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 43 : Next »

오디오 기기의 종류

옛날, 스마트폰이 없고 지금 같은 초고속 무선 인터넷이란 게 없고 컴퓨터가 고화질 고음질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거뜬히 처리할 정도로 성능이 좋지 못하던 시절에는(대략 20세기 말, 1990년대까지)..
우리에게 음성과 동영상 정보를 제공하는 물건들은 대부분 아날로그 기술 기반이었다.

매체 재생(!!)이라는 건 (1) 방송국의 전파를 받아서 재생하는 기능, 그리고 (2) 테이프에 저장된 것을 재생하는 기능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라디오의 경우, 한 기기가 둘을 모두 수행해서 '오디오'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 같다.

그러나 영상 쪽은 텔레비전은 전파 수신 기능만 있고, VCR 또는 VTR이 기존의 텔레비전과 단자를 연결해서 재생 영상을 보여주는 형태로 성격이 나뉘어 있었다.
텔레비전과 VCR의 기능이 일체형으로 통합된 물건도 나오긴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가성비가 안 맞고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비디오의 신호를 받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의 채널을 꼭 4번으로 맞추곤 했다.
그리고 VCR도 텔레비전 방송 녹화 기능을 갖추기 위해서는 TV로 신호를 보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 역시 TV의 신호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VCR을 켜고 TV 채널을 4로 맞추면, 재생 중일 때는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이 나오고, 그렇지 않을 때는 VCR이 받고 있는 TV 채널의 영상이 나오곤 했다.

과거에 있었던 오디오/비디오 기기의 차이를 이렇게 생각해 보니 흥미롭다.
텔레비전은 제작의 난이도와 브라운관의 부피 문제 때문에 휴대용 형태로 만드는 건 영 무리였으며, 일부 나온 제품도 그냥 흑백이었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그 반면, 라디오는 기계 구조가 더 단순하고 사람도 눈을 안 쓰고 귀로 듣기만 하면 되니, portability(휴대성)이 근본적으로 더 뛰어났다. 그래서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초소형 라디오는 옛날부터 있었다. 트랜지스터가 괜히 발명된 게 아닐 테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것도 호락호락 쉽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우리나라 금성사가 1960년대에 최초로 만들어 낸 국산 라디오만 봐도, 기능은 참 단순 단출한 게 부피는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라디오 말고 음반을 재생하는 휴대용 전자기기는 SONY의 그 이름도 유명한 '워크맨'이 발명되기 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워크맨 또는 '마이마이'라는 상표명이 거의 보통명사처럼 돼 버렸다.
LP 레코드는 그 육중한 지름부터가 호주머니 휴대와는 담을 싼 형태이고.. 카세트 테이프가 최초로 '밖에서 걸어가면서 음반을 듣는' 시대를 연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1) 휴대용 초소형 오디오는 스피커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어폰을 꽂아야만 청취 가능하다. 똑같이 휴대용이어도 아까 그 소형 라디오는 허접하게나마 자체 스피커로 소리가 나오기는 하는 반면, 워크맨 부류는 무조건 이어폰으로만 소리가 나온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전원도 건전지만 사용 가능하다. 나중에는 전용 충전지를 쓰는 것도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AC 전원 대신 전지만 지원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1980년대에 오디오 CD가 나오면서 그쪽은 동그란 휴대용/미니 CD 플레이어가 별도로 담당하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D는 디지털 매체인 덕분에 음질이 매우 좋다. 곡의 탐색 방식도 무식한 되감기/감기가 아니라 아주 간지 나 보이고..
게다가 번쩍거리는 디스크의 외형은 뭔가 21세기 하이 테크놀러지의 포스가 느껴지니.. 모든 것이 신기한 물건이었다. 사실, 테이프는 디지털 음원 매체에 비해 다음과 같은 점이 몹시 불편했다.

  • 무음 구간에서도 테이프의 재생 주행만으로 듣기 싫은 '쓰으으읍' 소리, 일명 hissing noise가 남. 테이프를 듣다가 CD를 들으니 이 노이즈가 없는 것만으로도 완전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 기계마다 재생 속도가 불균일한 편이어서 pitch가 왜곡됨.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게 많아서 원래 속도보다 거의 2~3% 가까이 빠르게 재생하는 물건도 있어서 아주 불쾌했다. 참고로 재생 속도가 6% 정도 더 빠르거나 느려지면 조가 한 반음만치 완전히 내려가거나 올라가 버린다.
  • 앞뒤로 감고 테이프 방향 바꿔 끼우는 게 몹시 불편함. 컴퓨터 주기억장치의 명칭이 왜 random access를 그리도 강조하는 형태로 지어졌는지(RAM)가 이해된다.
  • 늘어나고 씹히는 현상은 정확하게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잘 모르겠다. 본체 안에서 곱게 돌아가기만 해야 할 테이프가 밖으로 줄줄 새어나와 있는 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다만, 같은 음반이라도 CD는 단가가 테이프보다 1.5~2배가량 더 비쌌으며, 재생기도 더 비쌌다. 녹음도 가능하지 않고.. 그러니 테이프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별도의 고유 영역을 갖게 되었다.

워크맨 내지 마이마이보다 더 큰 체급의 오디오는 영어로 일명 (2) boombox(붐박스)라고 불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스피커는 일체형으로 1개 또는 2개인데, 1보다는 스테레오 채널을 지원하는 2가 더 일반적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이어폰 연결도 물론 가능하다.
  • 테이프 데크도 역시 1개 또는 2개인데, 이건 2보다는 1이 더 일반적이다. 2는 테이프끼리 녹음, 즉 복제를 지원하는 버전이다. 물론 1개짜리도 라디오 방송 녹음 정도는 할 수 있게 빨간 녹음 버튼이 있다.
  • 좀 고급형은 꼭대기의 뚜껑을 열어서 CD를 집어넣을 수도 있다.
  • 전원은 건전지와 AC 전원을 모두 지원하는 게 보통이다.
  • 어떤 물건은 통상적인 AM/FM 라디오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채널의 음성 신호를 수신하는 기능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런 붐박스는 걸어 다니면서 청취하는 것보다는.. 들고 다니다가 실내에서든 야외에서든 사용할 때는 내려놓고 사용하는 형태에 가깝다. 들고 다니기 편하라고 위에는 손잡이가 필수적으로 달려 있다.
옛날엔 각진 직사각형 모양이 주류였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동글동글해졌다. 아래의 금성 TSR-581은 옛날에 우리집에도  있었다. 완전 추억 돋는구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TSR-581처럼.. 좀 고급인 제품은 현재 출력되는 소리의 음량을 게이지 형태로 표시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것도 양 채널별로 말이다.
주파수 대역별로 음량을 다 표시하려면 저런 1차원 선이 아니라 2차원 평면에서 스펙트로그램을 그려야 할 것이고, 그걸 디지털 신호를 대상으로 구현하려면 푸리에 변환이 필요할 것이다..;;

음파를 단순 파형 이상의 온갖 현란한 애니메이션으로 표시하는 기능이 바로 컴퓨터용 mp3 재생기들이 지원하는 시각화 기능이다. 그럼 아날로그에서는 그런 기능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오디오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체급은 휴대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대신 다양한 기능과 극한의 음질만을 추구한 (3) hi-fi / 미니 컴포넌트, 혹은 일명 전축(전기 축음기??) 등으로 불리는 물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무조건 AC 전원 기반이며 손잡이 따위는 없다.
  • 좌우로 거대한 고출력 스피커가 별도의 파트로 구비되어 있다.
  • 음파의 주파수대별로 음량을 조절하는 이퀼라이저가 있다.
  • 공간 제약이 없으니 옛날 물건 중에는 꼭대기에 LP용 턴테이블을 갖춘 경우도 있다..;;

먼 옛날에 본인의 집에는 산요-한일 전자에서 제조한 전축이 있었다. 테이프끼리 녹음은 2배속으로 할 수 있으며, 무선 마이크가 있어서 FM 98MHz로 맞춘 뒤에 주변 소리를 테이프에다 녹음도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인이 접했던 붐박스급 오디오 중에서는 저런 걸 지원하는 물건을 못 봤으니, 전축이 오디오로서의 기능이 가장 뛰어났던 셈이다.

옛날에는 '인켈'이 전축 제조사로서 CF도 많이 내보내고 무척 잘 나갔었는데 요즘은 어찌 됐나 모르겠다.
사실, 일본이 아날로그 기반의 전자 기기의 압도적인 명품 명가였고, 이 점에서는 굳이 라디오나 TV뿐만 아니라 코닥 같은 필름 카메라 제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그 지위가 많이 흔들리게 되었다. 심지어 디지털 기술을 취급하는 MP3 플레이어 제조사들조차도(아이리버, 코원..)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해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됐으니, 기술 발전이라는 건 정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노릇이며 이 바닥에 종사하는 기업 경영자들은 어깨가 더욱 무거울 듯하다.

요즘 오디오는 구닥다리 테이프 데크는 빠지고(어쩌면 CD 데크도!) USB 꽂아서 MP3/WMA를 틀어 주고, 그냥 스마트폰보다 더 음질 좋은 스피커를 제공하는 것에만 의미를 둬야 할 듯하다. 하긴, 요즘은 블루투스 덕분에 스피커 단독으로도 장사가 얼마든지 된다. 스피커가 출력할 음원은 주변의 스마트폰에서 무선으로 공급해 주고 말이다.

지금도 중· 고등학교 영어 듣기 평가는 EBS 라디오로 진행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 전자 기술의 총아인 스마트폰이 아날로그 라디오의 기능마저 흡수하는 건 기술적으로야 일도 아닐 텐데.. 인터넷 데이터 장사 밑천을 날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제공되지 않는 것이지 싶다. 카카오톡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기존 SNS 장사를 망친다고 통신사와 앱 개발사 간에 마찰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오디오 얘기만 늘어놓았는데 이렇게 장문이 한 편 써 졌다.
하나만 얘기를 더 늘어놓자면, 자동차에 장착되는 카오디오는 붐박스라기보다는 전축의 영역에 가까운 물건으로 보인다. 쉽게 붙였다 뗐다 하지 않으며, 자동차 내부는 4채널 서라운드 입체 음향을 제공하기에 최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동차에 장착되는 음향 시스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고급이며, 카오디오는 더위와 추위와 온갖 혹독한 진동에도 견딜 수 있게 꽤 튼튼하게 만들어진다. 과거엔 고급 승용차에 장착되는 카오디오는 위 아래 두 단으로 구성돼 있어서 상단은 카세트 데크와 오디오 조작 버튼이 있고, 하단에는 이퀼라이저 게이지들만 놓여 있기도 했다. 아래의 대우 임페리얼처럼 말이다. (우측 하단을 주목한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오디오는 운전자의 편의를 위해 테이프의 한쪽 면이 다 되었을 때 갈아 끼우지 앉아도 역방향으로 곧장 재생하는 기능이 있으며, 라디오도 일일이 주파수 다이얼을 돌릴 필요 없이 방송이 존재하는 주파수를 자동으로 탐색하는 기능이 있다. 이것은 본인이 자동차 밖의 다른 오디오 기기에서 본 적이 없는 기능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6 08:33 2019/02/16 08:33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87

음악가/음악 관련 에피소드

1. 로베르트 슈만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이라고 19세기를 살았던 독일의 음악가가 있다.
이공계 석박사급 전문가 중에도 취미로 하는 음악이 연주건 작곡이건 (준)프로급인 괴수가 일부 있긴 하다만.. 슈만은 그렇지 않고 순수 문과.. 즉, 문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감성파 쪽 천재였다.

