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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이야기

1. 석유를 나타내는 말

세상에 기름은 돼지 기름이나 버터 같은 동물성이 있고, 씨앗을 짜서 만든 식물성이 있으며, 한편으로 신기하게도 석유 같은 광물성이 있다. 석유는 사람이 먹을 수는 없지만 연소 내지 폭발할 때의 화력이 매우 좋아서 동력과 난방용 연료로 쓰이며, 플라스틱 같은 화합물을 만들 때도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한국어에서는 석유라는 단어의 어원이 말 그대로 '돌+기름'인데, 이는 영어 petroleum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앞부분 petro- 는... 진짜 말 그대로 성경의 '베드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베드로'가 무슨 뜻인지는 교회깨나 다닌 사람에게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정말 한국식으로 치면 돌이, 돌쇠에 딱 대응하는 이름이다. 乭이라고 한국식 한자까지 있다.

성경에는 '게바'(cephas)라고 해서 베드로의 히브리/시리아 식 번역 명칭도 요한복음과 고린도전서에서 몇 차례 나오는데, 둘 다 딱 stone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밑바탕을 가리키는 반석(페트라~~)보다는 개념적으로 작은 단어이며, 교회가 베드로의 위에 세워진 거라고 둘러대는 건 좀 말장난 오바이다. 아무튼..

petro 다음으로 oleum은 평범한 기름 oil이라는 뜻이고.. 그러니 petroleum은 그냥 '돌+기름'의 한자어 대신 라틴어 버전인 것이다. "일석" 이 희승과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미국식 영어에서는 이 단어를 잘 안 쓰고 어지간하면 다 '가솔린'에서 유래된 gas라고 싸잡아서 말한다. 좀 더 격식을 차린 영국식 영어에서나 석유 내지 주유소를 가리킬 때 "petro-"가 붙은 말을 쓰는 편이라고 본인은 들었다.

석유 원유를 분별 증류하여 나온 다양한 기름들 중, 오리지널 원유와 제일 밑의 중유만이 시커멓다.
휘발유와 LPG, 등유는 별도의 색소가 들어가지 않은 한 완전 무색 투명하며, 경유는 약간 노리끼리하다. 엔진 오일 정도 되면 좀 갈색에 가까워진다.

2. 국내 자원 사정

우리나라는 무슨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땅에서 석유가 펑펑 나고 전국민이 세금을 안 내도 될 정도인 그런 곳은 아니다. 다만, 원유를 수입해서 종류별로 잘 정제한 석유를 다시 수출해서 외화를 벌기는 한다. 이것도 나름 첨단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해에서 천연가스와 석유를 소량 채굴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시 영토· 영해를 통틀어서 기름이 단 한 방울도 전혀 안 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산유국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민망한 양이며, 몇 군데 개척한 유전 역시 곧 고갈이 예상된다. 화력과 원자력 대비 풍력· 태양력의 전력 생산량과 비슷한 비율이다.
그러니 큰 그림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석유가 나지 않으며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지구가 적도 부분이 수십 km 남짓 더 길다고 해서 지구가 대체로 '구'인 사실은 변하지 않듯 말이다.

우리나라에 아주 많이 매장돼 있는 건 석유 대신 석탄이다. 그것도 남한 땅에 많이 있는 건 증기 기관이나 화력 발전, 제철 같은 동력· 산업용으로 적당한 역청탄· 갈탄류가 아니라 연탄으로 만들어 가늘고 길게 오래 태우기에 적합한 무연탄 위주이다. 하지만 무연탄은 난방 인프라가 가스로 바뀐 뒤에는 크게 쓸모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석탄 채굴은 진작에 한물 간 사양 사업으로 간주되어 국가 차원에서 구조조정 됐다. 강원도 경제를 살리려고 강원랜드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끝으로.. 무연 휘발유 할 때의 '무연'은 연기(煙)가 아니라 납(鉛) 성분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석탄에서 무연탄은 진짜로 연기가 없다는 뜻이다. 석탄과 석유의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에 무연 휘발유가 처음 도입된 건 1987년 7월 1일부터이다.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가 도입된 시기(7월 6일)와 아주 비슷하다.
이때부터 새로 생산되는 차들은 무연 휘발유만 사용하게 조치가 취해졌으며, 5년 반 동안의 과도기를 거친 뒤 1993년 1월부터는 기존 유연 휘발유의 판매와 유통이 전면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국내의 주유소에 "보통 휘발유/무연 휘발유"가 공존하던 시절은 딱 저 때.. 노 태우 시절과 거의 정확하게 오버랩 된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응답하라 1988에는 그 고증이 반영돼 있었나 모르겠다. 이때 휘발유 값은 리터당 5~600원 이랬지 싶다.

옛날에는 수은이 건전지와 온도계에 쓰였지만(수은주) 지금은 안전 문제 때문에 안 쓰이고.. 석면이라든가 프레온 가스도 이제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연 휘발유도 노킹 방지를 위한 '납' 성분 첨가제가 문제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3. 석유 비축 기지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근처에 있는 지금의 하늘 공원이 옛날에는 '난지도'라는 하중도였으며, 오랫동안 쓰레기 매립장 역할을 해 왔다. 그 언덕 자체가 사실은 쓰레기 산이라는 게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거기 근처에는 '매봉산'이라고 인공이 아닌 자연 언덕도 하나 있는데, 거기 기슭에는 난지도 쓰레기장이 조성된 시기와 비슷한 1970년대 중후반에 석유 비축 시설이 만들어졌다. 저 때는 오일 쇼크 때문에 국가적으로 상당한 경제 타격을 입은 상태였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석유 비축량을 더 늘려야겠다고 충분히 생각할 만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쓰레기장에다 석유 기지까지.. 저기엔 서울 최외곽으로서 민간인 출입금지 님비 시설만 골라서 들어서게 됐다. 그러다가 지금은 더 버틸 수가 없어져서 난지도는 저 멀리 김포의 수도권 매립지로 대체되고, 석유 저장고 역시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 서울 근교에 있던 군부대와 공장이 더 외곽으로 이사 가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그리고 매봉산에 있던 석유 비축 기지는 작년부터 잘 알다시피 문화 시설로 탈바꿈 중이다. 그렇게 하는 게 주변의 월드컵 경기장 내지 각종 공원들과도 잘 어울린다.

그럼 지금은 서울· 수도권 근교에 석유 기지가 전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서울의 동쪽 끝에 있는 아차산에서도 또 동쪽 기슭..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리시에 한국 석유 공사에서 관리하는 기지가 있다. 보안 시설 기간 시설이니 지도에는 당연히 표시돼 있지 않으며, 산 속에서도 잘 숨겨져 있기 때문에 정규 등산로만 다녀서는 이런 게 있는 줄 눈치 채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조직 구조가 어찌 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한국 석유 공사는 옛날 유공(대한 석유 공사, 현재는 SK 에너지)과는 뿌리가 다른 공기업이다.
하긴, 학회 이름만 해도 분야가 비슷한데 "대한 ..학회"랑 "한국 ..학회"가 서로 따로 노는 경우가 있다만..

옛날엔 냉동 기술이 없었던 관계로, 여름에 얼음은 굉장히 비싼 사치품이었다. 석빙고니 동빙고· 서빙고 같은 창고를 만들어서 겨울철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얼음을 국가 차원에서 비축해서 관리해야 했다. 그리고 왕이나 외국 사신 같은 국빈 VIP가 납셨을 때에나 얼음보숭이를 만들어서 대접했을 정도였다.

그랬는데 이제 얼음은 가정집 냉동실에서도 만들고 구경할 수 있는 존재가 됐고, 얼음이 아니라 그 냉장고를 돌리는 전력 생산의 원동력(중 하나)인 석유를 국가에서 관리하게 된 셈이다.

4. 송유관

우리나라는 경제가 발전하고 자동차가 엄청 많이 보급되면서 석유의 소비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래서 그 많은 석유를 유조차만으로 수송하는 것에 한계에 부딪히자.. 사람으로 치면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과 비슷한 조치가 석유를 대상으로도 취해졌다. 바로 지하 송유관 건설이다.

장거리 송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1980년대부터 하다가 1990년에 대한 송유관 공사가 설립됐다. 지하철로 치면 마치 서울 메트로나 서울 도시철도 공사가 창립된 것처럼 말이다. 이때까지 국내에는 서산-천안처럼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단거리 송유관 몇 군데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2년 말에야 인천과 김포 공항, 인천과 고양을 잇는 '경인 송유관'이 개통했으며 1997년 8월에 서울에서 울산-여수를 잇는 '전국구 송유관' 인프라가 완공됐다고 한다.
이걸 다 만들었다고 해서 송유관 공사가 할 일이 다 끝난 건 물론 아니다. 만들어진 송유관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기름 도둑을 잡아 내는 똑똑한 기술을 개발하고, 또 외국의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하기도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15 08:37 2018/08/1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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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격투기, 스포츠, 무술, 군사의 관계

격투기라고 하면 뭔가 무술과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사이에 미묘하게 걸친 영역 같다.
프로레슬링이야 대놓고 각본대로 짜고 치는 고스톱임이 명시되어 있으니 엔터테인먼트의 비중이 강하다. 프로레슬링 선수가 무대에서는 온갖 쎈 척 허세를 부리지만 정작 길거리 싸움박질에는 약하고 털렸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복싱은 격투기 종목임이 명백하지만 무술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축구는 발만 써야 하고 손으로 공을 건드리면 반칙인 반면, 복싱은 반대로 손만으로 공격해야 하고 발을 써서는 안 되는 게 참 대조적이다.
그리고 태권도· 유도 같은 전통적인 무술들은 헐렁한 도복을 입고 맨손 맨발로 싸우는 반면, 복싱은 사각팬티 차림으로 상의는 완전히 탈의하는 대신 두툼한 글러브(장갑)를 낀다.

글러브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공격 대미지의 증가가 아니라 펀치를 맞는 상대방의 안전을 위해서 끼는 목적이 제일 크다. 물론 때리는 사람의 손의 안전도 따라오는 건 덤이고.. 맨주먹으로 시멘트 벽을 때릴 때와 글러브를 끼고 때릴 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먼 옛날에, 지금처럼 온라인 게임과 모바일 게임이 발달하기 전, 볼거리 놀거리가 훨씬 적던 시절에는 바둑 같은 보드 게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대중적이었으며, 스포츠 중에서 복싱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옛날에 우리나라 군사 정권의 수장이던 박통, 전통 같은 사람도 경기 관람을 아주 좋아했으며, 무하마드 알리 선수가 방한했을 때는 대통령이 친히 만나러 나가기도 했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어느 세계 챔피언급 복싱 선수가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서 지갑에 갖고 있던 현금 몇십만 원 남짓을 순순히 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그를 인터뷰 한 사람이 "그런 양아치 정도는 그냥 한주먹에 때려눕히고 제압하면 되지, 왜 돈을 빼앗겼습니까?"라고 묻자 그 선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제가 대전료 겨우 몇십만 원 받고 싸울 수는 없잖아요?"

이거 무슨 "빌 게이츠는 길바닥에 몇만 원이 떨어져 있으면 줍지 않고 그냥 가 버릴 것이다. 돈 줍느라 손실되는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자기 일을 더 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그 액수보다 더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처럼 들린다만..
진짜 파이터는 실력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자존심과 프로 의식이 있어서 사소한 일에 자기 무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여러 긍정적인 의미가 담긴 것 같다.

복싱을 넘어 무에타이나 이종/종합격투기 쪽으로 가면 주먹에 발차기를 모두 쓰고,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규제만을 제외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쓰러뜨리면 되는 종목으로 변모한다.

우리나라에서 수 년 전(2013~2014?), 어떤 운전자가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듯하던 경차를 만만하게 보고 뒤에서 상향등, 옆에서 끼어들기, 앞에서 급정거 등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보복 운전을 일삼았다. 결국 두 차량이 모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운전자들끼리 현피를 뜨기 직전까지 갔는데..

귀여운 경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이종격투기 육 진수 선수였다.
경차로 다가가던 가해 운전자는 그 사람을 보고는 뒤돌아서 줄행랑을 쳤지만 육 씨가 그 사람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참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아저씨. 계속 위협운전을 하시던데 저랑 싸우고 싶으세요?
정 불만이시면 원하시는 시간 장소 잡아 주세요. 싸워 드리죠. 저는 싸우는 게 직업인 파이터이거든요?"
"...."
"제가 약한 일반 사람이었으면 지금 저 때렸을 거예요?"
"..."
"성질 부리기 전에 가족을 한번 좀 생각해 보세요. 세상엔 당신보다 더 강한 사람도 많아요. 남자가 살면서 그렇게 쉽게 완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돼요. 아시겠어요?"
"ㅠㅠㅠ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것들이 뭔가 파이터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일화의 예이다.

군사 쪽은 아무래도 기계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무인과 군인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 같다. 풍경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데 카메라와 그냥 인간 화가만큼이나 서로 영역이 달라져 있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 자체만이 목표이면 굳이 무술 수련할 필요 없이 그냥 총을 쏘면 되니까 말이다. 산을 굳이 빨리 오르고 싶으면 케이블카나 헬기 타면 되듯이..

