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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잘 알다시피 글쇠배열 수준을 넘어서 한글 조합 로직을 완전히 외부에 expose하고 사용자가 이를 입력 옵션의 일부로서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한글 입력 프로그램이다.

한글 조합 로직은 전산학에서 오토마타라고 불리는 '정규 문법'(regular grammar)으로 흔히 모델링되며, 보통은 그 알고리즘이 해당 한글 입력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 내부에 복잡한 switch문의 형태로 하드코딩되어 있다. 그러나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그렇지 않으며, 아예 C언어 수식의 문법 형태로 오토마타를 사용자가 일일이 지정이 가능하다.

정규 문법은 옛날에 1996년도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 경시부(본인이 그 시절에 정올 공부를 한 세대여서.. ^^)에서 출제되었던 잠수함 코드 식별 문제와 같은 차원의 난이도이다. 주어진 규칙대로 상태를 쭉쭉 switch해 나가다가 코드가 yes로 끝나면 잠수함이고, 그렇지 않으면 noise이다. 한글 입력 오토마타도 그런 수준이라는 뜻이다.

첨언하자면,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복잡한 차원의 문법은 그 이름도 유명한 문맥 자유 문법(CFG)이다. 이제는 다단계의 여닫는 식별 부호를 재귀적으로 처리할 정도가 되어야 하고, 제대로 파싱하기 위해서는 스택이 필요하다. 여기서 스택은 한글 입력 순서를 기억하는 그런 스택이 아니라, 각 재귀 단계별 상태를 기억하기 위한 스택이다. 정규 문법이 Windows의 INI 파일 정도의 복잡도라면, 문맥 자유 문법은 XML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전산학 전공자라면 데이터 구조 시간에 복잡한 괄호와 연산자가 들어간 수식을 처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을 텐데, 그게 바로 간단한 문맥 자유 문법을 인식하는 프로그램을 구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초-중-종성으로만 구성되지 '초성-여는 중성-종성-닫는 중성'이라든가, '여는 초성-중성-여는 종성-닫는 종성-닫는 초성' 처럼 글자 자체가 재귀적으로 이상하게 전개되는 형태는 아니므로, CFG가 아닌 정규 문법만으로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다.

사람이 다루는 자연어든, 컴파일러가 다루는 프로그래밍 언어 소스가 아니어도, 컴퓨터라는 계산 기계가 인식과 생성과 처리 가능한 모든 파일 포맷은 결국 이런 문법으로 formal하게 생성 규칙을 나타낼 수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 텍스트 파일이든, 그래픽 포맷이든, 심지어 기계어 코드의 포맷이든 말이다. 그래서 오토마타 이론은 전산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2.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한글 입력기 얘기를 계속하겠다.
한글 입력기도 구현체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프로그램마다 동작 방식이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중성+종성 형태의 미완성 한글의 입력이 가능한가? 그리고 세벌식의 경우 초성+종성 미완성 한글도 입력 가능한가?” 하는 것 말이다. 오토마타는 바로 이런 세밀한 로직을 바꿀 수 있다.

아래아한글은 도스용 3.x까지만 해도 그런 게 가능하지 않다가 윈도우용으로 넘어오면서 어느 샌가 미완성 한글의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특히 97 때는 전무후무하게 초-종-중 순의 입력도 가능해서 아주 초보적인 형태의 모아치기까지 지원했었다. 그게 워디안 이후부터는 다시 없어졌지만 말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그런 것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이어치기 오토마타뿐만이 아니라 미완성 한글의 입력을 불허하는 오토마타도 따로 갖추고 있다.
PC 환경이 도스에서 윈도우로 넘어가면서 한글 코드의 주류도 조합형에서 완성형으로 넘어갔다. 완성형은 구조적으로 낱자의 초성과 종성을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고 미완성 한글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한글 입력 오토마타도 그에 맞춰서 설계되는 게 불가피했다.

그런데 맥 OS가 제공하는 한글 입력기는 동작 방식이 흥미롭다. 두벌식은 별 차이가 없는데 MS의 한글 입력기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세벌식이다.
오토마타가 '미완성 한글을 허용 안 하는 이어치기'의 변종이다. 초성과 중성의 단독 입력은 허용하지만, 종성 단독이나 여타 미완성 한글의 입력은 아예 무시하여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받침 ㄲ, ㅆ은 ㄱ, ㅅ의 연타로 입력을 못 하고 반드시 한 타로만 쳐야 한다.

입력 무시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오토마타에서 -1이라는 음수 상태로 정의되어 있으므로 이런 입력 로직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 어렵지 않게 구현할 수 있다.

0 → A ? 1 : B ? 3 : C ? -1 : 0
1 → A ? 1 : B ? 2 : C ? -1 : 0
2 → B ? 2 : C ? 4 : 0
3 → B ? 3 : C ? -1 : 0
4 → C ? 4 : A|B ? 0 : -1

초기 상태에서는 종성 C만 -1로 빠지게 하여 무시하면 된다. 그리고 초성이 입력된 상태인 1번 상태에서도 C만 무시하면 된다.
초성과 중성이 모두 입력된 2번 상태에서만 종성의 입력이 허용되며, 이 경우 오토마타는 4번 상태로 가게 된다.
중성만 단독으로 입력된 상태인 3번에서도 중성만 동일 상태로 받아들이면 되고 종성은 여전히 무시한다. (C ? -1: 0)

끝으로 문제가 되는 건 초-중-종성이 모두 입력된 4번 상태이다. 받침 ㄴ+ㅎ=ㄶ 같은 결합은 계속 허용해야 하지만 더 결합할 수 없는 받침은 입력을 무시해야 한다. 그리고 초성과 중성은 다음 글자로 입력을 받아들인다. 이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오토마타로부터 양수 상태값을 얻어서 결합 가능 승인은 받았지만 실제로는 낱자 결합 규칙이 존재하지 않아서 추가 결합이 불가능해진 낱자가 발견될 경우, 성분 변수 A~C에다가 모두 0을 집어넣어서 해당 상태에 대한 오토마타 함수값을 다시 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C에 값이 있을 때는 일단 4번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하되, 초성이나 중성에 값이 있으면(A|B) 다음 글자로 넘어가서 조합을 진행하게 하고(0), 진짜로 세 변수가 모두 0일 때만 -1로 조합을 무시하게 하면 된다.

요컨대 초성과 중성만 단독 입력이 가능하고 정확하게 초-중-종 순서를 따르지 않은 unexpected 종성은 입력을 무시하게 한 오토마타인데, 이것도 좀 오래 써 보니 오타 방지 차원에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3.

이제 오토마타 얘기 말고 다른 기술적인 얘기로 넘어가겠다.
맥 사용자라면 이미 충분히 아시겠지만, 매킨토시 컴퓨터는 별도의 한/영이나 한자 키가 없기 때문에 한/영 전환이 cmd+space이고, 한자 변환은 opt(alt)+enter이다.

다만 약간 불편한 점은, 두벌식이든 세벌식이든 겹받침을 입력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두벌식에서 ㄱ+ㅅ을 누르면 둘은 따로 떨어지며, 세벌식은 아예 겹받침 단독 입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초성+한자로 특수문자를 입력하는 기능도 맥에는 없다. 일반 PC에서는 그야말로 도스 시절에서부터 존재한 오랜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맥은 그런 것의 영향을 지금까지 전혀 받지 않은 채 지내 왔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전/반각 모드 같은 것도 맥에서는 찾을 수 없다.

윈도우에서는 두벌식/세벌식이 한 한글 IME 내부에서의 설정치로 존재해 왔지만 맥은 각각의 벌식이 마치 영문 쿼티/드보락처럼 별개의 입력 방식으로 다뤄진다. 어찌 보면 이게 더 직관적인 디자인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입력 환경 설정 대화상자에는 글자판을 선택하는 옵션은 없으며 backspace 키의 동작 방식 같은 것만 있다.

Windows는 95 이래로 조합 중인 한글을 깜빡이는 네모 커서로 나타내는 관행을 도스 시절 프로그램으로부터 확실하게 도입하여 정착시켰다. 이 당연한 관행이 3.1때까지만 해도 없었기 때문에, 한글을 조합 중일 때 커서는 그냥 해당 한글의 앞에 똑같은 길쭉한 형태로만 보였다. 당시 윈도우 3.x용 MS 워드 6.0이 예외적으로 IME를 자체 처리하여 네모 커서를 자체 구현하던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맥은 조합 중인 한글을 그냥 일본어나 중국어의 조합을 표시하듯이 밑줄로 처리한다. 즉, 맥에서는 깜빡이는 네모 커서를 볼 일이 없다는 뜻. 사실, 깜빡이는 네모 커서는 도스 시절 이래로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편하기는 하지만, 한글 조합을 두 글자 이상의 길이로 표현하는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큰 제약도 존재한다.

그래서 MS 운영체제에서는 전통적으로 한글 조합을 단어 단위로 잡는 기능이 존재한 적이 없다. 한자 입력할 때를 빼면 사실 전/반각만큼이나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반면 맥에는 그 옵션이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한글 입력 하나를 두고도 맥과 윈도우는 문화가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차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오류가 없는 100% 정확한 세벌식 최종 글자판이 윈도우에서는 무려 비스타와 오피스 2007 타임라인에 와서야 겨우 제공된 반면, 맥에서는 공 박사님의 영향력 덕분인지 그야말로 OS X도 아니고 20세기 클래식 시절부터 당연히 기본 제공되어 왔음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7/20 19:21 2012/07/2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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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PC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있는 데스크톱용 운영체제는 역시나 윈도우, 맥, 리눅스 3관왕이다. 다만 이들이 대등한 점유율이 절대 아니며, 셋의 점유율은 공비가 무려 10에 육박하는 등비수열을 이룬다.

