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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Windows용 응용 프로그램들의 현대화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유니코드: 완전 기본 필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시스템 로케일(로캘?)이 한국어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운영체제에서 한글 UI가 ?로 죄다 깨진다거나 한글로 된 파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프로그램은 처지가 참으로 안습하다. 한글 로케일에서도 상용 한자 4888자 이외의 한자를 인식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면 역시 무효임.

2. 64비트: 프로그램이 혼자서만 동작하는 EXE라면 32비트만 있어도 큰 상관이 없겠지만, 여타 프로세스 내부에서 동작하는 DLL(셸 확장, 훅, IME, 드라이버 등등)이라면 64비트 바이너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3. 멀티코어: 빡세게 많은 작업을 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요즈음의 컴퓨터에서 CPU를 최대 겨우 10~20%대밖에 안 쓰는 비효율적인 형태로 동작해서는 안 된다. 여러 코어가 작업을 어떻게 분담할지를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4. 사용자 계정 컨트롤: Program Files 디렉터리 밑에다 개념 없이 사용자 데이터를 써 넣지 말며, XP 이하 OS에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던 권한 부족 에러가 제대로 처리되어야 한다. 레지스트리나 디렉터리가 redirection되는 일 없이 동작해야 한다.

5. 고해상도: 이제는 고해상도 모니터가 많이 보급되면서 종래의 100dpi가 아닌 120dpi 정도를 쓰는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UI 화면은 적당하게 확대되어 나오거나 차라리 시종일관 동일한 픽셀 크기로 나오지, 글자가 깨지거나 GUI 요소가 들쭉날쭉 뒤죽박죽으로 배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이슈들 중, 본인은 현재 5번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화면의 논리적 해상도를 바꾸는 건 엄청 옛날에 Windows 9x 시절부터도 있었던 기능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화면 해상도가 겨우 800*600이나 1024*768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화면이 작아 죽겠는데 배율을 더 키우는 기능은 사실상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정말 누가 쓰나 싶은 잉여로 전락했고,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운영체제에 그냥 표준 해상도인 96dpi밖에 존재하지 않는 걸로 가정한 채 각종 좌표들을 하드코딩한 채로 개발되었다.

그랬는데 요즘 컴퓨터의 모니터들은 가로 해상도가 1500을 넘어가고 세로 해상도가 1000을 넘어가니, 이제는 화면을 좀 더 큼직하게 써도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컴퓨터의 성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메모리와 CPU뿐만 아니라, 이런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도 컴퓨터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아이패드 같은 모바일 태블릿 기기조차 화면 해상도가 2000*1500을 넘어서 있다. 그러나 기술 발전을 아주 점진적으로 경험하여 legacy의 역사가 긴 PC 환경에서는, 고해상도를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프로그램들에게 재앙이 시작되었다. 논리 해상도에 따라 자동으로 크기가 조절되는 요소(시스템 글꼴 크기, 그리고 대화상자 크기)와 그렇지 않은 요소가 뒤섞이면 GUI 외형이 개판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화면의 논리적 해상도는 데스크톱 화면의 DC를 얻어 온 뒤 GetDeviceCaps(hDC, LOGPIXELSX)를 하면 구할 수 있다. X뿐만 아니라 Y도 존재하는데, X축 값과 Y축 값이 서로 달라지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반 배율인 100%일 때의 리턴값은 96이고, 125%일 때는 120이 돌아온다..

Windows에서 화면 DPI의 변경은 완전히 on-the-fly로 자유롭게 되는 작업은 아닌지라, 운영체제 재시작이나 최소한 로그오프가 필요한 이벤트이다. 그래서 그런지 Windows Vista는 전무후무하게 화면 DPI 변경을 '관리자 권한이 필요한 작업'으로 규정했었으나, 그 규제가 7 이후부터는 풀렸다. 또한, XP 이하의 버전은 100% (96dpi)보다 작은 값으로 변경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Vista 이래로 더 작은 값으로는 지정 가능하지 않게 바뀌었다.

본인이 개발하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경우, 보조 입력 도구들은 옛날에 급조하느라 각종 버튼들의 좌표가 하드코딩되어 있었다. 다음 7.0 버전부터는 고해상도일 때는 전반적인 외형도 그에 비례해서 더 큼직하게 나오게 바뀔 예정이다.

하지만 편집기는 논리적 해상도에 관계없이 글자가 언제나 무조건 16*16 고정된 픽셀 크기로만 출력되며, 이것은 쉽게 개선되기 어려운 약점이다. 글꼴 자체는 16*16 비트맵만 쓰는 게 불가피하더라도, 고해상도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글자를 살짝 확대해서 찍어 주는 기능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anti-aliasing을 적용해서 부드럽게 확대해서 말이다.

고해상도 환경은 아이콘을 관리하는 것도 무척 까다롭게 만들었다. Windows 95/NT4 이전에는 아이콘은 오로지 32*32 크기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16*16 작은 크기가 추가되었다. 요즘은 그것도 모자라서 20*20이나 24*24 크기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한 아이콘은 여러 크기의 아이콘 이미지들의 family 내지 컬렉션처럼 되었다고 본인이 예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예전엔 고해상도 모드에서 그냥 화면 왜곡을 감수하고라도 16*16 아이콘을 살짝 확대해서 보여주는 걸로 때웠지만, 이젠 안 그러고 20*20 크기용 아이콘도 직접 만들어 넣어 주는 셈이다.

사실 FM대로라면 운영체제가 사용하는 표준 아이콘 크기도 매번 GetSystemMetrics(SM_CXICON) 같은 식으로 쿼리를 해서 써야 고해상도 환경에서도 유연하게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맨날 봐 온 게 32나 16 같은 고정된 크기여서 하드코딩된 값을 쓰다가 나중에 그 코드를 고쳐야 하게 되면 대략 정신이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도 X값과 Y값이 서로 달라지는 일이 과연 존재할지 궁금하다.

그런데 문제는 Windows API는 아이콘이 여전히 단일 불변 크기만 있을 거라는 사상을 전제로 하고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HICON 은 여전히 그냥 단일 크기에 해당하는 아이콘 하나만을 나타내는 핸들이다. 즉, 한 아이콘 컬렉션 전체를 나타내는 자료형이 아니다. 그래서 LoadIcon이나 DrawIcon 같은 함수를 보면 아이콘의 크기를 받는 인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이 한계를 보완하는 LoadImage와 DrawIconEx 함수가 나중에 뒤늦게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draw 기능은 몰라도 load 기능은 리소스 ID를 지정해 주면 그 ID가 가리키는 모든 크기의 아이콘을 다 로딩하게 하는 게 간편하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draw 명령을 내리면, 원하는 크기와 가장 가까운 크기를 운영체제가 알아서 골라서 출력해 주는 것이다.