군대에서 일말의 무술 같은 면모가 느껴지는 건 제식이나 총검술 정도밖에 안 남았다. 전혀 무관하고 쓸모 없는 건 아니지만 훌륭한 무술이나 스포츠 기술이 훌륭한 전술로 곧장 이어지지는 못한다. 전에도 여러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사격만 해도 스포츠와 군사는 관점과 목표가 완전히 다르니 말이다. 육군 중에서도 특전사 같은 쪽이라면 모를까, 해군· 공군으로 가면 무술 같은 면모를 더욱 찾을 수 없다.

요즘 훌륭한 장수, 장군은 몸보다 머리를 더 쓰는 경영의 영역으로 간다. 개별적인 신체 능력이 특출나서 위에서 시킨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척척 잘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부사관'이라는 전문 영역이 따로 있다. 장교는 부하들을 잘 관리하고 군사 지식을 동원하여 전략을 잘 짜고 그런 임무 자체를 똑똑하게 잘 만들어 내는 역할일 테고 말이다.

2. 경기 중의 사고로 죽은 복싱 선수

복싱 선수가 너무 격렬하게 경기를 치르다가 사고 내지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례로는 국내에서는 비교적 최근(2008)인 최 요삼 선수가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더 옛날에는 김 득구 선수(1955-1982)가 사후에 세계 공식 경기의 룰을 개정시켰을 정도로 큰 여파를 끼쳤다.

이 사람의 사망으로 인해 경기 수가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줄었으며, 그 대신 매 라운드 사이의 휴식 시간이 60초에서 90초로 늘었다. 심판과 무관하게 각 선수 주치의의 진단만으로 경기를 전면 중단시킬 수 있는 '닥터 스톱', 그리고 굳이 바닥에 대짜로 뻗지 않고 울타리에 매달려 있어도 다운 및 KO 판정이 가능한 '스탠딩' 룰이 이때 도입된 걸로 본인은 들었다.

이 규정이 없던 과거에는.. 수세에 몰린 선수가 "맞아 죽으면 죽었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다" 내지, 무슨 스파르타 병사처럼 "걸어서 링을 내려오거나 들것에 뉘인 채로 나오겠다" 심정으로 울타리 로프만 붙잡고 대차게 얻어터지다가 진짜 치명상 입고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저건 법적으로는 선수의 자발적인 선택이며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다운 상태가 아니니, 경기를 강제로 중단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 득구 선수가 뇌사 판정을 거쳐서 결국 사망하자, 먼저 모친이 그 뒤를 이었다. 집이 가난해서 아들에게 복싱을 시킨 내 잘못이라면서 심하게 자책하다가 2개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의 대회 심판이 이건 선수의 컨디션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경기를 강행시킨 자기 잘못이라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머지, 7개월쯤 뒤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상대편이었던 챔피언 레이 맨시니 선수도 역시 죄책감 때문에 선수 생활을 오래 유지를 못 하고 배우로 직업을 바꾸게 됐다.
그런데 이런 트라우마에 빠진 맨시니 선수에게 무개념 팬이나 기레기들이 "아~ 당신이 김 득구 선수를 죽인 그 유명한 복싱 챔피언이군요~" 이딴 식으로 말을 걸어서 그를 더욱 멘붕시켰다고 한다.

저 사고 때문에 여러 사람이 인생이 꼬인 셈인데.. 그래도 그 당시 아직 김득구의 부인의 배 속에 있던 아들은 다행히 잘 태어나고 잘 커서 훗날(2010년대..) 치과 의사가 됐다. 그리고 레이 맨시니를 만나기까지 해서 확실하게 화해도 했다고 한다. 애초에 고의성이 없는 불의의 사고였을 뿐이지..

우리나라가 지금이야 양궁이 올림픽 메달을 쓸어담는 종목이라 하지만, 그래도 1948년 첫 올림픽부터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메달을 한둘씩 꼭 챙겨 오던 효자 종목은 복싱, 유도, (+역도) 같은 격투기 분야였다. 태권도는 그 시절엔 올림픽 종목도 아닐 뿐더러, 아직 자국에서조차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논외다.

저런 종목이 가난한 여건 하에서 축구처럼 조직적인 훈련과 팀웍 없이도, 혹은 육상처럼 천부적으로 타고난 신체 조건이 없이도, 정말 최소 비용 대비 최대 효과가 날 수 있고 오로지 개인의 근성과 정신력, 깡다구가 잘 통하는 종목이어서 그런 것 같다.

3. 나머지 말들

1) 최 요삼과 김 득구 모두 외국인 선수와 경기를 치른 뒤에 숨졌다. 최 요삼의 경우 상대방 선수가 도전자였고, 김 득구는 자신이 도전자였다.

2) 복싱에서 선수가 다운돼서 심판이 카운트다운.. 아니, 카운트 업을 하는 건.. 마치 컴퓨터에서 응용 프로그램이 n초 이상 동안 GetMessage / PeekMessage를 호출하지 않아서 작업 관리자가 '응답 없음' 판정을 내리고, 고스트 윈도우를 대신 표시하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프로세스의 강제 종료는 경기의 종료를 의미할 테고..
하긴, 옛날엔 "뭘 하다가 컴퓨터가 다운돼 버렸고 꼼짝도 안 합니다. 어떡하면 좋죠?"라는 질문에 "10초 동안 세어 보세요. 그래도 컴퓨터가 안 깨어나면 당신이 KO승입니다." 이런 컴퓨터 썰렁 개그도 있긴 했다.

3) 관악기에만 마우스피스가 있는 게 아니라 복싱 선수도 얼굴에 펀치를 맞았을 때 구강의 부상을 막기 위해 입에 뭔가 깨무는 것도 있다는 걸 근래에야 알게 됐다. 실제 경기 중계가 아니라 영화에서 복싱 경기 장면을 보면서 저게 뭔가 궁금해하곤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21 08:36 2018/07/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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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부록이나 표지에 넣을 만한 도표

물리학 전공 서적의 앞뒤 표지에는 각종 물리 상수들과 단위 변환표가 있다.
화학 교과서의 표지에는 당연히 원소 주기율표가 0순위로 들어가 있다.
수학 교재나 교과서의 앞뒤 표지에는 근의 공식부터 시작해서 초월이지만 초등에 속하는 주요 함수들의 미적분 패턴, 로그표와 삼각함수표, 주요 수학 상수들의 근사값 같은 게 있다.
성경은? 지도 내지 도량형 테이블, 주요 사건 연대기표가 들어갈 만하다.

다음으로 언어 쪽으로 가면.. 옥편(한자 자전)의 표지에는 당연히 부수 테이블이 있다.
일본어 관련 사전은 글자 테이블부터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사실, 원자의 합성 원리하고 한자의 합자 원리에 묘하게 유사점이 보이는 듯하다.)

영한사전은 당장 종이 사전을 갖고 있지 않고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주요 차이점 나열이 들어갈 만하며, 중간 중간 등장하는 영문법 용어 해설서의 키워드 목차가 있더라. 그리고 학생용의 좀 얇고 쉬운 사전이라면 불규칙 동사의 과거/과거분사 테이블이 있었다.

그럼 국어사전이라면..? 외국인이 한글로 쓰여진 한국어 텍스트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는 곧장 사전을 찾을 수 있도록.. (1) 격조사· 보조사의 전체 리스트, 그리고 (2) 각종 용언의 불규칙 활용형으로부터 사전에 등재되는 어간 형태를 유추하는 것을 돕는 규칙 테이블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런 힌트 없이 '들으면'이라는 어절로부터 '들다'(lift?)뿐만 아니라 '듣다'(hear/listen)라는 뜬금없는 동사를 외국인이 어떻게 유추하겠으며, '더워'로부터 '덥다'를 어떻게 유추하겠는가?

2. 둘 중 한 기준

좌우, 전후, 상하, 흑백 같은 이분법적인 체계에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딱 지칭하기가 어려워서 사람마다 의미가 통일되지 않고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말을 이렇게 써 놓으면 어려운데.. 쉽게 말해서 "얼룩말은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나, 아니면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건가?" 같은 거 말이다. 회전하는 방향의 경우 아예 "시계 방향, 반시계 방향"으로 기준이 통일돼 있으며, 3차원 좌표계에서는 손가락 방향을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를 왼손 좌표계, 다른 하나는 오른손 좌표계라고 부른다.

본인은 전화기의 숫자 버튼은 1 2 3이 위에 있지만 계산기의 숫자 버튼은 1 2 3이 아래에 있는 걸 지금까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 개발 작업을 하면서 이를 깨닫고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랐다. 하긴, 컴퓨터 키패드도 계산기 형태로 돼 있다.

마우스 휠을 위로 굴렸을 때 텍스트도 위쪽 앞부분으로 스크롤할 것인가, 아니면 손으로 종이를 위로 밀친 것처럼 아래로 스크롤할 것인가?
up-down 컨트롤은 위쪽 삼각형을 눌렀을 때 숫자를 감소시킬 것인가, 증가시킬 것인가?
텍스트 앞과 뒤는 cursor의 왼쪽-오른쪽에 대응하나, 아니면 오른쪽-왼쪽에 대응하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전글/다음글' 앞 뒤는 더 먼저 올라온 글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비트 배열 순서 endian 같은 문제가 컴퓨터 아키텍처뿐만 아니라 UI와 사람의 인지 구조에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옵션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다.

3. 대충 따지는 것과 정확하게 따지는 것

평소에는 근사값을 적당히 뭉뚱그려서 표현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1자리까지 정확하게 숫자를 따져서 계산해야 하기도 하는 분야가 몇 군데 있다.
먼저 연대기를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수백, 수천만 년 전의 지질 시대를 나타낼 때야 기준이 1950년이건 2010년이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다루는 시기가 불과 수천 년 전의 인류의 역사 시대에 근접한다면 정확한 기준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의 달력도 지금과 같은 그레고리력이 정착한 건 불과 몇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율리우스력은 4년 주기로 윤년이 들어갔지만, 그레고리력은 4의 배수 연도이더라도 400의 배수가 아니면서 100의 배수인 해는 평년이 되도록 보정을 한 것이다. 도중에 달력을 정리하느라 특정 기간의 날짜가 삭제되어 말 그대로 흑역사 처리되기도 했다.

서기 연대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실제 탄생 연도는 BC 4 정도로 더 오래됐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AD 1년의 이전은 BC 1년이다. 0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건물의 지상· 지하 층수와 비슷한 개념이다. 수천~수만 년의 기간을 다룰 때에야 0년이 있냐 없냐는 무시해도 아무 상관 없는 차이에 불과하겠지만, 1년 단위로 정밀하게 고대사 연대기를 논할 때는 이런 함정을 놓쳐서는 안 된다.

비슷한 혼란이 컴퓨터에도 존재한다.
잘 알다시피 사람은 10진법을 쓰지만 컴퓨터는 2진법이 친숙하다. 그래서 메모리나 디스크의 용량을 나타낼 때 사람은 1000 단위로 킬로· 메가 같은 단위 접두사를 얹어서 썼지만, 컴퓨터에서는 1000과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값인 2의 10승, 즉, 1024 단위로 단위 접두사를 만들어 썼다.

그런데 이게 겨우 수십 KB, 수십 MB 이러던 시절에는 별 문제 없었는데, 수백 MB~수십 기가바이트급부터는 오차가 무시 못 할 수준이 된다. n이 무한대로 갈 때 1000^n / 1024^n의 극한이 0으로 수렴한다는 건 고등학교 수학 수준으로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가령 램 용량이 16GB라고 하면 사용자는 1024 기준으로 생각하는데 컴퓨터 제조업자에서는 1000 기준으로 판매해서 이로 인한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 대세는 1000 기준인 KB/MB/GB와, 1024 기준인 KiB/MiB/GiB를 구분해서 표기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별 구분 없이 생각 없이 쓰다가 지금은 구분이 필요해진 것이다.
Windows의 경우 전반적으로 굳이 i를 써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스 시절의 레거시를 간직한 유구한 운영체제답게 내부적으로 1024 단위를 쓰는 것 같다. 그런데 1000이 아닌 1024 단위로 소수점은 어찌 표현하나 모르겠다("5.8GB 남음"처럼..). 일반적인 부동소수점을 쓰지는 않을 테고 소수점에 해당하는 작은 자리수의 정수 연산을 따로 하는 듯하다.

우리가 평소에는 질량과 중력도 별로 구분을 안 해서 킬로그램(kg)과 킬로그램중-힘(kgf)을 별 구분 없이 섞어 쓰는데, 1000과 1024 구분도 이런 것과 비슷한 관행인지 모르겠다. 이 정도야 인간이 중력 가속도가 다른 여러 행성을 수시로 드나드는 우주 시대라도 도래하지 않는 한, 호락호락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4. 규모와 비선형적으로 비례하는 가격

자동차 보험의 대물 보상 스펙을 보면 보상 한도가 겨우 몇천만 원에서 1억~2억을 거쳐서 10억까지 올라가는 것도 있다. 외제차와 사고 나도 집안 뿌리 뽑히지 않게 대비하려면 기본은 억대 이상으로 들어야 한다고 그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보험료와 보상 한도가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3천만 원짜리 보장과 10억짜리 보장은 단돈 몇만 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거의 로그나 그에 준하는 급으로 천천히 증가하는 것에 가깝다.