그는 20대 초반 나이 때 피아노에 완전 미쳐 있었는데.. 욕심을 내서 연습을 너무 무리해서 하다가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원래 지망했던 피아니스트의 길을 갈 수 없게 됐다. 결국 작곡, 지휘, 교육에다 문학 기질을 살린 음악 평론 분야로 전업했다.

나 초등학교 시절에 봤던 피아노 교본 앞부분에 슈만의 초상화와 함께 일대기 소개가 있었다. 다른 부분은 다 잊어버렸지만 “지나친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라는 문구는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지나치다’라는 국어 용언의 형용사 용법을 이때 거의 처음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excessive.. 동사는 그냥 pass by일 테고)

이게 단순히 손과 손가락이 쥐가 나거나 삐거나 피 좀 흘린 정도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부러지거나 영구적으로 마비되기라도 한 듯한 모양이다. 맨손으로 피아노를 죽어라고 치기만 했다고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피아노가 자체가 손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무슨 공작 기계이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말이다.

아, 생각해 보니 피아노 뚜껑을 덮다가 손가락이 끼이고 깔려서 다칠 수는 있겠다. ㅡ,.ㅡ;; 하지만 슈만이 그런 사고를 당한 건 물론 아니었다. 원하는 손가락 움직임을 강제로 구현하려고 손가락에 특이한 기구를 끼우고 평범하지 않은 상태로 연습하다가 탈이 난 것이었다. 1832년의 일이다.

장애가 생긴 부위는 오른손 약지였다. 참고로 안 중근 의사는 맹세를 할 때 왼손 약지의 첫 마디를 끊었다.
넷째 손가락이 손가락들 중에 그나마 가장 덜 중요한 부위라고는 하지만, 악기를 연주할 때는 안 쓰이는 손가락 부위가 없을 것이고, 아무 손가락이라도 그렇게 결손이 있으면 군대도 현역으로 안/못 간다.

그래도 얼마나 피아노에 미쳤으면 연습을 저런 식으로까지..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열정 하나는 존경스럽다.
하농 교본만 봐도.. 끝에 보면 “피아니스트로서 손의 감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이 60곡 전곡을 치라는 주문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문구와 함께 끝났었다. 물론 프로 전공자 한정이겠지만 말이다.;;

이 슈만은 피아노뿐만 아니라 연애에도 불같이 미쳤었다. 인생 한번 참 정열적이다.
자기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스승의 어린 딸.. 정확히는 자기보다 9살 어린 10대 아가씨(클라라)에게 완전 꽂혀 버렸으며, 그쪽의 마음도 얻었다! 그래서 없으면 서로 못 사는 사이가 됐다.

그 스승이라는 양반은 당연히 노발대발했다. 아무리 자기 제자라지만, 가난하고 미래 불투명하고 손도 다친 9살 연상의 작곡가 아저씨한테 내 딸 절대 못 준다고 맞섰고 치열하게 민사 소송까지 갔다. 허나, 결국 스승이 졌다.

둘은 1840년에 결혼해서 그래도 금슬 좋게 자녀도 여섯 명이나 낳고 잘 살았다. 부인은 남편이 못 이룬 피아니스트의 길을 계속 갔고 말이다. 이 정도면 뭐 승리한 인생 아니겠나.; (스승과도 나중에 화해했다고 함)
뭐, 빌 게이츠도 9살 연하의 자사 여직원과 결혼했다지만, 슈만은 빌 같은 처지가 아니었지...ㄲㄲ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철덕 작곡가로 유명했던 안톤 드보르작(1841-1904)도 슬하에 딸을 뒀으며, 자신의 어느 제자(요제프 수크)로부터 “스승님의 딸을 제게 주십시오!”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유럽 그 시절의 음악계엔 저런 관행이 드물지 않았던가 보다.

그 제자는 자신의 스승 겸 미래의 장인의 취향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여기 올 때 무슨무슨 번호의 열차를 탔고 열차의 움직임이 이랬다고 의기양양하게 보고를 했는데.. 드보르작은 표정이 썩으면서 그 시간대에 그 열차가 다닐 수 없다고 거짓말을 알아챘던가, 아니면 네가 차량 번호와 운행 스케줄 번호를 헷갈렸다고 쿠사리-_-를 먹였다고 한다. 그래도 결혼을 허락은 해 줬다.;;

2. 괴음악 "검은/우울한 일요일"

본인은 먼 옛날 중딩 시절에, 표지부터가 악마의 얼굴 모양으로 뭉게뭉게 치솟고 있는 화재 현장 연기 사진인..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도시전설 괴담 모음집 책을 본 적이 있었다.
"링컨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의 공통점"부터 시작해, 요런 얘기가 그 책에 있었다.

"검은 일요일"이라고.. 프랑스의 루란스 차르스라는 사람이 1932년에 작곡한 음악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암울하고 구슬픈 곡이었는지, 이걸 듣고서 유럽과 미국에서 1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극도의 멘탈붕괴를 체험하고 연달아 자살했다고 한다. 유서에다간 문제의 곡을 당당히 언급하면서 말이다.

"이 곡을 들으니 삶의 의욕이 송두리째 사라지네요. 찢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저는 이 생을 마감하렵니다. ㅠㅠㅠ 이게 다 검은 일요일 때문입니다. 제 장례식 때 이 곡을 연주해 주세요~" (헐, 조문객들까지 자살하게 만들려고?? =_=;;)
세계의 날고 기는 음악가와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들이 이 곡에 무슨 마가 끼였는지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려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곡과 작곡자의 정체에 대해서 오늘날 검증 가능한 건 물론 하나도 없다. 결정적으로 그 곡은 세계 각국의 방송국에서 연주 금지 처분을 받고, 1945년경에 전세계에서 악보가 회수되고 폐기· 소실됨으로써 이제 더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ㅡ,.ㅡ;;

그나마 저 이야기에 근접한 진실, 팩트는 이렇다.
1933년에 헝가리의 '셰레시 레죄'라는 사람이 우울한 단조풍으로 가사 없는 피아노 연주곡을 하나 작곡했다. 그 뒤 1935년에 다른 사람이 멜로디에 걸맞은 우울한 다른 가사와 제목을 붙여서 Gloomy Sunday라는 노래가 완성됐다.

지금은 저 곡을 유튜브에서 곧장 검색해서 들을 수 있다. (☞ 링크 46초 이후부터 곡이 시작됨) 주선율이 도도도~ b미미미 솔솔솔 도도도~ 로 시작하며, 다시 말하지만 장송곡 같은 우울하고 구슬픈 느낌이긴 하다. "봄봄봄봄(도 미 솔 도) 봄이 왔어요"(이 정선, 봄)와는 정반대 심상이다.
하지만 이 정도 곡을 멀쩡한 일반인이 듣는 것만으로 멘탈이 붕괴해서 머리를 쥐어뜯고 무슨 마 8:32의 돼지처럼 뛰쳐나가 자살을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프랑스 사람이 작곡한 검은 일요일(??)은 헝가리 사람이 작곡한 우울한 일요일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저 실존하는 곡조차도 대외적으로는 "Hungarian Suicide Song"이라는 섬뜩한 별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저 곡이 발표되었던 당시에 헝가리 내부에서, 저 곡 듣고서 자살한 게 아닌가 의심되는 사람이 10여 명 정도 있기는 했다고 한다. 그래서 헝가리에서 이 곡이 금지곡으로 찍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곡이 멀쩡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증명되고 검증된 바가 물론 없다. 안 그래도 극심한 가난과 질병, 인생 실패 등을 비관해서 자살할까 말까 고민 중이던 몇몇 소수의 사람이 왕창 우울한 곡을 듣고는 이판사판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권총 헤드샷을 날렸을 수는 있겠다. 루머도 아무 근거 없이 생기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별 상관 없는 얘기이다만.. 1932(33)~45년 사이이면 공교롭게도 전쟁광으로 흑화하던 일본, 나치 독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집권과 거의 일치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사람을 100수십 명씩이나 연쇄자살로 내몬 악마의 음악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지만, 단 한 명이라도 사람을 골수 중증 철덕으로 개조시킨 마법 마성의 음악은 지구상에 분명 존재하며, 그 증인 당사자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음악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에는 음악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이 연주되던 당시의 분위기와 맥락, 청취자의 심리도 기여하는 게 매우 크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07 19:29 2019/02/07 19:29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84

1. 사적 제재와 무장

공동주택에서의 3대 민폐는 담배, 애완동물, 층· 벽간 소음이지 싶다. 그야말로 후각· 촉각· 청각이 골고루 다 분포해 있구나! 또한, 상황이 좀 더 열악한 곳에서는 주차 시비까지 추가해서 4대가 될 수도 있겠다. 이것 때문에 살인 사건도 이미 몇 건 난 적이 있다.

주거용 건물은 계단 통로가 담배 냄새가 안 나는 곳을 별로 못 봤고, 요즘은 예전보다 개도 주변에서 부쩍 눈에 띈다. 먹고 살기 빠듯하고 힘들다면서 애완동물 키울 여력은 있는가 보다. 도시는 시골과 달리 동물에 친화적인 곳이 아니긴 하다.

다음으로 소음 문제의 경우, 찾아가서 항의하는 건 씨알도 안 통하니 당하는 쪽에서도 벽이나 천장을 같이 쿵쿵 치는 걸로 응사하는 편인데.. 인터넷을 뒤져 보니 단돈 몇 천원 짜리 고무 망치가 그렇게도 즉효약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 대표적인 사례: 슈랄라 월드)

잘 쳐 주면 건물 자체는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쿵쿵~ 웅웅~ 깊은 진동을 전해서 가해자를 놀라게 하고 숙면을 방해할 수 있다고 한다. 본인은 딱히 소음 피해를 겪은 적이 없고 저런 물건을 써 보지도 않아서 잘 모르겠다.

뭐랄까, 지금 같은 법치 의식이나 국가 정체성, 인권 의식이 형성되기 전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엄격하게 생기기 전엔... 서양에서는 민간인의 무장과 사적 제재라고 해야 하나, 그런 관념이 지금보다 훨씬 더 관대했다.

그러니 '사략선'이라는.. 한중일 문화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국가 공인 해적이 있었다. 전시에 민간인이 적국 선박을 터는 것을 합법으로 허용하는 면허 말이다.
그리고 '결투'도 있었다.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누구든 월급 주는 주인님을 위해 깃발 바꿔 달고 싸우는 '용병'은 요즘으로 치면 PMC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국군 상비군이 있는 일반적인 나라에서는 흔하지 않다. 아 하긴, 프랑스에는 아직 외인부대가 있던가?

또한 민간인이 스스로 무장하고 자기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은.. 용어를 저렇게 쓰면 어감이 굉장히 부정적이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조선과 구한말의 '의병'하고 별 차이 없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아주 성경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에스더기도 유대인 학살 명령이 공식적으로 철회되는 게 아니라, "너희들도 자경단 꾸려서 침략자에 맞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켜라. 아무도 안 말린다"가 추가되는 걸로 끝나니 말이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1992년의 미국 LA 폭동 때도 평소에 총을 구입해 놓고 대비를 했던 한인들은 자경단을 꾸린 덕분에 자기 가게를 안 털리고 지켜내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 남성들의 이런 저력(...)은 5· 18 광주 북한군 개입설을 부정하는 근거로도 활용된다.
서슬 퍼런 반공 군사 정권 하에서 교련에다 군생활도 무려 3년씩이나 의무적으로 했던 사람들이 진지 구축이나 총질쯤은 껌이며, 탱크 조종 보직이었던 사람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없을 리가 없다. 그 정도 군사 행동은 굳이 북괴 공작원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수많은 청년들의 자유를 제약하고 희생하며 돌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징병제의 위력을 만만하게 여기지 마시라.