API의 기능이 그렇게 설계되었다면 윈도우 클래스를 등록할 때도 WNDCLASS에 이어서 굳이 작은 아이콘 핸들 hIconSm이 추가된 WNDCLASSEX 구조체가 번거롭게 또 만들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응용 프로그램들이 고해상도용 아이콘을 지원하기도 훨씬 더 쉬워졌을 것이다. LoadIcon은 그냥 표준 크기 아이콘을 로딩하는 것만 지원하고, LoadImage는 아이콘을 로딩할 때 크기를 사용자가 일일이 지정해 줘야 하니 둘 다 불편한 구석이 좀 있다.

여담이지만, 응용 프로그램이나 운영체제별로 자신들이 설정하는 논리적 해상도는 제각기 좀 차이가 있다.
과거 도스용 아래아한글은 16*16 픽셀에 대응하는 글자가 10포인트였다. 그러나 Windows는 96dpi가 표준 해상도이며, 여기서는 12포인트가 16*16 크기이다.
한편, 맥 OS는 12포인트의 픽셀수가 Windows나 아래아한글보다 더 작다. 다시 맥 OS로 부팅해서 살펴보면 구체적인 비율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귀찮아서 생략.

이런 미묘한 문화 차이를 보면, FreeType API에서 FT_Set_Char_Size 함수에 굳이 상대 해상도 dpi값까지 인자로 받는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번거롭지만 그런 것까지 다 수용할 수 있는 계층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20 19:19 2013/06/2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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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바보 3유형

내가 생각하는 3대 크리스천 바보

1. 유대인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
2. 예수님은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사람
3. 성경 맹신주의, 성경의 우상화.. 이런 말을 쓰는 사람

애초에 불신자야 저런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 없지만, 예수 믿는다고 하고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종교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이 저렇게 생각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은 아이템별 간단한 해설이다. 내가 괜히 ‘바보’라는 말까지 쓰는 게 아니다.

1. 반유대주의

우리도 그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죄인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아니 그럼 예수님이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안 죽으셨으면, 우리가 대신 죄 가운데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됐을 것이다. 도대체 유대인을 특별히 미워해야 할 명분이 어디 있는가?

성경의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로 반유대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기독교를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문자적인 회복을 예언하며, 이 교리가 사실 화체설, 마리아, 연옥 만만찮게 천주교와 기독교 사이의 매우 큰 교리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유대인들도 죄악에 빠졌을 때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여타 민족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벌하고 심판하셨다. 많은 불신자들이 간과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많은 만큼, 계약 위반시 뱉어야 할 것도 많았다. 역사적으로 쟤들이 뭔가 죽이고 학살한 게 더 많았나, 아니면 반대로 자기들이 당한 게 더 많았던가?

그 ‘여타 민족’에 크리스천이 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였던 사람들이 최후가 좋았던 적은 없다.

2. 교회 무용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머리이기까지 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크리스천들을 위해 기독교 국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 교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창립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떳떳하게 회계 보고를 하고 싶다면, 당신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주변에 도저히 마땅한 교회가 없다거나),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 어차피 완벽한 교회란 없고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만 이뤄진 교회도 없다. 한 치의 허물도 없는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당신이 거기에 가입하는 순간 그 무결성은 깨진다.
대형 교회는 부패하고 돈만 밝힌다고 싫고, 작은 근본주의 교회는 교조주의적이고 ‘가오’가 안 난다고 싫다면 그건 뭐 무슨 상황이든 싫다는 변명일 뿐이다(마 11:18-19).

3. 성경(말씀) 무용론

이건 도대체 기독교의 믿음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극심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지위를 부여하시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이 들어가야 할 곳에 성경이 들어가는가 하면(요 7:38,42; 롬 9:17, 11:2; 갈 3:8,22 등) 시 138:2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모든 이름보다 크게 높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도 이미 얼마나 높은 존재인지는 빌 2:9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 높은 성경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아무리 굳건히 믿어도 시원찮을 성경이 어찌하여 ‘맹신과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난 비슷한 맥락에서, 일부 행실이 바르지 못한 크리스천, 육신적인 신자를 빌미로 성경을 폄하하고 특히 킹 제임스 성경 탓을 하는 주장을 매우 싫어하고 경계한다.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은 발상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증은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바보 크리스천 말고, 바보 불신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성경에서 시 14:1이나 눅 12:20에서 다루고 있다. 이 역시 누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18 08:31 2013/06/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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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한글 맞춤법이 바뀌면서(본격적으로 시행된 건 1989년 3월 1일부터) 생긴 대표적인 변화 중 하나는 종결 어미 '-읍니다'가 '-습니다'로 바뀐 것이다.
이 변화 때문에 사람들이 '-음'까지 '-슴'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8시에 갔슴). 그리고 재야에서 현행 한글 맞춤법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것이 형태주의에서 표음주의로 후퇴한 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습니다'는 한국어의 형태소를 더 잘 반영한 바람직한 변화이다.
이때의 '-습-'은 상대 높임을 나타내는 교착 선어말 어미로, '용언의 어간+시제 선어말 어미'까지 나왔고 앞 글자에 받침이 있을 때 등장하는 선어말 어미이다.
시제 선어말 어미가 마침 -ㅆ이기 때문에 '습'과 음운이 겹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원래 서로 다른 형태소이다.

ㅆ이 아닌 다른 받침을 생각해 보면 명확해진다.
가령, '괜찮습니다'는 맞지만 '괜찮슴'이라고는 안 하고 '괜찮음'이 맞다.
그리고 '괜찮사옵니다'/'괜찮소'라고 하지, '괜찮아옵니다'/'괜찮오'라고는 안 한다.

앞 글자에 받침이 없으면 이 선어말 어미는 '습' 대신 그냥 '-ㅂ'으로만 훨씬 더 단순하게 실현된다. 갑니다, 감, 가옵니다, 가오 등.
이 정도면 '습' 또는 'ㅅ'의 존재감에 대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맞춤법 개정 전에는 ㅆ 다음에만 '읍니다'이고, '괜찮습니다' 같은 다른 자음 받침 다음에는 '습니다'를 썼었다. 어차피 둘은 동일한 형태소이니, 괜히 그럴 필요가 없이 ㅆ 다음에도 똑같이 '습니다'로 적어 주는 게 더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1988년의 맞춤법 개정안에 비판적인 논조여서 내부적으로 성과 이름을 여전히 띄어 쓰고 있는 한글 학회에서도, '-습니다'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없다.

한국어의 변화무쌍함과, 그에 비례하여 한글 맞춤법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습니다'냐 '읍니다'냐를 따지는 건 국어학 내지 언어학에서 형태론이라는 분야에 속한다.
국어학 전공자 내지 국어 교사 지망생들은 용언의 어미를 공부할 때 '가/시/었/겠/습/니다'라는 단어를 일일이 떼어내서 각 형태소들의 의미를 공부한다. 어간과 어말 어미 사이에 저 화려한 선어말 어미들의 나열을 보시라.

