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선의 역사

금강산선에 이어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의 산악 철도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즐거운 한국 철도 역사 탐방 -- 태백선 편이다.

태백선은 중앙선(제천)과 영동선(동백산) 사이에 있으며, 우리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열차를 타고 갈 때 거치는 노선이다. 고속철이나 대도시 광역전철이 아니면서 대한민국에 2013년 현재 마지막으로 건설된 지방 대 지방 ‘신규 간선 철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태백선이 없던 시절엔 서울에서 강릉을 갈 때 무려 경상북도 영주까지 내려가서 영동선을 타고 다시 올라가야 했으니, 이는 어마어마한 우회와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태백선은 경부선처럼 처음부터 서울-부산 같은 식으로 전구간이 작정하고 한 번에 확 구상되고 건설된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여러 소규모 철도들이 독립적으로 찔끔찔끔 건설되고 연장되어 왔는데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최종적으로 태백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위키백과의 다음 그림이 태백선의 복잡한 내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철도 동호계에서 유명한 ‘조사부장’이라는 분이 만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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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었다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 치면 마치 멸종한 '모아'(moa)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태백선은 해방 이후에 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다.
생각을 해 보시라. 예전에 한반도에는 탄광과 공장이 거의 다 북부 지방에 몰려 있었는데 그게 이제 전부 북한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남한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자기네 지역에 있는 탄광이라도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업선 철도의 건설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1955년에 처음으로 제천-영월(약 34.1km) 구간이 건설된 것이 영월선으로, 이것이 태백선의 전신 되시겠다. 그 후 이 철도는 연장되어 함백 역까지 이어졌으며 함백선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함백 역에서 동쪽으로 더 연장을 하기가 어려웠다. 지형의 특성상 급커브와 급경사가 불가피했다.
그래서 함백이 아니라 전역인 예미에서 새 선로를 뻗어서 조동, 증산, 정선을 이었으며, 제천에서 정선까지를 통틀어 정선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함백선은 예미에서 함백까지 가는 구선로만을 가리키는 지선이 되었다.

그럼 함백은 막다른 종착역(terminal)으로 전락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가는 선로는 1975년에 추가로 건설되어 함백선에 편입되었다. 단, 저 그림에서 볼 수 있듯, 급경사를 감안하여 동그란 똬리를 그리면서 우회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철도에 등장하는 4개의 똬리굴 중 하나이다. (중앙선에 두 곳, 영동선에 스위치백을 대신하여 건설된 솔안 터널, 그리고 저것)

결국 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길은 곧은 길과 함백을 경유하여 우회하는 길 두 갈래가 존재하게 됐다. 요약하자면 함백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생겼지만, 그 뒤에 함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동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중에 생겼고,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똬리를 틀며 가는 길이 가장 늦게 생겼다.

지선인 함백선과 태백선 본선은 지리적으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혹시 태백선의 부분복선 구간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으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단선이 둘 존재하는 형태일 뿐이다. 양 선로에서 상행과 하행이 모두 오간다.

다만, 똬리굴이 없는 지름길은 우회가 없는 대신, 법적인 설계 한계에 육박할 정도의 급경사를 자랑한다(30퍼밀). 2도가 채 안 되는 오르막도 철도 차량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래서 무거운 화물 열차들은 상· 하행을 막론하고 함백선을 거쳐 가는 편이었다. 여객 열차는 맞은편에서 오는 열차와 원활히 교행하기 위해 함백선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그쪽으로 지나는 열차가 없다고 그런다.

태백선과 함백선의 관계는 이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새로 건설된 예미-조동 지름길 선로(현재의 태백선 본선)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멘(독일어 Rahmen) 식 교량 위에 놓여 있다. 일명 라멘교. 열차가 여기를 지날 때 창 밖으로 아래를 보면 함백선이 응당 내려다 보인다. (이 시점에서 FSM교의 'RAmen!' 구호라든가, 면발과 국물과 김치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라면교가 떠오른다면 지는 거다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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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60년대에 조동-예미 구간이 개량되고 정선선이 건설되고 있던 동안, 증산(현재의 민둥산)에서는 정선뿐만 아니라 고한으로 가는 철도도 건설되었으며, 동쪽에서도 황지(현재의 태백)에서 백산까지 현재의 영동선으로 치면 지선에 해당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두 철도가 동서로 한데 이어져야겠다는 스멜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고한과 황지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선과 영동선을 한데 잇는 철도가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태백선이 완성되었고, 정선선은 함백선과 마찬가지로 태백선의 지선이 되었다. 서울 방면에서 강릉으로 바로 올라가는 용도로 쓰이는 태백삼각선은 함백선의 똬리굴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앙선과 태백선, 영동선 구간은 전철화까지 완료되었다.

하지만 자동차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석탄 산업이 망하면서 이들 산업선의 지위 역시 오늘날 매우 쇠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뭐, 화물 수요가 꾸준히 있고 사북-고한 구간은 강원랜드-_- 때문에 여객 수요가 있으니, 완전히 망한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평창 동계 올림픽에 맞춰서 제천도 아니고 아예 원주에서 분기하는 강원도 행 철도가 복선 전철로 깔끔하게 건설된다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릉에 빨리 갈 수 있게 될 테고, 기존 태백선의 여객 수요는 크게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9 08:40 2013/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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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전기 철도, 금강산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는 금강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다. 경원선 철원 역에서 분기하여 국토의 딱 중부를 동서로 횡단한 뒤 금강산 근처의 내금강 역까지 가는 116.6km 길이의 철도이다. 처음에는 일본 내륙 철도 스타일의 협궤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표준궤로 형태가 변경되어 전구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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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1919년 3월 말에 건설이 논의되어 1924년에 부분 개통하고 1931년이 돼서야 전구간 개통했다. 건설 도중에 현장이 극심한 수해를 입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납품받을 예정이던 열차 부품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금강산선은 한국의 철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역사상 최초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틀어 유일했던 전기 철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존 글들을 뒤져 보면 전철이라는 금강산선의 위상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많이 강조하지만, '유일'이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키는 편인 듯.

