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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엔 거의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산행 후기를 올리게 됐다.
본인은 이제 인서울에서는 어지간한 산들은 다 오른 것 같다. 서울 외곽은 지금까지 주로 동쪽으로 살펴본 편이었다. 남양주 예봉산, 하남 검단산을 오르면서 오지를 탐험한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경부선이나 과천선 철도 주변에 있는 산들은 직선 거리로는 본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청계산 내지 관악산처럼 다른 산의 남쪽에 있는 산들은 교통이 불편해서 심리적으로 안 가게 된다. 북쪽으로 의정부의 사패산 같은 산도 다른 메이저 산에 가려져 있다. 게다가 그런 곳은 딱히 그린벨트 지대가 없어서 산기슭까지도 건물들이 빽빽해서 속세를 벗어난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든다.

본인은 서울의 동남부에 있는 성남에서는 불곡산을 올랐고 얼마 전에 영장산을 오른데 이어, 이번에는 분당이 아닌 구 성남 시가지의 동쪽에 있는 산을 다녀왔다. 성남과 광주 사이의 산맥 답사가 세 번째를 맞이했다. 등산 지점은 점점 더 북상하고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
분당· 판교에 직장을 뒀던 사람으로서(지금은 회사가 서울로 이사를 감), 서울 지하철 8호선이 지나는 구 성남 시가지와 거기 산기슭은 분위기가 어떨지 참 궁금했는데 이 답사가 의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등산을 할지 경로를 짜는 게 첫 고민거리였다.
작년에는 서울 마천 역 근처의 청량산 방면에서 등산을 시작해서 남한산성까지 올라갔었는데, 그때는 남한산성의 북쪽(서문과 북문)만 그야말로 수박 겉 핥듯이 둘러보고 도로 북쪽의 하남시 쪽으로 하산해 버렸다. 남문이나 심지어 조선 행궁 같은 것도 전혀 구경을 못 했다.

그래서 이번 산행에서는 일단 남한산성 남부까지는 성남시에서 접근해서 그냥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그래서 그때 못 한 남한산성 유적지 구경을 잠깐 한 뒤, 남쪽으로 내려가서 검단산과 망덕산까지 쭈욱 걷고 이배재 고개까지 구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성남시에도 하남 검단산과 이름이 동일한 산이 있다.

아침 일찍(7시 무렵), 엄청난 높이의 에스컬레이터로 악명 높은 서울 지하철 8호선 산성 역에서 내렸다. 여느 출구로 나간 게 아니라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는 북쪽의 환승 주차장으로 나간 뒤, 거기서 더 북쪽에 있는 폴리텍 대학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를 탔다. 산기슭의 '남한산성 입구'가 아니라 실제로 산을 올라가기도 하는 얼마 안 되는 버스이기 때문이다.

얘는 평소에는 성남 시내를 빙빙 돌다가 산을 오르지만, 주말 한정으로 등산객과 관광객을 위해 지하철역-남한산성 직행 셔틀이나 마찬가지인 9-1이 다니기도 한다.
산을 오르려면 기름이 굉장히 많이 들 것이고 평일에는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적어서 채산성이 안 맞을 텐데, 그래도 9번 버스는 10~20분대의 배차간격으로 다니는 편이었다. 지름길이 아니라 좀 이리저리 돌다가 산을 올라가는 것쯤은 얼마든지 봐 줄 만했다.

산을 오르면서 차창 밖 경치 중에서도 사진 찍고 싶은 게 여럿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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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남한산성 내부에 도착했다. 위의 사진은 만해 한 용운 기념관, 그리고 조선 행궁 '한남루'의 입구이다. 한낮인 것 같은 시간대이지만 방문 당시는 아직 아침 8시 남짓밖에 안 됐다. 그러니 둘 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이제 흙색의 낙엽은 바닥에서나 볼 수 있고 산들이 전반적으로 다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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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남한산성 남문이다. 자동차는 아래로 난 터널을 통해 성곽을 입체교차하여 산성 내부 구간으로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서울의 북악산도 팔각정까지 자동차 도로가 있긴 하다. 그러나 얘는 애초에 북악산의 뒤, 한양도성(서울성곽)의 바깥만 지나며 성곽과 만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터널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북악산에서 한양도성을 근접 구경하고 싶으면 도보로 등산을 해야 한다. 그래도 이것도 차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험준한 북한산을 올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북한산성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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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으로 나가자 남쪽으로 내가 가려는 길은 안내가 아주 잘 돼 있었다.
서울에 공식적으로 '둘레길'이 있는 것처럼 성남시에서도 '누비길'이라는 산길 브랜드를 만들어서 홍보하고 있었다. 성남과 광주를 지리적으로 가로막는 산들의 쭉 이으면 자동으로 길이 나오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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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길이 이렇게 평범한 시골길 같다가 나중에는 그냥 산길 흙길로 바뀌었다.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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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턴가 차도가 합류하더니 길이 이렇게 바뀌었다. 산 속에 깔린 자동차 도로는 사람용 등산로보다 경사가 완만한 대신 우회하는 길이가 훨씬 더 길다. 누비길은 얼마 안 가서 차도로부터 분리되어 나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누비길도 자꾸 이쪽으로 안내되어 있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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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검단산이 하남 검단산보다 훨씬 덜 유명하며, 누비길 말고 딱히 산 자체에 대한 등산로가 인터넷 지도에 별로 안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길 좌우로 철조망이 둘러지고 "과거 지뢰 매설 지역" 경고문이 나타났다.
이 산의 정상에는 공군 부대가 있다. 그것 때문에 자동차 도로도 필요했던 거다.

그러니 성남 검단산은 서울로 치면 우면산 같은 분위기였다. 이 길이 공식적으로 성남 누비길의 일부이며 남한산성에서 검단산까지 가는 최단경로이긴 하다. 하지만 서쪽의 약수터 쪽으로 우회하면 이런 군사 시설을 덜 마주치고 검단산 정상 쪽으로 갈 수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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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를 따라 걷고 또 걸은 끝에 검단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진짜 제일 높은 정상에는 군부대와 각종 통신 시설(KT 검단산 중계소?)이 있기 때문에, 민간인을 위한 정상은 차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꺾어서 진짜 정상보다 2, 300m쯤 떨어진 공터에 따로 있었다. 공터에는 헬리패드가 있고 무덤 비석 같은 자그마한 '검단산' 표지석이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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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지체 없이 계속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단산 정상을 지난 뒤부터는 군대 냄새도, 자동차 도로 같은 것도 없이 순수하게 자연의 정취가 느껴지는 산길이 쭉 이어졌다. 안 그래도 날씨도 맑고 따스하고, 주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여기는 간간이 사기막골(성남)이나 불당리(광주) 같은 주변 마을로 하산하는 분기점이 있었다. 성남 쪽은 산기슭에 공장(상대원 공업단지)도 있고 뭔가 대도시 같지만, 서쪽의 광주 쪽은 산봉우리가 더 있기도 하고 그나마 골짜기에 간간이 놓인 집들은 시골 분위기 그 자체였다. 다만, 어느 쪽으로든 시야가 나무로 가려져서 시야가 좋지 않은 건 아쉬웠다. 전망대 같은 건 누비길 전구간을 통틀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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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도 그때 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즉석 코딩으로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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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은 끝에 드디어 망덕산의 정상에도 도달했다. 여기는 딱히 공터가 있지 않고 평범한 등산로 길목에 탁자· 벤치와 정상 표지석이 있었다. 봉우리 이름은 '왕기봉'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성남 누비길에서는 휴식 공간에서도 딱히 운동 기구 같은 건 못 본 거 같다. 만만한 공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 높은 산도 아닌 그 중간 컨셉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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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산 정상을 지나자 등산로는 다음 목적지인 이배재 고갯길을 향하여 고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산은 분홍색 꽃나무가 많이 섞여 있는 반면, 앞에 펼쳐진 저 먼산은 전적으로 초록색으로 배경을 은은하게 물들여 놓은 게 풍경이 장관이었다.
저런 산의 어귀에 있는 마을에 혼자 틀어박혀서 광주시의 맑은 공기 마시면서 논문과 코딩에 전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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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재 고갯길에는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사실, 산들의 높이가 500미터대로 막 낮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고갯길만 해도 이미 고도가 200m를 훌쩍 넘기 때문에 내가 발로 이동해서 만든 고저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출발할 때도 남한산성까지는 버스를 타기도 했고 말이다.

이름이 왜 '이배재'냐 하면, 옛날에 과거 보러 한양으로 올라오던 선비들이 이 고갯길에서 왕궁을 향해서 절을 두 번 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다.
하긴, 근대화 이전에 한반도에서 한양(서울)-동래(부산)을 육로로 연결하던 지름길은 광주· 용인· 충주를 경유하는 '영남대로'였다. 수원과 대전을 경유하는 육로는 2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철도와 고속도로 모두).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 비행기 항로도 지형에 구애받지 않으니 영남대로의 선형과 더 가깝다.

숭실 대학교 근처에 있는 고갯길은 조심해서 살펴 가라고 해서 옛 이름이 '살피재'였다는데, 고갯길의 이름에도 이런 식으로 다 사연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육교를 타고 맞은편 산으로 등산을 계속할 수도 있다. 예전에 서울 지하철 3호선 녹번-홍제 구간 사이에(지상 도로는 통일로) 백련산과 북한산을 잇는 육교를 봤던 게 생각났다. 성남 누비길도 맞은편 산을 한 번만 더 넘어서 '갈마치 고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과 보급 관계상 본인은 거기까지는 안 가고 이 고갯길에서 버스를 타는 것으로 등산· 답사를 마쳤다. 이 길목은 광주 북부에서 모란 역(분당· 서울 8)을 잇는 버스가 수 분 간격으로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이배재로 다음으로 성남 시내에서는 '둔촌대로'라고 폭이 굉장히 방대한 길이 나 있었다. 길가엔 차들이 평행도 아니고 수직으로 주차돼 있었는데 이건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서울 지하철 8호선보다 한두 블록 아래로 성남 구시가지의 남쪽 끝을 지나는 큰길이다.

이 둔촌과 서울 '둔촌동'의 둔촌은 모두 동일하게 '둔촌 이 집' 선생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서울 일자산을 미리 다녀와 본 덕분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이 사람의 묘지가 여기 일대에 있다.
그런데 고려 말기의 너무 옛날 사람이기도 하고, 그가 이 정도로 칭송받을 정도로 뭘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게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후손인 광주 이씨 사람들이야 떠받들 만도 하겠지만 타지의 다른 사람들은 글쎄..

이렇게 산에서 역사 유적(남한산성), 군사 시설, 그리고 자연 풍경을 모두 구경하고 성남 시가지 구경은 덤으로.. 오늘도 유익한 답사를 하고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7/08/06 08:31 2017/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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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시 제도

옛날엔 대학 입시는 그냥 깔끔하게 대학별 본고사 아니면 학력고사 한 방이었고, 법조인 선발과 양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법 시험 원큐였다.
그러다가 지금은 아시다시피 사법 시험은 로스쿨로 바뀌었으며, 요즘 대학 입시는.. 뭐 내신에 수능에 수시가 어떻고 수행평가가 어떻고 생활기록부가 어떻고 등등~

확실하게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건, 어느 분야든 더 복잡하고 골치 아파졌고 돈 더 들게 됐다는 것이다. 추세가 그렇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과거와 현재의 차이 내지 장단점은 무엇일까?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는 모름지기 (1) 평가 잣대가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하고, (2) 부유층 사교육 돈지랄로 변질되지 않고 기회의 평등이 잘 제공돼야 한다.
그러면서 시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3) 시험 당일의 원큐 운빨에 너무 좌지우지되지 않고 문제풀이 테크닉만 익히는 방식이 되지 않아야 하며, (4) 응시자의 지식(현재) AND/OR 잠재적인 학업 능력(미래)을 전인적으로 잘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을 모두 만족하는 제도를 만들기란 대단히 어렵다. 사실은 이들 이념 중에는 교통수단의 접근성과 이동성만큼이나 상호 모순적이어서 둘 다 만족하기가 근본적으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있다.

시험 한 방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수저건 흙수저건 무조건 공평하게 서열화되는 체계라면 (1)이 주장하는 객관성이나 평등 같은 건 잘 달성 가능하다. 요즘은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과 복지 제도 발달 덕분에 기회의 평등은 옛날에 비해 굉장히 잘 보장되고 있다. 파이의 크기는 별로 안 커져서 각종 고학력 전문직들을 위한 일자리는 부족하고 불경기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와 채용은 안 하려 하는 판에 기회는 누구에게나 다 열려 있으니, 이것 때문에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것은 세상을 탓할 일이 아니다.