무기고 위치 정도는 그렇게 비밀도 아니며, 평소에 잡범 범죄자에 의해 종종 털리기도 했었다. 그럭저럭 민주화가 된 1990년대의 LA에서도 저랬는데 하물며 전투력이 그때보다 더했을 1980년대의 광주를 동일한 잣대로 생각해 보면 본인으로서는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소말리아 같은 막장인 나라 말고, 엄연한 잘사는 선진국 중에서 민간인이 버젓이 총을 소지하는 나라는 미국 말고 더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화력이 너무 강한 군인 소총이나, 은닉하기 쉬운 권총은 여전히 규제가 걸려 있지만, 샷건 정도는 시골로 갈수록 뭔가 생활 필수품인 것 같다.

2. 경찰 비슷한 것들

경찰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며, 정부에서 세금을 써서 유지시킨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공권력의 존재감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기관이 바로 경찰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군· 경의 역할을 민간이 대체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며 금기시한다. 그래서 사적 제재를 전면 금지하고 정당방위도 매우 보수적이고 제한적으로만 인정한다. 나쁜놈이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정말 제일 소극적인 제압만 한 뒤 바로 경찰에 넘기기만 해야 한다. 놈이 흉기를 들고 설치고 있으면 흉기를 재주껏 빼앗아서 버리기만 해야지, 그걸로 내가 반격 역관광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니 자경단이나 민병대· 의병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사설 탐정도 국내에서는 전면금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간인의 경찰 위장· 사칭은 죄질이 매우 나쁜 범죄이다. 일반인은 평시에 전투복뿐만 아니라 경찰복을 입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수갑 같은 경찰 전용 장비 역시 소지하거나 휴대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경찰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보조 내지 대행하는 민간인 조직이 아주 없는 게 아니다.
자율방범대(치안)라든가 모범운전자(교통 정리)가 그 예이다. 이런 사람들은 경찰과 어떤 관계를 맺고 보수를 어느 정도 받는지, 직무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까지 권한이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경찰처럼 누구를 체포한다거나 교통법규 위반 범칙금 딱지를 발급하지는 못한다.

은행이나 병원 같은 곳에 있는 청원경찰은 정식 경찰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 사설 경비원도 아닌 중간 위치 같다. 철도 경찰이나 해경은 일반적으로 아는 그런 경찰과는 다른 경찰일 테고..
그나저나 옛날에 미국에서 큰 모자 쓰고 말 타고 돌아다니던 '보안관'은 경찰하고는 어떤 관계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3. 사립 사관학교

본인은 먼 옛날에 사탄의 인형 시리즈를 1편부터 3편까지 영화관..은 아니고 TV와 비디오로 봤다. 1편은 진짜 공포 장르였지만 2편과 3편은 호러 코미디에 가깝다. 주인공 앤디가 처키의 정체를 완전히 알게 되면서 동심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가 됐고, 또 나이를 먹고 성장도 했기 때문에 1편과 같은 의미의 약자의 위치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3편의 경우, 애가 군사 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이름하여 Kent Military School.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나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군사 학교라는 건 도대체 정체가 뭔가? 국· 공립인가, 아니면 설마 사립인가? 한국에는 이런 교육기관은 없는 것 같은데..

병을 양성하는 곳인가, 간부를 양성하는 곳인가? 그냥 신병 훈련소라고 보기에는 내부 시설이 꽤 좋고.. 하지만 학생들의 연령대가 굉장히 다양하고 무슨 웨스트포인트 급의 정식 사관학교도 아닌 것 같다. 앤디처럼 불우하게 자란 애가 그런 정예 장교 양성 시설에 호락호락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죽은 아버지가 무슨 명예 훈장의 수훈자이기라도 하지 않다면 말이다.
그리고 계급의 번역이 제대로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도들 군기를 잡는 훈육대장이야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 무려 대령인 건 하는 일에 비해 계급이 너무 높은 것 같다.

검색을 해 보니 미국에는 이런 군사 학교가 몇 군데 있다고 한다. 나라에서 인가한 정식 사관학교와의 차이는 (1) 일단, '사립'이다. 자연히 학비는 전면 무료가 아니며, 여기를 졸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미군 간부로 임관한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여기는 (2) 애초에 대학교에 준하는 고등 교육기관이 아니라 중· 고등학교에 대응하는 중등 교육기관이다. 여기를 졸업한 애들은 소수의 군대 체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냥 일반 대학교로 진학한다.

즉, 여기는 무슨 정식 사관학교도 아니고 해병대 캠프나 스파르타 식 명문대 학원도 아니지만.. 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따 와서 일상생활에서 애들을 합숙시키고 군복(정복, 예복, 전투복 등..) 입히고 군대식으로 절도 있게 키우는 학교이다. 한국의 장성들이 자기 자녀는 저기로 유학 보내서 키우기도 한댄다. 중딩 고딩들한테 설마 진짜 사관학교처럼 공수 훈련까지 시키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총 잡고 페인트탄 워 게임 정도는 한다.

사탄의 인형 3의 배경인 '켄트(Kent) 군사 학교'는 '켐퍼(Kemper) 군사 학교'라고 미국에 실제로 있었던 사립 사관학교이다. 1800년대부터 있었던 학교이다 보니 캠퍼스가 굉장히 고풍스러우며, 사탄의 인형 말고 몇몇 다른 영화들의 촬영지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 학교는 쟁쟁한 졸업생 동문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점점 경영난을 겪었으며(신입생의 감소로 인해), 2002년에는 폐교하고 말았다. 국영 사관학교라면 이렇게 망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옛 캠퍼스 부지와 건물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4. 군대의 진급

우리나라의 현행 군대 계급 체계에서 다음과 같이 임관 내지 진급하는 건 흔치 않은 경우이다.

  • 준위로: 부사관에서 상사를 능가하는 만렙 계급은 일단 원사이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간 준위는 단순히 원사의 상위 레벨이 아닌 좀 특이한 계급이다. 부사관의 만렙으로서 자기 분야의 최고 전문가 스페셜리스트이면서, 한편으로 그 바닥에서 장교 같은 명령권도 있는 '준사관'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떤 준사관 계열은 아예 군필만 한 민간인이 곧장 들어오기도 한다.
  • 임관이 아니라 특진해서 소위로: 병장이 진급해서 자연스럽게 부사관인 하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병이나 부사관이 자기 계열에서 진급만 한다고 해서 장교 계급을 받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상 죽어서 소위 계급이 상징적으로 추서된 건 지뢰 밟고 죽은 군견이 유일하다.
  • 대장에서 원수로: 원수는 포스타 중에서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불멸의 성웅이나 받을 법한.. 상징적인 종신 계급이다. 통상적인 진급이나 전사자 특진만으로는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 과학 분야 노벨 상 수상자가 없는 것만큼이나 원수 계급을 받은 군인도 현재까지 없다. 그나마 제일 근접해 있는 백 선엽 대장마저도 못 받은 계급을 감당할 만한 용자는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전쟁터에서 혼자서 적군을 수십 명 때려잡고 아군을 수십 명 구했다면 그건 병이나 부사관이 무공 훈장과 포상금을 잔뜩 받을 일이다. 계급 자체는 그런 병/부사관 수준에서 1~2단계 정도 특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에 반해 포스타가 원수가 되려면..?? 가히 전군과 국가에 영향을 끼칠 만한 넘사벽급의 '통솔' 업적이 있어야 한다.

  • 사령관의 천재적인 지휘 하에 전군이 힘을 합쳐서 돼지 목을 따는 데 성공하고 북진 멸공 통일을 이룬다거나,
  •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했는데 한국군이 무슨 지구를 구하는 데 국제적인 기여를 했거나,
  • 국군의 규모가 지금보다 몇 배 이상 더 커져서 포스타마저 수십 명으로 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오성장군이 배출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1/31 08:34 2019/01/31 08:34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81

오늘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굴러다니는 글들 중,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필력이 정말 존경스러운 작품을 두 편 소개하고자 한다. 뭐, 내가 알게 됐을 정도면 알려진 지 이미 수 년이 지났고 네티즌들 사이에 퍼질 대로 퍼졌겠지만 말이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팩트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글, 비유와 패러디와 개드립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창의적인 글이 좋다. 본인은 Doom 코믹스 대사라든가 작은 하마 이야기 스타일의 개그 코드를 아주 좋아한다.
도대체 무슨 약을 빨아야 저런 필력이 나올 수 있을까? 나도 이런 스타일과 내용의 글을 쓰고 싶다.

1. 부산 운전 후기 (☞ 링크)

일단 닥치고 읽어 보시길.. 생각 같아서는 이런 주옥 같은 명문은 날개셋 타자연습의 연습글에도 당장 집어넣고 싶을 정도이다. 주요 감상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 야수의 심장을 쏘는 유신의 심정 → 이거 나름 롸임 있는데?? ㅋㅋ
  • 전쟁 이후로 갈아엎은 적이 있나 싶은 X같이 열악한 도로망, 쓸데없이 높은 인구 밀도, 붇싼싸나이 특유의 허세
  • 부산시에서 차량을 등록할 땐 깜빡이를 뜯어내야만 등록 허가가 난다. 이 씨X새X들은 절대로 깜빡이를 키지 않는다.
  • "어 점마 점마 머고? 부싼싸람 아이네!"
  • 수시로 차창을 내리고 옆 차량과 가정사를 물어보는 시끌벅적한 동네
  • 선 끼어들기, 후 깜빡이는 필수. 이때 뒤에서는 힘찬 크락션 소리가 너의 차선 변경을 축하해 줄 것이다. ㅍㅎㅎㅎㅎㅎ
  • 아니면 니가 끼어들 차로의 반대 방향으로 깜박이를 키는 것도 좋다.
  • 아이가 타고 있어요 → 이런 차들은 자기 애새끼가 진짜 불에 활활 타고 있는지 운전을 상당히 X같이 한다.
  • 뭔 동네에 유전이라도 터졌는지, 급제동 급발진을 X나게 습관적으로 하면서 길바닥에 기름을 쳐 뿌리는 걸 보면..
  • 부산에 진입하기 전에 대물 한도를 10억으로 늘리고 과감하게 운전하자. 이 동네에선 잃을 게 많은 놈들이 브레이크를 밟는 법이다.
  • 승객을 인질로 삼고 폭주하는 저 운전사는 도대체 버스 기사인지, 아니면 저승의 뱃사공인지 헷갈린다.
  • 근처 차량의 지붕에 뭐가 달려 있다(택시등ㅋㅋㅋㅋㅋㅋ) 싶으면 무조건 피해라. 아니면 니가 그 안에 타든지.
  • 도로를 달리는 건가, 요단 강 래프팅을 하는 건가?
  • 연비 절감을 위한 자구책인지.. (배기가스 절감이나 연료 소모 절감이 아님. ㅍㅎㅎㅎㅎㅎㅎ)
  • "뭐고, 붇싼 택시 처음 타능교? 내가 이래봬도 중앙동 넘버 쓰리라 안 카나. 남바 완, 투는 다 사고로 디져뿟다 아이가"

아.. 정말 빵터지는 한편으로 나도 어서 부산 가서 운전 좀 하고 싶어진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니면 내가 직접 차를 몰지 않더라도, 그 악명 높은 총알택시를 타고 궁극의 과속과 가속도 변화와 스릴을 경험하고 싶다. 나도 과격 격렬한 건 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말을 이렇게 하지만 본인은 평소에 택시를 타면 뒷좌석에서도 안전벨트를 꼬박꼬박 맨다.
그리고 차를 몰 때는 늘 (1) 1/2 mv^2이라는 물리 감각, (2) 풀 악셀을 밟을 때마다 기름값 몇십 원이 깨진다는 경제 관념, (3) 그리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곳에서는 언제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겁대가리라는 삼요소를 늘 숙지하고 명심하고 있다.