보험사가 실제로 10억씩이나 몽땅 물어줘야 할 일은 매우, 극히 드물게 발생하기 때문에 확률 통계상 원가를 산출해 보니 그런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금융 수학의 신비로운 면모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무보험 뺑소니 자가 보상은 1년 보험료가 몇천 원밖에 안 되는데 1억까지 보상되기도 한다. 대다수 일반인에게 평생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희소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반해 평범한 대물 보상은 늘 발생하는 사건인 관계로, 그런 사기적인 비율이 보장되지 않는다.

보험료뿐만 아니라 휴대전화의 데이터 정액 요금제도 이와 비슷한 모델을 반대 방향으로 따르는 것 같다.
월 2GB부터 시작해서 5, 10, 25GB 같은 단위가 있고 나중에는 무제한까지 간다. 요금은 용량이 올라갈수록 비싸지지만 이 역시 당연히 정비례가 아니다. 최저 데이터 용량보다 두세 배가량 비싸지지만 그래도 보장되는 데이터가 훨씬 더 많아진다. 이런 공식도 폰 이용자들의 행동 패턴과 전체 통신 시스템 유지비를 총체적으로 따져서 회사의 입장에서 최대 이윤이 나오게 정말 치밀하게 산출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적절한 요금제를 선택할 필요가 있는데, 자동차 보험료고 폰 요금이고 할 것 없이 너무 복잡하고 골치 아프긴 하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 정도 복잡함은 피할 수 없이 감내해야 할 듯하다.

5. 기타 일상에서 보고 들으며 느낀 것들 메모

(1)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은 곳을 가서 무슨 아파트의 24평형, 30평형 같은 면적 차이를 보면.. 자동차로 치면 2000cc, 2400cc 이런 배기량의 차이를 보는 것 같다.

(2) 고깃집 중에서 어떤 곳은 의자가 평범한 의자가 아닌 원통 드럼(?) 모양이고, 드럼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다가 손님의 옷이나 가방을 집어넣는 형태인 게 있다. 등받이가 없어서 약간 불편하지만 이건 꽤 괜찮은 디자인인 것 같다.
사람들의 소지품이 노출된 게 없고 깔끔한 게 마치 도시로 치면 지중화가 돼서 길거리에 전봇대와 전선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지중화를 하고 안 하고는 역사가 오래된 서울 시내 돌아다니다가 일산 내지 분당 가 보면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다.

(3) '콩고기'라는 게 있다. 비록 진짜 쇠고기· 돼지고기 같은 식감(특히 비계 부분!)을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저렴한 원가로 적당히 쫄깃한 단백질 맛을 내기 때문에 라면의 건더기 스프에도 들어가고 여기저기 쓸모가 있다.
이게 자동차로 치면 석탄으로 만든 석유라든가 세녹스 같은 휘발유 대체 연료가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4) 직불· 체크카드는 피처폰, 신용카드는 스마트폰에 대응하는 것 같다. 후자가 기능이 더 많고, 자꾸 장만하거나 교체하라는 귀찮은 전화가 오는 게 신세가 서로 비슷하다.
자동차, 폰, 통장은 '대포'라는 접두사가 붙어서 명의와 실사용자가 다른 물건이 엄격한 단속 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5) 그리고 자동차와 전화기는 '긴급'이라는 접두사가 붙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긴급자동차는 교통 법규를 어느 정도 무시하면서 빨리 가도 되는 특혜가 있고, 112 119 같은 긴급 통화는 누구나 어느 전화기로든 무료로 즉시 할 수 있다.
한편, 자동차와 총은 동작을 위해 폭발이 수반되며, 사용을 위해 사람에게는 면허, 물건에는 등록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6) 옛날에 브라운관 모니터는 화면 크기에 비해 부피가 매우 크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의 도트 프린터는 인쇄 속도가 느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시끄럽다는 단점이 있었다. 옛날에 쓰였던 컴퓨터의 출력 장치로서 분야는 다르지만 단점이 뭔가 그 시절을 풍미하는 독특함이 느껴진다.

(7) 대부분의 동물들은 노랑 계열, 회색 계열, 갈색 계열 같은 고유한 색깔이 있는 편인데, 색깔이 꽤 다양하고 컬러풀하다는 평판이 있는 품종은.. 앵무새와 카멜레온 같다.
그러니 컬러 프린터, 모니터, 카메라, 스캐너 같은 물건의 광고에는 화면이나 인쇄 결과물에 꼭 이런 동물이 들어가는 것 같다.

(8) 세상에는 1 - NEW - 2의 관계인 것들이 몇 가지 보인다.

  • 펜티엄 - 펜티엄 프로 - 펜티엄 2
  • 쏘나타 - 뉴 쏘나타 - 쏘나타 2
  • 인천 공항 여객 터미널 - 확장 탑승동 - 제2 여객 터미널..;;

Posted by 사무엘

2018/07/18 08:29 2018/07/1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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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라는 그룹이 부른 <칵테일 사랑>은 1994년 즈음에 국내 가요계에서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명곡이다.
그때 본인은 초딩이었다. 신세대 X세대 이러고 있었고 PC 통신이 아직 활발하게 돌아갔으며, 개인용 PC는 486이다 펜티엄이다 멀티미디어다 이러던 시절이었다.

칵테일 사랑은 몽환적인 반주와 적당히 아름다운 멜로디, 서정적인 가사, 그리고 뭔가 하늘의 목소리 같은 노랫소리가 어우러져서 가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 당시 음반에는 동일곡의 아카펠라 버전도 수록돼 있었다. 마치 붉은국과 맑은국, 후라이드와 양념 차이 같은데, 반주를 뺀 노래 음원에서는 '~팝 ~팝 ~드드드 두두' 이러는 비트박스(?)도 더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명곡을 만들어 냈으니 음반이 몇 장 팔리고 요즘 같으면 유튜브 조횟수가 얼마가 나오고, 작사· 작곡자와 가수는 떼돈을 벌기라도 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그런 소식은 별로 들리는 게 없다. 그룹 마로니에와 가요 칵테일 사랑은 관계자들이 얽힌 내력이 참 복잡하기 그지없다.

마로니에는 멤버들의 세대 교체가 잦았다. 칵테일 사랑은 초창기 창립 멤버들의 작품으로, 김 선민 작사· 작곡이고 최 선원· 신 윤미 노래이다. 우리가 아는 원곡의 녹음은 1993년 초에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곡이 훗날 이 정도로 대히트를 칠 줄은 노래를 만든 사람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녹음을 마친 뒤 가수 구성원이 공중분해돼 버렸다. 최 선원은 소속사를 변경하고 떠났으며, 신 윤미는 더 큰 물에서 음악을 하고 싶다며 미국으로 유학도 아니고 아예 이민을 떠났다.

그러니 싱어송라이터 겸 프로듀서인 김 선민은 다른 멤버를 뽑아서 칵테일 사랑의 얼굴마담 역할을 시켰다. 백 종우(남성)와 김 민경· 김 정은(여성). 이 트리오가 TV 출연도 하고 뮤직비디오 녹화도 했다.
곡의 퀄리티에 비해 굉장히 뜬금없고 촌스러운 티가 나는 그 동해 바닷가 뮤비 말이다. 그냥 가사 내용대로 그대로 길거리와 카페를 배경으로 넣기만 해도 저것보다는 나은 작품이 나왔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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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영상에서 유난히 예쁜 미인이다 싶은 사람이 김 민경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CF 모델 출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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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람이 바뀌었는데, 여기서 마로니에는 도덕적으로 좀 지탄 받을 짓을 했다.
립싱크야 아직 그때까지는 관행이었고 신규 대체 멤버들 역시 실력이 전혀 없는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음반의 노래와 얼굴마담들 라이브가 퀄리티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리고 출처 명시 없이 기존 신 윤미의 결말부 코러스 부분까지도 막 도용해서 내보냈다. 조가 G에서 Ab로 올라가고 "마음~ 울적할 때에~~ 거리를 걸어 보고 취해도 보고~~ 우우우~ 으아아아~~" 그 클라이막스 말이다.
그러니 진짜 가수인 최 선원· 신 윤미가 자기 정체를 다시 밝히고 저작권 소송을 걸어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룹 마로니에는 '칵테일 사랑'만을 남긴 채, 큰 주목을 못 받으면서 대중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6~07년쯤엔.. 마로니에의 초창기 멤버들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고, 백 종우(마로)가 한 타이밍 더 나중에 들어왔던 여성 멤버인 김 지영(파라)를 주축으로 해서 '마로니에 걸즈'라는 여성 듀엣 그룹을 결성했다. 백 종우는 기획· 프로듀싱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다른 여성 가수를 하나 더 충원해서 말이다.

그리고 2011년, 마로와 파라는 오랜 교제 끝에 결혼했다. 칵테일 사랑을 리메이크 해서는 부부가 같이 종종 매스컴에 출연해서 불렀는가 보다. 보기 좋은 커플이긴 하지만 이와 별개로, 리메이크한 곡이 원곡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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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 윤미 씨도 미국 간 지 10수 년 만이던 2005년,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해서 자기가 직접 칵테일 사랑을 다시 부른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원판 목소리가 어딜 가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 특히 결말부의 힘찬 코러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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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여곡절로 인해, 칵테일 사랑은 처음 노래를 부른 여자, 원곡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여자, 그리고 지금 마로니에의 후예를 자처하는 그룹의 여자 멤버가 모두 다른 인물인 노래가 됐다. 근본적으로는 오리지날 가수가 노래에 대한 권리를 확실하게 챙기지 않고 일찍 잠적해 버려서 벌어진 해프닝이라 하겠다. 그랬는데 곡이 너무 대박을 쳐 버리고, 이게 아직 국내 가요계의 후진적인 관행이던 저작권 의식이나 립싱크하고도 얽혀서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칵테일 사랑과 비슷한 시기에(1993~94) 히트 쳤던 국산 명작 게임인 미리내 소프트 "그 날이 오면 3"이 20년 뒤에 "드래곤 포스"라는 모바일 게임으로 리메이크된 걸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울러, 드라마 모래시계라든가 더 클래식 '마법의 성'도 비슷한 시기에 히트 쳤던 작품들이며 추억거리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19 19:35 2018/06/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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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

1970년대 중반, MS-DOS의 전신격인 CP/M 때부터 있었던 완전 초창기 실행 파일 포맷이다. 고안자는 개리 킬달.
엄밀히 말해, 얘는 파일 포맷이라 할 것도 없는 쌩 메모리 이미지 덤프였다. 그 어떤 고유한 헤더나 메타데이터도 없이 그냥 곧장 기계어 코드와 데이터가 쭉 이어질 뿐이었다. 코드와 데이터는 모두 64KB 단일 세그먼트에 묶여 있었고, 메모리 주소의 첫 256바이트는 시스템 용도로 예약되어 있어서 프로그램이 사용할 수 없었다.

확장자가 com인 실행 파일은 그냥 명령 프롬프트에서 돌아가는 간단한 유틸밖에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겨우 몇만 바이트 남짓한 com 형태로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되는 게임도 많이 나왔었다. 그래픽이라고 해 봤자 320*200 4색 CGA 수준이긴 했지만.. Alley Cat처럼 말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의 대세가 8비트에서 16비트로 넘어가고 성능과 메모리 용량이 향상되자, 이 형식은 큰 프로그램을 만들기에는 너무 비좁아졌다. 그래서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2. MZ EXE

1983년, MS-DOS 2.0에서 최초로 도입됐다. 그 전의 1.0은 파일 시스템에 서브디렉터리라는 게 지원되지 않았으며 실행 파일도 아직 COM밖에 없었다.
EXE는 단일이 아닌 다중 세그먼트(특히 코드 영역과 데이터 영역의 분리)를 도입하여 64KB 공간 한계를 얼추 극복했다. 메모리 모델이니, far near 포인터니 뭐니 하면서 일이 굉장히 복잡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또한, 멀티태스킹 환경에 대비해서 재배치 정보도 도입했다. 이제 좀 운영체제에서 파일을 있는 그대로 메모리에 올리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가공과 상대 주소 보정을 하는 loader가 필요해졌다.

오늘날 모든 EXE들은 앞부분에 MZ라는 문자로 시작하는 간단한 헤더를 갖추고 있다. MZ는 EXE 파일 포맷의 설계자인 당시 마소의 프로그래머 Mark Zbikowski의 이니셜이다! zip 압축 파일의 식별자인 PK (개발자 필립 카츠)만큼이나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파일 포맷 식별자 이니셜일 것이다. MZ 저분은 미국 토박이라고 하지만, 이름으로 보아하니 러시아 계열 이민자의 후손인 듯하다.