내가 늘 말하지만 옛날에 고학력 실업자가 없고 석사만 졸업하고도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옛날이 파라다이스여서 그랬던 건 개뿔 전혀 아니고, 애초에 국민들 대다수가 깡촌에서 대학 갈 여건 자체가 안 됐기 때문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봐야 한다.

(2)는? 듣기로는 차라리 7, 80년대 같은 적당한 옛날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고 그러는 것 같다. 교과서에 충실하게 시험 공부만 죽어라고 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그럭저럭 가능했던 모양이다.
다만, 학력고사조차 없이 대학별 본고사만 있던 완전 195, 60년대 옛날에는 대학들이 자기 학교 자존심을 걸고 문제를 살인적으로 어렵게 냈다. 가령, "sqrt(2)가 무리수임을 증명하시오"가 옛날에 서울대 본고사 문제였다. 수능에 최적화된 요즘 고딩들 중에 귀류법을 생각해 내서 쓱쓱 풀어 낼 애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기 때문에 실력 측정 변별력은 좋았을지 모르겠으나, 그걸 대비한 맞춤형 사교육이 횡행했다. 그리고 채점이 전적으로 대학 재량이었던 관계로 내부 부정도 있어서 (1)이 절대적으로 보장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니 결국 나라가 개입해서 학력고사라는 걸 만들었고, 그게 나중에는 수능으로 바뀌었다. 수능은 학력고사와는 달리 현재의 암기 지식 측정보다는 말 그대로 미래의 학업 능력 측정 지향적이다. "일단은" 말이다.

(3)은 수능처럼 굉장히 형식화되고 과거 학력고사· 본고사에 비해 쉬워진 시험이 (1)과 (2)를 건진 대신에 상대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점이다. 수능이 첫 도입되었던 시절에는 '원큐'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 준답시고 수능을 1년에 두 번 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수능을 두 번 준비하는 게 수험생에게 더 큰 짐을 지운다는 지적으로 인해 연 1회로 제도가 바뀌어 정착했으며, 시험에 대한 감을 익히는 건 그냥 모의고사로 대체되었다.

마지막 (4)로 가면.. 고민할 게 많다. 이것 때문에 중등 교육을 포함해 각종 법조나 행정 고시 분야들이 제도가 바뀌고 갈팡질팡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입식 입시 위주의 교육이란 게 단시간에 학생에게 많은 지식을 주입하는 용도로는 효율적이고 평가자에게나 학생에게나 비용이 덜 들며, 평가 방식도 일면 객관적이고 공평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특히나 나라가 가난하고 이것저것 배부른 고민 할 여유가 없던 시절, 인성이고 창의성이고 나발이고 그건 개나 줘 버리고, 학교에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에는 장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 의식 수준과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서 그런 무식한 교육 방식은 약발이 다했다. 정작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방면 융합 적응형의 창의적인(?) 인재를 발굴하는 데는 한계에 다다랐다. 학교 성적 비관해서 자살한 애들 소식에,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이젠 족해"로 시작하는 서 태지 노래도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서 30년 전 소식이 돼 간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설계하는 높으신 분들도 바보는 아니니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척'은 한다.

2. 로스쿨

다음으로 법조인 양성 시험 얘기로 넘어가 보자.
물론 법전과 판례를 달달 암기하는 머리가 기본적으로는 필요하지만.. 머리가 오로지 그 쪽으로만 굳어 버리면 요즘 세상에 온갖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민사 소송에 대처하기 힘들다. 가령, 소프트웨어의 저작권 관련 온갖 복잡한 라이선스(특히 오픈소스 진영)들을 이해하고 법 자문을 하는 건 그 바닥으로 배경이 전혀 없는 채로 별세계에서 사시만 달랑 합격해서 온 사람보다는 학부 때 컴공 전공하고 실제로 GPL이니 MIT 라이선스니 하는 오픈소스 끌어다가 간단한 프로젝트 진행한 경험도 있다가 로스쿨에서 따로 추가로 법 공부한 사람이 맡는 게 더 믿음이 가긴 할 것이다.

물론, 변리사나 특허 심사위원처럼 법과 이공계를 융합한 전문 업종이 이미 있기도 하고, 평생 글만 팠던 사시 출신 변호사라도 생소한 빽빽한 글을 비판적으로 읽는 건 전문가이며 대체로 상상을 초월하는 지능과 학업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니 저런 새로운 분야 하나쯤 새로 공부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국정원 요원만 해도 자기가 지키려는 기술이 뭔지 최소한의 배경은 알아야 산업 스파이가 노리는 걸 눈치채고 방어를 할 테니 관련 분야 논문도 찾아보고 늘 새로운 걸 공부한댄다.
이게 답이 딱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니 지금도 사시 존치론자와 로스쿨 옹호론자들은 상대방을 로퀴와 사시충이라고 부르면서 싸워 왔다. 하지만 로스쿨 자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착 단계에 도달하긴 했다.

로스쿨은.. (1) 입학을 위해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2) 학비 작살나게 많이 깨지되 정말 공인된 일부 극소수 중의 극소수 빈곤층에게만 장학 혜택 있고, (3) 3년 과정이 사법연수원 역할까지 포함하며, (4) 처음에 뽑을 때 전국에서 2천 명 정도 균등하게 많이 뽑고, (5) 나중에 변호사 시험은 최대 5년 동안 5번밖에 응시 못 하는 식으로 강제 필터링.. 이런 시스템적인 제약이 몇 가지 추가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로스쿨은 알다시피 출세로 가는 길로 여겨져서 문과· 이과를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날고 기는 공부벌레 수재들이 몰린다. 사시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던 출신 대학과 평점이 매우 중요하다. 변호사 시험도 아니고 맨 처음 입문 단계의 법학 적성, 일명 LEET 시험은 당장 복잡한 법학 지식을 묻는 시험이 아니며 무슨 미적분 같은 수학 시험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기출문제 한번 봐라. 눈 돌아간다. 수능 언어 영역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고 길고 생소한 글을 읽고서 "주어진 텍스트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등.. 수학 없이도 독해력, 논리력, 추리력을 통해서 공부 적성 아닌 사람, 머리 나쁜 사람 떨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로스쿨은 합격하고 입학한 것만으로도 경사 났다고 추켜세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뒤엔 3년간 미칠 듯한 공부지옥과 점수 경쟁, 변호사 시험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변호사 시험은 의대의 국시와는 달리, 점수가 아닌 등수가 중요한 상대평가이다!)

그런데.. 입문자에 대한 진입장벽이나 고시낭인 양성을 막기 위한 단순 제약 같은 것은 사시에도 도입 가능해 보이는 것들이고, 로스쿨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딱히 법대 + 사시 학원 강의보다 크게 나은 차별화 요소가 있나? 난 잘 모르겠다.
다재다능한 배경의 인재를 뽑겠다고 도입한 전국의 로스쿨들도 출신 배경의 다양성은 개뿔이고 결국은 변시 합격률에 목 메는 반쯤 학원처럼 돼 있다.

내가 거시적으로 보기에 로스쿨의 가장 큰 의미는 국가가 나서서 법조인 양성 과정을 좀 더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고, 사시 특유의 지나친 고위험성· 투기성을 여러 제도를 통해서 강제로 분산한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추상화 계층이 늘면 성능 오버헤드가 조금씩 추가되듯, 그 과정에서 입문하는 소비자(학생)의 금전적인 부담이 증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로스쿨은 의대· 공대처럼 실험 장비· 기자재를 쓰는 게 없고 밤낮 책과만 씨름하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비가 엄청나게 비싼 걸로 악명 높다. 사시 학원 강사보다 교수(법대 교수 내지 현직 법조인 출신의..)가 인건비가 훨씬 더 높기도 하거니와, 학교당 로스쿨이 인원도 굉장히 적기 때문에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로스쿨은 무슨 신림동 고시촌처럼 한데 밀집해 있는 게 아니고 전국의 지거국이나 명문대를 중심으로 학교와 학생이 골고루 흩어져 있다. 그나마 서울대 로스쿨의 TO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200명인데, 그래도 이는 과거의 서울대 법대가 매년 배출하던 사시 합격자 수보다 훨씬 적은 수이다. 그럼 하물며 학생 수가 50명밖에 안 되는 지방대 로스쿨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그 많은 교수들을 굴리려면 학교 입장에서는 돈이 얼마나 들까? 로스쿨 유치를 위해 대학들이 거액을 들여 건물 짓고 시설 새로 만들었으며, 투자 비용을 학생으로부터 회수해야 하는 건 부가적인 문제일 뿐이고 말이다.

결국 로스쿨은 학벌 타파(?)와 지역 평등을 위해 구조적으로, 근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비효율과 더욱 가중되는 학생 부담을 감수했음을 의미한다. 이건 극소수 장학 제도 갖고 실드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시 옹호론자이든 로스쿨 찬성론자이든 일단 이 원론적인 설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로스쿨이 그런 것을 다 상쇄할 정도로 기존 사시 체제의 단점을 보완해 주느냐, "단순 시험 점수 잘 받은 사람"과 "훌륭한 법조인 자질" 사이의 괴리를 더 잘 상쇄해 주느냐로 귀착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참고로 노 무현, 문 재인, 조 국 등 일명 진보 내지 좌파라고 불리는 법조인 배경의 인사들은 다 로스쿨 찬성론자였으며, 노 무현의 경우 대통령 재임 시절에 로스쿨을 도입한 것 때문에 자기가 신분 상승을 위해 올라탔던 사다리(= 사시)를 자기가 치워 버렸다고 비판받기도 했다는 것 역시 생각할 점이다.

3. 측정할 수 없거나 측정하기 어려운 것을 무리하게 측정하려는 것이 근본 문제

사시와 로스쿨 문제도 그렇고 앞서 언급했던 대학 입시도 그렇고.. 시험으로 줄세우기만 하면 제일 뒤끝 없고 공정하고 그나마 빈부격차 문제에서도 제일 자유로운 것 같다. 그러나 그로 인한 병폐도 있고, 단순 시험 문제 풀이 기계와 실제로 시험이 의도했던 모범적인 인재(?)상 사이의 괴리도 커진다.

그 폐단을 해결하려고 시험 점수만 보는 게 아니라 학생의 출신과 배경을 보고 대외 활동을 보는 식으로 비정량적인 것을 좀 보자니 그건 또 사교육 돈지랄로 변질되고 입시 제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락가락 바뀐다. 오죽했으면 교외 경시대회 실적은 학생부에 반영도 안 하게 됐는데..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의 혜택을 크게 입은 본인으로서는 참 애석함을 느낀다. 그것도 안 하면 도대체 학교 시험만으로 나타나지 않은 학생의 잠재성을 어떻게 보라고?

그리고 그 어떤 교육과정이나 시험으로도 사람 내면에 있는 사상이나 인성을 본질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어려운 사법 시험을 떡 붙고도 6· 25 전쟁이 무슨침인지를 분간 못 하는 똑똑한 바보도 법조인이 되는데, 이를 걸러내질 못한다.

창의성 같은 건 일부 공모전이나 경진대회를 통해 측정 가능하겠지만 정량적인 측정이 아니니 이 역시 사교육+부정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기 어려운 능력이나 배경까지 무리해서 측정하려다 보니 결국 부정이 들어갈 수 있고, 사교육 돈지랄로 귀착되는 식으로 거기는 거기대로 또 병폐와 부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걸 측정하려는 걸 아예 포기해서도 안 되는데.. 참 어려운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로스쿨 얘기에 대학 입시 얘기가 조금 두서없이 뒤섞이긴 했다만.. 이런 시험 관련 제도들 관련 문제는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 보인다.
애초에 근본적으로 국가나 사회 분위기가 '무리해서 대학 갈 필요 없는 세상', '자기 기술만 기막히게 좋으면 대접받고 충분히 성공하는 세상' 이런 식으로 가지 않는 한은, 전제가 애초부터 잘못된 상태에서 결론이 올바로 나올 수가 없다.

