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엔.. "조선/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망하지 않고 왕정인지 입헌군주제인지가 20세기 후반까지 유지됐다면?" 같은 낭만적인 상상을 배경으로 소설이나 드라마가 만들어진 게 좀 있다.

뭐, 현실에서는 조선이 그때 일제한테 안 먹혔으면 러시안스키들한테 먹혔겠지.. 이게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고 상황이 여전히 암울했겠지만 말이다. 러시아 제국은 한반도에 그렇게까지 큰 욕심이 없었던 것 같지만 후신인 소련 공산당은 자비심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이 위종이나 홍 범도 같은 애국자 독립투사가 소련으로 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친일 성향의 구한말 개화파들의 노선이 1900년대 이후까지 더 오래 지속됐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솔직히 "만약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고 일본이 졌다면?" 이건 현실적으로도 굉~~장히 설득력 있고 그럴싸한 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재로 한 대체역사물이 있다는 얘기는 난 딱히 못 들었다.

주 타겟이던 한반도가 세계적으로 별로 존재감이 없고 별로 장사가 안 되는 소재이기 때문이지 싶다. 그리고 그 당시엔 러시아가 이기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일본이 이기는 게 훨씬 더 극적이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즉, 현실이 픽션보다 더 픽션 같았으니 굳이 대체역사물이 또 나오지 않는 게 아닐까?

2차 세계 대전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에서 워낙 드라마틱한 전투 승리 내지 초인적인 인간 승리 스토리가 많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스토리에 창작 각색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전기/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전쟁 영화도 지금까지 한두 편 만들어진 게 아니다. 가령, 미드웨이 해전이나 진주만 같은 건, 진작에 영화가 만들어졌다가 후대에 각종 CG를 곁들여서 리메이크작이 또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인이 뻔히 다 아는 스토리만 곧이곧대로 차용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은 밀덕 역덕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가 워낙 많기 때문에 "만약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면? 조금만 핀트가 어긋났다면?" 이렇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자면 "만약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전땅크 대통령이 제 시각에 도착하는 바람에 그때 현장에 있었다면? 그때 폭발에 휘말려 순직해 버렸다면 세상이 지금과는 어떻게 달라지게 됐을까..??" 이런 것 말이다.

그래서.. 발상을 달리하여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대신 추축국 진영이 승리했다면? 혹은 추축국이 일부라도 그렇게 흑화하지 않고 연합국과 잘 지냈다면?"을 상상한 대체역사물이 좀 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것 일부만을 소개한다.

1. 비명(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찾아서 (1987) 복 거일 .. 독일만 망함

영어 공용화 논란 및 우파 진영 논객으로 유명세를 탔던 복 거일 씨가 소싯적에 발표한 소설이다. 나름 국내에서 만들어진 고퀄의 대체역사물이다. 얘랑 비슷한 스토리 전개로 예전에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대체역사물 영화가 한일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이 작품에서는 안 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실패"해서.. 이토 상은 부상만 입을 뿐, 1920년대까지 생존하며 장기 집권한다. 덕분에 일제 식민 통치나 대외 외교가 좀 더 젠틀하게 나간다.
정말 상상이 안 되지만 일본은 미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북 아시아를 무난히 접수한다. 2차 세계대전은 유럽 서부 전선 위주로만 벌어졌으며, 핵폭탄은 일본이 아니라 독일에 떨어진다. =_=;; (브레멘 & 드레스덴 ㄷㄷㄷㄷㄷ)

이로 인해 무려 국제연맹이 20세기 후반까지 존속하며, 한반도 역시 영원히 독립되지 못하고 대만이나 류쿠, 오키나와 같은 일본 식민지로 남는다.
일본은 미국, 소련에 이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느 2등 신민 조선인이 출생의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되고서 어찌어찌 한다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2. 높은 성의 사나이 (1962) 필립 K. 딕 .. 추축국이 몽땅 승리 (☞ 영화 소개)

이 장르의 거의 원조인 것 같은데.. 얘는 제일 비관적인 설정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이 암살 당해서 대통령이 못 되고, 뉴딜 정책이 시행되지 않고, 무기 대여법이 시행되지 않아서 2차 대전 유럽 연합국들이 빌빌대고.. 진주만 공습 때 미국의 함대가 몽땅 박살 난다.
결국 영국이 항복하고 미국도 독일· 일본의 합동 공격을 버티다 못해 조건부로 항복한다. 소련도 미국의 지원을 제대로 못 받으면서 독소 전쟁에서 패배해서 중세 시대로 되돌아간다.

유럽은 나치 독일 천지가 되고, 미국조차 서부는 일본, 동부는 독일이 접수하고 중부는 무법천지인 막장 상태로 전락한다.
전세계에 종교는 금지되고 히틀러 숭배만 허용된다. 독일의 과학력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일!!! 이 현실이 된다.
독일과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둘도 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은 견제 관계가 된다. 마치 현실에서 중공 VS 소련처럼..??

3. 당신들의 조국 (1992) 로버트 해리스 .. 일본만 망함 (☞ 영화 소개)

이 작품에서는 나치 독일이 우연한 계기로 에니그마 암호의 해독 체계를 바꿔 버리며, 이 때문에 연합국이 더는 맵핵을 쓰지 못하게 된다. 독일은 유보트로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 영국과 소련을 봉쇄시키고, 미국에 V2니 V3이니 로켓까지 날려보낸다.

결국 미국이 독일과는 강화 조약을 맺고, 독일은 세계 최강 패권국이 된다. 이 세계관에서는 일본만 핵폭탄을 맞고 그대로 항복한다.
뭐 이런 설정 말고는 얘는 30년 전 전의 "높은 성의 사나이"와의 변별성을 잘 모르겠다.

아, 참고로, 2번 "높은 성의 사나이"의 경우 굉장히 참신한 게.. 이 소설 내부에 또 가상의 소설이 있다고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고 만약 연합국이 승리했다면..??" 이렇게 뇌피셜을 펼치는데,

여기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무사히 집권한 뒤 3선 이상 연임을 하지 않고 물러나며, 히틀러는 패전 후 자살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된다.
그 뒤,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벌여서 소련이 작살나고 영· 미에 의해 분할된다. 그런데 그 뒤엔 영국과 미국도 서로 대립하게 된다. 흠..

흥미롭지 않은가? 대체역사물도 이런 식으로 상상하고 만들기 나름인 것 같다.
옛날 독일 영화인 '롤라 런'을 보면, 주인공이 집을 뛰쳐나갈 때 누구랑 부딪히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이 나비 효과마냥 완전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하물며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전쟁터라면 그런 간발의 타이밍 차이로 전황이 달라진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지 싶다. 그러니 이미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그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이런 걸 소재로 영화나 소설을 만드는 건 충분히 흥미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현실에서 벌어졌던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 광복은.. 그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이고 굳이 또 픽션으로 각색할 필요가 없는 기적적인 사건에 가깝다.
옛날에 어지간한 지식인들이 괜히 변절했던 게 아니다. 이제 항일 독립 운동이란 씨가 말라 버렸으며 일체의 희망이란 없고, 이놈의 일제가 망할 가능성이란 없다고 다들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상태로 세대가 바뀌게 생겼으니 신세대들은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지경이고.. "일제가 이렇게 갑자기 망할 줄 몰랐으니까"는 절대로 궁색한 변명이 아니었다. 이렇게 일제 시대가 1950년대 이후까지 계속됐으면, 독립 운동 대신 그냥 2등 신민 조선인의 차별 철폐, 인권 개선, 참정권 보장 따위를 요구하는 투쟁이나 벌어지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한테는 정서적으로 참 꺼림칙하겠지만, "조선이 영원히 해방되지 못했다면?" 이런 대체역사물이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 왕정이 계속 유지됐다면?"보다는 당연히 훨씬 더 더 현실적인 대체역사물인 셈이다.
심 훈의 "그날이 오면"은 우리 민족의 염원을 표현한 시일 뿐, 무슨 대체역사 소설은 아니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12/17 08:34 2021/12/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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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산-마곡: 지하철의 선형을 따라 뒤늦게 형성된 시가지

어떤 도시에 건물과 길이 평범한 직사각형 바둑판이나 방사형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곡선 궤적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면..
그건 지금은 없어진 과거의 철도 폐선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경주 성건동과 황오동 일대의 옛 중앙선 선로 주변이라든가, 서울 홍대 근처의 서교동 예술의 거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서울 지하철 5호선 발산역 인근의 건물 배치는 굉장히 흥미롭다.
얘는 폐선이 아니라.. 아래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지하철의 선로를 피해서 건물을 짓느라 형성된 궤적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발산-마곡 사이, 공항대로 북쪽의 땅은 2010년대 이전까지는 미개발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오죽했으면 마곡 역은 멀쩡히 건설됐던 뒤에도 2008년까지 12년을 미개통으로 봉인 당했을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7년경에 발산-마곡 사이의 풍경은 정말 저랬다. 그 당시에 본인이 직접 답사해서 디카로 찍었던 사진!)

그러니 여기는 고심도 땅굴을 팔 필요 없이 지면을 파헤치는 개착식으로 얕고 저렴하게 만들었으며, 애초에 공항대로라는 도로를 들쑤시지도 않았다. 그냥 옆의 공터를 대신 파헤치는 걸로 끝.. 그래서 마곡 역도 도로를 약간 비껴간 곳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다음의 송정역부터는 다시 도로 중앙 아래로 들어간다.

그리고 발산 역 주변의 경우, 김포 공항 방면의 엄청난 급커브 때문에 회전반경을 확보하기 위해 선로가 도로 바깥의 벌판(건설 당시에)을 약간 침범하는 것도 있다.
옛날에 지하철 1호선을 처음 만들던 시절에 시청-종각의 엄청난 급커브를 구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가 같이 떠오른다. 부족한 기술과 열악한 여건 하에서 저심도로 주변의 동아일보 사옥의 지하를 건드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광역전철 일산선(구파발-대화)도 나름 서울 지하철 5호선과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고 개통한 놈이다.
얘는 굳이 비싸게 FM대로 지하로 건설할 필요가 없는 널널한 구간은 아예 지상 고가 형태로 건설해서 약간 지상 지하 롤러코스터처럼 됐다.