전기 기관차는 매연을 뿜지 않으며, 물이나 석탄을 보충할 필요가 없이 전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곧장 공급받아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나아간다. 칙칙폭폭 같은 소리도 안 난다. 열차라고는 증기 기관차밖에 없던 그 시절에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는 디젤 기관차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디젤 기관차가 도입된 때는 6·25 중이던 1951년이다. 금강산선을 달리던 전기 기관차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원천은 인근의 산악 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관차의 차종들을 2000호대부터 8000호대까지 번호를 붙여서 식별하지만, 그때는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는 '데로'라고 불렸다.

전기 규격은 팬터그래프를 이용한 직류 1500V. 그러니 요즘 어지간한 지하철과 동일한 규격이 되겠다. 100km가 넘는 간선이면 교류를 써서 더 고압의 전기를 보내는 게 효율이 더 좋을 법도 해 보이나, 그 당시엔 더 정교한 변압 시설을 갖출 여건이 안 됐던 것 같다.

금강산선은 기업이 영리를 위해 건설한 사철이었으며, 거리당 임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용도는 대도시 통근을 위한 광역전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자원 수송을 위한 산업선도 아니었으며 건설 목적은 다름아닌 여가· 관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웰빙 열차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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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금강산선을 타고 금강산을 구경 가러 일본과 중국에서도 관광객이 왔으며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코스로도 애용되었다. 서울에서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직결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금강산선은 장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차는 하루에 7번 정도 다녔다고.

이게 왜 전철로 건설되었느냐 하면, 노선의 성격상 스위치백까지 있을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을 오르는 산악 철도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힘 좋은 전철을 투입하고도 정차를 가장 적게 하는 최고속 열차로 금강산선 전구간을 편도로 완주하는 데 4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표정 속도는 오늘날의 지하철보다도 살짝 느린 시속 30km대에 불과했다. 복선은 아니고 물론 단선 전철이다.

이렇듯, 금강산선은 우리나라 최초+유일한 전철 겸 관광 컨셉 노선으로서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금강산 종점 부근의 선로를 무려 49km나 뜯어내는 병크를 저질러서 금강산선은 금강산까지 갈 수 없는 노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 시절에는 전구간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6·25까지 터진 뒤부터는.. 그저 묵념.

앞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 금강산선은 전반적인 선형이 오늘날의 군사 분계선과 묘하게 비슷하다. 경원선이나 경의선은 북쪽으로 향하는 종축 노선인 반면, 금강산선은 횡축 노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원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 일부 구간에 존재하는 금강산선의 옛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속한 일부 구간은 북한이 2003년에 금강산 댐을 건설하면서 아예 수몰되기도 했다. 철덕으로서 아쉬움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강원도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방향만 다를지언정 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 지역인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이제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는 그냥 관광버스가 다니지 과연 철도가 다시 건설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금강산선은 재건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금강산선 이후로 대한민국에 전기 철도가 다시 등장한 건 무려 1970년대 초에 태백선과 중앙선이 산악 철도 산업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철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국가의 표준 전철 규격은 60Hz짜리 교류 25000V로 정해졌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알스톰 사의 8000호대 전기 기관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직류 1500V짜리 서울 지하철이 개통하기도 했다.

사실, 중앙선· 태백선 일대는 그 시절부터 만성적인 수송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전구간을 복선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선로 말고도 열차의 소통을 심각하게 저해하던 병목 중 하나가 바로 디젤 기관차의 열악한 출력이었다고 하니, 당시 전철화가 얼마나 시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전기 기관차는 가감속 좋고, 한 기관차에 어마어마한 양의 객차/화차를 연결할 수 있으니, 복선화가 아니라 전철화만으로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환경 이슈 같은 건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한편, 북한은 장거리 간선에 직류 3000V와 평양 지하철에 직류 750V를 쓰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전기 규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철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제3궤조 방식으로 집전한다. 전철화 비율 자체는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더 높았다고 하나, 전기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못해서 말짱 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6 08:39 2013/05/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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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인 철도 드립 ㅋ

1899. 9. 18.
2004. 4. 1.
1994. 9. 1.
1905. 1. 1.
2010. 11. 1.
1974. 8. 15.
2006. 12. 8.
1985. 11. 16.
1987. 7. 6.
2003. 4. 30.
2005. 1. 1.
2008. 6. 20.
1925. 9. 30.
1967. 8. 31.
1995. 12. 31.
2000. 11. 14.
1981. 12. 23.
1984. 1. 1.

당신은 이런 날짜들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우리나라 역사 속의 순간들이 곧장 떠오르는가?

내가 거의 9~10년 가까이 철도를 빨면서 느낀 건데, 철도는 혼의 구원만 빼고 인간 정서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학창 시절에 국사 과목을 지지리도 싫어했던 나 같은 사람도 연표 암기를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이 할 수 있게 해 준 존재가 바로 철도이다. 정말 Looking for you를 3천 번 정도 들어 보면 사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아이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역사와 지리에 애착을 갖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알고 문과· 이과· 예체능을 골고루 갖춘 인재가 되길 원하는가? 그럼 어릴 때부터 온몸으로 철도를 경험시키고, 철길 주변에서 아이를 키워라. 난 대학 졸업할 때가 다 돼서야 철도를 접한 완전 늦깎이여서 그렇게 못 자란 게 한이다.

2000년대 초에 아직 코레일이 출범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철도청은 정부 기관이었으며 승무원은 죄다 ‘공무원’이었다. 그리고 철도는 국영, 독점이라는 수식어를 받는 가장 경직되고 사회주의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적자가 나도 그냥 세금으로 메우면 되고, 마케팅· 시장 경쟁 같은 건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체계 하에서도 최고급 열차인 새마을호에서는 운행 직전과 종료 직전에 Looking for you라는 희대의 충격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니!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가히 신묘불측의 영역이요 주최 측의 농간이며,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4분 20초짜리 음악 한 곡 때문에 당시 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trance를 경험하고 완전히 철덕의 길로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Looking for you의 멜로디와 박자에 맡기자, 온갖 철도 지식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음악, 과학 등에 대한 향학열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의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철도청 내지 그 후신 코레일은 날 빨랑 책임져라.. (엉? ㅋㅋ)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오직 사랑 안에서 철도를 논하며”
“너희 속에 있는 철도 안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적이 있는 과분한 칭호들

철도 매니아, 진정한 의미의 오타쿠
철도교 교주
철도교 광신자
철도의 요정 (!!!)
천국에서도 철도를 만들 사람

“MALTA는 이 홈페이지 보면 상 줘야 된다” (Looking for you 음악의 작곡자!)
“철도청에서 너한테 상 줘야 된다”
“형제가 철도청 못 들어가면 그건 국가적인 손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4 08:22 2013/05/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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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컴퓨터의 인터넷 접근성이 워낙 좋아져서 응용 프로그램의 도움말은 그냥 개발사의 웹페이지에 기재된 문서 링크를 여는 걸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용자의 컴퓨터에 직접 저장되어 있는 형태의 도움말 시스템도 여전히 필요하며 수요가 있다.

