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역본 간의 차이들

1. 변개 유형 (신약)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가 타 성경에서 변개됐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뉜다.

(1) A형 오리겐 변개(원문)
요한복음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을 순종치 하니하는 자는"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골로새서 "그분의 피로" 삭제 같은 것들.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은 대체로 이 유형에 속한다.

(2) B형 번역 이슈(원어)
이사야서 루시퍼, 사도행전 이스터, 누가복음 갈보리, 요나가 '고래' 배 속, 증인이냐 순교자냐, 지옥이냐 음부냐 등..
같은 원어가 서로 다르게 번역된 것들이다.

(3) C형 후대 본문비평에 의한 변개(원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 요한의 콤마 따위
이건 옛날 사람보다는 웨스트코트-호르트의 기여도가 더 높은 변개이다.
수백 년 전의 옛날 성경에는 심지어 가톨릭용이라고 해도 이 C형 변개가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2. 변개 유형 (구약)

사실, KJV 옹호자/유일주의자들은 구약보다는 신약의 차이점에 관심이 더 많다. 신약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위주로 전수되어 왔으며, 본문 계보가 명백하게 이분화돼 있어서 번역의 차이에 앞서 내용의 차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허나, 구약도.. 맛소라 본문 덕분에 본문의 변개 문제는 덜한 편이지만.. 원어의 미스터리함이 아무래도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보다 더 심하다. 그래서 번역의 차이로 인한 잡음이 더 많고, 원어 말장난이 틈탈 여지도 더 많은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당장 기억하고 있는 예시 몇 가지일 뿐이다. 보다시피 숫자가 막 대놓고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 4년 뒤 / 40년 뒤에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7)
  • 3년 뒤에 십일조 / 3일마다 십일조 (암 4:4)
  • 온천 / 노새 (창 36:24)
  • 엘하난이 골리앗? 골리앗의 동생?을 죽임 (삼하 21:19)
  • 요셉에게 색동옷 / 소매 긴 옷 (창 37:3)
  • 그들을 톱으로 잘라서 끔살시켰다 /톱으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대상 20:3)

그러니 내가 주장하는 건.. 이게 다 맞을 수는 없고, 그래도 어느 것 하나가 정답이긴 할 거라는 점이다.

3. 의외로 KJV처럼 번역된 구절

한글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이나 심지어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서는 KJV 유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아쉽지만 부패한 본문에서 만들어진 변개된 역본이다.
그런데 얘들은 아주 극소수 예외적으로 KJV 스타일로 옮겨진 표현도 있긴 하다.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지만.. 복습해 본다.

(1) 개역성경의 경우, 창세기 요셉의 옷이 색동옷/채색옷, 어쨌든 무지개 같은 컬러풀한(창 37:3) 옷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KJV와 일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본들은 장신구 치장이 잔뜩 달린 화려한 옷, 소매 긴 옷 등으로 표현이 바뀌는 추세이다.

(2) 엡 4:12에서 KJV는 “각종 은사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perfecting) 한다”고 말하지만, 타 역본들은 성도들을 “준비시킨다”(equip, prepare)고 되어 있다.
이건 마치 마태복음 28:19에서 “가르치는”(KJV) 것과 “제자 삼는”(나머지) 것하고 비슷한 차이점 같다.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엡 4:12의 경우, 개역성경도 의외로 ‘준비시켜’ 대신 ‘온전케’ 한다고 KJV와 동일하게 번역되었다. 이건 원문의 차이점인지, 아니면 색동옷 같은 번역 스타일의 차이점인지 잘 모르겠다.

(3) 다음으로 요 3:36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KJV)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바뀐 걸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얘는 의외로 공동번역 성서도 “아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KJV와 동일한 워딩을 했다.

(4) 고후 13:11의 끝인사가 KJV만이 “굿빠이, 잘 있으라, 안녕히 계시오” 등의 작별인사인 farewell이다. 나머지 역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다 “기뻐하라”(rejoice)라고 바뀌었다.
우리말 역본 중에서는 심지어 말보회의 한킹조차도 ‘기뻐하라’라고 번역했는데(왜???)..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farewell이라는 의미로 KJV처럼 번역되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막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기보다는.. 흐름상 의역을 하느라고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게 아닌가 싶다. ‘믿는 자’ 다음에 논리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나오는 게 맞고, 그리고 서신이 다 끝나는 문맥이니 뜬금없이 ‘기뻐하라’보다는 ‘굿바이’가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4. 진짜 어려운 것

유경험자로서 말할는데, KJV는 겨우 -eth, thou thee ye, gay clothing, prevent 같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고어가 어려운 건 절대 아니다. 그건 그냥 며칠이면 적응되고 익숙해지니 하나도 문제될 것 없고..

진짜 어려운 건 대명사와 도치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에서 개나 소나 it he 대명사가 너무 많아서 뭘 가리키는지 분간이 안 될 때.. 그리고 복잡한 도치에서 주/객 관계 따지는 게 좀 어려울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왕상 3:27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저 여자가 진짜 애엄마다" 할 때도 KJV는 그냥 평범하게 her이다.
두 여자 중 누구를 가리키는 her인지를 기계적인 어휘 통사 구조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에 비해, 다른 역본들은 약간 해석을 추가해서 the first woman이라고 써 놓은 편이다.

솔로몬의 재판이야 워낙 유명하고 문맥이 뻔하기 때문에 "아이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고, 죽이지는 말아 주세요!"가 진짜 엄마인 걸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런 유명한 얘기 말고 더 어려운 문맥에서는 대명사 포인터를 역참조할 때 머리에서 쥐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KJV가 그렇게 자비심 없게 번역된 이유는 애초에 원어 원문의 표현이 그렇게 자비심 없고 모호했었기 때문이다. KJV는 표현 추가나 윤문을 극~~도로 꺼리면서, 불가피하게 단어 하나를 추가하더라도 이탤릭체로 티를 내면서 아주 보수적으로 정직하게 번역됐다는 걸 생각해 보자.

5. 고펠나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목재는 무슨 나무일까..??
성경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나는 당연히 전나무, X나무, 포플러나무 같은 친근한 나무 내지 레바논의 백향목, 아니면 출애굽기에서 성막 제조용으로 죽어라고 나오는 시팀나무 이런 걸 떠올렸는데.. 노아의 방주는 그렇지 않더라.

창 6:14에 따르면 고펠나무 gopher wood라고 한다.
그러나 gopher라는 단어는 고유명사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이면서 여기 말고 성경 다른 데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장 사전을 이용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특히 킹 제임스 유일주의 진영에서 좋아하는 방식-- 이 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킹제임스 흠정역을 출간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편찬한 성경 용어 사전에서도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 이상으로 설명이 더 없다. 다른 표제어들 대비 이상하리만치 풀이가 부실하다.
이건 그냥 통상적인 성서고고학이나 원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옛날 한글개역 성경은 그냥 '잣나무'라고 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음역으로 바뀌었다.
영어는 뉴 킹 제임스에서는 gopher가 단독으로 생산성이 없는 사어라고 간주하고.. gopherwood 한 단어로 붙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대에는 이게 사이프러스 나무가 아닐까 하는 해석이 등장해 있다(NIV 등). 이건 본문 변개하고는 관계 없고 후대에 와서 등장한 견해이다.

심지어 "노아의 홍수 이후로 멸종하고 현존하지 않는 나무 품종일 것이다",
"애초에 나무 품종 명칭이 아니라 나무를 가공하는 방식의 명칭일 것이다. 혹시 이건 비슷하게 생긴 다른 히브리어 글자의 오기가 아닐까..?? '고페르'가 아니고 '코페르'이면 pitched tree (역청 바른 나무..??)가 된다는데?"

이런 낭설까지 있는가 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뇌피셜이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성경 본문을 교정하는 정도로까지 선을 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도 킹 제임스 킹왕짱을 주장해 온 럭크만의 주석서에는 이 구절에 대해 뭐라 해설하고 있는지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참고로 이 gopher는 북미 다람쥐 동물이나 컴퓨터 고퍼 프로토콜과 스펠링이 우연히 같지만 이들과는 어원상 서로 전혀 무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5 08:35 2023/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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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목에는 KJV 유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특정 역본을 옹호한다기보다는.. 무오류한 역본 하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더 원론적인 사실"에 대한 변증 위주이다.

1. 언어 관련

과거에 하나님은 친히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언어와 문화, 민족 구분을 만들었다. 인간들을 강제로 찢어 놓고 파편화시켰다. 인류가 한꺼번에 동반 타락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심판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훗날, 언어와 민족의 구분 없이 한 가족인 교회라는 것이 태동할 때는 하나님께서 제일 드라마틱한 기적이면서 사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했던 외국어 구사 표적을 주셨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타 언어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절대로 아니라고 고린도전서에서 거듭 강조하셨다. 세례/침례 문제와 비교하면 대략 이런 관계이다.