그런데 5호선 마곡 역은 지상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 땅이 워낙 널널했으니 주변 공간을 미리 점유하면서 건설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티를 내서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고 인근의 발산 역 주변은 “지하철이 먼저 만들어지는 바람에 건물이 지하철을 피해서 건설된” 대단히 특이한 사례로 남게 됐다~!

2. 원형 시가지

우리나라에서 지도상으로 시가지가 확연하게 원형 방사형으로 만들어졌다 싶은 곳이 본인의 기억에 따르면 딱 두 곳 있다. 안산 선부동, 그리고 화성 동탄동 신도시.
전자는 정확하게는 육각형 모양이다. 원의 중앙에는 서해선 전철 선부 역이 지하로 지나며, 지상에는 선부/다이아몬드 광장이 있다.

후자는 완전한 원이 아니고 사실 반원의 크기도 안 되지만.. 그래도 선부동보다 반경이 더 큰 부드러운 원형이다. 원의 중앙에는 반석산이라는 언덕이 있으며, 원의 중심은 아니지만 근처에 경부 고속도로와 고속철 동탄 역이 있다.
저 두 곳 말고 다른 원형 시가지가 또 있는지 궁금하다.

3. 지하철역 바로 근처에 있는 보안 시설

청와대나 군부대처럼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보안 시설은 아무래도 시 외곽이나 산기슭 으슥한 곳에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하철역 바로 옆이나 근처에 그런 보안 시설이 자리잡은 경우가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그런 경우는 보안 시설이 먼저 있었고 그게 처음 생기던 시절에는 거기가 외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개발되고 지하철이 놓이게 된 것이다. 테란· 플토 건물의 주변에 저그 크립이 깔려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건물이 당연히 크립보다 먼저 지어진 것.. ㄲㄲㄲㄲㄲ)

  • 평촌(4과천): 4번 출구 주변에 웬 자원 재생 센터가 있다.
  • 가락시장(3/8): 그 유명한 중앙 전파 관리소가 있다. 지방으로 이전할 거라는 말이 진작부터 있었지만 2021~22년 현재 아직도 건재해 있다. 여기는 주변에 가락시장, 비닐하우스, 물류센터, 자동차 운전 학원 같은 거나 있던 외곽이었지만, 2010년대에 싹 바뀌었다.
  • 세류(1경부): 공군 부대와 바로 붙어 있다. 이 부대도 이전 떡밥만 잔뜩 무성하다.
  • 금천구청(1경부, 과거): 역시 군부대와 붙어 있다가 2000년대 말쯤에 싹 이전했다. 여기도 공군 부대였다고 한다.
  • 오금(3/5, 과거): 근처에 구치소가 있었지만 문정 법조 타운 쪽으로 이전했다.

4. 지하철 5호선의 특이한 과거

  • 천호대로(답십리-천호)는 바로 5호선 건설 공사를 하느라 파헤쳤던 것을 복구하면서 96년 초에 국내 최초로 중앙 버스 전용 차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 마곡 역은 초기에 잠깐 영업하다가 문을 닫은 게 아니었고, 처음부터 미개통 봉인 상태였다. 초창기엔 열차가 마곡 역에 도착할 때 형식적으로라도 감속이나 잠깐 정차를 했다가 출발했지만, 몇 달 후엔 이마저도 생략하게 됐다.
  • 5호선은 1인 승무로도 모자라서 아예 전면 무인 자동 운전까지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다. 무려 96년경에 실제로 시행한 적도 있었으나, 열차가 제 위치에 제대로 못 서고 버그와 문제점이 속출하면서 도로 봉인되었다.
  • 5호선이 전구간 개통하기 전에는 열차의 출력 설정이 지금과 달랐는지.. 가속 구동음의 첫음이 지금 같은 ‘레’가 아니라 ‘솔~라b’ 사이였다고 한다. 매우 충격적이다. (☞ 1995년 6월경의 시운전 영상 기록)

첫음이 저러니 영락없이 7,8호선 1차 도입분 열차의 GEC-알스톰 구동음처럼 들린다.
스타크래프트 개발 중 베타 버전에서 시즈 탱크가 뮤탈(!!!)을 공격하는 거..
Doom의 개발 중 베타 버전에서 BFG가 빨강 초록 파이어볼을 난사하는 형태이던 거..
그런 걸 보는 느낌과 비슷하다.

지금 같은 가속 구동음은 5호선이 전구간 개통한 뒤에 설정 변경을 통해 정착한 거라고 한다. 피치를 낮춘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12/14 19:35 2021/12/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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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 태우

이 사람은 민주화가 이뤄지고 지금 같은 6공 체제(5년 직선 단임제)가 출범한 뒤에 최초로 선출된 5년 단임제 대통령이다.
이때 야당 후보들이 단일화가 제대로 못 돼서 여전히 군인 출신 대통령이 선출됐다는 게 특이한데.. 이 시기는,

  • 무연 휘발유와 유연 휘발유의 과도기 (1987년 7월 ~ 1992년 말. 대통령 집권 기간과 거의 일치)
  • 범죄와의 전쟁
  • 분당과 일산 신도시 개발
  • 각종 교통 인프라들 건설 시작: 판교-구리 고속도로 건설(현 수도권 1순환 고속도로의 먼 전신), 서해안 고속도로, 인천 공항, 경부 고속철...!!
  • 지방자치제 시행 (개구리 소년 사건이 벌어진 때가 이거 선거일..)
  • 북괴가 의외로 인명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유의미한 도발을 한 적이 없음

요런 게 인상적이라고 느껴진다. 제4 땅굴이 1990년 봄에 발견되긴 했지만, 이때는 군견만 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고 동독이고 차우세스쿠고 다 운지하던 시절이었으니.. 북괴도 몸 사렸던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땐 남한과 북한이 나란히 UN에 가입했다(1991).

아울러, 이 시기에 미국-이라크 걸프 전쟁이 벌어졌던 것, 그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독립 국가 연합'이라는 선수단이 출전했던 것이 본인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7. 김 영삼: 많은 변화들

김 영삼은 우리나라 역사상 초대 할배나 마이너(윤 보선, 최 규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선거를 통해 군 출신이 아닌 민간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첫 사례이다. 별명을 괜히 문민정부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매우 믿어지지 않지만, 이때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대통령을 희화화하면서 "YS는 못 말려" 같은 유머 책까지 출간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람 때 나라 분위기가 실제로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 금융실명제 시행
  • 대전 엑스포
  • 고속도로 통행료 후불제
  • 쓰레기 종량제
  • 행정구역 개편 (직할시가 광역시로..)
  • OECD, WTO 기구 가입. 슬슬 선진국 인증?

역사· 정치와 관련해서는 이런 것도..

  • 군 내부 사조직이던 하나회를 전격 해체
  • 조선총독부 구 청사 철거
  • 전 두환과 노 태우 비자금 재판...;;;

이 사람 재임 때 있었던 북괴 관련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김 일성 사망 1994. 7. 정말 최대 압권
  • 국군 포로 조 창호 중위의 귀환 1994. 10.
  • 이 철수 대위 귀순 1996. 5. 현재까지 최후의 전투기 비행 귀순자
  • 강릉 무장공비 침투 1996. 9. 현재까지 잠수함 공작원 기반의 최후 대남 도발 (알려진 것)

이것들도 벌써 30년 전에 가까운 과거가 돼 간다.
이제 흑백뿐만이 아니라 컬러도 4:3 종횡비의 VHS급 저화질 사진/영상은 희뿌연 과거의 역사 기록이 돼 간다는 게 신기하기 그지없다.;;

8. 김 영삼: 대형 참사와 흉악 범죄들

그런데 1990년대 김 영삼 시절은 다른 면으로도 정말 판타스틱하긴 했다.

  •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1993. 3.
  •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 1993. 7.
  • 서해훼리호 침몰 1993. 10. (1993년 한 해에만 육해공이 나란히..)
  • 성수대교 붕괴 1994. 10.
    (당시 대한뉴스에서는 조 중위 얘기만 다뤘고, 성수대교는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그 해 12월 말을 끝으로 폐지를 앞두고 있기도 했고, 사건 사고 보도는 이미 싸제 방송사들이 훨씬 더 신속하게 자세히 해 주고 있었으니까.)
  •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1995. 3.
  • 삼풍 백화점 붕괴 1995. 6.
  • 대한 항공 801편 괌 추락 1997. 8. (현재까지도 대한 항공 최후의 여객기 인명 사고!!)
  • 기업들 줄도산, **외환 위기 IMF** 1997. 12.

보다시피, 한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아시아나와 대한 항공에서 나란히 여객기 추락 사고가 났었다.
이것들이 당연히 당대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사고가 겹치는 빈도가 이때 유난히 너무 높았다. 무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만 경제가 성장하고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네 마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원칙이 없고 미개하고 부정부패 편법이 만연하다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우리 제발 좀 늙어 죽어 보자고 난리가 났었다. 우리나라는 저런 사건 사고들로부터 배우고 시스템을 개선해서 옛날에 비해 그나마 많이 나아지고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그리고 이땐 대형 사고 참사뿐만 아니라, 흉악 범죄도 장난이 아니었다.

  • 부친 방화 살해 금수저 패륜아 박 한상 1994. 5. (사형 미집행)
  • 택시 강간 연쇄살인범 온 보현 1994. 9. (사형 집행)
  • 지존파 1994. 10. (사형 집행)
  • 부친 살해 패륜 대학 교수 1995. 3. (무기징역)

그나마 김 영삼은 1997년 12월 30일, 자기 집권 이전부터 확정돼 있던 사형수들을 몽땅 사형 집행을 하고 물러났다. 이게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후의 사형 집행이 돼 버렸다.
단지, 온 보현과 지존파는 당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흉악해서 예외적으로 1995년 11월에 바로 집행을 해 버렸다.

