 시계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고 글을 맺겠다.
옛날, 한 1980년대까지는 계기판에서 속도계 옆에 아날로그 시계가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공간은 엔진 회전수를 나타내는 타코미터로 대체되고, 시계는 계기판 또는 대시보드에 디지털 형태로 자그맣게 나오는 형태로 바뀌었다.

요즘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있다면 요즘 자동차는 내비게이션이 달려서 이게 진행 속도와 현재 시각을 자동차의 오리지널 계기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 자동차의 자체 시계는 차내 영상 서비스와 통합되어서 따로 나오지 않는 추세이다. 다만, 버스는 앞유리에 자동차 부품으로서가 아니라 완전 별개의 액세서리로서 시계가 걸려 있기도 하다. 승객들이 보라고 말이다.

오히려 차량용 블랙박스가 서버 동기화· 통신 같은 기능이 없기 때문에 내부 시계의 시각이 어긋날 여지가 있다. 여기 시각까지 자동 동기화되는 건 내비와 자동 연계가 되는 순정 블랙박스가 등장하면 도입되지 싶다.

옛날에 자동차의 기기들이 대체로 아날로그· 기계식이던 시절에는 시동이 꺼져 있을 때도 도어의 창문을 돌려서 개폐할 수 있었고.. 연료계 바늘은 언제나 실제 연료량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아날로그 시계도 상시 동작하고 있었다. 요즘 자동차에서는 이런 특성을 찾을 수 없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9/06/10 08:29 2019/06/1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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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 이야기

1. 바퀴를 굴릴 수 없는 곳에서 짐을 나를 때

인간은 손으로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짐을 간편하게 한데 넣어 다니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가방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 가방도 운반하기 위해서는 손을 사용해야 하니, (1) 손을 전혀 쓰지 않고 싶거나 (2) 팔과 손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할 때는 백팩이나 배낭처럼 어깨에다 메는 물건을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바퀴 달린 캐리어는 끌기 위해 여전히 손을 하나 써야 하기 때문에 (1)은 충족하지 못하지만, 바퀴 덕분에 (2)는 그럭저럭 충족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메는 부류에 속하는 물건 중에는 '지게'라는 것도 있다. 얘는 짐을 몽땅 감싸는 게 아니라 짐의 아래만을 받치는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게는 그 위에 쌓는 짐의 크기에 그다지 제약을 부과하지 않으며, 짐꾼의 체력이 허용하는 한 굉장히 많은 짐을 싣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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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원본에다가 뭔가 어설프게 색을 입힌 사진인 듯..)
지게는 왠지 옛날에 나무꾼들이 많이 사용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얘는 나무 말고 다른 짐을 나르는 데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오늘날도 나무는 아니고 알루미늄 재질의 지게가 만들어져 쓰이고 있다. 대문자 A 글자를 닮은 외형 덕분에 영어권에서는 A-frame carrier라고 불린다.

지게가 하필 나무꾼의 상징으로 등극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람이 다른 백팩이나 캐리어도 아니고 지게를 동원해서 저렇게 많은 짐을 꾸역꾸역 날라야 하는 상황이란, 바퀴를 활용할 수 없을 때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꼬불꼬불 좁은 산길은 이 조건에 완벽하게 해당된다. 거기서는 자동차는커녕 수레조차 끌 수 없으며, 캐리어의 그 작고 연약한 바퀴 역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열악한 지형을 감당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운송 수단은 사람의 다리와 지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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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게 부대

과거 6· 25 전쟁 중에는 민간 지게꾼들이 미군에 의해 대거 징발되어 수송·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 일명 '지게 부대'인데.. 명칭이 뭔가 '부대찌개'를 연상케 한다.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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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한반도는 온통 산지이고 도로다운 도로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엔 차도가 그나마 전국에서 제일 잘 닦여 있던 경성 시내조차도 아스팔트 포장이나 차선이나 신호등 따위 없었다. 아무 시설이 없으니 해방 후 미군정이 1946년 봄에 자동차의 통행 방향조차 우측으로 곧장 변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물며 서울을 벗어나면 그냥 전부 흙길 뻘밭..

지게 부대는 1951년 이후의 첩첩산중 고지전에서나 운용한 게 아니라 1950년 7월, 이미 대전이 함락되고 낙동강 고지를 사수하네 마네 하던 시절부터 운용되었다.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비화만 봐도 알 수 있듯, 대전-대구 사이 구간 역시 지형이 만만찮게 험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다른 글동영상이 이미 많이 올라와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란다. 원래 3, 40대 장정들만 모집한다고 광고했는데 더 어린 소년들과 60대 노인들까지 왕창 몰렸다고 한다.

<야인시대>에서 김 두한이 기를 쓰고 "4딸라!"를 고집하면서 올리려고 했던 건.. 이렇게 미군에 고용되어 부역한 민간인들의 임금(일당)이었던 셈이다. 뭐, 지게꾼들 말고 배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급품들을 하역하는 알바(?)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 시절 물가 기준으로 실제로 받았던 일당은 낮과 밤이 서로 차이가 있긴 했지만, 평균을 내면 4딸라는 개뿔, 1$도 안 되는 50센트 남짓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건 미군이 로동력을 저렴하게 착취한 게 결코 아니었다. 노동 여건을 비롯해 그 시절의 병사 월급이나 타 업종 소득과 환율을 총체적으로 감안하면.. 저것도 오히려 넉넉하고 후하게 준 것이었다. 그래서 지원자가 몰렸었다.
드라마 내지 원작 소설에서는 무슨 근거로 무슨 약을 빨고 하필 4딸라를 고집했던가 모르겠다..

또한, 한반도의 이런 안습한 도로 사정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괴의 입장에서도 동일하게 불리한 요인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인천 상륙 작전으로 허를 한번 찔리자 놈들도 보급로가 완전히 작살나서 곧 후퇴해야 하게 됐다.

3. 나무꾼

지게가 나왔으니 말인데.. 옛날에는 나무를 벨 때 <선녀와 나무꾼>, <금도끼 은도끼> 같은 전래동화에 묘사된 바와 같이 도끼를 주로 썼던 것 같다. 인간의 팔힘만으로 육중한 나무를 찍어서 쓰러뜨리는 건 굉장히 힘든 노동이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도 없을 리가 있겠나...

지금은 톱이 주류로 바뀌었다. 옛날에도 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흥부전>에서 박을 썰어서 개방하는 장면에서나 봤던 것 같다.
요즘은 그냥 톱이 아니라 동력 엔진이 달린 전기톱, 사슬톱, 기관톱(??)이 있으니 힘을 덜 들이고 나무를 벨 수 있다. 하지만 대단히 위험한 건 감수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이야 전기, 가스 같은 편리한 에너지 덕분에 옛날처럼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벨 필요는 없어졌다. 원시적인 지게보다는 지게차 같은 다른 육중한 동력 기계가 더 친숙한 세상이 됐다. 이제 도끼는 망치에 가까운 소형 버전이 유리창 깨고 자물쇠 딸 때, 비상 탈출용으로 쓰이는 것 같다.

더티한 화석연료가 역설적으로 산림을 보호해 주고, 원자력은 화석연료를 아껴 준다는 것이 반박불가의 진리이다. 인류가 문명의 이기들을 다 때려치우고 하루아침에 석기시대로 돌아가서 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산업화 되기 전인 조선 시대 내지 북한이 온통 민둥산인 건 이유가 있다.

뭐, 조선 시대나 6· 25 전쟁 당시가 아닌 지금도 벌목 자체는 행해지고 있을 것이고.. 또 히말라야 산맥 같은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등산가들의 수많은 보급 물자들을 같이 날라 주는 현지인 짐꾼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 역시 결국은 지게 같은 원시적인 도구를 써서 짐을 나른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무슨 군부대나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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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과거에는 나무꾼을 '나뭇군'이라고 표기했었다. 그리고 30년쯤 전에 맞춤법이 바뀌면서 '나무꾼'이라고 바뀌었다. 일꾼, 짐꾼, 몰이꾼처럼 말이다. 이 접미사는 사이시옷 대신 된소리 형태로 표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4. 언어 관련

끝으로.. '지게'는 스펠링이 '개'가 아니라 왜 '게'인 걸까?
명사화 접사 '-개'와 '-게'는 공교롭게도 모두 용언 어간 뒤에 붙어서 그 동작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의미를 만들어 준다. 전자는 베개, 지우개, 가리개, 덮개 따위가 있고 후자는 집게, 그리고 지게 정도가 있다.

의미와 용례가 비슷해 보이는데 왜 이런 구분이 생긴 것일까? 얼마 있지도 않은 후자를 '집개, 지개'라고 통합하면 많이 어색하려나? 둘의 어원이 궁금하다.
아, '-개'의 경우, 드물게나마 체언 뒤에 붙는 '-쟁이'와 비슷한 역할도 한다. 오줌싸개, 코흘리개 말이다. 이때는 '-개'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게'에는 이런 용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참 흥미로운 면모라 하겠다.

다음으로, '지게'를 사람 등에다 장착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용언으로는 '지다'뿐만 아니라 '메다'도 있다. 그리고 '-게' '-개'뿐만 아니라 '메다'와 '매다'도 만만찮게 헷갈린다.
'메다'는 어깨에 짊어지는 것, 무형의 임무를 떠맡는 것, load, charge와 관계가 있고.. '매다'는 매듭, 매달기, 묶는 것과 관계가 있다(tie, bind).

거기에다 추가적으로 김매기는 '매다'이고, 뭔가 채워져서 막히는 것도 '메다'이다.
그래서 목을 어떻게 해서 자살하는 건 '매다'(묶어서 대롱대롱..)이고, 목이 어떻게 돼서 말이 안 나오는 건 '메다'이다.
이상이다. '지게'에서 시작해서 별 희한한 주제의 얘기들이 다 튀어나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30 08:34 2019/05/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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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먼 옛날 어린 시절에 TV던가 비디오던가 어쨌든 "영구와 땡칠이"에서 영구가 김 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대동! 난지도!"라고 틀리게 부르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이 아니라 웬 뜬금없이 서당 훈장의 질문에 대답할 때 말이다. 심 형래가 영화 만드느라 흑화하기 전, 20세기엔 저런 연기도 했었다.