Windows가 98 시절부터 도입한 CHM, 즉 HTML 도움말은 여러 HTML 문서와 그림들을 한 파일로 묶어서 단일 컬렉션 파일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도움말뿐만이 아니라 웹 문서 아카이브로도 활용할 수 있고 대단히 유용하다. 그 잠재적 유용성에 비해서 MS가 이 기술을 너무 홀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야 HtmlHelp 함수를 호출할 때 부모 윈도우의 핸들로 내 창을 넘겨 주면 알아서 도움말 창이 잘 생성된다. 그런데 내 프로그램은 별도로 창을 만들지 않으면서 HTML 도움말만 띄우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령, 프로그램을 /?라는 인자를 주고 실행하면 옵션 사용법 도움말만 HTML 도움말 형태로 나온 뒤 프로그램을 바로 종료하게 하고 싶을 때 말이다.

일단, 운영체제는 HH.EXE라고 간단히 HTML 도움말을 띄워 주는 껍데기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CHM 확장자는 기본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ShellExecute 함수로 내 도움말 파일을 "open" 구동을 하면 도움말이 바로 뜨긴 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도움말을 띄우는 것 자체 말고는 도움말 창에 대해서 그 어떤 제어도 할 수 없다. 가령, index.htm 같은 기본 시작 화면이 아니라 도움말 파일 내부에 있는 특정 문서를 바로 열게 하고 싶으면 도움말을 열지 말고 HH.EXE를 열고, 옵션에다가 xxxx.chm::/yyyy.htm 같은 식으로, chm 파일과 내부의 문서 파일을 이어서 특이하게 줘야 한다.

또한, HH.EXE의 실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후속 처리를 하게 하려면 이 프로세스의 핸들을 얻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ShellExecute보다 사용하기가 훨씬 더 까다로운 CreateProcess를 써야 할 것이다.

사실, WinHlp32.exe로 구동되던 과거의 HLP 도움말과는 달리, HTML 도움말은 hhctrl.ocx라는 DLL을 통해 in-process로 구동된다는 큰 차이가 있다. 이 특성을 살려, 굳이 외부 껍데기 프로세스인 HH.EXE를 호출하지 않고 내 프로세스가 직접 HTML 도움말 창 하나만 띄웠다가 곱게 종료할 수는 없을까?

부모 윈도우에다가 NULL을 주고 그냥 HtmlHelp 함수만 호출한 뒤 프로그램을 종료해 버리면, 도움말 창이 한 0.1초가량 눈에 비쳤다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이 함수는 도움말 창을 띄워 주는 CreateWindowEx 함수와 개념상 거의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함수도 생성된 도움말 창의 핸들값을 되돌리며, 창을 만든 뒤에는 그 창을 실제로 동작하게 하는 message loop을 돌려 줘야 한다.

HWND hMyWnd=::HtmlHelp(NULL, _T("xxxx.chm"), 0, 0);
ASSERT(hMyWnd!=NULL);

MSG m;
while(::GetMessage(&m,NULL,0,0)>0) {
    ::TranslateMessage(&m); ::DispatchMessage(&m);
}

이렇게 하면 도움말 창이 나타나긴 하나..
이번엔 도움말 창을 닫아도 프로그램이 종료되지 않고 '작업 관리자'에 내 프로세스가 언제까지나 표시되어 보인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직접 창을 띄우고 윈도우 클래스를 등록하고 윈도우 프로시저를 구현하였다면, WM_DESTROY 메시지에서 응당 PostQuitMessage 함수를 호출해 줘서 GetMessage가 while문을 종료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말 창은 일반적으로 닫는다고 해서 응용 프로그램을 종료시키는 용도로 쓰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도움말 창만 단독으로 띄울 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HTML 도움말 창이 없어질 때 프로그램도 정상적으로 종료되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도움말 창이 WM_DESTROY 메시지를 받는 시점을 우리 프로그램이 잡아내어 그때 인위로 PostQuitMessage 함수를 호출하는 것이다. 훅킹(SetWindowsHookEx) 또는 서브클래싱(SetWindowLongPtr)을 생각할 수 있는데, 훅킹까지 쓰는 건 너무 오버인 것 같고, 내 경험상 이럴 때는 WM_DESTROY에 대해서 추가 처리만 살짝 해 주는 서브클래싱이 무난하다.

일반적으로 서브클래싱은 대화상자 안에 있는 각종 자식 컨트롤들의 동작을 미묘하게 바꾸기 위해서 하는데, 이렇게 큼직한 프레임 윈도우도 서브클래싱이 가능하다. 뭐, 서브클래싱을 쓰든 훅킹을 쓰든 어쨌든 콜백 함수를 정의해 줘야 하고 콜백 함수에게 context를 제공하기 위한 전역 변수나 TLS 슬롯이 필요하니 일이 여러 모로 복잡해진다.

다음 둘째는 첫째보다 더 정석적인 방법이다.
사실은 HTML 도움말 시스템 자체에, 도움말 창이 종료될 때 WM_QUIT 메시지를 보내게 하는 옵션이 있다. 딱 한 번만 옵션을 지정해 주고 나면 뒤끝 없이 OK이고 훅킹이고 뭐고 같은 지저분한 루틴이 없으니 아주 좋다. 그러나 옵션을 지정해 주는 방법이 생각보다 굉장히 지저분하다. API가 좀 구리게 설계되었다.