어떤 언어를 공부할 때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으면서 익혀야 할 텐데,
복잡한 용언 활용이 일어난 한국어 문장은 단어를 떼어내서 사전에 존재하는 표제어 형태를 유추해 내는 것부터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언어 직관을 필요로 할 것 같다. 특히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공부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오랜만에 모처럼 우리말 분야에 글 하나 투척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6/16 08:32 2013/06/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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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지능 검사

다중 지능 검사 (링크 클릭).

얼마전에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서 URL이 나돌고 있더라.
누가 만든 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해 보니 재미있는 테스트 같았다.
나의 결과는 주변의 페친들의 결과와는 사뭇 달랐다...

1위 음악 지능: 음악가, 음향 기술자, 음악 평론가, 피아노 조율사, 영상 음악 작곡가 등... =_=;;;;;;;
2위 자기 성찰 지능: 심리학자, 작가, 발명가, 기업가, 신학자
3위 언어 지능: 작가, 언어학자, 연설가, 방송인, 정치가, 설교자, 번역·통역사

이고

4위가 논리· 수학 지능
꼴찌는 신체 운동 지능

...;;;
여느 공대 출신 프로그래머답지 않은 이상한 결과이다.
다른 지인들은 대체로 논리· 수학 지능이 3순위 안으로 들던데 난 그렇지 않았다.
나의 경우 1위는 아예 예체능이고 2위와 3위는 전형적인 문과 적성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게 꽤 정확한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ㅎㄷㄷㄷㄷㄷ

저 검사 결과가 정확하다면, 내가 음악 지능이 저렇게 높게 나온 이유는 빼도 박도 못하고 철도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Looking for you를 완전히 뼛속까지 분해하고 씹어 먹어서 소화했기 때문에..;;; ㅎㅎ
그렇지 않고서야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밴드 하나 한 경험이 없는 왜곬수가 어째 저런 적성이 나오겠는가? 가끔 이공계 엄친아 중에서는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음악에도 프로급의 재능을 보이는 괴물이 종종 있긴 하나(안 지홍 씨라든가..), 난 그 정도 타입까지는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확실히 융합형 적성이긴 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14 08:27 2013/06/1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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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下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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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준 선생 묘소의 비석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닳아 있었는데 이곳이 허 준의 묘지라는 것은 꽤 어려운 계기를 통해서 알려졌다고 한다.
동의보감이 출간된 게 1611년이라고 하니 KJV 신자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영국에서 흠정역 성경이 나온 동안 조선에서는 의학 서적이 만들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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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주변의 언덕은 전원적이고 경치가 좋았다. 물론 주변에는 여전히 철조망(+지뢰밭?)이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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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파주 적성면에 있는 영국군 전적비였다. 주변엔 공원도 있어서 산책하고 쉬기에 좋았다.
미국의 인지도에 밀려서 그렇지 영국은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도왔던 국가이다.

특별히 이 전적비는 1951년 4월 22~25일 동안 이 일대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하고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번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 자신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652명 가운데 겨우 67명만 살아남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제일 먼저 여기 가서 참배부터 한 뒤 다른 볼일을 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육해공 참모총장과 김 관진 국방부 장관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화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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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로를 정리하면 이렇다.
글자가 좀 작긴 하지만, 임진강 역과 일대의 임진각 관광지는 지도에서 4번이다.
그리고 도라 전망대가 3번, 제3 땅굴은 2번이다. 땅굴을 견학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지하로나마 DMZ 구간에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동그란 점선은 민통선이고, 더 이북으로 길쭉한 점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허 준 선생 묘지는 24번이요, 영국군 전적비는 22번 근처에 있다. 이 지도 자체가 영국군 전적비 입구에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초청자분께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왕 적성면까지 자차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적군 묘지도 좀 들를까 했다.
국도 37호선을 타면서 근처를 분명 지나긴 했을 터이나 발견은 못 했다.

하긴, 이건 우리나라를 파괴하려 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진짜 최소한의 예우만 해서 매장해 놓은 묘지이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묘비에 이름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결정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그 어떤 종북 간첩 불순분자 정치인도 여기 가서 참배를 했다거나, 이곳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병신짓을 한 적도 없다. (뭐, 적군 묘지를 띄워 줄 수는 없으니, 반대로 국립 현충원 참배가 부당한 강요라고 희대의 개드립을 날린 빨갱이 정치인은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게 되었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과 종북 좌빨의 spirit은 역시 절대로 상호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가 민통선 안에 들어가서 제한적으로나마 사진 찍고 실시간으로 SNS와 카톡으로 자기 근황까지 알리는 극한의 자유를 누리는 게 무엇 덕분이고 누구 덕분일까?
또한 공무원· 관료가 아니라 엔지니어· 발명가가 대접받고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사회 구조 덕분에 컴퓨터가 발명되고 인터넷이 뚫리고 페이스북, 스마트폰 같은 것들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레알 넘사벽급 선진국이 맞다.)

그에 반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전국을 드나드는 게 우리가 지금 민통선을 드나드는 것과 비슷한 절차이다. 평양 시민이 아니면 일반 평민들은 출입증 없이는 시· 도도 못 빠져나간다.

우리나라는 군대 현역 복무가 2년가량이고 예비군까지 합쳐야 10년 남짓이지만, 북한은 남자들의 현역 복무가 10년이어서 20대 중· 후반까지를 전부 군대에서 날린다. 예비군 소속은 사실상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60대) 평생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전국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군인(경찰도?)을 무진장 많이 뽑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는 생산을 하는 게 아니라 세금을 소비만 하는 집단이다. 그러니 그런 대규모 군대를 돌아가게 하려면 주민들의 노동력을 무진장 착취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근본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북한의 비효율은 단순히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서만 야기되는 게 아니다. 겨우 이념만이 문제였다면 북한도 중국이나 소련처럼 경제 시스템을 개방하고 주민들을 살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냥 무력 군사 도발에 분노하고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북한 수뇌부의 시스템과 대처 매뉴얼, 알고리즘이 본질적으로 정말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선이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는 점도 말이다. 이걸 놔 두고 무슨 미국이 경제 봉쇄를 해서 북한이 굶주리고 있다니, 개성 공단 폐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니 하는 건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악한 국가가 6·25 시절처럼 정상적인 무력 기습으로는 우리나라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으니 우리나라의 자유를 악용하여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족 자주 통일 드립을 치면서 안보관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띄울 건 없으니 반대로 남한을 비하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통선 패스를 갖고 계신 어르신은 역시 안보관과 사상에 관한 한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보다 더하시더라. 정말 울분을 터뜨리면서 지난 종북 정권이 저지른 반역 행위를 비판하셨다. 개성 공단은 10년 공들인 탑이 아니라 10년간 앓던 충치에 더 가깝다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갔다.