부산은 6· 25 때도 북괴에 점령당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전쟁 때문에 길거리가 대판 파괴되어 리셋 재건된 역사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길거리의 선형에도 옛날 스타일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더 좁고 꼬불꼬불하고 오거리 육거리가 많은 것 같다. 거기에다 저기는 서울이나 대구만 한 분지도 없고 산이 많으니.. 구조적으로 자동차 운전에 친화적이지 않은 지형이 형성된 게 아닐까?

부산 도로의 특징에 대해 그나마 점잖게 써 놓은 곳은 다음과 같다. (☞ 링크 1, 링크 2)
롤러코스터 같은 산복도로가 많다, 오거리· 육거리가 많다, 고가도로가 많다 등..
고가도로가 많으면 그 아래는 기둥 때문에 길 모양이 꽤 복잡해지긴 한다. =_=;;;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부산 사투리를 빼놓을 수 없다.
부산 사투리라는 걸 최초로 전국적으로 퍼뜨린 매체는 20여 년 전에 나온 영화 <친구>임이 틀림없다. "-예 (하고 있지예, 그런데예)", "아잉교, 아이다" 등..
경상도 사투리라는 게 곧 부산 사투리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아저씨>에서는 오 명규 사장과 일부 형사, 그리고 <범죄도시>에서도 마 동석 말고 다른 동료 형사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게 클리셰처럼 됐다. ("뭐 보노 X꺄, 상X 터쟈뿔라 마~" ㄲㄲㄲ)

사투리계의 또 다른 계보는 물론 전라도다. "아따 거시기하네, 시방 겁나게 웃겼당께로~" 이런 거.. =_=;; 경상도와는 어휘와 억양이 미묘하게 다르다.
그 밖에 평양 사투리도 있다. "고조, ~했지비, 내레" 이런 말투가 쓰이는데, 자연스럽게 구사하려면 이것뿐만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그 억양을 북한 방송 보면서 익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어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부산은 나름 우리나라 제2위의 대도시인데 서울과 다른 고유한 언어와 교통(!) 문화를 잘 간직하고 사람들이 다이내믹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ㅎㅎ

2. 장애인 (☞ 링크)

이 글은 휠체어를 타는 실제 장애인이 썼다. 부산 운전만치 '웃긴 요소'는 별로 없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을 만하다.

휠체어의 회전 반경과 후방 시야

  • X발 니들 중에 휠체어로 회전반경 20cm 이하로 만들 수 있는 X끼 있으면 나와서 내 욕해도 됨. 세상 어느 휠체어가 제자리 회전이 되냐?
  • 휠체어 뒤로는 제발 바짝 서 있지 좀 마라. 휠체어엔 백미러가 안 달려 있다. 뒤로 목을 돌려 확인할 정도로 목이 잘 돌아가면 병신이라고 불리지도 않아~ 이 X신들아. 아니면 휠체어에 백미러 달아 주든가.

휠체어 탑승자의 높이 접근성

  •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라고 분명 마크 달려 있는데 130cm 위에 버튼 달아 놓은 건축 시공사 새X들 전부 대가리에 마대질 할 줄 알아라 씨X, 개놈들 다 총살시켜야 돼~
  • 팔이 어깨보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정도면 병신이라고 불리지도 않어. 그런 X나 당연한 게 안 되니까 병신인 거다.

휠체어 탑승자의 접근성과 이동권

  • 대학교 수업 들으면서 "휠체어가 고장 나서 지각/결석합니다"라는 멘트 한번 상상해 봤냐? "비 와서/눈 와서 수업 못 나갑니다"는 어때?
  • 차라리 아파서 결석이면 덜 억울해. 진단서 끊어 가면 인정받으니까.. 하지만 휠체어 수리는 영수증 제시한다고 인정될 사항이 아니지, X발
  • 전동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땐 무조건 6명 이상 모여라. 니들 허리 생각해서 하는 소리다.
  • 휠체어 전체를 덮는 비옷? 있기야 하지, 그런데 그걸 혼자 쓰고 벗을 수 있을 정도면 병신이라고 안 한다는 거 이제 식상하지?
  • 지하철 1, 4, 7, 10째 칸에 있는 빈 공간에 주저앉아 있지 좀 마라. 나 없을 땐 몰라도, 타면 알아서 좀 비켜라 병신들아, 진짜 병신 만들어 놓기 전에.

휠체어 도로 주행의 애로사항

  • 전동 휠체어는 굴러다니는 것 자체로 모든 면에서 위법임. 기름 넣고 굴러가는 자동차도 아니고(차도 X), 완전 보행자나 그에 준하는 물건도 아니고(차라리 수동 휠체어는 법적 보행자로 인정이지만 전동은..), 그렇다고 자전거도 아니고(자전거 전용 도로도 X).
  • 휠체어는 인도로 가라고 하는 놈들 다 휠체어에 태워서 인도 드라이브 한번 시켜 줘야 됨. 인도가 얼마나 익스트림 한지 니들 모르지?

본인도 휠체어는 지게차나 바퀴 달린 의자처럼 제자리 회전이 당연히 가능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아니었구나.

장애인은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한 데다가 수도 적다. 사회에서 완전 약자 중의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권이고 복지고 없고, 사실 사지 멀쩡한 사람들도 자기 입에 풀칠하느라 바쁘던 전근대 시절에는.. 장애인의 삶은 막장 시궁창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 병신이라고 불리면서 완전 천대와 무시, 멸시, 차별, 박해를 받으며 거지로 살아야 했다.

사회가 이런 사람들을 같이 수용하고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꾀병 부리는 거랑, 진짜 장애가 있는 것을 일일이 분간할 여력도 없었고 말이다. 오죽했으면 나치 독일은 유대인이 아닌 자국민이라도 이런 장애인은 몰래 죽여 버렸을 정도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가 훨씬 더 많다. 마치 낙태 사유가 강간으로 인한 것보다 피임 실패가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말이다. 누구든지 재수가 더럽게 없으면 장애인이 될 수 있는데.. 무슨 동성애자 인권 따위가 아니라 장애인 인권과 접근성 문제는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주제인 것 같다. 더구나 다른 장애인도 아니고 상이 군경까지 그 따구로 대했다가는 아무도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거나 다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1/28 08:35 2019/01/28 08:35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80

1. 장수

작년에는 백 선엽 예비역 대장이 무려 99세 생일을 맞이했다. (☞ 관련 기사)
1920년생이라니, 20세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모조리 겪은 거장이요, 국내 톱급의 장수 고령자이지 않을까.. 특히 시골 깡촌 장수촌에서 평생 농사만 지은 노인 할머니 말고,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한 남성 유명인사 중에서는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이가 60세가 아니요, 결혼한 지 60주년도 아니고, 대장 달고 예편한(1960) 지가 60년이 돼 가는.. 거의 미친 연배와 경력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부인도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송 해 씨가 1927년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26년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출신이어서 몸 관리 잘해서 그런지 늙어서까지 쌩쌩 팔팔하고 건강한 걸 보면 굉장히 부럽다.
전사자를 끝까지 찾아내고 노병을 깍듯이 예우하는 미군도 부럽고.
사실, 저 사람은 한국보다도 미국에서 훨씬 더 알아주고 존경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에 취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깍듯하게 ‘전입신고’를 하는 게 관례일 정도이니..

2. 다산

이 끔찍한 "먹고 살기 힘들다" 저출산 고령화 추세 속에서 우리나라에 현재 자녀를 제일 많이 낳은 집안은.. 구미에 살면서 무려 13명의 자녀를 둔 김 석태· 엄 계숙 부부이다. 이미 여러 번 매스컴 탔다. 이분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이 블로그에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구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2년 근황
2016년 근황

목사 집안인 것, 그리고 자녀들 이름을 모두 순우리말로 지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셋째인 '김 다드림' 군은 지난 2010년에 순우리말 운동 단체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러 모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애국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인데.. 2016년 근황에 따르면 장녀는 이미 대기업에 취업했고 서열 끄트머리뻘인 애들은 이제 고등학생이라고 한다.
모든 아이들이 대학에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일부는 곧장 취업하거나 방통대 독학사나 사관학교 같은 저렴한 방법으로 대졸 학력을 따야 할 것이다.

예외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경향이 있다. 가령, 안 철수 집안은 그야말로 부부가 다함께 돈을 빗자루로 긁어모은 수준의 억만장자이지만, 서로 자기 전문직 종사하느라 바빠서 자녀는 그냥 외동딸 하나가 전부이지 않던가..;;

자녀 계획이야 그건 하나님도 존중해 줄 정도로 전적으로 각 부부들의 재량 영역이다. 그런데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이 정도로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나니 자녀 계획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음이 느껴진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차와 돈과 집은 죽은 뒤에 절대로 못 들고 올라가지만, 자녀만은 그 뒤에도 영원히 같이 보며 지낼 수 있다. 물론 제대로 잘 키워서 구원받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아주 어렸을 때 병이나 사고로 잃은 자녀에 한해서 말이다.

3. 만학

지역 언론에는 잊을 법하면 한 번씩 시골 만학도 노인 얘기가 매스컴을 타는 것 같다.
그냥 4, 50대 나이에 방통대나 대학원에 다시 들어오는 정도로는 희소성(?)이 부족하다. 대학 교수나 의사· 변호사가 본업 은퇴 후에 또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서 늘그막에 방통대 같은 다른 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그래도 고등교육 등급의 만학이고 성격이 다르다.

아예 초등 교육 수준에서.. 한글도 제대로 못 깨우친 채 시골에서 평생을 보냈다가 이제야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새로 또는 다시 특별전형으로 입학하는 할머니들 소식이 종종 보도되곤 한다.

2007년 1월자, 전북 김제
2018년 11월자, 강원 평창

세계 톱클래스의 교육열을 자랑하고 무려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이 된 지가 10년이 넘은 이 대한민국의 한구석에, 아직도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이 실감이 잘 안 간다. 세월이 흐르고 일제 시대나 6· 25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죽고 세대가 바뀌고 나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만학도는 아마 찾을 수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하긴, 일제 시대에만 해도 의무 교육이란 게 없었다. 초등학교(그 시절 용어로는 소학교)도 시험 치고 돈 내고 들어가고, 심하게 사고 치면 얼마든지 짤릴 수 있었다. 특히 1940년대에 창씨개명 같은 거 거부하면 당연히 짤렸다. 그러니 북괴 김 일성의 최종 학력인 중졸도 그때는 아무나 보유 가능한 학력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마자 그 가난한 여건에서 국가 단위로 교과서를 대량으로 찍어내고 초등학교 의무 교육을 시행하려 한 건 굉장한 재력이 필요한 과업이었으며, 보통일이 아니었다. 문맹이란 게 얼마나 서러운 건지는.. 당사자가 되어 겪어 보지 않고서는 아마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걸 시행했던 남쪽의 수장 할배는 뭐.. 차원이 다르다. 프린스턴 박사는 지금의 잣대로도 어마어마한 학벌 학력인데, 그걸 100년도 더 전에 배 타고 미국 가서 영어로 논문 쓰고 취득했으니 가히 넘사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할배나, 할배의 박사 지도교수(우드로 윌슨)나 모두 자기 나라의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자기 나라의 역대 대통령들 중 명예박사가 아닌 진짜 박사 학위를 소지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1/07 08:35 2019/01/07 08:3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73

1.
인텔 CPU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1971년에 무려 4비트짜리로 나온 4004가 최초의 상업용 마이크로프로세서라고 여겨진다. 그 뒤 72년에 8비트 8008이 나오고, 1978년의 16비트 8086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x86 아키텍처의 서막을 열었다.