HH_WINTYPE hwt, *pwt=NULL;
::HtmlHelp(NULL, _T("xxxx.chm>main"), HH_GET_WIN_TYPE, (DWORD_PTR)&pwt);
if(pwt) {
    hwt=*pwt;
    hwt.fsValidMembers=HHWIN_PARAM_PROPERTIES;
    hwt.fsWinProperties=pwt->fsWinProperties|HHWIN_PROP_POST_QUIT;
    ::HtmlHelp(NULL, NULL, HH_SET_WIN_TYPE, (DWORD_PTR)&hwt);
}

이미 도움말 창이 떠 있는 상태에서 HtmlHelp 함수를 또 호출한다. 그런데, 도움말 창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창 핸들을 넘기는 게 아니라 또 도움말 파일을 길게 지정하고(중복 과잉 정보 공급), 그 뒤에 창의 내부 이름을 지정해 줘야 한다. 창의 내부 이름은 그 도움말 파일을 만든 사람이 지정해 준 명칭이다(저 예에서는 main).

핵심은 property에다가 HHWIN_PROP_POST_QUIT라는 속성을 추가로 지정해 주는 것이다. 이 상수는 불행히도 MSDN에 제대로 문서화도 돼 있지 않은 완전 잉여이다. 덕분에 이 명칭으로 구글링을 해도 수 페이지에 걸쳐서 이 이름의 값이 선언된 헤더 파일만 잔뜩 걸려 나올 뿐, 더 자세한 설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HTML 도움말을 이런 식으로 깊숙하게(?) 다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다.

나도 htmlhelp.h 파일을 뒤지다가 이걸 정말 우연히 발견했다. 그래도 이걸 써 주니 도움말 창을 닫을 때 프로그램이 바로 종료되게 할 수 있었다. Windows 98부터 8까지 다 잘 동작한다. HTML 도움말을 만든 개발팀에서 이 도움말 창만 단독으로 뜨는 상황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공용 컨트롤을 다루면서 LVITEM 같은 구조체를 다룬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저건 API 설계가 좀 특이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구조체를 선언하고, 구조체의 크기(t.cbSize=sizeof(t))와 얻고 싶은 정보를 나타내는 비트 플래그를 지정한 뒤, 구조체의 주소를(&t) get 함수에다 넘겨 준다.

그런데 HtmlHelp의 GetWinType는 아예 내부 포인터를 받게 돼 있다.
그리고 내가 지정하는 값은 property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set을 할 때 일단은 구조체의 모든 멤버들의 값을 넘겨 줘야 한다(hwt=*pwt). 안 그러니까 프로그램이 에러가 나더라. 여러 모로 형태가 이상하다.

사실, HTML 도움말에는 저런 옵션을 지정할 필요가 없이 부모 윈도우에다가 여러 이벤트를 알려 주는 기능이 있다. 도움말 창이 처음으로 뜰 때(HHN_WINDOW_CREATE), 각종 페이지 이동 버튼을 누를 때(HHN_TRACK), 어떤 페이지를 성공적으로 열었을 때(HHN_NAVCOMPLETE) 이렇게 세 개가 정의되어 있는데, 사용자가 X 버튼을 눌러서 도움말 창이 소멸하는 시점을 알려 주는 기능이 없는 것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뜻밖이다. 왜 정작 필요한 이벤트는 없는 걸까? 본인이 개인적으로 가장 직관적으로 생각한 형태는 이런 것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메시지를 받으려면 나도 윈도우를 하나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E의 형태로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응용 프로그램이 아니라 DLL 형태인 IME들도 도움말을 표시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IME들은 안정성이나 키보드 포커스 같은 이유로 인해, 또 다른 DLL을 주입시키는 HtmlHelp 함수를 호출하는 게 아니라 앞서 소개했던 HH.EXE 프로세스를 수동으로 띄우는 원시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움말 명령을 여러 번 내리면 도움말 창이 한도 끝도 없이 여러 개 생기며, IME를 사용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종료하더라도 도움말 창은 같이 없어지지 않는다. Microsoft가 제공하는 기본 한중일 3개 국어 IME들이 모두 그렇게 동작하며, <날개셋> 한글 입력기 역시 외부 모듈은 그 관행을 따르고 있다.

본인을 포함해 HTML 도움말을 사용하는 많은 개발자들이 잊고 사는 사항인데, HTML 도움말도 원래는 사용 전에 초기화가 필요하다. HH_INITIALIZE 및 HH_UNINITIALIZE를 해 줘야 하고, 심지어는 message loop에다가도 원래는 HH_PRETRANSLATEMESSAGE를 해 줘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in-process 형태인 대신에 WinHelp 시절보다 번거로운 게 많아졌으며, IME의 경우 그런 것을 응용 프로그램에서 다 기대할 수 없으니 도움말을 외부 프로세스 형태로 실행해 주는 게 실제로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HTML 도움말은 다형성을 지닌 인자에다가 typecasting을 하면서 여러 명령을 전달한다는 점, 초기화 및 해제가 필요하고 state를 지닌 변수가 존재한다는 점 등으로 인해 나름 클래스 라이브러리로 만들기에 적절한 면모가 있다. 물론 이 클래스의 인스턴스는 딱 단일체(singleton) 형태로만 존재해도 충분할 테고. 앞서 언급했던 자체 message loop을 도는 기능 역시 이 클래스의 멤버 함수로 추가해서 제공하는 것도 디자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만하다.
이 글에서는 어쩌다 보니 HTML 도움말 하나만으로 일반적인 Windows 프로그래밍 이슈를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5/21 08:30 2013/05/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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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모태신앙일 뿐만 아니라 모태솔로-_-인 본인더러, 연애 하는 걸 좀 배우라고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볼 것을 강력히 권하는 지인이 주변에 있었다. 그래서 1년 전 영화를 찾아서 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은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다.

1. 1990년대도 벌써 20여 년 전의 추억이 돼 가는구나.

2. 내가 보기에도 남자가 정말 미치도록 숙맥이긴 하다. ㅎㅎ 스토리가 참 서정적이고, 흥행 성공했다는 게 수긍이 간다. 기존 소설을 영화화한 게 아니라니 의외.
나도 철도 얘기, 정치 얘기, 프로그래밍 얘기 같은 거 집어치우고, 이성하고 같이 순수하게 저렇게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좀 들긴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하긴 할까?