검색을 해 보니.. 원래 매체는 영화였다. 198~90년대 그때는 만화영화가 아니면서 어린이용 특촬물 영화라는 장르가 있었다.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가 4편까지 있었고, 대동난지도 드립은 첫 작품인 1편의 중간쯤의 서당 씬에서 나오더라.
저 때는 강시, 홍콩 할매 귀신(...;;), 조폐공사 사장 딸 이야기 등 별별 희한한 공포 괴담들이 초딩 사이에 많이 나돌았었다. 추억 돋네~

그리고 영구뿐만 아니라 맹구도 있었다. =_=;;; 그건 심 형래 같은 전담 배우가 있는 게 아닌 그냥 보편적인(?) 개그 프로용 바보 캐릭터였던 것 같다.

1. 대동여지도

말이 나온 김에 먼저 심 형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지도 얘기부터 좀 꺼내도록 하겠다.
본인은 초딩 시절에 대동여지도도 알고 난지도도 알고 김 정호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옛날 학교 교과서와 계몽사 위인전을 읽으면서 '근근이'(어렵사리 겨우)라는 단어를 김 정호 편에서 처음이자 현재까지도 거의 마지막으로 접했다. 이 사람이 투잡을 뛰며 간신히 입에 풀칠 하면서 딸과 함께 지도 목판을 만들었댄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어 독본에 저 단어가 쓰였나 본데, 후대의 문헌들도 토씨 하나 차이 없이 그대로 인용한 듯하다.

그리고 '주리틀기'라는 형벌도 저기서 처음으로 접했다.;; 김 정호는 그 계몽사 위인전에 등재된 40명의 인물 중에 항일 독립 운동가를 제외하면 가장 비참한 형벌을 당하고 옥사한 사람으로 독보적인 1위였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는 김 정호 옥사설은 부정되고 있다. 위험물 이적표현물(?)이라고 나라에서 다 때려 부수고 폐기했다는 대동여지도는 멀쩡하게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고, 김 정호나 그 측근 인물들이 처벌 받았다는 기록은 그 어느 실록이나 야사 등지에도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이 유교 꼴통 이념에다 말기에 아무리 개망나니 막장으로 갔다 한들, 자국 지도를 근성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자국민을 무슨 반역죄인으로 취급하여 벌 주는 건..;; 좀 심하게 말이 안 되기도 한다. 단지, 양반들과 달리 자기 분야에서만 유명한 기술자· 덕후 계열 인물들은 정확한 출생이나 사망 일시가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이 점에서는 김 정호뿐만 아니라 장 영실도 마찬가지이지 않던가? 김 정호 옥사설은 이런 뿌연(불분명한 최후) 틈새를 파고들면서 생긴 오해와 낭설로 보인다.

대동여지도가 완성된 건 1861년으로,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시작된 때이다. 김 정호는 인생일대의 과업을 완수한 뒤, 1860년대 언젠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863년에 흥선 대원군이 집권했으며, 1866년에 병인박해라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사건의 순서가 저렇다.

김 정호가 평범하게 죽은 것만큼이나 그의 지도도 만능 절대무오 퀄리티까지는 아니었다. 훗날 일제가 조선 침략을 위해 더 발달된 기술로 오랫동안 한반도를 자체 측정한 자료는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더 정확 정밀했다. 그렇게 한반도 지형을 다 꿰뚫고 있으니 청일 전쟁도 이기고 경부선· 경의선 같은 장거리 간선 철도도 뚝딱 놓을 수 있었다.

요컨대 대동여지도를 조선이 몰라보고 일제가 뒤늦게 인정한 게 아니다. 조선도 대동여지도를 인정했고, 일본의 후대 측량은 더 뛰어났을 뿐이다.
무슨 고조선이나 삼국/고려 시대 같은 먼 옛날도 아닌데, 비교적 가까운 조선 시대 역사도 이런 식으로 서술이 뒤바뀐 게 김 정호 얘기 말고 더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선이 "십만 장병 양성설"을 씹고 당파 싸움만 일삼다가 임진왜란 때 허를 찔리고 쳐발렸다고들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도 나름 왜의 침략을 인지하고 대비했으며, 십만 장병 양성설은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하다는 반론이 나와 있다.

한편으로 1920년대 독립군의 청산리 대첩은 전과가 교차검증 가능 수준으로 확인되는 게 전혀 없다 보니.. 대첩이 아니라 그냥 '국지적 전투 승리' 수준으로 수정되었다.
우리한테 유리한 내용이건 불리한 내용이건 역사라는 건 절대적으로 팩트부터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성경도 내용이 인간에게 듣기 편한 것이건 아니건 일단 문자적인 의미부터 파악한 뒤에 적용을 더 넓게 비유적으로 하듯이 말이다.

몇 년 전에 "고산자, 대동여지도"라고 포스터의 풍경 사진만 멋진 영화가 나온 바 있다. 한물 간 통상적인 옥사설을 그대로 채택하는 병크는 다행히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연히 국가의 공인과 지지와 지원이 있었던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김 정호 개인의 과업으로 왜곡한 건 여전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비극을 만들기 위해 다른 명분인 천주교를 끌어들였다.. =_=;;; 그리고 석방 조건이 니가 만든 지도를 국가에다 헌납하는 것이다. 지도를 만든 것 자체를 죄로 만드는 것만 피하고, 다른 황당한 왜곡과 각색을 집어넣어서 옥사설을 유지시킬 생각은 어째 했는지, 정말 기가 막혔다. 날짜가 얼추 비슷하다고 저 사람을 아무 접점이 없는 천주교인으로 만들다니.. ㅡ,.ㅡ;; ActiveX를 없앤답시고 아예 바이너리 설치 프로그램을 만든다거나(exe냐 ocx dll이냐의 차이뿐;;), 자전차왕 엄 복동에다가 무장 항일 투쟁을 억지로 연결시킨 것과 비슷한 짓이다.

2. 용

심 형래는 영구와 땡칠이 말고 우뢰메 시리즈에서도 주연으로 출연하여 TV 코미디언뿐만 아니라 아동 영화 배우로 크게 성공하고 억만장자가 됐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어설프게 메가폰 잡으면서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몰락했으며, 단순히 돈만 날린 게 아니라 경영자로서 부도덕한 인간성 논란까지 잔뜩 일으켰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그나마 다시 방송에나 알음알음 출연하면서 왕년의 코미디언 행세를 다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 사람은 "용가리", "D-war"처럼.. 어째 괴수물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용 덕후였다. 아동 영화 배우 출신이어서 그런지.. 공룡처럼 크고 아름답고, 힘세고 강한 걸 좋아하는 어린애들 취향을 늘 의식하며 살았던 듯하다.

사실, 그의 지론은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이전 세상에서 1억 년이 넘는 중생대라는 기간 동안 공룡을 잔뜩 만들어서 굴리고, 흔적을 화석으로 미리 남겨 놓으신 가장 큰 이유는..
후대에 등장할 인간들의 "동심 형성"을 위해서임이 틀림없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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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눈에는 밤 하늘의 픽셀 하나로밖에 안 보일 별들을 위해서 수백~수만~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 태양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핵융합 가스 덩어리도 셀 수 없이 많이 박아 놓았거늘.. 하물며 공룡쯤이야 논리적으로 충분히 납득 가능한 추론이다.

내 이름에도 '용'자가 있기도 하고, 성경에도 '용'이 나온다. 호기심에 D-war 주요 장면을 보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동양에서의 용과 서양에서의 용은 심상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성 castle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긴 성벽 vs 그냥 저택) 달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긍정적 vs lunatic한 광기 등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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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은 날아다니고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색깔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듯. 그러나 나머지 외형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르다.

동양의 용은 뱀/도마뱀처럼 길쭉하고 얼굴에 긴 수염이 반드시 있으며 날개가 없이 꾸불텅꾸불텅 비행한다.
서양의 용은 날개가 반드시 있으며 몸이 동양 버전만치 길쭉하지 않아서 뱀 같다는 느낌은 훨씬 덜하다. 애초에 동양처럼 이무기가 용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여의주 물고 비행한다는 설정 자체가 전혀 없다. 지질 시대 생물인 공룡에 더 직관적으로 대응한다.

동양의 용은 영험하고 신성한 좋은 동물, 긍정적인 동물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 개룡남"이라는 속담과 단어가 있을 정도로 사람도 용처럼 되고 싶어할 정도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용은 그냥 처치해야 할 악당 몬스터 중 하나일 뿐이며, 개천에서 용 났다가는 큰일난다. 용처럼 된 사람이 아니라 용을 때려잡은 사람이 영웅이 된다.
영어에서 잠자리를 용파리라고 부르고, 화승총 쏘는 기병을 '드라군'이라고 부른 건 용을 전혀 신성시하지 않는 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그랬다.

성경에 나오는 용도 응당 동양이 아니라 서양의 용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될 것이다. 계시록에서 용이 워낙 부정적으로 나쁘게 나오니(계 12:9, 20:2) 한때는 본인도 내 이름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낄 정도였다. 뭐 그렇게까지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용에 대한 인식이 동양과 서양이 어쩌다가 서로 달라졌는지 답을 구하고 싶기는 하다.

D-war는 나름 미국에 진출해서 그 바닥에서 서양 드래곤이 아닌 동양 용을 나쁘지 않은 CG로 그려서 널리 알렸다는 최소한의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느라 돈을 얼마나 꼬라박고 손해를 입었는지는 이 자리에서 굳이 따지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3. 연기자 출신의 영화 감독

D-war는 희대의 망작 급으로 쫄딱 망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어마어마하게 든 제작비의 절반 남짓밖에 못 벌면서 심 형래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21세기 들어서 우리나라에 괴수물 자체가 "괴물"(2006) 말고는 별 재미를 못 봤으며, 얘도 괴수 자체의 묘사가 우수해서 흥행한 건 아니다. "7광구"는 IMAX 형태로 만들어지고도 쫄딱 망했고..

