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성의 독립운동가

(1) 최 재형(1860-1920)
요즘 이 이름은 ‘이 회창’처럼 감사원장을 역임한 대선 후보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명 독립운동가 동명이인도 있었다.
그는 겨우 10대의 나이로 생활고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북하듯이 무작정 러시아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꽃제비처럼 쓰러져 굶어 죽을 뻔했는데.. 어느 선한 러시아인 선장 부부가 그를 구해 주고 양자처럼 공부도 시키고, 자기 상선(무역선)에 태워서 선원일도 가르치면서 잘 키워 줬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해서 한국어와 통역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와 러시아 업주 사이에 중재를 잘 하고 일감 조율을 잘 한 공로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이걸로도 모자라서 양부모로부터 한 밑천 물려받았는지 군수업을 시작해서 엄청난 부자까지 됐다. 알거지 빈털터리 상태에서 러시아에서 이 정도로 성공했으니 정말 역전의 용사 개룡남이 따로 없는데..

그는 러시아에서 자신 같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동포들을 돕고 가르치는 일에 애썼으며, 조국 조선이 일제에 망할 위기에 처하자 항일 독립 운동에 자기 자산을 대부분 탕진했다. 그리고 안 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 주고 사격 훈련을 시켰다. 안 의사의 의거의 배후에 이 사람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중근이 아저씨 차 태식이라면, 저 사람은 문 달서 정도 되는 셈..

그는 훗날 1919년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정말 뼛속까지 애국자로 살았지만..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추적을 받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로부터도 밉보이게 되었다. 결국 1920년에는 일본군에게 잡혀서 그대로 총살 당해 순국했다.

(2) 함 태영(1872-1964)
생몰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승만 할배와 거의 동연배이며 비슷하게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이 사람은 공부 잘하고 똑똑했는지, 20대 초반의 나이로 법관양성소를 수석 졸업하여 판사가 됐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등장한 근대식 법조인의 1호 원로 원조인 셈이다.

그래서 고종 황제 시절에 김 홍륙이 저지른 고종· 순종 독살 미수 사건(1898)을 재판했는데.. 먼 훗날, 대한민국에서 심계원(감사원)장과 제3대 부통령도 역임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고위 공무원을 한 사람이라니,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일제 시대에도 전관예우를 받아서 계속 법조인으로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절하고 그 동안은 목사와 교육자로 살았다.

서 재필과 이 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그냥 반역자로 몰렸고, 일제 시대 동안엔 미국에 가 있었다. 함 태영은 저런 사람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3) 서 재필(1864-1951)
이 사람도 최 재형 이상으로 근성의 개룡남이었으며, 함 태영 이상으로 머리 좋고 공부를 겁나게 잘했던 것 같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면서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개화물 먹은 뒤 갑신정변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서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다. 부모와 친형제, 아내까지 몽땅 사약, 자결, 피살 등의 방법으로 죽었다~!! 이때 심지어 어린 자식까지 죽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 당사자도 멘붕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제 조선의 조 짜만 나와도 학을 떼는 골수 혐한 친일파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 재필은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 가서는 빈털터리 상태에서 먹고 살려고 직싸게 고생하며 주경야독을 거듭했다. 물론 도와 주는 선교사 후견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아직 인종 차별도 있던 살벌한 상태였다.

그는 그 여건에서도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 고별 연설을 하는 우등생 모범생이 됐고--(물론, 미국 토박이 동년배 고등학생들보다야 나이가 훨씬 더 많았음..)--, 자국도 아닌 미국에서 의사가 됐다. 친인척을 모두 잃은 알거지 역적 신세로 미국으로 망명 간 지 딱 10년 만에 미국 의사가 된 것이다.

다행히 고국에서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해서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구한말 때 잠시 귀국해서 독립 덕후 활동을 하던 당시엔.. 그는 머리로 동포의 자주 독립은 지지하지만 가슴에 조선 자체에 대한 애정은 싹 사라진 상태였다.
조선 땅에서는 완전 코쟁이 미국인 행세를 하면서 "오우 노!! You Koreans들은 이래서 안 돼.. ㅉㅉㅉ" 삿대질을 하고.. 조선 백성들도 그냥 가르치고 계도해야 할 미개인 정도로 생각하면서 자기와 거리를 뒀다고 한다. 뭐, 인간적으로 이해는 된다.

서 재필은 한국이 배출했지만 한국이 제대로 키워 주지 못한.. 참 여러 모로 아까운 인재였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경에 한국으로 돌아왔다(전 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공 병우 박사가 다른 관혼상제나 행사에는 좀체 참석을 안 했는데, 이 사람의 유해 봉환식에는 일부러 찾아가 참석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일본인

(1) 소다 가이치(1867-1962)
일본인으로서 기독교 선교사 겸 고아원 원장으로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105인 사건이나 3· 1 운동 때는 조선인들을 편들고 실드 쳤으며, 전후에는 자국을 상대로 전쟁 범죄에 대한 회개와 사죄를 촉구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정신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났으며, 월남 이 상재 선생으로부터 기독교 전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호의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후세 다쓰지’ 만만찮은 대한 독립 유공자 일본인으로서 손색이 없으나, 정식으로 인정은 아직 못 받았다.

(2)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근무한 관료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진짜 순수하게 학자 내지 덕후로서 조선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소반(밥상)>(1929)과 <조선도자명고(도자기 도예 관련)>(1931)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망우리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은 아니고 두 명 중 하나이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의 유언도 “조선 식 장례로 조선 땅에 묻어 달라”였다고 한다.

3. 역관 출신

(1) 김 홍륙 (러시아어)
이 사람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함경도 출신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어부 생활을 한 덕분에 러시아어 회화가 가능했다.
마침 1880년대의 조선 정치판에서는 “친러가 살 길이다” 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시대를 잘 탄 덕분에 벼락출세길이 열렸으며 고종의 측근으로서 부귀영화를 엄청난 누리게 됐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고위 공직자에 걸맞은 인품, 교양, 학식을 갖추지 못한 채 친인척까지 동원해서 부정축재와 학정을 일삼았다. 무능한 암군 소리를 듣는 고종이 보기에도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그는 결국 짤렸다(파직).

그런데 김 홍륙은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과 순종 부자를 통째로 암살, 독살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시는 커피에다가 몰래 치사량의 아편을 탔는데..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한 걸 알고 곧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그걸 그대로 마셔 버려서 한동안 앓아누우며 고생했다.

이 어설픈 사건은 곧장 배후가 드러났는지, 김 홍륙은 곧바로 교수형을 당했다. 왕을 통째로 암살하려 했으니 이거야말로 10여 년 전 갑신정변 주동자를 능가하는 역적이었으며, 동시대의 중국이었다면 능지형을 당해도 쌌다. 그래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연좌제가 폐지되고 잔인한 형벌도 금지된 덕분인지, 그는 김 옥균이나 서 재필 같은 급의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훗날 1919년,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나서는 심한 복통과 각혈을 호소하다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거야말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고종의 붕어가 3· 1 운동의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도 명백한 팩트이고..

(2) 이 하영 (영어)
이 사람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랬는데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과 만나게 되고, 어설픈 일본어와 영어 실력만으로 고종 황제의 개인 통역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인생은 정말 타이밍인 듯..

그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출세하고 성공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줄 잘 서고 기회 잘 잡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결국은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일제로부터 자작 지위도 받고, 조선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더 옛날에 김 대건 신부도 똑똑해서 외국어를 몇 개씩이나 구사했다고 한다. 조선의 관료들도 그 실력이 아까우니 가톨릭 신앙만 버리면 당장 살려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남에게 없는 외국어 실력을 갖고도 이렇게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연 저렇게 산 사람도 있었다.;;
참고로 이 하영의 손자 중 하나가 참 군인이라 일컬어지던 이 종찬 장군이다.

4. 이완용보다 더 부자 매국노

구한말에 나라를 팔아넘겨서 그 댓가로 호의호식했던 매국노는.. 그 뒤에 활동했던 생계형 친일파나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전자가 후자보다 수가 더 적으며, 훨씬 더 부유하게 살았고 죄질도 더 나쁘다고 봐야 한다.

매국노의 대명사야 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교집합 그랜드슬램을 모두 찍은 이 완용이다. 하지만 재산으로만 따지자면 이 완용보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더 갑부, 더 억만장자가 된 반역자도 있었다.

  • 민 영휘: 남이섬이 바로 이 사람의 손자인 민 병도의 사유지라 해서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 시절에 그 정도 가격이면 한국 은행의 총재까지 역임했던 능력자 민 병도가 개인 연봉과 퇴직금만으로 마련할 수 있는 부동산이고, 딱히 친일의 댓가· 피 묻은 돈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상태이다. (참고로 국사학자는 이 병도이구나)

  • 윤 덕영: 지금의 수성동 계곡까지 포함해서 서울 옥인동, 인왕산 자락까지 그야말로 초대형 저택을 꾸렸던 미친놈이었다. 재산이 이 완용보다도 몇 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밑천으로 해서 각종 부동산이나 사업으로 재산을 더 불린 것도 생각해야 한다. (참고로 축구 선수 골키퍼는 홍 덕영..;;)

Posted by 사무엘

2021/10/29 08:35 2021/10/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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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언어 유희

1.
일본식 소주인지 청주인지.. 그런 술을 일본어로 '사케'라고 부른다. 그런데 술안주 중의 하나인 연어도 외래어 음차인 '사먼'뿐만 아니라 '사케'라고 한댄다. (단, 억양의 차이는 있음)
우리말에서 고장(region / out-of-order)이나 거리(distance / street)처럼 일본어에도 이런 유형의 동음이의어가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저 섬나라 사람들도 술을 무척 좋아하는지.. 자국에서 개발한 공개 키 암호화 알고리즘의 이름도 SAKKE라고 붙였다. 고안자의 이름 같은 여러 단어들의 이니셜이긴 한데, 이어서 발음하면 저렇다.;;
하긴, 옛날에 일본 SEGA에서 개발된 황금도끼 게임도 몹들의 이름이 다들 술 이름이긴 했다.