  •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유아나 어린아이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침례도 아닌 세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통역 없이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가 공석에서 남발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외국어도 아닌 날랄랄따따 잡소리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듣지 못하는 '원어'에 대한 동경, 환상이 있다. 하나님께 다이뤡트로 내리꽂혀진다는 하늘의 신비로운 언어, 천상의 기계어 어셈블리어뻘..???? C/C++ 고급 언어 짜끄레기나 구사하는 자기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언어라고 말이다.

그게 말은 방언 기도(하나님에게 직통 전달되는 =_=;; )요, 글은 도대체 실체는 모르겠지만 original 원어 원문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hoax, myth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기독교는 "죽은 사람 갖고 장난치지 않으며 일체의 뒤끝이 없다(하늘 아니면 지옥.. 끝!)." 그리고 비슷한 차원에서, 무슨 신비로운 언어 주술 주문 말장난질이 없다.

하나님이 언어와 민족 구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을 '배려해서'이지, 그런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정말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는 성문법인 율법을 주시고 이방인에게 양심의 법을 주셨다고 해서 이게 민족별로 개인 구원 접근성에 대한 차별은 절대 아닌 것과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소통하는 큰 특권을 받은 대신에, 법을 어겼을 때의 처벌과 책임도 더 컸다. 마음속에만 있는 양심의 법의 물리적인 근거· 실체가 율법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논리로..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다음으로 영어로 된 최종 권위 성경을 하나 남겨 주셨다고 해서 이것이 영어 모국어 화자에게만 불공평한 특혜를 제공한 게 아니다. 관점을 좀 달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기왕 이렇게 민족과 언어가 다양하게 찢어진 와중에, 총체적인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 기준 하나를 제정하신 것 자체를 나쁜 조치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정말 만에 하나 불공평한 특혜라고 해도.. 지금 죽은 언어인 원어 공부한 신학자들에게만 불공평한 특혜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 제일 접근하기 쉽고 대중적인 외국어인 영어에다가 특혜를 주는 게 훨씬 낫고 '덜' 불공평하다.

2. 비유

(1) 죽어서 지옥 간 사람이 지옥에서 살아 나와서 막 증언을 하고 "지옥은 정말 있어!! 니들은 정말로 지옥 가면 안 돼!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돼..!!" 이렇게 증언을 하면 사람들이 말을 좀 들을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답은? 눅 16장 끝부분

(2)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신자들의 휴거까지 목격하고.. 반대로 초자연적인 재앙까지 겪으니 그때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성경 읽고 왕국 복음에라도 순종할 생각을 할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답은? 계 9:20

(3) 옛날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쓰던 사람이 살아나서 우리에게 "어 이건 이런 뜻인데?" 교통정리를 해 주면 성경 번역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될 것이다. 현지인이 깡패 아니겠나?
→ 과연?? 성경의 답은??? @@@

(4)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내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이렇게 따지느냐?
→ 킹 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이미 원어 원문 성경을 보았거늘.. (이하생략)

(5) 계시의 확대

  • 예수님이 사도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까? (초대 교회 시절)
    → 예수님이 일곱 교회 경륜까지 다 찍고 나서 21~22세기쯤엔 오실까? (현재)
  • 교황은 바로 그 적그리스도일까? (중세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생각)
    → 교황은 미래 진짜 적그리스도의 짝퉁 예시 모형인 걸까? (현재)
  • 영국에서 성공회와 청교도를 중재하기 위한 단일 성경 (1600년대 당시)
    → 영어로 완벽하게 보존된 최종권위 성경 (현재)

성경 역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비유를 적용해서 생각하면 이렇다는 뜻이다.

3. 임의성

성경 기록이란 건 증명 없이,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토 달지 말고 신자가 맞춰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심각하고 민감한 텍스트이다.

가령,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진술 중 둘째 날엔 다들 아시다시피 "보기 좋았더라"가 유일하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둘째 날에는 뭔가 안 좋은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 좋았다는 말을 넌지시 생략하셨구나, 저 바닥엔 여전히 사탄 마귀 잔당이 있고 악이 있구나" 이렇게 유추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변개되고 삭제되어서 없는 거면 논리가 정반대로 바뀌어야 된다~!!
"변개된 성서에서는 이 구절에서 '보기 좋았더라'를 고의로 삭제함으로써 재창조니 어쩌구니 하는 이단 교리가 들어올 빌미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풀이해야 된다. 어느 게 맞는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

성경에 원래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까라면 까로 논리를 맞춰야 된다는 거다.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대로 "임의적"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이 내용이 다르고 표현이 제멋대로인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그저 "여기서는 삭제됐지만 다른 구절에는 유사 내용이 있으니 상관없다", "아 그건 후대에 추가된 거고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 "원래 인간이 기록한 것이다 보니 오류가 좀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이건 내 성질 같았으면 너무 답답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죽빵이라도 날리고 싶은 사항이다.. ㅡ,.ㅡ;;

세상에서는 인간이 제정한 법조문을 갖고도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삭제되는 걸 반대하고 투쟁한다.
"A와 B 중"이 "A와 B 등"으로 바뀌어서 뉘앙스가 달라진 걸 귀신같이 간파해서 반대파를 반박하고 버로우 태운다.
그런데 성경은 큰 뜻만 통하게 대충 아무렇게나 만들어져도 괜찮다?

세상에서 맛집을 고르고 물건을 살 때도 같은 값이면 무조건 상태가 더 좋은 걸 고르는데.. 성경에 대한 관념이 무덤덤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 사람에게 성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굳이 최선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4. 불신자에게도 100%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논리

뭐~~ "킹 제임스 떠드는 신자들도 행실이 개판이더라, 말보회가 이단이더라, KJV 쓰는 교회들 중에도 이단 많다"
이런 쓰잘데기없는 소리들이 도대체 왜 나오는 건지 난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킹 제임스 성경을 거부하는 논리들을 보면.. "기성교회 vs KJV" 대신에 "불신자 vs 기독교/교회/예수"라고 치환만 하면 완벽하게 동일한 패턴이 많다.

예: 조선 시대 사람들은 다 지옥 갔나, 이 순신, 세종대왕도 다 지옥 갔나
→ 킹 제임스 이전엔 무슨 성경 썼는데? 한킹 나오기 이전에 주 기철 목사도 다 잘못됐나

지금 도대체 옛날 사람 얘기가 왜 나오는데?
난 그런 사람들이 애초에 예수 왜 믿는지, 교회는 왜 다니기 시작했는지 진지하게 궁금하다.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종교(편의상의 표현)에서..
그렇게 쓰여 있는 성경이 한 종류만 맞고 나머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
  • "부활의 날에는 그 여자는 칠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 "부활의 날에 **그들이 다 깨어나면** 그 여자는 칠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 "형제에게 화내는 자마다"
    →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자마다"

아멘???

당연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무인도나 감옥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무 성경이라도 선택의 여지 없이 봐야 한다면 개역이니 NIV니 심지어 메시지니.. 따질 때가 아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을 지경이라면 풀뿌리라도 뜯어먹고 쥐나 벌레라도 먹어야 하지 않는가?
옛날에 그 가난하고 열악한 여건에서 개역이라도 열심히 읽었던 선조들은 그 사람 사정이 따로 있고 우리는 처지가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변개된 성경과 변개되지 않은 성경을 대놓고 한 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고 팩트와 정보가 다 마련돼 있는데 굳이 변개된 성경을 고의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본인은 위쪽 같은 성경을 보기 싫고 아래쪽의 온전한 말씀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둘 다 옳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멘~! ^^ 대한민국이 아무리 물가가 올라서 먹고 살기 힘들기로서니, 풀뿌리나 쥐나 벌레를 찾아 먹어야 할 지경은 아니니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2 08:35 2023/03/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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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00년대 전반기에 잉글랜드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헨리 8세라는 군주가 재위했다. 그는 '수장령'이라는 걸 선포하며 자기 나라를 종교적으로 로마 교황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떼어 놓았다.
뭐, 루터처럼 무슨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이런 거창한 신념 때문은 아니고, 교황이 자신의 이혼을 승인해 주지 않고 어영부영한 것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크게 작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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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거쳐 간 마누라가 한두 명이 아니었고(6명), 심지어 그 중 두 명은 자기 손으로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궁예만 자기 마누라를 죽인 줄 알았더니..=_=;;
여러 모로 가정사가 비범하고, 도라이 정신병자 같은 기질도 있었지만.. 저 사람을 통해 종교 쪽은 결과적으로 좀 선한 결과가 나왔다.