심 형래도 그렇고 서 세원도 그렇고.. 방송인· 연기자로 잘 나가다가 영화 만들고서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방송인· 연기자들이 그 바닥에서 짬이 차고 나면.. 맨날 남이 짜 준 각본대로만 연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직접 감독하고 연출해서 만들고 싶어질 것이다. 그 심정은 본인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은 늙어서까지 남 밑에서 고용되어 특히 현장에서 발로 뛰며 일하는 걸 꺼리는 정서가 강하다. 그래서 자본만 있다면 가능한 한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굳이 그 정도의 야망까지 있지는 않더라도, 중· 장년 나이에 명퇴 당해서 퇴직금을 밑천으로 강제로 창업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업종을 바꿀 거면 새 업종에 대해서 기본기를 닦고 충분히 공부를 해야 된다. 성악만 몇십 년 한 사람이 갑자기 작사· 작곡을 하겠다고 하면 제대로 된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또한, 영화를 만드는 건 일종의 사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특별히 순수 예술만 추구하는 독립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남의 투자금까지 끌어들여서 밑천의 몇 배를 뽑을 상업 영화를 만들려 한다면...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에 대해 남들이 다 똑같이 자기처럼 생각할 거라고 추측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온갖 역대급 망작 영화들은.. 감독이 그런 안목 없이 무식한 신념을 고집스레 밀어붙인 덕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15 08:39 2019/05/1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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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사의 특징과 특권

애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단순히 소득과 지위 이상으로 여러 깨알같은 특권이 있으며, 근무 여건이 여느 직장인과는 다르다.
먼저, 경찰· 군인· 소방관· 철도 기관사와 마찬가지로 전시 보직이 동일하게 유지된다. 전쟁 나도 애들을 가르쳐야 하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예비군 훈련을 따로 받지 않는다.

교사는 비록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급의 불체포 특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범죄 혐의가 있어도 교내에서 수업 중에 체포되지는 않는다. 완전히 맛이 가서 교실에서 대놓고 애를 성추행 하거나 칼로 찔러 죽이려는 급의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경찰도 제자들 앞에서 교사의 최소한의 권위와 위신을 존중해 준다.

그리고 교사는 하루 종일 애들과 부대끼며 산다는 특성으로 인해, 점심 식사 시간도 법적으로 근무 시간으로 인정된다. "회식도 근무다"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이다. 교사는 안 그래도 다른 직장인들보다 일찍 출근하는 데다 이런 변수도 있기 때문에, 수업 다 끝나고 자기 행정 업무만 다 마치면 다른 직장인들보다 훨씬 일찍 퇴근해서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쉽게 말해 은행에서 창구에 셔터가 내려가고 내부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대가 교사들이 퇴근하는 시간대인 셈이다!

이건 교회 다니는 사람의 경우, 수요일 저녁 기도 모임 같은 데에 참석하는 것에 굉장한 호재이다. 뭐, 대학 교수는 하루 종일 애들하고 부대끼고 사는 게 아니니 굳이 '점심 시간 근무' 특혜의 적용 대상까지는 아닐 것이다.

또한, 교사는 "이윤을 내기 위해 상사 밑에서 생업 현장에서 뭔가를 생산하고 개발하는 근로자"가 아닌 관계로 노조 설립이 허용되지 않으며(전교조는.. 흠..), 근로자의 날 때 쉬는 대상도 아니다. 또한, 공립 학교 교사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재직 중에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으며,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남은 시간에 다른 투잡 같은 걸 뛰어서도 안 된다. 학원· 과외 같은 사교육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이나 대리 운전(!!) 같은 타 업종이라도 말이다.

의사는 교사보다 소득이 훨씬 더 많다 하더라도, 자기 병원을 차리면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보조가 없이 그냥 전문직 자영업자일 뿐이다. 한편으로 억대 연봉을 자랑하는 여객기 조종사들의 집단에도 노조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자.
교사는 애들과 학부모한테 치이고 각종 잡무에 시달리면서 마냥 편한 직업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이 종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저런 자부심과 법적 지위를 생각하면 할 만할 것 같다.

2. 교육의 등급별 차이

교사는 이미 주어진 교과서와 교육과정대로만 가르쳐야 하지만, 대학 교수는 자기가 독자적인 강의 계획표를 짜고 교재도 선택해서 전적으로 자기 재량껏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
교사는 한 교무실에서 자기 자리가 있지만, 교수는 각 개인이 법적으로 걸어다니는 교육기관이며 자기 연구실이 따로 있다.

더 근본적으로.. 교수는 각 학문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 학설· 기술을 연구 개발하고 논문으로 발표하는 게 업인 사람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르칠 거리들을 만들고 정하는 사람이 교수이다. 글쎄, 현실에는 자질 미달인 교수도 있고 정년 보장만 딱 받은 이후부터 능력 파탄· 인성 파탄· 정신줄 다 놔 버린 교수도 일부 있겠지만, 교수의 원론적인 직무는 저렇다는 뜻이다.

물론 교육과정대로만 가르치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니, 교사만 해도 일반인 평균 이상의 지능과 인성, 학력과 체력, 리더십이 필요한 직업이다. 어느 사회와 문명에서나 교사가 생업 전선 안 뛰어들고도 안정된 소득과 지위를 보장해 주는 좋은 직업인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의학에서 소아과에는 "소아는 덩치만 작은 성인이 절대 아닙니다" 이런 금언이 있다. 어린아이는 몸이 돌아가는 구조가 의학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니, 성인에서 물질대사 규모만 줄인 급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대학교 같은 고등교육 다음으로, 중등 아래의 유아· 초등교육은 마냥 쉽고 열등하고 하위 호환 관계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관계인 것 같다.
아이콘을 그리거나 글자를 찍는데, 초등교육은 10픽셀~20픽셀 같은 아주 작은 픽셀에다 그리는 것과 같다. 공간이 작으니까 쉽게 그릴 수 있을 것 같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다가는 큰 그림을 기계적으로 축소한다고 해서 절대로 보기 좋은 아이콘을 만들 수 없다. 정보량 자체가 아주 작으니 대충 그리는 건 금방 가능할지 모르나, 고퀄로 만드는 것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만화에서는 사람의 눈만 엄청 크게 그리듯, 이렇게 작은 공간에는 사람이 중요하게 인지하는 부분만 강조해서 아예 별도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글자의 경우도 픽셀의 배치가 단 1만 차이가 나도 그 여파가 굉장히 커지기 때문에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획을 그려야 한다. 폰트에도 쑤제 힌팅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기계의 자동화가 불가능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중등을 거쳐서 고등교육으로 가면 그냥 닥치고 수백~수천 픽셀에서 최고화질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게 된다. 현업 최전선에서 그림의 화질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려고 난리를 치는 게 고등교육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수십~100픽셀 이상 정도 크기부터는 굳이 크기별로 일일이 그림을 따로 그릴 필요 없이, 최고화질 그림을 축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글꼴에서도 힌팅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된다. 수백 픽셀 이상부터는 아마 산술적인 anti-aliasing조차도 별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교육과정의 수준도 단계별로 이런 식으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사와 중등학교(중· 고등) 교사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대학 교수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한편, 대학교 정도가 되면 의무교육도 아니고 학생도 반쯤 성인이며 굳이 "인간 되는 참교육"보다는 선생과 학생이 상업적인 거래를 하는 관계에 더 가까워진다. 학원과 얼추 비슷하지만 그래도 학원보다는 더 전문적이고, 실무보다는 일단 이론 위주의 학술 교육이 행해진다. (일단은 설립 취지가..) 대학 교수가 애들 군기를 잡고 생활 지도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게 필요하다면 차라리 조교들한테 시키지.

그러나 그 전의 교육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 강제성을 부여해서 선생이 학생들을 꽉 잡고 있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선생이 누구 말마따나 노조 설립까지 가능한 근로자이고 학생은 '고갱님'이어서 자기 귀에 맞는 선생을 언제든지 취사선택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좋은 모습이라 볼 수 없다. 아무리 자격 이하의 불량교사로 인한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교권 자체를 부정해 버리면.. 인간 안 된다. 그러니 학교와 관련된 사회 문제가 해결하기가 쉽지 않고, 또 학교에 암약해서 불량 이념을 애들한테 주입하는 교사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 과거와 현재

옛날 일제 강점기에 이 땅의 교육 제도가 지금과 크게 달랐던 점은..

일단, 그때는 의무 교육이란 게 없었다. 등급이 제일 낮은 초등학교도 돈 내고 다녀야 했으며, 사고 치면 짤릴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초등학교의 명칭은 '보통학교'였다. 1930년대 이후로 가서야 소학교라고 바뀌었다가 1940년대 일제 말기에 국민학교라고 다시 바뀌었다.

그 뒤,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학교의 이름은 '고등 보통학교'였다. 그 시절의 학생들 얘기를 읽어보면 소속이 '무슨 여고보, 무슨 고보'로 끝나는 편인데, 그게 저 명칭의 줄임말이다. 유 관순의 모교인 이화학당도 곧 이화여고보로 바뀌었다.

끝으로 고등교육으로 가면.. 정식으로 '대학'이라는 명칭이 붙어서 학사학위를 주는 기관은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경성 제국 대학'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나머지 선교사나 한국인이 세운 학교들은 대학보다는 등급이 살짝 낮은 '전문학교'라고 불렸다. 일제는 조선인이 자체적으로 대학 간판을 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연세대는 '연희 전문학교', 고려대는 '보성 전문학교', 심지어 600년이 넘는 연혁을 자랑하는 성균관대도 '명륜 전문학교' 이런 식이다.
물론 전문학교라고 해서 커리큘럼까지 무슨 '만화 전문학교 허리케인 준' 같은 가벼운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법적인 등급이 정식 대학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거기를 졸업한 뒤에는 경성제대로 편입 정도나 가능했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 사립 학교들은 연혁이 긴 편이지만, 해방 후에 설립된 국립 학교들은 연혁이 상대적으로 짧다. 특히 서울대라고 해서 경성 제국 대학 시절의 역사를 자기 정통성에 결코 포함시키지 않는다.
국립대는 지역별로 고르게 흩어져 있는 종합 대학들 말고는 사관학교, 경찰대, 항공대, 철도대, 해양대, 이공계 특성화 대학, 예술대, 체육대처럼 특정 분야 기간 인력 양성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4. 몇몇 대학교 위치 관련 잡설

(1) 서울대는 서울 강북에 의대와 병원만 남아 있고.. (연건캠)
카이스트는 서울 강북에 경영대학원만 남아 있는 게 흥미롭다.;; (홍릉캠)
뭐, 연세대는 역사가 긴 덕분에 서울 서대문구의 노른자땅에 꽤 넓은 본캠을 점유하고 있다. 서울 역과도 가까운 편이고..