9. 김 대중: 행적에 대한 괴담

이 사람은 IMF 시기를 경험한 것, 북괴의 수괴를 직접 만나고 어쨌든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시기도 새 밀레니엄 전환기이고 고속 인터넷에다 휴대전화가 막 보급되던 때였던 것으로 인해, 역시 중요도와 존재감이 크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의약 분업이 2000년 이 사람 집권 때 이뤄졌다.
그리고 서울 2기 지하철 전구간 개통, 인천 국제공항 개항, 서해안 고속도로 전면 개통도 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난히 노래와 관련된 괴담이 많이 나도는 경향이 있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금지시키고 6· 25의 노래조차 악의적으로 개사해서 원곡을 금지시켰다는데..
일단 내가 알기로 이것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때가 무슨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특정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 게 가능한 시절은 아니었다. 물타기 된 불순한 6· 25 노래가 우연히도 그때 민간 차원에서 발표된 것은 맞지만, 나라에서 그걸 채택해서 강제로 밀어붙이지는 않았었다.
단지, 남북 정상 회담뿐만 아니라 신 한일 어업협정도 그 당시엔 엄청난 논란이 많았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 제2 연평해전 당시의 불리한 교전 수칙이 이 사람 집권 때 일부러 개정된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 전부터 그랬다.

  • 1999년 제1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함장이 종북세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썰 역시 내가 아는 바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박 정성 제독, 송 영무 제독. 내가 무슨 군 출신인 건 아니니 내가 잘못 아는 게 있다면 재반박 환영)

  • "북한은 핵을 개발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책임 진다"라는 두고 두고 까이는 엄청난 발언도.. 2001년경의 발언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한은 의외로 정확한 최초 출처가 잘 나오지 않는다. 마치 6 25 개전 초기에 할배 대통령의 행적처럼 말이다.

  • 국정원의 대북 휴민트들을 적에게 몽땅 누설하고 와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구체적인 증거는 잘 모르겠다.

주된 팩트와, 그 팩트 속에 교묘히 섞여 들어간 자잘한 과장 왜곡 주작은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저 세부 팩트가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저런 오해가 불거지고도 남을 정도의 이상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적에게 퍼 준 거 하며, 제2 연평해전이 벌어진 날 태연히 축구 보러 일본으로 뜬 건 뭐..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특히 그 세월호 7시간 갖고 지랄하던 그 잣대를 적용한다면 더욱 말이다.
더구나 백 보 양보해서 저 사람의 의도가 악의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결코 좋게 나오지 않았다. 뭐 그건 그렇고..

* 총평과 여담

(1)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제일 많이 배출한 대학은 육사...;;;이다.
그런데 2021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서울대 출신 대통령, 그리고 유일한 노벨 상 수상자라고 하면 의외로 사람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유일한 박사학위 소지자라고 하면 할배, 아니면 반대로 고졸 출신이라고 하면 김 대중· 노 무현이라고 금방 떠오르는데, 저건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

(2)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은 어째 재임 순서와 사망 순서가 완전 역순이다.. 무슨 스택도 아니고..
노 무현 09. 5.
김 대중 09. 8.
김 영삼 15. 11.
노 태우 21. 10.
그 다음 전 두환 21. 11. (후배를 따라 나란히 갔구나. 그래도 전직 대통령들 중 퇴임 후에 제일 오래 길게 살았음!!)

(3) 대전 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은 만들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최 규하 한 명밖에 없다.;; 그것도 역대 최단기, 제대로 재직하지도 못했던 대통령만..

Posted by 사무엘

2021/11/27 08:35 2021/11/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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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승만: 한강 인도교 폭파 관련 오해

할배의 집권 시기였던 제1공화국은 미국과 비슷한 4년 중임 간접 선거(나중에 헌법이 개정되어 다 바뀌긴 했지만)와 부통령, 청와대 대신 경무대, 단기 연호, 써머 타임, 화폐 단위가 원이 아니라 ‘환’, 아직 서울 특별시 외에 직할시 광역시 따위 없음.. 이렇게 시스템이 지금과는 다른 게 너무 많았다. 한국어와 한글, 태극기 같은 것만 같았다.

병역조차도 건국 직후 맨 처음엔 모병제였는데 6 25 사변의 트라우마가 생긴 뒤부터 징병제로 바뀌었다. 심지어 기간도 역대 최장인 3년이어서 박 정희 때 1 21 사태로 인해 연장됐던 최장 기간과 동일했다. 뭐 그건 그렇고..

할배의 집권 시절의 흑역사 중 하나로 6· 25 사변 초기의 한강 인도교 폭파가 즐겨 회자되고 있다. 이건 시간을 벌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긴 했지만, 너무 일찍 터뜨리는 바람에 진짜로 후퇴해야 할 병력과 피난 가야 할 시민들도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해서 곤혹을 치르게 됐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다만, 피난민들이 멀쩡히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뜬금없이 그 다리를 폭파해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처럼 추락하고 꼬르륵..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역사 인식이 바뀌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누가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를 포함해 각종 위키에서도 한강 인도교 폭파 때의 자국민 인명 피해가 ‘군경 77명 사망’으로 고쳐졌다.

“그 큰 대교를 폭파하려면 비용은 둘째치고 폭파를 준비하는 데만 최소 몇 시간이 걸린다. 민간인 진입을 통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이 인도교 위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엔 민간인의 피해는 없고, 군경 77명의 피해가 있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 나무위키. 얘는 일방적인 보수 우편향 사이트가 절대 아니다.


윤 서인 인라이트 역사 만화에서나 봤던 설이 위키에도 반영되어 들어가다니 놀랍다. 그런데 폭파 당시에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럼 그 군경은 도대체 그 시간에 무슨 일로 거기에 있다가 폭발과 함께 강물로 떨어져 순직한 걸까..?? 민간인을 다 통제시켜 놓고 위험한 곳에 있다가 죽은 거면 직무상 순직으로밖에 볼 수 없을 텐데?
그리고 77명이라니. 이거 무슨 경부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수도 아니고, 숫자가 좀 인위적이어 보인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팩트를 더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한강 인도교 폭파는 관련 사진이 전해지는 게 전혀 없다. 1· 4 후퇴 때 평양에서 대동강 철교가 폭파되고 피난민들이 거기를 건너는 모습이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있으니, 거기에 오도되지 마시기 바란다.

  • 폭파 당시 말고 폭파 “후”에.. 다리에 대한 출입 통제가 제대로 안 돼서 피난민 행렬이나 차량이 추락한 경우는 좀 있었다. 이때는 가로등도 없는 칠흑같은 한밤중이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끊어진 것을 뒤늦게 발견했어도 뒤따라 오는 행렬에 떠밀려서 다리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정말 보면 볼수록.. 별로 크지도 않은 이 쬐끄만 나라는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인 근현대사에 과장과 왜곡과 날조가 너무 많은 거 같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보면 사람마다 정반대의 사관을 갖게 되기에 딱 좋다.
김 구의 행적이나 독립군의 전과도 그렇고.. 저 한강 인도교 폭파도 그런 카테고리에 들겠구나.

2. 박 정희: 인상의 변화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을 한 양반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집권 중에 얼굴이 연식 때문에 삭아(?) 가는 모습도 종류별로 제일 다양하게 존재한다.
솔직히 할배만 해도 1948년에 취임 선서하는 모습이나, 12년 뒤에 4· 19 시위 부상자들을 문병하는 모습이나 내가 보기엔 인상이 거의 차이가 없이 똑같은 할배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야 성명을 내는 모습 사진은 없는지..?? 이걸 못 구해서 딴 걸로 대신했다. 그래도 할배는 12년의 격차가 그닥 느껴지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허나, 원조가카는.. 대외적으로 왼쪽 같은 인상이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7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오른쪽처럼 인상이 많이 삭기도 했다.;;;
그러니 원조가카를 존경하는 진정한 매니아라면.. 사진에서 이 아저씨 머리가 하얗게 샌 정도, 옆에 영부인이 있느냐 장녀가 있느냐 등등의 단서를 토대로 이게 60년대 중후반 모습인지, 70년대 중후반 모습인지 정도는 바로 알아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 업적에 대한 시간 관념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가령, 월남전,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 근로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국민 교육 헌장 선포, 경부 고속도로 개통, 10월 유신 정도는 시간 순 나열이 가능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이런 거나 시험 문제로 좀 낼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새마을 운동이 1960년이 아닌 1970년대로 내 생각보다 나중이라는 것에 약간 놀랐다.

3. 박 정희: 일화들

아울러, 박 정희 대통령은 남과 대화를 하다가 대답을 센스와 재치 있게 잘 한 일화가 여럿 전해지는 사람이다.

(1) 미국의 어느 무기상과 거래를 하면서 비자금도 받았는데.. 박통은 이걸 받아서 그냥 쓰윽 하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하지도 않고.. “이 돈은 이제 내 껍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을 너한테 도로 줄 테니 그 액수만치 M16 소총을 더 갖다 주시오”라고 대답해서 상대방을 벙 쩔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건 정확한 출처와 일시가 검증 가능한 일화인지 모르겠다.

(2) 1970년대 초쯤엔가 지방 시찰을 갔다가 전주의 유명한 콩나물 국밥 식당 ‘삼백집’에서 전투력 최강의 욕쟁이 할머니를 대면했다. 그 할머니는 이 손님이 대통령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 이눔 봐라? 네놈은 박 정희 대통령이랑 되게 닮았네? 옜다, 계란이나 더 쳐먹어라” 라고 서빙을 해 줬는데, 박통은 “내가 대통령을 닮은 게 아니고 대통령이 나를 닮은 게요~ ㅎㅎ”라고 점잖게 넘겼다고 한다.

(3) 196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해서는(☞ 당시 대한뉴스 영상).. 나름 타국 원수 귀빈이 납셨는데 원하는 거 있으면 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생도들 퍼레이드, 생도들에게 연설, 진귀한 선물 등.. 그런데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지금 징계· 벌받고 있는 생도들이 있으면 다 사면해 주시겠습니까?”라는.. 정말 뜻밖의 요청을 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사면령이 떨어지자 박통은 식사 중에 생도들로부터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고, 이 생도들은 졸업과 임관 후에 한국 파견 근무를 선호하는 친한파가 되었다.