이 사람의 재위 때(1530년대) 윌리엄 틴데일이 순교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기도가 응답되어 커버데일, 매튜, 그레이트 같은 영어 번역 성경이 출간되어 나왔다.

이때는 훗날 킹 제임스처럼 왕이 자기 이름을 걸고 국비로 번역자들을 50여 명이나 소환해서 성경 번역을 추진한 단계까지는 아직 아니었다. 그저 "개인이 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할 자유 정도는 국가에서 보장한다. 이제 성경 번역자가 순교자가 되지는 않아도 된다" 정도만 이뤄진 것이었다.

헨리 8세는 1536년에 낙마 사고를 크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때 2시간 동안이나 의식을 잃었으며, 한쪽 다리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뒤로 평생 제대로 못 쓰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 사람은 더욱 심신이 피폐해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싸이코처럼 흑화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2.
어 그런데 1547년엔.. 프랑스에서도 '헨리'라는 이름의 새 왕이 즉위했다. 현지 발음으로는 '앙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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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잉글랜드 저 동네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골수 가톨릭이었다. 유럽을 휩쓸던 종교 개혁을 온몸으로 반대하는 소신이었다.
그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해서 대놓고 금지했으며, 종교개혁자고 개신교 신자들이고 눈에 띄면 잡아서 화형에 처했다. 심지어 죽는 동안 비명을 제대로 못 지르게 하려고 혀까지 미리 자르고 죽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앙리 2세(1519-1547-1559)(출생;즉위;사망)와 아주 비슷한 시기에 잉글랜드에서는 메리 1세(1516-1553-1558) 여왕이 재위 중이었다. 저 아줌마도 '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신교 박해에는 한 끗발 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째 저 시기엔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군주의 종교 성향이 똑같이 저렇게 갔는지가 흥미롭다. 어떻게든 종교 개혁을 짓밟고 없애 버리고 싶긴 했는가 보다.

다만, 메리 1세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죽인 것으로 확인된 사람도 일단은 몇백 명 단위가 전부(!)이다. 무슨 스페인 종교재판소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또 저 사람은 종교 박해만 빼면 세상적인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쪽에서는 아무래도 자기를 박해한 군주를 아주 나쁘게 기록할 수밖에 없고.. 폭스의 순교사 책에서도 재위 기간 대비 그녀의 악행(?)이 굉장히 길고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폭스 자신의 자국 얘기이기도 하니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앙리 2세는 여자인 메리 1세와 달리, 아주 마초스럽고 스포츠 승부를 즐기는 기사 스타일이었다. 허나 이 기질 때문에 사고를 당해 요절했다.
1559년, 그는 자기 장녀와 자기 여동생이 나란히 결혼--어떻게 이런 일이 동시에 가능??--하는 이벤트가 있어서 국내외 여러 왕족· 귀족들과 먹고 마시며 놀았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그는 자기 부하인 가브리엘 몽고메리 백작과 나란히 말 타고 창술 시합을 벌였는데..

격렬히 싸우던 중에 몽고메리 백작의 창이 빠직 부서졌다. 그런데 창 자루가 부러진 날카로운 파편이 앙리 2세의 투구 틈새로 튀어서 그만 국왕의 눈 바로 옆을 찌르고 관자놀이 근처까지 박혀 버렸다.
앙리 2세는 얼굴이 피칠갑이 됐다. 당대 최고의 명의들이 동원돼서 파편을 빼내고 치료에 수술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고 곪고 그 독소가 바로 근처의 뇌까지 퍼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앙리 2세는 끙끙 앓다가 사고 후 11일 만에 만 40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현대의 위생과 의술이 있었다면 겨우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고통 속에 죽어 가면서도 몽고메리를 사면하고, 사고의 책임을 저 사람에게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앙리 2세는 말에서 떨어진 헨리 8세보다 더 큰 사고를 당해서 결국 목숨까지 잃은 셈인데..
당시 노스트라다무스가 4년쯤 전에 이 사람의 죽음을 아주 막연하게나마 예언을 했다고 여겨진다.
"젊은 사자가 늙은 사자를 이길 것이다. 단 한 번의 전투를 치르는 전장에서 그는 황금빛 새장 너머 그의 눈을 찌를 것이다. 그는 두 상처가 하나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으리.."라고 썼다고 한다.

몽고메리는 이 사고에서는 무사했지만, 훗날 앙리 2세가 싫어했던 '위그노'--당시 프랑스에서 칼빈파 개신교도를 일컫던 멸칭--로 전향하고 잉글랜드 쪽으로 정치 입장까지 바꿨는가 보다. 그는 프랑스의 종교 내전이었던 위그노 전쟁에 참여했다가 잡혀서 처형 당했다.

프랑스는 종교 개혁이나 개신교 따위와는 영 접점이 없어 보이는 동네인데 웬 칼빈인가 싶지만.. 애초에 칼빈부터가 처음에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러니 대외적으로 '쟝 깔뱅'이라는 표기도 통용되는 것이다.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도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거기는 이런 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여전히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18 08:35 2023/0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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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실수한 이유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베드로의 인생일대 흑역사가 기록돼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님하와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는..
정작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붙잡히시던 타이밍엔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는지,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린 사건 말이다.

게다가 부인할 때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아 ㅆㅂ, 내가 저 사람을 본 적이라도 있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니까? 성을 간다! 내가 할복이라도 해야 내 말 믿어 줄 거야?” 급의 극언까지 불사했다고 성경은 진술한다.

이건 인간의 멘탈의 한계를 너무나 강렬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저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꼴 좋다 졸장부 찌질이 등신"이라는 비난보다는 동정과 공감의 시각이 더 강한 편이다.
"평소에 허세 똥군기만 잔뜩 부리던 녀석일수록 정작 실전에서는 총소리만 나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거다. 천하의 베드로조차 저랬는데 하물며 너 같은 쪼렙 X밥은?"과 같은 패턴으로 아주 즐겨 거론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다른 시각도 있다. 베드로는 천성이 저돌적이며, 저 정도로 찌질한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호언장담 맹세 자체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적 진영의 똘마니에게 용감하게 검을 휘둘러서 귀 한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요 18:10)
예수님이 베드로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로마 병정들을 그렇게 온몸으로 저지하다가 혼자 또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여 열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허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선의의 대응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뜯어말리셨다. “야, 내가 어디 무력이 부족해서 잡혀 가는 줄 아니? 지금은 성경 기록이 성취되고 있는 순간 아니냐? 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처신 잘 하라고..”
그리고 그분은 베드로를 말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공격을 받아 귀가 짤린 그 똘마니를 도로 치료까지 해 주셨다! (눅 22:51)

이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급 ‘시무룩~’ 무기력 모드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모세의 소싯적 일화가 떠오른다. 자기는 나름 동족을 위한답시고 어느 노예 감독을 몰래 죽여서 없애 줬는데, 동족은 그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날 “허 참, 당신은 노예 감독 다음으로는 우리도 때려죽일 거야?”라고 모세에게 따진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급 당황하고 멘붕하여 이집트를 떠나서 도망치게 된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최악의 취약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당부처럼 딱히 믿음의 강건을 기도하며 간구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전한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이라도 쳤느냐 하면 그리하지도 않고, 위험한 적진 내부를 혼자 계속 맴돌면서 염탐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 저 작자도 예수랑 한 패였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이런 말이 들리니 허를 완벽하게 제대로 찔린 것이다. 갑자기 겁에 사로잡혔는지, 멘탈이 나갔는지, 아니면 고의로 삐딱서니를 타고 싶었는지.. 이때 베드로는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태도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거듭해서 부인하게 됐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이 베드로의 심경 변화 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이렇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정도로 단순무식하게 비겁한 허세 겁쟁이는 아니었을 수 있다.
설마.. 의기탱천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괜히 쿠사리를 먹여서 의욕을 꺾는 바람에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겠는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기에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믿지도 못한 채, 내면의 두려움을 그저 알량한 혈과 육과 객기로 찍어누르고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분은 베드로의 본질적인 상태를 간파하고서 그러지 말라고, 영에 속한 싸움에 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에서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용감하게 물 위를 걷기 시작했는데 '어어..' 딴 생각을 하다가 불안해지고 물에 빠져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요 11의 "예수께서 우시니라"는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 것이다(창 50에서 요셉이 운 이유도 같이 참고를..).
그것처럼 베드로의 흑역사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인간이 어디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 신앙생활이 단순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인 투쟁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남을 죽이는 의사 투사든, 자기를 죽이는 열사든 무엇이건 말이다.

그나저나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에 제자들이 모두 성경을 잘 알고 성령 충만하게 FM대로 대처했다면 어찌 됐을까?
“스승님을 잡아갈 거면 우리도 다같이 잡아 가시오! / 우리부터 먼저 죽이시오~” 이렇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들러리 도적 대신에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가 같이 달리게 됐을 수도 있다.