비록 도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Windows용 실행 파일들은 지금까지도 과거 호환을 위해서 앞부분에 최소한의 MZ EXE 헤더 껍데기는 넣어 놓는 게 관행이 돼 있다.
한편, 32비트 이후부터는 프로그램들이 옛날처럼 다시 단일 세그먼트 기반 flat 모델로 돌아갔다. 단지, 그 세그먼트의 이론적 최대 크기가 꼴랑 64KB이던 것이 4GB로 왕창 커졌을 뿐이다.

3. NE (new)

1985년에 발표된 Windows 1.0과 함께 등장한 포맷이다. 도스와는 다른 방식의 API 호출, exe와 dll의 구분, 표준화된 리소스와 버전 정보 데이터, 함수의 import와 export 내역처럼 도스용 exe에는 없던 추가적인 정보가 많이 필요해진 관계로 새로운 실행 파일 포맷을 또 제정한 것으로 보인다. 단, 맨 앞부분은 그냥 도스 EXE처럼 시작하고, 새로운 방식은 다른 오프셋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NE 다음의 PE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NE는 Windows뿐만 아니라 마소에서 1986년경에 잠시 만들다 말았던 일명 '멀티태스킹 MS-DOS 4.0'(일반적인 그 MS-DOS 4.0 말고)용 실행 파일 포맷으로도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스는 텍스트 기반 환경이지만 Windows는 GUI 환경이고, 16비트 Windows에는 딱히 콘솔(명령 프롬프트)이라는 서브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바이너리 수준에서의 파일 포맷만 일치할 뿐, 양 플랫폼의 실행 파일을 딴 데서 원활하게 실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Windows 1.x부터 3.x까지 16비트 시절에 실행 파일 포맷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단, 2에서 3으로 넘어가던 시절에는 Windows에 386 확장 모드라는 게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종전의 리얼(real) 모드뿐만 아니라 보호(protected) 모드에서도 잘 실행된다는 보증 플래그가 추가되었다. 평범한 Windows API만 쓴 프로그램이 여기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이다.

1980년대 왕창 옛날에 만들어졌던 일부 Windows용 프로그램들은 95뿐만 아니라 3.x에서 실행해도 "구버전용임. 여기서도 일단 실행은 되지만 케바케이기 때문에 온전하고 정상적인 동작을 기대할 수 없음. 최신 버전을 구해서 쓰셈.." 이런 주의 메시지가 뜨는 게 있었는데, 바로 이 플래그가 없이 옛날 방식대로 빌드된 프로그램이어서 그렇다.
특히 대화상자가 캡션(제목 표시줄)이 없이 표시되는 프로그램을 보면 옛날 냄새가 풀풀 난다. 캡션은 popup 윈도우가 아닌 overlapped 윈도우의 전유물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NE 방식의 실행 파일에는 각종 코드와 데이터, 리소스들이 resident, non-resident, discardable 이런 식으로 속성 구분이 있었다. 컴퓨터에 메모리는 왕창 부족한데, CPU와 운영체제 차원에서의 가상 메모리 지원이 없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 멀티태스킹을 구현하려다 보니, 돌아가는 방식이 가난함과 처절함 그 자체였다.
읽어들인 데이터는 언제든지 주소가 재배치되거나(단편화를 막고 연속된 많은 영역의 메모리를 확보할 수 있게), 삭제되어서 디스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반드시 메모리에 언제나 불러들여 놓는 데이터는 성능 차원에서 정말 중요한 것에만 한해서 지정해야 했다.

4. PE (portable)

1993년에 등장한 Windows NT 3.1에서 첫 도입된 또 다른 새로운 실행 파일이다. AT&T에서 오래 전에 개발한 COFF라는 오브젝트/라이브러리 파일 포맷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마 Windows NT 개발진의 출신 배경이 그쪽 계열 연구소여서 이런 포맷에 친숙하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마소에서 개발하는 개발툴들은 16비트 시절에는 obj/lib의 포맷으로 인텔에서 개발한 OMF 방식을 썼지만 32비트부터 COFF로 갈아탔다. 그리고 exe/dll을 로딩하는 방식도 쿨하게 memory mapped file 방식으로 바꿨다.

PE는 현대적인 32비트 가상 메모리 환경에 맞춰졌기 때문에, 16비트 NE처럼 수동 메모리 관리를 염두에 둔 지저분한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그먼트 대신에 코드, 데이터, 리소스 등의 용도별 섹션이 있고, 이들 섹션은 간단한 문자열 태그로 구분하기 때문에 섹션의 추후 확장이 가능하다. 그리고 헤더에 CPU 식별자도 넣어서 굳이 x86뿐만 아니라 다른 CPU 아키텍처의 실행 파일도 이 방식으로 기술 가능하게 했다.

훗날 64비트 CPU가 등장하면서, 아니 정확히는 1990년대 말에 IA64의 출시를 염두에 두고 PE의 기본 틀은 동일한데 메모리 주소나 몇몇 size 필드만 4바이트에서 8바이트로 확장된 일명 PE+ 규격이 나왔다. 그래도 기존 32비트에서도 얘를 알아보고 최소한 "에러 메시지+실행 거부" 정도의 대처는 할 수 있다.
리소스는 64비트도 32비트와 바이너리 차원에서 포맷이 완전히 동일하다. 이게 무슨 기계어 코드도 아닌데 필드 크기가 굳이 64비트 크기로 확장됐다거나 한 건 없다. 문자열이 유니코드 기반으로 바뀌었으니 16비트 방식과는 호환되지 않지만 32와 64비트끼리는 호환된다.

오늘날은 재래식 네이티브 코드뿐만 아니라 닷넷 기반(가상 머신), 그리고 UWP용(일명 metro) 앱 같은 것도 나왔지만, 이들도 실행 파일들의 기본 골격은 PE로 동일하다. 그 안에서 읽어들이는 시스템 DLL과 구동 방식이 서로 차이가 날 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17 08:36 2018/06/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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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악 연주와 자동차 운전의 관계

페르마타(늘임표)는 자동차 주행 중에 만나는 과속방지턱과 비슷한 느낌이다. 사실, 자동차 주행을 음악 연주에다 비유하는 건 심상 면에서 의외로 그럴싸하다. 그래서 음악 연주에다 빗댄 자동차 CF가 있고, 우리나라엔 아예 '쏘나타'라는 이름의 자동차도 있다.

2. 작곡과 편곡의 관계

작곡과 편곡의 관계는 군용기에서 공중전과 폭격의 차이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에서 새로운 주선율을 만들어 내는 건 가장 화려하고 창의적인 활동이며, 이는 비행기로 치면 기동력이 가장 뛰어나고 제일 뽀대 나며, 공중전을 벌여서 적군의 군용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전투기와도 같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과를 가장 많이 세운 비행기는 우월한 기동성으로 육군과 해군을 지원하여 지상의 목표물을 없애 주는 폭격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선율을 실제로 풍성한 반주가 곁들어진 음악으로 만들어 주는 작업은 뼈대에다 살을 붙이는 편곡이다.
오늘날은 공중전과 폭격이 모두 가능한 전폭기가 대세이듯, 음악계에도 혼자 작곡· 편곡에 심지어 가사까지 직접 쓰는 만능 싱어송라이터도 있긴 하다.

3. 화음과 합창 파트

본인은 음악에서 박자보다 화음· 화성에 더 끌리는 편이다. 높이가 다른 음들에 대해서 마치 서로 다른 색깔을 보듯이 일종의 공감각적인 심상을 느낀다. 단선 악보 노래만 부르다가 화음을 넣어서 합창을 부르면.. 마치 흑백 영화를 보다가 컬러 영화로 바뀐 듯한 느낌이다. 사실, 각 파트별로 연습을 하는 게 사진 촬영으로 치면 R, G, B 각 색깔축을 제각기 현상하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교회에서 성가대 찬양 같은 거 연습할 때 파트 연습은 힘들고 어렵고 시간도 더 많이 걸린다. 하지만 제대로 부르면 훨씬 더 아름다운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힘들게 연습한 보람이 있다. 또한, 합창뿐만 아니라 돌림노래 같은 부류도 좋다.

합창은 보통 여자+고/저, 남자+고/저 이렇게 네 파트로 나뉘는데, 그 중 '남자+고'에 해당하는 테너 파트가 내 경험상 제일 어렵다.
소프라노는 그 노래의 주선율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쉽고 친숙하다. 알토는 조금 연습이 필요하지만 음역이 낮아서 부담 없으며, 소프라노의 협화음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음을 내기 쉽다. 베이스는 음역이 제일 낮으며, 그 멜로디도 굉장히 단순한 경우가 많다.

그 반면, 테너는 보통 여성 파트와 관계 없는 생소한 멜로디 위주인 데다 음역도 아주 높다. 조심해서 부르지 않으면 삑사리가 난다. 교회에서 합창 연습을 하면서 평소에 테너만 부르다가 다른 파트를 도와주기 위해서 파트를 옮겨 봤더니 거기는 부르기가 이렇게 쉬운 줄 몰랐다.

테너로도 모자라서 카운터테너는.. 뭐 높은솔 이상으로 올라가고 남자 성대로 거의 여자 음역을 내는 파트이니.. 타고난 성대나 특수한 테크닉을 구비하지 않으면 감당 불가능일 것이다. 접두사 'counter-'는 거의 'anti-, against'와 비슷한 뜻인데 테너의 반대가 아닌 테너의 강화를 나타내는 음역 이름에 붙었는지 모르겠다.

4. 음고 (또는 음정)

본인은 앞서 언급한 저런 취향과 배경으로 인해, 어떤 곡이나 노래를 배웠으면(특히 교회 찬송가) 들었던 그대로 기계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음높이로 부르는 걸 좋아한다. 악기 없이도 첫음이 정확하게 기억돼 있기 때문에 반주가 있건 없건 쌩목으로도 동일한 음고가 나온다. 이런 데에 좀 쓸데없는 집착 같은 게 있다.
화가로 치면 무슨 고전파처럼 걸어다니는 사진기를 추구하고, 음악으로 치면 걸어다니는 녹음기를 추구한다.

그런데 음반의 곡은 음역이 전문 가수에게 맞춰져서 그런지 일반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편이다.
예를 들어 <나>(송 명희 작사, 최 덕신 작곡) 같은 경우 음반의 오리지널 C장조로 그대로 부르면 결말부에서 음이 무려 높은솔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찬양집 악보를 보면 조를 A장조 정도로 낮춰 놓곤 한다.

비록 회중의 편의를 위해서 조를 옮긴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비록 같은 곡이긴 하지만 조가 바뀌면 느낌이 싹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흥, 감동, 여운이 C장조를 기준으로 다 형성되고 머리에 박혔는데, 곡을 다른 조로 부르면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가 달라지면 같은 곡도 느낌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내가 Looking for you를 들을 때도 mp3 음원을 구한 뒤부터는 사운드 에디터를 돌려서 얘를 단2도부터 장7도에 이르기까지 반음계의 모든 음역으로 조를 달리하면서 다 들어 봤다.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들으면서 조를 바꾸고, 템포를 바꾸고 가장 비슷한 악기를 찾아보고 멜로디를 채보하고..

이 음악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느낌을 그냥 뼛속까지 다, 금이빨만 빼고 모조리 씹어먹고 소화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모가 형 증기 기관차부터 KTX, 경인선에서부터 경부고속선에 이르기까지 철도 덕후로 머리 구조가 개조되어 갔다..
철도청이 사람을 완전히 버려 놨다. Looking for you라는 곡은 어설프게 내보내는 철도청 CF 10편, 이미지 광고 100편도 배출하지 못한 평생 매니아 고객, 철도교 신자를 만들었다.

5. 이조악기

본인은 오로지 Looking for you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색소폰을 악기를 직접 구입해서 배워 보기까지 했다. 새마을호 음악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내가 피아노 다음으로 접하는 제2군 악기는 플룻이나 기타 같은 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기타는 주선율 연주가 아니라 코드 반주용으로 워낙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기 때문이요, 플룻은 소리가 예쁘고 교회에서 찬송가 특송 보조용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2군을 넘어 3군으로 가면 클라리넷, 오보에 같은 것도 생각하고 있다. 철도가 아니었으면 색소폰도 3군에 속했을 것이다. 그것도 알토보다는 소프라노 색소폰 말이다.
이거 무슨 외국어 같다. 피아노는 영어 같은 악기이고, 2군 3군은 중국어나 스페인어, 일본어 같은 제2 제3 외국어에 해당되겠다. 바이올린은 좀 여성형 악기인 것 같아서 제낀다.

모든 악기들이 그렇겠지만 색소폰은 도대체 어떤 유체역학적인 원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걸까? 황동으로 된 커다란 몸체뿐만 아니라 마우스피스, 그리고 나무로 된 reed가 어떤 상호작용을 해서 소리가 나는지.. 어찌 보면 금속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만큼이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옛날에는 이런 악기나 열쇠· 자물쇠를 만드는 장인의 기술이 요즘의 자동차 반도체 기술 같은 최첨단 하이 테크놀러지였을 것이다.