맥이야 x86 계열 CPU로 갈아타고 기계의 가격도 내리면서, 옛날에 비해서야 정말 많이 대중화가 되었다. 또한 아이폰/아이패드가 모바일에서 워낙 큰 성공을 거둔 덕분에 맥북/아이맥까지 반사 이익을 보고 있기도 하다. 아이폰/아이패드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결국 그 계열의 PC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윈도우에 비하면야 맥 사용자는 정말 10% 이내의 소수이다. 맥OS를 작정하고 써 볼 의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맥 계열 기계는 비슷한 사양의 일반 컴퓨터보다 여전히 비싸며 구입 후에 서비스도 구리고 키보드· 마우스의 일부 동작 방식이 이질적이기 때문에 덥석 권할 게 못 된다. 솔직히 나도 지금의 맥북 살 돈으로 일반 노트북을 샀다면 아마 화면이 두 배 정도 더 큰 걸 살 수 있었지 싶다. 그러나 ‘스잡빠’, ‘앱등이’로 대표되는 굳건한 추종자도 있는 마당에, 이쪽 진영은 결코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맥은 소수이지만 인지도라도 있지 리눅스는 그조차도 없다. 리눅스를 서버도 아닌 데스크톱 로컬 환경의 주 운영체제로 쓰는 사람은 가히 소수 중의 소수이다. 작정하고 MS 진영을 반대하고 철저한 copyleft 정신으로 무장한 컴덕후 해커이거나, 잡스를 숭배하는 것처럼 리처드 스톨먼을 숭배하는(최소한 그의 인격이 아니면 그의 이념을) 사람 정도만이 리눅스를 쓰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맥이 예전보다 접근성이 개선된 것만큼이나 리눅스도 옛날에 비해서는 초보자가 쓰기 정말 편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초보자가 쓰기엔 리눅스는 인지도 있는 응용 프로그램이 부족하고, 뭘 세팅하고 바꾸려면 유닉스 명령줄을 다뤄야 하는 등 생소한 면모가 적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구 목적으로 2010년 무렵에 VM을 만들어서 돌려 본 우분투 리눅스 9.x의 화면이다. 한때 리눅스의 그래픽 셸은 GNOME이냐 KDE냐로 갈라져 혼란스러운 편이었으나, 요즘은 결국 둘 다 지원하는 쪽으로 가는 추세라 한다.)

20년이 넘게 도스와 윈도우에만 길들여지고 10년이 넘게 윈도우 프로그래밍만 해 본 본인의 입장에서 맥 OS에 존재하는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운영체제의 시스템 메뉴와 응용 프로그램의 메뉴가 한데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Windows는 운영체제의 시스템 메뉴에 해당하는 시작 메뉴가 task bar에 있다.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의 창에 소속된 메뉴하고는 당연히 완전히 별개이다. CreateWindowEx 함수는 창을 생성할 때 메뉴 핸들도 별개로 받는다.

그러나 맥은 화면 상단에 항상 고정되어 있는 시스템 메뉴에 응용 프로그램의 메뉴가 얹힌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건 윈도우에서는 OLE 개체 embedding 상태에서나 어렴풋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목은 워드패드인데 도움말에 나와 있는 건 그림판. 어?)

응용 프로그램 메뉴는 파일이나 도움말 같은 기본적인 것만 남고, 그 사이엔 개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메뉴가 뜨는 것 말이다. 요즘은 이런 디자인도 과거 유물로 치부되어 별도의 프로그램 창이 따로 뜨는 형태로 바뀌고 있지만. (MS부터가 자기네들이 만든 표준 메뉴 인터페이스를 구닥다리로 치부하고 안 쓰려 하니 말이다)

맥에서는 시스템 전체를 통틀어 pull-down 메뉴는 하나만 있으며, 한 순간에 현재 활성화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메뉴 하나만 볼 수 있다. 문서 창에 메뉴가 따로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맥에서 돌아가는 GUI 응용 프로그램이라면 반드시 이런 디자인을 따라야만 한다.

윈도우에서는 대화상자 하나만 달랑 띄우고 따로 메뉴를 만들기는 곤란한 프로그램의 경우, 대화상자의 시스템 메뉴를 customize해서 보통 ‘이동 / 닫기’만 있는 그 메뉴에다가 About이라든가 Always on top 같은 추가 명령을 넣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맥은 어떤 프로그램에게라도 무조건 기본 메뉴가 주어지니 그런 식의 테크닉이 존재하지 않는다.

맥은 그런 기본적인 인터페이스가 모든 응용 프로그램에서 무조건 동일하기 때문에 윈도우처럼 무슨 오피스 200x 스타일 메뉴나 도구모음줄을 만들어 주는 GUI 툴킷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윈도우에서야 보급 메뉴 대신에 그 자리에다 싸제 메뉴 창을 얹어서 보급 메뉴처럼 동작하게만 만들면 custom UI를 손쉽게 만들 수 있지만, 맥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비주얼 C++의 MFC 프로젝트 마법사를 보면, GUI 응용 프로그램을 전통적으로 MDI, SDI, 대화상자라는 세 형태로 분류한다. 그런데 맥에서는 어떤 형태의 프로그램도 일단은 가장 범용적인 MDI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문서 창은 하나밖에 생성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날개셋> 타자연습’을 맥용으로 만든다면, 프로퍼티 페이지의 밖에 존재하는 ‘사용자 로그인’이나 ‘종합 환경설정’ 같은 명령은 응당 메뉴에서 내리는 명령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맥은 동일 프로그램의 중복 실행에 대한 개념이 Windows와는 다르다. 같은 프로그램은 한 번만 실행되고 그 동일한 프로그램이 여러 문서를 담당한다는 MDI 사고방식이 맥은 더욱 엄격하다. 그래서 맥 OS의 task bar에 해당하는 dock은 프로그램이 실행됐냐 안 됐냐의 여부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 아이디어를 차용한 윈도우 7의 task bar는 프로그램의 중복 실행 개수도 살짝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디자인 때문에, 맥에서 프로젝트 단위로 문서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내부 구조가 많이 복잡해진다. 개발툴이 그런 예 중 하나이다. 비주얼 C++이야 여러 개를 실행해서 제각기 프로젝트를 열면 되지만, xcode는 프로젝트별로 각각의 문서창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 내부에서 또 파일을 편집하는 창을 관리해야 한다.

맥 응용 프로그램은 마지막 문서 창이 닫혀서 문서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키보드 포커스가 다른 프로그램으로 넘어갈 때 자동으로 종료되는 편이다. 이런 동작 방식은 Windows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물론 모든 프로그램이 그러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Finder도 파일 표시(윈도우로 치면 탐색기 창 같은) 창이 하나도 없이 포커스가 바뀌더라도 종료되지 않고 언제나 실행되어 있는다. 내장 웹브라우저인 사파리도 마찬가지이다.

키보드로는 Alt+F4에 해당하는 Cmd+Q를 누르면 언제나 프로그램이 종료된다. 단, 윈도우의 Alt+F4는 그냥 창을 닫는다는 보편적인 용도도 포함하는 단축키인 반면, Cmd+Q는 언제 어디서나 해당 응용 프로그램을 완전히 종료시킨다는 의미 차이가 있다.

윈도우 프로그래머라면, 맥에서는 저런 것뿐만이 아니라 응용 프로그램의 파일 구성까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될 것이다. 단순 실행 파일 말고 GUI 응용 프로그램은 아이콘, 리소스, 구성 파일이 한데 담긴 패키지 형태로 배포된다. 파일 시스템상으로는 디렉터리 구조이지만 운영체제 내부에서는 가상적인 단일 패키지 파일로 취급된다.

맥에서는 그럼 레지스트리가 없으면 응용 프로그램의 설정 저장을 위해 어떤 기법을 쓰는지? 프로그램 추가/제거는 어떻게 하는지? 동일 개발자가 만든 여러 프로그램이 동일 코드를 공유하려면 DLL 같은 건 어느 디렉터리에다 집어넣으면 되는지? 맥은 윈도우 같은 32/64비트 코드 혼용 문제는 없는지?

알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런 걸 윈도우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잘 설명해 놓은 인터넷 사이트나 책은 아직까지는 난 못 봤다. 아무래도 둘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달라서 두 플랫폼의 사고방식에 모두 완전히 통달한 개발자는 거의 없으리라 예상된다.;;

이렇듯, 그토록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맥 OS는 좀 써 보면 윈도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고급스러움, 미적 감각이 느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맥 같은 녀석이 존재함으로써 IT 세계가 좀 더 다양해지고 MS의 독점을 약간이나마 견제하는 효과가 난 건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그래도 이익이긴 한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2/07/10 08:11 2012/07/10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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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개발자가 심층 분석한 MS 한글 IME 리포트.
버그를 나열하기 전에 먼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기술 설명부터 하겠다.

A. MS IME의 두벌식과 세벌식의 구현 차이 -- 오토마타

일단 좋은 말부터 꺼내자면, MS 한글 IME는 현존하는 한글 입력기들 중, 어떤 의미에서는 기본에 충실하게 가장 FM대로 만들어져 있다. 두벌식과 세벌식의 로직이 서로 확고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MS 버전의 두벌식 한글 입력기는 전산학적으로 볼 때 진정한 두벌식의 고증에 가장 충실하게 만들어져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음이라면 초성을 조합할 때와 종성을 조합할 때의 조합 규칙에 차이가 없다. 그래서 초성이 입력되는 상태에서도 ㄶ, ㄳ 같은 겹받침을 바로 입력할 수 있는 반면, ㄲ, ㅆ 같은 쌍자음은 연타가 아니라 반드시 Shift로만 입력할 수 있다. 이 동작 방식은 내가 알기로 윈도우 95 시절 이래로 시종일관 변함 없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나 아래아한글의 두벌식 입력기는 그렇지 않다. 도깨비불 현상만 추가되었을 뿐 세벌식의 사고방식으로 두벌식을 덤으로 구현한 형태에 가깝다. <날개셋>의 경우, 이 점을 감안하여 지난 6.0 버전에서 초-종성 공유 낱자 결합 규칙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으며, 이를 사용하면 두벌식 입력 방식을 좀 더 두벌식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설정할 수 있다.