물론 우리나라 정부도 잘한 것만 있는 게 아니며 역사적으로 자신의 병크를 북풍으로 합리화한 것도 있다. 그러나 안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심각한 이슈로, 무슨 국내 치안처럼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처럼 신사적으로만 진행해서는 곤란한 면모도 있다. 간첩 한 명만 칼같이 가려내고 단 한 명도 억울하지 않게 공권력을 집행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전에 아라크넹 님은 “원전을 없애자고 할 게 아니라 원전에 대한 필요를 없앨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정곡을 찌른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몇 배로 오른 기름값과 전기료를 감수하면서 무턱대고 원전을 없앨 참인가? 현실적인 변수를 고려하지는 않고 무작정 원전을 없애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이다.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는 정부 수사 기관이 종북 수사를 병신같이 한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종북 자체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더 시급한 때임이 틀림없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전툴루, 전땅크 각하는 잘 알다시피 퇴임 후에도 25년이 넘게 장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강의 호강을 누리는 중이다. 돈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세금 추징금도 안 내고, 훈장도 반납 안 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는 다 받고 있다. 내가 알기로 건강도 아직 좋고 팔팔하다.

리즈 시절에 제3 땅굴을 발견한 것 좋으며,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형 집행을 시원스럽게 잘 해 준 것도 분명 잘한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의 모습은 좀 좋은 간증(?)이 못 되고 있고,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는 나쁜놈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전땅크 각하에게 공개적으로 제안 드린다.
아예 대놓고 국가를 위해 악역을 자처해 줬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지고서 이왕 구겨진 이미지를 확실히 완전히 구기란 얘기다. -_-;;
저 사람이 그 배짱으로 광주 5.18 피해자들한테 사죄(?)를 할 리는 없으니, 사죄를 안 할 거면 차라리 우익 쪽에 힘을 실어 주는 소신 발언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서”라고 말할 배짱이 있으면, 차라리 그때 명령을 따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고, 팀킬 오발 사고 때문에 몇몇 광주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희생된 건 애석한 일이라고... 심지어 5.18 때 북한 특수군이 쳐들어온 게 사실이기라도 하면 그것도 언급하라.
그게 사실이고 그 시절 자기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면 그 소신이라도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란 말이다. 지 만원 박사 같은 사람이 기를 쓰고 주장하는 내용을 당사자가 직접 입증해 보아라.

전직 대통령이니 얼마나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겠는가? 그런 말 아무리 해도 신변에 위협을 받을 일도 절대 없을 테고!
그것이 전땅크 각하가 그나마 마지막에 세금값 하는 인물로 남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난 광주 5.18 사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성향으로든 남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꿔 놓을 정도의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뭐 그건 그렇고,
언제 또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경의선 쪽을 갔으니 다음 안보 관광은 철원 경원선 라인으로 갈 예정이다. 제2 땅굴, 노동당 청사, 백마고지/월정리 역, 금강산선 옛 철교 흔적 등 말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6/11 08:39 2013/06/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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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中

다음은 임진각 전망대에서 북쪽 도라산 역 방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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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북쪽으로도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철조망 건너편은 비무장지대(DMZ)가 아니며 북한 땅은 더욱 아니다. 건너편은 그저 민통선 안쪽일 뿐이다.
과거의 경의선 철교와 지금의 경의선 철교의 위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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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에서 평화 공원으로 가는 길엔 이렇게 6·25 참전국 기념비가 있고, 아웅산 폭탄 테러 순직자의 위령비도 있다.
6·25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현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전쟁이다. 6·25만치 선악 이념이 분명했던 전쟁은 흔치 않다.

오죽했으면 UN이 창설 이래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딱 한쪽 편을 들어서--당연히 대한민국 편-- 반대편을 적극적으로 퇴치하는 군사 활동을 했으며,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국가들이 오로지 한 자그마한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불법 침략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 등을 생각해 보아라. 미군이 개입했던 전쟁 중에 6·25만치 참전 명분이 깔끔하고 정당한 전쟁이 있었는지를. 굳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제3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6·25는 여타 전쟁들과는 달리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인지도가 매우 저조하다. 아예 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 구도가 너무 명확하다 보니, 딱히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하거나 삐딱하게 풍자· 비판을 할 껀덕지가 없어서 잊혀졌다는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이라크, 베트남 등에 비해, 6·25는 전쟁을 겪은 당사자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거뜬히 이뤄 내고 G20 급의 선진국이 되어 있다는 점도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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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원래 부통령이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DR)가 급사한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한 양반이다.
그가 6·25 때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북한· 중공군을 완전히 격퇴하지 못했다”와 “한반도에서 또 핵이 떨어지고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뻔했던 상황을 예방했다”라는 두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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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평화 공원을 살펴본 뒤, 우리 일행은 다시 역으로 돌아와서 도라산 행 열차를 탔다. 문산-도라산도 아니고 임진강-도라산 겨우 한 정거장 거리만을 이용한 것이다.

개인이 도라산 역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며, 왕복 승차권 구입과 더불어 연계 안보 관광 패키지 신청도 같이 해야 한다. 예전에는 역 주변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같은데 정책이 또 바뀐 것 같다.
이 지대의 관광 상품은 도라 전망대, 제3 땅굴, 통일촌 견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은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3~4시간 정도 걸린다.

역 주변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역시 보안 시설에서 온갖 사람들을 통제하는 헌병이어서 그런지, 다들 키 크고 체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20대 초반 나이일 텐데 말이다.

도라산 역의 옛날 사진을 보니 역명판의 서체가 목판체 계열이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저건 코레일체도, HY울릉도도 아니라 윤 디자인에서 만든 월드컵체이다. 철도역에서 월드컵체를 볼 일이란 원래 전혀에 가깝게 없을 텐데 뜻밖이다.
역이 개통한 시기와 저 서체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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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역은 출· 입구 관리 사무소와 세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물론 현재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시설) 내부가 꽤 크고 넓다. 승강장 역시 KTX 한 편성 정도는 너끈히 세울 수 있어 보이는 규모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없이 한동안 설명만 좀 늘어놓겠다.
역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른 뒤, 도라 전망대로 향했다. 여기는 민간 관광객에게 개방되긴 해도 엄연히 일종의 GOP이며 군사 시설이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이 전망대로 펼쳐진 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비무장지대이고, 북한 땅이 코앞이다.
저 멀리 말로만 듣던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가 보였다. 기정동 쪽은 깃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료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펄럭이지 않을 뿐 인공기도 꽂힌 게 보였다. 게다가 북한 쪽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서 있는 북한군 병사까지 보였다! 김일성 백성들도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 달린 호모 사피엔스이긴 했다.