(2) 카이스트는 서울 강남에 도곡캠 건물도 있긴 하지만 존재감이 매우 희소하다.
서울대는 관악산 기슭으로 이사 가서 도심 접근성이 떨어졌다. 마치, 서울 종로구에 소재해 있지만 우리가 아는 그 느낌의 인서울은 전혀 아닌 상명대처럼 말이다.
하지만 서울대는 점유 면적 하나는 정말 방대하고 아름답다. 산을 참 많이도 깎아냈구나 싶더라.

(3) 연세 대학교는 정문 앞으로 '성산로'라는 큰길이 지나며, 정문 양 옆으로 두 개의 버스 정류장이 있다. 서쪽 정류장은 '연대앞'이고, 동쪽 정류장은 '세브란스 병원'이다.
두 정류장 사이의 거리는 330m 남짓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지하철이 아닌 버스임을 감안해도 짧다. 하지만 두 시설 모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이용객이 많기 때문에 버스들은 연대앞 정류장과 병원 정류장에 모두 일일이 정차하고 있다.

난 버스로 여기를 지날 때면 늘 대구 역과 동대구 역이 생각난다. 이 역 사이의 거리도 겨우 3.2km.. 저 버스 정류장 거리의 10배 정도밖에 안 되지만 KTX를 제외한 모든 열차들이 두 역에 모두 정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새마을호급 열차에서 가장 짧은 필수 정차 간격으로 손꼽히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9/05/12 08:35 2019/05/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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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오감도

다다이즘. 병맛. 유체이탈 화법.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아무말 대잔치.

요런 게 문학· 예술계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쯤 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초기 정도..
지금이야 인터넷 문화 코드가 가벼움 병맛이라지만, 그때 기존 통념과 권위와 관행, 질서를 모두 깨뜨리는 실험은 파격 그 자체였다.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이 극사실주의를 탈피해 이상한 형이상학 추상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간 것도 아마 이때와 비슷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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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국 문학에서 이런 일탈 쪽의 독보적인 권위자가 있었다. 바로 이 상(본명 김 해경, 1910-1937).
정말이지 참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어야 오감도 같은 시를 시리즈로 쓸까 싶다.
서 정주라든가, 이말년 씨리즈에 나오는 천재 문학인 박 달필(...;;;)처럼 문학만 판 사람과는 달리, 그는 이과 배경이 있는 사람이다. '건축무한육면각체', '이상한 가역반응' 이런 말을 만들어 낼 만한 사람은 한국 문학 역사상 저 사람이 유일하다시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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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최후) 이건 뭔가 박 달필 같은 느낌도 들긴 한다.
"오호 통재라! 과로는 어찌하야 나에게 쌍코피를 선물하느뇨! 시몬, 너는 아느뇨! 내 인증껍데기에 적혈구와 백혈구 트위스트 추는 모습을!" 말이다. -_-;;;

그의 소설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하는 그 날개, 그리고 시는 오감도가 유명하다.
오감도는 자기 전공 분야 용어인 조감도의 鳥(새)에서 획 하나만 삭제해서 烏(까마귀)를 만든 명칭이다. 요즘으로 치면 쏘나타 자동차 엠블럼에서 S자를 빼내서 오나타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하나만 쓴 게 아니라 무려 30회 시리즈를 신문에다 연재하려 했다. 조선중앙일보라고 오늘날의 조중동하고는 관계 없고 일제 말기에 폐간되고 없는 다른 신문이다.
신문에 총 30회 시리즈를 연재하려 했으나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이딴 걸 시라고 쓴 거야?"라는 독자들의 극렬 항의가 빗발치는 바람에 1934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딱 절반인 15회까지밖에 연재를 못 하고 짤렸다.
오감도의 첫 편이 바로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그 시이다. 원문은 한문 혼용이고 띄어쓰기가 없다.

그는 공부 왕창 잘했고 그림 내지 제도에도 조예가 뛰어났다. 자 없이도 직선을 척 긋는 건 캐드 같은 게 없던 옛날에 측량 기사로서 굉장히 큰 장점인 능력이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측량 기사로 일하면서 커리어 쌓았으면 돈도 많이 벌고 참 잘 나갔을 텐데.. 그는 좀 자폐 은둔형 천재였던 것 같다. 일본인 상사와 트러블을 겪은 뒤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와서 카페를 차리고 자영업을 시작했지만, 경영의 천재는 아니었는지 망하고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핵이 악화되어 죽었다.

생전에 제대로 인정을 못 받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겨우 27세 남짓한 나이에 결핵에 걸려 죽은 '비운의 천재'라는 점에서 그는 노르웨이의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1802-1829)과 비슷하다!
이 상이 해방 이후까지 천수를 누렸다면 난해한 암호 같은 시와 소설이 과연 얼마나 더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까지 경험했다면 분명 아스키 아트나 이모티콘 갖고도 재미있는 장난을 많이 쳤을 것이다.

그의 기행을 생각하면서 본인은 오감도를 날개셋 타자연습의 연습글로 수록해 봤다. 언제쯤 반영되어 홈페이지에다가도 정식으로 올라올지는 모르겠다. 이 글을 쳐 보면 타자 연습을 하는 사람도 내용의 해괴함에 멘탈이 붕괴되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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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9/05/05 08:36 2019/05/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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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2비트 컴파일러: 16비트 메모리 접근의 한계를 극복하기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1993년 말에 발매되었던 Doom 게임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3차원 그래픽 덕분에 게임 업계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업계 종사자들은 기술 수준 자체뿐만 아니라 "얘는 어셈블리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순수 C만으로 개발되었습니다"라는 존 카맥의 말에 더 큰 충격을 받게 됐다.

훗날(1997년) Doom의 소스 코드가 공개되면서 이 말은 사실임이 밝혀졌다.
Doom은 무슨 16비트 Windows 같은 쑤제 어셈블리어 튜닝 위주로 개발된 게 아니라, Windows NT처럼 굉장히 이식성 있게 개발되었다. 그러니 Doom 엔진 기반의 수많은 게임과 mod들이 온갖 플랫폼으로 이식되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단지, 오리지널 도스용의 경우, 컴파일러를 그 당시에 흔하던 볼랜드나 MS 같은 16비트용을 쓴 게 아니라 Watcom이라는 다소 생소한 32비트 고성능 제품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어셈블리어를 안 쓰더라도 고정소수점이라든가, IEEE754의 특성을 이용해서 3차원 그래픽용 실수 연산(삼각함수, 제곱근, 벡터 정규화...)을 왕창 빠르게 수행하는 각종 tweak들은 응당 최대한 구사해서 성능을 끌어올렸다.

그러니 Doom은 아직 상대적으로 생소하던 32비트 컴파일러라든가 DOS/4G 도스 익스텐더 같은 물건의 인지도를 끌어올려 줬다. 이렇게 Doom을 통해 Watcom 컴파일러까지 알렸던 id 소프트웨어에서는 훗날 퀘이크를 만들어서 이번에는 오픈소스 진영의 걸출한 도스용 32비트 컴파일러이던 djgpp를 알리게 되었다.

운영체제 자체를 OS/2나 Windows NT처럼 통째로 32비트로 쓰기에는 아직 기계값이 너무 비싸고 특히 메모리가 부족했다. 그러니 도스에서 돌아가는 일부 대형/고사양 프로그램이 자체적으로 도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호 모드로 진입하는 솔루션을 내장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국내에서도 아래아한글 2.1이 전문용은 Watcom C/C++을 이용한 32비트 전용으로 만들어졌다. 얘는 발매 시기가 심지어 Doom보다도 3개월 남짓 더 앞섰다(1993년 9월 vs 12월). 그러니, 터보 C, 볼랜드 C++ 하던 그 시절에도 32비트 컴파일러에 대해서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기는 했던 모양이다.

다만, 아직도 286 똥컴이 많이 굴러다니고 서민용 운영체제들은 아직도 16비트 도스와 Windows가 주류인데, 내 프로그램을 386 전용으로 개발하는 것에 대한 득과 실을 신중하게 따져야 했다. 오죽했으면 아래아한글도 후속 버전인 2.5와 3.0에서는 일반용/전문용 구분이 없어지고 그냥 hwp86.exe와 hwp386.exe 두 에디션을 모두 내장하는 것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추가 글꼴과 사전 컨텐츠는 '확장팩'으로 분리되고 말이다.

아래아한글은 Phar Lap 도스 익스텐더를 사용했다. 아래아한글이 그 시절의 도스용 게임처럼 DOS/4G(W) 로고를 띄우면서 실행되었다면 무척 볼 만했을 것이다.
86과 386 에디션은 성능 말고는 덧실행 프로그램이 지원되는지의 여부가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덧실행은 16/32비트용이 따로 나오지 않고 32비트 전용이었기 때문이다.

화면 보호기들, 그리고 확장팩에서 제공되었던 프라임 영한사전도 다 덧실행 프로그램이었다.
먼 옛날 1.2 시절에는 별도의 액세서리로 테트리스 게임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게 덧실행으로 컴백한 걸 보니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웠었다.

이렇게 1990년 중반에 도스용 프로그램들의 32비트화 추세와 달리, 마소는 진작부터 PC에서 도스를 Windows로 대체하려는 큰 그림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도스용으로 32비트 컴파일러를 결코 내놓지 않았다. 정작 자기들은 그 기술을 내부적으로 보유하고 사용했으면서 말이다.
Visual C++ 1.5x는 16비트 도스/Windows 바이너리들을 빌드할 수 있었는데, 명령 프롬프트에서 돌아가는 컴파일러와 링커 같은 툴들은 그냥 32비트 프로그램이 아니라 32비트 PE 기반의 콘솔 프로그램이었다.

Windows NT 같은 데서는 직통으로 실행 가능하고, 도스에서 실행되면 stub으로 embed된 도스 익스텐더가 컴을 보호 모드로 진입시키고 CreateFile/GlobalAlloc 같은 Win32 API를 제공해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스레드를 만들지는 못했겠지만 컴파일러· 링커가 사용하는 Win32 API야 뭐 파일이나 메모리 I/O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건 도스 익스텐더가 감당 가능했다. 결국 한 바이너리만으로 도스와 Windows에서 모두 사용 가능.