3. 건축학개론의 스토리 설정은.. 뭐랄까, 황 순원의 <소나기>에다가 옛날 하이텔에 pctools(김 현국) 님이 지은 <소나기 그 15년 후>-_-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저 15년 뒤 패러디판을 아는 분이 독자 여러분 중에 혹시 계시려나.. 물론 영화는 그 패러디물만 한 막장 스토리는 아니며, 여자 쪽이 죽는 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4. 그리고 결정적으로, 극중에 나오는 수업 내용은 건축공학하고는 아무 관계 없고 지리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내가 연세대 건축공학과의 수강 편람까지 다 찾아봤는데,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제목은 좀 낚시 같다.

지도 펼쳐서 길과 건물 살피고 여행 가는 건 철도에만 미치고 나면 알아서 다 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 짜 놓은 “철도학 개론” 커리큘럼을 참고하시라. 건축학 개론 영화가 나오기도 전에 만들어 놓은 자료이지만, 저거야말로 음대생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영화의 성격과 훨씬 더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수업이다

철도를 배경으로 사랑이 맺어지는 스토리의 영화가 나온다면 얼마나 멋질까! 영화 장면 중에는 중앙선 구둔 역도 나오더구만.

자, 그런 의미에서 “코레일-광역전철 길라잡이-구석구석 상상여행” 코너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KTX 촬영 명당인 반월 저수지 인근 야산도 아예 반월 역과 함께 공식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단, 이곳은 저 사이트에서 소개된 바와는 달리, 반월보다는 대야미 역에서 접근하는 게 거리가 약간 더 짧고, 찾아가기도 훨씬 더 쉽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로써 오늘도 기승전철 달성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9 08:26 2013/05/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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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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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보수, 우파'라고 하면 대체로 이런 성향을 싸잡아 일컫는 게 아닐까 싶다.

  • 역사· 이념적으로는 이 승만· 박 정희 전대통령에 대해 매우 옹호적이다. 이런 진영이 우리나라를 열악한 여건 속에서 비록 일부 과오도 저질렀지만 그건 위태롭던 시대 정황상 불가피한 것들도 많았고 전반적으로는 잘한 게 훨씬 더 많다. 폐허 속에서 경제 부흥과 자유 민주주의를 일군 대한민국 역사와 정체성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정치· 군사 방면으로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고 그들의 안보 위협을 좌시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종북 좌익들의 선동 때문에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반사 심리로 북한 주민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 도덕· 윤리 측면으로는 동성애 반대, 사형제 찬성, 체벌 옹호 등 말 그대로 과거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존중한다.
  • 경제 쪽에서는 사유 재산과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정부의 규제나 개입이 최소화된), 작은 정부, 선별적 복지를 최대한 민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듯, 성장이 최선의 복지이다. 그리고 친기업 정책이 최선의 일자리 창출 방법이다.
  • 종교 쪽은 꼭 일치하라는 법은 없지만 어쨌든 대체로 친기독교 성향이고, 최소한 기독 안티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보수라고 부른다면 나는 꼴보수이다. 그리고 이걸 우파라고 부른다면 난 극우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사회 통념적으로 지극히 건전하고 바람직하며, 성경과 하나님 앞에서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이념을 수꼴이라고 부른다면 난 기꺼이 수꼴이 돼 주겠다.

이런 방면엔 여러 유명 논객들이 있다. 저마다 프로필이 화려하며, 과거에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자기 분야에 기여하고 국가를 발전시킨 이력들이 있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 중, 본인은 최근에 정 창인 박사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는데..

1. 북한으로 자유를 확산시켜 북한 동포를 억압적 독재 체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바로 자유 통일입니다.
2. 우리가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면 건국 대통령 이 승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우리가 바른 의사 소통을 원한다면 한글만 쓰기를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우와! 블로그 소개글에 기재된 문장 하나하나가 지극히 공감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박사님께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곧장 성사됐다. 내가 먼저, 그것도 오프라인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페친 신청을 하는 경우는 매우 극히 드물다.

사실, 1940년대생에 육사 출신의 유학파 박사 군사 평론가라는 점에서 이분은 지 만원 박사와도 프로필이 비슷하다. 대북 강경론, 이 승만· 박 정희 빠, 한글 전용이라는 지론도 동일하다. 지 박사 역시 필요 이상의 한자 교육은 필요하지 않으며 한글 전용을 지지한다는 것을 글로 표명한 바 있다. (왜냐 하면 보수 진영에 잘 알다시피 유명한 한자 혼용론자 논객도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박사는 '보수'가 지니는 여러 속성들 중 저 세가지 세부 분야를 더욱 특화하여 미시는 듯하다. 박 정희의 경제 성장보다 이 승만의 반공 이념 건국을 더 밀고, 특별히 한글 전용도 더 강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 본인과는 그런 세부적인 취향까지 일치한다. 그러고 보니 정치· 철학 박사이면 이 승만하고 전공 분야도 아주 비슷하다?

난 사실 거의 15년 가까이 전의 고등학교 시절에 한글 학회 소식지 <한글 새소식>을 통해서 이분에 대해 사실 먼저 알고 있었다. 1999~2000년 사이에 한글 전용을 강한 호소력으로 지지하는 글을 투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글 하나가 아니라 <한글 사랑은 곧 나의 사랑>이라고 아예 시리즈로 아주 길게 글을 연재하셨다. 물론 저 블로그에서도 글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제는 문자관뿐만 아니라 다른 이념까지 일치하는 분이 되었으니 더욱 존경스럽게 보일 뿐이다.

지금 정 박사의 블로그는 첫 화면부터 <백년 전쟁>이 거의 성경 변개나 황 우석 논문 조작 급의 저질 퀄리티라는 걸 낱낱이 까발리는 반박 자료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백년 전쟁이란 중세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고 잔 다르크가 활약한 그 전쟁이 아니라, 이 승만에 대해 완전히 있지도 않은 사실 왜곡과 날조로 인격 살인과 난도질을 해 놓은 쓰레기 영상물의 이름을 일컫는다. 유튜브를 통해 이미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퍼 날랐다고 한다. 내가 이 승만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 몇몇 좌파 성향(?)의 지인들이 나보고도 그걸 좀 보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앞부분 조금만 봐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던데, 저분은 실제 미국 유학 생활을 토대로 더욱 조직적으로 <백년 전쟁>을 어디서 내밀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반박해 놓았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켕기는 게 있으니 이런 조잡한 방법으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을 능멸하고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한다는 게 느껴진다.