2.
우리나라엔 '대성 나찌 유압 공업'이라고.. 대성 그룹의 계열사이면서 일본에 있는 '나찌-후지코시'라는 이름의 기업과 제휴해서 설립된 기업이 있다. (☞ 홈페이지)
독일 나치 NAZI도 아니고 일본 나치 NACHI라니..!! 대박이다.

하긴, 그 시절에 일본군보다야 독일군이 '때깔'이 더 멋있긴 했다.
검은 군복은 과거에 우리나라 박통의 참모이던 차 지철조차 흉내 냈을 정도이고, 로마 제국 스타일을 흉내 낸 팔 뻗는 경례도 그 자체는 간지 나잖아..

독일은 유보트, V1, V2, 티거 전차 같은 무기도 그렇고, 베를린 올림픽 때 이미 텔레비전 생중계까지.. 과학 기술도 세계 최강이었다.
열등한 인종 민족을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다고 선 넘는 악행만 안 벌였으면 1차 대전 때처럼 그냥 평범한 패전국으로만 남았을 텐데.. 그건 교만으로 인한 패망이고 걔네들의 자업자득이 됐다.

3.
우리나라 현대로템은 '한국 철도 차량'이라고 처음에 상호를 정했는데.. 이게 영어 이니셜이 "KOROS 고로스"(일본어로 殺 죽인다)라고 읽히고 일본 거래처에서 기겁을 하는 바람에 다른 단어를 갖다붙여서 뭔가 스덕스러운 '로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난 일본어를 모르지만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서유기 편에서 "1등 하는 놈을 증오로 죽인다~!"라는 삼장법사의 저주 대사를 통해서 '이치 ... 고로스'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일본은 같은 추축국 전범국이어서 그런지, '고로스'에는 민감하면서 어째 나찌라는 상호는 멀쩡히 남아 있나 보다.

4.
일본어 언어유희라는 분야의 끝판왕은 일본의 20세기 격변기를 풍미했던 히로히토 천황의 궁호(미야고)이지 싶다. 한자로는 迪宮인데, 일본어로 읽으면 '미치노미야'...=_=;; 였다.
이건 일제 시대 때 조선인들로부터 당연히 0순위로 '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는 언어유희와 놀림의 대상이 됐다. 순사 짭새들에 대한 멸칭인 '개/나리'만 있던 게 아니었다.

창씨개명이 행해졌을 때도 이 이름을 응용한 창작물이 많이 시도됐다. 그건 좋게 끝나면 등록이 거부되고 퇴짜 맞았으며, 나쁘게 끝나면 당사자가 경찰서로 끌려가서 코렁탕을 먹었다.
일본에서도 식민지 언어인 조선어에 대해 연구를 안 한 게 아니고 한때는 한글/조선어 독본까지 만들었을 정도인데.. 이런 언어유희를 모를 리 없었다.

요즘은 반일 감정에 편승해서 국내 언론에서 어지간해서는 그냥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하지만 1990년대 말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로 우리나라가 외교 때 정식으로 사용하는 칭호는 여전히 원형 그대로 '천황'이다. 북괴의 수장도 꼬박꼬박 위원장이라고 불러 준다면 굳이 천황만 꺼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5.
옛날에 홍 사익이라고.. 조선 황실 출신이 아닌 평민으로서 일본 육사와 육대를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중장(한국군으로 치면 투스타 소장에 대응) 계급에까지 오른 유일한 개룡남 조선인이 있었다. 1889년 3월생으로 히틀러나 찰리 채플린과 거의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패전 이후에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서 사형을 당했다. 이 사람이 직접 전쟁을 벌이고 나쁜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필리핀에서 저질러진 대규모 연합군 포로 학대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인 예우도 못 받았는지 총살이 아닌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 돌아와서는 지인들에게 "나 갑종 합격이야~!"라고.. 무슨 징병 신체검사 1급을 받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얘기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뭐 갑종...?? 아.. 교수라고..? 교수형??!!!" 일본어는 甲種과 絞首가 발음이 こうしゅ(코우슈)로 같아서 나름 개드립을 친 것이었다.

우리 한국어로 치면 "내 동생이 방금 대학 교수 임용에 합격해서 난 이제 교수형이지롱~" 이런 드립을 친 것과 정확하게 같았다.

진짜 악질 전범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옥중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부처님.. 나무아 '미타' 불...)에게 가는 기쁨이여~~" 이런 유언을 남긴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반면, 홍 사익은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참회와 회개의 고백인 시편 51편을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되뇌이고 들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 사람은 뭐 독립운동 유공자로 예우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친일 반민족행위자라고 낙인 찍고 지탄할 대상도 아니었다. 동족에게 막 적극적이고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며, 창씨개명도 안 하고 늘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일본군 내에서 인정받고 저 정도로 출세한 건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그랬는데 결국 일본은 패망했고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 전범이 되어 처벌 받았다니 저 사람 개인으로서는 무척 불운한 경우였다고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10/23 19:35 2021/10/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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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구한말에 개신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는 감리교가 우세했다. 서 재필, 이 승만, 김 구, 유 관순, 최 용신, 남궁 억, 이 준 이런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은 다 감리교인이었다. 제암리 교회도 감리교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국내에서 장로교가 감리교를 누르고 지금처럼 세력이 커지게 됐을까?? 아, 장로교 안에도 고신, 예장, 기장 온갖 브랜드들이 있어서 성향의 차이가 크다는 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로 뭉뚱그려 봤을 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진귀한 데이터는 어떤 근거로 산출되었고 믿을 만한지 모르겠다. (☞ 출처)
허나, 이 표에 따르면 장로교는 생각보다 이른 일제 시대 초기부터 감리교를 누르고 우위를 차지했던 것 같다. 1900년대 후반은 정말로 '평양 대부흥'의 버프를 받기라도 한 걸까..?

이 때문인지 일제 말기 때 한국 교회들이 신사 참배에 굴복했을 때, 개인 단위로라도 항거했던 목사들은 다 장로교 출신이었다. 선교 초기에 장로교와 감리교는 한국 땅에서 서로 나와바리(?)를 어떻게 분할했을까?
안 창호도 비슷한 성향과 연배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장로교 출신이다. 내 직관과 달리, 의외로 감리교가 아니더라.

그 대신 감리교는 초창기에 항일 민족주의 성향을 많이 드러냈고, 이 때문에 일찍부터 탄압을 많이 받아서 교세가 주춤해진 거라는 해석도 있다.
전라도가 3· 1 운동 참가자 비율이 낮았던 이유는 그 동네가 사상이 불온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구한말 때 의병이 제일 많이 활동했었는데 일찌감치 토벌 당하고 와해되고 탄압을 제일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감리교에 대해서 아는 건 남자한테도 권사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 거 같더라, 목사가 로만 칼라 복장이더라, 알미니안주의를 좋아한다더라, 영성 훈련 이런 거 좋아하더라.. 이렇게 소문으로만 들은 게 전부이다. 직접 경험한 건 전혀 없다.
동성애 지지, 여자 목사, WCC, 정치 운동 이런 거는 특정 교파만의 문제는 아니고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일탈이니, 교파 전체의 문제로 싸잡아 침소봉대하지는 않겠다.

본인의 학창 시절에 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들은 다 장로교였지, 감리교는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좀 엄한 비유이다만, 접근성과 존재감을 햄버거 가게에다 비유하자면 장로교는 롯데리아-_-이고, 감리교는 버거킹 내지 맥도날드 같다.;; ㄲㄲㄲㄲ

2. 일본

일본은 조선(한반도)보다 더 옛날, 중세 때 포루투갈과 교류하면서 가톨릭이 먼저 들어왔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왜군 적장 중에도 이미 독실한 신자가 있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여 에도 막부가 시작됐을 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독한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고 그게 공식적으로는 먼 훗날 메이지 유신 때가 돼서야 풀렸다.

쟤들은 왜 가톨릭을 박해했는지, 거기도 황 사영 백서 같은 사건이 있었는지, 일본과 나중에 교류를 시작한 네덜란드나 영국 같은 나라들은 개신교 선교를 하지 않았는지? 일본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뭐 그런 것들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내가 자료와 정보를 입수한 게 맞다면.. 일본에서 가톨릭은 제사 거부 같은 종교 교리 때문에 찍힌 것보다는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서고 밉보인 게 더 컸다. 하필 가톨릭 신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진영에 많이 있었고 그 중 일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래서 가톨릭 전체가 역적의 종교로 싸잡아 낙인 찍혀 버렸던 것 같다.

나중엔 이웃 조선에서도 내가 추정하기로 종교 7 정치 3 정도 비율의 반감으로 인해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긴 했다. 하지만 조선은 법대로 곱게 목을 치기만 했지, 중세 일본처럼 사람을 매달아 놓고 창으로 찌른다거나, 갯벌에다 꽁꽁 묶어서 민물 바닷물에 서서히 익사시킨다거나,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다가 사람을 쳐박아 넣는 식으로 가학적인 방식을 일부러 고안해서 고문· 처형을 하지는 않았다.

에도 막부 때 일본은 왜구가 없어지고 중앙 집권 통치가 정착되고 유럽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예전과는 다른 나라로 탈바꿈했다. (왜구는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장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골칫거리였음)
하지만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국가이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와는 처음부터 종교 포교를 금지하고 물자와 기술 교류만 했다. 일본이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계열 종교가 맥을 못추고 소수에 머물러 있게 된 것에는 이런 역사 배경도 기여했다.