뭐, 아래아한글도 1980년대 말에 1.0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개발자들이 세벌식이 정확하게 뭔지 몰라서 자음만 한 벌 더 있을 뿐 여전히 도깨비불 현상이 존재하는 형태로 만들었다가, 고 공 병우 박사에게서 지적 받고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긴 한다만.

B. MS IME의 두벌식과 세벌식의 구현 차이 -- 글쇠 인식

표준 두벌식 글자판은 A부터 Z까지 딱 알파벳 글쇠 26개에만 한글이 배당되어 있고 나머지 글자들은 영문과 완전히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MS 한글 IME는 두벌식일 때는 알파벳 글쇠만 가로채어 사용하며, 숫자, 기호, 공백 글쇠는 처리하지 않고 응용 프로그램으로 그대로 넘겨 준다.

세벌식은 그렇지 않다. 몇 가지 영문과 일치하는 기호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 병우 세벌식은 4단까지 독자적으로 사용하고 숫자와 기호 영역까지 침범한다. 그래서 MS IME는 세벌식에 대해서는 아예 공백까지 포함한 48개 글쇠 자리를 모두 가로채어 동작한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가로챌 글쇠 영역 자체를 필요에 따라 정밀하게 제어하는 옵션을 아주 최근의 6.5 버전에서야 추가했다.

이렇게 두 글자판의 구현이 제각각 따로라는 점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는 MS IME에 두벌식을 쓸 때는 괜찮은데 세벌식을 쓸 때만 자잘한 버그가 존재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버그는 더럽게 안 고쳐진다는 특징도 있었다. 두벌식과 세벌식의 넘사벽 급의 인지도 차이 때문이다.

10년도 더 전에 포트리스라는 대포 쏘기 게임이 인기였을 때, 세벌식으로는 한글 모드에서 Space로 대포 쏘기가 안 되어 채팅과 게임을 같이 하기가 불편하다는 이슈가 있었다. 두벌식에서는 Space가 응용 프로그램이 직접 접수한 공백이지만, 세벌식에서는 Space가 직접 오는 게 아니라, 한글 IME가 가공을 하고 보내 준 공백이라는 완성된 문자열이 오기 때문이다.

C. 윈도우 7에서의 변화

자, 앞에서 다룬 건 MS 한글 IME의 두벌/세벌 메커니즘의 차이이고, 지금 하는 얘기는 운영체제의 버전에 따른 디테일의 변화 쪽이다.

16비트 윈도우 시절에는 운영체제에 유니코드도, 국제화(I18N)도, 지역화(L10N)도 없었다. 동일 제품을 한중일 나라의 문자를 입출력할 수 있게 개량하는 것은 MS의 각 지사에서 완전히 독자 기술을 사용해서 알아서 재량껏 해야 했다.

그러다가 윈도우 95/NT4가 되면서 글꼴 쪽도 획기적으로 발전하고(내장 비트맵, 트루타입 컬렉션 등), 입력기 쪽도 한중일 통합 IME 프로토콜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그리고 입력기 프로그램은 EXE가 아니라 여타 운영체제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형태인 DLL이 되었다. 그래서 윈도우만 입력기의 한영 상태가 각 프로그램별로(정확히는 스레드별로) 완전히 따로 놀지, 공유가 되지 않는다.

윈도우 2000부터는 추가 글꼴과 코드 페이지 데이터만 설치해 주면 세계 어느 나라 윈도우에서도 아무 나라 언어의 입력기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고, 윈도우 XP부터는 고급 텍스트 서비스라고 불리는 일명 TSF 기술이 도입되었다. 윈도우 비스타부터는 이제 전세계 언어의 입력기와 글꼴이 추가 설치를 할 필요도 없이 기본으로 제공되며, TSF 프로토콜이 주류가 되고 기존 IME 프로토콜은 호환성 계층을 통해서나 제공된다.

이로써 비스타에서 문자 입력 방식의 그랜드 슬램이 달성되고 해피엔딩이 된 것 같은데, 윈도우 7에 와서는 기능이 추가된 건 없으면서 뭘 또 잘못 건드렸는지 문자 입력 쪽의 안정성이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MS 한글 IME만의 버그인 것도 있고 운영체제 자체의 버그인 것도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A~C를 염두에 두고, 2012년 현재 MS 한글 IME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버그들을 정리해 보았다.

1. 세벌식 최종 + 전각문자

맥 OS는 공 병우 박사(이분이 요즘 같았으면 전형적인 앱등이이셨다ㅋㅋㅋ)의 텃새 덕분에 전통적으로 세벌식 최종이 강세였으며, 세벌식이라 하면 곧 최종 자판을 가리켰다. 그러나 PC 쪽은 도스 시절 이래로 390이 강세였기 때문에 세벌식이라 하면 곧 390을 가리켰다. 최종은 아래아한글조차 97에 와서야 제공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인지도가 미미했다.

윈도우 95 때 처음으로 세벌식 최종 글쇠배열이 있긴 했지만 그런 인지도 부족으로 인해 틀린 배열이 굉장히 많았다. 그게 98에서 좀 바로잡히긴 했지만 여전히 오류가 있었고, 그 오류는 윈도우 XP/오피스 2003에 가기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비록 최종 글자판은 참고표와 가운뎃점처럼 1바이트 아스키 영역에 없는 글자가 있는 게 특이점이긴 했지만, 윈도우 98부터는 어차피 한글 IME의 모든 내부 자료구조가 유니코드로 바뀌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구조가 그러하니 내가 파워업을 개발해서 패치도 가능했던 것이고.

윈도우 비스타 + MS 오피스 2007에 와서야 드디어 100% 정확한 세벌식 최종 글자판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2003년 중반에 내가 한국 MS를 방문해서 수정을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도 아마 작용하지 않았겠나 생각해 본다. 비록 그 해 가을에 발표된 오피스 2003에서 바로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전각 모드에서는 참고표와 가운뎃점이 제대로 입력되지 않는다. 얘들은 아스키 문자가 아니니 라틴 문자처럼 일괄적으로 0xFEE0를 더해서는 안 되는데 그거 처리를 추가하지 않은 듯하다. 윈도우 7+오피스 2010에서까지 변함없다. 물론 한국에서는 전각 문자를 거의 쓰지 않으니, 이건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참고로 한중일의 MS 오피스는 XP 버전부터 운영체제의 IME를 자기 것으로 패치하는 게 관행이 됐다. 일본어 IME는 운영체제의 것과 오피스의 것이 차이가 난다는 말도 있는 듯하지만, 한글 IME는 운영체제의 것이나 오피스의 것이나 차이가 거의 없음.

2. MS 워드 2007 이상에서 세벌식을 쓸 때만 나타나는 역상 현상

워드 2007 이상에서, 오피스 2007 이상 또는 윈도우 비스타 이상이 제공하는 한글 IME로 세벌식을 써서 한글과 숫자, 기호, 공백을 입력한다. 그 뒤에 IME를 날개셋이라든가 다른 일본어· 중국어 입력기로 바꾼 뒤 글자를 입력한다. 그러면 예전에 MS 한글 IME의 세벌식으로 입력했던 공백이나 숫자, 기호가 역상(검은 배경, 흰 글씨)으로 바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굉장히 기괴한 버그이다. 이것은 워드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워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세벌식으로 입력한 비한글 문자에 대해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MS IME의 문제이기도 하다. B에서 언급한 기술 차이를 생각해 보라.

이 역상은 문서의 내부 서식이 아니라, 문자의 중간 조합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문자 입력기가 임시로 부여하는 시각 효과이다. 일본어 입력 중에 나타나는 점선 밑줄 같은 것 말이다. 해당 문서를 저장한 뒤에 다시 불러오면 다행히 사라지긴 하지만, 그 상태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쇄도 그대로 역상 모양으로 된다. -_-

더욱 기괴한 건, 오피스 2003 같은 예전 버전의 MS IME로는 세벌식을 쓰더라도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MS 제품 자체의 버그가 확실하다. 윈도우 7/오피스 2010에서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3. 윈도우 7, 한글 입력 중에 바탕 화면을 클릭했을 때

윈도우 7에서 MS 워드 2007이나 2010을 실행하여 아무 한글 IME로나 한글을 입력한 상태로 있는다. 창을 최대화하지는 않은 채로 가령, ‘아’를 조합하고 있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마우스로 바탕 화면을 클릭했다가, 다시 워드의 제목 표시줄을 클릭하여 돌아온다.

비스타에서는 동일한 절차를 수행하고 나면 ‘아’의 조합이 종료되어 커서가 ‘아’ 뒤에 가 있다. 그러나 7에서는 커서가 여전히 ‘아’를 조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합이 끝난 상태이다. 받침 ㄴ을 입력하더라도 ‘안’이 되지 않고 ㄴ이 새로 조합된다.