이건 뭐 콘솔 프로그램계의 Win32s나 마찬가지인 엄청난 기술인데.. 마소의 Visual C++에서 이런 이중 바이너리를 만드는 걸 end-user에게 지원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마치 C# 네이티브 코드 컴파일러만큼이나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고 마소 내부에 봉인된 기술인 것 같다.

2. 슈퍼 VGA 라이브러리: 표준 VGA의 한계를 극복하기

IBM 호환 PC라고 불리는 물건에서 IBM이 주도하는 PC의 단일/표준 규격이라는 건 286 AT 이후로 없어졌다. 그러니 286 이후로 최초의 386 PC는 IBM이 아닌 컴팩에서 출시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래픽 카드도 절대불변 단일 표준은 1987년의 구닥다리 VGA가 마지막이다. 표준 VGA는 800*600 해상도조차 지원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색깔이 아쉬운 대로 다양해진 256색은 겨우 320*200에서밖에 지원되지 않아서 업무라기보다는 그냥 게임 전용 모드로만 쓰였다.

그 뒤로 VGA보다 더 높은 해상도와 더 많은 색상을 지원하는 규격은 그야말로 온갖 싸제 SVGA 제조사들이 난립하면서 파편화 천국이 됐다. VESA 같은 규격이 괜히 필요해진 게 아니다.

이게 불과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니, 앞에서 언급한 보호 모드가 어떻고 DPMI가 제정되던 때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하긴, 1990년에 나온 그 옛날 프로그램인 Deluxe Paint조차도 처음 실행될 때 맨 아래에 1024*768 256색 SVGA 모드가 있긴 했다. 물론 당대에 그걸 선뜻 고를 수 있을 정도의 금수저 컴퓨터를 소유한 사용자는 매우 소수였을 것이다.

마소의 베이직 컴파일러야 SCREEN 명령으로 SVGA 지원은 전무했다. API 구조가 완전히 다른 3rd-party 라이브러리를 구해서 써야 했다.
볼랜드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낫다. 비록 자체적으로는 VGA까지밖에 지원하지 않았지만, 일종의 그래픽 드라이버인 bgi 파일이 내부 스펙이 공개돼 있고 확장 가능했기 때문에 이걸 기반으로 SVGA 라이브러리를 만든 곳이 있긴 했다.

검색을 해 보니 Jordan Hargraphix 소프트웨어가 이 업계의 독자적인 큰손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1991년 무렵부터 유명했다.
바이오스를 거치지 않고 일명 VGA mode X라고 불리는 320*240, 400*300 같은 변형 모드까지 다 지원했다.
그때는 소프트웨어가 잘못된 명령을 내려서 컴퓨터만 뻗게 하는 게 아니라 모니터를 손상시키는 것도 가능했던 시절이다. (주사율 변조..) 옛날에 CGA도 160*100 같은 tweak mode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만큼이나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BGI라는 그래픽 API는 무려 1980년대 후반에 개발된 것이며, 아무리 bgi 드라이버를 새 하드웨어에 맞게 확장한다 해도 256색 이상의 색을 지원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한다. 트루컬러 SVGA를 지원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독자 라이브러리를 써야 했다.
BGI는 색상을 관리하는 게 RGB값 기반이 아니라 팔레트 인덱스 기반으로 고정돼 있었던 모양인데, 16비트 시절에 이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쟤가 무슨 Windows GDI 급으로 하드웨어 통합과 추상화를 표방한 물건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도스용 아래아한글은 16비트 바이너리의 경우 Turbo/Borland 컴파일러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아주 초창기인 1.x 시절부터 그래픽 라이브러리를 독자 구현했는지, 볼랜드의 보급 BGI 라이브러리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이건 비슷한 시기에 도스용 한메 타자 교사도 마찬가지다. 얘도 MS C로 개발되었지, 의외로 볼랜드 출신이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3/23 08:31 2019/03/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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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들 중에는 주인공이 극단적인 사고 또는 범죄를 당해서 특이한 위험한 장소에 갇히고 거기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태인 것이 몇 가지 있다.
이런 장르는 촬영 영역이 아주 좁고 등장 인물도 적은 특성상, 대작을 만들기는 어렵다. 하지만 굉장한 저예산으로도 작품을 너끈히 만들 수 있으며, 잘 만들면 스케일 대비 소재와 설정이 참신하다고, 작품성이 훌륭하다는 칭찬도 들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는 (1) <베리드(Buried)>(2010)이다. 주인공은 생매장-_-을 당해서 지하의 관짝 안에 있으며, 영화는 온종일 이 좁은 관 안에서만 진행되니 촬영 하나는 기가 막히게 단순하고 쉬웠을 것 같다. 관을 구성하는 직육면체 옆면 네 개 중에서 하나는 촬영을 위해서 뜯어냈을 것이고..

주인공은 유일한 희망인 휴대전화로 전화 통화를 하면서 외부 사람에게 자기 위치를 알려주고 구조 받으려 애쓰지만.. 거기 지역이 지역인지라 일이 영 쉽지 않다. 영화 자체는 공식적으로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주인공은 사실상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은 명을 단축하는 그 어떤 치명상도 입은 게 없다. 하지만 저렇게 좁은 관 안에서 누운 채 꼼짝달싹 못 하는 채로 목마르고 굶주리며 아주 서서히 죽는 건 단칼에 푹찍악 해서 죽는 것 만만찮은 비참한 죽음인 게 틀림없다. 당장 화장실도 못 가고 변을 그 자리에서 배출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자..;;

사람은 가만히만 있어도 언젠가는 죽는다. 허나, 아무리 사람이 물리적으로 연약하다 해도 그 명줄이란 게 호락호락 쉽게 금방 끊어지지는 않는다. 좀 민망한 얘기이다만,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더 빨리 죽으려고 굳이 목을 매달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번개탄을 피우는 등의 수고를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조선에서는 사도세자가 관은 아니고 뒤주에 갇혀서 저렇게 죽었다.
<킬 빌 2>(2004)에서는 잘 알다시피 버드가 주인공 키도를 제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 주겠다면서 생매장을 해 버리는데, 이건 나름 머리를 쓴 조치였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생매장 씬이 10여 개에 달하는 전체 스토리 중 극히 일부 에피소드만을 구성할 뿐이며, 결정적으로 주인공이 비현실적인 인간 흉기인 관계로... 정권으로 관을 때려부수고 무덤을 탈출한다는 차이가 있다.

<베리드>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이것 말고 (2) <화씨 247도>(2011)는 주인공 남녀 일행이 뜨거운 사우나 안에 갇혀 버리는 내용이다. 문의 자그마한 유리창을 주먹으로 쳐서 깬 덕분에 최소한의 환기와 냉각은 가능해졌지만, 사우나는 어차피 온도에 따라 화력이 자동으로 조절되고 있으며 세 명이나 되는 사람이 얼굴을 거기로 들이민 채로 잠을 잔다거나 할 수는 없다. 나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데, 결말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결국 죽는다..;;

(3) <12피트>(2017)는 자매지간인 아가씨 두 명이 커다란 수영장 내부에 갇히는 내용이다. 수영장의 수면 위로 덮개가 쳐지는 바람에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기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 상태로 수영장 관리자는 퇴근을 해 버리고, 그대로 불금 주말이 시작된다..;; 주인공들은 점점 지쳐 가고 체온이 떨어지는데..
다행히 수영장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긴 하지만, 관객들 열불나게 하는 짓을 벌이면서 주인공들을 호락호락 구해 주지 않는다.

<화씨 247>은 짐작하다시피 사우나의 내부 온도를 나타내며(섭씨 거의 120도), <12피트>는 수영장의 깊이를 나타낸다(3.7미터). 둘 다 주인공들이 처한 극한 상황의 특성을 제목으로 뽑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런 장르의 영화 소재를 앞으로 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령, 엘리베이터 안에 갇히는 건... 설마 했는데 (4) <데블>(2010)이라는 작품이 있다. 5명이 타고 있던 고층 건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 나는데, 무척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긴 하다만 불이 잠시 나갈 때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한 명씩 다치거나 죽는다.;;

밀실에서 범인이야 뻔한 노릇인데, 저 탑승자를 뒷조사 해 보니 저마다 사기꾼, 폭력 전과 등등 경력이 화려하다.
현실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충분히, 너무 안전하게 만들어져 나오기 때문에 고증을 많이 무시하지 않고서는 저런 식의 영화화가 곤란할 듯하다.

끝으로, 좀 옛날 영화인 (5) <폰 부스>(2002)는 사건 전개 장소가 시내 한복판이니, 사우나나 수영장 같은 통상적인 감금의 범주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빌딩숲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저격수를 설정해서 "그 전화를 끊는 순간 네놈 목숨도 끊어질 줄 알아라"로 주인공의 발을 꼼짝달싹 못 하게 묶어 놓는 게 흥미로운 설정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3/19 08:34 2019/03/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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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 외

1. 영화

올해는 3· 1 운동 발발 100주년인 해답게 이 타이밍에 맞춰 유 관순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적절하게 개봉했다. 말모이에 이어 또 일제 시대 배경 영화이긴 하다만, 이것도 명분이 충분하기 때문에 본인은 관람을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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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안 그래도 3· 1 운동 자체가 아니라 유 관순의 투옥 이후 시점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실제로 구경하고 나면 영화의 공간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니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분은 사전에 저기부터 가 보시기 바란다.

본인은 9년 전, 이 블로그가 처음 생겼던 2010년 초에 가 봤다. 일반 감방뿐만 아니라 유 관순이 말년에 실제로 격리 수용됐던 지하 독방까지 직접 볼 수 있다.

  • 유 관순은 서대문(경성) 형무소에서 옥사
  • 강 우규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유 관순이 투옥된 시기에 서울 역 광장에서 사이토 총독의 암살을 시도했던 노인)
  • 훗날 조선어 학회 사건 연루자 두 분은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
  • 주 기철 목사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사

지역이 이렇게 대응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례적으로 흔치 않은 흑백 영화라는 것도 미리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킬 빌처럼 일부 주요 장면만 흑백인 것도 아니다(녹엽정 전투..).
현실의 형무소 장면은 죄다 흑백이고, 일부 과거 회상 장면이 컬러이다. 보통은 그 반대인 것 같은데 이례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또 항일 운동을 소재로 한 "자전차왕 엄 복동"도 개봉했다.
하지만 스포츠로 한국이 일본을 이긴 얘기를 극화하고 싶으면 차라리 손 기정 내지 홍 덕영 골키퍼 (해방 이후 월드컵 예선 한일전!)같은 사람이나 재조명할 것이지, 참신한 소재를 찾는답시고 자전거 도둑질도 전문이었던 사람을 소재로 삼은 게 논란이 됐다. 그 사람이 하다못해 친일파· 일본놈들만 상대로 의적(?)질을 한 것도 아니다.