이게 내가 브라운관이나 LCD 같은 전자 기기가 아닌 매체로 북한 관련 시설물을 본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북한 쪽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 날은 외국인 관광객도 굉장히 많았다. 미국인이야 그렇다 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도라 전망대 다음으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제3 땅굴을 견학했다.
옛날에는 관광객들이 건물 수십 층에 달하는 높이를 걸어서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지만, 지금은 승강 열차가 생겨서 편하게 왕래를 할 수 있다.

주요 소지품들은 사물함에다 맡기고, 헬멧을 지급받은 뒤 몇백 m 정도 거리를 산보하듯 다녀 왔다. 땅굴 입구 자체가 거의 DMZ 경계선 근처에 있고, 땅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는 한계는 지상에서 군사 분계선이 200m도 채 안 남은 지점이 끝이다. 그 이상은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 굳게 잠긴 철문으로 봉인되어 있다.

땅굴은 키가 170cm가 넘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안 들키게 병력 수송을 위한 정말 최소한의 크기로만 굴착을 한 셈이다. 땅굴을 파는 게 좀 힘드나.. 지하철이라는 게 처음 등장하고 전기 철도가 도입되었을 때 제3궤조 집전식이 괜히 쓰였던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터널의 단면적이 작아도 되기 때문이다.

육로를 통한 남침 방법이 완전 원천 봉쇄되고 차단되자, 비열한 김 일성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한 땅굴을 파라는 지시를 내렸다. 악한 통치자 밑에서 영혼이 완전히 황폐화된 채 사는 북한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한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땅굴은 여러 개 팠으면서, 북한은 정작 평양 지하철을 만들던 중에는 대동강 아래를 관통하는 하저 터널 건설에 실패했다니 참 아이러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제3 땅굴은 1978년에 전땅크가 육군 제1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박 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탐사 작업을 통솔하다가 끝내 발견했다. (...) 이 양반, 그래도 리즈 시절에 나라를 구하는 과업을 한 건 이뤘다.

우리가 주로 관광한 것은 이 둘이었고, 그 뒤엔 통일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좀 놀다가 다시 도라산 역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민통선 내부는 온통 농경지나 황무지, 군부대이고, 민통선 내부이다 보니 사람이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황무지는 그냥 황무지가 아닌 게,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지뢰 매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도라산 연계 관광을 마친 뒤에는 초청자를 따라 개인 명의로 두 곳을 더 돌아다녔다. 일단, 허 준 선생 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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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에 들어와 있음을 나타내는 자동차 내비 화면 인증이다(텅 빈 지도!). 파주시는 임진강 건너편은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 준 묘지는 아무나 곧장 갈 수 없다. 도라산 안보 관광과 마찬가지로 공인된 여행사를 통한 단체 관광으로만 갈 수 있으며, 개인 자격 방문은 민통선 내부 출입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행을 얼마나 인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고 오는 차량의 대수가 늘어나면 절차가 그에 비례해서 더 까다로워진다.

민통선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조상 대대로 그 지대에 땅을 갖고 있었거나 그 지대의 땅을 산 지주는 국가로부터 출입증을 교부받는다고 한다. 물론, 출입 가능 지역이 정해져 있으니, 그 출입증만 있다고 해서 전국의 모든 민통선 지대를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민통선 출입이 일반 커피라면 대성동 출입은 가히 TOP이다. 거긴 민통선뿐만 아니라 남방 한계선까지 넘은 최고로 위험한 DMZ(비무장지대) 안이고, 레알 군사 분계선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거길 드나들려면 당일 신분증 제시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하 두 주 이상 전에 방문 신청을 해서 신원 조회를 받아야 하며, 마을에 들어간 뒤엔 신분증을 아예 맡겨야 된다. 승용차에는 하늘색 천을 달아서 펄럭이게 하고, 유엔 사령부 소속의 군인으로부터 완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이동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8 19:34 2013/06/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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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上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시는 모 자매님은 고향이 파주 적성면이다. (그런데 제주도 출신인 형제님과 결혼을 하셨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북단 거주자와 최남단 거주자가 만난 셈.)
이분은 성장 배경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파주 북부의 지리에 아주 밝고, 또 부모님이 민통선 출입증까지 갖고 계셨다.

본인은 이분과 같이 교제를 하던 중에 어째 이 주제로 얘기가 나왔고, 덕분에 하루는 이분의 가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파주 경의선 라인 쪽으로 거창한 안보 관광을 같이 가게 됐다.
작년 여름에 갔던 평택 해군 기지 이후로 바이블 빌리버와 함께 하는 안보 관광 제 2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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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승용차를 몰고 임진강 역으로 향했다.
강변북로와 서쪽에서 직결되는 자유로는 무려 10차선에 달하는 정말 넓은 도로였다.
과연 인천 공항 고속도로와 더불어 폭주족들이 스포츠카를 몰고 새벽에 난리를 부릴 만도 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딱 한 번, 지점이 아니라 구간식 속도 단속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즉, 특정 지점 한 군데에서만 제한 속도를 넘는지 단속하는 게 아니라, 시작점부터 끝점에서 차량 번호와 진입 시각을 두 번 파악하는 단속 방식 말이다. 그 구간 사이를 너무 빨리 통과해 버리면 단속에 걸리니, 차들은 강제로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도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차선 수도 덩달아 줄었다.
옆에 강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은 어느 샌가 짙은 안개로 확 뒤덮였으며, 차의 유리에도 성에가 꼈다. 좌우 주변의 경치가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뭐 날이 밝자 안개는 곧 걷히고, 다행히도 하루 종일 아주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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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은 바로 옆에 관리인이 없는 무료 주차장이 있었고 주변에도 공간도 넉넉했다. 그러나 나중에 낮이 됐을 때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세워 둔 차들로 인해 그 공간이 꽉 차고 빈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현재 경의선에는 문산 역까지 전동차가 다니고 있다. 문산은 1906년에 경의선이 처음 개통할 때부터 있었던 역이며 남북이 분단된 뒤부터는 수십 년간 경의선의 북쪽 종착역이었다. 문산 다음에는 곧바로 장단 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 대중 정권 시절에 경의선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북한과 선로가 연결까지 되면서 21세기에 문산 이북으로 3개의 역이 새로 생겼다.