아.. 박통은 생각이 깊고 정말 위대한 지도자였다.
학칙 위반 생도 사면은.. 이 사람이 좌빨들이 그렇게도 욕하는 일본 육사를 나오는 바람에 자신부터 군잘알, 사관학교 생도 생활 잘알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었지 싶다. 군알못으로 출세한 사람이라면 어디 저런 답변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부귀영화나 절대권력, 적장의 모가지 따위가 아니라 "백성들을 바르게 통치할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서 이쁨받았던 것과 비슷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 이듬해의 린든 존슨 대통령 방한 환영 행사도 그렇고.. 1960년대에 원조가카가 미국으로부터 점수 따서 지원 많이 받으려고 이런 식으로 노력을 굉장히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4. 전 두환: 일반적인 행적, 치안 안정

1980년대 전땅크는..

  • 통금 해제
  • 컬러 텔레비전
  •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 서울 올림픽 유치와 준비
  • 한강 종합 개발 사업과 올림픽대로
  • 정보화 시대: 삼성 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개발, 8비트 컴퓨터 개발, 1984년의 제1회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다음으로 전땅크는 범죄 예방과 사회 치안 쪽으로도 다음과 같은 독자적인 선정을 베풀었다.

  • "아이가 죽으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이 윤상(1980), 원 혜준(1988) 유괴 살인 사건. 가해자는 대통령의 약속대로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각각 아직 4공이던 초창기와 6공 출범 직전 시기의 일이다.
  • 삼청교육대: 1980년, 4공 시절에 잠깐 있다가 말았던 엽기적인 군대식 교화 시설이다. 비록 강제 징집 때문에 오점이 남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그 시절에 이런 거라도 있어야 했을 정도로 사회 기강이 개판이었다. 지방 조폭, 술 쳐먹고 행패 부리는 양아치들... 본인은 심지어 지금이라도 삼청교육대가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엔 7~80% 정도 동의한다.
  • 가정파괴범: 대한민국 역사상, 살인 없이 강도 강간 누범만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됐던 때는 할배도, 원조가카도 아닌 전땅크 시절이 유일했다~!! (1985년 11월)

이런 건 서 정주 시인이 지은 오글거리는 송시에도 언급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전땅크는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무려 30년이 넘게.. 역대 대통령들 중 독보적으로 제일 오래 생존한 사람이기도 하다. 역시 사람은 건강하고 볼 일이다.

5. 전 두환: 악을 선으로 갚기

지난 1984년에 우리나라는 극심한 수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때 북한에서 구호물자를 보내 줬다.
이건 사실, 북한에서도 남한이 그걸 받을 거라고 기대도 안 하고 농담/조롱 반 진담 반으로 “안됐네.. ㅉㅉㅉ 우리가 도와줄까? 구호물자 좀 보내줘?”라고 떠본 것이었다.

그런데 전땅크가 그걸 덥석 물고.. “응~! 좀 도와주면 고맙겠..! 우리가 남이가”이라고 손을 내밀어 버렸다. 그러자 북한도 없는 살림에 구호물자를 갑작스레 챙기느라 혼쭐이 나야 했다.
북에서 급조해서 보내 준 쌀, 시멘트와 옷감 따위의 품질이야.. 이 글에서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남한에서는 답례로 그 받은 쌀과 시멘트와 옷감 가격의 수십 배에 달하는 전자제품 공산품들을 북한 근로자들에게 선물로 뿌려줘서 북측의 자존심을 콱콱 구겼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전땅크가 대북 심리? 외교전에서 압승을 거둔 셈이다.

참고로 이건 전땅크의 목을 노렸던 아웅산 폭탄 테러가 벌어진 지 겨우 1년 남짓밖에 안 됐던 시점의 일이었다. 훗날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안 해 놓고 말이야” 이러는 것만 봐도.. 전땅크 역시 멘탈이 보통 멘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북괴는 이런 무식하고 야만적인 짓거리로 인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규탄과 손가락질 받고 단교 당하면서 외교전에서 장렬히 자폭했다. 실드의 여지가 없는 몰수패를 당했다.
그랬는데 남한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유치하면서 승승장구 중이니, 남한을 어떻게든 방해하고 저지하면서 자기들도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그러니 초대형 릉라도 경기장을 건설하고 류경 호텔도 착공하고, 올림픽 대신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을 유치하면서 별별 짓을 다했지만.. 대부분 돈만 날리는 뻘짓으로 끝나고 경제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24 08:36 2021/11/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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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예 vs 실리

(1) 롤스로이스: 한때는 구매자에게 차값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엄근진한 사회 지위 등,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했다.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한테도 "당신 같은 딴따라는 이런 고매한 차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퇴짜 놨을 정도였다. 이런 사람이 굳이 롤스로이스를 몰려면 중고차를 알아봐야 했다.
==> 지금은 그딴 거 없고 아무나 돈만 내면 살 수 있다. "돈만 내면"...;;

(2) 스위스 은행: 그 어떤 국제기구나 공권력이나 수사기관에게도 예금자의 개인 정보를 절대로 넘겨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구린일을 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출처가 떳떳하지 못한 돈을 여기에다 예치해 두곤 했다.
==> 스위스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국제 추세를 거스르면서 혼자 독고다이는 못 하며, 은행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수사에 협조해 주고 있다.

(3) 남성상: 과거에는 영국 신사, 조선 양반/선비 같은 이미지가 좋은 이미지였다.
==> 오늘날은 그런 거 없고 나쁜 남자 마초 상남자가 좋은 편이다. (절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4) 기네스북: 과거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연속살인범 우 범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강제로 잠을 안 잔 기록(266시간??) 같은 것도 실려 있었다.
==> 이제는 범죄 행위 내지 사람 건강을 망치거나 동물 학대를 조장하는 기행의 기록은 받아 주지 않는다.

(5) 복싱: 과거에는 선수가 바닥에 대짜로 완전히 뻗어서 기절하지 않은 한 무조건 경기 진행이었다. 그래서 "제 발로 링을 내려오거나 들것에 실려 내려오너라" 급으로.. 선수들이 승부욕 때문에 선뜻 gg를 치지 않고 벽에 기대어 있다가 계속 얻어터져서 사망· 중상 같은 사고가 나기도 했다.
==> 사고가 몇 번 난 뒤, 지금은 경기 시간 단축되고 라운드 수가 더 줄고 휴식 시간 늘고, '스탠딩 다운' 판정에다가 선수 주치의의 재량으로 경기를 임의로 종료시킬 수도 있게 하는 등.. 온갖 안전장치들이 추가됐다.

요컨대 과거에는 지금보다 체면, 위신, 명예를 따지는 성향이 더 컸고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기든가 죽어라" 근성과 의지드립을 더 강조했다.
오늘날은 그때보다 실리, 인권을 더 따지는 편이다. "이길 수 없으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해서 후일을 기약하자" 같은 관점이 된 것이다.
"죽음으로 책임지고 속죄하자" vs "그런다고 상황이 더 나아지는 건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 사람은 살자"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2. 폭력

옛날은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 지금보다 더 살벌하고 전투적이었다. 법을 어겼을 때의 형벌이 지금보다 더 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면모도 컸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애들이 일찍부터 깍듯이 예의를 지키고 철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러고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깝죽댔다가는 바로 쳐맞았으며, 심하면 자기 밥과 목까지 날아갔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꼭 일진 양아치들이 있었다. 그때는 체벌이 훨씬 더 심했고 교사가 학생을 폭행하는 데도 아무 제약이 없었건만.. 그런 강력한 교권을 동원해서 진짜로 섬멸해야 할 교내 불량배들을 제대로 단속하지는 않았는가(혹은, 못했는가) 보다.
군대에서는 좀 만만하고 약점 잡기 쉬운 애들이나 고문관한테 구타와 가혹행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행해졌으며.. 그게 군기 잡는다는 명목으로 간부들에 의해 묵인되기까지 했다.

동네의 체육관? 무술 업계(?)에서는 무협지에서나 보던 ‘도장 깨기’ 관행이 진짜 존재했다. 관장이라는 양반이 동네 양아치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사람은 쪽팔려서라도 밤에 짐 싸서 딴 동네로 몰래 이사를 가야 했다.

바로 이런 풍조의 강화 심화 버전을 상상해 보면, 과거에 서양에는 결투가 있었고 조선에는 석전(!!)이란 게 있었던 배경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자가 참관하는 정식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인 것은 살인이 아니라 합법 무죄였다.

석전에서 남에게 돌 던져서 대가리 깨뜨리고 죽인 것 역시 합법이었고, 이때는 심지어 상대편 진영 집을 터는 것까지도 허용됐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인 것과 동급이라는 것이다!
그런 시절에 지금 같은 과학 기술이 있고 여건만 갖춰졌다면 심지어 오징어 게임 같은 것도 합법으로 운영됐을 수도 있다.

3. 인권

옛날은 “인생은 실전이야 이 존만아” 관념이 훨씬 더 강했다. 그리고 ‘갑’과 ‘을’의 권익이 상충하고 둘 다 챙길 수 없었을 때는 명백하게 을이 일방적으로 희생됐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은 진짜 말 그대로 죽어야 했다. 사람을 고의로 죽인 흉악범은 자기도 목이 날아갔다.
  • 실수로 불을 내서 마을 전체를 태워먹은 사람은 처형 당하거나 평생 노예로 일하며 죄값을 갚아야 했다. 신분도 대물림되는 마당에 빚이야 당연히 대물림됐다.
  • 노예들을 배로 수송할 때는 전부 꽁꽁 결박을 했다. 사고가 나서 배가 침몰이라도 하면 그들은 그대로 같이 익사해야 했다.;; 정말 비인도적이고 잔인하지만 그렇다고 노예를 일일이 구조할 수 없으며, 탈출하게 내버려둘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죄수가 탈출하면 죄수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간수가 자기 목숨을 대신해야 했다. 이건 성경에도 나오는 관행이다(행12:19, 행16:27, 행27:47).
  • 우리나라도 6 25 때 전국의 형무소 죄수들을 제대로 이감 수용할 수가 없으니..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그냥 가석방하고, 중범죄자나 좌익사범 같은 위험한 죄수는 그대로 다 총 갈겨서 죽여 버렸다. 군대에서 즉결처분뿐만 아니라 이런 잔혹한 일도 벌어졌었다.