소재부터가 삐걱거리는데 영화 자체도 그리 잘 만든 게 아니었고, 더 고퀄인 "항거"에게 팀킬 당하니 엄 복동 얘기는 예전의 "대장 김 창수"의 말로를 가면서 대차게 망했다. 뭐, 자전거 도벽은 아예 친일 변절이나 강도살인보다는 죄질이 상대적으로 가볍긴 하다만, 저 양반이 훔친 액수도 단순 생계형으로 실드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2. 3· 1 운동

그럼, 영화를 벗어나 3· 1운동 자체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해 보자.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까짓 만세 부른다고 해서 일제가 "아 그러셨어요~? ^^"물러가고 독립이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3· 1 운동은 주요 배경, 명분, 동기에 핀트가 근본적으로 안 맞는 게 있었다.

(1) 1910년대 일제 무단 통치에 대한 반감과 민생고(흉년, 물가 상승)는 그렇다 치지만 (2) 고종 독살 의혹은.. 글쎄, 고종이 무슨 세종대왕 급으로 추모 받을 성군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3) 민족 자결주의는 1차 대전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유 관순도 그 기백이 정말 대단하긴 하지만, 너무 무모하게 매를 벌지 말고, 1년 반 정도만 빵에서 살다가 나와서 공부 더 하고 더 오래 살았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만세 시위 때 자기 부모를 왜놈들한테 잃고 완전히 꼭지가 돌아 버렸을 테니, 그 뒤로 왜놈을 가족과 민족의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저놈들한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고집 부린 그 악바리와 깡과 근성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유 관순의 감방 동료로 나오는 권 애라와 김 향화(배우 이름이 아닌 배역 이름)는 실존 인물이다. 특히 김 향화는 수원에서 활동한 기생이다. 이 시절에 기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야시꾸리한 직업 종사자가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스튜어디스 급은 되는.. 단순 서비스 접대 이상으로 지와 미와 예능을 갖춘 사람이었다.

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이 일본놈들한테 학을 떼면서 뭐 저런 상또라이들이 있나(반자이 어택, 카미카제..) 경악했었다. 하지만 더 옛날에는 일본도 조센징들을 보곤 뭐 저렇게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 독종 또라이들이 있나 멘탈 대미지(반자이 트라우마..)를 입고 충격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20년대에는 문화 통치 유화책이 나오게 되었다.

흔히 호남 지역을 비하하면서 저기가 3· 1 운동 참가자 내지 투옥자가 제일 적었다는 통계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거기는 3· 1 운동 이전에 1890년대의 동학 운동과 1900년대의 의병 때문에 항일 인사들이 몽땅 토벌되고 씨가 마른 상태이기도 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통계 자체에 대한 조작과 왜곡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을 때 말이다.

3.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 영화와 배경 내용에 대해서 말할 거리는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일단 기독교 신앙이 의외로 꽤 자주 언급되는 게 인상적이고 좋았다. 유 관순은 실제로 교인이기도 했으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시험을 면하게는 하지 않아도 이길 힘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음", "예수님은 바보여서 저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줄 아냐" 무려 이 정도 분량이 대사에 포함돼 있다.

신앙 쪽으로 왜곡 없는 중립· 긍정적인 묘사 덕분에 본인은 처음엔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슬슬 올라갔다. 그러나 결말부를 보고는 기분이 완전히 잡쳐 버렸다.
정작 유 관순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너무 얼렁뚱땅 대충 자막으로 때워 버리고는, 그 뒤에 어설프게 또 이상한 친일파 드립과 반일 프레임 엮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군.. ㅉㅉ" 싶었다.

정 춘영인지 누군지 출신과 생몰 시기도 모르는 웬 듣보잡 조선인 헌병이 있어서 유 관순을 내내 괴롭혔다고 한다.
이놈은 친일 부역 행적이 탄로나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그 이름도 찬란한 모 할배의 특별 배려(!)로 사면되고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걸 말이라고 자막을 떡 걸어 놨으니 나도 꼭지가 돌아 버리겠다. 하지만 실상은 유 관순이 교인이었던 것만큼이나 할배도 교파까지 같은(감리교) 교인이었으며, 유 관순이 독립 운동가인 것만큼이나 반민특위를 불가피하게 해체한 배후 인물(애산 이 인)도 똑같이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어디 '정춘영 유관순 고문'이라고 검색을 해 보아라. 정확한 기록 같은 건 없고, 같이 걸려 나오는 건 유 관순이 무슨 미꾸라지 고문을 당하고 코가 잘리고 머리 가죽이 벗겨졌다는 얘기, 아니 도시전설 괴담밖에 없다.
그렇게도 친일 부역자 조선인 헌병을 개새끼로 만들고 싶으면 영화에다가도 미꾸라지 고문 씬을 넣지 그랬냐? 일본 제국주의 악마들이 겨우 손톱 뽑기 내지 캐비닛 안에 선 채로 며칠 감금 정도만 했을 것 같은가?

그리고 크레딧 롤이 올라가는 동안이나 작품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죽기 전에.. 그 이름도 유명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출처불명의 비장한 유언도 좀 나왔어야지? 안 그런가?

삼일 운동 그 자체가 조국의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이 항거는 외국에까지 소개되어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는둥, 그 정신이 지금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돼 있다는둥, 유 관순 말고 다른 여학생· 기생의 의거도 많이 벌어졌다는둥.. 클로징 멘트로 다른 좋은 말을 얼마든지 골라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마무리를 의도적으로 저 따구로 지은 저의가 뭐냐!? 매우 유감스럽고 씁쓸했다.

4. 3· 1 운동 때 투옥된 뒤에도 천수를 누린 다른 여성

옛날에 우리나라엔 '추계 최 은희(1904-1984)'라고 무려 1920년대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여성으로서는 거의 국내 최초로 기자라는 직업에 종사한 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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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유 관순보다 약간 어릴 뿐 거의 같은 연배이다. 3· 1 운동에 가담하다가 붙잡혀서 세 주 남짓 옥고를 치르면서 험한 꼴을 봤지만, 그 뒤엔 풀려나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기자도 됐다. 덕분에 방송을 타고 비행기도 타 보는 등, 일제 시대 조선 여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참고로 3· 1 운동 당시의 소속이 유 관순은 이화학당, 저분은 경성여고보)

이분의 호인 '추계'는 추계 예술 대학교의 설립자하고는 관계 없다. 그 추계는 황 신덕(1898-1983)이라는 다른 사람의 아호인데, 저분 역시 최 은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여성이며, 3· 1 운동에 가담했고 기자 커리어까지 있는 것이 서로 굉장히 비슷하긴 하다. 아마 서로 아는 사이였지 않을까?

호 다음으로 '최 은희'라는 이름은 국내에서는 영화 배우의 이름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두 단어를 합친 '추계 최 은희'라는 사람은 인지도가 낮으며, 언론 쪽 종사자가 아니면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언론인 출신 최 은희가 영화 배우 최 은희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인물이다. 추계 최 은희는 대학을 설립한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을 딴 '최은희 여기자상'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저분은 결혼 후에는 기자 커리어가 중단되었다. 허나, 1남 2녀를 낳아서 세 명 모두 박사까지 공부 시키고 유학도 보내고 전부 대학 교수로 키웠다.;; 그 중 막내딸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한 이 혜순으로, 2000년대 중반에 정년 퇴임했다.

본인은 먼 옛날에 "유쾌한 구두쇠들"(1994)이라는 책을 통해 저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공 병우 박사, 남 기심 교수, 이 혜순 교수(두 교수 다 국문과이구나.. 세부 전공은 다르지만) 등 17명의 유명인사가 공동 집필한 책인데, 다들 비범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도 엄청 많이 번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일상생활은 서민들 이상으로 정말 둘도 없이 검소하게 효율적으로 하면서, 옳은 일 큰 일에 아낌없이 돈을 쾌척한 얘기들이 실려 있다. 지금은 시대에 맞게 저 책 내용이 웹툰으로 각색되어서 연재되면 어떨까 싶다.
다만, 저자 중에 지금은 완전히 몰락한 방송인 서 세원 씨까지 포함돼 있는 게 참 묘하다.

이 혜순 교수는 저 책이 나온 지 10년이 넘게 지나고 나이 70을 바라보는 명예교수가 된 뒤에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변함없이 자기 어머니라고 회고했다. (☞ 관련 링크)
뭐, 인생 한번 짧고 굵게 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유 관순 같은 인물이 형무소를 살아서 출소해서 공부 더 하고 후세도 남겼으면 인생이 최 은희와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3/11 08:36 2019/03/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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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기 공부하는 걸 외국어에다 비유한다면, 피아노는 기본 중의 기본이요 만국 공용어인 영어에 대응할 듯하고, 그 다음에 일본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2군에 대응하는 건 학교 음악 시간에도 접하는 작고 간편한 악기(리코더, 멜로디온, 실로폰, 하모니카...) 내지 바이올린· 기타· 플루트처럼 교육과정엔 없지만 일반인에게 비교적 친숙한 악기가 될 듯하다.

3군으로 가면 2군과 비슷하지만 살짝 더 마이너한 악기들까지 포함된다. 가령, 현악기라면 바이올린 대신 첼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말이다. 본인은 색소폰도 2군보다는 3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Looking for you 때문에 색소폰을 잠시 배워 봤지, 그게 아니었으면 교회 음악으로 더 적절한 2군 악기를 골랐지 싶다.