윈도우 7은 한글 조합 중에 창의 포커스가 바뀌었을 때의 내부적인 처리가 갑자기 좀 이상하게 혹은 엄격하게 바뀌었다. 비스타나 XP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던 게 7에서 갑자기 문제를 일으켜서 그에 대한 방어를 해야 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과거의 5.51과 5.52 때 이와 관련된 버그 패치가 행해졌다.

4. 윈도우 7의 콘솔에서 세벌식으로 조합을 종료할 때 글자가 덧남

윈도우 XP/비스타에서는 해당사항 없고 7에서만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서비스 팩 1에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명령 프롬프트에서 세벌식 자판으로 한글을 입력하다가 온점이나 스페이스처럼 비한글 문자를 입력하면서 조합을 종료시키면, 조합 중이던 한글이 덧난다. 가령, ‘다.’를 입력하다 보면 ‘다다.’가 된다.

이건 꽤 황당하고 심각한 버그인데 왜 아직까지 안 고쳐졌는지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윈도우 7은 출시된 지 이제 무려 3년이 다 돼 가지 않는가.
왜 세벌식일 때만 그렇냐고? 이 역시 B에서 설명되었듯, 비한글 문자를 처리하는 방식이 두벌식과 세벌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자 입력 프로그램이 아니라 운영체제의 구조적인 버그이기 때문에 윈도우 7에서는 MS IME든 날개셋이든 동일하게 발생한다.

5. IME 2010, 콘솔에서 한자 후보 목록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음

이것은 약간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콘솔에서 한글을 조합하는 중에 한자 키를 눌러 보면, 원래 한자 후보가 콘솔 창의 하단에 곧바로 떠야 하는데 뜨지 않는다.
물론 이 상태에서도 번호를 누르면 해당 한자로 바로 변환이 되며, 좌우 화살표 같은 페이지 전환 키를 누르면 그제서야 후보 목록이 나타난다. 뭔가 코딩 실수가 들어간 듯하다.

이 버그는 윈도우 7의 기본 한글 입력기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한글판 MS 오피스 2010과 함께 설치된 한글 IME 2010에서만 나타나는 문제이다. 즉, 운영체제의 것을 대체하는 오피스의 IME가 오히려 버그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는 물론 이런 문제가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24 08:34 2012/06/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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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下

아문센이 선택한 경로는 스콧이 선택한 경로보다 남극점에 96km 정도, 즉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만치 더 가까운 경로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가는 것이었다. 스콧의 경로는 선배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경로와 동일했다. 거기에다 아문센은 스콧보다 출발도 열흘 정도 더 일찍 했다.
아문센은 1등에 대한 압박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려 시도를 했지만 역시 맹추위와 준비 미숙 때문에 포기하고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잖아도 아문센은 북극점을 먼저 정복하려 했는데 선두를 미국인에게 빼앗겨서 조바심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섀클턴은 스콧보다 먼저 남극 탐험을 갔지만, 준비 미숙과 물자로 부족으로 인한 실패를 인정하고 북극점을 약 150km 정도 앞둔 지점에서 미련 없이 진행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사람이다. 그 대신 모든 대원들이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문센은 남극점을 빨리 찍고 돌아온다는 그 목표에만 집중하여 대원들도 전부 항해 측량술을 알고 스키를 능숙하게 탈 줄 알며 혹한 환경에서의 생존 능력이 뛰어난 베테랑들로 뽑았다. 그러나 스콧은 겸사겸사 학술 탐사에도 큰 비중을 둬서 대원 중엔 과학자들도 있었다. 군인보다는 민간인을 선호했던 셈. 스콧은 그 힘든 와중에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극에서 채취한 광물을 16kg치나 갖고 보관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북극 원주민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대로 남극에 갈 때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두꺼운 가죽옷을 입었고, 짐을 싣는 썰매는 개들을 이용해 운반했다. 현지에서도 수시로 바다표범들을 사냥해서 식량을 비축했고, 탐험 중에도 효용이 떨어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개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잡은 개고기를 다른 개에게 사료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콧은 원주민들이나 입는 가죽옷을 저속하다고 거부하고 개고기도 안 먹었으며, 현지에서의 사냥 역시 할 생각을 않았다. 개나 말이 죽으면 잡아먹기는커녕 묻어서 장례를 치러 줬을 정도이니! 모든 물자는 대영제국에서 조달하는 것만으로 충당하려 했던가 보다. 그러나 영국제 모직물 코트는 옷이 물에 젖고 얼면서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개 대신 조랑말과 스노우모빌(설상차)을 활용했는데, 말은 평범한 환경에서야 개보다 먹는 양에 비해 큰 수송력을 제공하는 게 사실이지만 별도의 사료를 챙겨 가야 하며 개들보다 추위에 훨씬 취약했고 잘못해서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었다. 스노우모빌은 매서운 추위와 험악한 지형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했으며, 후원사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양의 통조림도 얼어서 안 따지거나 심지어 터지기 일쑤였다.

영국이 자랑하던 자본력과 당대의 과학 기술은 남극에서만은 그들이 한낱 피지배민 루저로 치부하던 원주민들의 생활 노하우를 앞설 수 없었다.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부터 그 해 12월 14일까지 55일 동안 거의 1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끝에 남극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매일 23~24km씩 진행한 셈. 남극점 주변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었으니 그들이 1등을 한 게 확실했다.

아문센은 영국인들이 한 근성을 하기 때문에 스콧 팀도 아마 며칠 안으로 남극점에 곧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콧 팀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4일이나 지난 이듬해 1월 17일이었다. 출발 시기가 열흘이 차이가 나고 거리 차이가 100km 정도 났으니 두 주~보름 정도의 간극은 자연스럽지만 한 달이 넘게 차이가 났다는 건 스콧 팀이 시스템적인 비효율로 인해 진행도 더뎠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하루 전인 16일부터 무수한 개들과 썰매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남극점에 다다르니 거기엔 역시나 노르웨이 깃발과 함께 천막이 만들어져 있었고, 약간의 물자와 쪽지가 적혀 있었다. 쪽지에 적힌 글은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고 한다.

“존경하는 스콧 대장님, 우리가 먼저 남극점에 도착한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서 귀환하지 못한다면 대장님께서 이 쪽지를 본국으로 전달해서 우리에 대한 증거로 삼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식료품과 털옷을 좀 남겨 놓고 가니,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대장님의 무사 귀환을 빕니다. 아문센 올림”


아문센은 라이벌을 배려해서 정말 정중하고 대인배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었지만, 이 문구는 스콧에게는 가히 자존심을 건드리고 비수를 꽂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스콧 팀은 물자가 부족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문센이 남긴 보급 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아문센 팀은 1월 25일에 자기네 베이스 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갔던 길의 역순으로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귀환이 42일이 걸렸으니 55일이 걸린 출발보다 기간이 두 주 정도 더 단축됐다.

그러나 개도, 말도, 설상차도 없이 터덜터덜 허탈하게 귀환하던 스콧 팀에게는 이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귀환을 시작한 지 한 달이 경과한 2월 17일인데 이들은 거의 반밖에 진행을 못 했다. 그리고 이때 팀원 중 지질학자인 에드가 에반스가 가장 먼저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미 몇 번 추락 사고를 당해서 뇌진탕과 폐렴 증세로 인해 건강이 몹시 안 좋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한 달이 경과하여 3월 17일이 되었다. 귀환 60일째이고 전체 경로의 70% 정도는 완주한 시점이었다. 대원 중 로렌스 오츠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서 이미 괴저가 발생하고 거의 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는 대원들이 자신을 부축하고 자신과 보조를 맞추느라 귀환이 지체되고 있는 걸 알았으며, 제발 자기를 버리고 먼저 가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스콧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오츠는 그 날 저녁, “대장님, 밖에 좀 나갔다가 오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는 불편한 발을 이끌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캠프 밖으로 절뚝거리며 나갔고, 그 길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는 시신조차도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눈보라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눈에 찍힌 발자국조차 이내 사라졌던가 보다.) 스콧은 오츠가 일부러 죽음을 택했다는 걸 눈치 채고, 그가 영국 신사다운 최후를 맞이했다고 슬퍼하는 한편으로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오츠의 살신성인도 나머지 세 명을 궁극적으로 살리지는 못했다. 살인적인 악천후 때문에 3월 19일자 캠프에서 스콧 일행은 더 나아가질 못하고 1주일이 넘게 고립되었다. 베이스 캠프까지는 약 200km쯤 남았기 때문에(이미 1000km를 넘게 이동했고, 다 와 감) 저 기간 동안 조금만 더 분발했으면 근처의 보급 기지에도 도착했을 것이고, 베이스 캠프에까지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했을 터이나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남극에 무슨 생각으로 물을 끓여야 하는 번거로운 홍차를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식료품과 연료는 이미 다 떨어졌고 홍차는 생잎을 뜯어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3월 29일, 나머지 대원인 에드워드 윌슨과 헨리 바우어즈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어둠, 절망으로 인한 기력 소진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탐험대장인 스콧도 같은 캠프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일기장에 죽은 두 대원에 대한 언급도 있기 때문에 스콧이 가장 나중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익사나 추락사처럼 단번에 훅 간 게 아니라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굉장히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은 셈이다. 스콧 일행의 시신은 그로부터 무려 8개월 뒤에 남극에 여름이 다시 찾아왔을 때 미국의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자, 다음 그림은 아문센(빨간색)과 스콧(초록색)의 남극 탐험 경로를 정리한 것이다. (출처: 영문 위키백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에서는 영국 신사의 기품을 지키면서 남극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콧을 애국자와 영웅으로 열렬히 치켜세우고 떠받드는 한편으로, 어쨌든 1등을 해 버린 아문센을 헐뜯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때는 아예 대놓고 역사를 왜곡하여 스콧이 먼저 남극점에 도착했다고 가르치기까지 하다가, 국제 사회로부터의 조롱과 비웃음을 한몸에 받고서야 슬쩍 시정했다.