여러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기에 본인 역시 어린 시절엔 민문연 같은 단체가 존재의 의미가 있고 뜻 깊은 일을 한다고 인정을 했었으나.. 이런 걸 보면 정이 완전히 확 떨어지고 만다. 군사 정권 시절 같았으면 모조리 빨갱이로 몰려서 대표가 사형 당했어도 할 말이 없고 자업자득이었을 것이다..

이런 엉터리들이 이 승만 박사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엉터리 영상물을 만들었다. 이 승만 박사가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다. 이 승만 박사의 신발끈을 맬 자격도 없는 놈들이 감히 이 승만 박사에게 막말을 하고,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인격 모독과 인격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저질들이 바로 민족 문제 연구소--그 소장은 임 헌영이며 이사장은 함 세웅이다. 그리고 4.9 평화 재단, 그 이사장은 문 정현이다--의 실체다. (본문 중에서)


(* 본인 주: 사실, 이 승만 박사는 지하가 아니라 지금 하늘에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4 08:27 2013/05/1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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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은 누구는 애초부터 지옥 가라고 창조하셨고 누구는 천당 가라고 창조하셨다.
  • 빛이 없으면 자동으로 어둠이고 어둠이 먼저 있어야 빛이 필요하듯이, 선과 악도 서로 양 날개와 같은 존재이고 상대방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부류의 모든 거짓 교리들은 성경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저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다).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충족하는 성경의 하나님을 완전 잔인무도하고 무지막지한 신으로 왜곡함으로써 불신자에게는 회개하고 구원으로 이를 통로를 원천 차단하고, 안티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더욱 모함하고 조롱할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교리들이 잘못되었음을 널리 알려야 한다.

내가 예정론에 대해서 무엇보다 분노를 느끼는 건, 죄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왜곡한다는 점 때문이다.

생각을 해 보라. 왜 하나님이 죄인을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할 수밖에 없었나? 주위를 둘러보면 어지간히 평균적인 '교인'들보다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훌륭한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있는데도 우리가 어째서 감히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가?

죄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대가로 요구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존재인데,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을 무슨 죄인 역할극 악역 배우쯤으로 미화하는 이 무시무시한 교리는.. 마귀로부터 유래된 게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파라오와 헤롯의 유아 학살,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일본군 731 부대 생체 실험, 지존파,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전부 연기였다는 말인가?

파라오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곱게 내보내 줘도 어차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며 그게 피차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열 가지 재앙에 나라 경제를 완전히 말아먹고 험한 꼴을 다 당한 뒤에야 풀어 주게 됐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완악한 마음을 이용해서 그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보호 장치'를 해제해 버리셨으며 재앙을 통해 영광을 받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광 좀 받아야겠으니 너는 좀 이스라엘 백성 풀어 주지 말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 봐라. 나는 그 짓을 시키려고 너를 창조했다”는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악역을 활용하였으며, 좀 대놓고 말하자면 그들을 조롱하며 갖고 노신 적은 있다. 허나 당사자는 악역을 자처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사실 어떤 경우에도 악역을 맡아서는 안 된다. (그 중 제일 해서는 안 되는 악역은 유대인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악역은 죄이며 죄에는 심판과 형벌이 따를 뿐이기 때문이다. 악역을 자처해 봤자 삽질 잔뜩 하고, 시간· 돈 날리고 손해 보는 건 우리뿐이다.

하나님은 그 파라오인들 구원하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그가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었다면, 유대인들을 악하게 다룬 것과는 별개로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구원에 관한 한은, 이는 히틀러, 도조 히데키, 스탈린, 심지어 오늘날의 이북의 인간 악마 인간 백정 김씨 같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운명 예정론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다고 해서 자기가 무슨 아무 감정도 없는 로봇 컴퓨터이거나, 세상을 그런 기계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죄악으로 인해 인간을 지은 것을 슬퍼(repent)했다는 구절마저 성경에 들어있는 것이다. 로봇, 컴퓨터는 '정지 문제' 하나도 풀 수 없는 튜링 기계일 뿐이다. 0과 1만 분간할 수 있을 뿐, 선과 악을 분간할 수는 없으며 죄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없는 물건이다.

인간은 불가항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하나님 역시 불가항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을 결코 지옥에 보내지도 않는다. 지옥은 언제까지나 사람이 선악을 스스로 분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지은 자기 죄로 인해서 가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자발적으로 거부하여 제 발로 간다. 즉 전적으로 100% 후천적인 요인만 작용한다.

요컨대..하나님에게 미리 아심은 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런 운명의 데스티니가 보장되었다는 예정 정도는 성경적으로 물론 있다. 허나, 인간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미리 정해 놓은 예정 따위는 없다. 미리 아심은 read-only operation일 뿐이다. 혼동하지 말자.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딱 체계가 잡혀 있고 논리가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교리를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낭설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2 08:36 2013/05/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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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8 사용기

나보다 훨씬 더 전부터 8을 사용해 오신 분들께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정보이겠지만 어쨌든.
Windows 8은 잘 알다시피 데스크톱 PC용 소프트웨어에다 모바일 컨셉을 최대한 융합시킨 형태로 만들어졌다. UI 상으로는 Ctrl+클릭이 아닌 일반 클릭(=일반 터치)만으로 아이템 개별 복수 선택이 가능하게 바탕화면 아이콘들에 체크 박스가 뜨는 변화가 눈에 띈다.
그런데 문제는 Windows는 모바일 컨셉을 아무 단절감 없이 갖다붙이기에는 20여 년의 짬밥을 자랑하는 legacy가 너무 많다는 것. 이를 잘 절충하는 것도 숙제라면 숙제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Windows와 마소 제품들은 XP 이래로 모든 GUI가 “각진 직선이건 것이 둥근 곡선으로, 무미건조하던 단색이던 것이 그러데이션으로”라는 트렌드를 따르고 있었는데..
8에서는 이 추세를 정면으로 뒤집은 단순한 복고풍 디자인으로 돌아갔다.
이건 전력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는 모바일 환경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설계라고 그런다. 흠..
아이콘도 마찬가지로, Office, Visual Studio도 2012 버전은 아이콘 디자인이 다 초단순 형태로 바뀌었다.