위에 높으신 분들이 무슨 대책을 내놓고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를 업데이트 한다 해도, 이랬다 저랬다 여러 이념을 어중간하게 절충한 조삼모사에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한계는 염두에 둬야 할 듯하다. 그래야 그 한계 안에서 차선· 차악을 찾아 적응할 수 있지 괜히 답이 없는 문제에 끙끙대다 세상 비관 염세주의로 빠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19 08:31 2017/07/1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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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일자산 탐방기

본인은 올해 초에 서울과 고양시의 경계 역할을 하는 서울의 서쪽 병풍인 봉산· 앵봉산을 다녀왔다. 그 다음으로는 서울과 하남시의 경계 역할을 하는 동쪽 병풍인 일자산을 다녀오겠다고 진작부터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쪽 답사 이후 70여 일이 지난 뒤에야 계획을 실행하게 되었다. 둘 다 서울 둘레길에 포함되어 있다.

봉산· 앵봉산도 해발 200m대의 낮은 산이지만 일자산은 최고 높은 곳이 150m가 채 안 될 정도로 더욱 낮은 산이다. 그러니 등산 대상으로서의 의미는 별로 없고, 그냥 교외의 고지대에 자리잡은 공원 내지 산책로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름처럼 꼭대기 능선이 一자 모양으로 수 km에 걸쳐 있기 때문에 걷기에는 좋다.

일자산의 존재감은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선형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5호선은 잘 알다시피 강동 역을 끝으로 동쪽으로 더 직진하지 않고 상일동과 마천이라는 두 지선으로 갈라지는데, 일자산은 그 상일동· 마천 지선의 선형과 얼추 평행하게 동쪽 끝을 가로막고 있는 형태나 마찬가지이다.

천호대로를 타고 강동 역보다 더 동쪽으로 가면 서울 시가지가 끝나고 밭이나 화훼단지 농장 같은 거나 볼 수 있는 그린벨트 완충지대가 나타난다. 그리고 외곽순환 고속도로 진입로까지 지난 뒤부터는 행정구역이 서울에서 하남으로 바뀐다. 일자산은 서울과 하남의 경계 역할을 하다가 북쪽 끝에서 천호대로와 만난다.

본인은 이런 지리 정보를 염두에 두고, 5호선 마천 지선의 첫 정거장인 둔촌동 역에서 내려서 일자산으로 접근을 시작했다. 둔촌동 역 근처에는 지은 지 꽤 오래 된 듯한 주공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전통 시장도 길 건너편 주변에 보였다.
그리고 여기 버스 정류장에는 서울 버스뿐만 아니라 하남시 내부로 들어가는 하남시 소속 마을버스도 일부 다녔다. 본인은 여기서 하남 마을버스 7번 또는 8번으로 환승해서 일자산 기슭에 자리잡은 보훈 병원 내지 대순진리회 방면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버스는 평소에도 배차 간격이 20분을 넘고, 주말· 공휴일엔 45분까지 벌어지며 심지어 수틀리면 아예 운휴까지 하는 막장 버스였다. 아이고, 일자산 근처가 그렇게까지 오지는 아닌 것 같던데 이 무슨 낭패..
결국 산기슭까지 1.5km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서 갔다. 지하철 한두 정거장, 버스 서너 정거장 거리인데 어차피 도저히 못 걸을 거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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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서울 지하철 9호선 연장 공사가 진행 중인 게 보였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의 동남쪽 말단 구간 중에는 경찰 병원도 있는데 보훈 병원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군인도 경찰도 아닌 다른 국가유공자를 위한 병원 같아 보이긴 하다)
5호선은 상일동 지선이 더 연장되어 검단산 기슭까지 갈 예정이라는데, 9호선이 동쪽 끝까지 연장되면 일자산을 찾아가기가 더 쉬워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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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일자산 진입로를 발견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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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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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조금 걷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묘지가 나왔다. 예전에 망우산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던 거 생각이 났다.
당시 현장에서 눈으로 본 광경은 꽃과 풀 색깔이 어우러져서 색감이 이 사진으로 찍힌 것보다 더 밝고 알록달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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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를 지난 뒤에는 이렇게 잘 닦인 산책로가 이어졌다. 산악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녀도 될 법해 보이는데, 안전을 위해서 자제해 달라는 표지판도 곁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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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현대의 기준으로도 서울의 완전 끝자락인데 하물며 옛날에는 한양과 아무 관계 없는 깡촌일 뿐이었다. 일자산은 성곽 같은 역사 유물도 없고, 군사 시설도 없는 듣보잡 동네 뒷산 언덕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인 에피소드가 딱 하나 있었다.
둔촌 '이 집'이라고 고려 말(1300년대, 신 돈과 동시대)의 재야학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말년에는 일자산 일대에서 속세를 떠나 살았다고 한다. 굉장히 옛날 인물이고 지금까지 본인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인데 아무튼.. 젊은 시절에 많은 독서와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저런 격언을 남긴 모양이다. 참고로 무덤은 서울이 아닌 성남시에 있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이라는 지명은 바로 저 사람의 아호에서 비롯되었다. 村이라는 글자가 있지만 의외로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다. 강서구의 등촌동과는 전혀 관계 없으니 헷갈릴 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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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길은 계속 이어졌다. 서울 쪽보다는 하남 쪽이 전망이 더 좋았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훨씬 더 시골 분위기였다. 그리고 워낙 낮은 산이니 딱히 전망을 볼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단, 북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마주치는 등산객? 방문객이 갈수록 많아져서 아무도 없는 배경 사진을 찍기가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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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산의 정상처럼 생긴 공터에 도달했다. 등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언덕인데 시계와 온갖 운동 기구와 벤치가 비치되어 있고, 사진에 안 나왔지만 근처엔 컵라면과 음료수를 파는 산장(?) 천막도 있었다. 등산복 차림으로 벤치와 탁자에 앉아서 쉬거나 음식을 먹는 일행도 많이 보여서 이거 무슨 꽤 높은 산의 정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자산의 산책로는 이것으로 끝이고, 그 다음으로는 내려가는 비탈길만 있었다. 하산은 그냥 5분이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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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니 앞에는 뭔가 초원/정원처럼 꾸미려고 준비 중인 듯한 넓은 공터가 보였다. 모래 뻘밭에다 인위로 심어 놓은 나무가 듬성듬성 놓여 있으니 무슨 사막 같다. 차나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은 포장되고, 식물이 있는 곳에는 잔디가 어서 심겨야 할 것 같다.
일자산은 출발 지점이나 도착 지점 모두 주차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차를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편도 동선으로 인해 차마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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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둔촌동에서 출발해서 천호대로의 하남 초이동 근처 구간에서 일자산 산책을 마쳤다. 산에서 걸은 거리는 약 3km 정도 되고, 하산 후에 버스 정류장까지는 또 600m 정도 걸었다. 그러니 전부 합하면 최소한 5km 이상을 걸었다. 진짜 등산 매니아들은 이 정도는 약과고 10수 km 이상도 걷긴 하는데...

아까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 서울 강동구에는 일자산의 북쪽으로 명일 근린공원과 고덕산 같은 언덕 숲길이 더 있으며 이 역시 공식적으로 서울 둘레길의 일부이다. 한데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시내를 통과해야 하긴 하지만. 또한 둘레길은 아니지만 길동 생태 공원이 있고 일자산에도 산책로 말고 다른 공원이 더 있다. 인서울의 말석 외곽 위치여서 교통이 불편한 건 단점이겠지만 이런 거 하나는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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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꽃들이 굉장히 예뻐서 사진에다 몇 장 담았다. 여기는 경치 좋고 높고 유명한 산의 기슭이어서 등산용품 매점이나 식당· 유원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법적으로 개발 제한 구역이다 보니 화훼단지나 주말농장 같은 것만 있다. 서울에서 이런 사진 찍을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도 야금야금 그린벨트가 풀리고 개발되고 곳곳에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으니, 이런 광경을 보는 날도 얼마 안 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자연의 정취가 있는 곳은 많이 돌아다녀야겠다. 평지는 자동차로 다니고, 산은 운동을 겸하는 등산으로 다니면서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06 08:37 2017/07/0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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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검증

*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도저히 어려운 주제이다 보니, 팩트폭격과 더불어 조금 거친 표현이 있음을 미리 양해 구한다.

1. 반미 반전 이런 구호나 운동 극혐

1950년 6월 25일 당일이 일요일이었는데 올해도 6월 25일이 일요일이구나.
2000년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불순불온한 진영이 없애라고 외쳐 온 공략 대상을 쭉 살펴보면 (1) 주한미군, (2) 국가보안법, (3) 국정원, 그 다음은 (4) 싸드로 정리된다.
(1)에 대해서 적을 이롭게 하는 사악한 선동질 한 동일한 놈들이 (2), (3)을 거쳐서 (4)에 대해 외치는 구호도 우리나라를 위해서 외치는 구호일 리는 당연히 전혀 절대 만무하다.

저건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북괴의 입장을 100% 정확하게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다. 놈들이 원하는 것의 정반대로 하는 것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다. 북괴가 이런 쪽으로는 의외로 단순무식하게 일관성이 있다. 허나, 지구상에서 제일 반미 할 자격 없는 애들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저 짓거리 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미는 걸 억제할 수 없다.

배은망덕한 놈들, 광우뻥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로부터 배운 게 없는 미개한 놈들, 군복 차림에 가스통 들고 흥분해서 날뛰는 틀딱충 꼰대보다 더 사악한 놈들. 병역특례 부실복무나 하고서 안보 장사(?) 만화 그리고 있는 모 웹툰 작가보다도 더 위선적인 놈들.

이런 날 내 머리에 곧장 떠오른 성경 본문은 에스겔서 16장이었다.
남조선 인민들의 기구한 내력과 분에 넘치는 은혜, 그리고 병들고 썩어빠진 정신 상태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절묘하게 씽크되는 걸 볼 수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저 본문을 꼭 보고 두 번 보시길..
그리고 열왕기상 20장도 같이 보면 좋다. 자기의 적을 보고도 "그는 내 형제니라"(왕상 20:32) 이러는 멍청한 왕을 두면 그 밑의 백성이 얼마나 고생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전쟁의 반대가 평화인 건 자기가 힘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전쟁의 반대는 그냥 항복과 노예이다!
꼭 자기들이 전쟁을 하거나 평화를 유지할 선택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 본인은 굉장한 어이없음을 느낀다. 남조선이 무슨 스위스 같은 영구중립국이기라도 했냐? 일제 강점기에 6· 25를 겪은 게 100년도 채 안 지났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저런 식으로 하냐? 하다못해 중· 고등학교에서 일진 양아치들한테 안 당하기 위해서라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건(혹은 최소한 힘이 센 것처럼 보이는 것) 너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반도에서 Imagine 가사나 읊어 대면서 반전 (반미) 평화, 서로 싸우지 맙시다,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화해합시다 이딴 소리 하는 놈들은 그냥 99%는 빨갱이 내지 걔네들에게 놀아나는 저능아들이다. 내 말이 기분 나쁘면 북괴 수뇌부 앞에서나 그런 평화타령 한번 늘어놓아 보든가.

그리고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경험상 아동문학이 어떻고 사교육 주입식 입시교육 없는 세상, 대안학교.. 애들 참교육이 어떻고 이러는 부류 중에 사상 이상한 사람들 정말 많이 봤다.
옛날에 TV로도 방영됐던 몽실 언니 작가도 보니까 참.. 죄송한 말이지만 불순한 분 같지는 않고 정말 순진한 건지...;;;
유언장 중에 한 대목이 이거다.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그게 당신이 원한다고 굶주리는 애들한테 가 지나? 어유..
누군 뭐 바보여서 자금줄 압박, 고립, 대북제재 하는 줄 아나?
우리나라도 못살던 시절엔 몽실언니 같은 불쌍한 애들 많았지. 사회 분위기도 반쯤 살벌한 병영 분위기에 약자 인권 훨씬 더 열악했던 것도 사실이지.

근데 애들이 그렇게 불쌍하면.. <태양 아래> 같은 영화는 본 적 있나? 거기 나오는 주인공 진미는 오늘 내일 굶어죽는 꽃제비도 아니고 평양 금수저 최상류층이다. 그런 애들조차 완전히 로봇으로 세뇌당하고 개조돼서 지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보라는 부탁에도 바싹 긴장하고는 당령 읊어대고 앉았는데 걔들은 불쌍하다는 생각 안 드냐?