2001년에 가장 먼저 임진강 역이 생겼고, 2002년에는 드디어 민통선 안에 도라산 역까지 생겼다. 운천 역은 더 나중인 2004년에 문산과 임진강 사이에 생긴 임시승강장이다. 지역 주민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만든 역이지만 어차피 전철이 문산까지밖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유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임진강 역 근처에는 임진각, 평화 공원 등 여러 볼거리가 많다.
위의 사진에서 교각만 놓인 옛 다리는 6·25 때 파괴된 원래 경의선 철교의 흔적이고, 그 옆에 놓인 새 다리가 바로 다시 놓인 경의선 선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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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 평화 공원에는 '평화 열차'라 하여, 관광용 협궤 증기 기관차가 다닌다. 물론 생김새만 증기처럼 생겼고, 실제로는 기름으로 달린다.
나의 관심사는 (1) 이 선로의 궤간은 얼마 정도 될 것이며, (2) 남이섬에 있는 '유니세프 나눔 열차'와는 동일한 규격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 평화 열차의 선로는 수인선 협궤(762)보다는 약간 더 작은 듯했고, 한 우진 님께서 남이섬 열차의 궤간도 640쯤 되는 듯하다고 추측하신 걸로 보아, 둘이 거의 동일한 규격이 아닌가 싶다.
눈짐작으로 이런 궤간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철덕에게 필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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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중단점은 경원선 신탄리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사실, 상술했듯이 경의선도 시설이나마 연결된 지는 1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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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미카' 형 여객용 증기 기관차이다. 의왕의 철도 박물관과 더불어 임진각에도 한 량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6·25 때 순직한 김 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도 이것과 같은 차종으로, 그 실물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객차까지 그대로 대전 현충원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미카'는 emperor를 뜻하는 일본어 '미카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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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증기 기관차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이분 되시겠다.
'마터' 형 화물용 증기 기관차. 이름부터가 mountain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산악+화물 컨셉으로 제작된 고출력 기관차이며, 1940년대에 일본에서 비교적 최근에 제조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생김새가 전통적인 미카, 파시 같은 열차보다 좀 이질적이다.

이 열차는 1950년 12월에 영문도 모른 채 북한 쪽으로 달리다가 경의선 장단 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열차와 수송 물자를 적군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청야 전술에 의해 아군의 사격을 받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 쇳덩어리가 수백 발의 총알을 맞아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밖에 내팽개쳐졌다.

겨우 그게 목적이라면 열차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것이다. 허나 증기 기관차는 무슨 전후대칭 전동차 같은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전차대가 없는 역에서는 진행 방향을 그렇게 전환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열차를 운행 불능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장단 역은 완전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 기관차도 핏빛에 가깝게 새빨갛게 녹이 슨 상태로 무려 수십 년 동안 수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1990년대에 분단, 안보 관련 서적에는 이 기관차의 사진이 꼭 등재되곤 했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이 기관차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남쪽으로 가져와서 녹 벗기고 광 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2009년부터 임진강 역 주변 평화 공원에 정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이제 갈색으로 바뀌었다. 단,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은색 도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이 열차를 당시에 운행했던 기관사는 한 준기(1927-2011) 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 이거 안보 관광으로 시작했는데 철도 얘기만 자꾸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 (거 봐, 철도와 안보 의식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6 08:40 2013/06/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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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철도의 집전 장치

전기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은 아니고, 훌륭한 동력 공급원이며 매력적인 에너지이다. 그러나 생산과 동시에 광속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특성상, 전기는 여느 물리적인 연료와는 달리 저장과 축적이 어렵다는 게 난감한 점이다. 획기적인 장거리 무선 송전 기술이라도 개발되지 않는 한, 전기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에다 전력을 공급하는 방식은 다음 세 시나리오 중 하나로 귀착될 것이다.

  1. 자기가 전력을 직접 생산해서 쓴다: 이건 뭐 원자력 잠수함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제낀다. 디젤 전기 기관차 같은 경우도 응당 논외로 하고.
  2. 전적으로 배터리로부터 공급받는다: 무겁고 비싼 배터리의 충전 용량과 충전 시간, 그리고 수명 같은 여러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배터리는 충· 방전을 거듭할수록 용량이 하락하기 때문에 교체가 필요한 소모품이다. 그래서 순수 배터리 기반 전기 자동차는 단거리나 소형 교통수단에 머물러 있고, 하이브리드는 반대로 무게와 가격 문제 때문에 중형급 이상의 고급차에나 적용되고 있다.
  3. 전차선으로부터 공급받는다: 철도는 그나마 이게 가능해서 다행이다. 아니면 딱 전차선이 놓인 노선만 달리는 시내버스 정도나 말이다.

그래서 3번에 속하는 전기 철도 차량의 경우, 차량의 일정 부분이 전차선과 접촉하면서 끊임없이 전기를 공급받아야 한다. 가장 무난한 방식은 전차선을 선로의 위에다 달고, 열차는 천장에 달린 팬터그래프가 그 전차선과 접촉하여 전기를 받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어떤 철도가 전철화되면 선로 주변엔 일정 간격으로 어마어마한 개수의 전봇대가 세워지고 빨랫줄마냥 전깃줄이 선로를 따라 주렁주렁 달린다. 전철화는 아무래도 주변 미관에는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없다. 무슨 지중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전철화 작업에는 초기에 굉장히 많은 시설 부설 비용이 들기 때문에, 초기 투자 비용을 능가하는 이익이 날 거라는 확신이 설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노선만을 선별하여 전철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이 최초로 쓰인 것은 아니다. 전차선을 열차의 위에다 설치하는 게 아니라 아래의 선로에다 같이 설치하는 방식이 먼저 쓰였다. 일명 제3궤조 집전식.

여기서 용어 설명을 좀 하겠다.
'궤조'란, 열차 하나가 다닐 수 있는 철길을 구성하는 길다란 선 모양의 쇳덩어리 하나를 가리킨다.
이 궤조가 특정 궤간을 유지하여 평행하게 둘 깔리면 '궤도'가 된다.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는 사고를 일으키면 탈선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모노레일은 궤도가 단 하나의 궤조로만 구성된 교통수단이다.
끝으로, 노반이 다져지고 침목도 깔리고 열차가 실제로 달릴 수 있는 형태로 궤도가 놓인 철도 시설 전체를 '선로'라고 부른다.

따라서 제3궤조라 함은, 한 궤도에 양 바퀴를 올려놓는 두 개의 궤조뿐만 아니라 전력을 공급하는 제3의 궤조가 하나 또 놓인다는 걸 일컫는다. 전기 철도라고 해서 무조건 치렁치렁 전차선과 전봇대가 달려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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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유명한 사진이다. 이것은 독일의 베르너 폰 지멘스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전기 기관차로, 1879년에 베를린 박람회에 출품하여 선보인 모습이다.
좌우로 총 6명의 승객이 앉은 객차가 3개(= 총 18명) 편성되었으니, 영락없는 놀이공원용 꼬마열차 크기이다. 궤간은 겨우 490mm로 일본 케이프 궤간의 절반, 표준궤의 1/3 규모에 불과하다. 박람회장 내부에 설치된 시험선은 300m 남짓한 길이였다고 한다.