혹은 악의 무리들이 예수님만 잡아들이고 제자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체포됐을 때처럼 골방에서 열심히 기도라도 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 싶다.
뭐, 다~ '만약에 그랬다면?' 같은 낭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베드로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실컷 배반하고 나서는 어떤 계기로 마음이 또 바뀐 걸까? 뭔 바람이 들어서 뒤늦게 돈을 반환하고 난리를 치다가 자살을 했겠는지도 적지 않게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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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9 08:35 2023/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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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은사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형태와 위상이 비교적 명확한 아버지와 아들 말고 성령(..!!)은 존재감이 제일 없고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분이다. 그래서 번역도 성령 이전의 초창기엔 성신, 성숨(..!!) 등 난립하는 편이었다.

'신'자가 들어간 번역은 옛날 한글 개역성경에 ‘하나님의 신, 신령과 진정’ 같은 표현에서 남아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바뀌었지만..
성경에서 '신들'(gods)은 하나님 자신은 아니면서 인간보다는 능력이 우월한 천사, 그룹 등 다른 영적 존재에 대한 총칭으로도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가리키는 명칭에 '신'자가 또 들어기는 좀 난감해지는 구석이 있다. ㄲㄲㄲㄲ

다음으로 '숨'은 웬 말인가 싶은데 Spirit 말고 Holy Ghost의 번역을 말한다. 영어 성경에서 ghost는 '숨지다/숨을 거두다'를 뜻하는 yield/give up the ghost 아니면 Holy Ghost.. 딱 두 용례에서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치 testament를 '유언'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은 실험적인 시도인 셈이다.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떨며 한 말은 "앗.. 영이다(spirit)!! ㄷㄷㄷ"였다. 그걸 보고 흐물흐물 동양 귀신이나 서양 유령(ghost??)을 떠올렸다는 워딩은 현대에 와서야 등장한 것이다.

일부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듯이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냥 무슨 기, 에너지, 버프 아이템인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성경에 그런 것 같은 묘사가 있긴 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울이나 삼손 같은 사람이 초인으로 바뀌었다. 신약에서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온갖 이적이 터졌다. 하지만 그게 그림의 전부가 아니다.

본인이 아는 성령은 이 시대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에게 임한다. 그걸 성경 용어로는 '성령 침례'(요 1:33, 행 1:5)라고 부른다. 침례 시술사(!!) 요한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한 게 이것이었다. "나는 맛보기로 이렇게 물을 끼얹는 침례를 주는데, 나 뒤에 오실 분은 니들을 성령으로 침례를 주거나 불로 침례를 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눅 11:13, 요 20:22)

한번 거주한 성령님은 우리를 아주 버리고 떠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통해 느껴지는 성령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죄 짓고 육신적으로 살면 약해지고 식고 역사하지 못하게 된다.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 강림을 매번 간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수시로 간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성경 교리 논란까지 일으키는 주제이긴 하다만..
성령님은 초대 교회가 태동한 직후에 잠시 예외적으로 허락하셨던 초자연적 이적을 지금까지 매번 또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적이 그렇게 끊임없이 흔하게 발생한다면 그건 기적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때야 교회라는 게 갓 태어났고 신약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사도들이 유대인들 앞에서 한번 더 예수님을 증언하고 믿을 기회를 주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표적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바벨 탑 앞에서 인간들의 언어를 헤집어 놓으셨던 것과 반대로,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가라고 언어 장벽을 잠시 없애 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기적이 필요한 예외적인 사유가 없어지고 나면 하나님 역시 기적을 중단하시고 사람들을 평범한 일반적인 여건에다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부터 만나의 공급이 끝났듯이 말이다.
그 뒤에는 기적적인 병 고침이나 직통 계시 같은 건.. 정말 극단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처한 예외적인 사람 또는 아주 특수한 기도 응답이 아니면 일반적으로는 없다. 가능성이 0은 아니지만, 있더라도 개인의 간증 수준일 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교리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도들의 이적 표적을 재현한다는 사람들은 재현을 정확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남이 알아듣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막 16:17-18이 말하는 것처럼 독극물(poison)을 먹거나 독사(venom)에게 물려도 괜찮다거나 하지도 않다.

진짜로 옛날 사도들처럼 병 고치는 기적이 행해진다면, 지금 우리처럼 병원 치료와 기도를 병행한다거나..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절로 응답하셔도 감사.. 이렇게 어정쩡한(?) 케바케 같은 게 없는 게 정상이다. 특히 환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병이 안 고쳐지네 같은 개소리 구라 야바위 따위 없다!!

환자가 신자건 불신자건, 사도가 손만 얹으면 테란 메딕 실사판처럼 heal이나 restore가 짠~ 일어났다.
그러니 나더러 성령님의 사역을 감히 부정하네, 성령을 모독/훼방하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대들 필요 없다. 일단 성령님의 사역대로, 계약서대로 100% 똑같이 하기는 하고서 내게 태클 거시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에 사도들의 표적을 재현하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일반인들이 그렇게 직싸게 고생하며 공부해서 의대를 갈 필요가 없고, 대학 병원 중환자실이나 암 병동 따위가 없어도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전국의 병원부터 순회해야 되지, 무슨 부흥회 따위를 하고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_- 아무튼..

기독교계에서 "우리도 뜨겁던 초대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 이런 거 강조하다가 "성령님이여 오소서, 불 같이 뜨겁게 임하소서"가 와전되어 "불 받아라~!!"가 된 걸까..?? 이런 트렌드가 언제 무슨 계기로 들어온 건지 잘 모르겠다.

부흥회(?)라는 건 내 경험에 비춰 풀이하자면, 일반적인 설교나 성경 공부 모임보다 새신자 초청 복음 전도나 성령 간구(?)의 비중이 더 큰 집회이다.
그런 곳에서 더 즐겨 불리는 찬송가도 있다. 외국곡인 "불길 같은 주 성령" (...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이라든가,
국산곡인 "참참참 피 흘리신" ... (성령의 불길 성령불이야)

아~ 참 2~30년 전 추억 돋는다. 템포 올려 가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박수 치며 부르면 분위기가 진짜 뜨거워진다. =_=;; ㅋㅋㅋ
그리고 고 형원 "부흥"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도.. 얘는 뽕짝 느낌은 위의 곡들보다 좀 덜한 것 같다.

이런 곡들의 가사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묘사가 있다. 불에 그렇게도 집착한다는 거..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일단 행 2:3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묘사가 원조가 아닐까 한다.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흠정역) 개역성경 계열의 워딩도 이와 그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흔한 통념과 달리,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물체가 임했다는 건지 이 구절의 묘사는 의외로 분명하지가 않다.
오히려 통사 구조상으로는 불꽃처럼 낼름 갈라진 '혀', 단순히 '혀'에 가깝다. 불은 그저 비유 대상일 뿐이다. 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니가 진짜 문자적으로 식물 꽃이라는 얘기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 장면을 게임 아이템이나 쿵 퓨리 각성 모습을 떠올리면서 최대한 불에 가깝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번갯불 같은 게 번쩍 하더니 버프 효과가 남았다.."이다. 본인은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믿지 않지만, 저 혀가 곱게 머리 위에 앉은 거야말로 세례에 가까운 묘사인 것 같다.
저 행 2:3만 읽어서는 무슨 거대한 화염이 사람을 삼키고 감싸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구약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이나 불 병거 승천과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_-;; 아니면 페르시아의 왕자 2에서 불 먹은 왕자 모습을 떠올렸거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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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구절이 아니면, 설마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짬뽕 시킨 걸까? 그건 제발 아니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생명의 부활과 정죄의 부활만큼이나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 불 침례는 형벌이며,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침례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마 3:12) 처럼 대구 대조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긍정적인 심상이라고 해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돼서 공중의 새들이 앉았다"가 긍정적인 심상일 수는 없다. 그것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이 싹 앉았다" 이런 간접적인 묘사가 어쩌다가 "성령의 불 받아라~!"로 바뀌었는지 나로서는 성경만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아, 뜨거운 체험과 기분 각성이 가끔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신앙 생활에서 그게 '주 main'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그냥 사우나에 들어가면 된다. 방언 받고 희열을 체험하고 싶으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철도교를 믿어도 된다. 겨우 그런 것만 하기 위해서 무려 성경을 믿고 예수 믿을 필요까지는 없다.