2.
건반악기가 여러 종류가 있지만 피아노는 망치로 내부의 줄을 때려서 소리를 낸다. 오르간과 멜로디온은 페달질이나 입을 통해 공기를 따로 공급해 줘야 소리가 나며, 소리도 피아노 소리와는 다르다. 보급형 오르간은 옛날에 시골 학교나 교회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싹 사라졌다.
피아노의 페달은 음향 바리에이션 필터 역할만 한다. 3개 중 가운데의 것은 소리를 줄이는 소음기(silence), 오른쪽 것은 크게 울림(vibration??)인데 왼쪽 페달의 역할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피아노라는 건 외형이 전통적으로 두 계열로 나뉜다. (1) 윗뚜껑이 마치 자동차의 엔진 후드처럼 열려 있으며 표면이 직사각형도 아닌 곡선 모양인.. 일명 '그랜드 피아노', 아니면 (2) 그냥 높고 밋밋한 직사각형 상자처럼 생긴 'upright 피아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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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나 학교에서는 (2)를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공연장에서는 무조건 닥치고 (1)이 필수이다. 이건 마치 학교의 보급형 풍금과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2)가 가격이 더 저렴하고 공간도 덜 차지하기 때문에 훨씬 더 서민 지향적이다. 하지만 (2)는 (1)에 비해서 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일단 자동차의 V형 엔진과 L형 엔진이 실린더의 배치가 차이가 있듯이, 내부의 망치와 발성 장치를 배치한 방식이 어떤 형태로든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실, (1)이 우리가 생각하는 피아노의 원형에 더 충실한 모습이며, 처음에 발명된 피아노도 원래는 (1)과 같은 모양이었다고 한다.

3.
대부분의 악기들은 사람이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악기는 사람이 혼자서 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무겁다. 피아노가 대표적으로 이런 급이기 때문에 악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라(세례??) 연주자가 악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침례??).

하프는 그 경계에 속하는 것 같다. 악기의 인지도 자체는 굉장히 높은 반면, 현실에서의 존재감은 본인이 느끼기에 최소한 4군 이하.. 언어로 치면 한국인에게 무슨 알바니아· 불가리아어, 헝가리어 같은 매우 마이너한 악기이다. 일단 크기부터가 대형 하프는 높이는 거의 사람 키 만하고 무게는 40kg이 넘는다고 한다. 프로 전공자가 사용하는 최고급 물건은 단가가 거의 제네시스 이상 고급 승용차의 가격에 맞먹는다(수천만~억).

그런데 이건 개인용 악기를 매번 들고 다녀야 한다. (피아니스트가 자기 전용 피아노를 들고 다니지는 않을 텐데!) 여느 가구 옮기듯이 옮기다가 어디 잘못 건드리고 흠집이라도 났다간??
그렇기 때문에 하프는 운반만 전문으로 담당하는 업자가 있다고 한다. 페이지 터너(넘돌이 넘순이)만큼이나 음악에서 보이지 않는 조연 역할이다. 악기도 무슨 보험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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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으로.. 악기 중에서 입으로 불어서 본체에다 바람을 주입하여 소리를 내는 물건을 관악기라고 한다.
관악기는 더 세부적으로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로 나뉘는데, 말은 그렇게 써 놨어도 오늘날 '목'이냐 '금'이냐 하는 실질적인 분류 기준은 악기의 재질이 아니라 악기의 메커니즘 내지 발성 방식이다.

목관악기는 숭숭 뚫린 구멍을 막는 방식을 달리해서 음높이를 표현하는 일명 '피리'형 악기의 총칭이다. 그 반면, 금관악기는 구멍이 아니라 입술 상태 내지 밸브로 음높이를 표현하는 '나팔'형 악기의 총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루트나 색소폰은 각각 니켈이나 황동 같은 금속 재질이며, 특히 색소폰은 한쪽 끝이 크게 튀어나와서 나팔을 좀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목관악기로 분류된다. 둘 다 리코더처럼 구멍을 막아서 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뭐, 플루트는 과거에는 실제로 재질도 목재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색소폰도 입이 닿는 reed는 엄연히 목재이긴 하다. 도대체 이 자그마한 나무 조각이 무슨 역할을 하길래 이게 없으면 소리가 나질 않는다니, 악기의 물리학은 신기하기 그지없다.

5.
그런데 피리형 악기는 입술과 수평으로 평행하게 배치해서 부느냐, 아니면 수직으로 배치해서 부느냐로 나뉘는 것 같다. 플루트는 수평형이지만 나머지 리코더, 단소, 색소폰, 오보에, 클라리넷 등 대부분의 목관악기들은 수직형이다.
플루트 말고 다른 수평형 악기가 존재하는지?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삘릴리 개굴개굴 삘릴릴리"라고 개구리 왕눈이에서 주인공이 부는 피리는 그래도 플루트에서 모티브를 땄는지 수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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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는 일단은 수평형이긴 하지만 이걸 목관이라고 봐야 할지 금관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다. 구멍 같은 건 없고, 악기에서 마우스피스에 해당하는 부위가 점이 아니라 선분인 셈인데.. 그리고 하모니카는 부는(미는) 것뿐만 아니라 빨아들이는(당기는) 동작도 있는 거의 유일한 악기이다. 반음을 표현할 수 없어서 불편하지만 크기가 아주 작아서 휴대하기엔 좋다.

6.
오보에와 클라리넷은 길이, 두께 같은 외형(...)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단지 꼭대기 부분이 외관상 명백하게 차이가 난다(아래 사진에서 꼭대기가 은색으로 뾰족한 게 오보에). 그리고 클라리넷이 좀 더 색소폰에 가까운 웅웅~은은한 소리가 나고, 오보에는 코맹맹이 같으면서도(나쁘다는 뜻은 아님) 더 고유한 음색을 갖춘 소리가 난다.

본인은 오보에의 소리가 더 마음에 들고 음반 같은 데서 확실하게 들은 기억도 난다. 그래서 둘 중 하나만 배울 기회가 있다면 오보에를 불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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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를 진짜로 잡지 않아도 저렴하게 쇠고기 국물 맛을 내 주는 화학 조미료가 식품계에 존재하듯.. 음악계에도 소리 파형을 조작하여 실존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내 주는 신시사이저가 존재한다.
옛날에 주파수 변조만으로 수십 수백 가지의 악기를 구현했던 그 특유의 애드립 FM 음악(standard.bnk), 그리고 어지간한 PC용 운영체제에 내장돼 있는 미디 신시사이저들을 살펴보면 나름 바이올린, 피아노, 색소폰 등 기성 악기들을 구현했다고 그런다. 하지만 실물 악기의 소리와 비교해 보면 그냥 육개장 사발면과 실제 육개장의 차이와 비슷한 차이가 느껴진다.

최소한 큐베이스, 로직 같은 전문적인 오디오/음악 편집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비싸고 계산량도 많은 가상 악기를 동원해야 실물 악기와 비슷해진다. 마치 페인터의 브러시 엔진이 실물 종이와 물감을 일일이 시뮬레이션 하듯.. 악기의 물리적인 구조와 공기 진동을 일일이 다 시뮬레이션 해야 실물 악기의 모든 특성을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다양한 악기는 외국어뿐만 아니라 글꼴에다가도 비교할 수 있는데, 실제로 '사운드 폰트'라는 명칭이 존재한다고 한다.

8.
그러고 보니 악보와 음표· 음자리표 따위에 대해서도 취향별로 다양한 font family라는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다못해 옛날 찬송가와 21세기 새찬송가만 해도 악보· 음표의 스타일이 미묘하게 달라져서 같은 공간 안에서도 새찬송가의 음표가 약간 더 큼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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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악보들 중 우측 하단은 가사를 적은 한글만 밋밋한 굴림체인 게 아니라, 그야말로 음표와 조표들도 너무 밋밋하고 베이직한 스타일이다.
음악과 타이포그래피의 만남인가? ㅎㅎ

9.
독일어는 가히 음악인의 언어인 것 같다. 전공자들이 독일 유학을 워낙 많이 가니까 말이다. 정작 나타냄말 내지 셈여림 언어는 다 이탈리아어인데, 얘는 어쩌다가 주류에서 밀려났는지 모르겠다.

10.
끝으로.. 서양은 수학· 과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도 어쩜 저렇게 눈부시게 발달했나 모를 노릇이다. "우리의 것" 발굴하는 분들에게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고 어차피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 생각일 뿐이긴 하지만, 본인은 국악은 막 듣기 좋거나 예술성이 크게 뛰어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맨날 천날 암울하게 한이 서리네 어쩌네 하고, 주류 민요라는 게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딴 식으로 찌질하게 한풀이나 하고 있다. 서양 음계처럼 음이 다양한 것도 아니고 앵앵앵 소리도(해금??)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에 비하면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라고 볼 수 없다.

국악 스타일의 찬양도 말이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부류는 뭐, 흥겨운 건 인정하지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처럼 막 심금을 울리고 감동적이고 깊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반도에서 그나마 정말로 자랑스럽고 선한 게 나온 건 한글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9/03/05 08:33 2019/03/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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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라진 상식들

  • 포경 수술: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남자에게 무조건 닥치고 필수라고 여기는 풍조가 아주 강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하던 것을 아예 영· 유아 때 일찌감치 시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의학적으로 볼 때 이걸 모든 사람이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우리가 무슨 구약 유대인도 아니니 말이다.
  • 때밀이: 비누칠을 해서 기름때와 땀을 씻고 냄새는 제거해야겠지만, 굳이 피부가 벌개질 정도로 박박 문질러서 때를 미는 것은 피부 건강에 아주 안 좋다는 것이 입증돼 있다. 피부과 의사들은 심지어 가려운 데를 긁는 것조차 하지 말라고 권할 정도이다.
  • 피부 태움: 과거에는 이 과정에서 비타민 D가 합성되기도 하니.. 썬탠이 몸에 좋은 것처럼 포장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외선이 야기하는 피부 노화와 피부암 등 더 큰 해악들이 알려진 뒤부터는 그런 거 없다. 자외선은 살균 용도로나 써야 하는 것이고 물건이 아닌 피부에 쬐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물론 실외에서 운동과 신체 활동은 해야겠지만, 비타민은 그냥 식품이나 영양제를 통해 보충하는 게 더 낫다.
  • 혀 지도: 혀의 끝부분은 단맛을 느끼고 양 옆은 짠 맛과 신 맛, 그리고 제일 안쪽은 쓴맛을 느낀다네 어쩌네 하는 것.. 거의 혈액형 성격설에 필적하는 낭설인데 이게 무슨 근거로 오랫동안 옛날 과학 서적에 소개되었는지 모르겠다. 혀의 모든 부위가 한 치의 예외 없이 동일 균일한 방향과 크기로 미각 센서가 장착된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까지 부위별로 용도가 딱딱 나뉠 정도인 건 전혀 아니다.
  • L 글루타민산나트륨, 일명 MSG: 20세기에는 가공 식품 공포증의 주범으로 인식되었으나, 현재는 오랜 실험을 통해 그 의혹이 부정되고 매우 안전하다는 것이 밝혀진 지 오래다. 보통은 가성비 뛰어나던 화학 물질이 나중에 인체나 환경이 아주 안 좋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저 조미료들은 일단 그렇지 않다.