소리가 멋있긴 하지만 알토 색소폰 정도 되면 악기가 꽤 크고 무겁다. 그리고 불었을 때 소리가 피아노 이상으로 꽤 큰지라, 아파트에서 연습하기가 좀 부담되기도 한다.
저음을 제대로 내기가 어려운 건 초· 중딩 때 학교에서 배웠던 리코더와도 비슷하다. side effect 없이 옥타브를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것도 좀 어려운 축에 든다.

이 외에도, 본인은 색소폰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 얘는(알토 기준) 기준조가 C가 아니라는 걸 알고서 굉장히 놀랐었다. "아니 사람 헷갈리게 왜! 도대체 왜 악기를 그딴 식으로 만들지? 무슨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헐.. 색소폰이 이조악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으면 내가 덥석 색소폰을 사고 배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는 음과 실제로 악기에서 들리는 음이 서로 다르니, 굉장한 연상거부와 불편함이 야기된다. 그래서 색소폰으로는 아무 악보나 덥석 내가 원하는 조로 연주하지 못하며, 미리 전조를 머릿속이나 종이에다 해 놔야 된다. 가령, Looking for you를 들은 대로 그대로 불려면 오리지널 F조가 아니라 D조로 전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은 이조악기가 색소폰만 있는 건 아니다. 트럼펫은 기준조가 Bb(플랫)이라고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 장성 경례곡,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대 기상 멜로디가 왜 전부 Bb조인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6. 아리랑 멜로디가 붙은 영어 찬송가

한국인 중에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어느 장로교 교단에서 1990년대에 '아리랑' 멜로디에다가 가사를 써서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라는 찬송가를 만들어 수록했다.

이 사실이 내 기억이 맞다면 2000년대 이후에 어느 SBS 다큐멘터리의 소개를 통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백인 코쟁이들이 "오 아리랑이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요(찬송가용으로)! 원더풀!" 이러는 인터뷰가 실렸다. 심지어 그 영어 가사가 한국어로 역번역되어 일명 아리랑 찬송가로 수입되기까지 했다.

뭐, 한국 민요가 외국의 찬송가에 실렸다니 좋은 일이다. 막 "한민족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국뽕에 취할 필요도 없고, "그게 뭐 대수라고" 식으로 너무 시니컬하게만 볼 필요도 없다.
사실, 특정 민족의 민요 멜로디가 찬송가 가사에 붙는 건 흔한 일이다. 또한 극단적인 예로,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는 군가 정도가 아니라 "존 브라운의 시체"라고 찬송가와는 1도 관계 없는 노래의 멜로디에서 유래되었으며, 우리말 가사조차도 출처 불명의 창작이지 정확한 번역을 통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미국 본토에서 저 찬송 부르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있으면 링크를 소개하려 했는데, 전부 국내에서 "미국에 아리랑 찬송가가 있대!"라고 소개하거나 가사를 역번역해서 부른 것밖에 안 뜬다. 그래서 링크 소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난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찬송가에다가 국악 스타일을 접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서양식 7음계가 좋다. =_=;;

7. 옛날 자동차 소개 테이프에 수록되었던 BGM들

1991년쯤이던가.. 본인 초딩 시절에 집의 첫 차가 현대 엑셀이었다.
차를 사니 취급설명서와 보증서 같은 책자가 따라오는데, 책자뿐만 아니라 제조사에서 차량의 전반적인 관리 요령을 BGM과 함께 남녀 나레이터가 낭송해 놓은 테이프도 같이 줬었다.
아마 이건 차종마다 다르지는 않고 모든 승용차 공통, 모든 트럭 공통..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 오래 전 일이지만, 난 그 테이프를 즐겨 들었다.
"반드시 무연 휘발유를 사용하셔야 하며, 납 성분이 포함된 유연 휘발유를 사용하시면 뭐 어쩌구(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팬 벨트, 휠 베어링, 디스크 드럼의 마모 상태 점검.." 뭐 이런 단어가 나왔던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BGM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선곡을 한 담당자가 단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1) A면

El Bimbo (Paul Mauriat) -- 맨 처음 "안녕하십니까? 저희 현대 자동차의 고객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인트로와 함께 나오던 음악이다. 제목을 한참 뒤에야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C단조)
첫 곡이 끝난 다음에는.. 뭔가 월광 소나타 스러운.. Thexder 게임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나오는 게임오버 음악과 비슷한 곡이 나왔다. (F단조)
(정체불명. 기억 소실)

Love is Blue (Paul Mauriat) -- 난 이 곡을 현대자동차 테이프에서 난생 처음으로 들었다. (A단조)
그 뒤로도 두 곡 정도가 더 있었는데, 제목은 모르지만 주요 구간 멜로디는 지금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모두 C단조이다.

(2) B면

뒷면 첫곡도 꽤 유명한 음악인 걸로 기억하는데, 멜로디를 기억하지만 제목 모름. (C단조)
(중간은 정체불명. 기억 소실)

Plaisir D'amour -- 끝에서 셋째. 테입 전체를 통틀어서 거의 유일하게 장조곡으로 기억한다. 여느 연주와는 달리 주선율이 팬 플룻이고, 템포가 좀 빠른 편이었다. (F장조)

저 곡은 제목을 번역하자면 "사랑의 기쁨"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같은 제목의 바이올린곡을 작곡한 게 있는데, 그것과는 다른 곡이다. "도~미솔 파미 레(도#)레파라~".. 아마 들으면 다들 기억하실 것이다. 그건 원제도 독일어인 Liebesfreud이다. 자매품으로 "사랑의 슬픔"도 있다는 게 흥미로운데..
그 반면, 저 Plaisir D'amour는 출신이 프랑스 계열이다.

The Lonely Shepherd (James Last) -- 끝에서 둘째. 영화 <킬 빌>에서도 오마주 되어 흘러나온 유명한 곡이다. (D단조)
운행 중 비상 상황 발생시 대처 요령 섹션과 함께 흘러나왔다. 팬 플룻 연주곡이 두 곡 연속으로 나오는 셈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결말부에서 덕담과 함께 빠이빠이 하며 흘러나온 곡 역시 C단조의 유명한 곡이며 멜로디가 기억 나고 주선율을 악보로 정확하게 쓸 수 있지만.. 무슨 곡인지 제목은 모르겠다.
30대 이상 나이의 방문자 분들 중에 혹시 이런 추억 있으신 분 안 계신가 궁금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8/05/23 08:31 2018/05/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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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이야기

지구상의 포유류 동물 중에는 토끼나 원숭이나 사자 같은 평범한(?) 놈만 있는 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상한 하이브리드도 몇 종 있다.

  • 박쥐: 날개가 달렸으며, 이래뵈어도 자가비행이 가능한 유일한 포유류이다. 조류가 절대로 아니다. '박쥐의 알' 같은 걸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오리너구리: 분명 새끼에게 젖을 주긴 하지만 난생이다. 그리고 이빨이 없고 부리가 달려 있다!

오리너구리의 경우 생긴 게 워낙 기괴한지라,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을 때에 다른 학자들이 "어디서 합성(박제를..) 주작질이야"라는 핀잔과 함께 믿지 않을 정도였다. 현지(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포된 개체가 확인된 뒤에야 존재가 완전히 인정되었다.

박쥐는 포유류와 조류의 하이브리드인데, 색깔도 시꺼멓고 어두컴컴 음침한 동굴에서 살기 때문에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다. 동화에서는 무슨 카멜레온처럼 비겁한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각종 아케이드 게임에서는 닿기만 해도 주인공에게 대미지를 주는 악랄한 몬스터 역할을 한다. (고인돌, 라이온 킹, 알라딘 등..)

이 외에 날치는 어류와 조류의 하이브리드처럼 생기긴 했다. 뭐, 본격적인 비행 능력을 갖춘 건 아니기 때문에 교통수단으로 치면 비행정· 수상기라기보다는 호버크래프트에 더 가깝다.
그리고 펭귄은 시꺼먼 색깔에다 날개인지 지느러미인지 모를 팔로 헤엄과 잠수까지 가능한 것이 특이한 조류이다.
뭐, 모든 동물들을 다 합쳐도 인간의 특이함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뭐 일단은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다.

하늘과 땅 다음으로 물 속에는 고래가 저런 특이한 하이브리드에 속한다.
지느러미 달린 바다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류와는 달리 알이 아닌 새끼를 낳고 젖을 준다. 게다가 항온이고.. 무려 허파 기반의 공기 호흡을 하니 빼도 박도 못할 포유류이다. 다른 대형 어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런 특이한 고래 중에서 (1)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이다. 공룡처럼 이미 멸종한 옛날 지질 시대 생물까지 '다' 포함해도 이 바닥의 원톱이다!

  • 아프리카코끼리: 몸길이 6~7.5미터, 어깨높이 약 3미터, 몸무게 최대 6톤..;;
  • 기린: 몸길이 약 3미터, 뿔 끝까지 키가 약 8~9미터, 몸무게 약 1.5톤
  •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 몸길이 약 25미터, 몸무게 약 50톤이었을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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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는 성체의 몸길이가 25~35미터에 달해서 거의 보잉 737 여객기 초기형의 길이에 맞먹는다. 무게는 150톤을 훌쩍 넘어서 대형 디젤 기관차 한 량보다 더 무겁다. 공룡은 몸길이야 뭐 화석을 보고 비교적 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몸무게는 공룡과 가장 비슷한 악어의 부피 대 몸무게 비율을 토대로 추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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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는 뭔가 제일 고래처럼 생겨 있다. 이명에 걸맞게 턱 아래로 희고 긴 수염 같은 게 보인다.)

생물은 동물보다 식물이 더 크며, 동물 중에서는 포유류보다 파충류가, 육식보다는 초식 동물이 더 큰 편이다. 덩치 말고 생존력은 포유류가 파충류보다 더 뛰어나다.
먼저 체온. 항온동물인 포유류가 변온동물보다 훨씬 더 생존력이 강한지라, 더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겨울잠 같은 거 잘 필요 없이 서식할 수 있다.

이 겨울잠을 영어로 hibernate(-ation)라고 하는데, 요즘은 컴퓨터의 최대 절전 모드를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쓴다.
항온동물 중에도 겨울잠을 자는 놈이 일부 있긴 하나, 그래도 변온동물만치 체온이 확 떨어지고 가사(假死) 상태로 깊이 잠들지는 않는다.

파충류는 조금만 날씨가 추워져도 사람에게 저체온증이 찾아온 것처럼 동작이 둔해진다. 더구나 심장 구조도 불완전 2심실이어서 격렬하게 활동하다 보면 정맥피가 섞이고 몸이 경직되기 쉽다.
일례로 뱀을 계속 도구를 써서 긴장시키고 있으면 그 불완전한 심장 구조 때문에 피가 안 통해서 근육이 굳은 채로 삐끗거리게 된다고 한다. 땅꾼들은 뱀을 이렇게 긴장+stun 시켜서 잡는다.

그런데 체온 유지란 게 그냥 되는 게 아니어서 포유류는 털이나 땀 등 파충류보다 월등히 더 복잡한 메카니즘이 필요하다. 에너지 소비량이 많으며, 평소에 숨만 쉬고 가만히 지내더라도 많이 먹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덩치가 한없이 커질 수가 없다. 공룡 같은 덩치가 포유류였다가는 제 몸 수습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아프리카코끼리가 지금 여건상 육상 포유류가 가질 수 있는 덩치의 생물학적 한계치에 근접해 있다는 말을 언제 어디에선가 봤었다. 그 반면, 공룡은 제약이 덜한 파충류일 뿐만 아니라, 얘들이 활동하던 지질 시대급의 옛날에는 1년 내내 따뜻하고 환경 자체가 지금보다 더 좋기도 했으니 덩치가 더 커질 수 있었다.

조금 다른 분야의 얘기이다만, 플라나리아나 해면 같은 동물은 구조가 극도로 단순한 덕분에 몸을 여러 갈래로 쪼개도 살아남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생 능력을 자랑한다. 사람처럼 복잡한 생물은 손가락 하나만 잘려도 자동 재생은 엄두도 못 내거늘 말이다.
그 반면, 저렇게 너무 단순한 동물은 복잡한 물질대사와 상태 유지 능력도 전무한 관계로 사는 곳이 조금만 더러워지면 곧장 녹고 죽어 버린다. 파충류와 포유류 역시 생물학적 구조에 저런 식으로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동물이 덩치가 더 커질 수 있는 환경을 하나 더 꼽자면 공기 중의 육지보다는 물 속이다. 외부로부터의 힘· 충격이나 온도 변화가 공기 중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디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물 자체의 부력도 있으니 고래 같이 크고 무거운 생물이 그 속에서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지구상의 교통수단들 중에 선박이 그 어떤 비행기나 육상 교통수단보다도 덩치가 훨씬 더 크고 무거울 수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다만, 먼 옛날 지질 시대에 육지에서는 저렇게 큰 공룡이 활보했던 반면, 바다에는 지금의 대왕고래의 덩치를 능가하고 압도하는 해룡이 있었다는 증거가.. 딱히 검증 불가능한 도시전설 말고는 없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다.