진짜 성령이 임해서 충만해지면 무슨 병 고침 쪽의 기적 이적보다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처럼 평범한 자기 자아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오지 싶다. 이런 게 이적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도 1차적인 의미는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반면, 그렇게 불타는 체험을 하고 입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직통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바탕 눈물 콧물 빼고 나서
길거리에서 신들린 듯이 전도지 뿌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가? 감정적으로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했는가?
갑자기 예수님의 성품이 행동으로 나오기 시작했는가? 세상적인 유흥과 쾌락을 탐닉하던 습성이 바뀌고 진짜 성령 충만해졌는가...???
내가 아는 한, 아무것도 없다..;;;;;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저런 건 진짜 성령으로부터 유래된 표적이 아니다.

아무쪼록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진짜로 성령 충만한 게 뭔지를 많이 잘 보여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찬송가는 너무 뽕짝보다는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같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그런데 실로암은 딱히 성령 장르의 가사가 아니고 곡이 뽕짝 스타일도 아닌데 어째 어지간한 은사주의 부흥회 이상으로 군대 교회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지.. 얘는 멜로디에 무슨 마성이 들어있는지 이 역시 개인적인 미스터리이다. "왼발! 왼발! GOP!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 아마 작곡자가 보면 까무러치지 싶다.;;

말이 나왔으니.. 찬송가 중에서 부르기가 좀 조심스러워지는 장르들을 좀 정리하고 글을 맺겠다.

  • 성탄: 아기 예수 묘사는 교리적으로 큰 영양가가 없음. 휴..
  • 성령: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소서ㅠㅠㅠㅠㅠ
  • 열심과 헌신: 행위 구원이 들어갈 수 있음
  • 선교: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 나라 이뤄 간다ㄲㄲㄲㄲㄲ

이들 장르 자체가 잘못된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하지만 이런 장르는 가사에 누룩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내 경험상 높다. 더구나 영어 원래 가사는 그렇지 않았는데 번역이 이상하게 되는 편이다.

성령이야 이 글에서 많이 다뤘으니 더 언급을 생략하겠다. 그런데 다음으로 후천년· 무천년주의에 입각한 선교 이념도 참 난감하다. 하나님 나라 이루고 확장해 간다고 좋은 뜻으로 말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_=;;
하긴, 성경도 다 소실되고 훼손된 걸 학자들이 '불쌍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복원하고 복구하고 있는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복음화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 확장한다는 발상과 제일 비슷하게 세계에 복음이 확 전파됐던 때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뭐, 그 덕분에 한반도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건 "일면" 고마운 일이지만.. 이때는 여전히 우생학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의 끝은 세계대전 생지옥이었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개뿔..

복음 전파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왕국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두 눈을 직시하고 역사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30 08:35 2023/01/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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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찬송가, 새찬송가, 복음찬송가, 영광을 주께 등...
뭔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선곡하고 편찬된 찬송가라면 아무 거나 가져와도 작사자 색인을 보면 '패니 크로스비'(1820-1915)라는 사람의 곡이 최상위급으로 많이 수록돼 있다.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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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패니 크로스비는 인류 역사상 찬송시를 제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무려 8000개에 달하며, 문헌에 따라서는 9000개에 달한다고도  한다.
참고로, 2등은 6500여 편 남짓인 찰스 웨슬리(만 입이 내게 있으면, 주 보혈로 날 구해 준...)이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솔로몬의 문학 업적이 잠언 3000개, 노래 1005편이었다고 성경에 쓰여 있음을 생각해 보자. (왕상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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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해야 평생에 걸쳐 동일한 주제만으로 시를 8000개가 넘게 쓸 수 있을까?
그냥 1년 365일 24시간 맨날 예수 생각만 하면서 요즘으로 치면.. 트위터/페북에 뻘글 올리는 그 빈도로 찬송시를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분은 우리 같은 사람과는 세상을 인지하고 인생을 사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맨날 아침에 일어나고 하늘을 보면서도, 비구름을 보면서도, 정원의 호박밭 호박꽃을 보면서도 1순위로 늘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 생각을 하고 지냈다는 뜻이다. 아~~ 아니지 저 사람은 맹인이었잖아;;; ㅠㅠㅠ

저분은 각종 찬송가나 시집에 자기 이름만 너무 많이 뜨는 게 부담스러워서 거의 100개에 달하는 가명 필명을 돌려가며 쓰면서 찬송시를 많이 발표했다고 한다.
가령,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불러서"(원제: 노래하라, 즐거운 순례자여)는 작사자가 오랫동안 C. M. Wilson이라고 기재되었지만, 현재는 이것도 이분의 가사라는 것이 다 알려져 있다.

3.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인 존 뉴턴은 에서 "한때 내가 눈 멀었지만 지금은 본다 was blind, but now I see"라고 가사를 썼다. 이건 뭐 영적인 안목 얘기겠지..

그런데 패니 크로스비는.. 레알 맹인이었다.
선천성 기형이 아니라 의료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생후 몇 주 만에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래서 평생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 멀었어도 행복하고, 오히려 눈 멀어서 더 행복하다. 앞으로 하늘나라 가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예수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무슨 자학개그로 "안 본 눈 삽니다" 개드립이 유행인데, 이분은 제일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안/못 본 눈"을 천성적으로 보유한 셈이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저 말은 크로스비 여사가 아직 살아 있던 190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주일학교 교재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아저씨> 중에 나오는 대사 "걔(소미)가 천당으로 엄마 찾으러 갔어. 근데, 눈깔이 없어서 못 찾아."는 성경 교리의 관점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4.
패니 크로스비는 영국의 간호사 겸 보건 행정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완전 동갑 동시대 인물이었다. 이건 매우 인상적인 공통점인 것 같다. 둘 다 1820년생이고, 둘 다 90+세까지 장수한 여인이기도 했다. (각각 1915년, 1910년 사망)
앨버트 슈바이처와 우리나라 리 승만 할배가 생년과 몰년이 완전히 일치하는 동갑인 것처럼 말이다.

5.
끝으로.. 이분의 묘지에는 "이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She hath done what she could라고 당당히 새겨져 있다~! 이건 아무 문구가 아니라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적을 언급한 막 14:8 구절인데.. 싱크로율이 매우 높게 느껴진다.
이분은 앞 못 보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경과 처지 비관을 일체 하지 않고 그 여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성실히 수행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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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거창하게 벌이려 하지 말고 제일 기본적인 것 본질적인 것부터, 당장 니 여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생활화해라~~ better late than never 이런 사고방식 말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성경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1)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싶으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삼라만상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니 참으로 캄~~사하무니다.." 찬양과 감사와 회개와 간구의 순으로 FM대로 하라느니 말라느니..;;
아이고 이딴 복잡한 거 생각하기 전에, "주님, 제가 뭘 기도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 오늘은 좀 기도하고 싶지 않네요" 이런 말부터 기도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2)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아 씨X 이게 영어로 뭐더라? 말이 퍼뜩 안 떠오르네.. 영어가 술술 튀어나오지 않아서 답답하네" 이런 말부터 영어로 표현할 생각을 해라. -_-;;
(신앙과 관련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으면 영어 찬송 → 영어 성경 → 영어 기도...의 순으로 난이도를 올리면 될 듯하다.;;)

(3) 기우제를 지내서 진짜로 비가 내릴 거라고 믿는다면.. "비가 반드시 온다"에 손모가지를 걸지는 않더라도, 기우제 지내러 나갈 때 최소한 우산이라도 챙겨서 나가는 걸로 니 믿음을 행위로 입증해 보여라.

(4) 저출산이 그렇게도 심각한 문제이면.. 자꾸 새로운 애들 만들라고 독촉하고 삽질하기 전에, 이미 낳은 애들이나 잘 지켜 주고 자살 안 하게 하고 범죄자놈들은 반 쥑여 놓아라~~

* 이런 게 그다지 비논리 비합리적인 생각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래서 찬송가 중에도 Brighten the corner where you are (거창하게 큰 일 벌일 생각 하지 말고 니 주변부터나 빛을 비춰라) 라는 곡이 있다. 다만 이건 크로스비 여사가 지은 가사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안 창호 선생뿐만 아니라 저분의 인생에서도 이런 "작은 것부터" 정신이 있었다는 것도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0 08:35 2023/01/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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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으로도 못 가요 + 울어도 못 하네

위 두 곡은 내 행위나 스펙, 재물 따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기초적인 복음을 전하는 찬양 내지 영적 노래이다.
작사· 작곡자는 서로 다르지만 가사 비슷하고 조와 박자가 비슷해서 한데 이어서 부르기 아주 좋다.

2.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 주님 품에 새 생활

영어로 life라는 건 생물학적인 생명도 되고, 그냥 인생· 생활· 삶이라는 뜻도 된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찬송이 개인적으로는 위의 저 두 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과 "주님 품에 새 생활하네"(Ron Hamilton)이라고 생각한다.