그때 일본에서는 '후미에'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신자를 색출했던 걸로 유명하다.
나는 지금 살아 계신 부모님 사진을 밟고 지나가라고 하면 도의적으로 못 하지만, 실제 모습을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예수· 마리아 얼굴 그림이라는 건 차라리 별다른 죄책감 없이 밟고 지나갈 것 같다..;;

물론 성화· 성물로 신자 색출이 안 된다면 쟤들도 어차피 "김 일성 개XX 해 봐" 같은 더 고차원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앙 고백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색출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성물· 성화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개신교 사고방식에 근거한 후미에 회피는 별 영양가 없는 가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 쪽이라고 해도 좀 보수적인 사람은 외형적인 경건(?)과 절도 있음을 강조하곤 한다. 꼭 예수· 마리아 얼굴 그림이 아니더라도 성경책을 다른 책보다 신줏단지 모시듯이 신성하게 취급한다거나 할 수는 있다. 이런 것까지 그 당시 주변 맥락을 무시하고서 우상 숭배라고 싸잡아 정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에서 산파들은 자기 양심과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애들을 살려 주고는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산파들이 이유야 어쨌든 거짓말을 했으니 쟤들은 나쁜놈" 이러는 무책임하고 융통성 없는 잔인한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같은 사고방식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고방식, 공의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넓은 안목에서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 때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화를 감히 밟고 지나가지 않는 게 최선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알기로 가톨릭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의 일환으로 성찬식 때의 빵과 잔도 굉장히 신성하게 취급한다. 정작 개신교에서는 주의 만찬 때 썼다는 포도 주스나 빵이 남았으면 그냥 별 생각 없이 애들 줘 버리거나 임의 처분을 해도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게 옛날에는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교리 차이였다는 게 참 므흣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은 가톨릭이 먼저 들어오고 박해를 한바탕 겪었다가.. 19세기 중후반,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물을 먹어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군대와 선교사를 보낼 때쯤에 개신교가 들어왔다. 이때는 조선은 다 망해 가고 있었고, 일본은 반대로 서양물 먹으면서 근대화 중이었기 때문에 정부에 의한 종교 박해는 없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유럽의 기독교계에서도 교리에 목숨 걸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갖고 열나게 싸웠었는데.. 19세기 말에 가서는 초교파 선교 복음주의 쪽으로 트렌드가 바뀐 듯하다. 나중에는 그게 은사주의로까지 바뀌었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9/22 19:37 2021/09/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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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과학사 에피소드

※ 세균의 발견, 비타민의 발견

1. 19세기는 인류가 미생물과 세균을 막 발견하고,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떠나 보낸 시기였다.
독일에서는 로베르트 코흐가 1880년대에 탄저병, 결핵, 콜레라의 원인균을 최초로 발견해 냈는데, 같은 나라의 '막스 폰 페텐코퍼'라는 과학자는.. 위생학의 거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균설을 믿지 않았다. 더러운 물을 덮어놓고 마셔서 생물학적 세균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해로운 독 때문에 탈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면 유전병 또는 영양 결핍 따위..

그는 자기 주장을 입증해 보이겠다면서 콜레라 세균을 일부러 잔뜩 모아 놓은 맑은(?) 물을 공개적으로 원샷까지 했다.. =_=;; 그랬는데 그는 며칠(3~4일-_-) 설사만 약간 좀 하더니 멀쩡하게 나았다. 선천적으로 위장이 튼튼하고 면역력이 강했던가 보다.

그는 기고만장해서 자기 제자(루돌프 에머리히)한테까지 그 물을 먹였다. 불쌍한 그 제자는 죽을병을 끙끙 앓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그래도 페텐코퍼 아재는 죽을 때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더러운 물 때문에 콜레라가 창궐한다는 것까지는 맞았다. 단지 더러운 물에 병균이 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2. 그 다음으로 20세기에는 인류는 세균에 이어 비타민과 바이러스라는 것까지 발견해 냈다.
일본에서는 '모리 오가이'라고 문과 배경에다가 의학· 생리학을 두루 섭렵하여 일본군 육군 군의관을 역임한 꽤 똑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군대에서 비타민 B의 결핍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기병까지도 세균성 질환이라는 견해를 고집했다. 그래서 예방을 위해 식단 개선이 아니라 그저 근성으로 내무반 위생 검열만 빡세게 시켰다.

이 때문에 러일 전쟁 때 통계에 따르면 육군에서만 25만 명이나 되는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 중 약 2만 8천여 명이 사망했다. 이 환자 및 사망자는 거의 다 육군이었다. 오히려 식단이 더 열악했을 해군이 경험적으로 잡곡밥 처방을 하고 있어서 각기병 환자가 별로 없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자기 선에서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실책으로 많은 병사들을 죽이는 흑역사를 남겼다는 점에서는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도 비슷해 보인다. 이 사람도 죽을 때까지 비타민 B 결핍증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 파리와 구더기가 같은 종의 생물이라는 걸 모르고, 반드시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던 시절, 무작정 피를 빼내기만 하다가 생사람 잡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위생 보건 지식과 노하우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물리학에서는 19세기 말에 X선, 방사선 따위가 발견되고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한 반면, 생물학은 비슷한 시기에 미생물과 세균의 존재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저런 논쟁이 오갔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바이러스도 아니고 세균은 양성자 중성자보다는 덩치가 훨씬 더 큰 놈일 텐데.. 그만치 생물은 무생물보다 연구하기 더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 지구의 나이, 우주의 나이

1. 미국의 클레어 패터슨이라는 과학자는 납 농도만 죽어라고 측정하다가 지구의 나이 대략 45.5억 년을 계산해 내는 업적을 남겼다. 이게 1940년대 말의 일이며, 그 이후로 지질학· 천문학에서 몇억, 몇천만 년 전 이러는 것들은(Before Present) 편의상 1950년 1월 1일로부터 그만치 전이라는 뜻으로 관행이 정착됐다. 컴퓨터의 유닉스 원년인 1970년 1월 1일보다 정확하게 20년 더 전이다.

이 사람은 실험 중에 다른 모든 변인을 통제했는데도 납 농도 측정이 정확하게 안 되고 뒤죽박죽인 이유를 캐다가..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공기 중의 납 농도가 미세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걸 덤으로 알아내기도 했다.

납이야 인체에 매우 해로운 중금속이니.. 이 사람 덕분에 1970년대 이후부터 무연 휘발유가 따로 개발되게 되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어떻게 감지하고 인과관계까지 파악한 걸까?
자외선(오존층 파괴), 이산화탄소만큼이나 나름 지구를 구한 셈이다.

2. 1964년,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둘(윌슨과 펜지어스)은 인공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야 하는데 사방팔방에서 감지되는 정체 모를 미세한 잡음 때문에 무진장 고생하고 있었다. 안테나를 아무리 닦고 광 내도 잡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잡음의 정체는 우주를 균일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 아주 미약 미세한 열복사 전자기파였다. 지구의 운동, 계절 따위와 무관하게 모든 방향에서 거의 같은 세기로 도달했다. 즉, 얘는 태양계 바깥에서 온 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대폭발설, 일명 빅뱅 이론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 우주는 첫 시작이 있고 대폭발이 일어난 뒤 지금까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대폭발이 있었던 시점은 약 133억 년 전으로 여겨진다.

중세 때 천동설과 지동설이 대립했다면, 근현대의 천문학계에서는 정상우주설과 빅뱅이 대립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는데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관측 덕분에 결과는 빅뱅의 KO승.. 이게 얼마나 대단한 발견이었으면, 저 두 사람은 지구를 구한 클레어 패터슨도 못 받은 노벨 상을 받았다.

* 납과 전파 잡음. 지구와 우주에서 십억 년을 넘는 연대기를 측정하는 실험엔 실험을 방해하던 외부 요인과 뭔가 ‘우연’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1/09/20 08:35 2021/09/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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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세계사 중에서 중국의 역사는 1음절로 O나라 이런 말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 재미있는 분야이다. 은나라 주나라 금나라 요나라.. 특히 요나라 위에는 이불나라가 있다는 개드립이 나돌기도 했다. -_-;;

내가 보기에 중국의 역사는 대략 4개의 큰 구획으로 나뉘는 것 같다.
시즌 1은 춘추 전국 시대에다가 만리장성과 진시황으로 유명한 옛 진나라, 그리고 漢나라 정도까지다.
그 이름도 유명한 삼국지는 시즌1의 끝물 정도가 배경이다. 춘추 전국 시대인 줄 알았는데 거기랑은 다르다.

시즌 2는 진(위진 남북조)-수-당.
바빌론이 니므롯 시절의 왕창 고대 바빌론이 있고 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갔던 후대 바빌론도 있듯이..
중국 역사에는 같은 이름의 나라가 나중에 중복 등장하는 게 있다. 우리나라는 조선 정도나 그렇다. 단군조선, 이씨조선.. =_=;;

진나라가 존재감이 컸던지 중국을 뜻하는 Sino-계열 접두사 음운은 여기에서 유래됐을 거라 추정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Korea처럼 말이다.

안록산의 난, 사사명의 난은 당나라 후기에 등장한다.
안록산 - 안경서(아들) - 사사명(부하) - 사조의(부하의 아들) -_-;; 의 순으로 죽이고 죽이는 게 되풀이됐던 것은 성경에서 엘라 - 시므리 - 오므리의 순으로 부하가 하극상을 벌이던 북이스라엘 왕 역사와 비슷하기도 하고, 또 "케네디 - 오스왈드 - 잭 루비"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왜 어쩌다가 무슨 20세기 초중반의 이탈리아군처럼.. 군기 개 빠진 막장 군대의 대명사가 돼 버렸는지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의문이다. 당나라 당나라 하니까 당나귀가 떠오르는데.. ㄲㄲㄲ 당나귀조차도 '당나라에서 들여온 품질 좋은 나귀'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시즌 3은 중세-근대라고 할 수 있는 송-원-명-청이다.
대륙은 한족뿐만 아니라 만주족이니 거란족이니 심지어 몽골 민족이니.. 여러 민족이 번갈아가며 차지했던 적이 있다.
캐세이 패시픽 항공.. 이러는 cathay.. 이것도 '거란족'에서 유래된 또 다른 중국 명칭이다.