IME들은 아이콘이 아예 흑백 컨셉 배색으로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모든 프로그램들이 IME와 한/영 상태를 공유하는 파격적인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IME 아이콘과 상태 아이콘 딱 둘만 갖고 있게 단순화된 것은 TSF의 도입 이전 internat.exe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프로그램 제목이 Windows 95/NT4 이래로 왼쪽 정렬이던 것이 가운데 정렬로 바뀐 것은 3.x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그 전의 1.x부터 3.x까지는 죄다 가운데 정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8은 메트로인지 뭔지 Modern UI 엔진을 얹느라 어쨌든 더 무거워졌을 텐데 그래도 비스타/7에 비해 체감상 딱히 무겁다는 느낌은 안 든다. 덩치에 비해 최적화를 잘 한 것 같다.
Modern UI 기반 앱은 전체 화면으로 동작하는 게 마치 예전의 도스용 프로그램들이 화면 해상도와 색상이 훨씬 더 향상된 채로 동작하는 것 같다.

단,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건, 과거 비스타/7의 Aero 컨셉이 완전히 폐기되었느냐는 것이다.
프로그램 창의 굵은 border에 비스타/7처럼 금속/유리 느낌이 드는 반투명 효과를 내는 기능이 없어지고 굵직한 입체 효과 그림자도 없어졌으며, 그저 투박한 solid color만 표시해 주는 걸로 일부러 바꿨는지? 비주얼에 관한 한 이건 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인 것 같다. 정발된 제품 말고 preview 버전에서는 반투명 효과가 여전히 있었던 것 같던데.
사실은 예제로 제공되던 테마와 배경 사진들의 수도 Windows 7 시절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또한 Windows 95/NT4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 시작 메뉴가 없어지고, PC에 설치돼 있는 프로그램들을 리스트 형태로 한눈에 조회할 수가 없고, 심지어 컴퓨터를 끄는 방법도 직관적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했다 해도 너무 이질적이고 과격한 것 같다. 실제로 Windows 8을 구했지만 이런 것 때문에 너무 불편해서 다시 7로 복귀한 사람도 주변에 심심찮게 보인다. 과거에 비스타 쓰다가 XP로 도로 복귀하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나도 컴퓨터 끄는 명령을 못 찾아서 한동안 그냥 데스크톱 바탕 화면에서 Alt+F4를 누르곤 했다.
마우스로 화면 우측 하단을 가리킨 뒤, Settings를 고르고, Power, Shut down을 순차적으로 고르면 되긴 한데 예전 버전보다 접근하기 불편하긴 하다. 컴퓨터 사용을 끝내려고 하는데 왜 시작(Start) 버튼을 눌러야 하느냐는 전통적인 딴지를 의식한 디자인인 건지?

그리고 내가 쓰던 어떤 Windows 8은 팝업 메뉴가 전통적인 왼쪽 기준이 아니라 오른쪽 기준으로 완전 듣도 보도 못한 생뚱맞은 엉뚱한 방식으로 표시되곤 했다. 이건 R2L이 일상인 아랍 문화권에 대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어나 영어밖에 볼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쓸데없는 기능임. 구글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다음 레지스트리 값을 1이 아닌 0으로 고친 후 계정 로그인을 다시 하면 된다.

HKEY_CURRENT_USER\Software\Microsoft\Windows NT\CurrentVersion\Windows → MenuDropAlignment

전반적으로는..
8은 분명 나쁘지는 않다. 허나 멀티터치가 지원되는 화면에서 Modern UI 앱을 즐겨 쓸 게 아니면, 굳이 7 잘 쓰던 걸 8로 바꿀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끝으로, 바야흐로 201x년대에 등장한 Windows 8에서도 여전히 버프를 못 받고 시간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 듯이 보이는 legacy GUI 요소를 둘 보이고 글을 맺겠다.

1. MDI 창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구에 습기가 찬다. 응용 프로그램의 border가 다 딱딱한 사각형으로 바뀐 마당에 MDI 프레임은 여전히 둥근 모서리 그대로이다. Windows Vista 이래로 코드가 하나도 고쳐진 게 없다는 뜻이다.

2. HTML 도움말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15년 전에 HTML 도움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나 지금이나, 일단 프로그램 아이콘이 16색 그대로이다. 레지스트리 편집기와 더불어 아이콘이 고정불변인 극히 드문 프로그램에 손꼽힌다. -_-;;

그리고 HTML 도움말의 About 화면을 보면 연도가 2002년에서 멈춰 있음을 알 수 있다. 캐안습.
그래도 마소가 HLP와는 달리 CHM의 지원은 그렇게 섣불리 중단하지 못할 것이다. 운영체제 차원에서 이 정도로 완성도 높은 도움말 엔진을 제공해 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마소 역시 다른 모든 프로그램에서는 구닥다리 HTML 도움말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도움말을 표시하지만, 레지스트리 편집기에서 F1을 누르면, 여전히 CHM 도움말이 HTML 도움말로 표시된다.
일반 사용자들이 즐겨 쓸 걸로 예상하지 않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UI를 대강 만들고 legacy 기술만으로 대충 때운다는 걸 알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0 08:30 2013/05/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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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저수지 답사를 마친 뒤 다음으로 본인이 간 곳은 또 다른 철도 성지였다.

2. 철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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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이제 내가 여기를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방문하는 날도 찾아오는구나! 그렇잖아도 의왕 역에서 철도 박물관까지 가려면 수백 m 이상 걸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주차는 공간이 아주 넉넉하고 요금 걱정도 없고 아무 문제 없었다.

예전에 철도 박물관은 겨우 몇백원 대의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저렴한 입장료를 징수했으며 그나마도 철도 회원은 동반 1인까지 아예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가 보니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언제부턴가 없어져 있었다. 일반인은 입장료 2천원을 내야 하며, 철도 회원 혜택 같은 거 없다.