구원받아서 새 생명을 얻었으면 새 생활을 해야 한다.. 굉장히 적절한 메시지인 것 같은데..
허나, 위의 두 곡은 3박자 계열이긴 하지만 각각 3/4와 6/8이라는 차이가 있고 음악적인 느낌과 구조는 많이 달라서 바로 연결하기에는 어색해 보인다. 가사는 정말 딱인데 일단 내가 생각하기에는 좀 아쉽다.

3. 삼위일체 메들리

찬송가 중에는 1,2,3 각 절이 성부 성자 성령을 언급하는 형태인 게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가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 찬양 받으소서,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마치 군가 '멸공의 횃불'이 각 절마다 육해공군을 언급하듯이 말이다.
이런 곡들만 모아서 메들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공교롭게도 이런 곡들은 박자도 3박자 계열(3/4)인 편이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상극인 곡을 아무렇게나 연결할 수는 없으니..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정 종원)"와 "아버지 큰 사랑 감사해요(Father, I thank you)"을 묶는 걸 생각해 봤다. 특히 선발곡은 솔로로 선창하고, 그 다음에 후발곡을 합창으로 부르는 식으로 한 절을 다 부르고, 2절과 3절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 앞뒤에 적절한 도입· 결말부를 더 생각해 봐야 한다.

4. 기도 관련

기도와 관련해서 한데 이어 부르기 좋은 찬양 세트는 셋 정도 있다. 공교롭게도 각 세트들이 다들 국산곡과 외국곡으로 편성돼 있다.

(1) 주님의 시간에(in his time)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선발곡은 다 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심상인 반면, 후속곡은 요일 5:14에 근거해서 주님 뜻대로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좀 능동적인(?) 심상이다.
같은 C장조이고 이어서 부르기 좋다.

(2)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첫 마디의 계이름 “미~미 파미레도”가 일치하고 박자도 아주 비슷하다.
선발곡에서 “아무 염려 하지 말라”산상설교 내용을 묵상한 뒤, 후속곡에서 “기도했나요 용서했나요”를 권면하는 구조가 된다.
물론 후속곡을 이어서 부르기 위해서는 선발곡에서 조가 올라가고 마무리를 짓는 클라이막스 부분은 건너뛰어야 한다.

(3)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김 문영 사/최 덕신 곡) +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못갖춘마디의 3/4박자 곡이고 우울할 때 부르기 좋은 비슷한 가사이다.
단, 선발곡은 이럴 때 나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다짐이고, 후속곡은 너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일종의 위로이다. 굳이 따지자면 선발곡의 가사가 영적으로 수준이 더 높다.

5.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우선, 앞곡은 쌍팔년도를 풍미했던 찬양집 “찬미예수 시리즈”의 편저자가 지은 명곡이다. 가사가 내 진심을 담아 차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심오하다.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이거 부르다가.. 예배당 밖에서는

“서울 시내 아파트 값이 어떻고 삼성 전자 주식이 어떻고, 비트코인 뭐가 어떻고 금리가 어떻고..” 이러면 완전 현타가 작렬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
요즘은 유혹과 박해라는 게 무식하게 빼앗고 죽이는 형태가 아니라, 너 혼자 뒤쳐지고 박탈감 느끼게 하는 식으로 임한다.

그리고 이 곡은 “예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로 끝나니,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와 가사 내용과 분위기, 박자가 아주 비슷하다. 같이 이어서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

6.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작사· 작곡자가 서로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Ab)에 같은 박자(3/4), 동일한 길이의 못갖춘마디이다.
앞곡은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사모한다는 내용이고 후속곡은 그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지금 내 앞길을 인도해 달라는 간구이다.

서로 연계하기 굉장히 좋은 조합인 것 같다. 앞곡을 부르다가 간주 없이 곧장 뒷곡으로 넘어간 뒤, 다시 간주 후에 앞곡으로 돌아와서 끌내는 형태도 괜찮을 것 같다.

7. 내가 하늘에 들어가 (I saw Jesus in you / When I enter heaven's glory)

Ron Hamilton이 작사· 작곡한 이 찬양은.. 자기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다른 구원받은 지체들을 만나서는 “아.. 당신이 살아 생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줘서 그게 저한테도 선한 영향을 끼쳤어요” 이렇게 회고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게다가 저건 1절 내용이고, 2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한테서 그런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사람과 예수님이 후렴에서 동일하게 I saw Jesus in you라고 말한다는 게 핵심이다.

일반 기성 교회보다는 침례교 계열에서 더 유명하지 싶다. 이 곡을 모르시는 분은 유튜브에서 먼저 들어 보시라. (☞ 링크)
(화면에서 볼 수 있듯, 이 아저씨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어쨌든 애꾸이다. 이 특성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일부러 해적 코스프레도 종종 하는 것임..)

얘는 뭐.. 다른 곡을 짜깁기 하거나 메들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 가사에 화자가 딱 정확하게 나, 다른 사람, 예수님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메들리나 합창이 아니라 그냥 뮤지컬을 만들면 된다. 유튜브를 뒤져 봐도 이 곡을 이런 형태로 부른 영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ㅡ,.ㅡ;;

아 참.. 이거 가사가 자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간 뒤의 시점을 다루고 있으니.. 프리퀄 격으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내용이면서 박자나 멜로디가 이 곡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적절한 찬송을 미리 부르면 효과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천국, 소망'카테고리의 찬송가들은 내 인생이 끝난 관점 버전이랑 이 세상 전체가 끝난 관점 버전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이 곡은 명백하게 인생 종말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2/12/23 19:35 2022/12/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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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

1. 사고 개요

지난 10월 30일 아침엔 우리나라 전국민이 정말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소식을 접하며 일요일을 맞이했다.
할로윈, 그것도 마스크를 안 써도 되는 자유로운 할로윈을 기념해서 이태원 클럽 일대에 10만 명에 가까운 젊은 청년들이 몰려와서 파티를 벌이며 놀았다. 그런데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하고 비좁은 경사 골목길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대규모 압사 사고가 났다.

앞쪽 사람이 밀려 넘어지면서 뒤쪽 사람들에게 몇 겹으로 깔렸다. 이 때문에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밟혀 죽고 부상자도 이와 비슷하게 발생했다. 무려 1960년의 서울 역 압사 사고가 어설픈 풋 사과로 밀려났을 정도로..
사상자는 대부분 20대였으며, 여자가 남자보다 2배 가까이 더 많았다.

총기 난사나 폭탄 테러가 아니고 건축물 붕괴나 추락, 화재 따위도 아니고 미치광이 차량 돌진도 아니고..
주변 시설이나 지형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인간이 자기들끼리 깔고 깔려서 이렇게 많이 죽거나 다칠 수 있다니..
나라에서는 소방 대응 단계를 최고로 올리고 이태원 일대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난리가 났다. TV에서도 뉴스 속보와 특보를 내보내며 하루 종일 이 사고만 보도했다. 이 소식은 외신까지 타면서 세계로 전파됐다.

이때 현장이 얼마나 혼잡한 생지옥이었냐 하면.. 발이 둥둥 뜬 채 주변 군중에게 떠밀려서 이동하는 지경이었고, 사람이 숨을 들이쉴 수 없어서 말을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거 무슨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그리고 발이 둥둥 뜬다는 곳의 원조는 평일 출근 시간대에 신도림 역 환승 통로가 아니었던가? =_=;;

소지품이 땅에 떨어지면 그건 그냥 포기해야 했다.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다가는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꼴랑 1제곱미터 면적 안에 사람이 15명? 엥...??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극단적인 상황임이 틀림없다.

근데 이 할로윈 파티는 주최 측이라는 게 존재하는 정식 행사나 집회가 아니어서 책임소재를 따지기도 더 난감했다. 교황 방한 행사라든가 여의도 불꽃 축제, 태극기 집회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2. 할로윈

할로윈인지 핼러윈인지는 수십 년 전 라떼만 해도 영어 회화 학원에서나 배우는 마이너한 이벤트였다. 재꼴랜턴이라는 건 파닉스 영어 교재의 밖에서는 볼 일이 없던 단어였고.. 그랬는데 그게 갑자기 우리나라에까지 퍼져서 무슨 발렌타인 데이, 빼빼로 데이 같은 문화가 됐다. 이런 건 꼭꼭 챙겨서 놀아야 애들 집단에서 인싸가 될 수 있다.