고래는 물에서 살면서도 아가미가 아닌 공기 허파 호흡을 하기 때문에, 물 속에서 숨을 못 쉰다. 심지어 수면(?) 중에도 뇌를 반반씩 재우고 깨우면서 수면(!)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해야 하는 불편한 인생을 산다. 악어가 물 마시러 온 육상 동물을 공격하여 잡아먹듯, 인간은 숨 쉬러 올라온 고래를 바다에서 손쉽게 잡는다.

고래가 물 밖에 내팽개쳐지면 얼마 못 살고 죽는 주 이유는.. 그냥 장기들이 엄청난 체중에 짓눌려서 숨을 못 쉬고 질식하기 때문이다. 엎드려 자던 신생아가 질식사하듯이 말이다.
피부 표면이 공기에 노출되고 건조해지는 것도 고래에게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고래가 무슨 양서류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피부 호흡을 못 해서 죽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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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저런 아틀란티스인 같은 신체 구조는 아니라는 뜻... ㄲㄲㄲㄲㄲㄲ)

그런데 고래는 그 거구를 이끌고 시속 30km 이상의 고속으로 주행이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숨을 참은 채로 잠수를 더럽게 잘한다.
모든 고래들이 전반적으로 잠수 능력이 우수하지만, 특히 (2) 향유고래는 어지간한 잠수함으로도 엄두를 못 낼 수심 2000m 아래로 잘도 내려간다. 그리고 1시간 반 가까이 숨을 참으며 잠수가 가능하다. 그 엄청난 수압을 극복하고 올라오는 과정에서도 인간 같은 잠수병 걱정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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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고래는 앞부분이 직각형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다.)

인간은 맨몸으로 겨우 몇십 m만 잠수했다가도 올라올 때 시간 보면서, 마치 우주왕복선이 대기권으로 재돌입할 때처럼 조심해서 천천히 올라와야 되는데.. 고래는 기관지에 혈중 질소를 처리하는 장치가 갖춰져 있다고 한다. 아무렴, 산소 보충하러 빨리 수면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저렇게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잠수함· 잠수정 같은 기계들은 산소 조달 문제로 인해 수중에서는 내연기관을 가동할 수 없다! 거기서는 마치 월면차처럼 전기로만 동작해야 한다. 본인은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자력 잠수함 급이 아닌 이상, 수중 기계는 활동 반경과 시간에 근본적으로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미도 안 달렸으면서 고래는 육중한 체력은 어디서 나는지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또한, 산소는 그렇잖아도 물에 잘 안 녹는 기체여서 산소를 모을 때도 물 속에서 모을 정도인데, 거기에 있는 산소를 추출해 내는 어류들의 아가미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고래 중에는.. (3) 범고래가 있다. 얘는 앞서 언급한 네임드급 고래만치 거대하지는 않지만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 사냥꾼이며 바다의 조폭 깡패이다.
정작 그 큰 대왕고래는 주 식량이 의외로 플랑크톤이나 크릴 같은 아주 작은 조무래기들이구만, 범고래는 타 물범이나 바다사자, 심지어 다른 상어나 돌고래를 사냥해서 잡아먹는다. 어떨 때는 배가 안 고픈데 별 이유 없이 재미삼아 공격하기도 하며, 먹이를 향해 육중한 덩치로 박치기도 하고 심지어 물 밖으로 던져서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폭력적인 범고래가..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건드리지 않고 해친 사례가 없는 것이 아주 이색적이다. (다른 동물로 오인했거나,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거나 한 경우를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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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는 밋밋한 회색 위주인 타 고래들과 달리, 마치 펭귄처럼 흑백 구분이 명백하다. 그리고 눈 주변에 눈 흰자처럼 생긴 흰 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곰, 사자, 호랑이 같은 육지의 다른 맹수들이라든가, 어류 중의 깡패인 백상아리(죠스!!) 육상 공룡의 후신에 가장 근접한 파충류라고 여겨지는 악어 따위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차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애초에 어류 중에는 피 냄새만 맡고도 흥분해서 몰려오는 놈들도 있지 않던가. 범고래뿐만 아니라 다른 고래들도 전반적으로 다 사람에게는 적대감이 없다시피하다.

코끼리가 다 아프리카코끼리 같은 게 아니며, 작은 건 거의 마소 정도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그것처럼 고래 중에서도 작은 돌고래는 참치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고래는 전반적으로 아주 똑똑하고 집단 유대의식이 강하다. 동료와 협력해서 인간이 설치한 장애물을 치우고 먹이를 차지할 줄 알며, 연구에 따르면 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의 작은 이익을 접을 줄도 안다.

거기에다 (4) 돌고래는 고래 중에서 제일 작은 축에 드는 놈이지만, 물 속에서 초음파를 이용해서 어지간한 유인원이나 앵무새 이상의 수준으로 상대방과 의사소통 능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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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는 타 고래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 있다. 하지만 얘도 범고래에게만 밀릴 뿐, 체력과 공격력은 타 해양 생물들을 엄연히 능가하는 '갑'이다.)

고래가 반쯤 수면으로 나와서 물을 촤악 뿜는 건 잘 알다시피 호흡 때문이다. 그런데 주행 중에 저렇게(본문에서 범고래와 돌고래의 모습) 괜히 힘들게 도움닫기 점프까지 하는 건 나름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컴퓨터용 아케이드 게임이나 FPS에서도 점프를 하면서 가는 게 그냥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빠르지 않던가? ㅋㅋ

물론, 인간의 경우 달리기가 아니라 수영을 할 때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인간은 수영 중에 저렇게까지 높이 점프를 할 능력이 없으니, 그냥 물에 완전히 잠겨서 잠영을 하는 게 자유형 따위보다 더 빠르다. 신체가 물과 부딪치면서 잃는 에너지가 만만찮은가 보다.
그러니 수영 경기에서 최단시간 기록만 강조하다 보면 수영 대회가 잠수-_- 대회로 바뀌어 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에 공식 경기에서는 잠영을 허용하는 시간에 한계가 걸려 있다.

이렇듯, 고래는 생물학적 특성이 비범하고, 크고 아름답고, 생태계의 최상위 랭킹이고, 똑똑하기까지 한데 한편으로 여느 맹수와 달리 사람에게 호의적이라는 점으로 인해, 인간에게 느껴지는 인상이 아주 좋은 편이다. 최소한 뱀이나 악어 같지는 않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고래가 이렇게 독특한 건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창 1:21에서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라고 진술하면서 6일 창조 중 다섯째 날에 고래는 다른 수중 생물과는 좀 급이 다르게 따로 창조되었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비록 문장 구조상 다르게 읽힐 여지도 있긴 하지만, 본인은 고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6천여 년 전에 완전히 새로 등장한 종이라고 생각한다.

실러캔스야 아무래도 현 세상 이전의 지질 시대· 이전 세상에도 존재했다가 싹 멸종하고, 훗날 6천여 년 전에 6일 동안 그 종류대로 똑같이 '다시' 창조된 놈일 것이다.
하지만 고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전 세상에는 없었다가 현 세상에서 완전히 새롭게 등장했다. 근본적으로 뭔가 좀 new, fresh한 구석이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특성이 기존 동물들과는 좀 다른 구석이 있는 거라고 추측해도 아귀가 맞지 않겠는가?

다만, 킹 제임스 성경 외의 다른 성경에서는 whale이라는 단어가 남아나질 못해 있다는 것도 생각할 점이다. 당장 저 창 1:21을 비롯해서 겔 32:2까지.. 오로지 KJV만이 요나를 잡아먹은 생물이 고래였다고 말한다(마 12:40). 이스터 '파스카'만큼이나 그리스어 '케토스'도 논란의 대상이다. 최종 권위가 없으면 신앙의 근간이 이렇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작 킹 제임스 성경이 '바다 괴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애 4:3은 타 성경에서 전부 승냥이, jackal 같은 육상 동물로 바뀌었다. 음.. 고래도 포유류이기 때문에 새끼에게 젖 줄 수 있는데..? 어쨌든 고래의 생물학적 특징과 성경 번역에서의 혼란이 오버랩되는 현상이 무척 흥미롭다.

Posted by 사무엘

2018/05/17 08:31 2018/05/1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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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급 사회

군대라는 곳은 사회의 그 어느 조직보다도 상명하복 원칙을 따라 돌아가는 보수적인 계급 사회이다.
그런데 옛날 쌍팔년도 군대에서는 병 사이에서 단순히 고참의 갈굼과 구타· 가혹행위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군기· 기강과 반대되는 이상한 적폐도 있었다.

  • 병장들이 개기면서 초임 소위 장교를 길들인다거나.. (1994년엔 이것 때문에 무려 육사를 나온 장교가 항의의 뜻으로 무장 탈영을 벌이는 사고가 터지기도 함)
  • "나 간부다 임마" 한 마디에 초병이 어쩔 수 없이 간부들을 암구호 없이 들여보내 줬음. 그러다가 무장공비· 간첩까지 통과시켜 주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저런 것에 비하면 말년병장이 이병 동기 코스프레를 하면서 고참들 뒷담화를 유도해서 어리버리한 신병을 골탕먹인다거나.. 20대 중반의 새파란 소대장이 "자네가 행보관/주임원사인가?"라고 지껄이다가 중대장/대대장에게 까인다거나.. 하는 것은 차라리 귀여운 사례라 하겠다.
오랫동안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돌던 아이템들이지만, 이젠 인터넷 매체를 통해 다 알려져 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 군대에 갓 입문한 병이나 소위라도 속거나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국군은 경영 효율과 위계질서상의 이유로 인해, 복무 조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제약 내지 특성이 있다.

  • 여군은 어떤 형태로든 병 복무가 허용되지 않는다. 비전투 병과도 예외가 아니다. 차라리 사관학교에 들어가면 여자 생도도 남자 생도와 동급의 혹독한 전투 훈련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하지만, 여군 병 같은 건 없다.
  • 또한, 남자도 한번 병으로 복무해서 만기 제대했다면 절대로 병으로 현역 복무를 다시 할 수 없다. 아무리 저출산 때문에 병역 자원이 부족하다 해도, 그리고 심지어 당사자가 원한다 해도 말이다.
    병이 군대에서 지위가 제일 낮은 계급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낮은 병이 짬만 지나치게 많이(?) 먹은 상태로 예비군도 아니고 현역병과 한데 섞여 있는 건 위계 질서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말뚝 박으려면 최하 부사관으로 가야 한다.
  • 장교로 전역한 사람이 나중에 부사관으로 다시 군생활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장교 시절의 군번· 군적은 완전히 말소된다. 일개 중사가 "내가 소싯적에 대위였을 땐 말야" 이렇게 나대는 건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관학교(특히 육사) 퇴교자의 경우.. 비록 장교가 되려다가 짤렸거나 스스로 뛰쳐나오긴 했지만, 한때 최정예 엘리트 장교 양성 코스를 경험했던 애들이다. 그러니 이런 출신인 병이나 부사관이 자대에 오면 기존 간부들이 이미 사전에 다 파악하고 예의주시한다고 하더라. 나이답지 않게 전투복이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이고 남다른 연륜과 짬이 느껴질 테니 말이다.

원래 군대에서 병은 중졸 이상, 부사관은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정하고 운용하는 계급이다. 장교만이 대졸 이상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그토록 군국주의 전쟁광이던 나치 독일과 일제도 대학생은 재학 기간 중에 군 징집을 보류하고, 가능한 한 졸업 후 장교로 우선 선발했었다.
대학생이라는 건 학부만으로도 그 정도로 희소한 인재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징병제와 높은 교육열이 맞물리다 보니 대학생이 너무 흔해지고 병의 평균 학력이 너무 올라간 감이 있다.

2. 하이브리드형 인물들

세상에는 남들이 하나조차도 취득하거나 합격하기 어려운 면허· 자격· 학위를 둘 이상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괴수가 종종 있다.

  • 한 사람이 고시를 여러 개 붙었다거나.. (사법 시험 + 행정 + 외무)
  • 변호사 면허와 의사 면허를 동시에 소지했다거나..
  • 같은 변호사 안에서도 한국 변호사와 미국 변호사 면허를 동시에 소지..
  • 외국어를 네댓 개쯤을 모국어처럼 구사하거나..

이쯤 되면 분야를 불문하고 머리 싸움의 달인이요 공부 기계, 공부의 신이 아닌가 싶다.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_=
대학교에서 학사는 부전공· 복수 전공이나 심지어 전과· 편입(일반/학사)이 드문 일이 아니다. 특히 사관학교는 학사일정이 굉장히 빡세며 애초에 군사학을 포함해 학위가 두 개로 나오는 구조이다.

박사는 취득이 워낙 오래 걸리고 어렵기 때문에 명예박사가 아닌 이상 복수 소지가 사실상 없다. 한 분야에서 박사 졸업을 했다면 이젠 또 다른 학위를 수집(?)할 게 아니라 그 좁고 깊은 기존 바닥에서 계속해서 연구 경력을 더 쌓으면서 학력 인플레를 극복하고, 가방끈 길이에 걸맞은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각종 연구소에는 교수를 꿈꾸는 포닥들이 드글거린다.