황건적(한나라 시절에 활약)이랑 홍건적(원나라를 멸망시킴)은 정말 이 정도로 서로 완전히 다른 시대에 출몰했었구나. 까먹고 있었다. ㄲㄲㄲㄲㄲㄲ

강시처럼 땋은 머리에 동그란 모자 쓰고 있는 변발.. 이건 마치 흰 두루마기에 갓 쓴 조선 선비만큼이나 판에 박힌 중국 의상인데.. 당연히 청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 조선은 임진왜란 때까지는 명나라와 동맹도 맺었지만, 얼마 못 가 병자호란 때는 후신인 청나라한테 털렸었다.

마지막으로 시즌 4는 현대에 속하는 통일 중화민국, 그리고 1949년 이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공 vs 대만 구도가 되겠다.
소련은 무너지고 나서 러시아로 국호가 완전히 바뀌었지만, 중국은 지금도 국호와 정체성이 동일하다. 그저 경제를 개방했고 한중 수교를 한 덕분에.. 옛날 정도로 날을 세우는 적성국가까지는 아니게 됐기 때문에 중공 대신에 중국이라고 편의상 불러 줄 뿐이다. 중공의 본질은 현재까지도 바뀐 게 없다.

저 많고 많은 나라들을 거치면서 쟤들은 일본처럼 해가 뜨는 동쪽 근원도 아니고, 무려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국'이라는 자뻑 칭호를 스스로 쓸 생각을 언제부터 했나 모르겠다. 서양에서 지중해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쟤들은 공산당 시절에 전통 문화를 많이 단절시켰다. 현대의 글자(간체자)와 발음 표기(한어병음)는 시즌 1~3시절 것과 호환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용어도.. 옛날 중국어는 중문이라고 부르고, 현대 중국어는 '한어'라고 부른다. 's (~의)가 중문에서는 之이지만 한어에서는 的인 것.. 다들 아실 것이다.

역사가 유구하니 문화재가 많이 전해지기야 하겠지만 아편 전쟁 때 털린 것, 문화대혁명 때 자폭시킨 것=_=;; 장 제스가 망명 떠나면서 싹싹 긁어 간 것도 많다. 오히려 장 제스가 긁어 간 것들이 문혁 때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됐을 지경이니..

나도 동심이 있던 시절에는 중국은 대륙의 기상 같은 재미있는 게 많은 동네이고 우리와 같은 일제의 피해자(!!)라는 생각에 호의적인 쪽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도와준 건 대만의 장 제스이지 마오는 1도 기여한 거 없잖아? 오히려 북괴 편만 들었지.

요즘 같은 시국에서는 난 중공의 행패를 놔두고서 반일만 할 생각은 1도, 추호도 없다. 게다가 쟤들은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 유신 독재 시절보다도 더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고 온갖 매체들을 검열하고 심한 독재를 하고 있다.
중공은 짝퉁이나 미세먼지, 바이러스 같은 거 말고 제발 선한 것 유익한 걸 갖고 세계에 기여 좀 했으면 좋겠다.

여담으로, china와 japan은 소문자 보통명사로서 각각 도자기, 옻 칠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korea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스크래블 게임에서 만들 수 없는 단어이지만, china와 japan은 허용된다.

2. 프랑스의 역사

(1) 일반적으로는 1940년대에 세계의 악역으로 엄청난 깽판을 쳤던 일본과 나치 독일이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하지만 1800년대 초에는 프랑스도 유럽을 몽땅 전쟁터로 몰아넣었었다. 나폴레옹이 히틀러나 도조 히데키 이상의 전쟁광이어서 말이다.;;;
그는 자신은 군인으로서 전략 전술의 천재였고 타 인종 학살 같은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나 많은 자국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사지로 몰아넣어 죽게 만들었다. 러시아에 쳐들어갔다가 동장군에게 나가떨어진 것조차도 프랑스나 독일이나 똑같았다. 그리고는 나중에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몰락했다.

(2) 독일이 전간기 때 "우리가 1차 대전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질 리가 없었다. 이게 다 배후에 깔렸던 유대인, 빨갱이, 간첩 같은 놈들 때문이다"라는 인지부조화 합리화에 빠졌던 것처럼.. 프랑스도 과거엔 은근히 그런 감정이 있었다. 20세기 초, 마녀사냥 희생양을 찾는 분위기에서 벌어졌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누명 사건이다.
또한, 쟤들도 민족 순수주의 국뽕이 나치 독일(아리안 인종 게르만 민족..) 만만찮게 쩔어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수업" 같은 소설도 지어졌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 보면.. 독일이 아~~무 배경이나 맥락 없이 전적으로 혼자만 망상에 빠져 맛이 간 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프랑스 혁명 시절의 로베스피에르 아저씨에 대해 읽다 보면 옛날 이탈리아의 수도승 사보라롤라가 강하게 같이 떠오른다.
개인은 아주 금욕적이고 도덕적이고 청렴했는데, 뭔가 지도자로서는 진짜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 신념을 밀어붙이고 다 때려부시고 죽이다가(?) 결국은 폭발한 민중에 의해 축출되고 처형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사보라롤라는 하드코어 종교인 수도승이었던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 프랑스 스타일의 계몽주의에 심취해서 오로지 인간의 이성만 따지던 무신론자 내지 이신론자였다는 차이가 있다. 극과 극은 통했던 걸까.

(4) 난 대외적으로 칭송받는 것만치 프랑스 대혁명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 전 구제도가 정말 조선 말기 같은 X같은 상태이긴 했던 게 사실이지만, 혁명 진행 과정도 마치 6 25 도중의 광기어린 민간인 학살이라든가, 중국 문화 대혁명, 러시아 공산 혁명 같은 냄새가 느껴지는 게 많다.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빵이 없다고? 그럼 고기를 먹으면 되지?" 이 정도로 막장 개썅년은 아니었다는 건 후대에 밝혀지지 않았던가..??

공포정치 시절에 단두대로 사람 목을 하도, 너무 많이 짤라서 뭐 어찌할 지경이었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 스탈린 뺨치는 수준이었다. 과학자 라부아지에까지도 괜히 브루주아로 몰려서 목이 뎅겅 날아갔던 게 아니다.

(5) 쟤들은 뭘 그렇게 맨날 투쟁을 해대는지.. 프랑스 국가, 공산당 인터내셔널가(!!), 라 미제라블 영화에 나오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노래.. 세 곡이 다 뭔가 비슷한 심상이 느껴진다.
종교적으로는 유럽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정도를 골수 가톨릭 국가 3인방으로 칠 수 있겠다. (러시아는 정교회)
다만, 2차 대전 때 프랑스는 연합국이고 이탈리아는 추축국이 돼서 행로가 갈렸다. 스페인은 색깔이 좀 애매한 편..

3. 보너스: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

먼 옛날 시즌 1에 속하는 시기인 기원전 5xx~4xx년대엔 중국 대륙에 공자를 비롯해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뜬금없이 확 출현했었다. 왜 그랬을까?
더 나아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탄생과 불교의 창시조차도 얼추 이 시기이다.
이건 본인이 생각하기에, 비슷한 시기에 먼저 벌어졌던 남유다 왕국의 멸망과 유대인 바빌론 포로기하고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잠언과 전도서의 전파)

내가 무슨 세계사 고대사 전공자는 아니니 이런 식으로 성경을 세상 지식에다가 끼워맞추는 건 좀 조심해서 최대한 신중하게 언급하려 한다만.. 저 정도면 유의미하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긴 한다.
"한자 속에 담긴 창세기" 이런 것도 좀 무리수 어거지가 없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양 양(羊) 자가 아름답다, 의롭다 등의 굉장히 좋은 뜻의 부수로 쓰이는 건 우연이 아니어 보인다. 물론 이런 건 다 심증일 뿐이다~~

4. 보너스: 프랑스와 중국에서 역적의 최후

1757년, 프랑스의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엔’은 행차 중이던 국왕인 루이 15세에게 난입해서 칼을 휘둘려 시해하려다가 실패하고 붙잡혔다.
그는 사형 집행에 앞서, 다리 주리 틀기,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꼬집히기, 그렇게 꼬집힌 상처 부위에다가 뜨거운 액체 유황이나 납 들이붓기 같은 끔찍한 고문을 무려 두 달 동안이나 당했다.

공범이나 배후가 없이 단독 범행임이 밝혀진 뒤엔 이 사람도 말의 뒤에다가 팔다리와 목을 연결하고 잡아 당겨서 뽑아 버리기, 즉 거열형으로 처형 당했다. 판결문부터가 깔끔하게 “피고인을 사형에 처한다”가 아니라 “피고인을 …이렇게 죽인다”로 커스텀 맞춤형-_- 처형 방식이 아주 디테일하게 적혀 나왔다.

왕인 루이 15세 당사자조차 “짐이 실제로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닌데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냐”라고 이의를 제기했을 정도지만, 주변에서 일벌백계를 보여야 된다면서 만류해서 형이 저렇게 집행됐다.

한편, 1864년엔 중국 청나라에서 태평천국 운동이 완전히 진압됐다. 이때는 나라가 태평천국이라는 내란과 아편 전쟁이라는 외환 때문에 대단히 어렵던 시절이었는데..
창시자인 홍 수전이 자살 내지 타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아들 ‘홍 천귀복’은 도망쳤다가 붙잡혀서 겨우 15세의 나이로 능지형을 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 도망을 잘 쳤으면 시골에서 자기 정체를 깔끔히 세탁하고 잠적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그런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너무 곱게 자란 금수저였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시피한 코흘리개 응석받이였다. 시골에서 궂은일을 도저히 할 수 있지 않았다.