규모가 워낙 작기 때문에 혹시 그냥 배터리로 달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아니고, 그 작은 선로의 중앙에 직류 150V짜리 제3궤조가 있었다. (오늘날 지하철이 사용하는 1500V가 아님! 0이 하나 빠졌다. 그냥 가정용 전기 콘센트와 비슷한 규모의 전압.)
기관차는 3마력짜리 전동기로 그냥 사람이 살짝 빨리 걷는 속도인 시속 6km를 냈다고 한다. 단, 객차를 끌지 않고 기관차만 혼자 달릴 때는 그 두 배의 속도도 가능했다고.

제3궤조 집전식은 선로 주변의 미관을 해치지 않으며 시설 부설 비용이 저렴하다. 차량의 위에 치렁치렁거리는 주변 시설이 없으니 특히 지하철의 경우, 딱 열차 하나만 간신히 지나갈 만치 터널을 작게 뚫어도 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건설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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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극단적으로 작은 터널은, 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을 기준으로 건설된 지하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사진은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지하철인 런던 지하철이다. 런던이야 제3으로도 모자라서 제4궤조라는 특이한 집전 방식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쓰는 동네이다만, 얘네들뿐만 아니라 고무 타이어로 유명한 파리 지하철도 제3궤조요, 일본 도쿄의 지하철도 초창기에 개통한 두 노선인 '긴자'(1927) 선과 '마루노우치'(1954) 선은 직류 600V 제3궤조 집전식이다. 그러니 이들 지하철이 다니는 곳은 선로 주변에 전차선이 보이지 않는다.

전차선을 차량 아래의 선로에다 또 하나의 궤조 형태로 설치하는 방식은 저렴하고 미관에 좋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찮아서 선로에 사람이나 이물질이 떨어지면 안전이 굉장히 위협받게 된다. 또한 선로 분기나 교차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전력을 공급해 주기 어려우며, 건널목 같은 데는 아예 절연을 시켜 줘야 한다. 선로가 침수되거나 결빙됐을 때도 골치가 더 아파지는 건 덤이다. (작년 겨울에 의정부 경전철이 운행 멈춘 것 기억하시는지?)

물론, 바닥에 놓인 전차선의 위에다 덮개를 씌워서 제3궤조를 사람이 밟는 것 정도로는 감전이 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다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열차의 입장에서 집전 설비가 더 복잡해지고 유지 비용이 증가하는 건 불가피하며, 이런 한계로 인해 제3궤조 방식 전철은 고속화가 좀 어렵다. 영국에서 있는 수단 없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시속 160~170km 정도까지 달려 본 게 최고 한계라고 한다.

게다가 제3궤조로는 직류 수백 V, 혹은 정말 많아야 1000몇백 V 정도까지는 보내도, 이런 방식으로 수만 V에 달하는 교류 전기를 보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고 무리이다. 장거리 철도로 쓰기에는 전력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3궤조 집전 방식은 고속철 내지 장거리 간선용으로는 쓰이지 않으며, 끽해야 광역전철이고 지하철, 혹은 아예 저비용 경전철용으로 용도가 굳어져 가는 추세이다.
롯데월드에 가 보니 범퍼카가 천장을 향하는 집전봉이 달려 있지 않고 바닥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는데, 이게 개념적으로는 제3궤조식으로 바뀐 셈이다. 하루 종일 눈 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카에 배터리가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공중에다 전차선을 따로 부설하는 방식도 사실 역사가 길며, 우리나라만 해도 그 기원을 찾자면 서울에 노면전차가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에는 전차선으로부터 전기를 끌어 오기 위해 '집전봉'(trolley pole)이라는 막대가 쓰였다. 이건 점과 점을 일치시켜 접촉해야 했기 때문에 전차선이 레일과 조금만 어긋나 있어도 전기 공급이 끊어지기 쉬웠으며, 특히 한 상태로 차량이 전진과 후진을 동시에 할 수 없었고 고속 주행도 당연히 어려웠다.

그래서 접촉면을 점이 아니라 전차선과 수직 방향인 선으로 바꿔, 선의 아무 지점에나 전차선이 닿아도 집전이 가능하게 한 뷔겔(bow collector)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전차선의 높이 변화라든가 주행 방향에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어서 스프링이 달린 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이 발명되었으며, 이것으로 오늘날의 신칸센이나 KTX 같은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뷔겔과 팬터그래프의 차이는 간단하다. 전자는 열차 지붕에서 전차선까지 닿는 데 꺾이지 않는 막대기 하나가 쓰이지만, 후자는 사람의 팔처럼 한 번 꺾이는 막대기가 쓰인다.

앞으로 전기 철도를 구경할 일이 있으면 집전 장치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자.

Posted by 사무엘

2013/06/03 08:37 2013/06/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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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에 살으리랏다

1. 철도 기도문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대한민국에 철도라는 아름다운 문명의 이기를 교통수단으로 주시고 특별히 새마을호와 KTX 같은 열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길에 지나가는 은빛 레일을 성결(sanctify)하게 하시고, 이 철도 여행이 영을 소생시키고 강건하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하며, 열차 운전을 위해 수고하는 기관사와 승무원들에게도 힘과 지혜를 허락해 주시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철도를 통해 이 나라가 복을 받고 부강해지며, Looking for you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열차 객실 안에서 다시 울려 퍼져 듣는 이들에게 희열과 감동을 주고, 모두 철도 사랑 국토 사랑 정신으로 무장한 철덕후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열차 탑승을 앞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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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다니던 시절, 철덕 초창기에 찍었던 사진이다. 지금은 볼 수 없어진 열차가 대전 역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다.

철도는 고품격 웰빙 교통수단이다. 승객의 시간을 벌어 주고 국가 경쟁력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기반 인프라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디젤 엔진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VVVF 구동음 음향을 들으며 사색에 잠긴다.

철도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도로 정체, 소음과 진동, 급정거· 급커브 스트레스, 차멀미, 차냄새로부터는 구원할 수 있다.

2. 나의 꿈과 상상력을 이끌어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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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다 집어넣어 버리고 싶다.. ㅠㅠㅠㅠㅠ

사법고시나 교원 임용 시험이 이런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난 고시생 모드도 할 만할 것 같고 법조인이나 교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으며, 난 더 먼저 시작한 오덕질과 생업이 따로 있으니 이건 취미로만..ㅠㅠㅠㅠㅠㅠ.

3.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꿈

얼마 전의 주말엔 주중에 쌓인 피로를 감당치 못해서 낮잠을 좀 잔 적이 있었다.
이제는 나이가 나이여서 그런지 본인은 10여 년 전처럼 밤샘은 절대로 못 하겠고, 꼬박꼬박 최하 6시간 반 이상 자지 않으면 낮에 반드시 그 시간만치 채워서 자야만 하는 수면 시간 보존의 법칙이 성립하는 중이다.