학사는 그냥 시험 점수와 평점이 중요한 과정이니, 졸업식 때도 성적 우수자에게 상을 주고 졸업장에 magna cum laude라고 이 사실을 기재한다.
박사는.. 이제 자기가 걸어다니는 프로 연구자이다. 시험 점수가 아니라 자기 학위논문의 제목과 주제가 스펙이요 간판 역할을 해야 한다.
저런 것에 비해 석사 학위 둘은 일부 교수나 능덕 중에 가끔 눈에 띄지만, 그렇게까지 레어한 아이템이 아닌 것 같다. 위치 자체가 좀 애매하니 말이다.

갑자기 군대와 관계 없어 보이는 얘기를 왜 길게 늘어놓았느냐 하면, 군 내부에서도 저런 짬뽕형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수륙 양용, 도로-레일 겸용 차량처럼 말이다. 병, 장교, 부사관(+군무원)을 다 경험한 것 정도만으로는 희소성이 부족하고,

  • 육군 병장, 공군 중사를 거쳐서 해군 장교(헐.. 나이에 안 걸렸나?)로.. 3군 3계급을 다 경험한 분도 있다..;;
  •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김 영옥 대령(1919-2005) 같은 분은 분명 한국인이고 6· 25 참전도 했지만.. 미군 장교 신분으로서 참전했다.
  • 하긴, 옛날에는 일본, 중공, 북한에 이어 남한으로 깃발을 바꾸면서 매번 군번을 새로 받았던 한국인 병사도 있었다. 워낙 혼란하던 시절을 살았으니..

3. 스포츠와의 비교, 그리고 실적

군인과 경찰은 하는 일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제복 입고 무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순직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런데 신체 능력이 좋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군인을 운동 선수에다가도 얼추 비유할 수 있다.

물론 군대 사격과 스포츠 사격은 서로 다르며, 군대의 총검술과 스포츠에서 다루는 격투기 무술도 관점이 동일하지 않다. 그래도 공통점이 있긴 하기 때문에 체대 출신이 군생활도 더 잘하는 편이다.

이 두 업종의 종사자들은 생업을 위해 무슨 연구 개발을 하거나 세일즈 마케팅을 하지는 않는다. 그럼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세계 규모의 체육대회인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받으면..
일단 포상금 명목으로 6천만 원이 일시불로 들어온다. 그리고 평생 연금이 매월 100만원씩 들어온다.

우리나라가 스포츠 인프라가 열악하고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 투자가 인색하네 마네 말이 많지만.. 그래도 일단 실적을 낸 사람에 대한 특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후하다. 우리나라는 그깟 메달에 연연하지 않는 생활 체육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금메달에 목숨 거는 개발도상국 소수정예 엘리트 체육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금전적인 포상만 있는 게 아니다. 미필 남자의 경우 군 완전 면제는 아니지만 꿈에도 그리던 병역특례 보충역 대체복무라는 엄청난 특권이 주어진다. 아시안게임에서는 반드시 금메달만 받아야 하지만 올림픽에서는 아무 메달이나 받으면 된다. 병역을 해결하려는 절박함 때문에 올림픽 경기서 마치 약 빤 것 같은 초인적인 퍼포먼스가 나온다니, 이를 합법적인 도핑에다 비유한 '면제로이드'라는 말까지 있다.

이렇듯, 운동 선수는 대회 성적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냉정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스포츠는 그 자체가 물리적으로 뭔가를 생산하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먹고 사는 프로 선수는 국민 세금 지원이 아니면 대기업 후원이 있어야만 생계가 유지될 수 있다. 이런 프로의 세계에서 남의 돈이 헛되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결국 성적이 유일하다.

스포츠계와 마찬가지로 군대도 그 자체는 오로지 소비만 하는 집단이다. 생산을 하는 게 없다. 그렇다면 군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군을 잡거나 저지해서 나라를 지켰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옛날 전근대 시절로 치면 적군의 수급을 제출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단 민간인은 수상한 걸 목격했을 때 신고만 정확하게 잘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거물 월척을 낚는 데 성공할 경우 인생역전 급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군인은 그런 신고를 받는 입장이며, 병사가 상부에게 그걸 보고하는 것까지는 군인이 원래 당연히 맡아야 하는 업무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가 포상금을 받는 조건은 지금까지 배운 대로 적군을 제압하고 실제로 사살 또는 생포까지 했을 때 성립한다. 적의 시신에서 아군의 총알이 박혀 있었고 정황상 그 총알을 누가 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건 뭐.. 살인 사건의 범죄자가 밝혀지고 잡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이 방면으로 제일 유명한 사례는 1980년 3월 23일, 한강 서부 전선에서 경계 근무 중에 강 건너 침투하던 무장공비를 3명이나 사살한 황 중해 일병(그 당시.. 22세)과 그 부사수이다. 그는 1980년 물가로 1천만 원, 정말 집을 살 만한 액수의 포상금을 받았다.

어디 그 뿐이랴? 보통 전사· 순직했을 때에나 받는 1계급 특진을 살아서 받았으며, 6개월 사단장 휴가와 6개월 연대장 휴가를 연달아 받아서 남은 복무 기간 중에 무려 1년을 그냥 합법적으로 탱자탱자 놀았다. 그리고 휴가 떠날 때는 별들과 함께 헬기 타고 금의환향 했다!

그러고도 남는 것이, 이 병사의 상관들은 생판 누군지도 몰랐던 부하 한 명 덕분에 자기 근무 실적과 진급길까지 확 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굽신굽신 할 수밖에.. 자기 부대에서 탈영 사고· 자살 사고가 터져서 간부들의 인생이 덩달아 꼬이는 것과는 정반대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그 시절엔 탈북자들을 귀순 용사로 영웅시했던 것만큼이나, 반대로 적군을 사살한 아군이라면 이렇게까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으로 띄워 줬다. "참 잘했어요"가 아니라, "참 잘 죽였어요~"다.
이런 일을 하라고 세금을 쳐묵쳐묵하고 있는 게 군대이며, 군대의 존재 의의를 제일 드라마틱하게 입증한 병사가 나왔으니 이렇게까지 넘치도록 포상을 해서 빨갱이 소탕에 대한 동기를 확실하게 부여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가 군대에서 전방 근무를 하다가 적을 실제로 마주치고 사살까지 하게 될 확률은 로또 급으로 한없이 낮다.
복권은 억대의 금액에 당첨되더라도 불로소득인 관계로 세금이 왕창 떼이기 때문에 당첨의 기쁨이 적지 않게 반감된다. 그 반면, 이런 포상금이나 현상금은 일체의 세금 공제 없이 액면가가 그대로 일시불로 입금된다! 마치 책에는 관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다못해 대회 상금 같은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세금을 약간이나마 떼고 입금되곤 하는데 국가에서 국방· 안보· 치안과 관련하여 직통으로 주는 상금은 세금 오버헤드가 없다. 학교 시험을 빠지더라도 공결은 유일하게 아무 페널티가 없듯이 말이다. 이것도 놀라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 무장공비를 사살한 병사에 대해서도 무슨 헬기 타고 금의환향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억소리 나는 액수의 포상금과 함께, 단순히 안보관 잘 외우고 사격 잘한 형식적인 포상휴가와는 차원이 다른 긴 포상휴가가 주어졌다고는 한다.

옛날에는 잘 알다시피 온통 반공 웅변 대회에다 "때려잡자 공산당" 그랬다. "무장공비의 말로(末路) -- 이 음흉한 악당은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대가리에 납덩이가 박혔습니다~ 고소하다 쌤통이다 꼴 좋다!)"라고 사살된 공비의 시체 사진을 모자이크도 없이 그대로 교보재로 삼아서 공개 전시까지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김 영삼 문민정부는 시기도 1990년대이고 그 정도로 살벌하던 분위기는 많이 사그러들었으니, 강릉 무장공비에 대해서도 민간인 신고자의 포상 말고 군인에 대한 포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남파 공작원' 같은 중립적인 명칭 말고 '무장공비'라는 단어부터가 '공산 비적'-- '떼를 지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무장한 공산당 도둑놈 패거리'의 준말이다. (공작원의 '공'과 공비의 '공'은 한자가 완전히 다르다!) '북괴'에 필적하는 굉장한 멸칭인 셈인데, 저건 단순 멸칭이 아니라 놈들이 하는 짓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뭐 어쨌든, 무장공비를 사살했던 저 황 일병은 그 뒤로 말뚝 박아서 부사관으로 30년 가까이 더 복무하다가, 지난 2012년에 50대 중년의 나이로 상사 계급으로 전역했다고 한다. (☞ 관련 링크) 아무렴, 계급 특진도 전사해서 받는 것보다는 살아서 받는 게 더 나으며, 똑같이 국가로부터 예우받더라도 보상금보다는 포상금을 받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은 뭐랄까, 똥군기와 명예로운 죽음을 너무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특진이라는 걸 전사자 말고는 아무에게도 부여하지 않고.. 항복이나 포로 체험을 금기· 죄악시해 왔다.
미국은 관행이 좀 다르다. 큰 공훈을 세운 군인(전사자 포함)에게 그야말로 천조국 스타일의 어마어마한 혜택이 뒤따르는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 2차 세계 대전 도중에도 군인들 인권과 복지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뛰어났고 말이다.

다만, 계급 자체는 그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전시에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누구에게 높은 직책을 주느라 계급을 일시적으로 올렸다면, 전후에는 계급을 원래대로 되돌리기까지 했다.
본인이 보기에도 미국 스타일이 훨씬 더 합리적이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8/05/14 08:28 2018/05/1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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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방 생각

PC방이란 게 우리나라의 경우 20여 년 전 IMF로 인해 늘어난 퇴직 중년층들의 창업 수요, 비슷한 시기에 보급된 인터넷 전용선 인프라,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같은 초대박 게임 같은 요소들이 한데 맞물린 덕분에 크게 각광받았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는 고속 무선 인터넷 기반의 개인 노트북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단순 인터넷 서핑을 위해서 커다란 데스크톱 PC, 그것도 공공 PC를 이용할 일은 사실상 없어졌다. 어지간한 게임도 폰으로 다 한다.

그럼 이제 PC방이라는 업종은 꿈도 희망도 없이 완전히 망했느냐..??
그건 또 아니다. 요즘도 아무 PC방이나 아무 때나 가 보면 손님들 생각보다 많다.
제아무리 모바일 게임이 인기를 끌고 폰에서도 3D 그래픽이 나온다 해도, 스마트폰이 넘보지 못할 기계 성능과 정교한 키보드· 마우스 컨트롤이 필요한 PC용 게임들도 부지기수이다. PC용 게임 개발사들도 절대로 그냥 놀고만 있지는 않다.

그리고 안 그래도 요즘 게임들은 혼자 하는 게 없으며 이윤 창출을 위해서는 온라인· 네트워크화가 필수인데, PC방은 여러 애들이 한데 모여서 다같이 최신 사양의 컴터를 쓰면서 팀플을 하기 좋다. 이런 게 집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PC방은 게임 폐인(!)들 덕분에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럭저럭 먹고 산다는 거지 PC방 산업은 엄연히 레드 오션이다. 창업 진입장벽이 꽤 낮은 축에 들어서 가게 간 출혈 경쟁이 난무하며, 이용 요금이 유지비 대비 지나치게 하향평준화된 감이 있다. 이래 갖고 대박은커녕 건물 임대료와 알바 인건비, PC 관리· 업그레이드 비용, 게임 개발사들에 지불하는 로얄티는 어찌 충당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요 몇 년 전부터 시행된 전면 금연 조치도 본인 같은 비흡연자에게야 환영할 일이지만, 골초 폐인 고객들을 맞이해야 장사가 되는 업주의 입장에서는 뒷목 잡을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요즘 PC방들은 다른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반쯤 식당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겨우 과자 내지 컵라면 정도나 팔던 건 옛날 이야기이고, 김밥천국 수준으로 밥이 가미된 정식 식사나 온갖 기름진 야식류를 그 자리에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만화방은 자체 조리 음식보다는 배달 음식과 연계를 강화하는 식이었지 싶은데 PC방은.. 자체 조리 쪽이다. 이젠 PC방에서 담배 냄새가 사라진 대신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자욱해지지는 않으려나 모르겠다.

옛날에는 PC방 요금에 몇백 원 단위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요즘은 물가가 물가이다 보니 1시간 1000원이 최소 단위인 듯하다. 그리고 햄버거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PC방도 자리 배당과 요금 지불 같은 단순 업무는 전부 기계화· 무인화가 됐다. 오랜만에 PC방을 다시 찾아가 보니 이런 풍경이 신기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PC방에서는 모든 가정이 구비하기에는 귀찮은 장비를 제공하여 소규모로 사용하는 요금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캐너라든가 뭔가 독특한 프린터 같은 거 말이다. 독특한 인쇄가 무슨 말이냐 하면, 고퀄 컬러 사진이라든가, 커다란 A3 용지 출력 같은 거. 그렇다고 전문 출력소를 찾아가기에는 너무 귀찮고 인쇄 분량이 적을 때 말이다.
이런 시스템이 잘 돼 있어서 인쇄 주문만 원격으로 내린 뒤, PC방에 들러서 PC 이용료 없이 인쇄비만 내고 결과를 찾아갈 수도 있으면 더 좋다.