원래 할로윈의 본고장인 천조국에서도 이 날은 그냥 초딩 얼라들이 귀여운 귀신 분장을 해서 이웃집을 돌면서 trick or treat! 이러면서 재롱 부리고 사탕이나 얻어먹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게 울나라에서는 얼라가 아니라 20대 청년들이 코스프레 해서 클럽에서 술 마시고 춤추며 노는 날이 됐다. ㄲㄲㄲㄲ

일본도 서양 문화 동경하고 귀신 좋아하는 코드가 맞아떨어져서 할로윈 같은 거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거기는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다. 할로윈의 본동네 애들이 보고도 경악하지 않을지??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야 할로윈의 반기독교적인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에 의도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며, 본인 역시 그 입장에 동의한다.
10월 말쯤이면 늙은 호박 하나 장만해서 호박죽이나 맛있게 쑤어 먹을 시기이지 않겠는가? 이 사랑스러운 호박한테 그저 못생겼다는 프레임도 모자라서 흉측한 귀신 얼굴이나 새긴다니.. 나로서는 분통 터질 노릇이다.;; (글쎄, 이 따위 용도로라도 호박을 잔뜩 많이 구매하느라 호박 농가의 매출이 늘었다면 다행이지만, 아예 식용이 아닌 할로윈 전용 호박 품종을 따로 만들어서 재배하는 건 반대 소신)

깐깐한 신자는 할로윈이 아니라 성탄절조차도 실제 예수 탄신일이 아니고 기원이 태양신 숭배라면서 세상 분위기에 놀아나지 않는다. 그러니 하물며 할로윈이야 뭐.. 날짜가 루터의 종교개혁일과도 겹치니 더욱 배척할 수밖에 없다.

아 그러고 보니.. 굳이 기독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랑 아무 상관 없는 저딴 얄팍한 서양 귀신놀이 상술에 놀아나고 있냐? 전통 명절 하나 제대로 안 지키면서..?" 이런 보수적이고 좀 꼰대적인(?) 생각으로 인해 할로윈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뭐 그건 그렇다만..

한 가지 생각할 점은.. 할로윈 때 흥청망청 노는 애들이 다~~ 그 할로윈/반기독교 정신에 진지하게 동조해서 노는 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탄절 이브 때 흥청망청 노는 애들이 예수 탄생을 동조하고 기뻐해서 노는 게 전혀 아니며, 광복절 폭주족들이 조국의 광복을 축하해서 날뛰는 게 전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아해들한테는 성탄절이건 할로윈이건 유래나 의미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냥 노는 날 명분이 필요했던 것일 뿐이다. ㅡ,.ㅡ;;
도대체 할로윈이 울나라 울문화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몰려가서 미친 듯이 노는 건지.. 스트레스가 그리도 많이 쌓였는지는 솔직히 본인도 이해가 잘 안 가지만 말이다.
과연 내년엔 이태원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흥청망청 할로윈 파티가 또 열리고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들지 궁금하다.

3. 불순불온 정치 선동이 제발 근절되기를

꽃다운 나이의 수많은 청년들이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고로 저렇게 많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건 국가적인 비극인 건 맞다. 허나.. 이와 관련해서 본인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

(1) 그노무 대통령 때문, 서울시장 때문이다 부류의 미친 정치병.
안전 통제를 강화했으면 안 그래도 검찰총장 출신 대령통의 공안시국이라고 욕했을 거면서.

(2) 이게 다~~ 악하고 음란 퇴폐적인 할로윈 문화에 대한 ㅎㄴㄴ 심판이다.. 지긋지긋한 종교병.
할로윈을 종교적으로 반대하는 건 반대하는 거지만, 재난 사건 사고를 자꾸 그렇게 갖다붙이지 말라고.
지금까지 이런 식의 경솔한 발언들이 야기했던 부작용과 어그로에 대해서 아직도 깨달은 게 없냐..?
이럴 때 보통은 눅 13:4-5를 생각하면서 자중하는 게 더 건전한 대응이다.

내가 보아하니 종교병 병크가 터진 건 별로 없었다. 그 대신 벌써부터 남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못된 악귀들이 내 예상보다 더 일찍 더 대규모로 날뛰기 시작한 것 같다.
한 건 거하게 터졌으니 이 개새X들은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든 정부와 여당과 경찰을 욕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
지들이 지지하는 정치인 시절에 온갖 대형 화재와 사건 사고들이 터졌을 때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민망하지 않냐?

벌써부터 촛불시위 하겠다는 놈들.. 이것들은 진짜 인간도 아니다. 내전 벌여서라도 이런 놈들을 다 청소해야 이 나라가 살 수 있지 싶다. 광우뻥과 세월호 때 한번 데였으면 됐지 사람들이 설마 두 번 속을까보냐?
왜,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면서 시위하던 모 장애인 정치 단체가..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던 어느 장애인 가족이 반지하방에서 폭우 때 죽으니까 그걸 추모한다고 난리였었다. 그거랑 딱 같은 유형의 시체 장사이다.

저것들이 또 뭐라고 지껄였더라? "경찰이 마약 단속이나 대통령 경호 따위에만 너무 치우쳐서 진짜 필요한 군중 통제에 인력이 투입되지 못했다"....;;;
대통령이야 지들이 원래부터 싫어하니까 그렇다 치지만.. 마약.. 저 많은 인파가 밀집해서 노는 이태원 클럽이야말로 마약 단속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 마약이 나라 근간을 무너뜨리는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모르냐? 사람 혈압 올리고 암 유발시키려고 정말 아무 개소리나 의식의 흐름대로 쳐 씨부리는 것 같다.

4. 과다한 미화를 하지 말고 감성팔이와 남 탓 좀 하지 말길

사고로 죽은 청년들에 대해서 "쳐 놀다가 잘 죽었다"처럼 비난· 비하를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건 개념 밥 말아먹은 인간말종 짓거리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무슨 나라를 구하다가 순국 순직한 사람만치 떠받들고 애도할 필요도 없다. 인간들이 왜 이렇게 균형을 안 맞추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망자의 모친이 "아니 애들을 무슨 그런 좁은 곳에 몰아넣어서..."라고 통곡했다. 자녀를 잃은 것은 슬프고 애석한 일이지만, 그 자녀는 무슨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의문사한 게 아니다! 그 좁은 곳에 가라고 정말 아무도 전혀 강요하지 않았다. 제 발로 간 거지.. =_=;;;

사상자· 피해자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불러야 된대.. 이건 뭔 유체이탈 화법이야..??
영어로는 victim 한 단어이지만 우리말로는 뉘앙스와 어감에 따라서 뜻이 더 세분화돼 있다.
정말 악의적인 범죄를 당해서..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한 관료라든가, 007편 격추, 858편 테러에 당한 정도는 돼야 희생자이지.. 이태원 압사 사고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어감으로는 희생자는 아니다. -_-;;
옛날에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나 삼풍 백화점 victim한테 희생자라는 워딩이 선뜻 통용됐던가..? 그렇지 않다.

"예고된 참사" 이딴 소리도 쌍팔년도와 90년대까지 진짜로 나라 시스템이 미개하고 후진적이고 비리와 부실공사가 넘치던 시절에 통용되던 클리셰이지.. 이젠 지겹지도 않냐? 그리고.. 이미 다 예고되고 예견 가능했으면, 할로윈 분위기를 즐겁게 잘만 보도하던 이전 보도 자료는 또 뭐가 되는 건데?
지금은 저건 정치병이랑 결합해서 남에게 떼쓰고 징징대는 수단으로(나이 20~30씩이나 쳐먹고도!), 그리고 누구 하나 마녀로 몰아서 조지는 광기로 굉장히 이상하게 변질된 비중이 더 크다.

군대에서 누가 고참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으면.. 그 유가족에게 보상을 하고 가해자를 잡아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병사를 굳이 계급 특진을 시키고 육군장을 치러서 예우하고 현충원에다가 안장할 필요까지는 없다. 내 말 틀렸는가?

지금 벌어지는 일도 저런 부류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안전 통제 규제를 하겠다고 하면 공안시국이라고 난리 쳤다가, 사고가 나면 국가 탓 남 탓 떼쓰는 이 고약한 관행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이런 사고가 퍼졌을 때 나도 화내지 않고 순수하게 피해자만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07 08:35 2022/11/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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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루터교 목사 겸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1906-1945).
피끓는 정의감에다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던 대단한 사람으로, 강경한 나치 반대 운동가로 활동했다. 요즘으로 치면 뭔가 폴 워셔 목사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칭의론이 독일어로 저렇나??? 레흐트페르티궁...;; 우와 읽지도 못하겠다 ㄲㄲㄲㄲㄲㄲㄲㄲ)

일제 시대를 산 한국인이라면 주 기철 목사 이상으로 신사 참배를 맹렬히 반대했을 것이고, 오늘날 같으면 "북한 동포들을 김씨 부자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시키자~! 김돼지를 때려잡자! 대북전단 날리자~! 북한으로 성경책 잔뜩 보내자~" 이런 걸 열심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지론은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였다. 그야말로 침묵하는 다수, 악의 평범성, "버스 44" 영화에 나오는 무덤덤한 승객 같은 정신 상태를 아주 극혐했다. 물질적인 도움으로 현실적인 조치가 필요한 사람한테 아가리로 덕담만 해 주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약 2:16)

그래서.. "어떤 미치광이 음주운전자가 차를 몰면서 사람들을 치고 있다면.. 목사는 그저 희생자를 애도하면서 한가하게 장례 예배나 인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목숨 걸고라도 그 차에 올라타서 미치광이를 운전석에서 끌어내고 차를 세워야 한다" 이랬다. 그리고 이 말은 당연히 히틀러를 정면으로 겨냥한 비유였다.