8086, 80186, 80286은 모두 16비트 CPU이다. 186은 PC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286은 이론적으로는 보호 모드와 멀티태스킹까지 지원하는 물건이었지만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소프트웨어에서 실제로 제대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086에서 286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그냥 CPU의 클럭 속도만 올라가고, IBM PC 규격 차원에서 XT/AT의 차이가 더 컸던 것 같다. 가령, 하드디스크 탑재라든가 고밀도 디스켓 지원 말이다. 키보드의 반복 속도 조절 기능도 내 기억이 맞다면 AT부터 지원되기 시작했다.

무려 1985년, 아직 VGA도 없던 시절에 80386 CPU가 개발되어서 IA32라는 아키텍처가 완성되긴 했다. 하지만 이때는 컴퓨터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32비트가 가정용으로 보급되기는 곤란했다.
나중에 외부 데이터 버스를 32 대신 16비트로 줄여서 가격을 좀 낮춘 보급형 386SX라는 게 등장했다. 훗날 등장한 펜티엄은 반대로 그 버스의 크기가 64비트로 머신 워드 크기보다도 더 커졌으니, 386SX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또한 386 때부터 슬슬 캐시 메모리가 쓰이기 시작했으며, 486에서부터는 부동소수점 프로세서(FPU)가 기본 내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럭 속도의 증가는 덤이다.
486 이후로는 인텔이 숫자 명칭 대신 '펜티엄'이라는 자체 브랜드명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펜티엄 다음으로는 코어.. 코어 안에서는 네할렘, 샌디브릿지 같은 세부 공정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명칭을 붙여서 제품을 구분하고 있다.

2.
2000년대 중반, 딱 Windows XP와 IE6이 장수하던 05~06년 사이에 멀티코어와 64비트가 도입되면서 PC의 환경이 20세기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듯하다. 둘은 도입 시기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비슷하다. 펜티엄 4의 후기형을 거쳐서 펜티엄 D에서부터 싱글코어 기반의 x86-64가 정착했으며(정확히는 2003~04년 사이), 반대로 Core 1 Duo는 32비트 전용의 첫 멀티코어 프로세서였다.

그러다가 둘이 합쳐져서 Core 2 Duo가 64비트 + 2개짜리 멀티코어 시대를 열었다. 운영체제는 Windows Vista/7부터 말이다.
사실 Core 1 Duo는 PC용으로는 출시도 되지 않고 모바일용으로 나왔는데, 애초에 x86이 모바일에 적합한 구조의 아키텍처가 아니다 보니 존재가 모순적이었다. 그러니 별 재미를 못 보고 단종됐다.

CPU가 그렇게 바뀐 동안 모니터는 LCD와 와이드가 도입되었다. 옛날에는 4:3 비율의 액정 모니터도 있었지만 2000년대 중후반쯤에 자취를 감춘 듯하다.
요즘은 형광등이 처음 켜질 때 깜빡거리는 걸 볼 일이 없어진 것처럼.. CRT TV나 모니터를 처음 켤 때 화면이 예열과 함께 천천히 fade in 되는 모습도 볼 일이 없어졌다.

또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모니터의 테두리 색깔이 흰색이 많았는데 와이드 화면 모니터는 검은색이 주류가 된 것 같다.

3.
인텔 CPU가 초창기에 저렇게 발전해 온 동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국가에서 나서서 전국민에게 PC를 보급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전자는 그 말 많던 "교육용 PC" 사업이고(1980년대 말), 후자는 그로부터 10년쯤 뒤, IMF에다 세진 컴퓨터 랜드가 아직 있고 인텔 펜티엄 2, 셀러론 이러던 시절의 국민 PC 사업이다.

전자의 사업 때 이미 많이 보급돼 있던 MSX니 SPC니 하는 8비트들을 싹 배제하고 과감하게 16비트 IBM 호환 PC를 지정한 것은 마치 철도 표준궤와 220V 전압만큼이나 미래를 내다본 굉장한 선견지명이었다. 결국은 그 PC 계열이 천하를 평정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당시에 정보통신부나 과학기술처의 담당 관료가 중대한 결정을 잘 내렸다.

뭐, 8비트 컴터들은 대체로 화면 해상도가 낮고 성능도 떨어져서 당장 한글· 한자 처리에 애로사항이 너무 크긴 했다. 그 문제 때문에 한국· 일본은 16비트 컴에서 비디오 카드조차도 허큘리스에서 거의 곧장 VGA로 갈아탔지, 서양처럼 CGA/EGA를 진지하게 경험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PC는 너무 흔해 빠지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윤도 별로 안 남아서 하나 둘 철수할 지경이 돼 있다. 남사스럽게 PC에 연연할 필요 없이 폰이 다 보급돼 있고.. 당장 돈이 없어도 온갖 할부 제도를 이용해서 뿌리다시피하고 있다. 저 시절의 컴퓨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성능 좋고 작은 컴퓨터를 전화기에다가 얹어서 들고 다니는 게 경악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4.
지금까지 CPU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문자 인코딩을 CPU 명령의 인코딩에다 비유하자면, UTF-8은 CISC에, UTF-16이나 32는 RISC에 딱 대응하는 것 같다.
원래 UTF-8은 그 구조상 5~6바이트까지도 늘어나서 U+10FFFF보다 더 큰 코드값도 기록이 가능은 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코딩 규칙이 개정되어서 5~6바이트짜리는 현재로서는 고이 봉인하고, 1~4바이트까지만 사용하기로 했다.

오늘날 국내외의 컴덕이나 프로그래머들 중에는 UTF-8을 완전 만능으로 칭송하는 한편으로 UTF-16은 거의 사회악 쓰레기 수준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종종 눈에 띈다. 프로그래밍 배경이 Windows가 아닌 유닉스 계열인 사람, 그리고 특히 wchar_t의 플랫폼별 파편화 때문에 삽질과 고생을 단단히 한 사람일수록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하다.

본인은 주장의 논지는 이해하지만 그 정도까지 부정적인 견해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컴퓨터에서 어떤 데이터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결국은 값을 그대로 전하든지, 아니면 좀 덩치가 큰 데이터는 별도의 메모리에다가 저장해 놓고 그 메모리 주소만 전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32비트니 64비트니 하는 건 그 컴퓨터의 CPU가 한번에 취급하는 그 정보의 크기 단위이다.

문자 하나를 전하기 위해서 일일이 메모리 할당해서 문자열을 만들고 포인터를 전달하느냐, 아니면 그 문자의 코드 포인트 값만 간단하게 전하느냐..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는 프로그램 좀 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 와중에 옛날 사람들이 UTF-16이라는 계층의 존재를 예상 가능했던 것도 아니고, 1990년대에 메모리가 지금만치 풍부하고 저렴했던 것도 절대 아니고, 그저 모든 글자의 크기를 2바이트로 균일하게 늘리는 것만으로도 메모리를 너무 많이 잡아먹네 하던 시절에.. UTF-8도 아니고 UTF-32도 아닌 적당한 절충안인 UTF-16 내지 그 전신 UCS-2가 과연 그 정도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 존재인 걸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건 유니코드에 현대 한글 글자마디 11172자가 일일이 다 등록된 게 잘못된 거라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렇게 등록을 안 했으면 글꼴을 만들기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DB 문자열 필드나 파일명 같은 데에 집어넣을 수 있는 한글 글자 수가 크게 감소했을 텐데 말이다.

문득 Windows가 오로지 65001 UTF-8만으로 천하통일이 이뤄지고.. 심지어 9x 시절처럼 W가 아닌 A 함수가 주류로(그 대신 UTF-8 기반으로!) 회귀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사실상 0일 것이다. =_=;;
Windows의 WCHAR뿐만 아니라 macOS의 NSString, Java의 Char과 jstr, COM의 BSTR 등 많은 운영체제와 프레임워크들은 2바이트를 문자의 기본 단위로 사용하고 있으니 어차피 이걸 쉽게 벗어날 수 있지도 않다.

5.
컴퓨터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보조 기억 장치는 결국 (1) 자기 디스크, (2) 플래시 메모리, (3) 광학 디스크 이 세 범주 중 하나로 귀착된다. 또 완전히 새로운 범주가 개발될 여지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용량과 속도 가성비가 "전반적으로" 제일 뛰어난 건 역시나 자기 디스크이다 보니, 얘를 기반으로 한 '하드디스크'는 가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기계식, 물리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컴퓨터에 여전히 건재하다.

플래시 메모리는 PC에서는 USB 스틱 아니면 SSD의 형태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동작 중에 일체의 소음과 진동이 없는 순수 전자식이며, RAM과 보조 기억 장치의 경계를 허물 차세대 주자로도 각광받는 물건이다. 하지만 가격 때문에 하드디스크를 완전히 대체하는 건 여전히 무리이다.

마지막으로 광학 디스크인 CD/DVD/블루레이는 매체의 외형부터가 빛을 반사하는 새끈한 재질인 게 굉장히 간지 나고 미래 지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 40배속인가 뭔가에서부터 읽기 속도가 한계에 달했으며, 쓰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 때문에 쓰임이 반쪽짜리가 됐다.

USB 메모리와 초고속 인터넷 파일 전송, 가상 디스크 마운트 기술에 밀려서 광학 디스크를 사용할 일이 예전에 비해 극히 드물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부팅조차도 USB 메모리만으로 가능해질 정도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옛날에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컴퓨터 주변 기기들이 굉장히 비쌌다. CD 라이터라든가 레이저 프린터 말이다. 이런 것들이 개인이 쉽게 보유할 정도로 흔해진 건 이르게 잡아도 1990년대 말이고 21세기에 와서부터이다.
또한 얘들은 다 열을 많이 가하는가 보다. 레이저 프린터만 해도 종이를 고온 고압을 가해서 토너가루를 붙이는 식으로 인쇄하는데(그래서 타 인쇄 방식에 비해 전기도 많이 씀), 광학 디스크에다 기록하는 것도 한국어· 영어 공히 '굽다/BURN'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비슷한 메커니즘을 동원하는 듯하다.

여담이지만, 자기 디스크는 영어 철자가 disk이고, 광학 디스크들은 철자가 disc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6.
터치스크린은 기존 키보드와 마우스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모니터를 출력 장치뿐만 아니라 입력 장치도 겸하게 해 주는 깔끔하고 참신한 인터페이스임이 틀림없다. 단순히 버튼을 콕콕 찍어서 선택하거나 간단한 필적을 그리는 용도로 아주 좋다.

터치스크린을 구현하는 방식은 크게 감압식과 정전식으로 나뉜다. 감압식은 물리적인 압력을 감지하는 방식이고, 정전식은 그게 아니라 표면의 전기 신호의 변화를 감지하는 방식이다.
이게 마우스로 치면 제각기 볼 마우스와 광 마우스에 대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전자가 좀 기계식이고 후자는 말 그대로 전자식이다.

처음에는 전자와 후자가 장단점이 서로 호각인 지경인데, 기술적인 구현 난이도는 후자가 더 높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결국 기술적인 한계가 극복되고 후자의 장점이 더 부각된 덕분에, 후자 방식이 주류 대세가 되었다. 이런 변화 양상도 마우스와 터치스크린이 서로 동일하다.