물론 난 철덕으로서 예전에도 여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를 또 찾아간 이유는, 여기가 반월 저수지로부터 10km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겸사겸사 또 찾아갈 만한 명분이 성립하고, 개인적인 볼일이 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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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경부선 선로에 대한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것도 철도 박물관으로서 장점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까의 KTX 촬영지와 마찬가지로, 이 박물관의 근처에도 저수지가 있다는 점이다.

철도 박물관에서 본인은 부족했던 박물관 관련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방문 기념으로 구내 서점에서 다음 아이템들을 질렀다. (정 용태 님, 보고 계신지? 레일러 14호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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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판매하던 철도 박물관 도록은 이제 절판되고 없었다. 있을 때 사 놓길 잘했다. 그 대신 동인지 <레일러>를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 직원을 불러서 새마을호의 역사와 관련된 날짜가 두 군데 잘못 소개되어 있는 걸 고쳐 달라고 건의를 했다.
차량실에 새마을호 PP 디젤 동차가 1987년 7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고 소개되어 있는 걸 7월 6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고,
반대로 새마을호 PP가 최초로 서울-부산 4시간 10분 운행을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얘기해 줬다. 그건 PP가 등장하기 전에 1985년 11월 16일부터 달성된 것이니까 말이다.

3. 오봉 역

철도 박물관 다음으로 승용차로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철도 명소로는 오봉 역을 빼놓을 수 없다.
얘는 경부선에서 분기하는 지선인 남부 화물기지선의 끝에 있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객 영업 없이 화물만 취급하는 역이다.
먼 옛날에는 경부선 전철 의왕 역의 이름은 '부곡'이고 오봉 역이 '의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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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박물관과 오봉 역의 거리는 4km도 채 되지 않는다.
입구에 경비실이나 차량 진입 차단기 같은 건 없는지라, 별 부담 없이 차를 끌고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단, “직원 차량 외 주차 금지”라는 압박을 주는 표지판이 있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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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은 이렇게 생겼다.
철덕들 중에는 아예 승강장 내부로 들어가서 사진 촬영을 한 사람도 있는 듯하던데 난 차마 그렇게는 안 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나갔다. 그 대신 이런 근처의 선로 사진을 좀 남겼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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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부산 일대도 면적이 무척 넓고 철도 배선이 의외로 복잡하며, 항구나 공업 단지로 빠지는 지선 철도가 많기 때문에 승용차를 끌고 답사할 만한 곳이 무척 많을 것이다.

4. 김포 공항 근처

수도권 남부의 “반월 저수지-철도 박물관-오봉 역” 3대 명소를 아우르는 테마 여행을 이렇게 잘 마쳤다.
임무를 다 마쳤으니 이제 집에 갈까 생각했는데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고, 철도를 출사한 날 비행기도 같이 출사하여 둘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을 생각도 포기하고, 국도 1호선을 타고 서울 서부로 간 뒤 곧장 다시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 말이다.

반월 저수지가 KTX 촬영의 명당이라면, 오쇠 삼거리는 비행기 출사의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말 공교롭게도 여기도 전철 김포공항 역으로부터는 3.2km 정도 떨어져 있다. 다만, 여기는 버스가 수시로 많이 지나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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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주변의 흔한 보안 경고문.
여기는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이지만, 엄연히 국유지이기 때문에 민간인이 무단으로 이곳 땅을 이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처음 와 봤을 때에 비해서는 주변에 이것저것 공사도 많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덕분에 주차는 샛길 인근에 아무데나 얼마든지 해도 되니 걱정할 것 없다.
여담이지만 이 공항 주변의 황무지 일대에는 군부대인지 예비군 훈련장인지 어쨌든 군사 시설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지금 비행기가 놓인 저 활주로 말고, 왼쪽에도 활주로가 하나 더 있었으며 공항 내부의 비행기는 그 왼쪽 활주로에서 이륙을 하는 편이었다.
김포 공항에서는 아까 KTX보다도 더욱 자주, 수 분 간격으로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가 이착륙했다.

이륙은 본인이 서 있는 공항 남쪽으로 하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 한 관계로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착륙은 다행히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UFO처럼 아주 멀리서 불빛만 어렴풋이 보이던 비행기들이, 형체와 비행 소음이 갈수록 커지더니 공항 담장 너머로 사뿐이 착륙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항덕들은 비행기 한 대만 보면 보잉 7xx 같은 기종은 물론이고 소속 항공사 같은 것도 곧바로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의외로 여객기 말고도 소속이 어딘지 모를 터보프롭 경비행기 같은 것도 착륙하는 게 종종 목격되곤 했다.
그런 작은 비행기라면 모를까 중형 여객기 이상 되면,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마찰로 인한 연기가 튀는 게 이 멀리서까지 보였다.

이곳에 공개하지 않은 다른 사진과 동영상도 많이 찍었다. 소기의 방문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선 지점은 여전히 공항 담장으로부터 500m에 가깝게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래도 비행기의 착륙 경로와 일직선상에 있고, 지대가 살짝 높은 덕분에 보다시피 공항 활주로까지 어렴풋이 보인다는 점이 좋았다. 다음에 또 촬영할 기회가 있을 때는 다른 장소도 탐색해 봐야겠다.

동영상들을 보니, 보잉 737급의 여객기가 내 머리를 지난 뒤, 활주로에 착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3~25초였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활주로의 착륙 지점까지의 거리는 정황상 거의 1km는 된다. 담장에서 활주로 사이에도 수백 m에 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착륙 직전 상태인 비행기의 주행 속도는 대략 시속 140~150km대는 된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퇴근 시간대가 되어 귀가하는 길이 도로 정체로 애로사항이 꽃폈을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난 정체 시간대를 피해서 그냥 밖에서 저녁을 먹고, 차에서 한두 시간 좀 자면서 아예 밤 9시 이후까지 기다렸다가 귀가하려 했다. 난 어차피 차에서 야영을 하는 걸 아주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서울 외곽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만 좀 막혔을 뿐, 서울 시내에서의 자동차 전용 도로 주행은 그다지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사히 잘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07 08:31 2013/05/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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