얘는 태평천국이니 정치니 아무 관심도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했고, 고문 도구들을 보고는 무서워서 울면서 자기가 아는 것을 몽땅 다 술술 불었다. 그래서 투옥 기간 동안 딱히 험악한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비의 죄를 물려받는 바람에 꼬박 하루 동안 산 채로 1000군데가 넘는 칼빵을 당하면서 살점이 파였고, 아파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정말 비참하게 죽었다. 아편을 잔뜩 먹이거나 심지어 미리 죽여 버린 뒤에 살을 파내는 자비 같은 것도 없었다.

태평천국은 뭔가 태조의 입맛대로 마개조된 사이비 신정국가를 지향했다는 점, 기존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않은 점, 10수 년 남짓밖에 못 가고 망했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의 태봉 궁예와 좀 비슷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원본이 기독교냐 불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만, 사건이 발생한 시기의 유사성(1800년대), 그리고 관군과 반군 사이에 악에 받쳐서 항복한 포로까지 몽땅 몰살했다는 점에서는 홍 경래의 난과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한편, 중국에서 능지형이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집행된 건 1905년 2월, Fou Tchou-Li (또는 Fu Zhu-Li)라는 죄수라고 한다. 이 사람도 VIP를 살해한 정치범..
이건 서양 선교사가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였다면.. 굉장히 끔찍할 것이다.
저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인권 천국이 따로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1/08/21 08:35 2021/08/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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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차우세스쿠의 몰락

1945년 4월 말,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 당하고 처참하게 시신 능욕을 당하는 걸 보고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으며, 자살한 자기 시신을 철저히 화장해 없애서 적에게 신원 확인이 안 되게 하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치열 대조를 통해 히틀러의 시신이 확인됨)
무솔리니가 죽은 지 겨우 이틀 뒤에 히틀러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뒤 1989년 12월 말,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니콜라 차우세스쿠가 시민 혁명에 의해 축출되고 처형 당했다. 20세기의 독재자 중에서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번엔, 이 사건을 접하고는 평소에 켕기던 게 많아서 “우리도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 되는 거 아냐?”라고 와들와들 떨고 당황했던 인간들 중 하나는 북괴 김씨 일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당연히 주민들이고 군인이고 서로 더욱 감시하고 밀고하게 만들고, 그런 비생산적인 짓거리에 세금과 공권력을 더욱 투입하고..
북한은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폐쇄적이고 내부에서 항쟁, 혁명, 쿠데타 같은 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형태로 사회 구조가 더욱 썩고 곪아 버렸다.

영화 “Downfall/몰락”(2004)은 히틀러가 전쟁에서의 패색이 짙어지자 부하들을 탓하며 광분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행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역시 항복 열흘쯤 전부터 원자폭탄 두 방 맞은 것 하며, 히로히토 천황은 어린 신민들을 위하야 어엿비 너겨 항복을 결단하는데 밑에서 또라이 같은 장교들이 항명하여 쿠데타를 벌이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본에서 스스로 ‘일본 패망’ 이딴 식으로 영화 제목을 붙인 건 당연히 절대 아니다.. ㅋㅋ 저건 우리나라 개봉 때 붙은 로컬라이즈된 제목이다.
이 둘은 동양과 서양에서 제각기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전범국이었던 두 나라가 말기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영화들이라 하겠다.
독일의 히틀러는 총통으로서 국가 원수와 군 사령관 역할을 겸한 반면, 일본 천황은 신민들에게 얼굴조차 안 비치는 신이고 밑에 육군과 해군이 제멋대로 놀면서 폭주했다는 차이가 있다.;;

독일이 패망하는 영화가 제목이 Downfall인데.. 일본이 원폭 두 방을 맞고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을 때 일본을 상대로 시행되려 했던 특급 전면전 작전의 이름도 Downfall이었다.
북괴 정권이 일제나 나치 독일처럼 멸망하지 못하고 김씨 일가가 차우세스쿠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2. 중요한 개념 정리

(1) 남한과 북한이 이산가족들의 눈물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서로 왕래를 금지하는 이유는..

  • : 간첩, 공작원들이 지령 받고 와서 불순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 : 자기 주민들이 바깥 사정을 알게 되고 자기 체제의 치부도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고 이념 앞에서 가족도 없고, 남한 체제에 동화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이 강제 개조된 인간흉기만을 남한에 공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반대로 남한에서는 그 어떤 종북분자들도 아예 북으로 가서 눌러앉아 살라는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OK???

이게 반박불가인 팩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디 반박할 테면 반박해 보셔~)
그러니 이 본질적인 방해 요인을 해소하지 않고서 남북 교류니 협력이니 개방이니 헛짓 하는 건 전부 그냥 돈지랄 정치 쑈 사기극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 정세가 바뀌면 언제라도 파토 날 수 있다.
자유로운 서신 왕래나 전화 통화 하나 없이 무슨 개방이여 미친..

(2) 종북과 좌빨은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속성이다.

  • 좌빨: 북괴에 대한 호감도나 충성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증세, 공유 위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바꾸고 싶어함. 부자들 증오하면서 자기는 부자가 되고 싶어함.
  • 종북: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구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괴 수뇌에게 충성하고 저쪽에 못 퍼 줘서 안달. 미국/일본 잣대와 중국/북괴 잣대가 심각하게 일관성 없음.

그러니 서로 다르긴 하다. 종북은 아니고 좌빨만 강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둘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만 해당하고 다른 하나가 완전 강경하게 정반대인 사람은 거의 없다. 미사일 아니면 발사체, 간첩 아니면 활동가(!!)라는 차이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오늘날의 북괴는 무슨 스탈린, 레닌이 어떻고 하는 공산주의 집단은 아님.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공산주의자의 수법'만 그대로 계승해서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게 핵심..

3. 현실 직시

(1) 고래잡이를 근절시켜 준 것은 그린피스의 무식 과격한 시위가 아니라 고래기름 대체재의 개발이었다.

(2) 고문과 강압수사를 이만치라도 없앤 건 DNA감식, CCTV 등의 과학수사이지, 민주팔이 데모꾼들의 깽판 시위가 절대 아님.
민주화를 골백 번 한다 해도 고문과 강압수사를 동원해서라도 용의자를 잡아내야 할 강력 범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3) 산의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게 하고 벌거숭이 민둥산을 푸르게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은.. 무슨 자연 보호 운동 따위가 아니라 화석연료이다(땔감의 역할 대체). 그리고 그 더티한 화석연료조차 쓰지 않아도 되게 해 준 것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원자력이다!!

(4) 1940년대의 일제를 굴복시킨 것은 사랑의 원자탄 fat man과 little boy이지, 무슨 아가리 파이팅이나 맨주먹 항쟁 따위가 아니었다.
(아 물론, 일제를 굴복 항복시켰다고 해서 한반도가 100% 자동으로 해방되지는 않을 수 있었고, 일제만 물러난다고 해서 거기가 자동으로 한국인 소유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거기부터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기여한 것도 약간 있음)

(5)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잘 정착한 건 그나마 독재 흉내나 좀 냈다는 대통령들부터가 사실은 민주주의를 적극 추구했으며, 호구에 가깝게 너무 착하고 선량하고 순진해 빠졌던 덕분이다. 세상에 어느 정신나간 바보 등신 독재자가.. 자기더러 물러나라고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다치자 문병을 갔으며, 너희들이 장하다고 칭찬을 했느냐 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선량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데모질 좀 해 봤자 옛날의 북한, 중공, 헝가리, 캄보디아처럼, 요즘 미얀마처럼 총칼과 탱크에 진작에 싹 다 진압되고 갈려 나갔을 것이다.

아이고 이런 예가 얼마나 더 있을까? 현실을 좀 똑바로 직시하도록 하자.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니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오로지 "일제와 독재에 항쟁"밖에 없는 줄 안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은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부족해서 김씨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느니,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을러서 남한보다 못살게 됐다느니(혹은 미국놈들이 경제 봉쇄를 해서-_-) 같은 개 헛소리가 찍찍 나오는 것이다. 이건 사상과 분별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4. 사상 단속

본인의 지인 중에는 현역 군 장교도 있고 국· 공립대의 교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아하니 이분들은 소속의 특성상 개인 SNS에서 정치· 종교 분야의 자기 사상과 견해를 표현하는 것에도 좀 제약을 받는 것 같다. 상부에서 자기들의 SNS 계정까지 모니터링이라도 하는지, 몸을 사리시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알기로 공무원은 타 영리 활동 겸직(사교육 교사, 대리운전, 알바 등..)이나 노조 설립, 정당 활동 정도가 금지이다. 비영리로는 시인 등단까지도 가능한 걸로 아는데.. 왜 업무 외의 영역인 사생활에 저런 제약이 가해지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런 지엽적인 사상 단속은 그리도 꼼꼼히 하면서..
지금 공립 학교에서 어린애들한테 철저하게 정치 이념을, 그것도 매우 해롭고 악하고 불순하고 잘못된 쪽으로 주입해 넣고 있는 전교조 교사들 단속은 교육계에서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난 이에 대해 깊은 회의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교사를 뽑을 때 인성 면접에서 다같이 “김XX 개XX”를 소리내어 복창하고 동의시키든가, 그게 민망하고 남사스러우면 임용 시험에서 필적 확인 문구로라도 저걸 필사시켜야 하지 않나 싶다.
민망하고 남사스럽다고 최소한의 인증을 안 하다 보니 지금은 교육계가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적화됐기 때문이다.

사상이 저쪽으로 불량한 놈들은 사형, 추방, 삼청 교육대, 정신병원 중 하나가 마땅하겠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법조인, 성직자, 정치인, 교육자 같은 직업은 절대로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냥 사기업 월급쟁이나 자영업 장사로 자기 전공 기술만 이용해서 밥벌이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권위와 영향을 행사하는 직업은 절대로 넘볼 수 없게 해야 한다.

5. 죄책감??