그리고 본인은 “불면증이 뭐야? 먹는 거야?” 체질이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최하 2시간이 그냥 앞으로(뒤로는 아니고ㅎㅎ) 워프되어 있고 아주 개운하다. 꿈도 거의 안 꾼다.
그런데... 그 날은 하필 꽤 진지한 개꿈을 꿨다.

꿈이 뭔고 하니..
서울시에서 공휴일에 하루 종일 지하철의 운행을 멈추고 터널을 시민들한테 무료 개방했다. -_-;;
그래서 나는 친구/지인들을 데리고 선로 곳곳을 누비면서 지하철 배선 구조를 그들에게 설명하고, 특히 선로와 선로 사이가 연결된 지점들을 답사했다.
(가령, 충무로 역에는 승객만 3, 4호선을 환승하는 게 아니라 전동차도 3, 4호선을 상호 건널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

꿈 꾸는 중에는 머리가 온전히 돌아가지 않고 사리 판단을 100% 온전히 할 수 없으니, 지하철이 올스톱했을 때 서울 시민들의 멘탈이 얼마나 붕괴되는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나는 신설동 역 지하 3층의 봉인된 승강장을 기억하고 찾아갈 생각을 할 정도의 지각이 있었다.

아마 용인 경전철을 시승했던 경험이 꿈에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이거 마치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황당한 꿈 이야기를 하는 심정이다. ㅋ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3/06/01 08:29 2013/06/0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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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선의 역사

금강산선에 이어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의 산악 철도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즐거운 한국 철도 역사 탐방 -- 태백선 편이다.

태백선은 중앙선(제천)과 영동선(동백산) 사이에 있으며, 우리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열차를 타고 갈 때 거치는 노선이다. 고속철이나 대도시 광역전철이 아니면서 대한민국에 2013년 현재 마지막으로 건설된 지방 대 지방 ‘신규 간선 철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태백선이 없던 시절엔 서울에서 강릉을 갈 때 무려 경상북도 영주까지 내려가서 영동선을 타고 다시 올라가야 했으니, 이는 어마어마한 우회와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태백선은 경부선처럼 처음부터 서울-부산 같은 식으로 전구간이 작정하고 한 번에 확 구상되고 건설된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여러 소규모 철도들이 독립적으로 찔끔찔끔 건설되고 연장되어 왔는데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최종적으로 태백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위키백과의 다음 그림이 태백선의 복잡한 내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철도 동호계에서 유명한 ‘조사부장’이라는 분이 만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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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었다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 치면 마치 멸종한 '모아'(moa)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태백선은 해방 이후에 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다.
생각을 해 보시라. 예전에 한반도에는 탄광과 공장이 거의 다 북부 지방에 몰려 있었는데 그게 이제 전부 북한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남한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자기네 지역에 있는 탄광이라도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업선 철도의 건설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1955년에 처음으로 제천-영월(약 34.1km) 구간이 건설된 것이 영월선으로, 이것이 태백선의 전신 되시겠다. 그 후 이 철도는 연장되어 함백 역까지 이어졌으며 함백선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함백 역에서 동쪽으로 더 연장을 하기가 어려웠다. 지형의 특성상 급커브와 급경사가 불가피했다.
그래서 함백이 아니라 전역인 예미에서 새 선로를 뻗어서 조동, 증산, 정선을 이었으며, 제천에서 정선까지를 통틀어 정선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함백선은 예미에서 함백까지 가는 구선로만을 가리키는 지선이 되었다.

그럼 함백은 막다른 종착역(terminal)으로 전락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가는 선로는 1975년에 추가로 건설되어 함백선에 편입되었다. 단, 저 그림에서 볼 수 있듯, 급경사를 감안하여 동그란 똬리를 그리면서 우회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철도에 등장하는 4개의 똬리굴 중 하나이다. (중앙선에 두 곳, 영동선에 스위치백을 대신하여 건설된 솔안 터널, 그리고 저것)

결국 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길은 곧은 길과 함백을 경유하여 우회하는 길 두 갈래가 존재하게 됐다. 요약하자면 함백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생겼지만, 그 뒤에 함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동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중에 생겼고,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똬리를 틀며 가는 길이 가장 늦게 생겼다.

지선인 함백선과 태백선 본선은 지리적으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혹시 태백선의 부분복선 구간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으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단선이 둘 존재하는 형태일 뿐이다. 양 선로에서 상행과 하행이 모두 오간다.

다만, 똬리굴이 없는 지름길은 우회가 없는 대신, 법적인 설계 한계에 육박할 정도의 급경사를 자랑한다(30퍼밀). 2도가 채 안 되는 오르막도 철도 차량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래서 무거운 화물 열차들은 상· 하행을 막론하고 함백선을 거쳐 가는 편이었다. 여객 열차는 맞은편에서 오는 열차와 원활히 교행하기 위해 함백선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그쪽으로 지나는 열차가 없다고 그런다.

태백선과 함백선의 관계는 이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새로 건설된 예미-조동 지름길 선로(현재의 태백선 본선)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멘(독일어 Rahmen) 식 교량 위에 놓여 있다. 일명 라멘교. 열차가 여기를 지날 때 창 밖으로 아래를 보면 함백선이 응당 내려다 보인다. (이 시점에서 FSM교의 'RAmen!' 구호라든가, 면발과 국물과 김치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라면교가 떠오른다면 지는 거다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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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60년대에 조동-예미 구간이 개량되고 정선선이 건설되고 있던 동안, 증산(현재의 민둥산)에서는 정선뿐만 아니라 고한으로 가는 철도도 건설되었으며, 동쪽에서도 황지(현재의 태백)에서 백산까지 현재의 영동선으로 치면 지선에 해당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두 철도가 동서로 한데 이어져야겠다는 스멜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고한과 황지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선과 영동선을 한데 잇는 철도가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태백선이 완성되었고, 정선선은 함백선과 마찬가지로 태백선의 지선이 되었다. 서울 방면에서 강릉으로 바로 올라가는 용도로 쓰이는 태백삼각선은 함백선의 똬리굴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앙선과 태백선, 영동선 구간은 전철화까지 완료되었다.

하지만 자동차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석탄 산업이 망하면서 이들 산업선의 지위 역시 오늘날 매우 쇠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뭐, 화물 수요가 꾸준히 있고 사북-고한 구간은 강원랜드-_- 때문에 여객 수요가 있으니, 완전히 망한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평창 동계 올림픽에 맞춰서 제천도 아니고 아예 원주에서 분기하는 강원도 행 철도가 복선 전철로 깔끔하게 건설된다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릉에 빨리 갈 수 있게 될 테고, 기존 태백선의 여객 수요는 크게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9 08:40 2013/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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