영국이 이런 데서 은근히 찌질한 짓도 좀 했다. 영국인 중에서 양심껏 소신껏 아문센을 지지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한 사람은 스콧의 롤모델 탐험가이던 섀클턴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이 글에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아폴로 13호 같은 ‘성공적인 실패’를 기적적으로 이룩한 덕분에 이 양반 역시 아문센만큼이나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급인 위대한 탐험가로 역사에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 보기 바란다.

콩진호, 콩라인-_- 같은 예외를 빼면, 세상 역사에서 2등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지 못하는 게 통념이다. 허나, 남극에서만큼은 영국의 저런 집요한 로비로 인해 각종 시설물에 꼭 ‘스콧-아문센’ 브랜드가 심심찮게 남아 있다.

남극의 정복자 아문센은 거의 60년 뒤에 달에 갔다 온 닐 암스트롱만큼이나 세계의 영웅으로 등극하였고 곳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노르웨이 국내에서야 물어 보면 잔소리. 지금 한국으로 치면 김 연아, 안 철수 급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듣보잡 빈곤국이던 노르웨이의 위상을 그만치 끌어올린 사람이 역사상 누가 있었겠는가?

아문센은 교통 덕후여서 이 탐사 후에도 활발히 탐험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는 항공기 기술이 개발되던 시기인지라 남극을 아예 비행선으로 횡단하기도 했다. 그러다 1928년에 비행선 사고로 인해 행방불명되는 걸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이 우주 개발 경쟁을 할 때도 인공위성을 먼저 띄우고 달에 사람을 먼저 보내려고 기싸움이 엄청 벌어지긴 했다. 그러나 우주 개발은 전적으로 자본력과 기술에 의해 승패가 기울었으며, 다행히 우주 공간에서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도 없다. 또한, 소련은 자기네 연구 과정을 워낙 폐쇄적으로 공개를 잘 안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아문센과 스콧에 필적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없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11 19:39 2012/06/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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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上

인류 역사상 인간이 지구 밖으로 제일 멀리 나간 여행은 1970년의 아폴로 13호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세 명의 승무원이 모두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폭발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후 승무원과 관제 센터 직원들은 가히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승무원들은 갈증과 추위에 떨면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m(현재는 더 높아져서 8850이라고도 하는데)의 높이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이며, 인간이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등반 후 생환에 성공한 것은 1953년의 에드먼드 힐과 텐징 노르게이의 공동 등반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산들은 높아 봤자 대류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대류권에서는 고도가 1km 상승할수록 온도는 대략 6.4도 정도 떨어진다. 그래서 이런 높은 산들은 일년 내내 기온이 영하이고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 지대이다.
또한 해발 고도가 5천 m 정도 되면 기압도 해수면의 절반 정도로 떨어지고,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 무렵에서는 아예 1/3기압이 된다. 물은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에 밥을 지어도 쌀이 잘 익지 않으며, 산소도 덩덜아 부족하기 때문에 비숙련자는 조금 걷기만 해도 지표면에서 100미터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헉헉 숨이 차게 된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도면 지형이 그렇게 험하지 않으며(특히 이웃의 콩라인 K2에 비해서) 인지도도 압도적이고, 덕분에 등산로도 개척될 대로 개척되어 있어서 찾는 사람이 연간 수백여 명에 달한다. 그래서 인근의 네팔은 등산료와 관광 수입을 톡톡히 챙기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잘 알다시피 심지어 산소통 없이 등반한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계의 지붕인 이런 산들은 오늘날에도 만만한 곳이 아니어서 날씨가 험악할 때는 입산할 수 없으며, 해마다 최소한 국내의 철길 건널목 사망자 정도만치는 산에 오르다 죽는 사람이 꼭 나온다고 한다.

한편,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필리핀의 근처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 중에서도 더욱 아래에 11034m의 깊이를 자랑하는 비티아즈 해연이다. 1957년에 이곳을 발견한 구소련의 탐사선 비티아즈 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탐사선이 그렇다고 해연의 밑바닥까지 다 내려가 본 건 아니고, 일정 수준 이상의 깊이부터는 그냥 초음파만으로 깊이를 측정한 거라고. 실제로 거기 밑바닥까지 내려간 건 1960년에 미국에서 트리에스테-II 호가 해냈다.

일반 비행기가 공기 때문에 성층권도 못 벗어나고 한없이 높게 뜰 수는 없듯, 일반적인 잠수함들 역시 의외로 깊게 못 들어간다. 겨우 대륙붕 정도의 깊이밖에 못 들어가고 최첨단 핵잠수함도 500~700m 정도의 수심이 한계라고 한다. 군사 목적으로도 더 깊게는 들어갈 필요도 없고, 어차피 그 깊이 안에서 더 오래 머무르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말이다. 더 깊게 들어가려면 그 용도로 특별히 제작된 심해 잠수정을 써야 한다.

1만 미터 정도의 수심에서 물체가 받는 압력은 무려 1천 기압. 1㎠당 8톤의 힘이 가해져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살인적인 압력이다. 수심이 10미터 깊어질 때마다 대략 1기압이 증가하며(참고로 금성의 표면의 대기압이 90~95기압. 덜덜~) 덩달아 빛도 적어져서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느 수심과 압력 이상부터는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된다. 태양열이 닿지 않으니 수온 역시 영하급이다.

심해 잠수정은 실용성은 포기한 채 최대한 둥글고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졌고, 트리에스테 호는 무거운 추를 잡고 가라앉은 뒤, 그 추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 떠 올라오는 방법을 썼는데, 그때는 기술상의 한계로 20분 남짓밖에 못 머무르고 다시 올라와야 했다. 그러다가 타이타닉 호의 제작자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거의 반세기 만에 비티아즈는 아니고 챌린저 해연이라고 만만찮게 깊은 밑바닥을 2012년 지난 3월 말에 탐사한 바 있다.

우주나 심해 탐사는 아무래도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산 등정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극소수의 연구원이 최첨단 기계에 탑승해서 탐험하는 형태가 아니라 목적지를 직접 발로 걸으면서 탐험하며, 물자를 보급하는 보조 staff의 숫자도 아주 많다. 마치 영화 한 편이 배우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오늘날은 마음만 먹으면 항공기로 금방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냐는 질문은, 이건 마치 상대방을 쓰러뜨리려면 권총을 쓰면 되는데 뭣 하러 무술을 연마하냐 하는 식의 우문우답이 될 듯하다.

지구에 저런 높은 산 말고 또 남아 있는 혹독한 미지의 환경으로는 사막과 극지방이 있다. 이 중 사막은 제끼고,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는 두 꼭지점인 북극점과 남극점은 18세기~19세기 초 사이에 탐험계의 성배로 여겨져 왔다. 그 당시 인류 최초로 북극점을 정ㅋ벅ㅋ한 사람은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로 알려져 있었다(1909년 4월. 훗날 그건 오류로 판명되긴 했지만). 그리고 남극점을 정복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다(1911년 12월).

산이나 해저나 우주 같은 다른 곳에 비해서는 비교적 일찍 정복된 영역이지만, 두 극점 중에서 남극점에는 다른 미지의 영역에는 없는 특이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때는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과 영국의 로버트 스콧 팀이 남극점을 먼저 찍으려고 경쟁 중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듣보잡 빈민국에 불과했던 노르웨이가 물자가 월등히 더 풍부했던 대영제국을 누르고 압도적인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문센 팀은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개들만 약 40마리쯤 죽었음;;) 국제적인 영웅이 된 반면, 스콧 팀은 그렇잖아도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우울하게 돌아오는 길에 며칠째 혹독한 눈보라 때문에 조난을 당해서 스콧 포함 5명의 팀원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두 팀의 결말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달라진 것에는 단순히 운(날씨)보다 훨씬 더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문센은 원주민들의 노하우를 받아들여 극도로 최적화와 현지화를 잘 해 간데 반해 스콧은 남극 탐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했으며 쓸데없는 곳에서 괜히 명분과 품위만 따지다가 참혹한 낭패를 당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사람들 얘기를 좀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09 19:25 2012/06/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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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모니터 화면을 픽셀 단위로 있는 그대로 저장하는 기능의 필요성은 과거 도스 시절부터 쭉 있어 왔다. 프로그램의 기능을 설명할 때, 특정 인증샷을 남길 때 등 여러 모로 유용하고 필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키보드에는 print screen이라는 키가 있다. 옛날에는 사용자가 이걸 누르면 하드웨어 차원에서 인터럽트가 발생하여, 텍스트 모드 화면에 찍혀 있던 글자가 프린터 포트(LPT1)로 진짜로 갔다. 프린터가 안 켜진 상태에서 이걸 누르면 컴퓨터가 멎었다. pause를 누르면 컴퓨터의 전체 작동이 일시 중단되고 ctrl+alt+del을 누르면 컴퓨터가 곧바로 재부팅되던 시절의 얘기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기능은 너무 원시적이고 빈약하며, 그래픽 모드에 대한 대비책이 전무했기 때문에 화면 캡처는 결국 소프트웨어 계층이 담당하는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도스 시절의 화면 캡처 프로그램은 응당 램 상주(TSR) 프로그램의 형태였다. 아래아한글의 경우, 1.5x에서는 hcopy.exe라는 자그마한 유틸리티가 있었는데, 텍스트 모드 아니면 무려 허큘리스 단색 그래픽 모드만 지원했었지 싶다. 2.0과 그 이후부터는 별도의 유틸리티는 없어졌고 대신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에 자체적으로 화면 캡처 기능이 들어갔다. 언제라도 Alt+키패드 +키를 누르면 지금 화면을 PCX 그림 파일로 저장할 수 있었다.