또한 본인은 군인(특히 일개 병사가 아니라 사관생도나 장교)이나 사형 집행관이라는 사람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쓸데없이 죄책감 운운하는 게 굉장히 싫고 마음에 안 든다.
그건 의대생이나 현업 의사가 무섭거나 비위 상한다고 해부 실습 내지 수술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그럼 애초에 그 업계로 가질 말았어야지..

사형수한테 밧줄 씌우고 교수대 버튼 누르는 교정직 공무원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불쌍한 피해자 유족을 대변하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어디 뱃대지가 불러서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북 통일이니 협력이니 하기 전에, 먼저 북한에 올바른 통치 체제를 이식하고 개방을 시키고 서신과 통신 왕래라도 시켜야 된다. 그게 억만 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
인과관계와 우선순위를 이렇게 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이런 게 정치 성향이나 종교관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사항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비정상인가..?? ㅡ,.ㅡ;;;

내 경험상 필요악을 없애자고 선동하는 놈들은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절대악이 아닌 적이 없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8/18 08:35 2021/08/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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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찬송가에 수록된 제일 최신곡

한때 우리나라 교회에서 널리 쓰인 찬송가는 잘 알다시피 558곡짜리 통일 찬송가였다.
(난 21세기 새찬송가라는 건 진지하게 사용하고 분석해 본 적이 없어서 얘에 대해서는 뭐라 단정적으로 말을 못 하겠음. 그래서 라떼 옛날 것 기준으로..)

통일 찬송가는 편찬 위원들의 창작곡을 일부러 집어넣은 것을 제외하면, 수록곡들 중에 제일 최근에 만들어진 것은 1938년작인 “온 세상 위하여” 정도였다. (명목상 이것보다 미묘하게 더 최근인 곡도 있긴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루도록 하겠음)

요컨대 이 클래식 찬송가들은 대체로, 사실상 전부 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핵무기, UN 따위의 등장 이전 말이다.
난 개인적으로 저것들이 등장하기 전과 등장한 후의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생활 방식은 서로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또한 음악 자체만 해도.. 내가 잘은 모르지만 국민악파니 신고전주의니를 거친 뒤, 20세기 중반쯤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실용/세속 영역에 속한 '현대 음악'이 주류로 등장했다. 통상적인 클래식 장르는 뭔가 매니악한 별개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성탄절을 소재로 하는 노래들도 1940년대쯤부터 예수 성탄 찬송보다는 세속적인 캐롤로 확 바뀌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the Christmas song 등..
한때는 롤스로이스가 엘비스 프리슬리한테도 “당신 같은 딴따라한테는 우리 차의 품격이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퇴짜 놓고 차를 안 팔았을 정도였던 것 아시는가? (그래도 나중엔 결국 팔았다고 함)

그리고 분야를 완전히 바꿔서 과학 쪽으로 가면.. 지금 지구의 대기는 이산화탄소 농도만 증가한 게 아니라 방사능도 전지구적으로 극미량이나마 증가해 있다고 한다. 원자폭탄 투하와 각종 핵실험 때문에..
물론 그게 인체에 당장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 변화에도 민감한 초정밀 기계를 만들 때는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오죽했으면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강철이 필요하다고 태평양 전쟁 때 가라앉은 일본 전함의 잔해 고철을 끄집어내서 재활용할 정도라고 한다. 바닷물 속에 쳐박혀 있으면 다른 방식으로 부식될지언정, 방사선으로부터는 완벽하게 차폐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학 기술은 공기 중에 정말 새 발의 피만치도 들어있지 않은 방사능을 감지하고, 방사성 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도 하고, 납 성분도 덤으로 감지해서 무연 휘발유까지 만드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지질학에서 6500만 년 전, 46억 년 전 할 때의 before present 기준 연도는 바로 이런 관측이 시작된 시기 근처인 1950년 1월 1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처럼.. 195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찬송가들은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철과 비슷한 대표· 상징적인 의미가 영적 분야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산마다 불에 탄다 고운 단풍에” 같은 창작곡은 1967년작이다~~ ㅎㅎ

2. 앨버트 심슨, Once it was the blessing

앨버트 심슨은 찬송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를 작사한 캐나다의 목사, 신학자이다.
이 사람이 작사한 찬송가 중에는 저것 말고도 "Once it was the blessing"이라는 게 있다.

"한때는 난 오로지 복만 잔뜩 받고 싶어했는데 지금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한때는 난 '필'에 꽂히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말씀을 더 좋아합니다.
한때는 열심히 간구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하나님이 날 사용해 주시길 원합니다.
...
한때는 내 혼자 뭘 열심히 해 보려 애쓰고 낑낑댔지만 지금은 난 그분 안에서 평안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해 있고 그분이 모든 것이십니다."


송 명희 시 같은 대구로 가득하면서 신앙 생활과 영적 성숙의 본질이 잘 담긴 굉장히 훌륭한 시임이 틀림없다.
본인은 몇 년 전에 울 교회의 주보를 통해서 이 시를 처음으로 접했다. 담임목사님께서 엄청난 학구파 독서광에 거의 걸어다니는 신앙 서적 검색엔진 급이신 분이어서..; 온갖 출처로부터 신앙 생활과 관련된 유익한 글이 있으면 일부 excerpt를 소개하곤 하셨기 때문이다.

난 신앙 서적 검색엔진은 아니지만 회중 찬양 선곡과 인도 짬이 10수 년.. 내 찬송가 책이 다 낡고 성경책 이상으로 너덜너덜할 정도로 책을 많이 뒤진 상태였다. 걸어다니는 찬송가 검색엔진은 얼추 된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복음 찬송가' 책에 저 시와 비슷한 내용의 가사가 담긴 신곡을 본 적이 어렴풋이 있었다. 직접 불러 보거나 들은 적 없이, 악보를 눈으로 대충 읽고 지나갔던 기억만으로 말이다.

그걸 찾아냄으로써 "768장 복을 바라던 나 주를 바라고"가 울 교회에서 회중 찬송 때 최초로 소개되었다. 요런 것도 찬양 인도자가 경험하는 작은 보람이다.

기존 통일 찬송가에도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이라고 곡이 실려는 있지만..
얘는 가사가 굉장히 딴판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사람이 성숙하여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원문의 저런 반전 역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은혜를 구했더니 은혜, 신유를 구했더니 신유..;;;; 바뀐 게 없잖아~~ ㅋㅋㅋㅋㅋ

3. 웬일인가, 웬 말인가

우리말 찬송가 중엔 ‘웬일~’ 이렇게 놀라움, 경악을 뜻하는 ‘웬’이라는 글자로 가사가 시작하는 곡이 두 개 있는데.. 작사자는 서로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멜로디가 동일하다. 가사가 5절까지 있는 것까지도 같다~!
하나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라고 예수님이 감히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다니~! 그렇게 감격하고 놀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웬일인가, 내 형제여”라고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너 그렇게 안 믿다가 죽어서 지옥 가겠구나, 마귀를 좇고 재물만 좇다가 나중에 쫄딱 망하겠구나, 불에 활활 타겠구나, 인실X을 체험하겠구나..;;” 이렇게 경고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내용이다. 찬송가에 속해 있지만 내용은 찬양이라기보다는 복음성가에 더 가깝다.

게다가.. 찬송가 가사라는 게 보통은 한국어 번역이 영어 원문보다 더 부드럽게 희석되고 미화되는 편이다. 영어에서 hell이 있다 해도 그대로 번역 안 하는 편인데..
“웬일인가 내 형제여”는 한국어 가사가 영어보다도 ‘지옥’이 더 많이 나온다~!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번역 스타일인 것 같다.

이 정도로 청자에게 부정적인 경고, 책망조의 가사는 개인적으로 딴 데서는 주찬양 1집 “참 소경” 정도밖에 못 봤다.
“(말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를 못 하는 사람이 벙어리, 앞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소경 등등등~)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 당신은 병신이 아닌가” 이런 가사이다.;; 이건 가사가 노래 없이 시의 형태로 먼저 존재했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영어 찬송가는 tell과 롸임을 맞춰서 hell이 나오는 경향이 있다. “웬일인가..”뿐만 아니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도 딱 저 롸임이 존재한다~!

4.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유명한 찬송가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지금의 형태로 완성됐기 때문에 내력이 좀 복잡한 곡이다. 깔끔하게 단일 작사자나 작곡자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원곡은 스웨덴 민요 멜로디에다가 언어조차도 영어가 아니었다고 한다. 독일어와 러시어 가사부터 먼저 있다가 나중에 영어 번역이 몇 가지 나왔으며, 가사는 3절까지 있던 것이 추후에 4절이 추가됐다.
이 때문에 이 곡은 처음 1, 2절은 자연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8편 같은 분위기이지만 3절은 "살아 계신 주" 같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 얘기, 그리고 4절은 무려 재림 얘기까지 기독교 교리가 두루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엔 1949년작 영어 가사가 채택되어 있다. 이거 가사를 번역한 사람이 4절을 추가하고 멜로디를 개작도 한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은 연식에 비해 최종 작사· 작곡 연도가 2차 세계 대전까지 지난 굉장한 현대라고 기재되어 있다.
게다가 영어 가사만 바리에이션이 있는 게 아니다. 한국어 번역도. 가톨릭 쪽 번역과 개신교 쪽 번역이 서로 나뉜 상태이다.

이 곡의 영어 가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2절에서 "그랜저"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grandeur는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의 이름으로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웅장함, 장관' 이런 뜻을 지닌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When I look down from lofty mountain grandeur.. 그랜저가 저렇게 쓰인 걸 본인도 난생 처음 봤다.

그랜저는.. 한때 지존파의 살생부에 이 차의 차주가 올라가 있을 정도였고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랜저로 답했습니다" 이런 정신나간 CF도 만들어졌을 정도로 고급차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그랜저가 30년 전만치 고급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도 여전히 아무나 탈 수 있는 서민형 차는 아니다.