하긴, 본인은 샴푸 무용론도 오래 전에 접한 바 있다. 샴푸를 안 쓰고 맹물만으로 머리를 감으면, 처음 당장은 두피의 개기름이 제대로 씻겨 나가지 않아서 찝찝하지만 나중엔 상태가 더 좋아다고 말이다. 본인은 그건 반신반의하면서 지금까지도 차마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때조차 밀 필요가 없다니 샴푸 무용론과 비슷한 맥락의 얘기로 들린다. 피부의 개기름과 각질은 적정 수준은 그냥 있는 게 건강하고 평형을 유지하는 정상인가 보다.

2. 빨간약

요즘도 쓰이는지 모르겠는데.. 상처 났을 때 바르는 소독용 '빨간약'이라는 게 있다. 본인의 기억에도 10살 이하 어린 시절엔 키가 작기도 하고, 가다가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어머니나 양호 선생님(지금은 보건 교사라고 명칭이..)의 처방은 단순히 반창고만 바르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저런 '빨간약'을 바르는 것이었다.

본인은 그게 과산화수소수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병이 대체로 빨갛지, 원액이 붉은 것 같지는 않다. 얘는 살균· 표백 효과가 있다.
그것 말고 진짜로 시뻘건 액체는 머큐로크롬이라는 약품이다. 효과가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름에 대놓고 쓰여 있듯이 수은 함유가 논란이 되어 훗날 퇴출되었다. 과거에 유연휘발유가 '납'이라는 명칭을 교묘하게 숨긴 상품명으로 판매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얘 때문에 진짜 사람이 수은 중독으로 해를 입었다는 사례가 정확히 보고되고 입증된 건 없다. 하지만 건전지고 온도계고 생필품에서 수은은 온통 퇴출되는 게 추세이니 상비약 분야도 이 관행을 따르고 있다.

이것 말고 다른 빨간약은 요오드 팅크인데, 얘는 진짜 red보다는 브라운 갈색에 더 가깝다. 정확한 효능이나 부작용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도 다 포비돈 요오드니, 클로르헥시딘이니 하는 다른 약으로 대체되고 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약사가 문득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 구내염에 즉효약이라는 알보칠은 일반적인 피부 상처 소독· 살균제와는 성분이 어떤 차이가 있나 궁금하다. 안 아프다고 거짓말은 안 하네.. you only pain once라고 얼마나 병맛스러운 CF를 만들었는지.. 그래도 고퀄이다..ㅋㅋㅋㅋ
  • 그나저나, 저 빨간약을 자주 접하던 본인의 어린 시절에는.. 체했을 때 엄지손가락을 실로 감고 압박해서는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서 피를 내는... 일명 '따기' 시술도 받은 적이 있다. 이건 의학적으로는 별로 검증받거나 권장되지 않는 걍 "엄마손은 약손" 민간요법이지 싶다.

3. 요즘 와이퍼 워셔액에서 냄새가 나는 이유

본인은 얼마 전, 업무상 회사의 다른 동료의 차를 같이 탈 일이 있었다.
운전자분이 앞유리를 닦느라고 워셔액을 분사하자 차내에까지 자욱한 술 냄새가 몇 초간 풍겨 왔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에탄올 워셔액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동차 와이퍼용 워셔액은 단순히 세제나 부동액만 탄 물이 아니며, 증발 잘 하라고 알코올 같은 가연성 물질도 첨가된다. 그런데 딱 올해, 2018년 1월부로 메탄올 워셔액은 제조· 유통이 전면 금지되었다.
마치 과거에 유연 휘발유가 완전히 퇴출되고 무연 휘발유로 대체된 것과 비슷하다. 메탄올은 인체에 매우 해로운 독극물이며, 그걸 워셔액으로 쓰면 메탄올 증기가 저렇게 차내에 유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메탄올 워셔액이 전세계에서 지금까지 수십 년간 쓰인 동안, 무슨 유연 휘발유(납 중독)처럼 워셔액 때문에 사람이 직접적으로 해를 입었다는 임상 증거는 내가 알기로 없다. 그리고 에탄올 워셔액은 메탄올 워셔액보다 훨씬 더 비싸기도 하다.

본인 차는 이미 구입 내지 주입해 놓은 옛날 워셔액이 아직 남아 있어서 당분간은 이걸 계속 쓰게 될 것 같다. 주성분을 살펴보니 역시 메탄올이 적혀 있다. 그 대신 워셔액 살포 시에 송풍 모드를 반드시 유턴 모드(....;; )로 해 놓는 건 잊지 않을 것이다.

4. 감기

감기는 다 비슷비슷하게 코와 목에 탈을 일으키는 한편으로 딱히 생명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 흔한 병이다. 그런데 증상은 다 이렇게 비슷할지언정, 감기를 실제로 일으키는 바이러스(균도 아니네..!)는 100여 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니 인체에 아무리 면역계가 있다 해도 해마다 서로 다른 감기에 걸리는 것에는 장사가 없다. 이거 뭐 기능은 동일하지만 내부 구현 방식이 제각기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 내지 악성코드를 보는 듯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감기약도 특정 바이러스만 딱 공략하는 백신이나 치료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약은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을 줄여 줄 뿐이고 실질적인 치유는 결국 신종 바이러스에 적응해서 놈을 잡아먹고 퇴치하는 신체가 직접 하게 된다. 그러니 따뜻한 물 마시고 푹 자는 게 좋다. 감기와의 전투는 인체의 idle time processing 때 집중적으로 치러질 테니까..

백신 무용론, 약 무용론 음모론 주장하는 진영이 그나마 최소한의 명분이 서는 분야가 감기이다. 하지만 고혈압, 당뇨, 암 같은 다른 진지한 병을 그런 민간요법, 자연 치유 같은 식으로 접근했다간 진짜 큰일 나니까 문제이며, 그나마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감기약도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을 줄이고 신체가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응당 있다.

감기에 걸리면 코가 막히고 쌕쌕거리고 콧물 나오고 일상생활이 미치도록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코를 그때 그때 풀어 주고 호흡은 입이 아니라 호흡 전문인 코로만 하도록 해야 한다.
입에는 콧물과 코털 같은 방어 장치가 없다. 입으로 장시간 호흡하면 입안이 마르고 세균에 노출되는 등 구강 건강에 절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참고로...

  • 인간과는 달리, 다른 동물들은 오로지 코로만 숨을 쉴 수 있다.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숨을 쉬는 게 가능하며, '사레 들림'이라는 현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듣기로는 구토라는 게 없는 동물도 있다고 들었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 감기와는 달리 인플루엔자, 일명 독감은 단순히 "증상이 더 심하게 발생하는 감기, 여러 감기들 중에서 위력이 센 대빵" 정도의 레벨이 아니다. 근본이 완전히 다르다. 의약계 종사자들은 '독감'이라는 이름이 굉장한 오해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이거야말로 물이 아니라 위험한 화합물인 일산화이수소라고 불러 줄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5. 화상과 동상

인체는 화학적 성분의 2/3 가까이가 수분인 관계로, 발화점 이상의 고온에 노출됐다고 해서 무슨 땔감 장작마냥 불이 붙어 활활 타지는 않는다. 종이 냄비· 종이컵으로 제한적이나마 물 끓이는 게 가능한 것을 생각해 보시라.

이 때문에 죽은 시신을 화장하는 것 역시 생각보다 연료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사람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숯덩이를 넘어 하얀 뼛가루만 남을 정도로 홀랑 불태우려면 굉장히 오랫동안 태워야 한다. 인체는 수분이 없는 표면의 털 정도라면 모를까.. 내부는 기름 끼얹고 불을 한번 붙여 놓는다고 알아서 잘 타 없어지는 재질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도시전설로 전해져 오는 인체 자연 발화 괴담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체는 수백 도 이상의 고온에서 그렇게 쉽게 불타지 않는 대신, 겨우 수십 도의 '낮은 고온'에서도 잘 익을 뿐이다. 그 익은 상처를 우리는 화상이라고 부른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그 부위가 넓어져서 신체의 손상이 심해지면 죽을 수 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고분자 단백질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한편, 화상의 반대편 극단은 동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인체는 불이 잘 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얼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동상과 그에 따른 괴저· 괴사는 단순히 저온에서 피가 잘 안 통하는 바람에 발생한다(영양분 부족, 산소 부족..). 처음엔 가렵고 따갑다가 나중에는 해당 조직이 감각이 없어지고 죽고 썩어 버린다.

물론 바닷물이 얼 정도의 극도의 저온에 맨몸으로 오래 노출되면 체액이 진짜로 얼 수도 있다. 그랬다가는.. 물의 부피가 커지면서 세포막이고 혈관이고 다 터지고, 이론적으로는 방사능 피폭 급의 끔살을 당할 수 있다.
인체 냉동 보존에서 기술적으로 걸리는 가장 큰 문제도 이것이다. 자동차의 냉각수에다가는 부동액이라도 첨가할 수 있지, 체액은 그런 조치를 취할 수 없으니 말이다.

화재 현장에서 죽는 사람은 대부분 연기 질식과 내장의 화상 같은 간접적인 대미지 때문에 먼저 죽는다. 문자 그대로 산 채로 불길에 휩싸이거나 원자폭탄 급의 고온에 노출되어 형체가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몸에다 휘발유를 일부러 끼얹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것처럼 얼어 죽는 사람도 대부분 피 안 통하고 체온 떨어져서 기력이 다해서 스르륵 죽을 뿐, 액체 질소 같은 데에 퐁당 빠지기라도 하지 않는 한 문자 그대로 체액이 꽁꽁 얼어서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문자 그대로, 화학적으로 연소하거나 얼지만 않는다는 거지, 저런 죽음도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변함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27 08:33 2019/02/2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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