한동안 본인이 사용했던 프로그램은 수채화라는 그래픽 프로그램에 내장되어 있던 snap이라는 덜 유명한 국산 프로그램, 그리고 Screen Thief라는 비교적 유명한 외국산 프로그램이다 ST는 아주 특이하게도 텍스트 모드도 색깔과 바이오스 글꼴이 모두 가미된 그래픽 원형 그대로 캡처해 주는 끝내주는 기능이 있었다. 생성되는 그림 파일 확장자도 GIF로, 비록 오늘날의 JPG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PCX보다야 더 무겁고 압축률이 뛰어난 포맷이었다.

도스에서 윈도우로 넘어가면서 화면 캡처는 굉장히 쉬워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동시에 띄우고 드나들 수 있는 멀티태스킹 환경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Print Screen만 누르면 화면 전체 또는 활성화된 창이 비트맵 형태로 클립보드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래픽 하드웨어가 워낙 겹겹이 잘 추상화되다 보니, 화면 캡처란 이제 기술적으로 대상 윈도우의 DC 내용을 내 DC로 Bitblt하는 것이 전부이다.

너무 간단해졌다. 옛날에는 하드웨어 가속을 받는 동영상이나 일부 게임 화면은 이 방법으로 캡처할 수 없어서 별도의 특수한 프로그램을 써야만 했지만 이것도 비스타부터는 옛말이 됐다.

기본적인 기능은 운영체제가 자동으로 제공해 주니, 캡처 유틸리티들은 편의성을 더욱 강화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그래픽 편집과 보정 기능도 갖추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러 윈도우의 동시 캡처, 자동 스크롤 캡처, 그리고 현재 화면보다 더 큰 해상도를 가장한 화면 캡처, 멀티모니터 지원, 텍스트 정보 추출 등, 화면 캡처라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적지 않다. 편집 쪽도 Blur 같은 전문적인 사진 보정보다는, 색깔 추출, 디더링 같은 산술적인 변환 기능이 더 필요할 것이다.

본인은 옛날에는 동영상 화면의 캡처를 위해 HyperSnap이라는 프로그램을 잠깐 썼었는데 나름 굉장히 잘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거 없이도 동영상 화면 캡처가 얼마든지 가능해졌기 때문에 안 쓴다. 그냥 옛날 Paint Shop Pro가 같이 제공하는 화면 캡처 기능을 유용히 쓰는 중이다.
오늘날은 국산 프로그램으로는 ‘오픈캡처’가 이 분야에서 아주 유명하다. 완전 무료 프로그램이다가 최근에는 기업 대상으로 유료화되었다.

윈도우 환경이라도 게임들 역시 전통적으로 화면 캡처 기능을 제공해 왔다. 옛날에 256색 게임들은 운영체제의 print screen 키로는 비록 비트맵 데이터는 화면 캡처가 되지만 팔레트 정보가 저장되지 않아 화면이 이상한 색으로 저장되곤 했기 때문이다. 한편, 요즘은 컴퓨터의 성능이 놀랍도록 좋아지고, UCC 만들기가 보편화하면서 아예 게임 화면 동영상을 찍는 기능도 쓰이고 있다. 외산으로는 프랩스(Fraps), 국산으로는 반디캠 같은 프로그램이 좋은 예이다.

화면도 나오고 동영상도 나왔으니, 글을 맺기 전에 소리 캡처에 대해서도 잠깐만 언급하겠다. XP 이하 시절에는 내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를 도로 녹음하는 것이 비교적 쉽게 가능했는데 비스타부터는 그게 방법이 꽤 까다로워지고, 하드웨어 환경에 따라서는 아예 불가능한 컴퓨터까지 생겼다고 본인은 알고 있다. 비스타 때부터 비디오와 오디오의 하드웨어 계층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키매크로 유틸리티와 저런 부류의 캡처 유틸리티는 운영체제가 기본 제공할 만한 보조 프로그램의 아주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컴퓨터의 활용 능력 및 생산성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5/31 08:36 2012/05/3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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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대 김 빛내리 교수라고 우리나라에서 미생물학 내지 bio-informatics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가 계신다. 최종 학력은 옥스퍼드 대학 박사. 대외적으로 쓰는 영어식 이름은 Narry Kim이라고 한다. (오옷) 연구실 이름은 “RNA 생물학 연구실”.

이분은 외국의 저명한 일류 학술지에 수시로 논문을 냈으며 한국의 촉망 받는 여성 과학자로 이미 여러 번 선정되고 상도 받고 언론도 탔다. 진짜 이름값 하는 인생을 살았다. 허나 본인은 생물학에 완전 문외한인 관계로, 이분 소개는 예전에 이 광근 교수 같은 분을 소개할 때만치 자세하고 정확하게는 못 한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

본인의 지인 중엔 대학원에 진학하여 생물학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는 친구가 있다.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먼저 김 빛내리 교수 얘기를 꺼내자 걔도 “어, 너도 그분이 누군지 아는구나.” 하고 반가워했다. ^^

비슷한 예로, 본인의 동창 중에는 정말 학창 시절 내내 수학과 물리만 파면서 살던 덕후로, 과학고와 카이스트의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하며 사는 놈이 하나 있었다. 걔에게는 “잘은 모르겠지만 네 연구 분야가 그럼 이 휘소 박사가 파던 분야하고 비슷한 거냐?”라고 거들먹거려 주니까 걔 역시 반가워하더라.

2.

난 강 용석 씨가 한창 안 철수 씨를 때리는 글을 블로그에다 올릴 때 그의 글을 통해서 김 교수에 대해서 처음으로 듣게 됐다. 세상에 그런 엄청난 연구 업적을 남긴 사람도 그 긴 시간 강사 생활을 거쳐서 힘겹게 교수에 임용되고 그 짬밥에 아직도 조교수· 부교수 급인데, 안 철수 부부에게 주어진 서울대 정교수 특혜는 해도 해도 너무한 사기 수준이라고 말이다.

본인 역시 안 철수 씨가 머리와 노력을 겸비한 의학도 출신의 엄친아 수재이고 왕년의 컴덕후 겸 훌륭한 기업인· 경영자인 것은 응당 인정한다. 하지만 교수 세계에서 그 정도로 급격한 진급이 합당할 정도로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안 씨가 허접해서가 아니라 학계에는 유명세만 안 탔을 뿐이지 안 씨보다 더한 우주괴수들도 많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석학’은 아니잖아?

뭐, 강 용석 씨 자신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스펙과 프로필을 자랑하는 똘똘이 수재이며 한때는 시사와 관련하여 굉장히 통렬하고 날카롭고 속 시원한 글을 많이 올리긴 했다. 하지만 좀 싸가지 없는 말투와 교만과 오만방자함 때문에 지금은 다시 버로우 탄 듯하다. 조금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안목이 아쉬웠다. 지금까지 실패를 모르고 빳빳하게만 살아 와서인 걸까.

3.

김 빛내리 교수 말고 본인이나 평범한 한국인들이 아는 유명한 여성 과학기술인으로는 역시 윤 송이 씨가 있다. 학력은 잘 알다시피 서울 과학고에 카이스트를 거쳐 MIT 박사이다. 모교로 돌아와 교수의 길을 갈 법도 한 진정한 엄친딸이지만, 이분은 그냥 곧바로 기업체로 간 경우이다. 사실 윤 씨는 일단 진로 자체가 과학자보다는 공학자에 훨씬 더 가깝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억만장자가 됐을 터이니 굳이 교수 자리가 아쉬울 필요도 없다.

윤 송이 씨의 여동생인 윤 하얀 씨는 언니의 명성에 너무 가려져서 조명을 못 받았을 뿐이지 역시 만만찮은 천재로,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여 과학자의 길을 갔다고 알려져 있다. 분야는 생물학. 뭐, 본인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선배나 동기 중에 남매가 나란히 동일한 과학고에 입학하는 흠좀무스러운 형제· 남매가 있긴 했다.

윤 씨와 달리 김 교수가 과학고 출신이 아닌 이유는, 그 시절에 아직 주변에 과학고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김 교수는 1969년생. 서울 과학고가 1989년 개교이니, 그 시절엔 한국의 과학고 1호인 경기 과학고밖에 없었다. 윤 송이 박사가 1975년생이고 아마 서울 과학고의 초창기 졸업생이지 싶다.

4.

김 빛내리 교수와 상당히 비슷한 이름이 옛날에는 범죄의 안타까운 희생자의 이름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바로 1997년의 ‘박 초롱초롱빛나리 양 유괴· 살해 사건’인데 기억하는 분 있는가? (자동사와 타동사의 차이밖에 없다.) 언론에서는 편의상 줄여서 ‘박 나리’ 양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특이하게 긴 이름을 갖고 있고, 또 가해자는 겨우 20대 후반의 면식범 임산부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끼친 충격이 굉장히 컸다. 가해자의 남편은 경찰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아내에게 거의 멘탈 붕괴 상태로 “○○야, 설마 네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지? 제발 아니라고 얘기해 줘!”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못 말리는 된장녀 기질과 과시욕, 외국 유학을 갔지만 적응 못 하고 다시 돌아온 것, 입만 열면 횡설수설 거짓말, 자기 잘못은 인정 안 하고 끊임없는 변명 등을 보아하니, 본인은 가해자인 전 현주 씨의 모습이 21세기를 풍미한 희대의 또라이 사기꾼인 신 정아 씨하고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 내역은 성격이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비슷한 종류의 정신병 기질이 아닌가 싶다.