이러니 그는 결국 나치에 의해 진작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처음에는 그냥 감시만 당했지만, 1944년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까지 밝혀진 뒤엔 곧바로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는 나치의 패망을 겨우 한 달 남짓 앞두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게 아니라 법대로 사형을 당했다. 그의 유언은 "이것은 마지막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는 좌파 냄새 나는 사회 운동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신학자로서 이론과 내공도 탁월했다. 그는 외국(=미국)으로 망명 가서 신학교 교수만 하면서 안전하고 편하게 살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시에 내 동족과 함께 동고동락하지 않은 먹사는 전후에 조국의 기독교계를 재건하는 데 동참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간지나는 말을 남기고 고난을 자처하며 호랑이굴로 들어갔다.

바울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뜬금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리고 6· 25 때 전사한 미군 장교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가 "내 친구 나라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지 않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슬그머니 선교사로 들어가는 건 내 양심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저서인 '제자도의 댓가(Cost of Discipleship)'가 주 목사로 치면 '일사각오' 정도에 대응하는 것 같다.

이 밖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1) 이름이 '본 회퍼'가 아니고 한 단어 '본회퍼'이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었네~ 아이고.. -_-;; 폰 von 때문에 편견이 생겼던 것 같다. ^^

(2) 부활절을 치른 거의 직후에 처형 당했구나. 1945년의 부활절은 가톨릭은 4월 1일, 정교회는 4월 8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 사람이 처형된 날은 4월 9일.
(그 달 말인 28일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 당했고, 이틀 뒤인 30일엔 히틀러도 그 뒤를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애초에 저 사형 집행도 히틀러가 패전을 염두에 두고 죄수들의 뒷정리 차원에서 일괄 지시한 것이었다.)

(3) 그래도 나치 독일의 패망 직전 말기에 처형 당해서 그런지, 참수는 아니고 교수형으로 죽었다.
몇 년 전(1943)만 해도, 나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잡힌 백장미단 멤버들은(조피 숄 등) 다 이동식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독일은 민족 저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종교 개혁을 주도하고 위대한 수학자와 과학자,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20세기에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키는 사고를 쳤고 나치 독일과 히틀러라는 흑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 정도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목사가 자국민 중에 배출되기도 했다는 건 그나마 진지하게 실드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 참, 나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유명한 시를 이 사람이 썼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그건 아니더라.
'마르틴 니묄러'라고 본회퍼와 성향이 비슷했던 다른 독일인 목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노조 등등 이후...) 나치가 나를 덮쳤을 때는 나를 방어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osted by 사무엘

2022/10/25 08:36 2022/10/2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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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프레임

내가 기독교 신앙, 특히 이단과 관련해서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예를 좀 들면 다음과 같다.

(1) 창세기의 간극 얘기를 들으면 뭔 듣도 보도 못한 김 기동이니 귀신이니 아담 이전 인류(?) 이런 거 떠올리지 말고, “왜 둘째 날에는 ‘보기 좋았더라’가 없을까? 그러게, 물과 땅은 언제 창조됐고 루시퍼는 언제 타락했을까? 예레미야서에도 without form and void가 나오는구나!”를 좀 생각해 보자.

(2) 구원의 영원한 보장 얘기가 나오면 뭔 구원파 생각 좀 하지 말고, 바울 서신서가 실제로 뭘 말하며, 모순되는 듯한 히브리서 야고보서가 뭘 말하는 것이겠는지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라.

(3) 왕국 얘기가 나오면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 따위 생각하지 말고, 성경 용어가 kingdom이고 예수님이 왕 중 왕이며 통치 형태가 왕국이라는 걸 좀 생각하자.

(4) 휴거 얘기가 나오면 다미선교회니 뭐니부터 생각하지 말고, 살전 4:16-17을 제발 좀 먼저 떠올려 보자~!

하.. 이런 분들은 정말 오로지 이단 소리 안 듣는 것에만 목숨을 거는 것 같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ㅡ,.ㅡ;;; 세상으로부터의 편견이 그렇게도 두렵나?
이런 사고방식이니까 요한계시록을 읽는 게 통째로 금기시되고, 교회들이 대문 앞에다가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써 붙이는 것 같다.

이단들이 “우리도 성경 믿어요, 성경 공부해요~!” 이러면 이분들은 아예 성경 읽고 공부하는 걸 그만두지 싶다. =_=;;
거리설교를 이상하게 보고, 구원 확인 질문을 불쾌히 여기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아니, 예수 믿어서 은혜로 구원이 없으면 그건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잖아..!!!

그리고.. 신천지 추수꾼이 교회에 쳐들어와서 집기를 부수고 폭력을 쓰고 난동을 부리면서 예배를 방해한다면야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고 세상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건 좀..;; 성경의 비유를 이상하게 갖다붙여서 이단 교리 펴는 것까지도 경찰에다 신고해서 강제로 찍어누르고 금지시킬 생각인가?? ㅡ,.ㅡ;;
무슨 무한리필 부페 식당 입구에 “운동부 회식 금지”라고 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좀 민망하다.;;

그래서 본인은 제안한다.
“나는 저 이단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쪼잔하게 지내지 말고,
이렇게 단순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하게 성경대로 믿는 게 이단이면 난 그냥 이단 소리 듣고 말겠다” 같은 대인배 마인드를 가져 보면 어떨까? 자기가 믿는 것, 자기가 가는 신앙 노선에 대한 확신을 좀 가져 보시라.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그 길을 따라 내 조상들의 하나님께 그렇게 경배하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나이다.” (행 24:14)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가슴 펴고 통 크게 살아 보시라~!!

난 자동차, 철도, 컴퓨터, 호박, 멧돼지, 군사, 역사 등 이것저것 온갖 잡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긴 한데..
저런 미주알고주알 진짜 이단(?)들 교리는 거의 모른다. 정답만 알면 되지 오답을 일부러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정답의 일부가 오답이랑 비슷해 보이는 건 정답의 잘못/탓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비슷해 보여도 실상은 전혀 같지 않은데 같은 줄로 착각하는 건 당사자의 잘못일 뿐이다.;;

※ 보너스: 후대 드립

내 경험상,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는 교리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 theory의 내용 본질을 저격하는 게 아니라 출처· 기원· 계보를 따지고 트집 잡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요일 5:7 삼위일체 요한의 콤마는 원래 성경 본문에 없었고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 젊은 지구 창조론은 웬 안식교에서 만들어낸 산물이다.
  • 반대로 간극 이론은 토머스 캘머와 넬슨 다비 같은 19세기 최근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입각해서 진화론에 대항하려고 따로 만들어 낸 것이다.
  • 또 간극 얘기인데, replenish는 처음에 ‘다시’라는 뜻이 절대 절대 없었다. 후대에 진화론에 대항하려고 이런 의미가 재조명되고 추가됐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도 교리를 직접 파고드는 게 아니라 진영논리 이단 프레임에 입각한 좀 비합리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안식교가 주장하건 몰몬 교가 주장하건, 성경이 6일이라고 말한 것을 6일이라고 그대로 믿고, 1천 년이라고 말한 것을 1천 년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르고 잘하는 것이지 않는가?

더구나 그렇게 기원· 출처를 따진 것이 정확하게 맞는 팩트조차도 아닌 경우가 왕왕 있다.
요한의 콤마는 피터 럭크만 박사의 반박 자료에 따르면, 이미 고대 로마 제국 교부 시절부터 멀쩡하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를 방어하는 데 잘만 쓰였다.

간극 역시 19세기보다야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간파했다. 사탄 마귀의 타락과 이전 세상의 멸망이라는 개념 자체를 깨우치기 위해서 무슨 대단한 지성이나 과학 발견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토머스 캘머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보다 수십 년 이상 먼저 간극을 주장했었다.

replenish는.. 더 말을 하지 않겠다. 멀쩡히 중세부터 쓰였던 단어이고 더 강조해서 반복해서 채우고, 소모되어서 없어진 것을 다시 보충한다는 뜻이다. 애초부터 단순 fill과 동일한 단어가 아니었는데 이것도 무슨 재창조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의미가 왜곡된 거라는 소설은 어쩌다가 튀어나왔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10/04 08:35 2022/10/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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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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