엘리베이터 버튼 중에도 오로지 사람의 생 손가락만 인식하고 타 물체 내지 장갑 낀 손가락은 인식하지 않는 게 있는 게 개인적으로 신기한 한편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광 마우스는 유리판 위에서는 좀체 동작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 손가락만 인식하는 센서들은 다 정전식이다. 감압식이라면 무슨 물체를 쓰든지 버튼을 누른 건 다 인식돼야 할 것이다.

정전식은 감압식보다 터치를 더 부드럽게 인식할 수 있으며 특히 마우스가 결코 흉내 내지 못하는 멀티터치를 구현하는 게 더 유리하다.
Windows 98에서 마우스 휠이 정식 지원되기 시작했다면 지난 Windows 7에서 터치 장비가 정식으로 지원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7은 그림판이 크게 개선되어서 초보적이나마 브러시 엔진까지 도입됐는데, 여러 손가락으로 동시에 태블릿을 긁으면서 그림을 그리던 시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데스크톱/노트북급에서 화면이 터치스크린을 지원하는 장비는 10년째 한 번도 못 봤다. 장비를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도 멀티터치 같은 걸 연계한 입력 도구를 구현할 생각이라도 했을 텐데 그건 지금까지도 그냥 장기 계획으로만 머물러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터치 장비는 좌표뿐만 아니라 압력 정보까지 전할 수 있다.
다만, 얘들은 올록볼록 입체적인 점자를 표현하지 못하니 터치스크린 기반 UI는 장애인과는 그리 친화적이지 못한 인터페이스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시각 장애인 내지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은 스마트폰도 여전히 버튼식 폴더 형태로 된 기기를 써야 한다.

7.
자동차에 경차라는 차급이 있고 총기 중에도 제일 작은 권총이라는 게 있듯, 컴퓨터계에서 제일 작은 놈은 넷북이지 싶다. 정말 작고 아담해서 들고 다니기 편하며 값도 저렴하다. 부담 없이 인터넷과 문서 작업만 하는 용도로는 참 좋다.

하지만 얘는 그만큼 CPU의 성능이 매우 뒤떨어지고 화면 해상도도 너무 낮으며, 키보드 역시 적응이 힘들 정도로 너무 작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얘로 단순히 글자판떼기 치기 이상으로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프로그래밍, 그래픽 디자인 등등..)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키보드의 구조 때문에 단순 글자판떼기 치기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2010년대부터는 PC가 아닌 스마트폰 운영체제에 기반을 둔 각종 태블릿 판떼기들이 급속히 발전한 덕분에, 단순 휴대용 인터넷 단말기 및 게임기라는 수요는 사실상 거기로 다 흡수됐다. 그러니 단순히 노트북 PC를 경차급으로 줄인 넷북이라는 건 사실상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오히려 그 태블릿들이 필요에 따라서는 키보드를 연결해서 쓸 수도 있는 형태가 됐다.

물론 터치스크린은 기존 키보드와 마우스를 결코 완전히 대체할 수 없으며, 정보의 소비와 열람이 아니라 정보를 생산하는 도구로서 PC의 지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또한, 넷북이 없어진다고 해서 넷북의 용도 내지 걔들이 수행하던 작업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휴대용 컴퓨터는 좀 더 모바일 기기와 결합한 형태로 변모하고, 전통적인 PC는 자기 역할에 특화되는 쪽으로 가는 듯하다.

8.
1990년대 초반

  • 86키 키보드는 이제 거의 도태하고 101키 키보드가 대세가 됐다. 옛날 키보드는 F11, F12가 없으며, 기능 키 F1~F10이 맨 왼쪽에 2열 5행으로 세로로 배치돼 있었다. 지금의 capslock 자리에 ctrl이 있고 capslock은 지금의 우alt/ctrl 자리에 있었다. 키패드에서 우측 하단인 지금의 엔터 자리에 더하기가 있었다.
  • 옛날에 키보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전용 포트에다 꽂았으며 마우스는 모뎀과 같은 COM.. 직렬 포트에다 꽂았다. 프린터는 병렬 포트에 꽂았고.. 모뎀과 마우스의 충돌은 정말 대표적으로 골치아픈 문제였다.
  • Plug & play도 없고 USB도 없던 시절이니, 외장 하드디스크를 연결해서 인식시키는 것만 해도 바이오스 설정을 바꾸는 등 정말 고도의 컴터 지식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1990년대 중반

  • 좋은 그래픽 카드를 사용하면 화면이 바뀌는 곳에서도 마우스 포인터가 깜빡거리지 않기 시작했다. 단, 흑백 기본 포인터 한정으로. custom 포인터는 여전히 깜빡거렸다.
  • 486쯤부터는 컴퓨터 본체가 모니터 밑받침으로 까는 형태가 아니라 모니터 옆에 세워 놓는 형태로 거의 정착했다. 하지만 Windows의 '내 컴퓨터' 아이콘은 XP에 가서야 이 모양을 반영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 486/펜티엄급 컴에서 WinAMP로 128kbps급 mp3를 하나 재생하면 CPU 점유율이 10~20%가량 올라가곤 했다.

1990년대 후반

  • 시스템 종료 후에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이제 컴퓨터를 끄셔도 안전합니다"라는 주황색 글자를 사용자가 직접 볼 일이 없어졌다.
  • Windows 98쯤부터 멀티웨이브가 가능해졌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원래 옛날에는 한 프로그램에서 사운드를 출력하기 시작하면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운드를 사용할 수 없었다!

1999~2000 사이

  • 컴퓨터 규격이 크게 바뀌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USB 포트라는 게 등장했고, 키보드와 마우스용 초록색-보라색 PS/2 포트도 등장했다.
  • 전원을 3초 이상 꾹 눌러야 꺼지는 관행도 이때부터 정착했다.
  • 사운드카드의 스피커가 이제 컴터 본체에 내장되지 않기 시작했다.
  • 가정에서도 모뎀 대신 인터넷 전용선이 슬슬 보급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 이제 custom 마우스 포인터도 깜빡이지 않기 시작했다. 사실 Windows 2000은 9x와 달리, 16색 VGA 구닥다리 안전 모드에서도 마우스 포인터가 깜빡이지 않는 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신기했다.
  • 컴퓨터에서 오디오 CD의 음원을 추출하는게 옛날에는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손쉽게 가능해졌다.
  • USB 메모리가 디스켓을 확실하게 골로 보냈으며, 무선 인터넷과 합세하여 CD의 지휘조차 위협한다. 호각인 라이벌은 엄청난 용량을 자랑하는 하드디스크뿐..
  • PS/2포트조차 한물 가고 키보드와 마우스도 그냥 USB 기반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Windows Vista부터는 동영상 화면도 일반 화면과 아무 차이 없이 print screen으로 캡처 가능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18/12/06 08:34 2018/12/06 08:34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62

1. 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 베를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실제 모델 인물인 오 길남은 월북한 뒤 재독 한인을 포섭하는 공작원 명목으로 독일로 파견됐는데.. 북한 정권의 실체를 깨달은 뒤엔 거기서 자수하고 남한으로 귀순했다.

어색한 억지 감동 유도라든가, 좀 식상하고 허무한 듯한 결말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중간 전개는 역시 찢어 죽일 종북좌빨들이 충분히 불편해하고 싫어할 만한 팩트 위주이다.
그러니 북괴의 정체와 흉악한 수작이 까발려지는 걸 원치 않는 놈들은 블랙리스트니 화이트리스트니 나발이니 딴 거 갖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영화계 전체 그림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금 솔직히 우보다는 좌편향이 훨씬 더 심하지 않은가?

북괴가 역사적으로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악 중 하나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 걸 넘어서 가족을 저렇게 하루아침에 산 채로 찢어 놓은 것이다.
6·25 이산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옛날엔 여객기 납치로도 단란하던 가정을 많이 파탄냈다.

또한, 저런 젊은 학자들을 속여서 북한으로 보내서 그 가족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 악마가 지금 청와대 수장에게는 민족을 사랑하는 평화통일 운동가로 보이는가 보다. 정말 같은 부류의 악마이며, 쳐죽일 반민족 반역자임이 틀림없다. 한 번 속는 건 실수이지만 두 번 속는 건 공범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알려지고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

2. 바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일사각오, God’s not dead, 신이 보낸 사람 등 국내외의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영화를 봤지만.. 얘가 성경 고증과 작품성, 비주얼 등을 고려했을 때 제일 뛰어난 작품인 것 같다. 정말 잘 보고 왔다.
북미에서는 이스터(..)에 맞춰서 지난 봄에 개봉했지만, 국내에서는 종교 개혁 기념일에 맞춰서 10월 말에 개봉했다.

14년 전의 Passion of Christ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음침 암울하고 오로지 예수님이 잔혹하게 채찍질 당하는 장면 말고는 남는 게 별로 없어서 인상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특유의 교묘한 심상 왜곡이랄까, 그런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말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 사울의 회심 등 주요 장면들 다 나온다. 대사 중에 성경 말씀 인용이 굉장히 자주 나와서 아주 마음에 든다.
사울이 회심 후에 무슨 물고문 당하듯이 물에 얼굴까지 첨벙 잠겼다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게 침례를 의도한 장면이었다면, 난 평가 점수를 더욱 올려 줄 생각이다. 물 뿌리는 세례는 고증 오류이다.

그리고 촛불과 온갖 신들 형상(마리아 형상도 포함)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긍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로마인들의 잡신이라는 부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진다. 이것도 구도를 아주 잘 잡았다.

그러면서 허구 각색도 어색하지 않게 가미된다. 사랑하는 교회 동지가 어이없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자, 남자 청년들 일부가 극도로 흥분하고 분노해서 우리도 칼 들고 쳐들어가서 로마를 상대로 보복하자고 날뛴다.
바울은 회심 전에 자기가 죽이면서 눈 마주쳤던 크리스천들이 때때로 꿈에 나와서 트라우마를 안긴다면서 인간적인 고뇌를 호소하기도 한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교도소장인 로마 군인의 딸의 병을 극적으로 고쳐 준다. 무슨 오글거리는 기도 한 방으로 신앙 치료를 성공한 게 아니라, 자기 의술로 해낸다. 바울 역시 “자기는 소문과는 달리 아무 능력 없으며, 자기가 약함을 보일수록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다”라고 증언한다. 요런 식의 개연성 있고 자연스러운 허구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 횃불 될 사람은 되고, 사자밥이 될 사람은 그렇게 되면서 순교 행렬이 이어진다. 네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울은 딤후 4:6-8의 유언을 남긴 뒤 예정대로 참수당한다. 그래도 교도소장은 바울과 누가의 인품에 충분히 감화됐기 때문에, 마치 옛날에 안 중근 의사를 존경하게 된 뤼순 감옥 간수처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바울을 "잘 가시오" 이렇게 공손하게 댄디하게 대해 준다.