하이튼 절대악과 필요악 뒤섞어서 사람 속이는 건 도사들이야.. 썩을놈들이.
작정하고 사리분별 못하는 애들 오염시키고, 그리고 법조인들 차근차근 적화시키고. 통상적인 경제력과 병력만 빼고 체제 전복시키는 방법도 정말 치밀하다니까. 한 10대, 20대 나이 때까지는 사회 한쪽에서의 부조리 때문에 필요악만 나쁜 줄 알고 의분에 차서 무작정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딴 생각을 어떻게 30대 40대가 가도록 평생 무덤까지 가져갈 수가 있냐?

"나라가 이제 온통 용공사상에 오염되었다. 좋을 리 없어! 왜 우리는 국가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종북 빨갱이들을 적절히 처리하지 않는거지? 내가 개인적으로 페북과 블로그에 맨날 이런 글이나 싸질러댄다 해도, 남조선은 아이들에게 어떤 곳이 돼 버리겠나? 그리고 아이들의 아이들, 그리고... 아, 나라의 앞날은 어둡다!"
-- 뭐 패러디인지는 알아서 검색을..;; -_-;

2. 바퀴벌레가 극소수 한두 마리 좀 있어 봤자..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냐 종북 같은 게 어디 있냐?
남한과 북한은 군사력과 경제력 차이가 서로 쨉이 안 되는데 극소수 '김 일성 만세' 이러는 또라이가 설령 있다 한들, 일부 병신 미친놈들일 뿐이지 나라에 무슨 위협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사실, 교회식으로 비유하자면
콘스탄틴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진짜로 기독교가 세상을 이기고 영적 승리를 쟁취한 줄로 안다거나,
요즘 세상에 사탄 마귀가 어디 있냐, 지옥 같은 거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거나 혹은
성경 변개라는 게 "너는 루시퍼를 숭배할지니라" 이렇게 고치는 게 전부인 줄로 아는 참 순진하고 한심한 분별력으로는 이념 쪽으로도 저렇게 naive하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게 만만하고 낭만적이지 않다. 이 문제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집 싱크대에 바퀴벌레 한두 마리가 주기적으로 대놓고 보일 정도이면 보이지 않는 곳에는 바퀴벌레가 얼마나 우글거리고 있을까?
법정에서까지 극소수 "김 일성 만세" 외치는 미친놈이 있을 정도이면 보이지 않는 곳에 서식하는 빨갱이들은 도대체 몇 마리나 될까?
몇백 명이 먹는 급식 중 극소수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나 바퀴벌레가 한 마리쯤 나와 봤자 식당 위생은 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걸까?
이렇게 말이다.

굳이 핵이나 미사일 같은 비대칭무기 얘기를 하지는 않겠다.
군사력과 경제력 차이가 제아무리 쨉이 안 돼도 이념 적화로 인해서 순식간에 나라 망하는 건, 아주 쬐그만 구멍 하나 때문에 댐이 무너지고 풍선이 순식간에 터지는 것만큼이나,
몇 년을 재부팅 없이 돌아가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메모리 leak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뻗는 것만큼이나 아주 쉽게 가능한 일이다.

조잡한 폭탄으로 자그마한 구멍만 뚫어도 커다란 여객기가 공중분해될 수 있고(대한항공 858처럼), 비슷한 자그마한 결함으로 인해 컬럼비아 우주왕복선도 그냥 확 공중분해돼 버렸었다.
왜냐하면 댐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담겨 있었고, 비행기와 우주선 역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좀체 구경하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 시국에 대해서도 바로 저런 그림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볼까?
루시퍼의 죄와 아담의 죄(그리고 이전 세상과 현 세상)를 분간 못 하는 정도의 통찰력이라면, 그냥 나라 윗대가리들의 평범한 부정부패 비리랑 아예 적에다가 퍼주는 반역죄의 차이도 분간 못 할 수는 있겠다.
성경과 현 시국... 물론 분야는 다르지만 일관된 논리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이다.

3. 국정원의 여론몰이? 댓글 알바?

우리나라 같은 곳은 지나친 방종과 무질서, 안전불감증이 문제이지, 뭐 누가 검열을 하네, 민주주의가 죽었네 공안 통치네 뭐네 하는 건 정말 1도 고려할 가치가 없는 헛소리이다. 그런 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아직도 카톡 대신에 라인이나 ISIL이나 쓴다는 듣보잡 메신저들 잘 쓰고 계시나? 루머 괴담 하고는.. ㅉㅉ

요즘 같은 세상에 국정원 요원이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얼굴 안 보이는 사이버 공간에서 얼마든지 공작 활동을 한다. 그곳으로부터 지령이 대놓고 내려오고 유언비어 거짓 선동이 하도 많이 나돌고 불길처럼 퍼져 나가니, 저건 국가 안보 차원에서 국정원에서도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맞불 놓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쉽게 말해 악에 대해 같은 악으로 맞서서 대응한 것뿐이다.

왜? 국정원은 세상 정부 소속의 방첩기관일 뿐, 무슨 신약 기독교회 같은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가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인 것만큼이나 거기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게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니까 말이다.

흉악범들이 교수대에서 사형 당하는 걸 보고 동정하기에 앞서 흉악범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를 훨씬 더 동정해야 하듯.. 국정원의 존재가 불편한 것보다 국정원 같은 기관을 필요하게 만드는 놈들의 존재가 훨씬 더 불편하고 거북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진짜" 검열과 공안 통치 같은 건 그나마 지금 국정원을 무너뜨리고 해체하자고 외치는 애들의 바람이 이뤄졌을 때에나 진짜로 찾아올 것이다.

물론 국정원 요원들이 무능해서 임무 수행이 실패하고, 정체가 들켜서 언론 타고 존재를 노출해 버린 것은 실드 칠 수 없는 흑역사이다. 옛날에 스파르타 애들이 훈련 중에 민가에서 음식을 훔쳐 먹다가 잡히면, 도둑질 때문에 벌받은 게 아니라 병신같이 들키고 잡힌 것 자체 때문에 벌받았듯이 말이다.
저기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걸 봐 주는 곳인 만큼, 평가 내지 비판할 때도 의도나 과정 같은 거 따질 필요 없이 오로지 결과만으로 냉정하게 하면 된다. 단순히 본연의 임무에 실패한 것에 대해서도 없는 간첩을 조작해서 무고한 사람을 조진 것만큼이나 욕해도 된다.

4. (잘못된)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

우리나라는 헌법에서 '말로는'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게 마치 결혼처럼 나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현실에서는 남과 북 체제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없어지지 않는 한 통일 그딴 거 저언혀, 네버 가능하지 않다.
이는 우리나라가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인권 같은 걸 기본적으로 보장함에도 불구하고 신념에 따른 병역(집총) 거부자를 계속해서 실형으로 처벌해야만 하는 이유와도 정확하게 일맥상통한다. 유엔까지는 모르겠다만, 엠네스티나 EU 따위가 남의 나라 안보와 체제까지 책임지고 지켜 주지는 않는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을 최신식 국립호텔에서 1년 반만 살다 나오는 걸로 끝나게 해 주는 국가에서 사는 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뭐, 그 뒤로도 몇 년간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에다 취업· 여권 발급 같은 데서 불이익이 뒤끝으로 더 따르긴 하겠지만)

우리나라 법조계도 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니니, 여증들 상대하는 건 이골이 나 있다. 판결문은 보통 "님들에게 대체복무 같은 시스템이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구제책이 없고 사법부가 월권을 해서 그런 걸 마련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실형 땅땅땅" 이런 식으로 나오는 편이다.

사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실용주의(pragmatism) 관점으로만 접근하자면야 지뢰 제거 내지, 군복무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왕창 힘든 사회봉사로 퉁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와 사상이 성경 교리로나 사회 통념으로나 근본적으로 옳지 못하고 해롭고 잘못됐다는 것을 일깨우는 차원에서는 계속 실형 때려서 전과자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전국민이 동성애자이면 사회가 유지가 되겠으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전국민이 여증 신자가 된다면 남조선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유지가 되겠는가?

개인적으로 수혈 안 받는 거야 자유이지만, 자기 애한테도 수혈 안 시키고 심지어 자기가 의료인이 돼서 다른 환자한테까지 수혈 안 시키는 건 갈수록 죄질이 더 나빠지는 범죄이듯이 말이다. (이것도 성경하고 아무 상관 없음)
여증들은 수혈과 집총 거부하는 그 집념으로 술 같은 거나 거부했으면 어지간한 기독교인들 이상으로 더 좋은 평판을 얻었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침략 전쟁을 전혀 지향하지 않으며 근본 이념이 철저하게 방어적이다. 방어를 위한 전쟁 대비조차 하지 말자는 애들은 진짜 온갖 악독한 욕을 들어도 싼 나쁜놈들이다.

5. 5· 18과 6· 25의 차이

뭐, 전대갈이 법이 규정하는 절차대로 곱게 권좌에 오른 건 아니었으니 5· 18은 일단은 누구 말마따나 의로운(?) 항쟁으로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나 나중에 누구의 거짓 선동이 있었건 뭐가 있었건 어찌 됐든 폭동으로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나중엔 결국 정치 항쟁으로 변질되었듯이.
그리고 투입된 군인들 역시 과잉방어건, 스트레스와 패닉 속에서 맛이 가서 그랬든, 잘못된 정보에 입각했든 어쨌든 민간인을 죽인 게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광주 5· 18은 제주 4· 3 사태만큼이나 일종의 쌍방과실이다. 앞으로는 그렇게 자국의 민· 관· 군 간에 비극적인 오해와 오사가 없게 진상을 규명하고 화해할 필요가 있다. 민간인 피해 보상은 해야겠지만, 어쨌든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목숨 바친 군경에 대해서도 명예를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예우해야 한다. 그리고 정황상 둘을 이간질한 진짜 배후의 악한 제3자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이것도 꼼꼼히 연구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에 반해 6· 25는 빼도 박도 못하고 북괴의 고의성과 과실이 100%로 오래 전부터 입증된 침략 전쟁이다. 이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이나 입증된 사실이다.
그런데 역사를 왜곡하는 사악하고 나쁜놈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정말로 쌍방과실인 사건에 대해서는 오로지 국가 공권력만 일방적으로 나쁜놈으로 몰아가고, 100:0인 전쟁에 대해서는 '남북 공동 책임 반반씩' 이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갱이라도 6· 25를 무슨 남조선이 먼저 벌인 북침 이럴 수는 없으니, 그 대신 오로지 국군이나 미군 시행착오 저지르고 뭘 민간인 학살을 하고 잘못한 것만 부각시킨다.
그리고 미국놈들만 없었으면 이 모든 부작용(?) 없이 우리끼리 통일 이뤄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라 말한다. 물론, 무슨 통일인지는 절대로 얘기 안 한다.
이런 쳐죽일 놈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서 김 정호 옥사설보다 더 해롭고 악질적인 역사 왜곡을 책과 교육을 통해서 퍼뜨리고 있는 한, 나는 일제의 역사 왜곡 같은 훨씬 덜 중요한 왜곡엔 제대로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전 두환 회고록이 무슨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같은 취급을 받고 어디서는 아예 출판 금지 신청까지 했다는데..
뭐 동의한다. 단, 이 승만에 대해서 거짓말 헛소리 잔뜩 늘어놓고 애들 정신건강 해치는 기존 불쏘시개들도 다같이 싹 회수· 폐기 처분해 준다면 말이다. 나도 역사 인식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걸 지적하라면 그들 만만찮게 많이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5· 18은 설령 폭동 없이 정말 의로운(?) 항쟁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4· 19보다는 격이 낮고, 4· 19는 6· 25 참전 용사 유공자보다 더 낮은 격으로 취급돼야 마땅하다. 겨우 이 승만· 전 두환 끌어내리는 데 실패했고 1공 4공 5공이 좀 더 오래 갔다 해도 남조선이 근본적으로 북한 꼴 날 일은 절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민주화? 직선제?는 되면 더 좋고 안 돼도 상관없거나 어쩔 수 없고, 북괴 같은 안보 위협만 없으면 굳이 난리 안 쳐도 더 쉽게 실현됐을 일이었다.
이것이 팩트다.