하지만 요즘은 인권 의식(?)이 워낙 발달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사형 집행을 안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채무도 말이다. 상속을 포기하거나 파산 선언을 하면 된다.
경제적으로 여러 불이익이 뒤따르며 현재의 자기 재산이야 다 공개되고 압류당하고 탈탈 털리지만.. 그래도 자기 능력이 되는 한도까지만 갚으면 되며, 무슨 신체 부위를 판다던가 본인 및 처자식을 노예로 팔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면 세상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바뀐 것 같고 인권이 향상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 “제로썸 게임”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사형 집행을 안 해서 가해자의 인권을 챙겨 주면, 결국 가해자의 엄벌을 원하는 피해자 내지 유족의 인권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말살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인권팔이 위선자들이 한 마디도 입도 뻥긋 안 한다.

채무자 인권만 챙기느라 걸핏하면 채무를 탕감해 주고 배째가 가능하게 해 놓으면.. 결국 성실하게 빚 갚는 사람만 바보 되고 경제 모랄빵이 벌어진다. 그리고 예전과는 반대로 채권자가 돈을 못 받아서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채권자나 땅 주인 집 주인 기업주가 몽땅 다 샤일록 같은 놈일 거라는 인식도 프레임이고 거짓 선동일 뿐이다.

비정규직을 없애겠답시고 법을 무시하고 얼치기로 그 애들을 정규직으로 승격시키면.. 그럼 피똥 싸게 공부해서 공채 뚫고 정규직 입사한 애들이나 임용 합격해서 정교사가 된 애들은 뭐가 되는가? 이런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노예나 죄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먹고 살 만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나라 체제가 안정되고 사회 안전망 복지 인프라가 잘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인권을 챙길 여유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시 옛날 같은 열악하고 처절한 위기 상황이 닥치면.. 아무리 인권 인권 거리더라도 범죄자의 인권과 선량한 일반 시민의 인권을 다같이 챙길 수 없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윤리관 사회관 같은 게 달라졌더라도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나 딜레마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 문제를 해결한 듯하지만 그 문제가 형태만 바뀌어서 다른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통찰이 없이, 절대악은 그대로 놔 두고 필요악만 나쁘다고 없애자고 선동하는 애들은 절~~대로 선한 결과를 산출한 적이 없었다. 이런 것에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FPS 게임에 비유

FPS 게임에는 time to kill TTK라고..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데 걸리는 시간 내지 필요한 히트수라는 개념이 있다.
단칼에, 총 한 방 잘못 맞으면 바로 훅가는 건 TTK가 짧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러 발 때려야 되는 건 반대로 TTK가 긴 것이다.

TTK가 너무 짧으면 대부분의 뉴비들은 그냥 맵에 spawn되자마자 누가 쏜지도 모르는 총에 맞아서 바로 뒤지고 흥미를 잃기 쉽다. 그러나 고수도 재수 없으면 실수로 언제든지 훅갈 수 있으니 처신을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초반에 살아남은 소수의 초보가 드물게나마 뽀록으로 선빵을 날려서 고수를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TTK가 길어지면.. 그 누구라도 한 방 맞는다고 바로 죽지는 않고 반격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여건과 기회가 비교적 공평해지고 안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여건에서는 기습 뽀록이 안 통하며, 초보가 고수를 이기는 건 확실하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극단적인 예로, 성경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일격에 바로 쓰러뜨리지 못해서 골리앗의 반격을 허용했다면 그 다음 스토리가 어찌 됐을까? 바로 이런 이치이다.

이제 FPS를 현실 인생에다가 투영해 보자. 초보/고수를 흙수저 금수저에다 비유하고, 킬 올리는 걸 각종 성공이나 출세, 신분 상승 따위에다 비유해 보자면..
세상의 사회 시스템이라는 FPS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갈수록 TTK가 짧았다가 더 길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여~~러 정황상 말이다. TTK 값이 바뀜으로서 발생하는 장단점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라떼는 말이야 더 가난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다 버티고 성공했어" 이런 부류의 아재스러운 조언은..
TTK가 짧은 게임에서 살아남아서 고수를 여차여차 끝에 잡았다는 유형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사람도 노력을 안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의 운도 있었고, 지금 TTK가 긴 시스템에서 적용 가능하지는 않은 면모도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전장이야.. 눈부시게 발전한 무기들 덕분에 TTK가 엄청나게 짧다. 총이건 폭탄 포탄이건 한 방 맞으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시체도 못 찾는 처참한 꼴로 죽는 게 태반이다. 군함을 수리하는 정비함이라든가 갑옷 같은 게 괜히 없어진 게 아니다.
TTK가 짧을수록 현실 군대 반영 FPS이고, 길수록 과거 Doom 스타일의 비현실적이거나 캐주얼한 영웅 원맨쑈 FPS 장르가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18 08:35 2021/11/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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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나치 경례 거부

  • "주변에서 모두가 '예, 예' 할 때 혼자만 양심껏 소신껏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사관 생도 신조 중)

이런 것의 예시로 요런 짤방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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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군중들이 오른팔을 뻗치면서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을 때 혼자 생까고 가만히 있었던 이 사람은 정체가 무엇일까?
그는 아우구스트 란트메서(1910-1944)라는 독일인이며, 사진은 의외로 전시가 아니고 히틀러의 집권 초기이던 1936년, 나치 독일의 모 군함의 진수식 때 촬영된 거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연은 검색해 보면 다 나오니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지 않겠다.
핵심은 이 사람은 유대인 여자와 결혼해서 딸까지 생겼는데 하필 거의 같은 타이밍 때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에게 축객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저 군함을 제조한 조선소의 직원이었다. 그러니 진수식 행사엔 사실상 강제 동원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치 당에도 가입하긴 했지만, 유대인이니 정치니 이념 그딴 건 별 관심 없고 그냥 취업 때문에 가입한 것에 가까웠다.

그랬는데 나치 당에서 유대인들을 못 살게 굴기 시작했으며, 자기에게도 멀쩡한 아내를 버리라고 이혼을 종용한 것이다. 그러니 당이 좋게 보일 리가 없고 경례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이 사람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훗날 등장한 백장미단 조피 숄 같은 급으로 전시에 거창한 신념이나 소신을 갖고 나치 경례를 거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포즈로 대외 공개용 사진이 찍혀 버리자 나치 당에는 저 괘씸한 놈이 누군지 곧장 추적을 시작했고, 당사자 역시 신변의 위협을 진지하게 느끼게 됐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발각됐다. 인종오염법으로 기소되어서 수용소 행..;;

아내는 전쟁 중에 여러 수용소에 끌려 다니다가 1942년쯤에 결국 살해당했다(아마 가스실에서). 저 사람은 살아서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비국민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어느 죄수 부대에 징집되었다가 1944년쯤에 전쟁터에서 실종 내지 전사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어린 딸 둘은 고아원 내지 친인척 집을 거치면서 다행히 살아남아서 자기 부모의 사연을 후세에 전해 줄 수 있었다. 저 사진도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1991년에 딸에 의해 공개된 거라고 한다.

2.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 거부 (입법)

미국은 1941년 말에 일본으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것으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새끼 빼앗긴 암곰을 능가하는 복수귀로 각성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엄청난 빡침이 담긴 대국민 담화인지 연설을 한 뒤, 의회로부터 대일 선전포고와 참전 승인을 받았는데.. 상원에서는 전쟁 개시 관련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388:1로 반대가 딱 하나 있었다.

전미가 왜놈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눈이 시뻘개졌던 험악한 시국에서 홀로 반대표를 던진 용자는 바로..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여호와의 증인 급의 반전주의 소신이던 '지넷 랭킨(1880-1973)'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아줌마는 1차 대전부터 시작해서 2차 대전, 6 25 사변, 월남전까지 일체의 전쟁에 대해 자국이 참전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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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위기에서 이런 아웃사이더가 당장 테러· 협박을 당하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미국이 다양성이 존중받으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숙한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일제나 나치 독일에서 누군가가 저런 반전 운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간 그 사람은 어찌 됐겠는가? (군중 속에서 팔 뻗어서 같이 경례 안 한 것만으로도 아까처럼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뒤끝이 뒤따랐거늘..)

하지만 천조국이라도 선 넘을 정도로 이상한 소신을 포용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이를 계기로 소속됐던 공화당에서 퇴출되고, 정치판에서의 커리어가 통째로 끝장 났다고 한다.
결국 2차 대전 이후의 반전 운동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 운동가로서 개인 단위로 진행됐다. 분야는 다르지만 개고기 반대하면서 이상한 똥고집 부리던 프랑스의 그 아줌마 생각이 문득 난다.;;

3. 곁가지: 미군의 일본군 시체 훼손

이건 참 경이롭고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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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944년 5월, 미국의 어떤 아가씨가 남자친구로부터 웬 해골바가지를 선물로 받고는.. 잘 받았다며 감사 답장을 보내는 모습이 보도된 것이다.
남친은 해군에 입대해서 태평양 전쟁터에서 한창 고생 중이었는데.. 전사한 어느 적군 병사의 유해에서 두개골을 추출해서 여친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전시이니 저 여친도 군수공장에서 근무 중이었으며.. 저 때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그 당시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증오심은 일선의 병사들이 일본군 시체에서 해골바가지를 뜯어내서 장신구로 쓰고 연인에게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극심했다.
최악의 증오스러운 적을 상대로 싸우는 데다, 억만 리 떨어진 망망대해의 섬에 상륙해서 밀림 속에서 전투를 벌이던 태평양 전쟁터는 환경도 최악의 생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놈들도 상대방에 대해 "저놈들은 귀축영미, 항복했다간 무조건 죽음" 이딴 소리에 골수까지 세뇌된 괴물들이었다. (얼마나 세뇌됐으면, 훗날 전쟁이 끝났으니 귀환하라는 말조차도 안 믿고 섬에 틀어박혀서 거지꼴로 몇 년을 버틴 사람들조차 있었을 정도..)
같은 백인 코쟁이에 기독교 배경이 있고, 말과 문화가 일말의 통하는 구석이라도 있는 서부 전선의 나치 독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전쟁터에서는 최악의 조건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펼쳐졌다. 그 살벌함은 포카혼타스 Savages를 아득히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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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보시라. 천조국 군인들이 차라리 평시에 군기가 빠져서 민간인을 상대로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있지만..
전시에 적군의 시체를 훼손해서 저렇게 갖고 놀고 그게 저 정도로 대대적으로 매스컴까지 탔던 건 남북 전쟁, 미영 전쟁, 1차 대전, 월남전, 이라크전 등등등을 통틀어서 저 태평양 전쟁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물론 군 수뇌부에서 이런 짓을 금지하고 단속하긴 했지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군인 개개인의 감정을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미군이니까 이 정도로 정신줄을 놓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해골바가지만 득템해서 장식품으로 써먹는 정도의 짓밖에 안 한 것이다.
일본군은 뭐.. 연합군 포로들을 훨씬 더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대해서 다 죽이고,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이고,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대놓고 식인까지 했다.