물론 프린터를 구비한 PC방은 마치 세차 시설을 갖춘 주유소처럼, 이윤은 별로 안 나는데 장비의 유지 관리비만 더 들어서 귀찮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국내의 PC방들은 인쇄고 뭐고 그딴 거 필요 없이 게임 위주로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긴 하다.

뭐 아무튼, PC방은 게이머들의 수요 덕분에 2010년대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개인 노트북, 무선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해 확실하게 없어져 버린 것들도 있다.
첫째, 전문적인 PC방 말고 버스 터미널, 지하철역 내부, 심지어 찜질방이나 열차(새마을· 무궁화호급) 카페 같은 곳에 어설프게 비치되어 있던 "비게임용" 공중 PC(인터넷 라운지)들은 전멸했다. 왜, 500원짜리 동전 넣고 10분인가 15분 동안 쓸 수 있던 유료 공중 PC들 말이다.

하다못해 재래식 공중전화는 군인이나 외국인들을 위해서라도 소수나마 필요하겠지만, 게임용이 아닌 그런 컴퓨터들은 이제 쓰는 사람이 없으며 수익보다 유지 보수 비용이 더 커졌을 것이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공중전화가 필요할 정도일 사람은 긴급한 메일 확인을 위해서 이런 PC도 필요하긴 하겠다만.. 수요는 어차피 극소수일 것이다)
뭐, 전자기기 서비스 센터나 자동차 정비소 같은 데서 대기 고객의 편의를 위한 PC들은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있지만 그건 애초부터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게 아니다.

옛날엔 종로3가 역 환승 통로 같은 곳에 의자도 없이 아예 선 채로 무료로 잠깐 사용하는 인터넷 연결 PC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PC를 비치하느니 차라리 무선 인터넷 중계기나 스마트폰 고속 충전 단자를 설치하는 게 추세이다.

둘째, 그 다음으로..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매일 아침 지하철역 출입구에서 무료로 배부되던 찌라시들이 완전히 망하고 없어졌다. AM7이던가 Metro던가 이런 것들.
차라리 "교차로", "벼룩시장"처럼 처음부터 소규모 광고를 목적으로 무료로 배부되는 생활정보지들은 컴퓨터· 인터넷이나 지하철하고는 무관하게 존재해 왔다. 그런데 뭔가 연예· 스포츠 신문 같아 보이는 찌라시가 뭘로 어떻게 먹고 살려고 저렇게 무료로 뿌려지는지 개인적으로 좀 신기해 보였다.

뭐, 뉴스 기사의 분량과 퀄리티가 유료 종이 신문과 같은 급일 수는 없었겠지만, 거기에는 글과 광고만 있는 게 아니라 스도쿠 퍼즐 같은 것도 있고 연재 만화도 있었다.
승강장에서 지하철 기다리면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시간 때우기 용으로 괜찮기 때문에 집어가서 읽는 사람들이 제법 됐으며, 지하철 안에서는 "읽고 난 찌라시들은 선반 위에 놔두지 말고 제발 승강장 안의 수거함에다가 버려 주세요"라고 안내 방송이 지겹도록 나오곤 했다.

그런 찌라시들은 차내에 가만히 놔 두면 폐지 수집하는 어르신들이 알아서 잽싸게 가져가긴 했다. 그러니 청소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긴 했다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높은 선반으로 팔을 무리해서 뻗느라 민폐가 발생하는 게 문제였다.

그랬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어 사람들이 지하철 안에서는 DMB를 시청하고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 그 무엇을 하건 요 손바닥만 한 기기에서 눈을 떼질 않는 시대가 됐다. 찌라시 따윈 이제 아오안. 그래서 저건 답이 없는 지경으로 전락하여 사라졌다.
참고로 본인은 예나 지금이나 지하철 안에서는 그냥 자거나 내 노트북 PC를 꺼내서 작업하거나 성경을 읽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찌라시가 있던 시절에도 그걸 딱히 읽지는 않았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5/05 19:36 2018/05/0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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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복원

Windows에는 시스템 자신의 소프트웨어적인 유지 보수와 관련하여 (1) 업데이트와 (2) 시스템 복원이라는 두 기능을 제공한다. 전자는 프로그램을 최신 상태로 유지하는 기능으로, 개념적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것에 대응한다. 후자는 그와 반대로 과거로 돌아가는 기능이다.

옛날에는 프로그램의 업데이트/패치라는 게 오프라인 상으로 동작하는 기능에 버그가 발견되어 고쳐졌거나, 아니면 작게나마 새로운 기능이 추가됐을 때 이를 반영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는 굳이 그런 게 아니라 '보안 취약점'을 수정하는 업데이트의 비중이 커졌다.

보안 취약점은 세상의 컴퓨터들이 인터넷에 한데 연결돼 있지 않거나 아주 제한된 시간 동안 잠시만 연결된다면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컴퓨터가 상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으며 아무나 아무 컴퓨터로 패킷을 보낼 수 있고, 그 패킷이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정 지시를 수행하고 코드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편의라는 명목 하에) 보안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엑셀· 워드 문서가 그냥 데이터뿐만 아니라 매크로가 추가됨으로써 보안 위험이 커졌듯이 말이다.

이러면 최악의 경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성 코드가 원격 조작으로 실행될 수 있으며, 내 컴퓨터에 있는 데이터와 내가 키보드로 입력하는 문자가 나의 동의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컴퓨터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있다. 내 데이터가 날아가고 내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 내 컴퓨터가 주변의 컴퓨터로 악성 코드를 퍼뜨리는 좀비가 될지 모른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컴퓨터 시대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재앙이 벌어질 수 있다.

보안 업데이트는 프로그램의 그런 허점들을 막아 준다. 정적 분석 기술로 컴퓨터 프로그램이 취급하는 모든 데이터의 처리 양상을 원천적으로 분석해서 보안 취약점을 자동으로 찾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그때 그때 취약점이 발견되면 해당 소프트웨어의 제조사에서 패치와 업데이트를 내는 식으로 "사후 약방문" 식 대응이 어쩔 수 없이 통용된다.

소프트웨어는 굳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현 상태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유지 보수를 해야 하고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 반제품이 되었다. 첫 버전 출시를 한 것은 전반부 종료일 뿐이고, 그 다음부터가 후반부의 시작이다.

업데이트라는 게 평범한 기능 개선과 추가에 지나지 않는다면.. "난 그런 기능 없어도 지금 프로그램 쓰는 데 아무 불편 없어요" 이런 사용자는 굳이 업데이트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보안 업데이트는 마치 예방접종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내가 안 받으면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용자들이 반드시 받을 필요가 있다. 일단은 말이다.

업데이트에 대한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다음으로 시스템 복원은 위급한 상황에서 굉장히 유용한 기능이다. 개발자의 입장에서 이런 기능은 구현하고 테스트· 디버깅 하는 게 굉장히 엄청나게 어려웠을 것이다.

본인의 경우 꽤 오래 전(거의 2009~2010년경.. Vista 시절), 언제부터인가 집 컴퓨터가 인쇄가 안 되기 시작했다.
프린터가 USB 포트 상으로 인식은 분명히 되고, 인쇄 명령을 내리면 프린터가 이를 받아서 예열 작업까지는 한다(레이저임).

그런데 그 후로 프린터는 아무 반응이 없이 인쇄가 전혀 진행되지 않으며, 도리어 인쇄를 내린 응용 프로그램만 응답 불능 상태에 빠진 채 멎어 버리는 것이었다.
멎은 프로그램은 CPU를 사용하지는 않으며, 다른 프로그램들은 정상 동작했다. 하지만 그 멎은 프로그램은 작업 관리자로 아무리 죽여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드웨어 문제라면 이거 프린터를 수리 받아야 하는데, 무슨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멀쩡한 프린터가 갑자기 고장 날 리가 없으니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만약 소프트웨어 문제라면 프린터 드라이버를 다시 설치하거나 최악의 경우 운영체제를 새로 설치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부모님께서 내가 없는 동안 이 컴퓨터로 이것저것 ActiveX도 깔고 인쇄를 하긴 하셨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프린터가 이렇게 됐는지 몰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혹시나, 설마 해서 ‘시스템 복원’을 해 봤는데 이게 날 살렸다.
부모님께서 컴퓨터를 건드리기 전인, 약 1주일 전으로 복원을 시켰다. 그 사이에 컴퓨터에 생긴 변화는 운영체제 업데이트 몇 개가 자동으로 설치된 것 정도가 떠 있었다.

시스템 복원을 하고 나자 프린터는 거짓말처럼 인쇄가 되기 시작했다. 아까는 무엇 때문에 안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스템 복원 기능을 이용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잘 얻었다.
Vista보다 더 옛날, XP 시절에도 본인은 시스템 복원으로 여러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문제를 딱 해결한 적이 있었다. 이런 기능이 없었으면 영락없이 운영체제를 재설치해야 했을 터이다. 물론 이제는 운영체제를 재설치할 일 자체가 거의 없어지다시피했지만 말이다.

이런 Windows 업데이트와 시스템 복원은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르지만 그래도 서로 한데 맞물려서 돌아간다. 업데이트를 설치하는 것부터가 시스템 복원 지점을 만든 뒤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업데이트를 설치한 뒤에 운영체제에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할 수가 있다. 상태가 예전보다 나빠졌다면 시스템 복원을 실행해서 원상복구를 시킬 수 있다.

시스템 복원은 Windows 2000도 아니고 ME에서 첫 도입된 정말 얼마 안 되는 기능 중의 하나이다. 이 기능으로 인해 Windows는 평시에 차지하는 하드디스크 용량이 본격적으로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본인은 가끔 갖고 놀 목적으로 Windows ME 가상 머신을 갖고 있다. 여차여차 하다 보니 하드의 파일 시스템을 FAT32가 아닌 FAT로 잡아 버려서, 주 파티션의 용량이 겨우 2GB가 됐다. 거기에다가 MS Office와 날개셋 정도만 설치하면 하드 용량을 딱 절반인 1GB 남짓 차지했는데..

그렇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테스트 하고 빌드 스냅샷을 설치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가상 머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유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더니, 겨우 50~60MB 남짓밖에 안 남는 사태가 벌어졌다.
뜨악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시스템 복원 기능을 완전히 끄고 기존 스냅샷들을 모두 삭제한 뒤 재부팅을 하자.. 사라졌던 1GB 남짓한 공간이 다시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용량 쳐묵쳐묵의 범인은 시스템 복원 기능이었다.

얘는 마치 휴지통처럼 최대 몇백 MB까지만 공간을 사용하라고 옵션을 지정하는 게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훨씬 더 초과하여 디스크를 잡아먹고 있었다. ME의 복원 기능만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늘날의 Windows 10은 브랜드 이름과 주 버전은 이제 더 안 고치고, 찔끔찔끔 업데이트만으로 보안 패치와 서비스 팩, 버전업을 모두 겸하게끔 배포 방식을 바꿨다. 이제 날짜와 빌드 번호가 사실상 버전 번호가 된 셈이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너무 자주 업데이트가 발생해서 CPU 잡아먹고, 시간이 흐를수록 하드디스크 용량 소모가 너무 심하며, 컴퓨터를 원하는 때에 제대로 끄지도 못하게 만드는 등 민폐가 너무 심하다.

게다가 업데이트 설치 후에 부팅이 안 되고 컴이 먹통이 되는 현상을 집과 회사에서 두 번씩이나 겪은 뒤부터 본인은 학을 떼 버렸다. 인터넷 연결망이 종량제 기반이니 니 멋대로 업데이트 받아서 설치하지도 말고 알리지도 말라고 레지스트리를 조작해서 넣었다.
Windows 10만 그런 게 아니라, 구닥다리 7을 굴리는 작업실 컴도.. 하는 일 없이 CPU 잡아먹으면서 열받고 팬을 돌아가게 만드는 주범이 update 서비스인 걸 보고는 이거 nProtect만 욕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서비스 다 내리고 업데이트 따위 꺼 버렸다.

아무리 보안과 안전이 중요하다지만 나는 최소한의 보안 관념이 있고 내 컴퓨터 통제를 스스로 할 줄 알며, 대부분의 보안 결함은 여느 교통사고나 범죄 사건과 마찬가지로 정말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막장 상황에서나 발생하는 것들이다. 위험이 너무 과장되고 부풀려진 면모가 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횡포는 가성비를 따졌을 때 강제 업데이트를 justify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컴퓨터 자원은 무한한 게 아니다. 아무쪼록 시스템의 안정성을 관리하는 기능들이 지금보다 자원을 좀 아껴 쓰고 민폐 안 끼치며 동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

Posted by 사무엘

2018/04/28 08:30 2018/04/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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