6. 가난한 서민을 위한 정치인 같은 건 없음 -- 위선이나 떨지 말길

요즘 맨날 나오는 말이 수저 계급론에 경제 민주화, 갑질 이런 것들이다. 물론 요즘 사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제아무리 사회가 빈부격차와 개인의 사리사욕을 인정하면서 발전한다 해도 그 격차라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게 저열한 시민의식과 결합하면서 계층간의 불만과 위화감이 커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썩어빠진 부자들 기득권들에 대한 증오 부추기면서 세상을 바꾸자느니 적폐청산 하자고 떠드는 애들은 그들이야말로 이미 부자 기득권이며, 눈먼 나랏돈 말고 자기 재산을 남에게 기꺼이 기부하고 베풀어서 자기까지 그 평등의 대상에 포함시킬 생각이라고는 단 1도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입시 제도를 평준화시키더라도 자기 자식은 이미 외국 명문 사립학교 다 보낸 뒤에나 한다. 적폐청산? 정말 개뿔 헛소리다. 그냥 당장 입에 발린 거짓말로 우매한 민중을 선동질하는 라이온 킹의 스카 같은 나쁜놈일 뿐이다.

기업을 적대시하고 사업가가 부자가 될 수 없는 세상이면 거기는 그냥 군경· 관료· 법조 공무원 같은 철밥통이 아닌 평범한 기술 스킬로는 부자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세상이고 다같이 거지 되어 평등해지는 세상일 뿐이다. 기업만 부패하지 정부는 그럼 부패하지 않을 것 같냐? 내가 제일 답답해하는 점이 바로 이거다. 사람이 먼저 < "지 아들이 먼저, 북괴가 먼저" 이런 것 보고도 모르겠냐?

가난한 서민을 위한 정치인이 없는 건 가난한 서민을 위한 의적(?) 흉악범이 없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이다.
제아무리 주둥이로는 썩어빠진 부자들 기득권들 증오한다는 사회불만형 연쇄살인범 흉악범죄자들이 정작 현실에서 정말 죽여 줬으면 하는 놈들 죽이는 경우란 전혀에 가깝게 없다. 99.9%는 어차피 같은 서민이나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밖에 해치지 못한다! 옛날에 지존파도 그렇고 연쇄살인마 지 춘길도 그렇고 선례는 수두룩하다.

지가 국회의원이고 재벌이고 유명인사 죽이고 싶다고 해서 우주최강 철통보안 속에서 사는 그 사람들이 니 손에 선뜻 죽어 주겠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ㅉㅉㅉ 무슨 윤 봉길· 안 중근의 후예 나셨네. 근데 어쩌나, 그때는 그래도 CCTV 금속 탐지기라도 없던 시절인데.

흉악범죄자의 욕망이 절대 실현 불가능인 것만큼이나 "능력껏 벌어서 필요껏 나눠 쓰는 세상", "사람이 먼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이딴 구호들도 서로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차원에서 절대 실현 불가능이다. 저것들 전~부 기출문제들이니 앞으로 또 어떤 선전선동 구호가 문제로 출제될지 예상해 보시라.
그러니 헬조선을 조금이라도 헬이 덜 되게 하고 싶고 타락 속도를 늦추고 싶으면 그딴 망상보다 당장 북괴에다 안 퍼 주는 세상부터 만들려 힘쓰는 게 훨씬 더 현실성 있고 도덕적으로도 올바른 선택이다.

부정부패 없는 세상, 군대가 필요 없는 세상 같은 거야 그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이룩할 수 없다. 그건 예수님의 재림 말고는 답 없는 거 맞다. 허나, 북괴에게 안 퍼 주는 세상, '돈으로 평화를 사려는 수작' 하에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적과 내통하지 않는 세상 정도는 인간의 힘으로도 이룩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우리에겐 이것부터가 먼저다.

옛날에 잉카 황제가 스페인 군대에게서 황금을 댓다리 많이 퍼줘서 평화를 사는 게 성공했던가? 개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그런데 또 같은 사기를 치는 인간 악마가 결국 대통령까지 돼서 주한 미군 철수에 싸드 철회까지 밀어붙이니, 지금이 무슨 재벌 욕할 때이고 겨우 친일파 같은 걸 욕할 때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지금 정치판은 청렴하냐 부패했냐, 친부자냐 친서민이냐 같은 구도로 양 진영이 나뉜 게 전혀, 절대 아니다.
둘 다 부자 기득권들이고 둘 다 기회주의적이며 비슷하게 부패했다! 단지 한쪽은 그래도 국가관과 안보관이 최소한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정도까지는 아니고(병역비리 방산비리까지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은 아예 대놓고 북괴가 대화 상대라고 사기를 치는 양의 탈을 쓴 이리요, 마음의 조국은 따로 있는 놈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최악과 차악 중에서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걸 그 숱한 시행착오로도 깨닫지 못하는 바보 병신이라면 손발이 직접 고생해 보고서 몸으로 깨닫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긴 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나 포함 억울하게 피해 보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될 대로 되라고 무책임하게는 말 못 하겠다.
간첩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은 정치 성향 취향도 아니고 좌우 균형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기 때문에 본인은 그 어떤 강경한 표현도 불사하면서 팩트 폭격을 종종 가할 것이며, 욕 먹거나 명성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28 01:44 2017/06/28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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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영장산 (성남)

본인은 한동안 인서울 산만 오르다가 오랜만에 다시 성남을 찾아갔다. 이 지역에서는 작년에 분당의 동남부에 있는 불곡산을 오른 적이 있다. 성남 분당과 광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산들을 오르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뒤 이번에는 불곡산보다 더 북쪽에 있는 산을 올랐다.

지도를 펴서 분당선 내지 성남대로의 동쪽을 살펴보면 야탑과 서현은 시가지가 동쪽으로 깊숙히 조성돼 있다. 그러나 그 중간의 이매의 동쪽은 곧바로 산으로 뒤덮여 있으며, 기슭에는 고도 제한이라도 있는지 저층 건물로 된 아담한 마을만 좀 있는 정도이다. 지금이야 이매가 경강선과의 환승역까지 됐지만 분당선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엔 역이 있지도 않았었다. 야탑에서 서현은 거리가 3km가 훌쩍 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엔 중간에 역을 만들 필요가 인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본인은 저 산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 그런데 다른 산들과는 달리 이 산은 이렇다 할 등산로 진입로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정상까지 가는 경로가 비법정 탐방로까지 포함해서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빽빽이 그려져 있는 '네임드급' 산인 북한산과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동안 이 산으로 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도에 안 나와 있다고 해서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판교로'라고 야탑 역 근처의 도로 한구석에 등산로가 있으며, 이매동 마을에서도 이 산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단지 이 산에는 역시나 군부대 같은 보안 시설도 많이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유명해지거나 등산객이 몰리지는 말라고, 아는 사람만 조용히 찾아오라고 지도에 등산로가 표시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본인은 인터넷 검색을 한 끝에, 경남아너스빌 아파트와 807 의무경찰대 생활관이 있는 곳에서부터 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의무/전투경찰들은 군부대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식 경찰 공무원도 아닌데 병영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에 어디서 먹고 자는지 의문이 들었다. 도봉산인가 북한산도 오르는 길목에 의무경찰 생활관이 있는 걸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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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의 등산로는 요렇게 계단에서 시작되었다. 친절하게도 불곡산과 영장산을 한눈에 그려 놓은 안내도가 곁에 있어서 좋았다.
예전에 불곡산은 우측 중앙 하단의 이마트 근처 '정자공원 등산로'에서 올라서 불곡산 정상과 근처의 형제봉을 오른 뒤, 태재고개 쪽으로 가다가 반대편 광주 방면으로 하산했다.

오늘은 왼쪽 최하단의 '전경대 등산로'에서 올라서 종지봉(글자가 잘 안 보임)과 매지봉을 거쳐서 영장산 정상까지 간 뒤, 새마을 연수원 방면으로 하산했다. 광주 쪽으로 가기에는 그 뒤로 넘어야 할 산이 더 많이 있어서 다시 분당 방면을 선택한 것이다.
안내도에서 보다시피 이 산맥의 능선이 성남과 광주의 경계인 듯하다. 영장산과 태재고개 사이의 길고 긴 능선은 두 번의 등산으로도 답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됐다. 그래도 전경대-영장산까지만 해도 봉우리를 여럿 넘으면서 4km에 달하는 장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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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오른 언덕은 높이도 별로 안 높고 나무들에다 일정 간격으로 정자와 운동 기구들이나 놓여 있어서 별 특징 없는 평범한 동네 뒷산 티가 풀풀 났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저 아래로는 성남 아트 센터 건물이 보였다.
그런데 성남 아트 센터를 지난 뒤부터 남쪽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철조망 울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매동 일대에 숨겨진 무슨 군부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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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이 둘러진 등산로도 지나자 급격한 비탈길이 이어졌다. 이를 다 오르고 나자 '종지봉' 정상에 도달했다. 정자도 하나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높이도 별로 안 높고 그리 볼 게 없었다. 진짜 등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1.7km 정도를 이동했고, 여기서 영장산 정상까지는 2.3km 남짓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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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걸으니 또 양 옆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지대가 나타났다. 한쪽은 분당 예비군 훈련장 방면이고 다른 한쪽은 국군 수도 병원 방면이다.
산을 오른 날이 평일이었던 관계로 안 그래도 아침에 야탑 역 주변에서부터 군복 입은 아저씨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아침 10시 무렵엔 역시나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등산로에까지 들렸다.
참고로 본인은 예비군이 7, 8년차까지 완전히 끝났고 올해부터 민방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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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듯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맑고 적당히 쌀쌀해서 등산 가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래도 얼굴은 추워서 콧물이 날 지경인데 점퍼를 입고 있던 팔과 어깨는 더워서 땀으로 흠뻑 젖고, 땀이 식으면서 또 추워졌다. 이런 날씨에도 열 조절을 하기가 참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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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 쉽게 말해 서울 망우산에 있던 묘지 공원이다.
아마 이 부근의 땅 아래로 경강선 이매-삼동 구간 선로도 지나가고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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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있는 연못은 반대편 율동 공원 인근에 있는 '분당 저수지'이다.
이 산은 전구간 통틀어서 전망대가 하나도 없어서 먼 곳 경치를 촬영할 만한 곳이 없었다. 아쉬운 점이다. 딱히 옛날 유물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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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앞두고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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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100m 정도 남겨 두니 태극기가 펄럭이는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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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상에 도달했다. 등산객이 종종 다니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혼자 타이머 맞춰 놓고 쇼를 하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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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지나 온 길을 다시 복습해 보면 맹산 자연 생태 공원은 구경을 못 했고 그 대신 종지봉(정자)을 지났다. 그 뒤 산불 감시탑 겸 전망대가 있던 매지봉을 지나쳤고, 솔밭쉼터도 거친 뒤 정상에 도달했다. 이들 명칭에 대해서는 첫 화면에 있는 안내도를 참고할 것.
그 다음으로는 앞으로 더 진행해서 거북터로 내려간 뒤, 거기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새마을 연수원 방면으로 하산했다.

이 길은 일종의 계곡이었다. 난 지금까지의 등산 경험을 생각해 보니 하산은 계곡 쪽으로 많이 하는 편이었다. 수락산이나 북한산을 갔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이쪽은 산중턱까지 개발이 많이 돼서 논밭도 있고 건물도 이것저것 많이 지어져 있었다. 영장산의 환경 파괴가 심하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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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새마을 중앙 연수원'의 입구에 도달했다. 연수원은 말 그대로 무슨 수련원이나 학교 분교처럼 건물 한 채에 운동장 하나가 전부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대학 캠퍼스 같은 으리으리한 규모였다.
지금까지도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우리나라의 '새마을 정신' 컨설팅/카운슬링을 해 주는 곳인가 보다. 누가 언제 세운 기관이고 어떤 사람이 근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3분 간격으로 으리으리한 고급 승용차도 드나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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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을 뒤로 하고 시내로 나가는 길은 이랬다.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배차간격이 심각하게 길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했다. 예전에 검단산 등산을 마친 뒤에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시절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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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길을 걸어서 밖으로 나가니 국군 수도 병원과 율동 공원으로 가는 길목이 보였다. 여기가 이런 동네이구나! 교차로이지만 신호등은 그냥 황색 점멸이었다.
수도 병원 간판의 에메랄드 배경색이 굉장히 예뻐 보였다. 율동 공원도 자동차 내지 자전거라도 있으면 더 돌아다녀 보고 싶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무리였다. 이런 게 있다고 풍경 사진 몇 장 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여친이라도 생기면 데이트 코스로 적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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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늘 위로는 비행기가 자주 날아다녔다. 근처의 서울 공항에서 띄운 걸로 추정되는 군용기뿐만 아니라 민항기도 볼 수 있었다.
폰 카메라가 화소 수와 색감, 시야각 등이 경이로울 정도로 발전했지만 아무래도 렌즈 크기의 제약으로 인해 줌 성능은 취약하다. 하늘의 비행기 사진을 제대로 찍으려면 별도의 디지털 카메라가 필요하더라.