이런 악랄한 경험으로 인해, 미국은 쟤들은 안 되겠다고 원자 폭탄까지 터뜨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훗날 전범 재판에서도 일제 전범들을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총살도 아닌 그냥 교수형을 집행할 것을 건의하게 됐다. 교수형은 군인으로서의 예우를 박탈한다는 걸 뜻한다.
반대로 나치 독일 전범에 대해서는 독소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는 소련이 더 강하게 교수형 사형 집행을 요구했다.

4. 일본 전범의 사형 거부 (사법)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뒤엔, 다들 잘 알다시피 일본의 군인 지휘관과 정치인 중에 전쟁 범죄자를 가려내어 단죄하는 재판이(극동 국제 군사 재판) 열렸다.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전투 중에 적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민간인이나 포로를 고문하고 학살한 짓거리들 말이다.

그런데 이때 재판을 진행했던 연합국--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소련-- 판사들 중에 '라다비노드 팔'이라는 인도인은 유일하게 아싸 행세를 했다.
다른 판사들은 전범들을 처형하는 것에 다 동의했고 총살이냐 교수대냐를 갖고 논쟁하는 정도였던 반면, 저 인도인 판사는 혼자 강경하게 처형을 반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실드 쳤다.

그는 단순히 인본주의 박애주의자로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족 감정상으로 엄청난 친일 성향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다가 법을 뒤늦게 끼워 맞춰서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 왜 일본에 대해서만 일관성 없이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느냐, 연합국은 가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줄 아느냐, 너는 왜 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인제 와서 일본 탓을 하느냐" 등..
법리까지 거의 무시하면서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본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저 사람이.. 우리 한국으로 치면 후세 다쓰지--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 변호사--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극진한 예우와 존경의 대상이 됐다.;;; 야스쿠니 신사에 추모비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진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이 자국 인도를 식민지로 부려먹은 영국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저 사람도 '적의 적은 친구' 논리로 일본을 옹호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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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인도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한 국민 정서도 오늘날까지 굉장히 우호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애 이름까지 ‘아돌프 히틀러’라고 지어서 Adolf Lu Hitler Marak라는 이름의 1958년생 정치인도 있을 정도이다~!
하긴 인도인들은 영국인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 나치 독일에 의해 수용소 가스실로 끌려갔던 적은 없으니까.. 일면 수긍이 간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01 08:35 2021/1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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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성의 독립운동가

(1) 최 재형(1860-1920)
요즘 이 이름은 ‘이 회창’처럼 감사원장을 역임한 대선 후보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명 독립운동가 동명이인도 있었다.
그는 겨우 10대의 나이로 생활고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북하듯이 무작정 러시아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꽃제비처럼 쓰러져 굶어 죽을 뻔했는데.. 어느 선한 러시아인 선장 부부가 그를 구해 주고 양자처럼 공부도 시키고, 자기 상선(무역선)에 태워서 선원일도 가르치면서 잘 키워 줬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해서 한국어와 통역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와 러시아 업주 사이에 중재를 잘 하고 일감 조율을 잘 한 공로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이걸로도 모자라서 양부모로부터 한 밑천 물려받았는지 군수업을 시작해서 엄청난 부자까지 됐다. 알거지 빈털터리 상태에서 러시아에서 이 정도로 성공했으니 정말 역전의 용사 개룡남이 따로 없는데..

그는 러시아에서 자신 같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동포들을 돕고 가르치는 일에 애썼으며, 조국 조선이 일제에 망할 위기에 처하자 항일 독립 운동에 자기 자산을 대부분 탕진했다. 그리고 안 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 주고 사격 훈련을 시켰다. 안 의사의 의거의 배후에 이 사람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중근이 아저씨 차 태식이라면, 저 사람은 문 달서 정도 되는 셈..

그는 훗날 1919년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정말 뼛속까지 애국자로 살았지만..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추적을 받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로부터도 밉보이게 되었다. 결국 1920년에는 일본군에게 잡혀서 그대로 총살 당해 순국했다.

(2) 함 태영(1872-1964)
생몰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승만 할배와 거의 동연배이며 비슷하게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이 사람은 공부 잘하고 똑똑했는지, 20대 초반의 나이로 법관양성소를 수석 졸업하여 판사가 됐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등장한 근대식 법조인의 1호 원로 원조인 셈이다.

그래서 고종 황제 시절에 김 홍륙이 저지른 고종· 순종 독살 미수 사건(1898)을 재판했는데.. 먼 훗날, 대한민국에서 심계원(감사원)장과 제3대 부통령도 역임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고위 공무원을 한 사람이라니,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일제 시대에도 전관예우를 받아서 계속 법조인으로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절하고 그 동안은 목사와 교육자로 살았다.

서 재필과 이 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그냥 반역자로 몰렸고, 일제 시대 동안엔 미국에 가 있었다. 함 태영은 저런 사람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3) 서 재필(1864-1951)
이 사람도 최 재형 이상으로 근성의 개룡남이었으며, 함 태영 이상으로 머리 좋고 공부를 겁나게 잘했던 것 같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면서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개화물 먹은 뒤 갑신정변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서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다. 부모와 친형제, 아내까지 몽땅 사약, 자결, 피살 등의 방법으로 죽었다~!! 이때 심지어 어린 자식까지 죽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 당사자도 멘붕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제 조선의 조 짜만 나와도 학을 떼는 골수 혐한 친일파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 재필은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 가서는 빈털터리 상태에서 먹고 살려고 직싸게 고생하며 주경야독을 거듭했다. 물론 도와 주는 선교사 후견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아직 인종 차별도 있던 살벌한 상태였다.

그는 그 여건에서도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 고별 연설을 하는 우등생 모범생이 됐고--(물론, 미국 토박이 동년배 고등학생들보다야 나이가 훨씬 더 많았음..)--, 자국도 아닌 미국에서 의사가 됐다. 친인척을 모두 잃은 알거지 역적 신세로 미국으로 망명 간 지 딱 10년 만에 미국 의사가 된 것이다.

다행히 고국에서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해서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구한말 때 잠시 귀국해서 독립 덕후 활동을 하던 당시엔.. 그는 머리로 동포의 자주 독립은 지지하지만 가슴에 조선 자체에 대한 애정은 싹 사라진 상태였다.
조선 땅에서는 완전 코쟁이 미국인 행세를 하면서 "오우 노!! You Koreans들은 이래서 안 돼.. ㅉㅉㅉ" 삿대질을 하고.. 조선 백성들도 그냥 가르치고 계도해야 할 미개인 정도로 생각하면서 자기와 거리를 뒀다고 한다. 뭐, 인간적으로 이해는 된다.

서 재필은 한국이 배출했지만 한국이 제대로 키워 주지 못한.. 참 여러 모로 아까운 인재였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경에 한국으로 돌아왔다(전 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공 병우 박사가 다른 관혼상제나 행사에는 좀체 참석을 안 했는데, 이 사람의 유해 봉환식에는 일부러 찾아가 참석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일본인

(1) 소다 가이치(1867-1962)
일본인으로서 기독교 선교사 겸 고아원 원장으로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105인 사건이나 3· 1 운동 때는 조선인들을 편들고 실드 쳤으며, 전후에는 자국을 상대로 전쟁 범죄에 대한 회개와 사죄를 촉구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정신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났으며, 월남 이 상재 선생으로부터 기독교 전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호의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후세 다쓰지’ 만만찮은 대한 독립 유공자 일본인으로서 손색이 없으나, 정식으로 인정은 아직 못 받았다.

(2)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근무한 관료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진짜 순수하게 학자 내지 덕후로서 조선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소반(밥상)>(1929)과 <조선도자명고(도자기 도예 관련)>(1931)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망우리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은 아니고 두 명 중 하나이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의 유언도 “조선 식 장례로 조선 땅에 묻어 달라”였다고 한다.

3. 역관 출신

(1) 김 홍륙 (러시아어)
이 사람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함경도 출신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어부 생활을 한 덕분에 러시아어 회화가 가능했다.
마침 1880년대의 조선 정치판에서는 “친러가 살 길이다” 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시대를 잘 탄 덕분에 벼락출세길이 열렸으며 고종의 측근으로서 부귀영화를 엄청난 누리게 됐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고위 공직자에 걸맞은 인품, 교양, 학식을 갖추지 못한 채 친인척까지 동원해서 부정축재와 학정을 일삼았다. 무능한 암군 소리를 듣는 고종이 보기에도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그는 결국 짤렸다(파직).

그런데 김 홍륙은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과 순종 부자를 통째로 암살, 독살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시는 커피에다가 몰래 치사량의 아편을 탔는데..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한 걸 알고 곧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그걸 그대로 마셔 버려서 한동안 앓아누우며 고생했다.

이 어설픈 사건은 곧장 배후가 드러났는지, 김 홍륙은 곧바로 교수형을 당했다. 왕을 통째로 암살하려 했으니 이거야말로 10여 년 전 갑신정변 주동자를 능가하는 역적이었으며, 동시대의 중국이었다면 능지형을 당해도 쌌다. 그래도 갑오개혁을 계기로 연좌제가 폐지되고 잔인한 형벌도 금지된 덕분인지, 그는 김 옥균이나 서 재필 같은 급의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훗날 1919년,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나서는 심한 복통과 각혈을 호소하다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거야말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고종의 붕어가 3· 1 운동의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도 명백한 팩트이고..