법조인들이 보기에도 전 씨는 죄질이 매우 나빠 보였고, 그래서 엄벌이랍시고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8살짜리 딸을 잃은 유가족들은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분노했다. 그래도 가석방이나 사면 따위 없이 전 씨는 지금까지도 40이 넘은 나이로 교도소 복역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당연히 이혼을 했으며, 그때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진작에 외국으로 입양되었다. 쩝~
(애초에 저 여자,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하다. 온갖 감언이설로 자기 처지를 속이고 남자를 속였지 싶다.)


김 빛내리 교수로 얘기를 시작했는데 정작 이분 자체에 대한 얘기는 별로 못 하고 같이 덩달아 떠오르는 주변 지식 얘기만 잔뜩 늘어놓게 됐다. ^^
참고로 한글 학회 직원 중에도 ‘김 한빛나리’ 선생님이 계신데, 이분은 남성임.

Posted by 사무엘

2012/05/29 08:40 2012/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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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에 폰 노이만(폰 노이만 구조라는 컴퓨터 근간을 닦은 사람)이라는 사람은 기계어로 직접 컴퓨터에다 코딩을 하는 기계어 매니아였다. 기계어가 너무 불편하다고 어느 제자가 어셈블리 비슷한 상위 계층 언어를 만들려 하자 “귀한 컴퓨터 자원으로 쓸데없는 짓이나 한다”고 그를 나무랐다.;;
이거 마치 희대의 저격수인 시모 하이하가 조준경 그딴 걸 왜 쓰냐고 나무란 것과 비슷한 맥락 같다.;;
 
그 반면, 데이크스트라(다익스트라. 그래프 탐색 알고리즘을 고안한 그 사람)는 어셈블리/기계어 같은 언어를 비생산적이고 삽질스럽다고 아주 강하게 디스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주장하면서 GOTO문을 배격한 사람이 기계스러운 BRANCH 따위가 난무하는 저급 언어를 좋아할 리가 없겠다.
 
둘 다 우주괴수급의 천재 수학자 및 전산학자이다만, 이런 식의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보다. 재미있는 일이다.
 
2.

밸브 코퍼레이션의 창립자 게이브 뉴웰 (카운터 스트라이크, 하프 라이프, 포탈 등의 게임 개발사)
페이스북의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 (나보다 더 어림..)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인 빌 게이츠 (설명 불필요)
 
억만장자 IT 기업인인 이들은 모두 하버드 대학 중퇴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 미국인이기도 하고.

3.

개발자가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먹고 살려면

(1) 관공서나 기업에서 구입하지 않을 수 없는 핵심적인 프로그램을 개발 (교육이나 업무 분야)
(2) 하드웨어에 같이 들어가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하드웨어와 함께 판매
(3) 온라인 게임 개발 (늘 서버 접속을 하기 때문에 이용료 징수 가능)
(4) 아니면 개인을 대상으로도 유료 판매가 가능한 유통 경로(앱스토어, 스마트폰 등)를 거치는 프로그램 개발

중 하나로는 가야 할 것 같다. 저 네 가지 말고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까?

4.

내가 맥 OS에 매력을 느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폰트 래스터라이저가 정말 짱이라는 점.
똑같은 글꼴을 화면에 찍어 내는 퀄리티가 서로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이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는 Windows, 아래는 맥이다.
Windows는 ClearType을 시키면 맑은 고딕처럼 전용 힌팅이 들어간 글꼴이 아니면 그냥 안티알리어싱이 없는 것보다 약간 나은 정도로만 찍히는 반면.
Mac은 힌팅이 없다시피한 글꼴도 Adobe Reader 이상의 퀄리티로 찍어 준다!

5.

그나저나 맥 OS는 Finder (윈도우로 치면 탐색기)에서 파일이나 디렉터리의 이름을 바꾸는 게 엔터이고, 실행하거나 여는 게 Cmd+아래라니 참 희한하다. 윈도우라면 이름 바꾸는 건 F2이고, 여는 게 응당 엔터인데 말이다.

6.

과거에 MS 오피스가 2003에서 2007로 버전업되었을 때 비주얼이 화려해지고 좋아진 기능이 분명 적지 않았지만, 내게는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변화도 있었다. 그것 중 하나는 파워포인트에서 '컬러 타자기' 애니메이션 효과가 굉장히 느려져서 랙이 심해지고 프레임 수가 감소한 것이었다. 글자가 말 그대로 타자기로 찍듯이 한 글자씩 천천히 나타나는 것 말이다. 그렇게 현란하거나 CPU의 부하가 심한 효과도 아니다.

그랬는데 2010을 나중에 써 보니, 마치 2003처럼 애니메이션이 다시 매끄러워져 있었다.
혹시 컴퓨터가 빨라지고 화면 해상도가 낮아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 컴퓨터를 바꿔서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같은 1280*1024 화면이라도 역시 2010에서는 Core2 duo급 컴에서도 매끄럽게 나오는 반면, 2007에서는 쿼드코어 i5급 컴에서도 버벅거렸다.

그래서 이것은 소프트웨어적인 알고리즘 개선 덕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2007과 2010 사이엔 이런 차이도 존재하는가 보다.

7.

근래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구성 파일들에 대해서 바이러스 및 악성 코드 진단 문의가 부쩍 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개발자의 공식 입장을 내 홈페이지에다가도 게시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바이러스 아님”이다. 모든 프로그램들은 바이러스도, 안티바이러스(일명 백신)도 알지 못하는 100% 청정 컴퓨터에서 개발되며, 개발 환경에서 갓 빌드된 직후의 실행 파일들이 곧바로 설치 패키지로 포장된다. 바이러스 같은 게 들어갈 일이란 없다. 이 일 때문에 본인에게 문의하면 언제나 동일한 대답밖에 돌아올 게 없으며, 그 외에 더 할 말이 없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실행 파일과 MSI 패키지가 디지털 서명을 받지 못한 관계로, 웹브라우저부터가 빨간 경고와 함께 <날개셋> 프로그램의 다운로드를 저지(discourage)하는 것도 좀 아쉬운 점이다. 이건 훗날 프로그램이 더 나은 수익원과 배포 통로를 확보했을 때에나 해결 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참에 아예 프로그램 다운로드 페이지에다가 설명을 써 놨다. “10년이 넘게 인생을 걸며 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개선해 온 저를 믿으신다면, 그런 보안 경고들은 모두 무시하고 안심하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문득 생각해 볼 문제: 비주얼 C++이나 그에 상응하는 개발툴이 설치된 컴퓨터를 자동으로 감지하여 프로그램이 링크될 때 쓰이는 C 라이브러리 같은 lib, obj 파일을 감염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존재할까? 처음부터 바이러스에 감염된 프로그램이 생성되도록? -_-;;

Posted by 사무엘

2012/05/19 08:22 2012/05/1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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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함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회로부터 온 옛날 메일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발견했고, 거기에 역대 동문들의 근황 목록이 있는 걸 열어 봤다.
내가 다닌 학교의 특성상, 역시 선후배나 동기들이 다들 프로필이 너무 쟁쟁하고 너무 잘 돼 있고 대단했다.

  • 삼성맨이 된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생산직이든 영업부 사무직이든, 박사급 정예 연구원이든 분야 한번 참 많았다. 인터넷 신문 기사 댓글이나 SNS, 파워 블로그만 보면 삼성 욕하는 글로 넘쳐나지만, 역시 넷심은 민심과 일치하지 않는 법. 현실을 지배하는 건 돈의 힘이며, 삼성 전자는 지금도 여전히 공돌이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직장 1위이다.
  • 좀 덜 유명하고 입결이 낮다 싶은 학교에 갔다 싶은 친구들은 그 대신 과가 전부 의대였다. 예외가 없었다. ㅋㅋ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이공계의 희망이다 싶던 친구들이 공무원, 금융권, 의전으로 U턴을 생각보다 많이 해 있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전교 최고의 수학 영재로 이름을 날리던 어느 후배가 서울대 치의전에 가 있었고, 나와 대학을 같이 가고 나중에 서울대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까지 했던 1기 아래 후배도 다시 의전으로 진로 변경한 듯.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니 어딜 가도 다 제 갈 길을 잘 찾아가 있다. 그래서 이런 와중에 나는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면서 각오를 새로 하게 되었다.

어차피 저것들은 다 내 길이 아니다. 난 어차피 그런 학교도 공부 성적이 아닌 오덕질로 간 것이고, 내 진로에는 선례가 없다. 빨랑 석사 졸업하고 나서 박사 가서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다음 아이템에 목숨 거는 수밖에.
이거 덕질에 비하면, 철도 덕질은 덕질도 아니고 오히려 진짜 덕질을 은폐하기 위한 떡밥일 뿐이었음이 밝혀질 것이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다. 오늘은 본인의 고등학교 동문 중에, 매스컴에 아마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인물을 소개하겠다. 바로 금 나나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2년 5월, 얘가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혔다. 나나는 본인의 바로 한 기수 아래인 후배이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본인은 얘를 학교 기숙사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원래 미스코리아 대회는 1988년부터 2001년까지는 전국구 공중파 방송인 MBC가 생중계를 해 줬다. 하지만 선정성과 성 상품화 논란 때문에 미스코리아 안티까지 생긴 마당에 하필 딱 2002년부터 그 관행이 폐지되고, 미스코리아 중계는 케이블 TV로 관할이 넘어갔다.

대회는 세종 문화 회관에서 열렸다. 카이스트에서도 고등학교 선배와 동기들은 TV를 주시하였고, 몇몇 동기들은 아예 현장에서 나나를 보러 서울로 갔다. 그 시절 물가로 5만원짜리 좌석이 3층에 있고 무대에서 완전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더 가깝고 좋은 자리는 당연히 돈이 훨씬 더 많이 든다.