5. 샤론의 꽃 예수

멜로디가 굉장히 예쁜 곡답게, 현대에 속하는 1920년대에 발표된 곡이다.
얘는 4개의 절로 된 가사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결교의 4대 강령과 순서대로 대응하는 것 같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그래서 신유에 해당하는 3절을 보면 얘는 찬송가 중에서는 흔치 않게 “질병을 고쳐 주소서”라는 간구가 들어있다~!

아울러, 영어 가사는 똑같이 my life이지만 1절은 중생(거듭남)이라는 갓 구원 문맥이기 때문에 “내 생명”이고, 2절은 그 뒤의 성화되어 가는 모습(성결) 문맥이기 때문에 “나의 삶”인 것도 주목해 보자.
아 2:1 rose of Sharon은 ‘무궁화’라고 통용되는 단어인데.. 정작 무궁화를 국화로 쓰고 있는 나라에서는 장미나 무궁화도 아니고 수선화라고 더 널리 알려져 있다. ㅎㅎ

이렇듯, 어떤 찬송가는 아주 원론적이고 무난한 메시지만 있는 게 아니라 특정 노선이나 교파의 교리를 좀 더 부각시킨 경우도 있다. 이러니 종말이나 천국을 소재로 한 찬송가는 가사를 쓰기가 난감해진다.

그런데.. “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이 거역하는 인생을 은혜로 택했네 … 자랑하지 않게 함이요, 하나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 요 곡은..
개신교/기독교라면 차이가 존재할 리가 없는 구원과 은혜라는 공통 교리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예정론 냄새가 같이 느껴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꼭 장로교가 아니어도 크게 신경 안 쓰고 부르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1/07/30 08:33 2021/07/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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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십용사

본인은 작년 말쯤에 본인과 같은 진영에 속한 이웃 교회 형제들과 교제할 일이 있어서 화성 동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반원 모양의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시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외곽의 도로에는 웬 '십용사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흠, 육탄 십용사 멤버 중 일부가 이 지역 출신이기라도 했나 보다.

3년쯤 전에 도로명을 통해서 우연히 이 윤탁 한글 영비를 알게 된 것처럼.. 도로명을 잘 지은 게 나름 지역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저기는 아예 육탄 10용사 기념 공원까지 길목에 있는 걸 봤다. 다만, 시간과 동선 관계상 개인적으로 들러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군사 정훈 차원에서 기리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 중, 육탄 10용사는 극히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6 25 사변 "이전"의 굉장한 옛날이 배경이어서 이질적이다. 1년 남짓 전이던 1949년 5월, 지금 같은 휴전선이 아니라 38선이 아직 유효했고 개성 시내가 남한 땅이었던 시절이다.

문제는.. 38선에 따르면 개성 시내는 남한이지만, 바로 북쪽의 고지대인 송악산 중턱과 정상이 북한 땅이어서 남한이 방어하기가 매우 불리했다는 것이다. 북괴는 6· 25를 벌이기 전부터 여기에서 수시로 툭탁거리고 국지전 시비를 걸면서 남한을 귀찮게 했다. 그래서 그걸 견제하려면 북괴가 송악산의 남쪽 기슭에 만들어 놓은 벙커라도 파괴해야 했다.
(뭐, 그 시절 용어로는 벙커 대신 러시아어 '토치카'가 더 즐겨 쓰인다. 휴전선의 길이도 킬로미터가 아니라 꼭 155 '마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특공대에 자원해서 혈혈단신으로 괴뢰의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까 버리고 전세를 뒤집고 송악산 고지의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 열 명이었고 '육탄 10용사'라고 전해진다. 이들은 적진에서 장렬히 산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진정한 군인 애국자라고 아주 성대하게 기념했다. 동상 만들고 노래 만들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름을 딴 군부대와 상 등도 제정하고 별 짓을 다 했다.

전쟁터라는 게 한 사람의 뻘짓 때문에 수십 명이 몰살당할 수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 덕분에 수십 명이 목숨 건질 수도 있는 동네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보다 인명 경시 풍조가 더 심했으며, "이기든지 죽든지", 멸사봉공 진충보국 같은 관념이 더 강했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송악산 기슭과 개성 시내는 6 25 전쟁 때 결국 지못미가 돼서 완전히 북한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저 사람들도 죽은 게 아니라 작전에 실패했으며, 전부나 일부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도 육탄 10용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병사가 출연해서 자기 고향과 가족 인증을 했댄다..;;

너무 옛날 일인지라 이제 와서 정확한 진실을 알기는 난감하다.
다만, 북한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언급한다고 해서 걔네들 말이 언제나 다 맞는 건 아니다.
북한에서 뜬금없이 효순이 미선이 자리를 만들고 추모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걔들이 무슨 대공 안보 관련 사건에 휘말렸거나 미군의 '악질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무슨 광주에 투입됐던 대남 공작원의 묘지인지 위령비인지를 만들었다면서 5 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걔들은 자기와 아무 관계 없는 4 19 의거나 6 29 민주항쟁 등도 자기들이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제멋대로 기념하고 선동 자료로 써먹는다.
그리고는 정작 진짜로 침투했던 대남 공작원이나 6 25 공산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면서 존재를 부정하고 유해를 가져가지 않는다.

즉, 이런 쪽으로는 북괴의 대처가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반응만을 직접적인 근거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육탄 10용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황상 그 시절에 10명의 특공대가 조직돼서 폭탄을 들고 송악산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는 사실 자체는 팩트이지만.. 그 이상 정확한 사건의 결말을 알기는 어려워 보인다. 거기가 무슨 철원 백마고지마냥 6 25 때 피로써 수복해 내서 지금 전해지는 영토인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이 옛날처럼 카미카제 같은 전술이 마냥 미화되는 시기인 것도 아니니..

그러니 육탄 십용사는 문자적 적용보다는 '영적 교훈'이 더 의미를 갖는 영역인 것 같다. 북괴 몰아내고 개성 시내를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해당 장소에 대한 고증과 재조사 발굴이 대대적으로 필요하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 현충원에 있는 육탄 10용사 현충비. 굉장히 옛날(2007년!)에 찍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사무엘

2021/07/05 08:35 2021/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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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역사 인물 관련 메모

1. 나이, 종교

옛날 역사 인물들은 중요한 활동을 하고 행적을 남긴 시기가 굉장히 어리고 젊은 경우가 많다.
일례로, 조선 연산군이 겨우 30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걸 알고는 굉장히 놀랐다. 정말 짧고 굵게 깽판 치면서 나라 말아먹다가 갔구나..

그리고 본인은 김 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한 4~50대 나이쯤에 순교한 거라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막연히 생각해 왔다.;;
위인전 삽화에 묘사된 노안 중년 인상으로부터 형성된 편견..;; 종교가 나하고 다르다 보니 그리 깊게 진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것, 그리고 20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일제나 공산당에게 순교한 목사들의 평균 연령 등을 감안하면 이게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그랬는데 실제 연표를 보니.. 딱~ 윤 봉길 의사 같은 겨우 20대 중반 나이였다..;;

김 대건은 "가톨릭으로부터의" 개종을 거부하고 순교한 반면,
저 때로부터 300여 년 전, 잉글랜드에서 불운의 9일짜리 여왕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하고 성공회를 선택한 대가로 순교했다. 나이는 겨우 18세.. 고3~대1, 유 관순 나이였다.

물론 저 처자의 경우, 종교 때문만은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피의 메리 여왕에게 위험한 입지였던 것이 고려됐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종교만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메리가 제안했는데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 대건, 제인 둘 다 목이 잘렸다. 전자는 칼로, 후자는 도끼로 잘렸다는 차이만 있을 뿐..;;

요즘은 최악질 흉악범한테도 사형 집행을 안 하고 너무 인도주의적으로 대해 주는데.. 옛날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사람을 목을 치거나 심지어 불태우던 시절까지 있었다니.. 참 극과 극이 따로 없다. 반대로 그때는 사람들 사고방식이 지금 같은 황금 물질 만능주의가 아니라 뭔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게 더 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가난하고 불편하고 열악한 시절이다 보니 애들이 요즘 애들보다 훨씬 어려서부터 철 들고 어른스러웠을 것이고(그래야만 '생존'을 할 수 있..)
애들 교육도 툭하면 줘 패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잔혹 엄격하고 반인격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자기 신앙을 위해 목숨을 선뜻 바칠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대단하기도 하다.

끝으로 가톨릭이 중세 유럽에서는 남을 박해 '하는' 편이었는데.. 조선이나 일본 같은 극동 아시아로 가면 쟤들도 박해를 '당하는' 쪽에 있기도 했다는 것 역시 생각할 점이다.

2. 지능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이 방원은 역대 조선 왕들 중 과거 시험(문과) 합격 이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건 물론 고려 시절에 응시했던 과거였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초대인 할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명예 박사가 아니라 논문을 써서 취득한 정식 박사학위를 소지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것도 자국이 아닌 천조국 일류대에서 취득한 박사이고, 심지어 지도교수조차도 저 제자를 졸업시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조국 대통령이 됐다.;;; (우드로 윌슨. 할배와 윌슨 모두 각각 자기 나라에서 유일한 레일 박사학위 소지 대통령임)

최 규하는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전임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한 승계를 경험했으며(권한대행), 정당 활동 없이 외교관과 국무위원/총리 커리어만으로 대통령이 된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재임 기간은 윤 보선보다도 더 짧았고, 존재감 역시 제일 없다. 죽은 뒤에 개인적인 연고지나 서울 현충원이 아니라 제일 평범하게(?) 규정에 따라 대전 현충원에 묻힌 것으로도 현재까지 유일하다.