바울은 그나마 로마 시민인 덕분에 화형 같은 더 끔찍한 방법으로 죽지는 않고 저렇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형된 거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바울과 네로는 모두 AD 60년대 중후반에 죽은 꽤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때는 로마 제국에 콜로세움 경기장이란 건 아직 없던 시절이었다. (약간 뒤인 AD 70년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부터 등장)

네로 시절에 크리스천들이 로마 대화재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박해받고 처형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원형 경기장에 우루루 풀려나가서 사자밥이 되어 순교하는 것과 "네로 황제"하고는 엄밀히 말해서 시기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러니 영화의 묘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이다. 하지만 뭐 심각한 오류는 아니다. 60년대건 70년대건 시기가 그렇게 심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으며, 콜로세움 안이건 아니건 크리스천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신약 기독교라는 게 생겼던 당시에, 예수쟁이들은 불신자들이 보기에 도저히.. 뭐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고 정체를 알 수 없고,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익을 노리고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상한 집단이었다.
남들이 다같이 믿는 신을 안 믿고, 황제를 반신반인으로 숭배하지 않으며, '예수'라는 웬 듣보잡 목수 출신 유대인이 죽었다가 뿅 부활했다는 황당한 악성 루머를 퍼뜨린다는 점에서는 분명 미친놈 왕따 아싸 반동분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 대놓고 국가 권력에 반역하고 싸우려 드는 여느 독립투사나 정치범 사상범 같지는 않고, 이웃으로서 개인 단위로 만나 보면 행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슨 마술사 초능력자도 아닌데.. 자기들의 세속적인 통념과 계산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 11:38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지금처럼 아무나 “우리 교회로 오세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는 개뿔.. 언제 잡혀가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처지였다.
모르는 사람이 교회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하면 얘가 진짜 동지 형제인지, 아니면 우리를 밀고할 가짜 끄나풀 첩자인지 판별하는 게 급선무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으니.. 이럴 때 판별을 빨리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믿을 만한 이웃 교회 지도자의 ‘추천서, 보증서’였다. “우리가 보내는 이 형제는 스파이가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잘 대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옛날 건군 초기에 숙군 작업을 할 때도 “이 사람은 빨갱이가 아님을 내가 보증합니다”가 아주 유효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쪼록 이 영화를 보면 신약 교회가 이렇게 시작됐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저런 여건 속에서 기록되고 필사됐다는 것을 얼추 실감할 수 있다. 복음은 뭔가 GPL 라이선스 오픈소스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이 귀하던 시절에 감옥에 갇힌 채로 찬송가를 부르려면 가사를 평소에 다 외운 상태여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클래식 교과서적인 명작 영화는 옛날에 벤허 같은 것 말고는 이제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직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긴 한다. 생각을 바꿔도 될 것 같다.
그리스도 안의 지체로서 바울은 꼭 볼 가치가 있음을 추천하는 바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12/04 08:36 2018/12/04 08:36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61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어지간한 인터넷 웹사이트들은 폭이 참 꾀죄죄하고 입구나 메뉴가 플래시로 만들어졌으며, "IE 6 브라우저와 1024*768 해상도에서 가장 잘 표시됩니다" 이런 거 적는 게 유행이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은 제로보드 4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리적인 프레임 구분이 있는 웹사이트도 있었다. "이 페이지를 보려면 프레임을 지원하는 브라우저가 필요합니다" 에러 문구도 있고 말이다.

지금 저런 사이트를 보면 유지 보수되고 있지 않은 옛날 구닥다리 골동품 냄새가 풀풀 느껴질 것이다. 게시판은 온통 스팸 광고글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지가 걱정될 지경이고 말이다.

요즘 스타일의 웹사이트라면 큰 폭에 유연히 대처할 뿐만 아니라 플래시 없이 JavaScript만으로 모든 인터랙티브한 UI를 구현해야 한다. 특히 화면이 아래로 스크롤 됐을 때 메뉴 같은 게 쏙 줄어들어서 화면 한구석으로 밀려나는 거라든가.. 목록의 끝을 열람했을 때 다음 목록이 뒤에 실시간으로 추가되는 기능 같은 게 요즘 유행인 것 같다. css만 바꿔서 모바일 최적화 페이지도 제공하고 말이다.

사실, 본인조차도 HTML 지식은 거의 2000년대 초반 이래로 정지-_-해 있어서 최신 스타일의 홈페이지를 만드는 법을 잘 모른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지금이 웹 기술들의 파편화가 훨씬 줄어들고 웹 개발자들이 일하기 편리해지긴 했다.
지나간 옛날 이야기이다만 싸이월드의 사이트 개편도 그런 변화를 따라가기 위한 명분과 당위성이 충분한 개편이었다. 구형 싸이월드는 시대에 너무 뒤쳐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편을 매끄럽게 제대로 못 하고 개악에 가까운 수준으로 해 버리는 바람에 사용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망하게 됐다.

웹사이트의 현대화를 나타내는 지표는 단순히 저렇게 외형적인 것에만 있는 게 아니다.
웹 문서들의 인코딩은 국제 표준으로 등극한 UTF-8로 통일하도록 하고, 서버의 각종 URL에도 오로지 영문· 숫자만 쓰거나 아니면 최소한 UTF-8방식으로 인식하게 설정해야 한다.
1990년대 말에 한글로 된 파일을 첨부한 것이 인식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IE에서 "URL을 언제나 UTF-8 방식으로 보냄" 옵션을 끄는 게 팁으로 통용되었던 건.. 마치 Windows Vista에서 UAC 옵션을 끄는 팁만큼이나 뭔가 미개한 관행이었다.

그리고 요즘 무시할 수 없는 대세가 바로.. HTTPS이다. 이건 웹사이트계의 디지털 서명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용자가 서버로 뭔가를 입력하고 보내는 게 전혀 없이 오로지 일방적으로 조회하고 표시하는 기능밖에 없는 사이트라면 모를까, 로그인을 하고 최소한의 interaction이 있는 사이트라면 내가 이 사이트를 믿고 내 개인 정보를 제공해 줘도 되겠는지에 대한 보증이 필요하다.

요즘 최신 브라우저들은 HTTPS가 아닌 구닥다리 HTTP를 쓰면서 폼 입력 기능이 있는 웹사이트에 대해, 갈수록 더 적극적으로 "이 사이트는 위험함, 정보 전송을 권장하지 않음"이라고 경고하는 추세이다.
그러니 사이트 운영자들은 깔끔한 UX를 방문자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HTTPS를 도입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인증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암호 해독 때문에 서버의 트래픽과 오버헤드가 더 증가하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귀찮다.

내 홈페이지는 언제쯤 HTTPS를 도입하게 될지 모르겠다. 웹사이트가 아니라 당장 날개셋 한글 입력기 바이너리조차도 디지털 서명을 안(못) 하고 배째라 쌩으로 배포하고 있거늘..;;

이렇듯, Windows 기준으로 응용 프로그램의 현대화 지표가 유니코드 API, 고해상도 DPI 지원, 공용 컨트롤 6 매니페스트 같은 거라면, 웹사이트의 현대화 지표는 UTF-8, 無플래시, 최신 HTML/CSS 요소, 모바일 페이지, HTTPS 같은 것들이라 하겠다.

그나저나, HTML5 웹표준의 지원 수준 척도로 여겨지고 있는 ACID3 테스트 말이다.
마소에서 만든 IE11과 Edge도 ACID3을 100점 만점으로 통과하고 있고 Google 크롬 역시 예전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버전은 97점에서 멈추고 있다. 내 자리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또 뭐가 바뀌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크롬은 과거에는 APNG(png 기반 애니메이션)를 웹 비표준이라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다가 요즘은 지원하기 시작했다.
크롬도 나온 지 벌써 10년이나 됐다(since 2008). 정말 엄청난 속도로 버전업을 하고 있고 지금도 프로그램 내부가 쉴 새 없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옛날처럼 마소와 오픈소스 진영이 브라우저 전쟁을 하는 게 아니며, Visual Studio로 어설픈 Windows Phone 앱 대신 무려 안드로이드 앱을 만드는 지경이 됐다. 옛날에다 비유하자면 컴퓨터 세계에서 미국· 소련간의 냉전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삼성 갤럭시와 애플 아이폰도 갈수록 서로 비슷해져 가고 있다. (배터리 일체형은 삼성이 따라하고, 큼직한 화면은 애플이 따라하는 식)

IT 업계가 전반적으로 분리와 파편화가 아니라 통합과 상생이 대세인 듯하다.
마소의 경우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같은 초창기 원로들이 경영진에서 물러나고 사티아 나델라가 집권한 뒤부터 경영 방침과 회사 분위기가 굉장히 크게 바뀐 게 느껴진다. 제아무리 천하의 마소라 해도 영원무궁토록 Windows와 Office만 갖고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언제까지나 오픈소스 진영과 척지고 살 수는 없으며 인제 와서 Windows Phone이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뭐, 경쟁자들을 적대시하여 어떻게든 독과점으로 말려 죽이려 했던 옛날 마소 경영자들의 전략도 그 시절에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긴 했을지 모른다. 천하의 삼성 전자도 과거에는 일본의 아류 짝퉁이나 만드는 영세 전자 기기 제조사였던 적이 있으며, 마소도 처음에는 그냥 공룡 하드웨어 제조사에다가 소프트웨어를 납품해서 먹고 사는 을의 처지로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여유로운 잣대로 옛날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15 08:32 2018/10/15 08:32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43

(1)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절차: 우리나라 같은 단순무식한 직접 선거가 아니고 뭐가 그리 복잡하냐.. 잘 알다시피 땅이 너무 넓어서 그냥 선거인만으로 간접 선거를 하는데, 선거인단을 뽑는 절차와 조건, 그리고 표를 취합해서 당선자를 가리는 방식도 그냥 직관적인 다수결이 아니다. 미국 내부에서도 현행 선거 방식이 너무 복잡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2) 야구 룰: 득점 조건이 정확하게 무엇이고, 경기를 이기려면 각 선수들이 무엇을 잘해야 하는지.. 투수가 던진 공을 타수가 빠따로 친 뒤, 그 다음부터 벌어지는 일의 내막을 전~혀 모른다.
전산학 용어로 표현하면, 야구 경기라는 프로그램의 내부 상태 전이 그래프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이 없다.

(3) FIFA 월드컵에서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절차: 이 경기에서 몇 점 이상으로 이기면 상대방 국가에도 어떤 영향을 주고, 저쪽 나라가 이기면 우리도 16강 가고, 반대로 우리가 이 경기를 이기면 다른 무슨 나라가 탈락하고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그 조건과 원리.. 모름.

물론 요즘 세상에 10~20분만 투자해서 검색해서 공부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본인이 원리를 잘 모르는 분야가 또 있는데, 바로 달력이다.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세계 공통인 서기 연호에다가 그레고리 태양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음력 날짜가 쓰이며, 설이나 추석 같은 주요 명절은 음력으로 계산된다. 그렇기 때문에 달력에는 음력 날짜도 병기돼 있다.

철도에서 디젤 기관차가 더 정확하게는 디젤-전기 기관차인 경우가 대부분이듯, 한국에서 음력이라고 불리고 쓰이는 달력은 더 정확하게는 태음 태양력이다. 윤달을 넣어서 음력을 양력 달력에다가 절충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음력 달력은 딱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데 중국· 일본에서는 음력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을 쓰는지 모르겠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런 음력 달력을 써 왔는지도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단기 대신 서기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박 정희 3공 때라고 하는데, 음력 대신 양력 달력을 쓰기 시작한 것은 훨씬 더 옛날인 구한말 을미개혁 때부터라고 한다(1896년).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양력과 이 음력 달력은 공식 계산만으로 날짜의 상호 변환이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그때 그때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천문 데이터가 필요하기라도 한지, 음력 변환은 임의의 연도로 아무렇게나 가능하지 않고 수십 년 정도의 가까운 미래나 과거까지만 제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 궁금하면 한국 천문 연구원에 문의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는 개인 취향상 생일을 음력으로 지키는 걸 고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과거의 음력 관행을 우리나라보다 더 철저하게 없앤 것으로 본인은 기억한다. 성명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도 우리나라처럼 성-이름 따위 고집하지 않고 깔끔하게 이름-성 서양 스타일을 받아들였는데..