구체적인 디테일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건, 나나는 그때 인터뷰의 질문에 말을 너무 조리 있게 지적으로 잘 했었다는 점이다. 관중석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 이미지에다가 특목고+의대 출신이라는 점이 더해진 덕분에, 나나는 쟁쟁한 서울 출신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치고 결국 진을 차지했다.

TV를 보던 고등학교 동문들은 그때 동기나 선후배 가리지 않고 서로 얼싸안고 난리가 났었다고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더니 끝에 “경북 과학고 파이팅!”이라고 외쳐서 감동이 더욱 고조되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 진출했을 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간 직후이니까 모교에 대한 애교심(?)도 팔팔하던 시절이다.

이 일은 당연히 고등학교의 인지도의 변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교내 1층 복도에는 재학 시절에 전국 규모 이상의 경시대회에서 입상한 학생들의 사진이 걸린 명예의 전당이라는 게 있었는데, 금 나나는 재학 시절에 다른 입상 경력이 없고 미스코리아 입상은 졸업 이후의 행적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추후에 추가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인터넷에 얘 팬카페도 생겼다. 그 후 그녀는 언론에도 잘 알려졌듯이 책도 여러 권 쓰고 나중엔 하버드 대학에 편입해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미스코리아 경력 버프도 많이 받아서 들어갔겠지만, 결국 졸업할 때도 역시나 성적 우수자로 졸업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미국의 다른 대학에서 생물, 영양, 보건 쪽으로 박사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듯. 뭐 이미 너무 유명인사가 돼 버렸고 앞날이 창창하니 굳이 더 근황을 궁금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학고 동문 중에 이런 이력의 소유자가 나오는 건 분명 특이한 경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은 괴팍한 분야에서 특이한 연구로 가까운 미래에 이름을 남기련다.

재작년인 2010년엔 뜻하지 않은 경로로 고등학교 후배를 만난 적이 두 번 있었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갔던 예비군 동미참 훈련 때, 예비군 아저씨들 중에 정말 우연히도 2기수 후배와 마주쳤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인데.. 정 동수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사랑 침례 교회에서 그 해 8월에 개최했던 청년부 교제 모임 때는 무려 10기수 후배를 만나기도 했다. 나는 6기이고 그 친구는 2008년에 입학한 무려 16기! 세상에, 킹 제임스 진영에서 까마득한 고등학교 후배를 만나다니!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모르겠다. 세상이 좁다는 걸 느꼈다.

Posted by 사무엘

2012/05/13 19:34 2012/05/1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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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교나 관공서의 전산망에서는 인터넷 접속을 위해서 특정 보안 솔루션 ActiveX들과 그것도 모자라서 바이러스 백신까지 무조건 설치하라고 강요하는 걸 볼 수 있다. 그걸 안 하면 사이트 접속이 되질 않게 해 놓았다.  허나 본인은 그런 보안 솔루션들에 대해 정서적으로 굉장한 반감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을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여러 보안 솔루션 중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이 하는 역할은 아마도 사용자의 키 입력(비밀번호 같은)을 메시지 훅킹으로 가로챌 수 없게 하고, 반대로 없는 키 입력을 소프트웨어적으로 생성할 수 없게 하는 일일 것이다(온라인 게임에서 오토의 실행 차단). 또한, 은행 돈거래 관련 정보가 담긴 패킷은 정보가 유출되더라도 의미 파악이나 변조가 거의 불가능하게 아주 복잡한 계산을 동원한 암호화/해독이 클라이언트에서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기술적인 필요를 본인은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웹 표준만으로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운영체제 커널 기술 수준의 보안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면, 차라리 무리해서 웹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걸 포기하고 깨끗하게 로컬 환경에서 돌아가는 exe 형태의 프로그램과 배포 패키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nProtect 부류의 이상한 프로그램들은 웹브라우저를 끈 뒤에도 계속 메모리 차지하면서 남아 있는 것 정도나 보기 싫은 수준이고 그나마 ‘낫다’. 하지만 이놈의 빌어먹을 백신은 답이 없다. 바이러스나 악성 코드에 걸리지 말라고 설치하는 솔루션들이, 깔고 나면 악성 코드나 그 이상 수준으로 민폐 끼치면서 컴퓨터 성능을 쪽쪽 갉아먹기 때문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컴을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어 놓는다.

마치 치안과 국방을 담당해야 할 자국의 정규군이나 경찰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자기네들부터 민폐 끼치고 민간인들을 등쳐 먹는다거나, 반공을 빌미로 공권력이 심심하면 멀쩡한 생사람을 빨갱이로 몰아서 잡아 죽인다거나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되겠다.

맥북 이전 4대 노트북을 쓰던 시절의 일이다. 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내부에서 와이파이로 인터넷에 접속할 때 NetCare인지 뭔지 하는 보안 ActiveX와 바이로봇 백신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강요를 하고 있다. 둘 중 하나라도 설치를 안 하면, 몇몇 사이트는 아예 접속이 되지 않거나 쿠키가 저장되지 않아서 로그인을 할 수가 없으며, 되는 사이트도 보안 솔루션들을 설치하라고 협박하는 문구가 든 프레임이 웹사이트에 제멋대로 추가되어 나오곤 했다.

그래서 본인은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 깔라는 것들을 다 설치해 줬다. 그러자 저런 성가신 현상이 모두 없어지고 인터넷은 잘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뒤부터 내 컴에서는 끔찍한 헬게이트가 시작되었다.

부팅 직후에 시스템이 시작 메뉴 구동 같은 각종 조작에 응답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웹브라우저가 페이지를 여는 속도, 전반적인 파일 액세스 속도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수준이 되었다. 최대 절전 모드에서 복귀하는 시간까지 예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멀쩡하던 컴퓨터가 진짜 만신창이 장애인이 된 느낌이었다. 평상시에 운영체제의 메모리 사용량도 예전보다 수십 MB가량 늘었다.

나는 운영체제의 업데이트들은 목록만 자동으로 받게 한 뒤, 다운로드와 설치는 내가 지정한 것만 수동으로 하게 해 놓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 보안 솔루션은 나의 설정을 씹고, 인터넷만 됐다 하면 마구잡이로 온갖 업데이트들을 제멋대로 받아서 설치했다.

언제부턴가 MS 오피스가 SP2이던 게 느닷없이 SP3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로그램이 버전업되어서 좋은 게 아니라 도리어 부아가 치밀었다. “이 자식, 지금까지 왜 이리 느리고 쓸데없이 디스크 액세스를 하는가 했더니, 그 수백 MB짜리 업데이트를 내 동의도 없이 제멋대로 설치하느라 그랬군.” 하는 생각에 말이다.

참다못해 하루는 넷케어고 백신이고 전부 다 모조리 지워 버렸다. 요즘은 백신도 용량이 몇백 MB 수준으로 뭘 하느라 그리도 커졌는지 모르겠다. 이것들을 다 지우고 나자 내 컴퓨터는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모든 성능이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 보안 솔루션들이 그들의 퇴치 대상인 악성 코드가 하는 짓을 동일하게 하고 있음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이제 맥북을 사용하면서 뜻하지 않게 얻은 큰 수확이 있다. 보안 솔루션 제약은 Windows 운영체제에만 적용되며, 맥에서는 그런 게 전혀 없이도 인터넷을 곧바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야호! 빌어먹을 넷케어니 바이로봇 따위를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맥OS가 날 구했다. 스잡빠니 애플빠니 난 그딴 건 모르지만, 어쨌든 이거 덕분에 맥OS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한편, 고향에서도 비슷한 일을 최근에 겪었다. 고향집 컴퓨터가 언제부턴가 병신 중의 상병신이 돼 있었다. 부팅 후에 시작 메뉴를 눌러도 한참 동안 반응이 없고, 웹브라우저를 띄운 뒤에 창이 나타나기까지 몇 분이 족히 걸리고 있었다. 레지스트리나 파일 디렉터리를 살펴봐도 딱히 악성 코드에 걸린 것 같지는 않은데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이 현상의 주범은 바로 V3 Lite였다. 이놈을 당장 지우자 컴퓨터는 운영체제를 갓 설치한 직후처럼 아주 쌩쌩해졌다! 그러니 난 도대체 진짜 악성 코드란 어떤 놈인지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바이러스가 묻은 메일 첨부 파일을 클릭한 것도 아니고, 이상한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ActiveX 설치에 ‘예’를 누른 것도 아니었다. 이 V3은 어머니께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업무를 보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한 것이었다. 이거랑 무슨 희한한 듣보잡 ActiveX들을 설치하지 않으면 직장의 업무 자동화 시스템에 접속이 되질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나는 더욱 더 백신 따위는 죽어도 절대로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게 되었다. 옛날처럼 백신이 그냥 사용자가 요청할 때만 파일이나 메모리를 스캔하면서 바이러스 검사를 해 주던 시절이 그립다. 저런 거지 같은 잉여 쓰레기 프로그램을 얹고도 작업을 원활하게 하려면, 가히 정말 최신식 최고급 컴퓨터를 써야겠다. 아니, 내 컴퓨터가 아무리 빠르고 메모리가 썩어 넘친다 해도 저런 프로그램에게 컴퓨터 자원을 내어 주기는 싫다.

보안을 빌미로 원치 않는 프로그램의 설치를 강요하는 이런 못돼먹은 풍조가 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런 일이 계속될수록 이에 대한 반발 심리로 나의 컴퓨터 보안 위협 불감증은 더욱 커질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04/02 19:23 2012/04/0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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