이것으로 등산을 마쳤다.
성남 분당은 분당선 및 성남대로를 조금만 벗어나서 동쪽으로 가면 이런 미지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게 흥미롭다. 물론 서쪽도 미지의 세계이긴 마찬가지이다. 다음에는 기회가 되면 서쪽의 대장동· 석운동에 있는 산, 그리고 성남 검단산 같은 북쪽의 산을 답사할 계획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09 08:37 2017/06/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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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산· 서울 현충원 답사기

6월을 맞이하여 본인은 호국보훈 이념을 등산과 결합한 꽤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서울 현충원이 자리잡아 있는 서달산을 오르고, 현충원을 정문이 아닌 산을 통해서 방문하고 왔다.
본인은 비록 서울 현충원과는 아무 연고가 없는 가문의 출신이지만, 지난 2007년에 한번 혼자 현충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딱 10년 뒤에 거기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참고로 사진들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시간대가 이른 아침은 아니고 그냥 낮~저녁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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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이 아니라 숭실대입구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3번과 4번 출구 사이로 나 있는 비탈길을 계속 올랐다. 일명 '살피재'라는 고갯길이다. 지하철역 자체도 고도 차이로 인해 굉장히 깊지만 그래도 역이 있는 곳이 제일 높은 지점은 아니었다.
길가에는 한 경직 기념관, 기독교 박물관 등 숭실대 캠퍼스 건물이 계속 보였다.
그렇게 버스 한 정거장 거리 정도를 계속 걸으면 건물이 없이 산길 같은 구간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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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 생태다리를 통해서 서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숭실대 뒷쪽으로 달마사를 거쳐서 서달산을 오르는 경로도 있긴 한 모양이던데, 길이 골목길 위주로 복잡한 것 같아서 본인은 그리로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서달산은 해발 높이가 200m가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이며, 산 속 숲에 들어가기 전부터 길거리에서 이미 고도를 상당수 올려 놓은 상태이다. 저기서 추가로 오르는 높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서달산의 정상은 서쪽 끝자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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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니나다를까, 건물 몇 층 높이를 계단으로 오르는 기분으로 설렁설렁 언덕을 오르자 현충원의 상도 방면 뒷문이 나타났다. 오후 6시까지 개방이라고 하며, 가 보지는 않았지만 동쪽으로 사당 방면 뒷문도 하나 더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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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은 하늘을 제대로 보기 어렵고 어두컴컴할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했다.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그야말로 싱그러운 초록색 그 자체였으며, 아카시아 같은 향기도 느껴졌다.
6월에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는지, 주변엔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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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가 낮을지언정 그래도 산은 산이니 정상에 도달했다. 저 정자는 이미 동네 어르신으로 추정되는 아저씨들이 점령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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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는 이런 2층짜리 정자도 있었다. 정자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산이 숲이 얼마나 조밀하게 우거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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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정상을 구경한 뒤엔 서쪽의 숭실대 방면으로 하산하거나 동남쪽으로 산길 산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쪽으로 가지 않고 아까 그 상도 방면 뒷문으로 가서 현충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직선 거리로만 따지면 현충원 묘소들 중 산속 가장 깊은 곳에 놓인 박 정희 대통령 묘소와 아주 가깝다. 하지만 이 길은 묘소는 고사하고 곧장 현충원 내부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었다. '호국지장사'라는 절까지 굉장히 우회를 한 뒤에야 현충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우회가 심한 데다, 내리막이 계속되기까지 하니 나중에 다시 이쪽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비록 수평 이동이 길더라도 현충원을 나갈 때는 그냥 정문으로 나가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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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거쳐서 박 정희 대통령 부부 묘소를 10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대통령까지 되긴 했지만 애비의 처지와 딸의 처지가 모두 참 기구하다.
지금의 악한 대통령은 노골적인 좌편향과 친중종북 성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으며 도덕 청렴은 개뿔, 우리나라에서 정말 청산되어야 할 적폐는 무슨 이중국적· 위장전입이나 논문 표절 따위가 아니라 그냥 '내로남불'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입증해 보이고 있다.

왜, 자기가 좋아하는 대통령,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혼자 똥을 싸도 그저 잘한다고 언론에서 칭송해 댈 것 같은 우리 달님 달링님을 까니까 기분 나쁘신가? 문 창극, 김 종훈, 윤 창중 시절에 그 정도까지 쌍욕 안 퍼붓고 개 난리 안 쳤으면, 나도 지금 이렇게 거친 말 독한 말을 안 늘어놓는다. 잣대가 동일해야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나라 꼴이 도대체 어찌 되려는지.. 이러려고 공산화 막고 가난 떨쳐내고 근대화 한 게 아니었을 텐데.. 저기 모셔져 있는 가문의 대통령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를 깨닫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본인은 묵념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도 당당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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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병사 묘역의 구도 좋은 지점에서 사진을 하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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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서 100을 만든 분에 이어 아예 0에서 1을 만든 위대한 건국 대통령 할배의 묘소도 참배하고 방명록에다 내 이름을 썼다. 시뻘겋게 미쳐 돌아가는 나라 현실에 대한 자그마한 저항의 뜻을 이렇게 표현했다.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라는 시작하는 헌시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한다.
저기서 나라란 당연히 자유가 있는 정상적인 나라를 말한다. 북괴 같은 나라 말고. 일제만 망하고 물러났다고 해서 결코 저절로 수립 가능하지 않았다.

난 이분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중상모략과, 정황에 대한 고려 없는 악성 거짓 루머를 어지간한 부정부패 이상으로 나라를 좀먹으며 사람 정신을 병들게 하는 사회악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 인생을 걸고, 그 어떤 인간관계 단절과 물질적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평생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 싸울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그냥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대통령 호불호를 문제 삼는 게 결코 아니다. 단순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승만은 건국의 공을 무색케 하는 과오도 너무 많이 저질러서 괜히 호감이 안 간다" "난 외교 노선보다는 무장 항쟁 노선을 더 좋아한다" 수준이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건전한 생각과 취향으로서 존중한다.

단지 내가 극도로 싫어하고 공격하는 건, 예전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악의적으로 일부러 친일 청산을 안 하고 전쟁 초기에 그냥 도망갔네 식의 개소리, 그리고 각종 학살 참극에 대해서 김 일성· 마오 쩌둥과 이 승만에 대한 비판의 잣대가 전혀 같지 않은 것 따위를 말한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
왜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거짓을 근거로 싫어하며, 그 근거가 거짓이라고 반박해 줘도 듣지를 않는가? 그렇게 귀를 틀어막고 살 거면 남이 과격한 어조로 거짓을 저격하는 건 왜 듣고 반응하는데? 그런 것에 불쾌해할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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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간 끝에 드디어 정문에 도착했으며, 입구에 있는 멋진 분수대를 마지막으로 사진에 담았다.
10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지하철 9호선이 생겨 있으며, 특히 9호선이 현충원 입구와 더 가까이 만들어져 있어서 접근성이 더욱 좋다. 하지만 4호선과 9호선간의 막장환승은 답이 없는 것 같다. 고속터미널 7-9호선은 무빙워크라도 있다지만 저건.. 답이 없다.

글을 맺기 전에 역사 상식 하나..
현충원의 유래 정도는 검색만 하면 다 나오긴 하지만, 본인이 기억하고 있는 바를 이곳에다가도 또 늘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6· 25 전쟁 이전에도 38선 부근에서는 호전적인 북괴의 도발에 의한 국지적인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만큼이나 분위기가 험악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사자가 계속 찔끔찔끔 발생했으며, 이들은 처음엔 서울 중심부에서 가까운 장충단 공원에 매장되었다. 다시 말해 그때는 매장지가 지금 같은 '서달산'이 아니라 남산 기슭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6· 25라는 전면전이 터지자 전사자가 훨씬 더 많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매장하고 추모할 공간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새로 묘지를 만들 만한 곳을 전국적으로 물색하게 됐다. 아직 전쟁 중이던 1952년에 이와 관련된 신문 보도가 나갔었다.

그때 투표 같은 민주적인 절차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리박사 할배 각하가 여러 후보들을 몸소 검토해 본 뒤 그냥 답정너로 지금의 서달산 부지를 지목한 게 아닐까 싶다. 1950년대엔 한강 이남은 아직 인서울조차 아니었고 동작대교 같은 것도 없었다. 교통이야 지금과 비할 바가 못 됐겠지만 저 정도면 솔직히 서울 교외에 묘지로서 굉장히 좋은 입지이긴 했다.

그래서 이 묘지는 1955년에 '국군 묘지'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했다가 나중에 '국립 묘지'라는 명칭을 거쳐서 지금은 현충원이 됐다. 정부 청사가 서울, 과천, 대전, 세종 등 여러 곳에 있듯, 현충원도 서울에만 있는 시설이 아니다. 그래서 전체 명칭은 '서울 현충원'이다. 이 승만 당사자도 비록 하야 후 외국에서 죽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남을 위해 장지해 놨던 명당에 고이 묻히게 됐다.

서울 현충원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공간이 더 없다. 국민 정서상 극히 예외적인 특례로 봐 줄 만한 위인· 유명인이 아니고 단순히 국가원수, 전투 중 전사, 몇십 년째 군 장기 근속 같은 규정만을 만족해서 현충원에 가는 거라면 신규 인원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서울 대신 대전 현충원으로 가야 한다. 대전 현충원도 무려 1985년에 개장했다.

우리나라가 군사· 정치적으로 안정화가 됐고 굳이 나라를 구하는 특출난 위인이 나올 상황이 아니라면, 앞으로 서울 현충원에 누군가가 무리해서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대전 현충원의 국가 원수 묘역에 최 규하 다음으로 둘째로 들어가는 인물은 과연 누가 될지 무척 궁금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06 08:31 2017/06/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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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에 본인은 1년 전에 한번 오른 적이 있는 불암산을 다시 찾았다. 단, 북쪽의 당고개 역 인근에서 출발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태릉 방면의 남쪽 구간만 잠깐 오르다가 곧장 하산했다. 여기를 답사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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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중, '공릉산 백세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문과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근처에는 서울 과학 기술 대학교와 원자력 병원이 있고, 산기슭에는 서울여대, 육사, 태릉 선수촌 등이 있다. 예전에 불암산을 올랐다가 돌아오면서 이 도로(화랑로)를 버스 타고 지난 적은 있지만, 정작 근처의 불암산 구간을 답사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여기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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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뒤로 난 언덕길의 좌우로는 처음엔 평범한 울타리가 있다가 나중엔 살벌한 철책으로 바뀌기도 했다. 왼쪽엔 한전 인재 개발원은 고압 전기 시설 때문에 경비가 삼엄하며, 오른쪽에는 문화재인 태릉에다가 태릉 사격장이 있으니 아무래도 아무나 못 들어가게 통제를 해야 한다.
불암산이 남쪽엔 요주의 문화재와 보안 시설이 많이 자리잡아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말고 참호 같은 군사 시설도 있었고 거기에는 '촬영 금지 - xxxx부대장 백' 이런 표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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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철책을 따라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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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딱 한 군데 전망이 트인 곳에서는 육사 캠퍼스가 희미하게 보였다. 지인용(智仁勇) 탑과 근처의 동그란 육군 박물관이 보인다. 봉화산에서는 육사를 전혀 볼 수 없었는데 산에서 저기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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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인재 개발원에서는 한참 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바닥에는 한전에서 매설한 듯한 무슨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3 말고 4라고 적힌 것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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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암산 남부의 등산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나타났다. 서울 둘레길을 선택하면 인서울에 속한 산중턱 능선만 계속 타면서 북쪽의 당고개· 수락산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사실, 공릉산 백세문에서 시작해서 본인이 지금까지 걸은 길도 서울 둘레길이다.