그런데 일본은 책이나 신문에서 세로쓰기 정서법은 의외로 보수적으로 꿋꿋이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의 한국과 중국에서는 세로쓰기가 거의 다 사라졌는데 말이다.
중국은 일본처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보다는, 공산당 시절의 적폐 청산 개혁을 거치면서 글자가 간체자로 바뀌고 가로쓰기가 시행되어 있다.

여름에 마케팅 차원에서 어김없이 따지는 복날도 음력 달력과 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아마 아닌 듯). 지금은 상식으로 다 알려져 있는 천제의 움직임과 절기, 달력 같은 것도 먼 옛날에 관찰만으로 최초로 알아낸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13 08:37 2018/10/13 08:3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42

인간의 취향 중에는 뭐랄까, '폐허 덕후'라는 성향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폐건물에 유난히 집착하는 거 말이다. 왜 이런 성향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나 해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철덕이 이런 성향으로 가면, 지금은 없어진 폐선로 흔적이라든가 영업이 중단된 폐역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하긴, 본인이 어렸을 때에도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완전히 철거되지 않은 흉가 폐가(?) 같은 게 있었다. 거기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나뒹구는 쓰레기 중에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걸 줍기도 했다.
또한 그때는 건물뿐만 아니라 다 부서진 폐승용차의 잔해가 널부러진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사고 차량인 듯... 심지어 불에 홀랑 타고 녹슨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것도 있었다. 유독 자주색 기아 브리사 1 차량이 많았다.

그런데 저렇게 단순히 짱박혀 놀기 좋아하는 어린애들이라든가, 그저 으슥한 탈선 장소를 찾는 비행청소년들 말고..
성인이 뭔가 역덕후 지리 덕후, 또는 앞서 언급했던 철덕과 결부지어 폐허 탐방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요즘 인터넷 덕분에 특정 분야의 정보라는 게 워낙 많이 굴러다니고 널리 공유되곤 한다. 폐허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소가 처음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마이너한 곳이다가 이런 식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다. 광주 곤지암이 이런 대표적인 예에 속하지 싶다.

본인은 2000년대 중반쯤에 중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고속버스 창밖으로 나들목(IC) 이름을 통해 곤지암이라는 지명을 접한 게 최초였다. 거기는 성남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도달하기도 좋은 곳인데, 지명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그 당시에 했었다.

알고 보니 이 지명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신 립 장군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연이 있었다.
옛날에 고구려의 온달 장군은 전사하고 나서 관이 땅에 달라붙어서 떼어지질 않았다고 하는데(평강 공주가 해금시킴), 신 립 장군이 묻혔던 '곤지바위' 근처에서는 말이 발굽이 무슨 자석 붙듯이 붙어 버려서 움직이질 못했다고 한다..;; 설화들이 다 이런 식이다. 더 자세한 사연에 대해서 궁금한 독자께서는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 보시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게 바로 지명의 유래가 된 '곤지바위, 곤지암'이다.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로 72 소재.)

여기는 성남이나 서울과는 산으로 가로막힌 오지였지만 훗날 경강선 철도가 생기고(곤지암역!!) 52번 고속도로까지 생기면서 이름이 전국적으로 더욱 알려지게 됐다.
원래 행정구역 명칭이 실촌읍이었는데 2011년부터는 읍 이름이 통째로 곤지암읍으로 바뀌었다. 남한산성 일대가 중부면이다가 면 이름 자체가 '남한산성면'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곤지암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단순히 지역 명물인 소머리 국밥 때문이 아니라.. '남양 정신병원'이라는 폐건물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자 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1992년에 개업했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4년 동안밖에 영업을 못 하고 1996년에 문을 닫았는데.. 기존 의사와 직원들은 딴 병원으로 이직했으며, 건물주 가족은 죽거나 미국으로 이민 가 버렸다. 하지만 건물은 제대로 철거를 못 한 채로 방치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폐건물은 단순한 폐허 덕후의 성지 수준을 넘어, 귀신의 집(haunted house) 끝판왕이요, 희대의 납량특집 공포체험 명소로 둔갑해 버렸다. (남양이 아니라 납량..ㄲㄲㄲ) 교통 불편한 굉장한 오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나간 모양이다.
이 병원의 과거 내력에 대해서도 옛날에 어느 환자가 미쳐서 자살했고 밤마다 귀신이 튀어나오고, 건물주는 저주를 받아서 어찌 됐고 하는 등, 있지도 않은 괴담들이 더해지고 뻥튀기 되었다.

그런데 매년 여름에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애들은 사유지를 무단 침입해서 혼자 곱게 구경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내부를 부수고 낙서를 하고 고성방가와 술판 등 온갖 깽판을 벌였다. 주민들에게 끼치는 민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견디다 못해 건물주까지 뒤늦게 나서서 병원 정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철조망 두르고 출입금지 경고문을 달고 CCTV를 설치했는데도.. 애들이 막무가내로 안에 들어갔는가 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죽했으면 이걸 소재로 지난 봄에는 '곤지암'이라는 이름의 영화까지 나왔다. 세상에 저 이름이 공포 영화 제목으로 등장할 줄이야..
감독이 굉장한 좌파여서 그런지 영화 속 병원의 영업 기간을 박통의 재임 기간과 동일하게 각색을 하고, 병원 이름도 '남양'에서 '남영'으로 바꿨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의도한 작명인가 싶은데, 저건 그래도 1976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박보다는 전대갈 시절의 존재감이 더 짙다. (박통 시절 있었던 대표적인 분실은 내가 알기로 서빙고 분실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실제 정신병원 건물은 영화까지 나온 뒤에야 처분이 완료되었으며, 바로 지난 5월 말에야 뒤늦게, 허겁지겁 완전히 철거되었다고 한다. 철거되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귀신의 저주 때문은 전혀 아니고, 단순히 오지에 있는 낡은 건물이 부동산으로서의 가치가 시원찮았기 때문일 뿐이었다.

병원이 있던 자리엔 평범한 주택이 지어질 거라고 한다. 공포 테마 공원 같은 거라도 만들어지길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전무하다. 인근 주민들이 외지인들에게 이를 갈 정도로 완전 트라우마가 생겨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저기는 공포 체험을 할 만한 것들이 흔적도 없이 몽땅 사라졌으니, 외지인 없는 평온한 마을로 되돌아갈 듯하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사실은 저 영화 촬영조차도 실제 곤지암 남양 정신병원의 내부에서 하지는 못했다. 부산에 있는 다른 폐건물을 이용했음..)

폐허 얘기를 하다가 곤지암 정신병원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본인은 이 시점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공포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폐건물을 찾아가는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폐허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서 왜 저렇게 깽판을 치는 걸까? 단순히 자기 집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건 아닌 것 같다.

주변이 전혀 관리되지 않고 무질서한 곳이니까 여기서는 자기도 얼마든지 안심하고 무질서하게 굴어도 된다는 그런 심리가 작용한 게 아닐까?
빈민굴 슬럼가의 담벼락에 낙서나 쓰레기가 조금 생긴 걸 방치하면 얼마 안 가 다른 사람들까지 쓰레기를 왕창 버리고 낙서 천지가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하겠다.

자동차만 해도 관리 안 해서 먼지 쌓이고 녹슬고 타이어 터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면 주변 사람들이 정신줄을 놔 버린다. 어느 시점부터는 차가 자연스럽게 망가지는 것 이상으로, "주인 없는 차네?"라는 걸 인지한 주변 사람에 의해 유리창이 깨지고 표면에 동전으로 기스가 나고 내부에 쓰레기가 쌓이고 스프레이 낙서가 찍찍 칠해지는 등... 차가 도저히 사람이 탈 수 없는 폐차가 돼 버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형 에쿠스. 아무리 고가의 고급차라도.. 주인이 차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사고 차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흉물로 전락하는 건 생각보다 금방이다.)

하긴, 어차피 쓰레기가 100개가 있는 곳에 자기가 하나쯤 더 추가해서 101개를 만들어 봤자 티가 안 날 거라고는 누구나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다. 눈덩이가 일정 규모 이상 커진 뒤부터는 그야말로 급격히 커지듯이, 무질서도가 그런 모양새로 커진다.
또한, 사회에서 제아무리 똑똑하고 멀쩡한 사람이라 해도, 한데 모아서 군복만 입혀 놓으면 완전 야비군 좀비로 퇴화(?)하는 것 역시 동일하지는 않아도 비슷한 이치일 수 있겠다.

그러니 군대에서 단순히 위생 청결 이상으로 외형적인 정리정돈과 각 잡기를 강조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정신적으로 저런 빈틈과 안일함을 보이지 않고 최소한의 군기와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도둑만 해도 자기가 침입한 게 바로 티가 날 정도로 정리정돈이 잘 된 집은 털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 역시 집 말고 자동차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흠집 많고 청소· 관리 상태가 시원찮은 차는 차도둑뿐만 아니라 인근의 운전자들도 만만하게 보기 쉽다.

그럼 끝으로, 곤지암 말고 다른 유명한 폐건물을 몇 군데 짚어 보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1) 서울 망우산 기슭에 있는 용마랜드는 영업을 중단한 놀이공원이다만.. 2010년대에 크레용팝 뮤직비디오 이후로 유명세를 타고 성지가 됐다. 놀이기구를 가동하지는 않지만, 안에서 산책하고 CF건 뮤비건 찍으라고 지금도 관리인이 방문객을 돈 받고 일정 시간을 입장시켜 주는 모양이다. 극장 스크린에서 내려간 영화가 다음으로 DVD로 2차 수입을 얻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1970년대에 서울에서 지어졌던 각종 시범 아파트들은 이제 완전 흉물스러운 D급 폐가로 전락한 관계로, 차근차근 철거되었다. 노후한 외형은 둘째치고 안전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후의 물건인 회현 시민 아파트만은 리모델링을 거친 뒤 역사 공간으로서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듯하다.

여기는 '서울 도심 속의 폐가' 컨셉 유명세를 타고 나니 외부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사진 찍으러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는 비록 폐가처럼 생겼을지언정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인데, 입주민의 입장에서는 외부인들이 자꾸 찾아오는 게 그리 기분 좋은 현상이 아닐 것이다. 사진은 귀찮아서 생략함..;;

(3) 이천시 마장면에 있던 오천 역 건물은 수려선의 폐선 이후 최후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역사 건물이었다. 비록 소유주와 건물 용도는 진작에 바뀌었고 그마저도 폐가 상태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지난 2015년 10월에 본인이 한번 방문하고 나서 딱 한 달 뒤에, 이 건물은 인근 지구의 재개발과 맞물려서 싹 철거돼 버렸다. 여긴 곤지암 정신병원과는 달리, 뭐 철덕 말고는 찾아올 일이 없는 마이너한 곳이기도 했다.

(4) 일본에 있는 하시마 섬, 일명 군함도도 그 동네에 사는 폐허 덕후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명소일 것이다. 저 작은 섬에 석탄이 많이 나기라도 했는지 한때는 광부들이 몇천 명이나 바글바글 몰려 살던 곳인데.. 지금은 싹 다 빠져나가고 없다. 일본에서는 배틀로얄 2 같은 영화 촬영지로나 쓰였으며, 국내에서는 일제 시대 강제 징용 노동자를 주제로 "군함도"라는 영화가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저기는 안전 문제 때문에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에서 나열한 사례들과 비교했을 때, 곤지암 남양 정신병원은 재활용이고 뭐고 없이 방문자와 주민· 건물주들 사이에 마찰만 잔뜩 빚다가 철거되어 사라지게 됐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이라는 곳은 과거와 현재에 저런 특이한 내력이 담겨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7 08:35 2018/08/27 08:35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26

« Previous : 1 :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 43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2687801
Today:
893
Yesterday:
1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