셋 다 당대엔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3. 경성제대 학생들

인터넷을 뒤지다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1920년대 말의 꽤 흥미로운 사진을 하나 발견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경성 제국 대학 문과의 어느 조선인 학급 학생들의 단체 사진이라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들은 한반도 최고의 똘똘이 엘리트들이었다.
일제 시대엔 법적으로 ‘대학교’라는 게 한반도에 경성 제국 대학 단 하나밖에 없었으며, 얘들은 바로 거기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조선인이 설립했던 연희, 보성, 명륜, 숭실 등의 전문 학교들은 교육 수준이 대학교에 준하긴 했어도 대학교와 동급이 아니었다. 거기를 졸업한 뒤엔 경성 제대 같은 곳으로 편입을 해서 보충 교육(?)을 이수해야만 완전히 대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때 경성 제대 교수와 학생들은 특권 의식이 장난이 아니었지 싶다.

이 사진에서 맨 앞줄 왼쪽.. 즉, 좌측 하단에 있는 사람이 ‘서 두수’였다니 굉장히 흥미롭다. 서 남표 전 카이스트 총장의 부친이고 하버드 대학교 한국어/한국학과 교수를 역임한 그 사람 말이다.
서 두수 말고 내게 익숙한 이름은 이 희승밖에 없다. (사진에서 맨 앞줄 좌측에서 넷째, 우측에서 둘째인 사람) 서 두수(1907-1994)는 이 희승(1896-1989)보다 10살 이상 더 어렸다. 그러고 보니 서 교수는 공 병우 박사와 거의 동시대 동갑내기였구나.

4. 고려 시대

(1) 고려 시대엔 무신 정권 기간이란 게 있었고 몽골의 침입과 원나라 간섭기도 있었다. 조선 정부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면,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피난을 간 적이 있었다.

(2) 그리고 고려 말기의 거의 동시기에 문 익점은 목화를, 최 무선은 화약을 들여 왔다. 다만, 원나라의 입장에서 목화는 화약만치 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으며, 문 익점이 붓두껍에다가 목화씨를 숨겨서 기적적으로 밀반출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3) 유능한 배우가 연기만 잘하지 작품을 보는 안목은 부족해서.. 맨날 엄한 망작 졸작 괴작에만 출연하는 바람에 커리어를 말아먹는 경우가 있다. 문 익점은 격변의 시기에 친원이냐 반원이냐, 정 몽주냐 이 성계냐 같은 정치적인 줄을 매번 잘못 서서 독박을 쓰곤 했다. (파괴왕..;;;)
하지만 반대파가 보기에도 문 익점은 그렇게 정치질을 하는 위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관직을 빼앗기는 선에서 그쳤지, 역적으로 몰려 목이 달아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4) 정 몽주는 우리의 흔한 통념과 달리, 밤이 아니라 벌건 백주대낮에 자객의 철퇴에 맞아서 죽었다;;; 선지교/선죽교의 돌바닥에는 정 몽주의 혈흔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루미놀 시약 같은 걸로 검출 가능하려나?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 정 몽주나 최 영 같은 사람이 죽었고, 초창기에 왕씨 일가도 조직적으로 학살 당했으며 심지어 왕자들끼리도 숙청이 벌어지는 등 피바람이 많이 불긴 했다.

5. 조선 시대

  • 사후에 '종-조' 같은 시호를 못 받은 왕: 연산군, 광해군
  • 대원군: 자신은 왕이 아니지만 아들이 왕이 되었고 아들 이전에 섭정까지 했던 사람이다. 조선의 역사상 덕흥(선조), 정원(인조), 전계(철종), 흥선(고종) 네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마지막 흥선대원군이 가장 유명하다.
  • 생전에 퇴위한 상왕: 1~3대(태조, 정종, 태종), 그 다음은 단종(세조에게..), 고종(일제에 의해..)이다. 그나마 태종은 자발적인 퇴위에 가깝다.
  • 사화: 총 네 번 있었다. 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을사(1545). 다들 조선의 건국 이후 150년 안에 발생했던 이벤트이며, 임진왜란 이전의 일이다. 결투나 자객 암살이 아니라 다들 임금한테 "저놈은 죽이시옵소서" 이러는 형태였다는 게 참.. 지저분해 보인다.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긴급조치가 취해진 때, 헌법이 고쳐진 때, 계엄이 선포된 때, 국민투표가 시행된 때 같은 아이템들이다. 흥미롭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9 08:35 2021/06/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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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관행

1. 향교와 서원

조선 시대엔 '향교'와 '서원'이라는 뭔가 유교 냄새가 나는 공공 교육 시설이 있었다. 이게 뭘 하던 물건이며 둘의 차이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난 잘 모르겠다. 종교 시설은 아니겠지만 일본의 신사 같은 느낌도 좀 드는데 말이다. 위키를 찾아보니 오늘날로 치면 각각 지방의 국· 공립대 vs 사립대 정도의 위상이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런 게 지금보다 더 많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심지어 조선 정부에서도 많이 정리하고 없앴다. 특히 서원 말이다. 너무 많이 난립하니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나라가 못 돌아갈 지경이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원에 무슨 초법적인 권한이 있기라도 했는지...?

이런 이유로 인해 오늘날은 행정구역상 인서울엔 향교와 서원이 공교롭게도 각각 딱 하나씩만 남아 있다.
먼저 향교는 강서구에 있는 양천 향교가 유일하다. 원래는 인지도가 완전히 듣보잡이었는데 서울 지하철 9호선에 '양천향교'라는 역이 대문짝만 하게 생김으로써 크게 유명해졌다.

이 향교의 위로는 '궁산'이라는 높이 80m 남짓한 언덕이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고층 아파트를 계단으로 오르는 정도의 수고만 하면 금세 정상에 도달해서 넓은 풀밭과 함께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아주 좋다.
다음으로 서원은 '도봉 서원과 각석군'이라는 이름으로 도봉산 기슭에 딱 하나 있다.

본인은 지난 2016년 말에 지하철 7호선의 종점인 장암 역 부근에서 수락산을 올랐을 때 '노강 서원'이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얘는 근소한 차이로 인서울 서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봉 서원과 막 멀지는 않은 거리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2017년 여름에 관악산을 올랐다가 과천 시내 쪽으로 하산했을 때는 산기슭에서.. 그래, 과천 향교를 본 적이 있었다. 등산을 다니면서 이런 쪽 견문도 넓어지는구나.

본인은 예전에는 산 속에 벙커를 보고는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가 수 년 뒤엔 거길 뒤늦게 다시 찾아가서 안에서 잠도 자고 온 것처럼..왔다.
그런 것처럼 향교와 서원도 처음엔 잘 모르고 사진만 찍어 놨다가 수 년 뒤에 이렇게 존재감을 다시 생각하고 의미를 재발견하게 됐다.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니.. 전국에 있는 교동· 교촌이라는 지명은 다 향교의 흔적이라고 한다.
음.. 그럼 교촌 치킨도 향교에서 유래된 것이었구나~! +_+ ㅋㅋㅋㅋ

2. 색깔

하양 - 노랑 - 초록 - 파랑 - 빨강 - 검정
이게 뭔가 사람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색깔 별 등급 내지 레벨 대응인 것 같다.
태권도 도복의 띠 색깔이라든가, 카트라이더의 레벨 별 면허증 색깔, 그리고 서울 버스의 등급 별 색깔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무지개 hue 스펙트럼과 얼추 비슷하지만 시작 지점이 빨강이 아니라 노랑인 셈이다.

그런데 옛날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 관료와 왕이 입었던 한복은.. 하양 - 초록 - 검정 - 파랑 - 빨강 - 노랑의 순으로 격이 올라갔던가 보다. 흠 그것도 아무렇게나 배치한 건 아니었군.

빨강이 격이 높은 색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임금님 곤룡포는 다 빨강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 만세~!" 이렇게 왕 코스프레(?)를 당하실 때 걸쳐졌던 옷도 빨강이었다(마 27:28 등).

그 다음으로 노랑은.. 현대에서는 유치원 초딩, 초보, 조심· 주의의 상징이다. 병아리가 노란색이어서 그런지 스쿨버스나 어린이집 통학 차량도 전부 노랑이지 않은가?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노랑이 완전 고급스러운 색일 수도 있어서.. 중국을 포함한 동양에서는 노랑이야말로 황제의 색깔이었는가 보다.

대국을 받들어 모시던 조선에서는 노란색은 감히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군에 '원수' 계급은 반영구적인 공석인 것처럼.. 노랑은 그렇게 무기한 봉인돼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대한제국 때 탈중궈를 선언한 뒤, 끄트머리인 고종과 순종의 어진만이 노란 옷차림이다..;; 헐~

3. 종

우리나라 경주에는 신라 왕조에서 유래된 성덕대왕 신종, 일명 애밀레종이란 게 있다.
그리고 서울에는 조선 왕조에서 유래된 보신각 종(?)이 있다.
전자가 후자보다 시기적으로 600년이 넘게 더 앞섰다. 전자는 국보이고 후자는 보물이다. 하지만 둘은 용도와 심상이 굉장히 비슷하다.

요즘이야 새해가 됐을 때 보신각에서 타종 행사가 열리지만.. 먼 옛날(197, 80년대)에는 에밀레종도 타종했다. 텔레비전에서 서울과 경주의 타종 행사를 나란히 중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두 종 모두 문화재 보존을 위해 실물을 건드리지는 않고 있다.

그러다가 보신각 종은 1985년부터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경주 에밀레종을 복제한 새 종을 거기에다가 달아서 매년 타종하게 됐다.
그럼 경주에 있는 진짜 에밀레종은..?? 공식적으로는 1992년 이후부터 제야 타종을 중단했고, 박물관에서는 녹음된 타종 음향만을 주기적으로 쏴 준다. 이런 관계가 됐다.;;

보신각 종 원판은 상태가 안 좋아서 진짜 박물관에 처박혀서 영구 봉인된 듯한 반면, 에밀레종은 그렇지 않았다. 2003년까지 비정기적으로 타종을 좀 하다가 그 뒤로는 타종이 진짜로 중단됐다. 2020년에는 코로나 시국에도 오랜만에 타종한다는 보도 자료가 검색돼 나오지만, 그 뒤에 실제로 했는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3 19:34 2021/06/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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