아니면 다른 길로 가서 봉우리를 갈아탈 수 있다. 그러면 거기서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불암산의 정상으로 가거나 아니면 이 상태로 삼육 대학교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본인은 오랜 고민 끝에 서울 둘레길은 더 가지 않고 정상· 삼육대 방면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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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철책이고 울타리고 뭐고 다 없어지고 산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본인은 삼육대 방면으로 하산했다. 그러자 여기부터는 삼육대 사유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각종 울타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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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정상은 바로 저기이다. 북한· 수락산처럼 얘도 꼭대기 부근은 온통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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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삼육대 캠퍼스 안에 있는 그 유명한 '제명호'라는 인공 호수이다.
종교 계열 학교 아니랄까봐, 곳곳에서 금주 금연 강조하고 성경 말씀이 걸려 있고 "거룩한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등산객 여러분도 초대합니다" 이런 표지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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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 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의 모습. 삼육 대학교 캠퍼스를 구경한 건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비록 불암산 자체는 별로 높게 오르지 않고 등산을 짤막하게 마쳤지만 작년에 갔던 곳과 중복되지 않는 구간만 다닌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천장산 기슭에 의릉이 있는 것처럼 여기 근처에는 태릉과 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가 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본인은 여기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낮은 산인 초안산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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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은 전철 1호선 녹천 역에서 내리면 코앞에 있다.
옆에 중랑천을 흐르는 동부 간선 도로가 원래는 강의 양 옆으로 상행과 하행이 달리는데, 여기 초안산 구간만은 부지가 없어서 전철 선로가 중랑천의 바로 옆을 지난다. 이 때문에 이곳은 동부 간선 도로도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병목과 정체가 발생하곤 했다.

도로의 확장을 위해 철도 선로를 이설하겠다는 계획이 거의 2000년대부터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진행은 지지부진한가 보다. 그래도 여기 주변의 풍경이 가까운 미래에 바뀌기는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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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은 워낙 작고 낮은 산이며, 비슷한 체급인 봉화산처럼 등산로도 여기저기 많이 뚫려 있었다. 여느 산들처럼 어디에서 어디 지점까지가 수 km 거리가 아니다. 그냥 몇백 m만 설렁설렁 걸으면 된다.
원래는 산의 규모가 더 큰데 덕흥로라는 길을 내느라 둘로 쪼개진 듯하다(창동 주공 4단지 아파트, 생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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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산치고는 정상 주변에 헬리패드도 있고 정자와 심지어 태극기 등, 메이저급 산의 정상에 있을 만한 시설은 다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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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초안산을 찾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것.
초안산에는 조선 시대 궁궐 내시, 양반, 서민 등의 무덤이 1000여 개 가까이 있다고 한다. 정상 근처를 보니 웬 묘비와 석상들이 여럿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올랐던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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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 역에서 /자 모양으로 산을 남서쪽으로 가로질러서 하산했다. 역시 빽빽한 아파트와 빌라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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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08:31 2017/05/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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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여행

지난 설날 때 본인은 가족과 함께 당일치기로 강화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강화도는 민족 영산(?)이라는 마니산이 있고, 고려 시대에 나라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 임시 수도였으며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장소이기도 해서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그러고 보니 팔만대장경도 지금이야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에 있지만, 만들어진 곳은 강화도이다. 고려는 그야말로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실천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방대한 무게와 부피를 자랑하는 수많은 경전들을 그 시절의 교통 인프라 여건에서 섬-내륙으로 바다까지 건너면서 수송하는 것조차도 굉장히 큰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과거에 신라에 유일하게 여왕이 있었고 여러 가문이 차례로 번갈아가며 왕위를 잇는 관행이 있었다면, 고려에는 저런 종교 배경의 특성상 말기에 신 돈 같은 비선실세(?) 승려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이념은 '숭유억불'이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이 보기엔 고려가 망한 것에는 타락하고 막장으로 치달은 정교일치 불교계의 책임이 커 보였던 것 같다.
뭐, 지금에 와서는 조선도 이미지가 바닥을 기며, 유교 역시 진작부터 꼰대(질)의 상징에  '유교탈레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같은 말이 나돌 정도로 평가가 최악이다. 뭐든지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걸 느낀다.

아무튼,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차를 몰고 서쪽으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서 자연을 벗하며 놀 만한 곳으로는 동쪽으로 남한강이 있는 양평, 혹은 북한강이 있는 가평· 춘천 방면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거기보다 더 색다른 곳을 찾다 보니 강화도로 의견이 쉽게 한데 모였다.

강화도는 면적이 300㎢가 넘고 생각보다 크더라. 시내와 대부분의 볼거리는 북부에 있는 반면, 마니산만 혼자 최남단에 있는 듯했다. 북부에는 강화대교, 남부에는 초지대교가 있어서 육지와 통한다. 서울에서 강화도 남부를 가는 건 인천 공항 가는 것과 비슷한 거리이고, 북부는 그것보다 거리가 살짝 더 길어지는 듯하다.
강화도로 가는 길은 올림픽대로 + 국도 48호선(북부) 또는 지방도 356호선(남부) 끝이다. 아주 직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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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강화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유적이지 싶다. 안내문 표지판 말고 다른 시설은 없이 그냥 도심 속의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주차 걱정 없는 시골이니 그냥 골목길 담벼락 아무데나 차 세우고 내려서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고려 행궁도 지도상으로 근처에 있는데 거기에는 못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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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있다면 강화도에는 고인돌이 있다. 그나마 돌하르방은 훗날 유명세를 타서 레플리카가 만들어진 게 훨씬 더 많은 반면, 여기에 있는 고인돌은 옛날에 만들어진 레알이다.
접근하기도 편하게 딱 국도변에 넓은 들판과 함께 강화도 전체에서 가장 고퀄이라 여겨지는 고인돌이 놓여 있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인돌들은 딱히 식별 수단이 없으니 그냥 발견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서 부르는가 보다.

여기 주변에는 마침 강화 역사 박물관과 강화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두 박물관도 있었다. 하지만 설 당일이 휴관이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고인돌'은 안 그래도 영어로도 dolmen이라고 하는데 故人인지 '고이다+전성어미ㄴ'인지 어원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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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을 하나 더 답사했다. 처음에 봤던 것보다는 크기가 약간 더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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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풍경은 사방이 온통 논밭 벌판이고, 그러면서 높이가 300m쯤 돼 보이는 낮은 산들이 종종 둘러져 있는.. 그런 형태였다. 산들은 정상에도 뭔가 정자나 군사 시설 같은 게 빠짐없이 세워져 있는 편이었고, 그게 지상에서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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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우리는 강화도의 최북단에 있는 평화 전망대로 갔다. 여기는 민통선 안이기 때문에 중간에 검문을 받고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연고지나 지인 초청이 없어도 되며, 사전 방문 신청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차량 동승자가 아니라 그냥 대표자 한 명의 이름과 연락처, 차 번호만 적으면 됐다. 내 경험상 국내 민통선 안의 출입 정책은 각 지역과 관할 부대마다 케바케였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은 대부분 높은 산지이며, 선 주변에는 DMZ라고 불리는 완충 지대가 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의 서쪽 끝은 그 특성이 내륙· 동부와는 극과 극 수준으로 다르다. 여기는 육지가 아니라 물이 그대로 군사분계선이고 양측 강변이 남방과 북방한계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는 DMZ 같은 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동부와는 달리 강안경계라는 게 있다. 한강이 서울 시내 구간만 해도 강폭이 1km 남짓한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육박하고 강북과 강남을 가르는데.. 강화도가 있는 한강 최하류로 가면 강폭은 2km에 달하며, 강남과 강북이 무려 남조선과 북조선을 가른다..! 군사분계선이 육지에서 강으로 바뀌는 경계를 보고 싶으면 강화도에 도달하기 전에 파주의 오두산 전망대에 가 보면 된다.

6· 25 때 우리나라가 지형상의 불리함으로 인해 서부는 오히려 있던 땅도 빼앗겨서 38선 이남,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게 됐다. 이 때문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군사분계선이 저런 식으로 한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다대포 해수욕장까지 있는 낙동강 하구와는 달리, 한강 하구는 민간인이 접근 불가능한 영역으로 봉인되어 버렸다. 여기를 뱃길로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라뱃길이라는 경인 운하를 나중에 또 만들어야 하게 됐다.

황해에는 강과 바다에 형성된 군사분계선 근처에 섬이 여럿 있다. 게다가 연평도나 백령도 같은 섬은 위도가 상당히 높고 북한의 본토와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남한 땅이다. 이건 북괴가 전쟁 당시에는 섬들을 점령할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종전 후에도 남한 땅이 될 수 있었다. 휴전 직전엔 오히려 국군과 UN군이 북한 지역 위도의 다른 섬들까지도 몽땅 점령해 있었지만 휴전과 함께 철수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강화도를 포함한 그 일대의 섬들은 비록 다리가 놓였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육군 전방 부대가 아니라 상륙 작전을 염두에 둔 해병대가 주둔한다. 민통선 검문도 응당 얘네들 몫이다. 그리고 군용차도 일반적인 전차(탱크)보다는 수륙 양용 장갑차 같은 게 더 친숙하다.
아니, 우리나라 해병대 전체가 그냥 서부 전선의 전방 도서 지역을 지키라고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병대는 훈련소와 자대, 본부도 후방인 포항이 아니면 전방인 황해 이렇게 딱 두 지역에만 있다.

옛날에 태평양 전쟁 시절처럼 섬을 땅따먹기 하면서 물과 육지에서 모두 작전을 수행하는 게 쉬울 리 없으니 해병대는 일반 육군 보병보다 전투력이 더 뛰어난 정예 병력으로 간주된다. 100% 지원자만 그것도 경쟁을 뚫고 들어갈 정도이며, 훈련 때 목봉 체조 같은 것도 육군이나 해군이 아닌 해병대만 한다. 다만, 그게 전투력과는 별 관계 없는 지나친 이빨과 마초이즘 기수놀이, 똥군기로 변질된 건 문제이긴 하다.

해병대 아니랄까봐 "빨간 배경에 노란 글씨"로 민통선 내 행동 주의 사항이 적힌 안내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전망대 내부의 통제는 해병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리 빡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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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강 건너 펼쳐져 있는 북한 땅이다. 황해도 개풍군. 내륙처럼 남북의 DMZ 산림 없이 강 너머로 곧장 북한의 마을과 논밭, 건물, 심지어 사람까지 곧장 보이기 때문에 전국의 어느 전망대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북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그것도 위도상 최남단의 북한 땅을 말이다. 이게 강화도에 소재한 전망대에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이었다. 그런데 저기는 북한의 입장에서 민통선 내부이지 않을까?

철원의 평화 전망대나 고성의 통일 전망대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였고, 파주의 도라 전망대에서도 기껏해야 군인 극소수만을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장 빨간 점퍼를 입은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주택 담벼락을 서성거리는 두세 명의 사람 등 역대 전망대들 중 북한 민간인(군인이 아닌)을 제일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같이 "북한 방면 사진 촬영 금지" 이런 통제도 없었다.

아, 물론 사람까지 보는 건 육안으로는 불가능하고 유료 망원경을 동원해서 봐야 한다. 이런 곳에서는 500원 투자할 가치가 있다.
저 멀리 세로로 선전 구호가 쓰인 걸로 추정되는 기둥도 있었는데 글자가 무엇인지는 아쉽지만 망원경으로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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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봉우리의 이름이 제적봉이랜다. '적'의 한자가 enemy(敵)가 아니라 red(赤)이다. 즉, "공산당 빨갱이들을 제압하다"라는 뜻이다.
이름의 유래 설명에 따르면, '제적봉'이라는 이름은 박 정희 대통령의 개입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예전에 이 승만 대통령은 호수의 이름을 반공 컨셉을 넣어서 '파로호'(오랑캐들을 격파하다)라고 지은 적이 있는데, 이것과 무척 비슷한 심상을 형성한다. 조선 시대 얘기지만 '척화비'도 동일한 맥락일 수 있겠다.

이렇게 평화 전망대를 구경한 후, 우리는 교동도를 찾아갔다. 민통선 검문소는 교동대교보다 한참 앞에 있었다. 전망대에 갈 때와 비슷하게 간단한 출입 신청서만 작성하면 출입 허가는 곧장 나오며, 한번 출입증을 받으면 내 기억으로 2~3일 정도 교동도에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여느 민통선 구역처럼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통금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자정~새벽 4시 정도에만 출입을 자제하면 된다.