(2) 이 하영 (영어)
이 사람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랬는데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과 만나게 되고, 어설픈 일본어와 영어 실력만으로 고종 황제의 개인 통역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인생은 정말 타이밍인 듯..

그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출세하고 성공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줄 잘 서고 기회 잘 잡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결국은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일제로부터 자작 지위도 받고, 조선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더 옛날에 김 대건 신부도 똑똑해서 외국어를 몇 개씩이나 구사했다고 한다. 조선의 관료들도 그 실력이 아까우니 가톨릭 신앙만 버리면 당장 살려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남에게 없는 외국어 실력을 갖고도 이렇게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연 저렇게 산 사람도 있었다.;;
참고로 이 하영의 손자 중 하나가 참 군인이라 일컬어지던 이 종찬 장군이다.

4. 이완용보다 더 부자 매국노

구한말에 나라를 팔아넘겨서 그 댓가로 호의호식했던 매국노는.. 그 뒤에 활동했던 생계형 친일파나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전자가 후자보다 수가 더 적으며, 훨씬 더 부유하게 살았고 죄질도 더 나쁘다고 봐야 한다.

매국노의 대명사야 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교집합 그랜드슬램을 모두 찍은 이 완용이다. 하지만 재산으로만 따지자면 이 완용보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더 갑부, 더 억만장자가 된 반역자도 있었다.

  • 민 영휘: 남이섬이 바로 이 사람의 손자인 민 병도의 사유지라 해서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 시절에 그 정도 가격이면 한국 은행의 총재까지 역임했던 능력자 민 병도가 개인 연봉과 퇴직금만으로 마련할 수 있는 부동산이고, 딱히 친일의 댓가· 피 묻은 돈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상태이다. (참고로 국사학자는 이 병도이구나)

  • 윤 덕영: 지금의 수성동 계곡까지 포함해서 서울 옥인동, 인왕산 자락까지 그야말로 초대형 저택을 꾸렸던 미친놈이었다. 재산이 이 완용보다도 몇 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밑천으로 해서 각종 부동산이나 사업으로 재산을 더 불린 것도 생각해야 한다. (참고로 축구 선수 골키퍼는 홍 덕영..;;)

Posted by 사무엘

2021/10/29 08:35 2021/10/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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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언어 유희

1.
일본식 소주인지 청주인지.. 그런 술을 일본어로 '사케'라고 부른다. 그런데 술안주 중의 하나인 연어도 외래어 음차인 '사먼'뿐만 아니라 '사케'라고 한댄다. (단, 억양의 차이는 있음)
우리말에서 고장(region / out-of-order)이나 거리(distance / street)처럼 일본어에도 이런 유형의 동음이의어가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저 섬나라 사람들도 술을 무척 좋아하는지.. 자국에서 개발한 공개 키 암호화 알고리즘의 이름도 SAKKE라고 붙였다. 고안자의 이름 같은 여러 단어들의 이니셜이긴 한데, 이어서 발음하면 저렇다.;;
하긴, 옛날에 일본 SEGA에서 개발된 황금도끼 게임도 몹들의 이름이 다들 술 이름이긴 했다.

2.
우리나라엔 '대성 나찌 유압 공업'이라고.. 대성 그룹의 계열사이면서 일본에 있는 '나찌-후지코시'라는 이름의 기업과 제휴해서 설립된 기업이 있다. (☞ 홈페이지)
독일 나치 NAZI도 아니고 일본 나치 NACHI라니..!! 대박이다.

하긴, 그 시절에 일본군보다야 독일군이 '때깔'이 더 멋있긴 했다.
검은 군복은 과거에 우리나라 박통의 참모이던 차 지철조차 흉내 냈을 정도이고, 로마 제국 스타일을 흉내 낸 팔 뻗는 경례도 그 자체는 간지 나잖아..

독일은 유보트, V1, V2, 티거 전차 같은 무기도 그렇고, 베를린 올림픽 때 이미 텔레비전 생중계까지.. 과학 기술도 세계 최강이었다.
열등한 인종 민족을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다고 선 넘는 악행만 안 벌였으면 1차 대전 때처럼 그냥 평범한 패전국으로만 남았을 텐데.. 그건 교만으로 인한 패망이고 걔네들의 자업자득이 됐다.

3.
우리나라 현대로템은 '한국 철도 차량'이라고 처음에 상호를 정했는데.. 이게 영어 이니셜이 "KOROS 고로스"(일본어로 殺 죽인다)라고 읽히고 일본 거래처에서 기겁을 하는 바람에 다른 단어를 갖다붙여서 뭔가 스덕스러운 '로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난 일본어를 모르지만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서유기 편에서 "1등 하는 놈을 증오로 죽인다~!"라는 삼장법사의 저주 대사를 통해서 '이치 ... 고로스'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일본은 같은 추축국 전범국이어서 그런지, '고로스'에는 민감하면서 어째 나찌라는 상호는 멀쩡히 남아 있나 보다.

4.
일본어 언어유희라는 분야의 끝판왕은 일본의 20세기 격변기를 풍미했던 히로히토 천황의 궁호(미야고)이지 싶다. 한자로는 迪宮인데, 일본어로 읽으면 '미치노미야'...=_=;; 였다.
이건 일제 시대 때 조선인들로부터 당연히 0순위로 '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는 언어유희와 놀림의 대상이 됐다. 순사 짭새들에 대한 멸칭인 '개/나리'만 있던 게 아니었다.

창씨개명이 행해졌을 때도 이 이름을 응용한 창작물이 많이 시도됐다. 그건 좋게 끝나면 등록이 거부되고 퇴짜 맞았으며, 나쁘게 끝나면 당사자가 경찰서로 끌려가서 코렁탕을 먹었다.
일본에서도 식민지 언어인 조선어에 대해 연구를 안 한 게 아니고 한때는 한글/조선어 독본까지 만들었을 정도인데.. 이런 언어유희를 모를 리 없었다.

요즘은 반일 감정에 편승해서 국내 언론에서 어지간해서는 그냥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하지만 1990년대 말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로 우리나라가 외교 때 정식으로 사용하는 칭호는 여전히 원형 그대로 '천황'이다. 북괴의 수장도 꼬박꼬박 위원장이라고 불러 준다면 굳이 천황만 꺼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5.
옛날에 홍 사익이라고.. 조선 황실 출신이 아닌 평민으로서 일본 육사와 육대를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중장(한국군으로 치면 투스타 소장에 대응) 계급에까지 오른 유일한 개룡남 조선인이 있었다. 1889년 3월생으로 히틀러나 찰리 채플린과 거의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패전 이후에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서 사형을 당했다. 이 사람이 직접 전쟁을 벌이고 나쁜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필리핀에서 저질러진 대규모 연합군 포로 학대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인 예우도 못 받았는지 총살이 아닌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 돌아와서는 지인들에게 "나 갑종 합격이야~!"라고.. 무슨 징병 신체검사 1급을 받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얘기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뭐 갑종...?? 아.. 교수라고..? 교수형??!!!" 일본어는 甲種과 絞首가 발음이 こうしゅ(코우슈)로 같아서 나름 개드립을 친 것이었다.

우리 한국어로 치면 "내 동생이 방금 대학 교수 임용에 합격해서 난 이제 교수형이지롱~" 이런 드립을 친 것과 정확하게 같았다.

진짜 악질 전범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옥중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부처님.. 나무아 '미타' 불...)에게 가는 기쁨이여~~" 이런 유언을 남긴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반면, 홍 사익은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참회와 회개의 고백인 시편 51편을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되뇌이고 들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 사람은 뭐 독립운동 유공자로 예우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친일 반민족행위자라고 낙인 찍고 지탄할 대상도 아니었다. 동족에게 막 적극적이고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며, 창씨개명도 안 하고 늘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일본군 내에서 인정받고 저 정도로 출세한 건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그랬는데 결국 일본은 패망했고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 전범이 되어 처벌 받았다니 저 사람 개인으로서는 무척 불운한 경우였다고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10/23 19:35 2021/10/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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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구한말에 개신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는 감리교가 우세했다. 서 재필, 이 승만, 김 구, 유 관순, 최 용신, 남궁 억, 이 준 이런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은 다 감리교인이었다. 제암리 교회도 감리교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국내에서 장로교가 감리교를 누르고 지금처럼 세력이 커지게 됐을까?? 아, 장로교 안에도 고신, 예장, 기장 온갖 브랜드들이 있어서 성향의 차이가 크다는 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로 뭉뚱그려 봤을 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진귀한 데이터는 어떤 근거로 산출되었고 믿을 만한지 모르겠다. (☞ 출처)
허나, 이 표에 따르면 장로교는 생각보다 이른 일제 시대 초기부터 감리교를 누르고 우위를 차지했던 것 같다. 1900년대 후반은 정말로 '평양 대부흥'의 버프를 받기라도 한 걸까..?

이 때문인지 일제 말기 때 한국 교회들이 신사 참배에 굴복했을 때, 개인 단위로라도 항거했던 목사들은 다 장로교 출신이었다. 선교 초기에 장로교와 감리교는 한국 땅에서 서로 나와바리(?)를 어떻게 분할했을까?
안 창호도 비슷한 성향과 연배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장로교 출신이다. 내 직관과 달리, 의외로 감리교가 아니더라.

그 대신 감리교는 초창기에 항일 민족주의 성향을 많이 드러냈고, 이 때문에 일찍부터 탄압을 많이 받아서 교세가 주춤해진 거라는 해석도 있다.
전라도가 3· 1 운동 참가자 비율이 낮았던 이유는 그 동네가 사상이 불온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구한말 때 의병이 제일 많이 활동했었는데 일찌감치 토벌 당하고 와해되고 탄압을 제일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감리교에 대해서 아는 건 남자한테도 권사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 거 같더라, 목사가 로만 칼라 복장이더라, 알미니안주의를 좋아한다더라, 영성 훈련 이런 거 좋아하더라.. 이렇게 소문으로만 들은 게 전부이다. 직접 경험한 건 전혀 없다.
동성애 지지, 여자 목사, WCC, 정치 운동 이런 거는 특정 교파만의 문제는 아니고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일탈이니, 교파 전체의 문제로 싸잡아 침소봉대하지는 않겠다.