교동도는 2014년이 돼서야 다리가 놓였으며, 아무래도 주민 출입이 뜸하니 대교 주제에 도로폭은 겨우 2차선이었다(편도 1차선).
그리고 섬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농촌 마을일 뿐 어촌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 게 인상적이었다. 해수욕장? 횟집? 그런 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보안 때문에 바다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괜히 민통선 마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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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갔을 때는 교동도에 있는 커다란 '고구 저수지'가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늘의 색과 바닥의 색이 거의 동일한 게 무슨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보는 듯했다. 썰매를 타고 놀고 싶었다.

교동도를 한 바퀴 도니 날이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강화도까지 왔는데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니산을 어귀는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남쪽으로 향했다.
정상의 참성단까지 가는 길은 서울 남산처럼 흙길 등산로와 계단 등산로가 모두 닦여 있는 듯했다. 등산은 차마 못 하고 돌아왔지만 여기도 마치 제주도 한라산이나 성산 일출봉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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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아이고 이거 무슨 예비 의료인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도 하는 것 같다. 등산을 이렇게 거창하게 윤색해 놓은 시는 난생 처음 본다. =_=;;

나중에 강화도를 다시 찾아오는 건 결혼하고 애까지 동반한 뒤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짧은 시간 동안 강화도에서 의미 있는 여행을 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4/22 08:33 2017/04/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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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앵봉산· 봉산

서울 북서쪽의 은평구에는 동쪽으로는 북한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서울과 고양시의 경계 병풍 역할을 하는 길다란 언덕? 산?이 있다. 높이가 200여 m 남짓밖에 안 되니 등산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그냥 공원· 산책로에 가깝다.
정상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횡단· 종단에 의의를 둬야 한다. 또한 산기슭은 온통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등산용품 매장이나 유원지 같은 걸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저기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봉우리엔 북쪽에서부터 남쪽 순으로 앵봉산· 봉산· 수색산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다. 본인은 지난 한겨울에 저기를 다녀 왔다.
서울 시내 등산을 다니면서 본인은 한양도성, 북한산성 등 산과 관련된 여러 유물, 제도, 순환 관광 코스들에 대해 알게 됐다. 저기를 답사하면서 이번에는 '서울 둘레길'에 대해서 이제야 드디어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예전에 북한산이나 아차산을 오를 때도,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아니라 능선이나 중턱에 이상한 길이 나 있는 건 지도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한데 이어져 있고 서울시에서 비교적 최근에 작정하고 일관된 시스템으로 '둘레길'이라는 걸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는 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공식 홈페이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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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나름 지리 공부도 되고 나쁘지 않은 발상인 것 같다. 높은 산들은 그냥 중턱에만 길이 나 있고, 앵봉산· 봉산처럼 낮고 긴 산은 정상 능선이 경로이다.
서남부는 산이 없는 관계로 예외적으로 안양천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러니 옛날에는 산을 피하느라 경부선 철도도 영등포로 우회하는 형태로 놓인 것이지 싶다.

이런 의미를 두고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 역에서 내려서 먼저 앵봉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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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와 정자, 체력 단련 시설이 나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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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참호 같은 군사 시설도 등장했다.
안 그래도 답사 당시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저 참호 안에 들어가서 한숨 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안은 왠지 따뜻할 것 같았다.
한겨울엔 땀이 안 나는 대신 콧물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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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산의 건너편은 초록색 펜스로 가려졌다. 군사 시설 때문은 아니고, 건너편에 서오릉이 있어서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이다. 이 점에서는 의릉 때문에 펜스가 쳐진 서울 천장산과 사정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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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딱 한 군데 전망대가 있기도 해서 풍경 사진을 남길 수도 있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은 온통 나무가 우거져서 산 아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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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는 이렇게 텔레비전 송신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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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펜스의 색깔이 잠시 검정으로 바뀌기도 하다가 다시 초록으로 복귀하면서 내리막이 이어졌다.
나중엔 울타리와 산책로도 없어지고 흙길이 나오다가 서오릉로와 합류하는 걸로 앵봉산 구간이 끝났다. 여기까지 3km가 넘게 좀 걸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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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이 다니는 서오릉로를 횡단하면 봉산 구간이 곧장 나온다.
이 공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차를 세워 놓기에 안성맞춤인데 여기는 딱히 차 끌고 방문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딜레마이다.
참고로, 답사 당시에 저기는 길이 온통 빙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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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도 정상(?)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정말 금방 도달할 수 있다. 꽤 넓은 공터가 닦여 있으며, 전망대와 정자, 그리고 봉수대 모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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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건너편에는 비슷한 높이의 언덕인 망월산이 있고, 망월산과 봉산 사이에 '고양 향동 공공주택 지구'라는 이름으로 한창 공사판이 벌어진 게 보였다. 몇 년 뒤면 저기도 온통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게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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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높이가 대략 어떻고 산기슭이 어떤 분위기인지는 위의 사진 한 장으로 대략 설명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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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지난 뒤에도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런 식으로 길이 계속 이어졌다.
산이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증산· 수색 방면으로 계속 가고 싶었지만, 시간과 보급의 한계로 인해 서울 시립 서북 병원쯤에서 하산을 결정했다. 내려가는 길이 온통 미끄러운 빙판이 돼 있어서 다니기가 몹시 힘들었다.

최종 하산 지점은 봉산을 정면으로 관통하여 서울과 고양시를 잇는 터널 근처였다. 이건 작년 여름 시점의 로드뷰를 봐도 아직 미개통 상태였을 정도로 정말 최근에 뚫린 터널인 것 같았다.
국도 1호선 증산로 방면으로 한참을 걸은 뒤, 최종적으로는 새절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비록 산의 절대적인 높이는 낮은 편이지만 여느 산을 오를 때와 비슷한 시간 동안 총 7km가 넘게 걸은 것 같다.

산 너머로 그린벨트 마을 같은 게 있었으면 고양시 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쪽은 공사판이고 볼 게 없어서 도로 서울 시내 방면으로 하산하게 됐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서울 둘레길'이라는 컨셉으로 북한산 쪽도 돌아다녀 보고 이곳의 완전 반대편인 동부의 일자산 쪽도 가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7/04/19 08:34 2017/04/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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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수락산

2016년은 내 평생 등산을 제일 많이 간 해였다. 서울 근교에 있는 20여 개의 산을 일일이 답사했다.
그 뒤 한동안 바빠서 등산을 못 하다가 모처럼 시간을 내어 수락산을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인서울인 수락산, 당고개 다음으로 장암 역(= 의정부)에서 올랐으며 예전과는 달리 물론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산 건너편으로 넘어가면서 몇 시간 동안이나마 좋은 추억을 만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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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은 국립공원이 아니니 북한산· 도봉산처럼 탐방 지원 센터나 각종 출입 금지 구역 같은 건 없다. 등산로도 더 다양하게 열려 있었다. 그래도 그린벨트 구역, 문화재 보호 구역 같은 건 있었다.
장암 쪽에서 접근하는 등산로에는 각종 산장 식당들을 외에도 '노강서원'과 석림사가 있었다. 석림사까지 지난 뒤부터는 흙길 등산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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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계곡 쪽 등산로만 골라서 올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락산은 '물'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지간한 산들은 계곡이 있어도 특히 한겨울엔 가뭄을 버티지 못하고 바짝 말라 있기 십상인데.. 수락산은 곳곳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웃의 북한산에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긴 하다. 하지만 거기는 다 자연 보호를 명목으로 출입이 금지돼 있으며 눈으로 구경만 가능하다.
서울 근교에서 수락산처럼 출입금지도 아니면서 이 정도로 고퀄 대규모의 계곡과 물웅덩이가 존재하는 산은 본인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난 물에 들어가서 노는 걸 아주 좋아한다. 추워서 두꺼운 외투를 입은 상태였지만 옷 벗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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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폭포 옆으로 나란히 등산로가 조성돼 있기도 했다. 시기가 시기이니 산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갈색으로 변했다.
여름과 가을의 초록색이 시각적으로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등산자의 입장에서는 덥지 않은 동계 산행이 다른 계절 산행보다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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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올라서 한 봉우리의 능선에 진입하자 주변 전망도 얼추 보이기 시작했다. 수락산도 단순한 흙산이 아니며, 높은 부분은 화강암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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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뿌옇고 흐렸다. 그래도 아래로는 도봉 차량 기지가 보이고, 저 멀리는 도봉산이 분명하게 보였다.
수락산은 가끔 굉장히 가파른 계단을 타고 바위를 오르는 곳이 있었지만, 도봉산이나 북한산만치 험하게 손으로 뭘 잡고 올라야 하는 건 없었다.
(아, 검색을 해 보니 수락산도 '기차 바위'인가 여기는 줄을 잡고 바위를 타야 하는 험한 구간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내가 거치지 않았을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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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상 능선에 도달했으며, 거의 다 왔다. 정상은 불과 2~300m밖에 남지 않았다. 정상의 반대쪽으로 가면 일명 '기차 바위'에 도달하는데, 난 거기로는 가지 않았다.
고도가 더 올라가니 도봉산 역과 장암 역이 나란히 보이는 지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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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수락산 정상이다. 오르는 데 역시 2시간 정도 걸렸다. 해발 637m라니 검단산이나 예봉산보다 약~간만 낮은 수준이다.
그런데 태극기가 펄럭이고 안내문이 쓰여 있는 저 바위 위로는 도대체 올라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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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체없이 하산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계속 진행했으면 인서울인 수락산 내지 당고개 역 방면으로 하산하거나, 또 방향을 꺾어서 불암산으로 산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산을 횡단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남양주 청학동 방면을 선택했다.
여기는 군데군데 눈이 덜 녹은 흔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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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을 하나 지나자 '내원암'이라는 웬 절간 내지 암자가 나왔다.
수락산은 성곽이나 봉수대 같은 건 없지만 서원이나 절 같은 옛날 스타일 건물이 등산로 바로 옆에 종종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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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의 물이 참 탐스러웠다.
별도로 사진을 첨부하지는 않지만, 수락산은 약수터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어지간한 산들은 약수터 자체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물이 고갈됐거나 더러워서 식음 불가 상태인 반면, 여기서는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약수터가 몇 군데 있었다. 더워서 땀을 흘리는 상태는 아니지만 목이 좀 말랐는데 등산 당시 꽤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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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바위도 하나 타고.. 하지만 철봉과 발받침이 있으니 딱히 힘들거나 위험하지 않았다.
그 뒤 하산을 계속하니까 흙길이 점점 폭이 커지고 전깃줄과 전봇대가 보이고 건물들과 차량까지 보이면서 계곡과 등산로는 유원지로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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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렇게. 계곡을 반쯤은 운하처럼 바꿔 놓은 것 같다. 한여름 장마철에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피서객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
다만, 그린벨트 구역에서는 건물을 무단 증축하는 건 물론이고 계곡 근처에다 함부로 정자 같은 걸 만들어 놓고 "우리 식당 이용할 사람들만 근처 물가에서 노셈" 이러는 것조차도 원래 다 불법이다. 사유지 드립을 치지만 걔네들도 이미 법을 어기고 있긴 마찬가지다. 피서철만 되면 이런 게 뉴스에 종종 보도되나, 생계형 잡범형 불법 행위라고 해서 단호하게 근절되지도 않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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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를 빠져나오니 드디어 시내버스가 다니는 찻길이 나왔다. 그래도 길이 별로 크지 않고 여전히 오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런 느낌이 좋다.
예전에 갔던 도봉산에서는 완전히 건너편으로 넘어갔으면 양주시 송추 유원지 근처에 도달했을 텐데, 거기서는 대중교통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게 애로사항이 꽃폈지 싶다.
하지만 여기는 다행히 당고개 역까지 가는 남양주 소속 시내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꼬불꼬불 비탈길(순화궁 고개?)을 타고 덕릉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는 게 인상적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등산을 마치고 나자 드디어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울 지하철 7호선 종점에서 내려서 등산을 시작해서는 4호선 종점으로 돌아왔다.
수락산에 대한 총평은.. 산 이름이 괜히 '수락산'(물이 떨어진다?)으로 붙은 게 아니구나 싶었다. 예전에 수락산을 올랐을 때는 이런 면모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일찍 가서 자리만 맡아 놓으면 차를 생각보다 높은 고도까지 몰고 갈 수 있으며 주차도 별 문제 없어 보였다. 의정부 쪽이나 남양주 쪽 모두 말이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온다면야 차를 가져가는 데 문제가 없지만 이번에는 편도 동선이었으니 부득이 차 없이 뚜벅이 산행을 했다. 나중에 여름에 피서를 위해 수락산에 다시 가 보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7/03/27 08:36 2017/03/2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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