본인의 학창 시절에 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들은 다 장로교였지, 감리교는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좀 엄한 비유이다만, 접근성과 존재감을 햄버거 가게에다 비유하자면 장로교는 롯데리아-_-이고, 감리교는 버거킹 내지 맥도날드 같다.;; ㄲㄲㄲㄲ

2. 일본

일본은 조선(한반도)보다 더 옛날, 중세 때 포루투갈과 교류하면서 가톨릭이 먼저 들어왔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왜군 적장 중에도 이미 독실한 신자가 있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여 에도 막부가 시작됐을 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독한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고 그게 공식적으로는 먼 훗날 메이지 유신 때가 돼서야 풀렸다.

쟤들은 왜 가톨릭을 박해했는지, 거기도 황 사영 백서 같은 사건이 있었는지, 일본과 나중에 교류를 시작한 네덜란드나 영국 같은 나라들은 개신교 선교를 하지 않았는지? 일본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뭐 그런 것들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내가 자료와 정보를 입수한 게 맞다면.. 일본에서 가톨릭은 제사 거부 같은 종교 교리 때문에 찍힌 것보다는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서고 밉보인 게 더 컸다. 하필 가톨릭 신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진영에 많이 있었고 그 중 일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래서 가톨릭 전체가 역적의 종교로 싸잡아 낙인 찍혀 버렸던 것 같다.

나중엔 이웃 조선에서도 내가 추정하기로 종교 7 정치 3 정도 비율의 반감으로 인해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긴 했다. 하지만 조선은 법대로 곱게 목을 치기만 했지, 중세 일본처럼 사람을 매달아 놓고 창으로 찌른다거나, 갯벌에다 꽁꽁 묶어서 민물 바닷물에 서서히 익사시킨다거나,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다가 사람을 쳐박아 넣는 식으로 가학적인 방식을 일부러 고안해서 고문· 처형을 하지는 않았다.

에도 막부 때 일본은 왜구가 없어지고 중앙 집권 통치가 정착되고 유럽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예전과는 다른 나라로 탈바꿈했다. (왜구는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장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골칫거리였음)
하지만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국가이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와는 처음부터 종교 포교를 금지하고 물자와 기술 교류만 했다. 일본이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계열 종교가 맥을 못추고 소수에 머물러 있게 된 것에는 이런 역사 배경도 기여했다.

그때 일본에서는 '후미에'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신자를 색출했던 걸로 유명하다.
나는 지금 살아 계신 부모님 사진을 밟고 지나가라고 하면 도의적으로 못 하지만, 실제 모습을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예수· 마리아 얼굴 그림이라는 건 차라리 별다른 죄책감 없이 밟고 지나갈 것 같다..;;

물론 성화· 성물로 신자 색출이 안 된다면 쟤들도 어차피 "김 일성 개XX 해 봐" 같은 더 고차원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앙 고백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색출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성물· 성화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개신교 사고방식에 근거한 후미에 회피는 별 영양가 없는 가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 쪽이라고 해도 좀 보수적인 사람은 외형적인 경건(?)과 절도 있음을 강조하곤 한다. 꼭 예수· 마리아 얼굴 그림이 아니더라도 성경책을 다른 책보다 신줏단지 모시듯이 신성하게 취급한다거나 할 수는 있다. 이런 것까지 그 당시 주변 맥락을 무시하고서 우상 숭배라고 싸잡아 정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에서 산파들은 자기 양심과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애들을 살려 주고는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산파들이 이유야 어쨌든 거짓말을 했으니 쟤들은 나쁜놈" 이러는 무책임하고 융통성 없는 잔인한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같은 사고방식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고방식, 공의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넓은 안목에서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 때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화를 감히 밟고 지나가지 않는 게 최선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알기로 가톨릭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의 일환으로 성찬식 때의 빵과 잔도 굉장히 신성하게 취급한다. 정작 개신교에서는 주의 만찬 때 썼다는 포도 주스나 빵이 남았으면 그냥 별 생각 없이 애들 줘 버리거나 임의 처분을 해도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게 옛날에는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교리 차이였다는 게 참 므흣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은 가톨릭이 먼저 들어오고 박해를 한바탕 겪었다가.. 19세기 중후반,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물을 먹어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군대와 선교사를 보낼 때쯤에 개신교가 들어왔다. 이때는 조선은 다 망해 가고 있었고, 일본은 반대로 서양물 먹으면서 근대화 중이었기 때문에 정부에 의한 종교 박해는 없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유럽의 기독교계에서도 교리에 목숨 걸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갖고 열나게 싸웠었는데.. 19세기 말에 가서는 초교파 선교 복음주의 쪽으로 트렌드가 바뀐 듯하다. 나중에는 그게 은사주의로까지 바뀌었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9/22 19:37 2021/09/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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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과학사 에피소드

※ 세균의 발견, 비타민의 발견

1. 19세기는 인류가 미생물과 세균을 막 발견하고,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떠나 보낸 시기였다.
독일에서는 로베르트 코흐가 1880년대에 탄저병, 결핵, 콜레라의 원인균을 최초로 발견해 냈는데, 같은 나라의 '막스 폰 페텐코퍼'라는 과학자는.. 위생학의 거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균설을 믿지 않았다. 더러운 물을 덮어놓고 마셔서 생물학적 세균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해로운 독 때문에 탈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면 유전병 또는 영양 결핍 따위..

그는 자기 주장을 입증해 보이겠다면서 콜레라 세균을 일부러 잔뜩 모아 놓은 맑은(?) 물을 공개적으로 원샷까지 했다.. =_=;; 그랬는데 그는 며칠(3~4일-_-) 설사만 약간 좀 하더니 멀쩡하게 나았다. 선천적으로 위장이 튼튼하고 면역력이 강했던가 보다.

그는 기고만장해서 자기 제자(루돌프 에머리히)한테까지 그 물을 먹였다. 불쌍한 그 제자는 죽을병을 끙끙 앓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그래도 페텐코퍼 아재는 죽을 때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더러운 물 때문에 콜레라가 창궐한다는 것까지는 맞았다. 단지 더러운 물에 병균이 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2. 그 다음으로 20세기에는 인류는 세균에 이어 비타민과 바이러스라는 것까지 발견해 냈다.
일본에서는 '모리 오가이'라고 문과 배경에다가 의학· 생리학을 두루 섭렵하여 일본군 육군 군의관을 역임한 꽤 똑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군대에서 비타민 B의 결핍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기병까지도 세균성 질환이라는 견해를 고집했다. 그래서 예방을 위해 식단 개선이 아니라 그저 근성으로 내무반 위생 검열만 빡세게 시켰다.

이 때문에 러일 전쟁 때 통계에 따르면 육군에서만 25만 명이나 되는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 중 약 2만 8천여 명이 사망했다. 이 환자 및 사망자는 거의 다 육군이었다. 오히려 식단이 더 열악했을 해군이 경험적으로 잡곡밥 처방을 하고 있어서 각기병 환자가 별로 없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자기 선에서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실책으로 많은 병사들을 죽이는 흑역사를 남겼다는 점에서는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도 비슷해 보인다. 이 사람도 죽을 때까지 비타민 B 결핍증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 파리와 구더기가 같은 종의 생물이라는 걸 모르고, 반드시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던 시절, 무작정 피를 빼내기만 하다가 생사람 잡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위생 보건 지식과 노하우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물리학에서는 19세기 말에 X선, 방사선 따위가 발견되고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한 반면, 생물학은 비슷한 시기에 미생물과 세균의 존재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저런 논쟁이 오갔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바이러스도 아니고 세균은 양성자 중성자보다는 덩치가 훨씬 더 큰 놈일 텐데.. 그만치 생물은 무생물보다 연구하기 더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 지구의 나이, 우주의 나이

1. 미국의 클레어 패터슨이라는 과학자는 납 농도만 죽어라고 측정하다가 지구의 나이 대략 45.5억 년을 계산해 내는 업적을 남겼다. 이게 1940년대 말의 일이며, 그 이후로 지질학· 천문학에서 몇억, 몇천만 년 전 이러는 것들은(Before Present) 편의상 1950년 1월 1일로부터 그만치 전이라는 뜻으로 관행이 정착됐다. 컴퓨터의 유닉스 원년인 1970년 1월 1일보다 정확하게 20년 더 전이다.

이 사람은 실험 중에 다른 모든 변인을 통제했는데도 납 농도 측정이 정확하게 안 되고 뒤죽박죽인 이유를 캐다가..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공기 중의 납 농도가 미세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걸 덤으로 알아내기도 했다.

납이야 인체에 매우 해로운 중금속이니.. 이 사람 덕분에 1970년대 이후부터 무연 휘발유가 따로 개발되게 되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어떻게 감지하고 인과관계까지 파악한 걸까?
자외선(오존층 파괴), 이산화탄소만큼이나 나름 지구를 구한 셈이다.

2. 1964년,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둘(윌슨과 펜지어스)은 인공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야 하는데 사방팔방에서 감지되는 정체 모를 미세한 잡음 때문에 무진장 고생하고 있었다. 안테나를 아무리 닦고 광 내도 잡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잡음의 정체는 우주를 균일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 아주 미약 미세한 열복사 전자기파였다. 지구의 운동, 계절 따위와 무관하게 모든 방향에서 거의 같은 세기로 도달했다. 즉, 얘는 태양계 바깥에서 온 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대폭발설, 일명 빅뱅 이론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 우주는 첫 시작이 있고 대폭발이 일어난 뒤 지금까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대폭발이 있었던 시점은 약 133억 년 전으로 여겨진다.

중세 때 천동설과 지동설이 대립했다면, 근현대의 천문학계에서는 정상우주설과 빅뱅이 대립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는데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관측 덕분에 결과는 빅뱅의 KO승.. 이게 얼마나 대단한 발견이었으면, 저 두 사람은 지구를 구한 클레어 패터슨도 못 받은 노벨 상을 받았다.

* 납과 전파 잡음. 지구와 우주에서 십억 년을 넘는 연대기를 측정하는 실험엔 실험을 방해하던 외부 요인과 뭔가 ‘우연’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1/09/20 08:35 2021/09/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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